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파스칼 장편소설 ----- 차 례 ----- 제1장 모든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주목해요 제2장 버스에서 내린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제3장 사랑의 알레르기 제4장 가슴이 콩닥콩닥, 사랑이 아닐는지요 제5장 속수무책, 첫 식사시중 제6장 수영복 차림으로 있는 게 싫어서 그래 제7장 빛나는 아랫입술, 미소 속의 보조개 제8장 캠프에 남아 있길 얼마나 잘했는가 제9장 이십육 일 동안만 찌그러져 지내면 된다 제10장 한밤중에 꾸민 청백전 팡파르 제12장 창고에서의 입맞춤 제13장 모하프 산꼭대기의 청색 깃발 제14장 청백전의 마지막 날 제15장 그의 맑고 푸른 눈빛이 슬픔으로 흐려졌습니다 제16장 잔인한 열여섯 살 여름 제17장 캠프의 마지막은 아름다웠습니다 제18장 눈물 젖은 미소 제1장 모든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주목해요 그 얘기는 둘 중의 하나였다. 모든 게 잘될 거야. 아니면 우린 결코 견뎌내지 못할 거야. 난 혼자 중얼거렸다. 저건 끔찍한 경멸감을 나타내는 거니 아니면 뭐니? 올해는 내 인생에서 최고로 멋있는 해가 되어야만 한다. 우선 나는 마침내 열여섯 살이 되는 데 성공했다. 산술적으로 말하면 십육 년 밖에는 걸리지 않았겠지만, 내 부모님처럼 과잉보호하는 부모 밑에서는 열여섯 살이 되는 데 삼십 년은 족히 걸린 ?㈄v쏿? 고지식함을 단번에 만회할 기회를 가졌다. 내 생일을 위해서 굉장한 깜짝파티를 준비해 주었던 것이다. 단짝인 스테피도 부모님을 도와서 생일파티에 초대할 친구들 명단을 작성했는데, 친구들과 친구의 친구들 그리고 불청객까지 합해서 거의 육십 명 정도에 달하는 인원이 파티에 참석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든 걸 손수 준비했는데 그건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더구나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이 준비하는 걸 나는 조금도 눈치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열세 살난 내 여동생 진드기 니나마저도 거기에 합세했다. 아무도 그애가 정확하게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그건 대단한 게 아니다. 단지 그애가 주말 내내 집에 없었다는 것 여동생이 집에 없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것이다. 파티는 떠들썩한 성공을 거뒀다. 내 아버지는 변호사인데, 그의 고객 중의 한 사람이 롤링 스톤즈의 음악편곡 담당자였으므로 나는 편곡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최신 디스크를 갖게 되었다. 그 디스크는 아직 시중에 판매되지 않은 최신판이었다. 그게 그날의 인기종목이었다. 제니 그로포도, 그녀는 최근에 사귄 남자친구 로버트 보이어와 함께 왔었다. 올해 들어 벌써 네번째 바뀐 남자친구였는데 아직 오월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그녀는 아마 죽기 전까지 수많은 로버트는 파티 도중에 대담한 장난을 하기 위해 어느 방으론가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그 바보 같은 계집애가 어느 방을 골랐는지 알겠는가? 물론 여러분은 그들이 한창 일을 벌이는 중에 누가 그 방으로 불을 켜면서 들어갔는지 알 것이다. 그 일이 지난달에 벌어졌었는데 우리 아빠는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이제 두번째로 엄청난 얘기가 있다. 난 여름 내내 집을 떠나 있기 위해 가방을 꾸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뉴욕 주 북부의 산속에 있는 여름 캠프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작정이다. 내가 할 아르바이트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다른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걸 말한다. 그 모든 경비로 부모님은 내게 적어도 천 달러는 주셔야 뿐이어서, 캠프에서의 아르바이트로 이백육십 달러의 수입은 얻어야 될 것이다. 그게 충분한 돈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곳은 멋진 곳이라고 스테피가 말해 주었다. 그녀는 오년 동안 여름마다 그곳에 갔었기 때문에 캠프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캠프의 이름은 모하프이다. 마치 인디언 부족 이름 같지만 그 이름은 캠프의 공동 소유자인 모.해리.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캠프에서의 일은 쉬운 것이다. 할 일이란 고작 식탁을 준비하고 매일 세 끼의 식사시중을 드는 것이다. 접시를 씻거나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아도 된다. 스테피와 난 모든 걸 계산해 봤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아이들은 식탁에 오래 먹어치우고는 사라져버리지 않는가. 우리는 매 식사시간이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최대한 사십오 분이라고 예상했고, 사십오 분씩 세 번이면 하루 두 시간 십오 분 동안의 일만 하고 나면 해방될 것이다! 그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집에서 삼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을 하면서 아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돈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난 얼마나 거기 가고 싶은지 모른다! 또 한 가지 굉장한 사실은, 난 조금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 말은 우리가 다음주에 떠난다는 얘기다. 캠프는 미리 가서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한다. 몇몇 꼬마들에게 겨우 식사 몇 끼 주는데 무슨 준비가 그렇게 필요한지! 난 눈을 감고서도 해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부모님은 그 캠프가 좋다고 느끼셨는지 내 동생 진드기를 캠프학생으로 등록시켰다. 그렇지만 그곳은 아주 규모가 큰 캠프이기 때문에, 내가 신경만 쓴다면 아마 동생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린 아직 거기에 있지도 않은데 웬지 동생은 벌써 나를 신경쓰이게 한다. 난 그애보다 일 주일 먼저 떠나게 되는데, 그 사실은 내가 캠프에 가지고 가지 않을 옷들을 그애가 입고 돌아다니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물건을 전부 가방 가장 예쁜 옷들을 걸치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면 미칠 지경이다. 물론 동생에게 내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할 수 있고 그애는 또한 만지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건 순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가 집을 나서는 순간에 동생은 벌써 내 옷장을 뒤지고 있을 것이다. 그애는 내 옷을 입고 다닐 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게 자기의 뚱뚱한 여자친구 아네트에게 내 옷들을 빌려주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데 아네트는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로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늘 머리에 기름때가 흐르는 지저분한 계집애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난, 어디 가지 않고 집에 그냥 있고 싶은 것이다. 내 방에 전기장치를 해서 동생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주위에 가시철조망을 두르는 일도 불사할 것이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지난 주에, 내 근사한 새 수영복 때문에 동생과 티격태격한 후부터이다. 그 원피스 수영복은 여기저기 금실로 수가 놓여 있고 허벅지 부분이 브이자 모양으로 대담하게 파였으며 한쪽 어깨가 끈이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다. 한 마디로 아주 섹시한 디자인이다. 요컨대 난 그 수영복을 두세 번밖에 입지 않았다. 캠프에 가서 입으려고 아껴두었던 것이다. 난 수영복을 아주 정성스럽게 개어서 옷장 속에 넣어두었는데 이상하게도 매번 들여다볼 때마다 접은 모양이 다르게 느껴지곤 했다. 것처럼. 그래서 난 당연히 니나에게 물어보았고 그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절대로 내 수영복에 손댄 적이 없다고 맹세했다. 누가 그애에게 뭘 물어보기만 하면 그애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결백하다는 걸 맹세한다. 난 니나가 그런 맹세를 할 때면 너무 그애 가까이에 있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왜냐하면 언젠가는 분명 그애에게 벼락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난 니나에게 부드럽게 물어보았고 그애는 단호하게 부인했는데 뭔가 그 말투에 미심쩍은 구석이 엿보였다. "니나, 바보 같은 계집애야." 난 더이상 부드럽게 얘기하지 않았다. "네가 내 수영복을 만졌다는 걸 알고 있어. 만약 다시 한번 내 물건에 손대면 "난 그 더러운 수영복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어." 니나는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만약 날 그냥 두지 않으면 엄마한테 이를 거야! 또 날 진드기라고 부르지 마!" "어디 한번 일러봐, 일러봐. 진드기야!" 동생이 그토록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때면 난 미칠 것만 같다. "어머나, 미안해. 내 귀여운 동생아." 라고 말하면서 난 그애의 방에서 나오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에 일부러 잘 개어놓은 속옷더미를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엄마!" 니나는 마치 누가 자기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이 소리를 꽥 질렀다. 엄마와 우리 집의 덩치 큰 베르제 종인 서로 부딪칠 뻔했고 노먼은 속옷더미 위로 뛰어오르면서 마구 흩으려 놓았다. "무슨 일이지?" 엄마는 두 팔을 쳐들었고 우리가 미처 답변을 꺼내기도 전에 계속 말을 했다. "너희는 오 분도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니? 니나, 도대체 내가 방바닥에 옷을 어질러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되겠니?" "언니가 한 짓이란 말예요!" 그 작은 악마는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증명해 봐!" 난 아주 침착하게 맞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애는 이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 동생은 세상에서 같다. 그애는 하루에 적어도 네 번은 운다. 울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곁에 보는 사람만 있으면 언제든지...... 특히 자식들 앞에서는 분별력이 흐려지는 부모님 앞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니나는 내가 모든 것에 대해서 자기를 비난하는 방법에 대해서 늘어놓았고 난 항상 양보하고 늘 그런 식이었다. 물론 난 그 모든 걸 부인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동생은 온갖 꾸며낸 얘기와 거짓말 그리고 남의 물건을 뒤지는 습관으로 나를 골치 아프게 한다. 우린 심한 말다툼을 했고 엄마는 물론 니나 편을 들었는데, 이유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런 식으로 남을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나더러 그 물론 난 사과할 생각이 없었지만 엄마는 만약 사과하지 않으면 하루종일 외출금지라고 윽박질렀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긴 그 심술쟁이는 자기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자기는 바쁘니까 얼른 사과하는 게 좋을 거라고 놀려댔다. 그애는 나를 마음대로 했는데 엄마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면서 그애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고 내가 자기한테 굴복하기를 기다리면서 역겨운 표정으로 이죽거리고 있었다. 난 앞으로 백 년 동안 그녀에게 복수하리라 생각했지만 당장은 사면초가였으므로, 어쩌면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른다고 궁색한 답변을 시작했고 니나는 블라우스를 벗으면서 여전히 훌쩍거리며 말했다. 엄마. 난 절대로 언니 물건에 손대지 않았다구요."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그애는 계속해서 자기처럼 아무런 잘못도 없는 불쌍한 어린 동생에게 내가 얼마나 가혹하게 했는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니나는 블라우스를 벗었고 치마도 벗었다. 엄마와 난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완벽한 천사처럼 굴던 니나는,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 위에 비대칭형인 내 수영복 자국만을 남긴 채 완전히 발가벗고 서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잘 끝난 일이었다. 니나는 그날 오후 내내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언니를 괴롭힌 것에 대해서 자신의 가증스러운 잘못을 좀더 감쪽같이 숨길 수 있는 방법밖에는 궁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이 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난 앞으로도 계속될 동생의 상습적인 행동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운좋게도 니나가 일 주일 내내 감기에 걸린다면 고작 내 가운 정도나 빌려 입을 것이다. 난 내 옷 중에서 제일 예쁜 옷을 화학 책더미 뒤에다 숨겨놓기로 결정했다. 오직 떠난다는 기대감으로 아주 들떠 있다고는 해도 내 발길을 무겁게 하는 두 가지 걱정거리를 떨쳐버릴 수 없다. 토드 워큰과 얄미운 퍼스트 때문이다. 토드는 삼 개월 전부터 사귀고 있는 내 썩 드는 남자형이다. 사실 나의 감정은 그 이상이지만 그를 사랑한다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적어도 스테피가 캠프에서 만난 남자친구 로비를 사랑하는 것처럼은 아니라는 얘기다. 난 한번도 그녀처럼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다. 스테피는 로비에게 홀딱 반해 있다.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스테피는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은 그에게 편지를 쓰고 있고 다른 남자애와 데이트 한 번 안하는 걸 개의치 않는다. 난 그녀와 같은 감정을 토드에게 느끼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게 몹시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캠프로 출발하는 차에 오르려는 순간, 주디 퍼스트가 곧장 내 마음의 권리를 침해하리라는 걸 겨울 내내 주디는 토드와 자주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그녀는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자기 부모가 다니는 클럽에 열 번이나 그를 초대했었지만 그는 내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매번 거절했었다. 하지만 다음 주면 난 여기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난 주디 퍼스트에게 전혀 유감은 없다. 만약 토드가 맹하고 행실이 나쁜 데다가 머리를 염색하고 아무런 개성도 없는 여자들을 좋아한다면 그에겐 주디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파트너이다! 만약 토드가 이 지저분한 여자애를 댄스홀에 끌고 다닌다면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가. 물론 주디가 아무 남자애하고나 아주 잘하는 게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스테피는 내게 안달복달해도 아무 소용 방법은 집에서 여름을 지내는 거라고 말했는데 난 분명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난 정말로 주디 퍼스트가 미워죽겠다. 왜 항상 좋은 일은 한꺼번에 두 가지가 생겨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만약 모든 일이 다음과 같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넌 여름 내내 니나와 싸우면서 지내고 싶니 아니면 여름 캠프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내고 싶니? 바로 이런 선택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무슨 옷을 가져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더욱이 내가 갖고 있는 옷들은 전부 꼴보기 싫은 것들 볼썽사나운 옷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옷들도 이 주만 지나면 보기 싫어지는 것이다. 다행히도 스테피는 멋진 옷들을 갖고 있고 우린 사이즈가 똑같다. 체격이 같다는 것이 친구 사이에 아주 중요한 관계를 유지시켜 준다는 걸 여러분도 경험을 통해 익히 알 거다. 그리고 더욱더 잘된 일은 그녀 역시 자기 옷들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우린 서로 옷을 바꿔 입을 것이다. 아마도 난 그녀의 가방을 꾸리고 그녀는 내 가방을 꾸려야만 할까보다. 엄마는 수시로 와서 따뜻한 스웨터와 두툼한 재킷과 장화 챙기는 걸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난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다. 엄마는 내가 북극이나 그 비슷한 델 간다고 끄덕거리지만 장화는 절대 갖고 가지 않을 거다. 언제면 엄마는 내가 더이상 열 살난 소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까. 내 생각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가끔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얘기하는 걸 들으면 꼭 어린애한테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부모에게 자식은 늘 어린애로 생각되는가 보다. 로라 아줌마는 내 생일선물로 예쁜 화장품 케이스를 주었다. 거기에다가 내가 필요한 건 전부 넣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 필요한 게 있으면 거기 가서 언제든지 살 수 있을 것이다. 토드와 가족들을 떠난다는 사실 외에도 난 캠프에 대해서 염려되는 게 있다. 알지만 그녀는 오래 전부터 그 캠프에 갔었으므로 모든 사람과 친할 것이고, 난 아는 사람이라곤 그녀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만약 캠프가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그렇다고 생각을 바꾸고 집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 만약 그곳 생활이 너무 끔찍하다면 난 도중에 돌아올 수도 있지만 무언가에 참가하면 끝까지 해내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곤란하다. 특히 아빠는 내가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터이다. 난 부모님이 무척 보고 싶을 것이다. 비록 열여섯 살이 되었다고 해도 아직은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니까. 작년에 파이어 아일랜드에서 지낼 때 문제가 생길 절절했었으니까...... 누구나 뭔가 새로운 일에 부닥치면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난 걱정하는 데 소질이 있으니까. 하지만 난 캠프에 벌레나 짐승들같이 끔찍한 것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난 언제나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고양이나 개에만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나는 노먼도 무척 보고 싶을 거다. 노먼은 우리 가족의 실패작이다. 니나와 난, 노먼이 젖먹이 강아지였을 때 동물조련센터에 데리고 갔었다. 물론 노먼은 거기서 가장 귀여운 개였다. 노먼은 가장 심술궂은 개들도 좋아했다. 그리고 노먼은 결국 수료증을 받았지만 아마도 그냥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우린 노먼에게 못한 채 대경실색할 때까지 명령을 내릴 수는 있다. 그런데 노먼이 완벽하게 이해하는 말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건 밖으로 나가, 먹어, 비스킷, 케이크, 빵, 양고기 갈비, 스테이크, 아이스크림 그리고 침대에서 나와 엄마 온다! 등이다. 이번이 니나와 내가 동시에 떠나게 되는 첫 방학이다. 부모님은 우리가 굉장히 보고 싶을 텐데...... 특히 개를 산책시킬 때면 말이다. "누가 매일 아침 노먼을 산책시키죠?" 나는 얼마 전 저녁식사 때 이런 화제를 꺼냈던 것이다. "아빠가." 엄마가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엄마는 아주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사실 당신은 그 시간에는 일어나야 하잖아요, 여보." "하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니다." 아빠는 마치 엄마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에는 엄마가 노먼을 데리고 나갈 거야." "하지만 난 주말에도 아침잠을 설치고 싶지 않아요." 엄마는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그때 니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인 파이를 먹는 것도 멈춘 채 부모님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주중에 두 번 노먼을 산책시키고 싶은 모양이군." 아빠가 제의했다. 노먼을 산책시켜요." 엄마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마 당신은 주중에 두 번 정도 노먼을 산책시키려고 일찍 퇴근하고 싶은가 보죠?" 그때 마침 파이요리 때문인지 아니면 대화의 대상이 마치 자기인 줄 알았던지 노먼이 육십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식탁 밑으로 기어나오더니 니나에게 기대어 식탁 위에 턱을 내밀었다. "여보, 당신도 알겠지만 개를 산책시키려고 회의 도중에 빠져나올 수는 없어." 아빠는 어느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빠는 기선을 제압했다고 생각했는지 동의를 구하듯이 니나와 나를 누구도 편을 들거나 싸움을 방해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싸움이 그렇게 빨리 끝나버리기에는 너무나 볼 만한 것이었다. "매일 저녁에는 누가 개를 산책시켜요?" 니나는 싸움을 더욱더 부채질했다. "네 샐러드나 먹어라." 아빠는 열세 살이 되면서부터는 샐러드를 먹지 않는 니나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아빠." 니나는 포크로 양상추를 조금 찢어먹었다. "아빠는 만약 엄마가 매일 오후에 노먼을 산책시킨다면, 아빠가 저녁마다 노먼을 데리고 나가야 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하지만 난 아침마다 데리고 나가잖니?" 아빠는 언성을 높여 항변했다. 않았잖아요?" 엄마가 반박했다. "주말 아침을 한 번씩 나눠서 할 수 있을 거야." 아빠가 제의했다. "아! 그럼 저녁은 어쩌죠?" "나보고 저녁까지 하란 말야. 그건 부당해." 아빠가 기겁을 하자 니나와 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그 말을 어디서 들었지?" 엄마가 말했고 우린 모두 웃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이 멋진 이유는 그들이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유머 감각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무렵이다.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적어도 자식들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랬다.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부모로서 꽉 막힌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계속 나아지고 있는 중이다. 더 발전하기도 하고 오히려 나빠지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아빠는 아직도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나는 집에 남자친구를 데려오기가 겁이 나는데, 그건 현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그 친구가 아빠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아빠는 왕궁을 지키는 파수병처럼 근엄한 것이다. 아빠는 남자 애들을 악어가 들끓는 늪 속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두세 명 정도는 예절바르다고 생각한다. 맨 먼저 토드를 꼽을 수 있는데 토드마저도 때로는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특히 저녁에 함께 데이트할 때면 더욱 그렇다. 우린 아주 재미있게 지낸다. 그는 유머 감각도 있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데다 뛰어난 춤솜씨를 갖고 있지만 헤어질 시간이 되면 갑자기 드라큐라로 돌변한다. 그래서 난 때때로 그를 밀쳐내기 위해서 커다란 나무십자가를 갖고 다녀야만 하지 않을까 종종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달콤한 불장난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난 단지 진실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럴 수 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불타게 사랑하게 된다면 혹 모르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아침 일곱시 사십오분까지 정거장에 가야만 하는데 그건 온가족이 움직이는 단체행동이다.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진드기와 노먼도 가야 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엄마, 청바지 입을 거예요?" 내가 엄마에게 물어본다. "제발 그만 둬." 우리 엄마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야만 하겠다. 엄마는 매우 아름답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그건 참 좋은 일이다. 내 말은 그런 젊은 엄마가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뜻이다. 하지만 난 때때로 우리 엄마가 다른 여느 엄마들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캠프 여행을 떠날 막바지 무렵에 약간 얄밉게도 내가 노먼을 산책시킬 차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니나는 항상 내가 너무 바쁜 때면 그처럼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버릇이 있다. 아빠는 니나의 어리석음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므로 동생에게 노먼을 데리고 나가라고 소리치셨다. 니나는 툴툴거리고 불평을 하면서 갑자기 한웅큼의 눈물을 쏟으며 그녀 특유의 연기를 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낡아빠진 수법이어서 누구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노먼도 니나의 그런 모습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일곱시 삼십분에도 우리는 아직 집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제 상황은 아수라장이 때 그곳은 만원이었다. 마치 수천 개의 다른 캠프로 떠나는 아이들이 동시에 거기서 출발하기로 한 것처럼. 내가 타고 갈 차를 발견하는 데는 한참이 걸렸는데 여전히 스테피는 보이지 않았다. 스테피의 나쁜 점은 그녀의 엄마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지각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지각생은 한번도 비행기나 기차를 놓친 적이 없다. 늘 막판에 헐레벌떡 뛰어오긴 하지만.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학생들을 인솔할 선생님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늘 엄마는 선생님께 볼 일이 많았다. 마치 선생님과 안면을 익힘으로써 자기 자식을 보살펴달라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려는 것 과시하면서 말이다. 내가 탄 차의 운전사는 로저 아저씨였는데, 엄마는 마치 내가 여섯 살난 어린애인 것처럼 소개했다. 정말 그 아저씨한테는 말해도 아무 소용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소개하면서 가족들과 영리한 베르제 종의 개가 있으며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차에 올라탈 시간이 되었다. 난 스테피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겁이 나기 시작했고 또 자리를 잡아놓기도 어려웠다. 모든 애들이 내가 잡아놓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거장은 포옹과 입맞춤이 오가는 거대한 이별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신경이 예민해진 노먼은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잡아당겼다. 육십 킬로그램의 무게가 잡아당기는 힘으로...... 마침내 스테피가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를 껴안고 입맞춤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내 친구 스테피는 정말로 인기가 좋았다. 그 광경이 이상하게도 내 기분을 언짢게 했는데 그건 내가 그녀를 질투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캠프에서 아는 사람이 유일하게 그녀뿐이고 그녀를 다른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내 우려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난 옆자리를 스테피를 위해서 잡아두었는데 그녀는 자기 짐을 모두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스테피는 잠깐 엘렌 래퍼티 옆에 앉았다 오겠다고 내게 유명한 로비와 한동네에 사는 여자애였다. 그래서 스테피는 그의 소식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인 것이다. 난 정말로 그녀의 기분을 이해한다. 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내 훌륭한 부모님과 엉뚱한 여동생과 아주 특별한 우리 집 개는 점점 더 작아져 보였다. 이윽고 그들은 멀리 사라져버렸다. 이 분이 지나자 다가올 여름이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절친한 친구가 다른 애 곁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열여섯 살이면서도 동시에 여섯 살짜리가 될 수 있는 걸까. 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새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달리는 차에서 책을 읽으면 속이 메스꺼웠기 때문이다. 인상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지만 나중에 친해지게 되면 첫인상과는 달라져 보인다. 난 무심코 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모두 내게는 약간 딱딱하고 냉정해 보였다. 도저히 친해질 것 같지 않은 험악한 인상들이었다. 그들은 또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건 아르바이트 대상자 연령층이 열일곱 살까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내가 제일 어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때, 난 기껏해야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를 발견했다. 언제나 나이보다 아주 어려 보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곧 실은 열일곱 살이라는 걸 알게 된다. 심지어 실제 나이가 스물 다섯인데도 아직도 어린애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들도 있다. 난 자신이 사실은 열두 살이 아니라고 일일이 설명하면서 보내기엔 너무나 고달픈 것이다. 그 소녀는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는데 난 다정하게 굴면서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안녕, 난 빅토리아 마틴이라고 해." 내가 먼저 그 소녀에게 말을 걸자 소녀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기 이름은 애니 잉글이라고 했다. 난 일상적인 얘기들로 대화를 풀어나갔고 캠프 여행에 참가하기는 올해가 처음이며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 된다는 얘기를 했다. "나도 올해 처음 오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태도가 꾸밈없고 호감이 가서 난 이내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소녀는 아주 사랑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였고, 난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가슴속을 메웠다. 그런 느낌이 금방 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난 아르바이트 일이 조금 걱정스러워. 난 한번도 식사시중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내 친구 스테피와 난 그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면서 내가 계속해서 물었다. "넌 해본 적 있니?" "식사시중?" "응." "아니, 난 내가 너무 작다고 생각해." "어머, 그런 말하지 마. 난 네가 작다고 해서 그 일을 못해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내가 놀라며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자 "난 내가 그렇게 작다고는 생각지 않아." 내가 벌써 첫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우리가 탄 차는 아직 맨해턴을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난 캠프의 노먼과 같은 꼴이 된 것이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 난 내 실수를 만회하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난 항상 키가 작았으면 했어. 아주 귀엽잖아." 내가 더욱더 자승자박하는 지경이 되기 시작했을 때 더이상 그만둘 방법이 없었다. "작은 손과 작은 발은 정말 귀여워." 이제 소녀는 완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난 지난 학기에 우리 학년에서 제일 큰 축에 속했는걸." 난 소녀의 이 말이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지기 시작했다. "몇 학년이었는데?" "육 학년." 그녀가 열두 살처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 얼른 시선을 내 책으로 옮겼다. 애시당초 상황은 열두 살짜리 여자애 쪽으로 기운 것처럼 고약했던 것이다. 어쩌면 신은 내가 일부러 실수라도 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그녀를 내 앞에 앉혀놓은지도 모른다. 하느님 맙소사! 난 이곳이 지겹다. 그래서 난 눈을 감고 앉아서 대충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게 느껴졌다. 기발한 독서방법인데!" 한 소년이 쾌활함이 느껴지는 친근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난 그 남자애가 맘에 들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명랑하고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매우 호감이 가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코 위에 드문드문 뿌려져 있는 주근깨가 평화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 풍부한 얼굴이었다. 그의 키는 적어도 백팔십 센티미터는 돼 보였다. 그러나 앞에 앉은 망할 소녀처럼 어쩌면 열두 살 치고는 키가 큰 남자앤지도 모른다! "난 켄 어빙이야. 접수창구에서 일을 할 거야." "난 빅토리아 마틴인데 식당일을 맡았어." "앉아도 되겠니?" 그는 스테피의 짐을 한쪽으로 밀쳐놓으면서 슬쩍 자리에 앉았다. "그럼 넌 식사시중을 드는 거니?" "안 좋은 일이니?" "아냐, 아주 좋은 일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난 갑자기 불안해졌다. "생각이 든다는 건 무슨 뜻이야?" "아! 그건 아무런 뜻도 없어." 난 이같이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이 분명했다. "난 올해 처음으로 여기 오기 때문에 그냥 상상할 뿐이야. 식사시중을 드는 건 멋있는 일일 거야." 나는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 식사시중 드는 일은 굉장히 재미있을 거야." 그가 나에게 웃어 보였고 나 역시 미소로 답해야만 했다. 만약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의 당신의 첫 아르바이트가 아니라면 식사시중을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그건 어린애를 돌보거나 엄마를 돕는 따위의 그런 유치한 일과는 다른 것이다. 식사시중을 드는 일은 때문에 멋진 일인 것이다. 물론 난 그 얘기를 그에게 하지 않았다. 나를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넌 접수창구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잘 모르겠어. 지금까지 내가 들은 바로는 전화를 받는 일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 "저런, 그건 어린애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어떻게 넌 그렇게 쉬운 일을 얻었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문 구직란을 보고 말이지?" "농담하는 거야? 그건 제일 간단한 방법이야. 내 어머니의 사촌 캐롤라인의 딸이 모하프의 아들인 모와 결혼을 했거든. 그리고 캐롤라인이 압력을 넣어서 내가 얻었는데?" "그건 당연해. 모는 아버지거든." 내가 그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둘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난 켄이 아주 좋았는데 그는 함께 있으면 이내 마음이 편해지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오 분 후에 우리는 마치 오래 사귄 사이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유일한 걱정은 만약 그가 그 이상의 관계를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것뿐이었다. 당장은 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난 그에게 뭔가 그런 낌새를 느꼈지만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껏 내가 해왔던 대로 좋은 남자친구로 충분했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수다를 떨면서 너무나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으므로 먼저 그녀를 알아차리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저런! 내가 켄의 적극적인 태도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방금 나를 속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감이다. 왜냐하면 그는 로비 때문에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긴 내 친구 스테피야. 그리고 여긴 켄......" 내가 다정하게 말했다. "어빙." 이라고 그가 덧붙이면서 스테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녕." 스테피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좋아. 이제 난 켄 어빙에 대해서 결코 조금도. 비록 친구로서는 내 맘에 들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하지만 친구 이상의 감정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십오 분 정도나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가 그가 당신의 친한 여자친구를 쳐다보느라고 당신의 존재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아마 당신은 자신이 괜히 무뚝뚝하고 못생기고 뚱뚱하고 혐오감을 일으키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그 여자친구는 잘 보이려고 노력조차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날은 재수가 없었다. 내가 캠프로 떠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토드와 데이트를 즐길 주디 퍼스트 때문에 난 여름 내내 기분이 엉망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되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 결국 스테피와 켄이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여름방학을 망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캠프에 도착하는 버스 여행 동안만은 행복감에 젖고 싶었다. 급기야 내가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순간에 켄은 마지못해 스테피와 떨어져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켄이 자리를 뜨자 스테피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쟤 근사하다, 얘. 켄이 널 마음에 들어하는 거니 아니면 뭐니?" 스테피가 뚫어질 듯이 나를 보았다. "뭐니가 뭔데?" 나는 홧김에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건 그녀의 새로운 말버릇이었는데 말끝마다 "아니면 뭐니?" 아니?"였다. 그녀가 이런 말버릇이 생길 때마다 그걸 없애는 데는 종종 몇 달씩이 걸리곤 했다. 그리고 그 말버릇은 아주 따라하기 쉬운 전염병 같은 것이었다. "토리, 난 정말로 켄이 널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애." 아주 영리한 사람들도 때로는 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는 아주 근사해. 사실이야. 하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건 내가 아니야." 나는 그녀에게 시큰둥하게 말했다. "얘 좀 봐. 켄은 나한테 세 마디밖에는 안했어. 오, 빅토리아. 넌 너무 낭만적이야. 책을 너무 읽어서 그래. 사람은 그렇게 단번에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야." 사랑을 느끼지 않았니?" "꼭 그렇진 않아. 우선 난 생각했어. 제기랄! 그는 너무 근사해! 라고 말야. 그리고 나서 그와 잠깐 얘기를 하고 난 뒤에 난 생각했지. 그는 똑똑하고 호감이 가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고 말이야. 우리의 첫번째 만남이 있은 뒤에 난 그가 멋있고 특별하고 가장 환상적인 남자라고 생각하게 됐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그의 전화가 오지 않자 내 위는 경련을 일으켜서 아침을 먹을 수가 없었어.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어. 난 갑작스레 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사랑에 빠진 거였어. 그런데 몸에 열이 없는 걸로 봐서 그건 상사병이었던 거야."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스테피는 진지해졌다. "그를 보면 나의 이 심정을 곧 알게 될 거야. 빅토리아, 그는 정말로 괜찮아서 너도 금세 그를 좋아하게 될 거야. 난 그동안 로비 같은 사람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어. 우리 학교의 남자애들과는 달라. 하지만 학교의 남자애들은 모두 바보 같애. 오직 한 가지밖에는 몰라. 하지만 로비는 달라. 그는 정말 특별해. 가까운 친구들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대해.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야. 만약 아프카니스탄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정말로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질 거야. 언제든지 그는 편지를 쓰거나 뭔가를 보내거나 어떻게든지 도와줄 만반의 준비가 돼 있어. 그는 대통령이 될 만한 뜻이야! 난 정말 그를 사랑해, 토리." 난 한번도 스테피가 남자에 대해서 그렇게 신중하게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조차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납득할 수 있었고 그 사실이 무척 기뻐서 이렇게 외쳤다. "빨리 로비를 봤으면 좋겠어! 그는 벌써부터 내 맘에 들어!" 내 가장 친한 여자친구에게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라면 내게도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테피는 다시 로비에 대한 공상에 잠겼다. 난 미리부터 안절부절하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감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난 늘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시골풍경만 보면 언제나 감동을 받곤 한다. 맑은 시냇물이나 내가 열 살 때 즐겨 그리던 시골농장을 보여준다면 난 좋아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농가의 마당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암소떼의 평화로운 광경은 언제나 나를 깊은 감동에 젖게 한다. 스테피는 매년 여름을 여기서 지냈으므로 나만큼 인상적이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내 장황한 수다를 듣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공상에 파묻혀 있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난 잠자코 앉아서 그 모든 느낌을 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무심결에 스쳐 지나치는 그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때때로 난 모든 사람이 서로 부딪치며 살고 그 속에서 타인에 대해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조그만 도시에서의 삶이 아주 유쾌하고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축제가 있고 건초수레가 여기저기서 굴러다니는 따뜻하고 우정어린 그런 곳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건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도시에서는 원하기만 하면 자신을 숨길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조금은 작은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대학을 마친 뒤엔 어떨까. 그들이 농사일과 축제 사이에 뭘 하면서 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난 미래의 삶을 상상하는 데 몰두해 있다가 차가 큰 도로를 벗어나 간선도로에 접어들었을 때야 정신을 차렸다. 모두 부산하게 짐들을 챙기고 있었다. "오 분쯤 더 가야 돼." 스테피가 말하면서 자기 윗도리를 가방 속에 쑤셔넣고 있었다. "몹시 흥분되는데." "나도 그래. 넌 여길 좋아하게 될 거야, 빅토리아. 올 여름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 될 거야. 아침부터 밤늦도록 즐거운 일밖에 없을 테니까. 아무도 우리를 간섭하지 않을 거고 우린 편하게 지낼 거야." "멋있어! 난 아르바이트를 잘 해냈으면 하는 바램뿐이야. 한 번도 해본 적이 "농담하는 거니 아니면 뭐니? 아르바이트는 식은죽 먹기라구. 고급스런 레스토랑에서 격식 차린 손님들에게 시중을 드는 것과는 다른 일이거든. 우리가 식사를 갖다줄 대상은 그냥 애들이야. 그냥 꼬마들 앞에 음식을 갖다놓기만 하면 애들은 순식간에 먹어치울 거야.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 다음엔 자유야! 나머지 시간에는 일광욕을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매니큐어를 바르거나, 아니면 매일 벌어지는 굉장한 저녁파티에 입고 갈 옷을 고르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을 거야. 제일 힘든 일은 남자애들을 거절하는 일이 될걸. 남자애들은 단번에 널 좋아하게 될 거야. 빅토리아, 두고봐." 그때 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육중한 "다 온 거니?" "그래, 여기가 그 아름다운 모하프 캠프야. 아름다운 모하프 호수 위에 걸쳐 있는 모하프 산. 그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캠프야. 이곳을 소개하던 팸플릿 생각나지?" "아름다워." 우린 커다란 문을 지나서 캠프가 있는 언덕까지 구불구불하게 나있는 나무가 우거지고 모래가 깔린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캠프는 두 채의 원형건물로 나눠져 있었다. 하나는 여학생용 숙소였고 또 하나는 남학생용이었다. 그 두 건물은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캠프라기보다는 호텔처럼 보였다. 난 안내자가 오래 된 건물이라고 설명하는 걸 건물 같아 보였다. 차에서 뒤를 돌아다보면 호수가 보였다. 작은 호수였지만 물이 맑았다. 한가운데 모하프 섬인 작은 섬이 있었고, 그곳에는 수양버들이 길게 물 속까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었다. 호숫가 양쪽에는 너른 잔디밭이 언덕을 푸르게 뒤덮었고 저 멀리에는 운동장과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와 햇빛에 수면이 반짝이는 커다란 풀장이 있었다. 스테피의 말처럼 난 이곳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차는 주차장에 멈췄다. 우린 노새처럼 짐가방을 모두 짊어진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로저 아저씨가 앞장을 섰다. 우리가 가까이 갈수록 캠프는 더 근사해 보였다. 숙소건물은 눈부신 백색이었는데 같았다. 각 건물에는 다른 색깔의 덧문이 달려 있었다. 여학생용 숙소에는 근사한 보라색과 접시꽃색, 섬세한 분홍색 덧문에 자주색 점이 드문드문 찍혀 있었다. 남학생용 숙소 역시 하얀색이었는데 덧문 색깔은 전통적인 갈색과 회색이었고 어떤 덧문은 짙은 푸른색과 빨간색이었다. 그 모든 게 내 맘에 퍽 들었다. 로저 아저씨 뒤를 따라 우리는 이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난 접시꽃색 덧문이 있는 방에서 지내게 되면 좋겠어.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거든." 나는 스테피에게 낮게 속삭였다. "이 숙소는 캠프학생들을 위한 거야. 우리 숙소는 좀더 가야 있어." 잘은 모르지만 스테피는 약간 난처한 "오히려 잘됐어. 우린 좀더 조용히 지낼 수 있겠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북적거리는 어린애들과 같은 층에 있는 게 오히려 싫으니까. 로저 아저씨는 뒤돌아서서 팔을 들어 우리를 멈추게 했다. "여학생들은 계속 오른쪽으로 가요." 아저씨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으로 눈을 돌리자 뉴잉글랜드의 오래된 저택 같은 아름답고 큰 건물이 보였다. "환상적이야." 나는 놀라움에 큰 소리로 스테피에게 말했다. "제일 괜찮은 건물이지 않니?" 나는 왜 스테피가 약간 뒤에 처져서 내게서 멀어지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 숙소가 덧문이 달린 건물 중의 하나가 아니라서 실망한 모양이었다. 난 스테피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스테피, 난 다른 건물과 멀리 떨어진 큰 건물에 묵게 돼서 아주 기뻐. 우린 넉넉하게 그 넓은 공간을 쓸 수 있잖아.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애들끼리만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저 건물이 아니야." 그녀는 그야말로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든 작든 상관없어." 그녀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더니 흔히들 그곳은 온갖 떠들썩한 댄스장과 오락시설이 갖춰진 곳이었다. 굉장해! 우린 오락장 가까운 데 머물게 될 것이었다. 난 예기치 않게 가방을 떨어뜨려서 그걸 집으려고 몸을 숙이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스테피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큰 건물 구석으로 먼저 사라져버리는 걸 보았다. 그녀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난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길 바랐다. 내가 스테피가 사라진 쪽을 따라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난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스테피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까. 거기에는 헛간 같은 건물 중앙에 두 채의 황폐하고 쓰러져가는 지저분한 집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덧문은 망가져 있었고 계단은 삐그덕거렸으며 현관 가까이 있는 계단은 위태롭게 건물에 매달려 있었다. 어쩌면 우리 숙소는 이 초라한 집 뒤에 있는 숲속에 있는 걸까. 아마도 그런가 보다. 난 우리 숙소가 이 재앙같은 건물과 아주 뚝 떨어져 있기를 바랐다. 난 가방을 다시 집어들고 그 초라한 집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토리...... 여기야." 작은 목소리가 처음 낡은 집 안에서 새어나왔다. 그리고 나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는데 스테피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 전체 윤곽이 보였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조심스럽게 밟으며 그 낡은 건물에서 나왔다. 그녀는 정말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마치 미안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그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난 모든 걸 알 것 같았고 그건 기가 막힐 일이었다. "오! 아니야, 스테피. 난 믿을 수가 없어......" "미안해, 토리. 맹세하지만 작년에는 이 정도로 끔찍하진 않았어. 뭔가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던 게 기억나." "그렇겠지. 캘커타의 어두컴컴한 오막살이처럼 말이야." "날 원망하는 거니 뭐니?" 난 계단을 뛰어올라가 마룻바닥을 지나가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발을 발목까지 마루 속으로 빠뜨렸고 옴쭉달싹할 수가 없었다. 스테피는 내가 거기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리는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으며, 난 황급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난 곰곰히 생각했다. 할 말이 꼭 한 가지 생각난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하려고 스테피 쪽을 돌아보았는데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진 않았지만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곧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난 그만큼 네가 여기 함께 왔으면 했거든. 그런데 넌 여기가 어떤 곳인지 한 물어봤다면 난 사실대로 얘기해 줬을 거야. 이건 정말이야." "잠깐만 더 둘러보고 얘기하자." 나는 말하면서 문으로 들어갔다. 그게 내 두번째 실수였다. 다시 보니까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끔찍했다. 난 내가 머물 숙소의 흉칙함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여덟 개의 보기 흉한 철제침대는 전부 휘어져 있었다. 침대 다리 중의 하나는 바닥에 닿지 않아 기우뚱거렸고, 매트리스는 마치 감옥에서 내다버린 것처럼 낡아빠지고 쿠션도 형편없었다. 각 침대 옆에는 작은 옷장이 비치되어 있었다. 세 개의 선반과 그 밑에 아주 작은 서랍이 딸린 옷장이었다. 주말을 보낼 수 있는 옷가지만을 정리하기에 알맞은 조그만 옷장이었다. 하나만이 방 한가운데 천장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 전구에 손이 닿으려면 키가 이 미터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았다. 누구나 자기랑 제일 친한 친구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이건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제일 흉칙한 쥐구멍이야!" "그건 확실해. 약간 신경이 쓰일 거야. 하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금세 이곳을 보기 좋게 정리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크리스마스 때까지 애쓴다면 말이야." "얘, 빅토리야. 예쁜 커튼과 또 예쁘장한 침대 커버, 몇 개의 쿠션만 있으면 동화 속의 방처럼 꾸밀 수 있어. 그리고 근사한 사진과 포스터들도 벽에 붙일 수 있을 스톤즈 포스터를 보내달라고 하면 돼. 그걸 바로 여기 벽이 패인 부분에 붙이는 거야." 그녀는 볼링공 크기 만큼이나 갈라진 벽의 틈새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스테피의 발상은 훌륭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 지저분한 방을 버킹검 궁전으로 바꿔놓을 만한 수많은 아이디어를 지니고 있었는데 난 샤워장을 찾느라고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샤워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한쪽 구석에 사용할 때마다 고장날 것만 같은 좌변기가 하나 덜렁 설치된 초라한 화장실밖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로 원시적이야." 나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시골이잖아." "밖으로 조금 나가면 있어." "얼마나 가야 하는데?"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스테--피!" "건물 세 채를 지나면 있어. 하지만 다 조그만 건물들이야. 빅토리아, 이곳이 완벽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하지만......" 그 말을 끝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다시 한번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끔찍했고 서글펐다. 난 절친한 친구인 스테피를 바라보면서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는 내 자신이 보기 싫고 슬프게 느껴졌다. 좋아, 여긴 형편없지만 우린 보기 좋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매일 저녁 파티다 뭐다 해서 우린 거의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없을 거야. 남은 천이 있는데 그걸 나한테 보내줄 수 있을 거야......" 내가 우울하게 말했다. 스테피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더니 내게로 달려와 덥석 껴안았다. 나 역시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모든 게 다시 근사해 보이는 게 아닌가. 우린 함께 웃기 시작했다. "여긴 우물 바닥 같지 않니?" 스테피는 한술 더 떠서 얘기했다. "넌 여기가 우물 바닥 만큼이나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니?" "기중기가 있다면 여길 깨끗이 정리할 수 있을 텐데." "아니면 폭탄이나." "내 생각엔 벌써 그렇게 해본 것 "자 그럼, 네 생각엔 어느 침대가 제일 나은 것 같니?" 난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나마 제일 덜 흉측한 것 말이니 뭐니?" "그래, 차라리 그 표현이 옳다." "좋아." 스테피는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침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침대가 단단한데, 이렇게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밑에서 자면 끔찍할 것 같애." "벽이 패여 있는데?" "그래, 벽이 패인 데 말야. 내 생각엔 화장실 옆이 제일 나쁜 것 같애. 이쪽이 더 환하다." "덧문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면, 아주 햇볕이 잘 들 거야. 그런데, 제일 좋은 자리는 저기 있는 것 같애......" 그리고 스테피가 방 한쪽 끝 문가에 있는 침대를 가리키면서 선택하려고 하는 그때 한 예쁘장한 금발머리 여자애가 들어왔다. 금발머리는 얼른 방 안을 휙 둘러보고 나서 스테피가 가리키고 있는 침대 위에다 자기 짐을 내려놓았다. "이 침대야!" 스테피는 너무 늦게 선택한 것이다. "내 침대를 말하는 거니?" 그 금발머리는 소위 미국식 억양과 영국식 억양이 반반 섞인 말투로 물었다. "좋아, 안녕. 캘커타의 어두컴컴한 소굴에 온 걸 환영해. 난 스테피 마틴이야." 스테피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난 디나 조이스 풀러야." 그녀는 박수라도 쳐줘야 될 것 같은 침착한 태도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우리가 박수를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보다.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또다른 소녀가 들어왔는데 스테피와 내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그녀는 다음으로 괜찮은 침대를 차지했다. 그리고 십 초 만에 다른 네 명의 소녀가 재빨리 들어오더니 앞다투어 침대를 골랐다. 그 뒤에 우리 둘은 나머지 두 침대 옆에 뚝 떨어져 있었다. 하나는 화장실 곳이었다. 우린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각자 가까운 데 있는 침대로 갔다. 둘 다 끔찍해서 정말로 선택할 나위가 없었다! 난 벽에 구멍이 나 있는 곳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잠자는 동안 그 구멍으로 뭔가 큰게 기어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모두 다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디나 조이스와 클레어를 빼고는 모두 인상이 좋아 보였다. 거기에는 스테피가 작년에 와서 사귄 뉴저지 출신의 리자라는 여자애도 있었다. 그때도 아마 같은 방에서 지냈나 보다. 그리고 맥키노우 쌍둥이 자매가 있었는데, 난 절대로 그들을 구별하지 못할 것 같았다. 보스턴에서 온 클레어는 처음부터 웬지 불쾌한 선입견을 갖게 했다. 그녀는 완벽한 숙녀인 체하는 디나 조이스의 친구였던 것이다. 난 첫눈에 이 두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짐을 풀기도 전에, 확성기에서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모든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주목해요! 모든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주목해요!" "하느님 맙소사! 무슨 일이지?" 내가 소리쳤다. "아무것도 아냐, 너무 신경쓰지 마. 사무실의 에드나야. 그녀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불이 났는 줄 알 거야."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흥분했을 때는 리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작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나는지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에드나의 나머지 공지사항을 알리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모든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전부 게양대 앞으로 모인다. 지금 당장. 달려라! 어서! 열...아홉...여덟...일곱...... 서둘러라!...... 여섯......" "빨리 가자, 전부!" 스테피는 정리하던 가방을 침대 위에 내던지면서 외쳤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나를 잡더니 밖으로 떠밀었다. "오! 안 돼." 리자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우리 뒤를 따라왔다. 이제는 그 냉정한 디나 있었다. 스테피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난 그녀가 그렇게 빨리 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사방에서 열여섯 명의 아르바이트 여학생들이 달려왔다. 그동안 에드나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소녀들의 달리는 발소리와 가쁜 숨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난 도대체 무슨 일인지 스테피에게 물어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너무 빨리 달리느라고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우리가 게양대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뒤미처 따라온 학생들이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난 겨우 숨을 돌리고 스테피에게 물어보았다. 지금은 그냥 차렷자세로 내 옆에 서 있어." "농담이지, 스테피?" "아니야, 아니야. 앞으로 가지 마." "저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야." 완벽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 조용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우린 풀밭 위에 있었는데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난 내 앞에 있는 여자애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지만 전부들 사무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난 모든 얼굴들이 뭔가를 주시하면서 전체 인원이 똑바로 앞을 쳐다볼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걸 보았다. 난 내 앞에 서 있는 키 큰 여자애들 사이로 요령껏 보는 데 성공했다. 아, 하느님 맙소사! 난 쳐다본 걸 스테피를 돌아봤다. "무엇 하나 완벽한 게 없어." 그녀는 속삭이더니 이내 정면을 주시했다. 잠시 후 뚱뚱한 여자가 나타났는데 그녀는 백 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에 악덕포주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고 의기양양하게 손을 쳐들면서 말했다. "잘 왔어요." 그 뚱뚱보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전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카르토파 부인이고 여기는 데이비스 박사예요." 그녀는 옆에 서 있는 승마복 차림에 채찍을 들고 서 있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를 있다면 그건 외알박이 안경이었는데 그것만 있었다면 오래 된 영화에 나오는 게슈타포 장교와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게슈타포는 미소짓고 있었고 우린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난 스테피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하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침을 삼킬 뿐이었다. 아마 그들은 잠시 들른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거기!" 카르토파 부인이 소리쳤고 그녀는 내 쪽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거기!"라고 다시 소리쳤는데 이번에는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지적당한 애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난 스테피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느님 맙소사, 나였구나. 난 간신히 목구멍에서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부인." "질문이 있으면 나한테 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니까. 안 그래요, 박사?" 게슈타포는 다시 끔찍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땅바닥에 채찍질을 한 번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가 채찍만 휘두르며 겁만 주는지 궁금할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였다. "이름이 뭐지?" "빅토리아 마틴." 살펴보더니 발뒤꿈치를 세우고 카르토파 부인에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십삼이군." "네?" "너 말야, 십삼이라구." 그녀가 소리질렀다. "아니오, 부인. 전 열여섯 살인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서 네 번호가 십삼번이란 말이야. 우린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 십삼번, 우리 모두를 얼마 동안 방해한 그 중요한 질문이 뭐였지......?" 데이비스 박사는 카르토파 부인에게 시간을 가르쳐주었다. "사분 동안요."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의 질문도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부인. 잊어버렸어요." "그건 오십 센트의 벌금형에 해당해." 그녀는 연설을 다시 계속하기 전에 짚고넘어갔다. "오십 센트라구요!" 이게 무슨 말일까? "여러분들에게 모하프에서의 여름을 즐겁게 지낼 수 있게 해주는 몇 가지 법칙과 규율을 읽어주겠어요. 데이비스 박사와 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노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여학생 여러분?" "네, 그렇습니다." 수많은 고개들이 끄덕거렸다. 내가 보기에도 옳은 것 같았다. 어쩌면 난 "좋아요." 카르토파 부인은 말하면서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매일 아침 여기 게양대 앞에 모이도록 해요......" 아주 좋은 일이다. "......여섯시 반까지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집합해요. 캠프 깃발을 게양한 후에는 캠프노래 합창이 있겠어요. 그리고 그날 그날의 지시사항 전달과 지원자 지명이 있을 거예요." "지원자 지명이라고?" 나는 낮은 목소리로 스테피에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팔꿈치로 건드리기 전에 카르토파 부인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각자에게 두 개의 테이블이 할당된다." 과히 나쁘진 않군. "......한 테이블 당 열두 명의 학생과 세 명의 선생님이 앉게 된다." 그럼 삼십 명이잖아! "담당자는 항상 식탁이 깨끗하게 차려져 있는지, 접시는 잘 닦였는지, 컵은 반짝이도록 닦였는지 그리고 바트리시드 실은 완벽한지 살펴보아야 한다......" "스테피, 바트리시드 실이 뭐야?" "나중에." "다음과 같은 규칙을 어길 때에는 여러분에게 오십 센트의 벌금을 부과한다......" 악덕포주, 그러니까 카르토파 부인은 계속 떠들었고 처음으로 그녀와 데이비스 "지각, 무례함, 식탁이나 의자 위에 땅콩버터나 잼을 묻히는 일, 접시를 깨거나 음식물을 흘리는 일, 단정치 못한 유니폼, 음주나 흡연, 방청소를 게을리하거나 늦잠을 자는 일, 운동장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돌아다니는 일...... 그리고 기타 등등." 난 완전히 겁에 질려 스테피에게 속삭였다. "난 저걸 다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그녀는 나에게 뭐라고 대답했는데 그 얘기는 둘 중의 하나였다. "모든 게 잘될 거야." 아니면, "우린 결코 견뎌내지 못할 거야." 스테피 특유의 말투로 난 혼자 중얼거렸다. "저건 끔찍한 경멸감을 나타내는 거니 아니면 뭐니?" 제2장 버스에서 내린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그녀는 마치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홀로 거기 서 있었다. 나는 차 속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짐을 챙기는 걸 보았다. 차창이 색유리였기 때문에 누가 로비인지 알 수 없었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내가 바라던 그대로는 아니지만 좋은 면도 있으니까. 우선 여름 내내 난 가장 친한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게 됐잖아. 그리고 캠프의 나머지 부분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난 시골 공기를 좋아했고 카르토파 부인은 우리 엄마가 아니었고, 않는가. 게다가 쥐나 박쥐처럼 큰 어떤 동물도 내 침대 머리맡에 있는 벽의 갈라진 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에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수없이 장담했던 것처럼 내가 그것들을 무서워하는 것보다 그것들이 나를 더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이 짐을 정리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했다. 짐 정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 있는 그 게딱지 만한 옷장 속에 갖고 간 옷을 전부 다 집어넣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다 똑같은 문제를 호소했는데, 우린 가지고 간 옷가지의 대부분을 침대 옆에 놓아둔 가방 속에 그냥 쑤셔넣어야 했다. 그러자 지나다닐 공간이 겨우 오십 센티미터 가방에 무릎이 부딪쳐 시퍼렇게 멍들거나 발가락이 걸리는 일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조그만 공간 속에 모든 걸 다 집어넣고 산다는 건 무척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다행히 난 새 포스터 두 장과 그걸 고정시킬 압핀을 갖고 오는 걸 잊지 않았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포스터 중의 한 장을 침대 머리맡에 있는 구멍난 벽 위에 붙이는 일이었다. 그 포스터는 쥐나 박쥐들의 침입을 막을 만큼 튼튼하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옆으로 돌릴 시간적 여유는 줄 것이다. "넌 그 끔찍한 걸 벽 위에 붙여둘 생각은 아니겠지?" 그건 물론 내 롤링 스톤즈의 포스터에 목소리였다. "만약 모두 다 이 포스터를 싫어한다면 붙이지 않을께. 난 이 포스터가 아주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스테피?" "맘에 들어. 리자 너는 어때?" "정말 기발한 생각이야. 나도 똑같은 포스터가 집에 있어." 그때 디나 조이스는 단짝인 클레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포스터가 마음에 드니?" "아니......! 끔찍해." 디나 조이스가 일점을 땄다. 이제 디나는 맥키노우 쌍둥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쌍둥이 자매는 말없는 동의의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처음 본 사람을 좇아가는 순한 양 같은 타입이었다. 대부분의 쌍둥이들은 서로 달라 보이려고 하는데 그들은 똑같이 행동하고 옷 입는 것조차 똑같은 것 같았다. 이제 알렉산드라의 한 표가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난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아서 선수치듯 그녀에게 물어봤다. "네 생각은 어때, 알?" "난 좋아." 그래서 우린 무승부가 되었다. 난 여름 내내 우리가 함께 지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게 굴고 싶었다. 그래서 난 동전 던지기로 결정을 하자고 제의를 했다. 나중에 스테피에게 들은 얘기지만 디나 조이스는 그런 애였다. 견딜 수 없이 고약한 성질을 갖고 있는데도 언제나 성공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영화 속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는가? 항상 나쁜 사람이 이기는 것 같다. 난 포스터를 떼냈고 다시 벽에 난 큰 구멍을 봐야만 했다. "그게 훨씬 낫다." 디나 조이스는 끝끝내 우겼다. 난 언젠가 그녀에게 복수할 날을 위해서 그 일을 마음속에 새겨두었고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스테피와 나는 단둘이 현관 아래 앉아 있었다. 스테피는 목숨을 걸고 난간 위에 걸터앉아 있었고 난 앉아 있었다. "너 여기 온 걸 후회하는 거니 뭐니?" 그녀가 물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대답했다. "일단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면 모든 게 완벽해질 거야." "토리, 넌 썩 괜찮은 친구야. 정말로. 난 이곳이 어느 정도로, 그러니까 엉망이었는지 더이상 기억나질 않았던 거야. 내가 기억하는 전부는 로비뿐이고 그는 완벽해." "로비는 언제 오니?" "이틀 뒤에." "금요일 날?" "응,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난 굉장히 불안해. 그를 못 만난 지가 육 개월이나 됐는데 정말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기간이야. 난 어쩌면 더이상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몰라. 오! 하느님 맙소사. 머리를 이렇게 자르지 말 걸 그랬어. 이런 머리 스타일을 싫어하면 어떡하지?" "설마?"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아주 달라 보인다. 평소에 스테피는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인데 로비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형편없이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봐 항상 두려워하는가 보다. 나도 남자애들에게 반한 적이 있었지만 한번도 스테피와 같은 평소에도 소심한 성격이니까 만약 사랑에 빠진다면 아마도 진짜 얼간이가 되고 말 거다. 난 그녀가 어떻게 그 난국을 헤쳐나갈지 모르겠다. 아직 그가 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벌써 걱정하느라고 녹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난 그녀를 돕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닌가. 바로 그래서 친한 친구가 좋은 게 아니겠는가. "네 머리모양은 훌륭해. 작년 여름보다 훨씬 예뻐졌는걸. 넌 차에서 만난 켄이라는 남자애가 얼마나 너한테 반했는지 잊어버렸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뭐니?" "정말이야." "켄은 아주 친절했지만 이제 난 로비 거야. 난 사실 다른 남자애들이 남동생처럼 생각되거든." "내 생각에 그는 네 남동생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던데." "어림도 없는 소리!"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토리?" "너한테 로비 얘기를 좀더 해도 되겠니?" "일 주일 이상 걸리지 않는다면." "그가 영화에서나 봄직한 잘생긴 청년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려. 그는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섬세해.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제일 먼저 나서서 도와줄 그런 사람이야, 토리.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말야. 난 언제나 그가 사람들을 구해 내는 장면을 상상해." 같아서 내 맘에도 쏙 들 것 같은 느낌이야." "나도 그러길 바래. 너희 두 사람은 내 가족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가끔 난 그가 네 맘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겁이 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그는 벌써 내 맘에 드는걸." "누구나 다 인정할 정도로 잘생겼니?" 디나 조이스가 위태로운 현관 아래로 조심스럽게 나오면서 말했다. 분명 그녀는 다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스테피, 말해 봐. 난 로비 와그너에게 아주 관심이 많아. 아주." 그녀는 마지막 말을 거의 굶주린 듯한 쫓아다닌다면 난 그녀를 죽여버릴 것이다. "존 트래볼타 만큼이나 잘생겼어." 스테피는 전혀 불안한 기색 없이 말했다. 마치 늑대 아가리에 자신을 내던지는 기름진 어린 양처럼. 난 프랑켄슈타인조차도 디나 조이스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주 완벽해......" 어린 양인 내 친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이니?" 늑대는 말하면서 끈적끈적한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스테피는 모든 여자애들의 이상적인 남성상이라고 로비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하기 시작했다. 로비는 분명 디나 조이스의 이상형일 것이고 그녀는 그 꿈을 개수작이다. 로비는 정말로 스테피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그가 써보낸 몇 통의 편지들을 읽어봤는데 모두 진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디나 조이스는 사실 아주 예쁘고 남들보다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었다. 길다란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열여섯 살난 소녀가 지녀야 할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스테피 역시 예쁘지만 평범한 타입이다. 짙은 갈색 머리칼에 깊은 갈색 눈동자, 화장을 하지 않고도 그녀의 볼은 언제나 홍조를 띤듯 발그레했다. 그녀의 얼굴 윤곽은 석고상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워 호감을 주는 인상이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녀의 몸무게는 삼 킬로그램 늘었다. 난 살이 그녀는 항상 그 살을 빼려고 다이어트하는 중이다. 지금까지도 빼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 그래도 내가 안고 있는 고민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난 긴 금발머리에 엷은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 키는 백육십오 센티미터이고 몸무게는 사십팔 길로그램이나 나간다. 더 나은 것 같다고요? 아마 다른 사람이 그렇다면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외모가 늘 불만이다. 그건 디나 조이스와 아무 상관이 없다. 만약 디나 조이스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난 몹시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스테피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녀는 계속해서 로비에 대해서 지껄이고 있었고 그 닳아빠진 디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화가 아르바이트에 관한 내용으로 바뀌자 디나 조이스는 흥미를 잃고 들어가버렸다. 조금 후에 허름한 숙소의 방에 불이 꺼졌고 스테피와 나는 좀더 밖에 머물러 있었다. 초승달이 떠 있어서 밖은 아주 어두웠다. 시골에서 듣는 벌레 울음 소리는 정겨웠다. 난 그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곤충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것들은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대부분 귀뚜라미일 것이다. 난 뱀이나 쥐가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난 스테피에게 물었다. "이 근방에는 어떤 동물들이 있니?" 나타나긴 하지만. 그런데 한 번은 물가에서 사람들이 방울뱀 한 마리를 잡은 적이 있어. 작년에는 내 숙소 안에 생쥐 한 마리가 있었고 또 사람들 말로는 오락실 천장에 박쥐들이 살고 있었다고 그랬어." "박쥐라고?" "아! 걱정하지 마, 토리. 그냥 평범한 박쥐야. 흡혈귀 같은 건 아니고." "다행이야." "그리고 또 쥐새끼들이나 뭐 그런 것들도 있고 거미도 있어. 작년에 우린 왕거미를 발견했어." "난 잘 거야." 망가진 널빤지를 건너뛰면서 바로 입구로 성큼 들어서려 할 때 난 스테피가 아주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었다. 거미는 벌써 잡아서 죽였느니까." "뭘로, 대포알로?" 난 지금 시골이 싫어졌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방은 내 침대 머리맡에 있는 구멍이 보일 만큼 환했다. 고개를 쳐들고 모로 누운 자세가 잠자기엔 불편한 자세였으나, 침입자가 있는지 감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침입자들은 나한테 크게 해를 입히진 못할 것이다. 난 머리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약간 더웠지만 그래도 얼굴은 벌레에게 쏘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난 지금 내가 오고 싶어하던 곳에 이렇게 와 있다.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다. 왜 부모님은 고집을 부릴 줄 모르는 걸까? 만약 내가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면 집에 엄마 아빠! 설상가상으로 차에서 만난 그 남자애는 스테피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달리 말하면 난 켄 어빙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잠들기 전까지 기억하는 건 누군가가 엄지손가락을 빠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건 엄지손가락을 빠는 박쥐이거나 아니면 털어놓지 못할 비밀을 갖고 있는 누군가의 고약한 잠버릇일 것이다. 난 디나 조이스는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클레어일지도 모른다. 물론 난 악몽에 시달렸다. 내가 반바지 차림으로 정글에서 덮을 것도 없이 램프도 없이 야영하는 꿈이었다. 난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깼다. 지독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기도 전에 어제의 소리를 질렀다. "자, 여학생들! 일어나요! 기상, 기상, 기상...... 전부 기상!" 그 다음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나팔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모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 부딪치면서 어디가 어딘 줄도 모르고 서두르면서 우왕좌왕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디나 조이스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제일 먼저 샤워를 끝내고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 일착으로 거울 앞에 앉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우리 불쌍한 늦잠꾸러기들은 유니폼을 되는 대로 황급히 걸치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에드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입었지만 대부분 세수도 못하고 머리도 빗지 못한 꼴이었다. 하지만 얼추 준비는 끝낸 셈이었다. 문가에는 가장 엉망인 아르바이트 지원자 그룹이 서 있었는데 그 중에 디나 조이스만이 단정한 유니폼에 잘 빗겨진 머리 그리고 깨끗한 치아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령에 맞춰 걸어 게양대까지 갔다. 어제 모였던 자리에 정렬한 채로 끔찍한 이무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젯밤 동안 그들이 얼마나 끔찍했었는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리를 향해 걸어나오는 걸 보자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열여섯 명의 아르바이트생인 우리는 옷을 대충 입은 채, 얼마간은 새벽의 한기 때문에, 또 어느 정도는 겁에 질려서 덜덜 "너한테 모자에 핀을 꽂지 말라고 얘기하는 걸 잊어버렸어." 스테피가 내게 낮게 속삭였다. "마침 잘됐네, 난 핀이 없거든." "다행이다." "왜 그러는데?" "노래를 불러야 하거든. 너 어제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던 캠프노래 생각나니?" "노래 부르는 데 왜 모자가 필요해?" 갑자기 스테피는 내 질문에 대답도 않고 몸을 곧추세우더니 정면을 바라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카르토파 부인과 그 잘난 데이비스가 막 도착했던 것이다. "아주 좋아. 깃발." 그 말에 두 명의 고참인 듯싶은 여학생이 게양대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접혀 있는 게양대의 도르래에 묶었다. 나팔 소리에 맞춰 우리는 새 날이 동터오는 새벽에 깃발을 게양하면서 무슨 노랜가를 불렀다. 난 항상 깃발 속에 무슨 의마가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이어서 캠프의 위대한 역사와 우리가 이곳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선택된 행운과 우리가 보내게 될 멋진 여름에 대한 과장된 연설을 들었다. 만약 이무기의 입에서가 아닌 다른 누구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면 난 그 사실들을 고스란히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의 얘기가 믿겨지지 않는다. "자, 여학생들!" 스테피가 그때 내게 속삭였다. "나를 쳐다봐!"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고참이었으므로 오른팔을 머리 위로 쳐들더니 모자 위에 손을 가져갔다. 우리들은 입으로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말없이 고참들을 바라보며 하는 대로 따라 했다. 모자를 갖고 하는 행동도 따라 했다. 카르토파와 데이비스에게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세. 그들은 놀라운 팀을 이끈다네. 라! 라! 라......! 그 노래가사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열여섯 명의 정상적인 사춘기 소녀들이 거기 서서 바보처럼 모자를 쳐들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피는 나를 쳐다보기를 두려워했다. 당연한 일렬로 서서, 여전히 '카르토파 찬가'의 리듬에 맞춰서 구내식당 건물로 걸어갔다. 구내식당은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있는 사무실 옆에 위치한 거대한 백색 건물이었다. 식당은 커다란 홀이었는데 인조 나뭇잎들로 뒤덮인 격자무늬 망을 사이에 두고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인조 나무잎들은 하나하나가 기름으로 윤을 낸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도 아르바이트 학생 중에 자원봉사자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청결하게 빛나고 있었다. 식당 양쪽에는 각각 열다섯에서 스무 개에 이르는 식탁이 놓여 있었는데 원탁이나 직사각형 모양의 다양한 식탁들이었다. 초록색의 윤나는 비닐 식탁보가 씌워져 있었다. 또 각 식탁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내 담당 식탁번호는 십칠번과 십구번이었다. 그 식탁들의 위치는 주방에서 멀지 않아 배열이 잘된 것 같았다. 난 지금 얼마나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은지 모른다. 우린 완벽하게 정돈된 텅 빈 주방을 둘러보았다. 주방에는 문제가 없었다. 난 내가 할 일이 얼마나 쉬울까 하는 게 상상이 됐다. 우리는 약 한 시간 가량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지도자들은 우리가 쟁반을 들고 실습을 해보도록 내버려두었다. 쟁반은 생각했던 것보다 무거웠지만 들고 있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 일은 즐거우리라는 걸 나는 "굉장해." 내가 스테피에게 쟁반을 드는 방법을 보여줬을 때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소리쳤다. "누가 너한테 그 방법을 가르쳐준 거니 뭐니?" "우리 엄마 친구가 가르쳐준 거야. 그 아줌마가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배우였는대 그렇게 쟁반 나르는 역을 많이 맡았었대." 이제는 알렉산드라와 리자까지 와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야단이었다. 난 그들에게 손바닥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한쪽 어깨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모양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모두 직접 해봤는데 그건 보기보다는 어려운 일인가 보았다. 하지만 난 몇 주 동안 연습을 했기 때문에 난 출발이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난 조금 흥분해 있었지만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내리라고 확신했다. 난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였으니까. 스테피는 오늘 아침 다섯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그녀에겐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로비가 마침내 도착하는 것이다. 차는 열한시가 지나서야 도착할 테지만 스테피는 오전 내내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는 갖고 온 옷들을 전부 입어 보아야만 했다. 물론 그 옷들은 전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내 반바지와 리자의 블라우스, 알렉산드리아의 벨트를 빌려서 입기로 말하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난 여전히 걔네들을 구별할 수가 없으니...... 그녀는 스웨드 천으로 된 조끼를 빌려주었다. 그 조끼는 흰 블라우스와 썩 매치되었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되지 않는 유일한 옷은 반바지였는데 아마 그게 내 옷이었기 때문이리라. 일단 옷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헤어스타일과 화장에 신경을 썼다. 적어도 열네 가지의 다른 헤어스타일을 생각해 냈지만 결국 처음 헤어스타일로 되돌아왔다. 길게 늘어뜨린 채 머리끝을 동그랗게 말고 한쪽 머리는 뒤로 넘긴 스타일이었다. 바로 그녀가 작년에 했던 헤어스타일이었다. 화장품 색깔을 고르는 데 한 시간, 또 그걸 바르는 데 그만큼 준비가 끝났다. 열시 사십오분에 그녀는 느닷없이 내 반바지와 조끼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열시 오십오분에 그녀는 모든 걸 다 바꿨다. 이제 시간은 열한시가 됐는데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다시 처음 입었던 옷으로 바꿔 입었다. 마침내 옷을 대충 걸친 채 주차장으로 달려갔는데 조끼는 뒤집어 입었고 내 반바지 지퍼는 걸려서 올라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차는 조금 연착되었다. 캠프 버스인 그레이하운드가 캠프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 반바지 지퍼는 완전히 올라갔다. 거의 그곳에 와 있는...... 로비의 존재 외에는 신경쓸 일이 없었다. 그는 아직 차에서 난 스테피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뒤에 물러서 있었다. 난 그들이 재회하는 그림을 망치지 않으려고 주차장 밖으로 멀찌감치 나와 있었다. 만약 그 재회 장면이 영화라면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그건 아주 로맨틱할 것이다. 난 재빨리 로비를 보고 싶었고 그들이 만나는 걸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면서 준비하고 단장을 한 스테피는 멋진 숙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설레는 감정과 기쁨 때문에 더욱더 눈부시게 아름다운지도 몰랐다. 나로서는 누군가가 그런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게 상상하기가 어렵다. 난 많은 남자친구들을 만났었지만 그토록 모든 걸 변화시킬 만큼 발전된 아름다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마치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홀로 거기 서 있었다. 나는 차 속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짐을 챙기는 걸 보았다. 차창이 색유리였기 때문에 누가 로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일찍 비가 왔었는데 지금은 태양이 빛나고 상큼한 시골의 내음을 끌어안은 바람이 불고 있다. 땀이 흐를 만큼 후텁지근한 날씨도 아니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정도로 매운 바람도 아니다. 완벽한 여름 날씨에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에는 축복 같은 날씨다. 차에서 처음으로 내린 세 사람은 여학생이었다. 그리고 나서 약간 어른스러운 남자 한 명이 내렸는데...... 난 대번에 알아차렸다. 비록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지만 그녀의 어깨 근처가 순간 굳어지는 듯하다가 활기에 넘치는 듯 들썩거리는 것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한동안 로비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는 다른 쪽에 스테피가 있다고 생각하다가 그녀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하기에는 그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힘들다. 하지만 난 그가 잘생긴 용모에 키가 크고 날씬한 모델 같은 체격에 아주 매력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스테피를 발견하자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에게로 곧장 달려갔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 있었지만 그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는 발자국 못 가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고 그녀는 그의 품속에 꼭 안겼다. 그건 말이 필요없는 너무나 일치된 동작이었다. 스테피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서로 팔로 껴안고 있었는데, 얼굴의 각도로 봐서 난 그들이 키스를, 그것도 아주 진한 키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더욱더 밀착시켰고, 난 그들이 얼마만큼 친밀한 사인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녀의 볼과 이마와 다시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들은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오, 세상에! 난 그게 내 친구 스테피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건 마치 영화 여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로비의 존재 앞에서 스테피가 그렇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리라. 그녀는 너무나 딴 사람 같아 보여서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난 이런 어리석은 생각에 골몰해 있어서 날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다가 결국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릴 때에야 환상에서 깨어나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내 오랜 친구의 얼굴을 보았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미꽃 떨기 같았다. "빅토리아." 스테피는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잡았고 우린 스테피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난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으면서 말이다. "내게 제일 소중한 두 사람이야. 로비, 여긴 그 전설적인 빅토리아야. 그리고 여긴 내가 버스 정류장에서 발견한 남자야." 내 미소는 이제 진지했고 난 처음으로 그 멋있고 눈부신...... 로비를 쳐다보았다. 오......! 갑자기 모든 게 잊어버리고 땅 밑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는데 그건 내 생각 뿐이었을까. 난 마치 감전당한 사람처럼 그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하느님 맙소사. 스테피! 분명 그녀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게 될 텐데.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여전히 그녀의 수다를 듣고 있었으므로. 난 마치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빅토리아?" 스테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나는 로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비스듬히 시선을 비끼면서 얼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게 돼서 반가워." 나는 감히 그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 결코 그런 기분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난 무슨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이 싫었다. "진정해, 빅토리아!" 그는 나한테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들었는지를 말하고, 나나 그가 말하는 동안 시선을 스테피의 얼굴과 로비 어깨 사이에 어색하게 고정시키고 바보처럼 웃고 있다. 난 그 자리에서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다. 언제면 그는 입을 다물까. 결국 그는 말을 마쳤고 그들은 내가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들었다는 똑같은 말을 했다. 난 내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이내 깨달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때 스테피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로비를 잡아당기고 내게 우정 어린 주먹질을 하면서 우리를 앞장세우는 것이었다. 난 끊임없이 뒤처져 걸으려고 애썼는데 스테피는 한사코 자기들과 나란히 걷도록 나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디나 조이스라는 애는 끔찍해. 그렇지 않니, 토리?" 그건 쉬운 질문이었다. "응, 그래." 그런데 난 왜 그때 로비가 나한테 말을 걸어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구두끈을 고쳐 매는 척하면서 몸을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질문을 놓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난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멈춰 서서 내가 샌들을 닦는 걸 지켜보았다. "식당에서 일을 하는 게 맘에 드니?" 그는 내 숙인 머리 위에다 대고 말했다. 난 올려다보았다. 내 가장 친한 여자친구와 그녀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숭배하고 언젠가는 결혼까지 하게 될 그 그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대답을 하려면 난 그를 쳐다봐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쳐다본다면 난 다시 그에게 빨려 들어가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난 한번도 누군가에게 강하게 이끌려본 적이 없었다. 난 정확하게 그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지만 아주 굉장한 것인가 보다. 내가 아는 전부는 그건 우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테피는 그 일을 좋아해." 라고 말하면서 나는 "안 그래, 스테피?" 라고 말꼬리를 돌렸다. 그건 이상적인 대답이었다. 모든 관심을 스테피에게로 돌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편해. 하지만 애들이 도착하면 어떤 일이 난 여전히 구두를 고쳐 신는 시늉을 하면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얼굴에는 바보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난 고개를 들어 스테피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이제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로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지만 내게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을 감당하기가 힘이 들어서 난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머! 깜박 잊을 뻔했어! 난 가봐야 해. 난 오늘 아침 식당의 인조 잎사귀들을 윤내는 일을 맡았거든." 그리고 마치 백 미터 달리기에서 출발하는 선수처럼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난 로비가 물어보는 소리를 들었다. "잎사귀에 윤을 내다니? 그게 뭐야?"  ? 하지만 난 너무 멀어져서 스테피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난 내가 그런 일을 만들어낸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일이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자원봉사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어떤 일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제3장 사랑의 알레르기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조차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는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뭔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가. 내 가장 친한 여자친구의 남자친구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헐떡거리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거기 들어서면서 디나 조이스 혼자서 스테피의 옷장을 훔쳐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뻔뻔스럽게도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나는 영화에서처럼 근사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내 입에서는 엉뚱하게도, 누굴 찾고 있는 거지?여서 난 정말 당황했다. "옷장에서 말야! 정말로 빅토리아, 무슨 일이 있는 거니?" 그리고 천천히 태연하게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옷장 문을 닫고 내게로 돌아섰다. "넌 그 굉장한 로비를 보기는 했니?" 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디나 조이스는 옷장을 뒤지다가 들켜 궁지에 몰렸던 상황을 어느새 뒤바꿔놓고 있었다. 그녀는 몰래 스테피의 옷장을 뒤지는 역겨운 짓을 하고 있었는데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교묘하게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단번에 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괜찮았나 보지, 안 그래?"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면서 마치 우리가 공범이기라도 한 것처럼 웃어 보였다. "난 그냥 얼핏 봤을 뿐이야. 좋은 사람인 것 같애. 하지만 속은 알 수 없잖아? 외모가 전부는 아니란 말이야. 키가 크고 날씬하다는 것도 다는 아니지." '제발 누가 나 좀 말려줘!' "솔직히 말해서 난 그런 타입은 별로 끌리지 않아. 난 새까맣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좋아하지 않거든. 난 금발에 곱슬머리가 좋아. 아마 그는 그런 근육을 키우느라고 아령 깨나 했을 거야. 그리고 너도 알지? 만약 하루라도 그런 사람이 빌빌거리는 걸." '누구든지 제발 내 입을 막아줘.' "가까이서 보니까 뭐 대단해 보이는 구석도 없더라. 아냐, 그는 평범했어. 어쨌든 내가 본 소감은 그래. 그런 타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인물이야. 스테피는 그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애. 하지만 난 평범하고 그저 그런 남잔 것 같애!" '제발 날 좀 살려줘.' "근사하지 않아, 조금도. 형편없어. 마치 속이 텅 빈 것 같애...... 너 그런 거 알지......" "오, 저런, 저런!" "왜, 디나?" "난 한번도 누가 너처럼 쉽게, 그렇게 없어. 어머나! 세상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난 그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말했어. 그는......" "걱정하지 마, 빅토리아. 난 네 친구잖아. 넌 날 믿어도 돼." 내가 진 것이다. 만약 디나 조이스가 내 친구이고 내가 그녀를 믿어야 한다면 얘기는 끝난 것이다! 난 그녀가 그래도 내 속마음은 꿰뚫어볼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내 말을 곧이듣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지만 그녀는 언제나 궁지에서 빠져나온다. "넌 네 맘대로 해석할 수 있어. 하지만 독단하는 건 우스운 일 아니니. 난 이 년 말이야." "물론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네 얘기를 좀 하자. 넌 내 친구의 옷장을 가지고 뭘 하고 있었지?" 이젠 내가 그녀를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어머, 그게 네 친구 옷장이었니? 난 내 건 줄 알았어." 그녀는 나한테 그럴듯한 변명을 둘러대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큰 희열을 맛보기라도 하듯. "로비에 대해서 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그녀 앞에서 바보처럼 서 있는 나! 모든 사람들이 디나 조이스에게는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계속 말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으므로 난 썼다. 식사시중을 위해서 유니폼을 갈아입을 시간이 임박해졌다. 조금만 서두른다면 난 스테피가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난 디나 조이스가 있는 데서 스테피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난 다시 침착해지거나 아니면 다른 데로 피해야만 한다. 어떻게 사람들은 누구나 그토록 쉽게 내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걸까? 스테피는 뭔가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틀림없다. 열 살 때부터 사귄 친구를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것인가. 특히 나같이 안색이 잘 변하는 경우에는 말이다. 난 디나 조이스에게서 뻔뻔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 "토리?" "네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야. 얘기할 게 있어." 오, 하느님 맙소사! 그녀도 알고 있어. "단둘이서 말야." 그녀는 디나 조이스를 턱으로 가리켰다. "나하고 산책이나 하러 가자." "내가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얘기가 있다면 그건 네 잘난 로비에 관한 얘기란 걸 아니? 난 네 친한 친구한테서 그 얘기를 여기서 지겹도록 들었거든. 안 그러니?" 디나 조이스는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스테피에게 말을 했는데 마지막 말은 나를 겨냥한 것이었다. "어서 가자, 스테피." 난 스테피의 팔을 붙잡고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스테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쟤는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뭐니?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디나를 경계하는 게 좋을 거야. 항상 남의 걸 갖고 싶어하니까." 그 말은 근거가 있었지만 지금 경우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충분히 생각한 뒤에 한 말이었다. 사실 그게 디나 조이스의 본심이기도 했다. 스테피와는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가족을 빼고 내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었고 우린 한번도 서로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언젠가 내가 그녀를 조금이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걸 의심하게 된다면 난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로비에게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도 끔찍하다! 난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조차 모르지만 좀전에 내 마음속에서는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뭔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가. 그렇다. 내 가장 친한 여자친구의 남자친구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약간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뭔가가 일어났다. 아니 결국은 우리들 사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 쪽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내 쪽에서만 이러는 건지도. 오, 잘 모르겠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어쩌면 내가 뭘 무엇이든간에 스테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난 그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니까. 난 가능한 그와 멀리 떨어져 지내면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니, 토리? 넌 내가 한 말을 듣지도 않았어! 난 너한테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는 중이야." "싫어!" 그녀의 질문이 어떤 거였는지 모르지만 내 대답은 그거였다. 난 어떤 위기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안 돼! 절대! 싫어!" "뭐?" "난 안 돼라고 말했어. 안......돼!" 난 몸까지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넌 그가 전혀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정말로 낙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그녀의 얘기를 귀담아들었어야 했는데. "어머! 스테피, 물론 괜찮지." "그런데 왜 넌 내가 로비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계속 아니라고 그런 거야?" "아! 난 데이비스 박사 얘기를 하는 줄 알았거든." 다시 디나 조이스 같은 꼴이 된 나를 보라. 거짓말은 습관이 되는 것이다. "데이비스 박사라고? 그 괴물! 그런데 너 좀 아픈 거니 뭐니?" "미안해, 스테피. 난 좀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 너 아이들이 내일 도착하는 거 알지?" "그게 어쨌는데?" "그런데 로비는 어떻게 생각해?" "괜찮아." "괜찮다고? 토리,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네 마음에 드는 거니 뭐니?" "맘에 들어." "아니야." "정말이야, 맹세해. 그는 굉장히 근사하고 잘 생기고 친절해." "넌 그가 싫은 거야. 알 수 있어. 넌 날 속일 수 없어, 빅토리아." "진심이야, 스테피......" "로비는 널 좋아하는데." "아니야......" "정말이야. 내게 그렇게 말했는걸. 사실, 로비는 너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싶어했었어." "뭐가 아니야? 왜 이러는 거니? 넌 나랑 제일 친한 친구잖아. 나도 그의 친구들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싶어." "좋아, 그건 그렇고 넌...... 음...... 데이비스 박사를 어떻게 생각하니?" "난 정말로 진지하게 그를 사랑하고 있어." "데이비스 박사를?" "아니, 바보같이! 로비를 사랑한다구. 난 네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중요한 건 내가 그를 사랑하는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난 네가 왜 그토록 그에게 쌀쌀맞게 구는지 몹시 궁금해." 난 그녀가 내 태도를 냉정함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만약 그에 대한 내 감정이 조금만 더 뜨거웠어도 사태를 나는 정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거기서 도저히 로비에게 태연하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뭔가를 들킬까 봐서 말이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로 그건 좋지 않은 일인데도 난 바쁘다고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앞에 있을 때 벌써 난 나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더 나쁜 건 그의 생각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로비에게 냉정하게 구느냐 하는 것이라니! 그래서 난 스테피에게 진심을 얘기했다. "난 로비에게 쌀쌀맞지 않아. 절대로 그렇지 않아. 사실 난 그를 본 순간부터 정말 근사한 남자라고 평가하고 있었어. 그는 네가 말하던 그대로야." "그리고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정말이니, 토리? 나도 그러길 바래.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나는 다시 그녀 앞에서 디나 조이스 흉내를 내면서 우리가 함께 보내게 될 멋진 여름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었다. 또다시 가슴이 두방망이질할 위기는 없을 것이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비와 만나는 걸 피할 작정이었다. 내가 그를 생각한다면 그를 미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난 로비 와그너를 좋아하지 않아. 절대로! 그럴 수 없잖아. 그럴 수 없어! "식사가 끝나면 우리 함게 콜라나 마시러 가자고 했어." 수가 없어." "왜 그러는데?" "알렉산드라에게 손톱을 다듬어준다고 약속했거든." "상관없어, 우린 저녁식사 후에 갈 건데 뭐." "사실 편지를 몇 통 쓰려고......" "그럴 줄 알았어! 넌 그가 싫은 거야." "......하지만 편지는 나중에 쓰지. 야! 그건 정말 근사한 생각이다...... 콜라를 마시러 가는 거 말야. 벌써부터 물이 마른데." "토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넌 좀 이상해. 난 너하고 제일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넌 나한테 숨기려 드니?" "누구?" "토드 말이야. 정말이야, 스테피. 어쩌면 난 그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넌 어떻게 생각하니?" "만약 네가 그렇다면 그건 아마 진심일 거야. 토리, 넌 나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야. 난 말이지, 로비에 대한 나의 감정을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 난 더이상 로비에 대한 이야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로비에게로 귀착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 말은 만약 네가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면?" "그럴 리가 없어." "만약 그가 널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그래?" "그럴 순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어.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야. 잘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된다면 내 인생은 끝장이야." "얘, 스테피. 넌 겨우 열여섯 살이야. 그가 네 마지막 사랑은 아니잖아."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토리. 로비는 내가 일생을 함께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이상형의 남자야." "그와 결혼할 거란 얘기니?" "만약 당장에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면 난 그와 결혼하겠어!" 난 갑자기 우리가 일 분이라도 로비에 대한 얘기를 더 계속하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자, 여학생 여러분! 식사시간이에요! 빨리...... 빨리...... 빨리! 열...... 아홉...... 여덟...... 일곱....... 서둘러요, 여학생 여러분. 게양대 앞으로 모일 시간이에요!" 그 확성기의 숨가쁨처럼 기마행렬 같은 달리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스테피와 내가 제일 앞장섰다. 아무도 게양대 앞 집합에 늦어서는 안 되었다. 결코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된다! 난 그날 오후를 스테피와 로비를 만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머지 않아 저녁시간에 맞닥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난 저녁식사 후에 함께 콜라를 마시러 가기로 약속했지만 난 심각한 꾀병을 핑계로 턱뼈의 이상, 분명 그 증상은 콜라를 마시러 가는 데 따라가지 않을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온몸이 가려운 알레르기 증상까지 호소하는 것이다. 난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온몸을 긁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에 내 팔과 다리에는 너무 긁어서 생긴 붉은 핏자국이 생겼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스테피조차도 자기 기분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주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콜라 마시러 가는 거 잊지 마, 토리." 나로서는 불행하게도, 그녀는 저녁 그녀에게 몹시 저녁이 기다려지지만 이 끔찍한 알레르기 증상이 가라앉기를 바랄 뿐이라고 얘기했다. 그녀는 내가 뭣 때문에 알레르기를 일으켰는지 알고 싶어했고 난 그녀에게 로비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 생각에는 점심 때 먹은 음식 때문이거나 아니면 수풀에 대한 알레르기인 것 같애. 알레르기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거니까." "너 양호실에 가봐야 되겠다." "벌써 갔었는데 간호원이 그러는데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고 또 바르는 약을 준다고 했어." 여러분은 하나의 거짓말이 또다른 거짓말을 낳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마치 우리가 처음으로 남을 속이려고 할 때 우리가 꾸며대는 복잡한 거짓말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수법 같은 것인데, 한번 거기에 빠지면 우린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그 거짓말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기엔 너무 늦었다. 난 어느새 거짓말에 익숙해졌고 전문적인 거짓말쟁이들의 모임인 디나 조이스 패에서 일등가는 거짓말쟁이가 돼버린 것이다. 제4장 가슴이 콩닥콩닥, 사랑이 아닐는지요 "빅토리아?" "맞았어." 난 진심으로 그 말에 기뻤고 나 역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로비!" 난 내가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오늘 저녁은 정식으로 남학생들과 지도선생님들의 조수들과 캠프관리 직원들, 그러니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도선생님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내일 아이들과 함께 도착할 예정이다. 성대한 저녁을 위한 준비작업은 오후 네 시 경부터 시작되었다. 때때로 난 축제의 가장 멋진 하일라이트는 준비할 때라고 생각한다. 준비를 하는 동안은 모든 게 정말 완벽하게 느껴지니까 말이다. 그러한 기분은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다. 옷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난 여러 친구에게서 빌린 다양한 옷들을 근사하게 매치시켜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상당히 멋질 거라고 상상이 되는데 왜 일단 직접 입어보면 매력이 없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아주 사소한 부분, 즉 매니큐어 색깔까지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무도 그런 걸 유심히 살펴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최대한으로 동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오늘 저녁 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지 않고 일부러 보기 흉하게 보이려고 남루한 옷을 선택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론 한껏 치장했어도 흉하게 보일 때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훨씬 고약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서로 어울리지 않거나 혹은 키가 작아 보이거나 뚱뚱해 보이는 옷을 골라 입지는 않을 것이다. 난 체념하듯이 내가 단정하고 검소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의 옷을 빌려 입지 않고 내 옷으로만 갖춰 입었다. 내 자신이 겨우 알아볼 정도로. 아주 끔찍한 일이었지만 해야만 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준비를 끝냈으니까 말이다. "어머나! 디제이(디나 조이스) 이 골덴 반바지 참 좋다. 너무 근사해!" 디나 조이스의 가장 절친하고 가장 키가 크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인 클레어가 말했다. 그녀는 분홍색 새틴으로 가장자리가 둘러진 암자주색 반바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나 좀 빌려줄 수 있어?" "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안 돼. 사실 내 옷이 아니거든. 사촌 여동생 건데 아무한테도 빌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투는 너무 달콤하고 흐느적거려서 마치 남부출신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그때까지 뭐든지 그 유명한 사촌 여동생 거라고 말했디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빌려주기 싫어하는 이기심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클레어는 디 제이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었다. "아니야, 됐어. 디 제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잘 간수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아......" 그리고 클레어는 부탁한 것이 머쓱해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정말 디나 조이스는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예, 클레어." 디나 조이스는 다정하게 부르면서 클레어가 입으려고 침대 위에 놔둔 벨트를 집으면서 말했다. "이걸 하려고 그러는 거지?" 클레어는 사실 지나치게 디나 조이스에게 아첨을 하고 있었다. 정말 역겨운 장면이었다. "난 벨트 없이 이 원피스를 입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그녀는 마치 자루 같은 옷을 보이면서 오락가락했다. "네 생각은 어떠니?" 그녀는 거짓말쟁이 여왕에게 물었다. 우린 모두 포동포동한 클레어에게 그녀가 뭐라고 답변할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디나 조이스는 한참 동안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안 되겠다, 얘. 넌 뭔가를 허리에 둘러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둥근 공처럼 보일 거야." 벨트를 자신의 허리에 매는 것이었다. "난 맬 만한 게 하나도 없어." 클레어는 울상진 얼굴을 애써 감추면서 말했다. 그건 정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만약 당사자가 그 바보 같은 클레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난 끼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싸다. 그만큼 바보 멍청이 같았다. 난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자기 주관이 없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정말 구역질이 나는 일이다. 하지만 디나 조이스는 훌륭했다. 그녀는 단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할 수 없지 뭐.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야.' 하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무심하게 그녀는 되돌아갔다. 마침내, 맥키노우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가 아주 잘 어울리는 벨트를 매고 나타났다. 맹세하지만 디나 조이스는 단지 자신이 하고 있는 벨트가 제일 예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간섭하고 결점을 꼬집어 낼 거다. "어떠니?" 스테피는 뭔가 다른 옷을 걸쳐 보일 때마다 끝없이 내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넌 오늘 저녁 아주 눈부시게 예뻐서 뭘 입어도 괜찮아. 너 화장술을 바꿨니? 새 볼연지를 바른 것 같은데?" "아니." "뭔가 달라 보여." 그녀는 미소지었다.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뉴욕의 유명한 블루밍데일 백화점 화장품 진열장에 사랑이 없다는 건 유감이다. 우리 모두는 마침내 저녁파티에 참석할 단장을 끝냈다. 나만 빼고 모두 근사해 보였다. 우리 엄마가 만약 숙소의 공동침실을 본다면 노발대발 펄쩍 뛰실 거다. 침대란 침대 위에는 삼 층 높이의 옷들이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구두와 온갖 커얼클립과 헤어 드라이어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각종 화장품병과 튜브 그리고 콤팩트 등이 흐트러져 있었다. 거기에는 천 달러어치나 되는 아이새도우와 얼굴의 각질을 벗겨내거나 각질이 생기는 걸 방지하는 마사지 크림, 피부를 부드럽게 하거나 강하게 하는 팩, 모공을 열어주거나 보이게 하는 것 외에는 뭐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미용 화장품들이었다. 스테피는 언젠가 자기 엄마가 쓰는 노화방지용 크림을 얼굴에 발라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하루종일 너무 어리게 보이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었다. 우리는 무더기로 적을, 항상 너무나 우호적인 적들을 만나기 위하여 출발했다. 우리는 가는 중간에 마이클 잭슨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 노래는 흥겨웠고 떠나온 집을 생각케 해주는 향수 어린 최초의 소리였다. 언제나 그룹 미팅을 하기 위해 이런 장소에 들어가는 건 우리처럼 한꺼번에 몰려간다고 해도 쑥스러운 일이다. 난 디나 궁금하다. 남자애를 만나기 전에 안절부절해 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아마 얼빠진 녀석들뿐일 거라고 생각지 않니?" 알렉산드라는 스테피와 나와 함께 있었는데 그녀 역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걸 난 알아." 스테피는 말하면서 내게 살짝 윙크를 했다. "아무도 로비 와그너를 얼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절대로!" 알렉산드라도 동의했다. "그리고 차에서 만난 그 남자애는?" 스테피는 내게 질문을 툭 던졌다. "그가 너한테 열중해 있었다는 것만 빼면." 나는 스테피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내 알렉산드라는 버스에서 만난 그 남자를 궁금해 했고 스테피는 그녀에게 켄에 대한 얘기를 죄다 들려주었다. 스테피는 정말로 그가 인상적이었나 보다. 나도 그가 괜찮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는데 스테피는 그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켄 어빙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벌써 전부들 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애썼다. "디나 좀 봐." 디나 조이스는 맨 앞에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나 일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쟤는 혼자서 좋은 침대를 차지하던 첫날처럼 제일 먼저 가면 제일 괜찮은 남자애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하나봐!" 스테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야. 하기야 넌 좀 서둘러야겠다. 이번에는 제일 좋은 침대가 다름아닌 로비 와그너가 될 테니까 말이야!" 나 또한 이죽거렸다. 스테피는 웃으면서 깡총깡총 뛰듯이 걸어갔다. 디나 조이스는 정말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가 물었다. 우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와 똑같은 질문을 다른 쌍둥이도 물었다. "......재밌는 일이라도 있니?" 그 쌍둥이 자매는 정말 이상하다. 마치 동체가 붙은 기형쌍생아처럼 행동하는 것이 마치 외관상으로만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뇌는 공통이고 마치 똑같이 찍어낸 두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난 가까이에 있는 쌍둥이에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난 계속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난 여전히 첫날의 포스터 사건 때문에 그들과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디나 조이스를 선두로, 그녀의 몇 발자국 클레어와 우리는 건물의 목조계단을 올라갔다.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남자아이들은 우리가 들어서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기 전에 우리는 짧은 순간 자유롭게 스물다섯 명의 낯선 남자애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흥분과 두려움이 엇갈렸다. 마침내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했다. 그들 사이에 한동안 술렁임이 있더니 우리의 도착을 알리는 전갈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우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우린 몽롱한 상태였다. "미소지어, 토리." 스테피가 내게 속삭였다. 그제서야 난 내 얼굴이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그건 처음에 미소짓는 얼굴이었는데 뭔가 "스테피! 여기야, 스테피!" 난 어디서라도 그 목소리를 구별해 낼 것이다. 그 목소리는 내 왼편에서 났지만 난 감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스테피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나를 잡아당겼지만 난 그녀에게 말했다. "좀 있다 갈께." 그래서 그녀는 여자아이들 속으로 사라졌고 난 혼자 남았다. 난 재빨리 알렉산드라를 찾았지만 그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난 정말 혼자였다. 사람 살려! "안녕." 누군가가 친절하게 말했을 때 난 고개를 들었고 차 안에서 만난 켄을 보았다. "어머나, 안녕! 어떻게 지내?" "아주 좋아......" 애쓰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마, 기억나 스테피!" 바보 같은 놈! "스테피의 친구야." 난 여전히 상냥함을 잃지 않으려고 가능한 부드럽게 말했다. "맞아, 스테피의 친구지." 그는 겸연쩍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가 쑥스러운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친절했다. 난 그가 나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누구인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빅토리아?" 그가 말했다. "맞았어." 난 진심으로 그 말에 기뻤고 나 역시 "로비!" 난 내가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가. 그 이름이 내 입술에서 발음된 순간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면서 난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난 정말로 그 이름을 내뱉을 생각이 없었다. 하루종일 그의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저절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난 그의 이름이 켄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가 로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 하느님 맙소사. 난 미쳐 가는 모양이다! 그가 다시 먼저 말을 꺼냈다. "좋아, 우린 이제 비긴 거야." 다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화받는 일은 어떠니?" "굉장해. 난 사흘 동안에 열두 통의 전화를 끊어버렸어! 그런데 네 식당 일은? 난 아직 식당에서 단 한 명의 여학생도 못 봤거든." "우린 아이들이 도착하는 내일부터 일을 시작할 거야. 그동안 한 일은 고작 규칙을 익히는 거였어. 그게 얼마나 복잡한지 넌 모를 거야. 난 아직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너무 생각할 게 많으면 사람들은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리지.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번이 네 첫번째 경험이니까." "너도 벌써 이무기들을 만나봤니?" "난 그들 앞에서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 넌 어때?" "내 생각엔 그들을 사형집행시키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애." 그와 얘기를 하면서도 난 곁눈질로 스테피와 로비가 있는 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꼭 껴안고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자 그들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는 내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안녕!" 스테피는 말하고 나서 그녀는 켄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켄 생각나니?" "그래, 켄 어빙." 그녀가 이름을 생각해 내자 켄은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스테피가 그의 이름을 금방 기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애는 나한테 관심을 가질 수가 없는 모양이군. 그리고 나서 스테피는 그에게 로비를 소개했는데 그들은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한 방의 룸메이트였다. 그 증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난...... 웬지 모르지만...... 로비 때문에 괴로웠다. 그가 내 가까이에 있으면 내 모든 걸 지배하는 것 같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는데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난 우선 그로부터 떨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있을 것이다. 난 새로운 춤곡이 흘러나오는 걸 들었다. "난 이 곡을 좋아해." 나는 켄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불행하게도 스테피가 하는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스테피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스테피의 말을 중단시키기도 전에 그녀는 로비에게 말을 건넸다. "로비도 좋아하는 곡이잖아. 토리, 네가 어제 연습한 새로운 스텝을 그에게 가르쳐줘." 그리고 그녀는 스테이지로 나를 떠밀었다. 물론 그도 따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멈춰 세웠다. "난 춤을 출 수가 없어. 발목을 삐었거든."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언제 다쳤니?" 스테피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조금 전에." 스테피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지만 난 계속 중얼거렸다. "난 뭘 좀 마셔야겠어. 목말라 죽겠어. 누구 마시고 싶은 사람은 부탁해?" "내가 갈께. 발목을 보호해야 되니까." 로비가 말했다. "아니야, 좀 걷는 게 더 나을 거야." "하지만 춤추는 건 안 된단 말이지?" 스테피는 정말 묘한 표정으로 나를 봤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콜라 세 잔?" 자리를 피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난 상관없었다. 난 단지 내 절친한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와 위험한 관계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방법이야 어떻든 난 절대로 그와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오랜 우정에 걸고. 음료수가 있는 다른 쪽 구석으로 가면서 난 내 자신에게 거듭 다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난 다른 데로 사라져버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난 번번이 구실을 찾아낼 것이다. 그 이유들은 어쩌면 구슬프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그냥 머물러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난 이제까지 한번도 그토록 인상적인 사람을 만나본 "토리!" 스테피가 나한테로 와서 나를 공상과 악몽 속에서 끌어냈다. "괜찮아, 내가 갖고 갈 수 있어." 나는 허둥지둥 했다. "무슨 일이니? 도대체 발목 얘기는 어떻게 된 거야? 네 발목은 멀쩡해! 넌 다리를 절지도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토리?" "아무것도 아냐. 정말로 난 발목이 아팠었는데 이젠 훨씬 나아졌어. 내가 좀 걸으면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괜한 소리 마. 넌 로비가 맘에 들지 않는 거야. 그뿐인 거야. 난 알아." "아니야, 오해야. 난 그가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그에게 무례하게 굴었어. 난 네가 이토록 나한테 소중한 사람에게 그렇게 굴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돼." "그건 사실이 아니야." "사실이 아니긴 뭐가 아냐. 너도 잘 알잖아." 이렇게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인 우리 둘은 사실이 아닌 일을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싸움을 멈춰야만 했다. "켄 때문이야." 무슨 말이든지 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켄 때문일 수가 있어? 도대체 네가 로비에게 불쾌하게 대하는 거랑 켄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필사적으로 대답할 말을 찾고 있었다. 난 할 말을 찾아냈다. "난 로비에게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어. 단지 난 켄이 좋아졌고 그밖의 일까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애." 처음엔 말다툼을 했고 이젠 거짓말까지 하기에 이르른 것이었다. 너무나 심한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난 켄이 내가 로비와 춤추고 싶어한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 됐던 거야. 왜냐하면 그가 좀전에 춤추자고 했을 때, 난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싫다고 그랬거든. 또......" 스테피의 얼굴을 보면서 난 그 거짓말이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주워 담기엔 너무 늦었던 것이다. "또 난 정말로 로비와 춤출 수 없잖아, 난 눈두덩이처럼 더욱더 거짓말을 보탰다. 스테피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난 스테피 클링거를 국민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왔다. 우린 아주 어렸을 때 사소한 말다툼을 한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지금과 같이 심각한 적은 없었다.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한번도 진짜로 다툰 적이 없었다. 난 그녀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있지만 한번도 내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난 정말로 지나친 거짓말을 하고 나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난 네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또 왜 그가 네 맘에 들지 않는지도 모르겠어. 그건 어리석은 아니라면 말이야." "로비를 질투한다고?" "내 말은 나 때문에 네가 로비를 미워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위기에서 살아난 것이다! 그녀가 내게 핑계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만이 유일하게 먹혀들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하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그를 충분히 좋아하지 않는 것도 나쁜 일이니까 말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난 얼른 그 구실을 내 걸로 만들었다. "저기...... 난 그가 사실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할 거라고 생각해." 보내게 될지 모르지만 우린 여전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거야. 또 우린 같은 방에 있잖아. 우린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거야. 안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도......" "너한테 맹세해. 토리. 게다가 우린 셋이서 함께 지낼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다시 끔찍한 상황이 재현될 텐데. 난 불평을 그만 해야만 했다. "네 말이 맞아, 스테피. 난 네가 누군가 특별한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보는 데 익숙해 있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했나 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집에 있을 때 내가 토드와 함께 지내던 때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애. 결국 넌 로비와 단둘이 지내야만 해. 나도 토드와 그랬잖아, 안 "물론이야, 얼마간은 그래야겠지. 하지만 대부분 우린 모두 함께 지낼 거야."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물론 난 의도적으로 피하겠지만, 그러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뒤죽박죽된 상황에 대해서는 나중에 걱정해야지. "토리, 넌 내 제일 친한 친구고 나한테 무척 소중해. 그런데 넌 나한테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돼. 만약 뭔가 잘못된 게 있으면 솔직히 서로 털어놓기로 약속한 거 기억나니? 만약 이런 일 때문에 우리의 우정을 잃게 된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야.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일 때문에 그렇게 된다면 말이야." 난 그녀의 말이 옳다고 긍정했고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고 얘기했다. 일이 잘못됐는 줄 알겠다." "스테피, 난 네 말이 전부 옳다는 걸 알고 또 이젠 기분이 정말로 좋아졌지만 아직 저족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스테피도 내 심정을 이해하는지 좋다고 하면서 남자애들에게는 지금 내가 발목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겠다고 했다.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야, 토리. 언제까지나 그러리라 믿어." "나도 널 무척 좋아해, 스테피." 그녀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있다 보자." 그녀는 몸을 돌려 오락장의 계단을 올라갔다. 若騈?환갑연에 참예하고, "그럼!" 내가 말했을 때 그녀는 이미 오락장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난 발목을 핑계로 벗어났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로비 와그너와 멀리 하면서 스테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다. 그건 어려운 게임과 같이 머리 아픈 것이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일이었다. 난 숙소의 공동침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밤공기는 부드러웠고 겨우살이 덩굴과 풀냄새가 진동했다. 만약 이 엄청난 문제만 없다면 난 여기서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적어도 오늘 저녁 만큼은 말이다. 내일은 별문제인 것이다. 내일이면 아이들이 도착한다. 그들은 식사시간에 처음으로 식사시중을 들 것이다. 모두 조금은 불안해 하고 있는데 그 끔찍한 이무기들이 우리를 지켜볼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더 끔찍한 건 그들도 식사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난 너무나 내 자신의 문제에 온 정신이 팔려 있어서, 오락장에서 숙소까지 가는 숲길을 손전등 하나만을 들고 혼자 걸어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사실 뉴욕과 비교해 보면 모하프 여름캠프는 정글이나 다름없는데...... 난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면서 재빨리 걸었다. 만약 내가 온통 내 황당한 고민에 빠져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밤길을 혼자 걸으며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마치 소림끼치는 일이 또다른 무시무시한 일 옆에서는 견딜 만한 것처럼. 난 제일 먼저 숙소로 돌아왔고 다른 친구들이 돌아오기 전에 잠들려고 침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난 누구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디나 조이스와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잠든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5장 속수무책, 첫 식사시중 우린 둘이 균형을 잃고 식탁 주위에서 춤추듯이 팔과 다리를 휘젓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엎어졌다. 너무나 창피해서 난 바닥에 넘어지는 충격도 느끼지 못했지만 안나는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는 모두 아침 여섯시 반에 일어났다. 천하무적의 디나 조이스를 포함해서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날씨마저도 우중충했다.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려 쌀쌀하고 흐린 날씨였다. 공동침실 안의 모든 것도 눅눅한 것 같았다. 우린 식사에 우리의 커다란 시련이었다. 클레어가 제일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내가 속으로 제일 불안해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죄다 기억해야 할 식사주문 내용과 가능한 빨리 삼십 명, 비록 그 중의 스물네 명은 어린애이지만, 그들의 식사시중을 들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날라야 할 음식들이 왔다갔다 했고, 그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누구 하나 아침 식사를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여름 캠프의 마지막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예정보다 이른 열시 반 경에 도착했고 캠프촌은 갑자기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이백 명의 어린애들이 난 그들의 북적거림이 좋았다. 모든 게 훨씬 유쾌해졌고 이 변화무쌍한 아르바이트에 잘 적응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각오도 샘물처럼 솟았다. "십 분 후면 돌격이야!"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사실 우린 몇 시간 전부터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었다! "여학생 여러분 주목해요! 여학생 여러분 주목해요! 중앙 구내 식당으로 빨리 집합해요. 자, 여학생 여러분, 서둘러요!" 신경질적인 명령이 되풀이됐는데 마치 삼차 세계대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성화였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둘러야만 했다. 첫날 게양대 앞으로 집합할 때보다 더 빨리! 다시 풀밭 위를 달려가는 소란스런 와중에도 모자는 한 손으로 꼭 누르고 식당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숙소의 층계에 나와서 여학생들이 달려가는 걸 지켜보는 모습을 발견했다. 저 멀리 구내식당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무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카르토파 부인은 두 손을 쳐들었고 우린 일사불란하게 제자리에 정렬했다. "자, 여러분. 난 여러분이 준비가 돼 있다고 믿어요. 우린 여러분이 잘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안 그래요, 박사?" 그 키 작은 데이비드 박사는 아주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우린 모두 그 미소에 쫘르르 소름이 끼쳤다. "그래요, 우린 여러분을 믿어요." 카르토파 부인은 말을 계속 이었다. 자, 여학생 여러분. 말해 봐요! 여러분은 왜 여기 있죠?" "봉사하기 위해서요!" "그러면 어떻게 봉사할 건가요?" "완벽하게요!" 누가 우리에게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대답했다. "모두 식당으로 가세요!"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린 모두 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처음으로 모든 식탁이 차려질 것이었다. 식당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 것이다. 완전히 초만원이 될 것이다. 우린 이미 담당할 식탁이 어느 건지 알고 있었으므로 각자 자기가 맡은 식당으로 곧장 걸어갔다. 난 속으로 걱정스럽기는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난 가장 나이 어린 학생 두 그룹을 맡았다. 한 식탁에는 여섯 살에서 일곱 살까지의 여자애들이 있었고 또다른 식탁에는 같은 또래의 남자애들이 있었다. 난 그들이 앞으로 나의 친동생처럼 사랑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난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음식이 식탁에 넘칠 것 같았지만 아이들은 작았으므로 괜찮을 것 같았다. 웬지 모르지만 나는 식탁을 차리는 데 남들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데이비스 박사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그에게 신경이 쓰여서 포크와 나이프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잘 돼가니?" 스테피는 내가 맡은 식탁 쪽으로 다가오면서 물었다. "넌 벌써 다했어?" 나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 식탁이 좀 작은가 봐. 내가 도와줄께." 그래서 그녀는 접시를 들고 날 도와주기 시작했다. "네 식탁엔 몇 명이나 되는데?" 나는 벌써 세 번이나 떨어뜨린 포크를 집기 위해서 몸을 숙였다. "삼십 명 정도." "나도 그래." "첫날이라 너무 긴장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 맞아!" 이렇게 멍청한지 모르겠다. 마침내 식탁을 모두 차렸다. 오히려 잘 끝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난 내 식탁에 앉을 아이들을 위해 새 모양으로 냅킨을 특별히 접어 놓았던 것이다. "쟁반을 들어요, 여학생 여러분." 카르토파 부인이 지시를 내렸고 우린 모두 커다란 금속쟁반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각자 쟁반을 하나씩 들었다. 웬지 모르지만 스테피와 나는 제일 꼴찌로 쟁반 있는 데 도착했기 때문에 찌그러진 쟁반을 차지했다. 내 것은 약간 휘어져 있었고 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와 뭘 올려놓으면 옆으로 쏠리게 되어 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안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우유잔을 올려놓으면 엎지르기에 개뿐이었는데 클레어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영악하고 뻔뻔한 디나 조이스가 그 쟁반을 교묘하게 차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 클레어. 제일 가벼운 쟁반을 가져." 디나 조이스는 그녀에게 비슷해 보이지만 클레어의 쟁반보다 못한 쟁반을 내밀었는데 그건 분명 일 그램도 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맹추 같은 클레어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우린 이제 모두 준비를 끝내고 쟁반을 손에 든 채 각자 맡은 식탁 옆에 서 있었다. 식당 안은 조용했고 모든 것이 눈부시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제 필요한 건 아이들 뿐이었다. 난 빨리 내 식탁에 앉을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난 오직 이날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상상해 보았었다. 그 꼬마들은 마치 시내에서 학교수업이 파한 뒤에 길을 건널 때 하듯이 둘씩 짝을 지어 손을 잡고 나란히 들어올 것이다. 아주 조그만 꼬마들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웁다. 그렇게 그들은 약간 주저하면서도 즐거운 모습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들에게도 첫날이고, 모든 게 새로운 것이라서 어쩌면 약간 수줍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이들을 당장 편안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난 일종의 신고식 비슷하게 내 이름은 빅토리아이며 무엇이든 힘든 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부탁하라고 알려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 아이들이니까. 받을 것이다. 난 속기를 배웠기 때문에 주문을 빨리 받아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누가 뭘 주문했는지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의자마다 내 나름대로 번호를 매겨놓았으므로 제대로 음식을 갖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관심도 기울여서 예를 들어 한 꼬마가 콘 플레이크를 싫어하면 잘 기억해 뒀다가 그 꼬마에게는 계란이나 다른 걸 갖다줄 것이다. 난 캠프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훌륭한 아르바이트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날 좋아하게 될 것이다. 오, 난 얼마나 조바심이 나는지 모른다!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로비에 얽힌 이 끔찍한 문제 때문에 남은 여름이 아주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이 일을 갑자기 모두 긴장하는 듯했다. 우리는 멀리서 아이들이 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구내식당에 도착했다. 환상적이다! 우린 유리창으로 달려가서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는데 카르토파 부인은 저지하며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우린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왔다. "쟁반을 똑바로 들도록!" 그녀가 명령했다. 카르토파 부인은 결코 말을 하는 법이 없고 언제나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쟁반을 들고 차렷자세로 서 있었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그쳤다. 우리는 그들이 구내식당 밖에서 다시 정렬을 하고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이백 명의 아이들이라면...... 그건 꽤 많은 인원일 것이다. 갑자기 식당 문이 활짝 열리면서 수많은 캠프 학생들이 나타났다. 우린 그들이 식탁과 의자 사이로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알렉산드라는 정말로 뒤로 넘어졌고 스테피는 의자에 부딪쳤고 난 벽 쪽으로 몰렸다. 그건 마치 악다구니와 비명소리로 가득 찬 정신병원 같았다. 아이들은 의자들을 제멋대로 위치를 바꾸고 서로 의자를 바꾸다가 또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아이들이 그 난리를 치르는 동안 지도선생님들은 질서를 잡으려고 애썼고 결국 아이들에게서 떠밀려 밖으로 벗어났다.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던 것처럼 이내 소란이 멈추고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내가 맡은 꼬마들을 쳐다보면서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내가 예쁘게 정리해 둔 식탁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새 모양으로 접은 냅킨은 폭격을 당한 듯 쑥대밭이 되었다. 어느 식탁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양쪽 다 엉망이었는데, 난 여자애들 식탁 먼저 주문을 받기로 했다. 그건 웬지 모르게 나랑 같은 족속이 더 편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모두 안녕! 난 빅토리아라고 해." 그 여자애들은 서로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누구 하나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못한 것 같았다. 난 다시 이번에는 좀더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 "모두 안녕! 난 빅토리아라고 해."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두 명의 여자 지도선생님조차도 애들을 조용히 정돈시키느라고 바빠서 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끊임없이 펄쩍펄쩍 뛰고 자리를 바꾸고 떠들고 꽥꽥 소리를 지르는 그 아이들은 모두 미치광이들 같았다. 두 명의 여자애들은 울고 있었고 한 여자애는 식탁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난 절망적인 심정으로 남자애들의 식탁으로 갔다. 그곳도 나을 게 없었다. 어쩌면 더 나쁜 것 같았는데 유난히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조용한 사내아이가 눈길을 끌었다. "안녕! 난 빅토리아라고 해." 소리쳤다. 그 슬픈 표정을 하고 있던 어린 꼬마는 당황하는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그는 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난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에 이번에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안녕!" 그런데 갑자기 식당 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난 수습할 겨를도 없었다. "난 빅토리아라고 해." 내 외침은 침묵 속에 울려퍼졌다.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았다. 난 마치 그 순간이 한 달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지며 꼼짝없이 겁에 질려 있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리자 모두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식당 안이 조용해진 진짜 이유였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고 모두 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캠프에 온 걸 환영해요." 카르토파 부인은 중앙 식탁에서 위엄있게 얘기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통해서 난 짧은 순간이지만 카르토파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캠프에 온 것을 자신이 얼마나 기뻐하는지와 또 여러 가지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는데 아무도 떠들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아이들은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는 모두 얌전했으나 그 후에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빅토리아!" 지도선생님이 날 불렀다. 난 쟁반을 들고 달려갔다. "안녕, 난 캐리라고 해요." 그녀는 미소지으면서 나를 다른 지도선생님인 안나에게 소개했는데 그녀는 나를 본척 만척 했다. 그리고 나서 캐리는 식탁을 한 바퀴 돌면서 여자애들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내가 담당한 아이들이었고 또 그 꼬마들은 굉장해 보였다. 좋아, 시작은 아주 끔찍하게 잘못됐지만, 그렇다면 이제는 아이들에게 내가 무얼 할 줄 아는지를 보여줄 차례다. 어느 누구도 나처럼 오늘을 위해 준비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난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고 이제 그걸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 여러분. 우리는 오늘 굉장히 맛있는 해물 수프를 준비했어요." 그러자 아이들은 즉시 반응을 나타냈다. 거의 모든 꼬마들이 수프를 주문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의 말이 아이들에게 효력을 발휘하다니! 열한 그릇의 수프를 주문받았다. "금방 돌아올께." 난 주방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음식을 나르는 쟁반을 들고 줄을 서서 요리사가 건네주는 요리를 나르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프의 경우는 직접 갖고 오는 것이었다. 그건 마침 잘된 일이었는데 이미 음식을 타는 데는 장사진을 이루었으므로 난 곧장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접시를 들고 가서는 그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서 다시 식사시중을 드는 여학생들에게 갖다주고 있었다. 수프 냄비가 있는 데까지 가기 위해서 길을 트는 건 다소 어려운 일이었지만 난 잠깐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나아갔다. 그건 마치 아주 교통이 혼잡한 도로를 건너는 일처럼 어렵고 또 바닥에 쏟아진 음식물 때문에 미끄러워서 주저스러울 정도였다. 난 무사히 수프 있는 데까지 갔고, 누군가가 나한테 수프를 떠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한테 신경쓰지 않았다. "지저스?" 나는 가장 젊은 요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불렀지만 "이아고?" 하고 불렀지만 허사였다. "누가 수프 담당이시죠? 열한 그릇을 주문받아 왔는데요." "네가 직접 떠가렴, 얘야. 거기 국자가 있으니까." 내 말에 대꾸도 안하던 요리사가 내게 커다란 국자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난 어떻게 내가 그 통의 수프를 그릇에 담을지 암담하기만 했다. 거기엔 빈 그릇을 놓을 만한 자리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수프를 기다리는 열한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뭔가 방법을 궁리해 내야만 했다. 그때 난 다른 쪽 식탁에서 주문을 받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헐레벌떡 다시 돌아가서 가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난 우선 몇 그릇의 수프를 갖고 가면서 다른 주문을 받기로 마음을 정했다. 난 벌써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카운터의 한쪽에 빈 구석을 발견하고 거기 그릇을 올려놓고 수프를 담기 시작했다. 수프는 너무 뜨거웠고 냄비에서 그릇으로 옮겨담는 동안 반 이상을 바닥에 쏟았다. "이봐, 금발머리 아가씨! 수프 그릇들은 냄비 옆에 놓고 퍼야지?" 아까 그 요리사는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난 놀라서 국자에 있던 나머지 수프를 엎질렀다. "어머나! 죄송해요." 나는 엎지른 수프를 닦으려고 냅킨을 집었다. 그런데 그 요리사는 걸레를 가지고 있는 끈적끈적한 수프가 엎질러진 바닥을 닦았다. "얼른 수프를 들고 여기서 꺼져! 넌 통로에 서 있잖아." "너무 서툴러서 그래요. 하지만......" 그러나 그는 내 말도 듣지 않고 요리하는 데로 가버렸다. 난 쟁반 위에 수프 그릇을 올려놓았는데 볼록 나온 부분 때문에 세 그릇밖에는 올려놓을 수가 없었다. 난 여기 도착한 이후 계속 쟁반을 나르는 연습을 했지만 그 위에 진짜 음식을 올려놓고 날라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특히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프를 올려놓고는 더더욱 없었다. 막연히 쟁반 가운데를 손으로 받치고 손등을 어깨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될 거라고 어림 "거기서 비켜, 이 계집애야." 나를 떼밀면서 한 요리사가 말했다. 수프 그릇에서 조금씩 수프가 쟁반으로 넘쳐흘렀다. 어쩔 수 없이 난 두 손으로 쟁반을 받쳐들고 가야만 했다. 난 내가 맡은 식탁으로 돌아왔는데 모두들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안나가 내게 물었다. 난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물어놓고는 내 말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자, 수프나 줘. 전부 배고파 죽을 지경이야." "이것 봐, 안나. 오늘 처음이라서 그런 다른 지도선생님인 캐리는 아주 상냥했고 직접 일어나서 내 일을 거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때 남자애들 식탁에서 나를 불렀으므로 난 주문을 받으러 갔다. 제발 수프는 주문하지 마렴! 캐리는 내가 남자애들 주문을 받는 동안 여자애들의 주문을 받아 적어주었다. "수프는 어때?" 남자애들의 지도선생님인 프레디가 내게 물었다. "수프가 어떠냐고요?" "그래." 그때 또다른 지도선생님이 끼어들었다. "끔찍해요. 지독하게 맛없어요." 난 역겨운 듯한 표정으로 양 볼을 부풀어 보였다. 그러자 이내 모두들 수프에는 성공이었다. 그날이라고? 아니 그 주간의! 내가 여기 온 이후로 난 정말 형편없이 전락해 버렸다. 차 안에서부터 일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한 일 중에 처음으로 아르바이트생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일이었다. 난 활짝 웃고 싶었지만 그들이 내가 수프를 갖고 장난치는 줄 알까 봐 참았다. 캐리가 나한테 손짓을 했다. "이것 봐! 빅토리아, 주문을 다 받았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도와주셔서." "별 거 아니야. 자...... 토마토 소스를 치지 않은 소갈비 이인분에, 하나는 감자 퓌레를 곁들이고 하나는 감자튀김을 곁들이는 거야. 보통 소스 친 소갈비 감자 퓌레와 함께, 그리고 하나는 감자요리 없이 갖다줘. 셰프 샐러드 사인분에 둘은 러시안 소스를 치고 하나는 식초 소스에 하나는 푸렌치 소스를......" "이봐, 빅토리아!" 식탁 끝에 앉아 있는 안나였다. "나머지 수프는 어떻게 된 거지?" "죄송해요. 전 주문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빅토리아." 그 목소리는 사내아이들의 식탁에서 들려왔다. 사내녀석들의 지도선생님이었다. "우리 주문은 어떻게 됐지? 우린 배고파 죽겠어." "금방 갈께요." "그쪽은 벌써 수프를 먹고 있는데 우리 이제는 다른 지도선생님이 말했다.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내 빛나던 속기실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난 주문을 받아서 갈겨 썼음에도 그들이 너무 빨리 얘기했으므로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 다 스테이크 요리를 원하는 것 같았는데 아무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모두 색다르게 먹고 싶어했다. "빵은 없어요?" 누군가가 소리질렀다. "물은요?" "버터도 함께요!" "갖고 올께요, 갖고 올께요." 난 주방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난 정말로 문으로 곧장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난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잘 해내고 있는 듯했다. 나만 왜 이러는 걸까. 내가 주방 쪽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 로비가 내 쪽으로 오는 걸 보았다. 난 더이상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내 옆을 지나치면서 그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여서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는 음식을 타기 위해서 줄을 섰는데 그때 아직도 수프 일곱 그릇을 더 갖다줘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수프를 가지러 가는 게 좋겠니. 아니면, 여기 남아서 다른 음식을 기다리는 게 좋겠니?" 그런 질문을 알렉산드라에게 하는 건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뭐라고?" "난 모든 걸 뒤죽박죽으로 하고 있어. 난 잘 해낼 수 없을 거야." "넌 잘할 수 있어! 첫날은 아주 힘들지만 두고봐. 점점 더 나아질 거고 넌 잘 해낼 거야." "그럼 수프는 어떻게 하지?" "가서 갖고 와. 내가 대신 네 자리를 맡아줄께." "고마워, 알. 될 수 있으면 빨리 하고 올께." 난 주방으로 돌아가 나머지 수프를 뜨기 시작했다. 쟁반 위에 수프 여섯 그릇을 한꺼번에 올려놓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절망적이 아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쟁반을 식탁까지 들고 갔다. 그리고 안나 뒤에 멈춰서 수프 그릇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바로 내가 수프를 식탁에 내려놓고 있을 때 카르토파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안나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도 일어나면서 어깨로 내 쟁반을 건드렸다. 수프 그릇들이 가볍게 엎질러졌다. "조심해. 바보 같으니!" 안나는 소리쳤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하얗게 끈적거리는 액체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난 얼른 냅킨 한 장을 들고 그녀의 몸에 묻은 수프를 닦으려고 애썼지만 그녀가 뿌리치는 바람에 대합조개가 그녀의 눈썹에 달라붙어 있었고, 감자조각이 그녀의 귀걸이에 군데군데 묻어 있었고, 수프 국물이 그녀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흥건하게 적셔놓았다. 그녀는 정말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일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주춤 뒤로 물러섰는데 끈적끈적한 수프가 신발 밑에 묻어서 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붙들었는데 그것은 안나였다. 우린 둘이 함께 균형을 잃고 마치 식탁 주위에서 춤추듯이 팔과 다리를 휘젓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엎어졌다. 너무나 난처해서 난 바닥에 넘어지는 충격도 느끼지 못했지만 안나는 얼마나 아팠을까! 거야 뭐야? 넌 제일 형편없는 애야. 널 해고시키겠어!" "정말 죄송해요." 난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나를 뿌리치고 의자를 잡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의자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녀는 다시 조개 수프 속에 자빠지고 말았고 그래서 더욱더 화가 났다. 그 때문에 난 아이들 틈 속에 섞여 몸을 숨기려고 했지만 키 작은 꼬마들 틈에 숨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그런 난리를 피우는 통에 다른 식탁에 있던 지도선생님들이 구경하러 왔고, 모두들 끈적거리는 수프를 밟고 지나갔고, 가장 나이 어린 두 명의 꼬마녀석이 포크로 수프가 엎질러진 바닥에 낙서를 하기 조금 후에 모든 것은 제자리를 되찾았고 모두 나를 그날 저녁 때쯤 쫓아낼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나의 실수는 당연히 해고감이었으므로. 난 전국에서 제일 형편없는 식사시중 드는 여자애였다. 왜 내가 그토록 무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바보 같은 클레어조차도 잘 해내고 있는데 말이다. 적어도 그녀는 조개 수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한없이 비탄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난 수프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도 수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에게는 더이상 수프를 주문하지 않았다. 줄을 서러 갔다. 이제 그 줄은 더 길어져 있었다. 내 식탁과 내 아이들,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싶었고 특별히 시중을 잘 들고 싶었던 아이들은...... 내 탓에 벌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배고파 죽을 지경일 것이다. "이런, 조개 수프 아가씨잖아." 한 요리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소리치자 주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전부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저기......" "어서 얘기해 봐. 귀여운 아가씨! 어서, 활발한 아가씨! 저기 배고픈 사람들이 있고 난 오늘 오후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요, 라고 말이야." 난 주문받은 걸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캐리가 써준 주문내용은 한마디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건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였다. "자 계속해, 귀여운 아가씨. 난 하루종일 기다릴 수가 없어." 하지만 난 그 주문내용을 판독할 수가 없었다. "우선 제가 읽어드린 주문부터 해주실래요. 금방 돌아올께요." 난 대답을 듣지도 않고 식탁으로 달려갔다. 스테피의 식탁 옆을 지나치는데 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또 실수한 것이다. 그들은 벌써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요리사는 내게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들을 건네주었다. 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접시를 쟁반 위에 올려놓았는데 한꺼번에 여덟 개나 올려놓을 수 있었다.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조금 나아진 것이다. 나는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걸 느끼면서 뒤돌아서 식탁으로 달려가려고 하는데 스테이크가 가득 담긴 접시 하나가 쟁반에서 떨어지더니 정확하게 커다란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다. 난 얼른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사라진 건 할 수 없지 뭐! 난 일곱 개의 요리접시만을 들고 계속 달려갔다. 그것만으로도 과히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소스를 치지 않은 스테이크를 누가 먹겠다고 했지?" 아이들에게 황급히 물었다. 아무도 자기가 한 주문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일곱 살밖에 안 먹었는데 무슨 음식 취향이 잡혔겠는가? 꼬마들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면 소스를 끼얹은 스테이크는?" 그들은 전부 손을 들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요! 나요...... 나요......!" 난 소스를 치지 않은 스테이크를 주문받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캐리마저도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난 모든 걸 엉망으로 했는데 이거라고 별 수 있겠는가? 난 소스를 치지 않은 스테이크 세 접시를 들고 달려가서 요리사에게 소스를 끼얹어달라고 내밀었다.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주방으로 와서 나머지 음식을 들고 갔다. 난 속눈썹에까지 토마토 소스를 묻히고 있었고, 조개 다진 게 앞치마에 잔뜩 묻어 있었고, 또 내가 쟁반을 받쳐드느라고 허리 둘레에는 일종의 모듬요리처럼 온갖 음식물이 다 묻어 있었고, 호주머니 속에는 감자튀김이 네 개나 들어 있었다. 다른 식탁의 아이들이 디저트를 끝냈을 때야 비로소 내 식탁의 아이들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난 다른 애들이 어떻게 해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걸 쳐다볼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시작된 후로 난 스테피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나한테 무척 실망했을 것이다. 방금 스테이크를 주문한 꼬마들에게 난 물었다. "우린 디저트를 먹을 시간이 없을 거예요, 여러분. 우린 한시 반 전에 오락장으로 가야만 해요." 캐리는 자기 식탁에 앉은 꼬마들에게 설명했다. 여러분은 일곱 살 난 애들에게 초콜릿이나 이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해 본 적이 있는가? 여기저기서 항의와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들은 나를 미워했다. 난 너무 기진맥진해서 이십사인분의 디저트를 가지러 가느니 차라리 그들이 날 미워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빵과 우유, 없었다. 난 계속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마침내 식사는 끝이 났다. 아이들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 사라져버렸다. 내 식탁의 아이들이 제일 꼴찌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스테피는 이미 자기 식탁을 다 치운 뒤였다. "빅토리아." 난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투로 봐서 그녀가 내가 저지른 끔찍한 실수들을 죄다 목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흘낏 그녀의 표정을 보니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신경쓰지 마." 스테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질 거야. 모두 그렇게 시작하는걸." 허둥대지 않았어. 클레어마저도 나보다 잘 해냈어." 불쌍한 스테피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건 너무나 사실이었고 난 형편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나중에는 웃으면서 그 얘기를 하게 될 거라고 위로했지만 난 어쩌면 그럴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 나를 오늘 안으로 내쫓아버릴 테니까. "토리, 내가 널 도와주길 원하는 거니 뭐니?" "넌 이제 로비를 만나러 가야 되잖아?" "그래, 하지만 조금 늦어도 이해할 거야." "고마워, 하지만 나 혼자서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따가 봐." 그만큼 그녀는 로비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난 그를 이해한다! 정말로 너무나 그 심정이 잘 이해가 된다. 난 왜 아무도 유년부 아이들을 맡으려고 달려들지 않았는지를 식사가 끝난 뒤의 식탁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식탁은 마치 쓰레기장 같았다. 그들은 접시에 담긴 음식을 식탁에 흘리면서 먹었던 것이다. 난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고 내 생각에는 오십 번 정도 주방을 들락날락 하고서야 식탁에 묻은 음식 찌꺼기들을 말끔히 치우고 저녁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새 모양으로 냅킨을 예쁘게 접는 일을 끝내고 식탁 위에 필요한 식기와 포크, 나이프 등을 배열해 놓고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있는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리고 나 역시 그 꼬마의 이름은 헨리인데 그애는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과 닮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아주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꼬마였다. 난 낙오자가 되는 게 싫다. 그 꼬마의 걱정이 뭔지 궁금하다. 다른 친구들이 일광욕을 즐기면서 깔깔대고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기진맥진해 있었다. "빅토리아 마틴 있어요?" 캠프 사무실 직원인 리아나가 문으로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제가 빅토리아예요." "네가 우편물 돌리는 일에 자원봉사자로 등록되어 있는데." 없는데요." "사실, 신청자는 아무도 없어." 그녀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우리가 임의대로 자원봉사자들을 지명한단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다면 꼭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그건 네가 할 일이 아니니까. 만약 할 생각이 없다면 카르토파 부인에게 가서 이유를 설명하면......" "카르토파 부인에게 가서 설명을요? 오, 아녜요! 난 우편물을 돌리고 싶어요. 정말이에요."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할 수 있어요." "좋아. 사무실에 와서 우편물 가방을 받아가요." 그리고 그녀는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살짜리는 울지 않는 거야. 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더라면 그렇게 기분이 엉망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또 이 빌어먹을 우편물과 씨름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일은 쉬워 보였지만, 내가 하면 또 끔찍한 재난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청바지로 갈아입고 사무실로 갔다. 거기에는 벌써 세 명의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와 있었고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들은 각자 우편물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 참이었다. 내 몫으로 남아 있는 우편물 가방은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건 캠프학생들의 이름만 적혀 있는 가방이었다. 그래서 난 우편물을 찾아야만 했다. 그 일은 오후 두시 반부터 네시까지 나를 꼼짝없이 붙들어놓았다. 내가 몸을 씻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기에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삼십 분 정도였다. "빅토리아." 알렉산드라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수영복 차림이었다. "난 막 수영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너도 갈래? 같이 가고 싶다면 기다릴께." 피로감 때문이 아니라 난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결코 수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로비가 야외수영장의 수상안전요원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여름 내내 물가에는 얼씬도 못할 것이다. 정말 굉장하지 "고마워, 알. 하지만 난 너무 피곤해." "좋아, 그럼 이따 봐."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조용해서 기분이 좋았다. 난 낮에 식당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저녁식사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로비 문제나, 니나가 내가 있는 숙소를 찾는 건 시간문제라는 사실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특별히 생각할 일이 없었는데 끔찍한 것은 내가 너무나 지쳐 있어서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난 침대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그 허공 속에 디나 조이스가 나타나지 태도로 방금 들어온 것이다.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사방으로 널 찾아다녔어." 그녀는 말하면서 입이 귀까지 찢어져라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데?" 난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난 모든 걸 알고 싶어." "뭘 말이야." "오늘 첫 식사에 대해서."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난 너무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네 유머감각은 다 어디 갔니?" 그녀는 더욱 지독하게 비꼬는 것이었다. "지독한 디 제이, 그녀에게 그런 건 필요없어." 디나 조이스는 알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몸을 비비꼬면서 가버렸다. "우리들 중에 온실 속에서 자란 연약한 꽃 한 송이가 있는 줄은 몰랐어." "가끔은 아주 훌륭한 바보도 있어." 알렉산드라는 말하며 내 옆에 앉았다. "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만 해. 다른 방법이 없어." "아니야, 있어!" "뭔데?" "집으로 돌아가는 거." "이것 봐, 빅토리아. 시작이 나빴을 뿐이야. 내일은 훨씬 나아질 거야." "난 오늘 저녁에 잘 해낼지 모르겠어. 그들은 아마 내가 일하도록 내버려두지 중에 처음으로 괜찮은 생각이다." "두고봐. 저녁 때는 훨씬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빗나갔다. 저녁식사도 역시 실패였고 어쩌면 더 끔찍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난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시금치 퓌레가 조개 수프보다 더 떠내기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세 사람 등에 그 음식이 묻었고 네번째 희생자는 내 영원한 적인 안나였는데 그녀는 멀찌감치서부터 내가 식사시중 드는 걸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등은 무사했지만 시금치 퓌레가 담긴 접시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그녀는 접시를 놓치고 말았다. 시금치 퓌레를 도로 잡을 수는 없었다. 엉망이었지만 오후처럼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저녁식사가 끝나는 대로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작정이었다. 난 내일 아침식사 전에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테피, 난 도저히 못해낼 것 같아." 나는 끔찍한 저녁식사가 끝난 뒤 단둘이 숙소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천만에, 넌 할 수 있어." 그녀는 나를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녀는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말도 안 돼." "단지 첫날 운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단 말이니?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자, 토리. 젠장, 난 한번도 네가 그런......" "그런 뭐? 겁쟁이라구?" "어머! 난 그렇게 말하려는 게 아니었어." "아니야, 네 말이 옳아. 하지만 난 어쩔 수가 없어. 그건 마치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간요리를 먹는 것처럼 내가 할 줄 모르는 일 중의 한 가지야. 난 그냥 그걸 할 수가 없어." "끔찍한 일이야. 난 올 여름이 아주 근사할 거라고 믿었는데. 네가 여기 없다면...... 하나도 재미없을 거야." "너한텐 그래도 로비가 있잖아." 단짝이잖아. 게다가 우린 올 여름 내내 셋이 함께 지내기로 했잖아, 안 그래?" "정말 미안해, 스테피.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 "넌 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지 않니?" 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스테피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난 결심을 했다. 난 그녀도 내 결심을 눈치챘다고 느꼈는데, 왜냐하면 화를 내는 대신에 날 설득하기를 단념하고 말없이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서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내게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제일 친한 친구이고 또 만약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다. 저녁 열시 반 경이었다. 만약 저녁 외출을 나갔다고 해도 그 시간에는 집에 돌아와 계실 테니까. 난 열한시까지 전화를 걸어봤지만 허사였다. 그 시간 이후에는 전화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난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캠프를 떠나는 일이 스테피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또 정말로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난 더이상 그 일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뿐이었다. 과감하게 그만둘 줄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6장 수영복 차림으로 있는 게 싫어서 그래 넌 다음주 내내 수영장에서 보조로 근무하게 됐거든. 그렇게 순진한 척하지 마. 네 단짝을 골탕먹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모님께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새벽 여섯시 반부터 외출했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유일한 설명은 그들이 이삼일 동안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을 거란 추측 뿐이었다. 어쩌면 친구분들과 함게 롱 몰랐다. 하루 더 캠프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세 끼의 식사시중. 세 번의 재난. 난 결코 아르바이트를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서 내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누가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아맞춰보라? 그건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을 진드기 같은 내 여동생과 그애의 새 친구였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거의 스물네 시간 동안 그녀를 피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안녕, 언니!" 니나는 말하면서 마치 신나는 놀라움이기라도 하듯이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여긴 내 친구 낸시야. 나랑 같은 방에 있어." "안녕, 낸시." 나는 그녀에게 잠깐 웃어 보였다. 다른 친구들은 벌서 준비가 끝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늑장을 부릴 수가 없었지만 니나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싫었다.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는데 두 분이 여행을 떠나신 거니?" "응, 그랬어. 엄마 아빠는 우드스톡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갔어." "누구?" 난 단순한 호기심처럼 가장하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생각이 나지 않아." "얘기했는데 잊어버렸어. 처음 듣는 이름이었거든." 그애는 벌써 내 옷장을 열고는 내가 갖고 온 옷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난 얼른 옷장 문을 닫았다. 그래도 그녀는 다시 열어보았다. "만약에 급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나는 옷장 문을 소리나게 쾅 닫았다. "왜 넌 그 이름을 적어놓지 않았니, 바보 같은 계집애!" "날 함부로 부르지 마. 난 언니가 그 이름이 필요한지 몰랐어." "누가 필요하댔어.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 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상관없잖아? 게다가 난 그 이름을 적어놓았어." "그런데 왜 나한테 적어놓지 않았다고 그랬니?"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니나와 나는 너무 이 바보 같은 대화에 열중해 있어서, 방의 친구들이 전부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니나는 언제나 날 못된 언니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난 다른 사람들과는 절대로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않는데 말이다. "그 얘긴 그만두자."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어하는 동생에게 말했다. 난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니나는 그러지 말아야만 했다. "나한테 전화번호를 알려줘. 그리고 그 얘긴 그만하자." "응?" 그건 너무나 난데없는 응답이어서 다른 친구들의 관심이 사라져버렸다. "언니, 파란 조끼 갖고 왔어?" 이제야 그애가 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이지." "내가 그랬지?" 니나는 낸시에게 말하면서 곧장 내 옷장 있는 데로 갔다. "두고봐. 그건 믿을 수 없을 만큼 똑같애." "좋아, 그러면 넌 가서 전화번호를 갖고 사무실로 날 찾아와." "무슨 전화번호?" "필요없다고 그랬잖아. 엄마 아빠한테 전화하려고?" "넌 낸시에게 조끼 보여줬니?" "걔한테도 언니 거와 똑같은 조끼가 있어." "그래서 둘이 똑같은 스타일로 맞춰 입으려고 내 조끼를 빌려가고 싶은 거지?" "그래, 맞아. 빌려줄 거야?" 니나는 놀라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애에게 많은 걸 빌려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이지. 자 조끼를 가지고 가. 그리고 전화번호를 갖고 사무실로 와. 알겠지?" 그애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조끼를 빌렸기 때문에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서 니나와 낸시 그리고 조끼는 방에서 사라졌다. 나는 니나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엄마 아빠와 통화하려고 했지만 거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어쨌든 난 게양대 집합에 빠졌지만 운좋게도 무사히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곧장 구내식당으로 갔다. 사실 오늘은 식탁을 차리는 일이 훨씬 수월했지만 그게 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만사가 순조롭지만 그 후에는 난 속수무책이 되고 마는 것이다. 드디어 부랑자들이 도착했다! 난 한번도 어린 꼬마들이 나한테 그토록 영향력을 미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꼬마들은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런데도 조랑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그 나이에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주 중요한 일인 것이다. 모두들 자기가 원하는 좋은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으나 어제의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어린 소년 헨리만은 예외였다. 오늘 그는 더욱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 헨리!" 나는 소년의 기분을 명랑하게 해주려고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헨리는 주눅이 든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헨리 옆 자리에 한 꼬마가 앉으려고 할 때 한 키 큰 꼬마녀석이 그 꼬마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들은 둘이서 헨리를 쳐다보면서 히죽히죽 번졌다. 지도선생님인 라울이 엄한 눈빛으로 정숙하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웃음거리가 된 헨리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더욱더 의자 깊숙히 주저앉았다. 분명 제일 짓궂은 개구쟁이자 주모자인 키 큰 꼬마녀석이 뭔가 악취가 나는 것처럼 코를 막는 시늉을 해 보이자 식탁에 앉아 있던 꼬마들이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한테서 악취가 나는 건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번에는 라울마저도 아이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사실 그가 고함을 크게 지를수록 웃음소리는 더욱 더 커져 가기만 했다. 못된 꼬마녀석들 같으니. 아이들은 때때로 얼마나 심술궂은지 모른다! 난 그 심술궂은 녀석 뒤로 가서 그 참이었다. 내가 평소에 식사시중을 드는 솜씨로 미루어볼 때, 아무도 내가 일부러 했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꼬마녀석에게 다가가는 동안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식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가볼께요." 라울에게 말하고 난 헨리의 뒤를 쫓아갔다. 헨리는 멀리 가지는 않고 현관 끝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홀로 울고 있었다. "헨리?" 난 헨리에게 다가가면서 여린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작은 어깨가 너무 격렬하게 흐느끼고 있어서 마치 온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불과해. 신경쓸 것 없어." 내가 그 말을 헨리에게 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얘기를 했는지 깨달았다. 헨리는 참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 키 큰 꼬마녀석이 깡패에다 바보라고 해도 헨리의 마음은 여전히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나라도 울음이 나왔을 것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계속 울면서 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네 기분이 어떤지 알아." 그 말이 잠깐 헨리의 울음을 멈추게 하더니 꼬마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나도 나처럼 침대를 적신 적이 있어?" "아니, 이젠 그러지 않아. 하지만 다른 기분 나쁜 일들은 있지." 그리고 헨리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넌 나같이 다 큰 사람이 남들이 쉽게 해내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보면 어떤 생각이 드니? 넌 어제 내가 음식을 엎지를 때 모두들 날 비웃는 걸 보지 못했니?" "난 집에 가고 싶어." 헨리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내가 집에 돌아가도 되는지 누나가 물어봐 줄래? 난 여기가 싫어졌어." "넌 온 지 얼마 안 됐어. 여긴 근사한 캠프고 넌 굉장한 여름을 보내게 될 거야. 좀더 시간을 갖고 기다려봐." "난 집에 가고 싶어." "넌 그런 바보 같은 녀석이 네 여름방학을 온통 망쳐놓는 걸 그냥 "난 집에 갈 테야." "내가 그 녀석한테 따끔하게 얘기해 줄까? 난 그 녀석이 너를 다시 괴롭히기 전에 두 번쯤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어. 그래 볼까?" 헨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눈물이 내 블라우스를 적셨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 "집에 가고 싶어." "그럴 수는 없어." "내가 원하는데도 왜 안 돼?" "그건 포기하는 거니까. 넌 정말로 노력해 보기도 전에 포기할 셈이니?" 난 내가 무척 어른스럽고 분별력있게 느껴졌다. "우선, 넌 어쩔 수 없이 침대를 적신 "응." "좋아, 그렇다면 그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해. 자 헨리, 그런 깡패 같은 녀석을 다루는 방법이 있어...... 그 녀석 이름이 뭐지?" "스티븐." "......스티븐. 난 그런 녀석을 꼼짝 못하게 하고 싶어.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께."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난 더이상 여기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중간에서 포기하고 여기를 떠날 거니까. 난 바로 헨리에게 하지 말라고 한 걸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상황은 다르다. 그래서 난 계속 말을 이었다. "깡패 같은 녀석들이 그렇게 순 없어. 적어도 대항해서 싸워야만 해. 네 생각은 어때? 한번 시도해 볼래?"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만약 네가 지금 포기한다면 넌 영원히 비겁자란 소릴 들을 거야." 그는 갑자기 울음을 그치더니 단호한 태도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비겁자가 되고 싶진 않아."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다. 왜 난 이 꼬마에게 말하기 전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까? "나도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난 바로 그런 사람이 되려고 했어. 단지 불쾌한 하루를 보냈고 내 절친한 여자친구와 터무니없는 문제가 생겨서 우정이 망쳐질 거란 이유 때문에 말이야. 구는 이 지겨운 여자애가 너무 싫어. 젠장 헨리, 오줌을 싸는 일 따위는 내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우리 둘 다 집으로 돌아가." 나는 그 꼬마가 분별있는 소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빠는 항상 내게 비겁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 않았는가. "내가 너한테 한 가지 약속을 할께. 만약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을 거야." 헨리는 한참 생각했다. "자, 헨리. 우린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거야. 시도해 봐야만 해. 어때?" "좋아, 하지만 누나가 그 녀석 머리 위에 뭔가를 뒤집어씌워야만 해." "물론, 항상 그러니까." 헨리는 디나 조이스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 "좋아, 넌 식당으로 돌아가.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께." 헨리는 처음으로 해맑게 웃었다. 그 오줌싸개는 앞니가 빠져 있다는 걸 얘기해야겠다. 헨리는 정말로 운이 없었다. 난 헨리에게 날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조심해, 스티븐!" "디나 조이스." "디나 조이스, 조심해!" 그리고 우리는 고개를 쳐들고 가슴을 곧게 편 채 당당하게 식당으로 돌아왔다. 식탁에 도착하는 동안 헨리의 고개는 추를 단듯 다시 밑으로 처졌고 모두들 큰 소리로 난 늑장부린 걸 만회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스티븐 머리 위에 뭔가를 엎지르는 것도 잊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난 의자에 걸려 비틀거리는 바람에 계란요리가 담긴 접시를 그의 머리 한가운데 정확히 엎지르고 말았다. 모든 꼬마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난 헨리에게 한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건 조그만 승리였다. "빅토리아 마틴." 카르토파 부인의 엄한 목소리가 내 얼굴에서 웃음기를 말끔히 씻어갔다. "그건 오십 센트 벌금에 해당해요. 넌 그걸 내야만 할 거다! 당장에!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내가 맡은 식탁을 지나치면서 말했다. 아니다. 하지만 난 이제 그럴 수가 없다. 헨리를 위해서 끝까지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린 서로 굳게 약속을 했다. 난 변명을 했지만 카르토파 부인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스티븐은 얼굴에 묻은 계란요리를 떼어내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내가 쩔쩔매는 꼴을 보며 즐거워할 겨를도 없었다. 결국, 스티븐은 벌을 받은 것이고 그건 헨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을 것이다. 헨리는 적어도 자기한테 여자친구 한 명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비록 나는 제일 꼴찌로 일을 마쳤지만 어제 아침식사 때보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나아진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 난 어제 아침식사 시중을 들지 않았다는 게 기억났다. 내 재난은 점심 "토리,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알았지?" 스테피가 식당 안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말했다. 난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난 매번 내 제일 친한 여자친구가 자기 남자친구랑 함께 있다고 해서 피해 다닐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난 대답했다. "금방 갈께." 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로비를 보기만 해도 난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니까 말이다. 만약 스테피가 내 속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건 끔찍할 것이다. 난 문 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가까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 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기다리기로. 그런데 웬지 그들이 영원히 그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난 기척을 내려고 마른 기침을 두세 번 하면서 문을 밀고 나갔다. "안녕, 스테피." 나는 스테피만을 쳐다보면서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안녕, 로비!" 나는 좀더 큰 소리로 인사하면서 여전히 스테피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아주 빨리 끝냈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는 스테피가 "오늘 보니 많이 나아졌어." 로비도 옆에서 거들려고 애썼다. "남들보다 십 분 정도밖에 더 걸리지 않았어. 십 분이면 과히 나쁜 성적은 아닌데." "물론이야." 난 그의 얼굴 위를 쳐다보았다. "클레어보다, 그리고 다른 뒤처진 애들보다 십 분 더 걸렸어. 굉장하지!" "부모님은 오지 않을 거야. 난 생각을 바꿨어." 스테피는 펄쩍 뛰면서 나를 껴안았다. "믿을 수가 없어! 오, 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이제부턴 우리 셋이서 완벽한 여름을 보내게 될 거야." 맙소사! 돌아간다고 해서 괴로워했어. 나도 그랬어." 난 그 말이 끝날 때까지 그가 있는 쪽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마음을 돌리게 된 거야?" 스테피가 물었다.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 봤고 다시 한번 노력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하루 해본 걸로는 충분치가 않잖아." 만약 로비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난 스테피에게 사실대로 헨리에 관한 얘기와 포기하려 했던 내 심정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로비만 옆에 있으면 나는 이상해지는 것이다. 난 본래의 내 자신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난 정상적으로 말하려고 애써야 할 정도였다. "자, 우리 함께 콜라나 마시러 가자. 좋지 로비?" 스테피가 말했다. "난 갈 수가 없어, 스테피. 십 분 내로 수영장에 가봐야 하거든. 나랑 같이 갈래?" 로비가 수영장에 가자고 말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토리는? 넌 아직 수영장 구경도 못했지. 안 그래?" "난 오후에나 가려고." 그건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난 로비가 그곳에 있는 한 절대로 수영장에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항상 거기 있을 것이다. 수영장의 책임자로. "가자 토리. 넌 지금 한가하잖아." "갈 수가 없어." 또다른 거짓말. 약속했거든." 스테피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건 어리석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좋아, 그럼 이따 보자." 그리고 나서 그녀는 로비와 함께 호숫가로 사라졌다. 난 식당 앞에 혼자 남아 있었다. 내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우정이 망쳐지고 있는데도 난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해 보기로 하자. 난 스테피와 마찬가지로 로비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다. 하지만 다른 게 있다. 내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는 날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기분이 좋게 묘한. 너무나 기분이 좋을 정도로 정말 뒤죽박죽이다! 난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니나의 숙소로 가야만 했다. 다행히도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침실 바닥에서 니나가 습관적인 무관심 때문에 바닥에 팽개쳐둔 파란 조끼를 집어왔다. 내가 우리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 잘난 척하고 얄미운 디나 조이스가 있었다. "행운아가 오시네!" "무슨 얘기야?" 난 커다란 함정에 빠져들었다. "넌 다음주 내내 수영장에서 보조근무를 하게 됐거든. 그렇게 순진한 척하지 마. 넌 네 단짝을 골탕먹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난 더 고약하게 굴 수 있거든." "이것 봐! 그만 둬, 응? 난 네가 무슨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로비는 수영장을 감독하고 있었다. 난 아마도 일 주일 동안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될 모양이었다. 난 할 수가 없다.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만약 그 일이 그렇게 흥미가 있다면 우린 서로 일을 바꿀 수 있어. 그러면 네가 행운아가 될 거야." "난 로비 와그너가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야. 하지만 일주일 내내 젖은 수영복을 입고 떨고 싶을 정도는 아니야.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그 일은 네가 가져." "어쩌면 클레어가......" "농담하는 거니? 그녀는 나보다 더 물을 싫어하는 걸. 왜 너의 소중한 옛 친구 스테피는 자기 남자친구랑 함게 있으려고 너랑 일을 바꾸고 싶어할 텐데. 만약 스테피가 영리하다면 그렇게 할 거야."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너하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넌 매사를 아주 삐딱하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어! 로비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남자친구야, 그뿐이야." "그렇겠지." 그녀는 제멋대로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디나 조이스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녀는 심술궂게 행동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난 그녀가 누군가에게 상냥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지금까지 난 그녀에게서 조그만 친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리고 난 이제 그녀와 잘 그녀에게 알맞은 대우를 해줄 것이다. 그녀가 한마디만 더 한다면 난 따끔한 맛을 보여줄 것이다. 단 한마디만 더 한다면.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했다. "얘, 빅토리아. 몇 시니?" "지독한 계집애, 뭘 알고 싶은 거니?" 내가 그렇게 대꾸하는 순간에 클레어, 알렉산드라, 그리고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가 숙소로 들어왔다. 전부들 내가 돌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계속 거기 있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헨리와 함께 내 문제에 신경을 썼더라면 그 시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누구 수영장 감독하는 일과 다른 일하고 바꾸고 싶은 사람 없니?" 그건 막연하게 던진 질문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하고나 바꿀께." 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누가 일을 안할 건데?" 클레어가 눈알을 굴리면서 말했다. "그건 제일 고약한 일이야." "클레어 말이 맞아." 쌍둥이 중의 한 여자애가 말했다. "모두 그 일을 해야 하는데, 그걸 남에게 미루고 빠져나가려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해." "만약 누가 나와 일을 바꾸고 싶은지 그걸 알고 싶어서 그냥 물어보는 것 뿐이야." "그렇다면 난 아니야!" "좋아, 누구 다른 사람은?" 알렉산드라만이 친절하게 굴었지만 그녀는 자기가 맡고 있는 목공 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궁지에 몰렸다. 모두들 내가 어려운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테피는 바꾸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신중해야만 한다. 그녀는 어쩌면 내가 일 주일 내내 그와 가까이 있는 걸 견딜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젠장,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틀린 건 아니다. 스테피와 함께 구내식당으로 가면서 난 만약 그녀가 온종일 로비와 함께 지낼 수 있기를 원한다면 내 수영장 감독하는 일을 "어머! 난 정말 그러고 싶어. 하지만 난 연극 일에서 빠질 수가 없어. 베키 워커가 나한테 여름 행사 기획준비를 도와달라고 첫주에 특별히 부탁했거든. 난 작년에도 그 일이 참 재미있었기 때문에 벌써 승낙해 버렸어. 하지만 로비와 함께 일 주일 내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참 마음이 끌리기는 하는데......" 그건 정말 스테피에겐 힘든 선택이었다. 그러나 결국에 그녀는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주말 동안에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한 난 영락없이 월요일부터 수영장 일을 해야만 할 것이다. 난 마지막으로 다른 쌍둥이 자매에게 접근해서 제의해 봤지만 그녀 역시 그 일에 관심을 보이지 벗어나려고 애쓰는 걸 발견했고 그녀는 당연히 그 이유가 내가 로비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아니야, 스테피. 단지 다음주부터 생리가 시작되는데 수영복 입고 있는 게 싫어서 그래." 그걸로 그녀를 속일 수 있었지만 별로 뛰어난 핑계는 아니었다. 다음주 내내 나는 생리가 있는 척해야만 하고 또 그 다음주에 정말로 생리가 시작되면 안 그런 척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꼬이기만 했다. 일 주일 동안의 수영장 감독일은 끔찍할 것이다. 난 결코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제7장 빛나는 아랫입술, 미소 속의 보조개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난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사랑해, 로비." 난 그를 만지고 싶고, 그의 입술과 온몸을 느끼고 싶다. 월요일 아침은 여느 월요일 아침처럼 비가 오면서 시작되었다. 비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는 안개비였다. 그런 흐린 날씨는 언제라도 햇빛이 쨍 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수영장을 지키는 사람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기피했던 일이 바로 로비와 단둘이 있는 거였는데 말이다. 물론 그는 아주 다정했고 우호적이었으며, 나에게 구명장비 사용법과 수영법에 관한 모든 것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건 수상 안전요원으로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었기에 난 무척 주의를 기울여 듣고 있었지만 내 정신의 반은, 그가 가까이서 보니 잘생겼다는 사실과 그의 목소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넋이 나가 있었다. 가끔 나는 완전히 넋을 잃고 미소지을 때의 그의 아랫입술을 바라보곤 했다. 웃을 때 보조개가 살짝 패이는 아주 근사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난 그 모든 걸 스테피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의 외모에 넋이 나가리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느끼게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서로의 몸이 스치거나 할 때면 온몸이 짜릿짜릿 했고 발열체처럼 뜨거워지곤 했다. 어떻게 일 주일을 견뎌낼 것인가. 그런 생각만 해도 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자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매번 내가 그의 목소리나 아랫입술의 매력에 너무 사로잡히거나 넋이 나갈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스테피."라고 뇌까리기로 했다. 단지 마술을 풀어주는 주문을 외듯이 오랫동안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이다. 상투적인 화제가 궁해지면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 그는 직장동료들이 국무위원의 하나로 임하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단음절로만 간단하게 대답했기 때문에 대화는 어색하게 끊기곤 했다. 그러면 깨기 힘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분명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치러야 할 대가였다. 아침나절에 불쾌한 일이 있었다. 우린 서로 삼 미터쯤 떨어져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개구리 울음소리에 놀라서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아주 짧은 순간 감전된 듯이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건 아주 강렬한 눈빛이었고, 우리의 시선은 이 순간에 고정되어버린 듯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황급히 돌려야 했지만 오전 내내 책을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다. 스테피가 우리를 보러 왔는데 난 죄책감 때문에 그녀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난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지만 내내 속으로 상상하고 있던 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이상 로비와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는 그런 묘한 분위기 속에 앉아 있는 게 그녀에게도 그런 기분을 느끼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테피는 나를 따로 부르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너희들 두 사람은 슬픈 생각에 잠겨 있는 거니 뭐니?" "그냥 날씨 때문이야. 이런 이슬비를 맞으면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노라니 괜스레 우울해지는걸." 하지만 그런 내 설명에 그녀는 속지 않았다.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라도 좀 상냥하게 굴 수 있잖아......" "그건 말도 안 돼, 스테피. 정말 어려운 일이라구. 우린 단둘이서 내내 여기 있었지만 서로를 잘 모르니까 서먹서먹하기만 한걸." "하긴 그래, 토리. 미안해. 단지 진심으로 너희 두 사람이 잘 지내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아마 내가 너무 강요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가까워질 텐테 뭐." 로비는 수영장을 한번 돌아보면서 안전점검을 했고, 우린 다시 셋이 되었다. 다시 어려운 상황이 재현되었다. "어떻게들 생각해? 날이 개일까?" 우린 잠깐 동안 날씨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들만을 남겨둘 핑계를 궁리했다. 그들은 얘기하면서 수영장 한쪽 끝까지 갔다. 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녀의 눈빛에서, 그녀의 표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팔을 어루만지면서 그에게 다가서는 모습에서 사랑의 감정은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난 내게선 제발 그런 징후가 드러나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은 얼마 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들면서 눈길을 딴 데로 돌렸다. 왜 그는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는 뭔가 뜻모를 구석이 느껴진다. 난 내가 너무 내 자신의 감정에 도취해서 그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가 다르게 행동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잠시 후 스테피는 연극부로 돌아갔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사라지는 걸 내가 그렇게 좋아하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오후 시간은 침묵 속에서 보냈다. 날씨는 더욱더 흐려져 눅눅하고 서늘해졌다. 하지만 난 추위도 잊고 있었다. 사실, 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후 다섯시에 로비와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 반대 방향으로 헤어져서 돌아왔다. 수영장 감독하는 일 사이에는 내 생활은 끔찍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로비와 나는, 이제 서로 거의 말조차 나누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내 쪽으로 오면, 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쪽으로 피했다. 그가 무슨 말이든지 묻기만 하면 난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이슬비가 또 내렸다. 난 오후 내내 스테피의 방문을 두려워하면서 보냈다. 그건 최악의 순간이었다. 그건 아주 복잡미묘했는데 우린 둘 다 온갖 바보 같은 일들에 매달려 바쁜 척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난 구명보트의 끈을 열번이나 묶어야만 했다. 지난번에는 너무나 열중한 척하느라고 애쓰다가 내가 뭘 하는지조차 잊어버려서 풀려버려서 구명보트가 다 흩어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 구명보트를 잡으러 쫓아가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건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드는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스테피와 마주보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몇 시간 동안이고 젖은 수영복 차림으로 떨면서 앉아가지고 이틀 전부터 머릿속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책을 읽으려고 정신집중을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캠프는 마치 형무소 같다는 생각. 그리고 나는 마치 내 자신이 친한 친구의 애인을 빼앗은 죄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죄책감은 마음 속의 진실인 것이다. 물론 나는 솔직하게 그런 나의 감정을 한번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를 사랑하고 그 또한 나를 저녁이면 난 어떤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번번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댔고 스테피는 내가 생리중인 줄 알고 더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고 싶었는지도 몰랐고 오히려 그 편이 나았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많은 시간을 로비와 함께 보냈다. 내가 유일하게 잘 지내는 친구는 알렉산드라였다. 리자는 친절했지만 나하고는 맞지 않았다. 그리고 더이상 쌍둥이 자매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었다. 클레어는 바보였고 난 솔직히 디나 조이스는 싫어하고 경멸했다. "수영장 감독일은 잘 돼가니?" 디나 조이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게 물었다. 그녀의 물어보는 말투는 너무나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난 왜 스테피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전혀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왜 그녀가 의식이 없겠는가.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을 배신하리라고 의심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켄은 자주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난 왜 그가 우리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스테피 가까이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테피는 로비를 제외한 다른 남자애들에게는 거의 신경을 껐기 때문에 그걸 알아채지도 못했지만 가끔 켄이 아주 친절하고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을 하기는 했다. 그는 스테피를 바라보면서 내게 물었다. "난 싫어. 너무 피곤하거든. 어쨌든 고마워." "그럼 스테피는?" 그는 정말로 스테피에게 넋을 잃고 있었다. "빅토리아가 간다면 나도 갈께. 나도 약간 피곤하거든." 이제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한번도 그렇게 애원하는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내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난 최근에 너무나 모든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구는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좋아, 갈께." 나를 껴안다시피 했다. 물론 그의 그런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스테피는 내게 귓속말로 내가 가게 돼서 그는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라고 속삭였다. 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오락장에 들어섰을 때, 음악이 온통 그곳을 뒤흔들고 있었고 시끌벅적했다. 모두들 와 있었다. 다행히도 로비만 빼고 말이다. 나는 여기 온 이후로 처음으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난 춤추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아주 기분이 들떴다. 아무도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고 난 스테피하고 있는데도 아무 부담이 없었다. "굉장해. 난 너를 되찾은 것 같애. 넌 다시 예전 같아졌어." 난 켄과 함께 두세 번 춤을 추었지만 그의 눈에는 아마 스테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함께 있으면 정말로 잘 어울렸다. 만약 로비만 그림 속에 없었다면 그들은 아름다운 한 쌍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비는 단지 그림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가 음료수를 한잔 마시려고 돌아섰을 때, 그는 뼈와 살을 가진 실체로 거기에 와 있었다. 우린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얼른 시선을 돌렸다. 난 다시 처음 상태로 되돌아갔고 저녁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기분의 변화에 대한 핑계를 꾸며대기보다는 차라리 난 그냥 스테피에게 몹시 피곤해서 돌아가겠다고 얘기했다. 그녀는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나를 이해해 나왔기 때문에 그의 도착과 내 출발 사이에 어떤 연관을 지을 염려는 없었다. 숙소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이 전화해 주길 바란다고 보낸 쪽지가 배달되어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얼른 사무실로 달려가서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니, 내 귀여운 딸?" "아주 잘 지내요." "무슨 일이 있니, 빅토리아?" 어떻게 아빠는 나의 상황을 그렇게 빨리 눈치챌 수 있는 걸까? "아뇨, 그냥 생각보다 훨씬 힘든 것뿐이에요." "내가 뉴욕의 카네기 델리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시절 얘기를 해줄걸 그랬구나. 정말 엉망진창이었지! 난 겨자에 버무린 작은 엎질렀는데 그 손님은 알고보니 식당주인의 장인되는 사람이었단다." "어머나, 아빠! 제 기분을 이해하시겠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쫓겨났나요?" "그 자리에서, 하지만 난 낙담하지 않았어. 그 일이 있은 뒤로 난 누구에게나 경력있는 웨이터라고 말할 수 있었거든. 첫 실수는 쏙 빼놓고 말이다." "난 쫓겨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아요. 그냥 난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내야 할 벌금이 어마어마할 거예요." "포기하지 마렴, 얘야. 넌 그 일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이 아빠는 확신한다." "아!" "내 말을 믿어보렴." 눈부신 과거 경력에 대한 몇 가지 얘기를 덧붙였다. 그래서 난 얼마간 기분이 나아졌다. 아빠와 얘기를 해버리고 나면 어떤 일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아빠에게 로비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 악몽에서 나를 구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밤공기는 부드러웠고 비 온 뒤 숲속에는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하늘은 맑고 별이 가득했다. 아마도 내일 날씨는 좋을 모양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우린 단둘이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하루종일 수영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고 또 단체수영 시간이 있어서 많은 캠프학생들이 몰려들 테니까 바깥 날씨가 좋아사 나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벽에 난 구멍을 가리기 위해서 씌워놓았던 비닐을 걷어냈다. 그래서 난 밖의 세상을 볼 수 있는 조그만 창을 갖게 되었다. 이제 나는 시골생활에 익숙해져서 더이상 구멍으로 기어 들어와 내 머리 위로 동물이나 곤충 따위가 떨어질까봐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들이 유리창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작은 구멍으로도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잘못된 생각이라면 어쩌면 난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로비에 대한 문제에서는 벗어날 것이다. 항상 모든 것이 그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난 전에는 한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사랑해, 로비.' 난 그 말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스테피 때문에 난 그와 단둘이 있을 때면 늘 안절부절하지만 그런 미묘한 관계만 아니었다면 난 언제나 그와 함께 지내고 싶을 것이다. 난 그를 만지고 싶고 그가 내 손을 만져주었으면 할 것이다. 난 그의 입술과 온몸을 느끼고 싶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난 겉으로는 자제할 수 있지만 내 마음속으로 느끼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제8장 켐프에 남아 있길 얼마나 잘했는가 내 머릿속 한구석에 나를 구한 사람이 로비라는 걸 일러주고 있었다. 나를 안고 가는 그의 팔과 내 몸에 느껴지던 가슴의 감촉...... 그게 바로 로비라는 걸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은 완벽한 여름날씨였다. 이틀 동안 내린 비로 나무들은 더욱더 눈부시게 푸르렀고 꽃들이 활짝 피었다. 다 쓰러져가는 우리 숙소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가시덤불마저도 보기 좋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곳이 어떤지 조금이라도 알겠지만 적어도 그 가시덤불들은 망가진 덧문들과 쓰레기더미를 감쪽같이 감춰주었기 때문이다. 난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건 어쩌면 어제 저녁 아빠와의 통화 때문이거나 아니면 아침식사 중에 뭔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스트 조각이 접시에서 떨어지거나 삶은 달걀을 놓치는 것 따위는 내 경우에 실수라고 볼 수가 없다. 난 점점 일에 숙달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난 오늘 십분 이내에 식당을 빠져나왔다. 남들보다 늦은 십분 이내에 말이다. 얼마나 성공적인 식사시중이었는가. 하지만 난 그 환상적인 성공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제일 첫번째 단체수영은 가장 나이 어린 여학생들 그룹이었다. 니나와 그 또래 친구들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녀 스물여섯 명이었는데 그 중에 열여덟 명은 생리 때문에 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켠에 서 있었다. 그 여자애들은 풀밭을 돌아다니거나 생리대를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버리고 선탠 로션을 꺼내서 몸에 바르거나 손톱을 다듬는 일밖에는 할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동생 니나는 수영을 할 수 있는 애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애는 인명구조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수업시간 내내 오분마다 나를 방해했다. "빅토리아! 이게 맞는 거야?" 니나는 배영을 하면서 소리쳤다. 니나는 쉰 가지가 넘는 쓸데없는 질문으로 나를 귀찮게 했다. 나는 로비 앞에서 못된 언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애는 그걸 알아차리고 그 상황을 끔찍하게 이용했다. 난 그애 머리를 물 속으로 집어넣어 한 달간은 못 나오게 하고 싶었다. 그게 너무 심하다면 이주 동안만이라도. 내 동생은 로비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토드의 소식을 물었고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애는 내게 토드의 여동생인 자기 친구 리자가 들려준 얘기라면서 그가 정말로 주디 퍼스트와 데이트를 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로비가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는 걸 때문이다. 니나는 내 분홍색 니트를 빌려줄 수 있는지 내게 물어보았다. 난 동생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로비 앞에서 이기주의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승낙하고 말았다. 너무 속상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침내 첫번째 단체활동이 끝났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그 여자애들은 두번째 활동장소로 옮겨갔다. "옷 가지러 이따가 숙소에 들를께, 좋지?" 니나는 떠나면서 소리쳤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니나에게 그렇게 모질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좋지?" "그래." 그리고 그애는 사라졌다. 그 다음 그룹은 헨리가 있는 유년반이었다. 나는 그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둘이서 짝을 지어 손잡고 걸어오는 모습은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개구쟁이 녀석들이 아주 가까이 왔을 때 난 그 꼬마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내가 맡은 식탁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그 개구쟁이들은 나를 보더니 아주 놀라는 눈치였고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식사시중을 들 때처럼 인명을 구조하거나 수영을 가르친다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꼬마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약간 노련한 척해 보이려고 애썼다. 수영강습 책임자는 로비였지만 나 역시 감독해야만 했다. 꼬마들은 여섯 살에서 여덟 살 사이였는데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연령층이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너무 멀리 가거나 안전수칙을 위반하는 짓을 저지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 속에는 마치 어린 돌고래들이 물장구치며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비는 제일 얕은 곳에 안전띠를 둘러놓았다. 그 띠가 둘러진 호수 한쪽에서만 아이들은 수영을 할 수가 있었다. 만약 초보자가 아닌 제대로 수영을 배운 경우라면 구명보트가 떠 있는 데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면 꼬마들은 아주 작아서 호수 한가운데쯤에 가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으므로 초보자를 위한 안전구역을 벗어나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써야만 했다. 물론 지도선생님들도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헨리는 그의 숙명적인 원수인 깡패 스티븐 바로 옆에 있었다. 난 자리를 바꿔주고 싶었지만 평영 시범을 보이느라고 바쁜 로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별 탈이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헨리는 생각 외로 수영을 잘했기 때문에 스티븐이 골탕먹일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강습이 끝나자 로비는 꼬마들에게 자유롭게 물놀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수영장은 이내 물장구치는 소리와 웃음 뽐내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그게 그들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빅토리아, 나 좀 봐요." 헨리마저도 우울했던 분위기는 자취를 감추고 발랄하게 웃고 있었다. 적어도 스티븐이 헨리를 조용히 내버려두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장 나이가 어린 티미 휠란에게 물에서 뜨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수 저쪽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뭔가 잘못됐구나! 난 티미를 붙들고 물가로 올라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배다리 끝으로 달려갔다. 부리나케 달려갔을 때, 나는 두 명의 꼬마녀석이 안전띠 밑으로 사라지면서 수심이 깊은 지르고 있었다. 사태는 너무나 돌발적이었다. 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가능한 빨리 헤엄을 치면서 그들 있는 쪽으로 갔다. 물 속에서 빨리 서둘러야 할 때는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데 마침내 나는 그들 있는 데까지 헤엄쳐 갔다. 그 두 꼬마녀석 중의 하나는 스티븐이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갔지?" "헨리! 헨리가 빠졌어요." 스티븐은 물을 뱉어내면서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어디 있지?" 헨리를 찾았지만 아무데도 그의 모습은 "헨리는 어디 있어?" 나는 스티븐을 향해서 벼락같이 소리쳤다. "저기 있었어요!" 스티븐이 구명보트에서 몇 미터 떨어진 아무도 없는 텅 빈 수면을 가리켰다. "가서 로비를 불러 와! 어서!" 나는 찢어질 듯한 고함을 치며 다시 잠수했다. 호수는 너무 물이 맑아서 바닥의 커다란 수초까지도 볼 수 있었다. 햇살이 물 속으로 비쳐 들어와 내가 헤엄치면서 일으키는 물거품을 반짝이게 했다. 물 속에는 침묵과 고요, 그리고 공허함 뿐이었다. 난 크게 한 바퀴 돌았지만 헨리를 찾지 못했다. 끔찍한 공포가 나를 자꾸 수면 위로 떠올라야만 했다. 그때마다 수면 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헨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 제발 제발. 헨리에게 아무 일도 없도록 해주세요! 헨리는 너무 귀엽고 어린 꼬마랍니다. 난 헨리를 찾아야만 한다. 만약 그가 물 속에 있다면 몇 초도 너무 길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다시 잠수했다. 이번에는 구명보트 아래로 갔다. 만약 헨리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면 분명 이 구명보트 있는 데로 오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때 나는 구명보트 저편에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자꾸 밑으로 가라앉고 난 얼른 수면으로 다시 떠올라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이내 다시 잠수했다. 두 팔로는 물을 긁으면서 동시에 강하게 발길질을 하면서 헨리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으로 헤엄쳐 갔다. 나는 생각보다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숨이 가빴지만 다시 물 위로 떠오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너무 시간이 지체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속 헤엄쳐야만 했다. 삼 초 정도면 그가 있는 데까지 갈 것이었다. 심한 통증이 가슴을 압박했지만 나는 계속 헤엄쳐 가야만 했다. 그 통증은 마치 철사줄로 나를 꽁꽁 옭아매는 듯한 아픔이었다. 물 속의 압력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헨리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아직도 너무 멀리 있었다. 센티미터만 더 가면 난 그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더 이상 통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난 그를 붙잡자마자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팔로 헨리를 껴안고 무릎을 세워서 온 힘을 다해서 발길질을 했다. 우리 둘은 물 위로 올라오려고 애를 썼다. 한 손으로는 헨리를 잡고 또다른 손으로는 물살을 헤치며 힘껏 다리를 움직였다. 수면이 보였다...... 일 미터만 더 올라가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난 힘이 빠져버렸다. 참았던 호흡이 터지면서 물이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고 숨이 막혔다. 그 순간 난 온 힘을 다해서 헨리를 수면 위로 번쩍 밀어올렸고 손으로는 그를 꼭 잡고 있었다. 난 누군가가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는 걸 느꼈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난 숨을 들이쉬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침을 했다. 숨이 막히면서도 기침을 하면서 난 누군가가 나를 물 속에서 건져냈음을 느꼈다. 난 누군가가 내 목숨을 구해 줬다는 걸 알았지만 내가 걱정했던 것은 오직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쉰 다음에 다시 숨을 내쉬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숨을 쉬게 되었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난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헐떨거리면서도 내 두려움은 사라졌는데 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옮겨가는 걸 느꼈다. 나는 너무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손끝 하나, 머리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고 겨우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풀밭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고 비로소 나는 정상적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눈을 뜨자 아주 가까이에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내 의식의 한구석에서 나를 구한 사람이 로비라는 걸 일러주고 있었다. 나를 안고 가는 그의 팔과 내 몸에 느껴지던 그의 가슴의 감촉...... 그게 로비라는 걸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서 눈길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약해져서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동안 뭔가 보이지 않던 마음의 사슬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자 괜히 눈물이 나왔다. "괜찮아?"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무사해요?" "응." 그는 내 이마 위에 헝클어져 있는 머리칼을 섬세한 손길로 쓸어주었다. "넌 아주 제때 헨리를 구해 냈어. 그는 무사해." 그러자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난 그만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울음은 한편으로 헨리와 나에 대한 안도감 사이에 일어난 일로 해서 생긴 걷잡을 수 없는 슬픔 때문이기도 했다. 난 우리들 중의 누구도 마음속에 깊게 뿌리 내린 이 감정을 어쩔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내게 몸을 숙인 채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고 낯선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와 나를 부축해서 일으켜주었다. "헨리는 어디 있어요?" 나는 나를 부축하는 그들에게 물었다. "헨리를 만나고 싶어요." "저기 벤치 위에 있어." 지도선생님 중의 한 명이 대답했다. "네 덕분에 헨리는 무사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헨리는 담요에 난 헨리에게로 가서 그를 껴안았다. 젠장, 난 한번도 어린 꼬마를 보면서 그토록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다. "괜찮니?" 난 헨리를 더욱 힘껏 껴안았다. "응, 아주 좋아. 누나가 나를 구해 줬어. 난 물에 빠져 죽는 줄만 알았어. 고마워, 빅토리아." 그 말을 마치고 나서 헨리는 내 뺨에 진하게 입맞춤했다. 나 역시도 헨리에게 입맞춤했다. 모두 즐겁게 웃었다. 우린 모두 태풍이 지나간 후 안도의 한숨과 알 수 없는 마음의 감동에 젖듯 기뻐했다. 난 헨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왜 그렇게 먼 데까지 갔었지?" 있었다. 뭔가 이유가 있는데 그는 숨기려 하고 있었다. "헨리! 넌 수영강습을 마치고 수료증을 따기 전에는 그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니?" 헨리는 내 물음에 고개를 떨구었는데 만약 내가 계속 물어보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위축되어 있었다. "좋아, 하지만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지?" 나는 그를 껴안으면서 말했다. "다시 안 그럴 거야, 약속할께요." "스티븐 잘못이에요." 그건 모여 서 있던 사람들 뒤에서 들려온 아담 골드의 조그만 목소리였다. "어떻게 했는데?" 내가 다그치자 아담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담은 더이상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정색을 했다. 그리고 다른 꼬마들도 그랬다. 난 스티븐이 그 일에 관련돼 있을 줄 알았다. 젠장, 난 그 꼬마녀석을 수없이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석은 정말로 작은 불량배였다. 난 지금 진실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게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헨리가 너무나 지쳐 있고 또 어느 누구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린 괴물녀석은 그렇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일은 끝났다. "빅토리아?" 로비였다. "숙소로 돌아가서 좀 쉬는 게 어때? 난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난 정말로 괜찮아." 나는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계속 내가 가서 쉬기를 고집했고 지도선생님도 내 안색이 창백하다면서 그만 가서 좀 쉬라고 하였다. 그는 나와 함께 가주겠다고 제의했다. "난 가서 좀 누울래. 하지만 의사 선생님을 보러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애. 난 정말 괜찮아. 단지 좀 피곤할 뿐이야." 난 가운을 걸치고 숙소로 올라왔다. 내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생각 뿐이었다. 생각보다는 훨씬 피곤했기 때문이다. 누워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과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사고를 생각하니까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난 헨리를 생각하다가 그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죽을 뻔했었다. 그렇게 물 속에서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까지 모든 게 순조롭고 즐겁게 지내다가 다음 순간에 누군가가 죽는 것이다. 세상에! 난 그토록 심각한 사고를 가까이에서 경험하기는 처음이었다. 난 정말로 헨리의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한다. 난 부모님이 오래된 중국속담을 얘기하던 걸 기억한다. 그 말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뜻은 사람은 항상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구해 준 사람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구해 준 사람의 어머니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말로 이제부터 나는 헨리를 잘 돌봐줘야만 할 것이다. 내가 이 작은 깡패녀석 스티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테니 두고보라! 난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식사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아마도 식탁을 차리는 동안 내가 잠을 자도록 내버려두었나보다.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내가 들어서는 걸 본 스테피는 얼른 내게로 오더니 나를 껴안았다. 구해 낸 얘기를 하고 있어. 넌 정말 굉장했어."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더니 껴안아주었다. 그리고 내게 축하인사를 했다. 그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더욱 멋진 일이 있다. 다른 여학생들이 내가 쉴 수 있도록 내 담당 식탁을 맡아서 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난 처음으로 내 식탁의 아이들이 다른 식탁의 아이들과 동시에 식사를 시작하는 걸 바라보았다. 난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내 일을 다시 맡았다. 몇 분만에 다시 예전처럼 되돌아갔다. 역시 내 담당 식탁의 아이들은 다시 음식을 늦게야 받았다. 그래도 그들은 그런 일에 익숙해져 있고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해 주었다. 디저트를 먹기 직전에 내가 맡은 두 식탁에 앉아 있던 아이들과 지도선생님이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주었고 곧 식당 전체에 있던 사람들이 내게 박수를 쳐주었다. 젠장, 난 캠프에 남아 있길 얼마나 잘했는가! 제9장 이십육일 동안만 찌그러져 지내면 된다 제일 큰 세 가지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비, 스테피 그리고 얄미운 디나 조이스. 그 주 내내 그리고 그 다음주 중반까지 난 헨리를 구해 낸 영웅적인 행위 덕분에 화제의 인물로 지냈다. 하지만 그 다음주가 끝날 무렵에는 모두들 더이상 그 얘기를 화제로 삼지 않았다. 열광적인 분위기가 시들해지자 나는 다시 우울해졌고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우리 둘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헨리는 애써 기분을 마지막 남은 친구마저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는데 사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왜냐하면 헨리는 한번도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하루에 다섯 번 정도는 울었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늘 불행해 보였다. 게다가 이불을 적시는 데는 단연 일등이었다. 사실 헨리의 유일한 성공은 나였다. 내가 그 때문에 캠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무슨 성공이란 말인가! 나 역시 헨리처럼 불행하다고 느끼며 지냈다. 제일 큰 세 가지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비, 스테피, 그리고 얄미운 디나 조이스. 로비를 보기만 하면 내 가슴은 여전히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입을 다물고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난 그의 내면을 좀더 파악하게 되었다. 이틀 전에, 우리는 일 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테니스 경기를 보러 갔었다. 동시에 세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로비와 유명한 월리 크래머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월리는 성격이 고약하기로 악명 높은 선수였다. 그는 경기에서 지면 자신의 라켓을 부숴버리는 타입의 남자였다. 그런데 그는 이날 정말 미친 사람 같았는데 로비가 이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실점을 할 때마다 월리는 난잡한 욕설을 퍼부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서로 동점이 되었고 가히 환상적이었고 아무도 되받아칠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인 폭탄 같았는데 그때 그는 두 번이나 서브 미스를 범했다. 로비는 그걸 큰 목소리로 얘기했고 모두들 똑똑히 보았는데, 월리는 화를 내면서 완전히 미친 듯이 라켓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이것 봐, 크래머, 뭐 잘못됐나?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말고 말해봐!" "흥, 사실 난 네가 내 실책을 알리는 투가 맘에 들지 않아." "좋아, 그럼 그만두자!" 로비가 말하면서 코트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그때 월리가 빈정거리며 소리쳤다. "처음부터 속임수를 쓰더니 그리고 나서 포기하는 거야." 네트를 뛰어넘더니 그 두 사람은 서로 엉켜 땅바닥에 뒹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너무 난폭해지기 전에 멈추어졌는데 스테피마저도 깜짝 놀랐다. 난 왜 사람들이 로비가 그토록 흥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사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월리가 지나치게 야비하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협잡꾼 같은 사람들은 그냥 놔둬서는 안 되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제력이 강해 보이던 로비의 그런 모습은 사실 의외였다. 내가 로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는 스테피를 통해서 전해 들은 게 고작이었고 그녀는 결코 그의 결점 따위는 입에 담지도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스테피의 말을 들으면 누구나 그가 완벽한 사람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의 장점과 그가 스탠포드에 입학했다는 사실과 클라스에서 일등을 하고 또 뛰어난 운동선수이며 그가 출생한 코네티컷 가문의 전통 때문에 결코 타락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등에 대해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켄 어빙은 그를 별로 대단치 않게 평가했는데 그건 아마도 스테피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로비는 너무 자만해 보이는 타입이었다. 켄은 어쩌면 질투심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남자애들은 로비를 아주 좋아했고 없었다면 분명 여자애들이 줄줄이 그의 뒤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물론 나는 로비 와그너가 아주 평범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남들과 다른 특별한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는 약간 냉정한 편인데 그 점이 나는 좋다. 다른 남자애들이 농담이나 주고받고 소란스럽게 굴 때 그는 휩쓸리지 않는다. 거의 비슷한 나이 또래인데도 그가 훨씬 어른스러워 보인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아직도 애들처럼 유치한 짓을 한다. 그런데 그는 마치 어린 시절을 훌쩍 뛰어넘은 듯하다. 물론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었던 그 유치한 월리와의 싸움은 빼고 말이다. "정말 유치한 싸움이었어." 디 제이는 나중에 그 싸움에 대해서 나와 스테피에게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디 제이가 그 얘기를 하는 건 귀에 거슬렸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나는 너무나 어리석게 그녀의 말에 걸려들었다. "월리 크래머는 정말 바보 같애." "멍청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해." 스테피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때는 누군가가 그의 버릇을 고쳐줘야 했다구." "오, 하느님 맙소사! 과연 로비와 그의 여자친구들이로군!" 그리고 디 제이는 나를 향해 한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몸을 비비 꼬면서 가버렸다. "정말 재수없어." "언제 한번 꼭 혼내주고 말 거야." "잊어버려! 쟤는 그냥 질투하는 것 뿐이야." "너 어쩌다가 이제는 그렇게 쟤한테 친절해졌니? 디나는 정말 암적인 존재라구." "난 그냥 쟤 말은 안 듣기로 했어." 내가 스테피에게 말하지 않은 건 그녀보다도 더 디 제이를 미워하지만 그녀와 조그만 문제도 일으켜서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조금만 하찮은 구실을 준다면 디나는 나와 스테피의 우정을 산산조각 내버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로써, 우린 단둘이 있을 때만 좋았는데 뭔가 전같지 않은 어색함이 감돌았다. 스테피가 왜 그러는지 알지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내 생각에 그녀는 내가 여기 캠프에 와서 별로 즐겁게 지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여기 오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내게 강요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 주일만 더 있으면 여름방학도 절반이 지나가버린다. 내게는 너무 빠르다고 생각되지 않으니 이 무슨 비극인가! 사실, 모든 게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숙소 생활은 아주 좋았다.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제멋대로 해놓고 살 수 있었고 그건 숙소의 실내가 바깥의 쓰레기더미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지저분했다는 얘기다. 그것은 아무도 안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건 정말 행운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옷장이나 벽의 구석진 곳에 충분한 공간이 없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그럭저럭 정리를 잘 해놓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사방에 널려있는 옷들 때문에 가려져서 어디에 가구가 있는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침대는 몇 주 전부터 정리하지 않은 채 흐트러져 있었고, 시트는 음식물이 엎질러지지 않는 한 바꾸지 않았다. 사실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우린 그곳 생괄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항상 꿈구던 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게다가 우린 모두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건 아무것도 옮겨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유일한 것은 사이다 깡통을 밖으로 버리는 일이었다. 만약 저녁마다 그걸 밖으로 버리지 않으면 그 다음날 아침에 엄청난 개미떼의 습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 개미떼는 가운데 문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이었다. 처음에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디 제이였는데 그녀는 빈 사이다 깡통을 클레어의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버렸었다. 당연히 그녀는 자기 침대 밑에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보 같은 클레어는 그래도 그녀에게 고마워했을 것이다. 요컨대 그 다음날 아침, 문에서 사이다 깡통이 있는 데까지 이어진 십오 센티미터 넓이의 검고 구불구불한 행렬이 있었다. 그건 사이다 개미떼였다. 알렉산드라와 쌍둥이 자매들이 그걸 치우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공포와 역겨움의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주우러 달려갔다. 그 불쌍한 개미들은 겁에 질려서 죽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더이상 빈 사이다 깡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음식물이 아닌 경우에는 무엇이든지 언제까지나 바닥에 놔둘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무질서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옷이 구겨지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 탈 없이 완벽했다. 만약 우리가 그 뒤죽박죽 속에서 뭔가를 잃어버린다면 우린 그걸 찾기 위해서 떠나는 날 가방을 다시 쌀 때까지 난 알렉산드라의 친구가 되었다. 쌍둥이 자매들도 항상 함께 행동하고 줏대없는 것만 뺀다면 그다지 나쁜 친구들은 아니었다. 리자는 조금 재미있는 애였고, 클레어는 구제불능이었다. 그리고 디 제이는 아주 훈련이 잘된 심술궂은 마녀 같았다. 그러나 그녀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나를 주시하면서 내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이제 난 이십육 일 동안만 참으며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쉬운 일이야! 이렇게 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난 정말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제10장 한밤중에 꾸민 청백전 팡파르 사이렌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음악 소리가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화려한 브라스 밴드의 축하 음악이었다. 우리는 모두 청백전이 시작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청백전이란 여름방학 캠프에서만 행해지는 아주 특별한 행사다. 캠프는 두 팀으로 나뉘는데 청팀과 백팀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보통 늘 하는 운동경기를 하게 되는데 각자 자기 팀을 위하여 싸우게 되는 것이다.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또 '연극의 밤'이니 '노래하는 밤' 같은 특별행사도 펼쳐진다. 각 팀은 창작희극을 무대 위에 올리고 우수한 팀이 많은 점수를 얻게 된다. 모든 것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 경연을 벌이게 되는데 심지어 목공예 일도 몇몇 지도선생님들이 승자를 결정한다. 만약 청팀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언제나 청색 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거나 잠자러 숙소로 돌아올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심지어 구내식당에 가거나 다른 곳에 갈 때에도 자기와 같은 팀 사람과 함께 다녀야 한다. 여러분은 이제 그게 얼마나 대단한 행사인지 알았을 것이다! 이 행사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각자 자기 팀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어떻게 언제 청백전이 시작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더 흥미진진한 것이다. 스테피가 말하기를 작년에는 캠프 위에 소형 비행기를 띄워서 청백전 개시를 알리고 팀의 구성을 알려주는 설명서를 배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저녁, 스테피와 알렉산드라 그리고 나는 밖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는데, 내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가 청백전을 개시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농담처럼 그런 얘기가 오가다가 점점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정말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뿐이었다. 우리 계획은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린 뒤에 각 숙소의 공동침실로 살그머니 들어가서 침대 옆에 청색이나 백색 종이쪽지를 붙이고 나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은 전부 청백전이 시작됐다고 믿을 것이다.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근사한 계획이었다. 아무도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목요일 아침에 비번이었기 때문에 크레이프 종이를 사러 시내로 갔다. 우리는 주말 직전에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디나 조이스와 고자질쟁이인 클레어가 우리가 꾸미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절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철저한 보안유지를 해야만 했다. 감춰둬야만 했다. 제일 좋은 장소는 보통 종이를 넣어두는 곳이었다. 아무도 거기 숨겼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우린 새벽 세네 시 경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셋이서 몰래 침대를 빠져나와서 밖으로 나왔다. 각자 숙소 하나씩을 맡기로 했는데 나는 제일 나이가 많은 중등부를 맡았다. 스테피는 우리 계획에 대해서 로비에게조차도 귀뜸하지 않았고 금요일 저녁에 우리는 모든 걸 준비하기 위해서 평소보다 일찍 댄스홀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다른 애들이 돌아오기 전에 우린 모든 준비를 끝냈고 밤에 입을 검은색 티셔츠와 진바지를 침대시트 밑에 숨겨두었다. 불이 꺼지면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숨겨두었다. 크레이프 종이는 작은 띠모양으로 잘라서 침대다리에 두르기 좋게 만들어놓았다. 우리 셋은 각자 청색과 백색 띠를 한 세트씩 갖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자명종 시계를 세시 반에 맞춰놓았는데 헛수고였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흥분돼서 조금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는 다른 방 친구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디나 조이스는 수시로 몸을 뒤척거리며 자고 있었다. 난 그렇게 몸부림치며 자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난 내 손목시계를 계속 들여다보다가 세시 전에 알렉산드라를 깨워서 자명종 시계가 울리기 전에 시계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완전히 잠으로 혼수상태였다. "쉿...... 일어날 시간이야." 그리고 나서 나는 역시 잠이 덜 깨서 얼이 빠져 있는 스테피를 깨워 우리 셋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서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너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스테피가 내게 속삭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초승달이었기 때문에 달빛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야말로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러나 어둠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문을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린 이내 멈칫했지만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는 재빨리 현관 계단 아니었다면 아주 난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널빤지가 망가진 곳을 요령있게 피할 수 있었다. "기분이 어떠니?" 스테피가 우리에게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내 기분도 그랬다. 두려움. 준비하는 동안은 기막히게 재미있는 모험처럼 여겨졌는데 이제...... 그 계획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우린 잡히면 끝장인 것이다. 그런 데다가 일이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만약에 누군가가 잠이 깨서 우리를 본다면 그야말로 기겁을 해서 소리를 지를 것이다. 내 생각에, 한 꼬마녀석이 소리를 지르면 다들 잠이 깰 것이고 모두 비명을 지르기  怠쳄徘?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를 도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한꺼번에 덤벼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물어보았다. "너희들, 그만두고 싶니?" "어머! 아니야!" 알렉산드라는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절대로 아니야. 그럴 순 없어...... 물론 네가 그만두고 싶다면 혹 모르지만......" "난 그만두고 싶지 않아." 내가 말했다. "......아니면 스테피가 원한다면?" 그녀는 스테피가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기를 바라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스테피는 겁에 질려서 그만두는 사람은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 알렉산드라가 말하면서 내게 이렇게 얘기했다. "그리고 너도 그럴 수 없어. 왜냐하면 이건 네 생각이었으니까." "난 꿈에도 그만두겠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어." 처음으로 나는 알렉산드라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우리들 중의 누구도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우린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투표로 결정할까?" 나도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있어?" 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난 단지 민주적으로 해결하고 싶어서 그래." "좋아." 그녀가 말했다. "누구 그만두고 싶은 사람?" 우린 모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왕 벌인 일인데 해내야만 돼. 정말로 근사한 생각이잖아." 스테피가 말했다. "우린 이미 제일 어려운 일을 해냈어."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무얼?" 내가 물었다. "디나 조이스보다 더 힘든 장애물이 "사실이야, 자 가자." 그리고 우리는 각자 방의 침실을 향해서 어두운 밤 속을 헤쳐갔다. 그들과 헤어지자마자 나는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소름이 끼치는데 혼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겁이 났던 것이다. 다음에는 절대로 그런 생각조차 입밖에 내지 않으리라. 첫 숙소는 제일 상급반 여학생들이 잠자고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난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방 팀과 같이 하는 봉사활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난 가방에서 일곱 개의 종이띠를 꺼내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서 조심스럽게 주위는 너무나 조용했다. 난 문 손잡이를 돌려서 소리없이 문을 열었다. 그 안은 화덕 안처럼 깜깜했다. 난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안으로 슬쩍 들어갔고 첫번째 침대가 있는 데까지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걸어갔다. 드디어 조심스럽게 침대다리에 종이띠 하나를 둘렀다. 그리고 두번째 침대를 겨냥했다. 내가 종이띠를 붙이는 사이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런 내 행동이 마치 도둑질하는 짓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뒤탈이 날까 끔찍했고 내 자신이 나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겨우 시작에 불과한데 이 모양이니! 하지만 해내야만 한다. 적어도 처음 방만은. 난 내가 무슨 색깔을 몇장 둘렀다. 방 안이 너무 컴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세번째 방에 이르자 나는 전문가처럼 익숙하게 그 일을 해냈다. 모든 사람이 그토록 곤히 잠들어 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돼가자 나는 완전히 도취되어버렸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미칠 듯이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뱃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자 이번에는 더욱 우스꽝스러운 건 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난 더이상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개의 띠를 침대다리에 매고 나자 웃음이 훅 입에서 새어나왔다. 난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아무 소리도 나지 계속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무리였다. 그래서 나머지 종이띠를 매는 대신에 난 그걸 바닥에 팽개치고 얼른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제 나는 나머지 두 방에 가서 할 일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난 더이상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 것이었다. 나머지 두 방은 열세 살짜리 학생들이 자고 있는 곳이었다. 제일 마지막 방이 난코스였는데 그곳은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있는 곳이었다. 만약 그애가 깬다면 나는 완전히 올 여름을 망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첫번째 방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게 해치우고 나서 진드기가 있는 나서 다시 다섯 번 심호흡을 하고도 모자라서 또 세 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나는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날이 밝을 때까지 심호흡만 하다가 볼일 다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행운의 숫자를 헤아렸다. 그건 정말 나만의 행운의 숫자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47'이라는 숫자를 행운의 숫자로 삼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숫자는 너무 짧았다. 그래서 난 행운의 숫자를 '147'로 바꿨다. 방으로 들어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난 우선 니나의 침대다리에 종이띠를 둘렀다. 제일 먼저 해치워버려야만 후련할 것 같아서. 구석진 침대에서 나는 조그만 목소리였다. 난 제자리에 꼼짝 않고 우뚝 섰다. "그래도 돼요?"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세면장으로 가서 컵을 찾아서 물을 한잔 갖다주는 수밖에. 그곳은 더욱더 어두웠다. 난 컵을 놔두었을 선반 위를 더듬어보았지만 물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불상사다. 난 어찌할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일어나서 화장실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문을 열고 그 뒤에 숨었다. 그 여자애는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문을 닫았다. 난 그녀가 볼일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난 문 뒤에서 문을 다시 닫지 닫으려고 했지만 난 더욱더 세게 버텼다. 그리고 숨도 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다시 한번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침대로 돌아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내가 나가려고 할 때 나는 다시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물 한잔 갖다줄 수 없어요?" 난 다시 컵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때 누군가가 슬리퍼를 끄는 발걸음으로 오는 소리를 들었다. 난 다시 문 뒤에 가서 숨었다. 이번에 그 발자국 소리는 세면대 앞에서 멈췄다. 물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돌아갈 때까지 내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목소리가 들리고 침대로 가는 발자국 삐걱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잠이 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마저 뒤처리를 끝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내 모든 관심사는 들키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난 조금 기다리다가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문에 다가갔을 때, 누군가가 졸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디 가는 거지?" "화장실에요." 나는 대답했다. "좋아." 그녀가 말했고 난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일단 그곳에서 나오자, 나는 숙소로 있었는데 우리는 우리 방 침대를 마저 해치워야만 했다. 날이 새기 전에 해놓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꾸몄는지 단번에 들통나고 말 테니까. 우린 숙소 문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 스테피는 벌써 와 있었고 알렉산드라는 바로 내 뒤에 도착했다. "어땠니?" "끔찍했어. 난 마지막 방은 처리하지 못했어. 한 꼬마녀석이 내가 도착했을 때 손전등을 들고 서 있었거든." 스테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알렉산드라 역시 곤란한 일이 있었다. 어린 여자애 중 한 명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를 화장실까지 데려다줘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군지 몰라봤다는 것이다. 대충 열다섯 명 정도를 제외하고 우린 거의 모든 애들에게 색종이 띠를 둘러준 셈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 방으로 돌아가서 색종이띠를 몇 개 매고 나서 잠자리로 돌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차례로 아주 천천히 우리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갔을 때, 내 시선은 디나 조이스에게 가 멈췄다. 그녀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고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만 자세였다.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보니까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서 무사히 침대 있는 데까지 왔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녀가 거기서도 보니까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그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난 그 사실을 마음 한구석에 잘 챙겨두었다. 위기에 몰렸을 땐 결정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들은 각자 계획대로 자기 주위에 있는 침대에 색종이띠를 둘렀다. 그 일은 아주 훌륭하게 끝났다. 난 만사를 그렇게 해내고 싶었다. 그건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다. 난 아주 위험하기 때문에 그 모험을 더욱더 탐닉했다. 만약 카르토파 부인이나 데이비스 박사가 우리가 꾸민 일을 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난 디 제이가 자기 침대에서 몸을 끝내고 얌전하게 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입에 엄지손가락을 물고 뜬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래."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그녀는 눈을 다시 감았다. 그녀가 정말로 잠이 깬 게 아니었나보다. 제발 그랬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셋은 끝장이니까. 난 우선 불안해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난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깨어 있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결국은 잠이 들고 말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주 가까이서가 아닌 우리 숙소 놀라서 잠이 깼으니까 말이다. 굉장히 여러 명이 웅성거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나서 나는 모든 게 기억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난 모든 게 생각났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일어났는데 조금 후에 쌍둥이 자매가 거의 동시에 함께 일어났다. 그들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색종이였다. 그리고 이내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청백전이야!" 에니드가 외쳤다. 그러니까 에니드의 침대에 있는 쌍둥이 자매 하나가 그랬다는 얘기다. "말도 안 돼!" 엘렌이 침대에서 펄쩍 뛰면서 말했다. "어머나, 세상에!" 스테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젠장, 얼마나 형편없는 연극솜씨인가! 알렉산드라는 한술 더 떠서 방 안을 온통 뛰어다니면서 침대다리에 매어 있는 색종이들을 보았다. 비록 속임수였지만 우리는 원하는 대로 팀을 짰다. 알, 스테피, 그리고 나는 한 편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편이었다. 나는 디나 조이스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별로 흥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내내 흥분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여전히 침착했다. "굉장한데." 나는 시선을 여전히 디 제이에게 고정시킨 채 기뻐하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한 일을 다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청팀이니?" 나는 내 청색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디 제이 너는 어느 팀이야?" "괜찮아."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 않고 숙소를 나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우린 끝장인 것이다. 알과 스테피 역시 사태를 감지했다. 그녀는 우리를 고자질하러 간 것이다. 우리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쌍둥이 자매와 리자는 여전히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지만 우리 셋은 아주 침착해졌다. "어떻게 생각하니?" 알이 내게 속삭였다. "기다려보면 알겠지." 수 있잖아?"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린 함께 스테피를 쳐다보았다. "최선의 상태가 최악이겠지." "그 말을 들으니 안심된다." 내가 말했다. "사실을 알고 싶어?" 그동안 쌍둥이 자매와 리자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다가 멈췄다. "무슨 일이야?" 리자가 물었다. 우리 셋은 함께 입 모아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나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건 좀 뭔가 수상해." 갸웃하며 그녀의 그림자가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스테피가 리자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사실 그래." 알과 내가 이번에는 끼어들었다. "뭔가 좀 이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 쌍둥이가 말하자 우리는 더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수상한 점이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우리들 중의 몇은 이미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디나 조이스가 진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개를 데리고 그들이 우리를 잡으러 오는 건 "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자." 리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버려둔 채로 셋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우린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발작적이라고 말한 건 우리가 침대 위에서 그리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기 때문이다. 우린 침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스테피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가만, 들어봐. 굉장히 조용해졌어." 정말 그랬다. 갑자기 이상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모든 열광하는 소리가 밖에서 뚝 그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어떻게 생각하니?" 알이 놀란 눈으로 처음 말문을 열었다. "글쎄. 창문으로 한번 내다봐." 내가 말했다. "싫어, 네가 봐." "그럴 수 없어. 내가 일을 꾸몄잖아. 내 임무는 끝났어. 이젠 너희 둘이 알아서 해." "넌 디 제이가 전부 일러바쳤다고 생각하는 거니 뭐니?" 이제 스테피는 알처럼 가련해 보였는데 내 속마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만약 디나가 이르지 않는다면 우리를 굉장히 사랑하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 뭘. 왜 선생님들이 걔 말을 "농담하는 거야?" 스테피는 갑자기 이성을 되찾으면서 말했다. "청백전은 아주 중요한 행사야." 알렉산드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두들 심각하게 생각한다구. 그리고 그 잘난 디 제이가 그들에게 우리가 장난을 쳤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미치려고 할 거야. 두고 봐. 굉장히 무섭게 화를 낼 거야."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야?"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누가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아느냐에 달렸지." "정말 그래." 스테피가 말했다. "만약 아이들이 우리를 그냥 놔둔다면 "그건 별로 끔찍하지 않은데." "카르토파 부인이 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끼쳐!" 우리는 간밤의 사건을 알게 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우리는 상관없어, 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에게 고작 벌금이나 물게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내 말은 여름캠프에는 지독한 처벌 같은 건 없다는 얘기다. 적어도 팸플릿엔 그런 사항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우리는 몇 가지 억측을 하다가 겁에 질려버렸다. 여전히 밖은 이상하게 조용했고 조금씩 멀리서 커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수많은 군중의 함성 소리 같았다. 우스꽝스럽게도 그건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것 같았다. "난 너희 둘 중에서 누가 창문으로 가서 보고 올 건지 정할 거야." 그들이 우리의 요새를 포위하는 동안 우리는 막막한 심정이었고 스테피가 결국 굴복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망가진 덧창 사이로 곁눈질하면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어떻게 된 거니?" 나는 그녀가 창가에 닿았을 때 가쁜 숨을 고르며 물었다. "빌어먹을!" 알과 나는 창가로 뛰어갔다. 오, 하느님 맙소사! 그건 엄청난 광경이었다! 수백 명의 캠프학생들이 떼를 지어 우리 숙소 쪽으로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여러분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거친 부랑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바로 그런 광경이 코앞에 펼쳐지고 있었고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무기도 저들과 함께 있을까?" 알이 입을 바르르 떨며 물었다. "그들은 안 보이는데!" 내가 말했다. "그러면 다행이다." 스테피와 나는 알렉산드라가 혹시나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농담하는 거야? 사백만 명이 들고 일어났는데 넌 다행이라고 말하다니! 그들이 여기 도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나 하니? 게다가 그들은 "네가 그들에게 설명을 해야 할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냥 그건 사소한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거야......" 스테피가 끼어들었다. "싫어, 네가 그들에게 장난이었다고 말해." 그 거친 부랑자들이 정말로 우리를 향해서 몰려오고 있는 중이라고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사실 들이닥친들 우리에게 어쩔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정말로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다른 끔찍한 벌을 받을 염려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잔뜩 난 꼬마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겁이 덜컥 났다. "우린 숨어야 되는 거니 뭐니?" "좋은 생각이야." 우린 셋이 숨을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함성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세상에,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 "바보같은 짓이야. 세 사람이 여기 숨을 수는 없어. 그만두자. 아이들은 금방 우리를 찾아내고 말 거야. 우리가 숨으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거야. 우리가 잘못했음을 시인하는 꼴이 되니까 말야." 내가 말했다. "어떻게 해야만 하지?"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여기 남아서 부딪쳐보는 거지 뭐." "아니면 뭐니?" 물론 스테피의 말이었다. "아니면 도망치는 거야." 을 얻어서 제각기 밥을 그래서 우리 셋은 전부 출입문 쪽으로 갔다. 우리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는 이내 도로 닫았다. 너무 늦었던 것이다. 뉴욕시 인구의 절반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창문으로 가자!" 그런데 그 바보 같은 덧문들은 열리지가 않았다. 용감하게 맞서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는 그러는 게 참용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군중들이 서로 떼밀면서 가까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현관 계단을 무턱대고 올라왔다. 그들의 실수였다. 비명소리가 들리고 나서 조심해! 이런, 빌어먹을! 그리고 또 다른 주저앉거나 부서질 때마다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옷장을 문 앞에 갖다놓자." 스테피가 말했고 우린 리자의 옷장을 문 앞에 끌어다 놨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욱더 커졌고 또 몇몇은 우리에게 문을 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난 스테피에게 소리쳤다. "또다른 옷장을 가져와!"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은 벌써 반쯤 문을 열었고 아무것도 그걸 말릴 수는 없었다. 우린 끝장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단순한 것이다. 그건 악몽이었다. 우린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내 아이디어였으니까 내가 제일 먼저 나갈께." "그래, 먼저 가." 내 제일 친한 친구가 말했다. 그동안 문 밖에 있는 얼간이들은 계속 몸을 문에 부딪치고 있었고 경첩이 반쯤 빠진 문은 억지로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반쯤 벌어진 문틈 새로 기묘한 방법으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적들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후면 그들은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밀어닥칠 것이었다. 우린 벽에 딱 붙어서서 가능한 뒤로 물러섰다. 난 그 모든 일이 그렇게 사소한 장난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스테피를 보고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 어쩌지?" 나는 스테피가 겁에 질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겁이 났다. 알렉산드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문은 두 번만 더 세게 밀어붙이면 끝장날 것이다. 알은 금방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비명 소리에, 떠미는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에다가 이제는 더욱 더 끔찍한 소리가 덧붙여졌다. 날카로운 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더니 조금씩 커지면서 사이렌 소리처럼 숙소 앞으로 들려왔다. 문으로 멀어지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고 소란은 조금 가라앉았다. 억지로 열리던 문은 가볍게 다시 닫혔다. 우린 함께 창가로 달려갔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오락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었고 또다른 소리가 들렸는데 그건 북 소리 같기도 하고 심벌즈 소리도 같고 또 피리 소리도 나고 아무튼 음악 소리였다. 사이렌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음악소리가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화려한 브라스 밴드의 축하 음악이었다. 제일 뒤에 있던 아이들 중의 몇은 포기하고 오락장 쪽으로 가고 있었고 뒤이어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갔다. 제일 앞에 있던 시작하자 뒤따르던 아이들도 음악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알이 말했다. "무슨 상관이야? 우린 살아났어." 내가 기쁨에 탄성을 울렸다. 순식간에 우리 숙소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음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알겠어." 스테피가 말했을 때 나 역시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청백전이 시작된 거야." "이번엔 진짜야." 알렐산드라는 겨우 기운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야. 전화위복이라더니!" "아직 너무 좋아하지 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도 멀었어." 스테피는 말하면서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단은 최악의 상태는 모면했으니까. "우린 이제 살아났어. 기껏해야 벌금밖에 더 물겠니?" 내가 말했다. 그런데 알은 다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다른 벌을 받으면 어쩌지?" "뭐 대단한 건 아닐 거야...... 모두들 청백전 때문에 너무 바빠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 따위에는 신경쓸 겨를도 없을 거야. 두고봐. 모두 금방 잊을 테니 안 그러니, 스테피?" 정도 내는 걸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데, 너희는 모르고 있는 거니? 난 방금 청백전이 정말로 시작되었다는 걸 알았어! 난 내가 어느 편인지 빨리 알고 싶어 죽겠어. 자, 가보자." 그야말로 알렉산드라를 밖으로 억지로 끌고 나가야만 했는데 마침내 그녀는 우리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락장까지 달려갔다. 온 캠프식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악대가 행진하고 그 뒤로 어릿광대 차림을 한 지도선생님들이 애드벌룬을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큰 바구니를 팔에 끼고 있었는데 다른 손으로 청색과 백색의 공들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모두들 공을 신경쓰지 않았다. 공 하나가 바로 우리 앞으로 다가와 알이 그 공을 잡았다. 그 공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다는 공처럼 반짝거렸는데 그 안에 뭔가 들어 있었다. 알은 공을 열고 거기서 접혀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건 팀 구성원이 적혀 있는 명단이었다. "어서 펼쳐봐. 난 로비가 나랑 같은 팀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죽겠어." 스테피가 재촉했다. 나 역시 궁금했지만 나는 로비와 같은 편이 아니길 바랬다! 알렉산드라가 종이를 갖고 있었으므로 제일 먼저 알 수 있었다. "청팀이야, 난 청팀이야! 자 빅토리아, 네 이름을 찾아봐." 이번엔 내가 명단을 훑어봤다. 난 스테피에게 명단을 내밀었다. "빌어먹을." "왜 그래?" 난 명단을 나꿔챘다. "백팀이야. 그런데 로비는? 네가 찾아봐." 난 남학생들 쪽 명단을 훑어보다가 문득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럴 줄 알았어." 스테피가 말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는 청팀 맨 처음 세번째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유감이야."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 각 팀에는 약 백오십 명 정도의 "이건 말도 안 돼. 좋은 사람은 전부 청팀에 있다니 말이야." 불쌍한 스테피, 그녀는 정말로 실망이 큰 모양이다. "이봐! 아주 괜찮겠는데, 디 제이가 너랑 한 편이야."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근사하군!" "......그리고 또 쌍둥이 자매도." "둘 다?" "둘 다. 그리고 드라큐라와 밤에 늑대로 둔갑하는 요술쟁이도 네 편인데." "그만해." 알이 말하면서 나를 잡아당겼다. "더이상 적군하고는 비밀리에 만날 수 없어." 스테피가 투덜거렸다. "이런, 네 스포츠 정신은 어디 갔니?" "이것 봐요!" 어디서 나타난지 모르는 중급반 여자애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너도 그 일을 꾸민 사람 중의 하나지?" 난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 여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머 맞아. 바로 너야!" 그리고 그녀는 자기 여자친구를 붙들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구내식당의 그 여자 아냐?" "사고뭉치 말하는 거야?" "그래." "맞아. 바로 그녀야." 그 다른 계집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뭉치'라고 부르다니. 왜일까. "제기랄, 넌 난처한 일이 생길 거야. 우리 선생님이 너 때문에 정말로 화가 났거든." 처음 여자애가 말했다. "우리 선생님도 그래." 다른 여자애가 말했다. "선생님한테 가서 말해야지." 그리고 그 두 여자애는 달려갔고 우리 역시 그랬다. 우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숙소로 얼른 돌아왔다. "너희들 셋, 잠깐만." 돌아보지도 않고 우리는 이제 끝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결단난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아직 조금은 희망이 있다고 데이비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캠프의 부원장인 지지 파울러였다. "너희들 셋과 잠깐 면담을 하고 싶은데, 십오분 내로 내 사무실로 와요."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부원장님은 참 좋아. 여기에 계신지 몇 년이나 됐는데 다들 좋아하거든." 스테피가 말했다. 알렉산드라도 맞장구를 쳤다. "장황한 설교와 약간의 벌금 정도겠지.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우린 정말 운이 좋았어." 내가 말했다. "만약 진짜 청백전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우린 끝장났을 거야. 그런데 난 이 얄미운 디나 조이스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아마 쉽지 않을걸. 마치 불사신처럼 아무런 약점도 없거든." 알이 말했다. "누구나 약점은 있게 마련이야.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디나 조이스에게서?" 스테피는 그건 불가능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난 내가 어젯밤 목격했던 것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더 두고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 잘나고 영악한 디나 조이스도 어쩌면 생각보다 그렇게 난공불락은 아닐지도 모른다. 곧 알게 될 것이다. "자, 사무실에 가보자."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면 할수록 좀더 일찍 우리의 운명이든 뭐든 결정이 될 거야." 그리고 스테피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운명인지 뭔지를 향해서 출발했다. 예상했던 대로 지니는 우리에게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고 훈계를 했지만 벌금은 과히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십이 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그래도 이무기하고 면담을 갖느니 벌금을 내는 편이 나았다. 어쨌든 우리는 궁지에서 용케 벗어날 수 있었다. 스테피는 그 일을 나중에 회상하면 근사한 모험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했다. 난 또다른 계획이 있었다고 그랬더니 그녀는 만약 그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건 어제 일이었다. 오늘 우리의 미니청백전은 과열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진짜 청백전이 오늘 아침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해가 뜨자마자 우린 더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린 청팀이거나 백팀이었고 우리 모두는 살인자들처럼 무시무시했다. 모든 건 팀을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아침식사 때부터 전쟁은 시작되었다. 게양대 앞의 집합도 팀별로 했다. 그래서 나는 한 쪽에 모였고 스테피는 또 다른쪽에 자기 편 사람들과 함께 모였다. 그렇게 편을 가르는 건 우리에게 이상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 순간, 스테피는 나보다 디나 조이스와 더 유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도 디나 조이스하고는 공동의식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난 아직도 시골 아침날씨에 익숙해 있지 못하다. 시골 아침은 정말 화창하고 신선하고 싱그러워서 그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건 멋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쌀쌀해서 빈약한 유니폼 차림으로 언제나 몸을 떤다. 그건 추위 때문이거나 아니면 식사시중을 들어야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난 여전히 식사시중을 들 때마다 형편없어진다. 난 도저히 나아질 것 같은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런데도 내가 언제나 음식을 엎질러서 옷을 적시곤 하는 지도선생님 안나는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기 온 이후로 몸무게가 이 킬로그램이나 줄었다고 말했다. 노이로제였다. 사실 난 거의 열흘 동안 그녀에게 아무것도 앞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전전긍긍하느라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식당에서 아이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 분에 한번씩 모든 캠프의 아이들이 뭔가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때로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또 아니면 뭔가에 이겼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들이 쉬지 않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중에 나는 언제나 쟁반을 들고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낭패인 것이다. 즉 쟁반 밑에 있던 머리나 어깨 위에 음식을 엎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게 어깨 위든 머리 위든간에 이제는 빅토리아 청소반이 달려와서 더욱더 뒤죽박죽이 되게 마련이다. 오늘 아침은 모든 게 달라 보였다. 난 흥분한 상태였다. 난 경기에 참여하길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냥 구내식당으로 가는 대신에 우리는 자기 편끼리 모여서 팀의 응원가를 부르며 걸어갔다. 우린 모든 응원가의 레퍼토리를 외우고 있었다. 응원가는 누구나 잘 아는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아주 쉬운 곡조였다. 정말 이상한 일은 라라라가 많이 들어간 노래에 발맞춰 걸어가면서도 우리 자신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내 생각에는 누구나 게임을 하거나 모두 같은 일을 동시에 하게 되면 그 일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담당인 식탁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청백전 개시 후 모든 게 점수에 계산되는 것이었다. 식사시중을 드는 방법까지도 말이다. 우린 식탁을 차리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들이 숙소에서부터 노래에 발맞추어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그들은 줄을 지어 구내식당에 도착했고 보통 때 앉던 각자의 자리를 질서정연하게 찾아가서 앉았지만 완전히 태도가 달랐다. 마치 그들은 군대에 있는 것처럼 아주 규율 있게 행동했다. 내가 맡은 식탁의 아이들마저도 훌륭했다. 난 어제 헨리의 이름을 찾았는데 그는 나와 같은 편이었다. 그 지독한 말썽꾸러기 스티븐은 백팀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여전히 심술궂었고 헨리는 여전히 같은 문제들을 안고 고민하는 듯했다. 그 중에 제일 심각한 건 역시 침대를 적시는 일이었다. 헨리는 또한 한 방에서 제일 인기 있는 소년도 아니었다. 스티븐은 헨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난 헨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당장 헨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끝까지 견뎌내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도 힘겨운 일일 것이다. 헨리는 별로 강하지 못하므로 나는 그가 언제까지나 그렇게 나약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그 꼬마녀석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었으리라. 오늘 아침 그는 뒤로 잘 빗어넘긴 금발머리와 완벽하게 다려진 청색 유니폼, 있었다. 아주 사랑스러워 보였다. 헨리는 그 꼬마 그룹 중에 제일 어리진 않았지만 제일 작고 귀여웠다. 난 그가 언제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언제나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 일곱 살짜리 꼬마로서는 너무나 조용하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끼리 있을 때만은 예외였다. 그는 아주 총명했다. 내가 로비도 나와 같은 팀이고 또 동생 진드기도 청팀이라는 얘기를 했던가. 아, 정말 그렇다! 니나는 부모님에게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내가 청백전을 가짜로 꾸몄던 얘기를 일러바친 지겨운 존재인 것이다. 엄마 아빠는 어제 저녁에 전화를 했었는데 당연히 내 동생은 그 얘기를 부모님들은 그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나한테 잠깐만이라도 얌전히 지낼 수 없느냐고 당부했다. 난 사실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빅토리아, 오늘 아침에는 콘 플레이크 대신에 계란을 먹을 수 있어요?" 그건 평소에는 일곱 살짜리 악마였던 페이 밀러였는데 오늘 아침엔 천사처럼 굴었다. 그건 청백전의 영향 때문이었는데도 여러분도 아다시피, 만약 누군가가 행동을 잘못하면 팀 전체가 점수를 깎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식사태도를 채점하고 있었다. 복장 단정이나 숙소 청결, 걸음걸이, 노래하는 태도까지도 전부 채점대상으로 삼고 그러니까 청백전이 행해지는 동안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점수와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보통 때 내가 그 악마에게 콘 플레이크를 갖다줬다면 페이 밀러는 소리치거나 냅다 바닥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난 오늘까지 한번도 페이 밀러의 정상적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침 식사 내내 그런 식이었다. 나 역시 거의 완벽하게 일을 해냈다. 난 모두에게 제대로 주문을 받았고, 아무것도 떨어뜨리거나 엎지르지 않았고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아무하고도 부딪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바로 내가 아이스 티를 나르는데 로비가 지니가다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 이내 아이스 티를 내 발 위에 엎지르고 말았다. 난 동시에 우리 팀 점수를 깎아먹고 말았다. 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청팀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은 젖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기 때문이다. 왜 로비를 보기만 해도 난 바보가 되고 마는 걸까. 그 증상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에게도 뭔가 변화가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어제 오후처럼 말이다. 어제는 날이 더워서 여자애들이 몇이 물장구를 치면서 놀고 있었는데 남자애들이 도착했다. 그들 중에는 로비도 끼어 있었다. 난 스테피가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그 무리들 속에는 없었다. 걸 도와주는 척했지만 사실은 내게로 향해 있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 때마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괴짜라고 생각하고 단순히 끌린 건지도 모르지만 웬지 그의 눈빛은 특별한 감정을 호소하는 듯 강렬한 의미를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읽어낸 감정을 내 자신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다. 식당을 나가면서 스티븐은 헨리를 넘어뜨리려고 발을 걸었다. 모든 꼬마녀석들은 그걸 보고 미친 듯이 재미있어 했다. "괜찮니?" 난 헨리를 부축하려고 몸을 숙였다. 놀랍게도 울지 않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굉장한 발전이었다. 난 헨리가 나아지는 데 내 자신이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헨리는 내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았고 또 내가 얼마나 잘 견뎌내는지를 익히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린 똑같이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처럼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조만간 우린 저 녀석을 골탕먹일 수 있을 거야. 두고봐." "그러길 바래요." 헨리는 신통치 않게 대꾸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헨리는 스티븐 같은 녀석에게는 전혀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였는데 어쩌면 깡패들과는 늘 그런 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깡패들은 더욱더 의기양양해지는지도 모른다. 우리 둘에게는 별로 좋은 출발이 아니었지만 경주가 시작되면 좀 나아질 것이다. 양 팀은 진짜 운동경기에서부터 '자루 입고 달리기' 같은 재미있는 경주에 이르기까지 각종 운동경기를 하기 위해서 대운동장으로 모일 것이다. 난 달리기를 잘하니까 어쩌면 내가 아침에 잃어버린 점수를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11장 자루 속에 함께 들어가야 한다구요 난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티셔츠 아래로 그의 몸이 느껴졌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것이었다. 점심식사 준비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가보니 모두들 벌써 와 있었고 어떤 경기는 이미 시작된 것도 있었다. 사실 넓이뛰기 시합은 끝났고 결과는 백팀의 승리로 첫 육점을 땄다. 경기 첫날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몹시 흥분해 있었고 고함 소리와 응원 소리가 요란했다. 청백전에는 아주 짜증나는 면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각자 자기 편이 있는 운동장 반대편에 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로비가 내가 있는 쪽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너도 경기에 출전하니?" 로비는 내게 물었다. 사랑해.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고 그냥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우물쭈물거렸다. 그는 깜짝 놀라는 듯한 푸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 짝이 돼줄래?" 물론 난 영원히 그의 짝이 되고 싶다! 나는 이내 그렇게 말한 걸 후회했다. 그건 너무 심한 말 같아서 난 변명하려고 애썼다. "내 말은 우리 마음대로 짝을 정할 수가 없다는 얘기야. 안 그러니?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자루 속에서 달리는 경주에서는 그럴 수 있어." "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난 식사시중 때문에 일찍 가봐야 되거든. 어쨌든 고마워. 참 재미있을 텐데." 이젠 입 좀 다물어, 빅토리아. "......난 정말로 자루 경기를 좋아해. 아주 스릴 넘치지." 난 마음이 불안하면 더이상 내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다. 없어서 유감이야. 하지만 난 식사시간에 지각할 수 없는데...... 좀 있다가 너랑 함께 뛰어야 되니까......" "그건 지금이야." "뭐라고?" "경주는 곧 있을 거야." "너무 이르다. 내 발이 그때까지 낫지 않을 거야." 난 위급한 상황에서는 머리회전이 빠르다. 그는 아주 당황하는 것 같았다. "네 발이라니? 왜 그러는데?" "약간 다쳤는데 대단한 건 아니야." "유감이군. 넌 언제나 발이 말썽인 것 같구나, 안 그래?" 그는 아주 전에 내가 발목을 삐었던 걸 말을 믿었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아주 수상쩍어하는 눈치였다. 난 그가 문제의 성격을 모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맞아." 나는 약간 그에게 화가 났다. 그에게 바보처럼 마음을 뺏긴 이후로 좋아하는 감정 말고 다른 걸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우리가 짝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야만 한다. 왜 그는 그런 제의를 했을까. "너희는 경기에 나가야만 해." 스테피가 불쑥 나타나면서 말했다. "내 팀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난 도저히 디나 조이스, 월리 크래머나 클레어 아니면 이 형편없는 노먼 같은 녀석을 응원하게 나가기로 결정할 거니 뭐니?" "난 준비가 됐는데 빅토리아가 발이 아프대." "또?" 스테피는 몹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빨리 낫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다시 이주 전처럼 내가 로비를 싫어한다고 오해하는 스테피와 마주칠 것 같았다. "그냥 약간 벤 상처야. 대단치 않아."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로비에게 말했다. "나 때문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우린 깨끗이 물리칠 거야. 여기서 잠깐 기다려, 금방 돌아올께." 그리고 그는 출발선 옆에 잔뜩 놓여 있는 자루를 구하러 달려가는 로비의 뒷모습을 보고 넋을 잃고 말했다. "아주 멋있어!" "정말이니 뭐니?" "어머! 정말이지. 넌 로비가 하는 말 들었지. 우리가 그들을 깨끗이 물리칠 거라는 얘기 말이야!" "난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왜 이렇게 난 항상 너희 두 사람을 서로 가깝게 해주려고 안달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러다가 너희 둘이 정말로 좋아져서 날 잊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난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머나! 스테피,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나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 맙소사, 넌 나랑 제일 친한 친구잖아." 그리고 나서 그녀는 깔깔대기 시작했고 나 역시 억지웃음을 내비쳤다. 사실 난 그런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려서 편치가 않았다. 난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말들은 죄다 너무나 진지하고 사실 그대로여서 난 그냥 아무 위험도 없는 쉬운 말을 골라서 했다. "얘, 그런 말은 하지도 마!" 조금 후에 로비가 돌아왔는데, 우리가 깔깔대고 있었으므로 그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너 때문이야."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는 심하게 다친 사람처럼 몸을 구부리며 고꾸라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런 제스처가 그들끼리는 즐거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바보가 된 느낌이었고 거리감마저 느껴졌다. 갑자기 나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난 항상 내 절친한 친구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적어도 스테피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한 상태가 피곤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불쾌한 것이었다. 내가 로비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들키면 어쩌나 전전긍긍할 때도 그렇고,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아니면 질투가 날 때도 그랬다. 그 감정이 모른다. "이봐! 토리, 너 꿈꾸고 있는 거니 뭐니?" 스테피는 로비와 시시덕거리다가 내게 말했다. "정신차려, 넌 경주에서 이겨야 하잖아." "한번 해보자." 로비가 말하면서 자루를 벌렸다. "네가 먼저 들어가." 난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로비 역시 자루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스테피는 우리의 모양을 보려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건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내 몸에 바싹 밀착돼 있는 로비를 느끼는 것,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과 그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내 팔을 느끼는 것, 화끈거리는 게 새빨개진 것 같았다.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난 벌써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난 마음속으로 얼마나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똑바로 서 있어. 그리고 함께 껑충껑충 뛸 수 있도록 소리내어 숫자를 세는 거야." 난 단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무릎을 구부렸다가 그 다음엔 앞으로 펄쩍 뛰어나가는 거야." 우린 무릎을 구부렸다가 온 힘을 다해 앞으로 펄쩍 뛰었다. 그는 나와 자루를 끌다시피 하면서 나보다 멀리 뛰었기 때문에 난 넘어지지 않으려고 그에게 꼭 매달려야만 했다. "미안해." 난 그의 몸에 매달린 채 자루에서 다리를 "내 잘못이야, 빅토리아." "난 너보다 멀리 뛰지 말아야겠어. 다시 한번 해보자." "좀 있다 봐." 스테피가 운동장 반대편으로 돌아가면서 소리쳤다. "행운을 빌어!" 거기 있던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가 그 얘기를 듣고 소리쳤다. "스테피, 얘기 좀 해봐! 넌 도대체 어느 편이니?" "나? 어쨌든 난 백팀이지." 스테피는 활달하게 말하고 나서 우리에게 소리쳤다. "다리나 부러져라!" 그 얘긴 연극계에서 행운을 상징하는 꼬물거리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로비와 나는 출발했다. 자루 경기는 아주 까다로운 경주였고 또 균형감각을 요구했기 때문에 난 내가 로비에게 매달려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그와 가까이 있기는 처음이었는데 그랬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조금 있다가 호흡이 잘 맞아서 좀 수월해지자 난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난 그의 허리를 붙들고 있었고 티셔츠 아래로 그의 몸이 느껴졌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것이었다. 나 역시 몸이 달아올랐는데 특히 그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팔이 뜨거웠다. 그리고 닿았다. "좋아. 이제 충분히 연습했으니까 출발선으로 가자." 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그래." 그게 자루 속에 들어온 뒤로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내가 그를 유혹할 염려는 없었다. 우리는 출발선까지 갔다. 경기에는 여덟 쌍이 출전했는데 백팀에서 네 쌍, 청팀에서 네 쌍이 나왔다. 각각 상대편 팀 선수 옆에 서야만 했다. 당연히 우리는 디나 조이스 옆에 섰고, 그녀는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보고는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스테피는 어디 있니?" 들여다보았다. 만약 그 전에 내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면, 그 말에 얼굴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을 것이다. 난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 모든 게 내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비는 그녀 때문에 당황하거나 난처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초지종은 모르면서도 그녀가 아주 심술궂다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디 제이, 넌 장님이니? 스테피가 저기 있는 게 안 보여?" 로비는 손가락으로 스테피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는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그 농담 속에 뼈가 있음을 그녀는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는 얼굴 표정이 굳어졌는데 때문이다. 그는 죄의식도 느끼지 않은 것 같았고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조금은 짖궂어 보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난 그에 대해서 착각을 한 것이었다. 난 그의 눈빛에서 엉뚱한 감정을 읽었으니까 말이다. 그건 내 마음속에만 있던 감정이었고 그랬으면 하고 바랬던 것이었다. 부원장인 지니가 경주시작을 알렸고 우린 모두 출발선 앞에 정확하게 섰다. "차렷...... 준비...... 출발!" 우린 드디어 출발했다. 깡총깡총 뛰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또다시 일어나서 깡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린 디나 조이스, 월리 팀과 똑같이 달리고 있었고 있는 힘을 다해 전속력을 내었다. 우리는 입 모아 외치면서 뛰었다. 우리는 디 제이와 월리를 감시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다른 쪽에서 리자가 뛰어오다가 우리에게 부딪치는 바람에 우리가 디 제이 위로 넘어질 때까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자루 셋은 전부 쓰러지고 말았다. "어서, 일어나." 로비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린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이제 뒤처져 있었다. 이제 다른 다섯 쌍을 따라잡아야만 했다. 깡총, 깡총, 우리는 최선을 다해 속력을 냈다. 앞서가던 두 쌍의 자루가 서로 부딪치면서 넘어졌다. 이제 우리 앞에는 세 쌍만 남아 있었다. 마치 한 사람처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한 쌍이 바닥에 넘어지자 우린 세번째가 되었다. "자! 우린 할 수 있어." 로비는 내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오, 하느님 제발! 난 정말 일등을 하고 싶어...... 너를 위해서 로비. 너를 위해서라면." 다시 깡총, 깡총거리면서 우린 이등이 되었고, 바로 클레어와 노먼 조 뒤를 따라붙었다. 조그만 잘하면 추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바로 코앞을 가로막았다. 한쪽 옆으로 비켜나서 돌아가려면 너무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었다. "곧장 앞으로 가." "안 돼. 그러다간 부딪치고 말 거야." "자리를 비켜줄 거야. 두고봐......." 그리고 우린 깡총거리면서, 그들 꽁무니에 바짝 붙었지만 그들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우리가 크게 껑충 뛰자 그들은 우리를 피하려고 한 쪽으로 비켜갔다. 우리가 선두를 차지했다! 아직도 결승점까지는 육 미터 정도 남아 있었고...... 난 그들이 몇 센티미터 뒤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난 그들이 바로 우리 위로 날아와 덮칠 것만 같았다. 난 너무 숨이 차서 한 번만 더 깡총 뛰면 쓰러져버릴 지경이었다. 난 헐떡이는 숨소리 위로 관중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나와 함께 끝없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깡총 뛰려고 하는 순간에 클레어와 노먼 팀이 우리 자루자락을 밟아서 점프하는 걸 방해했기 때문에 우린 그들에게로 몸이 쏠렸고 그들은 우리 자루를 찢으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아주 심하게 흔들리면서도 로비는 자루를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우린 찢어진 자루자락을 허리에 감은 채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뒤로는 다른 두 쌍이 바싹 다가오고 있었지만 결승점까지는 육십 센티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마지막으로 크게 펄쩍 뛰면서 우리는 결승점에 골인했다. 우린 바닥에 쓰러져서 너무 기뻐서 데굴데굴 굴렀다. 사람들이 누더기 같은 너덜너덜해진 자루에서 빼내주었다. "우리가 이겼어!" 모두들 좋아서 환성을 지르고 날뛰었다. 우린 서로 껴안고 깡총깡총 뛰었으며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너희들이 이겼어, 치사한 애들 같으니!" 그건 백팀에 충실한 구성원이려고 애쓰면서 사실은 자기 친구들이 마침내 서로 잘 어울리게 된 걸 특별히 기뻐하는 스테피의 말이었다. 그건 그녀가 처음부터 바라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이겼다는 기쁨과 몇 주 동안 내 안에 쌓여 있던 뭔가 특별한 느낌이 포옹과 축하인사 속에 섞여 표출되었다. 그 감정은 내가 자제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불가능했다. 난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야만 했다. 난 로비도 나와 같은 감정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제12장 창고에서의 입맞춤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겹쳐졌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의 입이 벌어지면서 그의 입술과 합쳐질 준비를 하는 내 입술 안으로 살며서 점액질의 혀가 들어왔다. 다른 경기는 백팀이 모두 휩쓸었다. 우리가 '자루 입고 달리기'에서 얻은 이십 점을 제외하고 다른 승점은 전부 백팀에게로 넘어갔다. 청백전 첫날 오전에 청팀은 백오십 점이나 뒤져 있었다. 오후에도 점수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우린 배구에서 몇점 따긴 했지만 때쯤에 청팀은 아주 뒤처져 있었다. 난 몽롱한 상태에서 식사시중을 들었다. 아이들이 감자튀김을 주문하면 감자가루를 떠올렸다. 지난 몇 주 동안에 극기하며 자제했던 그 눈물겨운 짝사랑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적어도 내 식탁의 아이들은 디저트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본요리 전에 디저트를 먼저 갖다주었으니까. 난 오늘 저녁 꽉 막힌 수채구멍처럼 머리가 갑갑했다. 아이들은 디저트 먼저 먹게 돼서 좋아했지만 안나는 내가 좀더 처신을 잘해야 할 거라고 넌지시 충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 때문에 또 점수가 깎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난 애썼지만 수시로 생각은 오늘 오후의 경주와 로비의 쳐다보지 않는 동안은 이런 생각들로 기쁨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난 끔찍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난 식당에서 제일 꼴찌로 일을 마치고 나왔지만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스테피는 자기 팀을 위해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느라고 정신없이 바빴다. 난 음악의 밤 행사를 위한 무대장치 만드는 걸 돕기 위해서 오락장으로 가야만 했다. 그건 청백전 마지막 날 저녁에 있을 대경연이었다. 오백 점이나 걸려 있는 중요한 행사였고 승패를 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무대장치를 위해서 일할 정도 와 있었다. 난 상냥하게 인사만을 하고는 오락장의 다른 쪽 구석으로 피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내게 가까이 오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 했던 실수들을 다시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린 반원형의 바탕천 위에 만국기를 아교로 붙이고 있었다. 우린 우리 나라 국기와 캐나다 국기 외에는 진짜 국기가 없었으므로 또한 색칠된 천조각으로 다른 나라 국기들은 직접 만들어야만 했다. 알렉산드라와 나는 깃발을 고정시킬 나무틀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나무막대기를 교차시키고 그 교차점에 못을 박는 일이었다. 그건 흔히 보는 반원모양이었지만, 가능하다면 그건 뭔가 굉장히 마음을 끄는 대단한 것처럼 보일 "난 못을 더 갖고 올께. 넌 가서 나무조각을 몇 개 더 찾아와, 알겠지?" 알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오락장을 가로질러서 부원장에게로 가 어디가면 나무조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오락장 뒤쪽에 있는 창고에 가면 많이 쌓여 있어." 그녀는 말했다. "로비, 잠깐 하던 일 멈추고 빅토리아가 뒤쪽 창고에 나무 가지러 가는데 좀 도와주겠니? 넌 어딘지 알지?" "물론이죠." 로비는 대답하며 하던 일을 멈췄다. "너 손전등 있니?" 그와 일을 함께 하던 네드 와이너가 말했다. 난 로비를 따라서 구석에 붙어 있는 문으로 갔다. 만약 내가 그런 일을 원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원장 지니가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로비를 지명한 것은 놀라운 우연이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그런데 비참하게도 로비는 내가 미소짓는 걸 보고 말았고 그는 아마도 내가 자기랑 함께 가기를 원했다고 상상했을지 모른다. 보통 때라면 어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밖은 깜깜했다. 창고는 오락장에서 약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창고에 도착하자, 로비는 내게 문을 열고 있으라고 "이 문을 잠깐만 잡고 있을래?" 그는 내게 손전등을 건네주며 말했다. "스위치를 찾으려고 그래." 창고 안은 온갖 피킷들과 수많은 운동기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에 나무가 있는지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로비는 손을 더듬거려 스위치를 찾으려 했으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스위치가 이 널빤지 뒤에 있는 것 같니?" "스위치는 벌써 찾았는데 작동이 되지 않아." "내가 돌아가서 전등을 하나 더 갖고 올까?" "됐어. 네가 거기서 전등을 비춰주기만 하면 내가 나무조각들을 꺼낼께." 더 깊이 들어갔다. 만약 내가 모든 걸 계획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나는 교묘하게 비틀거리는 척했을 것이고 그는 휘청거리는 나를 껴안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더군다나 굳게 버티고 서 있어서 날 쓰러뜨리려면 허리케인 같은 폭풍우가 있어야만 할 정도였다. "조심해." 그는 나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그 순간 그의 발이 바닥에 있던 피킷 위로 미끄러졌다. 그는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벽 쪽에 기대려고 했지만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난 그를 잠깐 붙들었는데 그의 몸무게 때문에 그의 밑에 깔리고 말았다. 내 경우에는 가장 로맨틱한 것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미안해. 괜찮니?" "네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괜찮을 것 같애......" "응, 그래. 미안해." 그는 뭔가를 쓰러뜨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조심해." 그는 몸을 숙여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내가 일어나면서 우연히 널빤지를 건드려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로비는 나를 보호하려고 얼른 나를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난 그의 품 안에 있었다. 그의 스웨터의 부드러운 감촉이 내 뺨이 느껴졌고 나는 그의 따스한 몸을 기분좋게 느끼고 있었다. 있었다. 나는 이마에 와 닿는 그의 얼굴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느꼈다. 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지 마. 스테피는 어쩌고?"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대로 있었다. "토리." 스테피가 내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래도 난 그의 품 안에 그대로 안겨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치켜올렸고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겹쳐졌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의 입이 벌어지면서 그의 입술과 합쳐질 준비를 하는 내 입술 안으로 살며시 점액질의 혀가 들어왔다. 사랑의 충동을 느끼면서 그가 나를 껴안는 만큼 세게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난 한번도 그런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시 내 생각처럼 그런 감정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라는 말을 했다. 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 행복감만을 느끼고 싶었다. 난 살며시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그의 손은 내 몸을 더듬으면서 아래로 내려와 내 허벅지까지 어루만졌다. 우리의 입맞춤은 더욱 더 진하고 격렬해졌다. 우리가 여전히 서로 끌어안은 채 바닥에 쓰러졌을 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우린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서로의 몸이 밀착될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손이 어루만졌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슴을 건드렸다. 그 행동은 내 몸을 전율케 했는데 손가락의 선뜻한 감촉 때문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게 아주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그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난 그의 손길을 뿌리치거나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내게 키스를 했고 난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떻게 내가 스테피를 두고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는가.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있었고 그가 내게 키스할수록 더욱더 그가 그래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게 모든 사악함을 쫓아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냥 계속해서 난 그의 남성이 묵직해지는 걸 느꼈고 이제 스테피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도, 더이상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거기서 끝을 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는 내 남자친구가 아니다. 그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 난 한번도 다른 어떤 남자애하고도 사랑의 행위를 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사랑에 빠져본 기억도 없었다. 난 로비를 처음 본 그날부터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난 내 자신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멈췄다. 약간 내게서 떨어지면서 그가 멈췄다. "토리."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바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이끌리는 눈빛으로 말이다. "이게 바로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느낀 감정이었어. 너 역시, 그날 그랬다는 걸 알고 있어." "이러고 싶지 않아. 이건 나쁜 짓이야. 너무나 끔찍한 일이야." "우린 어쩔 수가 없어. 그 감정을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는 없는 거야." "아니야, 우린 그럴 수 있어." "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로 거리를 두면서 그러면 되는 거야." "그건 말도 안 돼."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목소리와 내 입술을 강하게 내리누르는 그의 입술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전에 없이 가깝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난 그가 나를 계속 껴안아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가 그만 두지 않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런 게 참사랑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바닥에 서로 마주보며 누워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뜨겁게 끌어안으며 키스를 했다. 아무도 그 상황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난 그냥 만사가 더욱더 은밀하고 다정하게 진행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건 정말로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친한 친구를 배신하고 있는지 그가 나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모든 걸 잊게 해주었다. 난 한번도 육체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난 토드와 함께 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은 욕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비와는 달랐다. 그와 함께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걸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난 그 감정에 대항해서 싸워왔다. 그런데 만약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난 더이상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한번도 누군가를 원해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나는 정말로 그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부당함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갑자기 나를 "우린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잠깐만, 얘기할 게 있어."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리고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나무 막대기들을 한아름 주워서 오락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잠깐만 기다려, 토리." 로비는 문 앞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난 그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우린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난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돌려세웠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난 여전히 이끌릴 만큼 "더이상 전같지 않을 거야. 스테피하고도 예전같을 수는 없어. 그건 너무 지독한 거짓말이 될 테니까 말이야." "스테피가 우리 사이를 알 필요가 없어. 게다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고 말이야. 그런 일은 결코 다시 일어날 염려도 없을 거야." 그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고개를 숙여 입맞추었다. 난 이내 그가 차에서 내리던 첫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스테피와 함께 하던 행동 바로 그렇게 그는 몸을 약간 숙이고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난 그 기억이 나자 견딜 수 없었다. "안 돼, 제발......" 난 그에게서 빠져나와서 그곳을 나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끔찍한 기분이 불쾌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그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였다. 난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빅토리아, 네가 저 구석에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누구지?" 로비가 물었다. "디나 조이스." 누구나 디나 조이스를 잘 알고 있었다. 로비까지도. "이런, 빌어먹을!" 그가 거칠게 내뱉자 나는 그가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릴 지켜본 건가?" 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얘기를 스테피에게 얘기한다면 디나는 정말로 치사하고 구역질나는 애야." "걱정하지 마. 걔는 그런 애니까." "그럼 내가 먼저 스테피에게 얘기해야만 해. 스테피의 생일 전에 말이야." "뭐라고 말할 건데?" "사실대로."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을?" "아니, 아직은 그 얘기를 할 수 없지. 그 얘긴 나중에 할 거야." "난 디나 조이스에게 어떻게 하면 좋지?" "그녀와 얘기를 해.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억지로 그랬다고 아무 말이나......" "그래 볼께. 하지만 디나는 너무나 거야." "그래도 한번 애써봐." 로비는 창고문을 밀었다. 나는 그가 나무를 한아름 안고 오는 동안 문을 붙들고 있었다. 나 역시 나무를 한아름 들고 우리는 오락장으로 돌아왔다. 두세 사람이 우리를 쳐다봤지만 대부분이 너무 바빠서 우리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시간은 거의 여덟시 반이 다 돼 있었다. 우린 오랫동안 창고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저녁시간은 정신이 없었다. 나는 나무막대기를 교차시키는 일을 하느라고 했지만 결국 일은 알렉산드라가 거의 혼자서 다 했다. 난 겨우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나와 로비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디나 조이스만 빼고. 난 오늘 저녁 그녀와 얘기를 해야만 한다. 난 디나 조이스가 중급반 학생들의 노래지도를 돕기 위해서 그곳 숙소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그녀를 기다렸다. 운좋게도 그녀는 혼자 나왔다. "디 제이." 나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웬일이야?"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긴지 퍽 궁금한데." 그러면서 그녀는 우리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난 그녀를 붙들었다. 생각하는 그런 게 정말로 아니야." "어머나, 그런 게 아니야!" 그녀는 그야말로 경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하고 그냥 인공호흡하고 있었던 거지, 안 그래?" 그녀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 참이었다. 난 모든 각오가 다 돼 있었고 내가 무슨 짓이든지 할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그런 일이 오늘 처음 일어났다는 거야." "물론 그렇겠지." 희망이 없었다. "넌 그 얘기를 스테피한테 할 거니?" 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거 같니? 결국 스테피는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난 스테피가 자기 남자친구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스테피가 사실을 안다면...... 네가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뭐든지 다할께." "뭐든지라고?" 그녀는 교활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난 정말로 무엇이든 할 참이었다. 그녀와의 우정이 깨지는 것도 그렇지만 스테피가 상처를 입는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뭐든지 다할께, 디 제이." "생각해 볼께." 그녀는 숙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토리." "왜 저러니?" 그녀는 디나 조이스가 춤추듯히 사라지는 걸 가리키면서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는 거니 뭐니?" 난 그녀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생리가 가까워져서 그러나 봐." "또?" "아니 그게 아닌지도 몰라. 아마 청백전 때문에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가 봐." 이제 스테피와 함께 있는 건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다. 난 그녀와 겨우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나의 비열한 짓과 배신행위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날 그토록 믿고 있는데! 아닌데 뭐." 한순간 나는 그녀가 내 속마음을 읽은 게 아닌가 해서 소름이 끼쳤는데 그녀는 청백전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비는 오늘 저녁에 무대장치 만드는 일을 했니?" 스테피는 숙소로 들어서면서 내게 물었다. 그때 스웨터를 벗는 중이었던 디나 조이스는 그 얘기를 듣고 중간에 멈췄다. 그건 볼 만한 광경이었다. 얼굴이 스웨터 안에 있는 채로 엿듣고 있는 디나 조이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쟤가 저렇게 괜찮았던 적은 없었을 거야." 스테피는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난 웃는 보일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그녀 앞에서 내가 처하게 된 화나는 상황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도대체 그녀는 얼마나 그 상황을 이용해 먹을까! 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했다. 지금처럼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남은 여름 내내 스테피가 나랑 얘기하고 싶어할 때마다 난 화장실에나 달려가면서 지내야 할 것인가. 난 내 절친한 친구를 피하기 위해서 옷 벗는 시간과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교묘하게 조정했다. 그리고 나서 소등시간이 되면 난 금방 잠이 들어버린 척할 수 있었다. 디나 조이스는 유별나게 내게 잘 자라는 밤인사와 함께 좋은 꿈 나는 그날 밤 어느 생일파티에서 로비와 내가 주인공이 되어 아주 가까이에서 춤을 추는 멋진 꿈을 꾸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자 그게 누구 생일이었는지 알기 전에는 아주 근사한 꿈이었다. "네 가죽 재킷을 입었으면 좋겠다." 디 제이는 내가 비몽사몽간에 있는데 와서 달콤하게 속삭였다. 난 다시 꿈 속으로 돌아가려고 애썼는데 그녀가 다시 그 말을 되풀이하자 잠에서 깨어났다. 더이상 달콤한 속삭임은 사라졌다. 이제 그녀는 동쪽 나라의 심술궂은 마녀였지만 난 고약하게 굴 수가 없었다. "저기, 내 침대 밑바닥에 있어." "고마워." 그녀는 다시 달콤하게 속삭이기 나중에 스테피는 내게 그 예쁜 가죽재킷을 디 제이에게 빌려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난 장차 다가올 일을 대비해서 뭔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대야만 했다. 그건 앞으로는 여러 가지 다른 것도 빌려줄 게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디 제이에게 상냥하게 구는 게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있잖아, 내 생각엔 디나가 정말로 변한 것 같애." "정말이야?"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스테피가 말했다. "뭘로? 두꺼비로 말이니?" "이것 봐, 스테피......" 화제를 얼른 바꾸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희는 어제 저녁에 작전모임을 가졌니?" "응, 너희는?" "오늘 아침식사 직후에 가졌어. 난 준비위원회에 들어갔어." 이 작전모임은 청백전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를 의논하는 것이었다. 각 팀은 모하프 산 정상에 자기 팀의 작은 깃발을 꽂아야 한다. 먼저 가서 꽂는 팀이 오백 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경기는 마지막 날 저녁행사인 뮤지컬 코미디에 버금가는 비중 있는 행사인 것이다. 모하프 산은 높은 산이라기보다는 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로의 팀을 감시하는 전령들을 파견한다. 정상에 도달하려면 약 열 명 정도의 사람을 따돌려야만 하는데, 그건 아주 힘든 일이고 살벌한 추격전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껏 어느 누구도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희는 뭔가 굉장한 방법을 찾아내야 할 거야. 왜냐하면 우린 정말 이길 수 있는 기막힌 계획을 짰거든. 켄이 생각해 낸 방법이야. 그는 정말 똑똑해." 오 하느님! 만약 그가 그녀의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그리고 아주 친절하고......" 그건 어쩌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이야. 그는 뉴욕에 살거든." 보였기 때문에 나는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하면서 끼어들었다. "난 그가 근사하다고 생각해. 정말로 멋있어." 그녀는 약간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이지. 그는 굉장해." "오! 토리. 난 내가 바보 같애. 난 네가 그에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어. 난 네 마음에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 "농담하는 거니? 난 조금도 그렇지 않아...... 내 말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야." "하지만 넌 그가 정말로 근사하다고 말했잖아......" 그렇지 않아. 난 그한테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아." "나도 그래. 나한테는 로비뿐이야...... 영원히!" "미안해, 그런데 난 화장실에 가야 되겠어." "화장실에?" 그녀가 영원히 자신에게는 로비뿐이라고 한 말이 내게는 치명적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올 여름은 화장실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미안해, 스테피. 금방 갔다 올께." 그리고 나는 재빨리 화장실로 줄달음질쳤다. 모두 다 숙소에서 빠져나갈 때가지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꾸물거리고 있으면 "얘, 토리. 넌 지각하고 싶은 거니 뭐니?" 스테피가 내게 소리쳤다. "어떠니?" 내 가죽재킷을 입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디나 조이스가 폼을 잡으면서 내게 물었다. 스테피는 내게 구역질이 나는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그때 확성기에서 집합을 알리는 에드나의 목소리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나를 살려주었고 게양대 앞으로 모두들 달려갔다. 작전모임은 아주 흥미진진했는데, 그건 내게 한숨 돌릴 여유를 주면서 로비를 얼마간 잊게 만들었다. 니나의 친구인 낸시는 아주 좋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골라서 양가죽으로 된 옷을 뒤집어씌운 뒤에 밤이 되면 작은 짐승처럼 가장하고 언덕 꼭대기까지 재빨리 올라가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건 좀 바보 같은 짓 같았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그 어린아이가 정말로 작다면 승산이 있을 듯했다. 언덕의 우거진 쪽으로 묘하게 숨어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린 모두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계획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유일한 어려움은 적당한 꼬마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난 헨리를 추천했는데 모두 그가 겁쟁이라고 반대했다. 모두들 스티븐이 그 꼬마를 얼마나 들볶아서 멍청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헨리는 이 게임의 적임자야. 적당한 난 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캠프에서 제일 키가 작을 거야. 그리고 달리기를 잘해. 헨리가 달리는 걸 본 적이 있거든." 하지만 모두들 헨리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 생각이 맞는지도 모른다. 헨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괴롭혀도 그냥 있고 늘 무슨 이유로든 울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게임이 그에게 자신감을 갖게 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텐데. 젠장, 만약 헨리가 그 일을 해낸다면 아무도 더이상 헨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헨리 역시 만족해서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고 어쩌면 더이상 침대에 오줌을 싸는 일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 데 많은 시간을 의논했다. 그 일에 정말로 적합한 로날드 벤터는 키가 너무 컸다. 그래서 난 계속 헨리를 고집했다. 마침내 알렉산드라가 한번 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야. 어차피 어떤 방법으로든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야." 알렉산드라의 이 말에 모두들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니까 한번 헨리에게 맡겨보자고 찬성을 했다. "내가 그 일을 알아서 할께. 우린 좋은 친구거든. 난 헨리를 설득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아무도 나와 함께 있는 헨리를 보면서 이 계획을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들은 모두 찬성했고 지도선생님 중의 한 명이 옷을 빌려주기로 했다. "서둘러야 돼, 빅토리아." 알이 말했다. "당장 오늘 저녁에 해야만 해. 난 백팀이 이번에는 굉장히 멋진 계획을 생각해 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난 지금 헨리가 어디 있을지 알아. 좀 있다 보자." 나는 알에게 인사를 하고 야구장으로 급히 달려갔다. 제13장 모하프 산꼭대기의 청색 깃발 온 캠프는 모하프 산꼭대기에 꽂혀 있는 청색 깃발을 보자 술렁거렸다. 우린 오백 점을 획득했고 헨리는 캠프의 영웅이 되었다. 난 야구장의 스탠드 뒤에 도착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멈췄다. 헨리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헨리는 아주 형편 없는 야구선수였다. 대담성이 없어서 말이다. 난 그를 불렀다. "헨리!" 난 얼굴을 내밀고 헨리에게 손짓을 했다. 헨리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헨리가 좀더 미소를 짓는다면 아주 사랑스러울 것이다. 난 일급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모두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으며 털 달린 옷을 뒤집어쓰고 작은 깃발을 가지고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난 예상했던 대로 그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았다. "난 하고 싶지 않아." "헨리,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붙잡히는 일밖에는 없어. 어려운 일이 아니야. 적어도 넌 한번 시도해 볼 수는 있잖아. 어떻게 생각하니?" "넌 해야만 해. 스티븐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넌 캠프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멋진 생각이니?" 헨리는 고개를 떨군 채 풀밭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건 울기 직전에 하는 헨리의 습관이었다. 만약 내가 당장 이 자리에서 설득하지 못하면 난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건 그를 위해서였다. "긴 말할 것 없어. 넌 해야 돼." 그건 스티븐 식의 거친 방법이었다. "난 벌써 네 이름을 등록시켰거든."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면서. "하지만 난 하고 싶지 않아." "너무 늦었어. 네 이름을 적어버렸는걸." "안 돼. 데이비스 박사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마지막 말을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난 아주 급했던 것이다. "난 겁이 나." 헨리에게 내가 함께 있을 거니까 걱정할 필요없다고 말했고 짙은 색 바지와 티셔츠를 입으라고 명령했다. "저녁식사 직후에 데리러 갈께." 내가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며 떠나려 하자, 헨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나 항상 그랬으므로 신경쓰지 않았다. 난 그동안 내 할 일을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진행중인 계획에 대해서 어두워졌다. 헨리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봐도 누군지 식별이 안 될 정도로 멀리 언덕 기슭의 나무가 우거진 쪽으로 산책을 하러 갈 것이다. 우선 출발 전에 나는 헨리에게 양가죽 옷을 입히고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처럼 가장할 것이다. 아무도 캠프에서는 개를 가질 수 없다는 규정은 없으니까. 만약 누군가가 개와 함께 있는 나를 본다면 그냥 누가 개를 가져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개와 잠깐 장난을 치다가 언덕 위로 공을 던지는 척하는 것이다. 그때 헨리는 출발하는 것이다. 그는 네 발로 뛰어가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공을 쫓아가는 것이다. 헨리는 깃발을 둘둘 않는 지점에 이르면 똑바로 서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꼭대기에 도착하면 모하프 깃발 옆에 우리 팀 깃발을 꽂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헨리는 천천히 내려와 내게로 오면 된다. 아침이 될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성공이 확실했다. 헨리라고 해도 그처럼 쉬운 일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것이다! 난 오후 내내 그 계획을 공들여 손질했다. 그리고 내가 헨리를 데리러 갔을 때 그는 환한 표정이었다. 성공은 보장된 것이다. 알렉산드라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만약 필요한 경우에 그들에게 미리 얘기를 해놓았다. 헨리의 숙소에서 예정된 장소까지 가는 동안 난 헨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털옷을 그에게 입히기 전까지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옷을 입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헨리는 감쪽같이 강아지로 둔갑한 것이다. 순식간에 그는 수풀 속을 헤치며 뛰어다녔다. 이제 더이상 헨리가 아니었다.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믿을 수 없는 변신이었다. 내가 공을 던지면 그는 그 공을 입에 물고 돌아왔다. 그러면 난 그를 쓰다듬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팀의 전령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네 강아지니" ??남북 통일과 자주 독립을 "응." "이름이 뭐야?" 난 밤이 되기 전에 헨리를 언덕 위로 올려보내야만 했으므로 오랫동안 그렇게 꾸물거릴 수가 없었다. 언뜻 떠오른 이름이 스포츠였으므로 난 그 이름을 댔다. 그러자 그애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스포츠, 이리 와. 스포츠, 이리 와......" 헨리는 정말로 강아지 역할을 잘 해내면서 민첩하게 재주를 부리려고 했다. 아! 안 돼...... 난 얼른 소리쳤다. "스포츠, 이리 와!" 하지만 헨리는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일을 망친다면 난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같으니!" 다행스럽게도 크리스티 마골리라는 그 여자애는 그다지 영리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얼마 안 있어 흔히 보는 푸들이 아니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 개는 무슨 종이야?" 난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하나 댔다. "폭스테리어야." "이상한데." 그녀는 좀더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를 오래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이 바보 같은 시도에 대해서 의심이 들기 시작한 순간에 헨리는 갑자기 멈추더니 총명한 그 꼬마는 한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래, 폭스테리어 맞아!" 그 여자애는 뭐든지 아는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보 같은 타입이었다. "내 사촌에게도 폭스테리어가 한 마리 있는 것 같애." "공놀이를 참 잘해. 자 봐!" 나는 언덕을 향해서 힘껏 멀리 공을 던졌다. "자! 스포츠! 어서 가서 공을 찾아서 이리 갖고 와!" 그리고 헨리는 그를 부추기는 크리스티와 함께 달려갔다. 나중에, 모두들 그 생각이 기가 막히다는 걸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헨리는 올라가서 깃발을 꽂았다. 그리고 부둥켜안고 축하의 입맞춤을 해주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날 저녁에는. 그 다음날 아침, 온 캠프는 모하프 산꼭대기에 꽂혀 있는 청색 깃발을 보고 술렁거렸다. 우린 오백 점을 획득했고 헨리는 캠프의 영웅이 되었다. 얼마나 기막힌 작전이며 성공인가. 헨리의 성공은 순식간에 구내식당에까지 이어졌다. 모두들 헨리를 위해서 특별히 축가를 불러주었고 그날 밤의 챔피언이 되었다. 헨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스티븐은 이제 더이상 짖궂은 장난은 걸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헨리 옆에 앉으려고, 헨리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우울했던 헨리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이상 훌쩍거리거나 침대시트를 적시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건 캠프 전체의 화제거리가 되고 있는 오백 점이라는 점수에 버금가는 승리였다. 그리고 나에게도 특별히 좋은 일이었다. 단지 나는 그 승리감을 만끽하기에는 너무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특히 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로비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스테피에 대한 죄책감, 로비와의 관계를 꼬투리로 나에게 접근하고 있는 디나 조이스 때문에 난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제14장 청백전의 마지막 날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스테피와 함께 있었다. 악단은 '우정'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 손을 맞잡고 부르는 대합창이었다. 청백전 마지막 저녁행사를 앞둔 지금, 청팀이 백팔십 점을 앞서고 잇다. '모하프 정상에 깃발 꽂기' 시합 이전에는 우린 백팀에 크게 뒤져 있었다. 마지막 남은 중요한 행사는 오백 점짜리인 '음악의 밤' 행사였다. 이제 우린 백오십팔 점만 따면 이기는 것이다. 노래와 춤 경연이 그것이었다. 난 뛰어난 춤솜씨를 갖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내 파트너로 로비를 제안했을 때 경연대회에 나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너무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로비는 그냥 춤솜씨가 그저 그런 알렉산드라와 한 조가 돼서 경연에 참가했다. 스테피도 춤을 잘 췄는데 켄과 파트너가 되었다. 켄이 춤을 잘 출지도 모르지만 난 그가 춤추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노래 경연은 쟁쟁한 각축전이었다. 우리 팀의 무대장치 또한 근사했는데, 그건 우리가 생각했던 그대로 진짜 만국기처럼 보였다. 난 음악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으므로 그건 뜻밖의 놀라움이었다. 그 좋은 노래를 갖고 참가했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지만 심사위원들은 우리 팀에게 백오십 점을 주었고 백팀은 백 점밖에는 얻지 못했다. 우린 시작이 좋았다. 스무 쌍이 춤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그 중에서 일, 이등을 한 팀이 나머지 이백오십 점을 나눠갖는 것이다. 니나도 상급반 남학생 한 명과 짝이 되어 춤을 추었다. 그애의 춤솜씨는 과히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애는 내 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니나가 내 동생이 아니었다면 매우 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애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 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내 맘에 들었을 스테피와 켄은 근사했다. 그들은 정말 매력적인 한쌍이었다. 실제로도 그렇다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근사해 보여도 사실은 그들은 연인 사이가 아닌 것이다. 심사위원은 시내 무용학교에서 초대해 왔기 때문에 참가자들과 전혀 안면이 없었다. 이등이 먼저 발표되었는데 백팀의 상급반 학생조가 차지했다. 이제 우리 팀은 일등을 차지해야만 했는데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스테피와 켄이 정말로 멋있고 환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괴로웠다. 지금껏 우리 팀이 승리하기를 바랐고 또 팀의 승리를 위해서 분주히 일했다. 하지만 스테피는 내 가장 그건 참 좋은 일일 것이다. 난 내 자신이 아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승리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심사위원들은 내 동생 팀까지 포함해서 다섯 팀을 가려냈다. 니나는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하지만 스테피와 켄은 정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들은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스텝을 밟았다. 그들이 최근에 피나는 연습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난 다시 그들에게서 뭔가를 끌어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의 순간적인 해결이 바로 내 목적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두 쌍이었는데, 한 쌍은 청팀의 상급반 학생이었다. 그러나 스테피와 켄에 견줄 만한 상대는 되지 못했다. 백팀이 승리할 것이다. 그들은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모든 것이 끝났고 백팀이 승리를 거두었다. 청백전은 폭죽처럼 온갖 환성과 발 구르는 소리로 가득 한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 와중에도 난 가능한 로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 성공했다. 매순간 그의 눈길이 내 얼굴에 꽂혔지만 난 지체없이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스테피와 함께 있었다. 악단은 '우정'이라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모두 손을 맞잡고 부르는 대합창이었다. 공식적으로 청백전은 끝난 것이다. 난 캠프도 끝나기를 바랐다. 아니면 적어도 스테피의 생일이 이미 지나갔기를. 그녀의 생일은 삼주 후였고 그건 캠프의 마지막 주가 될 것이다. 스테피는 자신과 로비를 위해서 굉장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나 역시 그 계획에 참가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제15장 그의 맑고 푸른 눈빛이 슬픔으로 흐려졌습니다. 난 미친 듯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지만 해야 할일을 했다는 홀가분이 들었다. 젠장, 해야 할일을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지만 청백전이 끝난 뒤인 지난 열흘 동안 스테피에게 변화가 있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말수가 줄어들었는데, 특히 로비에 관한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그에 대해서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건 어쩌면 나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로비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피하곤 했으니까.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점심식사 후에 우린 숙소에서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 스테피와 나였는데 그때 디 제이가 몸을 비비꼬면서 나타났다. "빅토리아." 그 끔찍한 목소리로 디 제이가 나를 불렀다. "나 목이 아파서 그런데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겠니?" "물론이지." 난 가능한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모두 그 말을 들었다. 그들은 보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오늘하고 내일 나 대신 우편물 배달을 해줄 수 있다면 아주 도움이 될 것 같애." 난 왜 그녀가 수고스럽게 그러는지 몰랐지만 그녀는 말을 마치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어쩌면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치사한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테피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왜 넌 아스피린을 먹지 않는 거니? 목이 아픈 건 대단한 게 아니잖아." "난 너한테 부탁한 게 아니야."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난 빅토리아에게 부탁한 거야. 해줄 거니 말 거니?" 그녀는 표독스런 눈빛으로 내게 쏘아붙였다. "좋아, 난 상관없어." 그리고 나서 나는 스테피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정말로 난 상관없어." 스테피는 네 마음대로 해, 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긴장을 해서 내 반바지 위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죄다 엎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요즘 그 멋진 남자친구하고는 어떻게 지내니?" 디 제이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스테피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 자리를 얼른 빠져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분홍색 매니큐어를 뚝뚝 흘리면서 숙소를 빠져나왔다. 나는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중간쯤에 와서야 걸음을 늦췄다. 난 공갈 협박하는 디 제이에게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영화에서처럼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협박하는 데 능숙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만약 디나 조이스 입장이라면 나는 도저히 상대방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디나 조이스처럼 못되게 굴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난 솔직히 그런 일을 하는게 거북할 텐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공략했다. "토리!" 돌아보지 않고도 난 그렇게 나를 부를 수 알고 있었다. 난 일 주일 이상이나 그를 피해 다니는 데 성공했었다. 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뒤에 뒤돌아보았다. "안녕." 그는 나를 붙잡았다. "얘기할 게 있어." "나 굉장히 바쁜데, 우편물을 고르고 또 그리고 나서는, 저기..... 잘 모르겠어....." 갑자기 나는 말문이 막혀버리자 사실대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난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건 끔찍한 실수였고 난 그 모든 일이 후회스러워."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그의 맑은 눈빛에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그래서 너랑 얘기를 하려는 거야." "우리에 대해서?" "아니,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겠어. 하지만 스테피에게 솔직하게 내 감정을 얘기해야만 하겠어." "뭐라고 얘기할 건데?" "글쎄. 그냥 사실대로." "네가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난 내가 스테피를 사랑했었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우린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내 마음을 붙잡기는 힘들었어." "다시 만났을 때 전같은 감정이 생기지 "그래, 맞아. 널 보기 전에 이미 그랬어. 물론 아직도 그녀가 맘에 들긴 하지만 전같진 않아." 그건 대단히 놀랄 만한 얘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돼서 조금은 위안이 됐다. 내가 그동안의 심정을 털어놓았더니 그는 내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스테피를 버린 건 자기였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난 처음으로 로비와 함께 그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내 감정 때문에 불편해 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친절했고 또 스테피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나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않았지만 내가 그의 가슴속에 사랑의 파문을 일으킨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상, 가령 결혼까지 꿈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이상의 발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으니까. "난 네가 나와 있었던 일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뜻이야?" "넌 어쩌면 단순하게 이끌린 경우가 하도 많아서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 거야." "난 너를 알고 나서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어." "나도 그랬어. 네가 수영장에서 보조로 일하던 그 주에......" "그땐 정말 끔찍했어, 안 그래." 그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그는 나를 사로잡고 내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난 그때 단 한순간도 네게서 눈길을 뗀 적이 없었어. 네가 온통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 난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자제해야 한다고 타이르곤 했지. 미칠 지경이었어." 그의 시선이 나를 놓아주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심각한 표정을 풀어버렸다. "하루 더 비가 왔다면 난 익사하고 말았을 거야." "운이 좋았네." 난 너무 행복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에 빠뜨렸을 거야." 우리는 후후 웃었는데, 그는 다시 심각해졌다.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잘 모르겠어. 난 내 자신과 싸우고 있었던 것 같애. 그런데 너는?" "난 그러고 싶었어. 하지만 속으로 끝없이 생각했지. 만약 내가 착각한 거라면? 그리고 네가 조금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알겠어.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거든." "그 심정을 잘 알겠어. 난, 너랑 제일 친한 친구의 남자친구인데 네 환심을 사려고 들었으니까! 넌 어쩌면 내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도 몰라." "문제는, 내가 절대로 그러지 "그럼 이젠?" "이젠 달라. 하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어. 모든 게 지긋지긋해." 그리고 난 그에게 어느 정도 끔찍한지 얘기했다. 매번 그를 볼 때마다 얼마나 괴로운지 이제는 스테피와 단둘이 있는 순간에도 그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고 말이다. "난 이제 어떤 방향으로든지 선택을 해야만 해." "어느 방향일지 나는 알아." "말해 봐." "난 아닐 거야." 그가 그 말을 한 순간 난 그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상관없어. 내가 난 그녀에게 고백을 해야만 해." "그건 끔찍해. 스테피는 몇 주 전부터 생일파티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 후로 미룰 수는 없어? 로비." "안 돼, 그럴 순 없어. 난 스테피에게 거짓말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 진실을 말해야만 해." 그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로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예전에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난 그걸 그에게 말하려고 애썼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너랑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다보니까 조금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애.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아닌 척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건 옳은 일이 아니야." 문제를 떠나서 내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정직과 성실함 등에 대해서 얘기하면 허튼소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사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를 배신하면서 원하는 걸 얻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난 로비가 정말로 아주 다정다감한 성격이며 또 스테피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디나 조이스하고는 얘기해 봤니?" "아직. 하지만 난 빨리 무슨 수를 내야만 하겠어. 정말 끔찍해." 그리고 디나 조이스가 최근 나한테 하는 그런데도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따끔한 맛을 보여줘." "농담하는 거야? 도저히 건드릴 수가 없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애야."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어.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내 생각이 바로 그거야. 하지만 넌 디나 조이스를 잘 몰라서 그래. 아! 깜빡 잊고 있었네. 그녀가 부탁한 우편물 배달이나 하러 가는 게 낫겠어. 안 그러면 난 끝장이야." "다시 만나게 될까?" 내가 일어서려는 순간에 그는 내게 물었다. "넌 나를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잖아." "난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 그 눈부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난 그와의 짧은 사랑을 영원히 마음속에 기억하기 위해서 할 말이 한마디밖에 없었다. "아니야.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나 역시 유감이야." 그는 실망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편지를 쓴다면?" "편지를 쓴다면 뭐?" "나한테 답장 써주겠니?" "아니." 나는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얼른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도 난 편지를 쓸 거야." 난 그를 한번만 쳐다봐도 다시 처음 만나던 순간으로 되돌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다져먹어야만 했다. "나 가봐야 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보지도 않고 사무실 쪽으로 얼른 발길을 돌렸다. 난 미칠 듯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지만 난 해야 할일을 했다고 위로했다. 젠장, 해야 할일을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16장 잔인한 열여섯 살 여름 "넌 누군가를 빼놓았어." 그녀는 정말로 당황하는 눈치였다. "누구?" "나." 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우편물을 분류하는 데만도 반나절이나 걸렸다. 모든 우편물을 돌릴 준비가 되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이미 일을 끝낸 뒤였다. 난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몽롱한 상태에서 우편물을 돌렸는데, 정신이 든 것은 헨리의 숙소에서였다. 청백전 때의 커다란 활약,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새 사람이 된 것 같은 헨리는 늘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안녕, 빅토리아!" 헨리는 인사하면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기를 추종하는 두 명의 친구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헨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잘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된 일은 스티븐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다. 헨리가 새로운 리더였다. 사람들이 개로 변장했던 얘기를 계속 화제를 삼은 한은 말이다. 난 그 얘기를 벌써 사백 번은 더 해주었는데도 꼬마들은 여전히 해달라고 졸랐다. 사실 난 그 빛나는 무용담을 들려준 게 좋았는데, 일은 아주 유쾌한 일이었다. 꼬마들은 나를 현관 앞 계단으로 데리고 갔고 난 헨리를 무릎 위에 앉히고 다시 그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었다. "자 얘들아, 이제 난 가봐야 돼. 너무 늦었어." "어떻게 헨리는 다리를 들 수가 있었죠?" 물론 나는 이 질문에 이미 대답을 수없이 해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처음하는 질문처럼 다시 물어보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헨리, 한번 보여주렴." 그러면 그는 순식간에 다시 스포츠로 둔갑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다녔다.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헨리에게 일어난 변화가 근사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물론 헨리에게는 아주 잘된 일이지." "그런데,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쟤들을 좀 봐." 그는 네 발로 기어다니는 시늉을 하고 있는 세 명의 꼬마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늘 개 짖는 소리를 내는 걸 빼고도 무슨 사냥개들을 모아놓은 집에 와 있는 것 같거든......" "그럴 만한 가치가 있죠. 헨리는 완전히 나았잖아요." "농담하는 거야? 전보다 더 나빠졌는데." "그럼 아직도 침대에 오줌을 싼단 "매일 밤 그래. 그런데 이제 그는 위대한 스타가 됐기 때문에 다른 녀석들도 그 짓을 따라한다고. 마치 열대림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애. 아주 고마워." 나 어깨를 들어 보이면서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얼른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래도 난 그 사건이 끔찍한 여름 내내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놀랍고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여름에 대해서 난 유감이 많은 디나 조이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묘안이 있었다. 그건 정말로 가망없고 어쩌면 어리석고 심술궂은 방법이었지만 그녀에게 꼭 맞는 방법이었다. 로비가 내게 그녀의 약점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었다. 난 결정적인 약점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않으면 그녀는 모든 걸 스테피에게 일러바치고 말 것이다. 난 정말로 스테피가 로비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가 그녀와 절교하려는 참인데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심한 충격이리라. 만약 스테피가 로비와 나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우리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난 정말로, 절대로 그걸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온 직후에 디나 조이스가 내게로 다가왔다. "있잖아, 네 가죽 재킷을 하루 더 입었으면 좋겠는데 괜찮지?" "안 돼." "뭐라고?" "안 된다고 말했어." "정말이야?" 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는 게 즐거웠다. 그녀는 분개했지만 신중했다.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물론이야." 한순간, 그녀는 몹시 놀라는 눈치였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이야? 지금 한 대답이 큰 실수라는 걸 잘 알 텐데?" 그녀는 다시 쌀쌀해졌고 난 괜히 그녀를 건드렸다고 후회할 뻔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정면 승부는 해야만 한다. "정말이야." "좋아." 그 얼음같이 차가운 계집애는 미소를 지으면서 내 옷을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리자에게로 다가갔다. "스테피 봤니?" "응." 리자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한 시간 전에 로비를 만나러 갔어. 금방 돌아올 거야." "고마워." 그녀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나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여기서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러렴." 영문도 모르는 리자는 흡혈귀 같은 여자애와 나만 달랑 남겨놓고 나가버렸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나는 오늘 오후부터 줄기차게 그 계획을 구상한 뒤로, 수없이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지금까지는 내가 상상하던 대로 진행되었다. 만약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과 남은 여름 내내 그녀의 실크 블라우스를 빌려 입게 될 거라는 생각을 새로 추가한 걸 빼고는 말이다. 물론 그녀는 내가 미치지 않았나 하고 이상하게 바라보면서도 약간은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내가 비장의 카드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으로 짐작했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난 그게 재미있었다. 난 그녀가 머리를 굴리도록 내버려두었다. 난 아주 교묘하게 그녀의 약을 살살 올렸다. 나는 몹시 거만하게 그녀는 내가 그토록 침착한 걸 보고 초조해졌다. 마침내 디나 조이스는 굴복하고 말았다. 난 이제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난 사실 역사상 처음으로 디나 조이스를 보기좋게 물리치게 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 식으로 진행ㄷ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서서 잘 빠진 엉덩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디나 조이스에 맞서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만약 네가 스테피에게 나와 로비 얘기를 한다면 난 네가 엄지손가락을 빤다는 사실을 소문내고 말 거야." "그래, 알았어." 가능한 침착하게 바닥에 집어던진 가죽옷을 다시 집어서 조심스럽게 내 침대 끝에 올려놓더니 데이비스 박사처럼 차가운 미소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곤 몸을 홱 돌려 숙소를 나가버렸다.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녀는 졌는데도 이긴 사람 같았다. 오히려 난 그녀 뒤를 쫓아가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미국에서 제일 형편 없는 협박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의 버릇을 고쳐주었던 것이다. 거만하게 행세하던 디나 조이스를 혼내주었던 것이다. 그건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환상적이고 용기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아무도 이 사실을 결코 모를 거라는 사실이다. 들어왔다. 그녀는 어디 아픈 것 같았다. 얼굴은 눈만 빼놓고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부어 있었다. 심하게 울었던 것이다. "스테피......" 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 맙소사, 난 우리들 사이에 존재해야만 하는 거짓말들이 얼마나 싫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내 침대에 걸터앉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었다. 내 마음의 한쪽이 파도에 스러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니?" 난 그녀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스테피는 흐느끼면서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로비와의 말을 듣고 중간중간 스스로를 나무라고 친구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준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지면서도 놀라는 척해야만 했다. 난 가능한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그녀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내가 함께 슬퍼한다는 걸 알았다. 나 역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스테피가 흐느끼며 말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날벼락이나 다름없어." 난 묵묵히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스테피는 자신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얘기했고 난 실연의 상처에 절망하고 있는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화가 난 듯했다. 난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 생각엔 딴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애." "설마, 그럴 리가."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사실이야. 토리, 분명 딴 여자애가 생긴 거야. 그리고 난 누군지 알 것 같애. 넌 누군지 알겠니?" 난 가슴속에 비수를 맞은 듯 굳어졌다. "아니야, 모르겠어." 난 너무나 떨려서 아니야, 라는 짧은 말도 잘 발음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고개를 가로젓는 일뿐이었다. "알렉산드라야." "누구라니? 우리의 영원한 친구처럼 행세했던 알렉산드라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니?" "그럴 리 없어." 난 알렉산드라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해." "그녀가 아니야." 하지만 스테피는 내 말에 개의치 않았다. "젠장, 얼마나 치사한 짓이니. 물론 나랑 제일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우린 여름에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말이야. 알이 그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알은 아무 짓도 안했을 거야." "그럼 다른 사람 누구? 디 제이? 로비는 디 제이를 싫어해. 그리고 실제로 자매는 구별하지 못해. 그러니 다른 사람은 없어." 자,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디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분명히 로비도 입을 다물 것이다. 난 무사할 것이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캠프는 일 주일밖에 남지 않았고, 알렉산드라는 코네티컷으로 떠날 것이고 우린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진실을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스테피와 나는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사실을 얘기해야만 했다. 결과는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었다. "넌 누군가를 빼놓았어." 그녀는 정말로 당황하는 눈치였다. "나." 난 지금껏 한번도 그 순간의 스테피의 표정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닌가 하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어안이 벙벙해진 채 나를 쳐다보았다. 그 후에는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난 그녀에게 어떤 변명조차 할 수 없었는데 그녀가 울음을 멈추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로 그녀는 내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열여섯 살이 된 올 여름은 내 일생에서 제일 끔찍하고 견딜 수 없이 잔인한 여름이 될 것 같았다. 제17장 캠프의 마지막은 아름다웠습니다 난 언니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언니 같은 사람이 내 언니라는 게 기쁘다는 말을 하려고. 그 모든 일은 남은 열흘 동안에 일어났다. 비록 스테피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알고 있는 듯했다. 로비와 스테피가 헤어지고 나서 나와 얘기를 하지 않는 스테피를 보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디 제이는 입도 뻥긋하지 피했다. 난 정말로 놀랐지만 그걸 이용할 방법이 없는 게 유감이었다. 사실 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난 협박꾼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난 내가 하루아침에 끔찍한 괴물이 된 것 같았다. 조금도 스테피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정말로 스테피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내가 필요한 것 같지 않았다. 스테피는 대부분의 시간을 알렉산드라와 켄 어빙과 함께 보냈다. 난 켄 어빙과의 관계가 단순한 반작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스테피는 로비와의 결별 후 그렇게 빨리 심각한 관계에 자신을 내던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바라보던 것처럼 스테피를 바라보았다. 난 더이상 로비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건 내가 사랑의 상처에서 치유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난 여전히 끔찍하게 괴로웠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전에는 내내 로비 생각만 했지만 이제 내 머릿속에는 스테피 생각 뿐이었다. 나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구에 대해서는 로비와의 경우에서처럼 모르는 게 없었지만 스테피에 대해서는 달랐다. 그녀는 십 년 이상이나 동고동락을 한 가장 절친한 친구였는에 이제 그녀는 나를 미워하게 된 것이다. 그건 내 마음을 아주 아프게 했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난 구토를 느꼈다. 그건 소름끼치는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로비가 나한테 편지를 쓴다고 해도, 나를 사랑하는 그를 생각하는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정말로 편지를 쓴다면 나는 그에게 답장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난 도저히 구제불능 같았다. 스테피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난 로비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정말 미치광이들의 삶이었는데 바로 내가 그 삶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스테피가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 궁금했다. 그녀는 분명 나에 대한 감정이 더욱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이제 스테피는 눈이 뜨인 사람처럼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와도 친구가 되었다. 것이다. 난 그녀가 그러는 척할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보다 더 빨리 상처에서 회복된 것 같았다. 어제 나는 그녀가 심지어 로비와 얘기를 나누는 것도 보았다. 난 어제 마지막으로 로비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여전히 다시 만나자고 고집했다. 나에겐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난 여전히 로비 와그너가 정말로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어쩌면 스테피가 말했던 것처럼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누구도 그 정도로 완벽하진 못할 것이다. 난 스테피가 더이상 그를 전처럼 근사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로비와 내가 서로 모르는 타인처럼 지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없어서 그게 제일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캠프의 마지막은 아주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떠나고 싶어 안달인 나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카르토파 부인과 데이비스 박사는 일어나서 작별연설을 했는데 사실 데이비스 박사는 옆에서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카르토파 부인은 모두에게 즐거운 겨울방학을 기원하면서 내년에 다시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모든 캠프의 학생들이 우렁차게 '캠프 찬가'를 불렀고 박수와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난 그들이 벌금목록을 읽기 전까지는 과히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백육십 달러의 적잖은 액수의 월급 중에서 내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파란만장한 여름이었다! 한 가지 유쾌한 기억은 헨리 뿐이었다. 난 그 울보 꼬마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헨리는 정말로 예전보다 명랑해졌고 난 그의 변화가 아주 자랑스러웠다. 여름 내내 아르바이트에서 얻은 가장 반짝이는 보석처럼 이 캠프촌의 내년 여름을 밝게 비출 것이다. 서로 껴안고 입맞추고 겨울 동안 잊지 말고 만나자는 이별식이 곳곳에서 벌어지자 캠프촌은 절정을 이루었다. 헨리는 정말로 특별한 꼬마였다. 나는 새로 사귄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차를 타러 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꼬마 영웅은, 한 손에 젖은 시트가 담긴 비닐가방을 들고 있었다. 것이다. 내가 숙소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작별인사를 하느라고 나가고 없는 것 같았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난 거의 혼자 지냈으니까. 난 여름 내내 쓰지 못했던 편지나 엽서를 쓸 시간이 많았지만 너무 늦어서 난 그 우편물들을 직접 갖고 가야 할 판이었다. 니나가 왔을 때 난 짐을 꾸리고 있는 중이었다. "왜 온 거야?" 가능한 빨리 용무를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내 동생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니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대답이 없었다. "좋아, 나한테 뭘 빌려 가고 싶은 거야?" "아무것도 빌릴 거 없어." "그럼, 니나. 무슨 일이야. 난 바빠." 그러자 니나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난 단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녀는 천천히 문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난 언니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언니 같은 사람이 내 언니라는 게 기쁘다고 말을 하려고." 그애는 단숨에 그 말을 하고는 이상했다. 니나의 느닷없는 그 말이 눈물이 핑 돌게 했다. 적어도 아직도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 누군가가. 내 동생이라고 해도 말이다. 니나의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난 한번도 니나를 따뜻하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 그애는 나보다 먼저 철이 든 모양이다. 그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모두들 내가 우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만이 날 도우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건 무척 그애에게 많은 용기를 요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언제나 그애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내 기분이 좋지 못할 때는 더욱더 그애에게 고약하게 굴었다. 난 가족이란 참 좋은 거라는 하나 있다는 것도 과히 나쁠 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난 옷가지들을 정리하다가 푸른 조끼를 발견했다. 난 그 옷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거의 입지도 않았다. 그래서 짐가방에 넣는 대신에 그 옷을 니나의 방에 두고 왔다. 그애가 없었기 때문에 난 그 옷을 그애의 침대 위에 살며시 놔두고 와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걸 보면서 그애가 느끼게 될 놀라움을 생각하니 난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그 생각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미소를 짓게 할 만큼 나를 위안해 주었다. 제18장 눈물 젖은 미소 "동행이 필요한 거니 뭐니?" 난 고개를 들지 않고도 그 낯익은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물론 필요해." 이제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차에 올라탈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난 아무도 내 옆에 앉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난 마치 다시 어린 소녀가 된 것 같았고 또 편을 가르다가 마지막에 남은 외토리가 된 기분이었다. 금방 눈물이 나올 난 차에 올라탔고 아주 구석자리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애들도 차에 올라타기 시작했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들 동반자가 있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말이다. 난 창 밖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뒤늦게 켄과 함께 차를 타러 오는 스테피의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왔다. 그들은 즐겁게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버스 속에 혼자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행복해 보여서가 아니라 스테피에 비해서 내 자신이 너무 슬펐기 때문이었다. 우린 그토록 오랫동안 단짝이었는데...... 그토록 많은 비밀과 사연들을 나눠가졌었는데 이젠 영영 친구라 할 수 슬픈 날 중의 하루가 될 것이었다. 난 스테피가 차에 올라타는 걸 보자, 고개를 푹 숙였다. 난 그녀가 통로로 걸어올 때 차마 고개를 들어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우는 걸 보이기 싫었기 때문에. 난 내 신발 끝만 응시한 채 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혀로 눈물을 삼켜야만 한다는 건 정말로 너무 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 모두들 내가 우는 걸 알게 되고 말 것이었다. "동행이 필요한 거니 뭐니?" 난 고개를 들지 않고도 그 낯익은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물론 필요해." 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스테피에게 눈물 젖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옷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건 열여섯 살 숙녀가 하기에는 아주 조잡한 행동이었지만 친한 친구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