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1 대지의 아들 편 동인도 문학의 진수 쁘라무디아 아난따또르 지음 정성호 역 - 차 례 - 프롤로그 제 1장 밍케 제 2장 쟝 마레의 비밀 제 3장 이상한 가족 제 4장 현지처 제 5장 증오와 갈등 제 6장 부빠티 취임식 제 7장 아아, 인간의 대지 제 8장 사랑의 열병 제 9장 우노크로모의 유곽 "인간의 대지"에 대하여 이책은 쁘라무디아 아난따 또르의 장편 4부작 중 하나인 "인간의 대지" (Pramoedya Ananta Toer, Bumi Manusia Jakarta 1980)의 완역본이다. 그 나머지 3부는 "모든 민족의 아들" "발자국" "유리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다. 이 4부작의 무대가 된 1898년에서 1918년까지의 시대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인도네시아 민족이 민족적 각성을 이루어가는 시대로서 영광과 일종의 향수를 갖고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시대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제 4부에서 하나의 주제로 반복해서 쓰이는 '새시대'라는 말이 상징하는 것처럼 새시대의 개막, 전통에서 근대에로의 과도기, 또는 인도네시아 민족이 세계사 속에서의 자기 위치를 모색해가는 시대의 시각이라 해도 좋다. 통신 및 철도망의 확대, 근대적인 인쇄술과 사진의 보급, 각종 중고등 교육기관의 정비 등은 이 새시대를 시작하는 준비이고 레모네이드나 코코아를 마시면서 토론하고 축음기로 레코드를 듣는 생활은 당시의 새로운 풍속을 보여 주고, 비덜란드인 자유주의파의 대두는 식민지 정책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새시대를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은 밍케에게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근대적 개인'의 등장이고, 그것이 마침내는 인도네시아인이 민족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새로운 민족의 여정, 민족 독립에로의 아득한 여경으로 이어져 간다. 지금까지 이러한 테마를 다룬 소설이 세계 문학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부분적이고 한정된 이야기로서 개인과 사회와 권력의 문제, 역사전체를 파악하여 그속에 있는 내용하나 하나를 섬세하개 그리고자 하는 의지로 씌어진 문학 작품은 이 소설이 처음이다. 어떤 평론가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이 만일 '지금까지 씌어진 모든 역사책을 무효로 만들' 정도의 충격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힘의 원천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 재구성에 대한 작가의 강인한 의지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독립 혁명기, 옥중에서 작가로 출발한 쁘라무디아는 약 5년 동안에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1955년 전후를 고비로 소설가로서는 세상에 내놓을만한 작품을 쓰지 않았다. 1957년에 장편 "부카시 강의 하반에서"와 단편집 "자카르타 이야기"를 발표했으나, 그것은 모두 초기에 쓰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 시기에 그의 관심은 창작보다는 문학인의 사회 참여 쪽에 쏠려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전반에 걸쳐 쁘라무디아는 인도네시아 역사를 연구했다. 역사의 연구는 이윽고 인도네시아 소수 민족으로서의 중국인의 역사를 공감하고 쓴 "인도네시아의 화교"(1960년), 인도네시아 민족 의식의 어머니인, 카르티니 전기 "나를 카르티니라고만 부르세요"(1962년) 등으로 결실을 맺고 19세기 말에 씌어진 소위 "냐이 소설" 등의 근대 인도네시아 문학의 전사(前史)를 이루는 작품군의 발굴과 기록에 이어져 있다. "인간의 대지"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냐이 온트솔로는 물론 쁘라무디아 자신이 창작한 인물인데, 본디는 '냐이 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다. 이 4부작 소설은 오래 전부터 구상(쁘라무디아에 의하면 1961년부터 준비)된 것인데, 블루 섬에서 강제 노동을 하는 동안 틈틈이 밤마다 같은 방의 죄수들에게 얘기해 들려 주는 형태로 완성시켜 나간 것이다. 그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다른 수용 동의 죄수들 사이로 전해지고 얼마 뒤 그는 타자기를 얻어 원고를 완성했다(1975년). 블루 섬에서의 유형 중 그는 소설, 전기, 희곡 등 7편의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석방 후인 1930년 8월에 출판된 "인간의 대지"는 초판 1만 부가 12일 만에 매진되고, 몇달 동안에 4만 부가 팔려나갔다. 그것은 인도네시아 출판계에 있어서는 공전의 사건이었고, 거의 20년의 공백기를 두고 쁘라무디아가 발표한 이 소설은, "소설의 새로운 기법의 도입에만 만족하고 사회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려 개인의 딜레머 문제에 부심해 온 현대 인도네시아 문학의 정체 상황에 강렬한 일격을 가하는 것"(인도네시아 죄고의 일간지 "콘파스"의 서평)으로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9월 30일 사건'의 B급 정치범의 소설은 권력자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던 것 같다. 1981년 5월 29일, 검사총장은 "인간의 대지", "모든 민족의 아들"을 금서로 정하고, 이 소설에 이어지는 "발자국", "유리의 집"의 출판을 중지시켰다. 제 1부의 발행으로부터 10개월쯤 지나서 발행 금지 처분을 받은 것은 그동안 정부 내부에서 이 소설의 평가를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사실 쁘라무디아와 같이 독립 혁명을 위해 싸운 세대인 부통령 아담 말리크는 그들의 부모나 선조들이 어떻게 식민지주의에 용감히 대항해 싸웠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대지"를 읽도록 모든 젊은 세대에게 권장해야 한다고 추천사를 쓰고 있다. 발행 금지 처분의 표면적 이유야 어떻든 식민지 국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거의 혼자 몸으로 항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냐이 온트솔로의 모습에서 권력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무엇인가를 정부 당국이 감지했다고 한다면, 그들이 이 소설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도 이유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 밖에 쁘라무디아는 석방후 "낡은시대"(1982년), 인도네시아 제1세대의 민족주의자, 언론인인 티루토아디스료의 소설에 평전을 붙인 "선각자"(1985년)를 발표했다. 티루토아디스료는 이 4부작의 주인공인 밍케의 모빌이 된 인물이다. 그는 중동부 자바의 부로라 시 부빠티의 아들이고, 어쩌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B시란 '부로라 시'일는지도 모른다. 부로라는 쁘라무디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끝으로 이 졸고를 쾌히 빛보게 해 주신 도서출판 '오늘'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1986년 9월 등촌동에서 정 성호 프롤로그 사람들은 나를 밍케라고 불렀다. 당분간은 나의 진짜 이름은......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본명을 숨겨 두는 이유는 특별히 내가 미스테리광이기 때문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내가 누구인지 사람들 앞에 밝히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본디 이 노트는 내가 슬픔의 상복을 입고 있는 동안, 즉 일시적이든 영원히든 그녀가 내 곁을 떠난 뒤에 쓴 것이다. 일시적이든 영원히든이라고 말했지만,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 당시의 나로서는 알길이 없었다. 미래라는 녀석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힌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대니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미래에 도달한다.......좋든 싫든 상관없이 모든 육체와 정신을 갖고서 말이다. 13년 뒤에 나는 이 짧은 노트를 다시 읽으며 재검토하여 꿈과 사상을 덧붙였다. 그 결과 당연한 일이겠지만 원래의 노트와는 아주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다음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지은이/쁘라무디아 아난 따 또르 1925년 인도네시아 슬라바야에서 태어난 인도네시아 작가로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처음 소개된다. 교육자의 아들로 성장해 일찍부터 조국 인도네시아의 민족적 독립과 자각에 눈을 떴다. 1947년 인도네시아 "자유의 소리"사에서 편집에 종사하면서 "판차 라야" 지 등에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같은 해 식민 통치 네덜란 드군에 체포되어 오렛동안 옥중 생활을 했으며, 조국 독립 후에도 정치범으로 투옥된 적이 있다. 1950년 옥중에서 발표한 장편소설 "사냥"으로 인도네시아 최고 문학상을 탔다. 주요 작품에 "새벽"(1950), "부패"(1961) 등이 있으며 1980년도 이후 아시아인으로서는 드물게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된 "인간의 대지"는 동인도 문학상을 받은 그의 대표작이다. 옮긴이/정 성호 카톨릭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여흥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80년부터 영어와 일어 번역을 시작했다. 옮긴 책에 존 필미어 "신의 아그네스", 시드니 셀던 "내일이 오면", 에릭 시갈 "하버드 동창생" 등 많이 있다. 나오는 사람들 밍케 : 필명 맥스 트레나르, 이 책의 주인공. 명석한 두뇌, 강한 긍지와 자존심을 가진 젊은이로 네덜란드 지배의 동인도에서 새 시대를 상징하는 '근대적 개인'의 한사람. 안네리스와 결혼하지만 헤어지게 된다. 안네리스 메레마 : 애칭 앤.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감수성이 예민하고 아름다운 혼혈 처녀. 밍케와 사랑에 빠진다. 냐이 온트솔로 : 본명 사니켐. 강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헤르만 데 레마의 현지처. 안네리스와 로베르트의 어머니. 네덜란드의 압력에 여자의 틈으로 꿋꿋이 항거한다. 쟝 마레 : 프랑스 화가로 외인부대에 자원했다가 원주민 처녀와 사랑에 빠져 딸을 하나 두었다. 밍케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다. 마푸다 뻬테루스 : 밍케의 학교선생님. 네덜란드인으로 자유주의자며 밍케의 정신적 지주. 과격파로 몰려 동인도에서 추방당한다. 헤르만 메레마 : 네덜란드인 . 냐이 온트솔로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본국에 두고 온 아들의 출현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폐인이 된다. 결국 살해당한다. 로베르트 메레마 : 안네리스의 오빠, 냉혹하면서도 의지가 약한 젊은이. 자신의 핏줄을 부정하다가 나중에 폐인으로 떠돈다. 미리암과 사라 자매 : 네덜란드 관리의 딸. 밍케가 민족적 각성을 하여 인도네시아인의 지도자로 나서 주기를 바라는 아가씨들. 편지로 밍케와 많은 교류를 갖는다. 로베르트 슬르호프 : 밍케의 동급생으로 매우 이기적인 젊은이. 안네리스를 사랑하지만 이루자 못하고 실연의 상처를 안은 채 인도네시아를 떠나간다. 다르삼 : 마두라인 칼잡이. 온트솔로의 수족과 같은 사람이다. 마우리츠 메레마 : 헤르만 메레마와 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버지를 찾아와 메레마 일가를 곤경에 빠뜨린다. 마르텐 네이만 : 슬라바야 일보의 편집국장. 인도주의자 같지만 한편으로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듯한 불투명한 사고의 소유자. 밍케를 도와 주는 입장에 선다. 얀 다페르스테 : 밍케의 동급생. 본디는 원주민이지만 혼혈아 행세를 하는 소심한 젊은이. 자신의 태생을 찾으려고 네덜란드인 양부모 곁을 떠나면서 이름도 찬지 다르만으로 바꾼다. 마이꼬 : 일본 나고야 출신의 창녀. 결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팔려다니다가 바바 아촌의 유곽에 정착. 타고 난 요부로 메레마 부자를 상대하게 되고 그 때문에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바바 아촌 : 중국인이며 우노크로모의 유곽 주인. 돈을 위해서는 인륜도 무시하는 비정함이 있으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솔직함을 보이기도한다. 제 1 장 밍 케 언젠가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러분의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온 학문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것은 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여러분과 같은 학년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내 가슴이 부풀어올랐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그때까지 유럽에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가 과연 사실인지 어떤지는 몰랐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은밀히 퍼지고 있었다. 즉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가들조차도 그녀와 가까와질 기회는 없다. 썩씩하고 잘 생긴 귀족들이 그녀의 마음을 끌기 위해 -고작 마음을 끌기 위해서!- 법석을 떨고 있다고. 할일없이 무료함에 빠질 때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할까 여러가지 공상을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신분이 높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있는 슬라바야에서 1만 해리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두개의 대양을 넘고, 다섯 개의 해협과 한 개의 운하를 지나서 배로도 일 개월은 걸릴 게다. 그렇게 해서 간다 하더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보증은 아무 데도 없다. 나는 그녀에 대한 이런 생각을 아무에게도 밟힐 용기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거나 미친 녀석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리라. 이것도 비밀이지만, 우체국에서는 때때로 머나던 바다 저편에 있는 그 고귀한 아가씨에게 보내는 구혼 편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쪽에 전해지는 편지는 한 통도 없다. 만일 내가 망상에 빠져 그런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뻔할 것이다. 우체국직원이 내 몸을 생각해서 그 편지를 압류할 것이다. 이 신비스낀 여인은 나와 같은 나이인 열여덟 살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해 머리 숫자가 작대기, 가운데 두 개가 점차로 끝쪽이 퍼지고, 마지막 숫자가 둥근 모양을 한 1880년에 태어났다. 생년월일도 똑같이 8월 31일. 다른 게 있다면 태어난 시간과 성별 뿐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태어난 시간을 기록해 두지 않았고 나 또한 그녀가 태어난 시간까지는 알지 못했다. 성별은? 나는 남자고 저쪽은 여자다. 그 불확실한 시간을 떠올릴 때면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아뭏든 다의 성이 밤의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그녀의 나라는 햇빛이 비추고 있으여, 그녀의 나라가 밤의 어둠 속에 있을 때 나의 섬은 적도의 대양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이 점성술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금지시켰다. 그녀는 말했다. "옛날에 토머스 아퀴나스는 생년월일이 똑같고 태어난 시간도 똑같고 게다가 태어난 장소까지 똑같은 두 사람과 만났다." 마푸다 선생님은 이렇게 애기하며 우리들에게 집게 손가락을 들이내면서 따질 듯이 얘기를 했다. "점성술 같은 것은 헛소리다. 그 증거로 이 두 사람의 운명은 똑같기는 커녕 18O도 달라서, 한 사람은 대지주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노예가 되었다. " 물론 나는 점성술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점성술이 과거에 인간의 학문과 지식의 발전에 있어 지침이 되었다는 전례는 없다. 점은 맞으면 아아 그런가 보다 하고 감탄할 뿐 그 다음은 돼지 밥그릇에 던져 버리는 것이 고각이다. 점성술은 내가 마음을 주고 있는 그 아가씨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맞히지 못한다. 더구나 다가올 일은 거의 맞히지 못한다. 어쩌다 한번은 심심풀이로 나의 연애운을 점쳐본 적이 있다. 점장이는 호로스코프(천궁도)를 몇 번이고 뒤적이더니 금니 두개를 드러내면서 신탁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참고 견디면 반드시....'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내 자신의 이성을 더 믿기로 했다. 비록 전인류의 인내력을 총동원한다 할지라도 그녀와는 만나는 것조차도 내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나는 과학과 이성을 더 믿고 있다. 적어도 거기에는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을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로베르트 슬르호프-여기서는 그의 본명은 사용하지 않겠다-가 나의 하숙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바로 그 아가씨, 가진 속의 고상한 여인에게 홀린 듯이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쑥스러웠다. 그는 대들듯이 무례한 말을 지껄였다. "헤이, 돈 환. 호색가. 색마 ! 오늘은 또 무슨 백일몽을 꾸고 있는 거지 ?" 물론 나는 그를 쫓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흥, 내가 알 바 아니잖아." "점성술은 뭐든지 다 알고 있어. 나자신에 관한 것 외에는......" 언제나처럼 그는 히죽이 이를 보이며 말했다. 여기서 로베르트 슬르호프를 소개하기로 하자. 그는 슬라바야의 하베에스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HBS-네덜란드 고등 시민학교로, 인도네시아인 중에서 이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학생으로 나와 동급생이다. 나보다 키가 크고, 그의 몸에는 몇 방울인지는 몰라도 쁘리부미(Pribumi-동인도의 토착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만 둬, 집어 치우라고. 그런 여자는 잊어 주라구 ! 이 슬라바야에도 여신은 있잖아. 굉장한 미녀라구. 그 사진의 주인공보다 결코 뒤지지 않을 거야. 어쨌든 그건 사진일 뿐이잖니." "뭘 가지고 미녀라고 하는 거지?" "뭘 가지고? 네가 정의하지 않았어 ? 골격의 위치와 형태가 올바르게 잡혀 있고 그 위에 살이 역시 올바르게 붙어 있어야지." "그래, 맞았어." 나는 겸연쩍음을 잊고 덧붙여 물었다. "그 밖에는 ?" "그 밖에 ? 섬세하고 보드라운 피부, 빛나는 눈동자, 게다가 조잘대는 입술." "조잘대는 입술이라고? 난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는데. 네 멋대로 덧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입술은 비명을 질러가며 너를 꾸짖기라도 해야 된다는 거니 ? 똑같이 꾸짖더라도 속삭이듯이 조잘되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그를 입다물게 하고 싶었다. "요컨대 네가 진짜 사나이, 진짜 돈 환이라면 나하고 함께 그 미녀에게 찾아가 보지 않을래 ? 네가 그녀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네가 입으로 지껄이는 것만큼 남자다운지 어떤지를 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단 말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전쟁터에 나가기도 전에 지레 겁먹는군 그래."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지각은 남을 무시하고 바보 취급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데만 발달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 나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약점이란 내 몸 속에는 유럽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그는 나에 대한 음모를 꾸미려 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 함께 가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와의 대화는 몇 주일 전, 막 신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바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다. 아마 동인도 전체가 그럴 것이다. 가는 곳마다 3색기가 즐거운 듯이 펄럭이고 있다. 저 유일무이한 아가씨, 미의 여신, 신비스러운 여인이 즉위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나의 여왕이며 나는 그녀의 신하가 되었다. 마치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토머스 아퀴나스의 이야기처럼 되었던 것이다. 그녀란 바로 빌헬미나 여왕 폐하(역자주 : 네덜란드 여왕으로 1880-- 1962년, 재위 기간은 1898--1948년)이다. 운명은 그녀를 여왕으로 즉위시켰고 나는 그녀가 통치하는 식민지국의 백성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여왕은 내가 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나보다 1,2세기 앞이나 뒤에 태어났더라도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공허하지는 않을 것이다. 1898년 9월 7일. 르기 금요일. 이것은 동인도의 날짜이다. 저쪽 네덜란드는 1898년 9월 6일, 클리온 목요일이다. (역자주 : 르기와 클리온은 5일간을 1주기로 하는 자바 시장력) 학교 학생들은 광란하듯이 여왕의 즉위를 축하했다. 운동 경기, 연극, 유럽인들한테 배운 기술과 힘의 발표 -축구, 체조, 연식 야구. 그러나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나는 스포츠는 좋아하지 않았다. 주위는 축포 소리, 깃발 행렬, 축가 등으로 떠들썩했다. 나의 마음은 어둡고 공허하고 불만스럽고 결코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이웃에 살고 있는 외다리 프랑스인 쟝 마레를 방문했다. "아이구, 밍케 아냐? 그래 잘 있었니?"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쟝, 주문이 들어왔어. 응접세트 1조야." 나는 고객이 구하고 있는 응접 세트의 도면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것을 살펴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알았어. 얼마면 만들 수 있는지 견적을 뽑아 보자구. 조각 세공은 제파라 풍으로 하면 되겠군." "밍케 ! " 바로 그때 이웃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하숙집 테린하 부인이 손짓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난 가기 싫은데. 저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주머니가 케이크라도 먹으라는 걸거야. 이 주문 너무 늦지 않도록 신경써 줘, 쟝." 하숙집에 돌아와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케이크가 아니라 로베르트 슬르호프였다. "자, 우리 외출하자." 신형 2륜마차, 칼베르가 한 대 이미 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올라타자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부는 다이가 지긋한 자바인이었다. "이 마차삯, 상당히 비싸겠구나." 나는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이건 다른 2륜마차나 4륜마차와는 질이 다르다구. 용수철이 부착되어 있거든. 아마 슬라바야에서는 처음 보는 걸 거야. 용수철값만 해도 보통 2륜마차보다 더 비쌀 거야." "알겠어, 로브. 그런데 도대체 어디 가는 거지 ?" "그 아름다운 천사 때문에 모든 젊은이들이 초대받기를 꿈꾸는 장소에. 왜 ? 싫어 ? 밍케, 잘 들어. 나는 다행히도 그 천사의 오빠로부터 초대를 받았단 말씀이야. 나 이외에 지금까지 거기 초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구." 슬르호프는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으쓱댔다. "우연히 그녀의 오빠 이름이 나와 똑같은 로베르트여서....." "요즈음은 로베르트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많잖아." 그러나 슬르호프는 나를 무시한 채 계속 지껄였다. "우리 두 사람은 축구 시합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어. 단지 그 뿐이지만 그의 집에서는 필요하지도 않은 황소가 여러 마리 태어났거든. 그것이 내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 그는 홀끗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뭐가 원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소 ? " "응, 그 송아지 고기를 대접하겠다는 거야. 그것이 내 문제거든, 네 문제는....."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내 눈을 살폈다. "네 문제는 그 로베르트의 여동생이구, 네 남성적 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단 말이야, 이 색골아 ! " 칼뻬르 마차는 브라우랑에서 우노크로모 방향으로 난 크랑간거리의 돌길을 덜그럭거리며 달렸다. "자 노래를 불러봐. 베니, 비디, 비키 ---왔다, 보았다, 승리했다. " 슬르호프는 바퀴 소리보다 큰 소리로 내게 재촉했다. "벌써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잖아? 그러고 보니 너 남자답지 않게 자신이 없어진 거니 ? 하하하 !" "어째서 넌 그 음식과 여신을 한꺼번에 독차지하지 않는 거지 ? " "내가? 하하하. " "사실은 우리가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는 인도 혼혈아야." "난 순수한 유럽 여자밖에는 관심이 없다구 ! " 로베르트 슬르호프 ---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도 역시 혼혈아였다. 그의 어머니-그녀도 혼혈-가 슬르호프를 낳기 바로 전에, 역시 혼혈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당황하여 그녀를 탄쥰 베라크(역자주:슬라바야 항구의 선창)에 데리고 가서 마침 정박 중이던 판 햄스케르크 호에 승선하여 거기서 낳게 했다. 요컨대 그렇게 함으로써 슬르호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신민임과 동시에, 네덜란드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비록 네덜반드 배 위에서 태어났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옛날에 로마 시민권을 둘러싸고 유대인이 취한 행동도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다. 슬르호프는 친형제 중에서도 자기만은 혼혈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그 네덜란드 배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예를 들면 탄쥰 뻬라크 다리나 마두라 거룻배 위에서 태어나서 마두라의 시민권을 얻었다면, 아마 그의 태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왜 그가 혼혈아라고 불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지 이해해 왔었다. 따지고 보면 네덜란드의 식민지 신민에 불과하지만 뒤에 올 자기 후손들의 이익을 위해 그는 네덜란드 시민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말과 행동으로 보아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장래에 혼혈아와 쁘리부미를 능가하는 지위와 보수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젊은 생명은 오직 청춘의 환희만을 호흡하고 있었다. 내 노력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공부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마음은 명랑해지고 고통이나 번민 따위는 었었다. 즉위한 아가씨는?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다. 건물과 대문에 꾸며놓은 장식들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며 공공 집회도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다. 신성한 여인! 하늘의 여신 ! 그리고 슬르호프는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 앞에서 나의 용기를 시험한다는 구실로 나를 놀림감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시내를 향해 걷고 있는 시골사람들에게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누런 자갈길은 곧장 우노크로모로 뻗어 있었다. 가옥, 밭, 논, 격자 모양의 대나무울타리로 둘러쳐진 가로수, 은빚 햇볕을 쬐고 있는 나무숲..... 모든 것들이 환희와 함께 쏜살같이 지다갔다. 저멀리 바위처럼 누워, 수도자처럼 진지하게 조용히 서 있는 산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복장을 하고서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까 ?" "상관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단지 먹기 위해서고, 너는 정복하기 위해서 가는 거니까." "도대채 어디 가는 건데 ? " "포획물을 잡으러 가는 거야. "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면서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로보, 괜찮으니까 가르쳐 줘." "그런 찡그린 얼굴을 하지 마 ! 만약 네가 진짜 사나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슬르호프는 혀를 찼다. "난 너를 우리 선생님보다 더 존경할 거야. 그대신 실패하면 너는 일생 동안 웃음거리가 될 거야. 그걸 잘 기억해 두라구, 밍케." "그만 놀리란 말이야. " "아냐, 이건 놀리는 게 아냐. 너는 부빠티 (역자주 : 원주민 관료 중 최고위에 위치하는 세습 관료로 우두머리를 가리킴)가 될거야. 아마 너는 불모지를 영지로 물려받을 거야. 나는 풍요로운 땅을 물려받도록 기도드리고 있지만 말이야. 그렇게 되었을 때, 저 여신이 라엔 아유(역자주 :부빠티의 정부인, 도는 자바의 귀족 부인의 호칭)가 되어 네 곁에 있게 되면 자바의 모든 부빠티들이 너무나 부러워 열병을 앓게 될 거야." "내가 부빠티가 된다고 도대체 누가 그러든?" "내가. 그리고 나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계속할 거야. 기사가 될 작정이야. 그렇게 되면 그때 다시 만나게 될 테지. 나는 아내를 데리고 너를 찾아갈께. 그때 내가 맨 먼저 할 질문이 뭐라고 생각하니 ?" "너 지금 꿈꾸고 있는 거니 ? 나는 부빠디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들어봐, 내가 조금 전에 이렇게 물었지. 헤이, 돈 환, 호색가, 색마, 너의 하렘 (역자주 : 회교도의 처첩이 거처하는 방, 또는 하궁)은 어디냐 말이야?" "아무래도 넌 아직도 나를 야만스런 자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 ? " "색을 좋아하지 않는 자바인, 그런 부빠티가 있다면 좀 만나보고 싶군 그래. " "어쨌든 나는 부빠티가 될 생각은 없어." 슬르호프는 쌀쌀하게 웃었다. 마차는 계속 달려 슬라바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상당히 상처받고 있었다. 나는 상처받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이다. 슬르호프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에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자바인 고관이 하렘(첩)을 둘 생각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믿을 수 없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종이든 혼혈이든 유럽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두번째 부인 세번째 부인을 맞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차는 우노크로모 지구에 들어섰다. 슬르호프가 말했다. "왼쪽을 좀 봐 ! "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고 구석구석 손질이 잘 된 앞뜰을 가진 중국풍의 저택이 한 채 있었다. 정문과 창은 닫혀 있었다. 온통 빨강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서 나의 미적 감각을 흐리게 했다. 그것이 누구의 저택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교 아촌의 소유인 유곽이었다. 마차는 계속 달렸다. "왼쪽을 계속 보고 있으라구." 유곽 앞을 지나 왼쪽으로 도로 백오십 미터 사이에는 집 없는 공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넓은 정원이 붙은 목조 2층짜리 저댁이 보였다. 그 나무 울타리 바로 안쪽에는 '바이텐졸프 농장'이라고 씌어진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슬라바야와 우노크로모의 주민이라면 그것이 헤르만 메레마라는 갑부의 저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비록 티크재로 지은 목조 가옥에 지나지 않았지안, 사람들은 그 저택을 '우노크로모 궁전'이라고 불렸다. 멀리서도 회색의 관자 지붕이 또렷이 보였다. 방문과 창은 활짝 열려 있어 아촌의 유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베란다는 없고 그 대신 커다란 차양이 붙어 있어서 현관문보다도 넓은 목조 계단을 가리고 있었다. 그 즈음 사람들은 주인 메레마 씨에 관해서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데 불과했다. 어쩌다 가끔 모습을 보았다든가, 단 한번 보았다든가 할 뿐 그에 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그의 현지처, 온트솔로 쪽을 자주 화제로 삼았다. 현지처라지만 이 넓은 농장을 혼자서 꾸려나가고, 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30대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는 온트솔로라는 이름을 농장 이름인 바이덴졸프에서 자바식으로 발음하여 따온 것이었다.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그녀의 가족과 농장의 안전은 다르삼이라는 마두라인 칼잡이와 그의 부하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 목조 궁전에 숨어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저택에 이르자 나는 긴장했다. 마차는 갑자기 왼족으로 돌아 정문을 들어서더니 '바이빈졸프 농장'의 간판 옆을 지나 곧바로 건물 정면의 계단 쪽으로 향했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다르삼이라는 남자의 콧수염 --단지 콧수염만이-- 과 거대한 주먹과, 무성한 가마가 머릿속에 그려지자 나는 몸서리 쳤다. 이 폐쇄된 궁전으로부터 누군가 초대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 슬르호프는 "쉿 !"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유럽계 혼혈의 젊은이가 한 사람 유리로 된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 슬르호프를 맞이했다.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얼굴 생김새는 유럽인, 피부는 쁘리부미, 큰키에다가 우람하고 다부진 체격이 었다. "안녕, 로베르트 ! " "안녕, 로브 ! 친구를 데려왔어. 괜찮겠지? 데리고 오면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 ?" 젊은이는 쁘리부미인 나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불안해졌다. 연극의 일막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젊은이가 나를 거부한다면, 슬르호프는 웃으면서 내가 다르삼에게 쫓겨 길거리까지 기어서 달아나는 광경을 구경할 것이다. 젊은이는 아직 거부도 쫓아내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빙긋하기만 하면 나는 쫓겨나는 것이다. .....하느님,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그는 갑자기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로베르트 메레마야. " "밍케 입니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내가 성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눈치를 챘다. 아마 그는 내가 아버지에개서 법적으로 인지를 받지 못한 사생아로서, 성이 없는 것은 비천한 혼혈아로 쁘리부미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쁘리부미다. 그러나 그는 내 성을 무리하게 물어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 안으로 들어가지." 우리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곁눈질하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나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 로베르트 메레마라는 젊은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집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의 경계심은 새로운 분위기에 압도당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우리들 앞에 희고 섬세한 피부, 유럽인의 용모, 쁘리부미의 머리칼과 눈을 가진한소녀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빛나는 눈동자는 새벽 하늘의 별과 같았고, 미소짓는 입술은 신앙심까지도 포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만일 슬르호프가 이 소녀를 두고 얘기한 거라면 그의 말은 틀림없었다. 여왕 폐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한낱 사진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안네리스 메레마입니다." 그녀는 먼저 나에게, 그리고 슬르호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게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들 네 사람은 등의자에 앉았다. 로베르트 슬르호프와 로베르트 메레마는 곧 자신들이 슬라바야에서 구경한 축구 시합 화제에 열중했다. 나는 그 틈에 끼는 것이 싫었다. 나는 단 한번도 축구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넓은 응접실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구, 천정, 그곳에 달린 크리스탈 샹들리에, 동관을 통해 벽에 매달린 가스 등. (가스탱크는 어디에 설치되어 있을까?) 그리고 거대한 나무 액자에 들어 있는 퇴위 직후의 엠마 여왕의 사진....... 그것들을 둘러보면서 동시에 내 시선은 몇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안네리스의 얼굴에 머물렀다. 나는 가구류를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핏 살펴보아도 응접실의 가구가 모두 숙련공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급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의자 밑에 깔려 있는 카페트에는 내가 그때까지 구경해 본 일도 없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특별 주문으로 만든 것이리라. 마루는 광택제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 거죠?" 안네리스가 감미롭고 친근한 네덜란드어로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눈을 똑바로 바라다볼 용기가 없었다. 성도 없고, 더구나 쁘리부미인 나를 그녀는 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대답 대신에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가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 모두 훌륭한 것들 뿐이군요."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물론이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또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치스러운 응접실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친란한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여 그 화려함 앞에서 오히려 호화로운 가구들이 빛을 잃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째서 자신의 성을 숨기고 있지요?"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불안해졌다. "꼭 말을 해야 합니까?" 나는 슬르호프를 곁눈질했다. 그는 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베르트 메레마와 축구 얘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가 시선을 거두려고 하자 그는 갑자기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안네리스가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인지받지 못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거예요." "나는 성이 없어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나는 각오를 하고 말했다. "어머 !" 그녀는 낮게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없어도 상관 없어요." "나는 혼혈아가 아닙니다." 나는 변명하는 말투로 덧붙였다. 그녀는 또 다시 소리질렀다. "정말이세요? 정말 혼혈이 아니예요?" 가슴 속에서 큰 북이 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쁘리부미라는 것을 그녀는 알아버렸다. 이제는 언제 쫓겨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나는 옷에 가려져 있지 않은 내 몸의 여기 저기를 값을 매기듯이 살피고 있는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을 눈앞에 둔 먹이를 평가하는 독수리와도 같았다. 눈을 들어 보니까 로베르트 메레마가 안네리스를 쏘아보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면서 나에게 눈을 돌렸다. 아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슬르호프의 웃음을 물보라처럼 맞으며 이 호화로운 저택에서 개처럼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이렇게 심한 불안에 떨었던 적은 여태까지 한번도 없었다. 스르호프의 예리한 시선이 내 목덜미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로베르트 메레마의 눈은 나를 향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 안네리스는 슬르호프를, 뒤이어 오빠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내 눈앞이 흐려지면서 얼굴과 손발이 사라진 안네리스의 흰 드레스가 보였다. 그 드레스에는 소매가 없었고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을 뿜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점점 더 확실해져 왔다. 처음부터 슬르호프는 나를 욕보일 속셈으로 남의 집에 데리고 온 것이다. 이제 나는 쫓겨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곧 다르삼이 불려와서 나를 문 밖으로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뜻밖에 안네리스의 높은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나의 두근거리는 심장은 이미 고동을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전천히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네리스의 이는 내가 그때까지 본 어떤 진주보다도 희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봐, 돈 환. 지금 이 지경을 당하고서도 너는 미녀를 감상하고 찬미할 여유가 있나 ? "어째서 얼굴이 그렇게 창백하지요? 쁘리부미면 어때요?" 안네리스는 여건히 웃으면서 말했다. 로베르트 데레마의 시선이 이번에는 누이동생에게 향해겼고, 안네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반발하듯이 오빠를 노려보았다. 오빠는 힘없이 시선을 돌렸다. 도대채 이건 무슨 연극이란 말인가? 슬르호프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로베르트 메레마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젊은이는 내 사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다만 내게 성이 없고 쁘리부미라는 이유만으로? 농담은 그만두라 ! 어째서 내가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친만에 말씀이야. 사과를 하다니 ? 안네리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쁘리부미라도 상관 없어요. 우리 어머니도 쁘리부미인걸요. 토박이 자바인이라구요. 당신은 내 손님이에요, 밍케. " 그녀의 목소리는 사뭇 명령조었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당신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나도 그래요.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서 에기해요. " 안네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잡아 달라는 듯이 어리광스러운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의 오빠와 슬르호프에게 약간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우리들을 뒤쫓았다. 안네리스는 그들을 돌아보고는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를 보냈다. 우리들은 넓은 응접실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다리가 마치 허공을 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젊은이의 시선이 등에 깊숙이 꽃히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은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응접실보다 한층 더 호화스러웠다. 그곳도 벽이 모두 엷은 갈색 니스를 칠한 티크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한 개의 식탁과 여섯 개의 의자가 세트로 놓여 있었고, 그 가까이에는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다른 세 모퉁이에는 각각 조그만 탁자가 불침번처럼 서 있고, 그 위의 유럽제 도자기 꽃병 속에는 방에 어울리도록 꽃은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었다. 나의 시선을 살피면서 안네리스가 말했다. "내가 꽂은 거예요. " "꽃꽂이 선생님은 누구지요?" "마마, 우리 엄마예요." "정말 멋지군요." 내 눈이 장식장에 못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는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 장식장은 식탁과 반대족 벽을 등지고 서 있었으며 그 쪽에는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미술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금은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이거예요." 그녀는 조그만 청동상을 가리켰다. "엄마 말씀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왕비래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내 기억이 옳다면 네패르티티라는 이름의 미인일 거예요" 그 청동상의 이름이 무엇이든 쁘리부미, 그것도 현지처인 보잘것 없는 여인이 고대 이집트 왕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단했다. 장 속에는 가루라(역자주:신화속의 새)의 등에 앉은 아일랑가(역자주:11세기 자바의 크디리 왕국의 왕)의 목각상도 있었다. 다른 조각과는 달리 그것은 내가 모르는 종류의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장의 첫번째 선반에는 여러 가지 동물의 열굴을 흉내내어 만든 작은 도자기 가면이 늘어놓여 있었다. "이것은 설인귀(薛仁貴-중국의 민화 속에 나오는 무장)의 이야기에서 본떠 손 가면이에요. 그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모릅니다." "나중에 내가 얘기해 드릴께요. 듣고 싶지요?" 안네리스의 목소리에는 방안의 범접할 수 없는 호화스러운 분위기와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거리를 없애 주는 친근하고도 은밀한 울림이 있었다. "무척 듣고 싶군요." "그렇다면 반드시 우리 집에 또 오셔야 해요." "영광입니다." 작은 테이블 다리에는 언젠가 부빠티의 관저에서 본 것과 같은 커다란 자개는 박혀 있지 않았다. 네개의 다리에 각기 조그만 바퀴를 단 낮은 받침대 위에는 죽음기가 놓여 있었다. 축음기의 밑 부분은 레코드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받침대 자체는 지나치게 조각이 되어 있고, 주문해서 만든 것 같았다. 어느 것이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한 안네리스의 메력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 그렇개 잠자코 있는 거죠?" 그녀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학생인가요?" "로베르트 슬르호프와 동급생입니다." "오빠는 그 사람과 같은 고등학교 학생을 친구로 갖고 있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나도 이제 고등학교 학생과 친구가 되었어요, 안그래요?" 그녀는 갑자기 안쪽에 있는 문을 돌아보며 큰 소리를 질렀다. "마마 ! 이리로 오세요 ! 마마, 손님이에요." 조금 뒤 진통적인 의상을 입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은실로 자수를 놓은 검은 빌로도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 청초한 생김새, 상냥한 미소, 그리고 아주 수수한 화장에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젊고 사랑스러워 보였으며 매끈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교과서식의 악센트로 발음하는 그녀의 훌륭한 네덜란드어였다. "안네리스, 네 손님이라니 어면 분이냐?" "이쪽이에요, 마마. 밍케라고 해요. 자바의 쁘리부미예요, 마마. " 부인은 유연한 모습으로 내게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바로 바이민졸프 농장을 여자 손 하나로 운영해 나가는, 우노크로모와 슬라바야 주민에게 떠들썩하게 소문이 나 있는 현지처, 냐이 온트솔로인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학생입니다, 마마." "그래요? 정말이세요?" 나는 망설였다. 유럽인 여성에게 대할 때처럼 손을 내밀어야 할까, 아니면 쁘리부미 여인으로서 그녀를 대해야 할까? 차라리 인사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둘까? 그런데 뜻밖에도 손을 내민 것은 그녀 쪽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쁘리부미의 습관은 아니었다. 유럽인의 태도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면 당연히 내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만 했다. "안네리스의 손님은 동시에 나의 손님인 셈이죠." 그녀는 유창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어떻게 불러야 할까? 투앙? 아니면 시뇨? 하지만 당신은 혼혈은 아닌 것 같고....." "혼혈은 아닙니다....."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 냐이, 아니면 마담? "정말 고등학교 학생인가요?" 다정한 미소를 띠고 냐이 온트슬로 부인이 또 다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모두들 나를 냐이 은트솔로라고 부른답니다. 바이덴졸프라고 발음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시뇨는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 같군요.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당신도 사양하지 말고 그렇게 부르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실례를 용서해 준 것 같았다.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틀림없이 부빠티의 아드님이겠군요. 어느 곳의 부빠티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냐, 냐......" "내 이름 부르는 것을 몹시 망설이고 있군요. 그렇다면, 만일 당신만 좋다면 안네리스와 마찬가지로 마마라고 불러요." "그래요, 밍케." 안네리스가 옆에서 거들었다. "마마 말대로 하세요. 마마라고 부르는 게 좋아요." "어느 곳의 부빠티 아들도 아닙니다, 마마." 그 새로운 호칭을 써 보았더니 나의 어색스러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 그 위에 그녀에게 갖고 있던 약간의 이질적인 느낌까지 한꺼번에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빠티 <역자주 : 부빠티의 보좌관>의 아드님이겠군요?" 냐이 온트솔로는 계속했다. 그녀는 내 바로 앞에 선 채로였다. "자, 앉아요. 어째서 계속 서 있는 거죠?" "저는 빠티의 아들도 아닙니다, 마마." "알았어요. 어쨌든 안네리스의 친구가 찾아와 주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요. 자, 엔, 네 손님을 정중히 모셔야 한다." "물론이지요, 마마." 축복을 받은 것처럼 안네리스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냐이 온트솔로는 안쪽 문으로 방을 나갔다. 나는 마술에 걸린 것처럼 아직도 멀거니 서 있었다. 그것은 단지 쁘리부미의 여인이 그토록 훌륭한 네덜란드어를 구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그녀가 남자손님에 대해서 조금도 어려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어디에 가서 그녀와 같은 여성을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어느 학교를 다녔을까? 그리고 그런 여성이 어째서 현지처, 첩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유럽 여성들처럼 그녀를 그토록 자유로운 여성으로 교육을 시킨 것은 누구일까? 나는 목조로 지은 금단의 궁전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손님이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어머니가 싫은 얼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네리스는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모두들 이곳에 오는 것을 무서워했어요. 학교 때 친구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학교에 다녔지요? " "유럽인 국민학교요. 하지만 졸업은 못했어요. 4학년이 되기전에 그만두었으니까요." "어째서 그만두었나요?" 안네리스는 손가락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불행한 일이 있었어요....." 그렇게만 말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갑자기 물었다. "당신은 이슬람교도죠?" "어떻게 그걸 알았죠?" "당신에게 돼지고기를 대접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요." "고맙군요. 그래요, 이슬람교도입니다." 하녀가 코코아와 케이크를 가져왔다. 그 하녀는 쁘리부미의 주인에게 대할 때처럼 무릎을 꿇고 내 앞으로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놀랐다는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쁘리부미의 주인 앞에서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머리를 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삶, 얼마나 멋진 것일까? "손님은 이슬람이셔." 안네리스가 하녀에게 자바어로 말했다. "절대로 돼지고기를 요리에 섞지 않도록 부엌에 전해 줘." 그리고 그녀는 재빨리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말이 없죠?" "아니, 이 집 때문에 얼이 빠져서 그레요. 모든 것이 너무 놀랍고 훌륭해서." "정말로 우리 집이 마음에 드세요?" "물론이죠." "조금 전에는 얼굴이 창백하던데 왜 그랬어요?" 안네리스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나도 모르게 대담해졌다. "왜 그랬느냐고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는 거꾸로 되물었다.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신을 배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녀는 입을 다물고 샛별과 같은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을 곧 후회했다. 머뭇거리면서 그녀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 여신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요?" "물론 당신입니다." 나도 머뭇거리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네리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의 표정이 달라지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가요? 내가 아름답단 말인가요?" 나는 더욱 대담해져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굉장한 미인입니다." "마마 ! "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치며 안쪽 문을 돌아다 보았다. 아뿔사 ! 나는 큰 낭패감을 느꼈다. 그녀는 문쪽으로 걸어갔다. 냐이에게 말할 생각인 모양이다.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처구니 없이 미숙한 아가씨다. 그녀는 이렇게 고자질할 것이다--밍케가 무례한 말을 했다고. 정말 이 집은 저주받은 곳이야 ! 아니, 아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저주도 아니고 재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자업자득이다. 냐이 온트솔로가 문을 열고 나타나자 안네리스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나에게 결어왔다. 내 가슴은 또 다시 심하게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잘못한 거다. 이 파렴치한 놈을 얼마든지 벌해도 좋다. 하지만 슬르호프 앞에서만은 모욕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또 왜그러지,앤? 이 젊은이와 말다툼이라도 시작한거니 ?" "아녜요. 말다툼 따위는 하지 않았어요." 안네리스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고 아까처럼 응석이 섞인 말투로 호소했다. "마마, 들어 보세요. 마마, 밍케가 나를 보고 미인이라고 했어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 냐이 온트솔로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에 안네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두 손을 딸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미인이라고 마마가 항상 말하지 않았니 ? 뛰어난 미인이라고 말이다. 앤, 의심할 필요도 없이 너는 미인이야. 저 젊은이가 말하는 것은 틀린 얘기가 아니란다." "어머. 마마까지도 ! " 안네리스는 어머니를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그렇게 소리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의 불안은 사라졌다. 냐이 온트솔로는 내 옆의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이런 일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방문해 준 것을 나는 기뻐하고 있어요. 밍케라고 했지요? 이 아이는 다른 혼혈아들과 같이 평범한 교제를 해본 적이 없답니다. 그래서 다른 혼혈아처럼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혼혈아가 아니라구요." 맏이 반박했다. "혼혈아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마마처럼 되고 싶어요." 나는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가족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일까? "밍케, 당신도 들었지요? 이 아이는 쁘리부미 쪽이 좋다는 거예요.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거죠? 아마 내가 당신에게 호칭을 붙여 부르지 않아 기분이 나쁜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마." 나는 황급히 부정했다. "당황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이럴 때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대하는 냐이 온트솔로의 태도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을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마치 나를 낳아준 부모이고, 나의 어머니보다 나이는 젊지만 그 이상으로 가까운 여성이라는 느낌조차 주고 있었다. 안네리스에 대한 나의 무례한 언사 때문에 냐이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화를 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우리 어머니와 꼭 같았다. 어머니도 여태까지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마음 속에서 경고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만둬라, 밍케. 이 여자를 어머니와 동등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한 현지처, 즉 첩에 지나지 않는 존재야. 사생아를 낳고 사치와 허영심 때문에 긍지와 명예를 팔아 먹은 하등 인간이란 말이야....... 그러나 냐이 온트솔로는 결코 무식한 여자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네덜란드어는 유창하고, 세련된 태도를 갖고 있으며, 자기자식에게 대하는 태도도 자상하고, 현명하고 일반적인 쁘리부미의 어머니들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그녀의 말투는 교양 있는 유럽여성을 연상시켰다. 그녀는 진보적인 새로운 물결에 동참하는 선구자를 방불케 했다. "새 시대"라는 말에 혹응하는 나의 몇몇 선생님들은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상을 종종 보여 주었는데, 과연 그들은 냐이 온트솔로를 그들 편으로 넣어 줄까? "문제는, 앤" 하고 냐이가 계속했다, "네가 친구들과 사귀지 않고 항상 마마에게 붙어 있으려고만 하는 데 있는 거다. 너는 이미 어른이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어린애같이 행동을 한다니까." 그리고 나서 냐이가 갑자기 내개 말했다. "밍케,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여자 아이들을 칭찬하나요 ?" 참으로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재빨리, 그리고 신중하게 맞받아 답했다. "그녀가 정말로 미인이라면 칭찬해도 팬찮지 않을까요?" "상대가 유럽인이나 쁘리부미라도 상관없이 말인가요?" "어떻게 쁘리부미의 여자아이를 칭찬할 수가 있겠읍니까? 옆에 접근하기조차 힘드는데요, 마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유럽인 여학생들입니다." "밍케, 정말 그렇게 할 수가 있나요?" "우리들은 자신의 감정올 솔직하게 표형하라고 배우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아름다운 유럽 여자 아이들을 맞대놓고 칭찬할 용기가 있다는 말이군요." "네, 있읍니다, 마마. 우리들의 선생님께서는 유럽식 예법을 가르치고 있읍니다." "당신이 칭찬을 하면 상대방 여학생은 어면 반응을 보이나요? 욕을 하나요?" "그런 경우는 없읍니다, 마마. 칭찬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칭찬을 받고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다는 증거라고 했어요." "그럼, 유럽 여학생들의 반응은 어때요?" "이렇게 말합니다, 마마. '고맙습니다' 하고."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말인가요?" 그녀는 아마 유럽의 소설을 읽고 있는 모양이다. 현지처 가운데 이런 여자도 있는가? "그렇습니다, 마마. 소설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앤, 너도 인사를 해야지. '고마와요' 하고." 쁘리부미의 여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안네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면서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상대방이 혼혈아인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요?" "만일 유럽식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반응은 똑같습니다, 마마."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 " "교육을 받지 못하고, 개다가 기분까지 나쁠 경우에는 욕을 먹을 때도 가끔 있읍니다." "당신은 자주 욕을 먹는 편인가요?" 그때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냐이 온트솔로는 웃음을 띠고 딸 쪽을 돌아다보았다. "앤, 너도 들었겠지 ? 자,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지....잠깐 기 다려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인사를 하기는 어색하겠지. 밍케, 이 아이에게 그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해 줘요. 나도 함께 듣고 싶으니까요."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얻굴을 새빨갛게 물들기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이 상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완전히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놀림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들려주지 않겠어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녀는 말했다. "알겠어요. 자리를 피해 주지요." 냐이 온트솔로가 다시 방을 나갔다. 나와 안네리스는 그녀가 문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어린애들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안네리스는 입술을 깨물면서 얼굴을 돌렸다. 이들은 도대채 어떻게 된 가족들가? 찌르는 것 같은 불길한 눈을 가진 로베르트 메레마, 어린애처럼 천진한 안네리스, 나의 판단력을 빼앗아 그녀가 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마음씨로 움직이는 기술을 가진 냐이 온트솔로. 그리고 이 막대한 부의 소유자 해르만 메래마씨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아버지는 어디 계신가요? " 그때까지의 대화를 마무리짓듯이 내가 물었다. 안네리스의 얼굴에서 명랑한 표정이 사라지며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과는 관계 없는 일이에요. 어제서 그런 것을 알고 싶어하시죠? 나조차도 알고 싶지 않은 걸 말이에요. 마마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요." "어째서요? " "당신은 음악이 듣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 식의 대화가 끝도 없이 계속되는 동안 어느 사이에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로베르트 메레마, 로베르트 슬르호프, 안네리스, 그리고 나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젊은 하녀 한 사람이 문 옆애 서서 분부롤 기다리고 있었다. 슬르호프는 그의 친구 옆에 앉아서 때때로 나와 안네리스를 흘끔흘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마마는 위쪽의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먹어도 못다 먹을 정도의 진수성찬이었다. 주요리는 송아지 고기였는데,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먹어 보는 것이었다. 안네리스는 내 곁에 앉아서, 마치 내가 유럽의 신사나 중요한 손님이라도 되는 듯이 정성껏 접대를 해 주었다. 냐이 온트솔로는 영국의 기숙학교를 졸업한 유서 깊은 가문의 유럽 여성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식사를 했다. 나는 스푼과 포크의 위치, 수프용의 스푼과 육류용의 나이프, 포크의 사용법, 그리고 식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느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양은으로 된 나이프도 강철의 회전 연마반(회전 숫돌을 회전하여 공작물의 면을 깎는 기계)으로 손질한 것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손가락을 씻는 그릇과 냅킨의 위치에서 은그릇에 든 유리컵의 위치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슬르호프는 지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게걸스렵게 먹어댔다, 냐이 온트솔로의 존재 같은 것은 그의 관심밖인 것 같았다. 이집에 들어와서 나는 지금까지 냐이가 아들인 로베르트에게 말을 하는 것을 단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밍케, 얼음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냐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정말로 차가운 얼음, 유럽의 눈오는 계절에 어는 딱딱한 얼음을 말이에요." "정말입니다, 마마. 적어도 신문에는 그렇개 보도되었읍니다." 슬르호프가 음식을 씹으면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신문보도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이 만들 수 없는 것은 이제 점점 없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마." 나는 그렇게 대답했으나, 신문 기사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대해 내심으로는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고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냐이는 부정했다. 갑자기 대화가 끊겼다. 로베르트 메레마는 친구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의자에서 일어나 쁘리부미의 부인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내 친구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마." 냐이도 일어나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목레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하녀가 식탁을 치웠다. 안네리스가 말했다. "마마는 사무실에서 일을 계속하고 계세요. 이렇게 점심식사가 끝난 다음이면 나도 뒤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은 무슨 일을 하지요?" "나를 따라오세요." "내 친구는 어떻게 하고요?" "걱정 마세요. 오빠가 틀림없이 밖으로 데리고 나갇 테니까요. 점심 식사가 끝나면 오빠는 항상 공기총으로 새나 다람쥐를 잡으러 나가요." "어째서 점심식사 뒤에 나가는 거죠? " "새도 다람쥐도 배가 불러서 졸리기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거예요. 자, 나를 따라오세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할수 없지만요." 그는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갔다. 만일 그녀가 미인도 아니고 매력도 없었다면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안 그런가, 돈환 ! 우리들은 뒷문을 통해서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쇠줄을 두른 나무통이 하나 가득 늘어서 있고, 가장 큰 통 위에는 교반기가 얹혀 있었다. 우유냄새가 작업장 전체에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이 병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천조각으로 몸을 닦았다. 모두들 흰 삼각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팔꿈치 10센티미터 밑에서 소매를 걷어올린 흰 웃옷을 입고 있었다. 모두가 남자는 아니고, 왼 웃옷 밑에 보이는 옷으로 미루어 보아, 여자들도 몇 사람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여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결코 집안의 부엌은 아니었다. 더구나 작업복까지 입고! 마을의 여자들이 ! 그녀들은 작업복 속에 브래지어를 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을 한 사람씩 살펴보았다. 그들은 나를 힐끔 쳐다보았을 뿐이다. 안네리스가 한 사람 한 사람 옆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동작만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이 어린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미녀가 의심할 여지 없는 그들의 감독인이고, 남자건 여자건 인부들이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여자들이 작업복을 입고 남자들 속에 섞여 직장에서 돈을 버는 모습에 아직도 어리둥절해서 그냥 서 있었다. 이것도 역시 동인도에서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일까? "여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네리스는 나의 놀라움을 읽어 내려는 듯이 잠자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훌륭하죠? 모두들 흰 작업복 웃옷을 입고. 네덜란드의 관습을 약간 흉내내 보았어요. 네덜란드에서는 당국이 이러한 제복을 입히도록 법률로 정하고 있거든요." 그리고나서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고 뒷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그곳은 농산물의 건조장으로 몇 사람의 인부가 갓따온 옥수수나 콩, 녹두, 땅콩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모두가 작업을 중단하고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모두 햇빛을 가리기 위해 대나무 갓을 쓰고 있었다. 안내리스는 딱딱 손뼉을 치고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을 두 개 들어 보였다. 조금 뒤 인부의 아이인 듯 싶은 어린에 대나무 갓을 두 개 가져왔다. 안네리스는 그 중 하나를 내 머리에 씌워 주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썼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은 자갈이 깔려 있는 길을 몇 백 미터 안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성대한 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어째서 그들은 쉬지 못하는 거죠 ? "쉬고 싶으면 쉬어도 상관 없어요. 마마와 나는 쉰 적이 없지만요. 그들은 날품팔이니까요." 우리들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길 앞쪽에 각기 총을 둘러맨 두 사람의 알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을 맡고 있지요? " "사무 외에는 무엇이나 다 해요. 사무는 마마의 담당이죠." 냐이 온트솔로가 맡고 있는 사무는 과연 어떤 것일까? "마마는 경영을 맡았나 보죠? " "모두예요. 장부 정리, 거래, 편지의 교환, 은행 관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안네리스도 함께 섰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에 외양간이 있는 곳까지 갔다. 멀리서부터 이미 소똥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으나 미녀에게 안내를 받고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나는 코를 쥐고 도망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외양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조차 과감하게 해치웠다. 외양간에 들어간 것은 그야말로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정말이다. 기다란 외양간 안에서는 인부들이 젖소의 사료와 물 시중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배설물과 마른 풀 냄새로 숨이 콱 막혔다. 나는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수의사는 자주 옵니까? " "부르면 와요. 작년에는 일년 내내 거의 매일 돔스홀 선생님이 오셨어요, 유선염에는 약장수 여자가 안든 생약이 잘 듣는데, 마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을 쓰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 유선염이란 어떤 것인데요?"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새틴 드레스의 옷자락을 걷어들고 그녀는 소에게 다가가서 두 개의 뿔 가운데 이마를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속삭이듯이 말을 하고 웃기까지 했다. 나는 떨어져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값비싼 새틴 드래스를 입은 채 스스럼없이 외양간에 들어가 소들을 돌보다니. 그곳에도 역시 여자 인부들이 있었다. 다만 작업복은 입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두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문턱 가까이까지 뒷걸음질을 쳐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안네리스가 내 쪽을 돌아보고 가까이 다가오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못본 체하고 내 모습에 몹시 놀라고 있는 듯한 인부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양간 바닥을 쓴 다음 물로 씻어 내리고 자루가 긴 솔로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모두가 여자들이었다. 안네리스는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고, 나는 그 반대 쪽에서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문득 멈춰서더니 젊은 여자 인부와 얘기를 시작했다. 그 처녀는 가끔 머리를 돌려 나를 훔쳐 보았다. 아마 두 사람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젊은 처녀 한 사람이 양철로 만든 빈 물통을 두 손에 들고 내 앞을 몸을 숙인 채 지나가려고 했다. 아주 매력적인 용모를 지닌 처녀로서,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브래지어와 사롱(인도네시아 등의 회교도 남녀가 허리에 감는 천)을 입고 있었다. 맨발은 젖어서 더러웠고, 억센 발가락이 대지를 힘차게 딛고 있었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풍만한 가슴이 자연스레 내 눈길을 빼앗아 갔다. 처녀는 인사를 하고는 나를 흘끗보고의미 있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시뇨 ! " 가볍개 그리고 유혹하듯이 그녀는 인사말을 건넸다. 당당하고, 스스럼 없이,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가볍게 말을 거는 쁘리부미의 처녀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 앞에 멈춰 서서 말레이어로 물었다, "시찰 나오셨읍니까?" "그렇소." 나는 맞장구를 쳤다. "이봐요, 미네무. " 갑자기 안네리스가 내 뒤로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 젖소에서는 하루에 물동이로 몇 개 나오지요?" 그때 그녀는 자바어를 사용했다. "변함이 없읍니다, 아가씨. " 미네무라고 불린 처녀는 자바어의 복잡한 경어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 갖고 어떻게 젖짜는 반장이 될 수가 있겠어요?" "아가씨가 반장을 시켜만 주신다면 충분히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유의 수량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지 않으면 모범을 보일수가 없어. 그렇게 되면 반장 같은 것을 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반장이 없으면 여러 가지로....." "내가 당신네들의 반장이잖아?" 안네리스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우리들은 나란히 줄을 선 젖소의 머리를 따라서 걸어갔다. "당신이 그녀들을 감독하고 있나요?"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우유를 짜낼 수가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소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좋으시다면 마굿간으로 가 볼까요? 아니면 밭으로 나가 보겠어요?" 나는 그때까지 밭이라는 곳에는 나가 본 일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안네리스를 따라갔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타 보겠어요?" "말을 타요?" 나는 엉겁결에 소리를 질렸다. "당신은 말을 탈줄 아나요?"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이 어린애 같은 처녀가 문득 성숙한 여인처럼 생각되었다. 그처럼 많은 업무를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많이 우유를 짜낼 수가 있고, 게다가 말까지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이지요. 글쎄, 말을 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토록 넓은 농장을 감독하며 돌아다닐 수가 있겠어요?" 우리들은 수확이 방금 끝난 밭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에 수확물인 땅콩이 땅바닥에 높이 쌓여 있고, 잎과 줄기더미가 가축의 사료용으로 실려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땅이 너무나 좋아서 땅콩이 건조된 것으로 1헥타르당 3톤이나 수확이 되고 있어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누구나 믿지 않겠지만요. 정말 좋은 땅이에요. 비옥한 일급 토지지요. 땅콩 잎이나 줄기도 비료와 가축의 사료로 안성마춤이라고요." 1헥타르 당 수확이 몇 톤이 되든 도대체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 그런 내 마음을 그녀는 읽은 것 같았다. "밭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군요. 말을 타는 것이 좋겠어요. 어때요 ?"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강제로 끌려가듯이 나도 함께 달렸다. 뛰어가면서 차츰 거칠어가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안네리스는 창고처럼 커다란 건물로 다를 데리고들어갔다. 그곳은 차고로 2륜마차와 4륜마차 등 여러 가지 마차가 늘어서 있었고, 벽에는 많은 종류의 등자<말을 탔을 때 두 발로 디디는 제구>가 달린 안장이 걸려 있었는데, 넓기만한 건물 안의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 부빠디의 관저에 못지 않게 넓은 차고를 보고 내가 몹시 놀라는 것을 보자, 안네리스는 웃으면서 번쩍거리는 놋쇠로 장식되고 카바이드 램프를 단 한 대의 2륜마차를 가리켰다. "저렇게 멋진 마차를 본 적이 있어요?" 그것이 누구 것이든 나는 그때까지 마차의 모양 같은 것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만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마음이 그렇게 갑자기 변한 것은 아마도 말을 꺼낸 상대가 안네리스였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 마차가 너무나 근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처음인데요. " 나는 마차로 다가가면서 대답했다. 안네리스는 다시 나를 잡아 끌고 갔다. 우리들은 넓고 기다란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말이 세 마리밖에 없었다. 마굿간에 가득 찬 말 냄새가 코를 찔렸다. 안네리스는 회색 말에게 다가가더니 목을 끌어안고 뀌에다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말은 우습다는 듯이 코를 힝힝거렸다. 그리고 안네리스가 코를 두드리자 거친 이를 드러내 보였다. 안네리스는 즐겁다는 듯이 네덜란드어로 말을 걸었다. "안돼, 바우크. 오늘은 산책이 아니라구." 바우크라고 부르는 말의 목을 끌어 안으면서 그렇게 속삭인 다음 그녀는 흘끗 나를 쳐다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오셨어. 저분은 밍케씨란다, 가명이겠지, 틀림없이, 그는 이슬람교도야. 하지만 밍케라는 이름은 자바의 것도 이슬람의것도 크리스찬 것도 아니니까 가명일 거야. 바우크, 그의 이름이 밍케라고 하면 너는 믿겠니 ?" 안네리스는 바우크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바우크가 대답 대신 다시 힝힝거렸다. "그것 봐요. " 안네리스가 이번에는 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름은 가명이 틀림 없다고 바우크가 말하고 있어요."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표적은 나였다. 다른 두 마리도 함께 힝힝거리며 커다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밖으로 나갑시다." 나는 안네리스를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나머지 두 마리에게 가서 각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돌아섰다. "당신에게서 말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안네리스는 그냥 웃기만 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바우크는 어릴 때부터 항상 저런 식으로 해온 걸요. 마마는 내가 귀여워해 주지 않으면 화를 내요, '네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단다. 설사 그것이 한 마리의 말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하고 마마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 나는 두번 다시 말 냄새가 난다는 따위의 불쾌한 말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내 이름이 밍케라는 것을 당신은 어째서 믿지 않죠?" 안네리스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불신과 비난, 고발, 이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의 이름은 밍케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밍케라고 불려지게 된 것은 처음부터 전혀 내 뜻이 아니었다. 내 자신조차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다. 얘기는 약간 복잡해서 내가 네덜란드어의 ABC도 모르고, 유럽인 국민학교(ELS)에 입학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첫번깨 담임선생님이었던 벤 로제봄 선생넘은 나를 몹시 답답한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 이외에 그의 질문에 내가 전혀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더 싫었는데, 그래도 매일 하인에게 이끌려 빠지지 않고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다음 해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어느 정도 네덜란드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으나, 결국 나는 일 학년을 두 번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변함없이 로제봄 선생님은 나에게 불친절해서, 나는 얼굴만 보아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낙제를 한 나는 2학년으로 진급한 친구들을 곁눈질로 훔쳐 보면서, 교실에서 네덜란드인 여학생 두 사람 사이에 앉혀졌다. 그 두 학생은 또한 쉴새없이 남에개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귀찮기 짝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내 옆에 앉은 벨라라는 계집애가 새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는 수업 시간에 인사 대신에 나의 넓적다리를 힘껏 꼬집었다. 내가 어떻게 했느냐고? 너무나 아픈 나머지 나는 비명을 질렀다. 로제봄 선생님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녀석, 조용히 해, 몽크.....밍케 ?" 그 뒤로 나와 새롭게 만나는 모든 동급생이 유일한 쁘리부미인 나를 보고 밍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윽고 다른 선생님들도 그대로 따라 부르고, 뒤이어 전학년의 학생들이, 다음에는 학교 밖에서까지 모두들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나는 할아버지에게 그 이름의 의미를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는 알 수가 없으시다며, 로제봄 선생님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물론 나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내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어는 물론 로마 글자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고 있는 것은 자바어의 쓰고 읽기 정도였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그 별명을 내 본명으로 하라고 했다. 현명하고 훌륭한 선생님이 지어 주었으니까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본래의 이름은 거의 잊혀져 버렸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이름에는 무엇인가 불쾌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 별명을 처음 입에 담았을 때, 로제봄 선생님은 황소눈처럼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이마에는 내 천자 주름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자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거기에는 애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명하고 훌륭한 선생님이라니 ? 천만의 말씀이다. 네델란드어 사전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다. 그 뒤 나는 슬라바야의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그 뜻과 어원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박식한 네덜란드인이라고 우쭐대도 그 뜻을 알아내지 못했고 거꾸로 나에게 되물을 정도였다. 대답을 하지 못했던 선생님들 중 한 분은 도대체 이름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영국 문학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명을 하는 형편이었다(그는 뭐라고 하는 문학가의 이름을 들먹였으나, 오래 전에 나는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들은 영어 수업을 받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내 이름과 음과 철자법이 비슷한 단어와 부딪쳤다. 다시금 그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크게 부릅뜬 눈, 그리고 찡그린 눈썹, 그것은 틀림없이 무엇인가 지독한 욕을 하려고 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보니 그 이름을 말했을 때, 로제봄 선생님은 잔깐 말을 더듬지 않았던가? 나는 조심스럽게 추리를 해 보았다. 아마도 그때 그는 "몽키"라는 말로 나를 욕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십중팔구 적중했을 그 추리를 나는 결코 입 밖에 먼 일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는 평생 어릿광대 노릇을 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네리스에게도 추리의 결론 부분은 얘기하지 않았다. "밍케라는 이름도 멋있어요." 안네리스가 말했다. "마을로 가볼까요? 우리 땅 안에는 마을이 네 개 있어요. 그곳에 살고 있는 모든 새대가 우리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구요."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안네리스를 '논', 또는 '노니'(아가씨)라고 불렀다. "당신의 농장은 몇 헥타르나 되지요?"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그렇게 물었다. "180헥타르예요." 180헥타르! 그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넓이인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논과 밭의 넓이에요. 숲이나 잡목림은 빼구요." 숲! 그녀는 숲을 갖고 있다. 미친 짓이야. 숲을 갖고있다니 ! 무엇 때문에? "장작을 얻기 위해서죠." "혹시 늪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그것도 있어요. 조그만 늪이 두 군데나 있어요." 그녀는 늪까지 갖고 있었다, "산은 어때요? 산은?" "이제 그만 놀리세요." 안네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꼬집었다. "분화했을 때 그곳에서 불을 얻기 위해서 산을 갖고 있는가보지, 아마 ? " "몰라요. " 안네리스가 또 한번 꼬집었다. "저기 보이는 것은 뭐지요?" "갈대예요. 이 갈내를 본 적이 없나요?" 갑자기 그녀는 어깨를 곳곳이 세웠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곳을 무서워하는 것 같군요. "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느껴졌다. 갑자기 안네리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한순간이라도 빨리 그 갈대숲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입술이 창백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며 신경질적으로 속삭였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자, 좀 더 빨리 걸으세요." 우리들이 한 마을로 들어갔다가 벗어나자 어느 새 또 다른 마을로 들어와 있었다.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곳에서다 아이들이 벌거벗고 놀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코를 질질 흘리고 있었고 그것을 쉴새없이 핥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그늘에서는 해산달이 가까운 커다란 배를 가진 여인들이 젖먹이를 허리에 안고 바느질을 하고 있거나, 두세 명이 모여 앉아 머리의 이를 잡고 있었다. 몇몇 여인이 안네리스를 불러 세우고 말을 하고는 배려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 유별난 아가씨는 마치 어머니처럼 상냥하게 그들을 대했다. 그녀 가족에게 생활 양식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한 마리의 말에게까지 아낌없이 애정을 쏟는 안네리스로서는 같은 인간에게 애정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 즉 그녀의 영지인들에게 둘러싸인 안네리스가 나에게는 매우 큰 존재로 보였다. 어쩌면 내가 그때까지 꿈 속에서 동경하고 있던 처녀, 지금은 영광스렵게 즉위하여, 동인도와 수리남, 안틸, 그리고 네덜란드 본국에 군림하게 된 문제의 처녀보다도 그녀 쪽이 더 위대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 피부도 더 섬세하고 더 아름다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녀 쪽이 나와 더 가까이 있었다. 안네리스가 인부들과 헤어지자 우리들은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주위에는 드넓은 별판과 머리 위에는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내가 그녀에게 속삭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왕의 사진을 본 적이 있나요?" "물론 있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분이에요." "그래요, 정말 아름답지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당신은 여왕보다 더 아름다와요." 한순간 안네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고마와요, 밍케." 날씨는 점점 더 무더위지고 주위는 정적을 더해갔다. 나는 안네리스가 어떤 행동을 보여줄지 궁금해서 길가에 있는 도랑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그녀도 긴드레스를 잔뜩 걷어올리고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 뺨에 키스를 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런 짓을 !" 그녀는 비난했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키스를 했다. 그녀의 빌로도처럼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와요. )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어요, 앤."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맙다고도 하지 않고, 다만 돌아가자는 몸짓을 할 뿐이었다. 그녀는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물고 빽빽이 들어선 인가에 이를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각했다. 밍케, 조금 전의 네 행위는 골치 아프게 될 것 같아. 만일 그녀가 다르삼에게 일러 바친다면, 너는 울 수도 없을 만큼 두들겨 맞을 거야. 안네리스는 고개를 푹 숙인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가 샌들 한 짝을 도랑의 반대 쪽에 멸어뜨리고 온 것올 깨달았다. 나는 모르는 체하고 있었으나, 그러는 동안에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샌들을 잃어버리고 왔군요, 앤." 그녀는 보지도 않고 대답도 없이 점점 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나는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화났어요. 앤? 나를 원망하고 있나요?" 여전히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멀리 다른 건물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 있는 목조의 궁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층 창에서 냐이가 우리들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머리를 숙이고 걷고 있는 안네리스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냐이의 시선은 우리들의 모습이 창고 지붕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우리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응접실의 의자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잠자코 앉아서 나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없이 안쪽 문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홀로 의자에 앉은 채 나는 점점 불안속으로 빠져들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내 행동을 고자질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만큼의 벌을 받개 될 것이다. 아냐, 나는 절대로 도망치지는 않겠어. 얼마 뒤 커다란 종이 꾸러미를 들고 안네리스가 돌아왔다.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녀는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늦었으니까 낮잠을 주무세요. 저쪽 문이....." 그녀는 뒤돌아보고 뒤쪽 문을 가리켰다. "당신이 주무실 방이에요. 이 속에 샌들, 타올, 파자마가 들어 있어요. 저쪽에서 목욕을 하세요.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어요." 방을 나가기 전에 그녀는 방문으로 다가가서 나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어디가 욕실인지는 아시 겠죠?" 그렇게 덧붙이고는 그녀는 나의 등을 가볍게 밀어 방안으로 들여보내고는 밖에서 문을 닫았다. 나는 혼자 방 안에 남겨졌다. 그때까지의 크고 작은 긴장 때문에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자신의 뻔뻔스러움이 원인이 되어 이제부터 일어날지도 모를 이런저런 일들을 나름대로 추측하느라 내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자신을 책망하고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책망을 할 수가 있겠는가? 안네리스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가 곁에 있다면, 젊은 남성은 누구다 나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물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욕실에 들어가 보니 그곳은 또 다른 사치스러움을 맛보도록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크림색 자기 타일 바닥을 기점으로 두께가 3밀리미터 정도의 거울이 정면에 붙어 있었다. 그토록 넓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욕실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다. 부빠티의 관저 같은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 타일을 깐 욕조 속의 맑은 물이 내게 머리부터 담그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비치는 것은 내 모습뿐이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물에 머리를 담그자 그때까지의 나의 불안과 의심이 한꺼번에 씻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운수좋개 부자가 된다면 이것에 뒤지지 않을 만한 훌륭한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마마가 응접실 안쪽 방에서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사업 얘기에 나를 끌어넣었다. 그것들에 관한 나의 지식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금방 탄로났다. 냐이 온트솔로는 내가 모르는 유럽의 많은 전문 용어에 통달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 용어의 해설까지 해 주었다. 해설까지 할 수 있다니, 냐이는 도대체 어떤 여성일까? "시뇨는 사업이나 장사에 관심이 있군요." 마치 그녀가 말한 것을 내가 건부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냐이 온트솔로는 말했다. "자바인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지요. 더군다나 고관의 아드님으로서는 말이에요. 앞으로 시뇨는 실업가나 장사꾼이 될 생각을 갖고 있나요?" "지금까지도 나는 일을 해 왔읍니다, 마마." "시뇨가? 부빠티의 아드님이 ? 어떤 일을?" "나는 부빠티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틀립없이." "어면 일인가요?" "최고급 가구를 취급하고 있읍니다." 나는 내 사업에 내해 선전을 시작했다. "유럽의 최신식 가구입니다. 대개 이곳에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을 배로 방문해서 팝니다만, 친구들의 부모님들을 찾아가서 파는 일도 있읍니다."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을까요?" "문제 없읍니다, 마마." "재미있군요. 나는 누구든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려요. 시뇨는 자신의 가구 공장을 갖고 있나요? 일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지요?" "그런 것은 없읍니다, 나는 다만 가구의 도면을 보여 주고 매매계약을 성립시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오늘 우리 집에 온 것도 장사를 하기 위해서인가요? 그 도면이라는 것을 보여 주겠어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읍니다. 하지만 마마가 원하신다면 다음에 가져오겠읍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영국의 궁전에 있는 것과 똑 같은 장농이라든가, 르네상스식, 바로크식, 로코코식, 빅토리아식....." 냐이 온트솔로는 내 얘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감탄을 했는지 아니면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지 두 번 가량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땀흘려서 일하고, 자신이 노력해서 인생을 즐기고, 스스로 자립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말투는 와얀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승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어머 ! " 냐이 온트솔로는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 위쪽을 보고 있었다. "멋있어라 ! " 계단에서 바티크 사롱과 레이스로 짠 쿠바야를 입은 천사 안네리스가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묶어서 높게 올렸기 때문에 흰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목, 팔, 귀, 그리고 가슴에는 초록색 에메랄드와 흰 진주,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있었다(그렇기는 하지만 어느 것이 에메랄드이고 어느 것이 다이아몬드인지,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모조품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황홀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는 "자바 연대기"에 등장하는 조코 타르프의 천사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안네리스는 수줍은 듯이 웃어 보였으나, 그녀의 장식은 솔직이 말해 상당히 화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러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장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실제로 안네리스 정도의 미모와 기품이 있다면 보석 따위는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설사 벌거벗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변함 없을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신들이 내려 준 천성의 아름다움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다와 대지에서 얻은 장식품으로 한껏 치장한 안네리스는 낯설어 보였다. 그리고 보통 때는 입지 않는 옷차림이기 때문에 움직임은 허수아비 인형 같았고, 타고난 우아함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은 어떻게 해도 아름다운 것이다. 문제는 어떤 말로 은근슬쩍 그녀의 과장된 겉치레에 일침을 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저 애는 당신을 위해 잔뜩 멋을 낸 거예요." 냐이가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냐이가 매우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네리스는 여전히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고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아마 마음 속으로는 벌써 칭찬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찬사를 보내려고 하는데 냐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도내채 누구한데 배웠지, 그런 옷차림을?" "어머, 마마는 ! " 안네리스는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새빨갰다. 남이 보기에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녀의 모습에 나는 난처해졌다. 그래도 나는 묵직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멋있고 씩씩한 사나이, 지칠 줄 모르는 미의 여신의 정복자라는 인상을 남겨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사 여왕 폐하 앞에 나가는 일이 있어도 나는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야말로 사자의 걀기, 호랑이의 이빨, 사나이다움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모녀의 내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앤, 시뇨는 돌아가려는 참이었단다. 내가 붙잡아 두기를 잘했지? 그러지 않았으면 이처럼 아름다운 너를 보지 못해 한이 될 뻔했구나." "어머, 마마는 ! " 다시 한번 안네리스는 어리광스렵게 소리를 지르고 어머니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그리고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밍케? 어제서 잠자코 있지요? 그 문구를 잊어버리기라도 했나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마마. 이런 미녀 중의 미녀에게 어떤 말이 어울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당신은 미녀 중의 미녀예요, 앤. " "맞아요. 앤, 너는 마치 동인도의 여왕과 같구나. 그렇지요, 시뇨 ?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마마 ! " 딸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의 모녀 관계가 나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은 냐이의 결혼은 법률로 인정되지 않는 내연 관계이고 거기서 태어난 안네리스는 서자라는 점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개 현지처, 첩이 있는 가정의 분위기란 보통 그럴 것이다. 아니면 오늘날 유럽의 근대적인 가경, 그리고 던 장래 동인도의 쁘리부미의 가정이 이런 분위기로 변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역시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모녀 간의 대화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끝났다. 해가 지고 차츰 어두워졌다. 마마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안네리스와 나는 오로지 듣는 역할만을 충실하게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네덜란드어의 풍부한 구사럭에 다시 한번 감탄했고 동시에, 선생님들에게서 배운 적도 없는 새로운 말들이 너무나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집에 돌아가는 것 조차 잊고 있었다, "돌아갈 마차가 걱정되죠? 마차는 뒤걷에 얼마든지 있어요. 괜찮다면 가장 큰 4륜마차를 타고 돌아가세요." 하인 한 사람이 가스 등에 불을 켜놓고 갔는데, 나는 가스의 중앙 탱크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하녀가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로베르트가 안방으로 불려오고 무언 속에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하녀가 응접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안방에서는 우유빛 유리 등피에 둘러싸인 램프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눈만이 접시에서 주발로, 주발에서 빵 바구니로 움직이고 스푼과 포크,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쳐 소리를 낼 뿐이었다. 냐이 온트솔로가 얼굴을 들었다. 현관문이 노크도 없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고개를 들어 냐이를 보니 그녀의 눈은 응접실 쪽으로 경계의 빛을 보내고 있었다. 로베르트 메레마도 같은 방향으로 흘끗 시선을 보냈다. 그 눈은 기쁜 듯이 빛나고 입술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또한 등 뒤의, 그들의 시선이 향해진 쪽을 돌아보고 싶었으나, 그것은 무례하고 신사가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참았다. 그 대신 나는 안네리스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을 위로 올리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신중하게 식사를 하던 손을 멈추고 등 쪽으로 신경을 집중시컸다. 마루를 밟는 구두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차츰 가까와오고 또렷해졌다. 냐이는 식사를 중단했다. 슬르호프도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스푼과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 놓았다. 구두 소리는 점점 커져서 시계추 소리를 삼켜버리고 내 뒷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로베르트 메레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드디어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안네리스도 뒤를 돌아보고 불안한 듯이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쨍그렁 하고 소리를 내며 그녀의 스푼이 마루에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집으려고 하니까 하녀가 재빨리 달려와서 주워주고는, 급하게 방을 나가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안네리스는 차츰 다가오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대결이라도 할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스푼과 포크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안네리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등지고 뒤돌아섰다. 냐이도 또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방문객의 그림자가 응접실의 램프 빛을 받아 차츰 길게 뻗어왔다. 질질 끄는 듯한 구두 소리가 한층 더 선명해졌다. 이윽고 키가 크고 몸집이 크며 뚱뚱하게 살찐 유럽인 남자가 나타났다. 입고 있는 옷은 구겨져 주름투성이였고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것이 백발인지 본래 은발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사나이는 우리들 쪽을 보고는 한순간 멈춰 섰다. "아버지 ?" 나는 안네리스에게 속삭였다. "그래요. " 그녀의 대답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메레마는 구두를 질질 끌면서 나에게, 다 한 사람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내 바로 맞은펀에서 그는 멈춰 섰다. 눈썹은 짙고 얼굴은 석회암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끈이 풀린 먼지투성이의 그의 구두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때 문득 상대방이 얘기를 하려고 할 때는 그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한 선생님의 말씀을 생각해냈다. 황급히 나는 다시 얼굴을 들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메레마 씨 !" 나의 인사는 네덜란드어로서 매우 공손했다. 메레마는 고양이 같은 신음 소리를 냈다. 다림질을 하지 않은 양복이 몸에 엉겨 붙어 있었고, 빗질을 하지 않은 엷은 머리칼이 관자놀이와 귀를 덮고 있었다. "너 같은 녀석을 누가 이집에 오라고 했지? 원숭이 같은 녀석 !" 그는 거칠고 천한 곳에서나 쓰는 말레이어로 고함을 쳤다. 내 등 뒤에서 로베르트 메레마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흐느낌을 억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슬르호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내 앞에 선 거한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때 몸이 마구 떨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가지, 냐이의 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만일 냐이 온트솔로가 잠자코 있으면 나는 파멸이다. 실제로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있었다. "이 녀석아, 유럽인의 옷을 입고 유럽인과 교제를 하고 네덜란드 어를 조금 할 줄 알면, 그것으로 유럽인이 될 수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 너 같은 놈은 어디를 가나 원숭이야 !" "조용히 하세요 ! " 냐이가 네덜란드어로 쏘아붙였다. "그는 내 손님이에요." 정기가 없는 메레마의 눈이 자기 첩에게로 옮겨 갔다. "냐이 ! " "미친 유럽인은 미친 쁘리부미와 마찬가지예요." 냐이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눈에는 강한 혐오감과 불쾌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 집에서 당신은 아무런 권리도 없어요. 자기 방이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요 !" 냐이는 그렇게 말하고 한쪽을 가리켰다. 그 손끝은 고양이 발톱처럼 날카로왔다. 메래마는 아직 내 앞에 선채로 망설이고 있었다. "꼭 그렇다면 다르삼을 부를까요? " 냐이는 겁을 주었다. 거한은 폴이 죽은듯 대답 대신에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내가 얼마 전까지 있던 방의 옆문으로 다리를 끌며 걸어가 방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슬르호프" 로베르트 메레마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밖으로 나가지, 이곳은 너 무 더우니까." 두 사람은 냐이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안네리스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조용히 해, 앤." "용서해 줘요, 시뇨." 우리들 두 사람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실크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냐이는 이미 닫혀진 문을 아직도 분노에 찬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앤, 너는 시뇨에게 부끄럽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단다." 냐이는 화가 난 말투로 우리들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시뇨, 당신도 지금의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뇨도 충격을 받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거나 하지 말 아 줘요. 나는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이에요. 그 사람은 아예 없는 걸로 생각해 주 세요. 옛날에 나는 저 사람의 정숙한 아내, 충실한 동반자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 사람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치욕을 주 는 것밖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이에요. 그것이 네 아버지란다, 앤." 그제서야 화가 풀렸는지 냐이 온트솔로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하지는 않았다. 몹시 굳어지고 험악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냐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여성이란 말인가? "만일 내가 그처럼 심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 사람의 자식들 과 이 농장......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우리들은 무일푼이 되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서 내게 애원하듯이 냐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를 너무 억센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줘요." 그녀는 아름다운 네덜란드어로 계속했다. "모든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는 그 사람을 다루어 왔어요. 그것이 그 사람의 희망이에요. 정말 이렇게 행동하도록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다름 아닌 유럽인들입니다. 밍케, 그래요, 유럽인이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 목소리는 믿어 달라고 내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학교에서가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그렇게 배워 왔어요." 나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냐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슴속 깊이 새겼다. 학교에서가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 억센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가 르친 것은 다름 아닌 유럽인...... 냐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끝에 장식술을 단 끈을 잡아당겼다. 멀리서 방울 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그리고 조금 전에 자취를 감추었던 하녀가 다시 나타났다. 냐이는 하녀에게 식사를 치우라고 말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돌아가세요, 시뇨." 나를 돌아보며 냐이가 말했다. "네, 마마, 이제는 돌아가 봐야겠읍니다." 냐이가 내게로 가까이 걸어왔다. 그녀의 눈은 다시 어머니와 같은 온화함을 되찾고 있었다. "앤, 오늘은 그냥 손님을 보내 드려라. 자, 이제 눈물을 닦아야지." "오늘은 그만 돌아가겠어요, 앤. 아주 즐거웠옵니다." "용서해 주세요, 밍케. " 목이 맨 소리로 안네리스가 속삭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앤." "시뇨, 휴가 때가 되면 이곳에 와서 천천히 놀다 가세요. 어려워할 것은 없어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으니까요. 어때요? 승낙하시겠어요? 자,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다르삼에게 마차로 바래다 드리라고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냐이는 다시 창가로 가서 끈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동안 나는 이 현지처의 강인함에 놀라 멍해져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고 있는 거다. 물론 나도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면 그토록 지적이고 총명하고 또 그 많은 사람들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한꺼번에 상대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만약 교육을 받았다면, 어째서 그녀는 현지처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것을 알아낼 열쇠를 나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한 마두라인 남자가 나타났다. 키 160센티미터, 나이는 40세 가량,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단도가 한 개 꽂혀 있고, 볼에 시커먼 수염이 더부룩하게 나 있었다. 냐이 온트솔로가 마두라어로 사나이에게 명령을 했다. 나는 그 뜻을 잘 알 수가 없었으나, 아마 마차로 나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라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다르삼은 똑바로 선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치 내 얼굴을 머릿 속에 똑똑히 새겨 넣으려는 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이 도련님은 내 손님이기도 하고, 안네리스의 손님이에요." 냐이가 자바어로 말했다. "전송해 드리고 돌아오세요. 만일 도중에 사고라도 나면 큰일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 " 아무래도 그것은 조금 전의 마두가어를 자바어로 다시 말한 것인 모양이었다. 다르삼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거수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냐이가 말했다. "밍케, 안네리스에게는 친구가 없어요. 오늘 시뇨가 우리 집을 찾아 주었기 때문에 이 아이는 몹시 기뻐하고 있옵니다. 물론 당신은 바쁜 탓으로 그다지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서 자주 찾아와 주세요. 메레마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것은 내 문제니까요. 그보다는 시뇨만 좋다면 여기서 함께 살아요. 그렇게만 해주면, 우리들은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어요. 학교는 매일 마차로 다니면 됩니다. 물론 결정은 시뇨에게 달려 있어요." 이건 또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제안인가? 사람들이 "마성의 저택"이라고 소문을 퍼뜨린 것도 당연한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중히 잘 생각해 보겠읍니다, 마마. 친절하신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싫다고 거절하면 안돼요, 밍케." 안네리스가 토라진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요, 잘 생각해 보세요. 만일 시뇨가 좋다면, 모든 것을 안네리스에게 준비하도록 하겠어요. 그렇지 않니, 앤 ?" 안네리스 메래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을 지나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슬르호프와 로베르트 메레마 두 사람이 잠자코 앉아서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 나와 슬르호프는 계단을 내려가서 마차에 올라탔다.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마, 앤, 로베르트."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냐이가 소리쳤다. "멈춰요 !" "밍케, 잠깐만 내려 줘요." 노예처럼 나는 다시 한번 냐이의 손바닥에 들어갔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차를 내려 계단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냐이는 층계를 한 계단씩 내려왔다. 안네리스도 뒤따라 내려왔다. 냐이는 내 귀에다 대고 살며시 말했다. "안네리스가 말을 했는데 시뇨, 화를 내지는 말아요. 당신이 그 애에게 키스를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벼락에 맞았다 하더라도 그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안과 초조가 은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지경이었다. "정말인가요?" 냐이는 재촉했으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안네리스를 데려다가 내 앞에 서게 했다. "역시 사실인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밍케, 지금 내 앞에서 안네리스에게 키스를 해 주제요. 내 딸이 거짓말장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몸이 떨렸다. 그러나 냐이의 명령에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안네리스의 볼에 키스를 했다. "이 아이에게 키스를 한 것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럼, 안녕. "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한 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냐이의 마술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안네리스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왔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무릎을 꿇게 하고 마는 냐이 온트솔로의 수완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차는 바퀴를 삐걱거리면서 길가의 돌을 튕기며 달리고 있었다. 마차의 카바이드 램프가 주위의 어둠 속에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날 밤 길을 가는 것은 우리가 단 마차뿐이었다. 사람들은 빌헬미나 여왕 즉위 기념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슬라바야로 몰려 나간 것 같았다. 다르삼은 투랑 강의 하숙집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내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나서 그는 슬르호프를 보내기 위해 다시 마차를 달렸다. "어머, 밍케 도련님 !"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테린하 부인이 큰 목소리로 나를 맞아 주었다. "이렇게 늦게 돌아오다니 이제는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건가요. 조금전에 방에다 편지를 갖다 두었어요. 얼마건 부터 편지가 몇 통 와 있는 데도 도런님은 그 편지를 아직 읽지 않은 것 같더군요. 전혀 뜯지도 않은 채 방에 내던져 두지 않았어요? 알겠어요, 도련님 ? 그 편지는 읽어 달라고 정성껏 써서 우표를 붙여서 보낸 거라구요. 혹시나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전부 시에서 온 편지들이에요? 도대체 왜 그러시죠? 아아, 그건 그렇고, 내일 물건을 살 돈이 없는데요." 수다장이이기는 하지만 마음씨 좋은 부인에게 나는 일 타렌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연제나처럼 몇 번씩 고맙다는 말을 했으나, 그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조건 반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방에는 뜨거운 코코아가 준비되어 있어서 나는 재빨리 그것을 모두 마셨다. 구두와 셔츠를 벗자 나는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그날 일어난 모든 일들을 되새겨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석유 램프 옆의 탁자에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가 버렸다. 그것은 내가 꿈 속에서 그리고 있던 소녀의 사진이었다. 나는 침대를 내려가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그것을 뒤집어 놓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나는 항상 베개 위에 놓여 있는 슬라바야와 부다위 발행의 신문을 옆쪽으로 밀어 놓았다. 잠들기 전에 신문을 읽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일본에 관한 기사를 찾아서 읽는 것이 나는 좋았다. 유학을 위해 영국이나 미국으로 건너가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기뻤다. 나는 일본에 대해서는 정보통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 불가사의한 대부호의 일가다. 마치 마술사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기술을 지닌 냐이, 아름답고 또한 어린애 같으면서도 인부들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능숙한 안네리스 메레마. 축구 이외의 일은 전혀 관심이 없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로베르트 메레마, 코끼리처럼 거대하고 꽤 까다로운, 그러나 자기의 첩에 대해서는 무력하고 갓난애 같은 헤르만 메레마. 한사람 한사람이 마치 연극 속의 등장인물과 같았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가족인가? 그리고 나 자신은 어면가? 나도 또한 냐이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직도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고 있었다. 안네리스에개는 친구가 없어요 ! 오늘 시뇨가 우리 집을 방문해 줘서 이 아이는 몹시 기뻐하고 있읍니다. 물론 당신은 바쁘기 때문에 시간이 없겠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자주 놀러 오세요......시뇨만 좋다면 여기서 함께 살아요. 그렇게 해주면 우리들은 얼마나 좋겠어요...... 얼마 뒤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집 밖에서 떠툴썩한 소리가 나서 나는 석유 램프에 불을 켰다. 새벽 5시였다. "짐이 왔읍니다. 밍케 씨 앞으로요." 그렇게 소리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유, 치즈, 버터, 냐이 온트솔로 부인이 보낸 편지도 있읍니다........." 제 2 장 쟝 마레의 비밀 보통 때와 다름 없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어쩌면 나뿐인지도 몰랐다. 우노크로모의 바이텐졸프 농장이 자나깨나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마술에 걸린 것일까? 순종이건 혼혈이건 유럽인 처녀라면 나는 얼마든지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안네리스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냐이 온트솔로의 목소리는 내 마음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밍케, 밍케 군, 언제 와 줄 거예요? 나의 머릿속은 혼란했다. 매일 아침 나는 메이 마레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이 소녀의 손을 잡고 우선 신빤의 에에르에스에 있는 그녀의 국민학교까지 가서 그곳에서 하베에스 거리에 있는 우리 학교로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등교길에 내 앞을 달리는 마차 한대 한대의 마부를 혹시 그것이 다르삼이 아닌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곤 했라. 또 뒤에서 마차가 나를 앞질러 가려고 할때는 꼭 돌아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마치 나는 길을 다니는 모든 마차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수업 중에도 안네리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고 냐이의 목소리가 되풀이해서 귀에 들려왔다. 언제 와 줄 거예요? 그 아이는 당신을 위해 멋을 부린 거예요. 언제 오는 거죠?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우노크로모의 일로 나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를 피하기만 하고 내가 안네리스를 함락시키면 나를 존경하겠다던 약속을 좀처럼 지키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생활은 잿빛 베일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동급생들은 순종의 유럽인도, 혼혈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변해버린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 그들 쪽에서도 내 마음의 변화를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다고난 쾌활함, 남다른 붙임성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쟝 마레의 화방에 들렸다. 직공들이 마침 오후의 작업을 시작했을 때었다. 쟝 마레는 언제나처럼 제작 중인 그림이나 스케치, 디자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곧바로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항구로 갈 생각도 없었다. 또 광고물을 만들기 위해 "경매"지의 사무실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글을 쓰고 싶은 의욕도 없었다. 혹은 또 아는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가구를 팔거나 초상화 주문을 받을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다만 침대에 누워 안네리스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안네리스, 그 어린애 같은 계집애 뿐이었다. 하숙집에 돌아오자 내가 바이민졸프 농장을 방문한 일에 대해서 테린하 부인이 집요하게 얘기를 캐내려고 했다. 얘기를 한 뒤 나는 그녀의 천박한 인신공격을 지루하게 들어야 할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도련님, 도련님이 그 처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알 수가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처녀의 어머니 쪽이지요. 그 어머니는 추잡한 욕망을 갖고 있어요. 그 처녀의 아름다움은 모두들 칭찬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찾아갈 용기는 없다고요. 정말 도련님은 운이 좋은 분이에요. 하지만, 제발 조심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냐이한테 당한다고요 ! " 유치하고 지저분하고 교양이 없고 유일한 관심은 추잡한 성에 관한 것뿐, 현지처 가정의 도덕 수준은 그런 정도라는 것이 테린하 부인이나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들은 창부의 가족, 품위가 없는 인종, 흔적도 없이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도록 운명지워진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냐이 온트솔로단을 얘기하자면, 그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맞는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나를 혼란케 만든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들어맞을 턱이 없어 !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혹시 나에게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알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 계층이 현지처의 가정을 단죄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쁘리부미, 유럽인, 중국인, 아랍인을 가릴 것 없이 모든 민족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린 가운데서 어떻게 나 혼자만이 "노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안네리스에게 키스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부터가 냐이의 낮은 도덕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해도 나는 아직 테린하 부인의 인신 공격에 나의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자신에게 납득을 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나와 안네리스 사이에 일어난 것은 젊은 남녀의 관계에서는 흔해 빠진 사건에 불과하다. 그것은 왕이든 장사꾼이든 종교지도자든 농민이나 노동자든 어면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가 있고, 신들의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다른 손이 나를 가리키며 지단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너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다 못해서 나는 그날 저녁때 쟝 마레를 찾아가 그의 지혜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말레이어는 조금씩 향상되어 가고는 있었지만, 그와 얘기를 한다는 것은 아직 기대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네덜란드어를 모르고 나의 프랑스어 실력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쟝 마레는 식민지 군의 병사로서 4년 이상이나 아치에에서 싸운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것만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네덜란드어란 군대의 명령 용어뿐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쟝은 나보다 나이가 많고 친구인 동시에 나의 동업자였으니까 그에게 의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찾아갔을 때, 화방에서는 직공들이 중국인 아촌으로부터 주문받은 가구의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었다. 아촌은 바로 냐이 온트솔로의 이웃에 있는 유곽의 주인인데, 주문이 유럽 스타일의 가구였기 때문에 중국인인 그는 자기 나라 업자에게 발주를 하였던 것이다. 그 주문을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받아온 것이었다. 쟝은 연필을 만지작거리면서 다음 그림을 위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요, 쟝."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제도용 테이블에 붙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쟝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시히루'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나요?" 내 질문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구나구나'는? " "그 말이라면 알고 있지. '흑색 마술'인가 하는 의미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어. 아프리카의 흑인이 잘 쓴다더군. 하기야 그것도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흑색 마술에 완전히 걸려버린 자신의 현재 상태를 쟝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또 현지처의 가정, 특히 냐이 온트솔로의 가정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샹 마레는 연필을 그림종이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똑바로 알아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프랑스어와 말레이어를 섞어서 조용하게 말했다.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것 같군, 밍케. 사랑에 빠져버렸나 보지 ?" "그렇지 않아요, 쟝. 나는 사랑 따위에 진 게 아니라구요. 그야 물론 그녀는 매력적이고 황홀할 정도의 미인이기는 하지만, 사랑에 빠진 것과는 달라요." "알겠어. 자네는 사랑의 병 때문에 괴로와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사랑한다는 것을 남에게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니까 상당히 중증인 셈이지. 알겠나, 밍케 ? 잘 들어둬. 자네의 젊은 피는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고 있어. 그리고 자네는 세상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그는 천천히 웃음을 떠올렸다. "세상의 평가가 옳다고 생각되면 존중을 해야지. 그러나 만일 그릇된 것이라면, 참고하거나 존중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밍케, 자네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야. 지식인은 먼저 생각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동에 있어서 편견을 버리고 진실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걸세. 그것이 교육을 받았다는 것의 의미지. 두 번이나 세 번쯤 더 그 가정을 방문해 보게. 그렇게 하면 세상의 평가라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좀더 잘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나보고 그곳을 또 찾아가라는 말인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의 평가가 옳은지 그른지를 자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알아 보라는 말일세. 그릇된 세상의 평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중의 과오를 범하게 되는 거야. 자네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스스로 심판을 내려야 되는 거야. 그 집안사람들이 그들을 심판하는 사람들보다 훌륭한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않나." "쟝, 당신은 진정한 내 친구예요. 나를 심판하려는 건 아니겠죠 ? "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남을 판단하거나 하지는 않네." "나는 그 집에서 함께 살자는 요청을 받고 있어요." "아뭏든 찾아가 보는 거야. 다만 자네에게 학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주문을 맡아 오지 않아도 괜찮다구. 이것 보게. 이제부터 완성하지 않으면 안될 초상화가 아직 다섯 장이나 더 남아 있다니까. 그리고 이것 !" 그는 스케치 용지를 가볍게 두드려 보었다. "이제부터 그토록 염원하던 그림에 손을 대 볼 생각이네." 나는 그의 앞에 놓인 스케치 용지를 집어들었다. 그 그림을 본 순간, 나는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의 식민지군 병사---나는 대나무 모자와 장검으로 그렇게 판단했다---가 아치에의 병사의 배를 발로 밟고 희생자의 가슴에 총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총검은 희생자의 검은 셔츠를 압박하고 셔츠 밑으로는 젊은 여인의 유방이 보였다. 여인의 눈동자는 크게 열려 있고, 머리칼이 흐트러진 대나무 잎 위에 둥글게 놓여 있었다. 왼쪽 손은 일어나려고 히우적거리고 오른쪽 손은 힘없이 단도를 쥐고 있었다. 병사와 여인의 위에는 강풍에 불려 꺾어진 대나무 잎이 우산처럼 덮여 있었다. 마치 우주에 살아 있는 것이란 한쪽은 죽이려 들고, 다른 한쪽은 죽임을 당하려고 하는, 그 두 사람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지독하게 잔인한 그림이군." "으응, 그래." 쟝 마래는 그렇게 말하고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담배를 피웠다. "쟝, 당신은 미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잔혹스런 저 그림 가운데 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 그림은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일반에게 공개할 성질의 그림은 아니라네.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나의 추억 속에 있네." "그렇다면, 이 병사는 당신인가요? 당신 자신?" "그래, 바로 나야." 쟝은 얼굴을 쳐들었다. "당신이 이렇개 야만스러운 짓을 했다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젊은 여인을 당신이 죽였나요?" 그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도망시켰나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은 당신에게 감사했겠군요." "아니, 죽여 달라고 애원했네. 그녀는 이곳 해안가까이에서 태어난 아치에 처녀인데, 이교도에게 납치당한 것을 치욕이라고 믿고 있었네." "그래도 당신은 죽이지 않았지요?" "그래, 죽이지 않았지,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네, 밍케."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말은 마치 내게가 아니라 이미 손이 닿을 수 없게 된 그 자신의 먼 과거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 여인은 어디에 있죠?"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쟝은 슬픈 듯이 대답했다. "죽었다네." "그러면 역시 당신이 죽였군요. 이 나약한 처녀를?" "그렇지 않아. 내가 죽이지는 않았어. 그녀의 동생이 병영 속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단도로 그녀를 찔렀지. 거의 즉사였어. 단도에 독이 묻어 있었던 거야. 누이를 죽인 동생도 그 자리에서 죽었지. '죽어라, 이교도의 앞잡이 !' 하고 외치면서." "왜 동생은 누이를 죽였을까요? " 나는 그때 나 자신의 고뇌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동생은 나라를 위해, 신앙을 위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의 누이는 항복한 뒤 그것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지. 그녀는 혼자서 죽어갔네. 그때 그녀의 아이는 이웃 사람이 산책에 데리고 나갔고, 남편은 임무를 위해 다른 곳에 가 있었다네." "그렇다면 이 여자는 항복하고 나서 식민지 군의 병영에 살고 있었나요? 포로로서 ? 포로가 되고 나서 아이를 낳았나요?" "처음에는 포로였지만 뒤에는 달랐지." 쟝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럼, 그녀는 다중에 누군가와 결혼을 했나요?" "아니, 결혼은 하지 않았네. " "그렇다면 산책에 나간 아이는 어떻게 해서 태어났죠?" "그 아이는 그녀가 나에게 낳아 준 아이였다네. 내 자식이야. 밍케." "쟝 !" "그렇게 된걸세, 밍케. 이 얘기는 결코 메이에게 해서는 안돼." 나는 갑자기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해 메이를 찾아 달려갔다. 시트가 없는 목제 침대에서 메이는 잔잔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나는 메이를 들어올려 키스를 했다. 소녀는 깜짝 놀라 커다란 눈을 뜨고 나를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이 ! 메이 ! " 나는 목이 메었다. 그리고는 메이를 안고 쟝 마레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쟝, 이 아이가 당신의 자식이에요? 이 아이가 그 갓난애란 말 인가요?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설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프랑스인은 손을 턱에 괴고 집 밖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계속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나의 물음에도 잠자코 있었다. 이 아이와 그 어머니의 운명, 그보다 더 한 샹 마레의 운명은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가? 이 친구는 이국에 살면서 미래도 없고 한쪽 다리도 없다. 그는 가끔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종종 나에게 얘기해 주었었다. 여기 있는 어린 소녀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결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어머니의 일굴은 영원히 볼 수가 없고, 다만 외다리를 가진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그건 아픈 과거 때문에, 나에게 우노크로모에 가보라고 했나요 ?" "밍케, 사랑은 아름다운 거야. 이 허무한 인생 속에서 인간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 " 쟝은 슬픈 듯이 말한 다음 내게서 메이를 빼앗아 무릎 위에 앉혔다. 소녀는 수염을 깎지 않은 아버지의 볼에 키스를 했다. 쟝은 프랑스어로 말했다. "메이, 너는 늦도록 잠만 자고 정말 잠꾸러기구나." "산책을 가는 거야, 파파?" 메이가 프랑스어로 물었다. "응, 그래. 그려나 먼저 목욕을 하고 오너라." 메이는 신이 나서 유모에개로 뒤어갔다. 어머니를 모르는 소녀의 뒷모습을 나는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라네, 밍케. 어쩌면 사랑의 뒤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람은 그 결과에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솔직이 말하자면, 그 우노크로모의 아가씨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나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의 경우는 어떻게 그녀를, 즉 메이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나요?" "자네가 그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것은 사실인지도 몰라. 하지만 어느 쪽이든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닐세. 또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지. 왜냐 하면, 사랑은 문화의 소산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사랑하고 있는지 어면지를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것을 키워가는 것도 내가 아니야. 자네 자신이 자기를, 자기의 마음을 시험해 보아야 하네. 아마 그 아가씨는 자네를 좋아하고 있겠지. 또 자네의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녀의 어머니가 자네를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네. 초면인데도 벌써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 거야. 나는 '흑색 마술'같은 것은 믿지 않네. 아마 그런 것은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런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그린 것이 통용되고 있는 곳은 문명이 아직도 극히 낮은 단계에 있는 곳뿐이지. 더구나 나이는 모든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자네가 달하지 않았나? 그런 여자가 흑색 마술 같은 것을 쓸리가 없지. 그녀는 오히려 이성의 힘을 믿고 있을 거야. 흑색 마술이나 주술을 하는 것은 이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 뿐이야. 냐이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있네. 아마 자기 딸의 인생에 깃든 고독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 "메이의 어머니에 대해 얘기해 줘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죽이려던 여자를 사랑하게 되다니,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다음에 얘기해 주지. 지금은 아직 얘기할 기분이 아니야. 그보다는 이 그림을 보아 주게나. 자네의 감상은 어면가?" "나는 아직 그런 것에 관해서는 모르겠어요." "자네는 교양이 있는 젊은이야. 그림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지." "아직 그림 공부할 때는 아니에요." "알겠어. 저녁때 메이를 산책에 데려가 주지 않겠나?" "당신은 한번도 데리고 가지를 않는군요." 나는 강하게 비난하는 투로 에기했다. "그 아이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해요." "그건 아직 안돼. 그애가 불쌍해서 말일새. 나와 산책을 나가면 모두가 우리 두 사람을 이상한 듯이 바라본다네. 그리고는 저 외다리 네덜란드인과 딸을 보라고 놀려댈 거야. 그 욕설이 메이의 귀에 들어가 보게나.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네. 밍케, 그 착한 어린 영혼을 설사 아버지의 불구가 원인이라 하더라도, 쓸데없는 고통으로 괴롭혀서는 안된다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어. 그 아이가 남의 이목에는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하고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네." 일찌기 쟝이 그토록 많은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또 그토록 어두운 얼굴을 한 적도 없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태어나고 자라나고 처음으로 대양을 본 나라, 그러니. 지금은 불구의 몸이 되어 이국에서 태어난 자식을 안고 돌아갈 수도 없는 나라, 그 조국땅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필생의 대작을 그려 조국이 위대한 화가로서 맞이해 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당신은 동정이라든가 불쌍하다든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을 텐데요?" "맞아. 자네 말대로야. 밍케, 인질가 자네에게도 말한 것처럼 불쌍하다는 것은, 선의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없는 사람의 감정이야. 불쌍하다는 감정은 하나의 사치, 내지는 나약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네. 선의를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인간은 물론 칭친할만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다네, 밍케. 유럽과 달라서 이곳 동인도에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쌍하다'는 말이 아름다운 울림을 갖게 되거든."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아 갔다. "왜 그러죠? 당신답지 않군요. 사람이 변한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군요." "염려해줘서 정말 고맙네. 자네 관찰력이 점점 더 날카로와져 가는 것 같군." "제발 부탁이니까 그런 어두운 얼굴은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는 아직 내가 있잖아요." 메이가 돌아왔다. 소녀는 아버지가 함께 산책을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단번에 표정이 달라졌다. "밍케 아저씨와 함께 가거라. 섭섭하지만 파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단다." 나는 프랑스인과 아치에의 혼혈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파파는 나하고는 절대 산책을 가지 않는다니까." 소녀는 네델란드어로 하소연했다. "내게도 손을 잡아 끌어줄 힘이 있다는 것을 파파는 믿지 않아요. 넘어지지 않도록 돌봐줄 수가 있는데 말이에요." "그렇지. 메이는 힘이 센 아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파파가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말이야. 이 다음에는 꼭 데려가 주실 거야, 메이 ! " 나는 코부렌 광장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메이는 조금 전까지의 우울했던 기분은 잊은 것 같았다. 우리들은 풀밭에 앉아 연날리기 시합을 구경했다. 메이는 가끔 프랑스어를 섞어 가면서 자바어와 네덜란드어를 뒤섞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고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내 머릿 속은 갖가지 일들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메레마의 가족, 쟝 마레의 가족, 변해버린 동급생들의 나에 대한 태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번해버린 나 자신. 실이 끊긴 연이 몇 개 하늘에 떠가고 있었다. 방향을 잃고 흔들거리면서. 메이가 내 손을 잡아끌며 지평선에 나타난 한 무리의 구름을 가리켰다. "파파를 사랑하고 있니, 메이 ? "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나는 쟝 마레를 보았다. 무성한 대나무 잎 아래 쓰러져 총검을 마주보고 누운 그 젊은여인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얼굴은 쟝 마레의 어릴 때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 있는 나이 어린 메이 마래는 자기 아버지가 어면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쟝 마레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일찌기 소르본느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어떤 학과이며 몇 학년까지 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의 이끌린대로 공부를 포기하고 온 정열을 그림에 쏟아부었다. 그것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자, 얼마 뒤 파리의 라틴 구에 살면서 길거리에서 자기 그림을 팔았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잘 팔렸으나, 파리의 비평계와 대중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는 길가에서 그림을 그리며 틈틈이 조각도 했다. 그렇게 해서 5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길은 열리지 않았다. 쟝은 차츰 자신의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아프리카의 목상을 만들거나 조각을 하는 그를 바라보는 구경꾼 무리, 그리고 파리, 자신의 처지,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그는 모로코,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이 찾고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을 찾을 수가 없었다. 충족을 느끼지 못한 채 불안과 초조로 계속 시달렸다. 여전히 그가 원하는 그림은 그릴 수가 없었다. 쟝은 아프리카를 떠났다. 그리고 동인도까지 왔을 때, 빈덜터리가 되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남겨진 유일한 길은 네덜란드 식민지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대하여 몇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아치에의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부대에서도 그는 변함없이 자기 혼자만의 새계에서 살며 네덜란드어로 내려지는 명령을 듣는 일 이외에는 누구하고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었다. 쟝 마레는 네덜란드어를 하나도 몰랐지만 전혀 배울 생각이 없었다. 쟝 마레는 군무중에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동인도의 원주민은 극히 단순하고 순박했다. 그들과 전쟁을 해서 실수로라도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총과 대포 앞에 칼이나 창기 무슨 위력이 있단 말인가? 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등병으로서 아치에로 보내졌다. 그가 속한 소대의 지휘관 바스티안 데린하 하사는 유럽 혼혈이었다. 쟝이 만일 준수한 유럽인이 아니었다면, 이등병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네덜반드어를 모르는 같은 순종의 유럽인 병사들과 같이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 병사들은 스위스인, 독일인, 스웨덴인, 벨기에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포르투칼인, 스페인인, 이태리인 등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가 각자 조국의 생활에서 실패한 삶의 낙오자들이었다. 꿈이 깨어진 사람, 경찰에 쫓기는 사람. 빚독촉을 견디지 못해 도망온 사람, 도박이나 투기로 파산한 사람 ---모두가 부랑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일등병 이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등병은 혼혈아와 원주민들만의 계급으로, 원주민 병사는 대개 풀오레조 출신의 자바인들이었다. 언젠가 나는 왜 풀오레조의 쁘리부미가 많으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쟝은 그들이 냉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식민지 군이 아치에 인과 싸우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선택한 것은 아치에 인이 위협적일 뿐만 아니라, 강철처럼 완강하고 끈기가 있으며, 행동이 뛰어난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석회암 지역 출신과 같은 다혈질의 인종은 처음 얼마동안 밖에 견딜 수 없어서 아치에의 전투에서는 곧 전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치에에서의 체험은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쁘리부미의 전투 능력에 대한 그의 선입관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아치에인의 능력은 우수했으며 빈약한 것은 무기 뿐이었고 조직력도 뛰어났다. 그는 또 한편으로 인력 조달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우수성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아치에의 긴 칼과 창, 그리고 죽창을 장치한 함정 등이 총이나 대포에 대항할 수 있을 턱이 없다는 자신의 선입관도 잘못이었다고 언젠가 얘기했다. 아치에인은 독특한 전법을 갖고 있었다. 자연 환경을 이용하고 능력을 최대한 살리고, 신앙에 의기해서 그들은 많은 숫자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을 섬멸시켰다. 쟝은 그것을 보고 경악했었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어린애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패배를 당해도 그들은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능 불가능을 따지기에 앞서 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반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또 언젠가 쟝 마레는 프랑스 어와 말레이어를 뒤섞은 어설픈 말투로 다음과 같이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내가 아치에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 때, 아치에인의 방어선은 내륙 깊숙이, 남쪽이 다켄곤 지방까지 후퇴해 있었네. 아치에군의 사령관 취트 알리는 병력과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기는 충천해 있었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나에게는 수수께끼었네." 그들은 언제까지고 싸움을 계속했다. 식민지 군에게 반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자기 군대 내의 내란과도 싸워야 했다. 다리, 도로, 통신망, 열차와 선로, 그와 같은 식민지 군의 연락망은 항상 그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음료수에 대한 독극물 투입, 기습 공격, 죽창을 장치한 함정, 매복, 칼과 창에 의한 기습, 야영지에 대한 육탄 공격....... 네덜란드의 장군들은 섬멸 작전을 계속하려던 계획을 거의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몰살당하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 노인, 병자, 그리고 만삭이 된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밍케, 그런 무력한 사람들은 식민지 군에게 살해당할 때 그것을 바로 요행으로 알고 죽어갔던 거야." 군부의 상층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유럽인 병사의 희생자는 자바 전쟁 때처럼 3천 명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발을 들여놓는 어떤 고장에서나 노이로제가 식민지군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윽고 쟝 마래는 용감무쌍한 아치에의 원주민에게 감동을 느끼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미 27년 간이나 그들은 전 유럽 문명의 경험과 과학의 소산인 최신예 무기를 상대로 완강히 싸워오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쟝 마레는 말했다. 하지만 과거에 적이 되어 싸운 여자 병사를 어떻게 해서 사랑하는 여인으로 변하게 할 수 있었는가를 그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다. 그 여자병사도 또한 쟝이 그녀를 사랑한 것과 같이 그를 사랑하고, 지금 내 무릎 위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사랑하는 딸 메이를 그에게 낳아 주었는데, 그 사랑의 이야기를 그는 아직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도대체 네 어머니가 너에게 젖을 먹일 수 있었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 너는 해안에서 태어난 아치에의 처녀인 네 어머니의 눈동자를 본 일이 없겠지. 어머니를 사랑해 볼 수도 없었을 거야. 메이, 너는 어린 나이에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셈이구나. "밍케 아저씨, 저기를 좀 봐 ! " 매이가 네덜반드어로 환성을 질렸다. "저 구름 위에 개처럼 생긴 연이 보여 ! " "개가 하늘을 날다니 이상하구나. 구름이 점점 더 두터워지는군. 자,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쟝 마레는 아직도 제도용 책상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가자 그는 얼굴을 들었다. 메이는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구름위에 떠 있던 개처럼 생진 연에 대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쟝은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 동안 나는 완성된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내일이나 모레 주문한 손님들에게 내가 전해 주지 않으면 안될 것들이었다. 쟝은 고객의 까다로운 주문을 좀처럼 만족시켜 줄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좀더 그들의 기호에 맞도록 다시 그려 달라는 요구가 자주 나왔다. 그리고 골치 아픈 일이지만 그런 손님을 설득시키는 것이 나의 업무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손님들을 설득시켰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입니다." 그 한 마디의 효과는 절대적이어서 그 자리에서 당장 그 그림은 불후의 ---주문한 손님의 수명보다는 불후할 정도의--- 명작이라는 믿음을 얻었다. 그래도 계속 다시 그려 달라고 할 경우에 그림의 불후성은 상실되고 평범한 화학 처리에 의한 얼굴 사진이 되어 버리고 만다며 설득했다. 가장 주문에 까다롭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여자 손님들이었다. 그 점에서 쟝으로부터 여러 가지 얘기를 들어 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여성은 현재라는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늙어서 추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들은 무상한 청춘시절의 꿈에 사로잡혀 그 꿈 속의 젊음에 영원히 매달려 있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여성에게는 참으로 잔혹한 일이다. 그래서 여자 손님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주문에 대항하려면 그녀들의 논리와는 다른, 듣기 좋은 논리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마담이 자녀들에게 남겨 주는 최고의 재산입니다. 단순히 사모님의 것만은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여자 손님 가운데는 아이를 못 낳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대체로 이런 나의 논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도 승복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할수없이 다음과 같은 은근한 협박을 했다. "알겠읍니다. 만일 마담의 마음에 안드신다면, 이 그림은 내가 사서 내 방에 걸어 놓겠읍니다." 이런 협박은 십중팔구 상대방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친다. 당장 그녀들은 이유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것이 된 다음에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내 마음대로입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예를 들면? 글쎄요, 콧수염이라도 그려 넣을까요.....? 미리 말해두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요컨대 오늘날까지 나는 손님과의 대화에서 진 적이 없는 것이다. 특히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대개의 경우 여성들은 두뇌 회전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는 패한 적이 없었다. "너무 늦었으니 가 보겠어요." "여러 가지로 고마왔네." 쟝은 이렇개 말하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학교 쪽은 괜찮겠나? 메이와 나 때문에 시간을 뺏겨 집에 가면 공부할 시간이 없을텐데......" "괜찮아요, 쟝. 시험은 언제나 잘 치니까요." 나는 건물 옆의 생나무 울타리를 뛰어넘어 하숙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다르삼이 편지를 갖고 아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사를 하고 나서 자바어로 말했다. "도련님, 냐이님이 회답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읍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우노크로모의 가족은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안네리스는 수심에 잠겨 있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어요. 일이 많이 밀려 있고, 일을 해도 실수만 하고 있어요. 밍케, 그 아이의 괴로움을 당신이 이해해 준다면 일을 잔뜩 안고 있는 이 어머니는 얼마나 감사할지 모르겠어요. 안네리스는 나의 왼팔과 같은 아이랍니다. 나 혼자서는 모든 일을 처리할 수 가 없읍니다. 그 아이의 건강 때문에 항상 걱정입니다. 시뇨가 와 준다면, 우리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거예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얼굴을 보여 주세요, 한 시간이나 두 시간도 좋습니다. 하지만 역시 우리들은 시뇨에게 우리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기를 마음 속으로부터 기원하고 있옵니다. 시뇨의 깊은 배려와 따뜻한 온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편지는 완벽한 네덜란드어로 씌어 있었다. 학력이 낮은 국민학교 출신의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적어도 로베르트 메레마가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누가 썼는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편지는 나에게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되살려 주었다. 그렇다. 나만이 그 두 사람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다. 두 사람도 역시 나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가 마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냐이와 같이 현명하고 위엄 있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고, 젊은이는 모두 절세의 미녀를 필요로 한다. 보라, 그 두 사람은 가족과 사업을 구하기 위해서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이 정도면 대단하지 않은가? 아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왜 또 이렇게 많은 이유를 늘어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좋다, 가 보자. 제 3 장 이상한 가족 냐이 온트솔로의 편지는 확실히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안네리스는 약간 수척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녀는 현관 앞의 계단에서 나를 맞이했다. 내 손을 잡자 눈동자가 빛나며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로베르트 메레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일부러 묻지는 않았다. 냐이는 응접실의 옆문에서 나타났다. "드디어 와 주었군요. 얼마나 오랫동안 앤이 기다렸는지 아세요? 자, 앤. 소중한 분을 잘 모셔라. 시뇨,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만...." 그때 나는 우연히 응접실과 이웃한 방 안을 흘끗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 눈으로 그곳이 사무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냐이는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득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느낀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라. 내 마음은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조심하라 ! 그때와 마친가지로 나를 힐책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곳에 오다니? 어째서 너는 그렇게 어리석지? 여기서 살겠다는 생각이냐? 현재의 하숙생활이 싫어졌다면, 왜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하숙집으로 옮기거나 하지 않는 거냐? 이 금단의 집에 유혹당해 맞서기는커녕 무조건 굴복을 하다니! 안네리스는 요전에 내가 쓰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다르삼이 나의 여행 가방과 짐을 마차에서 내려 방으로 운반해 왔다. 안네리스가 말했다. "당신의 옷을 옷장에 넣는 일은 내게 맡겨 주세요. 가방 열쇠는 어디 있죠? 주세요!" 내가 열쇠를 주자 그녀는 재빨리 정리를 시작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 놓고, 옷을 장농에 집어 넣고, 가방 속의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다르삼이 빈 가방을 옷장 위에 얹었다. 안네리스가 책을 말끔하게 정돈해 놓아서 책이 정렬한 병사들처럼 보였다. "마스'(역자주 : 오빠라는 의미로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쓰기도 함) !" 안네리스가 나를 그렇게 부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호칭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마치 내가 자바인 가족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편지가 세 통 있는데, 아직 읽지 않은 것 같군요. 왜 읽지 않았어요?" 모두가 내게 그 편지를 읽어 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 통이 모두 B에게서 온 거군요." "알아요. 나중에 읽죠." 안네리스가 펀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읽어 보세요. 중요한 편지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나는 편지를 침대의 베개 위에 내려 놓고,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우리들의 눈 앞에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그것은 넓지는 않았으나 아담했고, 몇 마리의 집오리가 헤엄치는 연못이 붙어 있어서 마치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연못가에는 돌로 만든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리 오세요."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양쪽이 초록빛 잔디로 둘러싸인 콘크리트의 좁은 길을 걸어갔다. 우리들은 돌 벤치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자바어로 얘기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다. 나는 그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로 그녀를 피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어도 좋아요." "우리들은 정말로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공부하느라고 바빴어요, 앤.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 "당신이라면 틀림없을 거예요." "고마와요, 내년에는 꼭 졸업을 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앤, 당신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안네리스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내게로 몸을 기대왔다.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누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죠?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정말이고 말고요." 나는 끌어안듯이 손을 그녀의 허리에 둘렀다. 안네리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알라 신이여 ! 당신은 이 새상에서 최고의 미녀를 내게 내려주신 거예요.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로베르트는 어디 갔죠?" 흥분을 달래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런 것은 물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오빠가 어디 있는지는 마마조차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꾸를 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느꼈다. "마마는 이미 오빠를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고 믿고 있어요." 안네리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요즈음은 오빠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어요." 나는 창백하고 밀랍 같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는 마마를 좋아하지 않아요. 나도 좋아하지 않지만요. 집에 붙어 있는 일이 좀처럼 없어요. 당신은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을 직접 봐서 알거예요."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나는 안네리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굉장하더군, 당신은." "고마와요, 마스." 그녀는 기쁜듯이 그렇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로베르트 오빠한테는 신경쓸것 없어요. 오빠는 쁘리부미의 모든 것, 쁘리부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제외하고는 쁘리부미의 전부를 증오하고 있어요. 마치 오빠는 마마의 아들도, 나의 오빠도 아닌, 어쩌다 우리집에 찾아든 이방인 같아요." 아무래도 로베르트의 일로 골치를 썩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그것을 확실히 읽을 수가 있었다. "투앙 메레마씨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 같군요."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파파 말인가요? 아직도 무서워하고 있나요? 그날 밤의 불쾌한 일은 용서하세요. 파파의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집에서 그 분은 완전히 남과 같아요. 일 주일에 한 번 돌아올까 말까 하는 형편이고 돌아와도 금방 나가 버리니까요. 가끔 돌아와서는 한잠 잔 뒤 다시 자취를 감추곤 하지요. 어디에 가는지는 몰라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과 일이 마마와 나의 어깨에 달려 있는 거예요."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가족인가? 여자 두 사람이 묵묵히 일하면서 가정을 꾸려 나가고, 그토록 큰 농장을 경영해 나가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투앙 메레마씨는 어디서 일하고 있지요?" "제발 부탁이니까 그 사람 일에는 신경쓰지 마세요.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본인이 병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우리들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과는 누구 한 사람 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린 상태가 벌써 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어요. 내가 자란 다음부터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었어요. 옛날에는 무척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지요. 매일 틈을 내서는 우리들과 놀아 주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 버렸어요. 며칠 등안 농장은 폐쇄되었어요. 그리고 마마가 울면서 학교까지 나를 데리러 와서 나를 학교로부터 영원히 떼어 놓았어요. 그날부터 나는 농장에서 마마의 일을 돕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파파는 일 주일이나 이 주일 만에 잠깐동안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했어요. 그 뒤 마마는 결코 파파에게 말을 하지 않았고, 파파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게 되었어요......" 불행한 얘기였다. "로베르트도 중도 퇴학을 했나요?" "내가 중퇴했을 때, 오빠는 7학년이었어요.,... 하지만 오빠는 중퇴는 하지 않았어요." "그 뒤 오빠는 상급 학교로 진학했나요?" "졸업은 했지만 진학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일을 할 생각도 없었고요. 축구와 사냥과 승마, 오빠는 그것밖에는 관심이 없어요." "어째서 마마를 돕지 않을까요?" "마마가 말하는데, 쁘리부미에게서 얻어지는 쾌락을 빼놓고는, 오빠는 쁘리부미를 아주 싫어한대요. 오빠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유럽인이 되어 모든 쁘리부미를 지배하는 것이 죄대의 관심사죠. 하지만 마마는 굴복하지 않았어요. 오빠는 농장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어하고 있어요. 사람은 모두, 마마도 나도 포함해서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오빠는 당신도 쁘리부미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나는 신중하게 물었다. 주저하지 않고 안네리스가 대답했다. "나는 쁘리부미예요. 놀라셨나요? 물론 나는 혼혈 쪽에 더 가깝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마마를 사랑하고 있고 믿고 있어요. 왜냐 하면 마마는 쁘리부미니까요." 완전히 수수께끼로 가득 찬 가족이다. 가족 하나 하나가 탐정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같았다. 많은 원주민이 네덜란드인이 되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데, 유럽인에게 더욱 가까운 모습을 가진 이 처녀는 오히려 원주민임을 주장하고 싶다고 한다. 안네리스는 얘기를 계속하고 나는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었다. "마마는 이렇게 말했어요. '로베르트, 네가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너는 이미 성인이니까, 네 아버지가 죽게 되면 변호사에게 가거라. 아마 이 농장 전부가 네 것이 될 테니까" 그리고 이런 말도 했어요. '하지만 너한테는 또 다른 합법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배다른 형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사람은 마우리츠 메레마라는 이름으로 직업이 기사란다, 너는 혼혈아에 불과하니까 네덜란드인에 대항할 힘은 없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이 농장 주인이 되어 훌륭하게 경영 해나갈 생각이 있다면 먼저 안네리스처럼 일하는 것부터 배워라. 너는 인부를 감독하는 것조차도 못하지 않느냐? 그것은 네가 스스로를 자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신을 자제할 줄 모른다는 것은 네가 일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지......." "저기, 저 집오리를 보세요. 솜처럼 하얗군요."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했으나 안네리스는 얘기를 계속했다. "왜 가족의 비밀을 나한테 얘기하는 거죠?" "그것은 지난 5년 동안에 당신이 우리들을 찾아온 첫손님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들의 손님, 가족의 손님, 물론 지금까지 몇 사람의 손님이 있었지만, 모두 사업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 뿐이었어요. 가족들의 손님이 한 사람 있기는 있지만, 그사람은 우리집 주치의예요.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손닙은 당신이 처음인 셈이에요. 게다가 당신은 스스럼 없고, 마마나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니까요." 안네리스의 목소리에는 쓸쓸한 울림이 깃들어 있었고, 어리광스러운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당신에게 털어놓고 있는 거예요, 마스. 당신도 우리 집에서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의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츰 감상적이고 대범해져 갔다. "마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당신 거예요. 이 집에서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좋아요." 막대한 재산에 둘러싸인 처녀와 그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외로왔을까? "자, 이제 좀 쉬세요. 나는 지금부터 일을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안네리스는 일어섰다.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망설이면서 내 뺨에 키스를 하고는 나를 혼자 남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안네리스는 얼마나 오랫동안 넘쳐 흐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 왔을까? 지금 용솟음쳐 나오는 그 감정의 흐름을 내가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주위에서 갖가지 소리가 들려 왔다. 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우유를 싣고 드나드는 마차 소리, 창고에서 창고로 물건을 나르는 침마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인부들이 도리깨질을 하며 땅콩 껍질을 벗겨내는 소리.....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노트를 펼치고 어면 우연으로 나를 그 속에 말려들게 한 이 기묘하고 을씨년스러운 가족의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장차 헤르토프 라모예의 화제작 "장미가 시들 때"와 같은 소설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누가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나는 "경매" 지에 짧은 기사와 광고문을 써 왔을 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당당하게 내 본명으로 써서 많은 애독자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네리스의 얘기 하나 하나를 써나갔다. 마두라의 칼잡이 다르삼에 관해서는 어떨까? 나는 아직 그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이 동떨어진 가족의 세 부류 가운데 도대체 다르삼은 누구 쪽에 속해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는 그들 모두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위험한 존재가 아닐까? 위헙 ? 위험은 정말 존재할까? 만일 있다고 한다면, 나 자신도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진짜로 위험이 있다면, 어째서 나는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이 집을 나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이곳을 나가는 것조차 내게는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신비스러운 안네리스의 매력이 내 마음을 시로잡고는 놓아 주지를 않는 것이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냐이 온트솔로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시뇨가 흔쾌히 와 줘서 안네리스와 나는 얼마나 기쁜지 도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덕분에 그 아이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예전의 쾌활함을 되찾았어요. 시뇨가 와 준 것은 사업의 윤활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안네리스에게 있어서 특효약이 되었어요. 그 아이는 시뇨를 사랑하고 있읍니다. 그 아이에게는 당신의 보살핌이 필요해요. 미안해요. 너무 일방적으로 이런 얘기를 해서." "알겠읍니다, 마마." 나는 우리 어머니 앞에 있을 때보다 더 맥을 못추는 것 같았다. 또 다시 냐이의 흑색 마술에 걸린 모양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 뿐이에요.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 줘요. 시뇨의 전용 마차와 마부를 준비해 두겠어요." "고맙습니다, 마마." "그럼, 여기 있기로 하는 거죠? 왜 잠자코 있지요? 그래요. 좀더 생각해 보겠다는 뜻인가 보군요. 서두를 것은 없어요. 지금 이렇게 시뇨가 이 집에 와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마마." 점점 나는 또 다시 그녀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됐어요. 그럼, 편히 지내도록 해요. 그리고 늦었지만 당신이 학교에서 무사히 진급할 수 있도록 마음 속으로 기원하겠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서서히 이 이상한 가족의 새로운 일원이 되어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해 두어야 할 게 있었다.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다르삼에 대해서는 그랬다. 그에게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자. 오히려 그에게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게 대하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베르트가 나를 가치 없는 쁘리부미로서 혐오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헤르만 메레마씨는 틀림없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안네리스 메레마라는 절새의 미녀 옆에 있는 행운의 대가로 짊어져야 할 내 문제니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인생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든 그것에 걸맞는 값을 지불하거나 보상하거나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짧은 순간의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저녁식사 때 로베르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헤르만 메레마씨의 그림자와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밍케, 만약 일에 흥미가 있어서 열심히 뛰어볼 생각이라면 여기서 우리들과 함께 일해 보면 어떻겠어요?" 냐이가 전천히 말을 꺼냈다. "우리들로서도 이 집에 남자가 있는 쪽이 안심이 되거든요. 신뢰할 수 있는 남자라는 의미지만요." "감사합니다, 마마. 생각해 보기 전에는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아직 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는 쟝 마레 일가의 사정을 설명했다. 냐이 온트솔로가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허물 없는 친구, 우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친구가 없는 생활은 너무 쓸쓸합니다......." 냐이의 말은 나에게보다는 오히려 그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안네리스에게 말했다. "자, 앤, 시뇨는 이제 네 옆에 있는 거야. 뜩똑히 보아 두거라. 더 무엇을 원하니 ?" "어머, 마마는 !" 안네리스는 조그맣게 소리를 지르고 나를 곁눈질했다. "너는 무슨 말만 하면 '어머, 마마 !' 밖에는 모른다니까. 자, 얘기해 보렴. 마마도 옆에서 듣고 싶구나." 안네리스 얻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냐이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런 식이라니까요. 이 아이는 꼭 어린애 같아요. 그런데 시뇨, 당신 쪽은 어때요? 안네리스 옆에 있는 소감이 어떻지요?" 이번에는 내가 우물쭈물하며 침묵을 지켰다. 물론 나는 안네리스처럼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냐이의 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움은 참으로 놀랄만했다. 그녀는 마치 타인의 마음 속을 엿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듯이 궤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째서 두 사람 모두 잠자코 있는 거죠? 비맞은 새끼 고양이처럼." 냐이는 자신의 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정말 그녀는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지처는 아니었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고등학교의 학생이다. 그러한 나에게 그녀는 털끝만큼도 끌리는 것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용기가 있고 자신의 인격적인 힘을 믿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들은 축음기로 오스트리아의 왈츠를 들으면서 지냈다. 무슨 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안네리스는 아무말없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메이 마레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메이는 좋아할 것이다. 그녀는 유럽 음악을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축음기는 그녀의 집에도, 내 하숙집에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녀의 일을 안네리스에개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운명, 그리고 쟝 마래의 친절함, 사려깊음, 순수함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냐이가 읽던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함께 내 얘기를 들어 주었다. 하녀가 축음기를 껐다. 나는 쟝 마래의 얘기를 계속했다. 언젠가 쟝은 그의 소대가 브랑 쿠제렌의 어면 마을에 대한 공격 명령을 받았었다고 말했었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전 9시경에 그 마을에 도착했다. 그둘은 일단 마을에서 훨씬 못미친 곳에서 적을 도망가게 하여 무익한 전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중을 향해 위협 사격을 한 뒤,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다시 한번 공중에다 대고 총을 쏘았다. 한참 있다가 그들은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마을에 들어갈 태새를 취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그의 소대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마을로 들어갔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들도 없었다. 병사들은 마을 안의 집으로 들어가 부술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20년 이상이나 계속된 전쟁 때문에 마올 사람들은 형편없이 가난했다. 병사들이 전리품을 가져가려고 해도 무엇 하나 가져갈 것이 없었다. 소대장인 데린하 하사는 집을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치에인이 개미떼처럼 멀리서 모습을 나타번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자도 여자도 있었다. 모두가 검은옷을 입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목소리로 그들은 '알라신'을 외쳤다. 몇 몇 사람은 빨간 어깨걸이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마을 안에서 젊은 아치에의 남자들 한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긴 칼을 빼들고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총은 니미 사용할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검은 개미떼 같은 무리도 차츰 가까와 왔다. 테린하 소대는 공격해 오는 젊은이들을 대부분 죽이기는 했으나, 큰 혼란에 빠졌다. 나머지 젊은이들은 도망쳤다.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안고 소대는 허둥지둥 마을을 빠져나갔다. 도중에 쟝 마레는 죽창을 장치한 함정속에 빠졌다. 날카로운 창끝이 그의 다리를 꿰뚫었다. 테린하 하가도 함정에 빠졌으나 경상으로 끝났다. 동료 병사가 쟝의 다리에서 죽창을 뽑아냈고, 쟝은 기절해 버렸다. 병사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밀려오던 개미 떼와는 별도로 또다른 아치에인이 공격을 가해올지도 몰랐으나 병사들에게는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치에인운 전략을 사용하는 데 능숙했다. 언제 갑자기 새로운 적이 나타날지 알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망가는 일뿐이었다. 데리고 돌아갈 수 있는 부상자는 데리고 돌아와 식민지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 15일 뒤 쟝 마레의 다리는 무릎 관절 부분을 잘라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몇 개월 전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지금 또 다시 자신의 무릎위를 절단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냐이가 말했다. "그 아가씨를 집에 데리고 오세요. 동생이 생기면 안네리스가 좋아할 거예요. 그렇지 앤? 아, 그렇겠구나. 동생은 필요 없겠지, 밍케가 있으니까." "어머, 마마는 ! " 안네리스가 수줍은 듯이 소리쳤다. 나도 안네리스처럼 망설이고 있었다. 여기서 질문을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비범한 부인 앞에서 인격을 가진 완전한 한 사람의 남자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으나, 그녀의 명석함 앞에서 그 시도가 번번이 꺾여 버렸다. 나의 인격은 냐이의 그늘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물론 그런 상태가 연제까지나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마마, 질문을 한 가지 하겠어요." 냐이의 그늘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마마는 어느 학교를 졸업하셨지요?" "학교?" 냐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닌 기억이라고는 전혀 없어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마마는 네덜란드어를 말하고 읽을 수가 있잖아요. 아마 쓸 수도 있을 겁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요?"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할까요? 인생은, 배우고 싶어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라도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우리 선생님에게나 누구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냐이라는 대단한 여성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녀가 현지처, 첩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펀견의 눈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또는 부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녀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즉 그녀가 현실적으로 하고 있는 일과, 그녀가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을 종합해서 냐이라는 여성을 보고 있었다. 고정관념 따위는 버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옳고 그름의 사리 판단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쟝 마레의 충고를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대단한 여성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만난 것은 냐이 온트솔로가 처음이었다. 쟝 마레의 얘기에 따르면, 아치에의 여인들에게는 전쟁터에 나가서 식민지 군과 싸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녀들은 남자들과 같은 참혹한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발리에서도 그랬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도 농촌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 중 누구도 마마와 비교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마마는 자신의 좁은 세계만이 아닌 넓은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쁘리부미의 여성 중에도 대단한 인물이 한 사람 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여학생이다. 그녀는 J의 부빠티의 딸로, 네덜란드어로 글을 쓰고 부타위의 학술 잡지에 글이 실린 최초의 쁘리부미 여성이었다. 첫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그녀는 열일곱 살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쓴 것이다. 학생들의 절반은 그 뉴스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단지 유럽인 국민학교를 나온 것뿐인 원주민, 그것도 아직 어린 소녀가 어떻게 유럽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써서 당당하게 발표할 수가 있으며, 더구나 학술잡지에 게재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었다. 또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더하기 위해서라도 믿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도 이미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아직 시험적인 단계이지만 어쨌든 나에게 글을 쓰도록 자극을 준 것은 그 쁘리부미 처녀였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그보다 오래 살아온 여성이 있다. 그녀는 그 부빠티의 딸과는 달리 글을 쓰지는 않지만 그 손아귀에 사람을 꽉 휘어잡아버리는 달인이다. 그녀는 또한 유럽식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아들과 내결하고 주인인 헤르만 메레마를 지배하고 자기 딸, 모든 남성의 동경의 대상인 미녀인 안네리스 메레마를 장래의 경영자로 만들기 위해 키워가고 있다. 나는 이 기묘하고 놀라운 가족에 대해 연구를 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글로 써 보고 싶다. 제 4 장 현 지 처 냐이 온트솔로, 이 놀라운 여성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몇개월이 지난 뒤에야 나는 안네리스로부터 어머니의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아래는 그때의 얘기를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마스,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당신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거예요. 누가 잊을 수 있겠어요? 나도 잊을 수가 없어요. 평생 잊어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 당신은 마마 앞에서 떨면서 나에게 키스를 해 주었어요. 나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죠. 마마가 끌고 가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계단위에 언제까지나 서 있었을 거예요. 그 뒤 마차가 당신을 내게서 빼앗아가 버렸어요. 당신의 키스는 뺨에 뜨겁게 느껴졌어요. 나는 방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어요. 아무 데도 달라진곳은 없더군요. 그날 저녁식사에는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후추가루가 약간 들어간 것밖에는.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화끈거렸을까요? 나는 몇 번씩이나 뺨을 문질러 보았어요. 그래도 여전히 화끈거리기만 했어요. 그리고 어느 곳을 보아도 반드시 당신눈과 마주치는 것이었어요. 나는 머리가 이상해지고 만 것일까? 어째서 당신만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어째서 당신 옆에 있으면 즐겁고 당신에게서 떠나면 외롭고 괴로운 것일까? 당신이 돌아가고 난 다음 어째서 갑자기 마음 속에 뻥 하고 구멍이 뚫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일까요 ? 나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촛불을 끈 뒤 침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어두워지니까 오히려 당신의 얼굴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었어요. 그날 오후처럼 당신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그러나 당신의 손은 없더군요. 나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몇번씩이나 고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어요. 몇시간이나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죠. 나의 가슴속에 두 개의 손이 있어서 내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손가락으로 자극하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어요. 나는 담요와 베개를 던져버리고 방을 나왔어요. 그때는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의 화끈거림은 사라져 버린 뒤였어요. 나는 노크를 하지 않고 마마의 방으로 들어갔어요. 언제나처럼 마마는 아직 자지 않고 있더군요.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책을 덮고는 돌아다보았어요. 그때 "냐이 다시마"라는 책의 제목이 얼핏 보이더군요. "무슨 책이죠, 마마?" 마마는 책을 서랍 속에 집어 넣었어요. "왜 아직 자지 않는 거냐?" "오늘 밤은 마마와 함께 자고 싶어요." "이렇게 커서도 아직 엄마와 같이 자겠다니 ! " "부탁이에요, 마마." "먼저 들어 가서 누워 있거라." 나는 침대에 들어갔어요. 마마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단속하고 왔어요. 그리고는 문을 잠그고 모기장을 내린 다음 촛불을 껐어요. 그러자 방안이 아주 캄캄해졌지요. 마마 옆에서 나는 당신에 대해서 마마가 어면 말을 해줄까 하고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네리스." 마마는 다정하게 입을 열었어요. "어째서 혼자 자는 것이 무섭지 ? 너도 이제 어른이 아니냐 ?" "마마, 지금까지 마마는 행복할 때가 있었어요?" "누구나 한번은 행복한 때가 있는 법이란다. 그것이 아무리 잠깐 동안이고 작은 행복이라 할지라도." "지금도 마마는 행복하세요?" "그런 것은 모른다. 현재의 마마에게 있는 것은 불안 뿐이란다. 그리고 단 한가지 희망은. 하지만 그것은 네가 묻고 있는 행복이라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 마마가 행복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아. 내가 걱정하는 것은 너의 일이다. 네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이 눈으로 보고 싶구나....."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해 왔어요. 마마를 끌어안고 어둠속에서 키스를 했어요. 언제나 마마는 나에 대해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해주시거든요. 마마 이상 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앤, 너는 마마를 사랑하고 있니 ?" 그 질문에 나는 눈물이 쏟아질 뻔했어요. 마마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처음으로 마마는 언제나 엄한 분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 마마는 네가 영원한 행복올 붙잡는 것을 보고 싶단다. 옛날의 마마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지는 않아.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조차 없는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가 않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행복이라는 얘기를 꺼냈니 ?" "그건 묻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마마." "앤, 너는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는지 몰라도 지금까지 마마는 너를 엄하게 키워 왔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앞으로 만에 하나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빌고 있지만-- 남편이 네 아버지처럼 되었을 때, 남편에게 의지 하지 않아도 되도록 너에게 일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단다." 나는 마마가 파파에 대한 존경심을 완전히 잃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나는 마마의 그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볼 필요는 없었죠. 게다가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얘기가 아니었거든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마마도 옛날에 느낀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알고 싶었던 거예요. "마마가 무척 행복하게 생각한 것은 언제예요?" "투양 메레마, 즉 네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뒤 몇년동안은 그런 행복이 계속되었단다." "그리고 나서는요?" "네가 학교를 중퇴할 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니 ? 그때가 행복의 종말이었단다. 이제 어른이니까 당연히 너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너도 알아 두어야 한다. 지난 몇주일 동안 너한데 얘기해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하지만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졸립지 않니." "열심히 듣고 있어요, 마마." "옛날에 아직 네가 무척 어릴 때의 일인데, 파파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단다.....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자기 딸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엇이든 다 얘기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 "그때는......" "그렇다, 앤. 그때는 파파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존경하고 있었지. 똑똑히 머릿 속에 새겨두고 삶의 지표로 삼았었단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사람이 변해서 옛날의 그가 아닌 정반대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단다. 그래, 그때부터 마마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거야." "마마, 그때까지의 파파는 현명한 사람이었나요?" "현명할 뿐만 아니라, 다정한 사람이었단다. 농업, 사업, 축산, 사무실의 업무 같은 것을 마마에게 가르쳐 준 것은 파파었어. 처음에는 말레이어의 회화, 다음에는 읽고 쓰기. 그것이 끝나자 네덜란드어도 가르쳐 주었단다. 파파는 단지 가르칠 뿐만이 아니라 가르친 것을 모두 실생활에 이용하게 했다. 파파와 애기를 할 때는 반드시 마마에게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게 했단다. 그리고 은행과의 관계, 변호사의 이용법, 거래상의 관계, 지금 마마가 너한데 가르쳐 주려고 하는 모든 것을 파파가 가르쳐 주었단다." "어째서 파파는 그렇게 갑자기 번했지요?" "그것에는 원인이 있었단다, 앤. 무슨 일이 일어났었단다. 그때부터 다정함도, 총명함도, 지혜도, 힘도,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어. 그 하나의 사건으로 파탄을 일으키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렸단다. 몰라보게 사람이 달라지고 자식도 아내도 잊어버린 동물이 되고 말았지." "불쌍한 파파." "그래, 가정을 마다하고 정처없이 나다니게 되었단다." 마마는 거기서 얘기를 중단했어요. 마마의 얘기는 마치 나의 미래에 대한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어요. 주위는 점점 조용해지고 들리는 것은 우리들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어요. 만일 파파에 대해서 마마가 그토록 심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마마에게서 여러 번 얘기를 들었어요--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가 없어요, 아마 나쁜 일, 내가 상상할수 있는 것 보다 훨썬 더 나쁜 일이 일어났을 거예요. "처음에 마마는 파파를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생각했었단다. 하지만 망설였지.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세상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보겠니 ? 네 아버지가 정신병자라는 것이 밝혀져 법원에서 금치산자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사업도 재산도 가족도 모조리 법원이 임명한 관리인 밑에 놓이게 된단다. 마마는 원주민 여자니까, 재산에 대해서는 일체의 권리가 없고, 너를 위해서도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게 되는 거야. 우리들이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뼈가 빠지도록 일해서 쌓아올린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거야. 법원은 내가 원주민이고 법률에 정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친권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마마가 너를 낳은 것도 무효가 되는 거란다. 알겠니, 앤 ?" "마마 ! " 나는 조그맣게 외쳤어요. 마마가 직면한 어려움이 그토록 큰것이라고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뿐만 아니라, 너의 결혼에 대한 승인까지도 어머니인 내가 아니라 생판 모르는 그 관리인한테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거야. 파파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법원의 관리를 받는다면, 파파의 상태를 온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고, 앤, 네 운명은......그런 일은 절대로 할수가 없다 !" "하지만 내가 왜 ?" "모르겠니 ? 네가 정신병자의 딸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지 ? 너와 마마는 어떻게 되겠니 ?" 나는 병아리처럼 마마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어요. 나 자신의 입장이 그 정도로 악화하고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거든요. "네 아버지가 정신병자가 된 것은 결코 유전적인 것은 아니란다." 마마는 나를 납득시키려는 듯이 말했어요. "어떤 불행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그렇게 된 것이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그 내막은 잘 알지도 못하고, 네게도 아버지와 같은 정신병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을 거야." 나는 소름이 끼쳤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파파를 방치해 온 거린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나는 모두 알고 있단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좋은 거야." 나는 파파가 가엾어져서 차츰 내 문제는 잊어가고 있었어요. "마마, 부탁이니까 내게 파파의 시중을 들게 해 주세요." "네 얼굴 같은 것은 벌써 잊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파파잖아요?" "안된다. 동정이라는 것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밖에는 통하는 것이 아니란다. 너야말로,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가진 너야말로 더 많은 동정을 받아야 하는 거야. 앤, 알겠니 ? 그 사람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린 사람이야.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너의 인생은 파멸해 가는 거야. 그 사람은 이미 선악의 구별을 할 수 없는 동물이 되어버렸단다. 더 이상 사람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더 이상 묻지 말아다오." 나는 즘더 알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어요. 마마가 이토록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무리하게 조르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나는 다른 사람들의 모녀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어요. 마마와 나는 어느 쪽도 친구나 친지가 없었어요. 우리들의 생활은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 고객에 대한 장사꾼 같은 것으로서, 사업 관계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집과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다른 혼혈아들은 어떤지 그것도 나는 몰랐었어요. 마마는 내가 교제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는 시간 여유도 주지 않았어요. 마마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힘이고 권위였거든요. "네가 정신착란자의 딸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것을 너도 충분히 이해를 하고 평생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마마는 문제를 결론지었어요. 그로부터 우리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어요. 마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머릿 속에 그리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거든요. 내 가슴 속에서 조금 전의 손가락이 다시 자극을 주기 시작했어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마마는 여전히 당신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과연 마마는 내 말을 찬성해 줄까요? 아니면 반대를 할까요? 아니면 당신은 다만 사업상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뿐일까요. 그곳에는 당신만이 있을 뿐 어둠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는 마마의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끝내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마마에게 졸랐어요. "마마, 어떻게 파파와 만나고 어떻게 파파와 살아 왔는지 얘기해 줘요." "그래, 그 일은 너도 알아두는 게 좋겠다. 하지만 충격은 받지 않도록 해라. 젊었을 때의 마마와 비교하면, 너는 아직 철이 없고 선택받은 아이니까. 그럼 얘기를 시작할 테니 잘 들어 둬라." 그렇게 해서 마마는 얘기를 시작했어요. 나에게는 오빠가 한 사람 있었단다. 파이망이라는 이름이었다. 오빠가 있었지. 나는 세 살 아래로, 사니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아버지의 이름은 사스트로토모라고 했단다. 이웃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이름은 '우수한 서기 (書記)'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근면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단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읽고 쓰기를 할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서기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미 삽이나 괭이로 밭을 갈거나 노동을 하거나 사탕수수를 심거나 거두어들일 필요도 없었고, 충분히 존경을 받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좀더 높은 지위를 꿈꾸고 있었던 거란다. 아버지에게는 동생과 사촌 형제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서기의 지위로서는 그들을 모두 공장에 취직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좀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면 그런일도 간단하고, 게다가 세상사람들의 눈에도 자신이 좀 더 훌륭해 보일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던 거란다. 더구나 아버지는 친척들이 단순한 쿠리나 최하층의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최소한 인부 반장으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지. 인부 반장의 동의만 있으면 누구든지 채용될 수 있는, 쿠리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구태여 집안에 서기가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고,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 갔다. 그 동안 급료는 물론 점점 더 높아졌지만 지위는 여전히 옛날 그대로여서 승진의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도에다 푸닥거리, 점, 월요일과 목요일의 단식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았지만 그것도 효과가 없었단다. 아버지가 꿈꾸고 있던 지위라는 것은 금고지기, 즉 시드아르죠의 투랑강 제당 공장의 출납계였다. 제당 공장의 출납계라고 하면 모든 곳을 관할하는 부서로서 그것과 관계 없는 사람은 없을게다. 예를 들면 인부 반장에게 있어서 출납계는 절대적인 존재였단다. 돈을 타기 위해 그들은 출납계에 가서 모인을 찍는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하인 쿠리들의 봉급을 타가는데, 만일 그들이 쿠리의 봉급에 부과되는 새금을 거부하는 경우, 출납계는 그 인부반에 지불하는 임금을 차압할 수가 있었다. 또 제당 공장의 출납계로서 투랑강의 유력자가 될 수도 있었단다. 장사꾼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 순종과 혼혈의 신사들은 말레지아어로 인사를 하고. 아뭏든 출납계의 글자 하나가 돈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공장내에서는 실력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게된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손에서 돈을 받기 위해 "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시오" 하는 아버지의 말에 잠자코 순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그토록 노력해서 손에 넣은 것은 승진도 명예도 존경도 아니었단다. 오히려 사람들의 증오와 반감을 사기에 이르렀던 거란다. 출납계의 지위는 여전히 그림의 떡에 불과했던 거야. 아버지는 네덜란드인 상사의 환심을 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그려한 아첨은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자신의 사회 속에서 아버지는 고립되어 버렸던 거다. 그려나 아버지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단다. 아버지는 일단 결심을 하면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분이었지. 흰 피부를 가진 신사들의 호의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는 흔들리지를 않았어. 사람들은 네덜란드인 상사를 어떻게든 자기 집에 초대하려고 아버지가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했단다. 그러한 상사들이 한두 사람 우리집을 방문하면, 아버지는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대접을 다했단다. 그러나 그렇게 해 보아도 역시 출납계 자리는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았단다. 드디어 아버지는 기도사를 이용하여, 자신도 금욕의 고행을 행함으로써 최후의 목표인 제당 공장의 지배인에게 마법을 걸어서 자기 집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효과가 없었단다. 그래서 거꾸로 아버지는 자기쪽에서 자주 지배인의 집을 찾아다녔단다. 물론 어떤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찾아가는 것은 아니었지. 다만 뒤뜰에서 잡일을 돕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지배인은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던 거란다. 아버지에 대한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은 나로서는 퍽 괴로운 일이었다. 때때로 아버지의 모습을 몰래 엿보고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아버지는 자신의 꿈에 얼마나 몸과 마음이 시달렸겠니 ? 얼마나 자신을 욕되게 하고,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겠니 ?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할 용기가 없었단다.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그러한 수치스러운 행위를 그만두도록 마음 속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자주 얘기했다. 알라신에개 기도를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하물며 백인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내가 아버지를 위해 기도한 것은 아버지가 출납계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단다. 수치스러운 행위를 깨닫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어. 그때 나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힘이 없었다. 다만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나 나의 기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단다. 지배인은 새로 동인도에 은 순수 유럽인의 전례처럼 독신이었다. 나이는 아마 아버지보다 위였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의 얘기로는 아버지는 언젠가 그 지배인에게 여자를 제공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제의를 거절하고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아버지를 욕하고 파면시키겠다고 협박했다는 거다. 그 이후, 아버지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단다. 어머니는 사람들의 놀려대는 소리를 듣고 차츰 몸이 마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지. 어쩌면 사스트로토모는 언젠가는 자기 딸까지 제공하지 않겠느냐고. 그 딸이란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단다. 그 말을 듣고 내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틀림없이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그 이후 나는 무서워서 두번 다시 집 밖에 나가지 않게 되었단다. 하루 종일 겁먹은 눈으로 응접실 쪽을 바라보며 백인 손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걱정하고 있었단다. 다행히도 손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네덜란드인 직원과는 달리, 지배인은 파디나 연회 같은곳에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단다. 매주 일요일에는 시드아르죠의 거리에 나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것이 습관이었지. 아침 7시면 말이나 마차로 외출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단다. 나도 먼 발치에서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열세 살 때에 나는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과 내 방밖에는 모르는 생활을 보내게 되었단다. 친구들은 대개 시집을 갔다. 어릴 때처럼 집 밖에 나가 있는 것처럼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웃 사람이나 친척이 찾아왔을 때뿐이었다. 힌관 옆의 베란다에 나가 앉는 것도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단다. 베란다의 마루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단다. 공장 일이 끝나고 직원이나 인부들이 돌아갈 무렵에 사람들이 우리집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넘겨다 보는 것을 나는 집 안에서 자주 볼 수가 있었지.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단다. 우리 집을 찾아오는 여자 손님은 한결 같이 나를 아름다운 처녀, 투랑강의 꽃, 시드아르죠의 미녀라고 칭찬을 해 주었거든. 실제로 내가 거울에 비춰 보아도, 그녀들의 칭찬을 부정할 이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잘 생긴 분이었어, 이름은 모르지만 어머니도 미인으로, 깔끔하게 몸단장을 하시는 분이었단다. 흔히 그렇듯이 아버지는 두세 명의 아내를 둘 수도 있는 처지였단다. 공장에 임대해 주고 있는 토지 외에도 남에게 경작시키고 있는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어. 미인 아내 한 사람으로 만족하고 있었단다. 제당 공장의 금고지기, 출납계, 장래 가장 존경받는 쁘리부미가 되는 것만이 아버지의 꿈이었단다. 열네 살이 되자, 세상 사람들은 나를 노처녀 취급을 했단다. 그 2년 전부터 나는 벤스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따돌림을 받았지만 나를 아내로 달라는 혼담은 자주 있었거든. 아버지는 그것을 모조리 거절했다. 나도 그런 얘기가 오가는 것을 내 방에서 몇번인가 들은 일이 있단다. 어머니는 다른 쁘리부미 여성과 마찬가지로 발언권이 없었어. 모든 것을 아버지가 결정하고 있었단다. 언젠가 어머니가 도대체 어떤 사위를 원하고 있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단다. 나는 어떤 사위감이 아니면 안된다고 결정할 생각은 없단다. 정하는 것은 앤, 바로 너, 자신이니까. 나는 다만 의논 상대가 될 뿐이지. 어쨌든 지금 얘기한 것이 내가 놓여졌던 상황, 당시의 젊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그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남성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집에서 데리고 가는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단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자신은 대체 몇번째 아내인지, 첫번째 첩인지 네번째 첩인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단다. 내 경우도 아버지 한 사람만이 결정권을 갖고 있었단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기가 첫번째 첩이고 그 위에 아내가 한 사람뿐이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그것은 제당 공장 등이 있는 지역 사회에서는지극히 드문 일이었단다. 그것만이 아니었지. 상대방 남성이 젊은 사람인지 늙은 사람인지조차 우리들은 미리 알 수가 없었단다. 일단 맺어지고 나면 여자는 그 만난 적도 없는 남자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섬기지 않으면 안되었어. 그것은 평생, 그녀가 죽든가 남자 쪽에서 싫증을 느껴 내쫓기든가 할 때까지 계속되는 거란다. 달리 선택의 길은 없었단다. 상대방 남자가 범죄자나 도박꾼이나 술주정뱅이인 경우도 있었단다. 아내가 되기 전까지는 그것은 아무도 모른단다.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단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단다. 문제의 지배인이 우리집에 나타났다. 나는 불안을 느꼈단다. 아버지는 안절부절 못하며 어머니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지시하고 너무나 당황해서 일단 명령을 내린 다음에 또 다른 지시를 내려서 취소하는 형편이었어. 아버지는 나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도록 명하고, 한 번인가 두 번 내가 옷을 차려 입는 모습을 보러 왔단다. 역시 사람들의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머니는 나 이상으로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아직 아무 일도 없는데 부엌 구석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코코아와 과자를 들고 나오라고 명했다. 아버지는 이미 커피를 끓이라고 했었는데,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단다. 나는 쟁반에 코코아와 과자를 얹어 응접실로 들고 나갔다. 지배인이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양가집 규수가 가족과 그다지 가깝지 않은 남자 손님 앞에서 눈이나 얼굴을 드는 것은 실례였단다. 상대가 백인인 경우에는 특히 더 그랬었지.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쟁반에 얹은 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바지는 자연히 눈에 들어오더구나. 흰 바지였다. 구두도 보이더구나. 크고 긴 구두로, 지배인은 키가 크고 몸집이 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손과 목덜미에 지배인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이 아이가 내 딸입니다, 지배인 나리." 아버지는 말레지아어로 그렇게 말했다. "벌써 시집갈 나이로군." 그 목소리는 마치 가슴 전채에서 울려나오듯이 크고 무겁고 깊은 소리였다. 자바인으로서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단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새로운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명령은 내리지 않았어. 얼마 뒤 지배인과 아버지는 함께 집을 나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사흘 뒤 점심을 끝낸 일요일 오후, 나는 아버지한테 블려 갔다. 아버지는 거실에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만두세요, 여보. 제발 부탁이에요." 어머니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야, 네 물건과 옷들을 모두 네 엄마의 트렁크에 챙겨 넣어라. 그리고 예쁘게 차려 입어라."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단다. 특히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방으로 돌아은 뒤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격하게 항의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대를 하지 않았다. 나는 옷과 물건들을 남김 없이 트렁크에 담았다. 다른 집 처녀들에 비해 나는 옷을 많이 갖고 있었고, 값나가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단다. 바티크 사롱이 여섯 벌 이상 있었고, 그 가운데는 내가 직접 만든 옷도 있었단다. 나는 여기저기 찌그려진 낡은 갈색 트렁크를 들고 방을 나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까와 같은 자리에 아직도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기를 거부했다. 그뒤 우리 세 사람은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네 집을 잘 보아 두거라, 사니켐. 오늘이 지나면 여기는 네 집이 아니란다." 나는 아버지가 말하려고 하는 뜻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우리 집에서 쫓겨나고 있는 것이었단다. 나도 울었다. 마차는 지배인의 집앞에서 멈추었다. 우리들 세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는 나를 위해 아버지다운 일을 해 주었단다. 나의 트렁크를 들어다 준 거야. 나는 주위를 돌아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방에 수천 개의 눈이 있어서 우리들 세 사람을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구나. 그 돌로 지은 집의 계단 위에 나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했던 여러 가지 생각과 궁리들이 나의 무거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몸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마치 내 몸은 경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단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끝내 지배인의 집으로 끌려갔던 거란다. 세상 사람들의 야유와 비난이 현실이 돼버린 거지. 앤, 나는 서기 사스트로토모를 아버지로 가진 것을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는 나의 아버지라고 말할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단다. 하지만 나는 그의 딸로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단다. 어머니의 눈물도 하소연도 개난을 막을 수는 없었단다. 하물며 이 새상 물정도 모르는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단다. 내 몸조차도 내것이 아니었단다. 지배인이 나오더구나. 그는 웃고 있었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국인다운 태도로 우리들에게 들어오라고 권했다. 전에 구두를 보았을 때부터 대충 침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몸집이 큰 줄은 몰랐다. 나는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단다. 아마 체중이 아버지의 새 배는 될 것 같더구나. 붉은 얼굴에 코는 높고, 자바인 서너 명을 합한 크기와 같은 몸집이었다. 팔뚝의 피부는 도마뱀처럼 거칠거칠하고, 누런 털이 수북이 나 있었다. 나는 이를 깨물고 점점 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단다. 그의 팔은 나의 다리통만큼 크더구나. 이렇게 해서 내가 이 도마뱀 피부를 가진 백인 거인에게 넘겨진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던 거란다. 똑바로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고 나는 조그만 소리로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단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모든 악마와 도깨비가 나를 포위해 버렸단다. 지배인의 권유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들 세 사람 맞은편에 지배인이 앉았다. 그는 말레이어로 말했다. 나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단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모든 사물들이 바다에서 떠올랐다가는 다시 빠져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배인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또한 그는 같은 주머니에서 뭔가 씌어진 종이 한 장을 꺼내자 그것에 아버지가 사인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봉투에는 나를 그에게 넘겨준 사례비로 25길더가 들어 있었다. 또 종이에는 2년 간의 시험 기간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를 출납계로 등용하겠다는 약속이 씌어 있었던 거란다. 앤, 그것이 바로 서글픈 의식, 한 소녀가 자기 아버지에 의해 팔려 가는 의식이었단다. 딸을 판 사람은 서기 사스트로토모, 팔린 딸은 바로 나 사니켐이었단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러한 나의 생각은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든, 그리고 누구든 가릴것없이 자식을 팔아버린 사람에 대하여 바뀔 턱이 없었단다. 나는 언제까지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 줄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고, 어머니는 나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이냐.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니켐, 지배인님의 허락 없이는 너는 이 집에서 나가서는 안된다. 지배인님과 나의 히락 없이 집에 돌아와서는 안된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단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되었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고 왔던 마차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의자에 남겨진 채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불안에 몸을 떨고 있었단다. 세상이 새까맣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나의 시선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송하고 들어오는 지배인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내 트렁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아끌며 일어서도록 명했다. 나는 몸이 떨렸다. 일어설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명령에 반항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일어설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나의 사롱은 젖어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두 다리의 경련이 멈추지 않았고, 마치 뼈와 근육이 관절에서 퉁그려져 나간 것 같았다. 그는 낡은 베개처럼 나를 안아 올리더니 소중한 듯이 방안으로 옮겨가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내려놓았다. 앉아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누운 채로 있었다. 아마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눈만은 아직 방 안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가 있었단다. 지배인은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은 내 트렁크를 열고 옷들을 커다란 옷장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트렁크를 천으로 닦아서 찬장 밑 부분에 집어넣었다. 그는 다시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말레이어로 말했다. 그의 숨결이 얼굴에 느껴졌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 거인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그는 나를 안아 올려 마치 나무 인형처럼 끌어안은 채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젖은 사롱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입술이 뺨과 입술에 와 닿았다. 내게는 울 만한 용기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용기도 없었단다. 은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타일 마룻바닥에 나를 서게 했으나, 내가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나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안아올려 끌어 안고 키스를 했다. 그때는 뜻을 몰랐지만,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사랑스렵고 사랑스러운 여인, 나의 인형, 사랑스러운 여인." 그는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떨어지는 나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듯이 나를 흔들어댔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또 한번 그는 나를 마루에 서게 했다. 나는 비틀거렸고 그가 넘어지지 않게 부축을 해 주었다. 그래도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는 내 옆으로 와서 손가락으로 내 입을 열고 이를 닦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는 집 뒤곁에 있는 욕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칫솔이라는 것을 보고, 그 사용법을 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단다. 내가 이 닦기를 끝낼 때까지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잇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 다음, 그는 몸짓 손짓을 섞어 목욕을 하고 향기가 나는 비누로 몸을 잘 문지르라고 명했다. 우리 부모의 명령처럼 나는 그의 명령에 온순하게 따랐다. 그는 샌들을 들고 욕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목욕이 끝나자 자기 손으로 내 발에 신겨 주었다. 깜짝 놀랄 만큼 크고 무거운 가죽 샌들이었다. 샌들을 신는 것도 나로서는 생전 처음이었단다. 그것이 끝나자 그는 나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방으로 데려가서는 거울 앞에 앉게 했다. 그리고 내 머리칼을 한 장의 두터운 천 --나중에 그것이 타올이라는 것인 줄을 알았다-- 으로 가볍게 문지른 다음 기름을 발라 주었다. 매우 좋은 냄새가 났으나 무슨 기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나의 머리를 빗으로 빗겨 준 것도 그였다. 다음으로 지배인은 옷을 갈아 입도록 명하고 나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이미 혼이 나가서 마치 인형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갈아 입는것이 끝나자, 그는 내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에 루즈를 발라 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두 명의 하녀를 불러 지시했다. "이 냐이를 잘 모셔야 한다." 앤, 이것이 나의 '냐이'(현지처)로서의 첫날이었단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때는 이미 자상하고 다정스러운 그의 태도 덕분에 나의 공포심도 어느 정도 엷어져 있었다. 하녀에게 지시 한 다음, 지배인은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두 명의 하녀는 현지처가 되다니 재수가 좋은 여자라고 비꼬듯이 나를 보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또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 집과 이 집의 규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보호를 청하면 좋을까? 도망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생각하자 도망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대단히 큰 힘, 아버지보다도 투랑 강의 어떤 쁘리부미보다도 더 큰 힘을 지닌 인물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두 명의 하녀는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들은 5분 간격으로 방문을 노크하면서, 이것을 하면 어떠냐 저것은 소용 없느냐 하고 귀찮게 굴었다. 나는 방 안 물건에 일체 손을 댈 용기가 없어서 벙어리처럼 잠자코 마루 위에 앉아 있기만 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무서워서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것을 산송장이라고 부를 것이다. 밤이 되자 지배인이 돌아왔다. 무거운 구두 소리가 들리고 그는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전율했다. 온통 흰색으로 차려 입은 그의 양복이 하녀가 저녁때 켜 놓고 간 램프빛에 반사해서 눈부시게 보였다. 그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룻바닥에서 나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이 두려워 나는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그 거대한 몸집을 가진 남자가 몇 시간 동안이나 나와 함께 있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실신해버린 것이다. 안네리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단다. 의식을 회복하자, 나는 곧 이미 자신이 어제까지의 사니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락없이 현지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 지배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단다. 그의 이름은 헤르만 메레마였다. 앤, 너의 파파, 네 아버지였단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니켐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단다. 엔, 벌써 잠들었니 ? 아직 깨어 있었구나. 왜 내가 너한데 이런 애기를 하는지 알겠느냐? 그것은 내 딸이 그런 저주받을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너는 제대로 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네 자신의 의지로 결혼해야 한다. 너는 내 자식이다. 내 자식이 소나 말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나는 허용하지 않겠다. 내 자식만은 누가 아무리 큰 돈을 가져와도 결코 팔지 않는다. 마마는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내 자식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싸울 것이다. 옛날에 나의 어머니는 나를 지켜 줄 수가 없었단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란다. 내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현지처로서의 생활은 참으로 쓰라린 것이었다. 현지처는 팔려 간 노예에 지나지 않고, 하는 일이란 주인을 만족시켜 주는 일뿐이란다. 모든 면에서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한편으로는 언제 어느 때 주인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식, 비합법직인 부부 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쁘리부미의 사회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식을 안고 쫓겨나야 하는 거란다. 두번 다시 부모와는 만나지 않겠다. 집에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나는 마음 속으로 맹세했단다. 부모님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 굴욕적인 사건은 돌이켜 보고 싶지도 않았단다. 그들이 나를 이와 같은 현지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현지처, 팔려간 노예가 된 이상,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노예, 최고의 현지처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인의 뜻에 따라 나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말레이어, 침대와 집안의 정리, 유럽식 요리 등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려고 했다. 그래, 앤, 나는 부모에게 복수를 하려고 생각했단다. 그들에게서 아무리 가혹하게 버려졌고, 설사 현지처로 전락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보다 가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일년동안 지배인 헤르만 메레마의 집에서 지냈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집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산책을 나간 적도 손님과 만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었겠니? 게다가 나 자신도 세상 사람 대하기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아는 사람이나 이웃 사람들과 일굴을 마주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부모를 가진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그 때까지 있던 하인을 모두 내보냈다, 모든 집안 일은 내가 혼자 도맡아서 하기로 했다. 현지처로서의 내 생활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의 의지를 갖지 못한 무가치한 천박한 여자, 나에 대해서 그러한 소문이 떠돌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몇번인가 상황을 보러 왔다. 나는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의 아내도 한번 찾아왔으나 나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헤르만 메레마는 한번도 나의 행동을 비난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또 그는 무엇이든지 배우려고 하는 나를 대단히 아껴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껴 줘도 상처를 받은 나의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너의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내게는 타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결코 파파에게 몸을 기대거나 매달리거나 하지 않았단다. 어디까지나 타인, 나를 버리고 투랑 강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언제 어느 때 네덜란드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르는 사람, 나는 항상 그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러한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나 자신에게 준비를 시키고 있었단다. 그가 없어진 지금에도 나는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근검절약하는 것을 배우고 돈을 저축하기로 했다. 파파는 생활비의 용도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간섭한 적이 없었다. 다달이 필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 시드아르죠나 슬라바야까지 사러 나갔단다. 일 년에 백 길더 이상을 저축할 수가 있었다. 어느 날엔가 헤르만 메레마가 귀국하거나 나를 쫓아내거나 해도, 나는 슬라바야로 가서 어떤 장사라도 시작할 만한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헤르만 메레마와의 생활이 일 년 지났을 때, 그는 회사와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는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투랑강에 온뒤부터 그는 계속 호주산 젖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나도 그 사육법을 그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밤에는 네덜란드어의 회화, 읽고 쓰기, 작문을 배우고 있었다. 우리들은 슬라바야로 옮겨 가서 우노크로모에 넓은 토지를 구입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이곳이 바로 그 땅이란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개간이 되지 않고, 덤불만 무성한 들판으로 곳곳에 원시림이 있었단다. 그곳에 소를 옮겼다. 그 무렵 마마는 생활이 즐거워지고 행복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내게 신경을 썼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묻고 상의를 했단다. 서서히 나는 그와 동등한 감정을 갖기 시각했단다. 오래 된 친지와 만나야 할 때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일년 동안에 내가 배운 것과 이룩한 것들이 나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거란다.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준비를 해 둔다는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자바의 여성, 그것도 당시의 나와 같은 젊은 처녀가 자존심에 관해서 운운한다는 것은 물론 어울리지 않는 얘기지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앤, 네 아버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자존심의 의미를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집을 옮긴 뒤에도 몇 번이나 내 아버지가 찾아왔으나, 나는 완강하게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아버지를 만나 보지그래?" 언젠가 헤르만 메레마가 나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든 네 아버지임에는 틀림이 없는 거야." "분명히 아버지는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 일이에요. 지금의 나에게는 아버지는 없읍니다. 만일 그사람이 주인님의 손님이 아니었다면 벌써 좇아냈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그 사람과 만나야 한다면 차라리 이곳을 나가는 편이 더 낫겠어요." "네가 나가면 나는 어떻게 되지 ? 소들은 어떻게 되고 시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소의 시중 정도는 사람을 고용하면 됩니다." "그 소들을 부릴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는걸." 그러한 응수를 통해서 현실적으로 나는 헤르만 메레마에게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은근히 비쳤단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모든 문제의 결정을 내가 하기로 했단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공부에 관한 것 이외에는 내게 무엇을 강요한 일이 없었단다. 배우는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엄하기는 하지만 좋은 선생님이었고 나는 고분고분한 착한 학생이었다. 그에게서 배우는 모든 것이, 장차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 나와 내 자식들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마마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스트로토모 서기에 대해서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팔아먹은 그 서기는 메레마를 통해서 몇번인가, 만일 직접 만나는 것이 싫다면 편지라도 한통 보내 달라고 내게 전갈을 보내 왔다. 나는 그것도 거부했다. 이미 나는 말레이어로도 네덜란드어로도 훌륭하게 편지를 쓸 수가 있었으나, 비록 한 줄이나 두 줄이라도 절대로 싫었던 것이다. 몇 번씩 반복해서 사스트로토모는 편지를 보냈으나 나는 한 통도 읽지 않고 그때마다 돌려보냈다. 어느 날 부모가 함께 우노크로모로 찾아왔다. 내가 완강하게 만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헤르만 메레마는 난처한 입장에 빠져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두 사람은 나를 만나개 해 달라고 조르고 어머니는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나에 대해서는 둥지에서 떨어진 달걀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미 깨져버린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달걀 탓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나와 부모 사이의 문제는 끝났단다. 앤, 어째서 마마의 팔에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게냐? 나는 너를 사업가, 장사꾼으로 만들기 위해 키워 왔단다. 모든 일에 감정을 내세워 그것에 연연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들의 세계는 손실과 이익으로 성립되어 있는 거란다. 마마의 태도에 너는 틀림없이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닭들조차도 적에게서 자기 새끼를 지키는 것이다. 암탉이라면 더더구나 자기 새끼를 지키려고 필사적이 될 것이다. 설사 하늘로부터 습격해 내려오는 매가 상대라도 그들은 싸울 것이다. 나의 부모가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도 마마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취해도 좋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네가 스스로 설 수 있을 때의 얘기인 것이다. 메레마는 그 뒤 또 소를 사들였단다. 그것도 역시 호주에서였다. 일은 점점 더 늘어나고, 인부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농장의 관리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그는 내게 맡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인부들에게 지시를 하는 것이 무섭기만 했는데, 그가 조언을 해주었다. 인부들이 일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이고, 그들을 부리는 것은 바로 나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메레마 총감독 밑에서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생님으로서는 여전히 엄하고 사려가 깊었다. 그러나 한번도 나를 때린 일은 없었다. 한번이라도 맞았다면 아마 뼈가 박살이 났을 테지만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나는 서서히 그의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어 갔다. 메레마 자신은 농장 관리 이외의 업무를 떠맡았다. 밖으로 나가서 고객의 유치를 담당한 것이다. 우리들의 사업은 순조롭게 발전해 갔다. 다르삼이 부랑자 모습으로 일자리를 찾아서 온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일에 열심이어서 주어진 일은 무엇이든 해냈다. 어느 날 밤, 다르삼은 칼을 든 도둑과 격투 끝에 도둑을 붙잡았다. 그 도둑은 죽었다. 물론 경찰에 붙잡혀 가게 되었으나 다르삼은 석방되었다. 그 이후 나는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나의 심복으로 삼았다. 그 사이 메레마는 집을 비우는 일이 점점 더 빈번해져 갔다. 그래, 앤, 깜빡 잊을 뻔했는데 깨끗이 몸단장을 하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선택하는 법을 마마에게 가르쳐 준 것도 메레마였단다. 그는 내가 몸치장하는 것을 즐겨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냐이, 너는 항상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꾸지 않은 얼굴이나 칠칠치 못한 복장은 사업까지도 형편 없고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쉬워서 사람들이 신용하지 않는 법이야." 그의 뜻에 나는 얼마나 열심히 따랐던가? 나는 그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나는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고 있었다. 때로는 잘 때조차도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실제로 보기 흉한 것보다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쪽이 훨썬 더 좋은 것이란다. 앤, 너도 그것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추한 것은 결코 사람을 매료시킬 수가 없는 법이란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하는 여성은 쓸모 없는 존재란다. 만일 내가 남자라면, 친구에게 그런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라. 자기 몸조차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데,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턱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 이가 언제까지나 희게 빛나도록 너는 킴마(역자주 : 껌 같은 것으로 한참 씹으면 빨개진다)를 씹어서는 안된다. 나는 진주같은 너의 이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나는 결코 킴마를 씹지 않았단다. 거의 다달이 책이나 잡지가 네덜란드에서 보내져 왔다. 메레마는 독서가였단다. 앤, 너는 왜 아버지처럼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지 그것이 이상하다. 마마도 독서를 좋아하는데 말이다. 책 가운데는 말레이어로 된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물론 자바어 책도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일이 끝난 뒤 집앞에 앉아서 그가 내게 그것들을 읽게 하곤 했다. 신문도 읽어야 했다. 그는 내가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잘못된 곳을 고쳐 주고, 내가 모르는 단어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한 일이 매일 되풀이되고, 이윽고 나는 내 손으로 사전 찾는 법을 배웠다. 나는 팔려온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그랬다. 나는 독서의 책임량을 부과받았다. 어떤 책을 혼자서 끝까지 정확하게 읽고, 그 내용을 그에게 들려 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 앤, 세월이 흘러가면서 옛날의 낡은 사니켐은 사라져 갔단다. 마마는 새로운 안목, 새로운 견해를 갖는 새로운 인간으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나 자신은 이미 몇년 전 투랑강에서 팔려온 노예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는 이제 과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갈색 피부를 가진 네덜란드 여성이 된 것일까 하고 때때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쁘리부미가 얼마나 뒤떨어졌는지를 내 주위에서 보고 있었으나,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너의 파파 이외의 유럽인과는 그다지 교제가 없었다. 언젠가 나는 지금 내가 교육을 받고 있는 것처럼, 유럽 여성들도 교육받고 있느냐고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니 ? "보통의 유럽 여성보다 네가 더 유능하다. 더군다나 혼혈 여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아, 그와 함께 생활할 수가 있어서 마마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나를 칭찬하고 이끌어 주는 것을 그는 얼마나 잘 해냈는지 ! 나는 몸도 마음도 기꺼이 그에게 맡겼다. 만일 젊어서 죽는 일이 생긴다면, 그의 품 속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려고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나는 새삼스렵게 확신했다. 메레마는 '남편이란 스승이고 신이다'라는 자바의 격인 그대로였다. 그는 네덜란드로부터 여성 잡지 몇 권을 나를 위해 정기구독을 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물론 그는 과장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쁘고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네덜란드의 여성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의 칭찬을 듣는 것은 몹시 즐거운 일이었단다. 그는 결코 깎아내리는 법이 없고 칭찬만을 할 뿐이었다. 또 나의 질문에는 무시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마는 점점 더 자신과 용기가 용솟음쳤단다. 그런데 앤, 그 얼마 뒤 나의 행복이 위협당하고, 내 생활의 토대를 크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윽고 로베르트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4년 뒤에는 앤, 네가 태어났단다. 사업은 점차 확대되어 가고 토지도 늘어났다. 우리들의 토지와 접하고 있는 마을의 미개림을 살 수가 있었다. 모두 내 명의로 구입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논이나 밭은 없었다. 사업이 점점 번창하기 시작하자 메레마는 과거의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서 나의 노동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기 시각했다. 나는 그 돈으로 정미소와 그 밖의 설비를 구입했다. 그 이후, 농장은 나의 주인으로서의 헤르만 메레마 개인 것만이 아닌 내것도 되었다, 그후 나는 5년 동안의 이익 분배금 5천 길더를 받았다. 그는 그것을 내 명의로 은행에 예금하게 했다. 또 그 무렵에 농장은 "바이텐졸프 농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농장내의 모든 문제를 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냐이 온트솔로, 냐이 바이텐졸프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앤, 잠이 들었니 ? 아직도? 그럼, 얘기를 계속하겠다. 여성 잡지를 오랫동안 구독하여, 거기에 씌어 있는 가르침을 여러 가지로 실천하고 난 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되풀이하여 물었다. "나는 이제 네덜란드 여자처럼 되었나요?" 네 파파는 큰 소리로 웃기만 했다. "네가 네덜린드 여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또 그렇게 될 필요도 없고. 지금 그대로도 너는 어면 네덜란드 여성보다 더 영리하고 훌륭해. 누구보다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물론 그는 과장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쁘고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네덜란드의 여성들에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의 칭찬을 듣는 것은 몹시 즐거운 일이었단다. 그는 결코 깎아내리는 법이 없고 칭친만을 할 뿐이었다. 또 나의 질문에는 무시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마는 점점 더 자신과 용기가 용솟음쳤단다. 그런데 앤, 그 얼마 뒤 다의 행복이 위협당하고, 내 생활의 토대를 크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나와 그는 로메르트와 너를 헤르만 메례마의 자식으로서 인지하기 위해 법원으로 갔었다. 처음에 나는 그 인지에 의해서 너희들이 적출자로 법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네 오빠와 너는 어디까지나 비적출자로 간주되고, 다만 헤르만 메레마의 자식으로서 그의 성을 쓸 권리만을 인정받게 되었다. 법원의 개입에 의해서 법률은 너희들을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단다. 너희들을 낳은 것은 이 마마인데도 지금에 와서는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인지 이후, 너희들 두 사람은 법률에 의해 헤르만 메레마 한 사람의 자녀가 된 셈이다. 법률, 그러니까 이곳 동인도에서의 네덜란드 법률에 의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법적으로야 어떻든 네가 내 자식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너희들 두 사람은 한 사람의 아버지를 얻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지에 뒤이어 메레마는 너희들 두 사람에게 세례를 받게 하려고 했다. 나는 교회에는 함께 가지 않았지만 너희들은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목사가 너희들의 세례를 거부한 것이다. 파파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가질 권리가 있어. 왜 이 아이들에게는 그리스도로부터 죄를 용서 받을 권리가 없다는 거야?" 나는 그러한 문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 얼마 뒤에야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우리들이 호적 등기소에서 결혼을 하기만 하면, 너희들 두 사람은 적출자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세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자 나는 매일 호적등기소에서 결혼을 하자고 메레마에게 졸라댔다. 집요하게 독촉했다. 새례 거부 사건 이후, 며칠 동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네 파파는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화를 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너희들 두 사람은 법률상 비적출자인 채로 새례를 받지 못하고 말았단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마마는 그 상태로 만족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 나를 마담이라고 불러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냐이"라는 호칭이 평생 동안 붙어다니게 되었다. 그래도 너희들 두 사람이 충분히 존경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의 평판도 높은 믿을 만한 아버지를 갖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에게서 인지를 받았다는 것은 너희들 자신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관도 너희들이 당연히 얻어야할 권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적출자로서 세례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나를 인정받는 것? 그것은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가 있었다. 앤, 벌써 잠이 들었구나. "자지 않아요, 마마." 마스, 당신에 대한 마마의 말을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또 다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나면 마마는 이토록 많은 것을 얘기해 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마마가 우리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를 꺼낼 때까지 나는 참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유도하듯이 물었죠. "마마는 파파를 사랑하고 있었나요? "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를 마마는 모른단다. 그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나도 나의 책임을 다 했다. 그것으로 우리들 두 사람에게는 충분했단다. 만약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라도 나는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서로 아무런 빚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좋을 때, 그는 내게서 떠날 수가 있었던 거야.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언어 나의 굳센 의지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 다는 일찌기 부모로부터 그에게 팔려온 첩에 불과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단다. 마마의 예금은 이미 1만 길더가 훨씬 넘고 있었단다, 앤." "마마는 투랑강의 가족은 한번도 찾아간 적이 없나요?" "투랑강에는 가족이 없단다. 나의 가족은 우노크로모뿐이다. 몇 번 오빠 파이망이 찾아왔는데, 나는 오빠하고는 만났다. 돈을 달라고 오는 거야. 언제나 그랬단다. 마지막으로 오빠가 온 것은 아버지가 집단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그 이전에 죽었다고 하더구나. 원인은 나도 모른다." "찾아가 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요, 마마?" "아니야, 그대로가 좋았단다. 과거와는 깨끗이 결별하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상처받은 명예와 자존심은 좀처럼 아물지를 않는구나. 내가 얼마나 비장한 생각을 하며 팔려왔었는지를 생각하면..... 사스트로토모의 탐욕과 그 아내의 나약함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사람은 일생에 한 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단다. 그것을 할 수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거야." "마마는 지나치게 냉정해요, 무섭도록 엄격하구요," "마마가 엄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겠니? 누구에 대해서나 엄한 태도는 늦추지 않을 것이다. 마마는 노예가 되는 길을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그린 일로 희생되는 것은 나 한 사람만으로 충분하다. 앤, 너야말로 너무 착해서 달이야. 쓸데 없는 동정만 하고......" 마마는 여전히 당신의 애기를 하지 않았어요. 마마는 파파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대답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를 않았나 봐요. 파파는 마마에게 있어서는 남이었거든요. 그것에 비한다면 마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어째서 나는 하루종일 당신 일만 머리에 떠오르고 언제나 당신 옆에 있고 싶은 것일까요? "그리고 나서 앤, 내개 두 번째 시련이 닥쳐왔단다." 마마는 얘기를 계속했어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었단다." 네덜란드 정부는 탄쥰 빼라크 항의 보수와 확장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항만 전문가 팀이 본국에서 파견되어 왔다. 그 무렵 우리들의 낙농업은 순조롭게 번창해 가고 있었단다. 수요는 늘어나고 매달 새로운 고객을 맞고 있었다. 드루새 석유 회사는 관련 부분을 포함해서 기업 전체가 우리들의 좋은 단골이었단다. 그때 갑자기 청천벽력과도 같은 파국이 닥쳐왔단다. 마마는 침대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러 갔다. 방안은 캄캄했다. 이층에 있는 그 방에서 우리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밤이었다. 괘종 시계의 뜩딱거리는 소리가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 아래층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 왔다. 마마가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그 소리는 사라졌다. 그 항만 전문가 팀에 한 사람의 젊은 기사가 있었단다. 처음에 나는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읽었다. 기사의 이름은 마우리츠 메레마었단다. 그의 경력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다. 타협을 싫어하는 정의파로, 짧은 경력이지만 이미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고 씌어있었다. 나는 그가 파파의 친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롭고 안정된 행복한 생활을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하고 싶지가 않았단다. 우리들의 사업에는 누구라도 손가락 하나 대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파파가 읽기 전에 나는 그 신문을 감췄단다. 신문은 오지 않았어요. 아마 배달부가 병이 난 모양이죠 하고 나는 꾸며 댔다. 그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너희들이 학교에 간 다음 말 두 필이 끄는 크고 멋진 정부의 공용 마차를 타고 한 사람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날 따라 파파는 집 뒤쪽에서, 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단다. 그것이 불운이었다. 공용 마차는 계단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마중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나갔다. 아마 어딘가 관청에서 유제품을 구입하러 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란다. 젊은 유럽인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차림은 아래 위가 모두 흰색으로, 웃옷은 해군사관의 제복이고, 쓰고 있는 모자도 해군의 모자였는데 옷소매에도 어깨에도 계급장은 붙어 있지 않았다. 딱 벌어진 체격으로 넓은 가슴을 가진 젊은이였다. 주저하는 빛빚도 없이 그는 문을 몇 번 노크했다. 얼굴이 헤르만 메레마와 꼭 닮았고, 닻 모양의 웃옷의 은단추가 빛나고 있었다. "투앙 메레마는 어디 있죠?" 그는 서두른 말레이어로 그렇게 물었다. 건방지고 무뚝뚝한 그의 말투에서 나는 금방 내가 알고 있는 유럽적 기호에 반대되는 난폭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단다. "누구신가요?" 나는 불쾌해하며 물었다. "투앙 메레마에게만 볼 일이 있어." 그는 먼저보다 더 오만한 말투로 대꾸했다. 또 한번 나는 자기 집에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갖지 못한 현지처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대농장의 주인이 아닌가? 아마 그는 나를 투앙 메레마에게 기생하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나의 도움이 없이는 이 집을 지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오만한 태도를 취할 권리 같은 것은 그 손님에게는 없었단다. 나는 그에게 의자도 권하지 않고 세워 둔 채로 누군가에게 메레마를 불러 오라고 일렀다. 너의 파파는 자기에게 관계가 없는 편지를 읽거나 대화를 엿듣거나 해서는 안된다고 내게 가르쳐 주었단다. 그러나 그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사무실과 응접실 사이의 문을 약간 열어 두었다. 그 남자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지. 메레마가 나타났을 때, 젊은이는 여전히 선 채로였다. 열려진 문 틈으로 파파가 마루에 얻어붙은 듯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투앙 메레마가 소리쳤다. "마우리츠 ! 이처럼 훌륭하게 자라다니......." 나는 금방 그가 탄쥰 빼라크 항의 보수를 위해 온 전문가 팀의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라는 것을 알아챘다. 젊은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건방진 말투로 투앙의 말을 정정했다.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요, 메레마 씨 !" 그 말을 듣고 파파는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다. 손님은 여전히 선 채로 있었다. 파파는 앉으라고 권했으나, 그는 무시한 채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앤, 이 얘기는 정확히 들어 둬야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순히 네 자식이나 손자에게 이 얘기를 전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 마마와 네가, 그리고 이 농장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발단은 바로 그가 찾아온 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란다. 젊은 네덜란드인 손님은 이렇게 말했단다. "이 의자에 앉기 위해서 나는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읍니다. 잘 들어요, 메레마 씨. 나의 어머니 아메리아 메레마 한벨스는 비겁하게도 당신이 집을 나간 뒤, 나를 먹이고 학교에 보내고 졸업을 시켜 기사가 되기까지 뼈빠지게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소. 메레마 씨, 나와 메레마 한멜스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굳개 맹세했소. 당신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어디에 있는지 소식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소." 문 틈으로 파파의 옆 열굴이 보였다. 그는 두손을 들었다. 입술은 움직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뺨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단다. 이윽고 두손이 축 늘어지더구나. 기사 메레마는 계속했다. "당신은 아메리아 한멜스에게, 그녀가 부정을 범했다는 비난을 남기고 사라졌소. 그녀의 아들인 나도 그녀와 같은 치욕을 맛보았소. 그 부정 행위를 당신은 법정으로 들고 나가지 않았소. 나의 어머니에게 자기 변호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지않은 거요. 어머니에 대한 추잡한 비난을 당신이 다른 누구에게 누설했거나 떠들어냈는지, 그런 것은 알 수가 없소. 메레마씨, 나는 우연히도 지금 슬라바야 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소. 그리고 이것도 우연한 일인데, 언젠가 "경매"지를 읽다가 '바이텐졸프 농장' 산 유제품과 우유 선전 광고를 발견했소. 그 광고 밑에 당신의 이름이 실려 있더군요. 나는 사립 탐정을 시켜 당신의 정체를 조사하게 했소. H 메레마란 바로 헤르만 메레마, 내 어머니 아메리아 한벨스의 남편이었소. 어머니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소. 그런데 당신은 문제를 마무리도 짓지 않고 도망쳐 버렸단 말이오."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그녀는 법원에 갈 수 있었어." 파파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처럼 거칠게 자라난 자기 자식에게 압도당한 듯이 약한 목소리였단다. "부정을 비난한 것은 당신인데 왜 어머니가 법원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거죠? 만일 어머니가 부정을 범했다고 정말로 믿고 있다면 어째서 당신은 지금이라도 법원에 이혼 소송올 제기하지 않는 거죠?" "만일 내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 네 어머니는 네덜란드에 있는 내 낙농 회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게 되는 거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메레마 씨. 진실은 단 한 가지, 당신이 법정에서 흑백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그 때문에 어머니는 희생을 당한 거란 말이오." "네 어머니가 부정을 폭로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충고가 없어도 나는 옛날에 소송을 제기했을 게다." "그때는 어머니에게 변호사를 고용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지금 그 아들은 그것을 할 수가 있소. 아무리 값비싼 변호사라도 고용할 수가 있단 말이오. 지금이라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어떻소, 메레마 씨. 당신에게도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있고, 위자료를 지불할 수 있는 여유가 있잖소?" 앤, 모든 것이 밝혀진 셈이란다. 기사 메레마는 네 파파의 외아들, 즉 그의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였단다. 그가 우리들의 생활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자로서 찾아온 것이란다. 나는 모든 얘기를 듣고 전율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서기 사스트로토모와 그의 아내에게도, 파이망에게도 우리들의 생활에 손가락 한개 대지 못하게 했다. 또 투앙 메레마의 태도 변화에도 위협을 받지 않았단다. 가정 생활과 사업은 누구에게서도 간섭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의 배다른 오빠가 우리들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해 왔던 것이다. 나는 그 때까지 아직 애기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으나,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단다. 파파를 돕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도 있었단다. "그 사립 탐정은 매우 상세하고 믿을 만한 보고서를 내게 제출했소. " 그곳에 나타난 나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는 계속했단다. "이 집의 각 방에 무엇이 있는지, 인부들은 몇 명인지, 소는 몇 마리 있는지, 밭과 논에서 쌀과 다른 작물이 몇톤이나 수확되는지, 당신의 연간 수입은 얼마인지, 은행 예금은 얼마나 있는지,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메레마 씨, 당신의 생활 윤리에 관한 것이오. 일찌기 아메리아 한멜스에세 부정한 여자라는 낙인을 찍은 당신의 인생 말이오. 이 현실은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은 법률상으로는 아직 우리 어머니의 남편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잊고 원주민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소. 그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서 말이오. 그리고 두 명이나 죄많은 자식을, 사생아를 만들었단 말이오 !" 그 말을 들은 나는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단다. 입술이 마르고 몸이 떨리고 이가 딱딱 마주쳤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서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소중히 지켜오고 키워오고, 그 때문에 심혈을 쏟고 사랑해 온 모든 것을 그는 모욕한 것이란다. "그 말은 메레마 한멜스와 그 아들의 집에서나 해야 할 소리 같군요 !" 나는 네덜란드어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무뢰한은 내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표정조차 변하지 않더구나. 그에게 있어서 나는 한 개의 돌덩이만도 못한 것이었다. 내가 그의 아버지와 간통을 하고, 그의 아버지가 나와 부정을 범했다고 그는 판단했던 거란다. 어쩌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그의 권리이고, 세상의 권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파파와 내가 한 사람의 여성, 아메리아라는 이름의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여인과 그 자식을 속였다는 말을 듣다니.......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더구나 그 일이 우리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우리들 손으로 세운 집, 다름 아닌 우리들 집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거란다. "내 가족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권리가 당신에게는 없어요 !" 나는 네덜란드어로 소리쳤다. "너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야, 냐이." 그는 서투른 말레이어로 건방지게 대답하고, 그 다음부터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구나. "여기는 내 집이에요. 그런 애기는 밖에 나가서 하세요. 여기서는 할 수 없다구요 !" 나는 너의 파파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눈짓을 했으나,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례한 젊은이는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였다. 파파는 제정신을 잃은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단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사실 그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 무뢰한은 네덜란드어로 계속했다. "메레마 씨. 설사 당신이 이 냐이, 이 첩과 결혼해서 그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해도, 이 여자는 크리스찬이 아니오. 이교도란 말이오. 가령 크리스찬이라고 해도 아메리아 한멜스보다 당신 쪽이 더 부패하고 타락한 거라구요. 옛날에 당신이 비난한 어머니의 배덕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큰 배덕행위를 당신은 저질렀소. 당신은 피의 죄, 금기로 되어 있는 유럽의 크리스찬 피를 유색 원주민의 이교도 피에 섞어 버렸단 말이오. 이건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란 말이오 !" "나가요 ! " 나는 소리쳤다. 그는 여전히 나를 무시해 버렸다. "남의 가정을 파괴하다니, 기사라고 잘난 듯이 떠들지만 예의는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군요 ! " 그는 나를 상대하지 않았다. 내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자 마치 원주민이 가까이 오는 것은 불쾌하다는 듯이 그는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메레마씨, 당신은 자신이 정말로 어떤 인간인지 이제는 알았을 거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우리들에게 등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가 두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라 탔다. 네 파파는 망연히 말도 잊은 채 마루에 못박힌 듯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이 당신과 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군요. 지난 10여년 동안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유럽 문명의 실태가 저런 건가요? 하늘에 닿을 정도로 당신이 예찬하던 문명이란 게 말예요? 협박을 하기 위해 남의 가정 환경을 조사하여 모욕하는 것이? 협박이 ? 이것이 협박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협박이지요? 무엇 때문에 남의 재산을 조사하는 거죠?" 앤, 내가 지르는 소리를 그는 듣고 있지 않았단다. 그의 눈동자는 그의 시선은 까딱도 않고 바깥 도로에 못박혀 있었다. 나는 계속 소리쳤으나, 그는 듣지 뭇하는 것 같았다. 인부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달려왔으나, 내가 투앙에게 마구 대드는 것을 보고는 항급히 물러가더구다. 나는 그를 잡아 끌며 가슴을 마구 쥐어뜯었다. 그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지 잠자코 서 있었다. 다만 내 마음 속의 아픔만이 표적을 찾아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단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단다. 분명히 네털란드 본국에 남겨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그 괴로움을 그가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쓰라렸단다. 그의 가슴을 쥐어뜯는 데도 지친 나는 엉엉 울며 의자 위에 헌 옷처럼 꾸겨박힌 채 앉았다.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었다. 얻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단다. 현지처에 대한 멸시는 언제쯤이나 끝다는 것일까? 모두에게 상처받는 것을 언제까지나 참아 내고 있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나를 현지처로 팔아 넘긴, 지금은 없는 부모를 저주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지만 나는 결코 그들을 저주한 일은 없단다. 나만이 아니라 나의 자식들까지 모욕한 것을, 교육을 받고 기사라는 직함까지 얻은 그 젊은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 자식들은 치욕이 버려지는 쓰레기통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리고 헤르만 메레마, 덩치가 크고 넓은 가슴을 갖고 털이 많으며 우람한 근육을 지닌 남자. 그에게는 어째서 자기 인생의 반려자, 자기 자식들의 어머니를 지킬 힘이 없단 말인가? 그린 남자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는 나의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내 자식들의 보호자이고, 나의 신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그의 지식이나 교양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유럽인으로서 모든 원주민에게 존경을 받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조차 지킬 수가 없다면, 나의 주인이고 선생님이고 그리고 나의 신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순간부터 너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사라져 버렸단다. 자존심과 명예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내 자신 속에서 이미 독립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지. 그는 사스트로토모와 그 아내 이상의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정도의 시련에 부딪쳐서 그가 보여줄 수 있었던 행동이 그 정도라고 한다면, 나는 그이 없이도 아이들을 키우고 나 혼자 힘으로 어떤 일이든 해나갈 수 있다. 앤, 나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모른다. 평생을 두고 그보다 큰 상처를 입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얼굴을 들어 보니까 눈물이 어려 있는 내 눈에 여전히 망연하게 서서 길거리를 내다보고 있는 메레마의 모습이 비쳤다. 인생의 반려자이고, 최대의 협력자이기도 한 내게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단다. 이윽고 그는 기침을 몇 번 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악마나 귀신이 들을까봐 염려라도 하듯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살며시 불렀다. "마우리츠 ! 마우리츠 ! " 그는 계단을 내려가 앞뜰을 가로질러 갔다. 큰 길까지 나가자 오른쪽 슬라바야 방향으로 구부러졌다. 구두는 신지 않았고 작업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있을 뿐이었단다. 그날 해가 질 때까지 너의 파파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달래지 못해 괴로와하고 있었으니까. 밤이 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단다. 이튿날 아침에도.....사흘 낮 사흘 밤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동안 나의 눈물만이 하염 없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단다. 다르삼이 모든 일을 맡아 해 주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때 그는 과감하게 문을 노크했다. 현관문을 열고 그를 이층으로 올려보낸 것은 앤, 바로 너였단다. 설마 그가 이층에 올라오리라고는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알았을 때, 마음의 아픔과 슬픔이 단번에 분노가 되어 폭발했던 거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아마 내 고통이나 슬픔보다 좀더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던 것 같다. 방에는 자물쇠가 잠겨 있지 않았다. 그것을 네가 열었던 것이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너는 잊어버렸을 게다. 그리고 다르삼이 이층에 올라온 것은 그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단다. 다르삼은 마두라어로 이렇게 말했다. "냐이, 읽는 것과 쓰는 것을 빼놓고 나머지 일은 모두 이 다르삼이 해놓았읍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계속 침대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단다. "냐이는 걱정하실 것 없읍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읍니다. 이 다르삼을 믿어 주십시오, 냐이." 사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나는 외출했다. 네 학교로 찾아가서 너를 퇴학시켰던 것이다. 우리들의 땀의 결정인 농장이 헛되이 무너져버리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농장이 나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우리들의 생활도 그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장이 나의 첫번째 자식인 셈이었단다. 거기까지 말하고 마마는 그때의 고통, 방어할 수도, 보복할 수도 없는 굴욕에서 오는 고통이 다시 떠오르는지 흐느껴 울었어요. 눈물이 그치고 나자 다시 얘기를 계속했어요. 앤, 너도 알고 있겠지. 그때 학교에서 돌아와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그래, 열다섯 명 이상의 인부들을 해고시켜 우리 땅에서 쫓아냈다. 불과 한두 푼의 돈으로 그들이 마우리츠에게 정보를 판 것이다. 아니 한 푼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마마는 네게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다. 네 파파와 나는 언젠가 너를 유럽에 유학시켜 그 곳에서 교사 자격을 따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었단다. 너를 중도 퇴학시켜서 나는 몹쓸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른이 되기도 진에 마마는 너를 맹렬하게 일을 시켰단다. 휴일도 없고 친구도 사귀지 못하게 하고 매일 일만 시켰던 거야. 친구들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사업에 온힘을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너는 좋은 경영자가 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영자는 인부들과 가까와져서는 안된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과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어쩔수없는 일이란다, 앤. 기사 메레마가 나타난 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누구에게 들은 것도 아닌데, 나는 파파의 일을 알고 있었어요. 이레째 되는 날 파파는 겨우 돌아왔어요.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 파파는 말쑥한 양복을 입고, 새 구두를 신고 있었어요. 그것은 일이 끝난 저녁때의 일이었어요. 마마와 나와 로베르트는 마침 집앞에 앉아 있었어요. 그때 파파가 돌아왔던 거예요. "모르는 척해라. 말을 걸어서는 안된다." 마마가 엄격하게 말했어요. 가까이 다가올수록 깨끗이 수염을 깎은 파파의 창백한 얼굴이 똑똑하게 보였어요. 머리는 한가운데서 단정하게 가리마를 타고 있었고 집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는 머리 기름 냄새가 우리들의 후각을 자극했어요. 향료가 섞인 강한 알콜 냄새도 났어요. 파파는 말을 하지도 않고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우리들 앞을 곧장 지나서 계단을 올라가 집안으로 사라졌어요. 갑자기 로베르트 오빠가 일어나서 눈을 부릅뜨고 마마를 노려보며 고함쳤어요. "나의 파파는 원주민이 아니야 !" 로베르트는 파파를 부르면서 달려 갔어요. 나는 마마를 보았는데 마마는 나를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했어요. "너도 그렇게 하고 싶으면 오빠 흉내를 내도 괜찮다." "싫어요, 마마." 나는 소리치며 마마의 목을 껴안았어요. "나는 마마를 따를 뿐이라구요. 나도 마마와 같은 쁘리부미니까요." 그래요, 마스. 이것이 우리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에요. 오빠인 로베르트, 배 다른 오빠인 마우리츠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우리 두 사람을 경멸하는지 어떤지를 나는 모르고 있어요. 집 안에서 파파는 대체 무엇을 했을까? 아래층도 이층도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어요. 15분 가량 있다가 파파는 다시 나왔어요. 파파 뒤에는 로베르트가 따르고 있었다는데 파파는 다시 앞뜰을 빠져나가 큰 길로 모습을 감추었어요. 로베르트는 파파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실망을 해서 어두운 얼굴로 집안으로 되돌아 왔어요. 그 이후 5년 동안, 나는 거의 파파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가끔 아무 소리 없이 나타나서 소리 없이 나갈 뿐이었죠. 마마는 파파를 거부하고 시중을 들려고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찾으러 나서는 것도 마마는 못하게 했어요. 그 뿐만 아니라 파파를 화제로 삼는 것조차 못하게 했어요. 파파의 초상화는 다르삼이 벽에서 떼어냈고, 마마가 명하는대로 앞뜰에서 가족과 인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불태웠어요, 아마 그런 식으로 마마는 복수를 한 것인 것 같아요. 처음에 로베르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어요. 파파의 초상화가 불태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항의했어요. 그는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마마의 방에서 마마의 초상화를 떼어다가 부엌에서 그것을 불태웠어요. "저 애는 아버지와 함께 두어도 상관없어요." 마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무술의 달인인 다르삼은 그런 마마의 말을 로베르트에게 전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어요. "냐이와 아가씨를 방해하는 녀석은 설사 그것이 도련님이라도 용서하지 않겠읍니다. 이 긴 칼 밑에서 목숨이 끊기고 말 것입니다. 도련님도 그런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해 보세요. 또 도련님이 투앙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그 사건이 있은 지 2개월 뒤, 로베르트는 유럽인 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로베르트는 그것을 마마에게 알리지 않았고, 마마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로베르트는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를 쏘다녔죠. 마마와 오빠와의 무언의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요. 5년 동안이나 말이에요. 처음 얼마 동안 로베르트는 창고와 부엌, 사무실 등 집안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내다 팔아 돈을 만들었어요. 마마는 그의 명령을 받고 도둑질을 한 인부들을 모두 해고시켰어요. 그리고 마마는 오빠가 그의 방과 식당을 빼놓고는 다른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일체 금지시켰어요. 그리고 벌써 5년이 흘렀어요. 5년이라구요, 마스. 그리고 두 사람의 손님이 나타났어요. 로베르트 슬르호프가 오빠의, 밍케가 나와 마마의 손님으로 말이에요. 그래요.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이 나타난 거라구요....... 제 5 장 증오와 갈등 우노크로모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지내게 된 지 닷새째였다. 로베르트 메레마가 자기 방으로 나를 초대했다. 나는 경제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보다는 많은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유리를 깐 책상이 하나 있고 그 유리 밑에 영국 국기를 단 화물선, 카리브 호의 커다란 사진이 끼어 있었다. 로베르트는 친절하게 나를 맞았으나 눈이 수상쩍게 빛나고 약간 붉었다. 입고 있는 옷은 말끔했고, 싸구려 향수 냄새가 났다. 머리는 포마드로 번쩍거렸고 왼쪽에서 가리마를 타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이로, 영리해 보이며 힘차고 정중하며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다갈색의 눈, 아랫 입술을 약간 내밀면서 훔쳐 보는 듯한 그의 눈만은 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방 안에 우리 두 사람만이 있다는 것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밍케, 이 집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보군. 자네는 로메르트 슬르호프의 동급생이지 ?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다면서 ?"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의자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본래대로 한다면 나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지금쯤은 졸업을 했을 거야." "왜 진학을 하지 않았지?" "그건 마마의 책임이야. 마마가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거라구." "안됐군. 자네도 아마 진학시켜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겠지." "부탁할 필요는 없었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마의 당연한 책임이니까." "자네에개 진학할 의사가 없다고 마마는 판단했겠지."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왈가왈부해도 이미 소용 없는 일이네. 어쨌든 여기 있는 것이 내 현재의 모습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원주민에 불과한 자네에게 나는 졌어. 누가 뭐래도 자네는 고등학교의 학생이니까...... 그만두겠네. 여기서 학교 얘기 같은 것을 해 보았자 소용이 없으니까." 그는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가 다갈색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질문을 하고 싶은데, 어째서 이 집에서 살게 되었지 ? 몹시 만족스러운 것 같은데 안네리스가 있기 때문인가?" "그래, 자네 동생이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지." 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로베르트는 헛기침을 했다. "내가 이 집에 있는 것이 자네는 마음에 안드는 것 같군." "내 동생을 좋아하나?" "응, 좋아하네." "유감이로군, 원주민인 주제에." "원주민이라서 안됐나?" 로베르트는 대꾸할 말을 찾으면서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 창밖으로 촛점이 없는 시선을 보냈다. 그 기회를 틈타 나는 그의 방을 살펴보았다. 침대에는 모기장이 없었다. 침대 밑에 병이 세워져 있고 그 주둥이 부분에 모기향이 남아 있었다. 병 밑에는 떨어진 재가 흩어져 있었고 마루는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그의 말소리가 들려서 나는 침대 밑의 관찰을 중단했다. "이 집은 내게는 너무 조용해." 로베르트는 화제를 바꾸었다. "자네는 체스를 할 줄 아나?" "유감이지만 할 줄 모르네." "그래 ? 그건 유감이군. 그럼, 사냥은 어떤가? 사냥을 함께 가지 않겠나?" "안됐지만 나는 공부할 시간이 필요해. 사실은 나도 사냥을 좋아하지. 다음 기회에 가기로 하겠네." "그러지. 다음에 함께 가자구." 그의 시선이 내 눈을 궤뚫었다. 그 시선에는 협박하는 빛이 역력했다. "잠시 산책 정도 하는 것은 어떤가?" "안됐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니까." 한참동안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았다. 나는 무엇인가 얘깃거리가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그때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다. 내 눈에 띤 것은 창문이었다. 만일 그가 갑자기 덤벼들면 저 곳으로 도망쳐서 뛰어내리자. 창 밑에 화분이 놓여 있지 않은 받침대가 보였다. 로베르트가 앉아 있지 않은 의자 위에 억지로 접은 한 권의 잡지가 놓여 있었다. 옷장이나 테이블 다리의 받침으로 사용된 것 같았다. "읽을 만한 책 가진 것 없나?" 로베르트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잘 닦인 흰 이가 빛났다. "읽을 만한 것이라니 이 책 말인가." 그는 접은 잡지를 눈으로 가리켰다. "나도 한번 잃어 보았는데. " 로베르트는 잡지를 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때 나는 그가 무엇인가 하려고 주저하는 기척을 느꼈다. 날카로운 그의 눈에 심장을 찔린 것처럼 나는 몸을 떨었다. 그가 건네준 것은 분명히 잡지였다. 표지는 이미 찢겨져 있었으나, "동인도XXX" 지라는 제목의 일부는 아직 읽을 수 있었다. "한가한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지. " 로베르트는 내뱉듯이 말했다. "읽고 싶으면 읽어 보게나. 갖고 가도 좋아." 종이와 잉크로 보아 그것이 새 잡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자네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갑자기 로베르트는 그렇게 물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 얘기로는 자네는 부빠티 후보생이라더군." "그렇지 않다네. 나는 관리가 될 생각은 없네. 지금처럼 자유로운 몸이 좋아. 게다가 도대체 누가 나를 부빠티로 임명해 주겠나?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어떤가?" "나는 이 집을 좋아하지 않네. 이 나라도 좋아하지 않지. 너무나 더워. 나는 눈을 좋아하네. 이 나라는 너무 더워. 나는 유럽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배를 타겠어. 그리고 전세계를 여행하겠어. 첫번째 배에 탈 때 가슴과 팔에 문신을 새길 생각이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 나도 외국에 가보고 싶어." "나도 그래, 그렇다면 함께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할 수가 있지 않겠나? 자네와 둘이서 말이야. 함께 계획을 세워 보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가 쁘리부미라는 것이 유감이군." "그래, 유감스럽지만 나는 원주민이지." "이 배의 사진을 보게나. 친구가 준 거야." 로베르트는 눈에 광채를 띠었다. "그는 카리브 호의 승무원이었네. 우연히 탄쥰 빼라크에서 알게 되었지. 그는 여러 가지 일, 특히 캐나다에 관해 얘기를 해 주었네. 나는 그를 따라가려고 했었는데 그가 거절했어. '뱃놈이 되어서 무얼 하갰다는 거야. 너는 갑부의 아들이잖아? 집에 얌전히 있는 게 좋아. 생각만 있다면 너는 배를 살 수도 있지 않겠어 ?' 하고 그는 말했네."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로 로베르트는 나를 응시했다. "2년 전의 일이었지. 그리고 두번 다시 탄쥰 빼라크에는 기항하지 않았어. 편지도 보내지를 않는 거야. 아마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지도 몰라." "자네가 떠난다면 틀림없이 마마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자네가 떠나 버리면 도대체 누가 이 큰 농장을 꾸려 나가겠나?" "흥, 나는 이미 어른이야. 나 자신의 일은 내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 확실히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야. 망설이고 있는 이유를 나 자신도 모르겠다니까." "먼저 마마와 의논하는 게 좋아." 내 의견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마마와 애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네. 괜찮다면 내가 자네의 마음을 마마에게 전해 줄까, 어떤가?" "아니, 괜찮네. 슬르호프한테 들었는데, 자네는 사기꾼에다가 호색가라면서 ?" 나는 피가 끓어올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곧 그가 지금까지 가장 하고 싶어했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본심이 나타났다면 그것도 또한 좋았다. "누구든지 선인이라든가 악인이라든가 제삼자에게서 멋대로 평가받는 경우가 있을 거야. 마찬가지로 또한 자신도 그렇게 남을 비난하지.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어. 자네도 그렇고 슬르호프도 마찬가지야." "내가? 나는 그런 일 없어." 로베르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남의 말이나 행동 같은 것에 신경을 쓴 일이 없네. 하물며 자네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나 자신에 관해 무슨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야. 다만 슬르호프는 이렇게 말했어. '저 밍케라고 하는 지저분한 쁘리부미에게는 조심하게. 저 녀석은 주잡한 오입장이니까.' 라고." "확실히 그의 말대로 우리들은 모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지. 슬르호프도 그렇고. 물론 나도 자네를 조심하고 있네." "내 말 잘 들어 뒤, 여자를 노리고 남의 집에 들어와서 먹고 자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초대를 받았다고 해도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어. " "나는 자네 동생을 좋아한다고 조금 전에 말했을 거야. 게다가 마마로부터 이곳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좋아. 하지만 자네를 초대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게나. " "잘 알고 있네. 마마가 보번 그 편지는 아직도 갖고 있지." "내개 보여 주게. " "나한테 온 편지야. 자네에게 온 편지가 아닐세." 차츰 그의 태도와 말투에 적의가 나타나기 시각했다. 내게 공포심을 심어줄 셈인지, 로베르트는 나에게 힐끔힐끔 찌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실제로 나는 이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네가 동생과 결혼할지 어떨지 나는 모르겠네. 마마와 안네리스는 자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더군. 그것은 상관없지만 이 집의 장남은 나라는 사실을 명심하라구."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자네의 갖가지 권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네. 자네 권리를 빼앗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니까. 이 집의 장남은 어디까지나 자네겠지. 그것은 아무도 어쩔수없는 거야." 그는 헛기침을 하고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머리를 긁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 집 사람들은 모두 나를 적대시하고 있어. 나를 상대해 주는 녀석은 아무도 없네. 이렇게 된 것은 누군가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지금 또 자네가 나타났어. 자네가 그들과 한패라는 것은 틀립없는 사실이야. 여기서 나는 외톨박이라네.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코 잊지 말게." 로베르트는 입술에 미소를 띠고 인상을 써 보었다. "알았네. 자네도 자신의 지금 말을 잊지 않도록 하게. 왜냐 하면, 지금 그 말은 자네 자신에게도 한 말일 테니까." 로베르트의 눈은 꿈꾸는듯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힘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미소를 띠고 그의 흉내를 냈다.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창문으로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방안에는 없다는 계산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말해 두겠는데 자네는 자신이 쁘리부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도록 하게. " "아아, 물론 잊지 않고 있네. 항상 머릿 속에 넣어 두겠네.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도 잊지 말게나. 자네 몸에도 쁘리부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는 혼혈아는 아닐새, 유럽 혼혈이 아니지. 그러나 유럽인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내 머릿속에도 유럽의 학문과 지식이 들어가 있네, 만약 자네가 유럽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면 말일세. " "밍케, 자네는 영리하군. 과연 고등학교 학생다와." 그때 로베르트와의 대화는 긴장에 차 있어서 몇 시간이나 계속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겨우 10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안네리스가 밖에서 불렀기 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것은 그때의 로베르트의 말이었다. 의자에 앉은 채 그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가 보게나. 자네의 냐이가 부르고 있어. "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문 앞에서 멈취 서서 어처구니가 없어하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녀는 자네 누이동생이야. 그런 말버릇이 어디 있나? 내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고. " 마치 그곳에서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안네리스는 황급히 나를 안방 쪽으로 끌고 갔다. 우리들은 크림색 바탕에 갖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커버가 달린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내게 바짝 몸을 붙이고 앉아서 근심스러운 듯이 속삭었다. "로베르트 오빠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아요. 오빠의 방에 들어가다니 말도 안돼요. 걱정이에요. 하루 하루 오빠는 변해가고 있어요. 마마는 벌써 두 번씩이나 오빠의 빚을 갚아주기를 거절했어요." "자기 오빠와 원수처럼 지낼 필요가 있겠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구요. 오빠는 자기가 일을 해서 벌어야 해요. 그럴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일하려고 들지를 않아요." "그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어째서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반목을 해야 하는 거지?" "내 탓은 아니에요. 그보다 마마 쪽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오빠는 마마가 쁘리부미라는 이유만으로 마마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오빠가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어요? " 나는 이 가족의 문제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구태여 그 이상의 것은 묻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잘 생긴 젊은이는 가정 생활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어 왔는가? 어머니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아버지에게서도 그렇다. 게다가 누이동생에게까지 애정도 동정도 얻고 있지 못하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들어왔으니 오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앤, 왜 당신이 다리 역할을 하지 않는 거지 ?" "무엇 때문에요? 오빠의 대도가 너무나 괘씸하기 때문에 나는 오빠를 저주하고 있는 형편이라구요." "저주? 앤이 그를 저주한다고?"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어요. 그전에는 잘 해 왔는데, 이젠 틀렸어요.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거예요, 마스." 갑자기 안네리스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나는 참견하려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 냐이가 방으로 들어와서 우리 곁에 앉았다. 손에는 "솔라바야 일보"가 들려 있었다. 그 신문에 실린 '평범한 현지처의 비범한 생활'이라는 단편을 그녀는 나에게 보여 주었다. "시뇨, 이 소설을 읽었나요? " "네, 마마, 학교에서 읽었읍니다." "아무래도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을 내가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마 창백해졌을 것이다. 제목은 바뀌어 있었으나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쓴 것으로서, "경매" 지 이외의 일반 신문에 처음으로 실린 나의 단편이었던 것이다. 몇개의 어구와 문장이 약간 고쳐졌다고는 하지만 내 작품임에는 틀림없었다. 소설의 소재는 안네리스에개서가 아니라 마마의 실생활을 바탕으로 한 내 자신의 창작이었다. "작자는 누구인가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맥스 트레나르. 당신은 정말 광고문밖에는 쓰지 않나요?" 얘기가 복잡해지기 전에 나는 솔직이 고백했다. "사실은 그 글은 내가 쓴 것입니다, 마마."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당신은 정말 잘 쓰는군요.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는 건 백 명 중에 한 사람도 없어요. 다만 이 소설속에서 당신이 그리고 있는 인물이 나라고 한다면....." "내가 창작한 가공의 마마입니다." 그녀의 말을 가로채듯이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사실과 다른 일이 많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얘깃거리로는 굉장히 훌륭해요.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가 되면 좋겠어요." 그녀는 빅토르 위고를 알고 있었다. 아아,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 그때 나는 위고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부끄러워서 묻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다. 언제 문학을 공부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아는 체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프란시스를 읽은 적이 있나요? G 프란시스?" 나는 아주 난감해졌다. 그것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시뇨는 말레이어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모양이군요." "말레이어 소설입니까? 그런 사람이 쓴 책이 있옵니까?" 나는 새끼 염소가 울듯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모르다니 뜻밖이군요. 그는 말레이어로 여러 권의 책을 썼지요. 내 추측으로는 그는 순수 백인이거나 혼혈로, 쁘리부미는 아닐 거예요. 당신이 관심을 갖지 않다니 정말 유감이로군요." 문학의 세계에 대해서 냐이는 많은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들으면 들을수록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헤르만 메레마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자랑스럽게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학교의 신생님들은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왔으나, 그녀가 말하는 작가나 작품에는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푸다 베데루스 선생은 한낱 현지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놀랍게도 내 앞에 있는 이 냐이는 소설의 언어에 관해서까지 논하러 들었다. "프란시스는 "냐이 다시마"라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완전히 유럽 풍의 작품이지만, 사용되고 있는 것은 말레이어예요. 나한테 그 책이 있어요. 아마 당신도 연구해 보고 싶을 거예요." 나는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그녀는 문학 세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한편으로 자기가 낳은 자식은 무시하고 돌보지 않으면서도 왜 그녀는 소설을 애독하고 작가들이 만들어낸 가공 인물에 대해 일일이 비평하고 문제삼고, 끝내는 그들이 소설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까지 논하려고 드는 것일까?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 속을 궤뚫어본 듯이 냐이가 물었다. "당신은 로베르트의 일도 써 보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마마?" "당신의 젊음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주변 인물의 일을 당신은 틀림없이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당신의 흥미를 끄는 인물, 당신의 공감이나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그런 사람들을 말입니다. 로베르트는 틀림없이 당신의 흥미를 끌고 있을 거예요." 다행히도 곧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그 유쾌하지 못한 대화는 중단되었다. 로베르트는 식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마도 안네리스도 별로 놀란 기색이 없고, 그의 일을 묻지도 않았다. 하녀도 묻지 않았다. 식사 도중에 나는 선원이 되고 싶으며 유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로베르트의 희망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뇨, 항상 인간에 관해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관해서 쓰세요. 가령 동물이나 악마나 신, 괴물을 등장시키더라도 인간을 묘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간만큼 이해하기 힘든 존재는 없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세상에 소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매일 몇 편씩 탄생하고 있어요. 나 자신은 그것에 대해 그다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옛날에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때로는 인간이 매우 단순하게 보이지만, 결코 인간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설사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과 면도칼과 같은 예리한 두뇌를 지니고 신보다도 섬세한 감수성, 인생의 음악과 비탄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겸비하고 있더라도,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마는 먹기를 중단하고 수프를 먹던 스푼을 턱아래 그대로 들고 있었다. "지난 10년동안 나는 많은 소설을 읽었어요. 모두 인간이 곤경을 뚫고 나가거나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었어요. 행복한 얘기는 내게는 전혀 흥미가 없읍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얘기가 아니라 천국에 관한 얘기이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대지에서는 분명히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마마는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그녀의 말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자면 재야의 교육자이고, 그녀의 말은 교실에서는 배울 수 없는 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그녀는 얘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틀림없이 로베르트에게 흥미를 느꼈을 거예요. 그애는 언제나 자기 쪽에서 문제를 불러들이고, 그것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지요. 아마 그런 것을 '비극적'이라고 부르겠지요. 아버지와 꼭 같습니다. 어쩌면 그애는 당신이 쓴 것을 통해서 ---그애가 읽을 거라는 가정 아래 하는 얘기지만요---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자기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애의 태도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지요? 단지 나로서는 당신에게 부탁이 한 가지 있읍니다. 로베르트에 대해서 쓴 것을 발표하기 전에 먼저 내게 읽게 해 주세요. 미리 내게 보여 주면, 그릇된 묘사나 잘못된 추측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당신에게 이의가 없는 경우에 말입니다만," 분명히 나는 로베르트에 대해서 글을 쓰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냐이의 경고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게는 그녀가 매와 같은 눈을 가진 감시자처럼 느껴졌다. 작가로서의 나의 권리 영역에 그녀의 예리한 감시의 눈이 침입해 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처음으로 소설이 활자화된 것에 나는 크게 의기양양해 있었으나, 그 의기도 로베르트에 관한 작품의 진척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냐이의 매서운 경고에 한 꺼풀 꺾인 것이다. 저녁식사 때 냐이가 한 말은 내게 여러 가시 일을 생각하게 했다. 그녀는 열렬한 독서가인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옛날의 헤르만 메레마는 지극히 사려 깊고 또 인내 깊은 선생님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냐이 쪽도 뛰어난 학생이고, 주인에게서 이해력이라는 자본을 얻은 다음 혼자서 발전시켜 나가는 능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얻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지금 현지처의 가족 가운데서 배우고 있다. 도대체 누가 그런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또한 그녀는 로베르트 메레마의 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쁘리부미를 증오하는 그 젊은이에 관해서 냐이가 내게 한 주문은 아들에 대한 그녀의 깊은 우려를 얘기해 주고 있다. 그 키가 큰 젊은이에 대해서 나는 아직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아마 어머니를 닮아서 그도 독서가일 것이다. 그가 내게 준 잡지는 흔해빠진 경박한 잡지가 아니었다. 서재에서 가져왔는지 아니면 우편배달부에게서 받은 뒤 냐이에게 전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로베르트는 그 잡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잡지에 게재된 기사는 모두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국가, 주민, 기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일본과 동인도의 관계를 다룬 내용이 있었다. 그 논문은 지난 몇개월 자주 논해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노트를 풍부하게 해 주었다, 학교 토론회에서 두 번 정도 거론된 일이 있는데, 나의 동급생 중에 그 나라와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동급생들은 일본인을 언급할 가치가 없는 지극히 저급한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주 간단하게 슬라바야의 유흥가, 쿤반준푼에 넘쳐나는 창녀, 또는 선술집, 요리점, 이발소, 행상인과 잡화점과 같은 이미지에 연결시켜 생각했다. 따라서 근대적인 학문과 과학에 도전하는 산업을 일으켰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언젠가의 학교 토론회에서 라스텐딘스트 선생님이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했을때, 그들의 대부분은 흥미를 나타내지 않고 따분하다는 듯이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일본도 또한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다. 기따사또(北星)는 페스트균을 발견하 고, 시가(志賀)는 이질균을 발견했다. 이와 같이 일본도 또한 인류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문명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공헌과 비교했다. 내가 그 얘기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그의 얘기를 적고 있는 것을 보고 라스텐딘스트 선생은 힐책하는 듯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밍케군, 자네는 이 토론회장에 있는 자바인 대표인데, 자네 민족은 인류에게 어떤 공헌을 했는가?" 대뜸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넘기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 라스텐딘스트 선생닌, 지금 단계에서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읍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냥 웃고 말았다. 위의 얘기는 일본에 관한 나의 노트에서 조금 발췌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베르트가 준 잡지 기사에 의해 내 노트에는 상당한 정보가 새롭게 보충되었다. 그것은 국방 전략의 결정을 둘러싼 일본의 동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노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학교 토론회 때 훌륭한 자료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기사에 따르면, 일본의 육군과 해군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그뒤 일본을 지키기 위해 해상을 주로 한 전략이 채택되었다. 그러자 몇백 년의 "사무라이" 전통를 갖는 육군이 불만을 나타냈다. 반대로 우리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어떠한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즉 동인도는 육군만 있지 해군이 없다. 일본은 섬나라이다. 동인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이 바다를 중시하고 있는데, 동인도는 육지를 중시하고 있는가? 나라를 지키는 문제는 양국이 같지 않은가? 거의 백년 전에 동인도가 영국의 손에 떨어진 것도 동인도의 해군력이 약한 것이 원인이 아니었던가? 왜 그것을 본보기로 삼지 않는가? 잡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일도 알았다. 즉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해군을 갖지 못하고 있다. 동인도 해역을 순찰하는 함정은 동인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네덜란드 왕국의 것이다. 일찌기 동인도 총독인 단데르스는 슬라바야를 해군 기지로 만들었다. 동인도에 군함이 한 척도 없었던 시대에 말이다! 그로부터 백년 뒤인 오늘날, 동인도가 독자적인 해군력을 갖는 것의 무용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위층들은 싱가포르의 영국 해군과 필리핀의 미국 해군을 의지하고 있다. 그 논문은 만일 일본과 진쟁이 일어날 경우를 가정한 것이었다. 무방비 상태의 영해를 안고 네덜란드 왕국 해군이 생각나면 한번씩 돌아보는 것이 고작인 동인도는 어떤 상황이 되겠는가? 1811년의 경험이 다시금 네덜란드의 패배라는 결과로 되풀이되지 않겠는가? 로베르트가 그 논문을 읽고 연구를 했는지 어떤지는 나는 모른다. 선원으로서 세계를 항해해 보고 싶다고 했으니 아마 읽고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숭배자로서 그는 백색 인종의 우월성을 믿고 있을 것이다. 그 논문은 또한 일본은 바다에 관해서 영국의 흉내를 내려 하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필자는 일본을 원숭이 흉내만 낸다고 비웃는 것은 그만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발전의 계기는 모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는 역시 흉내내는 것밖에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도 마침내 자라나서는 혼자 걸으며 자기 힘으로 자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필자는 그렇게 논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전쟁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쟝 마례와 테린하와의 대화를 듣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쟝 마레......역할이라는 것은 새대에서 새대로, 어떤 민족에게서 다른 민족으로 옮겨 가면서 번화한다. 옛날에는 유색 인종이 백인을 정복하고, 현재는 백인이 유색 인종을 경복하고 있다. 테린하.....지난 300년 동안 백인이 유색 인종에개 패한 적이 없다. 300년 동안을 말이다 ! 물론 백인이 다른 백인을 정복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색 인종이 백인을 정복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 앞으로 500년 간, 아니 영원히 있을 수 없다. 로베르트는 유럽인으로서 선원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카리브호로 항해하기를 꿈꾸고 있다. 태양이 지는 날이 없는 광대무변한 나라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서....... 제 6 장 부빠티 취임식 잠자리에 든지 얼마나 되었을까. 방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밍케, 일어나세요 !" 문을 열자 눈 앞에 마마가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머리칼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괘종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어두운 새벽의 정적 속에 울리고 있었다. "지금 몇시지요, 마마?" "네시. 당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어요."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촛불 빛을 가까이 가져가자 모습이 차츰 확실해졌다. 경관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경례를 하고 자바 사투리가 섞인 말레이어로 말했다. "밍케씨인가요?" "그런데요." "당신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옵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다." 경관은 영장을 제시했다.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B시의 경찰서로부터의 출두 명령으로, 슬라바야 경찰서의 승인이 나 있었다. 그곳에는 틀림없이 내 이름이 씌어 있었다. 마마도 영장을 읽은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는 불안을 느꼈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지난 몇 주일 동안의 나 자신의 행동을 전부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정말 아무짓도 하지 않았어요, 마마." 안네리스가 왔다. 검은 빌로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가 흐트러지고 눈은 아직 어리벙벙해 있었다. 마마가 내게로 다가왔다. "당신이 무슨 죄로 호출당하는지 이 경찰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장에도 적혀 있지 읽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경관쪽을 향했다. "어떤 일로 호출당하는지, 그에게는 알 권리가 있어요." "그런 명령은 받지 않았옵니다, 냐이. 어떤 사정으로 호출을 당하는지 영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면 당사자를 포함해서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읍니다." 나는 반론했다. "그런 바보 같은 법은 없옵니다. 나는 자바의 귀족인 라빈 마스(역자주 : 귀족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이런 엉터리 대우를 받을 까닭이 없읍니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으나 경관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을 보고 다시 계속했다. "내게는 '특별 재판권'(역자주: '백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르킨다)이 있옵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옵니다, 라덴 마스 밍케씨. " "그럼, 어째서 이런 짓을 합니까? " "나는 다만 당신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뿐입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이 사정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준비들 해 주십시오. 곧 출발해야 합니다. 오후 다섯시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마스, 어째서 끌려가야 하지요?" 안네리스가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경관이 대답하려고 하지 않는군그래. " "앤, 밍케씨가 입을 것을 준비해서 이리로 가져오너라. 며칠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출발하기 전에 목욕과 아침식사를 끝내도 상관없겠지요 ? " "물론입니다. 아직 시간은 조금 있읍니다." 경관은 30분가량 시간을 주었다.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나는 로베르트가 자기 방에서 그 소동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품을 했을 뿐 나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는 이 소동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어젯방과 그 전날 밤, 로베르트는 저녁 식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협박하는 듯한 말투 하나 하나가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좋아, 이 소동의 원인이 자네라고 한다면 로베르트, 나는 결코 자네를 잊지 않을 걸세. 응접실로 돌아가니까 커피와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경관은 이미 아침식사를 즐기고 있는 중기었다. 그는 조금 전보다는 약간 정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적의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자꾸만 웃으면서 말을 걸어 왔다. 마지막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별로 걱정할 것은 없읍니다, 냐이. 밍케씨는 아무리 길어도 2주일 정도면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2주일이든 한 달이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집에서 그가 구속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유로 구속되는지 내게는 알 권리가 있읍니다." 냐이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나는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이렇개 아침 일찍 찾아온 것입니다. 연행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읍니까? 내가 현관문을 열기 전에 문지기와 만나지 않았나요? " "그렇다면 문지기에게 입을 다물도록 명하면 되잖습니까?" "하여간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읍니다. 경찰서에 납득이 갈만한 설명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쉽게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여행용 가방을 든 안네리스가 말없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마루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은 떨고 있었다. 경관이 재촉했다. "우선 식사를 해 주십시오, 라넨 마스님. 아마 경찰에서는 이렇게 호화판 식사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안드시겠어요? 그럼, 출발합시다." "곧 돌아오겠읍니다, 앤, 마마, 틀림 없이 어떤 착오일 것입니다. 나를 믿어 주세요." 안네리스는 내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경관은 내 짐을 밖으로 옮겼다. 내가 경관의 뒤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안네리스는 그냥 내 손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하고 그 손을 놓았다. 안네리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시뇨." 냐이가 말했다. "자, 이제 됐다, 앤. 그가 무사하기를 빌자." 기다리고 있는 마차는 경찰용이 아니라 보통 임대 마차였다. 우리들이 올라타자 마차는 슬라바야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관은 나를 B시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새벽녁의 어둠 속에서 나는 옛날에 B시에서 본 건물들을 하나 하나 그려 보았다. 그 건물 가운데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경찰서? 감옥? 여관? 민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길을 가는 것은 우리들의 마차뿐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탱크차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드루세 석유회사의 정유소로부터 20대에서 30대 가량이 열을 지어 달리고 있을 텐데, 오늘은 볼 수가 없었다. 장사꾼이 몇 사람 슬라바야에서 팔 야채를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같이 탄 경관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틀림없이 로베르트가 나를 모함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행선지가 B시란 말인가 ? 마차의 석유 램프가 안개가 낀 새벽녘의 어둠을 조심스럽게 가르며 나아갔다. 마치 우리들만이 ---경관, 나, 마부, 그리고 말만이--- 길에 있는 생물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위안도 받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안네리스를 상상했다. 냐이는 나의 구속이 사업에 타격을 가져올 것을 걱정하며 실의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베르트 메레마는 슬르호프의 얘기가 사실이 아니었느냐 하고 큰소리 칠 구실을 찾았을 것이다. 마차는 우리들을 슬라바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나는 대합실에 앉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면 이유로 출두 명령을 받았는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안개가 간뜩 낀 새벽의 대기 속에서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해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단념했다. 마차는 경찰서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경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혼자 내버려 둔 채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을까? 그래도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해가 떠오른 뒤에도 안개를 좇아낼 수는 없었다. 잿빛의 작은 물방울들이 모든 것을 뒤덮고 나의 폐패속에까지 침입해 왔다. 화물 마차와 승합 마차, 보행인, 행상인, 노동자 등이 오가면서 경찰서 앞 거리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대합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9시 15분 건이 되자, 경관이 겨우 모습을 나타냈다. 한 시간 가량 잠을 자고 목욕을 한 것 같았다. 말쑥한 표정이었다. 그것에 비해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기진해 있었다. 여전히 출두 이유를 물을 기회는 없었다. "자, 갑시다, 라덴 마스 님." 다시금 마차를 타고 우리들은 역으로 향했다. 그때도 그가 내 짐을 들어다 주었다. 역에 도착해서도 경관은 짐을 내려놓고 차표 파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창구 속으로 그는 펀지를 제시하고 백색 차표를 두 장 받아들었다. 일등 승차권이었다. 이 시간에 떠나는 급행은 없을 것이다. 완행을 타는 것일까? 사실 우리들이 탄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서부행 완행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종류의 열차에 타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급행을 이용하고 있었다. 다만 B시에서 고향인 T시까지 가는 경우는 달랐다. 경관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객차 안의 승객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유럽인 남자 세 명과 중국인이 한명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따분한 모습이었다. 첫번째 역에서 중국인을 포함한 두 사람이 내렸다. 새로운 승객은 타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나는 그 구간을 지나다녔다. 그래서 철로변의 경치는 조금도 신기하지 않았다. B시에서 여관에 묵고는 이튿날 아침, 다시 T시까지 기차 여행을 게속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은 그 단골 여관은 아니다. 내가 가는 곳은 경찰서인 것이다. 열차가 앞으로 나아 갈수록 차창 밖의 풍경은 점점 더 지루하게 변해 갔다. 어떤 때는 잿빛, 어떤 때는 희끄무레한 황색을 띤 불모의 황무지였다. 나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알게 뭐냐? <아아, 인간의 대지>! 가끔 담배 농장이 나타나서는 작아지고 열차의 속력에 씻겨 나가서 사라진다. 그리고서는 다시 나타나서는 작아지고 또 사라져간다. 그리고 논, 논, 또 논...... 기차는 느릿느릿 기어가고 먼지에 더렵혀진 검은 연기를 뿜어낸다. 이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왜 영국이 아니고 네덜란드란 말인가? 그리고 일본, 일본은 어떤가? 경관이 나를 깨웠다. 내 옆에 그가 갖고 온 것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스푼과 포크, 볶은밥, 계란 프라이, 닭튀김이 놓여 있었다. 아마 나 때문에 일부러 준비해 온 것 같았다. 경관으로서는 그와 같은 음식을 내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몇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코코아가 든 흰 병이 옆에 놓여 있었다. 코코아는 쁘리부미에게는 그다지 친숙한 것이 아니었다. 저녁 5시 가까와서 드디어 음침한 B시의 거리가 눈 앞에 나타났다. 경관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나, 이곳에서도 내 짐을 옮겨 주었다. 나는 그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의 학생과 일개 경찰 관리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는 자바어와 말레이어의 읽고 쓰기를 조금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차가 우리들을 역에서 싣고 나갔다.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흰 자갈길은 어느 곳이나 낯익었다. 마차는 호텔로도, 나의 단골 여관으로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또 B시 경찰서가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거리의 광장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 뜯겨지고 패어진 풀밭으로 덮여 있었다.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임대마차는 부빠티의 관저로 향해 가서 돌로 만든 정문 반대쪽에 약간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이번 내 사건과 B시의 부빠티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의 머리는 필사적으로 그 연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경관이 앞장서서 마차를 내려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내 짐의 시중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바 경어로 말했다. "내리시지요."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관저와 비스듬히 마주보고 서 있는 카부파텐(역자주 : 부빠디가 있는 현청)의 청사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전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벽장식도 뜯겨지고 눈에 띄는 가구도 없었다. 우리들은 엉성한 가구가 놓인 방으로 들어갔다. 우노크로모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지내다가 이곳에 들어오자 마치 곡물 창고에 기어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안네리스의 닭장보다 약간 사치스러운 정도라고 해도 좋았다. 그곳은 아마 심문실인것 같았다.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방 안쪽에 선반이 있고, 서류더미 몇개와 책이 몇권 얹혀 있었다. 고문 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각 테이블 위에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경관은 여기서도 나를 마냥 내버려 두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기는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날이 저물어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커다란 사원의 북이 울리고 그 뒤로 예배 시각을 알리는 서글픈 아잔(역자주 : 예배 시간을 알리는 육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청사 안은 차츰 어두워져 갔다. 악령에 홀린 모기들이 떼를 지어 방안에 홀로 있는 나에게로 덤벼들었다. 무례한 놈들 ! 나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것이 라덴 마스이고, 고등학교의 학생인 나에게 대하는 대우란 말인가? 교육을 받고 자바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에게 하는 대우란 말인가? 옷이 몸에 착 달라붙고, 땀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정말 실례했읍니다, 라덴 마스님." 경관이 모기가 득실거리는 어두운 건물을 나가도록 나를 재촉했다. "내가 알현장으로 안내를 하겠읍니다." 또다시 그는 내 짐을 옮겨갔다. 결국 나는 B시의 부빠티에게 알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냐 ! 도대체 어떤 용건일까? 고등학교의 학생인 내가 그의 앞에 엎드려 일일이 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전혀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램프가 밝혀져 있는 알힌장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쩔수없이 읽고 쓰지도 못하는 무식한 왕 앞에 엎드려 달팽이처럼 기어가서 공경의 뜻을 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유럽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고 유럽인과 교제해 온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말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부빠티에게 알현하는 것은 자신을 내던져버린 채 자진해서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찌기 나는 내게 그런 태도를 취하도록 남에게 강요한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왜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역시 생각한대로였다. 무례하게도 경관은 내게 구두와 양말을 벗으라고 재촉했다. 견딜 수 없는 학대의 시각이었다.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나로 하여금 그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마루가 발바닥에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눈짓을 해서 나는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위까지 을라가자 그는 하나 놓여 있는 흔들의자의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나는 얼굴을 맞대고 앉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흔들의자는 파산 직전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남기고 간 최고의 선물이라고 우리 선생님께서 말한 적이 있다, 아아, 흔들의자여,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한 사람의 부빠티를 찬양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자신을 더럽히는가를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제기랄 ! 마치 다리가 없는 사람처럼 무릎으로 기어서 파산 직전의 동인도 회사의 유물인 --- 알현장의 벽가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의자에 다가가는 내 모습을 본다면, 친구들은 뭐라고 할까? "네, 무릎으로 걸어가 주세요, 라덴 마스님. " 경관은 진흙탕에 물소를 몰아넣는 듯한 말투었다. 그 10미터 가량의 거리를 나는 3개국 이상의 말로 저주하면서 기어갔다. 나의 양쪽에는 조개 모양의 깔개가 있고, 마루는 네 개의 석유램프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보통 때는 두 개의 다리 전체를 써서 발바닥을 밑으로 하고 걷는 인간이, 지금 다리를 절반으로 접고 두손의 도움을 받아 걷지 않으면 안되는 이 원숭이 재주와도 같은 모습을 보면 동급생들은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아아, 선조들이여, 무엇때문에 당신들은 자손의 존엄을 해하는 이와 같은 관습을 만들었는가? 당신들은 생각해 본적도 없으리라. 참으로 딱한 나의 선조들이여 ! 당신네들의 명예를 더렵히지 않고도 좀더 고귀할 수가 있었을 텐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당신네들은 이런 관습을 후세에 남겼는가? 나는 흔들의자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관습에 정해진 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마루에 눈을 떨구었다. 여전히 3개국어로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었다.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조각이 된 낮은 받침대와 그 위에 있는 발을 올려 놓는 쿠션, 그것뿐이었다. 쿠션은 오늘 아침 안네리스가 입고 있던 드레스와 같은 검은 빌로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저주스러운 흔들의자 앞에 고개숙이고 앉았다. 대체 B시의 부빠티와 내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친척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다. 하물며 친구도 아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앞으로 언제까지 이러한 학대와 굴욕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이러한 고역과 치욕을 참으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서 가죽으로 만든 실내화 끄는 소리가 차츰 가까와졌다. 나는 그 전율할 발을 끄는 듯한 헤르만 메레마의 구두 소리를 연상했다. 내가 앉은 위치에서 다가오는 실내화가 천천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개끗한 두 개의 다리, 남자의 다리가 있었다. 그 위에는 커다란 주름이 잡힌 바티크 사롱(역자주 : 말레이인이나 자바인이 허리에 두르는 천, 또는 통치마를 가리킴). 옛날 레바랑(역자주 : 단식일) 때에 본 나의 조부모, 또는 부모님에 대하여 관리들이 행동했던 모습을 본따서 나는 얼굴 앞에서 양손을 합치고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리고 그대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B시의 부빠티가 자리에 의젓하게 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공경의 뜻을 나타내면서 나는 지금까지 몇년에 걸쳐 조금씩 내가 몸에 익혀온 학문과 지식이 모조리 사라져가는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학문의 진보가 약속한 아름다운 세계가 사라지고, 인류의 밟은 미래를 환영하는 선생님들의 열광도 사라졌다. 앞으로 몇번이나 더 절을 하지 않으면 안될까? 얼굴 앞에서 손을 합치고 가능한 한 바닥에 가깝게 몸을 굽히고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복종을 맹세한다. 이것이 선조나 귀인을 알현하는 방법인 것이다. 내 자손에게는 결코 이러한 굴욕적인 방법을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그 사나이, B시의 부빠티는 에헴 하고 큰 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유유히 흔들의자에 앉아 발판 앞에 실내화를 벗어 놓고 그 고귀하신 발을 빌로도 쿠션 위에 얹었다. 의자가 약간 흔들렸다. 빌어먹을 ! 시간이 어찌 그렇게 더디게 느껴지는지 ? 어떤 물건이 -- -내 추측으로는 꽤나 긴 것이었다--- 모자를 쓰지 않은 나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 무례한 녀석에게 계속 굽실거리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가볍게 머리를 때릴 때마다 나는 고맙고 황송하다는 듯이 절로써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빌어먹을 ! 다섯 번 가량 두드리고 나자 그 물건은 거두어져서 의자 옆에 걸렸다. 그것은 무두질한 최고급품의 가죽을 얇게 감은 황소의 생식기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승마용 채찍이었다. "여보게" 그는 쉰 목소리로 가날프게 불렀다. "네, 각하 ! "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손은 기계적으로 몇번씩 얼굴 앞에서 합쳐 절을 했다. 마음 속으로는 이것으로 몇번째가 되는지 모를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그대는 어째서 지금까지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의 목소리는 독감이 걸린 목구멍에서 차츰 또렷하게 새어나왔다. 감기든 목소리 때문에 확실하게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어디에선가 들은 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설마 그는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 나는 아직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우편 사업을 멋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편지를 어떤 주소에 배달하고 그대의 손에 정확히 전달하는 정도는 틀림없이 해낼 수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의 목소리다. 설마 !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고 했으나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깨서 잠자코 있는가? 고등 교육을 받은 그대에게는 내 편지 따위는 부끄러워서 읽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틀림없이 그의 목소리다. 나는 다시 한번 언굴 앞에서 손을 합치고는 살며시 머리를 들어서 훔쳐 보았다. 아아, 이럴 수가 !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낙없이 그였다. 나는 소리쳤다. "아버님 ! " "죄송합니다." "대답하라 ! 내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것이 그대는 수치스러운가 ?" "참으로 죄송합니다, 아버님. 수치스럽다니 말도 안됩니다." "어머니의 편지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냐?" "아버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형의 편지에도......"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님. 죄송합니다. 우연히도 저는 그 주소에 살고 있지 않았읍니다. 잘못했읍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대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야자나무만큼 높은 교육을 받아왔느냐?"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 "우리들의 눈은 장님이라서 몇월 며칠 네가 우노크로모로 옮겨갔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아느냐? 우리들의 편지를 네가 읽지도 않고 이곳에 가져온 것을 나는 모두 알고 있다." 황소의 생식기로 만든 채찍이 흔들거렸다. 나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채찍이 내게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이 채찍으로 맞아야만 한단 말이냐?" "제발 사람들 앞에서 저를 때려 주십시오." 나는 쏟아지는 비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포자기하듯이 대답했다. "그 명령이 아버님에게서 내려진다면 명예로운 일입니다." 나는 점점 더 될대로 되라는 듯이 계속했다. "못난 녀석 !" 그가 고함쳤다. "옛날에 나는 역시 같은 문제로 T의 유럽인 국민학교에서 너를 데려왔다. 코흘리개 주제에 말이다. 그것으로 정신을 차렸는가 했는데, 상급생이 되어 갈수록 난봉군이 되어 가다니 ! 같은 나이 또래 처녀와 노닥거리는데 싫증이 났는가 했더니만, 이번에는 첩의 집에까지 들어가서 살고 도대체 너는 무엇이 될 생각이냐?"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는 부르짖고 있었다. 그대는 나를 모욕했다. 왕의 핏줄이여 ! 내 어머니의 배우자여 ! 좋다. 대답따위를 하는가 봐라. 자, 더 계속해라. 왜 그러는가? 자바 왕족의 피여 ! 어제까지 그대는 수리 사업소의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 갑자기 부빠티가, 조그만 왕이 되었다. 자, 그 채찍으로 나를 때려 보라. 어떻게 해서 학문과 지식이 인간의 대지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는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조그만 왕이여 ! "너는 할머님의 손으로 부빠티가 되도록 소중히 길러졌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도록.....가족 가운데서 가장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시내에서도 제일이었다....그런데 아아, 신이여 ! 이 아이는 도대체 무엇이 될 겁니까?" 좋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러나 너도 학교에서만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그것이 단 하나의 구원인 셈이다." 11학년까지 나는 진급할 수 있었다 ! 상처를 입은 내 마음은 소리쳤다. 자, 조그만 왕이여, 그대의 무지를 폭로하는 짓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첩과 함께 살고 있는 위험을 너는 생각한 적이 있느냐? 그 여자의 주인이 화가 나서 너를 쏘아 죽이기라도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느냐? 칼이나 단검, 부엌칼로 당하거나 혹은 목을 졸려 죽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되겠느냐? 신문은 네가 누구고, 부모가 누군지 떠들어대게 될 것이다. 너는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은 거냐? 만약 네가 그런 문제까지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마마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가족, 피의 끈(혈연)으로 나를 노예처럼 꽁꽁 붙들어 매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뿐인 가족 따위는 언제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있다 ! 자, 계속하라 ! 왜 그러는가, 자바 왕족의 피여 ! 그 다음을 계속하라 ! 나도 폭발할 수가 있다. "내일 저녁에 내가 부빠티로 임명된 축하연을 개최한다는 것을 너는 신문에서 읽지 못했느냐? B시의 부빠티가 된 것이다. B시의 부이사관님, 슬라바야의 이사관님, 감독관님, 그래서 근처의 부빠티가 전원 참석하기로 되어 있다. 고등학교의 학생이 신문을 읽지 않다니 말이나 되느냐? 설사 네가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았겠느냐? 네 첩은 너에게 신문도 읽어 주지 않더냐?" 임명이나 파면이나 전임 따위의 관리의 인사에 관한 뉴스는 나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헌 것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 푸리야이(역자주 : 원주민의 식민지 관리)의 새계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니다. 악마가 종두관에 임명되거나 부경을 범하고 징계 면직이 되거나 그것이 어쨌단 말이냐? 내가 찾는 세계는 관리의 직위나 지위, 급료, 오직과 같은 것이 아니다. 갖가지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의 대지, 그것이 바로 내가 찾는 세계인 것이다. "잘 듣거라, 이 불효막심한 놈 ! " 의욕에 충만한 신임 관리답게 그는 명령했다. "너는 남의 현지처에게 열을 올리고 있다. 부모를 잊어버리고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잊어 버렸다. 하기야 너도 아내를 얻고 싶을 것이다. 좋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을 해 보자. 이제부터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명심해서 들어야 한다. 내일밤 너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사람들 앞에서 나와 가족의 명예를 더렵히지 않도록 해라. 이사관과 부이사관, 감독관, 이웃 부빠티앞에서 말이다." "네, 알겠읍니다, 아버님." "통역을 맡아 주겠느냐?" "네, 기꺼이 하겠읍니다, 아버님." "그래, 그래야지. 가끔은 효도를 해서 부모를 안심시켜 줘야한다. 감독관님이 통역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다. 생각해 보아라. 높은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아버지의 취임 축하연에 자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들 생각하겠느냐? 또 언제 너를 그런 사람들에게 소개하겠느냐? 너에게 있어서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 문제는 정말 골칫거리다. 부모가 너에게 얼마나 열심히 입신 출세의 길을 열어 주려고 하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네가 가족 가운데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너는 그것보다는 첩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느냐?" "알겠읍니다, 아버님." "너의 출세길이 탄탄하도록 모두 노력하고 있다." "네, 아버님," "그럼, 물러가도 좋다. 저쪽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인사드려라. 너 같은 녀석은 그렇개라도 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오지 않는구나. 부이사관의 도움까지 청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정말 창피한 일이다. 어떠냐, 죄인처럼 강제로 끌려 오니까 재미있느냐? 하기야 너는 수치심이 없으니까. 자기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조차 잊어버리려고 결심하고 있었을 테지. 어쨌든 그 더려운 첩과의 관계는 청산해 버려라." 물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했던 대로 고개를 숙여 절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리의 절반과 두손의 도움을 받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감정을 등에 지고 소라게처럼 기어서 물러나왔다. 목적지는 내가 양말과 구두를 벗은 장소, 이 저주스러운 체험이 시작된 장소였다. 부빠티의 건물 안에서 구두를 신는 쁘리부미는 없다. 나는 구두를 손에 들고 알현강 옆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이 주방으로 통하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구두를 든 채 부서진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누군가가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왔다. 나는 모르는 체했다. 블랙 커피가 한 잔 나왔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마셨다. 만일 형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일부러 험악한 표정을 짓고 형은 네덜란드어로 말을 걸었다. "곧장 어머님께 인사를 하지 않다니, 너는 예의조차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원주민 관리 양성소의 학생,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관리 후보생인 형의 뒤를 따라갔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서 지구를 멸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줄곧 험악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네덜란드어가 서투른 형은 자바어로 바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무시한 녀석이라고 하면서 나를 더욱 힐책했다. 물론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부빠디 관저로 들어가서 문을 몇 개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문 앞에서 그는 말했다. "여기다. 들어가 보아라 ! " 나는 조그맣게 문을 노크했다. 누구의 방인지는 몰랐지만, 열고 들어갔다. 어머니가 거울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긴 다리가 달린 석유 램프 하나가 그녀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어머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새끼양이 우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음 그녀 앞에 꿇어앉아 무릎에 키스했다. 웬일인지 갑자기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사모의 정이 끓어올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제서야 돌아왔구나, 구스(역자주 : 자바의 귀족들이 아들을 부르는 애칭). 무엇보다도 건강해서 다행이구나." 마치 내가 네 살짜리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머니는 내 턱을 쳐들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애로 가득찬 인자한 목소리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눈물이 넘쳐 흘렀다. 어머니는 옛날과 다름없는 어머니, 틀림없는 나의 어머니였다. "제발 불효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미 한 사람의 어른이다. 콧수염도 훌륭하게 자라나고 있구나. 듣는 바에 의하면, 너는 유복하고 아름다운 현지처를 사랑하고 있다지." 나에게 애기할 여유도 주지 않고 어머니는 계속했다. "만약 네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다음은 네가 결정해야 한다. 너도 이미 어른이니까, 어면 결과를 가져오든 죄인처럼 도망가지 않고 그 결과와 책임을 받아들일 각오는 단단히 되어 있겠지?" 그녀는 갓난애를 어루만지듯이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구스, 학교 쪽은 잘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고마운 일이구나. 한편으로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면서 어떻게 공부를 잘 해 나갈 수 있는지 나는 가끔 궁금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것쯤은 쉽사리 해 낼 정도로 너는 머리가 좋은 모양이지 ? 하기야 남자란 모두 그런지도 모르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슬프게 들렸다. "남자들은 모두 토끼인 체하는 고양이다. 토끼처럼 풀잎을 먹고 고양이처럼 고기를 먹는다. 좋아, 구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라. " 나는 어머니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변명 같은 것은 아무 필요가 없었다. "구스, 남자들은 풀잎이든 고기든 하여간 먹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일이다. 하지만, 고등 교육을 받으면 받을 수록 그만큼 남의 것을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높은 교육을 받으면, 그만큼 한계라는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어려워서 이해를 못한다고는 하지 않겠지 ? 한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아아, 어머님, 당신은 너무나 많은 주옥 같은 말들을 내개 심어주고 계시군요. "아까부터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는데, 내게 무엇인가 할 얘기는 없느냐?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내게 선물로 줄 만한 얘기는 없느냐 ?" "저는 내년에 졸업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냐. 축하한다. 모두 하느님의 은혜다. 그저 기도만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좀더 일찍 돌아오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몹시 걱정을 하시고, 매일 네 일로 화만 내고 계셨단다. 아버지는 이번에 부빠티로 임명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 너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높은 사람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되고 말 것이다. 아버지는 자바어밖에는 모르지만, 너는 네덜란드 어를 할 수 있겠지.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니까. 아버지는 보통국민학교밖에는 못나오셨다. 너는 아버지와 달라서 네덜란드인과 폭넓게 교제를 하고 있으니, 장차 너도 반드시 부빠티가 될 것이다. " "아닙니다, 어머님. 결코 저는 부빠티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되고 싶지 않다고? 그것 참 별난 소리를 다 듣는구나, 그래. 네가 좋을대로 해 봐라. 그런데 너는 도대체 무엇이 될 생각이지 ? 그야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야 있겠지만." "저는 명령도 하지 않고 명령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은 것뿐입니다. 어머님. " "뭐라고? 그런 시대가 찾아은다는 말이냐? 처음 듣는구나, 그런 얘기는." 어렸을 때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어머니에게 열심히 얘기해 주었는데,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의 얘기를 인용해서, 프랑스 혁명과 그 의의, 그리고 기본 사상에 관한 지극히 흥미로운 해설을 나는 어머니에게 들려 주었다. 어머니는 다만 웃기만 할 뿐 이견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내가 어릴 때와 같았다. "땀 냄새가 나고 형편 없이 더럽구나. 목욕을 하거라. 목욕이 끝나거든 자거라. 내일 너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내일 너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 이 부빠티의 관저는 내게는 처음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석유 램프가 켜져 있었다. 방에는 형도 있었다. 그는 테이블 램프 옆에 앉아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서 나는 옆을 가로질러 갔다. 항상 장남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는 형은, 마치 나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전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공부에 열심인 학생이라는 인상을 나에게 주고 싶은 것일까?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여진히 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읽고 있는 책에 나는 흘끗 시선을 보냈다. 활자가 아니었다. 손으로 쓴 것이었다. 표지를 보고 나는 의심을 가졌다. 그것은 쟝 마레가 만들어 준 책의 표지로 나밖에 갖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틀림없는 나의 일기였다. 나는 그것을 빼앗아 들고 소리쳤다. "이 책에 손대지 말아 ! 누가 형더러 이것을 읽으라고 그랬지 ? 이봐, 형의 학교에서는 이런 짓을 하라고 가르치나 보지 ?" 그는 일어나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너는 이미 자바인이 아니구나."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당하면서까지 살아가야 한다면 자바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런 노트가 개인의 사생활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형에게는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지. 형 선생님은 개인의 권리와 윤리에 대해서 가르쳐 준 적이 없었어 ?" 형은 입을 다물고 분노의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장차 관리가 되기 위한 훈련이란 말이야 ? 남의 문제를 은밀히 엿보고 제멋대로 권리를 침해하는 형은 새로운 교육을 받지도 않았어 ? 무엇이든지 자기 좋을대로 하고 싶은 짓을 하는 왕이 되고 싶은 거야? 형의 선조님들의 왕처럼." 분노와 짜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것이 새로운 문명이라는 거냐? 모욕하는 것이 ? 관리를 모욕하는 것이 ? 그리고 너도 그리고 언젠가는 관리가 될 거다." 형은 항변했다. "관리가 된다고? 내가 관리 따위가 될 것 같아?" "좋아,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겠다. 아버지 앞에서 지금 한 말을 다시 한 번 해 봐라." "형이 데려가 주지 않아도 그 정도는 나 혼자서 얘기할 수 있어. 형이야말로 뭐야? 내 물건에 몰래 손을 대고 사과할 줄도 모르고 !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 아니면 예의라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 거야?" "닥쳐 ! 내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면, 벌써 내 앞에 엎드려 빌도록 네게 명령했을 거야." "나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형은 멍청이야, 얼간이고 ! " 그때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2년만에 만난 사인데......어째서 애들처럼 다투지 않으면 않되는 거냐?"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용서할 수가 없읍니다. 상대가 자기 형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님, 이 녀석은 자기 악행을 일기 속에서 솔직이 고백하고 있어요. 나는 그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려고 생각했읍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이 녀석은 화를 내며 내게 대들었읍니다." "너는 아직 관리가 아니야. 칭찬을 듣기 위해서 자기 동생을 팔 권리는 없다. 나는 내가 동생보다 훌륭한 사람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구나." 나는 짐을 집어 들었다. "나는 슬라바야로 돌아가겠읍니다." "안된다 ! 너는 내일 아버지한테 중요한 일을 위임받고 있어." "그 일이라면 형도 할 수가 있읍니다." 나는 형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형은 고등학교의 학생이 아니다."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어째서 이런 취급을 하는 거죠?" 어머니는 형에게 다른 방으로 가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가 나간 뒤 다시 말했다. "너는 이미 자바인이 아니야. 네덜란드인에게 교육을 받고 네덜란드인이 된 것이다. 갈색의 피부를 가진 네덜란드인이. 아마 너는 이미 크리스찬이 되었을 게다." "아아, 어머님, 그런 투로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옛날과 다름없는 어머님의 아들일 뿐입니다." "옛날의 내 자식은 이처럼 반항적이지는 않았다." "옛날의 어머님의 아들은 사물의 선악을 잘 모르고 있었읍니다. 지금 저는 다만 잘못된 것에 항변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어머님. " "그게 바로 네가 이미 자바인이 아니라는 증거다. 연장자와 마땅히 존경해야 할 사람과 보다 힘이 있는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려고 하지 않는 게 말이다." "어머님, 저를 꾸짖지 마십시오. 옳은 것에는 저도 경의를 표하고 있읍니다." "자바인은 나이 많은 사람과 보다 힘이 있는 사람에게만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거란다. 그것이 숭고한 것에 이르는 길이란다. 얘야, 사람은 복종하는 용기도 있어야 되는 법이란다. 아마 너는 그 노래도 벌써 잊고 있을 테지 ? " "아직 기억하고 있읍니다, 어머님. 저는 지금까지도 자바의 책을 읽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릇된 자바인의 잘못된 노래입니다. 복종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남에게 짓밟힐 뿐입니다, 어머님. " "얘야 ! " "어머님, 저는 오늘날까지 십여년동안 네덜단드인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러한 것을 터득하게 되었읍니다. 그래도 어머님은 저를 꾸짖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는 네덜란드인과 지나치게 가까이 사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와서는 동포와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으며 집안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에게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 거다. 우리들이 보낸 편지에 너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너는 이미 나까지도 좋아 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용서해 주세요, 어머님." 그녀의 말은 나를 날카롭게 찔렀다. 나는 마루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 앞에 앉아 다리를 껴안았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어머님. 너무 심하게 저를 꾸짖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다만 자바인이 모르고 있는 일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지식은 유럽인의 것이고, 저 그들에게 배워 왔으니까요." 어머니는 내 귀를 비틀었다. 그리고나서 무릎을 꿇고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너를 꾸짖지는 않는다. 너는 이미 네 자신의 길을 찾은거다. 나는 너에게 방해를 하거나 너를 집으로 부르지는 않을 생각이다. 너는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가면 되는 거다. 다만 너의 부모를, 그리고 네가 배웠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못배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저는 누구에게 상처입히려고 생각한 적은 없읍니다." "아아, 이것이 아마도 여자의 숙명일 게다. 여자는 낳을 때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자기 자식의 행동에 의해 또 다시 고통을 받는단다." "말대꾸를 하는 것 같습니다만 어머넘, 저의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너무 하신 말씀입니다. 어머님은 언제나 저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해 오셨옵니다. 저는 힘자라는 한 그 말씀을 지켜 왔읍니다. 그런데도 저를 책망하시다니요." 내가 아직 갓난애라도 되는 듯이 어머니는 내 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주셨다. "네가 내 뱃속에 있었을 때, 나는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단검을 준 꿈을 꾸었단다. 그때부터 나는 배 안에 있는 아기가 날카로운 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얘야, 그 단검을 사용 할 때는 제발 조심해야 한다. 네 자신에게 꽂히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아버지의 부빠디 임명을 축하하는 연회장의 준비에 아침부터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을 위해 카부파텐 가운데서 용모와 재주가 뛰어난 무회가 고용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이미 아버지는 청동으로 만든 최고의 가무란 악기를 T시에서 운반해 왔다.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가무란으로서 평소 사용되지 않을 때는 언제나 빨간 빌로도에 싸여 있고 해마다 조율을 하는 것 외에 꽃잎을 뿌린 물로 씻겨진다는 유서 있는 악기였다. 가무란과 함께 조율사도 와 있었다. 아버지는 가무란 악기 자체뿐만 아니라, 음질까지 순수 동부 자바식이 아니고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알현장은 아침부터 사람들이 조율을 위해 줄질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B시의 카부파민 청사의 공무 집행은 완전히 중단되어 있었다. 전 직원이 슬라바야로부터 불려온 유명한 장식가인 니콜로 모레노씨의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장식을 위한 도구를 담은 커다란 상자를 갖고 왔는데, 그것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것들 뿐이었다. 또 장식이라는 것이 하나의 진문 기술이라는 사실을 내가 안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니콜로 모레노씨는 B시 부이사관의 추천에 의해 슬라바야 이사관의 승인과 보증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날 아침, 나도 또한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레노씨는 내게 양복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인지 자기 손으로 내 몸을 쟀다. 그것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자유로와졌다. 이미 알현장은 그의 손에 의해 화려한 무대로 변하고, 그 중앙에는 내가 일찌기 꿈 속에서 동경했던 아름다운 처녀, 빌헬미나 여왕의 커다란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일부러 슬라바야에서 갖고 온 그 초상화는 휴센페르트라는 독일인 이름을 가진 화가가 그린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감탄할 뿐이었다. 삼색기가 한 개씩, 또는 두 개씩을 교차시킨 모양으로 여러 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또 3색의 긴 리본이 여왕의 초상화에서 알현장 전체에 둘러져 있었다. 그 장엄함에 참석자들은 매료당할 것이다. 알현장의 기둥은 그것 또한 내가 그 때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겨우 2시간이면 말라버린다는 분말의 도료로 칠해져 있었다. 반얀의 나뭇잎과 누르스름한 야자의 잎이 전통적인 색채로 어우려지고 메마른 벽과 기둥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상쾌한 무대장치로 바뀌고 있었다. 주황색, 푸른색, 흰색, 자주색과 같은 스며드는 것 같은 선명한 꽃들의 색채 경연이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아버지의 일생 일대 최고의 밤이 찾아왔다. 이미 조금 전부터 가무단이 낮은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내 방에서는 니콜로 모레노씨가 나에게 옷을 입혀 주는데 바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옷 입는데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백인한테! 마치 내가 시집을 가는 숫처녀나 되는 것처럼. 나에게 옷을 입히는 동안 그는 마치 쁘리부미의 입에서 나오는 듯한 억양이 없는 기묘한 느낌의 네덜란드어를 쉴새없이 지껄여댔다. 분명히 그는 네덜란드인은 아니었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그는 자주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각지의 부빠티, 자바의 왕족, 그리고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의 술탄 등의 양복을 만들고, 현재도 그들이 단골이라고 했다. 또 자바왕의 근위병 제복도 그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전부 믿지는 않았으나, 수긍도 반론도 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모레노는 나에게 자수가 들어 있는 조끼를 입혔다. 그것은 마치 거북이의 등 딱지로 만든 것처럼 거북살스러워서 몸을 굽히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또한 소가죽처럼 뻣뻣한 칼라는 목의 자유를 빼앗았다. 그와 같은 조끼를 입히는 것은 등줄기가 곧게 선 자세를 갖게 하고 두리번거리지 않고 진짜 신사답게 시선이 똑바로 정면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은띠가 달린 바티크의 사롱을 내게 입혔다. 사롱을 입은 모습에 씩씩한 동부 자바적 품격이 우러나도록 손질을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의향 같았다. 나는 수줍은 처녀처럼 고분고분 따랐다. 머리에는 니콜로 모레노 자신이 만든 동부 자바풍과 마두라풍을 섞은 아주 새로운 스타일의 두건이 씌어졌다. 뒤이어 보석을 박은 단검, 등이 터진 반코트 같은 검은 공단 웃옷이 입혀졌다. 검은 공단에 단검을 조화시켜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에 단성을 지르게 하려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검은 나비 넥타이가 매어져 목을 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에 내 눈이 한점을 향해 고정되었다. 서서히 뜨거운 땀이 등과 가슴을 적시기 시작했다. 가울에 비친 내 모습은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승리의 무사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웃옷 밑에는 금실로 자수를 놓은 빌로도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물론 나의 선조는 자바의 무사이니까 나도 또한 자바의 무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렇기는 하지만, 나를 이토록 씩씩한 대장부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째서 자바인이 아닌가. 왜 유럽인인가? 아마 니콜로 모레노씨는 이태리인이겠지만, 어째서 이태리인인 그가 자기는 입어 본 적이 없는 의상을 내게 입히지 않으면 않되는 것일까? "옛날에 아망크라트 1세 (재위기간 1646--77년) 이후로 자바의 임금님들의 의상은 유럽인이 디자인하고 만들어 왔옵니다. 미안하지만 당신네들은 우리들이 올 때까지 담요밖에는 몸에 두르지 않고 있었읍니다." 모레노씨가 말했다. 위도 아래도 머리도 담요뿐이었다니 ! 정말 자존심 상하는 얘기다.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그의 얘기는 둘째 치고, 거울에는 쓱 빼놓은 미남인 내가 비치고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조끼나 칼라, 넥타이에서 보여지는 유럽적 요소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위에 공단이나 빌로도가 모두 영국제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명실공히 자바의 의상이었다고. 지금 입고 있는 내 옷차림과 모습은 새로운 시대가 탄생한 19세기 말의, 인간의 내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인간의 대지 전체 속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통감하게 되었다. 이미 자바인의 복지는 투엔테(역자주 : 직물 산업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도시)에서 짜고, 그 재료까지 선택하고 있다. 마을의 직조물은 지금은 마을 사람만이 소비한다. 겨우 바틱 직조만이 자바인에게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이 육체, 나는 여전히 자바인이다. 모레노씨가 방을 나갔다. 나는 앉았다. 오늘 밤의 분위기를 들뜨게 하기 위한 동부 자바풍의 가무란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골똘한 생각에서 깨어나 다시금 거울을 들여다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관습에 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장에 들어설 때의 종자를 내가, 선도역은 형이 맡았다. 누이동생들은 공식 장소가 아니라 뒤쪽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내빈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하고 형이 두 사람의 앞쪽에, 내가 뒤쪽에 자리잡았다. 알형장에 마련된 식장에 우리들이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B시의 부이사관이 도착했다. 그러한 식순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기립해서 경의를 표했다. 부이사관은 아버지에게 똑바로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뒤이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형과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해서 겨우 아버지와 나란히 앉았다. 환영의 노래 "쿠보 기로"가 가무란으로 연주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알현장은 흥분과 가스등불빛 때문에 얼굴이 상기된 참석자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 뒤쪽의 정원에 돗자리가 깔려 있고, 촌장이나 마을의 관리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사회자인 B시의 부빠티 보좌관이 개회를 선언했다. 가무란이 한순간의 망설임 끝에 신비의 힘에 제압된 듯이 조용해겼다. 네덜란드 국가 "빌헬름스"가 제창되었다. 사람들은 일어섰으나 노래를 부른 것은 극소수였다. 물론 대부분이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쁘리부미로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한두 사람으로, 그 나머지는 어쩌면 그 기묘하고 짜증스러운 선율을 저주하면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B시의 부이사관이 슬라바야의 이사관 대리로서 축사를 하기 시작했다. 감독관 윌렘 엔데씨가 자바어로 통역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부이사관은 고개를 흔들고 손을 흔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그가 통역으로 지명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한순간 망설였으나 곧 침착성을 되찾았다. 걱정할 것은 없다. 나보다 잘 할 사람은 없을 거야 ! 그런 생각을 하자 용기가 생겼다. 학교의 시험 때와 같은 요령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자바의 관습에 따라 공손하게 절을 하고, 손을 모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교실 앞에 나와 선 것만 같았다. 어떤 곳에 시선을 보내도 부빠티들의 눈과 마주쳤다. 아마 그들은 절반은 자바풍, 절반은 유럽풍의 옷차림을 한 이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젊은 무인과 같은 나에게 놀라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절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반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이사관이 축사를 끝내고, 나도 자바어의 통역을 끝냈다. 그는 아버지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연설을 할 차례였다. 아버지는 네델단드어를 몰랐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조차 못하는 다른 부빠티보다는 나았다. 그는 자바어로 얘기를 하고 내가 그것을 네덜란드어로 통역했다. 그때 나는 부이사관과 그밖의 유럽인 내빈을 향해 전형적인 유럽식으로 통역했다. 마치 내가 연설하고 있는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부이사관은 나를 주목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니면 원숭이가 재롱을 피우고 있다고 나의 일거일동을 비웃고 있었을까? 아버지의 연설이 끝나고 나의 통역도 끝났다. 고관들이 부모와 형과 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부이사관은 내게 축하를 할 때, 나의 네덜란드어를 칭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굉장히 잘 했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말레이어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부빠티님, 이린 젊은이를 아들로 두어서 당신은 행복한 분이오. 네덜란드어는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태도가 훌륭했읍니다." 그리고는 다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자네는 고등학교의 학생이라고 했지 ? 내일 오후 5시에 우리집에 올 수 있겠나?" "네, 기꺼이 가겠읍니다." "마차를 마중보내겠네." 축사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촌장 등이 부빠티의 손을 잡고 절을 하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일일이 손을 내밀어 그들과 악수를 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들은 정원에 깔린 돗자리에 앉은채로 있었다. 다시금 가무란이 커다란 소리를 냈다. 풍만한 육체를 가진 무희가 장식띠를 얹은 쟁반을 들고 날듯이 식장으로 들어왔다. 은쟁반을 든 채 그녀는 뜩바로 부이사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백인 고관은 의자에서 일어나 장식띠를 자기 어깨에 걸쳤다. 사람들은 박수 갈채로 호응을 했다. 부이사관은 아버지에게 목테를 보내 양해를 구하고 나서 참석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그는 무희와 함께 회장의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장식띠의 끝을 잡고 징소리가 울릴 때마다 목을 활기 있게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그와 마주서서 육감적인 몸매의 매혹적인 무희가 멋지게 춤을 추었다. 몇분 뒤 무희가 또 한 사람 뛰어들어왔다. 그녀도 눈부실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은쟁반을 손에 들고 술이 담긴 작은 크리스탈 잔을 날라와서는 부이사관 옆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부이사관은 춤추기를 그만두고 새로 들어온 무희의 정면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크리스탈 잔을 들고 술을 4분의 3가량 마셨다. 나머지 4분의 1이 든 술잔을 그는 상대된 무희의 입술에 갖다 댔다. 여인은 춤을 추면서 싫다는 빛을 나타내 보인 다음, 그것을 쭉 들이마시고 몹시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관객은 요란한 갈채를 보내고, 촌장과 마올의 하급관리들이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마셔라, 아가씨 ! 마셔, 자, 한 잔 ! " 나중에 등장한 무희는 부이사관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들고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부이사관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쾌한 듯이 손바닥을 치며 웃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또 다른 무희가 나타나서 아버지에개 장식띠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멋지게 춤을 추었다. 그 춤은 이윽고 다른 무희의 쟁반에서 술을 마시고는 끝났다. 그것이 끝나자 부이사관은 돌아갔다. 부빠티들도 한 사람씩 호화로운 전용 마차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촌장들과 경찰 관리들은 알현장으로 밀려 들어와 술을 마실 때마다 환성을 질러댔고, 댄스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나의 여행용 가방에서 조그맣게 포개 쌓은 은화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축제의 이튿날이었다. 그 종이 뭉치에는 안네리스의 글씨로 <너무 오랫동안 소식을 끊지는 마세요. 안네리스 올림> 이라고 씌어 있었다. 돈은 모두 합쳐서 15길더였다. 그것은 마을의 한 가족이 10개월, 아니 하루 생활비를 2센트 반이라고 한다면 20개월은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침 나절에 나는 우체국으로 갔다. 확실한 이름은 모르겠으나, 혼혈인 우체국장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전날 밤 축제에서의 나의 네덜란드어는 참으로 훌륭하고 정확했다고 말하며 칭찬했다. 그 조그만 우체국의 직원은 모두가 일부러 일을 중단하고, 우리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 얼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이곳에서 일을 한다면, 우리들로서는 그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등학교의 학생이시죠?" "나는 전보를 치러 온 것뿐입니다."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있읍니까?" "아닙니다." 우체국장은 앞장서서 전보 용지를 가져오고 자기 자리에 나를 앉게 했다. 나는 전문을 써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취급했다. "당신의 형편만 괜찮으시다면, 우리들도 식사에 초대할 수가 있을 텐데요." 부이사관이 나를 초대한 것이 시의 큰 화제거리가 된 것 같았다. 백인과 갈색 원주민의 모든 관리에게서 초대장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하룻밤 사이에 왕자로 변신이 된 셈이었다. 이 문맹 사회의 한가운데서 고등학교의 최상급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 모두가 나를 떠받들 것이다. 부이사관에게 제일 먼저 초대받았다고 하면, 이미 그 사람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고, 하는 일 모두가 옳으며 자바의 관습을 깨뜨렸다는 등의 비난을 받을 걱정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 예측이 현실적인 것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 조그만 우체국을 나올 때, 나는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전직원이 공손하게 절을 했다. 아마 그들 가운데는 벌써 나를 데릴 사위나 매부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틀림 없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고등학생인 것이다. 역시 내가 생각한대로 집에 돌아오니, 자바어로 씌어진 편지가 몇통 이미 배달되어 있었다. 모두가 초대장이었다. 발송인 가운데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장인 내지는 매부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틀림없다고 나는 추측했다. 사람들은 나를 부빠티의 아들로서 본인도 장래에는 부빠티가 되리라 지목하고 있으며, 또한 젊은 나이에 이미 부이사관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감독관조차도 그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 이 도시, 아아, 인간의 대지의 한 잿빛 구석이여 ! 부모의 체면을 세우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그날 오전 내내 곧 슬라바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초대에는 응할 수 없다는 사과의 답장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저녁때 약속한 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다. 어머니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는 슬라바야에서의 일상 생활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갔다. 내가 부이사관에게 초대받았다는 소식은 벌써 온 거리에 퍼져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부빠티 관저와 부이사관 관저 사이의 짧은 거리를 가는 나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맨발이기는 하지만 깨끗한 자바의 복장에 몸을 감싼, 내가 모르는 많은 얼굴들이 공손하게 절을 했다. 두건 위에 모자를 쓴 사람들은 그것을 벗고 인사를 했다. 마차는 나를 태우고 곧장 부이사관 관저의 뒤쪽으로 가서 베란다가 있는 곳에서 멈췄다. 부이사관과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이사관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는 딸을 소개했다. "여기가 사라, 내 큰딸일세. 여기는 막내딸인 미리암, 두 아이모두 고등학교의 졸업생일세. 막내는 자네와 같은 학교에 다녔네, 물론 자네가 입학하기 전의 일이네만. 미안하지만 나는 그만 실례하겠네. 급한 일이 있어서. " 그렇게 말하고 부이사관은 가버렸다. 거리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명예로운 초대는 그런 것이었다. 나를 딸들에게 소개하고 본인은 재빨리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사라와 미리암은 나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았다. 선배는 웬만한 일에도 금방 으스대며 후배를 놀려대고 열을 빼놓는 일이 많다는 것을 고등학교 학생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밍케, 조심해라. 아니나 다를까? 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리암의 네덜란드어와 문학 담당이었던 메이러 선생은 지금도 있어요? 머리가 이상한 수다장이 말이에요?" "미스 마푸다 빼테루스로 바뀌었읍니다." "틀림없이 더 지독한 수다장이에다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부엌에 관한 얘기뿐이겠죠." "그녀가 '미스'라는 것은 확실한가요? " "모두들 '미스"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미리암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사라도. 도대체 무엇때문에 웃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얼마간은 될대로 되라는 듯이 떠들어댔다. "부엌 용어에만 능통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대단히 훌륭한 선생님으로 나는 가장 좋아합니다." 두 사람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곤혹스러웠다. 한순간 두 사람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양쪽에서 힐끗힐끗 나를 훔쳐 보는 것 같았다. 미리암이 놀려댔다. "선생을 좋아한다고요? 네덜란드어와 문학 담당으로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사람도 없었어요. 모두들 엉터리였어요. 당신은 그녀에게서 무엇을 얻었지요?" "80년대의 문학 형태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그것을 오늘날의 형태와 비교하는 것이 그녀의 특기입니다." 사라가 소리쳤다. "어머 ! 그렇다면 윌리엄즈 크로스의 (주 : 미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시를 어느 것이나 하나 암송해 봐요. 그러면 당신의 선생님이 정말로 우수한지 어면지 우리들도 알 수가 있을 태니까요." 나는 다시 될대로 되라는 듯이 계속했다. "그녀가 잘 가르치는 것은 80년대 문학 작품의 심리적, 사회적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대단히 재미있읍니다." "심리적, 사회적 배경이라니 ? 당신은 그것을 어떤 의미로 말하고 있는 거죠?" 사라와 미리암은 또 킬킬거리고 웃어댔다. 나는 그녀들의 심술궂은 웃음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두사람의 옆눈질을 피하기 위해 나는 조금 진까지 부이사관이 앉아 있던 의자로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그녀들과 마주 앉게 되었다. 그렇게 보니까, 두 사람 모두 쾌활한 유럽 처녀로서,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후배된 입장으로서 선배에 대한 경계심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그것에 관해 만약 논하라고 한다면. 눈앞에 구체적인 문학 작품을 놓고 검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궁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웃음은 점점 커지고 서로 곁눈질로 신호를 주고 받았다. "심리적, 사회적 배경에 관해서 논하는 네덜란드어와 문학 선생이 있다니 거짓말이지요? 그런 일은 모조리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라구요. 그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인가 하는 선생은 도대체 무엇이 될 생각일까? 기껏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80년대'의 문학가들 ---공장의 매연에 오염된 하늘을 탄식하고, 도로와 철조망에 침식되고 자동차나 기차의 소음에 파괴된 전원을 우려하는 작가들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겠지." 도전적인 미리암이 공격을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운운할 생각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감상적인 새대가 아니라 무르다투리 (역자주 : 식민지 관리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정책을 비판한 네덜란드 작가)에 대해서 논해야 해요..... 그리고 동인도에 대해서 ! " "그래요. 그래야만 비로소 힘찬 문학, 진흙이 연꽃을 피게 하는 문학을 논하게 되는 거라구요. " "그녀는 무르타투리에 대해서도 얘기했읍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학교에서 무르타투리를 가르치다니,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요. 진리니 뭐니 하는 것에 까다로운 곳에서 어떻게 그턴 일이 가능하겠어요? 교과서에 그의 글이 실린 적은 한번도 없어요." 미리암이 공격을 계속했고 사라가 맞장구를 쳤다. "미리암의 말대로예요. " 하고 "사회적 배경에 관해서 논할 생각이라면 무르타투리야말로 바로 전형적인 예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동생을 힐끔 쳐다보았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은 다만 단순한 전형으로서, 무르타투리를 거론한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에게 촛점을 맞추고 평가했읍니다." "촛점을 마추다니 !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라가 소리쳤다. "동인도 고등학교의 선생님이 무르타투리에게 호의를 표명했다고 !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미리암, 어떠니 ?" 미리암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당신들의 교과서가 달라진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당신네 선생님은 상당한 허풍선이군요. 당신도 그녀의 제자다와요. " 사라는 심술궂게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대담한 선생이군요. 만약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면, 그녀는 신세를 망칠 수도 있어요." 미리암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렇지요?" "당신도 상당히 단순하군요.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요. 꼭 알아두어야 해요. 왜냐 하면, 만일 당신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 선생은 어쩌면 급진파(식민지 탄압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급진파의 어디가 나쁩니까? 그들은 동인도에 진보를 가져오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 나는 내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 반드시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고, 적절하다고도 할 수 없어요, 안그래요? 좋은 일도 시간과 장소를 그르치면 잘못으로 되는 경우가 있어요." 미리암이 역설했으나 사라는 가볍게 헛기침을 할 뿐 참견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열심히 소개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두 사람의 말 장난은 점점 더 심해갔다. 그러나 후배로서는 도대체 누가 처음에 그런 전례를 만들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무르타투리의 대표작인 '막스하페랄'이나 '네덜란드 상업 회사의 커피 경매'입니다." "그럼, 무르타투리는 누구를 말하는 거지요?" 이번에는 사라가 공격을 해 왔다. "누구냐구요? 에드위드 다우에스 데켈입니다." "맞았어요, 하지만 또 한 사람의 다우에스 데켈을 알아 둬야해요. 의무예요, 그것은." 이 짓궂은 선배들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 사라는 나를 툭툭 쏘아대면서 입술을 경련시키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원주민을 노예마냥 놀림감으로 삼는 연극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무례한 여자들이다. 역사상 알려져 있는 다우에스 데켈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까 모르는 것 같군요, 당신은?" 사라가 쌀쌀맞게 말했다. "혹시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미리암이 억제할 수 없는 발각처럼 킬킬거리고 웃었다. 좋다. 이 악마의 음모와 대결을 해보자. 아무래도 이것이 시를 뒤흔든 부이사관으로부터의 명예로운 초대의 댓가인 모양이다. 좋다. 나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대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필명을 무르타투리라고 하는 에드워드 다우에스 데켈 뿐입니다. 다른 다우에스 데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정말 있어요." 사라가 계속했다. 미리암은 실크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에요. 자, 누굴까요?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지 말아요. 당신, 사실은 알고 있는 거죠? 모르는 체할뿐이죠?" "정말로 모릅니다." 나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마푸다 빼데루스라는 당신의 선생님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상식 부족이군요. 잘 들어요. 무르다투리보다 중요한, 또 한 사람의 다우에스 데켈이라는 사람이 어떤 젊은이냐면......" "젊은 사람입니까?" "물론 아직 젊어요. 지금 배를 타고 있어요. 아니 이미 지금쯤은 남아프리가에 도착해서 네덜란드 편에 붙어서 영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을지도 몰라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없읍니다. 그 사람은 어떤 글을 썼읍니까?" 나는 저자세로 물었다. "그는 아직 젊어요. 아직 저서가 없다 해도 용서받을 수가 있어요. " 사라는 그렇게 말하고 또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알턱이 없지 않습니까? 저서가 있어야 세상에 알려지개 되는 것이 아닙니까?" 겨우 나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 지상에 있는 몇억이라는 사람들은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저서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으로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도 많이 쓰고 있어요. 다만 독자가 한사람밖에 없을 뿐이지요. 가장 충실한 그의 독자, 그것이 이 미리암 드라크로아, 즉 그는 동생의 애인이라구요. 알겠어요?" 빌어먹을 ! 나는 마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미리암의 애인에 불과하다면, 내가 그 사나이와 무슬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여자도 안네리스 메레마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자, 미리암, 네 애인에 대해서 애기를 해 주렴." 사라가 매우 기분이 좋아서 재촉했다. "안돼. 우리들의 손님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야. 다른 얘기를 해요. " "밍케, 당신은 순종 쁘리부미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굴욕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려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럽식 교육을 받은 쁘리부미, 멋있어요. 유럽에 관해서는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자기 나라에 관해서는 그다지 모르고 있어요. 그렇죠? 내 말이 틀렸어요?" 드디어 모욕이 시작되었다. "당신네들의 선조는, 미안해요, 이런 얘기를 해서 화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당신네들의 선조는 대대로 번개라고하는 것은 전사가 악마를 붙잡으려고 할 때 일으키는 파열음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렇지요? 왜 잠자코 있어요? 당신 선조들의 신앙이 부끄러운가요" 사라 드라크로아가 웃음을 그쳤다. 진지한 표정으로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듯이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선조를 일부러 꺼낼 필요는 없을 텐데요?" 나는 반발했다. "유럽인의 선조, 네덜란드인의 선조도 옛날에는 우리들의 선조못지 않게 무지몽매했으니까요." "어머 ! 걱정하던대로군요. 당신들 선조를 들먹이며 싸울 생각이에요? " "그래요. 당신과 나는 소와 같은 거라고요, 밍케." 미리암이 계속했다. "처음 만났을 때 뿔을 마주대고 싸우고, 그 다음에는 사이가 좋아지는 거예요. 영원히 친구가 되는 거예요, 안그래요?" 싹싹한 아가씨다 ! 나의 불신감은 엷어져 갔다. "우리들의 선조 쪽이 당신네 선조들보다 무지했는지도 몰라요, 밍케. 당신네 선조가 이미 논과 관개를 만들고 있을 무렵, 우리들의 선조는 아직 동굴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당신도 학교에서 이런 것을 배웠을 거예요 ---번개는 정전기의 구름과 부전기의 구름이 부딪치는 것에 불과하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렇지요? 그것에 대해서 당신들의 선조는 번개를 잡아서 닭장 속에 가두었다는 키 아겐스라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을 갖고 있어요." 사라가 읏음을 터뜨렸다. 미리암은 점점 더 진지한 얼굴로 짙어가는 황혼 속에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수께끼를 던졌다. "당신은 틀림없이 정전기와 부전기의 구름에 관한 가르침을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가 있을 거예요. 왜냐 하면, 진급을 하려면 좋은 성적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그 가르침을 옳다고 믿고 있나요?" 나는 겨우 이해가 갔다. 그녀는 내 생각을 떠보는 것이다. 그렇다. 영낙 없는 시험이다. 솔직이 말해서, 나는 그러한 것에 관해서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극히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이번에는 사라가 끼어 들었다. "물론 우리들은 당신이 그러한 자연 과학의 수업을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해요. 다만 문제는 당신이 그것을 믿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에요. "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단지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지요.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당신이 아직 믿고 있지 않다는 애기라구요." "나의 선생인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는......" "또 마푸다 빼테루스군요." 하고 사라가 가로막았다. "그녀는 나의 선생님입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지 배우고 그리고 실천해 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했읍니다. 그것은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 두 사람도 만일 믿는 것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당신 선생닝의 말대로군요." 사라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한편, 미리암은 애인의 초상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공세를 겨우 물리칠 수 있게 되어 얼마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올해들어 우리들은 '새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말을 자주 하게되는데 당신은 어면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미리암이 번개의 문제를 젖혀두고 다시 공격을 가해 왔다. "알고 있읍니다. 다만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거지만." "그렇다면, 당신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이 말하는 '새시대'는 어떤 의미죠?" 미리암이 파고 들어왔다. "그 말은 사전에는 없지만, 우리 선생닝에 의하면, 과학, 미학, 효율성의 요건을 중시하는 정신, 태도, 사물을 보는 시점 등의 총칭입니다. 그밖에 다른 뜻은 나는 모릅니다. 그녀는 로마 교황에게 제명당한 카톨릭 교회 내의 분리파 출신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밖의 뜻도 있겠지요, 아마?" 사라와 미리암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이 내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내 질문에 대답하기는 커녕 친숙한 듯이 달려드는 모기들을 부지런히 쫓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 모기는 나를 레스토랑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사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번에는 내가 웃을 차례였다. "어머, 이걸 마시는 것을 잊고 있었네. 얼른드세요." 사라가 말했다. 긴장이 차츰 풀려 갔다. 나는 마음 놓고 숨을 쉴 수가 있게 되었다. 흰 바지와 셔츠를 입은 하인이 얼마 전에 우리들의 테이블에 컵과 케이크를 놓고 간 것을 생각해냈다. 처음으로 나는 웃을 여유가 생겼다. 그것은 긴장이 풀린 갓만이 아니라, 그녀들도 나 이상은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신은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역자주 : 네덜란드의 이슬람 학자, 1857--1936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나요?" 또 다시 미리암이 공격을 시작했다. 지금 부이사관이 나타난다면 이 고역도 끝장이 날 텐데. 구원의 신이여, 당신은 어디에 있읍니까? 어째서 나타나지를 않는가? 그리고 왜 이리 당신의 딸들은 황혼녕의 모기에 못지 않게 흉폭한가? 어쩌면 내 선배인 당신 딸들에게 곤혹을 당하게 하려고 당신은 일부러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부이사관은 의도적으로 나를 자기의 두 딸과 대결시켜, 나를 시험하려고 했던 것이다. 틀립없이 그에게는 무엇인가 명확한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하면 어떨까요? " 사라와 미리암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기다려요." 미리암이 가로막았다. "먼저 당신부터 대답을 하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뛰어난 선생님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당신도 못지 않게 우수한 학생이구요. 당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에요. 아마 나도 좋아하게 될 거예요. 내가 마지막으로 한질문 말인데, 당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아마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해주겠지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배우지 못했어요. 가르쳐주십시오." 다분히 미리암은 나의 선생으로서 등장할 기회를 줄기차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요령 있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학자이다. 비범한 사상가이며 실천가로서, 학문의 발달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용기를 갖고 있었다. 아치에 전쟁에서는 네덜만드의 승리를 결정짓는데 이바지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판 휴츠(아치에 전쟁의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후에 동인도 총독)와의 논쟁에 말려들고 있다. 아치에를 둘려싼 의견의 대립이다. 그 대립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것이 쓸데 없는 대립이다. (미리암은 그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세 사람의 원주민 젊은이와 어떤 귀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실험의 목표는 단 한가지, 과연 원주민은 유럽의 학문과 지식을 실제적으로 흡수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살려질 수가 있는가를 아는 데 있다. 매주 그는 유럽인 학교의 학생으로서 그들에게 내면적인 변화가 있는가, 또한 그들에게 그것을 흡수할 능력이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젊은이들과 토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과 지식은 쉽게 벗겨지고 마는 엷은 도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석학은 아직도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또 내가 웃을 차례였다. 별것은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이 두명의 아가씨는 그 훈장님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그녀들에게 마구잡이로 붙들려온 실험용 모르모트인 셈이다. 잘한디. ! 잘들 논다 ! 그러나 그녀들이 이러는 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고 아버지도 반드시 악의가 있어서 한 짓이라고는 속단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역습으로 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나는 미리암의 얘기를 입을 다물고 계속 듣기만 했다. 그것은 후배로서,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였다. 투명한 정적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잠자코 있던 사라가 물었다, "당신들은 어소시에이션 이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나요?" "미스 미리암, 여기서는 당신이 내 선생이군요." 나는 질문을 피해 얼른 말했다. "아니, 선생님은 아니에요. " 갑자기 미리암이 겸손해졌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지요, 안그래요? 그럼, 그 이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군요." "없읍니다." "알았어요. 그 이론은 푸르푸로니에 박사가 내세운 거예요, 새로운 이론이죠. 그의 생각은 만일 그의 실험이 잘 되기만 하면, 동인도 정부는 그것을 실제로 시행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사라?" "네가 얘기하렴. " "어소시에이션이란 유럽적 방법에 의거한, 유럽인 관리와 교육을 받은 원주민과의 '협동'이라는 뜻이에요. 진보적인 당신들과 함께 이 나라를 다스려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통치 책임은 이제 백인만이 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유럽인의 행정기구와 원주민의 행정기구를 연결하고 있던 감독관의 직책은 필요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부빠티가 직접 백인 행정 기구와 손을 잡게 된다는 거죠. 알겠어요?" "계속해 주세요?" "당신의 의견은?" "참으로 간단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들 쁘리부미는 '자바 연대기'와 같은, 당신들이 읽지 않는 것을 읽고 있읍니다. 자바어를 읽고 쓰는 것은 우리네 가정에서는 필수 과목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알다시피 유럽인 학교에서는 국민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에서 학생들은 우리들 쁘리부미를 정복한 네덜란드군의 용맹성을 친양하도록 배우고 있읍니다. " "네덜란드군은 정말로 용감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하고 미리암은 자기 민족을 변호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쁘리부미가 쓴 많은 연대기에는 당신들의 압박을 쁘리부미는 몇백 년에 걸쳐서 어떻게 견디어 왔는가를 적고 있읍니다. 그것을 알고 있읍니까?" 나는 그녀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패배의 연속이었다, 그 말인가요?" 미리암이 도전했다. "그래요. 확실히 지기만 했지요." 갑자기 나는 말을 계속할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대신 질문을 했다. "왜 3백년 전에 그 이론이 탄생하고 실현되지 않았을까요? 유럽인이 책임을 쁘리부미와 공동 부담하자고 해도 반대하는 쁘리부미가 없었던 시대에 말입니다, 왜죠?"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모르겠군요." 사라가 끼어들었다. "즉, 그 뭐라나 하는 박사는 당시의 쁘리부미들보다 3백 년이나 뒤떨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귀찮기만 한 두 선배에개 작별인사를 하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 왔다. 제 7 장 아아, 인간의 대지 내가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에게 초대받은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할수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집에는 쁘리부미의 지방 명사들로부터 초대장이 꼬리를 물고 쇄도했다. 부모님에게는 자랑거리인 아들이 선배들로부터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얘기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두 사람은 부이사관 댁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해 달라고 끈질기게 물어왔으나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빠른 시일 내에 슬라바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쇄도해 오는 초대장에 대한 답장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아버지는 이제 화가 풀리신 것 같았다. 부이사관의 초대로 나의 모든 잘못이 저절 용서된 것이다. 나는 다시 우노크로도에 전보를 쳐서 슬라바야로 돌아가는 날짜를 알리고, 역까지 마차로 마중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출발을 늦추게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냐이 온트솔로의 문제로도 또 다시 질책을 받는 일은 없었다. 부이사관에게 초대받은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불가침적인 존재가 되고, 그의 앞날에는 중요한 고위직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님은 부이사관에게 학교로 돌아간다는 인사를 하고 가라고만 말했다. 나는 죽기보다 싫었으나 아뭏든 부이사관 댁을 방문했다. 또 다시 사라와 미리암 자매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발견한 일이지만, 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두 사람의 공격심은 사라지고 오히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 "자네 학교의 교장은 나의 옛날 동창생일세." 부이사관은 말했다. "학교에 돌아가거든 내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해 주게."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딸애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있네, 두 사람은 어머니를 잃은 지 10년쯤 되었는데, 딸들이 귀국하게 되면 나는 틀림없이 쓸쓸해질 걸세. 그러니까......" 그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의 소식을 가끔 편지로 내게 알려 주게나. 그 편지를 읽는 것은 나에게는 크나큰 즐거움이 될 걸세. 또 사라와 미리암과도 편지 왕래를 해주게나.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지. 그것은 장차 보다 나은 인생의 기초가 될 걸세. 만약 장차 자네들이 모두 중요한 인물이 된다면, 더더구나 그 의의는 커질 걸세. 안 그런가?" 나는 그대로 실행할 것을 약속했다. "밍케군, 만일 자네가 현재의 생활을 계속한다면, 즉 대부분의 자바인과 같은 노예적 자세가 아니라 유럽인과 같은 적극적인 자세로 생활을 한다면, 얼마 뒤에 자네는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걸세. 민족의 지도자, 선각자로서 모범이 될 수가 있네. 지식인으로서 자네는 자기 민족이 얼마나 원시적인지 알고 있을걸세. 유럽인은 도와주려고 생각해도 아무 할 일이 없다네. 우선 쁘리부미 자신이 스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세."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의 말에 나는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렇다. 자바인이 외부인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면 나도 자바인의 한 사람으로서 같이 바보 취급을 받는 것에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쩔수없이 같은 피가 흐르는 자바인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바인의 무지몽매가 문제가 되면 나는 그것과 무관한 듯 자신을 유럽인처렴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부이사관의 말을 가슴에 담고 슬라바야로 돌아가는 급행 열차를 탔다. 만일 드라크로아씨가 자바인이라면, 그의 의도를 헤아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요컨대 나를 사위로 삼으려고 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유럽인이니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라와 미리암은 나보다 몇살씩 연상이었다. 그 식민지 고관은 내가 민족의 선각자, 모범이 되는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정말 꿈같은 얘기다 ! 그런 것은 우리 선조들의 역사에도 없었다. 진정으로 그런것을 바라는 유럽인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동인도의 역사에서 그런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동인도에서 3백 년 동안 네덜란드 군은 총과 대포를 쉬게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자바 민족의 개척자, 선각자, 모범이 되기를 기대하는 유럽인이 나타난 것이다. 어린애들의 동화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농담으로도 될 성 싶지 않은 애기다. 아무래도 부이사관은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어소시에이션 이론'의 틀 안에서 나를 실험 도구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 내가 알 바 아니다. 다행히도 나는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항상 지침과 경고가 될만한 일들은 적어 두고서 참고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 속을 뒤져서 아직 읽지 않고 있는 편지 몇 통을 꺼내 기차 속에서 읽어 보았다. 분명히 편지의 내용은 아버지의 부빠티 임명을 축하하는 리셉션이 열린다는 내용과 곧 돌아오라는 명령이나 요청들이었다. 형의 편지에는 학교의 교장선생님께 보내는 휴가 신청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은 나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나는 차안에서 가느다란 눈을 가진 뚱뚱한 사나이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갈색 능직물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구두도 또한 갈색으로 일등 차에 어울리는 구두였다. 비단 띠가 붙은 펠트 모자를 줄곧 머리에 쓰고 있었으며, 그것은 때때로 이마가 가릴 정도로 깊숙이 내려져서 아무 곳이나 은일히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짐은 작은 가죽가방 한 개로 선반 위에 얹혀 있었다. 그는 통로를 사이에 둔 반대쪽 좌석에 앉아 있었다. 차장이 차표를 검사하러 오자, 그는 차표를 내밀었으나 눈은 여전히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B시에서 슬라바야까지 급행 열차가 머무는 역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뚱뚱한 사나이는 중간 역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내릴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그도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그만 !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말자. 나는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충분히 쉬고 싶다. 푹 잠들고 싶다. 내게는 체력과 건강이 중요하니까. 열차는 슬라바야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5시가 되어서야 슬라바야에 도착했다. 그 기다란 묘지를 지나자 이윽고 기차는 멈춰섰다. 플랫폼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몇 사람이 서거나 앉아서 내리는 승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앤, 안네리스 !" 나는 창에서 소리쳤다. 그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안네리스는 내가 있는 차량으로 뛰어와서 창 밑에 선 채 손을 뻗었다. "괜찮았어요, 마스?" 뚱뚱한 사나이는 가방을 들고 내 옆을 지나쳐 갔다. 그는 먼저 기차에서 내리자, 안네리스에게 힐끗 시선을 보내고 출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 시선은 그 사나이를 쫓았다. 사나이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멈춰서서 우리들 쪽을 돌아다보았다. "자, 내려오세요. 또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안네리스가 재촉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렸다. 쿠리가 짐을 들고 뒤를 따랐다. "빨리 가요. 다르삼이 기다리고 있어요." 뚱뚱한 사나이는 아직도 개찰구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어서 우리들이 앞질러 가게 되었다. 사나이는 누런 피부에 붉은 얼굴이었다. 기차에서도 그랬지만, 연방 푸른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고 있었다. 우리들이 앞서자 미행이라도 하듯이 그 사나이가 움직였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 " 다르삼이 4륜마차 옆에서 소리쳤다. 뚱뚱한 사나이는 우리들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째서 자기 갈길을 가지 않고 계속 나를 엿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이 마차에 올라타자 그도 황급히 임대 마차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탄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금방 그의 마차도 뒤쫓아 움직였다. 분명히 뭔가 미심쩍은 게 있는 것이다. 사나이에게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그의 마차를 돌아보자 사나이는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면서 우리들 쪽은 보지 않고 있었다. 두 번째로 돌아다보았을 때는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봐요, 다르삼. 왜 오른쪽으로 구부러지지 않아요?" 나는 항의했다. "어째서 왼쪽으로 가죠, 다르삼?" 안네리스가 마두라어로 물었다. 다르삼이 짧게 대답했다. "잠깐 볼 일이 있읍니다." 마차는 역 구내를 나서자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한참 가다가 이사 관저의 광장 앞을 지났다. 다르삼은 어디로 갈 생각일까? 그는 매우 진지한 표경이었다. "어째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지지 않죠?" 안네리스가 물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잔깐만 참으시면 됩니다, 아가씨. 해는 아직 지지 않았읍니다. 랜턴도 준비해 왔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뚱뚱보 사나이의 마차는 우리들의 마차 뒤를 미행해 오고 있었다. 내가 몇 번째인가 돌아다보았을 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마부의 등에 얼굴을 감췄다. "잠시 속력을 늦춰 줘요, 다르삼." 마차는 3급 도로에 들어서서 친천히 달렸다. 뒤의 마차도 속도를 늦추었다. 길이 너무 좁아서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길을 비켜 주기를 바란다면 뒤의 마차는 종을 울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또 무리하게 추월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들의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왜 여기서 ? " 안네스리가 항의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요, 아가씨. 잠시 볼 일을 보고 올 테니까요. " 다르삼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마차를 길가로 끌고 가서 울타리 기둥에 고삐를 잡아맸다. 뚱뚱한 사나이의 마차는 빠져 나갈까 어쩔까 주저하고 있었으나 결국 빠져나갈 수밖에는 없었다. 푸른 손수건으로 코를 풀면서 그는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인도 중국인 혼혈도 아닌 것 같았다. 또 장사꾼같지도 않았다. 만일 동인도 태생의 중국인이라고 한다면, 아마 교육 정도가 높은 계층 출신으로, 마요르 공관(역자주 : 식민지 정부에 의해 임명된 자바 각지의 중국인 사회의 지도자)의 직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국인과 유럽인의 혼혈로서 휴가를 끝내고 슬라바야의 근무지로 돌아오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 B시에서부터 줄곧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옷차림으로 보아 장사군 같지는 않았다. 혹시 보르네오 수마트라 무역회사나 조지 웨일리 회사의 출납계는 아닐까? 아니면 마요르 공관일까? 그러나 마요르라면 보통 거만하고 자신을 유럽인과 동등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흥미를 가질 턱이 없으며, 애당초 쁘리부미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혹시나 그의 관심은 안네리스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아뭏든 B시를 출발할 때부터 줄곧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가씨,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이 가게에 잠깐 들러 나오겠옵니다." 다르삼은 그렇게 말하고 나에게로 눈을 돌렸다. "도련님은 잠시 내려 주십시오." 나는 경계하면서 마차를 내렸다. 나와 다르삼은 기와로 지붕을 얹은 찰나무로 만든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죠, 다르삼? " 마차 위에서 안네리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다르삼이 뒤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아가씨는 저를 못 믿게 되셨읍니까 ?" 나도 의심을 품었다. 뚱뚱한 사나이의 마차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 앞쪽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삼이 무엇인가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어요, 앤." 나는 안네리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개 말했으나, 눈은 마두라인 칼잡이 다르삼의 손과 긴 칼에 못박혀 있었다. 허르스름한 식당 안에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손님이 한사람 있을 뿐이었다. 우리들이 들어갔을 때, 손님은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뚱뚱한 사나이와 한패가 아닐까? 아니면 다르삼의 ? 다르삼은 내게 손님의 건너편에 있는 긴의자에 앉도록 명령투로 말했다. 그는 땀냄새가 날정도로 내게 몸을 가까이하고 앉았다. "밖에 있는 마차에 차와 과자를 갖다 드리게. " 다르삼은 식당 여주인에게 주문했다. 그리고 여주인이 나무 쟁반에 차와 과자를 얹어서 밖으로 갖고 나갈 때까지 날카로운 눈으로 여주인을 주시했다. 눈을 번뜩이면서 다르삼은 서투른 자바어로 속삭였다. "도련님, 우노크로모의 저택에서 일이 생겼음니다. 알고 있는 것은 나 한 사람뿐입니다. 아가씨와 냐이는 모릅니다. 놀라서는 안됩니다. 당분간 도련님은 우노크로모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위험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르삼?" 다르삼의 목소리가 얼마간 침착을 되찾았다. "도련님, 저는 냐이에게만 충성을 맹세했읍니다. 냐이에게 중요한 것은 제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냐이의 명령을 받으면 다르삼은 반드시 그것을 실행합니다. 어떤 명령이든 상관 없읍니다. 냐이는 도련님의 안전을 지키도록 명령했읍니다. 나는 그것을 실행할 것입니다. 도련닌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나의 임무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도련님의 자유입니다만, 어쨌든 여기서는 내 충고를 들어 주십시오." "당신의 임무는 잘 알겠소. 당신의 성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냐이는 나의 주인입니다. 그 다음이 아가씨입니다. 그녀 또한 나의 주인이지요. 지금 아가씨는 도련님을 사랑하고 있읍니다. 나는 도련님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충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다르삼의 칼이 도련님의 안전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아직 나도 잘 모르는 일이 있읍니다." "그것은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어쨌든 오늘은 도련님을 우노크로모가 아니라 두랑강의 하숙집으로 모시고 가겠읍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네." 다르삼은 입을 다물고 여주인에개 경계의 눈을 보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다르삼?" 안네리스가 밖에서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가씨. " 다르삼은 밖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계숙했다. "시뇨 로베르트입니다, 도련님. 시뇨가 여러 가지 약속을 하면서 도련님을 죽이라고 내게 명령했읍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악람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나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무슨 해를 끼쳤다는 겁니까?" "단순한 질투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냐이는 도련님을 좋아합니다. 집안에 자기 이외의 남자가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털어놓고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런 비열한 수단을 쓴답니까?" "그 도련님은 생각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도련님도 나의 충고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아가씨나 냐이에게는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럼 가 보시지요." 다르삼은 내 의견은 듣지도 않고 돈을 지불했다. 뚱뚱한 사나이의 마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이 탄 마차는 출발했다. 우노크로모에서는 만약 다르산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 젊은이가 나의 단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 하루종일 수상한 뚱뚱한 사나이가 B시에서부터 줄곧 나를 뒤쫓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도 그다지 엉뚱한 것은 아니다. 또 내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일 각오를 하라는 어머니의 경고도 웃어 넘길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 분명히 로베르트 메레마는 나를 그의 왕국에 대한 침략자라고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척어도 내가 그의 마음에 새로운 부담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볼 이유가 그에게는 충분히 있다. 안네리스는 언제 마차에서 빠져나가 도망칠는지도 모르는 물고기라도 되는 듯이 내 손을 붙잡은 채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 가방 속에서 당신이 넣어 둔 돈을 보았어요." "그래요. 내가 넣었어요. 당신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미지의 여행을 떠나서 한 시라도 빨리 내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니까요." "고마와요, 앤. 하지만 그 돈은 쓰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안네리스는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는 얼굴도 내 마음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마차 속은 랜턴의 빛이 반사하지 않아 어두웠다. 안네스리의 아름다움은 검은 어둠 속에 파묻혀버렸다. 설사 그렇지 않았다하더라도 나의 마음은 결코 평화롭지는 못했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릿속에 꽉 차서 다른 생각들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나의 대지, 인간의 대지는 일체의 확실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나를 올바르게 이끌어 온 학문과 지식은 증발해서 사라져버렸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로베르트? 물론 그는 알고 있다. 뚱뚱한 사나이? 그의 인상도 확인해 두었다. 어둠 속에서도 식별할 수가 있다. 그러나 범죄는 내가 모르는, 예측하지 못하는 제삼자가 저지를 수도 있다. 슬라바야는 1루피아 정도의 보수로 살인을 청부받은 청부살인업자가 많기로 유명한 도시다. 미국 해안이나 숲속, 길가, 시장에 반드시 시체가 나뒹굴고 있고 그 시체에는 칼자국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마차는 투랑강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왜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안네리스가 다시 항의했다. " 또 한 가지 볼 일이 있옵니다, 아가씨. 참아 주십시오." 다르삼이 대답했다. 안네리스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구실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마차는 데린하의 집 앞에 멈췄다. 아무 말도 없이 다르삼이 내 짐을 마차에서 내렸다. "왜 짐을 내리는 거예요?" 안네리스가 또 다시 항의했다. 나는 다정스렵게 말했다. "앤. 앞으로 일 주일 동안 나는 수업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돼요.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한동안 당신 곁을 떠나 있지 않으면 안된다구요. 그래서 오늘은 당신과 함께 우노크로모에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마중나와 줘서 고마왔어요. 마마에게 미안하다고 내 대신 전해 줘요. 틈이 나면 꼭 찾아갈께요." "마스, 지금까지 우노크로모에서는 공부를 못했나요? 아무도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을 텐데요? 내가 방해를 했다면 미안해요." 안네리스의 목소리는 금방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니까요." "방해가 되었었다면 그렇게 말해 줘요.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도록." 그녀는 점점 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변해갔다. "아니라구요, 앤. 절대로 그렇지 않다니까." 안네리스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어째서 우는 거죠, 앤? 단 한 주일 동안인데. 일 주일만 지나면 꼭 우노크로모로 돌아간다구요. 그렇지요, 다르삼?" "그렇습니다, 아가씨. 남의 집 앞에서 그렇개 울면 안됩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이 자바의 용감한 젊은이, 대적할 사람이 없는 용자라는-물론 그것은 내 생각이지만 ----의식은 사라지고 생명이 위험하다는 얘기에 잔뜩 겁을 먹은 단순한 겁장이로 전락해 있었다. "내리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어요, 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마차 속에서 안네리스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마스, 빨리 우노크로모로 돌아와 주세요." 그녀는 체념한 듯이 울면서 애원했다. "그럼, 나를 이해해 주겠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처리되면 곧 돌아갈 테니까. 오늘은 내 말을 믿고 내 입장을 이해해 줘요." "알았어요, 마스. 불평은 하지 않겠어요." 안네리스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 " "마스, 안녕 ! "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다르삼은 아직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완전히 지고 여기 저기서 램프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고 있는 것은 내 마음뿐이었다. "왜 마마에개 애기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다르삼애게 속삭였다. "안됩니다. 냐이는 로베르트 도련님과 주인님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이 문제는 나 혼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도련님은 잔깐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오." 데린하 부부는 의자에 앉아 내가 고향 얘기를 하기 위해 방에서 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실이 좋은 선량한 부부 ! 그들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일까? 다는 방에서 나가지 않고 문을 잠근 뒤 옷을 갈아 입고는 저녁식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로 들어갔다. 석유 램프를 끄기 전에 전가 다름없이 빌헬이나 여양의 초상을 바라보았다. 아아, 인간의 내지 ! 인간이 어떻게 하면 신들의 애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궁진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아마 그녀 개인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고뇌를 제외한다면, 무엇 하나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나는 어떤가? 그녀의 백성인 나는? 별점에 의해서 그녀와 같은 운명을 약속받았을 나는 로베르트 메레마가 보냈을 죽음의 신이 나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금 방 한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방 안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거실에서의 대화가 어렴풋이 귀에 들려 왔다. 애기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이 젊은 나이에 생의 위협을 느끼다니 ! 선생님께 들었던 가슴 설레게 다가와야 할 찬란한 새시대의 약속은 실현될 가망도 기미도 건혀 보이지 않았다. 로베르트.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미쳐버렸는가. 연애 문제를 둘러싼 질투 때문에 저질러지는 살인은 지구 어느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갖고 태어난 잔인함의 잔재이다. 재산을 둘러싼 살인도 또한 인간 본성의 한 표현이다. 그렇지 ? 내 말이 틀리는가. 그러나 자네에게는 훨씬 복잡한 배경이 있다. 자네는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태생을 증오하고, 또 자네는 구걸하듯이 아버지의 애정을 애걸복걸하면서도 그에게 멸시만 당한다. 로베르트, 자네는 자네 어머니의 애정이 내게 쏠리는 것을 시기하고 있는 거야. 왜냐 하면, 유럽의 소설에 흔히 나오듯이 유산 상속인으로서의 자네의 권리가 내게로 돌아올까봐 자네는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지. 아마 자네 눈에는 나는 한 사람의 범죄자로밖에는 비치지 않을 걸세.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도. 나는 다만 내가 노력한 만큼만 갖기를 원할 뿐,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한 인생이란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고투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내 가족과의 사이에 생겼던 벽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정말 가족이라는 것은 학교의 수업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다르삼, 너도 그렇다. 제발 그대가 얘기한 것이 거짓이기를 바란다. 네가 말하는 정도로 로베르트가 악인이 아니기를. 그러나 그대도 무엇인가 특별한 의도, 나쁜 속셈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 누런 피부를 가진, 가느다란 눈의 뚱뚱보, 그대는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대와 같이 말쑥한 옷차림을 한사람이 단순한 살인 청부업자일 수가 있는가? 메레마 가의 재산과 아이들이 갖고 싶은가? 그리고 사라와 미리암 자매, 부이사관.....그리고 어소시에이션 이론.......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이토록 겁장이란 말인가? 제 8 장 사랑의 열병 이 얘기를 순서를 쫓아 진행시키기 위해서 경관에게 연행되어 내가 B시를 향해 우노크로모를 떠난 뒤 로베르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 두어야겠다. 아래의 얘기는 안네리스, 냐이, 다르삼, 그 밖의 사람들이 말한 것을 바탕으로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내가 탄 마차가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안네리스는 마마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녀가 어린애처럼 그렇게 울었는지 나는 모른다). "조용히 해라 앤, 그는 틀림없이 무사할 거야." 냐이 온트솔로가 말했다. "어째서 마마는 그가 끌려가는 것을 막지 않았어요?" 안네리스가 항의했다. "법률의 대리인에개 반항할 수는 없는 거란다, 앤." "뒤를 쫓아가요, 마마." "그럴 필요는 없다. 아직 이렇게 이른시간이고, 또 그가 B시로 연행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 "마마, 어떻게 하죠?" "너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느냐? " "그런 말로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마마." "그런데 마마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일. 뿐이란다." "어떻게 해 봐요, 마마. 어떻게 좀 해 보라고요." "앤, 너는 밍케를 인형쯤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그는 인형이 아니야.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잠시 기다려 보자꾸나. 아직 이른 새벽이니까." "마마는 나를 이대로 놓아둘 생각이에요? 나를 죽일 생각이에요 ? " 냐이는 곤혹스러워짐을 느꼈다.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딸이 이런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안네리스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하고 있다는 것을 냐이는 알아챘다. 안네리스, 그 아이는 그녀의 사업상의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였다. 안네리스가 바라는 것, 안네리스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일이라도 들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냐이는 생각했다. 냐이는 딸을 데리고 가서 쉬게 하려고 했다. 안네리스는 그것을 물리치고 밍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우겨댔다. "그것은 억지다, 앤, 무리야. 그는 내일이나 모레가 되어야 돌아올 수 있단다." 안네리스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마는 점점 더 난감해졌다. 어릴 때부터 안네리스는 자기 생각을 좀처럼 드러내는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몇주일간 자꾸만 요구를 했다. 모든 것이 밍케에 대한 것으로서, 그것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재촉이고 강요였다. 항상 온순하고 얌전한 태도를 보이고 있던 가장 사랑하는 딸이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네리스는 갖고 놀던 인형을 돌려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어머니밖에 매달릴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냐이는 딸이 병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차츰 그녀는 딸의 행동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 온순한 아이도 또한 아버지처럼 정신적 충격 때문에 좌절하는 것은 아닐까?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르삼이 문과 창을 열기 위해서 왔다. 안네리스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놀랐으나, 힘으로도 칼로서도 어쩔수없는 문제 앞에서는 그도 무력했다. "그래, 이 것은 행정에 관한 문제야." 마마는 조용히 타일렀다. "손으로 만져볼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문제, 도깨비 같은 문제란 말이다." 문득 마마는 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그가 경찰에 밀고 편지를 보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녀는 로베르트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에게 따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마는 다르삼에게 말했다. "로베르트를 오라고 해요. " 얼마 뒤 눈을 비비면서 로베르트가 나타났다. 그는 잠자코 앞에 와서 섰다. 만일 다르삼이 없었다면 그는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서서 눈에는 냉담한 무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누구에게 몇번 밀고의 편지를 보냈지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르삼이 다가서며, 강요했다. "대답해요, 도련님. " 안네리스는 구원을 청하듯이 마마에게 매달린 채였다. "밀고 편지 같은 것은 나하고는 전혀 관계 없어." 얼굴을 다르삼 쪽으로 향하고 로베르트는 대들 듯이 말했다. "내가 그따위 편지나 쓰는 사람으로 보이나?" "냐이에게 대답하라구요, 내가 아니구요." "그런 편지는 쓴 기억이 없어요. 물론 보번 적도 없고요." "알았다. 나는 항상 네 말을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너는 밍케를 미워하고 있지 ? 그가 너보다 우수하고 고등 교육을 받고 있으니까? " "밍케 따위는 관심 없어요. 그 녀석은 원주민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원주민이니까 싫어한다는 말이구나." "그럼, 나의 유럽인 피는 어떻게 되는 거죠?" 로베르트가 덤벼들었다. "알겠다. 밍케는 원주민, 너는 유럽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다만 그 이유만으로 너는 밍케를 싫어한다는 말이구나. 알겠다. 내게는 너를 교육시키고 키워 갈 힘이 없다. 네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유럽인뿐일 테니까. 나는, 즉 네 어머니이고원주민인 나는 유럽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원주민보다 현명하고 교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는 틀림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절반은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는 너에게 부탁한다. 지금 슬라바야 경찰서까지 가서 밍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듣고 오너라. 다르삼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일이 없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 너는 네덜란드어에 능숙하고 읽기 쓰기도 할 수 있으니까.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고 싶구나. 말을 타고 갔다 오너라." 로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르삼이 명했다. "자, 가세요, 도련님." 로베르트 메레마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경고를 해 주세요, 다르삼." 마마의 명령을 받은 다르삼은 로베르트의 뒤를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마두라의 칼잡이 다르삼을 따라 방에서 나와 뒤쪽에 있는 마굿간으로 향했다. 그는 승마 바지에 장화를 신고 손에는 가죽 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너는 이제 그만 들어가 쉬거라, 앤." 하고 냐이가 말했다. "싫어요." 안네리스의 체온을 재 보니 열이 올라 있었다. 틀림없이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냐이는 걱정이었다. "다르삼, 사무실에 소파를 준비해 주새요. 일을 하면서 앤을 돌볼 수 있게. 담요도 잊지 말아요. 그리고 마르디네 의사 선생님을 불러 와요." 그렇게 말하고 냐이는 딸을 의자에 앉혔다, "마음을 굳게 갖고 참는 거야, 앤. 너,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니?" "마마, 나의 마마 !" 안네리스는 속삭였다. "앤, 마마는 네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단다.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내가 좋은 때, 그리고 그가 바랄 때, 언제든지 너는 그와 결혼해도 괜찮다. 다만 지금은 참고 견디는 거야." 눈을 감고 안네리스는 어머니를 불렀다. "마마, 마마의 뺨은 어디 있어요? 이리로 오세요. 키스를 할수 있도록. " 그녀는 어머니의 뺨에 키스를 했다. "하지만 병이 나면 안돼. 네가 병이 들면 도대채 누가 마마를 도와주겠니 ? 마마가 혼자서 말처럼 일하는 것을 보고 혼자 누워 있을 수 있겠니 ? " "언제든지 마마를 도울께요." "그러니까 이렇게 병이 나면 안되는 거야." "나는 아프기는 싫어요." "점점 더 몸이 뜨거워지는구나. 이럴 때일수록 안정해야 한단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는 여러 가지로 손을 써 보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단다." 다르삼이 혼자서 소파를 사무실로 옮겨 왔다. 안네리스는 로베르트가 출발하는 것을 보기 건에는 사무실로 옮겨 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로베르트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로베르트가 어떻게 됐나 보고 와요, 다르삼 ! " 마마가 소리 쳤다. 다르삼이 뒤곁으로 달려갔다. 10분뒤 키가 큰 잘 생긴 젊은이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말을 타고 달려 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15분 뒤 마르티네 의사를 데리러 다르삼이 마차를 몰고갔다. 냐이는 가까스로 안네리스를 달래서 사무실로 옮겼다. 그리고 식초와 양파 즙을 적신 천을 딸의 이마에 얹었다. "앤, 이제 한잠 자거라. 조금 있으면 의사 선생님이 오고 로베르트도 좋은 소식을 갖고 올 테니까." 냐이는 사무실 구석으로 가서 수도를 틀어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었다. 담요 밑에서 안네리스가 속삭듯이 물었다. "마마, 마마도 그를 좋아하세요?" "물론 좋아한단다, 앤. 네가 좋아하는 데 마마가 싫을 턱이 없지 않니 ? 그런 아들을 가진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여자로서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되는 사람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마마도 그를 사위로 삼으면 자랑스러울 것 같구나." "마마, 나의 마마 !" "그러니까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요? " "너에게 반하지 않을 젊은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순종도 혼혈도 쁘리부미도 모두 반할 게다. 마마는 잘 알고 있어, 앤. 너만큼 예쁜 처녀는 이 세상에 없다. 자, 이제 자려무나.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을 감아라." "마마, 만일 그의 부모가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랬잖니 ? 마마가 모든 것이 잘 되도록 돌보아 줄테니까 염려 마라. 가만 있거라. 우유를 가져올께. 너는 우선 건강해져야 한다. 네가 수척해져서 보기 싫어지면 밍케가 돌아와서 뭐라고 하겠니 ? 아무리 미인이라도 병에 걸리면 매력이 없어진단다." 냐이는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부엌에 있는 하녀를 불렸다. 얼마 뒤 하녀가 뜨거운 우유를 갖고 들어왔다. "자, 마셔라. 마마는 목욕을 하고 오겠다. 마시고 나서는 자는거야, 앤." 냐이는 목욕을 하러 갔다. 오는 길에 그녀는 더운 물과 타올을 가져와서 딸의 몸을 닦아 주었다. 안네리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르티네 의사가 와서 간단히 진찰한 다음 치료를 했다. 그는 정중한 태도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조용한 40대의 신사였다. 다르삼이 마르티네 의사를 위해 서둘러서 사무실에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냐이와 식사를 했다. "저녁때 다시 한번 오겠읍니다. 잠들기 전에 부드럽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먹이십시오. 시끄러운 소리는 금물입니다. 조용하게 해 줘야 합니다. 좋아지려면 수면을 많이 취하는 길밖에는 없읍니다. 그녀의 방으로 옮겨 주십시오. 사무실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싫다면 거실에 소파를 옮기고, 그곳에서 쉬게 해도 괜찮겠지요. 창과 문은 꼭 닫아 두십시오." 그런데 로베르트 메레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래에 기록하는 그에 관한 사건은 바이빈졸프 농장 사람들의 얘기, 그리고 나중에 법정에서의 증인 및 피고인의 진술에 의거하여 내가 구성한 것이다. 마굿간을 나온 로베르트 메레마는 큰길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는 슬라바야 방향인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큰길로 나온 그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침 경치를 구경하면서 말을 천천히 몰았다. 그는 아직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서 굴러온 말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밍케 때문에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경찰서까지 심부름을 간다. 무엇 때문인가? 밍케 따위는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좋다. 그가 없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가난해지고 좀 더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바람에 실려온 그 한 알의 먼지는 도대체 언제까지 내 집에 버티고 있으려는 것일까? 아직 아침 여물을 못얻어 먹은 탓인지 말은 힘없이 걷고 있었다. 그것은 로베르트도 역시 마친가지여서 그도 아침식사를 못얻어 먹은 채 심부름을 나온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아침이었다. 보통때 같으면 끊일 줄 모르고 긴 열을 이루며 우노크로모에서 드럼통으로 석유를 운반하는 화물 마차의 대열이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띄엄띄엄 마을에서 온 행상인들만이 슬라바야 시장으로 농작물을 짊어지고 줄을 지어 걷고 있었다. 말은 느린 발걸음으로 50미터 가량 걸어갔다. 로베르트의 생각은 두서없이 이리저리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때 길 오른쪽에 있는 생나무 울타리 너머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시뇨 로베르트." 로베르트는 말을 세우고 울타리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중국인 남자가 한 사람 붙임성 있게 그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머리 숱이 거의 없어서 변발도 매우 가늘었다. 웃으면 볼이 치켜 올라가서 가는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시뇨?" 로베르트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고 중국인은 인사를 되풀이 했다. "안녕하세요, 바바 아촌 ! " 로베르트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빙긋이 웃으며 목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냐이는 건강하신가요?" "건강하십니다. 바바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읍니까?" "언제나 일이 너무 바빠서요. 투앙은 어떠십니까?" "잘 있읍니다." "오랫동안 못뵈었읍니다." "항상 일 때문에 바쁘셔서요. 오늘은 문과 창을 열어놓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읍니까? 특별한 일이라도?"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즐기는 날이지요. 잠깐 들러 가시지요." 아촌의 웃는 얼굴은 그날 아침 로베르트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 주고, 또 중국인이나 중국풍에 관해 그가 품고 있던 혐오감도 잊게 했다. 그때까지의 그는 중국인과 사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인사를 해도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중국인의 뜰 안이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몹시 흥미를 느꼈다. "글쎄요. 그럼, 잠깐 들어가 볼까요?" 로베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말의 방향을 바꿔 그 이웃사람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바바 아촌은 알지도 못했고, 단지 이 사람이 그가 아닐까 하고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 말에서 내리려고 하자 중국인은 달려와서 로베르트를 맞았다. 중국인은 손뼉을 쳐서 하인을 부른 다음 로베르트의 말을 뒤곁으로 끌어가게 했다. 보통때는 문과 창이 닫힌 채로 있는 건물 쪽으로 로베르트와 아촌은 마당의 자갈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 있는 계단은 모두 야자 열매의 섬유로 짠 발로 가려 있었다. 베란다가 없는 정면의 대합실은 굉장히 넓고 조각된 디크 의자 세트가 몇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중국풍의 붉은 화문자(花文字)가 붙은 여러 가지 크기의 거울이 장식되어 있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계단이 통하고 있었는데, 그 출입구는 투명한 조각을 아로새진 목재 간막이가 가로막고 있었다. 또한 아무것도 꽂지 않은 커다란 도자기 화병이 몇개씩 방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용이 조각된 각대위에 서 있었다. 카페트는 깔려 있지 않았다. 빌헬미나 여왕의 초상도 없었고, 꽃은 대합실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촌은 그를 대나무 의자로 안내했다. 그것은 세 개의 의자와 하나의 긴의자가 세트로 되어 있고, 앞뜰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아촌과 로베르트는 그곳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랜 이웃끼리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 주시지 않다니 ?" "항상 문과 창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방문을 하겠읍니까?" "아닙니다. 왜 이 집을 닫아 두겠읍니까?" "문이 열린 것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처럼 열려 있을 때는 반드시 나는 이 집에 있읍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어느 집에 계십니까? " "어느 집이냐구요?" 아촌은 유쾌한 듯이 웃었다. "무엇을 마시겠읍니까? 보통 때는 무엇을? 위스키, 브랜디, 코냑, 진, 배갈, 아니면 보통 술입니까? 소흥주(중국 소흥 지방에서 나는 술)는 어떻습니까? 백색, 황색, 뜨거운 것, 찬 것 ? 아니면 마라가 포도주는요? " "하지만 바바 아촌씨, 아직 이른 아침입니다." "아침이면 어떻습니까? 땅콩을 안주로 한 잔 하시지요." "그럼, 기꺼이 들겠읍니다." "시뇨와 같은 손님을 맞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잘생기고 사나이답고 적극적이고 젊고..... 시뇨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읍니다. 더구나 돈 많은 부자에다......" 아촌은 정면을 향한 채 머리 한번 움직이지 않고 황제처럼 오만한 태도로 손뼉을 쳤다. 칸막이 그늘에서 소매가 없는 긴 드레스를 입은 중국 여인이 한 사람 나타났다. 드레스 옆은 깊이 갈라져 있어서 넓적다리의 일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머리는 두 갈래로 따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눈처럼 흰 피부를 한 그 여인을 보고 눈이 동그레졌다. 여인이 바로 옆에 와서 탁자에 위스키 병과 유리컵, 땅콩 볶은 것을 올려 놓을 때까지 그의 눈은 드레스의 갈라진 곳에 못 박혀 있었다. 아촌이 중국어로 무어라고 말하자, 여인은 재빨리 로베르트의 앞에 등을 똑바로 펴고 섰다. "자, 이 여자를 평가해 주십시오." 로베르트는 부끄러운 듯이 어물어물했다. 그는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이 눈과 얼굴을 엉뚱한 곳에 떨구고 있었다. "밍 호아라고 합니다. 마음에 안드십니까?" 아촌이 그렇게 말하고 헛기침을 했다. "홍콩에서 온 지 며칠 안됩니다." 밍 호아는 몸을 굽혀 쟁반을 내려놓고 로베르트 옆 의자에 앉았다. "유감이지만 밍 호아는 말레이어를 할 줄 모릅니다. 네덜란드어나 자바어도 못하구요. 중국어밖에는 모릅니다. 어쩔수가 없군요. 시뇨는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겁니까? 그녀는 시뇨 옆에 있읍니다. 자 자,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는 투의 얼굴은 하지 마시고. 바바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필요가 없어요." 밍 호아가 위스키 잔을 로베르트의 입술에 갖다대었고, 그는 무의식 속에서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촌은 일부러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했다. 밍 호아는 고개를 쳐들고 얼굴을 실룩거리며 간드러지고 요염하게 웃었다. 열린 입술로 진주와 같은 이가 드러나 보였는데, 하나만이 고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높은소리로 쉬지 않고 빠르게 무엇인가 말했다. 로베르트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인이 가까이 다가 앉자 그는 점점 더 침착성을 잃어갔다. 로베르트가 새파랗게 질려서 손에 든 컵을 떨어뜨릴 뻔하자 밍호아는 컵을 들어 그 키 큰 젊은이의 입술에 다시 갖다댔다. 로베르트는 서슬지 않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러고 갑자기 콜록거렸다. 알콜을 입에 대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위스키의 물방울이 아촌과 밍 호아에게 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유쾌하게 웃기만 했다. "자, 다시 한 잔." 밍 호아가 다시 위스키를 따라서 손님에게 마시도록 권했다. 그러나 젊은 손님은 거절하고 입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설마 위스키를 처음 마시는 듯한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겠지요?" 주인이 놀려댔다. "위스키도 싫다, 밍 호아도 싫다 이겁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인이 일어나서 칸막이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촌이 다시 손뼉을 쳤다. 이번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긴 비단 바지와 셔츠를 입은 다른 중국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과자를 담은 대나무 쟁반을 돌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밍 호아가 남기고 간 쟁반 위에 겹쳐서 올려놓았다. 여인은 로베르트에게 인사를 하고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밍 호아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루즈를 칠하고 있었다. 과자를 내려 놓기 진에 밍 혹아가 다시 나타나 물이 든 유리컵을 얹은 유리 쟁반을 로베르트 앞에 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앉았던 곳에 앉았다. "자, 이번에는 양손에 꽃입니다. 어느 쪽이 매력적입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이쪽은 셰셰입니다." 건물 앞에 마차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중국옷을, 어떤 사람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으며, 모두가 남자들로 변발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을 쓰는 기색도 없이, 그들은 의자에 앉아 잡담을 하거나 가래침을 뱉거나 도박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느 쪽도 시뇨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주인은 그렇개 말하고 저쪽으로 가서 손님들의 접대를 하도록 두 여인에게 손짓했다. "셰셰도 마음에 안드십니까?" 그는 일어나서 셰셰를 다시 불렀다. 셰셰가 다시 돌아오자, 아촌은 그녀를 잡아 로베르트 옆에 앉혔다. "시뇨는 이쪽을 좋아하지요, 아마. 눈치가 없어서......" 로베르트는 여전히 우물거리며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은 다시 웃음을 띠고 당황해하는 젊은이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른 손님들은 구석에 있는 그들 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셰셰는 빠른 말로 무엇인가를 떠들어대며 로베르트를 설득하려고 들었고, 그의 셔츠와 벨트의 위치를 고쳐 주며 셔츠의 단추를 쏜끝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주인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점점 더 위축되어 갔다. 이윽고 두 사람의 중국인은 큰 소리로 무엇인가 말을 주고 받았다. 로베르트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겠읍니다. 시뇨는 두 사람 모두 마음에 안드신다는 말이군요." 셰셰가 일어나서 칸막이 뒤로 사라지고, 아촌은 손바닥을 네번 두드렸다. 몹시 아쉬운 듯이 로베르트는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간막이 뒤에서 커다란 꽃무늬를 그린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이 나타났다. 이 여인은 얻굴을 붉히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둥근 얼굴로 입술에 루즈를 칠하고 줄곧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아촌의 옆에 앉았다. 웃으니까 금니가 한 개 보였다. "자, 또 다른 아가씨를 불렀읍니다." 후회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로베르트는 용기를 내어 일본 여인에게 시선을 보냈다. "여기는 마이꼬양. 2개월 건에 일본에서 왔읍니다." 아촌의 소개가 끝나기도 건에 마이꼬는 빠르고 높은 어조의 일본 말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로베르트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촌은 손으로 여인의 입을 막고 이렇게 말했다. "이 여자는 내 전용입니다만, 시뇨가 마음에 드신다면 좋을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이쪽에 앉으세요, 마이꼬 옆에요." 로베르트는 주인의 지팡이에 겁먹은 개처럼 일어다서 조심스럽게 긴 의자로 옮겨 앉아 마이꼬를 아촌과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그럼, 시뇨는 이 여자로 정했군요? 마이꼬로? 좋습니다." 아촌은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리를 비켜 드리지요. 뒤는 시뇨에게 맡기겠읍니다." 로베르트는 그가 자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아촌은 차츰 수가 늘어나 카드나 당구, 마작에 열중하고 있는 손님들 틈에 끼었다. 그는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살피다가, 다시 대나무 의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로베르트와 마이꼬 앞에 와서 섰다. "그래요, 꽤나 힘들지요? 마이꼬는 말레이어를 모릅니다. 물론 네덜란드어도 모르지요. 하지만 시뇨가 지금까지 젊은 일본 여자와 경험이 없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읍니까? 쿤반준푼에 가 보신 적이 없읍니까?" "구경하는 것조차 이것이 처음입니다." 로베르트는 가까스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너무나 아깝습니다. 젊은 부호가 일본 여자를 모르다니 말도 안됩니다. 우리들 같은 중국인 유곽에는 대체로 일본 여자가 있읍니다. 정말 안타깝군요. 유곽에 가 본 적이 없다고요? 없다면 정말 손해를 보신 것입니다. 일본 여자는 최고입니다. 경험이 없다니 참으로 안됐군요. 자, 이쪽으로......" 아촌은 황제처럼 과장된 몸집으로 재촉했다. 세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바바 아촌이 맨앞에 서고, 그 다음에 로베르트, 그리고 마이꼬가 그 뒤를 따랐다. 아촌이 걸을 때마다 변발이 흔들려 그의 파자마 등을 스쳤다. 세 사람은 칸막이 옆을 빠져나갔다. 마이꼬는 로베르트의 흥미를 끌기 위해 계속 콧소리를 내며 종종 걸음을 쳤다. 주위에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들은 층계로 들어섰다. 좌우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고, 벽 장식이 있을 뿐 가구류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중국 여인들이 몇 사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깨끗한 화장과 몸치장을 했고 아촌을 보고서는 절을 했다. 뒤이어 로베르트에게도 절을 했으나, 마이꼬에게는 하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한 사람 한 사람 주의해 보았다. 키가 큰 여자, 작은 여자, 뚱뚱한 여자, 마른 여자, 육감적인 여자, 궁상맞게 생긴 여자 --- 모두들 루즈를 칠하고 생글거리거나 또는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이러한 미녀들은 삶의 위안거리입니다. 시뇨가 중국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유감이로군요." 아촌은 놀려대듯이 웃었다. "방은 모두 마주보고 있읍니다. 자물쇠만 잠기지 않았으면 어떤 방을 써도 좋습니다." 그는 어떤 방문을 열고 내부를 보여 주었다. 가구류의 호화스러움이라든지 청결함이 로베르트의 방에 못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방이 약간 좁은 것을 빼놓고는 침대 등의 비품은 그의 것보다 훌륭했다. "좋으시다면 시뇨를 위해 환제의 방, 영광의 방을 준비하도록 하겠읍니다." 아촌은 다시 걸어가더니 다른 방문을 열었다. "여기가 황제의 방입니다. 이곳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마요르님뿐인데, 그분은 지금 홍콩에 출장 중이십니다." 방 안에 놓인 가구는 모두 새 것으로, 로베르트로서는 본 적도 없었고 어느 나라식 가구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문 앞에서 아촌은 손님에게 소감을 물었다. 로베르트는 그 훌륭함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다. 아촌이 안으로 들어가고 로베르트와 마이꼬도 따라 들어갔다. "최고급 가구입니다. 티크재를 사용하여 프랑스 식으로 만들었지요. 아뭏든 마요르님은 프랑스식을 좋아해서요. 유명한 프랑스의 장인이 만든 것입니다. 이 집에서 가장 비싼 가구들입니다. 저쪽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는 위스키와 사케(일본식 정종)가 있으니까 시뇨가 좋아하시는 것으로 드십시오." 아촌은 가구를 둘려보며 성명했다. "이런 조각을 한 침대는 보다 쾌적하게 잠을 잘 수가 있읍니다. 그렇지, 마이꼬?" 마이꼬는 허리를 굽히고 까치처럼 빠른 말투로 무어라고 대꾸를 했다. "그럼, 시뇨, 천천히 즐기십시오 ! " 로베르트는 주인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눈으로 쫓으며 그가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변발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9장 우노크로모의 유곽 이 장도 역시 시간적인 계속성을 중시하고 싶기 때문에, 나중에 법정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이다. 그 대부분은 선서 통역을 통해서 마이꼬가 진술하고, 그것을 내가 다시 기록한 것이다. 나(마이꼬)는 일본의 나고야 출신으로, 창녀로서 홍콩으로 건너왔읍니다. 나의 주인은 일본인이었으나, 그는 그 뒤 역시 홍콩에서 유곽을 경영하고 있던 중국인에게 나를 팔았읍니다. 그 두 번째 주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 밑에서 일했던 기간은 발음이 어려운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읍니다. 그는 또 다른 경영자에게 나를 팔았던 것입니다. 그도 역시 중국인으로, 나는 그렇게 해서 싱가폴로 배를 타고 끌려갔읍니다. 세 번째 주인에 대해서는 밍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그는 나에 대하여 매우 만족했고 좋아했읍니다. 왜냐 하면, 나로 인해서 그가 큰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네 번째 주인은 싱가폴의 일본인이었읍니다. 그는 나를 촌에 넣는데 상당한 열의를 보였읍니다. 꽤나 오랫 동안 매매 교섭이 있은 뒤, 결국 나는 싱가폴 달러로 75달러라는, 싱가폴의 일본인 공장에 붙여진 최고가로 그에게 팔려갔읍니다. 내 몸에 슨다 출신의 공창보다 높은 가격이 붙은 것을 나는 몹시 자랑으로 생각했읍니다. 일반적으로 동남 아시아의 화류계에서는 슨다인 창녀가 가장 값비싸고,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의 긍지도 오래 가지는 못했읍니다. 겨우 5개월이었읍니다. 나의 주인인 그 일본인이 얼마 뒤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기 시작했읍니다. 종종 나는 그에게 매를 맞았음니다. 담뱃불로 고문당한 일도 있읍니다. 원인은 내 손님이 차츰 줄어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가장 이름 있는 창녀에게도 여지 없이 찾아드는 위험, 즉 매독에 내가 걸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걸린 것은 보통 매독이 아니라, 이 저주받은 창녀의 세계에서 '비르마'라고 불리는 매독이었읍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 성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남성 쪽이 더욱 고통이 심하고 빨리 파멸해 버립니다. 여성은 상당히 오랫동안 자각 증상이 없읍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주인은 20달러로 나를 중국인에게 팔았읍니다. 그것이 나의 다섯 번째 주인으로, 나는 그를 따라 부타위로 갔읍니다. 매매가 이루어지기 건에 네 번째 주인은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기절할 때까지 나의 가슴과 허리를 두들겨 팼읍니다. 의식이 회복되자 벌겨벗겨서 몸의 여러 군데에 지압을 했읍니다. 그렇게 해서 성욕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일본인은 나까가와라는 이름이었읍니다. 이튿날 나는 새로운 다섯 번째 주인에게 인도되었읍니다. 새로운 주인에게 팔려간 첫날에 주인은 내 몸을 시험하기 위해서 요구했읍니다. 나는 거절했읍니다. 만약 내가 저주스러운 병에 걸렸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면, 틀림없이 나는 다시 폭력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살해당하고 말 것입니다. 창녀가 주인에게 살해당해서 시체가 토막나거나 어딘지 모르게 파묻혀 버리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읍니다. 창녀라는 것은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나는 몸이 쇠약해져서 성욕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징후를 깨닫고 있었읍니다. 나는 주인에게 부탁해서 중국인 지압사를 불러 달라고 했읍니다. 세 번 가량 지압사의 치료를 받고 나의 성욕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읍니다. 그렇지만 나는 주인이 요구하는 것을 여전히 거절했읍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단념해 주었읍니다. 3개월쯤 지나자 내가 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인은 겨우 눈치챈 것 같았읍니다. 그는 화를 냈읍니다. 나는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의 안색과 목소리로 그럴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손님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읍니다. 사람들은 나를 멀리했고, 주인의 짜증은 더해가기만 했읍니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그가 폭력을 휘두르지 않도록 빌었옵니다. 아니 저축해 둔 돈을 그에게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때리고 차는 것쯤은 참을 수 있었읍니다. 나는 일본으로 돌아가 나까다니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옵니다. 그는 내가 저축한 돈을 갖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결국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내 저금을 빼앗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옵니다. 내가 싱가폴 달러로 10달러에 가까운 가격으로 바바 아촌에게 양도되었을 때, 주인은 내게 반 길더의 전별금을 주면서 서투른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읍니다. "사실은 나는 너를 첩으로 삼고 싶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몹시 후회를 했읍니다. 첩은 창녀보다는 편합니다. 그런대로 보통 생활을 할 수 있고, 아내가 되는 여성에게 지참금을 기대하는 일본의 젊은 남성의 아내보다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스러운 병이 나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읍니다. 바바 아촌은 내 몸을 강력하게 요구했읍니다. 나는 새로운 제난이 두려워서 필사적으로 그것을 거부했읍니다. 여기서 또 다시 비밀이 드러난다면, 아마 내 몸값은 5달러 정도로 떨어지고, 나는 이국 땅의 쓰레기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압사를 고용해 주도록 부탁했읍니다. 중국인 지압사는 저녁때 지압 치료를 하고, 그것을 열 번 정도 계속하면 한 달 안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했읍니다. 그러나 바바는 비싼 돈이 드는 중국인의 지압 치료를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읍니다. 나는 단 한번 시험적인 지압 치료를 받았을 뿐입니다. 슬라바야로 떠나기 전까지는 나는 더 이상 주인의 요구를 거절할 구실이 없었읍니다. 우노크로모의 그의 유곽에 살면서 가장좋은 방을 배당받을 때까지 나는 완전히 그의 전유물로서 그 한 사람만을 상대했읍니다. 우노크로모의 유곽에 있을 때, 그는 거의 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모두 열네 개나 되는 다른 방에는 가지 않았읍니다. 바바에게는 내 병이 전염되지 않는 모양이었읍니다. 그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기뻐했읍니다. 확실히 특정한 남성은 화류병에 대해 면역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단 한번의 지압 치료가 효과를 발휘하여, 병새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전염되지 않은 것일까요?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 몸값도 다시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그렇개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읍니까? 만약 바바가 나를 첩으로 삼겠다고 하면, 나는 감사하고 첩으로서 열심히 그를 섬길 생각이었읍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아도 나머지 11개월이면 기일이 만료되어 낙적되기 때문에 나는 귀국할 예정이었읍니다. 적어도 나는 이미 마지막 주인에게 나 자신의 몸값을 치를만한 금전적 여유를 충분히 갖고 있었읍니다. 두 달이 지났음니다. 바바도 역시 비르마 매독에 걸렸다는 것이 판명된 것은 그 무렵입니다. 그는 그 기묘한 병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읍니다.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는 직접 나를 탓하는 일은 없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나 이외의 여자들도 많이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와 그는 서로 건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읍니다. 그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내가 안 것은, 어느 날 열네 명의 창부 - --여러 나라 국적의 여성들이었다--- 들을 발가벗겨서 자기 앞에 새워 놓고 그녀들의 병에 대해 한 사람씩 문책을 할 때였읍니다. 그는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왼손으로 그 불운한 여성들의 질에서 나오는 냄새나는 열을 쟀읍니다. 일본인인 나는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고 넘어갔읍니다. 이 지구상의 화류계에서 일본인 창녀는 항상 가장 청결하고 건강관리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그것이 병을 갖고 있지 않다는 보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검사를 받지 않을 수가 있었읍니다. 세 사람이 끌려나왔읍니다. 아촌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여자들에게 세 사람을 끈으로 묶으라고 명령했읍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졌읍니다. 아촌 자신이 직접 가죽 채찍으로 그녀들의 몸을 때렸으나, 재갈이 물려진 새 사람의 입에서는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읍니다. 세 사람은 나의 희생이 된 것입니다, 나는 잠자코 있었읍니다, 창녀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고된 것입니다. 성병에 걸리면 당장 보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고, 보고를 하면 했다고 해서 주인에게 당장 혼이 납니다. 가장 현명한 것은 주인이 독자적인 방법으로 병을 알아낼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화를 피할 수는 없읍니다. 매를 맞은 상처가 아물자, 새 사람의 창녀는 싱가폴의 중개인에게 팔려 메단으로 끌려갔읍니다. 나는 변함 없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아촌의 유곽에 있었읍니다. 그때까지 나는 바바 한 사람만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고되지는 않았읍니다. 건강이 좋아지고 생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읍니다. 그리고 아름다움도 말입니다. 대부분의 중국인 갑부들은 자신의 기루, 유곽을 갖고 있읍니다. 그리고 홍콩에서나 싱가폴에서나 또는 부타위나 슬라바야에서도 그들의 습관은 같습니다. 즉 그들은 차례를 전하고 각자가 소유하는 유곽을 서로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바바 아촌의 유팍에 그 당번이 돌아왔던 것입니다. 아침 일찍 바바가 손뼉을 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읍니다. 나는 대합실로 나갔읍니다. 그날은 아칙부터 도박이 예정되어 있었고, 여자와 함께 노는 것은 저녁때부터라는 규칙이 있었읍니다. 손님이 이미 몇 사람 도착해 대합실에서 카드와 마각, 당구에 열중하고 있었읍니다. 나는 몹시 불안했읍니다. 우노크로모의 유곽이 당번인 그 날 바바는 어쩌면 그의 손님에게 나를 제공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쨌든 일본 여성은 그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읍니다. 바바가 나를 제공한다는 말을 꺼내기만하면 나는 도대체 몇 사람의 손님을 상대해야 할지 모릅니다. 바바가 있는 곳에 가 보았더니, 예상했던대로 그는 어떤 손님을 접대하라고 내게 명령했읍니다. 그 손닌은 키가 크고 건강하고 우람하고 잘 생긴 매력적인 유럽인의 피를 받은 젊은이였읍니다. 이름은 로베르트. 첫눈에 보아도 그다지 경험이 없는 픗나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읍니다. 그의 장래를 생각하니까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읍니다. 만약 그가 내 몸을 요구하게 되면,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는 저주스러운 병을 나한테 물려받는 신세가 되는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는 평생 그 병을 짊어지고 살게 되고, 그 병이 원인이 되어 불구가 되거나 젊은 나이에 죽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바바는 진담일까 농담을 하는 것일까?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읍니다, 나를 로베르트에게 제공하는 것을 애석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읍니다. 순간 나는 병을 옮긴 것이 나라는 것을 바바는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읍니다. 얼마 뒤 그는 나를 다른 사람에게 팔든지 아니면 나를 사올 때 치른 10달러를 내놓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날 아침 나는 말할수없는 슬픔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읍니다. 바바가 로베르트와 나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밖에서 문을 잠그자 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헌신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슬픔이나 불안 따위는 모두 던져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읍니다. 로베르트는 긴의자에 앉았읍니다. 나는 곧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장화를 벗겼읍니다. 그의 양말은 더러웠고 깨끗이 손질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읍니다. 나는 벽장에서 그가 신을 샌들을 꺼냈읍니다. 하지만 치수가 맞는 것이 없었읍니다. 그의 발은 굉장히 컸읍니다. 그 뒤 그의 발에서 양말을 벗겼읍니다. 샌들은 그의 앞에 놓아두기만 하고 신기지는 않았읍니다. 짚으로 만든 샌들은 그가 신으면 부서질 것만 같았읍니다. 로베르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나와 내 동작 하나하나를 경이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읍니다. 나는 주머니가 두 개 달린 그의 셔츠를 벗겼읍니다. 그는 입을 다문 채였읍니다. 주머니는 어느 쪽도 텅 비어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를 일어서게 하여 승마 바지를 벗겼읍니다. 더럽혀져 있는 탓으로 냄새가 지독해서 싫었으나, 나는 바지를 접어 옷장 속에 걸었읍니다. 내의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마 일 주일 이상 갈아 입지 않은 것 같았읍니다. 그는 창피한 듯이 잠자코 있었읍니다. 로베르트는 젊음과 건강, 수려한 용모, 그리고 육욕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젊은이였읍니다. 나는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했읍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 젊은이에게 어째서 바바는 나를 제공했을까? 틀림없이 그는 그 저주스러운 병을 이유로 나를 사온 값을 내게 받거나 나를 팔거나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나의 병에 대해서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어느 정도 침착성을 되찾고 마음이 편해졌읍니다. 다른 옷장에서 나는 마요르가 입던 기모노를 한 벌 꺼내서 로베르트에게 주었읍니다. 그리고 그의 속옷을 벗기고 기모노를 입혀 주었읍니다. 여전히 그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기만 했읍니다. 나는 강장용의 포도주를 한 잔 그에게 주었읍니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자기 몸 속에 영원히 자리잡게 될 병에 걸린 것을 그다지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옵니다. 아름다운 꿈과 쾌락을 맛보는 것은 이미 그의 권리였읍니다. 설사 그가 끝없는 고통에 괴로와한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로베르트는 강장용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읍니다. 나는 그동안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애기를 계속하고 있었읍니다. 물론 그런 배려는 창녀로서의 여러 가지 임무 가운데 하나였읍니다. 물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읍니다. 하지만 나는 불쾌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읍니다. 일본 여인이 얘기를 하고 떠드는 것 따위는 듣기 싫다, 그녀들의 대도나 건는 모습 따위는 보기도 싫다, 방안에서 일본 여인으로부터 서비스를 받는 것은 싫다고 하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요? 아침 8시 반에 우리들은 침대에 들어갔읍니다. 로베르트는 엄청나게 힘이 세고, 땀에 젖은 육체는 마치 그가 청동의 주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읍니다. 그는 점심도 마다하고 단 한 번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읍니다. 침대 속에서의 그의 움직임은 경험이 없는 남성 특유의 조급한 것이었읍니다. 그 강장용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빈혈을 일으켜 혼자서는 침대에서 내려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을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는 없었읍니다. 그의 훌륭한 육체도 멀지 않아 파멸할 것이다. 젊음, 미모, 늠름함 -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것으로서 누구나가 갖는 것은 아닙니다-- 과 같은, 그에게 갖추어진 모든 것이 곧 소멸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옛날에 내가 중국인 지압사에게 받은대로 로베르트에게 거칠게 안기면서 그의 몸 곳곳에 지압을 해 주었읍니다. 무엇때문에 내가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는 어린애처럼 온순하게 참고 있었읍니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로베르트는 나를 해방시켜 주고 침대에서 내려왔읍니다. 나도 내려와서 땀이 흥건한 그의 몸을 몇 번씩이나 장미수와 젖은 타올로 닦아 주었읍니다. 타올이 다섯 장이나 필요했읍니다. 그는 완전히 정력을 탕진하고 있었읍니다. 억센 힘도 늠름함도 사라지고, 의자에 벗어던진 헌옷 같았읍니다. 그는 자기 옷을 달라고 했읍니다. 나는 그것을 가져다가 하나 하나 입혀 주었읍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더러운 양말도,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장화도, 그리고 그의 머리를 빗질해 주고, 그가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머리를 맛사지해 주었읍니다. 그리고나서 나도 타올로 몸을 닦고 옷을 입었읍니다. 로베르트는 매우 만족스러운 모습이었읍니다. 갑자기 그가 내 팔을 움켜잡고 자기 무릎 위에 나를 얹고는, 낮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읍니다. 말하고 있는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듣기에 기분이 좋았읍니다. 나는 로베르트의 성욕이 다시 솟구치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떨어졌읍니다. 다시 상대를 하라면 다는 부서져버렸을 것입니다. 나는 아침도 점심도 굶었옵니다. 아마 그도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병상에서 일어난 것처럼 로베르트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읍니다. 나는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도록 다시 강장용 포도주를 따라 주었읍니다. 그리고 나서 방 밖에까지 전송했읍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문 앞에서 멈춰섰읍니다. 그리고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끌어안고 우왁스럽게 키스를 했읍니다. 나는 공손하게, 그리고 상냥하게 로메르트를 방 밖으로 밀어내고 안에서 쇠를 잠갔읍니다. 나는 기진맥진해 있었읍니다....... 아래는 법정에서의 바바 아촌의 진술(말레이어로 행해지고 그것을 네덜란드어로 통역한)을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그때 나는 마침 사무실에 있었읍니다. 오후 4시경 '황제의 방'에서 호출 벨이 울리고 문을 열어 달라는 연락이 있었읍니다. 사무실을 나와 나는 직접 상황을 보러 갔읍니다. 아뭏든 시뇨 로베르트는 나의 특별한 손님이었던 것입니다. 왜냐구요? 이상한 것을 묻는군요. 그는 나의 이웃집 아들이고,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우리들의 전통적인 관습이니까요. 더구나 시뇨 로베르트는 장차 단순한 이웃집 도련님의 관계를 떠나서 나의 이웃집 주인이 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방에서 나왔읍니다. 얼굴이 창백해서 매력적인 모습은 완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읍니다. 거의 얼굴을 들 수도 없을 정도였읍니다. 전혀 한도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이, 언젠가는 마음도 몸도 모조리 욕망에 바쳐버릴 것 같은 인간, 그렇게만 보였읍니다. 그렇지만 로베르트는 만족스런 표정이었읍니다. 자연히 입술에 떠오르는 웃음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읍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기뻐한 것은 물론입니다. "시뇨 로베르트."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읍니다. "오늘부터 우리들은 사이 좋은 이웃입니다. 영원한 이웃, 어떻습니까?" 갑자기 로베르트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스러운 듯이 나를 쳐다보았읍니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든 듯이 몸이 굳어졌읍니다. 나와 같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읍니다. 즉 그는 방금 맛을 보고 온 쾌락의 대가로 거액의 화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계산은 사인으로 대신하면 안될까요?" 로베르트는 겁을 집어먹고 말했읍니다. "시뇨, 우리들은 사이좋은 이웃입니다. 시뇨에게서는 한 푼도 받을 수 없읍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리들은 공동 경영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시뇨는 언제 오시든지 대환영이라는 얘기입니다. 쇠가 잠겨 있지 않은 방은 어느 곳이나 자유롭게 사용해 주십시오. 시간에 제한 없이 밤이나 낮이나 좋습니다. 어떤 여자를 고르든 시뇨의 자유입니다. 만약 정문과 창에 쇠가 잠겨 있으면, 문으로 들어와 주세요. 정원사와 수위에게 얘기해 두겠읍니다." 그러자 로베르트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금방 사라졌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고맙습니다, 바바. 바바가 이렇게 좋은 분인 줄은 꿈에도 몰랐읍니다." "시뇨는 좀더 일찍 오셔야 했읍니다. 오늘이 처음이라니." "꼭 다시 오겠읍니다." "꼭 오세요. 기다리겠읍니다." 나는 선량한 이웃 사람으로서 그가 찾아온다는 것을 거절할 수는 없읍니다. 하물며 그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욕구의 분출구를 제공하도록 배려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만족하고 싫증을 낼 때까지 마이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로베르트는 돌아가겠다고 말했읍니다. "벌써 저녁때니까요." 나는 말리지 않았읍니다. 돌아가기 전에 그를 내 사무실로 안내했는데, 여자들을 보는 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읍니다. 로베르트는 완전히 변해서 이미 아침 나절의 내성적인 젊은이는 아니었읍니다. 나는 보고도 못본 체하고 있었읍니다. 만약 그에게 또 서비스한다면 모든 규칙이 어긋나게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자 이발사를 불러 내가 지정하는 머리형으로 그의 머리를 깎도록 명했읍니다. 시뇨는 이발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읍니다. 스페인풍으로 머리를 한가운데서 가르고, 최고급 머리 기름을 바르게 했읍니다. 그것이 끝나자 내가 특별히 간직해 둔 술을 그에게 마시게 했읍니다. "이렇게 하고 보니까 시뇨는 한층 더 돋보이는군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1링키트를 주었읍니다. 흠집 하다 없는 태양과 같은 순백색의 링키트 은화였읍니다. 로베르트는 그것을 부끄러운 듯이 받아들고 고개를 숙이더니 겨우 이렇게 말했읍니다. "정말로 바바는 최고의 이웃입니다." 점차로 수가 늘어난 손닌둘 사이를 빠져나가 나는 그를 밖으로 안내했읍니다. 손님 가운데 몇몇이 우리 두 사람을 불러 세우고, 마이꼬를 요구했읍니다. 시뇨는 불쾌한 얼굴을 했고, 나는 그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읍니다. 나는 그와 함께 뜰로 나왔읍니다. 그리고 로베르트가 탄 말이 거리로 나가 왼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 마이꼬를 살피러 갔옵니다. 그 뒤 나는 시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릅니다. 끝으로 로베르트 메레마에 관해서 냐이와 안네리스가 얘기한 것을 내가 정리한 것이다. 오후 2시, 안네리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열은 이미 내려 있었다. 당장 그녀는 로베르트가 경찰서에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아직 안돌아왔다, 앤. 로베르트는 도대체 어디까지 간 것일까 ? " 냐이는 몹시 짜증을 부리며 아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르삼에게 자기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명했다. 거리에 우유와 치즈, 버터를 배달하는 일은 다른 마부에게 맡겨졌다. 그 뿐 아니라 뒤곁에서 작업을 감독하는 것도 아직 감독이 되기에는 이른 인부에게 맡겨졌다. "현관에 나가서 기다리겠어요, 마마." 안네리스가 냐이에게 졸라댔다. "안된다. 여기서 기다리나 밖에서 기다리다 마간가지야. 마마와 함께, 응접실에서 기다리자꾸나." 냐이는 안네리스를 부축해서 장소를 옮겨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로베르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괘종시계 소리가 안타깝게 기다리는 두 사람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때때로 냐이는 앞뜰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로베르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앤, 그와 만나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는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본디는 그가 네게 빠져야 하는 건데."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에 기분을 상한 것 같았다. "식사를 가져다 줄까? " "필요 없어요, 마마." 그래도 냐이는 안으로 들어가서 밥에 반찬을 곁들인 요리 두 접시와 스푼과 포크, 그리고 마실 것을 들고 나왔다. 냐이는 자기도 먹으면서 안네리스의 입에 억지로 음식을 넣어 주었다. "씹는 것이 싫으면 그대로 넘겨도 괜찮다." 그러자 안네리스는 정말로 씹지 않고 넘기기만 했다. 두 번 가량 냐이는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다르삼을 불렀다. 안네리스는 먼 곳을, 아주 먼 곳을 바라보면서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갔다. "앗, 저 미친 녀석이 이제야 돌아오는군 ! " 냐이가 소리쳤다. 안네리스가 길거리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르삼 ! " 냐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다르삼이 들어오자 말했다. "사무실의 쇠를 잠가요. 그리고 여기에 서 있어요." 냐이는 사무실과 응접실을 연결하는 문을 가리켰다. 로베르트는 말을 타고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는 현관 앞 계단에서 멈추자 말을 매지 않고 놓아준 뒤, 계단을 올라와서 냐이와 안네리스 앞에 와 섰다. 아들이 머리를 자르고 한가운데서 가리마를 단 것을 보고 냐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땀도 흘리지 않고 먼지도 뒤집어쓰지 않은 그의 온몸을 뚫어보았다. 로베르트의 손에 승마용 채찍은 들려 있지 않았다. 모자도 쓰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다 두고 온 것일까? 냐이는 중얼거렸다. "저 머리꼴 좀 보지. 창백한 얼굴에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앤, 네 오빠의 모습을 좀 봐라. 네 아버지가 바깥을 쏘다니다가 돌아올 때와 어쩌면 저렇게 꼭 같니 ? 저 머리 기름 냄새......저것도 똑같구나. 로베르트가 입을 열면 5년 전과 같은 술 냄새가 날 거야." 냐이는 로베르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안네리스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눈동자로 오빠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르삼은 잠자코 서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자, 마두라의 칼잡이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베르트가 다르삼을 바라본 뒤, 그 다음에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경찰은 밍케가 어디에 연행되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읍니다." 냐이 온트솔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새빨개진 얼굴로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함쳤다. "거짓말 ! " "소식을 알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왔다구요." "더 이상 얘기할 필요 없다. 그 술 냄새, 향수 냄새, 머리 모양.....모든 것이 5년 건의 네 아버지와 똑같구나. 앤, 잘 봐둬라. 네 아버지가 돌아갈 방향을 잊어버리게 된 발단이 바로 이런 것이었단다. 당장 없어져 버려 ! 이 거짓말장이 ! 내게는 너같은 거짓말장이 아들은 없다 ! " 사무실로 통하는 문 앞에 서 있던 다르삼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앤, 오늘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옛날에 네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돌아왔었단다. 그래서 나는 그 뒤 내 삶 속에서 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단다. 지금 네 오빠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그 아이는 제 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저 좋을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지." 안네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앤, 너는 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강하지 않으면 저런 돼먹지 않은 인간의 놀림감이 되고 만다. 앤, 이제 그만 울어라. 너도 오빠나 아버지 같은 사람의 뒤를 밟고 싶으냐?" "마마, 나는 마마의 뒤를 따를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철없는 행동은 그만두어야지.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안네리스는 냐이가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집 앞에서 말이 힝힝거렸다. 로베르트는 자기 방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 누이동생, 다르삼을 무시한 채 집을 나갔다. 매어 두지 않았던 말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날 이후, 이 아들은 가족이 사는 집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