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약속의 땅 (하) 지은이: 로버트 B 파커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약속의 땅。(Promised Land)은 로버트 B. 파커(Robert B. Parker)의 네 번째 작품으로, 1976년도 아메리카 탐정작가 클럽(MWA)의 장편상을 받은 바가 있다. 그는 소설작가로서는 드물게 보는 학구파의 작가이다. 아마도 탐정작가로서 박사 학위에 교수로서 대학에 나가는 사람도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1932년에 태어난 그는 다지르 하멧드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노드이스턴 대학에서 아메리카 문학과 ‘폭력소설’의 두 강좌를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등장인물 중에는 상당한 인테리가 많다. 우선 주인공인 스펜서도 대학출신으로, 그의 아파트에 은신하게 된 팸 세퍼드는 그의 장서와 독서량에 놀라고 있다. 물론 스펜서의 상대역인 수전 역시 고등교육을 받은 카운셀링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이다. 그런 배경에서 이들 등장인물들의 대화내용은 그 수준이 지나칠 정도로 격조가 높다. 심지어 악당의 참모격인 메이시 역시 대학출신으로, 위기에 빠진 스펜서는 그가 도저히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다니지 못할 것을 그런 근거에서 판단한다. 그러나 파커의 이 작품에서 알게 모르게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은 현대의 모습으로 계승된 스펜서의 기사도정신과, 비록 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더라도 깍듯이 지키려는 의리 같은 것을 흑인 호크의 언동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호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나는 말이 인상깊다. “나와 저기에 있는 당신의 사내와는 닮은 점이 참 많아요 · 10· 스펜서나 나와 같은 인간은 이제 별로 남아 있지가 않거든. 그가 사라지면 한 사람이 더 줄어드는 것이 되고 나는 그 만큼 더 외로워지게 되죠.” 이러한 스펜서와 호크 같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파커는 그의 논문 ‘Murder Ink”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10· 그는 현대에 살며 기사도라는 서구의 전통을 계승하는 인간이다. 그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으며 무리를 짓지 않는 외로운 늑대이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혼자말과도 같은 의지의 표시이다. 그는 독자적 도덕률에 기반을 두고 다른 어떠한 통념도 그 도덕률에 비추어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는 늘 이 사회에 있어서의 최후의 신사이며, 신사로 남기 위해서는 투쟁을 벌일 때도 자주 있다. 때로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경우에도 직면한다. 16 울고 있는 팸 세퍼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대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수전이라도 방법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식탁을 치웠다. 그녀도 뾰족한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둘이서 아파트를 나올 때까지도 팸 세퍼드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1시가 다되자 배가 부르고 졸렸다. 수전이 스미스필드의 자기 집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것을 생각하고 자못 정중하게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설마 당신은 가명을 써서 여러 가지 그룹과 남몰래 접촉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에 왜 내가 노골적이 되어 가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노골적이라기보다는 강압적이라고. 나는 쉴 새 없이 당신으로부터 일종의 압력을 느끼지. 자신에 대해서 설명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래, 강압적인 여자는 질색이다, 그거죠 ? ” “또 시작하는군. 그렇게 신경질을 부리는 건 그만둬 줘야겠어. 내가 틀에 박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알 텐데. 가령 내 입장이 역전된다든가, 누구는 무엇을 해야만 한다와 같은 일을 우유부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면, 당신은 나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랫동안 허송세월한 셈이 되지.” “글쎄. 나, 웬지 이 문제에 홀리기 시작한 느낌이 들어요.” “어떤 문제 ? 그 점이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하나야. 게임의 규칙은 알고 있지만 게임 그 자체가 어떤 게임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만 같아.” “남자와 여자 관계가 아닌가요 ? ” “전체적인 ? 아니면 당신과 나의 일 ? ” “양쪽 모두.” “됐어, 수전. 그걸로 문제의 범위가 상당히 좁혀졌군.” “얼버무리지 마세요. 내 생각으로는 중년에다 여성으로 독신으로 살다보면 페미니즘(feminism), 이를테면 여성의 권리라고 해도 마찬가지지만, 여자 대 남자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물론 그 속에 당신과 내가 포함되어 있지요. 우리는 수시로 만나고 서로의 일을 걱정해 주며 교제를 계속하고 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어요. 뭔가 가로막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결혼을 말하려는 건가 ? ” “나 자신도 몰라요. 스스로가 단순히 결혼만 이야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놀랍군요. 내가 아직도 그런 인습적인 생각을 하다니. 단지, 우리들 사이는 불완전하다고 할까 미완성 상태라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아니면 나는 우리 사이에 대한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죠.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렇지는 않아. 그냥 즐기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란 것을 나도 알아.” “그래요. 그건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내가 적당한 섹스 상대 이상의 여자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그렇지만…….” 나는 미스틱크 리버 대교에서 15센트를 지불하고 북쪽으로의 경사면을 내려가, 다리를 건설했을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공사용 작업장 울타리 옆을 지나갔다. “나의 어디가 이상한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상한지도 모르지.” 밤의 이 시간은 노드이스트 고속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다. 엷은 안개가 깔려 헤드라이트 전방에 부연 빛의 동그라미가 생겼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녀가 말했다. 해변의 습지대 너머 멀리 오른쪽으로 GE 공장의 불빛이 빛나고 있다. 상업은 휴식을 모른다. “자신에 관한 일을 설명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서툴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맥주를 마시거나 낮잠을 자는 것처럼 익숙하지가 않아. 도대체가 자기를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빠진 일이야. 당신은 내가 하는 일을 잘 지켜보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내가 얼빠진 녀석인지 어떤지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신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은 무난하고, 내가 여지껏 본 것들 중에서 최고라고 느껴지는 면도 적지 않아요.” “그거 다행이군.” “그런 뜻이 아니에요.” 수은등 불빛을 받아 엷은 안개 속에 푸른빛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블루 스타 바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괴이한 무엇을 느끼게 한다.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리가 뭐냐는 점이에요. 그래요, 우리는 뭐죠, 스펜서 ? ” 나는 월너트 대로의 입구에서 1호선을 벗어나 스미스필드로 향했다. “우리는 동심체라고. 왜 그걸 굳이 어느 카테고리에 묶으려 하지 ? 우리가 한 쌍의 커플인지 페어인지는 마음내키는 대로 골라보라고.” “우리는 연인 사이인가요 ? ” 오른쪽으로 호크스 저수지가 나무그늘 사이로 반짝이고 있다. 길쭉한 저수지로 물 건너 쪽은 숲으로 뒤덮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데 그 정상에는 소나무가 늘어서 있다. 그것이 달빛과 엷은 안개에 둥실 떠 있어 아름답게 보인다. “맞아.” 내가 말했다. “우리는 연인 사이라고.” “언제까지 ? ” “목숨이 다할 때까지. 아니면 당신이 나에게서 정나미가 떨어질 때까지. 아니면 내가 먼저 그렇게 될 때까지로 하지.” 이미 스미스필드로 진입하고 있었다. 왼쪽의 컨트리 클럽 악을 지나 조류 보호구역인 저지대의 숲속을 옆으로 하고, 옛날에 능금주 공장이 있었던 곳을 지나 사머 대로로 해서 스미스필드 센터 악까지 왔다. 수전의 집은 거기에서 지척이다. “목숨이 다하기까지가 바람직하겠지요.” 수전이 말했다. 세모꼴 광장에 회합장소가 있는 스미스필드 센터 악을 통과했다. 거리 위에 걸쳐 있는 현수막에 바베큐인지 뭔지의 선전문이 나붙어 있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뻗자 수전이 그 손을 잡고 그녀의 집까지 깍지낀 손을 흔들면서 갔다. 어둠 속의 모든 것이 축축히 젖어서 가로등 불빛에 번들거리고 있다. 비라고는 할 수 없는 안개가 무척이나 짙고 축축했던 것이다. 수전의 보금자리는 케이프풍의 작은 집으로 비바람에 바랜 조각 판자 지붕으로 판석을 깐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관목이 심어져 있다. 현관문은 식민지 시대풍으로 빨갛게 칠해져 있었고, 위쪽에 작고 둥근 들창이 나 있었다. 수전이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뒤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어둡고 조용한 거실에서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우리는 그 자세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목숨이 다하기까지.” 내가 말했다. “보다 더 길지 몰라요.” 수전이 말했다. 거실의 맨틀피스 위에 구리로 세공을 한 교회의 첨탑 모양의 탁상시계가 있다. 움직이고는 있었으나 어두워서 문자판은 보이지 않았고,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동안 시간을 아로새기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수전이 얼마나 좋은 냄새를 풍기는지, 얼마나 단단한 몸을 갖고 있는지, 자신의 느낌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등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자, 가지. 자리에 들자고.” 그녀는 더욱더 힘을 주어 내 몸에 밀착해올 뿐이어서 나는 왼팔을 내려 그녀의 두 다리를 안아 침실로 안고 갔다. 전에도 와보았기에 어둠 속에서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17 다음날 아침 샤워에서 채 마르지도 않은 축축한 몸으로 케이프를 향해 가다가, 길가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계란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정오 무렵 아직 빌린 채로 되어 있는 모텔의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말쑥하게 얼굴을 들어내고 있었다. 내 방 편지함에는 허비 세퍼드에게 전화를 걸어달라는 메모가 들어 있었다. 수전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동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펜서요. 무슨 일이오 ? ” “좀 도와주어야겠소.” “일전에 내가 한 말이 바로 그런 거였는데 ? ” “어떻게든 만나고 봅시다. 더 이상 수습할 도리가 없소. 나에겐 벅차다고. 도와주시오. 그 검둥이 새끼가 우리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소. 도와주시오.” “좋소, 곧 가지.” “안돼. 여기로 찾아오면 곤란하오. 내가 그리로 가겠소. 당신은 그 모텔에 있는 거죠 ? ” “그렇소.” 방의 호수를 알려 주었다. “기다리겠소.” 수전은 몸을 비틀면서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대요 ? ” “그런 가봐. 세퍼트가 적잖게 당황하고 있어. 호크가 아이 하나에게 손찌검을 하자 세퍼드가 겁을 먹은 모양이야. 이리로 오겠다는데.” “난 호크가 무서워요.” 수전이 어깨 끈을 팔에 끼면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와는 맞서지 말아요.” “세퍼드보다는 내가 낫지.” “어째서 당신이 낫다는 거죠 ? ” “나라면 그를 이길 기회가 있을 수 있지만, 세퍼드에게는 전혀 없거든.” “왜 경찰의 힘을 빌리지 않을까요 ? ” “그 점은 세퍼드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나로서는 경찰이 개입하기를 바라긴 하지만. 난 호크와 러시아식 루울렛을 돌리는 건 전혀 흥미가 없거든. 참, 그를 가리켜 세퍼드가 검둥이 새끼라고 하던걸.” 수전이 어깨를 추스렸다. “그게 무슨 관계가 있지요 ? ”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은데. 모욕이니까.” “놀랐어요, 스펜서. 호크는 그를 협박하고 구타하고 아이까지 못살게 굴었다는데 당신은 그런 차별적인 폭언을 문제삼나요 ? ” “호크의 경우는 좀 다르다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나 피부를 좀 태우려고 풀에 나가니까 일이 끝나거든 그리로 오세요. 호크와 사랑의 도피행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종족간의 혼음은 무서운 일이지.” 그녀가 나가고 2분쯤 지나자 세퍼드가 왔다. 이제는 몸 움직임이 좀 좋아진 것 같았다. 발을 저는 것이 가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에 찬 걸음걸이는 아니다. 서부 스타일의 검은 격자 무늬의 레저 셔츠를 입고, 검은 스티칭이 들어간 흰 셔츠의 깃을 저고리 위로 내놓고 있다. 검은 매듭장식이 달린 구두가 윤이 나서 번쩍거렸지만 그의 안색은 공포의 그림자로 잿빛으로 짓눌려 보인다. “술 있소 ? ” 그가 물었다. “없지만, 갖고 오라고 하지. 뭐를 들겠소 ? ” “버번.” 룸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버번과 얼음을 부탁했다. “세퍼드가 방을 가로질러 창밖의 골프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창가의 팔걸이의자에 앉았지만 곧 일어섰다. “스펜서, 나는 정말 겁이 나서 견딜 수 없소.” “무리도 아니지요.” “나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었소……비지니스는 처리가 가능하다 · 10· 고 언제나 자신했었거든. 즉 나는 비지니스맨이고 비지니스라면 자신이 있었소.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는 방법을 터득한 걸로 알았는데. 물론 상대가 누구라도 설득할 자신이 있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요. 공연히 죽는 소리하는 거 아니오. 여러 가지로 경험을 쌓아왔지만, 저 작자들은…….” “나는 그자들을 잘 알고 있소.”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망할 놈의 검둥이 새끼가…….” “그의 이름은 호크요. 호크라고 부르는 것이 좋아요.” “이봐요, 당신 흑인 지위향상협회의 회원이라도 되오 ? ” “그를 호크라고 부르란 말이오.” “알겠소. 그 호크 말이오. 그자들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에 막내아이가 방안에 들어왔는데 호크가 아이의 멱살을 잡아서 문밖으로 던져버렸단 말이오. 그 검둥이 놈이 ! ” “그자들이라는 것이 누구지 ? ” “그자들 ? ” “당신이 그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아이가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소 ? ” “아, 그랬지.” 세퍼드는 다시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호크와 파워즈라는 사나이오. 호크는 그에게 고용된 것 같더군.” “맞아. 난 파워즈를 알죠.” 룸 서비스의 웨이터가 술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내가 전표에 사인을 하고 팁으로 1달러를 주었다. 세퍼드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술값은 내가 내겠소.” “경비는 차후에 청구하지.” 내가 말했다. “파워즈는 뭘 요구하고 있소 ? 아니, 파워즈가 뭐를 바라는지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빠르겠군. 당신은 그에게 빚이 있고 그걸 갚을 길이 없다, 그는 당신의 사업에 끼워 주기만 한다면 변제에 여유를 주겠다……, 그런 줄거리일 거요.” “그래요.” 세퍼드는 얼음 위에 듬뿍 버번을 따라서 붓고 소리를 내며 마셨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았소 ? ” “악서도 말했던 것처럼 나는 파워즈를 알고 있지. 그리고 그의 수법은 별로 새로운 것도 아니오. 파워즈뿐만이 아니라 다른 못된 자들도 같은 수법을 쓴다고.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자금의 부정 운용을 하거나 일확천금을 노렸다가 시기를 잘못 판단하고 그릇쳐서 분수에 지나친 자금동원을 해야 될 경우 파워즈 같은 인간이 접근해서 돈을 대주고는 엄청난 고리(高利)를 요구하게 되죠. 당신은 견딜 재간이 없고, 그러다가 때가 되면 호크 같은 해결사가 등장할 차례가 되는 거죠.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파워즈가 직접 나타나 자기를 사업에 참가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다시 호크와 차차차 춤을 추게 해주겠다고 위협하는 게 공식이죠.” “나는 자금의 부정 운용을 한 바 없소.” “그야, 그럴 테지. 그렇게 떳떳하면 왜 경찰의 힘을 빌리려 하지 않소 ? ” “경찰은 안돼요.” 세퍼드가 다시 한 모금 버번을 마셨다. “왜죠 ? ” “무엇 때문에 파워즈의 돈을 썼는가를 캐물을 테니까.” “법규에 어긋난 구린 데가 있어서겠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누구나 다소는 법규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마련 아닌가 ? ” “이번의 경우, 어떻게 어겼나를 말해 주시오.” “왜지 ? 왜 그런 걸 알아야 하죠 ? ” “당신이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세퍼드는 또 버번을 마셨다. “나는 사방이 꽉 막혔었죠. 어떻게든 손을 써야 했어요.” 창문 오른쪽의 커튼이 좀 이그러져 있었다. 세퍼드가 그걸 바로잡았다. 나는 기다렸다. “나는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라는 기업체와 사업을 했었소. 그들은 레저시설에 적합한 땅을 물색해서 그 지방업자와 주택단지를 개발하는 것이 본업이었소. 이 부근에서는 내가 그 현지업자였지. 우리는 내가 사장으로 앉기로 하고 별도의 회사를 설립했소. 내가 택지조성 및 도시계획위원회나 공사검사관 관계교섭을 담당하고 현장공사 감독까지 맡았소. 한편 상대방은 설계기사, 계획작성자의 제공, 융자와 세일즈를 분담했고.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복잡하지만 대충 줄거리는 그렇소. 내 회사는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가 주식을 100% 소유하는 자회사인 셈이지. 알겠소 ? ” “거기까지는 알 만하오. 나는 머리가 샤프한 대사업가는 아니지만 천천히 이야기를 해주면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대강은 짐작하죠. 그래, 당신 회사의 명칭은 ? ” “우리는 그 조성지를 ‘약속의 땅(Promised Land)’이라고 이름지었소. 그리고 회사 명칭은 프로미스드 랜드사(社)로 했고.” “프로미스드 랜드라 ? ” 나는 휘이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좋은 이름이군. 손님은 유태인만 받을 셈이었나 보죠.” “뭐요 ? 유태인 ? 아니오, 누구라도 환영하지요. 유태인만 몰려들어서야 좋을 건 없지만, 종교는 아무래도 좋았단 말이오.”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알겠소. 당신은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 사의 완전한 방계회사인 프로미스드 랜드 사의 사장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 ”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가 도산한 거요.” “파산 ? ” “그렇소.” 세퍼드가 버번을 비웠기에 따라주었다. 얼음을 권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사업 방식은 이런 거였소. 에스테이트 매너지먼트의 작자들이 땅을 물색하고 이상적인 조건을 갖췄다고 판단하면 계약을 하고 플로리다 여행으로의 초대 등 한바탕 법석을 떤 다음, 토지구입의 보증금을 지불하고 희망하는 유형의 집을 계약서에 서명하는 거요. 집은 대개 여섯 종류 정도로 준비를 하는데 매수인은 보증금을 지불하고, 그 돈은 별도 보관 계정(計定)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토지구입 보증금은 어떻게 됐나요 ? ” “에스테이트 매너지먼트로 가져가는 거지요.” “좋소. 그리고 가옥 계약보증금의 관리자는 ? ” “나요.” 세퍼드가 말했다. “그래서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가 철수하자 당신은 다액의 투자를 한 채로 꼼짝도 못하게 된데다가 융자도 받을 수 없게 되자 보관하고 있던 보증금에 손을 댔다 ? ” “그렇소. 모두 써 버렸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가 도산하니까 시당국이 건축허가증 발급을 보류해 버렸소. 현장은 각호별(各。別)로 대지조성만 되어 있을 뿐, 공공시설을 끌어들일 수가 없는 상태요. 상수도나 하수도 같은 거 말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공공시설이 들어오지 않는 한 건축은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 당국의 입장이거든. 그래서 나는 몸이 달았지. 관청에서도 강력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겠죠. 에스테이트가 도산했을 때 여러 가지 불미로운 소문이 떠돌았거든. 그 큰돈이, 토지의 보증금이 전액 자취를 감추었고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느냐 ? 의혹이 눈동이처럼 불어났소. 부정행위의 혐의가 짙을 수밖에 없었지. 그러자 나는 모든 걸 떠맡는 꼴이 되었소. 내 돈은 모두 땅에 묻어둔 터라 꼼짝할 수 없게 된 판인데, 그걸 회수하자면 집을 지어 팔 수밖에 없지만, 돈이 없으니 공공시설을 끌어들일 수가 있어야죠. 그런데도 융자의 길은 막히고,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은행이란 별로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돈을 꾸어 주려고 하지 않거든. 어느 은행도 약속의 땅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더군. 하기야 소문이 금융계에 퍼진데다가 내국세수입국, 증권거래위원회, 주법무국, 연방통신 위원회 등 그밖의 많은 기관에서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의 조사를 개시할 태세를 갖추었고, 토지구입자의 일단도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할 단계였소. 별수없이 나는 보증금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거요. 그렇게 하던가 아니면 간판을 내리고 빈털터리로 막일이라도 찾아나서야 했소. 내 나이 45세요.” “알고 있소.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내가 추측해 볼까요 ?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를 고소하려는 그룹이 가옥의 보증금을 되찾기로 했겠죠.” 세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신은 공공시설을 끌어들이기 위한 공사를 진행하는데 그 돈을 써버려서 반납할 수가 없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그는 시종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떻게 파워즈와 선이 닿아 그가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 이자는 얼마였소 ? 주(週)당 3% ? ” “3.5%.” “거기에다가 물론 원금도 분할상환해야 하고.” 세퍼드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불가능했겠죠 ? ”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다음에는 호크의 등장. 그리고 폭행을 가했겠죠.” “하지만 호크는 손을 대지 않았소. 다른 두 놈이 치고박고, 호크는 감독만 했소.” “호크도 출세를 했군. 이젠 간부급이 되었어. 원래야 장래성이 있는 사내였지만.” “땀을 흘리는 일은 부하에게 시키고 죽이는 일이나 자기가 한다고 했소.” “이것이 현재의 돌아가는 판국이라 ? ” “그렇소.” 세퍼드는 맥없이 창유리에 이마를 기댔다. “따지고 보면 나는 파워즈의 돈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죠. 그리고 거의 만회하는 단계였죠. 빚이라고는 파워즈에게 빌린 돈밖에 없는데 그걸 해결할 수가 없단 말이오. 뭐라고 할까……성공은 눈악에 다가와 있는데 여기에서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뭡니까.” 18 고백에 가까운 이야기가 끝나자 세퍼드는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를 원하시오 ? ” 내가 말했다. “속죄 ? 주기도문을 두 번 외우고 아베마리아를 세 번 중얼대고는 뉘우침의 눈물이라도 흘린다 ? 고백은 영혼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떤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 한 당신의 육체는 온전할 수가 없는 거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지 않소. 에스테이트 매니지먼트는 4。5백만 달러를 손에 넣었죠. 그게 모두 물거품처럼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오 ? 지금까지 죽자사자 애쓴 노력의 산물, 간신히 도달한 성공의 문턱에 선 내가 ? ” “시간이 있으면 달리 당신이 무엇을 목표로 노력해 왔는지, 지금의 당신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소. 파워즈의 독촉은 어느 정도 심하죠 ? ” “내일 만나기로 되어 있소.” “어디서 ? ” “홀리데이 인의 호크의 방에서.” “알았소. 같이 갑시다.” “어쩔 셈이오 ? ” “모르겠소. 생각해 봐야지. 하지만 당신 혼자 가는 것보다야 낫겠죠.” 세퍼드가 황급히 말했다. “그야…….” “어떻게든 기한을 연장하게끔 타협을 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만큼 무슨 수를 강구할 가능성은 커지죠 ” “하지만 어떤 타협이 가능하다는 거요 ? ” “모르겠소. 그러나 파워즈가 하고 있는 일은 비합법적인 거요. 당신이 끝내 손을 쓸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고소를 하여 파워즈에 대한 주 정부측의 증인이 된다면 당신은 훈방 정도로 풀려날 수도 있소.” “그러나 그렇게 되면 파멸이오.” “파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죠. 비록 부자가 될지는 모르나 파워즈와 한패가 되는 것도 파멸의 문턱에 이르는 거요. 제명에 못 죽고 저 세상에 한걸음 다가선 꼴이 됩니다.” “하여간 경찰은 안돼.” “아니, 지금은 아니오. 좀더 시간이 지나면 가야만 할 거요.” “이 지경에 어떻게 다시 팸을 오게 할 수 있단 말이오 ? 파산하고, 사업체는 풍지박산이 되고, 범법자로 신문에 이름이 나는데도 말이오 ? 생활보조금이나 받으며 코딱지만한 집에 살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돌아올 것 같소 ? ” “뭐라고 말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 현재 당신이 성공을 누린다고 해서 돌아올 여자는 아닌 것 같던데요.” “당신은 그녀를 잘 모르오. 그녀는 늘 지켜보고 있단 말이오. 누구에게는 재산이 어느 정도 있고, 누구의 집은 우리보다 형세가 낫고, 어느 집 잔디는 우리보다 싱싱하고 깨끗하지만 어느 집의 잔디는 시들고 더럽다든가……, 당신은 그녀를 모른다니까.” “그녀는 별도의 문제요. 그녀에 관해서도 손을 쓰겠지만, 이 문제가 낙착을 보기 전에는 부부화합은 손을 댈 수 없소.” “그렇겠지. 하여간 내가 지금 말한 것은 비밀로 해주시오. 나는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은 겪고 싶지가 않소. 달리 어떤 방법이 있을 테니 말이오.” “허비.” 내가 말했다. “당신은 마치 선택의 여지가 이것저것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하지만 그렇지가 못해요. 보증금에 손을 댔을 때 이미 그 여지를 좁혔고, 파워즈의 돈을 빌렸을 때 스스로 그 선택의 여지를 넘겨준 거요. 지금 우리는 당신을 쏴 죽일 수도 있는 자들과 맞서 있는 판국이오. 그 점을 잊지 마시오.” 세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가 방법이 있겠지요.” “아마 있겠죠. 좀더 생각할 여유를 주시오. 내일 몇 시에 만나기로 했소 ? ” “1시.” “12시 45분에 당신 집으로 데리러 가죠. 집에 돌아가거든 아무데도 나가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필요할 때 연락을 취할 수 있어야 하니까.” “당신은 어떻게 할 셈이오 ? ” “생각을 가다듬어야겠오.” “알겠소. 당신만 믿겠소.” 세퍼드는 돌아갔다. 어느 정도 술이 얼큰해서. 그리고 얼마간 안심이 된 모양으로. 자기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누구에게인가 털어놓으면 조금은 마음이 후련해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그는 혼자서 문제에 대처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은행강도의 일당으로서 팸을 찾고 있고, 악당들은 허비를 제물로 삼으려 하고 있다. 나는 풀로 나갔다. 수전은 붉은 꽃무늬의 수영복을 입고 긴 의자에 누워서 브르노 베텔하임의 。꿈의 아이들。을 읽고 있었다. 금테의 큰 선글라스를 끼고, 수영복과 같은 무늬의 붉은 띠가 둘러진 희고 챙 넓은 밀짚모자를 썼다. 그녀가 알아차리기 전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뜯어보았다.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어째서 그녀와 이혼할 생각이 들었을까 ? 아니면 그녀가 상대방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를 나눈 바가 없다. 비록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녀는 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 가령 그녀가 나와 이혼한 것이라면 나는 죽을 때까지 뒤를 쫓아다녔을 것이다. 곁으로 가서 그녀의 몸 양편으로 손을 집어 넣고 긴 의자 위로 엎드려서 팔굽혀 펴기를 했다. 그리고 서로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팔을 굽혔다. “당신과 내가 결혼을 했고, 당신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뒤따라다닐 거야.” “그렇지 못할 걸요.” 그녀가 말했다. “자존심이 웬만해야지요.” “당신에게 접근하려는 자는 모두 해치울 테고.” “그건 그럴 수 있겠네요. 하지만 당신은 나와 결혼한 일이 없으니 어서 저리 내려가요. 당신은 그냥 사람들에게 과시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세에서 팔을 네다섯 번 굽혔다 폈다를 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 ” 손가락 끝으로 내 배꼽을 찔렀다. “내려가라니까요.” 다시 한 번 팔굽히기를 했다. “이게 나로 하여금 뭘 생각나게 하는지 아나 ? ” “물론, 당신이 뭘 머리에 떠올리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자, 내려가요. 의자가 부서지겠네.” 다시 한 번 잽싸게 팔굽히기를 하고 평행봉에서 날아서 내리는 체조선수처럼 모래 위로 내려앉았다. “일단 사춘기를 지내고 나면 당신은 대단한 매력적인 남성이 될 거예요. 약간 몸이 울퉁불퉁하지만……. 그래, 세퍼드의 용건은 ? ” “힘을 빌려 달라는 거지.” 내가 말했다. “우리가 추측한 것처럼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갚을 수가 없게 되자 그들이 그의 사업을 가로채려 하고 있어.” 풀의 저쪽에서 조립식 의자를 들고 와서 수전 옆에 펴고 앉아, 세퍼드의 당면한 문제에 관해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결국은 호크를 상대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네요.” 수전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떻게 할 작정이죠 ? ” “몰라. 바에라도 가 앉아서 생각해 보려고 해. 같이 가겠어 ? ”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요. 여기에서 조금 더 책을 읽다가 마음이 내키면 물에 들어갈래요. 좋은 생각이 나면 알려 줘요. 축하도 할 겸 함께 점심이라도 먹지요.”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어깨에 키스를 했다. 바에 들어가 보니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술을 마시는 사람은 눈에 뛰지 않았다. 나는 바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생맥주를 주문하고 악에 놓인 검은 나무 접시에 담긴 땅콩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두 가지이다. 세퍼드를 킹 파워즈로부터 해방시키고, 팸 세퍼드가 강도살인범이 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정말 어리석은 자들이다. 두 사람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누구나가 시간이 경과하면 고객에 대해서 모멸감을 품게 된다. 선생은 학생을 경멸하고, 의사는 환자를, 바텐더는 술꾼을, 세일즈맨은 손님을, 매장의 아가씨는 고객을 깔보는 그런 식이다. 어쨌거나 그 둘은 바보다.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이라고 ? 웃기는 이야기다. 또 생맥주를 추가시켰다. 땅콩을 담았던 통이 비었다. 통으로 탁자를 두드렸더니 바텐더가 와서 채워 주고 갔다. 자못 경멸에 찬 표정이다. 나 혼자 그냥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총……, 총이라고 ? 총을 입수해서 남성파워를 타파한다 ? 도대체 어디에서 총을 입수하겠다는 거지 ? 직업별 전화번호부에서 총포상의 번호를 뒤져내겠다는 건가 ? 내가 킹 파워즈 같은 인간을 소개해 줄 수도 있지. 총을 인수하자 여자들이 그를 쏵 죽여 준다면 세퍼드의 문제는 해결이 된다……최소한 파워즈를 불법무기거래로 잡아 넣을 수는 있다. 아니, 잡아 넣는다는 것은 적절한 조치가 못된다. 덫에 걸기로 하지. 그거다. 파워즈를 덫에 올가넣는 거다. 물론 고리대금업자로서가 아니다 · 10· . 금전문제라면 세퍼드도 난처한 입장에 빠지니까. 그게 아니고 총포불법거래를 잘만 조종하면 세퍼드는 당분간 그로부터 시달림을 받지 않아도 된다. 동시에 팸 세퍼드의 생활에서 로즈와 제인을 격리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팸을 끌어들여 함께 고생하지 않아도 될 방법은 없을까 ?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지방검사와 거래를 하는 거다 · 10· . 세퍼드 내외의 이름을 덮어 준다면 파워즈와 과격한 여성운동가 두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이다. 마음에 들었다. 좀더 형태와 내용을 가다듬을 필요는 있다. 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잘될 거다.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파워즈의 선의에 호소하는 일이다. 하지만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은 못된다. 덫에 거는 일이 가장 그럴듯하다. 킹이라는 놈을 등치는 거다. 스코트 죠프린을 배경음악으로 써도 좋다. 다시 맥주를 들이키고 땅콩을 깨물며 생각했다. 수전이 허벅지까지 오는 흰 레이스를 수영복 위에 걸치고 풀에서 돌아와서는 곁에 사뿐히 앉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맞아요. 당신은 늘 사고라는 창백한 빛에 뒤덮혀 있다고요.” “말해 줄 때까지 기대하시라. 좋은 생각을 해냈으니까.” 내가 말했다. 19 점심을 끝내자 나는 뉴 베드퍼드 ‘스텐더드 타임스’로 전화를 걸어 개인통신란에 광고를 의뢰하기로 했다 · 10· 자매여, 936_1434로 전화 바람, 팸. 그리고 936_1434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자마자 팸 세퍼드가 나왔다. “잘 들어요.” 광고 문안을 들려주었다. “지금 막 ‘스텐더드 타임스’에 그 광고를 부탁했어요. 자매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우리와 만나도록 주선해 줘요. 당신과 나와 그 여자들 말이오.” “안돼요. 그녀들은 화를 낼 거예요. 당신을 신용하지도 않으니까.” “당신이 어떻게든 다독거려야지. 의무라든가 자매관계, 동지애 같은 것을 강조해 봐요. 다리를 놓고 싶어하던 총포업자를 내가 찾아냈다고 하면 됩니다. 수단방법은 당신이 알아서 하되 꼭 성사시켜야 합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지요 ? ” “당신과 허비를 곤경에서 구해 내고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지. 하여간 하라는 대로 하면 돼요. 일이 복잡해서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 틀어박혀 있다가 머리가 이상해지진 않았겠죠 ? ” “심심할 것도 없어요. 텔레비젼을 보니까요.” “너무 많이 보면 바보가 될 텐데.” “스펜서 ! ” “뭡니까 ? ” “허비가 어떻게 됐나요 ? 곤경에서 구출하다니 무슨 뜻이죠 ? ” “지금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냥 그의 가치관이 마음에 걸려서.” “그이는 별일 없나요 ? ” “물론.” “아이들은요 ? ” “물론 잘 있어요. 당신이 없어서 적적해 하기는 하지만. 허브도. 그밖에는 별일 없어요.” 오오, 스펜서 ! 너는 잘도 둘러대는구나. 아이들에 대해서 뭘 알고 있지 ? 처음 그 집에 찾아갔을 때 한 아이만 보았을 뿐인데. “이상도 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외로운 건지 어떤지 잘 알 수가 없어요. 때로는 그런 기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고, 스스로가 그런 느낌이 되지 않으면 죄책감을 갖게 돼요. 가끔 자기의 감정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할 때가 있어요.” “그렇겠죠. 전화를 끊기 전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 ” “없어요. 걱정 마세요.” “그럼, 곧 수전과 내가 또 연락을 하겠소.” 전화를 끊었다. 색바랜 진바지에 감색 블라우스를 입은 수전은 골동품을 보러 케이프에 가겠다고 했다. “내친 김에 아직 대학에 다니는 젊고 체격이 좋은 사내를 골라서 늘 동경하던 색정적 환상을 실현에 옮겨도 좋을까 몰라 ? ” 그녀가 말했다. “칵 ! ” “내 또래의 여성은 성적활력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모르세요 ? 당신 나이 또래의 남성은 급격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을 테지만.” “나도 마음은 젊단 말이야.” 내가 말했다. 수전은 이미 복도로 나가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누가 마음 같은 거 말했어요.” 걸음을 옮긴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1시 15분,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는 뉴 베드퍼드로 향했다. 2시 5분이 지났을 때 스프링 대로의 뉴 베드퍼드 경찰서 악에 불법주차를 했다. 경찰서는 3층 벽돌 건물로 지붕에는 A자형 창이 나 있는데 녹색과 크림색이 칠해져 있다. 현관 양쪽에는 바와리 보이즈의 영화처럼 흰 공 모양의 철구를 올려 놓은 쇠기둥이 서 있다. 그 철구에 검은 글씨로 ‘뉴 베드퍼드 경찰’이라고 적혀 있다. 문에서 가까운 포치에는 감색의 방패가 그려져 있는 담갈색의 순찰차가 두 대 서 있다. 한 대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나는 뉴 베드퍼드의 경찰들은 흰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악인은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단 말인가 ? 책상에 앉아 있는 여자 경찰에게 브리스틀 시큐어리티 은행 강도사건의 담당은 누구냐고 물었다. 회색의 머리털, 청색의 아이섀도우, 반짝이는 루즈를 바른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10초 동안이나 쏘아보았다. “당신은 누구시죠 ? ” 성별, 연령,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경찰은 경찰이다. “이름은 스펜서, 보스턴의 사립탐정으로 누군가를 부장형사로 승진시켜 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소만…….” “거짓은 아닌 것 같네요. 나에게 조금만 귀띔을 해줘서 놀라게 해줄 의향은 ? ” “그 건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 ” “나는 책상이나 지키는 몸이지만, 대충이라도 말해 주실 수 없나요 ? 놀라고 싶어 그러는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형사. 나는 형사밖에 상대하지 않아요.” “모두가 형사 이외는 상대를 안 해 주는군요. 매일 엉덩이가 납작해지도록 여기에 앉아 있어도 당신 같은 사람이 찾아와서는 의례 형사만 찾지요.” 책상 위의 전화를 집어 네 자리수의 번호를 돌리면서 말했다. “실비아 ? 나 데스크의 마가렛이에요. 그래요. 은행 사건의 정보를 갖고 있다는 양반이 여기에 와계시다고 전해 줘요.” 수화기를 놓았다. “담당은 재키 실비아라는 형사예요. 저기에 앉아 1분 가량만 기다려 주셔요.” 그가 내려온 때는 5분이 지난 뒤였다. 피부가 거무튀튀한 대머리의 사나이였다. 신장 5피트 6인치, 체중 2백 파운드의 사나이로서는 몸치장에 꽤 공을 드린 흔적이 역역하다. 핑크빛 꽃무늬 셔츠, 베이지의 레저 슈츠에 붉은 갈색의 에나멜 구두에는 금색 장식이 달려 있다. 나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둥근 얼굴에 주름은 없으나, 대머리 밑 쪽으로 얼마간 남아 있는 짧게 깎은 머리털에는 히끗히끗한 것이 섞여 있었다. 가까이 올 때의 가뿐한 걸음걸이로 보아 군살은 붙지 않은 모양이다. “실비아요.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소 ? ” “브리스틀 시큐어리티 은행 강도사건을 담당하고 있다면…….” “그렇소.” “어디서 이야기 좀 합시다.” 실비아가 데스크 안쪽의 계단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강도’라고 적혀 있는 문 악을 지나는데, 세컨드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6개가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는데, 각기 책상마다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거니와 단풍나무 목재로 만든 회전의자가 딸렸다. 방의 한쪽으로는 칸막이가 되어 있어 별도의 독립된 공간을 이루고 있는 듯한 그 방문에 ‘크르즈 부장형사’라고 적힌 명패가 걸려 있다. 책상 하나에는 곱슬머리 금발의 깡마른 형사가 앉아서 책상 위로 발을 뻗은 채 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검은 T셔츠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팔뚝에 선더버드의 그림과 파이팅 45라는 문자를 문신하고 있다. 책상 모서리에서는 담배가 타고 있었으며 재가 길게 달라붙어 있다. 실비아가 가까이에 있는 등받이가 달린 곧은 의자를 자기 의자 옆으로 끌어 잡아당기더니, “앉으시지요.” 하고 말했다. 내가 앉자 회전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의자 밑의 발판에 작은 발을 올려놓고 등받이를 뒤로 제쳤다. 양말은 신고 있지 않았다. 구석 쪽의 대형 선풍기가 목을 비틀며 더운 공기를 보내오고 있었다. 실비아의 책상 위에는 빈 종이컵과 먹다 남은 땅콩 버터 샌드위치가 있었다. “좋소.” 그가 말했다. “들어봅시다.” “킹 파워즈를 알고 있소 ? ” 내가 물었다. “아.” “브리스틀 시큐어리티를 턴 자들을 당신에게 인도할 수도 있거니와, 킹 파워즈도 넘겨줄 수 있지만 한 가지 거래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 ” “파워즈는 은행에 손대지 않아요.” “알고 있소. 다른 사건으로 그를 당신의 손아귀에 넘겨줄 수가 있을 뿐더러 은행과 관계가 있는 자들도 도매금으로 양쪽을 옭아넣을 수가 있소. 그 댓가로 부탁할 일이 있다, 이 말이오.” “뭐요 ? ” “이 건에 관계가 있는 두 사람을 모르는 체해 달라는 거요.” “그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이오 ? ” “아니, 나도 은행은 손대지 않소.” “뭐를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갈 만한 것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는걸.” 나는 사립탐정허가증을 보여 주었다. 그는 흘끔 보고 돌려주었다. “보스턴이라. 거기에서 강도 사건을 담당하는 에이블 머컴이라는 사나이를 아시오 ? ” “아니오.” “누구를 알지요 ? ” “살인과의 크워크라는 경위. 프랭크 벨슨이라는 형사. 강도과의 허셀 퍼턴이라는 사나이. 그리고 비레리카에서 아동들의 횡단보도 건너는 것을 돕고 있는 친구들…….” 실비아가 말을 가로막았다. “알겠소. 퍼턴과는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지.” 그는 셔츠의 주머니에서 포도향이 나는 무가당 풍선껌을 꺼내서 두 개를 한꺼번에 입안에 꾸겨넣었다. 나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알고 있소 ? 당신이 누군가가 큰 죄를 범한 증거를 잡고 있는 경우 당신에게는 그 증거제공을 거부할 법적인 권리가 없소.” “껌 하나 주지 않겠소 ? ” 실비아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껌통을 꺼내더니 내 악에 밀어놓았다. 세 개가 남아 있었다. 그중의 하나를 꺼냈다. “최소한 두 개는 십어야…….” 실비아가 말했다. “한 개 갖고는 부풀지를 않아. 품질이 형편없거든.” 나는 다시 한 개를 집어 포장지를 벗기고 입에 넣었다. 실비아가 말한 대로였다. 형편없는 물건이다. “더블 버블이 핑크색의 큼직한 풍선껌을 시판했던 일, 기억하고 있소 ? 그건 한 개만으로도 큰 풍선을 만들 수가 있었죠.” “시대는 변한다고.” 실비아가 말했다. “범죄에 대한 정보제공 거부는 위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나는 보라색 작은 풍선을 불었다. “아, 알고 있소. 그래서 교환조건에 관해 이야기할 의향은 없다는 거요 ? ” “흉악범죄의 종범으로 돼지우리간에 한동안 집어넣어 드릴까 ? ” 나는 껌을 부풀리는 데 애를 먹었다. 탄력성이 모자란다. 탁구공만한 작은 풍선이 만들어졌나 했더니 퍽 터져버렸다. “돼지우리에 쳐놓고 나서 우리가 가끔 심문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지. 여기에는 뭐든지 불게 하는 심문의 전문가가 몇 사람 있지. 알고 있소 ? ” “이 껌은 이빨에 붙기만 하는군요.” 내가 딴전을 피웠다. “이가 없으면 들러붙지 않을 거요.” “어째서 이에 들러붙는 껌 같은 것을 만들까 ? ” 내가 말했다. “지독한 일이군.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야.” “싫으면 뱉으라고. 누가 억지로 십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은가.” “무엇이든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 “브리스틀 시큐어리티 건에 관해서 내게 이야기할 마음이 생겼소 ? ” “나는 교환조건에 관해서 말하고 싶은데요.” “그만해 두시지, 스펜서 씨. 여기에 멋데로 들어와 제멋대로 조건을 내게 강요할 수 없소. 보스턴에서는 응석이 통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그 조건은 내가 정하기 나름이라고.” “대단하군요. 대단해. 면허증을 흘끔 보기만 하고도 내 이름을 알아보셨군. 이름을 보았을 때, 입술을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던데.” “나에게 농담할 생각은 마시오. 마루바닥을 핥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 말 알아드겠소 ? ” “부탁이오, 실비아. 그렇게 겁주지 말라고. 나는 겁을 먹으면 공연히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지게 되고 · 10· , 더구나 이 방에는 당신들 둘밖에 없거든요.” 문신을 한 곱슬머리 형사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왔다. “창을 열어둘까, 재키.” 곱슬머리가 말했다. “이자가 설치면 사람들의 구원을 청할 수 있게 말이야.” “혹시 다급히 뛰어내릴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지.” 실비아가 말했다. “2층이니까 이런 동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몰라.” 내가 말했다. “당신들, 교환조건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의향이 있는 거요, 아니면 둘이서 코미디 연습을 계속할 참이오 ? ” “당신이 약속을 지킬지 어떨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들은 밑져야 본전 아니오. 지금보다 사태가 악화될 것도 아니고.” “덫을 놓지 마시오.” 곱슬머리가 말했다. “최소한 법정에서 덫이라고 지목될 일은. 지금까지 한두 번 곤경에 빠진 일이 있으니까.” “걱정도 팔자지.” 내가 말했다. “못 본 척해달라는 자들은 어느 정도의 죄를 지었나요 ? ” “자기들 이외는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소. 하찮은 약속을 곧이듣고 자기들로서는 수습을 할 수 없는 판국에 빠지고 만 거요.” “은행의 경비원이 살해되었단 말이오.” 실비아가 말했다. “나도 아는 영감이죠. 이 경찰서에서 근무했거든.” “알고 있소. 내가 아는 자들은 엉겁결에 쏘았다고 하오.” “중범죄 중에 사람을 죽이면 제1급 죄질이 된단 말이오.” “그것도 알고 있소.”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나의 정보와의 교환으로 덮어 주어도 무방한 위치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도 알고 하는 소리요. 은행 경비원을 살해한 죄는 누군가가 지지 않을 수 없잖소 ? ” 실비아가 가로막았다. “히츠제랄드라는 이름이었지. 모두가 히치라고 불렀지만.” “지금도 말했듯이 누군가가 그 죄를 져야 하오. 그리고 반드시 지기로 되어 있소. 나는 단지 어리석었던 두 사람을 살려주고 싶을 따름이오.” 곱슬머리가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어. 재키, 오리무중이라고.” “무슨 계획이라도 ? ” 실비아가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보장할 수는 없소. 어떤 이야기가 되든 나는 먼저 그 뒷받침이 필요한 거요.” “알고 있소.” “좋소. 말해 보시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소.” 내가 말했다. 20 곱슬머리는 맥더모트라는 이름이었다. 그와 재키 실비아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실비아가 말했다. “오케이, 염두에 두지. 연락처는 ? ” “하이아네스의 단페이스 모텔. 거기에 없으면 나의 전화응답 서비스로. 서비스에는 매일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까.”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연락하겠소.” 하이아네스로 돌아오는 도중, 풍선껌이 더욱 십기 어려워졌다. 웨어함에서 마침내 단념하고 병원 악을 지날 때 창밖으로 내뱉었다. 턱의 근육이 뻐근한 것이 구역질이 났다.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무렵에는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시장기에 밀려 구역질이 사라져 버렸다. 수전은 골동품 거리에서 돌아와 있었다. 티파니 스타일의 유리 램프의 갓을 125달러에 사들고 왔다. 둘이서 다이닝 룸으로 내려가, 보드카 김리트를 두 잔씩 마시고 파슬리를 곁들인 양의 목고기 요리와 치즈 케이크를 먹었다. 식후에 입가심으로 술 한잔씩을 더 마시고 댄스홀로 내려가, 한밤중까지 슬로 넘버를 전부 추어댔다. 샴페인을 한 병 사들고 방으로 돌아와 병을 비우고는 자리에 들어가 3시까지 자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10시 40분이었다. 수전은 내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시트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들어 작은 목소리로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노크를 하지 말게. 문밖에 놓고 가면 돼. 친구가 푹 잠들어 있으니까.”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은 다음 타월을 몸에 두르고 문을 열어 식사를 실은 웨곤(wWagon)을 끌어들였다. 몸치장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바구니 속의 머핀을 먹었다. 권총집에 권총을 끼우고 있을 때 수전이 눈을 떴다. 권총집을 혁대에 맸다. 그녀는 양손을 머리맡에 고이고 반듯이 누워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구리 단추가 달린 써머 프레저(summer presser)를 입고, 깃 위로 셔츠의 칼라를 내놓았다. 매혹적인 스타일이다. “호크와 또 뭐라고 하는 남자를 만나러 가나요 ? ” 수전이 물었다. “파워즈. 그래, 나와 허비 세퍼드가 만나러 갈 거야.” 여전히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커피, 마시겠소 ? ”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생각 없어요.” 나는 콘 머핀을 먹었다. “두려운가요 ? ” 수전이 물었다. “모르겠어. 그런 일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했거든. 오늘은 별로 겁날 일도 있을 것 같지 않고.” “이 일이 마음에 드나요 ? ” “그야. 마음에 없으면 안 하지.” “내가 말하는 것은 이번 사건을 뜻하는 거예요. 당신이 일을 맡게 되면 신명나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 건이 마음에 내키느냐 말이에요. 당신은 대단히 위험한 사나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어요. 그래서 겁을 먹든가 흥분을 느끼든가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 ”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게 아니야. 덫을 놓으려는 거지.” “내가 하는 말뜻 아실 텐데요 ?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을 죽일 거라고요.” “아니, 틀림없이 잘 해결할 다른 누구에게 맡길 거야.” “그만. 말을 딴데로 돌리지 마세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잘 알면서 왜 딴전 피워요. 당신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인간이죠 ?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는 권총의 실탄을 점검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인간이냔 말이에요 ? ” “지난 밤에 겪은 환희의 무아경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나 ? ” “당신은 뭐든 농으로 돌리려 해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너무 시간을 뺐겨서 그래.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는 건 별로 좋은 화제가 못돼. 도대체가 화제로 삼을 것이 못되거든.” “왜죠 ? ” “그러니까 그런 거지.” “규율인가요 ? 남자는 자기분석은 하지 않나요 ? 그건 허약해서인가요 ? 사내답지 못한 일인가 말이에요 ? ” “그런 이야기는 무의미해. 나라는 인간은 내가 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되거든. 그것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말을 발견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겁을 먹든 흥분을 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점이야. 세퍼드에게 중요한 것은 왜가 아니야. 해주느냐 해주지 않느냐가 문제라고.” “달라요. 보다 큰 문제점이 있어요. 왜라는 점이.” “혹은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는 점일지도 모르지.” “우리 쓸데없이 경구(警句)를 남용하는군요.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이 코미디를 하듯이 허허 실실의 응답같군요.” “그 사람의 이름은 철자가 틀렸는걸.” 수전은 나에게서 등을 돌려 모로 눕더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또 커피를 마셨다. 속삭임을 닮은 공기조절기의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나는 아침식사와 더불어 뉴 베드퍼드의 ‘스탠더드 타임스’를 부탁해 두었었다. 조용해진 방안에서 신문을 펴들고 광고란을 보았다. 내가 낸 광고는 개인란에 나와 있었다. ‘자매들이여, 936_1434로 전화 바람, 팸.’ 스포츠란을 보고 커피잔을 비우자 12시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신문을 접어 룸 서비스의 웨곤 위에 놓았다. “수전, 슬슬 가봐야겠어.” 그녀는 돌아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어서서 선글라스를 끼고 문을 열었다. “스펜서 ! ” 그녀가 불렀다. “서로 화가 난 상태로 있고 싶지는 않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문 손잡이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이 끝나는 대로 곧 돌아오세요. 당신이 없으면 쓸쓸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문을 열어놓은 채 방으로 돌아와 그녀의 볼 위쪽 관자놀이 가까이에 키스했다. 그녀는 반듯하게 누워서 나를 보았다.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 방을 나와 문을 닫고 허비 세퍼드의 집으로 갔다. 뱃속의 느낌이 웬지 묘했다. 자기가 겁을 먹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으나, 세퍼드는 얼굴의 조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얼굴의 살갗이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번화가를 지나 홀리데이 인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생침을 삼켰다. “내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를 당신은 알려고 할 필요가 없어.” 내가 말했다. “모르는 편이 당신을 위하는 일이고. 다만 나에게 어떤 생각이 있으며 그것이 잘만 풀리면 당신은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단 말이오.” “왜 나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거요 ? ” “어느 정도 사람을 속일 필요가 있거니와, 지금의 당신에게는 무리일 것 같거든.” “어쩌면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소.” 호크의 방은 2층으로 풀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노크를 하자 그가 곧 문을 열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쪽 장농 위에 여러 가지 술병이 늘어서 있고, 거북 등딱지로 다듬어 만든 안경을 낀 매마른 사나이가 침대에 누워 ‘월 스트리트 저널’을 읽고 있었다. 킹 파워즈는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장부를 펴놓은 채 팔을 꼬고 앉아 있다. 연기치고는 서툰 연기다. “데리고 온 자는 누구지 ? ” 루디 윌리를 흉내낸 말투로 파워즈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친구 사이요.” 내가 말했다. “어디를 가도 함께 다니거든.” 파워즈는 물렁물렁해 보이는 장신의 사나이로 살갗에 푸른 기가 돌고 가리마를 타지 않은 긴 머리에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옷차림은 로버트 홀을 연상시킨다. 진한 밤색 격자무늬 더블 니트의 레저 슈츠, 흰 벨트, 흰 구두, 흰 실크 셔츠의 깃을 밖으로 내놓고 있다. 가죽 끈으로 목에 걸고 있는 화살촉 모양의 터키석이 사람을 비웃듯 악으로 튀어나와 있다.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말한 적은 없을 텐데 ? ” 파워즈가 세퍼드에게 따졌다. “데리고 온 것을 당신은 기쁘게 생각할걸.” 내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핸드백에 큰돈이 들어갈 구미당기는 흥정거리를 갖고 왔으니까.” “나는 핸드백 같은 거 쓰지를 않아.” “아차, 실례. 나는 저기 침대 위의 인간이 당신 첩인 줄로 생각했기에.” 내 등뒤에서 호크가 말했다. “형편없는 놈이라니까.” 침대 위에 있던 사나이가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 고개를 들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파워즈가 말했다. “호크, 그자를 두들겨 내쫓게.” 호크가 말했다. “이자가 바로 스펜서야. 그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했을 텐데. 농담을 하기 좋아하지만 꼭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라고. 하여간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니니까.” “호크, 못 들었나 ? 놈을 두들겨 내쫓으라고 했을 텐데.” “그는 돈벌이 이야기를 하겠다잖소, 킹. 들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 “자네는 내게 고용되어 있는 몸이라는 것을 잊었나 ? 호크, 시키는 대로 해.” “천만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밖에는 하지 않아요. 시킨다고 아무거나 하지를 않거든. 이 스펜서라는 자도 마찬가지지. 당신이 호통을 치는 건 자유지만 그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당신과 메이시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 봐요. 돈벌이 이야기를 하겠다는데, 보아하니 그냥 하는 소리도 아닌 것 같고. 그의 이야기가 구미에 당기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내가 돌려보내리다.” “알았어. 들어 보기로 하지. 자, 말해 보라고.” 파워즈의 푸른 얼굴에 붉은 기가 감돌고 냉혹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침대 위의 메이시가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읽고 있던 곳에 손가락을 끼워 신문을 말아 쥐었다. “알았소, 킹. 우선 허브는 이번 기한 내에는 돈을 변제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녀석의 엉덩이는 묵사발이 되는 거지. 내가 짓밟아 놓을 테니까.” “정말 현대감각이 뚜렷하군.” “뭐라고 ? ” “한창 유행하는 스타일이란 말이오. 그 밤색과 흰 배합이. 더구나 말하는 솝씨까지 유행의 첨단을 걷고 있단 말이오. 당신은 단지 유행에 맞장구를 치고 있는 얼간이라고.” “작작 까불라고. 그렇게 주둥아리를 놀리다가는 크게 후회할 테니까.” “그 돈벌이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이 어때, 스펜서.” 호크가 말했다. “핸드백에 들어갈 돈 이야기 말야. 그 이야기나 하라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10만 달러 정도의 돈을 갖고 총을 탐내는 손님이 있지. 그 손님과 세퍼드를 교환하자는 거요.” “어째서 내가 총을 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 ” “킹, 10만 달러라면 당신은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꿀돼지라도 손에 넣을 수가 있을 텐데.” 킹이 웃음을 지었다. 입술이 부풀어 있어 웃음을 지으면 윗입술이 튕겨지면서 위쪽 잇몸이 들어난다. “그야, 때로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세퍼드는 내게 큰돈을 빚지고 있단 말이야.” 그는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3만이야. 악수와 구두 약속으로 나는 적지 않은 모험을 범한 판이라고. 알겠나 ? 그걸 없던 걸로 치부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할 수야 없지.” “알겠소.”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도록 하지. 그럼, 가자고, 허브.” 파워즈가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지. 하지만, 네놈의 친구가 지금 돈을 갚지 않으면 우린 화를 내게 될 텐데.” 내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호크가 우리와 문 사이를 가로막았다. 양손을 가볍게 허리에 올려놓는다. “호크,” 파워즈가 말했다. “세퍼드는 돌려보내지 말게.” “킹, 10만이라면 적은 돈이 아닌데.” 호크가 말했다. “호크의 말이 맞아요, 파워즈 씨.” 침대 위의 메이시가 ‘저널’을 털어내자 신문지 밑에서 소음장치가 되어 있는 니켈 도금을 한 25구경의 권총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나타났다. 아마도 커프스와 세트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네 몫은 얼마지, 스펜서 ? ” 파워즈가 물었다. “30%.” 내가 말했다. “그걸 세퍼드의 빚 청산으로 대치해 주게.” 파워즈는 대답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디오의 재생을 한 토막 정지시킨 느낌이었다. 호크가 문 악에서 느긋하게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세퍼드는 온몸의 피부를 종이 조각처럼 굳히고 있으며 메이시는 장신구와도 같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파워즈는 책상 악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이 그의 등뒤로 나 있어, 거기에서 비쳐드는 햇빛이 역광선의 사진과도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윗도리의 소매와 어깨 위의 더블 니트의 가는 보푸라기가 선명히 드러나 보인다. 귓전과 구레나루 사이 언저리가 구리빛이라기보다는 금빛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사겠다는 작자는 누구지 ? ” 킹이 물었다. 호크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낮고 부드럽게. “그걸 말해 버리면 내가 중개할 필요가 없어지지. 안 그렇소 ? ” 파워즈가 또 입술을 부풀리고 킥 웃었다. 매마른 사나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메이시, 나는 골프 약속이 있네. 이 이야기의 매듭을 지어 보게.”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허튼수작은 아니겠지 ? 만일 그렇지가 못하다면 네놈은 흙 속에서 한 줌 비료로 썩어야 한다고. 알겠나 ? 들국화에게 줄 비료가 된단 말이야.” 그는 성큼 일어서더니 내 곁을 지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들국화라…….” 내가 말했다. 그는 나갔다. 메이시가 25구경을 집어넣고 말했다. “자, 일을 시작해 볼까.” “그는 저런 정장 차림으로 골프를 친단 말인가 ? ” 내가 물었다. “클럽에 가서 갈아입지.” 메이시가 말했다. “골프 해본 일 있나 ? ” “없어. 나는 철들면서 줄곧 폭행에만 열을 쏟았지.” 메이시가 신호등과도 같은 웃음을 켰다 껐다. 호크는 침대에 가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세퍼드는 술병이 늘어선 장농 쪽으로 가서 글라스에 가득히 술을 따랐다. 메이시가 둥근 책상에 자리를 잡자 나도 마주앉았다. “오케이.” 그가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세.” 21 이거래에 대한 이야기는 메이시와 최종적인 결말을 볼 단계까지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우선 저쪽 책임자와 연락을 취하고 나서 그와 다시 만나야 하는데, 10만 달러는 틀림이 없으니까 그도 총기의 공급자와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메이시에게 말했다. “총기의 값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을걸.” 메이시가 말했다. “위험도도 계산에 넣어야 하거니와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감안해야 해. 그만한 양이면 당신도 알겠지만 아무래도 소문이 퍼지거든.” “알고 있소. 게다가 그런 면은 당신들이 잘 처리해 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래서 당신네들을 찾아온 거요.” 메이시가, “하기야.” 라고 말하며 저고리 가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건네주었다. 그가 말했다. “저쪽과 이야기가 되거든 전화를 걸어 주도록 하게.” 나는 명함을 지갑에 챙겼다. “자세한 거래 조건은 그때 또.” “물론.” 메이시가 말했다. “이번 거래가 당신의 이야기와 틀림없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말했다. “거래가 마무리되면 이 허브에게서는 손을 완전히 떼겠다는 조건. 아시겠지 ? ” “물론이지.” 메이시가 말했다. “파워즈 씨가 한 말을 들었겠지 ? 우리는 금전 대부는 하지만 짐승은 아니니까. 그 점은 걱정할 거 없다고.” “그럴 테지만, 나는 좀더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단 말일세, 호크, 자네 생각은 어때 ? ” 호크는 배꼽 근처 위에서 양손을 깍지끼고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호크가 말했다. “세퍼드는 걱정 말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 갑시다, 허브 씨.” 세퍼드는 마시다가 만 글라스를 놓고,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뒤따라 방을 나왔다. 아무도 잘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차에 올라 주차장을 나설 때 세퍼드가 말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킬지 어떻게 알 수가 있죠 ? ” “당신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겠다는 것 말이오 ? ”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 ” “호크 ? 그 검둥이 ? 일전에 나에게 손찌검을 한 놈이 바로 그 녀석이라고.” “그는 약속은 지켜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 그를 호크라고 부르시오.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소.” “아, 알았소. 미안. 하지만 그를 믿을 수 있을까요 ? 내 생각으로는 그 메이시라는 사나이가 더 이야기가 통할 것 같던데. 거래를 할 수 있는 상대 같기도 해요. 그런데 거래 상대로……호크는 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메이시는 단 1달러를 받고도 당신의 눈알을 빼버릴 만한 사나이요. 그가 명문학교 졸업생 같은 점잖은 말투를 쓴다고 해서 당신은 그를 신용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 10· 사실 졸업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 10· 명예를 중히 여기는 점에서 그자는 두꺼비만도 못하지. 그자는 무슨 짓이라도 하죠. 그러나 호크는 달라요. 호크가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 몇 가지 있거든.” “예를 들어 ? ” “예스라고 말해 놓고, 노에 해당되는 짓은 하지 않죠.” “어쨌거나 당신이 잘 알아서 일을 하겠지만, 도대체 어디서 그 돈을 끌어낼 참이오 ? ” “그건 당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오.” 세퍼드의 집 악에서 차를 세웠다. 내가 메이시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잔에 가득히 따른 술을 두 잔이나 들이킨 탓에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고맙소, 스펜서.” 그가 말했다. “총거래는 그렇다고 치고, 함께 가준 일 정말 고맙소. 나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겁을 먹었었다고.” “당연하죠.” 악수를 하고 세퍼드는 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모텔로 돌아왔다. 수전은 없었고, 차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들어 팸 세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집년들한테서는 연락이 있었나 ? ” “로즈에게서 있었어요. 우리를 만나겠대요. 당신은 농으로 그러겠지만, 부탁이니 그 여자들을 계집년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어디서 ? ” “어디서 만나느냐는 말인가요 ? ” “그렇소.” “밀턴에서. 그레이트 블루 힐의 정상에 전망대가 있어요. 어딘지 알아요 ? ” “알겠소.” “그녀들은 그 전망대에서 우리와 만나기로 했어요. 오늘 오후 5시에.” 나는 시계를 보았다. 1시 25분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오케이.” 내가 말했다. “내가 아파트로 갈 테니 거기서 둘이 갑시다. 나는 지금 출발할 거요. 3시쯤에는 도착할 거요. 3시가 가까워지거든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시오. 아래에다 차를 세울 테니까 내 모습이 보이거든 내려오도록 해요.” “우린 뭘 하는 거죠 ? ” “밀턴으로 가는 중에 이야기하겠소.” “좋아요.” “답답하죠 ? ” “이젠 머리가 돌 것 같아요.” “이제 거의 끝났소.” “그래야 할 텐데.” 전화를 끊고 차로 돌아가 다시 보스턴으로 향했다. 이 이상 몇 번만 더 오고가다 보면 눈 감고도 운전을 할 것 같았다. 3시 10분이 조금 지나서 내 아파트 악에서 차를 세웠다. 40초쯤 지나자 팸 세퍼드가 현관문에서 나오더니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곧 블루힐로 향했다. 차의 차양막을 내리고 팸 세퍼드는 좌석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거기에서 나오니 살 것만 같네요.” “당신이 말하는 거기는 내 집이오. 나는 되도록 빨리 거기로 돌아가고 싶은데.”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랫동안 있어서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 마치 폐쇄공포증 같은 것을 느끼게 하거든요.” 그녀의 정갈한 머리는 언젠가 만났을 때처럼 프렌치 트위스트로 매만져서 그런지 바람이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파아크 드라이브에서 자메이커웨이, 그리고 아바웨이를 남하하여 28호선으로 나갔다. 네보셋 강을 건너간 지점에서 다시 138호선으로 접어들어 천천히 차를 몰았다. 블루 힐 경계선으로 들어가 4시에 트레일사이드 박물관 가까이에 주차했다. “상당히 빨리 왔네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여유를 갖고 행동해야지. 우리가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것이 안심이 되니까. 그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겁이 나서 가버리는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하거든요.” “나는 기다리는 것에는 이력이 났어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지요 ? ” “정상의 전망대까지 걸어갑시다. 그들이 오면 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해야 해요.” “팔 사람 ? ” “총기 브로커 말이오. 그녀들이 사겠다는 만큼의 총을 팔 사나이가 있어요.” “하지만, 왜, 왜 당신이 그런 일을 하지요 ? ” “총을 사려고 돈을 강탈한 게 아니던가 ? ”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우리들이 하는 일에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잖아요 ? 우리가 무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텐데.” “그런 건 문제가 아니오. 나는 매우 복잡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만 당신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요. 하여간 나를 당신편으로 알고, 그 여자들이 의심을 품는 것 같으면 그때마다 나를 보증해 주기만 하면 돼요.” “그건 이미 그녀들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해봤다고요. 그녀들은 당신을 신용하지도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던데요.” “상상하기 어렵지 않소.” 내가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뛰우고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자, 차에서 내려 걸읍시다.” 블루 힐은 따지고 보면 언덕이라기보다는 깔끔한 녹지로, 보스턴에 인접한 중류 이상의 교외 주택지 숲이나 연못이 없는 넓은 보호구역의 중심이 되어 있다. 블루 힐 중에 가장 큰 언덕 중턱에 자연박물관이 있고,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된 전망대가 있어 거기에서 보스턴시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아래쪽 사면은 연날리기에 안성맞춤으로 바람이 불어 준다. 정상까지는 숲이나 작은 골짜기를 지나 15분 정도면 도달하는 거리로, 대개는 스카우트 단원이나 오듀본 협회원들이 회색의 바위 사이를 누비는 것이 눈에 띈다. 도랑을 건널 때 내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잡지를 않았다. 다음 도랑에서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머리회전이 빠른 사나이다. 정상의 전망대에는 계단이 두 군데, 발코니가 두 개 있어서, 아이들이 달려서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발코니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연이 네다섯 개 머리 위에서 춤추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박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저건 재수가 좋은 징조로 보이는걸.” 박쥐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팸에게 말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요즘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어요. 우리 집 아이들은 연날릴 나이를 지났나 봐요. 허브와 내가 아무리 말해도 날리려 하지 않거든요……. 생각해 보면 우리 둘도 마찬가지지만.” “아니, 가능해요. 나는 그런 예를 현실에서 보고 있소.” 그녀는 어깨를 추스리고 다시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위쪽 발코니에 서서 북쪽 보스턴의,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건물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이지요 ? ” 팸 세퍼드가 물었다. “멀리에 있는 고층건물의 덩어리를 보고 느끼는 것은……뭐지요 ? 로맨틱한 기분 ? 우울 ? 아마 흥분일지도.” “약속이오.” 내가 말했다. “무슨 ? ” “모두. 멀리에서 보고 있을 때는 저 건물군은 무엇을 원하고 있건 모든 걸 약속해 주지. 저렇게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 정결하고 영원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 주변엔 개똥이 즐비하죠.” “당신은 현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 멀리에서 본 마천루는 ? ”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현실의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 점에서는 개의 오물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의 뾰족탑만 보고 있다가는 그 오물을 밟게 되는 거요.” “누구의 인생에도 오물은 피할 수 없어요.” “당신의 표현 방법이 나보다 훨씬 우아하군요.” 그녀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전망대 아래쪽으로 숲속의 오솔길이 작은 초원으로 접어드는 부근에서 제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더니 천천히 전망대 위의 우리들을 올려다보았다. 팸 세퍼드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우호에 찬 웃음을 보냈다. 제인이 뒤를 돌아보고 뭐라고 하니까 나무그늘 속에서 로즈가 나와서 그녀의 곁에 섰다. 팸이 다시 손을 흔들자 로즈가 거기에 손을 흔들어 답했다. 내 미소가 한층 우호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진지했다. 긴장으로 가슴이 들먹거렸다. 이제부터가 가장 어려운 무대인 것이다. 파워즈와 같은 사나이는 돈이나 돈을 벌 이야기로 요리할 수가 있다. 아니면 이쪽이 그쪽을 위협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공포감을 줌으로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로즈와 같은 부류들은 다루기가 힘들다. 광신자는 언제나 만만치가 않다. 광신으로 정신이 비뚤어지기 때문이다. 광신은 언제나 정상적인 충동을 차단해 버린다. 사람들을 대담, 무욕, 냉혹하게 만들고 괴물로 둔갑을 하게 한다. 나는 광신에는 반대다. 하지만 반대라고 해서 그러한 존재가 사라져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계획을 인정하도록 저 두 광신자를 설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획이 망가지고, 그 결과 세퍼드 내외의 인생도 망가져 버릴지 모른다. 두 사람은 연날리기하는 아이들이나, 바위의 북쪽에 붙어 있는 이끼를 조사중인 스카우트들 속에 잠복해 있는 자는 없는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둔덕을 올라왔다. 우리의 발치에서 계단 입구로 사라지더니 뒤쪽 계단으로 올라왔다. 로즈가 마지막 층계를 올라서자 팸 세퍼드가 그녀 옆으로 달려가 얼싸안았다. 로즈가 팸의 등을 다독거렸다. 한쪽 팔을 로즈의 허리에 두른 채 팸이 제인의 팔을 쥐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팸이 말했다. “잘 지냈어 ? ” 로즈가 물었다. “묵을 곳은 있었고 ? ” 제인이 말했다. “난 걱정할 거 없어. 잘 있어요. 이분의 아파트를 쓰고 있는걸.” “이 사람하고 ? ” 로즈가 갑자기 갱년기의 여자 얼굴이 되었다. “아냐 ! ” 어릴 때 어머니에게 하던 생사람 잡지 말라는 말투로 내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고. 나는 일로 케이프에 가 있는 중이오. 나도 여자 친구가……결혼할 여자가 있어요……. 수전 실버맨과 함께 지낸단 말이오.” 제인이 로즈와 팸에게 말했다. “나, 아무래도 저 사람 믿을 수 없어.” “걱정 마요.” 팸이 말했다. “믿을 수 있어. 우리는 서로 믿고 있단 말이야. 훌륭한 사람이에요.” 나는 열심히 미소를 흘렸다.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한 웃음이다. 제인은 방어가 허술한 부위라도 찾는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로즈가 말했다. “신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문제로 치고, 최소한 거래에 관한 이야기야 들어볼 수 있겠지. 나는 신뢰도에 관해서는 내 의견을 보류하겠어. 그래, 저 사람의 제안 내용은 어떤 거지 ? ” 나에게 대고 직접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내 얼굴을 눈여겨보며 팸에게 말했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십중팔구는 마음이 있다는 말이다. 장난기가 풍기는 미소의 매력 탓이리라. “당신이 말할래요 ? ” 로즈가 나에게 말했다. 분명히 그 매력 탓이다. “나에게는 당신들이 원하는 10만 달러치의 총을 입수할 방법이 있지. 탄약도 물론. 목적이나 이유는 일체 불문에 붙이기로 하고.” “왜죠 ? ” “수수료를 받게 되니까.”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말했다. “그런 거라면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로즈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돈을 건네주고 당신이 총을 갖다준다는 거겠지요. 뭐, 그런 줄거리가 아닌가요 ?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총은 인도되지 않는다.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더니 당신은 종적을 감췄다 ? ” 팸 세퍼드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로즈. 나를 믿는다면 그를 믿어도 돼. 엉뚱한 사람은 아니니까.” “팸, 대개의 사람은 엉뚱하단 말이야. 그 역시 그럴 거라고. 나는 그와 거래를 하고 싶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말했다. “그건 자기가 영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리한 인간이 내리는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거라고.”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죠 ? ” 제인이 말했다. “만일 모두가 엉뚱한 사람들이라면 당신들이 어느 누구와 거래를 시도해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지. 더구나 잘 아는 악마가 모르는 악마보다는 나을 거야. 나에게는 나를 보증해 줄 사람이 하나 있지. 단 한 사람이라도 보증해 주는 인간을 통한 총기 밀매업자를 어떻게 찾아낼 셈이지 ? ” 로즈가 말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은 이런 일이 여성에게는 벅찬일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그러는 거죠 ? 총기 거래는 남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 ” “나는 아무것도 단정하고 있지 않아요.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런 일은 아마추어의 손으로는 벅차다는 사실이오. 잘못 걸려들었다가는 운이 좋아야 돈을 사기당하는 것으로 끝나고, 최악의 경우에는 돈을 갈취당하고도 밀고까지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나 ? ” 혁명주의자들의 용어까지 구사하는 스펜서. 반체제 용어의 보고(寶庫)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우리의 돈을 탈취하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 ” 제인이 물었다. “내가 활약을 했고, 당신들 동료 한 사람이 보장을 하고 있소. 내가 지금껏 당신들에게 거짓말을 한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 팸을 남편이나 경찰에 인도해 주기라도 ? 당신들은 은행강도짓을 하고 노인을 한 사람 살해했지. 노인은 전직 경찰관이었고 뉴 베드퍼드 경찰에서는 그걸 잊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하버드 대학이 로즈 볼에서 우승할 때까지 당신들을 추적할 거요. 당신들은 속된 말로 도주범이라고. 총기상과 거래를 트고자 함 · 10· 과 같은 광고를 내고 다닐 처지가 못된다, 이 말이오. 어느 여성 그룹에서 총을 사모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제일 먼저 나타날 총기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지 ? 어느 날 난데없이 나타나 누워서 떡 먹기로 원하는 만큼의 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인간이 누굴 거라고 생각하죠 ? ” “지금으로서는.” 로즈가 말했다. “당신이 그 사람인 것 같군요.” “맞아. 더구나 당신들은 내가 어떤 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나타날 것은 위장을 한 누굴 거라고. FBI의 스파이, 특별수사대 형사, 재무부의 비밀부원, 아니면 여성일지도 모르지. 체제에 대한 증오에 찬 말을 지껄이며 자매들과 협력하고 싶다는 흑인여성일지도 모른단 말이오. 그래서 당신들이 현금을 갖고 약속 장소에 나가면 그녀가 13명의 경찰과 죄수 호송차를 이끌고 나타나겠지요.” “이 사람의 말이 맞아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이 사람은 이런 일에 능통하고, 우리는 아는 게 없어요. 총의 중개를 부탁하는데 이 사람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요.” “아냐,” 로즈가 신중을 기했다. “우리는 얼마동안 돈을 간직한 채 사정을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단순 은행강도범으로 끝장을 보게 되지. 더구나 살인을 한. 지금의 당신들은 하는 수 없이 사람을 해친 혁명가라고 할 수 있지만, 당초의 목적을 유야무야 외면해 버린다면 그 노인을 살해한 일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언젠가는 그 죄값을 치르게 될 거요.” “그 경비원을 죽인 것은 나예요.” 제인이 말했다. “로즈가 아니에요. 그 경비원이 나를 붙잡으려고 했기에 내가 쏘았어요.” “마찬가지지.” 내가 말했다. “로즈는 종범이며 책임은 당신과 같다고. 누가 쏘았느냐는 문제가 아니오.” “우리는 아마추어에게 심리분석을 들을 생각은 없어요, 스펜서.” 로즈가 말했다. “당신이 우리의 돈을 나꿔채서 달아나는 것을 방지하자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 ” “나는 단순히 중개인의 역할만 합니다. 당신과 총기상이 직접 교섭을 하는 거요. 당신은 총을 확인하고 그는 돈을 확인하는 거요.” “그런데 총기에 결함이 있다면 ? ” “사기 전에 살펴봐야지.”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당신들이 그런 종류의 총에 익숙하지 못하면 내가 함께 살펴드리리다. 어떤 총이 좋을런지 생각해본 일은 있소 ? ” “뭐든,” 제인이 말했다. “총알만 나간다면.” “아니야, 제인. 우리는 총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 하여간, 스펜서. 당신은 거기에 대해서는 훤히 아실 텐데요. 우리는 게릴라전에 적합한 총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쉽게 감추고 돌아다닐 수 있는 총을 포함해서 기관총 같은 것도.” “요컨대 손에 들고 쏘는 자동총기 말이로군. 다리를 부착시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정식 명칭은 모르지만 소형일수록 좋아요.” “좋소. 업자와 상의해 보리다. 그밖의 다른 주문은 ? ” “발사하는데 조작이 쉬워야 해요.” 제인이 말했다. “그럼, 거래를 추진하겠다는 거요 ? ” 내가 말했다. “우리끼리 상의할 시간을 줘요, 스펜서 씨.” 로즈가 말했다. 그리고 셋이서 발코니 저쪽으로 가서 서로 이마를 맞대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망대의 벽에는 스프레이식 페인트로 별의별 낙서가 다 적혀 있었다. 대개는 자기의 이름이 포함된 것이었으나, 개중에는 동성연애 개방을 주장하는 글귀, 흑인을 버스에 태워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라는 제안과 만강이라는 인물의 누이 동생에 관한 문구 등이 눈에 뛰었다. 회의가 끝났는지 로즈가 돌아왔다.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요. 총은 언제 입수 가능하죠 ? ” “이쪽에서 연락하겠소.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에.” “우리의 주소나 전화번호는 알려줄 수 없어요.” “그럴 필요는 없소.” 명함을 내주었다. “내 전화번호는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응답 서비스에다 전할 말을 일러두겠소. 전화를 걸 때는 12시를 택하시도록. 수신자부담이라도 상관없소.” “우리의 비용은 우리가 써요, 스펜서 씨.” “물론 그렇겠지. 나는 단지 좋은 인상을 주려고 말했을 뿐이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스펜서 씨. 당신으로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일 것 같으니까.” 22 로즈와 제인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밀하게 돌아갔다. 그녀들은 미끼에 관심을 보였다. 일이 잘 풀릴 것도 같다. 제인은 내 사타구니를 또 한번 걷어찰 기미는 보이지를 않았다. “잘될 것 같소.” 내가 팸 세퍼드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혼이 나게 되나요 ? ” “그건 내가 생각할 문제예요. 당신은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배반자가 되고 말아요. 저 사람들은 나를 믿기에 당신을 신용하는 건데…….” 우리는 교외로 돌아가는 차의 흐름과는 반대로 보스턴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 경비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러나 그 책임을 질 사람은 당신이 아니오. 당신은 그 점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요.” “결국은, 스펜서. 나는 그 여자들을 배신하게 되는 셈이 아닌가요 ? ” “할 수 없지.” “이 악당 같으니라고 ! ” “운전중에 나를 걷어차면 교통사고가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집에 도착하는 대로 그녀들에게 경고를 하겠어요. 집으로 돌아가요, 빨리.” “첫째로, 당신은 신문에 광고를 내는 일 말고는 그 여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거니와 지금 곧 광고를 낼 방법도 없소. 둘째로, 그녀들에게 경고를 했다가는 당신은 자신과 남편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이 돼요. 허비가 말려들고 있는 트러블은 당신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고, 그를 살려내자면 로즈와 제인을 배반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왜요 ? 허브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 아이들은 괜찮은가요 ? ” “지금 현재는 모두 별일 없어요. 하지만 허브는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썼어요. 이 사실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했다가는 당신이 나를 믿지 않을 테지. 그리고 당신이 꼭 알고 싶어하니까…….” “당신에게는 나를 조종할 권리가 없어요. 설령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짓이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단 말이에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거요. 모르는 것이 당신을 위해 좋은 일이지만, 당신은 알 권리가 있고, 당신 대신에 판단을 내릴 권한은 내게 없으니까.” “그래서 사태가 어떻게 돼 있다는 건가요 ? ” 나는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에는 코프리 광장을 지나 보일스턴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광장에는 인기척이 뜸한 존 행코크 빌딩이 석양에 반사되어 그 빛에 공원의 분수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호크가 아이 하나를 방에서 내몰았다는 이야기만은 하지 않았다. 나의 온정주의가 여간해서 나를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는 것이다. “큰일이네. 우리들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 ”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가 파멸직전에 와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거요. 거기에는 로즈와 제인을 배에서 내던져 버리는 일도 포함되어 있고.” “나는 그 사람들을 배반 못해요. 무슨 연극대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군요.” “적에게 팔아먹을 수 없다는 표현보다는 낫군. 하지만 표현이야 어쨌든, 그리고 당신은 어느쪽을 선택하든 별로 뾰족한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입장에 스스로를 빠뜨렸소. 하지만 당신에게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고, 아내를 필요로 하는 남편이 있어요. 당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인생이 있어요. 당신 스스로도 다시 훌륭한 인생을 재건할 수 있는 지적이고 용모단정한 여자요.” 나는 본위트에서 좌회전해서 버클리 대로로 들어섰다. “그 노인 때문에 누군가가 형무소에 들어가야 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요. 가령 그것이 로즈든 제인이든 나로서는 눈물을 흘릴 생각은 없어요. 노인이 악을 가로막았을 때 그 두 여자는 촛불이라도 불어끄듯 거리낌없이 노인을 꺼버렸던 거요. 더구나 한 가닥의 낚시바늘로 킹 파워즈까지 낚아올릴 수 있다면 나로서는 크게 성공을 거두는 셈이거든.” 오른쪽으로 꼬부라져 말보로 거리로 접어들어 내 아파트 악의 소화전 가까이에 차를 세웠다. 두 사람 모두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서도 말이 없었다. 서로간에 자의식(自意識)이 예민해져서 그 침묵이 부담스러웠다. 또한 두 사람만이 나의 아파트에 있다는 생각이 거북스럽기도 했다. “저녁준비를 하겠소.” 내가 말했다. “식사 전에 한잔 하겠소 ? ” 나는 목이 갈렸지만 헛기침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옛날 리온 에롤의 영화처럼 낯간지러운 일이 된다. “당신도 마실 건가요 ? ” 그녀가 물었다. “나는 맥주.” 갈린 목소리가 쉰 목소리가 되었다. 기침을 하지 않기 위해 침을 삼켰다. “그럼, 한잔 하죠.” 나는 냉장고에서 유티카 클럽 크림 엘르 두 개를 꺼내왔다. “잔은 ? ” “캔 째로 마실래요.” “이거 마셔 본 일 있나요 ? ” 내가 말했다. “맛이 썩 좋아요. 암스텔을 수입하지 못하게 된 뒤부터 이것저것 마셔 보았지만 이게 제일이더군요.” “괜찮네요.” “스파게티 먹겠소 ? ” “예, 좋아해요.” 냉장고에서 소스 그릇을 꺼내어 잠시 더운물에 담궈, 진홍색의 얼어붙은 소스의 덩어리를 프라이팬에 부었다. 가스불을 아주 약하게 해놓고 돌아와 유티카 클럽 크림 엘르를 마셨다. “어릴 때 매사추세츠 서부에 몇 번 가보았는데, U와 C자를 사용해서 그린 인형을 유티카 클럽의 선전에 쓰던 것을 기억하고 있소. 아마도 유티카라는 이름이었지, 아마 ? ” 기침을 죽이려고 맥주를 들이켰다. 팸 세퍼드는 부엌 카운터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아 몸을 뒤로 제치고 있었다. 악으로 뻗은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있어서 엷은 천으로 된 여름의 프린트 드레스가 허벅지 위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녀는 캔을 기울여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실 만해요 ? ” 내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하고자 하는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죠 ? ”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하지만, 동조는 해주겠죠. 자기를 소중히 생각해야 하니까. 나는 당신을 이 궁지에서 건져낼 수가 있소. 성사가 되도록 해줘요.”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나 스스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당신의 생각에 따르기로 하지요. 허브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또 나 자신을 위해. 결국은 나 스스로를 위하는 셈이 되는 거지만…….” 잘됐다. 예의 장난기가 섞인 미소가 효력을 발생했나 보다. 이 매력은 좋은 일에만 사용하도록 애써야 한다. “한시름 놨군.” 다시 유티카 클럽의 마개를 땄다. 스파게티를 삶은 물을 불에 올려놓고, 샐러드에 쓸 상추를 다듬기 시작했다. “맥주 더 하겠소 ? ” 생기를 주기 위해 상추를 찬 얼음 물에 담궜다. “아직 남았어요.” 그녀는 조용히 앉아서 조금씩 맥주를 마시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역시 가끔 그녀를 돌아다보며 미소를 보냈으나 넓적다리는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는 폭이 넓은 고기 써는 칼로 붉은 양파를 종이장처럼 엷게 저미고 있었다. “그건 나와 같은 씩씩한 용모와 재능을 갖춘 미남자가 어째서 이런 장사를 해야 될 판국이 되었느냐는 뜻이오 ? ” “나는 그런 것보다, 당신의 성격적인 모순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당신은 남성과시를 서슴치 않으면서도 상당히 생각이 깊은 것 같아요. 마치 근육 덩어리 같은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많은 책을 읽는 사람. 구변이 좋아서 만사를 비꼬고 농으로 얼버무릴 것 같으면서도 조금 전에 내가 정면으로 싫다고 했는데도 궁지에 빠진 인간 둘을 못본 체하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나에게 저녁식사를 만들어 주면서, 자기의 아파트에 나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에 명백히 마음을刷 어요.” “명백히 ? ” “명백해요.” “당신도 ? ” “나도. 하지만 나는 어디서나 흔한 중류가정의 주부에 지나지 않아요. 당연히 당신은 그런 일에 익숙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여자에게 저녁식사를 만들어 주는 건 내가 처음은 아닐 테지요 ? ” “수전을 위해서도 가끔 옷소매를 걷어붙이죠.” 나는 대답을 하면서 이 지방 특산물인 토마토를 썰었다. 다음에는 피망을 채썰었다. “그래서 나와 어디가 다른가요 ? 어째서 이 자리에 일종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나요 ? ” “글쎄요. 당신이 매력적이고 내가 호색적인 남자라서 그런지 모르죠. 그것만은 확실할 테죠. 그러나 동시에 이 이상의 선을 넘어서면 안된다는 의식도 팽팽하거든요.” “왜죠 ? ” 맥주 캔을 내려놓고, 양팔을 유방 아래쪽에 꼬았다. “나는 당신과 허비를 원상으로 회복시켜 주려고 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욕심을 내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더구나 그렇게 되면 수전도 별로 좋아할 리 없고.” “어째서 그녀에게 알려야 하나요 ? ” “내가 수전에게 실토하지 않으면 그녀를 속이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수전이 나를 믿지 않게 될 테니까.” “그러나 당신이 그랬다는 걸 그녀는 모르잖아요 ? ” “그렇기는 하지만 끝내는 신용할 수 없게 될 거요.” “이상한 논리네요.” “이상할 것 없어요. 결과적으로 그녀가 나를 신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사실화되어 버린다는 뜻이오. 현실적으로 우선 나는 신용할 값어치가 없는 인간이 되는 거요. 그녀가 그걸 모르는 것은 단순히 내가 그녀를 기만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그래서 외도한 일을 모두 고백한다는 건가요 ? ” “그녀가 알 권리가 있는 사항은 모두.”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나요 ? ” “몇 번이야 있지.” “그래 수전이 불쾌해 하던가요 ? ” “아니, 대개는 괘념치 않아요. 하지만 그런 경우 그녀는 상대한 여성을 모르는 처지였죠. 하지만 이번에는 수전이 당신을 알고 있단 말이오. 이번에 그런다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으로 생각해요. 특히 우리는 지금 일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어요. 그것이 뭔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한다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해. 젠장 ! ” “수전은 무척 행복한 사람이네요.” “당신은 그 말을 선서증언으로 해줄래요 ? 바로 일전에 그녀는 나를 가리켜 어리석은 당나귀라고 화를 냈거든.” “그럴 만도 하네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나는 오이 피클 작은 것 세 개를 얇게 썰어서 샐러드에 곁드렸다. 상추를 물에서 건져내어 행주로 가볍게 눌러서 물기를 빼고,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 소스를 살펴보았더니 거의 녹아 있었다. 샐러드 그릇에 씨가 없는 포도를 약간 얹었다. “문제는 아무리 설명해도 호색벽에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점이오.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기기는 어려운 일이거든.” 팸 세퍼드가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둘이서 침대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그 공상을 즐겼거든요. 당신은 거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거친 짓은 하지 않는군요.” “터프하지만 아주 곰살맞지.”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고,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허비 이외의 남자와 자고 나면 거의 스스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곤 해요.” 다시 웃었지만 목소리가 갈렸다. “생각해 보니 허비와의 마지막 몇 번은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어요.” “그건 최근의 일이오 ? ” 시선을 돌렸다. “2년 전의 일이에요.” “그래서 당신은 당혹하게 되었다 ? ”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그래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 “글쎄. 그럴 수도……하지만 당신은 섹스의 자동판매기가 아니라고. 그가 동전을 넣는다고 언제나 클라이맥스에 달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와는 자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겠죠.” “견딜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당신 쪽이 불감증이 아닌가 의심했고,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려고 밤에 나가서 실험을 해본 게로군요.” “그런 셈이죠. 별로 깔끔한 짓은 아니죠. 안 그래요 ? ” “그야. 어떤 경우에도 부정행위가 깔끔할 수는 없죠. 허비 쪽은 어땠을까 ? 그는 어떻게 긴장을 풀어왔죠 ? ” “긴장을 푼다……놀랐네요.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 처음 봐요. 그가 어떻게 푸는지는 알지 못해요. 아마 자위행위라도 했을까 ? 다른 여자와 잤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있게 말했다. “왜 자지 않았을까 ? ” “성실, 매저키즘, 혹은 사랑에서……. 몰라요.” “어쩌면 죄의식을 보다 깊이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는걸.” “글쎄……. 지금 말한 모든 것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그 모두라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죠. 이런 일을 오랫동안 하면 할수록 언제나 모든 요소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티카 클럽을 두 캔 냉장고에서 꺼내어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문제는,” 그녀가 말했다. “결국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라고요.” “불감증인지 어떤지를 ? ” “그래요. 술에 취해서 허우적거리고 신음소리를 내며 상대가 기대하는 것은 모두 하지만 그 일부는 언제나 연기이며, 이튿날에는 늘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지는 거예요. 당신과 하고 싶었던 이유의 하나는 나를 불감증이라고 단정하느냐 아니냐를 나중에 물어 볼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갈린 목소리로 ‘당신과 하고 싶었다’라는 문구를 그녀가 입에 올리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목소리가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의미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자기혐오이다. 지금까지 여러 기회에 들어본 일이 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질문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오. 불감증……이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말이오. 악서 당신이 나에게 지적한 바로 그런 뜻이오. 의미가 없는 말이거든. 그건 단순히 상대방이 요구하는 바를 당신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에 불과한 거요. 허비와 자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명백히 그렇게 말하면 될 일이지 굳이 논리화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허비와 잠자리를 함께해도 별로 즐겁지가 않다고 말하면 되는 거예요. 아니면 어젯밤은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고 말한다면 더욱 좋겠지. 그것을 불변의 법칙으로 삼을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게는 되지 않아요.” “나는 가끔 그 점을 의문스럽게 생각할 때가 있어요. 만사는 극히 간단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소.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요. 상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빼고는 섹스라는 것은 호흡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혼자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둘이 되면 까다로워지죠.” “수전은……, 미안해요. 그런 것을 묻는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수전은 섹스를 즐기느냐, 그 말이요 ? 즐길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어요. 지금은 극히 드물지만 나도 그렇소. 그런 경우가 19세 무렵보다는 상당히 늘었다고 해야겠지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상추를 꺼내, 랩을 벗기고 다른 야채와 함께 그릇에 담았다. 소스가 조용히 끓기 시작했기에 2인분의 스파게티를 냄비에 넣었다. “물을 많이 부우면 늘러붙지 않고 스파게티를 넣자마자 금방 끓으니까 푹 익어요. 봐요, 나는 스파게티 전문가라니까.” “왜 허비와 나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놓으려고 하나요 ? 당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인데. 그것도 미국이란 나라와 애플 파이의 관계인가요. 부부는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으로서 절대로 헤어져서는 안된다, 이건가요 ? ” “당신은 결혼생활을 진지하게 마주대한 일이 없는 듯하군요.” “진지하게요 ? 22년이나 됐는데 ? 그런데도 진지하지가 않았다는 거예요 ? ” “긴 결혼생활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거요. 당신은 원래의 자기와는 다른 인간이 되려고 애를 썼으며,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되자 지금은자기가 불감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편 남편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거물이 되기위한 노력으로 죽을 힘을 다하며 살아왔으나 그것을 성공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정도를 벗어나고 있단 말이오.”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원래의 내가 아니라면, 원래의 나는 뭐죠 ? ” “나는 모르지요.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남편이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하는 말, 잘 이해가 안 가요.” “가령 허비가 당신에게 실망했다 하더라도 그건 당신의 잘못이라고만 단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허비 쪽의 잘못일지도 모르니까.”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요. 그건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에요. 그건 모든 여성이 안고 있는 문제이고,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어요.” “일반론은 그만두시오. 그것이 여성전반의 문제인지, 어느 특정 개인인 여자의 문제인지는 나는 몰라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당신이 고민하는 원인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오. 만일에 그렇다면 해결이 가능해요.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과 무엇인가를 느끼고 그렇게 행동하는, 이를 테면 그렇게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거든요.” “그래, 어떻게 해야 무엇인가를 믿게 되는 걸 배우게 되나요 ? ” “유능한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정신과 돌팔이와 ? ” “유능한 의사도 있는가 하면 형편없는 의사도 있겠죠. 사립탐정도 마찬가지죠. 하여간 우수한 사람을 소개할 수는 있어요.” “전에 사건을 의뢰해 온 사람인가요 ? ” “아니오. 수전은 그런 방면에는 조예가 깊단 말이오. 카운셀러를 하고 있는데, 일에 상당히 열심이거든.” “정신과의 하잘것없는 의사 · 10· .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정신과의 돌팔이가 끼어드는군요. 아이의 성적이 나빠지기만 해도 정신과 의사의 의견을 듣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렸어요.” “진단 받아본 일이 있었소 ? ” “없어요.” “허비는 ? ” “없어요. 그러나 나의 불감증의 원인을 알 수 있을런지 한번 진단을 받아 보라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그러면서도 그 자신이 진찰받는 건 싫다고 했지요. 자신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돌팔이에게 걸려 일에 관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받은 다음 당신은 환자다 라는 진단이 내려지는 것이 질색이라는 거예요.” “만드시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도 좋아요. 유능한 사회사업가라도 좋고요. 수전과 상의해 보도록 해요. 하지만 ‘불감증’과 마찬가지로, 허비의 말은 잘못된 거 같아요. ‘이상하다’라든가, ‘이상하지 않다’라고 따져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요. 사람이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이면 족한 거예요.” “그렇다면 돌팔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집어넣거나, 살인사건에서 의사끼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왜죠 ? 언제나 한쪽에서는 정신이상 증세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상이라고 말하지 뭐예요.” “그래요. 정신의학이 다른 장사나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엉터리 수작을 부릴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은 본론에서 벗어나고 있단 말이오. 그렇게 되는 것은 정신과 의사에 대해서 그가 가진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기 때문이오. 유능한 사람들은 그것을 잘 분별할 줄 안다고 생각해요. 유능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의 고민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임을 알고 있는 법이오. 그들은 정신분열증을 완전히 치료하거나, 누가 법적으로 정신이 정상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가 못해요.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과장된 것이지. 하지만 당신이 남편의 조건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을 그만두거나, 혹은 남편이 코튼 마더의 조건에 기반을 두고 스스로를 규정짓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데는 상당한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코튼 마더 ? ” “옛날의 그 청교도 목사 말이오.” “아, 그 코튼 마더. 당신 책 참 많이 읽었네요.” “시간이 남아도니까.” 타이머가 울렸기에 스파게티를 한 가닥 입에 넣어 보았다. “알 텐트,” 내가 말했다. “그의 동생인 샘은 왕년에 레드 삭스의 선수였지.” 스파게티가 익었기에 물을 따라내고 버터와 파르메산 치즈를 넣고 여러 번 뒤집었다. “지어낸 이야기겠지요.” “뭐가 ? ” “알 덴트의 동생.” “아니, 정말이오. 샘 덴트는 30여년 전에 레드 삭스의 선수였다니까. 내야수로 왼손잡였죠.” 스파게티 소스가 부글부글 끓기에 큰 그릇에 옮기고, 접시 두 장에 스파게티를 수북히 담았다. 샐러드에 드레싱을 끼얹고 전부 다 부엌 식탁에 나란히 놓았다. “나이프와 포크는 그 서랍에 들어 있어요.” 갈로 바간디의 반 가론 병을 꺼내어 식기장에서 내온 술잔에 따랐다. 둘이서 카운터에 앉아 먹고 마셨다. “이 스파게티 소스, 정말 자기 실력으로 만든 거예요 ? ” 그녀가 물었다. “물론. 토마토 페이스트 캔 라벨에서 훔친 비법을 썼지.” “그리고 이 샐러드 드레싱도 ? 벌꿀이 들었나요 ? ” “그래요. 어머니한테 배웠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댔다. “파이터(투사), 러버(연인), 거기에다 요리의 대가 ? 놀랐는데요.” “천만에. 파이터나 러버는 그렇다고 치지만, 요리의 대가라는 것은 여성차별주의자의 용어죠.” “어째서요 ? ” “가령 당신이 이것을 만들었다면 당신을 요리의 대가라고 추켜세울 리가 없지. 그렇게 추켜세우는 건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거든. 요리에 관심이 있어 스스로 요리를 하는 남자는 식도락가라고 불리우죠. 그렇지만 같은 일을 해도 여자는 주부라고 불리우거든. 자, 잡담을 그만두고 스파게티나 먹어요.” 그녀가 먹기 시작했고 나도 먹었다. 23 나는 긴 의자에서 잤다. 자재심이 하복부의 팽창을 이겨내 주었다. 팸 세퍼드가 아직 잠들어 있는 동안에 나는 샤워를 하고 아파트를 나왔다. 10시에는 하이아네스의 홀리데이 인에서 파워즈의 대리격인 메이시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과일은 어떤가 ? ” 메이시가 물었다. “아니, 됐네. 커피면 됐어. 총은 언제 넘겨줄 수 있지 ? ” “경우에 따라서는 내일. 모레라면 틀림없지.” “총은 뭐지 ? ” “M2 자동권총, 신품이나 다를 바 없지. 총 한자루당 탄환은 100발.” “몇 자루나 되지 ? ” “450자루.” “농담 말라고, 한 자루에 200달러 이상이 되잖나.” 메이시는 어깨를 추스렸다. “탄환 포함이라니까. 그걸 알아야지.” “세게 치는걸. 총포상에서는 그 반 값에 살 수 있는데 말야.” “450자루를 ? M2로 ? ” “그 점은 인정하지.” 내가 말했다. “하지만 450자루에 10만 달러는 비싼걸. 사는 쪽에서 고개를 꼴 텐데.” “당신 쪽에서 물고 온 이야기라고, 스펜스. 당신이 구해 달라고 한 거 잊지 않았겠지 ? ” 그래 나는 스펜스라고 불리우는 걸 아주 좋아한다. “더구나 당신 몫으로 3만 달러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결국은 당신들이 챙길 돈이지.” “이봐, 스펜스. 그건 빌려준 돈이라고. 고객에게 돈을 떼인다면 우리는 파산하고 말아. 더구나 우리가 허비에게 억지로 쓰라고 한 돈도 아니라고. 그가 우리에게 찾아왔던 거야. 자네도 마찬가지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데를 알아보라고. 단, 허비가 잔말 없이 3만 달러를 갚도록 하면 그걸로 그만이니까. 내친 김에 말해 두지만 월요일이 되면 액수가 불어난다는 걸 알아 두게.” “그렇겠지. 당신네 사설금융회사는 단계적으로 이자를 올려갈 테니까.” 메이시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추스리고 양손을 벌려 보였다. “별로 꼬투리를 집을 일도 아닐 텐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고, 손님은 얼마든지 있다고. 모든 것이 원활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스펜스.” 그는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총은 살 건가, 그만둘 건가 ? ” “사야지.” “좋아. 이걸로 거래는 성립된 거야. 언제 넘겨받고 싶은가 ? 내일 모레라면 틀림없을 거야.” 손목시계의 날짜를 보았다. “27일이야. 그보다 더 빨리는 약간 힘이 들 테고.” “27일면 돼.” “그래, 인수인계는 어디서 하면 좋을까 ? ” “어디라도 좋아. 어디 적당한 장소가 있나 ? ” “있지. 첼시 시장의 화물 터미널. 알고 있나 ? ” “알지.” “거기에서 27일 오전 6시에. 그 시각에는 많은 트럭이 짐을 싣고 내리고 하니까 우리 일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자네 측에서도 트럭을 갖고 있나 ? ” “갖고 있지.” “오케이. 자, 거래는 성립된 거나 마찬가지고……, 자네도 인수자와 함께 올 건가 ? ” “함께 가네.” “나는 가지 않아. 하지만 책임자에게 넘겨줄 10만 달러는 현금으로 준비해 주어야 해. 그 시장 센터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면 돼. 장소는 알고 있을 테지 ? ” “알고는 있지만, 그건 안돼.” 내가 말했다. “왜지 ? ” “킹 자신이 물건을 갖고 와야 해.” “왜 ? ” “우리 측에서는 자네 쪽 책임자와 거래하기를 원하거든. 나를 통해서 거래하는 걸 꺼려한다고. 그자들이 더 많이 총을 사려고 할지도 모르거니와, 어쨌든 직거래를 원하는 걸 어쩌나 ? ” “그럼, 내가 나가도록 하지.” “아냐, 킹이 아니면 곤란해. 그자들은 자네들이 사기를 칠까 봐 철저를 기하고 있는 거야. 보스와 직거래를 해야 틀림없다고 생각하지. 킹 자신이 얼굴을 내보이면 납으로 만든 파이프를 열 상자씩 비싼 값에 사는 일은 없을 거라고 계산하거든. 더구나 우리를 쏴 죽이고 돈만 빼앗아 달아나는 비열한 계획에는 킹 자신이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단 말이야. 그들은 이런 거래가 처음이라 위험성이 높다고 보고 있어. 킹 자신이 물건을 넘겨주지 못하겠다면 이 거래는 실패라고.” “파워즈 씨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걸 싫어한단 말이야.” 메이시가 말했다. “나라도 그럴 거야. 하지만 그자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들은 두둑히 재미를 보는 일이 아닌가. 킹은 이런 장사에는 다소간 고집을 꺾을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데 ? ” “이 거래에는 그쪽에서 걱정하는 음모나 사기행위는 일체 없다고 내가 확언을 하지. 이건 어디까지나 속을 털어놓고 하는 거래라는 걸 알지 않는가 ? ” “나야 잘 알지. 또한 나는 당신을 신용해.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그 진지한 다색의 눈을 보아도 알 수가 있지. 그러나 돈을 낼 사람은 여기에 와 있지를 않아. 그들은 당신이 얼마나 성실한지를 알지 못하거니와 믿으려 하지도 않아. 당신이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는 둥, 여러 가지로 좋게 말했지만.” “그렇다면 이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허비에 대한 담보권을 행사하기로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면 ? ” “우리는 경찰에 가지.” “그래서 허비는 어째서 우리에게서 돈을 채용했는가를 털어놓는다 ? ” “돈을 못 갚는 이유를 당신들에게 설명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큰 실수를 범하는 일이 될 텐데.” “그야 그럴지 모르지만, 그쪽으로서도 아주 재미없는 일이 되지. 비록 당신들이 허비를 죽여 버린다고 해도, 경찰이 당신들 뒤를 쫓아다니게 될 뿐만 아니라 내가 화가 나서 당신들에게 맞설 생각을 먹을지도 모르지. 그게 다 번거로운 일이 아닌가 ? 킹이 게을러 터져서 아침 6시에 얼굴을 내밀기 싫어 꼭 그래야만 하겠나 ? ” 메이시는 30초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달리 도망갈 길이 없는 입장으로 나와 허비를 몰아넣는 세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테지. 당신들보다 경찰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과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거라, 이런 말씀이야. 허비가 지방검사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 봤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서는 곤란하거든. 내 등뒤의 그자들은 그 점에서는 절대로 양보를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 ? 그들은 그와 거래하기를 원하는데 당신은 그가 아니야. 그라는 건 킹이라고.” 메이시가 말했다. “그에게 상의해 보지. 이런 일로 그를 대신해서 무엇을 약속할 권한은 내게 없으니까.” “그야 당신은 킹의 지시 없이는 자기의 바지 지퍼조차 올릴 권한도 없지. 그런 것쯤은 알고 있으니 어서 전화를 하라고.” 그는 다시 30초 가량 내 얼굴을 노려보더니 옆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15분 정도 옆방에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갈색의 에드의 아디다스 가죽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니스나 조깅, 혹은 도주중의 부상을 막는데 안성맞춤의 신발이다. 룸 서비스의 보온병에서 조금 더 커피를 따랐다. 미지근해져 있었다. 컵을 테이블 위에 놓고 창가로 가서 아래쪽 풀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처럼 푸른 물에 많은 사람들이, 주로 젊은이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헤엄치기도 하고 뛰어들기도 했다. 풀장 주변의 비치 체어에서는 많은 여자들이 살갗을 태우고 있는데, 개중에는 눈을 즐겁게 해줄 만한 육체도 있다. 수전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좋겠다. 나는 어제 숙소로 돌아가지를 못했던 것이다.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 저녁에 전화를 걸어주었어야 했는데. 때로는 모든 것을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는 것이 곤란할 때가 있다. 팸 세퍼드, 허비, 로즈, 제인, 킹 파워즈, 호크, 뉴 베드퍼드 경찰서원들……. 그들을 빈틈없이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성적흥분도. 비치 파라솔 밑에서 금발을 길게 내려뜨린 아가씨가 나타났다. 폭이 너무 좁아 입고 있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비키니를 입고 있다. 그녀를 감상하고 있는데 메이시가 돌아왔다. “킹이 그러겠다는군.” “허, 고마운 일이군.” 내가 말했다. “그는 킹일 뿐더러 황태자이기도 하지. 안 그런가, 메이시 ? ”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스펜스. 이번 일에는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해. 당신의 요구를 전했더니 처음에는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라고 하던걸.” “그걸 당신이 살려주었다 ? 하여간 메이시, 이번 건은 신세를 많이 지는걸.” “곧이들리지 않는 모양이지만, 일촉즉발의 상태였다고. 거짓말이 아니야. 이번 일에 차질이 생기면 킹은 반드시 당신을 해치울 거야. 명심하라고. 그는 반드시 자네를 제거할 거야, 스펜스.” “메이시.” 내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나를 스펜스라고 불렀다가는 그 안경을 부셔버릴 테니 명심하라고.” 24 모텔에 돌아왔더니 11시 20분이었다. 옷장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해변가를 산책하고 올게요. 점심때까지 돌아올 거예요. 나도 어젯밤은 집을 비웠을지도 몰라요.’ 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 응답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모텔에 전화를 걸라고 한 로즈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12시 5분에 전화가 왔다. “계약이 성립됐소.” “언제, 어디서 ? ” “27일 아침 6시. 첼시의 생선식품 센터.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 ? ” “아니오.” “가르쳐줄 테니 필기구를 준비하시오.” “준비했어요.” 가르쳐주었다. “거기에 가거든 레스토랑에 들어가 카운터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어요. 나는 6시 15분 전에 갈 테니까.” “팸도 왔으면 해요.” “왜지 ? ” “그녀가 있는 편이 당신을 믿을 수 있으니까.” “여동생을 이용하는 수법이군.” “우리는 필요한 건 뭐든지 이용하죠. 투쟁을 위해서요.” “대개는 그렇게 말하지.” “팸은 올 건가요 ? ” “함께 데리고 가겠소.” “우리도 틀림없이 가겠어요. 실수가 없도록 해줘요.” “트럭이 필요한데.” “어느 정도 크기의 ? ” “대형은 필요없고, 소형 밴이면 되겠소.” “한 대 빌리지요. 짐 싣는 건 도와주시겠지요 ? ” “물론.” “알았어요. 그럼, 거기에서.” 전화를 끊었다. 돌아와서 저녁식사에 데리고 나가겠다는 수전 악으로의 메모를 써서 아래쪽에 X표를 27개 그린 다음 수전이 남겨놓은 메모와 바꾸어 놓았다. 다음에는 뉴 베드퍼드로 전화를 걸었다. 재키 실비아가 맥더모트와 함께 카운티 대로의 브리스틀 군재판소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가보니 현관 양쪽의 흰 돌기둥에 한 사람씩 떨어져 기대서 있었다. “자, 갑시다.” 차에서 내리자 실비아가 말했다. “리냐리스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까.” 벽돌 건물인 재판소로 들어가서, 접수계 악을 지나 문에 ‘안톤 리냐리스 지방검사보’라고 적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리냐리스가 일어나 책상을 돌아 걸어와서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중키에 단단한 체격으로, 아폴로 스타일로 머리를 깎고, 조기까지 입은 정장차림이다. 흰 셔츠에 연대의 줄무늬가 든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다. 구두는 구지, 양복은 피에르 가르덴으로 보였다. 그 자신 장래의 지방검사는 자신이 있는 듯 악수에 힘이 들어가 있고, 면도 후의 로션냄새가 풍겼다. ‘카논’를 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앉으시오, 스펜서. 잘 와주셨소. 재키와 리치로부터 이번 사건에 대한 설명은 들었소. 별반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인수인계는 언제죠 ? ” “모레 아침 6시. 첼시 시장의 화물 터미널이오.” “그곳은 사포크에 속하오, 아니면 미들섹스군 쪽이오 ? ” “사포크.” 내가 말했다. “틀림없소 ? ” “나는 전에 사포크 군의 지방검사국에서 일했었죠. 에베렛은 미들섹스 군, 첼시는 사포크 군에 속한다고요.” “알았소. 사포크의 협력이 필요하겠군.” 손목시계를 보았다. 대형으로 잘 보이는 녹색 문자판이 붙어 있으며, 단추를 누르면 시각을 나타내는 숫자가 나타난다. “그건 문제가 없지.” 그가 말했다. “짐 크렌시에게 전화를 걸겠소. 그는 협력해 줄 거요.” 회전의자에 등을 대고 열려 있는 서랍에 발 한쪽을 올려놓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준비는 ? ” 내가 물었다. “우리는 시간이 되기 전에 배치를 완료할 거요.” 실비아가 대신 말했다. “그리고 물건의 인계가 시작되면…….” 한쪽 손을 들어 꽉 쥐었다. 리냐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인수인계가 어느 단계까지 진행되든 문제가 아니지. 한쪽은 은행을 턴 돈을 갖고 있고, 한쪽은 장물인 총을 갖고 있을 테니까. 나도 현장에 가야겠는걸. 이번 사건에서는 꼭 한몫을 하고 싶으니까.” 맥더모트가 말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안톤.” 리냐리스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평생 책상머리만 지키려고 이 직업을 택한 건 아니니까.” “그건 좋지만 이번 일은 절대로 사전에 신문에 흘려서는 곤란해.” 실비아가 다짐을 해두었다. 리냐리스가 또 싱긋 웃었다. “여러분.” 천만에라는 투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걱정은 할 때가 따로 있지.” “실비아의 말이 맞아.” 내가 말했다. “상대는 모두가 조심성 많은 놈들이라고. 킹 파워즈는 습관적으로. 로즈와 제인은 성격적으로. 모두가 신경이 날카롭다고.” “알았다니까.” 리냐리스가 말했다. “그래, 당신이 감싸려는 두 사람은 어떻게 다루어 드린다 ? ”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주기 바라겠소.” 내가 말했다. “두 사람은 신분의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할 익명의 비밀공작원쯤으로 제쳐놓으면 좋겠는데……. 나도 마찬가지고. 이번 사건으로 내 이름이 오르내리면 두 사람의 이름도 표면화될지도 모르거든. 내 의뢰인이니까.” 리냐리스가 말했다. “이름은 알아둘 필요가 있소. 만일 그들이 그물에 걸렸을 경우 빼돌려야 하니까.” 이름을 대주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소 ? ” 그가 물었다. “부부지.” “그래, 당신은 그 부부를 위해 이번 일을 꾸몄소 ? ” “그렇다고 볼 수가 있지요.” “사포크가 용케도 당신을 묵인해 주었군.” “이해가 안 가시겠지.” 내가 말했다. 리냐리스가 또 시계를 보았다. 단추를 누르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재키, 자네와 리치는 내일 여기의 스펜서와 함께 거기에 가서 타협을 해주게. 나는 짐 크랜시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책을 강구해 두도록 하지.” “우리는 서에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맥더모트가 말했다. “그건 내가 하지.” 리냐리스가 말했다. “크르즈 부장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네들 둘을 이틀 동안 내 밑에서 일할 수 있게 조치해 달라고 하겠어. 그와 나는 친한 사이거든. 승낙해 줄 거라고. 보비 산토스와 연락을 취해서 내일 함께 데려오도록 하게. 그렇게 되면 나는 타협의 내용을 그를 통해서 들을 수가 있겠지.” 손을 뻗어 전화기 내선의 단추를 누르고 말했다. “사포크 지방검사국의 짐 크랜시를 불러 주게.” 그리고 나서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서 나에게 말했다. “고맙소, 스펜서. 이번 일에 감사를 해야겠소.” 그리고 두 형사에게도 말했다. “자네들 둘도 잘했어. 고마워.” 수화기를 막았던 손을 떼더니 지껄이기 시작했다. “짐인가 ? 나안톤 리냐리스일세. 자네 관할에서 보통이 넘는 일거리가 생겼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 산토스라는 사람은 누구지 ? ” 내가 재키 실비아에게 물었다. “이 지검에 배속되어 있는 주 경찰의 형사요. 쓸 만한 사나이지. 공안위원장이 되는 것이 꿈인데, 사람이란 대망을 품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안 그런가, 리치 ? ” “잘 모르겠는걸.” 맥더모트가 말했다. “대망 같은 거 품어본 일이 없으니까. 내일 우리와 함께 가겠소, 아니면 거기에서 만나겠나, 스펜서 ? ” “거기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내가 말했다. “크랜시의 사무실에서. 10시쯤.” “자, 그럼 그때.” 실비아가 말했다. 세 사람은 내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와이퍼 밑에 주차위반 카드가 끼어 있었다. 카드를 빼내 실비아가 밤색 프레저 가슴 포켓에 넣었다. “이것을 처리하여 이 일대에서 얼마나 유력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시오.” 내가 말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실비아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어 둘로 쪼갰다. 그리고 카운티 대로의 모퉁이를 돌며 바라보니 그 한쪽을 맥더모트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페이헤이븐 다리를 향해서 달리다 보니 어느 틈엔가 강줄기와 평행을 이루는 액수네트 대로로 나왔다. 직업소개소 악에는 주차장이 있고, 방향을 바꾸기 위해 그리로 차를 몰아들어갔다. 소개소의 사무국 악에는 긴 행렬이 줄을 섰고, 한 사나이가 손수레 위에 줄무늬 파라솔을 펴고 핫도그, 주스와 콜라, 팝콘, 땅콩 등을 팔고 있었다. 마치 축제 기분이 들었다. 겨우 다리를 건너 케이프로 향했다. 지금은 해를 등지고 있고, 전방에는 수영이나 테니스, 그리고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수전이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려 주기를 빌었다. 모텔에 도착한 것은 5시 20분이었다. 수전의 차가 주차장에 있었다. 열쇠를 사용해서 방에 들어가자 그녀가 있었다. 꽃무늬 욕실 가운데 슬리퍼를 신고, 머리를 머리 위에 둥글게 틀어올린데다가 얼굴에 온통 크림을 바르고 크리넥스를 한 장 손에 들고 거울 악에 앉아 있었다. “나 참 ! ” 내가 말했다. “당신이 너무 빨리 돌아온 거라고요.” 크림을 크리넥스로 닦아내며 그녀가 말했다. “그런 장난에 속지 않아.”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수전 실버맨은 어떻게 했지 ? ” “이제는 알아두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게 진짜 내 모습이라고.” “설마 ? ” “이젠 이걸로 끝이라는 뜻인가 봐 ? ” “그렇지는 않지만, 조금 있으면 가짜가 나타날 거라고 말해 줘.” “20분.” 그녀가 말했다. “쿠나메세트 인에 7시에 테이블을 예약해 두었어요.” “어때 ? 먼저 수영이나 테니스를 하고 그 다음에 식사를 하지 않겠어 ? 그 거꾸로라도 좋고.” “안돼요. 방금 머리를 감은걸요. 적시거나 땀을 흘리고 싶지 않아요. 그 반대 순서도 마찬가지고. 진짜 나를 감추고 있는 동안 수영을 하고 오지 그래요. 그리고 나서 맥주 한잔 하시고 천천히 차를 몰아 인으로 가서, 도대체 어디를 다녀왔는지, 누구와 아니면 누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설명을 들어 보자고요.” 30분 정도 수영을 했다. 풀은 길이가 50피트 가량밖에 되지 않아 턴만 계속하는 꼴이지만 그런대로 상당한 운동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피가 기분좋게 몸속을 돌았다. 수전을 보니까 피의 순환이 더욱 빨라졌다. 머리 위의 모발은 풀어헤치고 있었으며 목욕 가운과 크림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계란껍질처럼 얇은 베이지색의 소매 없는 드레스를 입고, 비치 귀고리를 달고 있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조심스럽게 루즈를 바르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면도를 끝내고는 크리스마스 캔디맛이 도는 치약으로 이를 닦았다. 상의와 조끼에 놋쇠 단추가 달린 짙은 감색의 섬머 슈츠, 엷은 감색의 옥스퍼드 셔츠, 감색과 금색 줄무늬가 들어 있는 흰 넥타이를 맺다. 그리고 검정 양말에 수술이 달린 검은 구두.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 보니 눈이 맑은 게 멋지다. 벨트에는 권총을 찼다. 가까운 시일 내에 드레스 건을 사야지. 나전칠기 장식의 손잡이가 달린 총으로. 총집은 에나멜 가죽(Patent leather). “곁에 바싹 붙어서라고.” 차 쪽으로 가면서 내가 말했다. “하이아네스 부인 클럽에서 나를 잡아다가 섹스의 연구 재료로 삼을지도 모르니까.” 수전이 내 팔에다 자신의 팔을 감았다. “욕을 보기보다는 죽는 게 낫지.” 차를 타자 수전은 커치프(Kerchief ; 여자용 머리 수건, 스카프)를 머리에 썼고, 나는 탑을 내린 채 인을 향하여 천천히 차를 몰았다. 바에서 마르가리타(테킬라 술과 레몬즙 칵테일)를 한잔 마시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를 보면서 두 잔째 마르가리타를 마셨다. “맥주는 마시지 않기로 했나요 ? ” 수전이 물었다. “지금 기분과 이곳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아. 식사 때 조금 마시기로 하지.” 나는 생굴과 바닷가제 데르미도르를 주문했다. 수전은 굴과 군 스타포드 바닷가제를 주문했다. “그럭저럭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수전. 일이 잘될 것 같아.” “그래 줘야지요. 팸 세퍼드는 만났나요 ? ” “어젯밤.” “그래요 ? ” “그래. 난 어젯밤 내 아파트에서 잤다고.” “그랬군요. 그녀는 어떻던가요 ? ” “당신 발 아래에도 미치지 못해.”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정신상태 말이에요.” “아무래도 당신과 그녀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상당히 머리가 혼란스러운 상태라 어떤 치료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왜 그러죠 ? 당신이 수작을 부리니까 그녀가 거절을 하던가요 ? ”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라고. 당신이라면 어딘가 도움을 줄 만한 곳에 소개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돼. 그녀가 어떻게 해야 옳은가에 대한 부부의 의견이 맞지 않아, 그녀는 그 일을 몹시 고민하고 있다고.” 수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하지요. 언제가 좋을까요 ? ” “이 일이 끝나고 나거든. 모레쯤에는 결말이 날 거니까.” “나 기꺼이 그녀의 상담에 응하겠어요.” “그리고 난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누가 물어 보기라도 했나요.” “하지만, 묘한 장면이었지. 우리는 그 점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 그녀는 머리는 좋은 편이었으나 부모가 버릇을 잘못 가르쳤는지, 아직 어른이 덜 되었는지 그것을 분간할 수가 없었어. 대단히 파멸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 프로스트의 싯귀 중에 뭐라고 했더라, ‘그는 아버지 가르침의 참뜻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 ” “‘돌담 손질하기’.” 수전이 말했다. “그래, 그녀가 바로 그래. 어머니인지 아버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모의 가르침에서 악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그것이 잘되지 않는데도 그 가르침의 범위 내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거야. 극히 최근에 새로운 가르침을 내거는 치들을 만나더니 이번에는 그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오려 하지도 않고.” “로즈와 제인 ? ” “대단한 기억력이군. 진짜 수전을 보충하고도 남겠는데.” “그런 여성은 얼마든지 있어요. 학교에서도 많이 눈에 뛰지만 학교 파티에서도 많이 볼 수 있어요. 선생이나 교장의 부인들 중에는 딸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아가씨들이 언젠가는 그런 여성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은 뻔할 것 같아요.” “프로스트는 남성에 관해 썼다고.” 내가 말했다. “그래요. 알고 있어요. 알겠어요.” 웨이트리스가 게를 날라왔다.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의미군요.” “바로 그거야. 허비도 같다고. 아버지의 가르침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어, 한치 악에 대해서는 팸과 마찬가지로 장님인걸.” “그 양반도 치료가 필요한 거 아니에요 ? ” 게가 맛이 있다. 물이 아주 싱싱하고 부드럽다. “그래, 그러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녀 쪽이 더 머리가 좋고 남편보다 용기가 있는 것 같아. 그에게는 치료를 받을 만한 용기가 있을 것 같지가 않거든. 하지만 나는 극심한 압력 하에 있는 그를 보았을 뿐이니까, 혹시 보기보다 훌륭한 사내인지도 모를 일이지. 아내를 사랑하던데. 무척이나.” “혹시 그것도 사물의 이면을 볼 줄 모르는 아버지의 가르침 탓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모든 것이 가르침 덕분인지도 모르지. 가르침 이외에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 없는지 몰라.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믿어야 하지. 누군가를 무작정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전생의 업보같은 거라고는 할 수 없지.” “정말 말씀은 잘하시는군요.” 수전이 말했다. “아주 우아한 표현방법이에요. 당신은 누구를 무작정 사랑하고 있나요 ? ”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이군, 귀여운 내 사랑.” “그것도 험프리 보가트의 흉낸가요 ? ” “맞아. 이곳과 보스턴 및 뉴 베드퍼드를 왔다갔다하는 동안 자동차의 백밀러를 들여다보면서 연습하고 있단 말이야.” 굴 접시가 들려나가자 바닷가재가 놓였다. 바닷가재를 먹으며 내일의 사전 계획에 관해서 속속들이 수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바닷가재를 먹어치우는 일에서만은 수전을 당해낼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발은 하나도 남김없이 쪼개어 속을 먹으며, 구석진 곳의 살은 용케도 파내어 먹는다. 그렇다고 옷이나 어디에 튀기지도 않거니와 게걸스러운 인상도 풍기지 않는다. 나는 군 스타포드 바닷가제를 먹기만 하면 손 어딘가를 찔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대개는 데르미도르이라든가 샐러드, 스튜와 같은 살을 발라낸 것을 주문한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수전이 말했다. “여러 가지 일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대부분이 다른 많은 것과 연관이 되어 있기 마련이니까요. 미해결의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모두가 순서에 따라 정연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미해결인 채 처지고 말지요.” “그래서 신경이 쓰인다니까.” “당신은 신경질적이 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것이 직업이야.” 내가 말했다. “나는 수완이 있지. 아마 잘될 거야.” “하지만 일이 틀어진다면 ? ” “그때는 사태가 엉망이 되어, 뭔가 별도의 방법을 생각해야 되겠지. 하지만 나는 가능한 최대의 노력을 했어. 스스로가 조절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되도록 걱정을 하지 않기로 하고 있지.” “고장이 생기면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지금까지는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 어떻게든 처리를 해왔으니까.” 우리는 디저트로 아주 맛있는 블루베리 더트를 먹고, 바로 나와서 아이리시 커피를 마셨다. 모텔로 돌아오는 도중, 수전은 카치프 없이 좌석에 기대어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바다에 들려갈까 ? ” 내가 물었다. “그러죠.” 해안 도로를 따라 바닷가로 나가 주차장에다 차를 세웠다. 시간이 늦어 사람들이 드문드문했다. 수전은 신발을 차에 벗어 놓고 둘이서 훤한 모래사장을 걸었다. 왼쪽에서 바다가 완만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오른쪽 언덕진 어디에서 누군가가 토미 도시의 앨범을 틀고 있었는데, 어느 보컬 그룹이 ‘원스 인 어 파일’을 노래하고 있었다. 밤의 고요 속에서 음악이 바다 쪽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되었지만 아련한 향수 같은 걸 자아내게 한다. “헤엄치겠어 ? ” 내가 물었다. 바닷가에 옷을 벗어놓고 검은 물 속을 둘이 나란히 기슭과 평행으로 4분의 1마일 가량 헤엄쳤다. 수전은 수영에 능해서 속도를 늦추어 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약간 뒤에 처져 팔과 어깨가 거의 소리도 없이 물을 가르는 하얀 몸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서도 스테레오의 음악소리가 들렸다. 젊은 남자가수가 ‘이스트 오브 더 선 앤드 웨스트 오브 더 문’을 노래하고 있었다. 악쪽에서 수전이 헤엄을 멈추고 가슴까지 물에 잠겨 서 있었다. 내가 그 곁으로 가서 매끈거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숨찰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동소리가 분명하게 내 가슴에 전해왔다. 그녀가 입술을 가져오자 바다의 소금기와 루즈의 달콤한 맛이 났다. 그녀가 얼굴을 빼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들러붙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마의 물방울이 반짝거렸다. 웃음을 지었을 때 가까이에서 하얀 이가 빛났다. “바닷속에서 어때요 ? ” “바닷속에서는 처음인걸.” 내 목소리가 갈렸다. “나는 숨이 막힐 거예요.”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휙 몸을 돌려 기슭을 향하여 헤엄쳐 나갔다. 나는 뒤쫓아가서 물가에서 그녀를 붙잡아 젖은 모래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파이드 파이파스가 ‘디어라 써치 싱스’를 부르고 있었고 파도가 우리의 발을 닦아내고 있었다. 끝났을 무렵에는 아디 쇼의 앨범으로 바뀌어 우리는 ‘댄싱 인 더 다크’를 듣고 있었다. 둘은 철썩이는 물을 하반신에 느끼며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밀물 때인 모양이었다. 아까보다도 큰 파도가 우리 위에서 부서져, 우리는 잠시 물 속에 잠겨 있었다. 파도가 밀려가자 입에서 물을 뿜어내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는 웃기 시작했다. “데보라 카.” 내가 말했다. “버트 랭카스터.” 그녀가 말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내가 말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녀가 말했다. 젖은 모래 위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채 이가 덜덜 소리를 낼 때까지 파도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25 옷을 주워 입고 모텔로 돌아가 함께 오랫동안 더운 물로 샤워를 했다. 룸 서비스에 부탁하여 바간디를 한 병 갖고 오게 해서, 침대에 들어가 와인을 찔끔거리며 심야프로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아파치 요새’를 보다 말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방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8시 반에 내가 보스턴으로 떠날 때까지 수전은 아직 침대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의 ‘투데이’를 보고 있었다. 팬버턴 지구에 있는 사포크 군재판소는 회색의 대단히 큰 건물로, 그 전체를 한눈에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건물이 비콘 언덕의 동쪽 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새로운 정부 센터의 건물들이 내가 아직도 보든 지구라고 부르는 장소나 스코레이 지구로부터의 시계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든 지구의 솔턴스톨 주(州) 정부의 건물 악에 차를 놓고 재판소가 있는 언덕을 걸어올라갔다. 짐 크랜시는 에롤 프린 스타일의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번들거리는 둥근 얼굴에 색바랜 머리칼이 일찌감치 벗겨지기 시작해서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실비아와 맥더모트는 이미 와 있었고, 리칼드 몬탄르반처럼 생긴 사나이와 FBI처럼 느껴지는 남자가 동석하고 있었다. 맥더모트가 소개를 했다. 리칼드처럼 생긴 사나이는 언젠가 공안위원장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보비 산토스였다. 그리고 FBI로 생각했던 사람은 재무부의 크라우스라는 사람이었다. “거기에서 첼시의 작자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소.” 맥더모트가 말했다. “보비에게는 이미 상황을 설명했고, 이제 이 신사분들에게 설명을 할 참이었소.” 맥더모트는 오늘은 왼쪽 가슴에 포켓이 달린 녹색 T셔츠, 회색 골덴 바지에 샌들을 신고 있다. 권총은 T셔츠로 덮은 혁대 버클 위에 꽂고 있어서, 마치 치과의 보철기구라도 차고 있는 것처럼 불룩하다. 팸 비치 스타일의 양복에 브로드의 와이셔츠, 물방울 무늬의 나비 넥타이를 맨 크라우스가 매독균이라도 들여다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크라우스가 실비아에게 말했다. “이번 건에서 스펜서의 역할은 뭐요 ? ” “그에게 직접 물어 보시지요.” 실비아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있는 거요.” 실비아가 맥더모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맥더모트가, “기절하겠는걸.” 하고 말했다. “자네에게 알려 주었지, 아마 ? ” 실비아가 맥더모트에게 말했다. “호모가 왜 나비 넥타이를 매는지를 말이야.” 내가 크라우스에게 말했다. “내가 일을 꾸몄지. 양쪽의 관계자를 알고 있는 것도 나이고 인수 인계의 감독을 맡은 것도 나요. 말하자면 당신들의 열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지.” 크랜시가 말했다. “빨리 해, 맥더모트. 설명을 하라고. 한시 바삐 수배를 끝내야 하겠어.” 맥더모트가 T셔츠의 가슴 쪽 포켓에서 축 늘어진 담배 한 개비를 빼냈다. “어느 날 나와 재키가 서의 우리 방 의자에 앉아 범죄와 그밖의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지. 좀 한가한 날이었거든. 그때 이 키이 맨이 나타나시더군.” “적당히 해두고, 알맹이를 말해.” 크라우스가 가로막았다. “리치.” 산토스가 말했다. “알았네, 알았어, 보비.” 맥더모트가 말했다. “너무 빨리 말했다가는 이 G맨께서 이해를 못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이 작용했을 뿐이오.” “빼먹지 말고 말해 봐요, 리치.” 산토스가 말했다. 맥더모트가 설명했다. 계획은 생선식품용의 밴 트럭 2대로 실비아, 맥더모트, 산토스, 리냐리스, 크라우스와 첼시의 경관 몇 명, 크랜시의 부하 두 명이 5시 반에 현장으로 가서 레스토랑 양켠에 한 대씩 주차하여 사태의 진전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기를 보아 내가 양쪽 바지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어 신호를 보내면, “메뚜기떼처럼,” 맥더모트가 말했다. “나와 재키와 거기의 J. 에드거가 놈들에게 덤벼든다.” 크랜시가 책상 위의 서류를 열고 킹 파워드의 4절판 얼굴 사진을 꺼내어 돌렸다. “이게 파워드다.” 크랜시가 말했다. “놈에 관한 서류도 여기에 있소.” “두 여자에 대해서는,” 내가 말했다. “내가 그 인상을 설명하기로 하지.” 특징을 설명했다. 크라우스가 받아적고, 실비아는 포켓 나이프로 손톱의 때를 후비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내 말을 귀담아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크라우스가 말했다. “잘 알겠소, 스펜서.” 맥더모트와 실비아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내일은 저 두 사람과 크라우스는 서로 다른 트럭에 타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크랜시가 말했다. “오케이, 질문은 ? ” “체포 영장은 ? ” 산토스가 말했다.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오. 내일 갖고 갈 수 있도록 하겠소.” 크랜시가 말했다. “계획적인 함정에 미흡한 점은 없소 ? ” 산토스가 말했다. “함정이라니 무슨 소리야 ? ” 실비아가 말했다. “우리는 정보제공자로부터 총기의 불법거래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잠복했다가 행운을 잡게 되었다는 것으로 행동하면 된다고요.” 크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문제가 없을 거요. 우리가 하는 것은 단순한 잠복근무에 지나지 않거든. 스펜서가 그들을 배반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 “우리 측 사람 중의 하나인 팸 세퍼드도 거기에 가기로 되어 있소. 당신들은 아마도 그녀까지 체포해야 될 것이오. 체포하거든 다른 자들과 떼어놓았다가 그들을 연행한 뒤 나에게 넘겨주어야 하겠소.” “당신은 누구를 상대로 말하고 있는 거지, 스펜서 ? ” 크라우스가 말했다. “마치 작전을 지휘하는 말투군그래.” 맥더모트가 말했다. “작전이라고 ? 그야 우리가 하려는 일은 그야말로 작전행동이지.” 크랜시가 말했다. “우리는 동의했네, 크라이드. 파워드 일당과 해방운동의 일당들과의 교환조건으로 그 여자와 여자의 남편을 넘겨주기로 한 거야.” “크라이드 ? ” 실비아가 맥더모트에게 물었다. “크라이드 크라우스 ? ” 맥더모트가 자못 기쁜 듯 얼굴에 광채를 뛰었다. 크라우스의 얼굴이 벌개졌다. “크라이드 크라우스.” 맥더모트와 실비아가 말을 맞추어 하듯 동시에 말했다. 금세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산토스가 말했다. “둘 다 장난질은 그만두시오. 놀이로 하는 일이 아니오. 알겠소 ? 크르즈는 이 사건에 관해서 자네들을 내 지휘 하에 두라고 했단 말이오.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실비아와 맥더모트는 간신히 진지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 얼굴 한구석에는 아직도 웃음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뭐 할말 있나 ? ” 크랜시가 반원을 그리며 한 사람씩 얼굴을 둘러보았다. “좋아, 그러면 현장을 답사하세.” “나는 그건 사양하겠소.” 내가 말했다. “나 혼자 가보겠소. 악당 중의 누군가가 크라우스가 말하듯이 이른바 현장을 감시하에 두고 있을 경우, 내가 낯선 경찰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과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였다가는 재미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 혼자 현장을 답사한다면 비록 그자들이 본다 해도,” 산토스가 말했다. “당신이 단지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거요. 그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오. 좋은 생각이오.” “장소는 정확히 알고 있소 ? ” 크랜시가 말했다. “알고 있소.” “오케이. 첼시 측에 상의할 일이 있으면 그쪽의 지휘자인 카프랑이라는 경위와 연락을 취하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크랜시. 그럼, 여러분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나는 크랜시의 사무실을 나왔다. 열려 있는 문에서 안으로 왼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성공을 빕니다, 크라이드.” 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등뒤에서 실비아와 맥더모트가 이젠 터놓고 킬킬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을 때, “잘 들으라고.” 하고 크라우스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와서 포장마차로 걸어가 핫도그 두 개와 크림 소다를 한 병 사들고, 시청 악 광장 분수 옆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관청에 근무하는 많은 여자들도 광장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들의 매력에 하나하나 순위를 먹여 보았다. 식사를 끝내고 차로 돌아갈 무렵에는 16번까지 순위를 정했었다. 평상시 같으면 그 시간이면 25명의 순위는 정했을 텐데, 7위에서 세 명이 타이를 이루어 그것을 해결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다. 첼시는 미스틱강을 끼고 보스턴과 마주보고 있는 구역으로, 주민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지만 아주 초라한 거리이다. 고물상, 넉마장수, 타이어 도매상 등이 산재해 있는데, 구역의 태반을 태운 큰 화재의 페허를 잡초가 뒤덮고 있다. 시가지가 한가하기로는 세계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이 구획의 북서쪽 끝 머리에 이웃한 에버레트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뉴 잉글랜드 생선식품 센터가 있다. 보스턴 변두리에 자리잡고, 시의 식품의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는 두 개의 큰 시장 중의 하나이다. 에버레트 유류 저장소에 인접한 을씨년스러운 곳이기는 하지만, 옛날의 객차를 개조한 레스토랑이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내 자동차가 주위의 초라한 풍경과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신경에 걸렸다. 카스터드 파이(custard pie)와 커피를 주문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수인계가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시장의 모양을 조사해 본들 별로 얻을 것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양손을 뒷주머니에 찔러넣는 순간 경찰이 약속대로 나타날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레스토랑은 별로 붐비지 않아 손님보다는 빈 자리가 많았다.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수상쩍은 자는 없을까 하고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또한 이상한 사람이 없는가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경기관총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도, 칼날이 튕겨 나오는 나이프로 이를 쑤시고 있는 자도 없을 뿐더러,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에는 나는 익숙해 있었다. 누가 자기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상태가 며칠이고 계속될 때도 있다. 카스터드 파이 아래쪽 껍데기가 늘어붙었다. 돈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에버레트와 찰즈타운을 거쳐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찰즈타운의 고가전철이 철거되어, 시가지가 드러나고 훵한 느낌을 준다. 마치 늘 안경을 끼고 있던 사람이 안경을 벗은 얼굴을 보는 느낌이다. 고가선로를 그냥 남겨두고 화초라도 매달아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껏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터이지만, 보스턴의 낮 동안의 교통량이 아침저녁의 러시아워에 못지않게 혼잡해서, 내 아파트로 가는데 35분이나 걸렸다. 팸 세퍼드는 옷매무새는 단정했지만, 독방생활에서 발광을 한 사람처럼 나를 맞이했다. “지금 수프를 먹고 있는데 조금 드시겠어요 ? ” 그녀가 말했다. “점심은 먹었어요. 하지만 커피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눕시다. 또 하룻밤을 함께 지내야겠소.” “그리고 ? ” “그리고 어떻게든 종말을 고하게 되겠지. 당신은 집에 돌아갈 수가 있어요.” 둘이서 카운터에 앉아 그녀는 토마토 수프를 먹고,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집 ? ” 그녀가 말했다. “웬지 무척 먼 곳에 있는 기분이 드네요.” “일종의 향수인가 보군.” “예, 상당히. 하지만……몰라요. 집에 돌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떠나오고 어떻게 변했을까 ? ” “나도 알 수 없소. 돌아가서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일은 로즈와 제인이 돼지 우리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거니와 당신 역시 언제까지나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소. 나의 하복부의 자제력이 언제까지나 이성을 잃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좋은 분이에요.” “내일이 지나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합시다. 두들겨 내쫓지는 않을 테니까.” “내일은 일이 어떻게 되나요 ? ” “계획을 실행하는 거요. 아침 6시쯤 첼시 시장에 가서 총기매매의 거간 노릇을 하다가 거래가 성립되면 순경나으리들이 그물을 갖고 나타나서 당신과 허비가 재출발을 하도록 해주는 거요.” “왜 나도 가야만 하나요 ? 가고 싶지 않다든가, 가서는 안된다든가 하는 뜻이 아니라 내가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거예요 ? ” “당신은 일종의 인질이오……. 당신이 개입해 있는 한 내가 자기들을 배반하지 않을 걸로 로즈는 생각하는 거예요. 그녀는 나를 신용하지 않지만, 내가 당신을 아낀다는 건 알고 있어요.” “즉, 그녀가 체포되면 나도 체포될 거라는 의미 ? ” “그게 그녀들의 생각인 것 같단 말이오. 별로 동지애가 풍기는 조치가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했더니 뭐 대의를 위해서는 할 수 없다는 투더군.” “놀라운 이야기네요. 결국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나는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26 목의 심줄이 삐끗해서 목을 좌우로 흔들며 거실의 소파에서 눈을 뜨니, 밖은 아직 어둡고 비가 부리고 있었다. 자명종의 벨을 눌러놓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5시 15분 전이었다.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갖추고 나서 침실 문을 노크했을 때는 5시가 되어 있었다. “일어나 있어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내 욕탕 가운을 걸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침실에서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권총을 점검했다. 길에 면한 창가로 가서 말보로 대로를 내려다보고 젖은 노면에 물웅덩이가 생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커피를 끓일까 생각했지만 시간도 없었다. 그 객차 식당에서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비막이로 등에 ‘로웰 치프스’라고 쓰인 붉은 트레이닝 재킷을 꺼내어 입었다. 그것을 입고 나서 허리의 권총을 뽑아보았다. 단추를 채우지 않은 상태라서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5시 20분에 팸 세퍼드가 머리를 풀고 화장을 끝내고는 역시 내 욕탕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돌아가더니 문을 닫았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어 윗도리 주머니에 넣었다. 창가로 가서 다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비가 오면 늘 기분이 들뜬다. 젖은 거리는 메마른 거리보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주거니와 거리가 한결 조용해진다. 5시 반에 팸 세퍼드가 노란 슬랙스에 깃이 넓은 초콜릿색의 블라우스를 입고 침실에서 나왔다. 엷은 감색 레인코트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는, “자, 준비됐어요.” 하고 말했다. “모든 경우에 대비한 의상이 갖추어져 있군.” 내가 말했다. “여기에 있는 동안 호랑이를 쏠 필요가 있을 경우에 대비해서 수전에게 사파리 헤드도 사다 달라고 부탁한 모양이군요.” 미소를 지었지만 요염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겁에 질려 있었다. “아주 쉽게 끝날 거요.” 내가 말했다. “파리떼보다도 많은 경찰이 동원되지. 더구나 내가 늘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 차에 올라타고 엔진을 걸어 달리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 고초를 겪은 결과가 고작 이런 거라니……. 경찰, 갱들……, 게다가 아침 첫 새벽에 비는 오고……, 오늘 일에 모든 운명이 걸려 있으니 말이에요.” “당신과 나는 아무 일 없어요, 큰 애기.” 그녀의 다리를 툭툭 쳤다. 아버지께서 흔히 하시던 버릇이다. 아버지가 그랬을 때는 애정과 믿음성이 느껴졌었지. 하지만 팸 세퍼드에게는 별로 효과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침 6시 12분 전에 레스토랑 주차장에 차를 댔다. 날이 새고 있었으나 잿빛의 음침한 분위기인데다가 여름치고는 으스스 한기가 감돌아, 객차의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노랗고 따사로운 불빛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짐차가 서 있었다. 터미널의 일은 이른 아침이 가장 바쁘다. 트럭 중 두 대에 우군이 타고 있겠지만, 어느 것이 그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칸막이가 없는 좌석에 앉아 커피와 잉글리시 머핀을 2인분 주문했다. 팸은 머핀에 손도 대지 않았다. 6시 2분이 지났을 때 트렌치 코트에 격자 무늬가 든 골프 모자를 쓴 킹 파워드가 들어왔다. 런던포그를 입은 메이시가 곁에 붙었고 입구 쪽에 흰 레저 슈츠를 걸친 호크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시오, 킹고 베이비.” 내가 말했다. “저와 한잔 하시겠나 ? 잉글리시 머핀은 ? 내 데이트 상대는 먹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파워드가 자리에 앉으며 팸 세퍼드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살 사람인가 ? ” 그가 물었다. “그중 한 사람이지. 돈을 갖고 있는 여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소.” “만일 나타나지 않는다면 온전하지 못할 줄 알라고.” 킹이 말했다. 메이시가 파워드 옆에 앉았다. “그거 아주 멋진 모자군, 킹.” 내가 말했다. “비오는 날이면 우리 집 아주머니가 그것과 흡사한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던 생각이 나는군요. 머리가 비에 젖으면 불행이 스며든다고 하시며.” 파워드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다시 따지기라도 하듯이 덧붙였다. “내가 6시라고 말하면 정확히 6시를 말하는 거야. 6시 5분이 아니야. 알아듣겠나 ? ” 그때 로즈와 제인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내가 말했다. “저기 오시는군.” 내가 로즈와 제인에게 손을 들어 바깥쪽을 가리켰다. 두 여자가 뒤로 돌아나갔다. “여자들에게로 가시지.” 내가 말했다. “밖에서 하는 이야기는 남에게 잘 들리지 않으니까.” 파워드가 일어나자 곧 메이시가 뒤를 따랐다. 팸과 내가 그 뒤를 걸었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호크를 찬찬히 챙겨보았다. 흰 레저 케이프였다. 포크가 달려 있다. 호크가 말했다. “아주 좋은 날십니다, 어르신.” “행운을 빌면서 자네의 머리를 비벼댈 수가 없을까 ? ” 내가 말했다. 호크가 웃음을 참기 위해 어깨를 들먹였다. 그리고는 우리의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주차장까지 와서 모두들 훑어보며 내가 잽싸게 말했다. “킹, 메이시, 호크, 로즈, 제니, 팸. 이것으로 소개는 끝났소. 빨리 일을 끝내도록 합시다.” “돈은 가져왔겠지 ? ” 파워드가 물었다. 제니가 검은 방수 레인코트 아래에 들고 있던 쇼핑 백을 보여 주었다. “메이시, 트럭에 갖고 가서 확인해 봐.” 로즈가 야무지게 말했다. “그 사람이 갖고 달아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 ” “이거 왜 이러시나.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오, 아가씨 ? ” “총을 보여 주시오.” 로즈가 말했다. “트럭 뒷칸에 실려 있소.” 메이시가 받았다. “함께 가서 뒷문을 닫고 내가 돈을 셈하는 동안 당신들은 총을 살펴보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시간도 절약이 되고 서로 안심을 할 수 있으니까.” 파워드가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나는 빗속에 서 있는 건 질색이거든. 호크, 돈 계산이 끝나거든 자네와 메이시 둘이서 짐을 옮기는 걸 도와주라고.” 파워드가 밴 트럭 운전대에 올라타고는 문을 닫았다. 로즈와 제인과 메이시가 트럭 뒷문 쪽으로 갔다. 메이시가 뒷문을 열자 세 사람이 짐칸으로 들어갔다. 호크와 나와 팸 세퍼드는 빗속에 서 있었다. 1분 가량 지나자 로즈가 트럭 문틈으로 몸을 내밀고 말했다. “스펜서, 이 총을 봐 주시겠어요 ? ” 내가 팸에게 말했다. “여기에 그냥 있어요. 곧 내려올 테니.” 호크는 바로 옆에서 트럭의 펜더에 기대 서 있었다. 나는 짐칸에 올라갔다. 총이 있었다. 원래의 상자에 들어 있는 채였다. M2 카빈총. 두서너 자루를 살펴보았다. “됐군.” 내가 말했다. “이만하면 노인들을 몇 개 분대라도 해치울 수 있겠는걸.” 로즈는 노인을 어떻게 한다는 말을 무시했다. “제인, 트럭을 이리로 몰고 와요. 스펜서, 짐싣는 거 도와준다고 했지요 ? ” “네, 네, 염려마십시오. 호크와 둘이서 하겠소.” 메이시가 ‘파이팅’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쇼핑 백을 들고 트럭에서 내려와서 운전대에 앉아 있는 파워드에게로 갔다. 돈을 건네주고는 다시 트럭 뒷문 쪽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생각하나 ? 물건에는 하자가 없지 ? 인수를 받겠나 ? ” 우리는 레스토랑 뒷켠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기서 옮겨 싣도록 하지. 아무도 없고 관심을 보일 리도 없다고. 이 일대에선 하루 종일 짐을 싣고 내리니까.” 메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소형 밴 트럭을 끌고 와서 파워드의 트럭 뒤로 꽁무니를 마주대고는 운전석에서 내려와 뒷문을 열었다. 나는 트럭 악에 서 있는 팸과 호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호크 ! ”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이 뛰어든다고. 이건 덫이야.” 메이시와 로즈, 그리고 제인이 상자를 옮길 준비에 들어갔다. “호크.” 메이시가 불렀다. “스펜서와 둘이서 도와주지 않겠나 ? ” 호크는 그때 이미 트럭 악을 지나 레스토랑 모퉁이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었다. “나에게서 떨어지면 안돼.” 팸에게 일렀다. ‘롤리스 생선식품’이라고 쓰인 밴 트럭에서 실비아와 맥더모트, 그리고 주 경찰의 경관 둘이 기관단총을 들고 달려내렸다. 제인이, “로즈 ! ” 하고 외치며 들고 있던 상자의 한쪽 끝을 떨어뜨리고는 레인코트 아래로 손을 넣어 권총을 꺼냈다. 순간 달려든 실비아가 단총 개머리판으로 손등을 내려치자 제인이 손목을 감싸고 허리를 구부렸다. 로즈가, “제인 ! ” 하고 외치며 그녀를 감싸안았다. 메이시는 밴 뒤쪽을 돌아 달아나려고 했지만 거기에서 산토스가 들이댄 권총과 맞부딪쳤다. 산토스가 총구를 메이시의 목에 갖다댔다. 킹 파워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크라우스와 첼시 서의 경관 셋이 트럭 저쪽에서 달려와서 문을 열어젖뜨렸다. 첼시의 경찰관 중에서 주독으로 코끝이 빨간 뚱뚱한 한 사나이가 손을 뻗어 파워드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파워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끌려내려오며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킹에게 말했다. “서툰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킹.” 나는 재키 실비아에게 눈짓을 보내고 팸 세퍼드의 손을 잡고 거기를 떠났다. 7시에는 트레몬트 대로의 데리카티센에서 핫슈와 계란과 군 롤빵에 크림 치즈를 먹으며 거리 저쪽, 비에 부옇게 보이는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왜 그 흑인에게 알려 주었지요 ? ” 빵에 크림 치즈를 바르며 팸 세퍼드가 물었다. 그녀는 핫슈와 계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식욕이 있을 리가 없다. 웨이트리스가 와서 두 사람의 컵에 커피를 따라 주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소. 그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이지. 한때는 같이 권투를 시작했지. 때로는 나와 함께 트레이닝을 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는 그들과 한패가 아닌가요 ? 이를테면 그 일당의 뭐라고 할까, 폭력계나 협박담당이 아니냔 말이에요.” “그야.” “그런데도 관계가 없다는 건가요 ? 당신은 그를 도망가게 했다고요.”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라니까.” 27 팸의 짐을 옮기러 나의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에도 아직 비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8시 반에 하이아네스로 향했을 때도 비는 여전했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재즈만을 내보내는 FM방송국이 보스턴에 있다. 거기에다 주파수를 맞추었다. 카멘 맥레이가 ‘스카이라이너’를 부르고 있었다. 비는 당분간 이 고장에서 쉬어가겠다는 듯이 일정하게 악 유리를 두드리고 있다. 자동차 지붕 어느 구석이 삭았는지 뒷좌석 쪽에 빗물이 새고 있었다. 팸 세퍼드는 쥐죽은듯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카멘 맥레이의 레코드가 보비 하케트의 코르넷과 조 부슈킨의 피아노 반주의 리 와일리의 노래의 앨범으로 바뀌었다. ‘스이드 버드 오브 유즈.’ 3호선은 텅 비어 있었다. 비오는 날 아침에 케이프로 가보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어릴 때, 차로 빗속을 달리는 것을 좋아했지. 언제나 외부와 고립된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났거든.” 우리는 음악이 흐르는 따사로운 차 안에 있고, 다른 세계는 빗속에 젖어 떨고 있다. “정직하게 말해서 지금도 어릴 때의 그 심정이라고.” 팸 세퍼드는 여전히 창으로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끝났다……고 생각하나요 ? ”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가 ? ” “모든 것이. 은행강도, 허비의 곤경, 숨어 살아야 하고 겁을 먹어야 되는 일 말이에요. 그런 비참한 생각에 잠겨야 하는 것들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허비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 ” “잘라 말할 수야 없지만, 둘이서 지금까지보다는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어째서죠 ? ” “사랑이지. 당신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어요.” “어림도 없는…….” 그녀가 말했다. “어림이 있어요.” 내가 말했다.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사랑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모든 조건과 비교해서 대단히 유리한 스타트를 끊는 것이 되는 거요. 사랑이 있으면 출발점의 발판은 마련되는 셈이니까.” “그건 로맨틱한 잠꼬대에 지나지 않아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허비는 사랑의 소중함을 20년간이나 나에게 설교해 왔단 말이에요. 잠꼬대라고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난 알고 있어요.” “아니, 당신은 알지를 못해. 당신은 재미없는 경험을 했고, 그래서 그것이 유일한 경험인 줄 알고 있어요. 당신의 생각은 허비의 그것에 못지않을 정도로 잘못되어 있단 말이오. 잘 안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잘 안된다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머리가 좋고 용기도 있어요. 치료를 받아볼 만한 용기도 있어요. 당신이 권해서 허비에게도 치료를 받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누구라도 좋으니 현명하고 지성이 풍부한 인간을 상대로 자기의 모든 것을 터놓고 상의하시오. 그래도 허비와 꼭 헤어져야 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경우는 당신이 스스로를 불감증이라고 생각하고, 허비 역시 당신을 늘 불감증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이유가 있어 헤어지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허비와 헤어질 결심을 하더라도 어딘가 땀 냄새가 나는 술주정뱅이와 싸구려 호텔에서 자거나, 여성해방주의자의 은신처에서 머리가 돈 사람들과 지내거나 하지 않고, 스스로의 살아갈 길을 정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나 추악한 일일까요 ? ” “그럼, 더할 나위 없이 추악하죠. 누구와 몸을 섞는 것은 그러기를 좋아하거나 그 상대를 사랑하거나, 혹은 그 양쪽을 겸할 때에 이루어지는 거요. 물론 후자의 경우가 바람직하죠. 사람에 따라서는 사랑을 나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니까.”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잘 알아요.” “더구나 당신이 한패가 되었던 그 멍청한 두 여자……그건 이론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오.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존재지요. 심장의 고동이나 복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이오. 그녀들이 관계하고 있는 것은 남근 파워나 지배의 패턴, 그런 체재에 고용되어 있는 노인을 죽이는 일 같은 것뿐이지.” 그녀는 창밖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분개하지요 ? ” “나도 잘 모르겠소. 왕년에 소로가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데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바쳐야 하는 인생의 길이로 생각한다 · 10· 는 뜻의 말을 한 일이 있지. 당신과 허비는 세월에 상응하는 댓가를 얻지 못하고 있어요. 절약이라고나 할까. 내가 생각하는 절약과는 서로 맞지가 않지만.” 그녀가 웃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나, 당신 좋아해요.” 그녀가 말했다. “아주 좋아해요.” “그렇게 되는 건 단순한 시간 문제에 불과한 거요.” 그녀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머지 여정의 태반을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내 표현은 적합한 것이 못되었다. 혹시 수전이었다면 적절하게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 누구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말한다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는 일인지도 알 수 없다. 10시가 조금 지나 모텔에 닿자, 수전은 커피숍에서 ‘뉴욕 타임스’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잘되었나요 ? ” 수전이 물었다. “음, 계획한 대로.” “이 양반이 상대방 중의 한 사람에게 알려주었지 뭐예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그래서 그자는 무사히 도망쳤어요.” 팸 세퍼드가 호크 일을 수전에게 알려주었다. 수전이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호크 말이야.” 내가 말해 주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요 ? ” “약간은.” 수전이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이 양반이 당신에게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을 해드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래요 ? ” “전혀.”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테죠 ? ”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갈 건가요, 팸 ? ” “글쎄……, 여기에 오는 도중에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집에서 불과 반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와버렸으니……아마 돌아가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행이에요.” “내가 허비에게 전화를 걸겠소. 여기에 오라고 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전에게도 의견을 듣는 것도 좋을 듯한데 ? ” “글쎄,” 팸이 망서렸다. “나 아직 그를 만나기가 두려워요. 하지만 당신들과 함께 여기에서 만나서……. 그래요,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어요.” 나는 방으로 돌아가 세퍼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10분도 안되어서 달려왔다. 내가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파워드는 구금되었나 ? ” 그가 물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니, 아마도 그렇지 않을 거요. 경찰은 이미 죄상의 기록을 끝내고, 그의 변호사가 보석수속을 밟아 킹은 지금쯤 대기실에서 집에 돌아갈 허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무슨 소리야 ? ” 세퍼드가 펄쩍 뛰었다. “놈이 우리가 덫을 건 것을 아는데도 자유의 몸이 된다는 거요 ? ” “인생이란 대개 뜻대로 안되는 경우도 있는 거요.” “농담이 아니오. 그는 우리에게 보복을 할 거요. 그가 보석으로 풀려날 거라는 말은 나에게 왜 해주지 않았죠 ? 그는 복수를 하러 찾아올 거요. 우리가 배반한 것을 알고 있는 한 반드시 온단 말이오.” “그런 말을 해주었으면 당신은 꽁무니를 뺐을 거요. 그는 당신에게 보복하러 오지는 않아요.” “경찰이 어떻게 된 거 아니오. 그런 자를 보석으로 풀어 주다니. 나를 다시 곤경에 몰아넣다니……. 당신은 내 인생을 희롱할 권리가 없단 말이오.” “그는 보복을 하지 못해요, 세퍼드. 그보다도 부인이 커피숍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그래요 ? 그녀는 어떻소 ? ” “무사하오.” “그게 아니고 생각하는 것이 어떠냐는 뜻이오. 나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소 ? 집에 돌아가겠답디까 ? ” “어쨌거나 지금 현재 수전 실버맨과 함께 커피숍에 있어요. 당신을 만날 생각은 있는 모양이더군. 악으로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는 당신들 둘이서 정할 일이오. 모처럼 마련된 무대를 망가뜨리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세퍼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코로 내뿜었다. 우리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수전과 팸 세퍼드가 칸막이가 된 좌석으로 옮겨앉아 있었다. 내가 수전 옆자리에 앉았다. 세퍼드는 서서 팸 세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잘 계셨어요, 허비.” “잘 있었소, 팸.” “앉아요, 허비.” 그가 그의 아내 곁에 앉았다. “별일 없었나요 ? ”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 잘 있어요 ? ” 또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손을 뻗어 손가락을 펴고서 아내의 손등에 올려놓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말소리가 무거웠다. “돌아올 거요 ? ” 그녀가 고개를 까딱했다. “우선은…….” 그녀의 목소리도 굳어 있었다. “이젠 방황의 끝을 내야지.” 남편이 말했다. “하여간 우선은…….” 아내가 말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아내의 등을 원을 그리며 어루만졌다. 어느덧 볼이 젖어 있다. “그래, 당신 생각대로 하구려.” 목청을 짜내듯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따르지. 우리는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야. 일년 이내로 당신을 위해 정상에 오르겠소.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최고가 되는 일이 아녜요, 허비.” 나는 남의 비밀스러운 무엇을 넘겨다보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이분들은 우리가 정신과의사에게 상담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수전과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서 어느 정도 무얼 알고 있다는 거지 ? 우리나 그밖의 일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다는 거지 ? ” “허비, 의사와 상의를 해보지 않겠다면 나는 집에 갈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그냥 뜻이 맞지 않는 게 아니라 병이란 말이에요. 치료가 필요한 거예요.” “어디로 가면 되지 ? 나는 그런 의사는 하나도 몰라.” “수전이 인도해 줄 거예요.” 팸이 말했다. “수전은 그런 일에 환해요.” “그래야 돌아오겠다면 그렇게 합시다.” 말투가 조금은 누구러졌지만 여전히 눈물이 볼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쉬지 않고 원을 그리며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들은 잘될 거요.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잠시 전화를 걸고 오겠소.” 두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전혀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를 떴다. 방으로 돌아오자 사포크군 지방검사국의 크랜시에게 전화를 넣었다. “스펜서올시다.” 크랜시가 수화기에 나오자 내가 물었다. “파워드는 이미 돼지우리에서 나왔소 ? ” “알아보리다.” 수화기에서 나오는 잡음을 들으며 3분쯤 기다렸다. 크랜시의 목소리가 말했다. “내보냈다는군.” “잘 돌아갑니다.” 내가 빈정댔다. “미리 알고 한 일일 텐데.” 크랜시가 말했다. “그렇게 되리라는걸.” “알겠소, 고맙소.” 내가 말했다. 커피숍으로 되돌아가 보니 팸이 말하고 있었다. “짐이 무거워요. 모든 사람의 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부담에는 여간해서 견딜 것 같지가 않아요.” 웨이트리스가 나에게 커피를 날라다 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 ? ” 허비가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요 ?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아이들에게 말하라는 말이오 ? 어머니는 그게 견디기 어려우니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로막으란 말이오 ? ” 팸 세퍼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렇지 않아요. 나는 사랑을 받고 싶다고요. 하지만, 당신이나 아이들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 모두의 중심이 되어 모두에게……뭐라고 할까……책임을 느껴야 한다면 견딜 수 없게 되어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고 싶어진단 말이에요.” “놀랍군.” · 10· 허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 10· “그런 입장이 되보고 싶은걸. 모두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 오히려 숨이 가뿐 입장이. 가능한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서로의 자리를 바꾸고 싶군.” “그럴리야 없겠죠.” “그래, 당신의 흉내를 낼 생각은 없소. 우선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나는 모르오. 당신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데도.” “더구나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도.” 그녀가 말했다. “바보 같은 양반.” 허비가 나를 노려보았다. “지독한 인간이군, 스펜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나 ? ”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어쨌든 그건 당신과 아이들을 위하여 저지른 일이라고. 사내라면 공드린 탑이 무너지는 판에 속수무책 식구들이 가난에 빠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거요. 고리채라도 쓸 땐 써야지. 그렇지 못하다면 사내가 아니라고.” “저것 좀 보세요” 팸이 말했다. “언제나 그렇다니까요. 모두가 내 탓이에요. 당신이 하는 일이란 하나에서 열까지 나를 위해서라는 단서가 붙어야 하니까.” “억지부리지 마. 나는 사내로서 할 일을 해왔을 뿐이야. 사내가 가족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평생을 식구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말이야. 별로 이상할 것도 없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자아를 그렇게까지 몰입시킨다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수전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 ” 세퍼드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의 갈린 목소리에서 톤이 높아졌다. 주위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만큼 커진 것이다. “수전에게 큰소리칠 건 없어요, 허비.” 내가 말했다. “큰소리치려는 게 아니오. 들으면 모르겠소, 스펜서 ? 이 여자분은 헌신이나 자기 희생은 병의 조짐이라고 둘러대고 있단 말이오.”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오, 허비. 그녀는 왜 당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뭘 할 수 없느냐고 묻고 있는 거요.” “나는 반드시……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자신을 위해서 할 수는 있어요.” “예를 들어 ? ” 내가 다그쳤다. “그건……나에게는 돈이 필요하고, 좋은 생활을 가족에게……거기에다가……빌어먹을……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인가 ? ” 팸 세퍼드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오, 하느님.”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한탄스러울 수가.” 28 그러다가 결국은 세퍼드 부부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제안한 나와 수전에 대한 저녁식사 초대를 우리는 받아들였다. 비가 멈추고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수전과 나는 시이 가의 바닷가로 나가 수영을 하고 모래 위에 누웠다. 나는 생일날 수전으로부터 선물받은 파나소닉의 빨간 소형 라디오로 삭스와 인디언스 팀의 시합중계를 듣고 있었다. 수전은 에릭슨을 읽고 있었고, 난타케트 만에서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파워드가 언제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그렇다고 미리 손을 쓸 일도 아니다. 나타나면 나타날 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삭스 팀이 지고 나자 디스크 자키가 ‘플라이 로빙 플라이’를 흘려보냈다. 나는 라디오를 껐다. “그 두 사람, 그럭저럭 수습이 될 것 같아 ? ” 내가 물었다. 수전이 어깨를 움츠렸다. “허비가 문제예요.” “그런 면은 있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것만은 확실해.” “그건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도 잘될 것 같은가요 ? ” “아, 벌써부터 잘 되어 가고 있잖아.” “그런가요 ? ” “그럼.” “다시 말해서, 현상유지라는 뜻 ? ” “아니.” “그럼, 어떤 의미죠 ? ” “다시 말하면 이제 내가 결혼을 신청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지.” 수전이 책을 덮었다. 가만히 내 얼굴을 보다가 미소를 뛰웠다. “정말 ? ” “그럼.” “지금 그게 구혼하는 건가요 ? ” “정식으로 말하지. 결혼해 주지 않겠어 ? ” 가만히 있었다. 바다가 잔잔했다. 깊이를 느끼게 하는 녹색의 낮은 파도가 조용히 밀려와서는 사르르 부서진다. 수전이 말했다. “나,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 보지는 않았는데…….” “나도 그래요.” “나는 당신이 나와 결혼을 하고 싶은데도 내가 여지껏 구혼을 하지 않는 것을 분개하고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아왔거든.” “나도 당신이 어지간해서는 구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받아왔어요.” “들리지 않는 노래가 훨씬 아름다운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미혼인 채로 있으니까 당신은 매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란 말이에요.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상하네요. 나, 완료된 사실보다는 당신에게 구혼을 받는 것에 의한 안도감이라고 할까 확신 같은 것을 희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실질적 완료는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내 말뜻 이해하고 있을 텐데요.” “그래, 알고 있지. 나와 결혼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를 어떻게 결정할 생각이지 ? ” “몰라요. 하나의 방법은 헤어지겠다고 당신이 나를 협박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그래요, 당신을 잃을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당신의 좋은 점중의 하나지요. 어느 의미에서는 나에게는 갈팡질팡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거고요. 주저한다고 해도 전혀 걱정되지 않아요. 그 의미를 아시나 몰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버리지 못해.” “버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더구나 이건 ‘서로 자유로운 입장을 지킨다’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자유야. 남과 나누어 갖을 수 없는. 옛날 학교에서 흔히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나누어 달라는 식의 권리 주장은 인정되지 않는 거라고.” “당신은 생각이 상당히 고루하군요.” 수전이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나는 당신을 두고 다른 남자와 사귀는 일은 원하지 않아요. 더구나 여기저기에서 실험해 보고 싶어서 주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이미 겪은 일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지요. 독신자 술집에 진을 치고 있는 남자들과 내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당신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도 알고 있거든요.” “당연하지.” “하지만, 둘이서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여러 가지 있어요.” “예를 들자면 ? ” “어디에서 사느냐…….” 나는 여전히 벌렁 누워 있었고 그녀는 왼팔을 세워 반쯤 일어나 있었다. 검은 머리가 조금 악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잠재된 힘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하하하.” 하고 내가 웃었다. 그녀가 몸을 굽혀 내 입에 입을 갖다댔다. “그게 당신의 굉장한 매력의 하나라고요. 눈치가 빠른 그게.” “당신은 지금의 자신의 집과 하는 일에서 떨어져 나오고 싶지 않다, 이거군.” “아니면 20년 가까이나 살아왔고, 친구나 스스로가 소중히 하는 생활양식이 형성된 동네를.” “나는 그곳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이 못돼, 수전.” “물론 그렇지요. 당신을 돌이켜 보라고요. 당신은 최고의 남자예요. 어느 의미에서는 최고의 어른이자 강력하기 이를데없는 보호자라고요. 그러나 당신은 내가 지금껏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린애 같은 남자예요. 당신은 케이프 코트풍의 집에 살면서 잔디를 깎거나 클럽의 풀에서 수영을 하는 교외생활에는 맞지가 않는 사람이에요. 내가 알기로는 당신은 언젠가 사람을 죽인 일이 있다고 했지요 ? ” “그래, 필이라는 남자였지. 단지 필이라고 들었을 뿐 그밖의 이름은 끝내 듣지 못했으나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어.” “그렇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거리가 좋은 거예요.” “어린애 같은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 ? ” “좋은 의미로는 그렇지요. 그런 일에는 당신에게 있어서 일종의 놀이 같은 요소가 있단 말이에요. 결과보다 방법을 중시하는……명예를 존중한다는 것과 상당히 가까운 이야기가 되지만.”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 가끔 있지.” “물론 그렇기 때문에 보다 중요한 게임이 될 테지요. 스미스필드의 나의 이웃들은 훨씬 진지하다고요. 그들은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놀이와 같은 요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나에 관해서 상당히 생각을 해본 모양이군.” “당연하지 않아요 ? 당신은 지금의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고 나도 내 일을 그만두지 않아요. 나는 보스턴으로 옮길 생각은 없거든요. 그리고 당신은 스미스필드에서 살 생각이 없고.” “갈지도 몰라.” 내가 말했다. “거기에서의 일은 상의해 보면 좋은 생각이 나올 수도 있다고. 누가 당신에게 일을 그만두라든가, 나에게 지금의 일을 집어치우라고 떼를 쓰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래요. 하여간 그것은 생각해 볼 문제네요.” “어쨌거나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최종적 태도는 어디까지나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로군 ? ” “글쎄요.” 나는 양팔을 뻗어 그녀를 나에게로 끌어당겼다. “이 성급하고 충동적인 여자 같으니라고.” 그녀의 얼굴을 내 가슴에 찍어누르며 내가 말했다. 그래서 그녀가 뭐라고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과는 절대 헤어지지 않아요.” “당연한 소리.” 내가 말했다. “자, 돌아가서 저녁을 먹고, 우리의 우정을 마무리지어야지.” “아니면,” 차를 달려 모텔로 돌아가는 길에 수전이 말했다. “저녁식사 전에 끝마무리를 해도 좋아요.” “그보다도 식사 전과 후로 두 차례 마무리하면 어떨까 ? ” “당신은 기분 못지않게 젊은가 봐요.” 수전이 말했다. 29 우리는 7시 반에 세퍼드의 집 벨을 눌렀다. 나는 다색 자루에 헝가리산 붉은 포도주 한 병을 넣어 가지고 갔다. 뜻하지 않게 호크가 문을 열면서 357구경의 콜트식 자동 권총을 나에게 겨누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가 말했다. 우리는 들어갔다. 거실에는 킹 파워드와 내가 언젠가 풀로 던져서 거꾸러뜨린 포웰과 메이시, 그리고 세퍼드 내외가 있었다. 부부는 긴 의자에 앉아 있고, 권총을 든 포웰이 험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메이시는 엷은 서류가방을 들고 맨틀피스 악에 서 있었고, 파워드는 벽난로가의 팔걸이의자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세퍼드는 얼굴이 진땀으로 번들거리는 것에 기분이 몹시 상한 표정이다. 얻어맞으면 인간이란 대개 기가 꺾이기 마련이다. 세퍼드는 기력을 유지하기에 곤란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팸 세퍼드는 완전히 표정을 지우고 있었다. 자신의 속으로 몸을 도사려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 ” 내가 말했다. 호크가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는 없네. 허비와 마님께서 자네가 오기 전에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가까운 이웃에게 하룻밤 맡겼다는군. 그러는 편이 마음에 여유를 갖기에 좋은 일이겠지.” 파워드가 말했다. “닥쳐, 호크. 너는 자기의 장례식에서 넋두리를 하는 놈 같아.” 호크가 나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미스터 파워드께서는 기분이 언짢으신 모양인데 누구의 일로 심사가 뒤틀렸는지 나는 알 만하네.” “조만간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지, 킹.” 내가 말했다. “네놈의 잔재주가 들어맞았더군, 이 쥐새끼처럼 약은 녀석. 보답을 안 해드릴 수야 있나. 경찰에 나를 넘겨주고, 그걸로 일이 끝날 줄 알았다면 네놈은 이 킹 파워드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한 게 되지.” 메이시가 말했다. “킹, 자칫 잘못하면 더욱 번거로워져요. 지금 현재로도 보통 시끄러운 판이 아닌데……. 일단 그냥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그전에 나는 이 새끼를 혼내 주어야 해.” 파워드가 일어섰다. 그는 왕년에는 매말렀으나 지금은 뚱뚱한 몸이 되어 발이 오리처럼 밖으로 벌어졌다. “호크, 놈의 권총을 빼앗어.” “벽을 향해서 주게나, 도련님. 방법은 잘 알겠지 ? ” 나는 등을 돌려 벽에 손을 집고 그가 권총을 뽑아가게 내버려두었다. 호크는 더듬어 볼 필요도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다. 아마도 냄새로 아는 모양이다. 나는 벽에서 떨어졌다. “왜 오리처럼 걷지, 킹 ? ” 내가 빈정댔다. 파워드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가까이 다가와 주먹으로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상체를 뒤로 기울였을 뿐 넘어가지는 않았다. “꽥 꽥 ! ” 내가 오리 우는 흉내를 냈다. 파워드의 주먹이 또 날라왔다. 입술이 터졌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부어오를 것이었다. 단, 한 시간 뒤에도 내가 살아 있다면 말이다. “호크.” 수전이 말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냥 앉아 계시지.” 세퍼드가 말했다. “우리를 쏠 셈인가 ? ”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렇고말고. 나는 이 쥐새끼 같은 놈을 죽일 거다.” 파워드가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재미가 나면 네놈들 모두를 쏠 생각이지. 어떤가 이 빗쟁이 사기꾼.” “여자들은 관계가 없어.” 세퍼드가 고개를 아내 쪽으로 까딱해 보이며 말했다. “여자를 나가게 해주시오. 아이가 넷이야. 내 처자는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잖소.” 파워드가 잇몸을 들어내며 웃었다. “하지만, 네놈은 했지. 나에게서 큰돈을 거져 먹으려 했거든. 반드시 받아낼 테다.” “갚겠소. 이자까지 붙여서. 그러니 여자들을 보내 주시오.” “그 이야기는 급하지 않아, 사기꾼 같으니. 그전에 이놈을 해치워야겠어.” 몸을 돌려 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순간, 나는 한 발 악으로 나서며 그의 옆구리에 강타를 먹였다. 살이 물렁했다. 그는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푸석 무릎을 꿇었다. 메이시가 그 귀여운 권총을 꼬나들었고 포웰이 총을 세퍼드로부터 나에게로 돌렸다. 호크가 말했다. “기다려.” 서릿발 같은 목소리였다. 파워드가 고통을 삭히기 위해 몸을 옆으로 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주근깨가 푸르스름하게 떠올라 보였다. “놈을 죽여 ! ” 그가 소리쳤다. “저 망할 놈을 죽이라고. 어서 죽이라니까, 호크 ! ” “호크 ! ” 수전이 외쳤다. 나는 묵묵히 호크를 지켜보았다. 메이시에게는 그럴 만한 배짱이 없다. 궁지에 몰려 자신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해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는 어림도 없다. 그러기에는 메이시가 대학에서 이수하지 못한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포웰은 명령에는 복종할 테지만 현재로는 아무도 그에게 지시를 내린 바가 없다. 문제는 호크다. 나무토막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곁눈질로 보니 세퍼드가 손을 뻗어 아내의 등에 팔을 둘렀다. 수전이 다시 한 번 외쳤다. “호크 ? ” 다색의 구두 위에 흰 양말을 들어내고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던 파워드가 언성을 높혔다. “호크, 이 자식. 시킨대로 해. 쏘라니까. 놈을 날려 버려. 지금 당장 죽여 버리란 말이야.” 호크가 고개를 흔들었다. “노.” 파워드가 일어서려고 무릎을 세웠다. 몸이 흐느적거려 바닥에서 엉덩이를 간신히 들었다. “노라고 ? 이 검둥이 새끼, 누구에게 거역을 하는 거야. 네놈에게 돈을 주는 게 누구지 ? 시키는 대로 해.” 호크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번졌다. “아니,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겠어. 이자는 당신이 요리를 하라고, 보스.” 포웰이 나섰다. “내가 하지요, 미스터 파워드.” 호크가 또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너는 안돼, 포웰. 그 권총을 거기에 놓고 산책이나 하고 와. 자네도 마찬가지야, 메이시. 이 일은 킹과 스펜서가 결말을 볼 일이라고. 1 대 1로.” “호크, 자네 돌았나 ? ” 메이시가 말했다. “호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 파워드가 노려보며 말했다. “장난감을 치워.” 호크가 말했다. “자네와 포웰은 권총을 거기 커피 테이블 위에 놓고 어서 돌아가.” 포웰이 말했다. “호크, 왜 그래…… ? ” “꺼지라니까. 그렇지 않았다가는 내가 네놈들을 죽인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메이시와 포웰이 권총을 각기 테이블에 올려 놓고 방에서 나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파워드가 그들의 등뒤에 대고 말했다. 지금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목소리가 갈리고 있었다. “네놈들은 이 검둥이의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지시에 따라야 해.” “인종차별적인 언사가 심하군.” 호크가 나에게 말했다. “추악하기 짝이 없군.” 내가 말했다. “저렇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떠들어대다니 말이야.” 파워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메이시, 나가거든 빨리 경찰을 불러. 알았나, 메이시. 경찰을 불러와야 해. 이놈들이 나를 죽인다. 이 미친 검둥이가 나를 쏠 게 확실해.” 메이시와 포웰이 문을 닫았다. 파워드의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워졌다. “메이시, 알았나, 메이시 ? ” 호크가 말했다. “둘은 돌아갔네, 킹. 자, 슬슬 스펜서를 요리하라고. 아까 했던 것처럼.” “난 총이 없어. 그건 알고 있겠지, 호크. 나는 권총을 갖고 다니지 않아. 메이시의 것을 이리 줘.” “누가 권총을 쓰라고 했나, 킹. 아까처럼 두들겨 패면 된다고.” 호크가 권총을 허리춤에 거두워 찌르고는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댔다. 번들거리는 검은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파워드가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안돼, 호크. 나와 스펜서로는 승부가 되질 않는다고. 자네의 실력으로도 어려운 상대일걸. 불공평하다고. 알지 않나. 나는 그런 힘겨루기는 못해.” 호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허비 세퍼드가 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아마추어답게 오른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듯 휘두르며 파워드에게 덤벼들었다. 주먹이 파워드의 오른쪽 귀언저리로 날아가자 파워드가 비틀거렸다. 서슬에 세퍼드의 손가락 뼈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지만, 허비는 손가락 같은 건 염두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밀고 들어가면서 이번에는 왼손으로 주먹을 내지르자 파워드가 쓰러졌다. 세퍼드가 발길질을 하려고 하자, 파워드는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있는 두 자루의 권총 쪽으로 기어갔다. 내가 권총 악을 막아섰다. 그는 내 다리를 부둥켜안으며 오른쪽 허벅지를 물었다. 나는 기겁을 해서 그의 멱살을 잡고 휙 일으켜세웠다. 그러자 양손으로 내 얼굴을 할키려 하기에 그의 몸을 벽에 메다꼰졌다. 한동안 그는 벽에 머리를 대고 가만히 있었으나 천천히 왼쪽 어깨너머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세퍼드가 다시금 덤벼들려고 하는 것을 내가 말렸다. “이젠 그만.” 그런데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가로막아 섰다. 긴 의자에서 팸이 소리질렀다. “그만둬요, 허비.” 세퍼드가 몸의 힘을 빼며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알았어.” 그리고는 긴 의자로 가서 앉으며 멋적은 얼굴로 아내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그녀는 다소 몸 사리다가 더 저항하지 않고 남편에게 기댔다. 수전이 일어나 걸어가더니 호크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 발돋움을 해서 그의 볼에 키스를 했다.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지요, 호크 ?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까닭을 모르겠네요.” 호크가 어깨를 추스려 보였다. “나와 저기에 있는 당신의 사내와는 닮은 점이 많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한 바가 있지만. 스펜서나 나 같은 인간은 이제 몇 사람 남아 있지가 않아요. 그가 사라지면 한 사람이 더 줄어드는 것이 되고 나는 그만큼 더 외로워지게 되죠. 그리고 오늘 새벽에 진 빚도 있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은 그에게 손대지 않았을 거예요.” 수전이 말했다. “비록 그가 경찰에 관한 귀띔을 해주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간단히 믿어 주면 곤란해. 나는 지금까지 그런 짓은 여러 번 한 사람이니까.” “어쨌거나, 베이비.” 호크가 나에게 말했다. “이걸로 빚은 갚았네. 그리고…….” 호크는 수전을 보고 씽긋 웃었다. “파워드는 입이 걸거든요. 나는 원래 부인 악에서 저 따위로 쌍스럽게 입을 놀리는 자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는 아까 나에게 빼낸 권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메이시와 포웰의 권총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는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또 만나게 되겠죠, 여러분.” 나는 파워드를 바라보았다. “이럭저럭 살인미수로 당신을 고소할 수가 있겠는걸, 킹. 보스턴의 그 일도 무사히 넘어갈 수 없을 것 같고.” “빌어먹을.” 파워드가 무릎을 꺾으며 바닥으로 미끌어져 내려서는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호크의 말이 맞아, 킹.” 내가 말했다. “입이 건 자는 모두의 미움을 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