프로이트 -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미 인간을 평준화했던 것입니다. 즉 "인간들 은 내게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인민 대중으로서, 계급이라는 집단으로서 흥미를 끌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생산관계가 규정한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근본적으로 심리학을 과소 평가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당신은 인간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교육이 계획될 수 있고 또 계획되어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 물질적 조건만이 각 개인의 관계를 결정짓는다고 가정해 버렸습니다. 당신은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사회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보지 않고, 그 결과물로 보는 근본적인 오류를 저질렀고, 그 대가를 당신의 추종자들이 혹독하게 치른 것입니다. 당신 추종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이 맹세한 연대감의 모범과 모순되는 성 격을 지닌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자신을 내맡겼고, 결국 이것은 이들 '지도자'의 독재적인 권력행사로 귀결되었습니다. 또 한마디 덧붙이겠는데, 당신이 들으면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오류를 범 했을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인 오만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억압받는 계급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나 한 듯 열렬하게 억압받는 계급의 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 노동자에게 진정한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면, 적어도 한 번쯤 당신은 그들이 일하는 공 장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그들의 고민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 신은 평생동안 안면으로나마 단 한 명의 노동자도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공장의 문턱을 밟 은 적도 없지요. 당신은 당신이 옹호한 인간들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을 전혀 갖지 않앗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실제로 당신은 당신이 옹호하는 사람보다도 당신이 싸우고자 하는 대상과 더 가까웠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이 테초프 소위와 몇 잔의 술을 들이켜며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이후 그가 당신 에 대해 어떻게 평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당신이 유일하게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은 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당신은 지배하는 것만을 생각했고, 아주 높은 곳에서 당신 마음을 뛰게 한다는 프롤레타리아를 내려다보았던 것이 아닐까요? 마르크스 - 그 소위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자본주의자들이 자행 하는 착취에 대해 격렬하게 분노했기 때문에 사람들한테서 비난받은 거라는 것은 여러분들 도 알 것입니다. 프로이트 - 물론 그 점에서는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자본주의자들 에게 분노를 갖고 있었다는 것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자시이 옹 호하는 사람보다 싸우고 있는 대상에 더 가까운 법입니다. 오늘날 인권 및 평화나 자연과 관련된 문제를 위해 열렬히 참여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 오히려 폭력 행위 자나, 전쟁을 일으키는 자나, 자연을 파괴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활동의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들은 싸우기 위해 적대감이 필요합니다. 사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찬성 (pro)' 이 아니라 '반대(anti)'입니다. 자본가에 대한 당신의 증오는 물어 볼 필요도 없이 당 신의 '반대'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당신의 친근함이 '찬성'의 발로 였 을까요? 어째서 당신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오 히려 당신 이론에 맞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 딸이 만든 설문지에 나와 있는 행 복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싸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추측에는 이 답변이 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변과 부합할 것 같습니다. 전사가 행복하려면 싸울 수 있는 적이 늘 있어야 하지요. 아인슈타인 - 그러니까 우리의 존경하는 마르크스가 사회를 무엇보다 계급투쟁, 혁명, 프 롤레타리아 독재의 모습으로 본 것은 싸움을 좋아하는 그의 개인적인 천성 때문이라는 건가 요? 마르크스 -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심리학적인 투사로 우리들의 세계관을 설명하려는 프로 이트의 우스꽝스러운 월권의 희생자가 되는군요. 프로이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어머니 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콤플렉스로 모든 가톨릭 공동체에 짐을 지웠다고 했습니다. 데카르 트는 감정을 억압하는 그의 합리주의로 인해 현대의 공격적인 학문과 그에 따른 모험적인 기술의 무책임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적대감에 빠진 반대형의 인 물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상에 자기 파괴적인 마조히즘을 만들어냈고 말입니다. 친애하는 프로이트, 나는 당신이 불쌍한 데카르트에게 붙여 준 전능 콤플렉스에 당신 자 신도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결국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심 리학적 해석이 되겠군요. 하지만 단 한 명에 대해서라도 그 행위에 대해 서로 일치된 해석 을 내린 정신분석가 둘이 있다면 내게 말해 주시죠. 물론 모든 프로이트 학파가 그들의 스 승인 당신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해석했다고 일치하여 맹세하는 것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당신은 이것이 당신 학문의 신뢰성을 증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여러분, 프로이트가 우리 모두의 구원론을 노이로제 환자의 망상으로 만들기 전에 나를 도와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아인슈타인 - 당신이 프로이트의 해석에 대해 그렇게 격분하면 프로이트는 당신이 의도 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준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프로이트의 모든 행동을 너그럽게 봐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 누구도 이성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겠지요. 즉 세게화된 자본주의가 가혹 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고, 그것을 자신이 조작하고 있는 인간의 심리를 별로 개의치 않으 며 이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무감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부처 - 여러분들은 이것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심문을 끝내려는 건가요? 그렇다면 유감이 군요.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다만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책임자들이 자 신의 생각을 전혀 실현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자신이 해방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을 억압했다 는 것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모두들 프로이트를 비판하지만, 내게는 그의 단언이 매우 설득 력 있게 들립니다. 즉 마르크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투쟁과 혁명의 의무를 너무 강하게 지웠기 때문에, 그들 이 투쟁과 혁명을 수행하는 데 관용과 타협이 결여되게 되었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의로 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협동정신이 장려되지 않았다는 것 말입니다. 나는 그와 같이 중요한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특히, 연대적인 협동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의 특성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그에 대해 매우 주목 할 만한 말을 했지요. "여러 경제체제 가운데 마르크스주의가 불교에, 특히 대승불교에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고귀한 원칙이 변형되면서 많은 잘못이 저질러졌고, 또 지배 계층에 대한 폭력적인 투쟁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낭비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시작부터 '동정심'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나도 프로이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세계화된 거대 자본주의에 대항할 효과적인 대응력을 세워야 한다면, 반대동기(anti-motiv)가 너무 우세하여 찬성동기 (pro-motiv)를 억압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연대감을 장려하는 감정의 힘이 주도해야 합니다. 즉 감정이입, 동정, 협동심, 관용 같은 것 말입니다. 서로 돕는 사회만이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를 도와 주고, 더 약한 자들 이 가치저하가 되고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 말입니다. 마르크스 - 복음을 들을 수는 있지만 내게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지금은 부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탐욕적인 사람들이고, 체제로부터 자신의 소유욕에 대한 보상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분의 3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지배자들의 사 회적 자선행위에 의해 달래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참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더욱 거대해진 것이고,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막강한 경제력에 밀려 기회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자본주의 체제에 사는 가난한 이들은 좌파 정부체제 아래 사는 대부분의 국민보다 물질적으로 나은 생활을 진정한 이유라고 믿습니다. 나의 추 종자들이 심리학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의존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체제에 얌전히 적응하여 얻 은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자였고 지금도 희생자로 남아 있는 그들 은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나한테서 영감을 얻은 사회에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희망을 없애는 데 한몫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굴복함으로써 스스 로 그 체제에 더욱 깊숙이 얽혀 들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소홀히 했던 저항을 만회할 능력 을 잃은 듯 보입니다. 속수무책으로 의존만 하고 있는 인류의 4분의 3에게, 그들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4분의 1이 모두의 번영을 위해 아직도 계속해서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한다는 것 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요. 실업자, 사회보조금 수령자, 연금 수혜자, 병자들의 집단은 자기 때문에 국가의 경쟁력이 감소했다는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피 할 수 없이, 공적인 국가 예산의 구멍을 임시변통으로나마 메우려고 반은 비어 있는 자기들 의 주머니를 움켜잡는 정당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른 정신병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프로 이트가 분명 여기에 대해 괴상한 해석을 준비하고 있겠지요. 프로이트 - 존경하는 마르크스, 당신은 심리학이 없이는 잘 꾸려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아 는군요. 당신이 미친 짓이라고 부르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내적인 저항과 싸워 획 득한 적응태도의 전형적인 결과입니다. 자신을 억압하는 자를 증오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지 키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증오심을 억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증오심은 깊은 내면에 서 결국 자아에게 옮겨지지요. 그는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됩니다. 하 지만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방편으로 억압하는 자에게 저항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자신을 설득하지요. 그때 적응은 필요에 따라 덕 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억압하는 자는 명예를 회복하는 겁니다. 결국 실업자와 빈민은 그들 이 스스로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병자들은 그들이 아픈 걸 죄스럽게 생각하고, 장애인들은 모두에게 너무 많은 수고를 끼치고 비용이 들게 했다고 부끄러워합니다. 자본주의 원칙이 완벽하게 내면화된 겁니다. 희생자는 실패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재정 이 더욱더 고갈되는 것을 당연한 벌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승리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 는 듯 더욱더 부자가 되는 거지요. 마르크스 - 프로이트 당신은 멋지게도 설명하는군요. 하지만 이런 적응과정은 자유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던 시대와는 달리 최근의 자본주의는 사회보장이라는 선 물을 이용해 의존집단이 자신의 처지를 간파할 수 없도록 눈을 멀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패배자는 서로간에 부처가 높이 평가한 아 름다운 덕목인 동정심, 배려, 협조 등이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보호가 필요한 이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는 모든 것이 무 너지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부처 -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역사가 반드시 당신이 예상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을 압니다. 역사는 당신은 한 번도 꿈도 꾸지 못했을 해결책을 알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에 서 자기 민족이 겪고 있는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억압이 끊임없이 거대한 대학살로 향해하고 있는 가운데, 27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자기 영혼 이 지닌 도덕의 힘을 통해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상에 거주하고 있는 다른 남자를 상기해 보십시오. 그는 완전무장한 식민세력에 맞서 무기도 없이 3억 명의 민족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물론 지금 간디를 말하는 것 입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앙의 힘으로 자기 동향인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자 기 자신을 반은 남자로 반은 여자로 느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물레를 즐겨 다루었으며, 자신이 모성적인 특성을 지닌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따랐는 데, 이것은 곧 고통을 감수하고, 그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으며, 그 어떤 고통도 가하지 않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시민 불복종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자기 민 족을 외세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마르크스, 이것은 밀교적인 동화가 아니라 역사입니다. 당신 세계관에 따르면, 억압받는 계급이나 민족이 억압하는 자에게 대항할 수단은 폭력적인 투쟁뿐입니다. 그 안에는 당신이 말하지 않은 하나의 심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즉, 물질적 억압은 자동적으로 증오를 증가시 키고, 결국 혁명적으로 폭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 니다. 남아프리카의 예를 보십시오.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이라는 잔학한 압제에 대항하여 관용과 지혜를 발전시켰던 지도자들을 관직에 임명하였고, 결국 그렇게 화해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와 같은 힘을 드러내기 위해서 억압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 합니다. 만약 올리버 탐보, 월터 시주루,앨버트 루툴리, 유저프 다두, 브람 피셔, 로버트 잠부 크웨 같은 사람들이 그들의 복음으로 자국민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만델라의 평화적인 업적은 보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마르크스, 나는 당신이 그런 심리적 에너지를 정치에 이용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은 것이 당신 이론의 결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 - 나는 아인슈타인이 간디나 만델라와 같은 기적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고대 하며 우리를 여기에 모이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양에서는 인도나 남아 프리카에서 이루어 냈던 성공을 거두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서구에서 그와 같은 메시아적인 구원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다만 사실에 대한 신 중한 계산만이 중요합니다. 원한다면 개인적으로 인도주의적인 해방자를 꿈꿀 수는 있습니 다. 하지만 이 모임이 그와 같은 단지 위로를 줄 뿐인 사유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아인슈타인 - 내가 부처를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부처는 무엇보다도 그 두 인물이 갖고 있던 힘을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힘 말입니다. 사회과정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대로만 고찰하고 계산하려는 사람은 쉽게 포기하게 됩 니다. 하지만 자기 내면에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활동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희망과 새로운 사회적 에너지를 깨우는 것이, 다른 이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내 적 자원은 데카르트 당신에게는 오히려 섬뜩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신은 마치 암울한 신비주의이기라도 한 듯 그 내적 자원에 대해 격렬한 혐오를 느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당신에게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군요. 데카르트. 당신이 자신의 무비 판적인 실증주의에 마르크스를 끌어들인 다면, 당신은 마르크스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것 입니다. 프로이트도 순전히 반대동기만 있고 찬성동기가 부족하다고 마르크스를 비난한다면,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도 꿈을 갖고 있었 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다만 개인의 '에고(자아)'만을 정치적으로 해방하려 했다고 생 각 했습니다. 그러난 그는 해방의 최종목표는 인간이 '같은 종족'끼리 새로운 형태의 공동생활 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것을 연대 책임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당신들은 내가 마르크스에게 '종교 적 인간'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면 나의 자의적인 판단일 뿐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정 치 적 해방이 이루어지고 나면, 인간적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가 나타나야 한 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비밀스런 희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아인슈타인 - 나도 마르크스의 영혼 한 귀퉁이에는 루소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선천적으 로 선하다는 꿈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급 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며, 자본가 계급은 늘 악하다는 말은, 어쩐지 아담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에게 원죄가 달라붙었다고 말하면서, 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조차 진정한 구원에 대한 확 신을 열어 주지 않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을 떠오르게 합니다. 부처는 인간에게 사회관 계를 개선시키고자 하는 선함이 존재하며 원죄나 경제적 억압도 그것을 방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처가 만델라와 간디를 언급한 이유는 그들이, 각기 정도는 다 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도덕적 능력이 내재되어 있으며, 경우게 따라 각성될 수도 있고 심지 어 올바른 대중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 나는 우리의 천상동료인 임마누엘 칸트가 생전에 그와 비슷한 낙관론을 갖게 되어 기뻤습니다. 칸트는 결코 격렬한 감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주변국가에서 프 랑스 혁명의 이념에 대해 굉장한 흥미를 보인 것은, 틀림없이 상황이 개선되리라라는 걸 증 명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반응은,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근원적으로 뿌리 깊은 도덕적 성향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떠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긍정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리라 는 것을 증명한다는 겁니다. 마르크스 -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순진한 선인이라고 조롱할 것입니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 우리들 인식의 모든 결과를 동원하여 신속하게, 몰락이 피할 수 없는 것인 지 아니면 아직은 구원의 길이 있는지 알아내려는 욕구가 계속해서 우리를 몰아붙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급함을 잠시나마 가라앉히고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이제부터 존 경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속마음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돌아가며 여기 앉아 있는 이들의 모든 실수와 자기 기만을 진단했으니, 이제 자신의 잘못과 자기 기만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프로이트, 이제 드디어 당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어 우리에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할 때가 왔군요. 나는 오늘날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보여 주고 있는 도덕의 타락에 당신이 결정적으로 어떤 기여를 했는지 분명히 하지 않고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내가 원죄설을 통해 인간에게서 내적인 평화를 빼앗았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나를 비난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정반대되는 일을 했고, 문화적인 소득도 없 이 너무 과도하게 성을 억압한다고 우리 문화를 비난했습니다. 당신 강의록에는 바로 이렇 게 씌어 있지요. "성적 활동을 제한하면, 인간을 실존적인 불안을 느끼는, 얌전하기만 한 약 골로 만든다"고 말입니다. 당신 견해에 따르면, 성생활에 대한 문화적 거부가 노이로제 증상 이나 행동장애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충동을 더 만족시키면 개인과 문 화가 더 나아진다는 거지요. 하지만 모든 군중이 성생활에 대한 가책을 떨쳐 버리기 위해 당신들을 찾은 결과 당신들 직업의 지위만 개선되었을 뿐입니다. 반면 문화는 급속하게 타 락해 갔지요. 프로이트 - 가톨릭 신부가 비밀스럽게 여자친구를 갖고 있고, 많은 주교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를 돕는 시종을 건드리는 것을 내가 학문적으로 설명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라는 건지 말해 보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 당신의 이론이 그들의 정신까지 혼란시켰는지 아닌지는 증명할 수 없 습니다. 하지만 당신 때문에 일어난 성적 혁명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끔찍한 결과를 낳 았다는 것은 기억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인간관계는 더 이상 구속 력을 갖지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누군가 다른 이를 믿는 이는 이미 버림 받은 것이다." 난교는 콘돔을 사용하기만 하면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미, 많은 가 난한 사람들이 섹스 관광객이 주는 돈과 자기 딸을 부유한 나라로 팔아 먹은 돈으로 먹고삽 니다. 포르노 영화가 큰 사업이 되었고, 어린이 인신매매단은 국제적으로 은밀히 성도착증을 지닌 고객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폭력이 모든 사회계층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치료 사들은 자신의 환자를, 교사는 그들의 제자를 성폭행합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약물중독 에 빠져 속수무책인 청소년을 성적으로 악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도, 신에 대한 경 외심도 사라졌습니다. 내 눈앞에 <요한 계시록>에 씌어 있는 것과 같은 탕녀 바빌론이 보 입니다. 그리고 나는 에이즈가 지옥형에 대한 마지막 경고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 - 아우구스티누스,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 교회는 가장 가혹한 벌을 받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지배영역에서 하필, 면역력을 높이는 약을 살 돈도 없는 가 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에이즈 감염에 대비한 예방수단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런 식으로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당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성도덕의 훼손에서 모든 곳에 만연되어 있는 부패와 폭력까지 도덕의 황폐화가 이 미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자칭 학문적이라는 허위적인 근거로 성 도덕을 무력화하여 이런 현상을 부추긴 이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당신은 회개하는 마음 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의 잘못이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은 다만 나의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당신의 연구결과라고 정당화하면서, 사회가 성적으로 황폐화되도록 이끌었습 니다. 아인슈타인 - 용서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은 프로이트가 성이론을 가지고, 모든 도덕의 황폐화를 일으킨 범죄의 배후자라고 확신합니까? 물론 프로이트가 첫 번째 임상 경 험으로부터 너무 광범위한 결론을 끌어 낸 듯 보이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첫 번째 히 스테리 환자는 어쨌든 성적 욕구의 억압으로 병든 것이 사실이었고, 이 경험을 통해 프로이 트는 당시의 억압적이고 위선적인 성도덕이 지닌 문제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은 모든 인간들을 노이로제나 그 밖의 다른 정신질 환으로부터 지키고, 사회생활을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몇몇은 심지어 이 개혁 을 마르크스의 제도적인 계획과 결합시키려고 했지요. 하지만 친애하는 프로이트, 당신이 무 절제한 삶을 지지해 주었다고 사람들이 축하한 것은, 그들이나 당신 제자들이 당신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프로이트 -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자위행위가 해롭지 않다는 통념에 대해 중대한 회의를 표명했지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과장된 걱정이었던 것 같지만 말입니다. 더 나아가 나는 문화가 발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적 충동이 승화된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 다. 당신들은 내가 인류의 존속은 문화 적대적인 성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과정이 진행 되면서 나타나는 성생활의 약화 때문에 위협받을 거라고 여러 차례 표명했던 일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문화발전을 유기적인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즉, 성적 충동을 만족시 키는 것을 더욱더 적게 허용하여, 결국 성적 충동이 퇴화되는 과정 말입니다. 많은 길들여진 동물류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죠. 아인슈타인 - 실제로 당신은 여러 번 그런 말을 했지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특이한 생각 을 하게 되었나요? 프로이트 - 나는 그 당시 사랑과 성에 대한 남자들의 태도가 더욱더 심리적인 성불구의 전형과 일치해 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자들의 충동적인 성향과 자상한 성향은 더욱더 나쁘게 융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품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섹스 파트너 와, 다만 애정과 미적 경외만을 얻은 이상화된 여성 사이에서 분열된 삶을 삽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들이 "성충동의 요구와 문화의 요구 사이의 긴장을 절대 해소할 수 없으며, 문화 발전의 결과로 인류는 체념하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인류라는 종은 멸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 -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남자들이 존경받을 만한 이상적인 여자들과는 잘 수 없기 때문에 품위가 떨어지는 여자들과 쾌락을 누리게 되고,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어떤 아 이도 낳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군요. 그런데 이제까지 품위가 떨어진다고 평가된 여자들은 더 이상, 단지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대상으로 노예화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포주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이미 출생률이 매우 낮지요. 프로이트 - 우리는 이런 상황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는 여성들이 그렇게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되리라고 분명하게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군요. 부천, 플라톤, 나 자신과 모든 세대에 걸친 철학자들과 구원론자들은 문화의 존속을 위협하는 성욕을 달래라고 요구했습니 다. 그런데 프로이트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화는 끊임없이 진보하면서 성욕을 잠재우 는 위험을 야기하고, 그렇게 하여 인류는 멸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요한 계시록>에 묘 사된 것과 같은 끔직한 세계종말도 없을 것이고, 다만 성적 불능이라는 장기적 질환마이 영 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프로이트 - 바로 당신 자신이 이런 발전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는 인생을 살았지요. 즉, 아주 전형적인 현상이지만, 당신은 고귀한 어머니로서의 여성에 대한 광신적인 사랑과 당신 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던 애첩에 대한 격정을 화해시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당신의 성적 능 력은 이런 갈등의 희생물이 되었지요. 아우구스티누스 - 당신은 이런 원시적인 생물학적 관점이 아니고는 나의 인생을 전혀 이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성적 비관주의를 당신처럼 생물학적으로 해석한 생물 학자가 있다는 것을 아마 알 것입니다. 즉, 당신 자신에게 아주 일찍부터 동침에 대한 욕망 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두 사실입니다. 첫째, 성은 지금 슬퍼해야 할 권태의 모습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무절제한 방탕을 보여 주 고 있습니다. 성폭행, 강간 살인, 성적인 아동학대가 신문의 표제어를 장악하고 있지요. 이런 우울한 현실만으로 불충분하다면, 똑같은 범주에 속하는 범죄들이 계속 새롭게 등장하는 현 재의 상황을 보십시오. 또 대중매체는 이러한 사실을 계속 보도하면서 적어도 환각을 통해 서나마 성적인 범죄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시청자의 갈망에 매일 봉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유럽 남동부의 전쟁에서 집단적인 성폭력 축제가 횡행했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둘째, 나는 당양한 성도착증을 보이는 성의 무절제가 전반적인 가치붕괴와 불의 및 폭력 에 대한 무감각에 수문을 열어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프로이트는, 쇠약 해진 불쌍한 충동의 자비로운 보호자가 아니라,원시적인 본능을 억제하여 고귀한 역사적 업 적을 보여 준 문화인을 아무 생각 없이 저 원시적인 본능에 넘겨 준 사람입니다. 아인슈타인 - 기이한 점은, 당신 둘 모두 결국은 서로 대립되는 몰락이론을 내세우는 비 관주의자라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성적인 원죄에 얽혀 들었기 때문에 세계종 말이 오고, 인류 대부분이 구원이 불가능한 지옥형을 받게 된다고 예언합니다. 반대로 프로 이트는 문화인이 성의 약화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은 아구 스티누스에게 전적인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지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대립은 서로 상쇄된다 는 규칙을 따를 수 있겠군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추종자들은 성적 본능이 감소되어, 자신들이 지배하는 데 비용이 줄어든다면 안도의 숨을 내쉬겠지요. 프로이트 학파는 성으로부터 혁명 적인 에너지가 방출되지 않을 정도로, 교회가 쾌락에 대한 적대감을 경감하기를 바라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몰락이론을 떨쳐 낸 다면, 우리는 더 이상 번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 안에서 뭔가가 이런 결론에 만족하는 데 저항하는 것을 느낍니다. 프로이트, 나는 당신의 비관주의 또 다른 근원 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직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프로이트 - 당신 생각을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죠. 아인슈타인 - 나는 성에 대한 당신의 이론이 실상에 맞는데도, 사람들이 당신의 성이론과 성도덕에 대해 너무 많이 흥분한다고 봅니다. 프로이트 당신은 한 번도 '성적 무절제'라는 것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혼란시키는 것은, 양심의 근원에 대한 당신 이론입니 다. 인간은 양심을 통해 선과 악을 판단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당신은 이 양심은 공격성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옳다면, 우리는 결코 파괴적인 공격성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한 번 더 양심의 형성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프로이트 - 나는 선사시대 드라마가 예나 지금이나 각 개인의 성장에 모사되어 있어 그 것이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상상하기로 그 드라마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인류 최초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매우 끔찍한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자식과 형제들 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식들에게는 후회가 엄습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살해 된 아버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아버지의 상을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양심으로 만들 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초자아'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이 죄책감은 그들의 공동생활이 공 격 에 의해 붕괴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이것이 문화발전의 조건이었습니 다. 오늘날, 아이들은 자신의 충동을 억압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충동을 금지하는 권위에 대해 치솟는 증오를 이 계통학적인 유산을 통해 미화한답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이는 허락되지 않은 충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때 권위에 대한 증오는 자신의 자 아를 반격하고 결국 내면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공포로 변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공격 성 외에도 자신을 처벌로 위협하는 부모상을 보호합니다. 플라톤 - 그러니까 당신 의견에 따르자면, 양심이라는 것이, 인간의 무의식에 유령처럼 나타나는 고대의 살인 이야기와 연루되어 있다는 건가요? 당신이 초자아와 양심에 대해 말 할 때마다 항상 공격성, 증오, 살인에 대한 환상, 금지, 불안, 죄책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 때문이군요. 당신 말대로 하자면, 고통받는 양심이 적의를 갖고 있는 공격적인 자아를 처벌 한다는 거군요. 그리고 이 양심의 근원적인 뿌리는, 내면에 옮겨진, 태초의 악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유년기에, 자신의 충동을 금지하는 부모에 대한 반항적인 언동이 억압되어 새로운 공격성이 내면화되는 거고요. 이런 식으로 자가 동력에 의해 마침 내 그 어떤 탈출도 희망할 수 없는 증오의 악순환이 계속 재생산된는 거고 말입니다. 부처 - 그것에 대해 나는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프로이트, 당신이 종종 상세하게 설명했던 양심이론에 따르면, 양심은 협박과 처벌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 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당신의 해석은 한쪽 면만을 본 것입니다. 이 내면의 목소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성취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다시 말해, 양심은 고무적인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양심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생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통 해 양심은 우리의 내면에 고통받는 이편에 서고 싶다는 충동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인간 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내면의 목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 여금 구조가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게 만듭니다. 쇼펜하우어는 당신들 나라에서 나의 이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철학자인데, 이 통찰 을 아주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나도 그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요. 그는 '양심이 란 결국 깊은 만족으로 이끌어 주는 이정표'라고 표현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우리 감정 세계의 깊은 곳에 있는 성향이고, 인간이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기만 하면 우리가 선을 완 성하도록 고무해 주지요. 단지 악한 것을 피하거나 악한 것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곤경에 빠져 괴로워하는 이들을 돕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까? 사회적인 직업에 따라 약한 자 와 피해를 당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강해지도록 도와 주고 그로써 공동체에 사회정의 가 넘치도록 노력하는 것은 또한 개인적인 자기만족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대승불교는 특히 이 경험을 제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 대승불교 대표자 달라이 라마는 그것에 대해 아주 간단한 말을 찾아냈지요. "우리가 세계와 세계의 무제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긴장이 해소되 고, 우리는 더욱 만족하게 된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걱정하고 다른 이들의 복지에 신경을 쓰는 만큼 시기심, 교만, 적의와 같은 감정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덜 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리스도교로서 나도 당신과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텐데요. 비록 나 는 당신처럼 낙관적으로, 선한 행위를 통해 더 높은 존재방식으로 승격되는 것이 인간의 손 에 달려 있다고 믿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부처 - 서양문화에서 자란 여러분들은, 양심의 긍정적인 작용을 깨닫기 어렵다는 것을 이 해합니다. 당신들의 <성서> 속에는 폭력과 잔인한 행위들만이 우글거립니다. 처벌을 내리는 신만이 오만하게 자신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길들일 수 있겠죠. 이스라엘이 당하는 재앙을 그들의 예언자는 마땅한 속죄 행위라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그리 스도교는 그 창설자를 살해하는 데서 생겨났습니다. 프로이트, 인류 최초의 아버지가 형제들에게 살해되고, 그 흔적으로 인해 오늘날의 사람들 이 죄책감으로 불안해하게 되었다는 당신의 이론은 이 모델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의 이론을 보면 바로 당신 자신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와 극단적인 가치절하, 신과 악마, 전능과 절대적인 무력, 무한과 무 사이에서 결코 균형을 발견하지 못했던 문화의 자식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생성과 소멸의 흐름 속에 있는 중간적인 위치와 화해 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죽음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심 지어 노화의 메커니즘을 통제하고, 방해가 되는 유전자를 없애서 재단사가 맞춘 옷과 같이 완벽한 종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지요. 아우구스티누스 - 나는 그리스도교도로서, 인간이 더 이상 신을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고 믿게 되면서부터 자아를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이것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지요. 인간들은 신의 형상과 일체가 된 것입니다. 신 이 전능하니 그들도 전능해야 하지요. 자신이 종속되어 있다는 감정과 그로 인한 두려움이 다시 커지지 않기 위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전능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사랑 은 이제 탐욕스러운 자기애로 왜곡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신격화된 미래의 자아에 대한 사랑일 뿐입니다. 그 때문에, 자연을 완벽하게 지배해야 하고,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자 를 신과 비슷한 무결점에 이르기까지 승격시켜야 한다는 강요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 한한 완성으로 가는 길을 중지하는 것은 공허한 무로 추락하는 끔찍한 두려움을 일깨우기 때문에, 이것은 유쾌한 오만이 아니라 내적인 강요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추락하는 것을 붙잡아 주고, 은총이라는 지주를 제 공해 줄 존재를 희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공상적인, 미래의 거대 자아 에 대한 나르시스적 사랑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불확실성이, 그 목표를 단순한 망상으로 설명하는 사람, 컴퓨터 사회가 곧 그 어떤 실수도 하지 않게 될 거 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 유전공학을 통해 인간의 손으로 초인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망상으 로 간주하는 사람 등에 대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차 파라오가 자신을 신처 럼 영원한 존재로 만들려고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처럼, 권력층이 곧 노예 집단을 만들기 위 해 인간의 품종을 개량할 거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헉슬리로 돌아오는군요. 부처 - 프로이트 당신이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서양인들이 위험 하게도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무모하게 궐기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서술했습니다. 당신은 그 들이 더욱 더 신과 비슷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들의 불안한 불행은 바로 이런 과대 망상에서 유래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그들이 최근에 정복된 자연력을 가지고 스스로 인류 라는 종을 모조리 멸종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진 단을 내렸을 때는 핵무기나 체르노빌이나 전지구적인 환경파괴에 대한 보도가 없었을 때였 지요. 아마도 저 위협적인 파시즘이 당신에게 한 덩어리로 뭉칠 파괴 에너지를 볼 수 있는 특별한 안목을 부여해 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 한 가지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평생 동안 정상적인 불안과 병적인 불 안에 대한 이론을 세우는 데 몰두했고, 불안이 생기게 되는 메커니즘을 아주 꼼꼼하게 분석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중년이 되었을 때 집단적인 자기 파괴를 일으키는 새로운 불안을 발견했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대강 설명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외적인, 현실적인 불안이었을 뿐이다. 즉 파괴 무기들로 가득 찬 무기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진정한 의미에서는 불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인 공포 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로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파괴 수단은 그 어딘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경악하고 있는 그들 자신에게 내재하는 위험한 동기에 대한 불안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이성적인 인간으로 하여 금, 자기 자신의 몰락을 가져올 수도 있는 도구들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건가요? 그것은 불 안스런 자살충동 아니었던가요? 프로이트, 왜 당신은 이 충동의 뿌리를 주의 깊게 추적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했더라면 분명 우리는 이미 한 걸음 더 나아간 상태에서 오늘의 이 조사를 하게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서양인들은, 자신이 점점 더 위험해지는 기술을 이용해 자신을 파괴하는 심연으 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안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주제이기 때문입니 다. 당신이 이미 핵무기가 없던 시절에 그들에게서 불안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것 을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위험과 그에 대한 불안이 높아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왜 당신은 이 불안과 이 불안의 계획적이고 능동적인 재생산을 당신 의 분석작업에서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프로이트 - 물론 나는 당신의 질문 속에 숨겨진 비난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 다. 하지만 당신이 언급한 나의 논문에서, 내가 성급하게 개인적인 노이로제와 문화공동체의 병리학 사이의 유사성을 끌어내기를 주저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요. 나는 개인들이 눈에 띄 지 않는 그들의 인간관계로부터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반면에 이런 기준은 문화 전반에 폭 넓게 존재하는 장애를 분석할 때는 누 락되었지요. 그래도 나는 나의 동시대인들이 겪는 동요를 자기 파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 석했고, 그 당시 책임자들이 스스로 알고 있는 자신의 파괴성의 진로를 곧 수정할 거라고 믿었다는 것으로 변명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세기말까지 지로를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 - 어쨌든 당신은 개인적인 장애와 병적인 문화조류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 을 수 있다는 거군요. 우리가 지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화현상과 유사한 병이란 도대체 어떤 병인가요? 프로이트 - 아마도 조종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무절제한 오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일에 돈과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그들이 유쾌 한 기분에 빠져 있으면 도덕적 기준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즉 존경, 수치, 예의 범절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 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ㄸ면 그들은 아주 불안정하고 분망합니다. 그것은 유쾌한 긴장의 해 소 상태가 아니라 격렬한 활동성입니다. 조증은 광기와 같은 것이죠. 첫눈에는 우리 문화가 지닌 치명적인 과대망상을 그런 정신병과 결합시키는 것이 너무 지 나친 생각으로 보일 것입니다. 서양인이 가지고 있는 과대망상과 같은 오만은 겉보기에는 과잉 기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지요. 그러나 서양인들은 두드러지게 신경질적이고 활동적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절제를 정상이라고 생각 한다고 해서, 그들이 건강한다는 것 을 증명해 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나 공자와 같이 낯선 문화에서 온 비판적인 관찰 자가 숨가쁘게 달리는 이 어리석음을 보고 놀라지 않더라도, 서양 출신인 우리 자신에게도 공포스러운 몰이사냥과다를 바 없는 오늘날의 경제생활이 비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물론 각각의 문화는 많은 내적 대립을 갖고 있는 매우 복잡한 구성물입니다. 하지만 하나 의 문화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류가 있습니다. 서양에는 터무니 없는 과대망상과 무책임한 무분별과 도를 지나친 요구들로 가득 찬, 자신에 대한 광기 어린 과대평가가 그 지류를 형 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증과 대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광기는 늘 대립적인 성질의 장애와 결합하지요. 즉 우울증입니다. 흔히 두 상태는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종종 교대 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치 환자가 근원적으로 의기소침에 빠져 있는데, 가끔씩 우울증이 다시 자기를 어둠으로 끌어내릴 때까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과도한 광기와 같은 기분 좋 은 상태로 도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관계는 섬뜩하고 수수께끼 같지요. 분명 유전자도 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개인적인 질환의 역학이 흥미를 끄는 것은, 그것이 우리 가 감행한 문화분석을 위한 비교모델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 - 당신은 혹시 서구의 모험적인 문화 속에 잠행성의 우울증이 숨어 있으며, 사회가 그로부터 광기 어린 대담함으로 도망 치게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프로이트 - 당신들이 문화심리학적인 고찰을 하도록 유혹했으니, 그 생각을 계속 이어 나 가고 싶습니다. 서구의 지배적인 분위기인 우울이, 내가 70여 년 전에 묘사했던 몰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 이라는 징후는 간과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더욱 강해진 진보에 대한 회의가 이 의기소 침을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당사자들에게는 너무 불안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얘기는 감히 꺼내지도 못하고, 그들의 정신상태를 곧이곧대로 말하는 이들을 패배주의자, 비관주의자, 종말론자로 취급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어 렵게 절망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데카르트 - 당신은 이런 진단을 통해 스스로 빙판길을 자초했다고 말했습니다. 내게는 당 신이 이미 이 빙판에서 미끄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소위 위험이 따르는 무책 임한 기술공학을 계획하고 있는 연구센터에서, 과대망상에 걸린 공상가도 상심과 불안으로 괴로워하는 우울증 환자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 내가 보기에 당신은, 자기 주변에서 병자들만 발견하고 자신의 임상적 진단이 옳다고 서로 싸우는 혼라스런 정신과 전 문의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당신은 곧, 지상의 인간들이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지, 정신질 환을 앓고 있는지, 완전히 미쳤는지, 아니면 혹시 당신들의 망상이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것 인지 마음껏 논쟁하기 위해 불멸의 영혼이 된 당신 동료들에게 가야할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 - 친애하는 데카르트, 나는 방금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공격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해석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당신의 자 유입니다. 당신은 방금 내가 말하던 것을 중단시켰는데, 내가 내 생각을 끝까지 말할 수 있 도록 해주십시오. 데카르트 - 나는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억압하고 숭고한 감정의 평화가 손상되도록 만들 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프로이트 - 여러분들은 서구의 문화병리학이 조울증이라는 정신질환가 유사하다는 나의 견해가 그렇게 지나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구인들이, 실존적 불안을 일으 키는 기술공학과 반사회적인 거대 자본주의를 통해 위험을 야기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일 자리에서 몰아내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든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설 명은 맞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그 결과로 생기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려고 광기 어린 오만 으로 도망 친다는 말도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역학의 본질적인 근원을 설명하지 는 못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살인적이고 자살적인 폭력성 때문에 놀라지 않도록 적절한 기술공학, 서로에 대한 애정, 겸손을 더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 만들어 낸,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우울증으로 부터 광기 어린 과대망상의 제국으로 도망 칠 필요도 없겠지요. 그들이 이 악순환을 못 깰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추종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놀라겠지만, 나 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심리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내가 계속 얘기하려 하는 사상과 똑 같은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 - 당신 둘이 좀더 가까워지지 않았나 싶군요. 그러면 기쁘겠습니다. 프로이트 - 나는 나의 가정을 짧은 역사로 표현하겠습니다. 서구인이 중세로부터 빠져 나 왔을 때, 그들은 데카르트처럼 그들이 획득한 자립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동시 에 그들은 안전과 보호를 상실했기 때문에 불안했지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들의 독실함은 그들이 성숙해지는 것을 제한하기는 했지만, 위대한 아버지의 손에 의해 이끌어진다는 기분 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방랑의 시작에 대해 진상을 알리지 않은 채 그들음 모호한 상태에 있게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서양인들에게 신의 존재가 부정되 자, "신이 있던 곳에 바로 내가 있겠다"라는 모토가 생겼습니다. 그물 없이 공중그네를 타는 것이나, 이카로스가 열에 민감한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난 것은 다음과 같은 망상 때문이었습 니다. 즉, "우리는 모든 위협을 지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드릴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혹시 신은 아직도 있는 것이 아닐 까?" 이렇게 하여 자신의 전능을 확신함으로써 무력감을 해소시키려는 처방법이 생겨났습니 다. 그래서 유한성 및 모든 나약함과 약한 저항력에 대한 투쟁, 안절부절못하는 행동주의,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에 대한 강요,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다른 행성을 정복하는 것, 끊임없이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가파른 절벽과 빙하로 이루어진 북극지방을 정복하는 것이 경쟁자에 대한 승리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소위 신과 비슷한 불사조라는 것을 증명받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인간이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고, 수동적으로 될 수 있을 것이며, 더 이상 승리할 필요도 없을 거이고, 그 어떤 신기록도 필요 없을 것이며, 마침내 인내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서로에 대해 염려하게 될 것이고, 자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 며, 부단히 어떤 것을 제어하고 학대하는 대신에 생명을 위해 헌신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만든 불안에 대해 폭력이 가득한 행동주의라는 무기로 싸 우려고 하는 한, 그건 한갓 꿈으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 내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당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당신들은 서구문화 의 광기 어린 상황이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신의 자리에 놓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인간이 진보하면 할수록 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겠지만, 동시에 더 욱 고독하고 무방비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안전하다고 느끼 기 위해서 되도록 빨리, 전능한 존재가 되기까지 아직도 남아 있는 결점을 보충하여, 최종적 으로 완전한 불사신이 되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새로 획득한 기술력 때문에 죽 음이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팽창된 자아는 자신 밖에 있는 것이나 자신을 넘어서는 것, 즉 어떤 초경험적인 것이나, 죽은 후에 계속되는 삶이나 해방도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마지막 남은 희망은 기술공학을 이용해 노화를 정복 하고 불멸의 유전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친애하는 프로이트, 당신은 과학과 결합된 전능에 대한 믿음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 을 계속해서 마음속에 품을 것인가를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 신은 죽음의 당위성이 어쩌면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의심을 했기 때문입니 다. 아니면 혹시 피할 수 있는 우연인지 결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부 각시켰던 신콤플렉스라는 과대망상의 일부분이 당신 자신 안에도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그 광기의 흔적이 당신 자신의 자아에도 스며들었다는 나의 추 측이 옳다면, 나는 왜 당신이 서양인이 갖추고 있는 자아붕괴에 대한 불안을 더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을 주저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묘사한, 서양문화가 갖고 있 는 이 불편한 심리는 분명히 당신 자신 안에도 있었던 거지요. 당신이 생물학에서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아직도 의심한다고 말했을 때마다, 분명 당신 자신도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해 의심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당신이 죽음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낼 때까지 말입 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친애하는 프로이트, 당신이 과학은 더욱 우수하게 진보할 것이라는 긍 정적인 기대를 보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문화를 비관적으로 보면서 동요하고 있기 때 문에, 당신은 나까지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당신이, 인류가 새로운 기술적 파괴수단을 이 용하여 공동으로 자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로 그 당시에, 당신은 "인간은 인류 공 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과학이 주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자연을 공격하고 자연을 인류의 의 지에 종속시킨다고"고 칭찬했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자신과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당신이 두려워하는 어떤 것을 칭찬했던 것입니다. 기술혁명이 당신을 매료시키기는 했지만, 당신은 이미 자연을 공격하여 인간에게 종속시키려는 의간의 의지 속에 파괴의 요소가 숨겨 져 있으며, 이 파괴의 요소가 문화에 대항하는 끔찍한 힘을 통해 공격자를 반격하게 된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극단적인 오만에 대한 하늘의 처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은 이미 내가 1,500년 전에 경고했던 것이지요. 프로이트 - 당신은 지금 내가 로맹 롤랑과 논쟁을 벌였던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인슈타인 - 바로 그것입니다. 로맹 롤랑은 자아가 외부세계 전체와 분리될 수 없이 연 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서, 종교적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 당신은 '나는 그런 감정을 모른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당신은 그와 같은 우주적인 연대감의 경험 은, 다만 자아를 외부세계와 구분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잔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맥락 에서 당신은 신앙이 속수무책인 유아적인 단계의 잔여 상태일 뿐이라고 설명했지요. 그것은 성년이 되어서까지도 강력한 운명 앞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고 위로해 주는 아버지 를 동경하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가요? 프로이트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기본 사실로 경험하며, 그들의 종교성을 지지해 주 는, 우주와의 내적 연대감 같은 감정을 나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부처 - 그 때문에 당신에게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 기초한 우리들의 윤리학도 여전히 낯선 것입니다. 우리를 모든 동물세계와도 결합시키는 그와 같은 경외심은 당신에게는 다만 아이들이 믿는 마술의 잔재물이었겠지요. 당신은 자아가 종속에서 풀려 나고, 지식이 증가하 여 종교라는 지주가 불필요하게 될 때 개인 및 문화의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 - 그 점에 있어서도 당신은 나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나는 과학적 인 식이 이루어지게 되면 종교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당 시에 과학의 정신이 막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단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 람들에게는 자신을 불안으로부터 보호하고, 곤경에 빠졌을 때 위로해 주고, 도덕적 타락으로 부터 지켜 줄 힘을 믿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점은 결코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이런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종교를 망상으로 설명하고, 집단적 인 강박신경증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는 종교를 군중광기라고 표현하는 것 도 주저하지 않았지요. 아인슈타인 - 친애하는 프로이트, 당신은 신앙심을 임상적인 현상으로 분석해 나를 혼란 스럽게 합니다. 당신이 신앙심을 마술을 믿는 유아기로의 퇴행으로 설명하거나, 심지어 신앙 심에 정신병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때, 당신은 바로 신앙을 그 어떤 임상적인 현상을 분석하 듯이 하는 것입니다. 로맹 롤랑이 표형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종교적인 감정이 당신에게는 평생동안 낯선 것이었다는 것은 인정하겠지요. 많은 경우 노이로제나 정신 장애가 신앙심으 로 위장될 수 있다는 당신의 관찰은 확실히 맞습니다. 하지만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을 당신이 경험한 학문으로 싸잡아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내가 불안의 종교라고 불렀던 신앙을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당신 의견에는 동의합니 다. 이런 종교에는 분명, 아동의 소망과 불안과 처벌을 원하는 욕구가 투사된 거대한 부모상 과 같은 인간적인 신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나는 과학과 화합할 뿐만 아니라 과학을 보충해 주는 또 다른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물론 종교를 망상이나 군중 광기라고 비 난했던 프로이트 다신과 똑같은 개인적인 의무감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존경 받는 사상가인 데모크리토스, 스피노자, 케플러, 뉴턴이 나의 입장을 지지해 준다고 봅니다. 나는 내 생각을 다음과 같은 아주 불완전한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은, 인간 의 소망과 목표가 무가치하다는 것과 자연에는 물론 사상세계 안에서 계시되는 숭고함과 놀 라운 질서를 느낀다. 개별적인 존재는 그것을 일종의 감옥으로 느끼고, 존재하는 것의 총체 를 통일적인 것으로 그리고 의미 있는 것으로 경험하려고 한다." 심지어 나는 감히 그와 같 은 종교적 감정이 학문을 연구하는 가장 강학 고귀한 동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연구의 시작 단계에서는, 그들은 그런 우주적인 감정을 자연과학의 특징인 경험주의적으로만 추구 하게 되어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상태로 머무르게 되지요. 아인슈타인 마르크스 - 나는 당신들이 논쟁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쟁 을 저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전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 중에 누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더 적절하게 이해하고 있는 지 인간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 각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정신분석가가 왜 전쟁과 폭력, 거대 자본주의의 승리행 진과 환경파괴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는지, 그리고 아인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그 고귀한 연구단체가 왜 산업체한테서 돈을 받고, 인간들을 파괴하는 무책임한 기술을 발전시 켰는지 물을 것입니다. 먼저 프로이트에게 묻겠습니다. 왜 당신들 정신분석가들은 사회가 저 지른 과오를 비난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개인의 갈등 문제를 손댈 용기를 잃었습니 까? 프로이트 - 우리 정신분석가들이 동시대인들에게 적시에 나치스의 세계관이 지닌 파괴성 에 눈뜨게 해주는 것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입니다. 비정치적 학문을 정신분석의 근거로 내 세우는 대신에, 저 백인 우월주의라는 망상의 엄청난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 입니다. 지금은 그런 사실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마르크스, 우리 정신분석가들 대부분은 그 당시 무사히 박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제자들 가운데 아주 적은 수만이 나 중에 비판적인 계몽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을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내가 예전에 정치적인 문제와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내게 공동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다 해도 말 입니다. 우리 정신분석가들은 정식분석을 통해 고객에게 심리적 해방을 경험하게 해주려고 합니 다. 사실 이것은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지요. 하지만 이런 사회는 해방된 인 간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이에 특히 나의 동료 에른스트 짐멜이 이 루어 놓은 업적 덕분에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마르크스 - 하지만 당신 설명대로라면, 왜 당신 동료들은 대부분, 오늘날 자기 뜻을 무자 비하게 고나철시키려는 인성과 환경파괴는 물론이고, 그것의 심리적 반작용에 대해 사회 비 판적으로 관여할 생각을 하지 않나요? 당신 추종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 지로 물질적인 적응의 강요에 복종합니다. 당신 제자들은, 눈에 띄지도 또 방해받지도 않고 서 의학의 복지 시스템의 부족한 틈을 메우고 그로부터 수입을 얻는 것에 기뻐하고 있습니 다. 그들은 경쟁상대인 동료 집단의 싸움, 제한된 비용부담과의 싸움,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움 또는 상이한 학파 사이의 싸움에 자신의 투쟁의 잠재력을 쏟아 붓 고 있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사회에서 생산된 심리적이고 정신, 신체상의 불행을 폐기물 처리하듯이 해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우리가 여기서 깨닫고 있는 현실적인 몰락에 대한 불안을 의학적인 방식으로 분석해 없애려고 시도한다고 말하겠지요. 그리고 존경하는 아인슈타인, 당신 동료들의 상태도 결코 더 낫지는 않습니다. 원자탄을 만드는 데 공범 역학을 했다고 당신 스스로 고백했지요. 하지만 당신 동료들은 전쟁이 끝나 고 나서도, 러시아와 미국에서 대량 학살무기를 계속해서 제작하도록 유혹했을 때 여기에 굴복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고 묻겠지요. 나는 인간을 심리적으로 해방시키려고 한 프로 이트 당신의 의도를 무조건 존중합니다. 특히 그와 같은 심리적 해방이 이루어지려면, 구조 적으로 그런 심리적 해방을 필요로 하는 사회형태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당신이 인식했기 때 문입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내가 당신의 인도주의적인 연구정신을 존경하며, 당신이 사회 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기뻐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확인시킬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동료와 제자들을 포함하여 당신 둘 다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우리가 한탄하는 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저기서 그런 악을 장려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우리가 이미 프로이트를 과도하게 비판했으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여기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당신은 아직 우리들에게 몇 가지 설명해 줄 책임이 있습니 다. 우리를 초대한 사람이면서 이 모임의 진행자인 당신을 당혹스런 입장에 빠뜨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자로서, 지금은 희 망보다는 불안을 훨씬 더 많이 일으키고 있는 저 과학의 대표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 대한 겸허함을 지녔는데도 20세기 끔찍한 계획 중 하나가 실행되도록 도운 것은 그 사실을 전형 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아닌가요? 매일 당신 동료들이,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지 의심스 러운 목표를 위해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인슈타인 - 내가 원자탄을 만들어 히틀러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일회적 인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때 잘못 생각했던 것이고, 당신들도 알다시피 그 후에 계속 해서 핵무기 반대 투쟁을 내 인생의 중심적인 과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과학자들 이 현재 과도하게 타자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겠지요. 마르크스 -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연구수단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데카르트처럼 재야 학자로서 연구에 필요한 몇 가지 기구를 마련하려고 자기 집을 팔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아인슈타인 - 과학자들이 물질적으로 의존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해롭다고 생각하는 일을 강요받는다면 거절해야겠지요.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이들도 많긴 하지요. 나의 친구 이자 동료인 막스 보른은 "자연과학자의 사고방식 속에 인류에 닥칠 위험이 존재한다. 왜냐 하면 자연과학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그 일이 과연 인류에게 유용할지를 충분 히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지요.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 스 보른 자신은 결코 자연과학적 인식이 파괴적인 목표로 이용되는 데 참여하지 않았습니 다. 무기생산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연과학이 이런 식으로 발전한 데 대해 공 동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비판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마르크스 - 연구자들은 대부분 은퇴하고 나서야 자기의 학문이나 업적이 초래한 해악을 자책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생화학자 에르빈 샤가프가 실험을 통해 세포핵까지 탐구해 상 을 탔을 때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나중에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행위를 공격학문이라고 부 르고, 더 현명한 시대라면 그런 실험을 분명 금기로 삼았을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컴퓨터 과 학의 선구자인 요제프 바이첸바움은, 자기 동료들이 오류가 없는 인공지능을 만들어 인류를 구원하려고 꿈꾸는 것을 경고했지요. "해가 지날수록 무릎은 약해지고 양심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네" 라는 옛 노래가 있습 니다. 고령의 노학자는 다시 교회에 나가고, 정년 퇴직한 자연과학자 및 과학기술자는 공개 적으로 고해성사를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불러낸 유령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개발한 대량 학살무기와 독성의 화학물질은 계속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당신은 방금 노벨상은 받은 우리들 의 천상동료 막스 보른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인류는 핵전쟁으로 멸망하지 않는다면, 컴 퓨터와 기계에 의해 지원받는 독재자 아래에서 바보가 될 것" 이라는 보른의 진단에 대해 당신이 뭐라고 말할지 더 자세하게 듣고 싶군요. 아인슈타인 - 내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당신들이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 행의 문제로 애써 골머리를 앓는 수고를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친구 보른도 자기의 비관주의적인 평가가 잘못된 것이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아직 우리 종족의 학습능력 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들도 핵무기의 위험이 드러난 이래로 지상에서 어 느 정도 유익한 논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핵무기의 그늘 아래 모든 인간 이 형제라는 사실이 드러날 거라고 말했지요.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핵무기 반대운동이 냉전 종식을 도운 것이 어쩌면 이미 자기 성찰이 시작되었다는 징표가 아닐까요? 마르크스 - 하지만 자기 성찰이 시작되자마자, 인간들은 군비 축소를 다시 멈추었습니다. 자연과학자와 과학기술자의 역할에 대해 좀더 논의하기로 하지요. 어리석은 설교가가 되어 종교회의와 윤리학자들의 회의에서 선을 설교하며 회개하는 몇몇 노인들을 제외한다면, 나 는 내 눈앞에 수천 명의 자신만만한 젊은 연구자들이,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 위험을 야기할 뿐인 하찮은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을 봅니다. 그들에게 노학자들의 회의같은 건 전혀 기대 할 수 없습니다. 부처 - 하지만 당신들 나라의 대학에서 특히 환경파괴와 관련이 있는 분야를 전공하는 학생수가 감소하고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쩌면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까요? 아인슈타인 - 사람들은 원자력을 다룰 수 있는 후진이 부족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도 더 이상 세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러 곳에서 화학, 물리학, 특히 핵물리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쇠퇴하고 있고, 대형 원자로 제조법과 플로토늄 생산법을 배우련느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학에 있는 후진들은 어떻게 해로운 기술을 수용 가 능한 기술로 대치할 것인가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 의사들도 유연하고 대안적인 치료법으로 방햐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결코 원칙적으로 기술에 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 고유의 치유려이 더 유익하게 작용할 영역에 마저 '과학'이라는 야심이 침범하는 것에 저항하는 겁니다. 마르크스 - 모두 좋고 존경할 만합니다. 하지만 전혀 피해를 내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라도 좋으니 내게 말해 보십시오. 이들 젊은이들이 보여 주는 사회적 민감성과 생태학적 열광은 그 어떤 것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이 이상주의자들이, 거 대한 에너지 기업이 대체 에너지 기술의 개발과 이용을 억제하고, 제약회사와 장비산업체가 의학계를 지배하며, 군수산업체가 무기를 팔아먹으려고 불안정한 나라에 전쟁을 조장하며 거대한 양의 학살무기를 유입시키고 있는 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 다. 아인슈타인 - 그래도 결국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들입니다. 물론 당신 말은 충 분히 이해합니다. 나는, 경제에 의존하는 사회과정이 불가피하게 인간들을 휩쓸고, 구속력이 없는 도덕적 자기 만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자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 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다르게 봅니다. 개개인은 굴복할 수 있고, 다음과 같이 설 득당할 수 있습니다. 즉, 어차피 사회과정이란 나를 그것이 원하는 대로 할 것이고, 따라서 나는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 아인슈타인은 그와 반대로, "네가 복종하 기를 원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자신의 무력감에서 오는 허위적인 변명이 숨어 있다. 네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너에게 공동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다"고 말하겠습니다. 마르크스 - 당신은 물론 그렇게 볼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당신이 말하는 이 공동책임은 순전히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에 호소한다는 것은 이미 의기소침해 있는 인간들을 더 우 울하게 만들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마음속으로 사회에 더욱더 애정이 넘쳐야 한다고 꿈꿀 지 모르고, 어쩌면 그런 꿈을 꿈으로써 개인적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으며 행복해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깨어나면, 그들에게 필요한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지 않고, 세상이 아직도 자신을 필요로 할지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생산하는 기계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기계가 있을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그들의 자존감 을 조금씩 감소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당신이 말하는 책임감이라는 말이 매우 생소한 단어처럼 들릴 것입니다. 부처 - 우리는 그 사이 역사란 인간과 인간의 사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인 생산관계에 복종하는 계급이나 집단에 의해 움직인다는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알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인슈타인이 인간적인 동기에 희망을 걸고 무엇을 발견하려 하든, 언제나 회의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 모인 노인들의 사상이 모든 문화 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러면서 경제관계의 다양한 변화를 오래 지속시킨 것 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 건가요? 아인슈타인이 플라톤, 공자, 나를 이곳에 초대한 것은 정신 사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공동체가 우리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 니다. 마르크스 당신도, 당신이 설명한 역사과정의 해설자로 인간의 의식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론자로 이해될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러 세대들이 당신의 이론을 연구하 는 데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당신들 서양인이 돌아가며 끔찍한 심문을 받는 일이 끝났습니다. 내 생각에, 이 심문을 통해 많은 것이 해명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돕는 모임'이라는 말도 나왔지요. 당 신 들이 공자와 나를 비판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한 것은, 아마도 당신들이 세계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파괴력의 근원지가 서양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공자와 내가 무죄한 구경꾼의 입장을 취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상에 만연되어 있는 <요한 계시록>에 묘사된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질서를 설명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 는데도, 이제까지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다루었던 까다로운 문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5.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가톨릭 해방신학자 한 사람이 "여자에게는 사제서품을 내릴 수 없다"라는 문장에 서명하 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문되었다. 이것은 100년 전이 아닌 오늘날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위기 는 여성들의 영혼에 깃들여 있는 '생명체에 대한 배려'를 '전지전능한 신과 같아지려는 남 성 들의 망상'이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부처의 말이 맞는 것일까? 프로이트의 진단에 의하 면 오늘날 인류는 심리적 분열을 겪고 있다. 이 심리적 분열은 남자들을 영혼이 없는 기술 만능주의자나 양심이 없는 광인으로 만들고 여자들을 의존적이고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존 재로만들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려 하고, 타인이나 자연과도 더 온화한 관계를 가지려 는 사람들의 문화창조 운동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부처 - 나는 우리가 여성의 역할과 여성이 처한 상황에 대해 충분히 평가하지 않았고, 심 지어는 완전히 잘못 평가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성 안에 내재하는 정신 및 영혼의 힘을 억압했기 때문에,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배려를 남성적인 전능에 대한 망상 이 억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 - 흥미로운 생각이군요. 당신들도 알다시피 나는 인류 역사의 기원을 다음의 신화 에서 찾았습니다. 즉, 인간은 원래 남녀 한 몸이었는데, 나중에 제우스가 반쪽씩 분리했다는 신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에로스를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과 다시 합치고 자 하는 동경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이 야야기는 인간이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여자는 남자 에게서 남자는 여자에게서 원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을 다시 찾아야 하다는, 즉 자신의 또 다른 부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공자 - 우리 중국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양과 음은 서로 싸우라고 잇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라고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플라톤 - 하지만 우리는 남자들의 권력 추구가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겸허, 외경심, 동정과 같은 덕을 외면하면서 불행을 자초할 수 있다는 위험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공자 - 우리는 여성에게 다만 봉사하는 역할만을 부여함으로써 이미오래 전에 여성이 문 화에 미칠 수 있는 힘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 - 당신 나라의 여자들은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렇지 않나요? 공자 - 사실 나는 여자가 내방 밖에서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처 - 우리 인도에는 여자 승려는 자기 짝이 되는 남자, 즉 남자 승려 뒤에 앉아야 한다 는 규칙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런 규칙을 바꾸려는 노력이 일고 있지요. 플라톤 - 그와 반대로 나는 우리 그리스인들에게 남녀 평등을 제안해 그들을 깜짝 놀라 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여자와 남자 모두 체육 및 예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요. 가장 높은 명예직이 남자에게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아 테네의 문화생활을 생각할 때, 풍부한 정신세계를 지닌 고급기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당 신들도 알다시피 나는 일찍이 소유구조의 해체와 공동으로 자식을 양육하는 일종의 공산주 의적 공동생활을 주장했는데, 그것을 당연히 여성의 완전한 해방이 전제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 - 하지만 당신은 결코 일관되게 행동하지 않았지요. 당신은 아테네에서 여성 운동을 어느 정도 인정하려고 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티마이오스>에서 당신은 여성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왜냐하 면 그 책에서 당신은 남자들에게 예언하기를, 비겁한 남자는 바로 다음 생에서 여자로 태어 나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메논>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해져서, 당신 은 아주 보수적으로, 집에서 얌전하게 구는 것과 질서 있는 생활을 여자의 덕으로 찬양했습 니다. 플라톤 - 당신은 내가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은 내가 맞서 싸워야 했던, 여자에게 적대적이었던 당시의 전통을 참작해 줘야 하니다. 여전 히 내 고향에서는 전설적인 헤시오도스를 최고로 숭상했는데, 그는 여자라는 존재를 늙은 남자를 돌봐야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제우스가 보낸 악이라고 일컬었습 니다. 내가 설립한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내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 하고 나서자 곧바로 나를 비난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도 남자에게 복종시 켜야 하며, "침묵은 여성에게 장식품을 가져다 준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했 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다고 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당시, 청 소년들을 교육할 때 쓰이는 노래를 지을 때는 두 성별의 상이한 본성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즉, 남자에게는 공명심과 투쟁적인 본성을, 여자에게는 신중함과 예의 바름을 가르쳐야 한다 는 것이었죠. 하지만 왜 여자들이라고 해서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을 배워서는 안 된다는 건 가요? 왜 입법기관은 여자에게 약함과 유약함만을 부여해야 하고, 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옛 아마존 여전사의 모범을 상기시켜서는 안되나요? 나는 여자들도 남자들이 누리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나는 국가에 대해 국민의 반에게만 행복한 생활을 허락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 내가 노예들의 권리를 위해서도 노력했다면 더 일관성 이 있었겠지요. 그 대신에 나는 때때로 원래 노예계급에 속하는 기생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제대로 교육을 받아서, 그들과 철학을 논하는 것이 내게 높은 만족을 줄 정도였습니다. 내가 예전에 기생이었던 아스파시아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는 당신들 도 알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나중에 페리클레스의 정부가 되었는데, 그 지성과 성적 매력으로 우리 아테네에서 유명했지요. 아우구스티누스 - 하지만 그녀는 도덕을 타락시키는 위험스런 여자이기도 했습니다. 하마 터면 그녀는 신성모독과 매춘 알선으로 처형당할 뻔했지요. 존경하는 플라톤, 나는 당신이 여성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근거로 하필 아스파시아를 예로 든 것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생들이 준 폐해는 아테네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치 로마인들이 결 국 성적 방탕 때문에 자신의 문화를 몰락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플라톤 - 당신이 성에 적대적이라는 것은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 그렇게 되었는지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성에게 사회 지배권을 넘겨 주는 것이 이성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해서 생명을 보호하는 능력이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 였고, 그리하여 지금 인류의 대부분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근본문제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인슈타인 - 나는 우리가 앞으로 두 가지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남자들 이 공적인 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지, 둘째, 이런 성 역할의 분리가 악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오늘날 서구문화가 겪고 있는 생명을 위협하는 병의 또 다른 이유가 되지 않았는지 하는 문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나는 우리가 그 두 가지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옳다고 보지 않 습니다. <성서>에 보면 모세는 분명하게,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지배권을 주는 것을 인정해 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런 신의 뜻에 따른 질서가 왜 유해하게 작용했다는 것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꼭 그것에 대해 숙고해야겠 다면 그렇게 하시죠. 플라톤 - 당신은 항상 사도 바울을 근거로 내세우는군요. 그런데 그는 디모테오에게 보내 는 편지에서 "아담이 유혹(성교를 말함 - 역주)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브가 유혹했다" 고 보증했습니다. 즉 아담이 능동적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까지 도 그가 저지른 죄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신 의 나라'에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듯,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정신은 남자의 일이고, 육체는 여자의 일이다"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비논리적입 니다. 아담이 이브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렇게 하도록 충동한 것은 그의 육체였습니다. 왜 이제 갑자기 여자가 책임을 떠맡아야 하고 남자의 정시넹 의해 훈련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프로이트 - 아마도 그런 생각 속에는 여자의 성적 에너지가 실제로 남자의 성적 에너지 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플라톤 - 그러면 그것은 여자를 얕보지 않으면 여자들에게 잠식당하고 여자들에게 의존 하게 될 거라는 남자들의 불안이겠군요. 남자들은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 정신적인 것이 자 신에게 속한다고 표명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육욕 때문에 억눌려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 군요. 이것은 매우 약은 착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것은 고안된 것이 아니라 계시입니다. 플라톤 - 나는 당신 그리스도교인들이 여성에게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 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 교회가 교리와 제도 안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신학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로마 종교회의 의장이 교황의 개인적인 허가를 받아 또 한 명의 중요한 해방신학자를 교회에서 파문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해방신학자가 "마리아가 일종의 최초의 여사제였다"고 말했으며, 또 "나는 예수가 남자 들만을 자신의 제자로 삼은 것이 그 당시의 사회적 혹은 문화적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유의사에 따라 그렇게 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 때문에 나는, 교회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여자에게 사제서품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라는 문장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입 니다. 사실 100년 전이었다면 여자들을 존중했다는 이유로 이런 투사를 파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단자라고 화형시켰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처벌은 하필, 동아시아에서 두 종교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는 것을 도왔던 티사 발라수르야라는 수도사에게 내렸던 처벌과 똑같습니 다. 아우구스티누스 - 우리 교회의 도그마 외에도 역사 속에서 남자들이 본질적으로 문화 창 조적이며 그 때문에 우선권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프로이트와 나는 생각이 일치합니다. 프로이트가 나를 환자로 가정하고 심리학적으로 해부 했듯이 나도 그의 이론에 비추어 나 자신의 생각을 평가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기쁘게도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여자는 가족과 성생활의 이익을 대변한다. 문 화활동은 전적으로 남자들의 일이다. 그리고 이 문화활동은 여자들의 덜 성숙된 충동을 승 화하도록 촉구하라는 어려운 과제를 남자에게 부여했다." 그러므로 문화의 진보를 위해 남 자들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할당한 것은 문화 자체입니다. 프로이트 - 아우구스티누스, 나는 이번에 프로이트가 당신 편에 서 있다는 당신의 승리감 을 이해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나는 프로이트가, 여자들은 공동체의 모임에서 함께 이성적으로 토론할 능력이 없다고 믿었던 사도 바울과도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은 뭔가를 배우려면 우선 남편에게 물어 봐야 한다는 겁니다. 프로이트 - 내가 그와 비슷한 주장을 했단 말인가요? 아우구스티누스 - 나는 당신을 전혀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당신은 많은 여자들이 지 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동료 정신과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 여자가 정신박 약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다만 그가 제시만 생물학적 근거를 반박했 을 뿐, 빈정대며 여자들이 정신박약이 된 것은 종교 때문에 사고가 억제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니면 당신은 내가 당신을 잘못 인용했다고 주장하려는 건가요? 프로이트 - 아닙니다. 다만 차이점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여자들이 선천적으로 정신박약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육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하지만 어쨌든 결점이 있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플라톤 - 당신 둘이 이 천상에서 우리 그리스 여신의 손아귀에 잡히면, 그 여신들한테서 무슨 말을 들을지 상상해 봅니다. 아주 재미있겠군요. 프로이트 - 이미 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유능한 여제자들은 나를 호되게 꾸짖었지요. 천 재적인 나의 딸 안나가 내가 죽은 후에 계속 발전시키고 전파하지 않았더라면 내 이론은 성 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사이 나 자신을 비판해 볼 마음이 생겼지요. 플라톤 -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프로이트 - 내 입장을 자기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지요. 남성의 문화활동은 여성의 억제되지 않는 성욕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과격했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이제까지 믿었던 것보다도 더 데카르트와 비슷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카르트가, 특히 여성에게 특징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감정을 자신의 학문적 사고에서 멀리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나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성에게서 인지하게 되는 그와 같은 동요에 정복당하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것입니다. 플라톤 - 간단히 말하면, 여자들을 교육하고 억압하는 이면에는 본질적으로, 여자들이 자 아가 독립하고 또 권력을 확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남자들의 투쟁이 숨겨져 있다는 거군 요. 당신은 문화활동이란 주로 무언가를 학문적으로 정복하려는 충동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때 감정과 격정, 충동은 자아를 무력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거고 말입 니다. 여자들은 이 짐스러운 감정의 대표자로 가치가 절하되고 억압되죠. 이것은 이중적인 분열과정입니다. 기술 만능주의적인 남성적 자아는 자기 내면 속에서 자신의 감정세계를 억 압하고, 동시에 이런 억압을 위태롭게 만드는 여자들과 싸웁니다. 하지만 남자들이 자신의 일부 가운데 보려고 하지 않는 부분을 여자들이 보여 주기 때문에, 여자들은 유용하기도 합 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인슈타인 - 프로이트가 이번에는 당신에게 동의할 것 같군요. 그런데 지금 플라톤이 여 자들에게 대한 차별대우가 부당하다고 말한다면, 누군가 나에게, 왜 2000년이 되는 지금 인 간들이 그로인한 재앙을 당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죠. 모세, 바울,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대가 아니고 말입니다. 부처 - 먼저 당신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종교에서도 남자들 이 확실히 이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성의 정신적 가치절하와 결부되어 있는 것 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결코 정신과 감각을 성별과 결부시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별에 따라 역할을 나누지 않습니다. 만약 순수하고 객관적인 사고 를 하는 데 감정적 동요를 없애거나 다스리는 것을 남자들이 더 잘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남 자들과 함께 토론해서는 안 된다면,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도덕적 가치척도를 결정하는 중요 한 일에 여성들을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은 무엇보다도 감정 속에 계시되 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 당신은 우리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있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서 바로 이 확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정의는 천성적인 동정심에 뿌 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 는 성향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적이라고 일컫는 업적을 이루도록 충동하는 힘이죠. 그 어떤 추상적인 의무 개념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동정심은 도덕성을 위해 중요한 동 기이고, 무자비와 폭력에 대한 대응력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논쟁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무시하면, 평화롭고 정의로우며 자연을 존중하는 정치를 하는 데 필수적인 본능이 약해지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동정심과 같은 동기가 논쟁할 때 특히 도움이 된다고 인정했습니다. 아인슈타인 - 그렇다면 왜 그 해악이 이제야 비로소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인가요? 프로이트 - 그 문제에 대해 우리는 비판적으로 더 자세하게 숙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것은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상기시켰듯이 나 자신이 여 성에 대한 모세와 바울의 평가에 대해 거의 회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중세적인 신앙이 감소함에 따라 서양이 처한 상황이 바뀌었다고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공적으로 여자를 성적인 존재로 낙인을 찍었지요. 하지만 중세의 남자들은 여자들과 마찬 가지로 겸허, 충성, 경외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 의식을 여자 에게만 돌렸고 그것을 가치절하한 것입니다. 중세에는 남자들도 자기가 신의 은총과 사랑 안에 있다고 느꼈고, 독립심과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신의 비밀을 쟁취하는 대신에 신이 자신을 인도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는 여성적인 연약함으로 간주되는 것 을 자신에게도 수용했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느끼고,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때, 고통과 죽음 은 그들에게 뜻 깊은 섭리였습니다. 고통이 없는 영원의 상태로 가는 여정에서 극복해야 할 적대적인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신의 자식이 되는 것에 대해 내적인 반발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은 우리가 이미 데 카르트에게서 발견했던 것과 같이 기본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이제 보호와 안전과 화해에 대 한 소망을 억누르면서, 또 내면에 있는 영혼의 한 부분을 분리하여 '나약함'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여자들에게 떠넘기면서, 남성적인 자아가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수 동적인 감정을 억압하려 애썼으며, 그렇게 하여 예속이라는 속박을 풀었습니다. 전능에 대한 망상과 무력감으로 인한 불안 사이의 동요와, 조울증이라는 악순환에 빠져 억압된 자신의 파괴성을 투사시키는 남성적이고 인위적인 신의 비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조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저하고 동요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 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더욱더 신이 되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보장하는 복지정 책인 양 계속해서 신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최근에 이런 과정은 급격하게 가속화되었지요. 과학을 기술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무 제한의, 실제로는 광기 어린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정복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회적 본능도, 그 어떤 자연에 대한 동정심도 자제시키지 못하는 정복욕 말입니다. 그 리고 이런 의지는 광기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적인 진화의 속도를 높이고 그 질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설득됩니다. 아인슈타인 - 그러니까 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여성적인 것에 대한 차별 은, 종교가 그 문화적 능력을 잃었을 때 해악을 드러낸다는 거군요. 그 이후 남자들은 무엇 보다도, 이전에는 아직도 신앙 속에 보호되었던 겸허, 경외심, 동정과 같은 덕을 무시하게 되죠. 이제부터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다만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기계, 즉 무한히 자 라고 있는 듯 보이는 그들 능력의 상징인 기계입니다. 하지만 이런 희망이 얼마나 기만적인 가는 핵무기로 인한 자기파괴 위협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차별받는 여성들이 새로운 사회적 힘을 얻도록 해주는 것이, 이런 끔찍한 진로를 수정할 수 있는 길 일까요? 프로이트 -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심리적 분열을 극복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겁니다. 이 심리적 분열이 한편으로는 남자들을 영혼이 부재한 기술 만능주의자나 양심이 부재한 광 인으로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들을 자신감 없고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존재로 만 들었지요. 하지만 이 분열은 또한 기묘한 반대 유형도 생기게 했습니다. 즉, 비자립적인 여 성화된 남자와 감정이 결여된 남성화된 여자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에는 반쪽 인 간들이 우세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인사 발령 때 수적으로 성비를 조정한다고 해서 사회 가 건강해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완전한 인간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즉, 여자 들이 자신의 힘, 야심, 의지력을 더 이상 억압하지 않게 하고,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세계를 억누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업신여기지도 다른 이에게 경멸당하지도 않게 하는 것입니 다. 내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평생동안 성을 심 리학적으로 고찰하면서 편견을 없애는 노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지요. 당신들은 내가 여자 들에게 남근 선망이 있으며 지능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과 문화발전을 순전히 남자들의 과제로 보았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아인슈타인, 이 점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분열되어 잇는 심리적 부분이 당신에게 는 성공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또 매우 특이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고 봅니다. 당신은 공 명심을 가지고 대담하게, 가장 풀기 어려운 세상의 수수께끼를 물리학적으로 풀어 보려 했 습니다. 즉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업적을 수행한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을 완전함과 조화의 모범으로 종교적인 외경심과 겸허함을 가지고 대했는데, 이것은 오히려 여 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태도지요. 아인슈타인 -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다른 사내애들과 다르게 느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한번은 병사들이 우리 도시를 행진해 갔을 때 내가 운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부모님에게 말했지요. "내가 어른이 되면 이 불쌍한 사람들처럼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하고 말입니다. 다른 사내애들은 나에게 항상 혐오감을 일으키는 군대에 열광했습니다. 나는 전쟁에서의 죽 음을 공동살인으로 느꼈지요. 물론 히틀러는 군사력에 의해 무너져야 했겠지요. 하지만 나 는,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도, 그 이후 사람들이 독립적인 세계기구의 도움으로 전 쟁과 같은 새로운 군비경쟁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이 비합리에 대해 항의했기 때문에, 나는 내 새로운 고향인 미국에서도 사랑 받지 못 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결코 내 안에서 남성적인 면이 어떤 심리학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거나, 내게 여성적인 특징이 있다거나 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특별함은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번은 끔찍하게도 나 자신을 스스로 유아라고 부르기 도 했지요. 플라톤 - 나도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 당신이 보통 다른 성에 귀속되는 것으 로 간주되는 요소를 당신 안에서 화해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프로이트 가 묘사한 완전한 인간형은 드물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상황이 변화되리라는 어떤 중요 한 조짐도 아직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내가 얘기한 신화를 분명히 이해하는 듯 보입니다. 자신의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인 특성을 기억해 내도록 하는 신화 말입니다. 본래 인간은 여성적인 면과 남성적인 면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외부적인 힘을 숭배합니다. 남성들은 권력과 정력을 신봉하고, 항상 싸워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협정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정복해야 한다는 강요를 느끼 지요. 지상에 정복해야 할 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가상의 세계에서 외계인이라도 발 견해 내야 합니다. 이 공격적인 팽창은 한계를 모릅니다. 지상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통 령이 '별들의 전쟁' 이라는 계획으로 우주에 있는 싸움터까지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 으 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엄청난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근 서구에서는 양성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보디빌딩을 하며 남자들을 쫓아가고, 계속해서 새로운 전투게임을 발견하며, 산소 마스크도 없이 8.000미터나 되는 히말라야를 애써 기어오르고, 또 무리를 지어 직업군인이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자들 스스로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연약한 특징을 성격상의 단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유행인 듯합니다. 이런 현상은 여자들이 과대망상증이 있 는 남성들의 권력숭배에 제동을 거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더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보 여 줍니다. 프로이트 - 그게 놀라운가요? 세대를 거치면서 여자들은 단지 수동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만 했고, 최근에는 나에게 여자들의 감정적인 욕구가 남자들이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 는 데 방해가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이런 가치절하를 내면화하 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 마침내 남자들과의 경쟁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자들의 일부분이 고집 세게 반항하는 동안, 여자들의 또 다른 일부분은 발전 가능성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부처 - 하지만 그것이 모두 진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젊은이들이 더 이상 과대망상에 빠진 위험한 공학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자연 을 보호하고 건강한 생활양식을 보존하려는 선구적 활동이 점점 더 많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혹시 소란스럽고 극적인 일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당신 서구인들의 인성 때문에 조용하고 은은하게 발전하고 있는 경향을 잘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신 들은 최근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명상과 대화를 통해 팽창주의적인 권력숭배라는 인습적인 목표와 작별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는 여자들이 가장 선두에 서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 학문적으로 수행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환경파괴적인 계획과 몇몇 위험한 공학, 특히 군대 투입에 반대표를 던지는 이들 가운데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습 니다. 마르크스 -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도처에서 독자와 청취자와 시청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지만, 결정권을 쥔 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한 것이 반영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도 이루어진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되죠. 전쟁에 반대표를 던졌다해도 전쟁은 일어나고, 심지어 전쟁에서 승 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전쟁에서 지게 되고 그러면 다음번에는 다시 지려고 하 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부처 당신이 날카로운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랑과 선과 평화 주의를 따르는 많은 동정적인 여성들이 그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대로 표를 던진다 해도 그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 - 친애하는 마르크스, 그것은 당신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당장 세계를 한방에 물질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정신적 변화는 오히려 침묵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가치와 서서히 결별함으로써 공동체는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에서, 결국에 는 수많은 지역에서 개인과 집단이 서로에게 다가가고, 다르게 살겠다고, 서로 다르게 대하 겠다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겠다고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 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서양에서는 빨리 성공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생각 에 익숙한, 성급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즉 평화주의가 바로 다음 전쟁을 막지 못하면 그 평화주의는 가치가 없는 것이 되죠. 시장에서 사람들이 당장 온화, 선, 관용과 같은 물건 을 찾지 않으면 그것은 곧바로 폐기처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익한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여러분들은 용을 죽이는 영웅을 찾지 말고, 지상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광기가 어려있는 파괴적인 권력투쟁과는 다른 힘이 필요하다는 믿음에 불을 붙인, 정신적으로 빛을 발하는 여자와 남자들을 찾으십시오. 프로이트 - 아름다운 미래상입니다. 하지만 내 제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숭배에 더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계화된 경제에서 경쟁하면서 살아 나으려면 더 강한 걸음걸이가 필요하 다고 믿지요. 난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보 다 약한 군중이 소요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만 부를 떼어 줍니다. 하지만 약한 대중에게서도 정당한 공동체 정신 같은 것은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여론조사가 보여 주듯 보편적으로 사 회적인 감정은 줄어들었습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좁아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많은 여자 들이 남성이 자기 중심적인 냉혹함에 좀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자기 중심적인 냉혹함은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억압된 감정적 측면을 좀더 개방하려는 성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 말한 완전한 인간은 아직도 극소수에 불과합 니다. 부처 - 그건 아마도 맞는 말일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체제의 원리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를 추월했을 때만 유쾌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리고 추월당 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을 열등하다고 느끼지요. 그리고 인간은 자기보다 더 빠르 고 완벽하게 생산해 내는 기계에 의해 추월당할 때마다 점점 더 자신을 열등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완강하게 내 입장을 고수하겠습니다. 나는 이런 살인적인 경향에 저항하는 소수의 사람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말한 젊은이들을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려 하고, 타인 및 자연과 더 온화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이를 먹으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하는 이들도 적지 않 겠지요. 하지만 동요하지 않는 몇몇 이들은 이 압력을 참고 견딜 것입니다. 여자들은 감정적 으로 굳어진 신념에 더 충실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에는 여자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모든 문화창조 운동이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공자와 내 가 가르친 것이 우리 동양인들에게 유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제자들 덕분 이었습니다. 나자렛의 예수는 열두 명의 제자들의 지원을 받았지요. 그리고 300년 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았을 때, 로마 시민 가운 데 그리스도교도는 15퍼센트도 안 되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꼭 좋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자신이 가는 길에서, 자신을 고독하 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고수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희망과 의미를 발견한다 고 느끼면 그들은 그 기회를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데카르트 - 하지만 서구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진로가 확정된 기차 안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 부처 같은 사람이 아주 아름답게 창작해 낸,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꿈의 기차에 대해 얘기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서양문화는 자신의 진로를 최종적 으로 확정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목표를 따를 거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내가 바로 처음으로 이런 방향을 결정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에 동의합 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내가 만든 이정표를 수정할 만한 설득력 있는 반박을 듣지 못했습 니다. 여러분들은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이 남성적인 권력사상을 너무 많이 반영하고 있 으며 완전한 인간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획득한 권 력이 인간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소유하지 못했던 자유와 확실성을 주지 않았나요? 이제 인 간은 기술을 이용해 완벽하게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고, 예전보다 더 오래 살고, 내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했던 편리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가 종말할 거라는 한탄은 뭔가요? 아인슈타인과 마르크스가 서구는 물론이고 전지구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폐 해에 대해 보고했는데, 그 보고 내용 가운데 어떤 것도,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몰락에 대한 예언의 정당성을 입증해 줄 결정적인 근거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현대를 사는 여자들은 진보를 책임지고 있는 남자들과 더욱더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남 자들로 하여금 여자들의 유아적인 감정 및 변덕스런 충동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흐름이거나 계몽이 가져다 준 보상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자식이 아니라, 우주여행과 가상세계 및 유전공학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수많은 종의 창조자입니 다. '남성적이다' '여성적이다' 하는 것은 이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합니다. 곧 유전공학에 의 한 변종이 나타나게 되면, 자연적인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물음은 향수에 젖은 질문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나는 이제 우리가 아담이 더 정신과 밀접한지 아니면 이브가 더 정신과 밀접한지, 그리고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우 리 종족의 모습을 불완전한 인간이라 불러야 할지 완전한 인간이라 불러야 할지에 대한 불 필요한 토론과 작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우리의 주요 문제들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즉, 소위 부분적으로는 우리들 책임이라는, 서양문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모험이 곧 인류를 멸망시킬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내 믿음대로 구원을 가져다 줄 위대한 해결책을 발견할지 하는 문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