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최후의 도박 지은이: R.파커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작가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제 21 장 제 22 장 제 23 장 제 24 장 제 25 장 제 26 장 제 27 장 제 28 장 제 29 장 제 30 장 ⊙ 작가소개 - 1971년 보스턴 대학을 졸업 - 하드 보일드(非情派)의 3대 작가인 더쉴 해미트(Dashiel Hammett, 미국, 1894~1961), 레이몬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미국, 1888~1959), 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 미국, 1915~1983)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땀. - 1973년 전통적인 사립탐정소설인 첫번째 작품 <갓울프의 원고(The Godwulf Manuscript)> 발표 - 1974년 폭력적인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신이 구한아이 (God Save the Child)> 발표. - 1975년 이후, <최후의 도박(Mortal stakes, 1975), <약속의 땅(Promised Land, 1976)>, <유다의 산양(The Judas Goat, 1978)> 발표 - 1976년 미국추리작가협회상(에드거 앨런 포상, MWA賞) 수상 - 1980년 <레이첼 월리스를 찾아라(Looking for Rachel Wallace)> 발표 - 1984년 <고별(Valediction)> 발표 제 1장 여름이라 레드 삭스 팀에게는 편한 게임이다. 마티 러브가 완전히 안정된 투구로 뉴욕 양키스를 요리하고 있었다. 나는 구장에 있었다. 스탠드 옥상의 자리에서 커다란 종이 컵으로 밀러 하이 라이프를 마시며 땅콩을 깨물면서 한껏 즐기고 있었다. 사실은 즐기고만 있는 처지는 아니다. 일하러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즐기면서 일하게 되는 때도 있는 법이다. 마음먹고 야구 구경을 하자면 펜웨이 파크보다 나은 구장은 없다. 스탠드가 그라운드와 가깝고, 펜스는 희망을 안겨주는 푸른 녹색, 흰 유니폼의 젊은이들은 진짜 틀림없는 천연의 잔디 위에서 경기를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하늘 아래, 기온도 자연 그대로이다. 인공 잔디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아스트로돔의 둥근 지붕도 없다. 에어컨 장치도 없다. 이미 오랫동안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텍사스 사람들도 없다. 인생에서는 순응한다는 것이 소중하다. 게다가 맥주 맛 또한 좋다. 내가 보아온 중에서 최고의 투수는 샌디 커팩스이고 그 다음이 마티 러브다. 러브는 커팩스처럼 왼손 투수지만 체격이 크다.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할 그 순간에 갑자기 휘어져 들어오는 멋진 슬라이더도 있다. 내가 종이 봉투에 손을 넣어 하나 남은 땅콩 껍질을 까고 있는데, 그가 그 멋진 슬라이더를 힘껏 새먼 맨슨을 향해 던져서 8회 양키스의 공격은 끝났다. 공수 진영이 바뀌는 사이에 나는 또 땅콩과 맥주를 사러 갔다. 스탠드 지붕 위에 설치된 자리는 본래 레드 삭스 팀이 요 먼저 먼젓번에 우승한 1946년, 월드 시리즈 때 기자석을 부득이 넓혀야 할 필요가 있어서 만든 것이다. 1루에서 3루 사이의 메인 스탠드 지붕 위에 설치되어 있다. 월드 시리즈가 매년 반드시 보스턴에서 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므로 기자석이 일반 관람석으로 개조되었다. 메인 스탠드의 콜타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방수 지붕 위에 판자로 만들어놓은 통로를 지나서 그리로 가면 땅콩, 맥주, 핫도그, 프로그램 등을 파는 매점 하나와 화장실이 있다. 그 어느 곳에나 판자로 통로가 이어져 있다. 붐비는 적도 없고 대체로 한적한 편이다. 자리에 돌아오니 삭스의 공격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으며, 나는 앞에 설치되어 있는 난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느긋한 기분으로 관전했다. 6월 하순, 눈부신 햇살, 따뜻한 날씨, 야구, 맥주, 땅콩. 이 멋진 자연이여. 다만 한 가지 불편한 것은 오른쪽 엉덩이에 차고 있는 권총이 배기는 것뿐이었다. 총의 위치를 바꾸었다. 야구 구경은 입체 슬라이드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강조되어 보인다. 잔디는 여느 때보다 더욱 짙은 녹색이다. 유니폼의 흰색이 실제보다 훨씬 두드러져 보인다. 주변이 막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점이 좁혀진다. 어쩌면 빠른 이닝에 맥주를 여섯 잔이나 여덟 잔쯤 마셔대는 버릇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건 어찌되었건 레드 삭스의 센터필더인 알렉스 몬타이어가 8회말에 홈런을 때렸다. 9회에 러브가 조그만 램 촙(lamb chops = 뼈가 그대로 붙어 있는 간단한 스테이크)을 커다란 부엌칼로 자르듯이 간단히 양키스의 타자들을 아웃시키고 시합을 끝냈다. 수요일이라 관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밀치락거리며 남의 발등을 밟는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스탠드의 구경꾼들 옆을 지나 아래 쪽으로 내려갔다. 아래 쪽에는 어둡고 쓰레기가 꽤 널려 있었다. 수십 개나 되는 돌돌 말린 프로그램이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매점 녀석들이 어느새 철제 셔터를 내려놓아, 롤톱 책상을 나란히 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부자(父子) 관객들이 나가고 있다. 짤막해진 여송연을 입에 문, 주름투성이 얼굴의 아일랜드계 노인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돌아가는 것을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땅콩 껍질들을 밟으며 걸었다. 저지 가(街)로 나와서는 오른쪽으로 꺾었다. 야구장 옆에 사무실 빌딩이 있으며, 두꺼운 유리로 전면이 가려진 예매권 창구와 '보스턴 아메리칸 리그 베이스볼 클럽'이라고 써붙인 조그만 문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거무죽죽한 나무 층계가 있고, 벽은 엷은 녹색의 라텍스가 칠해져 있다. 다 올라가니 거기에 또 문이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홀은 같은 엷은 녹색의 라텍스 칠에 짙은 녹색의 카펫이 깔려 있고, 뻣뻣한 머리칼을 푸르게 물들인 접수담당 아가씨가 있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 "스펜서라는 사람이오. 해럴드 애스킨을 만나고 싶소." 나는 푸타켓의 2군에서 막 들어온 쇼트 릴리프 투수 후보 같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속아넘어가지 않은 것 같다. "면회약속은?" 그녀가 말했다. "있소." 그녀가 인터컴(내부통화장치)에 대고 몇 마디 하고 대답을 듣고는 말했다. "들어가시죠." 해럴드 애스킨의 사무실은 좁고 검소했다. 구석에 녹색의 파일 캐비닛이 둘 나란히 놓여 있고, 문을 마주보고 노란 전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조그만 회의용 테이블, 등받이가 직각인 의자가 둘 있었으며, 창문으로 브루클린 가(街)가내다보였다. 애스킨은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멋을 낼 줄 모르는 남자였다. 작은 체구가 약간 살찐 편이고, 머리 꼭대기가 대머리였다. 남아 있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짧게 깎았다. 얼굴은 둥글고, 볼은 빨갛고, 두 손이 통통하게 살쪄 있었다. 과거 마이너 리그의 유격수로서 푸에블로에 소속되어 있던 시절, 어느 해인가 3할 2푼 7리를 때렸다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은 옷을 벗긴 산타 클로스처럼 보인다. "이리로, 스펜서 씨. 시합은 재미있었소?" "예, 공짜 구경 고맙습니다." 등받이가 꼿꼿하게 세워진 의자 하나에 앉았다. "그런 건 쉬운 일이지. 마티는 흔해빠진 보통 투수와는 좀 다르지 않소, 어땠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스킨은 의자에 기대앉아 왼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양쪽 입가를 문지르더니 아랫입술을 따라서 두 손가락을 한데 모았다. "내 변호사가 당신은 믿을 수 있다고 하더군."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변호사는 모르지만. 애스킨이 다시 입가를 문질렀다. "믿어도 좋겠소?" "믿고 말고도 없지요." "당신이 맡든지 그만두든지 그걸 떠나서, 여기서의 이야기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겠소?" "좋습니다." 애스킨은 여전히 아랫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묻은 것이 없었는데. "당신에게 전화해서 내 변호사가 뭐라고 했소?" "당신이 오늘 시합이 끝난 뒤에 나를 만나보고 싶어한다면서, 그전에 시합을 보고 싶으면 저지 가의 기자출입구로 들여보내도록 일러두겠다고 하더군요." "수수료는 얼마요?" "하루 100달러와 경비. 그러나 이번 주에는 특별 서비스를 하고 있소. 곤봉 사용법을 무료로 가르쳐 드리지요." "당신은 임기응변에 능하다고 하더군." 애스킨이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말도 변호사가 했소?" "그렇소. 그는 주경찰의 힐리라는 형사에게 당신에 대해 물어본 모양이오. 아마 힐리의 여동생이 내 변호사 아내의 남동생과 부부간일 거요." "애스킨, 당신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군요. 나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써보기 전에는 확인할 수가 없잖습니까. 나는 면허를 가진 사립탐정이오. 형무소에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소. 게다가 개방적이고 솔직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요. 여기 앉아서 한동안 당신에게 내 얼굴 구경을 시켜도 좋소. 시합을 공짜로 구경한 빚이 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내게 용건을 말하든지, 아니면 돌아가라고 하게 되겠죠?" 애스킨은 아직도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양쪽 볼이 더 빨개지고, 이제는 아랫입술에 물집이 생길 만큼 문질러대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왼손을 멈추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알겠소. 당신 말이 옳아.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내가 누구에게 의지가 된다니 기분이 좋군요." "마티 러브가 도박조직과 내통하고 있는지 그걸 알아내 주어야겠소." "러브." 순간적으로 되받아치는 것이 내 장기 중 하나다. "그렇소, 러브. 러브가 가끔 누군가와 미리 짜고 엉터리 시합을 한다는 소문이 있소. 소문이 아니라 냄새, 어쩐지 그런 냄새가 나는 것 같거든." "마티 러브?" 마음에 드는 대사는 가끔 써먹고 있다. "알고 있소. 믿기 어려운 일이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믿지 않소.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오. 짜고 하는 시합이라는 소문만 갖고도 야구계에 어떤 영향을 가져다 주는지 당신도 알 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러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돈을 번다는 이야기로군." 그 말을 듣기만 하고도 애스킨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책상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렇소. 마티가 던질 때마다 삭스의 상대에 대한 내기의 율이 올라가는 거요. 러브를 등에 업고 그 오른 만큼 벌어들인다면 큰 돈이 되지." "러브는 절대로 지지 않는데." 내가 말했다. "작년엔 어땠습니까, 25승 6패?" "그렇소. 그러니 그가 진다면 큰 돈벌이가 되지. 게다가 설령 그가 지지는 않더라도 가장 실점이 많은 이닝에 내기를 걸면 어떻게 되겠소? 마티는 그 이닝에서 조금 손을 늦출 수가 있지요. 우리는 득점이 적어요. 투수와 수비의 다리로 이겨온 팀이라오. 마티는 시합에 지는 데 별로 많은 점수를 주지 않아도 되고, 또는 가장 실점이 많은 이닝이라고 해도 상대에게 별로 점수를 줄 필요도 없지. 잘만 걸면 마티는 그 짓을 자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렇군, 분명히 그래. 러브의 협조를 얻을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유리한 투자가 되겠군요. 그러나 누군가가 그의 협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걸 잘 모르겠소.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는 겁니다. 또,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런 일이 눈에 띄고. 마티가 아주 중요한 때에 래지 잭슨에게 방심한 공을 던지는 거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아마 사이 영이라도 그랬을 거요.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는 동안에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지금 나는 그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소. 아마 착각이겠지.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내 처지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확인을 해야만 해요. 이것은 단지 팀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마티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오. 그는 아주 좋은 젊은이요. 만일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그는 파멸되고 말아요. 그는 야구계에서 추방당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걸 증명할 필요조차도 없지. 그는 도쿄 자이언츠에서 던지지도 못하게 돼요." "사립탐정에게 그에 대한 조사를 맡긴다면 문제를 비밀로 해두는 것이 어려울 텐데요?" "알고 있소. 당신은 비밀리에 조사를 해야만 해요. 그렇잖으면 설령 당신이 그의 결백을 입증한다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 점에 관해서 하나 더 묻고 싶습니다. 만일 그가 실제로 그런 짓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지요?" "그때는 야구계에서 쫓아내 버리겠소. 사람들이 최종 점수의 내용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야구계 전체가 붕괴되고 말아요.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상을 확인해야겠소. 절대로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요. 그것도 극비리에." "나는 여러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팀에도 들락거려야 하고, 또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진상을 규명할 수도 없고." "알고 있소. 뭔가 명분 있는 구실을 생각해 내야겠지. 당신은 야구는 하지 않겠지?" "1946년, 바인 가(街)의 호크스에서 타율 2위였소." "배터 박스에 서서 누군가에게 큰 시합용의 커브를 던져달라고 해본 적 있었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있지. 1952년 다저스의 봄 캠프에 참가했을 때, 처음으로 맞는 홍백시합에서 크렘 래바인이 공 열 개쯤을 커브로 던져 주더군. 덕분에 프런트 오피스(미국 프로 야구계의 스카웃, 팜 팀(메이저 리그의 선수육성을 위한 팀), PR, 흥행 등 각 부문의 책임자)에 들어가게 되었지. 그런데 당신은 나이가 너무 많아요." "내딴은 적당히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선수로 육성할 후보로서 말이오." "라이터로는 어떨까요?" 내가 말했다. "녀석들은 기자는 다 알고 있소." "스포츠 기자가 아닌 작가 말이오. 야구에 관한 책을 쓰는 인물 -- 즉, '여름의 사나이들', '여름의 게임' 같은 것들 말이오." 애스킨이 생각해 보았다. "나쁘지 않군. 좋은 생각이오. 당신은 별로 작가처럼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작가에게 일정한 타입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잖소? 됐어. 함께 아래에 내려가서, 당신이 책을 쓰고 있는데 팀에 들락거리며 이것저것 질문하게 될 거라고 모두에게 말해 두겠소. 틀림없이 곧이들을 거요. 그런데 책을 쓰는 일에 대해서 기초적인 상식은 있소?" "좀 읽기는 했지요." "내 말은 작가답게 말할 수 있느냐는 뜻이오. 지금 내가 보기에는 어느 헬스 클럽의 주먹 같은 느낌이 드니까." "보기보다는 점잖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좋소, 잘되겠지. 문젯거리는 별로 없을 것 같군. 하지만 신중하게 해야 돼요. 절대로 신중하게, 알겠소?" "나는 우리 작가들 사이에서 말하는 소위 사려분별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지요. 당신이 여러 사람에게 내어주는 패스나 신분증 같은 것이 있어야겠는데요. 그리고 당신이 밑에 데리고 내려가서 모두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고요." "그래요, 그건 그렇게 할 거요." 그는 나를 보면서 또 아랫입술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과 나 둘만의 이야기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감독, 구단주, 선수들,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소." "당신의 변호사는 어때요?" "그 사람은 구단과는 관계없소. 내 개인 변호사요. 내 개인적인 일로 당신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소." "알았습니다. 팀과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입니까?" 애스킨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늘은 벌써 늦었고. 반은 샤워를 하고 돌아가 버렸을 테니까. 내일이면 어떻겠소? 시합 전에 데리고 가서 내가 모두에게 당신을 소개하지." "그럼, 내일 정오쯤 이리로 오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소. 그런데 쓰기로 되어 있는 책의 제목은 생각해 두었소?" "독자들의 눈을 끌 만한 제목을 생각중입니다." '심미적 야구'라면 어떨까요 ?" "그 제목은 마음에 안 드는군." 하고 애스킨이 말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다른 제목을 생각하기로 했다. 제 2 장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강가를 따라 조깅했다. 산책길 여기저기에 보이는 비둘기에 참새와 찌르라기가 섞여 있었으며, 어린이 놀이터인 모래밭에 쇠박새가 두 마리 있었다. 강에는 보트가 두 척 떠 있었고, 갈색 하이 부츠에 면바지의 아랫부분을 밀어넣은 아가씨가 웰시 코기(웨일스산의 개 종류)를 산책시키고 있었으며, 그 밖에도 조카가 몇 있었다. 강이 휘어진 곳 가까이, 야외음악당을 지난 근처에는 낡은 자색 삭스킨(상어 피부처럼 짠 옷감) 의 양복을 입은 거지가 신문지를 깔고 자고 있으며, 스트로 드라이브가 통근차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말바라 가(街)의 서남쪽 끝에 살고 있으며, 보스턴 대학의 인도교까지 달려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체육대학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웨이트 룸을 쓰는 걸 눈감아준다. 웨이팅을 45분 동안 하고 다시 30분쯤 헤비 백을 쳤다. 그 무렵 교실로 가는 여학생이 몇 명 지나가고 있었으므로 스피드 백을 좀더 신나게 치고 끝냈다. 아무도 내 솜씨에 감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조깅으로 강 하류 쪽으로 돌아가니 이제는 기온이 꽤 올라가 있었으며, 통근차의 혼잡이 최고에 달해 있었다. 5분 전 9시에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에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으며, 혈액순환이 부드럽고 식욕도 왕성했다. 오렌지 주스를 짜서 마시고 커피 포트의 플러그를 꽂아둔 채 샤워를 했다. 9시 15분 지나서 지난번 생일에 수잔 실버맨이 준 빨간색과 흰색 타월 지의 로브(목욕용 가운)를 입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로브는 소매가 짧고 가슴 주머니 위에 골프용 양산 마크와 아놀드 파머 라벨이 붙어 있다. 그것을 입을 때마다 '야호' 하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처음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셰리 주를 넣은 매시룸 오믈렛을 만들어서 그 오믈렛과 빵 종류에 들어 있지 않은 아랍 빵을 먹고, '글로브' 조간신문을 읽으면서 두 잔째를 마셨다. 식사가 끝나자 식기를 세척기에 집어넣고서 침대를 손질하고 외출준비를 했다. 회색 양말, 회색 슬랙스(헐거운 운동용 바지), 검정 로파, 전체적으로 빨갛고 조그만 육각형 무늬가 그려져 있는 달걀색의 팽팽한 니트 셔츠. 홀스터(권총집)를 허리 오른쪽 벨트에 찼다. 회전권총의 짙은 청색 강철이 검게 보이는 홀스터, 회색 슬랙스와 멋지게 어울린다. 갈색 계통의 복장이라면 따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권총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호주머니와 깃가에 빨간 천을 댄 회색 작업복 윗도리를 입었다. 거울 앞에서 복장을 점검했다. 멋지다. 여성 우대일(야구장에 여성 관중을 유치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 아니라 다행이다. 만일 그랬다간 야구장의 여성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말 것이다. 말바라 가에 나왔을 때에는 햇빛이 찬란하고 기온은 28~29℃였다. 한 블록을 걸어서 커먼웰스로 나가서는 저습지(低濕地)를 따라서 펜웨이 파크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관중이 몰려들기에는 아직 좀 이르지만, 시합 전의 분위기가 벌써부터 느껴진다. 땅콩 파는 노인이 낡아빠진 캔버스 천으로 땅콩을 덮은 채 유모차 같은 수레를 밀면서 켄모어 스퀘어로 가고 있다. 한 중년여인이 켄모어 스퀘어 가까이에 있는 소방전 옆에 붉은 갈색 시보레를 세워놓고 트렁크에서 풍선을 팔 준비를 하고 있다. 트렁크 뚜껑을 올리고 뒤쪽 범퍼에다 공기가 들어 있는 철제 통을 세워놓고, 파란색과 흰색으로 된 테니스용 햇빛 가리개를 쓴 남편이 트렁크 안에서 판지로 된 커다란 상자를 열고 있었다. 브루클린 가 근처, 지하철 입구 옆에서는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젊은 남자가 푸른 바탕에 붉은 글씨로 '레드 삭스'라고 쓴 조그만 페넌트를 팔고 있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 11시 40분. 켄모어 스퀘어에서 야구장이 보이지는 않지만, 조명탑이 건물 위에 높이 솟아 있으므로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루클린 가에 들어서서 구장으로 향하니 옛날이 그리워졌다. 아버지와 나는 양쪽 팀의 내야 수비연습을 보기 위해서 언제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가곤 했었다. 브루클린 가를 두 블록 걸어서 저지 가에서 모퉁이를 돌아 층계 위에 있는 애스킨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열어놓은 가장 아래칸 서랍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 의자를 뒤로 기울인 채 변호사가 작성한 듯한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닫았다. "책 제목을 새로 생각해 냈소, 스펜서?" 옆에 있는 창 하나에 설치해 놓은 에어컨이 윙윙거리고 있었다. "'타자들의 계곡'이라면 어떨까요?" "허튼 소리 그만두시지, 스펜서. 이건 농담할 일이 아니오. 사람들이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도록 해놔야 한단 말이오." "'여름의 공'은 어때요?" 애스킨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토해 내고서, 붙어 있는 쇠파리를 쫓듯이 고개를 흔들더니 서랍을 발로 차서 닫아버리고는 일어섰다. "그만, 됐소. 갑시다." 둘이 층계를 내려가면서 기자용 패스를 주었다. "지갑에 넣어둬요. 이거면 아무데고 들락거릴 수 있소." 우리가 지나갈 때 A 게이트의 남색 모자를 쓴 안내원이 말했다. "컨디션은 어때요, 해럴드?" 매점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녹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튼튼해 보이는 리어카에 맥주를 몇 박스 쌓아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라커 룸(체육 시설-클럽의 탈의실)으로 들어갔다. 나는 먼저 실망부터 했다. 아주 흔해빠진 라커 룸이었기 때문이다. 위쪽에 이름표가 붙은 문도 없는 보통 로커였으며, 선반이 있고 앞에 걸상이 놓여 있었다. 오른쪽에 트레이닝에 쓰이는 부분에는 물이 소용돌이치는 욕탕, 마사지 테이블, 위쪽 유리문 안으로 테이프와 리니멘트 세제 등이 보이는 의료품 캐비닛 같은 것이 있다. 흰 T셔츠에 흰 면바지를 입은 사람이, 팬티만 입고 테이블에 걸터앉아 여송연을 피우고 있는 단단한 체격의 흑인 왼쪽 발목에 테이프를 감아주고 있었다. 선수들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인 땅땅하고 털이 붉은 젊은이가 로커 저쪽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봐요, 레이, 오늘도 불펜에 넣어주겠습니까? 홈 게임 때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가랑이를 벌리고 보여주는 아가씨가 있거든요." 로커 뒤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지난 주 디트로이트에서 파울 볼을 떨어뜨린 건 그 계집애를 찾다가 그랬나?" "그런 소리 말아요, 레이. 빌 디카도 가끔은 떨어뜨린걸요. 내가 아주 어리고 당신이 내 우상이었을 무렵, 당신이 떨어뜨리는 것을 난 한 번 봤다고요." 키가 크고 바싹 마른 남자가 두 손을 뒷주머니에 푹 찌르고 로커 뒤에서 나타났다. 45세쯤인데, 검은 머리를 짧게 깎아서 왼쪽으로 갈라붙여 놓았다. 귀밑털이 없어서, 전기 이발기로 일의 대부분을 끝내버리는 이발소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유난히 햇볕에 그을렸으며, 머리칼에는 새치가 더러 섞여 있었다. 유니폼 속에 수에트 셔츠를 입지 않고, 팔에는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애스킨이 우리 있는 쪽으로 손짓해서 불렀다. "레이." 애스킨이 말했다. "이쪽은 스펜서 씨야. 스펜서, 감독인 레이 패럴이오." 우리는 악수했다. "스펜서 씨는 작가인데 야구에 관한 책을 쓰고 있으시다니까 한동안 우리 팀에 들락거리면서 선수들 몇 사람과 인터뷰 같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내가 조치했어." 패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책이오, 스펜서?" "'서머 시즌.'" 내가 말했다. 애스킨이 한시름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거 괜찮은데." 패럴이 라커 룸 쪽을 보았다. "자, 모두들 들어. 이쪽은 스펜서라는 분이야. 책을 쓰고 있는데, 너희들과 이야기도 하고 메모도 할 거야. 모두들 협조해 주기 바란다." 그는 내 쪽으로 돌아섰다. "잘 왔소, 스펜서. 하나하나 소개를 해드릴까?"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소. 적당히 내 소개를 하면서 돌기로 하지요." "그것도 좋겠군. 나는 이만 실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서슴지 말고 말해 주시오." 그는 자리를 떠났다. "그럼, 지금부터는 혼자서 잘 해보시오. 가끔 연락해 주고." 애스킨이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마사지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는 흑인이 붉은 털을 보고 소리쳤다. "이봐, 빌리, 가랑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조심하는 게 좋아. 이분이 너의 그 일을 책에 써서 샐리가 그것을 읽는 날엔 큰코 다칠 거야." 칼로 베는 듯한 높은 음성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읽어도 아마 믿지 않을 거야." 붉은 털이 내게로 와서 손을 내밀었다. "빌리 카터요. 뚱뚱보가 술에 녹아떨어져서 다음날 못 일어나면 내가 캐처를 대신하죠." 그는 테이블에서 내려와 우리들 쪽으로 오는 흑인을 턱으로 가리켰다. 키가 작은 대신에 옆으로는 굉장히 벌어진 사람인데, 황갈색 지방질이 몸 전체를 덮고 있지만, 그 밑으로는 탄력 있는 굵은 근육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카터와 악수했다. "풍선 껌의 당신 카드는 전부 모으고 있소." 나는 흑인 쪽을 보았다. "당신이 웨스트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경기 보았소?" "아뇨. 블루트 광고방송에서 기억하고 있소." 그는 높은 소리로 웃었다. "손뗀 적 없지. 언제나 이닝 사이에 붙이고 있소." 잠깐 필립 윌슨의 흉내를 내며 손가락으로 딱 하고 소리를 냈다. 로커의 줄 저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봐, 홀리, 리그에 있는 녀석이 너한테 호모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 "대놓고 말하는 놈은 없어." 웨스트가 째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선수의 태반이 준비를 끝내고 2라운드로 나갔다. 엷은 남색의 시어서커(얇은 면직물 종류) 양복을 입고 각이 진 선글라스를 쓴 키가 작고 바짝 마른 사나이가 라커 룸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다가왔다. "스펜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잭 리틀이오. 삭스 팀의 홍보담당이오. 당신이 여기 있다고 애스킨이 가르쳐 주더군." "잘 부탁합니다." 내가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말하시오. 그게 내 일이니까." "선수들의 이력서 같은 것도?" "물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기자용 자료가 있소. 사무실에 들르면 우리 여직원에게 모두 내주라고 말해 두지." "당신의 그 여직원, 나이가 몇이오?" "밀리 말이오? 모르겠는데. 오랫동안 구단에서 일해 오고 있지요. 여자의 나이는 묻지 않는다오, 스펜서. 그런 짓을 했다가 된통 혼나니까, 그렇잖소?" "그래요, 그 말이 맞소." "갑시다. 덕아웃에 가서 선수를 몇 사람 가르쳐 주겠소. 말하자면 길들이기 안내지, 어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들이기라, 멋진데." 제 3 장 나는 덕아웃에 앉아서 선수들의 배팅 연습을 보고 있었다. 리틀이 옆에 앉아서 연거푸 체스터필드 킹을 피우고 있었다. "저 친구가 몬타이어요." 리틀이 말했다. "1968년, 푸타켓에서 연간 최우수선수였소. 작년 성적은 2할 9푼 3리, 홈런 25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 러브가 외야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윌리 메이즈 흉내를 내느라고 가슴 앞에서 플라이 볼을 잡아가지고는 언더스로로 내야를 향해 공을 돌려보내고 있다. "저 친구는 조니 티버. 스위치 히터랍니다. 저 조그만 몸집을 봐요. 방망이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 같지 않습니까, 어때요?" "약해 뵈는군요." 내가 말했다. "방망이나 제대로 돌아갈까?" "그렇죠? 우리는 그의 글러브에 돈을 내고 있지요. 센터를 강화하라고 늘 레이가 말한답니다. 사실 티버는 수비가 좋답니다, 그렇죠?" "그렇군요." 스탠드의 관중이 불어나기 시작하고, 소란한 소리가 커져 갔다. 양키스가 나와서 방문 팀의 회색 유니폼을 입고 내야연습을 시작했다. 태반이 젊은 선수였다. 모자 아래로 머리칼이 길고, 풍선 껌을 십고 있다. 나보다는 훨씬 젊다. 조니 린 같은 이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 러브가 워밍업 재킷을 입고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저 클립보드(종이끼우개가 달린 메모판)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마티 러브죠." 리틀이 말했다. "어제 던졌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피칭의 기록을 재는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한 친구지요." 리틀이 말했다. "저 사람만큼 인간성 좋은 젊은이도 없을 거요.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지. 야구가 좋아서 견딜 수 없는 거지요. 요새 젊은 녀석들은 대부분 돈이 목적이지만, 마티는 그렇지 않아요. 저렇게 인간성 좋은 젊은이는 없을 거요. 야구가 좋아서 견딜 수 없는 거지." 턱이 여러 겹으로 처진 사나이가 클럽하우스로 통하는 통로에서 나와 덕아웃의 가장 윗단에 서서 다이아몬드를 둘러보고 있었다. 빛이 바래기 시작한 금발이 기다란 것이 정말 현대적인 냄새가 났다. 고급 이발소의 커트가 틀림없다. 뚱뚱한 몸, 붉고 퉁퉁 부은 듯한 얼굴에 날카롭고 뾰족한 코가 튀어나와 있었다. 윗 단추 두 개가 풀어져 있는 붉은 체크 무늬 셔츠는 그가 대식가라는 것을 나타내는 깃발처럼 불룩한 배를 덮고 있었다. 무늬가 들어 있는 남색 슬랙스의 아랫단 폭이 넓고, 번쩍거리는 흰 구두에 놋쇠 버클이 붙어 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내가 리틀에게 물었다. "몰라요? 버키 메이너드인데. 야구중계방송이라면 첫손에 꼽죠. 누군지 몰랐다니. 그가 알면 망신당했을 거요." "팀과 함께 연습하는 경우는 별로 없죠." 메이너드가 연녹색의 여송연을 꺼내어 골고루 타들어가도록 빙글빙글 돌려가면서 꼼꼼하게 불을 붙였다. "조심해요. 그가 뚱뚱한 것에 대해선 아예 입 다무시오. 머리부터 아작아작 십어먹히기 전에." "그가 구장에 있는 동안에 기침은 해도 됩니까?" "당신은 농담을 하고 있지만, 버키 메이너드에게 밉게 보이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요. 그는 방송으로 사람을 매장시켜 버릴 수가 있단 말이오. 정말이라니까." "그는 구단 전속이 아닌가요?" "그렇죠. 하지만 인기가 워낙 대단해서 목을 자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해고시키고 싶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죠." 리틀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덕아웃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도청장치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나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요. 버크는 좋은 사람이오. 자존심이 너무 셀 뿐이지. 하지만 그에게 밉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않아요. 하긴 누구에게든지 밉게 보인다는 것은 손해지. 그렇지 않소?" "지당한 말씀." 리틀은 그 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틀림없이 오늘 중으로 어디선가 써먹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나는 말의 권위자가 된 것 같았다. 메이너드가 우리 쪽으로 오자 리틀이 일어섰다. "여어, 버크, 컨디션은 어때?" 메이너드는 아무 말 않고 리틀을 보았다. 리틀이 꿀꺽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스펜서를 소개하지. 삭스 팀에 관한 책을 쓰고 있네." 메이너드가 내게 눈인사를 했다. "스펜서어." 남부 사투리로 마지막 음절을 길게 끌며, 'R'는 발음하지 않았다. "잘 부탁합니다." 내가 말했다. 메이너드가 기분을 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거야, 버크. 우리의 버크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는 삭스의 책이 될 수가 없지. 그렇잖소, 스펜서. 내 말이 틀립니까?" "옳은 말이야." 리틀이 짧아진 체스터필드 킹의 새것에다 불을 붙였다. 메이너드가 말했다. "좀 지난 다음에 둘이서 방송석에 올라가서 게임을 보면 어떻겠소? 방송 팀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지요." "고맙소." 내가 말했다. "꼭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알아둬요, 난 누가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그런 방송은 안해요. 우리는 게임을 있는 그대로 전할 뿐이라오. 기자들에게 나눠주는 선전문 같은 쓸데없는 소리는 안해요.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손을 빼는 게임을 하는 것이 눈에 뜨이면 우리는 분명하게 손을 뺐다고 지적한다고요, 아시겠소?" "잘 압니다." 메이너드가 나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웨하스처럼 색이 엷고 조그맣고 편편한 눈이 되었다. "거짓말이 아니오. 나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가 그렇게 믿고 있지. 그렇잖나, 잭?" 메이너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틀이 대답했다. "정말 그래, 버크. 그 점은 모두들 알고 있어. 버키는 있는 그대로를 전달한다오, 스펜서. 그러니까 팬들에게 인기가 있는 거지." "스펜서, 언제라도 위로 올라오시오. 잭이 안내해 줄 거요." 메이너드가 여송연을 입 한가운데서 빙글 돌리더니 윙크를 하고는 그라운드로 나가서 양키스의 덕아웃으로 갔다. 이쪽 덕아웃 구석에 있던 빌리 카터가, "고래 발견." 하고 소리치자 메이너드가 홱 돌아서서 덕아웃 안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라이트 쪽 스탠드를 바라본다. 감독인 레이 패럴이 탈의실에서 나와 덕아웃 저쪽 끝에서 라인업을 써넣고 있었다. 그는 카터와 메이너드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메이너드가 다시 1분쯤 덕아웃 안을 들여다보고, 카터는 덕아웃의 기둥 하나에 두 다리를 기대 세우고는 모자 차양 밑에서 라이트의 파울 라인을 보고 있었다. 그는 휘파람으로 '터키 인 더 스트로'를 부르고 있었다. 메이너드가 방향을 바꾸어 양키스의 덕아웃 쪽으로 걸어갔다. 리틀이 멈추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저 바보 같은 카터 녀석, 언젠가는 큰코 다칠 거야. 늘 까분단 말이야. 그리고 일류인 척하고만 있고. 사실은 그 정도의 선수도 아니면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1년에 잘해야 30회 정도란 말이야. 좀더 얌전하게 구는 게 좋을 텐데, 가끔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댄단 말이야." "메이너드가 여기 서서 햇빛을 막고 있을 때, 나도 어쩐지 모비 딕 같은 농담을 하고 싶어지더군요." "메이너드에게 까불다가는 책은 절대로 낼 수 없을 거요. 그것만은 장담하겠소, 스펜서. 거짓말 아니오." 리틀은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지 침통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패럴이 덕아웃의 단을 올라가 라인업 카드를 손에 들고 홈 플레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양키스 감독이 저쪽에서 홈 플레이트 쪽으로 걸어올 때 나는 처음으로 심판들을 보았다. 선수들보다 나이가 들었고 몸이 거칠었다. "나는 방송석에 가보겠소." 내가 말했다. "만일 메이너드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진실이라며 나를 노려보아 내가 죽게 되거든, 그때는 우리 엄마에게 편지로 알려주시오." 리틀은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함께 기자석 입구로 올라가서, 지붕 밑 좁은 통로를 지나 메이너드 마을로 안내해 주었다. 방송실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케이블, TV 모니터, 마이크 코드, 방 안쪽 흰 벽에 붙어 있는 대형 컬러 TV 카메라 등으로 어수선했다. 생중계 광고방송 때문이겠지. 버키 메이너드가 어느 병맥주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실내에는 이미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미네소타 트윈스의 1루수를 하던 덕 윌슨인데, 지금은 삭스의 게임 해설을 맡고 있다. 큰 키에 뼈만 남은 남자로서, 테없는 안경을 쓰고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짧게 깎았다. 방송 테이블에 앉아 통계자료를 훑어보면서 종이 컵에 든 블랙 커피를 마시고 있다. 또 한 사람은 22살쯤 된 젊은이로, 중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에다 금발의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르고, 뒷머리는 귀 근처에서 커트쳐서 오클랜드 애슬리틱스풍의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폭이 넓은 표범 가죽 밴드가 붙은 하얀 사파리 모자에 파일럿 선글라스, 하얀 비단 셔츠의 앞을 하프 제프리처럼 허리까지 열어놓고, 하얀 면바지의 자락을 적갈색 웨스턴 스타일의 부츠에 밀어넣어 놓았다. 놋쇠 장식용 대갈못이 붙어 있는 가죽 벨트를 차고, 오른쪽 손목에는 구리로 된 팔찌를 끼고 있다. 빨간 마직의 감독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방송 카운터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는 껌을 십으면서 '내셔널 스타' 잡지를 읽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니까 윌슨이 얼굴을 들었다. "오, 잭, 아이들은 잘 있나?" "덕, 스펜서 씨를 소개하네. 삭스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데 버키가 여기 구경오라고 해서 말이야." 윌슨이 이쪽으로 손을 뻗어서 나와 악수했다. "좋소. 버크가 좋다고 했다면 OK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주시오." 사파리 모자를 쓴 젊은이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스타' 잡지의 책장을 넘겼다. 껌을 십고 있는 턱의 움직임이 부드럽고, 관절의 근육이 리드미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리틀이 말했다. "이쪽은 레스터 프로이드요. 레스터, 스펜서 씨일세." 레스터는 얼굴을 조금 들고 잡지를 손에 쥔 채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는 계속 읽어 나갔다. 내가 말했다. "저 사람은 뭘 하는 겁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 '플라밍고' 노래를 부르고 있나?" 이번에는 젊은이가 분명하게 얼굴을 들었다. 호박색 선글라스 안쪽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핑크색 껌을 커다랗게 불어서 이빨로 터뜨리더니 천천히 입안으로 도로 끌어들였다. 리틀이 말했다. "레스터는 버키의 운전사요, 스펜서. 레스터, 스펜서 씨는 삭스와 버키에 대한 책을 쓰기로 되어 있어." 레스터가 다시 껌을 불어서는 도로 입안으로 가져갔다. "내게 쓸데없는 시비를 걸었다간 엎어져서 제 궁둥이의 구멍을 쳐다보게 될 거야." 그의 광대뼈 언저리가 벌개지고 있었다. "'플라밍고'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닌 모양이군." 내가 윌슨에게 말했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레스터. 스펜서 씨는 농담을 했을 뿐이야." 리틀이 불안한 듯이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윌슨은 다이아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터의 껌 십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시비걸지 말라고 하는 거야." 레스터가 말했다. "그만둬, 레스터." 내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메이너드였다. "여기 와서 방송을 들으라고 내가 스펜서 씨를 초대한 거야. 그는 내 손님이야." "그는 내가 노래를 부른다거니 하면서 시비를 걸려고 했단 말입니다, 버키. 나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질색이에요." "알고 있어, 레스터. 네가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스펜서 씨, 미안하지만 레스터에게 사과해 주지 않겠소? 아주 좋은 청년인데, 굉장히 감정이 날카롭거든. 게다가 태권도 검은 띠라오. 당신이 책을 쓰기 시작하기도 전에 손을 못 쓰게 되면 나로서도 서운한 일이니까." 방송석에서 레스터와 맞붙어봐야 마티 러브에 대해서 알아낼 것도 아니다. 그가 솜씨깨나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뭐 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일 때문에 고용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내 솜씨가 어느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다. 더구나 작가라면서 검은 띠를 상대로 한바탕 붙는 것이 잘하는 짓도 아니다. 토크 쇼에서 호세 토레스와 입씨름을 하는 거라면 또 모르지만, 구장에서 싸움질을 한다면......? "사과하겠소, 레스터." 내가 말했다. "나는 가끔 농담이 지나칠 때가 있어서 말이오." 레스터가 나를 보면서 불던 껌을 탁 터뜨리더니 다시 '내셔널 스타' 잡지를 읽기 시작했다. 메이너드가 입으로만 웃고는 방송 테이블 앞의 푹신푹신하고 커다란 회전의자 쪽으로 갔다. 거기에 앉더니 패드가 붙어 있는 커다란 이어폰을 귀에 끼고서 마이크를 향해 뭐라고 말을 했다. 그의 오른쪽 테이블에 붙어 있는 모니터 TV의 스위치가 켜지고, 아래쪽 배터 박스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의 앞에 있는 클립보드엔 등사판으로 찍어낸 긴 리스트가 꽂혀 있었는데, 처음과 둘째 항목을 체크하면서 그가 말을 해나갔다. "버트, 나는 스테이빌의 워밍 업부터 시작하고 싶어. 덕과 내가 그의 너클 볼과 그 변화하는 모양에 대해서 몇 마디 하겠어. 알겠나?......그래, 방송 프로의 오프닝 테이프를 흘려보내자마자 말이야." 윌슨이 내 쪽을 보고 말했다. "그는 밖에 있는 중계차 녀석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라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터가 여전히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넘겼다. 리틀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난 가봐야겠소. 볼일이 있으면 주저 마시고 말해 줘요."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리틀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교회를 빠져나가는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갔다. 메이너드가 중계차 녀석들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생방송을 할 필요는 없겠는데, 그렇지?......리스트에는 아무것도 써 있지 않아......바보 같은 소리 말게. 그건 어제 오후 테이프에 올렸어......알았네, 잘 해주게." 레드 삭스의 유니폼을 입은 좀 촌스러운 야구선수의 만화가 모니터 TV 화면에 나타났다. 메이너드가, "20초." 하고 윌슨에게 말했다. 아래쪽 오른편 1루선 옆에서 릭 스테이빌이라는 좀 뚱뚱해 보이는 우완 투수가 워밍 업을 하고 있었다. 힘을 넣지 않고 슬쩍 포수에게 공을 던지고 있다. 윌슨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곳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에서 레드 삭스 대 양키스의 3연전, 다같이 1승씩 한 뒤의 3차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저는 덕 윌슨입니다. 버키 메이너드와 함께 시합의 진행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모니터 스크린에 맥주광고가 나가자 윌슨이 의자로 다가가 말했다. "스테이빌 이야기는 자네가 할 건가, 버크?" "그러지." 메이너드가 말했다. 모니터 스크린 가득히 맥주회사의 글씨가 넓게 번져 나가자 윌슨이 통계자료를 건네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레스터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다 읽고는 몸을 의자에 파묻은 채 잠이 든 것 같았다. 얌전한 뱀 같은 느낌이다. 태권도라고? 그걸 하는 녀석과 붙어본 적은 없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쉴 때마다 콧수염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겁먹어서 몸이 마비되어 있을 테지. 메이너드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레드 삭스 팬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카우보이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릭 스테이빌의 너클 볼을 보고......" 6회에 갔을 무렵에는 보스턴의 패배가 결정적이었다. 아무래도 스테이빌의 너클 볼은 뚝 떨어지지 않고 옆으로 흐르는 공이었던 모양인지 양키스가 11대 1로 리드하고 있었다. 나는 두 번 방에서 나갔다. 한번은 맥주와 핫도그를 사러, 또 한번은 땅콩을 사러 갔었다. 레스터는 계속 잠자고 있었고, 메이너드와 윌슨은 농담을 해가며 어떻게 해서든지 시합 분위기를 돋구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스테이빌은 배 근처의 기름기를 좀 빼야겠어요, 덕." "그래요. 좋은 선수인데 말입니다, 버키. 금년엔 몸이 좀 무거운 모양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덕. 그는 봄 캠프에 돼지처럼 살이 쪄서 찾아왔었는데, 아직도 군살을 빼지 않았군요. 좋은 공을 가지고 있지만, 먹는 것을 참지 못하면 선수생활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죠." 메이너드가 기록표를 보았다. "다음 타자는 그레이그 네틀스, 오늘은 만루 홈런을 포함해서 2타석 2안타." 나는 일어나서 방의 출입구로 갔다. 나올 때 윌슨이 나를 보고 윙크했다. 리틀의 사무실에 들러서 마티 러브와 다른 네 사람의 경력에 대한 자료를 받았다. 리틀의 여사무원은 틀니를 하고 있었다. 제 4 장 샤워장에서 나는 김이 라커 룸으로 흘러들어 공기가 눅눅했다. 최종 스코어는 14대 3이어서, 샴페인 내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마티 러브의 옆에 앉았다. 그는 엎드려서 스파이크의 끈을 헐겁게 하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내가 말했다. "내 이름은 스펜서요. 삭스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데, 먼저 당신 이야기부터 들어보는 것이 좋겠군요." 러브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기꺼이 도움이 되어드리지요. 하지만 오늘 시합은 없었던 것으로 해줄 수 없겠습니까?" 억울한 듯이 고개를 흔든다. 그는 키가 185cm인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단단해 보였다. 갈색의 짧은 머리가 V자형 이마에 튀어나와 있다. 머리는 정원공사에 쓰이는 부삽의 날처럼 모가 나고 길었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어서 그 밑에 있는 볼은 더욱 움푹 들어가 보인다. "버키 메이너드 얘기로는 스테이빌이 너무 살이 쪄서 좋은 피칭을 못한다더군요." 내가 말했다. "당신, 롤리치나 윌버 우드가 던지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러브가 말했다. "봤소. 그리고 메이너드도 보았고." 러브가 웃었다. "리키는 배로 던지는 게 아녜요. 오늘은 공이 제대로 달려가지 않더군요, 그랬을 뿐입니다." "어제의 당신 공은 잘 달리던데." "그랬죠. 어제는 기분좋게 던질 수가 있었죠." 러브가 이야기를 하면서 유니폼을 벗기 시작했다. 근육질의 울퉁불퉁한 체격에다, 까맣게 볕에 그을은 얼굴이나 목, 팔과 대조적으로 몸은 창백하다. "어쨌든 -- " 내가 말했다. "나는 말하자면 야구의 인간적인 면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마티. 오늘밤 어디서 만나 이야기를 좀 할 수 없을까요?" 러브는 발가벗은 몸에 타월을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탈의실의 거의 모두가 알몸이어서, 나는 나체주의자 마을에 들어온 이단자 같은 느낌이었다. "아아, 좋습니다. 그렇지, 잠깐 기다려 주시죠. 우리는 둘 다 오늘밤 아무런 예정이 없는 모양이군요. 어때요, 우리 아파트에 와서 마누라도 만나보고, 경우에 따라서 한잔하기로 하면? 당신 형편은 어떻습니까?" "좋소, 몇 시에?" "글쎄, 아이가 7시에 자니까 -- 7시 반. 그 시간이면 어떨까요?" "좋소, 어디요?" "처치 파크. 어디 있는지는 아십니까?" "알고 있소." "612호실이오."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 4시 35분. "좋소, 가지요. 정말 고맙소." "그럼 나중에." 러브가 샤워 있는 쪽으로 갔다. 몸은 키가 크고, 가늘며, 왼쪽 승모근(僧帽筋(등의 위쪽 등줄기 좌우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큰 근육)이 유난히 발달해 있어서 등뼈의 왼쪽을 따라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탈의실 밖에는 두 남자가 주변을 쓸고 있었다. 그밖에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나는 스탠드 밑의 비탈진 통로로 올라가서 그라운드를 보았다. 아무도 없다. 내려가서 칸막이 좌석의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변은 아주 조용해져 있다. 홈 플레이트로 걸어갔다. 왼쪽 벽이 바로 가까이에 있고, 높이가 150 미터나 되어보였다. 햇빛은 아직도 그 빛을 잃지 않았고, 지금 이 시간에는 3루 쪽 스탠드 너머로 비스듬히 비춰들고, 조명탑의 그림자가 달리(1904~스페인의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가 그린 거대한 그림처럼 보인다. 비둘기 한 마리가 센터 쪽 외야석에서 날아내려와서 경고표시 지대에서 무엇인가를 쪼아대고 있었다. 나는 마운드로 걸어가서 오른쪽 발을 피처 플레이트에 올려놓고 서서 홈 플레이트를 내려다보았다. 길거리 쪽에서 자동차 소리가 흘러들어오지만, 귀찮을 정도는 아니다. 오른손을 뒤로 돌려 엉덩이에 올려놓았다. 왼손은 힘을 빼고서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플레이트 쪽을 바라보았다. 9회말, 투 아웃, 만루, 스펜서 투수가 사인을 묻고 있다. 청소를 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통로에서 나와서 소리쳤다. "이봐요, 거기서 뭘 하고 있소?" "지금부터 토미 헨리치를 삼진으로 때려잡을 거요, 바보같이. 야구 모르나?" "거기는 들어가면 안된단 말이오." "알고 있소." 나는 스탠드를 지나 구장에서 나왔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제 곧 5시가 된다. 커먼웰스 가(街)의 저습지를 되돌아나와서 매사추세츠 가(街)로 나갔다. 커먼웰스 가가 그늘이라면 매사추세츠 가는 양지이다.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들어간 적이 없는 스테이크 하우스, 창문이 더러워진 사무실 빌딩, 간이식당, 손금 보는 곳, 마사지 팔러 등이 줄지어 있다. 매사추세츠 가를 건너 요크타운 터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유리창, 갈색 리놀륨을 깔아놓은 마루, 양철로 된 높은 천장이 하얗게 칠해져 있었으며, 왼쪽에 칸막이 좌석이 줄지어 있고, 오른쪽에 술집의 카운터가 있었다. 안쪽 구석의 컬러 TV에 '덕핀스 포어 댈러스'라는 볼링 게임의 장면이 나와 있으나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다. 카운터의 걸상 모두, 칸막이 좌석 거의 전부에 손님이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칵테일 같은 그럴듯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술집은 위스키 스트레이트와 맥주가 전문이다. 왼쪽의 가장 구석진 칸막이에 언제 보아도 바다표범을 생각나게 하는 셀차라는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세련된 옷차림에 윗몸은 마른 편이지만, 허리께는 살쪄 보이는 인물이다.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의 한가운데를 가르고, 머리에 찰싹 빗어 붙여놓았다. 가느다란 콧수염을 기르고, 코는 뾰족하고, 거무칙칙한 가는 세로줄 무늬 양복은 적어도 300달러는 주었을 것이다. 하얀 셔츠가 검은 양복이나 어두운 색의 술집과는 대조적으로 눈을 끈다. 그는 '헤럴드 아메리칸'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내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니, 그는 페이지를 넘겨서는 신문을 꼼꼼하게 접었다. 새끼손가락에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 조그만 다이아몬드를 흩부려놓은 듯한 은으로 만든 커다란 커프스 링크(소맷부리 물리개)가 눈에 띄었다. 콜롱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눈을 들어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조그만 입에 하얀 이빨이 가지런하고, 금이빨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안녕, 레니." 내가 말했다. "별것 아닌 일로도 가슴이 아플 경우가 있다네, 스펜서. 그런 경험 있나? 들어보게, 나는 지금까지 '레코드 아메리칸' 신문을 읽었어. 자네도 보았지? 타블로이드판이라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도 좋았어. 그런데 회사가 '헤럴드'를 사들이고 대형판으로 바꿔 버려서 지금은 마치 지도를 펼쳐 보고 있는 느낌이야. 이것을 제대로 접는 일도 쉽지 않고,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들어. 그런 일로 속상해 본 적은 없었나?" "일이 한가할 때에는." "한잔하겠나?" "글쎄, 브랜디 앨리그잔더나 마셔 볼까?" 셀차가 웃었다. "이봐, 프랭크." 그는 바텐더를 보고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쇼트와 맥주, 알았지?" 바텐더가 맥주를 가져와서 조그만 종이 받침 위에 올려놓고는 술집 저쪽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좌우간 뱃속에 기생충이 있었다면 지금 그 술로 모두 죽었을 거야." "그래, 프랭크는 위스키를 그냥 두고보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위스키보다는 나았다. "레니, 내가 들은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네." 그는 살결이 아주 고왔다. 매끄럽고 희고 주름 하나 없었다. 햇빛을 보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인다. "아아, 좋고말고. 아무 이유 없이 쓸데없는 소릴 하는 건 아무 도움도 못돼. 뭐를 알고 싶나?" 그가 새끼손가락은 빳빳이 뻗은 채 손가락만으로 잔을 들어 맥주를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고 가슴에 붙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꼼꼼하게 입가를 훔쳤다. "마티 러브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는지 알고 싶어." 셀차는 아주 정성들여서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세모로 접은 것 세 개가 나란히 되도록 꽂고는, 술집의 거울 앞에서 허리를 낮추어 손수건이 꽂힌 모양새를 살펴보았다. "예를 든다면?" 그가 말했다. "무엇이든 좋네." "그가 가끔 도박을 한다는 뜻인가? 뭐 그런 걸 말하는 건가?" "그런 것이며 그 밖에 다른 것이라도." "나를 상대로 도박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셀차가 말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묘한 이야기를 들었지. 그가 던질 때에는 도박하는 율이 조금 바뀌는 모양이야. 즉, 그가 등판예정인 때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이 걸린다는 거야. 큰 돈은 아니야. 자네 같은 사람이 찾아와서 그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으면 나는 마음에도 두지 않을 그런 금액이야." "그가 누구와 짜고 공을 던진다는 이야긴가?" "러브가? 말도 안되네, 스펜서.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란 말일세. 누가 봐도 모든 면에서 틀림없는 것 같다는 것이 아니고, 어렴풋한 짐작이라고 할까, 수면에 아주 잔잔한 물결이 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아. 나는 러브가 던질 때에 거는 돈은 주저하지 않고 다 받는다네. 주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야. 다만......" 어깨를 으쓱하고 손바닥을 위로 펴고서 두 팔을 벌렸다. "한 잔 더 어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한 잔으로 앞니의 법랑질(琺瑯質)이 벗겨졌어." "못쓰겠군, 스펜서." 셀차가 고개를 저었다. "점점 사람이 둔해져. 20년 전 자네가 앨리나에서 연습시합을 할 무렵엔 그것을 프랑스의 수입품으로 생각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 "나도 그때는 자네가 조지 블렌트 같은 차림을 했었던 기억이 없다네." 셀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생은 변해. 지금은 신문 대신에 쓸데없는 지도를 갖다주고 있지. 알고 있나?" 나는 신문을 다시 바로 접고 있는 그와 헤어져서 뭔가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 술집의 위스키가 뱃속에서 출렁거리고 있어서 뭐든지 먹어야만 진정될 것 같았다. 제 5 장 심퍼니 홀에서 조금 내려간 헌팅턴 가(街)의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인 맥도널드에서 치즈버거 두 개와 초콜릿 셰이크를 먹었다. 생각했던 대로 음식물이 위스키를 진정시켜 주었지만, 식당에서 나올 때에는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했다가는 두 번 다시 록 오버에서 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곤란한 것이, 나는 치즈버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6시에서 조금밖에 지나지 않아서 아직도 한동안은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여분의 시간이 늘어가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여가를 보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매사추세츠 가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강 쪽으로 내려갔다. 산책로에 대학생들이 잔뜩 나와 있어서 색깔도 선명한 프리즈비(플라스틱 원반)가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잔디에선 달콤한 냄새가 감돌고 있으며, 가끔 모터보트가 물을 가르며 상류로 가고 있었다. 강 저쪽으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이 콘크리트의 신전(神殿)처럼 어렴풋이 보인다. 빨간색 핫 팬츠에 높은 샌들을 신은 키 180cm쯤 되어보이는 흑인 여자가 짤막한 줄을 맨 라사 업소 개를 끌고 앞으로 지나갔다. 그녀가 서쪽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7시 15분에 매사추세츠 가를 처치 파크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되돌아왔다. 처치 파크는 거리의 맞은편에 있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교회 건물의 한 무더기와 관련하여 조성된 회색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도시개발지역이다. 수많은 초라한 벽돌 건물을 철거해 버리고 굉장히 긴 1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있다. 1층은 상점으로 되어 있고 2층부터 위로는 아파트로 되어 있다. 도어맨이 내게 기다리라고 하고 위층으로 연락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니 마티 러브가 복도 저쪽 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좌우로 균형이 잡힌 복도의 조화를 그의 머리가 깨고 있는 것이 어쩐지 쉬르리얼리슴(초현실주의)적인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쪽이오, 스펜서." 그가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문을 들어서니 곧바로 거실이었다. 오른쪽에 침대가 있고, 막다른 곳에 조그만 부엌이 있다. 거실의 왼쪽, 거리를 보고 나 있는 창으로 길 건너의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모교회(母校會)의 둥근 지붕이 보인다. 열어젖힌 창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온다. 거실은 바닥 전체에 베이지색 카펫이 깔려 있으며 벽은 엷은 노란색을 띤 흰색으로 되어 있었다. 벽의 여기저기에 러브의 구력(球歷)의 추억어린 사진이 액자에 넣어 걸려 있었다. 가구는 갈색과 베이지색의 현대적인 색상이었다. 긴의자 옆의 유리로 된 커피 테이블에 관상용 채소와 사워 크림 통을 올려놓은 쟁반이 있었다. "린다, 이분이 책을 쓰신다는 바로 그 스펜서 씨야." 러브가 말했다. "스펜서 씨, 내 아내인 린다입니다." 그녀와 악수했다. 머리칼이 검은 자그마한 여자이다. 얌전하게 정돈된 눈과 코, 눈이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느낌이다. 동그란 검은 눈의 속눈썹이 길다. 검은 머리를 등까지 늘어뜨리고, 목 언저리에서 검은 나무 클립으로 묶어 놓았다. 노란빛이 감도는 핑크색의 헐렁하고 소매없는 블라우스에 흰색 면바지를 입었다. 아주 엷게 화장을 하고 있어서 처음엔 맨 얼굴인 줄 알았다. "잘 오셨어요, 스펜서 씨. 긴의자에 앉으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크림이 든 통과 가장 가까우니까요." 그녀가 생긋 웃으니까 조그맣고 약간 뾰족한 이가 보였다. "고맙습니다." 내가 말했다. "독한 것을 좋아하십니까, 스펜서 씨? 아니면, 맥주?" 러브가 말했다. "캐나다 제품인데 좋은 에일(영국산 맥주)이 있어요. 러버트 피프티,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마셔보니 마음에 들더군요. 에일이 좋겠소." "린다는?" "요새 한동안 마시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잖아요. 마르가리타로 줘요. 마르가리타의 재료가 남아 있기는 있나요?" "있지. 뭐든지 다 있어." "좋아요, 술잔 옆에 소금을 넉넉하게 놔줘요." 그녀는 긴의자 맞은편의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서 샌들을 벗어버리더니 두 다리를 몸 밑으로 끌어들였다.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스펜서 씨." "그거야 상관없죠, 러브 부인......" "린다." "예, 린다. 아마 당신은 지금까지 나와 있는 책들과 대체로 비슷한 내용이라고 할 겁니다. 야구를 제도라는 틀 속에 갇힌 인간개성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이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으니까. "흥미 있는 시각이군요." "나는 스포츠를 규칙에 얽매이고 전통에 따라서 모양이 갖추어진 인간생활의 한 측면으로 보고 싶어요." 지금은 제물에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러브가 마르가리타의 루볼 글라스와 에일을 따라 담은, 코카콜라라고 써 있는 티파니 스타일의 고블렛(받침 달린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린다 러브가 한시름놓는 듯이 보였다. 토크 쇼 같은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좀더 있다가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러브가 마실 것을 각자에게 돌렸다. "뭐가 전통에 따라서 모양이 갖추어졌다는 건가요, 스펜서 씨?" 그가 물었다. "스포츠지요. 무질서 상태에다 질서라는 틀을 끼우는 하나의 방식인 겁니다." 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건 분명해요." 그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에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바싹 구운 캐슈 너트를 집어서 연방 입안으로 던져넣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러 왔소, 마티. 당신과 린다에 대해서. 당신은 야구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소?" "아주 좋아하죠." 러브가 말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린다가, "미쳐 있어요." 라고 해서 두 사람이 웃었다. "무보수라도 할 겁니다. 겨우 걸음마를 할 때부터 해 왔고, 또 일생 동안 하고 싶습니다." "왜?" "몰라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프랭키 개스틴의 서명이 들어 있는 글러브를 사주었죠. 지금도 기억이 나요. 내게는 너무 커서 아버지는 대만제의 값싸고 좀 작은 것을 사게 되었죠. 아시죠? 그물에 가느다란 가죽끈이 두 가닥쯤 붙어 있는 거 말입니다. 그리고 열 살쯤 되어 쓸 수 있을 만큼 커질 때까지 그 프랭키 개스틴의 글러브에 기름을 칠하고는 포켓을 주먹으로 때려댔죠.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다른 스포츠는 하지 않았었소?" 그저 던져 본 질문이지만, 언제나 묻는 내용이다. "했었죠. 실은, 대학은 농구 장학금으로 다녔답니다. 트래프트의 다섯 바퀴째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스카스로 지명되었는데, 졸업해서 야구 아닌 다른 운동을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린다는 대학에서 알게 되었소?" "아뇨." "당신은 어떻소, 린다, 야구를 어떻게 생각해요?" "마티와 만나기 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로드 게임에 나가는 것은 싫어요. 마티는 매 시즌 80게임은 밖에서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 말고는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마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스포츠이고, 또 그이가 아주 즐기고 있으니까." "두 사람은 어디서 알게 되었습니까?" "이력서에 나와 있을 텐데요?" 러브가 말했다. "그래요, 아마 나와 있겠지. 하지만 선전용 자료가 어떤 것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잖소." "그렇긴 하죠." 러브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일단 기자용 자료내용을 확인해 본 뒤에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소." 린다 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모두 다 나와 있어요." 러브가 말했다. "당신은 1944년 인디애나 주 라피에트에서 태어났군." 러브가 끄덕였다. "마켓 대학에 들어가서 1965년에 졸업, 그 해에 레드 삭스와 계약, 찰스턴에서 1년, 푸타켓에서 1년 던졌고. 1968년에 메이저 리그로 올라왔고. 그 뒤로 계속 1군에 머물러 있군." "그대로요." 러브가 말했다. "린다와 어디서 알게 되었소?" 내가 물었다. "시카고지요." 러브가 대답했다. "화이트 삭스와의 시합 때입니다. 그녀가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에 내가 그 대신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죠. 그녀가 그러마고 하더군요. 그리고 서로 마음이 통했죠." 나는 이력서를 보았다. "1970년의 일이군요?" "그래요." 내 잔이 빈 것을 보고 러브가 일어나서 에일을 가지러 갔다. 그는 반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그 6개월 뒤에 시카고에서 결혼했어요." 린다 러브가 방긋 웃었다. "시즌 오프 때에요." "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죠." 러브가 에일의 새 병을 건네주었다. 나는 잔에 따르고서 땅콩을 먹고 에일을 마셨다. "당신은 시카고 출신이오, 린다?" "아뇨, 알링턴 하이츠, 시카고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요." "처녀 때 성은?" "대강 하시죠, 스펜서. 어째서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하시죠?" "나도 모르겠소. 사과, 오렌지, 달걀 등을 크기에 따라 선별하는 기계를 본 적 있소? 여러 가지 크기의 것을 호퍼에 집어넣으면 기계 속을 지나가는 사이에 여러 가지 크기의 것이 각각 그 크기에 알맞은 구멍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오. 내 방식도 그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저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모두를 호퍼에 넣고 나중에 골라내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걀을 고르는 게 아니잖습니까?" "마티, 이분은 그게 일이잖아요. 내 처녀 때 성은 호킨스예요, 스펜서 씨." "그럼, 마티, 당신이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즉, 그 점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봤으면 하오. 그건 아이들 장난이 아닐까요? 내가 하는 말은 어떤 팀이 다른 팀에 이겼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무도 별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잖느냐 하는 뜻이라오." 작가가 물어볼 듯한 말씨로 나는 어떻게든지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게 하고 싶었다. 내 일의 대부분은 상대방의 내면을 알아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곤란한데요, 스펜서 씨. 내 말은, 그렇다면 아이들 장난이 아닌 것이 있느냐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소설을 쓰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은 어른만이 하는 일인가요? 야구도 하나의 일이라고요. 나는 그것을 잘하고, 좋아하고, 또 그 세계의 규칙도 알고 있지요. 내 손이 닿을 것 같지 않은 것을 목표로 해서 노력하고 있는 25명 중 한 사람이고, 시즌이 끝나면 내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아닌지를 알게 되죠. 달성되지 않았으면 다음해에 1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고. 달성되었으면 다시 한 번 반복할 기회를 얻는 거죠. 과거에 어떤 유명한 선수가, 야구를 하는 데는 소년 같은 요소가 크게 필요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남자가 아니면 안된다는 말을 했었죠." "로이 캔파넬라." "그래요, 캔파넬라죠. 다른 것은 몰라도 야구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 건전한 일입니다. 선수는 많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죠. 선수는 본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어요. 야구는 담배를 판다든지 네이팜 탄을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일이라고요. 그것이 내가 하는 일입니다, 아시겠어요?" "나이가 많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코치가 될지도 모르죠. 훌륭한 투수 코치가 될 자신이 있어요. 때에 따라서는 감독도. 방송 해설자도 좋고. 어떤 일을 하게 되든지 야구에서 떠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것이 안될 때는?" "아직은 린다와 아들이라는 보물이 있죠." "아들이 어른이 되면?" "그래도 린다는 남아 있습니다." 나는 내 역할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질문 중에서 몇 가지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이 러버트 피프티를 마저 마시고 실례하는 것이 좋겠는데. 더 이상 당신들의 시간을 빼앗을 염치는 없습니다." 린다 러브가 말했다. "아니에요, 아직 가지 마세요. 마티, 맥주를 한 병 더 가져와요. 우리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한걸요." 나는 고개를 흔들고서 잔을 비우고는 일어났다. "아니, 됐습니다. 정말 고맙소, 린다. 언제고 다시 기회가 있겠지요." "마티, 말려요." "린다, 이분이 돌아가고 싶어하면 돌려보내 드려야지. 이야기 상대가 있으면 아내는 언제나 이렇답니다, 스펜서." 두 사람이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나는 서 있는 두 사람과 헤어졌다. 마티가 훨씬 키가 크다. 오른손으로 린다의 어깨를 감싸안고, 린다는 왼손을 그의 팔에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택시로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들어갔다. 요즘 새무엘 엘리엇 모리슨의 。미국인의 옥스퍼드 역사。를 읽고 있었는데, 잠들기 전에 그 책을 두 시간쯤 읽었다. 제 6 장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침대는 정적 바로 그것이었다. 방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마치 흔들리고 있는 듯이 반짝반짝 빛나고, 에어컨의 낮은 진동음이 조용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두 손을 머리밑에 넣고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린다 러브에 대해서 마음에 걸리는 점이 대체 무엇인지 생각했다.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은, 린다가 마티와 만나기 전에는 야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에서 사인을 받을 때 마티와 만났다고 한 점이다. 그 두 가지 이야기가 어쩐지 딱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사리에 맞지가 않는다.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그 점뿐이었다. 그 이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미국 중부 출신의, 순박한 윤리정신을 가진 젊은이와 그가 사랑하는 아내. 시즌 오프에는 사냥이나 낚시를 하고, 어린 아들을 스케이트장에 데리고 가겠지. 그런 사람이 짜고 하는 엉터리 경기를 과연 할까? "그것이 내 일이오." 그가 말했었다. "그 세계의 규칙도 알고 있지요." 그 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 자신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가 시합을 일부러 포기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닉슨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일어나서 푸시업을 100번, 싯업을 100번 하고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는 침대 정리를 했다.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에 호이프트 크림 비스켓을 만드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브렌다 롤링과 저녁을 먹으러 그곳에 갔을 때 만드는 방법을 배워 왔었다. 커피를 끓이는 동안에 만들어서 오븐에 넣어 굽고, 그 사이에 오렌지 쥬스를 1파인트 짜서 마셨다. 신선한 딸기와 비스킷을 먹고, 커피를 석 잔 마셨다. 밖에 나왔을 때는 10시가 가까웠다. 아파트 건물 밖은 반짝이는 햇빛 속에서 여름 냄새가 넘치고 있었다. 알링턴 가(街) 저쪽의 퍼블릭 가든은 밝은 햇빛을 받아 정말로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토마스 볼이 제작한, 말을 탄 워싱턴의 커다란 동상 옆을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화단에는 피튜니아가 한창이고, 선명한 주홍색 금붕어풀을 배경으로 팬지 꽃이 냄새를 풍기고 있엇다. 요트 모자를 쓴 대학생들이 젓는 스완 보트가 연못을 돌기 시작했고, 질서정연하게 그 뒤를 따르는 배고픈 오리들은 관광객이 던지는 땅콩을 좇아 대열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스완 보트가 떠 있는 연못의 다리를 건너서 찰스 가(街) 건너편의 중앙공원으로 갔다. 그곳의 교차점에서 손수레에서 팝콘을 팔고 있는 남자,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남자, 풍선과 조그만 원숭이들이 매달려 있는 가느다란 막대기와 노란 글씨로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이라고 쓴 푸른 페넌트를 팔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꺽어 찰스 가를 보일스턴을 향해서 걸어갔다. 거리 모퉁이에 삼각대를 부착시킨 커다란 카메라로 스냅 사진을 찍는 노인이 있었다. 삼각대에 부착시켜 놓은 케이스에 엷은 색의 빛바랜 견본 사진이 들어 있었다. 보일스턴을 올라가서 트레몬토를 지나 거기서 스튜어트를 향해 내려갔다. 내 사무실은 스튜어트 가(街)에 있다. 대단한 사무실은 아니지만 장소가 알맞다. 성병 전문병원이나 해충방제업자에게 꼭 알맞은 곳이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곧 창문을 열었다. 이 창문을 여는 날은 푸시업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한다. 남색 블레이저 코트(화려한 스포츠용 윗도리)를 걸어두고는, 책상 앞에 앉아서 노란 괘지(罫紙)를 꺼내고서 전화를 끌어당겼다. 1시 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마티 러브의 경력이 자료와 일치한다는 것이 거의 확인되었다. 인디애나 주 라피에트 마을 기록담당자가, 그 마을에 마티 러브가 살았었던 것이며, 그의 부모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켓 대학의 학적과 직원이 그가 재학한 사실, 1965년에 졸업한 것 등을 확인해 주었다. 프로비던스의 아는 경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러브가 푸타켓에 있을 때에 혹시 문제를 일으킨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았다. 40분 뒤에 그가 전화를 걸어 왔는데, 그런 사실은 없다고 했다. 내가 조회한 일은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었고, 나도 그가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린다 러브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시카고의 등기소에 그녀가 러브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었다. 담당직원들이 아는 바로는, 마티 러브는 1970년이나 그 밖의 어느 해에도 시카고에서 린다 호킨스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와도 결혼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변두리의 어느 치안판사 입회하에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알링턴 하이츠에 전화를 걸어서 그 도시의 기록담당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기록이 없다. 린다 호킨스나 린다 러브에 관한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출생신고, 혼인신고, 기록이라고는 전혀 없다. 1분쯤 기다리면 자동차 관계를 조사해 주겠다고 했다. 기다렸다. 10분이나 기다렸다. 스튜어트 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덥고 건조했다. 땀이 배어서 폴로 셔츠가 등에 달라붙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3시 15분.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 뜨거운 바람 냄새를 맡아 보았다. 바람 방향이 알맞으면 거리 맞은편의 제이크 워스 상점에서 풍겨오는 자우어브라텐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바람 방향이 나빴다. 코에 들어오는 것은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무제한으로 내뿜는 배기 가스뿐이었다. 알링턴 하이츠의 기록담당직원이 전화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 거기 있소?" "기다리고 있소." "운전면허 기록은 없군요. 자동차 등록도 한 적이 없고. 시내 전화번호부에 호킨스가 네 사람 올라 있지만 린다는 없어요. 번호를 가르쳐 드릴까?" "그랬으면 좋겠소. 그리고 학무과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지요. 잠깐 기다리시지요. 여기서 곧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조사해서 가르쳐 주었다. 나는 학무과에 전화를 걸었다. 린다 러브, 또는 린다 호킨스의 기록은 없다. 1960년 이후, 그 도시의 학교에 호킨스라는 성을 가진 학생이 8명 있었다. 6명은 남자. 나머지 두 사람의 이름은 도리스와 올리브였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모두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알링턴 하이츠의 호킨스라는 성을 가진 첫번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전혀 관계 없음. 다음 두 집도 관계 없음. 네 번째 집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고 전화가 통해서 그 네 번째 집이 내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집이 아닌 바에는 린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야만 한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4시 30분. 일리노이 주에서는 3시 반이다. 아침 먹은 뒤로 아직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 제이크 워스에 가서 자우어브라텐을 먹고 흑맥주를 마셨다. 5시 45분에 사무실로 돌아와서 네 번째 집 호킨스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린다 호킨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의자를 돌려서 창틀에 두 발을 올려놓고 거리 건너편 의류제조공장의 맨 위층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 모두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어떤 여자의 경력을 조사했는데, 가지고 있는 자료와 즉시 부합되지 않을 경우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의 대부분은 거짓과 관련이 있고, 대개의 거짓 뒤에는 숨기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는 법이다. 건너편 공장의 창틀에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시계를 보았다 -- 6시 10분. 여름에는 저녁식사를 끝낸 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저녁의 소프트볼 리그가 시작된다. 아이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길모퉁이에서 놀고 있을 것이다. 남자들이 잔디에 물을 부리고, 아내들은 옆에 놓인 정원의자에 앉아 있다. 나는 두 마리의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린다 러브는 겉으로 드러난 경력대로의 여자는 아니고, 또한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마찬가지로, 러브와 결혼하기 전까지 야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야구시합 때에 처음 그와 만났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두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가 버렸다.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음이 차츰 작아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린다 러브에 관한 것을 알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삭스는 오늘밤 나이트 게임이 있으니까 러브는 집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있으니까 린다 러브는 틀림없이 집에 있을 것이다. 전화를 걸었다. 역시 있었다. "방해가 안된다면 찾아가서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이것저것 아내로서의 견해에 대해서 좀 물어보고 싶어서요. 시합하는 동안에 집에 있는 기분, 뭐 그런 것들인데." 아내로서의 견해, 마음만 먹으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교묘해. 어쩌면 '사랑스러운 여자'라고 하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좋아요. 스펜서 씨, 이제 방금 아이를 목욕시키기 시작했어요. 한 시간쯤 뒤에 오시면 나는 TV로 시합을 보고 있겠지만,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고맙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한동안 의류제조공장의 창틀을 바라보았다. 뒤쪽에서 사무실 문이 열렸다. 빙글 의자를 돌렸다. 알로하 셔츠에 파나마 모자를 쓴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가 들어와서 문을 열어놓은 채 그대로 두었다. 밝은 갈색의 더블 니트 바지 밖으로 셔츠를 늘어뜨리고 있다. 검은 테의 래프어라운드 선글라스(폭이 넓고 굽은 선글라스)를 쓰고 여송연을 물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나는 책상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다른 사나이가 들어와서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붉은색 로파가 번쩍거리고 있다. 두 손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윤기 있는 반백의 머리는 비싼 이발소에 단골인 것 같았고, 목덜미 뒤에서 컬을 넣고, 이마에는 곱슬거리는 머리칼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반백이지만, 얼굴은 젊고 주름 하나 없었다. 아는 사람이다. 이름은 프랭크 두어. "이야기가 있어, 스펜서." "놀라겠는데. 내 호이프트 크림 비스킷 소문을 듣고, 그 비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일 테지." 파나마 모자를 쓴 뚱뚱보가 두어 뒤의 문을 닫고 팔짱을 끼고는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킴 터밀로프다. "내가 누군지 아나, 스펜서?" 두어가 말했다. "TV 요리시간에 나오는 줄리아 차일드지?" "내 이름은 두어야. 네가 레드 삭스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어." 변장의 명수,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이다. "레드 삭스?" 내가 말했다. "그래, 레드 삭스야." 그가 말했다. "놀라겠군, 이렇게 빨리 소문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떻게 알아냈지?" "그런 건 알 것 없어. 대답해." "좋아, 좋아, 두어. 당신, 바비의 친척인가?" "나를 화나게 하지 마, 스펜서. 나는 알고 싶은 일은 반드시 들어야만 해." "그래, 좋아. 당신이 바비 두어를 싫어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나는 멋진 2루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월리." 눈은 나를 바라본 채 두어가 이름을 부르자 뚱뚱보가 알로하 셔츠 밑에서 권총을 꺼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스펜서. 이 바퀴벌레 집에서 보낼 시간은 없어." '바퀴벌레 집'이라는 말은 좀 불친절한 단어라고 생각했지만, 월리가 손에 들고 있는 권총도 별로 친절한 맛은 없었다. "알았어. 뭐 화낼 일도 아니잖아. 나는 이 지역의 리온 컬버슨과 똑같은 콘테스트에서 우승했기에, 삭스가 지명타자가 되는 이야기를 해본 거라네." 두어와 월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꽤 오래 계속되었다. "자네는 내가 리온 컬버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두어의 상체가 다가왔다. "너에 관한 것을 좀 알아보았어, 스펜서. 들리는 말로는 자신을 농담의 명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나는 구멍에 집을 짓고 사는 바퀴벌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35센트짜리 햄버거나 먹는 주제에 예의범절을 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건물 전체가 조용했다. 열어젖힌 창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가는 끊어지곤 한다. 월리의 권총은 나를 겨냥한 채 꼼짝도 않는다. 월리가 혀를 찼다. 나는 배 언저리가 조금 쑤셨다. 두어가 말을 계속했다. "너는 펜웨이 파크를 어슬렁거렸고, 방송석에 들어갔고, 여러 녀석들과 이야기했고, 작가라고 속였고. 자신이 알랑방귀나 뀌고 다니는 염탐꾼이며, 잔돈푼이나 벌어쓰는 피라미라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겼어.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그것도 지금 곧. 순순히 안 나오면 월리가 손을 좀 봐줄 거야.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도록." 나는 천천히 책상에서 발을 내려 바닥에 놓았다. 책상 위에 두 손을 천천히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프랭크, 베이비, 자네는 도박을 좋아하는 친구지. 내가 자네하고 내기를 한번 해야겠어. 그래, 두 가지야. 첫째, 너는 절대로 쏘지 않는다.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분명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쏘는 것은 굉장히 운이 나쁘기 때문이다. 둘째, 너의 애완동물인 포크 초프가 내게 손을 대면 나는 놈의 총을 빼앗아서 그것으로 이를 닦아주겠다. 반반으로 하지." 월리는 완전히 무표정이어서, 아치 샘 요티나 아가 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권총도 마찬가지였다. 두어의 선 램프로 그을린 얼굴이 조금 하얗게 되었다. 코 옆에서 입가에 이르는 골이 깊어지고, 오른쪽 눈꺼풀이 흠칫거렸다. 내 배는 여전히 쑤시고 있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이런 정도로 거칠지 않았더라면 나는 겁먹고 있다고 오해받았을 것이다. 월리의 권총은 월셔 P 38이다. 구경 9mm. 탄창에 7발. 좋은 총이다. 월셔의 총 손잡이는 쥐기 편하고, 총 전체의 밸런스가 좋다. 월리는 자기의 권총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래쪽 스튜어트 가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는 클랙슨을 붙인 녀석이 '세이브 앤드 어 헤어컷 투 비츠'의 곡조를 울려대고 있다. 어디선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두어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빙글 돌아서 등을 보이고 나갔다. 월리가 총을 집어넣으며 뒤따르고 문을 닫았다. 나는 방안의 공기를 코로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손가락 끝이 따끔따끔했다. 다시 의자에 앉아서 책상 제일 아랫서랍에서 버본 위스키 병을 꺼내어 병째 마셨다. 숨이 막혔다. 비트 슈퍼마켓의 싸구려 자사(自社) 브랜드를 사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람이 없어져 버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녹색 파일 캐비닛, 크리스마스에 수잔 실버맨이 준 펠메일의 복제품 액자가 넷, 두어가 앉았던 의자. 그렇게 바퀴벌레 집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제 7 장 린다 러브를 만나러 갈 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사진이나 그 밖의 장식에 대해서 생각중이랍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호화판으로 말이죠." 린다에게 설명했다. "대형판으로 만들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린다는 블루 진에 맨발이었고, 머리를 리본으로 묶고서 이제 막 화장을 끝낸 모양이었다. 거실의 25인치 컬러 TV에서는 버키 메이너드가 야수(野手)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었다. "저걸 보시죠, 덕. 홀리 웨스트가 저 강한 어깨로 램 초프를 던지면 이리떼라도 달려들지 못할 겁니다. 에이머스 오티스를 홈의 6m 앞에서 잡았군요." "대단한 어깨입니다, 버크." 윌슨이 말했다. "저건 마치 총알 같군요." 나는 여러 각도에서 린다와 거실의 사진을 찍었다. "마티가 던지는 것을 보면 걱정이 안되나요, 린다?" 정교한 각도에서 찍기 위해 바닥에 누워 커피 테이블의 유리 뚜껑을 투과해서 찍었다. "그래요. 지금은 별로 걱정 안해요. 그가 컨디션이 좋으니까 -- 그것보다 그가 지면 놀라지요. 하지만 걱정은 안해요." "그는 시합 때의 기분을 집에까지 가져오는 편인가요, 아니면 구장에서 깨끗이 잊고 오나요?" "졌을 때 말인가요? 구장에 두고 와요. 시합을 보지 않고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이겼는지 졌는지 모를 정도예요. 우리 아기는 아빠가 뭘 하고 있는지 거의 몰라요." 나는 린다 러브 앞에 놓인 커피 테이블에 컬러 사진 다섯 장을 나란히 놓았다. "어느 것이 제일 마음에 드십니까?" 내가 말했다. "모두 아이디어를 참고하기 위한 거죠. 출판사가 사진이 든 대형 호화판으로 책을 만들게 되면 전문가가 찍게 됩니다." 아서 오서 같은 대사다 -- 카슨 쇼를 들으면 때로는 도움이 된다. 린다가 왼쪽 끝의 한 장을 집어서 불에 비추어 보았다. "이게 재미있군요." 바닥에서 찍은 것이었다. 확실히 재미있다. 탐정사진작가의 작품이다. "그래요, 그게 좋군요. 나도 그게 좋습니다." 린다에게서 받아 봉투에 넣었다. "다른 것은?" 그녀가 사진들을 보았다. "다 좋지만, 처음의 것이 제일 좋아요." "OK, 의견일치요." 나는 나머지 네 장을 모아서 봉투에 넣었다. 버키 메이너드가 말했다. "오늘은 뜨거운 투수전인데요, 덕. 양쪽 투수가 윙윙 소리라도 날 것 같은 공을 던지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버키. 오늘밤엔 양쪽 투수가 모두 좋군요." 나는 일어났다. "고맙소, 린다. 이런 식으로 쳐들어와서 미안하군요." "괜찮아요. 재미있었어요. 다만 우리 아기의 사진에 대해선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마티는 가족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우리 가족은 집안끼리만 오가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당신이 사진을 책에 넣는 것을 마티는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린다. 걱정할 것 없어요. 팀에는 많은 선수가 있으니까, 사진을 넣을 때 마티가 반대하면 다른 사람을 몇 명 넣으면 되죠." 문 앞에서 그녀와 악수했다. 뼈만 앙상한 손이 차가웠다. 밖에 나와 보니 어두워져 있었고, 지나다니는 자동차 수도 적었다. 매사추세츠 가를 강을 향해 올라가서 보일스턴 가(街)로 나가기 전에 길을 건너서 글루메 후드 숍의 진열창에 놓여 있는 스페인산 멜론을 보았다. 자동차 배기 가스와 상점의 냄새에 섞여 강의 축축한 냄새가 어렴풋이 풍겨오면서, 시가지로 바뀌어버린 숲이며 땅의 기억이 떠올랐다. 말바라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아파트로 갔다. 양쪽의 벽돌과 갈색 사암(砂岩)의 건물 앞에 있는 조그만 나무들과 꽃이 달린 덤불에서 강의 냄새가 한결 짙게 느껴졌다. 아파트로 돌아오니 9시 15분이었다. 운이 좋으면 누군가가 늦게까지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에섹스 군(郡) 지방검사국에 전화를 걸었다.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내기 위해서 융자신청서의 초안을 생각하고 있었던 지방검사보(地方檢事補)일 것이다. "힐리 경위님 있습니까?" "없소, 그는 당분간은 커먼웰스 가 1010번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도 좋다면......" 아니, 괜찮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보스턴의 커먼웰스 가 1010번지의 주 경찰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힐리는 없었다. 내일 아침 전화하라고 한다. 전화를 끊고 TV를 켰다. 보스턴이 캔자스 시티에 2점 이기고 있다. 암스텔 맥주의 마개를 따고 긴의자에 옆으로 누워서 시합을 보았다. 존 메이베리가 9회초에 투런 홈런으로 동점이 되고, 암스텔을 다시 세 병 마시는 사이에 11회말, 3루에 있던 조니 테이버가 홀리 웨스트의 희생 플라이로 홈인했다. 뉴스를 하는 동안에 검은빵으로 햄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암스텔을 한 병 더 마셨다. 남자는 잠들기 전에 힘을 쌓아야 한다. 가슴이 뛰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꿈은 꾸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차를 몰고 커먼웰스 가 1010번지로 갔다. 힐리가 사무실에 있었다. 윗도리를 벗고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였으나, 폭이 좁고 끝이 뾰족한 칼라에 가늘고 검은 니트 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중키에 날씬한 체격이며, 폴 뉴먼 같은 반백의 머리를 선원 머리로 깎고, 눈은 연푸른색이다. 싸구려 셔츠 상점의 지배인처럼 보인다. 5년 전에 그는 맨손으로 사탕 상점에 들어가서 잔뜩 흥분해 있는 마약중독환자에게서 산탄총을 빼앗고 두 사람의 인질을 구해냈었다. 부상을 당한 것은 그 마약중독자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야, 스펜서?" 나는 전부터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경찰신문'을 팔고 있는데, 당신도 자신의 분야의 최신정보를 알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하고 왔지." "쓸데없는 농담은 집어치워, 스펜서. 무슨 일이지?" 나는 마티 러브의 집에 있는 커피 테이블의 유리를 투과시켜서 찍은 바로 그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 있는 봉투를 꺼냈다. "이 안에 두 가지 지문이 묻어 있는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어. 하나는 내 지문이야. 또 하나의 지문의 주인을 알고 싶어. FBI에 조회해 줄 수 있겠나?" "왜?"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신부 후보감의 신용상태를 알아보고 싶어. 믿겠나?" "아니." "믿지 않을 줄 알았지. 좋아, 이건 비밀이야. 말하지 않아도 된다면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고 싶고, 당신이 꼭 말하라고 한다면 이유를 말하겠어." "옷을 어디서 사나, 스펜서?" "흠, 뇌물이 먹고 싶은 게로군. 내 옷맵시가 부러워서 내 양복점 이름을 알고 싶은 거로군." "우중충한 히피 같은 꼴이야. 넥타이도 없나?" "하나 있어. 리츠 호텔의 메인 다이닝 룸에서 식사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그 사진 이리 줘." 힐리가 말했다. "회답이 있으면 알려주지."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레이프 제리나 마시맬로(양아육) 가루로 사진을 못쓰게 만들지 말라고 부하에게 잘 일러두게나, OK?" 힐리는 그 말을 무시해 버렸다.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건물을 나올 때에 유리문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빨간색과 검은색의 페이즐리 천의 스포츠 코트, 검은 폴로 셔츠, 검은 바지, 황금색 버클이 달려 있고, 물결 모양의 주름을 잡아놓은 번쩍거리는 로퍼 구두 차림새이다. 히피라고? 힐리가 생각하는 멋진 차림이라는 것은 겨우 프렌치 커프스 같은 거다. 선글라스를 쓰고 차에 올라타서 켄모어 스퀘어를 향해서 커먼웰스 가를 내려갔다. 자동차 뚜껑을 뒤로 접어놓아서 좌석이 뜨겁다. 지나치는 아가씨들 중에서 돌아서서 나를 보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제 8 장 펜웨이 파크로 가서 삭스가 오후의 시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의 취재처럼 보이기 위해서 홀리 웨스트와 30분, 알렉스 몬타이어와 30분 대화를 가졌지만, 그런 위장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싶었다. 내가 여기에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내가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된다. 또한, 두어와 삭스는 어떤 관련이 있고, 두어는 그것을 비밀에 부쳐두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어 같은 패거리들이 가끔 저지르는 실수다. 녀석들은 사람들에게 예스라고 말하게 하는 일에 익숙해 있으므로, 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잊고 있다. 위압적인 인간들은 그렇게 되기 십상이다. 자기들을 전능한 사람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실패한다. 놈과 월리에게 어서 꺼져 버리라고 했더라면 놈은 너무도 놀라서 어찌해야 할지도 모른 채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쪽의 비밀이 들통났다. 언제고 또 두어가 무슨 말인가를 하러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레드 삭스의 덕아웃 가까운 칸막이 좌석에서 난간을 붙들고 배팅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빌리 카터가 말했다. "이봐요, 스펜서, 두세 번 쳐보겠소?" 쳐보고 싶었지만, 윗도리를 벗어서 권총을 보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윗도리를 입은 채 배트를 휘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시지요? 샐리는 가볍게 던지고 있을 뿐인데." "바이올린을 시작할 때에 앞으로는 절대로 야구는 안하겠다고 엄마에게 약속했단 말이오." "바이올린? 놀리지 마시오. 아무리 보아도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안 보이는데. 체중은?" "89kg 정도요." "정말이오? 팀 같은 데 나가지는 않습니까?" "웨이트 리프팅을 조금 하지. 달리기도 좀 하고." "그렇겠지. 뭐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지. 바이올린만 켜고 있었으면 그렇게 목이 굵어지지 않거든요. 벤치로는 어느 정도인가요?" "250." "회수는?" "15회." "이렇게 되면 언제 한번 당신과 홀리에게 팔씨름을 시켜 봐야겠는데. 당신이 그에게 이기면 재미가 있을 겁니다. 팔씨름을 작가에게 진다면 홀리는 새파랗게 되겠는데." "오늘은 누가 던집니까?" "마티요." 카터가 말했다. "그 코는 누구에게 당했소?" "많지. 전에 복싱을 했었거든. 마티의 공을 받는 건 어때요?" "편하지 뭐." 배팅 케이지의 오른쪽 원 안에서 코치 한 사람이 외야에게 공을 쳐주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하늘에 공은 슬로 모션 같은 느낌으로 높다랗게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주 편해요. 저기서 허리를 낮추고 플레이트 뒤로 미트를 내밀면 마티가 그곳에 던져넣거든요. 그에겐 뭐든지 주문할 수가 있죠. 사인을 보내고 마티가 끄덕이면 공은 틀림없이 그리로 오지요. 절대로 고개를 가로젓는 법도 없고요." "어떤 공도 사인대로 던진단 말이오?" "그렇다니까요. 그 녀석은 강속구, 슬라이더, 커다란 커브, 더구나 그 전부에 변화도 줄 수 있죠. 게다가 지구력이 아주 좋아요. 받는 건 아주 쉽죠. 내가 그 녀석의 공을 언제나 받게 되고 다른 피처가 커브를 던지지 않았다면 나는 영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겁니다, 베이비. 쿠퍼즈타운행이죠." "언제쯤 나올 수 있소, 빌리?" "홀리가 걷지 못하게 되는 대로. 그쯤 될 겁니다. 어이쿠......남부 사투리 아저씨, 찐빵 녀석이 왔군요." 버키 메이너드가 스탠드 밑에서 나와 배팅 케이지 뒤에 가서 섰다. 벅스킨(사슴가죽) 헌팅 셔츠, 밴드에 은으로 만든 커다란 소라를 붙힌 검은 카우보이 모자, 이런 번쩍이는 차림새의 레스터가 옆에 붙어 있다. 메이너드는 언제나 입고 다니는 붉은 체크 무늬 셔츠 대신에 녹색 양치식물 모양이 들어 있는 흰 셔츠를 입고 있다. 반소매 밖으로 나와 있는 팔이 볕에 그을려 핑크색이 되어 있다. 아무리 볕에 내놓아도 붉은색으로 그을리지는 않을 듯한 느낌이었다. "메이너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오?" 내가 말했다. "나 말입니까? 나는 저 동글동글한 비계덩어리를 아주 좋아하지요." "그 말을 인용해도 괜찮겠소?" 나는 카터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말도 안돼. 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에게 밉게 보이면 마이너 리그에서 구원투수의 워밍 업 상대나 해주게 되고 말 거요. 거짓말 아니오, 스펜서. 여기서 저 녀석은 감독인 패럴보다도 영향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어째서?" "잘 모르겠어요. 팬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거든요. 모두들 저 녀석이 진짜로 내막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줄로 믿고 있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죠? 메이저 리그의 스타에 대한 최신의 소문거리, 풍선껌의 카드에 실려 있지 않은 사실들 말이오." "사실 그런가?" "사실은 대단한 건 아니죠. 아주 심술궂을 뿐이에요. 무슨 소문이든 들으면 그걸 소문으로 내는 겁니다. 그런 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대로 믿어버리는 거죠.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버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따라다니는 저 도마뱀은 진짜는 무엇을 하는 녀석이오?" "레스터 말인가요?" "그래요." 카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버키의 차를 운전하죠. 귀찮은 녀석들을 쫓아버리는 역할도 하고 있는 모양이고. 무슨 공수도 같은 것에 빠져 있다던데." "태권도. 한국 무술이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 녀석을 너무 놀리지 않는 게 좋아요. 애너하임에서 누군가를 거칠게 다룬 모양이던데. 그곳 호텔의 바에서 어떤 사람이 메이너드를 놀렸다가 레스터에게 반쯤 죽은 모양이에요. 이젠 나도 좀 쳐야겠습니다. 그럼, 또." 카터가 배팅 케이지 쪽으로 걸어갔다. 카터가 케이지에 들어가자 배팅 피처를 하고 있던 투수 코치인 클라이드 설리번이 돌아보고 손짓을 해서 외야수를 앞으로 오게 했다. "좋아요, 설리." 카터가 말했다. 메이너드가 배팅 케이지에서 어슬렁어슬렁 내 쪽으로 왔다. 레스터가 흔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따라왔다. "어떻소, 스펜서?" 메이너드가 말했다. "잘 있지요. 당신은?" "이런 늙은이 치고는 그런대로. 저 카터는 재미있는 친구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솜씨도 입만큼만 된다면 정말 좋은데 말이오. 피처 마운드밖에 공이 가지를 못하니." "타격은?" 메이너드가 웃었다. 밝은 웃음은 아니었다. 입술이 내려와서 이를 덮어버렸으므로 그 붉은 얼굴엔 따뜻함도 유머도 없고, 이가 보이지 않는 초생달이 떠올라 있을 뿐이다. "직구라면 괜찮지. 단, 공이 똑바로 오는 일이야 물론 절대로 없고." "하지만 보기엔 꽤 쓸 만한 젊은이 같던데." 레스터가 난간에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서, 부츠를 신은 발 한쪽은 단단히 땅바닥에 붙이고 다른 한쪽은 벽에다 대고 있었다. 영락없는 게리 쿠퍼다. 배팅 케이지 쪽을 향해서 많은 양의 갈색 침을 뱉었으므로 그가 담배를 십고 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옷을 바꾸면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는 남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메이너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좋아요. 잘도 떠들어대는 녀석이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게 아닐까요?" 내가 말했다. "대개 작가나 해설가라는 것이 그 짓으로 돈을 받으니까." "나는 사실을 말해서 월급을 받고 있어요. 카터는 지어낸 말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점이 다르지." 메이너드가 말없이 나를 보고 있어서 이건 진지한 대화로구나 하고 나는 직감했다. 레스터가 또 담뱃즙을 뱉어냈다. "나는 특별히 따지자는 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다만 여기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요. 아직은 단정해 버릴 생각은 없어요." "무엇을 단정한다는 거요, 스펜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빼버릴 것인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꿍꿍이속이 있는 이야기인가 하는 것. 왜 그런 걸 묻죠?" "단지 호기심이오. 나는 누구에 대해서든지 모두 알고 싶고, 또 알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지. 나는 단지 당신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물어보고 있을 뿐이오." "지당한 말씀이오. 나도 당신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주의해 보지요." 완곡한 표현이다. 그런 식으로 가는 거야, 스펜서. 교활하고 현명하게. "내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기꺼이 협조하겠소. 당신 출판사가 어디라고 했었지?" "서브시디. 뉴욕의 서브시디 프레스요." 메이너드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단추를 누르면 시간이 디지털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 버키 할아범이 슬슬 방송실로 올라갈 시간이군. 그럼, 또, 스펜서." 메이너드가 발끝을 45도 밖으로 벌리고 흔들흔들 걸어갔다. 레스터가 난간에서 물러나서는 소도둑이라도 숨어 있지나 않는가 하고 모자 차양 밑으로 주위를 빈틈없이 살피면서 앞으로 구부린 자세로 따라갔다. 셰인처럼 훌륭한 남자는 없는 법. 내일은 달타냥이 될 생각이겠지. 바로 조금 전에 여기서 서로의 아슬아슬한 탐색이 있었다. 그것도 보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탐색이었다. 1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라커 룸으로 내려가서 패럴 감독의 책상에 놓인 전화로 근무중인 브렌다 롤링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어." "알고 있어요." 브렌다가 말했다. "당신은 만날 때마다 제안이 있는걸요." "당신의 제안이 아니야. 다른 제안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까 말한 제안이 실시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마." "미안하지만, 뭐라고 했죠?"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잘 들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이런 거야. 당신이 오후에 조퇴할 수 있다면 내가 야구시합에 안내해 드리고, 땅콩과 크래커 잭을 대접해서 언제까지고 야구장에 있고 싶어지게 해주겠어." "끝나면 저녁도 먹여 주나요?" "물론이지. 그 뒤에 심야극장에 가서 네킹해도 좋아, 어때?" "오오, 나의 이 뛰는 가슴의 고동 소리. 야구장에 가면 되는 거지요?" "그래. 저지 가 쪽의 입구. 나는 브래지어에 사인해 달라는 티니호퍼에게 둘러싸여 있으니까 곧 알게 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갈께요." 제 9 장 브렌다 롤링이 갈색과 흰색의 보스턴 택시에서 내려섰을 때, 나는 육군 셔츠에 꽃무늬 넥타이를 매고서 25센트를 내놓으라고 졸라대는 노인을 쫓아버리고 있었다. "그의 브래지어에 사인해 주었나요?" "아가씨들이 여기에 있었는데, 당신 질투심이 대단하다고 했더니 모두들 당신 오는 것을 보고 도망갔어." "도망? 프로 복서치고는 꽤 딱딱한 표현이군요." "그래, 잊고 있었어. 여기서는 내가 책을 쓰는 사람으로 되어 있어. 내 진짜 신분은 어디까지나 비밀에 부쳐야만 해. 누구에게도 밝혀서는 안돼." "작가?" "그래, 레드 삭스와 야구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내가 택시에서 내렸을 때 이야기하던 상대, 그 사람이 당신의 에이전트인가요?" "아니, 에디터야." 그녀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금발을 단발머리처럼 짧게 깎아 놓았다. 눈은 녹색. 화장 솜씨가 굉장히 멋지다. 잘디잔 꽃무늬를 인쇄한, 소매는 길고 길이는 짧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햇볕에 많이 그을렸고, V자형으로 패인 가슴에 가느다란 쇠사슬에 매단 조그만 황금색 로켓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저지 가의 건너편에서 토산품을 팔고 있는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나도 보고 있었다. 언제나 문득 쳐다보게 된다. 포동포동하다기엔 아직 4.5 킬로쯤 모자라서 마침맞다. "요염하군." 내가 말했다. "뭐라고 했어요?" "우리들 작가는 그런 식으로 당신을 묘사하는 거야. 번득이는 눈에는 생기 넘치는 마성(魔性)을 감추고, 입가에는 비정함을 느끼게 하는 요염성." "스펜서, 핫도그와 맥주와 땅콩과 야구를 고대하고 있어요. 부탁이에요, 부탁이에요. 두손 모아 부탁이에요, 그 작가 같은 농담은 그만두고 어서 빨리 안으로 데려가 주지 않을래요?" 나는 단념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 시대에도 작가는 이해되지 않는군." 둘이서 들어갔다. 나는 브렌다에게 자랑할 생각으로 방송실로 데려가서 시합을 보았다. 내가 관전한다고 해서 레드 삭스의 사기를 북돋울 수는 없었다. 만루에서 프레디 패틱의 플라이를 알렉스 몬타이어가 에러로 3루타를 주어 3점 빼앗겨서 삭스가 캔자스 시티에 5대 2로 졌다. 메이너드는 우리를 무시했고, 윌슨은 이닝 사이에 브렌다를 한참 바라보곤 했다. 레스터는 오후 내내 '내셔널 엔콰이어' 지를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었다. 둘이서 다시 저지 가로 나왔을 때는 4시 10분이었다. 브렌다가 말했다. "그 카우보이 스타일의 귀여운 애는 누구예요?"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때. 내가 사준 그 핫도그 두 개로는 넘길 수 없겠지?" "저녁 먹자고요? 그 카우보이가 나오는 것을 여기서 기다려야겠어요." "어디 가고 싶어? 좀 이르지만 어디 가서 한잔해도 좋고." 시청 근처의 야외 카페에서 한잔하기로 했다. 벽돌로 바닥을 깔아놓은 광장 쪽으로 난, 색깔도 선명한 파라솔 밑에서 나는 생맥주, 브렌다는 스팅거 온 더 록스를 주문했다. 아직 새로운 구역으로서, 시의 풍기감시관이 금지하기까지 '불꽃의 붉은 머리' 위니 캐렛이 월요일의 최신 쇼에서 완전히 알몸으로 나왔었던 퇴폐적인 스컬리 광장을 재개발한 곳이다. 게임 센터, 문신 넣는 집, 극장, 카지노, 알코올 중독, 매춘부, 선원들, 술집, 꺼림칙한 장난감 가게 등, 젊은 사람들 상대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구역이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 여기저기 분수며 아케이드가 있는 넓은 쇼핑 광장으로 변했다. "사실은 소돔이나 고모라는 아니었었어." 내가 말했다. "뭐가요?" "스컬리 광장 말이야. 그건 월남전쟁 이전의 눈으로 본 악덕의 거리였지. 금발로 물들이고 버터프라이와 그물 스타킹으로 댄서가 춤추던 발레스크 극장이며 술집들이 있었어. 플라스틱으로 만든 개똥과, 소리가 나는 깜짝 쿠션 같은 것을 파는 가게도 있었지."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어요." 브렌다가 말했다. "어머니 이야기만 듣고 스컬리 광장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여놓기만 하면 금세 큰일이 나는 줄만 알았어요." "아니야. 바람둥이 어른 한 사람에 대해서 대학생이 열 명의 비율로 있었어. 콘버트 조안에 비하면 스컬리 광장 같은 것은 보육원 같은 곳이야." 둘 다 마실 것을 다시 추가했다. 테이블은 유리 뚜껑이며, 카페 전체에 인공 잔디가 깔려 있다. 웨이트리스는 서비스가 좋았다. 브렌다 롤링의 손톱은 밝은 빨간색이다. 해가 질 때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있었다. 브렌다가 화장실에 가고 나는 내 응답 서비스에 전화를 걸었다. 힐리 경위에게 전화를 해달라는 전갈이 있었다. 6시까지는 사무실에 있다고 한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5시 40분. 전화를 걸었다. "스펜서야. 뭘 알아냈나?" "그 지문은 도나 발링턴의 것이야." 스펠을 불러주었다. "1966년 3월 18일에 일리노이 주 레드퍼드에서 마약소지혐의로 체포. 그때 그 지문이 FBI의 파일에 들어가게 되었어. 그밖에는 체포된 적이 없어." "고마워." "빚이야." 힐리가 전화를 끊었다. 정말 따뜻한 맛이 있는 사람이다. 브렌다보다 먼저 테이블에 돌아왔다. 7시 15분에 둘이서 트레먼트 가(街)를 어슬렁거리면서 올라갔다. 구 시청 청사 안에 있는 프랑스 요리집으로 가서 새끼 양의 갈비와 로스를 2인분 먹고 잘 냉장이 된 트라미네일을 한 병 마시고, 디저트는 스트로베리 타트(파이의 일종)로 했다. 식사가 끝나니 9시 반 가까이 되었으며, 둘이서 스쿨 가 (街)를 트레먼트로 향해서 올라갔다.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지만, 아직 따뜻한 한여름의 아늑한 밤이며, 어슬렁어슬렁 지나온 더 커먼은 고요함 바로 그것이었다. 걷고 있는 사이에 브렌다 롤링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말바라 가에 나올 때까지 강도질을 하려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내 아파트에 들어가서 브렌다에게 말했다. "브랜디를 마시겠어, 아니면 곧바로 네킹으로 들어갈까?" "실은, 쿠키, 그전에 샤워를 하고 싶은데요." "샤워?" "그래요. 당신은 스니프터(주둥이가 좁은 술잔) 두 개에 브랜디를 잔뜩 따라서 침대에 들어가 있어요. 4~5분 뒤에 갈께요." "샤워?" "금방 끝내고 곧 갈께요." 나는 부엌에 가서 찬장에서 레미 마르탱을 꺼냈다. 데이비드 니븐은 코냑을 부엌에 놓아두던가?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 브랜디 스니프터를 둘 내놓고 반쯤 따라가지고는 침대로 돌아왔다. 샤워 소리가 들린다. 잔 두 개를 옷장 위에 올려놓고 알몸이 되었다. 아직도 샤워 소리가 들리고 있다. 욕실 입구로 갔다. 바닥 전면이 카펫이라서, 맨발로 걸으면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다. 손잡이를 돌리니까 문이 열렸다. 실내에 김이 가득차 있었다. 브렌다의 옷가지가 세면대 밑바닥에 놓여 있다. 란제리도 드레스와 함께 있었다. 샤워에 정신이 팔려 있다. 닫힌 샤워 커튼 위로 김이 오르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브렌다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고, 번들거리는 갈색 몸에 더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의 다른 부분과는 대조적으로 엉덩이가 희다. 빌리 엑스타인의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뒤에서 그녀의 알몸을 두 팔로 감았다. "깜짝이야, 스펜서. 뭘 하는 거예요?" "깨끗한 마음 다음은 깨끗한 몸. 등을 씻어줄까?" 브렌다가 비누를 넘겨주어 내가 등에 비누칠을 해주었다. 비누거품을 씻어내리려고 그녀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마주 서서 바라보니 엉덩이와 마찬가지로 젖가슴도 눈부시게 희다. "앞을 씻어 줄까?" 그녀가 웃으며 나를 안았다. 몸이 젖어서 미끈미끈하다. 입을 맞추었다. 여자와 처음 하는 키스에는 흥분을 느끼지만, 여러 번 키스하는 상대인 경우에는 깊은 친밀감이 느껴진다. 나는 그런 기분을 좋아한다. 변화보다는 계속되는 것이 더 즐거운지도 모른다. 샤워는 잠그지도 않고, 타월로 몸을 감지도 않은 채 둘이서 침대로 들어갔다. 제 10 장 열시간 뒤에 나는 아메리칸 항공 점보기의 이코노믹 클라스에 타고서, 날개 뒤 창가의 자리에 앉아 커피를 찔끔찔끔 마시면서 롤빵을 물어뜯고 있었다. 한번 데운 빵이 식어서 어렴풋이 반창고 맛이 났다. 비행기가 버팔로 위를 날고 있을 테니 좋은 생각이다.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다. 내 옆에는 15살쯤 되는 남자 아이와 11살쯤 되어보이는 그의 동생이 앉아 있었다. 둘은 개 이름이라고 생각되는 벤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크게 웃어댔다. 웃음소리가 시끄러워지자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차례 이쪽을 보고 무서운 눈으로 나무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패션 디자이너이거나 여류변호사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버지는 하역인부 같은 남자로서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거북한 듯했다. 미녀와 야수. 11시에 시카고에 닿았다. 렌트카를 빌리고, 사무실의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에게서 도로지도를 받아서는 시카고에서 남서쪽, 일리노이 주 레드퍼드로 향했다. 여섯 시간 반 걸렸으며, 미국의 위대한 심장부는 굉장히 더웠다. 빌린 녹색 더지 자동차는 에어컨이 달려 있어서 계속 틀어놓고 있었다. 2시 반경에 간이식당에 들러 블랙 커피에 치즈버거를 두 개 먹었다. 카운터 남자가 자기 아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검은 딸기 파이가 있다고 해서 두 조각 먹었다. 좋은 아내와 결혼한 모양이다. 4시 반경, 고속도로가 남쪽으로 구부러지고 강이 보였다. 여태까지도 보아 왔지만, 볼 때마다 일종의 향수를 느낀다. 미시시피 강, 프랑스의 탐험가, 카르티에와 러사르, 빅스버그를 포위 공략한 그랜트 장군, '뗏목 생활의 즐거움.' 폭 1.5 킬로미터에다 '무척 느리게 흐른다.' 고속도로의 길가에 차를 세우고 5분쯤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갈색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6시 40분에 레드퍼드에 닿아서 마을 북쪽에 있는 2층집인 할리데이 인에 방을 정했다. 강을 바라볼 수 있고 풀장이 있다. 식당이 열려 있고 손님은 반밖에 없었다. 생맥주를 주문하고 메뉴를 보았다. 맥주는 어마어마하게 큰 조키에 들어 있었다. 비나 슈니첼과 생채소를 주문했는데, 막상 가져온 것을 먹어 보고 그 멋진 맛에 놀라 버렸다. 그때쯤 거대한 조키로 맥주를 두 잔이나 비웠으므로 어쩌면 내 혀가 미묘한 맛에 둔감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방장에게 경의를 표해야겠다. 일리노이 주 레드퍼드의 할리데이 인은 별이 셋이다. 전표에 사인하고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마을에 갔다. 냉방이 잘 되어 있는 모텔에서 한 발자국 나가자마자 무더웠고, 강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매미가 울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할리데이 인과 미시시피 강이 레드퍼드의 명소인 모양이다. 아주 조그맡고, 강을 따라서 볼품없는 목조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 불과했다. 집들의 정원은 거의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으며, 보기 싫은 잡초더미가 쌓여 있었다. 마을에서 단 하나인 한길에는 철물점겸 사료가게가 하나, 울워스 텐 센트 상점, 스쿠터스 런치, 바깥에 필립 66 휘발유 펌프가 두 대 있는 빌 앤드 베티스 상점, 그리고 잔디밭에 민들레가 군데군데 나 있는 조그만 빈터 쪽으로 난 목조 2층 건물에 마을 사무소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풍의 둥근 기둥이 올려놓듯이 2층을 떠받치고 있었고, 다시 2층 높이만큼 더 올라간 종각의 위쪽은 뾰족한 첨탑으로 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풍향계가 달려 있다. 앞의 조그만 빈터에는 19세기의 대포가 있고, 그 옆에 동그란 포탄이 피라밋 모양으로 쌓여 있다. 마을 사무실 앞에다 차를 세웠을 때는 아이들 둘이 대포에 올라타 있었다. 사무실의 오른쪽 주차장에 휘프 안테나를 달고, 옆에는 'POLICE'라고 쓰인 흑백의 시보레가 들어가 있었다. 건물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뒤쪽에 철망을 댄 문이 있고, 그 위에 조그맣고 파란 전구가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길쭉한 방 저쪽 끝에 사람의 키만큼이나 되는 스탠드에 달린 선풍기가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뜨거운 바람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마호가니 재(材)의 낮은 칸막이가 있고, 그 저쪽에 회색 철제 책상과, 같은 계통의 회전의자, 발톱 끝에 구슬을 쥐고 있는 듯한 다리가 달린, 단풍나무로 만든 테이블 위에 무선 송수신기와 테이블 마이크가 올려져 있고, 황금색 테를 두른, 모서리가 둥근 냉장고가 있고, 수배사진을 몇 장 자석으로 출입문에 붙여 놓았다. 그 밖에는 회색 철제 파일 캐비닛이 있었다. 오른쪽 팔에 소리치는 독수리 문신을 새겨넣고, 테없는 안경을 낀 반백의 사나이가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카키색 제복은 풀기가 빳빳하고, 검정색의 큰 군용화 같은 구두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뚜껑이 열린 닥터 페퍼 깡통 옆에 연노란색 종군모(從軍帽)가 놓여 있다. 무전기 옆 캐스터가 달린 스탠드에 흑백의 포터블 TV가 올려져 있고, '할리우드 스퀘어스'가 방영중이다. 책상 위의 명패에 'T P 도널드슨'이라고 써 있다. 셔츠에 달린 커다란 은빛 별에 '보안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책상 위의 갈색 빵집 종이상자엔 레몬이 든 도너츠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스펜서라는 사람입니다." 사립탐정 면허증의 투명한 플라스틱 코팅을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코팅을 한 덕분에 나쁜 세균은 안 들어간다. "도나 발링턴이라는 여자의 경력을 조사하고 있소. FBI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1966년 여기서 체포된 것으로 되어 있던데." "난 도널드슨 보안관이오." 반백의 남자가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키가 크고 햇볕에 그을린 모습이 정말 건강해 보였으며, 관절이 울퉁불퉁하고 유난히 손이 컸다. 몸에 꼭 맞게 맞춰입은 셔츠는 군대식으로 다림질이 되어 있었다. "101부대?" "이 문신 말이로군? 그렇소. 나는 당시에 철부지였지. 혈기왕성한 때라 런던에서 취한 김에 동료 세 녀석과 함께 이 문신을 넣었다오. 여편네는 지워버리라고 생각날 때마다 잔소리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공수부대였소?" "아니, 보병이었지요. 다른 전쟁에서요. 하지만 101부대는 기억하고 있지요. 바스토뉴에 갔었습니까?" "그렇소. 등에 굉장한 종기가 났었지. 위생병은 좋은 것을 먹고, 몸을 더 자주 씻으라고 하더군." 그는 엄숙한 얼굴로 말을 했다. "그런데 독일병이 고쳐 주었다오. 유산탄 파편을 등에 한 방 맞고는 종기가 없어져 버렸지." "의학 덕분이군요." 그는 스스로도 놀란 듯이 계속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니까. 30년 전의 이야기이지." "평생 잊지 못하실 겁니다." "정말 그래. 그런데 누구를 조사하고 있다고 했더라?" "발링턴, 도나 발링턴. 다른 이름은 린다 호킨스, 26살 정도, 키 164cm, 머리는 검정, FBI의 기록에 의하면 1966년에 여기서 지문을 찍은 것으로 되어 있더군요. 당시는 18살쯤이었을 겁니다. 당신은 그때도 여기 있었나요?" 고개를 끄덕였다. "1946년 이후로는 여기 있었지." 그는 파일 캐비닛 쪽으로 갔다. 벨트의 등뼈 근처에 수갑이 걸려 있으며, 오른쪽 허리에 군수품인 뚜껑 달린 홀스터에 군용 45구경 권총을 꽂고 있다. 위에서 세 번째 서랍을 뒤지더니 마닐라 종이철을 하나 꺼냈다. 여전히 이쪽에 등을 돌린 채 종이철을 펴서 안에 든 서류를 훑어보고는 도로 덮고서 돌아서더니, 종이철 표지를 밑으로 책상에 놓고서 자리에 앉았다. "닥터 페퍼, 마시겠소?" "아니, 괜찮습니다. 도나 발링턴의 파일이 있나요?" "한 번 더 면허증을 보여주지 않겠소? 그리고 뭐 다른 신분증 같은 거라도." 사립탐정 면허증과 운전면허증을 건네주었다. 그는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돌려주었다. "왜 도나 발링턴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시오?"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려지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조사하고 있거든요. 그것도 아무런 관계도 없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도나 발링턴은 그 일과 어떤 관계가 있소?" "그녀는 자기의 이름, 전에 살았던 주소, 결혼한 경위에 대해서 내게 거짓말을 했지요.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겁니다." "무슨 죄라도 범했다고 생각하고 있소?" "내가 알기로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어요. 그녀가 목표는 아닙니다. 다만 일을 해나가는 도중에 거짓말에 부딪치게 된 거죠. 그래서 사실을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 당신도 아시겠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그 이유를 알고 싶어진다는 것을." 도널드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페퍼를 한꺼번에 털어넣고 윗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옛날 상처를 캐낼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 체포했을 때 그녀는 18살이었지요. 누구든지 18살 때에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요. 나는 그녀에 대한 것을 그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도널드슨은 여전히 윗입술을 빨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어보기 시작해서, 동부에서 온 사립탐정이 왜 도나 발링턴에 관해서 묻고 다닐까 하고 사람들이 수상쩍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게 오히려 더 귀찮게 될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알아내고 말 겁니다. 여기는 별로 큰 마을도 아니고." "묻고 다니는 걸 내가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소리는 마시지요, 보안관. 당신이 방해한다면 나는 주경찰에 연락해서 재판소의 명령서를 가지고 와서 묻고 다닐 겁니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고, 점점 더 소문이 퍼지고,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난처하게 될 테지요. 나는 합법적인 조사를 하고 있는 거랍니다." "끈질긴 사람이군, 당신은. 좋소, 묻는 데 대답하지. 나는 다만 정당한 이유도 없으면서 개인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나도 마찬가지이지요." "좋아." 그가 종이철을 펴놓고 안에 든 서류를 보았다. "나는 도나 발링턴이 대마초 담배를 세 개비 소지하고 있어서 체포했소. 그 아이는 스쿠터스 런치 뒤에 세워둔 소형 트럭 안에서 박스턴에서 온 사내아이 둘과 피웠소. 초범이었지만, 1966년 당시 이 부근에서는 대마초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꽤 신경질적이었다오. 좌우간 나는 그녀를 체포했소. 그녀는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가 되어 1년 동안 보호감찰을 받게 되었지. 그런데 6주 뒤에 그것을 무시하고 이곳의 불량배와 뉴욕으로 갔소. 그 뒤로는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소." "그 불량배의 이름은?" "토니 리스. 도나보다 여덟 살 위였소." "그녀는 어떤 아이였습니까?" "꽤 오래 전 일이라서." 도널드슨이 말했다. "한마디로 안정성이 없는 아이었지. 욕구불만 같은 느낌이었어 -- 악질적인 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소문은 나빴지만. 나이든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지. 학교 같은 반에서 담배, 술, 대마초 등은 누구보다도 먼저 시작하지. 다른 여자애들이 농업조합의 홀에서 열리는 댄스 교실에 다니고, 다른 사람들이 더러운 말을 쓰면 얼굴을 붉히던 그런 시절에 사내아이들이 겨우 용기가 생기게 되면 제일 먼저 불러내던 아이였소." "가족은 아직 이 마을에서 살고 있나요?" "살고는 있지만, 아무도 그 아이의 주소는 모를 거요. 그 아이가 가출했을 때 찾아달라고 부모가 내게 와서 귀찮게 졸라대던 일도 있었지. 그러나 여기는 나와 조수가 둘 있을 뿐이고, 더구나 그 중 하나는 시간제로 일하고 있다오. 어느 정도 손을 써보고도 찾지 못하자 그 부모도 그 아이에 대한 건 잊어버리고 말았소. 어떤 의미로는 도나가 가출한 것을 좋아했을 거야. 부모는 그 아이를 잡아놓지 못했으니까. 느지막이 태어난 아이였거든. 발링턴 부부는 그때까지 아이가 없어서 발링턴 부인이 거의 갱년기에 접어들 무렵에 도나가 태어났다오. 좌우간 내 아내가 그렇게 말하더군. 두 사람 다 굉장히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리스는 어떻습니까? 한 번이라도 돌아왔었습니까?" 도널드슨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뉴욕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고 들었는데, 형무소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어쨌든 이 근처에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그렇군요. 도나의 마지막 주소로 알려진 곳은?" "여기 있는 집뿐이오." "그 주소를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부모와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내 차로 데려다 주지. 내가 옆에 있어 주어야 그 두 사람은 안심할 거요. 둘 다 나이가 들어서 곧잘 신경질을 내곤 하거든." "나는 뭐 고문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도널드슨. 단지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도나 발링턴에 대해서 당신이 모르는 일을 두 사람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지요." "함께 가겠소. 둘 다 좀 무기력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누가 뭐라 해도 이 마을 사람들이오. 알아듣겠소?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도와주고 싶은 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가시지요." 둘이서 도널드슨의 흑백 경찰차에 타고 한길을 되돌아서 상점들과 초라한 정원을 지나갔다. 거리 끝에서 왼쪽으로 꺾어 강 쪽으로 내려가서 커다란 움집 앞에서 세웠다. 본래는 강을 등진 방 네 개짜리 방갈로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지붕을 달아내어 창고를 만들기도 하고, 허물어져 가는 건물을 보수하고 늘리기도 하여 지금은 방이 몇 개가 되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집 앞 진흙 마당에서는 더러운 흰 닭이 모이를 쪼고 있다. 갈색에 흰색이 섞인 돼지가 우리 옆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서 자고 있다. 바깥문 오른쪽에 칙칙한 회녹색의 커다란 가스 봄베가 두 개 서 있고, 왼쪽에 덩굴식물이 조금 남아 있지만 워낙 더러워서 무슨 식물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집 옆과 뒤의 땅은 물에 씻기어 조그만 골짜기 같은 느낌이며, 강을 향해서 내리막으로 비탈져 있다. 달아맨 창고의 한 모퉁이에 낡은 타이어가 쌓여 있으며, 그 너머에 40년 전 소형 트럭의 녹슨 차체, 채소를 담았던 빈 궤짝을 산더미처럼 모아두었고, 강물이 가까이까지 들어왔을 때 쌓인 진흙에 덮인 편편한 땅에 침대의 스프링이 있고, 강의 더러워진 거품으로 인해 미끈미끈한 이끼가 붙어 있다. 나는 처치 파크의 아파트에서 막 빨아입은 면바지를 입고서 검은 머리에 윤기가 흐르는 린다 러브를 떠올렸다. "음미해 볼 만한 곳이로군." 내가 말했다. "그래. 초라하지? 도나가 기회가 생기자마자 가출을 해버린 것도 무리가 아니라오." 우리는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걸어갔다. 다 썩은 못에 갈색으로 변해 버린 화환의 잔해가 걸려 있다. 과거의 크리스마스의 망령이다. 아니면, 발링턴 부부가 저승에서 가질 크리스마스를 위한 예비일지도 모른다. 도널드슨의 노크 소리에 늙은 여자가 나왔다. 뚱뚱했으며, 집안에서 입는 누런색의 옷에 싸인 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드러난 다리는 주름투성이이고, 낡아빠진 남자용 로퍼를 신고 있다. 백발이 단발머리처럼 짧고 끝이 고르지 못한 것은 아마 집에서, 그것도 잘 들지 않는 가위로 잘랐기 때문일 것이다. 눈코가 분명치 않고, 지방질로 주위가 불룩한 눈은 조그맣고 사팔뜨기처럼 보인다. "잘 있었소, 발링턴 부인?" 도널드슨이 말했다. "보스턴에서 온 분이라오. 도나에 대해서 당신네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거요." 늙은 여자가 나를 보았다. "도나를 만났나요?" "안으로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녀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요." 별로 나이 든 말투는 아니지만, 억양이 전혀 없고, 마치 할 만한 이야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한, 완전히 지쳐버린 단조로운 말투였다. 도널드슨이 모자를 벗고 들어갔다. 나도 뒤따라 들어갔다. 방에는 등유와 개, 그리고 그 밖에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감돌고 있었다. 굉장히 지저분했다. 도널드슨과 내가 긴의자에 앉을 곳을 발견하고 앉았다. 발링턴 부인이 다리를 끌면서 복도를 걸어가더니, 얼마 뒤 남편과 함께 돌아왔다. 남편은 얼굴빛이 나쁜 대머리 노인인데, 키가 크고 소매없는 언더셔츠를 입고 있었고, 검은 우스터드 천 바지 앞이 열려 있었다. 얼굴에는 흰 수염이 되는 대로 자라 있었고, 입가에는 말라붙은 달걀이 묻어 있다. 마르고 창백한 팔의 피부가 늘어져 있으며, 겨드랑 밑에도 주름이 있었다. 깡통에서 본드 스트리트 파이프 담배를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빨아들이듯이 입에다 넣었다. 그가 도널드슨에게 눈인사를 했다. "잘 있었소, 발링턴 씨?" 도널드슨이 말했다. 발링턴 부인은 버티고 선 채이고, 둘 다 움직이지도 않고 입도 떼지 않고 도널드슨과 나를 보고 있었다. 미국판 고트 인다운 태도이다. 내가 말했다. "사립탐정입니다. 따님의 주소를 당신들에게 밝힐 수는 없지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따님의 과거에 대해서 좀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따님에게 해가 될 일도 아니고, 오히려 따님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만, 모든 점에서 절대로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는 일입니다." "무얼 알고 싶은가요?" 발링턴 부인이 말했다. "따님에게서 마지막으로 소식이 있었던 것은 언제입니까?" 발링턴 부인이 말했다. "한 번도 없었어요, 가출한 뒤로는." "편지나 전화가 한 번도 없었다고요? 한마디도?" 발링턴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입을 열려고도 않고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마을을 떠날 때 따님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습니까?"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내와 뉴욕으로 간다는 쪽지를 남겼을 뿐이며, 그 뒤로는 소식도 모릅니다." "따님을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발링턴 부인이 보안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TP에게 말했어요. 그가 찾아보았지요. 찾지 못했어요." 발링턴 부인의 뒤에서 노란 털이 짤막하고 귀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앙상한 잡종개가 나타났다. 우리를 보고 으르렁대자 발링턴이 돌아보고서 허리께를 힘껏 걷어찼다. 개가 깽깽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토니 리스에게서 소식은?" 대뇌 절단수술 후의 환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남편에 비하면 그녀 쪽이 아직 생기가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노인이 문 뒤의 모래가 들어 있는 상자를 향해서 담뱃즙을 찍하고 내뱉었다. 상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두 사람은 아무 것도 몰랐으며,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남편은 내가 있는 동안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도널드슨이 잘 있으라고 하자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차에 오르자 도널드슨이 말했다. "다음은 어디로 가실까요?" "한숨 돌릴 때까지 1분쯤 여기 앉아 있고 싶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왔소." 도널드슨이 말했다. "누구라도 지쳐버릴 수밖에 없지." 나는 끄덕였다. "좋습니다, 토니 리스는 어떨까요? 여기에 가족이 살고 있나요?" "아니, 부모는 모두 죽었소." 도널드슨이 엔진을 걸고 차를 돌려서 마을 사무소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착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 같으면, 스펜서, 이번에는 뉴욕을 조사해 보겠소." "환락의 대도시지요." 제 11 장 비행기가 바다 위에서 크게 방향을 바꾸어 라 가디아 공항에 닿은 것은 저녁때였다. 버스는 38블록의 이스트 사이드 터미널로 갔다가, 거기서 택시로 웨스트 57블록의 할리데이 인으로 갔다. 레드퍼드의 비나 슈니첼이 아주 맛있었으므로 기왕이면 음식 맛이 좋은 곳에서 묵기로 했다. 웨스트 사이드는 지난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초라하고, 호텔도 그 지역에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로비가 너무 더러워서 비나 슈니첼이 있는지 없는지 식당에 물어보지도 않았다. 대신에 58블록의 스칸디나비아 요리 레스토랑에 가서 스모가스보드를 여러 가지 먹었다. 다음날 아침 내 방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뉴욕 시 사회봉사부의 몇 개 과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57블록을 5번가까지 걸어서 다운타운으로 갔다. 뉴욕에서는 언제나 걷기로 했다. FAO(UN 식량농업기구) 슈왈츠의 진열장에 거대한 기린 박제가 있고, 브렌타노의 진열장에는 여러 민족의 요리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들어가서 보스턴에 있는 상점의 지점인가 아닌가 물어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녀석들은 아무래도 내 재치있는 유머를 이해 못할 것이 틀림없다. 34블록에서 왼쪽으로 꺾어졌을 때는 9시 45분이 되어 있었다. 동쪽으로 4블록, 3번가와 2번가 사이에 소방서를 개조한 듯한 3층으로 된 베이지색 벽돌 건물이 있다. 층계를 넷 올라가서 갈색 쇠문 양쪽에 건물과 직각으로 깃대가 있다. 오른쪽 깃대 밑 판자에 '뉴욕 시 사회봉사부 요크빌 생활보조 센터'라고 새겨져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방이었는데, 색깔은 보지 않고도 상상이 되는 녹색이었다. 입구 오른쪽에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세 줄로 놓여 있었다. 왼쪽에 카운터가 있다. 카운터 너머에 있는, 파란 안경 사슬을 목에다 걸고 있는 몸집 큰 흑인 여자가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은 노파에게 그녀의 수표는 다음 주에 오며, 그전에는 오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노파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불평하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흑인 여자가 전보다 더 큰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카운터 끝의 접는 의자에 뉴욕 시경의 경관이 앉아 있었다. 홀쪽한 흑인 여자인데 배지를 달고, 권총을 겨드랑이 밑에 차고, 머리는 짧고, 굉장히 높은 플랫폼 슈즈를 신고 있다. 카운터 너머에는 방이 L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칸으로 막아놓은 사무실이 보였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뒤, 입구 오른쪽에 층계가 있다. 손으로 쓴 표식에 '면담은 위층'이라고 적혀 있고, 화살표가 붙어 있었다. 올라갔다. 2층에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면담하는 곳이 조그만 방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첫번째 면담실에는 사람이 있었다. 두 번째에는 없었다. 활짝 열려 있는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고해실과 거의 다름없는 넓이의 방인데 책상이 하나, 파일 캐비닛이 하나, 면담용 의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여위고 젊었으며, 바살이나 베닝턴 대학을 갓 나온 모양이었다. 햇볕에 그을려 눈가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잔주름이 있었다. 하얗고 소매 없는 블라우스의 목 언저리를 열어놓고 있었다. 갈색 머리를 짧게 깎고, 화장은 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틀이 잡히지 않은 느낌이며, 동정은 하지만 응석은 받아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 명패에는 해리스 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깔끔한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그녀가 말했다. 오른손에 연필을 쥐고 있었다. 나는 밝은 다갈색 하복, 짙은 남색 셔츠, 청색과 황금색 무늬가 들어 있는 흰 넥타이로 뉴욕풍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파트에 초대해 줄까? 아니, 생활보호자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양복점에 찾아가서 잔소리를 해줄 필요가 있다.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눈썹을 모으고 30초쯤 보더니 얼굴을 들고 말했다. "그래서요?" "모토를 넣는 게 좋았나?" 내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토. 명함에. 예를 들면 '뜬 눈으로 업무수행', 경우에 따라서는 '문제는 모두 나의 일' -- 이런 문구 말이오." "미스터......" 명함을 보았다. "......스펜서, 농담을 하시는 모양인데,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일에 쫓기고 있으니까 분명한 용건을 말해 주시면 안될까요?" "알았습니다. 앉아도 됩니까?" "그러세요." "그럼. 나는 8년 전에 여기에 와서 생활보호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젊은 여자를 찾고 있소." "왜 그 사람을 찾는 거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한 질문이지만, 말할 수가 없소." 명함을 볼 때처럼 눈썹을 모으고 나를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오래 전의 기록이 여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기는 정부기관이오. 정부기관은 절대로 기록을 없애지 않지. 언젠가, 누구에겐가 책임문제가 생겼을 경우, 당사자가 자기의 처지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여기에는 17세기의 마지막 네덜란드 총독인 페이터 스타이베산트의 복지기록도 있을 거요." 표정이 엄숙해지고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하나 생겼다. "어째서 그 젊은 여자가 생활보호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눈썹을 찌푸리지 않는 게 좋소. 눈가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잔주름이 생기지 않게." "스펜서 씨, 이 대화에 개인적인 일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내 눈의 상태는 이 이야기와 관계 없으니까요." "하지만 화냈을 때의 그 눈의 빛남이여." 그녀는 자칫 웃으려다가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내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당시 그녀는 18살쯤이었소. 중서부의 조그만 마을에서 그 마을의 질나쁜 사내와 가출했소. 뉴욕에 도착해서 그 사내는 그녀를 버렸을 것이 분명하오. 그녀가 생활보호를 받았거나, 매춘부로 전락했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소. 그래서 매춘부쪽보다는 이쪽에 기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거요." 오른손에 쥔 연필로 책상을 똑똑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섯 번쯤 두드렸을 때 그녀는 깨닫고서 그만두었다. "누군가가 생활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이 당사자에게 있어서 불리하게 이용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잔인한 일이지만, 그것이 인생의 현실인걸요. 그러니까 이 일에 관해서 내가 협조를 망설이는 이유를 이해해 주었으면 해요." "나는 그 아이 편이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내가 하는 말만이 유일한 방법이오." "하지만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군. 당신은 모르겠지." 다시 연필로 똑똑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전화를 보았다.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길 생각일까? 전화에서 눈을 떼었다. 훌륭하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도나 발링턴." 어느 방에선가 타이프 소리, 다른 복도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자, 조사해 주시지요. 언제고 누군가가 하게 될 거요. 하는 사람이 바뀔 뿐이지. 내가 직접? 경찰? 재판소? 당신의 보스? 보스의 보스? 기왕이면 당신이 해주면 어때요? 절차를 줄이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당신 말이 옳은 것 같군요. 알았어요."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다리가 멋있다.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나는 창가에 서서 34블록을 내려다보며 복지사무소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는 사람 수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다지 초라한 꼴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복도 저쪽에서 어떤 남자가 빠른 스페인 어로 저주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타이프 소리가 그쳤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해리스 양이 자료철을 가지고 돌아왔다. 앉아서 책상 위에 펴놓고 안에 든 서류를 읽어 나갔다."도나 발링턴은 1966년 8월에서 1월까지 이곳의 생활보호를 받았음. 당시의 주소는 이스트 13블록 116번지. 그녀와 이 사무소와의 관계는 11월 13일자로 끊겼으며, 그 이후의 일은 전혀 알 수 없음." 자료철을 덮고는 두 손을 깍지껴서 올려놓았다. "정말 고맙소." 내가 말했다. "천만에요."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 50분. "조금 이르지만 함께 점심이라도, 어떻소?" "아닙니다. 됐습니다." 보스턴에서 온 탐정은 면목없게 되었다. "한 손으로 엎드려서 팔굽혀펴기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소?" "물론 보고 싶지 않아요. 용무가 끝났으면, 스펜서 씨, 나는 아주 바쁘거든요." "좋소, 알았소. 조사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 내가 방에서 나오자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는 복도에서 사무실로 고개만 들이밀고 말했다. "한 손으로 엎드려서 팔굽혀펴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별로 감동하는 눈치도 아니기에 그 자리를 떠났다. 제 12 장 13블록은 다운타운 쪽으로 걸어서 25분이 걸렸으며, 116번지는 2번가와 3번가 사이의 이스트 빌리지에 있었다. 116번지 앞에는 남자들 한떼가 몰려 있었는데, 셔츠의 단추를 열어놓은 채 세워둔 차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큰 병의 맥주를 병째 입에 대고 마시기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스페인 어를 쓰고 있었다. 116번지는 4층으로 된 벽돌집이며, 오래 전에 노란 칠을 한 것이 지금은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그 옆은 한 층이 네 세대로 되어 있는 6층짜리 아파트로, 연회색의 페인트가 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문, 창틀, 비상계단과 앞면 돌층계의 난간이 밝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 친구들이 포터블 라디오로 스페인 음악을 한껏 볼륨을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116번가의 돌층계를 네 개 올라가서 '관리인'이라고 쓰인 벨을 눌렀다. 아무 기척이 없어서 다시 눌렀다. 맥주를 마시고 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말했다. "고장났소, 누굴 찾는 거요?" "관리인을 만나려고." "안에 있어요. 첫번째 문을 노크해 보시지." "고맙소." 들어가 보니 분스 팜 애플 와인의 빈병과 끈없는 스니커(고무 바닥 운동화)가 한쪽 구석에 있었다. 앞쪽 왼편 벽을 따라서 층계가 있고, 그 층계의 오른쪽에 짧은 복도가 안에까지 이어져 있다. 첫번째 문을 두드리니 금방 여자가 나타났다. 큰 키에 단단해 보이는 체격이었으며, 머리칼은 짧고 살갗은 올리브색이었다. 이마에서 뒤쪽으로 흰 머리가 섞여 있었다. 남자용 흰 셔츠에 커트오프 면바지. 맨발이며, 발톱에는 짙은 보라색이 칠해져 있다. 45세쯤 되어보였다. "나는 스펜서라는 사람입니다. 보스턴의 사립탐정인데, 8년쯤 전에 여기서 한동안 살았었던 여자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가 웃으니 가지런하고 흰 이가 보였다. "들어오시지요." 그녀가 말했다. 네모 반듯한 넓은 방인데, 거리 쪽으로 난 높은 창문에서 햇빛이 눈부시도록 들어오고 있었다. 벽과 천장은 흰색이며, 창엔 붉은 커튼, 바닥도 붉은 깔개가 깔려 있다. 방 한가운데에, 위에다 붉은 리놀륨을 붙인 튼튼하게 생긴 네모나고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 있고, 그 한가운데 과일을 가득 담아놓은 커다란 바구니, 양쪽 끝에 등받이가 높은 나무의자가 있다. 그녀가 몸짓으로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커피는?" "마시겠습니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그녀가 커피를 끓이기 위해서 구슬 커튼이 걸려 있는 아치형 통로를 지나 보이지 않게 되자 방안을 둘러보았다. 창 앞에 마호가니 재의 팔걸이 의자가 있는, 등받이가 둥굴고 뒤로 젖혀진 빅토리아 왕조풍의 소파가 있고, 벽에는 벨라스케스의 복제품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그녀가 붉고 둥근 쟁반에 커피 카라프와 흰 도기제 잔 두개를 올려가지고 돌아왔다. "크림이나 설탕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컵에 커피를 따라주고 테이블 맞은편 끝에 앉았다. "아주 맛있는 커피로군요." 내가 말했다. "내가 직접 따와요. 내 이름은 로즈 에스트러더. 내가 도움이 된다면." 어렴풋이 다른 나라의 사투리가 섞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린다 러브의 아파트에서 찍은 그녀의 사진을 꺼내놓았다. "이것은 도나 발링턴이라는 여자의 최근 사진입니다. 1966년 8월부터 11월까지 이곳 주소에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좋으니까 그녀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진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1966년, 우리 집에서 가장 어린 아이가 열 살......그래요. 기억하고 있어요, 도나 발링턴. 중서부 어딘가에서 왔어요. 집을 멀리 떠나서 뉴욕에서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동안 젊은 남자가 함께 있었는데, 그는 곧 떠나버렸어요." "그녀가 이곳을 나갈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 모르십니까?" "모르겠는데요." "옮겨간 주소는?" "아무 말도 안했어요. 돈 한푼 없고 방세가 밀렸기에 34블록의 복지사무소에 가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어느 날 돌아와서는 방세를 모두 현금으로 청산하고 옮겨갔어요." "그 돈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혹시 마음에 짚이는 것이라도?" "돈벌이를 했다고 생각해요." "매춘?" 끄덕였다. "분명한 것은 모르지만 외출을 자주 했고, 남자들도 자주 데려왔고, 바이올렛이라는 뚜쟁이와 자주 함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남자는 아직도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바이올렛 같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있게 마련이지요." "어디에 있습니까?" "대개 3번가의 15블록에 가까운 카사 그랑데 앞에 있어요." "그의 풀 네임은?"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냥 바이올렛. 커피 더 드시겠어요?" "고맙습니다." 컵을 내밀자 카라프에서 따라주었다. 그녀의 손은 깨끗하고, 강한 힘을 느끼게 했으며, 발톱과 마찬가지로 손톱에도 보라색이 칠해져 있었다. 반지는 끼고 있지 않았다. 가끔 밖에서 그 포터블 라디오의 음악과 맥주를 마시고 있는 녀석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위고 아주 자그마한 소녀였어요." 로즈 에스트러더가 말했다. "겁먹고 있었지요. 여기 있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집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았어요. 화장하는 방법이나 옷입는 방법도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방법도 몰랐고. 가령 매춘부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고생깨나 했을 거예요." 나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일어났다. "커피와 여러 가지 말씀 정말 고마웠습니다." "무슨 문제를 일으켰나요?" "아니,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내가 해결해 주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악수를 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로즈 에스트러더의 아파트에서 나오니 밖은 덥고 소란스러웠다. 반 블록 걸어서 3번가로 나가 북쪽을 향해 업타운으로 갔다. 14블록 모퉁이에서 코버트로 지은 오버를 입은 사나이가 잡화점 벽돌담에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어 하며, 몸이 흔들리며 벽으로 쓰러지기 직전인데, 한 손으로 코트를 누르고 있었다. 조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벽에다 대고 오줌을 눌 경우에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약 1 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나이가 인도에 쓰러져 무릎을 구부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함께 마신 모양이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 반이었다. 15블록의 모퉁이에 두꺼운 판유리 진열창 밑에 모조 자연석을 붙인 술집이 있다. 그 진열창 왼쪽에 있는 문은 모조 오크 재(材)이다. 조그만 네온 사인에 '카사 그랑데, 생맥주'라고 써 있다. 카사 그랑데 앞 인도 옆에 하얀 컨티넨탈과 하얀 비닐 지붕이 달린 밤색 캐딜락 쿠페가 세워져 있다. 영화 '슈퍼프라이'를 너무 많이 본 사나이가 그 쿠페 드 빌에 기대서 있었다. 흑인인데 키는 양말만 신고도 190cm, 지금처럼 오픈 투의 빨간 프랫폼 슈즈를 신고 있으면 2미터는 되어 보인다. 빨간색과 검은색의 다이아몬드형 무늬의 양말, 검은색 반바지, 미늘로 엮어서 만든 듯한 조끼를 입고 있다. 굉장히 커다란 붉은 깃을 단 삼총사풍의 검은 모자를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눌러쓰고 있었다. 빠진 것이라고는 '뚜쟁이 근무중'이라는 간판뿐이었다. "실례하겠소." 내가 말했다. "바이올렛을 찾아왔는데." 뚜쟁이가 높은 구두를 신고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어떤 여자아이에 대해서 알려줄 거라고 하던데." "누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나 보군. 나는 여자아이 같은 건 모르는데." "당신이 바이올렛이로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나 발링턴이라는 여자아이에 관한 정보를 원해." 링컨의 엔진이 걸리고 후진으로 인도 옆에서 떨어지더니 방향을 바꾸어 달려가 버렸다. "당신, FBI인가? 안 보던 얼굴인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단지 정보를 사고 싶을 뿐이야." "좌우간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는 총의 면허증은 가지고 있겠지?" 바이올렛은 세밀한 점까지 살피고 있다. "알았어." 가슴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사립탐정이야. 보스턴에서 왔어. 그러나 정보를 산다는 것엔 변함이 없어." "보스턴?" 바이올렛이 웃었다. "쓸데없이. 도나가 무슨 짓을 했기에. 돈이라도 훔쳤나?" "아니, 숙녀 양복점에서 틴에이저용 옷가지를 훔쳤어. 그런데 그 중 일부를 당신이 입고 있는 것 같군." 바이올렛이 또 웃었다. "이것 보시라고, 내가 당신들 백인처럼 고상한 차림을 하라는 건가?" 한 손으로 캐딜락의 보닛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웃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것 같은 그 밤색 바지를 한번 봐. 시시하구먼."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 "잘 들어, 바이올렛. 나는 당신의 그 부활절 보닛의 소네트를 쓰려고 온 것이 아니야. 어때, 맥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좀 해보지 않겠나?" "글쎄, 좋겠지. 정보를 사겠다고 했겠다?" 둘이서 카사 그랑데로 들어가서 술집의 카운터에 자리를 잡았다. 술집의 안쪽 TV에서 뉴욕 메츠의 시합을 방영하고 있었다. 깨끗하고 흰 셔츠를 입은 길버트 롤랜드 같은 중년 바텐더가 와서 우리들 앞의 카운터를 치워주었다. "뭘로 하겠소, 손님?" 나와 바이올렛의 중간쯤을 보면서 물었다. "맥주 두 잔." 내가 말했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헤크. 이 양반은 괜찮아. 잠깐 장사 이야기를 할 뿐이야." 그제서야 바텐더가 내 얼굴을 보았다. "OK, 바이올렛." 그가 맥주를 따랐다. 바이올렛이 모자를 벗었다. 머리가 매끄럽게 벗겨져 있다. "헤크도 당신을 형사인 줄 알았던 거야. 설마 변장하고 일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다른 사람은 아니겠지?" 바이올렛이 다시 크게 웃었다. "뭘 알고 싶나?" 도나 발링턴의 사진을 꺼내 바이올렛에게 보여주었다. "여덟 살 덜 먹었을 때의 그녀를 알고 있나?" "사겠다고 했지? 얼마에 사겠나?" "50달러." "대단찮군." "편하게 들어오는 돈이야. 밖에 있는 저 공룡의 배를 가득 채우는 데 쓸 수 있어."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맥주를 반이나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래, 도나를 기억하지. 당신이 이름을 대자 금방 알았어." "그녀에 관해서 말해 주시지." "굉장한 시골뜨기 계집애야. 어느 숲속에서 살다 온 게 틀림없었어. 내가 있는 곳에서 일하던 때에는 진짜 어린애였어. 6개월쯤 있었던가?" "어떻게 해서 그녀와 알게 되었지?" "그 아이의 남자친구가 내 구역에서 손님을 끌더군. 녀석을 쫓아버렸더니 그 아이는 나 있는 곳에서 일하기로 했지." "그녀는 그것 말고도 선택할 길이 있었나?" 바이올렛이 싱긋 웃었다. "이 부근에는 없어." "어째서 그녀에 대해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지?" "백인이었기 때문이지. 내가 데리고 있는 계집애들은 거의가 검둥이란 말이야." "그녀는 어떻게 되었나?" 바이올렛은 어깨를 으쓱했다. "업타운으로 옮겼지. 고상한 장사야, 예약제로." 그가 맥주잔을 비웠다.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바텐더가 다시 두 잔 가져왔다. "그녀 혼자서 장사했었나?" "아니야, 다른 여자가 하는 데야. 마담이지, 베이비. 굉장히 고급스러운 데야. 보스턴의 의젓한 손님밖에 상대 안할지도 몰라. 알아듣겠지?" 그가 다시 크게 웃었다. "그 여자의 이름, 알고 있나?" "알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건 별도야." "50 더?" "좋아." 바이올렛은 일어나서 입구 옆에 있는 공중전화로 갔다. 5분쯤 지나서 돌아왔다. "패트리셔 애틀리. 이스트 37블록 57번지." "고마워, 바이올렛." 지갑에서 100달러 지폐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보스턴에 올 일이 있으면......" 바이올렛이 또 웃었다. "글쎄, 베이비, 만일 잔돈푼이 생각나면......" 나는 맥주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바이올렛이 내 쪽을 보면서 카운터에 팔꿈치를 세웠다. "이봐, 스펜서. 애틀리에게는 정말 힘깨나 쓰는 녀석들이 붙어 있어, 알겠어?" "그 점은 걱정 없어. 힘쓰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일은 신경 안 써." "그래, 체격 보니 알 것 같군. 그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애틀리와 만날 때는 조심해, 베이비. 여기는 보스턴이 아니란 말이야." "바이올렛." 내가 말했다. "여기가 지구인지조차 믿어지지 않는 느낌이야." 제 13 장 맨해튼의 미드타운, 이스트 사이드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뉴욕이다.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깨끗하고, '당신 털코트에 어울리는 제비꽃을 사왔어.' 패트리셔 애틀리는 렉싱턴 거리의 서쪽, 이스트 37블록의 4층 건물인 타운 하우스에 있었다. 석조건물에다 식민지 시대풍으로 회색이 칠해져 있고, 유리로 된 문에 연철(鍊鐵)로 세공한 장식이 되어 있었으며, 창은 흰색으로 단장되어 있다. 슬레이트로 이은 만사드 지붕(2단으로 경사된 지붕)에 조그만 돌출 창문이 나 있고, 현관의 오른쪽 조그만 테라스에는 몇 그루인가 낮은 나무들의 푸른 잎을 배경으로 꽃이 피어 있다. 검은 철제 포트에 심은 붉은 제라늄과 하얀 루시가 현관으로 통하는 세 단의 화강암 층계 양쪽에 줄지어 있다. 벨을 누르자 흰 윗도리를 입은 반백의 체격 좋은 남자가 나왔다. 명함을 건네주었다. "패트리셔 애틀리에게 부탁합시다." "들어오십시오."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섰다. 한가운데 현관으로 들어갔다. 넓적한 돌을 곱게 갈아서 바닥에 깔았으며, 문 반대쪽에 수직부분을 희게 칠한 마호가니 층계가 있다. 흑인이 오른쪽 벽에 붙은 문을 열어주자 나는 37블록의 거리와 조그만 정원이 보이는 아늑한 거실로 들어갔다. 벽은 흰색 패널을 붙였고 녹색, 빨간색, 황금색의 티파니 램프가 한가운데 매달려 있었다. 동양 양탄자가 깔려 있고, 에드워드 왕조풍의 가구가 놓여 있다. 창과 반대쪽 벽에 다리가 높은 서양식 옷장이 있고, 커트 글라스의 데칸터(식탁용의 마개 있는 유리병) 네 개와 조그만 크리스탈 잔이 여러 개 올려져 있다. 데칸터의 스토퍼를 차례차례 집어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셰리, 코냑, 포트, 칼바도스. 칼바도스를 한 잔 따랐다. 문 바로 마주보는 벽에 검은 대리석 난로가 있고, 그 양옆으로 천장까지 닿은 서가(書架)가 있다. 책 이름을 살펴보았다. 찰스 디킨스 전집, 윈스턴 처칠의 <영어 국민권의 역사>, <롱펠로 -- 시 및 산문 작품집>, H G 웰스의 <세계사 대계>, 로크웰 켄트의 삽화가 들어 있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등뒤의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집사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스펜서 씨, 패트리셔 애틀리입니다." 손을 내밀었다. 악수했다. 서가의 책을 모두 읽고 이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40 전후, 골격이 단단하고 자그마한 체구의 블론드로서, 둥글고 큰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다. 머리카락을 다발머리로 땋았다. 헴과 네크라인에 남색과 녹색의 파이핑으로 테를 두른 오프화이트, 소매 없는 린네르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다리는 그대로 드러낸 채였으며,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앉으시지요. 술은 이미 따라놓으신 것 같군요. 잘하셨어요. 무슨 일이신지요?"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나의 맞은편 긴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무릎을 꼭 붙이고 발목을 겹치고 두 손을 무릎 위에서 마주잡고 있다. "8년 전에 당신이 알고 있던 도나 발링턴이라는 젊은 여자에 관한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스펜서 씨?" "당신과 같은 영업을 하는 사람 하나가 자기에게서 떠나서 당신 회사로 들어갔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실례지만, 이해가 잘 안되는군요." 파란 눈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얼굴에 주름이 전혀 없다. "기분나쁘게 할 생각은 아닙니다만, 실은 이스트 빌리지의 바이올렛이라는 뚜쟁이가 가르쳐 주기를, 그녀는 1966년 늦가을에 업타운으로 옮겨 당신 밑에서 일했다고 하더군요." "실례지만,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은 모르겠군요." "키가 크고 마른 남자인데, 야한 옷차림을 하고 있고, 잔챙이지요. 당신이 그에 관한 걸 알 리가 없죠. 핑커튼 탐정사가 내 이름 같은 걸 모르듯이 말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분야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분이 틀림없군요, 스펜서 씨." 웃으니까 두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하지만 내가 어째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 바이올렛이라는 사람은 돈이 탐나서 당신을 속인 것 같아요. 뉴욕은 정말로 방심할 수 없는 도시랍니다." 냉방장치가 되어 있어서 방은 썰렁하고 조용했다. 칼바도스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침 7시 반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벌써 4시 반 가까이 되었다. "미즈 애틀리, 나는 당신 일을 방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며, 도나 발링턴에게 피해를 줄 일도 원치 않소. 다만 그녀에 관한 것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미즈 애틀리, 그렇게 불러주시는 건 고맙지만, 미세스랍니다." "OK, 애틀리 부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지금 내가 한 말엔 변함없소.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나 발링턴의 과거를 알아낼 필요가 있소. 비밀은 틀림없이 지키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고 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소. 하지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요." 나는 브랜디 잔을 비웠다. 그녀는 일어나서 잔을 집어들어 다시 따라서는 내 앞, 대리석으로 된 커피 테이블에 놓았다. 그 몸놀림이 어색함이 없고 우아하며 품위가 있었다. 그녀 자신도 그랬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스펜서 씨, 나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겠군요. 그 젊은 여자를 알지도 못하고, 또 내가 알고 있다고 누군가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애틀리 부인, 처음 만났을 뿐입니다만 함께 저녁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수법 중 하나인가요, 스펜서 씨? 촛불을 밝히고 와인을 들면 내가 그 젊은 여자에 관한 일을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그래요, 그런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식사하는 것은 아주 질색이거든요. 이 도시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당신과 바이올렛뿐인데, 바이올렛은 선약이 있답니다." "그, 당신이 뭐라고 했더라, 이스트 빌리지의 뚜쟁이 대신이 될 생각은 없군요." "내가 취급한 사건 중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을 몇 가지 말씀드리지요. 그래요, 내가 '멀리서 짖는 개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각나는군요......" 보조개가 또 나타났다. "그 밖에 특별히 당신을 위해서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팝송도 몇 곡 부르는데, 그것도 한마디 한마디 가사를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거절한다면?" "그때는 폴리 스퀘어의 지방검사국에 가서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거들어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나는 협박당하는 것을 특별히 싫어해요, 스펜서 씨." "절망한 나머지 이렇게 된 겁니다. 고독과 욕망은 사나이를 미치게 하니까요. 그래요, 그래서 이런 일도 보시게 되는 겁니다." 나는 작은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고서 양탄자 위에 엎드려서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했다. 왼손을 등으로 돌린 채 몸을 올린 자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 더 해볼까요?" 그녀가 웃었다. 처음에는 진지한 얼굴로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배가 흔들리고 있었으며, 그러다가 잘 익은 올리브가 들어갈 정도의 보조개를 보이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내어 웃었다. "가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와서 곧 가겠어요. 자, 대강 해두고 일어나요, 정말 바보 같군요." 나는 일어났다. "장기인 한 손 팔굽혀펴기. 이걸로는 무조건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그녀는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브랜디를 또 한 잔 홀짝거리고 있으려니 목에서 여민, 등이 깊게 파인 흰 드레스에 보라색 샤시(허리에 감는 천)를 감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구두와 이어링도 샤시의 색깔과 같은 것이었다. "허바, 허바." 내가 말했다. "허바, 허바? 대체 무슨 뜻이죠?" "당신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당신만 좋다면, 여기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꽤 느낌이 좋은 레스토랑이 있어요." "맡기겠습니다. 여기는 당신의 도시입니다." "당신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에 따라서 생각이 변하는 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 식당은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요, 스펜서." "택시로?" "아뇨. 스티븐이 운전해 줄 거예요." 둘이서 현관을 나서니 바로 그 체격 좋은 흑인이 메르세데스 세단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윗도리는 남색 블레이저로 갈아입었다. 레스토랑은 이스트 사이드의 67블록에 있었으며, '비둘기의 날개'라는 이름이었다. "금으로 만든 그릇에 요리를 담아서 내오나?"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왜 그런 걸 묻죠?" "헨리 제임스. 책에 비유한 농담입니다." "난 읽은 적이 없어요."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겨우 5시 반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저녁 먹을 시간으로는 좀 일렀지만, 그래도 그들은 점심은 먹었을 것이다. 나는 먹지 않았다. 작고 아늑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로비에 디저트를 잔뜩 준비해 둔 테이블이 있고, 아치형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방이 두 개 있었다. 천장은 온실처럼 열리는 우유빛 유리, 벽은 한번 쓴 벽돌이다. 일부는 건물 본래의 것이고, 일부는 다른 벽돌들을 교묘하게 짜맞춘 것이다. 테이블보는 핑크색이고, 여기저기에 꽃과 관엽식물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달아매는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헤드 웨이터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애틀리 부인. 테이블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헤드 웨이터의 안내를 받았다. 레스토랑의 벽 한 면이 거울로 되어 있어서 실제보다도 훨씬 넓은 느낌을 주었다. 한 줄로 서서 들어가면서 나는 그 거울로 내 매무새를 점검했다. 양복은 아직 단정했으며, 머리는 바로 지난 주에 깎았다. '플레이걸' 잡지의 탤런트 스카웃이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다. "칵테일은 어떻게 할까요?" 패트리셔 애틀리가 말했다. "칸파리 온 더 록스에 레몬 토스트를 부탁해요, 존." "생맥주 있소?" 내가 물었다. "아뇨." 헤드 웨이터가 말했다. "병에 든 암스테르담 있소?" "아뇨." 내가 패트리셔 애틀리에게 말했다. "네딕스를 아직도 하고 있나요?" 그녀가 헤드 웨이터에게 말했다. "하이네켄 한 병 갖다줘요, 존." "알았습니다, 애틀리 부인." 헤드 웨이터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주방으로 갔다. 그녀가 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도 진지해질 때가 있나요, 스펜서?" "물론 있지요. 예를 들면 당신과 도나 발링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진지한 일이지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어째서 내가 그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내 질문은 진지한 것이에요." "당신은 고급 매춘업의 책임자이며, 내가 얻어낸 정보에서 알아낸 바로는 어떤 거물에게서 지원을 받고 있소. 그 일을 나는 알고 있고, 그 점은 당신도 알고 있소.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 진실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겁니다, 애틀리 부인." "알았어요. 당신이 하는 말이 맞다고 가정하고, 왜 내가 당신과 그 일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야만 하나요?" 웨이터가 마실 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가 옮겨놓을 때까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는 좀 경멸하면서 옮겨놓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불쾌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오 -- 경찰, 신문, 경우에 따라서는 FBI -- 일이 되어가는 상황에 따라서는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지원해 주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거물인가에 따라서 다르니까. 하지만 나와 직접 이야기가 된다면 일체의 비밀이 보장되고 도전적인 행위는 전혀 없을 것이오. 게다가 다시 한 손 팔굽혀펴기를 보여줄지도 모르고." "나를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불쾌한 짓을 한다면?" "나는 불쾌한 일을 견뎌내는 힘이 굉장히 세지요." 그녀는 칸파리를 한 모금 마셨다. "묘하군요. 어쩌면 전혀 묘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도나에 대해서 물어보러 온 사람이 당신이 두 번째예요." "또 누가?"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뭐라고 할까, 그래요, 옷을 걸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하얀 양복, 하얀 셔츠, 하얀 타이, 하얀 구두, 남미의 농장 주인 같은 희고 커다란 밀짚모자, 온통 하얀 것투성이였지요." "키가 크고 가느다란 체격? 껌을 십고 있고?" "그래요." "흐흠." 내가 말했다. "흐흠?" "그래요, 흐흠. 꼬리가 보이기 시작했다거나, 흐흠, 실마리를 찾아냈다거나 그런 뜻이지요. 탐정들 용어요." "그럼, 누군지 알겠군요?" "그래요, 알고 있어요. 무슨 일로 왔었나요?" 그녀는 또 칸파리를 마셨다. 나도 하이네켄을 한 모금 마셨다. "나의 여러 가지 사업 중에 -- " 그녀가 말했다. "영화사업이 있어요. 그분은 우리의 필름 중에서 도나를 본 모양인데, 마스터 프린트를 원한다고 했어요." "흐흠, 흐흠! 경영의 다각화로군."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웨이터가 가자 내가 말했다. "처음부터 말해 주십시오. 언제 도나와 만났는지, 그녀는 당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영화에 나왔는지, 그 모두를." "좋아요. 그 끊임없는 흐흠 소리를 그만두겠다고 약속한다면." "좋소." "도나는 어떤 손님을 통해서 내게로 왔어요. 그 사람이 취해 있을 때 이스트 빌리지에서 도나를 주웠대요."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시 그녀는 바이올렛 밑에서 일하고 있었죠. 그전에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손님을 끌어들였는데, 바이올렛이 겁을 주자 도망쳐 버렸지요. 그 남자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그 손님은 도나가 바이올렛 같은 조무래기 뚜쟁이를 위해서 차의 뒷좌석에서 몸을 팔기에는 너무 아까운 아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그녀를 내게로 데리고 온 거지요." 웨이터가 수프를 가져왔다. 나는 가스파쵸, 패트리셔 애틀리는 비시수아즈였다. "나는 초일류 사업을 하고 있거든요, 스펜서." "척 보면 알지요." "물론 이 일이 만일에 표면화된다면 나는 누구에게도 지금의 이야기를 부인할 거예요." "표면화되지는 않소. 나는 당신의 사업 같은 것은 문제삼지도 않소. 도나 발링턴에 관한 일밖에는 생각지 않소."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고 있군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소. 솔직히 말해서 애틀리 부인은 처음부터 문제삼지 않고 있는 겁니다. 나는 한번에 한 가지 일밖에는 생각지 않소. 지금은 도나 발링턴의 일밖에는 생각지 않는 거요." "이건 일종의 독지가적인 사업이에요. 남성의 욕구가 있으니까 존재하는 거지요." 그 욕구가 악취를 풍기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는 어느 쪽이 부정적이오?" "당신은 몰라요. 내가 보며 살아온 일을 당신은 보지 못했어요." "도나 발링턴 이야기를 하시지." "내가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18살이었어요. 아무것도 몰랐죠. 옷을 어울리게 입을 줄도, 머리 손질을 하는 법도, 화장하는 법도 완전히 무지였어요. 아무것도 읽은 것이 없고, 어디에 가본 적도 없고, 사람과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내 밑에서 있는 2년 사이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 주었죠. 걷는 법, 앉는 법, 사람과 이야기하는 법. 책을 읽게 하고, 화장법, 옷에 대한 맵시도 가르쳤어요." 웨이터가 생선을 가져왔다. 그녀는 사프란 소스를 친 혀가자미, 나는 가리비다. "렉스 해리슨을 닮았군." "그래요, 정말 그런 느낌이었어요. 나는 도나가 좋았어요. 정말로 천진하고 소박한 아이였거든요. 딸은 아니었지만, 그래요, 조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나갔어요. 결혼하기 위해서."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말을 안하는 거예요......손님 중 하나라고 생각은 하지만, 누구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언제 일입니까?" 패트리셔 애틀리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캄보디아 침공으로 대규모 항의 데모가 있었던 해, 1970년. 1970년 겨울에 내 밑에서 나갔어요. 겨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깃에 털이 달린 고급 트위드 코트를 입고 걸어가는 것을 뒤에서 보았거든요." 웨이터가 생선 요리를 내가고 레몬과 오일로 드레싱을 한 시금치와 생버섯 샐러드를 갖다놓았다. 한입 먹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 필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미성년일 때에 더러운 영화라고 하던 그런 것이겠지?" 그녀가 웃었다. "요즘은 그 판정을 내리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모두가 에로틱한 영화예요. 하지만 질이 높고, 회원 판매제예요." "검은 양말, 거터 벨트, 여자 둘에 남자 하나? 그런 겁니까?" "틀려요. 방금 말했듯이 고상하고 질이 좋은 거예요. 컬러나 사운드도 제대로 된 거예요. 사디즘, 호모, 그룹 섹스 같은 것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도나가 그 중 몇 개에 나왔나요?" "내게서 나가기 조금 전에 한 편 찍었어요. 보수도 좋고, 꽤 시간은 걸리지만 그녀에게는 약간의 기분전환이 되었을 거예요. 그 필름은 '교외의 환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어요. 그녀는 그 안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찍혔지요." "오리지널을 원한다며 찾아온 남자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은 오해를 하고 있군요. 그런 영화에 대해서나, 거기에 나오는 젊은 여자에 대해서 나는 전혀 모른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욕지거리를 퍼붓기에 스티븐을 불러서 그를 돌아가게 했어요." "상당히 솜씨가 좋은 남자라고 들었는데." "스티븐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랬군요. 내 경우에는 왜 스티븐을 시켜서 현관까지 배웅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더러운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앙트레(생선 요리와 육류 사이에 나오는 요리)가 나왔다. 나는 무화과와 브랜디 소스를 친 오리, 그녀는 오이와 게살 소스를 친 농어였다. 오리가 맛이 그만이었다. "그런 필름을 회원제로 팔고 있다고요?" 그녀가 끄덕였다. "그 회원 리스트를 구경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절대로?" "절대로. 당연한 일이지만, 내 처지는 아시겠죠? 그런 자료는 손님을 위해서 극비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어요." "세상에는 우송명단을 파는 사람도 있소." "나는 팔지 않아요. 나는 돈을 벌 필요가 없어요, 스펜서 씨." "그래요, 그건 그렇겠지. 그럼, 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할 테니, 그것이 리스트에 올라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방법은 어떻겠소? 그렇게 하면 내가 의심하고 있는 두 사람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으니까." 앙트레와 함께 신선한 이논드가 들어 있는, 브라운 소스를 친 당근과 버터로 볶은 즈키니가 딸려 있었다. 패트리셔 애틀리는 그 두 가지를 조금 먹고는 말했다. "저녁을 끝내고 브랜디를 마시러 집에 돌아가서 누구를 불러 조사해 보라고 시키지요." 둘 다 디저트로 클라프티를 먹었지만, 나는 아직도 블루베리의 팬케이크 같은 맛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커피는 엷었다. 계산은 팁을 보태서 119달러였다. 제 14 장 패트리셔 애틀리의 집에 돌아가서 나는 또 칼바도스를 마셨다. 패트리셔 애틀리는 셰리주를 마셨다. "그 필름을 보시겠어요, 스펜서?" "아니." "왜죠? 에로티시즘을 싫어하는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에로티시즘은 환상이오." 나는 처치 파크의 아파트에서 깨끗하고 흰 면바지를 입고 있었던 린다 러브를 떠올려 보았다. "영화가 싫소." "그럼, 좋으실 대로." 그녀는 셰리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게 이름을 몇 개 말하기로 했지요?" "그래요. 버키 메이너드 -- 진짜 퍼스트 네임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지 -- 그리고 레스터 프로이드." 나는 그녀가 스포츠에 관심이 없고, 메이너드의 이름 같은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를 바라고,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도나 발링턴과 레드 삭스의 관련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두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는 알고 싶었다. 그녀는 버키 메이너드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내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스터는 혼자서 무슨 일을 할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면 메이너드의 심부름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알아보겠어요." 그녀는 긴의자 옆 조그만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서 세 자리 숫자의 번호를 돌렸다. "회원 리스트를, 특히 '교외의 환상'을 조사해 보고 버키 메이너드와 레스터 프로이드라는 이름이 있는지 찾아봐. 그리고 주소와 날짜도. 고마워. 그래, 곧 전화로 알려줘. 서재에 있겠어." "그 필름의 복사판은 몇 개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말할 수 없어요, 비밀이니까." "좋습니다. 그 점은 별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니까. 문제는 내가 복사판 전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안돼요. 필름을 보겠느냐고 했더니 안 보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오." 전화벨이 울리고 패트리셔 애틀리가 받아서는 한동안 말없이 듣고만 있더니,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회원 리스트에 레스터 프로이드가 있군요, 버키 메이너드는 없고." "프로이드의 주소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아틀랜틱 가(街), 바버 타워스. 번지도 필요해요?" "아니, 그거면 충분합니다. 고맙소." 브랜디 잔을 비우자 그녀가 따라주었다. "아까 말하려던 것은 보기 위해서 필름을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태워 버리기 위해서 원하는 거요. 도나 발링턴은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소.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거실은 번쩍거리는 오크 재를 깐 바닥, 부엌은 완전히 전자화되어 있소.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런 형편입니다. 그 필름이 그녀의 생활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릴 가능성이 있어요."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스펜서. 그 필름을 보고 도나라고 알아보거나, 그녀와 필름의 관계를 눈치챌 사람이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게다가 지금은 1875년이 아니에요. 빅토리아 여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 에로틱한 영화에 한번 출현했다고 그 사람의 생활이 파괴된다는 것은 좀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요?" "그녀가 지금 있는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소. 지금 그녀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 일이 알려진다는 건 살해당하는 것과 같소." "여하튼, 가령 당신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아까도 말했듯이 내게는 상관없는 일에요. 나는 사회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영리사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필름을 태워 버리는 일은 내게는 이익이 될 수 없어요." "가령, 적정한 시장가격으로 사들인다고 해도?" "마스터 프린트는 안돼요. 그런 짓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것과 같은 거예요. 복사판은 적당한 시장가격으로 몇 개라도 팔 수 있지만, 마스터 프린트는 안돼요." 나는 일어나서 방을 지나 창문을 통해 37블록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불이 켜져 있고, 아직 완전히 해가 진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보이는 것에는 부드러운 청동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나다니는 차도 수가 적었고,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프레드 애스테어 영화의 엑스트라같이 보인다. 옷매무새가 좋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조그만 정원에 트럼펫 크기만하고 선명하게 붉은 꽃이 피어 있다. "애틀리 부인." 내가 말했다. "나는 도나가 협박당하고 있고, 협박자는 언제고 그녀와 남편의 생활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고, 또 그는 당신의 필름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뒤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돌아보고서 두 손을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 필름을 전부 손에 넣을 수가 있으면 나는 그 남자의 협박수단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가 있소."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모으고 발목을 겹치고 말없이 앉아서 셰리주를 품위있게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당신은 도나를 기억하고 있지요? 거의 조카나 다름없이. 당신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쳤소. 피그말리온(버나드 쇼의 희곡. 독신 음성학자가 꽃파는 소녀를 가르쳐서 후작 부인으로 행세시키는 내용.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 같은 내용이지. 그런 그녀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녀는 수렁에 빠진 상태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그 늪에서 기어나왔습니다. 수렁에서 빠져나와 대지 위에 섰는데, 다시 또 수렁으로 끌려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돈이 필요없는 신분이오. 당신 입으로 내게 그렇게 말했소." "나는 사업가예요. 사업에 불리한 일은 안해요." "당신은 늪으로 빠지는 것을 그렇게 함으로써 막고 있나요?" "무슨 뜻이죠?" "당신도 수렁에서 기어나온 사람인데, 그런 식으로 기어나왔소? 자신을 사업가라고 하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그것을 살아가는 명분으로 삼고 있느냐고요? 자기 자신도 뚜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서 말이지. 바이올렛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뚜쟁이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더러운 인간." 그녀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좋아, 베이비, 이제 이야기가 통하게 되었군. 당신은 품위도 있고 예의도 바르지만, 당신이나 나나 출신은 마찬가지요. 서로 그 점이 분명해진 이상 거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 필름이 있어야겠소. 필요한 때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손에 넣지." 이제는 그녀의 얼굴이 좀 전보다 희게 보였다. 화장이 전보다 분명하게 눈에 띄었다. "그녀를 수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소? 그녀는 기어나왔고, 당신이 힘이 되어주었소. 지금은 그녀도 품위나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그녀에게 진흙을 뒤집어씌우고 그녀의 과거를 파헤치려는 인간이 있소. 그녀의 인생은 파멸되어 버리고 말아요. 그녀가 그렇게 되어도 좋단 말이오? 사업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 바이올렛과 마찬가지라고 했더니 당신은 화를 냈소. 그 말을 바이올렛이 들었다면 얼마나 화를 낼지 생각해 보시지." 그녀가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고 인터컴의 단추를 눌렀다. "스티븐, 좀 와요."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는 스티븐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여유있는 걸음걸이이다. 힘이 넘치고 있었다. 게다가 38구경의 루거 블랙 호크를 손에 들고 있었다. 패트리셔 애틀리가 말했다. "권총을 가지고 있을 거야, 스티븐." "그렇습니다, 오른쪽 허리에. 들어올 때 이미 알아차렸습니다. 빼앗을까요?" 스티븐은 총구가 바닥을 향하게 루거를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느긋하게 권총으로 넓적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패트리셔 애틀리가 말했다. "밖으로 내쫓기만 해요." 스티븐이 문 쪽으로 고개짓을 했다. "나가." 패트리셔 애틀리를 보았다. 얼굴색이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자제심으로 누르고 있었으며, 침착하고 매력적이었다. 나는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 쪽으로 갔다. 밖은 따뜻한 여름밤이었다. 어둡고 청동색 색깔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이스트 사이드에서 미드타운은 조용했다. 5번가까지 걸어가서 택시를 타고 업타운의 모텔로 돌아왔다. 웨스트 사이드는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품위가 있다는 점에서는 비교가 안된다. 내 방에 들어가서 냉방을 세게 틀어놓고 TV를 켜고 샤워를 했다. 끝내고 나오니 양키스가 시합을 하고 있었으므로 침대에 누워서 보았다. 협박자는 레스터인가? 아니면, 레스터를 하수인으로 쓰고 있는 메이너드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그럴듯해. 러브가 게임을 짜고 한다는 소문, 아내의 과거, 거기에 관해서 마티는 뭔가를 알고 있다. 마티는 결혼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 레스터 프로이드가 나타나서 그의 아내에 관한 것을 묻고, 레스터 프로이드의 이름이 회원 명단에 올라 있다. 역시 그렇게 된 것이 틀림없다. 레스터나 메이너드가 영화 속의 린다 러브를 알아보고 남편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것을 입증할 순 없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다. 러브가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는 것 같다고 애스킨에게 보고하면, 그가 지방검사에게 얘기하겠고, 그 다음은 둘에게 맡겨놓으면 된다. 아니면, 필름의 복사판을 구해서 애스킨에게 보이고서 둘이서 러브를 몰아붙여, 게임은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야구와 미국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지 않겠느냐고 의논해 보는 것도 좋다. 그 뒤에 내가 사실을 얘기해 준다. 나는 이같은 일을 어느 것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은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양키스의 시합이 연장전이 되고, 10회에 줄 브릭스가 돈 매니를 3루에 두고 싱글 히트를 쳐서 밀워키가 이겼다. 밀워키는 뉴욕에서는 나보다 잘하고 있다. 제 15 장 패트리셔 애틀리에게서 '교외의 환상'의 마스터 프린트를 손에 넣을 방법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결국 잠이 든 것은 새벽 4시경이었다. 잠들기까지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고, 눈을 떠보니 10시 가까이 되어 있었는데 자고 있는 동안에도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10시 20분, 수염을 깎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타월을 허리에 감고 문을 여니, 보이가 얌전하게 포장된 네모난 것을 들고 서 있었다. "스펜서 씨?" "그래, 나요." "어떤 남자분이 이것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받아들고 옷장으로 가서 25센트짜리 동전 두 개를 찾아내어 보이에게 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하고는 돌아갔다. 나는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서 포장을 풀었다. 필름이 든 통이었다. 포장 속에는 흰 유산지에 타이프로 친 편지가 들어 있었다. 스펜서 이것이 '교외의 환상'의 마스터 프린트입니다. 내게 있던 복사판 두 개는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어젯밤 둘이서 이야기한 사람에게 복사판 하나를 판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열 개가 나돌고 있는데, 그것을 보낸 곳의 공통된 패턴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팔아버린 필름에 대해서는 당신이 앞에 말한 분과 직접 이야기해 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당신의 성공을 빌겠어요.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사업의 상도를 벗어나는 일이며, 나는 돈 이상으로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바이올렛은 이런 짓은 안하지요. 안녕.. 패트리셔 C 애틀리 마치 타이프로 친 듯이 검정 펠트 펜의 단정한 글씨로 서명이 되어 있었다. 잠 못 이루는 하룻밤을 보낸 것은 헛일이었다. 침대 옆 테이블에서 맨해튼의 직업별 전화번호부를 꺼내어 '사진용 기자제' 항목을 펴서, 호텔 가까이에 있는 영사기 대여업소를 찾아냈다. 필름을 보기로 한 것이다. 내용이 교통안전이라든가 성병예방에 관한 것이라면 엄청난 창피를 당하게 된다. 패트리셔 애틀리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나는 필름이 진짜라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호텔의 커피 숍에서 그런대로 먹을 만한 에그스 베네딕트(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프랑스산의 전통 있는 고급 리큐르주)를 먹고 나가서는 영사기를 빌렸다. 57블록으로 돌아올 때는,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는 이 사회가 미행자라도 붙인 듯이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는 세일즈 회의에 나가는 회사간부인 척했다. 방에 돌아와서 짐 올려놓는 곳에 영사기를 놓고 커튼을 치고, 불을 끄고는 침대 하나에 걸터앉았다. 내게 침대가 둘 있는 방을 내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모텔은 그런 짓을 잘한다. 투 베드의 방에 오직 한 사람. 노래 제목으로도 그럴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묘한 옷을 입고 기타를 들고 녹음을 해도 좋다. 영사기가 가볍게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 영화가 비쳤다. 패트리셔 애틀리가 말한 대로 질이 높은 영화였다. 베이지색의 벽에 비쳤어도 색깔은 곱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타이틀은 전문가 솜씨 같았으며, 세트는 조명이 밝고 진짜처럼 보인다. 소리는 전혀 들어보지 않고 화면만 보고 추측한 줄거리는 교회, 육아, 부엌이라는 틀에 박힌 생활에 욕구불만을 느낀 한 주부가 고풍스러운 포르노 영화의 고전적인 방법으로 해방감을 맛본다는 것이었다. 그 주부는 틀림없는 린다 러브였다. 어두운 모텔의 방에서 보고 있으려니 아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중년의 사나이가 모텔에서 혼자 포르노 영화를 본다. 그것이 끝나면 42블록에 가서 무비올라에 25센트 넣고 눈요기 쇼를 볼 수도 있다. 최초의 섹스 장면에서 영화가 진짜임을 확인하고는 영사기를 멈추고 필름을 되감았다. 욕실에 가서 릴에서 필름을 욕조 안에 풀어넣었다. 침대 옆 테이블에서 호텔의 성냥을 가져와서 필름에 불을 붙였다. 다 타버리자 샤워를 틀어서 타고 남은 것들을 배수구로 씻어 흘려보냈다. 호텔을 체크아웃한 때는 정오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셔틀 항공편으로 보스턴으로 돌아가기 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보고 싶었다. 택시로 업타운으로 가는 도중에 꽃집에 들러 장미를 1다스 패트리셔 애틀리에게 배달해 달라고 시켰다. 미술관에는 여행가방을 맡기고 돌아다니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보기도 하고, 분수 옆에서 점심을 먹기도 하며 오후를 보내고는 택시로 라 가디아 공항으로 가서 보스턴행의 6시 셔틀 항공에 탔다. 7시 45분에 집에 닿았다. 아파트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지만 공기가 갇혀 있었다. 창을 모두 열고 냉장고에서 암스텔을 한 병 꺼내어 바깥 쪽 창가에 앉아서 마셨다. 한참 있으려니 배가 고파서 부엌으로 갔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맥주를 한 병 더 마시고 부엌을 뒤져 보았다. 냉장고 안 맥주 뒤에 홀 호이트의 빵 반쪽, 찬장에 아직 뚜껑도 따지 않은 땅콩 버터가 한 병 있었다. 땅콩 버터 샌드위치를 두 개 만들어서 접시에 담고, 맥주를 또 한 병 따서는 창가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맛없는 요리다. 9시 반에 침대에 들어가서 모리슨의 <역사>를 또 1장(章) 읽고 잤다. 아주 기묘한 꿈을 꾸었다. 식민지 주민이 영국인과 야구시합을 하고 있는데, 내가 식민지 주민 팀의 3루수였고, 만루에서 3진이 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무거운 기분으로 눈을 떴다. 여행중 운동을 하지 않아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강가를 달리고, 보스턴 대학의 체육관에서 트레이닝을 했다. 끝난 다음에 샤워를 하고 옷을 입으니까 무거운 기분이 사라졌다. 3진이 어쨌다는 거야? 타이 커브라도 때로는 분명히 3진당했을 것이다. 10시경, 요크타운의 터번에 들어갔다. 술을 마시는 손님이 있어서 꽤 떨어져 앉았고,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와 맥주를 마시면서 TV의 '더 프라이즈 이즈 라이트'를 보기도 하고, 맥주잔 속을 말없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안쪽 언제나 정해진 그 자리에 레니 셀차가 하루 일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보스턴 글로브' 신문을 읽고 있었다. '헤럴드 아메리칸'과 뉴욕의 '데일리 뉴스'가 단정하게 접혀 앞에 놓여 있다. 오른손 옆에 맥주잔이 있었다. 오늘은 엷은 붉은색, 글렌 플레이드로 정장을 하고, 베이 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경기가 어때, 베이비?" 내가 앉자 그가 말했다. "가난한 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나니." 그가 바텐더에게 손짓을 하려는 걸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 10시에는 안돼, 렌." "왜? 언제라도 맛은 마찬가지야. 사실 나는 더 맛이 좋다고 생각해." "그걸 겁내고 있는 거야. 지금은 맨 얼굴로 있는 것이 힘들 정도로 귀찮은 일이 많단 말이야." "페이스 문제야, 모두가 마시는 방법에 달려 있지. 즉, 나는 맥주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뱃속에서 완전히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또 기다리지. 그것을 온종일 되풀이해도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 할망구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돌아갈 때에는 스님처럼 완전히 맨 얼굴이지." 시범이라도 보이듯이 맥주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생긴 동그라미 안에 정확히 잔을 내려놓았다. "마티 러브가 시합을 버리고 있는지 알아냈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도박에 관한 정보가 필요해." "그래?" "레스터 프로이드라는 남자.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셀차가 고개를 저었다. "버키 메이너드는?" "그 아나운서 말인가?" "그래. 프로이드는 그의 당번병이란 말일세." "그의 뭐라고?" "당번병. 영국 육군에서는 장교에게는 반드시 당번병이 하나씩 딸려 있다네. 개인적인 심부름꾼이지." "자네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스펜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돈이 안되는 일을 자네만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없어."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낫지." "우습군. 메이너드와 그 뭐라는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무얼 알고 싶은 거야?" "레스터 프로이드. 놈들이 야구에 돈을 걸고 있는가, 건다면 어느 시합에 걸고 있는지. 날짜를 알고 싶어. 그리고 얼마나 거는지를 꼭 알고 싶어. 혼자서 거는지, 아니면 둘이 함께 거는지도." 셀차가 끄덕였다. "OK, 연락하지." 제 16 장 이틀 뒤에 사무실로 레니 셀차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메이너드와 프로이드는 돈을 걸지 않았어." "제기랄." "예상이 빗나갔나?" "그래. 어느 정도 확실한가?" "상당히 확실해. 절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여기서 꽤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고 있거든." "빌어먹을." "메이너드는 한때 내기를 자주 했는데, 어떤 사람에게 상당한 빚을 졌으나 갚지 못했고, 그 사람이 증서를 어떤 고리대금업자에게 팔았어. 꽤 짭짤한 거래였다고 그 사람이 말하더군. 고리대금업자가 7할을 내고 사들였다는 거야." "흐흠." "뭐라고 했나?" 셀차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혼잣말을 했을 뿐이야. 그 고리대금업자의 이름은?" "월리 호그. 진짜 이름은 월터 호거스야. 프랭크 두어의 부하지." "뚱뚱하고 키가 작고 여송연을 피우는 인물?" "그래, 알고 있나?" "본 적은 있어. 놈은 언제나 두어 밑에서만 일하나? 아니면, 자신의 장사도 하고 있나?" "그가 자기 장사를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게다가 나 같은 위인이라 프랭크 두어에 대해서 누구에게 귀띔을 해주고 돈을 벌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알고 있네, 레니. 고맙네." 그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 1분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7할이라. 후한데. 두어는 메이너드의 지불능력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11시 45분. 퍼블릭 가든에서 브렌다 롤링과 만나서 피크닉식으로 점심을 먹기로 되어 있다. 그녀가 한턱 내는 것이다. 윗도리를 입고 사무실 문단속을 하고 나섰다. 그곳에 가보니 그녀는 이미 와 있었으며, 스완 보트가 떠 있는 연못 옆 잔디밭에서 버드나무로 세공한 바구니를 옆에다 놓고 앉아 있었다. "바구니?" 내가 말했다. "애버크롬비 앤드 휘치에서 팔고 있는 것과 같은 진짜 버들 세공품 피크닉 바구니?" "먼저 내 모습부터 칭찬하고, 그 다음에 바구니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나 그전부터 당신의 가치관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예쁘군." "지금 그 칭찬은 그런 정도로 그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엷은 남색 린네르 바지에 어머어마하게 큰 흰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서류가방에 도시락을 숨겨 가지고 있는 젊은 간부사원 타입의 무리들이 지나가다가 하나같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행한 이야기를 해줘요." "일리노이 주에서 굉장히 맛있는 검은딸기 파이를 먹었고, 뉴욕에서는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리구이를 먹었어." "잘하셨군요. 실마리는 찾았나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바구니의 뚜껑을 열고는 빨간색과 흰색의 체크 무늬가 들어 있는 테이블보를 꺼내어 우리들 사이에 폈다. 따뜻한 날씨에 바람도 없어 테이블보가 날리지도 않고 그대로 땅바닥에 펼쳐졌다. "그래,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다 좋지 않아. 좋지 않다고 생각해.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뒤얽혀 있어." 그녀가 짙은 남색의 번쩍거리는 종이 접시를 꺼내어 테이블보 위에 늘어놓았다. "이야기해 줘요. 당신이 그 뒤얽힌 부분을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나는 바구니 속을 넘겨다보았다. "거기 있는 것은 포도주?" 브렌다가 내 코를 쥐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재촉하지 말아요. 한 가지씩 꺼내서 당신을 감격시키기 위해 애써 준비했으니까, 그것을 보람없게 하는 것은 금물이에요." "육감이지. 나는 경험이 풍부한 탐정이란 말이야." "여행 이야기를 해줘요." 그녀는 진짜처럼 보이는 은제 나이프와 포크를 두 벌 꺼내 놓았다. "좋아. 러브에게는 시합을 한둘 내던져 버릴 이유가 있어." "그래요? 안됐군요." "그래. 러브 부인은 자기 말처럼 그런 여자는 아니야. 중서부 출신으로 일찍부터 마약에 조금 손을 댔고, 18살 때에 그곳 불량배와 가출했어. 뉴욕으로 가서 한동안 매춘부로 있다가 영화의 길로 들어갔어. 통신판매용 영화인데, 연기는 알몸으로 했고. 처음에는 싸구려 호텔에서 손님을 받았지. 얼마 후 거기를 나와서 고급 콜 걸 조직으로 들어갔어. 이스트 사이드의 훌륭한 타운 하우스를 본거지로 해서, 굉장히 세련된 여자가 도맡아서 하거나, 혹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녀가 하고 있는 조직이야. 지금의 남편과 만난 것은 그때였다고 생각해." 브렌다가 커다란 고블렛 둘을 우리 둘 앞에 놓고 로제 한 병과 코르크 마개 빼는 것을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그는......뭐라는지는 모르지만......손님이었다는 말인가요?"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이야기해 가면서 포도주의 코르크 마개를 뽑을 수는 없겠지? 내 정신집중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어요. 당신은 걷는 것과 휘파람부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어쨌든 포도주 마개는 뽑아야지요. 내가 따라주는 동안에 이야기하세요." 마개를 뽑아서 병을 넘겨주었다. "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굉장한 지능이군요." 그녀는 내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마티 러브는 지금의 아내가 -- 우리들 사회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 직업적으로 섹스 상대가 되었을 때에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다고 했어요." "말. 당신은 마치 마법의 천을 짜듯이 말을 잘하는군.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그걸 알죠?" 그녀가 자기의 술잔에 반쯤 포도주를 따랐다. "그는 아내의 과거를 숨기고 있어.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며, 결혼한 장소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어. 그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꽤 알고 있을 거야." 브렌다가 자르지 않은 빵 덩어리를 꺼내서 투명한 랩을 걷어냈다. "직접 구운 건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접시 한 장에 빵을 올려놓았다. "이야기는 그것뿐인가요?" "아니. 그녀가 출연한 필름의 복사판이 레스터 프로이드에게 팔렸어." 브렌다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스터 프로이드는 버키 메이너드의 '고퍼'야. 버키 메이너드를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삭스 게임의 실황방송을 하는 사람이야." "고퍼가 무슨 뜻이죠?" "심부름꾼. 고퍼 커피, 고퍼 담배,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그래서 메이너드가 그에게 '고퍼 더 필름' 하고 지시했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래, 아마도. 어쨌든 버키가 필름을 보고 러브 부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야. 그거 훈제 칠면조인가?" 브렌다가 끄덕였다. 그 옆에 크랜쇼 멜론 하나와 자두 네 개를 놓았다. "그녀가 모르면 좋을 텐데." "그래. 하지만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해. 게다가 마티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떤 방법으로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처음에 나는 메이너드나 변장을 한 레스터가 가끔 러브에게 시합을 일부러 망쳐 버리게 하고 도박사에게서 몰래 돈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요즘은 두 사람 다 전혀 도박을 하지 않으며, 메이너드가 샤일록에게서 돈을 꾼 것을 알게 되었어." "고리대금업자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고리대금업자야." 바구니에서 커다란 쐐기 모양을 한 몬테레이 잭 치즈가 나오고, 다시 브렌다가 붉은 장미를 한 송이 꽂은 조그만 크리스탈 꽃병을 꺼내어 테이블보 한가운데다 놓았다. "그 바구니는 서커스의 익살꾼 자동차 같군. 나는 황금으로 된 열쇠를 가진 소믈리에(고급 레스토랑의 포도주 책임자)가 튀어나와서 선생님은 포도주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하고 묻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거야." "먹어요." 내가 사워도 빵을 뜯어내고 있는 사이에 브렌다가 말했다. "그래서 그 고리대금업자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우, 우." 내가 말했다. "입안 가득히 뭘 집어넣고 말이 나오겠어요? 당신이 조금 먹고 나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께요." 나는 포도주를 마시고 말했다. "요리장에게 경의를 표하겠어." "요리장은 뉴베리 가(街)의 버츠 데리카트슨의 버트 하이드만. 당신이 만족해 하더라고 전하겠어요." "고리대금업자와의 관계는, 메이너드가 꾼 돈을 갚지 못하자 녀석들이 그에게 압력을 넣어서 메이너드가 그들에게 러브를 넘겨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러브를 넘겨주다니, 무슨 뜻이죠?" "예를 들어 메이너드가 샤일록에게서 많은 돈을 꾸었는데 갚지 못했다면, 또 비그도 치르지 못하고......" "뭘 치르지 못한다고요?" "더 비그 비고리시. 이자 말이야. 솜씨좋은 샤일록은 빚진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자를 계속 받아내고, 원금은 그대로 한푼도 줄이지 않고 놔두지......빚진 사람은 자전거 조업(쓰러지지 않게 자전거 패달을 계속 밟아야 하듯이, 무리를 해서라도 일을 계속하여 자금조달을 안하면 망해 버리는 불안정한 상태) 같은 거지......어쨌든 메이너드가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봐. 볼리 호그 같은 샤일록은 굉장히 무섭지. 뼈를 부러뜨려 버린다거나 발바닥을 프로판 가스 불로 태워 버리겠다고 겁을 주거든. 경우에 따라서는 지불이 미루어질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버리기도 하고." 브렌다가 몸서리를 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알겠어. 여하튼 그렇게 되었다고 치고, 가끔 행운이라는 것도 만나게 되지. 포르노 영화의 러브 부인 말이야. 메이너드가 샤일록에게 마티 러브가 던지는 시합은 조작할 수 있다고 했겠지. 지금으로서는, 아마 현역중에서는 최고의 투수인 러브를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야 샤일록과 그의 고용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을 두둑이 거머쥘 수가 있어." "하지만 그가 승낙할까요?" 브렌다가 물었다. "내 말은, 창피한 꼴을 당하기야 하겠지만 이미 성에 대한 혁명은 이루어졌다는 뜻이에요. 돌을 던져서 그녀를 죽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요." "그녀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혹 그럴지도 모르지만, 야구의 세계는 버팔로 시를 뭉뚱그려 놓은 것보다 더 보수적이란 말이야. 더구나 러브는 그런 가치체계의 전형적인 사람이거든 --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지켜야지." "가령 그가 시합을 던져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경우엔 어떻게 되나요? 선수로서의 도덕성은 어떻게 되나요? 당신도 알고 있듯이 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예요. 그 점은 문제가 없나요?" "그것은 운동선수의 진정한 가치체계가 아니야. 그것은 선수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녀석들이 생각하고 있는 운동선수의 윤리관이야. 선수의 진정한 윤리관이라는 것은 그런 것보다는 훨씬 복잡해." "놀랐어요. 우리는 선수의 윤리관에 대해서 신경과민이 되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야." "어쩌면 당신 자신이 운동선수의 윤리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빠져나와야 할 일이 아닐지도 몰라. 어쨌거나 언젠가는 진정한 선수윤리에 관한 내 유명한 강의를 해주겠어. 문제는 러브에 대한 내 판단이 완전히 빗나가지 않은 한, 그는 굉장한 궁지에 몰려 있다는 거야. 그는 어느 쪽을 향해도 자기의 도덕관을 저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야. 그는 최선을 다해서 야구를 하는 것, 자신의 힘이 자라는 한 가족을 지키는 것을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 두 가지 사명은 절대적인 것일 테고, 그 두 가지가 대립할 경우, 맞부딪치는 점은 굉장히 날카로운 것이 될 거야." 브렌다가 포도주를 마시고 아무 말 없이 나를 한참 보고 있었다. "다이너스 클럽 카드가 통용된다면 당신 생각을 알아내는 데 25센트 써도 좋아." 그녀가 웃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이 사건에 갇혀서 꼼짝할 수가 없는 느낌이에요. 아니면, 그 일부는 자신에 관한 걸 말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빈정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러브 부인이 나온 영화 이야기며 등장인물이 한 일을 말해 줄까?" "내가 아직도 그런 여러 가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배우는 것을 멈추면 발전이 있을 수 없어." "그리고 당신은 멋지게 이야기를 본론에서 빗나가게 했고요." 그 무렵 나는 다시 새 접시를 받아들 자격을 얻어서, 둘이서 두 병째의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일하러 돌아가야만 하나?" "오후엔 쉬기로 했어요. 점심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좋아." 나는 다시 내 술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제 17 장 브렌다 롤링을 찰스 리버 파크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을 때는 정말로 여름다운 아침이었다. 강은 힘센, 마치 들떠 있는 듯한 푸른색이며, 레버릿 서클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경관이 '버튼과 리본'을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강 건너의 케임브리지가 밝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나는 레버릿 서클을 돌아서 스트로 드라이브를 서쪽으로 되돌아왔다. 러시아워가 끝나가는 소음이 아직도 들리는 상태이며, 처치 파크까지 가는 데 20분이 걸렸다. 소화전 옆에 주차해 두고 엘리베이터로 6층에 올라갔다. 집을 나서기 전에 전화를 해두었으므로 린다 러브는 내가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티는 집에 없었다. 팀과 함께 오클랜드에 가 있었다. "커피 어떠세요, 스펜서 씨?" 들어가자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마시고 싶습니다." 커피는 이미 끓여져 있었고, 여러 가지 머핀 빵을 담은 접시와 함께 커피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머핀 빵은 옥수수, 크랜베리, 블루베리 등 모두 내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어져 있다. 린다는 엷은 남색 청바지, 파란색과 핑크색의 얼룩 무늬가 들어 있으며 마치 남자용 같은 셔츠의 깃을 열어놓고 핑크색 스커프를 목 언저리에 매고 있었다. 그리고 코르크 바닥으로 된 남색 수에드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다. 오른손의 약혼반지에는 팔이 아플 정도로 커다란 하트형 다이아몬드가 끼워져 있다. 왼손의 결혼반지는 폭이 넓고 장식이 없는 순금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어린 아들이 커피 테이블 옆에서 머핀 빵을 보고 있었는데, 접시가 내 앞에 있어서 집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접시를 들어서 밀어주자 부리나케 어머니의 다리 뒤로 숨었다. "마티는 낯을 가린답니다, 스펜서 씨." 린다가 내게 말하고는 아이에게 물었다. "크랜베리가 갖고 싶어, 아니면 블루베리, 마티?" 아이가 어머니의 다리에 얼굴을 묻고는 뭐라고 말했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 살쯤 되었다. 린다 러브가 블루베리 머핀을 집어주었다. "크레용을 가지고 올래?" 린다가 말했다. "이리로 와서 내가 스펜서 씨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바닥에서 그림을 그리면 어때?" 아이가 또 내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했다. 린다 러브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알았어요, 마티. 자, 함께 가지러 갈까?" 그리고는 내게 향했다. "잠깐 실례합니다, 스펜서 씨." 아이가 린다 러브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 두 사람은 방에서 나갔다. 그토록 많은 주부가 아침부터 버본 위스키를 마시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2분쯤 지나자 두 모자(母子)가 커다란 노란색 도화지와 크레용 갑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앉아 있는 의자 옆 바닥에 아이가 앉아서 갖가지 색깔의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렌지 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스펜서 씨?" 린다가 물었다. 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왔다. "꽤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러브 부인, 이 아이가 없을 때에 오는 것이 좋았을......" 말을 도중에서 중단했다. 아이가 얼마나 이해할는지도 몰랐고, 또 아이에게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점은 걱정하실 것 없어요, 스펜서 씨. 마티는 염려할 것 없어요. 우리들 이야기 같은 것엔 관심도 안 가질 거예요." "글쎄, 어떨까요, 좀 미묘한 이야기라서." "괜찮아요, 스펜서 씨, 걱정말고 이야기하세요. 정말로 걱정하실 것 없다니까요." 나는 커피를 마셨다. "좋습니다. 두 가지를 말할 테니까 이야기를 계속해도 좋은지 부인이 판단해 주십시오. 먼저, 나는 작가가 아니고 사립탐정입니다. 둘째 '교외의 환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린다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누가 고용했나요?" "애스킨,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 짓은 안합니다." "왜?" "왜 애스킨이 나를 고용했느냐 하는 뜻입니까? 그는 남편께서 짜고 하는 시합에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던 겁니다." "어머, 그 무슨 말씀을." 린다가 말하자 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린다가 빙긋 웃었다. "어머, 예쁜 가족을 그리고 있구나. 엄마와 아빠와 아기가 있네." "다시 오는 것이 좋겠습니까?" "다시 오실 것 없어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할말도 없어요."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지요. 지금 당신에게는 공황이 닥쳐와서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노'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그것이 정말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노." "아니오, 있소.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나는 당신들의 힘이 되어줄 수가 없소." "애스킨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당신을 고용한 것이 아니에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나는 언제라도 그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으니까." "도움을 받을 일은 없어요. 우리는 남에게서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어요." "아니, 있소." 아이가 다시 어머니의 바짓가랑이를 끌어당기며 그림을 들어올렸다. "아주 좋은 그림이구나. 그 그림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니?" 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싫은가? 당연하지. 나 역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마티." 린다 러브가 말했다. "멍멍이 집을 그려 봐." 아이가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혀를 내밀고서 그리고 있었다. "가령 우리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나요?"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전문분야의 일이지요. 이런 일에 관해서는 당신들보다 솜씨가 좋다는 것만은 우선 틀림없습니다." 내 커피 잔이 비자 린다 러브가 서서 따라주었다. 나는 옥수수 머핀 빵을 하나 집었다. 세 개째다.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마티와 의논할 필요가 있어요." 린다가 말했다. 나는 옥수수 머핀 빵의 한쪽을 물어뜯었다. 처음에 손으로 쪼갰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수잔 실버맨이 언제나 조금씩 먹는거라는 말을 내게 했었다. 린다 러브는 보고 있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오후에 두 시간쯤 보육원에 가야 돼요." 전화를 보았다가 아이를 보더니 또 손목시계를 본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오시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갔다. 린다 러브가 배웅하러 나왔다. 아이가 어머니의 바로 뒤에서 따라왔다. 다리 옆에 있지만, 지금은 바지를 잡고 있지는 않았다. 나가면서 나는 허리에서 손가락을 내밀고 권총 쏘는 흉내를 냈다. 아이는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쳐서 숨지도 않았다. 나는 본래 어린아이들을 다루는 솜씨가 좋다. 사립탐정계의 스포크 박사다. 매사추세츠 가에 나와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 11시 35분. 한 시간 반 여유가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 회원으로 되어 있는 헌팅턴 가의 YMCA에 가서 유니버셜로 전부를 해치우고도 벤치 프레스를 한 세트, 리스트 롤을 두 세트 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을 무렵에는 맥박이 100 이하가 되고, 호흡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1시 15분에 린다 러브의 아파트 문 앞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벨소리에 그녀가 문을 열었다. "마티는 보육원에 갔어요, 스펜서 씨.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제 18 장 커피와 머핀은 치워져 있었다. 린다 러브가 말했다. "어디서 비를 맞았나요? 머리칼이 젖었군요." "샤워. YMCA에 가서 트레이닝을 하고 왔습니다." "어머, 잘하셨네요."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거지요." "뭐 신분증명이 될 만한 것을 보여줄 수 없나요, 스펜서 씨?" 조그만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사립탐정 면허증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운전면허증도 보여 주었다. 린다가 둘 다 보고 돌려 주었다. "정말 탐정 같군요." "고맙소, 가끔 사람들이 확인해 주면 안심이 됩니다." "대체 어느 정도 알고 있나요, 스펜서 씨?" "일리노이 주 레드퍼드에 가서 도널드슨 보안관, 그리고 당신의 부모와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1966년에 마리화나 불법소지로 체포된 것을 알고 있소. 당신이 토니 리스라는 사람과 가출하여 그 뒤로는 돌아간 적이 없다는 사실. 당신이 뉴욕에 가서 이스트 빌리지의 셋방에서 살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처음에는 토니, 그 뒤에는 바이올렛이라는 뚜쟁이 밑에서 손님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소. 당신이 업타운으로 옮겨가서 패트리셔 애틀리 밑에서 일하고 포르노 영화 한 편에 출연한 일, 손님 중 한 사람과 사랑을 하여 1970년 겨울에 결혼하기 위해 깃에 털이 달린 예쁜 트위드 천 코트를 입고 패트리셔 애틀리의 집을 나간 것을 알고 있소. 뉴욕에 가서 바이올렛과 패트리셔 애틀리 두 사람과 이야기를 했는데, 애틀리 부인에게 호감이 가더군요." "그래요." 린다 러브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나도 그래요. 영화에 나온 나를 보았나요?" "보았습니다." 내게서 눈을 돌려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셨나요?" "당신은 아주 예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교회의 돔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말없이 있었다. "무엇이 목적이에요?" 린다가 말했다. "아직은 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방금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추측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죠. 당신이 결혼한 손님은 마티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교외의 환상'을 손에 넣고서 당신과 마티를 협박하고 있으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협박자가 야구에 대한 도박을 하면서 그가 큰돈을 거는 게임에 마티가 몇 개의 투구를 적당히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침묵이 계속되고 린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 앞으로 가서 막아설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영화에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린다가 말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모르는 남자를 상대로 하는 일에서 하나의 휴식 같은 것이었어요. 내가 하는 말은 그 영화에서 여러 가지 기교가 쓰이고 있지만, 그 모두가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긴 어떤 경우이든 모두 연기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그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연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어요. 처음 가보는 호텔 방에 혼자 들어가서 모르는 남자와 이야기하며, 상대가 변태는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당신은 이해하시겠어요? 사실 개중에는 변태성 손님이 있거든요. 당신은 상상도 안될 거예요." 창에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쪽에서 창밖으로 눈을 돌리고 싶었다. "단 한 편의 영화." 그녀가 말했다. "촬영조건이 일류고,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이나 그룹 섹스도 없고, 보수도 좋은 단 한 편의 영화, 그것도 마티와 처음 만난 직후에." "뉴욕에서?" "그래요. 양키스와의 시합으로 팀이 뉴욕에 왔었는데, 선수 중 하나가 절차를 밟았지요. 애틀리 부인이 우리 셋을 호텔로 데려다 주었어요. 마티는 매춘부를 상대하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어요." 말투가 거칠어지고, 나를 보고 있는 눈이 험악해졌다. "그는 본래 착실한 사람이거든요." 또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는 조금 취해 있었으며, 잘 웃고 넌지시 진한 농담도 하는 듯했지만 막상 둘만 남게 되자 그만 당황해 버리더군요. 처음부터 내가 리드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나중에 먹을 것을 방으로 가져오게 해서 늦은 저녁을 먹고 둘이서 TV의 옛날 영화를 보았어요. 그 영화 지금도 기억나요. 지미 스튜어트 주연의 '꺾인 화살'이라는 서부극이었어요. 내가 돌아갈 때에 그가 이별의 키스를 하고는, 내게 돈을 치르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더군요." "그래, 또 만났습니까?" "그래요. 다음날 호텔로 그를 찾아갔지요. 비가 와서 양키스와의 시합이 취소되었거든요. 그래서 둘어서 자연사박물관에 갔었어요." "전날 밤의 다른 두 선수는 어땠습니까?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나요?" "그래요. 블론드 가발을 쓰고 화장법을 바꾸었거든요. 아무튼 둘 다 내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매춘부를 자세히 쳐다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다음날 만났을 때 마티조차도 처음에는 나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언제 결혼했습니까?" "우리가 말한 그때. 단 상황을 바꿨지요. 마티와 둘이서 생각한 끝에 나는 알링턴 하이츠 출신이며, 시카고에서 만난 것으로 했어요. 나는 시카고에 두세 번 간 적이 있어서 도시 모습을 알고 있었거든요. 누가 물어봐도 문제 없었어요. 게다가 결혼하기 전의 내 신상에 관해 앞뒤가 맞도록 마티와 둘이 일부러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코미스키 파크 구장에도 가고 시카고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지요." "알링턴 하이츠를 고른 것은?" "지도에서 발견했을 뿐이에요."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엌 냉장고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복도 저쪽 어딘가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 지긋지긋한 영화." 린다가 말했다. "그 편지가 왔을 때 나는 고백하고 싶었지만, 마티가 허락지 않았어요." "무슨 편지?" "첫번째 협박장."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뇨." "지금 가지고 있지 않겠지요?" "없어요." "뭐라고 써 있었습니까?" "내용은 -- 한마디 한마디 거의 외우고 있어요 -- 마티 앞으로 왔으며, 내용은 '나는 "교외의 환상"이라는 영화를 가지고 있소. 다음 시합에서 지지 않으면 매스컴에 공표하겠소.'" "그게 다인가요?" "그게 다예요. 이름이나 주소 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그래, 그는 그랬나요?" 린다 러브가 알아듣지 못했다. "뭘?" "다음 시합에서 졌습니까?" "졌어요. 타이거스와의 시합인데, 7회 만루 때에 일부러 벗어나는 커브를 던졌어요. 내가 밤중에, 그날 밤중에 잠이 깨어 보니 그가 침대에 없더군요. 거실에서 창밖을 보면서 울고 있었어요." 린다의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있었으며, 눈가가 거슴츠레해졌다. "그래서 당신은 또 고백하겠다고 했겠군?" "그래요. 하지만 그는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시합을 버리는 것은 당신에겐 죽기보다 쓰라린 일일 거예요.' 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가 남자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하지만 당신은 견디지 못할 거예요.' 라고 했죠. 그런데 그는 다시는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어요. 이미 끝난 일이며, 이제 편지는 안 올지도 모른다고 그가 말했지만, 올 것이라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역시 왔나요?" 그녀가 끄덕였다. "그 뒤로도 계속?" 끄덕였다. "그럼, 마티는 시키는 대로 해왔나요?" 또 끄덕였다. "자주?" "편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마티는 1년에 35번 정도 선발투수로 나가지요. 작년에는 대여섯 번쯤 왔어요. 금년은 지금까지 세 번." "약군." 내가 말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 짐작가는 상대라도?" "없어요." "정말 교묘한 수법이야. 피해자에게 알려져 있거나, 돈을 주고받을 때 알게 되면 협박은 아주 위험하죠. 이 방법은 아주 완벽해요. 돈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당신들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상대는 다른 곳에서 돈을 받게 되는 겁니다. 상대는 절대로 알려지지 않고 끝나지.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10만 명쯤 될 테니, 당신들은 협박자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상대방은 지시를 우편으로 보내고 돈을 걸기만 하니까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도 없소." "그래요."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 자체가 협박자료가 되는 위법행위니까, 상대의 요구에 따를수록 상대에게는 협박자료가 늘어나지."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어요. 도박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알려진다면 마티는 야구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말아요." "협박의 수법, 그것만 생각하면 아주 멋진 거요." "수법에 대한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어요." "그래요, 분명 그렇겠지. 마티는 굉장히 고민하고 있겠군요?" "조금은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이나 길들여진다고 하잖아요......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어때요?"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에요." "죄의식에 빠진 것은 당신일 텐데? 남편이 당신 때문에 그러고 있다고 할 수도 있어.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소?" 린다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 얼굴을 타고내렸다. "매춘부와 결혼한 대가라고 하겠어요." "내가 말하는 뜻은 아시지요? 그의 처지와 뒤바뀌었으면 하는 마음 아닌가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꼭 마주잡고 꼼짝도 않고 앉은 채, 눈물이 소리없이 얼굴을 타고내린다. 나는 일어나서 두 손을 뒷주머니에 쑤셔넣고 거실을 이리저리 걸었다. 나는 의뢰받은 사실을 알아냈고, 내가 요구한 보수에 걸맞은 일을 끝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습니까?" 린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던지는 날이에요." 어조는 분명했지만 억양이 없었다. "등판하는 날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집중력을 흐트러놓고 싶지 않거든요. 그는 오클랜드의 타자에 관해서만 생각해야 돼요." "러브 부인, 야구는 종교가 아니오. 그는 오클랜드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거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잖소. 그가 공을 던지고, 상대는 그것을 치려고 하는 겁니다. 전국의 교정에서 아이들이 매일 하고 있는 일이지요." "그것이 마티에게는 종교예요. 그의 천직인 거예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우리들, 나와 아이도 그 일부예요 -- 시합과 가족. 그는 그것 말고는 머릿속에 없어요. 그러니까 고민하는 거지요. 우리나 시합 중 어느 하나를 버려야만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죠."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다. 애스킨의 사무실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보너스를 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표창장 액자라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 '메이저 리그 공인 사립탐정' 스타 전문의 탐정. 그러나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고, 아마 일리노이 주 레드퍼드의 그녀의 집에 가서 그녀의 부모를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들을 구해 주겠소." 내가 말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당신들을 협박하고 있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 이번에는 그녀가 내 얼굴을 보았다. 제 19 장 나는 알고 있는 것, 짐작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당신이 그에게 겁을 주어 포기하게끔 할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린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들킨 것을 알면 포기할지도 몰라요." "프랭크 두어가 그의 고삐를 잡고 있다면 그건 안된다고 봐야죠." "왜요?" "내가 아무리 겁을 주어도 그에겐 프랭크 두어가 훨씬 더 무서울 테니까." "그가 프랭크 뭐라고 하는 사람의 부하인 것은 확실한가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소. 나는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요. 내가 팀의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시작한 직후에 두어가 보디가드를 하나 데리고 내 사무실로 와서, 앞으로도 계속 파고든다면 멸종당해 버린 종자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죠. 은근히 풍기는 멋은 있었지만 결정적이진 못했지." "조사할 방법은 있나요?"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티는 많은 급료를 받고 있어요. 우리도 사례를 드릴 수 있어요. 의뢰하는 데 얼마예요?" "내가 받은 의뢰비는 통상 옥수수 머핀 빵 두 개와 커피 한 잔이지요. 나머지는 일이 끝난 다음에 청산합니다." "장난이 아니에요. 우리는 상당한 액수를 내놓을 수 있어요." "잭 웨브의 대사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주셨습니다, 부인." "고마워요." "인사를 받을 것도 못 됩니다." "하지만 마티의 허락을 받기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아니오. 당신네의 의뢰비에는 그런 것까지 들어 있지는 않아요. 나는 아직도 애스킨이 의뢰한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내막을 조사하는 중에 있지요. 지금은 당신들을 해방시키는 일도 염두에 두고 일을 하고 있지만, 당신들이 나를 못하게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우리들의 일은 비밀로 해두는 거지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마티가 승낙할 때까지만요." "당신과 마티의 의견을 듣게 될 때까지요." "조금 의견이 다르군요." "알고 있소." "하지만, 스펜서, 우리들의 인생과 관계되는 일이에요. 당신 수중에 있는 일이 우리들의 인생이란 말예요."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신중히 하지요." "그렇다면 약속해 줘요." "아니, 약속은 안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올지도 몰라요. 때에 따라서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유로 당신들 일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들에게 알려 드리지요." "그러면 약속은 못하시겠다는 건가요?" "할 수가 없는 거죠." "대체 어째서요?" "이유는 이미 말했잖소." 그녀는 벌레를 털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한 번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아요. 당신이 우리들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데에는 좀더 사리가 분명한 이유가 필요해요."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최대한의 이유가 그것이오. 나는 약속을 소중히 하고, 지킬 자신 없는 약속은 하고 싶지 않소. 그게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지요." "엉터리예요, 그런 건. 말도 안돼요." 그녀가 몸을 내밀자 콧구멍이 갑자기 커진 듯이 보였다. "내 일에도 규칙이라는 것이 있소, 러브 부인." "마티 같은 논법이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이에요." 교회의 돔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둘 다 철부지 아이들이에요." 나는 배 언저리가 스멀스멀해 오며 굉장히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 되었다. "러브 부인, 가능한 한 힘이 되어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다루는 방법에는 비교적 자신이 있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돔을 보고 있었다. "당신이나 마티나, 또 그 밖에 게임을 하고 있는 바보 같은 아이들. 모두들 게임은 잘해요." 그녀는 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돌아가세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방에서 나왔다. 뒤에서 그녀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내가 정말로 얼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왔다. 3시가 가까웠다. 아파트 입구 근처에 있는 약방 앞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들어가서 마틴 크와크에게 전화했다. "스펜서." 크와크가 말했다. "마침 잘됐어. 밀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네.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서장이 그러더군. '크와크,이 사건을 해결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어.'" "점심이든 술이든 한턱 내고 싶은데?" "점심? 술? 놀라겠는데. 꽤 어렵게 된 모양이군." 나는 농담을 할 기분은 아니었다. "예스인가 노인가. 농담이 듣고 싶었다면 '다이얼 어 조크'에 걸었겠지." "좋아. 알았어. 스타너프 가(街)의 레드 코치에서 만나지." 나는 수화기를 내렸다. 운전석 쪽의 와이퍼 밑에 주차위반 카드가 얌전하게 끼워져 있었다. 와이퍼의 아래쪽 부분에 끈으로 칭칭 감아놓았다. 꽤 열성적인 주차감시원인 모양이다. 대개는 끈 같은 것은 감지 않고 와이퍼 밑에 밀어넣고, 그것도 조수석 쪽이라 눈에 안 띌 때도 있다. 자기 직분에 긍지를 가진 사람을 본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가로등 기둥에 붙어 있는 공중 쓰레기통에 카드를 집어던졌다. 보일스턴 가를 내려가서 프루덴셜 센터에서 도서관의 증축부분을 지나고 코플리 스퀘어를 지났다. 광장의 분수가 힘차게 물보라를 일으키고, 그 부근의 벽에 대학생이며 건설 노무자들이 뒤섞여 일광욕을 하면서,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있었다. 셔츠를 벗은 사람들이 많았다. 분수대 저쪽으로 코플리 광장이 있고, 황금색으로 도금한 거대한 사자상이 입구 양쪽에 세워져 있다. 광장의 클라렌던 가(街) 쪽 끝에 트리니티 교회가 빛나고 있다. 바로 최근에 샌드블래스트(모래 청소)를 한 갈색 돌이 새것 같은 느낌이며, 첨탑이 핸코크 빌딩의 유리창에 번쩍거리면서 반사되고 있다. 큰 깡통 맥주와 커틀릿의 서브마린 샌드위치가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셔츠를 벗어서 햇볕을 쬐다가, 재수가 좋으면 여학생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네 아버지 정도의 나이야, 믿어지나? 그래, 그쯤 됐어. 오른쪽으로 꺾어 클라렌던 가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구부러져서 스타너프 가로 나와서는 짐차 전용구역에 주차했다. 스타너프 가는 맨 땅에 털이 난 듯한 길이며, 전기재료상가와 칼리지 사이에 밀고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레드 코치 그릴은 붉은 타일로 지붕을 이고, 창틀이 납으로 되어 구세대를 연상케 하는 상점이다. 경찰서 바로 뒤에 있어서 경찰관들이 언제나 들끓는다. 보험회사나 광고회사의 직원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마음에 드는 상점이다. 부드러운 조명, 오크 재(材)로 된 대들보, 그리고 그 밖에 이것저것. 크와크는 술집에 있었다. 경찰관은 이래야만 된다고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그런 옷차림을 하고 있다. 나보다 키가 크고 골격도 크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짧게 깎고, 손과 손가락이 크고, 목이 굵고, 이제 방금 정상회의(頂上會議)에서 나온 듯한 복장을 하고 있다. 오늘은 엷고 붉은 체크 무늬가 들어간 얇은 천의 회색 정장에 조끼까지 받쳐입고 있었다. 흰 셔츠에 폭이 넓은 붉은 실크 넥타이. 황금색으로 테를 두른 파텐트 가죽(검은 칠피)으로 만든 로퍼를 신고 있다. 나는 그의 옆에 있는 의자에 올라탔다. "자네는 뇌물을 먹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경찰 월급으로 그렇게 멋을 내고 다닐 수는 없을 거고."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으면 안될 것도 없지. 나는 15년 동안 휴가신청을 내본 적이 없어. 그러는 자네는 어디에 돈을 쓰고 있나?" "경찰 아저씨들 점심 사주는 데다 쓰지. 칸막이 자리로 가지 않겠나?" 크와크가 술잔을 들고 우리는 크루미 재(材)로 된 높은 칸막이가 있는 자리에 마주 앉았다. 칸막이 자리는 바와 나란히 입구에서 안에까지 이어져 있어서 식당과는 경계가 되어 있다. 나는 웨이트리스에게 버본 온 더 록을 주문했다. "비터스를 아주 조금 넣은 레몬 토스트. 내 데이트 상대에게 한 잔 더." 웨이트리스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금발을 아주 짤막하게 깎은 아가씨였다. 크와크와 나는 그녀가 카운터 너머로 몸을 뻗어서 마실 것을 집어올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꼴사나운 호색 영감이로군. 풍기단속관에게 일러줄까 보다." "자네는 뭘 하고 있었나? 단서를 찾고 있는 건가?" "스커트 밑에 무기를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봤을 뿐이라오, 경위님." 그녀가 마실 것을 가지고 왔다. 크와크는 스카치 앤드 소다를 마셨다. 둘 다 한 모금씩 마셨다. 나는 처음 한 모금을 좀 많이 마셨다. 크와크가 말했다. "자네는 맥주만 마시는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한데 기분나쁜 입맛을 얼른 없애는 데에는 버본이 빠르니까." "그 장사를 해오자면 기분나쁜 일에는 단련이 되어 있을 텐데?" 나는 술잔을 비우고 웨이트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크와크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걸로 조금씩 마시겠어." "당신네들 근무중엔 마시면 안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이야. 용건은 뭔가?" "법의 집행에 관한 사고방식에 대한 것 조금, 그리고 형무소 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고, 수사의 기술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을 교환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는 것뿐이야." "스펜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책상 왼쪽 서랍 속에 미해결된 살인사건 18건의 서류가 들어 있어.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하게." "프랭크 두어. 그 녀석에 관해서 알고 싶어." "왜?" "어떤 의뢰인을 협박하고 있는 사람의 차용증을 녀석이 쥐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말이야." "그럼, 그 사람은 그 차용증 때문에 자네에게 사건을 의뢰해 온 사람을 협박하고 있나?" "그렇다네." "두어는 아마 프리랜서일 거야. 자기의 조직을 가지고 있고, 갱의 구역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어. 장사는 주로 도박이야. 과거에 도박사였지. 오래 전에 라스베이가스, 리노, 쿠바에서 일했어. 고리대금업도 하고 있고. 꽤 벌어들이고 있는 모양인데, 소문에 의하면 머리가 좀 이상해져서 일이 마음대로 잘 안되면 미쳐 날뛰며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쏘아댄다는 거야. 그것은 탐욕이지. 그러다 보면 남의 구역에 너무 깊이 들어가게 되어 언제고 큰 조직에게 희생될 거야. 지금은 잘 되어가는 것 같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거야."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나?" "그 일로 냄새를 맡고 다니면 놈이 먼저 자네를 만나러 갈 거야." "하지만 그전에 이쪽에서 놈을 찾아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잘은 몰라. 찰스타운의 어딘가에서 장의사를 하고 있어. 경찰서에 돌아가면 알아봐 주지." "놈을 겁줄 만한 건덕지는 없나?" "자네가 말인가? 놈에게 겁을 주어 손을 떼게 한다고? 두어를 협박해 보라고. 시체보관소에서 엄지발가락에 이름표를 달게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걸세." "여하튼 놈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뭔가? 여자? 술? 곡예를 하는 바다표범? 놈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게 분명해." "금이야." 크와크가 말했다. "놈은 금을 좋아해. 내가 알고 있는 한 그것 말고 더 좋아하는 것은 없어." "놈이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나?" "추측이야. 놈을 만난 적이 있었나?" "한 번." "누구와 함께 있었나?" "월리 호그." 크와크가 고개를 저었다. "손을 떼게, 스펜서. 자네가 상대하고 있는 녀석은 뜨거운 날에 아이스캔디가 녹아서 없어지듯이 자네를 간단히 없애버릴 수 있는 놈들일세." 웨이트리스가 다시 빈 잔을 가져가고 새 잔을 가져왔다. 그물로 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뜻밖에 이야기가 통할 계집애일지도 모른다. 나는 버본을 마셨다. "될 수 있으면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은 기분이야, 마틴. 그런데 뗄 수가 없는 거야." "자네 자신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것만은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해. 이 일로 인해 슬픈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 있거든." "월리 호그는 -- " 크와크가 말했다. "두어의 말 한마디면 누구라도 죽여. 마음에 걸리든 말든. 천천히, 혹은 재빨리, 한 사람이든 백 명이든 문제가 아니야. 두어가 놈에게 지시하면 놈은 쏠 거야. 다리가 달려 있는 권총 같은 녀석이야." "월리 호그(돼지)가 나를 쏘면, 월리 소시지로 만들어 버리겠어." "자네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솜씨가 뛰어난 게 아니야, 스펜서. 하긴 그 점은 캡틴 마벨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자네보다 훨씬 솜씨가 못한 녀석들을 보아왔으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자네는 어떻게 해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 단, 맨 정신이어야만 해. 얼큰한 기분으로 두어의 부하와 맞설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게. 여덟 시간 푹 자고, 아침을 제대로 먹고, 아침 일찍 상쾌한 상태에서 가야만 하네." 그는 새로 가져다 놓은 잔의 얼음을 휘저었다. 그는 첫 잔을 아직도 비우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그냥 있군. 천천히 마시는 줄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가 손을 뻗어서 그의 술잔을 들어 마셔버렸다. "마시기 시합을 한다면 자네가 녹초가 되어 쓰러져도 나는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있어, 크와크." "놀랍군. 그 일에 대해서는 꽤 관심이 있는 모양일세." 크와크가 일어섰다. "자네가 취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경찰서에 돌아가야겠어." "크와크." 그가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누군지 이름을 안 물어서 고맙네." "물어봐야 말하지 않을 것이 뻔해. 아무튼 조심하게. 스펜서, 자네 같은 사내라도 없어져 버리면 쓸쓸해 할 녀석이 누군가 있을 걸세." 내가 옛날의 영국 공군 영화에서처럼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내세우자 크와크는 상점을 나갔다. 크와크의 새로 가져다 놓은 술잔을 마셔버리고 웨이트리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영국은 영원하리라. 저녁 5시 반에는 내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버본을 병째 입에 대고 마시고 있었다. 브렌다 롤링은 데이트가 있고, 수잔 실버맨은 나가고 없었다. 서쪽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방안이 덥다. 창은 열려 있지만 바람도 없고, 의자에 기대고 있는 등에 땀이 배어 있었다. 이 일에서 손을 떼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너무 많다. '무엇 때문이지요? 꺼져 버려!'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은 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철부지 아이들.' 더 심한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게임을 하고 있는 바보 같은 아이들.' 그보다 더 따가운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버본을 마셨다. 코의 감각이 둔해져서 얼굴의 표면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되었다.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 약속하라고? 말도 안돼, 자신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약속하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제기랄. 나는 하는 데까지는 한다고 했다. 그 여자는 대체 어쩌라는 건가? 나는 반드시 그 여자를 구해 주겠어. 병을 창 쪽으로 들어올려서 나머지를 보았다. 반쯤 있다. 좋아. 이걸 다 마셔 버려도 파일 캐비닛 안에 또 한 병 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야. 과거 클라크 게이블이 한 것처럼 파일 캐비닛에 윙크하고 입 한쪽으로 빙긋 웃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가 파일 캐비닛을 향해서 그런 적은 없다. 또 조금 입안에 집어넣고는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어쩌면 이빨이 취해 버릴지도 모른다. 킥킥 하고 웃었다. 클라크 게이블은 킥킥거리며 웃는 적은 절대로 없었지. 이빨이여, 실컷 마셔라. 빌어먹을.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은 옳았다. 이건 일종의 게임이다. 내 말은 야구든 뭐든 게임에는 일종의 규칙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렇잖으면 술에 취해서 파일 캐비닛에 윙크하는 신세가 되고 말지. 그리고 이빨이 취해 버리고. 다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프랭크 두어를 해치워야겠어. 그러자면 크와크의 말이 옳아. 맨 정신으로 몸의 컨디션을 조절해야만 돼. "두어, 지금부터 가겠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혀는 아직 취하지 않았어. 아직 말할 수 있어. 내 혀여, 한잔하게." 나는 마셨다. "사랑과 소원이 하나가 되어." 소리내어 말했다. 소리가 점점 묘해지고 있다. 내게서 떠나 방 저쪽 구석에서 들려온다. "행위가 목숨을 건 쓸데없는 승부일 때, 비로소 그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목이 뜨거워져서 식히려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마셨다. "목숨을 건 쓸데없는 승부. 지금 그 말을 알겠는가? 린다 러브 -- 도나 발링턴?" 풀어놓은 홀스터에 38구경 디텍티브 스페셜이 꽂힌 채 책상 위 버본 병 옆에 있다. 다시 버본을 조금 마시고 병을 내려놓고는 홀스터에 꽂힌 그대로 권총을 집어들어서 펠메일의 복제판 중 하나를 겨냥했다. 홀랜드 소녀가 우유가 들어 있는 피자를 가지고 있는 그림이다. "어때? 프랭크, 목숨을 건 쓸데없는 게임을 좋아하나?" 혀로 딱 하는 소리를 냈다. 한동안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거리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였다. 제 20 장 다음날, 8 킬로미터를 달려 웨이팅 룸에서 한 시간 반 보내니 혀가 부르튼 듯한 느낌이 겨우 가시고 몸의 여러 기관이 기능을 되찾았다. 간이식당에서 아침식사, 아스피린을 두 알 먹고 프랭크 두어를 찾으러 갔다. 찰스타운의 장의사라고 크와크가 말했다. 장소를 찾아내는 데 탐정적 재능을 다 동원한 끝에 직업별 전화번호부를 찾아보기로 했다. 초보적인 일이라네, 나의 친애하는 홈즈. '장의사' 난에 있었다 -- 프란시스 X 두어 찰스타운 메인 가(街) 228번지, 도망칠 수는 없어, 두어. 뚜껑을 내린 8년 전 형의 시보레를 타고 달려 다리를 건너서 시티 스퀘어로 들어갔다. 찰스타운은 보스턴의 일부다. 거기에 벙커 힐도 있고, 구시대의 프리깃 함(艦)인 '올드 아이언사이즈'도 항구에 전시되어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은 고가교통망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스틱 강 다리, 93호선, 피츠제럴드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모두 찰스타운에 있다. 그 미로 같은 도로망 안을 매사추세츠 고속교통국의 고가선로가 지나고 있다. 시티 스퀘어에는 시내의 다른 부분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강철과 콘크리트 기둥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가령 지금 영국군이 벙커 힐을 공격하려 한다 해도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시티 스퀘어에서 고가선로 밑의 메인 가를 달렸다. 두어 장의사는 시티 스퀘어에서 에버리트를 향해서 1킬로미터 정도 간 곳 근처다. 찰스타운의 그 주변에서 주차하기는 아주 편하다. 메인 가의 그 부분에 있는 양쪽의 상점들은 태반이 빈집이 되어 있다. 게다가 도시재개발은 아직 경제부흥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다. 내 차는 그 구역과 아주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두어 장의사는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은 벽돌 이층 건물이었다. 창에 합판을 붙여놓은 빈 식료품 상점과 로니즈 리젝츠라는 싸구려 구두상점 사이에 끼어 있었다. 거리의 건너편에는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빈터에 치컬리 앤드 앤 여왕의 레이스라고 불리는 야생 당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연은 여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허리의 권총을 건드려서 홀스터에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현관의 벨을 눌렀다. 안에서 아주 조용한 차임벨이 울렸다. 세밀한 점에까지 신경을 썼군. 거의 동시에 완전한 대머리의 뚱뚱한 사나이가 문을 열었다. 줄 무늬 바지, 흰 셔츠, 검은 윗도리, 검은 넥타이. 장의사의 견본 같은 사람이다. "무슨 일이신지요?" 낮은 음성이다. 정중한 말투. 지갑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돈을 전부 가져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다 우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두어 씨를 만나고 싶소." 두어 씨?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말투에 맞추어 가고 있었다. 배 밑바닥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이름만 인쇄된 명함을 대머리에게 건네주었다. "얼마 전 밤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두어에게 전해 주시오." '씨'를 빼버리니까 한결 배짱이 생겼다. "알겠습니다.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앉는 부분에 비로드를 붙여 놓았고 등받이가 곧게 세워진 의자에 앉으니까 대머리가 방에서 나갔다. 무릎을 꿇고 인사한 다음에 갈 줄 알았더니, 정중하게 한번 인사하고는 그냥 나가 버렸다. 인사 한번 받았다고 해서 배 밑바닥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른 돌아가 버리면 두려움은 사라지겠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건 어찌되었든, 두어는 그렇게 겁나는 상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빅 월리는 몸이 둔해진 것 같다. 물론 9mm 구경의 월셔를 두 발 쏘아대는 데 몸의 컨디션이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 집안은 정적 바로 그것이었으며, 교회 같은 냄새가 났다. 내가 앉아 있는 현관 입구의 방은 야자잎 무늬가 들어 있는 엷은 베이지색 벽지가 발라져 있다. 아주 소극적이며 노인 취향에 어울리는 벽지다. 바닥에 깔려 있는 동양 양탄자는 수수한 적갈색이 두드러지고, 천장에는 회반죽으로 된 과일 장식이 붙어 있다. 대머리가 돌아왔다. "이리로 오시지요." 문 입구에서 한 발 옆으로 비켜서서 나를 앞세웠다. 자, 스펜서, 마침내 너의 장례식이다, 하고 가슴속에서 중얼거렸다. 가끔 익살맞은 말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때가 있다. 두어의 사무실은 2층의 정면에 있었으며, 고가선로와 마주보고 있었다. 통근자에게 눈으로 말을 걸기에 안성맞춤이다. 두어는 그런 짓은 안하는 모양인지 창에서 등을 돌리고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상 위에 마닐라 종이철이 흩어져 있다. 전화가 둘 있었고, 창가의 조그만 탁자 위에 놓인 커다란 꽃병에 금어초가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두어가 말했다. 책상을 향해서 등받이가 직각으로 된 의자가 둘 있었는데, 나는 그 중 하나에 앉았다. 두어는 실내장식에 돈을 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는 것이 어때, 프랭크? 빙빙 돌려서 하는 인사는 그만두지." "무슨 일이야?" "지난번 밤에 내게 물었던 것 몇 가지에 대답을 하고 싶어." "왜?" "솔직하고 정직하라. 내 직업의 특징이지." 두어는 등을 펴고 앉아서 두 손을 회전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창밖을 설리번 스퀘어로 가는 전차가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나는 두어를 무시했다. "좋아. 너는 장난삼아 토스 배팅을 하는 것 말고 무슨 목적으로 야구장에 출입하느냐고 내게 물었어." 두어는 여전히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곳의 누군가가 경기를 조작하고 있는지에 관해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래서?" "누군가가 하고 있어." "누구야?" "서로 알고 있다고 보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나?" "여러 가지 일로 보아서지. 내가 거기에 간 직후에 자네가 총잡이를 데리고 찾아온 일도 포함해서." "그래서?" "그러니까 자네에게 알려준 녀석이 있어. 나는 경기를 조작하고 있는 인간, 그를 협박해서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사나이, 그 사나이가 돈을 꾼 고리대금업자를 알고 있어. 그래서 여기서 우리 두 사람이 대면하게 된 거야. 이름을 줄여서 너를 샤이라고 불러도 좋은가? 우리 서로 이만큼 기분이 통하고 있으니까." "이름을 말해, 스펜서. 나는 자네가 누구를 알고 있으며, 또 그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의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어. 이름을 말해 봐. 그러면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지." "마티 러브, 버키 메이너드, 그리고 자네." "그건 섣불리 할 수 없는 주장이야. 증거가 있나?" "섣불리 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나는 휙 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만화를 읽을 때 혀를 움직이는 남자치고는 훌륭한 말투로군." "이 빌어먹을 놈, 내게 함부로 입 놀리지 말아. 내 명령만 떨어지면 너는 엉덩이를 긁어볼 틈도 없이 저승으로 가는 거야. 알아? 자,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그렇잖으면 좋지 않은 꼴을 당하게 돼." "그게 좋군, 그것이 본래의 떠벌이 프랭키다워. 그래, 나는 증거를 갖고 있고, 또 더 많은 증거를 손에 넣을 수가 있어. 아직 증거가 없는 것은 자네와 메이너드와의 관련이지만, 그것도 손에 넣겠어. 메이너드는 압력을 넣기만 하면 가만 있어도 입을 열게 될 거야." "가령 네 말 그대로라고 하자. 그렇다고 치고, 네가 메이너드에게서 뭔가 알아냈다고 하자. 내가 메이너드를, 하긴 차라리 이러는 편이 좋겠지만, 자네를 없애지 못할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자네는 메이너드를 없애지 않아. 자네는 놈이 러브의 어떤 약점을 잡고 있는지 모르고, 또 놈은 그것을 어딘가에 감추어두고서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자네가 알아내지 못하도록 해놓았을 거야. 자네는 나를 죽이진 않아. 내가 호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게다가 살인과의 크와크라는 형사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그리고 첫째 자네에게는 나를 어찌해 볼 만한 부하가 없어." "자네가 하고 있는 말은 추측에 불과해." 두어의 표정만을 보아서는 내가 싸구려 장의사와 의논하러 와 있는 느낌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면허를 받은 거야. 메사추세츠 주가 추측하고 조사하는 일을 내게 허가한 거라고."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중단하길 원해. 메이너드가 협박에 쓰고 있는 자료를 받아내고 싶고, 자네들 모두가 러브에게서 손을 떼어주기를 원해." "그렇게 안되면?" "그렇게 안하면이라고는 말하지 않는군." "스펜서, 나는 자네가 지긋지긋해졌어. 자네 얼굴이나 입은 옷, 머리깎은 꼴, 계속해서 내 일에 얼굴을 들이미는 데는 진력이 났어. 자네가 살아서 까부는 꼴을 보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해졌어. 내가 하는 말을 알겠지, 이 빌어먹을 녀석아?" "내가 하고 있는 차림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나?" "귀찮아." 두어의 얼굴이 선 램프 밑에서 조금 벌개져 있었다. 그는 의자를 옆으로 돌려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연필을 만지기 시작했다. 연필로 허벅지를 두드리다가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아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쥐고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딱딱딱. 거꾸로 쥐고 딱딱딱. 다시 거꾸로. 첫번째 쪽. 지우개가 달린 쪽. 딱딱딱. 거의비어버린 전차가 이번에는 에버레트 역에서 시티 스퀘어 쪽으로 지나갔다. 나는 허리의 홀스터에서 가만히 권총을 뽑아 다리 사이 허벅지 밑에 넣고는, 마치 불안을 감추기 위해서 앞으로 구부린 것 같은 자세로 마주 잡은 두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불안한 듯이 위장하는 것은 쉬웠다. 두어가 연필을 쥔 채 의자를 이쪽으로 돌렸다. 연필을 나를 향해 들이댔다. "좋아, 여기서 보내주지. 하지만 그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지겨워지면 어떻게 되는지 조금만 보여주겠어." 책상 밑에 누르는 단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방에 숨겨진 마이크 장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책상의 왼쪽에 있는 문이 열리고 월리 호그가 들어왔다. 지난번과는 다른 꽃무늬 셔츠를 더블 니트 바지 밖으로 늘어뜨리고, 역시 똑같은 그 폭이 넓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프랑스 경찰관이 폭동진압에 쓰는 고무 제품 곤봉을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그를 보고 어릴 때 다리 밑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던 심술궂은 괴물 같은 사람이 떠올랐다. "월리." 나를 본 채 두어가 말했다. "아픈 맛이 어떤 건지 가르쳐 줘." 월리가 책상 이쪽으로 왔다. "앉은 그대로가 좋겠나, 아니면 서서 당하는 것이 좋겠나?" 그가 말했다. "나는 어느쪽이라도 좋아." 나의 바로 정면에 서서 내가 불안한 듯이 점점 앞으로 구부리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랑이 사이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올리면서 장진과 동시에 총구를 그의 턱 밑에 들이댔다. 턱뼈 밑 부드러운 곳이다. 총을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 "월리." 내가 말했다. "자네, 핼로윈 파티에서 마녀 역할을 하도록 고용되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있나?" 월리의 몸이 두어와 나 사이에 있었으므로 두어는 권총이 안 보인다. "뭘 꾸물거리고 있나, 월리? 나는 그 녀석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어." 내가 일어서니까 월리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 총구의 압력으로 조금 뒤꿈치를 들게 되었다. "자기과신이야." 내가 말했다. "또다시 자기과신이야, 프랭키. 자네가 나에게 겁을 주면서 실행하지 못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야. 지금 나는 월리의 혀를 쏘아버릴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곤봉을 내 왼손에 올려놔, 이 꼬마돼지야." 월리가 시키는 대로 했다. 우리의 얼굴은 1인치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그는 방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표정이 바뀌지 않고 있었다. 앞을 본 채 나는 곤봉을 뒤로 던졌다. "물론 네가 나를 쏘아도 좋아, 프랭크. 서랍 안을 휘저어보고 잡히는 것이 있으면 나를 쏘아봐. 자네에게도 승산은 있어. 나는 자네를 쏘기 전에 이 돼지를 쏘아야만 하니까. 한번 해보는 것이 어때? 내게 겁을 주어 떨다가 죽게 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빠를 거야." 나는 월리의 턱 밑에 총구를 힘껏 밀어붙인 채 그의 어깨 너머로 두어를 보았다. 두어는 손바닥을 밑으로 하여 책상에 철썩 붙이고 있었다. 시뻘건 얼굴에 입술이 떨리고 있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코 옆에서 입가로 그어진 골이 더욱 깊어지고, 왼쪽 눈꺼풀이 흠칫거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월리의 몸을 뒤져서 벨트로 눌러놓은 숄더 홀스터에 P_38이 꽂혀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 사이에 계속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1인치쯤 벌리고 있고, 왼쪽 구석에 조그맣게 침 거품이 묻어 있다. 혀 끝이 보이고, 겁에 질린 눈꺼풀이 입술의 움직임에 맞추어 떨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월리에게 달라붙다시피 서 있는 것이 불쾌해서 견딜 수 없었다. "돌아서, 월." 내가 말했다.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발을 뒤로 뻗어서 가랑이를 벌리고 체중을 두 손 쪽으로 모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은 알지?" 그에게서 떨어져서 책상의 모서리를 돌아 두어에게로 다가가자 월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좋아, 프랭크. 아픈 맛을 보여주기로 한 이야기는 이제 끝이야. 마티 러브를 협박하는 것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내가 그만두게 해줄까?" 두어의 입이 아까보다 더 크게 벌어지고, 아랫입술에 대고 있던 혀가 아까보다 심하게 떨리고 있다. 침방울이 터져버리고, 대신에 백치처럼 침을 조금 흘리고 있었다. 목을 앞으로 숙이고 있어서 나를 보는 눈알이 위로 향해야만 했다. 입도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어때, 프랭크? 여기 서서 자네가 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재미있지만, 나는 바쁜 몸이야." 두어가 가운데 서랍을 열고 권총을 꺼냈다. 내가 권총으로 그 손목을 향해 한 방 쏘니 책상 모서리에 맞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권총이 덜그럭거리며 책상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월리 호그가 얼굴을 들었으므로 그쪽으로 권총을 돌렸다. 두어가 손 위에 엎드려 몇 번이나 신음소리를 냈다. 회전의자 위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며 신음하고, 침을 흘리고, 울음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 그 소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은가, 프랭크?" 여전히 몸을 흔들면서 신음하며 울고 있었다. "한심한 녀석이군." 나는 두어의 소형 자동권총을 주워서 호주머니에 넣고는 월리에게 말했다. "나를 막으려고 하면 죽일 거야." 나는 문으로 나갔다.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현관까지 배웅해 주지는 않았다. 차를 몰아 그 자리를 떠났지만, 아무도 뒤쫓아오는 녀석은 없었다. 제 21 장 코뿔소 주변에서 살면서 코뿔소가 걸어가면 그 몸에서 날아오르는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새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전부터 내 일은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코뿔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코뿔소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반면에 울음을 그친 두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대강 짐작이 갔다. 그 짐작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방법은 진짜 새와 코뿔소의 경우에만 통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찰 근무로 돌아가서 당직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보지 않아도 된다. 메인 가를 나와 사탕공장 앞을 지나 설리번 가(街)의 로터리를 돌아서 러더퍼드 가(街)로 해서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사탕공장의 달콤한 냄새가 미스틱 강 건너편 발전소에 솟아 있는 굴뚝의 연기 냄새를 지워주고 있었다. 커뮤니티 칼리지(지역주민에게 대학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어 프리즌 포인트 다리를 건넜다. 옛날에 있던 다리는 헐어내고 새로 놓으면서 무슨 T 길모어 다리라고 불리고 있다. 교통계 기자들은 길모어 교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는 찰스타운의 옛날 형무소로 통하던 무렵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형무소의 담은 거리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사형집행을 하는 밤이면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전기의자에 전류가 흐르게 되면 여기저기의 조명이 갑자기 약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주(州)형무소가 월폴에 있으며, 사고 이외에는 감전으로 죽는 일이 없다. 아아, 젊은 날의 달콤한 추억이여.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차가 적었다. 5분 뒤에는 사무실 앞에 도착하여 때마침 비어 있는 불법주차 철거구역에 주차했다. 담배가게에서 '보스턴 글로브' 신문을 사서 사무실로 올라가 읽었다. 삭스는 오늘은 쉬고 내일은 클리블랜드와 홈 게임을 한다. 어제 서해안에서 마티 러브가 오클랜드를 2대 0으로 이기고 팀은 오늘 아침 일찍 로건 공항으로 돌아왔다. 해럴드 애스킨에게 전화를 걸어서 버키 메이너드의 주소를 물었다. 예상대로의 말이 오갔다. "어째서 알고 싶어하시오?" 애스킨이 물었다.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메이너드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돼요.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것이 당장 소문이 나버려요." "걱정할 것 없어요. 나는 신중성에 있어서는 귀감 같은 사람이니까." "참, 그렇겠군. 뭘 알아냈소?" "아직 보고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소. 단편적인 사실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잔수작은 집어치우시지. 뭘 알아냈소? 마티가 사실 그러고 있소, 아니오?"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애스킨 씨. 좀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당신은 하루에 100달러나 든단 말이오. 경비 쪽은 어떻게 되어가시오?" "많습니다. 일리노이 주와 뉴욕 시에 가서 어떤 증인의 이야기를 듣는 데 저녁식사비로 119달러 썼습니다." "무슨 소리요, 스펜서. 나는 예산의 범위 안에서 일을 해야만 되고, 지출명세서에 당신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소. 그만한 돈을 대체 어떤 식으로 꿰어맞추란 말이오? 잘 들어요, 그런 큰 돈을 쓸 때에는 미리 내게 연락하도록 하시오." "나는 그런 식으로는 일을 안하지만, 이젠 이 이상은 별로 경비가 들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해고되어 팀에서 쫓겨나는 건 싫다. 게다가 사례금도 필요하다. 말에겐 꼴이 필요하고, 갑옷 투구는 손질이 필요하다. "진상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밝혀 주시오." 애스킨이 전화를 끊었다. 멋지게 둘러댔군. '진상에 다가가고 있다.' 시인(詩人)이 되었어야 했어. 경찰 근무로 되돌아가면 말에게 먹일 꼴 걱정이나 갑옷과 투구를 손질할 걱정은 안해도 될 텐데. 하버 타워스는 보스턴 만(만)이 멀리 바라보이는 새 고층 아파트군(群)이다. 부두구역 재개발의 꽤 훌륭한 기념비 같은 존재이며, 로비에는 아직도 새 콘크리트 냄새가 감돌고 있다. 중앙 간선도로에서 시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격리되어 있어서, 과거 부두가 완전히 못 쓰게 된 자리에 풍요로운 신흥주택이 조그만 반도를 이루고 있다. 아틀랜틱 가, 메이너드의 아파트 가까운 곳으로서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는 고가도로 밑에 주차했다. 아스팔트가 물렁해질 정도로 더워서 로비의 냉방이 상쾌했다. 현관 문지기에게 이름을 대니까 위에 전화를 해보고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위층 8호실입니다." 엘리베이터 내부가 거울로 되어 있어서 내 옆얼굴이 어떤가 보려고 하는 사이에 가장 위층에 닿아서 문이 열렸다. 재빨리 앞을 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모습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꼴을 들킨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8호실은 엘리베이터의 바로 정면이었으며, 벨을 누른 순간 레스터 프로이드가 문을 열었다. 하얀 작업복 반바지, 하얀 샌들, 하얀 헤드밴드를 매고, 크고 흰 플라스틱 테에 검은 렌즈를 끼운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상반신은 뱀처럼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으며, 근육은 탄력이 있고 유연해 보였다. 벨트 대신에 검은 실크 스커프 같은 것을 혁대 고리에 끼워서 왼쪽 허리 부근에서 묶어 놓았다. 풍선껌을 십고 있었다. 그는 문을 잡고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갔다. 그가 뒤에서 문을 닫았다. 거실은 길이가 10 미터는 되는 것 같았으며, 막다른 벽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고, 발코니로 이어져 있다. 발코니 너머는 움직임이 없는 푸른 대서양이었으며,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만큼 넓었다. 레스터가 유리문 하나를 열고 발코니로 나가더니, 문을 닫고 철사로 정교하게 세공을 한 흰 철제 긴의자에 누워서 가슴에 로션을 바르고는 하늘을 보고 껌을 십는다. 손님 접대가 정중한 녀석이다. 나는 붉은 가죽을 입힌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방안에 온통 사진이 널려 있는데, 거의 모두가 메이너드와 유명인사가 찍혀 있는 4절판짜리 광택인화지다. 야구선수, 정치가며 영화배우 같은 것이 두 장쯤 있다. 사립탐정은 보이지 않았다. 공평하지 못한 녀석이다. 어쩌면 단지 눈이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레스터의 선 데크 쪽에서 휴대용 라디오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더 톱 포티. 매혹적인 음악을 껌을 십는 기계 같은 녀석이 듣고 있다. 오오, 세알라, 너와 나의 젊은 날이 그립도다. 버키 메이너드가 오른편 벽 안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해서 거실로 들어왔다. 밝은 황색 파자마 위에 밤색 실크 화장복을 입고, 폭이 넓은 비로드 벨트를 매고 있다. 수염은 자랐고, 눈이 부석부석하다.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이다. "모두들 일찍도 일어나는군요, 스펜서. 나는 4시에 겨우 잠들었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죠. 레스터가 무슨 이유로 뉴욕에 가서 패트리셔 애틀리를 만났는지 듣고 싶군요." 메이너드가 걸친 화장복 한쪽 깃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정중하게 쓸어내렸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소, 스펜서. 그에게 물어보면 알겠구먼." "외야 스탠드의 나같이 젊은놈들이 하는 소리가 아니니까 엉터리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지요, 버크. 레스터는 당신 심부름으로 간 거야. 나는 애틀리와 만났소. 프랭크 두어의 보디가드인 월리와도 만났고. '교외의 환상'이라는 영화도 보았고, 린다 러브와도 만났소. 아무래도 물어보는 방법이 잘못된 것 같군. 레스터가 뉴욕에서 무엇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가 알게 된 이상 우리 서로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일이오." "레스터." 메이너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레스터가 라디오를 켜둔 채 거실에 들어오더니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커다랗게 핑크색 풍선을 불었다. "놀랍군, 레스터." 내가 말했다. "정말 큰 풍선이야. 자네는 풍선을 부는 데는 내 우상이야. 대단해." 레스터가 풍선을 십으면서 입으로 끌어들였다. 입술에는 조금도 묻지 않았다. "꽤 시간이 걸렸을 거야." 내가 말했다. "여러 시간 동안 연습을 했겠지, 틀림없이." 레스터가 메이너드를 보았다. "스펜서와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자네도 옆에서 들어야겠어." 레스터가 미닫이 유리 문틀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나를 보았다. 메이너드가 가죽으로 입힌 의자 하나에 앉아서 말했다. "자, 당신이 질문하는 의미가 대체 뭐요, 스펜서?" "서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으니까, 때에 따라서는 의논해서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요. 의논하자는 거지, 레스터." "요점을 말하시지, 스펜서. 레스터가 화내기 전에." "당신은 프랭크 두어에게 돈을 꾸었는데 갚지 못했어. 그래서 당신이 지시하는 대로 속임수 경기를 하도록 마티 러브를 협박하고, 그 정보를 두어에게 제공하여 그에게 당하는 것을 면하고 있소." "프랭크 두어가 누군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면 먼저 나를 상대해야만 돼." 레스터가 말했다. "그래,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큰 문제지. 이번에 그와 호그가 오게 되면 혼을 내주어야 될 거야. 그가 겁을 먹고 기절하는지 한번 시험해 보는 거야." "당신 이야기는 듣기 싫어. 까불고 있어." 레스터가 팔짱을 풀고 내게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레스터." 메이너드가 말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레스터가 다시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섰다. 영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당신이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생각해 냈는지 나는 모르겠소, 스펜서. 하지만 가령 당신이 하는 말이 맞다고 치지.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당신과 어떤 상관이 있다는 거요? 작가로서 지금부터 책을 쓰려는 당신과?" "내가 작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 텐데?" "내가? 난 그런 줄은 전혀 몰랐어. 작가라고 당신이 내게 그러지 않았나?" 남부 사투리가 강해졌다. 정신적인 압력으로 진짜 사투리가 더 강해진 것인지, 아니면 가짜 사투리가 더 가짜의 심도를 깊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랬지. 그래서 당신이 즉시 두어에게 알려서 놈에게 내 뒷조사를 시켜 당신네 둘 다 내가 사립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잖소." "이거 놀라겠군." 메이너드의 양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사립탐정이라. 하지만 그렇더라도 질문이 달라질 건 없지. 당신이 노리는 것은 뭐요?" "러브 부부에 대한 협박을 그만두기 바라는 거요." "그래, 가령 내가 그 부부를 협박하고 있다고 치고, 그만둘 경우엔 어떤 이익이 생기나?" "글쎄, 나는 고맙게 생각하겠소." 미닫이문에 기대선 채 레스터가, "미치겠군." 하고 느릿느릿 말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메이너드가 말했다. "프랭크 두어에게 대처하는 데 거들어 주겠소." 레스터가, "미치겠군." 하고 이번에는 더욱 느리게 말했다. "여하튼, 스펜서, 당신이 걱정해 주는 것에는 아주 고맙게 생각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에는 이해 안되는 점이 몇 가지 있소. 우선 당신이 고맙게 생각해 주는 건 내게는 신나지도 우습지도 않다는 거요, 알겠소? 둘째로, 설령 내가 프랭크 두어에게 애를 먹고 있다고 해도 당신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어. 셋째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협박 같은 것은 하지 않았소. 하고 있나, 레스터?" 레스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여기에 찾아온 것은 헛수고인 것 같소. 그러나 당신이 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점은 흥미가 있어. 그렇지, 레스터?" 레스터가 끄덕였다. 선 데크의 라디오에서 디스크 자키가 '록 클래식'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모두들 앞일은 생각지 않는 것 같군." 제기랄, 놈의 말버릇을 닮아가는군. "무슨 뜻이지?"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은 그때만 피해 보려는 해결책밖에 안돼요. 마티 러브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던질 수 있을 것 같소. 5년이오. 이보시오, 그의 야구인생이 끝나버리면 두어가 당신을 그냥 놓아둘 것 같소? 두어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 돈을 우려낼 텐데." "두어는 내게 맡겨." 레스터가 말했다. 말투를 바꿀 수가 없는 모양이다. "레스터." 내가 말했다. "자네가 두어를 해치울 수는 없어. 두어를 상대한다는 것은 술집에서 관광객을 때려눕히거나 맨손으로 벽돌을 깨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른 거야. 월리 호그는 프로 보디가드야. 자네는 아마추어고.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은 한여름의 민들레처럼 날려버릴 수 있어." "미치겠군." 레스터가 말했다. 자기에게 딱 어울리는 대사라고 생각되어 그 한마디로 계속 버틸 모양이다. 메이너드가 말했다. "그 녀석들이 그렇게 세다면, 스펜서. 당신은 무슨 수로 거들어 주겠다는 거요?" "나도 프로니까, 버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도 알고 있다는 거요. 프랭크 두어 같은 녀석과 정면으로 맞붙어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부근에서 어정거릴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나는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꾀하는 방법을 알고 있소.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당신들 어릿광대들은 모른다는 거요." "당신은 그렇게 센 것 같지 않은데?" 레스터가 말했다. "그것이 자네와 내가 다른 점이야, 레스터. 음악에 대한 취향은 별문제로 하고 말이야. 나는 외모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 않아. 자네는 마음에 두지. 나는 내가 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어. 자네는 증명해 보여 주지 않고는 못 배기지. 지금 같은 말을 월리 호그에게 했다면, 자네가 싸울 준비를 하고 풍선을 부는 사이에 놈은 자네 코에다가 총알 세 방을 쏘았을 거야." 레스터가 싸울 자세를 갖추었다. 두 다리를 굽히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과거의 유명한 권투선수 존 L 설리번의 오래 된 사진과 비슷했다. "시험삼아 덤벼 보면 어때, 이 자식아." 나는 일어났다. "레스터, 좋은 것을 보여주지." 권총을 빼서 그의 이마를 겨냥했다. "이것은 38구경의 콜트 디텍티브 스페셜이야.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자네가 아무리 무술에 뛰어나도 전혀 쓸모가 없어." 메이너드가 말했다. "자, 자, 스펜서......" 레스터가 권총을 보고 있었다. "자, 그걸 내려, 스펜서." 메이너드가 말했다. "레스터. 그쪽에 좀 쉬고 있게." "네놈이 그 권총만 안 가졌다면." 레스터가 말했다. "그런데 그 점이 문제란 말일세. 레스 베이비. 나는 총을 가지고 있거든. 월리 호그도 권총을 가지고 있어. 자네는 가지고 있지 않아. 프로라는 것은 권총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보다 먼저 뽑는 사람이란 말이야." "자, 침착해, 좌우간 침착해." 메이너드가 말했다. "네놈이 언제나 그 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 테지, 스펜서?" "잘 들어, 아가야. 자기가 아기와 같다는 것을 알았지? 자네는 또 한 번 잘못 판단했어. 나는 언제나 권총을 가지고 있어. 자네는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잊고 정작 써야 할 때에 쓰지 못하지만, 나는 절대로 잊지 않고 가지고 다니지." "레스터." 메이너드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소리가 컸다. "침착해. 알겠어? 이젠 가만 좀 있어. 난 이런 일은 딱 질색이야." 레스터는 공격자세를 천천히 풀고 문 손잡이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고, 한쪽 눈꺼풀이 겁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권총을 도로 넣었다. "저 친구를 내 옆에서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시지요. 그렇잖으면 혼을 내줄 거요." 내가 메이너드에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스펜서. 레스터는 금방 흥분하는 버릇이 있지만, 바보는 아니오. 그렇지, 레스터?" 레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이너드는 입술 위에 땀이 솟아나 있었다. "가령 내가 당신과 공동전선을 펴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될 경우 -- " 메이너드가 말했다. "당신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소? 두어가 이리로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할 때에 어떻게 막을 생각이오?"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이젠 짜고 하는 경기는 손 떼고, 협박은 하지 않겠다고 하겠소. 그리고 그에게 수입이 다소 줄겠지만, 아무도 죄를 따지고 들지는 않을 거라고 하고. 서툰 짓을 하면 곧 경찰이 개입해서 누군가가 죄인이 될 거라고 하는 거요. 게다가 죄를 추궁당할 사람은 바로 그 친구라고 가르쳐 주고, 이쪽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경찰이 발견할 수 있도록 증거를 숨겨두었다고 하겠소." "내가 그에게 지고 있는 빚은 어떻게 되는 거요, 가령 있다면 말이오만?" "러브가 등판했을 때 그가 돈을 걸었다면 빚은 이미 옛날에 다 갚고도 남았을 거요." "하지만 두어는 더 욕심을 낼지도 모르고, 내게는 그런 돈이 없소."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 내 일이지요." "그거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점이오." 메이너드는 얼굴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어떤 식으로 그를 설득하겠다는 거요?" "모르지. 놈의 비즈니스 센스에 호소하겠소. 지금의 그 짓을 그만두는 게 계속하는 것보다 유리하다,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벌 수 있다, 세상에는 얼빠진 당신 같은 사람과 러브 같은 사람만 살고 있는 건 아니다......" 메이너드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전히 바깥 선 데크의 라디오에서 더 톱 포티가 흐르고 있었다. 레스터는 문에 기대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만(灣)에서는 여전히 흰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메이너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해. 스펜서, 당신 말대로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나를 못살게 굴지는 않고 있소. 그런데 당신이 말한 그런 방법으로 나간다면 못살게 굴 가능성이 많아." "두어는 내게 맡기라니까요, 버키." 유리문에 기대섰던 레스터가 말했지만, 마치 넋두리 같은 투였다. "자네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아까 그것이 진짜 싸움이었다면 너는 이 스펜서에게 당하고 말았을 거야. 분명히 말해 두겠어, 안돼. 나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추호도 없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일이 잘 되어왔어."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소, 버크." 내가 말했다. "지금은 내가 한몫 끼어 있으니까. 더구나 나는 여기저기 조사해 가면서 말벌을 화나게 할 생각이오. 이 이상 엉터리 시합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메이너드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과 프랭크 두어 중 어느쪽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지금으로서는 프랭크 두어 편에 서겠소.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 두지. 지금까지의 이야기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나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겠소." 지당한 말씀이다. 가령 내가 그였다고 해도 같은 길을 골랐을 것이다. "레스터." 메이너드가 말했다. "스펜서 씨를 현관까지 배웅해 주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서 나가겠소. 레스터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좋겠어. 저렇게 화가 나 있으니 문을 때려부수고 내 다리를 잘라버리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메이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리아 같은 매부리코 끝에 땀이 고여 있었다. 뒷걸음으로 방에서 나올 때 마지막으로 눈에 뜨인 것은 그 땀방울이었다. 제 22 장 하버 타워스 가까이에 수족관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까지 걸어갔다. 대낮이었으므로 안에는 거의 사람이라고는 없었으며, 어둡고 썰렁한 것이 바깥 거리와는 별세계였다. 수조 둘레의 나선형 통로를 올라가면서 상어, 능성어, 바다 거북,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들이 각기 다른 높이에서 소리없는 모양을 만들고, 투명한 물 속을 빙글빙글 미끄러지듯이 헤엄쳐 다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물고기들은 나를 무시하고 있고, 일종의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며 빙빙 도는 사이에 각기 다른 물고기들도 무시하고 있는 듯했다. 나선형 통로는 걸리적거리는 것이 전혀 없고, 수족관 안은 한없이 넓게만 보였다. 평평한 수조의 아래쪽에는 바닥에 조명장치가 되어 있어서 물이 차가운 녹색으로 비치고, 밝은 물 속에서 조그만 물고기가 빛을 배경으로 검게 떠올라 재빨리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현장견학을 온 국민학교 2학년쯤 되어보이는 학생들 몇몇이 한 무리를 이루고 들어왔다. 뿔테 안경을 쓴 자그마하고 통통한 수녀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물고기 관찰을 재빨리 끝내고는, 아이들은 이미 물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곳에 온 진짜 목적은 물고기가 아니고 수족관 자체의 느낌을 맛보는 것에 있는 듯이 건물과 그 넓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선형 통로를 뛰어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위아래에서 발코니 너머로 서로 고함치는 것이었다. 수녀는 억지로 조용히 하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넓은 공간과 어둠이 아이들의 소음을 빨아들여 버리는 것 같았다. 수족관 안은 아직 정적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수조의 두께 15cm 짜리 유리창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작은 몸집에 영양상태가 좋은, 두려움 같은 것은 느끼지조차 않는 상어가 미끄러지듯 계속 돌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사태의 처리를 잘못했다. 그 점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프랭크 두어를 화나게 했는데, 두어는 머리가 정상이 아니다. 메이너드가 내 요청을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 두어가 메이너드를 죄어가던 것을 중지할 리도 없고, 나와 흥정을 할 리도 없다. 아니면,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자존심이 걸려 있어서 어떻게 처신하도록 내게 설득을 당하거나 강요당할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조그만 아이가 창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내 앞에 끼어들었다. 벨트가 너무 길어서 몸을 한 바퀴 반 돌고도 남은 부분이 등의 벨트 고리에 꽂혀 있었다. 다른 아이가 와서 함께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미 수조에서 밀려나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사람을 밀어내는 방법을 터득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선형 통로를 따라 내려와 첫번째 발코니에서 펭귄을 바라보았다. 펭귄은 수족관의 조화를 깨고 있다. 유리벽은 없고, 구경꾼들과의 사이에는 2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을 뿐이고, 칸막이도 없다. 물고기와 펭귄을 구별하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그것을 막는 것이 없다. 불쾌했다. 투명한 물 속의 소리없는 물고기는 환상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펭귄의 악취는 현실의 것이었다. 나선형 통로를 내려와서 수족관을 나온 순간 뜨거운 햇빛이 소리를 내듯이 부딪쳐 왔다. 경찰에 알리면 두어와 메이너드를 형무소로 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랬을 경우, 린다 러브는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 것이고, 마티 러브는 아마 야구계에서 추방되겠지. 린다에게 공식석상에서 고백시킴으로써 두어와 메이너드에게서 협박자료를 빼앗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차의 뚜껑을 내려놓아 두었으므로 좌석이 뜨거워, 들어가 앉으니 불쾌했다. 메이너드를 두어에게서 떼어낼 수는 없다. 두어가 열쇠를 쥐고 있는데, 그 두어를 다루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가는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 이렇게 되고 보면 타협한다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러브 부부에게로 돌아갔다. 로비의 도어맨이 위층으로 연락해서 아파트의 입구에 마티 러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으며, 턱의 근육이 솟아올라 있었다. "개자식."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그럴지도 몰라."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돼." "이번에는 뭘 노리고 있소, 우리들 침실에 도청장치라도 할 셈이오?" "그 이야기를 복도에서 하고 싶진 않소." "당신 생각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야. 집에 들어가서 악취를 풍겨대는 짓을 하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잘 들어요. 나 자신도 비참한 기분이고 당신의 기분도 압니다. 무리도 아니라고는 생각지만, 서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고, 또 당신이 복도에서 이렇게 소리친다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소리나 지르고 있는 것을 고맙다고 생각하시지. 내가 때려주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 줄 아시라고." 린다 러브가 문 앞 남편 옆으로 왔다. "들어오게 해요, 마티. 우리는 아주 쓰라린 처지에 있는 거예요. 소리쳐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아요. 그를 때려도." "이 빌어먹을 인간이 일을 저질렀단 말이야. 이 사람이 주제넘게 끼어들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었단 말이야." "원인은 그에 못지않게 내게도 있어요. 매춘부는 나지 스펜서가 아니에요." 러브가 아내를 보았다. "두 번 다시 그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절대로. 내 집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어. 아들에게 그런 소릴 듣게 할 순 없어." 린다 러브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는 집에 없어요, 마티, 보육원에 있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들어와요, 스펜서." 두 손으로 러브의 오른팔을 잡고 문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들어갔다. 나는 소파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러브는 앉지 않았다. 우뚝 버티고 선 채 두 손을 불끈 쥐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 놀리는 것을 조심하시지, 스펜서. 나는 당신을 때려주고 싶어서 뱃속이 뒤집힐 지경이오. 서툰 입을 놀렸다간 두드려패 줄 거요." "마티, 오늘 아침 나를 박살내겠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 세 번째요. 더구나 성공 가능성에서도 세 번째고. 나는 당신처럼 공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내 몸을 건드리기도 전에 나는 당신을 병원으로 보낼 수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소." 나는 여러 녀석들에게 큰소리로 욕을 먹어 기분이 우울해 있었다. "당신 생각만 그럴 뿐이지." 내게도 자존심이 있다. "확실하다니까."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린다 러브가 남편의 팔을 놓고 앞으로 돌아 남편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그만둬요, 마티. 둘 다 어른이 되어가지고. 여기는 당신들 두 아이가 누가 더 센지 팔씨름이나 하는 놀이터가 아니에요. 여기는 우리들의 집이고, 장래의 희망의 터전이며, 꼬마 마티와 우리 부부의 인생의 보금자리예요. 어떤 문제가 되든지 팔씨름같이 해결할 수는 없어요." 차츰 목이 메어지더니 러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것도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린다. 남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남편의 가슴에서 말소리는 똑똑지 않았으나 린다가 그에게 소리쳤다. "그만해요. 남자라는 소리는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말아요." 나는 담배를 끊은 것이 애석했다. 두 손을 어찌해야 좋을지 낭패스러웠다. 러브가 아내를 안고 머리 꼭대기를 턱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모르겠어." 그가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어." "나도 마찬가지요. 그러나 당신이 앉는다면 의논해서 좋은 생각을 짜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앉아요, 마티." 린다 러브가 남편의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밀었다. 그가 앉았다. 아내가 옆에 앉아서 얼굴을 돌리고 클리넥스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모르겠어." 러브가 다시 말했다. 긴의자에 앉아서 두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마주 잡은 손을 무릎 사이에 끼고서 엄지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애스킨은 어느 정도 알고 있소?" "아무것도.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오. 그래서 모든 것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를 고용한 거요. 그는 시합이나 당신에게 수상한 점은 없다고 믿고 싶어하고 있소." "그럼 -- " 러브가 말했다. "나는 진정이오. 좋은 생각이 있소?" "내가 어제 한 말을 부인에게서 들었소?" 러브가 끄덕였다. "나는 두어와 이야기했고, 메이너드와도 이야기했소. 두어는 메이너드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메이너드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요. 메이너드는 겁에 질려 있소." "메이너드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정말로 빚이 있소?" "그래요."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군." "참을 수 있겠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소." 러브가 말했다. "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방법도 있지." 린다 러브는 눈물을 다 닦고 다시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녀가 말했다. "안돼." 러브가 말했다. "마티." 린다가 말했다. "안돼." "마티." 린다 러브가 다시 말했다. "우리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요. 나는 견딜 수가 없어요. 내 죄의식에도 견딜 수 없으며, 그들에게 돈벌이를 시키기 위해서 당신이 시합에 질 때마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언제나 질 필요는 없을 거야. 때로는 특정한 이닝의 내기에 대해서 상대에게 한두 점 내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어." "말씨름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마티. 편지가 올 때마다 당신은 그 뒤의 1주일은 굉장히 풀이 죽어 있어요. 당신은 팀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버틴다는 오랜 신념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어요. 당신은 죽도록 괴로워하고 있고, 나도 같은 마음이에요." "당신 이름이 전국에서 소문거리가 되게 하는 짓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어. 자기 엄마가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을 저 아이에게 듣게 해도 좋다는 거야? 차라리 그 아이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면 어때?" "소문 같은 것은 언젠가는 사라져요, 마티. 그 아이는 겨우 세 살이에요." "하지만 불펜에서는 좋은 화제가 된단 말이야. 내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녀석들이 웃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도 문제가 안될지도 모르지. 내가 엉터리 시합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 던질 일도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길 바라나?" "그렇지는 않지만 지금 이 상태도 견딜 수 없어요, 마티." "그래, 뉴욕에서 손님에게 다리를 벌리고 있을 때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할 걸 그랬군." 나는 명치 끝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린다 러브는 꺾이지 않았다. 말없이 남편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러브였다. "빌어먹을, 용서해 줘, 린다." 아내를 안았다. 린다는 몸을 빼내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막대기처럼 굳어져서 안긴 채 눈은 방 저편 먼 곳의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 러브가 다시 말했다. "아아, 제기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야?" 제 23 장 "야구를 할 수 없게 되면 어쩔 셈이오?" 내가 물었다. "코치." "코치가 될 수 없으면?" "스카우터라도." "그런데, 스카우터도 못되고, 코치도 못되면? 야구계와 완전히 인연이 끊기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러브는 다시 엄지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소." "대학에서 뭘 전공했소?" "체육." "뭘 하고 싶소?" "야구를 하고, 그 뒤에는 코치." "내가 하는 말은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거요." 러브의 눈이 깜박이지도 않고 엄지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다 러브는 커피 테이블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러브 부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출장정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절대로 틀림없어요. 나는 몇 게임을 일부러 버렸소. 커미셔너 사무국이 그것을 안다면 내 야구생활은 완전히 끝나는 거요." "내가 고백하면 어떻게 되나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내가 내 과거에 대해서 공표하고, 도박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어때요? 마티까지도 나에 관한 것은 전혀 몰랐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놈들은 내가 시합을 버린 일을 꼬투리로 협박할 수 있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소." 내가 말했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두어를 내쫓아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메이너드와 흥정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메이너드가 당신 일을 터뜨릴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의 일도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까. 그도 직업을 잃게 됩니다. 메이너드와 상대한다면 당신은 대등한 처지요." "어쨌든 마찬가지요." 러브가 엄지 손톱에서 눈을 들었다. "나는 린다에게 입을 열게 하지 않겠소." 린다 러브도 나를 보고 있었다. "두어를 쫓아버릴 수가 있나요, 스펜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소. 안된다면 우리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어요. 쫓아버리지 않을 수가 없지." "린다는 이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해선 안돼. 대체 나를 어떤 남자로 보고 있는 거야?" "어째서지요?" 린다 러브가 말을 하자 우리 두 사람 다 마티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을 나는 깨달았다. "몰라."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고백하겠어요." "안돼." 러브가 말했다. "마티, 이분이 준비해 주면 나는 말하겠어요.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당신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나는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우리와 야구 둘 다예요. 그러나 한쪽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이 상처를 입어야만 해요. 그것이 내 탓인 줄 알고 있는 것이 너무 괴롭고, 지금의 이 긴장과 공포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만일 스펜서 씨가 다른 한 남자에 대해서 무슨 수를 쓸 수만 있다면, 내가 고백해서 모두가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러브가 나를 보았다. "나는 찬성하지 않소, 스펜서." "애들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지, 마티." 내가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깨끗한 게 아니오.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에 말려들어 있는 거요. 만일 불펜에서 자신이 남에게 조롱당하고, 아내가 다소 부끄러운 입장이 된다는 것 정도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소. 완벽하다고는 못해요. 전보다 좋아졌다고 생각해야지." 러브는 고개를 흔들었다. 린다 러브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도 온몸이 굳어져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차츰 얼굴에 핏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러브가, "나는......" 하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했다. "우리들이 꼭 지금 여기서 의논할 필요는 없소. 두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는 내게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시오.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가 내게 먼저 시비를 걸어 올지도 모르지. 어쨌든 상황을 좀 두고봐야겠소." "무슨 일을 시작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에 우리와 의논해 주시오." 러브가 말했다. 나는 끄덕였다. 린다 러브가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일어나서 방에서 나왔다. 조심하라든가, 이 싸움은 절대로 이기자든가,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방법이 문제라든가, 그런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내가 그곳을 떠나면서 들은 것은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뿐이었다. 바깥인 매사추세츠 가에 나와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 1시 반, 집으로 돌아갔다. 부엌에서 맥주 깡통을 하나 땄다. 요새는 암스테르담을 좀처럼 구할 수 없어서 국산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러나 크게 다른 것은 없다. 지금까지 마신 것 중 가장 싸구려 맥주도 맛이 좋았다. 아파트는 아주 조용했다. 에어컨의 낮은 진동음이 조용한 것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두어가 문제다. 그 일에서 그를 물러나게 할 수만 있다면 메이너드를 설득하는 것쯤은 가능하다. 요는 두어에 대해서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를 생각해 내야만 한다. 맥주를 다 마셨다. 두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스펜서의 법칙 중 하나를 적용했다 -- 생각이 정해지지 않을 때에는 무엇이든 요리해서 먹어라. 셔츠를 벗고 다시 맥주 깡통을 따고는 냉장고 안을 살펴보았다. 돼지 갈비. 그렇다. 리퀴드 스모크를 잔뜩 쳐서는 오븐에 넣었다. 불은 약하게. 전에 미니애폴리스의 찰리 뭐라고 하는 레스토랑에서 찰리가 만들었다는 소스를 친 바베큐 돼지 갈비를 먹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똑같은 소스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해 오고 있는 터다. 아직 똑같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비슷해지고 있다. 이번에는 케찹 대신에 칠레 소스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두어가 좋아하는 것은 뭐냐? 그것은 이미 생각했다 -- 금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게 손을 얻어맞은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칠레 소스에 넣는 붉은 설탕의 양을 조금 줄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내가 정면승부로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기분나쁜 녀석. 그때의 반응은 단지 손이 아파서 운다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마늘을 두 개 넣었다. 그러나 그전에 맥주를 한 깡통 더 따자. 마늘 냄새를 없애는 데 좋을 거야. 어쨌거나 나는 오늘 놈에게 의사표시를 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레몬을 두 개 짜서 즙을 소스에 섞었다. 돼지 갈비 냄새가 부엌에 가득찼다. 냉방 스위치를 올렸다. 오븐의 열로 부엌이 더워서, 훌렁 벗어버린 가슴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두어와 만나는 것과, 이쪽에서 바라는 대로 되도록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이 순간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 그를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입에서 거품을 내는 남자를 본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를 죽인다고 한다면 돼지(호그)도 죽여야만 한다. 붉은 포도주를 조금 넣으면 어떨까? 붉은 포도주는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다. 반 컵 넣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두어가 죽어버리면 돼지는 부리뽑힌 잡초처럼 시들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확인해 보지 않고 끝내게 되면 가장 좋다. 타바스코(멕시코산 붉은 고추)를 한번 부려 봐? 확인해서 나쁠 건 없겠지. 또 맥주를 땄다. 가령 내가 죽는다면 부리째 뽑힌 잡초처럼 시들어버릴 것이다. 소스를 불에 올려놓고 이제 뭘 먹을까 하고 생각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화로 월리와 프랭크를 불러내어 둘이서 이쪽 조건에 동의할 때까지 요리를 만들어 주어도 좋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라고도 하니까. 채소를 넣어두는 서랍에 즈키니가 있기에 얇게 잘라서 밀가루를 발라 옆에다 두고, 맥주로 밀가루 반죽을 만들었다. 밀가루가 들어 있는 대접에다가 맥주를 넣을 때는 언제나 가슴이 아프지만, 결과는 아주 좋다. 그것이 나다. 미스터 결과. 그런데 프랭크 두어를 어떻게 하기로 했더라? 바베큐 소스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기에 푹 익으라고 불을 약하게 줄였다. 맥주로 반죽한 가루에 타바스코를 두 통 넣고 휘저어 맥주 안에 든 이스트가 가루에 작용하도록 곁에 놓았다. 냉장고 안을 보았다. 지난번 일요일에 수잔 실버맨의 집에서 야구를 보고 라인 포도주를 마시면서 둘이서 오후 내내 빵을 만들었다. 그녀가 가루를 섞고 내가 반죽을 하고, 끝났을 때에는 구워내어 포일로 싼 덩어리(로프)가 열두 개나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여섯 개를 가져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네 개 남아 있다. 한 개를 꺼내어 포일에 싼 채 오븐에 넣었다. 수즈에게 물어보면 프랭크 두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바베큐 소스에서 체리 맛이 나게 하는 방법, 또는 내가 요즘 너무 많이 마시는지에 대해서 무슨 의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계를 보았다 -- 3시 반. 그녀는 이미 학교에 가 있다. 전화를 걸어서 열 번 신호가 울렸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끊었다. 브렌다 롤링? 안된다. 나는 말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브렌다는 놀거나 농담하는 상대이며, 피크닉에서 먹을 것은 멋지게 준비하지만, 어려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나 자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돼지 갈비가 다 되었다. 빵이 뜨거워졌다. 얇게 자른 즈키니를 맥주를 넣고 만든 묽은 가루반죽에 살짝 넣었다가 올리브 기름을 조금 붓고는 튀겼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즐겁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 제 24 장 그후 마시고, 먹고, 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저녁때까지 생각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이 정해져 있었다. 하는 방법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찰스 강가에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른 일을 생각하면서 산책로를 달렸는데, 평소의 5킬로미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각을 집중하지 않으면 시간이 더 걸린다. 알링턴 가의 인도 옆에서 스트로 드라이브로 뛰어 건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지붕에 조그만 안테나를 단 검은 포드가 옆에 와서 멈추고는 조수석 창으로 프랭크 벨슨이 머리를 내밀었다. "타." 뒷좌석에 올라타니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이 부근을 돌게, 빌리." 벨슨이 다른 경관에게 말하자, 차는 서쪽인 올스턴으로 향했다. 벨슨은 앞으로 숙인 채 대시보드(계기판)의 라이터로 여송연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자 이쪽을 향해서 좌석 위에 왼팔을 올려놓고 나를 보았다. "정보에 의하면 프랭크 두어가 자네를 없앨 모양이야." "프랭크가 직접?" "정보제공자는 그렇게 말했어. 자네가 어제 놈에게 아픈 꼴을 보여줘서 놈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벨슨은 마르고 피부가 팽팽한 사람이며, 검은 수염을 매끈하게 깎았다. "마틴이 자네에게 귀띔해 줘야 한다고 그러더군." 우리는 강이 구부러진 곳에서 왼쪽으로 계속 달려서 솔저스 필드 로(路)로 나와 BZ국(局)의 라디오 송신탑을 지나갔다. "그런 일은 두어 대신에 월리 호그가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녀석도 하지." 벨슨이 말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놈이 직접 한다는 거야."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 "그렇다고 해서 자네를 때려눕히는 데 월리를 데리고 다닐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아니야." 빌리가 안전지대를 넘어 U턴 해서 시내 쪽으로 돌아갔다. 젊고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고, 풍성한 금발 수염을 기르고, 머리칼은 귀가 덮이게 깎았다. 벨슨의 구레나룻은 관자놀이 부근에서 짧게 깎여 있다. "그 정보제공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벨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늘 틀림없었어." "이번 정보에 얼마 주었나?" "100달러." 벨슨이 말했다. "미안해." 벨슨이 어깨를 움츠렸다. "회사 돈이야." 우리들은 하버드 스타디움 옆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자네나 크와크에게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벨슨이 고개를 저었다. "숨어버리면 어떨까?" 빌리가 말했다. "두어는 앞으로 10년이나 20년이면 죽을 성싶은데." "놈이 그렇게 세다고 생각하나?" 빌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벨슨이 말했다. "문제는 세고 약하고가 아니야. 미쳤다는 점이지. 두어는 미친놈이야. 일이 생각대로 안되면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죽이고 싶어해. 놈이 어떤 남자를 마티에테(날이 긴 도끼)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말 그대로 산산조각을 내버린 모양이야. 미치광이지." "산산조각의 명수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내면 어떻게 안될까?" 빌리가 코방귀를 뀌었다. 벨슨은 무시해 버렸다. 우리는 켄모어로 가는 출구를 지났다. 내가 빌리에게 말했다. "내 집 알고 있나?" 그가 끄덕였다. 벨슨이 말했다. "권총 가지고 있나?" "뛸 때에는 권총을 두고 뛰지." "그렇다면 뛰지 말게. 내가 두어라면 우리가 자네를 태운 그 인도 옆에서 간단히 해치울 수도 있어." 나는 프로에 관해서 레스터에게 설교하던 생각이 났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알링턴에서 고속도로를 내려가 그대로 말바라를 달렸다. 빌리가 내 아파트 옆에 차를 세웠다. "일방통행로를 반대쪽으로 가고 있어." 내가 빌리에게 말했다. "아주 가까이에 교통순경이 없어야 할 텐데." 빌리가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고마워." 벨슨에게 말했다. 그도 따라 내렸다. "방에까지 함께 올라가겠어." "나하고? 프랭크, 꽤 자상한데." "무사히 아파트에 집어넣고 오라고 크와크가 시키더군. 그 다음은 자네 혼자야. 우리는 얘기 봐주는 서비스는 안해. 설령 자네를 위한 것이라도, 베이비." 내가 아파트의 문을 열쇠로 열 때 벨슨이 윗도리의 단추를 푸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들어갔다. 내가 안을 여기저기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벨슨이 윗도리의 단추를 채웠다. "조심해." 그가 돌아갔다. 내가 앞쪽 창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벨슨이 차에 올라타고 빌리가 U턴 해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 라는 생각이 차츰 굳어졌다. 옷장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어 총알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는 욕실에 들어가면서도 가지고 갔다. 샤워를 하고 있는 사이에는 변기 뚜껑 위에 놓아두고, 옷을 입는 동안에는 침대 위에 놓아 두었다. 옷을 다 입고는 홀스터를 뒷주머니에 넣고 벨트에 클립을 걸었다. 몸에 익은 면바지에 줄무늬가 들어 있는 흰색의 고무바닥 운동화, 왼쪽 가슴에 비버 무늬가 있는 검은 폴로 셔츠 차림이었다. 아직 악어표 셔츠를 입을 신분은 아니다. 시어서커(린네르 천)를 입고 가벼운 금속테 선글라스를 쓰고, 현관의 거울 앞에 서서 옷차림을 점검했다. 전투용 복장이다. 바깥 복도의 찬장 자물쇠를 열고 12구경의 아이버 존슨의 펌프식 산탄총과 더블루오 총알을 한 상자 꺼냈다. 아파트를 나섰다. 복도에서 산탄총을 아래에 내려놓고 문의 경첩 쪽과 문기둥 사이, 바닥에서 5cm 위에 조그만 이쑤시개를 끼우고는 문을 닫았다. 틈새의 끝만 보이도록 이쑤시개를 꺾었다. 누가 들어갔었는지 알게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산탄총을 집어들고 차 세워둔 곳으로 나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입주자 하나와 마주쳤다. "어느새 사냥인가?" 그가 말했다. "그래." 밖에 나와서 산탄총과 총알 상자를 차의 트렁크에 넣고 잠그고는, 차에 올라 뚜껑을 내리고 북해안으로 향했다.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이번에는 행동할 장소를 찾아내야만 된다. 93호선 도로로 보스턴을 나와 서머빌과 메드퍼드를 빠져나왔다. 웰링턴 서클의 맞은편 미스틱 강가에 아직도 갈대와 한 발이나 되는 벼과의 풀이 그대로 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네온과 지독한 배기 가스로 아주 불쾌했다. 메드퍼드 스퀘어를 지나 93호선 도로를 버리고 린 펠스 파크웨이를 동쪽을 향해 숲을 마주보고 달렸지만 찾고 있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메드퍼드를 나와 멜로즈로 들어갔다. 펠스웨이에서 나와 스포트 폰드 주변을 달려 스토넘 동물원을 지나서 다시 멜로즈로 돌아왔다. 마음에 드는 장소가 아직도 눈에 띄지 않는다. 멜로즈를 빠져나와 호수 옆의 붉은 점토가 깔려 있는 테니스 코트를 지나 하이 스쿨과 크리스천 사이언스 교회 옆을 지났다. 1호선 도로로 나오기 직전에 브레이크 하트 레터베이션으로 들어갔다. 스케이트 링을 지나면 도로가 좁아지고 일방통행로인 1차선이 된다. 한번 수잔 실버맨과 피크닉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도로가 계속 일방통행이며, 숲속을 빙빙 돌아서 다시 그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숲속에는 승마하는 길, 호수, 피크닉에 알맞은 자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보호구에서 30미터 들어간 곳에서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 좁은 임시 포장도로 옆으로 다가가서 덤불을 범퍼로 밀어붙이기도 하고 타이어로 깔아뭉개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차를 세우고 내렸다. 도로에서 조그만 언덕이 비탈져 있고 그 중간에 도려낸 듯이 움푹 들어간 곳이 있다. 농구 코트 정도의 넓이에 아무런 모양 없이 만들어진 풀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거의 중앙에 윗부분이 편편한 화강암이 있다. 한쪽이 만곡져 있고, 지면에 닿은 부분은 어찌 보면 상어의 지느러미와 비슷한데, 사람 키보다 높다. 움푹 들어간 곳의 주변은 노란색 점토이고, 흐르는 물에 침식되어서 생긴 고랑이 있고, 키가 큰 나무가 여기저기에 서 있다. 급한 비탈이 위로 올라가면서 차츰 완만해지고, 그 주변에는 소나무, 자작나무, 옻나무 등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다. 움푹 꺼진 곳 밑으로 내려가서 화강암 옆에 섰다. 높은 쪽은 내 키보다 30cm는 더 높다. 덥고 조용한 숲속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새소리도 들린다. 다람쥐가 한 마리 자작나무를 타고 내려와서 그대로 단풍나무로 올라갔다. 나는 코트를 벗어서 바위에 걸쳐놓았다. 고랑이 있는 비탈을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움푹 꺼진 둘레를 한 바퀴 돌며 나무들과 태양을 보고 밑을 보았다. 여기면 됐다. 시계를 보았다 -- 2시다. 내려가서 윗도리를 입고는 차를 몰고 환상도로(環狀道路)를 달려 보호구역에서 나왔다. 출구인 길가에 조그만 쇼핑 센터가 있고, 퓨리티 슈프림 슈퍼마켓 앞에 세워놓은 몇 대의 차들 사이에 주차했다. 슈퍼마켓에 공중전화가 있기에 거기서 프랭크 두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없었지만,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정중한 사나이가 받으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전해 주겠다고 했다. "좋아. 내 이름은 스펜서야. 영국 시인과 같은 이름이야. 내가 누군지 알겠지?" "아, 알고 있어." 정중한 말씨가 사라졌다. "프랭크에게 전해.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소가스의 브레이크 하트 레터베이션으로 오라고 해. 스케이트 링 옆의 입구로 들어와서 도로를 30미터쯤 더 들어가. 주차한 뒤에 거기 있는 움푹 꺼진 곳으로 내려와. 금방 알 수 있어. 내려오면 상어 지느러미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어. 알겠나?" "알았어. 그런데 왜 그가 너를 만나러 가야만 하지? 프랭크는 누구와 만나고 싶으면 사무실로 불러. 쓸데없이 숲속을 차를 타고 찾아다니는 짓은 안해." "이번에는 녀석이 숲속으로 달려오게 돼. 그렇잖으면 프랭크가 싫어하는 노래를 내가 경찰 귀에다 대고 부를 거야." "갈지 안 갈지는 모르지만, 가령 간다면 몇 시에 가면 되나?" "오늘 저녁 6시야." "말도 안돼, 그 시간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지? 바빠서 못 갈지도 모르고. 너는 대체 누구하고 전화하는 줄 알고 있는 거지?" "오늘 저녁 6시야. 오지 않으면 나는 버클리 가(街)에서 경찰 녀석들에게 노래를 들려줄 거야." 전화를 끊었다. 제 25 장 히불 내셔널 볼로냐를 1파운드, 검은빵 한 덩어리, 브라운 마스터드 한 병, 우유 반 갤런을 사서 차로 돌아왔다. 차의 트렁크를 열고 낡은 대형 마대 자루를 꺼냈다. 자루에 산탄총, 탄약, 식료품을 넣고는 트렁크를 잠그고 자루를 둘러메고서 브레이크 하트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움푹 꺼진 그곳까지 돌아오는 데 15분쯤 걸렸다. 그곳을 지나 비탈을 올라 중간쯤에 소나무들을 서양층층나무의 덤불이 가로막고 있으면서 아래쪽 꺼진 곳과 도로가 보이는 장소를 발견했다. 마대 자루에서 식료품, 산탄총과 탄약을 꺼내고 윗도리를 벗어서 자루에 넣었다. 자루를 땅에 펼쳐놓고 그 위에 앉아서 총에 탄약을 넣었다. 여섯 발 들어간다. 예비로 여섯 발을 뒷주머니에 넣고는 펌프를 한 번 왕복시켜 약실에 총알을 넣고서 나무에 기대세웠다. 다음에 식료품을 펼쳐놓고 점심을 만들었다. 주머니칼로 빵에 마스터드를 바르고 차곡차곡 접은 종이봉투를 접시 대신으로 썼다. 카톤에 직접 입을 대고 우유를 마셨다. 나쁘지 않다. 야외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즐겁다. 시계를 보았다 -- 2시 45분. 샌드위치를 하나 더 먹었다. 3시. 매미가 이쪽을 향해 시끄럽게 울어댄다. 머리 위의 소나무 가지에서 참새가 파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아래쪽 길에선 아이들과 어머니, 개, 바람을 넣어 물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실은 차가 4~5분마다 천천히 지나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차츰 그 수가 줄고 있다. 네 개째의 샌드위치로 우유를 마저 마시고 빵과 볼로냐를 종이봉투에 넣어서 마대 자루에 밀어넣었다. 4시 15분에 은회색의 링컨 컨티넨탈이 움푹 패인 곳 가까이에서 길가로 다가와 서서 오랫동안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는 문이 열리고 월리 호그가 내려섰다. 혼자였다. 그 자리에 서서 조심스럽게 패인 곳을 둘러보고는 덤불 그늘에 내가 앉아 있는 곳 부근도 아울러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도로의 전후방을 살피더니 차 안에 손을 넣어 소총을 꺼냈다. 눈에 띄지 않도록 다리 옆에 붙여서 들고는 차에서 떨어져 도로 가장자리의 나무숲으로 들어갔다. 링컨이 엔진이 걸리더니 사라져 버렸다. 나무 그늘로 들어서자 월리의 총을 든 모양이 아까처럼 신중하지 못해진 것을 나는 눈여겨 보고 있었다. M_16 소총. 미 보병의 표준병기이다. 구경 7.62mm. 총알은 20발. 옛날 브로닝 자동소총 같은 멋진 휴대용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오래 된 톰프슨 총처럼 방아쇠의 안전장치 뒷부분이 권총 손잡이처럼 되어 있다. M_16이라고? 놀라겠군. 나는 이제 겨우 M_1을 손에 익히기 시작했을 뿐인데. 월리가 M_16을 가지고 맞은편 비탈길을 올라갔다. 스타크 힐 구두를 신고 있다. 한번 급경사에서 발이 미끄러져 언덕 기슭 가까이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허허! 이 몸은 한 번만에 올라왔는데. 링컨이 왔을 때 나는 산탄총을 집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잡고 있는 손에 조금 땀이 배어 있다. 손가락의 관절을 보았다. 힘이 들어가서 하얗게 되어 있다. 월리는 내가 올라온 것만큼 오르지는 않았다. 너무 살이 쪘다. 매일 아침 조깅을 해서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하네, 월리. 그는 패인 곳 가장자리에서 2~3미터 위쪽에 빽빽하게 엉켜 있는 덤불을 발견하고 그 뒤에 가서 앉았다. 패인 곳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자리를 잡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두꺼비 같았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15분 전 5시. 포장도로 위에 말발굽소리를 울리면서 말을 탄 무리들이 지나갔다. 지금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소리지만, 그러나 우유배달, 그리고 쓰레기 청소부들이 말을 이용하던 어릴 때를 생각나게 했다. 거리의 말똥과 참새. 아래쪽 길 위에 있는 말은 세 마리 모두 털에 윤기가 있고, 밤색 털이 땀에 젖어 검은 빛이 난다. 타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승마용 장화를 신은 여자아이가 둘, 청바지를 입고 셔츠는 벗은 사내아이가 하나. 옛날 청소부들의 마차를 끌던 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발이 어울리지 않게 크고, 커다란 엉덩이가 장관이라고 할 만큼 크다. 근육이 발달한 목이 둔중한 느낌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이웃의 집짓는 곳에서 지하실을 파면서 말을 진흙 치우는 데 쓰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말을 탄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말발굽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월리 호그는 여전히 조용히 몸을 웅크린 자세로 앉아서 도로를 보고 있다. 성냥을 켜는 소리가 들리고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조심성이 없군, 월리. 만일 내가 방금 도착해서 담배 냄새를 맡았다면 어떻게 되겠나? 숲속에서는 냄새가 멀리까지 퍼지게 되는데. 그러니까 월리는 숲속에서의 행동에는 별로 익숙지 못한 모양이구먼. 월리가 드나드는 장소에서는 정원에 물 부리는 호스 정도로 긴 담배를 피워도 누구 하나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숲속이 건조해 있으므로 그가 담배꽁초를 신중하게 처리해 주기를 바랐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산불이 훼방을 놓으면 곤란하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 5시 15분. 횡격막(橫隔膜)이 녹슨 듯이 가슴이 답답하고, 배꼽 뒤 부근이 치통처럼 쑤신다. 목구멍에 무슨 덩어리가 막혀 있다. 머리 위의 하늘은 아직 초여름의 석양빛에 청색을 띠고 푸른 나뭇잎을 통해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5시 반.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래쪽 도로에는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들, 아이들, 강아지들은 저녁을 준비해서 아빠와 함께 먹으려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정원에서 저녁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밤은 집안에서 밥을 먹기에는 너무 덥다. 맥주를 한두 잔, 술잔에 박하 잎을 하나 넣은 진 앤드 토닉이라도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면 남자들은 윗도리를 벗고, 고무 호스로 조용히 긴 활 모양의 물을 잔디에 부릴지도 모른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거침없이 나는 소리다. 게리 쿠퍼의 배에서 한 번도 소리가 난 적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오, 사랑과 의무의 중간에 끼어 만일 내가 진다면......5시 40분. 손가락 끝이 얼얼하고 두 팔의 안쪽도 얼얼하다. 가슴 근육, 특히 가슴의 바깥쪽, 어깨 주변이 뻣뻣하기에 근육을 움직여 풀기로 했다. 셔츠의 호주머니에서 껌을 두 개 꺼내 종이를 벗기고, 껌을 착착 접어서 입안에 넣었다. 포장했던 종이를 돌돌 말아서 셔츠 주머니에 넣고는 껌을 십었다. 15분 전 6시. 한국동란 때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볼로냐와 빵 대신에 스테이크와 달걀을 먹여주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게 생각났다. 인천 상륙을 앞두고도 배에서 소리가 났다. 더구나 인천에서는 혼자도 아니었는데. 10분 전 6시. 월리 호그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같은 곳에 그대로 있다. 그는 목구멍이 답답하지도 않고, 심호흡을 해도 아직 산소가 부족할 상태는 아니다. 거기에 앉아 있다가 프랭크 두어가 신호를 하면 등뒤에서 나를 쏘아죽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어느 정도의 증거를 잡고 있으며, 경찰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것을 알아낸 직후에 프랭크 두어가 신호를 보내겠지. 아니면, 두어는 제 손으로 나를 죽일 생각이고, 월리는 단지 지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7분 전 6시. 놀라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신나게 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턱없이 빨리 지나가는군. 나는 일어섰다. 산탄총은 안전장치를 풀어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다. 오른손으로 다리 옆에 붙여서 월리 호그의 위치와 반대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00미터쯤 떨어져 있다. 조심해서 나아간다면 그에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중하게 움직였다. 비탈진 곳에서 도로까지 내려가는 데 10분 걸렸다. 패인 곳에서는 50미터 정도 전방 부근이 될 것이다. 아직 햇빛으로 밝지만, 도로 가장자리의 나무숲으로 들어가면 한낮보다는 조금 어둡다. 도로에서 숲으로 조금 들어가서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6시 5분이 지나자 차가 와서 서고 문이 열린 다음,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산탄총을 겨드랑이 밑으로 늘어뜨린 채 도로를 따라 패인 곳을 향해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차는 밤색 쿠페 드 빌, 길가에 세워져 있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차를 지나쳐서 패인 곳으로 돌아갔다. 햇빛이 뒤에서 비쳐 패인 곳이 밝고 더웠다. 두어는 상어 지느러미 모양을 한 바위 옆에 서 있었다. 밤색 바지, 흰 구두, 흰 벨트, 검은 셔츠, 흰 넥타이, 흰 사파리 재킷, 검은 테의 선글라스를 끼고 흰 골프 모자를 쓰고 있다. 아주 공을 들인 차림새다. 춤도 꽤 잘 추겠지. 그에게로 걸어갔다. 손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월리 쪽은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내 왼쪽 30미터 정도 위쪽이다. 패인 곳으로 들어갈 때 바위가 그와 나 사이에 있게 되도록 해가면서 나아갔다. 산탄총은 총구를 밑으로 향하고 있었다. 느긋한 자세로 들고 있었다. 마침 옆에 있기에 그냥 들고온 듯한 자세로 두어와의 거리는 3미터, 상어 지느러미 같은 바위가 아직 나를 가리지 않는 부근에서 멈춰섰다. 바위 뒤로 들어가니 월리가 이동한다. "그 숏 건은 무엇 때문인가, 스펜서?" 두어가 말했다. "호신용이야. 숲속이 어떤지는 알고 있겠지? 난폭한 다람쥐 같은 것들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거든." 왼쪽 위편 30미터의 거리에 있는 윌리 호그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는 듯한 기분이다. 그 느낌이 갈빗대 부근, 겨드랑이 밑, 무릎 뒤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움직이면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내지 않을 만큼 움직임이 경쾌하지 못하고,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있지도 않다. 벗어버리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뒷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발자국 소리를 안 낼 수는 없다. 신경을 한 곳으로 모아 들어보았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내 말을 함부로 하고 다니는 모양이더군, 프랭키." "무슨 뜻인가?" "나를 없애버리겠다고 했다는 뜻이야." 아직 월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나는 바위에서 약 1.5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누구에게서 들었나?" 월리가 신발을 벗을 경우까지 생각한 것을 후회했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야.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해, 프랭키." "잘 들어, 이 병신아. 나는 너 같은 바보의 미친 소리나 듣자고 이런 숲속에까지 온 게 아니야. 내게 할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너에게는 그럴 만한 배짱이 없어, 프랭키." 두어의 얼굴이 벌개졌다. "너를 없애는 데 배짱이 없다고? 너 같은 바보 잔챙이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문제없이 없애 주지." "너는 어제 네 사무실에서 그럴 기회가 있었어, 프랭키. 그런데 내가 권총을 빼앗아서 너를 울려 주었지." 두어의 목소리가 차츰 쉰 소리로 변해 갔다. 그리고는 낮아졌다. "내게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나 하자고 불러낸 건가, 아니면 할말이 있는 건가?" 나는 온 신경을 한데 모아 월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을 만큼 열심히 기울였다. "너를 이리로 불러낸 것은 네가 겁쟁이고, 침이나 흘리고 다니는 미친 놈이고,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건강한 캠프 파이어 걸 하나도 당해 내지 못하는 녀석이라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야." 두어의 목소리가 굉장히 굳어지고 쉬어져서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지도 않았다. "나에 대한 그런 언사는 용납 못해." 먼지가 지나가듯이, 기묘하게 구식 문자를 짜냈다. "또 울고 있나, 프랭키? 어째서 그러지? 오줌싸개라고 엄마에게 야단맞았나? 그래서 그런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나?" 두어의 얼굴이 시뻘개져서 목의 동맥이 부풀어올랐다. 입은 움직였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권총을 뽑았다. 나는 언젠가는 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탄총을 수평으로 들어올려 그를 쏘았다. 두어의 손에서 권총이 날아가서 바위에 부딪치고, 그는 하늘을 보고 나자빠졌다. 나는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까지 보지는 않았다 -- 바위 그늘로 뛰어든 순간 월리의 첫번째 연속사격 총알이 뒤쪽 땅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른쪽 어깨부터 땅바닥으로 쓰러지면서 한 바퀴 돌아서 일어섰다. 월리의 두 번째 연속사격 총알이 바위에 맞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로 튀었다. 나는 바위의 경사진 쪽 어깨 높이쯤에서 총을 내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펌프를 작동하여 월리 호그가 있는 곳으로 다섯 발을 쏘았다. 바위 그늘에 몸을 굽히고 예비 총알을 재고 있을 때 그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쪽을 살펴보니까 비탈진 덤불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와서는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멈췄다. 이미 몸 전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구르는 사이에 피에 젖은 부분에는 낙엽이며, 잔나뭇가지, 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두어를 보았다. 10피트의 거리에서 쏜 산탄으로 인해 배 부분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나는 얼굴을 돌렸다. 끈적끈적하고 시큼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솟아오르려는 것을 억눌렀다. 둘 다 이미 죽었다. 그것이 산탄총의 좋은 점이다. 근거리에서 쏘면 일일이 맥을 짚어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앉아서 바위에 기댔다. 그럴 예정도 아니었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누구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하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주저앉아 버렸다. 무릎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으나, 산소가 충분히 얻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추웠다. 떨렸다. 시큼한 액체가 다시 솟아올라왔는데,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두 무릎 사이에 목을 늘어뜨리고 토했지만, 죽은 두 사람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한심한 이야기다. 제 26 장 7시 15분이었다. 산탄총을 마대 자루에 도로 넣고 마대 자루를 차의 트렁크에 싣고서 차는 펠스웨이가 1호선과 교차하는 고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1호선을 북쪽으로, 스미스필드로 향했다. 도중에 술집에 들러서 와일드 터키 버본의 쿼터들이 한 병을 샀다. 1호선을 내려가서 스미스필드 센터로 향하는 도중에 병마개를 뽑아내고 버본을 한입 가득 넣어 입안을 헹구어 창밖으로 뱉어버리고는, 병째 입에 대고 4온스쯤 마셨다. 술이 내려간 순간 위가 갑자기 오그라드는 듯했으나 이윽고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나는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얀 교회와 집회소가 있는 오래 된 광장을 지나서 왼쪽으로 꺾어 메인 가로 들어갔다. 1년쯤 전에 어떤 사건으로 이 부근에 온 적이 있어서 그 뒤로는 이곳 지리를 꽤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수잔 실버맨의 집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광장에서 북쪽으로 100미터쯤의, 창가에는 파란 나무상자에 빨간 피튜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처마 판자가 비바람에 바랜 조그만 케이프 코드식의 고풍스러운 집에 살고 있다. 차도에 그녀의 차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집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벽돌을 깔아놓은 좁은 길을 현관까지 걸어갔다. 양쪽에는 딸기가 심어져 있다. 하얀 꽃, 녹색 열매에 섞여 어쩌다 빨갛게 익은 딸기가 간혹 보인다. 스프링클러의 물이 앞뒤로 천천히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스탄 켄턴과 아주 비슷한 음악이 들린다. '아티스트리 인 리듬.' 놀라겠군. 벨을 누르고는 와일드 터키의 병목을 잡은 손을 옆에 늘어뜨린 채 문기둥에 기대섰다. 굉장히 피곤했다. 수잔이 문까지 나왔다. 그녀를 볼 때마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명치끝 부근이 꽉 조여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색깔이 바랜 리바이스의 커트오프에 골을 넣어서 짠 짙은 남색 홀터 톱(어깨에 끈이 달리고, 어깨와 팔이 노출된 여자용 윗도리)을 입고 있다. 테가 팔각형인 안경을 쓰고 오른손에 책을 들고서 서표 대신에 손가락을 끼우고 있었다. "뭘 읽고 있었어?" 내가 말했다. "에릭슨의 간디전(傳)." "나는 그전부터 리프의 책을 좋아했는데." 그녀가 4온스 줄어 있는 버본 병을 보고서 문을 크게 열었다. 나는 들어갔다. "얼굴색이 나쁘군요." "당신들 가이던스 전문가는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키스해 주면 기분이 좋아질까요?" "그렇긴 하겠지만 아직 안돼. 나는 토했어. 샤워를 하고 싶어. 몸을 씻고 나서 둘이 앉아 이야기하고, 나는 와일드 터키를 마시면 어떨까?" "장소는 알고 있죠?" 나는 거실의 커피 테이블에 버본을 놓고서 좁은 복도를 지나 욕실로 갔다. 욕실 옆에 린네르 천 제품을 넣는 찬장에 내 면도도구, 칫솔, 그 밖의 것들이 들어 있다. 꺼내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브러시로 몸을 문지르고, 샤워를 하고, 샤워기 밑에서 입안을 헹구고, 비누칠을 해서 씻고, 샴푸로 머리를 감고, 비누거품을 내어 씻어 흘려보내면서 30분쯤 있었다. 사라져라. 더러움이여, 사라져라. 샤워를 끝내고 타월로 몸을 닦고는, 전에 놔두고 간 테니스 반바지를 입고서 수잔을 찾으러 갔다. 스테레오는 꺼버렸고, 그녀는 뒤꼍 포치에서 내 와일드 터키, 얼음 통, 술잔 하나, 얇게 썬 레몬과 비터스 술병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파란 버들가지로 짜서 만든 팔걸이의자에 앉아 병째 들고 꽤 많이 마셨다. "뱀에게 물렸나요?" 수잔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물을 말아올린 포치 저쪽은 층계 같은 모양인데, 밭이 조그만 시내(川)를 향해서 이어져 내려가 있다. 그 층계 같은 땅에는 음지에서 자라는 식물이 심어져 있다. 콜레우스(차조기과의 관엽식물), 여뀌, 양치, 거기에 월계수가 많이 있다. 조그만 시내 저쪽은 나무가 많이 자라 숲이 되어 있다. "뭘 먹고 싶어요?" 나는 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마워." "맥주 대신에 버본을 마시고, 스낵은 마다하시고. 꽤 심한 모양이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고 싶어. 그러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나도 몰라." 술잔에 얼음을 넣고 비터스를 첨가하고는 레몬을 짜넣은 다음 버본으로 잔을 가득 채웠다. "당신도 조금 마시는 것이 좋아. 당신도 조금 취해 있는 게 이야기하기가 쉬우니까." 수잔이 끄덕였다. "그래요. 그럴 생각이었어요. 잔을 가져올께요." 그녀가 잔을 가져오자 나는 술을 따라주었다. 집 앞쪽에서 아이들 몇이 길거리에서 하키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숲의 여기저기에서 아직 새가 지저귀고 있지만, 주위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으며 새 소리도 줄어들고 있었다. "이혼한 지 얼마나 되었지?" 내가 물었다. "5년." "괴로웠나?" "그래요." "지금도 괴로워?" "아니. 지금은 그 일은 거의 생각지 않아요. 이젠 내가 가엾다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게다가 이젠 그가 없어서 쓸쓸하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어요. 당신이 그 모든 것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미스터 편리(便利)로군." 잔이 비었기에 다시 따랐다. "당신은 그렇게 많이 마시고 먹고 하는데 어째서 배에 근육이 생기지요?" "하나님이 나를 선량하게 만들지 않은 대신에 아름답게 만들기로 한 거야." "1주일에 얼마나 싯업을 하나요?" "수천억 번이나." 다리를 앞으로 뻗어서 몸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밖은 어두워지고, 저녁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 몇 개 보인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들리는 것은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와 128호선을 지나가는 어렴풋한 차소리뿐이었다. "풀 속에 단검의 칼날이 숨어 있어." 내가 말했다. "그리고 불 바로 바깥쪽에 호랑이가 숨어 있고." "놀라겠군요, 스펜서. 그런 급락법적(急落法的) 문구. 고민에대해서 이야기해도 좋고, 안해도 좋아요. 하지만 거기 앉아서 서툰 시는 인용하지 말아요." "애석하군. 지금부터 '햄릿'으로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그런 짓 하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알았어, 당신 말이 옳아. 하지만 급락법적이라? 그건 너무 준엄한데, 수잔." 수잔이 자기 손으로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시고 있었다. 포치에 조명은 없고, 부엌에서 불빛이 새어나올 뿐이다. "오늘 저녁 좀 이른 시간에 남자 둘을 죽였어." "지금까지 그래 본 적이 있었나요?" "있어. 그러나 이번에는 계획적으로 그 둘을 죽여버린 거야." "모살(謀殺)했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니......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수잔은 가만히 있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하얀 얼굴이 희미하게 떠 있는 느낌이다. 그녀는 내 맞은편 긴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주먹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또 버본을 마셨다. "스펜서." 수잔이 말했다. "나와 당신이 사귄 지 아직 1년 정도밖에 안돼요. 하지만 나는 그 동안 아주 유심히 당신이라는 사람을 보아 왔어요. 당신은 훌륭한 남자예요. 어쩌면 여태까지 내가 보아 온 남자 중에서 가장 훌륭할지도 몰라요. 당신이 남자를 둘 죽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을 거예요.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나는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그녀 앞에 섰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듯이 잡고는 몸을 굽혀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무잡잡하고 지적인 힘이 넘치는 얼굴이며, 생기를 내뿜고 있는 느낌을 주고, 웃으면 양쪽 입가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아직도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검은 눈이 렌즈를 통해서 커다랗게 보인다. "늘 그렇지만, 놀랍군." 그녀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서 우리 둘은 그런 자세로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수잔이 말했다. "앉아요." 내가 앉으니까 그녀가 긴의자에 기대어 내 상체를 끌어내려서는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가져갔다. "침대로 옮길까요?" 나는 크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안돼.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고 싶어." 그녀는 오른팔로 내 몸을 안고, 왼손을 들어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제 27 장 수잔과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덥고 바람이 센 화요일에 차로 보스턴에 돌아왔다. 도중에 어느 상점에 들러 신문을 보았다. '헤럴드 아메리칸'에 나와 있었다. 일면 접힌 부분의 바로 밑에 -- '갱, 총에 맞다.' 한밤중이 지나 네킹을 하려고 거기에 들어갔던 젊은이 두 사람이 두어와 월리 호그를 발견했다. 주경찰이나 시경찰은 아직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고 있다. 하버 타워스 앞에 차를 세웠을 때 고속도로 아래는 통근 러시 뒤에 오는 정적 속에서 도로의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현관 문지기가 위층으로 연락하는, 언제나와 똑같은 절차를 밟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버키 메이너드가 문을 열어주어 안으로 들어갔다. 불룩한 배에 팽팽해진 보스턴 레드 삭스의 T셔츠를 입은 편한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오, 스펜서?" 편한 차림이란 반드시 친근감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레스터는 벌거벗은 가슴 위에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유리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짙은 남색의 수에트 바지에 짙은 남색 줄이 들어 있는 트럭 슈즈를 신고 있다. 핑크색의 굉장히 큰 풍선을 불면서, 그 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풍선을 불면서 힘깨나 쓰게 보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레스터." 내가 말했다. "고무로 된 젖꼭지는 생각해 본 적 없나?" "무슨 볼일이냐고 물었소, 스펜서." 메이너드는 아직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에게 신문을 건네주었다. "접힌 곳 바로 밑, 오른쪽이오." 메이너드가 큰 제목만 읽고는 레스터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의 트러블도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럴지도 모르지." 메이너드가 말했다. "마티 러브의 트러블도 끝났다는 이야기겠지?" "트러블?" "그래요. 프랭크 두어가 이제 당신을 못살게 굴지 못하게 된 이상, 당신도 마티 러브를 못살게 굴던 일을 그만둘지도 모르겠는데." "스펜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나는 마티 러브에게 아무 짓도 한 일이 없어.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당신은 자신의 손실을 되찾을 생각이군, 그렇지? 이 바보 같은 녀석." "당신이 거기에 서서 큰소리칠 이유가 없을 텐데, 스펜서! 화를 내야 하는 쪽은 나야." "두어는 네놈을 통해서 러브를 먹이로 삼아왔지만, 네놈에겐 한푼도 들어오지 않았어. 놈이 죽고 난 지금, 이제는 자신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로군." "즉시 돌아가 주시지, 스펜서. 당신은 점점 모욕적인 말투가 되어가고 있어." 레스터가 풍선을 터뜨리고 킬킬대며 웃었다. 커피 테이블 위에 '보스턴 글로브' 신문과 '헤럴드 아메리칸' 신문이 올려져 있었다. 그들은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며, 메이너드는 비로소 돈을 낳는 기계가 손에 들어왔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째서 네놈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지 않나?" "아니, 알고 싶지 않아." "네놈은 완전히 해방이 된 거야.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돌아가." 레스터가 말했다. "그리고 잘 기억해 둬, 스펜서. 가령 누군가가 러브를 협박하고 있다면, 녀석들은 매춘부와 결혼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기 게임을 한 것을 이유로 협박할 수가 있는 거야." "그만둬, 레스터." 메이너드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스펜서는 이젠 돌아가려는 참이야." "좀더 빨리 돌아가도록 해줄 수도 있어요, 버크." "그는 돌아가려는 거야, 레스터. 그렇지, 스펜서?" "그래, 돌아가야겠다. 그러나 영화에서 모두들 그러듯이, 버키, 다시 오겠어." "나 같으면 그런 짓은 안하겠어. 내가 이 이상 레스터를 말리는 것은 무리야." "하지만 되도록이면 말리는 게 좋아. 그를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메이너드가 문을 열었다. 그는 처음부터 계속 문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이봐, 스펜서." 레스터가 말했다. "네가 아직 못 본 것이 있어." 두 손을 뒤로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손에 니켈 도금한 자동권총을 쥐고 있었다. 베레타 제품 같았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미스터 프로?" 내가 말했다. "레스터, 다시 한 번 그 권총을 내게 겨누면, 그때는 빼앗아서 너를 쏘아버리겠다." 나는 거친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나는 거리에 나왔다. 밖은 바람이 전보다 뜨겁고 세게 불고 있었다. 나는 굉장히 어두운 기분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도중에서 아가씨들의 스커트를 흘끗거리는 짓조차 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바람이 없는 날에도 당연한 일처럼 그랬었는데. 아파트 앞 거리의 건너편에 시경의 차가 와 있었으며, 벨슨과 그 빌리라는 경관이 타고 있었다. 내가 걸어서 다가갔다. "자네들,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당직사관의 눈을 피해서 숨어 있는 거야?" "경위가 불러." 빌리가 말했다.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벨슨은 조수석에서 몸을 반이나 눕힌 자세를 하고 손으로 두 눈을 덮고 있었다. "대강해 둬, 스펜서. 타. 크와크가 만나자면 자네가 틀림없이 간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어." 물론 그의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누가 위를 보라면 아래를 볼 그런 기분이다. 뒷좌석에 올라탔다. 본서까지 2분 걸렸는데, 그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크와크의 사무실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지금은 3층의 앞쪽이며, 버클리 가(街) 쪽에 있었다. 점심 먹으러 나가는 여러 보험회사의 비서들 모습이 보인다. 그의 방 문에 '살인과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벨슨이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왔습니다, 마티." 크와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전화와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투명 플라스틱 입방체밖에 올려져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추호의 빈틈도 없는 차림새를 하고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그의 침실에 있는 슬리퍼도 반짝반짝 닦여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리퍼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잠을 자지도 않겠지. "고맙네, 프랭크. 둘이서 이야기하겠어." 크와크가 말했다. 벨슨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등뒤에 있는 문을 닫았다. 책상 앞에 등받이가 직각으로 세워진 의자가 있다. 나는 거기에 가 앉았다. 크와크는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마주보았다. 앞쪽 스튜어트 가의 교차로에 교통순경이 있었는데, 그가 차를 건설현장에서 우회시키고 있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크와크가 말했다. "소가스의 그 둘은 자네가 해치웠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말했다. "흐흠." "자네가 꾀어내어 해치웠다고 생각해." "흐흠." "오늘 아침 일찍 가서 보고 왔어. 시경찰의 어떤 남자에게서 부탁을 받았어. 비공식적으로. 두어는 총을 쏘지 않았더군. 월리 호그는 쏘았어. 탄창이 거의 비어 있었고, 시체 위 숲속에도 탄피가 많이 떨어져 있었고, 그 커다란 바위 한쪽에 총알 맞은 자국도 있었어. 그리고 그 바위의 반대쪽 땅바닥에는 12구경의 탄약통이 여섯 개 떨어져 있었어. M_16이 있던 부근의 덤불이 산산조각이 되었더군. 누군가가 그쪽에다 대고 산탄총으로 다섯 발 쏘아댄 것처럼." "흐흠." "자네는 두어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자네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려놓고는, 놈들이 등뒤에서 기습해 올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서 두 사람의 의표를 찌르기로 한 거야. 자네 예상이 적중했어." "멋지군, 크와크. 굉장한 상상력이야." "상상력만이 아니야, 스펜서. 자네는 찾아와서 내게 한잔 사면서 프랭크 두어에 대해서 물었어. 다음날 나는 두어가 자네를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정보를 얻었어. 그리고 오늘 아침 그 숲속에서 두어와 보디가드의 시체를 보게 되었어. 자네, 어제 오후에서 저녁때까지의 알리바이가 있나?" "필요한가?" 크와크가 투명 플라스틱의 입방체를 집어들고 가족사진을 보았다. 바깥 사무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타이프라이터가 자신없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크와크가 입방체를 책상 위 제자리에 도로 놓고는 나를 보았다. "없어. 필요없다고 생각해." "지금 그 이야기를 소가스 경찰에는 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내 관할이 아니야." "그렇다면 왜 내가 여기 앉아서 자네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야 하는 거지?" "여기는 내 관할이니까." 바깥 사무실에서는 망설이고 있는 듯한 타이피스트가 여전히 글자를 찾고 있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잘 들어, 스펜서. 나는 프랭크 두어와 놈의 개가 죽어서 비탄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런 일을 못하는 녀석들도 많고, 처음부터 할 생각조차 못하는 녀석들도 많아. 자네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몰라. 하지만 돈 때문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자네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조차 아니었을지도 몰라. 굳이 추측하자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궁지에서 구해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피해자라고 해도 좋겠지." "자네는 그렇게 말해도 좋아. 나는 말 안해." "그렇겠지. 여하튼 좋아. 내가 지금 자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자네는 놈들을 내 관할 내에서 해치우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게다가 나는 어떤 의미로는 놈들이 당한 것을 좋아하고 있어. 그러나......" 말을 하다 말고 그는 나를 보았다. 그의 주먹만큼이나 무겁고 굳은 시선이었다. "내 관할에서는 절대로 그러지 말게."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일종의 사적인 법의 집행자라는 생각은 그만둬. 가령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났을 경우, 또 그러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돼. 여기서건 어디서건. 내가 하는 말 알겠나?" "음, 알지." "우리는 꽤 오래 알고 지내는 사이야, 스펜서. 서로 어느 정도의 경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우리는 친구는 아니야. 게다가 나는 자네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니야. 나는 경찰관일 뿐이야." "그게 전부인가?" "아니, 그 밖에도 있어. 나는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경찰관이야. 그러나 자네와 관계가 있는 것은 마지막의 사실뿐이야." "아니, 그렇지 않지. 남편이고 아버지인 것도 관계가 있어. 어느 누구라도 단지 직업만 있어서는 안되거든." "나쁘지야 않지. 동의하겠네. 그러나 지금 하는 말은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런 일에 다시는 입을 다물지 않을 걸세." "알았어." "좋아." 나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가려다가 멈추고서 돌아섰다. "마티?" "뭔가?" "악수." 그가 책상 너머로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악수했다. 제 28 장 아무도 집에까지 차로 데려다 주지 않았다. 버클리 가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였고, 또한 나는 걸어서 돌아가는 것이 고마웠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고,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 모두가 내가 생각한 대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쉽게 생각대로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희망은 있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였다. 밀가루만으로 직접 만든 빵과 레터스와 토마토 샌드위치를 두 개 만들어 우유를 한 잔 컵에 따라 카운터에 앉아서 먹고, 우유를 마시며 나와 러브 부부와 버키 메이너드의 현재 처지가 각각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생각했다. 두어와 그의 건맨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디저트로는 대황(大黃) 잎의 파이를 먹었다. 접시를 세척기에 넣고 스폰지로 카운터를 닦고서 손과 얼굴을 씻고는 처치 파크로 갔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므로 걸어서 갔다. 아직도 바람은 세었고, 말바라 가는 모래먼지가 조금 일고 있었지만, 선글라스 덕분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린다 러브가 문을 열어주었다. "라디오에서 무슨 두어라는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살해당한 것을 들었어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그녀는 매트리스 커버 같은 검정과 흰색 줄무늬가 든 소매 없는 드레스를 입고, 하얀 샌들을 신고 있었다. 머리는 두 가닥으로 땋아내리고, 흰 리본을 달고 있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그래요, 나도 들었소. 남편은 있소?" "아뇨. 야구장에 갔어요." "아기는?" "보육원에." "이야기가 있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나 차는 어때요?" "그래요, 커피로 하겠소." "인스턴트라도 괜찮아요?" "좋소. 블랙으로." 그녀가 커피를 타고 있는 동안에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TV 낮방송의 히스테릭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찰칵 하고 TV를 끄는 소리가 들리고, 린다 러브가 커피가 들어 있는 컵 두 개를 검고 둥근 쟁반에 올려서 가지고 왔다. 내가 컵을 하나 들었다. "버키 메이너드와 이야기했소." 내가 말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손을 안 뗄 모양이오." "두어가 죽었는데도?" 린다 러브가 낮은 걸상에 앉아서 커피잔을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자기가 도박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린다 러브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쥐고서 피어오르는 김을 얼굴에 쏘이면서 조금씩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또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좀 뜨거웠지만, 그냥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지요, 그렇죠?" "그래요." "내가 과거를 발표해 버리면 메이너드에게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거 말이죠?" "그렇소. 그래도 그는 마티가 몇 번 정도 엉터리 게임을 했다고 주장할 수야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 자신도 관련된 것이 들통나서 당신네와 함께 세상에서 매장되고 말죠. 그는 입을 다물 것으로 생각해요. 아무 득이 없으니까. 돈도 안 생기고, 그의 직업적 인생이 마티처럼 파멸해 버리지요." 린다는 커피잔 위에 엎드린 자세였다.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소." 그녀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를 죽일 수 있어요?" "노."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뭐죠?" "내가 신문기자를 찾아보겠소. 당신은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좋지만, 협박당한 것만은 입 밖에 내지 말아요. 그렇게 되면 기자회견, 사진반, 어쩌고 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고 끝나지요. 기자가 기사를 쓴 뒤 모든 질문은 내게로 미루시고. 집에 돈 있소?" "물론." "좋소, 1달러 받고 싶소." 그녀가 부엌으로 가서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가지고 왔다. 나는 명함을 꺼내어 그 뒷면에 영수증을 써서 그녀에게 주었다. "이제 당신이 내게 의뢰한 거요. 내가 당신의 대리인이 되겠소." 그녀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는 어때요? 그의 허락을 얻거나 의논할 필요는?" "아뇨. 당신이 신문기자를 불러줘요. 내가 그 사람에게 이야기하겠어요. 그 뒤에 마티에게 말하겠어요. 게임 전에 걱정거리는 절대로 말하지 않아요. 우리들이 한 약속 중 하나예요." "알았소. 전화는 어디 있소?" 부엌에 있었다. 긴 코드가 달려 있는 벽걸이 전화다. '보스턴 글로브' 신문에 전화를 걸어서 내가 서포크 군 지방검사국에서 일하던 무렵에 알게 된 잭 워싱턴이라는 경찰서 출입기자와 이야기했다. "'여자의 눈'란을 담당하고 있는 부인을 알고 있나? 작년에 니만 장학금으로 하버드의 특별연구원이 된 아주머니인데." "알고 있네. 그 아주머니라면 아주 좋아할걸." "그렇게 부르지는 않겠네. 지금부터 일러주는 주소로 그녀에게 와주도록 말 좀 해주지 않겠나? 오면 커다란 특종을 얻게 될 거야. 그 점은 약속하는데, 지금은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물어보지." 워싱턴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멀리서 성별을 알 수 없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여자 목소리가 말했다. "핼로, 캐롤 커티스입니다." 나는 워싱턴에게 말한 것을 그대로 반복했다. "왜 하필 나를, 스펜서 씨?" "언제나 당신 칼럼을 읽고 있는데, 품위 있게 쓰시더군요. 이 이야기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와 같은 것보다는 훨씬 깊은 사정이 있소. 굉장히 괴로워하고, 또 더 괴로워할 가능성이 있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모자 밴드에 기자증을 꽂은 무자비한 녀석들에게 산산조각이 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가겠어요, 주소는?" 주소를 말하자 전화를 끊었다. 나도 수화기를 내렸다. 전화가 끝나자 린다 러브가 물었다. "커피, 좀더 어떻겠어요? 물이 끓고 있는데." "그럼, 마시지요." 나는 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한 스푼 넣고 더운 물을 붓고서 스푼으로 저었다. "케이크나 쿠키 같은 건 어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면 충분해요." 둘이서 거실로 돌아가서 전처럼 앉았다. 나는 긴의자에, 린다 러브는 낮은 의자에. 둘 다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조용했다. 할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2시 15분, 문에서 부저가 울렸다. 린다 러브가 일어나 나가서 문을 열었다. 입구에서 어떤 여자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캐롤 커티스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들어오세요. 린다 러브입니다. 커피를 드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마시겠어요." 캐롤 커티스는 갈색 머리를 짧게 깎은 자그마한 여자며, 생기가 넘치는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코와 광대뼈 주변에 주근깨가 조금 있었으며, 연푸른 눈에 깊고 짙은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붉은색 무늬가 들어 있는 핑크색 드레스가 고급스런 느낌을 주었다. 린다 러브가, "이쪽은 스펜서 씨." 하고 소개해 놓고는 부엌으로 갔다. 나는 캐롤 커티스와 악수했다. 왼쪽 손에 금으로 된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당신이 전화를 하셨군요?" "그렇소." "잭에게서 당신 이야기를 조금 들었어요.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녀는 나와 나란히 긴의자에 앉았다. "그는 이야기를 잘 꾸미지요." 린다 러브가 커피와 쿠키가 놓인 쟁반을 가지고 와서 긴의자 앞의 커피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아까 그 낮은 의자에 가서 앉아 캐롤 커티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남편은 마티 러브입니다. 레드 삭스의 투수. 그런데 내 본명은 린다가 아니고 도나예요, 도나 발링턴. 마티와 결혼하기 전에는 뉴욕에서 매춘부였었고, 그와 만났을 때에는 포르노 영화에 나갔었어요." 캐롤 커티스가, "잠깐 기다려요, 잠깐만." 하며 핸드백을 열고 연필과 수첩을 찾았다. 린다 러브가 이야기를 멈췄다. 캐롤 커티스가 수첩을 펼치더니 속기 같은 글씨로 재빨리 썼다. "남편과는 언제 만났나요, 러브 부인?" "뉴욕에서, 말하자면 내 직업을 통해서지요." 그 다음부터는 단숨에 이야기해 나갔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서 싫증난 이야기를 아이에게 읽어주듯이 조용하고 담담한 어조로 모든 걸 이야기했다. 캐롤 커티스는 프로다. 이야기가 시작된 뒤로는 짙은 속눈썹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아주 적었다.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서 린다 러브에게 이야기를 시켰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왜 내게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나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오랫동안 그것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젠 견딜 수가 없게 되었어요. 나중에 비밀이 탄로나서 괴로움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커진 다음이라든지, 혹은......" 그 다음은 허공에 떴다. 듣고 있던 나는 그녀가 진짜 이유를 말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일한 이유가 아니고 진정한 이유를. "아기 아빠는 알고 계시나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요." "지금 어디 계시죠?" "야구장에." "이......음......고백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린다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동의하셨나요?" "물론이에요." "러브 부인." 캐롤 커티스가 말했다. 린다 러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뿐입니다. 미안합니다. 스펜서 씨가 내 대리인이며, 이 일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분이 할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무릎 위에 두 손을 깍지끼고서 긴의자에 앉아 있는 나와 캐롤 커티스를 쳐다보았다. "노 코멘트." 내가 말하자 캐롤 커티스가 미소지었다.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할 때, 당신은 그 말을 자주 쓰게 될 것 같군요, 그렇죠?" "노 코멘트." "이 일에 대한 대리인이 어째서 사립탐정인가요? 변호사, 혹은 홍보담당, 혹은 남편이 아니고?" "노 코멘트." 캐롤 커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는 내지 않고 내 장단에 맞추어 함께 말했다. 그녀가 수첩을 덮고 일어났다. "불러줘서 고마워요, 스펜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했다. "그냥 앉아 계세요." 그녀가 이번에는 린다 러브 쪽을 보았다. "러브 부인." 손을 내밀었다. 린다 러브가 그 손을 잡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당신은 성녀(聖女)에요, 러브 부인. 죄인이 아니에요. 나는 이 기사를 그렇게 쓸 생각이에요." "고마워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 " 캐롤 커티스가 말했다. "아주 훌륭한 여성이에요." 제 29 장 캐롤 커티스가 나가자 내가 린다 러브에게 말했다. "잠시 함께 있을까요?" "될 수 있으면 혼자 있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해럴드 애스킨에게 전화걸어서 미리 알려놓고 싶군요. 그에게서 돈을 좀 받았으니까, 이 일에 대해 아무 말 않고 그냥 있을 수는 없어요. 그와 동시에 그에게 부탁받은 일에서 이젠 손을 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끄덕였다. "내 사무실에서 전화하겠소. 마티에게 이야기할 때에 내가 옆에 있는 편이 나을까요?" "아니, 고마웠어요." "이젠 잘될 거라고 생각해요, 린다. 메이너드가 무슨 시비를 걸어오면 곧 연락해 주세요, 알았지요?" "예, 물론." "캐롤 커티스가 당신에게 한 말 알겠죠?" 그녀는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말했다. "나도." 잠깐 웃는 듯했으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녀를 그대로 두고 나는 혼자서 아파트를 나왔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택시로 사무실에 가서 해럴드 애스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린다 러브가 기자에게 말한 것을 전하고, 내일 조간신문에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티 러브가 도박을 하거나, 엉터리 게임을 하거나, 마약을 쓰고 있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애스킨은 린다 러브에 대한 일로 불쾌감을 나타내고, 내가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모르는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했다. 아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스펜서? 당신은 전부 다 털어놓지 않고 있소. 당신의 말 이상으로 뭔가가 있어. 나는 사람을 고용하면 당연히 내게 협력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 왔소. 당신은 내게 숨기고 있는 게 있어." 나는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으며,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청구하는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 점도 생각해 보겠다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양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내 책상 위에 처리해야 할 청구서며 편지가 올려져 있었다. 책상 가운데 서랍에 넣고 닫아버렸다. 그건 나중에 처리한다. 거리를 내려가면 건설회사가 의과대학을 짓기 위해서 스튜어트 가의 남쪽 건물을 철거하고 있다. 그들은 초봄부터 내가 들어 있는 빌딩에도 손을 대고 있다. 철거에 쓰이는 커다란 쇳덩어리가 의류공장의 위층이며, 전에 있던 손금보는 가게의 낡은 벽돌에 쿵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달까지는 새 사무실을 구해야만 된다.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부동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즉시 옮겨갈 준비를 해야만 된다. 허겁지겁 옮겨가면 약점을 잡힌다. 지금 곧 착수해야 한다. 약게 굴어서 옮길 필요가 생기기 전에 옮기는 거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4시 45분. 일어나서는 사무실을 향해 집을 나섰다. 러브 부부의 사건이 정리되면 새 사무실을 찾아보자. 더 커먼을 걷고 있으려니 발목까지 오는 밝은 노란색 로브를 입은 인도의 크리슈나 교도가 찬송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로브 자락 밑으로 흰 수에트 양말을 신은 해시 파피와 고무바닥 운동화가 보인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기묘한 옷차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 그리스도가 오늘날 있었더라면 하나님은 브레이(굵은 줄무늬 천)로 짠 셔츠에 폭이 넓은 바지를 입었겠지. 그 밖에 물놀이터에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아이들, 줄에 끌려가는 개, 자유로운 몸의 다람쥐와 비둘기가 있었다. 퍼블릭 가든에서는 여전히 스완 보트가 조그만 다리 밑에 있는 오리 연못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맥주를 한 깡통 꺼내어 '보스턴 글로브' 신문의 조간을 읽고, 저녁에 먹다 남은 비프 스튜를 데워서 시리아 빵과 함께 먹으면서 TV 뉴스를 본 다음에 모리슨의 저서를 가지고 거실로 가서 앉았다. 소프트 커버의 세 권짜리를 사서 현재 제3권을 중간쯤 읽고 있다. 30분 정도 멍청하게 들여다보았으나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7시 20분. 잠자리에 들기는 너무 이르다. 브렌다 롤링? 싫어. 수잔 실버맨? 아니. 하버 헬스 클럽에 가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조금 하고 헨리 시모리와 이야기를 하면? 역시 싫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사실은 책도 읽고 싶지 않았다. 신문의 TV 프로를 보았다. 볼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목각을 파볼 마음도 안 생기고, 아파트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싫었다. 개가 있다면 산책을 데리고 나갈 수도 있을 텐데. 하긴 개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산책을 해도 되지. 나서서 알링턴을 어슬렁거리며 커먼웰스까지 걸어가서 커먼웰스 모텔을 켄모어 스퀘어 쪽으로 걸었다. 켄모어 스퀘어에 도착해서는 브루클린 가로 들어가서 커퍼필즈라는 술집에 들어가 문닫을 때까지 맥주를 마셨다. 다시 걸어서 돌아와서는 침대로 들어갔다. 별로 자지 못했다. 얼마 안되어 아침이 되고 '글로브' 신문이 배달되었다. 그 1면 왼쪽 밑에 캐롤 커티스의 서명이 들어간 기사가 실려 있었다. '삭스 선수의 아내, 숨겨진 과거를 밝히다.' 커피를 마시고 옥수수 빵에 딸기 잼을 발라서 먹으며 읽었는데, 예상했었던 내용이다. 동정적이며 지적인 글솜씨였다. 안쪽 스포츠난에는 마티의 사진과 린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괴로움이 없을 무렵에 스탠드에서 찍은 것인가 보다. 전화벨이 울렸다. 마티 러브였다. "스펜서, 도어맨이 메이너드와 또 한 사람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더군요. 린다가 당신에게 연락하라고 해서 말이죠." "그녀도 거기 있소?" "있어요." "곧바로 가겠소. 내가 갈 때까지 놈들을 방에 들여놓지 말아요." "하지만 나는 별로 겁나지 않아요......" "겁내야 해요. 레스터는 권총을 가지고 있소." 전화를 끊고는 차로 달려갔다. 10분이 채 못되어 처치 파크의 로비에 갔더니 버키와 레스터가 나를 노려보았다. 도어맨이 위층으로 연락하여 셋이서 같은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안은 칠흑 같은 밤처럼 끈적거리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마티 러브가 문을 열자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첫번째가 나, 레스터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린다 러브가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침실에서 나왔다. 러브가 거실 한가운데서 우리와 마주 섰다. 두 발을 약간 벌리고,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있었다. 수에트 셔츠를 입고서 공을 던지는 자세다. "좋아요." 러브가 말했다. "용건을 말하고 끝나는 대로 돌아가시오. 세 사람 모두." 버키 메이너드가 말했다. "신문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대체 무슨 득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으로 너와 나의 거래가 끝나기라도 한 줄 아나? 만일 그렇다면 좀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야." "나는 생각해야 할 일은 모두 생각했소, 메이너드." 러브가 말했다. "당신과 내가 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소." "내가 이제는 너를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 나는 네가 엉터리 게임을 한 시합을 모두 기록해 두었어. 일부러 점수를 내준 이닝도 모두 필름에 담아두었으며, 나 역시 너의 귀여운 마누라에게 지지 않을 만큼 멋지게 신문에다 떠들어댈 수 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레스터는 뼈가 없는 듯이 문 옆 벽에 기대서서 턱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체 게바라'식으로 빳빳하게 풀기가 있는 작업복 바지, 발목 위에까지 올라오는 구두, 소매를 잘라낸 작업복 셔츠에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셔츠를 바지 밖으로 내놓았다. 그 니켈 도금이 된 베레타 권총을 벨트에 차고 있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떠들 수야 있지." 내가 말했다. "그러나 떠들지야 않겠지." 린다가 아이와 마티의 옆에 서서, 왼손으로 마티의 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쥐고 있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고?" "그래. 신문에 떠들면 너 자신도 함께 끝나게 되기 때문이야. 네가 마티에 관해서 떠들어봐야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떠들면 자신이 한 짓도 털어놓게 되지. 분명히 마티는 리그에서 추방당하겠지. 하지만 너도 추방되는 거야, 이 뚱뚱보야." 메이너드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지. 누구에게든지 한마디라도 해보시지. 조지아 주의 외딴 시골에서 개조된 차의 가속 레이스에서 장내방송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겠지."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레스터가 껌을 딱딱 소리내어 십어댔다. 그러자 러브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 꼬리를 잡고, 당신은 내 꼬리를 잡고 있다는 이야기야. 동점이지, 이 뚱뚱보야. 그러니까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을 끝내는 거야. 그러나 한 번만 말해 두겠어. 나는 던지고, 당신은 방송하겠지만, 만일 나나 내 가족에게 가까이 오면 죽여버리겠어." "너 같은 것은 어린애도 못 죽여." 레스터가 말했다. 러브는 메이너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 기분나쁜 녀석도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 그렇잖으면 놈도 죽이겠어." 레스터가 벽에서 떨어졌다. 흐느적거리던 태도가 사라지고 없었다. 갑옷이라도 입은 듯이 몸을 흔들더니 태권도 자세로 들어갔다. 아이가, "엄마." 라고 말했다. 큰소리로 울지는 않았지만 울음섞인 소리였다. 마티가 말했다. "린다, 저쪽 방으로 데리고 나가." 모자(母子)가 침실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메이너드의 얼굴이 시뻘개져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봐, 꼬마야." 레스터가 말했다. "네 엄마는 창녀야." 러브가 왼손을 크게 휘두르며 때리는 것을 레스터가 팔로 걷어냈다. 왼쪽 발에 몸을 지탱하고서 반원을 그리듯이 오른쪽 발을 휘둘러 뒤꿈치로 러브의 오른쪽 신장 부분을 찼다. 그 발길질로 인해 레스터는 돌아선 자세가 되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자동장치라도 달린 듯이 금방 돌아서서 앞을 향했다. 솜씨가 제법이다. 그 발길질로 러브는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음번 발길질엔 쓰러지겠지. 만일 쓰러지지 않는다면 레스터는 마음먹고 한 번 더 찰 것이다. 어쩌면 이미 타격을 입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발길질로 신장이 파열되는 수도 있다. 린다 러브가, "스펜서." 하면서 두 팔로 감아 남편을 말렸다. "그만둬요, 마티. 그만둬요." 아이가 부모의 다리에 매달려 있다. 마티 러브가 아내와 아들에게 붙들린 채 레스터를 향해서 갔다. 레스터는 본래의 자세로 돌아와서 커다란 풍선을 불어서는 다시 십어서 터뜨리고 있었다. 내 옆에서 1미터쯤 왼쪽에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 나서면서 목의 귀 뒤에 불의의 일격을 먹였다. 한 주먹에 레스터가 무릎을 꺾고는 속죄의 기도를 올리는 자세가 되었다. "마티." 내가 말했다.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나가. 아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돼. 그 아이 좀 봐." 아이는 겁에 질려 엄마의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티가 엎드리더니 안아올리고, 다른 팔로 아내를 힘껏 안고는 서둘러 두 사람을 침실로 데리고 갔다. "러브가 한 말을 내가 한 번 더 해주지, 이 뚱보 녀석야." 내가 말했다. "너와 그 마네킹 같은 녀석은 죽을 때까지 러브 근처에는 얼씬도 마. 그렇잖으면 둘 다 입원하게 될 거야." 레스터가 일어나서 덤벼들었으나 휘청거리고 있었다. 다시 돌려차기를 시도했으나 움직임이 아주 둔했다. 나는 몸을 젖혀 피했다. 내가 그의 돌려차기 뒤에 따라 들어가서 배를 노렸다. 레스터가 그것을 막고 내 명치를 때렸다. 나는 근육에 힘을 주어 받았지만 그래도 제법 충격이 있었다. 주먹을 비트는 좋은 펀치였지만 이미 힘이 없고, 지금의 나는 인사이드로 들어가서 바짝 붙어 있었다. 이쪽의 체중이 7킬로쯤 더 나가니까 힘이 세다. 레스터에게 바싹 붙어 있는 한 상대의 재빠른 동작을 막고 힘으로 압도할 수가 있다. 벽에다 힘껏 밀어붙였다. 턱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두 손으로 그의 배를 때렸다. 세게 때렸다. 그가 신음소리를 냈다. 두 주먹으로 내 등을 때렸지만, 거기는 두꺼운 근육이라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20년 동안 하이프리와 다른 기구들로 단련해 온 근육이다. 두 손으로 셔츠의 멱살을 잡고 벽에서 끌어내어 한 번 더 벽에다 박았다. 레스터의 손이 툭하고 벽에 부딪쳤다. 석고판이 떨어져 깨어졌다. 한 번 더 박으니까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두 팔 위에서 왼쪽 주먹을 옆으로 해서 얼굴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손가락을 다치면 안된다. 일종의 압력이 점점 몸속에서 솟아올라 아무것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없어졌다. 레스터를 벽에 박은 다음 한 발 물러나서 왼쪽, 왼쪽, 오른쪽, 얼굴을 때렸다. 지금은 그의 얼굴이 희미해져서 희게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얼굴을 또 때렸다. 쓰러지려고 하기에 왼손으로 셔츠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워두고 오른손으로 때렸다. 아까보다 더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으려고 하기에 왼손으로 벽에 밀어붙이고 오른손으로 연타를 퍼부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희지는 않았다. 피투성이며, 때릴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밀어붙이고 때리고 하는 사이에 온몸의 힘이 주먹으로만 집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펀치의 리듬이 내 머릿속으로 메아리쳐서 다른 소리는 일체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털어버렸다. 그때 사람소리가 귀에 들렸다. 계속 때렸다. 그때 린다 러브의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던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만해요, 스펜서, 그만해요, 스펜서. 죽이고 말겠어요. 그만해요."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마티 러브였다. 레스터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메이너드는 입을 벌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말리는 것을 털어버릴 때 그가 다친 모양이다. "그만해요, 그만해요, 그만해요." 린다 러브가 내 왼팔을 누르고 레스터의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내가 손을 놓고 물러서니 레스터가 벽에 기댄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메이너드가 엉금엉금 기어가서 손수건으로 레스터의 얼굴에 온통 범벅이 되어 있는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레스터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 자신도 숨이 거칠어진 것을 느꼈다. 마티와 린다 러브가 내 앞에 서 있고, 아이가 어머니의 손에 잡혀 있었다.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겁에 질린 눈이 동그래져 있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놀라겠소, 스펜서." 러브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요? 마치 미친 사람 같았어요." 나는 마치 열이라도 오른 듯이 온몸에서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고개를 저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소. 우리 모두가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었지. 이런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서 미안하오." 메이너드가 욕실로 들어가 젖은 타월을 가지고 돌아와서 레스터의 피를 닦아주기도 하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대어주기도 했다. "지금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해 둬, 버키 아가야." 내가 말했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마." 레스터가 조금 꿈틀거렸다. 입술이 터져 있고, 한쪽 눈이 부어올라 애꾸가 되어 있다. 메이너드가 젖은 타월로 얼굴을 계속 닦아주고 있었다. "정신차려, 레스터." 메이너드가 말했다. "정신차려." 레스터가 윗몸을 일으켜 타월을 대고 있는 손을 부리쳤다. "일으켜 줘." 그가 겨우 한 말이다. "여기서 나가." 레스터가 두 번째 한 말이다." 메이너드가 레스터의 등으로 팔을 돌려 부축하고 문 쪽으로 데리고 가려 했다. "버키." 내가 말했다. "러브와 동점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나? 앞으로는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도?" 메이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반쯤 말라버린 갈색 피가 조금 입술에 묻어 있다. "집으로 가고 싶어, 버키." 레스터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메이너드가 말했다. "그래, 그래, 레스터, 집으로 가자." 두 사람이 나갔다. 린다 러브가 바닥에 앉아서 아이를 끌어안고 아들의 머리에 얼굴을 비벼댔다. 바닥에서는 둘이 천천히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고, 마티 러브와 나는 말없이 그들 옆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됐소, 마티. 이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낸 것 같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당신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스펜서. 우리 부부는 꼼짝 못할 상태에 있었고, 당신이 없었더라면 빠져나올 수 없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우리를 위해 애써준 일을 고맙게 생각해요. 레스터의 일도 포함해서. 놈은 태권도 솜씨가 뛰어나서 아마 나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내가 먼저 기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게도 힘겨웠을지 모르지." 나는 악수했다. 린다 러브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나는 아파트를 나섰다. 그녀에게 잘 있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두 번 다시 그녀와 만나지 않았다. 제 30 장 "그럼, 그 남자를 계속 때렸군요." 수잔 실버맨이 말했다. 우리는 더 래스트 플레이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메뉴를 보며 오늘 저녁 처음으로 한 잔 마시고 있었다. 나는 도기(陶器)제의 조끼에 들어 있는 하프, 그녀는 워커 기믈렛. "몸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한 느낌이었어. 레스터가 원인은 아니야. 두어와 월리 호그와 나와, 사건의 내용과, 관계자 모두가 어느 정도 상처를 입고서 결말이 나게 되었기 때문이야. 그런 모든 것이 폭발해서 몸 밖으로 터져나와 나는 그 불쌍한 구더기 같은 녀석을 하마터면 죽여버릴 뻔했어." "당신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 당연한 인과응보지. 그 일은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 내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자신에 관한 거야. 나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단 말이야." "알고 있어요, 당신 가슴에 슈퍼맨처럼 붉고 큰 S자가 붙어 있는 것을 봤어요." "당신이 본 것은 그것만이 아니야, 이 귀염둥이야." "알고 있어요. 하지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그래? 그랬군."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온몸에 생기가 넘치는 듯한, 바로 해돋이와 같은 미소였다. "글쎄요, 좀더 생각해 보면 그 밖에도 더 생각날지도 모르지요." "뭣하면 나중에 보충수업 코스를 해보기로 하지." "때에 따라서는요."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아가더니 내게는 새 맥주 조키를 가져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린다 러브가 스포츠계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선수와 결혼해서, 가슴에 붉은 S자를 달고 호주머니에 권총을 넣고 있는 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가정을 구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는 점이야. 우리들 얼간이 같은 두 남자가 버티고 서서 자신들의 솜씨나 자랑하고 있는 사이에 해야 할 일을 한 것은 그녀였던 거지. 틀림없이 괴로웠을 거고, 나는 그들을 구할 수가 없었고, 남편도 자신들을 구할 수 없었어. 그녀가 자기 자신과 남편을 구한 거야." "메이너드는 협박을 그만두었나요?" "물론이지.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지. 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되니까." 나는 맥주를 마셨다. 웨이터가 굴 한 접시씩과 샤블리(프랑스산 백포도주)를 한 병 가져왔다. "신문은 러브 부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썼더군요." "그래, 상당히 호의적이야. 편지가 꽤 많이 왔는데, 개중에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한 것도 몇 통 있기는 했지만, 팀의 홍보담당이 취급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꼭 전할 필요는 없었어." "마티는 어때요?" "미네소타에서 놀려대는 녀석을 쫓아 스탠드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3일간의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어. 그 뒤로는 대꾸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지만, 마음이 아픈 건 분명하겠지." "그럼, 당신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웨이터가 빈 굴 접시를 내가고 조그만 접시에 담은 게와 바닷가재 스튜를 두고 갔다. "당신은요?" 수잔이 또 물었다. "남자를 둘 죽이고, 또 하나는 죽일 뻔했지." "그 둘을 죽였기 때문에 린다 러브는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알고 있어." "사람을 죽인 것이 처음이 아니죠?" "그래." "그들도 틀림없이 당신을 죽였을 거예요." "그건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니겠어요?" "나는 함정을 판 거야. 죽이기 위해서 놈들을 그리로 유인한 거지." "그래요. 그리고 존 웨인의 영화처럼 상대방은 둘이고 이쪽은 혼자인데, 당신은 두 사람 앞에 나선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당신을 기다렸던 거예요. 가령 그들이 성공했더라면, 그 일로 지금쯤 괴로워하고 있을까요?"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그들을 죽여야만 했어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방법 같은 것은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어요?" "그 점이 문제야. 방법. 문제는 바로 그 점이야." "자존심?" "그래." 웨이터가 와서 접시를 내가고 수잔에게는 대구 요리, 내게는 스테이크를 가져왔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먹기만 했다. "나는 농담이나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좀더 어른답고 똑똑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러브도 그렇지 않아.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어. 똑같은 이유로 나도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던 거야." "규칙?" "그래, 스포츠맨의 윤리, 명예, 규칙, 뭐라고 말해도 좋아. 그것이 이번 사건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던 거야." "수정할 수는 없나요?" "그렇게 하면 이미 규칙일 수는 없게 되지. 들어봐. 개인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지. 그 점은 당신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 정도가 지나쳐서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람은 무엇인가를 믿을 필요가 있어. 사람에 따라서는 종교, 출세, 애국심, 가정 등을 신념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많아.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야. 나는 종교나 가정 같은 것은 없어. 그러니까 사람은 뭔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어디까지나 그것을 지키지. 러브의 경우는 야구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괴로워도 하면서, 군소리를 안해. 그리고 실력이 있으면 이기고, 힘이 있을수록 이기고, 이길수록 힘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그런데 러브의 경우에는 가족을 지키는 일도 신념이 되어 있었으며, 그 두 시스템이 모순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어. 그는 양쪽의 신념을 다 지켜나갈 수가 없었어. 그런데 마침내 그 신념이 흔들려서 이미 지금까지와 같은 존재의식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지." "그럼, 당신은, 스펜서?"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내가 선택한 시스템에 이름이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이건 자존심에 관계되는 일이야. 자존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이유가 되는 행위인 거야. 알겠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요일에 죽은 그 남자인가요?" "그래, 폴스타프의 그 말을 알고 있어. 그러나 내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밖에 없어. 내게 들어맞는 시스템은 그것밖에 없는 거야. 내가 어떤 인간이든, 부분적으로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한다는 것이 기반이 되어있어. 또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하지. 내 경찰관 생활이 오래 계속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거야. 그것이 나와 마틴 크와크의 다른 점이야." "어쩌면 크와크는 단지 다른 시스템을 선택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않겠어요?" "그렇지. 그렇다고 생각해. 꽤 이해가 되는 것 같군." "그리고 당신 시스템의 두 개의 도의적 규범은 죄없는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둬서는 안된다는 것과,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절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 적절한 표현은 아닐지 몰라도 대강 그런 것이지요?" 나는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두 가지 규범 모두를 지킬 수가 없었군요. 한쪽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또 끄덕였다. "알겠어요." 둘 다 한동안 말없이 먹었다. "난 그 괴로움을 달래줄 수가 없겠군요." "그래, 할 수 없어." 둘 다 말없이 앙트레를 마저 먹었다. 웨이터가 커피를 가져왔다. "지금부터는 조금 자신감을 잃은 채 살아가게 되겠군요?" "어쨌든 나는 나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맛보았어. 누구나 때로는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것이 자신감 상실이 되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사람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몰라." 수잔이 커피잔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아까보다는 다소 나아져 있었다.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왔다. 바깥 트레먼트 가에 나서자 수잔이 내게 팔짱을 끼었다. 따뜻한 밤이며, 별이 보였다. 둘이서 더 커먼 쪽으로 걸어갔다. "스펜서." 수잔이 말했다. "당신은 여성해방운동의 전형적인 표적이 되겠어요. 남성의 신비성에 대한 신봉자라는 이유로. 그리고 나는, '이 어리석은 이여, 그쯤에서 헤밍웨이적인 바보 같은 사고방식에서 졸업하고 어른이 되시오.' 라고 말해 주고 싶군요. 그런데도......" 이야기하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그런데도 당신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은 없어요. 지금의 당신은, 당신은 이래야만 한다는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지도 몰라요.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을 죽인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당신을 지금처럼 소중하게 생각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에요." 파크 가(街)에서 더 커먼으로 건너가서 퍼블릭 가든까지의 긴 길을 내려갔다. 밤이라서 스완 보트는 강가에 매어져 있었다. 알링턴에서 말바라 가로 건너 내 아파트로 들어갔다. 말없이 올라갔다. 아직도 두 사람은 팔을 끼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수잔이 먼저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불은 켜지 않고 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수즈, 당신을 내 시스템 속으로 맞아들일 수가 있을 것 같군." "사랑의 말은 이제 그만." 그녀가 말했다. "자, 동시에 벗는 거예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