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필라스 피어스 지음 창작과 비평사 1.피신 뒷문 계단에 서서 톰이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분노의 눈물일 것이다. "안녕, 피터... 안녕, 사랑하는 정원," 톰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떠나야 하다니,피터와 둘이서 다가오는 여 름방학 동안 이 정원에서 지낼 계획들을 얼마나 열심히 세웠었는데... 도시집의 뜨락은 보통 조그마했고, 롱 씨네 정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채소밭과 잔디밭, 화단이 있고 뒤뜰의 울타리를 따라 빈 땅이 조금 있었는데, 거기에는 소 년들의 친구와도 같은 커다란 과나무가 있었다. 사과나무라고 해야 일년에 고작 몇 개 밖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터라, 두 소년은 마음껏 나무를 오르내리며 놀 수 있었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둘이서 가지 사이에 놀이집을 짓기로 했었다.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톰은 이윽고 눈물을 흩뿌리며 돌아섰다. 계단을 뛰 어올라 집으로 들어서며, 톰은 볼멘소리로 외쳤다. "안녕, 피터!". 소리가 꼬리를 물고 사라지는 저편 창문에서 칼칼하게 쉰 목소리가 들려 왔 다. "안녕, 형아..." 톰이 현관으로 나오자 엄마가 여행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안 으려고 손을 내밀었자만, 엄마는 가방은 건네주지 않고 자꾸 딴소리만 늘어놓았 다. "톰, 피터가 저렇게 홍역을 앓고 있으니 어쩌겠니... 너도 떠나는 것이 싫겠지 만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란다. 날마다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피터는 지금 홍역으로 고생하고 있잖아. "누가 뭐, 내가 없어서 엄마 아빠가 좋아했었어. 내말은... "쉬!" 건네주고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면서 귀엣말로 속삭였다. "톰, 자아, 톰! 마치 몇주일 치의 잔소리를 한꺼번에 하려는 듯, 엄마는 톰을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넌 손님이니까 행동을 조심해야 돼, 알겠니? 톰의 뺨에 입을 맞추 고 나서, 엄마는 자동차 쪽으로 살며시 톰의 등을 밀면서 따라갔다. 톰이 차에 타자, 엄마는 운전석에 않은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그웬한테 안부 전해 주 세요. 톰을 이렇게 데력 주셔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무튼 너무 고맙 군요. 톰?" "네, 그래요." 하고 톰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니, 애들 이 있을 데가 마땅찮군요, 하고 엄마가 앨런 이모부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 요 저희도 도와 드릴수 있어서 기쁨니다. 뭘 하고 이모부는 짧게 대답하면서 자 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톰은 엄마가 서 있는 쪽의 차창을 열었다. "갈게 엄마!" "톰!" 엄마는 입술을 떨었다. 정말 미안하구나. 모처럼 즐거운 여름 방학을 이렇게 망치게 하다니!" 이윽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톰은 뒤로 멀어져 가는 엄마를 돌아보며 소 리쳤다. 치잇,차라리 피터하고 홍역을 같이 앓는 게 낫겠어 톰은 분에 겨운 얼굴로 엄마한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홍역 때문에 밖에 나 와 보지도 못하는 피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치터는 온통 붉은 꽃이 핀 얼굴 로 침실 창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엄마는 이층을 쳐다보다가, 피터이 얼굴을 발 견하고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원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 지였던 피터는 엄마를 보자마자 황급히 안으로 숨어 버렸다. 톰은 차창문을 닫고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아무 소리없이 앉아 있었다. 이모부 가 목청을 가다듬고서 "자, 서로 잘 지내 보자꾸나." 하고 말을 건넸지만 꼭 뭘 물어본 말은 아니라서 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버릇없는 짓인 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부터 톰은 앨런 이모부를 좋 아하지 않았을뿐더러 커서 이모부 같은 사람도 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모 부가 나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날 한 번이라도 때린다면...' 하고 톰은 속으로 투덜댔다. 어휴, 그럼 당장 집으 로 도망칠 수도 있가고, 엄마 아빠도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겠다고 하실 텐데. 그렇지만 이모부는 절대 안 때릴거야. 이모랑 이모부는 뻔해. 그웬 이모는 더하 지, 뭐. 아이들이라면 그저 좋아서 호호, 하하 하니까. 씨이 그 갑갑한 집에 갇혀 서 몇주 일씩이나 지내야 하다니... 이제까지 한 번도 이모네 집에 가 보지 않았지만, 이모네가 정원이 없는 연립 주택에 산다는 애긴 들었다. 톰과 이모부는 다시 차를 타고 엘리 시와 펜스 지방을 지나 이모부가 살고 있 는 케슬포드 시에도착했다. 이모부네 집은 큰 집을 개조해서 만든 다세대 주택 이었다. 새로 지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선 한복판에 아무 멋도 없이 혼 자만 길쭉하게 서 있는 우중충한 집이었다. 이모부는 빵빵! 하고 자동차 경적을 울리며 차를 집 가까이까지 바싹 몰고 갔 다. 이모부는 차에서 내리며, "이 집은 반대쪽으로 지었으면 더 보기 좋았을텐데. 게다가 길도 더 넓혔어야 했어.하고 혼잣말로 했다. 톰은 기둥사이의 대문을 잡 아당겼다. 그웬 이모가 웃으면서 뛰어나와 뽀뽀를 하며 톰을 반겼다. 이모와 톰 이 안으로 들어가자 이모부는 짐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발밑에느 차가운 돌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아무도 손질하지 않는 듯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위를 돌아뵈지 어쩐지 으스스했다. 거실은 그다지 보기 흉한 건 아니지만, 과히 기분 좋은 곳도 아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과 히 기분 좋은 곳도 아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앞문에서 뒷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쭉 나 있고, 중간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옆 계단이 직각으로 나 있었다. 이 곳의 바로 집의 중심인에 썰렁하게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회색벽에 높이 붙여 놓은 듯했다. 한쪽 구석엔 빨래통이 놓여 있고 문 앞에는 우유 배달부에게 보내는 쪽지와 빈 우유통이 놓여 있었다. 도무지 이 거실에 어울리는 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 다. 이모가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피터의 홍역에 대해서 떠드는 소리말고는 쥐 새끼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텅 빈 거실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이모가 잠깐 얘기를 멈춘 사이에, 어디선가 똑딱거리는 괘종 시계 소리가 들렸다. "톰, 그건 만지면 안 돼?" 톰이 시계 쪽으로 돌아서자 이목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위층이 바돌로메 할머니 건데, 무척 아끼시는 거란다. 하고 소근거렸다. 좋아 나중에 혼자 봐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톰은 괘종 시계를 슬쩍 훔쳐 보았 다. 돌아서서 이모하고 딴청을 부리면서, 톰은 시계추가 있는 시계 상자 가장자 리를 더듬었다. "할머니가 아끼는 건데 왜 위층으로 안 가져가?" 하고 톰은 물었다. 손톱으로 문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계가 벽에 나사로 고정되어 있는데, 나사가 녹이 슬어 움직이질 않는단다. 하고 이모가 말했다. 톰, 거기 서있지 말고 이리와. 차 마시러 가자. "참, 그러네" 톰은 마치 자기가 어디 서 있었는지 몰랐다는 듯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시계 옆에서 떨어졌다. 시계문은 꽁꽁 잠겨 있었다. 모두들 이모네 집으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괘종 시계가 장중하게 한 시 종을 울렸다. 앨런 이모부가 이마를 찌푸리면서 투덜거렸다. 저놈의 시계는 시간은 곧 잘 가는데 종 치는 건 영 엉망이란다. 시계 바늘은 다섯 시면서 한시를 치다니 도대체 믿을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종소리가 너무 째져서 밤중엔 이층에서 도 더 엉터리 종소리가 다 들린단다. 이윽고 세 사람은 이모네가 살고 있는 이층으로 올라 갔다. 거기엔 이 집의 주 인이자 시계 주인인 바돌로메 할머니네 다락층으로 통하는 좁다란 계단이 나 있 었다. 할머니가 이 큰 집의 주인이고, 이모네는 다른 사람들고 함께 여기서 세 들어 살고 있다. "여기가 우리 집이란다, 톰 자, 이리와봐. 여기가 손님방인데 여기서 지내도록 해. 네가 좋아하라고 꽃도 꽂아 두었고 읽을 만한 책도 놓다 두었단다."이모는 톰이 여기서 즐겁게 지내기를 바란다는 눈빛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보통 크기의 방이었지만 천장이 무척 높았다. 방 안에는 출입문처럼 생긴 문 이 또 하나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보았던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다. 톰은 고 맙다는 얘기를 하려다 말고 갑자기 "아니, 창문에 창살이 있잖아! 이건 아기들 방이야! 이모, 난 아기가 아니야!" 하고 소리쳤다. "아암 그렇지! 하고 그웬 이모 도 똑같이 큰 소리로 말했다. "톰, 너 때문에 일부러 한 게 아니야. 우리가 처음 이사왔을 때부터 있었어. 욕실 창문에도 있단다." 하지만 그런 설명에도 톰의 의심은 말끔하게 가시지 않았다. 차를 마시기 전에 먼저 짐을 풀라면서 이모 방에서 나가자, 혼자 남게 된 톰 은 방을 더 자세히 훑어 보았다. 또 하나의 문을 열어 보니까, 그건 출입구가 아 니라 옷을 거는 벽장문이었다. 이모가 방에 꽂아 놓은 책은 이모가 어렸을 때 읽던 소설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모가 설명하려고 애쓰던 문제이 창살 이 있었다. 어쨌든 차를 마시니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모는 데본 차와 함 께 삶은 계란 요리와 집에서 만든 핫 케이크, 딸기쨈, 생크림을 내왔다. 이모는 자기가 얼마나 요리하기를 좋아하고 또 맛있게 만드는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톰 이 여기서 지내는 동안 맛있는 음식에 습관을 들이게 하려는 것 같았다. 차를 마시고 나서 톰은 엄마한테 잘 도착했다고 편지를 썼다. 피터한테도 그 림 엽서를 보내면서 짤막하게 이곳 상황을 적었다. "홍역이 많이 나았으면 좋겠구나. 이건 엘리 성탕탑 사진이야. 엘리시를 지나 왔자만 이모부가 탑에 못 올라가게 하셨어. 이모네 집은 오밀조밀한 다세대 주 택인데 뜰도 없다. 내 방 창문엔 창살이 쳐져 있는데, 이모 얘기로는 원래 그런 거래. 음식은 참 맛있어." 다시 편지를 읽어 보고 나서 톰은 이모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음식은 참 맛있 어 에다 밑줄을 그었다. 톰은 마지막으로 그림 엽서에 자기 얼굴을 그려 놓고 그 밑에다 가늘고 길쭉한 고양이 몸을 그렸다. 톰 롱의 사인이었다. 한참 고양이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있는데 아래층 거실에서 괘종 시계 소리가 들렸다. 정말 종소리가 잘 들리네. 종소리를 셀수도 있겠구나. 하나, 둘... 톰은 종소리를 세어 보다가 씨익 웃었다. 에이, 시계는 또 틀렸다. 정말 엉터리 시계 구나. 2.시계가 열세 시를 치다 톰은 이제 괘종 시계 소리에 친근함을 느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조용한 밤이면 더욱 그랬다. 톰은 잠이 오지 않았다. 늘 자던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몇 시간씩 말짱하게 깨어 있거나 뒤척거리기가 일쑤였다. 전에는 잠이 안와서 고생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쩐 일일까? 혹시 뱃속이 갑갑하거나 불편해 서 그런게 아닐까? 어떤 때는 반쯤 꿈나라에서 헤매는 동안, 자신이 생판 다른 두 사람이 되기도 했다. 자기가 막 잠들려고 하면 어느새 나타난 또 하나의 자 신이 눈을 말똥거리며 고집스레 깨우곤 했다. 요새 한창 맛을 들인 생크림이랑 새우 소스랑 럼버터며 마요네즈 같은 맛있는 음식 얘기를 소곤소곤 속삭여 주면 톰은 마침내 다시 깨고 말았다. 이모가 만들어 주는 음식이 너무 맛있느 것도 탈이었다. 또 운동 부족도 잠이 안오는 이유중의 하나였다. 톰은 하루 종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낱말 맞추기나 그림 맞추기 놀이를 하며 지냈다. 어쩌다가 우유 배달부가 와도,행여 홍역을 옮 길까 봐서 문을 열어 줄수도 없었다 그나마 운동이라고는 이모가 밥 먹을 준비 를 할 때 거드는게 고작이었다. 밥상은 늘 톰의 집보다 몇배나 푸짐하였다. 톰은 불면증을 해결할 몇 가지 수를 짜냈다. 첫째는 잠자리에서 이모가 학교 때 읽던 책들을 읽는 일이었다. 잠이 들 만큼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읽 을 만했다. 그런데 하루는 앨런 이모부가 밤 열한 시 반이 넘도록 책을 읽고 있 는 걸 보고 난리가 났다. 그 뒤로 이모부는 무지무지 엄격해져서, 잠들기 전 십 분동안만 책을 읽으라면서 이모가 잠자리 인사를 하로 불을 끄면 다시는 불을 켜지 말라고 했다. 물론 책을 읽는 시간은 지킬수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간은 예전보다 더욱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느날, 톰은 다른 때처럼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었다. 그러자니 자기 혼자 할 일도 없이 말똥거리고 있는 게 몹시 약이 올랐다. '씨이. 이모랑 이모부는 만날 불빛 아래서 책도 읽고 얘기도 나무면서, 나만 이게 뭐야.'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오늘 밤은 왠지 참을 수가 없었다. 톰은 침대에서 일 어나 이불을 걷어차 버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걸어 나왔다. 어둠속을 더듬어 조 용히 방문을 연 톰은 소리나지 않게 좁은 거실로 걸어 나갔다. 다른 방에서 이 모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모부가 좋아하는 주간지를 크게 읽고 있는 것 같은데, 이모는 그냥 듣고 있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아무 소리도 없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톰은 살금살금 걸어서 부엌에 있는 식료품 저장실로 갔다. 집에서는 피터랑 늘 하던 짓이었다. 식료품 저장실에는 차가운 돼지 갈비와 카스텔라 반쪽 이랑 바나나, 빵 케이 크가 있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지라 썩 내키는 게 없었다. 딱히 뭘 집을 지 몰라 머뭇거리던 톰은 '에이 그래도 뭐라도 잡자.' 싶어서 그냥 아무 맛도 없 고 오래된 빵을 집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에 있는 음식들이 지긋지긋해져서 빵을 도로 내려놓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일 맛있게 먹으려면... 지금까지 톰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런 일에 소리를 낼 만큼 서투른 짓을 할 톰이 아니다. 하지만 그날 따라 톰은 재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나오다가 마침 방에서 나온던 이모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만 것이다. 이모부가 깜짝 놀 라 호통을 치는 통에 이모까지 덩달아 나왔다.톰은 물론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 각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리를 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모는 톰이 배가 고파서 밤중에 부엌에 왔다고 생각했는지 무척 언짢아 보였다. 이모가 제대로 못 먹여서 그런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모부는 저녁 식사 때 톰이 게걸스럽게 먹는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 에 그런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톰한테 저장실에서 마음 대로 뭘 꺼내 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기까지 했던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톰이 여기에 있을 까? 장님이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러 왔을까? 톰은 사내아이들이란 원래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료품 저장실에 잘 들락거린 다는 평범한 사실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모네 말대로 밤이 너 무나도 늦었다. 톰을 낚아채듯이 침실로 데려온 이모부는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 을 듯이 버티고 섰다. "톰, 다시는 이러면 안 돼. 불을 끈 다음에 다시 켜서도 안되고 일단 잠자리에 들면 다시 나와서도 안 된다.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침에도 일어나지 말아요?" 하고 톰이 말을 가로챘다. "그거야 다른 문제지. 괜히 쓸데없는 소리 마라. 톰, 하여튼 침대에서 일어나지 마. 이유는..." "오줌이 마려워도요?" "오줌이 마려우면 물론 가야지. 하지만 바로 침대로 돌아가. 너는 꼬박 열시간 을 자야 해. 왜.가 무슨 말을 했었지?" "열시간 자야 한다는 얘기요." 톰은 화가 치미는데도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그래, 네 또래 아이들은 열 시 간은 자야 한다구 넌 그걸 알아야 해.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한대로 밤 아홉시부 터 열 시간 동안 자야 한다. 알겠니? 톰?" "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약속하지, 톰?" 어떻게 사내녀석이 이런 부당한 요구에 약속을 할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톰 은 "그럴께요 약속겠어요." 하고 말했다. 래, 네가 알아들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난 정말 잠이 안 온단 말이예요!" 앨런 이모부가 신경질적인 목소 리로 "이 녀석아! 모든 애들이 다 잔다." 고 말하자, 이모는 톰이 상심할까 봐 걱 정스러웠는지 다정하게 말했다. "그냥 네 생각일 뿐이야, 톰." 가엾은 톰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말해 보았자 지금은 말짱 헛것이었다. 이윽고 이모랑 이모부는 자기네 방으로 돌아갔다. 톰은 어둠 속에 누워서 엄 마한테 마음속으로 편지를 썼다. '날 당장 데려가 줘, 엄마' 아냐, 이건 너무 소심한 거야. 엄마가 걱정하실까. 엄마 대신 피터한테 하소연 하기로 하자. 비록 아파서 답장은 못하겠지만 말야. 피터한테 여기에서 지내는 건 밤중에도 얼마나 끔찍하게 지겨운지 애기해야지. 할 일도 하나 없고, 놀러 갈 데도 없고, 같이 얘기할 사람도 없다도 말야. 여태까지 있어본 곳 중에서 제일 끔찍한 곳이야 톰은 마음속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 어떤 곳이든, 여기가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톰은 자유로워지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 방 안 가득 부풀어올라, 마침내는 벽을 터뜨려 버리고 자신을 정말로 자 유롭게 해주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톰의 방에서 나간 이모네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모부는 목욕 중이었다.톰은 옆으로 누운 채 이모부가 목욕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모부를 증오 했다. 이상하게도 톰의 방 바로 옆에 있는 목욕탕에서 나는 소리는 너무 가깝게 들렸다. 마치 톰도 목욕탕 안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오곤 했는데, 오늘 밤 에는 특히 톰이 이모부랑 같이 목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방문 밑의 한줄기 불빛마저 사라졌 다. 복도의 불이 다 꺼진 것이다. 지루한 정적 속에서 괘종 시계가 열두시를 쳤다. 늘 이맘 때면 이모랑 이모부 는 잠이 들었다. 그저 몸 혼자만 부루퉁히 눈을 멀쩡하게 뜬 채 누워 있었다. 한참 뒤에 시계가 땡! 하고 한시를 쳤다. '벌써 한시구나.!' 하지만 시계는 고장이 난 걸 자랑이라도 하듯이 자꾸만 쳤다. 둘! 시계가 잘못 치는 소릴 처음듣는 건 아니지만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셋! 넷! "어휴, 이 바보야, 지금 한 시란 말야." 톰은 이불 너머로 툴툴거렸다. "왜 다른 시계들처럼 한시를 치치 않는 거야?" 다섯! 여섯! 투덜거리면서도 톰은 세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밤마다 하도 세 다 보니까 그만 버릇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곱! 여덟! 어쨋든 시계는 캄캄한 시 간속에서 톰과 이야기하는 단 하나의 친구였다. 아홉! 열! "얼씨구,그래 잘한다." 하고 말하면서 톰은 "아홉..."하고 하품을 했다.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 열 하나! 열둘! "이 멍텅구리야, 하룻밤에 열두시를 두 번 치는 시계가 어디 있냐." 톰은 졸음에 겨워하면서도 비웃었다. 열셋! 시계는 커다랗게 울려 퍼지고 나서 겨우 멈추었다. 열셋? 톰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진짜 열세번을 친걸까? 엉터리 고물 시계도 그렇게는 안쳐. 혹시 내상이 아니었을까? 아니, 내가 잠들었던 건 아닐까? 아냐, 아냐, 분명히 깨어 있었어. 설사 졸았을망정 잠이 든 건 아니었다 구. 틀림없이 열셋까지 셋단 말야. 톰은 여기에 뭔가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거의 직감적으 로 그런 느낌이 와 닿았던 것이다 정적이 흘렀다. 마치 숨을 꾹 참고 있는 듯, 거대한 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야, 톰. 시계가 열세 시를 쳤는데 어떻게 할 거 야? "체!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고 톰은 소리쳤다. 그리고는 속으로 투덜댔다. '괜 히 쓸데없는 소리 하구 난리야.' 하긴, 톰은 지금 무얼 할수 있단 말인가? 톰은 밤 아홉시부터 일곱 시까지 꼼 짝없이 침대에 누워 자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이모부와 약속까지 했는데 뭘 어 쩌라구? 앨런 이모부는 아까 자기 말이 옳다고 확신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톰은 이모부의 말에 좀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사실이간 하지만, 이모부의 주장은 하루에 열세 시에서 아침 일곱시까지 시이에 열세시가 있다면, 그건 열시간이 아니라 열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열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있 는다고 해도, 한 시간은 자우로이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흥분하지마! 이건 쓸데 없는 공상일 뿐이야. 열세시가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시계는 열세시가 있다고 하지! 그런 소리는 꿈에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래. 다들 저 괘종소리가 엉터리로 종을 친다는 걸 알고 있잖다.' 그러자 잠들려는 톰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톰이 속닥거렸다. '그래, 맞아. 시계는 틀리게 치지. 하지만 종소리눈 틀려도 시간은 맞았다구. 그러니까 시계가 열세 시를 쳤다면, 어디엔가 열세 시라는 시간이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없어." 하고 톰은 소리내어 말했다. 아까부터 잠자코 이 말싸움을 지켜보던 집이 안타까워서 못 참겠다는 듯이 한 숨을 쉬었다. "칫, 어쨋든 그건 엉터리야. 머리속이 너무 복잡해." 그러자, 집이 ' 넌 기회를 잃고 있는 거야.' 하고 속삭였다. "상관없어. 시계가 열세시를 친다고 해도, 그런 시간이 진짜 있는 건 아닌데, 뭐," 톰이 그렇게 말하자 집이 '과연 그럴까? 그럼 시계가 거짓쟁이란 말이지, 음?' 하고 차갑게 되받았다. 톰은 약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에잇.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어! 시계 바늘이 도대체 몇 시를 가리 키고 있는지, 아래층에 내려가서 보고 오겠어." 3.달빛 따라 이거야말로 탐험이었다. 톰은 그냥 잠옷 차림으로 슬리퍼를 신었다. 어차피 한 여름이었다. 해영 자기가 없는 사이에 꽝 소릴를 낼까 봐서 밖으로 나와 조심스 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올 때 문이 열려 있도록 현관문에 슬리퍼 한 짝을 벗어서 끼워 놓았다. 층계와 복도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다들 잠이 들었고, 바돌로메 할머니도 한창 꿈나라로 가 있었다. 빛이라곤 계단 위쪽의 길쭉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줄기 달빛뿐이었다. 발소리를 죽이면서 톰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림짐작으로 아주 옛날에나 쓰던 커다랗고 빛바랜 검정색 괘종 시계는 찾았지만, 시간을 볼수가 없었다. 시계판의 문을 열 고 시계 바늘을 만져 보면 시간을 알수 없을 것 같았다. 여거저기 더듬거렸지만 문을 열 만한 게 전혀 잡히지 않았다. 문득 여기 오던 첫날, 시계추 문은 열리지 않던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지금 시계추 문이나 시계판 문이나 다 잠겨 있는 게 틀림없었다. 빨리! 빨리! 톰의 주위에서 집이 재촉하듯이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고 있어. 자 꾸자꾸 간단 말이야... 톰은 스위치를 찾으려고 돌아섰다. 어디에 있지? 손으로 벽을 더듬거렸지만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빛, 빛이 필요해! 하지만 불빛이라고는 계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뿐인 데, 그건 쓸데없이 벽과 창턱만 비추고 있었다. 톰은 달빛을 관찰했다. 빛이 들어오눈 방향을 보면 달은 집 뒤쪽에서 비추고 있는게 틀림없다. 좋아, 그러면 집 뒤쪽인 거실 끝의 문을 열면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겠구나. 운이 좋으면 시계를 볼수도 있을 만큼 밝겠지. 톰은 소리내지 않고 복도 끝에 있는 문으로 갔다. 이모네는 항상 앞쪽 문만 썼기 때문에 여태까지 한 번도 그 문이 열려 있는 걸 본적이 없었다. 이모 말로 는 아래층 뒤쪽에 세든 사람들이 바깥에다 쓰레기통을 놓아 두거나 방수 천막 아래에 차를 세워 두고 있기 때문에,길가로 나가기가 불편해서 도통 쓰지 않는 다고 했다. 그문을 써 본 적이 없어서 밤에 어떻게 잠그는지 알수가 없었다. 만약 잠겨 있다면 어딘가 열쇠가 있을 텐데...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열쇠로 잠겨 있는 게 아니라 빗장이 쳐져 있었다. 톰은 조심스레 빗장을 뻬고 소리나지 않게 손잡이 를 돌렸다. 문을 활짝 열어 젖히자, 마치 새벽녘처럼 닭빛이 바닥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 순간 톰은 딴데 정신이 팔려 시계 바늘을 보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넋 이 빠진 사람처럼 뒷문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처음엔 놀라진 광경을 보며 치를 떨었다... 이모랑 이모부가 나를 속였어. 아니, 거짓말을 했어. 뭐. "뒤뜰엔 갈 필 요가 없어, 톰. "이라구? 게다가 "뒤뜰이라고는 하지만, 온통 지저분한 잡동사니 들뿐이야. 볼 게 아무것도 없단다."라구? 아무것도 없다니. 꽃이 만발한 꽃밭과 하늘 높이 자라고 있는 전나무. 양쪽 오 솔길 가로 아름답게 구부러진 상록수들은 뭐야. 정원 한쪽엔 웬만한 집 크기의 온실도 있고,정원 구석구석에는 오솔길들이 다른 쪽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놀라서 숨을 삼키며 멍하니 서 있던 톰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 며 한숨을 토해 냈다. 내일 낮에 몰래 여기에 와봐야지. 다들 여기에 못오게 했 지만 이젠 어림도 없어. 이젠 아무도 나를 말리지 못할거야. 이모도 이모부도, 뒤쪽에 세 든 사람들도. 까답롭다는 바돌로메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잔디밭으로 달려가 꽃밭도 뛰어다니고, 온실의 반짝이는 창문 안도 들여다봐야지. 그래. 문 을 열고 들어가 보기도 하자. 상록수 밑의 오솔길도 걸어가 보고, 나무에도 올라 가 볼 거야. 나무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얽힌 가지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 사이로 걸어 다녀야지. 누군가 찾으러 오면 이 무성한 잎과 가지와 줄기 사이에 새처럼 숨어 버리지,뭐. 톰은 벌써 정원에 마음을 빼앗겼다. 정원이 마치 톰을 부르고 있는 듯, 가까이 에 있는 상록수 그루터기에서부터 초승달 모양의 구석진 꽃밭에 피어있는 히아 신스의 꽃잎들까지 너무나 똑똑히 보였다. 톰은 갑자기 열 시간을 자야 한다는 이모부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어쨋든 약속은 지켜야 한다. 톰은 속으로 투덜대며 뜰에서 올라와 시계를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밖에서 본 광경에 넋이 빠져서 톰은 거실이 어떻게 변했는지 제대로 알 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어렴풋이 문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고, 맨발이 뭔가를 애기해 주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했지만... 괘종 시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 시계가 시간을 가르쳐 주겠지. 열 두시 아니면 한 시일 거야. 그 사이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고말고.세상에 열 세시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톰은 시계 쪽으로 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앞쪽 현관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자정부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전에 그림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톰은 하얀 앞치마와 모자와 까만 스타킹을 보고서 한눈에 그녀가 가정부란 걸 았았다. 가정부는 종이랑 장작이랑 성냥을 들고 있었다. 어디라도 숨을까 싶었지만 너무 짧은 순간이라 숨을데가 마땅치 않았다. 톰은 이렇게 된 바에야 들키기 전에 자기가 먼저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서 보니 가정부는 뜻밖에 어린 소녀여서 조금 마응이 놓였다. 상대방이 놀라지 않도록 "어흠!" 하고 헛기침을 했지만 가정부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가정 부가 가까이 오자 톰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정부는 톰을 보 긴 했지만 마치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양 톰을 통과해 버렸다. 아아! 톰은 저 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가정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톰을 지나쳐 갔다. "어, 나는!" 하고 톰이 얼떨결에 소리쳤지만, 가정부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톰은 지나쳐 간 가정부가 아래층 뒤편에 사는 사람들네 현관으로 가더 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벨도 울리지 않았고 열쇠를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눈앞에서 일어난 이 이상한 일에 톰은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 다 지금까지 맨발가죽 양탄자 위에 서 있었다. 거실에는 아름다운 양탄자들이 색색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톰은 그제서야 거실이 달라진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까지 있던 빨래 상자도, 우유병도, 여행 포스터도 어디론다 사라지고 없었다. 대 신에 벽에는 고딕식의 습도계와 공작 날래로 만든 부채랑, 기병과 말과 총탄에 찢긴 깃발들이 아로새겨진 거대한 조각 판화와 갖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또 저녁 식사를 알리는 종이랑 막대기가 옆에 걸려 있고, 커다란 우산처럼 생긴 기둥에는 우산이랑 지팡이랑 양산이랑 공기총, 낚싯대 같은 게 걸려 있었다. 그 리고 벽을 따라 식탁 키만한 붙박이 장식장이 늘어서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괘종 시계 옆이 장식장을 빼고는 모두 참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운 데 장식장만이 대리석으로 만든 건데, 그 위에 박제된 상자 안에는 사냥하는 장 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부엉이가 발톱으로 쥐를 잡고 있는가 하면, 족제비는 토 끼를 죽이면서 위를 쳐다보고 있고, 가운데 상자에는 빨간 여우가 싸움닭을 물 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거실에서 톰이 알아볼수 있는 것이라곤 키가 큰 괘종 시계뿐이었다. 톰은 가 만히 시계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을 보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이 시계가 정말로 그 전에 보던 시계인지 확인하려는 생각이었다. 시계를 만지려는 찰나, 뒤에서 작은 숨소리가 났다. 다시 돌아오는 가정부의 숨소리였다. 어쩐 일인지 가정부는 아까처럼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 았다. 가정부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거실에 불을 피웠어요." 가정부는 먼젓번에 들어온 문으로 나갔는데,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쫓던 톰 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가정부는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는 것 같더니 어느 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가정부는 나갔지만 문을 통해서 나간 것이 아니었다. 마치 사라지듯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가정부가 서 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문득, 지금 자기한테 무슨 일인가가 은밀히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톰은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거실의 가 구들과 양탄자와 그림이 없어졌다. 그것은 마치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더 이 상 거기에 있기를 포기하고 떠나버린 것 같았다. 톰은 여우를 들여다보기 전에 는 고딕식 습도계가 제자리에 있었는데 다시 돌아보니까 벽에는 낚서만 있고 습 도계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여우도, 다른 것들도 점차 사라 져 버렸다. 몇 초 사이에 거실은 처음에 보았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톰은 어이가 없어 서 멍하니 서 있었다. 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 순간 톰 은 뒷문을 열어 놓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건, 자신이 문 을 열어 놓은 건 사실이다. 그러니 이젠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가야 한다. 톰은 한참 동안 나무와 정원과 온실을 바라보다가 '다시 올게' 하고 마음속으 로 속삭이며 문을 닫았다. 위층에 올라가 자리에 누우면서 톰은 거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꿈이었을까? 어쩌면 유령을 본 걸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지. 유령 가정 부와 유령 물건들... 한데, 유령치고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나타난 게 아닐까? 유령... 톰은 이불 밖으로 손을 쏙 꺼내서 머리카락이 곤두서 있는지 만져 보 았지만 말짱했다. 게다가 아까 가정부가 자기를 쳐다보았을 때나 지나갈 때도 으스스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전전긍긍하던 톰은 굳이 지금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번뜩 들었다. 복도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든 톰한테 중요한 건 정원 이었다. 뜰은 정말 있었으니까. 톰은 속으로 내일 꼭 가보아야지 생각했다. 벌써 부터 자기가 나무 위를 기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고 꼭 히아신스 향기를 늘 기억 하고 있었다. 그 꽃을 무척이나 사랑하던 엄마는 크리스마스나 새해에는 집안 에서 키우다가 늦봄이 찾아오면 바깥 꽃밭에 내다 심곤 했다. 그리운 집 생각을 하며 톰은 어느새 소로록 잠이 들었다. 4. 햇빛 속에서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톰은 몹시 기분이 좋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원 생각이 났다. 거실에서 있었던 일은 어렴풋했지만, 정 원에서 본 광경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정원에 가는 일이 간밤에 생각했던 것처 럼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보나마나 이모와 이모부는 정원에 못 가게 하 려고 톰한테 갖은 핑계를 다 댈 게 뻔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정원에 대해서 숨 기고 있었단 말인가? 톰은 내심 얄미운 생각이 들어서 이모와 이모부한테 단단히 창피를 주려고 마 음 먹었다. 정원 같은 건 전혀 모르고 마치 가볼 생각도 없는 것처럼 꾸미면서, 톰은 아침 식사 시간에 불쑥 뚱딴지 같은 얘기를 꺼냈다. "이모, 거짓말은 나쁜 거야?" "그럼, 톰! 나쁘다마다." 하고 이모가 말했다. "으응, 근데 특별한 경우엔 거짓말을 할수도 있어?" "그러니까,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말이냐?" 이건 이모부가 좋아하는 성격의 질문이었다. 이모부는 신문을 접으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내가 보기엔 넌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고."하고 톰이 말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상대방한테 뭔가를 알려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상대방은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척하는 것 말이야. 자기가 알고 있으면 혹시라도 그 사람이 그걸 쓰는데 방해가 될까 봐서 요." 이모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한테, 가르쳐 주고 싶어하지도 않고 말해 주고 싶 어하지도 않는다니, 그게 뭔데?"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사람이야, 이모. 응, 그게 뭐냐 하면... 그러니깐, 물건으 로 말하자면..." "물병 같은 거니?" 하고 이모가 예를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아이,참 물병과 커다란 정원 사이에 적당한 물건이 없을까? "아! 말하자면 소파 같은 거 말야. 커다란 야외용 소파."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 커다란 야외용 소파라니..." "물건이 뭔가는 중요한 게 아니오, 여보." 하고 이모부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 했다. "톰의 말은, 저 편하자고 거짓말을 하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간다는 거 야. "네." 하고 톰이 대답했다.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요." "아니다. 어떤 거짓말이든 정당한 거라곤 없어. 절대로 거짓말을 해선 안 되 지." 이모부는 엄한 얼굴로 톰을 바라보았다. "톰,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놀 랍구나." 이모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신문을 챙겨 들고 직장으로 가버렸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마, 톰." 이모가 달래듯이 말했다. "이모부는 옳고 그른 것 에 유난히 민감하단다. 이모부도 스스로도 인정하지. 너도 자라면 그렇게 될 거 야, 톰." " 체, 나도 옳고 그른 건 잘 알아!" 하고 톰은 발끈해서 말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안 그렇단 말이야!" 톰은 이모부한테만 공격하는 건 신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무 나 억울했다. 톰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이건 마치 톰이 잘못하고 있다는 투가 아닌가. 게다가 톰더러 잘못한다고 꾸짖는 자기들이 바로 거짓말쟁이면서 도 말이다. 톰은 이모랑 같이 아침상을 치우고 나서 싱크대로 갔다. 접시에 마른 걸레질 을 하면서 일부러 이모한테 말을 걸었다. "이모." "왜? 톰."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방에 꽃을 꽃아 줘서 고마웠어." "저런,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그 꽃, 산 거야?" "응. 하지만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란다." "이모, 이모네 정원에서 꽃을 꺽을 수 있으면 더 편할텐데 그치?" "그래. 하지만 이 집엔 정원이 없단다." "정말?" "정말이라니? 무슨 뜻이냐,톰?" "으응, 그러니까 안 좋다구. 집 뒤에 정원이 있어서 나무도 있고 잔디밭도 있 고 온실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구." 그래 얼마나 좋겠니. 우리가 날개가 있어서 날아다닐 수 있다면. 그렇지? "이모, 만약에 말이야, 지금 당장 정원으로 나가서 꽃밭에서 히아신스를 꺽어 올수 있다면 어떡할래?" 톰은 자기가 정원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얘기를 최대한으로 부드럽게 표현했 다. 마침내 이모한테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이모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웃었다. "호호호... 네가 지금 어디서든 히아신스를 구해 온다면 진짜로 상을 주겠다." "엉?" "히아신스 철이란다. 그건 여름에 피는 꽃이 아니잖니? 봐라, 네가 얼마나 낭 만적으로 흘렀는지 알겠니?" "어어, 밖에 히아신스가 핀 걸 봐, 봤단 말야." 톰은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후후, 그럴 리가 없어. 벌써 철이 지난걸." "저, 이모... 아래층에 내려가도 돼?" "뭐하려구?" "그냥, 나쁜 짓은 안 할게." "지금은 안 돼. 오늘은 바돌로메 할머니다 시계 밥을 주러 내겨가시는 날이거 든 ." 이모의 말에 톰은 더 내려가고 싶어졌다. 순전히 나를 정원에 못 가게 핑계일 거야! 그래도 역시 톰은 조금 겁이 났지만... 바돌로메 할머니 때문은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톰은 히아신스 생각에 잠겼다. 그건 결코 꿈이 아니었어. 예 쁜 꽃도 보았고 향기도 맡았는걸. 지난밤에 똑똑히 보았어. 지금도 그 자리에 있 을거야. 문만 열면 그 꽃을 다시 볼수 있을거야. 정원도 볼 수 있고. 톰은 정원으로 나가는 뒷문의 손잡이를 틀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지난 밤 에는 빗장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빗장에 빠져 있었다. 그 빗장에는 하룻밤 사 이에 슬었다고는 할수 없이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빗장을 제자리에 놓으려고 했지만 너무나 녹이 슬어서 빗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몇 년쯤 녹이 슨 것 같았다. 문에는 요새 만들어진 예일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톰은 작은 손잡이를 틀다 말고 주춤거렸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는지 배가 살살 아파 오는 것이다. 침대로 돌아가 누울 수 밖에 없었다. 멀미가 나고 온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톰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바보야! 정원이 바로 저기 있는데!" 톰이 거칠게 문을 열어 젖히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톰은 잠 시 눈살을 찌푸렸다. 집 뒤에는 포장된 좁은 뒤뜰이 있었고, 한쪽 끝에 옆길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뒤뜰에는 쓰레기통이 다섯 개나 있었다. 밖에서 날아 들어온 신문지 조각이 햇 빛 속의 금속을 비추고 있는 태양의 정취와 판자 울타리에 칠해진 방부제용 크 레오소트 냄새가 자욱이 감돌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차 밑에 있던 남자가 기어 나왔다. 불그스레한 짧은 턱수 염말고는 아무 특징도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안녕! 너는 누구니?" 톰은 입을 꼭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오호라, 키슨 씨네에 온 아이로구나. 너 여기서 지내기 되게 지루하지?" "네,"하고 톰은 말했다. "아저씬 1층에 살고 계세요?" "그래."하고 턱수염 아저씨가 대답했다. 아저씨는 호기심에 차서 톰을 쳐다보 았다. 톰의 목소리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네 집에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응?누가 있냐고?" "그러니까, 아저씨네도 이모네도 정원이 없어요?" 톰은 현관 계단에 서서 아저씨가 대답을 미처 하기도 전에 벌써 울음을 터뜨 렸다. 아저씨는 무척 당황했다. "애야, 도대체 무슨 소리냐?" "몰라요!" 톰은 눈물을 가득 머금고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얘, 잠깐만 기다려라!" 아저씨의 말에는 어딘가 물리칠수 없는 투가 배어 있었다. "여길 보려무나." 톰은 잠깐 눈물을 멈추었다. "나도 정원이 없단다."하고 아저씨는 부들럽게 말했다. 집 안에는 톡탁거리는 시계 소리와 누군가 발을 끌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가 났다. "바돌로메 할머니야."하고 턱수염 아저씨가 속삭였다. "할머니가 아끼시는 시 계에 밥을 주러 오신 거야. 할머니랑 마주치지 마라. 여긴 애들이 없어서, 어쩜 애들을 싫어하실지도 몰라." 톰은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두손을 얼굴에 댄채, 손가 락 사이로 소리나는 쪽을 엿보았다. 발을 끌며 걷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돌로메 할머니가 나타났다. 나이 가 들어서 등이 꼬부라진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집에 온통 까만색 옷을 입고 있 었다. 할머니는 시계에 가까이 가더니, 지갑에서 열쇠를 꺼내 추가 든 상자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안으로 손을 넣어, 장나감 자동차 핸들처럼 생긴 반짝거리는 조그만 물건을 꺼냈다. 다시 위쪽으로 손잡이를 누르니까, 시계 바늘이 있는 유 리문이 '딸각'하고 열렸다. 할머니는 시계판 오른쪽에 있는 구멍에 그 조그만 물건을 끼우더니 자꾸자꾸 돌렸다. 그때마다 부드럽게 태엽이 감기는 소리가 났다. 왼쪽의 태엽도 다 감았 다. 할머니는 시계판의 문을 닫고 시계추 상자 안에 '태엽열쇠'를 도로 넣어 두고, 열쇠르 챙겨 발을 끌며 돌아갔다.발짝 소리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점차 꼬리를 감추었다. 시계에 밥을 주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톰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톰은 다시 한 번 정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조금전에 보았을 때는 없었지만, 어젯 밤에는 분명히 있었다. 종원과 히아신스와 모든 것들이 있었다. 톰은 다시 바깥 을 살펴보았다. 지난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뭐라도 연관되는 게 없을까? 한쪽 구석에 오래된 상록수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톰은 한가닥 희망을 갖고 나무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뭘 보고 있니?"하고 아저씨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돌로메 할머니 얘기, 고마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톰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복도로 갔다. 그 나무가 분명히 무슨 연관이 있 을 거야. 그런데 다른 집 정원에 있으니 어떡하지? 막 이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 라가는 순간 뒤에서 시계 소리가 났다. 그래, 저 시계도 연관이 있을 거야. 톰은 그쪽으로 가서 시계르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계는 평범했다. 시계판에는 열두 개의 숫자밖에 없었는데, 야릇한 장식이 톰의 흥미를 끌었다. 모든 것을 쓸 어 버릴 듯한 거대한 날개를 달고서 꼭 사람같이 생긴 생물이 서 있었다. 몸에 는 뭔가 하얀 것이 둘둘 말려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둥근 두 발을 가진 그 생물은 시계판 양옆으로 다리를 벌리고 한쪽 발은 풀밭을 딛고 있고, 또 한쪽 발은 바다 위를 딛고 서 있었다. 톰은 발 주위에 새겨진 물고기들과 해조들을 보았다. 그 생물은 한쪽 손에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만일 날개 달린 어깨 뒤에서 넘겨보다면, 책에는 도대체 무슨 얘기가 씌어 있 을까? 시계의 장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리송했다. 톰의 마음은 다시 딴데로 쏠렸다. 문득 담장 너머로 보이던 상록수가 생각났다. "그 담장은 넘어가기가 쉬워 보였어." 하고 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날 내내 톰은 계획을 세웠다. 피터한테 편지도 썼다. 말하자면 중요한 보고 서의 시작이었다. 지난밤에 자가가 무엇을 보았고, 오늘 밤에는 어떻게 하리라는 점을 자세히 적어 보냈다. 기회가 닿으면 옆집 정원으로 넘어 들어가 상록수를 조사해 볼 샘이었다. 확실히 그 나무는 지난밤에 정원에서 본 나무가 틀림없었 다. 자세히 훑어보고 나무 위에도 올라가 봐서, 어떤 단서라도 찾아야겠다고 단 단히 마음을 먹었다. 편지를 다쓰고 나서 톰은 편지 윗부분에다 '읽은 후에 태워 버려라'는 뜻으로 '읽.후.태'라고 약자를 썼다.요즘 톰이 피터한테 보내는 편지에는 모두 이표시가 있었다. 엘리 탑이 있는 그림 엽서에만 이 지시가 없어서 피터는 그 엽서만 남 기고 죄다 태워 버린 터였다. 그날 밤, 톰은 다른 때처럼 잠자리에 들어 조심스레 기다렸다. 이모와 이모부 는 오늘따라 굉장 히 늦게 자는 것 같았다. 톰은 기다리다 지쳐서 두 번이나 졸다가, 깜짝 놀라 깨 어나 방문 옆으로 가서 밖을 살펴보았다. 다른 방문 밑으로 아직 불빛이 꺼진 것을 화인했다. 돌다라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고, 톰은 더 기다리다가 살그머니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다. 뒷문 쪽으로 걸어갈 때 시계가 열두 시를 치기 시작했 다. ' 뒤 뜰을 지나가려면 달빛이 밝아야 할텐데. 쓰레기기통을 넘어뜨리기라도 하 면 끝장이야.' 하고 톰은 생각했다. 이윽고 문까지 다 와서 예일 자물쇠의 손잡이를 찾으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 지 자물쇠가 없었다.시계는 그 때 막 열세 시를 치려는 중이었다. 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열세 시라는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래? 톰 은 조심스레 비장을 벗겼다. 지금은 빗장으로만 잠겨 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톰은 떨리는 손으로 빗장을 벗겼다. 기름도 반질반질하게 쳐져 있고 녹도 슬지 않은 빗장을. 시계는 쉬지 않고 종을 쳤다. 위층에서 시계 소리에 잠이 깬 이모부가 투덜거 렸다. "어휴! 지금은 자정인데, 도대체 몇 번이나 종을 치는 거야?" 이모는 자는지 아무 대꾸도 없었다. "있지도 않은 시간을 자꾸 치잖아! 바돌로메 부인이 깨서 이 소리를 좀 들어 야 할텐데!" 하지만 이모부가 바돌로메 부인이 잠든 모습을 보았으면 얼마나 실망했을까. 할머니는 너무나 평화롭게 침태에 누워 있었다. 침대 곁의 유리잔에 담가 둔 틀 니가 고요한 달빛 속에서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합죽 다문 입가 에는 편안하고 달콤한 꿈을 꾸는 것 같은 웃음이 깃들여 있었다. 할머니는 흘러 간 어린 시절의 꿈을 꾸고 있었다. 시계가 멈추기를 잊어버린 듯 자꾸만 뎅뎅거리는 동안, 톰은 기쁨에 차서 빗 장을 빼고 문을 열였다. 그리고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어 주리라 생각했던 그 정 원으로 걸어 나갔다. 5.이슬 속의 발자국 온 세상이 잠들었을 때 밤과 낮 사이에는 어떤 시간이 있었다. 거기에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만이 볼수 있거나, 아니면 밤새 여행한 나그네만이 기차의 차양을 걷어 올리고 볼수 있는 고요한 풍경이 있다. 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나무와 숲 과 풀들이 꼼짝 않고 숨죽인 채, 마치 나그네가 지난밤에 제 몸을 코트나 담요 로 감쌌던 것처럼 잠으로 포근히 싸여 있는 풍경들이다. 이 잿빛 아침이 오기 전의 고요한 시간이 바로 톰이 정원을 걸어 나갔을 때의 시간이었다. 톰이 계단을 내려와 거실을 따라 정원으로 나가는 뒷문에 왔을 때 는 열 두시였다. 하지만 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섰을때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난 때였다. 밤새도록 달빛에 어리고 어둠에 싸인 채 정원은 깨어 있었다. 그렇게 밤새 깨어 있다가 이제서야 꾸벅거리며 조는 것이었다. 정원은 이슬에 젖어서 모두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해가 뜨기 전에는 초롱한 풀빛이 살아날 성싶지 않았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나무들은 웅크리고 줄기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울었다. 그러자 뜰 구석에 있는 커다란 전나무에서 한떼의 새들이 놀라서 날아가고, 커다란 새가 잠시 아래로 내려오려다 공기를 가르며 쓸 듯이 바람위로 날아 올 라 다른 나무로 날아갔다. 큰새는 바로 부엉이었다. 밤새 깨어 있어서인지, 주름 살이 눈부셔하는 것 같았다. 톰은 발끝으로 정원을 걸어 다녔다. 처음엔 정원의 끝이 어디인지 가보려고 제일 멀리 있는 네모난 자갈길을 걸어갔다. 그러다가 참을성 없이 가로지르는 길로 접어 들었다. 길 한쪽은 상록수로 단장하고 딴쪽은 개암나무 그루터기로 덮여 동그란 오솔길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어둑어둑한 길 저 앞쪽으로 녹회색의 삼각형 빛이 들어와 끝을 알려 주었다. 발밑에는 지난해의 썩은 낙엽들로 푹신 푹신했다. 톰이 길을 따라 유령같이 미끄러지듯 걸어가고 있으려니까, 오른쪽 상 록수들 사이로 뭔가 흘깃 흘깃 보였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집의 뒤편이었다. 톰은 정원 건너편에 있는 상록수숲 뒤쪽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오솔길을 따라가자 아스파라거스가 쭉쭉 자라난 채마밭이 나왔다. 마치 연못 이 무덤처럼 생긴 긴 언덕 너머로 타원형의 어두운 연못이 길게 누워 있었다. 연못 끝쪽을 바라보다니까, 입구까지 돌계단이 총총히 난 정자가 있었다. 그 정 자도 정원에 사는 모든 친구들처럼 잠들어 있었다. 연못과 정원 너머로 꼬부라 진 다른 길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그곳엔 한쪽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톰이 살펴본 바로는 정원의 네 방향 중 세곳이 담이었다. 하나는 집 뒷벽이고, 또 하나는 벽돌로 된 높다란 남쪽 담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지막한 담이었다. 다 른 담보다 울타리 똑이 지나가기 쉬울 것 같아서 톰은 얼른 그쪽으로 발길을 돌 렸다. 눈을 크게 뜨고 울타리 사이에 지나갈 만한 틈이 있는지 살폈다. 조그만 구멍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갈 셈이었다. 이윽고 작은 틈을 하나 찾아냈는데 놀랍게도 그 틈은 울타리 너머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ㄸ린 작은 길이 었다. 말하자면, 울타리 속에 높이 1미터에 넓이 30센티 남짓 되는 굴 같은 길이 나 있었던 것이다. 톰은 그 길을 따라 기어갔다. 길은 출구 같아 보이는 다른 틈까지 꽤나 멀리 나 있었다. 거기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소들이 막 아침을 맞으려는 풍경이 한가롭게 펼쳐져 있었다. 아직 자 고 있는 놈들도 있었고 뒷다리부터 일어나려느 놈도 있었으며 벌써부터 먹는 것 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놈도 있었다. 열심히 풀을 뜯던 한 녀석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안 눈길로 톰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한입 가득 풀을 베물고는 막 일기 시작한 아침 바람에 침을 실실 흩날리고 있었다. 목장 건너편 풀숲 사이로 긴 잿빛 거위의 머리가 삐죽이 보였다. 거위는 고개 를 옆으로 돌리고 한쪽 눈으로 울타리 구멍 주위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지만 톰은 전혀 몰랐다. 잠시후, 목이 새하얀 암컷들이 그 주위에 쭉 뻬고 가슴을 쳐 들며 푸드득 날개를 쳤다. 그러자 아침이 온 것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녀석들은 너도나도 따라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이 된 톰은 왔던 길을 기어서 정원으 로 되돌아왔다.톰은 이제 동그란 지붕길이랑, 굴 같은 작은 길, 숲이랑 정원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정원 구석에는 다른 나무들보다 키가 훌쩍한 전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었다. 나무는 꼭 포대기 사이로 아기팔이 쏙 빠져 나온 것처럼, 담쟁이에 친친 휘감긴 몸통 사이사이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돌로 만들 어진 해와 햇살 아래에 역시 돌로 만들어진 뭉실뭉실한 구름이 있었다. 구름이 꼭 면도 거품이 뽀글뽀글한 아버지의 턱 같다고 톰은 생각했다. 해시계 한쪽 옆 에 인동덩굴이 동그랗게 지붕을 이룬 문이 나 있었다. 톰은 문을 열어 보고 싶 었지만 해시계 때문에 마음이 바빴다. 아직 해가 비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가 는 걸 자꾸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온실에서는 그냥 창문 너머로 식물들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금붕어가 움직일 때마다 어렴풋한 빛들이 흔들리는 수조도 보였다. 톰은 온실옆에 있는 오이밭도 둘러 보고, 아름다운 꼬리를 가진 공작이 벽돌 바닥을 걸어 다니는 커다란 새장 도 바쁘게 지나왔다. 톰은 아스파라거스 밭 맞은편에 있는 채마밭을 가로질렀다. 과일나무와 딸기 밭, 콩밭이 있는 그곳엔 새들이 산딸기와 구스베리, 포도를 따먹지 못하도록 철 망이 쳐진 곳도 있었다. 구스베리 옆에는 장군풀이 재배되고 있었는데, 포기마 다. 낡은 통이나 배수관을 덮어씌어 위에다 천을 덮어놓았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낡은 통 틈새에 뭔가 하얀게 끼여 있었다. 꼬깃꼬깃 접어 놓은 한 장의 종이였 는데 어린아이 글씨로 '요정의 왕인 오베론에게'라고 씌여 있었다. 톰은 요정 이 야기 같은 것으로 헥갈리고 싶지 않았기 깨문에 장군풀밭에서 얼른 나와 버렸 다. 이윽고 톰은 잔디밭으로 다시 왔다. 초생달처럼 생긴 꽃밭에 피어 있는 히아 신스 위로 부지런한 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히아신스를 보니까 그웬 이모의 얼굴이 떠 올랐지만 이젠 화가 나지 않았다. 가엾게도 이모는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모를 원망할 수도 없다. 잔디밭 가장자리에서 톰은 느닷없이 멈춰 섰다. 이슬이 흠뻑 젖은 녹회색 잔 디에 조금 더 짙은 색 흔적이 나 있었다. '어? 발자국이잖아.' 발자국은 잔디밭으로 걸어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이 또렷했다. 얼마나 되었을 까? 분명히 톰이 정원에 들어오고 나서 왔다 간게 분명했다.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는 분명히 발자국이 없었어.' 언제. 누가 거기에 서 있었을까? 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상록수를 사이에 두고 톰과 반대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톰은 어쩐지 걱정스러워졌다. 아까 상록수 뒤를 지나가면서 그 사이로 집을 보았을 때 누군가 잔디밭에 서서 내가 지나치는 걸 보지 않았을까? 톰은 집의 창문마다 다 쳐다보았다. 혹시 누군가가 이층 창문에서 몸을 내밀 지 않았을까? 아니,그건 톰의 느낌일 뿐이었다. 톰은 신경이 곤구섰다. 정원 뒤쩍에서 무슨 소리가 났을 때에는 그야말로 팔 짝 뛸 판이었다.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톰은 잽싸게 숨어서 소리가 나 는 쪽을 보았다. 외바퀴 수레를 밀며 누군가 해시계 쪽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원사가 하루종일 일과를 시작하려나 보다. 정원사가 부는 휘파람 소리에 톰 은 문득 정원이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소리, 아침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소리, 나무와 숲과 풀잎이며 꽃들,곤충들이 살아 숨쉬는 소리들... 햇빛이 정원을 깨우듯 따스하게 비추며 이슬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 침내 해시계의 바늘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시간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톰은 별안간 자기의 시간이 아닌 낯선 낮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는 것이 두려웠다. 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톰은 허둥지둥 잔디밭 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과연 톰의 방과 침대가 그대로 있을까? 아침해가 비추어 준다면 지난밤처럼 거실로 꾸며져 있는 모습을 볼수 있겠지. 그것들은 진짜로 있었어... 걱정이 되어서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톰은 현관에 멈춰 서서 잔디밭 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다시 돌아보았다.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가장자리가 희미 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뚜렷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톰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똑딱거리는 괘종 시계 소리를 따라 방향을 잡았다. 벽의 장식장을 찾으면 길을 알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장식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습도계가 걸려 있던 자리는 빈 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가 텅 비고 시계만이 남아 있 었다. 그러나 시계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지난밤에도 가구랑 양탄자랑 그림하고 같이 있었고, 지금 이 낮시간의 텅 빈 거실에도 변함이 있는 것이다. 거실이 보통때 있던 것처럼 있다면, 다른 것들도 다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젠 무사히 자기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자,그러니 이층에서는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두려움이 조금 사라지면서 톰은 슬며시 양심의 가책이 일었다. 똑딱거리 는 시계 소리가 톰의 기억을 일깨워 주었다. 시계판에는 13이라는 표시가 없었 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침대에서 나와 돌아다닐 핑계도 없었다. 톰은 정원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해뜨기 전에 갔다가 해가 떴을 때 돌아온 것만은 확실했다. 살금살금 이층으로 올라가 부엌에 가서 시계를 찾았다. 작고 못생겼지만 시간 은 정확한 시계였다 성냥을 찾아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켰다. 불을 켜면 이모와 이모부를 깨울 것 같아서였다. 성냥불을 비추었더니 시간은 열두 시에서 겨우 몇 분밖에 안 지나 있었다. 세상에 아직도 열두 시 몇 분밖에 안됐다니! 성냥이 다 타버릴 때까지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톰은 적어도 이모부와의 약속을 깨지 않았다는 건 알수 있었다.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서 침대로 왔다. 이모부가 아직 잠이 들락말락한 상태 였으니 톰이 소리를 내지 않은건 천만 다행이었다. 앨런 키슨씨는 몇분전에 시 작한 일방적인 대화를 막 끝내고 있었다. "저놈의 시계, 한 시에도 계속 저 따위로 친다면, 바돌로메 부인한테 올라가서 따져야겠어. 설마 나한테 뭐라 그러진 못하겠지?" 6.문을 지나가다 밤마다 톰은 정원으로 갔다. 처음엔 정원이 없을까 봐 늘 마음을 졸이며 갔다. 어떤 때는 문을 열려다 말고, 정원이 없으면 어떡할까 하는 생각에 그냥 돌아온 적도 있었다. 문을 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다시 용기를 내서 문을 열었더니 정원이 그대로 있었다. 정원은 톰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톰은 갈때마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계절의 정원을 보았다. 그중에서 톰은 화창 한 여름 정원을 제일 좋아했다. 이른 여름에는 초생달처럼 생긴 꽃밭에서 히아 신스가 피었고, 둥근 꽃밭에는 조그만 계란꽃이 피었다. 히아신스와 계란꽃이 지 고 나면, 그 자리엔 다른 꽃들이 차례로 피었다. 온실 옆에 있는 숲의 한쪽 구석 빈터에는 제라늄화분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해시계 길을 따라 빨간 양귀비와 장미가 피고, 여름날 해질 무렵이면 저녁 앵초 꽃이 달빛처럼 노랗게 빛났다. 늦 여름에는 봉지에 싸인 배들이 달콤하게 익어가곤 했다. 톰은 정원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꽃을 보는 것보다도 나무를 타는 것이 더 신 났다. 아마 피터가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톰은 항상 이 정원에서 처음 보았던 그 상록수를 기억했다. 이제까지 상록수를 타고 올라가 본 적은 없었지 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첫 가지는 오르기 편하게 나지막이 자라나 있었지만, 줄기는 두 갈래로 거칠 게 뻗어 있었다. 톰은 갈라진 틈에다 왼발을 얹고 손을 뻗어 머리위의 가지를 부여잡았다. 한참동안 밀고 튕기고 잡아당기다 보니 다리와 발이 대롱거리다가 곧 가슴이랑 허리까지 속속 가지에 올라왔다. 앞으로 몸을 더 끌어당기면서 잽 싸게 몸을 뒤틀어 가지위에 올라 앉았다. 거기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건 식은 죽 먹기고 제일 신나는 부분이었다. 가 지랑 줄기로 오가며 톰은 자꾸자꾸 올라갔다. 줄기와 나무 껍질의 마른 감촉이 상쾌했다. 나무 껍질이 벗겨진 곳에는 껍질 밑으로 짙은 분홍색 살이 드러나 마 치 사람 살과 살갗처럼 보였다. 컴컴한 나뭇잎 속을 자꾸 올라가자, 머리위로 푸 른색과 금빛으로 어우러진 끝이 보였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주위에는 넓은 녹색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톰은 남 쪽 벽만큼 높이 올라와 있었다. 잔디밭 건너편에 서 있는 이층집 창문도 같은 높이였다. 집안에서 얼핏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그 가정부였다. 침실을 청소 하다가 창문으로 와서 문을 열고 먼지털이를 털던 가정부는 무심코 나무 쪽을 쳐다보았다. 톰은 아는 척을 하려고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마 치 장님에게 손을 흔드는 것과 같았다. 가정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을ㄹ 열어 놓아서 지금은 방 안이 더 훤 히 들여다보였다. 방 안에는 가정부말고 또 한사람이 있었는데 벽에 기대 서서 창문 쪽을 보고 있었다. 일하다가 가끔씩 서로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사람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않았다. 오직 희미한 얼굴 윤곽만이 톰 쪽을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못박인 듯한 시선에 톰은 당황했다. 점점 나무 아래로 기어 내려오다가,이내 나뭇잎 사이로 쑥 숨어 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톰은 정원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가정부는 자기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는 안심하고 사람들 의 뒤를 따라다녔다. 정원에는 톰이 생각한 것보다 사람들이 더 자주 오는 것 같았다. 때때로 톰은 지금까지 정원에 있던 사람들이 정원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하곤 했 다. 또 한편으론 왜 누군가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지 알수 없었 다. 어쨋든 다른 사람들이 톰을 보진 못해도 톰이 그들을 볼소 있다는 사실만으 로도 다행이었다. 가정부, 정원사, 톰이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 긴 보라색 치 마를 입은 험상궂게 생긴 여인까지, 다들 톰을 보지 못했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정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한테 톰이 보이지 않 았지만, 그렇다고 동물들한테까지 아주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정말 톰을 보 았는지 어쨋는지 모르지만, 새들은 고개를 쳐들고 톰을 바라보고 있다가 톰이 다가가면 표로롱 날아가 버렸다. 의심스러운 점은 또 있었다. 과연 톰은 정원에 있을 때 몸무게가 나가는 걸 까? 아니, 톰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나무에 올라가도 가지가 흔들리 지 않았고, 작은 가지 하나조차 부러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더 나중에야 안 일 이지만, 톰이 정원 문을 지나가려고 아무리 잡아당기거나 밀어 보아도 문은 꿈 쩍도 하지 않았다. 온실의 문도, 기관실의 문도, 해시계 옆에 있는 문도 열수 없 었다. 순간 톰은 맥이 탁 풀였다. 톰이 나가는 방법을 생각해 내기 전까지 닫힌 문들은 톰의 호기심을 꽁꽁 가 로막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톰은 너무나 간단하게 빠져 나갈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정원사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정원사는 늘 남 쪽 문을 통해 규칙적으로 온실과 난방실을 드나들었다. 톰은 남쪽 문께에 숨어서 정원사가 지나가는 것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연장 을 들고 자주 지나다니니까,그 문이 제일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어디선 가에 연장을 두는 헛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사는 항상 들어가기가 무섭게 문을 닫아 버려서 미처 따라 들어갈 틈이 없었다. 하지만 수레를 밀고 지나갈 때는 빨리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톰은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원사는 수레를 밀 때조차 긴팔을 수레 앞으로 쭉 뻗어 문을 열고는 재빨리 수레를 밀며 빠져 나가 버렸다. 그러면 문은 언제 나 톰의 코앞에서 닫히고 말았다. 톰은 또다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 문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다시한번 별 기대없이 빗장을 눌러 보았다.문은 여느 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톰의 손가 락은 마치 그림처럼 보였다. 톰은 너무나 화가 나서 인상을 쓰며 온 힘을 다해 빗장을 눌렀다. 순간,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빗장이 허깨 비인 양 톰의 손이 빗장 사이로 스르륵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빗장의 쇠 로 된 부분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톰은 이 역사적인 순간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부러지거나 삐지는 않았 을까 싶어서 왼손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다친 데는 하나도 없었다. 빗장도 다른 빗장과 똑같은 보통 빗장이었다. 그렇다면 빗장보다 문이 덜 단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톰은 조심스럽게 옆으로 기대 서서 문을 밀었다.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온 힘을 다해 밀었더니, 점차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처음엔 자기의 옆부분이 무감각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어... 내가 지나가고 있더." 톰은 너무나 놀랍고 신기한 나머지 숨이 막혔다. 벽돌담 바깥 쪽에서는 정원사가 수레에 가득 찬 잡초를 내려놓고 수레 손잡이 에 걸터앉아 새참을 먹고 있었다. 만일 정원사가 톰을 볼수 있었다면, 참 신기한 구경을 했을 것이다. 어깨부터 발까지 단단한 문을 지나오는 얇은 종잇장 같은 소년을 보았을 테니까. 처음엔 어깨부터 빠져 나왔지만 결국 다리부터 먼저 지 나왔다. 그리고 팔이 들어오고 계속해서 다른 한쪽 팔도 빠져 나왔다. 몸 전체가 다 빠져 나오고 머리만이 문 저쪽에 남았다. 톰은 갑자기 용기가 없어졌다. 뭐라 말할수 없는 느낌이었는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 특별한 고통도 없이 몸이 거의 다 빠져 나온 게 어쩐지 이상하기만 했다. "휴우, 잠깐만 쉬자." 지나오지 않은 톰의 머리가 문 저쪽에서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두려워서 시 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아까 배가 문을 지나갈 때 제일 불쾌했었는데, 머리는 어떨까? 눈과 귀는? 더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증기 기관차가 증기 압력을 잃어버리듯, 여 기서 괜히 우물거리다가 힘이 빠져 버리면 어떡하지? 그때는 오고가도 못하고 목은 영원히 이문에 걸려 있겠지. 저쪽에서 나를 볼수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 꼼 짝 못하고 걸려 있는 꼴을 보고 비웃거나 괴롭히지 않을까? 톰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밀어 냈다. 어지럽고 얼떨떨했지만 몸이 쑥! 빠져 나왔다. 눈앞이 맑아졌을 때, 비로소 화분 창고와 정원사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한 번도 정원사와 정면으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정원사는 덩치가 크 고, 햇빛에 벌겋게 익은 얼굴과 하늘색 눈을 가진 젊은이였다. 정원사는 톰을 뚫 고 멀리 쳐다보며 두꺼운 베이컨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먹고 있었다. 샌드 위치를 다 먹고 나서는 눈을 꼭 감고 중얼거렸다. "하나님, 범사에 감사합니다. 저를 악마의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소서." 사투리가 심해서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원사는 눈을 뜨더니 빵을 또 꺼냈다. 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저 아저씨는 샌드위치 하나를 먹을 때마다 꼬박꼬박 감사 기도를 드리는 걸까? 나 원 참,언 제까지 저럴지... 정원사가 계속 먹기만 하자 톰은 주위를 둘러보려고 돌아서서 과수원 안으로 들어갔다. 닭도 있고 땔감도 쌓여 있었다. 과수원 너머에 목장과 나무들이 있고 그 사이로 마을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톰은 정원사한테서 눈을 떼서 않았다. 새참을 다 먹고서 정원으로 일하러 가려는지 정원사는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톰은 옳거 니! 하고 정원사 옆으로 냉큼 뛰어왔다. 다시 아까처럼 문을 지나가고 싶지는 않 았다. 이제 ㅅ게 지나갈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톰은 빈 수레에 폴짝 뛰어올라 수레를 타고 편안히 정원으로 돌아왔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쨌든 톰은 이제 과수원 쪽은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했 다. 이제부터 다른 문들로 가보자. 톰은 낮은 담인 울타리 사이로 기어 가서 목 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놀갑게도 그곳엔 강물이 가로막혀 있었고, 유유히 흐르 는 맑은 개울에 갈대와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정원이나 주변의 풍경은 그 자체로는 자연적 실서의 밖에 있지 않았고, 톰은 자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맑은 날만 계속되 는지, 계절과 시간은 왜 자꾸만 드는지, 톰은 혼란스러워졌다. 어느 날 밤에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그날도 톰은 잠자리에 들 었다가 아래층으로 내려와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정원은 밤이었다. 높이 뜬 달 위로 구름이 물결처럼 흘러 가고 있었다. 정원엔 낮보다 더한 더위와 정적이 살 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톰은 잠옷 ㅇ단추를 풀어 젖히고 옷을 펄럭이며 걸었다. 아마도 폭풍이 오고 있나 보다. 톰은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달은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서 섬광이 하늘을 쪼개듯이 번쩍이더니, 뒤 따라 천둥 이 우드릉 쾅쾅! 쳤다. 톰은 냉큼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도착하자, 세찬 비바람이 치기 시작하며 잡자기 소름이 돋도록 추워졌다. 꼭 악마의 바람이 정원으로 들이닥친 것만 같 았다. 잦아진 번개 사이로 나뭇잎들이 바람에 거칠게 찢기고 떨어져 굴러다니는 가 하면, 정원 구석의 키다리 전나무가지들이 폭풍 속에서 사납게 흔들렸다. "어휴, 저러다가 나무가 날아가 버리겠어." 하고 톰은 혼자서 애를 태웠다. "아 냐, 큰 나무는 ㅅ게 날아가지 않아." 마치 이 말에 대꾸나 히듯이 거대한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울리고 세찬 비바 람이 불어왔다. 언뜻 번개가 정원의 나무를 치는 것 같았다. 눈이 부셔서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다. 톰이 눈을 감았다 떴을 때에는 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 다. 나무가 쓰러지는 동안 바람은 무섭도록 잠잠했다. 그 정적 속에서 누군가 겁 에 질린 목소리로 "오!"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이층의 어느 창문에서 난 소리였다. 그때는 몰랐지만,전나무는 채마밭의 아스파라거스 밭까지 길게 쓰러졌다.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나무가 맥없이 쓰러지고 나서 비바람이 다시 몰아치기 시작 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톰은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정신없이 집으로 뛰 어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안에는 여전히 괘종 시계가 평화롭게 똑딱거리고 있 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톰은 방금 본 게 상상이 아니었을까 싶어 문을 열고 내 다보았다. 여름밤의 폭풍은 아직도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번쩍! 하고 멀리 서 치는 번게 한줄기가 전나무가 서 있던 자리를 흉하게 비추어 주었다. 나무가 벼락에 쓰러지는 것도 무서웠지만, 이층의 비명소리는 톰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했다. 다음날 밤, 문을 열고 정원을 둘러보았을 때, 톰은 더더욱 놀랐 다. 처음엔 몰랐지만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간밤에 쓰러진 나무 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숨쉬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원의 나무들 사이 에는 빈틈이 없었고 덩굴이 우거진 전나무는 여전히 하늘 높이 솟아 있었던 것 이다. 6. 피터에게 편지를 쓰다 톰은 피터에게 보내는 편지 한구석에 그림을 끄적거렸다. 괘종 시계의 시계판 그림이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톰은 이모부의 말을 생각했다. "어떤 시계를요?" "뭐라고, 톰? "시계를 거꾸로 놓으면 나무가 쓰러졌다가 다음날 다시 서 있을 수 있다면서 요. 그게 어떤 시계를 말하는 건데요?" "뭐 특별한 시계를 말하는 건 아니야." 톰은 계속 괘종 시계를 그렸다. "그냥 해 본 소리야, 톰. 시계를 돌려 놓는다는 과거의 시간을 다시 오게 한다 는 얘기거든. 하지만 그럴수는 없어. 시간은 그런게 아니거든." 이모부가 다시 책을 읽었다. 톰은 편지지 다른 곳에다 또 다른 낙서를 했다. 얼마 있다가 톰은 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사가 다리를 벌리고 딨니?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톰은 자기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디서 이걸 생각해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간 '아하, 참, 그렇지. 괘종 시계에 있던 그 림이야.' 하고 생각했다. "이모부, 시간은 어떤 거예요?" 하고 톰이 물었다. 이모부는 마침내 보던 책을 접어서 내려놓았다. 이모도 뜨개질을 하던 손을 신경질적으로 멈추었다. "톰." 하고 이모가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얘기했다. "이모부한테 쓸테없는 질문하지 마. 하루 종일 일하느라 얼마나 힘드셨겠니? 이젠 쉬어야 해." "아니오. 여보. 애들이 질문할 땐 대답해 줘야 해요. 한데 말이다, 도대체 네 질문에는 일관성이 전혀 없구나. 또 어떤 때는 너무 건성으로 묻고 말이야. 처 음 질문만 해도 그렇지, 문을 지나다닐 수 있냐고? 아니, 그게 질문이냐!" "그래!" 처음부터 대화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이모는 "그런 바보 같은 말 이 어딨니?" 이모부가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이모는 뭘 뜻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문을 지나 다니는 건 매일 하는 일이잖아." "하지만 문이 닫혔을 때는 ......"하고 말하다 말고, 톰은 다시 투명 인간에 대해 서 물었다.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지." 하고 이모가 말했다. 톰은 절대 아니라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마지막 질문도 그게 뭐냐." 하고 이모부가 아까 하던 말을 이었다. "어느날 쓰러졌던 나무가 다음날에는 자연의 법칙을 깡그리 무시한다는 둥 ...... 그게 도대체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건 꿈이었을 거야!" 하고 이모가 얘기를 가로챘다. "개꿈이었어. 그렇지 않니, 톰?" "체, 아니야! 정말 그랬단 말이야!" 톰은 힘을 주어 소리쳤다. "정말이라면!" 하고 이모부가 천천히 말했다. "그런 나무가 정말 있다면, 말해 봐, 톰! 그런 꿈같은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 말해 보라구, 응?" 톰은 아무말도 못했다. 종이에다 펜으로 구멍만 뽕뽕 파고 있었다. "얘기해봐, 톰." "동화 속의 나무였지!" 하고 이모는 자기 얘기가 맞지 않냐는 듯이 거들었다. "도깨비 나무꾼이 나무를 쓰러뜨렸지. 그렇지, 톰?" 이모부가 웃으며 다시 책을 집었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 "폭풍우에 쓰러졌는데." 하고 톰은 주눅이 들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번개 에 맞았단 말이야." 톰은 이모부도 나무처럼 번개에 맞았으면 하고 바라는 듯한 눈초리로 이모부 를 쳐다보았다. 이모가 잽싸게 눈길을 가로채서 이모부가 얘기하려는 걸 막고 나섰다. "여보, 톰이 피터한테 편지를 다 쓸때까지 그냥 내 버려두죠!" 그렇게 해서 톰은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라기보다는 차라리 낙서라 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문을 지나간 얘기나 투명 인간 얘기나 전나무 얘기는 모두 사실이야. 참 이상한 일이간 하지만, 내가 투명 인간이 된다는 것만 빼면 다 괜찮아. 정원에는 가끔 휴버트랑 제임스랑 에드가라는 세소년이 놀러 온다. 에드가라는 애는 내 또랜데, 난 제임스란 애가 더 좋아. 그리고 그 애들을 쫓아 다니는 여자애가 하나 있어. 아주 꼬맹인데, 해티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다르게 부르기도 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모부가 말했다. "홍역이 이제 겨우 나아가는 애한테 긴 편지가 좋지 않아. 홍역을 앓고 나선 눈이 피로해지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지." "편지가 너무 길면 엄마가 대신 피터한테 읽어 주겠죠, 뭐." 하고 이모가 대꾸 했다. 그 말에 가슴이 뜨끔해서 톰은 편지 위부분에 큰 글씨로 큼지막하게 '비밀'이 라고 썼다. 그리고 편지를 몇 번 이나 접어서 그 위에다 다시 '피터 앞'이라고 양쪽으로 써 넣었다. 그런데 너무 당황해서 그만 자기 이름을 쓰는 것도 까맣게 까먹었음을 깨닫고, 접었던 편지를 다시 펴서 자기 사인을 했다. 그리고 봉투에 다 넣고 주소를 쓴 다음, 다시'피터 앞'이라고 왼쪽 구석에 눌러 썼다. 이모부가 책 너머로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톰은 좀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 침으로 봉투를 붙이고 꼭꼭 눌렀다. 봉투를 붙인 자리에다 자기를 닮은 길쭉한 고양이 그림을 그려 넣고 쓰윽 쳐다보았다. 이 그림은 아무도 편지 를 몰래 뜯어보지 못하게 하려는 장치였다. 고양이 밑에다가는 또다시 '읽은 후 태워 버릴 것'이란 뜻으로 '읽.태'란 암호까지 썼다. 이모부가 지갑을 가져왔다. "자, 그 귀중한 편지에 우표를 붙이렴." 톰은 편지도 다 썼고 이제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톰은 잠자리에 들 시간까 지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이모랑 이모부가 잠들 때까지 안 자고 기다 릴 거니까, 굳이 일찍 자러 갈 필요도 없었다. 요즘 늘 하듯이, 톰은 가만히 앉아서 정원 생각만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위험한 짓을 한 것 같았다. 다행히 이모랑 이모부가 웃어 넘겼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신경을 썼거나 다정하게 나왔으면 비밀을 다 털어놓을 뻔했다. 다음엔 꼭 같이 가자고 했을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우... 생각만 해도 톰은 몸서리가 쳤다. "얘, 괜찮니?" 하고 이모가 물었다. "응? 아하, 응. 고마워, 이모." 톰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이모는 체온계를 가져와서 톰의 입에 물렸다. "열이 있나, 좀 전에 떨던데." 톰은 입을 다문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홍역기가 아니어야 할텐데, 어쩌나. 홍역에 걸리면 열흘 뒤에 집에 못 간단다. 몇 주 더 있어야 해." 이모가 체온계를 꺼내서 불빛으로 가져갔다. "열흘 밖에 안 남았어?" 하고 톰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래,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지? 네 맘 잘 알아, 톰." 이모는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도 톰이 더 머물러 줬으면 싶은 눈치였 다. 이모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맙소사, 겨우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니! 정원에 갈수 있는 날이 열흘 밖에 안 남았다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저... 열도 있는 것 같고, 아마 홍역을 앓으려나봐."하고 톰은 말했다. 홍역을 앓으면 몇주동안은 더 정원으로 갈수 있을 것이다. "눈금 찾기가 어렵네."하고 이모가 말했다. 잠시 체온계를 이리저리 돌리던 이 모는 마침내 눈금을 찾았나보다. "아니야, 톰. 열도 없고 홍역은 아닌 것 같아. 녀석, 좋지? 곧 집에 가게 되어서." "그렇지만..." "왜 그러니,톰?" 톰은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톰은 집에 가기가 싫어졌다. 여기서 지내면서 그 신비한 정원에 놀러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이 아득히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피터조차도 똑 편지로만 이야기 할수 있는 아이처럼 느껴졌 다. 차라리 휴버트나 제임스나 에드가 같은 소년드링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특 히 제임스가 더 그랬다. 아 참, 꼬마 여자애도 하나 있었지. 그 애 이름이 뭐더 라? 해티... 8. 사촌들 휴버트는 세 소년들 중에서 제일 큰 아이였다. 피터한테 아이라고 쓰긴 했지 만 휴버트는 차라리 청년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가끔씩 윗입술 위로 드문드 문 난 진한 수염을 뭐나 되는 듯이쓰다듬곤 했다. 키는 벌써 어른만큼 자랐지만 몸집은 아직 호리호리한 소년이었다. 제임스와 에드가도 톰보다 나이가 많았다. 제임스는 목소리가 참 부드러웠지 만 언제나 말을 우물거리는 통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아주 힘들었다. 가끔씩 얘기 도중에 꺽꺽 하는 소리를 내서 자기 스스로 무척 당황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럴때면 "어, 저!" 그러면서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얼굴이 새빨개지곤 했다. 막내인 에드가는 얼룩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놓치 지 않을 듯이 날쌔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가졌다. 그 눈동자도 머리 색깔과 똑같 았다.에드가는 말소리도 날카롭고 빨랐다. 톰하고 나이가 제일 비슷했지만 어쩐 지 그애가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하루는 톰이 정원에 있는데 세 소년이 그리로 걸어왔다. 뒤에는 레이스가 달 린 앞치마에다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린 꼬마 여자애가 쫄랑쫄랑 따라오고 있 었다. 한마디로 '졸졸 쫓아 다니는 아이'라고나 할까. 꼬마는 늘 소년들을 쫓아다 니며 한 사람씩 뱅글뱅글 돌곤 했다. 아마 소년들이 하는 얘기도 듣고, 얼굴도 볼 셈인 것 같았다. 소년들은 오늘 밤에 쥐사냥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방앗간 주인이 부탁한 일이라면서 어두워지면 버티랑 코들링이랑 바티하고 같이 갈 거 란다. 등불과 공기총도 가져간다고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총이 하나밖에 없단 다. 근처에 있는 나무 사이에서 톰이 열심히 듣고 있는 동안, 꼬마는 쉬지도 않고 소년들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야, 해티한테서 도망치자!" 휴버티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긴 다리로 풀쩍풀쩍 뛰어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임스도 깔깔 대며 도망가고 에드가도 같이 내뺐다. 해티는 이런 장난에 도가 텄는지 쏜살같이 뒤쫓아갔다. 에드가가 돌아서서 폴싹 웅크리 고 앉더니 해티 쪽으로 뭔가를 던졌다. 꼭 해티를 맞히려느 건 아니었는데, 던진 것이 그만 꼬마의 발에 걸리고 말았다. 꼬마는 잔디밭에 엎어져 얼굴을 묻고 엉 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그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꼬마를 일으켜 세웠다. 제임스는 해티를 흔 들며 부드럽게 핀잔을 주었다. "어휴, 이 바보야!" ' 체, 갑자기 발 앞에 던지는 걸 어떻게 피할수 있단 말이야.' 하고 톰은 속으 로 생각했다. "흐흑... 숙모님이 뭐라고 하실까?" 꼬마는 눈물을 닦으며 풀물이 묻은 앞치마를 가리켰다. 제임스가 손으로 털어 주었지만 조금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제임스는 갑자기 참을성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넘어진 거야? 그러니까 앞을 잘 보고 뛰어야지! 에잇, 나도 모르겠 다. 도망갈 거야!" 그리고는 나무 사이로 소년들을 따라 도망쳐 버렸다. 꼬마 여자애는 훌쩍 훌 쩍 울면서 정신없이 뒤따라갔다. 나무들 사이로 오솔길로 찾아 다니더니,이내 눈 물을 그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쫑긋이 세우는 것 같았다. 그 전에도 이 런 놀이를 자주 했는지,꼬마는 귀신같이 세 소년들을 찾아내는 모양이었다. 톰은 해티의 뒤를 ㅉ아가기로 했다. 연못가에서 해티는 정원사와 마주쳤다. "아벨 아저씨, 제임스 오빠랑 휴버트 오빠 못 봤어? 에드가 오빤 찾고 싶지도 않아. "여긴 안 왔는데요, 해티 아가씨. 또 술래잡기입니까?" "오빠들은 만날 그 놀이밖에 안 해줘." "다음엔 해티 아가씨가 도망갈테니, 오빠들한테 찾으라고 해보지요?" "그건 안돼. 오빠들처럼 빨리 뛸수가 없단 말이야." "숨을 시간을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꼬마의 얼굴이 확 달라졌다. "그럼 절대 날 못 찾을 거야. 난 오빠들보다 더 잘 숨을 수 있거든." 꼬마는 정원사 앞에서 한껏 뽐내면서 발끝으로 통통 뛰었다. "내가 얼마나 숨을 데를 많이 아는데. 게다가 아주 감쪽같이 숨을 수도 있다 구. 조용해서 아마 내가 정원에 있는 줄도 모를걸?" "지금 그렇게 할수 있어요?" 정원사가 소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부러운 듯이 물었다. "난 사람들을 다 볼수 있는데, 아무도 날 못 보걸랑요." 소녀가 보란 듯이 말했다. 이제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갑자기 소녀 뒤에서 "깍꿍!"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에드가가 계속 찾게 만들 셈을 싹 나타났다. 말로는 에드가를 찾고 싶지 않다고 했어도, 해티는 내심 반가웠나 보다. 동시 에 다른 소년들도 속속 나타났다. 모두들 다시 집 쪽을 향해 잔디밭을 가로질러 우르르 뛰어갔다. 톰은 혹시 저러다가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서 겁이 났다. 제임스가 셋 중에서 제일 뒤에서 뛰어가고 있었다. 톰은 날쌔게 제임 스를 따라잡았다. 제임스에게 나무에 오라가자고 하면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할 것 같았다. 물론 제임스는 그날 저녁에 쥐 사냥을 하러 갈 생각이었지만. "잠깐만!" 하고 톰이 소리를 지르며 제임스에게 뛰어갔다. "기다려! 제임스!" 톰은 처음으로 정원에서 소리를 질렀다. 새 몇 마리가 놀라서 푸드득 날아갔 지만, 이름을 불린 소년은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톰은 지름길 쪽으로 앞질 러 가서 다시 불렀지만 헛수고였다. 제임스에게 톰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임스는 현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가더니 집 안으 로 들어가 버렸다. 이럴수가! 벌써 세명 다 사라진 것이다. 톰은 여간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가정부나 험상궂은 여인이나 정원사, 혹은 꼬 마 여자애나 키다리 휴버트, 그리고 자기가 별로 좋하하지 않는 에드가한테 자 기가 보이지 않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제임스만은 톰을 볼수 있어서 같 이 놀수 있는 친구가 되었으면 싶었다. 톰은 할수 없이 마음을 달래고 천천히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물론 톰이 늘 가던 집이었다.정원에서 놀다가 자러 갈 때면 늘 들어가곤 하던 집. 하지만 이젠 문을 닫지 않았다. 문을 닫으면 자기가 지내는 집에 들어가 버린다는 사실 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톰은 지금 정원과 같이 있는 다른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정원 문을 열어 놓고, 장식장과 습도계와 동물이랑 새들을 박제해 놓 은 유리장을 지나 거실로 걸어갔다. 톰은 숨을 죽였다. 오늘은 한밤주의 집안을 둘러볼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거실을 따라 부리나케 걸었 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가도 거실의 가구들은 톰보다 한발 앞서서 사라지고 있 었다. 거실의 중간쯤 가기도 전에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지고 시계만이 남았다. 이제 거실 바닥에는 더 이상 카펫도 깔려 있지 않았다. 낮에 이모제 식구와 다 른 사람들이 쓰던 그대로였다. 그저 이층에는 침대로 가는 길일뿐,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진 것이다. "에이!"하고 톰은 투덜거렸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문을 통해서 보니 정원은 아까하고 그대로였다. 톰은 현관 계단을 내려오다가 어깨 너머로 집을 돌아보았다. 거실은 다시 요술처럼 채워지기 시작했다. 장식장이랑 습도계, 우산 꽂이랑 저녁 종이랑 막대기 등이 속속 다시 들어섰다. 물론 괘종 시계도 제자리 에 있었다. 톰은 약이 올랐지만 참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고작 이까짓 일로 정원에 가는 즐거움을 망칠수야 없었다. 제임스와 다른 소년들도 싹 잊어버리기로 했다. 물론 해티도 잊어버렸다. 그 꼬마애는 뭣 때문인지 사촌 오빠들을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집 밖에 홀로 남았다. 톰은 해티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정원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9.해티 세 소년은 정원에 이따금씩밖에 찾아오지 않았다. 공기총을 갖고 놀 때나 과 일을 따러 올 때만 정원에 들르곤 했다. 맨 처음 소년들을 보고 나서 며칠이 지 난 어느날, 톰은 정원에서 사과를 따러 온 그들을 두 번째로 보았다. 집에서 개 를 데리고 나온 아이들은 별로 할 일도 없이 어슬렁대며 온실 옆의 채마밭으로 갔다. 갑자기 소년들이 벌떼같이 몰료들어 덜 익은 사과나무 가지를 잡아당겼다. "자, 분명히 따지 말라고만 했지." 하고 휴버트가 말했다. "얘들아! 어서 흔들 어서 떨어뜨려!" 휴버트와 제임스는 나무 줄기를 잡고 미친 듯이 앞 뒤로 흔들어 댔다. 사과가 후드득 떨어지자 에드가가 갑자기 숲을 날카롭게 째려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야,염탐꾼이다!" 보니까 해티가 거기 서 있었다. 숨어 있는 게 탄로나자 여자애는 살랑살랑 걸 어 나왔다. "나도 사과 하나 줘." 하고 여자애가 말했다. "안 주면 고자질하겠지! 이 치사한 염탐꾼, 고자질쟁이!" 하고 에드가가 소리 쳤다. "사과 하나만 줘. 그럼 말하지 않을 거야!" 하고 제임스가 얘기했다. 에드가가 주지 않으려 하자 제임스가 하나를 집어서 던져 주었다. 해티는 앞치마로 달랑 사과를 받았다. "지난번처럼 꼭지를 잔디밭에 버리지 마. 그랬다간 몽땅 야단맞 을 테니까." 소녀는 약속을 허고 서과를 베어 물면서 오빠들한테 다가갔다. 소년들은 사과 를 하나씩 쥐고 와구와구 먹어 치우면서 나무 밑에 자기네가 만든 흔적을 없애 려고 발로 바닥을 마구 짓뭉갰다. 그러고선 남은 사과를 마저 먹으려고 톰 바로 앞에서 등을 보이고 섰다. 그때 였다. 개가 소년들위 다리 사이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톰 쪽으로 왔다. 자 꾸자꾸 다가오더니 녀석은 톰을 쳐다보면서 털을 쳐다보면서 털을 곤두세우더니 연방 으르렁거렸다. 휴버트가 어리둥절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핀쳐, 왜 그래?" 휴버트는 돌아서서 톰 쪽을 보며 도대체 거지에 뭐가 있냐는 투였다. 거의 동시에 에드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톰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제임스도 돌아보았고, 마지막에는 해티까지 돌아보았다. 넷이 나란히 서서 멀뚱 멀뚱 톰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개는 밭밑에서 쉬지 않고 으르렁댔다. 톰은 기분이 나빴다. 한편으론 이런 바보 같은 친구들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했고 자기를 못 보는 아이들을 놀려 주고 싶은 충둥도 들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돌아 톰은 아이들한테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 대꾸라도 하듯이, 해티란 꼬마가 톰에게 "메롱!"하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톰은 깜짝 놀라서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말로 여자애가 자기한테 혀를 내미는 것이었다. 오, 세상에! 여자애는 톰을 볼 수 있 었던 것이다. "왜 혀를 내미니, 해티?" 제 눈에 들어오는 거면 뭐든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에드가가 대뜸 물었다. "혓바닥이 덥대."하고 해티는 놀랍도록 깜찍하게 쫑알거렸다. "혓바닥이 시원 했으면 좋겠대. 상틈한 공기도 쐬고." "이게, 버릇없이 거짓말만 하고 있어!" "놔 둬, 에드가." 하고 제임스가 뜯어말렸다. 그들을 개의 이상한 행동에도, 해티의 수상한 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개는 소년들과 톰 사이에서 불안스레 낑낑대며 소년들을 쫓아 갔다. 가면서도 녀석은 목구멍으로 나지막이 으르렁거렸고, 여자애는 그 애들보 다 몇 걸음 앞서서 걸어갔다. 톰운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톰은 기회를 엿보며 마냥 아이들을 쫓아갔다. 아이들은 온실과 숲 사이에 난 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해티가 앞서가고, 뒤 따라가는 소년들 뒤로 톰이 쫓아갔다. 잔디밭까지 갔을 때 여자애는 이미 어디 론가 사라지고 세 소년들뿐이었다. "해티는 어디 갔지? " 하고 제임스가 물었다. 제임스는 셋 중에 맨 뒤에 있었 다. "뭐, 숲에서 넘어졌나 보지." 하고 에드가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 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세 소년은 결국 저희들끼리 집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정원에 혼자 남은 톰은 뭔가 화가 난 표정이었다. 꼭 무슨 거창한 결 심을 한 사람처럼 잔뜩 이맛살을 구기고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여자애는 톰 한테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톰은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톰은 해티를 찾기 시작했다. 있을 만한 곳은 샅샅이 뒤져 보았다. 숲으로, 나 무 위로, 기관실 뒤로, 호두나무 아래로, 정자로, 구스베리 철망으로... 하지만, 아무 데도... 아무 데도... 해티는 아무 데도 없었다. 순간, 느닷없이 톰 의 뒤에서 "깍꿍!" 하는 소리가 났다. 여자애는 톰한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눈빛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톰이 자기 목소리가 그 애한테 들릴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네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줄 알았어." 톰의 말이 안 들리는 체하려면, 여자애는 아까 숲에서도 안 보이는 척했어야 했다. 그러니 여자애는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흥, 지금이라니!" 하고 여자애가 비웃듯이 소리쳤다. "전에도 숨어서 널 지켜 봤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네가 목장으로 가는 내 비밀 통로롤 가는 것도 보았어! 저번에 수잔이 청소할 때, 나무 꼭대기에서 손을 흔들었지? 그것도 봤단 말야! 과수원 분을 귀신처럼 지나가는 것도 보았구!" 그 생각을 하니까 좀 기분이 안 좋은지 여자애는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쏘아 붙였다. "흥, 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널 봤단 말이야. 네가 모르고 있을 때두!" 첫날 잔디 위의 발자국도, 잔디밭 건너편에 있는 방안의 그늘 속 얼굴도, 늘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도, 알고 보니까 다 해티 때문이었 다. 이제는 모든 것이 또렷하게 이해되었다. 마음속에서 해티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이 솔솔 일었다. "이야, 여자애가 진짜 잘 숨는구나." 하고 톰이 말했다. 해티가 그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톰은 얼른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 난 톰 롱이야." 해티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좀 이상한 이름이라고 느끼는 눈치였다. "근데... " 하고 톰이 초조하게 말했다. "네 이름은 알아. 해티지. 해티... 뭐라고 하던데." 톰의 말투는 다소 거만했다. 소녀의 오만한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반발심이 일었던 것이다. 해티는 잠시 망설이더니 목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해티 공주입니다. 난 공주야." 10. 놀이와 이야기들 처음에 톰은 해티가 진짜 공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티의 눈빛은 밝고 총명해 보였다. 빨간 뺨이나 긴 검은 머리와 짐짓 근엄한 태도는 어딘지 그림책 속의 여왕처럼 왕족다운 데가 있었다. 해티 바로 뒤에는 짙푸른 상록수가 울창하게 서 있었다. 한 손엔 초조해서 꺾었는지 장난 삼아 꺾 었는지 상록수 가지를 쥐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반쯤 먹다 만 사과를 들고 있 었다. 그것들이 톰의 눈에는 마치 여왕을 상징하는 봉과 구슬처럼 보였다. "내 손에 키스해도 돼." 하고 해티가 말했다. "싫어, 하고 싶지 않아." 하고 톰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만약 이애가 진짜 공주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렇지만, 고마워." 하고 덧붙였다. 그러나 어쩐지 자꾸 의심이 갔다. "네가 정말 공주라면 너네 엄머랑 아빠는 여왕이나 왕일 텐데, 왕궁이랑 엄마 아빤 어디 있어?" "말할 수 없어요." "왜지?" 헤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난 여기 귀양 와 있는 몸. 그러니까 변장한 공주죠. 내가 숙모라고 하는 사람 은 사실 숙모가 아니예요. 그 아줌만 얼마나 심술궂고 쌀쌀맞은지 몰라요. 오빠 들도 내가 사촌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사촌이 아니랍니다. 자, 이젠 내 비밀을 다 알았겠죠. 그대만은 나한테 공주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해티는 다시 손을 내밀었지만 톰은 무시했다. "자, 지금부터 그대와 함께 놀기로 하죠." "같이 노는 건 좋은데," 하고 톰은 뻣뻣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난 바보 같은 여자애들 놀이는 잘 몰라." 그러자 "날 따라오세요." 하고 해티가 말했다. 해티는 톰에게 정원을 보여 주었다. 톰은 자기도 정원에 대해서 이미 알 만 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해티하고 같이 가보니까 여태껏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자꾸자꾸 쏟아져 나왔다. 해티는 자기가 숨는 곳을 하나씩 보여 주었다. 몸집이 조그만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벽과 나무 줄기 사이의 잎 이 쌓인 틈이랑 아벨이 기관실 옆에 쌓아 둔 콩깍지로 만든 오두막집, 그리고 온실 옆에서 자라는 고사리 뒤쪽에 숨는 구멍들이며 아스파라거스 이파리 밑에 팬 굴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해티는 톰에게 커다란 전나무 뒤에 숨는 법을 가르 쳐 주었다. 먼저, 숨는 사람과 찾는 사람 사이에 나무 줄기를 두고서는 소리를 잘 들어. 그러면서 자로 잰 듯이 움직여야 해. 물론, 아무 소리도 안 내고. 해티는 톰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여 주었다. 해티가 장군풀을 보여 주려고 막 들어 올릴 때, 톰은 뭔가 퍼뜩 생각이 났다. "너, 언젠가 여기에 쪽지를 남긴 적 있니?" "어, 너도 보았어?" 하고 해티가 물었다. "응, 요정한테 보내는 편지 말이지." 톰은 자기가 비웃었던 걸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참 나, 요즘 세상에 요정이라니!" "도대체 누가 쓴 걸까요? 요정에게 보내는 편지라니? 믿을 수 없군요." 해티 는 궁금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선 재빨리 얘깃거리를 바꾸었다. "이리 와요, 톰! 보여 줄 게 있어요!" 해티는 꼭 다람쥐처럼 뛰어가 톰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둘은 빗장을 벗기고 구스베리 철망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열매를 보고서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지빠귀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이들이 다가가자 철망에 대고 요란스럽게 날개 치 다가 열어 놓은 문으로 반갑다는 듯이 날아갔다. "어머! 우리가 새를 봐서 다행이었어요." 하고 해티가 말했다. "아벨이 봤더라 면..." 해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벨 아저씬 말이죠, 새가 열매를 먹는 것보다 배가 고파서 쩔쩔매는 걸 더 좋아하나 봐." 해시계 길에서 해티는 톰에게 과수원 문과 화분 창고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연장이랑 씨앗 상자, 화분이랑 철망이 늘어선 곳 사이에 닭털과 오리털이 섞인 깃털 한자루가 있었다. 해티는 자루를 손가락으로 파내더니 깃털을 확 뿌렸다. 마치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폭풍처럼 깃털은 공중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톰은 코가 간질걸려 그만 에... 에취! 하고 재채기를 했다. 해티는 까르르 웃었다. 그러 곤 아벨이 화를 낼까 봐 냉큼 바닥을 기어 다니며 떨어진 깃털을 다시 자루에 주워 담았다. 톰은 수레 옆에 올라앉아 다리를 흔들며, 어직도 떨어지고 있는 깃 털들을 가리켰다. 해티를 도와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를 써 도 톰은 깃털 하나조차 들어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해티는 자기가 공주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듯, 사방으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벼 깃털을 주 워 모았다. 그러고 나서 둘은 온실 끝에 벽돌로 지은 난방실로 갔다. 해티가 문을 열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문 꼭대기에 달린 빗장을 벗기기에는 키가 좀 작았지만, 해티는 까치발을 하고서 나뭇가지로 간신히 빗장을 벗겨 냈다. 문이 열리자 둘을 퀴퀴한 먼지 냄새와 숯내음이 코를 찌르는 엷은 어둠 속으러 내려 갔다. 날씨가 더워서 온실로 보내는 난로는 켜 있지 않았다. 조그만 선반 위에 책이 두세권 있었는데, 해티 말로는 아벨의 책이라고 했다. 선빈은 높이 있었지 만 톰은 제일 위에 놓인 것이 성경책임을 알 수 있었다. "아벨 아저씨가 그러는데, 성경이 책 중에서 최고랍니다. 영국을 다스리는 여 왕처럼 말이죠." 둘은 온실로 갔다. 선인장과 천장에 매달린 선반으로부터 가 지를 축 늘어뜨린 덩굴들, 그리고 밖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꽃이 핀 식물들로 가득했다. 톰은 온실 안에서 한숨을 쉬면서, 이 답답한 공기에서 식물 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아주까리도 있었는데, 진귀한 함스초도 있었다. 해티가 이파리를 건드리자, 몸을 싹 웅크리는 모습리 신기했다. 이 식믈의 감각 은 여간 예민한 게 아니어서 톰이 살짝만 건드려도 곧장 반응을 보였다. 톰은 자기도 이파리를 수그러지게 할 수 있다는 에 신이 나서 이파리를 하나씩 다 만 져 보았다. 이어서 둘은 수조에 기대어 금붕어를 잡으려고 첨벙댔다. 해티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물 속에 집어넣자, 톰도 해티 뒤에서 손바닥을 벌리고 따라 넣었다. 각자 한 팔과 한손을 물에 넣고, 둘은 신나게 금붕어를 몰았다. 톰은 혼자선 아 무것도 할수 없었지만, 좀전에 해티가 붕어를 거의 잡을 뻔했을 때는 꼭 톰의 손도 해티와 하나가 되어 붙잡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해티는 온실 문으로 톰울 데려가, 문 위쪽에 조각조각 끼워 넣는 색 유리창을 보여 주었다. 그 창 하나하나를 통해서 보는 정원의 풍경은 모두 달랐 다. 초록빛 꽃들이 자라고 제라늄까지도 어두운 녹색으로 보였다. 빨간 유리창으 로는 언젠가 감은 눈 사이로 보았던 정원처럼 온 세상이 빨갛게 보였으며, 보라 색 유리를 통해서 본 정원은 마치 천둥이 치기 전의 어두컴컴한 날씨처럼 보이 기도 하고 밤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또 노란색 창으로는 레몬 주스에 담긴 듯 한 정원이 예쁘게 보였다. 끝으로 이 색유리창의 네 모퉁이에는 아무 빛깔도 없 이 별이 새겨진 창이 있었다. "저 창을 통해서 보면..." 하고 해티가 눈이 부신 듯 눈살을 찡그리며 쳐다보았 다. "별 유리창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하고 톰이 실망한 듯이 말했다. "가끔 나는 저 유리창이 제일 좋아." 하고 해티가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정원이 없는 것 같겠지. 하지만 정원은 언제나 거 기서 나를 기다리 고 있는걸요." 둘은 정원으로 다시 나갔다.해티는 정원에 서있는 상록수 이야기를 꺼냈다. 톰이 전에 올라가 손을 흔들었던 나무는 마터호른(알프스 산맥에 있는 같은 이름의 산에서 따옴- 옮긴이)이라는 나무라고 했다. '보초'라는 이름을 가진 상록수도 있 었고, '성바울 사원의 계단'이라는 나무도 있었다. 하나는 올라가기가 어렵다고 해서 '아차나무'라고 불렀다. 나무 아래 쪽에 가지도 없고 튀어나온 부분도 없는 벌거숭이나무라서 손하고 발만 써서 기어올라가는 수밖에 없는 나무인데, 휴버 트나 제임스나 에드가는 기어오를 수 있는데 해티만 못 한다고 했다. 톰은 '흥! 해티가 공주든 아니든 내가 더 훌륭하군.'하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해티의 얘기를 듣다 보면, 가끔씩 수상쩍을 때가 있었다. 둘이 어떤 숲 근처에 멈춰 섰을 때, 해티가 웬 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불타는 풀'이야. 원래 이름은 참빗살나무지."하며 잎을 뜯더니 손가락으 로 비벼서 톰의 코 앞에 갖다 댔다. 톰은 해티의 손끝을 맡아 보았지만 아주 희 미한 냄새 밖에 나지 않았다. "이거 숯 냄새니?" 하고 톰은 자신없이 물었다. "아니, 제임스 오빠가 레몬 버비너 냄새래." "그럼 왜 '불타는 풀'이라고 해?" "오빠들이 그러는데, 세례요한일 전날 밤에 여기다 불을 놓으면 풀이 확 타오 른댔어." "어떻게 알아. 해본 적 있어?" "물론 없어. 정원에 하나밖에 없는 건데, 태워 버릴 수 없잖아." "그래." 톰은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해티가 갑자기 톰한테 바싹 다가왔다. "비밀 얘기를 하나 해줄까? 진짜 비밀?" "뭐, 하고 싶으면 해." "이 나무는 모세가 하느님의 산에 갔을 때 태워 버린 그 나무에서 자란 거래." "바보, 그건 성경에 나오는 옛날 얘기야." "다시는 너한테 비밀 얘기 안 해줄 거야." 하고 해티는 토라져서 말했다. 하지만 해티는 입이 근질거려서 좀처럼 참지를 못했다. 처음 만난 날뿐만이 아 니라,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해티는 자기 비밀이랑 온갖 얘기들을 털어놓곤 했 다. 꼭 얼마 안 있어서 헤어질 사람처럼 쫓기듯이 말했다. 정원에서 놀다가 지치 면 해티는 늘 정자고 갔다. 오늘도 계단을 올라가서는 해티가 문을 열어 주었다. 해티는 정자 뒤에서 쇠로 꼬아서 만든 정원용 의자 두 개를 가져오더니 발코니 에다 놓았다. 둘은 항상 거기 앉아 길쭉한 연못을 바라보거나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주로 톰보다는 해티 혼자서 재잘거리기 가 일쑤였다. 그러다가 한 번은 에드가한테 들켜 버렸다.정원에서 에드가가 해티를 소리쳐 부를 때까지, 돌 다 에드가가 서서 듣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야! 그 위에서 뭐 하냐?" "아무것도 안 해, 에드가 오빠." "오 분 동안 너 혼자서 얘기도 하고, 고개도 끄덕거리고, 깔깔거리다가 누구 얘기도 듣고 그러던데." "나 혼자가 아니야. 친구한테 얘기하고 있었어." "어디에 있는데?" "다른 의자에 앉아 있지." 에드가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불쾌한 웃음이었다. "해티" 사람들이 보면 네가 정신 나간 줄 알거야. 지난 번에는 말도 안되는 요 정이야기를 하더니, 이번엔 또 없는 친구를 있다고 그래! 에드가는 실없이 킥킥대며 가버렸다. 해티는 톰을 돌아보며 불쌍하리만치 벌벌 떨었다. "어쩜 좋아, 가서 다 말해 버릴 텐데, 다들 날 놀리겠지. 그레이스 숙모님도 한 마디 하실 거야. 저러니 마을 애들하고 같이 놀 수 없다고 말야." "그런 줄 뻔히 알면서 뭣 땜에 에드가한테 내 이야길했니?"하고 톰이 물었다. 해티는 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니?" 거기에 앉아 있으면 둘은 아벨 아저씨가 정원에서 일하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다. 아저씨가 가끔씩 쳐다볼 때마다 공주들이 하듯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벨 아저씨 얘긴 너무 슬퍼." 하고 해티는 의미 심장하게 말했다. "슬프다니?" "가족들이 다 불쌍한 사람들이야. 얘기 안 한다고 약속하면 말해 줄게." 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해티는 벌써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아벨 아저씨한테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들에 일을 하러 같이 갔대. 아벨 아저씨가 정원사가 되기 전의 일이야. 형은 늘 아저씨를 질투하고 있었는 데, 그날은 무슨 일로 싸우게 되었대. 아마, 형이 아벨 아저씨를 흉기로 죽이려 했다나 봐." "계속해봐." "형은 결국 아저씨를 죽였어. 아니, 거의 죽일뻔했대. 들판에 엄청난 피가 흘렀 다지." 으스스한 침묵이 흘렀다. 톰은 불쑥 말을 꺼냈다. "잊어버렸어."하고 해티가 고개를 돌려 하늘의 새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 이름이 카인이지?" 하고 톰이 물었다. 해티는 못 들은 척했다. 톰은 그렇게 모르는 척하는게 제일 싫었다. 정원의 모 든 사람들이 자기를 못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해티. 카인과 아벨의 얘기는 성경에 있단말이야.카인은 아벨을 진짜 로 죽였어. 하지만, 정원에서 일하는 아벨 아저씨는 성경의 아벨이랑 아무 상관 도 없는 사람이야. 그냥 이름만 같은 걸 거야. 아벨 아저씨의 형이 아저씨를 죽 이려고 했다는 얘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수잔 언니가 나한테 얘기해 주었다는 거, 내가 말했니? 수잔 언니는 아벨 아 저씨의 애인인데? 아니, 아벨 아저씨가 나한테 직접 말해주기도 했는걸, 뭐."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톰은 되도록 해티의 기분이 상하 지 않게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지금 아벨 아저씨한테 가서 물어 볼래?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이 있었는지!" "다시는 너한테 비밀 얘기 안해줄 거야!" 해티는 뾰로통 골이 나서 소리쳤지만, 톰은 그냥 해본 소리라는 걸 알았다. 해 티는 곧 제가 먼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을 할 테니까. 어쨋든 아벨한테 가서 물 어 보자니까 싫다는 걸 보면, 해티의 애기는 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해티가 자기 말처럼 공주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티가 이 정원을 마치 왕국처럼 만들었다는 점만은 틀림없는 사실이 었다. 11. 바다로 흘러가는 강 톰은 피터한테 편지를 썼다. "해티한테 정원 애길 물어 보려 했는테,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어... 톰은 요즈음 뭐든지 잘 잊어버렸다. 낮에 이모네 집에 있을 때에는 정원 생각 밖에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정원이 어디서 왔는지,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홧속인 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해티를 떠보면,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을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원으로 갈때마다 그런 생각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리 고 오직 자기가 소년이라는 사실과 이 정원이 자기를 위한 곳으로서 늘 해티가 같이 놀아 준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정원에서는 할 일이 많았다. 해티가 널빤지를 구해 오는 대로 상록수 위에다 나무집을 짓기로 했던 어느날 둘은 숲속에서 우연찮게 활과 화살을 보았다. 해티는 몹시 부러운 눈초리로 사촌 오빠들은 정원에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로 빈 후드 놀이를 하곤 한다고 말했다. "넌 왜 안 해?"하고 톰이 물었다. "난 너무 어리대. 그렇지만 내가 같이 놀 만큼 크면, 그땐 또 자기네들이 너무 커버렸다고 애기할걸." "그럼 나 혼자서 놀지? 너도 네 화상이랑 활을 만들 수 있잖아." "난 못해. 만들 줄도 모르구. 그렇지만 화살은 만들수가 있잖아. 제임스 오빠가 만드는 걸 본적이 있거든. 그런데 활은... 톰은 해티한테 잘 드는 칼을 한 자루 구해 오라고 했다. 해티는 안으로 들어 가더니 치마 밑에 부엌칼을 숨겨서 나왔다. 톰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해티는 우선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서 잘랐다. 생가지였지만 별수 없었다. 해티는 대충 다듬 어서 양 끝에 줄을 끼우려는데 해티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톰이 도와줄 수도 없었다. 결국 해티는 아벨 아저씨한테 부탁하러 들었갔다. 줄을 끼워 주기 전에 아벨 아저씨는 칼질한 모양새를 쭉 훑어 보았다. "우리 해티 아가씨 솜씨인가요?" "응, 내가 했어." "누가 가르쳐 주었겠죠?" "응."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모르지만,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말썽이라구?" "그래요, 아가씨." 아벨 아저씨는 한참이나 해티를 쳐다보았다. 멀리서 지켜보던 톰은 무슨 일인 가 궁금해했다. 아벨 아저씨는 해티가 해달라는 대로 줄을 끼워 주었다. 화살은 만들기 쉬었다. 해티도-자기도 그렇게 말을 했지만-화살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해티는 묵은 개암나무 더미에서 곧고 마디가 없는 막대기를 골라 냈다. 그리고 개암나무 막대기 한쪽끝을 활시위에 맞도록 일일이 V 자로 파냈 다. 다른 쪽 끝은 딱총나무로 마개를 씌워서 무겁게 했다. 늘 사촌 오빠들이 딱 총나무를 화살촉으로 쓰는 것을 보았나 보다. 톰은 화살에 깃털을 달고 싶었는데 해티는 빨리 써보고 싶어했다. 톰은 자기 가 화살을 쏠 수밖에 없는 게 가슴 아팠지만, 옆에서 가르쳐 주는 것밖에 할 수 가 없었다. 톰은 해티한테 새를 겨누라고 했지만 해티는 싫다고 했다. 공중으로 화살을 쏘았다. 해티는 너무나 즐거워했다. 화살이 날아가자 해티는 실눈을 뜨고 눈부신 여름 하늘의 푸르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느다란 선을 바라보았다. 해티가 무턱대고 화살을 쏘았기 때문에 화살이 네 개나 나무위로 올라가 버렸 다. 다섯 번째 화살은 기어코 온실 지붕을 맞히고 말았다. 다행히도 본 사람은 아벨 아저씨뿐이었다. 아저씨는 물론 해티뿐이었다. 아저 씨는 깨진 유리를 쓸어 담으려고 빗자루랑 사다리랑 접착제를 가져왔다. 아저씨 가 유리를 갈아 끼우고 사다리를 내려올때까지 해티는 마음을 졸였다. "고마워, 아저씨. 숙모한테 말 안 할거지."하고 해티는 아벨 아저씨에게 말했 다. "걱정 마세요." 하고 아벨 아저씨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거 봐요, 내가 아까 뭐랬어요." 그건 묻는 것도 아니었고 야단치는 것도 아니었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경고 였다. 해티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썽을 일으킬 거라는 거?" 하고 물었다. 아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버렸다. 그 다음에 둘이서, 아니, 벌인 소동은 아벨 아저씨도 어쩔수 큰 소동이었다. 정원에서 활을 쏘다가 말썽을 피울까 봐 조심한다는 게 오히려 일의 발단이었 다. 해티는 유리를 깬 다음부터는 정원 울타리 너머 목장 쪽으로 활을 쏘았다. 그러고선 톰과 해티는 울타리 길을 기어 가 활을 주워 오곤 했다. 목장에 들어가도 별로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활쏘기보다도 찾는 데 시간 이 더 많이 가긴 했지만, 톰은 활을 찾으로 왔다갔다 하는 게 재미있었다. 해티 도 그랬다. 한 번은 화살을 찾다가 목장을 싸고 있는 강물을 보고 해티는 손뼉 을 치며 좋아했다. 해티는 거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둑으로 걸어갔다. 새끼들을 데리고 있었던 거위들은 경계심에 차서 톰과 해티를 바라보았다. 둘 은 거위들을 괴롭히지 않고 강가에만 가볼 참이었다. 톰은 앞장 서고 해티가 약 간 뒤처져서 걸어갔다. 앞에서 새끼 거위들이 겁에 질려 꽥꽥거리며 강 쪽으로 뛰어가자 어미 거위가 재빨리 뒤따르고맨 끝에 숫거위가 나타났다. 녀석은 몹시 화가 난 소리로 꽥꽥거리며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적한테서 한시도 눈을 떼지도 않더니,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고 노려보았다. 한순 간, 거위는 빙글 뒤로 돌아 몸을 추켜 세우고는 두 사람과 마주섰다. 그리고는 갑자기 머리랑 목을 땅바닥에 납죽 떨어뜨리고는 꼭 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달 려왔다. 해티는 뒤처져 있던 터라 숫거위가 겨냥한 상대는 물론 톰이었다. 거위는 마지막 순간에 톰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슬쩍 비켜 갔다. 녀석은 뒤뚱 거리면서 어미 거위와 새끼 거위들을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연방 힐끔힐끔 돌아 보며 경계 어린 눈빛을 ㄴ추지 않았다. 거위네 가족은 터져라 꽥꽥거리며 강가에 도착해서는 물 위로 뛰어들었다. 물 위를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면서 거위들은 아직도 반항하듯 꽥꽥거렸지만, 새끼 거위들은 자기들이 당한 위험을 벌써 잊어버린 듯 즐겁게 놀았다. 톰과 해티는 강둑에 앉기도 하고 강가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해티는 이 강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톰은 별로였다. 톰은 더 좋은 강도 많이 보았는데 해티는 아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건 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차라리 개울이라고 해야겠어. 안에 잡초 도 있고." 하지만 해티는 물이 흘러 가는 쪽을 보면서 말했다. "더 아래쪽을 못봐서 그래." "넌 본적이 있니?"하고 톰이 물었다. "없지만 얘긴 들었어. 여기서 조금 내려간 곳에 웅덩이가 있대. 거기서 남자들 은 수영도 하고 고기도 잡는데. 밑으로 갈수록 강이 커져서 캐슬포드를 지나 엘 리를 지나 결국 바다로 흘러간대." "강은 모두 바다로 가는 거야." 하고 톰이 말했다. 하지만 해티한테 관심이 있 는 건 자기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강, 눈앞에 흘러가고 있는 이 강뿐이었다. 해 티는 끝없이 여행을 떠나는 강이 부러운 듯, 강물이 흘러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땐 말이야, 톰. 여기서도 가끔 강이 커질때가 있지. 겨울이나 봄 에 홍수가 나면 물이 둑까지 차거든.어떨 때는 목장으로 흘러 넘치기도 한다." "해티."하고 톰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 강이 그렇게 좋으면 다른 오빠들 하고 같이 수영하러 가지 그러니? 왜 안 가보는 거야? 아니면 배를 타고 가볼수 도 있잖아, 강물이 어디로 가는지." 해티는 놀라서 톰을 바라보았다. "난 목장에도 못 가게 되어 있어. 옆에 강이 있기 때문이래. 숙모는 옷에 진흙 을 묻히거나 더럽힐 수도 있고 또 물에 빠질까봐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런 얘기를 하다가 퍼뜩 숙모 생각이 났는지, 해티는 갑자기 일어나 정원으 로 돌아가자고 했다. 톰이 무슨 말을 해도 해티는 막무가내일 것 같았다. 해티가 울타리길로 달려가자 톰도 할수 없이 뒤따라갔다. 둘이 강둑에서 떠나자마자 어 미 거위들과 새끼 거위들이 물에서 나와 강둑으로 기어올라 왔다. 세 마리의 우 두머리 거위가 톰과 해티가 울타리의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모습을 줄 곧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일어난 일은 정확히 말해서 거위 때문이라기보다는 활쏘기 때 문이었다. 언제나톰과 해티가 화살을 찾아서 나가는 걸 지켜보던 거위들은 마침 내 자기들도 그 길로 와본 것이다. 순전히 호기심과 채마밭에서 뭘 먹으러는 욕 심에서였지 딴 악의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12.거위들 거위들이 울타리를 통해서 정원으로 몰려온 건 아마 해가 뜨자마자였나 보다. 정원 잔디에는 아직 아침 이슬이 마르지도 않았을 때였다. 툼은 보통때처럼 열 두시쯤 내려와 정원 문을 열었다. 정원은 새벽녘이었는데 톰은 그만 거위들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어미 거위 두 마리랑 숫거위가 늘 하던 것처럼 목을 쭉 내밀고 톰을 바라보았 다. 옆에는 새끼 거위들고 있었다. 거위들은 별생각 없이 잔디위를 거닐며서 콕 콕 쪼고 있었고, 어떤 놈은 고개를 숙인 채 이슬을 마시고 있었다. 몇마리는 꼭 조르만 배처럼 잔디밭에 하얀 깃털을 펼치고 앉아 있었다. 더욱 곤란한 건 검푸 른 거위똥이 잔디 위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던 점이다. '맙소사,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톰은 퍼뜩 아벨 아저씨랑 휴버트랑 제임스, 에드가, 가정부인 수잔이랑 험상궂 은 해티의 숙모 얼굴이 떠올랐다. 해티는 그안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티 울타리의 비밀 통로가 탈이었다. 물론 톰한테도 책임이 있었다. 마음대로 그곳을 오갔을뿐더러, 아마 누구든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면 당장에 그곳을 가르쳐 주었을 테니까 곧 사람들이 거위를 보고 몰려들었다. 맨 처음에 온 사람은 아벨 잔디밭을 보 고는 딱 멈춰 섰다. 파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려서 할말을 잊고 서 있었다. 곧이어 창문 하나가 열리더니, 해티의 숙모인 듯한 사람이 마구 소리쳤다. 부 인은 거위들이 왜 거기 서 있는지 마구 소리쳤다. 또 창문 하나가 열리더니 저 것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거위가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그게 누구 때문 인지 따발총처럼 물어 댔다. 아벨 아저씨가 한참 대답하는 도중에 창문이 쾅 닫혔다. 이층에서 시끌벅적한 소리와 발짝 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계단으로 내려왔다. 아마 온 집안 사람이다 내려오는 듯했다. 톰은 얼른 나무 뒤로 숨었다. 아무도 자기를 못 보지 만,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본능적으로 숨게 마련이다. 나무 뒤로 자기 위해서는 아벨 아저씨의 앞을 지나가야 했던 톰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곧 모두들 현관으로 떠들썩하게 몰려나왔다. 해티도 들떠서 덩달아 서 있었는 데 아직 일이 얼마나 심각하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휴버 트랑 제임스랑 에드가는 난리라도 난 듯이 들떠 있었다. "쉿, 당황하게 하면 안 돼요." 하고 아벨 아저씨가 맞은 편에서 나지막히 외쳤 다. "과수원 안으로 몰아넣으면 돼. 그런 다음에는 목장으로 돌려보내면 되니까." 마지막으로 핀쳐가 나왔다. 현관 계단에 서 있는 소년들의 다리 사이로 뚫고 나와 맨 앞에 섰다. "개를 이리 데려가요." 하고 아벨 아저씨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핀쳐 녀석은 아저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관 계단에 태 연히 서 있었다. 아벨 아저씨가 천천히 거위 앞으로 다가가자, 세 소년들도 같이 과수원 문 쪽으로 거위들을 몰고 갔다. 톰도 흥분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거위들은 고개를 쳐들고 연방 뒤돌아보며 새끼 거위들을 앞세우고 쫓겨 갔다. 거위들은 꼭 벼랑 끝에 몰린 듯 겁에 질려 갈피를 못잡고 헤맸다. 그때였다. 느 닷없이 핀쳐가 왈왈 짖으면서 달려와 이 가엾은 거위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 아넣었다. 두 마리 어미 거위와 한 마리 숫거위가 당장에 푸드득거리며 꽥꽥대 기 시작했다. 마치 열마리, 아니, 백마리도 더 되는 듯했다. 휜색과 잿빛의 날개 들이 무슨 전쟁이라도 치르듯 사방에서 푸드득거리며 야단이었다. 화가 나서인 지, 겁이 나서인지 거위들은 닥치는 대로 짓밟고 다녔다. 새끼 거위들은 더욱 더 겁에 질려 뛰어다녔다. 꽃밭과 뜰이 엉망진창이 된 건 말할 나위도 없었다. 개는 거위들이 필사적으 로 달려들며 쪼아대자 얼른 꼬리를 감추고 집으로 내뺐다. 아벨 아저씨랑 소년 들은 뛰로 잠시 물러섰다. 격앙된 숫거위가 어미 거위들을 옆에 끼고 새끼 거위 를 뒤에 품다시피 숨기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그래서 다들 거위들이 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번엔 좀더 조심스럽게 거위들을 몰았다. 해티는 과수원 문을 열어 주려고 먼저 뛰어갔다. 줄곧 숨어 있던 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엉망이 된 정원과 현관 계단에 서있는 해티 숙모였다. 전에도 얼굴 표정이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까 훨 씬 더 몸소리가 쳐졌다. 그 부인과 톰은 서로 다른 곳에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귀를 세우고 있었 다. 이윽고 거위를 과수원 안으로 다 몰고 갔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톰은 이제 다들 돌아오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 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앗! 사람들이 거위가 어디로 들어 왔는지 알아보러 간 것이다. 아벨 아저씨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목 장 울타리를 따라가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이어졌다. 잠시후에 사람들이 돌아왔 다. 그 새 해티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이제서야 야단맞을 일이 생각나서 숨 어 버린 것 같았다. 잔디밭을 지나오면서 아벨 아저씨는 잔뜩 가라앉은 소리로 울먹이면서 투덜거렸다. 거위들이 양상추를 다 찢어 버렸다. 모종이 몽땅 짓밟히 고 부러져 쓸모 없게 되었다. 게다가 사방 천지에 거위똥들이 널렸다... 여주인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할수 없이 아벨 아저씨는 거위들이 울타리의 틈새와 굴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아니, 악마가 가르쳐 주지 않고서야, 거위들이 어떻게 그런 길을 만들었지!"하 고 에드가가 끼여들었다. "틀림없이 해티 짓이야." 톰은 속으로 그건 추측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죄다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벨 아저씨는 다시 생각해 보려는 듯 말을 멈추었다. 다른 사람들로 입을 다 물었다. 톰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멀리 나무뒤에 숨어 있는데도, 점점 거칠어 져 가는 해티 숙모의 숨소리가 들려 왔다. "해리엇!" 도저히 여인의 목소리라고는 할수 없을 만큼 거친 목소리가 숙모의 입에서 터 져 나왔다. 마치 당자이라도 해티를 잡아먹으려는 듯한 기세였다. 해티는 말없이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숙모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얼굴이 하얗 게 질려서 해티는 눈과 머리가 한결 더 검어 보였다. 가엾게도 해티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해티는 숙모 앞에서 멈추어 섰다. 숙모는 울타리의 굴같은 길을 해티가 만들 었는지, 또 왜 만들었는지 따위는 전혀 묻지도 않았다. 그 여자는 톰이 기대하고 있던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다 네 책임이야" 해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수 없는 것같았다. 해티가 상상 속에서 정원으로 데려왔던 인물들, 성경에 나오는 영웅이랑 요정이며 전설 속의 사람들 등, 해티의 공상 속에 살던 모든 친구들은 지금 해티한테서 멀어져 갔다. 톰조차 도 해티를 위해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고, 어떤 도움도 줄수 없었다. 이제 저 여자가 해티를 때리겠구나 생각하고, 톰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숙 모는 때리지 않았다. 그대신 해티한테 무자비하게 쏘아붙였다. 이 고아 계집애 야... 죽은 남편의 조카라서 어쩔수없이 받아 주었더니, 은혜도 모르는 거지 같으 리라구... 한때, 실수로 거둬 줬더니, 뻔뻔스럽게 고마워하지도않고 책임감도 없 는 넌... 말도 지지리 안 듣고, 돈만 잔뜩 들이는 넌, 도대체 집안에 창피만 주는 거짓말쟁이, 도둑년, 괴물 같은 계집애... "에잇!" 톰은 울화가 치밀었다. "왜 해티네 엄마랑 아빠는 해티를 안 데려가 는 거야, 왜?" 지금까지도 믿지 않았지만, 톰은 더 이상 해티네 부모가 왕이나 여왕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부모라도, 자기 아이 를 이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거야.우리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야, 나를 사랑하시 니까,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달려올거야. "해티네 엄마는 알고 있을까? 왜 해티네 아빠는 오지 않을까?" 톰은 쪼그리고 앉아서 얼굴을 두 손에 파묻도 울었다. 해티를 도와 줄 수 없 는 게 너무나 안타까와서... 잔인한 목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침내 욕지거리가 그치자 침묵만이 흘렀다. 잠시후, 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해 티와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아니면 가구들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는 지 어느새 자리에 없었다. 톰은 그들이 있던 곳을 지나서 정원 아래로 내려와 낮은 담을 훌쩍 넘어갔다. 나무 사이를 찾아 헤매다 지친 톰은 한나무 아래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퍼뜩 깨어났을 때, 어쩐지 주위가 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어느새 그저 시간이 지났구나. 하지만 햇빛은 여전히 동쪽에서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도 아침이었다. 톰은 다시 담을 넘어 정원으로 갔다. 해티는 아벨 아저씨든, 그 지독한 부인만 빼고 누구라도 만났으면 싶은 생각에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해시계 길을 돌아 서는데, 길 끝에 온통 새까맣게 입은 꼬마가 보였다. 키가 해티의 반쯤 될까? 그 렇게 작은 꼬마가 검은 드레스랑 검은 스타킹이랑 검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머 리를 묶은 리본조차 검은색이었다. 리본이 풀어져서 머리가 내려온 꼬마는 두손 을 같이 묶고서 슬피 울고 있었다. 톰은 여태까지 이토록 슬퍼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슬그머니 사라져 버릴 까 싶기도 했지만, 혼자 울고 있는 꼬마의 모습에 톰은 가슴이 아팠다. 어쩐지 오늘 아침엔 이 꼬마의 눈물이 자기하고 뭔가 상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원에서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해티뿐이었다. 톰은 부질없 는 짓인지 뻔히 알면서도 꼬마한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꼬마야, 울지 마." 놀랍게도 꼬마는 톰의 목소리를 듣고 살짝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울음을 그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꼬마는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흐느꼈다. "왜 우는 거야?" 하고 톰은 상냥하게 물었다. "흑흑... 집에 가고 싶어!" 하면서 꼬마는 눈길을 삼켰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 어!" 그제서야 톰은 입고 있는 검은 옷과 그치지 않는 눈물속에 담긴 외로운 의미 를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순간, 놀랍게도 톰은 꼬마의 목소리와 말투며 모습이 너무나 눈에 익다는 사실을 느꼈다. 가슴이 아팠지만 톰으로서는 "울지 마."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오, 오빠!" 꼬마는 더욱더 서럽게 흐느꼈다. 톰은 가슴이 뭉클했다. 이 꼬마는 자기를 휴버드나 제임스나 에드가 중의 하 나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는 바로 해티였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해티와 는 너무나 다른 모습의 해티였다. 훨씬 더 어린 꼬마,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 에 엄마 아빠를 잃고 졸지에 오갈 데가 없어진 꼬마, 집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 이, 오직 자기 아들들만 사랑하고, 자기 심장만큼이나 차가운 동정심을 가진 숙 모네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굳이 지금 자기가 사촌 오빠가 아니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또 무 슨 말을 해도 아이를 달랠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톰은 더이 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살며시 걸어 나왔다. 그 뒤로 다시는 어린 해티를 볼수 없었다. 어느날 정원에 다시 찾아갔을 때, 톰은 늘 만나던 해티를 보았다. 그후로는 해티한테 엄마 아빠 얘기 따윈 결코 묻지 않았다. 이따금 해티가 옛날처럼 꼭 자기가 귀양중인 왕족인 양 으시댈 때 도 톰은 잠자코 있었다. 13. 바돌로메 할아버지 이층에서 지내는 시간은 정원에서처럼 그렇게 뒤죽박죽이진 않았다. 나무가 쓰러진 때가 있는가 하면, 쓰리지기 직전의 시간이 온다거나, 어린 시절의 해티 가 나타났다가 금방 다시 현재의 해티로 돌아온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층에서의 시간은 꾸준히 흘러 갔다. 일 분씩, 한시간씩, 하루씩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가야 할 날은 벌써 지났지만, 톰은 아직 이모네 집에 머물러 있었 다. 톰은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룻밤만 자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던 날 밤에 톰은 헛기침을 한 뒤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 내일 집에 안 갔으면 좋겠어." 신문을 읽던 이모부는 더 이상 잡고 있을 힘이 없다는 듯, 신문을 접어서 무 릎에 내려놓았다.차차 신문에서 톰한테로 눈길이 옮겨졌다. "뭐라구?" "내일 집에 가지 않으면 좋겠다구요." 감히 더 이상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톰은 큰소리로 얘기했다. 이모는 놀 라소 소리를 지르며, 반가운 나머지 박수까지 쳤다. "어머나, 톰! 더 있고 싶다구?" "응." "며칠이나 더? 사나흘?아니면 일주일?" "오래 있을수록 좋아."하고 톰이 대답했다. "얘,당장 전보를 보내야겠구나." 하더니 이모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어나 갔다. 집에는 이제 톰과 이모부만이 남았다. 이모부는 호기심에 차서 꼬치꼬치 캐물 었다. "너, 어째서 더 있고 싶은 거냐?" "이모부가 싫다면 갈게요." 하고 톰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철 렁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모부는 아직 톰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냥, 왜 더 이상 있고 싶어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여기에 뭐 흥미를 느낄 만한 게 있던? 사내녀석이 지내기엔 여간 따분한 게 아닐 텐데...?" "그냥 여기 있는게 좋아요." 하고 톰은 중얼거렸다. 이윽고 이모가 톰의 엄마 아버지 한테 전보를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모는 몹시 들떠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얘, 우리 나가서 구경도 하고 소풍도 가자. 이젠 홍역 걱정 안해도 되니까 뭐 든지 할수 있어. 구태여 집안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잖니, 톰." 톰은 말로는 "고마워 이모. "하고 말했지만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차라리 전처럼 집안에 혼자 갇혀 있는게 더좋았다. 진짜 재미있는 생활은 밤에 정원으 로 가서 신나게 노는 일이었다. 낮엔 그저 쉬면서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기도 하고, 앞일을 계획해 보고 싶거도 했다. 가령, 이제까지 정원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거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피터한테 정원 이야기만 잔뜩 쓰면 서. 톰은 굳이 쉬어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낮에 이층에 있는 시간은 어 쨋든 자기한테는 잠들어 있는 시간과 한가지였다. 휴식이 필요했다. 이모는 백화점이랑 캐슬포드 시에 있는 박물관 가게랑 극장에 몇번인가 데려 가 주었다. 톰은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극장에 가는 게 제일 나았다. 깜깜한 어둠속에 눈을 감고 앉아 마음대로 생각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톰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날이 다시 다가왔을 무렵, 뜻하지 않게 날씨가 점 점 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모는 톰한테 비웃기랑 우산까지 씌워 고집스 레 외출을 했다. 그날도 극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모랑 톰은 한참 동 안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다. 버스가 왔을 때 이모가 놀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 고 보니, 톰은 줄곧 물덩이에 서있으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톰, 웅덩이에 계속 서 있었구나. 꽤 깊은 데인데!" 톰은 가슴이 뜨끔했다. 머릿속으로 끝없는 여름 정원위에 뜬 흰 구름을 생각 하다가 그만 발이 물에 잠긴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톰은 그제서야 발이 축축한 것을 느꼈다. "이를 어쩌나... 감기에 걸리지 않아야 할텐데." 그말에 대답이나 하듯, 톰은 엣취! 하고 제채기를 했다. 이모는 부랴부랴 집으롤 돌아와서 톰한테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목욕을 시킨 뒤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감기라는 놈은 일단 손을 뻗쳤다. 하면 시간이 지날 때까지 잘 안놓아 주게 마련이다. 톰은 재깍 독감에 걸렸다. 감기로 며칠동안 앓 아 눕는 바람에 더 많은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게 되었다. 감기가 쉽게 떨어지지 않자,그웬 이모는 오히려 신이나서 언니한테 이직은 톰이 여행하기가 무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톰도 피터한테 편지를 보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홍역 다음으로 신나는 일이야." 늘 그랬듯이 톰은 밤 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정원을 찾아갔다. 거기만 가면 나무랑 식물이랑 푸르른 잔디가 더운 피를 식혀 주는지, 항상 열이 내리고 한기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톰은 언제나 해티랑 같이 놀았다. 물론 낮에는 기분 좋게 침대에 늘어져서 누워 있었다. 그런 톰을 가엾게 여긴 이모부는 체스를 가르쳐 준다고 했지만, 톰은 머리가 근질거린다며 사양했다.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고 이모가 읽어 주는 이야기도 다 싫다고 했다. 맨 처음 아플때는 정말이지 머리가 멍하고, 눈도 꼭 들러붙은 것처럼 잘 떠지 지 않았다. 그러나 톰은 눈을 감고 있는 게 좋았다. 머릿속으로 정원을 들여다 볼 수도 있고, 거기서 해티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볼수 있었다. 이모가 잠시 방 에 들어와 미심쩍은 눈으로 들여다보며 깨어 있는지 알아보려고 조그맣게 톰의 이름을 불렀다. 어렴풋이 그 소리를 듣고 톰은 잠에서 깨어났다. 무엇인지는 몰 랐지만, 뭔가가 마음속에 그려졌다. 떠진 눈꺼풀 앞에 펼쳐저 있는 것은 확실히 자기 방이었지만, 톰의 눈에 어른거리는 것은 그림자 같은 해티의 모습이었다. 그 무렵, 톰의 눈에는 해티의 모습이 자주 비쳤다. 지금 이순간에조차 침대 가 까이에 있는 이모와 톰 사이에 꼭 해티가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톰은 혹시 유령 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톰 은 점점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톰한테 해티가 유려이라 고 얘기해 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할수없이 톰은 혼자서 곰곰히 생각해 볼 수밖 에 없었다. '혹시 해티는 아주 오래전에 이 집에서 살지 않았을까... 여기엔 언젠가, 내가 알고 있는 저 정원이 딸려 있었던 게 아닐까... 해티는 혹시 여기서 살다가 여기 서 죽은 건 아닐까...' 이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말해 주지 않는 바돌로메 할머니의 시계가 아래층에서 무심하게 종을 쳤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톰은 갑자기 숨을 딱 멈추었다. 옳거니, 바돌로메 할머니야! 할머니는 이 집의 과거를 다 알고 있 을 거야. 아니면 언젠가 이 집에 할머니의 남편이 바돌로메 할아버지가 사셨을 테지. 그 할아버지네 가족이 몇대에 걸쳐 이집의 주인이었을 테니까, 그 바돌로 메 할아버지라는 사람은 이 집에 얽힌 역사를 낱낱이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할 아버지는 아마 할머니한테도 이야기 해 주었을 거야. 어쩜 할머니는 아직까지도 그 얘기를 기억하고 계실지 몰라. 톰은 몸이 낫는 데로 할머니를 찾아가리라고 마음 먹었다. 사실 할머니는 사 람들이 모두 겁내는 고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딴 이유 때문에 단념할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아마 내가 대담하게 할머니네 벨을 울리면 , 아마 할머니는 문을 뻬꼼 열고 내다보시겠지. 그러고선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실 거야. 나를 보자마자 할머니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 버릴게 틀림없어. 톰은 옛날 동화 책에서 이런 장면들을 꽤 많이 읽었다. 그때는 도대체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 을까 싶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꼭 그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아이들을 싫어하는 할머니라지만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단박에 날 좋아하게 되실 거야. "어서, 들어 오너라."하시고는 내 앞에 맛있는 과자를 수북히 놓으시고 우아한 탁자 너머로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실거야. 때때로 내가 물어 보면 할머니께서 대답해 주실 거야."해티, 또 해리엇이라고 하는 작은 소녀 말이지?"아, 할머니는 꿈을 꾸듯 말 해 주시겠지."그래, 우리 영감이 언젠가 그 애 얘기를 해줬지. 아! 벌써 언제 적 얘기인지.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통에 데려와서 살게 되었단다. 한데, 그 애 숙모 가 얼마나 못됐는지, 원..." 톰의 머리속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졌다. 그런데 어쩐지 자기가 모르고 있 어야 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공상은 거기서 끝 이 나고 말았다. 할머니한테 직접 얘기를 들으러 찾아갈 때까지 우선은 기다리 로 했다. 마지막에 할머니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이렇게 얘기를 마치시겠지... "그 후로는 말이다. 그 여자애랑 다른 사람들이 죄다. 유령이 되어서 이집에 나타나곤 한단다. 운이 좋은 사람은 시계가 열두 시를 칠 때 일층으로 내려가서 옛날 정원 문이었던 뒷문을 열면, 정원과 그 여자애의 환영을 볼수 있다지, 아 마." 톰은 할머니를 찾아갈 일에만 몰두했다. 이젠 감기도 많이 나아서 이모랑 이 모부가 이따금 같이 얘기나 하자고 톰을 불러내곤 했다. 하루는 톰이 기어 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기..., 바돌로메 할아버지가 이집에 살았을 때는 ..." "응? 이 집에 그런 사람이 산 기억이 없는데."하고 이모가 말했다. "어떻게 생 각해요, 여보?" 이모부가 톰한테 가르쳐 주려다가 실패했던 체스 게임에 푹 빠져서 금방 대답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모, 이집은 할아버지네 집이었잖아? 안 그러면, 그사람이 이 집이랑 유령 얘기를 알 턱이 없잖아? 그럼 이 집에 얽힌 얘기와 유령 이야기들을 어떻 게 바돌로메 할머니한테 해줬겠어?"하고 톰이 말했다. "뭐, 뭐라고,톰?" 이모는 깜짝 놀랐다. "이 집엔 바돌로메라는 사람이 산 적이 없어,"그제서야 앨런 이모부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 이사왔을때부터 할머니 혼자였 어.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지만." "시계는요?" "무슨 시계 말이야?" "거실에 있는 시계요, 할머니 거라고 했잖아요. 그 시계는 원래부터 이 집에 있었다면서요, 아주 옛날부터, 이 집에 정원이 있었을 때부터, 시계는 이 집에 있었던 게 아닐까?" "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니?" 하고 이모가 물었다. 톰이 열에 들떠서 헛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보통때보다 다정한 말투였다. 톰은 어떻게 자기이 비밀을 폭로하지 않고 설명할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그 때 뜻밖에도 이모가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여보, 시계가 옛날부터 있었던 게 맞아요. 벽에 박힌 나사가 녹슬어 있잖아 요." "흠,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군," 하고 이모부가 말했다. 이모부는 톰을 진정시 키려고 톰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계는 네 말대로,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것 같구나. 그리고 그동안 녹이 슬었을 거고. 그 후로는 망가질까 봐 옮길 수가 없었겠지. 바돌로메 할머니가 이 집을 살 때 저 시계도 같이 사야 했던 게 아닐 까? 어때, 톰 그럴 것 같지 않아?" 그때부터 톰은 바돌로메 할머니한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해티가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조차 잘 의식하지 못했던 톰은 어느날 정원에서 해티와 싸우게 되었다. 둘이서 다투기는 진짜 처음이었다. 둘은 '성바울 사원의 계단'이라는 나무 위에다 놀이집을 짓고 있었다. 보통때 처럼 톰이 가르쳐 주는 데로 해티는 가지를 잡아당겨 촘촘하게 엮어서 벽을 만 들었다. 바닥은 벌써 해티가 화분 창고에서 찾아낸 낡은 판자로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 다. 일하는 동안 해티는 시이자 노래이기도 한 민요를 흥얼거리곤 했다. 지금도 해티는 '아름다운 몰리 말론'이라는 민요의 끝소절을 부르는 중이었다. 해티는 계속해서 후렴을 조그맣게 흥얼거렸다. "싱싱한 놈 있어요. 오, 싱싱한 놈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톰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던졌다. "도대체 어떤 걸까? 죽는다느거나 유령이 되는 기분은?" 해티는 노래를 그치고 어깨 뒤로 톰을 장난스레 돌아보더니 웃었다. 톰은 또 다시 물었다. "유령이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어떤 거지?"하고 해티가 되물었다. 해티는 살짝 돌아서서 톰의 무릎에 손을 얹고 빤히 쳐다보았다. "으응, 가르쳐 줘,톰!"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다가 톰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난 유령이 아니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톰." 하고 해티가 말했다. "저번에 잠긴 과수원 문을 뚫고 지나갔잖아. 다 봤단 말야." "바로 그게 내 말을 증명하잖아!"하고 톰이 씩씩댔다. "내가 유령이 아니고 그 과수원 문이 바로 유령이야, 그래서 내가 지나갈 수 있었던 거야. 문도 유령이고 정원도 유령이야. 그러니까 너도 유령이지 뭐야!" "어머, 말도 안돼. 유령은 바로 너라구!" 둘은 매섭게 쏘아보았다. 해티는 분에 겨웠던지 몸을 파르르 떨면서 " 넌 바보 같은 꼬마야!"하고 쏘아붙였다. "치잇, 넌 바보 같은 꼬마 유령이야! 아니면 어째서 그렇게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우리 사촌 오빠들은 정원에서 그렇게 옷 입고 놀지 않아. 그런 옷은 요새 옷이 아니라구. 난 알아! 이상한 옷이야!" "바보같이! 이건 잠옷이야!"하고 톰은 잔뜩 골이 나서 말했다. "제일 좋은 여 행용 잠옷이라구! 잘 때 입는 옷이란 말야. 그리고 이건 방에서 신는 내 슬리퍼 야. 슬리퍼 한짝은 항상 이층문 사이에 끼워 두기 때문에 한쪽 발은 맨발이었다. "흥, 그래서 넌 낮에도 만날 그런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니?" 하고 해티는 비꼬 듯이 말했다 "슬리퍼는 한 짝만 신는게 유행이고? 참나, 기가 막혀서. 정말이지 웃기는 얘기로구나! 넌 요즘 아무도 안 입는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는데다가, 나 한테밖에 보이지 않아. 난 유령을 볼수 있으니까." 왜 톰은 잠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지 아무리 설명해 줘도 해티는 믿지 않을 것 이다. 톰은 포기하고 반박할 말을 생각했다. "좋아, 지금 당장이라도 네 몸을 뚫어서 손을 넣어 보이겠어, 알겠니? 꼭 네가 거기 없는 것처럼 말이야." 해티는 웃었다. "진짜야! 할수 있어. 난 할수 있단 말이야!" 톰이 부르짖었다. 하지만 해티는 손가락으로 톰을 가르키며 잘라 말했다. "넌 유려이야!" 마침내 울화가 치민 톰은 가지를 잡고 있던 해티의 손을 무지막지하게 내려쳤 다. 순간, 엄청난 의지와 힘이 실린 톰의 손은 해티의 손목을 뚫고 지나갔다. 여 느때처럼 공기속을 지나가는 느낌니 아니라 뭔가가 둔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 다. 해티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잽싸게 손목을 움켜 쥐었 다. 아파서라기보다는 자기가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해티는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네 손이 내 손목을 뚫고 간 게 아니야. 내 손목이 네손을 지나갔어! 넌 유령 이야, 잔인한 유령의 손을 가진 유령이라구!" "아직도 모르겠어?"하고 톰은 씩씩대며 소리쳤다. "유령은 바로 너야, 방금 내 가 증명했잖아! 넌 죽어 없어진 유령이라구!"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틈새로 정원 맞은 편에 있는 숲에서 뻐 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그 뒤로 해티가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 다. "난, 죽지 않았어. 톰, 정말이야. 난 죽지 않았어!" 이제 소리 지르기는 끝이 났지만 톰은 결굴 무엇이 진실인지 알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건 오직 해티가 가슴 아프게 훌쩍인다는 사실뿐이었다. 이렇게 애달 프게 울고 있는 해티를 본 것은 일찍이 해시계 길에서 장례복을 입은 어린 해티 가 엄마 아버지를 잃고서 울고 있던 날 이래 처음이었다. 톰은 가만히 해티의 몸을 감싸 주었다. "자자, 이제 됐어, 해티!넌 유령이 아니야. 내 말다 취소할게. 제발 울지마!" 톰은 정성껏 해티를 달랬다. 해티도 결국 눈물을 닦고 가끔씩 훌쩍거리면서 가지를 다시 엮기 시작했다. 그후로 톰은 해티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그 문제 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단지, 얼마간 시간이 흐르로 나 서"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도 유령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해티도 믿어 주는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14. 사실을 밝히기 위해 해티한텐느 유령이 아니라고 믿는다고는 했지만 톰은 어쩌면 해티가 유령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것은 딱 두가지 때문이었다. 첫째는 다 른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해티가 유령 이 아니라면 톰 자신이 유령이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해티와 다투었던 날,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톰은 해티가 따지는 말에 무 척이나 놀랐었다. 소녀답게 옷을 보는 눈썰미가 날카로웠던 해티는 톰한테 그 점을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톰은 자기도 그런 눈썰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톰은 정원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톰은 막연하게 그들이 자기나 이모나 이모부처럼 옷을 입지 않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고작해야 '구식'이라는 게 다였다. 수잔도 해티 네 숙모도 거의 땅에 끌리는 치마를 입고 다녔다. 만일 해티가 유령이었다면, 자연히 그들의 옷도 구식일 것이다. 그 사실을 톰 이 해티한테 증명하려면, 정원에서 볼수 있는 옷들이 정확이 어느 시대의 옷인 지 알아야 했다. 어디서 알아볼까 궁리를 하던 톰은 문득, 이모네 부엌 선반위에 요리채하고 같이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라는 책이 꽂혀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이따금씩 쳐다볼 때마다 아주 매력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마침 이모가 시장을 보러 간 참이라 톰은 그 책을 빼내 왔다. 먼저'의복, 과거의 복장'이라는 목차를 찾았다. '복장,과거'라는 제목 밑에는 아 무것도 없었다. 또,'의복'이라는 제목밑에는 '끼지 않는 헐렁한 속옷'과 '방화복' 등, 톰이 보았으면 아주 흥미 있어야 할 소제목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변화하는 유행의 역사에 관한 항목은 없었다. 톰은 꼭 잔치집에 초대받아서 갔 다가, 안에 아무도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덮으려는 찰나 우연히 쓸만한 내용을 발견했다. "선해은 뼈와 함께 흙 속 에 묻힌다."라는 제목의 페이지에서, 톰은 노르만 정복 때까지 지금까지의 영국 군주들 명단을 찾았다. 언젠가 해티가 영국 군주에 대해서 말했던 일이 생각났 던 것이다. 둘이서 난방실에 쌓여 있는 아벨 아저씨의 책을 볼 때, 해티는 제일 위에 있 는 책이 성경이라고 말하면서, 아벨 아저씨가 '온 영국을 다스리는 여왕처럼' 성 경이 가장 위해한 책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그렇다면 해티는 여 왕이 영국을 통치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과거에는 여왕이 몇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살펴봐야 할 군주들의 범위가 줄어들었까, 가령 12세기,13,14,15세기에는 왕밖에 없었으니까, 해티가 이 시대에 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17세기나 18세기에도 대부분 왕이 통치했으니까 별로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17,18세기의 나머지 부분이나16세 기, 혹은 19세기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톰은 그 책을 도로 갖다 놓았다. 그러고 나서 이모가 외출하고 혼자 있을 때마다 다른 책을 찾아 다니던 어느날, 톰은 이모네 방에서 기가막힌 걸 발견했다. 이모부 침대 가까이에 유리장이 있었는데, 그안에 브리태 니카 백과 사전 전집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의복'을 찾았더니 '고전 의상을 보시오'라고 써 있었다 펼쳐보니까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한 페이지가 몇장이나 있어서 보기만 해도 지겨웠다. 옆에 있는 그 림이 재미 있어서 그것만 보았는데 정원의 사람들이 입은 옷과 일치하는 것 아 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옛날 그림을 보다가 톰은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백과 사전에서 처음으로 바지를 입 고 나타난 사람은 프랑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었는데 그것도 빅토리아 여왕시 대 초기부터였다. 톰이 정원에서 만난 남자는 자세한 건 몰라도 최소한 다들 바 지를 입고 있었다. 딱한사람, 에드가만은 가끔씩 짧은 바지 같은 옷에 스타킹을 신고 있었지만. 이 단서에 흥미를 느낀 톰은 다른 책에서 '바지'를 찾았다 거기에는 그림이 전 혀 없이 짤막한 설명만 붙어 있었다. 책에는 '바지란 무엇인가'라는 설명부터 씌여 있었다. "남자들이 입는 옷의 일종. 양쪽 다리를 따로따로 덮어 싸서 허리부터 발까지 내려온다." 옳거니! 톰은 자기가 바로 찾았다고 생각하고 쭉 읽어 나갔다. 바지를 입게 된 건 19세기 초기인가 보다. 웰링턴 공작이 처음 입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면서 설명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성직자와 대학에서 강한 반대를 받았다. 톰은 이제 논쟁을 할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생각했다. '해티는 남자들이 바지를 입던 시대에 살았던 거야. 그러니까 바지가 유행하기 시작한 19세기 전에는 결코 살수 없었어. 자. 이젠 됐어.' 그리고 이번에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서 나온 구절을 떠올랐다. "19세기에 영국을 통치한 여왕은 1837년에서 1901년까지 즉위에 올랐던 여왕 이다." '해티가 살던 시대의 여왕이 틀림없어. 그리고 바지를 입고 있는 프랑스 상류 사회 사람의 그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건 빅토리아 여왕 초기 시절의 사람이 야. 해티는 분명 이 시기에 살았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100년전 이야기 지. 만약 해티가 그 때 소년이었다면, 지금은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내가 정원 에서 본 건 역시 해티의 유령이었어.' 이제 모든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톰은 생각했다.그러나 좀 더 확실히 하기 위 해 이모부가 좋아하는 식의 질문으로 다시금 따져 보았다. 정원의 여자들이 입 은 긴 치마의 경우는 어떤가? 그건 언제 유행했던 걸까? 그런데 마침 이모가 시 장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톰은 얼른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모한테 긴 치마에 관 해서 슬쩍 묻자. 이모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해 주었다. 음... 1차 세계 대전 때까지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 초기에도 여자들이 긴 치마를 입었어?" "입었고 말고, 그 뒤에도 입었지. 아직도 긴 치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걸?" 하지만 톰은 그런 차마가 언제까지 유행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톰이 알고 싶은 건 과거에 입었다는 사실뿐이었다. 해티가 그 시절에 살았고, 초기 빅토 리아 시절의 유령이라는 증거만 잡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톰이 파악 한 정보를 보면 대충 맞아떨어졌다. 톰은 이제 만족해서 그 일은 더 이상 생각 하지 않기로 했다. 15.담 위에서 본 풍경 톰이 역사를 연구하고 증명을 해나간 것은 정원에서의 시간으로 보면 한참 뒤 의 일이었다. 물론 톰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해티와 싸웠던 놀이집은 거위 소동 이 일어나고 어린 소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본 뒤에 바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톰은 당시 그 소동들이 있고 나서 해티를 영영 못볼 것만 같았다. 정원은 쓸쓸 하고 인기척도 없었다. 톰은 해티를 부르며 늘 숨던 곳을 찾아 다녔다. 다람쥐처럼 움직이는 해티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몇번이고 전나무 주위를 돌았지만 해티는 없었다. 만일 해티가 숨었다면 이전보다 더 깊이 숨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정원에는 수풀들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톰은 남쪽 벽 너머로 부드럽고 잔잔한 여름 공기 속에 연기가 피어 오르는 모 습을 보았다. 아벨 아저씨가 모닥블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톰은 과수원 문 앞에서 또 다시 이문을 뚫고 지나가자고 마음 먹었다. '건너편에 아벨 아저씨가 있다면, 해티가 어디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몰 라'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해티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까지 걱정하던 톰 의 마음은 다짜고짜 신경질로 바뀌었다. 해티의 얼굴엔 우울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고, 오히려 한창 들떠서 신이 나있는 것 같았다. 해티는 빨갛게 상기된 뺨에 숯검정을 덕지덕지 묻히고서 치마 주머니 속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왜 대답 안 했어?" 하고 톰이 따지듯이 물었다. "내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 어? 몇번이나 불렀는데." "빨리 문 열어줘. 나도 모닥불 좋아한단 말야." "우리가 뭘 태웠는지 알면 그렇지 않을 걸?"하고 말하며 해티는 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태우고 있었는데?" 여기서 잠시 기세가 꺽인 해티는 눈길을 떨구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말했 다. "활이랑 화살이야. 하지만, 톰, 아벨 아저씨가 태우자고 했어!" 톰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벨 아저씨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아벨 아저씨는 그 활이 해티를 곤경에 빠드릴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 는데, 실제로 그랬던 것이다. 해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부엌칼은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칼이 날카로워 서 다칠 거래, 활이랑 화살을 태우고 부엌칼을 쓰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조그만 칼을 준댔어." "어떤 칼인데?" 해티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손바닥 위에는 파랑색 리본이 정성스레 묶여 있는 싸구려 연필깍이 칼이 있었다. "아저씨가 시장에서 수잔 언니에게 주려고 샀대. 하지만 수잔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칼을 받으면 안 좋다면서 받지 않았대. 그래서 아저씨가 나한테 줬 어. 이것 봐, 예쁜 칼이지." 해티는 귀엽다는 듯이 칼을 뒤집어 보였다. "열어 봐."하고 톰이 말하자, 해티는 칼날이 톰한테 잘 보이도록 해서 내밀었 다. 날은 한쪽밖에 없었다. "흥,하고 톰은 코웃음을 쳤다. ""이거라면 손을 베진 않겠군 고작해야 버터나 자를까!" 칼자루에 달려 있는 파랑색 장식이 예뻐서 줄곧 눈길을 떼지 않던 해티는 이윽 고 "이걸로 벌써 버터보다 더 딱딱한 것도 잘랐어. 이리와, 보여 줄게."하고 톰을 꾀었다. 해티는 톰을 마터호른이라는 나무로 데려가 줄기를 보여 주었다. 아주 자신만 만한 태도였다. 줄기에는 'H.M'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새 겼다기보다는 반쯤은 긁고 반쯤은 눌러 썼다고 하는편이 어울릴지도 몰랐다. 톰은 'M'이라는 머리글자가 어떤 성을 나타대는지 궁금했지만 물어 보지 않았 다. 그러자 해티가 평소처럼 먼저 말했다. "이건 해티멜번이 나무에 올라갔다는 뜻이야. 나, 이 칼로 상록수에다 몽땅 내 이름을 새겼어. 물론 아차나무만 빼고." "야, 나무에 뭘 새기는 건 나쁜 짓이야. 이건 쓰레기를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 라구!"하고 말하며 톰은 갑작스레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해티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톰을 쳐다보았다. 마치 '쓰레기'라는 말을 처음 들 어 봤다는 듯한 얼굴이었다.'뭐, 그까짓 대수롭냐.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내 맘대 로 해도 된다는' 투였다. "게다가 누가 나무 줄기를 봐봐, 틀림없이 말썽이 생길거야. 'H,M'이라고 쓴 걸 보면 당장에 에 이름이란걸 알텐데 어쩌려고 그러니. 엄청 야단 맞을걸? 나 라면 너처럼 안 해, 차라리 나만 아는 비밀 표시를 하겠어." 톰은 '톰 롱'이라는 이름 대신에 길쭉한 고양이 그림을 생각해 낸 얘기를 들려 주었다. 해티는 무척 부러워했다. "치잇, 멜번은 너무 재미없는 성이야." "바보 해티라는 이름이 있잖아."하고 톰이 말했다. "그러니까 넌 모자 표시를 하면 돼" 그러자 해티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단,나무 줄기에 새기는건 안돼. 그건 안돼 . 아까 내가 말했지. 그보다 우리 ..." 톰은 갑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증나서 말했다. "딴 것 하고 놀자." "그래 그러자." 해티도 찬성했다. 그래서 둘은 다시 정원에서 같이 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정원에서의 놀이는 계속되었다. 둘은 다시 나무에 올라가 신나게 놀았다 해티가 아차 나무에만은 도저히 못 올라 가겠다고 해서, 톰이 손과 발로 기어오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해티는 혹시라도 옷을 버릴까 봐 마음 놓고 따라 하지 못했다. 숙모한테 혼날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해티는 어느새 푹 빠져 버렸다. 얼마 후엔 팔과 다 리로 나무 줄기를 감아서 기어 올라 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아차 나무 위에 까지 올라간 해티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둘은 새로운 놀이도 했다. 해티는 버려진 정원 구석에서 야생 보리도 따오더 니, 어떻게 노는지 가르쳐 주었다. 풀 꼭지를 집어 한손에 잡고 다른 풀에다 대 고 두드리면서 "할머니, 할머니, 침대에서 뛰어 나와요." 하고 되풀이 했다. '뛰어 나와요' 라는 대목에서 좀더 세게 두드리자, 풀 꼬랑이가 초록색 침대에서 허공 으로 튀어나왔다. 해티는 깔깔대며 웃었다. 톰도 따라 웃었다. 또 둘이서 딸기밭의 잎사귀에서 어린 개구리를 ㅉ아냈다. 개구리는 깜짝 놀라 '퐁퐁' 뛰면서 딴데로 도망쳤다. 한 번은 온실 입구에 있는 계단 틈에서 갈색 두 꺼비를 보았다. 두꺼비는 색깔도 계단이랑 똑같은 데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옆구리가 부르르거리는 걸 눈여겨 보지 않으면 꼭 계단 처럼 보였다. 둘은 또 정원의 새들을 골탕먹이기도 했다. 특히 톰은 "왁!"하고 소리쳐서 새 들을 놀라게 하거나, 의심 많은 새들을 골탕 먹이는 데 선수였다. 그러나 둘은 다른 침입자로부터 새들을 지켜 주기도 했다. 해티는 구스베리 철망과 딸기밭에 서 새들을 날려 보내기도 하고, 아벨 아저씨가 멀리 있는 게 분명할 때는 아저 씨가 놓아둔 참새 덫의 문을 열어 주기도 했다. 사촌 오빠 가운데 누구라도 공 기총을 가지고 정원으로 오면, 톰은 그들을 앞질러 뛰어가며 팔을 흔들고 소리 를 질러 새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럴때면 콩밭에서 놀고 있던 비둘기가 느긋하 게 날아 올라 더 안전하게 숲 속으로 숨어 버렸다. 사촌 오빠들은 톰 때문에 아 무것도 맞힐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톰이 대신해서 허리께에 총알을 맞은 적도 있었다. 순간, 해 티는 새파랗게 질렸지만, 톰은 "헤헤!"하고 웃었다. 그냥 간지럽기만 했던 것이 다. 하루는 톰과 해티가 남쪽 벽의 해시계를 쳐다보며 저건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굴뚝새 한 마리가 돌햇살 뒤에서 얼핏 나타나다가 사라져 버렸다. 돌햇살은 벽에 바싹 붙어 있지 않았고 조금 떨어져 있었다. "톰, 저기에 굴뚝새 둥지가 있을까?" 하고 해티가 속삭였다. 톰은 그럴 것 같 다고 생각했지만, 밑에서 보아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옛날에 제임스 오빠가 저 담 위로 걸어갔더랬어." 하고 해티가 말했다. "난 그런 짓 안할거야. 그건 용감한게 아니라 무모한 거야. 이 담은 너무 높고 좁아 져 위험해" "야아. 톰, 너보고 걸어가란 얘기가 아니었어!" 하고 해티가 당황해서 말했다. "제임스 오빤 오기로 그랬던 거야. 에드가 오빠가 막 약올렸거든. 그래서 담 위 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간 거야. 내려와서는 에드가 오빠랑 한바탕 싸우고 병 이 났지. 어휴, 휴버트 오빠가 나중에 그 소릴 듣고 얼마나 화를 내는지. 제임스 는 오빠가 떨어져서 목이라도 부러졌으면 어떡할 뻔했느냐고 말이야." 톰은 잠자코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지금 해티가 한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리 고 '나도 한 번 담에 올라가보자.'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제임스한테 위험했을지 도 모르지만, 자기한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고쳐 먹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담 위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삐거나. 부러질 염려는 없었다. 톰은 이윽고 해티한테 말했다. "나, 해시계 뒤에 둥지가 있는지 보고 올게. 담위로 올라가 보겠어." "어머나, 톰!" 해티가 "어머나, 톰!" 하는 소리가 톰한테는 참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톰은 해티의 손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아무일도 없을 거야." 배나무의 가지를 사다리처럼 타고 톰은 담위로 올라갔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 리, 막상 담 위에 올라서니까 왈칵 겁이 났다. 담은 두뼘 정도 두께밖에 안 되었 고 벽돌이 떨어져 나가서 더 좁은 곳도 있었다. 게다가 덩굴들이 꽤 무성하게 자란 곳 위로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좁고 위험한 길 양쪽으로 담벽이 곧장 깍 아지르고 있었는데, 한쪽은 과수원이고 다른 쪽은 정원이었다 정원에서는 해티 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톰은 담을 똑바로 걸 어가려면 밑을 내려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톰은 눈을 들고 단호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곧 톰은 과수원 출입문 지나 담쟁이덩굴을 해치고 해시계가 있는 곳까지 왔 다. 담과 돌햇살 조각 사이의 틈에 낙엽이랑 정원의 부드러운 잡동사니들이 끼 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한군데만 다른 곳보다 더 두꺼워서, 톰은 담 위 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채 마르기 않은 녹색과 갈색으 이끼 조각들이 얽혀 있는 그곳은 틀림없이 굴뚝새 둥지로, 조그만 출입구 같은 구멍도 보였다. "야아, 굴뚝새 둥지가 있어." 하고 톰은 해티에게 조그맣게 소리쳤다. "그런데 만지지도 못하겠어. 새가 다칠까 봐." "톰! 이제 얼른 내려와!" 톰은 해티의 말대로 돌아가려도 다시 일어섰다. 잠시 거기서 주위를 둘러보니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톰은 마치 땅 위를 걷듯이 자연스럽게 담 위를 걷기 시 작했다. 해티는 밑에서 따라 걸으며 뭐라고 속삭였지만 톰한테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톰은 그만큼 해티한테한테서, 정원에서 멀리 있었던 것이다. 톰은 이제 까지 상록수 위에 올라갔을 때 제일 높이 올라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때보다 더 높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의 경계와 그 안의 울타리까지도 한눈에 마당을 향해 연방 키스를 날려 보내는 모습도 보 였다. 아벨 아저씨가 거기 있는 모양이었다. 안뜰에서 에드가가 핀쳐를 비눗물에 넣고 목욕시키는 모습도 보였다. 핀쳐는 깨끗하긴 했지만, 머릴르 앞으로 쭉 빼 고 귀를 뒤로 젖힌 채 꼬리를 떨구고 있는데 가엾어 보였다. 톰은 유쾌하게 소 리쳤다. "핀쳐, 기운내!" 핀쳐가 그 소리를 들었나 보다. 아니면 톰을 보았거나 냄새를 맡았는지 모르 지만, 비누 거품이 묻은 털을 바싹 곤두세우고 목욕통 안에서 후닥닥 뛰어나왔 다. 에드가가 소리를 지르며 ㅉ아가서 잡았는데, 비누 거품과 물세례만 잔뜩 받 고는 마구 화를 냈다. 저 멀리 정원과 집 너머로 말과 달구지가 터벅거리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 길 너머가 목자이고, 구불구불한 선은 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강은 목장을 지나 마을에 닿고, 하얀 난간이 있는 다리 밑을 흘러, 미끄러지듯이 멀리멀리 흘 러 가고 있었다. 해티와 톰은 모르는 웅덩이랑 물방앗간, 수문과 나룻배가 있는 곳으로 흘러 가는 것일까? 그렇게 강은 캐슬포드와 엘리와 킹스린을 지나 장엄 한 바다로 멀리멀리 흘러 갔다. "톰, 정원 너머로 뭐가 보여?" 호기심 때문에 어느새 두려움도 잊은 듯, 해티는 톰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네가 올라와서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톰이 담위에서 하는 말소리는 정원 구석구석까지 다 들렸다. 해티가 멀리 볼수 있는지, 정확히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평평 한 지역에서는 조그만 높이 올라가도, 마치 산꼭대기에 올라간 것처럼 널찍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제까지 톰은 정원과 그 주변밖에 몰랐지만, 지금 담위에 서서 보니까 마치 자기가 온 세상을 다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톰, 뭐가 보이는지 얘기해 줘." 하고 해티가 밑에서 졸랐다. "응, 여기선 강이 보여. 저 강을 따라가면..." 하고 톰이 말을 꺼내자 "근데? 뭐 가 있는데?" 하고 해티가 소리를 낮추었다. 그때 아벨 아저씨가 구석께에 있는 나무 사이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톰은 하던 말을 마저 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부리나케 해티한테 달려가더니, 다짜고짜 어깨 를 눌러 앉혔다. 톰은 해티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아저씨는 해티의 손에 뭐가 쥐어 주더니만, 해티 앞에 서서 조그만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톰은 뭔지는 몰라도 해티가 아저씨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을 보았다. 해티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눈치였지만, 톰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일인지 젼혀 알수 없 었다. 톰이 서둘러 내려왔을 때는 이미 해티 혼자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하고 톰이 물었다. "아벨 아저씨는 내가 제임스 오빠처럼 담 위에 올라가려는 줄 알았나 봐." 하 고 해티가 말했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못하게 했어." "난 또 아벨 아저씨가 널 때리려는 줄 알았어." "꿇어 앉아서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라는 거야. 절대로 담위에 올라가지 않 겠다고." "아저씨 화 많이 났던?" 하고 톰이 물었다. 해티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 난 아저씨가 하고 빨리 뛰어나와 와락 앉히길래 좀 놀랬어. 그렇지만 아저씨도 굉장히 놀랬나봐. 나한테 성경을 잡으라고 할 때 아저씨 손에 진땀이 나고 부들부들 떨리더라." "하지만 왜 갑자기 네가 담에 올라간다고 생각했을까?"하고 톰이 물었다. "내가 담위를 쳐다보는 걸 보고 그랬나 봐." "아냐, 그렇지 않아. 널 보기 전부터 성경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어." "아마 너한테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나 보지." "아냐, 네가 얼마나 작게 얘기했는데. 게다가 내 목소리는 못 들었을 텐데." 이 말은 톰이 조용히 얘기하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실 톰은 조용하게 말하지 않았다. 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아무리 목청껏 소리를 지르더 라도 아벨 아저씨는 듣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수잔 언니가 나를 보고 아저씨한테 내려가서 얘기해 주었는지도 모르잖 아." "그럴지도 몰라. 나도 수잔 누나가 창가에 있는 걸 보았으니까." 하지만 톰은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이제 해티와 톰은 다시금 놀이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아벨 아저씨에 대 한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16. 나무 위의 놀이집 피터에게 보내는 편지에 톰은 이렇게 썼다. "... 홍역이 다 나아서 다행이야. 너도 여기에 올수 있으면 좋겠어. 우리는 '성 바울 사원의 계단'이라는 나무위에 놀이집을 짓고 있어." 피터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깨끗이 태웠다. 그러 고는 우울하게 뒤뜰로 나가 내키지 않는 아음으로 사과나무 사이에 놀이집을 짓 기 시작했다. "톰이 너랑 같이 놀아 주면 좋을 텐데." 부엌 창문으로 지켜보던 롱 부인이 피터한테 말을 건넸다. 어딘지 톰을 걱정 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모와 이모부는 어련히 알아서 잘 해누랴 싶었지만, 그래 도 엄마로서는 마음 한구석이 왠지 찜찜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이모네는 톰의 집보다 형편이 좋다.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 집과 하나도 없는 집에는 우선 음식 이나 교육비비 등 지내다 보니까. 혹시 돌아오기가 싫어진 건 아닐까. 그러나 그 런 말은 없었다. 롱 부인도 그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톰이 엄마 아버지한 테 보내는 편지에는 언제나 이모네하고 지내는 게 지루하가는 간단하고 형식적 인 얘기뿐이었다. 식사 시간도 이젠 처음처럼 즐겁지 않고, 재미있는 일이 하나 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이모네 집에 더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접이 영 이상했다. "여보, 거기엔 다른 애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날 저녁에 롱 부인은 남편한테 말했다. "그렇다고 톰이 딴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피터, 네 편지에는 다른 얘기 없었니? 무척 긴 편지던데." 피터는 눈길을 떨구었다. "아파트에서 지낸다는 얘기밖에 없어." "허허, 톰 녀석, 집에 돌아오면 혼자서 방 안을 헤매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 야." 하고 롱 씨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렇지, 피터?" "어쨋든 학교 때문에 집에 와야지 뭐, 내가 홍역을 앓는 바람에 여름 학기 마 지막에 학교도 못 갔으니까. "가을 학기 시작할 때라니!" 하고 롱 부인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전에 데려와야 해, 피터!" 피터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자 엄마는 얼른 덧붙였다. "설마 너,형도 없이 여름 방학을 하 보내고 싶진 않겠지?" "저어... 하고 피터는 말을 꺼내며 엄마가 자기 생각을 물어 주기를 기다렸다. "응, 뭔데?" "있잖아... 형이 아직 안오고 싶어하면, 내가 이모네로 가도 되지 않을까..." 롱 부인은 놀라서 아들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참 나, 정원도 없는 갑갑한 집에서 사내녀석 둘이 도대체 뭘 하겠니?" "거기서 형이랑 같이 지내고 싶어." 하고 피터는 고집스레 말했다. "허허 녀석, 네말은 형하고 같이 있고 싶다는 거겠지. 형이 집에 왔으면 좋겠 다고, 응?"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너 진짜 그 집에 가고 싶어?" 하고 다시 엄마가 말했다. "응 가고 싶어!"피터는 떼라고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가고 싶단 말야! 자다가 깨서 형한테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걸. 그럼 진짜 형이랑 같이 있는 꿈을 꿔. 가고 싶어. 엄마! 가고싶단 말야!" "하지만 피터, 왜?" 하고 엄마가 물었다. 피터는 눈을 아래로 깔고 고집스런 목소리로 "그냥, 가고 싶어." 하고 똑같은 말만 할 뿐이었다. 이야기는 거기서 결론 없이 끝났다. 그날 밤에 롱 부인은 피터와 톰이 같이 쓰던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보통 때처럼 문이 조금 열여 있길래 안을 들여다보 았더니, 피터는 아직 깨어 있었다. 바깥의 가로등 불빛을 통해 벽난로 위에 붙여 놓은 그림 엽서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톰이 보내준 그림 엽서였다. 롱 부 인은 살며시 내려왔다가 두 번, 세 번 다시 가보았다. 세 번쩨 올라갔을 때, 피 터는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롱 부인은 방으로 들어가 피터의 얼굴을 들여 다보았다. 꿈을꾸고 있는지 잠을 자면서도 표정이 변했다. 한 번은 웃다가 금방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 또 한 번은 넋이 나간 듯이 보여서, 깨우려다가 그만두고 방에서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조그만 창문 사이로 뒤뜰을 내다보던 롱 부인은 언뜻 사과나무 옆에서 뭔가를 보았다. 바로 피터가 놀이집을 지으려고 가져다 놓은 나무였다. 사정을 모르는 롱 부인으로서는 전혀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피터의 작업은'성바울 사원의 계단' 나무집 만큼 많이 진척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톰의 나무집은 적어도 집보다 먼저 시작되었으니까. 그날도 톰은 피터에게 편지를 썼다. "해티는 요즘 집을 짓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나무집을 짓는 걸 얼마나 좋아 하는지 몰라." 톰은 해티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해티는 지나칠 만큼 나무집에 몰두했다. 이 를테면, 이 나무집만이 자기 집이라는 식이었다. 저택은 숙모와 사촌 오빠들 집 으로, 해티는 단지 거기서 살고 있기만 할뿐 진짜 자기 집은 여기뿐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 나무집은 해티만의 집이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해티는 자신의 장난감 찻잔들과 빈방에서 몰래 가져온 물건들로 나무집을 꾸밀 계획을 세우며 꿈을 꾸 듯이 중얼거렸다. 톰은 깜짝 놀랄서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또 해티는 나무집이 정원에서 제일 숨기 좋은 곳이라고 좋아했다. "내가 여기는 있는지 아무도 모를 걸. 집 짓는 걸 아무도 못 봤으니까." "아벨 아저씨도 못 봤어?"하고 톰이 물었다. "아암, 물론이지. 아저씨도 감쪽같이 속았을걸, 내가 여기에 뭘 가져오는지 상 상도 못할 거야. 눈에 띄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하는데." "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좋아."하고 톰이 말했다."뭐 하기야. 아저씨가 날 본 적도 없지만." "그래." 하고 해티는 대답했지만, 전에 서로 유령이라면서 싸웠던 일이 생각나 얼른 그얘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벨 아저씨는 나무집에 대해서 진작부터 알고 있었 다. 그날 오후 아벨 아저씨는 딸기밭에 철망을 치면서 정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 었다. 해티와 톰은 언제나 아벨 아저씨와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 고 나서야 나무집으로 올라갔다 지금 정원에서 아벨 아저씨 혼자 뿐인데다가. 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둘은 안심하고 나무집으로 올라갔다. 이제 나무집은 다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해티는 더 욕심이 나는지"하면서 창문은 지금 살고 있는 집처럼 타원형이어야 한다고 우겨댔다. "야, 너무 욕심내지마." 하고 톰이 핀잔을 주었다.그래서 해티는 눈치를 보며 혼자서 창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창문은 두 개였다. 그것은 창문이라기보다는 거칠게 판 구멍이었다. 해티는 창문 가장자리에다 작은 나뭇가지를 엮고, 창문이 매끈해질 때까지 손질을 하고 또 했다. 톰은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해티가 빨리 저 일에 싫증을 내기만 바 랬다. 뭐, 젼혀 창문 같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저걸 빨리 그만둬야 재미있는 놀 이를 할 수있을텐데. 창문은 군함의 포문이고 이 집은 바다위에 떠 있는 선장의 집이라고 생각하면서 놀텐데. 저러고만 있으니... 하지만 해티는 좀체로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바람이 나는지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그러던 해티가 잠시 노래를 그치고 톰을 불렀다. "톰, 여기에 쪼개진 가지가 있는데 괜찮을까? 그 위에 앉아 본 적 있어?" "쪼개진 가지?" 하고 톰이 말했다. "응, 앉아 봤어." 해티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하고 톰이 덧붙였다. "난 너하고 다르잖아. 너는..." 바로 그때였다. 톰은 보지 못했지만 해티가 올라서자마자 쪼개진 가지가 부러 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해티가 "앗!"하고 외치는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그러고는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째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났다. 가늘고 높은 해티의 비명 소리는 순식간에 온 정원을 뚫고 지나갔다. 작은 새 들은 놀라서 이리저리 날아 오르고 빨간 다람쥐는 개암나무 위로 기어올라 나뭇 가지에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그러나 이 난데없는 사태에 누구보다도 놀란 것 은 아벨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안고 있던 철망을 내팽개치고 성바울 나무 쪽으 로 뛰기 시작했다. 톰은 나무위에서 고양이보다 더 가볍게 해티 옆으로 뛰어내렸다. 해티는 기절 을 했는지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떨어지면서 바람에 날린 앞치마가 위로 올라와 이마를 덮고 있는 곳에서 마침내 빨간 피가 베어 나왔다. 톰이 아무것도 못 하고 멍청히 서 있는 사이에 아벨 아저씨는 헐레벌떡 뛰어 왔다. 아저씨는 피를 보고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해티를 덥석 안고 집으 로 향했다. 톰은 무턱대고 아저씨를 따라갔다. 그런데 갑작스레 아저씨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반쯤 틈며 고 개를 홱 돌렸다. 사고 때문에 겁에 질려 있었으면서도 톰은 아저씨가 자기를 보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는 톰을 똑바로 쏘아보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꺼져 버려!" 톰은 아벨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마,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 난 네가 누군지 다 알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단 말야. 차라리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척하는 게 낫다 싶었는데. 나쁜 자식. 네놈의 정체를 내가 모를 것 같아?" 톰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저씨가 자기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대답도 해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 아저씨!"하고 톰이 소리쳤다. "해티가 살아 있어요? 아니면, 주... 죽었나 요?" "나쁜 놈 같으니라구. 넌 엄마 아빠도 없는 이 불쌍한 애를 죽이려 했어. 악마 의 활과 화살로, 칼로, 또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다시 말하지만, 썩 꺼져 버려!" 톰이 안ㄱ고 그냥 있으니까 아저씨는 해티를 안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고는 뜰을 지나 집으로 가면서 숨차게 기도문을 외웠다. 언제가 빵을 먹고 나서 하던 그 기도문이었다. "... 악마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저를 지켜 주시고, 상치 못하게 하소서." 뒷걸음질 치던 아저씨는 잠시 비틀거리며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톰 한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계단을 올라가 안으로 들어갔다. 쾅!하고 문 이 닫히더니 안에서 빗장을 잠그니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짜고짜 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붙자고 난폭하게 밀어젖혔다. "아저씨, 아저씨! 나 좀 들어가게 해 줘요! 제발 부탁이예요." 톰은 미친 듯이 부르짖고 애원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중에는 "해티! 해 티!"하고 불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톰의 목소리를 들 을 수 있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톰을 안에 들여놓지 않으려 했고, 또 한 사람은 들여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7. 해티를 찾아서 현관무에서 미치 듯이 문을 두드려 대던 톰은 마침내 문에 기대어 흐느껴 울 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괘종 시계가 담담히 종을 치는 소리와 멀리 이층에서 왁 자지껄 떠드는 말소리와 서두르는 발짝 소리가 들려 왔다. 톰은 문을 열 수 없었다. 온 힘이 다 빠져 버린 후에야 그 문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그때는 이미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상태였다. 톰 은 이제 해티한테도 갈 수 없고, 이모네에 있는 자기 방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 러나 자기 일보다는 해티가 더 걱정 스러웠다. 톰은 다시 잔디밭을 지나서 상록수나무 사이의 후미진 곳으로 갔다. 지금으로 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정원으로 나오는 문이 열리고 아벨 아저씨 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톰은 곧장 아저씨한테 달려갔다. "아벨 아저싸, 제발 말씀해 주세요. 해티는 어때요?" 톰은 아벨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톰을 지옥 에서 온 꼬마 악마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사내아이로 변장하고 해티를 불행에 빠뜨리려 퍼부으며 기도와 성경으로 쫓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벨 아저씨는 톰을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고, 톰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벨 아저씨! 아벨 아저씨! 아벨 아저씨!" 하고 톰은 애걸하듯이 말했다. "해 티는 죽지 않았겠지요, 네? 죽지 않았지요?" 겨우 아벨 아저씨의 눈꺼풀이 깜박거리더니, 딱 한순간이었지만 톰 쪽을 바라 보았다. 소년의 얼굴에는 나무타기를 하느라 뽀얗게 묻은 먼지 위로 두 줄기 눈 물 자국이 또렷이 나 있었다. 그것은 피로와 두려움에 지친 흔적이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도저히 악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는 너무나 어린 소년다운 그 모 습에 아벨 아저씨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였다. 아벨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그래, 살아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눈길을 앞으로 돌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톰의 톰의 옆을 지나 화분 창고 쪽으로 갔다. 여름이면 늘 문을 열어 두던 습관대로 아벨 아저씨는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그냥 열어 둔 채 가버렸다. 톰은 다시 침대로 자러 갈지 아니면 해티를 찾아보 러 갈지 아직 마음을 못 정한 채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스레 결정이 났다. 톰이 거실을 걸어가는데도 가구가 눈앞에서 사 라지지 않았다. 박제 동물들은 유리장 안에서 유리로 된 눈으로 톰을 굳게 쳐다 보고 있었고, 습도계의 눈금은 '매우 건조'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톰은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았다. 5시 11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괘종 시계바늘 뒤로 전 에 있었던 그 그림이 다시 보였다. 해티 걱정을 하면서도 톰은 그 그림에 사로 잡혔다. 지금까지 알았던 것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새 로워 보였다. 톰은 책을 펼쳐 들고 바다와 땅 위에 서 있는 그림의 주인공이 누 구인지 잘 모르면서도, 어렴풋이 그 그림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머지 않아 확 실히 알게 될 것이다. 톰은 괘종 시계에서 돌아서서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놋쇠 막대기로 한계단마다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 고 한 계단 또 한 계단, 부드럽게 이층까지 쭈욱 깔려 있었다. 톰은 계단으로 발을 옮기다가 자기가 지금 무얼 하려는 걸까 생각하고 멈춰 섰다. 톰은 해티의 왕국과도 같은 정원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건 톰과 해티와 아 벨 아저씨, 세 사람만이 살고 있는 왕국이었다. 다만, 아벨 아저씨는 톰의 존재 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톰은 그 왕국을 떠나 멜번 가족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미 멜번 가족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톰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단 끝에 멤번 가족들의 모자와 코트, 망토를 걸어 놓은 옷걸이가 오 른쪽에 있었다. 그 옆에는 신발장이 있었다. 삐죽 열린 틈으로 부츠, 구두, 슬리 퍼, 무도회용 구두, 방수 장화 등의 신발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또 옷 걸이 반대 편엔 장식장이 있었다. 그 위에는 겉표지가 딱딱한 두 권의 장부와 조그만 잉크 병과 구식의 검정색 둥근 자가 놓여 있었다. 누구의 것일까? 장식 장 바로 옆에는 언젠가 수잔이 장직이랑 성냥을 들고 들어왔던 문이 있었다. 문 안쪽에는 여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뚜렷하 지 않았다.하지만 그 중 하나는 수잔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톰은 무척 낯설고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여기엔 해티가 없었다. 어쩌면 해티는 아무데도 없을지 모른다. 톰은 두려웠다. 아벨 아저씨가 "살아 있어"라고 말했지만 그건"겨우 살 아 있어. " 나 아니면 "살아 있는데, 오래 가지는 못할 거야."하는 뜻일 수도 있 었다. 전에 톰은 여러 가지를 조사해서 해티가 유령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 는데 만일 그렇다면 유령이란 반드시 그 전에 죽었어야 하니까 해티도 언젠가 죽어 버렸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톰의 추리는 불안 과 혼돈 속에서 맴돌았다. 계단으로 다가가 발을 디딜 때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톰은 용감한 아 이였지만, 만일 그때 뒤에서 괘종 시계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마지막 순간에 용 기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는 꼭 사람의 심장이 팔딱 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순간, 톰은 해티 생각이 나서 눈을 질끈 감고 곧장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다 올라갔을 때 톰은 지금까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멜번가의 집 에 서 있었다. 톰은 이집이 자기 이모네와 다른 사람들이 세들어 살고 있는 집 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입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나게 할 만한 것 은 하나도 없었다. 톰이 살고 있는 이층에는 두 집에 딸린 현관이 하나씩 있고 그 사이에 복도가 있었지만, 멜번가의 층계참은 톰이 잘 알고 있는 그 복도보다 훨씬 넓고 몇몇 침실로 통하는 문들이 있었다. 삼층 바돌로메 할머니네로 통하는 작은 계단은 이 멜번가에서는 삼층에 있는 세 방으로 올라가는 작은 층계참이었다. 톰은 맨 처음 층계참을 바라다보았지만. 어느 방문이나 다 잠겨 있고 삼층의 세 방으로 가는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도대체 해티는 어느 문 뒤에 누워 있을 까? 도무지 짚이는 데가 없어서 톰은 제일 가까운 문부터 들어가 보기로 했다. 숨 을 크게 쉬고 온몸을 바싹 긴장시킨 채 방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해티는 그곳에 없었다. 침대와 가구가 천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손님용 침 실인 것 같았다. 방의 창문을 통해 톰이 머리를 디밀고 있는 위치에서도 상록수 꼭대기랑 덩굴이 우거진 키다리 전나무가 보였다. 이때는 해티를 찾고 있는 중 이라서 무심코 지나쳤지만, 더 나중에 가서 톰은 이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톰은 머리를 꺼내고 나서 이젠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해티를 찾을 때까지 방문마다 머리를 들이밀까 볼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어 리석은 방법 같았다. 벌써부터 지쳐서 귀가 윙윙거리고 눈도 따가왔다.게다가 문 밖에 남아 있던 배까지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해티가 마지막 문뒤에 있 다면 톰은 도저히 거기까지 가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는 좀 비겁한 수를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톰은 열쇠 구 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귀를 기울였다. 세 번째 열쇠 구멍까지 가자 안에 서 아주 브드럽고 율동적인 소리가 났다. 삭삭삭...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열쇠 구멍으로 물둥이랑 세면대랑 긴 레이스 커튼이 창문과 의자를 약 간 가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어쨋든 해티가 아파서 죽어 가며 내는 소리는 아니라 고 생각했다. 다음 문을 들여다보려고 돌아서다가, 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어쩌면 저건 정신을 잃은 해티가 손으로 이불을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아닐까? 톰은 소리가 나는 방문에 머리를 들이밀어 보았다. 눈썹까지 문으로 들어간 찰나. 뒤에서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문에 걸린 채 붙 잡히게 될까 봐, 톰은 얼른 머리를 빼고 돌아섰다. 한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톰이 아래층 거실에서 보았던 장부를 팔에 끼고 잉크병과 자를 손에 든 모습이 꼭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직장인 같았다. 이 사람은 누굴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생김새로 봐서 영락없이 멜번 씨네 식구일 것 같았다. 남자는 곧장 톰 쪽으로 걸어왔지만 톰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 는 톰이 방금 들어가려던 문앞에 서서 점잖게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식사하는 소리가 멎었다. "누구냐?" 하고 소리가 나자 톰은 대번에 해티의 숙모라는 걸 알았다. "제임스예요." 제임스? 톰은 깜짝 놀랐다 요전에 정원에서 제임스를 보았을때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톰의 시간으로는 아주 잠깐 사이인데도, 멜번네에서는 제임스가 어 른이 되고 사업가가 될 만큼 시간이 흐른 걸까? 확실히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제임스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벌어진 건장한 모습에 아주 새로운 칼랄르 달 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어오너라." 하고 숙모가 말했다. "머리를 빗고 있는 중이니까." 제임스가 안으로 들어가자 톰도 따라 들어갔다. 결코 톰이 호기심이 많거나 뻔뻔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제임스가 문을 열며 "해티는 어때요?" 하고 물었기 때 문이었다. 제임스와 톰은 나란히 방 안에 들어와 섰다. 딱 한 번, 제임스는 미심쩍은 눈 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혼자였는데 꼭 누군가가 옆에 서 있는 것 같 았나 보다. 화장대 앞에 해티네 숙모가 서 있었다. 허리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갈색 머리를 꼭대기부터 끝까지 빗질을 해 내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섞여 있는 모습으로 봐서, 해티의 숙모한테도 역시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숙모는 제임스의 질문에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빗질을 다 마치자 이번에는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끝없이 손을 움직이면서 그 여자는 차갑고 무심하게"해티 는 괜찮아 질게다."하고 말했다. "의사가 그렇게 말해요?" "응." "고마운 일이군요." "고맙다니!" 머리를 잡은 채 해티의 숙모가 고개를 돌렸다. "고맙다니! 해티가 뭘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나무를 오르고 있었어. 다 큰 여자애가 할 짓이냐?충 분히 알만한 나이인데. 도대체 뭐야." "해티는 자기 또래 애들보다 어려요, 너무 혼자만 있어서 그렇겠죠, 뭐. 늘 정 원에서 혼자 놀잖아요."하고 제임스가 말했다. "넌 항상 해티를 싸고 돌더라!" 하고 해티의 숙모가 소리쳤다. 마치 아들을 비 난하는 투였다. "해티는 절대로 철이 들지 않을 거다!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원. 이제 나도 모르겠다. 하기야 지금도 이상한 애지만." 해티의 숙모는 다시 거울 쪽을 보며 땋은 머리를 손질했다. "해티도 철이 들어갈 겁니다." 하고 제임스가 말했다.화가 난 엄마를 대하는 제임스의 태도에 톰은 감탄스러웠다. "하지만 다 컸을 땐 저 애를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나한텐 더 이상 기대하지 마라. 이미 할 만큼 다 했으니까." "나한텐 더 이상 기대하지 마라. 이미 할 만큼 다 했으니까." "해티가 어떻게든 혼자 벌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면 결혼을 해 서 살든가. 그렇더라도 이 애는 집하고 정원밖에 모르는데. 아무도 안 만나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내가 죽더라도 그 애가 이 집 주인 행세를 하게 하진 않을 게다." "내가 죽더라도 그 애가 이 집 주인 행세를 하게 하진 않을 게다." 해티의 숙모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울 속에 비친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너희들도 이젠 다 커서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꾸려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독립을 하겠지. 그거야 좋은 일이다. 하나 미리 말해 두지만, 누구든 앞으로 해티와 결혼할 생각을 한다면 나한테서 한푼도 기대하지 마라. 휴버트는 그 애한테 눈길도 주지 않아. 에드가도 그 앨 싫어해. 한데, 너만 그 애를 불쌍하게 생각하니까 하는 말이다. 침묵 속에서 톰은 차라리 제임스가 아주 당당하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전에 는 해티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듣고 보니 좋은 생각 같군요. 어머니가 뭐라고 하셔도 저는 이 다음에 해티와 결혼하겠습니다. 어머니가 안 도와 주셔 도,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겠습니다."하고. 하지만 제임스는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한숨을 살짝 쉬더니 "저느 해티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저 앤 정말이지 불쌍해요."라고 했다. "흥. 불쌍하기야 하지." 하고 해티네 숙모가 쌀쌀맞게 말했다. "어머니, 제발 부탁이에요. 해티도 많이 컸어요. 집이나 정원에서 노는 것보다 도 더 많은 세상을 접하게 해줘야 해요. 사람들도 사귀어야 하고. 친한 친구도 필요합니다." "무슨 소리냐. 그 애가 정원에서 혼자 놀기를 좋아한다는 건 너도 잘 알잖니." "그러니까 그러지 못하게 해야죠. 보세요. 제 친구들이 와도 겁이 나서 숨어 버리잖아요. 사람들이랑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해줘야 해요. 파티에도 같이 놀기 도 하고, 강에서 보트도 타고, 소풍도가고, 축구 경기도 구경하고, 카드놀이도 하 고,크리스마스 캐럴도 함께 부르러 다니고, 스케이트를 탈 때..." "그 앤 자라는 걸 원하지 않아. 그저 정원에만 있고 싶어하지." "우리가 다른 것도 하게 해줘야지요. 어머니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얘기할께요. 병이 다 나으면 앞으로는 쾌활하게 지내시라구요. 식구들 모두다, 해티가 밖에 나가서 친구들을 사귀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식구들 모두? 톰은 거울에 비친 부인의 얼굴을 보았지만 차가운 반대의 빛이 스치고 있을뿐이었다. "어머니도 바라신다고 해도 되겠죠?" "그럼 어머니도 양해하셨다는 말은 해도 되겠죠?" "너 좋을 대로 해라. 난 그 애를 안 보면 안 볼수록 좋으니까." 부인은 거울 속의 아들도, 눈앞의 아들도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 는 방에서 물러나왔다. 톰도 제임스와 함께 따라 나왔다. 제임스는 마지막 문으 로 가서 똑똑 두드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제임스와 해티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톰은 밖에서 기다렸다. 제임스의 목소리 가 낮아졌다 하며 들려왔다. 마치 오래 몸져 누워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부드 러운 말투였지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임스의 긴 얘기를 다 듣고 있는 걸 보니, 해티의 부상은 걱정했던 것처럼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 았다. 18. 창살 쳐진 창문의 침실 마침내 제임스가 나와 해티 방문을 닫고 그의 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 다. 톰은 제임스의 방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가, 해티의 방문에 기대고 몸을 밀 어 넣었다. 해티는 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톰, 천천히 들어와. 어떻게 들어오는지 보고 싶어." "이건 빨랑빨랑 하는 게 진짜야." 하고 톰은 말했다. 하지만 자상한 톰은 해티를 위해 천천히 문을 뚫고 들어와 카펫위에 섰다. 오 히려 그렇게 들어와 보니까 더 편했다. 해티는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열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도 할수 있으면 좋겠어!" 해티는 톰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톰은 잠시 해티를 눈여겨 보았다. 확실히 처음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들 었다. 해티도 사촌 오빠들만큼 컸는데 이제까지 톰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다. 너무 자주 만난 것도 아니고 이런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한 탓도 있었다. "좀, 어떠니?"하고 톰은 물었다. 더 이상 해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았다. "아주 좋아. 게다가 의사 말이 상처도 없을 거래. 방금 제임스 오빠가 왔다 갔 는데 이젠 나무 타는 거말고 다른 놀이를 하라고 했어." "그럼, 이젠 나하고 같이 안 놀 거야?" "아니야, 톰.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돼!" 해티의 말투에 왠지 어린 동생한테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톰, 여기 앉아서 얘기해." 하고 해티가 말했다. "야아, 네 방 참 좋구나." 아름다운 멜번가에 있는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이방도 무척 넓었다. 해티으 방에는 큰 벽장 하나와 침대 옆에 커다란 창문 두 개가 있었다. 그런데, 창문 아 래쪽에는... "어, 창문에 창살이 있네."하고 톰이 말했다. "에이, 꼭 애들 방처럼." 언젠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말한 것 같기도 한 그 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 처럼 울렸다. 저 창살은 꼭 어딘가에서 본적 이 있는 듯했다. "옛날엔 애들 방이었어." 하고 해티가 말했다. "사촌 오빠들이 어렸을 때 쓰다 가 나한테 물려준 방이야. 내가 제일 꼬맹이라소 이 방을 쓰게 된거야." 톰은 최면에 걸린 듯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아 니, 어느 한쪽 창을 본 적이 있어. 아니, 그렇지 않아. 두 개 다왔지만, 따로따로 보았던 것 같아. "이 집의 목욕탕은 어디 있니?" 하고 톰이 물었다. "목욕탕?" "어디서 목욕하는데?" "난 내 방에서 하고, 오빠들은 각자 자기 방에서 하지." "여기서?" 하고 톰은 방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떻게?" "왜? 수잔 언니가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퍼다 주면 양철 목욕통에서 해. 겨울 엔 불을 피우고 불 옆에서 목욕하고." "그럼 여기다 목욕탕을 만들면 좋겠다." 마치 어디선가 그렇게 한 걸 본 적이 있는 것처럼 톰이 말했다. "이방 중간쯤에다 칸막이를 하면 양쪽에 다 창이 있게 되잖아. 그럼 이쪽은 그냥 네 방으로 쓰고, 저쪽은 목욕탕으로 쓸 수 있을 텐데." 해티는 참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휴, 그렇게 하면 방이 쪼개지잖아." "응, 그렇기는 해." 하고 톰이 말했다. "또 탄막이가 얇으면 네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옆방에서 목욕하는 소리가 다 들릴 거야." "그런 소리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해티는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래, 넌 그럴 것 같아." 하고 톰이 말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몰라." 톰은 창문께로 걸어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창가에서는 멀리 있는 풍경까지 내 다보였다. 처음엔 정원 너머 한구석에 있는 터다란 너도밤나무로 가던 톰의 눈 길이 점점 울타리와 길 너머로, 또 다른 울타리로, 커다란 느릅나무가 서 있는 목장으로 내달았다. 톰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네 방이 더 좋다. 경치가 참 맘에 들어." "그래, 목장 너머 강이 보이지?" 하고 해티가 물었다. "그런데, 톰. 뭐보다 더 좋다는 거니?" "응, 건너편에 집들만 따닥따닥 보이는 것보다 더 좋다구." 해티는 큰 소리로 웃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톰. 그럼 우리가 변두리가 아니라 시내에 사는거게?" "그래, 마을이 굉장히 커지면 시가 되는 거야." 톰은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넌 얼마 만에 목욕하니, 해티?" "음, 일 주일에 한 번. 넌?" "이틀에 한 번씩. 하지만 차라리 목욕을 자주 못 해도, 이런 방에서 멋진 경치 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티는 어리둥절해서 톰을 쳐다보았다. 무엇보다도 톰의 말에 일관성이 없고, 왜 갑자기 톰이 슬픈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톰, 왜 그래?" 톰은 '과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멀리 가져간 과거를... '시간' 은 해티의 '현재'를 붙잡아 톰의 '과거'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잠깐이긴 하지 만, 지금 그것은 여기서 톰의 현재이기도 했다. 톰과 해티의 현재인 것이다. 어 떻게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톰은 자기의 시간과 해티의 시간을 재고 있는 괘종 시계가 생각났다. 그리고 시계찬의 그림을 떠올렸다. "해티, 괘종 시계의 그림이 무슨 뜻인지 알아?" "응, 그건 성경에 있는 이야기야." 톰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해티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려운 이야기야. 나, 잊어버렸어... 내용이 하도 어려워서,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 알고 싶다면 내가 알아볼게." "그래, 고마워. 누구한테 물어 볼 건데?' 해티는 언제나 그렇듯이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괘종 시계한테 물어 보지. 거기에 써 있거든." "어디에?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넌 볼 수가 없었을 거야. 글씨가 너무 밑에 있어서 유리문에 가려져 있거든. 읽으려면 유리문을 열어야해." "시계추 상자 안에 유리문을 여는 고기가 있지?" "그래.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런 걸 아니?" "그냥. 시계 열쇠는 누가 갖고 있는데?" 해티는 또 미소를 지었다. "시계가 갖고 있지. 열쇠는 항상 열쇠 구멍에 꽂혀 있단다." 톰은 깜짝 놀랐다. "그럼 누가 열지도 모르잖아!" "열쇠를 쓰는 건 숙모뿐이야. 다른 사람은 아무도 시계를 못 만져." "하지만 낯선 사람이 집에 오면 어떡해? 호기심이 아주 많은 소년이 온다면?" 해티는 톰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티는다음에 아래층에 내려가서 아무도 없으면 시계판의 문을 열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면 톰이 직 접 읽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화제를 바꾸었다. 톰이 생각에 잠겨 조용히 있으니까 해티는 톰을 즐겁게 해주려고 아기방 이야기를 꺼 냈다. ...슬레이트로 된 앞창문에 있는 덧문 밖에서 박쥐들이 낮에 잠을 잔다. 덧문을 접으면 회색 거미줄과 마른 등나무 잎과 먼지 사이로 까만 박쥐가 거꾸로 매달 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어느날 밤, 우연히 박쥐가 조그만 검은 유령처럼 내 방으로 들이닥쳐서, 난 그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더랬어. 언젠가 수잔 언니가 그랬거든. 박쥐는 머리가 긴 사람을 무서워해서, 머리카락에 다 막 자기 몸을 엉키게 한다고(여기서 얘기를 듣던 톰이 잠시 웃자 해티도 웃 었다). 여름엔 등 나무 덩굴이 창문 꼭대기까지 자라서 초인종 줄을 친친 감아 버린 적이 있었어. 숙모가 그걸 보고 잘라 버렸지만. 어떤 때는 밤에 자려고 조 용히 누워 있으면, 벽 뒤로 쥐들이 뛰어 다니는 소리도 들렸단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쥐들이 들판에서 집으로 몰려와 유난히 극성을 피우고 난리였거든. 아마 먹을 게 없어서 그랬나 봐. 응... 또 벽장 이야기도 있어... 해티는 톰에게 벽장을 보여 주려고 침대에서 뛰어나왔다. 벽장은 옷을 거는 곳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해티가 손톱으로 방바닥의 판자를 끌어내 들어 올 렸다. 판자 밑의 공간에는 해티의 보물들이 있었다. 해티는 시내에서 사온 것이 라면서 날 이 한쪽밖에 없는 칼과 그림 물감 한 상자랑 작고 빛바랜 갈색 사진 을 가리켰다. "우리 엄마 아빠가 젊엇을 때 사진이야. 톰, 기억나니? 우리 엄마 아빠가 왕과 여왕이라고 했던 거." 그러고 나서 해티는 부리나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층계참에서 발짝 소리가 났던 것이다. 여름 황혼은 어느덧 방 안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수잔이 등불을 가져와 벽난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불을 켜고 나서 다시 나가더니, 이 번에는 해티의 저녁 시사를 가지고 돌아왔다. 우유에다 빵을 적신 것이었다. 해티가 식사를 하는 동안 둘은 쭉 이야기를 나누었다. 톰은 등불 위로 손을 쬐다가 천장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아래층에서 저녁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와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수잔이 와서 빈 그릇이랑 등불을 가져가며 해티한테 누워서 자라고 했다. 수 잔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 톰은 해티한테 이제 자기도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래." 하고 대답하면서도 해티는 톰이 어디로 가는 지는 묻지 않았다. "안녕, 내일 또 보자." 하고 톰이 말했다. 해티는 웃었다. "넌 항상 그렇게 얘기하고선 몇 달이나 오지 않을 때도 있더라." "어, 난 밤마다 오는데." 톰은 해치한테 작별 인사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맛있는 냄새 가 나고, 수잔과다른 가정부 하나가 바쁘게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식구들은 한 창 식사중이었다. 톰은 괘종 시계에 열쇠가 꽂혀 있는지 보려고 잠깐 멈추었다. 열어 보고 싶었 지만, 그래도 해티가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톰은 물끄러미 시계판의 천사를 바라보았다. 시계에서 물러난 톰은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금 천천히 저택 안으로 되돌아왔다. 눈을 감고, 문을 닫고, 빗장을 쳤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여전히 멜번네의 거실이었다. 톰은 거실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가 면서 톰은 마음속으로 계단 카펫과 손잡이들이 사라지고 이모네에 있는 자기 방 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자기 방이야 할 곳이 지금은 해티의 방이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어었다. "누구세요?" 해티는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야. 뭐, 뭣 좀 가지러 왔어." "으응... 찾았니?" "아니," 하고 톰이 말했다. "그렇지만 괜찮아. 잘 자, 해티." "응... 잘 자." 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정원으로 나갔다. 박쥐들이 날아 다니는 정원을 걸 어 다니다가다시 들어와 보았다. 집은 아직도 멜번네였다. '아, 다시는 돌아갈 수없을 거야.' 톰은 덜컥 겁이 났다. '해티한테 말해야겠어. 어떡하면 좋을지 물어보자. 날 유령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사실대로 다 털어 놓자.' 톰은 위층의 해티 방으로 올라가 어둠 속에서 해티를 불렀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쌔근대는 해티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톰은 해티를 깨워서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해티가 깨거나 움직이면 금방 알아 차릴 수 있도록 자기 한쪽 팔을 해티의 팔에 대고서 침대 곁의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고 선 머리를 팔에 대고 점점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눈을 떴을 때 톰은 자기가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다. 벌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저 바닥에 쪼그리고 있어서 쥐가 났다는 사실말고 는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조차 몰랐다. 퍼뜩 지난밤의 일이 생각나서 침대를 더 듬었지만 해티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침대는 해티의 침대가 아 니라 자기 침대였다. 방도 자기 방이었다 창살이 있는 창문 하나짜리의 반 쪼가 리 방. 톰은 자기가 어떻게 해서 여기 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숭 ㅓ었지만, 아무튼 무 척 기뻤다. 막 침대로 기어올라 가려다가, 문득 출입문 사이에 끼워 둔 슬리퍼가 떠올랐다. 이모와 이모부가 그걸 보면 난리가 날 텐데... 다행히 아직 이른 시간 이어서 이모와 이모부는 그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톰은 슬리퍼를 빼내고 이 층 출입문을 닫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얄팍한 칸막이 너머 욕실에서 이모부가 아침 목욕을 하려고 물을 트는 소리가 날 때까지, 톰은 마냥 천장을 바라보며 드러누워 있었다. 이윽고 이모가 아침 차를 들고 톰의 방에 들어왔다. 날마다 그렇게 가져다 주 어서 이제는 톰한테나 이모한테나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톰. 집에서 편지가 왔구나. 하나는 피터가 보낸 거고, 하나는 엄마가 나한테 보낸 거란다." 19.돌아오는 토요일 모두 아침 식사 상에 둘러앉았다. 이모부는 신문을 들고, 이머는 톰의 엄마한 테서 온 편지를 들고 앉았다. 폼도 피터의 편지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톰은 혹시라도 누가 넘겨다볼까 봐, 한손으로 편지 윗부분을 가리고 읽었다. 형에게 조심해! 엄마가 이번 주말에 형을 집에 보내 달라고 이모한테 편지를 쓰고 있 고 있어.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거야. 엄마는 내가 형을 굉장히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형이 꼭 와야 한다고 말하실 거야. 난 형이 와 버리는 걸 원치 않아. 형 이 편지로 알려 주는 일들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 더 자세히 편지해 줘. 나도 거기에 가고 싶은데, 엄마 아빠는 안 된다고 야단이야. 우리도 나무가 빽빽하고 가까운 강도 있고, 높은 담도 있는 곳에 살면 좋겠다. 형, 나도 거기에 가고 싶어. 톰은 한숨을 쉬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피터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톰 은 편지 앞부분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조심해!" 하지만 어른들, 특히 엄마 아버지의 결정에 대해서 아이들이 어떻게 반대할 수 있을까? 이번 주말에 집에 가게 될 거야, 오늘은... 톰은 앨런 이모부가 읽고 있는 신문을 얼른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화요일이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쯤 가 게 되겠지. 이모는 편지를 내려놓고 톰을 보면서 쓸쓸히 웃었다. "톰, 이번엔 진짜 헤어져야겠구나." "언제?"하고 톰은 심술이 나서 물었다. "이번 토요일에. 그날 아침에 싼 기차편이 있어. 엄마가 기차로 보내 달라시는 구나. 녀석, 이젠 귀양살이도 끝이네." "아니, 이번 토요일에?" 하고 톰은 되물었다. "그렇게 빨리?" 그러자 이모부가 불쑥 "네가 보고 싶을 거야. 톰" 하고 말하면서 자기가 한 말 에 몹시 멋쩍어했다. "엄마 아버지가 널 아주 사랑하신대.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가 봐. 엄마 말 로는, 또 피터가 널 굉장히 보고 싶어한대. 형이 없으니까 기운도 없고 늘 공상 에 잠겨 있지만 한다지 뭐니. 피터한테 네가 필요하다는구나. 널 양자로 들인다 면 또 몰라도, 더 이상 붙잡아 둘 수가 없구나." '만약에 양자가 된다면...' 하고 톰은 생각했다. '그럼 난 여기 있을 수 있어. 하 지만 가족들은 어떻게 되지? 엄마, 아빠, 피터하고 헤어져야 하는 거잖아.' 순간. 톰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갈비뼈 부근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둘 다 너무 나 갖고 싶다. 엄마 아빠랑 피터도 너무너무 소중하지만, 정원과 헤어지기도 너 무나 싫다. "내가 이모네 양자가 되면..." 하고 톰은 몹시 고통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얘, 그저 해본 소리야." 하고 이모가 톰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 말은 어떤 면에서는 좀 위로가 되었다. 적어도 가족들과 떨어져서 이모네 아이가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에서는 무슨 수라도 써야 한다. 피터의 편지나 이모의 말투로 보아, 집에 돌아가 는 걸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젠 더 이상 아프다는 핑계도, 좀 더 있다가 가겠다거나 이모네서 살겠다는 소리도 통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토요일 아침이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돌아오는 토요일... "아마 내년에..." 하고 이모가 말했다. "여름 방학때, 또 와서 고맙다는 말은커 녕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내년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톰은 가슴이 쓰라렸다. 아니,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오전 내내, 괘종 소리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톰의 귓가에 맴돌았다. 일 분 씩 일 분씩, 토요일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시계 소리를. 그러다 언뜻 오른 밤 해 티가 시계문을 열어 주면 시계이 비밀을 알아낼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 체 그 그림의 비밀이 무엇일까? 톰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굉 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상상의 나래를 펴다 보니까. 톰은 안타까운 마음도 사라지고 시간이 가는 것도 잊을수가 없었다. 적어도 오늘 밤 만은 시간이 빨리 갔으면 싶었다. 갑자기 밤까지 기다리는 게 너무 길고 지루하 다는 느낌이 드는 한편. 오늘 밤부터 토요일까지는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오후, 톰은 피터한테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인다는 애기와 함께 정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쓰면서 내일 더 쓰겠다고 했다. 톰은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이모랑 같이 산책을 나갔다. 걸러가면서 이모한테 혹시 요 근처 에 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모는 전에 강이 있었던 것 같다며 한 번 알아보자 고 했다.두 사람은 정원 뒷길을 걸어서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다리 있는 데까지 갔다. "어머, 네가 찾던 강이 여기 있구나, 톰!" 하고 이모가 기쁘게 말했다. 눈앞에 있는 강은 해티의 창가에서 얼핏 보았던 강이나 톰과 해티가 정원 울 타리를 빠져 나가 목장을 가로질러 찾아갔던 그 강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틀림 없이 같은강 같았다. 그런데 강 옆에는 목장이 아니라 뒷담장과 아스팔트로 포 장된 도로가 놓여 있었다. 마침 다리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모가 말을 건넸다. "뭣 좀 잡으셨어요?" "에이, 여긴 고기가 없답니다." 그 사람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의 옆에는 '알림, 지방의회에서는 수영 을 하거나,강을 건너거나,배를 타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 물 은 오염되어서 위의 놀이에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라는 경고 팻 말이 서 있었다. "이모, 오염이 뭐야?" 하고 톰이 말했다. "강이 깨끗하지 않거나, 건강에 좋지 않다는 뜻이야." 하고 이모가 대답해 주 었다. "아마 집이랑 공장이 하도 많아서 그럴 거야, 공장에서 끔찍한 폐수를 강 으로 흘러 보내니까." 톰은 강물 속을 들여다 보았다. 더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통 물 밑의 수초 들이 하늘거리거나 녹색으로 빛나는 반면, 여기는 지저분한 갈색 물때가 껴 있 었다. 근방에는 거위도 물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고기는 확실히 없을 것이 다. 대신에 깨진 유리와 도자기, 빈 깡통들이 강바닥에 널린 것이 어렴풋이 보였 다. "그럼 어디서 수영을 하거나 배를 타지?" 하고 톰이 물었다. "캐슬포드에 가면 수영하는 곳이 있어. 그 강은 캐슬포드로 흘러 간단다." "캐슬포드로, 엘리로, 킹스린으로, 그리고 바다로 흘러 가지." "어머나, 톰."하고 이모는 놀라서 말했다."이 지역의 지리를 어떻게 아니?" "아, 아냐, 이모. 그냥 누구한테 들었어." 하고 톰은 잽싸게 얼버무렸다. "지금 몇시야, 이모?" "네 시가 거의 다 됐어." 겨우?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어서 톰과 이모는 집으로 돌아갔다. 큰 집의 현관을 들 어서면서 톰이 처음 들은 소리는 뚝딱거리는 시계소리였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 까지, 계속 저린 식으로 똑딱거리겠지.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톰의 친구였다. 그 러나 이 밤이 지나면, 괘종 시계는 토요일을 향해 다시금 똑딱거릴 것이다. 그 런 의미에서는 시간은 톰의 적이었다. 20. 천사의 이야기 그날 화요일 밤에 톰은 해티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수 없었다. 나무에서 떨 어진 뒤로 아직까지 침대에 있을까? 아니면 다시 정원에서 놀고 있을까? 아니 면, 언젠가 제임스가 말하던 다른 놀이를 찾아 나섰을까? 톰은 이미 해티의 변화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종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을 때, 톰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계절의 변화였다. 계절이 바뀌어 어느새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그것도 구름이 잔뜩 낀 음산한 잿빗 겨울이 아니 라, 금방 내린 흰눈으로 사방이 반짝이는 겨울날이었다. 나무도, 풀도, 숲도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건 상록수 나무 사이의 깊은 구석쟁이 뿐이었다. 그곳은 마치 어둡고 깊은 눈동자처럼 잔뜩 웅크리고 앉아 톰을 바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 날씨가 그러했듯이, 지금도 또 완연한 겨울 날씨였다. 사방은 너무나 고요했다. 톰은 눈앞의 광경에 흠뻑 빠져 숨도 제대로 쉴수 없 었다. 붉은 뇌조 한 마리가 추운 듯이 잔디밭 가의 작은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신경질적으로 실룩러리면서도 녀석은 아주 침착하게 눈 덮인 잔 디밭을 가로질러 관목 사이로 사라졌다. 그 움직임에 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까, 붉은 뇌조의 세 발 발자국말고도 또 다른 발자국이 나 있었다. 사람 발자국이었다. 정원 문에서부터 길을 따라 난 발자국은 잔디밭 모퉁이를 건너 연못 쪽으로 온실까지 나 있었다. 톰은 해티의 발자국이라고 확신하고 그대로 따라갔다. 온실 모퉁이를 돌아 발자국을 쫓아가니까 연못에서 놀고 있는 해티가 보였다. 꽁꽁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해티는 한쪽으로 눈을 치워 놓고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사실 스케이드를 탄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해티는 정자에서 가져온 의자를 붙잡고 밀면서 얼음을 지치고 있었던 것이다. 톰이 소리내어 부르자 해 티는 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야아, 톰!"하고 해티가 소리쳤다. 연못가로 절뚝러리며 걸어 나온 해티는 미끄 러질까 봐, 발끝을 안쪽으로 오므리고 섰다. "해티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야위었다구?" 하고 톰이 대꾸했다. "아냐, 살쪘는데." 톰은 얼마 전에 이모가 1페니를 줘서 몸무게를 달아 본적이 있었다. 그 때 이 모가 막 좋아한 걸 보면 분명히 살이 쪘다는 얘기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뭐랄까? 말하자면..." "뭐, 그거야 아무려면 어때." 하고 톰은 애가 달아서 말했다. "그보다 괘종시계 에 있는 그림 얘기 빨랑 해줘." 해티가 애매한 표정을 짓는 것 보고는 톰은 더욱 초조해했다. "저번에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랬니?" "네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말이야. 그 뒤에 얘기했잖아." "얘, 그게 언제 적 얘긴뎨. 그렇게 오래 기다렸으니 좀더 기다려도 되겠다. 꼭 지금 당장 알아야 하니? 내가 스케이트 타는 거 보지 않을래?" 그러면서 해티는 요즘 자기가 스케이트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자랑하면서 곧 사촌 오빠들과 버티 코드링, 맨 씨네 딸들, 꼬마 바티랑 다른 아이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갈 수 있을 거라고 숨차게 말했다. "넌 스케이트 안 좋아해, 톰? 배워 본적 없어?" "있어." 하고 톰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제발 약속한 대로 괘종 시게를 열고 그 그림이 무슨 뜻인지 얘기해 줘!" 해티는 한숨을 쉬면서 붙잡고 있던 의자에 앉아 스케이트를 벗었다. 그러고 나서 신발로 갈아 신고 톰과 함께 집으로 갔다. 해티는 가면서 그림이 요한 계 시록의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거실 안으로 들어가 시계 옆에 서서 해티는 잠시 조심스레 귀를 귀울였다. "쉿! 숙모는 위층에 계실거야." 해티는 열쇠를 구멍에 꽂고 시계추 상자를 열었다. 해티가 시계판을 여는 고 리를 찾느라 더듬거리는 동안, 톰은 시계추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컴컴하니 거미줄이 쳐 있었고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춤추는 추가 보였다. 맨 밑에 납작하고 둥근 쇠에다 금박을 입힌 추는 움직일 때마다 햇빛처럼 반짝반짝 빛났 다. 톰은 금박으로 된 장식체의 글씨를 보았다. 추가 흔들리는 사이로 글씨가 보 였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구?" 톰은 깜짝 놀랐다. "그래, 그 뜻이야." 해티는 고리를 찾느라 애쓰며 말했다. "무슨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거지?" "아니, 아니! 넌 이해 못해 잠깐만." 마침내 고리를 찾았다. 해티는 시계판의 문을 열고, 책을 든 천사가 발을 벌리 고 있는 곳 바로 밑에 씌인 글씨를 가리켰다. "이것 좀봐! 내 달 대로 성경으 요한 계시록이 맞아. 몇장 몇절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톰은 소리를 내서 읽었다. "요한 계시록 10장 1절에서 6절." 톰은 외우려고 큰 소리로 반복했다. "쉬잇!"하고 해티가 말했다."방금 위층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니?" 해티는 놀라서 시계문을 닫고, 톰을 재촉해서 얼른 정원 왼쪽으로 물러갔다. "요한 계시록 10장 1절에서 6절까지." 톰은 자면서도 연방 중얼거렸다. "내 성경을 가져와서 찾아보자" 하고 해티가 말했다. 하지만 다시 안으로 들어 가서 이층으로 올라가기가 싫은 눈치였다. 톰은 난방실에서 보았던 아벨 아저씨의 성경이 생각나서 해티와 함께 난방실 로 갔다. 이번에도 해티가 문을 열었지만, 전처럼 까치발을 하지 않고도 꼭대기 의 손잡이에 쉽게 손이 닿았다. 확실히 해티는 처음에 정원에서 지내던 때보다 껑충하게 자란 것이다. 겨울의 난방실은 여름하고도 무척 달랐다. 온실 파이프에 뜨거운 물을 보내느 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어서, 비좁은 난방실은 답답하리만치 따뜻했고 타오 르는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해티가 성경을 찾아서 가지고 나왔다. 해티는 혼자 중얼거리며 책장을 뒤로 넘겼다. "디도-빌레몬-히브리-야고보-베드로 전-베드로 후-요한1-요한2-요한3-유다- 요한 계시록.요한 계시록은 성경의 맨 끝이다." 해티가 요한 계시록의 장들을 찾는 동안, 톰은 해티의 팔 너머로 글씨를 읽고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눈을 밟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둘 다 고개를 돌렸다. 아벨 아저씨가 호두나무 모퉁이를 돌아서 오고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러 왔거나, 손에 마당 빗자루를 들고 있는 걸 봐서 해티를 위해 연못에 쌓인 눈을 쓸어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벨 아저씨가 깜짝 놀라서 멈춰 섰다. 해티는 아저씨의 놀란 표정을 보고 오해를 했다. 아벨 아저씨는 톰을 보고 놀 랐는데, 해티는 자기가 성경을 꺼낸 걸 보고 아저씨가 놀란 줄로만 안 것이다. "아벨 아저씨?..." 하고 해티가 조마조마해하며 말했다. "화났어?우리,아니 난, 성경에서 뭘 좀 찾으려고 했었다." 아벨 아저씨는 여전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저씨가 화났다면 정말 미안해." 해티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저씨의 말을 기다렸다. "아뇨... 아뇨..." 아저씨는 가슴속에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성경 에는 진실과 구원이 있으니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지 않지요." 아벨 아저씨가 해티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투로 앞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 지만 톰은 그말이 의도적으로 자기한테 하는 말임을 알았다. 아무튼 아저씨는 이런 일에 끼여들고 싶지 않다는 듯 가버렸다. 둘은 다시 성경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티가 10장 1절을 찾아냈다. 나는 또 하나의 힘센 천사가 구름에 둘러싸여 하늘 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 다. 그 머리에 무지개를 이고, 그 얼굴에 태양과 같았으며, 그 발은 불기둥과 같 았다. 그는 작은 두루마리를 손에 펼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서 마치 사자가 으르렁대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 다. 그가 고함을 치자,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릴르 내며 말했다. 그 일곱 천둥 이 말할 때에 내가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비밀에 부쳐 두고,기록하지 말아라."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 와 땅을 디디고 서 있던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땅과 그안에 있는 것들, 그리고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성경을 다 읽었을 때 톰의 머릿속에는 구름과 무지개, 불과 천둥, 그리고 그 위에 위대하신 분 등이 가득 찼다. 누군지 모르지만, 오래전에 저 시계에 그림을 그린 그 사람도 톰과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톰은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려운 이야기야." 하고 해티고 맞장구를 쳤다."아마 이걸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 요한 계시록에는 천사라든가 괴물, 이상한 말들이 잔뜩 나오는 걸, 그러니 다들 어떻겠어?" "하지만 끝에,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이야?"하고 톰은 집요하 게 물었다."난 알아야 해. 그게 중요해. 시계추에도 써 있었고, 천사도 그렇게 맹 세했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맹세했어. 그게 무슨 뜻이지?" "아마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세상의 끝이 오면..." 해티도 막연하게 말했다. 톰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해티는 벌써 성경 을 덮고 난방실에 갖다 놓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연못을 보던 해티틔 눈이 갑자 기 초롱초롱 빛났다. 아벨 아저씨가 해티를 위해서 얼음 위에 남아 있는 눈을 쓸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고 톰은 중얼거리며 세상의 모든 시계가 똑딱 거리기를 멈추고 종치기도 멈추고, 위대한 나팔 소리에 얼어붙어 영원히 멈추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고 톰은 또 중얼거 렸다. 그 짧은 말에 무한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해티는 성경을 갖다 놓 았다. "톰, 연못에 같이 가서 내가 스케이트 타는 거 안 볼래?" "아니,"하고 톰이 말했다."난 할 일이 좀 있어." 이제 깊은 생각에 잠긴 톰은 해티와, 또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저 눈 덮인 정원과 헤어져 안으로 들어가 이층 침대에 누웠다. 21.계속되는 시간들 정원에서 돌아온 화요일 밤, 톰은 침대에 누워 처음엔 생각을 하다가 나중엔 꿈속에 빠져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톰의 마음 깊은 곳에서 더올라 서로 뒤섞였다. 꿈속에서의 시간은 여기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정원으로 가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엄청나게 커진 천사가 시계에서 내려와 번쩍이 는 칼로 톰의 길을 가로막았다. 톰이 저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꼼짝없이 있으려 니까, 결국 천사가 길을 비켜 주었다. 밖을 내다보니 정원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고, 쓰레기통이 서 있는 마당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돌로메 할머니가 마당 한가운데 서서 잔득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누가 내 시계의 시간을 건드렸지?" 그러고서 톰은 깨어났다. 이 이상한 꿈은 곧장 마음 깊숙이 가라앉으며, 시간 에 대한 혼란스런 생각과 의문들이 한데 몰려들었다. 톰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계의 천사는 그렇 게 말했다. 하지만 만일 시간에 끝이 있어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있는 시간은 일시적이지만 뜻이다. 시간은 어쩌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잇고, 피해 갈수도 있는 것이다. 톰 자신도 시간의 뒤에 숨어서 해티돠 정원에게는 현재인 과거 속으로 갈수 있지 않은가-지금 여기서, 또 영원히,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톰은 시간의 원 리를 알고 싶었다. "이모, 시간이 뭐야?" 여는 때처럼 이모가 아침 일찍 차를 가져왔을 때, 톰은 다짜고짜 물어 보았다. 이모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는, 거의 일곱 시가 다 되었다고 대답했 다. "그러니까 제 말은 시간이란 뭐냐고요.시간은 어떻게 움직여요?" 톰은 아침 식사때, 다시 이모부한테 물었다. 하지만 이모부의 말은 정확한 대 답이 아니었다. 이모부는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서 이론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건 항상 생각되어 온 문제지..."하고 이모부가 말을 꺼냈다. 톰은 어떤 말은 이해하고 또 어떤 말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줄곧 주의 깊게 들었다. "하나, 현대의 시간에 대한 이론은 말이다. 음, 그러니까 가장 최근의 이론 은..." 톰은 여자들의 옷처럼 이론도 유행에 따라 변하는지 의아했다. 어느 순간에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을 바꾸어 충분 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이해하지 못하겠다 는 생각이 들면서 톰은 무척이나 낙심했다. "저도 역시 어떤 이론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이모부가 차를 마시는 동안에 톰이 말했다. "나는 천사를 알아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 천사를 안다구요." "천사라니!" 이모부는 소리를 지르다가 넥타이에 차를 쏟아 버렸다. 그래서 그걸 닦느라고 더 화가 났다. "아니, 도대체 천사가 과학적인 이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톰은 겁이 나서, 이건 이론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불타는 듯한 천사의 확신이 라고 감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모부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더 이상 아침을 못먹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른 때보다 10분이나 일찍 집을 나서면서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문을 닫 았다. 이모부가 그렇게 나가 버리자 이모는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톰, 네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알았어, 이모, 그렇지만, 이모부가 천사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 어." "이모부는 보통 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천사에 대해서 경건하게 생각해, 하지 만 아침 식사때 그런 얘길르 하는 건 좀 그렇구나. 이모부는 아침마다 신경이 곤두서서 곧잘 화가 내신단다. 그럴 때면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어떨 땐 반도 안 먹고 남기곤 하지, 그럼 소화가 잘 안되잖니." "미안해, 이모."하고 톰은 대답했다. 이모는 비록 이모부하고 다른 방식이긴 했 어도, 상황을 정확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모부가 돌아오자마자 이모는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이모부는 처음엔 소리를 높이더니 점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모부가 먼저 말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렇게 하자구." 저녁밥을 먹을 때 이모부는 톰에게 "톰, 내가 사과할게." 하고 말했다.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톰이 주눅이 들고 말았다. 톰은 이제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모부는 아 침에 있었던 일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이모 부는 종이와 연필을 가져오더니 도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상상해봐, 톰, 이게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이야..." 나중에 이모부는 톰에게 화가가 풍경을 그리려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화가가 와서, 첫 번째 화가 뒤에서 그 화가가 그린 그 림이 들어 있는 똑같은 그림을 그렸고, 세 번째 화각가 와서 첫 번째 화가와 두 번째 화가가 그린 그림이 든 똑같은 풍경을 그리고, 네 번째 화가가 와서... "톰, 이렇게 비교하니까 문제가 훨씬 분명해지지." 하고 이모부가 말했다. "아 니면,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보자. 가령..." 톰의 얼굴은 이모부가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점차 굳어지다가. 마침내 는 갓난아이 같이 울상으로 변했다. 모든 게 너무나 중요한 말들인데, 하나도 이 해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이모부가 립 반 윙클이 이야기를 꺼냈다. "예를 들면, 립 반 윙클 생각해봐. 아, 아니다. 그 이야기는 별로 도움이 안 되 겠구나. 자 그럼 우리가 부르는 새로운 시간의 시점을 생각해 보자." 하지만 이미 늦었다. 톰은 벌써 립 반 윙클에 대한 생각에 빠져 버렸다. 이모 부의 설명 중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톰은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립 반 윙클 북아메리카의 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마술이 걸린 곳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하룻밤 잠을 잤다고 생각했지만, 일어나서 산을 내려가 가족들한테 갔을 때는 벌써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톰은 지금의 자기가 립 반 윙클의 경우와 거꾸로 된 것 같이 생각했다. 20년 뒤의 미래로 가는 대신, 톰은 100여년 전 해티의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밤마다 같은 시간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고, 시간의 순서대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전나무 같은 경우도 그랬다. 멀쩡하게 또다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자기또래의 소녀인 해티는 그 뒤에 훨씬 어린 아이가 되어 나타났다가, 요 즘엔 또 자기보다 부쩍 어른스러워진 소녀로 나타나는 것이다. 톰의 시간으로는 불과여름 방학 몇주일의 시간이었지만, 해티와 정원의 시간으로는 10년이나 흐 른 것을 보지 않았던가.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모부가 하는 말을 귓전으로 흘려 듣던 톰은 다시 대화 속에서 돌아와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각각 다른 사람은 각기 다른 시간을 보내지만, 사실 그건 전체 시간 의 일부분을 보낼 뿐이라는 얘기죠." "그래, 좀더 알기 쉽게 얘기하면..." 톰은 이모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과거로 갈 수 있 다면, 응, 그러니까..." 여기서 문득 톰은 처음으로 해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한 여자애가 내 시간 속으로 들어올수 있다면, 나한테는 현재인 시간이 그 애 한테는 미래가 되겠군요." "톰, 이렇게 설명하는 게 더 확실하겠구나. 그러니까, 이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 면... 하지만 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자애는 과거에서 온 유령이 아니고 나도 미래에서 온 유령이 아 닌거야. 우린 둘다 유령이 아니야. 정원도 유령이 아니구요, 야, 이제 다 됐다." "아니, 무슨 소리야?"하고 이모부가 참을성 없이 말했다. "정원이라니?게다가 뭐가 해결됐다는 거야?톰, 지금 우린 가능성과 이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 야." "하지만 누군가 정말 자기 시간 속에서 빠져 나와 다른 사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면, 그게 바로 증거지요." "증거!" 이모부가 버럭 소리를 지를자 톰은 또 화가 나셨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모 부가 잘 참았다. "톰, 내가 설명을 잘못했나 보다. 시간의 논리에서 증거라니...!" 분명히 시간에 대해서는 완전 범죄의 경우처럼 중거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톰은 그런 점은 상관하지 않았다. 스스로 뭔가 확신이 섰다. 천사한테서 배운 사실을 기초로ㅡ 톰은 시간은 성질에 대해서 귀중한 사실을 밝혀 냈다. 그게 어 째서 그런지는 아직 확실히 모르지만 최소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내실 흐뭇하고 신이 났다. 수요일 밤, 톰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정원에 갔다. 계절은 아직 겨울이었다.그러나 톰은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정말 같은 겨울일까? 이건 내가 들어온 해티의 다른 부분의 시간이 아 닐까? 그렇다면 이건 더 이전일까, 아니면 더 뒷일까?" 이 의문은 톰이 정원을 한바퀴 돌다가 울타리께까지 왔을때에야 풀렸다. 거기 엔 목자으로 가는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톰이 지난번에 왔을 때는 분명히 없던 문이 었다. 있었다면 톰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문은 틀림없이 그 뒤에 만 들어진 것이었고, 꽤 오래되었는지 언저리가 몹시 상해 있고 낡아 보였다. 톰이 문 쪽으로 자갈길을 걸어가는데 발밑에서 서리 때문에 바삭바삭하는 소 리가 났다. 문에 기대어 내다보니, 여름에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던 땅에 얼음이 꽁꽁 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얼음이 가장 잘 언 목장 저쪽 끝에서 사람들이 미 끄러지듯이 스케이트를 타며 웃고 있었다. 톰은 자기만 따돌림을 당한 것 같았다. 언젠가 제임스가 해티를 꼬셔서 데려 가려던 친구들과의 파티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해 티일까.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난 ㅉ던 톰의 눈에 이윽고 해티처럼 보이는 소 녀가 들어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얼음을 지치던 소년는 이제 혼자 떨어져서 스 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 지내던 버릇을 쉽게 고쳐지지 않나보다. 아니, 아마도 평생 동안 고쳐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스케이트를 타던 한 젊은 청년이 아이스하키를 할 막데기를 만드려고 버드나 무 가지를 잡아당겨 잘랐다. 공은 돌맹이였다. 여자아이들이 시끄럽게 재잘대면 서 모여들었다. 혼자 스케이트를 타던 소녀는 그들을 지나서 울타리 쪽으로 목장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해티, 해티였다. 톰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맞구나! 누군가 보이길래 너라고 생각했지." 해티는 톰 쪽으로 미끄러져 오면서도, 자기 눈을 못 믿겠다는 눈초리로 톰을 훑어보았다. 해티가 정원 문을 열어 주었다. "톰, 역시 너였구나!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챕맨 쌔네 딸들이랑 재미있게 놀 때도, 바티랑 다른 얘들하고 있을때도, 또 스케이트를 탈 때도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톰, 이거 스케이트 말야, 얼마나 좋은지 아니! 난 여기서 세상 끝 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모든 세상이 얼음이라면 난 꼭 새처럼 자 유롭게 느껴진다. 예전엔 정말 몰랐던 느낌이야. 멀리 가고 싶어, 아주 멀리!" 해티는 톰한테 얼음 위로 내려오라고 했지만 톰은 싫었다. "톰, 이리 와서 해봐!" 맨발로 빙판 위에 내려선 톰의 한쪽 발밑으로 얼음이 매끄럽게 느껴졌다. 해 티는 마치 무도회장에 서 있는 듯, 톰은 어느새 시간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 어버렸다. 해티가 저만치 미끄러지자, 톰은 피터랑 같이 보았던 거리의 얼음 바 닥보다 더 훌륭한 빙판을 지치며 해티의 뒤를 ㅉ아갔다. 톰은 해티보다 먼저 멈 추었다. 톰의 동작이 땅의 움직이라면 해티의 동작은 마치 힘찬 새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톰..." 해티가 얼음 저쪽에서 조용히 부르고는 어느새 바람을 일으키며 톰의 곁을 지나치면서 물었다. "넌 왜 스케이트가 없니?" "왜 스케이트가 없냐구?" 톰은 괴로운 심정으로 되물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신던 스케이트는 다 스케이 트장에 보관중이고 지금 이모가 스케이트를 갖고 있을리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 여름에 갑자기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 까. 그런데 문득 얼음빛처럼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생각이었다. 팔을 뻗어, 해티한테 스케이트를 멈추고 얘기를 들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곧 멈추었다. "해티, 스케이트를 안 쓸 때 어디다 두니?" "거실 신발장에.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스케이트에다 기름을 치고 종이에 싸 서 신발장 제일 위칸에 놔둬." 낮에는 거실에 있는 신발장 안에 스케이트가 없었다. 거기엔 붉은 턱수염 아 저씨가 언젠가 자동차를 손질할 때 쓰던 자질구레한 도구들뿐이었다. 만일 해티 가 스케이트를 거기다 두었다면, 아주 오래전에 맬번가의 사람들이 죽었거나 딴 데로 이사갔을 때 해티의 스케이트도 신발장 밖으로 버려진 게 틀림없었다. 팔 아 치웠거나 누누한테 줘 버렸든가. 아니면 밖에 내다 버렸으리라. 어쨌든 톰의 손에 닿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해티가 신발장 이야기를 다 하기도 전에 톰은 그곳이 스케이트를 보관하기엔 좋지 않은 장소라고 판단했다. 좀더 건조하고 안전한 비밀장소가 필요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해티, 나한테 한 가지 약속할래?" "뭔데?" "나쁜 짓이나 위험한 건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약속부터 해. 그렇지 않으면, 내말 듣고 나서 바보짓이 라고 그럴지도 몰라. 그렇지만 바보짓은 아니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좋아, 얘기해 봐. 들어보고, 할수 있는 일이면 약속할게." 톰은 이쯤에서 물러설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좋아, 딴 게 아니구 스케이트를 쓰지 않을때에는 너가 저 번에 보여 주었던 네 방 벽장 바닥 말이야. 거기 비밀 장소에다 놔두라는 거야." "거기에다!" 해티는 오랫동안 그곳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좀 바보 같다. 왜 꼭 거기다. 둬야 하니?" "약속해!" 하고 톰이 소리쳤다. "바보같아도 별로 나쁜 건 아니잖아. 약속해 줘. 너한테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이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해티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얘기하기엔 너무 길어. 하지만 약속해, 네 명예를 걸고, 스케이트를 타지 않을 땐 꼭 그 비밀 장소에다 둔다고, 거긴 아직 아무도 모르지, 응?" 톰은 갑자기 걱정이 되어서 덧붙였다. "명예를 걸고 약속해, 할 수 있으면 약속한다고 그랬잖아." 톰이 계속 졸라대는 바람에 해티고 결국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좋아. 약속할게.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톰은 해티를 굳게 믿었다. 이 얘기가 끝나자마자 톰은 곧장 돌아서서 집 문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하지만, 잠깐!" 해티는 무슨 생각이 난 듯이 톰을 불렀다. "이리 와봐, 톰! 내가 약속한 건 여기서 돌아간 후에 거기다 넣는다는 거야." 해티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톰은 멈추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동안 뒤에 서 해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더 멀리서 아이들이 해티를 부르며, 거 기서 혼자뭘 하는냐고 같이 하키를 하자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톰은 집으로 뛰어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 현관에 끼워 둔 슬리퍼를 빼고 문을 닫았다. 오늘밤, 톰은 다시 한 번 정원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 면 아파트까지 5분밖에 걸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다시 목장으로 내려가 해티랑 같이 스케이트를 탈 셈이었다. 자기 방에서는 불을 같이 켤 필요가 없었다. 톰은 손으로 더듬어서 벽장문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안에 있는 마룻바닥 사이를 더듬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조 그만 칼을 꺼내 그것으로 판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밑에 빈 공간이 있는 것이 느껴지더니, 종이에 싸인 제법 큰 물건이 만져졌다. 막 종이에 싸인 물건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톰은 자기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모와 이모부가 그 소리를 듣고 오고 있는 중 이었다. 톰은 벽장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침대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톰 이 침대에 들어가고 1초도 안돼서 이모가 방문을 열고 불을 켰다. 톰은 눈을 감 고 마치 나쁜 꿈을 꾸고 있는 양 신음 소릴르 내면서, 침대에서 돌아누우며 삐 걱삐걱 소리를 냈다. 이모가 그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게 할 셈이었다. 이모가 다가와서 톰의 이마에 손을 얹더니 열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뽀뽀를 하 고 방문을 열어 놓은 채 나갔다. 곧이어 이모가 자기 방에 들어가는 인기척이 들렸지만 방문이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심 걱정이 된 이모는 톰의 소 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두 방의 문을 다 열어 놓은 것이다. 톰은 눈을 벌겋게 뜨고 누워서 조금만 소리가 나도 이모가 다시 오겠지 생각 하며 애를 태우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다시 이모가 잠들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 알수가 있는가. 결국 먼저 잠이 든 것은 톰이었다. 잠이 들어 세상의 끝으로, 시간의 끝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가는 꿈을 꾸었다. 22. 잊어버린 약속 목요일 아침에 톰이 눈을 떴을 때 맨 먼저 생각한 것은 지난밤에 정원으로 다 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마룻바닥 밑에 있 는 비밀 장소였다. 톰은 지난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벽장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들어 올려진 마룻장과 조그만 칼이 놓여 있었다. 톰은 빈 공간에서 갈색 종이에 싸인 두 개의 뭉치를 꺼내 풀어 보았다. 스케이트였다. 아직까지 신발에 날이 붙 어 있고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종이쪽지와 함께 있었다. 꺼내서 읽어 보았더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누구든 이것을 찾는 분에게 이 스케이트는 해리엇 멜번의 것으로, 한 꼬마 소년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 해 여기에 둡니다. 쪽지에는 6월 20일 이라는 날짜와 서명이 적혀 있었다. 연도도 있었지만, 벌레 가 죽어서 얼룩이 지는 바람에 앞에 적힌 두 자밖에 읽을 수가 없었다. 처음은 1이었고 다음은 8이었다. 톰은 그날 온종일 해티의 스케이트,아니, 이제는 자기 것이 된 스케이트를 기 쁜 듯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톰이 알고 있는 스케이트보다 더 구식으로서 활주법도 다른 시대의 것이었다. 이른바 야외용 스케이트였는데, 날이 길고 야외 의 거친 빙판을 지나갈 수 있도록 끄트머리가 뱃머리처럼 휘어져 있었다. 이 스 케이트를 신는다면, 저지대의 어느 곳이나 얼음이 언 곳으로는 다 갈수 있었다. 톰은 정성스레 스케이트를 손질했다. 이모와 이모부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고 연장통에서 사포종이를 찾아내 스케이트의 녹을 닦아 냈다. 날을 빼내서 다시 박아야 할 것 같았지만, 톰이 하기엔 좀 벅차 보였다. 식료품 저장실에서 올리브 기름병을 가져와, 나무로 된 발 밑둥에 기름을 치고 가죽으로 된 신발과 끈을 바짝 말렸다. 신발은 대충 발에 맞았다. 조금 크긴 했지만 다른 건 다 ㄱ찮 아서 양말만 두 켤레 신으면 될 것 같았다. 신발에 기름칠을 하는 동안, 톰은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시간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마침 이모가 장을 보러 나가고 없어서 톰은 부엌 식탁위에다 스케이트를 펼쳐 놓고 기름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엌 시계가 건너편에서 말없이 톰을 바라 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시계를 바라보다가, 나중엔 굉장한 의문을 품고 시계 를 쳐다보았다. 톰은 갑자기 그날밤의 일이 떠올랐다. 오래전의 어느날 밤의 일 이. 그날밤의 시계는 톰이 정원 문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데 몇분이 걸렸는지 만 말해 주었을 뿐, 정원을 정원을 온통 헤매고 다녔는데도 그 시간은 전혀 흐 르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톰이 정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지냈건 부엌의 시계는 그 시간을 재지 않았다. 그렇다면 톰은 일반적인 시간의 0.01초도 쓰지 않고 정원에서 지냈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그것이 괘종 시계가 열 세시를 치는 의미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시간에서의 존재하지 않는 열두 시 이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끝이 없는 시간이었다. 톰은 가죽끈을 따라 기름칠을 하며서 자기 가 내린 결론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고 싶으면 정원에서 언제까지나 지낼 수 있다. 결국, 난 정원과 가족- 엄마 아빠랑 내 동생 피터-을 모두 가질 수 있게 된거야, 내가 정원에서 영원히 머무르는 한, 가족들은 언제까지나 이번 토요일오후를 기다리고 있겠지. 이곳의 시간은 항상 목요일에서 나를 기다려 줄 거야. 내가 정원을 떠나 이층 이모집으 로 돌아오지 않는한, 시간은 움직이지 않겠지. "난 정원에서 언제까지나 지낼 수 있어." 톰은 부엌 시계를 보고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라는 말이 어쩐지 너무 멀고 외롭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쨋든 한 번 해볼 거야. 며칠이나 몇 주, 아니면 1년쯤 지내 볼 거야,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이 말은 '집 생각이 나면'이란 뜻이었다. "그래 그러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어. 그래도 또 금요일 밤에 기회가 있으니 까, 뭐. 그땐 더 오래 있을 거야. 정원에 있는 걸 보고 무엇이든지 다 해본 다음 에 돌아올 테야." 스케이트를 손질하는 동안 톰은 줄곧 정원에서 무얼하며 놀까 하는 생각에 빠 져 있었다. 손질이 다 끝났을 때에는 이미 결정이 나서 오늘밤에 무얼 하며 지 낼지 단단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런데 그날, 잘못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침대에 들 때에야 톰은 퍼뜩 그 생 각이 났다. "아 참 어제 피터한테 편지를 안 썼어!" "걱정하지마."하고 이모가 톰을 다독거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약속했는데." "물론 약속을 지키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아주 나쁜 짓 이었다. 편지를 받지 못한 피터가 얼마나 실망했을까. 피터한테는 톰의 편지가 상상을 채워 주고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인데. "정원과 해티에 대해서 더 얘기해 줘, 형이 정원에서 뭘 하는지, 앞으로 뭘 하 려는지 꼭 써 줘." 피터는 톰에게 그렇게 부탁했었다. "미안해 피터." 톰은 베개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피터가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지금쯤 은 자기한테 배신당한 쓰라린 마음을 잊었기를 바랐다. 피터는 톰보다 일찍 잠 이 드니까 아마도 실망스러운 하루를 잠으로 끝맺고 있겠지. 하지만 톰의 생각은 틀렸다. 피터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피 터는 왜 오늘 형한테서 편지를 못 받았는지 알수 없었다. 형이 지금은 시계의 비말을 알아냈는지, 오늘 밤에는 또 무슨 신나는 일을 하려는지 너무나 알고 싶 었다. 피터는 어두컴컴한 방을 멍하니 쳐다보고 또 쳐다보다가 그만 눈믈이 나서 앞 이 뿌예졌다. 피터는 어느 때보다도 더 형과 같이 있고 싶소 형이 뭘 하는지 알 고 싶었다. 피터는 그런 바람을 가슴에 품고 지난날 형이 보내줘서 벽난로 위에 붙여 놓은 엘리으 그림 엽서를 쳐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톰도 잠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되자 얼른 잠에서 깨어났다. 톰은 양말을 두 켤레 신었다. 이번에는 이층 출입문 사이에 슬리퍼를 둘 다 끼워 놓고 스케이트 를 꼭 끌어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물론 바깥의 날씨가 겨울이 아닐 수도 있 었지만 왠지 아직도 겨울일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 문을 열었을 때 톰의 생각 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어느 곳에나 짙은 서리가 서려 있어 나무와 정원에 있 는 풀들은 서리로 꽁꽁 묶여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전체 가 돌로 된 조각처럼 보일 정도로 그렇게 심한 서리였다. 깊은 정적 속에서 톰은 누가 망설이듯이 뒤에서 자기 이름을 조그맣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톰은 돌아보았다. 해티가 따뜻해 보이는 두꺼운 옷을 입고 털모 자랑 털토시를 끼고서 복도에 서 있었다. "톰, 넌지 잘 몰랐어. 서리 때문에 잘 알아볼수 없었거든." "물론 나야." 톰은 해티가 눈이 나쁜가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돌아보길 바랐어. 네가 맞든 아니든 말야. 봐!" 해티는 털도시에서 한쪽 손을 꺼내 그 안에 있던 스케이트를 보여 주었다. 톰 도 자기의 스케이트를 보여 주었다. 해티는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만 해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톰이 알고 있는 걸 해티는 모르고 있으니까. "제임스 오빠가 곧 내려올 거야"하고 해티가 말했다. "오늘은 오빠가 캐슬포드 장날에 갈 차례인데, 나도 같이가. 제임스 오빠는 내 가 오후에 스케이트를 타려는 사실을 모르고 또 어디로 가려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다. 난 오늘 엘리까지 스케이트를 타고 갈 거야." "할 수 있겠어?" 톰이 걱정스레 물었다. 해티는 그 말을 오해한 것 같았다. "그래, 물론 안 된다는 건 알아. 숙녀답지 못한 짓이지. 그래서 아무한테도 얘 기하지 않았어. 더구나 혼자간다는 건..." "내 말은 정말 강이 거기까지 얼어 있을까 걱정이란거야." "물론 꽁꽁 얼어 있어,톰 어떻게 아냐고? 아벨 아저씨네 할아버지가 그러셨거 든 올해는 난생 처음 보는 길고 무서운 추위라고, 강은 여기서부터 캐슬포드랑 엘리까지 쭉 얼어 있어. 여긴 안전하게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데가 너무 조금 이야. 하지만 캐슬포드 지역은... 아 그래! 톰, 나하고 같이 가자!" 톰은 좋으면서도 깜짝 놀랐다. "지금? 정원에 가지 않고? 잠깐 드르지도 않을래?" "정원은 언제나 있어." 하고 해티는 톰을 꾀었다. "하지만 이런 굉장한 추위는..." 해티가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톰은 재빨리 마음을 먹고선 해티 옆에 착 붙 어 섰다. 좋아. 잠시 정원을 떠나서 해티랑 가보자.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은 제임스였다. 외출복을 차려 입은 제임스는 시장 가방 을 들고 내려오면서 해티를 보고 웃었다. 제임스가 거실 벽장에서 두꺼운 여행 용 담요 두 장을 꺼내 오자. 셋은 나란히 현관문을 나섰다. 톰이 한 번도 나가 보지 않았던 멜번네의 현관문이었다. 밖에는 아벨 아저씨가 길에다 말과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톰을 보자 아벨 아저씨는 "널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하는 표정을 뚜렷이 지어 보였다. 전에 보였던 두려움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차에 올라타고 해티와 제임스는 담요를 덮었다. 아벨 아저씨는 톰한테 다정 하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윽고 제임스가 고삐를 말 등으로 떨어뜨리자 말은 힘차게 출발했다. 멜번네 앞길은 한쪽이 과수원이고 다른 한쪽은 목장이었다. 말 들은 흰 도료가 칠해지 농가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8킬로도 넘는 얼어붙은 들 판과 목장 사이의 땅을 밟고 상쾌하게 뛰어갔다. 그들이 달려가는 땅 동쪽으로 는 마치 잠자는 거인처럼 보이는 낮은 언덕들이 평지 위에 누워 있었고, 서쪽으 로는 꼬불꼬불한 강이 언덕 위의 길과 나란히 캐슬포드로 뻗어 있었다. 톰은 전 에 버스를 타고 이모와 이모부랑 이 길을 와 보았지만 그때는 주위에 온통 집들 밖에 없었다. 이렇게 마차를 타고 여행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톰은 달리는 말의 근육과 다리들을 황홀하게 내려다보며서 나무 바퀴가 굴러가는 거친 느낌을 온 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캐슬포드 장날에 모여든 군중들 속으로 들어갔다. 제임스는 말과 마차를 대학고 여관에 매어 두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농부들과 제분업자들, 상인들도 다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제임스는 시장 가방을 손에 들고 볼일을 보러 갈 준비를 했다. "돌아갈 때 태워 줄까. 해티?" "고마워, 제임스 오빠.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 하고 해티가 대답했 다. "기차가 항상 있어." 라고 말한 뒤 둘은 헤어졌다. 캐슬포드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들고 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비 탈진 잔디밭 사이의 캐슬포드 다리 밑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여기는 얼 음은 잘 얼어 있었지만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거리가 충분하지 못했다. 해티는 더 좋은 곳을 원했다. 좁은 뒷길을 쏜살같이 걸어가는 해티를 뒤따라갔더니 강 이 캐슬포드를 지나 점점 더 넓고 깊어지기 시작하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강은 여러 수로들이 만나는 펜스 지방으로 흘러 들어간다. 해티네 정원 옆 목장으로 흐르던 좁은 시내가 벌써 오스의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모든 강들을 삼켜 버리 고, 그렇게 거대한 바다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 모든 강물들은 톰이 찾아갔을 때 다들 그 역사적인 추위 속에 갇혀 있었다. 23. 스케이트 여행 그 해 겨울에는 12월 말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해서 1월 한 주 동안 다소 추위 가 풀리긴 했지만, 3월초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다. 굉장한 추위였다. 심지어 흐 르는 물까지 얼었다. 얼음은 강 상류의 물방아를 멈추게 했고 그 당시 킹스린 상류에서 캐슬포드까지 왕복하던 거룻배의 길을 막아 버렸다. 온 영국이 얼음으로 뒤덮였다. 어떤 강 위에서는 황소가 통째로 구워지기도 했다. 얼마나 두꺼운 얼음인지 다양하게 쓰일수 있다. 옥스포드의 셔웰에서는 얼 어붙은 강 중간에 말 여섯 필이 끄는 마차를 끌고 가보기도 했다. 그러나 캐슬 포드나 펜스 지방 사람들은 다른 곳과는 달리 얼음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스케이트다. 톰과 해티가 이곳에 오기 몇 주전부터 사람들은 벌써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 다. 장이 열리는 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미끄러져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나 스케이트를 잘 타는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처음 배우는 사람도 있었 고 제복을 입고서 감색 백조처럼 근엄하게 타고 있는 경찰도 있었다. 새로 선보 인 피겨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도 있었는데 해태가 그 사람들을 가리키며 저것 좀 보라고 했다. 한곳에서 모자를 쓴 네명의 점잖은 신사들이 얼음 위에 오렌지 를 올려놓고 피겨 스케이트 시범을 보이는 중이었다. 때마침 신발에다 반은 가 죽끈으로 반은 그냥 끈으로 녹슨 스케이트를 붙들어 맨 개구장이 하나가 그곳으 로 뛰어들더니, 오렌지를 잽싸게 가로채서 와사삭 깨물어 먹으며 줄행랑을 쳤다. 피겨 스케이트 시범을 보이던 신사는 주춤주춤 ㅉ아가려 했지만, 웅성거리며 오 가던 군중들이 소년의 뒤를 가로막자 어이없다는 듯 자리에 멈춰 섰다. 해티와 톰은 꼬마 도둑의 뻔뻔스러운 행동에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면서도 해티는 자못 불안한지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곤 했다. 행여 누가 자기를 알아 보고 숙모한테 혼자 있더라며 일러바칠까 봐 몹시 겁을 냈다. 하지만 운 좋게도 해티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티와 톰은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을 탈 준비를 했다. 톰은 한 켤레의 스케이트를 두 사람이 탄다는 것이 어쩐지 야 릇하게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런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이 스케이트가 타는 사람보다 더 스케이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기술과 힘이 톰한테서 쏙쏙 들어왔다. 해티의 스 케이트를 신고 있으니까 톰은 해티 만큼이나 스케이트를 잘 탔다. 차이점이라고 는 해티의 스케이트와는 달리 톰의 스케이트날은 얼음 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 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둘은 서로 손을 놓고서 스케이트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탔지만 남 들이 보면 해티 혼자서 손을 잡은 것러럼 우스꽝스럽게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 다. 도시 아래쪽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지나와서야 둘은 박자와 호흡을 맞추어 나란히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 그날 오후따라 바람도 없어서 스케이 트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둘은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점점 더 빨리 나아 갔다. 해티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치마를 발목까지 걷어 올려 핀으로 꽂았다. 그러다가 이젠 팔고 마음대로 흔들려고 토시도 빼 버렸다. 해티가 앞으로 나아 가니까 끈에 매달려 있던 토시가 등뒤로 휘익 젖혀졌다. 결굴 토시는 끈이 끊어 져서 멀리 날아가더니 아이스 하키 경기를 하던 사람들 사이에 떨어져 뒤섞여 버렸다. 해티는 토시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나아갔다. 자리에 멈 추려고도 하지 않고 코스를 바꾸려고도 하지 않은 채 해티는 그저 깔깔대고 웃 기만 했던 것이다. 지금은 토시 따위야 어찌되든 숙모가 뭐라고 야단을 치든 아 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알아도 신경쓰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둘은 계속 스케이트를 탔다. 이윽고 캐슬포드 지역을 지나 문이랑 둑이랑 꽁꽁 얼어붙어 있는 수문까지 달 려갔다. 이내 뒤뚱거리며 둑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수문을 빙 돌아 다시 얼음 쪽으로 내려갔다. 둘은 다리 밑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갔는데 별로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인데도 얼음이 꽁꽁 얼어 있었다. 가는 길에는 나루터도 죄다 얼어 붙어 있었다. 사공들은 얼음 속에 갇힌 배 옆에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티와 톰은 점점 하류로 미끄러져 갔다. 도중에 스쳐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여자도 가끔 눈에 띄었지만 다들 남자하고 같이 온 사람들이었다. 강가에는 쓸쓸한 선술집이 있었는데 간판에 "어디서든 8킬로, 서두르지 마시오." 하는 말이 씌여 있었다. 그 일대 강둑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모두 펜스 지방 농 장에서 온 일꾼들이었다. 해티를 보더니 다들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어이, 아 가씨! 같이 타도 될까."하고 농을 걸었다. 해티가 "아저씨들한테는 안 보이겠 지만 나한텐 동행이 있어여."하고 소리칠 때까지 그들은 계속 불러 댔다. 다들 해티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고 웃었지만, 그 뒤로는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 다. 해티와 톰도 따라 웃었다. 줄곧 스케이트를 타고 가는 동안, 어느덧 가늘고 붉은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기 시작했다. 해티의 검은 그림자가 오른쪽의 눈부신 얼음 위로 날렸다. 어떤 때 는 강 한 가운데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강둑을 따라 서 있는 버드나무만이 돌을 바라보는 가운데 얼음 위를 달려갈 때마다 가볍게 스치는 소리가 났다. 둘은 이따금 서서 얘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줄곧 앞으로 뻗어 대는 팔다리와 몸은 마치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시계추처럼 정ㅎ하게 움직였다. 제법 시간이 흘렀을 때, 해티가 고함을 질렀다. "톰, 저기 봐. 엘리 성당 탑이야!" 그렇지만 엘리 탑은 강에 있는 여행자들을 놀리는지 둘이서 아무리 기를 쓰고 다가가도 가까ㅇ지 않았다. 다 왔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이쪽으로 보이던 탑이 저쪽으로 보였고, 나중엔 도 앞족으로 보이면서 구불거리는 강을 따라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끝까지 다 가니까 성당탑은 가까이 있는 지붕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덧 자기네는 강이 엘리 시내로 굽어지는 곳까지 와 있었다. 둘은 강둑으로 올라갔다. 다들 다른 신발을 가져오지 않아서 해티는 그냥 날 만 빼낸 채 스케이트 구두를 신고 걸어갔고, 톰은 스케이트를 벗어서 목에 걸치 고 양말바람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마을을 빠져 나간 두 사람은 대성당을 찾아서 그 유명한 거쪽 문으로 들어갔다.저물어 가는 겨울해가 벌써 성당 안을 더둑어둑하니 메우기 시적했다. 둘은 그곳을 지나 팔각당으로 가기 위해 본당을 지나갔다. 성당천장을 통해서 보는 하늘은 무척이나 작게 느껴졌다. 한참 걸어가다 위를 쳐다보면, 걸어온 것 에 비해 하늘은 너무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해티는 연방 황홀한 눈빛으로 걸어갔다. "어머나, 난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 몰랐어!" 하고 해티가 말했다. 교회당 안내인을 지나칠 때 톰은 재빨리 해티한테 속삭였다. "야, 어떻게 하면 탑에 올라갈 수 있느냐고 물어 봐." 해티가 돌아서서 묻자, 안내인은 서쪽 세례단에서 10분쯤 기다리면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게 오늘 마지막 차례인데 요금은 6펜스란다. 둘은 기다리는 동안 대성당 안을 구경했다. 성모 예배당 안에서 나올 때 톰은 오른쪽에 문자가 새겨진 배명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1812년 10월 15일, 72세 의 나이로'시간'을'영원'과 바꾼 이 마을의 신사 로빈슨 씨의 기념비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로빈슨이라는 사람의 흉내를 내려는 거구나.' 하고 톰은 생 각햇다. 토요일을 향해 흘러가는 보통의 시간들 끝이 없는 사간, 즉 정원에서의 여원한 시간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 톰의 계획이었다."시간으로 여원으로 바꾸 다." 하고 톰은 ㅁ 번이나 큰 소리로 외쳤지만, 다시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런 정적이 톰은 몹시 불쾌했다. 해티는 톰이 무엇 때문에 멈춰 서 있는지 보려고 왔다. 톰의 어깨너머로 그 기념비를 읽은 해티는 역시 같은 구절에 관심을 보였다. "시간을...영원으로..." 해 티가 말한 소리는 조그맣게 울려 톰이 말한 다음의 정적으로 메워 주었다.그 소 리에 톰은 다소 위로가되는 듯했다. 톰은 거의 충동적으로 해티를 돌아보았다. 그래, 해티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자. 이제까지 생각해 온 모든 계획을 털어놓자. 지금당장. 하지만 해티는 세례단 쪽을 보고 있었다. 벌써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해티 도 막 그쪽으로 가려는 중이었다. 물론 톰도 탑에 올라가고 싶었기 때문에 해티 를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톰도 얼른 해티의 뒤를 따라갔다. 나중에 캐슬 포드로 가는 길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 그때는 시간이 충분할 테니까. 24. 형제가 만나다 바로 그 목요일 밤, 피터는 얼핏 잠들었다가 금방 깨어났다. 끔이 하도 엉망이 어서 기분이 안 좋았다. 꿈속에서나마 형이 편지에 써 보낸 정원으로 가볼 수 있었던 피터는 밤마다 형과 함께 있는 꿈을 꾸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날따라 가 뜩이나 형이 뭘 하려는지 몰라 궁금했던 참에 정원조차 꿈에 보이지 않았던 것 이다. 그 대신 피터는 퍼뜩 눈을 떴지만, 가로등 불빛을 받아 어렴풋이 보이는 벽난로의 엘리 그림 엽서에 눈이 갈 때까지 자기가 본 게 무엇인지 몰랐다. 피터는 자기 눈에서 성당탑을 내쫓으려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저 형이 지금 물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면서 다시 잠들기 위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이 하듯이 울타리를 넘어가는 양의 수를 세지 않고 그냥 숫 자만 세었다. 정원에는 양도 울타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숫자를 세다 보니 피터는 어느새 다시 잠들기 시작했다. 몽롱한 상태에서 피터는 형을 찾으면서 이제 곧 정원을 볼 수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들 떴다. 형만 따라가면 된다... 이윽고 피터는 완전히 잠들었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피터는 계속 숫자를 세었고 그 숫자는 이제 어떤 의미를 지닌 숫자가 되기 시작 했다. 아직 정원까지 가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발자국을 세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잿빛 탑 안으로 뱅글뱅글 올라가는 계단의 숫자였다. 꿈속에서도 피터는 또다시 엘리 성당 탑을 보는 게 싫었다. 엘리 성당 탑 꼭대기까지는 거의 300개의 계단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톰이 오라가면서 센 숫자는 286개였다. 톰은 관광객 맨 끝줄에 있었고 해티는 톰 바로 앞에서 올라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둘은 몸을 구부리다시피 해서 작은 물을 빠져 나가 납으로 된 ㄷ 지붕 위로 나왔다. 이곳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둘은 난간에 시대어 눈 아래 보 이는 거대한 본당 지붕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아래로 엘리 시의 집들이 보였고 굴뚝 연기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에는 엘리 역에서 기차가 증기 를 내뿜는 소리와 바람 소리밖에 드리지 않았다. 위에서 보니까 엘리 시는 아주 작은도시였다. 저 멀리 도시 한쪽을 휘감고 흘 러가는 강을 눈으로 쫓아가자 하류가 보였다. 하얗게 얼어붙은 강은 석양빛을 받아 끝없이 부서지며 리틀포트, 덴버, 킹스린, 그리고 바다를 향해 굽이치면서 아련한 저녁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윽고 둘은 돌아서서 여기까지 미끄러져 온 얼음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먼 거리에 톰은 깜짝 놀랐다. 탑지기는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캐슬포드의 첨탑들이라고 말했다. 이 어서 관광객들을 옆쪽으로 데려가 이 쪽이 피터버러라고 말했다. 해티도 사람들 과 함께 그쪽으로 따라갔다. 혼자 남은 톰은 줄곧 캐슬포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혼자 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누군가 뒤늦게 탑계단 문을 열고 들어와 자 기 옆에서 있는 게 아닌가. 톰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피터라는 걸 알았다. 마침 옥상 건너편에 있던 해티는 톰이 어디 있는지 보려고 두리번거리던 참에 사내아이 둘을 발견했다. 똑같은 파자마에다 생김새도 아주 닮았다. 가뜩이나 요 새 톰의 존재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두 번째 소년한테서도 역시 똑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티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년들을 지나쳐 뒤에 있는 첨탑이 보이는 바람에 해티는 너무나 놀랐다. "형, 그런데 정원은 어디 있어? 정원에서 해티 누나랑 같이 놀고 있을 줄 알았 는데." 하고 피터가 불만스레 말했다. 톰은 어쩐지 시간이 자꾸 줄어둘고 있는 것 같아 재빨리 대답했다. "정원은 저쪽에 있어." 하며 팔로 캐슬포드 쪽을 가리켰다. "해티는 저기 있 구." "어디? 안 보이는데." 하고 피터가 말했다. 톰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피터는 지붕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관광객들 사 이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저기!"하고 톰이 말했다. "네 바로 앞쪽에 스케이틀을 갖고 있잖아." "형, 근데 저 사람은 해티 누나가 아니잖아. 어른인데!" 하고 피터는 짜증스럽 다는 듯이 말했다. 톰은 마치 처음 보는 듯한 눈길로 해티를 바라보면서, 무슨 말인가 꺼내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이제 내려갈 시간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하고 답니기가 소리쳤다. 관광객들이 일제히 답계단으로 몰려들어 차레대로 문을 빠져 나갔다. 이제 그 곳에는 해티와 두 소년만이 남아 있었다. "형, 저 사람은 어른이잖아."하고 피터는 또다시 말했다. 해티가 소년들 쪽으로 건너오는 사이에 톰은 피터가 점점 의미해지며 사라지 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누구였니?" 하고 해티는 톰에게 속삭였다. 이번에도 역시 돌아보지 않았지만 톰은 피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다. "너랑 많이 닮았던데. 걔도 너처럼 허깨비 같더라." "이리 오세요, 아가씨!" 탑지기가 수상쩍은 눈초리로 해티를 불렀다. 웬 젊은 아가씨가 정신이 나가서 ㅣ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 "내 동생...피터야." 하고 톰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 애는 진짜 야, 해티." "이봐요, 아가씨. 집에 안 갈 겁니까?" 탑지기가 마침내 다그치듯이 말했다. 해티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해 저문 도시의 창가에 서 밤을 맞는 노란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도시 너머엔 벌써 시커먼 어둠이 밀려와 구불거리는 강물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늦었어. 우리 서둘러야 해!" 하고 해티는 놀라서 소리쳤다. "우리라고? 허 참, 서둘러야 할 사람은 아가씨요! 난 아까부터 여기서 기다리 고 있었단 말이오." 하고 탐지기가 말했다. 해티는 톰을 뒤로 하고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탑지 기가 뒤에서 투덜거리며 두 사람이 나간 문을 잠갔다. 탑 안은 벌써 밤이 된 것처럼 깜깜했다. 해티는 날이 어두우니까 더 초조해서 서두르는 것 같았다. 톰은 그런 해티를 보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빨리 집에 돌 아가야 한다는 걱정이 뒤섞여, 피터와의 이상한 만남과 둘이서 나눴던 얘기들을 냉정하게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단지 피터가 어떻게 해서 자기한테 왔는지, 다시 찾아올것인지 하는 생각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일은 다시일어나지 않았다. 피터 롱은 집에서 거의 악몽을 꾸다 가 깨어났다. 침대에 우워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피터로서는 연결되지 않는 조각들만 얼핏 떠오를 뿐이었다. 아까 잠드려고 수를 세다가 286까지 셌던 기억 은 났다. 그러고는 주위에 정원이 없을 것 같아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굉장히 높은 곳에갔었다. 뜻밖에도 형은 거기 있었다. 형은 누군가를 가리키며 해티라고 했다. 피터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그 사람은 어른이지 어린 소녀가 아니라고 소 리 쳤었다. 순간 톰의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일었던 것까지 기억이 났 다. 톰과 해티는 서둘러 성당을 빠져나와 강으로 내려갔다. 스케이트를 타고 있던 엘리 시의 사람들은 다들 집으로 돌아가려하고 있었다. 다시 스케이트를 타려고 하는 사람은 톰과 해티뿐인 것 같았다. 강가의 기둥에 기대어 쉬고 있던 세 할아버지가 둘을쳐다보고 있었다.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해티한테 충고를 해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한 할아 버지가 날이 저물었는데 스케이트를 타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해티가 캐슬 포드로 간다고 대답하자 세 할아버지는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얼음이 괜찮아야 할 텐데." 하고 한 할아버지가 거정스레 말했다. "하나 이렇게 남서풍이 부는 걸 보면 곧 날도 풀리고 비도 올 것 같구면 그래." 톰과 해티가 탑 꼭대기에서 느꼈던 미풍은 어느새 강풍으로 변해 있었다. 강 을 내려왔을 때의 찌르는 듯한 냉기에 비하면 공기가 훨씬 따뜻하고 부드러워졌 다는 것을 톰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벌써 누가 얼음에 빠졌다지." 하고 두 번째 할아버지가 말했 다. "거, 상류 어디라고 아던데. 그래도 익사는 안 했다나 봐. 친구들이 마침 곁 에 있어서 얼음 위로 사다리를 놓고 건져냈다지. 하니, 필경 얼음에 구멍이 났을 테고 그 주변의 얼음도 시원찮을 게야. 조심해야할걸. 여보게 매튜, 그게 어디라 고 했지?" 첫 번째 할아버지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세 번째 할아버니는 그 구멍이 꽤 클 테니까 근처에 가거든 단단히 주의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특히 다리 밑이나 나무 밑, 혹은 갈대밭 주변의 얼음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첫 번째 할아버지는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차라리 캐슬포드까지 기차 를 타고 가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해티는 걱정해 주셔서 고맙다고 하면서도 스케이트 끈을 꼭 묶었다. 톰은 이 런 해티가 무척 용감하게 느껴졌다. 떠날 채비를 마친 둘은 나란히 얼음 위에 섰다. 해티가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를 하자 할아버지들은 조심해서 가라고 말했 다. 미끄러져 가는 두 사람의 등뒤로 한 할아버지가 그래도 보름달이 뜰 거라고 소리쳤다. 드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 갔을 때 해티는 톰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에리에서 캐슬포드까지 기차를타고 갈 돈이 없다는 얘기였 다. 둘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달려갔다. 마 지막 사람을 지나치고 나서는 줄곧 둘이서만 스케이트를 탔다. 톰은 지금이야말 로 해티한테 말할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해티는 스케이트르 타느라 정신이 없었 다. 톰은 가면서 피터가 한 말을 생각하며 해티의 앞모습을 슬쩍 훔쳐보았을 뿐 말은 걸지 않았다. 곧 할아버지가 말한 대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달무리가 져 있는 걸 보니 비가 올 것 같았다. 달빛이 앞길을 환히 밝혀 주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쓸쓸하 고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바람소리와 얼음을 스치는 스케이트 소리 말고는 아 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해티도 그 고요함이 싫었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려 곤 하지 않았다. 고요함과 달빛과 외로움 속에서 둘은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앞쪽의 오른편 강둑 위에 한 2미터쯤 되는 어두운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 였지만, 둘은 그저 기둥이나 나무 줄기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별안간 그 검은 그림자가 움ㅈ였다. 해티는 겁이 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이곳은 강이 휘는 곳이라서 해티는 달빛을 흠뻑 받고 있는 반면, 그 사람-어두운 그림 자는 사람이었다-은 달빛을 등지고 있어서 어둡게 보였고 유난히 키가 컸다. 그 사람은 뭔가를 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톰은 자기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 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서 마침내 서로가 나란히 있게 되었다. 강둑에 있던 검 은 그림자가 다시 움직이며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당신입니까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겁결에 꿈속에서 소리를 질렀던 것 같기도했다. "해티씨..." 해티가 주춤하는 바람에 둘의 리듬은 깨어졌다. "누구세요?" 하고 해티가 소리쳤다. 톰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몰랐지만 해티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해티는 점차 속도를 늦추면서 강둑 쪽으로 다가갔다. "접니다, 바티예요." "어머나, 바티 씨!" 해티는 안도감에 부끄러움도 잊고 소리쳤다. 청년은 둑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망토를 걸치고 농보장화를 신은 건장한 모습 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스케이트를 타고 어디로 갑니까. 더구나 혼자서?" "캐슬포드로요. 거기서 기차를 타든지 걷든지 해서 집에 가려구요. 빨리 돌아 가야해요." "집으로 가시는 길이라구요? 허나 혼자서 이렇게 스케이트를 타면 위험합니 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태워다 드리지요." 청년은 캐슬포드 장에서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강의 얼음이 어떤지 보려고 잠시 옆길로 내려왔는데, 그때 마침 해티와 톰이 그 를 본 것이다. 강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고맙게도 말과 마차는 둑에 서 불과 2,3미터 떠러 진 곳에 세워져있었다. 바티 청년이 손을 내밀어 해티를 둑 위까지 끌어올렸다. 말은 마차 앞의 휴대용 램프에서 나오는 노란 빛을 어ㄹ풋이 받으며 수레채 사 이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탑에서 도시의 창문을 통해 비치던 촛불과 램 프를 본 뒤로는 처음 조는 따뜻한 불빛이었다. 마차 너머로 뻗어 있는 길은 캐 슬포드와 집으로 가는 큰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 마차에 오라탔다. 바티 청년과 해티가 각자 양족 끝에 앉는 바람에 한가 운데가 텅 비어서 톰은 거기에 앉았다. "제가 워터비치까지 태워 드릴게요. 거기서 캐슬포드까지 가는 기차를 탸면되 겠지요. 실례지만 기차표를 살돈이 있습니까? 모자라시면 제가 꿔드리지요." 하 고 바티 청년이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하고 해티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괜히 저 때문에 돌 아가는 건 아니에요?" 바티 청년은 펜스 지방에 있는 아버지의 한 농장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워터비치와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워 드리게 되어서 몹시 기쁘다 고만 대답했다. 그러고는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마차를 타고 갔다. 워터비치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캐슬포드행 막차가 떠난 뒤였다. "그럼 제가 캐슬포드까지 모셔다 드리죠." 하고 바티 청년은 말했다. 몹시 즐 거운 눈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아까보다 얘기 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쑥수러워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아주 편하게 이야기 했다. 바티가 낮에 캐슬포드에 있는 학교에 같이 다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티와 바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케이트 얘기를 꺼냈다. 바티 청년은 해티가 오늘 혼자서 그렇게 먼 길을 활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 척이나 감탄했다. 자기도 올 경울에 캐슬포드와 엘리 사이를 활주하긴 했지만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한다는 건 흔치 않다고 했다. 옛날에 자기 어머니도 역시 그곳으로 가본 적이 있다면서 바티 청년은 그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 다. ... 아주 오래전이었죠.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귀고 있을 때에도 전국적으 로 이렇게 심한 추위가 있었답니다. 두 분은 캐슬포드에서 엘리까지. 엘리에서 리틀포트까지, 리틀포트에서 그 너머까지 스케이트를 타고 가셨나봐요. 너무나 길고 긴 여행에 지친 나머지, 어린 아가씨였던 우리 어머니는 스케이트를 타고 가면서 거의 잠이 들었답니다. 꿈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다에 이르러 그 매그럽게 얼어붙은 바다위를 지나 멀리 다른 나라까지 미끄러져 가는 꿈을 꾸었다니요... 해티와 청년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바티 청년은 올 겨울에 스케이트 를 탈 계획을 이야기 했다. 해티처럼 바티 청년도 스케이트 타기를 몹시 좋하했 다. 톰은 얘기 속에 끼여들 수가 없는 처지여서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톰은 해티 한테도 은근히 화가 났다. 해티는 마치 톰을 잊어버렸거나 전혀 안 보이는 것처 럼 행동했다. 이따금 해티가 몸짓을 할 때마다 손이 톰의 몸을 뚫고 지나가곤 했다. 한 번은 해티가 바티의 얘기를 좀도 잘 들으려고 비스듬히 앉아 팔을 마 차 의자 뒤에 기댔는데, 그 바람에 해티의 손과 손목이 톰의 목 위에 놓여서 톰 은 숨을 쉬기조차 곤란해졌다. 캐슬포드 역에 도착했을 때 톰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막차는 아직 떠나 지 않았지만 타고 가려면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바티 청년은 여기서 8킬로만 더 가면 되니까 아예 해티네 집까지 바래다 주는 게 낫겠다고 했다. 해티고 사 양하지 않았다. 톰은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텅 빈 기찻간에서 해티한테 둘 만의 비밀스런 얘기를 털어놓고 싶은데... 또 꼭 해야 할 이야기인데... 마차는 계속해서 달려갔다. 톰은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해티와 바티는 톰의 머리 너머로, 때로는 톰의 몸을 뚫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 수록 함께 있는 것이 더 즐거운 모양이었다. 어두운 시골길 저편에서 교회 종소 리가 은은하게 들려 왔다. 톰은 다시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기가 '시간'을 마음대로 할수 있어서 자시의 '시간'을 해티의 '영원'과 바꾸어서 언제까지나 즐 겁게 정원에서 놀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정원은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해티의 '시간'이 톰을 앞질러 톰의 놀이 친구였던 해티를 완전 히 성숙한 여자롤 바꾸어 버렸다.피터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말발굽이 달그닥서리는 소리 사이로 톰은 해티와 바티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하는 얘기는 완전히 어른들의 대화여서 톰한테는 조금도 재미가 없었 다. 그렇다고 혼자서 생각하는 것도 이젠 따분했다. 머릿속이 차츰 텅 비어 갔 다. 스케이트 때문에 지친 것도 아니고 바이 늦어서 졸린 것도 아닌데 톰은 그 만 잠이 들어 버렸다. 말발굽 소리가 너무나 단조로운 까닭인지도 모른다. 아니 면 해티가 이젠 자기를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아서 일 수도 있었다. 마차가 흰 도료를 칠한 농가 모퉁이를 돌아 저택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톰은 마차의 흔들 림을 어렴풋이 느꼈다. 마차가 현관에 닿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멜번 숙모가 쌀 쌀맞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숙모의 눈에는 마차에 타고 있는 두 사람밖에 보이 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나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해티조차도 자기 옆에 있는 딱 한사람, 바티 청년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25. 마지막 기회 금요일 아침, 사람들이 깨지 않은 고요한 시간에 그웬 이모는 침대에서 나와 아침 차를 준비했다. 물이 끓자 이모는 한 잔은 자기가 마시고 한잔은 남편한테, 또 한잔은 톰한테 갖다 주려고 일어섰다. 차를 가지고 좁은 복도를 지나가던 이모는 뭔가를 보고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다. 어젯밤에 남편이 잠근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잠깐 사이의 악몽처럼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해골이 달린 열쇠를 가진 도둑들, 쇠파이프를 든 강도들, 훔친 보따리를 메고 가는 도둑들. 죄다 까만 가면을 쓰고, 곤봉, 권총, 단도, 몽둥이 같 은 흉기를 가진... '이크!' 손가락이 너무 뜨거워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모는 어찌나 떨었던지 찻잔 받침에다 차를 쏟아 손가락을 데었다. 이모는 가까이에 있던 의자 위에 찻 잔과 받침을 내려다놓다가, 비로소 문이 왜 열려 있는지 알게 되었다. 톰의 침실 용 슬리퍼가 문틈에 끼여 있었던 것이다. 상상 속의 도둑들은 깨끗이 사라졌다. 톰의 짓이 틀림없었다. 톰이 처음 왔을 때 밤중에 침대에서 나와 돌아 다녔던 생각이 났다. 그때 남편과 심하게 말다툼 을 했었다. 그래서 이모는 이번만큼은 이 일을 혼자서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현관 밖으로 나가서 층계참을 살펴보았지만 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 다. 슬리퍼를 빼서 문을 닫고 톰은 방으로 들어갔다. 톰은 거기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이모는 문제의 슬리퍼를 손에 들고 톰의 곁에 섰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물론 야단을 쳐야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꾸짖어 여기서 보내는 마지막 날을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이모는 꾸중은커녕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톰을 깨웠을 때 톰이 하는 행 동을 보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눈을 뜬 톰은 마치 보기 싫은 광경을 보았 다는 듯이 다시 감아 버렸다. 눈을 감은 채 뜻도 없이 말을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안 돼, 싫어!" 그웬 이모는 슬리퍼를 내려놓고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꼬옥 껴안았다. "왜 그러니, 톰? 이제 깼으니까 됐어. 아침이야. 아무 탈 없이 이모랑 같이 있 잖아." 톰은 눈을 뜨고 이모를 바라보더니 마치 딴데서 누군가를 찾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뭐, 나쁜 꿈이라도 꾸었니? 하지만 이제 괜찮아. 지금은 금요일 아침이야. 내 일이면 집으로 돌아갈 텐데, 뭘." 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어진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이모는 톰에게 입을 맞추고 나서 새 홍차를 가져오려고 방에서 나갔다. 이모부 한테는 단지 이 렇게 말했다. "이젠 톰을 위해서라고 집에 보내야겠어요. 몹시 긴장해 있나 봐요. 악몽까지 다 꾸지 뭐예요." 침실 슬리퍼에 대해서도 이모는 달리 이해했다. "톰이 약간 몽유병 증세를 보이기도 하구요." 그웬 이모는 출입문에 끼여 있던 슬리퍼에 대해서 톰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았 다. 톰은 나중에 슬리퍼가 침대 곁에 있는 것을 보고서, 어떻게 슬리퍼가 거기 있게 되었는지, 또 자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너무나 궁금해 했다. 이부자 리 밑에는 어젯밤에 톰을 엘리까지 데려다 주었던 해티의 스케이트가 있었고 왼 손 손가락에 끈까지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금요일 아침에 이모네로 돌 아와 있지 않은가. 자신의 '시간'을 해티의 '영원'으로 바꿀수 있다고 믿었는데도 불과 몇 시간만에 자기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마, 내가 마차에서 잠이 들었기 때문일 거야.'하고 톰은 생각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이제 오늘 밤밖에 기회가 없다. 오늘 밤에 는 기어코 있고 싶은 만큼 정원에서 머무르리라. 그런데 스케이트를 가지고 갈까 말까. 오늘 밤에도 여전히 추운 날씨라면 연 못이나 목장에서 스케이트를 탈거야. 지난밤처럼 정원을 떠나지는 않겠어. 그렇지만 정원의 계절은 지금까지도 그래 왔듯이 갑자기 여름이 되진 않았을 까... 그래, 오늘 밤 내가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열면 틀림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나를 감싸고 향기로운 꽃냄시가 가득하겠지. 여느 때처럼 잔디밭 저편의 상록수가 나를 반겨줄거야. 나는 해시계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 상록수와 호두나무 그루터기 사이의 그늘진 굴길을 뛰어가야지. 아스파라거스 꽃밭이 있 는 곳까지 가면 다시 햇살속을 나올 거야. 아벨 아저씨는 사과 나무 옆에서 고 추냉이 뿌리를 케고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파란 앞치마를 두른 소녀 시절의 해 티가 나를 반기며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겠지. "정원 안에서의 시간은 되돌아 갈수 있으니까 오늘 밤 해티는 다시 작은 소녀 가 되어 있을 거야. 그럼 우린 같이 노는 거야."하고 톰은 혼잣말을 했다. 금요일에는 온종일 집에 갈 준비를 했다. 톰의 짐을 할곳에 모아서 하나씩 점 검하고 여행 가방 속에 넣은 뒤 가방을 깨끗이 닦아 이름과 주소를 다시 적었 다. 이모는 톰을 데리고 나가서 기차에서 먹을 간식이랑 엄마 아버지와 피터에 게 줄 조그만 선물을 고르게 했다. 톰은 한참 뒤에나 있을 그런 일 따위에 흥미 를 보이는 척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과연 며칠 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날밤, 그웬 이모는 톰이 또다시 몽유병 증세를 보이면 얼른 알아차릴 수 있 도록 양쪽 방문을 다 열어 놓았다. 톰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여기서 지내 는 몇 주 동안, 밤중에 눈치 보는 일과 소리내지 않고 움직이는 일이라면 이골 이 나 있던 터였다. 톰은 아무도 모르게 방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침실 창으로 보이던 하늘도 온통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달빛도 별빛도 없었 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층계의 창문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뭐, 이까짓 거, 상관없어." 톰은 그렇게 말하고 더듬더듬 계단을 내려가 거실로 갔다. 거기에 멈춰 서서 괘종 시계 소리에 귀를 기울엿다. 시계는 꼭 뭔가 알려 줄 것 같았지만 자기 일에 바빠서 톰한텐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그저 착실하게 똑 딱거리는 소리가 두근거리는 톰의 심장을 타일렀을 뿐이었다. 톰은 거실을 따라 걸어갔다. 낡은 신발장이 있는 데서 왼쪽으로 돌아 정원으 로 나가는 문 앞에 섰다. 갑자기 톰은 어떻게 나가야 할지 알수 없었다. 믿을 수 없게 도 톰의 손가락에 잡힌 것은 빗장이 아니라 자물쇠였다. "난 정원으로 꼬 가야해." 하고 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뒤에서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는 톰의 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이 없었다. 톰은 간신히 문을 열었지만 바깥은 집 안처럼 깜깜한 밤이었다.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다. 현관 계단에 서서 톰은 밤공기를 들어마셨다. 차가운 느낌도 없었 고, 꽃과 잔디와 나뭇잎에서 나는 여름의 향기도 없었다. 다만 어디선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 괜찮아."하고 톰은 말했다. 정원 일이라면 머릿속으로 훤히 외우고 있던 톰에게는 어두운 것도 별문제가 없었다. 눈을 감고 서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자, 먼저 어디로 갈까? 잔디밭을 지나서 상록수까지 가보자. 톰은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맨발이 차가운 돌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며 톰 은 커다란 금속 물질에 부딪혔다. 순간,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뚜껑이 돌바닥에 나뒹굴었다. 톰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쳤지만, 다시금 상록수가 있다고 생각하 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록수가 있는 곳에 훨씬 못 미쳐서 나무 담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까 입구애서 맡았던 지독한 냄새는 바로 크레오소트 냄새였다. 이곳은 붉은 턱수염 아저시가 차를 세워 두기고 하고 아파트 사람들 이 쓰레기통을 놓아 두기도 하는 좁은 뒤뜰이며, 자신은 크레오소트가 칠해진 나무다마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톰은 뒤로 돌아서서 마치 개떼한테 ㅉ기는 생쥐마냥 집 안으로 도망쳤다. 다 시 나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대로 돌아갈 염려도 나지 않았다. 톰은 거실 한가운데 괘종 시계 곁에서서 울기 시작했다. 시계는 여전히 차갑게 똑딱거리고 있었다. 위층 어디선가 불이 켜졌다. 그 불빛에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 다. 톰은 직감적으로 해티가 아니란 걸 알았다. 순간, 톰은 해티에게 도와 달라 고 소리쳤다. "해티! 해티!" 그 소리에 저택에 사는 사람들이 죄다 놀라서 깨어났다. 새소리처럼 날카로운 톰의 비명소리는 가장 꼭대기인 삼층에서 자고 있던 바돌로메 할머니한테도 들 렸다. 할머니는 60여 년 전 어느 여름날, 세례요한일에 있었던 자신의 결혼식 꿈을 꾸고 있다가 그 소리 때문에 깨어났다. 비명 소리는 아무래도 자기를 부르 는 소리 같았다. 할모니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에 취한 채 불을 켜고 침대에서 나왔다. 이모부는 마지막 몇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가 톰을 붙들었다. 톰은 마치 포 로로 붙잡힌 것처럼 흐느끼며 몸부림쳤다. 서서히 힘이 빠지면서 톰은 어깨를 들썩이며 조그맣게 흐느꼈다. 앨런 이모부는 이모가 기다리고 있는 이층으로 톰을 데려갔다. 그리고는 다시 내려가서 뒷문을 잠그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이층으로 올 라와 이층 사람들에게 자기 조카가 꿈을 꾸다가 걸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끝 으로 이모부는 바돌로메 할머니가 사는 다락층으로 올라갔다. 할머니네 현관문 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지만 잠기지는 않았다. 톰이 울부짖던 소리에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이다. 이모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열심히 듣기는 했지만 할머니 는 좀체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점점 황당한 질문을 하더니 똑같은 질문을 몇번이나 해댔다. 결국 이모부는 듣 다 못해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얼른 계단을 내려와 버렸다. 그웬 이모는 톰을 침대에 누이고 따뜻한 우유와 아스피린을 먹였다. 침실에서 나오자 남편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톰이 잠들 때까지 곁에 있을께요."하고 그웬 이모는 나지막히 말했다."무척 놀란 것 같아요. 깨보니까,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 떻게 해서 자기가 거기까지 갔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이걸 좀 보구려."하고 앨런 이모부는 구식 스케이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녀석이 이걸 갖고 있더군." 그웬 이모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잠자면서도 뭘 들고 다녀요?" "게다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어." 이모부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스케이트를 훑어 보았다. "최근에 기름칠을 하고 왁스를 칠하기 했지만 한 50년이나 100년쯤 안 쓴 것 같아. 이상하잖아..." "물어 보지 마세요, 여보 약속해 줘요.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알겠소. 그게 톰의 스케이트라면... 어쨋든 우리 집 안에 있던 건 아니니 내일 짐 속에다 넣어 주어야겠어." 그웬 이모는 톰의 침시로 돌아가려다가 퍼뜩 생각이 났는지 "아 참! 톰이 아 까 소리를 질렀을 때 말예요. 위에서 들으니까 누구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 요."하고 말했다. "그야 엄마를 불렀계지. 아니면 아버지를 불렀거나." "아녜요, 확실히 누구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요." "그럴 리가 있겠소. 그냥 소리를 지른 거겠지." 26. 사과 전에도 톰은 실망돠 슬픔속에 잠든 적이 있었지만, 항상 새로운 날에는 새로 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 아침만은 어젯밤의 연속인 것 같았다.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나자 어제의 공포와 슬픔이 다시름 톰의 가슴을 죄어 왔 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톰은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고 정원도 잃어버렸다. 오늘 은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눈물이 흘러 나왔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그웬 이모가 찾아와 톰을 부둥켜 안았다. "톰, 얘기해봐, 무슨 일이었니?" 톰은 이모한테 말할까 생각해 보았다. 슬픈 일을 다른 사람한테 속시원히 말 하고 나면 그만큼 슬픔이 덜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 톰의 이 야기는 너무나 길고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아무리 말해도 이모는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톰은 말없이 이모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닦았다. 마치 환자처럼 톰은 아침밥도 침대에서 먹었다. 킷슨 부부는 아침밥을 먹으면 서 톰에 대해서 의논했다. "여보, 이런 상태로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당신 차로 데려가 주 는 게 어떨까요?"하고 그웬 이모가 말했다. 이모부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톰의 집에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때쯤 떠나겠다고 전보를 쳤다. 톰은 아침을 다 먹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침대에 누워서 시 름에 빠져 있는 것보다 차라리 일어나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방에서 나오니까 마침 이모부가 막 출근 하려던 참이었다. 톰을 보더니 이모는 오늘 예 정이 바뀌어서 오후에 자동차로 가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윽고 "자, 그럼". 하고 이모부가 현관문을 나섰다. 이모가 문을 닫기가 무섭게 밖에서 이야기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에 이모부 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다시 들어왔다. "아, 저 할머니 도대체 왜 저러시지?"하고 이모부가 말했다. "바돌로메 부인 말인가요? 당신한테 뭐라고 해요?" "지난밤의 일을 사과하라는 거예요. 어젯밤에도 그렇게 사과했고 지금도 사과 를 했건만 막무가내야. 글세 톰이 직접 와야 한다는 거여." "어머, 말도 안 돼요!"하고 이모가 소리쳤다. "그럴 수는 없어요.제가 가서 이야기하겠어요!" 바돌로메 부인에게 몹시 화가 난 이모는 다짜고짜 현관문을 나서려고 했지만 이모부가 다급하게 말렸다. "여보, 진정해요! 상대는 집주인이오. 괜히 화나게 하면 골치 아파진다고." "상관없어요!" "아, 내가 다시 말해 보겠소."하고 이모부가 말렸다. "아니야." 갑자기 톰이 담담한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내가 가겠어요, 그게 옳아요. 이모, 난 괜찮아." "톰, 내가 그럴 수 없어!"하고 그웬 이모가 소리쳤다. "아냐, 갈래."하고 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마치 침대에 누워서 울다가 떨 치고 일어나는 것과 같았다. 비록 달가운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게 떳떳하고 마음도 편했다. 톰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이모와 이모부를 감탄시 키는 데가 있었다. 잠시후, 톰은 바돌로메 할머니가 사는 삼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예상했던 대로 할머니는 작은 키에 늙고 주름투성이에다 백발이었다. 딱 하나, 톰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 었다. 눈, 할머니의 검은 눈이었다. 그 검은 눈과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길이 어 쩐지 톰의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냐?"하고 할머니가 물었다. "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어요."하고 톰이 말을 꺼내자 할머니는 말을 가로챘다. "네가 톰이냐? 네 이모부가 그러더구나. 성은 뭐지?" "롱입니다."하고 톰이 말했다. "저 할머니... 사과 드리려고." "네가 톰 롱..." 할머니는 손을 내밀어 톰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톰이 입고 있는 옷의 촉 감을 느껴 보려는 듯, 과연 그 밑에 살과 뼈가 있는지 느껴 보려는 듯 가만가만 눌렀다. "넌, 넌 정말 사람이구나, 살과 뼈를 가진 소년이었어. 킷슨 씨의 조카... 지난 밤에..." 톰은 횡설수설하는 할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지난밤 일은 죄송했어요." "한밤중에 소리쳐서 날 깨웠지."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넌 이름을 불렀지."하고 할머니가 소리를 낮추었다. 그 소리에는 어쩐지 온화하고 행복하며 사랑이 넘치는 듯한 여운이 깃들여 있 었다. 아니, 더 많은 여운이 담겨 있었지만 말로 잘 표현 할수 없었다. 이제까지 바돌로메 할머니한테 이런 온화한 구석이 있으리라곤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오, 톰."하고 할머니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니? 넌 나를 불렀어. 내가 바로 해티야." 할머니가 하는 말은 별로 뜻이 없이 들렸지만, 그 검은 눈에 뜻밖에도 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지막한 소리로 기쁜 듯이 중얼거리는 할머니한테 이끌려 톰은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네 좁은 현관에 들어선 순간, 무척이나 눈에 익은 고딕식의 습도계가 마주 보였다. 할머니는 톰을 떠다밀다시피 해서 거실로 데려갔다. 저실 벽난로 위에는 어디 선가 본 것 같은 청년의 커다란 갈색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아련한 기억을 더 듬어 톰은 마침내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지난번 달빛 아래서 보았던 바로 그 청년의 얼굴이었다. "으응, 저 사람은 바티 청년인데."하고 톰이 말했다. "오냐",하며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었다."우리가 결혼하자마자 찍은 사진이란 다." 톰은 간신히 할머니의 뜻을 이해할수 있었다. 요컨대 바티 청년과 바돌로메 할아버지는 같은 사람이었다. 톰은 의자에 주저앉아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바티 청년이랑 결혼하셨어요?할머니는 누구세요?" "톰, 아까 얘기했잖니."하고 할머니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내가 바로 해티 란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살던 여자애였는데." "그래, 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사람이야.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니?"하고 할 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에 왕위에 올랐어요." "그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지."하고 바돌로메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난 여왕 통치가 끝나갈 무렵 태어났단다. 내가 소녀였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이 미 할머니였어. 그러니까 난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사람이란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정말이지... 정원은 없어졌는데... 습도계는 여기 있고... 할머닌 또 해티라고 하고... 그럼 엘리까지 스케이트 타고 갔을 때, 마지 막으로 본 뒤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마지막이라니?"하고 바돌로메 할머니가 말했다. "아니야, 톰. 널 마지막으로 본 건 그때가 아니야. 잊어버렸니?" 할머니는 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넌 우리 얘기를 전혀 모르는구나, 톰. 애기해 주마."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톰은 귀를 기울였지만, 처음에는 할머니가 하는 말보다 말투에 더 신경이 쓰였다. 눈을 크게 뜨고 할머니의 모습과 동작을 관찰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눈은 틀림없이 해티의 눈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톰은 손짓이나 목소리나 웃는 표정에서 정원에서 같이 놀던 작은 소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톰은 갑자기 고개를 내밀고 속삭였다. "할머니는 예전의 해티야.아니, 해티야! 할머닌 진짜로 해티야!" 할머니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야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27. 톰 롱에게 들려준 할머니의 이야기 "그건 1895년의 일이었지."하고 해티 바돌로메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둘이 엘리까지 스케이트를 타고 간게 말이다. 역사적인 강추위가 있었던 해였지. 우린 그날 엘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바티를 만났어. 바티는 우리를 마차에 태 워 주었지." 할머니는 웃었다. "그전에는 바티랑 말해본적이 없었어. 난 친구들한테도 부끄럼이 많았거든... 뭐, 지금도 그렇지만. 하지만 그날만은 달랐단다. 바티랑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 기를 나누다 보니까 어느새 서로를 잘 알게 된거야. 바티는 나중에도 입버릇처 럼 얘기하곤 했지. 마차가 우리 집 앞 길에 들어서기 전에, 벌써 나를 자기 부인 으로 맞이하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말이야. 후후후... 얼마 있다가 바티가 청혼을 해오기에 난 받아들였지. 멜번 숙모는 날 내보내게 되어서 무척이나 반가워했어 나는 강추위가 있었던 이듬해, 세계요한일에 결혼식을 올렸단다. 그러니까 세 례요한일 이브는 내 결혼식날 이브이기도 한 날이야. 그 날밤 짐을 다 꾸리고 나서 문득 스케이트 생각이 나더군. 그래서 네 생각이 난 거야, 톰. 나는 그때 약속한 장소에 스케이트를 넣어 두었어. 비록 너를 만난 건 훨씬 전이었지만, 계 속 거기에 남겨 둬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스케이트와 함께 편지를 남겼단 다. "그걸 찾았어요."하고 톰이 말했다. "서명이랑 날짜도 적혀 있었어요." "지난 세기의 마지막 어느 해, 세례요한일 이브였지. 그날밤은 어찌나 찌는 듯 이 덥고 천둥이 치는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더구나. 그래, 다음날 있을 결혼식을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내 어린 시절과 정원을 너와 함께 정원에서 지낸 모든 시간들을 두고서 말이다. 톰. 그 와중에 폭풍우가 가까 워지면서 사방에서 번개가 쳤지. 침대에서 일어나 창 밖을 보았더니 목장과 느 릅나무와 강둑이 훤히 보이지 뭐야.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까 문득 정원이 보 고 싶더구나. 너무너무 보고 싶었단다. 그래서 집 뒤켠에 있는 빈방으로 들어가 정원을 바라보았지." "아, 어느 방을 얘기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언젠가 그 방에 머리를 들이밀었 던 적이 있거든요."하고 톰이 말했다. "후후, 그래. 난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 보았지. 폭풍우가 가까워지면서 번 쩍거리는 빛에 상록수와 전나무, 정원 구석구석과 정자까지 대낮처럼 보였더. 그 러다가 널 보았단다." "나를요?"하고 톰이 소리쳤다. "할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요?난 못 ㅂ는데요." "넌 한 번도 쳐다보지 않더구나. 아마 정원을 걸어 다니고 있었던 모양이야. 구석 꽃밭에서 쓱 나타나더니 잔디밭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걸어갔으니까 그림 자가 꼭 달빛처럼 흐릿하게 보였어. 아마 파자마를 입고 있었던 것 같아 톰,그거 파자마 맞지? 그 당시엔 사내아이들이 셔츠만 입고 잠을 잤거든. 그러니 파자마 를 모를 수 밖에. 그때 네 파자마 윗도리가 열려서 펄럭거리던 생각이 나는구나. 네가 현관으로 가길래 안으로 들어갔나 싶었단다. 그게 널 마지막으로 본 거였 지. 그러고 나서도 나는 한참이나 창가에 서서 중얼거렸어. '톰은 가버렸지만 정 원은 여기 있어. 정원은 언제든지 여기 있을거야. 절대로 변하지 않을거야.' 톰, 기다려 키다리 전마무 생각나니?꼭대기까지 담쟁이 넝쿨이 휘감겨 있던 그 나무 말이다. 난 어렸을 때 곧잘 그 나무 아래 서 있곤 했단다. 바람이 드센 날이면 발밑의 흙이 불끈 올라왔지. 마치 뿌리가 근육처럼 힘차게 내 발밑을 밀어 올리 는 것 같았어. 그날 밤, 폭풍이 기승을 부릴 때 내가 보는 앞에서 사나운 바람이 전나무를 내리쳤지... 아, 얼마나 끔찍했던지! 순식간에 번개가 나무에 떨어진 거 야. 전나무는 힘없이 쓰러져 버렸어."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톰은 그 나무가 쓰러 진 뒤의 정적과 이층 창문에서 비명 소리가 났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톰, 그래서 난 알게 되었지. 정원도 변한다는 걸. 우리들의 추억말고도 모든 게 변해 가는 게지." "그리고 어떻게 되었어요?"하고 톰이 물었다. "그 다음날, 아벨 아저씨는 전나무 때문에 아스파라거스 밭이 망가졌다고 투덜 거렸지. 하지만 난 벌서 전나무도 잊어버리고 정원도 너무 까맣게 잊어버렸단다. 다음날이 바로 결혼식날이었으니까. 바티와 난 결혼식이 끝나자 펜스 지방에 있 는 바티 아버지네 농장에 가서 살았더랬어. 아주 행복했단다." "그리고요?" "우린 뭐든지 잘 풀렸지. 사촌 오빠들보다 더 잘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사촌 오빠들은 셋이서 같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휴버트 오빠랑 에드가 오빠가 떠나 버 리는 바람에 나중엔 제임스 오빠 혼자서 운영했단다. 제임스 오빠는 결혼해서 아이들도 얻었지만, 얼마 안 가서 부인이 죽어 버렸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업 도 자꾸 기울어서 마지막엔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지. 가기 전에 집이랑 가구랑 남은 땅을 죄다 팔아 치웠단다. 바티와 난 그 경매에 참석했더랬지. 그때만 해도 벌써 집은 많이 달라져 있었거든. 제임스 오빠는 자금이 부족해서 목장들을 먼 저 팔고, 과수원과 정원까지 팔아 치웠단다. 정원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지 뭐 야. 상록수와 잔디밭이 있던 곳을 따라 집집마다 좁다란 정원이 생겨났지. 남아 있는 나무라곤 아차나무 한 그루뿐이었어. 그 나무만은 지금도 어딘가 다른 집 정원에 남아 있단다." "아하, 그 나무가 아차나무로군요." "그래. 그날 경매에서 바트는 내가 좋아하던 가구들을 조금 샀단다. 습도계는 좀전에 봤겠지? 괘종 시계도. 나는 늘 저 괘종 시계 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지. 어렸을 때는 말이다. 아침이 되면 일부러 괘종 시계소리를 못 듣곤 했지. 뻔히 틀리게 친 줄 알면서도 하녀들보다 먼저 일어나 정원에 나가 노는 거야. 어떤 때는 해도 뜨기 전에 침대에서 나와 놀기도 했단다." "괘종 시계를 사놓고 왜 펜스 지방까지 가져가지 않았어요? 움직일 수 없어 서?" "아니ㅣ, 그럴 필요가 없었어. 바티가 이 집을 샀으니까 말이다. 바티는 살 수 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었지. 하지만 이 집은 이미 정원도 없고 별로 좋은 집이 못 된다면서 연립 주택으로 개조해서 세를 주었단다." "그때부터 쭉 여기서 사셨어요?" "그때부터는 아니야. 바티와 난 펜스 지방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단다.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 다 큰 전쟁... 요즘은 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부 르더구나... 그 전쟁에서 죽었단다."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 바티도 죽고 나 혼자 남았지. 내가 여기 온 건 그때 였단다. 그 이후로 줄곧 여기서 살아온 거야." 할머니는 이제는 할말을 다했다는 듯이 말문을 닫았다. 하지만 톰은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할머닌 여기에 이사 오신 뒤로 가끔 옛날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곤 하셨죠? 그렇죠?"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다니?"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간다구요." "톰, 사람은 누구나 내 나이쯤 되면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 속에서 살게 된단 다. 옛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꿈을 꾸기도 하지."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원에서는 왜 언제나 날씨가 화창했는지, 어째서 정원에서의 시간은 앞뒤로 마구 왔다갔다 했 는지 알수 있었다. 다 바돌로메 할머니의 꿈에 달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밤마다 정원이 나타나게 된 것은 꼭 할머니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톰에게 이렇게 말했으니까. "... 올 여름만큼 정원 꿈을 자주 꾼 적도 없었지. 어린시절의 느낌이 생생하게 기억난 적도 없었고, 누가 나와 같이 놀아줄 사람 없나, 어디 놀데 없나 애타게 찾았더랬는데..." "저도 올 여름 내내 그런 생각을 했어요."하고 톰이 말했다. 그리고 자기 마음 도 할머니하고 똑같았다고 생각했다. 톰은 늘 같이 놀 사람과 놀 곳을 찾았다. 그런 톰의 바람이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 큰 집을 찾아 저 오랜 옛날의 소 녀 시절로 이끈 것이리라. 할머니는 정원에서 놀고 싶은 마음에서 소녀였던 '시 간'으로 되돌아가 있었고, 톰은 할머니와 함께 똑같은 정원 속ㅇ르 들어갈 수 있 었으리라. "하지만 요 며칠사이 할먼닌 전혀 정원 꿈을 안 꾸셨겠죠. 겨울에 스케이트 타 던 꿈만 꾸고," "그래. 엘리까지 스케이트를 타고 갔을 때랑... 그때가 집에서 제일 멀리 가봤 을 때지... 어른이 되었을 때랑, 바티에 관한 꿈 같은 걸 꿨어... 정원이랑 너랑은 점점 꿈에 보이지 않더구나. 톰." "어른이 되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저께 밤에 마차 안에서 할머니는 바티하고만 이야기하셨죠. 나한테는 말도 안 붙이고." "매년 겨울, 너를 볼 때마다 모습이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단다. 바티랑 같이 마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넌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구나." 톰은 이제 조금도 괴로움을 느기지 않고 담담하게 말햇다. "그리고 어젯밤엔..." "어젯밤엔 결혼식 꿈이랑 펜스 지방으로 떠날 때의 꿈만 꿨어." "어젯밤에 계단을 내려가서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열였지만, 이미 정원은 거기 없었어요. 내가 소리를 지른 건 그때였어요.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들 을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나도 그 소리에 잠이 깼지. 잘은 몰라도 아하, 톰이 내 이름을 부르는구나 싶 었어. 오늘 아침에 네 얼굴을 볼 때까지는 설마 네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단다." 톰은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린 둘 다 살아 있는 사람이예요. 천사가 '시간은 얼마 남 지 않았다'고 말한 그대로예요." 저 밑에 있는 거실에서 시간을 알리는 괘종 시계 소리가 들려 왔다. 두 번 종 을 쳤다. 할머니는 그 종소리를 잘 알아듣는 듯 지금은 열 한시라고 말했다. 이 모는 지금쯤 톰이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톰은 잠시 이층으로 내려가 이모한테 바돌로메 할머니하고 차를 마시고 와도 되냐고 물었다. 그웬 이모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안 된다는 말도 못하고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했 다. 톰은 다시 바돌로메 할머니한테 돌아왔다. 마침 할머니가 과자를 곁들여 차를 끓여 왔을 때였다. 두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다시 느긋하게 정원 이야기를 나누 었다. 할머니와 톰은 정원에 얽힌 얘기와 비밀을 주고받았다. 톰은 먼저 아벨 아저 씨의 소식을 물어 보았다. 할머니는 아벨 아저씨가 수잔이랑 결혼해서 아이들을 많이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해 주었다. 톰이 그 얘기를 듣고 나서 해티말고 자기를 볼수 있었던 건 아벨 아저씨뿐이었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몹시 놀랐다. "그랬구나! 멜번 숙모는 늘 아벨 아저씨를 경멸했지. 아저씨가 목장의 소처럼 미련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단다." "하긴, 목장의 소들도 나를 볼 수 있었지만 그 아주머니는 보지 못했으니까, 뭐." 톰이 그렇게 말하자 할머니는 소리내어 웃었다. 이제는 할머니도 멜번 숙모 얘기에 웃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할머니는 그 얘기에 대한 답례 로 정원에 얽힌 자신의 비밀 얘기를 들려주면서, 아주 오래전에 톰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톰, 옛날에 네가 그랬었지. 나무 줄기에다 이름을 새기지 말라고. 그런데 네가 아차나무 오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때, 난 우리 둘의 표시를 거기다 새겨 놓 았단다. 가늘고 기다란 고양이가 모자를 쓰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어찌나 우스꽝 스러워 보이던지. 여태껏 너한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 "어, 저번에 아차나무를 보려고 담을 기어올라갈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할 머니, 아직도 그표시가 남아 있을까요?" "아암, 남아 있고말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사라졌다. 이윽고 시계가 열두 시를 치자 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래층에는 벌써 점심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것이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이모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톰, 꼭 다시 올 거지!"하고 할머니가 소리쳤다. "언젠가 엘리에서 본 네 동생은 어떻게 되었니? 이름이 뭐더라?" "피터예요."하고 톰이 말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어떻게 피터를 잊고 있을 수 있었는지 죄책감이 들었다. 처음엔 정원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나중엔 바돌 로메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정원을 다시 찾은 기쁜 때문에 동생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톰은 다시 의자에 앉아서 할머니에게 피터 얘기를 들려주었다. 피터가 얼마나 정원이랑 정원에서의 모험 얘기를 즐겨 들었는지 말해 주었다. "다음엔 꼭 피터랑 같이 오려무나." 하고 할머니는 힘주어 말했다. "가서, 피터 한테 내가 기다린다고 얘기해 주겠니?" 톰은 약속했다. 이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식구들이 다들 얼마나 반갑게 맞아 줄까. 환영 인사가 끝나면 피터를 조금만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해야지. "피터, 정원의 다른 비밀을 얘기해 줄게. 그리고 히태가 널 거기로 초대했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이제 진짜로 할머니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심 식사도 늦어지고, 집에 가는 것도 늦어지리라. 걱정이 된 그웬 이모는 벌써부터 밖에 나와 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네 집에서 나 오자 이모자 이층에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도 그웬 이모를 내 려다보았다. "안녕히 계세요, 바돌로메 할머니."하고 톰은 공손하게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같이 지내 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래, 다시 만나자꾸나."하고 바돌로메 할머니도 담담하게 말했다. 톰은 천천히 다락방의 계단을 내려갔다. 맨 끝까지 다 내려가는가 싶더니, 별 안간 돌아서서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그때까지 방 앞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할머니한테로 두 계단씩, 펄쩍펄쩍... 그 두 번째 이별의 광경을 나중에 그웬 이모는 남편한테 이렇게 전했다. "아 글세, 톰이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가자마자, 둘이 꼭 껴안지 뭐예요. 마치 오 늘 아침에 처음 만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말이예요. 그러 더니 여보, 더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보나마나 당신은 말도 안 된다고 그러겠지 만... 물론 바돌로메 부인은 꼬부랑 할머니긴 하지만, 어쨋든 톰보다는 크잖아요. 그런데 톰 녀석이 글쎄,할머니가 꼭 조그만 소녀라도 되는 양 두 팔로 꽉... 끌어 안으며 작별 인사를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