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변모시켜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약속입니다. " ● ‥‥‥라즈니쉬는 또 이렇게 말했다. "고행 따위는 하지 마라! 각성한 의식을 갖고 행한다면 성에의 탐닉과 쾌락의 충족은 진실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성적 쾌락을 통해서 사람은 진정 정신적 초월을 실천할 수 있다. " ●‥‥‥:엔카운터 그룹'의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집착력을 없애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하는 애인이 다른 사람과 섹스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봐야만 했다. 라즈니쉬는 항상 사랑과 소유욕을 분리시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면 자신의 애인이 타인과 섹스를 즐기는 광경을 보고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실험을 이겨내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였다. 실험 중에 도발자 자기 애인과 섹스하는 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관찰자(자기)가 폭발시키는 분노로 폭행을 당하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라즈니쉬의 재능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라즈니쉬를 상대하지 않았으며 라즈니쉬가 '바그완'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심한 경멸을 보냈다. 신도 아닌 인간이 그런 경외 스러운 극존칭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였다. 아무튼 크리슈나무르티는 디크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는 범죄자입니다. 그가 영성(靈性)이란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지금까지의 행동들은 명백한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 이 말은 곧 라즈니쉬가 법을 어겼다는 뜻이 아니라 그동안 최면술과 영적 능력을 교묘히 악용해 왔다는 지적이었다. 타·락·한·神 차 례 제1장 봄베이로 가는 길 21 제2장 바그완과의 만남 · 43 제3장 아부산의 명상캠프 · 63 제4장 성역(聖域)과 성역(性域) 사이 · 79 제 5장 천국과 지옥의 카일라쉬 · 90 제6장 푸나 시대의 개막 · 105 제7장 푸나 아쉬람의 비밀 · 126 제 8장 매춘과 마약의 산냐시들 · 141 제9장 바그완의 '엔젤' · 159 제 10장 푸나 최후의 나날들 · 169 제 11장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 · 183 제 12장 약속의 땅,배반의 땅 · 1% 제 13장 '섹스 교주 고 홈 !'· 209 제 14장 라즈니쉬푸람의 허상 · 223 제 15장 바그완과의 결별 · 235 제16장 신기루의 끝 · 215 제 17장 종 말 · 269 역자 후기 · 286 제1장 봄베이로 가는 길 1 ) 친근 내가 바그완을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3월 31일 봄베이의 작은 맨 얘서였다. 몇 안되는 가구가 보기 좋게 배치된 청결한 방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마치 마음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if새 영혼의 아버지,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인간, 인생 본래의 의뭐? 耉달은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마법에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경외로움에 빠져 흥분상태에 이르렀고 곧이어 바그완 자체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태어난 이래 최초의 경험이었다. 깨끗하게 매니큐어를 칠한 갈색의 화사한 손가락이 내 손을 잡는 양 나는 별세계에 있는 나 자신을 느꼈다.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그로 聃 흘러나오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 나는 이 완전히 독특한 존재로부터 뿜어져 나오 導비의 대해(大海)를 표류하고 있었다. -다르샨(Darshan)이라고 불리는 이 만남의 순간, 시간은 정지하고 거畿다. 나의 마음은 우주로 날아 오르고 모든 걱정은 사라졌다. 그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내 동경의 종착점이고 성취해야 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단지 그가 내준 음식을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오렌지색의 로브를 입도록 하라고 말한 바그완은 "오늘은 너의 새로운 탄생일이다. 과거는 씻겨져 가버렸다. 따라서 앞으로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고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런던 출신의 정골의(整骨匿)인 '휴 밀른'이라는 평범한 나는 스와미 시바무르티(Swami Shivamurti :힌두교의 최고쳔인 시바와 같은 자라는 의미)가 되었다. 이미 이 시점부터 나는 그를 향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런던에서 바그완의 소문을 접하고 그의 강론을 카세트로 들었던 나는 이 인물과 만날 필요가 있음을 직감했었다. 봄베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앞으로 몇 일, 몇 개월, 또는 몇 년이란 세월을 인도에서 체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라즈니쉬가 시키는 대로 6주 정도 체재하고 일단 영국에 돌아갔다가 5개월 후에 다시 찾아오기로 했다. 왜 라즈니쉬란 사나이와 그의 가르침이 나와 수많은 서양인들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주게 되었는가?그 해답의 일부는 60년대 후반으로부터 70년대 전반에 걸쳐 세상을 풍미했던 성적(性的) ·사회적 풍조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프리섹스'의 교리를 내걸고 라즈니쉬가 등장한 시점은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이 억압적인 사회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시대였다. 당시는 자유를 요구하는 수많은 물결이 도처에서 일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 했곤 부모와 조부의 세대로부터 답습된 것이 아닌 자신의 기분에 맞아떨어지는 라이프 스타일을 찾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였던 우리들은 감정을 자유롭게 발산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감정을 억눌러 참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구가하고 싶었다. 60년대의 표현법으로 말하자면 내키는 대로 하겠다'는 식이었다. 70년대엔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던 우리들 대부분은 성의 자유를 추구하고 나섰다. 피임약이 대량으로 나돌게 된 60년대 중반 이후 마침내 섹스를 생식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청교도주의와 시대에 뒤떨어진 도덕을 완전히 철폐하고 자유롭게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황금시대의 전망이 열렸던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탐구하려는 욕구도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바그완이 우리들에게 보여줬던 가르침은 이것들을 완벽』하게 겸비한 것이었다. 그는 섹스야말로 사람을 영적인 깨달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매개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섹스에 빠질 수 있는 권리가 우리들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나와 같은 많은 젊은이들이 이 운동에 커다란 매력을 느낀 큰 하나의 이유는 바그완을 따르는 초기의 여성신자들 때문이며 그녀들은 젊고 매력이 넘쳤으며 무척 선정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인도인인 바그완이 섹스와 노출에 유달리 민감한 나라에서 프리섹』스를 주장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매력의 핵심이었다. 그것은 효과가 빨라 마약처럼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했다. "고행 따위는 하지 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각성한 의식을 갖고 행하는 한, 성에의 탐닉과 쾌락의 충족은 진실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성적 쾌락을 통해서 사람은 진정 정신적 초월을 행할 수 있게 된다. " 나는 어릴 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내 속에 도사리고 있어 끊임없이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느낄은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그것을 백일몽이나 공상으로 간주하여 마음의 한구석으로 밀어버린다. 그러나 내 속의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날: 수록 강해지기만 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 했다. "나와 함께 춤추자.그러면 네게 놀랄 만한 선물을 주겠어.사실 그 선물은 이미 너의 것이지만 너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 선물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이 항상 나의 마음속을 지배했다. 나는 19:H년 에딘버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내가 태어났을 때 모두 학생신분으로서 가정을 이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내가 바그완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난 뒤 몇년이 지난 후, 아버지는 내게 "사실은 네가 태어나지 않기를 원했다. "고 솔직히 고백했다. 내가 어렸을 때의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신문으로 얼굴을 덮고 있길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빨강머리의 귀찮은 자식들로부터 자신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태도는 우리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함께 놀아주기를 바랐고 웃어주기를 원했으며 아버지를 좀더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동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나는 형제들과 자주 다투었는데 6세가 되던 어느날 아버지는 유독 나를 불러 형제들의 모범이 되라고 심하게 꾸짖었다. 그때의 상처로 말미암아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며 혼자서 사색하기를 좋아하다가 어린 시절을 빨리 앞당기고 남들보다 먼저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소음을 전혀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소란을 일으키◎ 아이는 저녁식탁에서 쫓아버렸다. 나는 지금도 밖에 쫓겨나 쓰레기통 뚜껑 위에 앉아서 밥을 먹던 일이 가끔 기억나곤 한다. 나는 학교가 쉬는 날이면 아버지에 의해 목가적인 스코틀랜드 저지대에 있는 양친 친구의 농가로 쫓겨났다. 거기서 자연과 가축,야생 동물과 친하게 지냈으며 하늘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게 되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그림자는 나의 꿈에 영감을 부여해 주었고 그 산의 정상에는 바이킹의 묘와 로마제국 시대의 성채 흔적도 있었다. 어렸던 나로선 바이킹과 로마인이 영국으로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 옛날의 일이라곤 실감할 수 없었다. 지금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듯했다. 전쟁의 흔적은 너무나 생생했고 나의 휴(Hugh)라는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아버지 친구』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내 어린시절에는 아직 식량배급제도가 강제적으로 시행되었고 징병제도도 남아있었지만 군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18세가 되기 전에 징병제는 폐지되어 군대에1 가지 않게 되었다. 야간 폭격기의 비행사였던 아버지는 많은 친구들을 전쟁터에서 잃고 그 역시 마음 한구석에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편한 구석만 찾았다. 자신이 진료소를 열지 않고 조부의 진료소에서 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 젊었을 때 이미 위험한 일을 충분히 겪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무리 봐도 우울한 아버지였으며 자기의 마음을 열어놓은 법이 없었다. 내가 만난 바그완은 모든 점에서 아버지와 정반대였다. 그에 비해서 어머니는 매우 적극적이고 모성적이며 항상 협조하는 타입의 여성 이었다. 양친은 나를 슈타이너 학교(독일의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가르침에 따라 운영되는 학교)에 다니게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한쪽 팔을 잃은 완고한 노인이 우리들의 담임선생님이었는데, 항상 우리들에게 자신있게 행동하라고 가르쳤고 남에게 불평불만을 전가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어릴 때의 나는 자신이 언덕에 사는 현자라든가 철학자라든가 성인이 되어있는 불가사의한 꿈을 자주 꾸었다. 아마 그것은 인도인이 말하는 전생(前生)의 기억이었는지도 몰랐다. 또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되고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13세 때 나는 작문시간에 자라서 철학자가 되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동급생 대부분은 운전사나 근위병이 되고 싶다는 글을 썼었다. 선생님은 나의 작문을 모두에게 들려주고 동료 선생님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작문은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왠지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 마음속의 비밀이 훤히 드러난 듯한‥‥‥ 느낌이었다. 철학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표명했으나 당시 나는 더 이상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느날 선생님은 나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이렇게 말했다. "자, 휴야. 대학은 네게 맞지 않아. 너는 그런 타입이 아니야. 정원·사라든가 그런 일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너를 상급학교에 추천하지 않을 작정이야. 지금 성적으론 어쩔 수 없거든." 선생님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2년이면 졸업이다. 그러면 네게 맞는 일이 생길 거야. 네 보람은 거기서 찾아질 거야." 나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꼈다. 내게 어떤 재능이 숨겨져 있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단 말인가? 정원사만은 죽어도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잔금이 간 손톱, 지저분한 손, 최저의 임금 등 60년대 초기의 그 직업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시험을 치고 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대학에 가고 싶은 거야. 비행기 조종사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뛰머난 사람이 되고 싶단 말야!' 집에 돌아와서 나는 선생님께 들은 말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불을 보듯 분명했다. 반에서 나의 성적은 실로 바닥권이었다. 대부분의 과목에서 꼴찌였던 것이다. 그래도 나亐 분개하였다. 선생님은 왜 나의 마음을 그토록 몰라주실까?내게 숨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왜 몰라주실까? 이미 슈타이너 학교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딘버러의 사립학교로 전학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지만, 거주지 중학교라 입학이 가능했다. 그곳은 시설이 엉망인 신설학교로서 교정에선 항상 민극이 벌어지기로 유명했다. 때로는 칼부림이 일어날 정도로 대단히 위험한 곳이었지만 나는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드디어 1학년으로 들어가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3년만에 나의 성적표에는 내가 필요로 했던 0가 다섯 개나 연이었고 1년 후에는 마침내 대학입학에 필수인 A가 매겨졌다. 그러나 나는 유명 대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대신 열심히 공부하여 런던의 정골 骨)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라는 주장을 고수하였으므로 내가 대학에 다니는 중에도 경제적인 지원은 전혀 해주지 않았다. 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대학 4학년 때 나는 런던에 있는 아비스 트럭의 렌탈담당 매니저 대리가 되었다. 덕분에 내 차를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이 되었으므로 경주용 엔진과 와이드휠을 증가한 로터스엘란을 타고 통학했다. 대학에서 보낸 수년동안 나는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 (유명한 철학자)와 구르디예프(Gurdiiev .러시아의 신비주의 철학자) 등 은 정신적 스승의 가르침에 접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에는 훌륭한 교수들이 몇 분 계셨고 일반적인 해부학과 병리학 강의 사이에' 형이상학 수업을 끼워넣어 우리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정골이란 대체의료의 한 분야로 관절, 뼈에 이상이 생기면 물리 등을 취급하는 의술이다. 뛰어난 정골의는 골격과 근육조직에 대한 것도 고려하지만, 치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데는 오히려 직관 쪽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내가 정골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당시 아직 정골은 정통적인 의료姜 인정받지 못한 시절이었으며,국가의 공공의료 서비스로 인정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당시 정골대학에는 재미있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재학힛 1967년부터 1971년 사이의 대학은 새로운 인간의 존재방식과 생활방식을 구하기 위한 실험장이었다. 내가 다니던 과에는 여자가 3명 있었는 데 그중 한명의 남편은 런던에서 최초로 채식(菜食) 레스토랑을 연 선3자였다. 또 금욕과 고행생활을 하는 수피(Sufi)도 있었다. 그리고 3학1 때에는 LSD(환각제)가 등장하여 거의 전원이 시험해 보기도 했다. 자기변혁에 대해 특히 흥미를 갖고 있었지만, 나 자신은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의식의 차원을 높이고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시대의 분위기로 말미암아 정신에 대한 나의 관심은 더욱 높아져 갔고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인생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 느꼈다. 혼시 미술대학에서는 학생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1968년에는 파리에서 그 유명한 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시가에서는 유혈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느껴졌다. 교육제도가 붕괴되고 보다 우수한 새로운 체제가 속속 등장하는 듯 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학생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졸업을 거부하려 했던 학생이 셋 있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한 선배 강사는 "규칙은 따라야 한다. "고 충고하면서도 "때에 따라」 그 규칙이라는 놈은 가치가 없지만 말야!" 하고 덧붙였다. 결국 우리 셋은 정골협회의 멤버로서 인정받긴 했지만 다른 학생들"보다 반년이나 지난 후에야 졸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무렵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본 나는 태어난 이래 당연시 하고 넘어갔던 여러가지 신념을 다시 생각해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검토해 보았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해 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어린시절보다 더욱 친밀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조금 호전되자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시골길을 오랫동안 산보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지, 왜 !6세의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지 내게 말하려 했다. 어머니의 일생은 가족들의 생활을 위한 중노동과 4명의 x 을 기르는 데 바쳐졌던 것이다. 결코 자신의 불행을 입밖에 내지 않았던 어머니는 수술받기를 거분하였고 자연요법으로 대처하려고 했다. 수면◎와 진통제를 받아들이는 것조차 싫어했다. 남들 앞에 비친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용기에 차 있었다. 나는 나의 신념을 재검토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신념의 대부분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수련기간을 마치고 런던 근교의 진료소에서 일하면서 나는 내게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환자 상담에 임하는 순간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정통적인 방법도 사용하였지만, 예상밖으로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직관적 능력의 덕택이었다. 대학졸업 후 1년 반쯤 되자 나의 수입은 졸업 후 5년이 된 사람의 수입보다 훨씬 많아 나는 로터스 스포츠 와 혼다 오토바이 그리고 옥스포드주에 집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로운 생활 속에서도 은밀한 내면의 소리가 끊임없이 강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너는 평생을 이런 식으로만 보내고 싶은거야? 내게 직관적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몸에 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친구들이 LSD 등의 약을 통해 체험했던 그 은밀한 공간, 마음의 평화, 초월적 감각을 어떻게 하면 발견할 수 있을까?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수피의 명상을 하면서 당시의 대중지가 단애무'라 불렀던 캘리포니아의 세라피그룹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마음의 근저에 있는 모든 것을 찾겠다고 결심한 나는 그 이후 일년 반동안 '인간성 심리학 그룹'(Humanistic Psychology Group)과 '엔카운터 그룹'(Encounter Group)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운동에 참가했다. 이러한 그룹운동은 駱년대 후반부터 성행했지만 현재는 세력을 잃고 없어져버린 것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잠시 설명해 두겠다. '인간성 심리학'이란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이론에 근거를 두고 발달한 심리학의 한 분야다. 매슬로우의 개념은 모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그것은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70년대 초에 싹트기 시작한 영국과 미국에서의 이른바 '성장'(Growth)센터들은 일반인들이 참가해 자기탐구를 하거나 자기의 욕구를 억제하는 데서 생겨나는 마음의 불안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적의 (敵意)를 알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들의 핵심 논리는 '낡은 심리적 방어를 벗어 던지면 보다 자유롭고 자기답게 살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인간성 심리학에서 출발한 '엔카운터 그룹'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칼 로저스가 '나의 시대'(me-decade)라고 명명한 시기에 번성했다. 칼 로저스가 시작한 이 그룹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자아발견의 여행을 통해 사람은 사회로부터 강제된 여러가지 가면을 전문가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벗겨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엔 카운터 그룹의 프로그램 중에는 연속해서 48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결국 편안하게 자신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엔카운터 그룹을 오싹할 정도로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것은 아직 자기 자신과 타인의 적의에서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EST(Erhart Seminar Training)도 역시 미국에서 개발된 '자신을 열기 위한 세라피였다. EST의 창시자는 워너 에어하트(Warner Erhart)라는 비즈니스맨으로서 그는 70년대 중에 바그완을 만나러 푸나를 ㅂ- 하기도 했다. 이 세션의 목적은 사람들이 선입관의 집착과 기대, 신U 에 潔매여 괴로워하는 원인을 봐혀내는 데 있다. 그 트레이닝은 2주에 걸쳐 총 60시간 동안 행해졌곤 참가자는 그 시간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치부를 조용히 앉아서 듣고 있어야만 했다. 세션중 참가자는 화장실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이른바 '소변 없는 훈련1(no-piss trainir으로도 유명했다. 나는 라이히파(派)의 바디워크(bodywork)에도 참가했다. 프로이트 제자였던 빌헬름 라이히는 성적 욕구의 억제와 오르가즘의 빈약함이 신의 응어리를 만들어 내고, 더 나가서는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성적 오르가즘을 통해 해방되어야 할 에너지가 정체되면 그것이 축적되어 근육의 긴장과 고통을 일으키며, 이 울적한 에너지가 순환계통의 지장 등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라이히의 세라피는 이 에너지의 정체를 없애고 에너지가 체롭게 흘러다니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구 강렬한 마사지 등으로 신체에 직접 충격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세션에 임한 사람은 오르가즘의 에너지가 보다 잘 해방될 수 있도록 전라(全裸) 또는 그에 가까운 모습이 되는 일이 많았다. 나는 다양한 세라피 그룹에 참가함으로써 내면의 세계에 충족을 줄 수가 있었지만 의식을 일거에 도약시키고 싶은 초조감에 쉽싸이곤 했다. 마음의 은밀한 소리는 '돈을 쓰기만 하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직관의 점을 밝혀내라!'고 속삭였지만 한편으로는 '생활은 어떻게 해나갈 것인기에 대한 이성의 소리도 들렸다. 이런저런 생각예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 결심의 순간은 저편으로부터 찾아왔다. 1972년 12월 내가 일하던 지역 진료소가 2개월 후에 문을 쉬게 되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운명의 손짓에 자신을 맡기고 진료소가 문을 닫고 나서 나는 친구인 빌 그로스만(나는 그가 주최하는 엔카운터 그룹에 참가하고 있었다)을 방문하여 평소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내가 치료해 주었던 환자 한사람이 새로운 엔카운터 그룹을 위해서 방 하나를 내게 제공해주었다. 마이크 바네트라는 이 사나이는 나보다 15세 정도 연상으로 'People Not Psychiatry'라는 세라피 그룹의 창시자였다. 그는 키가 작고 상당히 야윈 편이었으며 덥수룩한 턱수염과 파랗고 날카로운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바그완을 찾은 후 4년 정도 지나 나를 찾았고 바그완의 마음에 든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소멘드라(Somendra)라는 이름을 받고 라즈니쉬 조직 가운데서 특별한 인물로서 오랫동안 활약했다. 현재는 그도 라즈니쉬를 떠나 스위스에서 독자적인 세라피 센터를 열고 있다. 나는 그 외에도 응(Jung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의 책과 게슈탈트 사이 코 드라마(Gestalt and Psychodrama)의 선구자들이 쓴 책을 접하며 엔 카운터 그룹에 참가하는 등 대부분의 시간들을 고민과 사색으로 채워 넣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인 빌이 명상을 해보고 싶지 않느냐고 권해 왔다. 의심 많은 스코틀랜드인으로 자라온 나로선 무조건 찬성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 심령가라든가 구슬점을 치는 노파들이나 인도의 수도승 등과 잠시 접한 일이 있었지만, 그 모두가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빌의 권유는 집요했다. "2층에 그 여자가 있어. 거기서 다이나믹 명상(Dynamic Meditation. 라즈니쉬가 창안한 독특한 명상법) 코스를 시작하려 한대. 첫번째 세션이 내일 아침이래.가서 그녀를 만나보자." 이튿날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음침하고 썰렁한 1월의 런던 아침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여성은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로브를 걸치고 목제의 구슬목걸이를 하여 섹시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쪽은 비나(Veena)." 빌이 그녀를 내게 소개했다. "비나는 봄베이에서 막 돌아왔어. 바그완이라는 남자로부터 세계의 명상센터를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대. 비나의 목걸이에 그의 사진이 박혀 있으니까 한번 봐." 나를 응시하고 있던 비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예요. 그는 지금 봄베이의 작은 맨션에서 는데 제자가 몇 사람 있어요. 그는 제자를 산냐시(Sannyasi)라고 부르지요. 제자에게는 가르침과 새로운 이름과 말라(Mala: 1駱개의 구슬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준답니다. 말라는 바로 이 목걸이를 말하는 거예요." 나는 그의 사진에 눈을 돌렸다. 비틀즈가 한때 쫓아다니던 마하리쉬 (Maharishi)와 꼭 닮았다는 것이 나의 첫 인상이었다. 그는 참으로 한 얼굴로 덥수룩한 턱수염을 하고 모나리자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제대로 명상하기 위해서는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야 한다고 비나는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맙소사!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비나는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 얇은 로브의 엉덩이는 아주 자극적이었다. "회비는 얼마나 들지요?" "아, 무료예요." 그녀는 웃으면서 춤추듯 걸어가며 명상에 대해 설명했다. "전부 4단계가 있어.5_ 바그완은 헐렁한 옷과 눈가리개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나는 해보기로 했다. 어쨌든 잃을 것도 없으니까, 다음날 아침 5시 반 2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비나가 와있었고 사람들에게 명상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방에는 10명 정도가 모여있었다. "안녕, 눈가리개예요. 잘 맞았으면 좋겠어요. 어제 저녁 급히 서들러 만들었는데 고무줄이 부족했어요 스토브의 연료도 다 떨어져서 미안해요. 춥지만 참아주세요 하지만 호흡하는 사이에 곧 따뜻해져요. 명상의 첫 단계는 체온을 높이는 데는 최고예요." 이 건물은 버킹검으로 향하는 철로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방은 막 페인트칠을 마친 상태였고 커튼도 쿠션카바도 향로도 모두 인도산이었다. 벽 앞에 만들어진 작은 제단에는 교주인 바그완의 사인이 든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다. 몸짓,목소리,향루 옷, 게다가 햇볕에 타서 색이 바랜 듯한 머리칼. 그녀는 모든 면에서 이국적으로 보였다. 모두가 눈가리개를 한 채 10분간 깊고 빠른 과환기(過換氣) 호흡을 했다. 그리고 나서 감정이 이는 대로 발산시키는 '카타르시스' 단계로 들어 갔다. 그 다음은 춤이고 마지막은 완전한 정적상태였다. 4단계 모두 끝냈을 때 나의 육신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어느새 방안은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명상 후 민트 차(mint tea)와 함께 꿀과 비스켓이 제공되었고 그들이 바그완이라고 부르는 교주의 목소리를 아주 잡음이 심한 카세트로 들었다. 그의 강론은 모든 발음을 길게 끌어가는 치음(齒音)으로 일관하였으며 자기의 주장을 논하고 있다기보다는 사람을 유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유유자적한 듯 전혀 서두르지 않는 듯 문장마다 긴 틈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비나는 향에 불을 붙였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방안에 소용돌이 쳤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일에 착수하려는 것인가? 몇 사람인가 일어서더니 조용히 인사를 하고는 커튼 안으로 사라져 갔다. 방안은 신비스런 분위기에 내내 쌓여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카세트에서 바그완이 탄트라(Tantra) 철학에 관해서 말한 바대로,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탄트라 미술 전람회가 열렸다. 전람회를 돌아본 나는 말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내 자신이 이러한 미술을 창조해낸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동양의 신비를 재발견하고 흥분에 가득 차 있을 때 성의 명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부부교환, 집단애무, 주말마다 계속되는 교파티, 블라인드 데이트, 하룻밤만의 정사, 포르노 영화, 마리화나의 장,상류계급 전용의 매춘숙소 등‥‥‥ 매주마다 어지럽게 변해가는 당시의 성문화에 대해서 VTimeA지는 점을 두고 보도했다. 그것은 마치 인류에 있어서 로마시대의 바카스축 이래 가장 충격적인 경험인 것 같았다. 그때는 아직 헤르페스(Herpes: AIDS ·칸디다(Candida) 같은 성병이 널리 퍼져있지 않았으므로 프리 스의 축복에 악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시대풍조 속에서 바그완의 등장은 매우 적절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vTimeA지를 읽고 있었으므로 확실히 시대의 최첨단을 악하여 영적인 차원과 매스컴이라는 두 축을 기저로 포교활동의 실마리를 풀고 있었다. 한창 성을 구가하던 젊은이로서 나는 성에 관한 그의 해석이 아주 좋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눈이 트이는 듯했다. '그래, 이것이 인간관계의 참다운 진실인 거야: 그의 말에 취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것 때문에 그녀와의 관계가 잘 되지 않았던 거야. 또 다른 한 여자와의 관계도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어: 지금껏 나는 섹스와 사랑, 섹스와 소유욕을 혼동하여 왔었다. 그러나 바그완의 덕택에 점차 남녀관계의 본질에 대해 눈이 열려져 갔다. 시인 ·예술가 ·성의 연금술사·관능의 자유사상가 ·대마술사 ·궁정 어릿광대 등 모든 속성을 겸비한 자로서 바그완은 등장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상 최고의 현자(賢者)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그는 무한한 약을 보증하는 사람, 세계 속의 세계, 지혜를 초월한 지혜를 던져주는 자다. 그래서 나는 이 인물을 반드시 만나야겠다고 결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찌 않았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봄베이에 가기로 마음먹고 바그완과 탄트라에 관한 모든 책을 입수해 훑어 보았다. 탄트라란 성을 잘 활용하면 진실로 내면의 평화, 자신과 자연과의 깊은 조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고대의 가르침이다. 세익스피어의 vrwelflh wights 서두에서 올시노가 말한대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몰입하라. 넌더리가 날 정도로. 그러면 식욕도 녹아내려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고 탄트라는 역설한다. 탄트라의 요점은 훈련된 자각에 의해 성적 에너지를 이용하는 데 있다. 봄베이행 전에 내가 읽은 바그완의 책중에 vRajneesh-aglimpseA란 소 책자는 바그완에 대한 說페이지의 찬사를 묶은 것인데, 모든 문장이 최고의 칭송과 경이로운 말로 채워져 있다. 인용된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그 느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즈니쉬는 현대의 인간이 아니다. 그는 미래에 속해 있다. 현대의 소크라테스인 그는 이 나라 인도를 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여행하고 있는 그가 역설하는 진리는 현대적이고, 혁명적이며, 보편적이다. 라즈니쉬의 의도는 일반인의 마음 속에 신앙심을 북돋우는 것이다. " 이 책에는 또 '라즈니쉬는 리더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한계를 초월하여 상상이 미치지 않는 대단히 뛰어난 비전을 나눠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쓰여 있다. 저자에 의하면, 라즈니쉬(당시는 아직 바그완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빈곤의 척결과 종교로부터 신비성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류를 보다 신에 접근시켜 종교와 진리는 우리들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의도라는 것이었다. 이 소책자 안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점은 '바그완은 틀림없이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사람들을 인도할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었다. 나는 섹스에 관한 탄트라사상을 해설한 강론 테이프를 들었을 때 이 인물은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것을 실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가 여성을 가까이 한 일이 없었다면 섹스에 관해 그토록 상세하고 유창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투는 학자의 날이 선 비판적 논조가 아니라, 오래된 와인의 맛을 감상하는 감미와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했다. 자신이 독신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고 그 자신의 Al체허에 대해서 극히 애매하게 암시할 뿐이었다. 듣고 있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은 듣는 자 자신의 문제일 뿐이었다. '반드시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r은 탄트라에선 불가결한 요소이다. 탄트라는 인도의 신비주의가 요가를 받아들이면서 나타난 가르침으로서 이 양자는 많은 점에서 점반대의 성격을 갖는다. 요가는 포기하는 도를 가르치지만, 탄트라는 모든 종류의 탐닉을 적극 장려한다. 무엇보다도 그 탐닉은 스스로 자각을 지키면서 행하지 않으며 안되지만 나는 그때까지 수년에 걸쳐 진리탐구를 위해 노력해 왔기에 동양철학에 대한 흥미는 증대했지만 왠지 요가에 대해 매력을 느낀 적은 한버도 없었고 요가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체를 비틀어 구부리는 요가의 행위가 전혀 나의 체질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요가하는 자들을 나는 매크로 바이오틱 다이어트(macro-biotic diet. 장수를 위한 식이요법)의 신봉자들로서 과민하고 빈혈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요가 때문에 건강해졌다고 하는 사람을 그때까지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창백한 모습으로 고행에 찌든 듯한 내성적인 타입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몸을 비틀어 괴로운 자세로 한시간 이상씩 아있는 젓이 도대체 중요한 것인가? 내게는 그런 인내력이 없었다. 게다가 아주 무미건조했다.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섹스 어필도 없었다. 채식주의라 해서 고상하고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천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주로 채식을 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창백한 자부심은 잘 알고 있으나 나는 결코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면 바그완이 소개하는 탄트라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으로 사람을 깨달음과 자기 초월로 이끌어 갔다. 탄트라 수행자가 주장하는 성적(性的) 고행은 금욕이 아니라 섹스에 몰입함으로써 완수되는 것이었다. 나는 탄트라가 훨씬 현실적인 방법이라 여겨졌다. '제한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자신의 욕망대로 탐닉하라'고 탄트라는 말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기분 내키는 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되고 쾌락에 몰입하기 전에 적절한 준비를 갖추어둘 필요가 있었다. 어느 한 시기, 탄트라는 인도의 종교사에 큰 줄기를 이룬 적이 있다고 바그완은 강론 중에 말했다. 쿠자라호와 카르나크 사원(寺院)에는 남녀가 뒤엉켜 있는 관능적인 조각이 수없이 많은데 그것들이 탄트라의 개화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탄트라는 '원래부터 더러운 것은 없다. 선악을 본질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곧 사람이 어떤 사물을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생각하고 도덕적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마음자세에 달려있다. 성행위 그 자체는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부정적인 의미를 투영한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사람을 단순히 섹스를 통해서 섹스를 초월하는 경지로 이끌어 가는 것만은 아니다. 탄트라의 중요한 점은 사람들을 그 고정된 판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 탄트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신적 ·영적인 명징성(明灌性:밝고 맑음), 자신의 에고를 보다 큰 의식 속에 몰입시키는 것이며, 지극히 행복한 상태 속에 자기를 위치짓는 것이다. 붓다는 이 경지를 사마디(Samadhi) 즉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초월의 초월'이라 불렀고 예수는 이와같은 의식상태를 '신의 왕국'이라 했다. 바그완은 이것을 '깨달음'(Enlightenment)이라 불렀다. 그는 자기 스스로 21세 때 깨달음을 얻었다 했고 지상에서 자기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8∼9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란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덧붙여 이렇게 선언했다. "아마 나 이외에도 8∼9명의 깨달은 자가 존재하겠지만, 어느 특정 시대에 깨달음을 얻은 자는 단지 한 사람밖에 없곤 나야말로 바로 그 사람이다!" 탄트라에 따르면 투철하고 진실한 영성(靈性)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스스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억제되어서는 안된다. 억제는 매우 위험하다. 매크로 바이오틱 다이어트와 단식은 섹스를 고갈시킬 뿐이다. 또 성적 접촉기회를 없애려고 수도원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섹스의 힘을 약화시켜도 섹스는 어떠한 형태로도 나타나게 된다. 해소시킬 길이 없다면 꿈과 상상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탄트라는 말한다. '솔직하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시하라. 그래도 성적 존재인 것을 인정하지 않겠는가? 탄트라의 기본인식은 모든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성적인 것이고,그 에너지의 근원은 등골에 존재한다고 한다. 에너지가 적절한 방법으로 해방된다면 그것은 등골을 통해서 뇌로 상승하고 그래서 영적 중추와 합일이 이루어진다. 탄트라의 신봉자들은 현실이란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단식이나 고행은 모두 인간성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라고 간주한다.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향유하라.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하라. 그리고 탄트라적 섹스는 단순한 육체적 성교와 다르다. 상대와 사랑의 감정을 함께 공유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반드시 필요충분조건이라 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러한 감정은 오히려 사태를 한층 곤란하게 만들고 각성의 방해가 될 뿐이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파트너를 자신의 」교주r로 생각하고 상대의 신체를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여 예배한다. 성적 감정을 갖더라도 소유욕을 가져서는 안된다. 결코 욕망에 전부를 맡겨서는 안되며 관능적으로 되어서도 안된다. 만일 특정한 개인에게 맹렬한 욕망을 갖게 되면 사람은 자신의 명상적 중심, 즉 존재의 핵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바그완은 강론 중 몇차례에 걸쳐 '순간적' 오르가즘과 '지속적' 오르가즘의 차이에 관해서 말하였다. 」지속적인 오르가즘은 합일감을 한시간 이상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여 그동안 명상적 중심을 보유할 수 있다. 그래서 '지속적'오르가즘은 예술과 비교된다. 그러나 그 반대인 '순간적' 오르가즘은 극히 빈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후 푸나에서는 다양한 성의 실험이 행해졌다. 어느 탄트라의 세션에서 바그완은 한 여성에게 오럴섹스를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같은 푸나의 탄트라 세션에서는 남성이 여성 파트너의 넓적다리 사이에 끼워져 있는 망고(mango : 맛이 좋은 열대 과일)를 먹어야만 했다. 이 」망고 먹기'는 유명했다. 흥미있는 사실(아니,그보다 놀랍다는 표현이 적당할지도 모르지만)은 이 세션을 중도에 그만두는 쪽은 오히려 남성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 존재하는 불안과 직면해서 움츠러드는 쪽은 여성보다 오히려 남성이었던 것이다. 탄트라란 전적으로 자유로운 탐닉을 찬미하고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바그완의 가르침은 70년대 서양의 젊은이들에게 그토록 폭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쉬람(Ashram ·수행을 위한 종교적 성역)이 생기고 몇년이 지나자 탄트라 세션에서는 골절사고, 폭력사태, 난폭한 히스테리 등이 일어났다 이야기가 빈번히 전해졌다. 이러한 보고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근처 병원에서는 경찰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서 탄트라 세션 중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 '아쉬람에 가는 도중에 계단을 헛디뎌서 넘어졌다'는 내용의 진단서를 발부하기도 했다. 지금 되돌아 본다면 이러한 세션은 문란하기 짝이 없는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어쨌든 운동의 초기에는 가족과 같은 일체감이 있었고 모두 바그완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였다. 골절이나 그보다 더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조: 세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이 조직을 고소하려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세션에서는 항상 밝고 적극적인 분위기가 느껴졌고 영혼의 탐구가 신중히 행해지고 있는 듯하여 우리들에게 있어 세션은 마법이나 < 금술과 같은 것이었다. 비나의 명상센터에서 바그완의 강론 테이프를 듣는 동안 우리들은 = 그가 주장하는 모든 것을 실행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바그완과의 관계는 마치 인생이란 나무를 함께 키우는 사제관계였으며 우리들은 그 지혜와 과실을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우리들에게는 사랑과 성적 관심, 육체8 욕망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조화, 자신을 지키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들은 이해해야 할 것, 억제해야 할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분별력을 가지고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탄트라는 실로 훌륭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 바그완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 길을 선택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른 아침,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말은 마법의 주문과 같이 울려 퍼졌으며 그가 '나에게 오시오!'라고 했을 때 그것은 거역하기 어려운 명령과도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나의 정열과 상상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함께 춤추자고 유혹하면 마치 사랑의 속삭임을 듣는 듯했다. 후에 다른 사람들도 왜 바그완에게 끌리게 되었는지 내가 물으면 의레 같은 대답을 했다. "그때까지 늘 마음 속에 있었지만 잘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을 그가 잘 대변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영혼의 실천자였습니다 !" 피임약이 널리 또급되고 비틀즈, 베이비붐, 급속한 경제성장, 일찍이 없었던 번영의 시대에 자라난 세대,그리스도 교회의 쇠퇴 등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양사회는 바그완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들에게 특별히 흥미로웠던 점은 이 탄트라 운동이 성에 대해서 극히 폐쇄적인 인도라는 나라(높은 출생률에도 불구하고 가장 성이 기피되고 억압받는 나라)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바그완은 인도 여성의 태반이 오르가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인도 여성 몇 사람과 상대해본 나는 그의 말이 진실임을 납득했다. 매일 아침 런던의 좁은 명상센터에 모인 우리들의 눈에는 바그완이 대단한 매력에 차있는 신기한 세계로 우리들을 초대해주는 듯 여겨졌다. 나는 손만 담그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느끼며 온몸으로 바그완이라는 물 속에 뛰어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미 내가 갈 길은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일하고 있던 진료소가 폐쇄되어 더 이상 영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으며 돈도 충분하였다. 봄베이행을 결단하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제2장 바그완과의 만남 바그완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순간 나는 '이제야 진정한 아버지, 참 스승을 만났다. 교주찾기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확실히 느꼈다. 목적지에 도착했던 것이다. 1973년 당시, 봄베이에 있는 바그완의 작은 맨션에는 두 사람의 여성비서 라크슈미(Laxmi)와 크란티(Kranti) 그리고 바그완의 애인인 영국여성 크리스틴 울프가 기거하고 있었다. 비베크(Vivek)란 이름을 받았다는 울프는 하늘나라의 선녀처럼 버드나무 같이 가냘픈 분위기를 감돌게 하는 미인이었다. 당시 그녀는 23세 정도였고 최초로 바그완·을 찾은 서양인 중 한사람이었다. 1971년에 바그완을 만난 그녀는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그 당시는 아직 아쉬람이 생기기 전이라서 그의 강론을 듣기 위해· 매일 방문하고 있던 20여 명의 서양인은 봄베이 시내와 근교 호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라즈니쉬 화운데이션 인터내셔널(Rajneesh Foundation International)은 아직 설립되지 않았는데 그는 재산이 있지도 않았고 , 서양에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바그완의 유세(遊說)가 이미 유명했다. 그래서 그를 아차리아(Acharya:스승)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다. 나는 봄베이 시내의 호텔에 숙소를 잡고 즉시 바그완과의 면회를 신청했다. 그와 만났을 때의 모든 상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어쨌든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나의 인생은 완전히 변해버렸으니까. 당시 :ko세 정도였던 라크슈미는 새처럼 작은 몸집으로 눈동자는 컸고 속눈썹이 매우 긴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전에 공무원생활을 했었지만 1968년 바그완을 만나 사랑에 빠진 이래 그의 비서로서 바그완을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라크슈미는 항상 바그완의 방 앞에 진을 치고 앉아 면회를 통제하였으며 입실자를 매우 세심하게 체크하였다. 바그완이 냄새알레르기 증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유명했는데 그는 체취나 향수에 극히 민감했던 것이다. 바그완이 대학을 사직하고 유세가가 된 것은 1966년의 일이었지만 처음부터 그는 중요인물답게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고 했다. 그의 방이 가까워짐에 따라 만남에 대한 기대와 그 앞에서 내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하는 불안으로 나는 심하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대응하면 되는가?' 그의 제자들은 그를 구세주로 또는 신의 화신으로 생각하였으며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크슈미는 굿(good)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이 '굿'이라는 말투는 나도 곧 사용하게 되었지만, 바그완과 그 측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항상 사용하는 말로 그 의미는 그때그때 그들의 의향에 따라 다양했다. 그 당시 라크슈미가 내게 '굿'이라고 말한 것은 운이 좋은 시간이라는 의미였다. 천천히 문을 열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왜 방이 텅 비어있을까? 아무도 없는 것인가? 나는 갑자기 당혹스러웠다. 바그완은 어디 있을까? 그러자 문득 방 한쪽 구석에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다! 얼마나 아담한 몸집의 화사한 사람인가? 깨끗한 로브를 몸에 걸치고 자수가 놓여진 타월을 한쪽 팔에 걸치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고 온화하게 앉아있었기에 방에는 아무도 없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깊은 갈색 눈동자와 활과 같은 모양의 눈썹은 시인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물이 흐르는 듯 윤기있는 머리칼은 남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짙은 베이지색 비로드로 감싼 사무용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좀더 가까이,좀더 가까이." 팔걸이에 얹은 왼손으로 작은 원을 그리면서 내게 말했다. 바그완은 체취에 민감하다고 들었는데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도 괜찮을까? 그러나 그는 나의 손을 쥐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지금 현실 속에서 나와 닿아있다. 갈색의 손은 부드럽고 매끈하고 섬세하다. 잠시 적막이 이어진다. 어느 쪽이 먼저 입을 열 것인가? 걷잡을 수 없는 심정으로 나는 방의 여기 저기를 두리번거린다. 더블 침대가 보인다.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깨끗했다. 말끔히 닦여진 바닥에 빛을 가리는 블라인드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파스텔조의 엷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벽에는 커튼도 없고 그림도 걸려있지 않았다. 바그완의 침실 겸 거실이자 식당인 이 작은 공간은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천상의 나라,바로 그것이었다. "런던에서 왔는가? 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나는 어떻게 하고 있지? 센터는 잘 운영되고 있는가? 벽은 어떤 색으로 칠했지? 녹색이라면 좋지. 비나는 잘하고 있어. 런던에서는 이제부터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지. 음." 나는 엄청난 기대와 흥분을 느꼈다. 바그완은 잡담식의 이런 질문으로 분위기를 유도한 다음, 신중하고도 천천히 내게 접근해왔다. 전형적인 동양의 방식이었다. 마치 시공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이 새로운 어린아이의 존재 의미를 부여해주고 평범한 질문을 통해 이 아이의 이해도와 의욕을 확인해 보자는 듯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불가항력적이고도 강렬한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었고 나는 그 존재 속에 감싸여졌다. 그는 런던의 사람들, 비나의 애인, 센터의 장소 등에 대해 간단한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센터의 주변에 잔디가 있는지도 물었다. 또 런던의 버스 노선에 대해서, 지하철역에 대해서, 집세에 대해서, 엔카운터 그룹의 현황에 대해서도 질문을 했다. 긴장했던 마음이 차츰 풀려져 갔다. 그는 나의 속명(俗名)을 입에 올리기가 싫었던지 냉소적인 투로 '미스터 밀른' 이라 부르며 나의 주소와 연령을 물었다. 은행강도가 범행장소를 사전답사하듯 바그완은 나를 이리저리 떠보았다. 나는 정찰기가 내 마음의 상공을 선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순간순간 경계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여행은 어뗐는가? 숙소는 잡아놓았는가? 잘 됐군 음." 그의 몸에선 향수냄새가 났다. 소나무와 유카리 나무에서 나는 듯한 냄새였다. 향수는 帶에 바른 것일까? 아니면 옷깃에 바른 것일까? 이런 의문이 당돌하게 솟구쳤다. "명상은 어떤 식으로 하고 있지? 무릎이 아프지는 않은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결국 통증은 사라질 것이다. 누워서 명상하는 편이 좋아. 음. 아침 명상에 참가한 후에는 호텔로 돌아가도 좋다. 음. 그게 좋겠어. 누워서 하는 명상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해라. 그래서 온종일 그렇게 명상하고 있으라. 특별한 느낌이 너에게 찾아올 것이다. 오케이?" 갑자기 거리에 있는 걸인들이 떠올랐다. 이 시원하고 아름다운 궁 그들을 비교해 봤다. 바그완과 그들은 같은 인종이면서 마치 거짓말 같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이 정지된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없어진, 전혀 새로운 차원에 존재하고 있었다. 또 다른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벅시 주스(bugsy juice)였다. 라크슈미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는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가. 파리 한 마리 없다. 문을 나서서 몇 백미터만 가면 나병환자가 우글거리고 있는데 여기는 완벽할 정도로 청결하다: 어제 봄베이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고 아주 더럽고 혼돈된 모습이었다. 걸인과 순례자가 우글거렸다. 정말로 이곳이 같은 나라에 존재하는 세계란 말인가? 그는 여전히 나의 손을 잡은 채 질문을 계속했다. 촉감온도로 나의 심리상태를 알아내고 있는 것일까? 쥐었던 나의 손을 뒤집었을 때 그 수상(手相)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라즈니쉬란 인물은 현상을 초월한 아주 높은 경지에서 얘기를 진행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의 영혼이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와 생명력 있는 의미를 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나의 후두부 위에 손을 데었다. 머리 꼭대기에 무엇인가가 떨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을 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주시하면서 감각을 총동원해 나에게 파장을 보내는 듯했다. 그의 부드러운 손이 이번에는 이마로 내려왔다. 가만히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손은 목을 타고 내려와 결후(結喉.성인 남자의 중간에 후두 연골이 돌출한 부분)를 가볍게 압박했다. 그는 모든 차크라(Chakra :고대 동양에 의하면 인체는 7개의 에너지로부터 즉 차크라가 존재한다고 한다)에 가만히 접촉해 나갔다. 차크라가 임자를 만났음인가, 나는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에 대한 최초의 면접시험은 끝났다. 목적을 달성한 바그완은 조사 장치를 해체하듯이 내게서 손을 치웠다. 그리고 나를 탐색하듯 쳐다보며 물었다. "산냐스를 받을 용의가 있는가?" 란 신과 일체가 되기 위해서 모든 세속적인 관계와 소유물을 포기하는 사람을 말한다. 힌두의 산냐시는 신을 생각하고 명상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그러나 바그완의 신자들에게는 이 산스크리트(Sanskrit)어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바그완의 '산냐스'란 이전의 생활을 버리고 오직 라즈니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인도에서 문제의 장본인이 되었다. 이 말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해서 순수한 힌두교도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산냐스를 받을 것인지 생각해 봐야겠는가?" 바그완은 다시 물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는 미리 라크슈미에게 전해두었었다. "굿. 정말 준비가 되어있군. 이제부터 너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길 거야. 음. 너의 이름, 어떤 의미지? 음.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서양인들은 모두가 자기 이름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더군. 인도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음.그러면 새로운 이름을 주겠다. 음. 좋은가?" 그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메모지를 손에 들고 신중히 마치 그림을 그리듯 글자를 써내려 갔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펜은 인도 제품이 아닌 빨간색 일제 매직펜이었다. 바그완은 이런 종류의 펜을 좋아해 상당량을 수집하고 있었다. 바그완은 갈색 빛깔의 나무열매로 만든 구슬을 길게 이어놓은 것을 집어 나의 목에 걸어주었다. 바로 말라(Mala)라고 하는 108개의 구술로 목걸이였다. 그리고 이는 출가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이름이 쓰여진 한 장의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아아, 제발 이상한 이름이 아니기를! 종이를 보니 '스와미 시바무르티'(Swami Shivamurti)라고 쓰여 있었다. 바그완이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스와미란 자기 자신의 운명을 통솔하는 성스러운 자. 시바란 힌의 신들 중 하나다. 그리고 무르티는 시바를 표본으로 창조된 것을 말한다. 시바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가?" 나는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도서관에 가서 시바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으면 되겠군.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시바는 위대한 신으로 알려져 있고 많은 신(化身)들이 있지. 음. 이전의 이름에 미련이 있는가?굿. 과거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 지금부터는 에고를 버리고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나의 세계에 몰두해야 한다. 알았는가? 굿, 굿. 음. 그리고 이제부터는 오렌지색 옷을 입어라. 오늘이 너의 새로운 탄생일이 될 것이다. 이전의 생일 따위는 잊어라. 그것이 좋겠다. 오케 이 ?" 새 이름이 적힌 종이를 손에 든 나에게 바그완은 여러가지 요구를 제시했다. 오렌지색 로브를 몇 벌 만들 것, 그리고 속옷은 일체 입지 말 것. 속옷은 에너지의 흐름을 막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양식의 바지도 입지 말 것. 매일 명상할 것.그리고 아부산에서 행해지는 라즈니쉬 명상 캠프에 참가할 것 등을 내게 명했다. 언덕 위에서 행해지는 캠프는 섭시 40도에 달하는 3월의 봄베이 더위에 비하면 훨씬 시원할 것이라고 바그완은 덧붙였다. 그리고는 이제 나가도 좋다고 바그완은 몸짓으로 말했다. 일어선 나에게 그는 하리다스(Haridas)를 소개시켜 주라고 라크슈에게 지시했다. 하리다스는 젊은 독일인 전기기사로 1972년부터 일년 동안 교주를 찾아 인도 전체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바그완을 만나 더 이상 교주를 찾아 헤매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8년간 내가 인도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방을 나와 문을 닫자 라크슈미가 나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래, 정말 좋은 기분이었어. 우주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 생전 처음 경험하는 행복감. 마치 마법의 손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나는 창 옆에 앉아 큰 벵갈보리수를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거대한 에너지의 원천에 감사했다. 분명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후 라크슈미에게 가서 바그완을 다르샨(Darshan)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물었다. '다르샨이란 인도말로 '회견'을 뜻하나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라크미슈는 이미 계획이 잡혀져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3일 후 목요일 아침 8시에 다시 바그완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바그완의 맨션은 정신적 메카임과 동시에 일부 외국인 산냐시가 머무는 장소이기도 했다. 밤이 되면 우리들은 큰 거실에 모여서 힌두어로 강론하는 바그완의 앞에 앉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전 중에는 바다로부터 미풍이 프랑스식 창을 타고 불어와 거실 전체가 형언할 수 없이 시원했다. 또 새벽 5시에는 모두가 해변에 모여서 다이나믹 명상(Dynamic Meditation)을 하였다. 이곳에서 산냐시들과 생활하는 동안 나는 이 운동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차츰 납득이 갔다. 그 기초를 세웠던 인물은 라크슈미였다. 그녀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양가집 딸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가족은 봄베이에 큰 집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키는 작았지만 성격은 무척 외향적이었으며 유머와 정력적인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병적일 정도로 식욕이 없어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칠흑처럼 검고 아름다웠는데 언제나 고상한 빛깔의 스카프로 덮여있었다. 그녀가 머리를 풀 때면 검고 윤기나는 긴 머리카락이 마치 용트림을 하듯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내면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관능미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오늘의 바그완이 있기까지 라크슈미의 공적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지만 크란티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검은테의 묵직한 안경을 걸친 그녀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듯 항상 굳은 표정을 하고 있어 산냐시 가운데서도 극히 이채로움을 띠고 있었다. 두번째의 다르샨을 받고 있을 때 바그완에게 약과 미네랄 워터를 갖고 온 크란티를 나는 처음 보았다. 그녀는 외국인 앞에서는 초연하고 쌀쌀맞은 태도를 취하였지만 그것은 인도 상류계급 여성들의 공통적인 관습이었다. 소년시절의 '모한 찬드라 라즈니쉬'는 전도유망하고 우수한 학생이었다. 자이나교도이며 포목상인인 그의 부친은 간신히 자식을 대학까지 진학시켰다. 바그완 본인의 말로는, 대학졸업 후에 쟈이푸르 대학교의 부속인 마하코샬 아트 칼리지(Mahakoshal Arts College)의 교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60년대 초반에 그가 그 칼리지에서 강사로 있었던 건 확실했다. 1964년에 그는 대중연설을 처음 시작했고 66년에는 대학을 그만두고 유세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설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당시의 그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고 했다. '라즈니쉬 화운데이션 인터내셔널'이 창립된 것은 서양인이 많이 모여든 1975년의 일이지만, 공식년표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70년까지의 4 년간 라즈니쉬는 인도 전체를 철도로 돌아다니며 정치색채가 농후한 연설을 많이 하였다고 했다. 그의 연설에는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고 재정적으로도 항상 흑자였다. 라크슈미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봄베이의 작은 홀에서 자이나교도 그룹을 상대로 한 어느 연설회에서였다. 당시 그녀는 시내의 큰 관공서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녀는 바그완을 보자 한눈에 반했고 '사자·용감한 전사·정열적인 웅변가'라 부르며 그에게 열중하게 되었다. 그녀는 최초로 바그완의 제자가 되었고 그가 연설가로서 보낸 수년 동안 헌신적으로 그를 따라 다녔다. 가엾게도 후에 라크슈미는 그 지위를 쉴라(Sheela)에게 빼앗기고 버림받게 되지만 그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당시 라크슈미의 권력은 가히 절대적이어서 바그완을 만나려는 자는 반드시 그녀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라즈니쉬는 대학강사 시절부터 열렬한 연애지상주의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서양인을 끌어들이는 커다란 계기가 된 것도 섹스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였다. 바그완의 가장 강력한 매력 중 하나는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과학을 혼합해서 만든 그의 독특한 가르침이었다. 이 운동에서 '한 사람의 정신적 지도자의 사랑과 깨달음으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것이다'는 공식견해가 유포되었지만 실상은 애초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바그완이 어떻게 해서 최초의 산냐시들(모두 인도인)을 끌어들였는지에 대해서 라크슈미가 내게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어느날 우리들 몇 명이 사프란색의 옷을 입고 그를 맞으러 역에 나갔어요. 그 옷을 입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와 만난 우리들은 농담처럼 말했어요. '사프란색이란 출가자와 승려를 위한 노랑색이니까 이 색을 입은 우리들은 당신의 산냐시, 당신의 신자가 될지도 몰라요.' 그런데 갑자기 이 라크슈미(그녀는 자신을 가리킬 때도 3인칭처럼 라크 슈미라고 지칭했다)의 입에서 '당신의 산냐시가 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나왔어요.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이삼일 후 우리들은 그의 집에서 한번 더 그것을 제안했어요. 사프란색의 옷은 아주 좋은 느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때도 입고 갔었지요. 그리고 강론이 끝나고 나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그에게 말했어요. '아차리아, 우리들을 당신 최초의 산냐시로 받아주십시오'라고 말예요. 그러자 그는 라크슈미를 오랫동안 응시했습니다. 아마도 그 말에 대해 그도 깊이 생각했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느꼈습니다. '당신이 신과 같은 재능을 가진 건 누구의 눈에도 확실해요'라고 우리들은 다시 거론했어요. 우리들은 새벽 두세시까지 그의 집에 남아서 동서고금을 통한 그 훌륭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요. 그것은 정말 대단한 기쁨이었어요. 당시 바그완은 마하트마 간디가 좋아했던 것과 같이 아주 부드러운? 수직의 목면을 몸에 걸치고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어요.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유머에 소리 높여 웃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갔죠 ( 아! 정말로 즐거웠어요.그때 라크슈미는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답니다. 그는 마침내 라크슈미에게 샤프란색의 옷을 입을 것, 특별한 말라1 옷을 살 것을 명했어요. 그렇게 해서 이 라크슈미는 그의 첫 산냐시가 된 ; 것이지요." 라크슈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곧이어 vRajneesh-a glim:PseAi岺 소책자의 출판준비를 했던 일, 그의 전용 편지지를 위해서 최상급의 종이를 주문한 일 등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아무튼 그녀가 이 '사자'에 대해서 여기저기 선전하고 다닌 덕택에 :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강론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과 산냐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어갔기 때문에 라크슈미는 봄베이의 크로스 마켓에서 말라의 재고를 모두 구입해야만 했다. 바그완의 명성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정치가와 부자 ·배우 ·시인 ·작가 등이 그의 강론을 들으러 찾아오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더 크고 훌륭한 방이 필요했다. 라크슈미는 새로운 집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녀는 고층빌딩 안에 있는 맨션을 찾아냈는데 그 집세는 봄베이에서 꾀 이름이 알려진 Al 비스켓 사에서 지불하였다. 그 회사의 사장이 산냐시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양에서도 바그완의 강론을 들으러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기 때문에 비서와 접수처가 필요하리라 예상했어요." 그래서 그 역할을 라크슈미가 떠맡고 나섰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바그완을 만나려고 밤낮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어 그의 방 앞에 비서를 둘 필요가 생겼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무렵 바그완은 적당한 요청이 있으면 미국에 갈 심산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초대는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봄베이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라즈니쉬가 칭호를 '아차리아'에서 '바그완'으로 바꾼 것은 이 즈음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위대한 현자'를 의미하는 마하리시(Maharishi)라는 칭호가 제안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다른 교주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학자(梵學者)로서 산냐시인 요기 친마야가 '바그완'이라는 칭호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상은 라크슈미가 말해준 라즈니쉬에 관한 전말이지만 누구나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그완이 어릴 때부터 최면술을 사용하였다는 말과 그의 맨션에 가득한 감미로운 분위기는 방 라시(Bha- ng Lassie.대마초를 혼합한 요구르트 드링크)를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렸다. 바그완 전용 냉장고에는 항상 이 '방 라시'의 농축액이 들어 있었고 강론이 끝나면 자기 마음에 드는 손님에게 그것을 건네곤 했다는 것이다. 또 70년대 초기의 그의 외모는 전혀 섬세하거나 지적인 느낌은 주지 않았고 오히려 덥수룩하고 어깨가 쩍 벌어진 체격이었다고 했다. 런던센터를 운영하고 있던 그의 친척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바그완은 1966년에 대학을 사직한 후 털털거리는 작은 르노를 몰고 다녔다고 했다. 그 차의 트렁크에 자신의 책을 잔뜩 싣고 강연하는 틈틈이 책방을 돌아다니며 팔았다는 것이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결국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롤스로이를 소유하게 되었다. 언젠가 미국의 TV 인터뷰에서 "90대의 롤스로이를 갖고 있어도 아직 만족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바그완은 이렇게 대답했다. "999대가 있어도 충분하지 않다!" 라즈니쉬를 '바그완'으로 인정하는 문제는 인도인들로선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칭호는 대단한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양인들을 주변에 모아 '쾌락주의'를 역설하는 연설가에게 사용된다는 데에 저항감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많은 인도인들은 겸양의 미덕을 높이 사는데 이 라즈니쉬라는 사나이는 거침없이 자신을 진짜 신과 같이 받들라고 요구해왔기 때문이었다. 맨션에는 두 개의 방이 비어있었는데 바그완은 자신의 새로운 애인' 비베크를 그 하나에 들어앉혔다. 그녀와 바그완과의 관계는 내가 들어오기 이삼개월 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크란티도 바그완과 관계를 갖=고 있었기에 나머지 한개의 방을 점령하였다. 바그완과 비베크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애정관계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크란티는 바그완의 첫째 애인에서 둘째 애인으로 밀려난 사실을 가지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서 크란티는 잘 생긴 인도인 산냐시와 좋은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얼마간 오지의 명상센터 운영이 맡겨져 쫓겨나게 되었고 그 이래 나는 그들: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찾아간 1973년에 이미 바그완은 '섹스 교주'(Sex Guru)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이 말은 그의 수많은 강론내용과 사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었다. 그는 여성 오르가즘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주장하였고 인도여성 대다수가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설명했다. 사실 바그완은 클리토리스(음핵)와 그 기능, 자극의 방법 등 남녀의 성기에 대해서 해부학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했고 그것은 마치 산부인과의 강의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무척 당혹스럽게 하는 이러한 화제를 그는 항상 정신성과 결부시켜 탄트라적인 섹스가 어떻게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끄는가 하는 문제로 접근했기 때문에 그다지 거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그완의 강론을 듣고 있노라면, 앞으로 섹스를 할 때는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던 지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바그완은 성에 관한 그의 지식과 체험의 출처를 결코 밝히는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서양인은 인도에 찾아오기 전부터 바그완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들이 바그완에게 끌린 이유중의 하나는 섹스에 대해서 더 듣고 싶었으며 더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였기에 우리는 그가 사생활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여성신자는 '스페셜 다 르·뚤(special darshan) 즉 교주의 섹스 상대로 선택받기를 강렬하게 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의 인도인에게는 이러한 성적 행동이 지극히 부도덕한 것이었다. 교주라는 지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그완의 별난 성도덕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어 많은 얘기거리를 만들었다. 내가 봄베이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들로부터 자주 추궁당했다. 예를 들면, 바그완이 사람들에게 자기 앞에서 '옷을 벗으라는 명 령을 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바그완은 산냐시 커플에게 자기의 눈앞에서 섹스를 시킨 일도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성교방법을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행하여졌지만 어느 정도는 타인의 성행위를 엿보는 기쁨도 있었으리라. 봄베이 시대의 바그완은 모든 종류의 가십은 예술이라면서 가십을 크게 장려하고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소문을 부정하거나 막으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나 1974년에 센터가 푸나로 옮겨가자 견고한 장막이 쳐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십이 끊긴 일은 없었다. 1973년 경,바그완이 최면술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당시의 신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후에 나는 인도 중부에 사는 그의 친척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라즈니쉬에게 신자가 있으며 그것도 여성신자까지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바그완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 사진을 무수히 만들게 했다. 그것들은 모두 정신세계와 종교적인 경외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고안된 조명 아래 드라ㅁ띤한 연출로 찍었곤 또 그러한 사진의 대부분은 그의 청년기에 찍은 사진을 다시금 각색한 것들이었다. 바그완의 자서전 『 Re Sound of Running walerA에 사용된 12장의 사진은 그가 13세부터 21세까지 촬영한 사진의 각색품이었다. 그중 한 사진에는 감동적일 만큼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젊은날의 그가 찍혀 있었고 오전 2시 촬영'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이상한 일은 그런 시간에 사진사를 깨워 어떻게 해서라도 종교적 분위기가 감도는 사진을 촬영하게 한 그의 동기로서,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은 비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결의하고 장래의 성공에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취를 증거로서 기록해두기로 한 것 같았다. 내가 처음 봄베이에 갔을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모으고 끌었던 것은 초패티 비치(Chowpatty Beach)에서의 아침명상이었다. 매일 아침 5시가 되면 사프란색의 옷을 입은 10여 명의 산냐시가 해변에 모였다. 모두 말라를 목에 걸고 있었으나 다이나믹 세션 때에는 목에 감았다. 리더는 대개 여성으로 해변에 오면 모두에게 눈가리개를 건네주고 중품류를 맡았다. 세션 중 우리들은 격하게 호흡하며 뛰어다니기도 하여 복싱을 하듯 발버등치는 등 카타르Al스적인 움직임을 통해 억압당한 걱정과 불안을 해소했다. 그곳 지방의 어부들과 사람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인도의 전통을 모욕하고 있는 서양인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신체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하고 게다가 출가자들에게만 허락되는 사프란색의 옷을 입고서는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틀녀의 이른 시간에 가장 에너지가 충만되기 때문에 흥분한 들개가 사람의 발을 물어뜯는 일도 있었다. 이는 광견병이 만연한 인도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또 어느 때는 구경꾼 중 한사람이 명상하고 있는 서양인(센터에 있는 인도인은 거의 이 명상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여성의 얼굴에 주먹세례를 준 일도 있었다. 자신들의 성스러운 전통을 모욕 당하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명상이 끝날 즈음이면 해가 떠오르고 용광로 같은 더위가 밀려왔다.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우리들은 각자 호텔로 돌아가거나 해변가에 있는 노점에서 커피를 주문하기도 했다. 바그완으로부터 배운 명상에 몰두하기 시작할 때쯤 나는 마음 속의 걱정과 잡념을 쫓아내기에 급급했다. 호텔에서 명상하고 있다가도 에어콘 소리가 들려오면 쌓여가는 청구서가 걱정되었고, 앞으로 얼마나 이곳에 머물 수 있을지, 이곳에 평생 있고 싶지만 그럴 경우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야 할지, 여성에 대한 잡념 등 여러가지 개인적인 환상이 몰려오곤 했다. 내가 다르샨을 받고 이틀이 지난 후, 런던의 명상코스를 '졸업'하고 봄베이를 찾아온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 역시 최초의 다르샨을 막 마친 상태여서 서로의 감상을 비교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느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음, 나의 감상은 당신과는 전혀 달라요. 솔직히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바그완의 방에 들어선 순간 아주 거북한 느낌이었어요. 바그완은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당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허물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그 사람에 대해 신뢰감이 생기지 않았어요. 다르샨을 받을 때도 계속 그 사람은 서커스의 마술사 같았어요. 뭔가 꺼림칙하고 환상 속을 혜매는 느낌이었죠 그런데 그가 갑자기 '입고 있는 것을 전부 벗고 침대 위에 누우시오' 라고 말했어요." "정말이오?" 내가 물었다. "괜찮을까 생각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가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이번에는 위를 향해 누우라는 거예요. 그렇게 했더니 내 몸이 마음에 들었는지 예의 그 '음' 하는 소리를 길게 냈어요. 그러더니 옷을 입으라고 했고 그 이상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녀로서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바그완은 다르샨 중에 세라피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녀의 매력적인 몸매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바그완의 기묘한 이 행동을 정당화시켜 줄만한 이론과 가능성에 대해서 둘 사람이 여러가지 의논을 해보았지만 이 다르샨은 아무리 봐도하렘(Harem : 회교국의 후궁)의 면접과 같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날 바그완의 맨션과 해안 사이의 넓은 정원에 앉아 있자, 교양 있어 보이는 인도 사람이 다가왔다. 나는 오렌지색 옷을 입고 목에는 말라를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바그완의 신자인 것은 일목요연했다. 그는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교주는 올은 사람이라 할 수 없어요! 그는 여성신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있어요!" 나는 그의 기세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들 산냐시는 길에서 조소의 말을 듣는 데는 익숙해져 있어 별 감각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주 '하레 크리슈나 하레 라마'(Hare Krishna Hare Rama) 하고 몹시 떠들어댔다. 그것은 사프란색의 로브를 입고 '하레 크리슈나 하레 라마' 라고 노래하는 종교단체를 위장한 외국인 악당들을 고발하는 영화가 얼마 전에 개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화에서 악당들은 마약과 섹스에 빠져 인도인의 딸을 폭행하는데 끝에는 인도인 주인공이 나타나 통쾌하게 악당들을 해치워 버린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듣기 싫으라고 이 노래를 불렀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들과 함께 흥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길을 걸을 때마다 같은 노래를 듣게 되어 지긋지긋해진 나머지 나중에는 무시하게 되었다. 나는 두번째의 다르샨을 첫번째보다 훨씬 차분하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참가하였다. 그때 나는 그의 서가에서 톰 울프가 쓴 히피세대의 약물사용에 대한 책인 『罰옳剡點◎ckooz-져긴져cia TestA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바그완이 그 해에 출판된 책중 이 책이 제일 좋다고 말한 것을 비나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하루에 열권 ,내지 열다섯권의 책을 독파하는 대단한 독서가로서 언제나 세계의 지적 상황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음, 어떤가? 시바. 굿. 분발하고 있군. 명상은 잘되어 가고 있나? 음. 오케이. 이제부터는 호텔생활을 그만두지. 온종일 명상하는 것도 그만두고 이제는 너무 덥고 캠프도 임박했어. 너의 전 에너지를 캠프에 바치는 편이 좋아. 온종일 수영하러 가거나 산냐시와 사귀거나 하고 명상은 아침 해변에서만 하지. 음, 어떤가?해변은 자네 마음에 꼭 들지?음." 그는 말을 계속했다. "음, 시바. 연애는 어떤가?" 이 질문에 나는 무척 놀랐다. 너무 지나치게 사생활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언짢았다. "순조롭습니다. " 나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크란티가 소다수를 날라왔다. 바그완은 약을 한알 입에 넣고 소다수와 함께 삼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놀랄 만한 이야기를 했다. "음,산냐시 여성과 함께 지내면 좋을 거야. 너는 지금 어디에 묵고 있지. 샤리마르 호텔? 좋아, 오케이. 거기에 프라티마(Pratima)라는 산냐시가 묵고 있어. 그녀가 아파트를 임대하다고 하니 함께 빌리는 것이 좋겠어. 라크슈미가 소개해줄 거야. 음. 프라티마와 함께 지내라." 결국 나는 그녀와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프라티마라는 여자와는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녀가 매력적인 여자이고 나와 뜻이 맞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방을 나서자 여전히 라크슈미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보리수 쪽으로 눈을 주자 몸집이 크고 좀 각이 진 얼굴의 여성이 유심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그완이 자신에 대해 무얼 말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녀의 억양을 듣고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 당신이 프라티마군요. 함께 지내라고 했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무 거북했다. 그녀는 나 보다 20세 정도 연상이었던 것이다. "바그완은 진심으로 아파트를 공유하라고 말했나요? 실제로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이에요?" 프라티마가 물었다. "나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바그완이 말한 건 친밀한 관계가 되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녀는 말했다. "확인하고 와도 상관 없을까요?" 프라티마는 쾌활하고 마음이 따뜻한 여성같이 보였다. 바그완의 명령은 분명히 그녀를 곤혹스럽게 했지만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그완에게 확인하고 돌아온 그녀는 낭패감에 얼굴을 붉혔지만 가능한한 그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한 듯했다. "그는 진심으로 둘이 함께 지내라고 말했어요. 우선 차라도 함께 하고 서로 잘 사귀어 보기로 해요. 좋아요?" 이 일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참으로 기묘한 체험이었다. 이것이야말로 t나에 대한 진짜 테스트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프라티마와 나는 샤리마르 호텔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프라티마는 아무리 봐도 나의 연인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보다도 훨씬 명상 경험을 많이 쌓고 있었다. 10년간이나 명상해온 그녀에게는 제자가 수십 명이나 있었다. 바그완을 만나려고 그녀는 3㉡명 정도의 제자를 이끌고 인도를 찾아왔던 것이다. 프라티마의 제자들은 플라스틱 캡슬에 그녀의 사진을 넣어서 목에 걸고 있었다. 라크슈미는 이것을 보고 플라스틱 로켓(plastic locket)에 바그완의 사진을 넣어 산냐시 전원의 몸에 지니게 하려는 착상을 했던 것이다. 나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브라마차리아(Brahma- charya) 즉 독신으로 지내왔다는 것을 넌지시 비쳤다. 그러나 이야기만으로는 아무런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에 대하여 상당히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다. 손을 잡고 명상하거나 해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지만 두사람의 관계는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우리들은 일단 호텔에서 첫날밤을 지내기로 하고 이후 어떻게 될지 두고 보기로 했다. 봄베이에서 보낸 초기의 나날들은 정말 기묘한 일의 연속이었다. 제3장 아부산의 명상캠프 그렇게 해서 나와 프라티마는 성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섹스는 완벽하게 실패로 끝났다. 프라티마가 수은 피임약을 사용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수은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 약이 페니스에 닿는 순간, 강렬한 통증이 몰려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며칠간 페니스의 염증으로 아주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따라서 더 이상 프라티마와 섹스를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임실적인 문제 이외에도 그녀가 10년간 남성과 접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나의 연령이 그녀의 절반이라는 것,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명령에 의해 섹스를 아주 부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등이 마음에 걸렸다. 서양인으로 자란 우리들에게는 강제적인 것보다는 자발적인 것이 좋았다.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나와 프라티마가 혹시 성적으로 서로 끌렸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었다.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벌써 일주일 가깝게 분투하고 있는데 모든게 순조롭지 않았다. 바그완이 일러준 누워서 행하는 명상도 프라티마와 함께 지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녀가 좋긴 했지만 성적인 떤에서 궁합은 최악이었다. 그래도 바그완은 참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라고 ' 할 셈인가? 나는 나의 예감과 소문을 통해 바그완이 제자에게 매우 엄한 시련을 부과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최초의 본격적인 시험에 심하게 상처입고 의기소침해져 갔다. 아직 봄베이의 지리에도 익숙하지 않은데 이번에는 기차로 點시간의 거리에 있는 아부산(MountAbu)의 명상캠프에 가야만 했다. 바그완이 나와 프라티마의 실패를 전해 듣고 나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멀리하지는 않을까? 나는 겁먹고 있었다. 섹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어느날, 프라티마가 나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녀는 지난 일을 마음에 두거나 곤혹스러워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아침 햇살 속의 그녀는 몹시 행복한 듯했다. "우리 일은 잊어도 좋다고 바그완이 말했어요." 그녀는 내게 바그완의 뜻을 알렸다. 그녀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바그완의 반응에 오히려 곤란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프라티마는 바그완의 애인인 비베크에게 그날 밤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그런 개인적인 일을 남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인가? 그때 나는 비베크에 대해서 거의 몰랐고 어째서 그녀가 나의 성생활까지 알 필요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프라티마는 이렇게 말했다. "비베크가 바그완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크게 웃고 나서 그 일은 모두 잊어도 좋다고 말했다는 거예요.그렇게 말하고 바그완은 또 웃더랍니다. " 그날 저녁식사에서 나는 어느 그리스 여성을 소개받았다.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은 선박계의 여왕이라 했다. 국제적인 여성이라 그런지 세련된 분위기로 자신감과 여유를 풍겨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속삭였다. "당신의 불행한 일을 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아, 이미 모두에게 알려져 버렸단 말인가! 그 그리스 여성은 바그완으로부터 무크타(Mukta.힌두어로 '자유'를 의미) 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에 vTuminglnA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책은 1971년 8월에 발행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인도 스타일의 헌사가 있었다.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의 불멸의 서간 30통 Neo-Sannyas International 회 장 H. H. Ma Yoga Mukta에 바친다. '불멸의 서간'(Immortal Letters)인 일련의 편지들은 연애편지 ·일화 · 우화 그리고 통렬한 메시지가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봄베이로 출발하기 전에 나는 런던에서 이 소책자를 읽고 무척 감동하였다. '진부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진지한 애정이 깃든 편지를 매일같이 한 여성에게 끊임없이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지 않은가? 이 정도로 쓸 수 있다면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가 이 정도의 사랑을 바칠 수 있는 여성 또한 대단한 인물일 것이다: 이 서간집을 읽고 난 이후 나는 무크타라는 여성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봄베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그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활기에 넘친 젊은이들과 같이 왔고 그중 한사람은 그녀의 연인이었다. 그녀에게 프라티마와의 일을 얘기하자 그녀는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내가 경험한 일이 하나의 농담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무크타에게도 자기 혼자만의 고독을 곱씹는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 키가 In센티밖에 안되는 그녀는 언제나 훌릅한 차림으로 주위의 눈길을 끓었다. 그리고 감정이 그대로 얼굴 표정에 나타나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곧 그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때는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조심하라는 표시였다. 그녀는 분노와 불안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고 그때그때 표현하였다. 내가 처음 본 바그완의 머리칼은 새카만 색이었는데 이는 무크타가 남몰래 염색해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었다. 나는 간혹 비베크가 검은 염료로 얼룩진 수건을 질투어린 눈초리로 마냥 바라보고 있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974년에 이르러 바그완은 머리 염색을 그만두었는지 어느날 갑자기 그의 머리에 백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바그완의 백발은 자신의 외모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실버 교주 '(Silver Guru)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여주었다. 무크타의 명상방법은 남달랐다. 명상세션 중 그녀는 마치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밀의 회오리바람을 느끼는 듯했고 그와 동시에 '내게 손대지 말라'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명상이 끝나면 산냐시들은 서로 애정어린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정열적으로 포옹하곤 했는데 무크타는 언제나 고목나무처럼 선 채로 다른 동료가 두잔째의 홍차를 다 마시기까지 자신의 명상공간에 남아있었다. 황홀함의 극치를 체험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 부럽기까지 했다. 아침 명상이 끝나면 그녀는 늦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저녁 식사 때가 돼서야 밝고 활기찬 표정으로 나타나곤 했다. 프라티마와의 사건이 있은 후 우리들은 아부산으로 열흘간의 명상캠프를 떠났다. 캠프에 참여한 사람은 200∼300명 정도였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신자는 바그완이 묵고 있는 호텔에 함께 투숙하고 나와 그 나머지는 근처 마을에 있는 순례자와 방랑자들을 위한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좁은 방에서 네명이 함께 자기 때문에 더위와 모기에 시달려야만 했다. 캠프는 육체적으로 왜 힘든 과정이었다. 몸을 격하게 놀려야 하는 1상이 하루에 다섯 가지나 행해졌다. 육신의 힘을 소진시킴으로써 마응의 정적을 가져오게 하라는 바그완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었다. 새벽명 이외에는 거의 바그완이 나와서 손수 지도했다. 대부분의 명상은 테니스 코트에서 이루어졌다. 바그완은 항상 코트: 끝에 가설된 목제 연단에 자리를 잡았다. 의자 위에는 두꺼운 쿠션이 놓여져 있었고 연단 위로는 양산이 드리워져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테니스 코트는 강론을 들으러 온 신자들로 가득 찼다. 아부산에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바그완은 지난번 이곳에서 켐프를 열었을 때의 사건을 들려주었다. 이야기의 골자는 전라(全裸)의 명상이 행해졌으므로 이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였다는 것이다. 주민측 역시 그러한 비도덕적인 수행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때까지 명상캠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봄베이에서 충격적인 사진을 몇 장 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명상 세션 후 황홀한 듯 눈을 감고 있는 20∼30명의 나체 신자들이 낮은 의자에 앉아있는 바그완 주위를 둘러4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번 캠프에서는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없었다. 단정히 옷을 : 입거나 고작해야 남성이 상반신 나체가 되는 정도에서 명상이 치뤄졌다. 바그완이 테니스 코트에 나타난 순간 청중들은 잠잠해졌다. 그는 바로 강론을 시작하지 않고 항상 몇분 동안 침묵시간을 가졌다. 근처 무리지어 사는 원숭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때때로 정적을 깨고 들렸다. 바그완은 처음 한시간은 힌두어로, 그 다음 한시간은 영어로 강론을 했다. 6개월 전 바그완은 라크슈미에게 더 이상 영어로 강론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항상 자기 말을 번복하곤 했던 것이다. 그가 연단에 오르자 모든 이의 귀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마치 부드러운 비단이 청중들을 에워싼 듯 평화로움으로 가득찬 고요함이 번졌다. 태양이 떠오르자 기온이 금방 상승하여 몸에 걸쳤던 숄을 깔아도 지면의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힌두어의 강론은 아침 8시부터였다. 강론 중에 그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다리를 한 채 때때로 숄을 재빨리 고쳐 걸치는 정도였다. 턱수염의 한가운데쯤 설치된 몇 개의 마이크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현장에서 그늘 속에 앉아있는 사람은 바그완뿐이었다. 그가 입을 열자 모든 불안이 사라져 갔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곳으로 올 것을 호소했다. 너희들은 나의 호소를 듣고 이곳에 온 것이다. " 대학 교육을 받은 나는 그의 첫마디부터 반발감이 생겼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 먼 곳에 있는 나를 불렀다는 건가? 하지만 만일 바그완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어찌하여 이곳에 올 수 있었는가? 어째서 구릉지대인 이 찌는 듯한 테니스 코트에서 잡다한 종류의 사람들과 섞여 앉아있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바라는 신비체험을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아주 흥분되는 모험임에 틀림없다!' 바그완의 강론이 진행됨에 따라 그 설득력에 가득찬 웅변,5음을 질질 끄는 그 특유의 최면술적인 치음과 각 문장 어미의 음을 늘리는 버릇 등 은 상승효과를 일으켜 청중을 황홀하게 하기도 하고 영감과 에너지를 부여해 주기도 했다. 바그완이 학교의 토론대회에서 챔피언이 되었던 경력도 쉽게 수긍이 갔다. 그의 말은 우리의 취향에 맞아 아주 친숙한 사랑의 노래처럼 들렸다. 그 메시지는 듣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다가와 자기 외에도 수백명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아침의 첫 명상 이외에는 모두 바그완이 그때그때 지시하였다. 오후의 명상은 호텔 옆의 정원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특별히 제작된 단상 위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담으라. 전 에너지를 주입하라.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 그의 박력 넘치는 선동력에 명상 세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캠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마음도 점차 해이해져 마을로 술과 담배를 사러 가느라 불참하는 자들도 생기곤 했다. 캠프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베트남전에 종군했던 사람, 프랑스인 헤로인 중독자, 미국과 영국의 히피와 낙오자들,그런가 하면 확실한 직을 가진 부자와 전문직종의 사람들로 다양하였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서양에 바그완의 메시지를 전하는 첨병이 되었고 가르침을 확대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197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서양의 대도시에 라즈니쉬 센터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캠프기간 중 우리들은 서로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휴식시간에는 벼룩과 이질에 시달렸던 이야기로 화제의 꽃을 피웠다. 어느 산냐시는 히말라야에서 이 캠프로 오는 도중 자기 동료가 전갈에 손을 물렸다고 했다. 그 꼬리에 붙어있는 독침으로 말미암아 이제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 동료는 편하게 죽으려는 마음으로 네팔의 계곡에서 구한 최고의 조인트(joint.마리화나 연초)를 피워 보자고 제안했다고 했다. 그 산냐시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녀석, 물렸을 때는 굉장히 아파하더니 순식간에 환각에 빠져 그대로 죽는 거야. 원대로 편안히 말야.사치스럽게 죽은 편 아니야?" 우리들은 또 하루의 마지막 명상이 끝나면 천막에 모여 농담이나 각자의 체험을 교환했다. 몸은 고되지만 캠프는 정말 훌륭하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벽과 약물에 관한 한 프랑스인을 당할 수 없다는데 전원의 의견이 일치한 적도 있었다. 밤에는 주위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산냐시들의 소리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모두 함께 웃고 포옹하고 입술을 맞췄다. 모두가 평화와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성들은 매우 얇은 사프란색의 로브를 걸친 채 아주 섹시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남성들은 천을 허리에 감기만 한 '룬기'라고 하는 인도식 스타일을 하였다. 윗 옷으로는 담배와 잔돈을 넣을 수 있도록 주머니가 잔뜩 달린 조끼를 선호했다. 밤이 되면 백단(白檀)과 박하, 장뇌(樟腦)의 향수가 코끝을 진동해 황홀한 기분마저 느끼게 했다. 때로는 바그완이 사용하는 '벅시 주스' 병을 가지고 오는 산냐시도 있었다. 이 냄새는 모두에게 극히 강한 환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바그완과의 다르샨 동안에 맛보았던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 캠프가 행해질 당시 라즈니쉬 운동은 '생의 각성 운동'(Life Awakening Movement)이라고 불렀다. 바그완이 강론할 때 그의 뒤에는 다음과 같은 현수막이 항상 드리워져 있었다. '비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변모시켜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약속입니다-라즈니쉬' 지름 6미터 정도의 이 현수막에는 슬로건과 함께 작은 촛불을 합장하고 있는 손이 디자인된 심벌도 그려져 있었다. 우리들은 바그완의 '비우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나름대로 상상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들이 다르샨을 받을 때, 그는 웅변력 그리고 놀라운 정보력으로 유명했다. 분명 그에게는 초능력과 천리안이 구비되어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가 산냐시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아주 세밀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들은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라크슈미가 비밀정보원으로서 다르샨 전에 우리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의견이 가장 우세했지만,그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바그완은 결코 자기 지식의 근원을 밝히거나 자신의 스승이 누구였느니 하는 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항상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는 오히려 타인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현세(인도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환생설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에서 나는 스승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전생에서 수많은 현인들로부터 배워왔다. 그래서 지금 나는 너희들에게 지고한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다. " 어쨌든 우리들의 의견은 그가 '진짜 교주'라는 데 모아졌다. 그러므로 바그완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가끔 심한 말을 하거나 시련을 부여해도 모두들 복종하였다. 그가 제자 두사람에게 성관계를 맺도록 명령하면 무언가 그들 사이에 심원한 연금술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계맺기'는 봄베이에서 늘 있었던 일이었다. 아부산에서의 켐프를 마치고 봄베이로 돌아가자 나도 인도에 제법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봄베이에서 나는 인도의 민속옷을 걸치고 암시장에서 환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시장통에 있는 싸고 맛있는 레스토랑을 알아내었다. 초기에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캠프에서 돌아온 나는 숙소를 '다르므살라'(Dharmsala:순례자용의 싸구려 숙소)로 옮겼다. 지니고 있던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절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르므살라에서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인 아일랜드 출신의 릴라(Leela)와 함께 방을 빌렸다. 같은 층에 방을 빌려 살고 있는 산냐시들로 인해 마치 그곳은 '오렌지 피플'인 우리들에게 점령되어 있는 듯했다. 우리들은 고급 호텔과는 달리 모기와 바퀴벌레, 개미들과 함께 살아야만 했다. 일부 민감한 서양인들로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방이 지저분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온 한 여자는 세면장에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아부산에서의 캠프 직후, 라크슈미는 바그완을 위해 좀더 넓고 살기 좋은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새로운 산냐시의 수는 날로 증가해갔고 바그완은 이미 작은 맨션에 싫증 나 있었다. 건물을 찾고 있던 라크슈미가 어느날 인도의 열성적인 산냐시 몇명이 집의 구입자금을 기증해주기로 했다고 발표했고, 그들 또한 '바그완에게 집을 기증할 수 있다니 대단히 영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바그완은 어느날엔가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집을 기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대환영이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나는 마음이 꺼림칙하면 언제라도 집을 나와버릴 사람이라는 것.둘째 기증자가 된다고 해서 나의 측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조금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 이 발언이 있은 후 쇄도하던 기증신청은 꼬리를 감추듯 갑자기 감소해가고 말았다. 나는 바그완과의 세번째 다르샨을 위해 그를 만나러 갔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캠프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좋았습니다. " "좋았나? 굿, 시바. 너를 계속 관찰하고 있었지. 잘하고 있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음. 앞으로의 계획은? 음.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가? 현재 여자친구가 있겠지?그녀의 계획은 어떤가? 음." 나는 바그완에게 릴라의 계획을 말해줬다. 그녀는 3주간의 명상과 '완전한 침묵'이라는 바그완의 명상코스 중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오, 그녀가 3주간의 고독한 명상을 하겠다고? 그것 괜찮군. 너도 함께 가라!" 늘 지시를 받고 나는 잠시 당혹감에 빠졌다. 모우르나(Mourna)라는 이 수행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3주동안이나 견뎌내야 하는 고행이었다. 남의 몸에 닿아서도 안되고 읽고 쓰는 것도 절대 금지이며 식사도 가장 적은 양, 게다가 24시간 계속해서 명상해야 하는 것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호텔방에서 5분간 명상하는 것조차도 몹시 힘든 일인데‥‥‥‥ 바그완은 나의 표정과 태도를 가만히 관찰하며 말했다. "굿. 잘될 거야." 나는 바그완의 방을 뒤로 하면서 '굿'이라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이리저리 생각해보며 과연 내가 그런 장기간의 고문을 정말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부산 캠프에서 바그완은 그가 모든 제자와 항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수없이 언급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모든 제자들이 말라와 그의 사진이 들어있는 로켓(locket)을 몸에 지니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와 제자를 연결시키는 매개물이라는 것이었다. 일단 말라를 목에 걸게 되면 제자들은 항상 그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말라를 제자의 목에 걸어줄 때 "이제부터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만일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마음을 안정시키고 명상상태로 들어가 로켓을 쥐고 가슴에 갖다 대면 나는 너를 도우러 갈 것이다. "고 했다. 우리들이 잡담을 나눌 때면 항상 다르샨 중 바그완으로부터 무엇을 들었는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다르샨은 오전 중에 기껏해야 서너 명 정도밖에 받을 수 없었기에 우리 샨냐시들은 갖고 있는 정보를 서로 교환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있었던 주제는 '관계맺기'를 할 때 바그완이 보여주는 이상한 태도와 섹스에 대한 지시였다. 몇몇 커플들은 그의 눈앞에서 섹스할 것을 명령받았다고 했다. "섹스할 때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알도록 하라."고 그는 말했는데 그 때문에 우리들 '오렌지 피플'의 평판은 이웃사람들 사이에서 극도로 나빠 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산냐시들에게 바그완의 위상은 점차 초인적 성격을 띠어갔다. 예를 들면 택시를 제 시간에 잡아 열차시각에 맞추었는데도 그것은 모두 '바그완의 덕'이라는 식이었다. 확실히 바그완에게는 초능력자만이 지닐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지만 바그완에게는 쇼맨적인 능력과 상식의 범위를 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 스스로가 주장하듯 초능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괴로운 경험을 바그완에게 고백하면 그가 그 이야기의 뒤를 이어 자세한 정황설명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하게 남의 마음을 읽어내려 갔다. 상대가 생각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미리 알고 있는 것이었다. 바그완은 또 대화술에 관해서도 천재였다. 그는 사람들을 완벽할 정도로 설복시켜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고 자신의 모든 말을 성스러운 명령이라고 믿게 했는데,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산냐시의 대부분은 남에게 쉽게 속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 높은 교육수준을 지니고 있었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건 믿기 이전에 우선 의심부터 하는 습관을 가진 서양인들이었던 것이다. 열차는 불이 붙을 정도로 마른 흰빛의 산림을 지나서 웨스턴 가츠 (Western Ghats) 허리를 오르고 있었다. 구릉의 별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덥고 건조한 열차여행을 끝내고 역에 내려서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졸린 눈으로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길가에는 인적도 없었으며 두세 마리의 산양과 잠자리들만 어지러이 날고 있을 뿐이었다. 역으로부터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석탄 칠을 한 낮고 아담한 담에 둘러싸인 토지가 있었다. 우리들은 곧장 주인을 만났다. 수직의 목면옷을 걸치고 얼굴이 야윈 50세 가량의 주인 남자는 나와 릴라(Leela)가 예약한 오두막을 가리켰다. 그곳은 한쪽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밖으로는 철도가 놓여져 있었다. 보기에도 소음이 심한 듯했다. 그 오두막집 주인으로부터 사용상의 주의를 들었다. 식사는 1일 2회 차는 1일 3회, 그의 처가 가져다 준다는 것이었다. "아차리아는 어떻습니까? 건강하십니까?" 그가 물었다. 아차리아의 평판은 이 곳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고 그도 강론을 들은 일이 있는 듯했다. 수도 옆의 흑판을 메모판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이 말 대신 우리의 의사를 전달해 줄 유일한 매개물이었다. 주인은 인사를 마치자 마자 서둘러 떠나려 했다. 릴라의 넘칠 듯 발산되는 성적 매력에 그는 심하게 동요하는 듯했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사프란색의 얇은 로브만을 걸친 채 상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서양 여성에게 인도인은 익숙하지 못했다. 산냐시들은 남녀 모두 성스러운 색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도인들을 모욕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말했지만 그것은 마치 런던에 온 인도인이 성직자용 갈색옷을 입은 채 반라(半裸)의 여자 아이를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피카디리(Piccadilly) 거리를 걷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결국 주인이 요물을 앞에 놓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 방어는 딴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밖에 없었다. 릴라와 나는 오두막을 살피러 갔다. 안에는 노끈으로 짠 침대가 두 개 있고 그 위에는 흐늘흐늘한 매트리스가 깔려있었다. 그리고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저녁 7시. 문을 닫고 명상마라톤을 시작했다. 릴라가 몸에 감고 있는 천을 바로잡자 유방이 보기 좋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되어 있으니까. 좋아, 이 괴로운 21일 동안 섹스는 떨쳐야지!' 명상마라톤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실패였다. 8일째가 되자 지긋지긋 해지기 시작했다. 릴라는 착실히 명상을 계속하였지만 나는 그녀와 거리를 두기 위해서 구릉지대를 산보하기도 했다. 명상중에 그녀는 황홀감에 빠져 거듭 정진할 수 있었지만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라온 나는 그렇지 않았다. 한번은 산보 도중에 갈색의 작은 야생곰을 만난 적이 있었다. 누구의 명령에도 얽매이지 않고 생기차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그 곰이 무척 부럽게 느껴졌다. '사방 3미터의 벽 속에 감금당한 채 무서운 아일랜드 여자에게 눈총받고 있는 나와 저 갈색곰 중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운가?' 하는 식의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즉시 봄베이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언덕에 올라 오두막이 있는 작은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내게는 바그완이란 경이롭고 신비에 가득 차 있는 인물과 나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분석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래, 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인도까지 왔다. 아마 그는 나의 에고와 참을성의 결여, 노력 부족 등을 깨닫게 하려고 나에게 한계상황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어. 완전한 실격자다. 정녕 이 '마음비우기'수행은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에게는 다른 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생각을 한 나는 흑판에 '안녕'이라고 쓰고 다음 열차로 봄베이를 향해 떠났다. 봄베이에서 나는 다른 산냐시와 새로운 방을 공동으로 빌리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생각할 일이 있어서 2∼3주 동안 혼자 산에 다녀오겠어. 바그완을 만나러 가는 건 그 다음의 일이야!" 나는 짐을 배낭에 정리하고 나서 또 다른 구릉지대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곳은 전망이 좋은 장소였다. 벼랑 위에 앉은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토록 바그완에게 이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확실히 그는 자기 자신에도, 자기의 발언에도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 넘쳐흐르는 강한 카리스마성이 있다. 특히 설득력 있는 뛰어난 웅변가이며 결코 강한 마술사가 아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지적이며 총명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그 자신도 알고 있겠지, 나는 나 자신을 돌아봐도 그와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가지도 없다. 내가 다르샨을 받을 때 바그완은 독심술, 천리안, 치유력을 갖춘 사람이며 예언자이자 최고의 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맞지 않는 것일까? 무엇을 입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에 가야 할지, 게다가 누구와 함께 자야 할지, 모든 것에 명령받아야 한다는 것이 나로선 참을 수 없다. 이 정도에서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아니면‥‥‥: 마침내 나는 히말라야에 가서 다른 교주를 찾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바그완을 좀더 폭넓은 시각에서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틀림없이 현자는 많이 존재할 것이고, 바그완보다 더 내게 맞는 교주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히말라야가 나를 부르고 있다. 지금의 내게는 더 맑고 투명한 의식이 필요하다. 우선 급행열차를 타고 델리로 간 다음 그 유명한 안 깊은 산맥으로 향하자. 그곳은 기도자의 깃발과 고대의 흔적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얼음같이 찬 계곡물을 마실 수도 있고 송림(松林) 냄새가 떠오는 신비한 고산의 세계다: 나는 고급 바지를 가위로 잘라 짧은 바지로 만들고 그 자른 부분을 벼랑 위에서 던져버렸다. 그러자 그것은 벼랑의 측면을 불어치는 바람에 쉽쓸려 펄럭거리다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마리의 매가 훨씬 아래에서 흰 물이라도 발견한 듯 맹렬한 기세로 바람을 가르며 날고 있었다. 인도! 이곳이 지닌 여러가지 모순, 그 아름다움, 그 장대하고 신비함, 그 혼돈과 난잡. 이러한 모든것을 포함하고 있는 인도는 멋진 곳이었다. 이 나라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런던의 도시문명이나 스코틀랜드의 음산한 풍토와는 사뭇 달랐다. 거지와 양치기의 나라, 소수의 부자들과 많은 가난뱅이의 나라, 타는 듯한 더위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먼지 투성이의 길이 가난한 마을들을 격리시키고 있는 나라, 이것이 인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봄베이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치솟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봄베이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짐을 정리해 봄베이로 향했다. 일단 결심이 서자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철도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치 어깨의 무거운 짐을 벗은 듯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이었다. 역에 도착해보니 다음 열차까지는 아직 세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지만 그런 것은 이제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봄베이를 향해 밤새 철로변을 따라 걸었다. 가을의 밝은 달이 밤길을 비추고 있었다. 밤이 새기 전에 노변에서 두세 시간 잠을 자고 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평야지대의 촌락, 망고나무 金, 가물어 먼지 투성이가 된 논밭, 코코넛 농장 등의 풍경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를 걸었다. 도중에 수마차와 양치기, 고물자동차에 탄 우편배달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이 볼품없는 반바지 차림의 서양인을 신기한듯 바라보기도 했다. 아이들 중에는 처음 백인을 보는 아이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나에게 오이와 토마토 그리고 불결하게 보이는 음료수 등을 주었다. 그 물은 육안으로도 녹색의 미생물이 등등 떠있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상관 않고 마셨다. 맛있었다. 제4장 성역(聖域)과 성역(悚域) 사이 다음날 봄베이로 되돌아온 나를 보고 룸메이트는 놀라지 않았다. "네가 오늘 돌아오리라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알았어? 2주동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떠났는데‥‥‥‥ 그는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어제 네가 출발한 후 라크슈미를 만났어. 그리고 네가 바그완과 만나지도 않고 그대로 떠나버려 2주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과 릴과의 명상이 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어. 라크슈미는 곧 바그샨에게 보고하러 갔지. 바그완은 웃으며 네가 오늘 돌아을 거라고 라크슈미에게 말한 거야. 이런 신기한 일이 있다니! 바그완은 네가 돌아오는 즉시 만나고 싶다던데?" 일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잠시 생각했다. 바그완의 곁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려고 해도 그들을 반드시 다시 되돌아오게 한다는 말을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비베크가 작년에 바그완의 곁을 떠나려 한 일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화가 난 그녀는 봄베이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그러나 열차가 봄베이의 북쪽 교외를 지나갈 때쯤 되자 갑자기 도망치려던 기분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바그완에 대한 생각이 변해갔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음을 깨닫고 다시 되돌아 왔다고 했다. 우리들은 바그완의 포로가 된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었고 그의 지배력은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 강력한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나는 바그완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 그의 앞에 다가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었다. 서둘러 바그완의 맨션으로 찾아가 라크슈미를 만났다. 그녀는 바로 다음날 다르샨을 예약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바그완과 만났다. 그는 눈을 반짝이면서 여느 때와 같이 유연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더 가까이 앉으라는 몸짓을 해보이고 나서 그는 입을 열었다. "시바, 네가 이해해두지 않으면 안될 일이 두 가지 있다. 음,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문제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너는 다르다. 너는 아무 문제도 없다. 네게는 모든 일이 쉽게 풀려갈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도 많은 일을 해왔지만 지금부터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거야. 이제 알겠지? 너무 사사로운 일로 기운을 떨어뜨려서는 안된다. 만사가 잘 될 것이다. 음, 그런데 이제부터 너는 무엇을 할 계획이지?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나의 의향을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비우라'는 명령 대신 무엇을 하고 싶냐고 내게 물었던 것이다. 그는 카멜레온이고 마술사였다.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면 무얼 얼마만큼 비워야 하느냐고 되묻고 싶었는데‥‥‥‥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 당한 기분이었다. 바그완에게는 미리 대답을 준비해도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바그완은 내게 말했다. "일단 런던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몬순계절에 인도에 있어봐야 별 수 없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일시 귀국했다가 다음에 올 때는 장기간 체재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돈을 가지고 오도록 해라. 10월에 돌아오라.음, 10월. 10월이 굿이야." 또 굿이다! 하지만 이번의 굿에는 강력한 명령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한편으론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10월에는 기필코 돌아오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런던에 돌아온 나는 오렌지색의 로브와 말라를 몸에 걸치고 봄베이에서 신었던 가죽 샌들을 신고 다녔다. 그 모습이 사람들의 눈총을 샀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나에게는 바그완의 훌륭한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많은 사람들을 공동체에 모아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런던의 라즈니쉬 센터는 더 훌륭한 집으로 옮겼고 매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센터는 전보다 더 큰 기대감과 흥분으로 넘쳐흘렀다. 내가 인도를 다녀온 후에 대하는 런던의 거리는 거짓말같이 청결하고 싱싱하게 느껴졌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또한 참으로 상쾌하였다. 후덥지근한 아라비아해의 바람과는 성격이 다른 세련되고 맛깔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는 아니었다. 런던은 우리들이 인도에서 만들었던 공동체나 마음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는 그 무엇이 전무한 척박한 땅이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지에서는 다양한 인간성 회복운동과 정신 성장 그룹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이 구하는 바는 진정으로 자기 내면의 세계를 접하고 그리하여 우주의 진리와 조화를 깨닫는 데 있었다. 내가 런던에 돌아와 있는 수개월 동안에도 이러한 그룹은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대부분 미국에서 시작된 이러한 운동에는 현실생활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이 열심히 참가하였다. TV에서 엔카운터 그룹의 실체가 방송되자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비틀즈는 그들의 교주인 마하리시 마혜쉬 요기(Maharishi Mahe- sh Yogi)와 막 헤어진 상태였지만 그들이 동양의 정신세계에 관심이 깊다고 해서 역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랑이 있으면 세계를 바꿀 수 있어요'(With our love we can clean go the world)라고 노래한 비틀즈 덕택에 모두들 교주(Guru)라는 말을 알게 되었고, 거의 모든 신문에 마하리시의 사진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그완이 등장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시대였다. 매일 아침 라즈니쉬 센터에서 바그완의 강론을 듣는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해 줄 진짜 인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런던에 있는 동안 '프라이멀 세라피'(Primal Therapy)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한 정신치료사가 개발한 프라이멀 세라피에 의하면, 감정적 고통은 기본적으로 출생시의 원초적 충격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감정적 고통을 억압하면 결국 감응능력(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등)을 차단하고 신경질적인 증상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래서 프라이멀 세라피에서는 사람을 출생시의 고통으로 되돌리는데,출생의 충격을 재체험한 사람은 고통을 참지 못해 마구 소리친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 비명'(Primal Scream) ot다. 프라이멀 세라피와 바그완의 다이나믹 명상은 상당히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세라피 중 참가자들은 울기도 하고 아우성치기도 하고 수족을 바둥거리기도 하고 아기처럼 기어다니기도 한다. 참가자들에 의하면 세라피 중 재체험된 감정적 고통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어린시절의 욕구불만에서 나타나는 고통이라고 한다. 나 역시 앞에서 말했듯이, 아버지에 대한 욕구불만이 많았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의 소년기도 청년기도 사뭇 갈등과 번민 속에 보내야만 했다. 바그완을 찾은 것도 바로 여기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프라이멀 세라피에 열중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사랑과 욕망과 열정이 일치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인도에 가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나를 보고 다른 사람 같다고 말했다. 엔카운터 구룹을 하는 친구 마이클 바네트(Michael Barnett:그는 후에 Somendra 라는 이름을 받고 바그완 곁에서 8년간을 보내게 된다)조차 내가 상당히 변했다고 했다. "너에게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빛이 있어. 눈빛이 변했어. 바그완이라는 사나이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솜씨는 대단한 것 같군." 그 무련 나는 직업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치 아르바이트를 하듯 일했고 여가시간에는 오토바이를 몰고 스코틀랜드 지방을 여행했다. 그러면서 바그완이 시킨대로 10월에는 봄베이로 돌아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갈 내 여자친구는 미국 여성으로 프라이멀 세라피의 세라피스트)의 준비 부족 때문에 일정을 늦춰 12월에 가기로 했다. 이것이 잘못이었다. 최초의 인도행으로부터 9개월이 지난 후 나는 다시 봄베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내 여자친구와 열명의 산냐시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비나의 새벽명상 세션에 참가한 후 바그완을 만나고 싶어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봄베이에 도착하자마자 라크슈미는 ◎룹 다르샨을 준비해주었다.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바그완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었는데 그 다르샨이라니 실망이었다. 바그완은 나의 모습을 보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잘 지냈나? 바다스(Shivadas) !"하고 말했다. 뭐라고? 내게 준 이름을 벌써 잊어버린 것인가? 나의 자존심은 엉망이 되었다. 지난 9개월간 몸은 비록 바그완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다했다. 계속 오렌지색 로브를 입고 지냈으며 명상도 했다. 새로운 센터를 만드는 데 협력했고 그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했고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 그는 자신이 지어준 나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래, 어떤가? 너의 새로운 이름이야. 어떤가?" 결국 이것이 그가 명령한 대로 10월에 돌아오지 않은 데 대한 보답이란 말인가? 전에 내가 맛본 편안하고 친밀한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다른 신참자들과 내가 특별히 다를 바 없다는 의미였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작정인가? 끝으로 그는 나를 보고 말했다. "얼마나 체재할 작정이지? 다음의 아부산 캠프에는 갈 건가?굿. 거기서 다시 만나지. 아부산에서 다르샨 예약을 해라." 우리의 다르샨은 생각보다 간단히 끝났다. 그런데 바그완은 내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그대는 남으라." 순간 나는 다른 여성이 그의 지시에 의해 남았을 때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바그완은 옷을 모두 벗도록 명령하지 않았는가! 내 여자친구에게도 같은 짓을 할 것인가? 그가 섹스교주 즉 '음부(陰部) 교주'(The Guru of the Vagina)로 유명한 사실이 떠올랐다. 공원에서 작은 몸집의 인도인에게서 "당신의 교주는 옳지 않아! 여자 제자들을 농락하고 있어!"하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방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30분이 지나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최악의 사태를 머리 속으로 그리다가 혼자 아파트로 돌아와 안절부절하면서 기다렸다. 겨우 그녀가 돌아왔다. 바그완이 그녀에게 준 이름은 '신성한 사랑'이라는 의미의 프레므 디비야였다. 내일 아침 또 만나기로 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그녀는 바그완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많은 의문이 풀렸다고 말했다. "오늘밤은 당신과 함께 자고 싶지 않아In 오늘밤만은 혼자 지내고 싶어요." 그녀는 오늘밤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소파에 누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모두 함께 바그완을 만났는』 데 그녀만 특별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질투심이 일었다. 그와으 친밀감이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후에도 디비야의 개인적인 다르샨이 매일 계속됨에 따라 나의 마음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려갔다. 어떤 날은 그녀 혼자서 하루에 두 번이나 다르샨을 받았다. 나는 드디어 참을 수 없어 라크슈미에게 다르샨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다며 나를 쌀쌀맞게 몰아낼 뿐이었다. 바그완은 소유욕을 갖지 말라고 우리들 모두에게 엄하게 경고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디비야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동침을 거절당한 다음부터는 더욱 그랬다. 갈수록 나는 언짢은 모습을 띠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디비야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나는 치욕적인 모욕을 당했다. 그날 디비야는 새벽 4시의 특별 다르샨을 받으러 갔다. '에너지 나눠갖기'(Energy Shar ins)라는 완곡한 표현의 이 다르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많았다. 바그완은 매일밤 자정까지 한 여성과 함께 지낸 후 4시간의 수면을 취하고 나면 또 다른 여성을 그의 곁으로 불러들인다고 했다. 그날 아침 나는 바그완의 맨션 근처에 있는 찻집에서 혼자 처량맞게 홍차를 마시고 있자니 누군가가 다급하게 내게 왔다. "바그완이 지금 곧 오래! 빨리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 왜 바그완은 디비야와 만난 후 지금 나를 부르는 걸까? 라크슈미가 나를 방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그녀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마치 '이곳은 성역이므로 주의하세요!'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 생각으론 거기는 성역임과 동시에 성역(性域)이기도 했다. 바그완은 나를 보자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건강한가, 시바?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게 몇가지 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인데 앞으로 디비야는 너와 지낼 수 없다. 그녀에게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또 네게 있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괴로운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디비야를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 캠프 후에도 나는 그녀가 봄베이에 있었으면 한다. 그녀는 '프라이멀 세라피'가 가능하고 그것은 나의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카일라쉬 농장으로 가서 아쉬람 건설을 도와주기 바란다. 나의 공동체 건설 사업을 도와주겠지?" 카일라쉬(Kailash)라고? 카일라쉬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카일라쉬는 봄베이에서 동쪽으로 4백마일 떨어진 황량하고 척박한 토지인데 그 당시 제자 몇 사람을 보내 아쉬람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곳을 바그완은 새로운 공동체로 삼을 예정이었다. 서양인 산냐시가 열명 정도 선발대로 그곳에 파견되어 있고 남아프리과의 전직 파일럿 출신인 비트 라그(Veetrag)라는 산냐시에게 새로운 아쉬람의 건설과 운영의 책임이 맡겨져 있었다. 그 당시 바그완의 조직은 그렇게 여유있지는 않았지만 인도의 자본가 몇 사람이 건설자금을 재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그완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쉬람이 만들어지면 결국 나도 카일라쉬로 옮길 작정이야. 물론 산냐시 전원이 그곳에서 지내게 되겠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나의 친척이 그 토지의 소유자지.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야. 음, 굿, 시바. 걱정할 것 없어.모든 게 잘될 거야.캠프에서 다시 만나지." 나는 바그완의 말에 이중으로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디비야와 헤어지라는 것 또 하나는 카일라쉬로의 유배였다. 카일라쉬는 이미 '시베리아'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 내가 카일라쉬로 가기 직전에 아부에서 캠프가 열렸다. 50명 정도의 산냐시가 봄베이역에서 열차에 올랐다. 바그완도 같은 열차에 동승했다. 우리 산냐시들은 아메다바드역에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기,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 과격주의자들이 역에서 라즈니쉬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경찰로부터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바그완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비판하여 과격주의자를 노하게 한 탓이었다. 힌두교는 채식주의와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만 과격주의자들은 잔인한 폭동도 서슴지 않았다. 일단 폭동이 일어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게 없이 닥치는 대로 찍고 찌르곤 하였다. 기차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역에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두세 명의 산냐시가 열차에서 재빨리 뛰어내려 바그완이 탄 일등칸 앞에 진을 쳤다. 역은 온갖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며 여느때보다 많아 보였다. 군중 저편에서는 폭동진압용 장비를 갖춘 경찰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라크슈미가 경찰을 부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잠시 후 야유소리가 난 후 "라즈니쉬 무르다바드! 라즈니쉬 무르다바 드!"(Rajneesh Murdabad:라즈니쉬에게 죽음을!)하는 분명히 조직적인 구호가 들려왔다. 다행히 문제는 생기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엄청난 공포감을 맛보았다. 바그완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열차여행을 그만두었고 또 아부의 캠프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끝내고 말았다. 아부에 도착하자 더 없이 편안하고 좋았다. 나의 마음은 새로운 희망의 빛으로 채워졌다. 원숭이 무리와 화려한 작은 새들과 함께 보낸 이 수행기간 동안 디비야를 향한 애절한 마음이 점차 사라져갔던 것이다. 이 캠프에서 나는 희미하지만 처음으로 일상의 의식을 초월한 정신세계 즉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접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것이었다. 바그완이 나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느낌이었다. 멋지다! 이것은 모든 속세의 의미를 초월한 곳에서 맛볼 수 있는 느낌이었다. 캠프동안에 카일라쉬에 갔다온 몇명을 만나 여러가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 여성은 밭에 우글거리는 쥐가 털이 곤두설 정도로 무서웠다고 했다. 그녀는 바그완과의 다르샨에서 그 공포감을 이야기했다. "카일라쉬에서는 밤이 되면 쥐가 침대로 올라오는데 끔찍한 일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입니다. 쥐들은 한밤중에 찍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다가 마침내는 내 신발에 똥을 남겨놓고 갑니다. " 바그완은 그 공포의 원인이 단순한 성적 콤플렉스에 있다며 확실한 치료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오럴 섹스를 마음껏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카일라쉬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마치 지옥처럼 여겨졌다. 바그완은 지금까지 이미 30명의 서양 산냐시들에게 카일라쉬행을 명했고 새로운 사람들이 추가될 예정이었다. 카일라쉬에는 의심이 많은 사람, 반항적인 사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어중간한 자들이 선발되었다.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돈이 많아서 바그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람들은 카일라쉬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부에서의 나의 다르샨 날이 마침내 찾아왔다. 바그완의 방밖에는 긴 줄이 이어졌고 다르샨은 컨베이어 시스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방에 들어서자 앞 사람이 바그완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떤가, 시바? 음." 이번에는 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다. 나는 그에게 정글 한가운데 있는 불결한 농장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나를 응시하더니 양손을 합장하였다. "아, 그런가. 가고 싶지 않다면 물론 갈 필요는 없다. 다른 산냐시와 함께 봄베이로 돌아가도 상관 없어 !" 나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 못해 가겠다고 겨우 대답했다. 바그완은 천천히 나의 눈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바. 너는 가지 않으면 안돼. 가라고. 그리고 농장에서 음‥‥‥ 명상과 일과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해라. 그 3개월 동안은 침묵을 지키고 독서를 해서는 안돼. 오케이? 그렇게 하는 것이 너에게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거야.그리고 디비야도 준비되는 대로 그쪽에 보내도록 하겠어. 오케이 ? 굿." 나는 내 자신 스스로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며칠 후 멋진 일이 일어났다. 내가 디비야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자 이번엔 그녀의 편에서 나를 향해 찾아든 것이었다. 감미로운 기분으로 우리는 아부에서 최후의 이틀간을 사랑으로 장식했다. 캠프 마지막 날, 나와 같이 농장행을 명령받은 사람들은 그룹 다르샨에 불려갔다. 바그완은 입을 열었다. "카일라쉬 아쉬람이라는 건설을 위해서 선발된 여러분은 진실로 운이 좋다. 항상 새롭게 시작되는 곳엔 다른 장소보다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엄청나게 많은 혜택이 앞으로 그대들에게 부여될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행운을 얻을 것이다. 음, 그 땅으로 가라! 아름다운 토지다. 나는 어린시절에 여러번 그곳에 간 일이 있다. 너희들도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 아쉬람을 건설하고 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는 것이다. 모든 산냐시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나의 축岺을 가지고 가라. 즐거워하라. 기쁨에 차있으라! 거기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 그의 말 그대로였다. 실로 기상천외한 일들이 그곳에서 많이 일어났으니까. 제5장 천국과 지옥의 카일라쉬 카일라쉬는 그렇게 간단히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아부에서 열차로 온종일을 달려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했지만, 거기서도 아직 50 마일이나 더 떨어져 있었다. 농장까지 데려다 줄 차를 기다리는 데도 우리들은 이틀씩이나 기다려야 했다. 바그완의 친척이 오길 기다리면서 '도대체 우리들에게 무슨 일들이 펼쳐질까? 하고 모두들 궁금해 했다. 마침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바그완의 친척들은 우리들을 돌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그들로선 전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서양인들이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게다가 인도에서도 가장 더운 지방의 진흙투성이 농장에 가려했으니 말이다. 농장으로 가는 도중 그들은 우리들에게 비관적인 얘기만 늘어놓았다. "오래 있지는 마십시요. 누구에게도 무리입니다. 특히 요즘 철에는 좋지 않아요." 우리들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바그완의 축복만 있으면 신에게 버림받은 어떠한 토지라도 간단히 오아시스로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일라쉬에서 캠프생활을 하고 있는 서양인은 모두 35명 정도였다. 멤버구성 또한 묘했다. 금발에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스웨덴의 모델출신이 있는가 하면,사사건건 불평투성이인 미국인도 있었다. 그외에도 토론토 출신의 게이 커플, 카일라쉬의 리더인 남아프리카 출신의 전 비행사, 잡지 편집 일을 했던 쾌활한 오스트레일리아인, 상당히 미인인 두 사람의 미국 여성, 거기에 영국여성 한사람(바그완은 그녀에게 하루 3회 마스터베이션을 할 것을 명하였다)이 있었다. 그 영국여성은 바그완의 명령을 받고 고민하다가 성적 명상용으로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여 농가의 낡은 2층 건물 일부를 커튼으로 막아 사용하였다. 그리고 독일에서 전기기사 일을 했던 하리다스는 내가 그곳에서 가장'가깝게 사귄 동료였는데 상당히 무뚝뚝한 편이었다. 우리가 일이나 명상을 하고 있으면 그 지방 사람들이 찾아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곤 하였다. 그들로선 우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더위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자 우리들은 하나둘 옷을 벗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전라(全裸)인 채로 돌아다니며 명상하였다. 그러자 연일 강 저편 너머로 인도인 구경꾼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나체의 외국인'을 보기 위해서 20마일을 걸어 온 사람도 있었다. 카일라쉬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아부의 캠프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으므로 아무리 태어난 환경과 성격이 달라도 우리들은 바그완의 사랑에 의해서 결속되어 있었고, 개개의 다르샨을 통해 지시된 그의 명령이 우리들을 이끌고 있는 빛이었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찾아들면 우리들은 바그완의 말을 생각해내고 그것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반년간 지낼 것을 지시받았다. 따라서 몬순시기가 와도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나 바그완이 내게 내린 명령은 3개월간 머물라는 것이었다. 고맙게도 그는 내게 만은 반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자 산냐시 동료들간의 일체감이 강해져 갔다. 우리들은 항상 행동을 같이 했다. 바그완에 대한 사랑과 '그의 일'에 대한 헌신으로 하나가 된 우리들은 강한 유대감으로 뭉쳐진 대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출신의 파일럿이었고 아쉬람의 리더인 비트라그 (Veetrag)는 여러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바그완과 라크슈미는 그에게 우리들의 식사량과 행동을 제한하는 규칙사항을 점차 늘리라고 명령했다. 식사, 자유시간, 휴일을 줄이고 외출을 금지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그것은 평소 권위주의적이었던 비트라그에겐 안성맞춤의 역할이었다. 우리들은 비트라그에게 50루피의 생활비를 지불하였고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해야만 했다. 적은 식사량과 여러가지 까다로운 규칙을 견디지 못하고 몇몇은 카일라쉬를 떠나기도 했다. 그 일에 대해서도 그는 사전에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규칙이 너무 많다며 문제를 일으키면 '예고 없이 없애버린다. 할테떤 해봐라!'하는 식이었다. 처음 농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지역의 식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쓸데없이 분간 끓일 필요가 없다. 주민들이 이 물을 마시고 있으니까 우리들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삼일 후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비트라그에게 아메바성 이질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비췄다. "주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마셔왔기 때문에 몸의 조직이 물에 익숙해져 있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마실 물만큼은 끓여서 먹겠습니다. "고 말하자 그는 절감을 낭비한다며 투덜거리더니 마지못해 승낙해 주었다. 결국 물을 끓이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6주만에 산냐시 중 80% 정도가 아메바성 이질에 걸렸다. 나는 참혹스러을 만큼 쇠약해져 창백한 얼굴을 한 어느 영국여성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이질 때문에 3주간 누워있었는데 심한 탈수증상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들을 보자 의사는 깜짝 놀랐다. "물을 끓여 마시지 않았다고?도대체 어쩔 작정이었소?" 그는 우리들에게 충고했다. "정신이 돈 거요? 아무리 이곳 사람이 차니더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당신들은 서양에서 왔고 당신들의 신체는 이곳 물과 맞지 않아요. 이 여자는 죽어가고 있어요! 가서 책임자에게 그렇게 말해요." 의사가 말한 대로 비트라그에게 알리자 그는 "너의 네가티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퍼뜨려서는 안된다!"고 윽박질렀다. 이러한 체제는 마침내 비트라그 자신이 이질에 걸리고부터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모든 물을 끓이라고 명령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점차 떨어져 나갔다. 4주째에는 게이 커플이 사라졌다. 하리다스는 말했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파.모든 게 잘못되어 있어 !" 또한 어느 영국인은 전갈에 물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는 고통을 달래기 위해 밤새도록 드림을 두들겨 댔고 그런 밤이면 아무도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약간의 위안거리는 있었다. 인도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정글의 개척작업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재주가 뛰어난, 그리고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마음을 지닌 주민들을 존경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소의 분뇨를 다방면에 이용하였다. 집을 만들 때, 옷을 세탁할 때, 불을 피을 때, 그리고 전갈을 죽일 때에도 소의 분뇨가 사용되었다. 전갈을 죽이는 방법은 우선 아직 마르지 않은 소똥을 전갈에게 던졌다. 그리고 전갈이 질식할 때 그 꼬리를 끊어내었다. 그들은 전갈을 기름에 튀겨서 먹었다. 대단한 진미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는 채식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이 단백질 보충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바그완의 친척이 우리들에게 송아지를 선물한다고 해서 나는 랜드로버를 타고 150마일 떨어진 마을까지 갔다. 그 송아지가 우리들에게 우유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그 마을에 도착해 보니 송아지는 랜드로버에 싣기에 너무 컸을 뿐만 아니라 내가 도착하기 전에 송아지를 우리들에게 선물한다던 약속이 취소되었던 것이다. 인도에서는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 송아지가 있는 목장은 파리가 우글거리고 땅바닥은 버석버석 말라 있으며 개천은 푸른 이끼가 가득찬 황폐한 곳이었다.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대가족이 식사를 하기 위해서 둘러앉아 있었다. 송아지 선물은 무산되었지만 그래도 모두들 나를 환대해 주었다. 그들은 처음에 나와 같은 서양인이 진심으로 '라즈니쉬'를 교주로 생각하고 그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의 신자라고? 모한의? 정말인가? 당신뿐만 아니라 외국인 신자들도 많다고?" 가족 중 누군가가 모한의 사진을 들고 와서 말했다. "이게 모한의 사진이에요 당신이 따르고 있는 사람이 이 남자예요? ? 여성신자까지 있다고? 아직 최면술을 하고 있는 건가? 과거에 만났을 때는 최면술의 실험대상을 찾느라 난리더니만." 방에는 어른들과 함께 여섯 명의 아이들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간소한 목면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대접해주는 음식은 매우 맛있었다. 카일라쉬에서 마지못해 먹던 초라한 음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나에게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지 않는 인도식 식사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자 가족들은 기뻐하며 거듭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었다. 얘기의 주제는 날씨 특히 앞으로 찾아을 몬순에 관한 것에서부터 근처의 관광명소에 관한 것 그리고 점차 나 자신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결흔했는지에 대해 질문받은 나는 '노'라고 대답하고 나서 그러나 여자 친구가 있다며 디비야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들은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집안의 최고 어른인 조부가 한마디했다. "음,자네 여자친구 말인데 좀 많은 것 아닌가?"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대답했다. 물론 그녀는 많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이 화제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지만, 인도에서는 신랑 나이보다 대 여섯 살 정도 어린 나이가 신부의 적령기였으므로 나의 경우는 16세 정도의 여성이 적당하다는 뜻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는 또 나의 교주로 옮아갔다. 분명히 '모한'은 가족들 내에서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 무서운 아이)로 여겨졌다. 그들 대부분은 바그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깨달음'을 얻은 교주로 행세하는 것도 전혀 믿지 않았다. 바그완의 제자인 나로서는 그에 대한 어떠한 유보조건도 인정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바그완이 오랜 세월 최면술을 연습했고 주위 사람들을 실험대에 올려놓았었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언짢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바그완의 수법을 확실히 알게 된 나는 그의 친척들이 최면술이라고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바그완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때 일어난 신기한 일들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양친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외가의 유복한 조부모 밑에서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라났다. 바그완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전생은 7백년 전에 존재했었고 산속에서 신비주의 학교를 설립하여 In세까지 살았다고 했다. 전생을 통해 그는 깨달음을 얻으려 21일간의 단식을 단행했다. 그래서 마침내 동양과 서양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물질주의와 정신주의가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깨달음을 얻기 3일 전에 그는 살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라즈니쉬의 어머니(후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말로는 태어나서 3일간 그는 울지도 먹지도 못했다고 했다. 라즈니쉬는 특히 외조부를 많이 따랐는데 외조부는 그가 7세 때 죽었다. 이것이 어린 그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되어 유별난 성격으로 변해갔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점성가가 어린 라즈니쉬를 보고 7세 때까지만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했다. 그러나 7세가 돼도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점성가가 이 아이는 7년마다 죽을 고비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3, 7, 21이라는 숫자는 신비적인 의미를 띠고 라즈니쉬의 인생 속에 자주 등장했다. 조부가 죽은 후 라즈니쉬는 두번 다시 인간에 대해 집착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부의 죽음은 나에게 있어 모든 집착의 죽음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누구와도 인간관계를 쌓아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려는 순간 조부의 죽음이 나를 응시하곤 했다. 그 이후 나는 지금껏 혼자였다. " 라즈니쉬는 7세 때부터 가다르와라의 군즈 스쿨(Gunj School)에 다녔고 그의 창조적인 재능은 그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는 선생과 잘 사귀지 못했는데 그가 생각하는 것을 이해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본질을 밝혀내고 싶었던 그는 화장터에서 시체 나르는 사람들 뒤를 자주 따라다녔다. 근처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곧 장 달려가서 그 사람을 꼼짝 않고 관찰했다. 이 얘기는 그의 친척들 말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던 사실이었다. 바그완은 1979년에 출간된 출판물을 통해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죽음과 성(性)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귀를 기울이면, 섹스라는 현상은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의 문을 두드린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남성 사형수가 처형될 때 최후에 일어나는 것은 발기현상이다. 여성은 발기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처형당할 때의 현상을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나서 이러한 결론을 맺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은 어린 시절부터 나의 관심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어린시절 고향에서 사람이 죽은 현장이라면 빠지지 않고 찾아갔다. 누구든지 죽음의 자리에 들었다는 소리만 들리면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부자와 가난한 자, 거지, 게다가 개와 고양이까지 포함한 모든 종류의 죽음을 관찰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확실히 놀란 건 사람이 죽을 때 최후로 생각하는 것은 성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개와 고양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라즈니쉬에게는 두 사람의 죽음이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하나는 그의 어린시절의 연인이었던 사시(Sashi)의 죽음으로 16세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48년 간디의 죽음이었다. 라즈니쉬는 비베크가 사시의 환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매우 밀접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3년에 이르러 그는 비베크가 전생에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번복하였다. 라즈니쉬가 청소년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점성가가 있었다. 그는 라즈니쉬가 21세 때 죽는다고 예언했다. 점성가가 예언했던 21세가 되자 라즈니쉬는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21세 때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소년기와 청년기를 통틀어 자연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전혀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명상 중에 뱀이 몸 위로 기어다녀도 신경쓰지 않았고 20미터 높이의 다리 위에서 홍수로 물이 불어난 강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 그는 용솟음치는 강물 속에 뛰어들고서는 멋진' 체험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즈니쉬는 청년기부터 이미 호흡법 ·마술 ·최면술 등의 실험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늘 친구들을 실험대에 올리고 극한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했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사람을 물속에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머리를 강제로 물속에 처박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라즈니쉬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는데 그것이 의도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그에게는 가학적인 기질이 많았다. 푸나의 아쉬람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자살한 사람도 있지만 간염 등의 병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들의 병도 사전에 정확한 조치가 취해졌다면 결코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라즈니쉬는 아쉬람의 식사에 충분한 돈을 내놓지 않았고 우리들의 과로나 수면 부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학생시절의 라즈니쉬는 빈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공산주의에 흥미를 가졌다고 했다. 이것은 후에 그가 자본주의의 옹호자가 되고 '부자 교주'라는 악명을 얻은 것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얘기가 아닌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라즈니쉬는 대학시절에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했다. 그러나 다시 깨어난 자신을 발견하고 의식의 영원한 변화를 체험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그가 21세 때 얻었다는 '깨달음'이 아닐까? 그 뒤로 그는 매일 6마일씩 달리기를 시작했고 이를 수년간 지속했다. 달리기는 자신을 생기있게 만든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는 원인 모를 두통과 코피 등 몇가지 질병으로 계속 고생하였다. 1955년 라즈니쉬는 철학으로 학사학위를 따고 1957년에는 사우가르 (Saugar)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무렵이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강렬한 실험정신과 반항의 시기였고, 그 때문에 결국 자발푸르(Ja- balpur) 대학교의 강사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후로 그는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간디에게도 등을 돌렸다. 그리고 1968년에 이르러 많은 추종자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게 되었다. 이상의 사실들을 토대로 우리가 그릴 수 있는 라즈니쉬의 초상은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을 무엇보다도 좋아하고 그 반응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사나이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발휘될 수 있는지 보려 했고, 흡사 실험실의 과학자같은 태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는 타인들에 대한 자비심이 전혀 없었으며 기존의 권위에 대항하길 무척 좋아했다. 평소에 그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한 반면,사람들로부터 상당히 고립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라고 자만하는 것을 좋아했다. 유세가가 된 후 2년째인 1968년 8월 라즈니쉬는 사랑에 대한 일련의 공개강연을 통해 '섹스는 자연이고 신성한 것이며 고차원의 의식에 이르는 첫걸음'이라고 말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강론의 내용은 공식적인 전기 vReAwukened Qnea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는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랑에 담겨있는 근본적인 진실을 알고 싶으면, 가장 먼저 섹스의 신성함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신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열고 섹스를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봄베이에서 개최된 이 강론 시리즈는 청중에게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대중들이 받은 충격은 곧 라즈니쉬에 대한 분노와 공격의 화살로 되돌아 갔다. 그뒤 그는 조직적 종교운동을 맹렬히 공격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모든 종교가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게 골자였다. 그리고 1970년 그는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다이나믹 명상'이라는 새로운 명상법을 세상에 소개했다. 종래의 전통적인 명상은 이미 현대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그 명상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가 발가벗고 소리치는 행동을 보고 무서워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그런 장면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7월 라즈니쉬는 봄베이로 근거지를 옮겨 자신의 칭호를 '아차리아에서 '바그완'으로 바뀐다. 바그완이란 '축복받은 자' 또는 신(神)이란 뜻의 극존칭 이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그에게 혼담을 꺼낸 적도 있지만 그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힌 이후였다. 이는 결혼을 당연시 하는 인도사회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나는 바그완이 하리다스(Haridas)라는 소꿉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린시절 바그완은 어느날 강물이 불어 위험한 데도 하리다스에게 수영하러 가자고 부추겼는데 결국 하리다스는 강물에 떠내려가 익사하였다. 후에 바그완은 독일인 전기기사에게 하리다스 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익사한 친구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그완은 러시아 출신의 신비주의자 구르디예프(Gurdiiev)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 구르디예프는 '올바른 행동, 올바른 사고,올바른 욕망'을 주장하였는데 바그완에게 일종의 모델역할을 하였다. 언젠가 구르디예프가 파리의 집회에서 강연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사흘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 그가 강연회장에 나타났을 때 청중은 8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여기에 있는 바로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는 이곳에 왔다. " 바그완과 마찬가지로 구르디예프 역시 제자들과 활발한 성관계를 맺곤 했다. 카일라쉬와 그 이후 오리건에서의 바그완의 행동은 구르디예프의 전형적인 방법을 자기류로 응용한 것이었다. 카일라쉬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나는 바그완의 친척들이 말했던 '바그완의 실험'에 대해 신경이 쓰였다. 나는 카일라쉬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이라고 느껴졌다. 우리들은 실험동물이었다. 나는 이러한 실험농장에서 일하려고 인도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보다 차원 높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카일라쉬엔 송아지 대신 인도인 지주가 길안내인으로서 차에 동승했다. 그는 우리가 탄 랜드로버를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일부러 가장 먼 우회도로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재물 따위에 억매이지 않고 풍요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을 만나는 것도 훌륭한 체험이었기 때문에 카일라쉬에 돌아온 나는 사람을 아사시킬 듯한 식사를 해결하리라 작정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걸어가서 과자를 잔뜩 사들였다. 모두가 걸신들려 있었기 때문에 과자는 반시간만에 모두 없어졌다. 비트라 그는 그것을 보고 몹시 화를 내며 앞으로 농장에서의 외출을 금지한다고 모두에게 말했다. 이 명령을 듣고 3명이 다시 농장을 떠났다. 처음의 36명이었던 멤버가 20명으로 줄었다. 그제야 비트라그는 가까운 마을로 랜드로버를 몰고가 야채와 과일, 비스킷, 내가 사왔던 과자류 등을 싣고 돌아왔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람들을 굶겼다가 뒤에 맛있는 음식을 안기는 방법은 사람을 시험하는 바그완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우리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강인함을 형성하기 위한 시련이었다고 티르타가 설명해주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교주를 위해 마음을 비을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실험은 이를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옛날 현인들이 인내라는 성격형성을 위해서 감수했던 고난과 카일라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사이에는 뭔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이 농장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의 책임소재가 자의든 타의든 우리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음식과 식수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아메바성 이질에 의한 만성 피로와 간염으로 평생토록 간장장애를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산냐시들의 몸은 쇄약해지고 죽음에 대한 저항력도 약해져 많은 제자들이 죽어 갔고 살아남은 우리들도 그후 몇년 동안 질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바그완은 우리들의 '부정적인 마음자세'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고 강변하였던 것이다. 반면 바그완 자신은 전속 가정부 ·요리사 ·의사 등의 스탭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우리들이 받고 있는 고통과는 전혀 무관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렴 나는 디비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영국에서 보낸 편지였다. 바그완에게서 영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쓰여있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 그녀는 카일라쉬에 올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모델출신의 스웨덴 여성과 침묵의 명상을 하고 있었다. 2개월간을 거의 침묵으로 지내다보니 전달방법으로서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왠지 우습게 느껴졌다. 말 대신에 다른 감각이 발달하였는지 영기(靈氣)가 보이기 시작했고 남이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영적인 시각이 열린 것이었다. 나는 세계와의 일체감, 자연과의 조화를 느끼면서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와 함께 지내는 미국 여성이 아부산의 캠프에서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남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임질 증상이 나타났다고 호소하였다. 프리섹스와 집단난교는 바그완식의 수행방법 중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이 성병으로 발전하자 사정은 전혀 달라졌다. 편지를 읽고 난 후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그 날로 농장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황망히 짐을 꾸리고 있는 동안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나도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에 계획했던 히말라야 여행을 결행하고 싶었다. 농장을 떠나기 전에 나는 이 행동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명상했다. 황혼녘에 명상을 시작하여 한시간쯤 지나 하늘을 바라보자 신비스런 인도의 밤하늘에 별이 : 반짝이고 있었다. 인공위성 같은 유성이 히말라야가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멋지고 우아한 전조! 이 먼지투성이의 땅과는 이제 이별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산책이나 해두자: 그러면서 내가 어둠속을 100미터도 채 걷지 않았을 때, 나는 뭔가 대단히 큰 존재가 내 주변을 서성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머리칼이 곤두섰다. 이 시간에 마을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식인 호랑이가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날이 저물고 나면 절대로 외출하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크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몸을 꿰뚫는 듯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다! 전신이 떨렸다. 생애를 통틀어 그만큼 두려운 순간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모래 위를 걷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 거대한 물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휴- 농장의 개들이 미친듯이 일제히 짖어댔다. 호랑이 사건이 있은 지 2주일 후에 나는 인도를 떠나 네팔 국경의 다크푸를 향해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산다크푸는 세계 제3의 산인 칸첸중가 기슭에 있었다. 맑게 갠 상쾌한 공기를 통해 자유! 감각을 되찾을 수 있어서 근사했다. 히말라야 산맥이 굽이쳐저 멀리 베레스트까지 이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장엄한 전경에 경외감이 솟아올랐다. 나는 화려함을 자랑하는 로도덴드론(Rhododendron:철쭉파의 식물)' 수백평방 킬로에 걸쳐 자생하는 풍경 속을 지나 작은 마을들을 통과해서 하산했다. 나는 아직 말라와 오렌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마땅한 옷이 없었고 새 옷을 살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바그완과는 두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에게 명령받는 일도, 나를 시험하려 드는 교묘한 '꼬임'에 굴복하는 것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봄베이에 도착했을 때는 카일라쉬를 떠난 지 3주나 지나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돈과 패스포드 등 귀중품을 맡겨놓았던 여성 산냐시는 바그완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바그완은 이미 봄베이를 떠나 인접해 있는 푸나(Poona)의 호화저택으로 이사했던 것이다. 나는 소지품을 되돌려 받기 위해 푸나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푸나에 도착한 나는 소지품을 맡겨놓았던 여성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다르샨이 있다며 바그완을 만나러 갔다. 다르샨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내게 사과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은 당신께 드리는 거예요 바그완이 주라는 선물이에요. 바그완은 당신이 카일라쉬에서 굶주렸다는 말을 듣자 웃으며 당신에게 사과를 주라고 비베크에게 시켰어요 그리곤 '시바는 늘 배가 고파있군. 그는 이 사과를 좋아할 거야.내일 다르샨에 오라고 전하라'고 말했어.요." 작년에 도망치려고 했을 때와 아주 똑같았다! 아아, 바그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결심도 잠시, 이번에도 그는 돌아오라고 달래고 부추기고 선동하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린 나는 다르샨을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 작정인지 궁금했다. '좋아 만나러 가자! 가서 그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어보자. 설마 또 카일라쉬와 같은 교묘한 꼬임과 무자비한 실험으로 나를 테스트하지는 않겠지 !' 그런데 그날 나는 카일라쉬가 이미 폐쇄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떠나고 나서 채 2주도 못갔다고 했다. 그것으로 '최악의 실험'은 영원히 막을 내렸던 것이다. 제6장 푸나 시대의 개막 봄베이에 있을 때부터 바그완은 많은 서양인들을 끌어들였지만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푸나시대부터였다. 1974년 그는 푸나의 멋진 대저택으로 옮겼다. 나의 아침 다르샨은 바로 그 저택의 정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가 애용하는 갈색 비로드를 입힌 의자와 정밀하게 세공된 장의자가 이미 잔디 위에 놓여있었다. 라크슈미는 여전히 바쁜 듯이 돌아다니면서 이것 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비베크가 이른 아침의 햇살이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부르러 왔다. "그가 지금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요." 나는 바그완에게 갔다. 바그완은 새로 지은 순백의 로브를 입고 아주 근심스러운 듯이 앉아있었다. '피곤해서 인생이 싫어진 것 같군' 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주위에 인도인과 서양인 산냐시가 여러명 있었다. 나는 바그완의 의자 옆 잔디에 앉았다. 바지가 이슬에 젖어 짙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시바. 아직 배가 고픈가? 사과 하나 먹지 !" 그의 발치에는 쟁반에 사과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시바는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고 말했다. "굿, 시바. 야위지 않았나? 좋아, 전보다 미남이 되었군, 음, 이제부터 어떤 계획이지 ?" 이전과는 상당히 달랐다. 바그완은 뭔가를 하라는 명령 대신에 먼저 나의 계획을 물었다. "글쎄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아버지와 함께 일하면서 그곳에서 아쉬람이라도 열고 싶습니다. "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바그완은 예의 '음'을 반복하면서 나의 아버지에 관한 것, 스코틀랜드에 관한 것, 진료소에 관한 것, 카일라쉬에 관한 것, 여행에 관한 것 등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날 아침 나는 다르샨에 앞서 티르타로부터 내가 카일라쉬에서 고난을 극복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보고를 바그완에게 했다고 들었 다. 바그완은 그동안 빠짐없이 나에 관한 정보를 듣고 있었다. 바그완은 이번에는 다른 산냐시를 상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옆에 앉 아있던 나는 카일라쉬에서 발견한 그 아름다운 '침묵의 공간'속으로 서 서히 빠져들었다. 나는 바그완과 동질의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 이별이 있을 수 없었다. 전에 그의 앞에 있을 때는 항상 긴장하여 초조해 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편안하기는 처음이었다. 10분 후 바그완은 다시 나를 향해 건강상태에 대해서 간단한 질문을 했다. 그는 그 민감한 감각을 총동원해 나를 살피고 있는 듯했다. 말은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다른 산냐시 들과의 대화로 다시 돌아갔다. 바그완은 내 마음 속의 적막함을 느낀 듯 했다. 그 역시 나의 정신세계 속에 있음을 느꼈다. 내 마음 속의 변화를 다 읽었는지 잠시후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음, 시바. 푸나의 기후는 나의 체질에는 맞지 않아. 다음주 나는 봄베이로 돌아갈 작정이야. 넌 이곳 푸나에 남아 티르타와 함께 이 집을 아 쉬람으로 키워주길 바래. 티르타는 너의 카일라쉬 행적을 보더니 너와 함께 일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더군. 이곳의 운영을 도와주지 않겠는가? 스코틀랜드에도 아쉬람은 필요할 것이기에 시바는 언젠가 그곳에 아쉬 람을 만들게 될 거야.하지만 우선은 푸나에 머무는 게 순서야." 나는 가슴이 설렌다. 이미 내 마음은 그의 뜻으로 기울었다. 이쪽이 스 코틀랜드보다 훨씬 좋았다. 티르타와는 서로 잘 아는 사이고 게다가 마 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었다. 바그완은 계속했다. "음, 티르타와는 사이가 좋은가? 그런가? 좋은 일이다. 어쨌든 그가 새 로운 아쉬람의 쿨파티(Kulpati:리더)가 되고 네가 에크 쿨파티(Ek- Kulpati : 副리더)가 될 것이다. 오케 이 ?" 그 다음날 나는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에딘버러에서 의료진료 소를 열어 성공한 아버지는 내가 그 운영을 도우러 올 수 있는지 물어온 것이었다. 나는 귀국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답장을 썼다. 바그완의 명령이 한발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바그완을 모시는 일은 아주 힘든 고역이었다. 그의 두서 없는 명령 탓에 계획의 변경이 항상 뒤따랐으며, 그때마다 산냐시들은 이 인 물에 대한 자신들의 불합리한 애정을 스스로 위로해야 했다. 당장 1분 뒤의 일일 망정 바그완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결정할지, 자신이 어디로 보내지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결국 그는 2주가 지나서도 봄베이로 돌아 가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푸나에 7년간 체재하게 된다). 나는 다시 한번 바그완과의 다르샨을 신청했다. "지금쯤 스코틀랜드의 기후는 어떤가?" 그는 묻고 나서 말했다. "좋겠지, 음. 스코틀랜드에 돌아가서 아쉬람을 열어라. 우리 일을 계속 하는 거야.그것이 궤도에 오르면 돌아오너라.오케이?" 그래서 나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아버지의 진료소에서 일하면서 바그완의 아쉬람을 열기로 했다. 여기서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말해두고싶은 것은 그는 자식을 이상한 신흥종교에 빼앗긴 많은 부모들처럼 나를 미쳤다든가 세뇌당했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후에 아 버지는 자유롭게 인도여행을 할 수 있었던 내가 부러웠다고까지 했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진료소의 일과 아쉬람 건설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점차 바그완과 인도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섭씨 40도의 카일라쉬에 있었을 때 스코틀랜드를 그리워했던 기억을 되씹으며‥‥‥‥ 그런데 뜻밖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어느 일본 여성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정신적인 지식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바그완이 자기를 강간하여 임신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덧 붙이길, 이런 괴로운 수태로 태어나는 아이는 틀림없이 비뚤어지고 사악 한 성격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차에 이번에는 푸나에 있는 라크슈미로부터 편지가 왔다. 거기에는 어느 일본 여성이 바그완에 대한 중상모략을 세상에 퍼뜨리고 다니니까 주의하라고 쓰여 있었다. 라크슈미가 보낸 편지내용의 진상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 여성은 봄베이에서 바그완과 다르샨을 하던 중 그의 에너지가 그 녀의 마음 속에 지나치게 전달되어,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 어 그런 정신 나간 행동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아무리 아우성치더라도 마음에 두지 말라고 라크슈미는 당부했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봄베이에서 만났던 인도인의 말이 생각났다. "당신의 교주는 올바른 교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성신자들과 밤의 향연을 즐기고 있습니다!" 가을에 접어들자 나는 바그완에게 편지를 보내 언제 인도로 돌아가면 좋을지 물었다. 또 이전에 그가 설명한 '달리기 명상'(Running Medita- tion) 방법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바그완은 하루 한시간씩 달리는 것이 명상이 된다고 했는데 내게는 U분이 한계였던 것이다. 답장은 라크슈미에게서 왔다.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오세요! '달리기 명상'은 脚분이라도 상관 없 습니다. 어쨌든 오세요 !"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편지를 받고 나서 곧 봄베이행 항공권을 준비하고 짐을 챙겼다. 봄베이에 도착한 나는 밤길을 需고 택시로 푸나를 향해 달렸다. 내가 떠나있던 사이에 푸나의 저택과 정원은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강론회장으로 지어진 큰 흘에는 중국의 현자인 장자(莊子)를 기념하여 장자의 이름이 걸려있었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기 두세 시간 전에 '장자 홀'의 일부가 갑자기 무너 져 내렸다고 했다. 그 때문에 수려해야 할 정원이 콘크리트의 하얀 먼지 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 이지만 몹시 화가 난 바그완은 라크슈미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 를 전했다. "흘이 무너진 것은 어쩌면 이게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빈는 서양 제자들의 마음 탓이다. " 아무튼 건축공사를 감독한 티르타가 특히 제물이 되었다. 모두 너희들 의 '부정적인 마음자세'에 원인이 있다고 바그완은 덧붙였다. 그러나 바 그완은 구조상 결함이 있는 기본설계와 시멘트가 부족하여 강도(强度)가 약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상의 일은 제쳐두고라도 푸나는 바그완의 '체질'과 아주 잘 맞아떨어 지는 곳이었다. 라크슈미는 그동안 은밀히 별장지대로 유명한 이 지역의 저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저택이 탐난 나머지 당장 집주인에게 80만 루피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저택의 구입은 무크타를 중심으로 돈 많은 제자들이 기부함으로써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주인이 마음 속에 책정했던 값은 70만 루피였 다. 라크슈미는 스스로 살림살이에 관한 한 전문가라고 자부해 왔지만 10만 루피나 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정말 라크슈미답다! 내가 푸나에 돌아온 12월 바그완은 자신의 생일파티를 열라고 지시했 다. 그의 생년월일이 1931년 12월 11일로 공표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 고 그 당시엔 아무도 정확한 날짜를 몰랐는데 바그완의 어머니조차 날 짜는 커녕 태어난 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스코틀랜드를 떠나기 전에 티르타로부터 바그완에게 선물할 엄 청난 쇼핑 리스트를 건네받았다. 최고급 프랑스 브랜디, 초콜릿, 바그완 의 커프스 단추용으로 사용할 커다란 중국제 비취 등 하나같이 교주란 신분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티르타가 부탁한 품목 중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사용하는 향료 바그완이 갖고 있는 듀퐁 제품에 갈아끼을 펜 세트 등도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구입하였으나 비취만은 무리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내가 가진 돈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스코틀랜드에 가있던 7개월 동안 아쉬람의 규모는 두배 이상 커 져있었다. 원래의 부지에 인접한 집을 새로 구입하였으며 바그완은 그것 에 '크리슈나 하우스'(Krishna Hous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미 10여명 정도의 산냐시들이 이 새로운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제는 '바그완의 아쉬람'이 어디에 있는지 택시 운전기사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한편 무크타는 라크슈미에게 푸나 저택의 구입비용 대부분을 기증한 여성인데 부러을 것 없는 그리스 귀부인이 지금은 서양인들을 상대로 다르샨을 예약하는 담당자가 되어있었다. 바그완이 기거하는 집은 '노자(老子) 하우스'라고 불렀다. 다르샨에는 매일밤 10명 정도가 참가하였다. 내 차례가 왔을 때 그는 물었다. "시바, 이번에는 오래 체재할 작정인가?" 그는 내가 계속 있을 작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 "굿,오래 체재하면 좋지.그밖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예, 저는 제 자신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고 싶습니다. 저의 내면세계를 더 느끼고 싶습니다. " 내 말의 참뜻을 그는 알고 있는 듯했다. "내면세계를 느끼기 시작한 지가 어느 정도 되었는가?" 이 질문에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언제부터였던가? 3년 전에 어머니 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인가? 아니면 그전부터인가? "훨씬 전부터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음. 물구나무서기는 할 수 있는 가?" "굿. 물구나무서기를 해보라."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지금 하라는 것인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래, 지금 해보지." 말도 안돼! 나는 지금 관습대로 오렌지색의 로브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구석에 있는 중년의 여성 신참자 두 사람의 모습을 나는 흘끔 쳐다보 았다. 그녀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이 나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떻 게 하면 나의 고민을 바그완에게 알릴 수 있을까?나는 큰맘 먹고 입을 열었다. "바그완,저‥‥‥그‥‥‥속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만· "걱 정하지 말아라." 그는 더 잘됐다는 어투로 말했다. "괜찮다. 빨리 해보라." 나는 쭈뼛거리면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다행이었다. 로브는 무릎 근 처에서 가까스로 걸렸다. "굿, 시바. 너의 에너지는 잘 흐르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물구나무 서기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음, 잠자기 전에 물구나무서기를 3분간씩 해라. 오케이? 그리고 또 한가지 있다. 음. 너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받 아 왔다. 이번에는 네 쪽에서 줄 차례다. 일을 시작하라. 라크슈미가 너 에게 일거리를 줄 것이다. " 바그완은 의자 옆에 점잖은 얼굴로 앉아있는 라크슈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바그완을 위한 8년간의 세월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이 세월은 내가 그의 측근 중 한사람으로서 그리고 아쉬람 내에서 특 권을 부여받고 그의 곁에서, 그를 위해서 끊임없이 일한 운명과 같은 8 년간이었다. 나는 마침내 나의 집을 찾바온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일도 아버지의 진료소와 정골의라는 직업도 모두 내게서 멀리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제는 결코 바그완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했 다. 바그완과 함께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지각력은 불쾌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가 "지금부터 너는 계속 이곳에 있으라."고 했을 때 그는 내 마음의 밑바닥을 읽고 내 마음의 문을 연 것이었다. 그후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 와 만나게 되지만 그는 항상 상대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욕구를 례 뚫어 보며 마음의 밑바닥을 읽어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능력 중 어느 누구도 흥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상황이 아무리 곤란하거나 복잡해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삼 분의 숙고만으로도 순식간에 재기에 넘 친 해 결책을 제 시하곤 했다. 아쉬람에 새로운 방침이 제시되었다. 봄베이에서는 인간관계가 중요했 지만 여기에서는 '워크'(Work) 즉 크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중점 이 두어졌다. 내게 주어진 일은 바그완의 강론이 수록된 카세트의 복사본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 작업은 매일 아침 바그완의 강론이 행해지는 '노자 하우스' 의 이층 발코니에서 진행되었다. 그는 대규모의 '장자 홀'이 재건되면 강 론회장을 그곳으로 옳길 생각이었다. 매일 아침 8시 정각이 되면 바그완의 저택에는 그의 가르침을 들으러 수백명(13분의 2는 인도인이었다)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바그완의 얼굴도 내가 전에 봄베이에서 만났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 보였다. 무크타가 그의 머리 염색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전에는 반들반들 한 흑발이었지만 이제는 흰머리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바그완은 桃세이었는데 항상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간 것은 아니 었다. 내가 도착한 지 1주일 후 바그완의 아침 강론시간에 젊은 미국 여 성이 갑자기 바닥을 두들기며 금속성 소리를 질러댔다. 나와 티르타는 곧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지만 몸집이 큰데다가 발버등치는 그녀를 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그완은 강론을 중지하고 그 여성을 발치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바 그완은 살며시 손을 뻗어 온화한 투로 두세 마디 말을 걸면서 그녀의 머 리를 만져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한쪽 발의 신발을 벗어 그 발을 그 녀의 어깨 위에 살짝 談어주었다. 그러자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그 여성 은 울부짖음을 그치고 아주 온순하게 변했던 것이다. 라크슈미가 습격받은 사건도 생겼다. 그녀가 밤에 '크리슈나 하우스' 근처에서 막 '노자 하우스'로 돌아오려고 하는 찰나였다. 범인은 그녀에 게 몇번이나 다르샨 신청을 거절당한 어느 인도 남성이었는데 풀숲에 숨어있다가 지나가던 그녀에게 덤벼들어 코를 물어뜯은 것이었다. 이것은 명예를 손상당한 인도인의 전통적인 복수방법이자 부정(不貞)을 저지른 아내에게 가하는 벌이기도 했다. 라크슈미는 몸부림치면서 "바그완! 바그완!" 하고 소리질렀다. 다행히 그녀의 비명을 들은 어느 산냐시가 그녀를 구출했다. 의사는 그녀가 코에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파상풍 예방주사를 맞고 수일간 요양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자 그녀는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나를 방으로 불러서 "코가 뭐 대단해요?"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이예.5_ 그분뿐이에.5_ 라크슈미의 몸 따위는 어때도 좋아요. 하지만 그는 라크슈미에게 보디가드를 선사했어요 시바가 라크 슈미의 보디가드가 된 거예요. 이 라크슈미는 보디가드 따위는 필요없다 고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어요. 일단 그의 입에서 명령이 나온 이상 의논 따위는 필요없어요.사실 보디가드가 필요한 건 라크슈미가 아니라 그이예요.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어요. 시바처럼 강하고 잘 생긴 남성을 제게 주셨지만 라크슈미는 그런 선물이 필요없어요. 당신이 그이를 경호하는 거예요 !" 나는 뜻밖에 바그완의 보디가드가 되었다. 미치도록 기뻤다. 아니, 이런 표현으론 부족했다. 세계의 정점에 선 기분이었다. 산냐시에게 있어서 마치 꿈과 같았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그날 밤부터 나는 바그완의 보디가드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매일 밤 어둠이 다가을 즈음이면 오렌지색의 로브를 입은 산냐시들이 강론회 장에 모여 하얀 로브를 두른 교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외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일어서서 울타리를 둘러보러 갔다. 누군가가 담을 넘어을 경우를 대비해서 곡괭이 모양의 짧은 곤봉 을 만들어 바그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화분 속에 감추어 놓았다. 초기의 경호체제는 이렇듯 지극히 원시적인 것이었지만 몇년 후에는 고도로 훈 련을 받은 수백명의 경호대가 경기관총을 갖추고 그를 지키게 되었다. 114 타락한 神 나는 습격받을 경우를 대비해서 무기를 준비해두고 싶었지만, 바그완 이 비폭력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무 기는 필요했다. 곤봉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비베크가 그 곤봉에 대해서 물어왔다. "당신은 정말로 곤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바그완은 당신의 모 습이 마치 '사무라이' 같다고 했어違」" 하지만 나는 절대로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일주일 후 비베크는 어느 미국인 산냐시로부터 온 투서를 내게 내밀 었다. 곤봉의 일을 비난한 내용이었다. "그럼, 곤봉은 절대 안된다는 겁니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곤봉을 버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비베크는 그리고 나서 나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시바, 오늘부터는 라크슈미가 당신에게 어떤 일을 명령할 때라든가 또는 바그완을 중상모략하는 정보를 접했을 때는 반드시 내게 찾아와 보고해 주세요. 알겠죠?" "알았어-S_" 비베크의 미모에 새삼 감탄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상류계층의 액센트 가 담긴 그녀의 영어는 들을수록 품위가 있었다. 많은 제자들이 나의 새 직책을 부러워했다.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해 서 선택되었는지 물어왔지만 나 역시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얼마 전 한 미국 여자가 아우성쳤을 때 재빨리 일어나 손을 썼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시 다르샨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든 게 추측에 불과할 뿐 바그완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봄베이에서는 누구나 바그완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하고 심지어는 농 담까지 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 온 이후 비밀주의라는 새로운 용어가 우리를 에워쌌다. 그 발단은 '스페셜 다르·◎이었다. 이 다르샨을 받는 것은 대단한 명예이자 축복이지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봄베이에서 경험한 일 중에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나와 함께 성관계를 맺은 여성의 대부분이 다음과 같이 물어오는 것이었다. "지난 주 내가 누구와 관계를 가진 줄 아세요? 모르는군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결국 나도 그 답을 알게 되었다. "글쎄, 모르겠는데?" 내가 말하면 그녀들은 "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돼요. 나, 바그완과 관계를 맺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세월과 더불어 아쉬람은 확장을 계속하였지만 이 운동의 후기에 비하면 당시는 재산다운 재산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토지는 남의 것을 빌린 상태였고 아쉬람운동에 드는 비용의 대부분은 기부에 의해서 꾸려지고 있었다. 푸나시대의 초기에는 아직 세라피 그룹도 없었고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신자가 찾아오면 라크슈미는 그 사람의 자라온 생활환경과 경제상태를 냉정하게 판단하여 최초의 다르샨을 받기 전에 반드시 바그완에게 보고했다. 바그완은 부자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였던 것이다. 라크슈미는 아쉬람을 확장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부동산을 물색하러 다녔는데 내가 그녀를 직접 보좌했기 때문에 바그완은 종종 부동산에 대해서 나에게 물어오곤 했다. 나는 때때로 명상을 하면서 깊은 명상상태에서 전달되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한 명상공간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웠고 체험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저녁에 실시하는 초기의 그룹 다르샨에는 특별히 혜택받은 사람의 경우 일대 일의 형식으로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한 사람은 그룹 다르샨이 있기 전에 무크타, 라크슈미, 비베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참가한 가운데 바그완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성적인 것이 많았다. 한편 아쉬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인간 회복운동'에서 파생된 세라피와 동양에서 전해오는 여러가지 명상을 실천하는 그룹이 생겨났다. 후자 중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탄트라 그룹(Tantra Group)이었다. 이 세션에서는 참가자 모두가 나체가 되어 서로에게 성적인 실험을 했다. 상대를 밖워가며 모두가 보는 가운데 섹스하는 것도 예사였다. 이 세션은 최소한 5일동안 계속되었다. 남들은 이런 그룹섹스 사진을 보고 외설적인 느낌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들은 성에 대해 그때까지 시도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탐구하였던 것이고 그것은 정말 엄청난 '인간해방'이었다. 바그완은 탄트라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그 중에서도 지속적 오르가즘'과 '순간적 오르가즘'의 차이는 특별히 중요한 것이었다. 전자 쪽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남성은 사정을 지체시켜(가능한 사정하지 않고) 그 직전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성행위를 계속 연장시키는 기술을 습득해야만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남녀 쌍방이 오르가즘의 직전에서 불안과 걱정과 긴장이 없는 극히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얻는 데 있었다. 스스로 흥분을 억제하고 여성에게 수차례의 오르가즘을 선사하는 것도 남성의 의무였다. 바그완은 이 경지에 도달하면 몇시간이고 섹스를 계속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 깊은 명상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단 사정을 해버리면 이 명상상태는 끝나고 평소의 상태로 되돌아 가버렸다. 아무튼 바그완은 강론에서 이 화제를 계속 문제삼았기 때문에 '음부(陰部) 교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특히 섹스의 생리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정작 본인이 세계 최고의 섹스의 명수였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는 않았다. 세상에 이름난 호색가 치고 자신의 성생활에 만족한 사람은 드물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바그완과 잠자리를 같이한 많은 여성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주장했듯이 몇 시간이고 섹스를 계속하기는 커녕 실전에서는 십분도 못버틴다고 했다. 그는 성의 쾌감 대부분을 실제의 섹스보다는 전희(前戱)나 남이 하는 것을 엿보는 데서 찾은 듯했다. 매력적인 여성이 다르샨에 오면 그는 옷을 벗기고 침대 위에 눕힌 다음 만족스러을 때까지 열심히 그 몸을 감상하였다. 그리고 자기 눈앞에서 커플에게 섹스를 시킨 일도 많았다. 후에 공동체의 배신자가 된 쉴라가 바그완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쯤이었다. 그녀는 바그완과의 성관계를 자랑스러워했다. 관계라고 해봐야 성교가 아니라 바그완의 무臺 위에 유방을 갖다얹는 정도였다는데 과연 그 일밖에 없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걱정했던 대로, 바그완의 보디가드라는 나의 특권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자가 나타났다. 어느날 밤 다르샨에서 한 미국인 산냐시가 자신도 보디가드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바그완에게 간청하며 자신은 무술 전문가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무술 따위는 배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 자신의 무능함에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그완은 그를 가만히 보고 나서 "네게 수고를 끼칠 정도는 아니야." 하고 말했다.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어쨌든 언젠가는 나보다 몸집도 크고 힘센 괴한이 습격해 올지도 몰랐다. 나는 생각 끝에 우리의 교주를 보다 잘 경호하기 위해 가라테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특히 주의한 것은 습격자의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항상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시도는 꾀 효과를 거두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경호를 맡았던 오랜 기간동안 바그완은 습격받은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경호하지 않았을 때 바그완은 세번 정도 습격받을 뻔한 일이 있었다. 강론 자체가 선동적인데다가 인도인들이 대체적으로 다혈질이라 바그완이 늘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아쉬람의 확장과 또 새로운 그룹의 창설과 급속히 성장하는 공동체의 운영 등으로 무척 바빴다. 우리들은 24시간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바그완은 아침강론을 끝낸 다음이면 하루 종일 자신의 방에서 독서를 하였다. 그는 대단한 속독가였기에 하루에 15권의 책을 독파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그 특유의 지혜와 힘을 자신이 읽은 책 속에서 이끌어내는 듯이 보였다. 따라서 강론 때에는 축적된 모든 에너지가 기지와 재치와 명석함의 불꽃이 되어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의 힘에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것은 특히 밤에 현저히 나타났고?강론을 할 때도 90분 이상을 넘기면 몹시 지친 모습을 한 채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푸나시대에 있어 바그완은 단 한번도 아쉬람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허리는 미련하리만큼 살쪄 있었다. 그는 식사 후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토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바그완이 체중을 줄이려는 것으로만 알았으나 라크슈미는 이를 에너지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에너지가 상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에너지는 아주 섬세해져 있기 때문에 음식이 체내로 내려가는 것조차 그에게는 부담이 되는 것입닝다. 그래서 구토를 해야 에너지는 다시 상승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 내가 푸나에 온 지 1개월쯤 지났을 때 다르샨의 입회인 겸 진행자이자 다르샨 일기(日記)의 편집자 찌함이 마니샤(Maneesha)라는 오스트레 일리아 여성에게 부여되었다. 바그완의 주위에 날아다니는 모기를 쫓는 일도 그녀의 임무였다. 다른 산냐시들도 각기 자기 일을 갖기 시작했다. 바그완의 정원사가 된 무크타는 일주일에 한두번 이국적인 식물을 구입하여 갈색의 불모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갔다. 무크타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항상 카메라를 들고 아쉬람을 시찰하는 바그완의 뒤를 쫓아다녔다. 바그완의 사진촬영벽은 여 전하였다. 국내용 출판물에 사용되는 사진은 인도인 산냐시가 촬영하였 으며 나도 보디가드 일을 하면서 정원을 산보하는 바그완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 필름을 스코틀랜드의 숙부에게 우송하여 현상해 받곤 했는데 실제 봄베이의 사진관에 부탁하는 것보다 휠씬 빨랐다. 바그완은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무크타의 딸에게 '진짜 카메라'를 내게 주라고 명 령했다. 내가 바그완의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사진용' 얼굴과 '평소 우리가 보고 있는' 얼굴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 다. 그때까지 바그완의 카메라맨이었던 무크타의 딸은 그의 대머리와 지 나치게 긴 코에 대해 상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했다. 바그완은 항상 "몸은 촬영하지 마라!"고 귀가 따갑11 이야기했다. 그 는 다양한 표정을 담은 얼굴사진 외에는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다. 후 에 바그완으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그가 특히 신경을 썼던 부위는 눈이 었다. 그의 눈은 확실히 사람을 최면에 빠뜨릴 만큼 힘이 있었다. 나는 망원렌즈를 사용하떤 바그완의 旦기 싫은 긴 코가 어느 정도 보 완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해서 촬영한 사진을 그는 대단히 좋아 했으며 그 덕분에 나는 수석 카메라맨으로도 일하게 되었다. 하루는 무크타의 딸이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왔었다. 그것을 본 바 그완은 모자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바그완은 즉시 그 모자를 빌 려 썼고 우리들은 모자 쓴 바그완의 사진을 몇 장 촬영했다. 이때부터 그는 모자광이 되었다. 그는 다음 촬영부터는 반드시 여러가지 모자를 준비하도록 명했으며 그 이후로는 촬영 때마다 모자를 쓰게 되었다. 이 변화는 그를 몹시 기쁘게 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벗겨진 머리를 감출 수 있는 좋은 방법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그의 사진촬영용 소도구만을 전담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기1도 했다. 바그완은 항상 자신의 공적인 이미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푸나에서는 공동체 내부를 대상으로 vNeo Sannyasi라는 월간지를 발행하 고 있었는데 언젠가 인도인 사진담당자가 진흙 속에서 명상하는 산냐시 들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하였다. 바그완은 즉시 앞으로는 표지에 자기 사진 이외에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무렵 아쉬람에는 각계의 전문가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에서 그 래픽 디자인 및 인테리어 전문가가 찾아오자 바그완은 영어판 다르샨 일지인 yHammeron theRoc桃의 제작을 그에게 맡겼다. 그런데 나는 바그완으로부터 내일의 촬영회에 일할 카메라맨을 두 사 람 더 고르라는 지시를 받고 그 영국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부탁 했다. 그러나 그는 내 요청을 좀처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젊은 산냐시들보다 10세 정도 연상인 이 야트리(Yatri)라는 그래 픽 디자이너는 다르샨을 받던 날 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씻고 청결한 로 브를 입은 채 바그완을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바그완은 새로운 가구 를 들여놓으려고 개요를 설명했는데 U분 사이에 그의 요구사항이 수십 번 바뀌더라는 것이었다. "거 참. 그는 가구의 크기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거요! 30분이 지나서 도 여전히 비베크에게 의견을 묻는가 하면,그녀가 의견을 말하면 또 그 녀에 따라 의견을 바꾸곤 했어요. 만일 그의 말대로 방을 꾸민다면 아마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을 거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그 다음날 우리들은 촬영회로 향했다. 바그완이 등장하여 의자에 앉았 다. 그는 뭔가 긴급한 용건이 있는 듯했다. 그는 야트리를 부르더니 비베 크에게 서둘러 에스파냐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출판 한 책을 가져오게 했다. 그 책은 표지에 순금을 사용한 인상적인 것이었다. 야트리는 무릎을 崙은 채 바그완의 자기 책에 대한 요망사항을 열심히 들었다. 바그완은 W분 동안이나 계속해서 얘기했고 야트리는 찌는 듯한 더위와 崙은 자세 때문에 폭포수처럼 땀을 흘렸다. 한참 후 바그완은 말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야트리를 향 해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잊어주게. 오케이? 당신이 좋아하 쪽으로 책을 만들게 !" 바그완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야트리는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한편 '크리슈나 하우스'의 2층은 거의 산냐시들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그들은 트럼프를 치거나 잡지를 읽고 시원한 주스를 마시면서 하루를 보냈다. 혹독한 더위로 서양인들은 거의 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들 살갗이 알맞게 태워져 있었다. 그들은 지루해지면 푸나의 최고급 호 텔에서 식사를 하거나 풀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다. 1975년 중반까지 아쉬람에서는 나를 포함한 15명 정도의 스탭 산냐시 들이 하루 6시간씩,주 6일동안 일하고 그 대가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 받았다. 우리를 위해서 라크슈미는 요리사를 고용했는데 그의 요리솜씨는 직 업이 의심스러을 정도로 맛이 없어 전혀 식욕을 일으키지 못했다. 밥과 콩수프가 하루에 두번씩 그리고 때때로 야채가 곁들여졌다. 이런 상태가 3개월동안 계속되자 하리다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라크슈미에게 따 지러 갔다. 그러나 그녀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요리사에게 급료도 잘 지불하고 있으며 재료비도 알맞게 주고 있습 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있는 것은 서양에서 사치스러운 식사에 길들여져 있는 당신 쪽이에요. 여기는 인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 아무튼 라크슈미에게 식사관리를 맡긴 것은 완전한 실패였다. 그녀는 원래 음식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거의 단식애호가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 러므로 아쉬람의 식사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리다스는 진정서를 써서 모두에게 돌렸다. 우리들은 거기에 서명하고 식사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덧붙였다. 나는 거리낌 없이 '스코틀랜드의 돼지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여 기보다 훨씬 좋은 것을 먹으니까'라고 썼는데 '장자 홀'이 무너진 이래 조심스러워진 티르타만은 결국 서명을 거부했다. 이틀 후 우리는 라크슈미의 사무실에 불려갔다. "바그완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의 식사 가 싫은 사람은 지금 당장 나가도 상관없다. 또 여러분의 배은망덕한 태 도에 정말 실망했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최선의 것을 부여하 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아쉬람에서 생활하는 명예를 부여받은 행운아들 이란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알겠습니까? 바그완은 이러한 불평을 두번 다시 듣고 싶어하시지 않습니다. " 그러나 이 일이 있은 1개월 후 그 요리사가 식사의 재료비로 지불한 돈 중 :k분의 3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라크슈미가 알게 되었다. 곧 새로운 요리사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자 그의 얼굴은 전염성 간염으로 샛노랗게 변했다. 그는 라크슈미에게 치료를 위해서 집 으로 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으나 그녀는 "말도 안되는 소리! 일을 계속 하지 않으면 안돼요!"하고 펄쩍 뛰었다. 이곳이 서양이었다면 그 요리사 는 즉시 격리병동에 수용됐을 텐데‥‥‥ 그리고 나서 이삼 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수명의 산냐시가 간염으로 쓰러졌다. 그래도 바그완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 이었다. 이삼년 후 그는 아침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간염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 걸리는 간염. 또 하나는 내 가 여 러분에게 주는 간염 이다 !" 이런 일이 벌어지는 중에도 각종 인간회복운동 그룹이 늘어나고 있었 다. 이전에 런던에서 엔카운터 그룹을 지도하던 티르타는 바그완으로부 터 푸나에서 엔카운터 그룹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크리 슈나 하우스'의 옥상에 있는 나의 텐트로 찾아와서 말했다. "시바,내 팔을 잠시 봐주지 않겠어?골절된 것 같은데‥‥‥ 그가 염려한 대로였다. 그의 팔을 꺽은 사람은 그의 여자 친구였다. 엔 카운터 그룹 세션 중 그녀는 격심한 질투심으로 인해 발작증세를 일으 켜 티르타에게 마구 덤벼들어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그녀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너무 폭력적으로 나왔 기 때문에 골절된 것이었다. 시일이 좀 지나자 더욱 많은 골절사고가 엔카운터 그룹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엔카운터 그룹은 상당히 인기있었다. 인근 병원에서는 이 렇게 많은 골절환자를 취급한 적이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자주 발생 하는 골절사고를 아무래도 의심하는 듯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 경위를 꾸며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서 병원측은 경찰에 보낼 보고서에 '슈리 라즈니쉬 아쉬람을 향해 오토바이로 달리는 도중 뒤집혔다' 라든가 '슈리 라즈니쉬 아쉬람에서 사다리를 타다 떨어졌다'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엔카운터와 같은 그룹은 '억압된 분노를 해방하고 사랑과 명상이 진실로 개화(開花)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바그완의 제1단계였다. 그러나 내재해 있던 폭력성이 그대로 표출되어 종종 그룹 내에서 폭력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서로의 신뢰와 이해 속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푸나시대에는 소송사건이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바그완은 그의 생일이나 그가 '깨달음'을 얻은 기념일이면 특히 마음에 드는 제자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선물들은 비베크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바그완이 입었던 로브와 베개 커버, 자수가 놓여진 타월 등이지만 가끔 금시계와 펜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처음 받은 것은 한벌의 로브였다. 그후에 상당량의 커프스 단추 세트가 봄베이와 서양에서 들어왔을 때 나는 모조 호박(琥珀) 단추를 받았고 그리고 회색으로 된 스코틀랜드제 순모 스웨터를 받은 일도 있었다. 아무튼 바그완은 대단한 수집광이었다. 커프스 단추를 선물로 나눠줄 즈음에는 약 3백세트 정도나 모으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진주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등의 보석을 사용한 것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멋진 것들이었다. 1975년이 끝날 무련 푸나에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강력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거인이 커다란 손발을 펼치며 자기의 본성을 세계에 나타내는 용트림과도 같았다.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일주일 정도의 체재 예정으로 찾아왔다가 그대로 아쉬람에 몇년이고 계속 머무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국인과 인도인을 필두로 프랑 스인, 이탈리아인 등이 수백명이나 찾아들기도 했다. 곧 유럽 이외의 나라에서도 바그완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 '아리카 무브먼트'(Arlca Movement)에서 파견된 미국인들이 푸나를 방문한 것은 1976년의 일이었고 그 3년 후에는 일본인들이 무리지어 찾 아왔다. 유명한 작곡가인 기타로는 초기 제자 중 한사람이었다. 또한 독 일 음악가 도이테르도 푸나에 체재하였다. 새로운 산냐시들 대부분은 엔지니어 ·의사 · 변호사 ·정신과 의사·건 축가·예술가 등 전문직의 사람들이었다. 푸나를 방문한 다음 흘딱 반해 버린 이른바 'New Age Movement'에 물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 을 정리해 바그완의 곁에서 생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75년이 넘어서자 서양에서 찾아온 사람의 수가 인도인의 수를 상회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트림프 놀이와 라임주스로 보내던 우리들의 편안한 날들은 종말을 고하고 아쉬람은 새로운 일로 활기가 충만해 있었다. 라크슈미는 대규모 건축사업을 감독하였고 이 일을 위해서 인도인 인부를 수십명이 나 고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문맹이었다. 그들의 원시적인 방법 때문에 일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고 그들 대신 우리 산냐시들이 작업을 떠맡 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그릴 즈음에 라크슈미는 나에게 '크리슈나 하우스'와 방을 하나 주었 다. 더 이상 옥상의 텐트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다. 공동체 내에서 나 의 지위는 계속 을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문제는 여전히 파란 을 幕고 있었다. 어느날 밤 젊은날의 캔디스 버겐을 빼닮은 멋진 캘리포니아 미인이 다르샨에 왔다. 바그완은 그녀에게 '사랑을 주는 자'라는 의미의 프레므 다(Premda)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녀와 나는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 고 그녀는 나의 새로운 방에 들어왔다. 한동안 사이좋게 지냈지만 그것도 잠시, 서로의 성격차로 말미암아 틈 이 생겼고 결국 나는 나의 방에서 나가달라고 윽박질렀다. 프레므다는 버티었다. 나웨 여자친구라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강론과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었는데, 나와 혜어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모든 것에 요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의 돈을 갖고 있지 않았으 나 나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결국 그녀는 떠나갔다. 그러나 그날 새벽 1시경 그녀는 창으로 몰래 들어와서 잠자리로 뛰어 들었다. 모기장을 걷고 들어와 나를 물어뜯는 등 난동을 부렸다. 내가 누 군가와 함께 자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다음날 아침 강론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평소 소중하게 간직했던 선 인장과 나팔꽃 화분 등이 창밖에 박살나 있었고 벽에는 크레용으로 낙 서가 되어있었다. 눈이 뒤집힐 만큼 화가 났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도서관으로 갔다. 2시간 정도 도서관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기분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밑바닥에서는 화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노자 하우스'의 문을 지날 때 프레므다가 디크샤 등 두세 명의 여성과 함께 손수레 위에서 야채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대로 지나치려 하자 디크샤가 "저 녀석을 해치워버려!"하고 금속성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프레므다가 뛰어와 나의 등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며 나의 긴 머 리채를 잡았다. 나는 돌아서서 그녀의 팔을 잡고 뒤로 비틀어 가까스로 공격을 저지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팔꿈치 뼈가 부러진 것 이었다. 그녀를 안고 병원으로 운반하는 동안 나는 마치 약한 자를 괴롭히는 악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겨우 그녀가 의식을 되찾자 나는 뛸듯이 기 뻤다. 병원의 당직 간호사가 "나는 다 알아요!"하며 웃는 얼굴로 우리들 을 보고 말했다. "슈리 라즈니쉬 아쉬람에서 넘어진 것이겠죠?" 우리들은 끄덕였다. 그녀의 골절은 금세 나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애 정이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공격하도록 프레므다를 부추 기던 디크샤는 불과 두세 시간도 안돼 미안하다며 칼로 자신의 손가락 힘줄을 잘랐다. 그러나 병원의 외과의사는 그 힘줄을 원상복구할 능력이 없었기에 그녀의 손가락은 지금도 굽어진 채 그대로이다. 1976년 전반기에 접어들자 아쉬람의 스탭은 2배 이상 늘어났고 방문 자 수도 전년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하였다. '크리슈나 하우스'는 완전 히 만원상태였으므로 라크슈미는 장소만 생기면 새로운 건물을 계속 지 어갔다. 아쉬람은 마치 거대한 토끼장처럼 변했다. 바로 그 무렬 아쉬람에서 최초의 자살자가 생겼다. 어느 미국인이 아 쉬람의 모퉁이 부근에 위치한 5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자살 원인은 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자괴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살 직전까지 그는 세라피그룹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그 그룹의 해산식 때 내가 촬영한 기념사진을 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료센터는 이 시기에 설립되었지만 의사와 스탭들의 국적이 각양각 색이어서 종종 혼란이 초래되곤 하였다. 처음에는 2명의 독일인 의사밖 에 없었는데 곧 파리에서 온 이란인 의사와 뉴질랜드 출신의 간호사가 합류하였다. 그 무렵 나는 적성에 전혀 맞지 않는 목수 일도 하고 있었다. 나의 주 요 임무는 여전히 바그완의 보디가드였지만 필요에 따라 라크슈미의 보 디가드이기도 했다. 홀 내의 경비는 큰 행사가 있을 때만 내가 담당하고 평소에는 뉴질랜드인 산냐시가 하였다. 라크슈미가 봄베이에 갈 때면 운 전기사 노릇도 하였고 아쉬람의 사진도 거의 내가 촬영하였다. 거기다 바그완의 의료검진과 약 시중을 드는 일도 나의 임무였다. 또한 3주마다 그의 소변검사를 위해 인력거로 푸나의 중심가까지 오줌을 실어나르는 일도 하였다. 그래서 검사결과가 나오면 의사의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가야만 했고, 바그완이 약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문날까봐 내가 복용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그완은 서양의학의 신봉자였는데 처방전은 상당히 장황하고 매주 그 내용이 변했다. 바그완의 보디가드가 된 이후 나는 경호술의 대가가 되려고 노력하였 다. 그래서 바그완의 집 옥상에서 격투기를 연습하다가 청소부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한번은 시카고로부터 거인처럼 큰 흑인이 바그완을 만나러 왔다. 그가 가라테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그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또한 일본에 가라테를 배우러 가는 도중 산냐스를 받으러 온 미국인 두 사람 도 있었다. 바그완 앞에서 시범을 보인 그들을 보고 무크타는 그들이야 말로 이상적 인 보디가드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얼마 후 쿵후를 하는 미국인에게 본격적인 무술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가르쳐 주었던 것은 눈을 가리고 싸우는 방법과 단 한번의 가격으 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술이었다. 또 한사람, 몰리코라는 무술가도 찾아왔다. 그는 힘이 무척 센 스포츠 만능형의 스웨덴인이었다. 그는 스웨덴 최강의 공수부대에서 복무하다 부상을 당해 전역하였는데 그뒤로 평소에 좋아하던 합기도를 더욱 수련 하기 위해 일본에 가서 2단을 딴 후에 푸나로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동안 나 자신도 동양의 격투기를 몸에 익히 게 되어 마침내 신참자들을 가르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1975년 초에는 라즈니쉬 조직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한사람의 인도 여성이 아쉬람에 찾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쉴라(Sheela) 였는데 처음에는 아쉬람의 주방에서 일했다. 그녀는 1년 전에 미국 남편 인 마크 해리스 실버맨(Marc Harris Silverman . '친마야'라는 이름을 받게 된다)과 함께 와서 잠시 체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라크슈미의 발치 에서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하는 그녀의 공손한 태도에 놀랐다. 보통 사 람들은 오직 바그완에 대해서만 그런 예의를 표했던 것이다. 아무튼 지 금 다시 나타난 그녀는 영구히 바그완 곁에 머물 작정이었다. 나는 라크슈미로부터 또 새로운 일을 지시받았다. 스탭용 주방의 운영 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 일을 하다 보면 식당의 요리와 위생면에 대해 불만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나는 쉴라와 자주 마주쳤다. 처음 그녀는 아주 소박하고 온순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 러나 식당에서부터 출발한 그녀는 혜성과 같은 위세로 아쉬람의 높은 지위를 차지해 결국 라크슈미의 오른팔이 되었다. 쉴라는 봄베이에서 4백 마일 정도 북쪽에 위치한 농장지대의 마을에 서 태어났다. 여섯 형제 중 막내였다. 양친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여행자와 순례자들을 농장에 초대해 대접하길 좋아했으며, 라즈니쉬에 대해서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 17세 때 미국 뉴저지주로 유학간 쉴라는 2 년 후인 1969년 유태계 미국인인 실버맨과 결흔했다(그도 결국 라즈니쉬 교로 개종했다). 이렇게 해서 그린 카드(Green Card:외국인에 대한 노동 허가증)를 손에 넣은 쉴라는 정식으로 미국에 거주하며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바그완을 알고 있었으며 미국에 있을 때도 주위사 람들에게 바그완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곤 했다. 바그완의 눈이 그녀를 사로잡았다는 것이었다. 푸나에 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는데 그 이후 바그완은 그녀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아쉬람 내에서의 지위가 격상됨에 따라 권력이 쉴라의 인격을 변화시 킨 듯했다. 그녀는 이미 라크슈미의 발치에서 공손하게 무릎꿇던 그때의 그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노골적으로 권력의 맛을 탐했다. 당초 의 소박하고 온순한 태도는 완전히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련 아쉬람 내에서 알게 모르게 자주 만났던 나와 쉴라는 어느새 서로 성적으로 끌리게 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의 남편이 애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죠? 그러니까 아무 것도 문제될 건 없어요." 또 나를 보면 같은 빨강머리의 스코틀랜드인이었던 뉴저지 시대의 미 술선생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녀는 그 교사를 무척 짝사랑했던 것 같았 다. 나는 그때까지 인도인 여성과 관계를 가진 적이 별로 없었지만 성문 제에 관한 한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바그완은 강론을 통하여 여러차례 인도여성은 오르가즘을 모른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쉴라와의 연애관계 속에서 알게 되었다. 쉴라의 냉정하고 조심스러운 사랑법에 한편으론 호감이 갔 지만 어쩐지 둘 사이에는 허전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살아 숨쉰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한채 마치 불감증환자 같았다. 나의 거친 호흡에 비해 그녀의 반응은 너무 차갑고 무덤덤한 것이었다. 한편 쉴라의 남편은 나와 그녀의 관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이 문제에 대해 바그완에게 편지를 썼다. 어느날 바그완은 다르샨에 앞서 쉴라 에게 자신의 발치로 오라고 명했다. 바그완은 같은 공범(?)인 나를 거들 떠 보지도 않고 오로지 쉴라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쉴라,나는 친마야로부터 편지를 한통 받았다. 그는 네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친마야와 비교하면 지금의 관 계는 천박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는 그 관계를 포기해야 한다. " 나는 바그완이 우리들의 관계를 알고 있으리라곤 전혀 몰랐고, 쉴라로 부터 친마야는 우리 관계를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참 으로 당혹스러웠다. 결국 '신'에 의해서 우리들의 관계는 종말을 고했다. 나는 불평 한마디 없이 그의 뜻을 수용했다. 그러나 쉴라는 그렇지 않았 다. 오히려 그녀는 내게 버림받았다고 여겨 내내 원망하였다. 이 사건 때 문에 나의 이름은 그녀의 '복수' 리스트에 올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완은 성에 관한 완전한 자유를 계속 장려하였 다. 그는 한사람의 상대와 사귀다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즉시 다른 파트 너로 바꾸라고 가르쳤다. 여기에 우리들의 동물적 욕구가 더해져 난교 (亂交)의 분위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아쉬람의 난교는 바깥 세상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 찾아와 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푸나의 상 황을 충격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지난날 성적 욕구를 억압하는 교육환경 속에서 자랐 지만 여기 아쉬람에서는 일체의 억압을 벗어던지라고 했다. 푸나가 제공 한 성의 자유는 아주 경이적인 것이었다. 1천명 이상의 산냐시 중에 적 어도 6백명 이상이 여성이었고 게다가 그들 대다수는 섹스에 매우 적극 적 이 었다. 푸나에 찾아온 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교주에게 매력을 느꼈다. 우리들은 마음껏 섹스의 향연을 즐겼다. 그것은 로마시대의 바커스축제 이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일찍이 사람들의 육체적 욕구가 이렇게까지 충 분히 채워졌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욕정과 다른 점은 그 모든 것이 사랑,우정, 위로의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산냐시 여성의 대부분은 너무 섹스를 밝힌 나머지 오히려 그에 응해 야 하는 남자쪽이 부담스러워 했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여성을 거절하기 에 바빴고 여성의 무차별적인 '성 공격'에 경악하고 두려워했다. 세라피 그룹이 발전하면서 실적 관계는 우리들의 용기와 인내력 그리 고 헌신을 시험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수단으로는 그 밖에도 잔뜩 취하는 일과 지나치게 먹는 것 등이 있었다. 오직 금지되어 있는 것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쉬람 내에서 만 문제였을 뿐 문을 한발짝만 나서도 공공연히 행해졌다. 나는 바그완의 측근이라는 특권적 지위 덕분에 섹시하고 매력적인 많 은 여성들로부터 유혹받는 행운을 누렸다. 푸나에는 뛰어난 미인이 수없 이 모여들었고 그 대다수가 나에게 접근하려고 했던 것이다. 영원한 처 녀인 라크슈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열기로 가득찬 섹스의 무대 한가운데서 그녀는 초연하게 고고함을 유지해 나 갔다. 그녀는 종종 사람들에게 "시바는 매일 다른 여성과 논다. "고 말하곤 했다. 결국 나는 '아쉬람의 플레이보이'로 유명해졌다.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은 힘만 미칠 수 있으면 하루에도 여러 명의 여 성들과 섹스를 즐겼고 때론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조차 있었다. 당 시에는 헤르페스나 AIDS와 같은 성병이 유행하기 전이라 섹스의 천국 과 같은 곳에서 우리 1천명의 산냐시들은 부담없이 성적 욕구를 마음껏 채을 수 있었다. 언젠가 라크슈미는 런던으로부터 푸나를 방문한 비 산냐시 사진작가에게 탄트라 그룹을 촬영하도록 허가해 주었다. 벌거벗은 남녀가 뒤섞인 체 유유히 차례차례 섹스 상대를 바꿔가는 광경을 보고 그 카메라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건 끝없는 섹스향연뿐만 아니 었다. 우리들은 섹스 외에도 알콜, 노래와 연주, 환락, 성적 마사지 등에 보란 듯이 탐닉했고 망고 세션에서는 여성의 넓적다리에 끼운 잘 익은 망고를 남성이 흔쾌한 모습으로 빼먹기도 했던 것이다. 라크슈미가 그 사진작가에게 세션의 촬영을 허락하자 그녀의 부하 중 한명이 진위 여부를 확인하러 왔다. 라크슈미가 그런 허가를 해줄 리 없 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야. 무엇을 걱정해! 그 사진작가가 촬영할 수 있도록 도와줘. 그는 좋은 사람이고 선전해주면 우리들의 일을 돕는 게 되잖아!" 그러나 그 부하는 이렇게 지적했다. "세션에서는 모두 벗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섹스도 하고 있어요!" 그래도 라크슈미는 개의치 않았기 메문에 그녀의 부하는 상당히 당황 했다. 부하는 라크슈미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사용해서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알아차리고 외쳤다. "라크슈미는 그 실상을 잘 몰랐어! 어째서 아무도 이 라크슈미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거야? 즉시 그 사진작가를 쫓아내! 필름도 모두 몰수하고!" 그렇게 해서 그 카메라맨의 필름은 빼앗았지만 라크슈미의 순진함은 그후 아쉬람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전해지게 되었다. 또 언젠가 라크슈미가 그녀 부하의 방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 부하는 침대 위에서 남자친구와 한참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맞달라붙 어 싸움하는 것으로 생각한 라크슈미는 도와주려고 다가섰다가 그제야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섹스에 관한 한 마음껏 즐길 수 있었지만 먹는 것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아쉬람의 식사는 우리들의 활동량에 비해 너무 열악했으며 대다수 산냐시들은 영양실조로 까칠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서 돌아눕다가 늑골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음식에 돈이 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무일푼으로 저금해둔 돈도 1개월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라크슈미에게 용돈을 받으러 갔다. 이전부터 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산냐시에게 는 용돈이 주어졌던 것이다. 월 50루피라면 사소하긴 했지만 최저한의 생활필수품은 조달할 수 있는 액수였다. 라크슈미는 단호히 말했다. "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크슈미 혼자서는 아무 것도 결 정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그것이 완전한 거짓말이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나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할머니의 유언에 의해서 1천 파운드가 내게 상속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돈에 여유가 생기자 여가시간을 이용해 사진촬영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상품성 있는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기술이 충분하다 고 자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스튜어디스인 산냐시에게 부탁해서 동경으로 부터 카메라 한 세트를 구입하였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거리와 산의 풍 경, 아침 해돋이 등을 촬영한 사진은 최고 5달러까지 받으며 뉴욕의 대 리점에 팔 수 있었다. 돈이 손에 잡히자 나는 단백질을 보충하는 데 노력했다. 더 이상 한밤 중에 늑골이 부러지는 사태는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난 후 나는 먹는 것이 건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금방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거의 병에 걸리는 일이 없었지만 다른 산냐시들은 영양실조로 병을 앓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도 생겼다. 영국의 유명한 배우인 테렌스 스탬프(Terence Stamp)가 푸나를 방문한 것은 1976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구르디예프의 vMeetings with Remarkable iwenA을 시나리오로 한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조사를 하던 중 바그완과의 회견을 희망하였다. 그는 푸나를 방문한 유명인 제1호로 우리들은 모두 대단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아쉬람의 여성 중에는 스탬프의 눈에 띄려고 지나친 행동을 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가 다르샨에 참석하자 바그완은 좀더 가까이 와서 앉도록 했다. 그 리고 유쾌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바그완의 융단폭격 같은 말을 듣고 있던 그가 혹시 졸도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스탬프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그완의 말이 그에게 어 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는지 표정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좨 심 각하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바그완은 그에게 산냐스를 주며 '초월자'를 의미하는 비텐(Veeten)이라는 이름도 주었다. 테렌스 스탬프가 바그완과 마주앉아 지나친 사랑과 관심을 받는 광경 을 보고 나는 내심 불만을 느꼈다. 우리들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어째서 신참자가 이렇게 중하게 받들어져야 하는 가? 정녕 유명세와 돈이 이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바그완도 강론을 통 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이 부자인가, 유명한가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여하는 것이다. " 바그완은 내가 뚱해 있는 이유를 눈치채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티르타를 통해 내가 촬영한 사진, 나의 태도, 내가 하는 경호 등에서 몇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적해 왔다. 그리고 해명 서까지 쓰라고 명 령했다. 화가 난 나는 그동안의 고민과 불만을 정리해서 썼다. 나는 현재 담당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보디가드, 운전기사, 카메라맨, 안전 감독, 다르샨에 앞서 하는 냄새검사, 정골의, 연구실의 조수, 약 사러 가는 일 등)을 지적하고 대폭 줄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가를 이용해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사진촬영)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글을 써서 올리면서도 나는 왠지 불안했다. 행여나 그의 눈밖에 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날밤 비베크가 나를 불러서 바그완의 회답을 전해주었다. "좋은 편지였다고 바그완이 말했어요. 다르샨에 앞서 냄새맡는 일은 그만둬도 좋아요. 지금부터 그 임무는 여성에게 전담시킬 거예요. 다르샨 때에는 경호에만 전념해 주세요. 다르샨의 사진촬영은 크리슈나 바르티 에게 맡길 겁니다. 그리고 바그완은 당신이 이제 한 여성을 찾아서 안정 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공동체가 돈벌이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시점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 일환으로 아쉬람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8루피의 입장료가 책정되었 던 것이다. 런던의 yTimesA 신문기사에서 버나드 레빈(Bernard Levin)은 그 금액 을 '불과'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인도의 막노동자가 하루에 버는 액수의 약 두배에 해당됐고 웬만한 사무원과 숙련공의 일급에 맞먹는 것이었다. 봄베이에서 옳겨온 처음과 비교해 입장료가 거의 4배나 뛴 것 이 었다. 앞서 말했지만 티르타는 아쉬람의 '엔카운터 그룹'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인간회복운동의 중심인 캘리포니아의 에살렌연구소에서 교육받은 후 런던에서 유럽 최초의 성장센터를 창설한 사람이었다. 티르타의 엔카운터 그룹은 폭력과 난교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와 그의 여자친구는 바그완으로부터 금욕생활을 하라고 명령받았다. 그 래도 티르타는 바그완의 명령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애무하는 것 정 도는 괜찮다며 그룹의 여성들을 마구 만지고 다녔다. 티르타 그룹의 실험 중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집착력을 없애 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애인이 다른 사람과 섹스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봐야만 했 다. 바그완은 항상 사랑과 소유욕을 분리시켰으며 사랑과 소유욕은 서로 조화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진실된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면 자신의 애인이 타인과 섹스를 즐기는 광경을 보고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실험을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 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실험 중 도발자 역할을 도맡아 하는 티르타에게는 관찰자(애인)가 폭발시키는 폭력적인 분노의 과녁이 되곤 하였다. 티르타 그룹은 마음이 약한 자와 신참자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 수준 높은(?) 그룹에 참가하려면 전 단계의 예비그룹에 수차례 참가 하여 몸속의 저항을 약화시키구 내면의 벽과 억압을 자각할 수 있어야 했다. 특히 티르타에게는 누구도 흥내낼 수 없는 정열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룹의 참가자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인내로써 감당해야 했 으며, 이것이 골절 등 많은 부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티르 타도 팔다리가 성한 날이 없었다. 우리들의 운동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인간의 잠재능력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바그완에 대한 호기심이 날로 높아져 갔다. 에살 렌연구소의 창립자 중 한사람인 리차드 프라이스(Richard Price)도 이때 푸나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비베크로부터 바그완의 명령을 전해받은 나는 곧 안정할 수 있는 파트너를 발견했다. '지혜'를 의미하는 가얀(Gayan)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독일 출신의 발레교사였던 그녀에게는 3살 난 딸이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도 산냐시였으며 개조한 세단차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차를 몰고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을 출발하여 먼 길을 마다 않고 터키, 아프가 니스탄을 거쳐 인도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가얀은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즉시 나의 방으로 옮겨왔다. 라크슈미는 그녀에게 아이를 아쉬람에 들여보낼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면 모를까,그렇지 않다면 아이 아버지의 세단차로 보내야만 했다. 나는 솔직히 그녀의 딸과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 마음을 안 그녀는 아이를 두고 올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지 반년 후 우리들은 최고의 특권을 부여받았 다. 바그완의 집에서 함께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9개월 후 가얀의 비자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체재를 연장시키는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방법이라고는 봄베이의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비자 를 연기하거나, 나와 결혼하는 두가지 길 중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당시 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인은 인도에 체재하는데 비자가 필요없었다(비자가 필요하게 된 것은 수상이었던 간디여사가 암살된 1984년 후부터의 일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녀에게 청흔했다. 그녀는 영어가 상당히 서툴렀기 때문 에 처음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손짓 발짓을 통해 겨우 나의 의사가 전달되자 그녀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청혼을 받아 들였다. 우리들은 비베크에게 결흔허락을 받으러 갔다. 바그완을 만나고 돌아 온 비베크는 이렇게 말했다. "바그완은 말했어요. 당신들이 결혼하는 일에는 상관하지 않겠다. 단 그것이 비자 때문에 한 결정이라면." 나는 그의 메시지에 내심 상처받았다. 바그완의 결혼관은 특별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평생 결혼한 적도 없었 며 결혼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바그완은 산아문제에 대해서도 철저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아 쉬람에서 여자가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서도 극력 반대하였다. 바그완 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혼이란 편의상 하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나와 가얀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결혼이야말로 두 사람의 끈 을 확고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에게 청 혼한 것은 진정한 사랑의 발로였지 편의상의 문제 따위는 결코 아니 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그완은 결혼을 일시적인 협정에 불과하다며 결혼 자체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라고 요구했다. 바그완이 강조하는 진실한 관계란 그와 제자 사이의 관계뿐이며 이 결합만이 진정으로 가치있다는 것이었다. 바그완은 자기와의 관계를 제외한 모든 관계는 이차적인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우리들이 푸나에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와의 관계를 심화 시 키 기 위해서 였다. 그는 교주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관계를 재편성 하거나 심지어는 부부에게 각각 다른 상대를 찾도록 명하였다. 또한 어 린애가 생기면 그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임신한 여성에게 는 즉시 중절할 것을 명령하였다. 나아가 그는 임신의 근본적인 해결방 안으로 불임을 강력하게 권했다. 나는 다르샨에 앞서 새로운 산냐시들에게 항상 '금지조항'을 알려주어 야 했다. 이 조항 중에는 '임신 ·중절 ·불임수술 등에 대한 어떠한 문제 제기도 바그완에게 하지 말 것!'이라는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그완은 이성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지 않는 한 '깨달음'을 얻기란 불 가능하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어릴 때부터 감정적인 갈등에 대해서 초연한 태도를 꾸준히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76년에 접어들자 바그완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자서전을 쓰라고 명 령했다.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전 허락과 아쉬람의 공식적인 인가가 필요했으며 그의 지시에 따른 수정절차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원고내용은 온통 바그완에 대한 과장된 칭찬으로만 얼룩져 있었다. 제 8장 매춘과 마약의 산냐시들 '장자(莊子) 홀'이 무너지고 나서 1년 후에는 6백명 정도를 수용할 笭 있는 새로운 흘이 완성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식 보디가드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라크슈미가 부하를 한사람 붙여주었다. 아침강론의 참가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규칙도 엄해졌다. 새로운 규峯 중 '20초 룰'이라는 게 있었다. 이는 흘의 음향효과가 너무 좋아 뒤에 있는 사람의 기침소리까지 확연히 들리기 때문에 기침하는 시간을 20臺 이내로 제한한다는 규칙이었다. 만일 기침을 제한시간 이상으로 하게 되면 퇴장명령을 받거나 강제로 끌어냈다. 홀에는 산냐시와 방문자의 자리를 각각 구분하는 로프가 쳐져 있었고 일반 청중에게는 맨됫쪽의 가장 나쁜 자리가 배정되었다. 강론중에 '카티 르시스'를 일으켜 날뛰거나 소리치는 자가 발생하면 규칙대로 30초간 오 의 옅에서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제한시간을 넘어서면 장외로 끌어릇 다. 이 방식은 대단히 효과가 있었다. 얼마 후 나는 5명의 경호원으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난동을 일으키는 사람을 장외로 끌어내는 동안에도 홀에는 경호하는 지 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라크슈미는 내가 경호원들에게 훈련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항상 우리들의 과잉방어로 문제가 생길까 염려하였다. 당시 바그완은 폭력을 막으려는 의도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 른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우리들은 '무기' '총' '습격자'란 말 대신에 '만 일 누군가가 바그완에게 무엇인가를 겨눈다면 우리들의 몸으로 그를 감 쌀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표현하였다. 강론 중 바그완을 촬영하는 일은 내가 맡은 임무 중 매우 중요한 것이 었다. 라크슈미의 방에서 산냐시들이 모여 사진에 관해 얘기하고 있을 때 그녀는 말했다. "보세.5_ 바그완의 사진을 시바처럼 잘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In 시바는 바그완을 렌즈로 가장 멋지게 잡고 있어요. 정말 좋은 사 진이에요. 그링지 않아요?'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그녀에게서 이런 칭찬을 받기란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홀에서는 좀처럼 좋은 사진을 촬영할 수 없었다. 바그 완이 앉는 의자 바로 뒤에 라크슈미의 침실 창살이 있어 배경을 엉망으 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사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검은 커튼을 의자 뒤에 치자고 비베크에게 제안했다. 그녀는 커튼보다는 나무 판자가 먼지도 나지 않고 바그완의 알레르기도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일주일 후에 나무판자가 도착하여 검정색 페인트 칠을 하고 건조시킨 후 비베크에게 냄새검사를 받았다. "안돼요. 냄새가 너무 심해요!" 나는 일주일 더 말려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문제의 나무판자를 단념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며칠 후 비베크가 오더니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아쉬람에서는 이런 일이 다반사였다. 바그완은 사진촬영에 관해서 끊임없이 번거로운 주문을 해댔다. 말은 자신의 얼굴에만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라고 했지만 그것도 자연스러운 표정을 잡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인정을 받으려면 긴 코와 벗겨진 머리를 보완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눈에 최대의 포인트를 두었다. 사진이 완성되면 그는 모든 사진을 빠짐없이 훑어보고 그중 일부분만을 공개하였다. 이것은 그의 인물사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아쉬람의 공식적인 사진 모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그완의 구미를 맞추기란 참으로 어려웠고 어떤 때에는 참기 힘들 정도로 울화가 치밀 때도 있었다. 예의 그 나무판자에 관한 일인데, 나는 아침강론 때 나무판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왜 이런 착상을 진 작부터 하지 못했나 후회스러을 정도로 배경판에 대해 만족하였다. 정말 완벽했다. 바그완의 하얀 로브와 백발이 섞인 머리칼이 검은 배경과 훌 릉한 대조를 이루어 특히 흑백사진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며칠쯤 지나 정원에서의 촬영 때 바그완은 이렇게 말했다. "음, 시바. 그 나무판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은 마음에 들지 않아. 다 시 그 판자를 사용할 생각은 아니겠지? 음." 나는 실망했다. 그 판의 어디가 어때서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1개월 후 그는 사진첩을 편집하는 작업실에 들러 그때 촬영한 사진 모두를 삽입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렇듯 그 누구도 그의 속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겉으로는 절대적인 자신감과 박식함을 가장하 고 있지만사실 그의 마음속은끊임없이 동요하고 머뭇거렸던 것이다. 강론 중의 촬영시간에 관해서도 그는 규칙을 정했다. 어느날 비베크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강론이 시작되고 15분이 지날 때까지 촬영은 삼가해 주세요. 바그완 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려요.그 뒤로는 자유롭게 촬영해도 좋아요." 그런데 집회 중에는 뜻하지 않은 일이 자주 벌어졌다. 한번은 젊은 일본여성이 다르샨을 받으러 왔다. 온순하게 앉아있던 그녀가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바그완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양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라크슈미가 달려들어 그 여성을 메어내긴 했지만 몸싸움을 벌인 탓에 두 여자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경호대장인 내가 이미 선수를 빼앗긴 꼴이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사태라서 손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그완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사건을 비베크가 모르게 넘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중에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이봐요, 시바. 굼벵이가 따로 없더군요 졸기라도 했나요? 이런 일은 두번 다시 없도록 주의하세요 !" 충격을 받은 나는 경호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특히 무술의 최고 경지라는 동양의 무술을 연마하는 데 노력하였다. 한달 후 그때 그 일본여성이 또 다르샨을 받으러 왔다.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즉시 뛰어나갈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이번만은 나도 완벽한 자세를 갖추고 모든 감각을 그 여성에게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심적 변화를 완벽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나의 적의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바그완에게까지 전달된 것 같았다. "시바에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 바그완은 나를 의식하지 말라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 곁에 와서 너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라." 그리곤 바그완은 그녀의 미간을 만져본 후 윤기가 나는 나무상자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그것을 받아들고는 얌전히 방을 빠져 나갔다. 그 상자에는 바그완의 머리카락 한 다발과 잘라낸 손톱 부스러 기가 들어있었다. 그것들에 대하여 바그완은 "깨달음의 에너지를 방출한 것이기 때문에 교주와 제자와의 결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고 하였다. 어느 날인가 아침강론 때 또 다른 여성이 바그완을 향해 달려들었다. 누가 봐도 습격으로 보였다. 나는 그 여성의 바로 앞에 위치한 경호원에게 긴급시에 사용하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주위만 두리번거릴 뿐 목석처럼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성을 간단하게 저지시키리라 예상했는데 오히려 무력하게 통과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바그완을 향해 돌진했다. 나는 재빨리 뛰쳐나가 가까스로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쳤다. 내가 그녀를 잡고 있는 동안 바그완은 유유히 홀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뭘하고 있었나!" 나는 멍청하게 서있던 경호원에게 소리쳤다. 긴급상황시에 신속히 대 응할 수 있도록 나는 그를 1년간 훈련시켜 왔던 것이다. 그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그녀는 나의 새 여자친구입니다. 어젯밥 함께 잤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 이 일이 있고 나서 티르타는 나의 신속한 행동에 대해 "당신이 바그완 을 잘 지켜주어 정말 훌릉해. 당신만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며 크게 칭찬해 주었다. 그래도 당시는 즐거운 시기였다. 우리들은 대단한 인물과 함께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손에 넣은 듯한 기 분이었다. 우리들에게는 매일매일이 크리스마스였으며 바그완은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였다. 내게 무엇보다도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점은 성(性)이 완전히 해방되 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의 해방이지 현실적으로 성욕을 만족시킨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차이는 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에 관한 한 남성보다도 여성이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성의 해방과 더불어 아쉬람에는 2∼3천명의 친구들이 '바그완의 꿈'이라는 공 동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마치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과 가능성을 세계에 제시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선구자인 양 느껴졌다. 1977년 라크슈미는 10년 이내에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의 반수 이상이 산냐시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녀의 말이 전혀 허황되게 여겨지지 않았다. 푸나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 치고 이곳 을 떠나고 싶어하는 자는 별로 없었다. 우리들에게 서양으로 돌아가라는 명 령은 곧 사형선고와 같았다. 어느날 아침 나를 포함한 16명의 산냐시들이 8대의 오토바이에 두 사 람씩 나눠 타고 약 80킬로 떨어진 교외까지 달렸다. 쉴라도 새로 사귄 남자친구(카일라쉬의 리더였던 남아프리카 출신의 파일럿)와 함께 참가했 다. 파일럿의 오토바이 뒤에 탄 그녀는 환성을 지르며 법석을 떨었다. 오 렌지색 옷이 바람에 날리는 가운데 두 팔을 쭉 뻗은 그녀의 모습을 나는 사진에 담았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낀 채 하얀 이를 빛내며 즐거운 표정 을 짓고 있었다. 호수에 도착한 우리들은 땀과 먼지로 뒤범벅된 몸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물속에 던졌다. 오후 늦게 아쉬람에 돌아오자 라크슈미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우리들 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강론에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바그완이 라크슈미를 시켜 수소문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직속 부하인 쉴라까 지 함께 갔던 것이 의외였는지 "이런 유치한 짓은 앞으로 하지 마!"하고 야단쳤다. 쉴라가 야단을 맞은 일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그후 두번 다시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예고 없이 바그완의 방에 들어갔는데 그가 커다란 종이 에 복잡한 계획표를 작성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나를 보자 당황 해서 그 클립보드를 팔걸이 의자 옆의 서가에 서둘러 집어넣었지만 그 계획표의 개요는 이미 내 머리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색이 다른 볼펜 으로 제자의 이름을 늘어 써두었다. 아쉬람 사람들의 생활을 편성하고 그 주의 기본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그완은 이렇듯 몇시간에 걸쳐 청사진을 만들고는 라크슈미에게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바그완과 매일 아침 미팅을 가진 후면 항상 긴급한 용무라고 법석을 떨며 새로운 명령 을 내리곤 하였다.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당사자가 무엇을 하고 있든 상 관없었다. 예를 들면 한참 정원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명령이 내려와 주방이나 건설현장으로 가라든가 또는 즉시 서양에 돌아가 5천 파운드 를 벌어오라는 식이었다. 이 시기의 아쉬람은 급속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1978년에 라크슈 미는 훌릉한 아치형의 문을 건축했다. 티크로 만들어진 문에는 한쌍의 커다란 장식 징이 박혀져 있었다. 이 문을 찍은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유 명해졌다. 문앞에는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 아쉬람'이라고 쓰여진 호화 간판이 걸렸다. 무엇이든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외관이 아니면 안되었다. 눈부시게 화려한 샹들리에를 좋아했던 라크슈미는 수만 루피나 들여서 몇 개씩이나 구입하여 여기저기에 매달아 놓았다. 일의 영역도 새롭게 늘어갔다. 서점과 선전부도 생겼다. 신축된 커다란 아파트의 일부를 사들여 '지저스 하우스'(JesusHouse)라고 이름붙였다. 라크슈미는 여전히 주변의 토지를 사들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고 아 쉬람은 더욱 확대되어만 갔다. 또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붓다 홀' (Buddha Hall)을 세을 예정이었다. '장자 홀'로는 밀려드는 사람을 더 이 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쉬람의 훌릉한 신축 건물 옆에는 인부들의 판잣집이 줄지어 서있었 다. 그 초라한 오두막의 행렬은 무수히 줄지어 있는 검은 물고기 시체를 연상케 했다. 아무튼 평소의 아쉬람은 일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다이 나믹 명상'을 위해 대문(라크슈미는 The Gateless Gate라고 명명했다)이 열리는 새벽 5시반부터 밤 10시반까지 아쉬람은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아쉬람의 식사는 여전히 양과 질에서 모두 형편없었다. 그래서 하리다스는 바그완 전용주방에서 일하는 여성 중 한명을 사귀리라 마음 먹었다. 이는 민생고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바그완에게 나오는 식사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한동안 하리다스는 그 여자 친구 와 함께 특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주방을 감독하는 비베크가 '관계 자 외 출입금지'를 선언하자 하리다스는 다시 산냐시 식당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산냐시의 식탁으로 되돌아온 첫날 그는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바로 뱉어내며 "정말 끔찍해 ! 도대체 애정이 들어있지 않아!"하고 큰소리쳤 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틀 내내 단식하다가 라크슈미에게 탄원하러 갔 지만 허사였다. 그의 여자친구가 바그완의 주방에서 먹을 것을 몰래 빼다주기도 했지 만 그것만으로는 양이 부족했다. 결국 하리다스는 버티다 못해 식당에서 먹게 되었다. 그는 종종 "이런 똥 같은 걸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 하 고 불평하곤 했다. 바그완의 생활담당 책임자인 디크샤는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여 념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수하에 세탁하는 사람, 바느질하는 사람, 시장 보는 사람 등을 거느리고 소형 트럭과 오토바이 두 대,금고 두 개를 구 비해놓고 있었다. 아쉬람은 큰돈을 버는 보고였다. 금고에는 현금과 금괴가 가득했다. 아쉬람에서는 입장하는 데도,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데도, 세라피 그 룹에 참가하는 데도 요금이 필요했다. 서적도 판매되었으며 오렌지색의 로브도 상품화되기 시작했다. 특수한 무취비누와 샴푸를 만들기 위한 공 장이 문을 열었고 조금 지나자 디크샤가 제과점을 시작했다. 그녀는 돈 많은 산냐시들을 위한 고급 레스토랑도 열었는데 하얀 식탁보와 고급 도자기, 순은제 나이프와 스푼을 갖춘 최고급 식당이었다. 디크샤는 전속 회계사를 고용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생기는 이익을 챙겼는데 레스토랑과 그에 따른 장사는 세라피 그룹보다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1981년 경에는 매점의 매상만 해도 주 10만 루피를 상회하였다. 몇몇 독일인 의사에 의해서 시작된 건강센터는 '지니'라는 하와이 출신의 날씬한 미인이 경영하면서부터 날로 번성해 갔다. 나는 헬스클럽을 맡게 되었고 세라피의 한 파트도 담당하였다. 또 정골의 자격증을 소지 하였기 때문에 나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정골 이외에 고대 중국의 한 방치료도 병행했다. 베란다를 개조한 장소에 일본인 지압사와 함께 진료 소도 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의 전반적인 생활도 변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경호원 들의 훈련을 끝내고 푸나의 교외로 달려가 아쉬람의 출판물에 사용할 사진과 뉴욕 대리점에 팔 사진을 촬영하고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은 세 라피나 진료소에서 치료에 쏟아부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정력이 넘치는 체질을 타고나 脚분 이상 명상하기가 힘들었지만 그 대신 창조적인 일을 계속해 나가며 그 공백을 메웠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인도에 온 지 4년쯤 될 무렵 라크슈미로부터 봄베이의 CID(범죄수사국)에서 온 소환장을 건네받았다. 나로서는 소환당한 이유를 알 수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라크슈미는 태연자약하였다. "시바, 긴장하지 말아요! 라크슈미를 보세요.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요. 바그완의 힘만을 신뢰하세-S_ 그가 보 살펴 줄 거예요!" 다음날 아침 그녀는 내 손에 봄베이의 변호사 주소가 적힌 쪽지와 차 비를 건네주었다. 변호사와 반시간 면담한 후 CID로 갔다. 나는 그때까 지도 내가 심문받아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사태의 진상은 이러했다. 풍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젊은 인도 산냐시가 나를 현금 밀반입 용 의자로 CID에 고소한 것이었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나와 관 계를 맺자 질투심을 참지 못해 나를 인도에서 쫓아내려고 그러한 일을 벌인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산냐시는 이 일이 있은 후 어느 술자리에서 취기에 실언을 하였고, 그 진상이 라크슈미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곧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당시 나는 아내인 가얀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우리 둘은 결혼신고서를 낸 이후 힌두식의 화려하고 멋진 축하연까지 벌였다. 그리고 나서 1년 반동안 나는 그녀를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프 리섹스가 성한 아쉬람에서 기특하게도 나는 다른 여성들의 유혹을 모두 거절하여 왔었다. 그러나 어느날 밤 나는 그만 그 여자의 유혹에 지고 말았던 것이다. 심한 죄책감에 다시는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하였지만 왠지 그때부터 가얀에 대한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프리섹스를 즐기고 싶은 나의 욕망에 그녀가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약 1개월을 흔란스럽게 보낸 후 나는 비베크에게 가얀과의 문제에 대 해 바그완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편지를 쓸까도 생각했지만 당 시에는 일년에 두차례 아버지 앞으로 편지 쓰는 것 이외의 편지는 금지 되어 있었다. 비베크는 곧 바그완의 의견을 내게 전달해 주었다. "바그완은 이렇게 말했어요 어떠한 일이든 결코 죄책감을 갖지 마라. 자연스레 대처하라. 자신의 느낌에 따르라고 말이에요. 아주 멋진 메시지 아녜요?"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띠웠다. "이제 당신은 자유예요!" 나는 전신에 해방감을 느꼈다. 한사람의 여성에게 정착하라는 바그완 의 지시를 받은 지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쩌면 그 명령이 나에게나 가 얀에게 고통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쉬람의 존재이유 중에서도 가장 중요 한 성적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바그완을 찾았다. 그 회답은 당장 두사람이 떨어져 각 방을 쓰라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나는 지난 2년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여성들과 부담없이 사귈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기대한 만큼의 기쁨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생활이 시들해질 때쯤 해서 관계를 맺었던 한 여성으로부터 임질 에 걸렸다는 고백을 들었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즉시 함께 잤던 여성들 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날 오후 의료센터 밖의 벤치에는 수많은 여성 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때 내가 그 앞을 지나갔다면 엄청난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 감염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무렵 아쉬람에 달갑잖은 손님이 찾아들었다. 바로 무서운 병인 혜 르페스가 아쉬람을 덮쳐 순식간에 공동체 내에 퍼졌다. 어느 영국 산냐 시는 눈꺼풀 안쪽에 수포(水疱)가 생겨 실명하기도 했다. 섹스에 대한 열 정을 식혀야 할 시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치료를 담당한 의사들은 그때까지 헤르페스를 본 적이 없었다. 당시까 지만 해도 성병에 대하여 무지한 의사가 많았기 때문에 매일 골머리를 싸매며 치료에 열중하였다. 성병뿐만 아니라 다른 병들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미 서너명의 산냐시가 간염으로 죽었으며 어느 네덜란드인 산냐시는 뇌종양으로 죽 었고 결핵과 폐렴은 다반사였다. 당시는 몰랐지만 나 자신도 결핵에 걸 려있었다. 질병이 만연하자 그룹(특히 탄트라와 엔카운터)에 참가하기 전 에는 반드시 건강진단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우리들의 적은 성병만이 아니라 이와 옴이란 놈까지 있었다. 인도에서 아쉬람의 체재비용을 벌기란 쉽지 않았다. 서양인이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었다. 결국 많은 여성 산냐시들이 매춘(賣春)의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그녀들은 봄베이까지 원정 나가 초 일류 호텔의 로비에서 손님을 유혹했다. 그들의 공략대상은 돈 많기로 소문난 아랍인들이었다. 이 매춘으로 말미암아 성병문제는 한층 증폭되었으며 아랍의 신사들이 희생양이 되곤 했다. 돈을 벌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은 마약거래였다. 아쉬람측은 이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이 불법적인 활동에 연관되어 있던 자들은 지금도 이 사실을 좀처럼 고백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약거래가 공공연히 행해졌 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 당사자들은 바그완에게 거래일시 등 을 넌지시 물어보기도 하였다. 푸나 체재비용을 벌기 위해서 이 위헙한 장사에 손을 댔던 자들은 상 상 외로 많았다. 마리화나 등은 푸나에서 간단히 입수할 수 있었고 헤로 인과 아편은 봄베이에서 싸게 사들일 수 있었다. 마약매매 혐의로 체포된 산냐시들도 왜 되었다. 캐나다에서 체포된 어 느 인도 여성은 집행유예 1년,뉴질랜드로 도망가다 체포된 영국 여성은 징역 2년의 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19「9년에 영국 여성이 체포되었을 당 시 영국의 신문들은 '사악한 이교도(異敎旋)'니 '세뇌' 등의 표현으로 우리 들을 공격하였다. 산냐시들의 마약거래를 알고 있던 라크슈미는 경찰본부 내에 스파이 를 두고 단속망을 교묘히 피하곤 했다. 물론 아쉬람 내에서는 마약사용 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지만 외부에 사는 산냐시들은 언제라도 밀거래가 가능하도록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경찰의 단속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면 라크슈미는 보호 조치를 강구하 기에 바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선 몇몇 산냐시를 과감하게 속죄양으로 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한 산냐시는 봄베이에서 3년형을 받았다. 라크슈미가 경찰 내에 스파이를 두고 있듯이 경찰측도 아쉬람에 밀고 자를 박아두고 있었다. 그중 한사람은 라크슈미의 타이피스트였는데 어 느날 라크슈미와 나는 그녀가 경찰과 만나는 현장을 붙잡기도 했다. 산냐시가 마약거래를 하려면 먼저 바그완을 찾아가 "언제 태국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면 그는 "수요일이라면 좋겠지." 라든가 "금요일까지는 가서는 안돼."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물론 서로간에 오가는 말의 의미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바그완과 라크슈미 두 사람이 매춘과 마약거래를 장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일단 아쉬람에 돈이 들어오면 라크슈미는 그 출처를 묻는 일이 없었고 바그완도 아무 부담없이 그 수입을 향유하였다. 이 빈곤한 나라에서 1980년에 바그완이 롤스로이스를 두 대나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액의 기부금은 곧바로 아쉬람 내에서 높은 지위와 엄청난 특혜로 연결되었다. 어느 신참 산냐시가 라크슈미에게 5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 고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라크슈미는 공개적으로는 딱잘라 거절하 였다. 바그완과 라크슈미는 애써 돈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 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일도 채 되지 않아 그 산냐시는 바그완 의 집에 숙소를 제공받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2년 정도 뼈빠지게 노력봉 사를 한 사람에게만 그런 특권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 신참 산냐시는 즉시 내가 이끄는 경호대에 배속되었는데 일을 아 주 열심히 했다. 그런데 2주일쯤 지난 후 쉴라가 그가 기부한다던 돈을 갑자기 요구해왔다. 그는 당황하며 그 돈은 이제 없어졌다고 대답했다. "날아가버 린 거예요?" 놀란 쉴라가 물었다. "예‥‥ 저‥‥ 지난주 어떤 거래에서 실패해 모두 날아가버렸습니다. " 그러자 라크슈미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경호대에서 그를 메어버 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속보이는 거짓 이유를 들어 그를 잘라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갔다. 건축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은행의 응자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재정과 경영에 뛰어난 브레트(Brett)라는 산냐시가 인도은행에 거액의 응자를 신청하러 갔다. 라크슈미가 실패한 융자건을 브레트는 10일만에 성사시켰다. 체면을 잃은 라크슈미는 시큰등해졌다. 그녀는 그에게서 경호와 합기도 사범의 자격을 박탈하라고 명했다. 나는 그를 변호했지만 라크슈미 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채 1개월도 되지 않아 그는 영 국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한편 바그완의 수집벽은 그 사이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취미가 변할 때마다 측근 사이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바그완이 펜과 시트, 타월 등을 모으자 어느새 우리들도 그것을 흥내내곤 하였다. 1977년 당 시 그의 수집대상은 주로 펜종류로서 특히 다이아몬드가 잔뜩 박혀있는 최고급품들을 좋아했다. 바그완은 신제품이라면 사족을 못쓸 정도로 좋아하여 손에 넣고 즐겼 다. 바그완의 취미생활을 도와주는 역할은 티르타의 몫이었다. 그는 주저 하지 않고 던힐 ·듀퐁 ·몽블랑 ·카르티에 등의 회사에 신제품들을 주문 하였다. 어느날 바그완은 아침 강론에서 갑자기 타월을 걸치지 않겠다고 선언 했다. 그때까지 그는 어디를 가든 반드시 청결한 타월을 손에 들고 있었 고 타월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므로 그의 선언을 들은 산냐시 들은 놀라움과 의문으로 웅성거렸다. 그는 타월로 벌레를 쫓거나 손을 닦기도 하였으며 무릎에 걸치는 데도 사용하였다. 때에 따라선 그가 산 냐시들에게 내리는 귀중한 선물 구실도 했다. 나 역시 타월은 촬영의 중 요한 소도구였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타월을 애용하여 왔지만 물질세계에 대 한 집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앞으로는 타월을 손에 들지 않겠 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최후의 타월을 청중을 향해서 던졌다. 그 타월은 어느 인도 산냐시의 발치에 떨 어졌다. 그는 자랑스럽게 그것을 집으며 다른 산냐시들의 부러움의 시선을 확인하려는 듯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다음날 아침 강론에 빈손으로 나타난 바그완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는 다시 타월을 손에 들고서 나타났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 꺼내려 들지 않았다. 3일째 강론시 간에 그는 30분이나 늦게 나타났는데 이때는 또 타월을 들고 있지 않았 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들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수일 후 나는 바그완의 침실청소를 하는 샨티로부터 일의 전말을 들 었다. 실은 바그완에게는 강론이 끝나면 더러워진 타월을 서가 뒤에 쑤 셔박는 버릇이 있었고 이를 비베크가 뒤쫓아다니면서 일일이 챙기곤 하 였는데, 항상 청결한 타월을 준비하는 데 지긋지긋해진 비베크가 스스로 타월을 챙기지 않으려면 모두 버리라고 바그완에게 짜증을 부렸다는 것 이다. 그러나 첫날은 타월 없이 용케도 견디었지만 다음날이 되자 그는 타 월을 지니고 싶어 안달이 났다. 비베크 모르게 방안을 한참 뒤진 끝에 낡은 타월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바그완이 다시 타월을 갖고 있는 것을 본 비베크는 그날로 집안의 타월이란 타월은 모두 치워버렸다. 3일 째 그가 강론장에 20분 늦게 나온 이유는 타월을 내줄 때까지 강론을 하지 않겠다고 비베크에게 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비베크의 고집을 당하지 못한 바그완은 타월 없이 강론에 임했다. 그는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남성은 공처가이다. 내가 말한 사실은 문자 그대로 모든 남성의 일이다 !" 1977년 그 무렵에 놀랍게도 비베크의 마음이 격변했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 현장이 바로 그해의 어느 사진촬영회 때의 일이었다. 그때 바 그완은 왠지 불안한 듯 주위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갑자기 비베크 는 그의 머리와 모자를 매만진 후 주위의 나무 그늘 속으로 뛰어 들어갔 다. 그리고 나서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비베크가 괴로움을 참지 못해 울고 있었던 것이다. 바그완은 계속 그녀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비베크의 울음소리가 사뭇 마음에 걸렸던지 바그완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촬영회는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비베크는 그때까지 7년간 바그완의 연인으로서 항상 그와 함께 있었 다. 그러나 바로 그때를 기점으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특 권적인 지위는 변함 없었지만 바그완의 그녀에 대한 태도가 변한 것이 었다. 바그완의 마음이 돌아선 것일까? 혹시 다른 여성이 생긴 건 아닐 까? 아니면 비베크 쪽에서 그를 거부한 것일까? 주위 사람들은 무슨 일 이 생긴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비베크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상대는 프 라사드(Prasad)라는 이름의 독일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 모 두는 아연실색했다. 산냐시 애인과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녀는 평범한 산 냐시로 전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바그완의 식사 준비와 건강관리를 헌신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독일인 애인과 함께 지금까지 한번도 참가한 적이 없었던 우리들의 철 야 파티에 나와 거리낌 없이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녀에 비해 그 독일인 남자는 그다지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연애하기 시작한 지 몇개월 후, 하루는 비베크와 그가 주방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몸에 말라가 없음을 발견했다. 지난밤 프라사드는 호텔에 묵고 있는 어느 프랑스 여성과 하룻밤을 즐긴 후 깜빡 잊고 말라 를 침대 곁에 놔두고 온 것이었다. 그날로 비베크는 프라사드에게 절교 를 선언하고 또 다른 남자를 찾아다녔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바그완의 발언은 산냐시들의 건강예 지대한 영향 을 끼쳤다. 여성들에게 불임수술 붐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비용이 많 이 들 뿐만 아니라 되돌릴 수도 없고 게다가 인도에서는 위험을 수반한 수술이었다. 1979년에는 일주일동안 2명의 여성이 수술 도중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라크슈미는 남성들에게 정관수술을 적극 권장했다. 그게 보다 신속하고 안전하며 또 비용도 營다. 비베크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1개월 후쯤 되어 나는 그녀의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보았다. 데바라즈(Devaraj)라는 이름의 산냐시로 본명은 조지 메레디스 박사라고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작은 트럭을 타고 의료센터에 수술용 구를 팔러 온 때였다. 그는 아라비아의 어◎ 병원 책임자였는데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인도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세상물정에 밝고 인자한 사람이 었지만 그 반면 개성적이고 정열도 있었다. 그가 푸나에서 가장 먼저 벌인 일은 화장실개선캠페인이었다. 그때까 지 아쉬람에서는 화장실 휴지를 불필요한 사치품으로 여겼으며(인도에서 는 손과 물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한 대용품도 없었다. 여기에 문제를 느낀 데바라즈는 휴지 대신 물을 분사해서 항문 을 씻어내는 기구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데바라즈가 벌인 그 다음의 정관수술 캠페인은 나로선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언젠가 나와 마주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정관수술을 하고 오는 길이야. 너무 간단해서 놀랐어. 거기에 국 부마취만 한 것 같은데 금방 끝나더라구!" 그는 붕대로 감겨있는 국부를 보여주겠다기에 나는 애써 참아달라고 말렸다. 도대체 보여줘서 어쩌겠다는 건가? 그는 싫다는 나를 억지로 붙 잡으며 바지를 까발겼다. 나는 쏜살같이 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나서 1주일 후 라크슈미의 조수 한사람이 내게 다가와 "수술 은 생각해 業어요?"하고 물었다. "생각해 봤지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러나 그녀는 강조했다. "당신이 정관수술을 받으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거 예요 !" 나는 더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수술에 대한 결정은 그날 즉시 내릴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바그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자식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고 지구는 이미 인구 과밀상태이므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나 한사 람이라도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받은 나에게 의사는 이 캠페인을 공동체 전체로 확대하는 데 협조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서 몇개월 사이에 남성 산냐시들의 약 4분의 1이 정관수술을 받았다. 그후 아쉬람에서는 정관수술이 바그완에 대한 완전한 '마음 비우기'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제 9장 바그완의 '엔젤' 1970년대 후반, 공동체는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지만 오히려 사람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아쉬람을 찾는 방문객이 늘어날수록 나는 경호체제에 불안을 느꼈다. 10루피만 지불하면 누구라도 아쉬람에 들어을 수 있었구 바그완의 강론 에는 3천명 이상 모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되자 라크슈미는 마지 못해 하면서도 麗명의 경호원을 내게 붙여주었다. 그러나 수천명의 군중 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그완의 강론은 힌두어와 영어를 격월로 해서 실시되었다. 모든 강론 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역시 영어로 강론할 때의 참가자 수가 배 로 많았다. 아침 8시의 강론은 입장료를 지불하기만 하면 누구나 들을 수 있었지 만 그것에 비해 저녁 때 행해지는 다르샨은 사람을 계속 선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라크슈미의 사무실 앞에는 오후 4시 경부터 사람 의 행렬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르샨의 참가 희망자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더 세밀한 조사가 행해졌 다. 바그완은 갈수록 허약해지는 듯했고 그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대상도 끊임없이 증가해 갔다. 양말과 모직 옷도 그 대상이었다. 두 명의 여성 산냐시가 '노자 하우스' 입구에 서서 다르샨에 입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냄새를 검사하였다. 비록 아무리 유명인이라고 해도 예외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냄새검사의 대상은 단순한 체취뿐만이 아니었다. 바그완은 화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주인공이므로 습격자나 암살자의 표적이 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의심스러운 인물을 선별해내고 문제 의 소지를 없애는 일이 나의 주요 역할이었다. 하지만 폭력적인 사람과 불안한 사람, 뭔가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람 등 좋지 않은 '분위기'를 풍 기는 사람을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위험 도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흥분한 프랑스인과의 격투로 피투성이가 된 일도 있었다. 매일매일의 강론은 신축된 '붓다 홀'에서 진행되었다. 이 흘에서 나의 경호원들에게 가라테를 가르치던 나는 'Enlightenment Intensive'그룹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명상그룹은 하루에 30분씩 수 차례에 걸쳐 시선을 1미터 전방의 지면에 떨어뜨리고 명상하며 천천히 걷는 수행을 하였다. '붓다 홀'의 주위를 돌던 30명 정도의 사람 중에서 나는 칠흑의 머리칼 을 가진 대단히 뛰어난 미인을 발견했다. 갈색 피부를 한 그녀는 마치 남해의 공주 같았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느라 가라테 훈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자유대련을 시키면서도 눈길은 늘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얌전히 시선을 떨어뜨린 채 나를 쳐다보려고 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 관한 것을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었다. 며칠 후 그녀가 마침내 산냐스를 받기 위해서 바그완을 찾아왔다. 바그완은 그녀에게 마 프렘 이사벨(Ma Prem Isabel)이라는 이름을 주었고(이사벨은 그녀의 본명. 바그완은 서양인 산냐시에게 인도식 이름 붙이기를 그만두었다) 탄트라와 엔 카운터 그룹에 참가하도록 지시했다. 바그완의 옆에 앉아있던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소리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이사벨과 나는 50센티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진짜 공주 같았다. 결국 나는 이사벨이 칠레 태생 프랑스인으로 타히티 관광국에서 가이드 일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사벨을 처음 본 날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보았지만 거절당했다. 시간이 없다는 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나는 다른 작전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의 마사지를 받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눈을 빛내면서 응했다. 2개월동안 예약 스케줄이 잡혀있지만 원한다면·당장이라도 시간을 만들겠다고 떠봤다. 이사벨은 동의했다. 다음날 우리들은 오후 내내 사랑을 나뒀다. 나는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여 ! 나는 완전히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이렇게 멋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이 나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당시 내 방은 바그완의 방 바로 윗층에 있었지만 우리들은 거의 매일 밤 내 방에서 함께 섹스를 즐겼다. 나는 그녀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탄트라적 체험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1개월 후 뜻밖에도 이사벨이 산트와 함께 자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는 고참에 속하는 인도인 산냐시였고 경호대원이기도 했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이사벨에게 그 일을 추궁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바. 뭐가 잘못 됐죠? 내가 당신의 소유물은 아니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바그완도 내게 그렇게 가르쳤어요. 세 사람이든 네 사람이든 관계를 가질 수 있잖아요. 산트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멋진 남자이고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도 좋아요. 이대로 우리의 관계를 계속해 나가면 안되겠어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 당신은 내게 있어 몹시 소중한 사람이야. 당신이 산트와 자고 있는 것을 알면서 태연하게 있을 수는 없어. 내게 있어서 단신은 단순한 잠자리 상대가 아니야.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멋진 여성이야. 삼각관계 따위는 딱 질색이야! 만일 당신이 산트와 함께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나와는 안돼, 적어도 나에게는 이렇게 하지 말아줘!" 나는 그녀가 틀림없이 나를 선택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사벨은 산트를 선택했다. 나는 한달동안 실연의 고통, 환멸, 절망으로 괴로워했다. 다른 여성과 사귀어 보려고 해보았지만 이사벨과 비교되어 잘 되지 않았다. 반년 후 이사벨은 라크슈미의 부하로 일하게 되었고 우리 둘 역시 예전의 자연스런 관계로 돌아갔다. 아쉬람 권력 내부의 많은 여성들은 이사벨을 순식간에 출세한 자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았다. 단지 라크슈미 한사람만이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였다. 반면 쉴라는 그녀를 매정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며 항상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쉴라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지적인 여성이었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내가 의료센터에서 방으로 돌아오는데 이사벨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멈춰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나에게 산트와의 관계가 끝났으며 그는 지금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청했다. "내 오두막집에 가서 같이 차라도 마시지 않겠어요?" 아쉬람이 급성장하고 있던 당시,그 주변에는 1천여 채 이상의 오두막 집이 줄지어 있었고 이사벨의 거주지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지. 당신 집으로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군." 그후 우리 둘은 친밀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항상 함께 지냈다. 이사벨은 내가 이질과 뎅그열(Dengue Fever'뼈와 근육이 아픈 증상)에 걸려있는 동안에도 곁에서 간병해주었다. 한두번 헤어질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화해하고 넘어갔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잔 경우에는 그것을 솔직히 상대에게 알리기로 약속했으며, 만일 누군가와 하룻밤을 함께 지 내도 실제로 섹스를 하지 않았으면 특별히 말할 필요는 없었다. 푸나의 아쉬람이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는 바그완이 선전하기를 유독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전광이었다. 아쉬람의 선전부가 발행하는 공식 기관지는 인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보내졌다. 매스컴은 아쉬 람에 관한 기사가 훌릅한 소재라는 것을 알고 기자들이 끊임없이 몰려 들었다. 유명한 영국 TV의 앨런 휘커(Alan Whicker)는 1978년 6명의 취재진 을 데리고 푸나를 방문했는데 호의적인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보도했다. 2년후에는 버나드 레빈(Bernard Levin)이 찾아와서 런던의 yUk 瑞mesA 에 우리들을 극찬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기사들은 모두 커다 란 영향력을 발휘해 바그완의 이름을 전세계로 알리게 되었다. 바그완은 세상의 '좋은 평'과 '나쁜 평'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서 세평(世評)이란 모두 좋은 것이었으며 TV와 잡지 등의 취재에도 거 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독일의 vStenA 잡지는 탄트라그룹에서의 전라(全裸) 세션을 촬영하였 지만 검열은 전혀 행해지지 않았다. 이 잡지에는 내가 연 차문으로부터 비베크와 바그완이 나오는 사진이 게재되었는데 '아내를 둘이나 거느린 바그완'이라는 표제가 붙어있었다. 그때 나의 머리는 허리 근처에까지 자 라 있었으며 오렌지색 로브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으로 오해받았던 것이다. 바그완은 이것을 아주 재미있어 하며 강론에서 "시바는 정말 아름다워. 그게 뭐 잘못된 일인가?"하고 웃었다. 그는 그리고 나서 세평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나의 인생은 성취되었다. 평판이 좋건 나쁘건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나를 붓다로 보든 라스푸틴(Rasputin)으로 보든 관계없 다. 나를 붓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대다수는 라스푸 틴 쪽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멋진 일이다. 그러나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 이 무렵 바그완은 특별한 롤스로이스를 갖고 있었다. 특별제작한 이 차는 쉴라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구입한 것이었다. 총포, 최루가스 분 사기,두께 1인치의 유리창 등을 갖추었고 총탄과 수류탄은 물론이고 지 뢰에도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나는 매일 바그완을 롤스로이스에 태우고 강론회장까지 백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를 운전했다. 따라서 그가 인도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카리 스마적 교주인 것은 분명했다. 앨런 휘커의 뒤를 이어 가수 다이아나 로스(DianaRoss)와 EST의 창 시자인 워너 에어하트가 함께 아쉬람을 찾아왔다. 다르샨에 온 다이아나 로스와 워너 에어하트에게는 맨앞쪽의 특별석 이 배려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맨발로 앉아있어야 했다. 두 사람은 처음 한시간 동안은 가능한 한 체면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후 거북한 듯이 약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호화로운 팔걸이 의자에 앉 아있는 바그완은 붓다와 같이 안정감을 보였다. 그는 신참자들에게 산냐 스를 주면서도 그 사이의 메시지는 다이아나 로스와 워너 에어하트에 맞춰서 행하고 있었다. 에어하트는 늠름하고 위세가 당당한 미국인 그 자체였다. "에어하트씨. 결국 찾아왔군요!" "예. 당신과 만날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다이아나와 나는 당신에 대해서 근사한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 "음, 그렇습니까? 음, 당신들은 다시 여행을 계속할 셈입니까? 오스트 레일리아로? 음, 산냐시들과도 사귀며 며칠 더 체재하는 것이 어떻습니 까?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즉 마음의 내면을 알게 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체재한다면 많을 것을 배을 수도 있을 것이 고‥‥‥ "예, 바그완.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스케 줄 때문에 빨리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 그들의 대화는 짧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다르샨은 곧 끝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모여 감상을 나뒀다. 왜 에어하트는 바그완과 아무것도 의논하려 하지 않았는가? 회견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몇개월 후 vESTNewsletterA의 카피가 아쉬람에 회람되었다. 거기에 는 에어하트의 세계여행에 관한 상세한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지만 바그 완과 푸나의 방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 경멸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바그완은 강론 중 에어하트는 돈 만 밝히는 인간이며 정신성을 이용하고 있는 천박한 사람이라고 공공연 히 비난을 시작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센터를 운영하는 산냐시들에게 EST의 세미나에는 절대 사람을 참가시키지 말라는 지시가 보내졌다. 나는 늘 라크슈미가 바그완의 경호에 관해서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었다. 경호원의 훈련과 습격의 예방조치에 대해서 그녀는 항상 의문을 표 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기가 문제일 뿐이지 바그완을 습격하는 자가 곧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비해 두고 싶었다. 아쉬람의 주변에는 확실히 위험인물들이 많았던 것이다. 어느날 밤 11시 경 바그완의 집 옥상에서 자고 있던 나는 경호원이 부는 경적에 잠을 깼다. 급히 바그완의 방밖에 있는 홀로 뛰어 내려갔 다. 거기에는 비베크가 이미 나와 있었다. 미친 듯한 인도인이 바그완의 창문을 마구 두들겼다는 것이다. 정원을 지나 경호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바그완의 창문을 두들기던 사나이가 붙잡혀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금세 알아챘다. 자신의 말라를 삼켰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잡아 빼내고 그 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갑자기 바그완이 부른다는 느낌이 들어 그 부름 에 응했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러한 사건 후에도 라크슈미는 바그완의 안전에 관해서는 무관심하 였다. 그녀는 바그완을 모든 습격으로부터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신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베크는 바그완을 지키는 데 있어 이런 미온적인 방법은 부 적절한 것이고 아무도 바그완의 생명과 프라이버시를 생각하고 있지 않 은 것 같다며 격분했다. 상황은 날로 위험하게 전개되었고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가 됐 다. 나는 비베크에게 라크슈미 때문에 생각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지금 바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반복해서 요구했다. 그래서 바그완의 강론이 끝나고 나서 경호에 대한 나의 방침을 비베 크에게 설명했다. 우선 무술전문가인 흑띠 소지자만으로 특별경호대를 조직하여 바그완의 집을 겋호한다. 그리고 나는 세라피를 그만두고 그들 의 훈련과 통솔에 전념한다. 또한 특별경호대는 기존의 경호대와는 별도 로 운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계획을 직접 비베크에게 말하면 라 크슈미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 일 라크슈미가 이 계획을 알게 되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저지해 오리 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바그완으로부터 나의 이 계획을 전해 들은 라크슈미는 내게 "바그완이 바라고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지점, 즉 그의 방앞에 흑띠를 소지한 '여성만'을 앉혀두는 것 뿐이에요!"라고 힐책하듯이 말했다. 나는 라크슈미가 '여성만'이라고 강조한 이유를 알아다. 그것은 바그완이 '여성주의'(Female Principle)라는 신념을 고집하고 있기로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여성주의'란 남성보다 여성이 더 쉽게 자 신을 비을 수 있다는 주장이며 그러므로 바그완이 공동체의 요직에 여 성만을 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그완은 훨씬 전부터 자신은 푸나에서 산냐시에게 습격받을 것이며 습격자는 서양인 중에서 나오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라크슈미와 쉴 라 두사람은 습격자가 자신들의 동족, 즉 인도인이 아닐 것이라는 이유 로 그 예언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 무렵 아쉬람에서 흑띠를 소지한 여성은 단지 한사람밖에 없었지만 경호대 중 흑띠를 맨 남성은 8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나의 경호대를 '사무라이 부서'라고 불렀으며 그후 50명의 '사무라이'가 이 부서에서 활 동하게 되었다. 가이아나 인민사원에서 짐 존스(Jim Jones)의 신자들이 집단자살했다 는 뉴스를 들은 것은 우리들이 경호대를 조직하여 훈련하고 있던 시기 의 일이었다. 존스에게도 막강한 경호조직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나는 그 경호대의 이름이 내가 나의 경호대에게 붙여준 이름인 엔젤(천사)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짐 존스의 '엔젤'들은 자살하기 전에 독이 든 청량음료를 신자들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바그완은 가이아나 인 민사원에서의 대참극에 대한 질문에 '나의 친구들'에게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강론이 시작되고 23분쯤 경과했을 때 '경찰에서 오늘 습격이 있을 것 같다는 정보가 왔음' 이라고 쓰여진 메모가 내게 왔다. 나는 즉시 '긴급사태'의 신호를 경호원들에게 보냈다. 그런 후 얼마 되지 않아 건장한 체격의 인도인이 연단으로부터 20미 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일어섰다. 그는 힌두어로 "너는 우리들의 종교를 모욕하고 있다!"고 소리치며 결연한 시선으로 바그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여섯 명의 경호원이 이미 나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요기라는 덩치 큰 캐나다인이 그 사내를 붙잡았고 세 사람 이 더 가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한사람의 인도인이 벌떡 일어서서 경호원들과 충돌하였다. 바닥에는 길이 15센티 정도의 녹슨 칼이 떨어져 있었다. 처음의 사나 이가 경호원들에게 붙잡힐 때 내던진 칼이었다. 강론회장은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울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인도인을 데리고 나갈 때 바그완은 "그 사나이를 거 칠게 다루지 마라! 거친 짓을 해서는 안돼 :''하고 말했다. 바그완은 다시 청중을 향해서 "평정을! 평정을!"하고 외친 후 강론을 재개했다. 강론이 종료될 때쯤 경찰봉을 휴대한 제복차림의 경관들이 트럭으로 도착했다. 습격자는 CID(범죄수사국)로 연행되었다. 결국 이 습격이 있고 나서 라크슈미는 경호에 대한 규제를 철회했고 우리들이 총 ·나이프 무기 ·수류탄 ·습격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청중들 속에 섞여있는 경호원들은 바그완 쪽을 향해 서 앉아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에는 연단으로 다가오는 습격자를 곧 발 견할 수 있도록 몇명은 뒤를 향해 앉게 되었다. 아무튼 그후 강론회장의 '엔젤'수는 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모든 입장 자의 소지품 검사를 위해서 여성 산냐시팀도 조직되었고 미국으로부터 금속탐지기까지 주문하였다. 제 10장 푸나 최후의 나날들 키르티(Kirti)라는 '사무라이'는 영국 하노버의 월프왕자(Prince Wilf of Hanover)로서 찰스왕세자의 사촌이었다. 처와 딸을 데리고 그가 아쉬람에 온 것은 습격이 있기 몇개월 전의 일 이었으며 동양으로의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관해 서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세계 각지를 돌며 다양한 모험을 한 것 같았다. 일찍이 네팔을 여행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도둑들을 물리친 적 도 있다고 했다. 키르티는 190센티 정도의 키에 야윈 편이었으나 귀족적인 표정과 태 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왕자의 훈련과정으로서 태권도를 단련하였으며 흑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품있는 권위와 침착함에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무술에 소질이 있다고 무심코 그가 말했기 때 문에 나는 라크슈미의 승낙을 얻어 즉시 사무라이로 받아들이기로 했지 만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는 아쉬람의 채소밭에 물을 주는 등 조용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전에 태국의 도장에서 몇년 동안 엄격한 수행을 한 이래 가라테에는 싫증을 낸 듯했다. 과거 키르티는 왕실의 칭호를 버리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었다. 그들 부부는 '왕자' '왕녀'라는 칭호가 붙지 않은 여권을 취득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 당국은 그들의 칭호가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그 여권을 무효화하였다. 1980년 찰스왕자가 봄베이를 방문했을 때 키르티는 사촌으로서 그를 만나러 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찰스의 스케줄은 공식행사로 가득차 있어 키르티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 분밖에 없었다. 키르티는 사프란색의 로브를 입은 채 찰스를 만났다. 찰스왕자가 그런 차림의 키 르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찰스는 자신도 아쉬람에 가보고 싶지만 영국교회의 장(長)이 될 신분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찰스는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내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어. 월프, 너는 교주가 있어서 정 말 행운이군. 너처럼 나에게도 그러한 인물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좋겠는데‥‥‥‥ 그리고 나서 1개월 후, 키르티는 롤스로이스의 세차 담당자와 함께 바 그완의 경호를 서고 있었다. 그때 두사람은 영양실조로 몸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키르티는 "나도 상당히 상태가 좋지 않아. 스위스에 가서 장기간 요양하고 싶어."라는 말을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밤새 야간근무를 끝낸 키르티를 보았다. 그는 가라 테 훈련이 시작되는 오전 10시 30분까지 잠시나마 한숨 자기 위해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오전에는 쉬고 오후의 세션에나 나오라고 했다. 그는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됐습니다. 어떻게든 나오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디크샤에게 어 제 밤에도 수프가 없었다고 말해주지 않겠습니까?" 나는 디크샤에게 밤근무 경호원들을 위해서 수프를 준비해 주라고 전 해두었지만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오전 가라테 사범은 키르티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저 쉬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한참 지나도 키르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료 산냐시가 장난치는 거겠지 하며 다가갔다. 그 러나 그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순간 그는 키르티를 안아 일으켰다. 키르티는 곧 의료센터로 운반되었고 다시 지역병원으로 옳겨가서 집 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4일째가 되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 졌다. 뇌출혈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심 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이미 뇌파는 정지돼 있었다. 바그완은 병원에서 키르티를 담당하는 산냐시 의사들에게 키르티의 사망고지가 강론이 시작되는 시간에 아쉬람에 도착하도록 생명유지장치 의 스위치를 오전 8시 직전에 끊으라고 지시했다. 그날 바그완은 여느 때와 같이 강론을 시작했다. 키르티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통지를 듣고 그의 부모들이 푸나에 와있었고 홀에는 그들을 위한 특별석이 설치되었다. 강론은 아무일 없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0 여분 정도 지나자 그는 불안정해 보였고 말의 조리를 잃은 듯이 보였다. 이야기를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 우왕좌왕 하는 듯했다. 강론이 시작되고 40분 후 비베크에게 건네려는 메모가 나에게 왔다. 이것이야말로 바그완이 기다리고 있던 통지였다. 비베크는 키르티가 죽 었다는 것을 바그완에게 전하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V사인을 그렸다(키 르티의 풀네임은 Vimalkirti. V는 그 頭文字이다). 비베크의 신호를 눈치챈 바그완은 곧 강론을 끝내고 』천명 이상의 청 중들 앞에서 자기가 키르티에게 신체를 떠날 것을 허락해 주었고, 그래 서 키르티는 이미 그 자신의 '체내'를 떠났다고 발표했다. 홀 밖에는 이 미 디크샤가 화장을 위한 장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인도인 의사들은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이 용하는(그것도 마치 자신이 초능력을 사용한 듯이 말하는) 바그완의 작태에 될개했다. 교묘히 사망시각까지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죽어가 는 존재가 바그완의 극히 미심쩍은 영적(靈的) 게임의 수단으로 이용되 었기 때문에 그들이 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생명유지장치의 스위치는 바그완의 지시대로 오 전 8시 직전에 끊겼지만 키르티의 심장박동과 폐기능은 자력으로 계속 되어 갔던 것이다. 죽음이 찾아온 것은 그리고 나서 한시간 가까이 경과 하고 나서 의 일이 었다. 키르티의 유체는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작더미 위 에서 힌두교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화장되었다. 기묘하고도 원시적인 방식으로 화장되는 것을 봐야 하는 귀족들은 한층 더 고통스러웠던지 그들은 불안해 보였고 감정을 상한 듯했다. 그후 키르티의 어린 딸은 엔카운터 그룹에서 티르타의 조수일을 맡고 있는 어머니와 함께 푸나에 남았다. 이 딸은 후에 찰스왕자가 다이아나 스펜서와 결흔할 때 신부의 들러리로 결혼식에 초대받기도 하였다. 그녀 가 영국에 있는 동안 BBC방송은 푸나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거 기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옷을 입고 엔카운터 그룹에서 다른 참가 자를 때리는 그녀의 어머니인 하노버 왕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서 키르티의 부모는 왕녀의 극히 경망스러운 행동을 이유로 손녀 를 맡아 후견인이 되었고 1982년 왕녀는 자기 딸에 대한 권리를 모두 잃고 말았던 것이다. 1980년경 개별적인 다르샨을 허락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붓다 홀' 에서 일어난 습격사건 이래 다르샨 전의 냄새검사와 소지품검사는 더 복잡하고 까다로워져 냄새검사부터 다르샨 회장에 입장할 때까지 U분 이 걸리 기도 했다. 어느날 밤 다르샨에서 바그완은 '에너지 다르·◎(Energy Darshan)이라 는 새로운 다르샨을 실험할 계획이라고 중대 발표를 했다. 호기심어린 눈빛의 참가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많은 여성 산냐시들은 나의 에너지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오랜 기간동안 그녀들을 준비시켜 온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녀들과 함께 워크(Work)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간다. 10명에서 12명의 선 발된 여성들이 매일밤 다르샨에 오게 될 것이다. 그녀들은 '영매'(靈蝶: Mediums)로서 나의 에너지를 공동체 전체에, 나아가서는 바깥 세상에도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영매들의 리더로는 비베크를 선택했다. 11년간 나는 그녀에게 집중 적으로 교육해 왔다. 지금부터는 나와 비베크가 영매들을 지도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를 전하는 신성한 일에는 에고와 이름이 불필요하므로 영 매들은 특별한 유니폼을 입게 될 것이다. 최초의 영매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발표하겠다. " 그때까지 몇개월 동안 바그완은 "깨달음을 얻은 마스터에게는 섹스와 신체적 접촉이라는 것은 필요없다. "고 누차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 새로 운 계획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사무라이들의 통솔자로서 누가 영매가 될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 다. 그녀들은 '노자 하우스'에 허가 없이 출입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 나 그것을 조사해내는 것은 귀찮은 문제였다. 나는 '에너지 다르·뚤이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상상하다가 비베크를 만 나 솔직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와 티르타가 영매들 중 누군가와 함께 성관계를 가져도 좋은지? 그러나 그녀는 바그완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비베크는 엄한 표정으로 나에게 회답하였다. "언제쯤 당신이 어른이 되느냐고 바그완이 말했어요" 아무래도 나는 바그완의 기분을 상하게 한듯 했다. 아무튼 이 실험적인 다르샨에 바그완은 음악과 번쩍거리는 섬광을 도 입했다. 하리다스가 바그완이 손발로 조작할 수 있는 조명장치를 만들었 다. 바그완은 빛과 음악의 혼돈으로 다르샨의 진행을 변화시켰다. 다르샨 중 바그완은 몇분동안 모든 조명을 껐는데 그 순간에 실제로 무엇인가 가 일어나는 듯했으며 그것은 극히 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일단 불이 꺼지면 사진촬영은 일체 금지되었다. 영매들은 에너지 다르샨에 노팬티로 참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처 음에는 12명의 영매만을 선발했지만 곧 더 많이 선발할 것이라고 했다. 자연히 바그완의 모습이 나타나는 곳마다 엄청난 여성들이 얼굴을 보이 게 되었다. 자신이 영매로 선발되기를 바란 나머지 여성산냐시들은 한마 디도 이해할 수 없는 힌두어 강론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고급실크의 소매가 짧은 로브를 사서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새벽에도 그것을 입기 도 했구 아름답게 보이도록 우아한 숄과 멋진 귀걸이를 한 여성도 있었 다. 또한 속살을 노출시킨 이들 여성들은 강론에서도 다르샨에서도 서로 가 맨 앞줄에 앉으려고 애쓰곤 했다. 여성 산냐시들에게는 영매가 되어 바그완과 접촉한다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었다. 그와의 접촉은 그들을 황흘경으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 었다. "영매가 될 수 있는 타입은 어떤 여성입니까?"라고 누가 질문하자 바 그완은 "가슴이 큰 여성만이 행운을 얻을 것이다. "고 하며 "나는 지금까 지의 전생에 있어서 가슴이 작은 여성에게 계속 고통당해 왔다:'고 놀란 청중에게 말했다. 그래서 빈약한 가슴의 여성은 실망한 나머지 스스로 경쟁에서 물러났 지만 그로부터 불과 2주 후 가슴이 빈약한 여성 3명이 영매로 선발되었 기 때문에 여성들 사이에 여러가지 얘기가 분분했다. 나의 여자친구인 이사벨도 영매로 선발되었다. 나는 홍분했다. 매일 밤 다르샨에 함께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었다. 아쉬람의 방문객 수는 계속 늘어갔고 과밀상태가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었다. 이미 산냐시를 더 수용하는 것도 아쉬람의 활동을 계속해 나가 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푸나의 길은 산냐시들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푸나로부터 30마일 떨어져 있는 사스와트(Saswat)에 또 다른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그곳에 이상적인 건물이 있는 데 건축한 지 3백년 정도 된 성이었다. 쉴라는 건물과 주변의 토지를 임차하고 푸나 아쉬람의 부속적인 공동체로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1980년 후반 사스와트에서는 그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폭력적 인 사건이 빈발했다. 우물에 독이 투여됐고 발전기가 폭파되었다. 그리고 산냐시 여성에 대한 강간미수로 지주가 고소되기도 했다. 쉴라는 공동체 에 대한 파괴행위는 지주의 친구인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라며 임차료 의 지불을 보류했다. 그러자 지주는 '라즈니쉬 화운데이션'을 고소했지만 바그완에게 칼을 들고 습격한 사나이가 그의 친척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사태는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스와트에서의 일련의 사건, 그리고 공동체의 마약거래, 매춘 등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우리들을 점점 적대시하였다. 어느날 밤 나는 라크슈미로부터 긴급호출을 받았다. 어느 영국 산냐시 가 근처의 주택지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사 는 여성을 희롱하다가 폭행을 당한 것이었다. 나는 현장으로 뛰어갔다. 무기를 지닌 23명 정도의 무리가 나를 가로막았다. 이미 경찰이 와서 조 사하고 있으니까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하라며 그 들 중 한사람이 쇠사슬을 휘두르며 나를 위협했다. 몇분 후 경찰이 문제의 산냐시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피투 성이가 되어있었으며 옷은 갈기갈기 ◎어져 있었다. 전신이 상처투성이 로 온통 부어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지역주민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먼다. 산냐시가 길을 가면 오토바이에 탄 인도인 무리들이 막대기나 곤봉으로 구타하고 도망치는 사건이 빈발했고 산냐시 여성이 노상에서 폭행당한 일도 있 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공동체 자체 내에서도 계속 일어났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산냐시가 생기기 시작했고 마약에 관련된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신도의 수도 늘어갔다. 산냐시들의 오두막집은 아쉬람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 무리지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산냐시가 다른 산냐시 의 손에 살해되기도 했다. 또한 근처의 다리 아래서 전신이 마구 찔려 죽어있는 산냐시도 발견되었다. 또 다른 산냐시는 바그완의 책을 읽은 후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자살하기도 했다. 그 책에서 바그완은 만일 큰 결의를 가지고 자기 숨을 멈추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열 수 있을 것 이라고 했던 것이다. 경찰의 사체보관소에 전라인 채로 신원확인을 기다리고 있는 서양인 도 있었다. 그 사체는 즉시 처분되었지만 결국 신원도 모른 채 끝나버렸 다. 그리고 로나발라 동굴에 명상하러 간 산냐시는 1개월 후 부패된 사 체로 발견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공동체의 새로운 후보지를 찾기 위해서 바그완은 자야라는 영국 인 간호사 그리고 나의 친구인 지니를 오스트랄라시아(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近海)에 파견해서 자치권을 갖는 낙원의 섬을 찾게 했다. 그들 은 아름다운 섬을 하나 발견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바그완은 그 곳으로 옮기지 않았다. 라크슈미도 파키스탄과의 국경지역에 이상적 장소를 발견했지만 당시 인도의 수상이던 데사이(Desai)의 간섭이 있어 그 계획을 단념하지 않 을 수 없었다. 1980년 12월, 드디어 바그완은 미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래 서 쉴라가 후보지를 찾으러 미국으로 떠났다. 쉴라가 미국에 가있는 때와 같은 시기에 라크슈미는 1981년 4월까지 인도의 후보지를 다시 찾아나섰다. 바그완은 그녀에게 새로운 후보지를 찾기 전에는 푸나로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만일 그해 4월까지도 인 도에서 후보지가 발견되지 않으면 바그완과 쉴라는 측근 몇명과 함께 몰래 미국으로 날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바그완이 왜 그렇게까지 푸나를 서둘러 탈출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그의 활동에 의혹을 품은 경찰당국의 움직임이 점차 활발 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의 CID(범죄수사국)와 지역경찰 내에 정보망 을 두루 갖추고 있던 쉴라는 국민에게 종교상의 흔란을 일으켰다는 이 유로 바그완이 가까운 시일 내에 연금상태에 놓일 것이라는 정보를 알 아냈다. 게다가 아쉬람의 비영리단체로서의 자격에 의심을 품은 푸나의 자선 사업감독위원회와 법적 분쟁이 발생하였다. 아쉬람은 설립 이래 극히 짧 은 기간에 8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수입을 올렸기 때문에 위원회가 아쉬 람의 감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 결과 기부금 등의 수령액을 허위로 기 재하여 아쉬람의 회계사 8명이 기소되었다. 라크슈미와 쉴라도 이 감사 를 받았고 드디어 봄베이의 자선사업감독위원회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 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봄베이의 법정에서 아쉬람 쪽에 불리한 판결이 내 려졌던 것이다. 또한 푸나의 경찰도 불법 장기체류자의 적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26명의 아쉬람 체재자가 기소되었는데 그중에는 쉴라의 미국인 남편인 친마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호 지킨병(악성 육아종증)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 소송 의 대부분은 장기 불법체재하는 산냐시를 즉각 출국시키는 것에 아쉬람 측이 동의했기 때문에 취하되었다. 그리고 푸나의 주민들이 아쉬람의 불법적 마약거래에 항의하고 나섰 다. 아쉬람은 마약 밀수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발표하였지만 우리들이 아쉬람에서 떠난 지 몇개월 지나지 않아 푸나경찰이 미국 영사관에 제 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공동체가 없어지고 나서 마약거래가 격감했다는 게 드러났다. 그러나 바그완은 이러한 모든 일들이 종교적 박해라며 오히려 공격에 나섰다. 아쉬람측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피해자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지금까지 있었던 지역주민들의 방화,폭행사건 등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바그완이 인도를 떠나려고 한 것은 이러한 분규만이 그 이유 의 전부는 아니었다. 가택연금 등이 큰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최대 의 이유는 아니었다. 인도 내에서의 아쉬람 이전계획이 인도정부에 의해 서 방해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행이 결행된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제국(帝國)을 보다 거대한 것으로 만들 시기가 왔다고 스스로 판 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81년 2월 바그완은 등뼈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강론은 중지 되고 그 대신 산냐시들을 '침묵의 강론장'에 모이도록 했다. 우리들은 비 어있는 바그완의 의자를 보며 그저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바그완의 치료를 위해 아쉬람에서 전문의사 두사람을 초청했지만 전 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나에게 차례가 돌아왔지만 바 그완은 대체진료를 전혀 신뢰하고 있지 않았고 나의 노력도 실제로 거 의 효과가 없었다. 결국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영국 정형외과의 일인 자인 제임스 시리악스를 불러들였다. 그는 치료를 하고 경막외(硬膜外) 주사를 놓았지만 바그완은 이 처치가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 일시적인 위안뿐이라고 불평했다. 바그완이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그의 대변자가 된 쉴라는 그 룹 리더,세라피스트,그리고 각 부문의 책임자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 이 발표했다. "바그완은 '은퇴'했습니다. 이제 그가 사람들 앞에서 강론하는 일은 없 을 것입니다. "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바그완은 워크의 최종단계에 들어가 있습니다. 말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의 의사를 이해할 수 있는 제자들의 수가 충분하므로 이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의 다르샨은 티르타가 대신하게 됩니다. 영매들은 바그완이 없어도 그 역할을 계속하고 싶은지 어떤지 결단해 주세요" 한순간에 조직 전체가 발칵 뒤집혀졌다. 이제부터 공동체는 어떻게 될 것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1개월이 지난 후에 바그완은 쉴라의 발표와는 달리 다시 '침묵의 강론장'에 나타났다. 그는 아주 병약 한 듯이 보였다. 침묵의 강론을 하던 어느날 크리슈나 바르티가 사진을 한참 촬영하고 있는데 바그완은 졸면서 끄퍽거리고 있었다. 바르티는 곧 그 사진을 파 기하도록 지시받았다. 바그완은 "나는 결코 자지 않는다. 그저 의식을 낮 은 단계로 낮췄을 뿐이다. "고 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쉴라의 조수로부터 여권은 유효하냐는 질문을 받 았다. 그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비베크로부터 가장 우수 한 사무라이 4명의 명단을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무엇인가 수수께 끼에 싸여갔다. 다른 부서의 리더들도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의 순으로 명단을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자연히 아쉬람 내에서는 여러가지 소 문이 난무하게 되었고 산냐시들 사이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퍼져나갔다. 어느날 저녁 때였다. 쉴라와 디크샤는 주요 리더들을 위시하여 40여 명을 모이게 했다. 방밖에는 망을 보는 사무라이 한사람이 서있었다. 드디어 쉴라가 중대발표를 했다. "우리들은 바그완과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모두는 이 엄청난 소리에 놀랐고 미심쩍어했다. 그녀는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와 계속 함께 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나 가주십시오. 미국에서는 그런 사람은 쓸모가 없습니다. 이 계획을 비밀로 해둘 자신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하다거나 사랑하고 있어도 우리의 계획을 알려서는 안됩니다 !" 나는 이사벨을 생각했다. 그때 그녀는 후보지를 찾기 위해서 라크슈미 와 함께 멀리 카슈미르 쪽으로 가있었던 것이다. "나와 디크샤에게 완전히 복종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지금 당장 나가 도 좋아요!" 쉴라는 협박하듯이 말했다.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확인되자 잠시 후 계획의 개요가 설명되었다. '우선 선발대가 미리 미국으로 떠나 바그완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그런 후에 나머지 멤버가 미국으로 향한다. 모두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서 봄베이까지 가야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돈이 있는 자는 항공료로 1천달러를 내도록 한다. 돈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아쉬람이 항공료를 부담한다. 이 계획에 대해서 결코 누구에게도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 또 소유물을 팔거나 남에게 주거나 해서 의혹을 품게 하는 일을 해서도 안된다!' 쉴라가 회의를 해산한 후 우리들은 방을 나왔다.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행운을 믿을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비밀회의가 열린 날로부터 몇주가 지난 4월 초에 접어들자 여러가지 소문이 난무하고 아쉬람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 대부분은 부정확한 것이었지만 우리들이 어딘가로 떠나려 한다는 것과 그래서 푸나에서 지 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산냐시들은 오토바이, 자전거, 오두막집, 아파트 등 자기 소유 물을 팔기 시작했다. 또한 하리다스와 산티와 같이 우수한 산냐시를 포 함하여 많은 산냐시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남은 산냐시들은 비자 를 쉽게 받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기 때문에 아쉬람 안은 일대 혼란상태가 되었다. 쉴라는 모두들 앞에서 '북쪽'으로 갈 것이라고 계속 이야기했고 아쉬람을 옮길 때는 한사람도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얼마되지 않아 쉴라는 은밀히 우리 40여 명에게 미국 동부의 뉴저지 주로 떠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출발 날짜는 결행일의 3일 전에 전달되었다. 출발 당일 나는 카슈미르에서 돌아온 이사벨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어느 정보제공자에 의하면 곧 바그완에게 구속영장이 나을 것이며 그래 서 바그완이 체포된다면 적어도 금고(禁鑛) 2년은 확실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특히 공항에서의 경호를 게을리 하지 않도 록 했다. 출발하는 일요일, 바그완은 두 대의 롤스로이스 중 한대로 푸나에서 마지막이 될 '침묵의 강론장'에 들렀다. 그 사이에 나는 다른 한대의 를 스로이스('횐 코끼리'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에 가솔린을 채우고 타월 등 을 실었다. '침묵의 강론장'을 나온 후 '흰 코끼리'에 바그완과 쉴라가 탔다. 나는 내가 선발한 사무라이들과 함께 경호차에 타고 '횐 코끼리'를 경호했다. 우리들은 마침내 아쉬람을 떠나는 것이었다. 비밀작전이 효력이 있었는지 두대의 하얀 롤스로이스가 '노자 문'을 나 갈 때에도 밖에 있는 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 고 있었다. 문지기인 산냐시조차 아무말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바그완을 다시 병원으로 데려가는 정도로 생각하였다. 우리들은 모래먼지가 휘날리는 대낮의 푸나를 통과해서 곧장 봄베이 로 향했다. 도중 로나발라 근교에서 바그완이 탄 롤스로이스가 정차했 다. 하얀 로브를 걸친 눈부신 바그완이 바람을 쐬기 위해서 차밖으로 나 오자 사람들은 그 유명하다던 라즈니쉬를 서로 보려고 몰려들어 교통체 증이 일어났다. 운집한 사람들을 우리 경호대로서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바그완은 차안으로 급히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길가로 면해 있는 아름답고 고요한 백사장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8년 가까이 보낸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몹시 서운해졌다. 일행은 봄베이 교외에 있는 인도인 갈냐시 집에서 다음날 새뵉 2시까지 지낸 후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을 통과했을 때 나는 바그완의 롤스로이스가 비행기의 앞바퀴 바 로 옆에 멈추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렇게 해놓았다! 어떠한 출국수속도 일체 생략하고 비행기 바 로 아래까지 몰고 갈 수 있도록 해놓았던 것이다. 뇌물의 효과는 뚜렷했 다. 상당한 금액의 돈이 투여된 듯했다. 서둘러 탑승한 나는 트랩을 올라오는 바그완을 영접했다. 쉴라는 일등 칸 犯석 모두를 예약해 놓았다. 조종실로부터 기장(fn::)이 와서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희 비행기에 탑승해주신 것은 더 없는 영광입니다. " 30분 후 엔진이 웅웅거리더니 기체는 활주로를 이륙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나는 안도와 흥분이 뒤섞인 기분이었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들의 경외스런 교주를 인도로부터 모시고 나가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음은 미국이라는 신세계를 점령할 차례다! 바그완은 최고급 프랑스산 샴페인과 접시에 담긴 케이크로 손을 뻗었 다. 바그완의 좌석 뒤에 서있는 쉴라는 비베크와 함께 승리의 미소를 만 면에 지 었다. 자, 이제 미국으로! 자유와 명성을 향해 출발이다! 제 11장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 푸나의 공동체를 해산하기 위한 작전은 미국행을 결정하기 전부터 계 획되어 있었다. 인도의 라즈니쉬 화운데이션(Rajneesh Foundation)으로 서는 많은 부채와 법적 문제를 안고 있기에 미국에서 새로 설립한 법인 인 라즈니쉬 인터내셔널(Rajneesh International)과 법적인 관계가 전혀 없도록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아쉬람은 소득세 미지불분 5백만 달러 이 외에도 출판사, 제본쇼 직물공장, 각종 원료의 공급처들에 대해서 거액 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또 거대한 '붓다 흘'은 지주가 반환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산냐시들의 공동주택지인 '지저스 하우스'도 아쉬람측의 지불 불이행으로 소유자에 게 반환수속이 취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도 우리가 출국을 서두른 이 유중 하나였다. 바그완이 떠나고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아쉬람의 해체작업이 시작 됐다. '붓다 흘'은 무너지고 '지저스 하우스'는 주인 손에 넘어갔다. 사후 처리를 위해 남겨진 자들은 신속히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부티3, 세라피룸, 세탁소 제과점, 레스토랑 등은 모두 폐쇄되고 재고품은 파격적인 헐값으로 팔려나갔다. 수백 채나 되는 오두막집도 팔리거나 소각됐으며 일부는 그대로 방치되기도 하였다. 중고품 시장에는 산냐시들이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까지 나돌았다. 세일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수많은 인도인들이 아쉬람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입구에 있는 'Gateless Gate'는 군중에 밀려 넘어질 정 도였다. 이 세일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의 동굴과 비슷해서 카 메라 · 컴퓨터 · 에어컨 · 금속탐지기 · 암실기구 · 롤스로이스 · 금고 · 쩐기 기구 ·신변잡화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대부분의 물건들은 인도에서 입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것이 파격적인 헐값으로 팔려나 갔던 것이다. 바그완은 푸나의 됫정리에 진력하는 자를 우선적으로 새로운 공동체 로 부르겠다고 약속해두면 공동체의 재산매각과 산냐시들의 해산도 순 조롭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듯했다. 그러나 인도를 떠날 시기가 되자 상당히 괴로운 입장에 처한 산냐시 들이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산냐시 중에는 무일푼인 사람들이 많 았으므로 그들에게는 부모나 친구, 대사관 등이 신원보증을 서주거나 그 렇지 않으면 산냐시의 전통같이 되어있는 마약거래와 매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크슈미와 이사벨은 푸나에서 봄베이까지 우리들을 따라왔지만 함께 비행기에 탄 것은 아니었다.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던 라크슈미의 시대 가 끝났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것이었다. 그 지위를 빼앗은 쉴 라는 이미 라크슈미가 갖고 있던 결정권의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고 있었다. 쉴라는 자야난다(Jayananda)라는 뉴저지주의 전(前)은행원 인 미국인과 재흔한 후 바그완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기 위해 지금 라 크슈미보다 훨씬 졸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기내에서 미국의 입국수속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받았다. 외국인이 보디가드를 데리고 입국하는 데에는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입국 때는 일반 관광객이라 해야 한다과 쉴라는 말했다. 바그완의 등뼈 부상에 관한 일은 이미 미국에까지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선발대인 디크샤와 그 정예대원들이 구급차와 들것을 준비하고 JFK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되어있었다. 공식적으로 등뼈의 상태가 악화되어 인도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으로 대수술을 받으러 간다 고 발표했던 것이다. 아무튼 바그완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그는 트랩 위에 멈춰서서 주변 을 둘러보며 "나는 아메리카가 기다려 왔던 구세주다!"하고 과장되게 외 쳤다. 그런데 쉴라는 바그완이 살 수 있는 집을 찾기 위해서 그동안 은밀히 인도와 미국을 여러번 비행기로 왕복했었다. 결국 그녀가 구입한 것은 뉴저지주의 몬트클레어에 있는 호화저택이었다. 그 저택은 녹색으로 이 루어진 언덕 등성이에 서있는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는데 아무 것에도 가 로막혀 있지 알아 인접한 뉴욕의 맨해튼을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쉴라 는 그 저택을 '성(城)'이라고 불렀다. 바그완의 도착을 위해 선발대의 산냐시들이 그 집의 개축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 일행이 푸나를 급히 떠났기 때문에 아직 작업은 완성 되어 있지 않았다. 성에 도착한 바그완은 선발대 산냐시들의 환영을 받 았다. 바그완은 잠시 그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있다가 저택으로 들어갔 다. 디크샤는 계단에 장애자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놓았는데 그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복도의 큰 방에서는 아직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 문에 바그완은 우선 지붕밑 다락방에 자리를 잡았다. 디크샤는 연장을 더 사서 작업을 재촉하였으며 그 지역의 산냐시가 소집되었고 비산냐시인 인부들도 고용되었다. 그리고 바그완이 뉴저지주 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비밀엄수의 맹세를 하도록 했 다. 쉴라는 이 시점에서 아직 매스컴의 취재를 원하지 않았다. 이 장소에 산냐시가 수천명이나 찾아오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몬트클레어 성은 금세 엄청난 변화를 맞았다. 개축 책임자인 디크샤가 바그완을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을 하얗게 칠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훌릉한 마호가니 목재는 하얀 페인트로 덧칠해져 그 아름다움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디크샤는 또 대단히 고가인 티파니 스테인드글라스를 잡동사니 물건으로 간주하고 쓰레기 취급을 하였다. 나는 같이 도착한 산냐시들과 함 께 즉시 작업에 참여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쉴라는 나를 통해 가 장 우수한 사무라이를 두명 선발하였으며 그들은 주야로 바그완의 방으 로 통하는 계단을 지켰다. 라크슈미와 이사벨이 찾아온 것은 우리들이 도착하고 나서 2주 후의 일이었다. 소문에 듣자니 라크슈미는 여승 차림으로 인도 출국에 성공한 듯했다. 그때까지 라크슈미는 인도를 떠난 일이 없었고 미국에 도착할 때부터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그완은 그녀가 공동체에서의 지위 변화에 익숙해지도록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갤리 (Galley.옛날 노예나 죄수들에게 노를 젓게 한 배)선의 노예와 같이 일하 고 있는데도 바그완은 이사벨로 하여금 라크슈미의 시중을 들게 했으며, 용돈도 주고 차도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여 맨해튼 나들이까지 허락해 주기도 하였다. 아무튼 우리들 조직에는 일대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푸나에서 는 권력을 갖고 있던 자가 돌연 격하되고 이전에는 그다지 중요한 지위 에 있지 않았던 자가 갑자기 상승하기도 했다. 쉴라와 디크샤 때문에 나 자신의 지위는 완전히 인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충치로 고생하고 있었다. 실은 푸나를 떠나기 며칠 전부 터 아파오기 시작했는데 푸나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나는 비행기 속에서 치통 때문에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통증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쉴라와 의논을 하자 그녀는 나를 디크샤에게 보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이가 아프면 치과에 가면 되지." "하지만 디크샤,내겐 돈이 없어요." "시바.돈이라면 당신은 항상 갖고 있잖아.날 놀리지 말아요!" 그때 나는 단지 20달러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1백 달러 가까이 든다는 것을 설명하고 80달러 정도 빌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우는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 시바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미스터 빅 사무라이 보디가드? 아니야. 시바, 지금 당신은 나의 부하 인부일 뿐이에요. 돈이라면 여기 있는 모두에게 돌아다니며 꾸어가지.내게 애원하러 오지 말고 말이야!" 나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그녀를 그렇게까지 신뢰한 나는 얼마나 얼간이란 말인가! 바그완에게 미국은 첫 외국생활이지만 그는 쉽게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만에 자신의 식생활을 바꾸고 이탈리아 산냐 시가 그를 위해서 특별히 요리한 계란을 먹었다. 이것은 엄격한 채식주 의를 지키는 자이나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자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기가 든 두부도 시식하였다. 바그완이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신품의 롤스로이스가 배달되었 다. 그는 이 차를 스스로 운전하고 싶어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핸들을 잡 은 것은 9년 전의 일이었고 더우기 병약하기 때문에 운전을 한다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아침 바그완은 바 람을 쏘이면서 달리고 싶다며 롤스로이스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하여 우 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가 운전한다면 그의 건강도 염려되지만 틀림 없이 매스컴이 그를 찾아내게 되어 사태가 복잡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바그완은 처음 3일간 산냐시가 운전하는 것을 관찰하고 4일째 부터는 직접 운전하였다. 그리고 나서 1주일 동안 그는 속도위반 딱지를 몇장이나 받았는데 그때마다 동승자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한번은 롤스로이스가 성에 도착하자 스피드광인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두려움을 갖고 동승하는 것은 오늘로서 충분하다. 앞으로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 차에 타고 싶은 자는 너희들 이외에도 많이 있을 테니까. 아무튼 나 자신은 차를 타고 공포를 느낀 일 이 없다. 알겠나?" 얼마 후 독일 잡지 vStemA이 결국 바그완의 소재를 알아냈다. 한 카메 라맨이 망원렌즈를 들고 나무 위로 오르는 것을 어느 인부가 발견한 것 이 었다. "뭘 도와드릴까요?"하고 인부가 정중히 말하자 그 카메라맨은 겸연쩍 은 듯한 얼굴을 하고 도망갔다. 이틀 후 같은 카메라맨이 성의 정원을 과속으로 통과하며 사진을 찍고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그때 롤스로이스 를 세차하던 한 산냐시가 그 차를 세웠다. 그러자 카메라맨은 차를 그대 로 버리고 근처의 수도원으로 도망쳐 들어가 종교상의 보호를 구했다. 결국 경찰과 변호사가 오고 그는 필름을 쉴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다른 카메라맨이 계속 오게 되어 마침내 비밀이 세상에 드 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푸나의 공동체를 특징짓던 자유롭고 달콤한 섹스생활은 이미 변해가 고 있었다. 뒤에 도착한 라크슈미와 이사벨을 포함해도 남녀간의 비율은 여자 1명에 남자가 5명이었기 때문에 디크샤는 파트너를 공유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사벨이 도착한 날 쉴라는 더 이상 여성을 푸나로부터 불러들일 예 정이 없으니까 남자친구가 없는 여성 산냐시는 파트너가 없는 남성 산 냐시를 상대하라고 했다. 결국 여성 산냐시는 어떤 상대이든 함께 자고 싶다는 제의를 받으면 동의해야만 했다. 새로운 형태의 '마음 비우기'였 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공동체 부지가 발견될 때까지의 일시적인 조 치이며 부지가 발견되면 많은 여성들이 찾아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대로 될 것이라고 쉴라는 설명했다. 남자들은 함께 자고 싶은 여성에게 얼마든지 잠자리를 요구했으며 만일 그 여성이 시간이 없는 경우는 예약 리스트에 이름이 기입되었다. 나는 아직 이사벨과 연인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3명의 사무라이와 좁 은 방에서 흔숙했으며 게다가 화장실이 방 옆에 있어 사람들이 매일 밤 지나다녔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잔다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러나 나는 이사벨이 다른 파트너와 자지 않도록 매일 밤 함께 지내기로 했다. 물론 성 안에서는 사적인 자유가 談었고 하루 19시간의 중노동에 늘 지쳐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간의 섹스는 도저히 만족스러을 수 없었 다. 그러나 이 여성공유 제도는 얼마 안가서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것이 시작되고 정확히 2주 후 혜르페스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산냐시들이 성을 순백으로 장식하는 동안 쉴라는 새로운 공동체 의 부지를 찾기 위해 미국 전체 산냐시들 앞으로 이상적인 장소를 조속 히 찾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공동체 후보지의 상세한 요건은 맑고 깨끗한 공기, 목초지, 나무가 풍 부한 삼림, 작은 강, 야생동물,그리고 잘 정비된 도로 등이 갖춰진 장소 여야 했다. 바그완은 비가 적고 1년 내내 온난한 기후일 것도 아울러 요 망했다. 몇주 후 쉴라는 조수 세명을 데리고 콜로라도주에서 아리조나주를 거 쳐 서북부에 위치한 오리건주로 날아가 부동산업자를 만났다. 그리고 '빅 머디 랜치'(Big Muddy Ranch)라는 황량한 목장을 안내받았다. 존 웨인 같은 카우보이가 나을 듯한 그곳을보자 쉴라는"이곳을사겠 어요!"하고 즉석에서 파격적으로 말했다. 그때는 아직 그곳의 토지조사 도 되어있지 않았으며 가격조차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쉴라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산냐시들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최고의 장소 를 찾았으니까 모두 철수해도 좋다고 말했다. '빅 머디 랜치'는 오리건주 의 동부지역으로 그 일대가 고원의 사막지대인 변두리였지만 쉴라는 이렇게 말했다. 11발견한 토지는 나무가 무성하고 25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는 노후 연금 생활자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으며 기온은 연평균 21도 정도라서 1년 중 3백 일이 쾌청한 매우 훌륭한 장소입니다. " 이 중대결정을 하자마자 쉴라는 랜치의 지주인 바브 하베이와 함께 그 장소에서 즉석 축하파티를 했다. 이 랜치에 살고 있는 사람은 바브와 그의 처인 글렌더 그리고 두명의 딸뿐이었다. 쉴라는 위스키에 잔뜩 취 해서 바브를 연봉 5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보수로 그 땅의 관리인으로서 고용했다. 그리곤 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지껄여댔다. 그리고 나서 보름 후 바브는 랜치로 찾아온 지니와 친해졌는데 지니 는 여성 산냐시로서 푸나에서부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날 위스 키에 취해 쉴라가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싶어한 바브는 지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fr쉴라 일입니다만‥‥‥ 그때 그녀는 왜 취해 있었어요」 뭔가 알 수 없 는 말을 했지요. 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다든가 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요. 여기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으니 까요 아무튼 쉴라는 그리고 나서 친마야라는 사람에 관해서 말했는데 그 사람이 이곳으로 돌아온다든가 뭐라든가‥‥‥ 어쨌든 횡설수설했어 .5_ 친마야는 누구지요? 쉴라와 친한 사람인가요? 그리고 '돌아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지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쉴라가 그 황량한 토지를 구입한 것은 죽은 전 남편 친마야가 그곳에 서 환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따위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n. 우리들은 친마야가 돌아을 수 있도록 오아시스 를 만들어야 한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바그완의 괌과 희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는 바그완을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게 아닌가? 어쨌든 1981년 7월 쉴라는 랜치를 575만 달러에 구입했다. 그러나 쉴라는 계속 재정난을 호소하고 나왔다. 쉴라와 디크샤는 회의를 소집하여 조직 내에 돈이 없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하며 각자의 소유재산을 모두 공출하겠다고 했다. "여러분들을 비행기로 여기까지 데려왔고 바그완을 위해서 랜치를 欲 기 때문에 이제 현금이 한푼도 없어요 돈이 필요해요 지금 곧 필요합니 다. 다이아몬드 반지와 금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은 그것도 주세요!" 쉴라는 계속 말했다. "주머니에 갖고 있는 돈이 몇푼이라도 있다면 그것도 내세요. 비록 그 것이 전재산이라고 하더라도 !" 나는 쉴라의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서 품어왔 던 증오가 일거에 폭발할 것 같았다. 나는 바그완에게서 받은 순금 롤렉 스 시계를 갖고 있었고 아름다운 라피스 라줄리(靑金石) 반지도 끼고 있 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우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것이 탐욕 이라고 확신한 나는 결코 시계도 반지도 내놓지 않았다. 쉴라의 말을 받아서 이번에는 디크샤가 처분하고 싶은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느냐고 했다. 그리고 각자 부모들에게 신장결석수술을 받 아야 하기 때문에 시급히 2만 달러가 필묘하다는 전화를 걸라고까지 하 였다. 특히 나는 나의 집 재산과 스코틀랜드에 있는 아버지의 진료소에 관한 것 등에 관해 심문당했다. 디크샤는 지금 곧 콜렉트 콜로 아버지에 게 전화를 걸어서 돈을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며 계속 나의 손목에 있는 롤렉스 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긴급수술 때 문에 거금이 필요하다는 식의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었다. 사실 공동체 내에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거금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쉴라는 돈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치던 그 시기에 빨간 벤츠를 개인 용도 로 구입했고 디크샤도 새 차를 주문했다. 또한 바그완에게는 세대째의 롤스로이스가 도착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마음대로 쉬지도 못한 채 밤중까지 뼈빠지게 일하는데 쉴라와 디크샤는 왕후귀족 같이 지내고 있었다.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는 시 간은 9시나 10시. 그리고 나서 자신들의 차를 타고 맨해튼으로 돈을 뿌 리러 나가는 것이었다. 우리들에게는 잠깐동안의 외출도 금지되어 있었 고 편지를 부치러 나갈 수도 없었으며 편지를 부치고 싶은 경우에는 사 무실에 있는 담당자를 통해야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지만, 편 지는 '공동체를 위해서' 사전검열되었으며 그녀들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 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게다가 성 밖에서 전 화를 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쉴라는 우리들을 게으름뱅이라고 끊임없이 몰아세우며 사치가 가능한 시대는 끝났다고 다그쳤다. 이미 명상하는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작업이 바로 우리들의 새로운 명상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극도로 피로가 겹쳐 커피를 진하게 마셔도 스스로 잠들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절대 녹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만일 이것이 나 에게 내리는 불의 시련이라면 보기 좋게 이겨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경기에서 계속 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수면부족 때문에 사소한 소리에도 놀랄 정도로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여명으로서 시작된 빛나는 영적 운동은 이미 파 시스트의 악몽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조화로 가득찬 멋진 삶의 방식을 사람들에게 보이겠다'던 나의 꿈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단지 쉴라가 팔아 서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도록 한 채의 크나큰 집을 개축하는 것,그 렇게 해서 나 자신을 고통스런 피로 속으로 몰아붙이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들은 '마음 비우기'라는 미명 하에 노예와 같이 혹사당하고 있었 다. 내가 피로한 나머지 커피잔 위로 푹 엎어질 때 바그완은 호화로운 제왕과 같이 롤스로이스를 타고 드라이브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녹초가 된 나는 그가 나갈 때 손을 흔들 기운조차 없었다. '이제 끝이야! 나를 쉬게 해줘!'나는 중얼거렸다. 어느날 바그완의 차가 내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마음 속으로 '쉬게 해 주세요! 바그완, 이제 더 이상 떠터나갈 수 없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냈 다. 나와 눈이 마주친 바그완은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1 다음날 모든 인부들에게 하루동안의 휴식이 주어진다고 디크샤가 발표했다. 바그완이 그녀에게 지시한 것이었다. 銳시간의 자유! 행복한 하루! 돈은 없지만 어쨌든 자유다! 나는 오후 4시까지 푹 잤다. 눈을 뜨자 매트리스와 모포를 뒤집어쓰고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우리들을 보며 디크샤가 웃고 있었다. 다음날도 휴 식이 주어진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바그완은 내 눈속에서 메시지를 읽은 것이었다. 기적적인 이틀 간의 휴식 후 모든 작업 스케줄은 완화되고 더 편해졌 다. 파티가 열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라크슈미는 이사벨이 조수에서 떨 어져 나가게 되었고 그래서 지위도 부하도 잃은 그녀는 우울과 슬픔의 나락으로 더욱 필이 빠져들어 갔다. 그 무렵 바그완의 성에는 푸나로부터 잇달아 사람들이 도착하였으며 미국 각지에서도 바그완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산냐시들이 찾아왔다. 쉴라는 바그완이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완전한 깨달음의 상 태에 있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어느날 뜻밖에 내게 새로운 일이 주어졌다. 그것은 산냐시용 식당에서 야채를 씻는 일과 운전이었다. 운전으로는 JFK공항에 도착하는 산냐시 들을 맞으러 가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루는 내가 산냐시를 공항에 마중하러 갔는데 키르티(하노버의 월프 왕자)의 재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바그완 부친의 재가 함께 도착하 였다. 바그완이 그들을 자기 가까이에 두려고 두 사람의 재를 가져오도 록 한 것이었다. 그 재는 후에 오리건의 랜치에 매장되었는데 그때 두 사람의 재는 서로 뒤죽박죽 섞여 있었으므로 어느 쪽이 왕자의 재고 어느 쪽이 부친의 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하루는 '빅 머디 랜치'를 다녀온 쉴라가 빅 머디에서 가장 가까운 안텔 로프 마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곳은 연금생활을 하고 있는 노인들의 마을로서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나무를 자랑하는 멋진 장소인 듯했다. 그녀가 말하는 모습은 모두의 기대를 부풀게 만들었다. 그런데 뉴멕시코 에서 부동산 개발업자였고 지금은 작업반장인 리차드가 진지한 어조로 그 토지가 무슨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지 물었다. 미국에서는 토지를 사용목적별로 구분하기 때문에 자신의 토지니까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것은 통하지 않았다. 그 토지가 일단 특정한 토지로 지정되면 그 지정을 변경하는 것은 매우 어련다는 것이었다. 질 문을 한 리차드는 토지 지정에 관한 오리건주의 규정이 미국 내에서도 가장 엄격주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농업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요. 당연하지 않아요?" 쉴라가 말했다. "그 토지의 일부분이 상업용과 택지용으로도 지정되어 있나요?" 그는 다시 물었다. "리차두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요. 일부가 상업용으로 지정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사겠어요? 그리고 택지용으로 지정된 부분 도 있어요." "쉴라.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이 규정에 대해서 많 은 경험을 갖고 있어요. 농업용지가 동시에 상업용지로도 지정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아요. 그리고 그 토지의 일부가 택지용으 로도 지정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곳에 살 수 있는 사람 수에 대해서는 어떤 제약이 있을 겁니다. " 푸나에는 6천여 명의 산냐시들이 있었지만 바그완과 쉴라의 이번 계 획은 20만명까지 살 수 있을 만한 부지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오리건주에서 두번째 규모의 이 랜치는 미국의 '새로운 구세주'를 위해서 가능한 한 거대한 공동체를 건설할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리차드에게 추궁당한 쉴라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는데 즉시 그 녀의 남편이 화제를 돌려 그 곤경에서 벗어났다. 그때까지 나는 아직 토 지지정의 규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무언가 감이 잡혔다. 쉴라는 토지의 사용목적을 규정하는 법률이 있는지도 모른 채 6백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지불한 것이었다. 리차드는 자신의 의견을 어느 정도 이야기하고 현명하게도 조용히 물 러났다. 이곳에서는 유식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과거에 '장자 홀'이 완성된 후 1주일만에 무너져 내리자 그들은 '네가티브'하다고 비난받았을 뿐이었다. 전문가적 지식은 자신의 가슴에 숨겨두는 편이 몸 에 좋은 것이었다. 그후 인부들of 이층에 있는 바그완의 호화로운 거실과 응접실을 완성 시키자 바그완은 기록적인 속도로 일을 끝마친 우리들을 잔디로 불러서 축복의 치하를 하였다. 카메라맨은 비베크의 남자친구였지만 아직 미숙 했기 때문에 전문 카메라맨을 불러 사진을 촬영하도록 하였다. 디크샤가 가만히 내 옆에 와서 속삭였다. "전문 카메라맨이 도착할 때까지 당신이 잠시 사진을 찍도록 해요 그 렇다고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둬요. 우쭐대지 말아요. 당신은 아직 나의 부하에 불과하니까!" 제 12장 약속의 땅, 배반의 땅 1981년 7월, 20명의 선발대 인부가 오리건으로 향했다. 그들은 출발 전에 오리건의 랜치 사진을 보았다. 강줄기를 배경으로 큰 나무 아래 쉴 라와 디크샤가 서있는 사진이었는데 그곳은 상당히 좋은 장소인 듯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지만, 120평방 마일의 거대한 랜치에 강은 단지 두 줄기뿐이어서 두사람은 수마일이나 걸은 끝에 겨우 그 장소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 었던 것이었다. 쉴라는 사진을 보이면서 경고했다. "여러분들 중 푸나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자기 전용의 방이라든가 낮잠이라든가 하는 특권의식 말입니 다. 하지만 나의 랜치에서는 어느 누구도 특별한 인간이 될 수 없어요. 알겠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흠칫했다. 쉴라의 태도는 라크슈미의 태도와 너무 달랐다. 그래도 라크슈미는 항상 바그완의 의견을 존중했고 '나'가 아니라 '우리들'이라는 주어로 말을 했지만 쉴라는 바그완과 의논한 듯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독단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쉴라가 오리건의 대지를 자신의 랜치로 만들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2주 후 갑자기 디크샤가 랜치로 보내졌다. 쉴라는 여왕벌처럼 몬트클 레어 성에 머물렀다. 쉴라가 디크샤를 졸지에 내쫓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강자도 얼마나 가련하게 추락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쉴라는 성이 전체주의적 체제가 된 것은 오로지 디크샤의 탓이라며 계속해서 힐책했다. 또 사람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고 이 성의 미관(美觀)을 속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이사벨과 라크슈미도 곧 오리건을 향해 날아갔으며 제1호 '트레일러' 에 입주했다. 트레일러란 서너 개의 방이 있는 조립식 주택으로서 거의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을 차로 견인해 랜치에 죽 늘어놓고 볼트로 연결하여 산냐시용 주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사벨과 라크슈미가 자리잡고 나서 2주 후 내가 랜치로 갈 차례가 되었다. 비베크의 남자친구와 영국출신의 배관공도 동행했다. 마드라스(Madras)에 도착한 우리들은 차를 타고 '안텔로프 인구 40 명'이라는 표지를 세운 작은 마을을 지났다. 쉴라는 트레일러 한대를 이 작은 마을의 변두리에 놓고 그것을 랜치 의 초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랜치까지는 먼지투성이의 길을 16마일 정도 더 가야 했다. 어느 언덕 위에 도착하자 운전사는 지평선을 가리키며 "여기서 보이 는 모든 땅이 우리들의 것입니다. "고 말했다. 앞에는 거칠은 언덕이 이어지고 저지대에는 초라한 나무와 쑥이 자라 나 있었다. 경치는 약간 푸른 빛을 띠고 있고 공기는 아주 투명했지만 쉴라가 묘사한 신록이 무성한 곳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토지는 척 박하기 이를 데 없고 나무라고는 덤성덤성 여기저기 볼품없이 서있었다. 새는 한마리도 없으며 초원도 강도 없었다. 도처에 모래먼지만 소용돌이 치며 날아다녔다. 도대체 바그완은 이런 황무지에서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포장도로로 나가려면 수십 마일 이상이나 달려야 하는 곳에서 어떻게 롤스로이스를 운전할 셈인가? 그리고 쉴라의 사진에 있던 멋진 장소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30분 후 우리들은 광대한 평야지대의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한 '랜치 하우스'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땅에는 모래먼지가 10센티 가까이 쌓여 있었다. 한 그루의 키 큰 포플라 나무가 랜치 하우스에 그늘을 늘어뜨리고 있 었으며 그 주위에는 헛간, 옥외변쇼 기계실, 차곤 창고 등이 있었다. 그 리고 갈대가 자라난 갈색의 호수가 접한 곳에 될라의 사무실이 설치되 어 있었다. 그 주변을 2n∼n명의 산냐시들이 돌아다니고 있다가 우리를 포옹하며 환영해 주었다. 거의 모두가 카우보이 모자와 부츠를 신고 선 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나는 재회한 이사벨을 정신없이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가 말라를 걸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어서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 다. 이사벨의 설명에 의하면 지역주민을 자극시키지 않도록 산냐시들은 말라를 걸지 말 것을 쉴라가 지시한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이사벨이 말했다. 바로 전날 랜 치 내에 거주하는 사람수를 조사하러 관할지역 조사관이 찾아왔다는 것 이었다. 그가 온다는 정보를 받자마자 산냐시 현장감독은 모두를 한곳에 몰아넣고 랜치에는 10명 정도밖에 없는 척했다. 랜치의 지정거주자 수는 10명 이내였던 것이다. 이사벨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멋진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지만 팔장을 끼고 걸으면서 그녀는 내게 말해두고 싶은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틀림없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 새로운 애인이 생겼 어遣」 시바." 그러나 나와도 계속 만나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일거에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졌다. 새로운 땅,새로운 공동체, 게다가 새로운 애인을 만든 이사벨! 단지 2주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나는 신설된 중기(重機) 부서에 배속되었는데 기계의 대강을 시험해 보고 보람이 있을 듯한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큰 불도저가 가장 운전기 술을 요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선택했다. 랜치는 푸나보다도 훨씬 더웠다. 섭씨 43도! 공동체 외부에서 온 어느 인부는 이 지방의 기후에 대해서 쉴라가 뭐라고 말했는지 듣고서 크게 웃었다. "이것 봐요. 이곳 계절은 두 가지밖에 없어요. 7월과 8월이 여름이고 나머지는 겨울이란 말이오!" 나와 비베크의 남자친구에게 주어진 숙소는 랜치에서 상당히 외진 곳 에 있는 '리버 하우스'였는데 방 가나에 6명이 틀어박혀졌다. 우리들 이 외의 전원은 랜치 하우스에서 숙박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이사벨과 만나 삼각관계로는 지낼 수 없다고 말했다. 푸 나에서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고 해서 두번 다시 같은 상황을 반복하기 는 싫었다. "오늘밤은 지금까지의 인연을 생각해서 함에 지내요." 이사벨이 제안했다. 나는 결국 이틀동안 그녀와 함깨 지낸 후 마침내 그녀와의 관계를 모 두 첩산했다. 나는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푸나에서는 요직에 있었 지만 지금은 단지 작업원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변했으며 푸 나의 상황이 재현되는 일은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바그완 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다'고 계속 나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1주일동안의 불도저 작업이 끝나자 덤프카의 운전이 내게 할당되었 다. 덤프카 운전이 불도저 작업보다 더 안전하긴 했지만 먼지를 뒤집어 쓰는 양은 오히려 더 많았다. 내가 랜치에 도착하고 나서 2주일 후 잠시 랜치에 왔던 쉴라자 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바그완이 곧 도착하리라고 생각했다. 바그완의 거처는 일반 트레일러 크기의 세배나 되는 트레일러였다. 우리들은 그것을 나사로 조립하고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며 카페트도 깔고 파이프를 설치하는 등 깨끗이 단장했다. 그런데 나는 바그완이 도착하기 전날 비베크의 남자친구와 함께 바그 완의 숙소로 옮기라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루의 중노동을 끝내고 나의 텐트로 돌아오자 나의 짐은 모두 바그완의 거처로 옳겨져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엄청난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바그완을 맞기 위한 총정리작업을 위해서 랜치에 있는 70여 명의 산냐시 전원에게 소집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들은 밤 12시가 지날 때까지 일했다. 이사벨은 다시 사귀고 싶다는 듯이 나를 유혹하였다. 그 래? 나는 짐작이 갔다. '텐트살이 할 때는 외면하더니 내가 바그완의 거처로 옮기게 되자 너 도 함께 들어가려고 하는 속셈이 아닌가? 이제는 속지 않아!' 바그완이 온다는 사실에 모두 상당히 흥분했다. 임시변통의 물뿌리개 장치를 만들어서 트랙터의 뒤에 설치하고 그것으로 바그완의 집과 랜치 하우스 사이를 왕복하면서 모래먼지를 씻어냈다. 정원사들은 집 주위에 서들러 정원수를 심고 베란다에는 화분을 장식했다. '라즈니쉬푸람'(Rajneeshpuram)이라는 새로운 간판이 랜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바그완이 곧 온다는 통지가 들어오자 산냐시들은 랜치의 이곳저곳으 로 옷을 들고 다녔다. 순식간에 먼지로 더럽혀져 버리기 때문에 바그완 을 맞이하기 직전에 갈아입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잔디에 앉아서 산냐시 음악가들의 연주와 함께 웃는 얼굴로 합장하면서 환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바그완을 위해서 큰 안락의자가 정면에 놓여졌다. 오전 10시 롤스로이스를 탄 자야난다가 도착해서 나와 카메라를 급히 찾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마드라스에 도착할 바그완을 내가 촬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한테도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구?" 그는 고함을 질렀다. "1시간 반 후면 바그완이 마드라스에 도착한다구!" 나는 즉시 자야난다를 따라 마드라스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바 1완을 태운 제트기는 마드라스에서 비행기로 20분 거리에 있는 레드몬 드로 착륙지를 변경하였다. 우리들은 이번만은 제트기가 늦어지기를 바 라면서 레드몬드로 서둘러 갔다. 레드몬드에 도착하자 제트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관제 소의 말로는 30분 전에 레이더로부터 사라져 버렸다며 그 이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바그완의 초능력이 또 활발해져 기계를 고장나게 한 것일까?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하고 10분 후 제트기의 모습이 다시 레이더에 나 타났다. 착륙준비에 들어갔다는 관제사의 말에 우리들은 안심했다. 나중 에 안 것이지만, 바그완이 1백 마일 떨어진 후드산의 대삼림을 보고 쉴 라가 사들인 이 황폐한 토지에 실망하지 않도록 그녀는 조종사에게 랜 치 위를 저공비행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나는 바람을 맞고 있는 바그완 의 멋진 포즈를 촬영했다. 그는 평안해 보였고 미소를 지으며 밝은 얼굴 이 었다. 랜치에 도착한 바그완은 모래먼지에 쌓인 파란 롤스로이스에서 내려 환영하는 산냐시들 앞에서 5분간 앉아있었다. 산냐시들 대부분은 푸나 이래 바그완의 얼굴을 처음 보기 때문에 "드디어 바그완이 왔다!"하며 몹시 기뻐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쉴라가 발코니에 모습을 나타내고 기쁜 듯이 큰 웃음을 지었다. "바그완께서 마음에 들어 하세요!"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서로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교주와 다시 함께 있게 되다니 ! 쉴라는 곧 전체회의를 열고 산냐시 전원에게 자신에 찬 목소리로 힘 있게 말했다. "잘 명심해 두세요. 불평불만 같은 부정적인 마음자세는 모두 버리세 요 우리의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100퍼센트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만 합니다. 바그완과 이곳에서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여러가지 일이 과거와는 달라질 겁니다. 푸나에서와 같이 아 쉬람 밖에 방을 빌려 살아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이 중앙통제 하에 이루 어지게 됩니다. 당분간은 자신의 소재를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결코 안됩 니다. 바그완의 도착이 외부세계에 알려져서도 안됩니다. 만에 하나 이 일이 외부에 누설된다면 그를 우리들의 리더라고 하지 말고 한사람의 방문자라고 둘러대주세요. 바그완은 아직 관광비자밖에 없기 때문입니 다. 알겠지요?" 이어서 쉴라는 이 지역의 거주 허용인원이 10명밖에 안되기 때문에 조사관이 오면 나머지 65명은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자 유행동이나 외부사람들과의 접촉, 랜치의 일을 알리는 것은 일체 금지하 겠다고 했다. 또한 여기에 있는 롤스로이스는 여섯대가 아닌 두대라고 덧붙여 말했다. 공동체는 협동농장이고 그래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이 외의 사람들은 오지 않게 되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매스컴의 리포 터 등이 와서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곳에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 들은 일시 방문자나 자원봉사를 위해 온 사람들이지 이곳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도록 했다. 쉴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든 매스컴 관계자가 찾아오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지쳐있는 사람, 부정적인 마음자세를 지닌 사람,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들과 접촉해서는 안됩니다. 인터뷰를 받는 사람은 말할 때 주의해 주 세요. 바그완을 신뢰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잘될 것이지만, 유토피아가 완 성될 때까지는 모두가 어렵고 많은 일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게으름 뱅이, 불평분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즉시 공동체에서 추방당할 것입 니다!" 그녀는 그리고는 사람들을 차례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요청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릴 테니까 불만이 있으면 지금 무엇이든 말해주세 요. 누구에 관한 것이건, 무엇에 대한 것이건 좋으니까 됫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말했다고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산냐시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본 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푸 나시대의 경험에 비추어 그런 말에 속아넘어 갈 리 없었다. 긴장된 침묵의 몇 초가 지나고 나서 비베크의 남자친구가 대담하게도 몇 가지 불만사항를 말했다. 숙박시설에 대한 것, 하루에 배급되는 맥주 의 양에 대한 것, 저녁식사를 위해 30분간 한줄로 늘어서야 되는 것, 장 거리전화를 걸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 등등을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불만은 우리들 모두가 너무나 공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마 그는 비베크와 사귀고 있기 때문에 발언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 이었다. 그러나 그후 2개월도 채 못돼 그는 바그완의 비서 업무에서 밀 려났고 비베크와의 관계도 끝나버렸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콘크리트 작 업장으로 쫓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가 이야기를 끝내자 쉴라는 치미는 노기를 가까스로 참고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은 더 없어요?" 그녀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재촉하자 다시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쉴라는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바그완으로부터 들은 말입니다만, 만일 이 공동체가 잘 되지 않는다면 그는 7∼8명의 선택된 산냐시를 데리고 이곳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이 말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푸나에서 있었던 권력게임 같은 것은 이제 끝났어요. 누구도 바그완에게 선물을 하거나 바그완으로부터 선물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선물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는 사람은 나의 트레일러로 가지고 와주세요 바그완에게 보여드릴 테니까.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전 적으로 바그완의 생각에 달려있습니다. 또한 이제부터는 남 앞에서 팔짱 을 끼거나 키스를 하는 등 제멋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은밀한 장소에서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쉴라는 사무실의 허가 없이 랜치로부터 외출하거나 외부 로 전화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회의를 끝냈다. '아아, 정말 도대체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나는 바그완이 푸나에서 말한 것을 생각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결코 누구에게도 너의 인생을 지시받아서는 안된다. 누구에게도 !" 그러나 지금 금지되지 않은 것은 섹스뿐이었다. 아직, 이것만이 겨우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남아있었다. 결국 우리들이 랜치에 도착하자마자 쉴라가 절대권력자로서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고 전반적인 분위기도 격변하기 시작했다. 바그완이 오리건에 도착한 후 한달 반동안 쉴라는 우리들이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지역의 로터리그룹과 부인단체, 관공서 등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그런 곳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빅 머디는 국제적인 거대한 공동체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250명 정도가 모여 살 예정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그저 농민으로서 우리 친구들과 협력해서 아름다운 오아시스를 만들 작정입니다. 소와 말에게 잠식당한 목초지는 2년 이내에 비옥한 농지로 꼭 만들어놓을 것입 니 다. " 쉴라는 또 라즈니쉬가 잠시 미국을 다니러 왔을 뿐이니까 안심하라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비산냐시로서 랜치의 관리인인 바브 하베이도 지역 TV프로에 나가서 새로운 농장 근로자들에게 매우 감동했다며 우리들의 근면함, 영농의 노 하우,60톤의 불도저를 취급하는 기술 등을 격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쉴라의 선전은 처음 두달간은 잘되어 갔지만, 어느날 '랜치에는 최종적으로 몇사람이 살 것입니까?하는 질문을 받고 그녀는 무심코 이 렇게 대답해버 렸다. "글쎄요. 최종적으로는 약 1만명 정도가 될까요?" 이 발언의 파문을 막기 위해 선전담당인 이사벨이 즉시 나섰지만 손 쓰기에는 이미 늦어있었다. 쉴라의 그 말에 지역 주민들은 바그완이란 존재를 본격적으로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리건으로 공동체를 옳긴 지 두달만에 랜치에 사는 산냐시의 수는 2백명에 달했고 우리들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저항의 소리가 높아 지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악화되어 가는 어느날, 우리의 하수처리 설비가 규정을 어겼다고 어느 농민이 관할 군(T%) 당국에 항의하자 쉴라는 곧 복수를 개시했다. 그녀는 내가 헬리콥터를 타고 그 농민의 농장을 항공촬영하도 록 명령했다. 그의 농장도 하수처리에 관한 규정을 지키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쉴라는 좋아라 하면서 그 사진을 익명으로 군청에 보냈다. 그런데 바그완이 받은 속도위반 딱지 수는 순식간에 쌓여갔다. 뿐만 아니라 한번은 롤스로이스를 도로 옆으로 처박기도 했다. 롤스로이스는 세계 제일의 차니까 어떤 속도로도 코너를 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단 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동승한 비베크는 "그 사고는 정말 끔찍했어요. 바그완도 나도 죽는 줄 알았어요."하며 몸을 떨었다. 그 사고 후 비베크는 그의 키를 빼앗았다. 쉴라 또한 바그완에게 운전을 포기시키기 위해서 대형 수영장을 만들고 경배행기를 탈 수 있도록 활주로도 건설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실제로 바그완의 오락을 위해서 즉 시 1백만 달러 상당의 터보 프로펜러 경비행기를 주문하였으며 수영장 도 만들었던 것이다. 그 무렵 공동체의 조직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바그완은 쉴 라에게 산냐시들을 7개 그룹(그에게 있어서 7은 늘 신비적인 숫자였다)으 로 나누고 한 그룹에 각각 7명의 '모니터 멤버'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이 '모니터'란 2천 5백년 전 인도에서 붓다의 수제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공동체의 규칙은 모두 이 회합에서 토의되고 결정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쉴라는 자기 권력의 분산을 염려한 듯 바그완의 이 모니터제 지시를 묵 살해 버렸던 것이다. 한편 라크슈미에게는 여전히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바그완은 그녀에게 은퇴해서 즐겁게 지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 다. 라크슈미에게 '여가'가 주어진다면 그녀는 아마 죽는 편을 택했을 것 이다. 그녀는 이 강요된 은퇴생활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1981년 8월부터 12월까지 우리 작업원들은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 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했다. 우리들은 눈사태가 일어나는 장소와 흥수에 쉽쓸릴 위험이 있는 장소 에는 결코 집을 짓지 말라는 바브 하베이의 경고를 무시하고 경치가 좋 은 강가에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6주 후 흥수가 나서 모든 것이 떠내려 가버렸다. 그래서 우리 들은 지반을 굳히고 배수로도 만들어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쉴라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나갔다. 모니터 안을 묵살시킨 그녀는 라크슈미에 의해서 발탁됐던 산냐시들 중 아직 지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을 쫓아내고 자기가 새로이 사람들을 선발해서 자신의 측근그룹으로 만들어 갔다. 그들은 쉴라를 숭배하고 그 권력을 무조건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쉴라는 전속 헤어드레서, 하우스보이, 청소부, 그녀를 맹목적으로 사랑 하는 남편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라면 죽는 시능까 지 하는 여러 부하들, 말하자면 운전기사·파일럿 ·요리사 ·선전 스탭 등도 있었다. 그리고 쉴라는 일반 산냐시들이 참혹한 조건에서 심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새빨간 메르세데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구찌 구두와 핸드 백을 걸치고 디오르 의상과 던힐 선글라스로 멋을 부렸다. 또 손가락에 는 황금반지가 번쩍이고 팔에는 순금 롤렉스를 차고 있었다. 그녀가 절 대적인 권력을 수중에 넣은 지금, 그 횡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녀를 꺾으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날 쉴라는 은행가 그룹을 랜치로 초대했다. 그들은 오리건주의 최 대 도시인 포틀랜드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으로부터 비행기로 날아 왔다. 그녀는 그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가능한 한 열심 히 일하는 태도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쉴라는 거액의 응자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디크샤로부터 만일 바그완 곁을 떠난다면 어디로 갈 것 이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캘리포니아로 갈 것이라고 대답 했다. 이전부터 캘리포니아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 나 나는 그런 질문을 해온 디크샤에 대해 의아스러웠는데, 당시 나는 몰 랐지만 쉴라가 만든 추방대상자의 리스트에 내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사 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랜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12월 초까지는 거대한 창고, 새로 개정된 허용 거주자 수에 따라서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식당, 수리시설을 갖춘 중기계 공장 등이 완공되었으며 활주로의 확장공사도 완료췄다. 또한 정식허가를 낸 트레일러 하우스 50대의 건축도 거의 완성하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지면은 얼어붙어 모든 작업의 중단 이 부득이했다. 이것이 쉴라가 말한 연중 온난한 기후였는가 ! 제 13장 '섹스 교주 고 흠 !' '빅 머디 랜치'에 쏟아부은 금액은 4년동안 총 1억2천만 달러에 달했다. 당국의 눈을 피해 일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지만 우리들은 바그완에게 최상의 공동체를 바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우리들이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미국에서 계속 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대부분의 산냐시는 관광비자밖에 없었던 것이 다. 그래서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면 체재가 가능하기 때문에 1981년 6월이 되자 결혼 붐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집단 결흔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당국은 곧 조사에 착수했다. 라즈니쉬 신자들이 빅머디에 모여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 들은 비자 연장신청을 여러 주에서 나누어 하고 있었다. 또 미국 시민으 로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들은 미국식 발음도 어느 정도 익혀둬야 했다. 영어의 특별훈련 코스가 개설됐고 나도 거기에 참가하여 미국식 발음을 익혔다. 우리들이 몰두하고 있는 이 거대한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은 도대체 어디서 끌어모으는 것일까? 그 내막을 알아보면, 라즈니쉬푸람 건설자금의 많은 부분을 조달한 사람은 시카고 출신의 자금조달책 요가 수쉴라(Yogasushila)였다. 그녀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전 세계를 돌며 공동체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호소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마지못해 돈을 내는 처지가 되 었다.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스튜어디스인 한 산냐시는 후에 이렇게 털어 놓았다. "수쉴라가 바그완은 다음 주 식량을 살 돈도 없다고 해서 나는 갖고 있는 돈을 모두 드렸어.5_" 하지만 그 무렴 바그완은 11대째 롤스로이스를 구입했던 것이다. 언젠가 나는 수쉴라가 일하는 장면을 촬영하라는 지시를 받고 모금 현장에 동석한 일이 있었다. 내가 뉴저지에서 치과 치료비가 없어서 곤 란해 하고 있을 때 친절하게도 내게 돈을 빌려준 중년의 그 산냐시 여성 이 초대되었다. 그녀의 경제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수쉴라의 면접이 시작 되 었다. "바로 어제 당신의 영적 발전이 기쁘다고 바그완이 말했어요."하고 수 쉴라가 말했다. 축배를 올리기 위해 웨이터가 독한 브랜디를 가져왔다. 계속 브랜디가 날라져 왔고 "이것을 마시고 이제 변호사와 결말을 지어 버립시다. "하고 수쉴라가 재촉했다. 변호사가 서류다발과 펜을 갖고 왔다. 명석해 보이는 사나이였다. 수쉴 라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바그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훌릉한 영적 도약을 할 수도 있지만 '마음 비우기'에 한가지 장애가 있다. 그것은 당신이 가 지고 있는 돈이다. 이제 그 돈을 처분하고 영적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가 왔다!고 말입니다. 훌릉한 말이지 않습니까'~l 나를 보세_S_ 나는 1센 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만 공동체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돌봐주고 있 잖아요 !" 수쉴라는 이어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주식은 없습니까? 골동품은? 그림과 태피스트리(Tapestry:벽걸이용 고급 응단), 보석 같은 것은 없습니까? 나를 믿으세오」 공동체는 거금이 필요해요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맨해튼에 있는 아파 트는 어떻습니까? 얼마 정도죠? 금주 중에, 아니 지금 당장 그것을 팔 수 없습니까? 창고에 골동품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문제 없습니다. 내 일이라도 산냐시의 트럭을 보낼 테니까. 아아, 잡동사니는 처분해야 기분 이 상쾌합니다. 정말로 후련하지요 자, 이번에는 해외투자, 해외토지 등 은 어떻습니까? 그래요? 멋지군요. 계속하세요! 브랜디 한잔 더 드세요. 후- 오늘은 무척 덥군오」" 변호사의 수중에서 의미 깊은 서류가 수쉴라에게 전해졌다. "아참, 내가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깜빡 잊었어요 바그완으로부터 이 멋진 펜을 당신에게 드리라고 건네받았어요. 예, 여기 있어요! 그래 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 시시한 서류에 이 멋진 펜으로 사인하세요. 아주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나는 마음속으로 '지지 마라!'고 그녀를 응원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생각하고 싶으니까 3일간만 기다려달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 을 쉬었다. 변호사가 안정을 잃고 입술을 아래쪽으로 구부렸다. 그려가 방을 나가자 수쉴라는 곧 다음 산냐시를 불러들였다. "어제 밤 바그완이 당신에 대해서 말했어요‥‥‥‥ 공동체 내에서는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 점점 강조되어갔다. 일부 산냐시가 오리건을 떠나가자 바그완은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유지하는 자는 랜치의 체재를 허용하겠지만 '부정적인 마음'으로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자는 즉시 추방시키겠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랜치에서는 여전히 남성의 수가 여성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게다가 랜치에 찾아오는 여성은 섹시하고 매력적인 타입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여성들이 많기 때문에 대다수의 남자들은 늘 성적 욕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작업원 중 한사람은 나중에 "그 시절 랜치에 총이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틀림없이 총격전이 일어났을 겁니다. "고 회상했다. 우리가 야외에서 작업한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건강한 것도 병에 걸 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리건에 도착하고 나서 몇개월이 안되어 랜 치에는 아메바성 이질이 퍼지기 시작했다. 전염경로는 확실했다. 아메바 를 갖고 있는 자(대개 인도인이었다)가 취사를 담당했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에 퍼져버린 것이었다. 또한 임질과 헤르페스도 발생되었다. 그래서 산냐시끼리의 성적 관계 는 이전보다 훨씬 엄한 감시와 관리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게다가 간염 에 걸린 산냐시도 나타났다. 마치 푸나에 있었던 모든 병이 우리들의 흔 적을 밟아 뒤따라 온 것 같았다. 한편 지역 주민들의 반감은 더욱 격화되어 갔다. 이미 바그완에 대한 거부반응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롤스로이스가 총격을 받은 일 까지 발생하였다. 바그완은 공동체가 이렇게 빨리 법적 문제에까지 말려든 것은 지역 주민의 산냐시에 대한 이해부족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왜 이 렇게까지 된 것인가? 그 답을 알고 싶어했던 바그완은 과거에 다국적 기업의 분쟁조정역을 했던 브레트를 불러들였다. 바그완이 그에게 준 임무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1. 어떻게 바그완의 비자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2.공동체가 법적인 문제에 말려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3. 바그완이 습격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브레트는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답을 했다. "바그완, 당신의 첫번째 잘못은 이곳에서 비영리단체로서 활동을 시작 한 데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명백하게 돈을 벌고 있습니다. 세무서에서 조사하게 되면 그것은 쉽게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3개의 독립된 법인이 설립되어 있습니다만, 그것들은 유령단체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이 공동체와 무관한 척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당국은 우리 생각만큼 호 락호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법인 따위는 모두 그만두고 솔직하게 영리단체를 하나 만드십시오. 미국 정부에 정확 하게 세금을 내면 아무도 트집잡지 못합니다. 두번째 잘못은 당신이 롤스로이스를 11대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 다. 그것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미 국차를 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비자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조금 더 수수한 차를 타고 큰 차는 그 이후에 애용하십시오.그때는 링컨 콘디넨 탈이라도 좋습니다. 미국 대통령에게 어울리는 차라면 당신에게도 충분 히 어울릴 것입니다. 또 많은 산냐시가 습격을 받거나 미움을 받는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단정치 못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산냐시들은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고 법률을 초월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는 호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특히 이곳은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 시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법률을 어기는 이상야릇한 히피들에 게 가슴을 열고 환영해 줄 사람들은 없는 것입니다. " 브레트의 말은 신랄했다. 바그완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공동 체의 법인체계를 바꾸는데 어느 정도의 시일과 비용이 드는지 물었다. 브레트는 자신이라면 1주일이면 가능하고 비용은 단지 수천 달러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바그완은 그에게 잠시 랜치에 체재하면서 법 인과 그 재산을 바르게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브레트는 이 제의를 흔 쾌히 받아들였다. 방에서 나가려는 그에게 바그완은 말했다. "가능한 빨리 새로운 회사를 만드시오." 브레트는 바그완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경리부서의 트레일러에서 일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뜨인 서류는 고품질의 대형 텐트 영수증이었다. 거기에는 20달러라고 적혀 있었지만 분명히 허위기재한 것 이 었다. 그는 즉시 그 텐트를 철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쉴라는 그대로 두 어야 한다고 끝까지 우겨 그 주장을 취소시켰다. 그녀는 자신이 공동체 운영의 책임자이며 자신의 말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갖는다고 브레트에 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브레트는 "연못에 뛰어들어 머리라도 식히고 와라. 나는 당신 에게 굽실거리거나 하지는 않는다!"하고 대응하여 그곳에 있는 모든 사 람들을 긴장시켰다. 브레트는 다음날 컴퓨터 화일을 조사하기도 하고 장거리전화를 걸기 도 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 그는 정직한 사람들과 접촉해 나갔다. 그때 갑자기 쉴라가 나타나서 브레트에게 친구로서 이야기하자며 그 를 자신의 트레일러로 데리고 갔다. 쉴라와 그녀의 부하들은 그의 노하 우에 대한 모든 것을 질문했고 그가 접촉한 워싱턴 U의 주요인물들 전 화번호에 대해서도 알고자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쉴라의 남편인 자야난다가 브레트를 두들겨 깨워 불 러냈다. 브레트가 졸린 눈을 비비면서 따라나가자 쉴라와 30여명의 부하 들이 그를 둘러쌌다. "말라를 이리 내놔!" 쉴라가 명 령했다. "바그완이 당신을 당장 랜치에서 쫓아내라고 말했어.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계획은 모두 끝난 거야! 알겠어?" 그 다음날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쉴라의 부하인 한 여자가 와서 내게 말했다. "당신은 브레트와 사이가 좋았다죠? 하지만 그는 이제 산냐시가 아니예요. 그 사람은 랜치에서 추방당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앞으로 더 이상 그와 접촉하지 말아.5_편지도 전화도 안돼In 알겠죠?" 사실 브레트가 말한 그 현명한 계획은 공동체의 위급한 상황을 틀림 없이 구했을 것인데도 그후 그것들은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다. 10월 諦일 지역 보안관이 공동체에 '우호적 관계'를 목적으로 찾아왔 다. 그는 우리들에게 "내년 봄까지는 오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길이 불통 이 될 테니까."하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보안관의 말 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11월 초순에 벌써 서리와 첫눈이 내렸다. 나는 그동안 '빅 머디'(큰 진창)라는 지명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만 그제서야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비 때문에 도로는 진창 처럼 되었던 것이다. 푸나의 열대에서 수년간 보낸 산냐시들이 이번에는 영하의 기온 속에서 장갑도 없이 U톤의 트럭을 진창에서 끌어내기도 하고 바퀴가 열개나 되는 덤프카에 체인을 감는 것을 배워야 했다. 거대 한 불도저가 진창에 처박힌 일도 있었다. 하수처리 설비가 심각하게 문제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6인 용 하우스가 30동이 있었는데 한 하우스에 40명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겨울용 장비로 말하면 바그완의 수영장을 증축하고 있는 작업 원들보다 불도저 같은 중기를 취급하고 있는 작업원 쪽이 휠씬 나았다. 수영장 작업원들은 우리들처림 두툼한 작업복도 없었고 단지 2주 건너 털실 장갑만 지급될 뿐이었다. 털실을 짜는 산냐시가 졸지에 인기인이 되먼고 마드라스에 나가서 가죽장갑을 사을 수 있는 친구는 귀빈대우를 받았다. 휴식은 2주일에 한번, 그것도 반나절뿐이었다. 그 휴식도 수면부 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대개 잠으로 보내야만 했다. 우리들에 대한 포틀랜드 이민국의 조사는 급속히 진행되었지만 담당 조사관인 톰 케이시(Tom Casey)를 보좌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라즈니쉬측을 상대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전혀 증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무차별하게 조사한다며 항의하기도 하고 거꾸로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조사를 방해했다. 더욱이 그 규모나 대응력, 경제력 등 여러가지 면에서 '라 즈니쉬 화운데이션 인터내셔널'(Rajneesh Foundation International)은 보 잘 것 없는 포틀랜드 이민국 사무소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이 상대해야 할 우리의 사람수나 기동력이나 전략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푸나시대에 섹스와 폭력이 절정에 달하고 있을 무렵에 촬영된 vAshramA이란 영화가 마드라스와 그 주변 마을에 공개되자 지역 주민 들은 극도로 분노하기 시작했다. 바그완은 드라이브 도중 거리의 벽에 '섹스 교주 고 홈!'이라고 쓰여져 있는 대형 경고문을 발견했다. 또 나는 마드라스로 쇼핑하러 나갔다가 옆을 지나는 주민으로부터 심한 욕설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덤프카를 수리하러 갔을 때 정비공은 차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신 교주는 초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이렇게 엉망진창 인 차를 타는 당신을 계속 지켜주고 있는 걸 보면. 나라면 이런 걸 운전 하는 짓은 절대 사양하겠어요 그냥 모는 것조차 위험한데 짐을 싣고 운 전하다니, 미 친 짓이군요 !" 그 무렵 라크슈미는 바그완과 개별 다르샨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결 의에 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어느 농장을 알고 있는데 그곳에는 5백 명 정도가 살 수 있고 아름다운 金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장소이지만 도 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 건에 대해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게 이미 내락을 받아낸 단계에 있으며 그 농장의 가격은 약 6백만 달러 라는 것이었다. 바그완은 오리건에 전재산을 쏟아넣고 있기 때문에 남은 돈이 없다고 말하자 라크슈미는 그를 위해서라면 기부해줄 친구들이 많이 있다고 보증했고?단지 쉴라에게 주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지금까지 기부를 보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그완은 라크슈미의 계획에 동의했는지 새로운 공동체에 적합한 공식적인 직함을 그녀에게 주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의 방을 나온 라크 슈미는 당장 내게 일의 전말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라크슈미와 쉴라 사이의 권력다툼이 본격화 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바그완은 특별한 회의가 있다며 쉴라, 자야난다, 이사벨을 불러들이고 오리건의 공동체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말했 다. 기후도 나쁘며 泰도 삼림도 거의 없고 새도 없다고 했다. 이 장소에 서는 육체에 담겨져 있는 것에 곤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신 체를 떠날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그는 항상 최후의 위협으로서 이 말을 사용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1천명 이상의 산냐시를 이 랜치에 모으는 것(그는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보다 편안하다고 느꼈다). 둘째는, 숱을 만드는 것. 셋째는, 자신에게 매주 새 차를 사줄 것. 그런데 바그완이 이 회의를 열기 바로 한시간 전, 라크슈미는 새로운 공동체계획에 착수할 목적으로 이미 캘리포니아를 향해 출발했다. 그날 쉴라는 긴급회의를 열고 더 많은 산냐시, 새 차, 그리고 金이 없 으면 곧 육체를 떠난다는 바그완의 말을 모두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틀 후 라크슈미는 즉시 랜치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전화로 나에게 연락을 취하여 왜 불러들이는 것인지, 도대체 무 슨 일이 생겼는지를 물어왔다. 사정은 바로 밝혀졌다. 라크슈미의 계획을 알아낸 쉴라가 바그완에게 '나를 택할 것인가? 그녀를 택할 것인가?하는 최종선택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쉴라는 승리했다. 라크슈미는 이후 일체의 공동체 활동을 그만 두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랜치로부터의 외출이 금지되고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담당 산냐시에게 전해야 했다. 철저하게 패배한 것이었다. 그후 쉴라는 다른 집회에서 우리들에게 라크슈미는 이제 '보통사람'이니까 일반 산냐시와 똑같이 대하라고 했다. 한편 비베크도 엄청난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공동체의 생활에 따분해 하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였고 매일 덤프카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외에는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식당 또한 땀냄새나는 작업원으로 가득차 있었으므로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인 그녀에게는 도저히 맞을 리가 없었다. 1982년 쵸 나는 비베크로부터 치과의자에 앉아있는 바그완의 사진을 촬영할 것을 부탁받았다. 매일 치료가 있다고 그녀는 말했고 바그완은 치료중 계속 촬영할 것을 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바그완이 매일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오리건의 랜치에서는 어떠한 약물도 허용되지 않았다. 푸나에서는 마 리화나를 피우기도 하고 아편을 시험해보는 자도 많았지만 그러한 것은 오리건의 황량한 고지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사진을 촬영하러 방에 들어간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바그완은 약물에 대한 금지령을 빠져나갈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는 아산화질소(마취제)를 약물 대신 흡입하고 있었다. 가늘고 투명한 튜 브를 그의 코에 삽입시킨 후 특별히 제작된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는 그의 모습을 촬영했다. 바그완은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좁은 치과 치료실에는 바그완 외에 치과의사 간호사·비베크 ·바그완의 주치의 데바라즈 ·그리고 내가 있었다. 치과의사는 벽 필숙한 곳에 감춰진 두개의 손잡이를 돌려서 가스의 양을 조절했다. "산소를 조금 더. 이번에는 질소를 조금 더." 바그완은 주문했다. "좋아. 좋아. 지금 아주 좋아!" 나는 셔터를 누르면서 왠지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주치의는 바닥에 무릎을 崙고 있었고 간호사는 바그완의 머리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 는 걸상에 앉아있었다. 나는 이 치과용 의자가 바로 런던에서 구입한 것이며 중고품처럼 보 이게 해서 인도로 들여온 것을 기억했다. 그런가? 이 의자를 산 원래의 목적 이 이 것이 었단 말인가? 가스가 효력을 나타내자 바그완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투는 아주 느린 발음으로 'S'음을 끄는 버릇이 한층 뚜렷해졌다. 아산화질소는 ◎1 고의 약물'(the drug of the ego)이라고도 불렸다. 순전히 이의 치료 때 문이었지만 나도 뉴저지에서 이 가스를 흡입한 일이 있었는데, 무척 행 복하다는 느낌과 신체이탈에 가까운 의식상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그완은 이를 치료하는 동안 천식을 억제하기 위해 이 가스를 사용 했는데 그 이후 아산화질소를 상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하루에 한두 시간 이 가스를 흡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반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듯했다. 이 가스의 구입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여러 곳에서 들여오는데 그 역 할은 산냐시 의사와 치과의사가 맡고 있으며 그들은 매일 다른 판매점 으로부터 아산화질소를 들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바그완의 말투에는 가스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쉬이이이이일라아아아아아가 나에게 비행기를 사라고 하고 있어. 하 지만 내겐 비행기 따위가 필요없어. 나는 이미 날고 있어." 바그완이 '날고' 있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상태가 강력한 약물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간호사는 바그완이 말하는 모든 것을 노트에 받아 적고 있었다. 바그완은 치과의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 했다. "너는 정말로 어리석은 녀석이야." 그래도 치과의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정히 앉아있었다. "너의 마음은 끊임없이 지껄여댄다. " 바그완은 계속했다. "여전히 지껄이고 있다. 아아, 시끄러워! 나는 시끄러운 인간이 아니 다. 잡음은 싫다. 그러니까 그 입을 다물어줘. 시이이이이이바아아아아도 있군. 이 녀석은 나의 보디가드지. 이 녀석도 잡음을 내는 일이 있지. 가 라테의 기합을 지르는 것이다! 그는 나를 이해하고 있다. 나는 큰소리를 내지 않지만 시바는 큰소리를 내는 일이 있다. 이 녀석은 나의 보디가 드! 시바는 큰소리를 질러서 너희들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방에 있는 자 가운데 나 이외에는 아무도 현 상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확실히 모두가 이런 광경에 익숙해있는 듯했 다. 갑자기 나는 여성들의 생각대로 조종되고 운전할 때만 외출할 수 있 는 바그완이 가엾게 생각됐다. '그렇다. 바그완에게는 내가 필요한 것이다! 쉴라가 나를 쫓아내려고 계략을 꾸며도 바그완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나는 무의식 중에 바그완에게 이렇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당신을 위에서 덮쳐누르고 있는 이 거대한 잡동사니로부터 그리고 당 신을 삼켜버린 이 엄청난 조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군요: 결국 바그완이 나를 이 방으로 부른 것은 사진을 찍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보이고 자신이 얼마나 자포자 기하고 있는지를 나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바그완은 계속 지껄였다. "이제 깨닫고 있는 척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해방되고 있어. 가엾게도 크리슈나무르티(그는 바그완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깨닫고 있는 척 해야 한다니!" 나는 생각했다. '바그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바그완이 깨닫고 있지 못하다면 도대체 나는 이런 지옥과 같은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무수한 규칙에 속박되고 영하의 기온 속에 몸을 악화시켜 가면서‥‥‥그리고 시시각각 지역 주민들을 적으로 만들어가는 이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반면 바그완은 정말 어떻게 된 것인가? 그는 정말 발작을 일으킨 것 인가?중한 병에 걸린 것인가?' 아무튼 그후 바그완은 계속 토지를 늘여가고 있었지만 그것과 동시에 추앙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35대(매주 그 수가 늘어가고 있었다)나 되는 롤스로이스와 세계최대의 공동체에 매달리게 된 것이었다. 이제 자 신의 힘으로 '날' 수 없으므로 주변에 수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모으고 자기가 아직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존 재 이유이자 주체의식 이었다. 많은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으면 그의 영혼은 이렇게 절망적 으로 추락하는 것인가? 어느날 아침 바그완은 쉴라를 자기 방으로 부르고 이 장소를 택한 그 녀의 선택에 대해서 비꼬듯 말했다. "너는 우수하고 훌릉한 비전을 갖고 있다. 산냐시들을 끊임없이 '부려 먹으면' 이곳도 10년 후에는 아름다운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 금 당장 아름다운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비베크의 새로운 남자친구가 내게 전한 말에 따 르면, 바그완은 쉴라에게 그 특유의 시니컬한 말로 단호히 이렇게 말한 듯했다. "이 토지를 샀을 때 너의 머리와 엉덩이가 거꾸로 붙어있었음에 틀림없어." 바그완이 '빅 머디'를 싫어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는 이 부(富)의 올가미로부터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볼모로 해서 물질적인 세계를 손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이 눈으로 직접 본 엄청난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바그완의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것이었다. 따 라서 나는 그를 도와서 이곳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그의 자유를 담보로 부와 권력을 결코 포기하 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누군가와 상의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이 공동체에 서는 마음으로부터 신뢰할 만한 상대가 없어졌다. 이사벨조차 쉴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로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 14장 라즈니쉬푸람의 허상 1982년 3월에 이르자 반산냐시 운동이 급속히 고조되어 갔다. 미국 정부는 비자 연장수속을 거부한 79명의 산냐시에게 추방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은 2주 이내에 미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럴 즈음 이사뗄이 돌연 니렌(Niren)이라는 신참 산냐시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니렌은 명석한 두뇌의 변호사였으며 쉴라에게는 상당히 중요 한 인물이었다. 이사벨은 부끄러운 듯 내게 말했다. "당연히 그와 함께 자게 되겠지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추방자 명단에는 라크슈미의 이름도 올라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내게 도 추방통고가 나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나와 가얀은(그녀는 법률 상 아직 나의 아내였다) 노동비자로 신고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두사람 모 두 계속 체재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곧 추방명령에 관한 일을 라크슈미에게 알리러 갔지만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말했다. "이 라크슈미에게 추방명령이 나왔다고 말하러 왔지요? 그러나 나는 바그완을 신뢰하고 있어요" 각오가 서있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고 나는 바로 병으로 쓰러져 라크슈미와 연락을 취할 수가 엇었다. 그 사이 나의 담당업무가 바뀌어 추위 속에서 1개월 이상이나 불도저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게 된 것이었다. 산냐시 의사로부터 개조한 트레일러 병실에서 당분간 요양하는 게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실에는 나 이외에 3명이 누워있는데 모두 야위어 까칠해져 있었다. 처음 1주일 동안 나는 계속 잠만 자느라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거의 알지 못했다. 매일 이사벨이 병문안을 와주었던 것 같았다. 내 도처에 가 자고 있을 때면 그녀는 문병을 왔다는 표시로 한송이의 꽃을 두고 갔 다. 이 꽃으로 나는 상당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요양한 덕택에 혈뇨 는 멈췄지만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은 10일간의 절대안정 상태가 지 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불도저에 올라가 소음을 견디면서 단단한 바 위를 상대로 뇨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영국 출신의 간호사인 자야도 병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상태는 1주일 이 지나도 입원 초기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일하고 싶어 조이 쑤신다고 했지만 그 힘없이 움푹 꺼진 눈, 윤기 없는 머리칼, 거친 피부를 보면서 u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지?" 하고 내가 입을 열자 그녀 는 둑이 무너지듯 울었다. 어느날 비베크의 남자친구인 리차드가 문병을 왔다. 초봄의 상쾌한 날 이니 베란다에 나가지 않겠느냐고 그가 말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두 사람만이 되어 아무도 들을 염려가 없게 되자 그는 공 동체의 도처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모순에 질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도 쉴라를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쉴라는 절대적인 독재자로서 완전한 권력을 쥐고 그녀는 랜치의 활동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공동체를 다스렸다. 어떤 것이든 그녀에게 보고하지 않고 공공연히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의 스파이가 있는 듯이 여겨졌다. 누구와 비밀얘기를 해도 곧바로 쉴라에게 그 내용이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 바그완과 함께 있기를 원했고 그에게는 초월적 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두사람 모두 바그완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되어 상당히 많은 것을 얻었다고 느꼈다. 나는 푸나에서 지니(푸나의 의료센터 에서 동료였던 여성)가 바그완을 위해서 물색한 남태평양의 섬에 관한 것 을 떠올렸다. 남태평양에 지니와 동행한 사람은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영국인 간호사 자야였던 것이다. "그 섬이 아직 그대로 있는지 다시 한번 지니를 파견해서 비공식적으 로 타진해보자." 나는 리차드에게 제안했다. 리차드는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며 즉시 비베크와 상의하자고 말했다. 다음날 바그완은 비베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내켰던 모양이 라고 리차드가 전해주었다. 쉴라를 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 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 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나는 병실에서 가능한 한 나의 인맥을 만들려고 했고 리차드 는 지니를 부동산업자가 있는 포틀랜드로 보낼 방법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움직였다. 1주일 후 포틀랜드로 조사하러 간 지니 가 돌아와서 그 섬은 아직 5백만 달러에 나와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져 온 사진을 나와 리차드에게 보여주었다. 나무랄 데 없는 낙원 같았다. 청 록색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데 나무가 무성한 섬 주변을 산호초가 둘러 싸고 있었다. 직경은 약 2마일 정도로 코코넛과 바나나 농장이 있었다. 이상적 인 장소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들은 '빅머디'에서 여전히 소송에 걸려있었다. 뉴저지의 성 과 오리건의 랜치를 중개한 부동산업자에게 수수료 지불을 쉴라가 거부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그완도 지불하기 싫어했다. 결국 쉴라는 그 부동산업자에게 수수료의 절반만을 보냈다. 이전에도 역시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어느 부동산업자가 권총을 갖고 랜치에 뛰어들겠다고 위협한 적도 있었다. 이번의 섬 문제로 지니가 교섭하고 있는 상대도 바로 그 부동산업자였다. 이 시기에 쉴라는 캘리포니아에 가 있었다. 그래서 주임 회계사인 크 로프트라는 영국 출신의 젊은 여성이 쉴라를 대신해서 일하고 있었다. 바그완은 크로프트에게 시바와 지니가 섬 문제를 가지고 접근해 왔지만 자신은 그런 계획에 전혀 흥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일주일 후, 나는 병실에서 姿겨나게 되었다. 정말 어처구 니 없는 일이었다. 그후 나는 무슨 일로 바그완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쉴라를 만났다. "이봐요 시바!" 그녀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정치놀음을 즐겼다면서요?" 좌절된 '남태평양 낙원계획'에 대해서는 그 말밖에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한편, 79명의 산냐시에 대한 추방명령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쉴라 는 라크슈미에게 그녀의 이름이 명단에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늦춰 통 보하였다. 바그완은 라크슈미에게 미국인과 결혼할 것인가, 미국을 떠날 것인가의 최종선택을 하게 했다. 라크슈미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 다. 도대체 누가 라크슈미와 같이 철저한 독신주의자와 결흔을 생각할 것인가? 쉴라가 라크슈미에게 추방명령을 통보한 것은 금요일이었다. 그녀에게 남겨져있는 것은 3일간, 결국 일요일까지 미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라크슈미에게는 전용차도 전화도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어떻게 이민담당 변호사와 연락을 취할 것인가? 비록 변호사와 연락이 닿는다 해도 토요일부터 휴무이기 때문에 '최후의 일격'이 되도록 귈라는 일부러 긍요일을 선택한 것이었다. 라크슈미는 바그완과 만나서 그에게 '이제 당신의 시대도 끝나가고 있으니 당신도 이 미국을 떠나는 편이 낫다. 쉴라를 신뢰한 당신은 바보이다. 설령 쉴라를 신뢰해도 앞으로 그녀가 잘해나가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곧 이곳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그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한 논쟁 끝에 라크슈미는 미국에 체재할 수 있도록 변호사 고용 비 용으로 1만 달러를 바그완으로부터 받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경 리부서로부터 라크슈미가 받은 돈은 단지 5백 달러뿐이었다. 이것밖에 줄 돈이 없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분연히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면 이 돈은 당신네들이나 받아두세요! 이 라크슈미보다 당신 들이야말로 돈이 더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무일푼으로, 하지만 당당하게 공동체를 떠나갔다. 라크슈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우리들은 이 런 소문을 들었다. 그녀는 랜치를 떠난 직후 고열로 쓰러져 어느 의사로부터 인도행을 연기해야 된다는 진단서를 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이유로 체재의 연장 또는 영주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후 3년간 정식비자를 받지 못한 라크슈미는 엘라(Ella)라는 이름으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면서 미국을 떠돌아 다녔다. 우드스톡의 거 리 판매대에서 큰소리를 지르면서 값싼 물건을 팔기도 했다. 그녀의 모 습은 무척 진기하게 보였을 것으로 무일푼의 여성이 그 팔에는 순금 를 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으니‥‥‥ 라크슈미가 우드스톡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랜치에서는 곧장 사 람이 파견되어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산냐시에게 그녀와 접촉을 갖지 않 도록 경고하고 다녔다. 그녀가 문을 노크해도 차를 대접하는 것은 물론 문을 열어주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것이다. 우드스톡에 있던 라크슈미는 3통의 편지를 받았다. 3통 모두 바그완의 서명이 들어있는 것으로 말라의 반환을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크슈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바그완이 나를 시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며 말라를 계속 늘어뜨리고 다녔다. 1982년 6월 포틀랜드 이민국은 그녀에게 연락을 하여 '그린카드' 건으 로 상의하고 싶으니까 출두하도록 요청했다. 그린카드(Green Card)란 외국인 등록카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갖고 있으면 미국에서 합법적 으로 일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포틀랜드 공항에 착륙하자 라크슈미는 당국에 의해서 어느 호텔로 연행되었다. 그곳에는 조사관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그완의 입국자격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을 한다면 기꺼이 그린카드를 발부하겠다며 그녀의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라크슈미는 이 요청을 완 강히 거부하였다. 그리고 나서 2년 후, 라크슈미는 뉴욕 이민국으로 연행됐다. 그녀는 '선(禪) 마스터'의 자격으로 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절되고 결국 체포되 어 유치장 신세까지 지게 되었던 것이다. 쉴라는 디크샤가 공동체를 떠나자 공동체의 공금을 20만 달러나 횡령 했다고 발표했지만, 라크슈미의 경우는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약 60만 달러를 갖고 달아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고참 산냐시들은 그러한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디크샤에게는 자신의 재산이 많았으며, 라크슈미의 곧 은 성격은 예전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크샤 와 라크슈미를 모르는 새로운 산냐시들은 될라의 이러한 중상모략을 그 대로 믿었다. 당시 라크슈미는 이미 50세를 지나고 있었다. '금후 어떠한 이유로든 디크샤와 라크슈미와의 접촉을 금한다!'는 공 고문이 식당에 게시되었다. 그들의 이름 뒤에는 '네가티브'란 말이 쓰여 져 있었고 권력을 잃은 인간이 어떻게 네가티브해지고 적대세력을 형성 하는지 서술되어 있었다. 또한 '적대세력'을 따르는 자는 가치있는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덧붙여 있었다. 하지만 라크슈미와 디크샤는 결코 적대세력이 아니었다. 어느 산냐시는 뭔가 잘못 된 것이라 생각하고 이 공고문을 메어낼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게시판에는 성관계를 금지시키는 산냐시들의 명단이 적힌 또 하나의 공고문이 있었다. 이 공고문에는 매일 새로운 대상자들이 포 함되었다. 성병이 공동체 생활 속에 만연되어 갔기 때문에 성병에 감염 된 자는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 했구 당사자들에게는 괴로운 일이 지만 성병의 확산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진 조치였다. 그 대신 감염자의 이름이 삭제될 때마다 우리는 맥주를 실컷 마시면서 축하해 주었다. 그 무렴 간염에 걸린 나는 회복이 지연되었는데 쉴라는 그것이 나의 '네가티브한 태도'에 연유한다고 했다. 그녀는 항상 병에 걸린 자는 모두 네가티브한 태도에 그 이유가 있으며, 만일 마음가짐이 포지티브하다면 애당초 병이 날 리가 없다는 게 그녀의 논리였다. 4월 초 주임회계사 크로프트는 나를 문병하러 와서는 얼마나 지나면 활동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네가티브하다고 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쌓였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130데시벨의 소음을 60센티 거리에서 하루 14시간 이상 계속 듣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알고 있어? 쇄석기(바위나 돌을 부수는 기계)에 타고 일해 봐라. 한 발만 헛디디면 3백 미터 아래로 거꾸로 처박히는데 모래 먼지로 발판 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수개월 동안 이런 식으로 일 하면 누구라도 병 이 안나겠어 !" 그리고 나서 나는 바그완의 명령이라며 쉴라가 전하는 대부분의 지시 가 쉴라 자신의 말처럼 들린다고 덧붙였다. 금방 돌아을 보복이 두려웠 지만 이왕 나온 말이라 하는 김에 다해버렸다. "쉴라와 그 무리들 때문에 정말 괴롭다! 게다가 규칙만 계속 늘어갈 뿐 공동체는 의혹에 싸여간다. 당국에는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며 이런 저런 일로 기분은 잡쳐가기만 한다. 전화 도청과 우편검열 따위는 질색 이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해라! 어째서 랜치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는 것 인가? 마치 파시스트 제국이 돼가고 있는 것 같다. 정녕 이것이 파라다 이스란 말이냐? 미래의 가능성을 세계에 제시하기 위해 우리들이 하는 일이 정말로 이런 것인가?" 그녀는 곧장 바그완에게 나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한시간 후에 돌아왔다. "바그완은 왜 당신이 압박받는 기분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것 은 심한 육체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당신에게는 보다 창조적인 일이 필요하니 지금부터 3주간 휴가를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러 면 당신의 기분이 다시 좋아질 것이라고 아아, 그리고 쉴라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덧붙였어요" 바그완에게는 어떠한 휴가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이 잘된다면 휴가 따위는 생각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까 지의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바깥세상은 적의로 가득차고 마음 이 편치 않은 장소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가 밖에 나가고 싶겠는가? 바깥세상에는 참된 마음도,따뜻한 가족도, 진정한 사랑도 없 다는 것이 우리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험이 아 니었다. 거의 모든 산냐시들은 무일푼인데다가 친구들과 접촉을 끊은 지 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부모도 차가운 시선으로 볼 것이 틀림없었다. 장 발에 오렌지색 옷 그리고 말라를 걸친 모습을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비베크에게 휴가에 대해 물어봤다. 그녀의 대답은 예스였 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휴가를 갖기로 결심했지만, 안텔로프의 의회 선거가 어떻게 될지 보고 싶어 그때까지는 공동체에 머물기로 했다. 안텔로프 주민들은 40명밖에 없는 이 작은 마을이 지역공동체로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통해 자치 지역으로 독립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바그완은 이 지역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갖기 위해서 이 지역의 의회를 장악해야 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계획을 눈치 챈 안텔로프 주민들은 마을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라즈니쉬주의자들에게 의회를 빼앗길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만일 빼앗기 게 되면 세금이 올라가고 많은 주민들은 부득이 퇴거당할 것이 분명하 였다. 반면 자치 지역으로 독립만 한다면 바그완은 이 마을에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쉴라는 안텔로프의 주택들을 계속 사들였고 그곳에 산냐시들을 이주 시켰다. 그곳 지역신문도 라즈니쉬 일당이 선거 2주일 전까지 산냐시를 80명이나 거주시켜 의회를 장악하고 안텔로프를 지배할 계획이라는 것 을 보도했다. 오리건주의 법률로는 주소를 옳기고 나서 2주일이 지나면 그 지역에서 선거권을 얻을 수 있었다. 어쨌든 우리들은 지역주민들이 집을 팔고 떠나도록 매일같이 마을 중심가에 모여 밤새도록 시끄럽게 파티를 열기도 했다. 또한 마을의 전지역에서 진한 키스와 포옹이 장려되었다. 결국 쉴라는 80명의 산냐시들이 살기에 충분한 주택을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지역주민의 두배나 되는 산냐시를 마을로 들여보냈다. 선 거에서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산냐시들은 안텔로프의 주민을 24시간 감시하기 위해 마을의 도처에 있는 동료들과 무선으로 연락을 취하였다. 이 시기에 안텔로프를 떠난 한 여성이 vRe naEZes TVe凉粒鳶eminderA 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라즈니쉬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자유 의사'로 집을 내놓은 것인가?"하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들은 안텔로프에 작지만 아담한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그래도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전 부였습니다. 열심히 일해 겨우 마음에 드는 집으로 개조했습니다. 계속 그곳에 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늘 사진을 찍기도 하고 밤새도록 소란을 피우기도 하는 탓에 나 는 체중이 10킬로 빠지고 남편은 14킬로나 줄었습니다. 식탁에서도 불안 과 긴장으로 아무 것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납세 기일도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안텔로프를 떠나는 날은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만일 안텔로프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저의 집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엉망이 되어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1982년 5월 13일자의 vRe iwadras PioneevA지에는 라즈니쉬 푸람의 시장인 크리슈나 데바의 다음과 같은 투서가 실렸다. "모든 토지는 그 소유자가 '자유의사'에 의해서 부동산업자를 통해서 매각한 것이지 어떠한 강제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이 간과되고 있 는 것은 유감이다. " 마침내 선거 당일, 산냐시 두사람이 불 꺼진 방에 숨어서 커튼의 틈으 로 투표소인 학교를 감시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오는 산냐시 이외의 투표자 전원의 얼굴을 촬영할 수 있도록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장치했다. 이것은 선거자격이 없는 투표자를 상대로 랜치측의 변호사가 법정에서 싸을 때 증거사진이 될 것이었다. 평소의 안텔로프는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지만 선거일은 마치 서커스 공연날과 같았다. 사전에 정보를 얻은 미국의 주요 TV방송망은 모든 진 행상황을 필름에 담으려고 앞다투어 취재진을 보내왔다. 그 이외에도 오 리건과 캘리포니아의 각지로부터 비행기로 날아왔고 그래서 취재진 수 가 주민과 산냐시를 합친 수보다 상회할 정도였다. 매스컴은 '지역주민 대(對) 적색분자'라는 표제를 붙였다. 그런데 오전 9시까지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투표자가 나타난 것은 거의 정오 무렵부터였고 우리들은 뭔가 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았다. 2백명 이상의 낯선 얼굴들이 우리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몇번이나 길을 왕래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무선으로 변호사에게 문의하 니 15분 후에 답이 왔다. 학교의 지하에 '안텔로프를 구하는 모임'이 결 성되어 안텔로프의 주민과 지원자가 오전 내내 그곳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텔로프의 과격파 중 한사람은 염주 대신 약재의 콩깍지로 만든 말 라를 목에 걸고 '적색분자가 되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라는 피켓을 들 고 있었다. 지역주민의 한 사람이 vsixty Minutest라는 전국 네트워크 TV프로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신흥종교에 대해 맹렬한 반대자인 그는 위세 좋 게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의 가족은 U년간 안텔로프에서 살아왔다고 했 다. 그는 전에 카우보이였지만 요즈음은 도로공사장에서 덤프 운전을 하 고 있기 때문에 나와는 안면이 있었다. "안텔로프의 이 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고생각합니까?" 아나운서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없어요! 총으로 저 녀석들을 여지없이 쓸어버리는 것밖에 없어요." "그 의미는 당신 자신이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계신다는 뜻입니까?" "그렇고 말고요. 잘 때는 침대 밑에 총을 놓아두고 있어요. 저 녀석들 때문에 편히 잘 수가 없어요." "라즈니쉬 반대운동을 계속해 갈 작정입니까?" "예, 그래요. 저 녀석들을 마을에서 쫓아낼 겁니다. 나는 마지막 피 한 방을 다할 때까지 싸을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곳에 계속 살 작정입니까?" "물론입 니 다 !" 예상대로 선거 결과는 80대 39로 우리들의 승리로 끝났으며, 마을의 독립은 성공적으로 저지되었다. 선거 전 안텔로프 주민들은 연방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당국이 제출한 1982년 4월 U일자 보고서에서 안텔로프의 상황은 '레벨 4'라는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레벨 5'가 폭동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명백한 폭력행위가 일어난다고는 예상할 수 없다'는 이유 로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1982년 후반의 또 한차례 선거에서는 산냐시 중에서 새로운 시장(여 성)이 선출되었다. 그래서 공공기관의 직원들 대부분은 산냐시로 채워졌 다. 땅값도 포틀랜드시와 대등해졌고 1983년에는 '안텔로프'를 마침내 '라즈니쉬'라는 지명으로 변경까지 하였다. 제15장 바그완과의 결별 푸나 시절 바그완은 '새로운 공동체 나무에 금꽃을 피우자'고 말했는데 우리들이 랜치에서 하기 시작한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과연 '부자 교 주'다운 면이 있었다. 우리들은 온힘을 다해서 세라피 센터, 부티3, 레스 토랑,호텔 등을 건설하였으며 방문자에게 고액의 요금을 받았다. '라즈니쉬 국제 명상대학'의 부속인 '라즈니쉬 세라피 연구소'에서 행해 지는 세라피나 마사지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바디워크(Bodywork) 요금은 세계에서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또 이 시기 우리들은 거대한 영리사업의 일환으로 1982년 6월로 예정되어 있는 '제1회 월드 페스티벌'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81년 세계 각지의 센터로부터 접수된 기부금은 U만 달러에 달하였 다. 이 돈의 대부분은 '라즈니쉬푸람'의 식목사업에 사용되었다. 나무에 돈이 열릴지 어떨지는 제쳐놓고 나무를 사서 심는 데에도 역시 돈이 필 요했다. 심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물을 주거나 사슴에 의한 피해를 생각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심은 나무의 대부분이 일년도 채 못가 시들어 죽고 말았다. 81년 랜치에 투자한 금액은 약 2백만 달러인데 반해 82년의 수입은 기부와 상품의 판매만으로도 6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센터에게 공동체의 영리사업(출판사 이외에 나이트 클럽과 카지노까지 경영하였다)에 대한 출자를 계속 요청하였다. 사업계획 중에는 지나치게 기발해서 계획으로만 그치고 만 것도 있었다. 예를 들 면 피임수술을 하지 않은 라즈니쉬의 정자를 모은 '정자은행'을 설립해서 인공수정용으로 팔겠다는 계획 같은 게 그것이었다. 바그완 자신도 랜치의 제1목적이 돈벌이란 소문을 공공연히 받아들였 고 만일 돈벌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침묵의 맹세를 깨뜨려도 좋다고까지 했다. 또한 바그완은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자기과 시를 위한 선전을 원했으며 사진촬영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봄날 보스턴 출신의 산냐시이자 직업 카메라맨이 바그완의 사진 을 찍으러 왔다. 바그완은 남의 눈을 유달리 의식하며 수선을 떨고 있었 다. 보스턴의 카메라맨은 몇가지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좋은지 바그완에 게 물었다. "바그완, 여기는 푸나와 전혀 다릅니다. 나는 이곳을 보고 보스턴에 있 는 나의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가지 사실을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음. 우선 이곳은 푸나와는 전 혀 다르다. 부지는 광대하다. 120평방 마일이나 된다. 나는 이 랜치의 모 든 곳이 나의 산냐시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 ' 그는 '120'이라는 숫자를 특별히 강조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사 람으로 북적이던 푸나 아쉬람의 120배라는 데에 놀랐다. 이곳의 자연 생 태계가 입을 손상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10만명의 산냐시를 모은다는 것이 그의 기본계획이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사람수를 강조하는 것일까? 쉴라의 말에 따르면 '라즈 니쉬푸람'의 최종목표는 산냐시 1백만명의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침묵에 들어가 산에 은거하게 될 것이다. 함께 데리고 갈 산냐시 제자는 고작 5백명에 불과하다. 지상에서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8∼ 9명밖에 없다. 모두 마음을 비운 헌신적인 소집단의 산냐시들과 함께 있어야만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참된 산냐시만이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다. 그때까지 너희들은 나의 선별 대상이다. 나는 선별하 는 것에 자신이 있다. " 바그완은 보스턴의 카메라맨에게 계속 말했다. "모든 미국인들이 나의 공동체, 나의 산냐시들을 주의 필게 지켜보고 있다. 우리들은 전세계에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평화적이고, 명상적으 로 살아가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푸나와는 전혀 다르다. 푸나에서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라면 우리 들은 환경을 주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푸나에서는 잘못 된 인간이 책임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림도 없다. " 이 발언은 나를 역겯게 만들었다. 바그완은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잘 못된 인간'이란 표현을 썼는가? 책임자를 선택하고 지시하며 이끌어간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만일 그들이 잘못되고 교활한 인간이라 면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은 바로 바그완 자신일 것이다! 바그완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곳과 세계 각지의 아쉬람은 지금부터 더욱 더 중요하게 될 것이다. 우선 이곳에 처음 오는 자는 그 전에 각지의 아쉬람에서 준비절차를 갖 추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그들은 이곳에 친숙해지고 이곳 산 냐시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너의 공동체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준비를 갖추게 하라. 각지의 공동체는 세상의 오아시스가 되고 나의 일은 전세계에서 계속 진행된다. 또 이 랜치의 도시건설을 도우러 사람들을 이곳으로 보내도 좋다. 알겠는가? 음. 세계 각국에 큰 공동체가 하나씩 건설될 것이다. 그리고 각 공동체로부터 최고의 사람들이 이곳으 로 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네 말이네만, 보스턴에 후계자를 키우라. 일을 도맡을 수 있는 누군가를. 그렇게 하면 자네도 이곳에 올 수 있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공동체와 나의 일에 몰두하는 거야. 자네는 그 준비가 되어 있어. 만일 맡길 만한 사람이 없으면 랜치에서 누군가를 자네 의 공동체로 보내지.그렇게 하면 자네는 세상과의 관계를 모두 끊고 세 상을 잊어버릴 수 있겠지.그게 좋겠어,음." 하지만 바그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촬영을 마친 후 그 카메라맨은 이곳에 올 생각이 전혀 없다고 털어놓았다. 내게 남긴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공동체 안에서 나를 잃고 싶지도 않으며 세상을 버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집도 한채 있으나 그것을 쉴라에게 내주고 싶지 않다. 평생 일해서 겨우 장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 벌써 50세, 앞으로 무슨 일이 생 길지 누가 알겠는가? 만일 바그완이 어디론가 간다면 나의 꼴은 무엇이 되겠는가? 이곳은 자네 같은 젊은 카우보이나 있을 장소야!" 그리고 나서 1주일 후, 일에서 돌아온 나는 비디오 담당자로부터 바그 완의 방에 대형 비디오 스크린을 운반하고 있는데 와서 도와달라는 부 탁을 받았다. 푸나에 있을 때 바그완은 하루에 10권에서 15권의 책을 독파하였는데 이제는 비디오를 탐욕적으로 즐겼던 것이다. 랜치의 분위기는 갈수록 파시스트적이며 타락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 했다. 안텔로프에서의 선거 직후인 4월 중순, 쉴라는 랜치의 의료진들과 회합을 가졌다. 중병에 걸린 산냐시가 속출하여 그에 대한 대처방안을 바그완이 지시했다고 하였다. "바그완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받아왔습니다. "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산냐시들이 찾아와서 고통을 호소하면 주사를 한대 놓아주고 바로 일터로 돌려보내 주세요." 주사약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병은 네가티브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네가티브하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확실한 치료를 해주는 것처럼 보이게만 하고 대강 얼버무려 바로 일터로 되돌려 보내세요. 좋 습니까? 질문 있습니까?" 나는 친구인 의사와 마주보고 한숨을 쉬었다. 병이 난 사람은 정상인 의 몇배 이상으로 피곤해 있었다. 신경이 맥을 못추기 때문에 곧 나을 듯한 병이라도 좀처럼 낫지 않았다. 부상을 당하거나 전염병에 걸린 환 자들이 그렇게 간단히 낫겠는가? 게다가 병실은 6인용인데 항상 30명 이상이 북적거렸다. 의료진은 더 많은 병실을 요구했지만 여유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당시 나는 의료센터에서 뼈를 다친 사람들도 돌보고 있었다. 시시각 각 악화되어 가는 사람들을 방관하고 있는 것에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인 의사와 둘이서 환자를 병실에 계속 수용해 나가기로 결정 했다. 그렇게 되자 쉴라는 마지 못해 하우스를 병실로 하나 더 할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냐시의 수는 2천 5백명에 달하고 있었다. 쉴라는 그들을 향해서 비 밀엄수와 협조적 태도를 당부하였고, 나아가 가까운 시일 내에 당국의 단속이 있을 것인데 산냐시 중에서도 당국의 스파이로 잠입해 있을 가 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어느 곳이든 그렇지만 특히 식사 때에는 자신의 발언에 주의하세요. 주수사관과 연방수사관이 일반 방문자인 척하고 와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 바그완에게 물어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자의 태반은 네가티브 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고된 일을 24시간 하더라도 나를 위해 끊임없이 인내해 줄 것이다'고 말 입니다. " 쉴라는 과밀상태의 병실을 해소하는 강압적인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병실로 찾아온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 당장 일어나 서 일하지 않는다면 2개월 후의 페스티벌까지 그대로 계속 누워있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날 수십명의 환자 중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병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두번 다시 의료센터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3주간의 휴가를 강행했다. 내게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장래를 다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로운 오토바이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있었기 때문에 서해 안을 한바퀴 돌아볼 작정이었다. 9년만에 갖는 첫 휴가였다. 첫날에는 1천 마일 가까운 거리를 달렸다. 랜치 밖을 나와 흔자 된 것이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3주간의 휴가 동안 나는 오토바이로 6천 마일을 달렸고 실로 상쾌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막상 휴가일정이 끝나자 두려움이 앞섰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쉴라와 피상적인 대화만을 나누고 헤어졌다. 내 가 없는 사이에 비베크는 교통사고를 일으켰으며 가얀과 독일인 산냐시 는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새로이 많은 규칙이 발표되어 있었다. 나는 식 당에 붙어있는 규칙과 성병 격리자의 명단을 바라보면서 이런 상태로는 조만간 공동체 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목을 다쳐 병실에 있는 독일인 여자를 문병하러 갔는데 그녀는 전혀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지 못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제 더 이상 있을 곳이 못 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여행에서 도착한 당일날 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부터 다시 불도저 작업을 해야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환멸로 말 미암아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이것이 바그완과 함께 보낸 10년간의 결과인가? 밤 11시 경 나는 마침내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바그완에게 텔레파시 로 물어보려고 생각했다. 뉴저지에서 극도로 피곤해 있을 때 이러한 방법으로 바그완에게 자비를 구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었고 최종적으로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바그완 자신뿐이었다. 바그완은 침묵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그와 접촉할 수는 없어 도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나는 그의 방밖에 있는 잔디에 앉아서 명상하며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과 함께 나의 에너 지를 그에게로 향했다. "바그완,나와 당신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입니까?" 한참후나는 눈을 畿다. 그러자그의 방에 갑자기 불이 일제히 꺼졌다. 그것은 마치 나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는 걸 상징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바그완의 여러가지 모습들을 떠올렸다. 비디오 스크린 앞에 몇 시간이나 앉아있는 바그완,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바그완, 속도위반의 딱 지를 받고 있는 바그완, 보스턴의 카메라맨에게 달콤한 말을 토하고 있 는 바그완,그 모든 것이 표면적인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깨달음을 얻은 자,교주, 전지자,완전무결한 의식을 소유한 자로 보였 던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비디오 감상, 위험한 운전, 공동체가 돈을 벌 것을 명하는 것, 매주 새 로운 롤스로이스를 사는 것‥‥‥‥ 비디오는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래서 그를 만 족시키 위해 담당 산냐시들은 신작 비디오를 사려고 매일 비행기로 포 틀랜드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었다. 엄청난 낭비였다. 과거엔 고상 한 내용의 책을 하루에 1㉠권 내지 15권을 읽고 대단한 달변과 지식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을 경탄하게 했고, 모두를 몇시간이나 마법의 포로로 만 들었던 그 인물이 지금은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이제 바그완으로 향한 나의 길이 끝났음을 실감했을 때 나는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했다. 자유와 해방감으로 채워진 나는 이슬 젖은 잔디 위를 마구 굴렀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이사벨을 만나 공동체를 떠날 결심이 섰다고 알렸다. "당신의 기분을 알아요" 그녀는 걱정스럽게 말하였다. 나는 마침내 쉴라를 만나 이곳에서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하므로 내 스스로 공동체를 떠나갈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나의 말에 수긍하는 척하더니 "이제부터 주의하세요!"하고 덧 붙였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날 비베크도 만났다. 그녀는 주방에 있었다. 여전히 온화하고 상냥한 표정 이었다. "안녕, 비베크. 좋아요? 나는 이곳을 떠나-S_" 그녀는 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이 내가 떠나는 이유를 자세하게 말해달라는 듯했다. 비베크는 항상 속마음을 그 눈에서 읽어내 야만 했다. 나는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의견을 솔직하게 피력하였다. 바그 완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이곳을 떠 났다는 결론을 확실히 말했다. "내가 당신이 떠나는 이유를 바그완에게 전해주겠어요. 그리고 그에 대한 애정도 함께요." 비베크는 그렇게 하겠다는 말만 할뿐 그녀 자신의 의견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함으로써 바그완과의 관계를 청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내가 랜치를 떠나 처음으로 간 곳은 캘리포니아의 카멜이었다. 그곳에 사는 전(前) 산냐시에게 가서 체재할 작정이었다. 언제가 그가 일자리를 제공해 주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 도착해 보니 모든 게 허사였다. 10년간의 동면에서 눈을 뜨고 세상을 보자 모든 게 낮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서히 나는 랜치의 대가족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에게는 바 그완의 공동체만이 유일한 생활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공동체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은행구좌를 개설하는 간단한 일 조차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기만 하던 생활을 오 랜 기간 계속해온 탓에 스스로 일을 결정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린 것이 었다. 6주 후 라즈니쉬푸람에서 '제1회 월드 페스티벌'이 개최될 것이란 생각이 떠오르자 나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렸다. 나의 친구들은 모두 랜 치로 향하고 있었다. 바깥 세상은 아주 불친절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 람도 없었다. 어떻게 일자리를 구해야 좋을지 몰랐으며 그저 랜치에 대 해 고통스러을 정도의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동체에 대해 어떻게 느끼곤 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가를 바그완에게 확실히 알리고 싶었다. 나는 편지를 써서 부 쳤다. 그러나 기다려도 회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절망감 속에서 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그완이 당신의 편지는 '넌센스'라고 말했어.5_ 하지만 공동체로부터 떠나간 사람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용의가 있다면,물론 라크슈미와 디크샤 그리고 이 두세 달 사이에 그만두고 간 사람도 포함해서,그들과 완전히 끊을 자신이 있다면 돌아와도 좋아요." 그건 너무 심했다. 그들이 아무리 네가티브한 마음을 가져도 나의 친 구였다. 그렇게 간단하게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대답하자 쉴라는 말했다. "당신이 비참해진 것은 네가티브한 마음의 소유자들과 아직 관계를 계속하기 때문이라고 바그완은 말했어요." "그런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그완에게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전해주세.5_" 그러자 그녀는 놀라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전할께요._ 당신도 조심하세요."라고 말했다. 2주 후, 나는 다시 한번 바그완에게 편지를 썼다. 과연 쉴라가 바그완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필사적이 되었고 카멜로 나를 찾아와 준 친구들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염려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의 마음은 비참해져 갔다. 바그완에게의 두번째 편지는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좋은 말투로 시작한 것이었다. 이 편지에는 랜치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가득 찼다. 페 스티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곳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던 것이다. 그 편지에 대한 회답은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편지를 받은 쉴라는 곧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바그완도 마음을 바꿀 수가 있어In그는 얼마 전 당신이 돌아와도 좋다고 말했지만 지금 마음이 다시 변했어요. 바그완은 당신에게 이렇게 알려주라고 말했어요. '시바는 훌릉한 기회를 놓쳤다. 만일 나의 곁에 있었다면 금생(今生)에서 깨달을 수가 있었는데. 이제 손 쓰기에는 너무 늦어 버 렸다'고 말예요." 나는 쉴라의 말을 되새기며 화가 치밀었다. '내가 깨달음을 얻을지 예 언할 수 있는 자격이 너에게 있느냐? 왜 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행세하는 것인가?' 어쨌든 내가 랜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카멜에서 일을 찾고 분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는 중국식 한방 마사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직업을 얻을 수가 있었다. 얼마후 내가 돈도 좀 모으고 나름대로 생활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 을 때 랜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크로프트였다. "네가티브한 태도를 모두 버린다면 돌아와도 좋아요. 단, 당신의 일은 불도저를 전담하는 것이에요." 내가 지금 돌아가면 텐트생활을 각오해야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고향으로 돌아오세In 시바." 그녀는 말했다. "돌아오세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나의 가슴은 환희로 벅차오르고 기쁨의 눈물이 넘쳐올랐다. 이사벨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축제에 참가할 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당시엔 랜치로 돌 아가는 일만이 중요했다. 만사를 제쳐놓고 한번 더 모든 것을 비워보자! 만일 그래도 잘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단호하게 랜치를 떠나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한 나는 순간적으로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 자신의 인생과 자유를 향해 다시금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낚시바늘에 걸려들었 다. 그 끄는 힘은 너무나도 강력했던 것이다. 내가 랜치에 돌아오자 이전의 불도저 일이 곧 내게 맡겨졌다. 나에 대 한 모두의 태도는 마치 죽음의 나라에서 돌아온 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 "너처럼 운좋게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 나는 페스티벌에 참가할 수 없어 유감스러웠으나 페스티벌은 여러 면 에서 성공이었던 것 같았다. 전세계에서 1만5천명이나 찾아왔다. 쉴라는 전세계의 산냐시 수가 60 만명에 달한다고 자랑했다. '나는 랜치에 갔었다'라든가 '모세는 투자하고, 예수는 저축하고, 바그 완은 쓴다!'고 쓰여진 스티커와 선물용 상품을 대량 생산했다. '주의-델리키트한 에고'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는 많이 팔렸지만 바그완이 드라이브하고 있는 모습을 새긴 플라스틱 열쇠고리는 인기가 없었고 랜치의 산냐시가 실제로 입던 카우보이 옷도 그다지 팔리지 않았다. 방문자의 대부분은 페스티벌의 참가비와 교통비로 돈의 대부분을 사용한 듯했다. 축제 후, 바그완의 새로운 의상에 대해서 얘기가 분분했다. 바그완이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보고 로브와 양말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느 낀 것이었다. 그래서 3명의 디자이너가 심하게 질책받았고 비디오 촬영 팀에도 공격의 화살이 가해졌다. 축제가 끝나고 그해 10월,바그완은 8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호수가에 서 촬영회를 가졌다. 그때 그는 비베크와 쉴라 등과 함께 보트를 타고 호수를 노니는 장면을 연출하였지만 표정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 런데 카메라맨이 탄 보트가 비디또팀의 보트와 부딪쳤다. 이 돌발사고로 주위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바그완은 아주 유쾌한 듯이 즐겼고 이 장면이 비디오의 영상에 그대로 잡혔다. 이런 일이 그에게는 즐거운 사 건이 었다. 그 다음 장면은 호수가에서의 인터뷰였다. 쉴라가 바그완에게 이 호수 가에 나무로 둘러싸인 최신식 집을 갖고 싶지 않은지 물었다. "특별제작한 에어컨과 새 집을 지어드릴 테니까 매일 이곳을 찾아와 마음껏 즐기시면 좋겠군요. 작업반을 동원해 1개월 내에 도로도 완성시 킬 테니까요. 멋진 드라이브도 할 수 있어요." "쉴라,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이 질문에 쉴라는 당황했다. 전에는 독서와 댕상으로 계속 자신을 발 전시켜 가던 사람이 이제는 오락을 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연방정부 이민국은 그동안 바그완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수사는 '라즈니쉬의 체재신청서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 익명의 편지를 에드윈 미즈(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고문)가 받고 부터였다. 그 편지내용은 포틀랜드 이민국에 전달되었으며 즉시 중요사항으로 취급되었다. 라즈니쉬주의자들을 담당하고 있던 톰 케이시는 1972년부터 포틀랜드 이민국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 업무에 관해서 12주간의 교육밖 에 받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대상은 너무나 방대한 자산과 그리스도교적인 도덕관념이나 페어플레이 정신과는 전혀 관계 없는, 6명의 입국수속 전문변호사를 가진 거대한 다국적 조직이었다. 게 다가 그 당시 이미 5백만명의 불법 입국자가 미국 내에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연방정부 이민국의 예산을 40퍼센트나 삭감하 였으므로 이민국은 산처럼 쌓인 업무량과 일손 부족으로 상당히 애를 먹고 있는 상태였다. 포틀랜드 이민국은 시의 중심가에 있는 사무실에 있었다. 그곳에서 라 즈니쉬 조사 업무를 맡은 사람은 케이시 한명밖에 없었으나 조사의 초 기단계서부터 쉴라가 그의 사무실에 스파이를 심어놓았다는 것과 연방 정부의 고관 중에도 스파이가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것이었다. 후에 바그완이 체포되기 전날,그 정보를 랜치에 제공한 자는 후자 쪽이 었다. 어쨌든 쉴라가 조사의 진행상황을 처음부터 계속 알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산냐시들의 어느 '비밀회의'에서 이민국에 스파이를 심 어놓을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보수 등에 대해서 장시간 토의한 일도 있기 때문이었다. 케이시는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자질이 우수한 6명 의 전문변호사를 거느리고 있는 랜치의 산냐시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랜 치측은 비용지출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가엾은 케이시를 혼란에 빠뜨 리기는 식은 죽 먹 기 였다. 자신의 적이 얼마나 힘겨운 상대라는 사실을 그가 몰랐던 것도 무리 는 아니었다. 비록 그가 이민국 역사상 가장 우수한 조사관이었다고 해 도 산야시 모두를 상대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그는 흔자서 주당 48시간 일했으나 장거리전화를 걸 때도 일일이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도대체 그각 무슨 조사를 하고 증거자료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처음에 케이시는 과감히 흔자 힘으로 조사를 수행하려고 했다. 그는 총 8차례 랜치를 방문했는데 1982년 여름이 되서야 그는 겨우 적의 거 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라즈니쉬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인 워싱턴이 그를 연방정부의 대리조사관으로 임명한 것은 겨우 그 다음해 의 일이었다. 어쨌든 1982년 가을에 접어들자 우리들은 사방으로부터 포위되었다. 지역주민들은 법정과 매스컴을 통해 행동을 개시하겠다고 결의했다. 또 연방정부 이민국의 조사관들은 시종 우리 주변을 맴돌고 다녔다. 이 무렵 쉴라는 바그완을 대리해서 이런 엄청난 발표를 했다. "2∼3년 내에 세계는 핵전쟁으로 파멸하고 캘리포니아는 1984년에 대 지진에 쉽쓸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그것은 랜치를 둘러싼 구릉지대에 일대 터널망을 건설하는 일이다. 그곳 에 핵폭탄과 방사능에 대한 방어장비를 갖추고 지상에서 호흡이 가능해 질 때까지 공동체 모두는 그곳으로 피난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신세 계의 건설에 필요한 하이테크 제품을 한사람이 한개씩 터널로 가지고 들어갈 것이다. 대변혁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산냐시들뿐이며 그날에 대 비해서 서서히 식사조절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최종적으로는 비타 민과 미네랄 캡슬만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 발표가 있자 쉴라의 터널건설에 협력을 자청한 산냐시가 수십명이 나왔다. 내가 봄베이에 있을 때 세계는 1978년에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예언을 바그완에게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예언이 빗나가자 바그완은 또 세계종말의 해가 1980년이라고 번복하였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파멸은 항상 향후 약 5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예언하였다. 그가 예언했던 지구파멸의 날, 즉 '예정된 미래'는 문자 그대로 엿장수 맘대로였다. 아무튼 바그완은 예비된 시간이 먼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 묵시록 같은 예언을 하기 전날 바그완은 영화 vNoslradamftsl를 보았 다고 했다. 나의 비자변경 신청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랜치로 돌아와서 채 1개월도 안돼 나는 포틀랜드로 호출되어 톰 케이시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다. 나는 심문 전 1주일 동안 법률전문 여성 산냐시로부터 예상되는 질문과 그것에 대답하는 방법에 대해서 매일 특별훈련을 받았다. 케이시의 질문사항은 랜치 전문가들이 사전에 준비한 그 범주를 벗어 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방식은 참으로 신사적이었다. 10월에는 마침내 바그완도 포틀랜드 이민국으로부터 심문을 받기 위 해 호출되었다. 그는 새로 구입한 미쯔비시 쌍발 터보 프로펠러 헬리콥 터를 타고 포틀랜드로 향했다. 또한 15만 달러짜리 카르티에 손목시계를 차고 갔다. 이민국의 조사관들에게 자신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려는 의 도인 듯 싶었다. 이민국 사무실에 도착한 바그완은 특별실로 안내되었다. 이 방에는 쉴 라도 들어갈 수 없었다. 심문은 두 시간에 걸쳐서 행해졌고 그 모든 것 은 녹음되어졌다. 심문에 임하는 방법에 대해서 바그완은 철저히 사전훈련을 받았었다. 워싱턴의 변호사로부터 '마스터'니 '교주'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바그완은 "나는 수퍼 수퍼 수퍼 스승이다!"고 했다. "그러면 모한씨, 만일 당신이 수퍼 수퍼 수퍼 스승이라고 한다면 제자 들 중에는 당신처럼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몇 명은 있겠군요. 10년 이상 가르쳐 오셨으니까요.그렇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 "누구입니까?그 이름을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까?" "그릴 순 없다. 내가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발언을 하면 공동체의 다른 제자들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 "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든 가능한 일이다. " "티르타는 어떻습니까? 비베크는? 라크슈미는?" "그중 몇사람은 깨달음에 아주 근접해 있다. " "어째서 당신은 라크슈미를 쫓아냈습니까?" "그녀는 내게 더 이상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 바그완이 방을 나온 뒤, 심문을 담당한 조사관들은 의자에 앉아 10분 정도 생각에 잠겼다고 했다. 아마 내 생각으로는 어떻게 하면 바그완을 조속히 미국에서 추방시킬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바그완은 다 음해인 1983년 2월까지 미국을 떠나라는 추방명 령을 받았다. 한편 랜치에서는 여전히 규칙을 늘려갔다. 축제기간 동안 성병보유자 에 대한 격리조치가 취해졌고 이는 모두 강제적으로 집행되었다. 그리고 팔에 끼는 밴드의 색으로 사람들의 감염정도를 표시하였다. 오렌지색은 '깨끗한' 자, 청색은 '의심스러운' 잠복기에 있는 자, 녹색은 아직 한번도 검사를 받지 않은 장기 체재자들을 나타냈다. 말라에도 '깨끗하다' '의심스럽다' '미검사'를 표시하는 색깔의 염주알을 끼워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 조치로는 공동체 내의 성적(性的)인 열정 을 억제하기 어려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공동체의 분위기가 이렇게 악화되어 가자 고참 산냐시들은 차례로 공 동체를 등졌고 젊은 미국인들이 그 후임자리에 앉아 공동체의 대세를 좌우하게 되었다. 교양있는 자, 여행경험이 풍부한 자, 또는 진한 동료애 를 느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평균연령은 22세 정도로서 당시 34세이던 나는 그들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시 끄럽고 오만하기까지 했다. 어느날 나는 바그완의 주치의로부터 바릅액을 마시고 X레이의 피사체가 되어주지 않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바그완의 집에 새롭게 마련된 X레이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바그완이 병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한 성격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고 그는 평소에도 암으로 죽을 것 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다. 아무튼 나는 푸나에서부터 지금까지 바그완의 마네킹 노릇을 해왔지만 그를 위해 나의 몸을 인체 실험대상 으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바그완의 형제 중 한사람(몇명이 랜치에 와있었다)을 실험대에 올리는 게 좋겠다고 의사에게 말했다. 랜치에서는 '노우'라는 말은 곧 반역행위와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 는 충분히 반역하고 있었다. 이전에 읽은 적이 있는 카를로스 카스타네 다의 다음과 같은 귀절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보통사람과 용사와의 가장 큰 차이는 용사는 모든 것을 도전과 응전 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보통사람은 모든 것을 축복과 재앙으로 생각한 다는 점에 있다. " 나의 길은 이 도전에 대해 용사와 같이 맞서는 일이었다. 11월의 어느 아침, 마침내 쉴라로부터 호출이 왔다. 이것이 마지막 대 결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정면으로 핵심을 찔러왔다. "시바, 당신에 관해서 몇가지 좋지 않은 보고를 받았어요.다시 네가티 브하게 됐다고요. 지난번 당신이 돌아을 때는 오로지 바그완의 자비 덕 으로 복귀가 허락된 거였죠 나였다면 절대 돌아오게 하지 않았어요 하 지만 이번에는 바그완도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의 네가티브한 태도는 우 리의 훌륭하고 열성적인 다른 친구들을 뎃나가게 만들고 있다고 말예요 그러니까 그 네가티브한 태도를 버리든지 아니면 랜치를 떠나든지 여기 서 결단내세요. 말라를 계속 지니고 있을 것인지 아닌지? 자, 어느 쪽을 바라죠?" 나는 음험한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나의 마음은 이미 공동체를 떠나있었던 것이다. 트레일러 밖으로 나온 나는 우연히 이사벨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사건의 전말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슬픈 듯한 표정으로 아직 바그완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게 물었다. "사랑하고 있어. 그건 지금도 여전해," 우리들은 이별을 안타까워하듯 오랫동안 포옹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지니를 찾으러 갔다. 돈이 없던 나는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용을 빌려달라고 지니에게 부탁했다. 그녀의 집은 유복한 지주였다. 그녀에 대한 쉴라의 관심사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쉴라는 자 신의 주변에 언제나 부자들을 끌어모아 자금줄이 끊기지 않도록 해두었 던 것이다. 간부 중 한사람이 곧 나를 찾아와서 일몰까지 랜치를 떠나라고 명령 했다. 나는 영국에 돌아갈 자금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날도 저물어 갈 무렵, 나는 랜치의 비자 담당자로부터 톰 케이시가 포틀랜드에서 다시 한번 나를 심문하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다. 갑자기 랜치측은 케이시의 심문에 대한 대응책을 내게 주입시키느라 혈안이 되 었다. 나의 심적 상황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있기 때문이었다. 케이시는 아직 자신의 적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랜치와 그 법인조직인 '라즈니쉬 화운데인션 인터내셔널'의 악명 은 이미 포틀랜드에서 높을 대로 높아 있었다. 케이시는 내가 쉴라와 언 쟁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실종된 내 친구 암바라의 수색에 내가 동 료애로써 앞장섰던 사실도 알고 있었다. 랜치측이 그의 사무실에 스파이 를 박아둔 것처럼 그도 랜치에 스파이를 풀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가? 휴." 그는 친구와 같이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에 대해서는 전부터 계속 조사해 왔지. 자네가 상당히 충실한 바 그완의 제자란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어. 아마 가장 충실한 제자였겠지. 그래서 그는 자네를 보디가드로 선택했던 것이지. 하지만 내가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이 있어. 왜 자네 같이 성실한 사람이 쉴라 같은 인간과 동 료인가 하는 점이야. 암바라 사고 때 자네가 뜨거운 동료애를 나타냈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겠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그런데 어째서 쉴라와 같은 자와 동료로 지낼 수 있지?" 나는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쉴라를 변호했다. "쉴라는 밖에서 보면 골치 아픈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근본은 착한 사람입니다. " 케이시는 나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 푸 알고 있었다. 그의 교묘한 심문은 4시◎ 동안이나 계속됐다. 아내 가얀과 그녀의 어린 딸인 하샤는 나와는 별도로 심문을 받았다. 케이시는 하샤에게 아주 상냥했다. 나는 가얀에게 나와 친하게 지냈던 몇사람에게 이별의 말을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심문이 끝난 후 지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간부회의 석상에서 쉴라 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며 전해주었다. "시바는 네가티브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떠나갔습니다. 그는 케이시의 앞에서 바그완을 배신하고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서 모조리 까발겼습니 다. 때문에 바그완은 미국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포 지티브한 모든 것이 한사람의 네가티브한 인간에 의해서 배신당해 버린 것입니다. " 이 회의가 끝나자 지니의 남자친구도 공동체를 떠나겠다고 했다. 그도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떠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자 쉴라는 황급히 긴급회의 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서 쉴라와 비베크는 함께 눈물을 머금은 채 연단 에 섰다. 쉴라가 비베크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바그완은 앞으로 한사람이라도 이탈자가 생기면 즉시 자신의 신체를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공동체는 해체되고 그의 위대한 사 업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모두 알고 있듯이 과거 2년동안 나와 비베크 사이에는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다시 하나가 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일체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극히 중요한 시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함께 뜻을 모아 바그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구도 허 락 없이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공동체를 떠나려 했던 산냐시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 설득 앞에 짐을 풀었다. 누구도 바그완의 죽음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때 랜치를 마지막으로 떠났고, 떠난지 40일째 되는 날 말라를 반송했다. 그리고 아무리 괴로워도 다시는 랜치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제 16장. 신기루의 끝 천신만고 끝에 런던으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삶의 설계에 모든 고민 을 집중하였다. 그동안 못 만났던 일가 친척들과 친구들도 찾아보았다. 그들과 만나 삶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진지하게 논의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에 런던명상센터의 로비에서 한 사람의 매력적인 여성 (vPenlhouseA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산냐시. 그 사진에서 그녀는 실오라기 하 나 걸치지 않은 채 말라만 걸고 나왔다)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라즈니쉬푸람으로 돌아오고 싶다면 문은 아직 열려있다'는 내용 이 었다. 순간 나는 감시의 눈동자들이 여전히 내 주위를 감돌고 있음을 느꼈 다. 랜치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소재, 가진 돈, 장래의 계 획 등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나는 생각 끝에 전(前) 산냐시이자 나와 비 슷한 경로로 지금은 일반사람이 된 파리의 옛 동료를 찾아갔다. 그러나 쉴라의 남편인 미국인 자야난다와 독일센터의 리더 두 사람이 나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서 파리까지 쫓아왔다. 런던의 어느 산냐시 친구가 내가 파리에 갔다는 사실을 말해버린 것이었다. 파리의 친구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마치 '위험인물' 취급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화를 받은 나의 친구에게 나를 파문하는 이유를 악의에 찬 쉴라의 편지내용으로 밝혔다. "휴 밀른(崙 스와미 시바무르티)은 이미 바그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의 의사로 라즈니쉬푸람을 떠났으며 바그완과 그의 워크 (Work)와는 무관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은 깨달음을 얻은 마스터의 진실한 제자라면 권 력과 특권적인 지위를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막중한 책임이 동 반된 일이든 청소와 같은 단순작업이든 제자에게 있어서는 모두 마찬가 지의 일입니다. 진실한 제자라면 바그완의 사랑을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 적으로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상당히 중요한 지위에 있던 제자가 권 력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에게 있어서 절호의 수행 기회인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무언가 초월하는 계기가 되겠지요. 그러나 집착을 버리지 못 한다면 결국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휴 밀른은 책임있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권력에만 있었고 바그완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푸나시대에 그는 3백명이나 되는 경호대의 대장이었고 바그완이 제자와 만날 때면 항상 동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위를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라즈니쉬푸람에서 권력을 누릴 기회를 얻지 못했던 휴 밀른은 곧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공동체의 일반 멤버로서 건설작업에 노력하는 것을 그는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는 한번 공동체를 떠나간 후 자신의 죄를 사과하는 편지를 써보냈습니다. 그래서 바그완의 사랑과 자비 덕택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공동체에서 특권적인 지위에 오르기만 바랐습니다. 더욱이 두번째로 떠나갔을 때 그의 도주방법은 실로 음험하고 교활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진실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마스터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만일 정말로 필요하다면 저는 언제라도 당신을 위해 달려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완전히 오해한 말입니다. 마스터는 누구도 그리고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마스터란 완전히 초월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마스터의 유일한 희망은 스스로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뿐입니다. 휴 밀른의 이 말은 특별한 자로서 다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휴 밀른은 이제 두번 다시 랜치에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바그완의 제자가 아닙니다. 각지의 라즈니쉬 센터, 아쉬람은 일체 그에게 협력하거나 연락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특히 이제 막 산냐시가 된 사람들 중에는 바그완의 곁에 앉은 휴 밀른의 사진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실체는 바그완을 팔아먹는 교활한 인간일 뿐입니다. 바그완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권력과 지위를 이기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우리들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한 네가티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지금부터라도 공동체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바그완의 축복을 담아서 전임비서 마 아난드 쉴라 그리고 나서 1개월 후, 역시 랜치를 떠난 뉴스레터 편집자 중 한사람 으로부터 그 편지의 서명인은 쉴라지만 직접 쓴 사람은 바그완 자신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걱정과 불안감을 느꼈고 실제로 테러의 위협까지 받았다. 바그완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나올까 생각하면 두려워졌다. 푸나시절 이후 지금까지 이탈자들에게 향했던 그 공격의 화살이 이제는 내게 향해지고 있고 보다 많은 액수의 상금이 걸려있는 듯했다. 나는 베를린에 있는 옛 친구를 찾아갔다. 거기서 미국에 있는 지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말했다. "이 전화는 도청되고 있으니까 신중히 말해주세요." 그리고는 바그완에 대한 당국의 조사가 한층 활기를 띠게 되는 곧 미국으로부터 추방당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바그완은 포틀랜드에서의 심문 후에 '국외추방' 명령을 받았지만 그 통고서를 랜치의 변호사 6명이 면밀히 검토한 결과, 법률상의 결함이 발견되어 무효가 되었다. 톰 케이시 팀의 대실패였다. 그것으로 라즈니쉬를 쫓아내는 데 그들은 3년을 더 소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후 내가 스위스에 체재하고 있을 때, 평소 라즈니쉬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독일 잡지 vStenA에 랜치의 특집기사가 실렸다. 나의 이탈에 관해서는 기사의 2단이 할애되었는데 내 친구 암바라의 실종, 곧 죽음에 분개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즉시 랜치가 파시즘적 체제에 놓여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어떻게 이탈자를 박해하는지,그리고 랜치가 어떤 경로로 폭군의 감옥으로 전락 하였는지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여 vStenA에 투고했다. ySlevnA은 나의 투고를 가얀의 사진과 함께 크게 발표하였다. 가얀의 사진은 5년 전 바그완의 카메라맨이 푸나 교외에서 촬영한 것이었는데 폭포 아래서 헐리우드식의 전라(全裸)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또한 취리히에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디크샤를 만났다. 그녀는 숱한 번민과 방황 끝에 크리슈나무르티를 찾아갔다고 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바그완의 탁월함은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바그완을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특히 '바그완'이라는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는 것에 심하게 경멸하고 있었다. 신도 아닌 인간이 그런 경외스러운 극존칭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디크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도 했다. "나는 전세계로부터 '왜 이 사나이에 대해 반대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가' 라는 문의의 편지를 수천통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나이는 범죄자'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확실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가 영성(靈性)이란 미명 하에 사람들에게 행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입니다. 사람은 결코 어떤 특정인간(그는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에게 의식의 궁극적 표현인 '의지 결정권'을 맡겨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12년간에 걸쳐서 이러한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이해해 주십시요. 즉 그는 자신의 신봉자들로부터 부여받은 힘 이외에는 전혀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신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신봉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게는 좋은 것입니다. " 디크샤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이러한 통찰력에 마음의 안식처를 발견하였다고 했다. 나는 한동안 피신생활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런데 융(Jung) 심리학을 연구하는 지성과 매력을 겸비한 어느 여성의 초대를 받은 나는 그녀의 집에 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2개월 동안 나는 본서의 초고를 써내려 갔는데 그다지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막상 출판되었을 경우 바그완의 보복이 두려웠고,무엇보다도 공동체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키우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해인 1983년 5월 런던으로 돌아온 나는 세라피스트 그룹을 찾아 가 치료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런던센 터로부터 지령을 받아서인지 산냐시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알고 보 니 런던산냐스센터에서 비밀집회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나를 '악마' '네가 티브' '유다' 로 낙인찍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8월에 세라피 활동을 청산하고 말았다. 한편 오리건에서는 불법입국에 대한 조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톰 케이 시가 나의 거처를 알아내 연락을 해왔다. 내가 조사에 협력해줄 것으로 기 대했던 것이다. 급기야 런던 경찰청의 형사 두명이 나를 찾아왔다. 한편으로는 협조하 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로선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응하지 않기로 했다. 케이시가 런던까지 찾아왔지만 그에게는 나를 체포할 이유도 권한도 없었다. 이미 '라즈니쉬 화운데이션 인터내셔널'로 부터 쫓겨다니는 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까지 시달릴 이유가 없었던 것 이다. 내가 라즈니쉬 공동체를 벗어나 흔자 일어서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런던에 있는 몇명의 친구들은 어느 유명한 여자 심령치료사를 만나보도 록 내게 권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망설였지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도 소용 없었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해보기로 했다. 예약을 하기 위해서 전화를 하자 이미 2개월 후까지 차있다는 대답이었 다. 그러나 나의 병든 듯한 목소리에 위급함을 느꼈던지 그녀는 당장 내 일 스케줄을 잡아놓겠다고 하였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녀를 찾았다. 그녀의 방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 방안은 온통 개구리 인형으로 가득 차있었다. 작 은 수정구슬을 손에 든 그녀는 내 바로 정면에 앉아서 몇가지 간단한 질 문을 했다. 나는 나의 이름을 그냥 '휴'라고 밝히고 나서 나이와 자라온 환경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서서히 그녀의 눈 흰자위가 번득였다(이때 그녀의 눈동자가 사라졌다). 10년 전에 바그완에게서도 똑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질문 을 계속하더니 말했다. "당신은 신의 이름을 갖고 있군요." 그녀의 말에 나는 놀랐다. "어느 남자가 당신에게 신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인도인입니다. 그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됐습니다. 당신은 이 이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이름은 그만큼의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부여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결 코 노력해서 이 이름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두번 다시 이 이 름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 인도인 남자,그는 조금 머리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난 고 향을 뒤로 했습니다. 고향에 있을 동안에는 진실을 말했습니다만, 일단 그곳을 떠나버리자 탐욕스러워졌고 타락해 갔습니다. 이제 그는 밀려나 버렸습니다. 여성 그룹들이 그의 뒤를 인계받았으며 그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브나, 아니 바르카, 잠깐만‥‥‥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바브나에 가까운 이름입니다. 우선 그렇게 부르기로 하 겠습니다. 그는 머리에 이상한 것을 쓰고 있습니다. 뭔가 모자와 같은 것. 이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것 을 쓰고 있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숨기려는 것입니다. 그가 간 곳, 미국이군In 미국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폭력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 다. 그의 그룹에 있는 사람들,그의 가르침에 이끌려 그룹에 들어간 사람 들은 이제 돈 때문에 그곳에 남아있습니다. 그중의 다수는 신경쇠약증세 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그녀의 말은 묘하게 사람을 끄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나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한 내용이 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심장마비를 일으키려고 뭔가를 꾸미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있어서 방해자입 니다. 당신을 정리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에너지를 통해 당신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녀의 놀라운 통찰력은 계속 이어졌다. "이 사나이, 바브나, 그는 당신을 그동안 이용했었군오」 경호? 그는 그런 일을 시켜서는 안됐습니다. 그가 경호를 필요로 한 것조차 잘못이었습니다. 그가 경호를 필요로 했다는 것은 그만큼 주위에 수많은 적을 만 들고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진실한 성자(聖者)라면 경호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을 방어벽으로 자신에게 가해질 온갖 부정적인 요소를 해소시켜 왔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향해진 악한 에너지 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 그런 말을 들은 나는 다르샨 전에 행했던 냄새검사를 포함한 모든 보 안체제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이 심령치료사는 계속해서 내가 '바던나'로부터 많은 것들을 전수받았 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가 선물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그 선물을 통해서 나를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선량한 사 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받은 선물을 버려야 한다고 그녀는 충고하였다. "나쁜 영기(靈氣)의 정화법을 알고 있습니까?" 그녀는 물었다. "해로운 에너지를 다른 데로 돌리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사람들과 얼마나 함께 지냈냐고 질문을 하기에 10년이라고 대답하 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녀의 질문을 받고 나는 문득 부끄러워지며 나 자신이 완전히 보잘 것 없는 어리석은 자인 듯 느껴졌다. 그후로도 쉴라는 내가 새 삶을 꾸릴 수 없도록 계속하여 방해해 왔다. 나는 살아가는 데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남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고립시키는 데 있어서 그들은 전문가였다. 그들의 작전은 성공했다. 중국식의 교묘한 고문처럼 그것은 나의 주체성에 대한 감각을 파괴시켜 나갔던 것이다. 절망의 나날을 걷던 나는 마침내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해 나갈 수 없었다. '뻐꾸기 등지' 속 에 숨어버리면 쉴라는 승리를 선언하고 나에 대한 공격을 그만 둘 것이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몇주일만에 퇴원할 수 있었지만 신경안정제는 계속해서 복용해 야 했다. 우울증 증세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인생에서 일체의 기쁨이나 웃음이 사라져버렸고 오로지 실패만이 운명처럼 거듭거듭 내게 다가오 는 것 같았다. 수개월 후 나는 다시 취리히로 가서 한 친구의 도움으로 정골의 개업 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나의 병세도 상당히 호전되는 기미를 보였다. 인간관계도 원활하게 이루어져 갔고 일에도 재미를 붙여 갔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pPenthouseA에 전라의 사진이 실렸던 그 여성 산냐시로부터였다. 그녀 는 바그완의 특별 메시지를 내게 전했다. 제자 중 21명이 깨달음을 얻었 다는 사실과 그중에 나의 이름도 들어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화가 있고 나서 2주후, 나는 쉴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금박이 박힌 바그완의 전용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나에게 부여한 새로운 칭호가 들어있었다. '보디사트바 스와미 시바무르티'(Bhodhisatva Swami Shivamurti). '보디사트바'란 '이 생애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의미라고 했다. 그 리고 나의 이름 뒤에는 몇 개의 학위도 붙어있었다. 전(前) 산냐시라든가 배신한 녀석이라는 언급은 한마디도 쓰여있지 않았다. 쉴라가 쓴 편지의 수신인도 '휴'가 아니고 '사랑하는 시바'로 되어있었다. 이건 또 무슨 변화인가! 나는 바그완에게 간단한 답장을 쓰고 회복을 축하해 준 것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 뜻밖의 선물은 또 다른 그들의 사악한 유혹임이 분명하기에 나는 나의 입장을 명확히 해두려는 생각으로 편지에는 '휴'라고만 서명했다. 그리고 나서 3개월 후 나는 다음과 같은 바그완의 선언을 들었다.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이라는 발표는 모두 농담이었고 라즈니쉬 국제 명상대학(물론 공인받은 대학은 아니었다)으로부터 부여된 명예학위는 모두 취소한다. " 다음해 1984년 축제에서 쉴라는 3명의 산냐시가 AIDS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망자 이름은 공표되지 않았다. 그녀는 에이즈 예방을 위해서 섹스할 때는 콘돔과 고무장갑을 사용해야 한다고 바그완에게 제안했다. 바그완은 산냐시 간의 섹스행위에 대해 몇가지의 제한규정과 함께 그것을 승인했다. '섹스는 신성하다!'고 주장하던 봄베이시대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입술과 항문 성교도 모두 금지되어졌다. 그리고 게이(Gay) 커플은 모든 라즈니쉬 공동체로부터 떠나도록 명령 받았다. 런던에서는 섹스할 때 사용할 '제3의 고무장갑'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 산냐시 전원을 상대로 교육시켰다. 제3의 고무장갑이란 성교를 끝낸 후 앞서 사용한 2개의 장갑을 버릴 때 감염되지 않도록 사용하는 또 다른 고무장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랜치에 신축된 호텔 객실에는 깨끗하게 포장된 콘돔과 고무장갑이 사용설명서와 함께 침대 위에 단정하게 놓여졌다. 바그완은 '암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3분의 2가 죽을 것이다'고 예언했다. 랜치의 소식통에 따르면 1984년 8월, 여덟명의 산냐시가 성교의 공 식규정을 어겨 랜치에서 추방되었다고 했다. 또 반대로 최저 7년간 결혼 상대자 한명과 성관계를 가진 커플만이 고무장갑 없이 성교할 수 있다 는 규정도 있었다. 산냐시 중에 그런 커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무렵 나는 최면술을 배우려고 어느 교육에 참가했다. 강의를 듣다 보니 그동안 신기하기만 했던 바그완의 수법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긍정 반사'(YesResponse)가 있었다. 많은 청중을 앞에 놓고 바그완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여러분은 모두 진리를, 행복을,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였다. 여러분이 오늘 이곳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은 이 길을 걷고 있기 때문 이고 충만함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너무나도 당연한 이러한 말에는 누구나 '노우'라고 말할 수 없고, 그 결과 청중 전원이 수용적인 심리상태로 유입되어졌다. 이 시점에서 바그 완은 숙달된 최면술사가 되어 최면으로 옳겨가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마스터가 필요하다.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할 깨달음을 얻 은 마스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런데 일단 이 최면적 트랜스(초월적 몽환의 경지)를 위한 요건이 갖 추어지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상태가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 다. 기침하는 사람을 姿아내는 이유도 또한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하 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아아,그런 것이었단 말인가? 이제야 알겠어 !' 전문 최면술사들은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거부당할 발 언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대답을 끌 어내는 것('여러분은 누구나 행복을 필요로 하고 있다' 등)에 계속 신경을 기울이며 그리고 논리적으로 포장된 결론('깨달음을 얻은 마스터는 단지 한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등)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람을 몽환상태로 유도하기 위한 최초의 프로그래밍이 일단 성공되면 능숙한 최면술사는 간단한 말 한마디 또는 약간의 몸짓과 가 벼운 접촉만으로도 상대를 더욱 몽환상태에 빠뜨릴 수 있었다. 바그완이 강론 중에 자주 손을 일정하게 움직였던 이유와 다르샨 때 그의 손을 나 의 미간에 접촉했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바그완이 상대 목소리의 억양과 어조,사투리까지 흥내냈던 이유는 모두 상대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기 위한 것이거나 방어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느끼게 하여 마음의 벽을 허무는 방법이었다. 결국 그가 말하는 '포지티브'한 제자와 '네가티브'한 제자의 차이란 최 면술에 걸리기 쉬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 다. 후자는 '닫혀있다'라든지 '저항적'이라고 불렸다. 아무튼 바그완의 '비 우라!'는 말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바그완은 최면적 단계와 영적 단계의 양면에서 동시에 설득을 하였다. 1973년 나를 구릉지대에서 불러들일 때에도 그런 식이었다. 그는 칸막이 가 쳐진 방에서 장시간 그리고 집중적으로 최면에 필요한 에너지를 응 축시켰던 것이다. 바그완은 최면술과 영적 능력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을 사로잡았지만 그중에는 그 속임수를 한눈에 간파했던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버나 드 레빈은 맥없이 속아 넘어갔지만 워너 에어하트는 전혀 감동하지도 속지도 않았던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바그완을 범죄자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바그완이 법 을 어겼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최면술과 영적 능력의 악용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다. 산냐시와 바그완을 영적으로 연결시켜준 중심고 리는 말라였다. 따라서 말라의 착용과 반환은 곧 바그완의 곁에 있고 없 고를 구분하는 중요한 열쇠였던 것이다. 그 무렵 내가 런던과 취리히에서 하고 있던 정골의 일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나는 랜치라는 '마의 동굴'로부터 겨우 해방되었던 것이다. 반면 랜치의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주위의 원성에 몸살을 앓고 있었 다. 연방경찰의 수사망은 하루가 다르게 그 범위가 좁혀지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수많은 산냐시들이 목숨을 건 이탈을 감행하였다. 1984년 9월 쉴라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나는 다른 한쪽 帶을 내밀라고 하는 예수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 같으면 맞은 만큼 양쪽 睿 모두 세게 때려줄 것이다. 우리들은 각오 가 되어있으며 방어를 위한 무기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vOregonianA 신문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무기에 대해서 상세한 기 사를 썼다. "그들이 갖고 있는 기관총의 탄약은 오리건 경찰들이 가지고 있는 것 을 상회하고 있다. 게다가 SGW CAR-15 실전용 라이플 6정, Galil실 전용 라이플 15정, Springfield MIAI 실전용 라이플 7정, Roger Mini-14 라이플 3정, U逑 반자동 캐빈총 16정이 있다. " 더욱이 1백50명 정도의 산냐시가 '평화군'(Peace Forc끓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모두 무기사용에 대비한 훈련을 했다. 바그완과 쉴라는 공동체 전체의 관리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곤 반란의 기미를 사전에 적발하기 위해 라즈니쉬푸람 전체에 은밀히 도청장치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국에서 랜치의 위법 건축물들을 철거하라는 통고를 하자 쉴라는 다 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우리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불도저를 나의 피로 물들일 것입니다! 나의 친구들은 목숨을 건 희생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1984년 '제3회 월드 페스티벌'에서 그녀는 또 이렇게 외쳤다. "우리들은 극악한 파시스트 세력으로부터 일제히 공격을 받고 있습니 다. 이 공동체를 위해 우리들은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뿌리며 싸을 각오 입니다 !" 1984년 6월 바그완은 강론과 기자회견을 겸한 모임에서 "라즈니쉬푸 람이라는 신도시가 토지사용법을 위반하고 있다면 그런 법률이야말로 엉터리이기 때문에 태워버려야 한다. "고 말했다. 그해 10월 쉴라도 오리 건주의 관리를 랜치로 초대하여 시찰토록 하고 라즈니쉬푸람이야말로 오리건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희망이란고 그들에게 주장했다. "우리들은 떠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들을 내보내고 싶다면 이곳을 폭격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 그런데 '제3회 월드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바그완은 페스티벌이 한창일 때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번의 페스티벌이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산냐시는 어떠한 애로사항이 있더라도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래서 페스티벌에는 1만4천여 명이 모였지만 바그완은 결코 죽지 않았구 결국 그 소문은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것이 판명됐다. 드러난 사실은 아니지만, 랜치에서는 산냐시들의 불만과 원성을 가라 앉히기 위한 수단으로 '기분을 전환시키는 약을 주입하였다. 바로 환각제의 공공연한 사용이 행해졌던 것이다. 건설 감독을 맡고 있던 내 친구는 랜치를 도망치려다가 쉴라에게 발각되자 그녀는 억지로 그의 입에 약을 털어넣었다. 그에게 투여한 것은 최고 BS시간 환각상태가 지속된다는 할돌(Haldol)이라는 강력한 약이었다. 제 17장 종말. 다음해인 1985년은 라즈니쉬에게 치명적인 해로서 그의 예언은 전혀 맞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몬터리 근처에서 작은 지진이 있긴 했지만 그가 예언했던 캘리포니아의 대지진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제자가 백만명 이상이라고 주장했지만 그해 10월에 열린 '제4회 월드 페스티벌'에는 1만 2천명밖에 오지 않았으며 그 숫자는 3년 전의 제1회 때보다 수천명이나 적은 것이었다. 섹스를 할 때는 그 유명한 고무장갑을 사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후, 유럽의 산냐시 수천명이 떠나갔고 또 세계 각국의 라즈니쉬센터의 수도 격감하였던 것이다. 1985년 말에 이르자 미국의 센터는 랜치와 캘리포니아의 라구나 비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런던명상센터가 폐쇄되었으며 메디나 라즈니쉬는 11월에 50만 파운드에 매각되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도 그때까지는 라즈니쉬의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라즈니쉬 디스 코텍(베를린에 있는 디스코텍은 최고수준으로 알려져 있었다)만이 활황을 보였을 뿐이었다. 라즈니쉬운동은 미국 이외에도 5개국에 걸쳐 譏개 이상의 은행구좌를 갖고 있었고 스위스에만 적어도 12개의 구좌가 있었다. 또 주식회사, 재단법인, 연구소, 대학 등 24개의 조직이 전세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인도에 미납된 세금이 4백만 달러 이상 남아있었고 미국에서의 세금문제는 연방정부로부터 면밀한 조사를 받고 있었다. 뉴 멕시코 출신의 전 산냐시는 푸나에서 빌려준 돈을 변상해주지 않자 쉴라를 기소하여 1백70만 달러를 받아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랜치는 그들에게 향해진 증오에 침식되어 구성원들이 차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의료진의 책임자인 푸자는 혈액에서 AIDE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며 11명의 산냐시를 수개월간 완전한 격리상태에 두었다. 그러나 사실은 AES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랜치측이 도청하고 있다는 비밀을 이 11명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중 라자루스라는 이름의 게이가 독방 속에서 사망하자 오리건주 경찰은 그의 사인(死因)이 푸자가 조금씩 독을 투여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기도 했다. 1985년 여름 vOregonianA지는 라즈니쉬주의자들의 활동을 봄베이 시대 이전부터 소급하여 12항목에 걸쳐 철저히 조사하여 발표했다. 이 연 재의 타이틀은 '사랑을 위해서냐? 돈을 위해서냐?'(For Love or Money) 라는 실로 흥미로운 제목이었다. 이 연재가 시작되자마자 청소부로 위장한 두명의 여성 산냐시가 조사 자료를 없애려고 vOregonkanA사 내에 침입을 기도했다. 그러나 그 여성 들은 제복을 입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신분증명의 명찰을 달고 있 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또한 포틀랜드의 검찰총장인 찰스 터너 암살계획이 발각된 것은 11월 의 일이었다. 훨씬 이전부터 쉴라 외 5명의 산냐시들이 흥기의 출처를 숨기기 위해서 우선 뉴욕에서 위조 신분증명서를 입수한 후 텍사스로 날아가 권총을 구입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은, 그해 9월 연방 대배심원의 개정이 임박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쉴라가 돌연 랜치를 도망쳐 서독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러자 놀란 라즈니쉬는 뇌졸증을 일으킬 정도로 격분해서 쉴라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녀는 랜치를 강제수용소로 만들었다! 그녀는 독재자였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믿었던 쉴라의 도주가 라즈니쉬에겐 엄청난 충격이었겠지만 그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 라즈니쉬는 쉴라의 부정을 폭로하기 위해서 이민국 ·FBI ·세관 등의 조사관을 일제히 부르고 TV등 보도진과의 인터뷰에 빈번히 얼굴을 내 놓기 시작했다. 인터뷰 도중 기자로부터 "왜 항상 모자를 쓰고 있는가?"하는 질문에 그는 "나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그 것을 막기 위해서다!"고 대답했다. 나는 2년 전에 런던의 심령치료사가 했던 말이 연상되었다. 그의 모자 는 역시 타인의 사고를 차단하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라즈니쉬는 랜치에서 행해진 U여 가지의 불법행위를 상세히 설명하고 이 모든 것들은 쉴라가 한 짓이며,그 자신은 완전한 감금상태 에 있었다고 변명했다. "쉴라는 나에게 살의를 갖고 내가 마시는 우유를 공급하는 젖소에게 독약을 계속 투여하고 있었다. "고 진술하는 그의 표정은 실로 처참함 그 자체였다. 쉴라가 허등지등 도망치고 나자 마 프렘 하샤(Ma Prem Hasya)가 전 임비서 자리를 맡았다. 프랑스 태생의 48세인 그녀는 로스엔젤레스 사교 계의 유명인사로서 영화 vGodfatherA의 프로듀서였던 알 러디와 결혼한 적 이 있었다. 그 와중에서 대배심원, 이민국, 오리건주의 조사관들은 라즈니쉬를 계 속 추궁해 들어갔다. 그가 미국에 불법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민국에 거짓말을 계속해온 사실, 위장결혼을 교사한 사실, 정교분리(政敎分離)를 골자로 한 미국의 법률을 악용하여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서 선거운동을 했던 사실 등에 대해서 그들은 확실한 증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라즈니쉬 문제를 담당하는 포틀랜드 이민국 조사반은 이미 이 방면의 최고 전문가 7명을 거느린 정예부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라즈니쉬는 자신이 기소될 기미가 보인다면 1981년에 인도를 도망쳐 나왔듯이 이번에도 탈출하려 할 것이었다. 이를 포틀랜드 이민국도 충분 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밀리에 행동하였다지만 랜치측에서는 상황의 변화를 한발 먼저 알아내는 수단이 갖춰져 있었다. 10월 23일 일요일 아침, 대배심원의 주변에 있는 고급 관리로부터 35 가지의 기소요건으로 라즈니쉬를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가 긴급히 왔다. 체포 예정시간은 U시간 이내였다. 만일 모든 혐의점에 대해 유죄판결이 내려진다면 합계 175년의 징역은 면할 수 없었다. 체포가 임박하였다는 것을 안 라즈니쉬와 그 수하들의 행동은 민첩했 다. 오후 2시 포틀랜드에 있는 리어 제트기의 조종사는 한시간 이내에 라즈니쉬푸람으로 오라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그 조종사는 즉시 도착 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로부터 리어 제트기 한대가 더 도착하였다. 두대의 제트기는 라즈니쉬와 산냐시 8명을 태우고 이륙했다. 그 산냐시 중에는 비베3, 하샤, 그리고 쉴라가 떠난 6주 사이에 두각을 나타냈던 디얀 존 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고 악몽에서 깨어난 한 산냐시의 신고로 항공관 제소는 리어 제트기의 항로를 즉시 모니터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즈니쉬가 어느 비행기에 탔는지 알 수 없었다. 두대의 제트기는 각각 다른 방향을 향했는데, 한대는 연료보급을 위해서 콜로라도주의 푸에블 로에 착륙하였고,다른 한대는 유타주의 솔트 레이크 시티에 착륙했다. 그리고 나서 두대는 함께 동쪽을 향했으므로 그 진로는 틀림없이 미 국 동부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로트(Charlotte)를 목표로 하고 있는 듯했다. 샬로트에서 버뮤다(미국과 가까운 영국령 섬)나 낫소(미국과 가까운 바하 마의 首都)까지 가는 비행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라즈니쉬주의자들은 필 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미국을 벗어난 라즈니쉬가 비자 없이 체재할 수 있는 곳이 이 두군데밖에 없으며 리어 제트기로는 멕시코만을 횡단한다는 것이 불가 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샬로트 경찰에서는 그 제트기의 승객이 라즈니쉬주의자 들이라는 사실과 틀림없이 무장하고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접수되어 있 었다. 두 대의 제트기가 샬로트 공항에 착륙한 것은 월요일 아침이었다. 연 료탱크 부근의 덤불에 잠복해 있던 무장경찰들은 총을 겨누면서 기체를 포위했다. 그리고 전원 체포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연행된 후 활주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U구경 권총 한자루와 탑승객 전원의 여권이 들 어있는 비닐주머니가 발견되었다. 권총에는 방탄조끼도 관통한다는 테플 론 탄환이 채워져 있었다. 당일 라즈니쉬는 불법비행죄로 기소당했다. 그러나 주정부의 기소 절 차상 하자가 있었던 관계로 이 죄목은 삭제되고 위장결혼을 교사한 혐 의와 이민국에 허위신고를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비베3, 데바라즈(라즈니쉬의 주치의), 체테나(비베크의 새로운 부하) 등 3명은 이 도피비행을 교사하고 방조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4일 후 각각 2만5천 달러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는 금,다이아몬두 에메랄드 등으로 된 손목시계와 팔찌 등 수십 가지의 귀 금속과 현금 5만8천 달러가 발견되었고 그 합계액은 백만달러 이상이라 고 했다. 라즈니쉬는 독방에 구속되었으며 불의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 24시간 감시되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3년 전부터 랜치를 떠나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은 랜치에 남아 라즈니쉬에 대한 TV인터뷰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인터뷰는 유명한 vivightlineA TV프로로서 테드 코펠이 맡았다. 라즈니쉬는 회색의 죄수복 차림에 모자는 쓰고 있지 않고 매우 참혹 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위기에 몰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는 자신의 심경을 한마디 한마디 표현해 나갔다. Q) 바그완, 신자 중에는 당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 니다만 당국의 대우는 어떻습니까? A) 아주 만족하고 있다. 특히 샬로트 보안당국 그리고 여직원들은 상 당한 경의를 갖고 친철하게 대해주고 있다. 그러나 연방 보안당국으로부 터는 심한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체포영장도 없이 총으로 위협해서 나 를 체포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릴 필요가 없었는데 나를 이런 형편 없는 장소에 구속했다. 그 때문에 등뼈의 통증이 도졌으떠 기침도 심하다. 천 식이 재발한 것 같다. 그들이 내게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어떠 한 죄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Q) 그렇다면 당신의 범법 사실 여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만, 물론 최종결정은 재판소에서 하겠지요.그러나 버뮤다로 가려 했던 이유 정도는 해명하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A) 나는 많은 위협을 받아왔으며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서 친구 몇 명과 함께 소환장이 나을 때까지 안전한 장소에 있다가 소환 장이 나오면 바로 오리건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이상이 그 이유다. 나 는 소환장 때문에 도망치진 않았다. 소환장에 대해서 나는 아무 것도 모 르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 나오게 될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지난 일년간 계속 그러한 유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면 언제라도 돌아을 수 있다. 따라서 랜치를 떠난 것은 그저 신변의 안 전을 생각해서였다. 도망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용사다! 싸움 이 있을 때 나는 결코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 Q) 그렇습니까? 바로 한달 전 당신이 이 프로에 나오셨을 때, 인터뷰 를 한 사람은 나의 친구 찰리 깁슨이었습니다만, 그때 당신은 어떠한 상 황이 되더라도 결코 오리건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 그렇다.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Q!) 하지만 당신은 오리건을 떠났잖습니까? A) 아니, 그렇지는 않다. Q!) 분명히 오리건을 뒤로 하지 않았습니까? 버뮤다를 향해서 가셨던 것이겠지요. 게다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계셨다면‥‥‥‥ A) 그러나 나는 미국으로부터 도망치지는 않았다. Q) 하지만 그렇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A) 그렇지 않다! Q!) 그렇습니까? 아시는 대로 버뮤다는 미국 영토에 속해 있지 않습니 다만‥‥‥‥ A) 아니, 나 자신은 미국 내의 어딘가로 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친구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인지는 몰랐다. Q) 당신의 조종사는 버뮤다로 진로를 잡고 있었습니다. 모르셨습니까? A)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셈이었는지 나는 정말 몰랐다. Q!) 아,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런 말은 당신의 그룹에 속해 있지 않은 즉 당신의 신자가 아닌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 정 도는 아시겠지요? 뭔가 귀찮은 일이 일어날 듯하면 당신은 항상‥‥‥ A) 나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Q) 그 진실이 란 무엇임니까? A) 진실이란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다. 즉 그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한 것인지 나는 전혀 몰랐으며 나는 그들에게 행선지조차 묻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자고 있었다. O) 그렇습니까? 그러면 많은 것을 빼앗겨버린 지금, 어떠한 생각을 갖 고 계신지 들려주십시요 그리고 만일 지금 당신이 희망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A) 아무것도 빼앗긴 것이 없다. Q) 하지만 당신은 지긍 유치장에 있습니다. A) 그런 것은 문제가 안된다. 0!) 당신의 '자유'에 관한한 그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롭게 행 동할 수 없는 이상 문제가 되免 A)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이런 일은 며칠 내로 해결될 것이다. 건강상태가 조금 나쁘긴 해도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나의 싸움은 이추에 도 계속될 것이다. Q) 어디에서 싸운단 말입니까? A) 이곳에서도 계속되곤 이제 곧 오리건으로 돌아가면 그곳에서도 계 속될 것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때까지 미국을 떠날 생각은 손톱만큼 도 없다. Q) 바그완, 실례되는 말씀을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이도 아닌 어 른이 행선지도 모르는 채 비행기에 탄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한 행동이 아닙니까? A) 나는 ‥‥‥ 거의 모든 일을 친구들에게 맡기고 있다. Q) '친구들'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A) 그렇다. Q) 신자들이라구요? A) 그렇다. Q) 여기서 다시 한번 당신과 나의 친구인 찰리 깁슨과의 인터뷰로 되 돌아 가봅니다. 그때 당신은 맹세코 자신에게 신자는 없다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A) 당신이 그들을 '신자'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에 맞춘 것뿐이다. Q)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두번이나 물었던 것입니다. 질문을 반보하 것은 그 때문입니다. A) 당신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신자라고 생 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신 이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랜치에 있는 동안 나는 계속 고립되어 있 었고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나는 그 기간에 일어난 모든 일fl 대해서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이다. Q) 알겠습니다. 결국 당신은 비행기에 타고 있을 때도 자고 있었으며 행선지도 몰랐다고‥‥‥ A) 그렇다. ' G) 사태를 알고 있는 게 좋지 않을 듯 할 때면, 당신은 자고 있기도 하고 그곳에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신 은 종교도 가지지 않았으며 어떠한 집단의 리더도 아니라는‥‥‥‥ A) 그렇다. 나는 리더가 아니다. 나는 한 사람의 친구이자 안내자of 것이다. Q) 친구고 안내자인 사람이 신자도 아닌 사람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아왔다는 것입니까? A)그렇다. 친구로부터 돈을 받아도 별로 상관없는‥‥‥‥ Q) 아아, 상관없고 말고요. 그러나 90대의 롤스로이스는 아무리 뭐라 고 해도 좀‥‥‥ 비록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라 해도 지나치다고 생각합 니다만. A) 내게 지나친 것은 아무것도 없다. Q) 어째서 그렇습니까? A) 비록 그것이 9백대라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미국의 법정에서 확실히 승소할 자신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미국 헌법을 믿고 있으며 미국 국민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전인류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나라 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국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미국 정치가들 을 상대로 싸을 작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민주주의와 헌 법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산냐시들)은 나의 친구다. 이 생 각은 여러분에게는 신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느껴 질 것이다. Q)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드립니다만, 다이아몬드가 온통 박힌 손목시계와 롤스로이스를 줄 만한 친구가 내게는 한사람도 없으며, 그러한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한편 라즈니쉬와 그 공모자들이 샬로트에서 기소되던 바로 그날, 쉴라와 두 사람의 수하도 숙박 중인 서독의 호텔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의 체포에는 FBI와 오리건주의 조사반이 입회인 겸 체포를 돕기 위해서 가담했다. 그들은 살인공모, 살인미수, 그리고 제1급 폭행죄로 기소되어 여성용 유치장에 보내졌던 것이다. 라즈니쉬의 전임비서 하샤는 쉴라의 방식을 본받아 미국 법정에 폭언 을 퍼부어댔다. 샬로트 법정에서는 재판장이 그녀의 표적이 되었다. "나는 상당히 화가 나있습니다. " 그녀는 법정에서 큰소리치며 말했다. "재판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와 됫거래를 하고 있는 것 아닙 니까?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성실한 그리스도교 국가인 미국에서 설마 바그완에게 불리한 판결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미 법 정 자체가 편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그완은 이 나라에 사랑을 표명 해 왔으며 4년동안이나 이 나라에서 살기 위해 싸워왔는데‥‥‥‥ 그러나 버뮤다행 계획에 대해서는 그녀도 인정했다. 라즈니쉬는 시종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며 등뼈의 통증을 호소했다. 하샤는 TV리포터에게 "바그완은 유치장에서 죽을지도 모릅니다!"고 외쳤고, 라즈니쉬 자신은 지병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 싸워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용사다! 우리들은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그런데 라즈니쉬에 대해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매스컴을 향해 하샤는 다음과 같은 경위를 공식발표했다. "우리들의 교주는 '휴양을 위해서' 노스캐롤라이나로 가려고 했을 뿐입 니다. 미국을 깊이 사랑하는 그가 어떻게 국외 도주를 생각할 수 있겠습 니까? 휴양 후에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곧 오리건으로 돌아을 예 정 이었습니다. " 그러나 2주동안 미국 각지의 유치장을 전전하던 라즈니쉬는 결국 11 월 13일 포틀랜드 재판소에서 그의 혐의 중에서 비교적 가벼운 위장결 혼 교사죄와 정부에 대한 허위신고죄,두 건만은 겨우 시인했다. 마침내 그에게는 脚만달러의 벌금이 과해졌고5일 이내의 국외추방령 이 선고되 었다. 그러나 이 판결은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결백을 주장하는 라즈니쉬의 말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인했음에도 불 구하고 놀랄 만큼 가벼운 것이었다. 그것은 당국의 최우선적인 목표가 한시라도 빨리 그를 미국 밖으로 쫓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미국을 떠나기만 하면 랜치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기막힌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미국에 체재하고 있었다. TV에서는 수갑에 채워져 법정으로 가는 라즈니쉬가 연일 비쳐졌다. 그 표정에는 초췌함과 환멸이 깃들어 있었다. 카메라의 조명을 받자 라즈니 쉬는 보도진에게 인사를 하면서 과거의 쇼맨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는 자신을 '수퍼 스타'라고 생각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세계의 수천명이나 되는 산냐시들은 사건의 진행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의 옛 친구 중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를 하고 있는 전 산냐 시는 TV에 비친 라즈니쉬의 인상을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Ui에 비친 그를 보고 놀라움과 동시에 불쌍한 생각도 들었어. 인도 에서는 누구도 감히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여기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여론에 라즈니쉬의 가면이 여지없이 벗겨져 버리더군. 확실히 라즈니쉬 입장에선 분개와 좌절감을 느끼겠지만 그가 탐욕스런 거짓말 쟁이라는 사실은 이제 세살짜리 아이도 알 수 있어." 라즈니쉬가 추방당한 직후부터 랜치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가 미국 을 떠나고 2주일 후에 랜치의 폐쇄를 알리는 공식발표가 있었고, 남아 있던 천여 명의 산냐시들은 '푸나의 최후'와 똑같은 상황이 자신들에게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이상 공동체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었고 게다가 기온은 연일 영하 6도까지 내려갔다. 많은 산냐시들은 무일푼에다 여분 의 옷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해서 랜치측은 경제적 지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2∼3개월 전부터 '데빗 카드'(Debit Card)라는 크레디 트 제도가 랜치에 도입되어 있었지만 11월 22일자로 그 제도는 정지되 었다. '파산'하고 있다는 구실 하에 랜치측이 산냐시들의 신용대출을 중 단한 것이 었다. 그래서 푸나와 마찬가지로 대탈출극이 재현되었다. 산냐시들은 콜렉트 콜(요금 수신자 부담)로 부모나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귀향비용을 보내달 라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나의 추측으로는 이 사건 당시 '라즈니쉬 화운데이션 인터내셔널'과 그 관련단체의 총자산은 5천만 달러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 자금의 대부분 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방정부의 수사가 있었어도 정확한 금액은 밝혀낼 수 없먼다. 그의 롤스로이스 중 9대를 제외한(이 9대는 몰래 인도로 수송할 계획이었다) 나머지 모두는 텍사스의 어느 업자 에게 5백만 달러에 매각되었다. 당국에 의해 정체가 폭로되어 위신이 실추된 라즈니쉬지만 그 도피행은 왕의 여행과도 같았다.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잔뜩 껴안은 채 호화 로운 호텔을 전전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랜치에서는 남겨진 사람들 이 절망의 황야에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일찍이 대단한 듯 이 여겨졌던 사랑과 평화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 갔다. 그들은 마음을 비우면 무조건의 사랑을 준다고 약속했던 교주에게 버림받았고 이제는 무일푼의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런데 라즈니쉬는 랜치를 떠나기 전에 라크슈미를 다시 불러들여 인 도에서 체재할 만한 곳을 찾으라고 지시하였다. 거짓말쟁이이자 교활한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고 랜치에서 雲겨난 후 그녀는 3년간이나 암에 시 달렸는데 결국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라즈니쉬 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그녀는 과거의 울분을 잊은 채 바로 행 동을 개시하여 인도로 날아갔다. 인도에 돌아온 라즈니쉬는 즉시 미국에 대하여 욕을 하기 시작했다. "만일 지옥을 체험해 보고 싶다면 미국으로 가라!" 그가 주장하는 바로는 랜치의 공동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이 상향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에서 4년간 공동체생활을 하는 동안 강 간과 범죄는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이는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아 인구억제에도 공헌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동체의 장점을 과장되게 부 각시키는 반면,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In명의 '평화군'과 성교 때 콘돔과 고무장갑의 착용을 강조했던 것,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환각제를 광범위 하게 사용한 것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또 AIDS에 걸리지 않은 자를 에이즈 환자라고 진단해서 격리시킨 일, 반항자용 독방, 전화도청, 우편물의 무단검열, 정직하고 착한 랜치의 주 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소송, 그리고 공동체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최후의 분열을 조장한 사실도 라즈니쉬는 모른 체하였다. 더욱이 자신이 뭔가 과오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쉴라의 책임이었으며 그 자신은 3년간 '은둔의 침묵상태에 있었다'고 강변했던 것이다. 라즈니쉬에 의하면, 그는 강제로 미국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라즈니쉬 푸람은 미국사회의 실태를 폭로하고 그 문화의 근저를 밑바닥으로부터 개조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청렴결백하고 깨달음을 얻은 현 자를 미국정부는 부당하게 감옥에 넣었던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랜치는 3천5백만 달러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인 도에 돌아오자마자 인도정부는 채권자의 손실을 변상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의 일환으로 푸나의 아쉬람을 압류했다. 인도정부와 미국정부는 라 즈리쉬 자산의 불법유출이 행해지지 않도록 계속 감시하였으므로 결국 라즈니쉬는 그 자신의 국제적 게임에서 결정적인 허를 찔린 것이었다. 그는 라크슈미와 함께 인도로 돌아와서 처음 1개월 동안을 고급호텔 에서 보냈다. 그러나 두사람은 2만 달러의 요금을 지불하지 않은 채 도 둑과 같이 한밤중에 호텔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내가 라즈니쉬운동에서 벗어나자 주위 친구들은 '자기 자신을 되돌릴' 때까지는 최소한 1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정상적인 본래의 모습을 찾기까지 1년은 커녕 3년 이상이 소모되었다. 장기간 라즈니 쉬와 함께 지낸 사람은 예외없이 분노와 비통함을 동반한 엄청난 상실 감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데 크나큰 곤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라즈니쉬를 만나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할 때까지 꼬박 3년이나 걸렸지만 전 산냐시인 친구와 함께 정골의로서 일하고 있는 지금의 내 경우는 오히려 행운인 편이다. 어리석은 마스터일수록 자신의 주변에 가능한 한 많은 추종자들을 모 으게 된다. 라즈니쉬라는 인물은 제자들을 다루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갖 추고 있었지만, 그가 끊임없이 많은 제자들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자기 왕국 내에서 안주하기 위해서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조사해 보면 이러한 현상이 결코 희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라스푸틴, 히틀러,무솔리니가 그랬다. 그들은 모두 카리스마적인 강력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을 교묘히 조종하여 자 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결국에는 양심조차 버리게 했던 것이다. 존스타운에서 일어난 인민사원(人民寺院)의 비극이 좋은 예이다. 짐 존 스의 제자들은 개개의 인격을 잃고 그들의 마스터에게 완전한 노예가 되어있었다. 우리 산냐시들도 그때 만일 라즈니쉬에게 죽음을 명령받았 다면 그렇게 했블 것이다. 추종자란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교주의 힘을 강하게 만들 어 간다. 그리고 그 힘은 부(富)와 비밀에 의해서 더욱 증폭된다. 라즈니 쉬는 자신의 심복을 만들어 그들의 생활을 마음대로 관리하고 조종하였 다. 그리고 심복들을 자신의 주변에 묶어두기 위하여 경제력을 조종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라즈니쉬는 인간관계나 물질세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93대나 되는 롤스로이수 자가용 비행기, 궁전과 같 은 저택 등을 향유하였던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에 대한 소유욕을 일체 갖지 말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신과 비베크와의 관계는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유지시켜 나갔다. 라즈니쉬는 평소에 자신이 주장하는 진리야말로 유일한 진리로 간주 하였고, 동의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바보취급을 했다. 또 제자들이 라즈니쉬 자신과 조직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 다. 그의 왕국은 초기부터 비밀주의, 표리부동, 가면, 그리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과장된 선전 등에 의해서 유지된 것이었다. 라즈니쉬푸람의 모든 시나리오는 라즈니쉬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아마 이 문제에 있어서는 쉴라가 라즈니쉬의 꼭두각시 인형이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 구구한 해석이 나을 수 있다. 디크샤는 '서로 맞물리는 관계'라고 했는데 어쩌면 이 말이 가장 적절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요가 교주는 그 가르침대로 독신으로 일관하며 고행하지만 탄트라의 교주는 보다 자유롭고 자극적인 가르침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떠한 교주 라 할지라도 제자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도덕적 ·법률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라즈니쉬는 그 모든 것을 짓밟아버린 것이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해 석하려 해도 또는 아무리 창조적인 해석을 덧붙이려 해도 다음과 같은 분명한 사실은 은닉할 수가 없다. 즉 공동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약속했 는데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는 척하면서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순식간 에 살인적인 모래바람이 되어 그들을 삼켜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운동은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본서에 의해 서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갖게 되구 그래서 라즈니쉬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 지도자에게 지성과 양식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왜, 어떻게, 이끌려 갔 는가 하는 의문에 조금이라도 해답의 실마리가 되었으면 다행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했듯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자기 삶의 결정권을 주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사실이다. 國 역자 후기 혹자는 라즈니쉬를 성자라 부른다. 또 어떤 이는 그를 '살아있는 신'이라고까지 한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민하였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권씩의 책을 읽어나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와 눈길이 닿지 않은 철학서와 경전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가슴은 특별한 열망으로 끓어 올랐다. "이제 침묵의 시간은 종쳤다. 이를 깨달음이라 하자."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의 가슴 속을 메웠던 열망은 순식간에 번득이는 칼날로 변했다. 수십년 동안 갈고 닦은 해박한 지식과 쇼맨적 기질로 그는 사람들의 심장을 하나하나 도려내 나갔다. 그의 최면술에 이끌린 사람들은 광란의 '프리 섹스'와 짜릿한 환각의 세계를 부여받은 반면, 살아있는 신에 대한 끝없는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른바 사회의 도덕과 법률이 미치지 못하는 신의 세계가 탄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병과 마약과 온갖 범죄로 얼룩진 '타락한 신'이 지배하는 묘한 왕국이었다. 이 책은 약 10년 동안 라즈니쉬와 함께 생활하며 그의 전속 카메라 맨 ·경호대장 등 측근 역할을 했던 휴 밀른(Hugh Milne)의 『BHAG- WAN: Re God RatFaiZe端를 번역한 것이다. 라즈니쉬라 하면 이미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최고의 성자라는 찬사와 함께 그의 해박한 지식은 우리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논리로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기 뜻을 관철시켜 나가는 그 과정과 방법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많을 것 같아 독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는 바이다. 명상도 좋고 정신의 행복도 좋다. 허나 그것이 더불어 함께 공감되고 공영되지 못한 채 자기 혼자만의 자위에 그친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독자들의 냉철한 판단에 맡긴다. 1993. 7. 白獄齋에서 *역자 최승규는 1986년 고려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후 여러 출판사 편집장을 지냈다. 현대 문학 철학 ·사상 등에 몰두하며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