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2 사랑의 제단 편 동인도 문학의 진수 쁘라무디아 아난따또르 지음 정성호 역 - 차 례 - 제10장 동인도인들 제11장 사랑의 굴레 제12장 청춘 , 악령 제13장 무서운 과거 제14장 영혼과 철판 제15장 미행자 제16장 소문의 덫 제17장 졸업식과 결혼식 제18장 승자 , 패자 제19장 긴 이별 제10장 동인도인 들 오전 9시, 나는 두통 때문에 잠을 깼다. 눈의 위쪽을 무언가가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파라키아 씨앗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부를 뚫고 들어가 내 머릿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 위해 뇌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과 좋은 진통제가 만들어졌다고 요란스럽게 보도하던 신문 기사를 생각해냈다. 그 약은 독일인이 발명한 것으로 '아스피린'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약은 신문에만 등장했을 뿐 동인도에서는 아직 판매되고 있지 않았다. 최소한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아, 동인도, 다만 유럽의 제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라여 ! 데린하 부인이 열이 내리도록 몇번 양파와 식초로 내 이마에 찜질을 해 주었다. 방 안에는 온통 식초 냄새가 가득 찼다. "혹시 나에게 온 편지가 없읍니까?" "어머, 처음으로 도련님이 편지 얘기를 다 꺼내는군요. 지금까지는, 읽는 것조차 싫어하더니 정말 많이 변했군요. 아마 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조금 전까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도련님은 아직 주무시고 있다고 했죠.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지금쯤은 돌아왔을 거예요. 내가 그 사람에게 밍케 도련님은 지금 우노크로모에 있을 거라고 말했더니 못들은 척하고 잠깐 이웃에 다녀오겠다고 하며 쟝 마레씨 댁으로 간 것 같아요." 하숙집은 조용했다. 다른 하숙생들은 학교에 가고 없었다. 마음씨 좋은 하숙집 여주인은 식탁을 끌어다가 침대 옆에 붙이고, 그 위에 코코아와 게이크를 놓아 주었다. 케이크라는 것은 쌀가루와 흑설탕을 반죽해서 기름에 튀긴 것이었다. "도련님, 오늘은 무엇을 드시고 싶으세요?" "돈은 있으세요? " "없으면 도련님에게 청구하면 되니까요, 안그래요?" "요즈음 나에 관해서 뭐 알아볼 것이 있다고 경관이 찾아온 적이 없나요? " "네, 있어요. 하지만 경관은 아닙니다. 도련님과 비숫한 나이의 젊은이였어요. 도련님의 친구 같아서 사정 얘기를 다 해 주었답니다." "혼혈? 유럽인 ? 아니면 쁘리부미던가요." "쁘리부미였어요." 나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역시 그때 그 경찰관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련님, 오늘은 무엇을 잡수시고 싶은가요?" "마카로니 수프." "알겠읍니다. 마카로니 수프를 드시고 싶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한 봉지에 얼마나 하는지 아세요? 5센트나 한다니까......." "두 봉지면 충분합니다." 테런하 부인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나에게서 15센트를 받아들고 황급히 그녀이 왕국인 주방으로 사라졌다. 조용한 아침이었다. 이따금 마차의 방울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각양 각색의 얼굴과 모습을 한 살인청부업자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마푸다 빼테루스, 내가 좋아하는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까지 비수를 빼들고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것은 모두가 다르삼의 얘기에 너무 겁을 집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에 불과하다. 그 진위도 근거도 뚜렷하지 않은 일에 나는 왜 이토록 겁을 집어먹는 것일까? 학문을 배운 내가? 그 얘기가 비록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밍케여, 만일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너는 두 번씩이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너는 벌써 극도의 공포에 빠져 있다. 이것이 첫번째 피해다. 두번째 피해는 아무리 두려워한다 해도 너는 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되는 것은 한번이면 충분하다. 밍케, 어느 것이든 하나로 족하다. 자, 일어나라. 무엇 때문에 두 개의 피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가? 지성인 이라고 자처하면서 너는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무의식 중에 나자신을 비웃었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빠져나가 어떻게든 걸어서 욕실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주위의 물건들이 이리저리 흔들거려서 나는 의자 등받이를 움켜 잡았다.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방을 나갔다. 욕실에 가는 것은 그만두고 거실에 앉아 신문을 읽으려고 했다. 두통은 차츰 가라앉았으나, 양파와 식초 냄새가 지독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참으로 호사스러운 몸이군' 하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나는 욕실로 가서 참견하기 좋아하는 테린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욕을 했다. 자식 복이 없는 그 부인은 얼마만큼 나를 귀여워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유럽인보다 쁘리부미에 가까운 혼혈이었는데, 옛날의 미모는 간 곳이 없고, 지금은 통나무처럼 살이 쪄 있었다. 테린하 부인의 네덜란드어는 형편 없이 서툴렀으나,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상 용어이고, 가족 사이에서 쓰는 언어였다. 그녀는 단 한번도 학교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읽고 쓰기를 못했다. 자식이 없는 그녀가 양자로 삼은 것은 한 마리의 들개 수놈뿐이었다. 그 개는 시장에서 생선을 훔쳐오는 것이 특기로서, 하루에 두세 번씩 훔쳐와서는 양모에게 건네주며 구어 달래서 먹었다. 그리고 그것을 먹어치운 다음에는 문 한가운데서 낮잠을 자고 다시 잔이 깨서는 도둑질을 하러 나갔다. 이 개는 낯선 사람이 찾아와도 결코 짖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방이 먼저 짖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눈을 껌벅이면서 손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빗은 다음 나는 쟝 마레를 찾아갔다. 그의 딸 메이의 어머니가 싸우고 있는 문제의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었다. 쟝 마레는 그 그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최고 걸작으로 만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메이가 내 무릎에 앉아 어리광을 부렸다. 지난 며칠 동안 내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그녀는 서운해했다. 대개 나는 캔디를 사다 주곤 했는데, 그때 내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산책 안갈래요, 아저씨 ? " "아저씨는 오늘 몸이 좋지 않단다." "얼굴색이 좋지 않군, 밍케." 쟝 마레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나는 몰랐어요." 메이가 역시 프랑스어로 말하며 무릎에서 내려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아저씨 얼굴이 창백해요." "수면 부족이에요." "우노크로모와 관계가 생긴 뒤로 자네는 자주 여러 가지 일에 말려드는 것 같은데, 밍케." "요즈음은 새로운 주문도 맡아 오지 못하고 말일세. " "요즈음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되면 그런 말씀은 하지못할 겁니다. 정말이에요." "또 뭔가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군." 그는 책망하는 말투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눈에 차분함이 없어." "눈을 보면 상대방의 마음속을 다 알 수 있나요?" "메이, 아빠 담배 좀 사다 주겠니?" 메이는 밖으로 나갔다. "자, 밍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 얘기해 보게나." 나는 수상하고 뚱뚱한 사나이에 관해서 얘기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것, 가는 곳 마다 나를 노리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칼로 찌를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바로 내가 예상한대로군. 그것은 남의 첩 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져야 할 당연한 위험 부담일세. 자네는 이전에는 현지처의 인간적인 가치와 도덕 수준을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었어. 그때 내가 뭐라고 했나? 자신이 확실히 모르는 일에 대해서 남이 하는내로 허단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거야. 그리고 두세 번 그곳에 찾아가서 지식인으로서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라고 조언했었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네는 그곳에 갔었지만, 단지 간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눌러 앉았거든." "맞아요." "자네가 그곳에 눌려 앉은 것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가 현실과 일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네. 오히려 자네는 그러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증명해 보이는 꼴이 되었거든. 즉 비열하고 치욕스러운 도덕 수준에 말려들어간 셈이 되었지. 그리고 이윽고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는 협박을 받게 되었구. 틀림없이 가장 가깝게 있는 사람, 자네에게서 피해를 입은 사람일 거야. 지금 자네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느끼고 있네. 그러나 자네는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죄의식에 쫓기고 있는 거야." "그래서요?" "내 말이 틀렸나?" "맞을지도 몰라요." "왜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나?" "그것은, 즉 내가 그 치욕스러운 행위라는 것을 확실히 저질렀다고 가정했을 경우에는 맞는다는 얘기죠." "그럼, 저지르지 않았단 말인가?"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그 말을 듣고 나는 안심했네, 밍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해 보았는데, 냐이는 그런 여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녀에게는 교양이 있어요. 아마 내 인생에서 만난 최초의 지적인 뿌리부미 여성이라고 믿습니다. 경탄할만한 여성이었어요. 언젠가는 당신에게도 소개해 드리지요. 메이도 데리고 갈 겁니다. 그애도 그곳이 마음에 들 거예요, 틀림없이." "그런데 치욕스러운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자네의 공포심은 어디서 오는거지 ? 자네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야. 자신의 양심에 솔직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자네도 쁘리부미 지식인 제1호 가운데 한 사람일세. 자네는 올바른 행실을 보여야 하네. 그렇지 못하다면, 자네 뒤를 잇는 쁘리부미 지식인에개서는 자네보다 더 부패한 인간들이 태어날 테니까 말일세." "너무 그러지 마새요, 쟝, 그런 쓸데없는 설교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정말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다구요." "그건 자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거야." 메이가 옥수수잎 담배를 한 다발 갖고 왔다. 쟝은 즉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당신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요." 그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그 프랑스인은 조금도 내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그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근거 없는 추측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만나자마자 나를 힐책했는데, 쟝 마레도 나의 결백을 믿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러쿵 저러쿵 말은 하면서도 그도 결국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갖고 나를 심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와 얘기를 계속해도 소용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메이의 손을 끌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둘이서 베란다의 긴의자에 앉았다. "왜 학교에 가지 않지, 메이 ?" "파파가 그림을 그리는 옆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래 ? 옆에서 메이는 무엇을 하지 ? " "파파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있어요. 잠자코 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때 파파는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니 ? " "물론 얘기를 해요. 이 참나무 숲속은 항상 바람이 불고 있으니까 시원하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 군인에게 짓밟히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불쌍해요, 아저씨." 바로 그 발에 밟히고 있는 것이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메이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메이, 노래를 해 봐라." 소녀는 그녀가 즐겨 부르는 곡을 스스럼없이 불렸다. "프랑스 노래지, 메이 ? 네덜란드 노래는 아저씨가 모두 알고 있거든. " "프랑스 노래 ?" 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귀여운 북치는 소년'을 불렀다. "어머, 아저씨는 듣고 있지도 않으면서. " 그때 나의 눈은 도로 건너편 르쟈크(설탕을 친 과일 샐러드)장수 옆의 타마린드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뚱뚱한 사나이에게 못박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차양이 었는 패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구두는 물론 샌들도 신지 않고 옷은 캬라코의 웃옷에 검은색 헐렁한 바지, 주머니가 많이 달린 넓은 가죽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웃옷은 단추를 채우지 않고 있었다. 특징 있는 체격, 피부, 그리고 찢겨져 올라간 가느다란 눈은 나를 속일 수 없었다. 틀림없이 저 녀석이 나의 목순을 노리는 살인청부업자일 거야. 저 뚱뚱보 ! 다르삼을 이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로베르트는 저 녀석을 하수인으로 고용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따금 르쟈크를 먹으면서 사나이는 우리 두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 파파를 불러 오너라." 소녀는 뛰어갔다. 얼마 뒤 키가 큰 깡마른 몸집을 지팡이에 의지한 쟝 마레가 절룩거리면서 나타나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역시 내 착각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쟝. 저 사나이가 바로 그 녀석이라고요. 저 놈이 B시에서부터 나를 미행해 왔어요. 옷차림은 그때와 다르지만." "모두가 자네의 환상에 지나지 않아. " 쟝은 나를 타일렀다. 마침 그때 테린하가 어디선지 모습을 나타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는 한쪽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에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길이가 1미터쯤 되는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쟝, 밍케 ? 웬일인가? 아침부터 둘이 이런 곳에 앉아서 말일세." 테린하가 말레이어로 말을 걸어왔다. "사실은......" 쟝 마래가 나의 공포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의심하고 있는 문제의 뚱뚱보 사나이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테린하는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았다. 바구니 속에는 아직 푸른 구돈돈 열매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 손에 쇠파이프를 든 채 테린하는 험악한 눈길을 도로 건너편으로 보냈다. "좀더 가까이 가서 보아야겠군. 자, 밍케, 함께 가보세. 그를 알고 있는 것은 자네니까." 나는 테린하의 뒤를 따라갔다. 쟝 마레가 절룩거리며 뒤따랐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그때의 뚱뚱보라는 것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지금도 틀림없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사나이는 못본 체하고 있었다. 힐끗힐끗 옆눈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여전히 르쟈크의 맛을 즐기는데만 열중하고 있는 체하고 있었다. 사나이의 변장이 나의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역시 그녀석이 틀림없어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테린하는 쇠파이프를 손에 잡은 채 위협하듯이 사나이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쟝은 절룩거리면서 아직도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테린하가 자바어로 대들었다. "이봐 !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는 거야?" 사나이는 못들은 체하고 계속 먹고만 있었다. "이녀석이 시치미를 떼고 있어 ?" 전 네덜란드 식민지군 병사, 지금은 제대해서 연금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테린하는 이번에는 말레이어로 협박했다. 그리고는 르쟈크 그릇을 빼앗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뚱뚱보는 혼혈아를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천천히 일어나서 양념으로 더렵혀진 손을 타마린드 나무에 문지르고는 입속에 남아 있던 르쟈크를 삼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르쟈크 장수의 양동이에 손을 씻고 나서야 겨우 침착하게 자바어로 말했다. "나는 어떤 것도, 또한 어떤 사람도 감시 따위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사나이는 나를 힐끗 보고 미소지었다. 저런 간덩이가 큰 녀석 보겠나 ! 저녀석은 나를 보고 웃었어, 이 살인자 ! 웃기까지 하다니 이럴수가 ! "빨리 여기서 꺼져 버려 ! " 테린하가 소리쳤다. 르쟈크 장수인 노파는 싸움이 날까봐 이미 도망쳤다. 멀리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유럽인 혼혈을 상대하는 용감한 원주민에게 흥미를 느낀 것이 틀림없다. "나는 매일처럼 이곳에서 르쟈크를 사 먹고 있읍니다, 아저씨." "너 같은 녀석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꺼져 ! 아니면......" 뚱뚱보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계속 경계하는 빛을 보이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르쟈크를 먹는 것을 금지당한 적은 없읍니다, 선생." "내게 말대꾸를 하는 거냐? 내가 식민지군의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하는 말이냐? " 사나이는 완력에 자신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 식민지군 병사를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마도 검술이나 권법을 익히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곳에서 먹어서는 안된다고 경찰이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런 금지표시도 없지 않습니까? 내가 편안하게 앉아서 르쟈크를 먹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아직 대금도 지불하지 않았으니까요."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앉으려고 했다. 사나이의 말을 듣고 나는 불안해졌다. 분명히 그는 법률이나 조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린하는 좀더 신중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힘을 행사하는 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테린하가 주먹을 휘두르며 사나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사나이는 날쌔게 피했다. 그러나 반격해 오지는 않았다. "그만 됐어요, 그만 ! " 쟝이 말리러 들었다. "그만두시지요, 선생." 사나이는 부탁했다. 테린하는 자신의 명령에 반항하고 말대꾸를 하는 버릇 없는 인간에게 격분했다. 문제의 발단 따위는 이미 그의 안중에 없었다. 혼혈 퇴역 군인으로서의 위신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는 오른 손을 들어 뚱뚱보의 머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사나이는 침착하게 주먹을 피했다. 표적을 잃은 테린하는 자기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때 사나이는 충분히 상대방의 옆구리에 한 방 먹일 수가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이리저리 피할수록 테린하는 점점 더 격분해서 집요하개 덤벼들었다. 뚱뚱보는 후퇴를 되풀이하더니 이윽고 도망치고 말았다. 테린하는 추적했으나 그 사나이는 쓰레기 하치장으로 쓰는 좁은 골목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쟝 마레가 내뱉듯이 말했다. "미치광이 테린하 ! 아직도 군대에 있는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니까. " 퇴역 군인은 추격을 단념하지 않고 사나이가 사라진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런 짓을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 자, 돌아가세. 자네가 모든 일의 장본인이야." 쟝 마레는 나를 책망했다. 내가 부축하려는 것을 그는 거절했다. 그때 메이와 테린하부인이 황급히 뛰어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쟝도 나도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앉아서 신경질적인 퇴역 군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10분 뒤 테린하가 돌아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식식거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아내가 그를 보자마자 몰아세웠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죠? 당신은 상이 군인이라는 것을 잊었나요? 싸움 따위를 하고 다니고. 아직 당신이 젊다고 생각하세요? " 그녀는 남편에게 다가가서 쇠파이프를 빼앗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린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 사이에는 마치 암암리에 양해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참극이 빚어지지 않은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또 다르삼의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고도 생각했다. 자칫 잘못 했으면 상해 사건의 장본인이 될 뻔했던 것이다. "도련님은 아직 병이 낫지 않았잖아요." 집 안에서 테린하 부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 곳에 앉아서 바람을 쐬면 안돼요, 들어와서 쉬세요. 곧 식사 준비가 끝나니까요. " "메이, 너는 집에 돌아가 있거라." 쟝의 말을 듣고 메이는 돌아갔다. 우리들 세 사람은 테린하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잠자코 앉아있었다. "조금 전의 얘기는 잊어 주세요." 만일 경찰 문제가 되어 골치아픈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나는 불명예스러운 사건의 장본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쟝, 또 두통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실례하겠어요, 태린하씨, 쟝....." 방으로 돌아오자 나는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뚱뚱보는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그는 로메르트의 앞잡이다. 다르삼의 얘기를 황당무계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밍케, 조심해라 ! 한낮인데도 나는 문 안쪽에서 쇠를 잠갔다. 창에도 그리고 마루를 청소하는 걸레 자루로 사용하고 있던 튼튼한 막대기를 방구석에 세워 두고 언제나 손에 참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아직 초보자에 지나지 않지만, 일찌기 T시에 있을 때 호신술을 배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교육을 받은 인간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누군가가 내 생명을 노리고 있지만, 그것을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다. 냐이와 안네리스, 얼마 전에 부빠티로 임명된 아버지, 그리고 특히 어머니를 사건에 끌어들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그러나 충분한 경계심을 갖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흘이 지났는데도 두통은 낫지 않았다. 수면 부족에 빠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매일 아침 변함없이 우노크로모로부터 우유가 배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르삼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학교를 결석한 것 같았다. 의사는 3주일 동안의 요양을 필요로 한다는 내용의 진단서를 끊어 주었다. 머릿속의 파라키아 열매는 유일하고 정당한 소유자인 내 허가도 없이 한 그루의 나무로 성장해 있었다. 파라키아의 나무여, 확실히 네가 경고하는대로 나는 냐이와 안네리스의 일을 잊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는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관계를 계속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얻는 것은 충돌 뿐이다. 그 기묘하고 불안스러운 가족을 모른다고 해서 내 인생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문둥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예전처럼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문사에 보낼 원고도 써야 한다. 무슨 일이 있든 나는 아직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 학우들과 마음을 터놓고 사귀지 않으면 안된다. 무한히 펼쳐지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자.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와 인간의 대지로부터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한다. 다음 달 말쯤에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토론회를 열어서, 인간의 대지에 대해 가능한 한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해보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병을 앓고 있다니. 휴가는 아무런 보람도 없이 지나갔다. 긴장으로 가득 찬 시간속에서 이따금 나는 나와 같은 젊은 나이에 이렇게 심한 긴장속에서 괴로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아직 그럴 필요는 없다고 자문자답했다. 언젠가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무르다투리와 그의 친구인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르다 판 에이싱하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동인도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한 강인한 신념과 싸움 때문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개성 때문에 늘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았다. 모든 유럽인들의 원주민에 대한 억압에 항거해 그들은 동시에 일어섰다.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동인도 사람들을 위해, 찾아와주는 친구도 없는, 구원의 손길도 없는 고립무원한 속에서....... 밍케, 로르다 판 에이싱하가 '센토트'라는 가명을 사용해서 쓴 시 '자바에서의 네덜란드 최후의 날'을 꼭 잃어 보아라. 그 단어 하나하나에는 세상을 깨우치려는 한 인간의 의지가 담겨져 있으니까. 무르타투리와 판 에이싱하는 숭고한 사명감 때문에 주위로부터 늘 준엄한 긴장과 압력을 받았다. 그것에 비해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긴장은 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의 무분별한 행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안네리스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내 가슴은 아무리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 그리고 냐이......그렇게 매력적이고 뛰어난 개성과 마력을 지닌 여왕을 단념하라고? 그래,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이고 미워하게 되면 보조개도 곰보 자국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와 같은 거야.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나는 이해를 해 갔다. 즉 이 긴장의 원인은 모두 환희의 세계, 꿈이 형실로 이루어지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통행세 지불을 내가 꺼리고 있는 데 있는 것이다. 무르타투리와 판 에이싱하는 통행세를 지불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내가 쓰는 작품에 어떠한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다만 모든 것을 나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야심을 불태우고 있을 뿐이 아닌가 !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 역시 나는 안네리스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안녕, 아름다운 여신이여 ! 행복한 꿈, 두 번 다시 꿀 수 없는 달콤한 꿈인 채로 헤어지자. 한 여인의 미모나 현지처의 매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할 것이다. 무의미하게 죽어서는 안된다. 나의 생명, 나의 육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하고 또한 최고의 재산이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자 두통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나은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느닷 없이 나타나서 감쪽같이 사라져가기도 하는..... 머릿 속의 파라키아 나무는 뿌리와 가지를 더이상 뻗지 못하고 이윽고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 것을 계기로 메말라 죽어갔다. 그것은 조그맣고 섬세한 글씨로 가지런히 씌어진 미리암 드라크로아로부터의 편지였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친구에게 틀림없이 무사하게 슬라바야에 도착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당신으로부터의 편지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오지 않더군요. 마침내 내가 졌읍니다. 놀라지 마세요. 당신에 대한 파파의 관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느냐고 벌써 두 번이나 물었읍니다. 파파는 당신의 변화에 대해서 몹시 궁금해 하고 있읍니다. 당신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당신은 평범한 자바인이 아닌 개척자이며 혁신자라고 파파는 말하고 있읍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읍니다. 뿐만 아니라, 파파의 의견을 당신에게 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파파는 언젠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미리암, 사라, 밍케의 모습이 지금부터 자바인들이 보여 줄 바로 그 모습이다. 우리들의 문명을 정확하게 흡수하여 더 이상 햇볕에 오무라든 지렁이처럼 위축되지 않을 새로운 자바의 얼굴이란다." 파파가 이번 거친 비유를 쓴 것을 용서해 주세요. 밍케, 파파는 모욕할 의도는 없는 것입니다. 화내지 마세요. 파파나 우리들 두 사람도 쁘리부미에 대한 악의는 없읍니다. 더구나 당신에게 그런 감정은 털끝만큼도 없읍니다. 파파는 지금과 같은 몰락한 자바인의 모습에 몹시 동정하고 있읍니다. 이것도 먼저 번과 같이 난폭한 비유를 쓰고 있지만, 제발 이해해 주세요..... "이 지렁이 같은 민족이 필요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희들은 아느냐? 그것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지도자란다." 밍케, 내 얘기를 이해하겠어요? 제발 내 참 뜻을 이해하기전에 화부터 내지는 마세요. 모든 유럽인이 당신네 민족의 몰락에 협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파파는 부이사관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분명히 파파는 나와 사라 언니가 그런것처럼, 가령 아무리 원조의 손길을 뻗쳐 주려고 열망하더라도 당신네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껏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일뿐입니다. 당신은 무르타투리를 좋아했지요? 급진파가 찬양해 마지않는 그 작가는 물론 당신네 민족을 위해 큰 공헌을 했읍니다. 그렇습니다. 무르타투리, 그리고 바른 판 호에펠(바다비아의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목사),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마 당신의 선생님도 그에 내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잊었겠지만, 로르다 판 에이싱하. 그렇지만, 이 세 사람은 당신네 민족을 향해 호소한 적은 없읍니다. 그들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자기 나라 국민, 즉 네덜란드인이었옵니다. 그들은 당신네 민족을 정당하게 대우하도록 유럽에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입니다. 밍케, 그들이 당신네 민족을 위해 한 것은, 파파의 말을 빌리면 이 19세기가 끝나려고 하는 오늘날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쁘리부미 스스로가 자신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날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노력에 대해서 논의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박사는 우리 가족의 사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읍니다. 그때 당신이 비웃은 '에소시에이션 이론'을 우리들은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왜 파파가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당신도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실제로 파파도 우리들도 당신과 같은 자바인을 만난 적이 없읍니다. 파파에 의하면, 당신의 태도는 완전히 유럽적인 것으로서 당신이 태어난 이 땅에 유럽인이 발을 들여놓은 이래 줄곧 계속되어온 패배시대의 산물인 자바인의 노예근성과는 달랐읍니다. 이 넓은 관저에서의 쓸쓸한 저녁, 우리들의 큰 즐거움은 피로하지 않을 때 파파가 들려 주는 당신네 민족의 운명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것입니다. 당신네 민족은 유럽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괴로운 싸움 속에서 몇백 몇천 명이라는 지도자와 영웅을 낳았읍니다. 그들 지도자나 영웅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쓰러지고 패배하고 전사하고 항복하고 발광하고 굴욕 속에서 잊혀져 갔읍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싸움에서 승리한사람은 없읍니다. 우리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하고, 동시에 당신네들의 지도자들이 그 성격적, 정신적인 약점을 폭로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동인도 회사에 영지 등을 분양받아가는 데에 분개도 했읍니다. 당신네들의 영웅들은 파파의 얘기로는 그러한 매국적 반역이라는 배경 속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옵니다. 그들은 몇 세기에 걸쳐 차례차례로 나타나서는 싸웠고, 그리고 그것이 모두 과거의 투쟁을 되풀이하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파파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영광이라는 단순한 추상적 관념을 위해서 육체도 정신도, 그리고 물질적 부도 팽개쳐 버린 민족인 것입니다. 파파가 말하는 것은 그들은 패배하도록 운명지워져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자기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층 더 애처로운 것입니다. 이 위대하고용감한 민족은 끊임없이 수면에서 머리를 내밀려고 하다가는 그때마다 유럽인으로부터 머리를 다시 물 속으로 처박혔읍니다. 원주민이 목을 공중으로 들어 위대한 알라의 세계를 쳐다보는 것을 유럽인은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투라는 말을 잊어버릴 때까지 고투를 계속하고 패배라는 단어를 잊어 버릴 때까지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읍니다. 파파에 의하면,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과학과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것 없이 인간은 개인은 물론이고 국민으로서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과 지식을 익힌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몰락과 죽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파는 '에소시에이션 이론'에 동의하고 있읍니다. 그것만이 쁘리부미에게 있어서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파파는 당신이 가까운 장래에 유럽인과 대등한 입장에 서서 이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가기를 바라고 있읍니다. 그 기대는 우리들 자매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읍니다. 당신은 이미 그 문턱에 서 있읍니다.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당신은 틀림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자매는 아버지를 대단히 사랑하고 있옵니다. 그 분은 단순한 한 사람의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동시에 우리들이 세상를 보고 이해해 가는 데 올바른 지침을 제시해 주는 교사이고,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원숙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부하들의 처지는 아랑곳 않고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그런 부류의 행정관도 아닙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우리들을 방문한 날, 당신이 돌아간 뒤에 파파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려 드리겠어요. 돌아갈 때 당신은 분개하고 있었지요? 우리들은 알고 있었읍니다. 그때 당신은 아직 우리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그날 파파가 당신을 두고 즉시 자리를 뜬 것은, 당신이 우리들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업게도 당신은 몹시 긴장해서 굳어 있었읍니다. 당신이 돌아간 뒤에 곧 파파는 당신에 대한 우리들의 의견을 물었읍니다. 사라 언니가 끝내 밍케가 화를 냈다고 얘기하고,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와 그의 '에소시에이션 이론'은 3백 년이나 뒤떨어져 있다고 한 당신의 말을 그대로 전했읍니다. 그러자 파파는 깜짝 놀라서 내게 좀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읍니다. 그뒤 파파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밍케는 자바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갖고 있구나. 그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민족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밍케는 보통 자바인과는 전혀 다르다. 자바인은 동포들 속에서는 자신들이 세계에서 비할 바 없이 훌륭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유럽인 앞에 나가면 상대가 한 사람밖에 없어도 갑자기 위축되어 얼굴을 들 용기조차 잃어버리거든. " 밍케, 당신에 대한 파파의 찬사에 나도 동감입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 그때 와양 오랑의 작은 방에서 가무란 소리가 들려 왔옵니다. 파파는 2년 전부터 가무란에 관심을 갖고 당신네 민족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도록 우리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읍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가무란을 듣는 법을 공부해 왔다. 이제는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게다. 잘 들어 보아라. 가무란의 선율은 모두 징소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따르고 있다. 저것이 자바 음악의 기본이다. 그린데 자바인의 현실적인 생활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이 애처로운 백성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 징을, 즉 자신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와 사상가를 지금까지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부탁이에요, 밍케, 제발 아버지의 이 말을 이해해 주세요. 그런 애기는 나의 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한테서는 들을 수가 없읍니다. 저 위대한 학자인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에게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아버지를 가진 것을 우리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유럽 음악보다는 가무란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아버지는 확신하고 있음니다. 왜냐 하면, 당신은 우아한 가무란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라났을 테니까요. 밍케, 가무란의 선율 속에 등장하는 징소리 말고 도대체 자바의 현실 생활 어디에 징이 존재할까요? 당신이 장차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위대한 징으로? 당신이 그렇개 되기를 기도해야 될까요? 그리고 다서 파파는 저 가무란 소리를 잘 들어 보라고 하며 다시 한번 말했읍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가무란의 연주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바인의 현실 생활에 있어서의 징은 지금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가무란은 대개 구세주의 도래를 대망하는 민족의 감정을 노래한 것이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앉아서 기다리고 바라기만하는 것으로서, 구세주를 자기 힘으로 찾거나 탄생시킨다는 얘기는 아니다. 즉 가무란은 자바인의 정신 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추구하는 것을 기피하고, 기도나 주문과 같이 단순한 요행만을 바라면서 사고를 점점 잃어가고 힘이 없는 나약한 미로의 세계에 사람을 끌어들인다. 가무란은 그런 그들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란다." 밍케,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유럽인의 견해입니다. 자바인에게는 그런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파파는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읍니다. "20년 뒤에도 그런 가무란의 선율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 민족이 아직도 자신들의 구세주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아, 밍케, 이 불쌍한 당신네 민족은 20년 뒤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언젠가 우리들은 네덜란드로 돌아갑니다. 나는 정계에서 활동할 생각입니다. 다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아직 여성이 하원의원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읍니다. 언젠가 그런 제도가 바뀌어 내가 영광스러운 하원의원이 되었을 때, 나는 국회에 나가 당신네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바에 돌아오게 되면, 나는 제일 먼저 당신들의 가무란을, 더할수 없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읊어대는 가무단을 다시 한번 들을 생각입니다, 그때 만일 여전히 똑같은 선율이라면..... 스스로의 노력을 포기하고 기다릴 뿐이라는 주제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곧 구세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일 테지요. 또 그것은 당신이 아직도 징이 되어 등장하지 않았다는, 즉 자바인은 아무도 징이 될 사람이 없고, 결국 당신네 민족은 끝없이 쏟아지는 선률의 홍수와 악순환 속에 언제까지나 가라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만일 가무란의 선율에 변화가 있다면, 나는 당신을 찾아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할 생각입니다. 20년 ! 그것은 경주마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변화해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도 충분히 길고 또한 한 인간의 생애로 보아도 넉넉한 시간입니다. 밍케, 이것이 당신이 나한테 받는 최초의 편지입니다. 당신의 성공을 비는 성실한 친구 미리암 드라크로아 올림 편지를 접을 때, 나는 내 눈물이 여기저기에 번져 푸른 얼룩을 만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단 두번 밖에 만난 적이 없는 처녀의 편지를 읽고 나는 왜 울어야만 했을까? 육친도 천척도 아니고 동포도 아닌 데 말이다. 그녀는 나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미리암은 그녀의 동포가 아니라 내 동포 내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나에게 바라고 있다. 과연 새로운 무르타투리, 새로운 판 에이싱하가 태어날 것인가? 나는 이미 "슬라바야 일보"의 편집국장 마르틴 네이만씨한테 재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편지에 도대체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까? 미리암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겨우 답장을 썼다. 고마와요, 미리암, 고맙습니다.----- 그 말을 다는 징소리를 기다리면서 전주를 반복하는 가무란의 선율처럼 몇번이고 몇번이고 되풀이했다. 답장 또한 마침 내가 무르타투리와 판 에이싱하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도 또한 편지 속에서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우연의 일치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고, 우리들이 동시에 두 사람을 생각한 것은 아마도 같은 시대조류, 즉 같은 자유주의적인 시대의 흐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편지를 매듭지었다. 친애하는 미리암, 당신과 같은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게 되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앞으로 20년 뒤 어떤 일이 일어나 있을지 나는 알 수가 없읍니다. 내가 징이 될 수 있다니,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읍니다. 북이 되는 것조차 꿈꾼적이 없읍니다. 만일 아름답고 감동적인 당신의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동포가 아닌 사람의 편지였기 때문에 당신의 편지는 더욱 가슴을 찌르는 것이 있었읍니다. 나의 성실한 미리암, 당신에게 안녕과 행운이 깃들기를 빕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영광스러운 하원의원의 자리에 오르개 되기를 빌겠읍니다. 나는 얼굴을 테이블에 파묻었다. 미리암의 편지를 평생 잊지 말자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우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두통은 차츰 덜하더니 조금 뒤에는 완전히 나았다. 미리암은 단지 편지를 보낸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거기서 긴장감을 좇아주는 부적을 얻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는 용기를 얻었고, 세상이 전보다 더 밝고 찬란하게 빛나 보였다. 징이 되는 거야 ! 그런 목소리가 내 귀에 강하게 울렸다. "도련님 !" 나는 얼굴을 들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인물이 눈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의 파라키아 나무가 일제히 되살아나서 조금 전보다 더 힘차게 뿌리와 가지를 뻗기 시각했다.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바로 다르삼이었다. "실례했읍니다, 도련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셔서." 흘끔흘끔 그의 긴 칼과 손을 보면서 나는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수염을 만지면서 다르삼은 붙임성 있게 웃었다. "도런님은 나를 의심하고 있군요." 그는 말했다. "다르삼은 도련님의 친구인데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물었다. "냐이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읍니다. 아가씨께서 중병에 걸리셨읍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르삼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는 편지를 내밀었다. 이따금 그의 칼과 손에 시선을 보내면서 나는 그 편지를 읽었다. 분명히 안네리스는 심한 병이 들어서 마르티네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냐이는 안네리스가 병에 걸린 원인을 설명하고, 의사의 권고에 따라 즉시 돌아와 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안네리스는 회복할 가망이 없고, 점점 더 악화되어 갈 것이라고 마르티네 의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자, 도련님, 우노크로모로 가 주십시오, 어서요."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테이블 모서리를 잡고 희미한 눈으로 마두라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어깨를 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시뇨 로베르트는 염려 없읍니다. 이 다르삼이 틀림없이 지켜드리겠옵니다. 자, 가십시다." 미리암 드라크로아는 사라졌다. 증발해서 궤도로부터 소멸했다. 우노크로모가 발산하는 마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르삼의 부축을 받아 나는 2륜 마차에 올라탔다. "하숙집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가지 않아도 됩니까?" 다르삼이 물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테린하 부인을 불러 외출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문턱에 서서 반갑지 않은 얼굴을 해 보였다. "너무 오래 있으면 안됩니다, 도련님." 그녀는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 "몸이 시원치를 않으니까요." "도련님은 우노크로모에서 곧 완쾌될 것입니다." 다르삼이 대답했다. 무시무시한 다르삼의 얼굴에 검을 집어 먹었는지 테런하 부인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 짐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느크로모까지 가는 도중 나는 마차 속에서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때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유혹을 받아들인 탓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를 초래했고, 많은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생명을 위협당하는 긴장 속에 떨고 있다는 점뿐이다. 그 동안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마두라의 칼잡이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뿐이었다. "이 마차와 말은 지금부터 도련님 것입니다." 제11장 사랑의 굴레 다르삼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냐이 온트솔로가 마중을 하기 위해 뛰어나왔다. "너무하는군요, 이처럼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니 ? 안네리스는 당신이 보고 싶은 나머지 중병에 걸렸어요." "도련님도 편찮으십니다, 냐이. 일단 모시고는 왔읍니다만." "괜찮아요.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테니까요. 병 따위는 도망가버릴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동시에 그것이 독소가 되어 머릿 속의 파라키아를 움츠리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냐이는 내 어깨를 잡고는 미소를 띠며 귓가에서 속삭였다. "정말 열이 있군요.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거예요. 자, 이층으로 올라가요. 당신의 안네리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편지 한장 보내지 않다니 너무 했어요." 냐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해서 마치 나의 어머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내 마음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왔다. 그녀의 손에 끌려가는 나는 갓난애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눈만큼은 빈틈 없이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로베르트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나에게 덤벼들지 모르는 것이다. "로베르트는 어디 있읍니까?" 계단을 올라가면서 내가 물었다. "당신이 그런 것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그애는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 이 여자 앞에 서면 왜 나는 이토록 온순해지는 것일까? 그녀의 마음대로 빚어지는 점토처럼 어째서 아무런 반발심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일까? 저항할 의욕조차 없어져 버리는가? 그녀는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그녀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이층은 훨씬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계단 바닥은 거의가 융단이 깔려 있어서 도둑 고양이처럼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걸을수가 있었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는 멀리 논밭과 숲이 끝없이 펼쳐진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들 한 무리가 수확의 마무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손을 대지 않은 채 방치된 논이 건조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해는 대풍작이라고 신문은 보도하고 있었다. 동부 자바와 중부 자바의 가장 비옥한 미작 지대는 실제로는 사탕밖에는 생산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삼에서 낮은 품질의 쌀을 수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기 드물게 어린 나이로 즉위한 빌헬미나 여왕이 신에게 축복받고 있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침대 앞에 섰다. 냐이는 딸의 담요를 반듯하게 다시 덮어 주었다. 안네리 스의 가슬이 담요 밑에서 탐스럽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냐이는 딸의 손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안네리스 !" 괴로운 듯이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우리들 쪽으로 얼굴을 돌리려고도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수심에 잠긴 시선을 천천히 천정으로 보내고는 이윽고 다 시 감았다. "밍케, 나의 귀중한 보물을 보살펴줘요." 냐이가 속삭였다. "당신도 몸이 아프다고 했죠?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낫기를 바래요. 당신과 함께 이 아이를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냐이는 절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만일 이 아이가 다시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니까, 내가 하려는 말 뜻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내 팔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나는 담요 밑에서 안네리스의 손을 더듬었다. 차가왔다. 그녀의 귀에 가까이 입을대고 몇 번씩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안네리스는 미소를 지었으나 눈은 감은 채였다. 열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때 나는 머릿속에 있는 파라키아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몽땅 뽑혀서 밖으로 내던 져져 어디론가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지금 안네리스와 나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 리며 뜨거운 피를 온몸에 뿜어댔다. 땀이 배어나왔다. "밍케의 도착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지 ?" 나의 착각인지 실제로 그랬는지 안네리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앤, 당신은 밍케가 그리웠지 ? 틀림 없이 그리웠을 거야. 나도 당신이 그리웠어. 사실이야. 항상 당신 곁에 있고 싶어. 내가 얼마나 당신을 인생의 반려자로 삼고 싶어하는지 당신이 알아 준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 보다 더 기쁠 거야. 왜냐 하면, 나의 행복은 바로 당신이니까. 앤, 밍케가 옆에 있잖아. 제발 눈을 떠 줘, 응?" 안네리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눈과 입술은 여진히 닫혀 있었다. 이미 내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안네리스의 얼굴과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 처녀는 죽어버린 것일까? 이토록 아름다운 처녀가? 나는 안네리스의 몸을 끌어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가슴 안쪽에서 느릿느릿한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앤, 안네리스 ! " 참다 못해서 나는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눈을 떠요, 앤"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안네리스는 눈을 떴다. 허공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나를 보지도 내 얼굴에 와 닿지도 못했다. "앤, 벌써 나를 잊었어 ? 나를? 밍케를?" 그녀는 미소를 지었으나 그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앤, 앤, 이래서는 안돼. 밍케가 왔는데도 기쁘지 않은 거야? 내가 왔어. 당신을 남겨 두고 다시 돌아가라는 거야? 안네리스, 나의 안네리스 !" 내 품에서 그녀를 죽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일어서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계속해요, 밍케." 문 가까이에서 냐이가 격려했다. "그 아이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얘기를 하세요. 그렇게 하라고 마르티네 의사가 말했어요." 나는 뒤돌아보았다. 냐이는 밖에서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안네리스가 위독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직 의식이 분명치 않을 뿐이다. 나는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안네리스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래서는 안돼요, 앤." 나는 나 자신에개 확신시키듯이 말했다. 담요를 옆으로 치우고 그녀의 두손을 잡아당겨 침대 위에 일으켜 앉혔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쇠약한 탓으로 내가 손을 놓자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다. 나는 다시 일으켜 앉혔다. 그러나 여전히 안네리스는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될까? 다시 한번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손이 움직였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조금 전보다는 많이 움직였다. 나는 안네리스의 목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녀의 입을 열게 하려고 다시 말을 걸었다. "앤, 당신이 이렇게 앓아 누워 있으면 도대체 누가 마마를 도와 주지 ? 아무도 없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앓아 누워서는 안 돼. 건강해야 한다구. 일을 하고 나하고 산책도 할 수 있게 말이야. 말을 타고 함께 슬라바야의 거리를 달려야지." 나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안네리스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눈동자에 얼굴이 비친 것은 환영이었을까 ? 냐이 온트솔로가 두 잔의 따뜻한 우유를 갖고 다시 나타났다. 컵 하나는 테이블 위에 놓고, 다른 하나는 내게 갖고 와서 내 입술에 갖다댔다. "쭉 마셔요, 밍케. 다시 건강해져야 해요. 병 때문에 몸이 약해진 사람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거예요." 그리고 안네리스를 향해 말했다. "앤, 일어나라. 밍케가 네 옆에 있잖니 ? 또 누구를 기다리고 있니 ?" 안네리스의 반응도 살펴보지 않고 냐이는 다시 방에서 나갔다. 얼마 뒤 아무런 진전도 없는데 마르티네 의사가 냐이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안네리스의 머리를 베개에 눕혀놓고 그를 맞았다. "선생님, 이족은 밍케입니다. 오늘은 그가 간호를 하고 있읍니다. " 우리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냐이는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더니 계속 말했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옵니다. 아래층에 볼 일이 있어서요." "당신이 밍케씨군요?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부럽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의 깊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말이오." 의사는 서투른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선생님, 제가 온지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앤의 상태는 변함이 없읍니다. 걱정이 되어서......" 40대의 의사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 아가씨를 좋아합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네, 좋아합니다." "그녀를 장난삼아 데리고 논다는 생각은 없겠지요?" 그는 나를 똑바로 쏘아 보면서 말했다. "데리고 논다고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고등학교의 학생은 언제나 젊은 여성들의 신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생긴 이래 계속 그랬읍니다. 부타위에서도 사마랑에서도 그렇습니다. 밍케씨, 다시 한번 다짐하겠는데, 당신은 그녀를 장난삼아 사귀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내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계속 말했다. "이 아가씨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입니다. 당신 이외의 것은 그녀는 무엇이든 갖고 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슴속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처음부터 안네리스를 데리고 놀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가 그녀가 아니더라도 젊은 처녀와 사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안네리스는 나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서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마르티네 의사의 질문에 대해서 아직 확신도 없는데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은밀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녀의 의식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그렇게 원하고 있옵니다. 의식이 돌아오기만 하면 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생각입니다." "회복할 겁니다. 사실은 내가 일부러 약을 써서 잠들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오래 혼수 상태에 있는 것도 좀처럼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당신 탓입니다. 깨어 있을 때, 당신이 곁에 없으면 그녀는 병이 더 악화됩니다. 거꾸로 당신이 없다고 해서 약으로 너무 오랫동안 혼수상태로 놓아두면 심장이 위험해집니다. 어쨌든 당신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읍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위험한 상태에 빠진 것도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조금 있으면 의식을 회복하게 됩니다. 아마 15분쯤 뒤일 것입니다. 그 기미가 보이거든 말을 걸어 주십시오. 조용하고 다정스럽게 말입니다. 거친 말투로 꾸짖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읍니다. 용기를 갖도록 해 주십시오." "알겠읍니다, 선생님." "네, 그렇습니다." "축하합니다. 약의 효력이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그녀 곁에 있어 주셔야 합니다. 괜찮다면 당신의 성을 가르쳐 주시겠읍니까?" "성은 없읍니다." 그는 침을 삼키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으나 의아스러운 듯이 내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창가로 걸어가서 안채 옆의 밭과 뜰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의사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다가가서 창가에 나란히 섰다. "없음니다. 정말입니다." "세례명은요? " "없읍니다." "성도 세례명도 없는데, 고등학교의 학생이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읍니까 설마 당신이 쁘리부미라는 건 아니겠죠?" "바로 맞혔읍니다. 나는 쁘리부미입니다." 그는 나를 보고 심문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쁘리부미가 아무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을 거요, 당신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소." "아닙니다. 숨기는 건 없읍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묻겠는데, 당신은 인제까지나 안네리스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까." "물론입니다. " "영원히 ? " "왜 그런 말을 묻습니가?" "그녀는 가엾은 아가씨입니다. 난폭한 것은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아껴 주는 사람, 열렬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을 그녀는 바라고 있읍니다. 안네리스는 지켜 주는 사람도 없고 세상 일도 모르고, 오로지 외토리라는 생각으로 쓸쓸하게 살아 왔읍니다. 당신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은 과장된 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이끌어 주고 사랑해 주고 돌보아 주는 어머니가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지금과 같은 어머니의 태도가 언제까지나 계속 되리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 무슨 이유로 어머니와 헤어질 때가 찾아올 지도 모른다고 항상 겁을 먹고 있읍니다." "......하지만, 신생님, 마마는 현명한 여성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네리스는 진심으로 믿고 있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어머니는 자기보다도 사업 쪽에 더 애착심을 갖고 있다고 그녀는 믿고 있어요. 이것은 당신과 나만의 비밀 얘기입니다. 내 말 알겠지요?" 다시 마르티네 의사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겠지요?" "대충 알겠읍니다." "심한 말이나 난폭한 얘기, 충격을 주는 얘기 같은 것은 절대금물입니다. 안네리스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읍니다. 내가 이런 얘기를 일부러 하는 것은 여성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다루는 데 쁘리부미 남성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그렇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유럽 문명을 배워 왔기 때문에 여성을 대하는 유럽의 남성과 쁘리부미 남성의 태도의 차이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일반적인 자바 남성과 마찬가지라면, 이 아가씨의 건강은 장담할 수가 없읍니다. 죽지는 않더라도 산 송장이 될 것이 뻔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안네리스와 결혼할 경우 당신은 두 번째 부인을 맞을 생각입니까 ?" "그녀와 결혼을요?" "그래요. 적어도 이 아가씨는 그것을 꿈꾸고 있옵니다.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겠지요딜?당신은 지금 마지막 학년일 테니까요." "지금으로서는 구혼할 의사는 없읍니다." "필요하다면 이 아가씨를 위해서 내가 중매역을 하겠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와 결혼을 하실 생각인가 보군요. 그리고 두번째 부인도 얻지 않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서 확답을 얻으려는 듯이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처음부터 나는 여러 명의 아내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두 명 이상의 아내를 갖는 남자는 모두 예외 없이 거짓말장이들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거짓말장이가 된다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서 항상 떠나지를 않았다. "이 아가씨의 마음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부서지기 쉽고 조그만 일에도 곧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항상 다정하게 돌보고 신경을 쓰고 토닥거려 주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안네리스는 빈 껍질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빈 껍질 ?" "원인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있읍니다." "누군가요, 그것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읍니다. 어쨌든 그녀가 놓인 환경, 그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젊은 나이에 아가씨의 마음은 말로는 표힌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문제로 꽉 차 있읍니다. 그것을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는 고아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항상 안네리스는 자신이 공중에 떠 있는 듯이 느끼고 있지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녀는 자신을 부축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읍니다.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돈의 힘이라는 것을 그녀는 자각하지 못합니다. 안네리스에게 있어서 돈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이것이 그녀에게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얘기를 듣고 있읍니까 ?" 마르티네 의사는 주머니에서 외쪽 안경을 꺼내 오른쪽 눈에 끼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진지하게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보십시오. 풍요와 평화 속에 둘러싸여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행운입니다. 만일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 머릿 속의 파라키아 씨앗은 다른 종류의 씨앗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의사의 얘기 속에 담긴 뜻에 대한 의혹이었다. "나는 심리학자는 아닙니다만 지금까지 안네리스의 어머니와 나눈 얘기를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읍니다. 그녀의 말한마디 한마디는 교양이 있고 깊은 내용이 담겨 있읍니다. 또한 거기에는 사무친 원한을 품은 인간의 강한 의지가 숨겨져 있읍니다. 여자로서 그 정도 지식을 갖기는 상당히 힘듭니다. 유럽에도 그녀 같은 여성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녀는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를 변하게 만든 원인이 한 가지, 아니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녀가 뛰어나게 강인한 의지와 예리한 사고력을 가지고 노력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열매를 맺어 그녀를 강하고 용기있는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도 어떤 문제에서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있읍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혼자 힘으로 성공을 한 사람은 한결같이 일종의 결함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내가 얘기의 참뜻을 스스로 이해하기를 기대했는지, 그 이상은 계속하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올 시간이 된 것 같군요." 갑자기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남겨 두고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안네리스의 맥박을 재고 나서 나를 손짓해 불렀다. "자, 밍케씨, 몇 분 있으면 그녀는 당신이 알고 있는 옛날의 안네리스로 돌아옵니다. 당신의 간호로 다시 건강올 되찾기를 법니다. 지금부터 이 아가씨는 이미 내 환자가 아니라, 당신의 환자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한 얘기는 모두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안녕." 마르티네 의사는 방을 나갔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내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한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체험을 했고, 그 속에서 정신없이 쫓겨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또 하나의 관문을 뚫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안네리스다 ! 언젠가 쟝 마레는 이렇게 말했다. 밍케, 위대한 예술가가 위대해진 이유는 그것이 화가이든, 또는 지도자이든 군인이든 그들의 삶이 감각적으로, 또 정신적이고 육채적으로 크고 강렬한 체험을 잉태하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세.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네덜란드의 시인 폰텔과 무르타투리의 생애를 내게 소개했을 때였다. 위대한 경험이 없이 위대해지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위대함은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만들어 낸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내가 쓴 글이 활자가 되어 발표되고 있다는 것을 쟝 마레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만일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앞으로 나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냐이가 얘기한 것처럼, 제2의 빅토르 위고가 될지도 모른다. 또는 드라크로아 일가가 기대하는 것처럼 민족의 선각자나 지도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로메르트 메레마와 뚱뚱보 사나이가 바라고 있는 것처럼 썩어빠진 시체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안네리스의 숨소리가 들리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의식이 되돌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그녀가 내 눈 앞에서 숨을 거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지켜 보았다. 환자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왔다. 섬세한 피부, 코, 눈썹, 입술, 이, 귀, 머리칼......모든 것이 아름다왔다. 이 미녀의 심리에 관한 마르디네 의사의 분석이 내게는 의문스럽게 생각되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육체에 깃든 정신 세계가 과연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불안정하고 혼란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녀가 아름답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그녀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혼혈의 미녀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인생 항로는 어쩌면 이렇게도 골치 아프게 전개되어 가는 것일까 ? 모두가 호색가인 내 죄다. "마마 !" 안네리스가 힘없이 불렀다. 그녀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앤 ! " 그녀는 눈을 떴다. 그 눈은 여전히 먼 곳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내 환자라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고치는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테이블에서 우유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머리를 팔로 받쳐 일으키고 우유를 조금씩 입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맛을 보듯이 홀짝거렸다. 틀림없이 안네리스는 의식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넣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시기 시작했다. "앤, 나의 안네리스, 모두 마셔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더 많은 우유를 흘려주었다. 냐이가 두 사람분의 점심을 갖고 들어왔다. "어째서 마마가 직접 그런 일까지 하세요?" 나는 이상한 듯이 물었다. "그게 아니에요. 일하는 사람들을 이층으로 못 올라오게 하니까 그런 거예요. 역시 선생님이 말한대로 의식이 돌아왔군요." "거의 회복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밍케,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이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이라고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냐이는 다시 방을 나갔다. 안네리스가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앤, 어디가 아프지 ?"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베개 위에 뉘어 주었다. 아름다운 콧날에 매혹되어 나는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눈썹은 짙고 풍부했다. 위로 말려올라간 긴 속눈썹이 두 개의 눈동자를 새벽 하늘에 빛나는 샛별처럼 보이게 하고, 그 별을 담은 얼굴은 더욱 투명한 하늘을 연상케 했다.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그토록 훌륭한 혼혈의 미녀를 인간의 대지말고 다른 어디서 볼 수가 있단 말인가. 신은 단 한번 내 앞에 있는 이 육체에 그 미를 창조한 것이다. 앤, 당신의 마음이 어떻든 나는 결코 당신을 놓아 주지 않을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상대이든 간에,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싸울 거야. "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아요."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약간 덥기는 하지만 습도가 낮아서 상쾌하군요." 안네리스는 코 끝에 촛점을 맞추고 나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가끔씩 눈을 깜박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고, 일체의 인위적인 것을 초월한 고귀함,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었다. 안네리스는 알라 신의 유일무이한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것이다. "눈을 떠요, 앤. 당신은 모르고 있소?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조차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사랑을 고백할 거요.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국가도 민족도 기꺼이 희생했겠지, 알겠소 ? 제발 눈을 떠요."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의 긴 한숨이 내 얼굴에 부딪쳤다. 나는 다시 안네리스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열리고 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의 처녀들을 찬미하는 솔로몬처럼 그녀의 모든 것에 생각나는대로의 찬사를 쏟아놓았다. "마스 !" "앤, 나의 안네리스 ! " 나는 소리쳤다. "병은 이미 나았소. 자, 일어나서 걸어 봐요." 안네리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자, 내가 안아주지." 나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렇다. 안아 올렸다. 하지만 내게는 힘이 없었다. 정말 믿을 수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가냘픈 여자 하나를 안아 올리지 못하다니! 나는 안네리스를 카페트 위에 내려 놓았다. 그녀는 걸으려고 하다가 비틀거 렸다.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조금전까지 의사가서 있던 창가로 그녀를 부축해갔다. 정말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된 기분이었다. 광활한 전원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해는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다. "앤, 잘 봐요. 숲이 조그맣게 보이죠? 그리고 산, 하늘, 대지, 보여요, 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찬 바람이 광대한 자연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오듯이 창 틈으로 불어들어왔다. 안네리스는 몸을 떨었다. "앤, 추위요?" "괜찮아요." "다시 침대에 가서 눕는 게 좋겠군요, " "이렇게 당신 옆에 있고 싶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당신은 와 주지 않았어요." 안네리스가 책망하듯이 말했다. "나는 여기 있을 거요." "나를 꼭 잡아 줘요. 놓으면 안돼요." "이러다가는 얼어버리겠소." "따뜻해요. 멀리 보이는 숲이 보통 때와는 다른 것 같아요. 바람도 산도, 그리고 새들도." "병이 나은 거요, 앤. 다시 건강해진 거라구." "병은 싫어요. 나는 병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에요. " 그때 이미 내 병도 나아 있었다. 문득 무엇인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냐이와 마르티네 의사가 문틈으로 흘끗 보였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시 문을 닫았다. 제12장 청춘, 악령 의사의 진단서에 기재된 기간이 넘게 내가 학교를 쉰 것을 교장선생님은 묵인해 주었다.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로부터의 안부 인사가 그의 내도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며칠을 걸려서 나는 뒤떨어진 공부를 보충했다.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일찌기 할머니는 나를 다음과 같이 격려하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너는 어면 학과라도 훌륭히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믿어라. 그렇게 하면 간단해지는 것이다. 어떤 학과든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왜냐 하면, 그러한 공포심이 무지의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의 충고를 따르고 그 가르침의 정당성을 믿고 있다. 지금까지 단한번도 나는 다른 학생에게 공부에서 뒤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비교해 내가 특별히 공부벌레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때만은 뒤떨어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마차와 마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마가 나를 위해 특별히 제공해 주었다. 아침에 마차로 등교할 때 나는 언제나 도중에서 메이 마레를 태우고 신팡에 있는 그녀의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많이 번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호화로운 전용 마차로 슬라바야의 시가지를 오가면서부터 나는 자신의 위치가 꽤나 높아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변화는 급우들에게서도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게 나와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았다. 그것을 나는 갑자기 잘 살게 된 사람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이것도 또한 일시적인 추측이지만, 내가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등교하는 것을 보고 어딘지 모르게 서먹서먹한 태도를 보였고 그들과 대등한 성인으로서 나를 대하는 것같았다. 나는 이미 내가 옛날의 밍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모습은 똑같지만 그 내실, 사물을 보는 눈이 변하게 된 것이다. 이미 농담이나 하며 강난을 치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더 점잖아지고 이전보다 사리가 깊어졌다고 나 자신을 느끼는 한편, 급우들의 여전한 유치함이 유달리 눈에 거슬렸다. 사물을 대할 때에도 겉모양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어떤 대화나 토론에서도 직접 문제의 본질에 파고 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도 역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서로 마주쳤을 때는 항상 나를 피해 갔다. 여학생들도 내가 전염병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피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몇번씩이나 나를 불러 내가 결혼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을 한 학생은 자동적으로 퇴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추측으로는 교장선생님에게 나에 관한 일을 일고한 것은 슬르호프임에 틀림없었다.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문제의 발단을 아는 것은 슬르호프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나는 그 추측이 역시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슬르호프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려서 급우들이 나를 멀리하도록 만들었다. 그 때문에 나에게 향해지는 급우들의 시선은 마치 생판 모르는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점점 서먹해져 갔다. 모든 것이 변했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생기를 잃고 쓸쓸하게 보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생님들 가운데서 단 한사람 태도가 번하지 않았던 것은 네델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을 담당하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독신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갈색 주근깨 투성이었고, 맑은 다갈색 눈을 항상 깜빡거리고 있었다. 처음 마푸다 선생님을 보았을 때 우리들은 무심결에 웃고 말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흰 원숭이 암놈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첫 강의를 듣고나자 모두들 생각이 달라졌다. 존경심이 우러나 원숭이 같다는 인상도 얼굴의 주근깨도 모두 쓸어가 버렸다. 네덜란드에서 온 그녀가 우리반에서 처음으로 한 말은 이랬다.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마푸다 빼데루스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을 담당하게 되었읍니다. 여러분 가운데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 있읍니까? 있으면 손을 들어 주세요." 거의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 가운데는 벌떡 일어서서 반발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다. "좋습니다. 고마와요. 자리에 앉아 주세요,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있는, 가장 원시적인 사회에서 생활하고 학교에서 배우기는커녕 평생에 단 한번도 책을 대하지 못하고 읽고 쓰기도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문학을 사랑할 수가 있읍니다. 물론 그들의 경우는 구전(口傳) 문학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것에 비해 적어도 10년 가까이 학교에서 공부를 해온 고등학교의 학생이 만약 문학과 언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놀랄 수밖에는 없군요." 누구 한 사람 웃거나 놀려대거나 하는 학생은 없었다. 교실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물론 여러분은 학력은 향상되어 가겠지요. 어떤 어려운 학위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영리한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아직 네덜란드에 가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자라났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민족이 모두 우리나라의 문학 작품을 애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옵니다. 사람들은 또한 반 고호, 렘브란트 같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화가의 그림을 애호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묻는 사람, 또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야만적인 네덜란드인이라고밖에 할 수 없옵니다, 회화는 색채에 의한 문학이고, 문학은 언어에 의한 회화인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세요." 야만적인 네덜란드인이 되지 않도록 그 뒤부터 누구나가 그녀의 말은 한마디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학생들을 자기 손아귀에 넣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변하는 일이 없었다. 틀림없이 그녀도 로메르트 슬르호프가 나발을 불고 다니는 소문을 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거의 매주 토요일 오후에 전교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보통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기꺼이 토론회를 주재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정열적으로 그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 토론회에서는 의제로 어떤 문제라도 제출할 수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 지역적 또는 국제적인 뉴스 등 무엇이든 좋았다. 교사가 의제를 내는 것은 학생에게서 의제 제기가 없는 경우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사실 관심이 없는 학생은 출석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나, 토론회를 주재하는 것이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에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학년에서 대부분의 학생이 참석했다. 그 때문에 토론회는 강당에서 해야만 했고 대부분이 마룻바닥에 앉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대성황이었다. 일어서는 것은 발연하는 학생 뿐이기 때문에 참석한 선생님들도 마루에 앉아 있었다. 다만 토론의 진행을 맡은 선생님은 역시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럴 때 마푸다 빼태루스 인생님의 주근깨는 어쩔수없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 주위의 상황에 대한 나의 입장과 태도는 어떤 것이었는가, 내 자신의 상황판단은 정확했는가 아닌가, 그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전교 토론회에서의 나의 체험을 여기서 얘기해 두고 싶다. 언젠가의 토론회에서 나는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에소시에이션 이론'에 대해서 질문했다. 마푸다 빼테루스는 '먼저 학생들에게 해답을 구했는데, 누구 한 사람 그 이론을 알지 못했다.' 뒤이어 그녀는 동료 교사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선생님들한테서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식민지 경치의 과정에서 제기된 하나의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민지 정치가 무엇인지 학생여러분, 알고 있읍니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지배국과 그 민족에 대한 통치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시스템, 즉 권력 기구를 말합니다. 그러한 시스템에 찬동하는 사람을 식민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다만 찬동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여 실천하고 옹호해 나갑니다. 그들 가운데는 식민지에서 꿈을 찾고 그곳에서 혜택을 받고 식민지 체제에 감사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옵니다. 이 시스템에서의 기본적인 문제는 생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학생 여러분은 아직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여러분은 아직 나이가 젊습니다. 만일 그러한 문제가 문학 작품의 테마로서 거론된다면, 이미 여러분에게 소개해서 몇번인가 토론을 한 무르타투리의 작품처럼 좀 더 여러분의 흥미를 끌었을것입니다. 밍케군,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에소시에이션 이론'이란 어면 것인지 한번 설명해 보세요." 나는 미리암 드라크로아한테 들은 얘기에 나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대충 설명을 해나갔다. "잠깐만."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닌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한 테마를 고등학교에서 논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학교밖에서 하는 것은 자유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여왕 페하와 네덜란드 정부, 총독, 동인도 식민지청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학생여러분이 이 테마에 대해서 좀 더 논하기를 원한다면, 학교 밖에서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읍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의제가 없는 것 같으니까, 내가 테마를 내겠읍니다." "최근에 나는 동인도의 생활에 대해 쓴 어떤 작품을 읽었읍니다. 그러한 일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작품은 몹시 나의 흥미를 끌었읍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각자는 유럽의 혼혈일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그것을 읽은 사람이 있읍니까? 제목은 '어떤 아름다운 시골 처녀의 멋진 생활에서로'이고, 작가의 이름은 맥스 트레나르입니다." 몇개의 손이 올라갔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맥스 트레나르는 나의 필명이다. 내가 붙인 원제목은 변경되고 내용 자체에도, 편집자의 손이 가해져 있었다. 내가 처음에 붙인 제목도 바뀌어져 있고 내용도 썩 내마음에 들게는 아니지만 편집자가 손질을 한 것이었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낭독을 시작했다. 말에 강약을 붙여 단락을 지어가면서 읽는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투가 되어 내 원문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운을 남겼다. 그렇다. 그것은 한편의 서사시와 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거의 모두가 꼼짝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낭독이 끝나자, 겨우 그들은 긴감장에서 해방되어 휴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동인도의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씌어지고 동인도에서 발표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 아무도 학급에서 거론한 일이 없읍니다. 여러분, 누군가 앞에 나와서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의견을 말해 주세요, 비평도 곁들여주면 좋겠읍니다." 간발의 차도 두지 않고 로베르트 슬르호프가 움직였다, 그는 일어나서 양 다리를 벌리고 마치 어떤 힘에도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루에 버티고 섰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주저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입을 열기 전에 그는 급우들을 둘러보았다. 아마 지지를 얻고자 하는 뜻이었으리라. "나는 최근에 맥스 트레나르가 쓴 네 작품을 읽었읍니다. 모두가 마치 작가가 어떤 외적인 힘에 포박당해 있는 것처럼 같은 주제를 같은 필치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가는 지독한 열병에 걸려 있읍니다. 씌어 있는 것은 마치 제 정신을 잃고 자기가 서 있는 현실을 잊어버린 사람의 장황스러운 잠꼬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맥스 트레나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작가가 누구인지는 추측할 수가 있읍니다. 왜냐 하면, 나는 그의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일련의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 그와 같은 작풉을 고등학교의 토론회에서 다룬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 이 자리가 더렵혀질 뿐입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 작가는 성조차 갖지 못한 인물입니다." 슬르호프는 잠깐 쉬었다가 긴장된 눈빛빚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학생들로 꽉 찬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은 승리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 최후의 일격이 가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쉴새없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강당을 메운 학생과 선생님들 가운데서 오직 나만이 슬르호프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노골적으로 복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에서 안네리스에게 접근하려고 한 것은 사실은 그 자신이었다는 것도 점차 분명해졌다. 나에 대한 적의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려고 하는 것은 질투 이외의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 안네리스를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은 처음부터 그였던 것이다. 그날 나를 우노크로모에 데리고 간 것은 나를 그의 들러리로 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나를? 그것은 내가 원주민이니까, 나하고 비교해서 자신을 보다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을 보다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던 옛날의 유럽 상류층 부인들의 풍속과 비슷했다. 그런데 짓궂게도 그 결과는 슬르호프가 데리고 간 원숭이가 안네리스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선생님, 그는 혼혈아도 아닙니다." 슬르호프는 말을 계속했다. "아버지에게 인지받지 못한 혼혈아보다 더 비천한 태생입니다. 그는 원주민......유럽 문명의 틈바구니에 끼어든 쁘리부미인 것입니다." 그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에게 절을 하고 마루에 주저앉았다. "여러분, 방금 로베르트 슬르호프군이 자기 혼자만이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이 작품의 작가에 대해서 의견을 말했읍니다. 내가 요구한 것은 작가의 얘기가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한 의견이었읍니다만 좋습니다. 그런데 슬르호프군, 학생의 추측에 의하면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입니까"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뒤이어 선생님은 슬르호프의 말에 따라 유럽인이나 혼혈아가 아닌 급우들에게로 향해졌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폐부를 찌를듯이 따갑게 쁘리부미 학생들에게로 향해졌다. 쁘리부미 학생들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슬르호프의 얼굴이 내개 향해져 있는 것을 느꼈다. 다른 학생들도 그의 시선을 따랐다. 겁먹지 마라. 겁낼 것 없지 않느냐고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제기랄 ! 만일의 경우에는 이 학교를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 그래,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겠다, 슬로호프가 다시 일어나서 짤막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바로 이곳에 있읍니다." 그는 이미 학교 전체에 소문을 퍼뜨린 것이 틀림없다. 이제는 모든 얼굴이 나 한 사람에개 향해져 있었다. 나는 슬르호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승리감에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다니 누굽니까, 그것은?"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이 물었다. "밍케입니다 !" 마푸다 빼대루스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목덜미와 손을 닦았다. 당황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참석하고 있는 선생님들을 보고 그 다음에 나를 보고, 다시 마루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신생님들과 그날 우연히 참석하고 있던 교장선생님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회장의 중앙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헤치면서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자, 나는 드디어 궁지에 몰려 모든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구나. 그녀는 내 앞에 와서 섰다. 다리의 주근깨가 눈에 들어왔다. "밍케 군 !" "네, 선생님." 나는 일어섰다. "이 글을 쓴 것이 정말 밍케군인가요?"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은 "슬라바야 일보"를 들어 보였다. "맥스 트레나르라는 필명으로?" "그것을 쓴 것이 나쁜 일입니까?" "맥스 트레나르 !" 그녀는 속삭이고 나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로 오세요. "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교장선생님 앞으로 데리고 갔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해 있었다. 교장선쟁과 신생님들 앞에서 나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냉담하게 인사에 답했다. 마푸다 빼태루스는 나를 학생들 쪽을 향해 서게 했다. 강당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이 여선생은 내 어깨를 잡은 채 놓지 않았다. 그때 나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얼굴이 창백해 있었던 것이다. "학생 여러분. 선생님들, 그리고 교장선생님,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특히 학생 여러분에게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한 학생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밍케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이미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소개하는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밍케군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재능을 지닌 밍케군, 즉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네덜란드어로 표현하는 데 능숙해서 이미 하나의 문학 작품을 세상에 발표한, 그러한 밍케군입니다. 그는 모국어 이외의 인어를 사용해서 하나의 오류도 없이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읍니다.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는 있어도 표현할 수는 없는, 어떤 생활의 한 단면을 그는 우리들에게 그려내 보였읍니다. 밍케와 같은 학생을 가진 것을 나는 자랑스업게 생각합니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그녀의 칭찬을 들으면서 나는 가시나무 꼭대기로 자꾸만 기어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최후의 도끼가 내려쳐지는 것을 나는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밍케군, 성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선생님. " "학생 여러분, 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칭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의 역사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 우리들의 조상은 모두 성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았읍니다." 그렇게 말하고 마푸다 선생님은 성에 관한 나폴레옹의 결정이 그의 지배하에 있던 전 영토에서 법제화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적절한 성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관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붙이게 하고, 유대인에게는 동물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분, 성이라는 것은 결코 유럽 고유의 것도, 나폴레옹의 독창적인 생각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서 발상을 얻은 것입니다. 유럽에서 문명이 발달하기 휠씬 이전부터 유대인이나 중국인은 이미 씨족 명을 사용하고 있었읍니다. 바로 그러한 타민족과의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은 성씨의 중요성을 깨닫기에 이른 것입니다." 성씨에 관한 그녀의 강의는 거기서 끝났으나, 나는 여전히 선배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밍케군, 혼혈아가 아니라는 것이 사실인가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이번에는 당연히 나오리라고 쟁각했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원주민......쁘리부미입니다, 선생님." "그래요." 그녀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백 퍼센트 순종이라고 믿고 있는 유럽인은 그들의 몸안에 아시아의 피가 어느 정도 흐르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공부해서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몇백년 전 여러 아시아 민족이 유럽을 침략하여 그 후손들을 남겨 놓았읍니다. 아랍인, 터어키인, 몽고인이 그랬으며, 그것은 로마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이후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유럽의 일정 지역에 대한 로마인의 지배하에서 아시아의 피가 아랍, 유대인, 시리아, 이집트 등과 같은 갖가지 아시아계의 로마 시민을 통해서 그 자손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 회장 안은 여건히 숙연해서 기침 소리 하나 없었다. 나의 머릿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몸이 노곤하여 얼른 마루에 앉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유럽의 대부분의 학문은 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읍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매일 사용하고 있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아라비아 숫자입니다. 제로라는 숫자도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아라비아 숫자가 없고 제로라는 숫자가 없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수를 헤아리겠읍니까? 제로라는 개념은 본디 인도 철학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철학의 의미를 여러분은 알고 있읍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얘기하겠읍니다. 제로라는 것은 무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무에서 유가 생기고, 그것이 나아가서 9라고 하는 정점의 수에 이르고, 또다시 무가 된 뒤 10, 11, 12....등 보다 높은 수치를 만들어내고, 그 위에 백단위, 천 단위 등등으로 무한히 계속해 가는 것입니다. 제로가 없으면 십진법이 성립하지 않고, 여러분은 로마 숫자로 계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여러분의 이름, 새례명의 대부분도 아시아의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탄생한 것이니까요." 마루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서 드디어 초조감이 보이기 시작했다. "쁘리부미가 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이 성씨를 필요로하지 않기 때문이므로 별로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네덜란드가 프란바난 불교 유적이나 보로브두르 힌두 유적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당시 자바쪽이 네덜란드보다 분명히 앞서 있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네덜란드가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은 네덜란드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 교장선생님이 가로막았다. "이제 토론회를 끝내는 것이 좋겠읍니다." 전교 토론회는 그렇게 끝났다.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을 빼놓고 모두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큰 소리로 웃는 사람도 없었고, 웃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토론회가 끝나자마자 앞을 다투어 뛰어 나가던 학생들도,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깊은 생각에 잠겨 조용히 걸어서 돌아갔다. 얀 다페르스테 학생이 담 옆에 서서 눈으로 나를 쫓고 있었다. 그의 생김새는 원주민에 가까왔으나,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혼혈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지 내게만은 자기가 쁘리부미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친구라 믿고 다페르스테 목사의 양자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았던 것이다. 양자 ! 그는 진짜 쁘리부미인 것이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서, 내가 전용 마차를 타고 다닌 뒤부터 수업이 끝나면 편승시켜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도 지금은 나를 멀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얀 다페르스테를 대신해서 편승시켜 달라고 부탁해 온 사람은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이었다. 집에까지 가는 동안 그녀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머릿속이 여러 가지 문제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떠들어 보았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가는 마차나 사람들의 모습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한가지,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에 대한 학생과 다른 선생님들의 분노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유럽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옆에 앉은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유감이었어요." 그녀는 허공을 향해 중얼가렀다. 나는 못들은 척했다. 마차가 그녀의 집 앞에서 멈추고, 나는 언저 내려서 유럽식으로 손을 뻗어 부축해 주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덧붙여 말했다. "잠깐 우리 집에 들렸다 가요, 밍케군. " 그녀의 집에 나를 초대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안내하는 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서 거실 의자에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다. "밍케군, 당신에게는 정말 놀랐어요. 그 작품을 정말 당신이 썼나요?" "네, 그렇습니다. " "내 제자 가운데서는 두말할 것없이 당신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에요. 지금까지 나는 5년 동안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을 가르쳐 왔어요. 그 가운데 1년은 네덜란드 본국에서 가르쳤지만, 그 정도의 문장력을 가진 학생은 없었어요, 더구다 활자화가 되다니 ! 당신은 물론 나를 좋아하지요?" "어떤 선생님보다 좋아합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솔직한 감정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내 강의에 항상 모든 감성을 다 동원해 듣고 있었죠, 틀림없이 ? 그렇지 않고서는 그토록 훌륭한 글을 쓸 수가 없을 테니까요. 슬르호프에 대해 화를 내고 있지는 않겠지요?" "화는 내지 않습니다." "그래야 해요. 당신 쪽이 그보다 훨썬 더 훌륭해요.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였으니까요." 그런 찬사를 듣는 것은 매우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내게 일어서라고 말했다. "밍케군, 당신은 지난 5년 동안의 내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어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깜짝 놀라는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숨막힐 정도로 격렬한 포옹을 당했다. 나는 매일 메이의 등하교의 시중과 새로운 가구의 주문을 전해주기 위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쟝 마레의 집에 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하숙집에도 얼굴을 내밀 필요가 있었다. 전용 마차 덕분에 가구 주문을 맡으러 다니거다 "경매"지에 내는 광고문이나 그 밖의 원고를 쓰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하루가 훨씬 길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우노크로모에 도착하면 몹시 지쳐서 잠시 낮잠을 자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그럴 때 언제나 깨끗한 타올을 갖고 나타나서 나를 깨워 목욕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안네스리였다. 그리고 그 뒤 안네리스와 잡담을 하거나 동인도의 신문이나 네덜란드의 잡지를 읽는 것이 나의 일상 생활이었다. 밤이면 나는 안네리스의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집필을 했다. 안네리스의 건강은 나날이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마마는 사무실이나 뒤쩝에서 일에 쫓겨 낮에는 우리들 두 사람과 함께 지낼 시간이 없었다. 그날 밤도 나는 언제나처럼 안네리스의 방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니엘 데포의 네덜란드 번역판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작성해 두었던 것이다. 모두 뒤마, 스티븐슨 같은 젊은이들이 읽기 좋은 책으로, 그것들을 그녀는 한달 안에 읽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사전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마마가 지난 10년동안 써온 것으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게 된 낡은 사전이었다.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안네리스와 마주보고 앉아서 소설을 쓰기 전에 미리암과 사라에게서 온 편지를 읽었다. 앞에서 말한 소설이란,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제목을 붙일 예정이었다. 그것이 로베르트 메레마의 이야기임은 두 말할것도 없다. 이번에 온 미리암의 편지는 한결 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그이'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얼마 전에 나는 네덜란드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읍니다. 남아프리카 트랜스발 지방에서의 '또 한 사람의 그이'에 관해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편지의 필자는 어떤 작은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네덜란드로 귀국했는데, 그전에 그와 같은 부대에 있었읍니다. 그 부대는 편지에 의하면, 매우 엄격하고 용감하고 야심에 찬 메레마라고 하는 젊은 기사의 지휘 아래 있었다고 합니다. 밍케, 이 편지를 받고 나는 굉장히 기뻐했읍니다. 당신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에 못지 않을 정도입니다. 편지에는 당신이 흥미를 느낄만한 일들이 씌어 있었읍니다. '또 한 사람의 그이'는 당신보다 약간 연상일 것입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그것을 끝까지 지켜가는 남아프리카 네덜란드인들의 호소에 응하여 별다른 생각도 없이 남아프리카로 건너가서.....그리고 큰 실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전쟁에 관해서는 동인도의 신문에도 보도는 되었으나, 보도되지 않은 문제가 아주 많이 있읍니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인은 대부분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입니다만 지금까지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을 지배해 왔읍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네덜란드인이 역시 유럽에서 건너온 세력인 영국인에게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에는 원주민을 최하층으로 하는 여러 계층의 계급구조가 이루어졌읍니다. 밍케, 생각해 봐요. 그것은 동인도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전에 파파가 말한 것처럼, 물론 약간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그것은 역시 기본적인 구조를 숨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동인도의 원주민은 왕, 술탄, 부빠티와 같은 권력자에게 지배받고, 그 갈색 정부는 백인 정부에 지배받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동인도의 왕, 술탄, 부빠티와 그 부하는 남아프카리에서의 네덜란드 이민 세력과 같은 입장에 놓여 있읍니다. 밍케, '또 한 사람의 그이'가 크게 실망을 느낀 것은 영국인과 보어인(네덜란드 이민) 사이의 전쟁은 사실은 토지와 황금,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둘러싼 쟁탈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애절한 호소에 응해서 세계 각지에서 남아프리카로 건너간 네덜란드의 젊은이들은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국익과는 관계가 없는 일 때문에 상처를 입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그이'는 편지에 의하면,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이 동인도 원주민보다, 아치에인보다 훨씬 비참한 상환에 있다는 것을 목격했읍니다.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묻는다면, 그는 아치에의 식민지군 병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실제로 깨닫는 것이 너무 늦었읍니다. 그렇게 깨닫게 된 것도 어떤 주민과의 예기치 않는 만남이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원주민은 자바어를 할 줄 아는 몇 사람의 부유한 농민 중 한 사람으로서, 이름은 마드 윙스라고 했읍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아프리칸스어(남아프리카 네덜란드계 주민의 언어)를 말하기는 하지만, 백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토착의 흑인도 아닙니다. 그들은 슬라메예르인(이슬람 사람과 말레이인과의 혼혈), 즉 당신네 동포였던 것입니다. 마드 웡스라는 이름은 아프리칸스어화된 이름으로, 내 추측으로는 본디 마르디 웡스였을 것입니다. 슬라메예르인이란 이전에 동인도 회사에 의해 남아프리카로주방된 자바인의 후손입니다. 흥미로운 얘기지요?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편지를 보낸 친구에 따르면, 그들이 소속되어 있던 메레마 소대는 언젠가 마드 원스의 저택에 들어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부탁했읍니다. 그러자 백발의 그 노인은 그것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노발대발해서 그들을 내쫓았읍니다. 메레마는 화가 나서 쏘아 죽이겠다고 노인을 위협했읍니다. 그러자 마드 웡스는 이렇게 소리쳤읍니다......너희들 네덜란드인은 더 이상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지 ? 그전에 너희들은 자바에서 우리들의 재산을 빼앗고 자유를 빼앗아갔다. 그러한 너희들이 이제는 내 집에서 잠자리까지 뺏으려 들다니 ! 너희들은 강도와 거지가 뭔지 모른다는 거냐? 자, 쏴라 ! 이 마드 웡스의 가슴을. 너희들에게는 처마끝도 판자 한쪽도 빌려 주고 싶지 않다. 꺼져라 ! 어찌된 영문인지 메레마는 그냥 물러갔읍니다. 그는 부대와 함께 야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요, '또 한 사람의 그이'를 눈뜨게 한 것은 바로 그 사건이었읍니다. 이제서야 겨우 그는 네덜란드인에 대한 동인도 원주민의 증오의 깊이를 깨닫고, 그의 부대가 숭고한 이상의 옹호자 같은 것이 결코 아니라 순전히 식민지주의적 이상의 옹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그릇된 장소에 두게 된 것을 그는 부끄러워했고, 머릿속이 혼란해졌읍니다. 일찌기 영웅이 되기를 꿈꾸고 인류에 공헌하기를 바라고 있던 그는 지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압제의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던 것입니다. 불쌍한 '또 한 사람의 그이' 이튿날 아침, 그듣의 부대는 남아프리카의 영국 기병대가 점거하고 있는 지점에 공격을 감행했읍니다. 친구의 편지에 의하면, 그 기병대는 W. Ch. 중위가 지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 그들 부대보다 먼저 다른 방향으로부터 보어인 대대가 그 지점을 공격했으나, 반격을 당해 후퇴하다가 포위당해서 전멸의 위기에 빠져 있었읍니다. 그 때 메레마 부대가 적의 배후를 급습한 것입니다. 영국군은 기습을 당해 혼란에 빠지고, 두 곳으로부터의 파상 공격을 받아 패주했읍니다. 그렇게 해서 그 지점은 보어인 손에 들어갔읍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그이'는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되었읍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며칠동안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밍케, 내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동인도에서는 그다지 공개되는 일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좀더 눈을 크게 뜨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신문에서 읽고 있는 것은 영국의 잔학 행위와 네덜란드의 승리에 관한 기사뿐이지 않습니까? 반대로 영국의 신문들은 파파에 의하면, 원주민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잔인함과 탐욕성을 보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인도는 물론이고 네덜란드 본국도 영국도 남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해 정확하게 보도하는 신문은 하나도 없읍니다. 슬라메예르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읍니다. 정말로 이 세계야말로 기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에 비한다면 자바의 쁘리부미는 아직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들 편에 서서 대변해 주는 사람이 몇사람인가 나타났으니까요. 물론 관료 기구의 그늘에 가려서 확실하게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들은 아직 토론과 검토를 하지 않았읍니다.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해요, 알겠지요? 밍케, 나의 친구여, 당신의 답장이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해서는 안돼요. 미리암 드라크로아 올림 사라의 편지에는 또 다른 것이 씌어 있었다. 마푸다 빼대루스 선생님이 '에소시에이션 이론'에 관해서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리암과 나도 솔직이 말해서, 그날 당신에게 얘기한 것 이상은 모릅니다. 그것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파파에게 그 이론에 관해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더라고 전했읍니다. 파파는 단지 큰 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읍니다....너도 밍케에게 얘기한 것 이상은 모르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아무래도 선배라고 너무 으스댄 모양이구나. 당신의 편지를 받은 다음, 나는 파파에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도 역시 그 이론을 모르고 있는것 같아요. 다른 신생님들도 설명을 하지 못했대요. 설명하지 않은 것은 그 이론을 알면서도 자제를 했든가 아니면 실제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자 파파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사람의 마음이 다 같지 않은 것처럼 누구나가 식민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란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동인도 전체가 식민 관청의 위대함, 권위, 견식, 정의, 관용을 신뢰하고 있단다. 지금 길거리에서 굶어죽는 거지는 없다. 맞아 죽는 일도 없다. 거지라 하더라도 식민지 관청의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거든. 또한 외국인이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몰매를 맞아 살해당하는 일도 없다. 외국인도 또한 관청의 법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란다. 밍케, 당신에게 꼭 알려 두어야 할 일이 있어요. 파파는 당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 젊은이는 네덜란드의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해야한다. 법학부에 적을두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게 하면 설사 나중에 졸업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유렵적 의미의 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당신의 의견은 어떠세요? 과연 쁘리부미는 유럽의 학문을 마스터할 수가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파파는 회의적입니다. 그전처럼 화를 내지 말고 들어 주세요. 파파는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쁘리부미의 정신 연령은 아직 유럽인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단다. 그들은 음탕한 욕망에 빠져 너무나도 쉽게 판단력을 상실해 버리거든. 파파의 말이 맞는지 어떤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특히 당신네 민족의 상층 계급을 보면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어떻개 생각합니까? 또 한 가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읍니다. 그것은 문제의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실험 대상 중 한 사람으로서, 반민출신의 아프마드라는 젊은이의 일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언젠가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되어 편지 왕래를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한숨을 쉬는 거죠?" 갑자기 안네리스가 물었다. "불이 났다구요." "무슨 불인데요?" "머릿 속에 불이 났단 말이오, 여러 가지 일이 차례차례로 내 머리를 괴롭히고 있어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잠깐 동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구요. 자, 어서 이 편지를 읽어 봐요." 하고 나는 두 통의 편지를 안네리스에게 내밀었다. "내게 온 것이 아니잖아요." "당신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에게는 팬이 상당히 많은 것 같군요. 유감스럽게도 편지의 내용을 잘 알 수는 없지만요." "조금도 유감스러울 것도 없어요. 모두들 나의 신생님이 되려고 하는 것뿐이니까요." "선생님이 많으면 좋지 않아요?" "앤, 당신까지 ! 물론 신생님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죠. 어떤 일이라도 알아두어서 해로울 것은 없으니까요. 다만 싫은 것은 그들의 도움으로 내가 중요 인물이 되는 것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식의 도움 같아서 싫다는 것이죠, 그런 일을 그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쨌든 따분한 선생은 그것만으로도 벌써 훌륭한 고문인 셈이죠." "그렇다면, 답장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럴 수도 없다니까 ! 나는 이미 그들의 편지를 읽었어요. 그들은 답장을 받기 위해 편지를 쓴 거라구요." 그렇기는 하지만 사라는 너무했다. 부끄러움도 없이 음욕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쓰고 있었다. 게다가 답장까지 보내란다, 나에개 벌거벗으라는 것일까? 유럽에서조차도 그런 문제는 내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적인 문제로서 터놓고 얘기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드라크로아가의 딸들은 도가 지나치다. 안네리스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었다. 그것이 젊은 두 명의 자매한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무래도 태연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안네리스는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반듯하게 접어서 봉투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아무런 소감도 말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는 몸의 상태도 좋아진 것 같군요." "당신의 간호 덕택이에요. 고마와요, 닥터." "이 상태대로라면 내일부터는 이 방에서 당신을 간호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안네리스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투랑강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계속 이곳에 있어 달라고 한다면 물론 돌아가지는 않겠읍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와 미리암의 편지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렇게 내 곁에 있는 것이 싫어졌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당신의 병이 완쾌되지 않는 동안은 !" "또 병을 앓아야 하나요?" "그건 또 무슨 뜻이지요 ?" 그 순간 나는 마르티네 의사의 얘기가 생각났다. 그녀에게 별로 난폭한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곧 덧붙였다. "완전히 건강해지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마마는 당신을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 "내가 아프지 않으면 어째서 내 옆에 있어 줄 수가 없다는 거죠 ?" 안네리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모두들 뭐라고 말하겠어요." "누가 뭐라고 한다는 거예요 ?" "내 말 잘 들어요, 앤. 당신은 이미 병이 나았다구요. 당신이 바라지 않는다면 나는 물론 투랑강에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것은 믿어줘요. 당신이 원하는대로 우노크로모에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방은 안돼요. 내일부터 나는 일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심심하면 당신이 내 방으로 찾아오면 되니까요. 그러면 마찬가지 아닐까요?" "마친가지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어 줘요. 당신이 내 방에 있어 줘요. " "하지만 이층에는 마마와 당신밖에는 출입금지일 텐데요? 그규칙은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온갖 얘기로 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눈의 촛점이 차츰 먼 곳으로 향할 뿐이었다. 안네리스는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나는 쟝 마레를 찾아갔다. 우노크로모에서 나오기 전부터 나는 이미 남아프리카 문제에 관한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천전히 입을 열었다. "밍케, 나는 유럽인으로서 나 자신이 식민지 문제에 관여해 온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해 왔네. 아마도 나는 지금 자네가 얘기한 인물, 우리들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 인물과 똑같은 처지였었네 나는 아치에 전쟁에 참가했었네. 이유는 단지 쁘리부미에게는 저항할 능력이 없으니까 충분히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었지. 그들은 저항했으니까. 맹렬하고 철저하게 저항했거든. 유럽의 수많은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용감무쌍했지. 아치에의 싸움에서 내가 부끄렵게 생각한 것은 유럽의 최신 무기와 아치에 인의 몸싸움이었다는 사실일세. 자네가 내 의견을 알고 싶어 하니까 대답은 하겠는데, 앞으로는 내 양심을 괴롭히는 이런 문제는 두번 다시 끄집어내지 말아 주게나." 어느 틈엔가 테린하씨가 나타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가와서 테이블에 걸터 앉았다. 우리들의 얘기에 끼어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과거 25년동안의 식민지 전쟁은 모두 자본을 위한 것, 즉 유럽의 자본을 위한 시장회득을 위해 싸운 것에 지나지 않네. 요즘은 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귀중한 존재가 되었거든. 오늘날에는 국가가 발전하거나 퇴보하는 것은 자본이 결정하지." "전쟁이라는 것은 어떤 시대에도 어느 쪽이 승자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힘과 전략의 대결이라구." 테린하가 참견했다. "테린하씨, 그건 틀린 말입니다." 하고 쟝 마레가 테린하씨의 말에 반박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은 없었읍니다. 승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전쟁을 하는 민족은 얼마든지 있읍니다. 그들은 싸움터에 나가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아치에인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 단순한 삶이나 증오, 또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마찬가지일세, 쟝. 승자가 되기 위한 힘과 전략의 대결이지." "그것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테린하씨.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좋습니다.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 현재의 전쟁에서 가령 아치에인이 승리하고 네덜란드가 패배했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네덜란드 본국은 아치에의 소유가 됩니까 ?" "아치에가 이기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치에인 자신이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네덜란드 쪽도 자기네들이 틀림없이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치에인은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인은 만약 아치에의 힘이 자기네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면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 전쟁을 시작할 턱이 없읍니다. 문제는 자본에 있어서의 손익 계산에 달려 있읍니다. 민일 이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째서 네덜란드는 룩셈부르크나 벨기에를 공격하지 않는 겁니까? 두 나라 모두 가까이에 있고 풍요한 나라인데도 말입니다." "자네는 프랑스인으로 동인도에는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나는 이 땅에서 전쟁에 참가한 것을 후회하고 있읍니다." "하지만, 자네는 퇴역 후에도 계속 연금을 받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렇겠지만." "그래요. 당신과 같은 처지지요. 하지만, 그 연금은 나를 싸움터로 보낸 사람들로부터 내가 얻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당신도 그렇지요? 전쟁에서 나는 한쪽 다리를 잃었고, 당신은 건강을 잃었어요. 우리들 두 사람에게 아치에 전쟁이 가져다 준 것은 그것뿐입니다. 서로 말다툼하는 것은 이제 그만둡시다. 테린하씨." "군대에 있을 때 자네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 " "군대에서는 나는 당신의 부하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렇게 다투어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내가 뜯어 말렸다. "나는 남아프리카 문제에 대해 질문했을 뿐입니다. 이만 실례하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나서 나는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남아프리카에 관해서 ? 당신은 정치가가 될 생각인가요?" "선생님, 정치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시금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딱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라도 천천히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 그런 일보다 지금은 졸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세요. 물론 당신의 성적은 나쁘지 않지만, 더욱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기를 빌겠어요. 지금은 다른 일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밍케군, 누가 퍼뜨렸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어떤 현지처의 집에 살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선생님." "그런 일을 세상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보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 "알고 있읍니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일을 하나요?" "어디서 살고 있느냐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이 그녀를 냐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녀는 참으로 교양이 있는 여성으로, 제가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입니다." "선생님이라고요? 무슨 선생님이죠?" "꼬집어서 무슨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독학으로 모든 것을 몸에 익힌 경이적인 여성입니다." "독학으로 무엇을 몸에 익혔다는 거죠?" "제일 면저 자기 자신을 다스려 나가는 것, 그리고 대농장을 경영해 나가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자기 변호를 하지는 마세요." "지금까지 저는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을텐데요?" "분명히 지금까지는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 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마푸다 빼데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쉴새없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동작은 나의 추측에 의하면 그녀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밍케군,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요. 당신은 학문을 배운 사람이에요.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이 학문을 배운 사람으로서의 대답입니다."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의 눈에서 우려하는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으나, 이제는 우스꽝스럽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냐이가 독학으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는지 나에게 설명을 해 줘요. 당신이 말하는 것은 유럽적인 의미의 독학이겠죠?" "적어도 제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신생님께서 시간이 있을 때, 언제라도 좋으니 저녁 무렵쯤 한 번 방문해 주십시오. 돌아오실 때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읍니다. 그녀들은 거의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없읍니다만, 선생님은 저의 손님으로서 초대하겠읍니다." "알겠어요." 그녀는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마푸다 빼데루스선생님이 반드시 찾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가시지 않겠읍니까?" "좋아요. 직원 회의에서 보고하기 위해 사실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으니까요. 밍케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대로 있다가는 당신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출발했다. 우노크로모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였다. 나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을 응접실로 안내한 다음, 의자를 권하고 그 표정을 살폈다. "내 예상과는 틀리는군요." 그녀는 속삭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물론 유럽의 어느곳에서도 이런 집은 보지 못했어요. 그럼 당신은 여기 살고 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저택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보는 것만 하더라도...... 그래요, 밍케군, 중부 유럽의 독일인의 집이 이런 느낌이 들더군요. "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집중되는것 같았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쫓아갔다. 검은 빌로도 드레스를 입은 안네리스가 응접실에 들어온 것이었다. "앤, 이분이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 나의 선생님입니다." 안네리스가 가까이 다가와서 절을 하고 상냥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푸다 빼데루스 신생님은 마술에 걸린 것만 같았다. 눈을 깜빡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입을 멍청하니 벌리고 악수를 나누었다. "안네리스 메레마입니다, 선생님. 아직 병중입니다. 앤, 미안하지만 마마를 불러다 주겠어요? " 안네리스는 손님에게 목례를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여왕님 같군요. 무척 섬세한 얼굴이라서 마치 이탈리아의 프리마돈나 같아요. 그녀가 냐이의 따님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하고 기품이 있고 귀하게 자란 것 갇군요. 당신이 여기 사는 것은 그녀 때문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어떤 아름다운 시골 처녀의 멋진 생활에서' 의 주인공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프리마돈나, 프랑스나 러시아의 발레리나라도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할 거예요." 마치 자신의 운명을 한탄이라도 하듯이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보면, 모두가 혼혈 미녀를 자주 화제에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로군요. 하지만 아깝군. 저 드레스는 밤에 입어야 더욱 어울리는 건데." 마마가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레이스로 뜬 흰, 쿠바야, 초록과 빨강과 갈색 무늬의 사롱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손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분이 마마입니다. 마마, 이분이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입니다. 우리 선생님이십니다. 네덜란드어와 문학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선생님, 마마는 평소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은 없읍니다." 나는 양쪽에 양해를 구하듯이 말했다. 그것은 냐이의 동의없이 선생님을 모시고 왔기 때문이었다. 마마는 나의 행동을 불쾌하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신생님, 밍케의 공부는 어떻습니까?" "본인이 노력만 한다면 더욱 향상되리라고 봅니다." 마푸다 빼테루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희들은 평소에 손님을 초대하는 습관은 없읍니다만......." 마마는 완벽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일부러 와 주셔서 대단히 기쁩니다." "마담, 내가 댁을 찾아온 것은, 사실은 학교의 용건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밍케군이 이곳에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요." "밍케군은 아침에 나가서 저녁때 돌아옵니다. 저녁에는 독서나 공부, 그리고 글을 쓰고 있읍니다. 그런데 신생님,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나는 보통때 '마담'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적이 없읍니다. 사실 나는 기혼자는 아닙니다. 마담이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고 그렇게 불릴 자격도 내게는 없읍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냐이'고 불러 주십시오. 누가뭐래도 나는 냐이이니까요. 상관은 없읍니다. 무례한 것도 아니구요. 다만 마담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이론적으로 따져봐도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남편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라고 하는 인간을 소유했던 남자가 한 사람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고뇌를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향해 던지는 날카로운 항변 같았다. "소유라고요?" "그것이 현실이었읍니다. 유럽 여성인 선생님은 그런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치를 떠시겠지만요."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졌다. 마푸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아무래도 마마는 자신의 과거 상처를 들추어 내는 방향으로 끌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듣는 쪽에서도 얘기하는 쪽에서도 결코 유쾌한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냐이, 동인도에서는 30여 년 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선생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나는 동인도의 각지에 아직도 노예 제도가 남아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읍니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 읽으셨겠죠? " "내 처지는 그런 노예와 마찬가지였읍니다." "마담은 결코 노예는 아닙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냐이라고 불러 주세요, 신생님." 마마는 정정했다. "노예는 설사 황제의 궁전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노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읍니다." "어떤 이유로 냐이는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읍니까?"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문제가 지금 한 사람 유럽여성을 앞에 두고서 항의, 규단, 저주, 호소, 고발, 그리고 논고에서 판결까지 한꺼번에 무너뜨리기 위해 배출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듣고 있으려니까 나는 점점 더 참을 수가 었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을 도망쳐 나갈 구실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냐이는 과거의 문을 열어 젖혔다. "어떤 유럽인, 순종인 유럽인이 나의 부모한데서 나를 샀던 것입니다. " 고뇌에 찬 그녀의 목소리에는 궁전을 다섯 개 물려받아도 아물 수 없는 원한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자식을 낳고 키우는 암말이 되기 위해 팔려온 것입니다."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잠자코 있었다. 황급히 나는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감회에 젓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이층에 올라가니 안네리스가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앤, 왜 내려오지 않았죠?" "이 책을 마저 읽고 싶어서요. " "어깨서 그렇게 서둘러 잃지 않으면 안되죠?" "사실은 책 같은 것을 읽는 것보다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직 내개는 얘기를 해 주지 않았어요. 이런 책이나 다른 사람이 쓴 것만을 읽으라고 하면서요. 당신의 이야기를 내개 들려 주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겠죠?" "물론이죠." 안네리스는 다시 책을 읽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읽는 것을 중단하고 나를 돌아다보았다. "왜 이층에 올라왔어요? 이곳은 출입 금지일 텐데요." "당신을 부르러 왔다구요. 선생님이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해서요."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책을 읽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네리스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내가 손에서 책을 빼앗았을 때, 그녀는 내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안네리스는 얼굴을 돌렸다. "앤, 무슨 일이죠? 화났나요? " 대답이 없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소설은 틀림없이 훌륭한 작품이에요." 안네리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내 앞으로 돌렸다. 갑자기 안네리스는 나에게 매달리며 봇물을 터뜨리듯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앤? 당신이 상처입을 말이라도 했나요?"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얘기를 늘어놓아야 했는지 ? 그래도 안네리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녀의 손에서 떠나 푸른 하늘로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듯이. 안네리스는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열려진 문 사이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 소리가 이층층계참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네리스는 나를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는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 마푸다 선생님과 냐이가 이층의 어떤 방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밍케, 선생님이 우리 서재를 구경하시겠대요. 당신도 오세요. 이제부터 안내할 테니까요." 그 방은 헤르만 메레마씨의 서재였다. 넓이는 안네리스의 방과 비슷했는데, 세 개의 서가에는 호화롭게 장정한 책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또한 서가에는 유리 케이스가 놓여 있고, 그 속에 메레마 씨가 수집한 파이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가구는 모두 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것이었다. 바닥은 카페트도 깔지 않고 니스를 칠하지도 않은 보통 판자마루였다. 책상은 한 개뿐이고, 거기에 의자와 팔걸이 의자가 한 개씩 붙어있었다. 책상 위에는 열네개의 초를 꽃은 흰 금속 촛대가 서 있었다. 잡지를 철해 놓은 듯한 책이 한 권 책상 위에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너무나 훌륭한 방이군요. 깨끗하고 분위기도 차분하구요." 마푸다 빼데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전원 풍경이 펼쳐져 있는 유리창으로 시 신을 보냈다. "어머, 아름다와라 ! " 그리고는 그녀는 똑바로 책상으로 다가가서 펼쳐진 채로 있는 잡지의 합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라고 할것없이 물었다. "이 '동인도 안내'는 누가 읽고 있읍니까?" "수면제 대신 제가 읽고 있읍니다." "수면제 대신이라구요 !" 마푸다 빼데루스 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냐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자기 전에 책이라도 읽으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서요." "불면증인가요? " "네, 그래요." "오래 되었나요?" "벌써 5년이나 되었어요." "불면증 말고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나요?" 마마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냐이는 이 잡지의 어느 부분을 읽나요?" "읽고 있으면 잠이 오는 것이면 아무 거나 좋습니다." "그밖에 어떤 책이 수면제 역할을 하죠?" 그녀는 검찰관처럼 물었다. "닥치는대로입니다. 특별히 고르지는 않습니다." 마푸다 선생님은 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 있는 책 가운데서 냐이는 어떤 책을 좋아하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선생님." "스누크 무르푸로니에의 '소시에이션 이론'에 관해서 냐이는 알고 계십니까?" "잠깐 실례하겠어요." 냐이는 마푸다 선생님의 손에서 잡지를 받아들고 어떤 페이지를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마푸다 빼데루스 신생님은 그 페이지를 대충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소시에이션 이론'을 전교 토론회에서 질문했지요? 냐이에게 질문하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좀더 상세하게 그 이론에 관해 알고 싶었읍니다." 이 집에 서재가 있고, 그런 문제를 다룬 잡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도 나는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마푸다 선생님은 서가에 어면 책이 진열되어 있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아름답게 장정된 잡지의 합본이었다. 그녀는 마치 냐이의 두뇌 구조를 검사해 보아야겠다는 태도였으나 축산, 농업, 임업, 목재 관계의 책이 제속되기 때문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동인도와 네덜란드, 독일에서 발행된 여성 잡지, 종합 잡지를 합본한 것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한 책들을 그녀는 대충 훑어보면서 지나갔다. 그 뒤 다시 식민지 관계 잡지의 합본이 진열된 곳으로 돌아와서,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전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문학 작품은 없는 것 같군요." "투앙은 플랑드르인의 작품을 빼놓고는 네덜란드 문학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으니까요." "그 말은 냐이도 플랑드르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네, 있읍니다." "왜 투앙 메레마씨는 네덜란드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지 괜찮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겠읍니까?" "나는 잘 모릅니다. 다만 네덜란드 문학은 아기자기한 면은 있지만 기백이 없다, 불꽃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마푸다 뻬테루스 신생님은 헛기침을 하며 침을 삼켰다.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시 서재를 빙 둘러보았다. 그것은 마치 냐이의 가족, 요즘 빈번하게 학교에서 중상모략의 표적이 되고 있는 가족의 문화 수준에 대해서 일단은 가늠할 수 있개 되었다는 인상을 우리들에게 심어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안네리스 메레마와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앤, 안네리스 ! " 마마가 큰소리로 불렸다. 나는 그녀의 방으로 갔다. 안네리스는 창가에 앉아서 멀리 보이는 산과 숲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아요, 앤 ?" 여전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그대로 방에 있어요." 나는 안네리스를 남겨두고 방을 나왔다. "앤 !" 냐이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불렸다. "아직 몸이 편치 않은가 봅니다. 용서해 주세요, 선생님. 중병에서 회복된 지가 얼마 안되거든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여성은 쉴새없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무엇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나는 올 때와 같이 마차로 슬라바야의 자택까지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닌을 전송해 주었다. 도중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집에 도착하자 잠깐 할 얘기가 있다면서 나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밍케군, 그 가정의 생활 태도를 보고 나는 앞으로도 종종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확실히 당신의 마마는 보기 드문 여성입니다. 그 옷차림이라든가 생김새라든가, 그리고 태도라든가 모든 것이 말이에요. 단지 그녀의 마음은 몹시 복잡한 것 같더군요. 그녀는 어느 모로보나쁘리부미이지만, 옷차림과 언어를 제외하면 굴절된 복잡한 심리는 진보적이고 밝은 유럽인 쪽에 가까운 것입니다. 쁘리부미로서 특히 쁘리부미 여성으로서 그녀는 세상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당신이 말한대로 그녀는 당신의 선생님이라고 부르기에 어울리는 여성이에요. 다만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복수의 절규, 그것은 차마 들을 수가 없더군요.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 그래요 그것만 없다면 그녀는 참으로 뛰어난 여성이에요. 어쨌든 나는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척해 나가는 사람과 처음 만났어요. 더구나 그것이 여성이라니 ! " 선생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그녀가 그처럼 높은 법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그냥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푸다 선생님의 얘기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몇군데 있었다. 기회를 보아서 쟝 마레에게 물어보자.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생각해 봐요. 그녀는 냐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린다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단지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아요. 확실히 '냐이'라는 것은 외국인의 첩이 된 쁘리부미 여성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호칭이겠지만 말이에요. 그녀는 겉치레 말이나 아첨하는 것을 싫어해요. 어디까지나 의연한 태도로 복수의 칼을 갈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요." 여전히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푸다 된생님은 마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하듯이 마마를 소설의 주인공인양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성격을 분석해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밍케군, 그녀는 항상 신중하게 일을 진행해 나가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큰 사업이라도 그녀라면 훌륭하게 경영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이 정도의 여류 실업가를 지금까지 나는 만난 적이 없어요. 상업 전문학교의 졸업생이라도 그 정도로 할 수 있을지 어떤지 의심스러워요. 분명히 당신이 말한대로 그녀는 오직 혼자 힘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사업 쪽의 얘기지만 말이에요. 정말 대단한 여성이에요 ! " 마푸다 선생님은 혀를 내둘렀다. "밍케군, 쁘리부미 역사상으로도 그녀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정말 대단해요. 그녀는 본디 20세기에 태어나야 할 여성이라고요. 정말 그래요 !" 여전히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 비범한 여성에 대해서 나도 글을 써 보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밍케군만큼 문장력이 뛰어나지 못해요. 조금 전에 그녀는 기백이 없다, 불꽃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요. 밍케군, 당신은 문학 재능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 돼요. 그리고 문제의 '에소시에이션 이론' 말인데 그것은 단 한사람의 쁘리부미 여성, 즉 당신의 마마의 출연에 의해서 이미 쓸모 없는 것이 된 것이나 다름없읍니다. 만일 그녀와 같은 쁘리부미가 천 명 있다면 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반드시 파산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이 과장된 것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첫인상에 불과해요. 잘 들어요, 밍케군, 첫인상이라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이에요."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또 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아직도 더 발전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람은 동족들과 함께 살아나갈 수는 없을 거예요. 비유를 하자면, 그녀는 궤도를 벗어나서 끝없는 우주 공간을 혼자서 달리는 유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어디에 도착할까요? 다른 혹성일까요? 아니면 이 대지로 되돌아올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우주의 저 너머로 사라져버릴까요? " "선생님은 마마를 너무 칭찬하시는 것 같군요." "그것은 그녀가 쁘리부미이고 여성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사실 뛰어난 여성이니까요." "그렇다면 종종 방문해 주십시오." "유감스럽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어요." "저의 손님으로서 말입니다." "밍케군, 그럴 수가 없어요." "그렇겠군요. 마마는 항상 바쁘니까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당신의 프리마돈나가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미안해요. 초대해 줘서 고마왔어요, 밍케군. 그 프리마돈나는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행운아예요. 나도 당신들에게 그런 중상모략을 하는 의도를 이제 겨우 알게 되었어요." 제13장 무서운 과거 우노크로모에서의 생활에 나는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로베르트는 한번도 모습을 나다내지 않았다. 마마와 안네리스도 로베르트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은 곧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생각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온 데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 또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는 것, 나는 단순한 손님에 지나지 않으며,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갈 용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외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심어 주려고했다. 그날 밤 공부를 대충 끝냈는데도 나는 일부려 글을 쓰지 않았다. 한숨 돌린 뒤 다시 공부를 계속할 작정이었다. 학교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따겠다고 결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지금 갑자기 그런 공부벌레가 되었는지 나 자신으로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단 한가지 확실한 점은, 나의 가족이나 안네리스의 질타와 격려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머니에게서도 공부에 관해서 격려의 편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펀지는 언제나 내가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네 번째 보내온 어머니의 편지에, 나는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내게 보내는 매달의 송금을 동생이나 누이동생을 위해 써 달라고 답장을 썼다. 편지 말이 났으니 말인데, 나에게는 펀지를 주고받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도 모든 편지에 테린하의 주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우노크로모의 주소를 이용하는것은 미리암과 사라와 펀지를 주고받는 경우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새 주소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들이 먼저였다. 두 사람이 우노크로모의 주소를 어디서 알아냈는지 나는 따로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이미 대수 문제를 세 개나 풀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9시를 쳤다. 그 아홉 번째 소리가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도 하기 전에 안네리스가 들어왔다. "9시에는 잠을 자지 않으면 안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지요?" 나는 그녀를 꾸짖었다. "싫어요 ! " 안네리스가 토라졌다. "당신이 그전처럼 내 방에서 공부를 해 주지 않으면 자지 않겠어요. " "당신의 어리광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군요." 정말 이런 까다로운 환자에게는 마르티네 의사도 골치를 썩었을 것이다. 그녀의 뜻대로 될 때까지 정말로 자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층으로 와 주세요. 언제나처럼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얘기를 해 줘야 해요." "이젠 이야깃거리도 다 떨어졌다고요." "내가 잠을 못 자도 괜찮다는 거예요?" "이야기라면 마마가 더 많이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신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안네리스는 책상에 펼쳐 있는 책을 모두 덮어 버리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환자의 말이면 거역하지 못하는 이 의사는 손을 잡힌 채 이층으로 올라가 마마의 거실과 서재 앞을 지나 다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더이상 안네리스가 잘 때 담요를 덮어 주거나 모기장을 내려 주거나 하는 것을 중단하고 있었다. 차츰 눈에 띄게 건강이 회복되자 그것은 그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네리스는 침대에 올라가 뜩바로 눕고는 이렇게 말했다. "담요를 덮어 주세요, 마스. " "설마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어리광을 부릴 생각은 아니겠지요 ?" "당신에게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면 누구에게 부려 보죠? 자, 이야기를 해 줘요. 그렇게 서 있지만말고 여기 앉으세요, 언제나처럼. " 나는 시키는 대로 침대가에 걸터앉았으나, 회복기에 있는 미의 여신 옆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 빨리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 줘요. 스티븐슨의 "보물섬"이나 "유괴"보다 훨씬 더 멋지고, 디킨즈의 "친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요. 그들의 소설은 말을 해 주지 않는다고요, 마스. " 도대체 나는 그녀의 건강 때문에 항상 꺾여야만 된단 말인가? "앤, 어떤 얘기가 좋을까요? 자바의 이야기 ? 아니면 유럽의 얘기 ? " "당신 좋을대로 하세요. 나의 귓가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듯이 얘기해 주는 당신의 목소리가 좋아요." "어디 나라 말로? 자바어 ? 네덜란드어 ?"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시작해 줘요." 나는 얘깃거리를 찾기 시각했다. 준비는 전혀 없었다. 이야기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스스푸낭 아망크라트 4세의 왕비와 라민 스쿠로의 사랑 이야기를 생각해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이야기는 잔혹해서 그녀의 건강에 해로울 것이 뻔했다. 나는 마르티네 의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의를 받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즐거운 얘기를 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시무시한 내용은 금믈입니다. 이 아가씨는 참으로 기묘한 일이지만, 육체나 지능의 발달은 정상적인데, 정신 연령은 아직 열 살짜리 어린애와 같아요. 밍케씨, 당신이 그녀의 좋은 의사가 되어 주는것입니다.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당신밖에는 없읍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완전한 믿음을 갖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을 안네리스는 꿈꾸고 있읍니다. 그 원인은 너무나 일찍 여러 가지 책임이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부담이 없는 자유롭고 느긋한 생활을 그녀는 동경하고 있어요, 밍케씨. 저런 미녀를 망쳐서는 안됩니다. 버티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녀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 줄 수가 있읍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생각나는대로 나는 얘기를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결말의 이야기가 될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등장 인물은 적당히 표절하고, 각 인물에게 얘기를 마무리짓게 할 생각이었다. "멀고 먼 어떤 나라에." 나는 시작했다. "앤, 모기 소리가 시끄럽시 않나요?" "아뇨. 하지만 어째서 모기가 그 먼나라 얘기에 나오지요?" 안네리스는 그렇게 말하다 방울이 울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이가 촛불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멀고 먼 그 나라에는 이곳처럼 모기는 없었어요. 모기를 잡아 먹으려고 벽을 기어다니는 도바뱀도 없읍니다. 깨끗한 나라였지요. 그 나라는 너무나 깨끗했옵니다. " 언제나처럼 안네리스의 시선은 뚫어질 듯이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병을 앓는 눈동자였다. ".....그 나라는 땅이 비옥해서 언제나 초록빛으로 넘쳐 있었읍니다. 심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열매를 맺었어요. 해충 따위는 전혀 없었지요. 질병도 가난도 없읍니다. 사람들은 모두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읍니다. 누구나가 노래와 춤을 사랑하고, 그것이 또한 능숙했읍니다. 모두 제각기 말을 갖고 있었읍니다. 빨강, 하양, 까망, 노랑, 파랑, 갈색, 회색, 분홍색 말들이 있었는데 얼룩말은 한 마리도 없었어요." "어머, 참 우습다 !" 안네리스는 웃음을 참으며 혼자 조그맣게 되풀이했다. "파랑 말과 검정 말이 있었읍니다." "그 나라에 매우 아름다운 공주님이 한 분 있었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가 없었어요. 피부는 섬세해서 마치 상아빛 빌로도처럼 매끄럽고, 눈동자는 샛별처럼 빛나서 모두들 눈이 부셔서 처다볼 수가 없을 정도이고, 산의 능얼처럼 뚜렷한 속눈썹이 그 새벽 하늘의 샛별을 감싸고 있었어요. 몸매는 모든 여성의 부러움을 샀읍니다. 목소리는 달콤해서, 그 목소리를 듣고 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읍니다. 그런 미녀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어요. 그녀가 한번 미소지으면 아무리 악한 사나이라도 금방 사랑을 느꼈지요. 웃으면 희고 빛나는 이가 드러나 보였고, 그녀의 숭배자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읍니다. 화가 나면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고, 얼굴은 홍조를 띠었어요,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러면 그녀는 한결 더 아름다와지고 매력적이 되었읍니다.......어느 날 그녀는 하얀 말을 타고 정원을 한바퀴 산책하고 있었읍니다. " "그 공주님의 이름은요? " 나는 아직 알맞는 이름을 생각해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무대가 유럽인지 동인도인지, 또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인지 그때까지도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주님을 보고 정원의 꽃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줄기를 굽혔읍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도저히 맞설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게 되었지요. 꽂들은 빛깔을 잃고 창백해졌읍니다. 공주님이 지나간 다음에 가까스로 그들은 고개를 들어 햇님을 보고는 불만을 털어 놓았읍니다...... 오오 ! 우리들의 위대한 태양신이여 ! 무엇때문에 우리들은 이렇게 치욕을 당해야만 합니까? 당신은 옛날에 자연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로 우리들을 지상에 보낸 것이 아니었나요? 그리고 인간들의 생활에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는 임무를 우리들에게 주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우리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존재하다니 !" "햇님은 그 불만을 듣고 창피해서 얼른 두터운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어요.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슬픔에 젖은 꽃들을 심하게 흔들어댔읍니다. 얼마 뒤 비가 내려서 형형색색의 꽃잎들을 지게 했읍니다." "공주님은 그녀가 지나온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산책을 계속했어요. 비도 바람도 공주님에게 훼방을 놓을 용기는 없었읍니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은 멈춰 서서 감탄의 소리를 질렀지요......" 언뜻 보니까 안네리스는 잠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먼지떨이를 들어 침대에서 모기를 쫓고 모기장을 치려고 했다. "마스." 갑자기 안네리스가 눈을 뜨고 내 손을 잡았다. 그 바람에 또다시 나는 침대 끝에 앉아 중단된 이야기의 다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요. 공주님은 말을 타고 산책을 계속했어요.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이 자신을 저 말로 변신시켜 주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공주닌 자신은 그들의 감정을 알 턱이 없었지요.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믿고 있었어요. 단 한번도 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더구나 자신이 절세미녀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읍니다." "그 공주님의 이름은요?" "글쎄요?" "이름, 그녀의 이름 말이에요." 안네리스는 재촉했다. "그녀의 이름은 안네리스가 아닌가요?" "맞아요. 그녀의 이름은 안네리스라고 했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안네리스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많은 옷을 갖고 있었읍니다. 가장 아끼는 것은 검은 빌로도의 이브닝 드레스로, 낮이고 밤이고 할것없이 그 옷을 입고 있었읍니다." "어머나 ! " "공주님은 아름다운 사랑......하늘 나라 신들의 유명한 사랑이야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하고 있었음니다. 남자답고 잘생기고 용감하고 신사보다도 더 고귀한 왕자님이 나타나기를 꿈꾸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꿈이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잘생기고 남자다운 왕자님이었지요. 다만 그는 말을 갖고 있지 못했읍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을 탈 줄도 몰랐읍니다." 안네리스가 우습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그는 임대용 이륜 마차를 타고 왔읍니다. 허리에는 칼도 차고 있지 않았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한 번도 전쟁에 나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연필과 펜, 그리고 종이가 있을 뿐이었옵니다." 또 안네리스가 웃었다, "왜 웃습니까?" "그 왕자님의 이름은 밍케라고 하나요?" "그래요. 밍케라고 합니다." 안네리스는 눈을 감았다. 손은 내 팔을 꽉 움켜쥔 채였다. 내가 가버릴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착한 왕자님은 마치 개선이라도 한 듯이 공주님의 궁전으로 들어갔읍니다. 두 사람은 얘기를 주고받았음니다. 공주님은 곧 그를 사랑하게 되었읍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안네리스는 항의했다. "왕자님이 먼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구요 ! " "그렇습니다. 왕자님은 잊고 있었읍니다만, 그가 먼저 공주님에게 키스를 했읍니다. 공주님은 그것을 왕후에게 일러 바쳤읍니다. 왕후에게 왕자님을 꾸짖어 달라고 일렀던 것은 아닙니다. 왕자님을 왕후에게 인정받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왕후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읍니다." "당신의 얘기는 약간 틀렸어요. 공주님의 어머니는 진심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어요. 화를 내셨다구요." "정말로 화를 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 "이렇게 말했어요. '왜 고자질을 하지. 네 쪽에서 그의 키스를 기대하고 있었으면서'라고요." 이번에는 내가 웃음을 참아야 할 차례였다. 안네리스의 부푼 마음을 꺾지 않기 위해 나는 황급히 애기를 계속했다. "왕자님은 참으로 멍청하군요. 별써 두 번이나 틀렸으니까요. 사실은 공주님은 그로부터 키스를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말이에요. 그녀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왕자님이 나타났어요. 그는 말을 탈 줄 몰랐어요. 아니, 오히려 말을 무서워하고 있었어요. 그가 다가와서 공주님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키스를 했다구요. 이것이 진실이라구요." "그러나 공주님은 싫다고는 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샌들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거짓말 ! 당신은 거짓말장이야 !" 안네리스는 힘껏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얘기가 사실에서 벗어난 것에 항의했다. 그 기세에 이끌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팔 속으로 쓰러졌다. 심장이 거친 바람에 일어난 파도처럼 심하게 두근거렸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올라와 의사로서의 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게 했다. 무의식 중에 나는 그녀의 포옹에 응했다. 안네리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나의 숨결도 거칠어져 있었다. 어쩌면 숨결이 거칠어진 것은 나 혼자였는지도 모르지만, 무아경에 빠진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무(無) 속으로 소멸한 것처럼 느껴졌다. 존재하는 것은 안네리스와 나뿐으로, 어떤 힘에 의해 한쌍의 원시동물로 변한 우리들뿐이었다. 그리고나서 우리들은 빈껍질처럼 축 늘어져서 나란히 누웠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상실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의미가 없는 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커먼 덩어리 같은 것이 마음속에 나타났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안네리스가 또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침묵. 우리들은 적대하듯이 서로에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적대 ? "후회하고 있어요?" 내가 크게 숨을 내쉬자 안네리스는 그렇게 물었다. 그렇다.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교양도 분별도 있고, 그녀를 의사로서 돌보아야 할 처지에 이린 일을 벌이다니 ! 검은 덩어리가 점점 더 부풀어갔다.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또 다른 하나의 후퇴가 일었다. 안네리스는 대답을 재촉했다. 일어나서 침대에 앉자 내 몸을 세게 흔들어대며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다만 한줌, 조금 전보다 더욱 기다란 한숨만이 나의 대답이었다.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얼굴을 나에게로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가 나의 대답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 주세요 !" 안네리스는 강요했다. 나는 그녀 쪽을 보지 않고 물었다. "앤, 내가 첫번째 상대는 아니지요? " 안네리스는 나를 뿌리치고 침대에 쓰려졌다. 그리고 나를 등지고 벽쪽을 향해 흐느껴 울었다. 가혹한 질문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나는 그녀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그냥 흐느껴 울고 있었다.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은 후회하고 있군요." 안네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나는 내가 취했어야 할 행동을 생각해냈다. "미안해요, 앤." 그렇게 말한 다음 나는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듯이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한참만에 그녀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자신을 격려하면서 쥐어짜듯이 말했다. "어느 날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물을 것이라고 말이에요. " 안네리스는 한층 더 평온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그런 길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는 모든 용기를 다져 왔어요.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지만 나는 아직 두려워요. 당신이 떠나버리는 것이 무서워요, 마스. 나를 버리고 가실건가요? " 그녀는 여전히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겠어요, 안네리스." 하고 위로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응." 안네리스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나에게 등을 돌린 채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단락을 지어 그녀가 말했다. "마스, 당신에게 미안해요. 첫 번째 상대가 아니어서요. 하지만,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사고였어요. 피할 수 없는." "첫 번째 상대는 누구지 ?" 나는 쌀쌀맞게 물었다. 한참동안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원망하실 작정이세요?" "그가, 누군데?" "부끄러워요." 그녀는 계속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나는 내가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짐승 같은 인간 !" 그녀는 벽을 두드렸다. "로베르트 ! " "로베르트라구 ? " 나는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내뱉었다. "슬르호프하고? 설마하니 ! " "슬르호프가 아니에요. " 또 다시 안네리스는 벽을 쳤다. "그가 아니라구요. 메레마예요. " "당신 오빠가 ? "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네리스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난폭하게 그녀를 붙잡아 똑바로 눕혔다. 그녀는 황급히 팔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은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거짓말이야 ! " 그런 식으로 그녀를 다루는 것이 당연한 내 권리라도 되는 듯이 나는 안네리스를 힐책했다. 안네리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은 아직도 팔로 가리고 있었다. 내가 그 팔을 떼어내려고 하자 심하게 저항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얼굴을 감추지 말아요." "당신에게 부끄러워요.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부끄럽구요." "그하고 몇 번 관계했지?" "한번뿐이에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사고였어요." "거짓말이야 ! " "거짓말이면 나를 죽여요." 안네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믿어 주지 않는다면, 살아 있어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당신도 진실을 알게 될 때가 올거예요." "로베르트 메레마 외에는?" "없어요. 당신뿐이에요." 나는 안네리스를 놓아 주었다. 충격적인 그녀의 고백에 대해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것이 현지처 가족의 일반적인 도덕 수준일까? 나는 거의 "예스"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그때 쟝 마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지식인은 먼저 그 머릿 속에서 편견을 버리고 진실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쟝이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하는 모습이 떠을랐다. "밍케, 그렇게 말하는 자네의 도덕 수준은 어떤가? 그녀들보다 높다고는 할수없을 걸세."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렇다. 안네리스가 밍케보다 비열하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참동안 우리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안네리스가 입을 열었다. "마스, 어떻게 해서 그런 사고가 생겼는지 나한테 설명하게 해줘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평온해져 있었다. 안네리스는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흐느끼던 모습과는 반대로 의연해져 있었다. 다만 아직도 눈만은 오른 팔로 가리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 일이었는지 날짜와 요일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벽에 붙은 달력에 붉게 표시해 놓았어요, 당신도 보이죠? 약 반년 전의 일이었어요. 마마가 나한테 다르삼을 찾아오라고 했어요. 모두의 얘기로는 다르삼은 마을에 있다고 했어요. 나는 애마를 타고 그를 찾으러 갔어요.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나는 마을에서 마을로 찾아다녔어요. 마을 사람들도 함께 찾아 주었구요. 하지만, 다르삼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 때 누군가가 다르삼은 지금 밭에서 땅콩 작황을 조사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어요. 나는 말의 방향을 바꿔 땅콩밭으로 가보았지요. 하지만 그곳에도 그는 없었어요. 그 근처에는 키큰 나무도 없었는데, 그의 모습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다르삼은 항상 아래 위 모두 검은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얼른 눈에 띄는데 말이에요. 결국 그는 땅콩밭에도 없었어요. 그 뒤 지나가던 한 어린애가 다르삼은 늪 건너편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어요, 그때서야 나는 겨우 다르삼이 새로운 실험용 밭을 개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지요. 그것은 그메까지는 깊은 풀숲이었지만, 밭으로 만들어 마마가 호주에서 새로 수입해온 가축의 사료용으로 쓸 목초를 심기로 계획되어 있었어요. 그것은 주위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에 가로막혀 있어서,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어요. 갈대를 자르고 난 그루터기가 있던 것을 당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가자고 했을 때 내가 가기를 거절한 그 장소 말이에요?" "아아, 기억하고 있소." 빽빽하개 자란 높은 갈대 숲이 있었다. 틀림없이 그때 안네리스가 두려워 몸을 떨던 것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나는 말의 방향을 바꿔서 늪의 반대쪽에서 다르삼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어요. 아무 대답도 없었어요. 양쪽의 갈대를 비집듯이 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자, 다르삼이 아니라 로배르트가 나타났어요. '앤' 로베르트 오빠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어요. 그리고는 총과, 그날 아침 사냥에서 잡은 집오리를 끈에 묶은 채 땅에 내던졌어요. '다르삼은 조금 건에 이곳을 지나갔어.' 그가 말했어요. '마마에게 간다고 하더군. 오늘 아침 9시에 마마와 만날 약속을 깜빡 잊고 있었다면서 급히 갔다구' 그 말을 듣고 나는 안심했어요. '오늘은 많이 잡았어 ?' 나는 로베르트에게 물었지요. 그는 집어던진 집오리를 다시 집어들어 내게 보였어요. '이런 것이야 별 것 아니지. 그것보다 오늘은 희귀한 것을 잡았지. 앤, 말에서 내려오너라.' 로베르트는 몇 미터 걸어가서 검은 털로 덮인 커다란 삵괭이 시체를 주웠어요. 나는 말에서 내렸어요. '좀처럼 보기 힘든 삵괭이지 ?' 그가 말했어요. '아마 이것이 사향고양이라는 것일 거야.' 나는 그 삵괭이의 부드러운 털을 만져 보았어요. 머리를 무엇인가로 강타당해 있었어요. '그래, 총을 쏜 게 아니야. 나무 밑에서 기분 좋게 자는 녀석을 한방에 때려 죽였지.' 갑자기 그의 더러운 손이 나의 어깨를 움켜잡았어요. 나는 화를 냈어요. 미친 물소처럼 덤벼 들었어요. 나는 균형을 잃고 갈대 숲 속에 넘어졌어요. 만약 그때 뾰죽한 갈대 그루터기가 있었다면 그것에 찔려 죽었을 거예요. 로베르트는 내 몸을 덮쳐 누르며 왼팔로 끌어안고 내 입을 틀어 막았어요. 나는 죽이는 줄만 알았어요.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그의 얼굴을 할퀴었어요. 그러나 그의 힘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어요. 죽을 힘을 다해 마마와 다르삼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의 손바닥에 막혀 버렸어요. 나는 그때서야 겨우 오빠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는 마마의 경고를 이해할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어요. 훨씬 이전부터 로베르트는 파파의 유산을 차지하려 들지 모른다고 마마는 오빠의 탐욕을 비웃고 있었어요. 그때 문득 그는 나를 죽이기 전에 언저 욕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베르트는 내 옷을 찢었어요. 입은 틀어막힌 채였구요. 그때 라의 애마인 '바우크'가 큰소리로 힝힝거렸어요. 얼마나 나는 바우크가 도와주기를 바랬는지 몰라요. 로베르트는 꽉 오무린 나의 두 다리를 억센 무릎으로 벌리려고 했어요. 그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재난이었어요, 마스." 안네리스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그녀가 얘기한 광경을 내 머릿 속에서 재현시키고 있었다. "바우크가 다가와서 로베르트의 엉덩이를 물었어요. 오빠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 일어났어요. 한동안 말은 그를 쫓아다녔어요. 로베르트는 갈대 숲 속으로 도망쳤어요. 나도 총을 들고 쫓아가서 그를 쏘았어요. 맞았는지 어떤지는 몰라요. 그의 바지에 피가 배어나와서 넓적 다리에서 무릎께로 흘러내리는 것이 먼발치로 보였어요. 바우크한데 물린 상처였어요. 나는 총을 버렸어요. 온몸이 쑤셔댔어요, 입 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나는 바우크의 등에 올라탈 힘이 없었어요, 하지만 마을 가까이까지라도 가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말등에 올라탔지요. 흐트러진 내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안네리스 ! " 나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믿을께, 앤. 당신 말을 믿겠어요. " "당신이 믿어 주는 것, 그건 바로 나의 생명이에요, 마스. 처음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또 다시 우리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때 마르티네 의사가 한 얘기가 의심스러워졌다. 안네리스는 이미 완전한 어른인 것이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죽는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 "애기를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사태가 좋아질 것도 아니구요, 만약 마마가 그것을 알게 되면, 로베르트는 틀림없이 다르삼한테 죽음을 당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지요. 마마도 나도 말이에요. 아무도 이 농장을 가까이하지 않게 될 거예요, 이 집은 악마의 저택이 되고 말 거예요. " 마지막으로 하는 말에서는 굳센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힘은 곧 사라졌다. 안네리스는 나에게 매달려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마스, 내가 나쁜 여자일까요?" 나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다시 우리들은 한 쌍의 원시 동물로 변해서 그대로 침대에 뒹굴었다. 그때는 이미 마음 속에 검은 덩어리 따위는 없었다. 나무 인형처럼 우리들은 그냥 꽉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안네리스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나는 마마가 방으로 들어와 잠시 침대 앞에 멈춰 서서 모기를 좇으며 중얼거리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마치 두 마리의 개처럼 끌어안고 있구면." 그리고 나서 마마는 우리들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는 모기장을 내리고 촛불을 끈 뒤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나는 비몽사몽간에 느끼고 있었다. 제14강 영혼과 철판 급우들은 여전히 나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단 한사람 나에게 다시 접근해 온 것은 얀 다페르스테였다. 이전부터 얀은 나의 숭배자였고 나를 행운아, 좌절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5월의 사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얀은 공부벌레였으나 성적은 언제나 나보다 밑이었다. 학교에서 매일 쓰는 돈은 모두 내 주머니에서 나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친형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마 그 용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같은 반이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항상 나에 대한 소문을 전해 주었다. 그 때에 내게 대한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악의에 찬 행동을 자세히 알수가 있었다. 나를 교장 선생님에게 밀고한 것이 슬르호프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역시 얀을 통해서였다. 나는 그런 음모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퇴학시키고 싶으면 시켜도 좋다. 어차피 이 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학교를 대신해 줄 장소는? 적어도 여기보다는 자유롭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교장 선생넘이 나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아무래도 요즈음 자네는 말수가 적어지고, 급우들에게서 따돌림을 받는 것 같은데 왜 그런가?" "저는 모두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좋아하도록 강요 할 수는 없잖습니까 ?" 나는 대답했다. "그들이 자네를 멀리하고 있는 것은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걸세."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로서는 잘 모르겠옵니다. 다만 저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읍니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은 로베르트 슬르호프입니다." "이유는 자네가 이미 그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데 있네. 자네는 이미 그들의 동료가 아니야. 그들과는 다르단 말이지." 나는 곧 눈치챘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퇴학시키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다. 그것에 대처할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구태여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어.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게 된다면 ? 그것이 어쨌다는 거냐 ? 학교라는 곳은 결국 매일의 시간표를 메꾸어 가는 곳에 불과하다. 졸업을 해도 좋고, 설사 졸업을 못한다 해도 큰일날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자네가 행실을 고쳐 주기를 바라고 있네. 장차 자네는 중요한 지위에 오를 인물이야. 자네는 유럽의 교육을 받아 왔네. 장차 유럽에서 상급 학교에 진학할수도 있을 걸세 자네는 부빠티가 되고 싶지 않나?" "되고 싶지 않습니다." "되고 싶지 않다고?" 짧은 순간이지만 교장 선생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아, 그렇군. 자네는 작가 지망생이었지. 벌써 몇 작품 발표도 한 모양이더군. 아니면 저널리스트 지망생인가. 어쨌든 이 사회에서 살아 나가려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되네. 밍케, B시의 부빠디 님에게 내가 꼭 편지를 써야 하겠나? 아니면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에게 쓸까." "교장 선생님께서 제 일 때문에 편지를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 자네의 행동을 편지로 써도 상관없단 말인가?" "저는 별로 상관이 없읍니다. 그것은 교장 선생님 자신의 문제지, 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요." "관계가 없다고?" 교장 선생님은 더욱 날카로운 눈초리로로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을 하고 곤혹스러운 듯이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누구를 상대로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 밍케 ? 아니면 맥스 트레나르?" "똑같습니다. 이름은 달라도 어느 쪽이나 같은 하나의 인격체니까요." 교장 선생님은 가도 좋다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나를 부르지 않았다.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도 호의적인 시선에는 번함이 없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나를 멀리하고 있는 모양으로, 내가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수업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전교 토론회는 교장선생님에 의해 동결된 채로 있었다. 나 자신도 놀라고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쓴 작품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점점 더 많이 발표되고 있었다. 하기야 내게 그동안 원고료 따위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았다. 만일 집필자인 내가 쁘리부미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은 단번에 흥이 깨져 속았다고 분개할 것이다. 원주민인 주제에 ! 그런 사태에 대해서도 나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것을 세상에 폭로하려고 하는 슬르호프의 계획을 얀 다페르스테가 통고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 한달 동안 나의 생활에서 일어난 일은 교장 선생님의 호출사건만이 아니었다. 얀 다페르스테가 슬르호프의 계획을 은밀히 가르쳐 준 지 얼마 안되어, "슬라바야 일보" 사에서 호출이 왔다. 그 신문사 사장이며 편집국장 마르턴 네이만씨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함께 가 달라는 나의 권유를 얀 다페르스테는 거절하지 않았다. 마르빈 네이만씨는 우리들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하고 독자로부터 보내 왔다는 투서를 내게 보여주었다. 바로 다페르스테가 알려 준 그대로였다. 그것은 맥스 트레나르가 원주민에 불과하다는 투서였던 것이다. 나와 다페르스테는 그 필적을 본 적이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하는 듯이 얀 다페르스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투서를 읽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 나를 이곳에 불렀읍니까 ?"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이 투서 내용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 "그럼, 당연히 손해 배상을 청구해야겠지요." 네이만씨는 싱글싱글 웃었다. "청구서는 이미 준비해 두었읍니다. 우리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벌써 알고 있겠지요? " "모르겠읍니다." "트레나르씨, 우리들의 요구는 당신에게 우리 신문사의 촉탁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상임 촉탁입니다." 그렇개 말하고 네이만씨는 한 장의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그것은 영수증이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의 원고료조로 받았다. "앞으로는 상임 촉탁으로서 좀더 많은 사례금을 드리겠읍니다." "촉탁으로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당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됩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마차는 우리들을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얀 다페르스테는 나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난생 처음 식사를 하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교장 선생님과 "슬라바야 일보"의 호출에 뒤이은 세 번째 사건은, 마르티네 의사와의 면담이었다. 나는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길로 마르티내 의사를 만나러 갔다. 그때도 얀 다페르스테가 동행했다. 마르티네 의사는 자기 집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와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닥터." 그는 말을 꺼냈다. "환자의 상태는 어떤가요? " "양호합니다." "그건 어느 정도를 말하지요?" "상당히 건강을 회복해서 이미 예전처럼 일을 하고 있읍니다. 한가한 시간에는 독서도 하게 되었구요. 밭이나 마을을 돌아볼 때는 말을 탑니다. 독서는 내가 만든 계획표에 따라 열심히 하고 있읍니다. 가끔 마마와 셋이 느긋하게 앉아서 축음기로 음악을 들을 때도 있읍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봐서는 건강을 회복한 것 같군요." 그 동안 얀 다페르스테는 혼자 베란다에 남아 있었다. "겉으로만 그렇다구요? 그럼, 선생닝께서는 아직 기대한 만큼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오, 밍케씨. 나는 요즈음 여섯번인가 그녀를 진찰했읍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세 번째 진찰이 끝난 뒤 내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몸이 떨리고 소름이 돋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읍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지요. 이 아름다운 처녀의 내부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녀의 의식 밑바닥에는 무엇인가 정상이 아닌 것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시 나는 연구를 시작했지요. 처음에 생각한 것은 그녀가 나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소. 나의 생김새가 그녀의 눈에 추잡한 동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거울로 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읍니다. 오른쪽 눈에 뾰쪽 안경을 끼게 된 것밖에는 10년 동안 나는 달라진 것이 없읍니다. 내 얼굴은 그다지 못생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오히려 미남 축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그다지 뛰어난 미남은 아니지만요." "아닙니다. 선생님은 상당한 미남이십니다." "허어, 고맙군요. 나는 이 정도로 충분해요. 진짜 미남은 당신이지요? 그러니까 안네리스는 내가 아닌 당신을 선택했지요." "농담 그만하세요, 선생님." "아니, 사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닥터 밍케." 마르티네 의사가 웃었다. "당신을 알고나서 겨우 그녀가 몸을 떠는 것이 나의 생김새 탓이 아니라는것을 알았읍니다. 아마도 그녀의 경련의 원인은 내 피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흰 피부에 말이오." "그녀의 아버지도 흰 피부입니다. 순수한 유럽인이니까요." "글쎄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피부가 흰, 순수한 유럽인이지요. 좋습니다. 밍케씨, 내가 당신을 만나자고 한 것은 그 문제에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맞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순종 유럽인이죠.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를 미워하고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증오하는 정도가 잤으냐 얕으냐 지속적인 것이냐 일시적인 것이냐는 둘째 치고 말입니다. 물론 통계가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아이들이 많이 있읍니다. 애 그들이 부모를 증오하는 원인은, 가령 부모 자신의 행동 때문이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피부색이 같은 경우에는 피부색이 증오의 원인이 되는 일은 물론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안네리스도 흰 피부입니다." "그렇소. 쁘리부미의 섬세함을 가진 흰 피부지요. 한때는 나도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꿈꾼 적이 있었소. 우습지요? 닥터 밍케, 유감이지만 그녀는 나와 비교하면 너무 어립니다. 어림도 없는 꿈이었지요. 기분 나빠하지는 마세요. 농담이니까요. 어쨌든 문제는 그녀가 나를 보고 경련을 일으켰다는 데 있읍니다. 말씀대로 그녀도 피부가 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판단했읍니다. 즉 어떤 외적인 영향으로 저항할 수 없는 굉장히 강한 힘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만들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을 뱃 속까지 철저한 쁘리부미라고 믿고 있으며, 어쩌면 그녀는 어머니 때문에 유럽인이 모조리 더럽고 인품이 비천한 인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냐이와 안네리스 본인과 면담을 해 보고 나는 그런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읍니다. 과연 냐이는 특별한 여성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나는 당신에게 냐이는 무의식 속에서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다른 쪽으로는 실패했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자녀들의 양육법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갈등 속에 자식들을 말려들게 했읍니다. 그것은 단순히 경솔했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되돌이킬 수 었는 결정적인 실패였던 것입니다. 밍케씨. "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부에게 얀 다페르스테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일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강요된 것을 모조리 받아들여, 자신의 감각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갔읍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계속했다. "그러나 마마는 결코 유럽인을 증오하지만은 않습니다. 유럽인과 많은 거래를 하고 있으며, 선생님 같은 의사라든가 변호사와 교제하고 있읍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책까지 읽고 있읍니다." 내가 한 마디 했다.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이익이 될 경우에 한정되어 있읍니다. 지금 그녀와 투앙 메레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읍니까. 투앙 덕택에 그녀는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줄곧 투앙을 경계하고 불신감을 버리지 않았읍니다. 이곳 상류사회 사람들은 모두 투앙 메레마와 현지처와의 비극적인 애기를 알고 있어요. 모르는 것은 안네리스 한 사람뿐입니다. 냐이는 무의식 중에 안네리스를 제2의 자신으로 만들었읍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떠나서 스스로 설 수가 없읍니다. 주도권은 항상 어머니에게 빼앗기고, 어머니의 말은 절대적인 명령이 되어 그녀를 구속합니다. 불쌍한 처녀지요. 그토록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도 말입니다. 밍케씨, 그녀는 혼란 상대에 빠져 있음니다. 그녀의 중추 신경은 어머니의 것과 똑같습니다." 나는 놀라움을 느끼면서 마르티네 의사의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린 분석은 내게는 낯설고 복잡한 것이었으나, 방법이 너무나도 직접적이어서 매우 흥미로왔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꿰뚫을 수 있는지 나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냐이는 지나치게 개성이 강합니다. 그것에는 폭넓은 지식이 바탕으로 되어 있지만, 동인도라고 하는 이 무지한 정글 속에서 살아나가는 데는 그런 학식 따위는 쓸모가 없읍니다. 모두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압도당해 꼼짝 못하게 된다는 선입관 때문이지요. 나 같은 사람조차 압도당해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만일 그녀가 평범한 현지처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정도의 재산과 미모를 갖고 있고 더구나 주인은 실종 중이니까 틀림없이 많은 사내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전혀 그린 일이 없읍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지요. 내가 알고 있는 한 유럽인도 혼혈아도 누구 한사람 유혹의 손을 뻗친 사람이 없읍니다. 물론 쁘리부미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을 턱도 없읍니다만. 그들은 암호랑이와 상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음니다. 한번 포효하기만 하면 귀뚜라미 같은 사내들은 모조리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버릴 겁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입니까?" "당신도 한번 생각해 보시오. " "저 같은 고등학교의 학생이 그런 일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가장 깊이 관련된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내가 얘기를 지어서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지식인이오. 내가 틀렸다면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문에 만나자고 했으니까요. 당신 쪽이 그들과는 훨씬 더 가깝습니다, 본디는 당신이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다만 조그만 단서를 제공하려는 데 불과합니다. 당신은 이미 어른입니다. 그리고 안네리스를 도울수 있는 것은 당신밖에는 없어요. 그 처녀는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읍니다. 사랑이야말로 어떤 것보다도 강한 힘의 원천입니다. 사랑은 인간을 변하게 할 수가 있읍니다. 인간을 파멸시켜 폐인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또한 도와 주고 재생시킬 수도 있어요. 당신에 대한 애정, 그것만이 그녀를 어머니로부터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시킬 수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읍니다. 요즈음의 진료와 그녀의 헛소리나 눈의 광채로 판단하건대, 그녀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걸고 있어요. 이것은 나의 억측도 비약도 아닙니다......." 그의 분석은 점점 더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그것은 물론 얘기가 나 개인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안네리스가 어머니에게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내부에 번화가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하지만, 모든 일의 탄생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냐이 자신이 무의식 속에 그런 새로운 씨앗을 자기 자식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당신과 딸의 관계를 반대하지 않은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반대하기는커녕 냐이는 당신들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밀어 주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 처녀에게는 무엇인가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 있읍니다." (마르티네 의사의 얘기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지만, 내 지식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다.) "당신의 연인 안네리스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문제 때문에, 그것이 줄곧 그녀의 섬세한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온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길은 열려 있읍니다. 길을 열어 준 것은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아무래도 냐이는 당신을 사위로 삼기를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그런 냐이의 뜻에 따를 것 같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처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았어요. 만일 내 눈이 들리지 않았다면 안네리스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읍니다. 상식으로 보면 그녀는 행복감에 젖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오히려 몹시 괴로와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당신을 잃는 것,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밍케씨, 그녀의 심리 상태는 지극히 복잡합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은 미쳐버립니다.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정서 불안정에서 신경 이상을 일으켜 발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얘기를 중단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과 목덜미를 문질렀다. "덥군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일어나더니 방구석으로 걸어가서 신풍기 태엽을 감았다. 선풍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방안이 시원해지는 것 같자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임상 예라고 생각한다면, 이처럼 흥미있는 것은 없읍니다. 하지만 그만한 젊음과 미모가 불안이나 공포에 구속받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정말 딱합니다.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읍니까? " "글쎄요, 그 공포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 잘모르겠읍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말하겠읍니다. 어쩌면 이브 이래로 지금까지 미모를 가진 여성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잘못이나 결함도 덮어주고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떠받들려지고 귀중한 존재로 여겨져 왔읍니다. 그렇지만 어떤 미모도, 인생 자체도 그렇기는 하지만, 공포에 지배당해서는 무의미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면, 문제는 그녀를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읍니다, 선생님." "알겠다고만 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내 의견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심리학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나에게는 의견이 없읍니다." "그럴 리가 있읍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주시지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마르티네 의사는 말을 제속했다. "내 말 잘 들으세요, 밍케씨. 학문의 세계에 '부끄럽다'는 문구는 없읍니다. 틀렸다든가 실패했다든가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읍니다. 잘못이나 실패는 오히려 진리를 보다 견고하게 해 주고 결과적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도와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선생님. 내게는 의견 같은 것이 없읍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읍니다. 틀림없이, 설사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 할지라도 어면 의견을 갖고 있는 법입니다. 자, 말해 보세요." 그는 맑은 회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손을 나의 어깨에 올려 놓고 말을 이었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나를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는 마세요." "선생님."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이 말씀 드린다면,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저 놀라고만 있을 뿐인데, 어떻게 결론 같은 말을 할 수가 있겠읍니까? 분명히 나도 안네리스와 마마에 대해서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읍니다. 특히 로베르트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나의 느낌으로는 의견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선생님이 지금까지 하신 말씀은 거의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선생님은 제가 그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읍니다. 제 말이 우습지요?" "아닙니다. 우습지 않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때로는 겸허한 태도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겸손 따위는 필요없읍니다. 하지만, 만일 내 태도가 검찰관처럼 보였다면,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문제는 당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옵니다." 선풍기의 회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방구석으로 가서 태엽을 감았다. "좋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 얘기를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당신이 집에 들어가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줄 것입니다. 먼저 당신을 잃는다는 공포에 대해서입니다. 그 문제는 완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읍니다. 제삼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당신에게 버림받을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녀는 금방 불안에 휩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기색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녀를 정말로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는 부서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는 책상 위에서 연필을 집어들었다. "이전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연필을 두 동강 냈다. "연필은 부러져도 다시 쓸 수가 있어요. 하지만 밍케씨,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는 안됩니다. 살아 있다고 해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나는 말했지만, 거꾸로 그녀를 죽이는 일도 당신은 할 수가 있어요. 그녀의 사랑을 배신하면 죽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지금까지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솔직하게 내 견해를 얘기했읍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심없이 말입니다. 구원자가 되느냐 살인자가 되느냐는 당신 마음에 달려 있읍니다. 이것을 당신에게 얘기함으로써 비로소 나의 마음도 가벼워졌읍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다시 의자에 앉아 부러진 연필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는 또 다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지금 말한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얘기가 아니라고 나에게 확신시키려는 것만 같았다. "알겠읍니다, 선생님." 내가 말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안네리스는 바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독립된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그녀는 지금 남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병에 걸린것은 새로운 인격을 탄생시키는 진통이 원인이었읍니다." 하고 마르티네 의사가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유럽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불신감이 끓어올랐다. 내 마음의 움직임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황급히 그는 덧붙여 말했다. "되풀이 해서 말하지만 밍케씨, 나의 해석이 반드시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반 정도 맞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하물며 백퍼센트 옳다고는 할 수 없읍니다. 다만 당신이 아직 자신의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내 얘기를 하나의 단서로 삼아 달라는 것 뿐입니다. " 그는 얘기를 한동안 중단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진 것 같았다. 솔직이 말해서 나도 마음을 놓았다. 최소한 나도 자유롭제 숨을 쉴 수가 있으니까. 처음부터 그가 나에게 퍼부은 것은 말의 돌팔매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맞아야 하는 나의 심중은 어떠했나 ! 마치 나를 철판으로 삼아 망치를 휘둘러 이해라는 이름의 강철을 만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선생님." 나는 엉겁결에 말을 했으나, 그것은 내가 영혼을 갖지 못한 철판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은밀한 의사 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소."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슴에 맺힌 것을 토해 내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소, 내가 한 말은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오. 몇 가지의 사실에 바탕을 둔 추측 말이오." 자신을 변호하듯이 아니면 사과하듯이 그는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 차래요. 당신이 얘기해 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겠소. 당신의 얘기를 들려 주시오. 밤에 당신은 어면 방에서 자지요?" 내가 난처해하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학교에서도 나에게 그런 실례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문에서는 부끄럽다는 생각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단 한푼의 값어치도 없읍니다. 밍케군, 나에게 협력해 주어야 합니다. 그녀의 또 하나의 공포를 게거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두 사람밖에는 없읍니다. 그러니까 대답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어디서 잡니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알겠읍니다. 당신은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한푼의 가치도 없는 관념에 묶여 있읍니다. 하지만, 반대로 당신이 부끄러워서 대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내 추측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읍니다. 냐이는 말의 안정을 바라고 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진실을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벌써 그녀와 침실을 같이 쓰고 있어요, 그렇지요?" 나는 더 이상 마르티네 의사의 얼굴을 뜩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는 황급히 덧붙였다. "당신의 사생활을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자로서 안네리스의 건강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과 냐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협력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나의 추측이 잘못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안네리스의 병을 고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읍니다. 물론 당신의 사적인 비밀과 환자의 비밀은 보장되고 지켜집니다. 나는 의사입니다. 자, 얘기해 주시지요." 내가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레모네이드를 갖고 다시 나와서 그것을 글라스에 따랐다. "왜 손수 이런 일을 하십니까? " "이 집에는 아무도 없읍니다. 나 혼자지요." "하녀나 하인은 없나요?" "하루에 세시간, 파출부가 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합니까? " "레스토랑 신세를 지고 있읍니다. 자, 얘기를 계속 할까요? 우선 한 모금 드세요. 얘기를 하려면 당신도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요. " 그렇게 말하고 마르티네 의사는 친근하게 웃었다. 나에게 용기따위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는 조언을 했다. "큰 마음먹고 자신을 삼인칭으로 바꿔 보는 겁니다. 당신도 그런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삼인칭이란 문법적 의미의 삼인칭은 아닙니다. 먼저 당신은 일인칭으로서 생각하고 계회하고 실행 명령을 내립니다. 다음에 이인칭으로서 일인칭의 당신이 실행하려고 한 일의 정당성을 판단하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거나 함니다. 물론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옵니다. 그럼, 삼인칭의 당신은 누군가? 그것은 타인으로서의 당신, 문제의 대상으로서의 당신입니다." 마르디네 의사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당신이 거울 속으로 보고 있는 실행자로서의 자기는 타인으로서의 자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자, 일인칭, 이인칭으로서의 당신이 거울에 비친 삼인칭으로서의 자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즌 애기를 하라는 겁니까?" 나는 또 다시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당신의 환자와 관계있는 일이라면."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그럼, 얘기할 생각은 없군요. 내가 문제를 제기하겠읍니다. 우선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자 시작할까요? 당신은 이미 안네리스와 같은 방에서 살고 있음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냐이는 그것을 금지하거나 그 일 때문에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냐이는 자기 자식의 행복을 위해 현명한 방법을 택했군요. 당신은 안네리스와 따로 잡니까? 아니면 같은 침대에서 잡니까 ? " "따로 자지는 않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읍니까?" "이삼 개월 전 부터입니다." "안네리스의 커다란 공포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군요. 그러니까 그녀와는 벌써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겠군요 ?" 나는 몸을 떨었다. "왜 그러지요? 여기가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앞으로 또 같은 사태에 직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모금 마시고 시작할까요?" "신생님, 화장실에 다녀오겠옵니다. " "그러시죠. " 그는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에도 뒤곁에도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묘지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욕실에서 나는 얼굴을 씻고 머리를 적셨다. 차가운 물이 상쾌해서 기분도 한결 개운해졌다. 뚝뚝 흘러내리는 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그곳에 있는 빗과 거울을 썼다. 거울에는 삼인칭의 밍케가 비치고 있었다. 다시 내가 그의 앞에 앉자 마르티네 의사는 바로 얘기를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긴장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나의 마음을 읽어내는 그의 관찰안은 점점 더 예리해져 갔다. 나는 다시 침착성을 잃어갔다. 도망치고만 싶었다. "자, 얘기하세요. 이제는 내가 질문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생각대로 얘기해 보세요.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또 길 안내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상관없읍니다. 당신은 이미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지요. 육체 관계도 있구요. 그리고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다른 남성이 먼저 스쳐갔던 겁니다." "선생님 ! " 나는 외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의 실이 끊기고 나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래요. 실컷 우세요, 밍케씨. 갓난애처럼 우는 겁니다. 태어났을 때처럼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 왜 나는 그렇개 울었을까? 나의 부모도 아니고 전혀 타인과 같은 사람 앞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비밀, 나와 안네리스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 "역시 내 추측이 옳았읍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그 처녀를 사랑하고 있읍니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상실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무엇인가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잃고 그것에서 오는 실망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미 순결한 처녀는 아니었지요. 그래요, 그렇게 울고 있어도 좋아요. 하지만 내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아직 질문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안네리스가 경험한 최초의 성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그녀에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추측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최초의 섹스 체험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지고, 그 사람의 성에 대한 관념을 결정하는 수도 있읍니다. 아니, 그런 표현은 적당치 않군요. 앞으로 그 사람의 성개념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묻겠는데, 그 최초의 상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보다 앞서서 그녀와 관계한 남성이 누군지 안네리스는 당신에게 고백했읍니까? 자진해서 먼저 그 애기를 했읍니까?" "안되겠읍니다, 선생님." 나는 비통하게 소리쳤다. "여기서 제 3의 밍케씨를 등장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 질문의 끝도 아닙니다. 누굽니까, 그 상대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자코 있는 것은 그 사람 또는 그들이 누구인지 당신은 똑똑히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아닙니다. 그 한 사람뿐입니다." "알겠읍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굽니까?" 마르디네 의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거침없는 질문이 번개처럼 나의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누굽니까? 그, 그렇다면 상대는 한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그가 누굽니까?" "아아, 선생님! " "알겠읍니다. 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그 인물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당신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고 있옵니까?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의 성적인 욕망을 운운하자는 게 아니고 평소의 행동에서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선생님. 나에게는 평가를 내릴 권리가 없읍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무엇이든 개인의 비밀, 또는 가족, 말하자면 가까운 장래에 당신도 그 일원이 될 가족의 비밀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가족 모두, 장래의 가족 전체에 대한 의리라는 말이군요." 나에게 여유를 주려는 듯이 마르티네 의사는 일부러 딴청을 부렸다. "어쨌든 그 인물이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읍니다. 그래요, 당신의 반응을 보면 대강 짐작은 갑니다. 당신은 아직 젊어요. 대단히 젊지요. 그런데 당분간 안네리스를 도울 수가 있는 사람이란 당신밖에는 없음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결코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만 말입니다. 이미 당신은 그녀의 나약함이 가져온 결과를 받아들일 도량을 갖고 그녀의 건강과 행복에 자진해서 책임을 지려 하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내버려두면 수많은 독수리들이 그녀를 덮칠 테니까요.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느 나라의 남자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합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결국 당신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녀의 좋은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원히 말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복잡하고 힘겨운 삶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과 맞설 수 있도록 사람은 점점 더 큰 용기를 갖지 않으면 인됩니다." 그의 얘기가 길어점에 따라 나의 머릿속에서 로베르트 메레마가 신이 나서 날뛰기 시작했다. 나를 비웃고 협박하고 곁눈질로 훔쳐 보며 주먹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 "그렇소. 바로 당신의 태도가 내 추측을 인증해 주고 있소. 나의 추측을 부정도 긍정도 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군요." "신생님, 상대는......그녀의 오빠인 로베르트 메레마입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레모네이드 글라스가 마루에 떨어져서 깨졌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마차까지 곧장 달려나갔다. 그 뒤에도 마르터네 의사는 몇 번인가 우노크로모를 방문했다. 보통 그가 오는 것은 저녁 때로, 냐이 온트슬로와 안네리스가 일을 끝낸 뒤였다. 그들은 뜰에 앉아서 잡담을 하거나 축음기로 음악을 듣거나 했다. 나는 마차를 타고 밖에서 돌아와 그의 모습을 보면 먼저 목욕하고 나서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충격적인 면담이 있은 뒤 ---그것에 관해서는 내 노트에 쓴 이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르티네 의사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점점 더 깊어지고 솔직해져 갔다. 나는 그를 단순히 노련한 의사라든가 고결한 인간성을 지닌 학자라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고, 내 속에 무엇인가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준 은인이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타인을 이해하는데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단지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교사로서 도움을 베풀기 위해서 말이다. 나중에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명명한 바에 의하면, 그는 바로 '인류의 친구' 였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애를 표시했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따금 나는 아무리 그것이 나의 권리 였다고 해도 그를 의심한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한동안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마르티네 의사의 나이는 40대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아무래도 노련한 50대 같았다. 붉은 기가 도는 얼굴은 언제나 생기에 차 있었으며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그의 젊음 앞에서는 주름따위는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그의 얘기는 하나 하나가 깊은 흥미로 함축되어 있었다. 그는 화술이 능란했고, 자기 얘기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어느 틈에 받아 적어서는 환자를 알고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삼고 있었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에 의한 것이고, 혹시 틀렸을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는 어느 정부요인 가족의 초상화 주문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집 주인은 베린다에서 어떤 영국잡지를 읽고 있었다. 얼마 뒤 그는 무엇인가를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가고 잡지는 펼쳐진 채로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얼핏 그 인쇄물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마르티네 의사의 글을 발견한 것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사건이었다. 글의 제목은 "새시대의 개막과 사회 변동에 따르는 병의 양상" 이었다. 컬럼 안에 '사회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행해지는 의료는 이미 중세의 의료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귀절이 있었다. 주인이 돌아왔기 때문에 잡지를 테이블에 되돌려 놓았으나, 나는 그 이후 마르티네 의사가 문필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와 같은 소설가가 아니라 자연과학 계통의 글이 전문이지만 말이다. 그날 저녁에 마르티네 의사가 우노크로모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전보다 좀더 자세히 그의 일거일동을 살펴보려고 했다. 더 이상 나는 그가 내 마음 속을 엿보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낼 필요가 없었다. 그때에도 그는 약간의 농담을 섞어가며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어떤 쌍동이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한 그릇에 밥을 먹고, 같은 공기로 물을 마시며 자랐다. 그뒤 그들은 얼굴은 꼭 같았으나 대조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각각 다른 욕구와 꿈에 따라 행동하개 되었다, 그들의 욕구도 꿈도 그 뿌리는 똑같은, 채워지지 않는 현실에서 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이한 이미지, 그렇게 되고 싶다는 이미지, 그것이 욕구가 되고 꿈이 되었던 것이다. 마르티네 의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나는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다. 함께 듣고 있는 마마와 안네리스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만일 마르티네 의사가 곧 이렇게 덧붙이지 않았다면, 두사람은 곧 따분한 얼굴을 지어 보였을 것이다. "이 안네리스양처럼 말입니다. 금전, 애정이 넘치는 어머니, 뛰어난 미모, 일에 대한 재능 등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갖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느끼고 있읍니다. 그 욕구는 정확하게 채워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될 수도 있어요.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잔혹하게, 그리고 용서없이 육체를 억압합니다. 감정도 이성도 그것에 지배되고 명령을 받습니다. 욕구불만이 많은 사람은 병자와 같고 심하면 착란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안네리스양에게 묻겠는데, 몸져 누울정도로 당신이 풀지 못한 소원은 도대체 무엇이었지요? " "없어요, 그런 것은, 정말이에요. " "그런데 왜 얼굴이 붉어졌을까요? 사실은 밍케씨 때문이 아닌가요?" 안네리스는 곁눈질로 나를 힐끗 보고 고개를 숙였다. "보신대로입니다, 냐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습지만, 될 수 있는대로 빠른 시일 내에 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십시오." 마르티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밍케씨, 이제 용기를 얻었읍니까? 배울 용기가 생겼느냐는 겁니다." 그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임대 마차가 한 대 도착했다. 마부의 손을 빌어 남자가 한 사람 내렸다. 쟝 마레였다. 메이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두 사람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쟝 마래, 제 친구입니다. 화가이며 가구 디자이너입니다. 프랑스인으로 네덜란드어는 모릅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불행하게도 마마와 안네리스는 프랑스어를 못하고 마르티네 의사는 프랑스어를 하지만 말레이어를 못했다. 그 말을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메이와 나뿐이었다. 메이는 안네리스와 친해져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언니와 동생처런 기뻐하는 안네리스와 메이의 들뜬 모습을 보고, 마르디네 의사는 자꾸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는 흘끗 쟝 마레를 보고 프랑스어로 물었다. "아이는 몇이나 됩니까?" "메이는 제 외동딸입니다, 선생님." 쟝 마레는 대답했으나, 그의 눈에는 그런 질문을 받은 데 대한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마르티네 의사는 사람의 심리를 파헤치려고 드는 의사의 습정 그대로 다른 것에 개의치 않고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네덜란드어로 계속 말했다. "저 두 사람을 함께 있도록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벌써 오래전에 그렇게 해 주었어야 하는 건데...... " 그 사이에 안네리스는 메이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아예 나오지를 않았다. 어느 때는 말레이어로, 또 어느 때는 자바어로, 네덜란드어로 즐겁게 떠들어대며 웃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딸의 밝은 목소리에 쟝 마레는 자꾸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표정이 빛나고 있었다. 안네리스와 메이의 즐거워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싫었는지 마르티네 의사는 인사를 하고 안채 옆에서 기다리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마르티네 선생님은 명의예요." 나는 말레이어로 말했다. "안네리스의 병을 고쳐준 것은 그 선생님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감사하고 있옵니다." 그리고 나는 냐이에게 말했다. "마마, 사실은 제 친구는 마마에게 부탁이 있어시 찾아왔옵니다. 만일 마마가 허락해 주신다면 마마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 "나를 그려서 어쩌겠다는 거죠?" "마담." 쟝 마레가 나를 대신해서 말했다. "저는 냐이입니다. 마담이 아닙니다." "밍케군이 마담에 대해 많은 애기를 해주었읍니다." "냐이라니까요." " .....드물게 보는 쁘리부미 여성이라고 해서요. 너무나 밍케가 마담을 칭찬했기 때문에......" "냐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니까 초상화로 영원히 남겨두자는 데 둘이서 의견이 일치했읍니다. 앞으로 1년 뒤가 될지 40년 뒤가 됨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기억하고 칭송할 것입니다." "미안합니다만 남에게 칭송을 받고 싶은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읍니다." "말씀은 잘 알겠읍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높이려는 사람은 어리석기 그지 없으나 마담의 경우는 본인이 아니라 시대의 산 증인으로 찬양하고 기리려는 것이니까요. "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사양합니다." "그렇다면.....그렇습니까? 그것은 정말 유감이군요....만일 그러시다면 마담의 얼굴을 잘 좀 보여 주시겠읍니까 머릿속으로나마 새겨 놓게 말입니다." 쟝 마레는 띄엄띄엄 정중하게 제의했다. 냐이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 집에 돌아가서 그릴 수가 있으니까요." 쟝 마레가 덧붙였다. 냐이는 내게 시선을 보내고나서 안채 쪽으로, 다음에는 멀리 보이는 농장 간판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마지막에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어색한 동작에서 초조와 당혹감을 읽을 수 있었다. "안됩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냐이는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밍케, 당신은 내 얘기를 밖에서 어떻게 하나요?" "나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읍니다. 마담," 쟝 마례가 대답했다. "언제나 칭찬만 하더군요." 냐이가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황급히 끼어들었다. "마마는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요. 다른 날 다시 부탁해 보지요. 다음에는 틀립없을 거예요." "다음에도 안돼요. " "제 친구입니다, 마마. " 아마 신체적인 결함 때문이리라. 평소에도 민감한 쟝 마레는 안절부절을 못하며 금방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초조한 듯이 자기 딸을 찾고 있었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멀리서 노래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따님은 집안에 있어요." 냐이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우리들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메이와 안네리스의 명랑한 노래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냐이는 그것이 기쁜듯했다. 내가 우노크로모에서 살게 된 뒤 안네리스의 노래 소리를 듣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마치 안네리스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은 일찍부터 짊어지워진 책임과 일에 빼앗겨서 맛볼 여유도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린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쟝 마레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마레씨." 우리들이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마마가 말했다. "댁의 따님이 우리 집에 신선한 공기를 가져다 준 것 같군요. 어떠세요, 조금 전에 마르디네 선생님이 권한 것처럼 따님을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오게 하면 어떨까요?" "그 아이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나는 상관없읍니다." 쟝 마레는 대답했으나, 무엇인가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듯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밍케, 오늘 밤 집에서 주무시고 가시도록 당신이 마레씨에게 부탁을 하세요. " "쟝, 오늘밤 여기서 자고 가면 안돼요?" 그의 그런 태도를 보는 것은 이것으로 몇 번째일까? 이 예술가, 미의 창조자의 반응은 몹시 어색했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요, 쟝. 자고 가면 되잖아요. 아침 일찍 내가 모셔다 줄 테니까요. 그렇게 하면 작업장을 여는데도 지장이 없지 않겠어요?" 쟝 마레는 세심한 배려에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나타냈다. 그날 밤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 전에 나는 마르티네 의사가 내게 했던 문답식 진찰 방법을 흉내내듯이 쟝에게 질문했다. "쟝, 요즈음 계속 피곤해 보이는데 지금도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있나요? 미안해요, 이런 질문을 해서요. " "그것은 작가로서의 질문이군 그래, 밍케. 자네는 정말 작가가 된 것 같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쟝. 나는 당신보다 어리고 경험도 지식도 훨씬 부족합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나요?" "그것은 완전히 내 개인적인 일이야. 그리고 요전에 자네에게 보여준 그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그것으로 과거의 일을 청산할 생각이네. 자네는 내 얘기를 쓰고 싶은 건가?" "당신은 특별한 사람 같아요. 그래요. 쓸 수 있다면 써 보고 싶어요. 쟝, 당신의 진짜 꿈은 무엇이죠?" "꿈? 꿈이라고 ! 자네도 예술가, 나도 예술가야. 예술가는 모두 성공을 꿈꾸며 앞으로 나가지. 오직 성공을 위해서. 그리고 그 성공을 지켜나가는 거야. 그 한가지를 위해 온 정력을 기울이지.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말일세." "하지만 당신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없어요. 마치 그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 자신은 믿고 있지 않는 것 같아요." "자네는 이미 훌륭한 예술가일세. 그 질문은 자네 자신의 심리적인 갈등에서 생겨난 것, 요즈음의 자네 심경의 변화가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네. 결코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야. 권위를 담고 있는 질문이야. 자네 자신은 그 질문을 이해하고 있나?" 나는 한순간 당황했으나 태연한 척 되물었다. "권위라니 무슨 의미지요?" "요컨대, 자기 자신의 질문을 진실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 " 분명히 그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의 시도가 실패한 것은 확실했다. 그날 밤 나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고 이제는 승리에 찬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 시대와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남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노트에 기록한 모든 사건은 그것을 승리가고 불러도 좋을만한 것이었다. 그 많은 승리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안네리스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 비록 그녀는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형과도 같았지만. 괘종 시계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마르티네 의사의 말을 생각해냈다. "냐이가 키우고 있는 젖소는 송아지에서 젓소로 자라는데 불과 13개월에서 14개월밖에 걸리지 않아요. 그것에 비해 사람은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 그 육체적인 성숙과 졍신적인 성숙이 완전한 균형을 이루기까지 10여 년, 아니 몇십 년이 걸리지요. 결국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타인이나 사회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 정신이상자, 범죄자가 그런 셈이오. 한 사람이 가치있는 인간으로 성숙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가 직면한 시련의 정도에 달려 있소. 그러한 시련과 시험에서 도망가려고만 하는 사람, 범죄자나 정신이상자들은 결코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이오. 소는 불과 14개월에 완전히 자라게 됩니다. 시련이나 시험을 거치지도 않고....." 아아, 알라신이여, 당신이 내린 시련과 시험은 나와 같은 애송이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들은 본디 나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뚫고 나가기에 아직은 어린 나이입니다. 알라 신이여, 당신이 내게 준 시험과 시련을 이겨나갈 힘을 내게도 내려 주소서. 제15장 미 행 자 그날 아침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다. 쾌청한 일요일이었다. 편안하지 못한 것은 나의 마음뿐이었다. 멀지 않아 폭풍우가 불어닥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전날 전교 토론회가 었었던 토요일 오후, 안네리스와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을 때 (나는 승마에 익숙해 있었다.) 문제의 뚱뚱보를 얼핏 보았던 것이다. 그 뒤 나는 다시 안정을 잃었다. 그는 내가 보았을 때 초라한 말을 타고 농장 부지 안에 있는 마을을 떠나려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밤 다르삼이 읽고 쓰기와 계산을 배우기 위해 내 방에 찾아왔을 때, 나는 수업을 중단하고 B시에서부터 나를 미행해온 수상한 사나이에 대해 얘기했다. "도련님, 그 녀석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뚱뚱안 몸집의 중년 남자죠 ?" "맞아요. " "아아, 그 녀석이라면 몇 번 마을에서 본 적이 있읍니다. 나는 행상인이라고 생각했읍니다만." "행상인은 변발을 했을 텐데 녀석은 변발이 아니에요. 틀림없이 로베르트의 패거리 같아요." 다르삼은 잠자코 있었다. "로베르트는 지금 어디 있지요? 내가 B시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 "무서워서 이 집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겁니다. 도련님, 요전에 제가 한 얘기롤 기억하세요? 도련님을 죽이라고 내게 명령한 일 말입니다. 그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읍니다. 내 주인은 냐이와 아가씨뿐입니다. 두 분에게 소중한 사람은 내게도 소중합니다. 만일 당신이 도련님을 죽이라고 한다면, 당신을 죽여버리겠읍니다.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니까요. 각오하시오 ! 내가 칼을 뽑아 들었더니 그는 도망쳤읍니다." 다르삼과 뚱뚱보 얘기를 한것이 바로 전날이었다. 뚱뚱보의 등장은 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아침의 밝은 햇살도 마음 속에 덮친 검은 구름을 쫓아버리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그 뚱뚱보를 본 일이 있다는 말이군." 전날 밤 나는 다르삼에게 물었었다. "이번에 녀석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겠소? " "만약 시뇨 로베르트의 패거리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살려둘 수 없읍니다." "저런 ! 그런 난폭한 짓은 안돼요. 녀석에게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화가 미친다구요. 절대로 알겠어요, 다르삼? 허튼 짓은 안패요, 알겠어요?" "알았읍니다, 도련님. 허튼 짓은 안합니다. 다만 녀석이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혼내 줄 생각입니다." "그것도 안돼요. 우리들은 아직 내막을 잘 모르니까요. 만일 법적인 문제로 까지 간다면 누가 마마를 돕겠어요? 우리들은 안돼요. 그런 힘이 없으니까요." 다르삼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알겠읍니다. 도련님 분부대로 하겠읍니다." "그래요. 내 말대로 하세요. 나는 이 가족을 파멸 속에 몰아넣는 장본인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비밀로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아침 주위를 근심스러운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는 다르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차하면 내가 언제나 그를 부를수 있도록 일부러 앞에서 얼씬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뜻하지 않은 뚱뚱보의 습격으로부터 내 생명을 지켜주려고 하는 다르삼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우리들 세 사람, 마마와 안네리스와 나는 안채 앞뜰에 앉아 헝가리 민속 무용곡을 듣고 있었다. 그 선율은 홍수 대의 개울 새우처럼 생기있고 활기찬 것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건히 무겁고 암울했으며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는 안네리스와 마마의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 마마는 보통때와는 다른 다르삼의 행동을 의아스러운 듯이 보고 있었다. "마마,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지요?" "항상 그래요. 다르삼이 뒤주에 쥐 들락거리듯 눈 앞에서 얼쩡거리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 불안해져요. 어김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마니까요. 어젯밤부터 아무래도 이상해요. 다르삼 ! " 그러자 다르삼이 다가와서 마마에게 경례를 했다. "왜 그렇게 서성거리는 거죠?" 마마는 마두라어로 물었다. "제 다리가 근질근질해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다리가 근질근질하면 뒤곁을 돌아다니면 되잖아요?" "웬일인지 이 다리가 앞뜰을 돌아다니겠다면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표정은 왜 그렇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살기등등한 얻굴을 해가지고서 ?" 다르삼은 억지로 웃어 보이고 거수 경례를 하고는 물러갔다. 주문이라도 외고 있는듯이 콧수염이 흔들렸다. 확실히 오늘 아침 다르삼의 눈은 개미 한 마리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앤, 왜 그렇게 잠자코 있지?" 말이 없는 안네리스가 이상해서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안네리스는 일어나서 축음기 쪽으로 다가가 축음기를 껐다. "왜 음악을 끄니 ?" 마마가 물었다. "웬일인지 오늘은 음악이 귀에 거슬려요." "밍케는 더 듣고 싶을 텐데 ? " "아니, 괜찮습니다, 마마. 그런데 앤, 어제 말을 타고 있던 남자를 기억하겠어 ? " "갈색 줄무늬가 있는 파자마를 입고 있던 사람 말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인가요? " "누가 말을 타고 있었다는 게냐? 어디서 ? " 마마가 황급히 물었다. "마을에서 보았어요." "말을 타고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드루세 석유 회사의 수위로 있는 무보크 카루요와 그의 아들을 빼놓고는." "그 사람은 아니었어요. 왜냐 하면 그는 부모를 만나러 말을 타고 올 때 파자마 같은 것을 입고 오지는 않아요. 그 사람은 살이 찌고 누런 피부에 눈이 치켜올라가 있었어요." "다르삼 ! " 마마가 소리쳤다. "아시겠읍니까, 냐이 ? 그래서 근질근질한 내 다리가 필요한겁니다." 마마는 다르삼의 우스갯소리를 묵살했다. "어제 마을에서 말에 타고 있던 뚱뚱보 남자는 도대체 누구죠 ?" "흔해빠진 행상인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마세요. 말을 탄 행상인이 어디 있어요? 오늘은 당신 정상이 아니에요. 그 남자는 변발을 하고 있었나요? " 다르삼은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로, 무엇인가를 숨기려고 하는 웃음이 분명했다. "냐이는 언제부터 이 다르삼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읍니까?" 그는 콧수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다르삼 ! 오늘은 정말 이상하군요. " 마두라의 칼잡이는 다시 한번 웃더니 경례를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다르삼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어." 마마는 중얼거렸다. "점점 더 불안해지는군. 자, 집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마마는 독서를 그만두고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르삼도 마마도 모두 이상하군요. 왜들 그럴까요? " "내가 알 리가 없지. 자, 들어가요, " 안네리스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주위를 살폈다. 그때 칼을 빼들고 정문 쪽으로 달려가는 다르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앞쪽에 얼핏 슬라바야 방향으로 걸어가는 뚱뚱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아색 양복을 입고 흰 모자와 흰 구두에 지팡이를 들고, 마치 관광여행이라도 나선 듯한 옷차림이었다. 그가 중국인 마요르의 부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전의 내 추측은 이 시점에서는 이미 통하지 않게 되었다. 다르삼을 보고 나는 엉겁결에 큰 소리로 외쳤다. "그만둬, 다르삼 ! 그만두라구 ! " 다르삼은 내가 제지하는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뚱뚱보를 계속 추격해갔다, 할수없이 나도 그의 뒤를 쫓아갈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서는 안된다. 다르삼은 추적을 중단하지 않았다. 제지하기 위해 나도 소리를 지르며 기를 쓰고 마두라의 칼잡이 뒤를 따라갔다. 등 뒤에서 안네리스의 비명이 들렸다. "마스 ! 마스 ! " 나는 힐끗 뒤돌아보았다. 안네리스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멈춰라 ! 이 뚱뚱보야 ! 멈춰 ! " 다르삼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뚱뚱보는 자세를 낮추며 속도를 더 빨리했다. "다르삼 ! 돌아와요 ! 쫓지 말아요 !" "마스 ! 마스 ! 따라가면 안돼요 ! " 등 뒤에서 안네리스가 금속성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정문에 이르렀다. 선두를 달리는 뚱뚱보는 일직선으로 슬라바야를 향해 달렸다. 다르삼은 차츰 거리를 좁혀 갔다. "안네리스 ! 앤 ! 돌아오너라 !" 냐이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뒤돌아보니 냐이가 사롱의 옷자락을 쳐들고 뒤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풀어져 흩날리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뚱뚱보를 다르삼이 추적하고, 다르삼을 내가, 나를 안네리스가, 그리고 안네리스를 냐이가 쫓는 형태가 되었다. "다르삼 ! 내 말 들어 ! 그만두라구 ! " 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다르삼은 추적을 계속했다. 얼마 뒤 뚱뚱보는 다르삼에게 붙들려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안된다 !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막아야 한다. "마스 ! 마스 ! 쫓아가지 말아요 ! " 안네리스가 외쳤다. "앤, 안네리스, 돌아오너라 ! " 마마가 소리 쳤다. 뚱뚱보는 슬라바야 방향으로 똑바로 도망치면 틀림없이. 다르삼에게 죽게 된다. 그 길은 일요일에는 사람의 통행이 없고 논과 밭, 아촌의 유곽, 그리고 냐이의 밭과 논이 있고 논이 계속되고, 그 다음에 겨우 숲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뚱뚱보는 그 주변 지리에 밝은 것 같았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길에서 벗어나 아촌의 유곽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그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쪽으로 꺾어지면 안돼 ! " 다르삼이 도망치는 뚱뚱보에게 소리쳤다. "다르삼 ! 그만둬요 !" 이윽고 마두라의 캅잡이도 길에서 구부러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안돼 ! " 냐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곳에 들어가지 말아요 ! " 안네리스가 마마의 소리를 받아 외쳤다. 나도 다르삼의 뒤를 쫓아 길을 꺾어서 아촌의 들안으로 들어갔다. 뚱뚱보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다르삼이 혼자서 어떻게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건물 정면의 문과 창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다르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도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렸다. "도련님, 그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읍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더 이상 쫓지 말아요." "안됩니다. 붙잡아서 혼을 내주어야 합니다." 제지할 수가 없었다. 다르삼은 건물 옆면에 있는 창을 따라 걸어갔다. "마스 ! 그 건물에 들어가면 안돼요 !" 안네리스가 정문에서 소리쳤다. "마마가 안된대요. " 그렇게 말하며 안네리스도 비틀거리면서 아촌네 뜰안으로 들어섰다. 다르삼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칼은 그냥 뽑아 든 채였다. 드디어 나도 눈에 핏발이 섰다. 뜰 안에 들어와 보고야 처음 알았는데, 우리들의 이웃 아촌의 유곽은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넓고 컸다. 그 밖에도 뒤쪽으로는 길다란 별관이 서 있었다. 건물은 거의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잘 가꾸어진 과실수와 꽃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자갈을 깐 좁은 길이 정원 전체를 구획짓듯이 가로지르고 짐은 페인트칠을 한 육중한 나무 벤치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얼핏 한 쌍의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미처 우리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광경은 몇겹으로 심어진 두텁고 높은 생나무 울타리에 가려서 보통 때는 외부에서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다르삼은 오른쪽으로 꺾어져 본관 뒤쪽으로 돌아갔다. 가까이에 인기척은 없었다. 뒷문이 하나 활짝 열려 있었다. 나의 등 뒤에서는 안네리스가 창을 따라 본관 옆 길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냐이의 목소리가 차츰 또렷하게 들려 왔다. "안돼요 ! 그 건물로 들어가면 안된다니까 !" 다르삼은 곧장 뒷문으로 들어갔다. 뽑아든 칼을 손에 든 채 그는 문턱에서 잠시 좌우를 살폈다. 나도 다르삼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에 상당히 넓은 홀이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 식기 등이 들어 있는 식기장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식당인 것 같았다. 벽에는 중국의 꽃글자가 씌어진 거울이 걸려 있고 새우, 대나무, 말을 그린 수묵화의 족자가 몇개 장식되어 있었다. 갑자기 다르삼이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마룻바닥에 못박힌 듯이 우뚝 섰다. 양쪽으로 쭉 벌린 그의 두 팔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나를 제지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일까? 그런데 식당 구석쪽에 유럽인 같아보이는 남자가 한 사람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큰 키에 땅땅한 배가 튀어나와 있고, 붉은 머리칼에 백발이 섞여 있고 약간 벗겨져 있었다. 오른손은 머리 위에 들고 왼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목과 턱은 노란 구토물로 덮여 있었다. 알콜 냄새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 그의 셔츠와 바지는 새까맣게 찌들어 있었는데, 몇달 동안이나 세탁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투앙 !" 다르삼이 속삭였다. "투앙 메레마? " 그 이름을 듣고 나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때에 본 것보다 살이 찌기는 했으나 메레마씨와 몸집이 비슷한 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방구석에 넝마처럼 누워 있었는데, 술이 취한 상태인지 토하고 나서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르삼이 다가와서 몸을 굽히고 왼손으로 그를 건드렸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칼을 빼들고 있었다,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르삼은 몸을 흔들어 보고 다음에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나도 바짝 다가갔다. 틀림없는 투앙 메레마였다. "죽었어요 ! " 마두라의 칼잡이가 조그맣게 소리쳤다. "죽었어요. 투앙 메레마가 죽었어요." 그의 얼굴에서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네리스가 문턱에 나타나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쉰 목소리를 짜내 말했다. "마스, 이 건물에 들어가면 안돼요 ! " 나는 안네리스의 어개를 잡고 문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곳에 마마가 괴로운 듯이 숨을 헐떡이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얼굴이 붉고 흐트러진 머리칼이 얼굴에 흘러내려 있었다. 땀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빨리 돌아가요! 세 사람 모두 ! 이런 마굴에 들어가면 안돼요 ! " 그녀는 헐떡이며 말했다. "도련님 ! " 다르삼이 안에서 나를 불렸다. "들어가면 안돼요 !" 이번에는 내가 마마와 안네리스를 제지하고 혼자서 들어갔다. 다르삼은 메레마씨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칼이 들려 있었다. "틀렸어요, 이미." 다르삼이 말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맥박도 멈추었어요." 뒤돌아보니 안네리스와 마마가 서 있었다. "파파. " 안네리스가 속삭였다 "그래, 당신의 파파요. " "투앙 ?" 냐이가 속삭였다. "죽었어요. 투앙 메레마씨는 죽었읍니다." 두 여인은 몇 발자국 더 다가와서 우뚝 셨다. "이 술 냄새 !" 냐이가 중얼거렸다. "마마 !" "앤, 이 술 냄새를 잘 맡아 보렴. " 냐이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으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기억이 나느냐?" "그때의 로베르트가 풍기던 것과 같은 냄새를? " "그래. 그 아이가 미치기 시작했을 때는 이것과 뜩같은 술 냄새였어. " 냐이가 계속했다. "투앙이 그렇게 되기 시작했을 때도 역시 같은 냄새가 났었다. 가까이 가서는 안돼. 앤, 안돼 ! "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 모두 돌아다 보았다. 빨강과 검은꽂을 그린 노랑색 기모노 차림의 여인이 나타났다. 피부는 황색보다는 흰색에 가까왔다. 일본 여인이었다. 그녀는 종종 걸음으로 우리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맑고 매혹적인 목소리의 일본어로 말을 걸어 왔다. 물론 우리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나는 식당 구석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가리켰다. 여인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계단 안쪽으로 도망치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눈으로 그녀를 좇았다. 내가 일본 여성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둥근 얼굴, 약간 치켜올라간 가는 눈, 장미빛 루즈를 칠한 입술, 한개의 금니를 해넣은 이.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얼마 뒤 여인이 사라진 곳에서 바싹 마르고 눈이 움푹 들어간 키가 큰 혼혈 젊은이가 나타났다. "마마. " 안네리스가 소근거렸다. "로베르트예요. " 가까스로 나는 그 젊은이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넘치던 기개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히 로베르트였다. 로베르트라는 이름을 듣고 웅크리고 앉아 있던 다르삼이 투앙 메레마의 시체를 버려두고 벌떡 일어났다. "시뇨 ! " 다르삼이 소리 쳤다. 그것과 동시에 로베르트가 우뚝 섰다.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칼을 빼든 다르삼을 보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도망쳤다. 다르삼이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아연실색해서 마루에 못박힌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칼을 맞고 입을 해벌린 채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는 로베르트의 모습이 한순간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르삼이 씨근덕거리며 다시 나타났다. 험악한 얼굴이었다. "도망쳤읍니다, 냐이. 방으로 들어가서 창문으로 뛰어 내렸읍니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만뒤요, 다르삼. 이제 됐어요." 냐이는 가까스로 말했다. "미친 짓들 그만하세요. 그 아이는 내 아들이에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보다 당신은 투앙을 돌보세요." "알겠읍니다, 냐이." 안네리스는 어머니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정말, 이 꼴들이라니 !" 냐이는 분노를 억누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창피스러위요. 앤, 너는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마가 뭐라고 했지 ? 이런 부도덕한 곳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인된다. 다르삼, 투앙을 집으로 옮겨 가세요." "이곳에서 짐차를 빌려요." 나는 다르삼에게 지시했다. 다르삼은 그제서야 겨우 칼을 칼집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냐이는 굳어진 표정으로 투앙의 시체를 바라보고 안네리스는 어머니의 가슴에 얻굴을 파묻었다. 가족들의 시중을 마다하고 이웃 사람에게 신세를 지다니! "아촌 아촌 !" 냐이가 큰소리로 불렀다. "아촌 ! 바바 !" 사나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르삼이 돌아왔다. "무례한 수위녀석이 허가 없이는 짐차를 빌려줄 수 없답니다." "바바는 어디 있지요?" "이곳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마차를 갖고 오겠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은 여기 있으세요. 나는 돌아가겠어요. 자, 돌아가자, 앤." 냐이는 그렇개 말하고 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두 여인은 손을 잡고 뒷문으로 해서 아촌의 유곽을 빠져 나갔다. 입을 헤벌쭉 벌리고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투앙 메레마의 시체에 그들은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냐이가 그녀의 주인과 얼마나 깊은 단절 상태에 있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의 시체인데도 그녀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단 말인가? "도련님, 행복의 막이 열리고 중오의 막이 내린 셈입니다." 다르삼이 얼굴을 찡그렸다. "추구하던 것은 멀리 도망가고 얻은 것은 파멸뿐이군요." 얼마 뒤 계단의 안쪽 방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곧이어 여자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바바 아촌의 창녀들 !" 다르삼이 내뱉듯이 말했다. "5년 전부터 투앙은 이곳에서 붙어살고 최후도 여기서 맞이한겁니다. 창녀의 소굴에서 목숨을 거둔 것입니다. 투앙 메레마! 지난 5년동안 냐이는 분노를 누르며 살아 왔어요. 그러니 투앙이 죽어도 거들떠보지 않죠. 정말 투앙은 인간 쓰레기였어요 ! " 다름삼이 마루에 침을 뱉었다. "로베르트도 이곳에 있었어요. 한 지붕 밑에 같은 창녀들과 함께. 천벌을 받을 ! " "그 동안의 계산은 모두 마마가 했나요?" "매달 청구서가 날아 왔읍니다." "다르삼, 시체를 건드리지 말아요. 그대로 놓아 두세요." 마차가 한 대 도착했다. 타고 있는 것은 안네리스도 마마도 아닌, 네 명의 경관과 혼혈 지휘관이었다. 검증이 시작되고 경관 한 사람이 지휘관의 말을 기록했다. "시체의 위치는 달라겼는가? " 지휘관은 말레이어로 물었다. "약간. 조금 전에 내가 잡아 흔들었읍니다." 다르삼이 마두라어로 말했다. "이 집의 주인은 어디 있는가 ? " "이곳에 없읍니다." "이곳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 " 지휘관은 회중 시계를 꺼내 보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 모습을 다타내지 않았다.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군가?" 대답 대신 다르삼이 헛기침을 했다. "농장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이곳에 오다니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지휘관은 마두라어로 물었다. 나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제 경찰 문제가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성가신 일에 말려들게 된 것이다. "내가 뚱뚱보를 쫓고 있었읍니다." "뚱뚱보? 그는 누구인가?" "수상한 사나이입니다. 그 녀석이 도망쳤기 때문에 이곳까지 추적해 왔읍니다. 그 녀석은 여기서 모습을 감췄읍니다." 다르삼이 설명했다. "남의 집에 침입했단 말인가? 허가도 없이?" "우리가 여기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음니다, 게다가 이곳에는 누구나 허가 없이도 들어올 수 있읍니다. 이곳은 유곽이니까요." "그러나 당신들이 이곳에 온 것은 여자를 사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는가?" "지금 말한대로입니다." "뚱뚱보를 추적해 왔을 뿐입니다, 아마 그 녀석은 이곳 단골인 모양이죠?" 지휘관은 차갑게 웃었다. 경관들이 시체를 들고 나가려고 했다. 힘이 달리는 것을 보고 다르삼이 재빨리 거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의 질문을 피하려는 순간적인 행동이었다. "좋아. 당신들의 이름은?" 그 뒤 다르삼과 나는 시체와 함께 관청 마차로 경찰까지 연행 되어갔다. 우리들은 집요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아아 ! 그러는 동안에 아버지는 신문에 실린 자식의 이름을 보게 될 것이다. 집안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자랑거리였던 자식이 형사 사건, 그것도 매춘굴에서 일어난 추잡한 사건에 연루가 되다니......바로 아버지가 걱정하고 있던 일이 현실로 나다난 것이다. 그날 안으로 메레마씨의 사인은 독물에 의한 중독사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구토물 및 구강, 인후의 점막 손상 등이 그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검시를 위해 불려온 마르디네 의사에 따르면 피해자는 독물을 아주 조금씩 오랜 기간에 걸쳐 복용해왔기 때문에 이미 독물에 대한 면역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죽던 날은 보통 때보다 두세배 가량의 독물이 투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사건은 각 신문에 보도되었다. '슬라바야 최대의 자산가 중 한 사람, 바이민졸프 농장의 소유자, 메레마 씨의 사망 !' '우노크로모 바바 아촌의 유곽에서 죽다 ! ' '독이 들어간 술을 토하고.......' 그리고 우리들의 이름이 되풀이해서 언급되었다. 쁘리부미, 중국인, 혼혈아, 유럽인 등 모든 신문 기자가 우리들에게 몰려왔다. 마마와 안네리스는 그들의 질문에 일체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함구령을 내린 것은 나였다. 집 앞의 도로에는 우리들이 사는 곳을 보려고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렇다. 바로 우리들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좋은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신변을 구속당한 사람은 없었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나는 사건의 진상에 가까운 보고를 쓰고, 그것이 "슬라바야 일보"에 게재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의 그 연재 기사는 신문의 발행 부수를 증가시켰다고 한다. 뉴스의 출처가 믿을 만한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슬라바야 이외의 도시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자산가의 변사는 언제나 갖가지 억측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가 보다 . 학교의 일 주간의 휴가를 이용해서 나는 수많은 편향된 허위 보도에 대한 반론의 붓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새로운 기사가 나타났다. 그것은 경찰 관계자로부터의 믿을 만한 정보라고 전제한 뒤, 경찰 당국은 현재 뚱뚱보 사나이와 메레마가의 장남 로베르트 메레마의 행적을 수사하고 있으며, 로베르트는 부친 살해의 공모혐의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뚱뚱보 사나이는 누군가?' 어떤 말레이어와 중국어 신문은 그렇게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그는 최근에 자바에 밀입국한 '신케(新客)'일 가능성이 높고, 아마도 '중화 신청회'(中華新靑會)라고 자칭하는 조직의 일원일것이다. 그것은 청조의 타도를 외치는 결사이고, 그 조직의 특징의 하나는 변발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뚱뚱보 사나이는 변발이 아니었다. 뚱뚱보 사나이는 홍콩이나 싱가폴에서 영국경찰의 수배를 받았기 때문에 자바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그는 슬라바야를 혼란 속에 몰아넣고 있다. 밀입국자, 특히 변발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은 분명히 범죄의 의지를 갖고 있으니까 단호한 조치를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억측이다 !' 나는 그 신문의 보도를 부인했다. 확실히 그는 약간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중국인만의 특징은 아니다. 변발이 아니라는 것도 그를 '중화신청회'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로는 부족하다. 이런 반론 기사를 게재한 결과 "슬라바야 일보"는 경찰 당국으로부터 뚱뚱보 사나이에 관한 조회를 받았다. 그것에 대해 마르텐 네이만은 정보 제공을 거부했다. 사실 그는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인데, 경찰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흘 동안 구류 처분을 당했다. 미리암과 사라 드라크로아 자매는 나와 안네리스와 냐이에게 동정의 뜻을 표시하고, 우리들에개 혐의가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들의 편지에는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의 전언도 씌어 있었는데, 우리들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시련을 꿋꿋이 극복해 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적혀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에는 눈물어린 걱정과 우려로 일관하고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와 동시에 나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가 그대로 적혀 있었는데, 대노한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서 나를 퇴학시키겠다는 내용을 통지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두 번째 편지에는 B시의 부이사관이 아버지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찾아왔었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부이사관은 내가 나쁘다고만 몰아붙이는 것은 경솔하다. 오히려 내가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해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단다. 그리고 내가 바이민졸프 농장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 꼭 부도덕하고 추잡한 것이라고 속단할 수만은 없다. 우리들이 겪게 되는 사고에는 물론 자업자득 같은 것도 있으나, 전혀 당사자와는 관계 없이 뜻밖의 재난으로 일어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리고 그런 재난이 언제 닥치느냐 하는 것은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이사관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아들과 딸에게는 경찰 문제가 된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며,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이다. 따라서, 그런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절대로 앞으로는 자식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모든 편지에 답장을 썼다.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서는, 만일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 앞으로는 어머니만을 사랑하고 어머니만을 위한 아들이 되겠노라고 써 보냈다. 형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어머니는 네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고, 네 태도에 몹시 걱정하고 있다. 왜 너는 불효막심한 짓을 해서, 그렇지 않아도 화를 내고 있는 아버지의 심기를 더욱 괴롭히는 거냐? 마치 아버지가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방해라도 했다는 듯이 너는 행동했다. 너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네가 아버지보다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당연히 네가 굽히고 들어와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형의 현지를 묵살했다. 아버지가 화를 내셔도 할수없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어면 태도를 취하건 그것은 아버지의 자유다. 나와 아버지와는 그다지 가까운 관계는 아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호칭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를 대할 때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했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지 ! 아버지의 노여움도 권위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를 고등학교에서 퇴학시키는 것도 물론 그의 마음대로다. 쁘리부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고위 관료의 보증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보증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다. 아버지가 나를 퇴학시키려고 하더라도 교장 선생님이 꼭 승인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이 퇴학을 인정한다고 해도 좋다. 이미 나는 독학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고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이 있다. 시체가 발견 된 지 나흘뒤에, 메레마씨는 푸레네에 있는 유럽인 묘지에 묻혔다. 우리들은 모두 장례식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농장 내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그 밖에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가 7명, 그리고 마르티네 의사, 쟝 마레, 테린하가 참석했다. 매장은 패르부루헤 장의사에 의해 치러졌다. 메레마 가의 대리인을 맡은 마르터네 의사는 장례식 조문 가운데서 과거 5년 동안 메레마 집안의 사람들, 특히 냐이 온트솔로와 안네리스를 찾아온 가혹한 시련을 목격하고 대단히 가슴 아파했다고 동정을 표시했다. 그것은 참으로 강인한 사람만이 견디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이겨낸 것은 쁘리부미의 여성이며, 그녀의 힘이 되는 사람이라고는 단 하나, 유능한 조수로서 일하는 자기 딸 뿐이었읍니다. 그렇지만 마르티네 의사가 말하는 시련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시 법정으로까지 번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족에 대해 동정을 나타낸 마르티네 의사의 발언은 즉각 말레이어 신문과 네덜란드어 신문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식민지 저널리즘의 안성마춤의 표적이 되어, 자신의 발언에 관한 상세한 해명을 요구받았다. 해명을 하게 되면 그것이 왜곡되어 신세이셔널한 흥미물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르디네는 완강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 때문에 네덜란드어 식민지 신문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필치로 원주민이며 첩인 냐이 온트솔로에게 보인 마르티네의 동정을 헐뜯고 비난했다. 냐이는 아직 완진히 무죄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 첩이 외부인과 공모해서 자기 주인을 살해하려고 한 예는 많이 있었다. 동기는 색정과 금전이다. 어떤 신문은 이렇게 썼다. '19세기에만해도 교수대에 올라간 첩은 다섯 손가락을 헤아린다. 냐이 다시마도 만일 그녀의 투앙인 에드워드 윌리엄스가 현명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도 끝에는 살인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다만 희생자가 에드워드 윌리엄스가 아니라 냐이 다시마 자신이었지만......' 그렇게 논한 신문은 더욱 세밀하게 냐이 온트솔로를 심문해 줄 것을 당국에 요구하면서 기사를 끝맺었다. 한편, 부타위의 어떤 신문은 그 밍케라는 인물을 좀더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티네 의사와 마르텐 네이만은 여러 도시에서 발행되는 엄청난 수의 신문을 모아서 우리들에게 보내주었다. 그러한 신문의 논평이나 주장을 읽은 냐이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쁘리부미가 그들의 발 밑에 짓밟혀 없어지는 것을 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쁘리부미는 항상 검고, 유럽인은 항상 희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쁘리부미라는 것 자체가 죄악이며, 쁘리부미로 태어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목인 거예요. 우리들은 지금 전보다도 훨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읍니다. 밍케, 내 아들 !" 냐이가 나를 '내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을 버릴 생각인가요?"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우리들은 힘을 합쳐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친구는 있읍니다. 마마, 제발 이 밍케를 그련 비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부탁입니다. " "그들은 우리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악인으로 날조할 수 있는 자료를 갖추고 있읍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특히 다르삼이 염려되었지만 우리들 가운데 구속된 사람은 없읍니다. 아무래도 경찰은 신문 보도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메레마 가에 있어서의 나의 존재를 고발하는 기사가 나타났다. 분명히 로베르트 슬르호프가 쓴 것으로, 그것에 의하면 나는 남의 재산을 빨아먹는 염치도 없는 기생충인 주제에 세상에는 '무고한 참새'로 행세하는 인물, 성도 없거니와 뻔뻔스러움만이 자본인 철면피, 요컨대 불한당이 틀림없다고 되어 있었다. 그 문장을 실은 것은 물론 "슬라바야 일보"는 아니었다. 편집광적인 엽기 취미의 협력자들, 마르티네 의사의 표련을 빌리면 고대 로마의 티투스 같은 병자를 몇 명 고용하여 모든 영역의 스캔들, 추문을 끈질기게 쫓는 것으로 이름난 어떤 일간지였다. "힘을 내십시오. 침울해 있어서는 안됩니다." 기사를 읽고 걱정을 한 마르티네 의사는 나를 찾아와서 그렇게 격려했다. 어떤 동정이나 위로의 말도 격려도 그 기사에서 내가 받은 충격을 덜어 주지는 못했다. 고통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를 고소하겠어요, 마마." "안돼요." 냐이가 말렸다. "당신에게는 승산이 없어요." "그가 쓴 것이 거짓말이라고 마마가 증언만 해주시면 나는 승리할 수 있읍니다." "마마는 물론 당신 편이에요." 냐이는 말했다. "하지만 법률 앞에서는 당신이 불리해요. 문제를 법정에까지 끌고 나가면, 당신은 유럽인을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검사나 판사까지도 당신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재판 경험이 없고, 변호사도 믿을 수 없읍니다. 쁘리부미가 유럽인을 상대로 한 재판 같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펜에는 펜으로 대항하세요. 펜을 무기로 삼아 그와 대결하는 거예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이 기사의 필자는 아마 나의 친구일 것이다.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이 나는 반격의 펜을 들었다. '왜 자네는 당당하게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가? 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돌을 던지려고 하는가? 본디의 얼굴을 보여라. 어째서 자네는 자신의 얼굴을, 본명을,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숨기고 있는가? ' 나의 반론은 우선 마르빈 네이만씨의 "슬라바야 일보"에 게재되고, 그뒤 어면"경매"지에도 발표되었다. 그 "경매"지는 여전히 지면의 대부분을 선전 광고가 차지하고 있었으나, 헤르만 메레마 변사 사건 덕택에 보통 일간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 무렵 슬라바야에는 여섯 개의 경매 회사가 있어서, 제각기 독자적인 신문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 일간지로 승격한 것은 바로 그 신문 하나뿐이 었다. 나는 "경매"지에 이렇게 썼다. '도대체 내가 무엇때문에 고 헤르만 메레마씨의 재산을 노린다는 것인가? 자네 대답해 보게나.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하게. 자네가 확인하고 싶다면 메레마씨의 유족에게 협력을 구할 수가 있다, 아니,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계리사를 고용해도 상관없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신문들이 미친 듯이 나를 향해 집중 공격을 해 온것이다. 바로 마마가 말한대로였다.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았는대도 그 지경이었다. 그러니 실제로 고소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촛점은 이미 내가 고 헤르만 메레마의 재산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라는 것이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 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피부색이 다른 유럽인 대 쁘리부미의 대결로 옮겨가 있었다. 슬라바야 이외의 다른 신문들도 하나 둘 끼어들기 시각했다. 그때문에 나는 한 달 동안 교과서를 펼쳐 볼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 매일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 응답하고, 마르티네이만이 전해 주는 공격 기사에 하나 하나 반론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푸다 뻬테루스도 나를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바로 이것이 식민지의 일반적 상황입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어디나 마친가지입니다. 그곳에서는 유럽인이 아닌, 특히 통치국 국민이 아닌 원주민은 모두 여러 면에서 유럽인의 우월성, 통치국의 힘을 과시하는, 그것 때문에 비웃음을 받고 욕을 당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밍케군,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동인도에 통치자로서 건너온 그들은 다만 유랑민, 유럽 본국에서는 쓸모가 없게 된 부랑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 쫓겨와서는 허세를 부리고, 오만한 유럽인으로서 행세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쓰레기들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우리들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안네리스가 이 복잡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힘썼다. 생각대로 그것은 잘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냐이와 나 사이에 외부 세계에 맞서는 동맹관계가 맺어졌다. "밍케, 만일 내 편을 들어 그들과 대결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끝까지 철저하게 그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예요. 그들은 마지막에 버틸 수 없게 되면, 당신을 이 사회에서 못살게 만들 거예요. 지금까지도 그런 일이 몇번 있었어요. 어때요, 그래도 해 보겠어요?" "이것은 중요한 문제로서 어디까지나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마, 이 밍케는 비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옵니다. 결코 도망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한동안 학교는 쉬도록 해요. 이 싸움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학교에 가면 당신은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고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처를 입게 될 거예요.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당신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적과 맞서야 할 거예요. 그리고 명성이라는 이름의 증서를 받고 졸업을 하게 될 거예요. "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나를 옹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유럽인이 발행하는 말레이어 신문에 콤멜이라고 칭하는 인물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 것이다. 밍케, 필명 맥스 트레나르가 만일 위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를 고발함으로써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나가려는 사람이 왜 비난자들 가운데서 다타나지 않을까? 동인도의 법률은 아직도 그들의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또는 의도적으로 법률을 병신취급해서 우리의 영광스러운 법무관들의 무능을 폭로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존경할 만한 신사들은 그렇게 해서 새로운 법률을 만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이 콤멜의 글은 몇 사람인가의 법률가 사이에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나에 대한 집중 공격은 딴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냐이가 약속한 명성이라는 이름의 졸업증서는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냐이 온트솔로는 어떠한 사태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비정상적인 분주함 속에서 안네리스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해 갔다. 외부 세계와의 교섭은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유일한 남자 가족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법적으로 인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헤르만 메레마 살인 사건의 공판은 이제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었다. 로베르트 메래마와 뚱뚱보 사나이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채였다. 그 때문에 법원은 일단 바바 아촌을 피고로서 법정에 세우기로 했다. 백인 법정, 유럽인 법정에 말이다. 백인 법정에 세워지게 된 것은 아촌이 '특별재판권'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공범 관계가 존재한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공범 관계란 비유럽인과의 공범 관계를 가리킨다.) 아촌은 헤르만 메레마의 살해를 용의주도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죄로 기소되었다. 아마도 그 재판은 슬라바야의 재판 사상 가장 특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신문보도, 또는 사건을 둘러싼 저널리즘 내의 논쟁에 신동되어 각색 인종으로 구성된 슬라바야 시민이 방청석으로 몰려 들었다. 다른 도시에서도 대거 원정을 왔다고 전해졌고, 냐이의 친오빠도 투랑강으로부터 모습을 나타냈다. 또한 이것이 역사상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재판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댔다, 법정에서는 자바어, 마두라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말레이어가 등장한다고 해서인지 통역이 네 명이나 동원 되었다. 통역은 모두 순수 유럽인이었다. 테린하, 쟝 마레, 그리고 문제의 콤멜도 방청을 하러 왔다. 콤멜은 평소에는 몹시 두려워하는 법원 건물에 사람들이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 몰려드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신문 기자가 된 이래 처음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경매 사무소 "경매"지의 사주도 방청을 했다. 슬라바야 고등학교는 역사상 처음으로 휴교가 실시되었다. 교사와 학생이 교실을 법원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마르티네 의사는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입장에서 증언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바바 아촌은 일부러 중국으로부터 영어를 쓰는 변호사를 한 사람 고용했다. 그때문에 통역도 한 사람 더 늘어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은 또한 중국인이 백인 법정에서 심판받는 최초의 재판이라고도 말했다. 처음에 심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단계에서는 네덜란드어가 사용되었다. 의학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중국의 약초를 재료로 한 것을 먹였다고 최종적으로 인정하기는 했으나, 살인의 동기에 대한 진술을 바바 아촌으로부터 받아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상세한 약초의 처방에 대해 밝히는 것을 거부하고, 다만 카리스소크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는 열명의 살인범에 대한 실험에서 증명된 것처럼, 그것을 마신 사람은 평형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밖에는 시인하지 않았다. 아촌은 처음에는 그 약초가 사람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는 단지 야자 술의 향기를 좋게 하기 위해 사용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로서 증언대에 선 어떤 한의사가 그의 주장을 뒤집었기 메문에 아촌은 최대의 약점을 찔려 결국은 자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인의 동기는 무엇일까? 처음에 아촌은 6년 동안이나 눌러앉아 나가려고 하지 않는 손님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손님은 그동안 계속해서 수입을 올려 주었을 텐데 싫증이 나다니 무슨 까닭인가? 게다가 만일 싫증이 났다면, 어째서 나중에 로베르트 메레마까지 손님으로 받아들였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냐이 온트솔로에 대한 심문은 재판의 주인공이 된 그녀의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었다. 그녀는 네덜란드어의 사용이 금지되고, 자바어를 쓰도록 명령받았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말레이어로 진술했다. 그녀는 고 헤르만 메레마의 아촌에 대한 지불은 한 달에 45 길더이고 그것은 언제나 심부름꾼이 그녀의 사무실로 청구를 하러 왔다는것, 최근에는 그것에 로베르트 메레마의 몫 60길더가 더해져 매달 청구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어째서 로베르트의 지불 쪽이 더 많았을까? 왜냐 하면, 시뇨 로베르트는 가장 화대가 비싼 마이꼬만을 상대했고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아촌은 답변했다. 정말로 마이꼬는 로베르트 메레마만을 상대했는가? 마이꼬는 부인했다. 아촌이 명하는 내로 아촌 본인을 위시해서 누구라도 상대했다. 그런데 로베르트 메레마는 차츰 체력이 약해져서 성욕이 쇠퇴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마이꼬는 진술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창녀가 되고 난 뒤 성병에 걸린 일은 없는가 하는 질문이 마이꼬에게 던져졌다. 전문가로서 마르티네 의사가 마이꼬가 매독에 걸려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증인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그런 병을 퍼뜨린 것을 유감으로 생각지 않는가? 그 질문에 대해서 마이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는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 병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창녀로서 자신의 의무는 단지 손님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방청객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누가 그 병을 증인에게 옮겨 주었는가?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마이꼬는 전혀 모르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손님이 그녀에게서 병을 옮아갔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바바 아촌은 냐이에게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냐이는 그 이웃 사람은 얼굴도 본 적이 었고, 오직 그의 청구서를 본 적이 있을 뿐이며,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한 것은 이 법정이 처음이라고 답변했다. 재판은 마지막 단계에 와서 많은 문제에 부딪친 채로 그것을 규명하지 못해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정적인 장애가 된 것은 물론 로베르트 메레마와 뚱뚱보 두 사람이 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동안 법정에서 행해진 수많은 심문 가운데서 완전히 이치에 어긋나고 엉뚱한 쪽으로만 몰고 간 것은 나와 안네리스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방청인들은 그 질문에 소리죽여 킬킬거리거나 큰 소리로 웃거나 했으며, 판사와 검사까지도 우리들의 관계를 사람들 앞에서 비웃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와 냐이의 관계도 추잡하고 불쾌한 질문으로만 일관된 것이었다. 나의 희망이고 스승이었던 유럽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질문의 의도가, 메레마 살해에 우리들이 관여한 상황 증거로서 이용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성관계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질문은 곧 끝났다. 우리들을 구해준 것은 바바 아촌이었다. 그는 냐이도 나도 안네리스도 다르삼도, 그밖에 누구도 살인에는 관계가 했다고 단언하고, 그 증언이 그 사건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는 열쇠가 되었다. 2주일 간에 걸쳐 심리가 진행되었는데, 여전히 바바 아촌으로부터 살인의 동기에 대한 진술은 얻을 수가 없었다. 판사는 그에 대한 판결 언도를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검사는 로베르트 메레마의 신병을 구속하여 취조하기 위해 그의 거처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법원의 결정은 세상 사람들을 실망시킨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동양인이 유럽인을 계획적으로 살해했으므로 판사가 사형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판사는 바바 아촌을 미결인 채 계속 구류할 것을 결정하고, 그의 협력자들에게 3년에서 5년형을 인도했다. 마이꼬는 그녀의 고용주인 아춘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병원에 입원할 것을 명령받고, 의사의 감시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재판은 로베르트 메레마와 뚱뚱보 사나이의 신병을 확보한 뒤 재개하기로 결정되었다. 제16장 소문의 덫 재판이 일시 휴정으로 들어가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내가 탄 마차가 교문 앞에 멈춰섰을 때, 다른 학생들은 이미 교정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던 것을 중단하고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교장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밍케군,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이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대표로서 재판에서의 자네 승리에 대해 축하하네. 또 세상사람들의 공격에 대한 자네의 끈질긴 변호활동에 개인적으로 축하하네. 나를 포함하여 우리들은 모두 자네 같은 똑똑한 학생을 갖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네. 재판의 경과에 대해서는 선생님이나 학생이다 모두 주목해 왔네. 물론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밍케군, 자네는 그야말로 우리들 모두의 관심의 대상이었네. 그것은 물론 자네가 이 학교의 학생이기 때문이지. 이제부터 교직원 회의의 결정을 자네에게 전달하겠네. 자네 일로 치열한 토론이 전개되었는데, 교직원 회의는 법경에서의 자네 진술, 즉 안네리스 메레마와의 관계에 대한 자네 진술에 의거하여 급우와 책상을 나란히 하고 앉기에는 너무 어른스럽고, 특히 여학생에게는 위험한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했네. 교직원 회의는 여학생의 안전에 대해서 학부형이나 보호자에개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거지. 내가 말하려는 뜻을 이해하겠는가?" "잘 알겠읍니다, 교장 선생님." "참으로 유감이야.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앞으로 몇개월 뒤에 졸업할 수 있을 텐데." "할수없읍니다. 모든 것은 교장 선생님께서 결정하는 일이니까요." 마지막으로 교장은 내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밍케군, 자네는 학교에 관한한 실패한 셈이네. 그러나 사랑과 인생에 있어서는 승리자일세." 교장실을 나왔을 때 수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창 너머로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손을 흔들어 나에게 답했다. 쁘리부미인 나를 아직도 걱정해 주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올랐다. 마부는 아직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마차를 세우도록 마부에게 명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쫓아왔기 때문이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유감이군요, 밍케군. 당신을 지켜줄 수가 없어서. 힘껏 싸웠는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사적인 일을 질문하다니, 그 법정은 파렴치해요." " 고맙습니다, 선생님. "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은 되돌아갔다. 나는 다시 마차에 올라타고 내가 부탁한대로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그렇다. 정말 그 법정은 파렴치했다. 검사는 로베르트 슬르호프를 닮기라도 한 것처럼 특히 우리들의 사생활을 사람들의 면전에서 폭로해 보이려고 했다. 마치 마르티네 의사의 길문을 되풀이 하듯이 검사는 네덜란드어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밍케군, 당신은 어떤 방에서 잠을 잡니까? 물론 나는 편견과 악의에 찬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번에는 안네리스에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안네리스 메레마양은 누구와 잠을 잡니까? 안네리스에게는 대답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크고 작은 갖가지의 노골적인 비난과 조소가 법정 안에 퍼져 나갔다. 계속해서 질문은 냐이에게 퍼부어졌다. 냐이 온트솔로, 본명 사니켐, 고 헤르만 메레마씨의 첩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서 냐이는 냐이의 손님과 딸의 불순한 관계를 방치해 둘 수 있었는가? 방청석에는 점점 더 노골적인 비웃음이 퍼져갔다. 검사, 그리고 판사까지도 비굴한 웃음을 띠고 많은 유럽인 여성들에게서 시샘을 받고 있는 원주민 여성에게 정신적 고문을 가할 수 있게 된 기쁨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자바어를 강제적으로 쓰게 하려는 판사의 제지도, 나무 망치소리도 무시하고 냐이는 낭랑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완벽한 네덜란드어로 답변했다. "재판장 각하, 검찰관 각하, 우리들의 가정 생활이 무참하게 폭로당하고 있는 데 대해....(망치가 다시 테이블을 때리고, 질문에 직접 답변하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나, 냐이 온트솔로, 본명 사니켐, 헤르만 메레마의 첩은 내 딸과 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분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읍니다. 나 사니켐은 한 사람의 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첩의 뱃속에서 안네리스는 태어났읍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와 헤르만 메레마의 관계는 누구에게도 지탄받은 적이 없읍니다. 그것은 그가 순수 유럽인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에서였읍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 딸과 밍케씨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까? 밍케씨가 쁘리부미라는 이유에서입니까? 어째서 혼혈아의 부모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까? 나하고 헤르만 메레마씨의 관계는 주종 관계였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법이 되거나 남들의 비난을 받은 적도 없읍니다. 내 딸과 밍케씨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고, 그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물론 아직 두 사람은 합법적인 혼인관계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한 내가 낳은 자식들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아무 비난을 듣지 않았읍니다. 유럽인은 고 헤르만 메레마가 나를 산 것처럼 쁘리부미의 여자를 살 수가 있읍니다. 그런 인신 매매 쪽이 순수한 사랑보다 더 옳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압도적인 부와 권력때문에, 만약 유럽인의 그런 행위가 허용된다면, 어째서 쁘리부미는 순수한 사랑 때문에 조소를 받지 않으면 안된단 말입니까?" 법정이 얼마간 소란스러워졌다. 냐이는 판사의 망치 소리를 무시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안네리스가 쁘리부미가 아니고 혼혈아라는 것을 냐이는 어쩔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그때 검사의 노한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혼혈아, 너보다 훨씬 신분이 높은 인간이다 ! 밍케는 '특별 재판권'을 갖고 있기는(그 점에서 나는 냐이보다 신분이 높다 !) 하지만 원주민에 불과하다. 밍케의 특별 재판권 따위는 언제든지 취소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안네리스양은 어디까지나 원주민보다 신분이 높은 것이다. "각하, 내 딸, 안네리스는 말씀하신대로 혼혈아입니다. 그렇다면 왜 안네리스에게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행위가 허용되지 않습니까? 그녀를 낳고 키우고 교육시켜 온 것은 나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에게서 한푼의 원조도 받지 않고 말입니다. 또 지금까지 그애를 책임져 온 것도 내가 아닙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안네리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걱정해 주거나 그 애를 위해 땀 한방울 흘린 일이 없읍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참견을 하는 겁니까?" 이미 법원의 권위 따위는 냐이의 안중에 없었다. 한 사람의 법정 관리가 그녀를 법정에서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냐이는 끌려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원한에 사무친 말을 계속 퍼붓고 있었다. "나를 첩으로 만든 것은 누굽니까? 냐이라고 불리게 만든 것은 누굽니까? 투앙이라고 존경받고 있는 당신네들 유럽인이 아닙니까? 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까? 왜 모욕을 당해야 합니까? 당신네들은 내 딸도 또 첩이 되라고 하는 건가요?" 냐이의 목소리는 법원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판사도 검사도 방청객도 모두 침묵했다. 냐이를 끌고 나가는 관리만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한 사람의 쁘리부미 여성과 그녀를 비웃어 온 사람들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당당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냐이가 유럽인을 고발하는 검사가 된 것 같았다. 법정 밖으로 끌려 다가면서도 냐이는 호소를 멈추지 않았다.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아침 길을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그래, 지금 이곳은 법정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학교의 법정에서도 판결의 망치가 내려졌었다. 더 이상 급우들과 함께 공부해서는 안된다. 여학생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라고 해서 나는 불명예스러운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만약 선생님들의 부끄러운 비밀이 법정에서 폭로되고 가차 없이 비난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들이 결함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가 한가지쯤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비정한 검사나 판사는 어면가? 그들도 남몰래, 혹은 내놓고 첩을 두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세상의 이목과 법률의 감시의 눈이 없다면, 그들의 행위는 사니켐에 대한 헤르만 메레마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부패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차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지탄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봐라, 저 자가 문제의 밍케라는 녀석이다. 안네리스라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와 동침하고 있는 사내지. 기어코 학교에서도 쫓겨난 모양이야. 녀석에게는 우리의 상식은 통하지 않거든. 아뭏든 법정에서 사생활을 폭로당한 파렴치한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그런 일은 당하지 않거든. 검사나 판사가 까닭없이 그런 일을 할 턱이 없으니까. 그때 나의 심정은 우리 조상들이 '누란소'라고 부른 적막감, 허망함, 비애, 동포와 함께 살아가면서도 이미 그들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쓸쓸함, 똑같이 작렬하는 햇볕을 쬐면서도 홀로 마음 속의 뜨거운 분노를 견뎌내는 고독감 같은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다는 길은 같은 운명, 유대감, 고뇌를 함께하는 사람들, 냐이, 안네리스, 쟝 마레, 다르삼과 함께 마음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나는 쟝 마레의 집을 찾아갔다. "기운이 없군, 밍케. 퇴학이라도 당했나? 고개를 들라구."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기 일쑤이던 장이 이번에는 반대로 나에게 고개를 들라고 한다. 기운을 내려고 해도 내 마음 속에서 기운을 북돋을 만한 것들이 모두 없어져버린 것 같았다. "그 학교는 이미 자네에게는 너무 좁은 거야, 밍케. 하지만 설사 밍케가 실패했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맥스 트레다르는 건재하지 않은가 ?" 마치 나에게는 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것이라는 듯이 쟝 마레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학교를 못다니게 되면 가구의 주문을 받아오는 것이 어렵게 되어 우리들의 일에 지장을 가져온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감자기 웃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 났다.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밍케?" "웃을 일이 아닐 텐데요." 나는 불쾌해하며 말했다. "아냐, 웃기는 얘기지. 모르겠나? 지금 자네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한 가지 있네. 결혼하는 거야, 밍케. 안네리스와 결혼하는 걸세. 설사 악마와 맞서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는 거야. 이제는 그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네. 요컨대 그들과 같은 어리석은 야만인이 되라는 말일세. 결혼을 하게나, 밍케. 결혼만 하고 나면 문제는 간단해지는 거야."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우리들에 대한 법정의 태도는 파렴치하다고 했어요." "그래, 그건 야만이지. 야만이라는 말밖에는 그들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말레이어 신문과 네덜란드어 신문에도 그렇게 쓰고 있다더군. 야만이라는 심한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말일세. 그런 질문은 본디 비공개 재판에서 해야 하는 걸세." "맞아요. 그러나 네덜란드어 신문에서는 오히려 마마가 법정을 혼란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마마의 발언 내용은 한 마디도 싣지 않았다구요." "콤멜의 기사를 읽어 보게나. 상처를 입은 사자처럼 공격하고 있네. 그는 자네 편이야."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 주새요. 나는 읽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는 이렇게 쓰고 있네. 검사와 판사의 행위는 첩 또는 현지처에게서 태어난 모든 유럽 혼혈아를 모욕하는 것이다. 혼혈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지를 받으면 쁘리부미가 안 되지만 인지를 받지 못하면 쁘리부미가 된다. 바꿔 말하면, 쁘리부미와 첩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인지받지 못한 혼혈아는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콤맬은 법정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폭로한 것을 비난하고 있네. 검사와 관사에게는 유럽인답지 않게 비도덕적이며 프로노 치트로를 심판하기 위해 위로구노가 행한 쁘리부미 법정보다도 악랄하다고 비난하고 있네. 그것은 약 25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인 모양인데, 프로노치트로와 위로구노는 어떤 인물이지?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 두 사람에 관해서는 나중에 얘기해 줄께요."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곧장 사무실로 가서 냐이에게 학교에서의 일을 전했다. "마마, 우리들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마마는 어떻게 생각하지요?" "조금 기다려요.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있나요?" 나는 새로운 가구 주문이 어렵게 되어서 이대로는 쟝 마레의 사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것도 어쩔 수가 없겠지요. 유감스럽지만 지금 당장 결혼을 허락할 수는 없어요. 재판 때문에 우리들의 사업은 많은 피해를 입었어요. 지금은 그 피해를 복구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왜냐 하면, 사업을 견실하게 경영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가족의 명예를 지켜 나가는 것이니까요. 이해해 주겠지요? " 나는 냉정하게 타이르는 냐이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엿보였다. "밍케, 전부터 줄곤 생각해 온 일인데, 인생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만약 이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냐이로 전락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안네리스예요. 나는 어머니로서 실격이 되고 맙니다. 그 아이는 세상의 어면 혼혈아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게 되지 않으면 안돼요. 자기 민족 가운데서 존경받는 쁘리부미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존경을 받는 길은 이 농장을 훌륭하게 경영해 나가는 것밖에는 없음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세상이 보는 눈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안네리스는 뒤곁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의자에 앉은 채 순수 유럽인, 혼혈, 쁘리부미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혼란을 일으켜 내가 느끼고 있던 고독감과 좌절감 따위는 사라져버렸다. 순수 유럽인, 혼혈, 쁘리부미 등으로 얽혀진 혈연 관계가 마치 거미줄처럼 사회의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물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 첩, 냐이라고 불리는 여인들이다. 그러나 그 암거미들은 망에 걸린 먹이를 잡아 먹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망에 걸린 일체의 능욕과 멸시를 받아들이고 혼자 잠자코 삼켜 버린다. 그녀들은 설사 투앙과 같은 집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주인공일 수는 없다. 자기 배로 낳은 자식과 같은 계층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럽 순종이나 혼혈은 물론 아니고, 이미 쁘리부미조차 아니라고 해도 좋다. 그녀들은 환상의 산인 것이다. 이윽고 나는 물흐르듯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콤멜이 제시한 생각이 내 문장의 기본이 되었다. 해가 질 무렵 문장은 거의 완성되었다. 알라 신이여, 깊은 좌절이나 고독도 또한 당신의 백성이 무엇인가를 낳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 같군요.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고 번식해 가도록 인류에게 명한 것도 당신이었읍니다. 사회적 경제격인 능력의 차이 때문에 태어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도 당신은 축복을 줄 수가 있었읍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적으로 차이가 없는 두 사람의 남녀가 자유로운 의지와 책임에 의해서 맺은 관계를 왜 당신은 축복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인가요? 지금까지 당신은 그턴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고 당신의 축복 속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큰 권력을 휘두르는 혼혈아라는 계층을 만들지 않았읍니까 ? 알라 신이여, 지금 나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왜냐 하면, 거기에 대한 답변을 아무도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라 신이여, 당신이 대답을 해주십시오. 나는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에 관해 쓰고 있는데 불과합니다. 모든 학문과 지식도 또한 근원을 따지자면,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던가요? 순수 유럽인, 혼혈, 쁘리부미라는 문제에 대한 맥스 트레나르의 글이 발표된 지 10일 뒤, 학교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시간에 마푸다 뻬테루스가 찾아왔다. 교장선생님이 나를 찾고 있으니까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학교와는 인연이 끊긴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냐이도 내가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안네리스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이 말했다. "이유야 어떻든 꼭 가지 않으면 안돼요. 하지만 그전에 우선 내 축하의 말부터 들어 주세요. 당신이 얼마 전에 발표한 글 말인데요. 확실히 그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문제를 좀 더 이성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했어요." 그래서 결국 나는 함께 가기에 이르렀다. 학교로 가는 도중에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나와 같은 학생을 둔 것을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러 차례 강조했다. 요즘 얼마 동안 뜻하지 않은 일에 우롱당하고 긴장해야 했던 나에개 그녀의 말은 위안이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였으므로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 있었다. 밀실 재판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나 한 사람을 위해 왜 일부러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내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란 말인가? 교장 선생님이 개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문화적인 공적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 있읍니다. 이 슬라바야에서도 그런 유럽의 전통은 유지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그 문화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문제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그 공적에 의해서, 동포에게 그가 어떤 공헌을 했느냐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시작한 교장선생님은 그 다음에 최근에 발표한 나의 글에 대해 얘기를 이어 나갔다. "참으로 감동적이었읍니다.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 글이 진리를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동인도의 쁘리부미 역사에는 인연이 없었던 유럽적인 휴머니즘이 지금 맥스 트레나르, 여기에 모인 선생님들의 제자인 밍케군 속에 싹트기 시작한 것은 명백합니다." 교장선생님이 말하는 유럽적 휴머니즘의 의미가 나에게는 분명치가 않았다. "밍케군을 퇴학시킨 우리들의 조치에 항의하는 편지가 이미 일곱 통이, 그 가운데 두 통은 졸업생한테서 온 것입니다만, 나에게 왔읍니다. 그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그 학생을 퇴학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B시의 부이사관은 이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몰라바야의 이사관을 만나러 올 용의가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옵니다. 슬라바야의 이사회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B시의 부이사관은 밍케군의 후견인을 떠맡을 용의가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읍니다. 부이사관은 또한 만일 슬라바야에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할 경우, 교육산업 종교부 장관에게 직접 부탁하겠다고 했읍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내린 조치는 지금 지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로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내린 결정을 재고하려는 것은 그런 지탄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유럽인들의 양심에 비추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중요한 교직원 회의에는 맥스 트레나르, 즉 밍케군이 참석하고 있읍니다. 이 죄의에서 밍케군에 대한 앞서의 결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판단을 내려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자기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사자가 새끼를 다시 찾으려는 듯이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포효하며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덤벼들었다. 얼굴의 주근깨가 한결 눈에 띄고 눈의 깜빡거림이 더욱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를 야무지게 끊어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육이라는 것은 지극히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어떤 학생이 학교를 떠나 최근의 글 속에 나타난 밍케군처럼, 사고방식에 있어서나 태도에 있어서나 휴머니즘에 넘친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면, 설사 그 인격 형성에 기여한 교사의 역할이 미미하더라도 우리들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비범한 개성은, 밍케군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한층 견고한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다시 밍케군을 이 학교의 학생으로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합니다." 교직원 회의는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는 나를 복학시키기로 결정했다. 단 그것에는 일정한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나는 다른 학생들과 떨어져서 앉아야 하고, 교실의 안팎에서는 물론이고 가령 질문하거나 질문에 대답하는 경우라도 동급생과는 일체 말을 해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었다. "밍케군, 들은 그대로일세. 자네 의견은 어떤가?" 이런 문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표정이 교장 선생님의 얼굴에 역력했다. "가능하다면 학교를 계속 다니겠읍니다. 다시 받아 주신다면, 물론 다니겠읍니다만, 안된다면 거기에도 이의는 없읍니다.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선생닌 모두가 나와 축하의 악수를 나누었으나,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험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네덜란드어 선생님은 더할수 없이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내가 복학하게 된 것을 그녀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헤어질 때, 교장 선생닌은 미리암과 사라 드라크로아 자매가 보낸 우표가 붙지 않은 편지를 내게 건네 주었다.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교내는 조용했다. 교사와 교정, 그리고 그곳에 깔려 있는 자갈이 지금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의 시선이 내 등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까지 곧장 걸어갔다. "천천히 달리도록 해요." 나는 마부 마르주키에게 자바어로 일렀다. "곧장 신문사까지 갑시다." 도중에 마르주키가 주저하며 물었다, "도련님, 안색이 나쁜 것 같아요.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 ? " "왜 요양을 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학교를 졸업하면 그렇게 해야지. 몇달만 다니면 되니까." "앞으로 3개월 남았죠 ? " "그래, 3개월 더 노력해야지." "하지만 도련님, 더 이상 학교를 다녀서 뭘 하시겠읍니까? 도련님은 뭐든지 다 알고 있는데요." "뭘 하느냐구?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일을 해도 마친가지거든. 웬지 그런 느낌이 드는걸." "도련님은 지금 모든 일을 잘 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잘 해나가다니, 무엇을?" "그야 모두들 그렇게들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도련님에게는 안네리스 아가씨가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돈이 많고 똑똑하고 많은 정부고관, 명사, 네덜란드인과도 친분이 두텁구요. 우리같은 것 하고야 비교가 안되지요."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나?" "네, 도련님. 더구나 젊고 잘 생기셨고 곧 부빠티가 되신다고들 그러던데요." "잊어버리게나. 그런 얘기는 잊어버리라구." "슬라바야 일보"의 사무실에서는 마르빈 네이만이 끝까지 학교에서 퇴학을 주장한다면 신문사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도록 하라고 권했다. 급료는 12.5길더로 많지는 않지만, 일은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 미스 마푸다 뻬데루스가 당신을 열렬히 변호했겠군요. 그녀와 친한가요? " "그녀는, 가장 현명하신 선생님입니다." "하지만 그녀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는 쪽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친절한 분입니다." "친절 ? 그것은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그녀의 무기지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마르덴 네이만씨가 말했다. "함정이라구요?" "이런 애기는 처음 듣겠지만, 친절을 내세워 남을 함정에 몰아넣을 수가 있지요." "어떻게 함정에 빠뜨린다는 거죠?"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광신적인 급진파, 즉 과격파입니다. '동인도를 위한 동인도'를 부르짖는 조직의 한 사람이지요. 그 구호를 들은 적이 있나요? "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동인도를 네덜란드와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이 동인도에서의 광신적인 급진파의 특색입니다. 그녀와 그 조직은 동인도에 갖가지 제약이 뒤따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 제약에 도전하고 게다가 그것을 침범하려고 하는 사람은 파멸을 피할 수 없읍니다. 그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제약이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지요. 분명히 네덜란드 본국에는 완건한 자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것이 전혀 없어요. 자유주의자라는 그 자체는 그가 여러가지 규정을 존중하고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 한 별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도 알아두는 게 좋아요. 쁘리부미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다행입니다. 가령 당신이 과격파가 되어, 그들의 동지가 되었다고 합시다, 자유주의파는 일단 정청의 주목을 받으면,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상관없이 그가 순종 유럽인이라면 동인도에서 퇴거 명령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만일 혼혈아라면 결과는 좀더 비참해서, 그는 직장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쁘리부미라면 틀림없이 자유를 잃고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채 구속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밍케씨, 아무쪼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태어난 이 나라는 네덜란드나 유럽이 아닙니다. 여기는 동인도예요. 만일 당신이 덫에 걸려 곤경에 빠져도 그들은 누구 하나 당신을 도와 주지 않을 것이고, 도와 줄 힘도 없읍니다." "그녀는 나의 선생님일 뿐입니다, 네이만씨. " "밍케씨, 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소문을 나침판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인도의 상류 사회에서의 소문은 믿을 수 있었어요. 이미 마푸다 뻬테루스에 관해서도 소문이 떠돌고 있읍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은 곤경에 휘말렸었읍니다. 더 이상 새로운 화를 초래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밍케씨 ?" 마르빈 네이만은 오랫동안 자유주의파의 활동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자세하게 설명해 돌려 주었다. 어느 대목에 이르자 그는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롭게 안심하고 살 수 있으며, 국민에게 나날의 양식을 충분히 공급하고 있는 지금의 동인도를 그들은 변혁시키려 하고 있다면서 비난까지 했다. "게다가 밍케씨, 역내 쁘리부미왕 지배 아래에서 이 나라의 국민은 평화와 안녕을 얻을 수가 없었읍니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했지요. 그것은 물론 법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메문입니다. 동인도 정청의 어디가 마음에 안드는 것일까요? 그들은 동인도에 대해서 기묘한 환상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도 또한 유럽인임에는 틀림없읍니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에 나는 갖가지 대립이 얼마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래부터의 대립에 지금은 유럽인끼리의 대립이 더해진 것이다. 여기에 외국인이 추가되면 어떻게 될까? 마르텐 네이만도 역시 휴머니즘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유주의를 거부한다. 많은 사람과 사귀면 사귈수록 그만큼 지금까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참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마치 우후죽순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네이만은 앞으로의 일에 지금부터 대기를 해 두도록 나에게 경고했다. 그에 의하면, 멀지 않아 마푸다 뻬태루스는 동인도에서 추방당할 가능성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가능성은 매우 크다. 벌써부터 그것을 암시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그먼 사태가 일어나기 건에 나에게 그녀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푸다 뻬테루스는 다만 동인도에서 추방당하면 끝납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딘가에 유배당해 그곳에서 유폐 생활을 보내개 될지도 모릅니다." 그가 말하는 동인도에서의 제약이 어떤 것인지 네이만은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좋다. 그 문제에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자. 적어도 만약 그런 제약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사실이라면, 그의 말은 신빙성이 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테린하의 집에 들렸더니, 어머니의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것은 자바어로 씌어 있었다. "아들아, 네 일을 신문에서 읽고 모두 걱정을 하고 있단다. 너는 나의 씩씩한 아들이다. 그 한 가지에 나는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갖고 있단다. 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옛날 내가 한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 도망쳐서는 안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네가 안고 있는 문제를 회피하려고 든다면, 네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과 학교에 다닌 것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만다. 왜냐 하면, 그렇게 된다면 내 자식은 단순한 비겁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너는 냐이 온트솔로의 딸을 좋아한다고 했지. 그것은 네 자신이 정할 일이고, 우리들이 간섭할 문제는 아니다. 내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다음과같은 것뿐이다. 결코 자신이 직면한 문제로부터 도망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항해 나가는 것이 남자로서의 너의 권리이니까. 아름다운 꽃은 손에 넣어라. 왜냐 하면, 그것은 용감한 남자를 위해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연애에 있어서 비겁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비겁한 사람이란 재산이나 지위를 내세워 여성을 손에 넣으려는 남자를 말한다. 그런 남자는 비겁자이고, 그것에 걸려들어 정복당하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여자일 뿐이란다. 네덜란드어 신문을 읽은 사람이 애기를 해 주었는데, 너는 지금은 문필가로 유명해졌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얘야, 왜 너는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글을 쓰는 게냐? 너의 사랑 이야기를 어머니나 이 나라 사람들이 노래할 수 있도록 팡클, 키난리 같은 전통의 시가 형식으로 써다오. 아버지 걱정은 하지 마라.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노래가 있으니까......" 아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당신의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당신은 나를 벌한 적이 없어요. 이 아들을 한번도 단죄한 적이 었읍니다. 어릴 때부터 회초리를 든 일조차 없었읍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안네리스와의 관계를 탓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어요. 다만 당신은 내게 자바어로 써라, 당신이 노래할 수 있는 글로 쓰라고만 하십니다. 어머니, 자바의 시가 형식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당신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내 생활의 리듬은 자바의 전통 세계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전통 시가 형식을 쓰기에는 어렵습니다. 어머니와의 은밀한 교류는 테린하 부인의 입버릇인 넋두리 때문에 깨어졌다. "어떻게 하지요, 밍케 도련님? 내일 시장을 봐야 하는데요." 그것은 내 주머니에서 적어도 1타렌을 내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쟝 마레의 집으로 찾아가니 메이가 새로운 메트레스를 깐 자기 방 침대에서 시트도 깔지 않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쟝 마레는 무슨 생각엔가 골몰해 있었다. 집 뒤쪽에 있는 방은 조용했다. "쟝, 내일부터 마마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마마가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 같은 것을 하고 있을 때, 그리는 것이 좋아요. 내일부터 나는 다시 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당신이 마마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메이는 우노크로모에 머물러 있게 하면 될 거예요. " "그렇다면 가 보기로 할까?" 쟝 마레는 아직도 어딘지 서운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솔직이 지금은 그녀를 그리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걸." "그리고 싶다고 말을 꺼낸 것은 당신이잖아요?" "밍케, 그녀는 대단한 여성일세. 매우 강한 성격이야. 나는 감탄하고 있네. 특히 법정에서의 그녀는 놀랍더군. 그녀는 참으로 의연한 여성이야. 굳건한 주권을 가지고 있어. 그녀 앞에 서면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 같네. " 나는 조용히 쟝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마마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그런데 그것을 전할 수가 없다는 것일까 ? 쟝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쟝, 당신은 사랑때문에 괴로와해 본 적이 있나요?" 그는 얼굴을 들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오히려 되물었다. "자네는 프랑스의 화가 투루스 로트랙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불후의 걸작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위대한 화가 말일세." "아니, 모르겠는데요. " "그는, 사실은 인생에서 모든 일을 성취했네. "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죠 ?" 쟝은 의미 있는 웃음을 띠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잠이 덜 깬 메이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목욕을 하고 오너라, 메이. 지금 우노크로모로 가자. 내일 아침 다시 밍케 아저씨와 학교에 가는 거야." "우노크로모에서 마차를 타고?"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면서 메이가 물었다. 쟝 마레는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신도 함께 가요.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이 지금 함께 갑시다." 우리들 셋은 출발했다. 세 사람이 타기에 마차는 비좁았다. 그날 밤, 쟝 마레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등학교의 졸업 시험에 합격하는대로 나와 안네리스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세상과 나의 마음이 조용히 악수를 나누었다. 제17장 졸업식과 결혼식 졸업식은 금상첨화였다. 학교로 돌아가고 나서 3개월 동안 나는 공부에만 몰두했다. 글 쓰는 것도 그만두고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공부, 오로지 공부만 했다. 그러는 동안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졸업식은 급우들과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극히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이제부터 각자 끝없는 바다로 배를 저어나갈 이별을 앞에 둔 귀중한 시간이었다. 학부형이나 후견인이 몇줄씩 나란히 참석하고 있었다. 모두가 순수한 유럽인, 혼혈아, 그리고 몇 명의 중국인들로서 쁘리부미는 한 사람도 없었다. 마마가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안네리스를 동반했다.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한다는 것은 안네리스에개 있어서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검은 빌로도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세 겹으로 감고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매달리온, 그리고 팔찌를 차고 있었다. 본디의 아름다움에도, 치장을 한 모습에서도 안네리스가 내덜란드 여왕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내 모습은 졸업증서를 받는 다른 학생들처럼 위아래 모두 흰 옷차림이었는데, W자를 새긴 황동 단추를 달지 않은 것만 뺀다면 정청 관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들 두 사람은 졸업식장에 들어가 정장을 한 마푸다 뻬태루스 선생님의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몹시 흥분해서 안네리스를 맞았다. "프리마돈나 ! 당신이 오늘의 여왕 같아요 !"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안네리스는 별로 싫어하는 기색도 없어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닌 안내를 받으며 가족석으로 걸어갔다. 남학생도 여학생도. 모두 고개를 돌려서 나의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제야 알았을 것이다. 이 세계가 나의 왕국이 되었다는 것을. 그것은 내가 고난 끝에 힘겹게 얻은 것이다. 나는 재빨리 로베르트 슬르호프를 찾았다. 눈에 띤 것은 슬르호프가 아니라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얀 다체르스테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참석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부터 자랑스러운 이 아들이 고등학교의 졸업장을 받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어머니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장엄하고 화려한 분위기의 어던가에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졸업식장의 웅성거림이 멈췄다. 3색기와 테이프가 펄럭이는 가운데 참석자 전원의 제창에 의한 "빌헬름스"가 울려 퍼졌다. 그 다음에 교장 선생님이 졸업생들에게 간단한 축사를 했다. 그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생들의 찬란한 앞날을 축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 생활에서의 성공을 기원했다. 네덜란드에 건너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할 학생들에게는 무사한 항해와 함께 그들이 네덜란드와 동인도, 그리고 세상에서 유능하고 쓸모있는 학자가 되기를 빌었다. 유럽인 장학사의 축사는 없었다. 그 뒤 순서는 1899년도 통일국가시험의 합격자 발표로 옮겨갔다. 선생님들은 교장 신생님 뒤에 줄지어 있었다. 침묵과 긴장의 순간이었다. "이제 19세기도 저물어가는 이번 학년을 끝마치면서 동인도의 통일 국가시험을 치른 45명 중 수석 합격자는 바타비아 고등학교 학생이 차지했읍니다. 45명 중 11명은 불합격으로 판정되어, 내년도에는 더 한층 노력을 해야겠읍니다. 차석 합격자는 슬라바야 고등학교에서 나왔읍니다. 이것은 곧 그가 슬라바야에서 수석이라는 뜻도 됩니다." 졸업식장은 갈채 속에 휩싸였다. 나는 급우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각자가 자기가 전 동인도에서 2등, 슬라바야에서는 1등이 아닌가 하고 상상하며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도 또한 오랫동안 꿈꾸어 온 일이었다. "전 동인도에서 차석, 슬라바야의 수석, 그 학생의 이름은.,....밍케." 나는 몸이 떨렸다. 예상치도 못한 결과였다. 사실 유럽인의 자녀들보다 높은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쁘리부미 학생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금기와 같은 것이다. "밍케군 ! " 교장 선생닝이 나를 불렀다. 나는 아직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곁에 있던 급우가 보다 못해 부축해 주었다. "밍케군 !"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닌이 손짓하며 불렀다. 비틀거리면서 나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졸업식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처량한 내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제일 먼저 호명된 것이 쁘리부미였기 때문이다. 선생님들 쪽에서도 박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희미하게 박수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마푸다 뻬태루스 선생님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안네리스도 박수를 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니 박수는커녕 철부지와도 같은 그 아가씨는 틀림없이 시골 처녀처럼 얼이 빠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상에 올라가 졸업장을 받고 격려사를 들었다. 졸업장을 받는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침착하게나, 밍케군." 교장 선생님이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전천히 걸어서 자리로 돌아왔다. 뒤따르듯이 선생님들 쪽에서 약한 박수가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학생 몇 사람, 뒤이어 참석자 몇몇이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뒤로 다섯 번째가 슬르호프, 꼴찌는 얀 다페르스테였다. 그 마지막 학생이 자리로 돌아갈 때 가족석에서 유럽인인 다페르스테 목사가 튀어나와 애정어린 포옹으로 그를 맞이했다. 목사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이 있었다면 안네리스도 그렇게 맞이했겠지만, 그녀에게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파티가 시작되었다. 일이 학년 학생들이 "다윗과 밧세바"라는 연극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어떤 선생님이 각색한 것이라고 했다. 학부형 등의 참석자와 졸업생이 한데 어울려 앉게 되어 안네리스도 내 옆에 앉았다.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에 교장선생님이 우리들 두 사람의 자리로 찾아와 B시에서 왔다는 전보를 건네주었다. 통일 국가시험에 전 동인도에서 차석으로 합격한 데 대한 미리암, 사라, 에르베르 드라크로아로부터의 축전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당사자인 나보다 먼저 이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은 친절하게 안네리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교장 선생님의 친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심으로 그가 모욕적인 말을 하지나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진심으로 안네리스를 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 우리들은 오는 수요일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읍니다. 교장선생님과 여러 신생님들을 초대하고 싶은데 참석해 주시겠읍니까? 저녁 7시부터입니다" "그렇게 갑자기 ?" 교장 선생님은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네리스는 그의 악수에 쌀쌀하게 응했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마르티네 의사의 분석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닌은 희색이 만면해서 잡고 있던 내 손을 크게 흔들고 나서 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쪽을 돌아다볼 정도로 크게 손바닥을 쳤다. "그 일을 지금 여기서 모두에게 발표해도 되겠나?"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 물론 상관없옵니다. 구두에 의한 정식 초대로서 말입니다." "초대장을 만들지 않았나?" "약간 걱정이 됩니다, 지금까지의 경위가......"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도 역시 악수를 청했으나, 그녀는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문제의 깜빡거림이 빨라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교장 선생님은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무대 위에서는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 천전히 막이 오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가 나타났다. 그것은 이제부터 밧세바가 목욕을 하개 되고, 그 모습을 예언자 다윗에게 들키게개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다 밧세바는 막이 완전히 올라갔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다윗이 등장할 리도 없다. 사람들은 목을 길게 빼고 미녀 밧세바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밧세바를 대신해서 외쪽 안경을 벗어 든 교장선생님이 나타나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교장 선생님도 어쩔수 었었던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랍인의 옷과 터번이 아닌 외쪽 안경을 손에 든 그 다윗은, 지금부터 알려야 할 일이 있어서 나왔다고 관객에게 양해를 구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발표하게 되면 효과가 없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들의 결혼식 초대를 전달했다. 망설이는 듯한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선생님과 재학생과 졸업생 이외에는 초대받지 못했으니까 참작하시기를 바랑니다." 와아 하고 회장에 웃음이 터졌다. "제군들 가운데는 아마 지금 곧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이미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해서 참석할 수 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대표해서 내가 솔라바야 고등학교의 교장으로서 내일의 신랑 신부를 축복하고 두 사람의 영원한 행복을 빌겠읍니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무대를 내려왔다. 막 그늘에서 무대를 내다보고 있던 밧세바와 엇갈리면서...... 결혼 피로연은 처음에는 간소하게 할 예정이었으나 졸업 파티에서 갑자기 손님을 초대하개 되었기 때문에 성대하게 치러야만 했다. 냐이도 그것에 찬성했다. 그녀는 피로연에의 초대가 졸업 파티에서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안네리스한테서 전해 듣고 매우 기뻐했다. "밍케, 이 피로연은 졸업 시험에서의 당신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이기도 해요, 그렇게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어요. 모든 시련을 당신은 보기 좋게 극복해낸 거예요. "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 전에 나의 가족을 대표해서 어머니가 우노크로모에 찾아왔다. 냐이는 마치 백년지기라도 만난 듯이 어머니를 환영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될 안네리스가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결코 며느리 곁을 떠날 수 없다는 듯이 싫증도 내지 않고 안네리스의 아름다움에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부인." 어머니는 얼마 뒤면 아들의 장모가 될 냐이에게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처녀로군요. 아마 바누와티 (전설상의 미녀) 보다도 더 아름다울 거예요. 당신이 내 아들을 사위로 맞아 주다니 꿈에도 생각 못할 일입니다. 평생, 아니 저세상에 가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서로 사랑하고 있었읍니다. 다만 저로서는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읍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 아이는 훌륭한 집안의 출신이 아니고 태어난 것은......"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라면 달리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읍니까?" 그날 밤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아들아, 너는 참으로 행운아다. 저렇게 예쁜색시를 맞이할 수 있다니 말이다. 네 선조님 시내에 저런 미녀가 있었다면 아마 전쟁이 났을 게다." "설마 어머니는 내가 싸우지 않고 그녀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갰지요?" "아니지. 네 말이 맞다. 너는 싸우고, 그리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게 틀림없다." 우리들의 결혼식은 이슬람 양식으로 거행되었다. 이슬람 법에 따라 다르삼이 입회인이 되었고, 안네리스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결혼식이 시작된 것은 아침 9시 정각이었다. 관습대로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들은 어머니와 마마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우리들의 절을 받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들을 축복했다. 안네리스도 울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경사스러운 날에 행복을 함께 나눌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와 마마는 서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젖은 눈으로 마주보며 끌어안았다. 감상, 그리고 눈물.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의 표현이다. 동시에 그것은 감정의 표현은 지난날의 아픈 상처와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인간은 그런 대 지위나 체면을 완전히 떠나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뒤이어 집안끼리의 조촐한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본격적인 피로연은 그 다음에 있다. 농장 안의 각 마을 주민에게 있어 우리들의 결혼식은 성대한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벼나 잡곡의 건조장에는 천막이 쳐지고 대연회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인부들에게는 모두 유급 휴가가 주어졌다. 가축을 돌보느라 도저히 쉴 수가 없는 인부들에게는 세배의 임금이 주어졌다. 소가 다섯 마리, 300마리의 닭이 사라졌다. 그리고 2025개의 계란, 온갖 유제품이 주방에 쌓였다. 그리고 마차들은 모두 오색의 색종이로 장식되었다. 이렇게 성대한 결혼 피로연은 우노크로모의 주민에게는 처음보는 것이었다. 언젠가 안네리스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마마는 결혼 피로연을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아끼지 않을 거예요. " 또 이렇게도 말했다. "마마는 딸의 결혼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을 보고 싶어해요.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어도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안네리스도 마마도 금전상의 도움 같은 것은 일체 요구하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들이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읍니까? 안네리스는 이미 미래의 남편에게서 모든 것을 받지 않았읍니까?" 마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꼭 돕고 싶다면 아직 밍케에게서 받지 못한 것, 내가 죽을 때까지 나에 대한 절개를 지키겠다는 약속, 그것을 약속해 주세요. " 안네리스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결혼식에서 안네리스에게 맹세했다. 오후 5시, 내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얀 다페르스테였다. 약간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말쑥한 고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주저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미안해, 밍케. 너무 일찍 왔나봐. 사실은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 일부러 일찍 왔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섞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자네는 재수가 좋은 친구야. 바라는 것은 모두 손에 넣었으니까 말일세.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되고, 몇년 있으면 부빠티가 될테고 말이야." "운이 나쁜 녀석이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 말투로군 그래." "자네 말 그대로야. 사실은 파파와 마마에게서 도망쳐 나왔어. 배가 유럽을 향해 출항한 뒤,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해안까지 헤엄쳐 왔다네." "거짓말. 멋진 양복을 입고 있으면서, 뭘?" "이 옷은 친구한테서 빌린 거야. 친구라고 해도 동급생은 아니지만." "모두가 유럽을 동경하고 있는데 자네는 왜 싫다는 건가?" "유럽에는 잠깐 들르는 거고, 그 다음에 수리남(남미의 네덜란드 식민지)으로 건너갈 예정이었어. 물론 내가 한 짓이 잘못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양자로서 얼마나 깊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도 알고 있네." "자네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꾸짖는 것을 벌써 여러번 들었어." "미안해.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재수 없는 소리를 해서. 하지만 밍케, 나를 도와 주어야겠어. 나는 자바를 떠나고 싶지 않네. 나는 네덜란드인도 아니고 혼혈아도 아니야." "그 얘기도 몇번 들었네." "그럴거야. 그런데 무엇보다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이 싫어." 다페르스테 목사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때 양자로 입적되어 세례를 받고, 부부의 성인 다페르스테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얀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그 이전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다페르스테 목사는 법원을 통해 그를 정식 양자로 삼는 수속을 취하려고 했다. 그런데 네덜란드 민법에는 양자에 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목사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결과, 얀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은 인정을 받았지만 법적으로는 끝내 인지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겁장이였지.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나에게 있어서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은 언제나 고문 같은 것이었네." 그렇다, 그의 겁장이 기질은 동급생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다페르스테(용감한자)를 라프스테(비겁한자)로 바꿔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만일 그의 얘기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끊임없는 고문처럼 느껴온 이름에서 해방되기 위해 갑자기 그는 '용감한 자'로 변신한 셈이 된다. 아뭏든 바다로 뛰어들어 양부모 곁을 떠나온 것이다. "그럼, 지금은 누구 집에 머물고 있나?" "여기저기 다니며 신세를 지고 있어. 고등학교의 졸업장을 내세워 슬라바야에서 취직을 하고 싶네, 다만 문제는 졸업 증서의 이름이 다페르스테로 되어 있다는 걸세. 밍케, 나는 평생 그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할까?" "이름은 바꿀 수가 있어. "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하면 개명할 수 있는지 수속 방법을 연구해 왔네. " "수속? 어떻게 하는 건데 ?" "이사관에게 서면으로 신청하는 거야. 그러면 그가 총독에게 그것을 보내지." "그럼 그렇게 하면 될 것 아닌가? 왜 안하는 거지 ?" 고등학교 졸업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멍청한 눈으로 얀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혀를 차더니 얼굴을 돌렸다. "할 수 없는 거야? 정식 신청서가 있을 텐데." "문제는 인지대금이야, 밍케. 인지대금이 너무 비싸, 신청서에만 일 길더 반의 인지대금이 필요하네. 내가 필요한 최종 결정서를 받을 때, 또 일 길더 반을 내지 않으면 안돼.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그런데, 왜 신청하지 않았지 ?" "그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도대체 어디서 삼 길더를 구한다는 말인가? 그밖에 우표값도 필요하다네." "돈이 필요하다면 왜 진작 그 말을 하지 않았지 ? 그 정도는 간단히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 이 경사스러운 날에 이런 얘기를 자네에게 하는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네." "내 행운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겠지 ?" "천만의 말씀. 솔직이 말해서 나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네." "그렇다면 나와 행운을 나누어 갖도록 하지." "그래서 나도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겠나?" "그런 말이 아니고 얀, 내 말을 잘 들어. 이 피로연이 끝나고 나면 마마는 사업을 확장하게 될 거야. 향료 분야에 손을 댈 계획일세. 자네에게 뜻이 있다면 여기서 일을 배울 수가 있어. 해 볼 생각 없나? 개명의 최종 결성서가 나올 때까지 말이네, 어때 ?" "고마와, 밍케. 자네는 항상 친절하고 내게는 잘 해 주었어. 최종 결정서를 받으려면 먼저 신청서를 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신청서도 작성하지 못했네." "그 새로운 회사의 책임자로는 후양도르넨보스라는 혼혈아가 맡기로 되어 있네, 나중에 소개해 줄께. 모든 것을 내게 맡겨 두게. " 얀 다페르스테는 내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 동안 나하고 얘기다 하지." "고맙네, 밍케. 사실은 또 한 가지 부탁아 있네. 내 얘기를 들어서 대충 사정을 알겠지만, 일 주일 가량 머물 장소와 슬라바야를 돌아다닐 교통비가......" 그때 내가 옷 입는 것을 거들어 주기 위해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 일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고 온 참이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지금부터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려는 데 다른 사람이 옷을 입혀 준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오른손에 종이 상자, 왼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바구니에는 가지각색의 꽃이 끈에 매달았거나 그냥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얀 다페르스테의 태도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우리 어머니야, 얀." 나는 소개했다. 다페르스테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짓고 공손하게 절을 했다. "어머니는 네덜란드어를 모르시네. " 나는 주의를 주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유창하게 자바어 경어로 얘기를 했다. 나는 어안이벙벙했다. 그는 같은 고등학교의 졸업생이고, 목사의 아들이라고 어머니에개 소개했다. "그 전에는 목사의 양자였읍니다." 얀이 내 말을 바로 갑았다. "지금부터 이 아이의 옷을 입혀야 하니까 실례하겠어요." "저도 돕겠읍니다, 어머님." "그건 고맙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것은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니까요. 혼자서 하고 싶습니다.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얀 다페르스테는 애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지쳐 있고 잠을 못 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몹시 허기져 있을 것이다. 나는 표경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종이를 한장 꺼내 그의 시중을 들도록 다르삼에게 지시 사항을 썼다. "이걸 다르삼을 찾아서 전해 주게. " 얀 다페르스테는 종이쪽지를 받아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방 안의 가스등을 켰다. 그것은 6시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다르삼이 관리하고 있는 안채 뒤쪽의 돌방에 설치된 가스는 이미 열려 있었다. 방안이 밟아졌다. 어머니는 나의 얼굴, 목, 가슴, 손을 이름도 모르는 액체로 문질렀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어릴 때처럼 어머니는 얘기를 시작했다. "저런 미녀를 며느리로 맞으려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을 게다. '왕궁은 멸망시키는 것, 공주는 약탈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옛날에는 그것이 예사로운 일이었단다. 지금은 세상이 평화로와서 우리들이 어렸을 때와는 다르지. 하물며 내 할머니가 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가 없단다. 새상이 옛날보다 평화로와진 것은 모두가 네덜란만인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얘기하고 있다. 확실히 네덜란드인은 네 선조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네덜란드인은 과거에 이 나라를 지배하던 왕들과는 달리, 남의 아내나 딸을 약탈하지는 않는다. 네가 만일 그 시대에 살았었다면 네 아내, 이 아름다운 미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년 내내 싸움터에 나가 있지 않으면 안되었을 게다. 얘야, 그녀는 선녀보다 더 아름답더구나. 이런 며느리를 얻어서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행복을 맛보는 것도 모두 네 덕이구나." "어머니 며느리에게는 전혀 자바인다운 데가 없는 걸요." "너는 그녀에게 만족하고 있지 ? 지금은 우선 기쁘게 생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굉장한 미녀니까 잠시도 눈을 떼서는 안된다. 너무나 아름다와서 신들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쉬지 않고 내 몸을 문지르며 얘기를 계속했다. "너는 운이 좋구나 ! 선조들처럼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어머님." "아아, 저 며느리를 B시로 데리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런만. 온 마을 사람들이 뛰어나와 그녀를 환영할 것이다. 어떠냐? 한번 B시에 돌아오지 않겠느냐?" "무리한 말씀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그렇다면, 내가 양보해서 너와 며느리와 손자의 얼굴을 보러 이곳으로 찾아오도록 해야겠구나." "아버지가 반대하실 거예요." "그런 것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너는 네 아내가 삭치(결혼을 하게 되면 이를 갈아서 고르게 하는 것)하는 것을 반대하느냐? 그녀의 비어져 나온 이를 그냥 둘 셈이냐?" "아내의 이는 그대로 놓아 두도록 해 주세요, 어머니." "유럽 사람들처럼 날카로운 채로 내버려 두라고?" "왜 어머니는 내몸을 이렇게 문지르는 거지요? 마치 내가 한번도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에요." "저런 ! 오늘은 네 결혼식날 아니냐? 이 경사스러운 날에 나는 신의 아들처럼 빛나는 네 모습을 보고 싶단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신의 아들처럼 보여서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 신의 아들처럼 꾸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너 때문만은 아니다. 이먼 혼례식에는 네 선조님들도 모두 오셔서 축복을 내리신단다. 이 어미도 언젠가 네 손자나 아들의 결혼식에는 저 세상에서 찾아오게 되겠지. 손자의 경사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피로연의 윗자리에 앉은 자기 손자가 자바의 사토리오 같지 않다면 나는 어떤 심정이 되겠느냐? 부모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손자가 자바인답지 않다면 저 세상에 가서 나는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한단 말이냐?" "네덜란드인의 조상들도 이 세상에 내려와 그들 자손의 결혼식에 참석할까요?" "저런 ! 왜 너는 네덜란드인에게 신경을 쓰지 ? 너는 아직 완전한 자바인이라고 할 수가 없구나. 선조님들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구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너는 문필가로 활약하고 있다는데, 밤이면 밤마다 너를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노래할 수 있는 시가를 너는 어디에 쓰고 있다는 게냐?" "저는 자바어로는 쓰지 못합니다, 어머니." "네가 아직도 자바인이라면 언젠가는 자바어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어로 쓴다는 것은 이미 자바인이기를 원하지 않고 있기 메문이다. 너는 네덜란드인을 위해 쓰고 있는 거야. 어째서 너는 그렇게 그들을 의식하는 거냐? 그들은 자바의 땅에서 얻은 걸로 마시고 먹고 있다. 하지만 너는 네덜란드의 땅으로부터 아무것도 얻고 있지 않아.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느냔 말이다?" "네, 어머니." "뭐가 네냐? 너의 선조님, 자바의 왕후들은 모두 자바어로 글을 썼단다. 혹시 너는 자바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냐? 네덜란드인이 못된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어머니의 말에 대답할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부드러운 말투이기는 했으나, 어머니의 말에는 저항할 수 없는 근엄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나가 내게 요구를 한다. 지금 어머니 또한 그렇다. 내가 어머니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어머니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보다는 오히려 선조를 향해 나를 용서해 주도록, 사랑하는 자식을 용서해 주도록 몇번이고 얘기했다. 나의 선조여, 어머니가 애원하고 있읍니다. 저에게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아아, 어머니,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은 단 한번도 내게 무리하게 강요한 적이 없읍니다. 말로도 힘으로도 나를 괴롭히신 적이 없읍니다. "자, 이 바디크 사롱을 입어 봐라. 이 바티크는 오늘의 너를 위해 내가 만든 것이다. 몇년 동안이나 상자 속에 보관하고, 매주 쟈스민 꽃을 뿌렸단다. 재판에 관한 신문 보도를 사람들한테서 들으면 즉시 나는 이 바티크를 깨끗하게 했다. 하나는 네 것이고, 또 하나는 신부 것이다. 자, 바티크의 만듬새를 살펴보아라. 그리고 몇년 동안이나 뿌린 쟈스민 향기를 맡아 보거라." 어머니의 재촉대로 나는 바티크 사롱을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훌륭합니다, 어머니.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납니다. 실에까지 쟈스민 냄새가 스며 있읍니다." "저런 ! 바티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내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일부러 눈을 돌렸다. "내가 이 손으로 남색과 빨간색으로 물을 들인 것이란다. 그 염료도 내가 만들었다. 다시 한번 맡아 봐라. 소가(역자주 : 바티크를 염색하는 데 사용하는 식물성 적색 염료)와 좋은 향기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바티크를 내 코앞에 내밀었다. "정말 좋은 냄새로군요, 어머니 " "거짓말도 꽤 잘 하는구나 ! 나도 기쁘다. 이 늙은이를 거짓말이라도 해서 기쁘게 해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린 나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신부와 어머니는 바티크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모든것을 만들기로 했다. 아들아, 내가 어렸을때는 바티크를 만들 수 없는 여자는 여자로서 실격이었단다." "어머니의 바디크는 매우 섬세하고 올이 가늘군요. 짜는 데 한달은 걸리겠지요?" "두 장 짜는 데 두 달이 걸렸단다. 오늘 입게 하려고 특별히 만들었으니까, 피로연이 끝나고 나면 버리든지 마음대로 하려무나."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정말 말이 많이 늘었구나. 꽃장식도 내가 만들었단다. 이 계도(역자주 : 악마를 비방한다는 칼)는 네 할아버지의 유물인데, 몇백 년이나 된 유서깊은 물건이란다. 마타람보다도 파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마자 파이트 시대 (1293--1528년)의 것이란다."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것을 배우셨지요?" "옛날 할아버지 집에 계도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할아버지 얘기를 너는 들은 적이 없지 ? 몹쓸 손자로구나. 아마 너는 네덜란드인이 말하는 것밖에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계도는 네 아버지를 빼놓고, 선조 대대로 사용해 오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위해서 할아버지가 소중하게 간직해 둔 것이다. 아아, 너하고는 대체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정말 답답하구나, 얘야, 무지한 이 어머니를 용서해라. " "어머니 ! " "네덜란드인은 아무도 계도를 만들 수가 없다. 앞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열어 봐라. 그것을 만든 명장의 솜씨인 무늬가 보일 것이다." 그때 나는 사롱을 입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죄송스럽지만 어머니가 계도를 빼서 보여 주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이미 자바인이 아닌 것 같구나. 이 계도를 부엌칼과 같이 취급하고 있구나?" 어머니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다는 황급히 사롱을 몸에 걸치고 어머니 앞에 엎드렸다. "용서하세요, 어머니. 어머니를 속상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읍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얻굴을 돌리고 눈물을 닦았다.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라.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계도를 칼집에서 뽑는 것이 여자에게 허용되었느냐? 계도는 남자만의 것이다. 여자를 위한 단검은 계도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중에 거울을 들여다 봐라, 허리에 계도를 차면 너는 딴 사람처럼 보일 게다. 선조님을 닮게 되어 본디 네 자신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그 다음에도 쉴새없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윽고 옷입는 것이 끝났다. "그럼, 그곳 마루에 앉거라. 머리를 숙이고." 어머니는 독촉했다. 지금부터 무엇이 시작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피로연에 임하기에 앞선 훈계였다. 그 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너는 자바의 사토리오, 무사의 자손이다. 왕국의 건설자, 파괴자들의 자손이다. 네게는 사토리오의 피가 흐르고 있다. 너는 용감한 무사인 것이다. 자바 무사의 필요 조건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저는 모릅니다, 어머니." "저런 ! 너라는 인간은 무엇이든 네덜란드인에 관한 것밖에는 믿지를 않는구나. 자바 무사에게는 다섯 가지 필요 조건이 있다. 위스모, 와니토, 투롱고, 쿠키로, 추리고의 다섯 가지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물론 기억할 수 있읍니다." "의미는 알겠느냐?" "네, 압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너는 자신의 혈통도 모르는구나. 잘 들어라. 그래서 장차 네 자식들에게도 이것을 전해야 한다." "네, 알겠읍니다." "우선 첫번제 위스모, 집이다. 집이 없는 사토리오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단순한 부랑자에 지나지 않는다. 집은 사토리오가 출발하는 곳이고, 돌아오는 곳이다. 단순한 집이 아니다. 그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과의 상호 신뢰의 장소인 것이다. 벌써 지루하니?" "재미있게 듣고 있읍니다." 어머니는 내 귀를 잡아당겼다. "하기야 너는 부모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 아이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듣고 있읍니다." "두 번째 조건은 와니토, 여자다. 여자가 없는 사토리오는 남자로서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여자는 생명과 생활의 상징이고 풍요, 번영, 안녕의 상징이다. 단순하게 남편에 대한 아내만의 존개는 아닌 것이다. 여자는 만물의 중심으로 생명도 생활도 그곳에서 시작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거란다. 너도 늙은 어머니를 그와 같은 존재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네게 딸이 태어나면 그런 생각을 갖고 키워야 한다." "알겠읍니다. " "네덜란드인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 하시만, 너는 꼭 알아두어야 한다. 너는 자바인이니까." "네, 어머니. 그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릅니다." "세 번째는 투롱고. 말이다. 말은 너를 어디에나 태워다 주는 도구이다. 그것에 의해서 너는 학문이나 지식, 능력, 실력, 기량, 기술과 같은 것, 그리고 마지막에 진보에 이르는 것이다. 말이 없으면 멀리까지 같 수 없고 따라서 안목이 좁아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그것이 수백 년에 걸친 경험속에서 태어난 지혜라는 것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네 번째는 쿠키로, 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의 상징, 생명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 다만 개인의 내면의 충족에 관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은 영혼을 갖지 못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추리고, 계도이다. 그것은 경계심, 대비, 용기의 상징이고, 앞의 네 가지를 지키는 무기이다. 계도가 없으면 재난이 닥쳐왔을 때, 네 가지는 파괴되고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떠냐? 고등학교 졸업생님 ? 이런 것은 학교의 선생님에게서도 배우지 못했지 ? 그 네덜란드인들에게서 ? 너는 자바의 무사로서 이제 모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네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손에 넣어야한다. 다섯 가지 모두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선조님의 말씀에 너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선사 다른 것은 따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다섯 가지 조건만은 완벽하게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아들아, 지금 듣고 있는 거냐? " "네, 듣고 있읍니다. " "그럼, 지금부터 명상을 해라. 박해와 중상, 진투로부터 지켜 달라고 선조님에게 보살핌과 용서를 구하는 거다." 나는 여전히 마룻바닥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는 안된다. 똑바로 정좌를 하고 앉아라. 어깨의 힘을 빼고 손을 가만히 무릎에 얹어라. 이 한 순간 단 한번만이라도 진정한 자바인이 되는 것이다. 좀더 깊이 머리를 숙여라." 그때까지 어머니의 명령과 요구를 따라오던 나는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선조님에게 순순히 용서를 빌었다. 그 순간 얼굴을 생각해낼수도 없는 선조를 대신해서 그 뚱뚱보의 얼굴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어머니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슬 모양으로 엮은 쟈스민 꽂장식을 내 목에 건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어머니는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조그만 화환을 내 양쪽 손바닥에 얹고 아무 말없이 내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잡게 했다. 나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선조들의 얼굴은 나의 머릿속에서 형태를 이룰 사이도 없이 사라져 갔다. 그 대신 심한 격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을 저리게 하며 더욱 눈물을 쏟아지게 했다. "이 아이에게 가호를, 당신들의 피를 이어받은 이 아이에게 가호를, 그를 재난에서 지켜 주시고 박해와 중상과 질투에서 지켜 주십시오. 이 아이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고 제가 빈사의 고통끝에 낳은 아이 입니다." "어머니 !" 나는 마루에 몸을 던지고 어머니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는 이 날을 맞기 위해 오늘날까지 살아 왔읍니다. 이 아이는 당신들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입니다. 이 아이를 위대함과 영광에 가까이 가도록 해 주십시오. " 나는 어머니의 손이 내 등에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어머니는 울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의 자세를 바로잡고 목에 걸린 꽃장식과 손으로 쥔 꽃의 위치를 고쳐 주었다. 그리고 쿠바야 옷자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명상을 해라, 얘야. 나의 도움을 빌지 말고 혼자서 명상을 해라." 손님들이 꼬리를 물고 도착하여 응접실과 거실 또는 야외에 설치된 가설 회장을 메워 갔다. 그때도 나의 마음은 조금 전에 거행된 의식에서 어머니가 보여준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신랑이 피로연 직전에 그와 같은 의식을 받는 것을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 자신의 즉흥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으로부터는 소외당하고 있으나, 어머니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아들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초대한 콤벨이 7시 6분 전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에 찬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고 친근하게 악수를 했다. 그 다음 안네리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밍케씨, 이 결혼으로 인해서 외야석의 말많은 친구들은 침묵하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이 시작한 일에 자신이 결론을 지었읍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잘 협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물론입니다, 콤멜씨. 우리들은 좋은 동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활발한 성격의 혼혈아였다. 머리 모양과 높은코만이 유럽인을 닮았을 뿐 쁘리부미와 다름없었다. 정신도 쁘리부미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세에서 열 다섯 정도 많을 것이다. 활동적인 성격과 생김새에서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쟝 마레와 메이 부녀, 그리고 테린하 부부가 4륜 마차로 도착했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과 급우들도 똑같이 4륜 마차를 타고 찾아왔다. 마르빈 네이만과 부인은 자가용 마차로 왔다. 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축사를 써서 마푸다 뻬데루스 신생님 편에 보냈을 뿐이다. 7시 1분 전에 미리암, 사라, 에르베르 드라크로아가 보낸 축전이 도착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오늘 결혼식 얘기를 들었을까? 또 다시 나는 궁금해졌다. 예상했던대로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불참은 급우들 사이에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얀 다페르스테가 자진해서 손님 접대를 맡아 대활약을 보였다. 내 손님만해도 상당히 많았다. 그 가운데는 얀 다페르스테를 제외하고 쁘리부미는 없었다. 마마의 거래처 손님도 계속 도착했다. 몇개월 전에 그녀를 일약 법정의 스타로 만들었던 재판이 오히려 마마의 사업에 선전 효과를 가져다 준 것 같았다. 달변가인 마르티네 의사가 피로연의 사회를 맡았다. 8시 정각에 그는 유창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나와 안네리스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연애 소설에도 나오지 않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맺어진 사랑이야기로서 한편의 소설로도 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다. (내가 나의 체험을 이 노트에 기록한 것도 바로 그때 마르티네 의사의 연설이 동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두 번 다시 없을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다. 말주변이 좋은 의사는 청중을 한순간 긴장시키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그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가서는 반드시 손짓을 섞어가며 강조했다. 다만 말레이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 유감이다.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를 모두 얘기한 뒤 마르티네 의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에 화제를 돌렸다. "여러분. 행복해 보이는 신랑신부 위에 결려 있는 그림을 보아 주십시오." 웅변가와 같은 멋진 제스처로 그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마마의 초상화에 참석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저 그림은. " 마르티네 의사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총명한 여성, 뛰어난 쁘리부미 여성, 그렇습니다. 신부의 어머니이며 신랑의 장모인 냐이 온트솔로라는 분의 초상화입니다. 참으로 그녀는 훌륭한 사람이며 명선장입니다. 그녀의 조타술이면 배는 난파하는 일이 없이 항해할 수 있읍니다. 오늘 이러한 경사를 맞이하게 된 것도 선장으로서의 그녀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처녀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젊은 시인의 풍부한 재능이 이렇게 맺어진 것은 도저히 그녀의 존재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었읍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이 선장의 도움으로 힘을 합하여 빛나는 인생 항로를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 훌륭한 초상화의 작가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어느 천재 화가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가가 아닙니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화가가 모빌의 영혼을 참으로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움, 위대함, 고결함이 유감없이 나타나 있읍니다. 나의 이 비평은 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쟝 마레씨 ? 그렇습니다. 참석하신 여러분, 저 초상화를 그린 것은 예술 분야에서 위대한 전통을 갖는 나라 프랑스 출신의 화가입니다. 쟝 마레씨, 일어나 주십시오." 테린하가 쟝 마레를 부축해서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참석자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쟝 마레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고 곧 자리에 앉았다. 마르티네 의사의 그 짧은 연설은 식장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그것은 마마와 쟝 마레를 알리기 위한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 아래 모두 검정색으로 차려 입은 다르삼이 혼자 있는 것이 보였다. 짙은 콧수염이 뺨까지 뻗쳐있었고, 눈은 경계의 빛을 띠고 쉴새없이 주의를 살피고 있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칼은 보이지 않았으나 검은 웃옷 밑에 단검이 몇 자루 숨겨져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의 장모인 냐이 온트솔로는 우리들의 자리 뒤쪽에 쳐진 천막 그늘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며느리 곁에 앉아서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를 부치며 쉴새없이 바람을 보내주고 있었다. 천막 그늘에서는 테린하 부인이 여자 손님들의 접대를 맡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나와 안네리스 앞에는 축하 선물들이 자꾸만 쌓여 갔다. 나중에는 누가 보낸 것인지 구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우리 양쪽 옆에는 화환이 차츰 줄을 이었다. 오후 8시, 동부 자바의 가무란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타유브의 반주에 사용되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의 향연이 시작된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따금 환성도 들려왔다. 이미 다르삼의 부하들이 싸움이나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펴고 있었다. 야자술이 준비되고 마을사람들은 쉴새없이 마셔대기 시작했다. 9시 반이 되자, 손님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면저 자리를 뜬 것은 급한 환자가 생겼다는 전갈을 받은 마르디네 의사였다. 그 뒤에 곧 한 젊은이가 도착했다. 검은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머릿기름을 바르고 빗으로 정성들여 빗은 머리가 번쩍였다. 화려한 손수건이 가슴 주머니를 장식하고 황금 사슬이 조끼 주머니에 금시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는 손님들 사이를 젊은이는 가슴을 활짝 펴고 나와 안네리스가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그는 똑바로 걸어 왔다. 그는 다름아닌 로베르트 슬르호프였다. 그는 매우 정중하게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축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안네리스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미안합니다, 마담. 늦었읍니다." "로베르트, 자네가 와 주어서 정말 기쁘네." 나는 반갑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일은 용서해 주게, 밍케. " 그는 마치 나이 많은 어른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한 태도를 버리지 않고 말했다. "자네 부인에게 기념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굉장히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손에다 키스했다. 그런 다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네, 밍케. 자네에게 매우 깊은 찬사와 경의를 표하네. "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분홍색 리본이 달린 작은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오늘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네. 언제까지나 행복하기를 빌겠네."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어 고맙네." "사실은 나도 이 기회에 작별 인사를 하고 싶네. " 그는 힐끗 안네리스를 곁눈질했다.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네. 진학해서 법률 공부를 할 예정이야." "항해가 무사하기를 바라네. 그리고 성공적으로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빌겠네. " 그리고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올 때처럼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친구들 틈에 끼었다. 눈에 눈물을 머금은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앞으로 3년 동안 당신이 좀더 성숙해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군요 언젠가 당신들 두 사람이 유럽을 방문하게 되면 잊지 말고 내 주소로 연락해 줘요. " 그녀는 종종 걸음으로 돌아갔다. 테린하 부부와 쟝 마레 부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우노크로모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얀 다페르스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층의 신랑신부 방으로 선물을 부지런히 나르고, 보낸 사람의 이름과 주소 목록을 만드는데 바빴다. 선물 가운데는 드라크로아 일가의 선물도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것을 갖고 왔는지 아는 사람이 었었다. 글을 쓴 쪽지가 붙어 있고 미리암의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우리들을 초대하는 것이 부끄러웠나요? 아니면 우리들이 초대손님으로서 어울리지 않았을까요? 그 미녀의 영광스러운 들러리가 되고 싶었었는데. 그럴 수가 없군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것 뿐입니다. 앞으로도 편지를 보내는 것을 잊지 마세요. 부인에게 우리들의 축복과 경의를 전해 주세요." 사라의 선물 꾸러미 속에는 또 다른 쪽지가 들어 있었다. "밍케, 나는 조금 앞서 유럽으로 돌아가요. 당신의 결혼식에 축하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에요. 안녕, 유럽에서 다시 만날때까지. "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보번 선물 가운데는 몇 권의 책과 지은이도 발행인도 또 발행 년월일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팜플렛이 한권 들어 있었다. 그 팜플렛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밍케군, 당신과 같은 신랑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물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해 보았읍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책, 그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당신이 마음에 들어할 것 같은 책을 몇권 골라 보았읍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대쯤이면, 나는 이미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제자의 행복한 모습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보람있는 생활을 이끌어 나가기를 빕니다. 언젠가, 만일 미숙하고 고지식하기만 했던 한 여교사를 기억하게 된다면 위대한 휴머니스트, 무르타투리의 뒤를 따르고자하는 한 학생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부디 기억해 주세요. 밍케군, 동인도 관청은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많은 학부형의 압력 때문에 나를 해고시키고 동인도를 떠나도록 권고해 왔읍니다. 만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강제 추방을 당할 것입니다. 내일 영국기선으로 이곳을 떠납니다. 안녕 !" "이것을 읽어 보게, 얀. " 나는 다페르스테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선생님이 쓰신 거야." "왜 그래요, 마스?" 앤이 말했다. "역시 그 소문은 사실이었던 것 같네. 정청은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을 동인도에서 추방하려고 하고 있네. 어때, 앤, 가슴이 뭉클하지 않아? 이렇게 어려운 일에 처해 있으면서도 일부러 우리들을 위해 와 주었어." "정말 정청은 비열하군 그래." 메모를 읽고 난 얀 다페르스테가 중얼거렸다. "그래, 비열해. 마푸다 선생님은 추방당하고 자네는 자바를 떠나기 싫어 하고. 어떤가. 얀, 내 부탁 한 가지 들어 주겠나?" "물론이야. "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을 배까지 배웅해 주었으면 좋겠어. 우리 두 사람, 마마, 그리고 자네 자신을 대표해서. 그리고 나의 어머니 몫도 함께. 그렇게 좋은 사람을 혼자 외롭개 떠나보낼 수는 없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돼. " 선물 가운데 가늘고 긴 뭉치가 한 개 있었다. 열어 보니까 촉이금으로 된 펜이 달려 있는 아름다운 펜대였다. 직접 그린 듯한 그림 엽서가 들어 있고, 활자체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밍케, 안네리스 메레마 두분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저에 관한 일은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시기를 빕니다. 이름도 없는 뚱뚱보로부터.' 선물이 마룻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마스 !" 안네리스가 주의를 주었다. 멀어진 물건을 얀 다 페르스테가 주웠다. "그것은 자네가 갖게, 얀." 나는 말하고 그림 엽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찢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얼마 뒤 심리가 재개될 공판정에 제출하기 위해 보관해 둘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1시를 지나고 있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이미 일을 끝내고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나는 안네리스에게 다가갔다. "앤, 당신은 이제 나의 아내야." "그리고 당신은 나의 남편이구요."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문을 열었다. 마마가 들어왔다. 너무나 울어서 눈꺼풀이 많이 부어 있었다. 우리들에게 다가왔으나 말이 나오지를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우리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해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마마. "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마는 우리 두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우리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돌봐주시고 걱정해 주었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결코 잊지 않겠읍니다."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가스등 밑에서 안네리스가 내게로 다가와 두손을 내밀었다. "이 반지를 빼 주세요. " 나는 수상쩍은 반지를 뽑았다. 반지 그 자체도 의심스러웠지안 그보다 안네리스의 손가락에 그것을 끼워 줄 때의 슬르호프 동작이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것이다. "받고 싶지 않아 ? " "그 사람에게서 편지는 많이 받았지만, 한번도 답장을 쓴 적은 없어요." 이제야 모든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슬르호프는 아무도 몰래 안네리스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밀하게 반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분명 22금의 반지였다. 그러나 거기에 붙어 있는 다이아몬드가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짜 다이아몬드 치고는 너무 컸다. 그런 것을 선물할 정도로 슬르호프는 돈이 많지 않다. 그의 용돈이 한달에 1링기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부모를 잘 알고 있었는데, 결코 부유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평소에 그의 어머니가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선물을 할 때 으례 담아오는 반지 상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반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에게 돌려 주세요, 마스." "응, 그렇게 하지." 밤은 깊어 갔다. 슬르호프와 뚱뚱보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제18장 승자, 패자 과학은 점점 더 많은 기적을 낳고 있었다. 우리 선조들의 진설은 이제 아득한 옛날 얘기가 되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상대와 얘기를 하기위해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독일인이 영국에서 인도까지 해저 전신을 부설한 것이다 ! 그와 비슷한 시설은 차츰 수가 늘어나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 문제를 해결할 때는 구태의연한 방법밖에는 모른다. 특히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다. 예를 들면,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었는 검은 린빈을 입힌 판지로 만든 상자 속에 나와 슬르호프 이외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속에 든 것은 돈이나 보석이 아니다. 부적도 아니다. 사랑에 패배한 한 인간이 그 사랑을 쟁취한 또 한 사람의 인간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가 들어 있을 뿐이다. 한쪽은 사랑의 패자, 한쪽은 사랑의 승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 간다고 하더라도 연애에 관한 한 실패와 성공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밍케, 나의 친구.' 그는 쓰고 있었다. 글씨가 컸고 떨면서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지 속에서 슬르호프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 비열한 행동, 그리고 남의 사랑올 시기해 온 데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있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런 여러가지 행동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안네리스 메레마에 대한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슬르호프는 다섯 번인가 안네리스를 본 적이 있는데, 얘기를 하기는 커녕 인사를 할 기회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안네리스를 사랑하게 된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었다. 밍케가 너무나 쉽게 안네리스와 가까와지는 것을 보고 그는 몹시 괴로와했었다. 그러나 체념하지는 않았다. 체념이라는 말은 자신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슬르호프는 말했다. 그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경로로 몇 통씩이나 편지를 써 보냈다. 한 번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안네리스를 잊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끝났네. 반대로 자네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시작이지.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는 지금도 아직 현실을 믿고 싶지 않네. 이 동인도를 떠나는 길밖에 그녀를 잊을 방법이 없네. 밍케, 나는 잊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하지만 지난날이야 어쨌든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우리의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은 바라지 않네.' 결혼식이 있은지 20일 뒤, 콜롬보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에게서 온 것이었다. 편지에서 그녀는 로베르트 슬르호프와 같은 배를 탔다고 쓰고 있었다. 슬르호프는 수부로서 배를 타고 있었고,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녀는 수부는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며, 더구나 그는 유학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므로 부끄러워할 것 없다고 슬르호프를 격려해 주었다고한다. 그것과 동시에 사라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그녀는 싱가폴의 훌륭함에 대해서 쓰고 있었다. 넓고 깨끗하며 번잡하지만 역시 개끗한 도로. 항구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꽉 찬 배들. 그 수효는 지난날 암스테르담에서 본 것보다 훨씬 많으며 로테르담과도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B시의 부이사관의 편지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동인도 정청에 대해 내가 네덜란드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고 신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학업 성적이 충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청은 기각되었다, 정청이 요구하는 유학을 위한 첫째 조건은 방정한 품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조건에 합당치 않다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부이사관은 쓰고 있었다. 그것도 또한 과학의 진보가 낳은 결과인 것이다. 이제는 나의 인격, 품성까지도 무조건 실격 낙인이 찍힌 것이다. 먼저 학교당국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재판 경과를 보도한 저널리즘에 의해서. 본디 나는 남의 이목에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취급을 당하게 되자 몹시 마음의 상처가 컸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다. 남의 명예를 훼손 시킨 일도 없다. 또 남의 물건을 가로채거나 암거래에 관계한 일도 없다. 그런 나를 부당하게 단죄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켜나가야 하는가? 언젠가 쟝 마레는 나에게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경우에는 먼저 편견을 버리고 솔직해져야 한다고 가르쳤었다. 분명히 그말은 그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이 현실에서 사리를 그르치고 있는것은 오히려 유럽인들 자신이라는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이 새시대의 성과도 또한 틀림없이 유럽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독일제의 해저 전선을 타고...... 3개월이 지났다. 나의 일은 주로 사무실의 마마 옆에 앉아서 때로는 그녀의 업무를 도와주기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슬라바야의 이사관을 통해 총통의 최종 결정서를 받았다. 판지 다르만이 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던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에서 가까스로 해방된 것이다. 성격도 차츰 그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근면하고 명랑 활발하고 개방적으로 되어 갔다. 그는 처음에 농장에서 마마의 사무를 돕고 있었으나, 얼마 뒤 도르빈보스씨의 사무실로 옮겨 가 향료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지났다. 어머니는 두 번 우리들을 방문했다. 다섯 달이 지났다. 사라 드라크로아가 두 번 편지를 보내왔다. 미리암은 자신도 또한 언니의 뒤를 따라 유럽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알려 왔다. 그 넓고 적막한 부이사관저택에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가 혼자 살게 된다. 따라서 좀더 자주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그녀는 부탁하고 있었다. 여섯 달이 지났다. 그리고 그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당연히 일어나야 할 것이 일어난 것이지만, 안네리스가 냐이와 함께 백인 법정에 출두 명령을 받은 것이다. 또 다시 법원에 가다니 ! 더구나 이번에는 안네리스가 제일 당사자로 소환된 것이다. 두 사람은 출두했다. 나는 집에 남아서 마마의 업무를 대신했다. 대신한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군대의 병영이나 항만 사무소, 또는 선박용 식료품을 취급하는 업자에게 답장을 쓰거나 새로운 주문이나 고객의 주소 변경을 노트에 적거나 하는 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밖에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마마에게 어떻게든 접근하려는 진 식민지군 병사들을 쫓아내는 일이었다. 그 전 식민지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나도 그깨까지 네 차례 정도 마마가 그들을 쫓아내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아치에 전쟁에서 돌아와 지금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는 그들 동료들 사이에 냐이가 화제거리가 된 모양이다.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지닌 메레마미망인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써서 접근해 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건 식민지군 소위라고 자칭하는 그 혼혈아는 과거에 청동 훈장을 수여받았고, 연금의 일부로 마랑시 교외에 농지 10헥타르를 받았다고 하면서 꼭 마마를 만나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마마와 공동 경영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헤어질 때 그 소위라는 사나이는 그의 말을 그대로 냐이에게 전해 달라고 하면서 나의 협력을 구하고, 일이 잘되면 무엇이든 바라는 것을 사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나이는 이름을 말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돌아갔는데, 그런 친구들을 쫓아 버리는 것도 내 일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 밖의 시간을 나는 "슬라바야 일보"의 원고를 쓰는 일로 보냈다. 안네리스와 마마가 떠난 지 3시간이 지났다. 나는 차츰 불안해졌다. 원고 쓰는 것을 중단하고 우유를 운반하는 짐마차가 들어올 때마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4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내가 초조해하면서 기다리던 마차가 돌아왔다. 멀리서 냐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밍케, 빨리 !" 나는 현관 앞으로 뛰어나갔다. 먼저 마마가 내렸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 마차 안에 있는 안네리스에게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내가 내려왔는데 얼굴은 창백하고 눈물에 젖어 있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쓰러지듯이 내게 안겼다. "데리고 올라가요." 마마가 거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마마는 빠른 걸음으로 우리 곁을 스쳐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마와 다투기라도 했어 ? " 나는 안네리스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나는 안네리스를 이층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했다. 그녀의 몸은 차가왔다. "어째서 마마는 저렇게 화가 났지 ? "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이층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을 마다하고 응접실의 의자에 앉혀 달라고 눈짓했다. "몸이 아프기라도 한 거야 ? "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야 ?" 이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나의 인형은 무엇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몹시 불안해졌다. "마실 것을 갖다 줄까? " 안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을 갖다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마시자 좀 나아진 것 같았다. "다르삼 ! " 사무실에서 마마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마두라의 칼잡이를 찾으러 뛰어갔다. 그는 자기 집에서 수염을 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빨리 와요, 다르삼. 마마가 화를 내고 있어요." 그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거울과 쪽집게를 대나무 바구니에 집어 던졌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다르삼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안네리스도 있었다. "왜 침대에서 쉬지 않지, 앤?" 냐이는 책망했다. 아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마는 아직도 얼굴이 새빨갰다. "마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르삼이 냐이에개 경례를 하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르삼이 나가자 곧 마차가 자갈을 튕기며 사무실 앞을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마마는 내물음을 무시하고 창으로 걸어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서둘러 가요 ! 조심해서 ! " 그리고 나서 그녀는 돌아서서 안네리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앤, 오늘 일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마와 네 남편과 둘이서 해결할 테니까. 우리들에게 맡겨 두거라,"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밍케, 드디어 올 것이 왔어요.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나는 법률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들은 어떻게든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힘과 전 재산을 걸고서라도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마마는 몇 통의 서류를 나에게 내밀었다. 원본과 사본으로 된 그 서류의 발행처는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으로 내무성, 식민성, 사법성등 각 부처의 날인이 찍혀 있었다. 첫번째 서류는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가 남아프리카에서 그의 어머니 아메리아 메레마 함멜스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었다. 그 속에서 마우리츠 메레마는 슬라바야에서 살해된 아버지 헤르만 메레마의 유산 상속에 대해서 그 수속을 어머니에게 위임한다고 씌어 있었다. 다음에는 마우리츠 메레마의 어머니 편지의 사본이 있었다. 그것은 고 헤르만 메레마의 유산에 대한 아들의 권리 확인을 아들을 대신해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에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슬라바야의 법원, 검찰국과 암스데르담 지방법원이 교환한 통신문의 사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고 헤르만 메레마와 사니켐 사이에 혼인증명이 존재하는가, 생전에 헤르만 메레마가 유언장을 남겼는가, 아촌에 의한 헤르만 메레마 살해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 로베르트 메레마 실종에 관한 확인, 사니켐에게서 태어난 두 명의 자식, 안네리스와 로베르트에 대한 헤르만 메레마의 인지 증명 사본 등이었다. 그리고 냐이의 계리사와 슬라바야 법원이 교환한 펀지의 사본이 있고, 그 속에서 계리사는 바이텐졸프 농장의 자산에 대한 조회에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응할 수 없다는 거부 회답을 하고 있었다. 또 그 다음에는 바이텐졸프 농장의 납세액에 대한 세무서의 기록 등본, 농장의 넓이와 구역에 관한 토지국의 기록등본, 소등 가축의 수와 사육 상황에 관한 농업 축산 사무소의 보고가 이어졌다. 마마와 안네리스의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한 장씩 서류를 읽어나갔다. 두 사람은 내 의견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문제가 될만한 것을 나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종류의 서류가 있다는 것 자체도 몰랐고, 또 그런 것을 써서 보수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뒤이어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에 대한 공식 기록의 사본이 있었다. 슬라바야 법원에 집행을 위임한 그 결정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암스테르담 주재 변호사 한스 푸라에프를 통해서 행해진 고 헤르만 메레마의 아들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의 청구에 의거하여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더 이상 의심할 것 없는 슐라바야로부터의 공식 기록에 근거를 두고 헤르만 메레마와 사니켐에게 법적인 혼인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고 헤르만 메레마의 전 유산을 아래와 같이 분배하기로 결정한다. 즉 적출자인 마우리츠 메레마가 전체의 6분의 4를 상속한다. 인지된 서출자인 안네리스 메레마와 로베르트 메리마가 각기 6분의 1을 상속한다. 로베르트 메레마에 대해서는 그 소재가 일시적으로 불명하다고 신고되었기 때문에, 동인이 상속할 유산은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가 관리하는 것으로 한다.'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또한 안네리스 메레마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기사 마우리츠 메리마를 그녀의 후견인으로 지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안네리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녀의 유산 상속권도 또한 마우리츠 메레마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우리츠 메레마는 후견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그의 변호사 한스 푸라에프를 통해서 슬라바야에 있는 한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지명하여, 안네리스의 보호와 그녀의 네덜란드에서의 양육에 관해서 냐이 온트솔로, 즉 사니켐 및 안네리스 자신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슬라바야의 백인 법정에 제소하고 있었다. 가공할 그 기록들을 읽고 나는 하마터면 실신할 뻔했다. 내용은 대부분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성을 무시하고 완전히 사람을 상품 목록의 한 항목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이었다. "마마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잘 들어요, 밍케. 나와 안네리스가 법원에 도착하자 이미 우리 변호사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런 서류의 사본을 준비한 것은 그 사람이었어요. 판사 앞에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그 내용을 설명한 것도 그였어요." 그것을 들으면서 나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인은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과거에 이 나라를 지배한 왕들과는 달라 남의 아내를 약탈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 바로 그들은 당신의 며느리를 빼앗아 가려 하고 있읍니다. 어머니에게서 자식을, 남편에게서 아내를 빼앗아가려 하고 있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마가 20년 동안 하루도쉬지 않고 뼈빠지게 일해서 얻은 땀의 결정까지 그들은 약탈해 가려 하고 있읍니다. 그 약탈의 근거가 되는 것은 대서사들이 꾸민 아름다운 서류, 종이 두께의 절반까지 스며들어 결코 변색되는 일이 없는 검은 잉크로 씌어진 서류일 뿐입니다. "우리도 법률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군요." "데라데라 변호사가 곧 올 거예요." 그 기묘한 이름은 얼마 전 내가 겪었던 복잡한 문제 때문에 내게도 이미 낮익은 것이었다. "변호사 데라데라 레리오부트쿡크스......" 그 이름을 외어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는 데는 상당히 긴시간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와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마마는 법률 상담을 위해 이따금 그를 찾아다녔다. 내 상상으로는 그는 틀림없이 온몸이 붉은 털로 뒤덮인, 헤르만 메레마와 같은 비만형의 거한일 것이다. 그 이름에서 도깨비 같은 인물을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진 법률가가 틀림없었다. "그 결정에 마마는 항의하지 않았나요?" "항의요? 항의 정도가 아니라 단호하게 거부했어요. 그들 유럽인은 돌담처럼 딱딱하고 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요. 그들의 말은 확고해서 웬만해서는 뒤집을 수가 없어요. 안네리스는 내딸이에요. 나는 법원에서 말했어요. 그애에게 권리를 가진 것은 나뿐이며, 내가 그애를 낳고 키웠어요. 그러자 판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기록에 의하면, 안네리스 메레마는 헤르만 메레마씨가 인지한 자식이오.' 어머니는 누구지요? 그녀를 낳은 것은 누구지요 하고 내가 물었읍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니켐, 별명 냐이 온트솔로라는 여자가 어머니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니켐입니다. '그렇다. 그러나 사니켐은 메레마 부인은 아니다.' 나는 증인을 세울 수가 있읍니다. 안네리스를 낳은 것은 바로 나입니다. '안네리스 메레마에게는 유럽의 법률이 적용된다. 냐이는 그렇지 않다, 냐이는 원주민에 불과하다. 만일 안네리스양이 메레마씨에게 인지받지 않았다면 그녀도 또한 원주민이고, 백인 법정은 그녀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판사는 그렇게 말했읍니다. 밍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얘기예요. 그래서 나는 결정을 따를 수 없으며. 유능한 변호사를 내세워 싸울 것이라고 말했어요. '좋을대로하시오.' 하고 판사는 냉담하게 대답했어요. 안네리스는 단지 울고만 있을 뿐이어서 다는 다른 문제는 완전히 잊고 말았어요." 마마는 심호흡을 했다. "밍케, 당신도 함께 가야 했어요. 법정 밖에서도 당신은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는 있을 거예요. 그 판사도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을 테니까요." 그때 나의 노여움, 그 심정은 누구라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막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문제에서는 나는 아직 코흘리개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딸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라고도 나는 말했읍니다. 그러자 판사는 웃으면서, '그녀는 미혼이다. 아지 미성년이다. 설사 누군가가 그녀를 결혼시키고 누군가 그녀와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불법적인 것이다.'라고 대답하더군요. 밍케, 들었어요? 불법이라고 했어요." "설마 그럴 리가 있읍니까 ? " "그뿐만 아니라, 인정받지 못한 결혼에 대해서 당국에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은 범죄 행위라고 나를 몰아세웠어요. 부녀 폭행의 공범이라나요." 사무실은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한산했다. 우리들 세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암스테르담 지방 법원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성실하고도 유능한 변호사뿐일 것이다. 아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이여 ! 백인 법정과 마찬가지로 그 곳도 또한 고등교육을 받고 정의롭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법학자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모인 곳이 아닌가. 그 법원이 어떻게 해서 우리들의 법의식, 우리들의 정의감에 모순된 법률을 집행할 수 있는가. "나의 권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유산 분배 문제에 관해서는, 말 한 마디 못해 보았어요. 물론 이 농장이 내 소유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안네리스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읍니다.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읍니다. 판사는 우리의 관심사는 안네리스뿐이라고 말했어요. 나는 첩, 원주민이기 때문에 당 법원과는 일체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마마는 이를 갈며 원통해했다. "결국은. "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확실히 유럽인 대 쁘리부미, 유럽인 대 나라는 거예요. 밍케, 똑똑히 새겨 두세요. 쁘리부미를 학대하고 혹독하게 괴롭히는 것이 유럽인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들에게서 흰 것이란 피부 색깔뿐이에요. 그들의 마음도 영혼도 온통 검게 물들어 있어요." 마마는 그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 변호사도 역시 유럽인인가요? " "돈의 노예에 불과합니다. 돈을 주면 주는 것만큼 고용주에게 충실해지는 인간이지요. 바로 유럽인의 전형이에요." 나는 몸을 떨었다. 몇년 동안에 걸쳐 학교에서 배워 온 것이 현지처가 얘기한 단 몇 마디 말로 뒤바뀐 것이다. 안네리스는 긴장에서 오는 피로 때문인지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흔들어 깨웠다. "앤, 이층으로 가요." 그녀는 그것을 거절하고 다시 등을 바로 세우고 의자에 고쳐 앉았다. "이층에 가서 쉬어라, 앤. 네 일은 마마와 밍케에게 맡겨 두렴. 할 수 있는데까지 손을 써보겠다." 마마의 말에 안네리스는 순순히 따랐다. 나는 이층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침대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마마와 내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안네리스는 단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내 얘기는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법리에 대해서 나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혼자 있어도 되겠지 ?" 안네리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는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인형 같은 네 아내의 운명은 왜 이다지도 험난하단 말인가?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기력이 없는 것 같았다. "마르티네 선생을 불러 줄까 ? " 그녀는 끄덕였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치의를 불러 오도록 마부에게 일렀다. 마르주키가 슬라바야를 향해 마차를 달리는 것이 보였다. 사무실에서는 마마가 유럽인 한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내 어깨 정도 닿는 키에다 깡마르고 볼품 없는 체격을 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벗어지고 치켜올라간 눈에 가는 테데 둥근 안경을 쓰고 있었다. 마마는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에서 발송되어 온 안네리스에 관한 기록을 읽는 그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데라데라 레리오부트쿡크스 변호사인 모양이었다. 결코 똑똑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이 오래 전부터 마마의 법률 고문을 맡아온 것이다. 왜 마마가 아직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었었다. 그의 능력은 이미 판사 앞에서 똑똑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나는 두 사람을 관찰했다. 홍조를 띠고 있던 마마의 얼굴 표정은 차츰 나아지고 자세도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밍케, 이분이 데라데라씨예요" 우리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네, 당신에 관해서는 그전부터 애기를 많이 들었읍니다. 잠깐 기록을 다시 검토해야겠는데, 괜찮겠읍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는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이 왜소하 사나이가 냉혹하고 독신과 폭력으로 가득 찬 거대한 유럽의 법률에 어떻게 맞설 수가 있단 말인가 ? 더구나 그는 유럽인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 붙겠는가 ? 그는 몇번씩이나 서류를 반복해서 읽어가며 한 장 한 장 자세히 검토했다. 마마는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하고 마실 것까지 손수 마련해 왔다. 변호사는 마치 주위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침착하게 서류 사본을 조심스럽게 읽고 있었다. 한 시간 뒤, 그는 서류를 챙겨 쌓아 놓고 그 위에 검은 돌로 만든 문진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찡그리고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헛기침을 한 다음 마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 마마가 답답해서 물었다. "우리들은 미칠 것만 같다고요." "그 마음은 알겠읍니다. 하지만 냐이, 법률 문제인 경우에는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내세워 봤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률이니까요." "그럼, 재판에서 우리들이 진다는 말인가요?" "이기고 지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변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여기서는 아직 아무 대책을 취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냐이는 어디까지나 침착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률은 냉정합니다. 아무리 감정을 내세워 봤자 아무 이득도 없읍니다. 밍케씨, 듣고 계십니까?" 그는 대뜸 내게 얼굴을 돌렸다. "당신은 네덜란드어를 잘 알겠지요?" "듣고 있읍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의 결혼과 당신 부인의 운명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우리보다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해보는 데까지는 해 봅시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당신과 냐이가 그 결정을 어떻게든 번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결정의 집행을 지연시킬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우리둘이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저항하는 것뿐이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일찌기 쟝 마레가 얘기해 준 네덜란드와 아치에인의 싸움처럼 칼이 꺾이고 화살이 없어질 때까지 저항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마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문제는 패배한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식, 농장, 피와 땀의 결정, 그리고 그녀 개인의 재산, 결국 모든 것을 그녀는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요. 밍케, 우리들은 싸워야 해요." 마마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그녀가 몹시 늙어 보였다. 지친 발걸음으로 딸을 살펴보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변호사는 다시 서류 검토에 몰두했다. 나는 왜소한 법률가에 대한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그가 서류를 몇장 몰래 빼가지나 않을까 줄곧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다시 한 시간이 흘러갔다. 마마가 다시 이층에서 내려와서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내 곁에 변호사와 마주보고 앉았다. "아직도 검토할 것이 있읍니까 ?" 그녀 본디의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변호사는 얼굴을 들고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긴다는 확신은 없다는 말인가요?" "소송은 제기할 수 있읍니다." 변호사는 되풀이 말하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려고 했다. 마마는 그에게서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나머지 사례금은 나중에 댁으로 보내드리겠음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데라데라 레리오부트쿡크스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에게 목례를 하고 다르삼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갔다. "밍케, 우리들은 싸워야 합니다. 각오는 되어 있나요?" "싸워요, 마마. 힘을 합쳐서." "변호사는 없어도 상관없어요. 우리들은 백인 법정을 상대로 싸우는 최초의 쁘리부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또한 하나의 명예가 아닐까요? "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나로서는 막연하기만했다.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무기는? 전술은?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 싸우는 것이다 ! "싸웁시다, 마마 ! 싸워요. 힘을 합쳐서 반격을 하는 겁니다." "당신이 만일 안네리스를 위해 싸운다면 그애는 틀림없이 저렇게 병으로 앓아 눕거나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일도 없어질 거예요, 당신 같은 남편에게 있어서 그녀는 인생의 최고의 반려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안네리스를 간호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았다. 마우리츠 메레마와 그 어머니는 어쨌든 헤르만 메레마에게 원한을 품을 만도 했다. 그렇다. 그들이 헤르만 메레마의 재산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유산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안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안네리스의 아버지가 죽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아촌의 범행에 가담하여 그의 행위를 도왔을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이 처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의 범죄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바로 백인이 쁘리부미를 파멸하고 마마를 파멸시키고 안네리스와 나를 파멸시키는 사건이다. 피지배 민족인 쁘리부미를 파괴하는 것이다. 마푸다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이것이 이른바 식민지 문제일 것이다. 나는 문득 쁘리부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자고 주장하는 자유주의파를 생각했다. 존경하는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 당신을 배까지 전송하지 못한 것을 나는 후회하고 있옵니다. 만일 당신이 슬라바야에 있다면 기꺼이 도와 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적어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푸다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어떤 의혹이 생겼다. 과장된 추리일는지도 모르지만, 그 의혹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푸다 선생님이 동인도에서 추방당한 것은 사실은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을 집행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아마도 그녀는 진짜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얼마 뒤 세상에 알려질 이번 사건으로부터 그녀를 미리 떼어놓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의혹은 점점 더 확실해져 갔다. 즉 모든 것은 마우리츠 모자와 암스테르담 지방법원과의 악마의 동맹에 의해 미리 줄거리가 꾸며진 것이 틀림없다. 만일 이번 사건에서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을 일부러 떼어놓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와 그녀 사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다. 이 기발한 추리가 만약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악마처럼 사람을 희롱하기 위한 연극이라고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내가 동인도 전체에서 차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것도 한낱 연극, 자유주의파를 기쁘게 하기 위해 꾸며진 연극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대담한 추리와 의혹은 용서되지 않는 일인가? 나의 생각은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일까? 그런 추측은 바보스러운 것일까? 지나치게 비약된 걸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같은 곳에 이르고, 내 추리가 정당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퇴학 처분, 복학, 전교토론회의 중지, 마푸다 뻬테루스의 추방, B시의 부이사관의 개입, 졸업 파티 석상에서 교장 선생님이 결혼식에의 초대를 공표한 것, 그리고 결혼식에는 교장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불참하고 한 장의 편지를 마푸다 뻬레루스 선생님에게 보내는 것으로 그친 것. 아니 결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유치할 것도 었다. 각각의 사건은 한줄의 실처럼 이어져서 쁘리부미인 사니켐, 그 딸과 사위, 그 재산을 상속받기 위한 마우리츠 메레마의 의리를 가져오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 "마마, 순조롭게 된다면 오늘 저녁 때 이번 문제에 대해 내가 쓴 최초의 글이 신문에 개재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그때는 우리의 패배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지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우선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 될 수 있는 한 정당한 방법으로 반격할 것, 그것이 우선이에요." "나의 친지, 친구 가운데는 양심적인 유럽인이 있읍니다. 그들에게 호소해보겠읍니다." "신중하게 하세요, 실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저녁때 나는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에게 전보를 치고, 우리들의 문제를 그의 양심에 호소했다. 만일 그들이 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칭찬을 해 온 유럽의 학문과 지식은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된다. 허상 ! 모든 것은 결국 우리들이 그토록 애쓰며 가꾸고 우리들이 아껴온 것, 즉 명예, 긍지, 땀, 권리, 그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과 아내까지도 약탈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나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날 밤 마마와 나는 또 다시 마르티네 의사에게서 수면제를 투여받아야만 하는 안네리스를 침대 옆에 앉아 지켜보았다. 마르티네 의사는 기구한 운명, 아득히 먼 북쪽 나라에서 엄습해 온 인위적인 운명에 꽁꽁 묶인 환자와 그 어머니, 그 남편에게 깊은 동정과 우려를 나타냈다. "나는 다만 의사에 불과합니다. 법률이나 정치에 관헤서는 아는 것이 없읍니다." 그는 자신이 원망스러운 듯이 말했다. 정치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것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냐이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내가 아무 일도 해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사교 클럽과는 친분이 없어서 정부고관등에 친한 사람도 없읍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매우 겸손하게 말했다. "내 친구들은 오히려 나의 조그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 밖에는 없읍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들에 대한 이번 결정이 부당하다고 믿고 계시죠? " 마마가 물었다. "부당한 정도가 아니라 야만입니다 ! "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정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라면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런 힘도 되어 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침통한 얼굴로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다가 한숨을 섞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인생에서의 단 한가지 고통은 세금을 내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이 하늘 아래 이와 같은 괴로운 일이 또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읍니다." 다르삼의 전송을 받으며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B시의 부이시관에게 전보를 친지 벌써 5시간이 지나 있었다. 5시간 ! 회답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에르베르 드라크로아, 미리암도 의출중일까? 아니면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일까? "그래요. 우리들끼리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유럽인이 아무리 우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은 유럽의 법률, 자신들의 법률이 결정한 것에 거역하는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쁘리부미를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싸우다가 지더라도 부끄러울 것은 없읍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밍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왔지만 쁘리부미는 변호사를 고용할 수가 없어요. 설사 돈이 있다해도 고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전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쁘리부미는 평생 지금의 우리들과 같은 고통에 신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 한사람 어떻게 해보려고 들지 않아요. 깨지고 부서지더라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모두 우리 뒤를 따라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릅니다." 마마는 무엇에 씌인 듯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미 사건은 가족이나 그녀 개인의 감정을 넘어서 있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는 껍데기 뿐인 원주민의 설움과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참패당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에는 닥쳐올 패배를 예감한 울림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수치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마." "수치심 따위는 유럽 문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마마는 화가 난 듯이 나를 커다란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줄곧 그들과 교제해 온 당신이 지금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쁘리부미로서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세요. 유럽인에 대해서 수치심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그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알겠읍니다. 마마." 나는 대답했다. 그것은 그녀의 우위성을 인정한 꼴이 되었으나, 그녀가 말한 것이 정당한가 아닌가는 별개 문제였다. "나는 학교라는 곳에는 전혀 가본 일이 없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을 찬미하도록 교육을 받은 적도 없어요. 학교라는 곳은 몇십 년 다니건 어떤 것을 공부하건, 그 교육 이념은 같습니다. 무조건 유럽인을 찬미하고 숭배할 것, 우리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교육시킬 것, 그것이 학교 교육의 이념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다행입니다. 최소한 다른 민족의 것을 약탈하는 데 있어서 독특한 방법을 쓰는 민족에 대해 알 수가 있으니까요." 마마는 테이블에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내가 쓴 글과 편집자의 해설이 실려 있었다. "당신의 글은 너무 조심스러워요. 마치 규중 처녀가 쓴 글 같아요, 요전에 그렇게 호된 경험을 겪었는데 어째서 더 강해지지 못하는 거죠? 지금도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데 왜 좀더 과감하게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녀는 누가 우리 말을 엿듣기나 하고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밍케, 이제부터는 말레이어로 쓰세요. 말레이어 신문 쪽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어요." "유감스럽지만 마마, 저는 말레이어로 쓸 수 없읍니다." "쓸 수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번역을 시키세요." 대뜸 콤멜이 머리에 떠올랐다. "알겠읍니다, 마마. " 나는 얼른 대답했다. "당신들의 결혼은 이슬람 법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슬람 법을 모욕하고 이슬람 사회가 신봉해 온 계율을 모독하는 것입니다........아아, 법에 의해 인정받는 결혼을 나도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때마다 그 사람은 거절했어요. 그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안네리스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으로서 내 경우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 합법적인 결혼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글을 쓰겠읍니다. 마마는 쉬세요." 그녀는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 발걸음은 개선장군처럼 힘차고 확신에 넘쳐 있었다. 새벽 3시 10분쯤 되었을 때였다. 글은 거의 완성되었다. 해뜨기 전의 정적 속에서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차츰 가까와 오더니 이윽고 앞뜰로 들어왔다. 조금 뒤에 창밑에서 다르삼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일어나세요 ! " 창을 내다보니 다르삼이 들고 있는 석유 램프의 희미한 불빛속에 우편배달부의 제복을 입은 유럽 혼혈아가 함께 서 있었다. 배달부는 나를 향해 경례를 하고 말레이어로 물었다. "밍케씨입니까? B시의 부이사관님 전보입니다." 팁으로 준 10센트 은화를 받아들고 그는 신이 나서 돌아갔다. 닭의 홰소리에 섞여 말을 달리는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도련님, 너무 일을 많이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뜹니다. 이제 주무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르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다르삼, 너와 같은 칼잡이가 천 명 있어도 2천 자루의 긴 칼을 갖고도 우리들을 도울 수는 없다. 이것은 힘의 문제는 아니야. 다르삼, 이것은 원리와 법과 정의를 둘러싼 문제이고, 너의 권법과 그 긴칼로도 우리들을 지켜 줄 수는 없다. 갑자기 반론이 들려 왔다. 밍케여, 편견을 버리고 솔직해져라. 칼잡이인 다르삼은 물론이고 말을 할 수 없는 돌들조차 너의 힘이 되어 줄 수가 있다. 네가 그들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한 인간의 힘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더구나 두 사람이지 않느냐 ! "알겠어요, 다르삼. 그만 자도록 합시다." "안녕히 주무세요, 도련님. 해가 뜨면 또 다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법입니다." 이 검은 옷의 사나이는 얼마나 현명한가?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 전보를 읽었다. '밍케, 고명한 변호사가 모레 스마랑으로부터 도착. 그를 믿어달라. 역까지 마중 바람. 급행 열차. 냐이와 안네리스에게 안부를 미리암, 에르베르.' 어머니 ! 어머니 ! 드디어 나의 절규가 그들에게 전해졌읍니다. 하지만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계십니다. 편안히 주무세요, 어머니. 앞으로도 어머니를 깨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은 여기 있읍니다. 결코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언제까지나 버티고 싸우겠읍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비겁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소중한 며느리를 빼앗겨서야 되겠읍니까? 제 아내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손자를 안겨 드릴 것입니다. 언제인가는 당당한 자바인으로서 결혼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어머니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드리겠읍니다. 백인의 법률에 의한 이슬람 법의 침범을 고발한 내 글은 네덜란드어로 "슬라바야 일보"에, 말레이어판인 "말레이어 신문"에 같은 날 오후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마르빈 네이만이 게재된 신문을 들고 직접 찾아왔다. "지금까지 당신은 우리들을 많이 도와주었옵니다. 이번에는 우리들이 당신을 할 수 있는데까지 도울 차례입니다."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과 가족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지면으로 지원하는 길밖에는 없읍니다. 우리 신문의 편집국 사원과 직공들은 당신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고 마음속으로 당신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참새가 폭풍에 시달리는 것처럼 발버둥치며 그래도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그 기개를 높이 사고 있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트래나르씨." 그는 신문에 실을 안네리스의 사진을 빌려 달라고 했다. "될 수 있으면 당신과 냐이의 사진도 있었으면 좋겠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장식하고 자바의 정장을 한 안네리스의 사진을 마마에게서 받았다. "다만 유감인 것은 이 사진을 당장은 실을 수가 없읍니다. 두 달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네이만은 설명했다. "동인도는 아직 미개의 정글이라서 사진의 '네가 필름'을 아연판으로 만들 수 있는 공장이 없읍니다. 따라서 이 사진의 필름은 홍콩에서 만들게 됩니다. 동남 아시아로부터의 주문이 많아서 만일, 홍콩에서 만들 수 없는 경우에는, 유럽까지 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늦어지겠지요. 어쨌든 이것이 잘 되면 더욱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목판이나 석판이 아닌 아연판 필름에 의한 사진을 우리들이 동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에 게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안네리스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우리들은 그녀가 병으로 누워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절했다. "혹시 안네리스양이 임신한 것은 아닙니까?" 네이만은 물없다. "미안합니다, 그런 질문을 해서. 실례되는 질문인 줄은 알지만 만일 임신 중이라면 사태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마우리츠 메레마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있읍니다." 안네리스가 임신? 그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일이었다. 네이만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마마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눈만 멀뚱거리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르민 네이만이 돌아간 다음 이번에는 콤멜이 역시 내 글이 실린 신문을 들고 찾아왔다. "냐이, 밍케씨. " 그는 말했다. "이 기사는 곧장 농촌에도 들어가기로 되어 있읍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기사를 읽어 줄 사람을 우리들이 고용했읍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듣게 될 것입니다. 또 빨간 연필로 밑줄을 친 특별판 15부를 이슬람 학자들에게 발송했읍니다. 그들도 이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밤 그들의 견해를 취재해 올 생각입니다. 냐이와 밍케씨는 결코 고립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콤멜을 당신들의 친구로 생각해 주십시오." 같은 마차로 콤멜과 나는 슬라바야로 출발했다. 그는 구멘사리에서 내리고, 나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변호사를 마중하기 위해 그대로 역으로 향했다. 콤멜은 헤어질 때 마차 밖에서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은 인도주의적인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마중나간 변호사는 차분한 느낌의 중년 신사였다. 웃는 얼굴로 기꺼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데라데라 변호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큰 소송사건에서 종종 이름을 듣는 법률가로서 그 빛나는 활동에 의해서 명성과 부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노크로모의 우리들 집에 묵었다. 밤을 새워 그는 안네리스의 관계 기록을 검토하고 모든 기록의 사본을 작성하기 위해 서기를 두 사람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다. 판지 다르만, 즉 얀 다페르스테와 내가 서기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서기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나는 글씨를 지저분하게 쓰고 틀린 곳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르삼이 밤중에 나가서 드루세 석유회사의 서기를 찾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는 공문서용의 특별한 잉크를 갖고 왔다. 스마랑에서 온 변호사(나는 그의 이름을 말할 용기가 없다. 이 재판이 패배로 끝났을 경우, 그의 변호사 활동에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르니까)는 아침까지 모든 기록을 검토했다. 두 사람의 서기는 각 기록에 대해서 2부씩 사본을 작성했다. 오전 5시가 되자 두 사람은 각기 직장으로 떠나고, 또 다른 서기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전 7시, 변호사는 장문의 서류를 쓰기 시작하고, 새로운 서기들이 그 사본을 몇부 작성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 사본의 하나를 갖고 슬라바야의 유럽인 법원에 다르삼을 데리고 갔다.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그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법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콤멜이 게재한 그날 오후의 뉴스는 이슬람 학자들이 슬라바야의 유럽인 법원에 몰려가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과 슬라바야의 법원에 의한 그 집행에 항의를 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이슬람 학자들은 그 문제를 슬라바야의 이슬람 종교 재판소에 제소한다고 위협했고, 당국이 동원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고 한다. 콤멜 자신이 쓴 것으로 보이는 논설은 이슬람 교도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경청하는 이슬람 학자에 대해서 당국은 좀더 사려 깊은 신중한 대도로 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신앙을 비웃는 것은 위험하다. 무력한 식민지의 백성을 우롱하고 그들의 재산이나 처자식을 빼앗거나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었다. 콤멜은 두 번에 걸쳐서 우리들 편에서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교묘하게 우리들을 대변하고 우리들의 입장과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 논했다. 그의 논조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으나 무게가 있고 자신에 넘쳐있었으며 호소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슬라바야 일보"는 네이만에 의한 냐이의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었다. "나는 20년 이상이나 피땀을 흘려가며 일해서 이 농장을 꾸려왔읍니다. 이 농장에 바친 나의 노력은 나의 두 자식에 대한 것 이상이었읍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 되었읍니다. 나는 돌아간 투앙 메레마의 생활 태도, 병, 무능력 때문에 장남 을 잃어버렸옵니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한 사람의 메레마라는 사람이 나에게 남겨진 딸까지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권리로써 획득한 것, 내가 사랑해 온 모든 것들로부터 유럽의 법률로 나를 떼어 놓으려고 하고 있읍니다. 그런 일이 교묘하게 꾸며진 것이라면 나는 이렇게 물어볼 수 밖에 없읍니다. 무엇이 자신의 원리이고 무엇이 자신의 권리가 아닌가,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정의가 아닌가를 가르칠 수 없을 정도라면 당신네들의 학교는 도대체 무엇때문에 존재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뒤이어 네이만은 나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결혼한 것이고, 안네리스의 어머니도 이 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1800년에 법률에 의해 노예 제도가 정식으로 폐지된 이후, 우리들의 신체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고, 다른 어떤 사람의 소유물도 아니다. 적어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역사'에서는 그렇게 가르쳐 왔다. 나는 법원의 결정으로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지금 현재 유럽의 양심에 묻고 싶다. 그 저주받을 노예 제도를 당신들은 부활시키려 하고 있는가? 어째서 당신들은 한 장의 공문서로 사람을 결정지으려 하는가, 왜 인격을 가진 인격체로서 사람을 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마르티네 의사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그 가족과 교제를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안네리스 메레마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도 결혼하고 나서도 잘 알고 있다. 안네리스는 그녀의 남편, 어머니, 그리고 주위의 환경을 사랑하고 있다. 중대한 결의를 갖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서 그녀는 매우 강한 집착을 갖고 있다. 만일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이 그대로 집행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정서적으로 극도의 불안정 상태에 빠져서 그 결과, 젊고 아름다운 생명을 단축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안네리스 부인은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안될 상태에 놓여 있다. 이미 그녀는 확실히 안심할 수 있는 것, 법적인 보증 같은 것의 존재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그녀의 마음 속은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방 밖에는 태양이 빛나고 웃음과 환희가 넘쳐 있는데, 나는 언제까지 그녀에게 수면제를 투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젊은 천사는 왜 그녀의 뜻과는 관계가 없는 결정에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는가? 앞으로 그녀에게 수면제의 투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나는 의사로서 더 이상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스마랑에서 온 변호사는 우리들의 재판에 관한 자료를 남김 없이 읽었다. 그는 그것을 노트에 적었으나, 우리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도 무턱대고 질문을 해서 그를 번거롭게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녁때 그는 슬라바야 이외에서 온 신문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그런 다음 그는 않은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를 갖고 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냐이." 그는 마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메레마씨는 냐이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읍니까?" "투앙이 왜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나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옵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나는 몇번이나 졸랐읍니다만." 마마는 대답했다. "내가 가까스로 사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의 아들인 마우리츠 에레마가 갑자기 이 집에 나타났을 때입니다. 약 5년 전의 일이었읍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투양 메레마는 마우리츠의 어머니와 아직도 법적인 혼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변호사는 놀라서 마마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혼하지 않고 있었읍니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메레마씨는 법률상 이곳에 있는 자식을 인지할 수가 없읍니다. 왜냐 하면, 그런 자식들은 사생아나 다름 없고, 그들에 대한 인지는 합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소송에서의 냐이의 입장은 매우 유리해집니다." 마마와 나에게 희미하게나마 서광이 비쳤다. 그러나 며칠 뒤 그런 것을 이유로 맞서도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다고 변호사는 통고했다. "네덜란드 본국에 전보로 조회한 결과 알게 된 일인데, 아메리아 메레마 한멜스 부인은 남편이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 지 5년뒤, 네덜란드의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읍니다. 정당한 이유없이 남편이 그녀를 버렸다는 것이 제소의 이유였읍니다. 그리고 메레마씨의 실종이 최종적으로 확인된 다음, 1879년에 아메리아 부인의 이혼 청구는 인정되었읍니다. 따라서 그들의 혼인 관계는 법률상, 냐이의 장남 로베르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없어졌던 것입니다." 변호사는 그렇게 설명한 다음 마마에게 물었다. "메레마씨는 그 이혼에 대해서 알고 있었읍니까?"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분노를 터뜨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우리츠 메래마는 5년 전, 이곳에서 투앙과 대면했을 때 교활하게 거짓말을 했읍니다 ! 내 어머니가 부정을 저질렀다면 이혼 소송을 제기해 보라고 그는 투앙 메레마에게 대들었읍니다. 그 얘기가 투앙을 정신적인 파멸에 이르게 했던 것입니다." 마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으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우리츠 메레마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졌다. 아무래도 그는 의도적으로 헤르만 메레마에개 정신적 충격을 주어 죽음을 재촉하려고 계획한 것 같았다. 모든것은 재산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변호사는 스마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그렇게 해서 법률가라는 방패를 잃어버렸다. 법원의 결정과 싸우는 직접적인 무기를 빼앗긴 것이다. "괜찮습니다. 마마. 남은 것은 펜밖에는 없지만 말이에요." 나는 썼다. 쓰고 절규하고 열변을 토하고 단식하고 포효하고 탄핵하고 신음하고 선동했다. 콤멜이 그것을 말레이어로 번역해서 지면을 제공해 주는 신문사에 배부했다. 그리고 어느 졍도의 성과는 있었다. 슬라바야의 종교 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밍케와 안네리스의 결혼은 이슬람 법에 의해 승인되고 보증된 것이므로, 그것을 부정하거나 침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편 몇몇 식민지 성격을 띤 신문은 모멸, 냉소, 악담을 퍼부었다. 네이만과 콤멜의 신문은 종교재판소의 성명을 부지런히 요약해서 실었다. 나의 아내,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형 같은 안네리스가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슬라바야는 그녀와 냐이와 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 사건의 발생 이후 콤멜이 기울여 온 노력은 차츰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신문은 농촌에서 글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많은 청중이 그 주위에 모였다.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귀와 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 전 사회적인 사건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도 다르삼은 얼마 뒤 사태의 진상을 알아챘다. 그는 자식들의 도움으로 말레이어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시 안네리스와 냐이는 법원의 소환을 받았다. 안네리스의 출정은 무리였다. 그래서 마마와 나만이 변호사를 동반하지 않고, 출정하고, 그녀는 마르티네 의사가 특별히 간호를 하게 되었다. 판사는 즉시 안네리스의 거처를 물었다. "아픕니다. 마르티네 의사가 간호하고 있읍니다." "의사의 증명서는 ?" "내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법원에서는 결정했나요?" 난폭한 냐이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좋소." 판사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냐이는 좀더 말을 삼가시오. " "모든 것을 잃게 된 사람에게 이 자리에서 말을 삼가라고 하는 겁니까 ? 판사는 무엇을 바라고 있읍니까? 분명히 말해 주세요. " 판사는 쁘리부미 여인과의 충돌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양보를 했다. "좋소. 그럼 지금부터 고 헤르만 메레마씨가 인지한 자녀, 미스 안네리스 메라마에 대한 슬라바야 법정의 결정을 전한다. 미스 안네리스 메레마는 닷새 뒤 슬라바야로부터 선박으로 이송하기로 한다." "딸은 병중입니다. " 마마가 항의했다. "배에는 훌륭한 의사가 동승하고 있소." "그녀의 신병 이송은 인정할 수 없읍니다." 나는 거부했다. "나는 그녀의 남편입니다." "누가 그녀의 남편이라고 내세우건 당 법원은 일체 상관하지 않는다. 안네리스 에라마양은 미혼이며, 남편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악마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판사는 회중시계를 꺼내 본 뒤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형용할 수도 없는 격심한 분노를 느끼며 우리들은 법원 건물을 나섰다. 나는 마마를 먼저 돌려보내고 네이만과 콤멜을 만났다. 그리고 법원의 결정을 두 사람에게 전하고, 두 사람의 사무실에서 그것을 보도하는 기사를 함께 만들고 인쇄소에서 활자를 줍는 문선일까지 도왔다. 그날 저녁 뉴스가 보도되었다. 집에 돌아가 보니 마르티네 의사가 냐이와 함께 안네리스 옆에 붙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얘기를 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믈라바야 법원의 결정은 많은 사람과 단채의 분격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긴 칼과 낫 등으로 무장한 마두라인 일단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 집안으로 들어 오려는 유럽인과 정청 관리에개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통행인과 마차들은 무슨 일인가하고 멈춰 서서 지겨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마두라인 남자 한 사람이 셔츠 앞을 풀어헤치고 누구라도 상대해 주겠다는 듯이, 그리고 어떤 위험도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활개치고 다녔다. 머리에 두른 띠가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았다. 안네리스의 방 창문으로부터 백인 법정의 결정은 알라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교도의 범죄이고, 미래 영겁을 두고 용서받지 못할 대역 행위라고 비난하는 마두라인의 저주 소리가 쉴 새없이 들려 왔다. 이른 아침부터 오전 11시까지 그들은 집 주위를 점거했다. 농장 일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인부들은 혼란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각기 마을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찰 2개 소대가 마차에 나누어 타고 도착했다. 이미 멀리서부터 그들이 마차 위에서 두들겨대는 징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었다. 마두라인을 무시하고 마차의 대열은 다짜고짜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방에서 보고 있으려니까 그때 몇사람의 마두라인이 큰 낫을 휘두르며 말의 다리를 공격했다. 말이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마차 가운데 두대가 뜰 안으로 들어와 개구리가 있는 연못으로 넘어졌다. 운좋게 집안으로 들어와 멈춘 나머지 마차에서 총을 든 제복의 경찰들이 뛰어내려 마두라인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두라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충돌이 일어났다. 내가 있는 곳에서 경찰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경찰대의 유럽인 지휘관이 총을 발사하라고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때 돌멩이 한 개가 날아와 그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맞았다. 지휘관은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대신 지휘를 맡은 검은 네덜란드인(경찰에 고용된 원주민)이 더욱 큰소리로 마두라인을 물리치라고 소리쳤다. 그도 팔에 칼을 맞아 순식간에 셔츠가 피로 물들었다. "알라 신은 위대하다 ! " 마두라인의 아우성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힘이 넘쳤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패배해서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앞뜰 잔디 위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몇몇씩 쓰러져 있었다. 훈련을 끝낸 지 얼마 안되는 특수 부대, 마레소세가 경찰대를 대신해서 투입되었다. 경찰대는 하늘을 향해 쏘았다고는 하나 총을 발사했기 때문에 명령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특수부대원들에게 욕설을 들으며 연못에 빠진 두 대의 마차를 끄집어 내는 즉시 철수하도록 명령받았다. 마두라인과 그밖의 사람들로 구성된 한 무리가 집안으로 돌입하려고 했다. 그들은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직도 경찰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특수부대원이라는 것을 알자, 그들은 겁을 집어 먹고 일부는 집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도망쳤다. 마레소세는 식민지 군의 우수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정예부대로서, 전 동인도에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한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폭동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고무 곤봉을 사용할 뿐 화기나 칼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그들은 용감한 집단으로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방에서 보고 있으니까 번쩍번쩍 빛나는 놋쇠로 만든 사자 휘장이 달린 청죽 모자가 새로운 침입자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호각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고, 곤봉이 마구잡이로 침입자들 머리위에 떨어졌다. 호각, 곤봉과 둔기의 충돌은 반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두 명의 마레소세 대원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날은 또한 항의를 하기 위해 몰려든 다른 무리도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르삼이 체포되어 어디론가 연행되어 갔다. 소동이 진압되고 나서 함멜스테라고 칭하는 특수부대의 하사관이 우리들이 있는 방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마마가 문을 열고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냐이 온트솔로? " 하사관이 말레이어로 물었다. "마레소세 따위에 볼 일이 없어요." "이 집과 주변을 마레소세가 경비하게 되었소." "내가 알 바 아닙니다, 내 허가 없이는 이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 "그래서 내가, 함멜스테 하사관이 그 허가를 얻으러 온 거요." "허가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앞뜰에서 야영을 하겠소." 냐이는 쾅 하고 문을 닫은 뒤 안에서 쇠를 잠그고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일단 양보하기 시작하면 기어오르는 사람들이에요. 걱정 말아요. 그들이 어떻개 하겠어요. 그들은 이 집에 관한 영장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냐이의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창에서 마르티네 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의 하사관과 정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쫓겨나려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소리는 내가 있는 곳에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봐서 마르티네 의사는 왕진을 위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하사관이 그것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르티네 의사는 끈질기게 버렸으나 결국은 다시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이제는 안네리스를 돌볼 의사도 없었다. 우리들만이 돌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오후 늦게 안네리스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커다란 눈을 뜨고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듯이 조심스럽게 둘레를 둘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앤, 안네리스." 나는 불러 보았다. 안네리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핏기가 없는 창백한 입술이 열렸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코코아를 집어 입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컵으로 절반 정도 마시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마는 의자에 앉은채 잠자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갔다. 나는 처음에 소를 돌보고 있는 인부들을 감독하기 위해 뒤뜰 쪽으로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마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누구나 네덜란드에 갈 수가 있는데, 나는 왜 안된다는 거죠?"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아래층에서 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순수 유럽인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얘기는 낮아서 내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이따금 냐이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 딸을 쫓아간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누구의 돈도 아니고 내 돈으로 간다는데 말입니다." 상대방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내 딸을 쫓아가서는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남자는 손을 움직인 것 같았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역 증명서는? 건강 진단서는? 내 딸도 아직 갖고 있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지금 앓아 누워 있어요. 배 위에서 예방 접종을 받게 되나요? 그렇다면 나도 배에서 받겠어요." 나는 두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안네리스가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고 창가로 내려갔다. 그곳이 그녀가 좋아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안네리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억지로 얘깃거리를 찾았다. "앤, 당신은 아직 저 산까지 가 본 적이 었지 ? 저 산에서는 우노크로모와 슬라바야 전체가 내려다 보이겠지. 언젠가 함께 가 보도록 하지." 산은 게으름장이가 젓다 만 코코아처럼 묵직한 구름에 가려서 볼 수가 없었다. 언제나 암록색으로 보이는 멀리 있는 숲도 낮게 깔린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훨씬 먼 곳의 하늘에서 이따금 번개가 번쩍이고, 한순간 구름들을 제압하며 하늘에 군림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연계에는 자연계의 섭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옆에서 안네리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마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조용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안네리스를 창가에 남겨두고 다가갔다. "밍케, 당신이 얘기하세요. 출발이 사흘 뒤로 다가왔다는 것을 말이에요." 물론 그것은 남편인 내가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지난 며칠 동안 어수선함에 쫓겨 아직 얘기하지 못한 그러나 내가 할 일이었다. 우리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반격은커녕 자신들조차 지키지 못하고 참패했다는 것을 안네리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 멀리 있는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번개가 칠 때마다 어둠은 더해갔다. 창 밑에서는 경찰대의 마차에 부서진 연못이 손질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보통 때는 창문을 통해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던 농장 안의 마을은 지금은 쥐죽은듯이 조용해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내 뺨을 갔다 댔다. 나는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았다. "앤 !"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앤, 안네리스, 내 얘기를 들어 주겠어 ?" 그녀는 듣지 않고 있었다. 왼손으로 목덜미를 천천히 긁었다. 말려 올라간 머리칼에 숨겨진 아름다운 목덜미는 창 밖의 자연보다도 더 완벽했다. 우리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도 앞으로 사흘. 나의 연인, 더할수 없이 아름다운 나의 인형, 안네리스는 사흘 뒤면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 엔, 당신은 그 뒤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당신은 저 먼 하늘의 번개처럼 한순간의 광채로 주위의 사물을 밝혀 주다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갑자기 당신을 재판에 걸어 이런 판결을 내리게 했어. 그리고 또한 그는 우리들에게서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을 떼어 놓으려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은 이토록 야위고 창백해졌어. 마마와 나도 이렇게 바짝 야위어버렸구. 앤, 당신이 너무도 불쌍해.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미모도 젊음도 함께 할 수가 없군. "앤, 내 말 듣고 싶지 않아 ? " 그녀는 여전히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앤, 당신은 저 산을 좋아하지 ?"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좀더 오래 전에 말을 타고 가볼 걸 그랬어. 마마가 집에 있을테니까 우리 둘이서 말이야." 다시 한번 그녀는 살짝 끄덕였다. "당신의 애마 바우크가 울면서 묻곤 하더군. 앤은 어디 있느냐고? " 안네리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나를 돌아다 보았다. 새벽 하늘의 샛별과도 같은 두 개의 눈동자가 꿈꾸듯이 나를 바라다보았다. 입은 여전히 꼭 다물고 약 냄새만을 풍길 뿐이었다. 마마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10분 쯤 있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유럽인과 함께였다. 우리들이 서 있는 곳으로 그 사나이는 똑바로 걸어왔다. "정청의 의무관이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말했다. "미스 안네리스 메레마의 건강 진단을 하겠소." "미세스입니다." 나는 정정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내 아내를 침대에 데려다 앉혔다. 그리고 긴 웃옷 주머니에서 청진기를 꺼내 검진을 시작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혈압을 쟀다. 그런다음 청진기를 주머니에 넣고 눈을 검사했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코와 입에서 나오는 숨을 맡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마는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의무관은 환자에게 누우라고 일렀다. "냐이! 왜 당신은 이처럼 많은 약을 이 아이에게 먹이도록 내버려 두었소? " 그는 거친 말래이어로 마마를 힐책했다. "당신,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은가요? " 냐이는 그보다 더욱 거친 말투로 대꾸했다. "빌어먹을 ! 내가 누군지 몰라? 나는 정청의 의무관이야 !" "당신 따끔한 맛을 봐야 알겠어 ?" "좋아. 당신을 고발하겠어. 마르티네 의사도 마찬가지야. 두고보라구 !" "고발하려면 당신네 집에 가서 하시지. 우리 집에서 얼씬거리지 말고. 문은 열려 있으니까 썩 꺼져 !" 의무관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는 나를 돌아다보았다. "당신도 들었겠지 ?" 그가 소리쳤다. "이 여자가 지금 한 말, 당신이 중인이 되어야 해, 알겠지 ? " "문은 열려 있다니까요." 내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냐이가 나와 안네리스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는 몸이 몹시 쇠약해 있어. 그냥 눕혀둬. 심장이 약해졌어. 내버려 둬 !" 의무관이 말했다. 우리들은 안네리스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여 의자에 앉혔다. "앤, 식사를 가져다 줄깨. 누가 뭐라든 무슨 일이 있든 신경쓰지 마라." 안네리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무관은 위협적인 태도로 내게 다가와 협박했다. "너는 내 명령에 반항할 생각인가?" "아내에 관한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요." 나는 그를 보지 않고 말레이어로 대답했다. "좋아, 마음대로 해라 ! " 그는 말하며 방을 나갔다. "어디 두고 보자 !" "앤, 어째서 당신은 한 마디도 말이 없지 ? " 여전히 안네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내 말 들려 ? 그 머리가 이상한 의무관은 가 버렸어.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안네리스는 여전히 창밖의 구름에 덮여 있는 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마는 잠자코 내 행동을 지켜보았다. 안네리스는 천천히 음식을 씹어가며 삼킬 때마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 등 뒤에서 마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에 마우리츠는 혈연 관계를 폭로했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그 피가 부른 죄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어요. 그를 성스러운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일을 생각해도 필요 없읍니다, 마마."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요. 추억은 이따금 고문이기도 하지요. 분명히 지나간 일은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자 소용이 없군요. 그런데 안네리스에게 그 얘기를 했나요? " "아직 못했읍니다." "말을 해라, 앤. 왜 그렇게 말을 안하지 ? " 안네리스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안네리스가 웃었다 ! 마마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앤, 당신은 이제 나은 모양이군 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마마는 일어나서 딸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앤, 너의 웃는 열굴을 보니까 마마의 슬픈 생각도 사라져 버리는구나 네 남편도 마친가지야. 너무했다, 앤. 한 마디도 안하다니 ? " 마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네리스는 천천히,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듯이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마르티네 의사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단점은 한 가지를 어디까지나 고집하려고 하는 데 있다. 일단 붙잡은 것은 결코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장차 어떤 일이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고, 그 결과 주위에 있는 것과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관심을 잃어 버릴 가능성 이 있다고. 그렇다면 아내는 지금 그 단계에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믿을 수 있는 마르티네 의사는 왕진을 금지당했다. 그때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그녀가 주어진 상황에 순순히 따를 수가 있다면 안네리스는 건강해질 것이라고. 지금은 어떤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마마도 모른다. 마르티네 의사여, 당신은 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마르티네 의사는 자신의 치료를 받고 있을 대의 안네리스는 그곳에 있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리고 마르티네 의사는 우리들이 패배하여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나도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순순히 따르는 듯이 보이지만 마음은 천갈래로 찢어져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약으로 겨우 심리적인 손상을 막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가치를 상실할 수가 있다. 혹은 거꾸로 그녀 자신이 남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메레마씨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그녀가 의식을 회복하고 나면 멋진 일, 아름다운 일, 희망에 넘치는 일,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일을 쉴새없이 그녀에게 얘기해 들려 주라고, 그러나 지금 남편으로서의 나의 임무는 앞으로 사흘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녀에게 전하는 일이다. 더구나 마르티네 의사의 왕진이 금지된 지금 약을 쓸 수도 없는 것이다. 안네리스는 이미 위기는 넘겼다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한 적이 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우리들이 결혼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지금 그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여기서도 또한 안네리스를 구할 수 있는 의사는 내가 아니다. 밍케씨, 당신, 남편인 당신, 그녀가 사랑하는 당신이 그녀의 의사가 되는 겁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네덜란드까지 그녀를 따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120길더가 필요한데 냐이는 그 정도의 비용은 부담할 수가 있읍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결코 큰돈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이미 우리들이 안네리스와 동행하는 것을 금지해버렸다. 어떻게든 해 보아야 한다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다.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아직도 어린 부인의 생명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없이는 그녀는 살 수가 없읍니다. 지금 그녀에게는 당신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나는 모든 방법을 써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서 패배한 것이다.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에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슬라바야의 백인 법정은 냐이와 나 두 사람은 안네리스와 일체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냐이는 교묘한 계책을 하나 세워놓고 있었다. 판지 다르만 즉, 얀 다페르스테에게 향료의 거래를 위해 네덜한드로 건너가도록 이르고, 그렇게 해서 그를 내 대신 안네리스와 동행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미 냐이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가 우노크로모에 가까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기선회사의 대리인이 꾀를 내어 안네리스의 선실 옆 2등 선실에 다르만을 태우기로 했다. 또 그의 건강진단일의 날짜를 실제보다 앞당기도록 꾸며 준 것도 그 대리인이었다. 아내의 표정은 대리석 조각 같아서 마치 안면의 신경이 뇌와 끊어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움직임도 감정 표현도 일체 없고, 변함없이 말이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출발 날짜를 그녀에게 알려 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녀는 스푼으로 네 번 정도 먹었을 뿐, 그 다음은 입을 벌리려고 하지 않았다. 도대체 몇번을 그랬을까? 냐이는 안절부절 못하고 방안을 들락거렸다. 냐이가 방을 나갔을 때, 나는 아내를 끌어안고 용기를 내어 귓가에 속삭였다. "앤, 우리들은 패배하고 말았어. 당신을 따라 우리들도 네덜란드로 가려고 했는데, 그들이 그것마저 금지해 버렸어. 앤, 듣고있어 ? " 그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당신이 어떻개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앤, 잘 들어줘. 마마와 나 대신 얀 다페르스테가 가기로 했어. 사흘 뒤 그도 같은 배로 유럽까지 당신과 함께 가기로 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마마와 나도 곧 뒤쫓아갈 거야." 안네리스는 변함 없이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이미 남편으로서의 무거운 임무를 다 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그것을 듣지 않았다면 임무를 완전히 다 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도대채 나는 몇번이나 얘기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나는 안네리스에게 키스를 했다. 그래도 반응은 없었다. 어쩌면 마르티네 의사가 말한대로 그녀는 벌써 위기를 지나서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것으로 몇번째일까? 마마가 또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그녀는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에게서 온 전보와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B시의 부이사관은 변호사를 파견했으나 그것이 실패로 끝난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전해 왔다. 우리들과 슬픔을 함께 하고 우리들에게 진심으로 동정을 표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장문의 전보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었다. 즉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은 부당하다. 그는 동인도 총독에게 전보를 쳐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이 그대로 집행된다면, 자신은 사직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또 사법성에도 항의의 전보를 보냈으나 회답조차 없었다. 그때문에 그는 사직하고 미리암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문제의 안네리스는? 여전히 그녀는 일체의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그녀는 건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침대에 데리고 가서 눕히고 나도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럴 때 내가 많은 이야기, 선조의 진설 같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윽고 바닥이 났다. 유럽의 이야기에서 나는 "성 주느비에브"를 최소한 네번, "걸리버 여행기"를 네번, "작은 엄지손가락"을 두번 이상 얘기했다. 그 밖에 새끼 사슴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목이 쉬어버렸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모자라서 나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경험담까지 덧붙이지 많으면 안될 정도였다. 안네리스를 안고 입을 그녀의 귀 가까이에 대고(그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자세였다) 나는 되풀이해서 애기를 들려 주었다. 눈을 뜨자 밤이 지나고 어느새 방안에 밟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피곤했다. 문득 나는 안네리스가 나를 안고 키스를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앤, 안네리스 !"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에 느껴지는 그녀의 맥박은 전날처럼 느리지는 않았다. "마스 ! " 그녀는 대답했다. 정말로 내 아내가 말을 했을까? 아니면 꿈에 지나지 않는가? 꿈이여, 나를 괴롭히지 말아다오 ! 그러나 내가 본 것은 틀림없이 미소 짓고 있는 나의 아내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이는 지저분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아, 안네리스, 이제 나았군 ! "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지난 며칠 동안의 나의 필사적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식사 준비가 되어 됐어요, 마스. 드세요." 그녀는 병이 나기 전과 다름 없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안네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리는 불안정하고 정상적인 경신 발육이 없었다고 마르티네 의사가 말했는데, 과연 그럴까 ?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슬픔에 젖은 눈이었다. 입술은 아직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사팔뜨기가 된 것 같았다. "마마 ! " 나는 소리쳤다. "안네리스가 정신을 차렸어요." 마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수도 하지 않고 나는 식탁 앞에 앉았다. 내 앞에는 스푼도, 포크도 접시도 없었다. 다만 안네리스가 내 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미쳐 버린 것일까? 아니면 나혼자서 먹으라는 것인가? 그녀는 스푼으로 음식을 떠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혼자 먹을 수 있어, 앤. 당신이나 먹어요. 내가 먹여 줄 테니까." 안네리스는 자기는 먹지 않고 계속 내게 먹이려고 했다. 나는 씹지 않고 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다. "왜 이렇게 나만 먹게 하는 거지 ? " "어때요? 일생에 한번 내 손으로 당신에게 먹여 드리고 싶었어요. "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안네리스는 입을 다물고 다시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제19장 긴 이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농장 일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마레소세 (기마 힌병대-1890년에 아치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 부대)는 농장 출입을 일체 금지하고 있었다. 겨우 소의 시중, 우유 짜는 것만이 평상일이었다. 마마의 항의는 묵살되었다. 많은 편지가 왔으나 답장은커녕 읽어 볼 시간조차 없었다. 네이만에게서 보내져 온 신문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쌓여만 갔다. 마마와 나, 그리고 안네리스도 욕실과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밖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들은자택 연금된 셈이었다. 앞뜰에 쳐진 야영 텐트에서 마레소세 병사들이 나오는 것은 길가에 모인 사람들을 쫓을 때뿐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우리들에게 동정을 나타내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그 가운데는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구경온 사람들도 있었다. 안네리스는 여위고 창백하고 눈빛이 흐려 있었지만, 정신 상태는 비교적 정상처럼 보였다. "전에 얘기해 준 무르타투리 이야기처럼 네덜란드에 대해 얘기해 줘요." 갑자기 그녀가 요구했다. "북해의 연안에 어떤 나라가 있었읍니다....." 나는 생각나는대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 나라는 땅이 낮았기 때문에 '저지대의 나라'라고 불리고 있었읍니다. 그곳이 바로 네덜란드, 즉 홀란드입니다." 거기서 나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변함 없이 슬프고 꿈꾸는 듯한 눈이 생전 처음으로 보는 신기한 동물이 눈앞에라도 있는 듯이 신기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땅이 낮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제방을 보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옵니다. 개다가 싫증이 난 사람들은 나라를 버리고 산이 있고 땅이 높은 나라들을 동경하여 방랑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읍니다. 땅이 높은 나라로 건너간 사람들은 이윽고 그 나라를 지배하려고 생각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읍니다. 그린 나라들에서 그들은 원주민을 지배하고 압박했읍니다." "바다 얘기를 해 줘요. " 그때 흰 옷에 흰 모자를 쓴 유럽인 여성 한 사람이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며칠 동안 우리들의 방에는 누구나가 제멋대로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에 냐이와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인은 사무적인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세시간 뒤면 출항이에요, 아가씨." 하고 여인이 말했다. "아가씨는 호화스러운 기선을 타고 넓은 바다를 횡단하여 수에즈 운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브롤터를 본 일이 있나요? 그래요, 그 산호초의 도시를 아가씨는 지나게 되지요. 그리고 나서 며칠 뒤에 아가씨는 드디어 선조의 땅을 밟게 되는 거예요. 황금식으로 빛나는 모래, 형형색색의 꽃들, 그곳에는 아가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어요.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유명한 학자이고 기사인 오빠와 함께 살게 되니까요. 그리고 만일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이 년 있다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요 아가씨,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마스, 나는 큰 파도나 물보라나 거품이 더 좋아요. 기선이나 네덜란드보다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 여인이 가로막았다. "네덜란드에는 무엇이든 다 있어요. 아기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 "마스, 이곳에는 없는 것이 있나요? " "그렇지는 않아, 앤. 무엇이든 여기서도 구할 수 있어. 당신은 여기서 행복했지." "만일 네덜란드에 무엇이든 다 있다면......" 마마가 화가 나서 말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네덜란드인은 이곳에 왔죠?" "냐이,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얼른 그녀의 옷이나 챙겨요." "아니, 옷뿐이 아니에요." 마마는 차츰 흥분했다. "이 애의 보석도, 예금통장도, 아버지의 인지 증명서도 모조리 싸 줘야 해요. 그리고 어머니와 남편의 기도도 함께요." "마마." 안네리스가 말했다. "지금도 마마는 기억하고 있어요. 언젠가 마마가 들려 준 이야기를?" "이야기라니 무슨?" "어머니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집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를 말이에요." "응,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왜 ?" "그때 마마는 낡은 갈색 트렁크를 들고 집을 떠났지요?" "그렇단다, 앤." "그 트렁크는 지금 어디 있어요?" "창고에 있단다." "그것을 갔다 주세요." 마마는 트렁크를 가지러 갔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에요, 아가씨." 유럽인 여성이 옆에서 말했다. 안네리스도 나도 못들은 척했다. 얼마 뒤 마마가 낡은 갈색 트렁크를 들고 돌아왔다. 녹이 슬어 모양은 일그러지고 여기저기 찌그러진 양철제 트렁크였다. 안네리스가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 트렁크를 갖고 갈께요, 마마." "너무 작고 보기 싫구나, 앤." "마마, 옛날에 마마는 이 트렁크를 갖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집을 나왔어요. 이 트렁크에는 마마의 쓰라린 추억이 하나 가득 담겨 있어요. 안에 담겨 있는 마마의 쓰라린 추억과 함께 이 트렁크를 가져가게 해 주세요. 시어머니가 만들어 준 바티크 신부 의상, 내가 가져가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여기에 넣어 주세요, 마마. B시의 시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보냅니다. 저는 갑니다, 마마. 과거의 일은 돌아보지 마세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잊어버리세요 마마. 사랑하는 마마." "아가씨, 마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유럽인 여성이 다시 옆에서 끼어들었다. "앤, 그건 무슨 의미지 ? " "옛날의 마마와 마찬가지로 저도 이 집에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앤, 안네리스, 사랑스런 앤." 마마는 소리를 지르며 안네리스를 끌어안았다. "앤, 마마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너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단다. " 마마는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다. 나도 흐느껴 울었다. "우리들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다했어, 앤." 나는 덧붙여 말했다. "그만두세요, 마스. 울지 말아요. 또 한 가지 소망이 있어요, 마마.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말해다오, 앤. 소망이라는 것이 뭐냐 ? " "마마, 동생을 낳아 주세요. 마마를 소중히 모실 귀여운 동생을 말이에요." 마마는 점점 더 심하게 울었다."마음씨가 곱고, 나처럼 마마를 울리지 않는 여동생을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거냐 ?" "그러면 안네리스가 없어도 마마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앤, 앤, 어쩌면 그런 말을..... 용서해 다오. 마마가 너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마스, 그동안 함께 지내서 우리들은 행복했지요?" "물론이지. " "그 행복했던 일만을 생각해 주세요, 마스. 그 밖의 것은 안돼요." 문턱에서 혼혈의 사나이가 소리쳤다. "서둘러 ! 벌써 출발이 2분이나 늦었어." "자, 아가씨, 갑시다." 유럽인 여성이 안네리스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갑자기 안네리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무표정해졌다. 잠깐 동안 보였던 당돌한 기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천히 걸어서 방을 나가 유럽인 여성에게 끌려 계단을 내려갔다. 몸이 너무나 쇠약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나와 마마는 뛰어가서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혼혈의 사나이와 여인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계단 밑에는 마레소세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우리들은 가까이 가는 것을 금지당했기 때문에 소가 끌려가듯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계단을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다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찌기 투앙 메레마로부터 딸을 지킬 수가 없어서 끌려가는 딸을 지켜보기만 했던 마마의 어머니도 역시 이런 쓰라린 마음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네리스의 마음은 어떨까? 과연 그녀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도 포기해버린 것일까?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갑자기 마음 깊숙이에서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패배했읍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들은 도망치지는 않았읍니다. 어머니, 자신의 아내를, 당신의 며느리를 끝까지 지킬 수는 없었지만 나는 결코 비겁자는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럽에 맞서는 쁘리부미는 이다지도 약하단 말입니까 ? 유럽 ! 나의 스승, 유럽이여 ! 이것이 그대의 문명적 행동인가 !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아내는 덕택에 그녀의 작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렸다. 그녀 한 사람의, 그래, 단 한사람의 인간의 평화와 안전조차 보증할 수 없었던 세계에 대한 믿음을...... 나는 안네리스의 이름을 불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앤, 나도 곧 뒤따라 갈께. " 대답은 없다. 돌아보지도 않는다. "마마도 갈께, 앤. 용기를 내라 ! " 마마의 목소리는 쉬어서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안네리스는 여전히 대답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현관 문이 열렸다. 정청의 마차 한 대가, 말에 탄 마레소세 병사들 틈에 끼어 얘기하고 있었다. 마마와 나는 밖으로 나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안네리스가 부축을 받고 마차에 타는 것이 잠깐 보였다. 그때도 그녀는 우리 쪽을 돌아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문이 밖에서 잠겼다. 자갈을 튕기는 바퀴 소리가 차츰 멀어져가고,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여왕 빌헬미나가 윽좌에 앉아 있는 나라로 안네리스는 떠나간 것이다. 우리들은 문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우리들은 패배했옵니다. 마마." 나는 속삭였다.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읍니다. 힘 닿는 데까지 민족의 긍지를 갖고." -----제 1 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