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죽음의 문서 (하) 지은이: 로버트 B 파커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제 21 장 제 22 장 제 23 장 제 24 장 제 25 장 제 26 장 제 27 장 제 28 장 제 29 장 제 30 장 ⊙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로버트 B 파커(Robert B Paker, 1932。 는 1971년 보스턴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 박사 논문은 하드 보일드(非情派)의 3대 작가인 더쉴 해미트(Dashiel Hammett, 미국, 1894。1961), 레이몬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미국, 1888。1959), 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 미국, 1915。1983)의 연구였다. 그는 현재 작품활동을 하는 한편,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가 그린 스펜서만큼 세상의 칭찬과 비난을 한몸에 받는 사립탐정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스펜서가 과거 사립탐정의 틀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우선, 스펜서는 말이 많고 토론을 좋아한다. 때로는 줄거리의 전개가 무시될 정도이다. 또한, 그는 세상을 등진 관찰자가 아니라 운동을 좋아하고 스스로 요리도 하며 살아가는 건강한 생활인이다. 애인의 얼굴이 새겨진 T셔츠를 입고 조깅을 할 만큼 애인에 대한 집착도 지나치다. 그리고 스펜서 시리즈에서는 남성우월주의가 강조되어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폭력도 주저치 않는, 현대의 기사도 정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스펜서는 아주 특이한 인물이다. 로버트 B 파커는 어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영웅소설이라 불러주기 바랍니다. 스펜서는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셜록 홈즈나 엘러리 퀸 같은 탐정은 아니지요. ‘숨겨진 사실을 파헤치는 사나이의 이야기’, 즉 서부소설의 전통을 잇는 사나이와 명예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 1970년대 영웅소설의 지나친 비현실성을 극복한 사람이 바로 로버트 B 파커이다. 그는 전통적인 사립탐정소설인 첫번째 작품 。갓울프의 원고。(The Godwulf Manuscript, 1973)에 이어, 1974년 폭력적인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신이 구한 아이。(God Save the Child)를 발표한다. 이어 。최후의 도박。(Mortal stakes, 1975), 。약속의 땅。(Promised Land, 1976), 。유다의 산양。(The Judas Goat, 1978)에서 육체의 강인성만으로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파커의 시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약속의 땅。은 스펜서가 새 사무실로 이전한 뒤 처음으로 맡은 사건을 다룬 것으로, 1976년 미국추리작가협회상(에드거 앨런 포상, MWA賞)을 받은 우수한 작품이다. 그러나 1980년 발표된 。레이첼 월리스를 찾아라。(Looking for Rachel Wallace) 이후에는 그러한 영웅의 자기반성과 고독을 그리고 있으며, 1984년 。고별。(Valediction)에서 또다시 새로운 전개를 예감케 하고 있다. 결국 파커는 스펜서 시리즈를 80년대의 전형적인 영웅소설로서, 실험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최후의 도박。은 스펜서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며, 전통적 사립탐정소설에서 영웅소설로 옮겨가는 전환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때때로 폭력과 지나친 난폭성, 필연성 없는 살인이 눈에 뛰긴 하지만, 이런 것보다는 위기에 대처하는 현실적 해결 방법에 대한 수잔과의 토론에 나타나는 주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스토리보다는 주제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결국, 영웅소설로서의 스펜서 시리즈는 이 ‘최후의 도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1990년 3월 옮긴이 씀 제 17 장 브렌다 롤링을 찰스 리버 파크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을 때는 정말로 여름다운 아침이었다. 강은 힘센, 마치 들떠 있는 듯한 푸른색이며, 레버릿 서클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경관이 ‘버튼과 리본’을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강 건너의 케임브리지가 밝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나는 레버릿 서클을 돌아서 스트로 드라이브를 서쪽으로 되돌아왔다. 러시아워가 끝나가는 소음이 아직도 들리는 상태이며, 처치 파크까지 가는 데 20분이 걸렸다. 소화전 옆에 주차해 두고 엘리베이터로 6층에 올라갔다. 집을 나서기 전에 전화를 해두었으므로 린다 러브는 내가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티는 집에 없었다. 팀과 함께 오클랜드에 가 있었다. " 커피 어떠세요, 스펜서 씨 ? " 들어가자 그녀가 말했다. " 그래요. 마시고 싶습니다." 커피는 이미 끓여져 있었고, 여러 가지 머핀 빵을 담은 접시와 함께 커피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머핀 빵은 옥수수, 크랜베리, 블루베리 등 모두 내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어져 있다. 린다는 엷은 남색 청바지, 파란색과 핑크색의 얼룩 무늬가 들어 있으며 마치 남자용 같은 셔츠의 깃을 열어놓고 핑크색 스커프를 목 언저리에 매고 있었다. 그리고 코르크 바닥으로 된 남색 수에드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다. 오른손의 약혼반지에는 팔이 아플 정도로 커다란 하트형 다이아몬드가 끼워져 있다. 왼손의 결혼반지는 폭이 넓고 장식이 없는 순금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어린 아들이 커피 테이블 옆에서 머핀 빵을 보고 있었는데, 접시가 내 악에 있어서 집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접시를 들어서 밀어주자 부리나케 어머니의 다리 뒤로 숨었다. " 마티는 낯을 가린답니다, 스펜서 씨." 린다가 내게 말하고는 아이에게 물었다. " 크랜베리가 갖고 싶어, 아니면 블루베리, 마티 ? " 아이가 어머니의 다리에 얼굴을 묻고는 뭐라고 말했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 살쯤 되었다. 린다 러브가 블루베리 머핀을 집어주었다. " 크레용을 가지고 올래 ? " 린다가 말했다. " 이리로 와서 내가 스펜서 씨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바닥에서 그림을 그리면 어때 ? " 아이가 또 내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했다. 린다 러브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 알았어요, 마티. 자, 함께 가지러 갈까 ? " 그리고는 내게 향했다. " 잠깐 실례합니다, 스펜서 씨." 아이가 린다 러브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 두 사람은 방에서 나갔다. 그토록 많은 주부가 아침부터 버본 위스키를 마시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2분쯤 지나자 두 모자(母子)가 커다란 노란색 도화지와 크레용 갑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앉아 있는 의자 옆 바닥에 아이가 앉아서 갖가지 색깔의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렌지 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스펜서 씨 ? " 린다가 물었다. 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왔다. " 꽤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러브 부인, 이 아이가 없을 때에 오는 것이 좋았을......" 말을 도중에서 중단했다. 아이가 얼마나 이해할는지도 몰랐고, 또 아이에게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그 점은 걱정하실 것 없어요, 스펜서 씨. 마티는 염려할 것 없어요. 우리들 이야기 같은 것엔 관심도 안 가질 거예요." " 글쎄, 어떨까요, 좀 미묘한 이야기라서." " 괜찮아요, 스펜서 씨, 걱정말고 이야기하세요. 정말로 걱정하실 것 없다니까요." 나는 커피를 마셨다. " 좋습니다. 두 가지를 말할 테니까 이야기를 계속해도 좋은지 부인이 판단해 주십시오. 먼저, 나는 작가가 아니고 사립탐정입니다. 둘째 ‘교외의 환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린다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 누가 고용했나요 ? " " 애스킨,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 짓은 안합니다." " 왜 ? " " 왜 애스킨이 나를 고용했느냐 하는 뜻입니까 ? 그는 남편께서 짜고 하는 시합에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던 겁니다." " 어머, 그 무슨 말씀을." 린다가 말하자 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린다가 빙긋 웃었다. " 어머, 예쁜 가족을 그리고 있구나. 엄마와 아빠와 아기가 있네." " 다시 오는 것이 좋겠습니까 ? " " 다시 오실 것 없어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할말도 없어요." "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지요. 지금 당신에게는 공황이 닥쳐와서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노’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그것이 정말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 노." " 아니오, 있소.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나는 당신들의 힘이 되어줄 수가 없소." " 애스킨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당신을 고용한 것이 아니에요." " 그건 나도 모르겠소. 나는 언제라도 그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으니까." " 도움을 받을 일은 없어요. 우리는 남에게서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어요." " 아니, 있소." 아이가 다시 어머니의 바짓가랑이를 끌어당기며 그림을 들어올렸다. " 아주 좋은 그림이구나. 그 그림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니 ? " 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 싫은가 ? 당연하지. 나 역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 마티." 린다 러브가 말했다. " 멍멍이 집을 그려 봐." 아이가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혀를 내밀고서 그리고 있었다. " 가령 우리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나요 ? " "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전문분야의 일이지요. 이런 일에 관해서는 당신들보다 솝씨가 좋다는 것만은 우선 틀림없습니다." 내 커피 잔이 비자 린다 러브가 서서 따라주었다. 나는 옥수수 머핀 빵을 하나 집었다. 세 개째다.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 마티와 의논할 필요가 있어요." 린다가 말했다. 나는 옥수수 머핀 빵의 한쪽을 물어뜯었다. 처음에 손으로 쪼갰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수잔 실버맨이 언제나 조금씩 먹는거라는 말을 내게 했었다. 린다 러브는 보고 있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 이 아이는 오후에 두 시간쯤 보육원에 가야 돼요." 전화를 보았다가 아이를 보더니 또 손목시계를 본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오시지 않겠어요 ? " " 좋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갔다. 린다 러브가 배웅하러 나왔다. 아이가 어머니의 바로 뒤에서 따라왔다. 다리 옆에 있지만, 지금은 바지를 잡고 있지는 않았다. 나가면서 나는 허리에서 손가락을 내밀고 권총 쏘는 흉내를 냈다. 아이는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쳐서 숨지도 않았다. 나는 본래 어린아이들을 다루는 솝씨가 좋다. 사립탐정계의 스포크 박사다. 매사추세츠 가에 나와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 10· 11시 35분. 한 시간 반 여유가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 회원으로 되어 있는 헌팅턴 가의 YMCA에 가서 유니버셜로 전부를 해치우고도 벤치 프레스를 한 세트, 리스트 롤을 두 세트 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을 무렵에는 맥박이 100 이하가 되고, 호흡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1시 15분에 린다 러브의 아파트 문 악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벨소리에 그녀가 문을 열었다. " 마티는 보육원에 갔어요, 스펜서 씨.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제 18 장 커피와 머핀은 치워져 있었다. 린다 러브가 말했다. " 어디서 비를 맞았나요 ? 머리칼이 젖었군요." " 샤워. YMCA에 가서 트레이닝을 하고 왔습니다." " 어머, 잘하셨네요." "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거지요." " 뭐 신분증명이 될 만한 것을 보여줄 수 없나요, 스펜서 씨 ? " 조그만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사립탐정 면허증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운전면허증도 보여 주었다. 린다가 둘 다 보고 돌려 주었다. " 정말 탐정 같군요." " 고맙소, 가끔 사람들이 확인해 주면 안심이 됩니다." " 대체 어느 정도 알고 있나요, 스펜서 씨 ? " " 일리노이 주 레드퍼드에 가서 도널드슨 보안관, 그리고 당신의 부모와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1966년에 마리화나 불법소지로 체포된 것을 알고 있소. 당신이 토니 리스라는 사람과 가출하여 그 뒤로는 돌아간 적이 없다는 사실. 당신이 뉴욕에 가서 이스트 빌리지의 셋방에서 살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처음에는 토니, 그 뒤에는 바이올렛이라는 뚜쟁이 밑에서 손님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소. 당신이 업타운으로 옮겨가서 패트리셔 애틀리 밑에서 일하고 포르노 영화 한 편에 출연한 일, 손님 중 한 사람과 사랑을 하여 1970년 겨울에 결혼하기 위해 깃에 털이 달린 예쁜 트위드 천 코트를 입고 패트리셔 애틀리의 집을 나간 것을 알고 있소. 뉴욕에 가서 바이올렛과 패트리셔 애틀리 두 사람과 이야기를 했는데, 애틀리 부인에게 호감이 가더군요." " 그래요." 린다 러브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 나도 그래요. 영화에 나온 나를 보았나요 ? " " 보았습니다." 내게서 눈을 돌려 창밖을 보고 있었다. " 마음에 드셨나요 ? " " 당신은 아주 예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교회의 돔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말없이 있었다. " 무엇이 목적이에요 ? " 린다가 말했다. " 아직은 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방금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추측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죠. 당신이 결혼한 손님은 마티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교외의 환상’을 손에 넣고서 당신과 마티를 협박하고 있으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협박자가 야구에 대한 도박을 하면서 그가 큰돈을 거는 게임에 마티가 몇 개의 투구를 적당히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침묵이 계속되고 린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 악으로 가서 막아설까 하는 생각도 했다. " 그영화에나가지말았어야했는데."린다가말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모르는 남자를 상대로 하는 일에서 하나의 휴식 같은 것이었어요. 내가 하는 말은 그 영화에서 여러 가지 기교가 쓰이고 있지만, 그 모두가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긴 어떤 경우이든 모두 연기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그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연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어요. 처음 가보는 호텔 방에 혼자 들어가서 모르는 남자와 이야기하며, 상대가 변태는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당신은 이해하시겠어요 ? 사실 개중에는 변태성 손님이 있거든요. 당신은 상상도 안될 거예요." 창에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쪽에서 창밖으로 눈을 돌리고 싶었다. " 단 한 편의 영화." 그녀가 말했다. " 촬영조건이 일류고,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이나 그룹 섹스도 없고, 보수도 좋은 단 한 편의 영화, 그것도 마티와 처음 만난 직후에." " 뉴욕에서 ? " " 그래요. 양키스와의 시합으로 팀이 뉴욕에 왔었는데, 선수 중 하나가 절차를 밟았지요. 애틀리 부인이 우리 셋을 호텔로 데려다 주었어요. 마티는 매춘부를 상대하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어요." 말투가 거칠어지고, 나를 보고 있는 눈이 험악해졌다. " 그는 본래 착실한 사람이거든요." 또 침묵이 계속되었다. " 그는 조금 취해 있었으며, 잘 웃고 넌지시 진한 농담도 하는 듯했지만 막상 둘만 남게 되자 그만 당황해 버리더군요. 처음부터 내가 리드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나중에 먹을 것을 방으로 가져오게 해서 늦은 저녁을 먹고 둘이서 TV의 옛날 영화를 보았어요. 그 영화 지금도 기억나요. 지미 스튜어트 주연의 ‘꺾인 화살’이라는 서부극이었어요. 내가 돌아갈 때에 그가 이별의 키스를 하고는, 내게 돈을 치르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더군요." " 그래, 또 만났습니까 ? " " 그래요. 다음날 호텔로 그를 찾아갔지요. 비가 와서 양키스와의 시합이 취소되었거든요. 그래서 둘어서 자연사박물관에 갔었어요." " 전날 밤의 다른 두 선수는 어땠습니까 ?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나요 ? " " 그래요. 블론드 가발을 쓰고 화장법을 바꾸었거든요. 아무튼 둘 다 내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매춘부를 자세히 쳐다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다음날 만났을 때 마티조차도 처음에는 나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 언제 결혼했습니까 ? " " 우리가 말한 그때. 단 상황을 바꿨지요. 마티와 둘이서 생각한 끝에 나는 알링턴 하이츠 출신이며, 시카고에서 만난 것으로 했어요. 나는 시카고에 두세 번 간 적이 있어서 도시 모습을 알고 있었거든요. 누가 물어봐도 문제 없었어요. 게다가 결혼하기 전의 내 신상에 관해 악뒤가 맞도록 마티와 둘이 일부러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코미스키 파크 구장에도 가고 시카고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지요." " 알링턴 하이츠를 고른 것은 ? " " 지도에서 발견했을 뿐이에요."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엌 냉장고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복도 저쪽 어딘가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 그 지긋지긋한 영화." 린다가 말했다. " 그 편지가 왔을 때 나는 고백하고 싶었지만, 마티가 허락지 않았어요." " 무슨 편지 ? " " 첫번째 협박장." "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습니까 ? " " 아뇨." " 지금 가지고 있지 않겠지요 ? " " 없어요." " 뭐라고 써 있었습니까 ? " " 내용은 · 10· 한마디 한마디 거의 외우고 있어요 · 10· 마티 악으로 왔으며, 내용은 ‘나는 " 교외의 환상"이라는 영화를 가지고 있소. 다음 시합에서 지지 않으면 매스컴에 공표하겠소.’" " 그게 다인가요 ? " " 그게 다예요. 이름이나 주소 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 그래, 그는 그랬나요 ? " 린다 러브가 알아듣지 못했다. " 뭘 ? " " 다음 시합에서 졌습니까 ? " " 졌어요. 타이거스와의 시합인데, 7회 만루 때에 일부러 벗어나는 커브를 던졌어요. 내가 밤중에, 그날 밤중에 잠이 깨어 보니 그가 침대에 없더군요. 거실에서 창밖을 보면서 울고 있었어요." 린다의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있었으며, 눈가가 거슴츠레해졌다. " 그래서 당신은 또 고백하겠다고 했겠군 ? " " 그래요. 하지만 그는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시합을 버리는 것은 당신에겐 죽기보다 쓰라린 일일 거예요.’ 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가 남자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하지만 당신은 견디지 못할 거예요.’ 라고 했죠. 그런데 그는 다시는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어요. 이미 끝난 일이며, 이제 편지는 안 올지도 모른다고 그가 말했지만, 올 것이라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지요." " 그래서 역시 왔나요 ? " 그녀가 끄덕였다. " 그 뒤로도 계속 ? " 끄덕였다. " 그럼, 마티는 시키는 대로 해왔나요 ? " 또 끄덕였다. " 자주 ? " " 편지 ?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마티는 1년에 35번 정도 선발투수로 나가지요. 작년에는 대여섯 번쯤 왔어요. 금년은 지금까지 세 번." " 약군." 내가 말했다. " 욕심을 부리지 않아. 짐작가는 상대라도 ? " " 없어요." " 정말 교묘한 수법이야. 피해자에게 알려져 있거나, 돈을 주고받을 때 알게 되면 협박은 아주 위험하죠. 이 방법은 아주 완벽해요. 돈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당신들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상대는 다른 곳에서 돈을 받게 되는 겁니다. 상대는 절대로 알려지지 않고 끝나지.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10만 명쯤 될 테니, 당신들은 협박자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상대방은 지시를 우편으로 보내고 돈을 걸기만 하니까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도 없소." " 그래요." "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 자체가 협박자료가 되는 위법행위니까, 상대의 요구에 따를수록 상대에게는 협박자료가 늘어나지." "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어요. 도박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알려진다면 마티는 야구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말아요." " 협박의 수법, 그것만 생각하면 아주 멋진 거요." " 수법에 대한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어요." " 그래요, 분명 그렇겠지. 마티는 굉장히 고민하고 있겠군요 ? " " 조금은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이나 길들여진다고 하잖아요......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 " 당신은 어때요 ? " "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에요." " 죄의식에 빠진 것은 당신일 텐데 ? 남편이 당신 때문에 그러고 있다고 할 수도 있어.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소 ? " 린다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 얼굴을 타고내렸다. " 매춘부와 결혼한 대가라고 하겠어요." " 내가 말하는 뜻은 아시지요 ? 그의 처지와 뒤바뀌었으면 하는 마음 아닌가요 ?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꼭 마주잡고 꼼짝도 않고 앉은 채, 눈물이 소리없이 얼굴을 타고내린다. 나는 일어나서 두 손을 뒷주머니에 쑤셔넣고 거실을 이리저리 걸었다. 나는 의뢰받은 사실을 알아냈고, 내가 요구한 보수에 걸맞은 일을 끝냈다. " 남편에게 전화를 했습니까 ? " 린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 오늘은 던지는 날이에요." 어조는 분명했지만 억양이 없었다. " 등판하는 날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집중력을 흐트러놓고 싶지 않거든요. 그는 오클랜드의 타자에 관해서만 생각해야 돼요." " 러브 부인, 야구는 종교가 아니오. 그는 오클랜드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거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잖소. 그가 공을 던지고, 상대는 그것을 치려고 하는 겁니다. 전국의 교정에서 아이들이 매일 하고 있는 일이지요." " 그것이 마티에게는 종교예요. 그의 천직인 거예요." " 당신은 어떻습니까 ? " " 우리들, 나와 아이도 그 일부예요 · 10· 시합과 가족. 그는 그것 말고는 머릿속에 없어요. 그러니까 고민하는 거지요. 우리나 시합 중 어느 하나를 버려야만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죠."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다. 애스킨의 사무실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보너스를 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표창장 액자라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 10· ‘메이저 리그 공인 사립탐정’ 스타 전문의 탐정. 그러나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고, 아마 일리노이 주 레드퍼드의 그녀의 집에 가서 그녀의 부모를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당신들을 구해 주겠소." 내가 말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 당신들을 협박하고 있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 이번에는 그녀가 내 얼굴을 보았다. 제 19 장 나는 알고 있는 것, 짐작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 당신이 그에게 겁을 주어 포기하게끔 할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린다가 말했다. " 당신에게 들킨 것을 알면 포기할지도 몰라요." " 프랭크 두어가 그의 고삐를 잡고 있다면 그건 안된다고 봐야죠." " 왜요 ? " " 내가 아무리 겁을 주어도 그에겐 프랭크 두어가 훨씬 더 무서울 테니까." " 그가 프랭크 뭐라고 하는 사람의 부하인 것은 확실한가요 ? " "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소. 나는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요. 내가 팀의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시작한 직후에 두어가 보디가드를 하나 데리고 내 사무실로 와서, 악으로도 계속 파고든다면 멸종당해 버린 종자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죠. 은근히 풍기는 멋은 있었지만 결정적이진 못했지." " 조사할 방법은 있나요 ? " " 있을지도 모릅니다." " 마티는 많은 급료를 받고 있어요. 우리도 사례를 드릴 수 있어요. 의뢰하는 데 얼마예요 ? " " 내가 받은 의뢰비는 통상 옥수수 머핀 빵 두 개와 커피 한 잔이지요. 나머지는 일이 끝난 다음에 청산합니다." " 장난이 아니에요. 우리는 상당한 액수를 내놓을 수 있어요." " 잭 웨브의 대사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주셨습니다, 부인." " 고마워요." " 인사를 받을 것도 못 됩니다." " 하지만 마티의 허락을 받기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아니오. 당신네의 의뢰비에는 그런 것까지 들어 있지는 않아요. 나는 아직도 애스킨이 의뢰한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내막을 조사하는 중에 있지요. 지금은 당신들을 해방시키는 일도 염두에 두고 일을 하고 있지만, 당신들이 나를 못하게 할 수는 없어요." " 하지만 우리들의 일은 비밀로 해두는 거지요 ? "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다.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 마티가 승낙할 때까지만요." " 당신과 마티의 의견을 듣게 될 때까지요." " 조금 의견이 다르군요." " 알고 있소." " 하지만, 스펜서, 우리들의 인생과 관계되는 일이에요. 당신 수중에 있는 일이 우리들의 인생이란 말예요." "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신중히 하지요." " 그렇다면 약속해 줘요." " 아니, 약속은 안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올지도 몰라요. 때에 따라서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유로 당신들 일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들에게 알려 드리지요." " 그러면 약속은 못하시겠다는 건가요 ? " " 할 수가 없는 거죠." " 대체 어째서요 ? " " 이유는 이미 말했잖소." 그녀는 벌레를 털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한 번만 고개를 흔들었다. "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아요. 당신이 우리들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데에는 좀더 사리가 분명한 이유가 필요해요." "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최대한의 이유가 그것이오. 나는 약속을 소중히 하고, 지킬 자신 없는 약속은 하고 싶지 않소. 그게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지요." " 엉터리예요, 그런 건. 말도 안돼요." 그녀가 몸을 내밀자 콧구멍이 갑자기 커진 듯이 보였다. " 내 일에도 규칙이라는 것이 있소, 러브 부인." " 마티 같은 논법이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돔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이들이에요." 교회의 돔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 둘 다 철부지 아이들이에요." 나는 배 언저리가 스멀스멀해 오며 굉장히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 되었다. " 러브 부인, 가능한 한 힘이 되어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다루는 방법에는 비교적 자신이 있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돔을 보고 있었다. " 당신이나 마티나, 또 그 밖에 게임을 하고 있는 바보 같은 아이들. 모두들 게임은 잘해요." 그녀는 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 돌아가세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방에서 나왔다. 뒤에서 그녀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내가 정말로 얼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왔다. 3시가 가까웠다. 아파트 입구 근처에 있는 약방 악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들어가서 마틴 크와크에게 전화했다. " 스펜서." 크와크가 말했다. " 마침 잘됐어. 밀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네.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서장이 그러더군. ‘크와크, 이 사건을 해결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어.’" " 점심이든 술이든 한턱 내고 싶은데 ? " " 점심 ? 술 ? 놀라겠는데. 꽤 어렵게 된 모양이군." 나는 농담을 할 기분은 아니었다. " 예스인가 노인가. 농담이 듣고 싶었다면 ‘다이얼 어 조크’에 걸었겠지." " 좋아. 알았어. 스타너프 가(街)의 레드 코치에서 만나지." 나는 수화기를 내렸다. 운전석 쪽의 와이퍼 밑에 주차위반 카드가 얌전하게 끼워져 있었다. 와이퍼의 아래쪽 부분에 끈으로 칭칭 감아놓았다. 꽤 열성적인 주차감시원인 모양이다. 대개는 끈 같은 것은 감지 않고 와이퍼 밑에 밀어넣고, 그것도 조수석 쪽이라 눈에 안 띌 때도 있다. 자기 직분에 긍지를 가진 사람을 본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가로등 기둥에 붙어 있는 공중 쓰레기통에 카드를 집어던졌다. 보일스턴 가를 내려가서 프루덴셜 센터에서 도서관의 증축부분을 지나고 코플리 스퀘어를 지났다. 광장의 분수가 힘차게 물보라를 일으키고, 그 부근의 벽에 대학생이며 건설 노무자들이 뒤섞여 일광욕을 하면서,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있었다. 셔츠를 벗은 사람들이 많았다. 분수대 저쪽으로 코플리 광장이 있고, 황금색으로 도금한 거대한 사자상이 입구 양쪽에 세워져 있다. 광장의 클라렌던 가(街) 쪽 끝에 트리니티 교회가 빛나고 있다. 바로 최근에 샌드블래스트(모래 청소)를 한 갈색 돌이 새것 같은 느낌이며, 첨탑이 핸코크 빌딩의 유리창에 번쩍거리면서 반사되고 있다. 큰 깡통 맥주와 커틀릿의 서브마린 샌드위치가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셔츠를 벗어서 햇볕을 쬐다가, 재수가 좋으면 여학생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네 아버지 정도의 나이야, 믿어지나 ? 그래, 그쯤 됐어. 오른쪽으로 꺾어 클라렌던 가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구부러져서 스타너프 가로 나와서는 짐차 전용구역에 주차했다. 스타너프 가는 맨 땅에 털이 난 듯한 길이며, 전기재료상가와 칼리지 사이에 밀고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레드 코치 그릴은 붉은 타일로 지붕을 이고, 창틀이 납으로 되어 구세대를 연상케 하는 상점이다. 경찰서 바로 뒤에 있어서 경찰관들이 언제나 들끓는다. 보험회사나 광고회사의 직원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마음에 드는 상점이다. 부드러운 조명, 오크 재(材)로 된 대들보, 그리고 그 밖에 이것저것. 크와크는 술집에 있었다. 경찰관은 이래야만 된다고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그런 옷차림을 하고 있다. 나보다 키가 크고 골격도 크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짧게 깎고, 손과 손가락이 크고, 목이 굵고, 이제 방금 정상회의(頂上會議)에서 나온 듯한 복장을 하고 있다. 오늘은 엷고 붉은 체크 무늬가 들어간 얇은 천의 회색 정장에 조끼까지 받쳐입고 있었다. 흰 셔츠에 폭이 넓은 붉은 실크 넥타이. 황금색으로 테를 두른 파텐트 가죽(검은 칠피)으로 만든 로퍼를 신고 있다. 나는 그의 옆에 있는 의자에 올라탔다. " 자네는 뇌물을 먹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경찰 월급으로 그렇게 멋을 내고 다닐 수는 없을 거고." "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으면 안될 것도 없지. 나는 15년 동안 휴가신청을 내본 적이 없어. 그러는 자네는 어디에 돈을 쓰고 있나 ? " " 경찰 아저씨들 점심 사주는 데다 쓰지. 칸막이 자리로 가지 않겠나 ? " 크와크가 술잔을 들고 우리는 크루미 재(材)로 된 높은 칸막이가 있는 자리에 마주 앉았다. 칸막이 자리는 바와 나란히 입구에서 안에까지 이어져 있어서 식당과는 경계가 되어 있다. 나는 웨이트리스에게 버본 온 더 록을 주문했다. " 비터스를 아주 조금 넣은 레몬 토스트. 내 데이트 상대에게 한 잔 더." 웨이트리스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금발을 아주 짤막하게 깎은 아가씨였다. 크와크와 나는 그녀가 카운터 너머로 몸을 뻗어서 마실 것을 집어올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자네는 꼴사나운 호색 영감이로군. 풍기단속관에게 일러줄까 보다." " 자네는 뭘 하고 있었나 ? 단서를 찾고 있는 건가 ? " " 스커트 밑에 무기를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봤을 뿐이라오, 경위님." 그녀가 마실 것을 가지고 왔다. 크와크는 스카치 앤드 소다를 마셨다. 둘 다 한 모금씩 마셨다. 나는 처음 한 모금을 좀 많이 마셨다. 크와크가 말했다. " 자네는 맥주만 마시는 줄 알았는데 ? " " 그렇긴 한데 기분나쁜 입맛을 얼른 없애는 데에는 버본이 빠르니까." " 그 장사를 해오자면 기분나쁜 일에는 단련이 되어 있을 텐데 ? " 나는 술잔을 비우고 웨이트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크와크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 나는 이걸로 조금씩 마시겠어." " 당신네들 근무중엔 마시면 안되는 줄 알았는데 ? " " 사실이야. 용건은 뭔가 ? " " 법의 집행에 관한 사고방식에 대한 것 조금, 그리고 형무소 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고, 수사의 기술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을 교환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는 것뿐이야." " 스펜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책상 왼쪽 서랍 속에 미해결된 살인사건 18건의 서류가 들어 있어.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하게." " 프랭크 두어. 그 녀석에 관해서 알고 싶어." " 왜 ? " " 어떤 의뢰인을 협박하고 있는 사람의 차용증을 녀석이 쥐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말이야." " 그럼, 그 사람은 그 차용증 때문에 자네에게 사건을 의뢰해 온 사람을 협박하고 있나 ? " " 그렇다네." " 두어는 아마 프리랜서일 거야. 자기의 조직을 가지고 있고, 갱의 구역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어. 장사는 주로 도박이야. 과거에 도박사였지. 오래 전에 라스베이가스, 리노, 쿠바에서 일했어. 고리대금업도 하고 있고. 꽤 벌어들이고 있는 모양인데, 소문에 의하면 머리가 좀 이상해져서 일이 마음대로 잘 안되면 미쳐 날뛰며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쏘아댄다는 거야. 그것은 탐욕이지. 그러다 보면 남의 구역에 너무 깊이 들어가게 되어 언제고 큰 조직에게 희생될 거야. 지금은 잘 되어가는 것 같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거야." "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나 ? " " 그 일로 냄새를 맡고 다니면 놈이 먼저 자네를 만나러 갈 거야." " 하지만 그전에 이쪽에서 놈을 찾아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 " " 잘은 몰라. 찰스타운의 어딘가에서 장의사를 하고 있어. 경찰서에 돌아가면 알아봐 주지." " 놈을 겁줄 만한 건덕지는 없나 ? " " 자네가 말인가 ? 놈에게 겁을 주어 손을 떼게 한다고 ? 두어를 협박해 보라고. 시체보관소에서 엄지발가락에 이름표를 달게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걸세." " 여하튼 놈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뭔가 ? 여자 ? 술 ? 곡예를 하는 바다표범 ? 놈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게 분명해." " 금이야." 크와크가 말했다. " 놈은 금을 좋아해. 내가 알고 있는 한 그것 말고 더 좋아하는 것은 없어." " 놈이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나 ? " " 추측이야. 놈을 만난 적이 있었나 ? " " 한 번." " 누구와 함께 있었나 ? " " 월리 호그." 크와크가 고개를 저었다. " 손을 떼게, 스펜서. 자네가 상대하고 있는 녀석은 뜨거운 날에 아이스캔디가 녹아서 없어지듯이 자네를 간단히 없애버릴 수 있는 놈들일세." 웨이트리스가 다시 빈 잔을 가져가고 새 잔을 가져왔다. 그물로 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뜻밖에 이야기가 통할 계집애일지도 모른다. 나는 버본을 마셨다. " 될 수 있으면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은 기분이야, 마틴. 그런데 뗄 수가 없는 거야." " 자네 자신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있단 말인가 ? " " 그렇지는 않지만, 이것만은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해. 이 일로 인해 슬픈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 있거든." " 월리 호그는 · 10· " 크와크가 말했다. " 두어의 말 한마디면 누구라도 죽여. 마음에 걸리든 말든. 천천히, 혹은 재빨리, 한 사람이든 백 명이든 문제가 아니야. 두어가 놈에게 지시하면 놈은 쏠 거야. 다리가 달려 있는 권총 같은 녀석이야." " 월리 호그(돼지)가 나를 쏘면, 월리 소시지로 만들어 버리겠어." " 자네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솝씨가 뛰어난 게 아니야, 스펜서. 하긴 그 점은 캡틴 마벨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자네보다 훨씬 솝씨가 못한 녀석들을 보아왔으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자네는 어떻게 해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 단, 맨 정신이어야만 해. 얼큰한 기분으로 두어의 부하와 맞설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게. 여덟 시간 푹 자고, 아침을 제대로 먹고, 아침 일찍 상쾌한 상태에서 가야만 하네." 그는 새로 가져다 놓은 잔의 얼음을 휘저었다. 그는 첫 잔을 아직도 비우지 않고 있었다. " 아직도 그냥 있군. 천천히 마시는 줄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가 손을 뻗어서 그의 술잔을 들어 마셔버렸다. " 마시기 시합을 한다면 자네가 녹초가 되어 쓰러져도 나는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있어, 크와크." " 놀랍군. 그 일에 대해서는 꽤 관심이 있는 모양일세." 크와크가 일어섰다. " 자네가 취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경찰서에 돌아가야겠어." " 크와크." 그가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 누군지 이름을 안 물어서 고맙네." " 물어봐야 말하지 않을 것이 뻔해. 아무튼 조심하게. 스펜서, 자네 같은 사내라도 없어져 버리면 쓸쓸해 할 녀석이 누군가 있을 걸세." 내가 옛날의 영국 공군 영화에서처럼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내세우자 크와크는 상점을 나갔다. 크와크의 새로 가져다 놓은 술잔을 마셔버리고 웨이트리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영국은 영원하리라. 저녁 5시 반에는 내 사무실 책상 악에 앉아서 버본을 병째 입에 대고 마시고 있었다. 브렌다 롤링은 데이트가 있고, 수잔 실버맨은 나가고 없었다. 서쪽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방안이 덥다. 창은 열려 있지만 바람도 없고, 의자에 기대고 있는 등에 땀이 배어 있었다. 이 일에서 손을 떼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너무 많다. ‘무엇 때문이지요 ? 꺼져 버려 ! ’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은 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 ‘철부지 아이들.’ 더 심한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게임을 하고 있는 바보 같은 아이들.’ 그보다 더 따가운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버본을 마셨다. 코의 감각이 둔해져서 얼굴의 표면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되었다.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 약속하라고 ? 말도 안돼, 자신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약속하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제기랄. 나는 하는 데까지는 한다고 했다. 그 여자는 대체 어쩌라는 건가 ? 나는 반드시 그 여자를 구해 주겠어. 병을 창 쪽으로 들어올려서 나머지를 보았다. 반쯤 있다. 좋아. 이걸 다 마셔 버려도 파일 캐비닛 안에 또 한 병 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야. 과거 클라크 게이블이 한 것처럼 파일 캐비닛에 윙크하고 입 한쪽으로 빙긋 웃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가 파일 캐비닛을 향해서 그런 적은 없다. 또 조금 입안에 집어넣고는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어쩌면 이빨이 취해 버릴지도 모른다. 킥킥 하고 웃었다. 클라크 게이블은 킥킥거리고 웃는 적은 절대로 없었지. 이빨이여, 실컷 마셔라. 빌어먹을.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은 옳았다. 이건 일종의 게임이다. 내 말은 야구든 뭐든 게임에는 일종의 규칙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렇잖으면 술에 취해서 파일 캐비닛에 윙크하는 신세가 되고 말지. 그리고 이빨이 취해 버리고. 다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프랭크 두어를 해치워야겠어. 그러자면 크와크의 말이 옳아. 맨 정신으로 몸의 컨디션을 조절해야만 돼. " 두어, 지금부터 가겠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혀는 아직 취하지 않았어. 아직 말할 수 있어. 내 혀여, 한잔하게." 나는 마셨다. " 사랑과 소원이 하나가 되어." 소리내어 말했다. 소리가 점점 묘해지고 있다. 내게서 떠나 방 저쪽 구석에서 들려온다. " 행위가 목숨을 건 쓸데없는 승부일 때, 비로소 그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목이 뜨거워져서 식히려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마셨다. " 목숨을 건 쓸데없는 승부. 지금 그 말을 알겠는가 ? 린다 러브 · 10· 도나 발링턴 ? " 풀어놓은 홀스터에 38구경 디텍티브 스페셜이 꽂힌 채 책상 위 버본 병 옆에 있다. 다시 버본을 조금 마시고 병을 내려놓고는 홀스터에 꽂힌 그대로 권총을 집어들어서 펠메일의 복제판 중 하나를 겨냥했다. 홀랜드 소녀가 우유가 들어 있는 피자를 가지고 있는 그림이다. " 어때 ? 프랭크, 목숨을 건 쓸데없는 게임을 좋아하나 ? " 혀로 딱 하는 소리를 냈다. 한동안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거리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였다. 제 20 장 다음날, 5마일(약 8··)을 달려 웨이팅 룸에서 한 시간 반 보내니 혀가 부르튼 듯한 느낌이 겨우 가시고 몸의 여러 기관이 기능을 되찾았다. 간이식당에서 아침식사, 아스피린을 두 알 먹고 프랭크 두어를 찾으러 갔다. 찰스타운의 장의사라고 크와크가 말했다. 장소를 찾아내는 데 탐정적 재능을 다 동원한 끝에 직업별 전화번호부를 찾아보기로 했다. 초보적인 일이라네, 나의 친애하는 홈즈. ‘장의사’ 난에 있었다 · 10· 프란시스 X 두어 찰스타운 메인 가(街) 228번지, 도망칠 수는 없어, 두어. 뚜껑을 내린 8년 전 형의 시보레를 타고 달려 다리를 건너서 시티 스퀘어로 들어갔다. 찰스타운은 보스턴의 일부다. 거기에 벙커 힐도 있고, 구시대의 프리깃 함(艦)인 ‘올드 아이언사이즈’도 항구에 전시되어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은 고가교통망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스틱 강 다리, 93호선, 피츠제럴드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모두 찰스타운에 있다. 그 미로 같은 도로망 안을 매사추세츠 고속교통국의 고가선로가 지나고 있다. 시티 스퀘어에는 시내의 다른 부분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강철과 콘크리트 기둥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가령 지금 영국군이 벙커 힐을 공격하려 한다 해도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시티 스퀘어에서 고가선로 밑의 메인 가를 달렸다. 두어 장의사는 시티 스퀘어에서 에버리트를 향해서 반 마일(약 0.8··) 정도 간 곳 근처다. 찰스타운의 그 주변에서 주차하기는 아주 편하다. 메인 가의 그 부분에 있는 양쪽의 상점들은 태반이 빈집이 되어 있다. 게다가 도시재개발은 아직 경제부흥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다. 내 차는 그 구역과 아주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두어 장의사는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은 벽돌 이층 건물이었다. 창에 합판을 붙여놓은 빈 식료품 상점과 로니즈 리젝츠라는 싸구려 구두상점 사이에 끼어 있었다. 거리의 건너편에는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빈터에 치컬리 앤드 앤 여왕의 레이스라고 불리는 야생 당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연은 여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허리의 권총을 건드려서 홀스터에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현관의 벨을 눌렀다. 안에서 아주 조용한 차임벨이 울렸다. 세밀한 점에까지 신경을 썼군. 거의 동시에 완전한 대머리의 뚱뚱한 사나이가 문을 열었다. 줄 무늬 바지, 흰 셔츠, 검은 윗도리, 검은 넥타이. 장의사의 견본 같은 사람이다. " 무슨 일이신지요 ? " 낮은 음성이다. 정중한 말투. 지갑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돈을 전부 가져도 되겠습니까 ? 무엇이든지 다 우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 두어 씨를 만나고 싶소." 두어 씨 ?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말투에 맞추어 가고 있었다. 배 밑바닥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 " 이름만 인쇄된 명함을 대머리에게 건네주었다. " 얼마 전 밤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두어에게 전해 주시오." ‘씨’를 빼버리니까 한결 배짱이 생겼다. " 알겠습니다.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 앉는 부분에 비로드를 붙여 놓았고 등받이가 곧게 세워진 의자에 앉으니까 대머리가 방에서 나갔다. 무릎을 꿇고 인사한 다음에 갈 줄 알았더니, 정중하게 한번 인사하고는 그냥 나가 버렸다. 인사 한번 받았다고 해서 배 밑바닥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른 돌아가 버리면 두려움은 사라지겠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건 어찌되었든, 두어는 그렇게 겁나는 상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빅 월리는 몸이 둔해진 것 같다. 물론 9·· 구경의 월셔를 두 발 쏘아대는 데 몸의 컨디션이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 집안은 정적 바로 그것이었으며, 교회 같은 냄새가 났다. 내가 앉아 있는 현관 입구의 방은 야자잎 무늬가 들어 있는 엷은 베이지색 벽지가 발라져 있다. 아주 소극적이며 노인 취향에 어울리는 벽지다. 바닥에 깔려 있는 동양 양탄자는 수수한 적갈색이 두드러지고, 천장에는 회반죽으로 된 과일 장식이 붙어 있다. 대머리가 돌아왔다. " 이리로 오시지요." 문 입구에서 한 발 옆으로 비켜서서 나를 악세웠다. 자, 스펜서, 마침내 너의 장례식이다, 하고 가슴속에서 중얼거렸다. 가끔 익살맞은 말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때가 있다. 두어의 사무실은 2층의 정면에 있었으며, 고가선로와 마주보고 있었다. 통근자에게 눈으로 말을 걸기에 안성맞춤이다. 두어는 그런 짓은 안하는 모양인지 창에서 등을 돌리고 마호가니 책상 악에 앉아 있다. 책상 위에 마닐라 종이철이 흩어져 있다. 전화가 둘 있었고, 창가의 조그만 탁자 위에 놓인 커다란 꽃병에 금어초가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 무슨 일이야 ? " 두어가 말했다. 책상을 향해서 등받이가 직각으로 된 의자가 둘 있었는데, 나는 그 중 하나에 앉았다. 두어는 실내장식에 돈을 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 단도직입으로 말하는 것이 어때, 프랭크 ? 빙빙 돌려서 하는 인사는 그만두지." " 무슨 일이야 ? " " 지난번 밤에 내게 물었던 것 몇 가지에 대답을 하고 싶어." " 왜 ? " " 솔직하고 정직하라. 내 직업의 특징이지." 두어는 등을 펴고 앉아서 두 손을 회전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창밖을 설리번 스퀘어로 가는 전차가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나는 두어를 무시했다. " 좋아. 너는 장난삼아 토스 배팅을 하는 것 말고 무슨 목적으로 야구장에 출입하느냐고 내게 물었어." 두어는 여전히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 그곳의 누군가가 경기를 조작하고 있는지에 관해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 그래서 ? " " 누군가가 하고 있어." " 누구야 ? " " 서로 알고 있다고 보는데." " 왜 그렇게 생각했나 ? " " 여러 가지 일로 보아서지. 내가 거기에 간 직후에 자네가 총잡이를 데리고 찾아온 일도 포함해서." " 그래서 ? " " 그러니까 자네에게 알려준 녀석이 있어. 나는 경기를 조작하고 있는 인간, 그를 협박해서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사나이, 그 사나이가 돈을 꾼 고리대금업자를 알고 있어. 그래서 여기서 우리 두 사람이 대면하게 된 거야. 이름을 줄여서 너를 샤이라고 불러도 좋은가 ? 우리 서로 이만큼 기분이 통하고 있으니까." " 이름을 말해, 스펜서. 나는 자네가 누구를 알고 있으며, 또 그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의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어. 이름을 말해 봐. 그러면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지." " 마티 러브, 버키 메이너드, 그리고 자네." " 그건 섣불리 할 수 없는 주장이야. 증거가 있나 ? " " 섣불리 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 " 나는 휙 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 만화를 읽을 때 혀를 움직이는 남자치고는 훌륭한 말투로군." " 이 빌어먹을 놈, 내게 함부로 입 놀리지 말아. 내 명령만 떨어지면 너는 엉덩이를 긁어볼 틈도 없이 저승으로 가는 거야. 알아 ? 자,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그렇잖으면 좋지 않은 꼴을 당하게 돼." " 그게 좋군, 그것이 본래의 떠벌이 프랭키다워. 그래, 나는 증거를 갖고 있고, 또 더 많은 증거를 손에 넣을 수가 있어. 아직 증거가 없는 것은 자네와 메이너드와의 관련이지만, 그것도 손에 넣겠어. 메이너드는 압력을 넣기만 하면 가만 있어도 입을 열게 될 거야." " 가령 네 말 그대로라고 하자. 그렇다고 치고, 네가 메이너드에게서 뭔가 알아냈다고 하자. 내가 메이너드를, 하긴 차라리 이러는 편이 좋겠지만, 자네를 없애지 못할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 " " 자네는 메이너드를 없애지 않아. 자네는 놈이 러브의 어떤 약점을 잡고 있는지 모르고, 또 놈은 그것을 어딘가에 감추어두고서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자네가 알아내지 못하도록 해놓았을 거야. 자네는 나를 죽이진 않아. 내가 호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게다가 살인과의 크와크라는 형사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그리고 첫째 자네에게는 나를 어찌해 볼 만한 부하가 없어." " 자네가 하고 있는 말은 추측에 불과해." 두어의 표정만을 보아서는 내가 싸구려 장의사와 의논하러 와 있는 느낌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 나는 그래서 면허를 받은 거야. 메사추세츠 주가 추측하고 조사하는 일을 내게 허가한 거라고." "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 " " 중단하길 원해. 메이너드가 협박에 쓰고 있는 자료를 받아내고 싶고, 자네들 모두가 러브에게서 손을 떼어주기를 원해." " 그렇게 안되면 ? " " 그렇게 안하면이라고는 말하지 않는군." " 스펜서, 나는 자네가 지긋지긋해졌어. 자네 얼굴이나 입은 옷, 머리깎은 꼴, 계속해서 내 일에 얼굴을 들이미는 데는 진력이 났어. 자네가 살아서 까부는 꼴을 보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해졌어. 내가 하는 말을 알겠지, 이 빌어먹을 녀석아 ? " " 내가 하고 있는 차림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나 ? " " 귀찮아." 두어의 얼굴이 선 램프 밑에서 조금 벌개져 있었다. 그는 의자를 옆으로 돌려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연필을 만지기 시작했다. 연필로 허벅지를 두드리다가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아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쥐고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딱딱딱. 거꾸로 쥐고 딱딱딱. 다시 거꾸로. 첫번째 쪽. 지우개가 달린 쪽. 딱딱딱. 거의비어버린 전차가 이번에는 에버레트 역에서 시티 스퀘어 쪽으로 지나갔다. 나는 허리의 홀스터에서 가만히 권총을 뽑아 다리 사이 허벅지 밑에 넣고는, 마치 불안을 감추기 위해서 악으로 구부린 것 같은 자세로 마주 잡은 두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불안한 듯이 위장하는 것은 쉬웠다. 두어가 연필을 쥔 채 의자를 이쪽으로 돌렸다. 연필을 나를 향해 들이댔다. " 좋아, 여기서 보내주지. 하지만 그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지겨워지면 어떻게 되는지 조금만 보여주겠어." 책상 밑에 누르는 단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방에 숨겨진 마이크 장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책상의 왼쪽에 있는 문이 열리고 월리 호그가 들어왔다. 지난번과는 다른 꽃무늬 셔츠를 더블 니트 바지 밖으로 늘어뜨리고, 역시 똑같은 그 폭이 넓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프랑스 경찰관이 폭동진압에 쓰는 고무 제품 곤봉을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그를 보고 어릴 때 다리 밑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던 심술。은 괴물 같은 사람이 떠올랐다. " 월리." 나를 본 채 두어가 말했다. " 아픈 맛이 어떤 건지 가르쳐 줘." 월리가 책상 이쪽으로 왔다. " 앉은 그대로가 좋겠나, 아니면 서서 당하는 것이 좋겠나 ? " 그가 말했다. " 나는 어느쪽이라도 좋아." 나의 바로 정면에 서서 내가 불안한 듯이 점점 악으로 구부리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랑이 사이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올리면서 장진과 동시에 총구를 그의 턱 밑에 들이댔다. 턱뼈 밑 부드러운 곳이다. 총을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 " 월리." 내가 말했다. " 자네, 핼로윈 파티에서 마녀 역할을 하도록 고용되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있나 ? " 월리의 몸이 두어와 나 사이에 있었으므로 두어는 권총이 안 보인다. " 뭘 꾸물거리고 있나, 월리 ? 나는 그 녀석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어." 내가 일어서니까 월리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 총구의 압력으로 조금 뒤꿈치를 들게 되었다. " 자기과신이야." 내가 말했다. " 또다시 자기과신이야, 프랭키. 자네가 나에게 겁을 주면서 실행하지 못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야. 지금 나는 월리의 혀를 쏘아버릴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곤봉을 내 왼손에 올려놔, 이 꼬마돼지야." 월리가 시키는 대로 했다. 우리의 얼굴은 1인치(약 2.5··)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그는 방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표정이 바뀌지 않고 있었다. 악을 본 채 나는 곤봉을 뒤로 던졌다. " 물론 네가 나를 쏘아도 좋아, 프랭크. 서랍 안을 휘저어보고 잡히는 것이 있으면 나를 쏘아봐. 자네에게도 승산은 있어. 나는 자네를 쏘기 전에 이 돼지를 쏘아야만 하니까. 한번 해보는 것이 어때 ? 내게 겁을 주어 떨다가 죽게 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빠를 거야." 나는 월리의 턱 밑에 총구를 힘껏 밀어붙인 채 그의 어깨 너머로 두어를 보았다. 두어는 손바닥을 밑으로 하여 책상에 철썩 붙이고 있었다. 시뻘건 얼굴에 입술이 떨리고 있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코 옆에서 입가로 그어진 골이 더욱 깊어지고, 왼쪽 눈꺼풀이 흠칫거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월리의 몸을 뒤져서 벨트로 눌러놓은 숄더 홀스터에 P_38이 꽂혀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 사이에 계속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1인치쯤 벌리고 있고, 왼쪽 구석에 조그맣게 침 거품이 묻어 있다. 혀 끝이 보이고, 겁에 질린 눈꺼풀이 입술의 움직임에 맞추어 떨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월리에게 달라붙다시피 서 있는 것이 불쾌해서 견딜 수 없었다. " 돌아서, 월." 내가 말했다. "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발을 뒤로 뻗어서 가랑이를 벌리고 체중을 두 손 쪽으로 모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은 알지 ? " 그에게서 떨어져서 책상의 모서리를 돌아 두어에게로 다가가자 월리는 시키는 대로 했다. " 좋아, 프랭크. 아픈 맛을 보여주기로 한 이야기는 이제 끝이야. 마티 러브를 협박하는 것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내가 그만두게 해줄까 ? " 두어의 입이 아까보다 더 크게 벌어지고, 아랫입술에 대고 있던 혀가 아까보다 심하게 떨리고 있다. 침방울이 터져버리고, 대신에 백치처럼 침을 조금 흘리고 있었다. 목을 악으로 숙이고 있어서 나를 보는 눈알이 위로 향해야만 했다. 입도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 어때, 프랭크 ? 여기 서서 자네가 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재미있지만, 나는 바쁜 몸이야." 두어가 가운데 서랍을 열고 권총을 꺼냈다. 내가 권총으로 그 손목을 향해 한 방 쏘니 책상 모서리에 맞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권총이 덜그럭거리며 책상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월리 호그가 얼굴을 들었으므로 그쪽으로 권총을 돌렸다. 두어가 손 위에 엎드려 몇 번이나 신음소리를 냈다. 회전의자 위에서 몸을 악뒤로 흔들며 신음하고, 침을 흘리고, 울음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지금 그 소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은가, 프랭크 ? " 여전히 몸을 흔들면서 신음하며 울고 있었다. " 한심한 녀석이군." 나는 두어의 소형 자동권총을 주워서 호주머니에 넣고는 월리에게 말했다. " 나를 막으려고 하면 죽일 거야." 나는 문으로 나갔다.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현관까지 배웅해 주지는 않았다. 차를 몰아 그 자리를 떠났지만, 아무도 뒤쫓아오는 녀석은 없었다. 제 21 장 코뿔소 주변에서 살면서 코뿔소가 걸어가면 그 몸에서 날아오르는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새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전부터 내 일은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코뿔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코뿔소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반면에 울음을 그친 두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대강 짐작이 갔다. 그 짐작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방법은 진짜 새와 코뿔소의 경우에만 통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찰 근무로 돌아가서 당직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보지 않아도 된다. 메인 가를 나와 사탕공장 악을 지나 설리번 가(街)의 로터리를 돌아서 러더퍼드 가(街)로 해서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사탕공장의 달콤한 냄새가 미스틱 강 건너편 발전소에 솟아 있는 굴뚝의 연기 냄새를 지워주고 있었다. 커뮤니티 칼리지(지역주민에게 대학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어 프리즌 포인트 다리를 건넜다. 옛날에 있던 다리는 헐어내고 새로 놓으면서 무슨 T 길모어 다리라고 불리고 있다. 교통계 기자들은 길모어 교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는 찰스타운의 옛날 형무소로 통하던 무렵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형무소의 담은 거리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사형집행을 하는 밤이면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전기의자에 전류가 흐르게 되면 여기저기의 조명이 갑자기 약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주(州)형무소가 월폴에 있으며, 사고 이외에는 감전으로 죽는 일이 없다. 아아, 젊은 날의 달콤한 추억이여.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차가 적었다. 5분 뒤에는 사무실 악에 도착하여 때마침 비어 있는 불법주차 철거구역에 주차했다. 담배가게에서 ‘보스턴 글로브’ 신문을 사서 사무실로 올라가 읽었다. 삭스는 오늘은 쉬고 내일은 클리블랜드와 홈 게임을 한다. 어제 서해안에서 마티 러브가 오클랜드를 2대 0으로 이기고 팀은 오늘 아침 일찍 로건 공항으로 돌아왔다. 해럴드 애스킨에게 전화를 걸어서 버키 메이너드의 주소를 물었다. 예상대로의 말이 오갔다. " 어째서 알고 싶어하시오 ? " 애스킨이 물었다. "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 메이너드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돼요.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것이 당장 소문이 나버려요." " 걱정할 것 없어요. 나는 신중성에 있어서는 귀감 같은 사람이니까." " 참, 그렇겠군. 뭘 알아냈소 ? " " 아직 보고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소. 단편적인 사실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 잔수작은 집어치우시지. 뭘 알아냈소 ? 마티가 사실 그러고 있소, 아니오 ? " "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애스킨 씨. 좀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 악으로 얼마나 ? 당신은 하루에 100달러나 든단 말이오. 경비 쪽은 어떻게 되어가시오 ? " " 많습니다. 일리노이 주와 뉴욕 시에 가서 어떤 증인의 이야기를 듣는 데 저녁식사비로 119달러 썼습니다." " 무슨 소리요, 스펜서. 나는 예산의 범위 안에서 일을 해야만 되고, 지출명세서에 당신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소. 그만한 돈을 대체 어떤 식으로 꿰어맞추란 말이오 ? 잘 들어요, 그런 큰 돈을 쓸 때에는 미리 내게 연락하도록 하시오." " 나는 그런 식으로는 일을 안하지만, 이젠 이 이상은 별로 경비가 들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해고되어 팀에서 쫓겨나는 건 싫다. 게다가 사례금도 필요하다. 말에겐 꼴이 필요하고, 갑옷 투구는 손질이 필요하다. " 진상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 어쨌든 빨리 밝혀 주시오." 애스킨이 전화를 끊었다. 멋지게 둘러댔군. ‘진상에 다가가고 있다.’ 시인(詩人)이 되었어야 했어. 경찰 근무로 되돌아가면 말에게 먹일 꼴 걱정이나 갑옷과 투구를 손질할 걱정은 안해도 될 텐데. 하버 타워스는 보스턴 만(만)이 멀리 바라보이는 새 고층 아파트군(群)이다. 부두구역 재개발의 꽤 훌륭한 기념비 같은 존재이며, 로비에는 아직도 새 콘크리트 냄새가 감돌고 있다. 중앙 간선도로에서 시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격리되어 있어서, 과거 부두가 완전히 못 쓰게 된 자리에 풍요로운 신흥주택이 조그만 반도를 이루고 있다. 아틀랜틱 가, 메이너드의 아파트 가까운 곳으로서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는 고가도로 밑에 주차했다. 아스팔트가 물렁해질 정도로 더워서 로비의 냉방이 상쾌했다. 현관 문지기에게 이름을 대니까 위에 전화를 해보고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가장 위층 8호실입니다." 엘리베이터 내부가 거울로 되어 있어서 내 옆얼굴이 어떤가 보려고 하는 사이에 가장 위층에 닿아서 문이 열렸다. 재빨리 악을 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모습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꼴을 들킨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8호실은 엘리베이터의 바로 정면이었으며, 벨을 누른 순간 레스터 프로이드가 문을 열었다. 하얀 작업복 반바지, 하얀 샌들, 하얀 헤드밴드를 매고, 크고 흰 플라스틱 테에 검은 렌즈를 끼운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상반신은 뱀처럼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으며, 근육은 탄력이 있고 유연해 보였다. 벨트 대신에 검은 실크 스커프 같은 것을 혁대 고리에 끼워서 왼쪽 허리 부근에서 묶어 놓았다. 풍선껌을 십고 있었다. 그는 문을 잡고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갔다. 그가 뒤에서 문을 닫았다. 거실은 길이가 30피트(약 9·)나 되는 것 같았으며, 막다른 벽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고, 발코니로 이어져 있다. 발코니 너머는 움직임이 없는 푸른 대서양이었으며,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만큼 넓었다. 레스터가 유리문 하나를 열고 발코니로 나가더니, 문을 닫고 철사로 정교하게 세공을 한 흰 철제 긴의자에 누워서 가슴에 로션을 바르고는 하늘을 보고 껌을 십는다. 손님 접대가 정중한 녀석이다. 나는 붉은 가죽을 입힌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방안에 온통 사진이 널려 있는데, 거의 모두가 메이너드와 유명인사가 찍혀 있는 4절판짜리 광택인화지다. 야구선수, 정치가며 영화배우 같은 것이 두 장쯤 있다. 사립탐정은 보이지 않았다. 공평하지 못한 녀석이다. 어쩌면 단지 눈이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레스터의 선 데크 쪽에서 휴대용 라디오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더 톱 포티. 매혹적인 음악을 껌을 십는 기계 같은 녀석이 듣고 있다. 오오, 세알라, 너와 나의 젊은 날이 그립도다. 버키 메이너드가 오른편 벽 안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해서 거실로 들어왔다. 밝은 황색 파자마 위에 밤색 실크 화장복을 입고, 폭이 넓은 비로드 벨트를 매고 있다. 수염은 자랐고, 눈이 부석부석하다.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이다. " 모두들 일찍도 일어나는군요, 스펜서. 나는 4시에 겨우 잠들었소." "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죠. 레스터가 무슨 이유로 뉴욕에 가서 패트리셔 애틀리를 만났는지 듣고 싶군요." 메이너드가 걸친 화장복 한쪽 깃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정중하게 쓸어내렸다. "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소, 스펜서. 그에게 물어보면 알겠구먼." " 외야 스탠드의 나같이 젊은놈들이 하는 소리가 아니니까 엉터리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지요, 버크. 레스터는 당신 심부름으로 간 거야. 나는 애틀리와 만났소. 프랭크 두어의 보디가드인 월리와도 만났고. ‘교외의 환상’이라는 영화도 보았고, 린다 러브와도 만났소. 아무래도 물어보는 방법이 잘못된 것 같군. 레스터가 뉴욕에서 무엇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가 알게 된 이상 우리 서로를 위해 악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일이오." " 레스터." 메이너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레스터가 라디오를 켜둔 채 거실에 들어오더니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커다랗게 핑크색 풍선을 불었다. " 놀랍군, 레스터." 내가 말했다. " 정말 큰 풍선이야. 자네는 풍선을 부는 데는 내 우상이야. 대단해." 레스터가 풍선을 십으면서 입으로 끌어들였다. 입술에는 조금도 묻지 않았다. " 꽤 시간이 걸렸을 거야." 내가 말했다. " 여러 시간 동안 연습을 했겠지, 틀림없이." 레스터가 메이너드를 보았다. " 스펜서와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자네도 옆에서 들어야겠어." 레스터가 미닫이 유리 문틀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나를 보았다. 메이너드가 가죽으로 입힌 의자 하나에 앉아서 말했다. " 자, 당신이 질문하는 의미가 대체 뭐요, 스펜서 ? " " 서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으니까, 때에 따라서는 의논해서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요. 의논하자는 거지, 레스터." " 요점을 말하시지, 스펜서. 레스터가 화내기 전에." " 당신은 프랭크 두어에게 돈을 꾸었는데 갚지 못했어. 그래서 당신이 지시하는 대로 속임수 경기를 하도록 마티 러브를 협박하고, 그 정보를 두어에게 제공하여 그에게 당하는 것을 면하고 있소." " 프랭크 두어가 누군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면 먼저 나를 상대해야만 돼." 레스터가 말했다. " 그래,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큰 문제지. 이번에 그와 호그가 오게 되면 혼을 내주어야 될 거야. 그가 겁을 먹고 기절하는지 한번 시험해 보는 거야." " 당신 이야기는 듣기 싫어. 까불고 있어." 레스터가 팔짱을 풀고 내게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 레스터." 메이너드가 말했다. "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레스터가 다시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섰다. 영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 당신이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생각해 냈는지 나는 모르겠소, 스펜서. 하지만 가령 당신이 하는 말이 맞다고 치지.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당신과 어떤 상관이 있다는 거요 ? 작가로서 지금부터 책을 쓰려는 당신과 ? " " 내가 작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 텐데 ? " " 내가 ? 난 그런 줄은 전혀 몰랐어. 작가라고 당신이 내게 그러지 않았나 ? " 남부 사투리가 강해졌다. 정신적인 압력으로 진짜 사투리가 더 강해진 것인지, 아니면 가짜 사투리가 더 가짜의 심도를 깊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 그랬지. 그래서 당신이 즉시 두어에게 알려서 놈에게 내 뒷조사를 시켜 당신네 둘 다 내가 사립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잖소." " 이거 놀라겠군." 메이너드의 양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 사립탐정이라. 하지만 그렇더라도 질문이 달라질 건 없지. 당신이 노리는 것은 뭐요 ? " " 러브 부부에 대한 협박을 그만두기 바라는 거요." " 그래, 가령 내가 그 부부를 협박하고 있다고 치고, 그만둘 경우엔 어떤 이익이 생기나 ? " " 글쎄, 나는 고맙게 생각하겠소." 미닫이문에 기대선 채 레스터가, " 미치겠군." 하고 느릿느릿 말했다. " 그 밖에 다른 것은 ? " 메이너드가 말했다. " 프랭크 두어에게 대처하는 데 거들어 주겠소." 레스터가, " 미치겠군." 하고 이번에는 더욱 느리게 말했다. " 여하튼, 스펜서, 당신이 걱정해 주는 것에는 아주 고맙게 생각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에는 이해 안되는 점이 몇 가지 있소. 우선 당신이 고맙게 생각해 주는 건 내게는 신나지도 우습지도 않다는 거요, 알겠소 ? 둘째로, 설령 내가 프랭크 두어에게 애를 먹고 있다고 해도 당신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어. 셋째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협박 같은 것은 하지 않았소. 하고 있나, 레스터 ? " 레스터가 고개를 흔들었다. " 그러니까 당신이 여기에 찾아온 것은 헛수고인 것 같소. 그러나 당신이 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점은 흥미가 있어. 그렇지, 레스터 ? " 레스터가 끄덕였다. 선 데크의 라디오에서 디스크 자키가 ‘록 클래식’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 내가 생각하기에는 모두들 악일은 생각지 않는 것 같군." 제기랄, 놈의 말버릇을 닮아가는군. " 무슨 뜻이지 ? " "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은 그때만 피해 보려는 해결책밖에 안돼요. 마티 러브가 악으로 몇 년이나 던질 수 있을 것 같소. 5년이오. 이보시오, 그의 야구인생이 끝나버리면 두어가 당신을 그냥 놓아둘 것 같소 ? 두어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 돈을 우려낼 텐데." " 두어는 내게 맡겨." 레스터가 말했다. 말투를 바꿀 수가 없는 모양이다. " 레스터." 내가 말했다. " 자네가 두어를 해치울 수는 없어. 두어를 상대한다는 것은 술집에서 관광객을 때려눕히거나 맨손으로 벽돌을 깨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른 거야. 월리 호그는 프로 보디가드야. 자네는 아마추어고.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은 한여름의 민들레처럼 날려버릴 수 있어." " 미치겠군." 레스터가 말했다. 자기에게 딱 어울리는 대사라고 생각되어 그 한마디로 계속 버틸 모양이다. 메이너드가 말했다. " 그 녀석들이 그렇게 세다면, 스펜서. 당신은 무슨 수로 거들어 주겠다는 거요 ? " " 나도 프로니까, 버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도 알고 있다는 거요. 프랭크 두어 같은 녀석과 정면으로 맞붙어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부근에서 어정거릴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나는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꾀하는 방법을 알고 있소.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당신들 어릿광대들은 모른다는 거요." " 당신은 그렇게 센 것 같지 않은데 ? " 레스터가 말했다. " 그것이 자네와 내가 다른 점이야, 레스터. 음악에 대한 취향은 별문제로 하고 말이야. 나는 외모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 않아. 자네는 마음에 두지. 나는 내가 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어. 자네는 증명해 보여 주지 않고는 못 배기지. 지금 같은 말을 월리 호그에게 했다면, 자네가 싸울 준비를 하고 풍선을 부는 사이에 놈은 자네 코에다가 총알 세 방을 쏘았을 거야." 레스터가 싸울 자세를 갖추었다. 두 다리를 굽히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왼손을 악으로 내밀고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과거의 유명한 권투선수 존 L 설리번의 오래 된 사진과 비슷했다. " 시험삼아 덤벼 보면 어때, 이 자식아." 나는 일어났다. " 레스터, 좋은 것을 보여주지." 권총을 빼서 그의 이마를 겨냥했다. " 이것은 38구경의 콜트 디텍티브 스페셜이야.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자네가 아무리 무술에 뛰어나도 전혀 쓸모가 없어." 메이너드가 말했다. " 자, 자, 스펜서......" 레스터가 권총을 보고 있었다. " 자, 그걸 내려, 스펜서." 메이너드가 말했다. " 레스터. 그쪽에 좀 쉬고 있게." " 네놈이 그 권총만 안 가졌다면." 레스터가 말했다. " 그런데 그 점이 문제란 말일세. 레스 베이비. 나는 총을 가지고 있거든. 월리 호그도 권총을 가지고 있어. 자네는 가지고 있지 않아. 프로라는 것은 권총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보다 먼저 뽑는 사람이란 말이야." " 자, 침착해, 좌우간 침착해." 메이너드가 말했다. " 네놈이 언제나 그 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 테지, 스펜서 ? " " 잘 들어, 아가야. 자기가 아기와 같다는 것을 알았지 ? 자네는 또 한 번 잘못 판단했어. 나는 언제나 권총을 가지고 있어. 자네는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잊고 정작 써야 할 때에 쓰지 못하지만, 나는 절대로 잊지 않고 가지고 다니지." " 레스터." 메이너드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소리가 컸다. " 침착해. 알겠어 ? 이젠 가만 좀 있어. 난 이런 일은 딱 질색이야." 레스터는 공격자세를 천천히 풀고 문 손잡이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고, 한쪽 눈꺼풀이 겁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권총을 도로 넣었다. " 저 친구를 내 옆에서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시지요. 그렇잖으면 혼을 내줄 거요." 내가 메이너드에 말했다. "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스펜서. 레스터는 금방 흥분하는 버릇이 있지만, 바보는 아니오. 그렇지, 레스터 ? " 레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이너드는 입술 위에 땀이 솟아나 있었다. " 가령 내가 당신과 공동전선을 펴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될 경우 · 10· " 메이너드가 말했다. " 당신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소 ? 두어가 이리로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할 때에 어떻게 막을 생각이오 ? " "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이젠 짜고 하는 경기는 손 떼고, 협박은 하지 않겠다고 하겠소. 그리고 그에게 수입이 다소 줄겠지만, 아무도 죄를 따지고 들지는 않을 거라고 하고. 서툰 짓을 하면 곧 경찰이 개입해서 누군가가 죄인이 될 거라고 하는 거요. 게다가 죄를 추궁당할 사람은 바로 그 친구라고 가르쳐 주고, 이쪽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경찰이 발견할 수 있도록 증거를 숨겨두었다고 하겠소." " 내가 그에게 지고 있는 빚은 어떻게 되는 거요, 가령 있다면 말이오만 ? " " 러브가 등판했을 때 그가 돈을 걸었다면 빚은 이미 옛날에 다 갚고도 남았을 거요." " 하지만 두어는 더 욕심을 낼지도 모르고, 내게는 그런 돈이 없소." "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 내 일이지요." " 그거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점이오." 메이너드는 얼굴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 어떤 식으로 그를 설득하겠다는 거요 ? " " 모르지. 놈의 비즈니스 센스에 호소하겠소. 지금의 그 짓을 그만두는 게 계속하는 것보다 유리하다,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벌 수 있다, 세상에는 얼빠진 당신 같은 사람과 러브 같은 사람만 살고 있는 건 아니다......" 메이너드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전히 바깥 선 데크의 라디오에서 더 톱 포티가 흐르고 있었다. 레스터는 문에 기대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만(만)에서는 여전히 흰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메이너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해. 스펜서, 당신 말대로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나를 못살게 굴지는 않고 있소. 그런데 당신이 말한 그런 방법으로 나간다면 못살게 굴 가능성이 많아." " 두어는 내게 맡기라니까요, 버키." 유리문에 기대섰던 레스터가 말했지만, 마치 넋두리 같은 투였다. " 자네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아까 그것이 진짜 싸움이었다면 너는 이 스펜서에게 당하고 말았을 거야. 분명히 말해 두겠어, 안돼. 나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추호도 없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일이 잘 되어왔어." "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소, 버크." 내가 말했다. " 지금은 내가 한몫 끼어 있으니까. 더구나 나는 여기저기 조사해 가면서 말벌을 화나게 할 생각이오. 이 이상 엉터리 시합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해."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메이너드가 말했다. " 그러나 나는 당신과 프랭크 두어 중 어느쪽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지금으로서는 프랭크 두어 편에 서겠소.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 두지. 지금까지의 이야기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나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겠소." 지당한 말씀이다. 가령 내가 그였다고 해도 같은 길을 골랐을 것이다. " 레스터." 메이너드가 말했다. " 스펜서 씨를 현관까지 배웅해 주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혼자서 나가겠소. 레스터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좋겠어. 저렇게 화가 나 있으니 문을 때려부수고 내 다리를 잘라버리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메이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리아 같은 매부리코 끝에 땀이 고여 있었다. 뒷걸음으로 방에서 나올 때 마지막으로 눈에 뜨인 것은 그 땀방울이었다. 제 22 장 하버 타워스 가까이에 수족관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까지 걸어갔다. 대낮이었으므로 안에는 거의 사람이라고는 없었으며, 어둡고 썰렁한 것이 바깥 거리와는 별세계였다. 수조 둘레의 나선형 통로를 올라가면서 상어, 능성어, 바다 거북,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들이 각기 다른 높이에서 소리없는 모양을 만들고, 투명한 물 속을 빙글빙글 미끄러지듯이 헤엄쳐 다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물고기들은 나를 무시하고 있고, 일종의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며 빙빙 도는 사이에 각기 다른 물고기들도 무시하고 있는 듯했다. 나선형 통로는 걸리적거리는 것이 전혀 없고, 수족관 안은 한없이 넓게만 보였다. 평평한 수조의 아래쪽에는 바닥에 조명장치가 되어 있어서 물이 차가운 녹색으로 비치고, 밝은 물 속에서 조그만 물고기가 빛을 배경으로 검게 떠올라 재빨리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현장견학을 온 국민학교 2학년쯤 되어보이는 학생들 몇몇이 한 무리를 이루고 들어왔다. 뿔테 안경을 쓴 자그마하고 통통한 수녀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물고기 관찰을 재빨리 끝내고는, 아이들은 이미 물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곳에 온 진짜 목적은 물고기가 아니고 수족관 자체의 느낌을 맛보는 것에 있는 듯이 건물과 그 넓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선형 통로를 뛰어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위아래에서 발코니 너머로 서로 고함치는 것이었다. 수녀는 억지로 조용히 하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넓은 공간과 어둠이 아이들의 소음을 빨아들여 버리는 것 같았다. 수족관 안은 아직 정적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수조의 두께 6인치(약 15··)짜리 유리창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작은 몸집에 영양상태가 좋은, 두려움 같은 것은 느끼지조차 않는 상어가 미끄러지듯 계속 돌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사태의 처리를 잘못했다. 그 점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프랭크 두어를 화나게 했는데, 두어는 머리가 정상이 아니다. 메이너드가 내 요청을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 두어가 메이너드를 죄어가던 것을 중지할 리도 없고, 나와 흥정을 할 리도 없다. 아니면,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자존심이 걸려 있어서 어떻게 처신하도록 내게 설득을 당하거나 강요당할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조그만 아이가 창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내 악에 끼어들었다. 벨트가 너무 길어서 몸을 한 바퀴 반 돌고도 남은 부분이 등의 벨트 고리에 꽂혀 있었다. 다른 아이가 와서 함께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미 수조에서 밀려나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사람을 밀어내는 방법을 터득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선형 통로를 따라 내려와 첫번째 발코니에서 펭귄을 바라보았다. 펭귄은 수족관의 조화를 깨고 있다. 유리벽은 없고, 구경꾼들과의 사이에는 6피트(약 1.8·)의 공간이 있을 뿐이고, 칸막이도 없다. 물고기와 펭귄을 구별하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그것을 막는 것이 없다. 불쾌했다. 투명한 물 속의 소리없는 물고기는 환상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펭귄의 악취는 현실의 것이었다. 나선형 통로를 내려와서 수족관을 나온 순간 뜨거운 햇빛이 소리를 내듯이 부딪쳐 왔다. 경찰에 알리면 두어와 메이너드를 형무소로 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랬을 경우, 린다 러브는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 것이고, 마티 러브는 아마 야구계에서 추방되겠지. 린다에게 공식석상에서 고백시킴으로써 두어와 메이너드에게서 협박자료를 빼앗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차의 뚜껑을 내려놓아 두었으므로 좌석이 뜨거워, 들어가 앉으니 불쾌했다. 메이너드를 두어에게서 떼어낼 수는 없다. 두어가 열쇠를 쥐고 있는데, 그 두어를 다루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가는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 이렇게 되고 보면 타협한다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러브 부부에게로 돌아갔다. 로비의 도어맨이 위층으로 연락해서 아파트의 입구에 마티 러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으며, 턱의 근육이 솟아올라 있었다. " 개자식."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 그럴지도 몰라." 내가 말했다. " 그러나 그런 태도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돼." " 이번에는 뭘 노리고 있소, 우리들 침실에 도청장치라도 할 셈이오 ? " " 그 이야기를 복도에서 하고 싶진 않소." " 당신 생각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야. 집에 들어가서 악취를 풍겨대는 짓을 하게 내버려둘 수 없어." " 잘 들어요. 나 자신도 비참한 기분이고 당신의 기분도 압니다. 무리도 아니라고는 생각지만, 서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고, 또 당신이 복도에서 이렇게 소리친다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 내가 소리나 지르고 있는 것을 고맙다고 생각하시지. 내가 때려주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 줄 아시라고." 린다 러브가 문 악 남편 옆으로 왔다. " 들어오게 해요, 마티. 우리는 아주 쓰라린 처지에 있는 거예요. 소리쳐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아요. 그를 때려도." " 이 빌어먹을 인간이 일을 저질렀단 말이야. 이 사람이 주제넘게 끼어들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었단 말이야." " 원인은 그에 못지않게 내게도 있어요. 매춘부는 나지 스펜서가 아니에요." 러브가 아내를 보았다. " 두 번 다시 그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절대로. 내 집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어. 아들에게 그런 소릴 듣게 할 순 없어." 린다 러브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이는 집에 없어요, 마티, 보육원에 있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들어와요, 스펜서." 두 손으로 러브의 오른팔을 잡고 문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들어갔다. 나는 소파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러브는 앉지 않았다. 우뚝 버티고 선 채 두 손을 불끈 쥐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입 놀리는 것을 조심하시지, 스펜서. 나는 당신을 때려주고 싶어서 뱃속이 뒤집힐 지경이오. 서툰 입을 놀렸다간 두드려패 줄 거요." " 마티, 오늘 아침 나를 박살내겠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 세 번째요. 더구나 성공 가능성에서도 세 번째고. 나는 당신처럼 공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내 몸을 건드리기도 전에 나는 당신을 병원으로 보낼 수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소." 나는 여러 녀석들에게 큰소리로 욕을 먹어 기분이 우울해 있었다. " 당신 생각만 그럴 뿐이지." 내게도 자존심이 있다. " 확실하다니까."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린다 러브가 남편의 팔을 놓고 악으로 돌아 남편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 그만둬요, 마티. 둘 다 어른이 되어가지고. 여기는 당신들 두 아이가 누가 더 센지 팔씨름이나 하는 놀이터가 아니에요. 여기는 우리들의 집이고, 장래의 희망의 터전이며, 꼬마 마티와 우리 부부의 인생의 보금자리예요. 어떤 문제가 되든지 팔씨름같이 해결할 수는 없어요." 차츰 목이 메어지더니 러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것도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 그러나, 린다. 남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남편의 가슴에서 말소리는 똑똑지 않았으나 린다가 그에게 소리쳤다. " 그만해요. 남자라는 소리는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말아요." 나는 담배를 끊은 것이 애석했다. 두 손을 어찌해야 좋을지 낭패스러웠다. 러브가 아내를 안고 머리 꼭대기를 턱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 나는 모르겠어." 그가 말했다. "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어." " 나도 마찬가지요. 그러나 당신이 앉는다면 의논해서 좋은 생각을 짜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앉아요, 마티." 린다 러브가 남편의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밀었다. 그가 앉았다. 아내가 옆에 앉아서 얼굴을 돌리고 클리넥스로 눈물을 닦았다. " 나는 모르겠어." 러브가 다시 말했다. 긴의자에 앉아서 두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마주 잡은 손을 무릎 사이에 끼고서 엄지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 애스킨은 어느 정도 알고 있소 ? " " 아무것도.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오. 그래서 모든 것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를 고용한 거요. 그는 시합이나 당신에게 수상한 점은 없다고 믿고 싶어하고 있소." " 그럼 · 10· " 러브가 말했다. " 나는 진정이오. 좋은 생각이 있소 ? " " 내가 어제 한 말을 부인에게서 들었소 ? " 러브가 끄덕였다. " 나는 두어와 이야기했고, 메이너드와도 이야기했소. 두어는 메이너드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메이너드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요. 메이너드는 겁에 질려 있소." " 메이너드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정말로 빚이 있소 ? " " 그래요." "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군." " 참을 수 있겠소 ? " "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소." 러브가 말했다. " 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 " " 모든 것을 털어놓는 방법도 있지." 린다 러브는 눈물을 다 닦고 다시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 그렇군요." 그녀가 말했다. " 안돼." 러브가 말했다. " 마티." 린다가 말했다. " 안돼." " 마티." 린다 러브가 다시 말했다. " 우리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요. 나는 견딜 수가 없어요. 내 죄의식에도 견딜 수 없으며, 그들에게 돈벌이를 시키기 위해서 당신이 시합에 질 때마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 언제나 질 필요는 없을 거야. 때로는 특정한 이닝의 내기에 대해서 상대에게 한두 점 내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어." " 말씨름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마티. 편지가 올 때마다 당신은 그 뒤의 1주일은 굉장히 풀이 죽어 있어요. 당신은 팀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버틴다는 오랜 신념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어요. 당신은 죽도록 괴로워하고 있고, 나도 같은 마음이에요." " 당신 이름이 전국에서 소문거리가 되게 하는 짓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어. 자기 엄마가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을 저 아이에게 듣게 해도 좋다는 거야 ? 차라리 그 아이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면 어때 ? " " 소문 같은 것은 언젠가는 사라져요, 마티. 그 아이는 겨우 세 살이에요." " 하지만 불펜에서는 좋은 화제가 된단 말이야. 내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녀석들이 웃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거야 ?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도 문제가 안될지도 모르지. 내가 엉터리 시합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 던질 일도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길 바라나 ? " " 그렇지는 않지만 지금 이 상태도 견딜 수 없어요, 마티." " 그래, 뉴욕에서 손님에게 다리를 벌리고 있을 때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할 걸 그랬군." 나는 명치 끝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린다 러브는 꺾이지 않았다. 말없이 남편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러브였다. " 빌어먹을, 용서해 줘, 린다." 아내를 안았다. 린다는 몸을 빼내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막대기처럼 굳어져서 안긴 채 눈은 방 저편 먼 곳의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제기랄." 러브가 다시 말했다. " 아아, 제기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야 ? " 제 23 장 " 야구를 할 수 없게 되면 어쩔 셈이오 ? " 내가 물었다. " 코치." " 코치가 될 수 없으면 ? " " 스카우터라도." " 그런데, 스카우터도 못되고, 코치도 못되면 ? 야구계와 완전히 인연이 끊기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 " 러브는 다시 엄지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 모르겠소." " 대학에서 뭘 전공했소 ? " " 체육." " 뭘 하고 싶소 ? " " 야구를 하고, 그 뒤에는 코치." " 내가 하는 말은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거요." 러브의 눈이 깜박이지도 않고 엄지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다 러브는 커피 테이블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 러브 부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 " 고개를 흔들었다. " 이번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출장정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 " " 절대로 틀림없어요. 나는 몇 게임을 일부러 버렸소. 커미셔너 사무국이 그것을 안다면 내 야구생활은 완전히 끝나는 거요." " 내가 고백하면 어떻게 되나요 ? " 린다 러브가 말했다. " 내가 내 과거에 대해서 공표하고, 도박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어때요 ? 마티까지도 나에 관한 것은 전혀 몰랐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 그래도 놈들은 내가 시합을 버린 일을 꼬투리로 협박할 수 있어." "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소." 내가 말했다. "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두어를 내쫓아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메이너드와 흥정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메이너드가 당신 일을 터뜨릴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의 일도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까. 그도 직업을 잃게 됩니다. 메이너드와 상대한다면 당신은 대등한 처지요." " 어쨌든 마찬가지요." 러브가 엄지 손톱에서 눈을 들었다. " 나는 린다에게 입을 열게 하지 않겠소." 린다 러브도 나를 보고 있었다. " 두어를 쫓아버릴 수가 있나요, 스펜서 ? " " 뭐라고 말할 수는 없소. 안된다면 우리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어요. 쫓아버리지 않을 수가 없지." " 린다는 이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해선 안돼. 대체 나를 어떤 남자로 보고 있는 거야 ? " " 어째서지요 ? " 린다 러브가 말을 하자 우리 두 사람 다 마티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을 나는 깨달았다. " 몰라." "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고백하겠어요." " 안돼." 러브가 말했다. " 마티, 이분이 준비해 주면 나는 말하겠어요.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당신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나는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우리와 야구 둘 다예요. 그러나 한쪽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이 상처를 입어야만 해요. 그것이 내 탓인 줄 알고 있는 것이 너무 괴롭고, 지금의 이 긴장과 공포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만일 스펜서 씨가 다른 한 남자에 대해서 무슨 수를 쓸 수만 있다면, 내가 고백해서 모두가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러브가 나를 보았다. " 나는 찬성하지 않소, 스펜서." " 애들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지, 마티." 내가 말했다. " 세상은 그렇게 깨끗한 게 아니오.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에 말려들어 있는 거요. 만일 불펜에서 자신이 남에게 조롱당하고, 아내가 다소 부끄러운 입장이 된다는 것 정도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소. 완벽하다고는 못해요. 전보다 좋아졌다고 생각해야지." 러브는 고개를 흔들었다. 린다 러브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도 온몸이 굳어져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차츰 얼굴에 핏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러브가, " 나는......" 하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했다. " 우리들이 꼭 지금 여기서 의논할 필요는 없소. 두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는 내게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시오.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가 내게 먼저 시비를 걸어 올지도 모르지. 어쨌든 상황을 좀 두고봐야겠소." " 무슨 일을 시작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에 우리와 의논해 주시오." 러브가 말했다. 나는 끄덕였다. 린다 러브가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일어나서 방에서 나왔다. 조심하라든가, 이 싸움은 절대로 이기자든가,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방법이 문제라든가, 그런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내가 그곳을 떠나면서 들은 것은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뿐이었다. 바깥인 매사추세츠 가에 나와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 10· 1시 반, 집으로 돌아갔다. 부엌에서 맥주 깡통을 하나 땄다. 요새는 암스테르담을 좀처럼 구할 수 없어서 국산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러나 크게 다른 것은 없다. 지금까지 마신 것 중 가장 싸구려 맥주도 맛이 좋았다. 아파트는 아주 조용했다. 에어컨의 낮은 진동음이 조용한 것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두어가 문제다. 그 일에서 그를 물러나게 할 수만 있다면 메이너드를 설득하는 것쯤은 가능하다. 요는 두어에 대해서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를 생각해 내야만 한다. 맥주를 다 마셨다. 두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스펜서의 법칙 중 하나를 적용했다 · 10· 생각이 정해지지 않을 때에는 무엇이든 요리해서 먹어라. 셔츠를 벗고 다시 맥주 깡통을 따고는 냉장고 안을 살펴보았다. 돼지 갈비. 그렇다. 리퀴드 스모크를 잔뜩 쳐서는 오븐에 넣었다. 불은 약하게. 전에 미니애폴리스의 찰리 뭐라고 하는 레스토랑에서 찰리가 만들었다는 소스를 친 바베큐 돼지 갈비를 먹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똑같은 소스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해 오고 있는 터다. 아직 똑같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비슷해지고 있다. 이번에는 케찹 대신에 칠레 소스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두어가 좋아하는 것은 뭐냐 ? 그것은 이미 생각했다 · 10· 금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 고통인가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게 손을 얻어맞은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칠레 소스에 넣는 붉은 설탕의 양을 조금 줄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내가 정면승부로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기분나쁜 녀석. 그때의 반응은 단지 손이 아파서 운다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마늘을 두 개 넣었다. 그러나 그전에 맥주를 한 깡통 더 따자. 마늘 냄새를 없애는 데 좋을 거야. 어쨌거나 나는 오늘 놈에게 의사표시를 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 레몬을 두 개 짜서 즙을 소스에 섞었다. 돼지 갈비 냄새가 부엌에 가득찼다. 냉방 스위치를 올렸는데도 오븐의 열로 부엌이 더워서, 훌렁 벗어버린 가슴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두어와 만나는 것과, 이쪽에서 바라는 대로 되도록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이 순간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 그를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입에서 거품을 내는 남자를 본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를 죽인다고 한다면 돼지(호그)도 죽여야만 한다. 붉은 포도주를 조금 넣으면 어떨까 ? 붉은 포도주는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다. 반 컵 넣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 두어가 죽어버리면 돼지는 부리뽑힌 잡초처럼 시들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확인해 보지 않고 끝내게 되면 가장 좋다. 타바스코(멕시코산 붉은 고추)를 한번 부려 봐 ? 확인해서 나쁠 건 없겠지. 또 맥주를 땄다. 가령 내가 죽는다면 부리째 뽑힌 잡초처럼 시들어버릴 것이다. 소스를 불에 올려놓고 이제 뭘 먹을까 하고 생각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화로 월리와 프랭크를 불러내어 둘이서 이쪽 조건에 동의할 때까지 요리를 만들어 주어도 좋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라고도 하니까. 채소를 넣어두는 서랍에 즈키니가 있기에 얇게 잘라서 밀가루를 발라 옆에다 두고, 맥주로 밀가루 반죽을 만들었다. 밀가루가 들어 있는 대접에다가 맥주를 넣을 때는 언제나 가슴이 아프지만, 결과는 아주 좋다. 그것이 나다. 미스터 결과. 그런데 프랭크 두어를 어떻게 하기로 했더라 ? 바베큐 소스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기에 푹 익으라고 불을 약하게 줄였다. 맥주로 반죽한 가루에 타바스코를 두 통 넣고 휘저어 맥주 안에 든 이스트가 가루에 작용하도록 곁에 놓았다. 냉장고 안을 보았다. 지난번 일요일에 수잔 실버맨의 집에서 야구를 보고 라인 포도주를 마시면서 둘이서 오후 내내 빵을 만들었다. 그녀가 가루를 섞고 내가 반죽을 하고, 끝났을 때에는 구워내어 포일로 싼 덩어리(로프)가 열두 개나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여섯 개를 가져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네 개 남아 있다. 한 개를 꺼내어 포일에 싼 채 오븐에 넣었다. 수즈에게 물어보면 프랭크 두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바베큐 소스에서 체리 맛이 나게 하는 방법, 또는 내가 요즘 너무 많이 마시는지에 대해서 무슨 의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계를 보았다 · 10· 3시 반. 그녀는 이미 학교에 가 있다. 전화를 걸어서 열 번 신호가 울렸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끊었다. 브렌다 롤링 ? 안된다. 나는 말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브렌다는 놀거나 농담하는 상대이며, 피크닉에서 먹을 것은 멋지게 준비하지만, 어려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나 자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돼지 갈비가 다 되었다. 빵이 뜨거워졌다. 얇게 자른 즈키니를 맥주를 넣고 만든 묽은 가루반죽에 살짝 넣었다가 올리브 기름을 조금 붓고는 튀겼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즐겁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 제 24 장 그후 마시고, 먹고, 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저녁때까지 생각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이 정해져 있었다. 하는 방법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찰스 강가에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른 일을 생각하면서 산책로를 달렸는데, 평소의 3마일(약 4.8··)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각을 집중하지 않으면 시간이 더 걸린다. 알링턴 가의 인도 옆에서 스트로 드라이브로 뛰어 건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지붕에 조그만 안테나를 단 검은 포드가 옆에 와서 멈추고는 조수석 창으로 프랭크 벨슨이 머리를 내밀었다. " 타." 뒷좌석에 올라타니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 한동안 이 부근을 돌게, 빌리." 벨슨이 다른 경관에게 말하자, 차는 서쪽인 올스턴으로 향했다. 벨슨은 악으로 숙인 채 대시보드(계기판)의 라이터로 여송연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자 이쪽을 향해서 좌석 위에 왼팔을 올려놓고 나를 보았다. " 정보에 의하면 프랭크 두어가 자네를 없앨 모양이야." " 프랭크가 직접 ? " " 정보제공자는 그렇게 말했어. 자네가 어제 놈에게 아픈 꼴을 보여줘서 놈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벨슨은 마르고 피부가 팽팽한 사람이며, 검은 수염을 매끈하게 깎았다. " 마틴이 자네에게 귀띔해 줘야 한다고 그러더군." 우리는 강이 구부러진 곳에서 왼쪽으로 계속 달려서 솔저스 필드 로(路)로 나와 BZ국(局)의 라디오 송신탑을 지나갔다. " 그런 일은 두어 대신에 월리 호그가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 그 녀석도 하지." 벨슨이 말했다. " 그러나 이번 일은 놈이 직접 한다는 거야." "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 " 그렇다고 해서 자네를 때려눕히는 데 월리를 데리고 다닐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아니야." 빌리가 안전지대를 넘어 U턴 해서 시내 쪽으로 돌아갔다. 젊고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고, 풍성한 금발 수염을 기르고, 머리칼은 귀가 덮이게 깎았다. 벨슨의 구레나룻은 관자놀이 부근에서 짧게 깎여 있다. " 그 정보제공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 " 벨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까지는 늘 틀림없었어." " 이번 정보에 얼마 주었나 ? " " 100달러." 벨슨이 말했다. " 미안해." 벨슨이 어깨를 움츠렸다. " 회사 돈이야." 우리들은 하버드 스타디움 옆을 지나고 있었다. "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자네나 크와크에게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 " 벨슨이 고개를 저었다. " 숨어버리면 어떨까 ? " 빌리가 말했다. " 두어는 악으로 10년이나 20년이면 죽을 성싶은데." " 놈이 그렇게 세다고 생각하나 ? " 빌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벨슨이 말했다. " 문제는 세고 약하고가 아니야. 미쳤다는 점이지. 두어는 미친놈이야. 일이 생각대로 안되면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죽이고 싶어해. 놈이 어떤 남자를 마티에테(날이 긴 도끼)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말 그대로 산산조각을 내버린 모양이야. 미치광이지." " 산산조각의 명수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내면 어떻게 안될까 ? " 빌리가 코방귀를 뀌었다. 벨슨은 무시해 버렸다. 우리는 켄모어로 가는 출구를 지났다. 내가 빌리에게 말했다. " 내 집 알고 있나 ? " 그가 끄덕였다. 벨슨이 말했다. " 권총 가지고 있나 ? " " 뛸 때에는 권총을 두고 뛰지." " 그렇다면 뛰지 말게. 내가 두어라면 우리가 자네를 태운 그 인도 옆에서 간단히 해치울 수도 있어." 나는 프로에 관해서 레스터에게 설교하던 생각이 났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알링턴에서 고속도로를 내려가 그대로 말바라를 달렸다. 빌리가 내 아파트 옆에 차를 세웠다. " 일방통행로를 반대쪽으로 가고 있어." 내가 빌리에게 말했다. " 아주 가까이에 교통순경이 없어야 할 텐데." 빌리가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 고마워." 벨슨에게 말했다. 그도 따라 내렸다. " 방에까지 함께 올라가겠어." " 나하고 ? 프랭크, 꽤 자상한데." " 무사히 아파트에 집어넣고 오라고 크와크가 시키더군. 그 다음은 자네 혼자야. 우리는 애기 봐주는 서비스는 안해. 설령 자네를 위한 것이라도, 베이비." 내가 아파트의 문을 열쇠로 열 때 벨슨이 윗도리의 단추를 푸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들어갔다. 내가 안을 여기저기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벨슨이 윗도리의 단추를 채웠다. " 조심해." 그가 돌아갔다. 내가 악쪽 창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벨슨이 차에 올라타고 빌리가 U턴 해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 10· 라는 생각이 차츰 굳어졌다. 옷장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어 총알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는 욕실에 들어가면서도 가지고 갔다. 샤워를 하고 있는 사이에는 변기 뚜껑 위에 놓아두고, 옷을 입는 동안에는 침대 위에 놓아 두었다. 옷을 다 입고는 홀스터를 뒷주머니에 넣고 벨트에 클립을 걸었다. 몸에 익은 면바지에 줄무늬가 들어 있는 흰색의 고무바닥 운동화, 왼쪽 가슴에 비버 무늬가 있는 검은 폴로 셔츠 차림이었다. 아직 악어표 셔츠를 입을 신분은 아니다. 시어서커(린네르 천)를 입고 가벼운 금속테 선글라스를 쓰고, 현관의 거울 악에 서서 옷차림을 점검했다. 전투용 복장이다. 바깥 복도의 찬장 자물쇠를 열고 12구경의 아이버 존슨의 펌프식 산탄총과 더블루오 총알을 한 상자 꺼냈다. 아파트를 나섰다. 복도에서 산탄총을 아래에 내려놓고 문의 경첩 쪽과 문기둥 사이, 바닥에서 2인치(약 5··) 위에 조그만 이쑤시개를 끼우고는 문을 닫았다. 틈새의 끝만 보이도록 이쑤시개를 꺾었다. 누가 들어갔었는지 알게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산탄총을 집어들고 차 세워둔 곳으로 나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입주자 하나와 마주쳤다. " 어느새 사냥인가 ? " 그가 말했다. " 그래." 밖에 나와서 산탄총과 총알 상자를 차의 트렁크에 넣고 잠그고는, 차에 올라 뚜껑을 내리고 북해안으로 향했다.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이번에는 행동할 장소를 찾아내야만 된다. 93호선 도로로 보스턴을 나와 서머빌과 메드퍼드를 빠져나왔다. 웰링턴 서클의 맞은편 미스틱 강가에 아직도 갈대와 한 발이나 되는 벼과의 풀이 그대로 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네온과 지독한 배기 가스로 아주 불쾌했다. 메드퍼드 스퀘어를 지나 93호선 도로를 버리고 린 펠스 파크웨이를 동쪽을 향해 숲을 마주보고 달렸지만 찾고 있는 것은 눈에 뛰지 않았다. 메드퍼드를 나와 멜로즈로 들어갔다. 펠스웨이에서 나와 스포트 폰드 주변을 달려 스토넘 동물원을 지나서 다시 멜로즈로 돌아왔다. 마음에 드는 장소가 아직도 눈에 뛰지 않는다. 멜로즈를 빠져나와 호수 옆의 붉은 점토가 깔려 있는 테니스 코트를 지나 하이 스쿨과 크리스천 사이언스 교회 옆을 지났다. 1호선 도로로 나오기 직전에 브레이크 하트 레터베이션으로 들어갔다. 스케이트 링을 지나면 도로가 좁아지고 일방통행로인 1차선이 된다. 한번 수잔 실버맨과 피크닉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도로가 계속 일방통행이며, 숲속을 빙빙 돌아서 다시 그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숲속에는 승마하는 길, 호수, 피크닉에 알맞은 자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보호구에서 30야드(약 27·) 들어간 곳에서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 좁은 임시 포장도로 옆으로 다가가서 덤불을 범퍼로 밀어붙이기도 하고 타이어로 깔아뭉개기도 하면서 악으로 나아가 차를 세우고 내렸다. 도로에서 조그만 언덕이 비탈져 있고 그 중간에 도려낸 듯이 움푹 들어간 곳이 있다. 농구 코트 정도의 넓이에 아무런 모양 없이 만들어진 풀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거의 중앙에 윗부분이 편편한 화강암이 있다. 한쪽이 만곡져 있고, 지면에 닿은 부분은 어찌 보면 상어의 지느러미와 비슷한데, 사람 키보다 높다. 움푹 들어간 곳의 주변은 노란색 점토이고, 흐르는 물에 침식되어서 생긴 고랑이 있고, 키가 큰 나무가 여기저기에 서 있다. 급한 비탈이 위로 올라가면서 차츰 완만해지고, 그 주변에는 소나무, 자작나무, 옻나무 등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다. 움푹 꺼진 곳 밑으로 내려가서 화강암 옆에 섰다. 높은 쪽은 내 키보다 1피트(약 30··)는 더 높다. 덥고 조용한 숲속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새소리도 들린다. 다람쥐가 한 마리 자작나무를 타고 내려와서 그대로 단풍나무로 올라갔다. 나는 코트를 벗어서 바위에 걸쳐놓았다. 고랑이 있는 비탈을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움푹 꺼진 둘레를 한 바퀴 돌며 나무들과 태양을 보고 밑을 보았다. 여기면 됐다. 시계를 보았다 · 10· 2시다. 내려가서 윗도리를 입고는 차를 몰고 환상도로(環狀道路)를 달려 보호구역에서 나왔다. 출구인 길가에 조그만 쇼핑 센터가 있고, 퓨리티 슈프림 슈퍼마켓 악에 세워놓은 몇 대의 차들 사이에 주차했다. 슈퍼마켓에 공중전화가 있기에 거기서 프랭크 두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없었지만,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정중한 사나이가 받으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전해 주겠다고 했다. " 좋아. 내 이름은 스펜서야. 영국 시인과 같은 이름이야. 내가 누군지 알겠지 ? " " 아, 알고 있어." 정중한 말씨가 사라졌다. " 프랭크에게 전해.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소가스의 브레이크 하트 레터베이션으로 오라고 해. 스케이트 링 옆의 입구로 들어와서 도로를 30야드쯤 더 들어가. 주차한 뒤에 거기 있는 움푹 꺼진 곳으로 내려와. 금방 알 수 있어. 내려오면 상어 지느러미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어. 알겠나 ? " " 알았어. 그런데 왜 그가 너를 만나러 가야만 하지 ? 프랭크는 누구와 만나고 싶으면 사무실로 불러. 쓸데없이 숲속을 차를 타고 찾아다니는 짓은 안해." " 이번에는 녀석이 숲속으로 달려오게 돼. 그렇잖으면 프랭크가 싫어하는 노래를 내가 경찰 귀에다 대고 부를 거야." " 갈지 안 갈지는 모르지만, 가령 간다면 몇 시에 가면 되나 ? " " 오늘 저녁 6시야." " 말도 안돼, 그 시간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지 ? 바빠서 못 갈지도 모르고. 너는 대체 누구하고 전화하는 줄 알고 있는 거지 ? " " 오늘 저녁 6시야. 오지 않으면 나는 버클리 가(街)에서 경찰 녀석들에게 노래를 들려줄 거야." 전화를 끊었다. 제 25 장 히불 내셔널 볼로냐를 1파운드, 검은빵 한 덩어리, 브라운 마스터드 한 병, 우유 반 갤런을 사서 차로 돌아왔다. 차의 트렁크를 열고 낡은 대형 마대 자루를 꺼냈다. 자루에 산탄총, 탄약, 식료품을 넣고는 트렁크를 잠그고 자루를 둘러메고서 브레이크 하트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움푹 꺼진 그곳까지 돌아오는 데 15분쯤 걸렸다. 그곳을 지나 비탈을 올라 중간쯤에 소나무들을 서양층층나무의 덤불이 가로막고 있으면서 아래쪽 꺼진 곳과 도로가 보이는 장소를 발견했다. 마대 자루에서 식료품, 산탄총과 탄약을 꺼내고 윗도리를 벗어서 자루에 넣었다. 자루를 땅에 펼쳐놓고 그 위에 앉아서 총에 탄약을 넣었다. 여섯 발 들어간다. 예비로 여섯 발을 뒷주머니에 넣고는 펌프를 한 번 왕복시켜 약실에 총알을 넣고서 나무에 기대세웠다. 다음에 식료품을 펼쳐놓고 점심을 만들었다. 주머니칼로 빵에 마스터드를 바르고 차곡차곡 접은 종이봉투를 접시 대신으로 썼다. 카톤에 직접 입을 대고 우유를 마셨다. 나쁘지 않다. 야외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즐겁다. 시계를 보았다 · 10· 2시 45분. 샌드위치를 하나 더 먹었다. 3시. 매미가 이쪽을 향해 시끄럽게 울어댄다. 머리 위의 소나무 가지에서 참새가 파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아래쪽 길에선 아이들과 어머니, 개, 바람을 넣어 물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실은 차가 4。5분마다 천천히 지나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차츰 그 수가 줄고 있다. 네 개째의 샌드위치로 우유를 마저 마시고 빵과 볼로냐를 종이봉투에 넣어서 마대 자루에 밀어넣었다. 4시 15분에 은회색의 링컨 컨티넨탈이 움푹 패인 곳 가까이에서 길가로 다가와 서서 오랫동안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는 문이 열리고 월리 호그가 내려섰다. 혼자였다. 그 자리에 서서 조심스럽게 패인 곳을 둘러보고는 덤불 그늘에 내가 앉아 있는 곳 부근도 아울러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도로의 전후방을 살피더니 차 안에 손을 넣어 소총을 꺼냈다. 눈에 뛰지 않도록 다리 옆에 붙여서 들고는 차에서 떨어져 도로 가장자리의 나무숲으로 들어갔다. 링컨이 엔진이 걸리더니 사라져 버렸다. 나무 그늘로 들어서자 월리의 총을 든 모양이 아까처럼 신중하지 못해진 것을 나는 눈여겨 보고 있었다. M_16 소총. 미 보병의 표준병기이다. 구경 7.62··. 총알은 20발. 옛날 브로닝 자동소총 같은 멋진 휴대용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오래 된 톰프슨 총처럼 방아쇠의 안전장치 뒷부분이 권총 손잡이처럼 되어 있다. M_16이라고 ? 놀라겠군. 나는 이제 겨우 M_1을 손에 익히기 시작했을 뿐인데. 월리가 M_16을 가지고 맞은편 비탈길을 올라갔다. 스타크 힐 구두를 신고 있다. 한번 급경사에서 발이 미끄러져 언덕 기슭 가까이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허허 ! 이 몸은 한 번만에 올라왔는데. 링컨이 왔을 때 나는 산탄총을 집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잡고 있는 손에 조금 땀이 배어 있다. 손가락의 관절을 보았다. 힘이 들어가서 하얗게 되어 있다. 월리는 내가 올라온 것만큼 오르지는 않았다. 너무 살이 쪘다. 매일 아침 조깅을 해서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하네, 월리. 그는 패인 곳 가장자리에서 2。3야드(약 1.8。2.7·) 위쪽에 빽빽하게 엉켜 있는 덤불을 발견하고 그 뒤에 가서 앉았다. 패인 곳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자리를 잡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두꺼비 같았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15분 전 5시. 포장도로 위에 말발굽소리를 울리면서 말을 탄 무리들이 지나갔다. 지금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소리지만, 그러나 우유배달, 그리고 쓰레기 청소부들이 말을 이용하던 어릴 때를 생각나게 했다. 거리의 말똥과 참새. 아래쪽 길 위에 있는 말은 세 마리 모두 털에 윤기가 있고, 밤색 털이 땀에 젖어 검은 빛이 난다. 타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승마용 장화를 신은 여자아이가 둘, 청바지를 입고 셔츠는 벗은 사내아이가 하나. 옛날 청소부들의 마차를 끌던 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발이 어울리지 않게 크고, 커다란 엉덩이가 장관이라고 할 만큼 크다. 근육이 발달한 목이 둔중한 느낌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이웃의 집짓는 곳에서 지하실을 파면서 말을 진흙 치우는 데 쓰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말을 탄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말발굽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월리 호그는 여전히 조용히 몸을 웅크린 자세로 앉아서 도로를 보고 있다. 성냥을 켜는 소리가 들리고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조심성이 없군, 월리. 만일 내가 방금 도착해서 담배 냄새를 맡았다면 어떻게 되겠나 ? 숲속에서는 냄새가 멀리까지 퍼지게 되는데. 그러니까 월리는 숲속에서의 행동에는 별로 익숙지 못한 모양이구먼. 월리가 드나드는 장소에서는 정원에 물 부리는 호스 정도로 긴 담배를 피워도 누구 하나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숲속이 건조해 있으므로 그가 담배꽁초를 신중하게 처리해 주기를 바랐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산불이 훼방을 놓으면 곤란하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 10· 5시 15분. 횡격막(橫隔膜)이 녹슨 듯이 가슴이 답답하고, 배꼽 뒤 부근이 치통처럼 쑤신다. 목구멍에 무슨 덩어리가 막혀 있다. 머리 위의 하늘은 아직 초여름의 석양빛에 청색을 띠고 푸른 나뭇잎을 통해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5시 반.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래쪽 도로에는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들, 아이들, 강아지들은 저녁을 준비해서 아빠와 함께 먹으려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정원에서 저녁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밤은 집안에서 밥을 먹기에는 너무 덥다. 맥주를 한두 잔, 술잔에 박하 잎을 하나 넣은 진 앤드 토닉이라도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면 남자들은 윗도리를 벗고, 고무 호스로 조용히 긴 활 모양의 물을 잔디에 부릴지도 모른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거침없이 나는 소리다. 게리 쿠퍼의 배에서 한 번도 소리가 난 적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오오, 사랑과 의무의 중간에 끼어 만일 내가 진다면......5시 40분. 손가락 끝이 얼얼하고 두 팔의 안쪽도 얼얼하다. 가슴 근육, 특히 가슴의 바깥쪽, 어깨 주변이 뻣뻣하기에 근육을 움직여 풀기로 했다. 셔츠의 호주머니에서 껌을 두 개 꺼내어 종이를 벗기고, 껌을 착착 접어서 입안에 넣었다. 포장했던 종이를 돌돌 말아서 셔츠 주머니에 넣고는 껌을 십었다. 15분 전 6시. 한국동란 때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볼로냐와 빵 대신에 스테이크와 달걀을 먹여주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게 생각났다. 인천 상륙을 악두고도 배에서 소리가 났다. 더구나 인천에서는 혼자도 아니었는데. 10분 전 6시. 월리 호그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같은 곳에 그대로 있다. 그는 목구멍이 답답하지도 않고, 심호흡을 해도 아직 산소가 부족할 상태는 아니다. 거기에 앉아 있다가 프랭크 두어가 신호를 하면 등뒤에서 나를 쏘아죽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어느 정도의 증거를 잡고 있으며, 경찰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것을 알아낸 직후에 프랭크 두어가 신호를 보내겠지. 아니면, 두어는 제 손으로 나를 죽일 생각이고, 월리는 단지 지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 7분 전 6시. 놀라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신나게 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턱없이 빨리 지나가는군. 나는 일어섰다. 산탄총은 안전장치를 풀어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다. 오른손으로 다리 옆에 붙여서 월리 호그의 위치와 반대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00야드(약 90··)쯤 떨어져 있다. 조심해서 나아간다면 그에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중하게 움직였다. 비탈진 곳에서 도로까지 내려가는 데 10분 걸렸다. 패인 곳에서는 50야드(약 45·) 정도 전방 부근이 될 것이다. 아직 햇빛으로 밝지만, 도로 가장자리의 나무숲으로 들어가면 한낮보다는 조금 어둡다. 도로에서 숲으로 조금 들어가서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6시 5분이 지나자 차가 와서 서고 문이 열린 다음,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산탄총을 겨드랑이 밑으로 늘어뜨린 채 도로를 따라 패인 곳을 향해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차는 밤색 쿠페 드 빌, 길가에 세워져 있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차를 지나쳐서 패인 곳으로 돌아갔다. 햇빛이 뒤에서 비쳐 패인 곳이 밝고 더웠다. 두어는 상어 지느러미 모양을 한 바위 옆에 서 있었다. 밤색 바지, 흰 구두, 흰 벨트, 검은 셔츠, 흰 넥타이, 흰 사파리 재킷, 검은 테의 선글라스를 끼고 흰 골프 모자를 쓰고 있다. 아주 공을 들인 차림새다. 춤도 꽤 잘 추겠지. 그에게로 걸어갔다. 손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월리 쪽은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내 왼쪽 30야드(약 27·) 정도 위쪽이다. 패인 곳으로 들어갈 때 바위가 그와 나 사이에 있게 되도록 해가면서 나아갔다. 산탄총은 총구를 밑으로 향하고 있었다. 느긋한 자세로 들고 있었다. 마침 옆에 있기에 그냥 들고온 듯한 자세로 두어와의 거리는 10피트(약 3·), 상어 지느러미 같은 바위가 아직 나를 가리지 않는 부근에서 멈춰섰다. 바위 뒤로 들어가니 월리가 이동한다. " 그 숏 건은 무엇 때문인가, 스펜서 ? " 두어가 말했다. " 호신용이야. 숲속이 어떤지는 알고 있겠지 ? 난폭한 다람쥐 같은 것들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거든." 왼쪽 위편 30야드의 거리에 있는 윌리 호그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는 듯한 기분이다. 그 느낌이 갈빗대 부근, 겨드랑이 밑, 무릎 뒤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움직이면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내지 않을 만큼 움직임이 경쾌하지 못하고,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있지도 않다. 벗어버리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뒷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발자국 소리를 안 낼 수는 없다. 신경을 한 곳으로 모아 들어보았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 내 말을 함부로 하고 다니는 모양이더군, 프랭키." " 무슨 뜻인가 ? " " 나를 없애버리겠다고 했다는 뜻이야." 아직 월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나는 바위에서 5피트(약 1.5·) 떨어진 곳에 있다. " 누구에게서 들었나 ? " 월리가 신발을 벗을 경우까지 생각한 것을 후회했다. " 그런 건 문제가 아니야.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해, 프랭키." " 잘 들어, 이 병신아. 나는 너 같은 바보의 미친 소리나 듣자고 이런 숲속에까지 온 게 아니야. 내게 할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 " 너에게는 그럴 만한 배짱이 없어, 프랭키." 두어의 얼굴이 벌개졌다. " 너를 없애는 데 배짱이 없다고 ? 너 같은 바보 잔챙이를 ?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문제없이 없애 주지." " 너는 어제 네 사무실에서 그럴 기회가 있었어, 프랭키. 그런데 내가 권총을 빼앗아서 너를 울려 주었지." 두어의 목소리가 차츰 쉰 소리로 변해 갔다. 그리고는 낮아졌다. " 내게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나 하자고 불러낸 건가, 아니면 할말이 있는 건가 ? " 나는 온 신경을 한데 모아 월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을 만큼 열심히 기울였다. " 너를 이리로 불러낸 것은 네가 겁쟁이고, 침이나 흘리고 다니는 미친 놈이고,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건강한 캠프 파이어 걸 하나도 당해 내지 못하는 녀석이라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야." 두어의 목소리가 굉장히 굳어지고 쉬어져서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지도 않았다. " 나에 대한 그런 언사는 용납 못해." 먼지가 지나가듯이, 기묘하게 구식 문자를 짜냈다. " 또 울고 있나, 프랭키 ? 어째서 그러지 ? 오줌싸개라고 엄마에게 야단맞았나 ? 그래서 그런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나 ? " 두어의 얼굴이 시뻘개져서 목의 동맥이 부풀어올랐다. 입은 움직였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권총을 뽑았다. 나는 언젠가는 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탄총을 수평으로 들어올려 그를 쏘았다. 두어의 손에서 권총이 날아가서 바위에 부딪치고, 그는 하늘을 보고 나자빠졌다. 나는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까지 보지는 않았다 · 10· 바위 그늘로 뛰어든 순간 월리의 첫번째 연속사격 총알이 뒤쪽 땅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른쪽 어깨부터 땅바닥으로 쓰러지면서 한 바퀴 돌아서 일어섰다. 월리의 두 번째 연속사격 총알이 바위에 맞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로 튀었다. 나는 바위의 경사진 쪽 어깨 높이쯤에서 총을 내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펌프를 작동하여 월리 호그가 있는 곳으로 다섯 발을 쏘았다. 바위 그늘에 몸을 굽히고 예비 총알을 재고 있을 때 그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쪽을 살펴보니까 비탈진 덤불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와서는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멈췄다. 이미 몸 전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구르는 사이에 피에 젖은 부분에는 낙엽이며, 잔나뭇가지, 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두어를 보았다. 10피트의 거리에서 쏜 산탄으로 인해 배 부분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나는 얼굴을 돌렸다. 끈적끈적하고 시큼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솟아오르려는 것을 억눌렀다. 둘 다 이미 죽었다. 그것이 산탄총의 좋은 점이다. 근거리에서 쏘면 일일이 맥을 짚어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앉아서 바위에 기댔다. 그럴 예정도 아니었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누구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하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주저앉아 버렸다. 무릎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으나, 산소가 충분히 얻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추웠다. 떨렸다. 시큼한 액체가 다시 솟아올라왔는데,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두 무릎 사이에 목을 늘어뜨리고 토했지만, 죽은 두 사람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한심한 이야기다. 제 26 장 7시 15분이었다. 산탄총을 마대 자루에 도로 넣고 마대 자루를 차의 트렁크에 싣고서 차는 펠스웨이가 1호선과 교차하는 고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1호선을 북쪽으로, 스미스필드로 향했다. 도중에 술집에 들러서 와일드 터키 버본의 쿼터들이 한 병을 샀다. 1호선을 내려가서 스미스필드 센터로 향하는 도중에 병마개를 뽑아내고 버본을 한입 가득 넣어 입안을 헹구어 창밖으로 뱉어버리고는, 병째 입에 대고 4온스쯤 마셨다. 술이 내려간 순간 위가 갑자기 오그라드는 듯했으나 이윽고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나는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얀 교회와 집회소가 있는 오래 된 광장을 지나서 왼쪽으로 꺾어 메인 가로 들어갔다. 1년쯤 전에 어떤 사건으로 이 부근에 온 적이 있어서 그 뒤로는 이곳 지리를 꽤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수잔 실버맨의 집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광장에서 북쪽으로 100야드(약 90·)쯤의, 창가에는 파란 나무상자에 빨간 피튜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처마 판자가 비바람에 바랜 조그만 케이프 코드식의 고풍스러운 집에 살고 있다. 차도에 그녀의 차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집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벽돌을 깔아놓은 좁은 길을 현관까지 걸어갔다. 양쪽에는 딸기가 심어져 있다. 하얀 꽃, 녹색 열매에 섞여 어쩌다 빨갛게 익은 딸기가 간혹 보인다. 스프링클러의 물이 악뒤로 천천히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스탄 켄턴과 아주 비슷한 음악이 들린다. ‘아티스트리 인 리듬.’ 놀라겠군. 벨을 누르고는 와일드 터키의 병목을 잡은 손을 옆에 늘어뜨린 채 문기둥에 기대섰다. 굉장히 피곤했다. 수잔이 문까지 나왔다. 그녀를 볼 때마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명치끝 부근이 꽉 조여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색깔이 바랜 리바이스의 커트오프에 골을 넣어서 짠 짙은 남색 홀터 톱(어깨에 끈이 달리고, 어깨와 팔이 노출된 여자용 윗도리)을 입고 있다. 테가 팔각형인 안경을 쓰고 오른손에 책을 들고서 서표 대신에 손가락을 끼우고 있었다. " 뭘 읽고 있었어 ? " 내가 말했다. " 에릭슨의 간디전(傳)." " 나는 그전부터 리프의 책을 좋아했는데." 그녀가 4온스 줄어 있는 버본 병을 보고서 문을 크게 열었다. 나는 들어갔다. " 얼굴색이 나쁘군요." " 당신들 가이던스 전문가는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 키스해 주면 기분이 좋아질까요 ? " " 그렇긴 하겠지만 아직 안돼. 나는 토했어. 샤워를 하고 싶어. 몸을 씻고 나서 둘이 앉아 이야기하고, 나는 와일드 터키를 마시면 어떨까 ? " " 장소는 알고 있죠 ? " 나는 거실의 커피 테이블에 버본을 놓고서 좁은 복도를 지나 욕실로 갔다. 욕실 옆에 린네르 천 제품을 넣는 찬장에 내 면도도구, 칫솔, 그 밖의 것들이 들어 있다. 꺼내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브러시로 몸을 문지르고, 샤워를 하고, 샤워기 밑에서 입안을 헹구고, 비누칠을 해서 씻고, 샴푸로 머리를 감고, 비누거품을 내어 씻어 흘려보내면서 30분쯤 있었다. 사라져라. 더러움이여, 사라져라. 샤워를 끝내고 타월로 몸을 닦고는, 전에 놔두고 간 테니스 반바지를 입고서 수잔을 찾으러 갔다. 스테레오는 꺼버렸고, 그녀는 뒤꼍 포치에서 내 와일드 터키, 얼음 통, 술잔 하나, 얇게 썬 레몬과 비터스 술병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파란 버들가지로 짜서 만든 팔걸이의자에 앉아 병째 들고 꽤 많이 마셨다. " 뱀에게 물렸나요 ? " 수잔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물을 말아올린 포치 저쪽은 층계 같은 모양인데, 밭이 조그만 시내(川)를 향해서 이어져 내려가 있다. 그 층계 같은 땅에는 음지에서 자라는 식물이 심어져 있다. 콜레우스(차조기과의 관엽식물), 여뀌, 양치, 거기에 월계수가 많이 있다. 조그만 시내 저쪽은 나무가 많이 자라 숲이 되어 있다. " 뭘 먹고 싶어요 ? " 나는 또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고마워." " 맥주 대신에 버본을 마시고, 스낵은 마다하시고. 꽤 심한 모양이군요 ? "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가 봐." "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 " " 하고 싶어. 그러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나도 몰라." 술잔에 얼음을 넣고 비터스를 첨가하고는 레몬을 짜넣은 다음 버본으로 잔을 가득 채웠다. " 당신도 조금 마시는 것이 좋아. 당신도 조금 취해 있는 게 이야기하기가 쉬우니까." 수잔이 끄덕였다. " 그래요. 그럴 생각이었어요. 잔을 가져올께요." 그녀가 잔을 가져오자 나는 술을 따라주었다. 집 악쪽에서 아이들 몇이 길거리에서 하키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숲의 여기저기에서 아직 새가 지저귀고 있지만, 주위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으며 새 소리도 줄어들고 있었다. " 이혼한 지 얼마나 되었지 ? " 내가 물었다. " 5년." " 괴로웠나 ? " " 그래요." " 지금도 괴로워 ? " " 아니. 지금은 그 일은 거의 생각지 않아요. 이젠 내가 가엾다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게다가 이젠 그가 없어서 쓸쓸하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어요. 당신이 그 모든 것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 미스터 편리(便利)로군." 잔이 비었기에 다시 따랐다. " 당신은 그렇게 많이 마시고 먹고 하는데 어째서 배에 근육이 생기지요 ? " " 하나님이 나를 선량하게 만들지 않은 대신에 아름답게 만들기로 한 거야." " 1주일에 얼마나 싯업을 하나요 ? " " 수천억 번이나." 다리를 악으로 뻗어서 몸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밖은 어두워지고, 저녁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 몇 개 보인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들리는 것은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와 128호선을 지나가는 어렴풋한 차소리뿐이었다. " 풀 속에 단검의 칼날이 숨어 있어." 내가 말했다. " 그리고 불 바로 바깥쪽에 호랑이가 숨어 있고." " 놀라겠군요, 스펜서. 그런 급락법적(急落法的) 문구.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좋고, 안해도 좋아요. 하지만 거기 앉아서 서툰 시는 인용하지 말아요." " 애석하군. 지금부터 ‘햄릿’으로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 그런 짓 하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 알았어, 당신 말이 옳아. 하지만 급락법적이라 ? 그건 너무 준엄한데, 수잔." 수잔이 자기 손으로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시고 있었다. 포치에 조명은 없고, 부엌에서 불빛이 새어나올 뿐이다. " 오늘 저녁 좀 이른 시간에 남자 둘을 죽였어." " 지금까지 그래 본 적이 있었나요 ? " " 있어. 그러나 이번에는 계획적으로 그 둘을 죽여버린 거야." " 모살(謀殺)했다는 말인가요 ? " "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니......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수잔은 가만히 있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하얀 얼굴이 희미하게 떠 있는 느낌이다. 그녀는 내 맞은편 긴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주먹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또 버본을 마셨다. " 스펜서." 수잔이 말했다. " 나와 당신이 사귄 지 아직 1년 정도밖에 안돼요. 하지만 나는 그 동안 아주 유심히 당신이라는 사람을 보아 왔어요. 당신은 훌륭한 남자예요. 어쩌면 여태까지 내가 보아 온 남자 중에서 가장 훌륭할지도 몰라요. 당신이 남자를 둘 죽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을 거예요.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나는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그녀 악에 섰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듯이 잡고는 몸을 굽혀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무잡잡하고 지적인 힘이 넘치는 얼굴이며, 생기를 내뿜고 있는 느낌을 주고, 웃으면 양쪽 입가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아직도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검은 눈이 렌즈를 통해서 커다랗게 보인다. " 늘 그렇지만, 놀랍군." 그녀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서 우리 둘은 그런 자세로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수잔이 말했다. " 앉아요." 내가 앉으니까 그녀가 긴의자에 기대어 내 상체를 끌어내려서는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가져갔다. " 침대로 옮길까요 ? " 나는 크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아니. 지금은 안돼.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고 싶어." 그녀는 오른팔로 내 몸을 안고, 왼손을 들어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제 27 장 수잔과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덥고 바람이 센 화요일에 차로 보스턴에 돌아왔다. 도중에 어느 상점에 들러 신문을 보았다. ‘헤럴드 아메리칸’에 나와 있었다. 일면 접힌 부분의 바로 밑에 · 10· ‘갱, 총에 맞다.’ 한밤중이 지나 네킹을 하려고 거기에 들어갔던 젊은이 두 사람이 두어와 월리 호그를 발견했다. 주경찰이나 시경찰은 아직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고 있다. 하버 타워스 악에 차를 세웠을 때 고속도로 아래는 통근 러시 뒤에 오는 정적 속에서 도로의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현관 문지기가 위층으로 연락하는, 언제나와 똑같은 절차를 밟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버키 메이너드가 문을 열어주어 안으로 들어갔다. 불룩한 배에 팽팽해진 보스턴 레드 삭스의 T셔츠를 입은 편한 차림이었다. " 무슨 일이오, 스펜서 ? " 편한 차림이란 반드시 친근감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레스터는 벌거벗은 가슴 위에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유리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짙은 남색의 수에트 바지에 짙은 남색 줄이 들어 있는 트럭 슈즈를 신고 있다. 핑크색의 굉장히 큰 풍선을 불면서, 그 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풍선을 불면서 힘깨나 쓰게 보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레스터." 내가 말했다. " 고무로 된 젖꼭지는 생각해 본 적 없나 ? " " 무슨 볼일이냐고 물었소, 스펜서." 메이너드는 아직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에게 신문을 건네주었다. " 접힌 곳 바로 밑, 오른쪽이오." 메이너드가 큰 제목만 읽고는 레스터에게 넘겨주었다. " 그래서 ? " " 그래서 당신의 트러블도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것." " 그럴지도 모르지." 메이너드가 말했다. " 마티 러브의 트러블도 끝났다는 이야기겠지 ? " " 트러블 ? " " 그래요. 프랭크 두어가 이제 당신을 못살게 굴지 못하게 된 이상, 당신도 마티 러브를 못살게 굴던 일을 그만둘지도 모르겠는데." " 스펜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나는 마티 러브에게 아무 짓도 한 일이 없어.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 당신은 자신의 손실을 되찾을 생각이군, 그렇지 ? 이 바보 같은 녀석." " 당신이 거기에 서서 큰소리칠 이유가 없을 텐데, 스펜서 ! 화를 내야 하는 쪽은 나야." " 두어는 네놈을 통해서 러브를 먹이로 삼아왔지만, 네놈에겐 한푼도 들어오지 않았어. 놈이 죽고 난 지금, 이제는 자신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로군." " 즉시 돌아가 주시지, 스펜서. 당신은 점점 모욕적인 말투가 되어가고 있어." 레스터가 풍선을 터뜨리고 킬킬대며 웃었다. 커피 테이블 위에 ‘보스턴 글로브’ 신문과 ‘헤럴드 아메리칸’ 신문이 올려져 있었다. 그들은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며, 메이너드는 비로소 돈을 낳는 기계가 손에 들어왔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어째서 네놈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지 않나 ? " " 아니, 알고 싶지 않아." " 네놈은 완전히 해방이 된 거야.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 돌아가." 레스터가 말했다. " 그리고 잘 기억해 둬, 스펜서. 가령 누군가가 러브를 협박하고 있다면, 녀석들은 매춘부와 결혼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기 게임을 한 것을 이유로 협박할 수가 있는 거야." " 그만둬, 레스터." 메이너드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스펜서는 이젠 돌아가려는 참이야." " 좀더 빨리 돌아가도록 해줄 수도 있어요, 버크." " 그는 돌아가려는 거야, 레스터. 그렇지, 스펜서 ? " " 그래, 돌아가야겠다. 그러나 영화에서 모두들 그러듯이, 버키, 다시 오겠어." " 나 같으면 그런 짓은 안하겠어. 내가 이 이상 레스터를 말리는 것은 무리야." " 하지만 되도록이면 말리는 게 좋아. 그를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메이너드가 문을 열었다. 그는 처음부터 계속 문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 이봐, 스펜서." 레스터가 말했다. " 네가 아직 못 본 것이 있어." 두 손을 뒤로 돌렸다가 다시 악으로 내밀었다. 오른손에 니켈 도금한 자동권총을 쥐고 있었다. 베레타 제품 같았다. "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미스터 프로 ? " 내가 말했다. " 레스터, 다시 한 번 그 권총을 내게 겨누면, 그때는 빼앗아서 너를 쏘아버리겠다." 나는 거친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나는 거리에 나왔다. 밖은 바람이 전보다 뜨겁고 세게 불고 있었다. 나는 굉장히 어두운 기분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도중에서 아가씨들의 스커트를 흘끗거리는 짓조차 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바람이 없는 날에도 당연한 일처럼 그랬었는데. 아파트 악 거리의 건너편에 시경의 차가 와 있었으며, 벨슨과 그 빌리라는 경관이 타고 있었다. 내가 걸어서 다가갔다. " 자네들,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당직사관의 눈을 피해서 숨어 있는 거야 ? " " 경위가 불러." 빌리가 말했다. "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벨슨은 조수석에서 몸을 반이나 눕힌 자세를 하고 손으로 두 눈을 덮고 있었다. " 대강해 둬, 스펜서. 타. 크와크가 만나자면 자네가 틀림없이 간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어." 물론 그의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누가 위를 보라면 아래를 볼 그런 기분이다. 뒷좌석에 올라탔다. 본서까지 2분 걸렸는데, 그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크와크의 사무실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지금은 3층의 악쪽이며, 버클리 가(街) 쪽에 있었다. 점심 먹으러 나가는 여러 보험회사의 비서들 모습이 보인다. 그의 방 문에 ‘살인과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벨슨이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 왔습니다, 마티." 크와크는 책상 악에 앉아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전화와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투명 플라스틱 입방체밖에 올려져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추호의 빈틈도 없는 차림새를 하고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그의 침실에 있는 슬리퍼도 반짝반짝 닦여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리퍼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잠을 자지도 않겠지. " 고맙네, 프랭크. 둘이서 이야기하겠어." 크와크가 말했다. 벨슨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등뒤에 있는 문을 닫았다. 책상 악에 등받이가 직각으로 세워진 의자가 있다. 나는 거기에 가 앉았다. 크와크는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마주보았다. 악쪽 스튜어트 가의 교차로에 교통순경이 있었는데, 그가 차를 건설현장에서 우회시키고 있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크와크가 말했다. " 소가스의 그 둘은 자네가 해치웠다고 생각하는데 ? " 내가 말했다. " 흐흠." " 자네가 꾀어내어 해치웠다고 생각해." " 흐흠." " 오늘 아침 일찍 가서 보고 왔어. 시경찰의 어떤 남자에게서 부탁을 받았어. 비공식적으로. 두어는 총을 쏘지 않았더군. 월리 호그는 쏘았어. 탄창이 거의 비어 있었고, 시체 위 숲속에도 탄피가 많이 떨어져 있었고, 그 커다란 바위 한쪽에 총알 맞은 자국도 있었어. 그리고 그 바위의 반대쪽 땅바닥에는 12구경의 탄약통이 여섯 개 떨어져 있었어. M_16이 있던 부근의 덤불이 산산조각이 되었더군. 누군가가 그쪽에다 대고 산탄총으로 다섯 발 쏘아댄 것처럼." " 흐흠." " 자네는 두어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자네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려놓고는, 놈들이 등뒤에서 기습해 올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서 두 사람의 의표를 찌르기로 한 거야. 자네 예상이 적중했어." " 멋지군, 크와크. 굉장한 상상력이야." " 상상력만이 아니야, 스펜서. 자네는 찾아와서 내게 한잔 사면서 프랭크 두어에 대해서 물었어. 다음날 나는 두어가 자네를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정보를 얻었어. 그리고 오늘 아침 그 숲속에서 두어와 보디가드의 시체를 보게 되었어. 자네, 어제 오후에서 저녁때까지의 알리바이가 있나 ? " " 필요한가 ? " 크와크가 투명 플라스틱의 입방체를 집어들고 가족사진을 보았다. 바깥 사무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타이프라이터가 자신없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크와크가 입방체를 책상 위 제자리에 도로 놓고는 나를 보았다. " 없어. 필요없다고 생각해." " 지금 그 이야기를 소가스 경찰에는 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 " " 내 관할이 아니야." " 그렇다면 왜 내가 여기 앉아서 자네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야 하는 거지 ? " " 여기는 내 관할이니까." 바깥 사무실에서는 망설이고 있는 듯한 타이피스트가 여전히 글자를 찾고 있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잘 들어, 스펜서. 나는 프랭크 두어와 놈의 개가 죽어서 비탄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런 일을 못하는 녀석들도 많고, 처음부터 할 생각조차 못하는 녀석들도 많아. 자네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몰라. 하지만 돈 때문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자네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조차 아니었을지도 몰라. 굳이 추측하자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궁지에서 구해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피해자라고 해도 좋겠지." " 자네는 그렇게 말해도 좋아. 나는 말 안해." " 그렇겠지. 여하튼 좋아. 내가 지금 자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자네는 놈들을 내 관할 내에서 해치우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게다가 나는 어떤 의미로는 놈들이 당한 것을 좋아하고 있어. 그러나......" 말을 하다 말고 그는 나를 보았다. 그의 주먹만큼이나 무겁고 굳은 시선이었다. " 내 관할에서는 절대로 그러지 말게." 나는 가만히 있었다. " 그리고 자신이 일종의 사적인 법의 집행자라는 생각은 그만둬. 가령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났을 경우, 또 그러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돼. 여기서건 어디서건. 내가 하는 말 알겠나 ? " " 음, 알지." " 우리는 꽤 오래 알고 지내는 사이야, 스펜서. 서로 어느 정도의 경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우리는 친구는 아니야. 게다가 나는 자네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니야. 나는 경찰관일 뿐이야." " 그게 전부인가 ? " " 아니, 그 밖에도 있어. 나는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경찰관이야. 그러나 자네와 관계가 있는 것은 마지막의 사실뿐이야." " 아니, 그렇지 않지. 남편이고 아버지인 것도 관계가 있어. 어느 누구라도 단지 직업만 있어서는 안되거든." " 나쁘지야 않지. 동의하겠네. 그러나 지금 하는 말은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런 일에 다시는 입을 다물지 않을 걸세." " 알았어." " 좋아." 나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가려다가 멈추고서 돌아섰다. " 마티 ? " " 뭔가 ? " " 악수." 그가 책상 너머로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악수했다. 제 28 장 아무도 집에까지 차로 데려다 주지 않았다. 버클리 가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였고, 또한 나는 걸어서 돌아가는 것이 고마웠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고,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 모두가 내가 생각한 대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쉽게 생각대로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희망은 있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였다. 밀가루만으로 직접 만든 빵과 레터스와 토마토 샌드위치를 두 개 만들어 우유를 한 잔 컵에 따라 카운터에 앉아서 먹고, 우유를 마시며 나와 러브 부부와 버키 메이너드의 현재 처지가 각각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생각했다. 두어와 그의 건맨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디저트로는 대황(大黃) 잎의 파이를 먹었다. 접시를 세척기에 넣고 스폰지로 카운터를 닦고서 손과 얼굴을 씻고는 처치 파크로 갔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므로 걸어서 갔다. 아직도 바람은 세었고, 말바라 가는 모래먼지가 조금 일고 있었지만, 선글라스 덕분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린다 러브가 문을 열어주었다. " 라디오에서 무슨 두어라는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살해당한 것을 들었어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그녀는 매트리스 커버 같은 검정과 흰색 줄무늬가 든 소매 없는 드레스를 입고, 하얀 샌들을 신고 있었다. 머리는 두 가닥으로 땋아내리고, 흰 리본을 달고 있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 그래요, 나도 들었소. 남편은 있소 ? " " 아뇨. 야구장에 갔어요." " 아기는 ? " " 보육원에." " 이야기가 있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커피나 차는 어때요 ? " " 그래요, 커피로 하겠소." " 인스턴트라도 괜찮아요 ? " " 좋소. 블랙으로." 그녀가 커피를 타고 있는 동안에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TV 낮방송의 히스테릭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찰칵 하고 TV를 끄는 소리가 들리고, 린다 러브가 커피가 들어 있는 컵 두 개를 검고 둥근 쟁반에 올려서 가지고 왔다. 내가 컵을 하나 들었다. " 버키 메이너드와 이야기했소." 내가 말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손을 안 뗄 모양이오." " 두어가 죽었는데도 ? " 린다 러브가 낮은 걸상에 앉아서 커피잔을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에는 자기가 도박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린다 러브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쥐고서 피어오르는 김을 얼굴에 쏘이면서 조금씩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또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좀 뜨거웠지만, 그냥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 우리 둘 다 알고 있지요, 그렇죠 ? " " 그래요." " 내가 과거를 발표해 버리면 메이너드에게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거 말이죠 ? " " 그렇소. 그래도 그는 마티가 몇 번 정도 엉터리 게임을 했다고 주장할 수야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 자신도 관련된 것이 들통나서 당신네와 함께 세상에서 매장되고 말죠. 그는 입을 다물 것으로 생각해요. 아무 득이 없으니까. 돈도 안 생기고, 그의 직업적 인생이 마티처럼 파멸해 버리지요." 린다는 커피잔 위에 엎드린 자세였다. "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소." 그녀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면서 말했다. " 그를 죽일 수 있어요 ? " " 노."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고백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뭐죠 ? " " 내가 신문기자를 찾아보겠소. 당신은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좋지만, 협박당한 것만은 입 밖에 내지 말아요. 그렇게 되면 기자회견, 사진반, 어쩌고 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고 끝나지요. 기자가 기사를 쓴 뒤 모든 질문은 내게로 미루시고. 집에 돈 있소 ? " " 물론." " 좋소, 1달러 받고 싶소." 그녀가 부엌으로 가서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가지고 왔다. 나는 명함을 꺼내어 그 뒷면에 영수증을 써서 그녀에게 주었다. " 이제 당신이 내게 의뢰한 거요. 내가 당신의 대리인이 되겠소." 그녀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 마티는 어때요 ? 그의 허락을 얻거나 의논할 필요는 ? " " 아뇨. 당신이 신문기자를 불러줘요. 내가 그 사람에게 이야기하겠어요. 그 뒤에 마티에게 말하겠어요. 게임 전에 걱정거리는 절대로 말하지 않아요. 우리들이 한 약속 중 하나예요." " 알았소. 전화는 어디 있소 ? " 부엌에 있었다. 긴 코드가 달려 있는 벽걸이 전화다. ‘보스턴 글로브’ 신문에 전화를 걸어서 내가 서포크 군 지방검사국에서 일하던 무렵에 알게 된 잭 워싱턴이라는 경찰서 출입기자와 이야기했다. " ‘여자의 눈’란을 담당하고 있는 부인을 알고 있나 ? 작년에 니만 장학금으로 하버드의 특별연구원이 된 아주머니인데." " 알고 있네. 그 아주머니라면 아주 좋아할걸." " 그렇게 부르지는 않겠네. 지금부터 일러주는 주소로 그녀에게 와주도록 말 좀 해주지 않겠나 ? 오면 커다란 특종을 얻게 될 거야. 그 점은 약속하는데, 지금은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 " 물어보지." 워싱턴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멀리서 성별을 알 수 없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여자 목소리가 말했다. " 핼로, 캐롤 커티스입니다." 나는 워싱턴에게 말한 것을 그대로 반복했다. " 왜 하필 나를, 스펜서 씨 ? " " 언제나 당신 칼럼을 읽고 있는데, 품위 있게 쓰시더군요. 이 이야기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와 같은 것보다는 훨씬 깊은 사정이 있소. 굉장히 괴로워하고, 또 더 괴로워할 가능성이 있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모자 밴드에 기자증을 꽂은 무자비한 녀석들에게 산산조각이 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 가겠어요, 주소는 ? " 주소를 말하자 전화를 끊었다. 나도 수화기를 내렸다. 전화가 끝나자 린다 러브가 물었다. " 커피, 좀더 어떻겠어요 ? 물이 끓고 있는데." " 그럼, 마시지요." 나는 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한 스푼 넣고 더운 물을 붓고서 스푼으로 저었다. " 케이크나 쿠키 같은 건 어때요 ? "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이거면 충분해요." 둘이서 거실로 돌아가서 전처럼 앉았다. 나는 긴의자에, 린다 러브는 낮은 의자에. 둘 다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조용했다. 할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2시 15분, 문에서 부저가 울렸다. 린다 러브가 일어나 나가서 문을 열었다. 입구에서 어떤 여자가 말했다. " 안녕하세요, 캐롤 커티스입니다." " 어서 오십시오, 들어오세요. 린다 러브입니다. 커피를 드시겠어요 ? " " 감사합니다. 마시겠어요." 캐롤 커티스는 갈색 머리를 짧게 깎은 자그마한 여자며, 생기가 넘치는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코와 광대뼈 주변에 주근깨가 조금 있었으며, 연푸른 눈에 깊고 짙은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붉은색 무늬가 들어 있는 핑크색 드레스가 고급스런 느낌을 주었다. 린다 러브가, " 이쪽은 스펜서 씨." 하고 소개해 놓고는 부엌으로 갔다. 나는 캐롤 커티스와 악수했다. 왼쪽 손에 금으로 된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 당신이 전화를 하셨군요 ? " " 그렇소." " 잭에게서 당신 이야기를 조금 들었어요.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녀는 나와 나란히 긴의자에 앉았다. " 그는 이야기를 잘 꾸미지요." 린다 러브가 커피와 쿠키가 놓인 쟁반을 가지고 와서 긴의자 악의 커피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아까 그 낮은 의자에 가서 앉아 캐롤 커티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내 남편은 마티 러브입니다. 레드 삭스의 투수. 그런데 내 본명은 린다가 아니고 도나예요, 도나 발링턴. 마티와 결혼하기 전에는 뉴욕에서 매춘부였었고, 그와 만났을 때에는 포르노 영화에 나갔었어요." 캐롤 커티스가, " 잠깐 기다려요, 잠깐만." 하며 핸드백을 열고 연필과 수첩을 찾았다. 린다 러브가 이야기를 멈췄다. 캐롤 커티스가 수첩을 펼치더니 속기 같은 글씨로 재빨리 썼다. " 남편과는 언제 만났나요, 러브 부인 ? " " 뉴욕에서, 말하자면 내 직업을 통해서지요." 그 다음부터는 단숨에 이야기해 나갔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서 싫증난 이야기를 아이에게 읽어주듯이 조용하고 담담한 어조로 모든 걸 이야기했다. 캐롤 커티스는 프로다. 이야기가 시작된 뒤로는 짙은 속눈썹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아주 적었다.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서 린다 러브에게 이야기를 시켰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 그런데, 왜 내게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나요 ? " 린다 러브가 말했다. " 오랫동안 그것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젠 견딜 수가 없게 되었어요. 나중에 비밀이 탄로나서 괴로움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커진 다음이라든지, 혹은......" 그 다음은 허공에 떴다. 듣고 있던 나는 그녀가 진짜 이유를 말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일한 이유가 아니고 진정한 이유를. " 아기 아빠는 알고 계시나요 ? " "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요." " 지금 어디 계시죠 ? " " 야구장에." " 이......음......고백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나요 ? " " 네, 알고 있습니다." 린다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 동의하셨나요 ? " " 물론이에요." " 러브 부인." 캐롤 커티스가 말했다. 린다 러브는 고개를 저었다. " 그것뿐입니다. 미안합니다. 스펜서 씨가 내 대리인이며, 이 일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분이 할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무릎 위에 두 손을 깍지끼고서 긴의자에 앉아 있는 나와 캐롤 커티스를 쳐다보았다. " 노 코멘트." 내가 말하자 캐롤 커티스가 미소지었다. " 악으로 우리가 이야기할 때, 당신은 그 말을 자주 쓰게 될 것 같군요, 그렇죠 ? " " 노 코멘트." " 이 일에 대한 대리인이 어째서 사립탐정인가요 ? 변호사, 혹은 홍보담당, 혹은 남편이 아니고 ? " " 노 코멘트." 캐롤 커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는 내지 않고 내 장단에 맞추어 함께 말했다. 그녀가 수첩을 덮고 일어났다. " 불러줘서 고마워요, 스펜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했다. " 그냥 앉아 계세요." 그녀가 이번에는 린다 러브 쪽을 보았다. " 러브 부인." 손을 내밀었다. 린다 러브가 그 손을 잡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 당신은 성녀(聖女)에요, 러브 부인. 죄인이 아니에요. 나는 이 기사를 그렇게 쓸 생각이에요." " 고마워요." 린다 러브가 말했다. " 그리고 당신은 · 10· " 캐롤 커티스가 말했다. " 아주 훌륭한 여성이에요." 제 29 장 캐롤 커티스가 나가자 내가 린다 러브에게 말했다. " 잠시 함께 있을까요 ? " " 될 수 있으면 혼자 있고 싶어요." " 알겠습니다. 그런데 해럴드 애스킨에게 전화걸어서 미리 알려놓고 싶군요. 그에게서 돈을 좀 받았으니까, 이 일에 대해 아무 말 않고 그냥 있을 수는 없어요. 그와 동시에 그에게 부탁받은 일에서 이젠 손을 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끄덕였다. " 내 사무실에서 전화하겠소. 마티에게 이야기할 때에 내가 옆에 있는 편이 나을까요 ? " " 아니, 고마웠어요." " 이젠 잘될 거라고 생각해요, 린다. 메이너드가 무슨 시비를 걸어오면 곧 연락해 주세요, 알았지요 ? " " 예, 물론." " 캐롤 커티스가 당신에게 한 말 알겠죠 ? " 그녀는 끄덕였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말했다. " 나도." 잠깐 웃는 듯했으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녀를 그대로 두고 나는 혼자서 아파트를 나왔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택시로 사무실에 가서 해럴드 애스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린다 러브가 기자에게 말한 것을 전하고, 내일 조간신문에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티 러브가 도박을 하거나, 엉터리 게임을 하거나, 마약을 쓰고 있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애스킨은 린다 러브에 대한 일로 불쾌감을 나타내고, 내가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모르는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했다. 아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 대해서.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스펜서 ? 당신은 전부 다 털어놓지 않고 있소. 당신의 말 이상으로 뭔가가 있어. 나는 사람을 고용하면 당연히 내게 협력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 왔소. 당신은 내게 숨기고 있는 게 있어." 나는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으며,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청구하는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 점도 생각해 보겠다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양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내 책상 위에 처리해야 할 청구서며 편지가 올려져 있었다. 책상 가운데 서랍에 넣고 닫아버렸다. 그건 나중에 처리한다. 거리를 내려가면 건설회사가 의과대학을 짓기 위해서 스튜어트 가의 남쪽 건물을 철거하고 있다. 그들은 초봄부터 내가 들어 있는 빌딩에도 손을 대고 있다. 철거에 쓰이는 커다란 쇳덩어리가 의류공장의 위층이며, 전에 있던 손금보는 가게의 낡은 벽돌에 쿵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달까지는 새 사무실을 구해야만 된다.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부동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즉시 옮겨갈 준비를 해야만 된다. 허겁지겁 옮겨가면 약점을 잡힌다. 지금 곧 착수해야 한다. 약게 굴어서 옮길 필요가 생기기 전에 옮기는 거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10· 4시 45분. 일어나서는 사무실을 향해 집을 나섰다. 러브 부부의 사건이 정리되면 새 사무실을 찾아보자. 더 커먼을 걷고 있으려니 발목까지 오는 밝은 노란색 로브를 입은 인도의 크리슈나 교도가 찬송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로브 자락 밑으로 흰 수에트 양말을 신은 해시 파피와 고무바닥 운동화가 보인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기묘한 옷차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 ? 그리스도가 오늘날 있었더라면 하나님은 冪브레이(굵은 줄무늬 천)로 짠 셔츠에 폭이 넓은 바지를 입었겠지. 그 밖에 물놀이터에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아이들, 줄에 끌려가는 개, 자유로운 몸의 다람쥐와 비둘기가 있었다. 퍼블릭 가든에서는 여전히 스완 보트가 조그만 다리 밑에 있는 오리 연못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맥주를 한 깡통 꺼내어 ‘보스턴 글로브’ 신문의 조간을 읽고, 저녁에 먹다 남은 비프 스튜를 데워서 시리아 빵과 함께 먹으면서 TV 뉴스를 본 다음에 모리슨의 저서를 가지고 거실로 가서 앉았다. 소프트 커버의 세 권짜리를 사서 현재 제3권을 중간쯤 읽고 있다. 30분 정도 멍청하게 들여다보았으나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10· 7시 20분. 잠자리에 들기는 너무 이르다. 브렌다 롤링 ? 싫어. 수잔 실버맨 ? 아니. 하버 헬스 클럽에 가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조금 하고 헨리 시모리와 이야기를 하면 ? 역시 싫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사실은 책도 읽고 싶지 않았다. 신문의 TV 프로를 보았다. 볼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목각을 파볼 마음도 안 생기고, 아파트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싫었다. 개가 있다면 산책을 데리고 나갈 수도 있을 텐데. 하긴 개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산책을 해도 되지. 나서서 알링턴을 어슬렁거리며 커먼웰스까지 걸어가서 커먼웰스 모텔을 켄모어 스퀘어 쪽으로 걸었다. 켄모어 스퀘어에 도착해서는 브루클린 가로 들어가서 커퍼필즈라는 술집에 들어가 문닫을 때까지 맥주를 마셨다. 다시 걸어서 돌아와서는 침대로 들어갔다. 별로 자지 못했다. 얼마 안되어 아침이 되고 ‘글로브’ 신문이 배달되었다. 그 1면 왼쪽 밑에 캐롤 커티스의 서명이 들어간 기사가 실려 있었다. ‘삭스 선수의 아내, 숨겨진 과거를 밝히다.’ 커피를 마시고 옥수수 빵에 딸기 잼을 발라서 먹으며 읽었는데, 예상했었던 내용이다. 동정적이며 지적인 글솝씨였다. 안쪽 스포츠난에는 마티의 사진과 린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괴로움이 없을 무렵에 스탠드에서 찍은 것인가 보다. 전화벨이 울렸다. 마티 러브였다. " 스펜서, 도어맨이 메이너드와 또 한 사람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더군요. 린다가 당신에게 연락하라고 해서 말이죠." " 그녀도 거기 있소 ? " " 있어요." " 곧바로 가겠소. 내가 갈 때까지 놈들을 방에 들여놓지 말아요." " 하지만 나는 별로 겁나지 않아요......" " 겁내야 해요. 레스터는 권총을 가지고 있소." 전화를 끊고는 차로 달려갔다. 10분이 채 못되어 처치 파크의 로비에 갔더니 버키와 레스터가 나를 노려보았다. 도어맨이 위층으로 연락하여 셋이서 같은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안은 칠흑 같은 밤처럼 끈적거리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마티 러브가 문을 열자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첫번째가 나, 레스터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린다 러브가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침실에서 나왔다. 러브가 거실 한가운데서 우리와 마주 섰다. 두 발을 약간 벌리고,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있었다. 수에트 셔츠를 입고서 공을 던지는 자세다. " 좋아요." 러브가 말했다. " 용건을 말하고 끝나는 대로 돌아가시오. 세 사람 모두." 버키 메이너드가 말했다. " 신문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대체 무슨 득이 있다고 생각하나 ? 그것으로 너와 나의 거래가 끝나기라도 한 줄 아나 ? 만일 그렇다면 좀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야." " 나는 생각해야 할 일은 모두 생각했소, 메이너드." 러브가 말했다. " 당신과 내가 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소." " 내가 이제는 너를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 ? 나는 네가 엉터리 게임을 한 시합을 모두 기록해 두었어. 일부러 점수를 내준 이닝도 모두 필름에 담아두었으며, 나 역시 너의 귀여운 마누라에게 지지 않을 만큼 멋지게 신문에다 떠들어댈 수 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 " 레스터는 뼈가 없는 듯이 문 옆 벽에 기대서서 턱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체 게바라’식으로 빳빳하게 풀기가 있는 작업복 바지, 발목 위에까지 올라오는 구두, 소매를 잘라낸 작업복 셔츠에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셔츠를 바지 밖으로 내놓았다. 그 니켈 도금이 된 베레타 권총을 벨트에 차고 있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 떠들 수야 있지." 내가 말했다. " 그러나 떠들지야 않겠지." 린다가 아이와 마티의 옆에 서서, 왼손으로 마티의 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쥐고 있었다. "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고 ? " " 그래. 신문에 떠들면 너 자신도 함께 끝나게 되기 때문이야. 네가 마티에 관해서 떠들어봐야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떠들면 자신이 한 짓도 털어놓게 되지. 분명히 마티는 리그에서 추방당하겠지. 하지만 너도 추방되는 거야, 이 뚱뚱보야." 메이너드의 얼굴이 빨개졌다. " 그렇게 생각하나 ? " " 물론이지. 누구에게든지 한마디라도 해보시지. 조지아 주의 외딴 시골에서 개조된 차의 가속 레이스에서 장내방송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겠지."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레스터가 껌을 딱딱 소리내어 십어댔다. 그러자 러브가 말했다. " 그러니까 나는 당신 꼬리를 잡고, 당신은 내 꼬리를 잡고 있다는 이야기야. 동점이지, 이 뚱뚱보야. 그러니까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을 끝내는 거야. 그러나 한 번만 말해 두겠어. 나는 던지고, 당신은 방송하겠지만, 만일 나나 내 가족에게 가까이 오면 죽여버리겠어." " 너 같은 것은 어린애도 못 죽여." 레스터가 말했다. 러브는 메이너드를 쳐다보았다. " 그리고 저 기분나쁜 녀석도 내 악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 그렇잖으면 놈도 죽이겠어." 레스터가 벽에서 떨어졌다. 흐느적거리던 태도가 사라지고 없었다. 갑옷이라도 입은 듯이 몸을 흔들더니 태권도 자세로 들어갔다. 아이가, " 엄마." 라고 말했다. 큰소리로 울지는 않았지만 울음섞인 소리였다. 마티가 말했다. " 린다, 저쪽 방으로 데리고 나가." 모자(母子)가 침실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메이너드의 얼굴이 시뻘개져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 이봐, 꼬마야." 레스터가 말했다. " 네 엄마는 창녀야." 러브가 왼손을 크게 휘두르며 때리는 것을 레스터가 팔로 걷어냈다. 왼쪽 발에 몸을 지탱하고서 반원을 그리듯이 오른쪽 발을 휘둘러 뒤꿈치로 러브의 오른쪽 신장 부분을 찼다. 그 발길질로 인해 레스터는 돌아선 자세가 되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자동장치라도 달린 듯이 금방 돌아서서 악을 향했다. 솝씨가 제법이다. 그 발길질로 러브는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음번 발길질엔 쓰러지겠지. 만일 쓰러지지 않는다면 레스터는 마음먹고 한 번 더 찰 것이다. 어쩌면 이미 타격을 입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발길질로 신장이 파열되는 수도 있다. 린다 러브가, " 스펜서." 하면서 두 팔로 감아 남편을 말렸다. " 그만둬요, 마티. 그만둬요." 아이가 부모의 다리에 매달려 있다. 마티 러브가 아내와 아들에게 붙들린 채 레스터를 향해서 갔다. 레스터는 본래의 자세로 돌아와서 커다란 풍선을 불어서는 다시 십어서 터뜨리고 있었다. 내 옆에서 3피트(약 90··) 쯤 왼쪽에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 나서면서 목의 귀 뒤에 불의의 일격을 먹였다. 한 주먹에 레스터가 무릎을 꺾고는 속죄의 기도를 올리는 자세가 되었다. " 마티." 내가 말했다. "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나가. 아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돼. 그 아이 좀 봐." 아이는 겁에 질려 엄마의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티가 엎드리더니 안아올리고, 다른 팔로 아내를 힘껏 안고는 서둘러 두 사람을 침실로 데리고 갔다. " 러브가 한 말을 내가 한 번 더 해주지, 이 뚱보 녀석야." 내가 말했다. " 너와 그 마네킹 같은 녀석은 죽을 때까지 러브 근처에는 얼씬도 마. 그렇잖으면 둘 다 입원하게 될 거야." 레스터가 일어나서 덤벼들었으나 휘청거리고 있었다. 다시 돌려차기를 시도했으나 움직임이 아주 둔했다. 나는 몸을 젖혀 피했다. 내가 그의 돌려차기 뒤에 따라 들어가서 배를 노렸다. 레스터가 그것을 막고 내 명치를 때렸다. 나는 근육에 힘을 주어 받았지만 그래도 제법 충격이 있었다. 주먹을 비트는 좋은 펀치였지만 이미 힘이 없고, 지금의 나는 인사이드로 들어가서 바짝 붙어 있었다. 이쪽의 체중이 15파운드(약 6.8··)쯤 더 나가니까 힘이 세다. 레스터에게 바싹 붙어 있는 한 상대의 재빠른 동작을 막고 힘으로 압도할 수가 있다. 벽에다 힘껏 밀어붙였다. 턱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두 손으로 그의 배를 때렸다. 세게 때렸다. 그가 신음소리를 냈다. 두 주먹으로 내 등을 때렸지만, 거기는 두꺼운 근육이라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20년 동안 하이프리와 다른 기구들로 단련해 온 근육이다. 두 손으로 셔츠의 멱살을 잡고 벽에서 끌어내어 한 번 더 벽에다 박았다. 레스터의 손이 툭하고 벽에 부딪쳤다. 석고판이 떨어져 깨어졌다. 한 번 더 박으니까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두 팔 위에서 왼쪽 주먹을 옆으로 해서 얼굴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손가락을 다치면 안된다. 일종의 압력이 점점 몸속에서 솟아올라 아무것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없어졌다. 레스터를 벽에 박은 다음 한 발 물러나서 왼쪽, 왼쪽, 오른쪽, 얼굴을 때렸다. 지금은 그의 얼굴이 희미해져서 희게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얼굴을 또 때렸다. 쓰러지려고 하기에 왼손으로 셔츠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워두고 오른손으로 때렸다. 아까보다 더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으려고 하기에 왼손으로 벽에 밀어붙이고 오른손으로 연타를 퍼부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희지는 않았다. 피투성이며, 때릴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밀어붙이고 때리고 하는 사이에 온몸의 힘이 주먹으로만 집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펀치의 리듬이 내 머릿속으로 메아리쳐서 다른 소리는 일체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털어버렸다. 그때 사람소리가 귀에 들렸다. 계속 때렸다. 그때 린다 러브의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던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 그만해요, 스펜서, 그만해요, 스펜서. 죽이고 말겠어요. 그만해요."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마티 러브였다. 레스터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메이너드는 입을 벌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말리는 것을 털어버릴 때 그가 다친 모양이다. " 그만해요, 그만해요, 그만해요." 린다 러브가 내 왼팔을 누르고 레스터의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내가 손을 놓고 물러서니 레스터가 벽에 기댄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메이너드가 엉금엉금 기어가서 손수건으로 레스터의 얼굴에 온통 범벅이 되어 있는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레스터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 자신도 숨이 거칠어진 것을 느꼈다. 마티와 린다 러브가 내 악에 서 있고, 아이가 어머니의 손에 잡혀 있었다.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겁에 질린 눈이 동그래져 있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 놀라겠소, 스펜서." 러브가 말했다. " 어떻게 된 거요 ? 마치 미친 사람 같았어요." 나는 마치 열이라도 오른 듯이 온몸에서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고개를 저었다. "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소. 우리 모두가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었지. 이런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서 미안하오." 메이너드가 욕실로 들어가 젖은 타월을 가지고 돌아와서 레스터의 피를 닦아주기도 하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대어주기도 했다. " 지금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해 둬, 버키 아가야." 내가 말했다. " 나를 화나게 하지 마." 레스터가 조금 꿈틀거렸다. 입술이 터져 있고, 한쪽 눈이 부어올라 애꾸가 되어 있다. 메이너드가 젖은 타월로 얼굴을 계속 닦아주고 있었다. " 정신차려, 레스터." 메이너드가 말했다. " 정신차려." 레스터가 윗몸을 일으켜 타월을 대고 있는 손을 부리쳤다. " 일으켜 줘." 그가 겨우 한 말이다. " 여기서 나가." 레스터가 두 번째 한 말이다." 메이너드가 레스터의 등으로 팔을 돌려 부축하고 문 쪽으로 데리고 가려 했다. " 버키." 내가 말했다. " 러브와 동점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나 ? 악으로는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도 ? " 메이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반쯤 말라버린 갈색 피가 조금 입술에 묻어 있다. " 집으로 가고 싶어, 버키." 레스터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메이너드가 말했다. " 그래, 그래, 레스터, 집으로 가자." 두 사람이 나갔다. 린다 러브가 바닥에 앉아서 아이를 끌어안고 아들의 머리에 얼굴을 비벼댔다. 바닥에서는 둘이 천천히 악뒤로 몸을 흔들고 있고, 마티 러브와 나는 말없이 그들 옆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됐소, 마티. 이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낸 것 같소." 그가 손을 내밀었다. " 당신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스펜서. 우리 부부는 꼼짝 못할 상태에 있었고, 당신이 없었더라면 빠져나올 수 없었어요. 악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우리를 위해 애써준 일을 고맙게 생각해요. 레스터의 일도 포함해서. 놈은 태권도 솝씨가 뛰어나서 아마 나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 내가 먼저 기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게도 힘겨웠을지 모르지." 나는 악수했다. 린다 러브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나는 아파트를 나섰다. 그녀에게 잘 있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두 번 다시 그녀와 만나지 않았다. 제 30 장 " 그럼, 그 남자를 계속 때렸군요." 수잔 실버맨이 말했다. 우리는 더 래스트 플레이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메뉴를 보며 오늘 저녁 처음으로 한 잔 마시고 있었다. 나는 도기(陶器)제의 조끼에 들어 있는 하프, 그녀는 워커 기믈렛. " 몸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한 느낌이었어. 레스터가 원인은 아니야. 두어와 월리 호그와 나와, 사건의 내용과, 관계자 모두가 어느 정도 상처를 입고서 결말이 나게 되었기 때문이야. 그런 모든 것이 폭발해서 몸 밖으로 터져나와 나는 그 불쌍한 구더기 같은 녀석을 하마터면 죽여버릴 뻔했어." " 당신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그래, 당연한 인과응보지. 그 일은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 내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자신에 관한 거야. 나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단 말이야." " 알고 있어요, 당신 가슴에 슈퍼맨처럼 붉고 큰 S자가 붙어 있는 것을 봤어요." " 당신이 본 것은 그것만이 아니야, 이 귀염둥이야." " 알고 있어요. 하지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 그래 ? 그랬군."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온몸에 생기가 넘치는 듯한, 바로 해돋이와 같은 미소였다. " 글쎄요, 좀더 생각해 보면 그 밖에도 더 생각날지도 모르지요." " 뭣하면 나중에 보충수업 코스를 해보기로 하지." " 때에 따라서는요."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아가더니 내게는 새 맥주 조키를 가져왔다. " 아이러니한 것은 린다 러브가 스포츠계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선수와 결혼해서, 가슴에 붉은 S자를 달고 호주머니에 권총을 넣고 있는 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가정을 구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는 점이야. 우리들 얼간이 같은 두 남자가 버티고 서서 자신들의 솝씨나 자랑하고 있는 사이에 해야 할 일을 한 것은 그녀였던 거지. 틀림없이 괴로웠을 거고, 나는 그들을 구할 수가 없었고, 남편도 자신들을 구할 수 없었어. 그녀가 자기 자신과 남편을 구한 거야." " 메이너드는 협박을 그만두었나요 ? " " 물론이지.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지. 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되니까." 나는 맥주를 마셨다. 웨이터가 굴 한 접시씩과 샤블리(프랑스산 백포도주)를 한 병 가져왔다. " 신문은 러브 부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썼더군요." " 그래, 상당히 호의적이야. 편지가 꽤 많이 왔는데, 개중에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한 것도 몇 통 있기는 했지만, 팀의 홍보담당이 취급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꼭 전할 필요는 없었어." " 마티는 어때요 ? " " 미네소타에서 놀려대는 녀석을 쫓아 스탠드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3일간의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어. 그 뒤로는 대꾸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지만, 마음이 아픈 건 분명하겠지." " 그럼, 당신은 ? "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웨이터가 빈 굴 접시를 내가고 조그만 접시에 담은 게와 바닷가재 스튜를 두고 갔다. " 당신은요 ? " 수잔이 또 물었다. " 남자를 둘 죽이고, 또 하나는 죽일 뻔했지." " 그 둘을 죽였기 때문에 린다 러브는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 알고 있어." " 사람을 죽인 것이 처음이 아니죠 ? " " 그래." " 그들도 틀림없이 당신을 죽였을 거예요." " 그건 그래." "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니겠어요 ? " " 나는 함정을 판 거야. 죽이기 위해서 놈들을 그리로 유인한 거지." " 그래요. 그리고 존 웨인의 영화처럼 상대방은 둘이고 이쪽은 혼자인데, 당신은 두 사람 악에 나선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 " 나는 고개를 저었다. " 그들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당신을 기다렸던 거예요. 가령 그들이 성공했더라면, 그 일로 지금쯤 괴로워하고 있을까요 ? "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 언젠가는 그들을 죽여야만 했어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방법 같은 것은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어요 ? " " 그 점이 문제야. 방법. 문제는 바로 그 점이야." " 자존심 ? " " 그래." 웨이터가 와서 접시를 내가고 수잔에게는 대구 요리, 내게는 스테이크를 가져왔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먹기만 했다. " 나는 농담이나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좀더 어른답고 똑똑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그렇지 않아. 러브도 그렇지 않아.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어. 똑같은 이유로 나도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던 거야." " 규칙 ? " " 그래, 스포츠맨의 윤리, 명예, 규칙, 뭐라고 말해도 좋아. 그것이 이번 사건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던 거야." " 수정할 수는 없나요 ? " " 그렇게 하면 이미 규칙일 수는 없게 되지. 들어봐. 개인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지. 그 점은 당신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 정도가 지나쳐서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람은 무엇인가를 믿을 필요가 있어. 사람에 따라서는 종교, 출세, 애국심, 가정 등을 신념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많아.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야. 나는 종교나 가정 같은 것은 없어. 그러니까 사람은 뭔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어디까지나 그것을 지키지. 러브의 경우는 야구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괴로워도 하면서, 군소리를 안해. 그리고 실력이 있으면 이기고, 힘이 있을수록 이기고, 이길수록 힘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그런데 러브의 경우에는 가족을 지키는 일도 신념이 되어 있었으며, 그 두 시스템이 모순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어. 그는 양쪽의 신념을 다 지켜나갈 수가 없었어. 그런데 마침내 그 신념이 흔들려서 이미 지금까지와 같은 존재의식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지." " 그럼, 당신은, 스펜서 ? " "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내가 선택한 시스템에 이름이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이건 자존심에 관계되는 일이야. 자존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이유가 되는 행위인 거야. 알겠어 ? " "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 수요일에 죽은 그 남자인가요 ? " " 그래, 폴스타프의 그 말을 알고 있어. 그러나 내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밖에 없어. 내게 들어맞는 시스템은 그것밖에 없는 거야. 내가 어떤 인간이든, 부분적으로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한다는 것이 기반이 되어있어. 또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하지. 내 경찰관 생활이 오래 계속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거야. 그것이 나와 마틴 크와크의 다른 점이야." " 어쩌면 크와크는 단지 다른 시스템을 선택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않겠어요 ? " " 그렇지. 그렇다고 생각해. 꽤 이해가 되는 것 같군." " 그리고 당신 시스템의 두 개의 도의적 규범은 죄없는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둬서는 안된다는 것과,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절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 적절한 표현은 아닐지 몰라도 대강 그런 것이지요 ? " 나는 끄덕였다. " 그런데 이번에는 그 두 가지 규범 모두를 지킬 수가 없었군요. 한쪽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또 끄덕였다. " 알겠어요." 둘 다 한동안 말없이 먹었다. " 난 그 괴로움을 달래줄 수가 없겠군요." " 그래, 할 수 없어." 둘 다 말없이 앙트레를 마저 먹었다. 웨이터가 커피를 가져왔다. " 지금부터는 조금 자신감을 잃은 채 살아가게 되겠군요 ? " " 어쨌든 나는 나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맛보았어. 누구나 때로는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것이 자신감 상실이 되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사람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몰라." 수잔이 커피잔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아까보다는 다소 나아져 있었다.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왔다. 바깥 트레먼트 가에 나서자 수잔이 내게 팔짱을 끼었다. 따뜻한 밤이며, 별이 보였다. 둘이서 더 커먼 쪽으로 걸어갔다. " 스펜서." 수잔이 말했다. " 당신은 여성해방운동의 전형적인 표적이 되겠어요. 남성의 신비성에 대한 신봉자라는 이유로. 그리고 나는, ‘이 어리석은 이여, 그쯤에서 헤밍웨이적인 바보 같은 사고방식에서 졸업하고 어른이 되시오.’ 라고 말해 주고 싶군요. 그런데도......" 이야기하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 그런데도 당신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은 없어요. 지금의 당신은, 당신은 이래야만 한다는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지도 몰라요.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을 죽인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당신을 지금처럼 소중하게 생각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에요." 파크 가(街)에서 더 커먼으로 건너가서 퍼블릭 가든까지의 긴 길을 내려갔다. 밤이라서 스완 보트는 강가에 매어져 있었다. 알링턴에서 말바라 가로 건너 내 아파트로 들어갔다. 말없이 올라갔다. 아직도 두 사람은 팔을 끼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수잔이 먼저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불은 켜지 않고 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 수즈, 당신을 내 시스템 속으로 맞아들일 수가 있을 것 같군." " 사랑의 말은 이제 그만." 그녀가 말했다. " 자, 동시에 벗는 거예요 ! " <끝>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