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루터스처럼 르삑 씨: 홍당무야, 너는 지난 해에는 내가 기대한 만큼 공부를 안했구나. 성적표에 좀더 하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쓰여 있다. 너는 공연히 공상에 잠기거나, 읽어서는 안되는 책을 읽고 있단 말야. 기억력이 좋아서 시험에는 꽤 좋은 점수를 따고 있지. 그러나 숙제를 게을리 하고 있어. 홍당무야, 좀더 열심히 해보려는 생각을 가져라. 홍당무: 두고 보세요, 아빠. 아빠 말대로 지난 해에는 내가 조금 게으름을 피웠어요. 하지만 올해는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전과목 다 일 등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예요. 르삑 씨: 아무튼 열심히 해라. 홍당무: 참 아빠도! 너무 기대가 커요. 지리와 독일어와 물리와 화학은 가망이 없을 것 같아요. 아주 잘하는 녀석이 두세 명 있거든요. 그 아이들은 다른 과목은 형편없으면서도 그 과목만은 뛰어나요. 그 애들만은 도저히 앞지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아빠, 프랑스어 글짓기로는 우리 반에서 첫째가 될 작정이에요. 그리고는 계속 유지할 생각이에요. 만일 노력해서 첫째가 못되더라도 조금도 나를 나무라지는 마세요. 그래도 나는 부루터스처럼 자랑스럽게 외칠 수가 있어요. "오오 미덕이여! 너는 한갓 이름에 불과하도다."라고 말이예요. 르삑 씨: 그래, 홍당무야. 너는 틀림없이 모두를 휘어잡을 것이다. 형 훼릭스: 아빠, 홍당무가 뭐랬지? 누나 에르네스띤느: 나는 못 들었어. 르삑 부인: 나도야. 어디 한 번 더 말해 보렴, 홍당무야. 홍당무: 응, 아무것도 아냐. 르삑 부인: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지만 너는 우쭐해서 한참 동안 열을 내어 이야기하지 않았니?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휘둘러 대며 말이야. 그 목소리는 동구 밖까지 들렸겠다. 그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해 보렴! 틀림없이 모두를 위한 좋은 말일 테니. 홍당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엄마. 르삑 부인: 천만에. 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했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홍당무: 엄마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르삑 부인: 그렇다면 더 듣고 싶구나. 자, 똑똑한 척은 그만 하고, 내 말을 들어라. 홍당무: 그렇담, 말하겠는데, 엄마, 나는 아빠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했어요. 아빠가 나에게 친절히 충고를 해 주시기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던 거예요. 고맙다는 표시로, 부루터스라는 로마 사람처럼 미덕에 호소해 보겠다는 생각 말이에요. 르삑 부인: 무냐, 시시하게시리^5,5,5^. 제발 아까 말한 그대로를 한 구절도 빼지 말고 한 번 더 말해 보려므나. 나는 뭐 페루 나라를 달라듯,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엄마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잖니? 형 훼릭스: 내가 말해 볼까, 엄마? 르삑 부인: 아니다, 홍당무가 먼저 하고 나서 네가 해야지. 양쪽을 비교해 볼 테니. 자, 홍당무야, 빨리 해라. 홍당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머뭇거리면서) 미, 미, 미덕이란 한갓 이름에 불과하도다. 르삑 부인: 형편없구나. 이 개구쟁이한테서는 아무 얘기도 못 듣겠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보다는 얻어맞는 편이 낫겠다. 형 훼릭스: 저, 엄마. 얘는 이렇게 말했어요(눈알을 휘둥그리면서 모두에게 도전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 만일 내가 프랑스어 글짓기를 일등을 차지하지 못하면(볼을 잔뜩 부풀리고 발을 구르면서) 나는 부루터스처럼 외칠 것이다.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오오, 미덕이여! (들었던 팔을 허벅다리 위에 탁 내리며) 너는 한갓 이름에 불과하도다, 이렇게 말이에요. 르삑 부인: 잘했다, 잘했어. 정말 근사하구나. 홍당무, 축하한다. 하지만 남을 흉내내는 일은 결코 진짜만 못한 것이란다. 그런만큼 난 네가 고집을 부린 게 언짢구나. 형 훼릭스: 하지만 홍당무, 그렇게 말한 것이 정말 부루터스였니? 카토가 아니었니? 홍당무: 틀림없이 부루터스였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친구 하나가 내민 칼에 몸을 던져 죽은"거야. 누나 에르네스띤느: 홍당무 말이 맞아. 나도 이제 생각인 난다. 부루터스는 미치광이 흉내도 내고, 지팡이 속에 황금을 숨기기도 했어. 홍당무: 틀려, 누나. 얘기가 뒤죽박죽이 되잖아. 누나는 내가 말하는 부루터스와 다른 부루터스를 혼동하고 있는 거야. 누나 에르네스띤느: 그랬었나? 하지만, 소피 선생님이 하시는 역사 강의는 절대로 너희 중학교 선생님보다 뒤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 르삑 부인: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 싸움은 그만 해요. 중요한 것은 우리 집에도 한 사람의 부루터스가 필요하다는 것이야. 그런데 이때까지 조금도 이런 명예로운 일을 통 모르고 있었지 뭐냐. 자, 새로운 부루터스를 존경해다오. 주교님처럼 라틴어로 말씀하시지만, 귀머거리가 있더라도 미사의 말을 두 번 되풀이해 주지는 않는단다. 뒤로 돌아 보아라. 앞에서 보니 오늘 갈아입은 새 옷에 얼룩이 져 있어. 뒤에서 보니 바지가 찢어졌구나. 오오, 하느님, 도대체 쟤는 또 어디에 틀어박혀 있다가 왔을까요? 아무튼 저 부루터스 홍당무의 괴상한 모습을 차근차근히 바라보세요! 정말 감당해 낼 수 없는 개구쟁이(부루터스)란 말예요. 정말! @ff @[ 홍당무가 르삑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인, 르삑 씨가 홍당무에게 보낸 답장"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상 마르크 기숙사에서) 아빠 방학 동안의 고기잡이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여 내 온몸의 피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허벅다리에 큰 종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반듯이 누운 채로 간호원이 찜질을 해줍니다. 종기는 터질 때까지는 아프지만, 터지고 나면 아주 깨끗하게 나아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병아리새끼처럼 자꾸만 늘어갑니다. 하나가 나으면 새 것이 세 개나 생기는 판입니다. 하지만 대수롭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홍당무 올림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너는 첫 영성체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배우고 있으니, 사람이 종기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다만 너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지. 예수 그리스도는 두 손과 두 발을 못으로 박혔는데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못은 종기가 아닌 진짜 못이었다. 기운을 내라!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금니 한 개가 또 났습니다. 아직 나이로 말하면 이릅니다만, 이것은 분명히 조숙한 사랑니입니다. 나는 한 개만으로 그치지 않지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 품행을 단정히 하여 열심히 공부를 함으로써 늘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당무 올림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네 사랑니가 나오고 있을 바로 그 무렵에 나의 이가 한 개 흔들리기 시작했단다. 어제 아침, 드디어 빠지고 말았구나. 이리하여 너의 이가 한 개 새로 나오면 내 이는 한 개 빠진다. 그러니까 아무 변화 없이 가족들 이의 합계는 언제나 같은 셈이다.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상상해 보세요. 어제는 우리에게 라틴어를 가르치시는 작크 선생님의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의논해서 만장일치로 반 전체의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나를 대표로 뽑았습니다. 이 영광이 너무도 자랑스러워 나는 긴 연설문을 준비했습니다. 적당히 라틴어도 인용해서 짜넣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족할 만한 연설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큼직한 양면괘지에 깨끗이 정서를 했습니다. 이윽고 그날 친구들이 "빨리 해, 빨리!"하고 속삭이는 바람에, 나는 작크 선생님이 학생들을 보지 않고 있는 때를 틈타 교단 쪽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종이를 펼치고, 소리를 높혀서 "존경하는 선생님!" 하고 시작한 순가, 작크 선생님이 벌떡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지 못할까!" 내가 어떻게 도망쳐서 자리로 돌아갔는지 상상하실 수 있겠지요. 친구들은 모두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작크 선생은 발끈 화를 내어 나에게 명령했습니다. "연습 문제를 번역해 봐." 아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네가 장래 국회의원이라도 되면 틀림없이 그런 일을 많이 당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제 구실이 있는 법이다. 선생님이 교단에 서는 것은 분명히 연설을 하기 위해서지, 결코 너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이제 막 그 토끼를 지리 역사의 르그리 선생님께 전해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이 선물을 기뻐하시는 모양으로 아빠한테 매우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비에 젖은 우산을 그대로 들고 들어갔더니, 선생님은 얼른 내 손에서 그것을 받아 손수 현관으로 가져가시더군요. 그리고 나서 선생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학년 말에는 틀림없이 일등상을 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빠,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죽 서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르그리 선생님은 다른 점에서는 매우 친절했지만, 한 번도 나에게 의자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잊으신 것일까요, 아니면 예의를 몰라서 그랬을까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빠, 아빠의 의견을 꼭 듣고 싶습니다.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너는 언제나 불평만 하고 있구나. 작크 선생님이 제자리로 돌아가랬다고 해서 투덜거리고, 르그리 선생님이 세워 두었다고 해서 또 투덜거리니 말이다. 너는 어리기 때문에 어른 대접을 받기에는 아직 무리야. 그리고 르그리 선생님이 너한테 의자를 권하지 않았더라도 이러쿵 저러쿵 해서는 못 쓴다. 틀림없이 네가 꼬마이기 때문에 벌써 의자에 앉아 있으리라고 착각하셨을 것이다.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파리로 가신다교요? 아빠와 함께 파리 관광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습니다. 파리는 나도 구경하고 싶은 곳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만이 따라가겠습니다. 학교 공부 때문에 이번 여행은 단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책을 한두 권 사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갖고 있는 책은 벌써 모두 외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 책이라도 좋으니 아빠가 골라 주세요. 사실 책이란 어느 것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갖고 싶은 것은 후랑소아 마리 아루에 드 볼떼르의 "앙리아드"와 장자크 루소의 "누벨르엘로이즈" 입니다. 아빠가 이 두 권을 사다 주시더라도(파리에서는 책값이 아주 싸답니다.) 방 감독이 빼앗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네가 편지에 써서 보낸 작가 역시 너나 나와 다름없는 인간이란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 역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도 책을 써서 그것을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르삑 씨로부터 홍당무에게 홍당무야 오늘 아침에 받은 너의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지만,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우선 문장도 여느 때와 다르고 말하고 있는 내용도 괴상망측해서 너에게나 나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언제나 너는 자세히 온갖 일들을 가족들에게 알려 주었지. 성적 순위라든가 선생님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 새로 온 반 친구의 이름, 속옷 같은 게 해어졌다든가, 잘 잤느니 못 잤느니 식욕이 없느니 하는 것들을 써보내곤 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대체 어째서 이 한겨울에 봄 이야기를 썼니? 날짜도 없고, 내게 부친 것인지, 아니면 개한테 보낸 것인지 그것마저 알 수가 없구나. 글씨체도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다르고 행수라든가 그 많은 대문자 등. 나로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요컨대 너는 누군가를 놀릴 작정인 모양 같구나. 그러나 놀림을 받는 것은 너 자신이 된 것 같다. 나는 너를 크게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다만 주의를 시킬 뿐이다. 홍당무의 답장 아빠 지난번의 편지에 대해서 먼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신 것 같은데, 그것은 "시" 입니다. @ff @[ 헛간 이 조그마한 헛간은 닭이나 토끼나 돼지가 번갈아 가며 살아왔는데, 지금은 텅 비어 있어 여름 방학 동안은 홍당무가 전적으로 소유권을 쥐고 있다. 그는 쉽게 거기로 들어간다. 헛간에는 이제 문이 없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오르띠 풀이 우거져서 입구를 가로막고 있으므로 홍당무가 엎드리면 꼭 숲같이 보인다. 잔잔한 먼지가 땅바닥을 덮고 있다. 벽의 돌들은 습기로 번지르하게 빛나고 있다. 홍당무의 머리카락은 천장에 닿는다. 거기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편하다. 귀찮은 장난감 같은 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공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친다. 그가 즐겨하는 놀이는 헛간의 네 구석에 엉덩이로 둥지를 파는 일이다. 흙손 대신 먼지를 긁어모아 그것으로 둥지와 엉덩이 사이의 빈 곳을 메워 둥지 속에 옴폭 들어앉는 것이다. 미끈미끈한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오그린 채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둥지 위에 앉아 있으면, 아늑한 기분이 된다. 정말 이보다 더 자리를 작게 잡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는 세상 일을 잊어버린다. 이제 세상 같은 건 두렵지 않다. 그의 마음을 헝클어 놓는 것은 우르릉 번쩍 하며 벼락치는 소리뿐일 것이다. 어떤 때는 그릇 씻은 개숫물이 바로 옆 수채구멍으로 폭포처럼 쏴아쏴아 흘러내리고, 어떤 때는 뚝뚝 한 방울씩 흘러간다. 그리고 그에게 찬바람을 보내 준다. 그런데 느닷없이 경보가 울린다. "홍당무는 어디 있나? 홍당무는 어디 있어?' 누군가의 머리가 기웃거리며 나타난다. 홍당무는 작은 공처럼 몸을 웅크려서 땅바닥과 벽 사이로 틀어박힌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입을 벌린 채,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두 개의 눈이 어둠 속을 살피고 있는 것을 느낀다. "홍당무야, 게 있니?" 홍당무는 관자놀이를 울툭불툭이며 겁을 먹고 있다. 하마터면 나지막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올 뻔했다. "없구나, 그 개구쟁인, 대체 어디 갔을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멀어져 갔다. 홍당무의 몸은 긴장이 조금 풀려서 다시 편한 자세가 된다. 고의 공상은 또다시 긴 침묵의 길을 마구 달린다. 그러자 떠들썩한 소리가 귀에 가득 들이닥친다. 천장에서 날벌레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거미는 줄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내려오고 있다. 배는 빵 속처럼 하얗다. 잠깐 동안 거니는 불안한 듯이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있다. 홍당무는 엉덩이를 살짝 들고는 거미의 동정을 살피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마지막 장면을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이 비극을 자아내는 거미가 덤벼들어 별 모양의 다리를 오므려서 먹이를 죄기 시작하자, 홍당무는 정신없이 벌떡 일어섰다. 마치 자기 몫을 내놓으라는 듯이.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 거미는 다시 위로 되돌아갔다. 홍당무도 다시 제자리에 앉아서 공상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어렴풋한 토끼의 마음 같은 영혼 속으로 . 잠시 뒤 모래를 품어서 무거워진 한 줄기의 냇물처럼 그칠 줄 모르는 그의 공상은 경사진 곳이 없어지자, 물결이 멈추어 물웅덩이를 이루면서 괴고 만다. @ff @[ 고양이 1 홍당무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가재를 잡는 데는 고양이 고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 닭의 내장보다도 소, 돼지의 고기 조각보다도 가장 좋다. 그런데 그는 고양이를 한 마리 알고 있었다. 늙고 병들어 골골하며 여기저기 털이 숭숭 빠져 아무도 상대를 하지 않는 고양이다. 홍당무는 우유를 한 잔 대접하겠다고, 그 고양이를 자기 헛간으로 초대했다. 거기라면 주인과 손님 단둘뿐이다. 쥐가 한 마리쯤 위험을 무릅쓰고 벽 밖으로 모험을 하러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홍당무는 우유 한 잔밖에는 내놓지 않을 작정이다. 우유잔을 헛간 구석에 놓고 고양이를 그쪽으로 떠밀며 말했다. "자, 실컷 먹어라!" 등을 쓸어 주면서 여러 가지 다정스러운 이름으로 불러 주기도 했다. 혓바닥의 재빠른 움직임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가엾은 녀석.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마냥 즐겨라." 고양이는 우유잔을 바닥까지 깨끗이 핥고는 가장자리까지도 말끔하게 싹싹 핥았다. 그리고는 달콤한 입술을 혀끝으로 샅샅이 쪽쪽 빨았다. "벌써 다 먹었니, 정말 배가 부르냐?" 홍당무는 연거푸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아마, 한 잔 더 먹고 싶겠지, 하지만 이것밖에는 못 가지고 왔어. 어차피 조금 빠르거나 늦는 것의 차이 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고양이의 이마에 엽총의 총부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에 홍당무 자신도 아찔해졌다. 헛간마저 날아간 듯 싶었다. 연기가 사라진 뒤 자세히 보니 고양이가 한쪽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 머리의 절반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피가 우유잔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죽지 않은 모양이구나." 홍당무는 말했다. "제기랄, 똑바로 정확하게 겨누었는데." 홍당무는 꼼짝도 할 수 없다. 한쪽 눈만이 노랗게 빛나고 있어 몹시 불안스럽다. 고양이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전혀 달아나려고는 하지 않는다. 피를 한 방울도 땅으로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우유잔 안에만 철철 흘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홍당무도 풋내기는 아니다. 이제까지 몇 마리나 되는 들새와 가축을 죽였으며, 개도 한 마리 죽인 적이 있다. 장난 삼아 한 적도 있고 다른 사람을 돕느라고 같이 죽인 적도 있다. 그러므로 요령은 잘 알고 있다. 만약 짐승이 좀처럼 죽지 않을 때에는 재빨리 처치해 버려야 한다. 용기를 내어서 거칠게, 필요하다면 맞붙을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잘 알고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동정심이 선뜻 머리를 쳐든다. 그래서 겁쟁이가 된다. 때를 놓쳐 끝내 해치우지 못하게 된다. 우선 조심스럽게 여러 모로 건드려 본다. 그리고는 꼬리를 잡고 총의 개머리로 목덜미를 여러 차례 내려친다. 내려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한 대다 하고 여겨질 만큼 세게 친다. 죽어가던 고양이는 미친 듯이 다리로 허공을 긁는다. 동그랗게 몸을 움츠렸는가 하면 다시 몸을 쭉 뻗는다. 그러나 소리는 지르지 않는다. "도대체 누구야? 고양이는 죽을 때 운다고 자신만만하게 나한테 말한 사람은?" 홍당무가 말했다. 그는 몹시 안타까웠다. 너무 오래 걸렸다. 엽총을 내던지고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발톱에 긁히면서 더욱 흥분되어 이를 악물고 핏줄을 불끈 세워 간신히 졸라 죽였다. 끝내는 홍당무도 숨이 막혀 버린다. 기진맥진하여 비실비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양이와 얼굴을 맞대고 두 눈으로 고양이의 외눈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5,5,5^. 2 홍당무는 지금 자기의 쇠침대에 누워 있다. 부모님과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온 친구들이 헛간의 낮은 천장 밑에 허리를 구부리고 그 잔인한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요?" 어머니가 말했다. "글쎄 으스러지게 목을 졸라 죽인 고양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있잖아요. 그걸 억지로 떼려니, 여느 때의 몇 배나 되는 힘을 내야만 했다오. 정말이에요. 나를 그토록 힘껏 껴안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잔인한 이 이야기는 뒷날 가족들의 이야깃거리로 전해지게 되겠지만, 그 소행을 어머니가 이러니 저러니 설명하고 있는 동안 홍당무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냇가를 따라 거닐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으레 달빛이 몇 갈래나 흔들리면서 마치 뜨개질 바늘처럼 서로 얽혀 흔들린다. 가재 잡는 그물 위에는 고양이의 살덩이가 몇 개나 맑디 맑은 물에 비쳐 불타듯이 반짝이고 있다. 하얀 안개가 목장의 땅바닥에 자욱하다. 어쩌면 둥실둥실 떠다니는 유령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홍당무는 뒷짐을 지어 유령들에게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 소가 한 마리 다가와서 우뚝 섰다. 그리고 음매 하고 우는가 싶더니 쏜살같이 달아났다 발굽 소시를 하늘에 울려 퍼지게 하고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만약 시냇물이 종알거리거나 소곤대어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으면 얼마나 조용할 것인가. 냇가뿐인데도 할머니들이 모인 거처럼 수다스럽고 귀찮았다. 홍당무는 냇가를 후려 갈겨서 조용하게 하려고 생각했는지, 그물 막대기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우거진 갈대밭에서 엄청나게 큰 가재가 여러 마리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가재는 계속 늘어났다. 곧추서서 번들번들 번쩍이며 물 속에서 나온다. 홍당무는 괴로움에 몸이 천근같이 무거워져 달아날 수도 없다. 가재는 그를 에워쌌다. 목을 향해서 몸을 뻗쳐 온다. 재깍재깍 소리를 낸다. 벌써 집게발을 활짝 벌리고 있다. @ff @[ 양 맨 처음에 홍당무는 어렴풋이 공 같은 것이 튀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한꺼번에 뒤섞여서 귀를 찢는 것 같은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마치 학교의 실내 체육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같기도 하다. 공 하나가 홍당무의 다리 사이로 뛰어든다. 어쩐지 섬뜩해진다. 또 하나가 천장 들창에서 들어오는 햇빛 속으로 뛰어오른다. 새끼 양이다. 홍당무는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 우스워서 빙그레 웃었다.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자, 잔잔한 데까지도 분명하게 부였다. 양의 새끼치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침마다 농사꾼인 빠졸이 헤아려보면, 두서너 마리씩 늘어나 있다. 어미양들 틈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는 갓난 새끼 양이 눈에 띈다. 작달막하게 못생긴 모양으로 네 다리를 힘껏 딛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 다리 모양은 마치 아무렇게나 깎아 세운 네 개의 나무 막대기 같다. 홍당무는 아직 쓰다듬어 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새끼 양들은 훨씬 대담하게 벌써 홍당무의 구두를 핥기도 하고 입에 풀을 한입 물고 앞발을 그에게 걸치기도 한다. 태어난 지 일주일쯤 된 약삭빠른 녀석은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어 몸을 쭉 뻗치고는 허공에 떠서 갈지자 걸음을 걷는다. 하루밖에 안된 녀석은 아주 말라서 앙상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가도 기운차게 벌떡 일어선다. 갓 태어난 새끼가 땅바닥을 기고 있다. 아직 어미가 핥아 주지 않아서 몸이 반지르하다. 어미 양은 물에 부풀어 뒤룩거리는 태주머니가 귀찮아서 머리로 새끼를 밀어젖힌다. "못된 어미로군." 홍당무가 말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빠졸이 말했다. "이건 틀림없이 유모에게라도 맡기고 싶은 거야." "그럴지도 몰라.' 빠졸이 말했다. "젖꼭지로 길러야 할 새끼가 많이 있어 약방에서 팔고 있는 그 젖꼭지 말이야.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아. 어미한테 정이 생기지. 게다가 어미한테 젖을 달라고 새끼들이 보채니까." 빠졸은 어미 양의 어깨를 붙들어 우리 안으로 넣는다. 우리에서 달아나면 알아볼 수 있게 양의 목에 짚으로 목걸이를 매어둔다. 새끼 양이 뒤따라왔다. 어미 양은 강판을 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풀을 먹고 있다. 새끼 양은 덜덜 떨면서 약하고 여린 다리로 서 있다. 덜렁덜렁한 젤리 같은 것을 잔뜩 묻힌 코를 비벼대면서 처량한 모습으로 젖을 빨려고 한다. "이런 어미도 정이라는 게 생길까요?" 홍당무가 말했다. "물론이지, 엉덩이가 나으면 알이지.' 빠졸이 말했다. "아무튼 낳는 게 힘들거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게 좋을 텐데." 홍당무가 말했다. "왜 잠시 동안만이라도 다른 어미 양한테 새끼를 맡기지 않지?" "저쪽에서 거절하거든." 빠졸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헛간 구석구석에서 어미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와 젖 주는 시간을 알린다. 홍당무의 귀에는 어느 것이나 똑같이 들리건만 새끼양들에게는 저마다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다. 모두 실수 없이 제 어미 젖꼭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새끼를 훔치는 어미는 없단다." 빠졸이 말했다. "이상한데." 홍당무가 말했다. "이런 양털로 뭉쳐진 것 같은 녀석들한테도 가족의 본능이 있다니,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틀림없이 코로 냄새를 맡는 거겠지." 시험삼아 어느 한 마리의 코를 막아 보고 싶어진다. 사람과 양을 자세히 비교해 본다. 그러다가 새끼 양들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다. 새낀 양들이 열심히 젖을 빨아먹고 있는 동안, 어미들은 옆구리를 쿡쿡 코로 찔리면서도 한가롭게 풀을 먹고 있다. 홍당무는 여물통의 물 속에 쇠사슬 조각이며 수레바퀴의 테며 닳아빠진 삽 같은 게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여물통은 더럽구나!" 홍당무는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아니, 이런 쇠붙이를 넣어서 양의 피를 보자는 셈인가!" "맞았어!" 빠졸이 말했다. "너도 곧잘 알약을 먹지?" 그는 홍당무에게 그 물을 마셔 보라고 한다. 물에 훨씬 더 영양가가 많아지게 그는 닥치는 대로 뭐든지 던져 넣고 있다. "진드기 한 마리 줄까?" 빠졸이 말했다. "기꺼이 받겠어. 고마워!" 홍당무는 영문도 모르고 대답했다. 빠졸은 어미 양의 푹신푹신한 턱 속을 헤쳐서 노랗고 둥글둥글하게 살찐, 피를 잔뜩 빨아먹은 큼직한 진드기를 한 마리를 손톱 끝으로 잡아 냈다. 빠졸의 이야기로는 이민한 진드기 두 마리만 있으면 어린아이 머리쯤은 자두 먹듯 갉아 먹어 버린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홍당무의 손바닥에 놓아 준다. 그리고 장난이 치고 싶다거나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는 형이나 누나의 목이나 머리카락 속에 그 녀석을 넣어 두라고. 벌써 진드기는 꿈틀거리기 시작하여 살을 물기 시작했다. 홍당무는 손가락에 싸라기눈이라도 내리듯이 따끔따끔한 아픔을 느꼈다. 그 느낌은 손목 그리고 팔꿈치로 옮겨져 마치 진드기의 수가 늘어난 점점 팔에서 어깨 쪽까지 갉아먹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홍당무는 그 녀석을 힘껏 쥐어서 죽여 버렸다. 그 손을 어미 양의 등에 문질러 닦았다. 빠졸이 눈치채지 않도록 살며시.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뭐. 한참 지나서 홍당무는 차츰 조용해지는 양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귀기울여 듣고 있다. 이제 곧 천천히 놀리는 턱 사이로 풀을 씹는 둔한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겠지. 풀 시렁에 걸려 있는 무늬가 바랜 농사꾼의 외투가 홀로 양의 망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ff @[ 대부 가끔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대부(이름을 지어준 사람)를 만나러 가도 좋으며 자고 오는 것까지도 허락해 준다. 이 대부라는 사람은 성미가 까다로운 고독한 노인으로, 낚시를 하거나 포도밭을 손질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홍당무만은 귀여워해 준다. "왔구나, 이 개구쟁이!" 대부가 말했다. "네, 아저씨." 키스도 하지 않고 홍당무가 말했다. "내 낚싯대도 준비해 두셨어요?" "둘이서 하나만 있으면 돼." 대부가 말했다. 그러나 홍당무가 헛간문을 열어 보니 자기의 낚싯대도 고스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부는 늘 그를 놀린다. 하지만 홍당무는 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노인의 이런 버릇이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 일은 결코 없다. 이 노인이 "예스"라고 말할 때는 "노우"라는 뜻이며, "노우"라고 할 때는 "예스"인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 된다. (아저씨가 이런 걸로 재밀 삼고 있다면, 나는 상관없어.)홍당무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래서 두 사람은 늘 의좋은 친구이다. 대부는 언제나 일주일에 한 번씩 일주일 분의 식사를 만들어 두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홍당무를 위해서 완두콩을 큰 라드 덩어리와 함께 넣어 커다란 냄비에다 끓여 주었다. 그리고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진한 포도주를 한 잔 억지로 홍당무에게 먹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낚시를 하러 간다. 대부는 강가에 앉아서 낚시줄을 날렵하게 풀어간다. 그는 놀랄 만큼 긴 낚싯대의 손잡이를 무거운 돌로 눌러 놓고 큰 고기만 낚아 올린다. 낚은 물고기는 그늘에 펼쳐 둔 수건으로 갓난아기처럼 감싸준다. "주의해 두지만." 홍당무에게 말한다. "낚시찌가 세 번 가라앉기 전에는 낚싯대를 올려서는 안 돼." 홍당무: 어째서 세 번인가요? 대부: 맨 처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물고기가 툭툭 쳐보는 것뿐이지. 두 번째는 진짜다. 먹이를 삼킨 거야. 세 번째는 틀림없지. 도망치려고 해도 꼼짝 못하지. 아무리 천천히 끌어 당겨도 문제없단 말이야. 홍당무는 망둥이를 잡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구두를 벗고 물 속에 들어가 발로 모래 바닥을 휘저어서 물을 흐려 놓는다. 그러면 바보 같은 망둥이가 얼른 몰려나온다. 홍당무는 낚싯대를 던질 때마다 한 마리씩 낚아 올린다. 대부에게 큰소리로 일일이 알릴 틈도 없을 정도다. "열 여섯, 열 일곱, 열 여덟^5,5,5^." 대부는 해가 머리 위에 왔을 때 점심을 먹으러 돌아가자고 한다. 그는 홍당무에게 흰 완두콩을 배불리 먹인다. "이렇게 맛있는 건 없어." 대부가 말했다. "하지만 난 삶은 게 더 좋아. 딱딱한 완두콩은 씹으면 마치 자고새 날개 속에 박힌 탄알처럼 이빨에 깨물리거든. 그런 것을 먹을 바에는 차라리 곡괭이의 쇠끝을 깨무는 편이 낫단 말이야." 홍당무: 이건 정말 입안에서 슬슬 녹는걸. 엄마가 늘 만들어 주는 것도 맛없지는 않지만, 요즘은 나빠졌어요. 틀림없이 크림을 아껴서 그럴 거야. 대부: 얘, 네가 잘 먹는 걸 보니 즐겁구나. 엄마 앞에서는 틀림없이 배부르게 먹지 못할 테지? 홍당무: 모든 것이 엄마의 식욕에 달렸어요. 엄마가 배고프면 엄마의 배가 부를 때까지 먹게 해줘요. 엄마는 자기 접시에 담을 때, 나한테도 덤으로 주니까요. 엄마가 이제 그만 하면 나도 그만 일어서는 거예요. 대부: 더 달라고 말하려므나, 바보 같으니. 홍당무: 말하기는 쉽지요. 아저씨, 하지만 언제나 배는 덜 차는 게 좋은 거예요. 대부: 나한테 자식은 없지만 원숭이 엉덩이라도 핥아 주겠다. 만약에 그 원숭이가 내 자식이라면 말이야. 이런 기분 알겠지? 두 사람은 그날의 일과를 포도밭에서 끝냈다. 홍당무는 대부 아저씨가 땅을 파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그 뒤를 따라가기도 하고, 포도덩굴 위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버드나무의 새순을 씹기도 했다. @ff @[ 샘터 홍당무는 대부와 함께 자는데,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방은 춥지만) 털이불은 대부의 늙은 손발에는 부드럽고 기분이 좋을 듯했으나, 홍당무는 곧 땀에 흠뻑 젖었다. 하지만 어쨌든 엄마 곁을 떠나서 잘 수 있게 된 셈이다. "엄마가 그렇게도 무서우냐?" 대부가 물었다. 홍당무: 그렇다기보다 엄마한테는 내가 그다지 무섭지 않나 봐요. 엄마가 형을 때리려고 하면, 형은 빗자루의 손잡이에 올라타고 엄마 앞에서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는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그래서 엄마는 형을 정으로 다스리려고 해요. 엄마도 말해요. 웨릭스는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때려서는 안된다고요. 홍당무는 때려야 하지만 하고 말예요. 대부: 너도 빗자루로 해 보았더라면 좋았을걸, 홍당무야. 홍당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훼릭스와 나는 곧잘 싸움을 벌였어요. 진짜 할 때도 있고, 장난으로 할 때도 있지만 말예요. 나는 형하고 맞먹을 만큼 힘이 세요. 그래서 형처럼 맞지 않고 막아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엄마를 상대로 빗자루를 들기라도 한다면 엄마는 틀림없이 엄마는 나를 때리기 전에 고맙다고 말할 거예요. 대부: 자아, 얘야, 그만 자자! 둘 다 잠이 오지 않았다. 홍당무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돌아눕는다. 숨이 답답해서 허덕였다. 대부 아저씨는 그것을 측은하게 여겼다. 홍당무가 깜박 잠이 들려고 할 때, 대부는 별안간 그의 팔을 잡았다. "아, 거기 있구나, 얘야." 대부는 말했다. "꿈을 꾸었구나. 네가 아직도 샘터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너는 그 샘터를 기억하고 있니?" 홍당무: 아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아저씨, 따지는 건 아니지만, 그 이야기는 벌써 여러 번이나 들었어요. 대부: 얘야, 가엾게도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곧 온몸에 소름이 끼친단다. 나는 풀밭에서 자고 있었어. 너는 샘터에서 놀고 있었지. 그러다가 미끄러져 샘 속으로 빠지고 말았어. 너는 큰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을 쳤어. 그런데 딱하게도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를 못했단다. 물은 고양이가 빠질 정도도 못되었는데 너는 일어서지 못했어. 그것이 탈이었단 말이야. 너는 대체 일어설 생각조차 못했었니? 홍당무: 샘물에 빠져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요? 대부: 네가 물장구를 치는 소리에 겨우 잠이 깼지.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애야. 가엾게도 너는 펌프처럼 물을 토했단다. 옷을 갈아 입혔지, 베르나르의 나들이 옷을 말이야. 홍당무: 네, 그 옷은 따끔따끔했어요. 온몸이 쓰라렸지요. 그건 말털로 만든 옷이었지요. 대부: 그렇지 않아. 하지만 베르나르는 너한테 빌려 줄 만한 깨끗한 속옷이 없었단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1초만 늦었더라도 내가 끌어올렸을 때 죽었을 거야. 홍당무: 지금쯤은 먼 곳에 있겠지요. 대부: 방정맞은 소리 말아라. 하긴 나도 공연한 말을 했구나.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하룻밤도 편히 자 본 적이 없단다. 이것이 천벌이겠지. 마땅한 벌이야. 홍당무: 하지만 아저씨, 나는 그런 벌은 아 받아도 돼요. 졸려서 죽겠는걸요. 대부: 그래, 자거라, 얘야. 잘 자거라. 홍당무: 내가 자기를 바란다면 , 아저씨. 이 손을 좀 놔주세요. 한잠 자고 나면 되돌려 줄께요. 다리도 치워 주세요. 누군가의 살이 닿으면 털이 까칠까칠해서 나는 잠을 못 자요. @ff @[ 살구 한참 동안 잠을 못 이룬 채, 둘은 털이불 속에서 뒤척거리고 있었다. 대부가 말했다. "얘, 잠들었니?" 홍당무: 아니오, 아저씨. 대부: 나도 그렇구나, 차라리 일어나자. 어떠냐, 지렁이라도 잡으러 갈까? "그게 좋겠군요." 홍당무가 말했다. 둘은 침대에서 뛰어내려와 옷을 입었다. 초롱불을 켜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홍당무는 초롱을 들고, 대부는 진흙을 절반쯤 담은 깡통을 들고 있다. 그는 그 깡통에 낚시질에 쓸 지렁이를 담아 둔다. 그리고 위에는 젖은 이끼를 덮어 둔다. 그렇게 해두면 절대로 달아나지 못한다.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면 수확이 많다. "밟지 않도록 조심해라." 하고 홍당무에게 말했다. "살며시 걷는 거야. 감기만 안 걸린다면 운동화를 신고 오는 건데. 조금만 소리가 나도 지렁이는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단다. 지렁이란 놈은 구멍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면 잡기가 어려워. 얼른 잡아서 힘을 들여서 쥐고 있지 않으면 안돼. 미끄러져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말이야. 절반쯤 구멍 속으로 달아난 놈은 놓아 줘라. 잘라진단다. 잘라진 지렁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거든. 다른 놈까지 썩게 한단다. 더구나 예민한 물고기는 그런 건 거들떠 보지도 않거든. 물 속에서 몸을 움츠리는 지렁이를 통째로 쓰지 않으면 싱싱한 물고기는 낚을 수 없어. 물고기를 그놈이 도망치는 줄 알고 쫓아가지, 그리고는 마음 놓고 덥석 삼켜 버려." "난 실수만 하는걸." 홍당무가 투덜거린다. "그놈들의 더러운 침으로 손가락이 이렇게 더러워졌잖아." 대부: 지렁이는 더러운 게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거야. 흙밖에 먹지 않으니 몸을 꾹 눌러 보면 나오는 것은 진흙뿐이지. 나는 먹기도 하는걸. 홍당무: 그럼, 내 것도 아저씨한테 드릴 테니 잡숴 봐요. 대부: 이놈은 너무 큰데, 우선 불에 구워서 빵에 발라야지. 하지만 작은 놈이라면 날것도 먹지. 살구나무에 붙어 있는 벌레 정도라면. 홍당무: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집 식구들이 아저씨를 싫어하는군요. 특히 엄마는 특히 더 그래요. 아저씨를 생각하기만 해도 속이 언짢아진대요. 하지만 나는 아저씨가 하는 일에 찬성이에요. 흉내는 안 내겠지만 말이에요. 왜냐하면 아저씨는 잔소리도 안하고 우리는 서로 잘 통하니까요. 홍당무는 초롱을 치켜 들고 살구나무 가지를 당겨서 열매를 몇 개 땄다. 좋은 것은 제 몫으로 떼어 놓고 벌레먹은 것을 대부에게 주었다. 대부는 한입에 통째로 씨까지 삼키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놈이 가장 맛있는데." 홍당무: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할 거예요. 아저씨처럼 그런 것을 먹겠어요. 다만 냄새가 나서 키스해 줄 때 엄마가 알아차릴까봐 걱정이에요. "냄새는 무슨 냄새냐?" 대부가 말했다. 그리고 홍당무의 얼굴에 입김을 분다. 홍당무: 정말 담배 냄새밖에는 안 나네요. 하지만 너무했어요, 아저씨. 담배 냄새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아요. 그렇지만 난 아저씨가 좋아요, 담배만 피우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아저씨가 좋아질텐데. 대부: 꼬마야, 그런 소리 마라. 이건 몸에 좋은 거야. @ff @[ 마틸드 "엄마." 누나인 에르네스띤느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르삑 부인에게 일러 바친다. "홍당무가 또 목장에서 마틸드와 신랑각시 놀이를 하고 있어요. 웨릭스가 둘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있고요. 하지만 분명히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되지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목장에서는 조그만 마틸드가 흰 꽃이 핀 사위질빵 덩굴로 옷을 삼고서 얌전하게 서 있다. 한껏 멋을 부린 마틸드는 오렌지 화관을 쓴 신부와 꼭 같다. 더구나 한평생 배앓이를 모두 고칠 만큼 많은 오렌지 가지를 온몸에 매달고 있다. 그런데 이 사위질빵 덩굴은 먼저 머리 위에서 관 모양으로 틀어져 있으면서 턱 밑과 등과 두 팔을 따라 축 늘어져 있다. 서로 얽히면서 허리에 휘감겼다가 끝내는 땅바닥으로 처졌다. 그것을 형인 훼릭스가 극성스럽게 끝없이 늘어 놓는다. 훼릭스가 뒷걸음치면서 말한다. "이제 움직이면 안돼! 자, 홍당무 차례다." 이번에는 홍당무가 신랑 차림을 하게 된다. 역시 사위질빵 덩굴을 잔뜩 감았는데, 군데군데에 양귀비꽃, 쓰넬르꽃, 노오란 민들레꽃들이 산뜻한 색깔을 보이고 있다. 마틸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웃지도 않는다. 세 사람 모두 아주 진지하다. 모두가 어떤 의식에 어떤 모양이 어울리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장례식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슬픈 표정을, 또 결혼식에서는 미사가 끝날 때까지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놀이건 재미가 없어진다. "서로 손을 잡고!" 형인 훼릭스가 말했다. "앞으로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라!" 두 사람은 조금 떨어져 나란히 보통 걸음걸이로 걷는다. 마틸드는 앞자락의 사위질빵풀이 엉켜 붙어, 앞자락을 걷어 올려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 동안 홍당무는 한쪽 발을 든 채 다정스럽게 신부를 기다리고 있다. 형인 훼릭스는 두 사람을 목장의 이곳 저곳으로 끌고 다니면서 양팔을 휘둘러 박자를 맞추어 준다. 마치 읍장이라도 된 것처럼 두 사람에게 축하인사도 하고 신부님처럼 축복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또 두 사람의 친구인 듯 축사를 하고 그것이 끝나자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두 개의 막대기를 비벼 대어 끽끽 소리를 냈다. "잠깐!" 훼릭스가 말했다. "화관이 비뚤어졌어." 그리고 마틸드의 화관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고는 곧 또다시 나란히 서게 하여 이리저리로 끌고 다닌다. "아야!" 마틸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 질렀다. 사위질빵 덩굴 마디 한 개가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훼릭스는 머리카락째 그 덩굴을 뜯어 냈다. 행렬은 다시 계속되었다. "됐다!" 훼릭스가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결혼을 했어. 자, 서로 뽀뽀를 해라!" 두 사람이 머뭇거리자 "아니! 왜 이러는 거야, 뽀뽀를 하란 말이야. 결혼하면 누구나 뽀뽀를 해야 하는 거야. 서로 정답게 마주 서서 뭐라고 한마디 해. 말뚝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거니?" 자기는 잘난 듯이 두 사람을 비웃고 있다. 틀림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여 본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본보기를 보이는 척하면서 자기가 먼저 마틸드에게 뽀뽀를 했다. 홍당무도 대담해졌다. 얽혀 있는 덩굴풀 사이로 마틸드의 얼굴에 뽀뽀를 했다. "장난이 아니야." 홍당무가 말했다. "난 정말 너하고 결혼할래." 마틸드는 홍당무가 한 그대로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다 어색한 듯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훼릭스는 양쪽 손 둘째 손가락으로 뿔 보양을 해보이면서 놀려 댔다. "야야, 빨개졌구나, 수줍은 모양이지!' 그는 두 손가락을 마주 비비고,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발을 동동 구른다. "야, 이 바보들아! 진짜로 된 줄 알고 있어." "첫째." 홍당무가 말했다. "나는 부끄러울 게 없어. 그리고 놀리고 싶으면 놀려도 좋아. 엄마만 허락해 준다면 내가 마틸드와 결혼하는 것을 형이 막지는 못할걸." 그러나 바로 그대 엄마가 "허락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하러 왔다. 목장의 나무문을 밀어 젖히며 고자질한 에르네스띤느를 데리고 들어섰다. 울타리 옆을 지나는 길에 마른 나뭇가지를 동여매어 놓은 가운데서 가시나무 가지를 꺾었다. 잎사귀는 떼어 버리고 가시만 남겼다. 어머니는 곧장 내달아 온다. 폭풍우와 같아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 "조심해, 회초리가 날아간다." 훼릭스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는 목장 끝까지 달아나 버렸다. 거기라면 숨어서 엿 볼 수 있다. 홍당무는 결코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겁쟁이나 빨리 끝장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더구나 오늘은 웬지 용기가 솟아올랐다. 마틸드는 발발 떨면서 흐느껴 울고 있다. 홍당무: 무서워 하지 않아도 왜. 난 엄마의 성질을 잘 알고 있어. 엄마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나한테 뿐이야. 꾸중은 내가 듣는 거야. 마틸드: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네 엄마가 틀림없이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엄마한테 매를 맞는다 말이야. 홍당무: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버릇을 고쳐 준다고 말하는 거야. 여름 방학 숙제를 선생님이 고쳐 주는 것과 같이 말이야. 너의 엄마도 네 버릇을 고쳐 주니? 마틸드: 가끔, 경우에 따라서야. 홍당무: 난 늘 그래. 마틸드: 하지만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 홍당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자, 조심해라. 르삑 부인이 다가온다. 이젠 두 사람을 붙잡은 거나 다름없다. 시간은 넉넉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바짝 다가서자, 에르네스띤느는 회초리가 자기 쪽으로 잘못 날아올까 두려워 곧 무대 중심 지대가 될 장소의 경계선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홍당무는 "신부" 앞을 가로막고 선다. "신부"는 더욱 흐느껴 운다. 사위질빵 덩굴의 흰꽃이 흐트러졌다. 르삑 부인의 가느다란 회초리가 번쩍 쳐들어져 막 후려갈기려는 순간, 홍당무는 파랗게 질려서 팔짱을 끼고 목을 움츠렸다. 매를 얻어맞기도 전에 벌써 허리가 화끈하고 종아리가 따끔거렸다. 그런데도 기세 등등하게 이렇게 소리쳤다. "이런 걸 가지고 뭘 그러세요, 장난으로 그랬는데요!" @ff @[ 금고 이튿날 홍당무가 마틸드를 만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모두 말했단다. 그래서 난 엉덩이를 많이 맞았어. 너는 어땠니?" 홍당무: 난 어땠는지 다 잊어버렸는걸. 하지만 네가 맞을 까닭은 없잖아?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마틸드: 정말 그래. 홍당무: 난 분명히 말하지만 너하고 결혼해도 좋다고 말한 건 사실이었어. 마틸드: 나도 너하고라면 정말 결혼해도 좋다. 홍당무: 내가 너를 깔보아도 이상할 것은 없어. 왜냐하면 너의 집은 가난하고 우리집은 부자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너를 존경하고 있으니까. 마틸드: 부자라니, 얼마나 있는데, 홍당무야? 홍당무: 우리 집에는 적어도 백만 프랑은 있단다. 마틸드: 백만 프랑이면 얼마나 되니? 홍당무: 무지무지하게 많지. 백만장자가 되면 아무리 써도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쓰지 못해. 마틸드: 우리 집에는 돈이 조금도 없다고 아빠와 엄마가 늘 한탄하고 있단다. 홍당무: 그거야, 우리 집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남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괜히 그러는 거야. 더구나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이야. 하지만 우리 집이 부자라는 걸 난 다 알고 있어. 매달 초하루에는 우리 아빠가 한참 동안 혼자서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단다. 그러면 금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저녁때이기 때문에 꼭 청개구리가 우는 것처럼 들리는 거야. 아빠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린단다. 엄마도 형도 누나도 아무도 몰라. 알고 있는 건 아빠 뿐이야. 그러고는 끼익 하며 금고가 열리고 아빠는 돈을 꺼내어 그걸 부엌 테이블 위에 갖다 놓는 거야. 아무 소리도 않고 그저 돈을 짤랑짤랑 울려서 아궁이 앞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한테 알리지. 아빠가 밖으로 나가면 엄마는 돌아서서 얼른 돈을 거두어 가시는 거야. 매달 그래. 벌써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는 걸. 금고 속에 백만 프랑 이상이 있는 건 틀림없단 말이야. 마틸드: 그래서 금고를 열 때 뭐라고 하니 응, 뭐라고 하셔? 홍당무: 묻지 마, 물어 봐도 소용없어. 우리가 결혼하면 가르쳐 줄게.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남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말이야. 마틸드: 지금 당장 가르쳐 줘.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홍당무: 그건 안돼. 아빠하고 나하고의 비밀인걸. 마틸드: 너도 모르지? 알고 있다면 왜 말을 못하니? 홍당무: 미안하지만, 알고 있습니다요. 마틸드: 모르는 거야. 그래, 모른단 말이야. 아아, 꼴 좋다. "그럼, 내기하자." 홍당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내기를?" 마틸드는 주춤한다. "내가 만지고 싶은 데를 만지게 해줘." 홍당무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면 그 말을 가르쳐 줄게." 마틸드는 홍당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무슨 말인지 잘못 알아 들은 모양이다. 잿빛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뜬다. 알고 싶은 것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셈이다. "먼저 그 말을 가르쳐 줘, 홍당무야." 홍당무: 가르쳐 주면 내가 만지고 싶은 데를 만져도 된다고 맹세해. 마틸드: 엄마가 함부로 맹세하면 안된다고 말했는데. 홍당무: 그럼, 안 가르쳐 줄 테야. 마틸드: 좋아, 이제 안 가르쳐 줘도 괜찮아. 그 말이 뭔지 알았단 말이야. 벌써 다 알았어. 홍당무는 조마조마해져서 저도 모르게 서둘렀다. "이봐, 마틸드. 네가 뭘 안다고 그러니? 하지만 맹세하겠다면, 가르쳐 줄게. 아빠가 금고 열 때 하는 말은 "얼빠진 놈아!"라는 거야. 자, 이제 만져 보아도 되지?" "얼빠진 놈아! 얼빠진 놈아!" 마틸드는 말했다. 비밀을 알아 낸 기쁨과 그것이 엉터리가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주춤해진다. "정말, 나를 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홍당무가 대꾸도 않고 한쪽 손을 내밀며 다가오자 마틸드는 달아난다. 그녀가 킥킥거리며 헛웃음을 웃고 있는 소리가 홍당무의 귀에 들린다. 마틸드의 모습이 사라지자, 뒤에서 놀려대는 소리가 들린다. 홍당무는 뒤돌아 보았다. 마구간의 들창에서 머슴이 얼굴을 내밀고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다 봤다, 홍당무야." 하고 소리쳤다. "모두 네 엄마한테 말해 버릴 테다." 홍당무: 장난한 거예요, 삐에르 아저씨. 그 아이를 속이려고 한거예요. "얼빠진 놈아!"라고 말한 건 내가 엉터리로 꾸며 댄 말이었어요. 사실은 난들 아나 뭐. 삐에르: 걱정 마라, 홍당무야. "얼빠진 놈아!"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아, 다른 일을 말하겠단 말이야. 홍당무: 다른 일이라니요? 삐에르: 얘, 넌 나이치고는 제법 능란하던데. 하지만 단단히 각오해라, 오늘밤엔 네 귀가 찢어질 만큼 비틀릴 테니. 홍당무는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날 때부터의 빨강머리가 무색할 만큼 얼굴을 붉히며 멀어져 갔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코를 훌쩍이면서 절뚝절뚝 물러간다. @ff @[ 올챙이 홍당무는 마당 한복판에서 혼자 놀고 있다. 한복판에 있으면 르삑 부인이 창문으로 이 아이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당무는 얌전하게 노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친구인 레미가 나타났다.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인데, 절름발이인 데도 언제나 달음박질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름거리는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 뒤에 질질 끌릴 뿐, 도저히 상대방을 따라가지 못한다. 손에 소쿠리를 들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 가겠니, 홍당무야, 아빠가 강에 그물을 치고 있어. 아빠의 심부름을 가면서 소쿠리로 올챙이를 건지는 거야." "우리 엄마한테 물어 봐라." 홍당무는 말했다. 레미: 왜 내가 물어 봐야 하니? 홍당무: 내가 물어 보면 허락을 안해 주니까 그렇지 뭐. 바로 그때 르삑 부인이 창가에 나타났다. "아주머니." 레미가 말했다. "올챙이를 잡으러 홍당무와 함께 가도 괜찮아요?" 르삑 부인은 유리창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레미는 큰소리로 되풀이했다. 그제서야 르삑 부인이 알아챘다. 입을 놀려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두 아이들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히 "안된다"라는 신호다. "안된대." 홍당무가 말했다. "아무래도 곧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려나 봐." 레미: 그럼 어쩔 수 없구나. 아주 재미있는데, 못 가는 거지, 안된다 말이지? 홍당무: 가지 말고, 여기서 놀자. 레미: 싫어, 올챙이 잡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단 말이야. 오늘은 날씨도 따뜻하니 소쿠리로 마냥 건져 낼 거야. 홍당무: 잠깐만 더 기다려 봐. 엄마는 언제나 처음에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곧잘 생각이 바뀌니까 말이야. 레미: 그럼, 15분만 기다릴게. 그 이상은 안돼. 둘은 거기에 선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시치미를 떼고, 계단 쪽을 유심히 보고 있다. 잠시 뒤, 홍당무가 팔꿈치로 레미를 쿡 찔렀다. "어때, 내가 말한 그대로지!" 마침내 문이 열리며 르삑 부인이 층계를 내려온다. 홍당무에게 줄 소쿠리를 손에 들고 있다. 그러나 수상쩍은 눈으로 멈춰 섰다. "아니, 아직 있었니, 레미야? 벌써 간 줄 알았는데, 아빠한테 말해 주어야겠다. 여기서 빈들거리고 있었다고 말이야. 틀림없이 야단을 맞을 거야." 레미: 아줌마, 하지만 홍당무가 기다리라고 그러는 걸 어떡해요. 르삑 부인: 뭐, 그게 정말이냐, 홍당무야? 홍당무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시치미를 떼고 있기로 작성했다. 홍당무는 르삑 부인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또 어머니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레미가 일을 망쳐 놓았기 때문에, 홍당무는 이제 될 대로 되라 하고 발 밑의 풀을 지그시 밟으며 얼굴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말이야, 나는 한 번 말 한 것을 돌이켜 본 적은 없단다." 르삑 부인이 말했다. 그 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려온 층계를 다시 올라갔다. 홍당무가 올챙이를 잡으러 가지고 갈 소쿠리를 그대로 손에 든 채. 일부러 날호도를 비우고 가지고 온 소쿠리였는데. 레미는 벌써 멀찍이 가고 있었다. 르삑 부인은 거의 농담을 안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조심들을 한다. 학교 선생님만큼이나 무서워하고 있다. 레미는 도망가 저편 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주 빠른 속력이다. 그래서 언제나 뒤에 처진 그 왼쪽 다리가 큰길의 먼지에 한 가닥의 줄을 그어 뒤뚝거리면서 요리 냄비가 끓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날을 헛되이 망쳐 버린 홍당무는 이제 놀고 싶은 기분도 나지 않는다. 멋지게 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슬슬 억울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기다릴 뿐이다. 외롭고 서글픈 기분으로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자기가 못나서 받게 되는 벌이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ff @[ 극적 변화 1 르삑 부인: 너 어딜 가려는 거냐? 홍당무: (새 넥타이를 매고, 침을 뱉어 반들반들하게 구두를 닦고 있다.) 아빠하고 산책할 거예요. 르삑 부인: 가면 안돼. 알겠지? 가기만 해봐라^5,5,5^ (오른손이 날아올 듯이 뒤로 간다). 홍당무: (낮은 목소리로) 알았어요. 2 홍당무: (벽시계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매를 안 맞는 일이다. 아빠는 엄마보다는 덜해. 정확하게 계산해 보았단 말이야.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3 르삑 씨: (홍당무를 귀여워하고 있기는 하나 조금도 돌봐 주지 않는다. 일이 바빠서, 언제나 일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 가 볼까! 홍당무: 응, 나, 안 갈래. 르삑 씨: 왜, 가기 싫으냐? 홍당무: 왜, 가기 싫으냐? 르삑 씨: 까닭을 말해 봐라. 왜 그러느냐? 홍당무: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지만 집에 있을래. 르삑 씨: 아아, 그렇군. 또 그 변덕이 시작된 게로구나. 아무튼 넌 당해낼 수가 없는 아이다. 너한테는 정말 두 손 다 들었어. 언젠 가고 싶다고 졸라대더니, 벌써 가고 싶지 않다니^5,5,5^ 그래, 집에 있거라. 네 마음대로 울상이 되어서 말이다. 4 르삑 부인: (부인은 언제나, 문 옆에 서서 남의 말을 엿듣는 나쁜 버릇이 있다.) 정말 가엾게시리! (징그러운 목소리로 홍당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면서 쥐어뜯는다.) 눈물이 글썽거리는구나. 그래, 아빠가^5,5,5^ (르삑 씨 쪽을 살며시 본다.) ^5,5,5^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시든? 엄마는 그처럼 매정하게 들볶지는 않는단다. (르삑 씨 부부는 서로 등을 돌린다.) 5 홍당무: (벽장 안. 입 안에 두 개의 손가락을 넣고 있다. 코 안에는 손가락 하나) 아무나 되고 싶어서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로구나. @ff @[ 사냥 르삑 씨는 아들들을 번갈아 사냥에 데리고 간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뒤를 조금 오른쪽으로 뒤쳐져서 따라간다. 총 끝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잡은 것을 등에 짊어지고 간다. 르삑 씨는 지칠 줄 모르는 단단한 다리를 가졌다. 홍당무는 불평도 하지 않고 기를 쓰고 아버지 뒤를 쫓아간다. 구두가 꼭 끼어 아프지만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다. 발가락 끝이 부풀어 올라 마치 자그마한 망치같이 되었다. 맨 처음의 사냥에서 토끼라도 잡으면 르삑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가까운 농가에 맡겨 두거나, 울타리 속에 숨겨 두었다가 저녁 때 가지고 가는 게 좋겠지?" "아니예요, 아빠. 내가 가지고 다니겠어요." 홍당무가 말한다. 이래서 온종일 토끼 두 마리와 자고새 다섯 마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수도 있다. 홍당무는 손이나 손수건을 사냥 망태기의 멜빵 밑에 넣어 어깨가 직접 닿지 않도록 함으로써 아픔을 덜어 보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등을 돌려 보인다. 그러는 동안은 잠시 무거운 것을 잊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싫증이 났다. 특히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는 허영심이니 뭐니 다 없어지고 그저 힘들기만 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르삑 씨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저 밭을 훑어 보고 오마." 홍당무는 혼자서 속을 태우며 햇빛 속에 가만히 서 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행동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흙덩이를 밟아가며, 마치 쇠스랑으로 땅을 고르듯이 샅샅이 뒤지고 있다. 총대로 울타리며 덩굴이며 엉겅퀴 같은 것을 후려갈긴다. 그러는 동안에 사냥개 삐람므까지도 지칠 대로 지쳐 그늘을 찾아 잠깐 누워서 혓바닥을 쑥 내놓고는 헐떡거린다. "저런 데 뭐가 있을 것 같아서^5,5,5^." 홍당무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마음대로 후려갈겨 봐요. 쐐기풀이나 때려 눕히며 이리저리 뒤져 보세요. 만일 내가 풀잎이 덮인 구덩이에 굴을 파놓고 있는 토끼라면, 이런 더위 속을 무엇 때문에 뛰어 다니겠어?) 이렇게 그는 속으로 르삑 씨를 원망했다. 르삑 씨는 또 다른 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옆에 있는 말먹이 풀밭을 뒤지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토끼 두세 마리쯤은 있으리라고 단단히 점을 찍고 있다. "아빠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지만." 홍당무가 중얼거린다. "이쯤되면 쫓아가야지. 시작이 나쁜 날은 끝까지 엉망이거든. 실컷 달려, 땀에 흠뻑 젖어서 말야. 개가 녹초가 되고 내가 쓰러진들 상관 있나? 어차피 결과는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오늘밤은 틀림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왜냐하면 홍당무는 꽤 미신을 믿는 순진파였기 때문이다. (홍당무가 모자의 가장자리를 만질 때마다) 삐람므는 사냥감을 발견하여 털을 곤두세우고, 꼬리를 번쩍 쳐들고 우뚝 선다. 르삑 씨는 엽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메고는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사냥감에게 다가간다. 홍당무는 멈춰선 채 꼼짝하지 않는다. 솟구쳐 오르는 첫 번째의 감동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홍당무는 모자를 벗는다.) 그러면 자고새가 날거나, 토끼가 불쑥 튀어 나온다. 그리고 홍당무가 다시 모자를 쓰거나, 모자를 들고 경례하는 흉내를 내든가 하는데 따라 르삑 씨는 실수를 하거나, 용케 맞히거나 한다. 이 방법이 백이면 백 다 들어맞는 게 아니라는 것은 홍당무도 잘 알고 있다. 너무 자주 여러 번 되풀이하면 효과가 없어진다. 운명의 여신도 똑같은 신호에 그때마다 대답하기가 싫증나기 때문이다. 이래서 홍당무는 적당하게 간격을 두고 가끔 써먹으면 그런대로 효과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쏘는 것을 보았느냐?" 르삑 씨가 묻는다. 아직 체온이 따뜻한 토끼를 번쩍 쳐들어서 블론드 빛의 배를 눌러 마지막 똥을 짜냈다. "왜 웃지?" "아빠가 이놈을 잡은 게 내 덕이니까 그렇죠." 홍당무가 말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것이 자랑스러워서 침착하게 자기의 비밀 방법을 설명한다. "너는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르삑 씨가 말했다. 홍당무: 아니예요. 늘 들어맞는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5,5,5^. 르삑 씨: 그래 알았으니 썩 입을 다물어! 바보 같으니라고. 말해 두겠지만, 나는 네가 머리 좋은 아이라는 평판을 잃게 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안하는 게 좋을 게다. 기껏해야 비웃을 뿐일 테니까. 그런데 너는 나를 놀리는 게 아니냐? 홍당무: 아니예요, 아빠. 하지만 아빠 말이 맞아요. 미안해요, 난 아직도 철이 덜 들었나 봐요. @ff @[ 파리 사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홍당무는 뉘우쳤다는 뜻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바보스럽게 여겨져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도 다시 기운을 내어, 새로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싹 따라갔다. 르삑 씨가 왼쪽 발로 디딘 곳을 열심히, 조금도 어김없이 왼쪽 발로 디디려니 몹시 바빴다. 마치 사람 잡아먹는 귀신에게 쫓기는 것처럼 크게 다리를 벌려서 걷고 있다. 쉬는 것은 다만 오디며 똘배며 산사자열매를 딸 때이다. 산자사열매를 먹으면 입 안이 죄고, 하얗게 말랐던 입술이 본디의 붉은 빛으로 되돌아가 갈증을 없애 준다. 더욱이 그가 짊어지고 있는 사냥 망태기의 주머니 속에는 꼬냑이 한 병 들어 있다.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홍당무 혼자서 거의 다 먹어 버렸다. 르삑 씨는 사냥에 열중해서 자기에게도 한 모금 달라는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빠, 한 모금 드릴까요?" 바람결에 돌아오는 대답은 "필요없어."라는 말뿐이다. 홍당무는 방금 권했던 한 모금을 마저 마시고는 병을 비운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다시 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다 갑자기 멈춰서서 귀에 손가락을 넣어 힘껏 후벼낸다. 그리고는 그 귀로 무언가 들어 보려는 듯이 르삑 씨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빠, 귓속에 파리가 들어갔나 봐요." 르삑 씨: 꺼내면 되잖느냐? 홍당무: 안으로 쑥 들어갔어요. 손가락이 안닿는 걸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르삑 씨: 내버려 둬, 저절로 죽을 테니까. 홍당무: 하지만 아빠, 혹시 알이라도 낳거나 집을 지으면 어떻게 하지요? 르삑 씨: 손수건을 쑤셔 넣어서 죽여 버리려므나. 홍당무: 꼬냑을 조금 넣어서 빠져 죽게 해볼까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아무거나 부어 넣어라." 르삑 씨가 소리쳤다. "하지만 빨리 해라." 홍당무는 병 주둥이를 귀에 대고 빈 병을 다시 흔드는 척한다. 르삑 씨가 갑자기 술을 달라고 할 때에 대비해서 미리 잔꾀를 부린 것이다. 얼마 뒤 홍당무는 달리면서 쾌활하게 외친다. "아빠, 이젠 파리 소리가 안 들려요. 틀림없이 죽었나 봐요. 그런데 그 파리 녀석이 꼬냑을 모두 마셔 버렸어요." @ff @[ 첫 번째 도요새 "거기 있어라." 르삑 씨가 말했다. "제일 좋은 사냥터이니 나는 개를 데리고 숲속을 돌고 오겠다. 도요새를 몰아올 테니 삐삐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리거든,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고 있거라. 도요새는 네 머리 위로 날아올 테니까." 홍당무는 두 팔로 엽총을 비스듬히 안고 있다. 처음으로 도요새를 쏘게 된 것이다. 전에도 르삑 씨의 총으로 메추리를 한 마리 잡은 일과 자고새의 날개를 스친 일, 토끼를 놓친 적이 있기는 하다. 메추리는 땅 위를 걷고 있었는데, 사냥감을 발견하여 멈춰서 있는 개의 코앞에서 쏜 것이다. 처음에 그는 잿빛을 한 이 동그란 공 모양의 작은 새를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뒤로 물러서라, 너무 가깝다." 르삑 씨가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홍당무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총을 어깨에 대고 바로 옆에서 방아쇠를 당겼더니 잿빛의 둥근 공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가루가 되다시피 하여 흔적도 없어진 메추리의 시체는, 다만 몇 개의 깃털과 피투성이가 된 주둥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젊은 사냥꾼이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는 도요새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이야말로 홍당무의 생애에서 기념할 만한 밤이 되어야 한다. 저녁놀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사람의 눈을 잘 속인다. 여러 가지 물체의 윤곽이 연기처럼 흔들린다. 모기가 한 마리 날아와도 마치 천둥이 다가오는 것처럼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래서 홍당무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눈앞에 다가올 그때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목장에서 돌아온 지빠귀의 한 무리가 참갈나무 사이에서 확 흩어져 둥지로 돌아간다. 홍당무는 먼저 눈을 익히기 위하여 그것을 겨누어 본다. 총대에 서리는 습기를 소매로 닦는다. 낙엽이 여기저기서 굴러 다니고 있다. 이윽고 두 마리의 도요새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길다란 주둥이 때문에 둔하게 날고 있다. 빈틈없는 애정을 보이면서 서로 쫓고 쫓기며 법석거리는 숲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도요새들은 르삑 씨의 말대로 삐삐 삐삐 하며 울고 있다. 그러나 너무도 희미한 목소리여서 홍당무는 과연 이쪽으로 날아올지 얼마쯤 걱정되었다. 줄곧 눈을 움직였다. 그러자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개머리판을 배에 대고 어림잡아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마리의 도요새 가운데 한 마리가 주둥이를 아래로 내밀고 떨어진다. 메아리가 숲속 구석구석으로 무서운 총소리를 흩뜨린다. 홍당무는 날개가 부러진 도요새를 주워들고 자랑스럽게 흔들면서 화약 냄새를 맡는다. 삐람므가 르삑 씨보다 앞서서 달려왔다. 르삑 씨는 여느 때보다 꾸물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틀림없이 깜짝 놀랄 거야." 칭찬해 줄 것을 기다리며 홍당무가 생각했다. 그러나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타난 르삑 씨는 덤덤한 목소리로 아직도 화약 냄새에 싸여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왜 두 마리 다 잡지 않았느냐?" @ff @[ 낚시 바늘 홍당무는 잡아 온 물고기의 비늘을 한창 긁고 있는 중이다. 모래무지며 잉어며 게다가 농어까지 섞여 있다. 칼로 배를 갈라 두 겹으로 된 투명한 공기주머니를 발로 밟아 터뜨린다. 고양이에게 주기 위해 내장을 한데 모은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거품이 일어 하얗게 된 물통 위에 기대어 일을 하면서도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조심을 한다. 르삑 부인은 잠깐 살펴보러 온다. "수고했다." 르삑 부인이 말했다. "오늘을 맛있는 튀김거리를 잡아 왔구나. 하려고만 하면 서투른 솜씨는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는 홍당무의 목과 어깨를 다정스럽게 쓰다듬어 준다. 그러나 손을 떼는 순간 커다랗게 소리쳤다. 손가락 끝에 낚시 바늘이 꽂힌 것이다.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달려왔다. 형 훼릭스도 뒤쫓아 달려왔다. 얼마 뒤 르삑 씨도 왔다. "어디 좀 봐요." 세 사람이 말한다. 그런데 부인은 손가락을 스커트의 양쪽 무릎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 바람에 낚시바늘은 더욱이 깊이 꽂힌다.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어머니를 부축한다. 그러는 동안 르삑 씨는 그녀의 팔을 작고 치켜든다. 그래서 모두가 손가락을 보게 된다. 낚시 바늘은 손가락을 꿰뚫어 꽂혀 있다. "안돼요, 그렇게 하면!" 르삑 부인은 쇳소리로 고함을 친다. 과연 낚시바늘은 한쪽이 구부러져 있고 그 끝에 고리가 달려 있어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르삑 씨는 코걸이 안경을 썼다. "야단났군, 바늘을 부러뜨려야지 하는 수 없어." 르삑 씨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부러뜨린단 말인가! 아무튼 손가락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남편이 조금만 힘을 주어도 르삑 부인은 질겁을 하며 비명을 질러댄다. 도대체 심장이나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야단인가? 게다가 성가시게도 이 낚시바늘은 고급 강철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르삑 씨는 말한다. "살을 찢을 수밖에 없겠군." 코걸이 안경을 단단히 고쳐 쓰고는 창칼을 꺼내어 잘 갈아지지 않은 칼날로 손가락의 살집을 슬쩍슬쩍 문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살살 문지르기 때문에 칼날이 살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힘을 주고 땀을 흘려서 겨우 피가 조금 나왔다. "아유, 아파! 아프다니까요!" 르삑 부인이 소리친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고 있다. "아빠, 좀더 빨리 하세요."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말했다. "그렇게 엄살을 부리면 안된다니까요." 형 훼릭스가 어머니에게 말한다. 르삑 씨는 이제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 칼을 마구 살을 째고 톱질을 한다. 르삑 부인은 "백정 같으니! 이 백정 같으니!" 하고 악을 쓰다가 다행스럽게 정신을 잃어버렸다. 르삑 씨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얼굴이 창백해지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살집을 뜯어 낸다. 이리하여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거기서 낚시바늘이 떨어졌다. "후유우!" 그러는 동안 홍당무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자마자 달아나고 만 것이다. 계단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날벼락 같은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언젠가 낚싯줄을 멀리 던졌을 때 낚시바늘만 등에 걸려서 그대로 꽂혀 있었던 거겠지. "물고기가 걸리지 않은 것이 수상했어." 홍당무는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아무리 듣고 있어도 별로 슬프지 않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이번에는 홍당무 쪽이 어머니 못지 않게 큰소리를 지르며 목이 쉬어라고 울어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당장 복수한 셈이 됐다고 생각하고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 틀림없다. 몰려든 이웃 사람들이 홍당무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홍당무?" 하지만 홍당무는 대답하지 않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빨간 머리가 손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층계 밑에 줄지어 서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 마침내 르삑 부인이 밖으로 나왔다. 어린아이를 낳은 여자처럼 핼쓱한 얼굴빛이었지만, 매우 위험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지, 정성들여 붕대를 감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픔을 꾹 참고 있다. 그 자리의 사람들에게 미소지으며 몇 마디의 말로 안심시키고는 홍당무에게 다정하게 말한다. "너는 엄마를 정말 아프게 했구나. 하지만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네가 잘못한 것을 아니니까."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이토록 상냥스럽게 홍당무에게 말을 건넨 적을 없다. 깜짝 놀란 홍당무는 얼굴을 들러 보니, 어머니의 손가락은 헝겊과 실로 둘둘 감겨 깨끗하고 굵직한 네모가 되어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인형과 꼭같다. 홍당무는 맑은 두 눈이 눈물로 가득 찼다. 르삑 부인은 몸을 굽혔다. 홍당무는 팔굽으로 그것을 막으려 한다. 버릇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런데 부인은 너그럽게도 모두의 앞에서 홍당무에게 입을 맞춘다. 홍당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 그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운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 용서해 주겠다고 했잖느냐! 아니면 엄마를 심술궂다고 생각하고 있니?" 홍당무는 더욱더 흐느껴 운다. "바보예요, 이 아이는. 남이 들으면 목이라도 조르는 줄 알겠어요." 그녀의 애정에 감동된 이웃 사람들은 르삑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낚시바늘을 그들에게 건네주자, 모두들 신기한 듯이 자세히 본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건 8호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차츰 말이 여느 때처럼 자유로이 나오게 되자, 어머니는 비참한 그때의 모양을 모두들에게 수다스럽게 늘어 놓았다. "정말 그 순간만은, 어쩌면 얘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귀여워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작은 낚시바늘이지만^5,5,5^ 나는 정말 죽는 줄로만 알았다니까요."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이 바늘은 멀리 마당 한구석에 구덩이라도 파고 묻어 진흙으로 덮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아냐, 그냥 둬!" 형 훼릭스가 말했다. "내가 맡아 두겠어. 이것으로 낚시질을 해보고 싶군. 굉장할 거야. 엄마의 피에 젖은 바늘인걸. 낚시에는 안성맞춤이겠지! 많이 낚아야지, 물고기를 말이야! 멋있을 거야. 허벅다리만큼이나 큰 놈을 몇 마리나 말이야!" 그리고는, 형은 홍당무를 흔들어 댔다. 아직도 벌을 받지 않는 까닭을 몰라 멍하니 있던 홍당무는 뉘우쳤다는 표시를 더욱더 크게 나타내어 쉰 목소리를 짜내면서 보기 흉한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눈물로 씻고 있다. @ff @[ 은화 1 르삑 부인: 너 뭐 잃어버린 것 없니, 홍당무야? 홍당무: 없어요, 엄마. 르삑 부인: 찾아보지도 않고 없다는 말하니? 자, 먼저 네 주머니를 뒤집어 봐라. 홍당무: (주머니 속을 뒤집는다. 그리고 헝겊이 당나귀 귀처럼 늘어져 있는 것을 본다.) 아, 그렇구나. 엄마, 되돌려 주세요! 르삑 부인: 되돌려 달라니, 뭘 말이냐? 그럼, 뭔가 없어졌니? 한 번 물어 보았더니 들어맞았구나. 뭘 잃어버렸느냐? 홍당무: 몰라요. 르삑 부인: 저것 보게! 거짓말을 할 작정이로구나. 벌써 정신나간 잉어처럼 얼떨떨해지는구먼. 당황하지 말고 대답해 봐, 뭘 잃어 버렸니? 팽이냐? 홍당무: 네, 팽이에요. 깜빡했어요. 그래요, 엄마. 르삑 부인: 그렇지 않아요, 엄마겠지. 팽이는 아니다. 팽이는 지난 주일에 내가 빼앗았잖니? 홍당무: 그럼, 나이프예요. 르삑 부인: 어떤 나이프? 누가 나이프를 주던? 홍당무: 아무한테서도 얻지 않았어요. 르삑 부인: 형편없는 아이로구나. 이러다가는 언제까지라도 끝이 없겠다. 마치 내가 너를 미친 사람으로 몰고 있는 꼴이 아니냐. 하지만 여기는 나와 너뿐이다. 나는 너한테 친절하게 묻고 있는 거란다. 엄마를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모든 것을 털어 놓아라. 틀림없이 은화를 잃었을 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아마 분명히 그럴 거다. 그렇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할걸. 그것 봐라, 코가 벌름거리지 않니. 홍당무: 엄마, 그 은화는 내 것이에요. 대부 아저씨가 일요일에 주셨거든요. 잃어버려서 정말 속상해요. 마음이 아프지만 단념하겠어요. 더욱이 그다지 미련은 없어요. 은화 하나쯤 있으나마나니까요. 나한테는 마찬가지인 걸요. 르삑 부인: 어머나, 이 무슨 건방진 말버릇이냐. 내가 사람이 좋기 때문에 물어 본 거야. 그럼, 너는 대부 아저씨의 기분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단 말이지? 그토록 너를 귀여워 하지만 틀림없이 화를 낼거야. 홍당무: 하지만 엄마,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나요? 내가 좋아하는 일에 그 돈을 썼다고 말이에요. 평생 그 돈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르삑 부인: 이제 그만 해 둬, 누가 물으면 시무룩한 얼굴만 하면서! 준 사람이 그렇게 해도 좋다는 말을 안했다면 그 돈은 잃어서도 안되고, 허락을 받지 않고는 써서도 안되는 거야. 너는 그 돈을 잃어버렸어. 대신 내 놓을 돈이 있어야 해. 자, 빨리 가 봐. 쓸데없는 말 그만 하고. 홍당무: 응, 엄마. 르삑 부인: "응, 엄마."라는 말은 이제 안 해주었으면 좋겠다. 괴짜인 척하는 것도 정말 싫으니까. 그리고 또 말해 두겠지만, 콧노래를 하거나 잇사이로 휘파람을 불며 한가로운 마부 흉내를 내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나한테 그래 봐야 하나도 이로울 것 없다. 2 홍당무는 마당의 좁은 길을 어정거리고 있다. 징징거리는 소리를 낸다. 잠시 찾다가는 몇 번이나 코를 훌쩍인다. 어머니가 감시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 있으면 가만히 멈춰 선다. 아니면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 끝으로 수영풀 뿌리나 모래를 후벼판다. 르삑 부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더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코를 쳐들고 왔다갔다 할 뿐이다. 그 은화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 높은 나무 위의 꼭대기에 있을까? 아무것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금화를 줍는 일이 흔히 있다. 실지로 그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홍당무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무릎과 손톱이 닳도록 찾아 헤매어도 핀 하나 줍지 못할 것이다. 르삑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불러 본다. "엄마, 엄마!" 대답이 없다. 이제 막 어디로 어디로 나갔는지 바느질 탁자의 서랍이 열려 있다. 보니, 털실이며 바늘이며 흰색, 붉은색, 검정색의 실에 섞여서 은화가 몇 개 뒹굴고 있다. 은화는 그 속에서 묵은 돈이 되어 버린 듯했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잠이 깨는 일은 어쩌다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곧잘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으로 밀리곤 해서 뒤섞이는 바람에 제대로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세 개인가 하면 네 개이고, 또 여덟 개가 되기도 한다. 헤아리려면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서랍을 책상 위에 뒤엎어 놓고 실꾸러미를 해쳐 보지 않으면 안되리라. 그러나 어떤 흔적이 남지 않을까?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돌보아 주지 않는 그 기회를 이번만은 잡아야지, 하고 홍당무는 굳게 각오하며 팔을 뻗쳐 은화 한 닢을 훔쳤다. 그리고는 도망쳤다. 그 자리에서 잡혔다가는 큰일난다고 생각하자 망설임도 후회도, 또 바느질 책상으로 되돌아가는 위험도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홍당무는 쏜살같이 달아난다. 너무 무섭게 내달아서 멈춰 설 수 없다. 마당의 좁은 길을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곳을 찾아 거기에 은화를 떨어뜨렸다. 발뒤축으로 힘껏 밟아서 땅바닥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는 엉금엉금 기어서 콧등으로 풀잎을 헤치고 마구 기어다니면서 되는 대로 동그라미를 몇 개 그린다. 그 모습은 눈을 가린 한 어린아이가 숨겨 놓은 물건을 찾느라고 그 둘레를 빙빙 돌아 다니는 장난과 꼭 같다. 이 어린아이의 장난에는 으레 장단을 맞추는 아이가 속이 타는 듯이 다리를 두드리며 이렇게 외친다. "야, 큰일났다! 창고에 불이 붙었다. 창고에 불이 붙었어!" 3 홍당무: 엄마, 엄마, 찾았어요! 르삑 부인: 나도 찾았다. 홍당무: 네? 이것 보세요, 여기 있잖아요. 르삑 부인: 여기도 있단다. 홍당무: 좀 보여줘요. 르삑 부인: 네 것도 좀 보여 주려므나. 홍당무: (은화를 보인다. 르삑 부인도 자기 것을 내보인다. 홍당무는 두 개의 은화를 손에 들고 비교해 본다. 할 말을 준비한다) 이상한데요, 엄마. 엄마는 어디서 찾았지요? 난 이 좁은 길의 배나무 뿌리에서 찾았어요. 찾아 낼 때까지 스무 번도 더 그 위를 밟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반짝이는 게 있잖겠어요. 그래서 주워 볼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내 주머니에서 떨어졌을 거예요. 언젠가 풀 위를 뒹굴고 법석을 떨면서 논 적이 있거든요. 엄마, 조금 몸을 굽혀 이 약삭빠른 몸이 숨어 있는 곳을 들여다 보세요. 녀석이 숨어 있던 집 말이에요. 놈은 나를 골탕먹인 것을 자랑해도 괜찮을 거예요. 르삑 부인: 골탕먹이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네 것은 너의 다른 웃옷 주머니 속에 있었단다. 그렇게 일러도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일을 잊어 버리더구나. 성실한 버릇을 가르쳐 주려고 본보기 삼아 찾아 내도록 한 거야. 그런데 찾으면 으레 나온다는 게 정말이로구나. 왜냐하면 네 은화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되었거든. 큰 부자가 된 셈이다. 끝이 좋으면 모든 일이 잘 된다. 하지만 돈만으로는 행복해질 수가 없는 법이지. 홍당무: 그럼, 놀러 가도 괜찮겠지요, 엄마? 르삑 부인: 그래, 놀다 오너라. 하지만 어린애 같은 장난은 하지 말아라. 네 은화를 두 개 다 가져 가거라. 홍당무: 아이예요, 엄마. 한 개면 돼요. 그것도 필요할 때까지 엄마가 갖고 계셔요. 엄마, 그렇게 해주시겠지요? 르삑 부인: 아니다,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 네 은화는 네가 가져라. 두개 다 네거니까. 대부 아저씨한테서 얻은 것과 배나무 밑에서 찾은 것. 배나무 밑의 은화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말이다. 하지만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르겠구나. 너는 짐작이 가니? 홍당무: 정말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런 건 내일에나 생각해 보겠어요. 그럼, 엄마, 잠깐 놀다 오겠어요. 고마워요! 르삑 부인: 잠깐만, 어쩌면 정원사의 것이 아닐까? 홍당무: 지금 곧 물어 보고 올까요? 르삑 부인: 아니, 여기서 나를 도와다오. 같이 생각 좀 해보자꾸나. 아빠는 그 나이에 돈을 떨어뜨리는 부주의한 일은 안하실 것이고, 누나는 동전을 저금통에 넣으며 형은 돈을 잃어버릴 겨를도 없다. 돈을 얻기가 무섭게 써 버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보면 아마도 내가 떨어뜨렸을 거야. 홍당무: 엄마, 그럴 리는 없어요. 엄마는 무엇이든 꼼꼼하게 정돈해 놓으시잖아요. 르삑 부인: 어른들도 때로는 아이들처럼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단다. 좋아,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아무튼 이건 내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다. 걱정할 건 없어. 빨리 놀다 오너라. 하지만 너무 멀리 가면 안된다. 그 동안에 내 바느질 탁자의 서랍을 좀 뒤져 볼 테니까. 벌써 뛰어나갔던 홍당무는 홱 돌아서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간다. 이윽고 어머니를 앞질러 뛰어가 그 앞을 가로막아서는 아무 말도 않고 한쪽 뺨을 내밀었다. 르삑 부인: (오른손을 든다. 홍당무는 얻어 맞기 직전) 네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구나.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덧붙이다니. 언제나 그런 식으로 해봐라.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될 테니.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 어미를 잡아 먹을 게다. 뺨을 후려갈기는 첫 번째 따귀가 무섭게 홍당무의 얼굴에 떨어졌다. @ff @[ 자기 의견 르삑 씨와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 그리고 홍당무. 이 네 사람이 난로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난로 속에는 뿌리가 붙은 통나무 하나가 활활 타고 있다. 네 사람은 의자에 걸터앉아 배를 젓듯이 그 의자를 끽끽 앞뒤로 흔들고 있다. 모두들 토론을 하고 있다. 홍당무는 르삑 부인이 없는 틈에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내 생각으로는." 홍당무가 말했다. "가족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져요. 하지만 내가 아빠를 몹시 좋아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나는 아빠가 우리 아빠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기 때문에 나도 좋아하는 거예요. 사실 아빠에겐 아버지의 자격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하지만 나는 아빠의 애정을 굉장히 큰 호의하고 보고 있어요. 나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가 없는 호의도 아빠가 기분 좋게 선심을 베풀어 준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으흠!" 르삑 씨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나는 어떠니?" "나는?"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묻는다. "같은 이치야." 홍당무가 말한다. "우연이라는 것이 두 사람을 나의 형과 누나로 했을 뿐이지. 그것을 내가 형이나 누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까닭은 없잖아? 또 우리들 세 사람이 한 집안 식구가 됐다 해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두 사람 다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거지. 그렇게 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형제가 된 데 대해서 고마워 할 필요도 없어. 형, 다만 형에게는 나를 여러 모로 보호해 주는데 대해서, 그리고 누나, 누나에 대해서는 하찮은 일에까지 마음을 써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천만에." 형 훼릭스가 말한다. "그런 꿈 같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니?"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말했다. "더욱이 내가 하는 말은." 홍당무가 덧붙인다. "일반적으로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거야. 다만 매력적인 표현을 피하고 있는 셈이지. 만일 엄마가 여기 눈앞에 있더라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어." "두 번 다시 못할걸." 형 훼릭스가 말했다. "내 말의 어디가 잘못됐다는 거지?" 홍당무가 물었다. "내 의견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애정이 아쉬운 사람은 아니야. 뿐만 아니라 보기보다도 훨씬 더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하지만 내 애정은 평범하고 본능적이 판에 박은 게 아냐. 정확히 의식한 이성적이며 논리적이 애정이지. 그래요, 논리적,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단어야."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함부로 쓰는 버릇은 언제 버릴 거냐?" 벌떡 일어서서 침실로 가려던 르삑 씨가 물었다. "더구나 네 나이에 벌써 남을 설교하려는 그 버릇도 말이다. 만일 내가 돌아가신 너의 할아버지에게 방금 네가 한 것과 같은 그런 헛된 소리를 조금이라 비췄다간, 당장 매를 맞거나 뺨을 맞아. 내가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할 것이 뻔해." "심심풀이 삼아 해본 말인데 뭐 어때요." 홍당무는 벌써 불안해져서 변명한다. "잠자코 있는 것이 더 좋겠다." 촛불을 손에 든 르삑 씨는 이렇게 말하고 나가 버렸다. 형 훼릭스가 따라 나갔다. "그럼, 안녕, 함께 사는 어린 친구야." 그는 홍당무에게 말했다. 그런 다음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일어서서 엄숙하게 "잘자!" 라고 말하고는 나갔다. 홍당무는 외톨이로 남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어제 르삑 씨는 홍당무에게 모든 일을 잘 생각하는 것을 배우라고 타일렀었다. "사람들은 무엇이냐?" 르삑 씨는 말했다.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무도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너는 귓전으로 얻어들은 남의 말을 성경을 읽듯이 외쳐대는구나. 조금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려고 애써 보아라. 자기 생각을 말하도록 하려므나. 처음에는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말이다." 그런데 큰 마음 먹고 해본 첫 번째 의견이 호되게 얻어 맞았으므로, 홍당무는 난로불에 재를 뿌리고는 의자를 벽가로 옮겨 놓았다. 벽시계에다 절을 하고 침실로 갔다. 이 방은 헛간의 계단과 통해 있었으므로 헛간방이라고 불리고 있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기분 좋은 방이다. 사냥에서 잡아온 짐승도 이곳이라면 일주일은 충분히 간다. 요즈음 잡은 토끼가 코에서 피를 흘리며 접시에 얹혀 있다. 암탉에게 줄 싸라기로 가득 찬 바구니도 몇 개 놓여 있다. 홍당무는 두 팔을 걷어 붙이고 팔꿈치까지 집어넣고는 쉬지 않고 싸라기를 휘저었다. 여느 때라면 외투걸이에 걸려 있는 온 집안 식구들의 옷이 묘한 느낌을 준다. 마치 자살한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반장화를 윗선반에 나란히 얹어 놓고 막 목을 졸라맨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밤에는 무섭지 않다. 침대 밑을 들여다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달빛에도, 그림자에도,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사람한테 알맞게 만들어진 것 같은 마당의 우물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무섭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이 무서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젠 무섭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셔츠 하나만으로도 붉은 바닥의 차가움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 것처럼, 발뒷축으로 걷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침대 속에서 바람벽 여기저기에 생긴 습기로 부풀어 오른 곳을 쳐다보면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 있다. 역시 자기 가슴속에 간직해 두어야만 하므로 "자기 의견" 이라고 말해야겠지. @ff @[ 나뭇잎의 폭풍 벌써 오래 전부터 홍당무는 물끄러미 높다란 포플러나무 꼭대기의 잎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멍하니 공상에 잠기면서 그 잎이 흔들리기를 있다. 그 잎은 나무에서 떨어져 오직 혼자 따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줄기도 없이 자유롭게. 날마다 그 잎은 동이 틀 때와 마지막 햇살에 황금빛으로 빛난다. 정오를 지나면 꼼짝하지 않는다. 잎이라기보다는 얼룩이라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되면 홍당무는 초조해져서 침착성을 잃고 만다. 바로 그때 겨우 그 잎이 신호를 한다. 그러자 그 바로 밑의 잎이 같은 신호를 한다. 다른 잎도 이 몸짓을 되풀이하며 그것을 옆의 잎에 전한다. 그 잎이 얼른 또 다른 잎에 전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보의 전달이다. 왜냐하면 지평선에 둥그스름한 같색 모자 가장자리가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포플러나무는 벌써 떨고 있다. 몸을 움직여서 방해가 되는 묵직한 공기층을 밀쳐 내려고 한다. 포플러나무의 불안은 느티나무며 참갈나무며 마로니에나무로 옮겨진다. 그리고 온 뜰 안의 나무가 몸을 떨면서 서로 속삭인다. 하늘에 그 둥근 모자가 펼쳐져서 뚜렷한 검은 가장자리를 이쪽으로 밀어붙여 오면^5,5,5^. 맨 먼저 나무들은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흔들어서 새들의 노래의 노래를 멈추게 한다. 날완두콩을 던지는 것 같은 소리로 변덕스럽게 가끔 노래를 부르는 지빠귀, 페인트칠을 한 것 같은 목구멍에서 꾸르륵 꾸르륵 울음 소리를 짜내는 것은 홍당무가 조금 전에 본 산비둘기, 게다가 연미복(제비꼬리같이 된 예복)같은 꼬리를 달고 있는 아니꼬운 까치. 이윽고 나무들은 굵직한 팔을 휘둘러서 적에게 겁을 주려고 한다. 납빛의 둥근 모자는 여전히 서서히 쳐들어오고 있다. 둥근 모자는 차츰차츰 하늘을 덮는다. 푸른 하늘을 밀어젖히고 하늘에서 공기가 통하는 구멍을 막아 끝내는 홍당무의 숨통까지도 막으려 든다. 이따금씩 모자는 자신의 무게 때문에 휘청거리며 마음 위로 떨어질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종각의 뾰족한 끝까지 오자 걸려서 찢길까봐 얼른 멈춰 선다. 벌써 먹구름이 가까이 다가왔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혼란한 사태가 벌어져 소동이 일어난다. 나무란 나무는 모두 얽히고 설켜서 성난 둥지를 서로 비벼댄다. 홍당무는 그 잎사귀 속에 둥근 눈과 하얀 부리를 한 새 둥우리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나뭇가지가 축 늘어지는 듯싶더니, 별안간 잠이 깬 사람처럼 번쩍 쳐든다. 나뭇잎은 떼를 지어 날아갔다가 이내 무서워서 얌전하게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본디의 나무에 매달리려 한다. 아카시아의 가느다란 잎새는 한숨을 짓고 껍질을 벗긴 벚나무의 잎은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 있다. 마로니에의 잎은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고 덩굴진 아리스똘로쉬 잎은 담벽 위에서 차례차례로 잎을 나부끼며 파도처럼 출렁댄다. 아래쪽에서는 무성한 사과나무가 사과를 흔들고 있다. 땅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둔한 땅울림이 들린다. 훨씬 더 낮은 곳에는 구즈베리나무가 빨간 핏방울을 , 검은 구즈베리나무가 잉크빛의 시커먼 핏방울을 흘리고 있다. 그보다 더 낮은 곳에서는 주정꾼 같은 양배추가 당나귀처럼 귀를 흔들고 있다. 또 상기된 양파가 서로 맞부딪치면서 씨앗으로 불룩한 둥근 머리를 터뜨리고 있다. 왜 그럴까?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천둥도 치지 않고, 우박도 내리지 않는다. 번갯불도 번쩍이지 않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폭풍 같은 시커먼 하늘이, 대낮에 닥친 소리없는 어둠이 주위의 초목을 미치게 하여 홍당무를 겁먹게 하고 있다. 바야흐로 둥근모자는 해를 덮고 그 밑에 쫙 퍼져 있다. 이 먹구름은 움직이고 있다. 홍당무는 그것을 알고 있다.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덩이는 언젠가는 지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해를 볼 수 있겠지. 큰 먹구름은 하늘 가득히 천장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는 홍당무의 작은 이마를 힘껏 죄어든다. 홍당무는 눈을 감는다. 그러자 홍당무의 눈까풀을 따갑게 누르면서 눈을 가린다. 양쪽 귀를 손가락으로 틀어 막는다. 그런데 폭풍의 고함과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든다. 큰길의 종이쪽지를 빼앗듯이 그의 심장을 붙잡는다. 그 심장을 마구 쥐어짜서 자그마하게 뭉쳐 버리고 만다. 얼마 안 되어, 홍당무는 자기 심장이 이젠 눈깔사탕 만큼이나 줄어든 듯싶었다. @ff @[ 반항 1 르삑 부인: 홍당무야, 너는 착하지? 제발 부탁이니 물방앗간에 가서 버터 한 파운드만 사다 다오. 빨리 갔다 오너라. 네가 올 때까지 식사를 안하고 기다리마. 홍당무: 싫어요, 엄마. 르삑 부인: 왜 또 싫다고 하니? 아무 말 말고 갔다 오너라. 자, 기다릴게^5,5,5^. 홍당무: 싫단 말이에요, 엄마. 나는 물방앗간에는 안 가요. 르삑 부인: 뭐라고? 물방앗간에는 안 가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부탁한 게 누구니? ^5,5,5^ 무슨 농담을 하는 거냐? 홍당무: 그렇지 않아요. 르삑 부인: 어머나, 홍당무야.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구나. 당장 물방앗간에 가서 버터를 한 파운드 사 오너라! 홍당무: 듣고 있어요. 하지만 난 안 갈래요. 르삑 부인: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어떻게 된 거냐? 내 말을 안 듣겠다니, 네가 태어난 뒤 처음 있는 이이 아니냐. 홍당무: 엄마, 그래요. 르삑 부인: 친엄마의 말을 안 듣겠다는 말이지? 홍당무: 친엄마라고요? 그래요, 엄마. 르삑 부인: 이건 정말 놀랄 일이로구나! 어디 정말인지 아닌지 좀 볼까? 잔, 냉큼 갔다 오라니까. 홍당무: 싫다는 대두. 엄마는^5,5,5^ 르삑 부인: 시끄러워, 빨리 갔다 오라면 갔다 와. 홍당무: 입 다물겠어요. 하지만 난 안 가요. 르삑 부인: 이 접시를 가지고 갔다 오라니까. 2 홍당무는 입을 다문 채 꼼짝도 않는다. "이건 혁명이로구나!" 르삑 부인이 소리쳤다. 계단 위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사실 홍당무가 어머니에게 "싫어요!"하고 거절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테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방해를 했다거나, 한창 놀고 있는 중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런데 지금 홍당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엄지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심심해서 못 견디는 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거만한 태도로 얼굴을 번쩍 쳐들고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도움을 얻으려는 듯이 가족들을 불렀다. "에르네스띤느, 훼릭스,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빠와 함께 나와 봐라. 아가뜨도 오너라.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보렴!" 그래서 마침 큰길을 지나가던 사람도 멈춰 서게 된다. 홍당무는 모두에게서 뚝 떨어져 마당 한가운데 앉아 있다. 눈앞에 위험이 닥쳐오는 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홍당무 자신도 놀라고 있다. 그리고 르삑 부인이 때리는 걸 잊어버리는 것에 더욱 놀라고 있다. 너무도 무서운 순간이어서 르삑 부인 자신도 어쩔 줄 모르는 참이었다. 새빨간 칼날처럼 불타는 저 홍당무의 눈초리에 여느 때의 위협도 단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무리 잠자코 있으려고 애를 써도 그녀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만다.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와는 씩씩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온다. "여러분, 좀 들어 보세요." 르삑 부인이 말한다. "나는 홍당무한테 잠깐 심부름을 갔다 와 달라고 상냥하게 부탁했어요. 산책 삼아 물방앗간까지 갔다 와 달라고 말이예요. 그랬더니 이 아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저 아이한테 한 번 물어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마치 내가 꾸며 대는 줄로 생각하실 테니까요." 모두들은 곧 짐작이 갔다. 홍당무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 새삼스럽게 대답을 되풀이시킬 필요가 없었다. 마음씨 착한 에르네스띤느가 다가와서 살며시 홍당무에게 귀띔한다. "조심하는게 좋아. 너 혼난다. '네'라고 대답해라, 너를 사랑하는 누나가 시키는 일이니 잘 들어야 해." 형 훼릭스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누가 와도 이 자리는 내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홍당무가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심부름의 일부는 으레 형인 자기가 하게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홍당무를 응원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제까지는 동생을 얕잡아 보고 바보 취급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와 엇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 존경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다. "세상이 뒤집혀졌어요. 이젠 말세라오." 더욱 놀라며 르삑 부인이 말했다. "이젠 내 힘으로도 벅차서 어쩔 수가 없군요. 난 물러가겠어요. 누가 말을 해서 저 짐승 같은 아이를 순종하도록 해줘요. 그럼,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만나 얘길 해 가지고 해결을 지어요!" "아빠!" 흥분할 대로 흥분한 홍당무가 목을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까지 어머니한테 대든 적이 없었던 터이라 잔뜩 흥분되어 있다. "아빠가 제발 물방앗간까지 가서 버터를 한 파운드 사 가지고 오라고 하면 난 사오겠어요. 아빠를 위해서라면, 오직 아빠를 위해서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엄마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로 안 가겠어요." 이렇게 자기편을 들어 주는 데 대해, 르삑 씨는 기분이 좋아지기보다는 오히려 난처한 모양이다. 기껏 버터 한 파운드를 사는 것쯤으로, 주위의 구경꾼들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권유를 받고 아버지의 위신을 앞세운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너무도 어색해 그는 풀밭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어깨를 움츠리고 홱 돌아서더니 얼른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잠시 이것으로 중단되었다. @ff @[ 최후의 말 저녁 때 르삑 부인은 기분이 언짢아서 누워 있었으므로 식사하러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들 잠자코 먹고 있는데, 이것은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서로가 거북했다. 식사가 끝나자 르삑 씨는 냅킨을 접어 테이블 위에 던지고는 이렇게 말했다. "옛 큰길의 언덕까지 산책을 하겠는데, 누가 같이 가지 않으련?" 홍당무는 아버지가 이런 방법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려는 것을 눈치챈다. 그래서 자기도 일어선다. 여느 때처럼 의자를 벽가로 옮겨 놓고 얌전하게 아버지를 따라간다. 처음에는 두 사람 다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러다가 틀림없이 아버지가 이것저것 묻겠지만, 당장은 그런 기색이 없다. 홍당무는 머리 속에서 무슨 말을 물을지, 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그것을 이모저모로 궁리해 본다. 얼마 안되어 준비가 끝났다. 몹시 마음이 괴로웠으나 이젠 아무것도 후회할 건 없다. 낮에 그토록 엄청난 사건을 맛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아버지의 말투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르삑 씨: 뭘 우물쭈물하고 있느냐? 엄마를 슬프게 한 아까의 행동은 어떻게 된 이이냐. 까닭을 말해 보려므나. 홍당무: 아빠,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 분명히 해둬야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난 엄마를 좋아하지 않아요. 르삑 씨: 흐음! 그래 어떤 점이, 언제부터? 홍당무: 모든 것이 싫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르삑 씨: 흐음! 그거 참, 야단났구나. 하지만 나한테만은 엄마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말해 다오. 홍당무: 이야기하려면 끝없이 길어져요. 그런데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나요? 르삑 씨: 눈친 챘지. 네가 토라진 것을 자주 보았으니까. 홍당무: 토라졌다는 말을 들으니 더 화가 나는데요. 그야 홍당무라는 아이는 진심으로 남을 원망하지는 못해요. 다만 토라져 보일 뿐이지요. 토라졌을 때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거예요. 토라질 만큼 토라지고 나면, 마음이 풀려 명랑한게 구석에서 나오는 거예요. 특별히 그 아이한테 관심을 가진 척해서는 안돼요. 아무래도 좋다라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 미안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건 그저 아빠나 엄마나 다른 사람들한테 아무래도 좋다는 거예요. 나는 가끔 겉으로만 토라져 보일 때가 있어요.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두는데, 마음속으로부터 분개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에 받는 모욕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르삑 씨: 그건 못 써. 남에게 놀림받은 건 곧 잊어버려야 한단다. 홍당무: 그게 안돼요, 정말 안돼요. 아빠는 잘 몰라요. 집에 잘 안계시니까요. 르삑 씨: 사업 관계로 자주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 홍당무: (흥분된 말투로) 아빠, 사업을 사업이에요. 아빠는 사업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어요. 하지만 엄마는, 이제 이렇게 된 바에는 모두 말하지만, 나를 때리는 것 말고는 화풀이할 데가 없는 거예요6. 아빠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스파이처럼 몰래 아빠한테 일러바치면, 그야 물론 아빠는 꼭 내 편이 되어 주겠지만 말이에요. 그럼 조금씩 옛날 이야기를 해볼까요. 내가 허풍을 떠는 건지, 또 얼마만큼이나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챌 테니까요. 하지만 아빠, 우선 의논할 일이 있어요. 나는 엄마하고 헤어져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간단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까요? 르삑 씨: 일년에 두 달, 방학 때 만날 뿐이잖니? 홍당무: 방학 때도 기숙사에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틀림없이 성적도 오를 거예요. 르삑 씨: 그건 가난한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야.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너를 버린 것으로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너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돼. 그렇게 되면 나도 너와 만나지 못하잖니? 홍당무: 면회하러 오시면 되잖아요, 아빠. 르삑 씨: 그런 여행을 하게 되면 돈이 너무 들어서 감당해 낼 수 없단다, 홍당무야. 홍당무: 꼭 해야 할 여행을 이용하면 되잖아요. 조금만 돌아서 오면 되는 거예요. 르삑 씨: 나는 이때까지 너를 네 형이나 누나와 똑같이 대해 왔다. 누굴 특별히 어떻게 한다든가 하는 일은 결코 안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작정이다. 홍당무: 그렇다면 학교를 그만두겠어요. 기숙사에서도 나와 버리고요.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핑계로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뭔가 일거리를 구해야겠지요. 르삑 씨: 무슨 일거리? 이를테면 구둣방에라도 들어가겠다는 거냐? 홍당무: 구둣방이건 뭐건 다 좋아요. 그렇게 되면 밥 걱정 없이, 또 자유롭게 있을 테니까요. 르삑 씨: 이미 때가 늦었다, 홍당무야. 구두 바닥에 못을 치게 하기 위해서 너를 교육시키느라 큰 희생을 치르진 않았어. 홍당무: 하지만 아빠, 난 자살한 뻔했던 일도 있어요. 르삑 씨: 너무 허풍을 떨지 말아라, 홍당무야. 홍당무: 정말이에요, 아빠. 어제만 해도 나는 목을 매려고 했었어요. 르삑 씨: 하지만 넌 멀쩡히 있지 않니? 그러니 그런 생각은 없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런데도 자살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고 잘난 척 으스대고 있구나. 죽고 싶은 건 자기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홍당무야, 너무 제멋대로 굴면 자신을 그르치게 된단다. 너는 자신의 논에만 물을 끌어들이고 있어. 이 세상에 오직 너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홍당무: 아빠, 형도 행복하고 누나도 행복해요. 그리고 엄마가 아빠 말처럼 재미 삼아 나를 놀리는게 아니라면,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끝으로 아빠인데, 아빠는 우리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이므로 모두들 쩔쩔매거든요. 엄마까지도 말예요. 아무도 말예요. 아무도 아빠를 불행하게 하지는 못해요. 그게 바로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도 있다는 증거예요. 르삑 씨: 이 세상의 고집쟁이 꼬마인 홍당무야, 너는 보잘 것 없는 이치만 내뱉고 있어. 사람의 진심이 너에게도 똑똑히 보인단 말이냐? 네 나이에 모든 일을 다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홍당무: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아빠. 르삑 씨: 그렇다면 알겠느냐, 홍당무야. 행복 같은 건 아예 단념해라! 일러두겠지만, 지금보다 절대로 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단 말이야. 홍당무: 그런 건 몰라요. 르삑 씨: 단념해라, 너의 마음을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는 거야. 어른이 되어 네 자신을 너 스스로 다스려서 자유를 얻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과 인연을 끊고, 비록 너의 성격이나 기질을 바꾸지 못한다 할지라도 집을 바꾸어서 새 가정을 만들 수는 있다. 그때까지는 언제나 떳떳하게 행동하도록 해라.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아라. 너의 식구들까지도 말이다. 아마 재미있을 거다, 생각지도 못한 기분전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홍당무: 틀림없이 다른 사람도 나름대로는 저마다 고민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은 내일이나 되어야지, 오늘 당장은 나 자신을 위해서 정의를 요구할 뿐이에요. 어떤 운명도 나보단 나을 거예요. 나한테는 엄마가 있어요. 그런데 이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나 역시 싫어해요. "그럼, 나는 너의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줄 아니?" 참다 못한 르삑 씨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 말을 듣자 홍당무는 눈을 들어 아버지를 쳐다본다. 수염이 더부룩한 아버지의 무뚝뚝한 얼굴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 수염 속에 입이 너무 지껄인 것을 수줍어하는 듯 숨어 버렸다. 주름진 이마, 눈까풀이 축 늘어져 마치 걸어가면서 졸고 잇는 것 같다. 얼마 동안 홍당무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맛보고 있는 남모를 기쁨과, 힘껏 마주보고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듯한 아버지와 아들의 손. 이런 것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마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했다. 이윽고 홍당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멀리 어둠 속에 고요히 잠드는 마을을 향해 번쩍 쳐들고 을러댄다. 그리고는 그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심술궂은 여편네! 흥, 빈틈없는 심술쟁이 여편네! 난 정말 싫어." "그만둬!" 르삑 씨가 말했다. "그래도 역시 네 엄마가 아니냐." "아아!" 홍당무는 조심스럽게 여는 아이로 되돌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이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예요." @ff @[ 홍당무의 앨범 1 만일 르삑 씨네 집 앨범을 들춰 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놀라리라. 누나 에르네스띤느와 훼릭스는 온갖 자세로 찍혀 있다. 서 있는 모습, 앉아 있는 모습, 좋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 또 반나체로이거나 즐거운 듯이, 또는 얼굴을 찌푸리거라도 하며 저마다 멋진 배경 속에 찍혀 있다. "그런데 홍당무의 사진은 그다지 없군요." "아주 어렸을 때의 사진은 몇 장 있었는데." 르삑 부인이 대답한다. "너무 귀여워서 사람들이 모두 가져가 버렸어요, 그래서 한 장도 남아 있질 않아요." 정말은: 홍당무를 찍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2 가족들은 언제나 홍당무라고만 부르고 있으므로, 이 아이를 본명으로 부르려 해도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하필이면 홍당무라고 부르지요? 머리털이 불그스름하기 때문인가요?" "성격은 더 불그스름하다오." 르삑 부인은 말한다. 3 그 밖의 개인적이 특징으로. 홍당무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남의 호감을 할 수가 없다. 홍당무의 콧구멍은 마치 두더지 굴처럼 크고도 깊다. 아무리 후벼 주어도 홍당무는 언제나 빵부스러기 같은 귓밥이 잔뜩 들어 있다. 홍당무는 혓바닥 위에 눈을 얹어 놓고는 쭉쭉 빨면서 녹인다. 홍당무는 뒷굽을 서로 맞부딪치면서 볼썽사납게 걸어간다. 난장이로 알 정도이다. 게다가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난다. 절대로 사향 냄새는 아니다. 4 홍당무는 신구들 가운데서 가장 빨리 일어난다. 하녀와 같은 시간이다. 겨울에는 날이 밝기 전에 침대에서 뛰어내려 손으로 시간을 본다. 손가락으로 시계바늘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커피나 코코아가 나오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얼른 입에 집어 넣는다. 5 누군가에게 소개를 하면 홍당무는 외면을 하고 손을 앞으로 내민다. 따분한 듯이 다리를 꼬꼬는 옆 벽을 긁어 댄다. 그때 "키스해 주겠니, 홍당무야?" 하고 부탁하면 이렇게 대답한다. "싫어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6 르삑 부인: 홍당무야, 대답 좀 해라. 너를 부르고 있지 않니. 홍당무: 네, 아빠(네, 엄마). 르삑 부인: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애들은 입에 뭘 잔뜩 넣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이야. 7 홍당무는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고는 못 배긴다. 르삑 부인이 가까이 오면 급히 손을 빼지만, 그래도 미처 못 뺄 때가 있다. 어느 날 이윽고 르삑 부인은 홍당무의 두 손을 넣은 채 주머니를 꿰매고 말았다. 8 "남에게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거짓말만은 결코 해선 안된다." 대부가 상냥하게 말한다. "그건 천한 결점이야. 더욱이 거짓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단다. 반드시 드러나거든." "네." 홍당무가 말했다. "하지만 시간을 벌 수가 있어요." 9 게으름뱅이 형 훼릭스가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다. 기지개를 켜며 홀가분한 듯이 숨을 내쉬고 있다. "너는 뭘 좋아하지?" 르삑 씨가 묻는다. "너의 생활을 정해야 할 나이다. 뭘 할 작정이냐?" "뭐라고요? 또 뭔가 해야 합니까?" 형 훼릭스가 묻는다. 10 모두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베르뜨 양이 소문의 대상이다. "베르뜨 아가씨는 파란 눈이기 때문에^5,5,5^." 홍당무가 말했다. 모두들 감탄하여 소리친다. "멋지다, 멋져! 정말 멋진 시인이야!" "아니야." "그 아가씨의 눈은 보지도 않았어. 아무 생각없이 말했을 뿐이야. 상식적인 말이지, 듣기 좋게 꾸며 댄 말이라구." 11 눈싸움을 할 때면 홍당무는 혼자서 한쪽을 맡는다. 상대편에게는 무서운 적이다. 그의 소문은 멀리까지 파다하게 퍼져 있다. 아무튼 눈 속에 돌을 넣어 던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머리를 노린다. 이렇게 하는 것이 승부가 빠르다. 얼음이 얼어 다른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있어도, 청개구리인 홍당무는 모두들에게서 뚝 떨어져 얼음판 옆의 풀밭에 조그마한 빙판을 만든다. 말타기 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자기가 말이 되겠다고 우긴다. 붙들기 놀이를 할 때는 얼마든지 붙잡혀 준다. 자유 같은 것에는 전혀 미련이 없다. 또 숨바꼭질을 할 때는 너무 꼬꼬 숨기 때문에 마침내는 모두가 그를 찾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12 아이들이 키 자랑을 하고 있다. 형 훼릭스와는 경쟁이 안될 것은 보기에도 뻔하다. 그는 두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그러나 홍당무와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재어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에르네스띤느는 얄밉게도 발끝으로 서서 키를 높인다. 그런데 홍당무 쪽은 누구의 비위도 거스르고 싶지 않아 살짝 몸을 굽힌다. 누나와 자기의 키 차이를 조금이라도 더 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13 홍당무는 하녀 아가뜨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마님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내 욕을 하면 돼."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이를테면 르삑 부인은 여자가 홍당무를 건드리는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한다. 이웃의 어떤 여자가 서슴없이 홍당무를 혼내 주는 일이 있다. 르삑 부인은 달려가서 화를 내며 아들을 구해 준다. 아들은 감격스러워 밝은 얼굴이 되지만 "자, 이번에는 내가 너를 혼내 줄 차례다." 르삑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14 "어리광을 부린다는 건 어떤 것이지?" 홍당무는 삐에르에게 묻는다. 삐에르는 엄마의 귀염둥이다. 그러면 삐에르는 큰소리로 "나는 오직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감자튀김을 접시에서 손가락으로 듬뿍 집어 먹어 보고 싶어. 그리고 복숭아를 절반쯤 씨가 붙어 있는 그대로 먹어 봤으면 좋겠어." 그는 속으로 생각해 본다. (만일 엄마가 깨물어 먹고 싶도록 나를 귀여워 한다면, 틀림없이 불쑥 나온 이 코부터 먹기 시작하겠지.) 15 가끔 누나 에르네스띤느와 형 훼릭스는 놀다가 싫증이 나면, 자기 장난감을 선선히 홍당무에게 빌려 준다. 이래서 누나와 형의 행복을 살짝 맛보게 된 홍당무는 조심스럽게 행복을 꾸며 본다. 그러나 홍당무는 장난이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을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장난감을 되돌려 달라는 말이 나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16 홍당무: 그럼, 내 귀가 너무 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지? 마틸드: 좀 이상한 것 같긴 해. 이리로 좀 와 봐. 그 귀에 모래를 넣어서 "파이"를 만들고 싶어. 홍당무: 엄마가 먼저 귀를 당겨서 뜨겁게 열을 내놓으면 반죽한 파이도 잘 익을 거야. 17 "잔소린 집어치워! 한 번만 더 말해 봐라. 그럼, 너는 나보다 아빠가 더 좋단 말이지?" 르삑 부인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곧 그만두겠어요. 이젠 아무 말도 안하겠어요. 맹세하지만 어느 쪽이 어느 쪽보다 더 좋다는 생각은 절대로 없어요." 마음 싶은 곳에서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로 홍당무는 대답한다. 18 르삑 부인: 홍당무야, 뭘 하고 있니? 홍당무: 몰라요, 엄마. 르삑 부인: 그럼, 또 보나마나 바보짓을 하고 있었구나. 일부러 또 그런 짓을 하는 거지? 홍당무: 전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예요. 19 엄마가 자기를 보고 웃고 있다고 생각한 홍당무는 흐뭇해서 자기도 미소짓는다. 그런데 르삑 부인은 막연하게 혼자서 빙글빙글 웃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 얼굴간 그 얼굴이 검은 구즈베리나무의 열매 같은 어두운 눈을 한 음흉한 얼굴로 바뀐다. 홍당무는 어리둥절해져서 쥐구멍을 찾는다. 20 "홍당무야,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웃을 수는 없니? 그리고 울 때는 왜 우는지 까닭을 알아야 해." 르삑 부인이 말한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이 아이는 뺨을 아무리 때려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으니 말이야." 21 르삑 부인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어딘가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거나 길바닥에 똥이 떨어져 있으면, 그 아이는 꼭 그런 것을 묻혀 온다니까. 아무튼 고집쟁이여서, 머리 속에 뭔가 생각하기만 하면 끝내 풀 줄을 모른단 말이야. 자존심이 꽤 강해서,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자살이라도 할 거예요." 22 사실 홍당무는 양동이에 찬물을 가득 부어 넣고 자살하려고 한다. 양동이 속에 코와 입을 용감하게 담근 채 가만히 있는다. 바로 그때 귓바퀴를 후려 갈기는 손이 있어 양동이가 구두 위에 뒤집혔다. 하지만 그 덕분에 홍당무는 목숨을 건진다. 23 이따금씩 르삑 부인은 홍당무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걘 나를 닮아서, 악의라곤 통 없어요. 심술궂다기보다는 바보스럽지요. 아주 느림보라서 눈에 띌 만한 짓은 못해요." 또 어떤 때는 이렇게 생각하며 기뻐하기도 한다. 만일 그 아이가 별일 없이 잘 자라기만 하면 끝내는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24 "만일 어쩌다가" 홍당무는 공상에 잠긴다. "훼릭스 형이 선물 받은 것과 같은 목마를 나도 받게 된다면, 나는 그 목마를 타고 도망쳐 버릴 거야." 25 밖에 나가면 홍당무는 휘파람을 분다.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마음이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르삑 부인의 모습을 보자 휘파람을 딱 그친다. 너무도 애처로운 이야기이다. 마치 어머니가 홍당무의 입안에 있는 싸구려 피리를 부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어머니가 별안간 나타나면 나오려던 딸꾹질이 딱 멎어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26 홍당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락병 구실을 한다. 르삑 씨가 이렇게 말한다. "홍당무야, 이 단추가 하나 떨어졌구나^5,5,5^." 홍당무는 셔츠를 르삑 부인한테 가지고 간다. 그러면 부인은 "이상한 아이로구나, 네 명령은 안 듣겠다." 그러면서도 받짇고리를 꺼내어 단추를 단다. 27 "만일 아빠가 살아 있지 않다면." 큰소리로 르삑 부인이 말한다. "아득한 옛날에 너한테 혼이 났을 게다. 너는 이 칼로 내 심장을 찔렀을 테고, 나는 틀림없이 거리를 헤맸을 거야!" 28 "코를 푸는구나!" 쉬지 않고 르삑 부인이 말한다. 홍당무는 줄곧 손수건 가장자리로 코를 푼다. 그러나 자칫 잘못 풀고는 콧물이 보이지 않게 다시 접는다. 감기에 걸리면 르삑 부인은 언제나 홍당무의 얼굴에 친절하게 초를 발라 준다. 너무 많이 바르기 때문에 에르네스띤느와 훼릭스가 샘을 낸다. 그러나 이 아이를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덧붙인다. "이건 너 같은 아이에게는 잘 듣는 약이다. 아무튼 감기도 고치고, 너의 나쁜 머리도 산뜻하게 해주니까." 29 오늘 아침부터 르삑 씨가 너무 놀려 대는 바람에, 홍당무의 입에서 이런 심한 말이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개망나니 같으니라구!" 이렇게 말한 순간 둘레의 공기가 험악해져 양쪽 눈에 불덩어리가 타오르는 것 같다. 입 안으로 머뭇거리며, 위험하다 싶으면 땅속에라도 파고들 준비를 한다. 그러나 르삑 씨는 그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빤히 쳐다볼 뿐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30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곧 결혼한다. 그래서 르삑 부인으로부터 약혼자와 산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렸다. 다만 홍당무의 감시 아래이다. "먼저 가거라, 힘차게 뛰어서 말이야!" 에르네스띤느가 말한다. 홍당무는 앞장서서 걸어간다. 뛰다가 달리다가 개처럼 빨리 달음박질쳐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칫 발걸음을 늦추게 되면, 들을 생각이 없는 데도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남의 눈을 피하는 키스 소리, 그는 헛기침을 한다. 신경일 날카로워진다. 마을의 십자가 상 앞에서 모자를 벗었다가 그 순간 모자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발로 지근지근 밟아 대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아무다 나 같은 건 사랑해 주지 않을 거야. 나 같은 건 말이야!" 그 순간 귀가 밝은 르삑 부인이 담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다. 입가에 무서운 웃음을 띤 오싹해지는 얼굴로^5,5,5^. 홍당무는 어리둥절해져서 이렇게 한마디 덧붙여 말한다. "엄마만은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