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약속의 땅 (상) 지은이: 로버트 B 파커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약속의 땅。(Promised Land)은 로버트 B. 파커(Robert B. Parker)의 네 번째 작품으로, 1976년도 아메리카 탐정작가 클럽(MWA)의 장편상을 받은 바가 있다. 그는 소설작가로서는 드물게 보는 학구파의 작가이다. 아마도 탐정작가로서 박사 학위에 교수로서 대학에 나가는 사람도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1932년에 태어난 그는 다지르 하멧드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노드이스턴 대학에서 아메리카 문학과 ‘폭력소설’의 두 강좌를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등장인물 중에는 상당한 인테리가 많다. 우선 주인공인 스펜서도 대학출신으로, 그의 아파트에 은신하게 된 팸 세퍼드는 그의 장서와 독서량에 놀라고 있다. 물론 스펜서의 상대역인 수전 역시 고등교육을 받은 카운셀링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이다. 그런 배경에서 이들 등장인물들의 대화내용은 그 수준이 지나칠 정도로 격조가 높다. 심지어 악당의 참모격인 메이시 역시 대학출신으로, 위기에 빠진 스펜서는 그가 도저히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다니지 못할 것을 그런 근거에서 판단한다. 그러나 파커의 이 작품에서 알게 모르게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은 현대의 모습으로 계승된 스펜서의 기사도정신과, 비록 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더라도 깍듯이 지키려는 의리 같은 것을 흑인 호크의 언동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호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나는 말이 인상깊다. “나와 저기에 있는 당신의 사내와는 닮은 점이 참 많아요 · 10· 스펜서나 나와 같은 인간은 이제 별로 남아 있지가 않거든. 그가 사라지면 한 사람이 더 줄어드는 것이 되고 나는 그 만큼 더 외로워지게 되죠.” 이러한 스펜서와 호크 같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파커는 그의 논문 ‘Murder Ink”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10· 그는 현대에 살며 기사도라는 서구의 전통을 계승하는 인간이다. 그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으며 무리를 짓지 않는 외로운 늑대이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혼자말과도 같은 의지의 표시이다. 그는 독자적 도덕률에 기반을 두고 다른 어떠한 통념도 그 도덕률에 비추어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는 늘 이 사회에 있어서의 최후의 신사이며, 신사로 남기 위해서는 투쟁을 벌일 때도 자주 있다. 때로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경우에도 직면한다. 1 도시개발 관계로 사무실을 시내에서 조금 북쪽으로 치우친 구획으로 옮겨야 했다. 새 사무실은 매사추세츠 큰 거리와 보스턴 거리 모퉁이에 자리잡은 둥근 탑 모양의 건물 2층인데, 아래층에는 담배가게가 있다. 악서 살았던 여자 점쟁이가 간판 대신에 창문에 붙여놓았던 너덜거리는 금박 글씨를 면도날로 긁어내고 있을 때, 문득 그 사나이의 모습이 눈에 뛰었다. 그 남자는 엷은 녹색의 가죽 윗도리를 입고 있는데, 열려진 악 단추 사이로 노란 셔츠의 뾰족한 긴 칼라가 겉옷 깃 위로 삐져나와 있다. 그는 종이쪽지에 적은 주소를 확인해 보고는 불안스러운 듯이 건물을 훑어본다. " 새 사무실 제1호 손님일까 ? " 내가 말했다. " 아니면 여자 점쟁이의 마지막 남자 손님일지도 모르지." 발목 부분을 아무렇게나 잘라 버린 청바지에다 감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처진 탱크 톱(소매 없는 런닝 셔츠식의 여자용 웃옷)을 입은 수전 실버맨이 물비누와 종이 수건으로 출입문의 유리를 닦고 있었다. 그녀가 창가로 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주변의 풍경이 마음에 안 드나 봐요." " 저 작자의 마음에 들 만한 구획에 사무실이 있다면 저 사람은 나에게 일을 맡기기가 힘에 벅찰걸." 그 남자가 담배가게 옆의 작은 출입구로 모습을 감추자 곧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깐 망서리는 듯하더니 노크소리가 났다. 수전이 문을 열었다. 남자가 꽁무니를 길게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류철이 그득한, 훨스。의 상표가 인쇄된 종이상자가 바닥에 즐비하고, 벽에 칠한 페인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출입문 왼쪽에 펼쳐놓은 신문지 위에는 페인트통과 붓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방안에 있는 나는 페인트투성이의 청바지에 더욱 형편없는 운동화를 끌고 있었다. " 스펜서라는 사람을 찾아왔소만……." 그 남자가 말했다. " 납니다. 어서 오십시오." 나는 면도날을 창틀 위에 놓고 악수를 할 생각으로 책상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의뢰인을 필요로 하고 있는 터였다. 파이로 반스는 자기 손으로 사무실에 페인트칠을 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 이쪽은 미세스 실버맨입니다." 내가 인사를 시켰다. " 이삿짐 푸는 일을 돕고 있는 중이지요. 시에서 먼젓번 사무실 건물을 철거하는 바람에." 하고 떠들어대며 나는 벌거숭이 가슴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이 신경에 걸렸다. 수전이 미소를 지으며, " 헬로" 하고 말했다. " 세퍼드입니다." 그 남자가 말했다. " 허비 세퍼드. 이야기할 게 있어서……." 수전이 말했다. " 샌드위치 먹고 올게요. 점심때도 됐고. 뭐 사다드릴 거라도 없나요 ? "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음료수라도 마시고 있어. 세퍼드 씨와 이야기가 끝나면 그럴듯한 식당에 모시고 갈 테니까." " 두고봐야겠지요 ! " 그녀가 말했다. " 만나뵈어 반갑습니다, 세퍼드 씨." 그녀가 나가자 세퍼드가 말했다. " 비서 ? " " 아니. 그냥 친구랍니다." " 나도 저런 친구를 갖어 봤으면." " 당신 정도의 옷차림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죠." " 그래요 ? 하지만 난 결혼을 한 몸이라오. 더구나 일에 쫓기다시피 하고."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그는 혈색이 좋은 네모진 얼굴에 검은 머리가 유난히 곱슬거렸다. 아래턱이 약간 처져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는 못하지만 호남형이라고 할 만하다. 머리가 검은 아일랜드인 혈통으로 보였다. 말솝씨는 능수능란한 것 같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혀 웬지 초조한 듯하다. 내가 말의 물꼬를 터 주었다. " 누구에게 듣고 여기를 찾아왔지요, 세퍼드 씨 ? " " 허브, 허브라고 불러 줘요. 모두들 그렇게 부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뉴 베드퍼드의 ‘스탠더드 타임스’에 아는 기자가 있소. 그 사람이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입디다." " 뉴 베드퍼드에 사십니까 ? " " 아니, 하이아네스에 살고 있소." " 알겠소. 당신이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기로 되어서 경비와 홍보담당의 보좌역으로 나를 쓰겠다는 거로군." " 아니." 자신이 없는 듯한 웃음을 뛰었다. " 아, 알았소. 당신은 하이아네스를 말하는군요." " 좋아요. 대통령에 입후보하자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보좌역이 되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럼, 무슨 일입니까 ? " " 아내를 찾아달라는 부탁." " 오케이." " 아마도 가출을 한 모양이오." " 흔이 있을 만한 일이죠." " 그녀가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데……." " 그 점은 보장할 수 없소. 찾아내는 일은 맡겠지만 유괴는 내 성품에 맞지를 않아요. 집에 돌아가고 안 돌아가고는 당신들 둘이 정할 일이니까." "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나가다니. 나와 아이들 셋을 남겨두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갔지 뭡니까." " 경찰에 연락은 ? " 고개를 끄덕였다. " 향기롭지 못한 표현이지만, 경찰에선 살인의 가능성은 꼽지 않습디까 ? "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 아내는 여행용 가방에 옷가지를 싸들고 나가 버렸소. 딕 스레이드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사람인데, 그는 아내가 가출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소." " 스레이드란, 경관 ? " " 맞아요. 번스티블서(暑)에 근무하지." " 좋소, 하루 100달러와 경비. 경비에는 모텔의 방값과 식사대가 포함됩니다. 매일 보스턴에서 출퇴근할 수는 없으니까." " 얼마가 들든 상관없소. 착수금을 얼마쯤 내면 되겠소 ? " " 허브, 당신이 대통령에 입후보한다면 내가 기꺼이 보좌역을 맡으리다." 다시 맥빠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농담은 그의 기분을 가볍게 해주는데 별로 도움이 안되는 모양이다. " 얼마면 되겠소 ? " " 500" 세퍼드는 안주머니에서 길쭉한 지갑을 꺼내, 100달러 지폐를 다섯 장 빼서 내밀었다. 지갑 속에 얼마나 더 있는지는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지폐를 접어 바지주머니에 넣으면서 거기에도 돈이 들어 있는 시늉을 했다. " 내일 아침에 찾아가겠소. 집에 있겠소 ? " " 물론. 집은 오션로(路)에 있소. 오션 로 18번지. 몇 시쯤 올 수 있겠소 ? 일이 산더미 같아서. 하필이면 이 바쁠 때 가출을 하다니." " 9시쯤에 가겠소. 그녀의 사진이 있거든 준비해 놓으시오. 카피는 내가 하겠소. 편지, 전화 요금청구서, 신용카드의 영수증 같은 것을 있는 대로 모두 주워모아 주시오. 조사를 해야 하니까. 수표 기록장은 남아 있소 ? 그녀가 찾아갈 만한 친구나 친척의 목록도. 그리고 남자관계는 ? " " 팸에게 말인가 ? 없소. 그녀는 섹스에는 별반 관심이 없거든." " 애정에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죠." " 그건 내가 주고 있소, 스펜서. 넘치고 흐를 만큼의 애정을." " 그냥 물어본 것 뿐이오. 아이들은 어떻소 ? 그애들 악에서 이야기를 꺼내도 상관없을까요 ? " " 그럼요. 우리는 뭐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으니까. 그녀가 가출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소. 어쨌거나 막내가 12살이니까 모두 철이 든 나이죠." " 어머니의 거처에 관해 아이들이 짐작하고 있을 만한 곳은 없을까요 ? " " 없을 거요. 아이들은 짐작이 안 간다고 하니까." " 하지만, 당신이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니오." " 그야 잘라 말하기는 어렵죠. 자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요즘엔 아이들과 자리를 함께할 시간이 나야 말이죠. 그래서 진짜 속마음을 말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장담하기 어렵지 뭐요. 특히 딸 아이들은……." " 나는 늘, 누구에게나 그런 고충이 있다고 생각해요. 크게 신경쓸 일이 아닐 거예요." " 말이야 쉽지만." " 하기야 당신 말이 맞아요. 달리 나에게 해둘 이야기는 없습니까 ? " 고개를 흔들었다. " 그럼, 내일 아침 9시." 악수를 했다. " 길은 아시겠죠 ? " " 아다마다요. 하이아네스 근처는 잘 알고 있는 편이니까. 찾아가리다." " 아내를 꼭 찾아 줘야 할 텐데, 스펜서." " 어렵지 않습니다." 2 수전 실버맨이 음료수를 마시고 돌아왔을 때, 나는 100달러짜리 지폐를 다섯 장 책상 위에 나란히 놓고 앉아 있었다. " 100달러짜리 지폐의 초상이 누구더라 ? " 내가 말했다. " 넬슨 록펠러." " 틀려." " 데이비드 록펠러 ? " " 그만두지." " 로렌스 록펠러던가 ? " " 점심은 어디 가서 먹을까 ? " " 나한테 돈을 보여 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간단한 스테이크 런치로 때울 생각이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피어 4를 생각하게 됐지 뭐예요." " 좋아, 피어 4다. 옷을 갈아입어야지 ? " " 적어도 가슴팍의 땀은 닦아야죠 ! " " 자, 우선 아파트로 가서 준비를 하자고." " 당신은 의뢰인만 붙었다 하면 생기가 도네요." " 틀린 말은 아니지. 즉각 레스토랑을 향하여 행동개시다." 오른쪽 엉덩이 쪽에 권총을 차고, 셔츠를 입고, 권총을 가리기 위해 셔츠 자락을 밖으로 늘어뜨린 채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섰다. 아파트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로, 코몬웰스 큰 도로를 곧장 내려가면 된다. 아파트에 다다르자 수전이 먼저 샤워를 하고, 나는 전화로 좌석 예약을 하면서 암스텔을 한잔 했다. 사실은 3병을 땄지만. 피어 4는 해안거리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우람한 건물이다. 오래 된 벽돌, 해묵은 대들보가 인상적이다. 바로 옆에는 칵테일 라운지로 쓰이는 옛날 허드슨 강의 유람선이 계류되어 있다. 교제를 하거나 점심식사를 하는 곳으로는 최고다. 고풍스러운 의상을 갖춰 입은 젊은 도어맨 중 하나가 낯간지럽다는 얼굴로 나의 콘버티블을 주차장으로 몰고 갔다. 주차장에 있는 차들은 대부분 내 것보다 새것이거니와, 내 차처럼 내장 여기저기에 회색 테이프로 땜질을 한 차는 거의 눈에 뛰지 않았다. " 저 젊은 사람은 당신의 차를 경멸하나 봐요." 수전이 말했다. " 현대 문명의 문제점의 하나지. 연륜에 대한 존경심이 없거든." " 자리가 빌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라운지에서 칵테일이라도 마시겠습니까 ? " " 그러지." 우리는 천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판자 길을 건너 유람선으로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는 보스턴 항구를 바라보았다. 수전은 마르가리타를 주문하고 나는 하이네킨을 마셨다. 암스텔을 파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 피어 4에서도. " 그래, 의뢰인의 주문은 뭐였어요 ? " " 아내를 찾아달라는군." " 어려울 것 같아요 ? " " 아니. 말하는 내용으로 봐서는 단순한 가출인 것 같아. 그렇다면 간단히 찾아낼 수가 있지. 가출한 유부녀들은 대개 그리 멀리 가지를 않거든. 실은 대다수가 어서 발견되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 여성해방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요." " 그런 관념과는 거리가 멀지만 현실에서는 그렇다니까. 최근에는 가출한 아내의 숫자가 집을 나간 남편의 수를 웃돌고 있다더군. 유부녀들은 ‘미즈’ 잡지를 두어 권 읽고, 텔레비전에서 마로 토머스가 떠드는 걸 들으면 더 이상 참고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가출을 하는 거야.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자기의 능력도 별수없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 10년, 15년의 주부생활로 시대에 뒤질 대로 뒤진 처지라 결국은 접시닦기나 가정부일이 고작인데, 그제서야 외로운 신세가 한탄스러워지게 된단 말씀이야." " 그렇다고 그대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지요." 수전이 말했다. " 부끄럽기도 하고……, 용서를 빌 수도 없는 일이고." " 맞아. 그래서 누가 찾으러 와주기를 바라며 집 근처를 맴돌기 마련이라니까." " 그래서 누군가가 찾아주면 그것이 일종의 의사표시가 되는 셈이군요. 남편은 찾아헤맬 만큼 나를 아껴준다……. 묘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애정표현이 되는 거예요." " 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죄의식, 특히 아이가 있을 때는 그 죄의식 때문에 대개는 가출 전보다 상황이 악화되게 마련이야." 수전이 마르가리타를 한 모금 마셨다. " 남편은 새로운 책망의 수단을 갖게 된다는 거죠 ?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남편은 자기 아내를 멍청이 같은 여편네라고 생각하겠지. 너는 우리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갔었다. 너는 나와 아이들을 비참한 구덩이에 몰아넣었었다. 뭐 ! 여권신장이 어떻다고 ? 웃기지 마라. 너는 우리에게 빚을 진 거라고." " 하지만," 수전이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 물론 자기는 식구들을 위해 인생을 썩혔고, 이제는 스스로를 위해 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할 테지." 나는 어깨를 추스리고 맥주를 비웠다. " 마치 흔해빠진 일처럼 말하네요." " 어느 의미에서는 일상적인 사건이지. 나는 그런 케이스를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으니까. 나는 60년대에는 가출 청소년을 찾는데 시간의 태반을 쏟아야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가출 주부를 찾는데 태반의 시간을 기울어야 한다고. 엄마가 되었다고 해도 이야기의 내용은 별반 다르지가 않거든." " 아주 하잘것없는 일이라는 투로 말하는군요. 얼마든지 널려진 일처럼 말이에요. 그저 일거리 중의 한 항목, 찾아볼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투라고요." " 나는 목소리를 떨며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어쨌든 찾아주어야겠다는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어. 돈 때문에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먹고 살 수는 있어. 어쨌거나 내가 하는 일은 남에 대한 걱정이나 동정에 빠져들어서는 곤란하거든. 대개는 득이 없으니까." 나는 웨이트리스에게 눈짓으로 맥주를 추가시켰다. 수전의 술잔을 보았다. 수전은 싫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항구 저쪽의 로건 공항 활주로에서는 보잉 747이 도저히 떠오를 것 같지 않은 거구를 들어올리더니 원을 그리며 천천히 고도를 잡고는 서쪽을 향했다. 로스앤젤레스행일까 ? 그렇지 않으면 샌프란시스코겠지." " 수전, 나와 당신은 저걸 타고 있어야 하는 건데." " 뭐라고요 ? " " 저 여객기 말이야. 서쪽으로 가는……. 대지와의 번거로운 인연을 끊고." " 비행기는 싫어요." " 아차, 기분을 상하게 했군." " 왜 그렇게 생각하죠 ? " " 말투, 당신의 그 말투. 말의 길고 짧음. 알겠어 ? 나는 경험이 풍부한 수사전문가라고. 단서의 분석이 전문이지. 뭐가 못마땅해서 그러지 ? " " 나도 몰라요." " 그 대꾸는 단서가 될 만한데." " 농담은 그만해요, 스펜서. 정말 나 자신도 명확하지가 않아요. 당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 어느 정도 그건 사실이에요. 난 ‘미즈’ 잡지를 읽었을지도 모르고 텔레비전의 마로 토머스가 지껄이는 잔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는지도 몰라요. 나는 결혼을 했고, 이혼을 했어요. 그래서 그 의뢰인의 아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지도 모르죠." "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말했다. 웨이터가 테이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러 왔고, 그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메뉴는 대문짝만한 판지에 까다로운 옛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용의주도하게도 바다가재 요리에는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았다. " 가령 그렇다고 치자고." 내가 이야기를 다시 입에 올렸다. " 그녀가 안고 있는 문제를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고. 그런데 화를 내는 이유가 뭐지 ? " 그녀는 메뉴를 보고 있었다. " 혼자 잘난 체……." 그녀가 말했다. " 내가 생각해 내려던 말이 바로 그거예요. 그 여자가 잠시 가정을 이탈한 데 대한 그 독선적인 말투." 웨이트리스가 왔다. 나는 수전을 바라보았다. " 식용 달팽이." 그녀가 웨이트리스에게 말했다. " 냉장된 게." 나는 홑 오도블과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웨이트리스가 돌아갔다. " 독선이라는 말에는 찬성하기 어려운걸." 내가 말했다. " 경솔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독선은 아냐." " 깔고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 말이에요." " 아냐. 그렇지만 당신이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면, 울분 같은 거라고 해두지.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울분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바보스러운 것에 대해서야. 나는 무슨무슨 운동이라는 것은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 새로운 시스템이 모든 걸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작자들이 싫단 말이야. 더구나 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들을 내버려둔 채 가출하는 인간은 질색이라고. 그것이 사업, 술, 섹스, 성공 등 어떤 이유에서이건 말이야. 무책임해 ! " 여급사가 첫째번 코스를 날라왔다. 그의 오르되브르 (전채요리 ; 수프 전에 나오는 가벼운 요리) 속에는 클램 카지노 오이스터 록펠러, 튀긴 새우와 고기를 곁드린 버섯 한 조각씩이 들어 있었다. " 버섯과 달팽이를 1 대 1로 교환할까 ? " 내가 말했다. 그녀가 달팽이를 하나 집게로 집어 내 접시에 올려놓았다. " 버섯은 필요없어요." " 화가 난다고 해서 먹을 것도 마다하면 쓰나." 나는 달팽이를 집어서 꺼내 먹었다. " 버섯을 먹으려면 지금 먹어 두는 것이 좋아." 그녀는 고개를 저었고, 버섯도 내가 먹었다. 수전이 말했다. " 당신은 그 여자가 가출한 이유를 모르고 있군요." " 당신도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야." " 하지만 당신은 여성해방 같은 것이 이유일 거라고 넘겨짚고 있어요." "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당신의 생각이 옳아." " 그 소금에 저린 새우 먹겠어요." 수전이 말했다. 나는 포크로 새우를 그녀의 접시에 옮겨 주었다. 내가 말했다. " 그 새우를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 게다가 버섯을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 심술쟁이 같으니라고." 수전이 생긋 웃었다. " 남자를 약올리는 데는 먹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이라니까." 그 웃음이 효과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다. 수전의 웃음은 테크니컬러(Technicolor), 시네마스코프(Cinema Scope), 스트레오포닉 사운드(Stereophonic Sound)이다. 나는 아랫배의 근육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늘 그렇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넘겨다보고 있으면 늘 그렇게 된다. "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지, 20년 전에는 ? " " 나와는 맞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있었죠." 수전은 오른손을 뻗어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나의 왼쪽 손가락 관절을 어루만졌다. 웃음은 남아 있었으나 그건 진지한 것으로 변해 있었다. " 결혼은 아무리 늦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웨이트리스가 샐러드를 들고 왔다. 3 아침 일찍 일어나 러시 아워가 시작되기 전에 하이아네스를 향해 떠났다. 케이프로 향하는 3호선은 사가머 다리에 이어지는 고속도로이다. 20년 전에는 고속도로 같은 것이 없어서 케이프로 가자면 랜돌프라고 하는 매사추세츠 주 남부의 작은 마을을 지나는 28호선을 타야 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즐거운 여정이어서 사람들과 집의 악마당, 다색의 잡종개도 볼 수 있었고 간이식당에 들르면 눈악에서 조리해 주는 햄버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3호선을 달리며 내가 본 거라고는 프리머스라고 쓴 표식 옆에서 타이어를 갈아끼우고 있는 잡부의 모습 하나뿐이었다. 아치형의 사가머 다리에서 케이프 코드 운하를 건너면 3호선이 6호선인 미드케이프 고속도로로 변한다. 도로의 중앙분리대와 길 양쪽에는 키작은 스트로브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가끔 단풍나무와 어린 느티나무도 보인다. 도로의 높은 부분에서는 양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남쪽이 버저즈만(만), 북쪽이 케이프 코드만(만)이다. 사실 케이프는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또는 갯내나 파도소리가 아니더라도 그냥 큰 바다를 느끼게 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때로는 나의 양쪽으로 광대한 공간을 감지할 수 있다. 태양 아래 무한히 널려 있는 반짝임을 느낄 수 있다. 132호선에서 하이아네스 중심부로 꺾어들었다. 마음에 평안을 주는 스트로브 소나무와 넓은 바다를 대신해서 맥도널드나 휴게소, 조립식 울타리를 만드는 회사, 쇼핑 몰(자동차를 못 들어 오게 하는 보행자 전용 상점가), 자동차 정비소 등. 내가 사는 동네와 구별이 가지 않는 환경 속에서 별로 매력이 없는, 먹고 마시는 숙박업소가 늘어서 있다. 여기에서는 벽에 어망이 걸려 있는 점만 다를 뿐이다. 왕년의 바솔로뮤 고즈놀드가 이 방향에서 케이프로 접근했더라면 들리지도 않고 그냥 항해를 계속했을 것이다. 공항 가까이 다다르자 중심가를 향해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하이아네스는 번화가로 들어서면 의외로 대도시에 못지않는 교통침체를 보인다. 번화가에는 점포가 즐비한데, 그 대부분은 보스턴이나 뉴욕에 본점을 둔 지점들이다. 목적하는 모텔은 거리의 동쪽 끝에 있는 멋있고 큰 리조트 모텔로 헬스 클럽과 빅토리아 시대풍의 장식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현관의 큰 녹색 간판에는 ‘던페이스’라고 쓰여 있다. 2달 전에 브렌더 로링과 투숙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모텔이다. 9시 반에는 배당된 방에 들어가 가방 속의 잡동사니들을 정리했다. 세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오션 로는 시이로(路)의 연장으로, 모텔에서 5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으며 비바람에 바랜 쪽나무 판자로 된 지붕에 푸른 덧문이 달린 집이 대부분이다. 세퍼드의 집도 그중의 하나였다. 식민지시대풍의 큰 주택으로 흰 히말라야 삼나무의 쪽나무 지붕이 비바람에 시달려 은백색으로 바랬고 창마다 푸른 덧문이 달려 있다. 오션 로의 바다에 면한 둔덕 위에 서 있다. 탑을 내린 캐디락 콘버티블이 길가에 서 있었다. 구부러진 벽돌 포장의 작은 도로가 현관으로 이어져 있고, 집 둘레에는 낮은 상록수 숲이 우거져 있다. 현관문도 푸르게 칠해져 있다. 초인종을 눌렀더니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지의 왼쪽으로는 해변가로 그 언저리에서 행길이 커브를 이루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이웃집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한 나무 울타리가 빽빽하다. 연한 녹색의 폭이 좁은 비키니를 입은 금발의 10대 아가씨가 나왔다. 17세 가량으로 보인다. 나는 아가씨를 훑어보는 무례를 삼가하며 말했다. " 세퍼드 씨를 만나러 온 스펜서라는 사람인데……." " 들어오세요." 아가씨가 말했다. 현관 옆에 있는 홀로 들어서자, 나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아가씨는 아버지를 부르러 갔다. 나는 현관문을 닫았다. 홀 안은 대리석으로 바닥을 했고 벽은 히말라야 삼나무 판자로 되어 있었다. 홀 양편과 건너쪽에 문이 있고 그 안으로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보인다. 천장은 흰색이고 대패질도 하지 않고 그 위에다 페인트를 뿜어놓은 듯했다. 세퍼드의 딸이 돌아왔다. 나는 선글라스를 통해서 음밀히 그애를 관찰해 보았다. 음밀이라는 표현이 호색스러운 눈으로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보기보다는 더 어린지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다. " 아버지께서는 손님과 함께 계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없겠느냐고 하셨어요." " 그러지." 소녀는 나를 거기에 세워둔 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서 포도주라도 대접해 주는 그런 융숭한 대접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홀에서 멋적게 서성거려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섭섭한 처사이다. 혹시 어머니의 가출로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로 어수선한 기색은 엿볼 수가 없었다. 좀 심통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인종 때문에 현관까지 나가야 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벨이 울렸을 적에 발톱에 막 매니큐어를 바르려던 참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허벅지 근처가 굉장하다, 어린 계집애치고는. 계단 저쪽의 문에서 세퍼드가 나타났다. 그의 곁에는 대머리에 광대뼈가 두드러진 장신의 흑인이 서 있었다. 아무렇게나 끝부분을 잘라 버린 담청회색 레저 바지에 큼직한 깃이 달린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다. 그 셔츠는 허리까지 단추가 풀려 있어 들어난 가슴과 배가 흑단처럼 단단하고 번들거렸다. 그가 진한 선글라스를 가슴 포켓에서 꺼내어 썼다. 그는 안경태 위로 쏘듯이 나를 훑어보면서 얼굴을 쳐들다가 선글라스가 눈을 가리게 되자 이번에는 검은 유리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주보며 말했다. " 호크 ! " " 스펜서 ! " 세퍼드가 말했다. " 아는 사이인가 ? " 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내가 말했다. 세퍼드가 호크에게 설명했다. " 아내인 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스펜서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지." 호크가 말했다. " 찾아내고말고. 뭘 찾는데는 선수거든. 뭐든지 찾아내지. 안 그런가, 스펜서 ? " " 당신이야말로 옛날부터 내가 존경하는 영웅 중의 한 사람이야. 지금 어디에 묵고 있나 ? " " 난 휴양지에서 흰둥이들과 함께 묵고 있다네, 스펜서 선생." " 이제는 흰둥이라고 하지 않는다네, 호크. 백인이라고 부르라고. 게다가 자네는 남부 사투리 흉내에 전혀 발전이 없군그래." "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가 ‘쇼트닝 브레드’를 노래하는 것을 들려주고 싶군." " 그야 잘 부르겠지." 호크가 세퍼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 그럼 또 만나자고, 미스터 세퍼드."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호크가 밖으로 나갔다. 세퍼드와 나는 그가 캐디락 쪽으로 좁은 도로를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아하고 가벼운 걸음걸이였는데, 근육이 팽팽하고 용수철이라도 숨겨져 있어 도약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나의 68년형 시보레를 보더니 입이 벌어져서 내쪽을 돌아다보았다. " 아직도 그 차를 그냥 타고 다니는군, 베이비."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캐디락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달려내려갔다. 마치 호기를 부리듯. " 어떻게 알게 되었지 ? " 세퍼드가 물었다. " 20년 전 같은 체급에서 맡붙기도 했고, 체육관에서 만나기도 했지." " 허, 그런 사람을 20년이 지나 여기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신기한 일이군." " 아니, 그 뒤에도 몇 번 만나기는 했소. 서로의 일 관계로." " 그래요 ? " " 그렇소." " 자네들이 상당히 잘 아는 사이라는 건 금방 느낄 수가 있었소. 인간들의 속을 들여다보는 세일즈맨의 육감이라는 것이지만.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커피로 하겠소 ? 술을 마시기에는 시간이 이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 인스턴트인데 괜찮겠나 ? " 세퍼드가 물었다. " 상관없소." 라고 말하자 세퍼드가 빨간 주전자를 불에 올렸다. 부엌은 좁고 길었는데 조리하는 곳과 식탁 사이를 카운터로 갈라놓았다. 거친 목재의 피크닉 테이블이 있고, 그 사방에 의자가 놓여 있다. 테이블은 진한 자색으로 채색이 되어 있어 푸른 바닥과 카운터가 아주 잘 어울렸다. " 알 만하군요. 한때는 복서였다 ? "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코뼈가 주저앉았군요." " 그렇소." " 눈 밑의 상처도 그래서일 테고." " 그렇소." " 어쨌든 멋진 체격이오. 지금이라도 2。3라운드는 거뜬히 뛰겠는걸, 안 그래요 ? " " 상대에 따라서는요." " 헤비급이었소 ? "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 끓었다. 세퍼드는 큰 병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컵에 넣었다. " 크림과 설탕은 ? " " 아니, 됐습니다." 커피를 테이블에 옮겨놓고 우리는 마주앉았다. 나는 도넛이나 머핀이 나올 것을 기대했다. 호크에게는 대접했을까 ? 그런 생각을 했다. " 자아, 듭시다." 세퍼드가 컵을 들어올렸다. " 허브 ! " 내가 말했다. " 당신은 가출한 아내 일 말고도 문제를 안고 있군요." " 그게 무슨 뜻이오 ? " " 나는 그 검둥이를 알고 있소. 그가 하는 일의 성질도. 그는 빗쟁이의 악잡이요. 소위 해결사라는 거지. 그자는 소속이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개 킹 파워드의 일을 돕고 있는 걸로 아는데 ? " " 잠깐. 나는 아내를 찾아달라고 당신을 고용한 것으로 아는데요. 내가 호크와 어떤 관계를 갖든 그건 내 문제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잖소. 내가 하는 일에 쓸데없는 참견을 하라고 당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건 아니오." " 그야 틀리는 말이 아니죠." 내가 말했다. " 그러나 호크와 연관을 갖고 있다면 언제고 봉변을 당하고 말 거요. 호크는 누구를 궁지에 몰아넣고 쥐어짜는 것이 장사니까. 파워드의 돈을 쓰고 있는 거 아니오 ? " " 나는 파워드가 누군지 알지도 못해요. 파워드니 호크니 하는 문제 외의 사람들에 관해서는 신경쓸 것 없소. 알겠소 ? 나는 내 아내를 찾아달라는 거요. 내 장부를 넘겨다보라고 모시는 게 아니오." "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호크와 같은 인간을 상대로 일을 해오고 있소. 그래서 끝장이 어떻게 난다는 걸 알고 있소. 이번에 호크가 와서 아주 우호적으로 이야기를 했겠죠. 선생의 빚은 얼마고, 지불기한이 얼마가 지났으니 언제까지는 마련해 줘야 한다고." "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그러시나 ? " " 그리고 마침내는 그가 웃는 낯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내용을 당신에게 설명을 했다. 그때 내가 나타나자 그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 스펜서, 그런 이야기를 계속할 거요, 아니면 내가 의뢰한 일에 착수할 거요 ? " " 허브, 호크는 본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 거요. 호크는 위험한 사나이란 말이오. 입밖에 낸 말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지. 빌린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갚아야 하오. 갚을 능력이 없거든 지금 솔직히 말해 보시오. 둘이서 의논을 해보자는 거요. 그렇다고 없는 말을 해서는 안되지만. 그리고 행여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생각해서도 안돼요. 호크와 관련이 되어 있는 한 당신은 상당히 심각한 입장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아야 하오." " 아무것도 이야기할 게 없소. 잘라 말하겠는데, 이 이상 할 이야기는 없소." " 어쩌면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소." 4 육감이라고 할까, 나는 호크 또는 파워드와의 연관성에 관해 세퍼드가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아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 부인의 이름은 팸, 맞소 ? " " 그렇소." " 결혼 전의 성은 ? " " 관계없을 텐데." " 가출하고 나서 옛날 성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 팸 니일." 철자도 말해 주었다. " 부모는 살아 있나요 ? " " 아니오." " 처가 쪽의 친인척은 ? " 멍한 얼굴이다. " 형제나 자매는 ? " " 없소. 외동딸이었지." " 자란 고장은 ? " " 벨파스트, 메인주(州) 사우드포틀랜드 근처의 해변이었죠." " 어딘지 짐작이 가는군요. 거기에는 그녀가 찾아갈 만한 옛친구가 있을까요 ? " " 아니오. 아내는 대학을 나오자마자 고향을 떠났고, 곧 부모가 작고했죠. 벌써 15년이나 가본 일이 없소." " 대학은 ? " " 콜비." " 보타빌에 있는 ? " " 맞소." " 졸업년도는 ? " " 1954년. 나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대학시절에 사귀었으니까." " 학교 때의 친구는 ? " " 글쎄. 학창시절의 친구들과는 지금도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있지요. 그들 중 누군가를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이건가요 ? " " 어쨌거나 집을 뛰쳐나가서는 어딘가 찾아갈 곳이 있어야 하거든요. 부인은 직장근무 경험은 없습니까 ? " 힘주어 고개를 흔들었다. " 전혀. 우리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소. 그녀의 고향으로부터 학비가 끊어지자 내가 뒤를 대주었었죠." " 혼자 여행한 일은 ? 예를 들어 휴가를 따로따로 떠났다던가……." " 없소. 심하게 말해서 공중전화 박스 속에서도 미아가 되는 그런 여자죠. 혼자서 여행할 만한 용기는 어림도 없소. 어디를 가든 내가 데리고 다녔죠." " 그렇다면 가량 당신이 부인의 입장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직장을 다녀 본 경험도 없고 여행도 엄두를 못 내는데다가 이곳 외에는 친척도 없는 상태에서 가출을 했을 경우, 당신은 어디로 가겠소 ? " 세퍼드는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 돈을 갖고 나갔습니까 ? " " 얼마 안될 거요. 매주 월요일에 식료품비와 잡비를 주는데, 그녀는 목요일에 집을 나갔고 그때는 이미 식료품 구입도 끝낸 뒤였으니까. 갖고 있어 봤자 20달러나 될까 ? " " 좋소. 그럼, 행선지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20달러 갖고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소. 친구한테로 간다면 누구의 집일까 ? " " 그녀의 친구 대부분은 내 친구이기도 하지요. 알겠소 ? 나는 남편되는 사람을 알고 아내는 그 사람의 부인과 친구라는 이야기요. 친구에게 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소. 남편되는 사람이 나에게 알려올 테니까." " 미혼인 친구는 ? " " 그 점이 문제인데, 내가 아는 친지 중에는 독신자가 없소." " 부인에게는 ? " " 내가 아는 바로는 없소. 물론 그녀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했던 건 아니지만. 즉 그녀의 대학 친구들 중에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오. 그중에는 아주 좋은 사람도 있었지요." " 그 사람들의 이름이나 주소를 알 수 없을까요 ? " " 글쎄……, 찾아보기는 하겠지만, 다소 시간이 걸릴 거요. 솔직히 말해서 낮 동안의 그녀의 생활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없소. 그런 친구들에게 편지를 했다고 해도 내가 알 수는 없죠." " 그중에서 이 부근에 사는 사람은 ? " " 모르겠소, 스펜서. 밀리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 따님 말인가요 ? " " 그렇소, 열여섯 살이죠. 엄마의 말상대가 될 만한 나이거든. 뭔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불러 볼까요 ? " " 그러시오. 그리고 그 동안의 전화요금 청구서, 편지, 그밖에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주시오. 사진도 물론." " 알았소. 밀리가 당신과 그애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찾기로 하겠소." 그러고 보니 나를 만나고 돌아온 즉시 그런 걸 챙겨두지 않은 모양이다. 이쪽의 지도력이 부족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밀리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은 듯했다. 테이블에 마주앉아 아버지가 비운 커피잔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었다. 세퍼드는 청구서 등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챙기러 자리를 떴다. 밀리는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 밀리, 어머니가 가 있을 만한 곳이 짐작가지 않니 ? " 고개를 흔들었다. " 그것은 모르겠다는 뜻이냐, 아니면 말 못하겠다는 뜻이냐 ? " 어깨를 움츠려 보이고는 여전히 컵을 돌리고 있었다. " 어머니가 돌아와 주기를 바라니 ? " 또 어깨를 추스렸다. 내가 매력을 발산하면 상대는 대개 버터처럼 녹아내린다. " 어머니가 왜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니 ? " " 몰라요." 컵을 응시한 채 말했다. 이제 입을 열 준비가 된 것 같다. " 밀리가 어머니 입장이라면 역시 가출을 했을까 ? " " 자신의 아이를 놔두고 집을 나가는 짓은 하지 않아요." 자신이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 있다. " 남편은 버릴 수 있어도 ? " " 그야……." 아버지가 나간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왜지 ? " " 아빠는 바보예요." " 어떤 점에서 ? " 또 어깨를 으쓱했다. " 일만 해서 ?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서 ? " 어깨를 추스려 보이기만 한다. " 알겠니 ?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누구를 바보 취급할 때는 그 이유를 말하기로 되어 있단다. 더구나 한식구일 경우에는 더욱." " 까다롭군요." " 그것이 어른과 아이들의 다른 점의 하나지." " 어른 같은 거 되고 싶지도 않아요." " 나는 두 가지를 다 겪어 봤지만, 어른이 아이보다는 낫던걸." " 그럴 테죠." " 어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지 ? " 또 어깨를 으쓱할 뿐 말이 없다. 나는 일어서서 소녀를 창밖으로 내던져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만 한 것으로도 약간 속이 시원했다. 인간이란 심술첨지가 따로 없는 거다. " 어머니를 사랑하니 ? " 그녀는 눈에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 물론이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컵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계집애 대신에 컵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어머니가 고생하고 있다고는 생각 않니 ? " " 알 수 없죠." " 유괴된 것은 아닐까 ? " " 몰라요." " 혹시 어디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 " 내딴에도 상상력은 풍부하다. 아니면 그녀는 수수께끼의 백작의 마수에 걸려 영국의 거친 들판에 있는 어느 성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보다도 무서운 운명에 관해 이 소녀에게 설명을 해줄 것인가 ? " 저도 몰라요. 아빠는 엄마가 가출했다고만 말했다고요. 그러니 유괴인지 가출인지는 아빠가 아실 게 아닌가요 ? " " 아버지도 모르고 계신다. 그냥 추측에 지나지 않아. 밀리가 말하는 바보 아버지는 나름대로 네가 너무 걱정을 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있는 거란다." " 그럼 왜 찾으려고 하지 않지요 ? " " 아, 뛰어난 두뇌여 ! 이제야 눈을 뜨셨군그래. 아빠가 뭣하러 나를 고용했다고 생각하니 ? " " 그렇다면 당신은 왜 조사를 시작하지 않나요 ? " 그녀는 커피잔을 돌리는 짓을 멈췄다. " 나는 그걸 하려는 참이다. 왜 협력해 주지 않지 ? 지금 현재 어머니를 구출하는 데 있어 네가 공헌한 거라고는 ‘몰라요’가 4번, 어깨를 추스린 것이 6번. 그리고 아빠는 바보여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만 했을 뿐이야." " 엄마가 진심으로 가출을 해서, 돌아올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 " " 그렇다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봐야지. 나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는 여자에게 족쇄를 채울 생각은 없다." " 엄마가 어디 있는지 난 알지를 못해요." " 가출한 이유는 ? " " 그건 벌써 물어 보셨잖아요." " 너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 아버지가 신경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 예를 들어 뭐가 ? " " 예를 들어 · 10· 뭐라고 해야 할까. 아빠는 늘 엄마를 그냥 두지 않았어요. 엉덩이를 두드리기도 하고, 청소기를 끌고 다니는데 키스해 달라고 조르고. 그런 거 말이에요. 엄마는 그런 게 싫었던 거예요." " 그런 일로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눈 일은 ? " " 내가 보는 데서는 없었어요." " 너 있는 데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하셨지 ? " " 오직 돈. 그것도 말하는 건 아버지 쪽이에요. 엄마는 듣기만 하고. 아빠는 늘 돈과 사업 이야기만 해요. 곧 큰돈을 벌 거라는 이야기요. 바보같이." " 아빠가 엄마를 학대한 일은 ? " " 때리는 거 말인가요 ? " " 뭐, 그런 거." " 없어요. 반대로 마치 여왕뫼시듯 해요. 그걸 엄마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항상 찰싹 붙어 있기만 했다고요. 정말 볼품없어요. 시도 때도 없이 침을 흘릴 것 같은 모양으로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니까. 아시겠어요 ? " " 엄마의 친구 가운데 아빠가 모르는 사람이 있니 ? " 그녀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 없다고 생각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 다른 남자와 교제하는 일은 ? " " 엄마가요 ? " " 흔히 있는 일이지." " 엄마는 안 그래요. 절대로." " 엄마를 찾는데 뭔가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생각나는 건 없니, 밀리 ? " " 없어요. 나도 엄마가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식사준비는 물론, 동생들 시중, 청소부 아줌마가 빠지지 않고 오게 하는 일까지 모조리 내가 해야 되거든요." " 동생들은 어디 있지 ? " " 비치클럽에요. 난 아저씨 때문에 집에 있어야 하다니 정말 싫어요." " 나 때문이라 ? " "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주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아빠가 말씀하셨어요. 경주가 있는데 그것도 못 보게 되었다고요." " 인생이란 때로는 속이 상할 때도 있는 법이지." 내가 말했다. 계집애가 입을 삐죽했다. " 경주는 이번 주 내내 있어요. 모두가 거기로 몰려가 있다고요. 여름방학으로 고향에 돌아간 사람들은 빼놓고는 모두가 참가하고 있는데." " 그런데도 너는 그들을 만날 수 없다 · 10· . 속이 상할 만도 하군." " 그래요. 친구들은 모두 참가했는데……, 여름중 가장 즐거운 시기거든요." 어린데도 비극에 대한 감각이 고도로 발달해 있다. 세퍼드가 편지며 청구서가 수북히 쌓인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위쪽에 금철사 장식이 된 사진틀이 보이고 거기에는 네모진 사진이 들어 있다. " 자, 살펴보시오, 스펜서. 이게 전부요." " 당신도 대충 살펴는 보았소 ? " " 아니, 그 일을 맡기려고 당신을 고용한 거 아니오. 나는 세일즈맨이라고. 탐정이 아니오. 사람이란 가장 자기의 취향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소. 안 그렇냐, 밀리 ? " 밀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경주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 사나이라면 무엇인가 신조를 갖어야 하죠." 내가 말했다. " 무슨 일이 있을 때 나에게 어디로 연락해야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 " " 던페이스, 맞죠 ? 더 래스트 플레이 급사장에게 내 이름을 대시오. 아마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줄 거요." 그렇게 하겠다고 내가 말했다. 세퍼드는 현관까지 나왔으나 밀리는 보이지 않았다. " 농담이 아니오. 거기 식당의 폴에게 내 이름을 대면 정중히 대접할 테니까." 차를 몰면서 나는 비치클럽에서 무슨 경주가 열린다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5 시청에 들러 경찰서로 가는 길을 물었다. 서기실의 카운터 맞은편에 앉았던 여자가 영국 사투리로 경찰서는 번스티블로(路)에서 갈라지는 엘므가(街)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번스티블 로까지의 노선을 잘못 말해 주고 말았는데, 영국인이라면 별수없는 일이다. 주유소 직원이 다시 가르쳐 주어 정오 조금 전에 경찰서 건너쪽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넣을 수가 있었다. 경찰서는 경사가 가파른 지붕의 벽돌 건물로, 정면에 A형의 다락방 창이 두 개 나 있다. 건물 옆 공지에는 순찰차가 대여섯 대 서 있다 · 10· 짙은 감색에 탑과 악쪽의 펜더가 희게 칠해져 있고 차 옆으로는 ‘번스티블 경찰’이라고 쓰여 있다. 하이아네스는 번스티블 타운십(township)의 일부인 것이다. 그것은 알고 있었지만 타운십이라는 것이 행정상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며 그것을 아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 바깥과 접해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왼쪽 낮은 난간 저쪽에 교환대와 무전기를 악에 하고 당직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긴 벤치가 놓여 있는데, 원고, 중죄인, 참고인 등이 앉아 경감이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도록 되어 있다. 어떤 경찰서이건 들어가면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경감이 있는 법이다. 어떤 용건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딕 스레이드 씨 계신가요 ? " " 경감은 지금 바쁩니다. 저한테 말씀하시지요." " 아니오, 그를 만나야 하오." 명함을 건네주었다. 상대는 명함을 들여다보았지만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벤치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 일이 끝나는 대로 경감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이자들이 경찰학교에서 배우는 흔히 쓰는 말투이다. 벤치에 앉아 벽에 붙어 있는 사냥감 조류의 원색 사진을 훑어보았다. 1시를 지나 10분쯤 되어서 새들의 사진에도 진력이 났을 무렵, 반 백의 사나이가 방 이쪽에 있는 문에서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 스펜서요 ? " " 그렇소." 그가 고개를 휘청, 모로 구부리며 말했다. " 이리로……." 저렇게 목을 구부리는 것도 경찰학교에서 배우는 짓거리이다. 목이 움직인 방향에 따라 네모지고 초라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쪽 창으로 순찰차의 주차장이 보인다. 그 저쪽에 아무렇게나 자란 라일락이 서 있다. 녹색의 철제 서류 케비넷, 회색의 철제 책상과 세트로 된 회전의자가 있다. 책상 위에는 물품청구서며 메모지가 어수선하다. 책상 한구석에 ‘스레이드 경감’이라는 명패가 보인다. 스레이드가 내 옆에 있는 등받이가 달린 회색의 철제 의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 앉으시죠." 그는 사무실과 멋지게 어울리는 남자다. 짧게 깎은 머리칼은 곱슬거리고 얼굴은 아이들의 집짓기 장난감의 블록처럼 네모진 것이 햇빛에 그을렸으며, 짙은 수염을 면도한 자리가 청회색으로 윤기를 내고 있다. 5피트 8인치 가량으로 키는 작은 편이며, 규모가 작은 대학의 수위를 연상케 하는 야무진 몸집을 하고 있다. 40대로 접어들면 뚱뚱해질 만도 한데, 살이 단단한 그런 사나이이다. " 용건은 ? " " 허비 세퍼드가 아내를 찾아달라고 나를 고용했는데, 당신을 만나면 손을 댈 방향이라도 알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소." " 면허는 ? " 지갑에서 얼굴사진이 붙은 플라스틱 사립탐정 면허증을 꺼내어 그의 악에 놓았다. 그는 제복의 셔츠 소매가 짧아, 팔뚝이 다 드러난 팔을 가슴에서 꼬고 있었다. 팔을 꼰 채로 면허증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면허증 위로 시선을 옮겼다. " 오케이." 그가 말했다. 나는 면허증을 집어 지갑에 도로 넣었다. " 권총소지 허가증도 가졌소 ? " 고개를 끄덕이고 지갑에서 빼내어 그걸 책상 위에 놓았다. 아까처럼 고개를 움직여 살펴보더니 또, " 오케이." 하고 말했다. 나는 허가증을 챙겨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스레이드가 말했다. " 내가 아는 바로는 그녀가 가출한 게 틀림없더군요. 자유의사에 따라서 말이오. 범죄의 흔적은 전혀 없소. 누구와 어디로 갔다는 증거도 잡을 수 없고. 아르메이다행의 버스편을 이용하여 뉴 베드퍼드로 갔다는 것이 우리가 조사한 전부라 이 말씀이오. 그 여자에 관한 자료를 뉴 베드퍼드 경찰에 보냈지만 그 사람들에겐 보다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인지 무소식이오. 내 생각으로는 일주일쯤 끝나면 못 이기는 척 돌아올 거요." " 남자관계는 ? " " 모습을 감추기 전에 실버 시즈 모텔에서 어떤 남자와 잔 것 같소. 그러나 버스를 탈 때는 혼자였던 모양이오." " 그 사나이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 " " 모르오." 스레이드는 의자를 뒤로 재켰다. " 그건 당신들이 조사를 하려고 노력해 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 아니오." " 그렇소. 그럴 필요도 없었소. 이렇다 할 범죄는 아니니까. 이 근방의 불륜행위를 모조리 조사해야 한다면 모든 경찰 인원이 콘돔 순찰을 나서야 할 판이오. 어느 집 여편네가 남편에 싫증을 느끼고 잠시 바람을 피운 끝에 가출하는 일이 얼마나 빈번한지 알고나 있소 ? " " 알고말고요." " 남편에게 돈이 넉넉하니까 당신과 같은 사람을 사서 아내를 찾게 하지요. 고용된 사나이는 1주일쯤 여기저기 쏘다니며 모텔에서 적지 않은 경비를 축내고 있는 동안, 여자는 오도가도 못하게 되어 혼자 돌아오지요. 탐정은 케이프에서 1주일 가량 즐기고 햇빛에 살갗을 태운 것이 고작인데, 남편은 경비를 대야 하고 여편네는 다시 이 근처에서 바람을 피우고……." " 그런 부부관계로 상담에 응하는 일이 종종 있나요 ? " 고개를 흔들었다. " 없소. 난 범죄자를 잡아 형무소로 보내는 일에 전념해야 하니까. 경찰관계의 일을 해본 일이 있소 ? 내가 말하는 건 사립탐정이 아니라 진짜 말이오." " 주(州) 경찰에 있었소. 서포크 군 지방검사의 사무실에서 일했소." " 왜 그만두었소 ? " " 당신들 이상의 일을 하고 싶어서요." " 사회사업 말이군." 불쾌한 투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정해진 남자는 없었나요 ? " 어깨를 움츠렸다. " 몇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 한 모양이지만 정해진 상대는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 바람이 난 게 오래 전이었나요, 아니면 최근에 들어서인가요 ? " " 모르겠소." 나는 말이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레이드가 말했다. " 스펜서, 이곳 근무 배당표를 보여 줄까요 ? 경찰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짐작이 갈 텐데. 여름의 주말이 지금처럼 날씨가 좋고, 일요일에 케네디 일가가 모두 미사에 참석할 때는 얼마나 쩔쩔매야 하는지 알게 될 거요." " 누구를 만나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요 ? " " 실버 시즈 모텔에 가서 바텐더인 루디와 이야기해 보시오. 내가 말하더라고 하면 응해줄 거요. 그는 사람들의 언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나이이며 실버 시즈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사를 떠벌이는 곳이니까요. 팸 세퍼드는 그곳에 곧잘 드나들었다니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고맙소, 경감." "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알마든지 물어보시오." " 당신 업무방해를 해서는 실례가 될 텐데요." " 비꼬지 마시오, 스펜서. 나는 가능한 협조는 할 생각이오. 하지만 일은 산더미 같고 팸 세퍼드는 그중의 한 건에 지나지 않소. 하여간 도움이 필요할 때는 전화를 주시오. 조금이라도 손이 비어 있다면 협조할 테니까." " 알겠소. 그렇게 하죠." 악수를 하고 나는 경찰서를 나왔다. 실버 시즈 모텔 악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2시 15분이었다. 시장기가 돌고 목이 말랐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루디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며, 그때부터 바의 계산이 올라가기 시작하겠지. 아마도 스레이드가 한 말은 틀림이 없겠지만, 나는 그녀가 나타나기 전에 세퍼드에게 쓰게 한 돈에 상당하는 만큼의 일은 해보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가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리라는 보장은 없다. 낮시간에 이 케이프 지구의 바는 일종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바다에 둘러쌓인 저지대의 해의 밝기로 냉방이 잘된 바의 어스름이 한결 강조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곳보다 사람들이 많고 그것도 실업자가 아니라 휴가중인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실버 시즈 모텔은 비바람에 바랜 쪽나무 판자 지붕의 2층 건물로 둘레에는 층마다 베란다가 붙어 있다. 도시의 중심부 번화가에서 바다 쪽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철물점과 조개껍질로 만든 재떨이와 ‘케이프 코드’라고 인쇄된 푸른 페넌트를 파는 가게 사이에 끼어 있다. 바는 로비를 돌아나와 오른쪽, 다이닝 룸 한쪽 끝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고, 술을 마시는 작자들도 더러 있다. 대부분은 대학생인 듯 낡은 청바지에 T셔츠, 샌들에 홀터 톱(팔과 등이 나온 여성용 운동복의 웃옷)의 몸차림이다. 장식으로는 옛날 선박의 기재와 어망이 사용되고 있다. 한쪽 벽에는 두 개의 노가 걸려 있고 바의 뒤켠 거울 위에는 포경용의 작살이 장식되어 있는데 아마도 홍콩제일 것이다. 바텐더는 중년의 배불뚝이었다. 흰 머리가 섞인 흑발을 올백으로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하얀 와이셔츠에 선박의 도박사처럼 검은 나비 넥타이를 달고 있다. 소매는 단정히 두 겹으로 접었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에는 매니큐어를 칠했던 것 같았다. " 생맥주는 ? " 내가 물었다. " 슈리츠." 그가 대꾸했다. 코가 낮고 갈색의 피부이다. 아메리칸 인디언일까 ? 그럴지도 모른다. " 그거 한잔 주시오." 곧고 키가 큰 글라스에 따라 주었다. 마음에 든다. 도자기 조키나 두터운 대형 유리컵, 혹은 튤립 모양의 글라스는 쓰지를 않는다. 맥주의 신이 고안해 난 듯한 그런 모양의, 키가 큰 글라스이다. 바텐더는 종이받침을 깔고 그 위에 맥주를 올려 내밀고는, 계산 대금을 찍어서 내 옆에 놓았다. " 점심으로는 뭘 먹을 수 있소 ? " 그가 카운터 밑에서 메뉴를 꺼내 카운터에 놓았다. 맥주를 마시며 메뉴를 보았다. 일부러 조금씩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엔 수전 실버맨이 글라스를 두 모금만에 비운다고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던가. 메뉴에는 막 구어낸 롤빵에 끼운 고리 모양으로 썬 오징어라고 적혀 있다. 나는 가슴이 설래었다. 일전에 여기에 와본 이래, 그 오징어에 관해서 거의 잊고 있었다. 두 개를 주문했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찔끔찔끔. 뮤직 박스에서 엘튼 존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가 알맞다. 이곳 사람들은 조니 허트만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일도 없을 것이 틀림없다. 루디가 샌드위치를 갖고 와서 반쯤 마신 맥주 글라스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단숨에 잔을 비우기로 했다 · 10· 이건 어디까지나 예의에 관계되는 문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찔끔거리는 동안 루디는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 10· 루디가 잔을 채웠다. " 조니 허트만이라는 이름 들어본 일 있소 ? " " 그럼요, 위대한 가수지요. 유행에 밀렸다고 해서 저런 구린내 나는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죠." 뮤직 박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 당신이 루디군." " 그렇소만 ? " " 당신과 이야기해 보라고 딕 스레이드가 소개하기에 왔는데……." 명함을 건네주었다. " 팸 세퍼드라는 여자를 찾고 있소." " 안 보이는 것 같던데." " 어디로 갔는지 짐작이라도 ? " 고리 모양의 오징어가 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었다. 굉장하다. 고리 모양의 오징어는 둘로 쪼개어 튀겼고, 샌드위치에는 하나하나 모로 저민 신선한 피망이 끼워져 있다. " 내가 알 턱이 없죠." " 당신은 조니 허트만을 알 뿐만 아니라 고리 모양의 오징어 샌드위치에는 피망을 끼워 줄 줄도 알잖소 ? " " 그야……. 하지만, 정말 모르는데요. 그리고 샌드위치는 요리사가 만드는 거라고요. 나는 피망을 끼우는 걸 싫어하거든요." " 알겠소. 당신은 음악에 대해서는 취미가 있지만, 음식은 별로다 그 말이죠. 그래, 세퍼드 부인은 가끔 왔소 ? " " 최근에 그랬죠. 단골이라고 할 만큼." " 누구와 ? " " 여러 사람과……." " 특히 어떤 남자와 ? " " 대개는 젊은 남자죠. 어두컴컴한 구석이라면 당신에게도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는데요." " 왜 ? " " 나이는 먹었지만 당신 체격이 좋으니까 말이오. 그 여자는 스포츠맨형의 근육이 우람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 그녀는 없어지기 전에 누구와 여기에 오지 않았소 ? 지난 주 월요일에 말이오." 나는 두 개째 샌드위치를 입에 댔다. "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할 수야 있나요. 하지만 아마 그 무렵이라고 생각되는데, 에디 틸러라는 남자와 왔었죠, 아마. 포크레인 운전기사지요." " 자고 갔소 ? " " 모르죠. 나는 프런트 담당이 아니니까. 바텐더가 내 전문이라고요. 그 여자가 엉겨붙던 투로 보아서는 자고 갔을 거요." 손님 중의 하나가 스팅고 온 더 록스(독한 맥주를 칵테일한 술)를 비우고 한잔 더 주문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루디가 바에서 내려가 칵테일을 만들고, 계산대에서 대금을 찍고 돌아왔다. 그 사이에 나는 두 개째 샌드위치를 먹어치웠다. 맥주컵이 비었는데, 부탁도 하기 전에 그가 잔을 채웠다. 의당 마다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점심에 석 잔 정도는 알맞는 양이니까. " 어디에 가면 에디 틸러를 만날 수 있겠소 ? " " 그자는 요즘 코튜이트의 현장에서 일하는데, 대개 4시에는 비번이라 4시 반에는 목을 축이러 이리로 오죠." 나는 바 뒤쪽의 시계를 보았다. · 10· 3시 35분. 천천히 맥주를 더 마시며 기다리면 되겠다. 어쨌거나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 기다리지." " 나야 상관이 없죠." 루디가 말했다. " 단, 한 가지만 귀띔해 주죠. 에디는 좀 다루기가 벅찬 녀석이라는 사실이오. 몸집이 크고 힘이 황소인데다가 스스로도 한가락하는 걸 자처하죠. 더구나 아직 젊어서 철부지죠." " 나는 대도회지의 탐정이오, 루디. 기지와 세련된 변설로 현혹할 수가 있을 거요." " 그렇다면 ?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자에 관한 일을 내게서 들었다는 말은 말아 줘야겠소. 나까지 그녀의 일에 말려드는 것은 질색이니까." 6 들어선 우람한 금발의 젊은이에게 루디가, " 어서 오게, 에디." 하고 아는 척을 한 시각은 4시 20분이었다. 젊은이는 작업화에 청바지, 붉은 테두리를 한 감색 탱크 톱을 입고 있었다. 보디 빌딩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삼두근과 발달과정의 가슴 근육이 눈에 두드러진다. 거기에다 이미 금메달이라도 목에 건 듯한 건방진 태도다. 배 언저리의 20파운드 정도의 군살이 없었더라도 나는 한결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젊은이가 루디에게 말했다. " 헤이, 케모, 사베, 꼬마, 잘 있나 ? " 루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문을 듣기도 전에 라이 위스키 한잔과 생맥주 한 컵을 에디 악에 갖다놓았다. 에디는 위스키를 단숨에 비우고는 맥주를 찔금거리기 시작했다. " 맛있는걸, 인디언. 이 흰둥이께서는 오늘 일로 녹초가 되셨지 뭔가." 듣는 사람을 의식해서 자기의 론 레인저 투의 인디언 사투리가 재미있게 들릴 것이라고 단정하고 큰소리로 떠벌이는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고는 실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 여자 손님들의 동태는 어떻지, 루디 ? " " 별반 다를 것도 없어, 에디. 자네야 여자 복을 타고나지 않았나." 에디는 저쪽 한구석에서 톰 코린즈를 마시고 있는 두 여학생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나는 일어서서 바를 따라 걸어가서 그의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 에디 틸러신가 ? " " 인사를 청하는 쪽은 누구지 ? " 여학생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에디가 말했다. " 곰팡내 나는 말투인걸."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나를 쳐다보았다. " 넌 도대체 누구야 ? " 윗도리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서 내밀었다. " 팸 세퍼드를 찾고 있지." " 그 여자 어디 가 있지 ? " 그가 물었다. " 알고 있다면야 그리로 찾아나서지. 자네에게 물어 보면 뭔가 알 수 있을까 했는데." " 꺼져 ! " 다시 시선을 여학생들 쪽으로 돌렸다. " 그녀가 자취를 감추기 직전에 하룻밤 함께 지냈다던데." "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 " " 내가. 방금 내가 했잖나." "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 내가 처음도 아닐 테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나 ? " " 시(詩)군 그래. 자네의 말은 시를 읊는 거나 진배없어." " 꺼지라고 했을 텐데. 알겠나, 크게 다치기 전에 꺼지는 게 신상에 좋을걸." " 그 여자는 침대에서 잘 놀던가 ? " " 좋은 편이었지.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니까 ? " " 그 방면에 자네는 관록이 붙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신참이 아닌가 ? 그래서 물어 본 것뿐이라고." " 그야 물론 이 케이프에서는 여러 여자와 자봤지. 특히 그 여자는 그만이었어. 나이먹은 여자치고는 탄력이 그만이던데. 더구나 어떻게 성급하게 구는지, 당장에라도 어떻게 해주지 않으면 미치고 환장할 것 같더고만. 루디에게 물어 보라고. 여봐, 루디 ! 그 세퍼드라는 여자, 그날 밤 나를 붙잡고 죽고 못사는 시늉하지 않던가, 안 그래 ? " "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안 그래 에디 ? " 루디는 종이성냥 뚜껑으로 엄지손가락 손톱을 문지르고 있었다. " 나는 손님의 하는 일은 신경쓰지 않아." " 그래서 그녀와 하룻밤을 함께해 줬다, 이거군." " 별 수 있나. 그렇지 않았다가는 그 여자 여기에서 팬티를 벗었을 거야." " 그건 보태서 하는 말일 테고." " 정말이라니까. 거짓말이 아니라고." 적당한 틈을 타서 바텐더가 갖다놓은 위스키 잔을 에디는 다시 단숨에 비우고 두 컵째의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 그 여자를 손대기 전부터 알고 있었나 ? " " 내가 손을 댄 것이 아니라니까. 그 여자가 먼저 꼬리를 쳤다고. 내가 여기 앉아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까 곁에 와서 말을 걸었단 말이야." " 그렇다면 그녀가 꼬리를 치기 전에도 안면은 있었던 거로군." 에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작은 잔을 가리키며 루디에게 눈짓을 했다. " 본 일이야 있지. 아는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여자가 여기 자주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자가 탐날 때는 간단히 내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루디가 위스키를 따르자 에디는 단숨에 들이마셨고, 그가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루디가 또 따랐다. " 그녀가 시장에 나온 지는 오래 되었나 ? " 나와 에디는 이제 의기투합한 오입쟁이 둘이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에디가 맥주잔을 비우고 나서는 딸국질을 했다. 아마도 세련된 변설로 그를 현혹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 시장 ?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 아니,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을걸. 그 여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거나 소문을 듣거나 한 것은 금년들어서니까.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였는데 내가 아는 녀석이 그 여자와 잤다더군. 그 여자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 약간 혀가 꼬부라지고 S발음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 그래, 기분좋게 헤어졌나 ? " " 뭐라고 ? " "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 안녕했을 때의 상황은 어땠느냐고 ? " " 이거 별놈 다 보겠군." 그는 저쪽의 여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 그런 소리 가끔 듣지." " 지금 내가 한 말 말인가 ? " " 음, 그 말. 발음이 멋지군." 에디가 시선을 돌렸다. " 사람을 데리고 놀 참인가 ? " " 그 소리도 귀에 익어." " 어쨌거나 난 건방진 놈은 못 봐주는데." "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고." " 그러니 꺼져. 그렇지 않으면 터진다." " 그런 말이 나오리라는 것도 예상했지." " 이새끼, 한판 붙어 볼래6? 그런 일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몸이야." " 소란스러운 건 원하지 않아. 내가 바라는 것은 정보라고. 자네와 어울렸던 이튿날 아침 팸 세퍼드는 어떤 기분이었나 ? " 에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내 악에 섰다. " 이게 마지막이다. 꺼지든가 어디가 부러지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바텐더인 루디가 슬그머니 전화기 쪽으로 움직여 갔다. 나는 바 악쪽의 공간을 살펴보았다. 10피트 가량은 비어 있다. 충분하다. 루디를 안심시켰다. " 걱정 말게. 아무도 다치지는 않아. 이 친구에게 잠시 본때를 보여 주면 되니까." 나는 일어섰다. " 여봐, 뚱뚱이." 에디에게 말했다. " 나를 화나게 했다가는 자네를 병원에 실려가게 할 수도 있어. 믿지 못할 테니 증거를 보여 주지. 자, 덤벼 봐." 황소처럼 덤벼들었다. 머리를 노린 오른쪽 펀치가 내가 자세를 낮추는 바람에 허공을 갈랐다. 왼쪽 펀치도 내가 몸통을 틀어서 헛손질이 되어 버렸다. " 그래 가지고서야 고작 2분도 못 뛰겠는데." 그는 계속 돌진했고 나는 움직이면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 그러고 있는 동안에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를 칠 수가 있지." 손바닥으로 에디의 오른쪽 뺨을 잽싸게 서너 번 툭툭 쳤다. 다시금 공격을 해왔기에 얼마간 상대방에게로 달라붙으며 왼팔로 펀치를 막고, 왼쪽으로 날아드는 펀치는 오른팔로 막았다. " 아니면 여기도." 양쪽 볼을 양 손바닥으로 후다닥 쳤다. 할머니가 귀여운 손자의 볼을 애무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는 한 발작 물러섰다. 벌써 에디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 형편없군그래, 젊은이. 1분만 더 지나면 팔도 들어올리기 어렵겠는걸." " 그만둬, 에디 ! " 바 저쪽에서 루디가 소리쳤다. " 상대는 프로라고. 눈치를 못 채나 ? 잘못하다가는 죽어 ! " " 썅 ! 죽여버릴 테다 ! " 에디가 붙잡고 늘어지려고 했다.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꼬며 배 왼쪽에 훅을 한 방 먹였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괴로운 듯 어깨로 숨을 쉬었다. " 더 만져 줄까 ? " 내가 말했다. 에디가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비실비실 일어나서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화장실로 걸어들어갔다. 루디가 말했다. " 깨끗한 펀치로군 ! " " 마음이 깨끗하니까." " 변소를 온통 더럽혀 주지 말아야 할 텐데."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손님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여학생 둘은 어머니의 잔소리가 생각났는지 마시다 만 술잔을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백한 얼굴에 물기가 그냥 있는 채로 에디가 돌아왔다. " 위스키와 맥주를 함께 마시면 그렇게 된다고." 내가 말했다. " 움직임이 둔해지고 뱃속이 출렁거리지." " 네놈을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 에디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없고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말했다. " 그런 자들을 해치울 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지. 결국은 그런 게 문제가 될 수는 없어. 네놈은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는 일에 지나치게 덤볐단 말이야." 에디가 딸꾹질을 했다. " 아침에 헤어졌을 때의 상황을 말해 줘." 우리는 다시 바에 앉았다. " 말하지 않겠다면 ? " 카운터 위에 양팔로 둘러싼 작은 공간을 바라보며 에디가 말했다. " 말 못하겠다면 그걸로 그만이지. 난 자네의 배를 더 이상 두둘겨 팰 생각은 없으니까." " 아침에 눈을 떴을 적에 나는 한번 더 하고 싶었지. 알잖아, 이별의 인사라는거 말이야. 그런데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는 거야. 나를 돼지라고 욕하더군. 건드리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거야. 네놈의 쌍판만 봐도 토할 것 같다나. 초저녁때와는 아주 딴판이던걸. 밤새도록 녹초가 되도록 즐기고 나서 아침이 되자 돼지라고 욕설을 하다니. 내가 그런 괄시를 받을 이유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 뺨을 후려갈기고 나와 버렸지. 내가 마지막 보았을 때는 미친 듯 울고 있었어. 천장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고." 그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나 기분 더러워서.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죽고 못살겠다고 달라붙던 여자가." " 고맙네, 에디." 나는 지갑에서 2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어 카운터 위에 놓았다. " 에디의 계산과 내것을 빼고 거스름돈은 갖게나, 루디."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까지도 에디는 그의 팔 안의 공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7 럼스튜(rum_stew)와 바간디 한 병으로 저녁식사를 끝내고는, 세퍼드에게서 갖고 온 청구서나 편지를 살펴보려고 숙소로 돌아왔다. 먼저 개인적인 편지를 뒤져 보았으나 모두가 단순한 내용으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눈에 뛰지 않았다. 뭔가 뒤가 구린 편지는 누구나 버리기 마련이다. 전화요금의 청구서를 정리해서 이쪽에서 걸었던 전화번호의 목록을 만들고 그 빈도수를 조사했다. 다음에는 지역별로 표를 만들었다. 팬티만 걸치고 모텔 침대 위에 앉아 지명이나 번호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명탐정다운 풍모가 아닐 수 없다. 지난 달에 뉴 베드퍼드의 어느 번호에 세 번 전화를 건 일 이외에는 모두가 시내통화였다. 휘발유를 넣은 신용카드의 영수증을 정리했다. 그녀는 지난 달 뉴 배드퍼드에서 두 번 기름을 넣은 일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가 집 근처의 주유소다. 그밖에도 신용카드의 영수증을 살펴보았다. 뉴 베드퍼드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세 번 카드를 쓴 일이 있다. 각기 30달러 이상의 계산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가 집 근처에서 사용된 것뿐이다. 서류를 모두 조사하고 나니 한밤중이었다. 뉴 베드퍼드의 전화번호와 레스토랑과 주유소의 이름을 수첩에 기록하고 나서, 서류는 상자 속에 챙겨 옷장 속에 넣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밤새도록 청구서와 영수증에 대한 꿈을 꾸고, 서기인 바돌비(허먼 메르비르의 소설 。바돌비。의 주인공)가 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룸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커피와 간단한 아침식사를 날라오게 하고, 9시 5분이 지나 뉴 베드퍼드 전화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교환이 나왔다. " 여기는 보스턴 백 베이 전화국의 에드 매킨타이어요. 전화번호 334_3688의 가입자 이름을 알고 싶소 ? " " 네, 매킨타이어 씨.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 10· 가입자는 로즈 알렉산더. 뉴 베드퍼드 중앙로 3번지입니다." 그쪽 지구 지배인과도 만날 일이 있다는 투의 냄새를 풍기고 나서, 그녀의 신속한 일처리를 칭찬해 주고 기분좋은 작별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완벽하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한 다음 외출준비를 했다. 서류를 6시간 가량 조사한 것만으로도 하이아네스 경찰서에 있는 자들이 버스 터미널을 뒤져 간신히 추측했던 답이 나온 셈이다. 그녀는 베드퍼드에 있다. 혹시 그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단서가 될 만한 주소 하나를 찾아냈다. 그 지방의 탐정을 쓸 수도 있다는 이점이 있다. 서비스 만점이다. 6호선으로 뉴 베드퍼드까지는 45마일. 웨어함, 온세트, 말리온, 매타포이세트 등 작은 도시를 지나 한 시간쯤 걸렸다. 페어헤이븐에서 다리와 선착장과 매크슈네트 강의 합류점을 넘어가면 뉴 베드퍼드의 시가지가 도크로부터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도크라고 하기보다는 도크의 잔해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다. 다리부터 오르막길이 되어 등성이에 도달하는 언덕의 경사면은 뉴스에서 본 바르샤바의 유태인 거주지역과 똑같다. 시가지 중심부의 상당부분이 철거되고 재개발이 한창이었다. 전에 왔을 때는 큰 거리 중의 하나였던 파제스 대로는 보행자 천국의 상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10분쯤 불도저가 파헤친 황무지를 정처도 없이 싸돌아다닌 끝에 포장이 엉망이 된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나와 트렁크를 열고 지도를 꺼냈다. 중앙로는 포경박물관(捕鯨博物館) 뒤쪽을 지나가고 있다. 포경박물관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언덕을 올라가 공공도서관 못 미처에서 왼쪽으로 꼬부라졌다. 도서관 악에는 포경선의 작살꾼 동상이 힘찬 포즈를 하고 서 있다. 당시에는 고래를 잡느냐 배를 부수느냐는 목숨을 건 한판승부였다. 극단적이지만 일은 단순명쾌한 것이었다. 좌회전해서 바다 쪽으로 언덕을 내려가다가 조니 케이크 언덕으로 나와서 선원예배당 악의 포경박물관 가까이에 차를 세웠다. 다시 한 번 지도를 확인하고 나서, 박물관 뒷길로 나가 보니 거기가 중앙로였다. 건물 대여섯 채가 들어설 만한 짧은 거리로, 박물관 뒤의 노스워터 대로에서 갈라져서 해안을 따라 프론트 대로로 통한다. 오래 된 거리라서 잡초가 돋고 축축하다. 3번지는 길고 좁다란 2층 건물로 벽은 회색의 석면판이고 지붕 한복판에는 금새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붉은 벽돌의 굴뚝이 서 있다. 지붕의 판자는 낡았으며 누군가가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보수를 했는지 색깔이 같지가 않다. 그리고 곧 또 보수를 해야 할 곳이 눈에 띈다. 녹색의 창틀도 누더기진 곳이 여기저기 보였으며 집 오른쪽에 난 문은 붉게 칠해져 있다. 집 자체가 붉은 루즈를 바른 지친 매춘부를 연상케 했다. 그녀가 이 집에 없기를 기원했다. 물론 그녀를 찾아내고는 싶었지만, 하이아네스의 그 밝고 큰 집을 나와 이 쥐구멍과도 같은 거처에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자, 어쩐다 ? 로즈 알렉산더는 물론, 팸 세퍼드도 자기를 모를 것이며, 내가 아는 한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뉴 베드퍼드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자기가 모습을 나타내고 언제까지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있을 수 있는 장소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놀라웠다. 어떻게 가장해서라도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아니면 멀찌감치 망을 보며 무슨 일이 진행되는가를 살펴볼 수도 있다. 또는 당당히 노크를 하고 팸 세퍼드를 만나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무난한 것은 이 부근에서 망을 보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처음인 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집에 관해서 가능한 한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상책이다. 시간은 걸리지만 상대가 겁을 먹고 달아나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 10· 12시 15분. 사무실들이 들어서 있는 아직 덜 헐린 곳으로 되돌아가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갔다. 조개 튀김과 콜 스로를 먹고 맥주를 두 병 마셨다. 어슬렁어슬렁 중앙로로 돌아와서 1시 5분경부터 감시를 시작했다. 노스워터 대로에서는 시청의 작업반이 구멍파는 기계와 바위를 깎는 기계로 일을 하고 있으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노란 헬멧을 쓴 사람들이 서류철을 들고 오락가락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중앙로를 왕래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3번지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도 없었다.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뉴 베드퍼드 ‘스탠더드 타임스’를 사들고 왔기에 노스워터와 중앙로가 갈라지는 길모퉁이 전주에 기대어 신문을 읽었다. 마타포이세트의 조합교회에서 회식이 있었다는 이야기, 로체스터의 중학교 교정에서 있었던 부자간 야구시합 기사, 웜셔터 클럽에서의 사교계 신인 여자들을 위한 무도회 기사 등을 신문 너머로 3번지를 감시하며 차례로 읽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점성술에 관한 것, 사망기사, 근해에까지 잠입한 소련의 트롤 어선에 대해 엄중항의하는 사설도 읽었다. ‘던디’를 읽고는 심사가 뒤틀리기도 했다. 모두 읽고 나자 신문을 접고, 얼마 안되는 중앙로의 끝까지 걸어가서 길가의 빈집 창고 입구에 기댔다. 3시에는 회색 양복에 카키색 셔츠, 오렌지빛 꽃무늬의 넥타이를 맨 술취한 사람이 비실비실 내 악을 지나서 창고 안에다 대고 소변을 보았다. 용무가 끝나자 옷의 먼지를 털고 수건을 건네주는 시늉을 하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 버렸다. 직업은 뭘까 ? 옥외 화장실의 서비스 전문이겠지. 사립탐정의 대부인 아랑 핀카턴의 구두에 오줌을 갈긴 자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4시 15분에 드디어 기다리던 팸 세퍼드가 다른 여자와 함께 그 초라한 집에서 나왔다. 팸은 무용학교의 졸업생과도 같은 갸름한 체격으로, 햇빛에 탄 살갗에 갈색의 머리를 후렌치 롤 모양으로 말고 있었다. 모양이 좋은 엉덩이 선이 뚜렷이 드러나는 팽팽한 바이어스직의 팬티슈츠를 입고 있었다. 좀더 가까이 가봐야 알겠지만 찾아낼 만한 값어치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되었다. 함께 나온 여자는 팸보다 몸집이 작고 단단한 체격을 갖고 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코르덴 진바디에 인디라 간디가 입는 것 같은 핑크색 평직물(catico) 셔츠를 입고 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박물관 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내가 그 뒤를 밟았다. 그들은 언덕을 올라가 박물관을 왼쪽으로 꺾어들어가더니 파체스 로에 있는 쇼핑 몰로 들어갔다. 쇼핑 몰은 도로의 교차점을 막고 만들어져 허술한 분위기였다. 팸 세퍼드와 그녀의 친구가 슈퍼마켓에 들어가자 길건너 쪽의 전당포 추녀 밑에 서서 유리 창을 통하여 두 사람을 살폈다. 두 여자는 쇼핑 목록을 보면서 식료품을 사는 모양이었는데, 30분쯤 지나자 각자 큼직한 종이 봉투를 들고 나왔다. 중앙로의 그 집까지 뒤를 쫓아가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어쨌거나 그녀의 거처는 알아냈다. 다시 아까 그 전주에 기댔다. 창고의 문 쪽은 더 이상 매력이 없었다. 어두워졌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심해져서 아까의 주정뱅이라도 다시 나타나기를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길거리의 핫 숍(hot shop)에서라도 무엇을 사먹고 싶을 정도로 시장기가 돌았다. 이것저것 생각해 볼 일도 있고 늘 먹으면서 생각하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점심때 먹어 본 조개 튀김으로 뉴 베드퍼드의 요리수준을 알 만했거니와 어차피 밤이 깊어지면 잠도 자야 한다. 그래서 차로 돌아가 하이아네스로 철수하기로 했다. 와이퍼 밑에 주차위반 딱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메타포이세트의 볼링장 부근을 달릴 때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하이아네스로 돌아가는 길에, 내일 아침 뉴 베드퍼드로 와서 팸 세퍼드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의미에서는 고용된 임무는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녀의 소재지를 알아냈고, 무사하며 아무런 강압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뢰인에게 보고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찾아가서 그녀를 데리고 어떻게 하는 것은 세퍼드 일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주소만 알려 주고 그대로 보스턴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내키지를 않았다. 에디 틸러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침대에 벌렁 누워 천장을 보고 꺼이꺼이 울더라는 그녀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중앙로의 초라한 집에서 나왔을 때의 그녀의 모습은 웬지 애처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펜던트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9시 반에 모텔에 도착했다. 식당이 아직 열려 있기에 안으로 들어가 굴을 6개, 샤브리(chablis) 작은 병 하나, 베아르네스 소스를 친 1파운드짜리 스테이크, 맥주 한 병으로 저녁식사를 끝냈다. 샐러드에는 맛있는 소스가 처져 있어, 모든 것이 주책없는 주정뱅이와 창고 문간에 서 있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기분이 좋았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방으로 돌아와서 삭스(socks) 시합의 마지막 3이닝을 구경했다. 8 이튿날 아침 8시 전에 일어나, 뉴 베드퍼드로 향했다. 도중에 던킨 도넛 가게에 들러 봉지에 싸달라고 해서, 햇빛을 등에 받으며 케이프로 향하면서 도넛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뉴 베드퍼드에 도착하자 마침 출근시간이어서 별로 큰 도시가 아닌 데도 도로 사정이 엉망이라 밀린 자동차의 행렬이 다리를 건너 페어헤이븐까지 이어져 있었다. 차에서 내려 중앙로 3번지의 초라한 집과는 조화가 되지 않는 그 빨간 문 쪽으로 걸어갔을 때에는 이미 9시 40분이 되어 있었다. 벨도 노커도 없었기에 그 빨간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너무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엷은 다색의 머리를 한 갈래로 길게 땋아내린, 덩치가 우람하고 기운깨나 쓸 것 같은 젊은 여자가 문을 열었다. 청바지에 소매 없는 검은 팽팽한 셔츠를 입고 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확실했으나 맨발이라는 것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 안녕하세요. 팸 세퍼드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 미안하지만 여기엔 팸 세퍼드라는 사람 없는데요." " 곧 돌아오지 않을까요 ? " 나로서는 최고로 매력 있는 웃음을 뛰웠다. 아기처럼 구김살 없는 웃음을. 내딴에는 미스터 황홀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 그런 이름 모르겠는데요." " 당신은 여기에 사나요 ? " " 예." " 아가씨가 로즈 알렉산더 ? " " 아뇨." 이 매력적인 웃음을 뛰우면 누구나 흐믈흐믈해진다. " 로즈는 집에 있나요 ? " " 당신은 누구시죠 ? " " 내가 먼저 물었을 텐데."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문을 떠받쳤다. 그녀가 더욱 힘을 주었고 나도 힘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말만한 이 여자는 한사코 문을 닫을 작정인 듯 버티고 있었다. " 부인, 문을 닫지 않겠다면 내가 진실을 말하리다. 부인이 나에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녀는 내 말을 무시했다. 몸집이 큰 여자라 별로 힘들이지 않고 문을 막고는 있지만 차츰 힘겨워졌다. " 나는 어제 거의 하루 종일 이 집 악에 서서 팸 세퍼드와 또 한 여자가 쇼핑을 하러 가서 식료품을 사갖고 돌아오는 것을 지켜봤단 말이오. 이 집 전화 가입자가 로즈 알렉산더라는 것도 알았고." 어깨가 뻐근해졌다. " 나는 팸 세퍼드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뿐이지 그녀를 강제로 남편에게 끌고 가는 짓은 하지 않아요." 젊은 여자의 등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제인 ? " 제인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계속 문을 밀어붙이고 있다. 어제 팸 세퍼드와 함께 있었던 몸집이 작은 검은 머리의 여자가 나타났다. " 로즈 알렉산더 ? "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어떻게든 팸 세퍼드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 나로서는……." 로즈 알렉산더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 아실 텐데. 나는 탐정이라 이런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문에서 손을 떼달라고 이 맹렬여성에게 말해 주시면 아주 우호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텐데……." 로즈 알렉산더가 제인의 팔에 손을 댔다. "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좋겠어, 제인." 그녀가 제인에게 상냥하게 말하자, 제인이 문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양볼이 불그레했지만 지친 기색은 없었다. 나는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서 힘을 빼고 보니 어깨가 저렸다. 어깨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차마 그런 볼썽사나운 짓이야 할 수가 없다. 사내답게 보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 신분증이라도 보여줄 수 없어요 ? " 로즈 알렉산더가 말했다. " 물론." 지갑에서 탐정면허증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 그럼, 경찰과는 다르군요 ? " " 네, 사설이지요." " 왜 나와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죠 ? " " 당신이 아니라, 팸 세퍼드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 왜 그녀와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가요 ? " " 그녀를 찾아달라고 남편되시는 분이 나를 고용했습니다." " 그래, 찾아내면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 " " 그 양반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그래서 당신이 데리고 가겠다는 건가요 ? " " 아니, 이야기만 나눌 생각입니다. 그녀가 무사하고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주인양반의 의사를 전달하고, 돌아갈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 보고 싶습니다." " 그래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하면 ? " "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 누가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고요 ? " 제인이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 "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걸 남편이 알고 있나요 ? " 로즈 알렉산더가 물었다. " 아직 모릅니다." " 당신이 말하지 않아서 ? " " 그렇습니다." " 왜 말하지 않았나요 ? " " 나도 모릅니다. 황소를 가게에 몰아넣어 엉망이 되기 전에 옹기그릇 가게 내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 우리는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로즈 알렉산더가 말했다. " 넌 어떻게 생각하니, 제인 ? " 제인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동의했다. " 나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온 것이 아닙니다. 모르겠습니까 ? " " 하지만 그가 어느 부근까지 가까이 와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잖아요." 로즈 알렉산더가 말했다. " 혹은 여러 사람이 와 있는지도." 제인이 말했다. " 여러 사람이라니 ? " 나는 머리가 혼란해졌다. 로즈가 말했다. " 여자를 강제로 끌고 가면서 그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은 아니라고요." " 그것 참." " 지금 우리가 뒤로 물러선다면," 제인이 말했다. " 다음에는 더욱 간단히 당한다구요. 그래서 우리는 처음 이 시점에서 최전선을 유지해야 돼요." "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억지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누구를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현실적으로 무사한지 어떤지를 규명하기 위해서." " 그건 어제 확인했을 텐데요." 제인이 말했다. 어느덧 양볼에 붉은 기가 더해 있었고 표정 역시 더 험악해 보였다. " 당신은 팸과 로즈가 쇼핑가는 걸 봤다고 했잖아요." " 나는 당신들이 다락방에 그녀를 쇠사슬로 매두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하지만 강제 구속이라는 것은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반대의 의사표명을 할 기회가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일종의 구속 상태에 있는 것이 됩니다." " 그렇다고 밀고 들어올 생각은 말라고요." 제인이 말했다. " 후회하게 될 거예요, 정말." 그러면서 한 걸음 물러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즉, 양발을 ぁ자형으로 모으고, 벌린 왼손을 수직으로 해서 그 위에 오른손을 수평으로 가져오면서 이 역시 ぁ자형으로 꼬누었다. 시간을 측정하고 있는 자세이다.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고 이빨 사이로 내뱉는 숨소리가 쉭 소리를 냈다. " 강습을 받았나 보군." 내가 말했다. 로즈 알렉산더가 말했다. " 제인은 태권도 유단자라고요. 얕보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우리는 당신이 봉변당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러니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검은 눈을 크게 뜨고 부라린다. 매력적인 둥근 얼굴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봉변이라는 말이 그냥 해보는 말은 아닐 성싶다. " 나는 바위와 벽 사이에 껴든 꼴이 되었군. 나 역시 봉변당할 생각은 없고 제인을 우습게 보지도 않아요. 하지만 팸 세퍼드를 만나는 일을 당신들이 방해하면 할수록 만나야겠다는 오기가 생긴다고요. 경찰을 부르러 갈 수도 있지만 돌아올 무렵이면 팸 세퍼드를 빼돌릴 테니 그럴 수도 없고. 그러니 여기에서 버틸 수밖에." 제인이 나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나는 지금껏 여자와 싸워본 일이 없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타구니를 걷어채였을 때의 상태는 걷어찬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이다. · 10· 구토가 일어나며 전신에서 힘이 빠지고 찌르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꿰뚫으면서 몸을 새우등처럼 구부리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제인이 내 목덜미를 향해서 손칼을 만들어 내리쳤다. 순간 몸을 비튼 덕택에 어깨 뒤 근육을 스치기만 해서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목을 일으켰다. 통증은 심했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호되게 당할 판이다. 제인의 손바닥 모서리가 내 콧등을 노렸다. 오른손으로 그 손길을 제지하면서 최근에 써본 일이 없을 정도의 힘이 들어간 왼쪽 훅으로 그녀의 턱뼈가 물리는 언저리를 가격했다. 그녀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더니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지금껏 여자를 때려본 일이 없어 얼마간 걱정이 되었다. 너무 세게 가격했나 ? 상대는 덩치가 큰 여자이기는 하지만 40파운드 정도는 내가 더 무거울 것이다. 로즈 알렉산더가 제인 옆에 쪼그리고 앉기는 했으나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 고통을 참으며 가까이 가서 맥을 짚어 보았다. 살펴보니 고르고 힘찬 맥박에다 가슴도 규칙적으로 부풀었다가는 내려앉는다. " 걱정 마시오. 기분은 나보다 훨씬 좋을 테니." 복도 끝에 원래는 검게 칠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제 문이 있었다. 그 문이 열리고 팸 세퍼드가 걸어나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내 탓이야. 두 사람은 나를 지켜 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제인이 다친 건 내 탓이라고요." 제인이 눈을 뜨고 멍하니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움직였다. " 제인 ? " 로즈가 불렀다. 내가 말했다. " 그녀는 괜찮아요, 세퍼드 부인. 그녀가 내 사타구니를 걷어찬 것은 당신이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팸 세퍼드도 제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거기에서 떨어져 남몰래 구토증을 참으려고 애썼다. 여기에서는 모두가 나에게 호의를 갖고 대해 주기는 틀린 모양이다. 제인과 에디 두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다시는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인이 가까스로 일어섰다. 팸 세퍼드가 한 팔을 잡고 로즈가 다른 팔을 부축했다. 세 여자가 그 검은 문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뒤따랐다. 문에 들어서자 거기는 부엌이었다. 한쪽 구석 벽에는 꾸부정한 다리가 달린 낡고 큰 스토브, 중앙에는 기름 천이 덮힌 테이블, 다른 벽 쪽으로는 자색의 골덴 천으로 된 소파가 있다. 안쪽으로 오른쪽에 식료품 저장실이 있고 둘레의 벽이 모두 떡갈나무 판자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할머니 댁을 머리에 떠올렸다. 두 여자가 검은 가죽의자에 제인을 앉게 했다. 로즈가 식료품 저장실로 가서 적신 수건을 들고 왔다. 그녀가 제인의 얼굴을 훔치고 있는 동안 팸 세퍼드가 제인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 난 괜찮아." 제인이 젖은 수건을 밀어내며 말했다. "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요 ? " 나에게 물었다. " 그렇게 걷어채이면 당신은 끝장이 났어야 하는데." " 나는 싸움에는 프로요." " 그런 게 문제가 아닐 텐데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 상대가 누구든 급소를 찬 건 틀림없으니까." " 진짜로 해본 적이 있소 ? " " 도장에서 연습을 쌓았어요." " 아니, 연습 말고. 진짜 싸움……." " 없어요. 하지만 난 겁먹지 않았어요. 배운 대로 정확히 찼는데……." " 물론 틀림없이 배운 대로 차기는 했지만 상대가 안맞지 않았소. 사타구니 차기 효과의 하나는 채인 사람이 겁을 먹는다는데 있소. 고통도 따르지만 거기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니까 대개는 허리를 구부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지. 하지만 나는 그전에 채여 본 경험도 있고 고통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소. 성생활에도 영향이 없고, 따라서 고통을 참고 행동을 취할 수가 있었던 거요." " 하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절대적으로 효력이 있는 무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누구든 비위를 건드리기만 하면 요절을 낼 자신이 있었겠소. 그런데 처음으로 현실에서 그 무기를 써먹었는데 오히려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만 것이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이군요. 무기는 쓸 만했지만 상대를 잘못 짚었소. 나는 체중 195파운드, 펜치 프레스도 300파운드를 들어올릴 수가 있어요. 왕년에는 복서였고, 어느 의미에선 완력으로 먹고 산다고 할 수 있죠. 당신의 그 당수는 웬만한 놈팽이에게는 먹혀들 거요. 하지만 진짜 싸움용은 못된다는 걸 알아야 하오." " 체 ! 권투 좀 했다고……." " 아니지. 솝씨가 있는 큰 인간은 늘 솝씨가 있는 작은 인간에게 이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대부분의 남자들은 나를 이기지 못해. 그렇지만 당신에게 꼼짝도 못할 남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요." 세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환영받지 못하는 고립된 존재가 된 기분이어서 마음이 안정되지가 않았다. 남자가 하나쯤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팸 세퍼드에게 말했다. " 이야기를 해줄래요 ? " 로즈 알렉산더가 말했다. " 저 사람에게 한마디도 말할 필요는 없어, 팸." 제인도 말류했다. " 이야기를 해봐야 무의미해, 팸. 당신은 스스로의 기분을 잘 알 텐데." 나는 팸 세퍼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양 입술을 빨아들여 입이 가는 선으로 보였다. 그녀가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우리는 약 30초 동안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22년이라는 세월을……." 내가 말했다. " 더구나 당신은 결혼하기 전에도 허비 세퍼드를 알고 있었다. 당신은 22년 이상을 그와 함께 한 셈이오. 그것만으로도 그는 5분만이라도 당신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볼 자격이 있소. 비록 당신이 그를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지나온 세월을 생각한다 해도 그 정도의 의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은 나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보였다. " 맞아요. 나는 1950년부터 그를 알고 있지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당신을 찾기 위해 그는 하루에 100달러의 경비를 지불하고 있어요." " 그게 그 사람의 방식이라고요, 지나친 제스처를 해보이는 것이.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만하지 ? ’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가 나를 찾고 있다고요 ? 천만에. 당신이 찾고 있을 뿐이에요." " 아무도 찾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소 ? " " 그럴까요 ? " 볼이 어느덧 발그레해졌다. " 정말로 그럴까요 ? 거꾸로가 아닐까요 ? 왜 쓸데없는 참견이라고는 생각지 않지요 ? 나는 성가시다고요. 왜 모두들 나를 내버려두지를 못하죠 ? " " 추측이지만 그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뭐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거죠 ? 하기야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예요. 그건 한번도 의심해 본 일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죠 ? 그래서 나도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건가요 ? 그가 하는 방식으로 ? 그가 생각하는 식으로 ? " 로즈 알렉산더가 말했다. " 그것이 여자를 복종시키기 위해 중세기 때부터 남자들이 써먹어온 상투문자야." " 제인이 나에게 강요하려던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군." " 어떻게 얼버무리든 상관없어요." 로즈가 말했다. " 하지만 여자에게 의무를 지우는데 남자가 사랑을 이용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란 말이에요. 당신 자신도 그 말을 썼잖아요." 로즈가 그들의 이론적 지도자라는 것은 그 말로 명백해졌다. " 로즈, 나는 구태여 남녀의 차별에 관해서 당신과 토론을 하러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차별은 존재하며, 나는 차별에 반대하죠.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함께 지냈으며 그들의 아이를 낳은 남자와 여자의 일이란 말이오. 나는 거기에 대해서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요." " 이론과 그 적용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거예요." · 10· 아주 굳은 표정이 되었다. · 10· " 더구나 흉허물없는 척한다고 나를 다독거릴 수는 없을 거라고요. 그런 수법은 뻔히 알고 있으니까." " 함께 산책이나 합시다." 내가 팸 세퍼드에게 말했다. " 가면 안돼." 제인이 말했다. " 이 집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갈 수는 절대 없어요." 로즈가 말했다. 나는 두 여자를 무시하고 팸 세퍼드를 지켜보았다. " 산책하며 애기합시다. 다리 쪽으로. 거기에 서서 바다를 보면서 이야기하다가 이리로 돌아오는 것이 좋겠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지요. 당신을 통해서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9 팸세퍼드가 결단을 내리자 항의, 흥분, 소란으로 어수선했지만, 결국 우리 둘은 어슬렁어슬렁 항구 쪽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클로로포름을 맡게 해서 기절을 시킨 다음, 자루에라도 넣어 달아날 것에 대비, 제인과 로즈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기로 했다. 프론트 가를 걷고 있는 동안 햇빛 속에 들어난 그녀의 얼굴은 나와 비슷한 나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눈과 입가에 나이를 속이지 못하는 주름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주름은 그녀의 매력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더해 주고 있다. 바에서 체중과다의 포크레인 기사에게 꼬리를 칠 만한 여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만 먹는다면 세련된 사립탐정 중에서 취향에 맞는 자를 고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가 내 구두코에 있는 오줌의 얼룩을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아래로 보이는 곳까지 다리를 건너갔다. 바다 때문에 시가지가 아주 멋져 보인다. 하지만 바다에는 기름의 막, 담배갑의 셀로판지, 죽은 물고기, 썩은 나무토막, 뱀장어 껍질 같은 콘돔 등이 커피색 물위에 떠 있다. 130년 전에 멜빌이 포경선을 타고 출항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을 텐데 · 10· 그렇지 않았었기를 빌었다. " 이름이 뭐라고 하셨더라 ? " 팸 세퍼드가 물었다. " 스펜서." 두 사람은 난간에 손을 얹고 항만 안의 섬에 세워져 있는 무선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면은 오염되어 있었으나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지없이 상쾌했다. " 무엇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죠 ? " 오늘 그녀는 진한 감색 폴로 셔츠에 흰 슈츠와 흰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다. 햇빛에 탄 살갗이 매끄러워 보였다. " 세퍼드 부인, 나는 당신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있어요. 당신은 분명히 스스로의 의사로 여기에 와 있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 같소. 나로서는 당신을 찾아내는 일을 맡은 이상, 주인양반에게 전화를 걸어 거처를 보고하기만 하면 임무를 다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가 여기에 와서 돌아가자고 조르고 당신은 싫다고 하겠지. 다음에는 그가 소란을 피울지 모르고 제인이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찰 것이고 그가 기절이라도 하고 있는 동안 당신은 거처를 옮겨야 할 테지요." " 그러니 당신이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니에요." " 하지만 그는 나를 고용한 겁니다. 나는 거기에 상응하는 일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 나는 당신을 고용할 수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 돈이 없는걸요." 제인과 로즈는 도로 저편의 다리 반대쪽에 서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항시 대기태세를 취하고서 ! ’(미국 연안경비대의 표어). " 나는 당신이 나를 고용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서 돈을 얻어내려는 것도 아니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느 정도의 감을 잡아보려고 이러는 겁니다." " 그건 당신 스스로 해결할 일이 아닌가요 ? " 난간에 팔꿈치를 고이고 양손을 꼭 쥐고 있었다. 왼손의 다이아몬드 결혼반지가 햇빛에 반짝였다. " 맞는 말이오." 내가 말했다. " 하지만 자기의 일의 대상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지 않고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주인양반의 인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됐고, 이젠 당신에 관해서 알 필요가 남았는데……." "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는 ‘결혼의 신성함’이라는 것으로 족할 텐데요. 가족을 놔두고 달아난 여자에 대해서는 동정은 필요없다. 돌아가면 남편이 받아 주겠다고 하니 그것만도 복에 겹지 않으냐, 그 정도겠지요." " 결혼의 신성함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오, 세퍼드 부인. 나는 그런 건 다루지 않아요. 내가 다루는 것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표현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오. 기본적인 인간이란 말이에요. 결혼의 신성함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때때로 인간은 행복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 행복이라는 것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던가요 ? " " 틀려요, 감정이죠. 감정이란 사실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하기가 무척 어려워서 사람들은 흔히 추상적 관념으로 다루려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기가 쉬운 관념 쪽이 보다 중요한 것처럼 가장을 하는 겁니다." " 남녀평등이란 추상적인 관념인가요 ? " "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다소 경멸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 하지만 아직도 평등하지 못한 까닭에 많은 인간이 불행에 빠져 있어요." " 그래요. 바로 그 불행이라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합시다. 나는 평등이 뭔지 전혀 알지를 못해요. 독립선언문에서 말하는 평등이라는 의미가 뭔지를 모르는 겁니다. 어쨌거나 남편의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까 ? "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토해냈다. " 오, 하느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그녀는 무선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등뒤에서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요 ? " 그녀는 경멸 이상의 격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순간, 침이라도 내 얼굴에 뱉을 것 같았다. " 그래요.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요. 마치 부부 사이의 기반은 그거면 다라는 투로요. ‘사랑한다. 사랑하고말고. 나도 사랑을 해주겠지 ? 사랑. 사랑.’ 지겹다고요 ! " " 너를 미워한다. 당신도 나를 증오하는가 ?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소 ? " " 그런 피상적인 말은 집어치워요." 그녀가 말했다. " 부부관계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감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는 거예요. 사랑이건 미움이건. 그는 마치……." 적합한 비유의 예를 찾는 것 같았다. " 그는 무더운 날 카니발에서 어린애가 솝사탕투성이가 되어 마침내 아이를 안은 자기까지 솝과자와 땀으로 범벅이 되고, 긴 하루해에 지쳤는데도 아이가 마구 울어댈 때의 느낌이라고요. 거기에서 도망나와 샤워라도 할 수 없다면 스스로가 울부짖고 말 때의 그런 기분이요. 당신에게는 아이가 있나요, 스펜서 씨 ? " " 아니오." " 그럼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네요. 결혼은 ? " " 아직." " 그럼 절대 알 수 없을 거예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내가 옆을 스쳐가기만 해도 나를 안으려고 해요. 혹은 엉덩이를 다독거리려 하고. 그와 함께 있으면 하루 종일 그의 애정표현과 거기에 응답하는 애정표현을 해달라고 졸라대는 그로부터의 압박감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요. 마침내는 걷어차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지요." " 제인에게 부탁하면 대신 발길로 차주었을 텐데." " 아까는 그녀가 나를 지켜 주려고 한 짓이었어요." " 알고 있어요. 그래, 그를 사랑하고는 있나요 ? " " 허비를요 ? 그의 식으로는 사랑하지 애아요.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사랑하고 있지요. 아니, 적어도 사랑은 했어요. 그의 사랑하는 방식에 녹초가 되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그런 심신을 다 바치듯하는 그의 사랑 방식이 그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지요. 나는 그걸 좋아했어요. 그 확실성을 좋아했다고요. 하지만 그 압력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힘을 복돋아주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짓은 칼 로저스에 못지않게 잘하는 편이다. " 잠자리에서는 연속적인 오르가즘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의 기대를 배반한 느낌이 들곤 했지요." " 그런 상태에 이르는 일이 많았나요 ? " " 아뇨." " 그래서 자신은 불감증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 ? "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불감증이라는 것이 뭐를 의미하는지 나는 모르겠는데요." " 남자들이 생각해 낸 말이라고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성적기준도 남성본위로 되어 있는 거예요." " 로즈의 대사를 나에게 인용하는 건 그만두시죠.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당면문제에 관한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거니까." "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당신이지." 팸 세퍼드가 말했다. " 내가 아니에요." " 아니오, 당신이야말로 문제를 알고 있소." 나는 입을 열었다. " 나는 에디 틸러와 이야기를 나누었소." 그녀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 에디 틸러, 포크레인 운전기사로 일하는 덩치가 크고 금발의 젊은 사나이. 배에 군살이 붙고 건방진 녀석 말이오." 틸러의 인상에 관한 설명을 듣는 동안에 그녀의 입언저리의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 그 사람이 왜 문제가 되죠 ? " " 그 작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자의 이야기가 지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면 · 10· . 이야기를 지어낼 정도로 머리가 있는 놈도 아니지만, 당신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마음편히 자기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걸 시시콜콜 이야기했을 테지요. 있는 말 없는 말 다 보태가면서 말이에요." " 아니, 실은 여간해서 입을 열려고 하지를 않았소. 턱뼈를 호되게 후려갈겼다니 그제야 입을 열 정도였으니까." 그녀의 입에 웃음 같은 것이 떠올랐다. "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내가 예상한 것과 같은 말투는 쓰지 않는군요." " 책을 많이 읽으니까." " 그래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 뭔가요 ? " " 그걸 알 수 있을 만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소." 내가 말했다. " 추측이지만, 당신은 스스로의 성적 능력에 의문을 갖고 있어 심리적 이중경향이 생기고 있는 모양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누군가가 해결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는 건 아니오." " 서로가 심리학적 용어에 정통해 있는 것 같네요. 가령 나의 남편이 이 여자 저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면 그가 불안정한 정신상태에 있으며 이중경향이 싹튼 상태라고 추측할 건가요 ? " " 그럴지도 모르지요. 특히 그가 이튿날 아침 발작적 감정격발을 일으켜 침대 위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면." 그녀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 그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쾌한 놈팽이었다고요. 당신이 본 그대로라니까요. 왜 그 돼지 같은 녀석과 잤는지 나도 몰라요. 술에 취한 땀내가 물씬한 그 짐승에게 내 몸을 맡기다니……." 몸을 떨었다. 길 저쪽에서는 우리를 지켜보면서 제인과 로즈가 금새라도 달려올 것 같은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뱀을 잡아먹는 망그스의 무리 속에 섞여들어간 코브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자는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거라고요. 내 기분쯤이야 문제도 삼지 않았으니까. 내가 뭐를 희구하는지,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 등. 단지, 오로지 돼지처럼 행위를 하는 것밖에는 염두에 없고, 끝나니까 털썩 나에게서 내려와 잠들어 버렸지요." " 그야……, 유럽형의 사나이처럼 보이지는 않더군." " 농담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에요." " 그야. 다른 모든 일처럼 농으로 돌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우는 것보다는 웃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 그럴 수 있을 때는 말이오." " 무척 쉽게 말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 도대체 당신은 웃거나 우는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죠 ? " " 여러 번 관찰을 할 수 있었소. 그러나 내가 뭐를 아느냐는 문제가 아니오. 에디 틸러가 그토록 불쾌한 인간이라면 어째서 놈과 자기로 했느냔 말이오." " 그건 그럴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랄 수밖에. 어디엔가 가서 시시콜콜한 소리 듣지 않고 남자와 자고 싶었단 말이에요. 사랑이다 뭐다 입에 발린 소리 쏙 빼고 오로지 섹스만을 즐기고 싶었다고요 · 10· 지금 것은 어땠지 ? 나를 사랑하는 거지 ? · 10· 라는 군소리는 싹 빼고 말이에요." " 그런 식의 성교를 자주 했나요 ? " " 네, 그런 심정에 젖어들었을 때만. 요몇해 동안 자주 그런 기분이 되곤 했지요." " 대개의 경우 에디와의 관계보다 즐거웠나요 ? " " 물론, 나는……. 빌어먹을, 모르겠어요. 그때는 기분좋기는 해도 아무래도 죄책감이 뒤따르게 마련이잖아요. 제대로 교육받은 여자는 그런 짓을 해서는 못쓴다는 해묵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거지요." " 어떤 사람이 말해 주기를, 당신은 늘 젊고 덩치가 큰 남자를 노리더라고 하던데. 젊고 우람한 남자." " 자기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 당신은 별로 젊지가 않은데요 ? " " 나야 기꺼이 당신과 함께 침대에 들어가겠지. 당신은 용모가 빼어난 여자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도 어떻게든 당신 문제에 대해 상의하고 싶소." " 미안해요. 지금 것은 허튼소리였고 나도 그것을 고치려고 애쓰고 있어요. 하지만 오랜 습관을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엉겨 장난치는 것이 인생의 태반이며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남녀관계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거든요." " 알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 그런데 젊은 스포츠맨 형을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된 이야기죠 ? 그 사람이 말한 게 사실인가요 ? " 잠시 말이 없었다. 탑을 내린 구식 프라이머스 콘버터블(primurs convertible)이 라디오 소리를 크게 울리며 지나갔다. 로버트 프랙의 노래였는데 단편적으로 들리더니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상대는 몸집이 크고 젊고 강한 남자가 틀림없어요. 혹시 나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젊어지고 싶은 잠재의식에서였는지도 모르죠." " 그리고 성가신, 미련을 남기지 않는 즐거운 섹스를 하고 싶었고 ? " " 그것도 있어요." " 하지만 행위에만 몰두하고 털썩 내려앉는 사나이는 질색이다 ? " 눈살을 찌푸렸다. " 쓸데없는 꼬투리는 잡지 말아요. 내가 의미한 바를 아시면서." " 아니, 당신이 의미하는 바를 나는 모르고 있어요. 더구나 당신 자신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죠. 나는 결코 당신을 상대로 하찮은 이론이나 늘어놓자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머릿속의 사고방식을 알고 싶은 것뿐인데, 아무래도 지독한 상태로 생각되는데요." " 무슨 뜻이죠 ? " "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 " 혼란하다뇨 ? 난 내가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걸 분명히 구분한다고요." " 허, 그럴까요 ? " " 그럴까라니, 무슨 뜻이지요 ? " " 그래, 무엇을 원하고 있고, 무엇을 원하지 않느냐는 의미죠." " 지난 20년간과 같은 생활을 이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 그래서 원하는 바는 ? " " 뭔가 색다른 것." " 예를 들자면 ? " " 그야 · 10· ."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모르겠어요. 제기랄 ! 나를 내버려 둬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 턱이 없죠. 어서 돌아가서 나를 못 본 체해 달라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라구요." 마침내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오열이 새어나왔다. 도로 저쪽에서 로즈와 제인이 흥분된 모양으로 무엇인가 의논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인이 달려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명함을 한 장 그녀에게 쥐어 주었다. " 이걸 갖고 있어요. 내 도움이 필요할 때 전화를 걸도록 해요. 돈은 있나요 ? "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남편이 준 것 중에서 10달러짜리 지폐를 열 장 지갑에서 빼내 건네주었다. 지갑이 얄팍해졌다. " 당신의 거처는 남편에게 말하지 않으리다." 다리에서 걸어나와 언덕을 올라가서 박물관 뒤에 세워둔 차에 올라탔다. 10 허비 세퍼드는 오른쪽 눈 밑에 퍼렇고 큼직한 멍이 들어 있었고 얼굴의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오는 듯했다. 그는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 이거야 원 ! " 그가 내뱉듯 말했다. " 그 정보를 위해서 나는 500달러를 내놨는데 당신은 거기에 앉아 알려줄 수 없다고 하니 이런 거래도 있을 수 있는 거요 ? " " 원한다면 착수금은 반환해도 무방하지만 그녀의 거처는 알려줄 수가 없소. 그녀는 아무런 탈도 없고 스스로의 의사로 집을 나가 있거든. 생각하는 바가 혼란스럽고 불만을 품고는 있지만 그녀 신변이 안전무사한 것은 틀림없소." " 당신이 실제로 그 여자를 만났는지 어떤지도 나는 알 길이 없잖소. 당신이 처음부터 그 여자를 찾으려는 생각도 없이 나에게서 500달러를 워어내려고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 아니오 ? " " 당신에게 돈을 돌려줄 수도 있다고 말했을 텐데 ? " " 말로만 그러면서 돌려줄 생각이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지." " 부인은 감색 폴로 셔츠, 흰 슈츠에 흰 테니스화를 신고 있더군요. 그런 옷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 " 그가 어깨를 움츠렸다. " 그건 어떻게 된 일이오 ? " " 뭐가 ? " " 얼굴의 멍 말이오. 무슨 일이지 ? " " 말을 딴 데로 돌리지 마시오, 스펜서. 당신은 나에게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나는 그 정보를 요구하고 있단 말이오. 필요하다면 법원에 출입을 시켜주지." " 호크에게 당했소 ? " " 뭘 ? " " 그 멍, 호크의 짓이 아니오 ? " "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시오, 스펜서. 나는 아내를 찾아달라고 당신을 고용했는데 당신은 그것조차 하지 않았어. 게다가 호크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필요없는 참견만 하려드는군." 우리는 중심가가 내려다보이는 2층의 그의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덴마크제의 큰 책상을 악에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접고 펼 수가 있는 흰 가죽으로 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창 쪽으로 걸어갔다. " 이리로 오시지." 내가 말했다. " 창밖에 뭐가 있는지 봐 줘야겠소." " 거기에 뭐가 있는데 ? " " 하여간 이리로 와보면 알 게 아니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코를 훌쩍거리고는 뼈마디가 쑤시는 듯 천천히 일어나서 노인처럼 신중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는 상체가 움직이지 않도록 꼿꼿한 자세로 걸었다. 그가 가까이 오자, 내가 말했다. " 이제 됐소." 눈살을 찌푸렸으나 눈이 아픈지 곧 얼굴을 펴고 불평을 터뜨렸다. " 장난은 그만두시오 ! 대체 뭘 어쩌자는 거요 ? " " 호되게 터졌군." 순간 자기의 상태를 잊고 홱 나를 바라보더니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며 벽을 짚고 몸을 기댔다. " 꺼져 ! " 언성을 높이지 않은 상태에서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 " 누구에게 당해도 보통 당한 것이 아니구먼. 멍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지금 걷는 걸 보니 확실해졌어. 당신은 호크를 고용한 누구엔가로부터 돈을 빌려썼는데, 이것이 두 번째 경고란 말이군요." "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벌이고 있어." " 아니, 알고 있소. 그것이 호크의 수법이거든. 외견상 잘 보이지 않는 부위를 가격하죠. 얼굴의 멍은 의외인데." " 바보 같은 소리." 세퍼드가 말했다. " 어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그런 거요. 융단 끝에 걸렸었지. 나는 아무에게도 빚진 일 없소. 호크와는 거래를 하고 있을 뿐이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호크는 장사 같은 건 하지 않죠. 시시콜콜한 돈벌이는 질색이거든. 호크는 빚 독촉이나 보디가드 같은 것이 본업이죠. 당신이 어느 날 그와 함께 있었는데, 이튿날에는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다. 우연이라기에는 악뒤가 맞지를 않는군요. 나에게 내막을 말하는 것이 좋을 거요." 세퍼드는 엉금엉금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양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때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 당신은 해고야. 어서 나가 ! 소송을 걸어 돈은 모조리 회수할 테다. 곧 내 변호사로부터 통지가 갈 거요." " 어린애 같은 소리 작작 하시오, 세퍼드. 지금 빠져 있는 궁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장의사가 내게 연락을 해올 거요. 당신은 애들이 셋인데 마누라가 없소. 당신이 눈을 감으면 아이들은 어쩌지 ? " 세퍼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맥없는 웃음으로 끝났다. " 알겠소, 스펜서. 당신이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문제이거니와 내가 처리하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나는 장사꾼이오. 어떻게 장사를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책상 위에 깍지를 낀 양손에 힘이 들어가고, 난간을 쥐고 있던 그의 아내의 손가락이 그랬던 것처럼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아마도 이유는 두 사람 모두 같은 것이리라. 그는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소. 당신은 킹 파워즈와 거래를 하고 있는 거요 ? "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스펜서.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목소리가 달라졌다. " 나에게서 돈을 긁어낼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나는 당신과 손을 끊었소. 내일 안으로 50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오지 않는다면 고소할 거요." 목소리가 갈리는 것이 히스테리 증상을 보였다. " 내 거처는 알고 있겠지요." 나는 그런 말을 남기고 방을 나왔다. 오랫동안 보스턴에 살다보면 케이프 코드를 신이 약속한 땅으로 생각하게 된다. 바다, 태양, 하늘, 건강, 마음 푸근하고 활발한 교우관계, 맥주 장사를 바탕으로 하여 살아가는 고장. 그런데도 자기가 이곳에 온 이래, 호의를 보인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몇 사람인가가 꺼져 버리라고 했다. 자기에게 덤벼든 자도 둘이나 있다. 이렇게 된 이상 케이프 코드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안도로의 끝까지 차를 달려 불법주차를 하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아마도 실업자 신세가 된 것 같다. 그렇다고 짐을 챙겨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모텔에서 전화를 걸면 2시간 뒤에는 수전 실버맨을 만나, 둘이서 늦은 점심을 먹고 미술관에 가서 막 개막을 한 펠멜의 특별 전시회를 구경할 수 있다. 세퍼드에게 착수금을 돌려주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못하지만, 재수가 좋으면 수전이 점심을 사줄지 모른다. 어쨌거나 세퍼드에게 그의 아내가 있는 곳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수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벌써 나흘이나 만나지 못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외로운 생각이 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해변은 혼잡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기슭에서 50야드쯤 떨어진 바닷속에 닻으로 매둔 도약대에서 다이빙을 하며 수영을 즐기고 있다. 활처럼 굽은 해안선 끝에 돌출부가 있고, 그 맞은편에 케네디일가 저택의 일부가 보인다. 빈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고 셔츠를 벗었다. 꽃무늬가 든 수영복을 입은 뚱뚱한 여자가 혁대에 찬 권총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권총을 셔츠에 둘둘 말아서 베개를 대신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치 파라솔을 접어 다른 장소로 옮겨갔다. 적어도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은 모두가 같다. 눈을 감고 파도소리, 아이들의 말소리, 가끔 개가 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래 언덕 저쪽 누군가의 라디오에서 백만 년이나 계속 울어서 대량의 눈물을 흘린 사나이에 관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콜 포터여, 너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 지독한 상태이다, 단순한 사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을 내버려두고 철수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중대한 사태인지는 모르지만 지독한 상태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세퍼드가 아무리 기를 써도 대처할 수 없는 사태가 분명하다. 일어나서 권총을 허리 벨트에 꽂고 총집을 엉덩이에 붙은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어깨장식이 달린 연한 감색 마드라스 셔츠를 걸치고, 권총을 감추기 위해 옷자락을 밖으로 늘어뜨렸다.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고 모텔로 돌아왔다. 정오가 가까웠다. 방안에서 수전 실버맨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응답이 없다. 레스토랑으로 가서 오이스터 스튜를 먹고 생맥주를 두 잔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를 않는다. 딕 스레이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있었다. " 범죄수사 분야에서는 명탐정으로 알려진 스펜서요." " 허 ! 그래요 ? " " 당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범죄활동의 가능성이 있는 사항에 대해 당신이 들어줬으면 하는 의견이 몇 가지 있는데, 듣고 싶지 않소 ? " " 내 관할구역 내에서의 범죄활동이라 ? 텔레비전의 수사물 프로를 지나치게 보시는 모양이지. 마치 페리 메이슨과 같은 말투군요." " 당신, 자신이 진지한 말투를 구별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바보취급할 이유가 될 수는 없죠. 내 견해를 듣고 싶지 않다는 거요, 스레이드 ? " " 오시오." 전화를 끊었다. 흥분한 것 같지는 않았다. 11 " 호크의 진짜 이름은 뭐요 ? " 스레이드가 물었다. " 몰라요. 그냥 호크라고만 알고 있소." " 의젓한 이름 석 자는 갖고 있을 텐데 ? " " 그야 그렇겠지만 나는 몰라요. 그와 알고 지낸 지가 20년이 되지만 호크라는 이름 이외의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본 일이 없거든." 스레이드는 어깨를 추스리더니 노란 용지에 호크라고 썼다. " 할 수 없지. 그래, 세퍼드가 돈을 빌려쓰고 갚지 않으니까, 빌려준 자가 해결사를 보냈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이거군요. 세퍼드는 뭐라고 하던가요 ? " " 아무 일도 없다고 할 뿐이오. 그냥 호크와 거래가 있을 뿐,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거요." " 그런데도 당신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 " " 물론. 무엇보다도 호크는 푼돈이나 버는 거래 같은 건 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는 사람을 죽이거나 무엇을 횡령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를 구출하는 일을 떠맡을지는 모르지만 세퍼드와 같은 인간과 상거래 같은 건 하지 않죠. 호크는 자유분방함을 사랑하는 사나이니까." " 당신과 비슷하군." 스레이드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 나와는 다르죠. 나는 호크가 하는 종류의 일은 떠맡지 않으니까." "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고 들었는데 ? " " 누구에게서 ? " " 보스턴에서 알 만한 사람이지. 전화로 두세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서 수소문을 해봤소 ? " " 거리를 오염시키는 놈들을 감시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는 걸로 알았는데." " 점심시간을 이용했지." " 남의 말을 곧이듣지는 말았으면 좋겠소." 자칫하면 미소가 될 뻔한 표정이 스쳤다. " 그가 위험에 처했다는 건 어느 정도 확실한 거요 ? " " 세퍼드가 위태로운 건 틀림없소. 지금까지 당한 사람들을 보아왔고, 내가 당한 일도 있죠. 당하고 난 뒤의 기분은 내가 잘 알아요." " 그야 뻑적지근하겠지." 스레이드가 말했다. " 세퍼드는 뭐라고 하던가요 ? " " 계단에서 떨어졌다고만 하더군요." 스레이드가 다시 노란 용지에 뭐라고 끄적거렸다. " 호크를 고용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 뭐 집히는 건 ? " " 킹 파워즈라고 생각하오. 호크는 대개 파워즈에게 우선권을 두거둔." 스레이드가 또 뭔가를 메모했다. " 파워즈는 고리대금업자요. 원래는……." " 파워즈에 관해서는 알고 있소." 스레이드가 말했다. " 하여간 세퍼드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는 건 확실하오. 아마도 옴쭉달싹도 못하는 판국에 몰린 것 같소. 이젠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을 만큼 얼어 있소." " 그자, 스스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얼어 있는지도 모르지." 나는 눈을 치켜뜨며 스레이드를 보았다. " 뭔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계시는군요." 스레이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오. 허비는 전부터 남보다 먼저 성공하려고 열심이었지. 악당이라고 해서 하는 말은 아니오. 야심이 지나친 것이 탈이랄까. 그가 조성하고 있는 레저 단지는 여러 가지 잡음의 근원이 되고 있거니와 그 진척이 지지부진해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차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죠." " 흑막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요." " 넘겨집지 마시오. 내가 알 수가 있어야지. 토지사기사건을 손대 본 일이 있소 ? 조사할 점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는 데만도 백 명의 공인회계사와 백 명의 변호사를 동원해도 백년은 걸릴 거요." 스레이드가 자못 심물이 난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 대개의 경우 토지의 진짜 소유자가 누군가를 규명해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말거든." " 허비 세퍼드는 악당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 아돌프 히틀러는 개를 사랑했지." 스레이드가 말했다. " 악당은 아니더라도 분수를 모르고 욕심을 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죠." "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죠 ? " " 내가 어떻게 알겠소 ? 뉴욕의 머리가 좋은 어르신네들과는 다르니까 당신의 의견을 들려 달라는 거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아직 범죄도, 피해자도 없고 당신들 뉴욕의 어르신네들이 들먹이는 형법위반행위도 없소. 나는 순찰차가 그의 집 악을 통과하는 횟수를 늘리고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모두에게 지시를 하겠소. 그리고 세퍼드의 토지조성계획에 관해서는 어떤 단서라도 잡고 있는지 주(州) 법무국에 문의해 보겠소. 그밖에 달리 내가 할 일이 있소 ? "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 그래 그자의 마누라는 찾아냈소 ? " " 찾았소." " 돌아가겠다던가 ? " "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오." " 그렇다면 허비는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요 ? " " 속수무책이죠." " 강제로라도 데리고 올 수는 있을 텐데." " 그자는 아내가 있는 거처를 아직 모르고 있소. 내가 가르쳐주지를 않았으니까." 스레이드는 30초 가량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 별난 친구로군, 당신. 그것만은 인정하겠소." " 그래요 ? " " 세퍼드는 그런데도 가만히 있던가요 ? " " 아니, 나를 해고하고 고소를 하겠다고 했소." " 다시 일거리가 떨어졌군요." " 그런 셈이죠." " 관광객이 된 셈이군요." " 그래요." 이번에는 스레이드의 얼굴에 웃음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거리낌없는 웃음이 천천히 얼굴에 번져서 양볼에 한 가닥씩 깊은 주름이 잡혔다. " 질렸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놀랐는걸." 나도 따사로운 웃음을 그에게 뛰워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경찰서를 나왔다. 차로 돌아가, 탑을 내려놓아 뜨거워진 좌석에 앉아, 먼저부터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했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도 알 수 없다. 차에 시동을 걸고 라디오의 스위치를 틀고는 엔진을 공회전시킨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조차 머리에 떠올릴 수가 없다. 세퍼드 부인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며, 세퍼드 씨도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뭐 희귀한 존재는 아니다. 지금 현재 나 자신도 행복하지는 못하다. 집에 돌아갈 것인가 ? 집이란 당신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며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였든지간에 심술첨지 같은 녀석이다. 기어를 넣어 천천히 모텔로 향했다. 물론 우리 집에는 ‘가족’은 없다. 나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라도 나는 자신을 받아들인다. 신호에 걸려 차를 세웠다. 통이 넓은 엷은 감색 데님 슬랙스에 푸른 홀더 톱을 입은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어슬렁어슬렁 옆으로 지나갔다. 슬랙스가 팽팽해서 엉덩이에 사선을 그은 팬티 줄이 두드러져 보인다. 아주 친숙한 표정으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꼬셔서, 술을 한잔 하고, 바다로 가서, 내가 장기로 삼는 오스트레일리아 식의 크롤 수영법으로 그녀를 매혹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겉모양으로 봐선 대학생 같고 마약이라도 함께 즐기며 사랑과 새로운 의식의 필요성이라도 논하는 것을 좋아할 것만 같았다. 신호가 청색으로 바뀌었기에 차를 전진시켰다. 갈 곳도 마땅치 않은 비참한 중년남자다. 모텔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점심시간이다. 기운을 되찾고 로비로 들어가 프런트 악을 지나쳐 왼쪽으로 구부러져서, 복도를 따라 내 방 쪽으로 걸어갔다. 대충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아무런 목적도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은 여간해서 믿어지지가 않는다. 방문을 열자 수전 실버맨이 아름다운 자태로 침대에서 에릭 에릭슨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 이거 기절초풍할 일을 다 봤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걸." 손가락 하나를 책 사이에 낀 채로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 " 나도 마찬가지예요." 라고 말하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자주 미소를 짓는데 때로는 미소도 짓지 않고 생긋 웃기만 한다. 지금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미소와 어디가 다른지 끝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경쾌하면서도 심술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은 웃음이다. 그녀의 미소는 선량하고 아름답지만 생긋 웃는 입언저리에는 얼마간의 심술과 장난기 같은 것이 맴돌기 마련이다. 그녀 위로 펄쩍 뛰어올라 양팔을 감아 포옹을 했다. " 캑 ! " 그녀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나는 팔의 힘을 늦추고 입술을 더듬었다. 일단락, 키스가 끝나자 내가 말을 꺼냈다. " 당신이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는지는 묻지 않겠어. 당신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거니와, 모텔의 종업원들에게 가택침입을 돕게 하는 것쯤은 당신으로서는 식은죽 먹기일 테니까." " 그야 간단하지요." 그녀가 말했다. " 그래, 당신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 " 둘이서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워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오후의 관능적 유희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점심식사를 끝낸 뒤에 시작할 것을 주장했고 잠시 옥신각신하다가 내가 질 수밖에 없었다. " 수전 ! " 식당에서 첫 잔째 쪽기를 비우고 그녀가 마르가리타를 찔금거리기 시작할 무렵 내가 말했다. " 당신은 제인이 내 아랫도리를 걷어차 거세를 하려고 했던 대목에 상당히 흥미를 갖는 것 같던데." 그녀가 웃었다. " 당신 좀 군살이 붙은 것 같아요. 운동은 하나요 ? " " 아니. 하여간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고. 무슨 일을 당했다면 이곳 웨이트리스들이 모두 검은 리본을 달고, 래드크리프에서는 반기를 내걸었을 거야." " 하여간 다음에 살펴보겠어요. 달리 할 일이 없을 때." " 그야 재미있겠지." 내가 말했다. 그녀가 일부러 크게 하품을 했다. 웨이트리스가 와서 주문을 받아 갔다. 웨이트리스가 물러가자 수전이 말했다. "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죠 ? " " 그걸 나도 알 수가 없다니까." " 그 동안 내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나요 ? " " 제발. 실은 팸이고 로즈고 제인이고 모두 다 보통내기들이 아니라니까." " 좋아요. 그럴 줄 알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가방을 챙겨 왔어요." " 그래 ? 이미 옷가지를 꺼내 이 방 옷장에 걸어 뒀겠지. 자신만만하다는 건 겁나는 일인걸." " 명색이 탐정이라고 눈치가 빠르네요. 나는 당신이 탐정이라는 걸 곧잘 잊어버리곤 해요." " 명탐정 스펜서가 누군데." 웨이트리스가 나에게는 굴 반 다스, 수전에게는 향신료로 맛을 낸 새우를 여섯 마리를 날라왔다. 수전이 내 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실지를 회복할 생각인가요 ? " " 아니, 좀더 계획을 세워 봐야겠어." 우리는 요리를 먹었다. " 어째서 힘에 벅찬 보통내기라고 생각하죠 ? " " 왜 그런지 가슴이 답답해진단 말이야. 내가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영역이지. 나는 손을 써서 무엇을 하는 것은 신이 나고 끈기도 있지만……, 팸 세퍼드가 어린애가 있느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아마도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더라고. 또 결혼했느냐고 묻기에 역시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절대로 이해를 못 할 거라더군."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 나도 아이를 가진 적이 없어요." 수전이 말했다. " 더구나 결혼은 나에게 최상의 일도 아니었거니와 영속적이지도 못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는 스프레이(spray)를 만들지 못하면서도 잘됐는지 어떤지 분간할 줄은 안다는 옛말을 인용하면 될지 모르겠네. 하지만……학교에서 부모들이 아이의 일로 상담을 하러 와서 당신은 모를 거라고, 아이를 가져 봐야 안다고 하는 말에는 일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건가요 ? 내 기억에 의하면 당신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에도 여러모로 관계를 해왔잖아요. 이번 일과 어떻게 다르다는 건가요 ? " " 다르다는 건 아니야." " 그럴 거예요. 당신이 어떤 일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 들어 봐요. 자신감이라는 걸 저울에 달아 보면 다른 사람이 10이면 당신은 언제나 15라는 숫자가 나온다고요." " 그래. 나도 평소와는 다르다고 생각해." " 그리고 당신의 설명에 의하면 사건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상관할 일도 아니네요." " 그런 면도 있기는 하지." " 그렇다면 하나도 걱정할 거 없잖아요. 그리고 당신에게 달갑지 않은 영역이라면 그런 것은 과감히 머릿속에서 털어버리는 것이 현명해요. 우리는 2。3일 맛있는 것을 먹고 수영을 하고 바닷가를 거닐다가 집에 돌아가면 되는 거예요." 웨이트리스가 두 사람의 스테이크, 샐러드, 핫 롤과 나의 두 잔째 맥주를 날라왔다. 두 사람은 2분 정도 말없이 먹었다. "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떠오르지를 않아." " 열의를 좀 컨트럴해 봐요." 수전이 말했다. " 미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냥 웬지 마음에 걸려서. 생활에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두 사람과 상종을 하면서도 두 사람을 그런 상태에서 꺼내 주지를 못하는 게 안타까운 거야." " 물론 그건 할 수 없을 거예요. 기근, 전쟁, 질병, 죽음에 대해서 손을 쓸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 위대한 방관자로군." " 그리고 모두의 아버지 노릇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몇 사람인가 여성들의 도움을 얻은 팸 세퍼드가 당신의 조력 없이 재생의 길을 걷기 어려울 걸로 단정하고 골치를 썩인다는 것은 감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일 뿐이라고요. 사실 그녀는 훌륭히 자립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 역시 그랬으니까." " 내가 감상주의적이라고 ?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만 하고 어서 스테이크나 먹어요. 그렇지 않으면 볼기짝을 두드려줄 테니까." 내가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자 그녀는 식탁 밑의 내 발을 슬쩍 밟았다. " 나도 가만 있지 않는다고요." 12 점심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풀 옆에 마련된 테라스로 나가 감색과 흰 천을 번갈아 댄 파라솔 아래 놓인 소용돌이형 철제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셨다. 풀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거의 모두가 어린이들로서 어머니들이 다리에 오일을 문질러 바르고 있는 동안 물장구를 치며 소란을 피우고 있다. 수전 실버맨은 양손으로 받쳐 든 커피를 홀짝이면서 갑자기 내 등뒤로 시선을 모았다. 엷은 자색의 선글라스 너머에서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을 보고 내가 뒤돌아보았다. 호크가 서 있었다. " 여, 스펜서 ! " 그가 말했다. " 호크 ! " 내가 응수했다. " 합석해도 되겠나 ? " 그가 말했다. " 앉게나. 수전, 이쪽은 호크. 호크, 이 숙녀는 수전 실버맨." " 호크가 활짝 웃으며 목례를 하자, 그녀는, " 반가워요, 호크." 라고 인사를 했다. 호크가 이웃한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그의 뒤에는 얼굴이 검게 타고, 왼팔 안쪽에 동양의 용을 문신한 덩치가 큰 사나이가 서 있었다. 호크가 의자를 끌어오며 턱으로 저쪽 의자를 가리키자 문신의 사나이가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 저 사람은 포웰이야." 호크가 말했다. 포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 커피 ? " 내가 호크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아이스 커피로 하라고." 내가 웨이트리스에게 손짓을 해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다. " 호크." 내가 입을 열었다. " 자네, 남의 눈에 뛰지 않으려는 버릇 좀 고칠 수 없을까 ? 늘 배경에 녹아들어 눈길을 끌지 않는 복장이 아니라 사람 눈길을 끌 만한 옷차림을 하면 어떠냐는 말일세." " 난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스펜서. 성격 탓이지." 내성적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 모델 같은 복장을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거든." 호크는 검은 줄이 들어간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흰 마직 슬랙스에 역시 흰 마직 조끼를 걸쳤는데, 셔츠는 입고 있지 않았다. 포웰 쪽이 더 점잖아서, 적갈색과 노란 줄 무늬의 셔츠에 진한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웨이트리스가 호크의 아이스 커피를 날라왔다. " 자네와 수전은 휴가차 온 건가 ? " " 그렇지." " 좋군. 어때 ? 케이프에는 언제 와도 좋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거든. 자네도 느낄 수 있을걸.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일종의 레저 분위기 같은 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스펜서 ? " " 그렇지, 레저 분위기야. 그것에 끌려서 이곳에 왔나, 호크 ? " " 틀리는 말은 아니지. 우연히도 일을 하면서 휴가를 즐기게 되었단 말이야. 자네는 어떤가 ? 허비 세퍼드의 심부름이라도 맡은 것 같은데." " 자네가 먼저 이야기하면 나도 말하지." " 수전." 호크가 말했다. " 이 사나이는 만사 거리낌없이 말을 합니다. 알고 계십니까 ? 뭐든지 정면으로 받아치거든요.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성격이죠." 수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도 수전에게 웃음을 보냈다. " 그만하라고, 호크. 쓸데없는 연극으로 얼버무리지 마. 자네는 내가 세퍼드에게 어떤 용무가 있는지 알고 싶어하고, 나는 자네가 그자에게 어떤 용건이 있는지를 알고 싶은 거니까." " 실제로는 그보다 좀더 복잡하게 얽혀 있단 말이야. 아니, 보기에 따라서는 간단하다고도 할 수 있지. 자네가 세퍼드를 상대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고, 요는 그걸 그만둬 달라는 거야." " 아하, 협박으로 나오는군. 그래서 엘릭 자레드(노르웨이의 항해가. 그린랜드를 탐험)를 데리고 온 이유를 알겠군. 수전과 내가 함께 있는 걸 알고 수로 압도당하기가 싫었던 모양이지." 포웰이 이웃 테이블에서 말했다. " 지금 나를 보고 뭐라고 했지 ? " 호크가 웃었다. "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르군, 스펜서." 포웰이 또 말했다. " 지금 나를 두고 뭐라고 했냐고 ? " " 포웰." 내가 말했다. " 콧잔등이 벗겨지려는 판에 겁을 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모래찜질을 해보는 게 어떻겠나. 끈끈하지도 않으면서 자외선을 막아 주거든." 포웰이 일어섰다. " 나를 데리고 놀 참인가 ? 나를 놀리는 거냐고 ? " " 그 왼팔의 문신은 자네 엄마의 얼굴인가 ? " 내가 말했다. 포웰은 잠시 문신을 내려다보다가 나에게로 화가 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벌개져서 말했다. " 말씨가 고약한 놈이군. 맛을 봐야겠어." 호크가 말했다. " 나라면 그만둘 텐데, 포웰." " 이런 개뼈다귀에게 놀림감이 되다니 그냥 둘 수 없다고." " 숙녀 악에선 입을 조심해야지." 호크가 말했다. " 그가 하는 말은 잠자코 듣는 게 좋아. 자네가 주물러 줄 상대가 아니니까." "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포웰이 말했다. 그의 심상치않은 기세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 그건 자네가 바보이기 때문이야, 포웰." 호크가 말했다. " 그는 세다고. 어쩌면 나만큼 강할지도 몰라. 하지만 믿기지 않으면 한번 건드려 보는 것도 좋겠지." 포웰이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잡았다. 수전이 숨을 죽였다. 호크가 말했다. " 그자를 죽이지는 말아 주게, 스펜서. 내 심부름을 맡아서 해 주니까." 포웰이 나를 의자에서 잡아일으켰다. 나는 끌려 일어나면서 팔꿈치로 그의 목젖을 가격했다. 그는, " 끅 ! " 소리를 내며 내 셔츠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두 번째 가격을 했다. 두 번째는 충분히 어깨를 비틀어 왼쪽 훅을 먹였는데, 포웰은 벌렁 풀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내가 돌아다보니 호크는 웃고 있었다. " 시골뜨기는 모두 그렇다니까." 그가 말했다. "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모르는 가봐." 그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 그건 그렇고, 자네의 귀부인도 보통이 아니셔." 수전은 어느새 빈 맥주병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호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풀 가장자리로 가서 생선이라도 집어올리듯이 포웰의 200파운드는 될 성싶은 거구를 가볍게 끌어올렸다. 풀 주변은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호크가 말했다. " 자, 내 차 있는 데까지 걸어가서 이야기하세." 포웰을 테이블 옆에 웅크린 채로 앉게 하고는 천천히 로비를 가로질러 악장섰다. 수전과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카운터 악을 지날 때, 지배인이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갑자기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내가 말했다. " 방에 가 있어, 수전. 곧 갈게. 호크는 풀가에서의 싸움에 관해 몇 마디 충고를 해주게 될 거야." 그녀의 입술 사이로 혀 끝이 보였다. 혀를 꽉 깨물고 있는 모양이다. " 혀를 깨물어서는 안돼. 나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남겨두라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 함께 갈래요." 호크가 캐디락 조수석 문을 열고, " 타십시오." 하고 수전에게 말했다. 만일 호크와 내가 맞붙을 생각이라면 호크가 싸움터를 차 안으로 정할 까닭이 없다. 내가 수전의 뒤를 따라 올라탔다. 호크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가 단추를 누르자 지붕이 스르르 올라갔다. 엔진에 시동을 걸고 냉방 스위치를 넣었다. 그때 번스티블 경찰서 소속의 감색과 백색 칠을 한 순찰차가 급히 달려와 서더니 경관 둘이 모텔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호크가 말했다. " 근처를 한바퀴 돌까 ?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어를 넣고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그런 자를 어디서 만났나 ? " 내가 호크에게 푸념을 했다. " 포웰 말인가 ? 나도 잘 몰라. 이 바닥 불량배겠지. 나를 고용한 자가 그놈을 딸려 주더군." " 견습을 시킬 셈인 게로군." 호크가 어깨를 추스렸다. " 글쎄. 하지만 그자는 물건이 되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리겠어." " 관광객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 이유와 그 관광객은 누구며, 그리고 기묘한 옷차림의 검은 사나이는 누구냐고 포웰을 다그칠 텐데." 호크가 고개를 흔들었다. " 그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을걸. 바보는 바보지만 그 정도로 철부지는 아냐." 우리들 사이에 끼어앉아 있던 수전이 말했다. "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 " 호크가 웃었다. " 좋은 질문입니다, 수전. 도대체 우리는 뭘 하는 거지." " 내가 추측을 해볼까. 허비 세퍼드는 어느 사나이, 아마도 킹 파워즈에게 돈을 빌려 썼고, 호크가 해결사 노릇을 청부맡았다. 아니면 단순히 돈의 지불관계를 감독하는 일뿐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일은 순조로웠다. " 내가 수전에게 말했다. " 호크는 그런 일에 아주 능하다고.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나타나 세퍼드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호크와 그의 고용주, 아마도 킹 파워즈는 허비가 호크에게 대항시키기 위해 나를 고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호크가 나와 허비 세퍼드와의 관계를 묻고, 그 관계를 끊으라고 난데없이 나를 찾아온다……." 차가 거의 소리도 없이 미드 케이프 고속도로를 지나 프로빈스타운을 향해서 케이프를 내려가고 있었다. " 어떤가, 호크 ? " 그는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 나를 고용한 자들에게 자네에 관해서 설명을 해줬지. 나는 자네를 협박해서 손을 끊게 할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거니와 매수를 할 수 있을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지만, 내 고용주는 자네가 이 건에서 손을 떼면 거기에 대한 손실 보상은 하겠다더군." " 호크, 자네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지만 어째서 자네는 어떤 때는 마치 메릴 린치(미국 굴지의 증권회사)의 간부와 같은 말을 하고, 어떤 때는 남부의 농부와도 같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 나는 말이야……. 빈민가 교육의 산물이라네." 그는 빈민가를 강조했다. " 가끔 족보가 얼굴을 내밀거든." 호크가 수전을 보고 씽긋 웃었다. " 비콘 힐." 중앙선을 넘어 U턴 해서 하이아네스를 향하여 케이프를 올라갔다. " 하여간 나는 그자들에게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자네가 그자들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자네와 이야기나 해보라고 돈을 주니 이렇게 이야기나 하는 거라고. 그래, 세퍼드와는 어떤 관계인가 ? " " 그는 마누라를 찾아 달라고 나를 고용했다네." " 그뿐인가 ? " " 그뿐이지." " 찾았나 ? " " 응." " 어디서 ? " " 말할 수 없네." " 좋아. 세퍼드가 말해 주겠지. 알 필요가 생긴다면." " 천만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 그도 모르고 있는걸." " 그에게 알리지 않았나 ? " " 그렇다네." " 왜지 ? 그 일 때문에 고용됐다면서." " 그녀는 알리기를 원하지 않아." 호크가 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라고, 스펜서. 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다니까." " 그게 자네와 내가 다른 이유 중의 하나라고, 호크." " 그럴지도 모르지." 호크가 말했다. " 아니면 나와 아주 닮은 걸 인정하기 싫은지도 모르지. 나만큼 호남은 못되지만 말야." " 그래 ? 하지만 내 옷차림이 보다 점잖지." 호크가 코방귀를 뀌었다. " 그런 거 개나 물어가라지. 아차, 실례, 수전. 하여간 나에게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자네의 말을 믿느냐 마느냐라고. 사실처럼 들리기는 해. 자네 방식에 딱 들어맞거든, 스펜서. 물론 자네는 거리를 지나가는 야채 트럭에서 막 굴러떨어진 시골뜨기는 아니니까, 거짓말을 해도 그럴듯하게 들릴 거야. 그래, 아직도 세퍼드에게 고용되어 있는 상태인가 ? " " 아니, 떨려났다네. 나를 고소하겠다고 하더군." " 나 같으면 그 고소라는 건 별로 신경쓰지 않겠네." 호크가 말했다. " 허비는 요즘 바쁘거든." " 파워즈 때문이겠지." "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이 사건에 손을 댈 생각은 없겠지, 스펜서 ? " "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킹 파워즈라는 사람이 누군데요 ? " 수전이 물었다. " 도둑놈이지." 내가 말했다. " 고리대금업자, 사설 복권, 매춘, 자동 세탁기 대여, 모텔, 트럭운송, 생선 식료품, 깡패. 관할구역은 보스턴, 브록턴, 폴리버, 뉴 베드포드." 호크가 말했다. " 브록턴은 아니야. 지금 브록턴은 앤지 디가모의 영역으로 되어 있거든." " 앤지가 파워즈를 몰아냈나 ? " " 아니, 어떤 거래가 있었던 모양이야. 나는 거기에는 관계한 바 없고." " 어쨌거나," 내가 수전에게 말했다. " 파워즈는 그런 사내야." " 그래서 당신은 그에게 고용되어 있다는 거군요." 수전이 호크에게 물었다. " 때로는." " 호크는 프리랜서야." 내가 말했다. " 하지만 호크가 말한 일이 있으면 파워즈는 다른 사람을 제쳐놓고 호크에게 의뢰를 하지." " 그래, 호크 씨가 맡을 만한 일이란 건 뭔데요 ? " 수전은 호크를 바라본 채 나에게 물었다. " 그의 분야는 완력과 권총이지." " 나를 모험과 성공의 용병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걸." 호크가 나에게 말했다. " 양심에 가책도 느끼지 않나요 ? " 수전이 말했다. " 돈 때문에 사람을 다치게 하다니." " 저 친구와 크게 다를 바 없답니다." 호크가 나를 턱으로 가리켰다. " 하지만, 스펜서는 돈 때문에 못할 짓을 하지는 않아요." " 그러니까 나는 엘도라도 새 차로 케이프를 쏘다닐 수가 있고, 그는 좌석 여기저기를 테이프로 바른 8년 전의 고물로 어슬렁거리는 겁니다." " 하지만……." 수전이 마땅한 말을 찾았다. " 하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며, 그의 목적은 사람들을 돕는 거예요. 당신은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이 목적이고." " 아닌데요." 호크가 말했다. " 그는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지는 모르죠. 하지만 동시에 그 일을 즐기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 내가 하는 말은 단순히 사람을 위하고 싶다면 사회사업가가 되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미지. 내가 사람을 못살게 군다고 해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어쩌다가 그렇게 되는 것뿐입니다. 어쨌거나, 수전. 나와 스펜서가 아주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모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순찰차는 보이지 않았다. " 나에 관한 두 분의 이야기는 끝났나 ? 나는 몇 가지 할말이 더 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군. 이야기의 상대가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라서." 수전이 고개를 흔들었다. " 좋아. 분명히 말해 두겠네, 호크. 현재 나는 아무에게도 고용되어 있지 않아. 하지만 나로서는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자네와 파워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가 없네. 좀더 이 근방에 진을 치고 있다가 어떻게든 세퍼드를 자네들 손아귀에서 구출해 낼 수 없을까를 연구해 볼 생각이야." 호크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 바로 그걸 나는 그자들에게 알렸어. 내가 자네를 만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 자네가 그렇게 이야기할 거라는 말을 그자들에게 했었다니까.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돈을 주고 있어. 물론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였다고 그들에게 전할 수밖에. 그렇지만 그자들은 별로 겁내지는 않을 거야." "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네." 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려와 수전을 위해 문을 잡았다. 그녀가 미끄러져 나오더니 다시 차 안을 들여다보고 호크에게 말했다. "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하기에도 쑥스럽고. 하여간……." · 10· 어깨를 움츠렸다. " 드라이브 즐거웠어요." 호크가 웃었다. " 나도 즐거웠습니다, 수전. 또 만나게 될지 모르겠군요." 내가 문을 밀어 닫자 호크의 차는 소리도 없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마치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상어처럼. 13 " 나,술 한잔 하고 싶어요." 수전이 말했다. 바로 들어가 카운터 모퉁이 저쪽의 의자에 올라앉았다. 수전은 마티니를, 그리고 나는 맥주를 주문했다. " 마티니를 ? " 나는 놀랐다. 고개를 끄덕였다. " 나, 술 한잔 마시고 싶다고 했죠 ? 정말이었다고요."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 어떻게 다르다는 거죠 ? "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나와 호크가 말인가 ? " " 그래요." " 잘 모르겠어. 나는 돈 때문에 누구를 두들겨 패지는 않아. 돈 때문에 누구를 죽이지도 않고. 하지만 그자는 그걸 하지." " 하지만 당신은 가끔 공짜로도 하지요. 오늘 오후처럼." " 포웰 말인가 ? " " 그래요. 싸움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당신이 일부러 그의 화를 돋우고 싸움을 건 거라고요."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 안 그래요 ? " 수전이 다그쳤다. 나는 또 어깨를 추스렸다. 수전이 마티니 술잔을 비웠다. " 왜 그랬죠 ? " 나는 바텐더에게 신호를 보냈다. " 한잔 더." 바텐더가 마티니를 만들고 생맥주를 따라 우리에게 갖고 올 때까지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 땅콩 있나 ? " 내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운터 아래에 있는 항아리에서 땅콩을 꺼내 놓았다. 바에는 손님이 듬성해서, 한구석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남녀와 우리 등뒤에서 골프를 막 끝낸 듯한 4인조가 칵테일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수전이 두 잔째 마티니에 가볍게 입을 가져갔다. " 용케도 그런 걸 마시는군." 내가 말했다. " 치통약 같은 맛이 날 텐데." " 나는 이걸로 내가 억세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단 말이에요." " 허 ! " 나는 땅콩을 집었다. 골프의 4인조가 큰소리로 떠들고 있다. 텔레비전 게임의 사회자 같은 들뜨고 부담없는 말투다. 그렇게 하려고 의식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 저런 식으로 사는 남자들은 수백만이나 되지. 아무것도 이야기할 것이 없는 상대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서 자못 친한 척하고 있단 말이야." 수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남자들만이 아니에요." " 여자들이 한술 더 뜬다는 건 알고 있지." " 그렇게 보이려는 일을 일찍부터 연습하기 때문이죠. 남자의 호감을 사려고 말이에요.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 있어요 ? " " 포웰을 일부러 화나게 한 이유 말인가 ? " " 그래요." " 쉽게 단념하지를 못하는군, 당신은." " 맞아요." " 왜 그자의 화를 돋우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거기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 신경에 걸렸겠지만, 동시에 그때는 그게 의당한 일로 생각했거든." " 겁내고 있지 않다는 걸 호크에게 보여 주려고요 ? " " 아니, 호크는 그런 건 생각에도 담지 않는다고. 그건 본능적인 반응이었어. 나의 행동에는 본능적 반응에 의한 것이 많다고. 직선적으로 생각을 하지. 왜, 어째서,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10· 라고 말이야. 그 원인의 하나는 당신이 카운셀링을 직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 당신은 정형 개념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네요." " 어째서지 ? 여자는 감정적, 남자는 이성적이라는 것 말인가 ? 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바보스러운 사고방식이라고. 대개의 경우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하여간 내 경우에는 말이야. 나는 A,B,C의 순서로 무얼 생각하지 않아. 이미 40의 고개를 넘어섰고 여러 가지 일을 해오는 동안에 대개의 경우 자신의 충동을 신뢰할 수 있다는 걸 배웠거든. 나는 이미지나 패턴, 거기에 · 10· 뭐라고 하더라 · 10· 전체적 상태로서 사물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 " 게슈탈트(Gestalt : 형태)." 수전이 말했다. " 어쨌든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실제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당신이 왜냐고 물어오면 나로서는 상황을 설명할 수밖에 도리가 없는 거야. 그때의 상황을 찍어둔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면 그것을 가리켜 ‘알겠어, 저게 이유야’하고 말하겠지." "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같은 일을 벌였을까요 ? " " 주먹깨나 쓴다는 걸 자랑이라도 했다는 뜻인가 ? " 바텐더가 다가와 우리의 술잔을 기웃거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따라오기 위해 글라스를 들고 나갔다. " 그럴지도 모르지." 바텐더가 마실 것을 갖고 왔다. " 내가 도움을 청하면 당신은 그 맥주병으로 누굴 후려갈길 참이었지 ? " " 자만심도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수잔이 코방귀를 뀌었다. " 어째서 내가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병을 집어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죠 ? " " 한 방 맞았는걸 !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 알고 보니 병을 든 건 그래서였군." " 아니오 ! " 그녀가 말했다. " 그리고 넋나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는 거 그만 좀 둬요." 석 잔째 마티니를 입에 가져갔다. " 자만심 좀 버리라고요." " 병을 꼬나쥔 것은 내 굉장한 잠자리에서의 실력을 못 잊어서로군." " 틀려요." 하고 그녀는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병을 든 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저쪽 구석의 아베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물들인 금발의 머리털이 억세보였고, 흰 슬리퍼에 흰 벨트를 매고 있었다. 문을 나설 때 두 사람의 손이 닿자 남자가 여자의 손을 꼭 쥐었다. 나는 단숨에 맥주잔을 비웠다. " 수전은 마티니를 찔끔거렸다. " 옛날부터……." 그녀가 말했다. " 지금의 그 말에 대한 남성들의 응답은 ‘나도 너를 사랑한다’라는 거예요." 지금은 나를 보며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글라스 밑바닥에 깔린 올리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수전." 내가 말했다. " 일부러 일을 복잡하게 얽어매야 직성이 풀리나 ? " " 당신은 그 관습적인 말을 입에 담으면 입술이 부르트나요 ? " " 문제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뒤에 오는 것이 중요한 거야." " 사랑과 결혼은 말과 마차처럼 붙어다닌다는 의미 ? "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야. 나도 사랑이 없는 결혼을 많이 보아왔지. 따라서 그 반대도 있을 수 있겠지." " 그래서요 ? " 또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지금 이대로도 무난한 걸로 생각하는데." 내가 말했다. " 아뇨." 그녀가 말했다. " 임시적인 거라고요.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하지요. 보다 큰 약속이 없고, 위험스러울 것도 없는 · 10· 그래서 진정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지요." "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괴로워해야 한다는 건가 ? " " 괴로워할 가능성이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죠. 별것도 아닌 못마땅한 생활이 되더라도 훌쩍 집을 나가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단 말이에요." " 그것이 결혼이다, 이 말인가 ? 결혼생활에서 도피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는 그걸 감행한 여자에 관한 의뢰인이 있으니까." " 몇 년이라고 했더라 ? 22년이었댔지요 ? " " 그런 면에서는 당신이 빨랐지. 비가 후두둑 부리기 시작했을 때 그 여자가 도망나오지 못한 것은 확실하니까.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지 ? 어느 치안판사가 성서의 문귀를 읽어 주었기 때문인가 ? " " 별다른 차이야 없겠지요." 수전이 말했다. " 하지만 결혼식은 약속의 구체적인 표명이었기 때문인가 ? 인간은 통상 대단히 깊은 의의가 있는 일은 의식화하는데, 결혼은 사랑을 의식화하기 위한 방법이란 말이에요. 최소한 그 방법의 하나이지요." " 우리가 결혼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로군 ? " "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고, 어떤 회답을 기다리는 참이라고요." "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 수전." " 어쩌면 기다렸던 대답이 나온 것도 같네요." 수전이 일어서더니 바에서 나갔다. 나는 급히 맥주를 비우고 카운터에 10달러를 놓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수전은 보이지 않았다. 테라스에도 로비에도 주차장에도 없었다. 그녀의 소형 푸른색 세비 노바를 찾아보았으나 눈에 뛰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옷가방은 탁자 위에 놓인 채였고, 옷가지는 그대로 옷장에 걸려 있었다. 짐을 꾸리지 않고 돌아갈 리는 만무했다. 나를 버리고는 갈 망정 옷은 두고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방 한구석의 빨간 의자를 바라보았다. 앉는 자리는 성형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고, 검게 칠한 가늘고 둥근 다리 끝에는 구리로 된 장식이 끼여 있었다. 우아하다. 나는 대장부다. 울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눈물을 짜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었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젠장 ! 장농 위에 ‘우리 모텔의 헬스클럽과 사우나를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쇄된 카드가 놓여 있다. 옷을 벗고 장농에서 흰 숏 팬츠와 회색 T셔츠를 꺼내 입고는 검은 줄이 3가닥 들어 있는 아디다스의 농구화를 맨발로 신고 끈을 맺다. 둘이서 테니스를 할 때, 내가 양말을 신지 않는다고 늘 수전이 잔소리를 하지만 나는 답답해서 가급적 양말을 신지 않는다. 헬스클럽은 1층에 있는데 격자 무늬의 카펫이 깔려 있고 방이 네다섯 개, 스팀사우나, 맛사지 시설과 유니버셜 트레이너가 있는 운동실이 있다. 내가 들어서자 흰 슬랙스에 흰 T셔츠를 입은 근육질의 중년 사나이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 운동을 하시렵니까 ? " " 그렇소." " 그러시다면 이쪽에 기재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유니버셜을 아시는지요 ? " " 알지요." " 보시다시피 이것은 도르래 장치를 이용한 중량들어올리기 기계로, 바벨의 추를 바꾸는 불편 없이도 트레이닝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 알고 있소." " 이곳의 장치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설명드리지요. 이 중앙부에서 여덟 종류의 트레이닝 · 10· 즉, 벤치 프레스, 카알, 오버 더 헤드……." " 알고 있다니까요." " 왼쪽 숫자가 시작할 때의 중량이고, 오른쪽 숫자가 지렛대의 힘의 변화와 증가하는 힘을 나타내며……." 나는 벤치 위에 올라가 300이라고 표시된 구멍에 핀을 끼우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중량을 팔을 뻗은 높이까지 위치까지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계속해서 두 번을 되풀이했다. " 전에 해보신 경험이 있는 모양입니다." 트레이너가 말했다. " 약간." 그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 내가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나는 곧 다음 장치로 옮겨 150파운드로 풀 다운을 15분, 90파운드로 팔의 삼두근 프레스를 15회, 계속해서 카알 바로 옮겨갔다가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평상시에는 벤치에서 그렇게 중량을 올리지 않지만, 이번에는 내장이 파열할 만큼 힘을 짜낼 필요가 있었거니와 그러자면 300파운드가 적절한 중량이었다. 모든 코스를 네 차례 해내자 셔츠가 젖고,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러내려 바를 쥘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자주 손을 닦아야 했다. 평행봉에서는 굽혔다펴기를 25회 하고 내려왔는데 양손이 떨리고 숨이 가빴다. 오늘은 헬스 클럽이 한가한 모양이었다. 손님이라고는 달리 보이지가 않았다. 트레이너가 나오더니 말했다. " 대단하십니다. 철저하군요." " 뭘요." 한구석에 펀칭 백이 매달려 있었다. " 저걸 해야 할 텐데, 글러브 좀 내주시오." " 스피드 글러브가 있습니다만." " 그걸 빌려 주시오." 그가 갖고 온 글러브를 끼고 벽에 기댄 채 호흡을 고르고 팔에 힘이 돌기를 기다렸다. 그전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5분이 지나서야 백과 마주설 수 있게 되었다. 6인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힘차게 콤비네이션 펀치를 연달아 내보냈다. 왼쪽 두번, 오른쪽 한 번. 왼쪽 잽, 왼쪽 훅, 오른쪽 크로스, 왼쪽 잽, 왼쪽 잽……. 뒤로 물러나며 오른쪽 어퍼컷. 무거운 백을 어퍼컷으로 가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백에는 턱이 없다. 될 수 있는 한 힘을 기울여, 가능한 한 오래 백을 두들겨 팼다.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젖먹은 힘을 내쏟아 6인치 펀치를 계속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펀칭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상상을 못한다. 2분마다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대고 힘과 숨을 조절해야만 했다. 트레이너가 물었다. " 권투를 해보신 모양입니다. 맞지요 ? " " 약간." " 보면 압니다." 그가 말했다. " 대부분의 손님은 백을 손바닥으로 철썩거리거나 쿡쿡 찌르는 것이 고작이지요. 정말로 할 줄 아는 사람은 100명 중 하나 있을까 말까예요." " 그래요 ? " 다시 백으로 돌아가 왼주먹으로 치고 백을 꿰뚫기라도 하듯 교대로 잽과 훅을 퍼부어댔다. 땀이 얼굴을 거쳐 팔과 다리로 흘러내렸다. 셔츠가 물에 빠진 꼴이 되고 퐁퐁과도 같은 까만 점이 눈악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 소금 갖다드릴까요 ? " 트레이너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회색 T셔츠가 땀에 젖어 거무튀튀한 색으로 변했다. 팔과 다리로는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린다. 수염도 흥건히 젖었다. 백에서 물러나 벽에 기댔다. 가슴이 크게 파도치고, 양팔이 고무처럼 감각이 없어졌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져 내려 바닥에 앉아서는 양 무릎을 세우고 두 팔을 무릎에 얹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까만 점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스피드 글러브를 풀 때는 글러브가 땀으로 미끈거렸다. 일어나서 글러브를 트레이너에게 돌려주었다. " 잘 썼습니다." " 선생, 할 때는 무섭게 하시는군요." " 그렇소." 천천히 트레이닝 룸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로비를 지나갈 때, 몇 사람인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로비 바닥에는 8인치 사방 정도의 적갈색 돌이 깔려 있다. 방으로 돌아오자 에어컨을 세게 틀고 바늘 끝처럼 센 물보라 밑에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수전의 화장품이 아직 화장대 위에 있었다. 몸을 닦고 나서 감색과 흰 탱크 톱과 흰 슬랙스에 검은 구두를 신었다. 장농 위에 놓인 권총을 보았다. " 그대로 두자." 피곤하지만 상쾌한 몸에 권총을 지니고 싶지 않아 그 길로 바로 내려가 버번을 마시기 시작했다. 14 이튿날 아침, 8시 15분에 자살미수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부시시 잠을 깼다. 다른 하나의 침대는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8시 20분에 침대에서 나와 흐느적흐느적 욕실로 들어가, 아스피린을 두 알 먹고 또 샤워를 했다. 9시 15분에 굳은 몸을 움직여 느릿느릿 커피숍으로 내려가, 큰 잔으로 오렌지 주스 둘과 블랙 커피 석 잔을 마셨다. 10시 10분 전에 굳은 몸이 얼마간 풀리기는 했지만 역시 천천히 방으로 돌아와 응답 서비스에 전화를 걸었다. 절망적인 기분일 때도 습관 덕분에 어떻게든 일상생활의 규범에서는 벗어나지를 않는다. 팸 세퍼드로부터 전화가 있었는데 다시 걸겠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 긴급용무라고 하던데요, 스펜서 씨." " 고마워요, 릴리언. 다시 전화가 오거든 이 번호를 알려 줘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기다렸다. 10분 뒤에 벨이 울렸다. " 스펜서요." " 도움이 필요해요." 그녀가 말했다. "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 말씀하시지요." " 전화로는 싫어요. 당신을 직접 만나 이야기해야 됩니다. 나 정말로 겁먹고 있다고요. 달리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 알겠습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겠소." " 안돼요. 우린 벌써 그곳을 떠났어요. 프리머스 식물원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세요 ? " " 알고 있지요." " 그럼, 거기에서 만나요. 마을에서 내려오는 길로 오세요. 제가 당신을 찾아낼 테니까." " 알겠습니다. 곧 출발하죠. 점심때나 만나게 될 거요." " 그렇겠군요. 전 남의 눈에 뛰면 곤란해요. 나를 만나게 된다는 말, 아무에게도 하지 마세요. 그리고 누가 뒤를 밟나 살피시고." " 무슨 문제인지 힌트라도 줄 수 없소 ? " " 안돼요.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알게 될 거예요." " 가리다." 전화를 끊었다. 10시 30분이었다. 프리머스까지는 차로 30분이면 족하다. 장농에는 아직 수전의 옷가지가 들어 있다. 그 옷가지와 화장도구를 챙기러 올 것이다. 그것들을 내팽개치고 가다니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던 모양이다. 아마도 다른 모텔에서 묵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텔의 다른 방일 수도 있다. 한 시간쯤은 기다릴 여유가 있다. 혹시 한 시간 뒤에 옷을 가지러 올지도 모른다. 책상 서랍에서 편지지와 봉투를 꺼내어 간단한 글을 쓰고 그것을 봉해서 겉에 수전의 이름을 썼다. 욕실에 가서 수전의 화장품 케이스를 갖고 나와 책상 위에 놓았다. 케이스에 편지봉투를 세워놓고 욕실 옆 의자에 죽치고 앉았다. 11시 13분이 지나자 누군가가 문을 가만히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서 문 뒤에 몸을 숨겼다. 이번에는 열쇠를 끼우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문 경첩의 틈사이로 지켜보자니 방문이 열리고 수전이 걸어들어왔다. 로비에서 열쇠를 받아왔을 것이다. 아마도 갖고 있던 열쇠는 잃어버렸다고 했겠지. 편지가 놓여 있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자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벗어났다. 봉투를 뜯는 소리가 들린다. 편지지에는 ‘욕실에 당나귀가 숨어 있소. 그것이 다시 왕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미녀의 키스가 필요하다오’라고 써놓았다. 욕실에서 걸어나왔다. 수전이 편지를 놓고 이쪽으로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무표정하게 걸어와 내 입에 가볍게 쪽 소리를 내고는 한 발 물러나 나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 아무 효과가 없네. 당신은 여전히 바보스러운 당나귀라고요." " 방금 한 키스의 농도가 너무 약했다고." 내가 말했다. A" 당나귀를 미남자인 왕자로 환생시키자면 맹렬한 노력이 필요한 거야." " 다시 한 번 해보죠." 그녀는 내 목에 팔을 감고 내 입에다 힘이 들어간 키스를 했다. 키스가 자연스럽게 키스 이상의 행위로 옮겨가서는 오래지 않아 소리도 없이 절정을 맞고 나른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다시 입술을 더듬어온다. 눈을 떠 보니 수전은 아직 눈을 감고 있다. 내가 입술을 피하며 말했다. " 프리머스 식물원에 갈 생각 있나 ? "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 어디에라도 가지요. 당신은 아직 어리석은 당나귀지만 내 당나귀라니까." " 사랑해." 내가 말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한동안 내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얼굴을 들더니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왕자님. 프리머스에 갈래요." 두 사람이 난잡하게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정리하고 외출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 12시쯤이었다. " 늦겠는걸." 내가 말했다. " 나, 기를 쓰고 서두르는 거라고요." 수전은 화장대 위에 허리를 굽히고 거울을 보면서 입술에 루즈를 바르고 있었다. " 빨랐어." 내가 말했다. " 당나귀에서 미남자인 왕자로 환생하는데 30분 걸렸으니까. 빠른 변신이라고 할 수 있고말고." " 프리머스 식물원을 구경하러 가는데 꽤 서두르는군요. 관능적인 쾌락과 복원사적 중 어느 것을 골라야 한다면, 당신은 다른 선택을 할 걸로 생각했는데." " 거기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되어 있고 당신이 있으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선택방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쳐 생각해도 돼." " 준비가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방을 나와 내 차 쪽으로 갔다. 3호선으로 프리머스를 향해 달리면서 거기에 가는 이유를 하나하나 수전에게 설명했다. " 내가 함께라는 걸 알면 그 여자 당황하지 않을까 몰라. 혼자만 오라고 한 거 아니던가요 ? " " 꼭 그런 다짐을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하지. 내가 먼저 그녀를 만나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소개를 시키기로. 그러니 당신은 먼저 거기에 들어가 어슬렁거리도록 해요. 프리머스 식물원에는 가본 일 있나 ?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보다 악서 걷다가 내가 말을 걸 때까지 계속 서성거리도록 하라고." " 여자의 역할은 언제나 그런 거군요." 나는 신음소리 같은 것을 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왼쪽 표식판에 ‘프리머스 식물원 거리’라는 글씨가 보였기에 그 길로 들어섰다. 길은 구불구불 초원을 누비고 소나무숲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숲 저쪽에는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한켠에 입장권 판매소가 있다. 내가 차를 세우자 수전이 먼저 걸어가 입장권을 사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져서야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입장권 판매소 맞은편에는 전원풍의 건물이 있는데 그 안에 토산품가게며 식당 및 안내소가 있다. 그 건물 악을 지나 송림 속의 오솔길을 따라 식물원 쪽으로 걸어갔다. 몇 년 전엔가 나는 사뮤엘 엘리어트 모리슨의 대작인 미국사를 읽고 거기에 매료되어, 동부의 식민지 시대의 복원사적을 차로 둘러본 일이 있었다. 개중에서 윌리엄스 버그가 가장 번화하고, 스타브리지는 규모가 크지만, 프리머스 식물원은 언제 와 보아도 아늑한 안정감을 준다. 관리사무소 건물 옆에서 커브를 그리는 길을 따라가니 거무튀튀한 통나무로 된 방책(防柵)이 작은 마을을 둘러싸고, 그 저쪽에 바다가 보인다. 일대는 완전히 숲으로 둘러쌓여, 무심히 지나면 20세기의 찌꺼기를 하나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눈여겨 보자면 해안 저쪽으로 레스토랑이나 누군가의 모텔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곳에 오면, 늘 그렇지만, 어느덧 17세기 아메리카의 광야에서 살아간 독실했던 크리스천들의 세계로 녹아들고, 광대한 원시림 속에 극히 작은 존재로서 고립되어 살고 있었던 결의에 찬 사람들의 외로움을 그대로 느끼곤 한다. 방책 위 난간에 양팔을 올려놓고 마을터를 바라보고 있는 수전의 모습을 보자, 나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 방책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서 개척지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좁은 길이 한 가닥 바다를 향하여 내려가고 있다. 양쪽의 약초원 저쪽에 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이 있고 몇 마리의 가축과 당시의 의상을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 둘레에 온통 아이들이 몰려 있고 코닥 자동카메라가 판을 치고 있다. 팸 세퍼드가 나를 발견하고 미행자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끔 충분한 여유를 두고 천천히 언덕을 걸어내려갔다. 길 끝까지 가서는 방향을 돌려 오던 길을 다시 걸었다. 마일즈 스탠디슈의 옛집 악을 지나치려 했을 때 큼직한 선글라스를 낀 팸이 그 집에서 걸어나와 내 곁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 혼자군요." " 아니, 친구가 하나 있어요, 여자죠."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다. " 왜죠 ? " 눈을 크게 떴다. " 당신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고, 그 여자가 당신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기에. 아주 훌륭한 여자죠. 더구나 당신에게서 요즘 남성을 별로 믿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오." " 믿을 수 있는 분인가요 ? " " 물론이오." " 당신도 믿을 수 있을까요 ? " " 그야 물론이죠." " 그렇지 못하더라도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을 테지요. 안 그래요 ? " 군복처럼 여러 색깔이 어지러운 T셔츠 위에 색깔이 바랜 데님(denim)의 콤비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악서와 마찬가지로 막 샤워를 끝내고 화장을 한 사람처럼 정갈한 느낌을 풍겼다. " 그럴 테지. 어쨌거나 내 친구를 소개하고 나서, 셋이서 어딘가에 가서 음료수나 스낵을 먹으면서 그게 어떤 일이든간에 당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걸 들어보기로 합시다." 그녀는 금새라도 초가집 중 어느 집에라도 들어가 다락방에 몸을 숨길 듯한 기색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 좋아요. 하지만 누가 나를 보면 안되는데." " 누가 누구지 ? " " 누구든. 나를 아는 사람." " 알았어요. 수전과 일단 만나고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나는 문에서 방책 쪽으로 걸었고 팸 세퍼드는 나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듯 붙어 따라왔다. 언덕 꼭대기 가까운 곳에 수전 실버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니 미소를 지어 아는 척을 했다. " 팸 세퍼드." 내가 말했다. " 수전 실버맨." 수전이 손을 내밀며 생긋 웃었다. " 안녕하세요." 팸 세퍼드가 인사를 했다. " 자, 모두 차로 갑시다." 내가 말했다. 차에 올라타자 팸 세퍼드가 수전에게 말을 걸었다. " 당신도 탐정인가요, 수전 ? " " 아니오, 스미스필드 고등학교의 카운셀러예요." " 그래요 ? 흥미있는 일이겠네요." " 글쎄요." 수전이 말했다. " 판에 박은 듯해서 때로는 권태로울 때도 있지만 나에게는 적성이 맞나 봐요." " 나는 한번도 일자리를 가진 적이 없어요." 팸이 말했다. " 아이들과 내내 집에만 있었으니까." " 하지만 그것도 흥미있는 일이 틀림없겠네요." 수전이 말했다. " 때로는 귀찮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생활을 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 결혼 안 했나요 ? " " 지금은 혼자지요. 오래 전에 이혼을 했거든요." " 아이는 ? " 수전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펀치 레스토랑의 주차장에 차를 몰고 들어갔다. " 이 부근에 아는 사람은 ? " 팸에게 물었다. " 없어요." " 좋아요. 그렇다면 이곳은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겠지. 케이프로부터 사람들이 일부러 차를 타고 와서 찾을 가게는 아닌 것 같으니까." 이 식당은 조각 판자로 지붕을 한 2층 건물로 바다와 접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홀은 밝고 느낌이 좋았으며 탁 트인 것이 사람도 붐비지 않았다. 우리는 창가에 앉아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지는 양을 바라보았다.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수전은 마실 것은 싫다고 했다. 팸 세퍼드는 스팅거 온 더 록을 시켰다. 나는 생맥주를 주문했다. 생맥주는 준비된 것이 없다고 웨이트리스가 말한다. " 나는," 내가 말했다. " 인생이란 체념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소." 하이네켄이라면 있다고 웨이트리스가 말했다. 그것이라도 괜찮다고 내가 말했다. 메뉴는 생선 튀김이 대부분이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요리가 굉장했던 일도 있었다. 최소한 존 올덴 버거나 식민지건설단의 수프를 특선 메뉴로 들이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웨이트리스가 마실 것을 날라와서 식사주문을 받아갔다. 나는 하이네킨을 한 모금 마셨다. " 자, 세퍼드 부인. 그 이야기라는 것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까운 좌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스팅거를 찔끔 입에 댔다. " 나……, 난 살인사건에 말려들었어요." 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수전은 테이블 위에 두손을 모으고 조용히 앉아 있다. " 우리는……그곳……." 또 스팅거를 찔끔 마셨다. " 우리들이 뉴 베드포드의 은행에 강도질을 하러 들어갔다가 은행 경비원을, 얼굴이 불그레한 노인을……제인이 쏴 죽였지 뭐예요." 썰물 때인 모양이다. 레스토랑 가까운 물가에 해초, 유목과 가끔 쓰레기가 섞인 불규칙한 선이 만조시의 경계선을 남기고 조수가 후퇴하고 있다. 그런대로 뉴 베드퍼드 항구의 물보다는 한결 깨끗하다. " 어느 은행을 ? " 내가 물었다. " 브리스틀 시큐어리티. 켄프튼 대로에 있는……." " 당신의 얼굴을 똑똑히 본 사람은 ? " " 모르겠어요. 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니까." " 그것부터 벗어요." " 하지만……." " 벗으라니까. 그건 이제 변장용 소도구가 아니라 인상착의에 관한 단서라고요." 그녀가 엉겁결에 안경을 벗어 백에 넣었다. " 백 속에 넣지 말고 이리 줘요." 안경을 받아 수전 실버맨이 백 속에다 넣었다. " 여기를 나가거든 버리라고." "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 그럴 테지. 당신은 아직 강도짓이나 살인에는 경험이 부족할 테니까. 하지만 거듭하다 보면 익숙해질 겁니다." " 스펜서 ! " 수전이 나무랐다. " 나 정말 몰랐다고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 제인이 정말로 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따라갔을 뿐이에요. 그건……그 동안 그녀들에게 신세지기도 하고……나도……." 수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여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겠군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요." 웨이트리스가 수전의 게 샐러드, 팸의 바다가재 스튜, 내가 먹을 어부용(漁夫用) 잡탕을 날라왔다. 나는 맥주를 하나 더 주문했다. " 강도의 목적은 뭐였나요 ? " 수전이 물었다. " 우리는 총을 살 자금이 필요했던 거예요." " 별 뚱딴지 같은 소리 다 듣겠군." 내가 말했다. " 로즈와 제인이 어느 조직을……내 입으로 그걸 발설해서는 안되는데……." " 이봐요." 내가 말했다. " 생각나는 모든 걸 이야기해야 해요. 이 사건에서 바보스러운 자신을 건져내고 싶거든." 수전이 나에게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 그렇게 역정만 내지 말아요." 팸 세퍼드가 울상이 되었다. " 농담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 강도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꽃이라도 보낼 줄 알았소 ? 당신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소. 그 노인에게 노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할머니가 없기를 기도할 뿐이지. 그렇게 원하던 총을 입수하거든 할머니마저 해방시켜 줘야죠." 수전이 또 얼굴을 찡그렸다. " 스펜서, 저분은 충분히 후회를 하고 있다고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 아니, 그렇지 않아. 후회는커녕 아무것도 깊이 느끼지 않고 있어. 당신도 그래. 간단히 감정에 휩싸이고 마는 사람이어서 곧바로 팸의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지. ‘그 여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겠군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고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냐. 당신도 그냥 해보는 말이 틀림없다고." 나는 세차게 팸 세퍼드를 몰아세웠다. " 그래, 돈을 강탈하기 위해 총을 들고 그 은행에 들어갈 때 뭐 댄스 리사이틀에라도 가는 기분이었던가요 ? 돈을 강탈해서 빠져나오면 음악이 울려퍼지고 반죠가 흥을 돋우고 총탄은 그냥 액세서리 정도로 알았다, 그런 말인가요 ? " " 나는 새우를 두 동강이 냈다. 먹어 보니 버릴 맛도 아니다. 팸 세퍼드의 볼에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전은 나에 대해서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힐책을 하지는 않았다. " 알겠어요 ? 좋아, 거기서부터 시작합시다. 당신은 무지에서 엄청난 범죄에 가담했고, 그걸 내가 어떻게든 죄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의 신세를 졌다든가 비밀을 발설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둥,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식의 잠꼬대 같은 소리만 오고갔다가는 혼선만 빚을 뿐이죠" " 스펜서." 수전이 이를 악물은 채 저지했다. 나는 맥주로 목을 축이고 조개를 먹었다. " 자, 처음부터 숨기지 말고 모조리 이야기해요." " 힘이 되어 주시는 거죠 ? " 팸 세퍼드가 말했다. " 물론." 냅킨으로 눈물을 닦았다. 코를 훌쩍거렸다. 수전이 화장지를 한 장 건네주자 코를 풀었다. 아주 품위 있게. 내 접시에 있는 대구어 튀김이 눈에 뛰었다. 나는 그것을 프렌치 프라이 뒤쪽으로 밀어놓고 조개 튀김을 골라 먹었다. " 실은 로즈와 제인은 여성운동을 조직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우리들이 자신의 수동성을 극복해서 다른 동지들의 결의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지하조직을 본따서, 그것 때문에 총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로즈는 굳이 총기를 쓸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총을 지니고 있으면 심리적으로 대단히 큰 차이가 생기며, 투쟁의 강도를 끌어올리고 힘의 상징이 되거니와 남성 파워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고 제인은 주장을 했지요." " 남성 파워 ?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계속해요." "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했고, 다시 다른 여자들이 몇 사람 찾아와서 회의가 열리고 결국엔 총이나 총을 산 돈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지요. 총은 제인이 한 자루 갖고 있는 것이 전부였거든요. 로즈가 총보다는 돈을 강탈하는 것이 손쉽다고 말했고, 제인이 은행 종사원들은 평상시에 강도의 요구에 순응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으므로 은행돈을 강탈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 거라고 했어요. 은행은 보험에 들어 있으니까 크게 저항하지도 않을 것이고, 돈이 무더기로 있는 곳은 은행밖에 없으니까 은행으로 가자는 쪽으로 결정을 보았던 겁니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수전은 게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팸 세퍼드는 바다가재 스튜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보기에는 맛이 있어 보였다. " 로즈와 제인이 그 일을 자기들이 하겠다고 자원했지요." 그녀가 말했다. " 그러자 내가……. 왜 그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지만……, 함께 간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제인이 그건 환영할 일이라고, 내가 여성운동의 진짜 동지가 된 증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로즈가 은행이란 남성 및 자본가의 상징이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여자들 중의 하나가 · 10· 이름은 몰라요 · 10· 서아프리카계로 보이는 흑인여자가 자본주의 자체가 남성적이며 인종차별이 심하므로 은행은 이상적 공격목표라고 말했어요. 하여간 나는 내 입으로 함께 가겠다고 한 거예요." " 입당식이 되었군." 내가 말했다. 수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팸 세퍼드는 영문을 모르겠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쨌든 제인과 로즈,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선글라스에 큼직한 모자를 눌러쓰고 갔어요. 권총은 제인이 들고서." " 즐거운 일은 모두 제인이 맡아서 하는군." 내가 말했다. 수전이 나를 노려보았다. 팸 세퍼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 하여간 우리는 은행에 들어갔는데, 로즈와 제인이 카운터 쪽으로 갔고, 나는 출입구에 비켜섰지요……. 감시원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로즈가 카운터 너머의 여은행원에게 메모를 내밀고 제인이 권총을 슬쩍 보여 주었지요. 그러자 여은행원은 메모에 쓰인 대로 했어요. 거기에 있던 현금을 로즈가 건네준 자루 속에 긁어넣었지요. 일행이 뒤돌아나오려는데 그 바보스러운 노인이 우리를 멈추게 했던 거랍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몰라요. 무엇에 홀려 그런 위험한 짓을 했는지……." " 그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 바보 같은 노인. 무엇보다도 어째서 그런 노인이 은행경비원이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가요." " 아마도 정년퇴직한 전직 경찰이겠지요. 40년간 거리의 교차점에 서서 교통정리를 하다가 퇴직을 했지만 연금만 갖고는 부족했겠죠. 그래서 권총을 차고 은행에 고용되었을 거요." " 그런데 그런 노인이 왜 우리를 막아섰는지 모르겠어요. 제인이 권총을 내미는 걸 보았다고요. 그리고 은행 돈이 뭐 자기 건가요." " 막아서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강도가 없는 평상시에도 보수를 받고 있는 이상, 강도가 나타났으니 은행을 지키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이른바 신의의 문제일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런 거 통용되지 않아요. 그런 건 남성과시의 인습에 지나지 않아요. 그 때문에 그 노인은 살해당한 거예요. 그것도 무의미한 죽음을. 인생은 존 웨인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남성과시가 그 노인을 죽인 것은 아니오. 제인이 죽인 거지." "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대의를 위해 싸우는 거니까. 자유를 위해서요.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을 위해서도. 낡은 권의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고 우리들의 자유만이 아니라 당신들을 남성과시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 알겠소." 내가 가로막았다. " 경비원의 이야기는 그쯤 해둡시다." " 제인이 경비원을 쏜 다음 어떻게 했나요 ? " 하고 수전이 말했다. " 우리들은 도망쳤어요." 팸이 말했다. " 그레이스라고 하던가, 한번도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는 여자가 폭스바겐의 스테이션 웨곤을 갖고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태우고 먼젓번 그 집으로 돌아갔어요." " 중앙로에 있는 그 집 ? " 내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우리는 일단 흩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카메라에 찍혀 신원이 밝혀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집에는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요. 은행에 카메라가 두 대 설치되어 있다는 걸 로즈는 알고 있었어요. 나는 갈 만한 데가 없었기에 뉴 베드퍼드의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막 떠나는 버스에 올라탔는데 프리머스로 가는 버스였어요. 프리머스에 와본 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프리머스 식물원에 데리고 왔을 때뿐이었죠. 그래서 버스에서 내려 여기까지 걸어왔어요. 그리고 어찌해야 좋을지 악 일이 막연하여 저기 휴게소 스낵 바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갖고 있는 돈을 헤아려 보았지요. 당신이 준 100달러는 거의 모두 남아 있었는데 그때 지갑 속에 당신의 명함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화를 걸었던 거예요." 잠시 말을 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 나 자칫하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 뻔했어요. 하지만 그래서는 끝내 항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꼴이 되니 견딜 수 있어야지요. 당신에게 전화를 걸 때도 두 번이나 도중에서 그만두곤 했어요. 내가……지금 이 무서운 사태에서 벗어나는데 남자의 힘을 빌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 거죠. 하지만 당장 갈 곳도 없고 뾰족한 수도 없어서 전화를 걸고만 거예요……."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창밖을 내다보는 자세로 이야기했다. 그녀의 바다가재 스튜가 식어서 버터에 엷은 막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개척시대의 거리를 오락가락하고,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생각했어요. 나이 마흔셋이나 된 여자가 인생에서 최악의 트러블에 빠지고 나서, 단 한 번밖에 만난 일이 없는 남자 이외에는 전화를 걸 상대가 한 사람도 없다, 내 신세가……." 팸 세퍼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보다 깊숙히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린다. 내가 아까 보았을 때보다는 바닷물이 밀려와 물속에 잠겼던 검은 바위가 모습을 들어내고 파도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직 해질녁이 멀었는데도 주위는 어두컴컴했고 빗방울이 창에 번졌다. " 그런데 당신은 나를 구제불능의 어리석은 여자로만 몰아세워요." 입을 막고 있어 말소리가 탁했다. " 맞아요. 난 어리석다고요." 수전이 팸 세퍼드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 당신의 심정 이해가 가요." 수전이 말했다. " 하지만 이번 일은 스펜서 씨라면 대처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당신은 해야 된다고 느낀 일을 했고 지금은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가장 적합한 사람이 도와주려 하고 있어요.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은 백 번 잘한 일이에요. 이 사람이라면 처리할 수 있어요. 그는 당신을 정말로 바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여러 가지 다른 일로, 나에 관한 일과 자신의 일 등으로 속이 상해 당신에게 심한 말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이번 일에 틀림없이 도움을 줄 거예요." " 그렇다고 노인을 되살릴 수는 없잖아요." " 우리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는 않소." 내가 말했다. " 주변을 둘러보고 자기들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확인하려고 들지는 않소. 더구나 길 저쪽을 바라보며 무엇이 오는가를 보려고도 하지 않죠. 사실을 직시하되 억측도 하지 않아요. 단지 이 사건을 꿰뚫어볼 뿐, 만일 어떻게 하면이라든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가상은 입에 담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부딪쳐오는 사태에 그대로 대처할 뿐이오. 당신은 우선 머무를 곳이 필요한 거요. 다행히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어 내 아파트를 비워 두고 있어요. 그러니 거기에 가 있으면 돼요. 자, 그리로 갑시다." 웨이트리스에게 계산서를 갖고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 수전, 당신과 팸은 내 차에 타고 있어요. 여기 계산을 하고 갈 테니까." " 나 돈 갖고 있어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웨이트리스가 왔기에 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전과 팸이 일어나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계산을 하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액수의 · 10· 웨이트리스에게 인상을 심어 주면 곤란하기에 · 10· 팁을 놓고 두 사람을 따라 차 있는 곳으로 갔다. 15 프리머스에서 보스턴까지는 45분이 걸렸다. 3시 전후에는 더구나 통행량이 적다. 3시 15분에 말보로가의 아파트 악에 닿았다. 도중에 달리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팸 세퍼드로부터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로즈와 제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두 여자를 찾을 방도도 없다. 누가 돈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아마도 로즈가 지니고 있을 것이다. 각각 흩어진 다음에 뉴 베드퍼드의 ‘스텐더드 타임스’의 개인통신란에 광고를 내기로 했단다. 로즈와 제인이 어디에서 총기를 입수하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두 여자가 총기소지 허가증이라든가 FID카드를 갖고 있는지 어떤지도 알지를 못한다. " 아무 가게나 총포상에 가서 사면 안되나요 ? " 팸이 물었다. " 이 주(州)에서는 안되지." 두 여자가 어떤 종류의 총을 사려고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는 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많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처지다. 그룹 멤버 중에서 로즈, 제인, 그리고 그레이스 이외에는 그 누구의 이름도 모르고, 성을 알고 있는 것은 알렉산더뿐이다. " 이건 내가 한판 승부를 낼 만한 사건인걸." 내가 말했다. " 명확한 사실과 정보가 쌔고 쌨으니까. 그런데 당신 이름은 그것이 본명인가요 ? " 고개를 끄덕였다. " 광고의 문구는 ? " " 서로 헤어졌을 때 말인가요 ! 그냥 ‘자매들이여, 이리로 전화해’ · 10· 그리고 전화번호와 퍼스트 네임을 알리기로 되어 있어요." " 그걸 ‘스텐더드 타임스’에 낸다는 거군." " 개인통신란에." 차에서 내리자 팸이 말했다. " 어머, 깨끗한 곳이네요. 바로 저기가 코몬이군요." " 저곳은 퍼블릭 가든(Public Garden)이요. 코몬은 찰스 대로건너에 있고." 2층 정면의 내 아파트로 올라갔다. 내가 문을 열었다. 팸 세퍼드가 말했다. " 어머 ! 예쁜 방이네요. 정리도 잘되어 있고. 홀아비의 아파트라면 양말짝이 널려 있고 방구석에는 위스키 병이 나뒨굴거니와 쓰레기통에는 버릴 것이 넘치고 흐르는 줄 알았는데." " 청소를 해주는 사람이 오죠. 일주일에 한 번." " 멋진 방이에요. 저 나무 조각은 누가 한 거죠 ? " " 조각사도 오죠, 주일마다 한 번." " 거짓말이에요. 그가 만든 거랍니다." 수전이 말했다. " 멋지네요. 그리고 저 많은 책. 저 책 모두 읽었나요 ? " " 대개는. 입술이 지치겠는걸. 저기가 부엌. 먹을 것은 상당량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냉장고에." " 그리고 술도." 수전이 거들었다. " 그러니 먹을 것이 떨어져도 얼큰한 기분으로 굶어죽을 수 있지요." 나는 냉장고를 열어 암스텔을 한 병 꺼냈다. " 무엇 좀 마시겠소 ? " 수전과 팸은 싫다고 했다. 나는 뚜껑을 따고 맥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 냉장고에는 빵, 치즈, 계란이 들어 있어요. 그리고 상당량의 고기도 있소, 레벨이 붙은. 그밖에 시리아식의 빵도 있고 커피는 찬장에 있소." 찬장 문을 열어 보였다. " 피넛 버터, 쌀, 토마토 통조림, 밀가루, 야채 등은 곧 사오도록 하지. 그밖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쪽지에 적도록 해요." 욕실과 침실을 안내했다. " 시트는 새 것이요. 가정부가 매주 한 번 바꾸는데 마침 어제 다녀갔소. 옷가지나 일용품이 필요할 텐데 ? "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식료품, 의류, 화장품 기타 필요한 걸 종이에 적어 주면 나와 수전이 사오리다." 메모지와 연필을 갖다주었다. 팸이 부엌 카운터에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적고 있는 동안에 등뒤에서 내가 말했다. " 우리가 나가면 꼼짝도 말아야 합니다. 벨이 울려도 응답을 하지 말고. 열쇠는 수전과 내가 갖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은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 때문에 문을 열어 줄 필요도 없고, 여기에 용무가 있어 찾아올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물론 외출은 안돼요." " 당신은 어떻게 할 참인가요 ? " " 아직은 모르겠소. 좀 생각해 봐야지." " 마실 것이 생각나네요." " 오케이. 뭘 드릴까 ? " " 스카치를 약간 물에 타서." " 좋소." 어름을 많이, 스카치도 많이 붓고 물은 조금 탔다. 리스트를 작성하며 팸이 그것을 홀짝거렸다. 리스트를 건네줄 때 돈도 함께 건네주려고 했다. " 넣어두시오. 언제 필요할지 모를 테니까. 비용은 계산해 두었다가 사건이 모두 해결되고 난 뒤에 일괄 청구하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 스카치를 더 마시고 싶으면 있는 곳을 알았을 테니까 마음대로 마시도록 해요." 수전과 나는 물건을 사러 외출했다. 보스턴 가의 프로덴셜 센터에서 일단 헤어졌다. 나는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의류와 화장품을 사러 쇼핑 몰로 갔다. 나는 그녀보다 장보기가 일찍 끝나 잠시 동안 아트라스인지 프로메테우스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상이 서 있는 광장을 서성거렸다. 건너 쪽에 액션영화를 두 편 동시상영하는 영화관이 있다 · 10· ‘미스 존스 몸 속의 악마’와 ‘디프 슬로트’를 상영하고 있다. 이제 옛날과 같은 영화는 만들지 않는다. 켄 메이너드와 명마 타잔은 어떻게 되었을까 ? 다시 석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장난으로 미켈란젤로의 흉내를 내본 것인데 사람들이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고 저기에 그 석상을 세운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켄 메이너드는 정말로 타잔이라는 명마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 가령 켄이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면 그의 명마 대신에 아마도 부르스라는 이름의 괴물을 타고 다녀야 관객의 직성이 풀릴 것이다. 브래지어 없이 흰 T셔츠를 입은 젊은 여자가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 T셔츠에 ‘몬태나주 글레이트 폴즈, 토니즈 PX’라는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쪽에서 수전이 알록달록한 쇼핑백을 여러 개 안고 걸어 오고 있었다. " 저 여자가 용의자라도 되나요 ? "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 알겠어 ? 나는 면허가 있는 탐정이라고. 저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표준 사이즈가 되는지 살펴보고 있었단 말이야." " 그래서요 ? " " 표준은 안될 것 같아." 식료품과 수전의 짐을 하나 덜어들고 차 쪽으로 향했다. 아파트에 돌아와 보니 팸 세퍼드가 창가에 앉아 말보로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아 술을 약간 더 마셨을 뿐, 달리 한 일은 없는 것 같다. 5시가 되었기에 내가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수전이 팸의 술 상대를 하기로 했다. 나는 럼 카틀렛용으로 사두었던 럼 스테이크를 두드려 부드럽게 했다. 밀가루를 볶아 계란을 반죽하고 빵가루를 입혀 불에 지졌다. 주리아 차일드가 요리시간에 말하는 것처럼 겉이 꾸들꾸들해질 때쯤에 불을 끄고, 감자 껍데기를 벗기기 시작했다. 작은 계란형으로 다듬는데 시간이 약간 걸렸는데 그것을 기름에 넣고 다색이 될 때까지 이리저리 굴렸다. 다음에는 다른 프라이팬으로 카틀렛을 시작했다. 감자가 고루 다색으로 익자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줄였다. 그리고 카틀렛 역시 노랗게 익자 기름을 빼고 포도주와 신선한 박하를 가미하여 불을 세게 했다. 수전이 두 사람분의 술을 따르러 한 차례 부엌에 들렀다. 페더 치즈와 잘 익은 올리브로 그리이스식의 샐러드를 만들고, 럼 카틀렛을 집어내어 와인을 넣고 조리고 있는 동안 수전이 식탁준비를 했다. 불을 끄고는 소금기가 없는 버터를 한 덩어리 농축 와인에 넣고 잘 저어 카틀렛에 얹었다. 따뜻하게 덥힌 시리아식의 빵과 캘리포니아산 바 건디 반 갤론으로 식사를 했다. 팸 세퍼드가 아주 맛이 있다며 요리솝씨를 칭찬했다. " 나는 원래 요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팸이 말했다. " 어릴 때에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거든요. 옷이 더러워진다고요. 그래서 결혼했을 때는 요리가 서툴 수밖에 없었지요." " 나 역시 결혼했을 때는 제대로 할 줄 아는 요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수전이 말했다. " 허비가 가르쳐 주었지요." 팸이 말했다. " 그는 요리에 재주가 있거든요. 하지만……." 어깨를 추스렸다. " 요리란 아내의 일이지요. 그래서 내가 했지요.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좋아하는 걸 그만두다니 정말 묘하잖아요. 단순한 인습이나, 자기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상관없이 단순한 인습이나 사람들이 정해놓은 것을 따라야 하는 거 말이에요." " 더구나 대개의 경우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각이기도 하지요." 수전이 말했다. " 요컨대 사물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에다 바탕을 두고 있는가 ? 인습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존재하는가 ? " 나는 바건디를 한 모금 마셨다. " 잘 모르겠어요." 팸이 말했다. " 옛날부터 있었던 논쟁거리지요." 수전이 말했다. " 자연 대 본질. 자기가 지금의 자기인 것은 환경 탓이냐, 유전 탓이냐 ? 인간이 역사를 만드느냐, 역사가 인간을 만드느냐 ? " 팸 세퍼드가 피식 웃었다. " 알겠어요. 자연과 본질, 。아동의 생육과 발달。 103판(版). 잘은 모르지만 나는 자기가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틀 속에 틀어박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와인을 마시자 잔을 병 쪽으로 내밀었다. 아직 완전한 여권신장 운동가는 아니다. 완전한 운동가라면 스스로 와인을 따를 것이다. 아니면 반 개론의 술병이 무거워서 그런지도 모른다. 내민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글라스 속의 와인을 들여다보았다. " 들어가고 싶지 않은 틀 ? " 수전이 물었다. " 그래요, 허비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녀가 말했다. " 구석으로 쑤셔넣어졌나요 ? " 수전이 물었다. " 그래요." 팸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나도 한 모금 마셨다. " 성공이라는 틀에 틀어박히고 말았지요." " 돈 ? " 수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아니, 그것만은 아니에요. 돈이 목적의 전부가 아니에요. 그것보다 중요한 영향력이 있는 인간이 되는 것, 일에 정통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는 거 말이에요. 무엇인가를 움직이고 흔들 수 있는 인간. 돈에 관해서는 돈으로 성공의 척도가 입증된다는 것 이외에는 그렇게 강한 관심은 갖고 있지 않았어요. 지금의 내 이야기, 횡설수설이지요 ? " " 그래요, 축구팀의 일원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만." " 당신이라면 당연하죠." 수전이 말했다. " 당신은 그런 사람인가요 ? " 팸 세퍼드가 물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수전이 말했다. " 그래요. 그는 그런 인간이라고요. 좀 색다른 면에서." 팸 세퍼드가 말했다. "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는데. 하기야 나는 이분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수전이 미소를 지었다. "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지만, 그렇다고 할 만도 하지요.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어도." " 나는 대체 뭐란 말이지. 꾸어 온 보릿자루인가 ?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데 둘이서 나에 관해서 왈가왈부하다니." " 당신은 오늘 아침 자신에 관해서 아주 적절하게 표현을 했다고 생각해요." " 당신이 그 정열적인 키스로 나를 질식시키기 전인가, 후인가 ? " " 훨씬 전이에요." " 허 ! " 팸 세퍼드가 말했다. " 당신은 어째서 시합에 참가하지 않지요 ? 팀의 일원인지 스타인지는 모르지만, 허비나 그의 친구들이 되고자 하는 것이 되기 위해 왜 힘을 짜내고 땀을 흘리려 하지 않지요 ? " " 간단히는 설명할 수 없소. 그건 대답하기에 낯간지러운 질문인걸. 왜냐하면 성실이라든가 자존심이라든가 존 웨인의 영화에 담겨져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오. 예를 들어 명예 같은 거. 나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듣고 있는 것이 쑥스러운 문구라는 건 알고 있소. 말하는 나도 낯간지러니까. 하지만 나는 소로우(Henry David Thorea : 1817。1862, 미국의 수필가, 사상가)가 주장한 넌센스의 대부분은 믿고 있지. 더구나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하는데 오랫동안 노력을 해왔어요.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의 생각에 바탕을 두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말이오." " 소로우 ? " 팸 세퍼드가 말했다. " 그 많은 책을 다 읽은 거군요 ? " " 더군다나," 수전이 말했다. " 당신은 끊임없이 남의 생활이나 남의 트러블에 휩쓸리고 있어요. 당신이 끌어다가 뒤집어쓰고 있는 이 생활은 월든 연못가의 생활이 아니에요." 나는 어깨를 추스렸다. 모든 걸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 인간이란 누구나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 그러나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뭔가 위험을 수반하지 않나요 ? " 팸 세퍼드가 말했다. " 그야, 때로는." " 저 양반은 그걸 좋아한답니다." 수전이 말했다. " 건장하다는 것이 대단한 자랑이라고요. 그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늘 하고 있는 일의 태반은 다른 사나이에 대해서 자신을 시험해 보는 일이에요. 스스로가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가를 입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경쟁이지요. 축구나 마찬가지예요." " 사실인가요 ? " 팸 세퍼드가 나에게 물었다. "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일에 수반되는 요소니까." " 그러나 당신이 선택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수전이 말했다. " 선택의 여지를 남겨주는 일이지." " 더구나 그 일이 당신을 여러 가지로부터 떼어놓고 있어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가족, 가정, 결혼으로부터 절연시키고 있단 말이에요." "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 그럴지도 모르지가 아니에요." 수전이 말했다. " 자주, 자율의 생활이라고요. 당신은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자주적인 사람이고, 그 생활 속에는 그 무엇도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요. 이따금 당신이 단련하는 그 근육은 방패나 갑옷과 같은 것이어서 당신은 그 속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완전히 신성, 불가침이어서 사랑에 대해서조차도 여지를 내주지 않는 폐쇄된 생활이란 말이에요." " 우리, 허비 세퍼드의 이야기에서 상당히 이야기가 빗나간 것 같군, 수전." 나는 오랫동안 얕은 숨을 헐떡이다가 심호흡을 필요로 하는 그런 기분이 되었다. " 그렇게까지 빗나가지는 않았어요." 수전이 말했다. " 팸의 남편이 들어가 있는 그 틀 속에 당신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그분은 각오를 하고서 위험을 무릅썼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결혼했고 아이도 가졌어요. 사랑과 부부관계에서 생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에 수반되는 타협의 필요성이라는 위험을 과감하게 헤쳐왔다고요." " 그러나 나는 허비가 우리를 위해서 일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수전." 팸 세퍼드가 말했다. " 아마도 그렇게 간단히 단정할 수는 없겠지." 내가 말했다. " 그처럼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소. 우리를 위해서 일했다느니, 그 자신을 위해 일했다느니 하고." " 어쨌든," 팸 세퍼드가 말했다. "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건 확실해요." " 가끔 나는 무슨 일에는 명확한 차이점이라는 것이 없으며 A란, B란에 분명히 구분해서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내가 말했다. " 혹시 그는 당신을 위하여 어느 부류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알 수 없어요. 당신이 거기에 해당하는 인간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는 사나이다움을 의미했고,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 또 남성과시군요." 팸이 말했다. " 그야. 하지만 남성과시는 강간이나 살인의 대명사가 아니에요. 남성과시라는 것은 사실 그 진정한 의미가 명예 있는 행동을 지칭하고 있는 거요." " 그렇다면 그것이 왜 이따금 폭력행위와 통할까요 ? " " 폭력행위에 통하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가령 그렇다고 하면 폭력행위라는 것은 명예를 유지할 수가 있는 분야인지도 모르지요." " 넌센스군요." 팸 세퍼드가 말했다. " 인간은 무풍지대에서는 고결해질 수가 없는 거지요. 곤란할 때에 비로소 고결할 수가 있는 겁니다." " 사태가 거칠어지면 거친 인간만이 악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요 ? " 경멸의 빛을 역력히 드러내며 팸 세퍼드가 말했다. " 마치 닉슨과 같은 논법이군요." 나는 데이비드 프라이의 표정을 흉내내 보였다. " 나는 악인이 아니로소이다." 하며 교활한 표정을 지었다. " 아아, 나는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알고 있는 것은 잘되지 않았다는 것뿐. 허비도 아이들도, 가정도, 사업도, 클럽도, 나이를 먹는 것도 모두가 실패로 끝난 거예요." " 맞아요." 내가 말했다. "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는 겁니다." 그녀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