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찾아서 2권 지은이: 오쇼라즈니쉬 출판사: 계몽사 쿤달리니 에너지의 상승 나르골(Nargol)의 명상캠프에서 당신은 삭티파트(Shaktipat)의 의미를 신(The Divine)의 에너지가 구도자에게 하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삭티파트와 은총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이 두 가지는 다소 차이점이 있는 동시에 유사성도 있다. 사실, 이 두 가지의 범위는 서로 겹치는 면이 있다. 삭티파트는 신(The Divine)의 에너지다. 실제로 신의 에너지를 제외한 다른 에너지는 없다. 삭티파트에서는 한 사람이 매개체로 작용한다. 궁극적으로는 이것 또한 신의 작용이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는 신의 에너지가 작용하는 수단으로 한 개인이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것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번갯불고 집안을 밝히는 전깃불에 비교할 수 있다. 그 에너지는 똑같다. 그러나 집안을 밝히는 전깃불은 매개체를 통해서 온 것이다. 그 뒤에는 인간의 손길이 숨어 있다. 번갯불도 똑같은 에너지다. 그러나 번갯불은 인간을 통해 온 것이 아니다. 인간이 멸망해도 번갯불은 여전히 하늘을 가로지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멸망하는 순간 전구는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삭티파트는 전구와 같다. 거기엔 인간이 매개체로 작용한다. 반면, 은총(grace)은 하늘의 번갯불이다. 거기엔 매개체의 도움이 필요 없다. 이 에너지를 얻은 사람, 신과 접촉한 사람은 매개체로 기능할 수 있다. 그는 그대보다 더 훌륭한 수단이다. 그는 신의 에너지에 친숙하다. 그 에너지의 작용에 익숙하다. 그러므로 그를 통하면 에너지가 더 신속하게 그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는 효율적인 매개다. 두 번째로,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잘 조정된 통로의 역할을 한다. 이 통로에 의해 그대의 능력에 적합한 만큼의 에너지가 들어온다. 그대는 전깃불 아래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 전깃불은 잘 조정된 불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갯불 아래에서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번갯불은 조절되지 않은 빛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연히 은총의 상태에 들어가 매개체의 도움 없이 별안간에 삭티파트가 일어난다면, 이 때 그는 미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많다. 그의 수용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리 환희에 넘치는 경험이라 해도 이렇게 생경하고 정도에 넘치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경험이 된다. 이것은 몇 년 동안 어둠 속에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밝은 태양 아래서는 것과 같다. 그는 태양의 빛을 보기는커녕 더 깊은 어둠을 맞을 것이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는 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릴 것이다. 때로는 그대도 사이에 모르는 무제한적인 은총의 에너지가 들어오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은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불시에 습격을 당하는 꼴이다. 따라서 큰 재앙이 빚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 은총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삭티파트의 경우에 이런 재앙이 일어날 확률이 드물다. 거의 제로에 가깝다. 매개체로 작용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매개체를 통과하면 서 에너지가 부드럽고 순하게 된다.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에너지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는 그대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에너지만 통과시킨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는 에너지의 수단이며 통로일 뿐이지, 이 에너지의 근원은 아니다. '내가 삭티파트를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완전히 틀렸다. 이것은 전구가 '내가 빛을 준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빛은 전구를 통해 발산된다. 그러므로 전구는 '내가 빛을 창조한다.' 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구는 빛의 근원이 아니다. 다만 빛이 현현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삭티파트를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전구와 똑같은 환상에 빠진 것이다. 전이되는 에너지는 언제나 신의 에너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매개체로 작용하면 우리는 이것을 삭티파트라고 부른다. 매개체 없이 이 에너지가 직접 하강하면 해를 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면, 끈기를 갖고 꾸준히 명상해 왔다면, 이때는 삭티파트가 은총의 형태로 일어날 수 있다. 이 때는 매개체가 없어도 아무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끈질긴 기다림과 인내, 흔들림 없는 헌신, 굳건한 결의가 무한한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 때는 아무 재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신의 에너지가 그대를 찾아오는 것은 매개체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불문하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매개체가 없는 겨우, 그대는 이것을 삭티파트가 아니라 저 너머에서 오는 은총으로 느낄 것이다. 이렇게 차이점과 유사성이 공존한다. 나는 가능한 한 은총의 편에 서고 싶다. 가능한 한 매개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방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매개체가 그들에게 신의 에너지를 부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에고가 없는 사람만이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때 위험율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에고가 없는 사람은 매개체로 기능하는 동안에 구루(guru)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라는 에고가 사라졌다. 그러므로 구루가 될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구루가 된 사람은 그대와의 관계 안에서 구루가 된다. 그는 그대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매개체로 작용하는 사람은 우주적 존재(universal being)와의 관계 안에서 일한다. 그는 그대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는다. 이 차이점을 이해하겠는가? 신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에고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와 관련된 상황에서는 에고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루는 구루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사드구루(sadguru), 완벽한 스승에 대한 정의 는 '구루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 말은 스스로 구루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구루가 될 자격이 없음을 뜻한다. 자신을 구루로 내세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구루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보다 더한 무자격자는 없다. 이것은 그의 에고를 보여준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 에고가 완벽하게 사라진 공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사실 '그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말도 틀렸다. '그는 매개체다.'라고 말해야 옳다. 이런 사람의 곁에 있을 때, 그의 현존을 통해 삭티파트가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엔 아무 위험이 없다. 그대에게도 위험이 없고, 매개체에도 위험이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는 은총을 선호한다. 에고가 주고 더 이상 '개인'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면 삭티파트는 거의 은총이 된다. 매개체에 '나는 매개체다.'라는 의식이 없을 때 삭티파트는 은총과 거의 같아진다. 그럴 때는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해프닝(happening)이 일어날 수 있다. 그대의 눈에는 그가 하나의 개체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대를 향해 뻗는 신의 손이 되었다.' 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런 사람은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의 말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이 '나'는 절대자(the Supreme Self)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언어를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크라슈나(Krishna)가 아르주나(Arjuna)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내게 복종하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기에 감히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해 왔다. 크리슈나의 말은 그의 에고를 확인시켜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에고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나'는 크리슈나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손이 뻗어 나간 것이다. '내게 복종하라.'고 말한 존재는 크리슈나의 뒤에 숨어 있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내게 복종하라. 유일자에게 복종하라." 맘 에캄(mam ekam), 이 유일자라는 말은 매우 소중하다. '나'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다수의 '나'가 존재한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나'가 유일자(the only One)가 된 지점에서 말한다. 이것은 에고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는 에고의 언어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한 말을 에고로 가득 찬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자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는 필연적으로 착각이 따른다 다른 하나는, 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여기엔 착각의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처럼 개인의 에고가 작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궁극적인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다. 삭티파트와 은총은 표면적으로 크게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심에서 보면 아주 가까이에 있다. 나는 삭티파트인지 은총인지 구별하기 힘든 상황을 선호한다. 그런 상황만이 유용하고 가치 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승려가 큰 잔치를 열어 스승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누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인지 물었다. 그는 항상 '내게는 스승이 없다. 스승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잔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꼬치꼬치 묻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사람들은 굽히지 않았다. "당신은 스승의 날인 오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스승이 있다는 말입니까?" 승려가 말했다. "나를 궁지에 몰지 마시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사람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이 잔치는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스승이 있습니까?" 승려가 말했다. "이렇게 끈질기게 파고드니 몇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오늘 나는 내 스승이 되기를 거부했던 한 분을 떠올렸습니다. 만일 그가 나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거부당했을 때 나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분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원하기만 했다면 그는 내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내 청을 거절했습니다. " 사람들이 물었다. "아니, 당신을 거절한 사람에게 무엇을 감사한단 말입니까?" 승려가 말했다 . "그는 내 스승이 되지 않음으로써 어떤 스승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따라서 내가 입은 은덕도 두 배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내스승이 되었다면 우리 서로가 주고받은 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르침을 주고 나는 엎드려 절하면서 경의를 표했겠지요. 그런데 그는 내 스승이 되지도 않았고 존경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게 입은 은덕은 두 배가 되는 셈이지요. 이것은 철저하게 일방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엄청난 것을 주었지만 나는 감사를 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감사할 기회조차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는 삭티파트와 은총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만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을 멀리해야 한다. 차이점이 없을수록 좋다. 나는 은총을 강조한다. 삭티파트와 은총이 아주 가까워져서 구분조차 불가능한 날이 온다면, 이때 궁극의 일이 올바르게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알면 된다. 집 안의 전기가 하늘의 번개처럼 무제한적이고 자연적인 에너지가 되었을 때, 전구가 더 이상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때, 그 순간에 삭티파트는 은총과 동일하다. 내가 말한 바를 명심하라. 나르골(Nargol)의 명상 캠프에서 당신은 '내부로부터 에너지가 솟아올라 신에게 도달하거나, 신의 에너지가 하강하여 내면으로 스며들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당신은 내면에 잠자는 에너지가 무한자(the infinite)의 엄청난 에너지와 만날 때 폭발이 일어나며, 그 폭발이 곧 삼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하스하르(sahasrar)차크라까지 올라가는 쿤달리니의 상승과 신의 은총은 같은 것입니까? 하나의 에너지만으로는 폭발(explosion)이 일어날 수 없다. 폭발은 두 에너지의 통합이다. 하나의 에너지로도 폭발이 가능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폭발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것은 성냥갑과 성냥개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패로는 무한한 세월이 흘러도 불꽃이 일어날 수 없다. 성냥갑과 성냥개비의 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소용없다. 0.5센티미터가 떨어져 있건 25센티미터가 떨어져 있건 아무 차이가 없다. 불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폭발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성냥갑과 성냥개비의 마찰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불을 얻을 수 있다. 성냥갑과 성냥개비 들 다 안에 불이 잠재해 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갖고 불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두 에너지가 만날 때 폭발이 일어난다. 내면에 잠자는 에너지가 사하스라르 차크라까지 상승해야 한다. 그래야 통합이 일어난다. 그래야만 폭발이 가능해진다. 에너지가 사하스라르 차크라까지 올라가지 않는 한 통합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바깥에 태양이 빛나는데 그대의 문이 닫혀 있는 것과 같다. 태양 빛이 그대의 문 밖에 있다. 그대는 집 안에서 이동하여 문 앞까지 다가선다. 그러나 여전히 그대는 태양 빛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문을 열어야만 태양 빛과 접할 수 있다. 쿤달리니의 최후 지점이 사하스라르다. '사하스라르'라는 문에서 은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신은 이 문에서 항상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대가 문은 열고 나오지 않는다. 그대는 집 안 어딘가에 앉아 있다. 그대가 문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 곳에서 통합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통합은 폭발의 형태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폭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가 즉각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 이상 전재하지 않을 것이다. 성냥갑은 많겠지만 성냥개비는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대'라는 성냥개비는 재가 되어 형상 없는 세계로 사라질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났을 때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실종될 것이다. 그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문 뒤에 있던 그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문 밖에서 기다리는 자만 남을 것이다. 그대는 그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이런 폭발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대가 무한한 우주적 에너지에 도달해야 한다. 잠자는 에너지가 깨어나 사하스라르 차크라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 곳에 우주적 에너지가 기다리고 있다. 쿤달리니의 여행은 그대의 잠자는 센터(center)에서 출발하여 그대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끝난다. 물질적 육체라는 하나의 경계선(boundary)이 있다. 우리는 이 경계선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영역이 있다. 만약 내손이 절단되어도 내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발이 잘려나가도 크게 달라지는 점이 없다. 나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눈과 귀가 없어도 나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육체라는 범주는 그대의 실제적인 범주가 아니다. 그대의 실제적인 범주는 사하스라르 센터다. 이 센터를 넘어서면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계선은 넘어서자마자 그대는 사라진다.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쿤달리니는 그대의 잠자는 에너지다. 이 에너지의 범주는 섹스 센터로부터 정수리 센터까지 뻗어 있다. 우리가 몸의 다른 부분과는 동일시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얼굴, 머리와의 동일시를 떨쳐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손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이 얼굴은 내가 아니다.'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얼굴과 머리가 한계다. 인간은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지성은 버릴 수 없다. 한때 소크라테스(Socrates)가 만족(contentment)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만족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당신은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와 만족하는 돼지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하고 물었다. 소크라테스가 응답했다. "나는 만족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만족하는 돼지는 자신의 만족을 인식하지 못하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신의 불만족을 의식할 것이다." 이 사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린다해도 지성만큼은 버리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불만스러운 지성이라 해도. 지성은 마지막 차크라인 사하스라르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두 개의 경계선이 있다. 하나는 섹스 센터다. 이 센터 이하의 차원에서 자연의 세계가 시작된다. 섹스 센터에서는 나무, 새, 동물, 인간 사이에 아무 차이점이 없다. 인간에게는 이 센터가 첫 번째 출발점이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에게는 이 센터가 최후의 한계다. 섹스 센터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는 우리 인간 또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다른 한계는 지서이다. 지성은 우리의 두 번째 경계선 근처에 있다. 이 경계선을 넘어선 곳에 신이 있다. 이 지점을 넘어섰을 때 우리는 인간에 그치지 않는다. 그 때 우리는 신이다. 이것이 우리의 경계선이다. 그리고 이 경계선 사이에는 우리의 에너지가 움직인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잠들어 있는 저수지는 섹스 센터 근처에 있다. 인간의 생각, 꿈, 활동의 99퍼센트가 그 지점 근처에서 소모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문화적인 색깔을 칠하고 그럴 듯한 구실을 갖다 붙여도 인간은 오로지 그 지점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섹스 센터 근처에서 살아간다. 돈을 버는 것은 섹스를 위해서다. 그 모든 행동의 뿌리에서 우리는 섹스를 발견한다. 이해의 차원에 도달한 사람들은 인간이 꿈꾸는 두 가지 목표에 대해 말한다. 섹스와 해탈이 그것이다. 부와 종교라는 다른 두 가지 목적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부는 섹스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성적인 시대일수록 부를 지향하며, 해탈을 구하는 시대일수록 종교를 지향한다. 부가 수단이듯이 종교 또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해탈을 갈구한다면 종교가 그 수단이다. 반면에 성적인 만족을 원한다면 부가 그 수단이다. 이렇게 두 가지 목표와 두 가지 수단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두 개의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그대는 어디에서도 휴식을 취하거나 멈출 수 없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해탈에 대한 열망이 없을 때 사람들은 큰 어려움에 처한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해서 섹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때도 그들은 끔찍한 곤경에 처한다. 그들은 섹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지만 해탈을 위한 센터 근처로 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회의와 의심의 수렁에 빠져 버린다. 이것은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옥 같은 상태다. 그들의 삶 전부가 온통 내적인 혼란으로 채워진다. 중간 상태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며 아무 의미도 없다. 이것은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이 중간에서 멈춰 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올라가거나 내려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사다리는 집이 아니다. 사다리 중간에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 사다리의 중간 지점에 체류하고 있는 것보다 무용한 짓은 없다. 중간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사다리의 꼭대기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인가 할 수 있다. 척추는 사다리와 같다. 각 척추뼈는 이 사다리의 칸이다. 쿤달리니는 가장 낮은 센터에서 출발하여 가장 꼭대기에 도달한다. 쿤달리니가 가장 높은 센터에 도달했을 때 필연적으로 폭발이 일어난다. 그리고 쿤달리니가 가장 낮은 센터에 머물 때는 필연적으로 성적인 배설, 사정의 양상을 띄게 된다. 이 두 가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쿤달리니가 가장 낮은 센터에 있을 때는 성 에너지의 배설이 필연적이다. 그리고 쿤달리니가 가장 높은 센터에 도달했을 때는 반듯이 폭발이 일어난다. 두 가지 다 폭발이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타인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성의 배설에는 타인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상상을 통해서라도 타인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에너지 전부가 성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성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그대는 성적인 차원 이상의 존재다. 그대는 이지점보다 훨씬 진보해 있다. 동물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만족한다. 따라서 그들은 해탈을 구하지 않는다. 만일 동물들이 경전을 썼다면 그들은 두 가지 간절한 목적에 대해 썼을 것이다. 부와 섹스가 그것이다. 물론, 부는 동물의 세계에서 다른 양상을 띨 것이다. 살이 더 많고 힘이 강한 동물이 더 부유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는 성적인 경쟁에서 다른 동물을 이길 것이다. 이것 또한 일종의 부다. 신체에 남아 도는 여분의 지방질이 그의 재산이다. 인간 또한 동물의 세계에서 지방질로 전환될 수 있는 부를 갖는다. 한 명의 왕이 천 명의 왕비를 거느릴 수 있다. 부의 정도가 부인의 수에 따라 평가되는 시절이 있었다. 가난한 남자가 어떻게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릴 수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교육 수준과 돈이라는 기준이 등장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옛날에는 부인의 숫자가 유일한 부의 척도였다. 우리가 고대의 영웅들을 찬미하기 위해 그들이 거느린 부인의 숫자를 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다. 예를 들어, 크리슈나는 만 육천 명의 부인이 있었다. 크리슈나의 시대에는 그의 위대함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크리슈나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부인을 갖고 있는가?"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만 육천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래야 강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인구 폭발이 일어난 시대에는 그렇게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게 인구가 많지 않았다.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단 세명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있다. 한 명의 남자가 네 명의 아내를 가졌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들은 세 명까지밖에 모른다. 섹스이 차원에는 타인의 존재가 요구된다. 타인이 부재하는 경우에는 상상을 통해서라도 타인을 끌어들여야 한다. 타인이 필수적이다. 상상 속이라도 신이 현존하면 영적인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헌신의 길을 가는 박티의 전통에서는 영적 폭발을 위해 상상력을 이용하는 방편이 개발되었다. 상상을 통해 사정이 가능하다면, 같은 방식으로 사하스라르에서 에너지의 폭발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이것이 상상을 이용해 머릿속에서 신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었다. 그러나 실에로 신과의 만남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정은 상상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정은 이미 현실속에서 경험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신과의 만남은 다르다. 우리는 신과 만난 적이 없다. 따라서 그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경험한 것만 상상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특정한 쾌락을 경험했다면 그는 언제라도 그 경험을 회상하며 다시 즐길 수 있다. 날 때부터 귀머거리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꿈 속에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소리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은 빛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살아가는 도중에 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언제라도 빛을 상상하거나 꿈꿀 수 있다. 이제 그는 상상 속에서만 빛을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실제로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경험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할수 있는 방법은 없다. 폭발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상상이 작용하지 못한다.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 때 실제의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사하스라르 차크라는 그대의 마지막 경계선, 그대가 끝나는 지점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인간은 하나의 사다리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의 말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두 세계 사이에 놓인 다리다." 하나는 자연의 세계다. 이 자연의 세계는 끝이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의 세계다. 이 세계 또한 무한하다. 인간은 이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다리다. 이 다리는 휴식을 취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물러서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이 다리 위에는 집을 지을 만한 장소가 없다. 이 다리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다리는 집을 짓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악바르는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에 모든 종교를 위한 사원을 지으려고 했다. 그는 모든 종교의 정수를 통합한 하나의 종교, 딘 에 일하헤(Deen-e-Illahe)라고 불리는 하나의 종교를 꿈꾸었다. 그래서 그는 출입구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새겨 넣었다. '이 세상은 쉬어 가는 곳이지 영원히 머물 집이 아니다.' 잠시동안 이 세상에 멈추어서 쉬어 가는 것은 괜찮지만 영원히 체류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은 여행중에 쉬어 가는 곳일 뿐이다. 이 세상은 밤증에 머무는 여행자 숙소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여행을 재개해야 한다. 우리는 아침이 되면 다시 츨발하려고 이 곳에 머무는 것이다. 다른 목적은 없다. 영원히 이 곳에 머물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사다리다. 우리는 이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긴장되어 있다. 인간이 긴장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인간 자체가 긴장이다 다리는 항상 긴장되어 있다. 긴장되어 있기 때문에 달인 것이다. 다리는 두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가 긴장인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인간은 평화를 모른다. 한시도 평온하지 않다. 인간은 동물처럼 되었을 때만 약간의 평화를 맛본다. 또는 신이 되었을 때 완벽한 평화를 맛본다. 동물이 되었을 때 긴장이 느슨해진다. 이 때 인간은 사다리를 내려와 땅에 서 있는 것이다. 수많은 생 동안 익숙해진 곳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긴장에서 해방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섹스를 통해 긴장에서의 해방을 추구한다. 또는 섹스와 연관된 다른 경험들, 알코올이나 마약 등 일시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경험들을 통해 긴장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대는 잠시 동안만 그런 상태에 머물 수 있다. 그대가 원한다 해도 동물적인 상태에 영원히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악의 인간이라 해도 동물적인 상태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잠시동안만 가능할 뿐이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 순간에 동물이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다면 그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동물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은 땅에서 점프하는 것과 같다. 잠시동안은 허공 중에 떠 있겠지만 다시 땅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최악의 인간이라 해도 영원히 악하지는 않다.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잠시 동안에 악한 짓을 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이다. 잠시 동안 그는 긴장이 없는 편안한 상태를 원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세계, 긴장이 없는 동물의 세계고 추락했다. 동물들에게서 긴장을 찾아볼 수 없다. 동물들의 눈을 들여다 보아라. 거기엔 긴장이 없다. 동물들은 결코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다.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속박 아래 놓이게 된 동물들에게는 이런 모든 일이 가능하다. 동물원에 들어가거나 애완 동물이 되었을 때는 이런 일들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인간이 동물들을 다리 위로 끌어당길 때 복잡한 문제가 시작된다. 주인 없는 떠돌이 개가 이 방에 들어온다고 하자.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애완견은 명령받은 곳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애완견은 동물의 세계를 버리고 인간의 세계에 들어왔다. 그는 곤경에 처했다. 그는 동물이지만 인간이 갖는 긴장을 경험한다. 그는 영원히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다. 그는 방 밖으로 달려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를 간절하게 기다린다. 인간은 일시적으로만 동물적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은 잠깐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행복은 영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을 찾는 곳에서는 일시적인 행복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동물적인 상태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잠시 동안 유지된다. 동물적인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이전의 단계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어제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눈을 감고 어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얼마나 가겠는가? 눈을 뜨는 순간 그대는 현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 잠시 동안은 강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항상 후회가 뒤따른다. 일시적인 행복은 언제나 후회를 동반한다. 그대는 모든 노력이 헛되다고 느낀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일시적인 행복은 동물적인 차원에서도 가능하지만 영원한 행복은 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만 가능하다. 그대의 내면에서 이 여행이 완결되어야 한다. 다리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다. 그래야만 두 번째 일이 일어난다. 나는 섹스와 삼매를 동등하게 본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이 두 가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동등한 일이다. 섹스 안에서 우리는 다리의 한 쪽 끝, 사다리의 가장 낮은 칸에 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자연과 하나다. 그러나 삼매 안에서 우리는 다리의 다른 쪽 끝, 사다리의 가장 높은 칸에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과 하나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일종의 합일이며 폭발이다. 두 경우 모두 그대는 그대 자신을 상실한다. 섹스 안에서는 그대가 일시적으로 실종되고, 삼매 안에서는 영원히 실종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대가 사라진다. 섹스는 일시적인 폭발이다. 그 순간이 지나자마자 그대는 다시 돌아온다. 그대가 이미 지나온 낮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신 안으로 용해되면 그대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것은 동물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일단 신 안에서 용해된 다음에 다시 결정화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것은 어른이 아기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절대자와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다시 한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개인적인 자아는 무의미하고 협소해졌다. 이제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개인'은 여기에서 끝난다. 폭발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도 가지가 필요하다. 그대 내면의 여행이 사하스라르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의 은총과 만난다. 이 센터를 '사하스라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지속적인 사용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령, 우리는 '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지칭하기 위해 '문'이 아니라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으며, 문을 의미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다. 그 단어 모두가 똑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어떤 이름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닐 때, 그 이름은 모든 언어에서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가령 도어(door)나 드와르(dwar)는 우리가 나가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언어에서 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경험의 일부지 아무렇게나 만든 단어가 아니다. 이 '문'이라는 단어에 의해 입구와 출구라는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하스라르'라는 단어도 경험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정수리 센터를 경험하자마자 그대는 갑자기 내부에서 천 개의 꽃봉오리가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는 '천'이라는 숫자는 무한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경험을 꽃에 비유한다. 이 경험이 개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봉오리처럼 닫혀 있던 어떤 것이 활짝 열린다. 꽃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이렇게 개화라는 맥락에서 사용된 것이다. 무한하게 많은 꽃이 피어난다. 따라서 이 경험을 '일천 장의 연꽃잎이 열린다.'고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른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 그러면 머리 속에 천개의 연꽃잎이 피어나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을 어느 정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멋진 경험이 있다. 섹스가 그것이다. 섹스 안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들 또한 이런 개화 현상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경험이다. 안에서 무엇인가 피어나지만 즉시 닫혀 버린다. 이 두 경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섹스 안에서는 꽃이 아래를 향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 삼매 안에서는 꽃잎들이 위를 향해 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은 두 가지 경험 모두를 통과해야만 알 수 있다. 아래를 향해 피어나는 꽃들이 그대를 아래의 영역과 연결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를 향해 피어나는 꽃들이 그대를 높은 영역과 연결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꽃이 피어나는 현상은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이것이 그대를 다른 영역에 대해 민감하게 만든다. 문이 열리고 그 문을 통해 무엇인가 안으로 들어온다. 쿤달리니의 상승과 신의 은총,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그대는 사하스라르를 향해 여행하고, 그 곳에는 항상 누군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거기에 도달했을 때 누군가 그 곳으로 찾아 올 것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대 안에 폭발을 일으키기 위하여 누군가 이미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쿤달리니 사하스라르를 향해 상승하는 것은 삭티파트에 의해서만 가능합니까? 그래야만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다른 사람을 통해 삼매를 얻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존재계에는 한 면만 보고 쉽게 이해할 만큼 간단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망치로 문을 내리쳤을 때 문이 열렸다고 하자. 이 때 나는 망치로 내리쳤기 때문에 문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망치로 내리치지 않았다면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망치 때문에 문이 열렸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똑같은 망치로 다른 문을 내리쳤을 때 망치만 부서지고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이때 우리의 지식에 다른 요인이 들어온다. 문이 열린 것은 전적으로 망치 때문이 아니었다. 문이 이미 열릴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 다. 그러므로 문이 열린 이 사건에는 망치뿐만 아니라 문의 상태도 그만큼 작용을 미친다. 한 경우에는 망치로 내리쳐서 문이 열렸지만 다른 경우에는 망치만 부러지고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삭티파트 안에서 해프닝(happening)이 일어날 때 그것은 전적으로 삭티파트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명상가가 이미 내적으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그 일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삭티파트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았다면 명상가는 사하스라르에 도달하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사하스라르에 도달한 것은 오로지 삭티파트 때문만은 아니다. 삭티파트는 시간을 줄여 주었을 뿐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명상가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망치로 문을 내리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이 문은 낡아서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무너질 상태였다. 설령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이 왜, 어떻게 무너졌는지 설명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문은 항상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ikananda)는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의 곁에서 신을 일별하는 체험을 얻었다. 만일 이 일이 전적으로 라마크리슈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면 비베카난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라마크리슈나에게는 수백 명의 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전적으로 비베카난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벌써 오래 전에 이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라마크리슈나를 만나기 전에 많은 스승들을 찾아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일이 일어난 배경에는 비베카난다도 나름대로 준비가 되어 있었고, 라마크리슈나도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자의 준비와 스승의 능력이 만날 때 시간이 단축된다. 비베카난다가 특정한 순간에 라마크리슈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해프닝은 1년 후나 2년 후, 그의 다음 생, 아니면 열 번쯤 어 환생한 후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준비만 되어 있다면 조만간 해프닝이 일어날 것이다. 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시간은 허구며 꿈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별로 가치가 없다. 실제로 시간은 꿈과 같은 현상이다. 그대는 1분도 안 되는 동안 잠깐 졸면서 꿈을 꿀 수 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대는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꿈꿀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어난 다음에는 1분도 안 되는 동안에 그렇게 긴 꿈을 꾸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꿈속에서는 시간의 차원이 달라진다. 꿈 속의 시간은 짧은 동안에도 많은 사건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환상인 것이다.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죽는 곤충이 있다. 우리는 이 곤충을 보고 '불쌍한 녀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곤충이 그 시간동안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산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가 칠십 년 동안 경험하는 것을 그는 하루만에 경험한다. 거기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집을 짓고,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를 낳고, 적들과 싸운다. 심지어 산야스(sannyas)의 상태까지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이 24시간만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시간 개념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그렇게 짧은 생을 부여받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24시간만에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70년이나 걸려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가 얼마나 멍청하겠는가? 시간은 마음에 달린 문제다. 시간은 심리적인 것이다.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할 때는 시간이 짧아진다. 그러나 고통에 시달리거나 문제 상황에 빠져 있을 때는 시간이 아주 길어진다. 어떤 사람이 임종을 맞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대는 그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 밤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침해가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 슬픔은 시간을 길게 연장한다. 슬픔 속에서 그대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바람이 강할수록 시간은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시간은 항상 똑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위의 경험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진다.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녀가 너무 늦게 온다고 느낀다. 그녀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속도로 걷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녀가 비행기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를 바란다. 이렇듯 슬픔 속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러나 행복할 때는 다르다. 절친한 친구나 애인을 만나서 밤새도록 정담을 나눌 때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새벽동이 틀 무렵 그대는 밤이 그토록 빨리 지나간 것에 대해 깜짝 놀란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한 순간과 슬픈 순간에 따라 다르다. 시간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외부의 대리인이 그대의 마음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시간적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몽둥이로 그대의 머리를 내리친다면 그대의 머리는 당연히 상처를 입을 것이다. 외부에서 그대의 육체를 때리는 것처럼 그대의 마음을 때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 타격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몸도 마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대는 자신을 몸과 마음으로 생각한다. 몸과 마음은 외부적으로 영향받는다.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줌으로써 시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천 년이 한순간이 될 수도 있고, 한 순간이 천년이 될 수도 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대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지금은 예수 이후로 2천년이 지났으며 크리슈나 이후로 5천년,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와 모세 이후로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대는 깜짝 놀라며 '세상에! 저들도 지금 막 깨달았군!'하고 말할 것이다. 시간적인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다. 수천 년이라는 세월이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진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모든 이가 깨닫는다. 한순간의 차이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깨닫는 순간 그대는 붓다, 그리스도, 마하비라, 크리슈나와 동시대 사람이 된다. 그들 또한 방금 깨달은 것처럼 그대와 함께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순간의 차이도 없다. 하나의 원을 그리고 원주에서부터 중심을 향해 여러 개의 선을 그린다고 하자. 원주에서는 두 선 사이의 거리가 가장 많이 떨어져 있다. 그러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두 선 사이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고, 중심에 닿는 순간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다. 중심에서 모든 선이 하나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깊은 경험의 중심에 도달했을 때는 원주에 존재했던 간격, 2천년 또는 5천년이라는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나 중심에 도달한 사람이 이런 경험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원주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 또한 원주에 속한다. 심각한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를 따르는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물었다.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말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마 제 말을 잘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저는 예수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 내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대가 내말을 잘 듣지 못했다. 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혼란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예수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그대는 예수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예수를 아는 순간, 그대와 예수 사이에는 아무 차이점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에 관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화가가 라마크리슈나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가 라마크리슈나에게 초상화를 보여 주면서 물었다. "이 그림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라마크리슈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초상화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 라마크리슈나가 무엇인가 착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가 일깨워 주었다. "이 그림은 당신의 초상화입니다."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이 인물은 말할 수 없이 깊은 삼매에 들었다. 그러니 이 그림이 어떻게 나의 초상화일 수 있겠는가? 삼매 안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삼매에 대해 엎드려 절한 것이다. 그대가 나를 상기시켜 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나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웃고 있었다. 원주의 언어와 중심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 크리슈나는 '나는 라마(Rama)였다.'고 말했으며 예수는 '나는 전에도 와서 너희들에게 말했다.' 고 했다. 붓다는 '나는 다시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 그들은 중심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불교도들은 지금도 붓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이미 여러번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똑같은 형상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꿈과 같은 형상이다. 이제는 영원히 사라진 얼굴이다. 중심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없다. 그러나 그대의 시간적인 상태에 다양한 속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가능하다. 깨달음에 걸리는 시간을 가속화시키거나 늦추는 것은 가능하다. 삭티파트에 의해 속도를 한층 높일 수 있다. 이 질문의 말미에서 그대는 삼매에 다른 사람이 연루되는 문제에 관해 물었다. 타인이 타인으로 보이는 것은 그대가 자신의 에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베카난다는 그 해프닝이 라마크리슈나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라마크리슈나가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라마크리슈나에게 있어서 그 해프닝은 전혀 다른 식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오른손이 상처를 입고 왼손이 약을 발라 주는 것과 같다. 이제, 오른손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치료해 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갖고 오른손은 감사를 표하거나 치료를 거부할 수도 있다. 오른손은 '나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 나는 자립적인 존재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그는 오른손을 통해 작용하는 에너지와 왼손을 통해 작용하는 에너지가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한 사람이 타인에 의해 도움을 받을 때, 사실 그는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의 준비성(readiness) 자체가 그 자신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도움을 끌어 내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어떤 책에 이렇게 씌어 있다. "스승을 찾지 말라. 그대가 준비되는 순간 그가 그대의 문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책은 또 이렇게 말한다. "설령 그를 찾으려 해도 그대가 어떻게 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를 알아볼 것인가? 스승을 알아볼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이미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스승이 제자를 알아본다. 항상 그렇다. 제자는 결코 스승을 알아 볼 수 없다. 그럴 가능서이 없다. 방법이 없다. 그대는 자기 내면의 존재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스승을 알아본다는 말인가? 그대가 준비되는 날 어떤 손이 그대를 돕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그 손은 그대 자신의 손이다. 그 손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보이는 것은 그대가 모르기 때문이다 앎에 도달하는 날, 그대는 감사를 표하려고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일본의 선원에는 한가지 풍습이 있다. 명상을 배우려고 선원에 오는 구도자는 항상 돗자리를 갖고 온다. 그는 땅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앉는다. 그는 날마다 돗자리 위에 앉아 명상한다. 그리고 명상이 완성되는 날 그는 돗자리를 걷어들고 그 곳을 떠난다. 이 때 스승은 구도자의 명상이 완성되었음을 안다. 스승은 감사의 인사를 기대하지 않는다. 감사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누가 누구에게 감사한단 말인가? 구도자는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난다. 구도자가 돗자리를 걷는 것을 보고 스승은 상황을 이해한다. 돗자리를 걷을 때가 되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감사의 표현조차 필요 없다. 만일 구도자가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스승은 그를 몽둥이로 내리치고 다시 돗자리를 깔라고 명령할 것이다. 이 때는 구도자의 명상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타인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무지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이 어디에 있는가? 무수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수많은 길 위에 놓여 있다. 무수한 거울 속에 오로지 나 자신이 있다. 설령 우리가 거울 속에서 타인을 본다. 해도 그 거울 속에 있는 것은 적대적으로 나 자신이다.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 수피의 이야기가 있다. 개 한 마리가 어떤 방에서 길을 잃었다. 그 방은 벽과 천장이 온통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개는 큰 어려움에 처했다. 보는 곳마다 온통 개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수많은 개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다. 문 또한 거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도 많은 개들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당황한 그가 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그는 자신의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그가 맹렬하게 짖을수록 다른 개들 또한 더 큰 소리로 짖어댔다. 더욱 두려움에 싸인 개는 그들과 싸우려고 여기저기 달려들었다. 그러자 다른 개들도 똑같이 달려들었다. 밤새도록 그는 거울 속의 개들을 향해 짖고 싸우면서 기진맥진 해 버렸다. 아침이 되었을 때 경비원에 의해 그는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덤벼들고, 짖고, 사우면서 죽어 간 것이다 그가 죽자,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거울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쳤다. 이렇게 수많은 거울이 있다. 타인은 여러 가지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타인은 허구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관념은 환상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 또한 환상이다. 타인이라는 현상 자체가 환상이다. 일단 이것을 깨달으면 삶이 아주 단순해진다. 타인을 지향하는 모든 행동이 중단되다. 이 때는 타인을 위해 어떤 일 하건,그대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하건 오직 그대만 남는다. 그대는 타인을 도와 줄 때도 그를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도 그를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그대 자신이 있을 뿐이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도 그대는 자기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대를 돕는다면 그는 그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궁극적인 체험 후에나 가능하다. 그 전에 타인은 절대적으로 타인이다. 한때 당신은 비베카난다가 삭티파트를 통해 무엇인가 얻는 데 실패했으며, 그에게는 삭티파트가 해로운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삭티파트 자체가 해로운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이 해를 미쳤다는 뜻이다. 얻고 잃는다는 생각 또한 꿈 속의 일이다. 그런 생각은 꿈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의 도움을 받아 삼매를 일별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삼매를 얻었다. 하지만 이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이것은 다음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다. 내가 망치로 문을 두들겨 무너뜨린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망치로 못을 박아 문을 다시 고정시킬 수 있다. 처음에 문을 부수는 데 사용되었던 망치가 문을 다시 만들어 다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두 경우에 똑같은 망치가 사용된다. 라마크리슈나는 곤경에 처헤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베카난다를 이용해야만 했다. 라마크리슈나는 완전히 일자무식이었다. 그는 심오한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전달자로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그대는 라마크리슈나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알리려고 한 것을 순전히 자비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만일 내가 집 안에 보물을 가득 쌓아 두고 있는데 내가 걷지 못하는 불구자라고 하자. 나는 이 보물을 그대의 집에 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어깨에 올라탄다. 이 때 나는 이 사람의 어깨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나를 업고 있는 이 사람은 다소 불편하고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보물을 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걷지 못하는 불구자기 때문에 이 보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심지어 나는 밖으로 나가 보물에 대한 소식을 전할 수도 없다. 이것이 라마크리슈나의 문제였다. 그러나 붓다의 경우는 달랐다. 붓다 안에는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가 둘 다 들어 있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자신이 안 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는 비베카난다에게 내면의 보물을 힐끗 보여 주었다. 그러나 즉시 그는 비베카난다에게 내면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열쇠를 자신이 간직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그는 비베카난다에게 말했다. "네가 죽기 삼일 전에 그 열쇠를 돌려주겠다." 비베카난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라마크리슈나에게 그 열쇠를 거두어 가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너는 달리 할 일이 있다. 만일 네가 삼매에 들면 너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고 나의 일이 어렵게 될 것이다. 내 일이 끝나기 전에 네 가 삼매를 경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삼매를 얻기 전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삼매를 얻은 후에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로서는 그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는 삼매를 얻은 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한다. 라마크리슈나는 삼매를 얻은 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누군가 '람(Ram)'이라는 단어만 내뱉어도 그는 즉시 무아지경(trance)에 빠지곤 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자이 람지(Jai Ramji)' 하고 말해도 그는 즉시 이 세상을 잊어버렸다. 신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는 의식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이름이 즉각 저 너머의 세계를 상기시켰다. 누군가 '알라(Allha)!'하고 말하기만 해도 그는 즉시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는 사원만 보아도 삼매에 빠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길거리를 걷다가 찬송가 소리만 들어도 그는 무아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비베카난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비베카난다에게 말했다. "너는 큰 일을 해야 한다. 그 일을 완수한 다음에 너는 삼매에 들 수 있다." 비베카난다는 평생 동안 삼매를 얻지 못하고 지냈다. 이것이 그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명심하라. 고통은 꿈의 세계에 속하는 일이다. 이것은 악몽을 꾸는 것과 같다. 비베카난다는 죽기 3일 전에야 삼매의 열쇠를 건네 받을 수 있었다. 그 때까지 그는 크나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죽기 5일이나 7일 전에 쓴 편지를 보면 고통과 번뇌로 가득차 있다. 죽기 3일 전까지는 가는 삼매에 대한 일별의 경험밖에 없었다. 힐끗 한 번밖에 보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염원과 더불어 번뇌 또한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대의 염원은 아직 강렬하지 못하다. 그대는 삼매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순간 일별을 얻고 나면 염원이 강렬해질 것이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라. 지금 그대는 어둠 속에서 조약돌을 손에 쥐고 있다. 그대는 이돌을 소중한 보물로 생각하면서 행복해한다. 이 때 번갯불이 번쩍하면서 그대는 바로 앞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이아몬드를 앞에 둔 채 쓸모 없는 조약돌을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번갯불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그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긴다. 그대는 손에 조약돌을 움켜쥐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중한 보물이 앞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 이제 번개는 더 이상 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앞에 놓인 보물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 그대의 과제다. 그래서 비베카난다에게는 라마크리슈나를 보완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것은 라마크리슈나의 일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제였다. 라마크리슈나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보충해야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면 서너 명의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때로는 한 사람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다섯 명이나 열 명이 필요하다. 라마크리슈나는 자비심에서 그렇게 했지만 이것은 비베카난다를 큰 어려움에 빠뜨렸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한 한 삭티파트를 피하라고 말한다. 가능한 은총을 열망하라. 오직 은총과 버금가는 삭티파트만이 유용하다. 집착의 끈이 없는 삭티파트, 아무 조건이 없는 삭티파트, 적대적으로 무조건적인 삭티파트, '내가 얼마 동안 열쇠를 간직하고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삭티파트, 오직 그런 삭티파트만이 유용하다. 매개체 없이 삭티파트가 일어나야 하다. 설령 그대가 그에게 감사하기를 원한다. 해도 어디에서도 그를 발견할 수 없어야 한다. 이런 삭티파트가 그대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간혹 라마크리슈나 같은 사람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다른 길이 없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를 통해 일별을 얻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라마크리슈나의 경험은 완전히 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이 경험을 표현해 주는 매개체가 필요했으며 비베카난다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 비베카난다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이것은 내말이 아닙니다. ' 하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미국에서 찬사를 받았을 때도 그는 '저는 참으로 괴롭습니다. 이 영광은 당신들이 전혀 모르는 어떤 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비베카난다를 '위대한 분'이라고 칭송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스승님의 발에 묻은 먼지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가 직접 미국에 갔다면 정신 병원에 감금되었을 것이다. 그는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했을 것이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광기와 신성한 광기를 구분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는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가 정신 병원에 수용될 것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베카난다는 온갖 찬사를 받았다. 그의 말은 지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신성한 광기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라마크리슈나의 편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우체부에 불과했다 그는 라마크리슈나의 편지를 읽어 주는 대리인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그는 이 편지를 달 읽어 주었다. 물라 나스루딘이 그의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편지를 쓸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부탁하곤 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 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스루딘은 발이 아프기 때문에 편지를 쓸 수 없다고 말했다. 편지를 부탁한 사람이 말했다. "발이 아픈 것과 편지를 쓰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글은 손으로 쓰는 게 아닙니까?" 나스루딘이 말했다. "당신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소. 내가 쓴 편지는 오로지 나밖에 읽을 수 없소. 그래서 당신이 편지를 다른 마을로 보내면 그 마을에서도 편지를 읽어 달라고 나를 부른단 말이오. 당신이 굳이 편지를 써 달라면 써 주기야 하겠지만 그 편지를 누가 읽는단 말이오? 지금 나는 발이 몹시 아파서 다른 마을까지 갈 수 업소. 그러니 발이 나을 때까지는 아무 편지도 쓰지 않을 것이오" 라마크리슈나 같은 사람들이 쓴 편지는 오로지 그들만이 읽을 수 있다. 그들은 그대의 언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언어는 그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들을 미친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 중에서 대리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야 한다. 이렇게 선택된 사람은 우체부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비베카난다를 경계하라. 그 자신은 아무 경험이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경험이다. 그는 매우 유능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전문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경험이 아니다. 비베카난다의 말에서 자신감이 엿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요점을 강조하다. 이것은 자신의 결점을 보충하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정으로 지혜에 도달한 자는 항상 망설인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한다. 그는 입을 열어 말하기 전에 수 백 번도 더 심사숙고한다. 그리고 그 말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까 봐 염려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곧장 입을 열어 말한다.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처럼 깨달은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는 특정한 질문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차라리 우리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더 낫다. 그들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들이 붓다보다 낫다. 그들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해 물으면 그들은 '예'와 '아니오'중에서 자신 있게 하나를 선택해서 말한다. 그런데 붓다는 이런 질문에 묵묵부답이다. 이것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는 '예'와 '아니오' 중에서 분명하게 대답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머뭇거리면서 '이런 질문 말고 다른 것을 물으시오' 하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것은 그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꼴이다.'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붓다는 우리와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한다. 이것이 어려움을 낳는다. 라마크리슈나처럼 이 세상에 아무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떠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리에 대한 앎과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을 겸비한 사람은 아주 드물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티르탕카르 아바타르 또는 예언자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깨달은 사람들의 숫자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었던 각자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는 만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있고, 당신은 지난 사십년 동안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당신과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붓다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당신을 알아보는 것처럼 그들을 알아볼 수 없을까요?" 붓다가 말했다. "그대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데 반해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그들을 알아보기 힘든 것이다. 만일 내가 침묵을 지켰다면 그대는 나 역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는 오직 언어를 이해할 뿐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진리를 알고 또한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다." 비베카난다에게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어려움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라마크리슈나가 비베카난다에게 이런 어려움을 안겨 준 것은 그가 비베카난다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비베카난다는 절망했지만 이 절망은 꿈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꿈 속의 일일지라도 절망을 맛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 밑에 누워 꿈을 꾸고 있었다. 이 때 개 한 마리가 나무 그늘 밑에서 쉬려고 다가왔다. 개가 보니 고양이는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개가 보니 고양이가 어떤 꿈을 꾸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개는 고양이가 깨어난 다음에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물었다. 고양이가 말했다. "오, 그건 정말 멋진 꿈이었어. 하늘에서 쥐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더군." 개가 멸시하는 눈초리로 고양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리석은 녀석! 하늘에서 쥐가 쏟아져 내렸다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우리 개들도 꿈을 꾸지만 항상 뼈다귀가 쏟아져 내리지. 쥐가 쏟아지지는 않아. 우리의 경전에도 뼈다귀의 비가 내린다고 씌어 있어. 쥐가 쏟아져 내리는 경우는 없어. 이 멍청한 고양이야! 꿈을 꾸려면 뼈다귀 꿈을 꾸어야 해."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꿈을 꾸어야 한다면 왜 나쁜 꿈을 꾸는가? 그리고 깨어나고자 한다면 그대의 능력, 그대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 조금도 의존하지 말라. 도움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문제다. 도움을 기다리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도움을 기대할수록 그대의 의지가 더 약해진다. 도움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그대 스스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라. 그대 혼자라는 것을 명심하라. 여러 곳에서 도움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그대 자신의 의지력을 강조한다. 강인한 의지력만 있다면 아무것도 걸릴게 없다. 설혹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얻는다. 해도 그것을 바라거나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비베카난다가 절망감에 시달렸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그런 아픔을 모질게 느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졌다. 그들은 비베카난다가 말하는 세계를 일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비베카난다 본인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은 먹어 보지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그대에게 소개하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한때 그 맛을 보았다 해도 그것은 이미 깨져 버린 꿈 속의 일이다. 내가 꿈을 깬 다음에 '이제 너는 더 이상 그것을 꿈꿀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해야한다.' 는 말을 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비베카난다가 이런 경우였다. 그는 고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고난을 잘 이겨냈다. 이것은 자비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대 또한 이런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라슈너와의 접촉을 통해 삼매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경험이었습니까? 그것을 일시적인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 진정함(authenticity)이라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오직 일별을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경험이었다. 이 일별은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영적인 것도 아니다. 이런 일별은 마음이 끝나고 영혼이 시작되는 경계선에서 일어난다. 깊이라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심리적인 경험일 뿐이다. 따라서 그 일별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베카난다는 깊이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라마크리슈나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베카난다가 너무 깊이 들어가면 라마크리슈나는 그를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깨달음의 세계로 깊이 들어간 사람은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베카난다를 그렇게 무용한 사람으로 남겨 두고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백 퍼센트 옳지는 않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40년 동안 설법을 폈다. 예수와 마하비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이런 면에서 취약점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약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비베카난다에게 순간적인 일별을 주었다. 그 일별은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진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적인 것이었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비베카난다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부분적인 삼매의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부분적인 경험은 없지만 일시적인 경험은 가능하다. 이 둘 사이엔 차이점이 있다. 삼매의 경험은 부분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삼매의 심리적인 일별은 있을 수 있다. 경험은 영적이지만 일별은 심리적이다. 산꼭대기에 서서 바다를 본다. 해도 나는 분명하게 바다를 볼 것이다. 다만 거리가 떨어져 있을 뿐이다. 나는 해안에 서 있지 않다. 바닷물에 닿거나 맛보지도 않는다. 나는 바다로 뛰어들거나 헤엄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산꼭대기에서 분명히 바다를 보았다. 그대는 이것을 부분적인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아니다. 내가 바닷물에 옷깃 하나 스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나의 경험을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비록 바다와 하나가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나는 산꼭대기에서 분명히 바다를 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육체의 정상에서 영혼을 볼 수 있다. 육체에도 정상이 있다. 정상에서의 경험이 있다. 육체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그대는 그 곳에서 영혼을 일별할 수 있다. 그대가 완벽하게 건강하고 평안함을 느낀다면, 육체가 완벽한 건강함으로 층만하다면, 그대는 육체의 정상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혼을 일별할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것임을 경험할 것이다. 이때 그대는 영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육체의 최고 정상에 도달할 것이다. 마음 또한 그 정상이 있다. 가령, 깊은 사랑 안에 있을 때... 나는 섹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섹스는 육체의 일부다. 그러나 섹스 안에서도 성적인 경험의 정상에 도달하면 그대는 영혼을 일별한다. 이것은 꿈꾸듯이 희미한 일별이다. 가장 먼 곳에서 본 일별이다. 그러나 그대가 깊은 사랑 안으로 들어간다면, 연인과 함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오직 사랑의 물결이 오고갈 뿐 아무 행위나 욕망이 없을 때, 이런 사랑의 순간에 그대는 마음의 정상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상에서 영혼을 일별할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영혼을 일별할 수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그림을 그리는 데 완전히 몰입한 사람은 잠시 동안 신이 된다. 그는 창조자가 된다. 그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상태를 체험한다. 그러나 이 정상은 마음에 속한다. 일별의 순간에 그는 자신을 창조자처럼 느낀다. 그래서 이 경험만으로 충분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험은 음악, 시, 자연 속의 아름다움 등을 통해 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멀리 떨어진 봉우리에서 보는 체험이다. 삼매속으로 안전히 녹아 들어가야 비로소 깨달음이 일어난다. 물론 밖에는 많은 봉우리가 있으며, 그 곳에서 그대는 영혼을 일별할 수 있다. 비베카난다의 체험 또한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마음의 차원에서는 다른 사람이 그대를 끌어올려 정상에 올려놓을 수 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라. 내가 어린아이를 어깨에 태우고, 그는 그 곳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 다음에 내가 그를 내려놓는다. 나의 어깨가 그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의 다리는 아직 짧다. 그가 내 키만큼 성장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내 어깨에 올라탔을 때 그는 많은 것을 보았다. 이제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가서 자신이 본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은 키로 그런 것들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어깨에 올라타서 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이런 가능성 모두가 마음에 속하는 일이다. 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초보적인 경험일 뿐이다. 초보적인 경험은 육체에서 일어날 수 있고,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히 완결된 경험이다. 그리나 그것은 마음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영혼의 세계에 속하는 경험이 아니다. 영혼의 경험 안에서는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올 길이 없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아무도 그대의 열쇠를 간직하고 있을 수 없다. 아무도 '내가 열쇠를 돌려주어야만 깨달음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차원에는 그렇게 말할 사람이 없다. 특별한 과제를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초원의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어려워질 것이다. 비베카난다의 경험은 진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의 진정함은 심리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또한 작은 일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아주 강인하고 성숙한 마음이 필요하다. 라마크리슈나가 비베카난다를 착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이 '착취'라는 단어에는 비난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비베카난다를 착취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비베카난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는 비베카난다를 유용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만 그가 비베카난다를 착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착취(exploitation) 와 실용화(utilization)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나의 에고를 위해 무엇인가 이용한다면 그것은 착취다. 그러나 재가 온 세상을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어떤 것을 이용한다면 거기에 착취의 문제는 없다. 라마크리슈나가 일별을 주지 않았다면 비베카난다가 스스로 삼매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런 문제는 오직 깨달은 사람들만이 판정할 수 있다. 나는 라마크리슈나가 준 일별이 없었어도 비베카난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관해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마크리슈나는 비베카난다에게 '너는 죽기 삼 일 전에 열쇠를 돌려 받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이 말은 '너는 스스로 노력한 결과에 의해 죽기 삼 일 전에 삼매를 얻을 것이다.'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라마크리슈나가 말한 의미였다. 라마크리슈나는 이미 죽어 있었지만 열쇠는 그가 말한 데로 정확하게 되돌려졌다. 이런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은 그대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에 대해 그대 자신보다 더 잘 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그대의 잠재성을 본다. 그는 그대가 고유의 보폭대로 걸으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지 안다. 예를 들어, 그대가 가는 길에 산이 놓여 있다고 하자. 이제 나는 산을 넘어가는 길을 안다. 그 산을 넘어가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그대가 어떤 어려움과 직면할지 나는 안다. 나는 그대가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말할 수 있다. 가령, 그 산을 넘는 데 3개월이 소모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대가 여행하는 속도와 태도를 보고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내가 그대를 들어올려서 산의 정상을 힐끗 보여 주고, '3개월 안에 너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하고 말하면서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는다고 하자. 이것을 두고 내가 그대를 이용한다고 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내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보든 일은 아주 미묘하고 복잡하다. 밖에서 보는 시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니르말라(Nirmala)가 어제 집에 갔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당신은 쉰 다섯 살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쉰 다섯 살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 보장대로 이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쉰 다섯 살에 죽지 않는다면 그녀는 이것을 내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비베카난다는 죽기 삼일 전에 열쇠를 받았다. 그러나 누가 그 열쇠를 돌려주었는가? 라마크리슈나는 비베카난다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어려운 수행의 시기를 통과해야 하는 것을 알고 그가 희망을 잃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으로 일별을 주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 수도 있다.'는 가정 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런 식의 가정에는 끝이 없다. 이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런 식의 가정에서 출발하면 터무니없는 생각이 끈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정확하게 무엇이 가능한가 하는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이상을 넘어가는 것은 좋지 낳다. 이런 가정의 길은 무의미하다. 이런 길은 그대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심각한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실상을 계속 놓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라. 그리고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한다면 '-일 수도 있다.'는 식의 모든 가정을 버려라. 정확한 사실을 모른다면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알아라. '-일 수도 있다.'는 식의 가정으로 그대의 무지를 감추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결점을 감춘다. 그런 속임수를 버려라. @ 먼저 그대 자신을 준비하라. 지난번 강의에서 당신은 갑작스럽고 직접적으로 내려오는 은총이 때로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은총이 항상 축복과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의문이 당연히 떠오릅니다. 이런 재앙은 은총의 수혜자가 그 은총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합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은총이 내려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은 인격체(person)가 아니라 에너지다 그리고 에너지는 개인을 고려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개인 각자에게 공평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강둑에 서 있는 나무는 강으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더 크고 강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강 속에 빠진 나무는 거센 물결에 떠내려가면서 파괴된다. 사실 강은 이 두 그루의 나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강은 둑에 서 있는 나무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데도 관심이 없고, 떠내려가는 나무를 파괴하는 데도 관심이 없다. 강은 그저 흐를 뿐이다. 강은 흐르는 에너지다 강은 인격체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신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한다. 우리는 신이 친절하고 자비롭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이 항상 축복을 준다고 말한다. 이 모든 거이 우리의 기대와 욕망을 신에게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와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모든 책임이 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은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에너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에너지를 다루면서 그 에너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꿈 속을 헤매는 것이다. 에너지를 에너지로 다루면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 중력을 예로 들어보자. 그대가 땅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력이 특별히 그대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걷지 않아도 중력은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대가 걷지 않으면 중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중력은 그대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그대가 사라진 다음에도 있을 것이다.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이 또한 중력의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누군가를 고발할 수는 없다. 책임질 사람이 없다. 중력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중력을 다루고자 한다면 그 작용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중력은 자신의 법칙을 따를 뿐 그대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에너지는 각 개인을 고려해서 작용하지 않는다. 사실,'신의 에너지'라는 말은 적당치 않다. '신의 에너지다.' 라고 말해야 한다. 신은 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는다. 신이라는 에너지는 고유의 영원한 법칙을 가지며, 이 법칙에 따른다. 이 영원한 법칙이 종교다. 종교란 신이라는 에너지가 행동하는 법칙을 의미한다. 그대가 이해와 분별력을 갖고 이 에너지와 일치되게 행동하면 이 에너지는 은총이 된다. 이것은 에너지 자체에서 비롯되는 일이 아니라 그대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그대의 행동이 에너지는 은총으로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정반대로 행동한다면, 에너지의 법칙과 상반돼 행동한다면 이 에너지는 은총과 거리가 멀다. 신이 은총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대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것은 오류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라 에너지다. 그러므로 기도와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신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신성한 에너지가 축복과 은총을 가져다 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영적인 수행이 의미를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도는 무의미하다. 명상은 의미가 있지만 예배는 무의미하다.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하라. 기도 안에서 그대는 신에 대해 무엇인가 행한다. 그대는 구걸하고, 주장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명상 안에서 그대는 가지 자신에게 무엇인가 행한다. 예배를 통해 그대는 신에게 무엇인가 행하지만, 사드하나( sadhana)를 통해서는 그대 자신에게 무엇인가 행한다. 사드하나는 존재계 또는 종교와 불협화음을 이루지 않도록 그대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그대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대는 강둑에 서서 물을 빨아들이며 뿌리를 강하게 만든다. 신을 에너지로 보는 순간 종교의 구조 전체가 바뀐다. 돌발적이고 직접적인 은총이 내려오면 때로는 큰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질문의 다른 부분에서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적합하지도 않은 사람이 은총을 받을 수도 있습니까?" 자격을 갖추지 안은 사람에게 은총이 내려오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언제나 은총은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내려온다. 그러나 때로는 부적합한 사람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필수적인 자격 요건을 갖추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해프닝(happening)은 항상 올바른 조건하에서만 발생한다. 이것은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빛이 보이고 장님에게는 비칭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장님이 치료를 받아 눈을 떠도 곧장 병원 밖으로 나와 직접 태양을 보면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다. 그는 직접 해를 볼 수 있기 전까지 두세 달 동안 색안경을 쓰고 지내야 한다. 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면 재앙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태양을 탓할 수는 없다. 그는 태양 빛을 견딜수 있는 안력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릴 위험성이 있다. 처음에 눈이 멀었을 때는 의학적인 수술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눈이 멀었을 때는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을 잘 이해하라. 경험은 오직 자격을 구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 그러나 자격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어떤 환경 탓으로 인해 필수적인 특성을 갖게 되는 일이 간혹 일어난다. 이렇게 도면 항상 재앙의 위험이 따른다. 갑자기 에너지가 내려오는데 그것을 견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얻어서 아무 해가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을 얻었을 때 재앙이 생기는 경우를 흔히 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복 또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 행복을 견딜 능력이 필요하다. 서서히 찾아온 행복을 감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복이 서서히 찾아오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서히 찾아와야만 그것을 감당 할 준비가 된다. 이런 감당 능력은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뇌신경, 신체 조건, 정신적 능력... 그러나 이 모두가 한계를 갖고 있는 반면 우리를 찾아오는 에너지는 무한하다. 이것은 바다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바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물방울은 즉각 죽어 버릴 것이다. 물방울은 철저하게 파괴될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드하나에는 두 가지측면이 있다. 우리는 에너지의 길에 들어가 그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그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가 완수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문을 열어 시야를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눈이 밝은 빛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빛이 더 깊은 어둠을 초래할 수 있다. 빛은 이 일에 책임이 없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아무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삶이라는 여행은 수많은 생에 걸쳐서 진행된다. 인간은 한 번의 생마다 많은 일을 한다. 인간은 삼매를 얻기 직전에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죽음과 더불어 그는 그 삶에 대한 기억을 모두 상실한다. 여러 생 동안 수행을 해서 99도에 도달했을지라도 그대는 그것을 모른다. 죽음과 더불어 과거 생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러나 99도의 상태는 그대 안에 그대로 남는다. 기본적이 요소는 그대로 남아 다음 생으로 전달된다. 이제 그대 옆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다고 하자. 그는 전생에 1도 밖에 성취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상태를 모두 잊었다. 이제 그대와 그가 같이 앉아서 명상한다고 하자.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수준에 속해 있다. 과거 생에 1도의 성장을 이룬 사람에게 다시 1도의 성장이 일어나면 그는 2도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그에게는 은총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생에 99도의 성장을 이룬 그대는 1도만 성장하면 100도에 도달한다. 돌연 은총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이것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대가 전생에 이룬 99도의 성장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자기 은총이 그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를 위해 적절한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재난(mishap)'이란 그대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프닝이 일어나는 경우를 뜻한다. '재난'이 반듯이 나쁘거나 고통스러운 사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재난이란 그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백만 달러의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놀래서 죽을 수도 있다. 백만 달러! 그의 심장이 멈춰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재난'이란 그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이 반대의 경우 또한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준비가 된 상황에서 죽음이 온다면 이 죽음은 반듯이 나쁜 사건만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처럼 기꺼이 죽음을 맞고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준비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죽음은 삼매가 된다. 그는 넘치는 사랑과 기쁨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그는 결코 죽지 않는 실체를 알게 된다. 우리는 극심한 비통함으로 죽음을 대한다. 그래서 죽기 전에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 빠진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 동안 수없이 죽음을 겪었으면서도 그 죽음의 과정을 알지 못하는 이유다. 일단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이 때는 죽음이 찾아와도 옆에 비켜서서 그 죽음을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의식이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이 행운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은총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장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궁극의 해프닝을 열망하고, 추구하고, 꾸준히 나아가야 하는 것과 동시에, 그 해프닝을 대비해 스스로를 준비시켜야 한다. 빛이 우리의 문은 찾아왔을 때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신은 인격체가 아니라 에너지라고 말했다. 이 말을 명심하면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신을 에너지로 받아들이면 아무 어려움이 없다.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는 개념이 큰 어려움을 초래한다. 마음은 신을 인격체로 만들고자 한다. 그래야만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그의 탓으로 돌린다. 어떤 사람이 직업을 구하면 그는 신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직업을 잃어버리면 신에게 화를 낸다. 종기가 난 사람은 그것을 신의 탓을 돌린다. 그리고 종기가 다 나으면 신에게 감사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신을 이용한다. 신이 우리의 종기에 대해서 까지 걱정해야 하는가? 이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점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길에서 동전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우리는 '내가 동전을 찾은 것은 신의 은총이야.'하고 말한다. 우리는 신이 우리의 돈 1원까지도 지켜 주기를 원한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을 대하는 태도는 주인이 하인을 다루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신이 우리의 문 앞에 보초를 서면서 단 돈 1원까지도 지켜 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면 많은 이득이 있다. 모든 책임을 쉽게 그에게 덮어씌울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구도자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다. 사실, 구도자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삶이 슬프다 해도 그것은 그대의 책임이다. 그대의 삶이 행복한 것도 그대의 책임이다. 그대가 평화롭다면 그 평화는 그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대가 불안하다면 그 불안은 그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은 그대의 실수지 중력을 탓할 수는 없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이때 그대는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이때는 재난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그러므로 준비가 된 사람에게 은총은 커다란 축복이라고 나는 말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모든 일에는 적합한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비극이다. 당신은 삭티파트의 효과가 점차 감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도자는 매개체와 정기적인 접촉을 유지해야 합니까? 이 말은 구루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 의존성이 있을 수 있다. 구루(guru)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과 구루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의존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제자가 되거나 구루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제자도 없고 구루도 없다면 의존의 문제는 없다. 그대가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해도 그 사람은 그대 자신의 일부다. 그 사람은 그대의 조금 앞서 있는 부분에 불과하다. 이 때 누구 구루고 누구 제자가 되겠는가? 붓다에 관해 내가 자주 언급하는 이야기가 있다. 붓다는 자신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내게 절을 하는데 내가 그대에게 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실수가 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일부다. 그대 중에서 몇 걸음 정도 앞선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와 내가 둘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지나면 그대 또한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고 왼발이 뒤따라오는 것과 같다. 사실, 왼발이 뒤에 남는 것은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 사실 스승(guru)과 제자의 관계는 해롭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 아닌 관계(non-related relationship)는 아주 유용하다. 이 '관계 아닌 관계'라는 말은 거기에 두 사람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관계에는 두 사람이 있다. 제자가 스승을 분리된 개체로 느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제자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 또한 이런 식으로 느낀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앞에서 인도하는 소경은 매우 위험한 존재다. 뒤에 따라오는 소경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영적인 의미는 없다. 실제로 모든 관계는 힘과 연관된 역학적 관계다. 모든 관계가 힘의 정치학과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고 어떤 사람은 아들이다. 만일 이것이 사랑의 관계라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때 아버지는 자신을 아버지로서 의식하지 않을 것이고, 아들은 자신을 아들로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아들은 그저 아버지에 후속되는 존재고, 아버지는 아들에 선행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씨앗을 심으면 나무가 자라난다. 그리고 이 나무는 다시 수많은 씨앗을 낳는다. 그렇다면 처음의 씨앗과 나중의 씨앗들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어떤 씨앗은 먼저 오고 다른 씨앗들은 나중에 왔다. 그러나 땅 위에 떨어지고, 흙 속으로 들어가 썩고, 싹을 틔우는 것은 똑같은 씨앗의 여정이다. 똑같은 사슬 속에서 아버지는 첫 번째 고리고 아들은 두 번째 고리다. 하나의 사슬이 있을 뿐 분리된 개체는 없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에게 절한다면 그는 자기보다 선행하는 고리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고, 양육하고, 옷을 사 입힐 때 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양육하는 존재는 그 자신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젊어진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때 그것은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사랑이지 관계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관계를 목격한다. 아버지는 강하고 아들은 약하다. 따라서 아버지가 아들을 지배한다. 은연중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전부다.'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조만간 아들이 강자가 되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때가 되면 아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아버지를 지배할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남편과 부인의 관계는 변태적인 현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남편과 부인 사이에 왜 관계가 있어야 하는가? 두 사람은 서로간에 일체감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를 지배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지배한다. 서로가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이것은 힘의 정치학이다. 스승과 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승이 제자를 압박하고, 제자는 스승이 죽기를 기다린다. 그래야 스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스승이 빨리 죽지 않으면 그에 대항하는 음모와 술수가 펼쳐질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거나 적이 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수제자는 스승의 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제자를 선택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이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힘에 의한 압박은 항상 반역을 초래한다. 이것은 영성(spirituality)과 아무 관계가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압박하는 경우는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 다 무지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런 데로 너그럽게 봐 줄 만하다. 남편이 아내를 압박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압박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는 흔하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용서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스승이 제자를 억압하는 경우는 곤란하다. 최소한 이런 영역에서만큼은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주장이 없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무엇인가?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 너는 무지하지만 나는 지혜롭다. 무지한 자가 지혜로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그러나 '너는 경의를 표하고 복종해야 한다. '고 말하는 사람이 현자인가? 그야말로 가장 무지한 사람이다. 그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식을 습득하고 경전을 공부했다. 그리고 기억을 통해 그것을 되풀이한다.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마 이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는 고양이가 있었다. 그는 고양이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해졌다. 세상에서 독보적인 스승이며 성자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많은 것을 알게 된 이유는 도서관으로 숨어 들어가는 틈바구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서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 어느 쪽 서고가 기대앉기에 가장 편안한가, 겨울에 어느 책이 따스하고 여름에는 어느 책이 시원한가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양이들 사이에는 누구든지 도서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전지한 고양이를 찾아가라는 말이 떠돌았다. 도서관에 대한 어떤 질문이든지 답을 준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이 고양이는 당연히 전지한 존재로 여겨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책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어느 책 위에 앉으면 편안한가, 어느 책이 헝겊 표지가 되어 있어서 따뜻한가 하는 따위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책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고양이가 어떻게 책안에 있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인간 중에도 이렇게 전지한 고양이들이 있다. 책으로 자신을 가릴 줄 아는 고양이들이 있다. 그대가 공격하면 그들은 라마야나(Ramayana)속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 안에 실린 구절들을 갖고 그대를 반박한다. 또한 그들은 '기타(Gita)에 이렇게 씌어 있다'고 말한다. 이제 누가 기타에 맞서 싸우겠는가? 만일 내가 '이것은 나의 말이다.' 하고 말한다면 그대는 나와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를 들먹이는 즉시 나는 안전해진다. 나는 기타 뒤로 피신한다. 살벌한 냉기 속에서 기타는 따스함을 준다. 기타는 내게 직업을 주고,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방패막이 된다. 기타는 장신구도 되고, 가지고 노는 장남감도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기타에 대해 아는 것은 도서관 안의 고양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는 고양이보다 더 아는 것이 없다. 어쩌면 고양이도 도서관을 오래 들락거리다 보면 책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식으로 가득 찬 구루들은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책에 대해 더 많이 배울수록 알고자 하는 욕구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안다는 환상에 빠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앎의 권위를 내세운다면 그는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꼴이다. 안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무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안다고 말하기를 꺼린다면 그는 지혜의 빛을 보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구루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루가 될 꿈조차 꾸지 않는다. 구루가 됨과 더불어 지식이라는 권위가 등장한다. '구루'하는 말의 의미는 아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자신이 안다고 확신한다. 이제 그는 '너는 알 필요가 없다. 내가 너에게 지식을 나누어 줄 것이다.' 하고 말한다. 이런 주장과 권위가 다른 사람들의 탐구심을 죽인다. 타인을 억누루지 않으면 권위는 존재할수 없다. 권위를 휘두르는 사람들은 그대가 진리를 발견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대가 진리를 발견하면 그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그는 그대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추종자와 제자들을 긁어 모은다. 그리고 제자들 사이에는 수제자와 말단 제자라는 계급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 조직이다. 영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특정한 사람의 현존을 통하면 신의 에너지가 하강하는 삭티파트가 쉽게 일어난다. 이 말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거나 매달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나 의존하라는 뜻이 아니다. 또한 그대의 탐구를 포기하라는 뜻도 아니다. 매개체를 통해 신의 에너지가 내려올 때 그대는 이렇게 느껴야 한다. "매개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경험도 이토록 기쁨으로 넘친다면 신의 에너지가 직접 내려올 때는 얼마나 지복에 넘치겠는가?" 타인을 통해 오는 것도 신선도를 잃는다. 그것은 다소 생동감이 떨어진다. 내가 정원에 들어갔다가 꽃향기가 몸에 가득 베어서 나왔다고 하자. 이 때 그대가 와서 나를 통해 꽃향기를 느낀다. 그러나 이 꽃향기에는 나의 체취가 섞여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 향기마저 희미해질 것이다. 그대는 저기에 정원이 있으며 꽃이 만발해 있다는 소식을 접해야 한다. 그래야 이 소식에 고무되어 용기를 갖고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내가 '처음에는 삭티파트가 유용하다.' 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뜻이다. 구루를 찾는다면 그대는 그 자리에 정체될 것이다. 이정표 위에 멈춰 서지 말라. 이정표는 우리가 구루라고 부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정표는 목적지까지 정확하게 몇 마일이 남았는지 말해 준다. 어떤 스승도 이렇게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없다. 우리는 이정표를 숭배하거나 그 곁에 주저앉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스스로 이정표보다 못 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꼴이다. 이정표는 여행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아려 주려고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정표는 그대가 멈춰서야 하는 지점이 아니다. 거기에 멈춰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정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너에게 필수적인 정보를 주었다. 너는 지금까지 10마일을 여행했으며 20마일이 남았다. 이제 이것을 알았으니 더 갈 필요없다. 내 제자가 되어라. 나를 따르라." 그러나 이정표는 말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구루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말을 한다. 그래서 구루가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내게 감사하라. 너는 내게 감사의 예를 올려야 한다. 너는 내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 명심하라.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그대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정표는 여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정표 위에는 정보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 정보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감사함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경계하라. 한 개인에 얽매이지 말라. 개인을 넘어 형상 없는 세계로 나아가라.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라. 그러나 매개체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을 통해 일별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궁극적으로 개인 또한 신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물을 통해 바다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을 통해 무한의 세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라. 어느 것에도 노예가 되지 말라. 모든 관계는 구속이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이 모든 관계가 구속이다. 관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속박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도자는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지키는 것은 아무 해가 없다. 이런 관계는 장애물이 아니다. 이런 관계는 구도의 길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이없는 사실은 그가 부부 관계와 부자 관계를 포기하고 스승과 제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영적인 관계'라는 개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관계가 세속적인 영역에 속한다. 관계 자체가 세속적이다. 그러므로 관계 자체가 세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대는 독립적인 존재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말이 아니다 타인들 또한 혼자며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보다 두 걸음 정도 앞서 있다. 그 발자국을 발견했다면 그대는 자신의 여행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안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보다 두 걸음 뒤져있고, 어떤 사람은 그대와 나란히 가고 있다. 이렇게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모두 동반자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조금 앞서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뒤져 있다는 것뿐이다. 그대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라. 그러나 절대로 노예가 되지 말라. 위존과 관계를 멀리 하라. 특히 영적인 관계를 멀리 하라. 세속적인 관계는 위험하지 않다. 세상 자체가 하나의 관계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메시지와 암시를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라. 이 말은 그들에게 감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라. 감사를 요구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그대가 감사하지 않는 다면 이것 역시 똑같이 나쁘다. 지금 나는 이런 뜻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정보를 준 이정표에 감사해야 한다. 이정표가 그대의 말을 듣건 말건 상관없이 감사해야 한다. 구루가 감사함을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듣는 사람을 미혹시키고 에고를 살찌게 만든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맞는 말이다! 그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실수를 범한다. 우리는 이 말을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해석한다. 나는 그대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내말은 구루가 감사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감사를 요구하는 구루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그대는 감사해야 한다. 이 감사함은 속박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감사함을 요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감사드리는 것은 전혀 속박이 아니다. 그대가 요구하지도 않는데 내가 감사한다면 이것은 속박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감사를 요구한다면 내가 감사를 표하건 표하지 않건 속박이 될 것이다. 암시나 일별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얻어라. 그것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영구적일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대 자신의 것만이 지속될 것이다. 그대는 여러 번 반복해서 삭티파트를 체험해야 한다. 만일 자유를 잃을까 봐 두렵다면 그대 자신의 경험을 구하라. 그러나 속박에 대한 두려움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그대에게 묶이는 것이 속박이라면, 이 속박이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 또한 그대에게 속박된 행위다. 이 또한 그대에게 얽매인 행위다. 그러니 그대가 얻은 것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라. 그리고 계속 나아가라. 만일 무엇인가 얻었다가 다시 잃었다고 느낀다면 그대 내면의 근원을 찾아라. 그 곳에서 나온 것은 영원히 잃지 않는다. 그것을 잃을 방법이 없다. 우리 내면의 보물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거지가 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들인 것을 기회로 삼아 그대 자신의 탐구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통해 무엇인가 얻었다면 그것을 그냥 맏아들이고 감사하라. 그리고 더 나아가라. 당신은 '신은 공평무사하고 순수한 에너지다. 신은 인간의 삶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해 어떠한 의무도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카트 우파니샤드(Kath Upanishad)에는 '신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의 이러한 편애는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나는 신이 그대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일 신이 그대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대는 애당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신이 그대에게 무관심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신은 그대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의 일부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의 연장이다. 내가 말한 의미는 신이 그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신이라는 에너지가 그대를 위해 자신의 법칙을 어기는 일은 절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은 그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대가 돌로 자신의 머리를 치면 당연히 피가 흐를 것이다. 자연은 그대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돌로 쳤을 때 피가 흐르는 것은 신이 그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법칙이다. 그는 법칙을 어기면서까지 그대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그대가 물에 빠져 익사할 때도 자연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대의 익사가 자연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그대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익사하기로 되어 있다면 신은 그대를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은 그대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지붕 위에서 떨어지면 그대는 골절상을 입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은 그대가 골절상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의 기호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르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프랄라드는 불 속에서도 타지 않았고 산에서 떨어졌을 때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신의 주된 관심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에너지는 항상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우리 인간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인간은 편파적일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는 항상 공평무사하다. 공평무사함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에너지는 법칙에 따르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것이며,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신의 입장에서 기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카트 우파니샤드의 구절에 대해 말해 보자. 이 구절의 의미는 그대가 생각하는 바와 사뭇 다르다. 카트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그가 선택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가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만난다. " 당연히 그대는 신이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실, 이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진리를 표현할 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에 도달한 사람들은 반듯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의 노력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티끌보다 못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에 도달한다. 우리가 수행했다 해도, 우리가 얻은 이 엄청난 보물에 비하면 그 수행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우리의 노력과 우리가 얻은 보물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그 깨달음이 노력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었다. 신이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 준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이것은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노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한 것을 얻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얻지도 못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깨달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다. 그의 말에는 분명한 느낌이 들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누구기에 그것을 얻는다는 말인가? 그것이 우리의 힘이며 능력이었던가? 그것이 우리의 권리였던가? 아니다. 우리가 신을 만난 것은 순전히 신의 자비다. 그가 우리를 축복해 준 것이다. " 신에 도달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들이 말하는 뜻은, 그들은 자신이 얻은 것을 노력의 결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에고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선물이고 은총이다. 그들의 말은 옳다. 그러나 카트 우파니샤드를 읽을 때 그대는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카트 우파니샤드뿐만 아니라 어떤 경전을 읽든 그대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경전은 앎에 도달한 사람들의 말이다. 그런데 앎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 경전을 읽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한 데로 해석하고 이렇게 말한다. "좋다, 신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난다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사람들만 선택한다면, 우리가 걱정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모든게 신의 뜻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아의 경지에 든 사람들의 선언이 우리의 나태함을 합리화시키는 방패막이 된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깨달은 사람이 겸손함과 무아의 경지가 우리의 우둔함과 게으름을 정당화시키는 보호막이 된다. "신은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자기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노력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의 말 중에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신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만일 이런 식으로 신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어떤 사람은 좋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나쁘게 만들었다면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그렇다면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그대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이 실제로 의미한 바는 전혀 다르다. 그는 좋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만하지 말라. 신은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만든 것이다. " 그리고 그는 나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통해 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신은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을 만든 것이다. " 그러나 나쁜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나는 아무 책임이 없다. 내가 악한 것은 신의 책임이다." 좋은 사람 또한 태만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신은 자신이 선택한 바에 따라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들었다." 그의 삶이 무의미해지고 정체된다. 이것이 모든 경전이 세상에서 해온 일이다. 경전은 깨달은 사람들의 말이다. 앎에 도달한 사람들은 경전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경전을 읽는다. 이 때 그들은 실제의 의미와 정반대로 이해한다. 우리가 깨달은 사람들의 말에 부여한 의미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지 실제의 의미가 아니다. 나는 두 종류의 경전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깨달은 사람들의 말은 따로 보존되어야 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경전이 있어야 한다. 깨달은 사람들의 말이 들어 있는 경전은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숨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 자신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고, 모든 것이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깨달은 사람들의 모든 지혜가 왜곡되었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당신께서는 '에너지의 전이 현상인 삭티파트는 에고없는 사람을 매개체로 해서 일어난다.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이비며, 그를 통해서는 삭티파트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식으로 삭티파트를 수행하면서 경전에 씌어진 대로 쿤달리니의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이런 과정 전체가 거짓된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또한 그대가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점이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에 대응하는 거짓된 짝을 갖는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모든 차원에 위조품이 존재한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위조품이 진품보다 더 그럴듯해 보인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휘황찬란함이 위조품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진품은 그렇게 휘황찬란하지 않아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위조품은 떠들썩하게 자신을 내세워야 한다. 자신의 허구성을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조품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구매할 수 있다. 모든 영적인 현상은 그에 대응하는 위조품을 갖는다. 대응하는 위조품이 없는 경험은 아무것도 없다. 진짜 쿤달리니가 있다면 그에 대응하는 가짜 쿤달리니가 있다. 진짜 차크라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가짜 차크라가 있다. 진정한 요가의 방편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거짓 방편이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진정한 경험이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향기를 맡는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음악을 듣고, 이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색깔을 본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은 최면술에 의해서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최면술에 의해 색깔, 멜로디, 맛과 향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경험에는 내적인 변형이 필요하지 않다. 최면에 의해 무의식 상태에 빠지기만 하면 된다. 이런 경험은 위조품이다. 명상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최면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최면에 의해 유도된 상태다. 그것은 꿈과 같다. 그대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면 꿈 속에서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 꿈 속의 그녀가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녀가 실재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알겠는가? 꿈이 깬 다음에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온갖 꿈을 만들어 내는 방편들이 있다. 쿤달리니에 관한 꿈, 차크라에 관한 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온갖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대는 이런 꿈에 빠지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 꿈이 너무나 황홀하기 때문에 그대는 꿈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이런 꿈들은 꿈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그 꿈들은 그대가 깨어서 활동하는 동안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낮에 꾸는 꿈이다. 이런 꿈은 연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대는 이런 꿈에 빠져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무데도 도달하지 못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평생동안 기나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꿈을 만들어 내는 방편들이 있다. 다른 사람이 그대 안에 이런 꿈을 유도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 때 그대는 이 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진짜 경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짜 동전을 보지 못하고 항상 가짜 동전만 사용해온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이 동전이 가짜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가짜를 가짜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진짜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야만 이 두 가지 경험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알 수 있다. 진짜 쿤달리니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명심하라. 쿤달리니에 관한 경전을 풀이한 설명 중에서 많은 부분이 거짓이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 이제 내가 경전의 비밀에 대해 말하겠다.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성자와 선각자들은 그들의 경전안에 의도적으로 기본적인 오류를 남겨 두었다. 이것은 제자들의 구도 과정과 그 진실성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집에 방이 여섯 개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방이 다섯 개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대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집 안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당신 말대로 방이 다섯 개 있더군요." 이 때 나는 그대가 다른 곳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환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대가본 것은 내가 말했던 그 집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방이 항상 빠져 있다. 이를 통해 그대가 진짜로 집안을 경험했는지, 그대의 경험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대의 경험이 경전과 완전히 일치한다면 그것은 가짜 경험이다. 경전에는 항상 무엇인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대의 경험이 책과 완전히 일치한다면 그것은 진짜 경험이 아니다. 책에 관한 지식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 그대의 경험이 다른 식으로 왔을 때, 어떤 부분은 경전과 일치하고 어떤 부분은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 때 비로소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하라. 무엇인가 진실한 일이 일어났다. 그대는 단순히 경전에서 읽은 내용을 투영하고 있는 게 아니다. 구도자가 갖는 경험의 진실성 요부를 가리기 위해 경전에는 의도적으로 변형된 부분들이 있다. 진정으로 쿤달리니가 깨어났을 때 그대는 어느 것이 그런 부분인지 알 것이다. 그 전에는 알 수 없다. 모든 경전은 필수적으로 어떤 정보를 빠뜨려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험의 진실성 여부를 가리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한 교수가 있었다. 그는 내가 어떤 책을 언급할 때마다 '나도 그 책을 읽었다. '라고 말했다. 어느 날, 내가 가짜로 지어 낸 책이름과 저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말했다. '이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참으로 훌륭한 책입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물론, 나도 그 책을 읽었다. " 내가 말했다. "교수님이 그 책을 지어 낸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 '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은 모두 거짓입니다. 사실, 그런 책과 저자는 없습니다. " 그가 소스라치게 놀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책이 없다고?" 내가 말했다. "물론, 그런 책은 없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주장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즉각 간파한다. 그대의 경험이 경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그대는 즉각 간파될 것이다. 경전과 진정한 경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는 거짓된 부분이 보태지고 진실된 것이 삭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전에 묘사된 경험은 인위적으로 창조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마음의 능력은 참으로 엄청나다. 그대가 내면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은 온갖 수단을 다해 그대를 속인다. 게다가 그대가 자신을 속이고 싶어한다면 그런 일은 아주 쉽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경전에 어떤 식으로 묘사되어 있건, 어떤 사람이 삭티파트를 행한다고 주장하거나 어떤 방편에 대해 말하건, 나는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문제의 핵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경험의 진실성을 가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 그러나 꿈 속에서 물을 마신 사람은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아침에 그는 목이 차고 입술이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한다. 꿈 속에서 마신 물이 갈증을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오직 진짜 물이 갈증을 해소시켜 준다. 그러므로 그대의 갈증이 해소되었는지 살펴보면 그 물이 진짜였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 있다. 지금 그대가 말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쿤달리니가 깨어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들은 많은 것을 경험했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들의 방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에 대해 아무것도 무른다. 그저께 한 친구가 나를 찾아와 무념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명상의 방법을 물었다. 자, 이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쿤달리니가 깨어났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어떤 사람은 쿤달리니가 각성되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섹스 문제로 시달린다. 이렇게 경험의 진실성을 판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방법들이 있다. 진정한 경험을 얻은 사람은 탐구가 끝난다. 그 때는 신이 와서 지복과 평온을 준다 해도 그는 정중하게 거절할 것이다. 그는 '고맙지만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계십시오. 저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진실함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인격(personality)을 들여다보면 된다. 이것이 그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삼매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는 땅속에 6일 동안 매장되었다가 살아서 나온다. 그러나 그대가 집에 돈을 놀고 나가면 이 사람이 들어와 훔쳐갈 것이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게걸스럽게 술을 마실 것이다. 만일 그가 삼매의 경지에 들었다고 주장한다면 사실을 몰랐다면 그대는 그에게서 가치 있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인격에는 향기가 없다. 광채도 없고 우아함도 없다. 그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아니다. 그는 삼매의 경지에 든 것이 아니다. 그는 가짜 삼매의 속임수를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땅 속에서 6일 동안 머물 수 있는 호흡법을 터득했다. 그는 호흡은 어떻게 조절하는지 배웠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공간에서 최소한의 산소를 소모하여 살아 남는다. 그는 땅속에서 6일 동안 머물 수 있다. 그는 눈 속에 들어가 6개월 동안 동면하는 시베리아 곰과 거의 똑같은 상태에 있다. 그는 삼매에 빠진 것이 아니다. 우기가 끝날 때쯤이면 개구리는 땅 속으로 들어가 8개월을 지낸다. 이 개구리들은 삼매의 경지에 든 것이 아니다. 이 사람도 똑같은 기술을 배웠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로 삼매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땅 속에 묻는다면 아마 그는 죽어 버릴 것이다. 삼매는 땅 속에 매장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만일 붓다나 마하비라를 이런 식으로 땅 속에 묻었다면 그들이 살아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기술을 터득한 사람은 살아나올 것이다. 이런 기술은 삼매와 아무 상관이 없다. 삼매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그러나 땅 속에서 살아 남는 기술을 배운 사람은 대중의 인기를 끌 것이다. 만일 마하비라가 실패하고 이 사람이 성공한다면 이 사람이 진짜 티르탕카르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마하비라는 가짜로 전락할 것이다. 이렇게 초능력 현상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영적인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 주장을 합리화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개발해 냈다. 그래서 그들의 주변에는 실체와 아무 상관이 없는 별개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변형을 일으키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땅 속에서 6일을 머물건 6개월을 머물건 그것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다. 그런 사람의 내적인 상태는 어떤가? 그의 내면에 얼마만큼의 평화와 침묵이 깃들어 있는가? 그의 내면이 지복으로 층만한가? 물론 그는 땅 속에 묻혀서도 6일 동안 편안하게 머물 수 있다. 그러나 동전 한 닢만 잃어버려도 그는 끙끙 앓으며 밤잠을 설칠 것이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해아 한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삭티파트를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삭티파트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최면의 일종이다. 깊은 곳에서 보면 그들은 어느 정도 최면술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물론, 그들이 이런 방면에 관해 완벽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런 최면적인 과정에 대해 과학적으로 아는 것이 없다. 자신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도 모른다. 그들 역시 크게 혼동하고 있다. 인도의 길거리에서는 흔히 마술사를 볼 수 있다. 그가 천을 펼쳐 놓고는 어린 소년에게 그 위에 누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년의 가슴 위에 장신구를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소년에게 '저 사람 주머니 속에 있는 지폐의 일련 번호가 뭐지?'하고 묻는다. 그러면 소년이 일련 번호를 정학하게 말할 것이다. '저기 서 있는 사람의 시계가 몇시를 가리키고 있지?'하고 물으면 소년이 정확한 시간을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의 이름이 뭐지?'하고 물으면 소년이 그 이름을 말할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이것을 장신구의 마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그가 소년의 가슴에서 장신구를 치우고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소년은 묵묵부답으로 누워 있다. 소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이제 이 마술사가 마법의 장신구를 팔기 시작한다. 한 개에 단돈 1루피! 그대는 이 장신구를 사서 집으로 가지고 간다. 그리고 가슴에 장신구를 올려놓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소년이 마술사에게서 '가슴 위에 장신구를 올려놓으면 말을 하고, 장신구를 치우면 입을 다물어라.'하고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장신구에 특별한 마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수법에는 보다 더 깊고 미묘한 차원이 있다. 이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이 수법은 '최면 후의 암시(posthypnotic suggestion)'라고 불린다. 어떤 사람이 최면에 걸려 무의식 상태에 빠진다. 이런 최면 상태에서 그는 장신구를 잘 보라는 말을 듣는다. 또한 그는 장신구를 가슴에 올려놓으면 무의식 상태에 빠지라는 말을 듣는다. 그 다음에 이런 무의식 상태에서 그는 지폐의 일련 번호를 읽거나 시계의 시간을 맞출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속임수는 없다. 소년은 천 위에 눕고 가슴 위에 장신구가 놓이자마자 최면 상태에 빠진다. 이제 그는 마술사가 묻기만 하면 지폐의 일련 번호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년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마술사 여기 소년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마술사는 한 가지 수법을 배웠다. 한 사람에게 최면을 건 다음 어떤 물건을 보여주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이 물건이 당신 위에 놓일 때마다 당신은 즉각 무의식 상태에 빠질 것이다. 다시 최면상태가 될 것이다. 이 방법이 완벽하게 작용한다. 마술사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내면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이 에너지 현상이 역학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소년도 모르고 마술사도 모른다. 만일 이것을 알았다면 길거리에서 이런 공연이나 하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것이 심령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이런 현상의 메커니즘을 아는 것은 상당히 심도 있는 주제다. 프로이트와 융도 이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몰랐다. 현대의 가장 뛰어난 심리 학자들도 이 신체 에너지의 역학 작용에 대해 전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이 마술사는 어쩌다가 이 수법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실용화시켰다. 전기 스위치를 누르는 데 전기가 무엇인지,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알 필요없다. 스위치만 누르면 전기가 흐른다. 스위치를 누르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거리의 마술사는 최면 후의 암시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이 기술을 장신구를 파는데 이용한다. 그대는 장신구를 사서 집으로 갖고 가지만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최면적 암시의 과정에서는 분명히 장신구가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대가 이 장신구를 가슴 위에 올려놓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때 그대는 자기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 장신구가 분명히 작용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가짜 경험, 사이비 경험이 창조될 수 있다. 이것을 사이비며 가짜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런 경험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사이비며 가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심령 현상일 뿐이다. 모든 영적인 경험에는 그에 대응하는 심령 현상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심령 현상은 얼마든지 창조될 수 있다. 심령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이런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적인 경험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삭티파트를 행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행위자'라면 해프닝이 일어났을 때 그대는 내게 집착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사람은 행위자가 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는 공이다. 그런 사람의 곁에만 있어도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대 로마 시대에 한 성자가 있었다. 그의 존재로부터 뻗어 나가는 향기와 지혜의 빛이 어찌나 강한지 하늘에 있는 신들까지 그것을 알게 되었다. 신들이 그에게 찾아와 말했다. "그대의 소원을 말하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겠다." 성자가 말했다. "일어나야 할 일은 모두 일어났다. 내겐 더 이상 아무 욕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원하라는 부탁으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 당신들의 제의로 나를 곤경에 빠뜨리지 말라. 그 제의를 거절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일어나야 할 일은 모두 일어났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까지." 이 말을 듣고 신들은 더 감동받았다. 그가 모든 욕망을 초월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의 향기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신들은 고집을 피웠다. "당신은 무엇인가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 성자는 난처한 지경에 처했다. "나보고 무엇을 요구하라는 말인가?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좋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주고 싶은 것을 주어라.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 신들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신비한 힘을 주겠다. 당신이 만지기만 해도 병든 자가 깨끗이 나을 것이며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이다. " 성자가 말했다. "좋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큰 문제에 빠질 것이다. 내 안에 '내가 병든 자를 치료했다. 내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놓았다.'는 에고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에고가 들어오면 나는 끝장이다. 나는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니 부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내가 기적을 일으킨다 해도 나 자신은 그것을 모르게 해 달라." 이 말에 신들이 동의했다. "이제부터 당신의 그림자가 스치는 곳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성자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다. 이제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 달라. 내 목을 뻣뻣하게 만들어 달라. 그래서 내 그림자가 어떤 효력을 미치는지 돌아보지 못하게 해 달라." 신들은 이 소원을 들어주었다. 성자는 묵이 굳어서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방랑했다. 그의 그림자가 스치는 곳마다. 시들었던 꽃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저만큼 가 버린 뒤였다. 그는 목이 굳어서 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몰랐다. 죽음을 맞는 말, 그가 신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의 선물이 결실을 맺었는가?" 그는 자신이 일으킨 기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매우 사랑한다. 삭티파트는 이처럼 일어난다. 삭티파트는 매개체의 그림자와 더불어 일어난다. 그런데 그는 목이 뻣뻣하게 굳어서 되돌아볼 수 없다. 신의 에너지가 흐르는 매개체는 완벽한 공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머리가 뒤를 돌아볼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에고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길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면 '내가 그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이런 생각을 버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완벽한 공이 되면 그의 주변에서 삭티파트가 아주 쉽게 일어난다. 이것은 태양이 떠오르면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 강물이 흐르고, 나무는 그로부터 양분을 흡수한다. 강은 많은 나무에 물을 주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 때문에 많은 나무가 꽃을 피웠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강은 이런 일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 나무에서 꽃이 피어날 때쯤이면 이미 강물은 바다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강물이 나무 견에 기다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하겠는가? 그럴 시간이 있는가? 뒤돌아볼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삭티파트는 영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에고가 남아 있다면, '내가 이 일을 했다.' 는 행위자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심리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최면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의 다이나믹 명상에는 최면이나 환상의 가능성이 없습니까? 이 명상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물론, 일련의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올바른 길고 들어선 것입니까? 혹시 이들 중의 일부는 단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몇 가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최면은 과학이다. 이 과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 그대를 돕는데 쓰일 수도 있다. 과학은 항상 양날을 가진 칼과 같다. 원자 에너지는 밭에서 밀을 재배하는데 쓰일 수도 있고, 단번에 인류 전체를 파괴하는데 쓰일 수도 있다. 두 가지 일 모두 가능하다. 집 안에서 선풍기를 돌리는데 쓰이는 전기가 그대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전기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에고이스트(egoist)는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파괴하고, 현혹하는 데 최면술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반대의 일 또한 가능하다. 최면은 가치 중립적인 에너지다. 그것은 하나의 과학이다. 최면은 그대 안의 꿈을 없애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그대의 뿌리 깊은 환상을 더 강화시키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초기 단계에서 내가 사용하는 방법은 최면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대를 최면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이 기본적인 요소가 주시(witnessing)다. 이것이 최면과 명상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엄청난 차이점이기도 하다. 최면에 걸렸을 때 그대는 무의식 상태에 빠진다. 그래야만 최면술사가 그대에게 작용을 미칠 수 있다. 명상에서도 최면이 유용하다. 하지만 그대가 관찰자가 되었을 때만 유용하다. 이 때 그대는 깨어 있다. 그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다. 이 때는 그대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일도 행해질 수 없다. 거기엔 항상 그대가 현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면에서는 암시가 그대를 무의식 상태로 만든다. 그러나 똑같은 암시가 그대의 무의식을 깨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초기 단계는 모두 최면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모든 여행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음 안에 살고 있다. 그 곳이 그대가 위치한 지점이다. 따라서 그대의 여행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여행은 두 가지 길로 나뉠 수 있다. 하나의 길은, 연자방아를 돌리는 소처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똑같은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길은 그대를 마음의 외곽으로 인도할 것이며, 그 외곽에서 그대는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초기 단계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최면의 초기 단계는 명상의 초기 단계와 동일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는 전혀 다르다. 목적지가 다르다. 두 경우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인 요소는 전혀 다르다. 최면은 무의식적인 상태, 잠을 요구한다. 모든 암시가 잠과 더불어 시작되고 그 다음에 휴식이 따른다. 그러나 명상에서는 깨어있음과 더불어 암시가 시작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주시하는 상태가 강조된다. 그대 안의 주시자가 깨어 있다. 그러므로 외부의 인물은 그대에게 아무 영향을 줄 수 없다. 또한 그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전히 의식한다. 이제, 해프닝이 일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의지력이 약하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해프닝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모든 것이 연기는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이 모두가 그들의 심리적인 방어 수단이다. 그들은 '이 사람들은 약하다. 그러나 나는 쉽게 영향받는 약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에고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이런 해프닝은 약한 사람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 오직 지성적인 사람들에게만 이런 일어난다. 지성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바보는 최면에 걸리지도 않고 명상에 들어갈 수도 없다. 두 가지다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미친 사람은 최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최면에 더 빨리 반응한다. 지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최면에 걸리는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은 지성과 의지의 결여를 어떻게 합리화시키는가?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방어한다. "이 사람들은 연기를 하는 것 같다. 그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영향받는 것이다." 최근, 암리차르(Amritsar)의 명상 켐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교육 수준이 높은 노인이었다. 그는 은퇴한 박사였다. 그가 명상 캠프의 세 번째 날에 나를 찾아와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좋지 못한 생각을 푸고 있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용서를 구하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내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말했다. "첫째 날에 당신이 일부 사람들과 각본을 짜고 이 쇼를 벌이는 것이며, 마음이 약하나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그들을 따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래, 내일은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날에 나는 두 서너 명의 내 친구들이 이 명상 실험에 열성적으로 빠져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 또한 박사입니다. 내가 그들의 집으로 찾아가 '자네들이 이 쇼에 참여하고 있을 리는 없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연기를 한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 내가 물었다. "그들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우리가 연기를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도 어제까지는 자네하고 똑같이 생각했네. 그런데 오늘 어떤 해프닝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네.'하고 말했습니다. " 그 다음에 서 번째 날이 되었을 때 그에게도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가 나를 찾아와 사과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났습니다. 이제 나의 환상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히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 박사 친구들까지 의심했습니다. 그들도 당신과 짜고 연기를 하거나 최면술에 걸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게도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니 내동생, 그 또한 박사입니다. 그 동생이 '오늘 쇼는 어땠습니까? 형님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동생에게 '아누야 나를 용서해라.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쇼라고 무를 수 없다. 이틀동안은 나도 이 실험 전체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내게도 그 일이 일어났다. 나는 네 말에 화가 나지 않는다. 어제까지는 나도 너처럼 냉소적이었으니까. ' 하고 말했습니다. " 이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에 대해 내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방어 수단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에고를 보호하는 길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해프닝이 일어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단지 의지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용기만 낸다면, 결연한 의지를 갖고 모든 금기를 떨쳐 버리기만 하면 해프닝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 어떤 여성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가 내게 말하기를 ,친구가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실험에서는 사람들이 벌거벗고 이상한 짓을 한다며? 버젓한 집안의 여자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릴수 있지? 그 여자들이 도대체 무슨 집안 망신을 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나는 명망 있는 가문에 속하지만 저 사람들은 비천한 집안 출신이다.' 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이 모두가 에고의 방어 수단이다. 자신을 명망 있는 가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이 명상 실험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가문에 꽁꽁 묶어 두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이 벌거벗었다고 해서 문제에 빠지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는 고상한 집안의 규수가 아니다. 그녀가 벌거벗은 사람과 무슨 할 일이라도 있는 말인가? 우리의 마음은 항상 이상한 핑계를 발명해 낸다.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난잡하고 불결한 짓이다. 내게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대단히 강한 사람이다." 만일 그랬다면, 정녕 그대가 강인하고 지성적인 사람이었다면 벌써 해프닝이 일어났을 것이다. 지성적인 사람은 직접 시도해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성적인 사람의 징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가짜라고 낙인찍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대가 누구기에 다른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단정짓는가? 그렇게 잘못된 단정이 큰 어려움을 낳는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은 미쳤다.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그의 말은 터무니없다. '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마하비라에게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이 '이 사람은 벌거벗음으로써 큰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마하비라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내면에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단정하는가? 지성적인 사람은 스스로 행해 보기 전에는 아무 견해도 표명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성적인 사람의 징표다. 만일 그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 실험에서 지시대로 철저하게 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지세대로 철저히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프닝이 일어나겠는가? 최근에 포르반데르(Porbander)의 명상 캠프에서 나는 '100도까지 완전히 자신을 탈진시키지 않으면 그대의 노력이 99도에 달했다 해도 그대는 실패할 것이다.'하고 말했다. 한 친구가 내게 와서 말했다. "저는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좀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한가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식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혼신의 힘을 다했고,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 이런 식으로 느긋한 태도를 갖고 있다면 이 명상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우리는 두 배를 동시에 타려고 한다. 두 발을 각기 다른 배에 올려놓고 있는 사람은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하나의 배로 충분하다. 설령 그 배가 지옥으로 간다 해도 최소한 그대는 하나의 배를 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 발은 천국행 배에 올려놓고, 다른 발은 지옥행 배에 올려놓는다. 실제로, 마음은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마음은 천국으로 가야 행복할지 지옥으로 가야 행복할지 결정하지 못한다. 항상 두려워한다. 이렇게 두 발을 각기 다른 배에 올려놓으면 아무데로도 가지 못한다. 그대는 물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마음은 항상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마음은 정신분열증 환자다. 우리는 어디론가 가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스스로 제동을 건다. 이것은 매우 해롭다. 전력을 다해 이 실험에 임하라. 다른 사람에 관해 어떤 견해도 갖지 말라. 전력을 다해 이 명상에 임하면 틀림없이 어떤 해프닝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나는 아주 과학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종교적인 미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총력을 기울이면 반듯이 결과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신은 에너지며, 이 에너지는 공평하다. 여기에서는 기도와 예배가 소용없다. 상류 계층 출신이거나 인도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무관하다. 이것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문제다. 전력을 다해 이 명상에 임하면 신도 그대가 성공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설령 신이 없다 해도 상관없다. 이 명상 실험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항상 그대의 내적 경험에 따라 판단하라. 외양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잘못된 길로 빠질 것이다. 자유에 이르는 쿤달리니의 길 어제 강의에서 당신은 거짓된 쿤달리니 경험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것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사이킥 경험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초기 강의에서 당신은 쿤달리니가 오직 사이킥 경험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며 두 가지 상태의 쿤달리니, 즉 사이킥한 쿤달리니와 영적인 쿤달리니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그대를 이해시키려면 먼저 여러 가지 미묘한 신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인간은 일곱 가지 신체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신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물질적 육체다. 두 번째는 에텔체(etheric body)고, 세 번째는 아스트랄체(astral body)다. 네 번째는 멘탈체(mental body) 또는 심령(physic body)체며, 다섯 번째가 영체(spiritual body)다. 여섯 번짼느 코스믹체(cosmic body)며,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니르바나 샤리르(nirvana sharir)며, 열반체 (nirvanic body), 무체의 체(bodiless body)라고 불린다. 이 일곱 가지 신체에 대해 좀더 설명하는 것이 쿤달리니를 완전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최초의 7년 동안은 스툴 햐리르(sthul sharir),즉 육체만이 형성된다. 다른 신체는 아직 씨앗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 신체들은 성장의 잠재성을 갖고 있지만 초기 단계에는 잠들어 있다. 이 7년 동안에는 지성, 감정, 욕망이 성장하지 않는다. 이 기간에는 오직 물질적 신체만이 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계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 단계에 정체되어 있다. 그들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동물들은 물질적 신체만이 성장한다. 다른 신체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다음의 7년 동안, 일곱 살부터 열네 살까지는 브하와 샤리르(bhawa sharir), 에텔레체가 성장한다. 이 7년 동안 감정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열네 살 때 성적인 성숙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은 감정의 가장 강렬한 형태기 때문이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이 단계에 정체되어 있다. 그들의 물질적인 신체는 성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두 신체에 정체되어 있다. 열네 살에서 스물한 살까지인 세 번째 7년 동안에 수크쉬마 샤리르(sukshma sharir),아스트랄체가 개발된다. 두 번째 신체에서는 감정이 개발되었다. 이제 세 번째 신체에서는 이성과 사유, 지성이 개발된다. 7살까지는 아이가 어떤 짓을 저질러도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는 물질적 신체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를 동물과 똑같이 다룬다. 우리는 아이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 설령 아이가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그는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그 일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진짜 범죄자는 아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두 번째 신체가 발전한 다음에 인간은 성년기(adulthood)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적인 성년기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자연이 전적으로 협조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이 단계에서 인간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이성과 지성, 사유능력이 개발되는 세 번째 신체는 교육과 문화, 문명의 결과다.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투표권이 주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나라는 스물한 살에 투표권을 주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투표권의 제한 연령을 열여덟 살로 낮추자는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점점 진화하고 있으며, 각 신체가 성장하는데 걸리는 7년이란 기간이 점점 단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여자들은 열세 살이나 열네 살 때 사춘기에 도달한다. 그러나 지난 삼십 년간 이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제는 열한 살짜리 소녀도 사춘기에 도달한다. 투표 연령이 열여덟 살로 낮아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스물한 살 때 하던 일을 이제는 열 여덟 살 때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흔히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는 세 번째 신체의 성장에 필요한 나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 단계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들의 성장은 세 번째 신체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 동안 아무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프쉬케(psyche)라고 부르는 것은 마나스 샤리르(amans sharir), 네 번째 신체에 속한다. 이 신체의 차원에서는 고유의 멋진 경험을 가질 수 있다. 지성이 개발되지 않은 사람은 수학에 관심을 갖거나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수학에는 고유의 매력이 있다. 그러나 오직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만이 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것은 음악가 음악에 취하고, 화가가 색깔에 취하는 것과 같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수학은 일이 아니라 놀이였다. 그러나 수학이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지성의 발전이 정상에 도달해야 한다. 각 신체가 개발됨과 아울러 우리 앞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에텔체가 개발되지 않은 사람, 즉 첫 번째 단계에 머무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첫 번째 신체까지만 도달한 문화권에서는 음식의 맛을 즐기는데 매달린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 번째 신체에서 정지한 문화권은 섹스가 그 중심을 이룰 것이다. 그들의 문학 작품, 음악, 영화, 책, 시, 그림, 심지어 그들의 집과 운송 수단들까지 섹스를 지향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성으로 가득 찰 것이다. 세 번째 신체가 완전히 개발된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지적이고 사유 능력이 깊어질 것이다. 한 국가나 사회에서 세 번째 신체의 발달이 배우 중요한 상황에 이르면 많은 지적 혁명이 일어난다. 붓다와 마하비라의 시대에 비하르(Bihar) 지방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 작은 지방에서 붓다와 마하비라 같은 인물이 여덟 명이나 태어난 배경이다. 그 당시에는 탁월한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시대의 그리스(Greece)가 그런 상황에 있었으며, 노자와 공자 시대의 중국도 그랬다. 더 놀랄 만한 사실은 이 탁월한 인물들 모두가 5백 년이란 기간동안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5백 년 동안에 인간 안에 있는 세 번째 신체의 발달이 정상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세 번째 신체에서 멈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물한 살 이후로는 아무 발전도 이루지 못한다. 네 번째 신체에서는 흔치 않은 경험이 일어난다. 최면, 텔레파시, 투시 등이 가능해진다. 시간과 공간이 장애 없이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도 있다. 외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의 밖으로 여행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아스타랄체를 이용할 수 있으며 자신을 물질적인 육체와 별개의 존재로 알게 된다. 네 번째 신체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라는 이 신체를 개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신체의 차원에는 많은 위험과 더불어 속아넘어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더 미묘한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속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육체에서 벗어났는지 아닌지 아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그의 꿈에 불과할 수도 있고 실제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그 자신 외에는 아무 장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속을 가능서이 많다. 세 번째 신체까지가 객관적인 세계라면 네 번째 신체부터 시작되는 세계는 주관적이다. 네 손에 1루피가 있다면 나도 불 수 있고 그대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객관적인 세계다. 거기에 1루피가 있는지 없는지 객관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내 생각의 영역에는 그대가 들어올 수 없고, 그대 생각의 영역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다. 여기에서부터 사적인 세계가 시작된다. 이 세계에는 온갖 위험이 산재해 있다. 이 세계에서는 타당성을 검증하는 외부적인 기준이 사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짜 기만의 세계는 네 번째 신체로부터 시작된다. 그 앞 단계까지는 모든 기만을 감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기만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반듯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가장 큰 위험성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미묘하고 아리송하며 개인적이다. 경험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단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가 이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 신체를 이용하게 된 사람들은 항상 비난과 중상 모략에 시달려야 했다. 유럽에서는 수백 명의 여자들이 마녀로 몰려 화형 당했다. 그들이 이 네 번째 신체의 기능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탄타라를 수행하던 사람들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 또한 네 번째 신체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이 비밀은 인류에게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대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았다. 그들은 그대라는 집안에 사물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집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네 번째 신체의 영역은 흑마술로 여겨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인간이 세 번째 신체 이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해 왔다. 네 번째 신체는 항상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 신체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엄청난 이득도 있다. 우리는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대신에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했다. 그런 연구가 필수적이었다. 그랬다면 우리의 경험을 검증할 수 있는 길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과학적인 도구들이 있다. 인간의 이해력 또한 크게 증진했다. 그러므로 과학에서의 많은 발견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경험을 검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 동물이 꿈을 꾸는지 아닌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동물들이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 한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꿈꾼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간밤에 꿈을 꾸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줄기찬 노력과 연구를 통해 동물들이 꿈을 꾸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알기 위해 몇 년 동안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계속했다. 그는 원숭이에게 영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원숭이에게 전기 충격이 주어졌다. 원숭이가 이 버튼을 누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매일 원숭이를 의자에 앉히고 영화를 보여 주었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전기 총격을 가했다. 그리고 이때마다 원숭이는 버튼을 눌러 전기를 껐다. 이런 일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그 다음에는 원숭이를 이 의자에 앉히고 잠을 재웠다. 이제 원숭이는 꿈을 꾸기 시작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그에게는 실험 기간에 본 영화와 꿈속에서 나타나는 영상이 똑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꿈이 시작될 때마다 그는 버튼을 눌러 댔다. 이런 식으로 그는 반복해서 버튼을 눌러 댔다. 이 실험으로 그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제 인간은 말 못 하는 동물들의 꿈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다. 구도자들은 네 번째 신체의 경험을 외부에서 검증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이제는 그 경험이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지 허구인지 조사할 수 있다. 네 번째 신체의 쿤달리니 경험은 사이킥 체험이다. 그러나 이것은 쿤달리니 경험이 가짜라는 말이 아니다. 사이킥 상태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 내가 '쿤달리니는 사이킥 체험일 뿐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그 경험이 반듯이 가짜라는 말은 아니다. 사이킥 체험은 가짜가 될 수도 있고 진짜가 될 수도 있다. 그대는 밤에 꿈을 꾼다. 이 꿈은 잠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 일어났을 때 그대는 실제로 꾸지도 않은 꿈을 기억할지 모른다. 꾸지도 않은 꿈을 꾸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이 때 이 꿈은 가짜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간밤에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간밤에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밤새도록 꿈을 꾼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들은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 물론,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사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이 정반대의 경우 또한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꾸지도 않은 꿈을 기억할 수도 있다. 이 또한 허구다. 꿈은 허구가 아니다. 꿈은 나름대로 실재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꿈은 진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진짜 꿈은 간밤에 실제로 꾸었던 꿈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꾼 꿈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대에는 꿈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크게 존경받았다. 꿈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대는 어떤 꿈을 구고, 그것을 기억할 때는 완전히 역순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영화 필름을 돌리는 것과 같다. 영화를 볼 때는 필름의 첫 부분에서부터 스토리가 풀려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꿈이라는 드라마는 잡 속에서 한 방향으로 감기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풀려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기억할 때 먼저 꿈의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회상한다. 가장 먼저 꿈꾼 것이 그 꿈을 회상할 때는 마지막 부분이 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역순으로 뒤집어진 단어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꿈을 기억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은 훌륭한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꾸지도 않은 꿈을 기억한다. 또한 우리는 실제로 꾼 꿈의 상당 부분을 버리고, 그 나머지 대부분을 변경시킨다. 꿈은 네 번째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네 번째 신체는 엄청난 잠재성을 갖는다. 요가에서 '싯디(siddhi)'라고 부르는 초능력이 이 신체에서 얻어진다. 요가는 수행자들에게 이 초능력에 빠지지 말라고 수없이 경고한다. 잘못된 길로 빠질 가장 큰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설령 사이킥 상태로 들어간다 해도 거기엔 아무 영적인 가치가 없다. 나는 쿤달리니가 사이킥 체험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쿤달리니 체험이 네 번째 신체에서 실제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생물학자들이 인간이 육체에서 쿤달리니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들이 쿤달리니와 차크라를 부정하고 그것을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쿤달리니와 차크라는 네 번째 신체에 속한다. 네 번째 신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주 미묘하다.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육체만이 포착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신체와 내 번째 신체 사이에는 서로 대응하는 지점이 있다. 이것은 일곱 장의 종이를 겹쳐 놓고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첫 번째 종이에서 구멍이 없어져도 나머지 종이의 구멍들과 대응하는 지점은 남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종이에 구멍이 없다 해도 그 위에 겹쳐진 나머지 종이의 구멍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차크라와 쿤달리니는 첫 번째 신체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물학자들이 그런 것들을 부정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첫 번째 신체에는 이와 대응하는 지점이 있다. 차크라와 쿤달리니는 다른 신체에 속하지만 육체에서도 그와 대응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쿤달리니는 네 번째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사이킥 체험이다. 그리고 이 사이킥 체험에는 진짜와 가짜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그대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이다 상상에서 나온 체험은 가짜다. 그러나 이 상상 또한 네 번째 신체의 속성이다. 동물들은 상상의 능력이 없다. 그래서 글들은 과거에 대해 아주 조금의 기억밖에 없고,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동물들은 고뇌를 느끼지 않는다. 고뇌는 항상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자기 또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죽음의 공포가 없다. 인간들 중에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은 항상 죽음을 타인과 연결시킬 뿐 자신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네 번째 신체의 상상력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상 또한 진짜가 될 수도 있고 가짜가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진짜 상상은 우리가 미래를 볼 수 있음을 뜻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려보는 것이 진짜 상상이다. 그러나 일어날 수 없는 일,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하는 것은 가짜 상상이다. 이 상상이 올바른 전망을 통해 사용되면 고학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과학은 상상에 불과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하늘을 나는 꿈을 꾸어 왔다. 이런 식으로 꿈꾼 사람들은 매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지 않았다면 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가 비행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다음에 실험이 행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인간은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달에 가기를 꿈꾸어 왔다. 처음에 이것은 상상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현실적인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런 상상은 진정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상은 언젠가 발견될 현실의 길 위에 놓여 있었다. 과학자가 상상하듯이 미친 사람도 상상한다. 내가 과학이 상상이듯이 광기도 상상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을 과학과 광기가 하나며 똑같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라. 미친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 이물질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을 상상한다. 처음에는 이 물질계와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에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있다. 과학자는 그런 것들을 상상한다. 네 번째 신체의 여러 가능성 중에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항상 잠재해 있다. 그 때 허구적인 세계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신체로 들어가기 전에 어떠한 기대도 갖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이 네 번째 신체는 사이킥 신체다. 가령, 이 집에서 일층으로 내려가기를 원한다면 나는 승강기나 계단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 속에서 일층으로 내려가기를 원한다면 승강기나 계단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 자리에 앉아서도 내려갈 수 있다. 상상과 생각의 영역에서 위험한 점은,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어떤 예상과 기대의 세계로 빠져들 것이다. 그래야만 마음이 기꺼이 협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쿤달리니가 깨어나기를 원한다고? 좋다, 이제 쿤달리니가 올라오고 있다... 이제 다 올라왔다!" 그대는 쿤달리니가 상승하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쿤달리니가 완전히 깨어나고 차크라가 활성화되었다고 느낄 때까지 마음은 이 거짓된 느낌을 계속 고무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체험의 진실성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각 차크라가 열릴 때마다 그대의 퍼스낼리티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대는 이 변화를 상상하거나 예상할 수 없다. 이 변화는 물리적인 세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그대는 술이나 마약 따위에 손을 댈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멘탈체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알코올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므로 여성이 술을 마시면 남성이 술을 마시는 경우보다 더 위험하다. 여성의 멘탈체가 훨씬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멘탈체가 신속하게 영향받고 그녀의 통제권을 벗어난다. 여성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이다. 여성들은 사회의 규율에 의해 스스로를 이런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여자들은 남자와의 평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래에는 이런 면에서도 여자들은 남자와의 평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조차 여자들이 평등을 주장하고 남자들을 능가하게 되는 날, 여자들 스스로가 심각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남성에게 당한 어떤 피해보다도 더 심각한 해를 입을 것이다. 네 번째 신체에서 일어나는 쿤달리니의 각성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절대 증명될 수 없다.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쿤달리니의 각성과 그 체험은 허구적인 상상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체험의 진실성은 오직 그대의 물리적인 특성에 의해서만 판별될 수 있다. 그대의 인격(personality)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보면 된다. 에너지가 각성되자마자 그대 안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항상 내가 행동은 외적인 기준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내면에 일어난 일이 기준이다. 각 단계마다. 필연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령,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술이나 마약을 복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쿤달리니가 여렸다고 말하면서 마약이나 술에 탐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체험은 모두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알면 틀림없다. 쿤달리니가 각성되고도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후에는 폭력적인 성향이 완벽하게 사라진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폭력성도 사라진다.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 남에게 해를 입히고 싶은 충동은 쿤달리니가 잠자고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쿤달리니가 깨어나는 순간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해를 입히려는 충동은 불가능하다. 이 때는 폭력적인 충동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런 충동 자체가 없으므로 폭력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일 폭력적인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면 쿤달리니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알면 된다. 눈을 뜬 다음에도 여전히 지팡이가 필요하다면 그대의 눈은 아직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도 그대의 눈은 아직 볼 능력이 없다. 아직 지팡이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대의 행동을 보면 그대가 사물을 보는지 못 보는지 알 수 있다. 그대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 망설이는 태도, 안정되지 못한 걸음걸이, 이런 것들이 그대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쿤달리니의 각성과 더불어 그대의 행동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마하바라타(mahavarata)에 나오는 종교적인 서약들, 즉 비폭력, 도둑질하지 않기, 무소유, 독신(celibacy),철저한 각성 상태,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고 쉬워진다. 이럴 때는 그대의 경험을 진실한 것으로 알아라. 쿤달리니의 경험은 사이킥 체험이다. 그러나 동시에 진실한(authentic) 것이기도 하다. 이제 그대는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체험이 진실하다면 그대는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번째 신체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여기는 목적지가 아니다. 앞으로 더 통과해야 되는 다른 신체들이 있다. 전에도 말했듯이, 네 번째 신체까지 진보한 사람은 극소수다.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네 번째 신체까지 진보한다면 이 세상에서 기적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열네 살 이후의 단계에 정체된 사회에서 이보다 조금 더 진보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천 년 전에는 일식이 일어나는 날짜를 예상하는 것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기계도 이런 것을 알아 낼 수 있다. 이것은 계산상의 문제일 뿐이지, 천문학자나 예언자, 아주 박식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컴퓨터는 한 번의 일식뿐만 아니라 수백만 번의 일식도 알아맞힐 수 있다. 심지어 태양이 차갑게 식는 날까지 예측할 수 있다. 이 모두가 계산상의 문제다. 컴퓨터는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이 날짜를 예측할 수 있다. 태양이 가진 총 에너지를 날마다 방출하는 에너지의 양으로 나누면 이 태양이 얼마 동안 지속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지금 우리에게 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신체까지 완전히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천 년 전에는 월식이 일어나는 때를 알아맞히는 것이 큰 기적이었다. 그런 사람은 초인으로 여겨졌다. 이 시대에 일어나는 기적들, 사진틀에서 재가 떨어지는 등의 기적은 네 번째 차원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일이 기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네 번째 신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대가 나무 밑에 앉아 있고 나는 나무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 이제 나는 멀리서 마차라 오는 것을 본다. 나는 한 시간 안에 마차가 와서 나무 밑에 멈출 것이라고 그대에게 말한다. 이 때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예언자입니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방을 둘러봐도 마차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 그러나 한 시간 후에 마차가 나무 밑에 당도할 것이고, 그대는 내 밑에 엎드려 '오, 존경하는 스승이시여, 당신은 위대한 예언자입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와 나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좀더 높은 곳에 앉아 있다는 것밖에 없다. 나는 나무 위에 앉아 있다. 그 곳에서 나는 그대보다 한 시간 앞서 마차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현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현재와 나의 현재 사이에는 한 시간의 간격이 있다. 내가 좀더 높은 곳에서 보기 때문이다. 마차는 한 시간 후에 그대의 현재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이 마차는 지금 이 순간이 현재다.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일수록 더 기적적인 존재가 된다. 아직까지 표면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행위가 우리에게는 기적으로 보인다. 우리에게는 그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일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네 번째 신체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네 번째 신체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종말의 기적을 원한다고 그것을 대중에게 설교한다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세 번째 신체를 교육시켜서 언어와 수학을 이해시키듯이, 이제는 네 번째 신체를 훈련시켜야 한다. 모든 인간이 적절한 단계에 올라야 한다. 그래야만 기적이 멈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누군가 이런 상황을 이용할 것이다. 네 번째 신체는 스물 여덟 살까지 7년 동안 발달된다. 그러나 이 네 번째 신체를 발달시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아트마 샤리르(atma sharir), 즉 영체(spiritual body)라고 불리는 다섯 번째 신체는 큰 가치를 지닌다. 만일 아무 장애도 없이 자연스럽게 성장이 이루어전다면 서른 다섯 살에 이 신체가 완전히 개발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원한 일이다. 네 번째 신체조차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개발되었다. 영혼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오직 토론의 주제로만 남아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런 단어 뒤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우리는 아트만(atman)을 말하지만 이 아트만은 그저 단어에 불과하다. 이 단어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우리가 벽에 대해 말할 때 이 벅은 단순히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에는 실체성이 있다. 우리는 '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러나 '아트만'이라는 단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아트만에 대해 아무 지식도, 아무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아트만이 우리의 다섯 번째 신체다. 그리고 네 번째 신체에서 쿤달리니가 깨어나야만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네 번째 신체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섯 번째 신체 또한 미지로 남아 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다섯 번째 신체를 발견했다. 그들을 우리는 유심론자(spiritualist)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 단계를 여행의 끝으로 생각하고 '아트만을 얻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섯 번째 신체에서 멈춘 이 사람들은 신을 부정하며 '브라흐만(brahman)은 없다. 파라마트만(paramatman)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첫 번째 신체의 차원에 정체된 사람들이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유물론자(materialist)들이 '육체가 모든 것이다. 육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말하듯이 유심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트만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트만이 모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높은 단계다." 그러나 아트만은 다섯 번째 신체일 뿐이다. 여섯 번째 신체는 브라흐마 샤리르(brahma sharir), 코스믹체라고 불린다. 아트만을 넘어섰을 때 , 기꺼이 아트만을 잃어버릴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여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다. 만일 인간이 과학적으로 진화하면 마흔두 살에 여섯 번째 신체의 개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흔두 살에는 일곱 번째 신체인 니르바나 샤리르(nirbana sharir), 열반체가 개발될 것이다. 이 열반체는 무체의 상태, 무형의 상태다. 이 궁극적인 상태에서는 오직 공이 남는다. 신도 업고, 우주적 실체도 업고,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붓다는 이렇게 답했다. "불꽃이 죽는다. 불꽃이 사라졌을 때 그대는 '불꽃이 어디로 갔는가? 이제 불꽃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지 않는다. 불꽃은 사라졌다. 그것이 전부다." '니르바나(nirvana)'라는 단어는 불꽃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붓다는 '니르바나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다섯 번째 신체에서 모크샤(moksha)가 경험된다. 그전에 있는 네 가지 신체의 한계가 무너지고 영혼이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그러므로 해탈은 다섯 번째 신체의 경험이다. 천국과 지옥은 네 번째 신체의 차원에 속한다. 이 차원에 정체된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첫 번째나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신체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이 전부다. 그들에게는 죽음 너머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단계를 넘어서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그는 이 삶 후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그 천국과 지옥에는 행복과 불행의 가능성이 무한하게 열려 있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해탈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여서 번째 신체에 도달하나 사람은 신을 체험한다. 이 여섯 번째 신체의 차원에는 해탈의 문제조차 없다. 그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that which is)'과 하나가 된다.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 나는 신이다.)'라는 선언이 이 차원에 속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의 차원이 더 남아 있다. 이 마지막 차원에는 '나'도 없고 '신'도 없다. 나와 네가 부재한다. 그저 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니르바나의 경지다. 이 일곱 가지 신체는 49년 동안 개발된다. 50대 중반이 전환기로 여겨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반의 25년 동안에는 처음의 네 가지 신체를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서 교육은 완결되고, 그 다음에는 남은 여생동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신체를 탐구하기로 되어 있었다. 남은 25년 동안 일곱 번째 신체에 도달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50살이라는 나이가 결정적인 때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와나프라스트(wanaprasth)'가 되었다. 이것은 이제 그들이 사람들과 사회, 세속으로부터 눈길을 거두고 숲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흔 다섯 살이라는 나이도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 때 인간은 산야스(sannyas)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숲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세상과 군중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숲 속에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해도 '나'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흔 다섯 살이 되면 이 '나' 또한 버려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일을 하고 일곱 가지 신체의 차원 모두를 개발해야만 나머지 여행이 쉽고 즐거워진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나머지 여행이 매우 어려워진다. 왜냐 하면 7년이란 주기는 특정한 발달의 단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처음 7년 동안 아이의 물질적 육체가 완전히 성장하지 않으면 그는 항상 몸이 아플 것이다. 병이 나지 않는다. 해도 그는 결코 건강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7년 동안에 형성되어야 했던 건강의 기반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견고하고 강하게 형성되어야 했던 것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그 기간동안에 물질적 육체가 개발되어야 했다. 이것은 집의 기반을 다지는 것과 같다. 지붕까지 올린 다음에 기초를 고치는 것은 힘들다. 불가능한 일이다. 시작 단계에서 기초를 잘 놓아야 한다. 처음 7년 동안에 첫 번째 신체를 위한 조건이 충족되면 육체가 적절하게 발달된다. 이제 그 다음의 7년 동안 두 번째 신체와 감정이 발달하지 못하면 성적인 변태가 그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이것을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각각의 신체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기간이 매우 중요하다. 삶의 각 단계에 있어서, 각각의 신체는 미리 정해진 발달 기간이 있다. 여기저기에 야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열네 살안에 아이가 성적으로 발달하지 못하면 그는 평생동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스물한 살 때까지 지성이 발달되지 않으면 나중에는 지성이 발달할 기회가 거의 없다. 우리는 아이의 첫 번째 신체를 돌보고 지성을 발달시키기 위해 학교에 보내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나머지 신체 또한 정해진 발달 기간이 있으며, 그것을 놓치면 큰 어려움에 빠진다는 것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다. 이 적당한 시기를 놓치면 21년 안에 개발될 수 있었던 신체를 개발하는 데는 50년이 걸린다. 그리고 쉰 살에 이른 사람이 스물한 살 때와 같은 힘을 갖지 못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스물한 살 때는 쉽게 이룰 수 있었던 것이 더 어려워지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외에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스물한 살 때는 그는 바로 문 앞에 있었지만 기회를 놓쳤다. 이제 삼십 년 동안 여기저기 방황하다 보니 그는 어디가 문인지 잊었다. 스물한 살 때는 살짝만 밀어도 문을 열 수 있는 지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아이가 스물 다섯 살에 이르기까지는 잘 준비된 체계적인 상황이 필요하다. 그들을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적절한 상황이 마련되어야 한다. 네 번째 신체 후에는 일이 쉬워진다. 기초가 잘 닦였다. 이제는 열매가 성장하는 일만 남았다. 네 번째 신체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형성되었다. 이제 다섯 번째 차원부터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고 일곱 번째 차원에서 절정에 달할 것이다. 기초를 다진 다음에는 여기저기 손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먼저 기초를 닦는 일에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면에서 몇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초반의 네 가지 신체에는 남녀간의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의 물질적인 육체는 남성이지만 그 배후의 두 번째 신체인 에텔체는 여성이다. 음극과 양극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라는 개념을 놓고 보면, 남성의 몸은 양극이고 여성의 몸은 음극이다. 여자의 육체는 소극적(negative)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섹스의 문제에 있어서 결코 공격적이지 않다. 이럼 문제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의 폭력을 견딜 수 있지만, 그녀 자신이 폭력적이 될 수는 없다. 남자의 동의가 없다면 그녀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반면, 남자의 육체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는 여자의 동의가 없어도 여자를 공격적으로 대할 수 있다. 남자는 공격적인 첫 번째 신체를 가졌다. 그러나 '음극(negative)'이라는 말이 제로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전기라는 개념에서 보면 음극은 수용성과 저장을 의미한다. 여자의 몸 안에는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다. 많은 에너지가 비축되어 있지만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 에너지는 비활동적이다. 여성이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까닭이 그것이다. 여성은 시를 짖지도 않고, 위대한 그림을 그리지도 않는다. 여성은 과학적인 연구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런 연구나 창조적인 일을 위해서는 공격적인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 여자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남자는 양성체(positive body)를 갖는다. 그러나 양성체가 있는 곳에는 항상 그 배후에 음성체(negative body)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양성체가 존재할 수 없다. 양성체와 음성체가 공존함으로써 원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여자의 두 번째 신체가 남성인 반면, 남자의 두 번째 신체는 여성이다. 이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사실이다. 남자의 육체는 강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강인함의 배후에는 혀약한 여성체(female body)가 있다. 남자가 잠시 동안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기적인 면에서 보면 남자가 여자에 뒤진다. 여자의 허약한 여성체 뒤에는 강인한 양성체가 있다. 여자들의 끈기와 지구력이 남자보다 강한 까닭이 그것이다. 똑같은 병에 걸렸을 경우 남자보다 여자가 더 오래 견딜 수 있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 만일 남자가 아이를 낳아야 했다면 그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 때는 아마 가족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잠시동안 불처럼 화를 낼 수는 있지만 아홉 달 동안 뱃속에 아이를 담고 다닐 수는 없다. 남자는 몇 년 동안 끈기를 갖고 아이를 키울 수 없다. 만일 아기가 밤새도록 울면, 남자는 아기를 질식시켜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소란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남자는 강인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예민하고 섬세한 에텔체가 있다. 이로 인해 그는 고통이나 불편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여자는 병에 걸리는 확률도 적고 수명도 더 길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남녀간에는 다섯 살 정도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과부 천지가 될 것이다. 남자가 스무 살이라면 그의 배우자로는 스물 넷이나 스물 다섯 정도의 여자가 좋다. 남자의 수명은 여자보다 4,5년 이 더 짧다. 그러므로 4,5년 정도의 격차를 두는 것이 좋다. 여아 백 명당 남아는 백 열여섯 명이 태어난다. 남녀간의 출생률에 열 여섯 명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숫자는 똑같아진다. 열 여섯 명의 남자아이들은 열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그래서 숫자가 거의 평준화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빨리 죽는다. 이것은 여자들이 두 번째 신체인 남성체를 통해서 오는 강인한 인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세 번째 신체인 아스트랄체는 다시 남성이 된다. 그리고 네 번째 신체인 사이킥체는 다시 여성이 된다. 여자의 경우에는 정 반대로 진행된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다섯 번째 신체는 성을 넘어선다. 아트만을 얻자마자 남성도 사라지고 여성도 사라진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별이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모든 남자는 내부에 여성체를 갖고 있으며, 모든 여자는 내부에 남성체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연히 어떤 여자가 자신의 남성체와 일치하는 남자를 배우자로 얻거나, 어떤 남자가 자신이 여성체와 일치하는 여자를 배우자로 얻는다면 그야말로 성공적인 결혼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적인 결혼이 아니다. 결혼의 99퍼센트가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공적인 결혼을 성사시키는 기본적인 법칙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각 신체간에 올바른 동맹관계가 성립되는지 확인하지 않는 한, 다른 면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결혼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 내부의 신체에 관해 상세하고 과학적인 조사가 행해져야 성공적인 결혼이 가능하다. 쿤달리니의 각성 상태에 도달한 남녀는 올바른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주 쉽다. 자신의 내적 신체에 대해 완전히 알면 외부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올바른 선택이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이런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스물 다섯 살까지 독신(brahmacharya)을 지킴으로써 초반의 네 가지 신체를 개발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결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떤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가? 그는 남은 여생 동안 어떤 여자와 함께 보내기를 원하는가? 그는 어떤 여자를 찾고 있는가? 그리고 여자는 어떤 남자를 원하는가? 여자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남성을 구한다. 우연히도 올바른 연결이 이루어지면 남자와 여자 둘 다 만족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불만이 따를 것이고, 이로부터 온갖 어려움이 시작된다. 남자는 창녀를 찾아가거나 이웃집 여자에게 눈을 돌릴 것이다. 그의 불행은 날마다 심해질 것이다. 그의 지성이 성장함과 더불어 이런 불행 또한 깊어질 것이다 열네 살의 단계에서 성장이 멈춘 사람은 이런 고뇌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고뇌는 세 번째 신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체에서 성장이 멈춘 사람은 그저 섹스의 차원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독신 기간인 스물 다섯 살 안에 네 번째 신체까지 발달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조혼을 서둘러야 한다. 조혼은 지성이 발달하기 전에 결혼해서 섹스의 차원에 정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 . 결혼 관계 전체가 동물적인 차원에 머물기 때문이다. 조혼 관계는 순전히 성적인 관계다. 거기에 사랑의 가능성은 없다. 미국처럼 교육이 크게 발달하고 세 번째 신체가 완전히 개발된 나라에서는 결혼 관계가 붕괴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잘못된 배우자 관계에 대해 서 번째 신체가 반역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혼이 성행한다. 그런 결혼 관계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올바른 교육이란 처음의 네 가지 신체를 발달시키는 것이다. 그대를 네 번째 신체까지 성장시키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다. 이 단계에서 교육의 역할은 완수된다. 어떠한 교육도 다섯 번째 신체가 들어사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없다. 교육의 역할이 완수된 후 다섯 번재 신체의 성장이 시작된다. 이 성장은 매우 가치 있고 사적인 것이다. 쿤달리니는 네 번째 신체의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사이킥 현상이다. 이제 그대가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했기를 바란다. 삭티파트에 있어서, 매개체와 구도자 사이에 심령적인(psychic) 속박 관계가 성립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만일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이 관계는 구도자에게 해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유용한 것일까요? 속박 관계는 결코 유용할 수 없다. 얽매이는 것 자체가 나쁘다. 집착이 깊을수록 더 나쁜 상황이 된다. 심령적인 속박 관계는 매우 나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슬로 그대를 묶는다면 그대의 육체가 영향받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슬로 그대를 묶으면 그 영향력이 더 깊어진다. 그 사슬을 부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그리고 누군가 쉬라드하(shraddha)의 사슬, 즉 신뢰의 사슬로 그대를 묶는다면 이것은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 이 때는 그 사슬을 부수는 것이 배신으로 여겨질 것이다. 모든 속박은 나쁘다. 그리고 심령적인 속박은 더 나쁘다. 삭티파트에서 매개체로 작용하는 사람은 결코 그대를 속박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매개체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에게 묶일 가능성은 높다. 그는 그대에게 커다란 은총을 내려 주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의 발 밑에 엎드려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맹세할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에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 한다. 집착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인 길에서는 모든 집착이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고 나면 감사의 느낌이 그대를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를 해방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감사할 때 거기에 무슨 집착의 문제가 있는가? 오히려 나의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내면에 무거운 짐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감사를 표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그대를 구속할 것이다. 감사를 표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완결 짓는다. 감사함은 속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인 자유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항상 속박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설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매달린다.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목소리가 두려움을 덜어 주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면 매달릴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용기를 북돋우려고 한다. 인간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이나 붙잡으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지푸라기는 그의 생명을 구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푸라기는 그와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질린 마음은 아무것이나 잡으려고 한다. 스승이든 물건이든 아무것이라도 작고 매달린다. 우리는 이렇게 매달림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두려움이 모든 속박의 뿌리다. 구도자는 안전을 경계해야 한다. 구도자에게는 안전에 대한 욕망이 가장 큰 집착이다. 한순간이라도 안전을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분의 보호 밑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스승의 그늘 아래 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구도자에게 안전은 없다. 불안전이 구도자에 대한 축복이다. 위험이 클수록 영혼이 대담해지고 성장할 가능서이 높아진다. 안전한 만큼 그는 허약해진다. 도움을 받는 것과 의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삭티파트는 그대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 도움은 그대로 하여금 아무 도움없이 설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 도움을 통해 그대는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삭티파트의 도움은 이런 의도로 주어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얼마 후에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울 것이고 아버지는 손을 놓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아이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아직 걷는 법을 배우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 때 아이의 손을 놓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손을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목적이다. 만일 아이가 계속 손을 잡는 것을 허용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는 아이의 적이다. 그런데 많은 아버지와 구루들이 이렇게 한다. 이것은 도움을 주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들은 그대에게 제 발로 우뚝 설 수 있는 강인함과 건강을 주는 동시에 평생 동안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 불구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와 구루들을 기쁘게 한다.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그대 홀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만족시킨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에고가 만족을 얻는다. 이런 구루는 진정한 구루가 아니다. 진정한 구루는 그대가 내미는 손길을 뿌리치고 스스로 걸으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러 번 넘어져도 아무 해가 없다. 그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넘어져야 한다. 그리고 넘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 없이 넘어져야 한다. 마음은 항상 어딘가에 기대려고 한다. 그래서 속박이 시작된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도자는 항상 '나는 안전을 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대는 안전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만일 진리에 대한 열망이 진실하다면 그대는 안전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허구적인 관념들은 많은 보호벽을 만들어 준다. 이런 관념들은 아주 신속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의 산에 오르지 못한다. 그는 몽상에서 나온 허구적인 관념들에 물들고 '이제 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고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제 자리에 움츠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어떤 유형의 집착이든지 위험하다. 그리고 스승에 대한 집착은 더 위험하다. 이것은 영적인 집착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인 집착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영적인 자유라는 말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영적인 구속이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상에서 영적인 구속보다 심한 구속은 없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자유의 영혼이 솟아나는 네 번째 신체가 아직 미개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직 세 번째 신체까지만 개발되었다. 고등법원 판사나 대학 교수가 어리석은 자의 발 밑에 앉아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저 사람 발 밑에 앉아 있다면 틀림없이 무엇인가 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판사나 대학 교수는 세 번째 신체까지 완전히 개발되었다. 그들의 지성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에 관한 한 그들은 아무것도 무른다. 네 번째 신체에 대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그리고 지성과 이성의 개발에 관여하는 그들의 세 번째 신체는 끝없는 토론과 생각에 완전히 지쳐서 이제 휴식을 원한다. 지쳐 버린 지성은 전혀 비지성적인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극단적인 활동 후에 지쳐 버린 것은 무엇이든지 그 본성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치달린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것이 어느 아쉬람(ashram)에서든 대학 교수나 고등법원 판사를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그는 지쳤다. 그는 자신의 지성에 신물이 났다. 이제 그는 이 지성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비합리적인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그는 지성의 눈을 감아 버리고 맹목적으로 무엇이든지 믿으려고 들것이다. 그는 박식함과 이성, 토론이 자신을 아무데로도 이끌지 못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것들을 버리려고 한다. 이것이 그들의 근본 취지다. 이런 것들과 관계를 끊기 위하여 그는 전혀 반대되는 것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 지성인을 신뢰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흉내내기 시작한다. 그는 매우 지성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에 관한 한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네 번째 신체가 조금이라도 개발된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항복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는 지성적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어떤 것을 가졌다. 이런 속박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네 번째 신체가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네 번째 신체가 개발된 사람에게 매달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 자신의 네 번째 신체를 개발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이해함으로써만 그대 자신의 네 번째 신체를 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골치 아픈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그대는 무작정 그에게 매달린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해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당신의 발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지옥의 강을 건너가면 나도 당신과 한께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배에 매달려 천국의 강을 건너갈 것이다." 이해 안에서 성장하려면 고통을 통과해야 한다. 이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변형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해는 하나의 노력이며 수행이다. 이해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해는 혁명이다. 이해를 통해 변형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변한다.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 무작정 매달리는 것이 더 낫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추종함으로써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 홀로 가야 한다. 이 길은 전적으로 홀로 가야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집착이든 방해가 된다. 어떤 일별을 얻을 때마다 그것을 통해 배우고 이해하라. 그 일별을 얻을 때마다 그것을 통해 배우고 이해하라. 그 일별을 환영하라.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말라. 휴게소에 집을 짓지 말라. 그대에게 내민 손을 잡고 매달리지 말라. 그 손을 하나의 이정표로 생각하라. 그대는 '더 나아갈 필요가 없다. 여기에 머물러라. 이곳이 피안의 세계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은 스스로 묶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편에는 자신의 두려움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묶어 두려는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고 그는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따르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확실히 나는 무엇인가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믿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주변에는 많은 구도자를 끌어 모으려는 구루병이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구루병에 걸린 사람은 더 많은 추종자를 모으려고 혈안이 된다. 그리고 추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자신의 앎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나는 무엇인가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따르겠는가?'하고 생각한다. 이런 추리가 그를 의기양양하게 만든다. 이 추종자들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 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낄 것이다. 추종자가 사라지면 그의 앎도 사라진다. 이렇게 수많은 마인드 게임(mind game)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게임을 경계하라. 이 게임은 양방향에서 진행된다. 오늘은 구루에게 묶여 있는 제자가 내일은 다른 사람들을 속박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연쇄 반응이다. 오늘은 제자인 사람이 내일은 구루가 될 것이다. 그가 얼마 동안이나 제자로 남아 있겠는가? 오늘 누군가에게 매달려 있는 사람은 내일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매달리도록 만들 것이다. 이런 속박은 연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 번째 신체의 미개발에 있다. 이 신체를 개발하면 그대는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그 때는 더 이상 속박의 문제가 없다. 이 말은 비인간적으로 되거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속박이 있는 곳에 관계는 없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속박이 있다. 우리는 '신성한 결혼의 끈으로 묶여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청첩장을 보낼 때도 '아들이 애정의 끈으로 묶일 것입니다.'라고 쓴다. 그러나 속박이 있는 곳에 관계는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먼 훗날에는 아버지가 청첩장을 보내면서 '제 딸이 아무개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라고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것이 더 지성적으로 보인다. '아무개의 사랑이 그녀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지성적이다. 이 때는 아무 구속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 사랑은 자유를 탄생시켜야 한다. 사랑조차 속박이 된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 자유를 얻을 것인가? 속박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있다. 거기에 지옥이 있다. 밖에서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부에는 모든 것이 썩어 있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또는 친구 사이의 속박을 경계하라. 속박이 있는 곳에 관계는 없다. 그리고 관계가 있는 곳에서 속박은 불가능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끈으로 맺어져야만 관계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우리와 묶여 있지 않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을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한 여자가 불고 한 시간 전에 만난 사람에게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속박이 없을 때는 관계가 더 쉬워진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낯선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하면서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낯선 사람과 있을 때는 구속이 없다. 따라서 관계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구속이 있을 뿐 관계가 없다. 이 때는 어떤 사람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형식적인 의무처럼 보인다. 구루와 제자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모든 관계가 아름답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속박은 아름다워질 수 없다. 관계는 해방을 의미한다. 선사들에게는 아름다운 관습이 있었다. 제자가 일정한 수련을 마치면 선사는 자신의 반대파에게 제자를 보내 공부하게 했다. 선사는 '너는 한 쪽에서 배웠으니 이제 다른 쪽에서 가서 배워라.'하고 말했다. 구도자는 스승의 말에 따라 이 사원에서 저 사원으로 옮겨 다녔으며, 스승의 경쟁자들 밑에 들어가 공부했다. 스승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가서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네 스스로 판단하라. 양쪽 말을 다 들은 후에는 남는 것이 진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서 배워라." 이런 말은 영적인 성장이 절정에 달했을 때만 가능하다. 이 때는 아무것도 그대를 속박할 수 없다. 나는 이 나라에서 스승이 제자를 속박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내보내는 풍토가 조성되었을 때 놀랄 만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듣고 배우라고 그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스승은 나쁜 스승일 리 없다. 설령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 해도 그는 옳은 스승이다. '다른 곳에 가서 배워라.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스승이 있다면 설령 그의 가르침 전부가 거짓으로 드러날지라도 그대는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대를 기꺼이 다른 곳으로 보내는 스승은 나쁜 스승일 리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스승이 구도자를 묶어 두고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스승이 구도자를 묶어 두고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제자가 다른 스승에게 가서 배우는 것을 금지한다. 경전에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원으로 가지 말라. 미친 코끼리가 달려들어도 다른 사원으로 피신하느니 그냥 밟혀 죽는 게 낫다." 그들은 구도자의 귀에 다른 말이 들어갈까봐 항상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어떤 스승의 가르침이 옳다 해도 그가 그대를 묶어두고 있다면 그는 틀린 스승이다. 그런 스승에게는 감사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뿐이다. 그는 그대의 정신을 파괴하고 그대의 영혼을 죽인다. 이것을 이해하면 속박의 문제는 없다. 당신께서는 순수한 삭티파트에는 속박의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맞다. 거기에 속박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삭티파트라는 미명하에 영적인 착취가 행해질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런 일로부터 구도자를 보호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삭티파트라는 미명하에 얼마든지 영적인 착취가 행해질 수 있다. 사실 요구가 있고 선언이 있는 곳에는 항상 착취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 주겠다고 선언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대가로 무엇인가 빼앗아 갈 것이다. 주는 것과 가져가는 것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재산, 존경, 신뢰 등 어떤 형태로든 간에 그는 무엇인가 그대로부터 받아 갈 것이다 고집스럽게 주려고 하는 자는 분명히 무엇인가 받아간다. 무엇인가 준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대가로 더 많은 것을 가져간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부터 무엇인가 주겠다고 소리지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낚시꾼은 낚시 바늘에 벌레를 꿴다. 바늘만 있다면 물고기가 물리지 않을 것이다. 물고기는 낚시 바늘을 냉큼 물지만 그것은 미끼에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벌레를 먹으려고 낚시 바늘을 삼키는 것이다. 벌레가 미끼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이미 그것을 삼키고 난 후의 일이다. 이미 낚시에 걸려든 후의 일이다. 그러니 삭티파트를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지혜를 주겠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대를 삼매로 인도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 진실로 저 너머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대가 '당신 덕분으로 저는 은총을 경험했습니다.'하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실이다. 그대는 무엇인가 오해했다. 그 일은 나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대의 감사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매개체였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애에게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은총이 내려온 것이다. 그것은 신의 자비였다. 내가 누구기에 그런 일을 하겠는가? 나는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가 한 마을을 지나고 있는데 병든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예수가 그를 껴안자 병이 씻은 듯이 낳았다. 그가 말했다. "당신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당신께서는 저의 고통을 없애 주셨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일을 행한 분에게 감사하라. 내가 누구기에 이런 일에 끼여든단 말인가?" 그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그대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모든 일이 그분 을 통해 일어났다. 그분이 그대를 치료했다. " 이런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착취할 수 있겠는가? 착취하기 위해서는 미끼 속에 낚시 바늘을 숨겨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낚시 바늘은 고사하고 미끼로 쓸 벌레조차 갖고 있지 않다. 황금빛 결과를 약속해 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를 경계하라. 그대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벌레로 낚시 바늘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대가 기대를 갖도록 부추긴다. 그는 그대를 선동하여 희망과 욕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대가 욕망에 사로잡혀 '오, 존경하는 스승이시여, 그것을 주소서!'하고 말하면 그는 무엇인가 요구하기 시작한다. 곧 그대는 벌레는 미끼였을 뿐이고 그 안에 낚시 바늘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적을 주장하는 삶이 있는 곳에는 그대의 발걸음을 조심하라. 그 곳은 매우 위험한 지역이다. 누군가 그대의 스승이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길을 피하라. 그런 길에는 항상 복잡한 함정이 있다. 그렇다면 구도자는 어떻게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가?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을 멀리 하라. 그것이 모든 악에서 그대를 구하는 길이다. 기적적인 결과를 약속하는 사람을 찾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함정을 만들어 놓고 누군가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영적인 이득을 챙기려고 하지 말라. 영적인 주장에 솔깃해 하지 말라.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대는 내면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그대가 준비되기만 하면 반듯이 해프닝이 일어날 것이다. 그 때는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건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매개체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는 옷거리와 같다. 그대가 옷을 얻는 날 그 옷을 걸 수 있는 옷거리가 준비된다. 옷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옷거리가 없으면 문에 옷을 걸 수도 잇다. 문이 없으면 나뭇가지에 걸어도 된다. 무엇이든지 옷거리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옷거리가 아니라 옷이다. 그런데 우리는 옷이 없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이리 오라. 내가 옷거리다!'하고 외친다. 이 소리를 듣고 달려가면 그대는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대는 옷이 없다. 그러니 옷거리에게 달려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 자신을 거기에 매달 위험성이 많다. 그대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자신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은총이 찾아왔을 때 그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대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스승을 찾는 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그대의 일이 아니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Arjuna)에게 말한 내용은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결과는 신에게 맡겨라." 행동의 결과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런 염려는 장애가 된다. 그렇게 되면 온갖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염려가 그대가 이룬 모든 공적을 오염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결과가 아니라 행동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격을 갖추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완결되는 순간 모든 것이 성취된다. 이것은 하나의 씨앗이 꽃을 피우는 시점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태양은 항상 꽃을 피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봉오리만 준비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봉오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 때는 태양이 아무리 밝게 빛나도 소용없다. 그러니 태양을 구하지 말라. 그대의 봉오리를 성장시키는 일에 전념하라. 태양은 항상 거기에 있으며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빈 그릇이 되어라 그러면 즉각 채워진다. 사실, 수용적으로 되는 것과 채워지는 것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똑같은 일의 양면이다. 이 방 안의 공기를 모두 제거하면 밖으로부터 즉각 신선한 공기가 밀려들어와 진공을 채운다. 이것은 별개의 일이 아니다. 방안의 공기를 제거하자마자 바깥의 공기가 밀려든다. 내면의 법칙도 이와 같다. 우리가 준비를 갖추기만 하면 즉각 그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는 이유는, 준비도 하기 전에 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황된 요구를 하면 항상 허황된 것이 제공된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나를 놀라게 한다.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저는 마음이 불안합니다. 평화를 얻고 싶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내게 이런 말을 하다가 자기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아들에게 직업이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아들이 직업을 구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이 사람이 마음의 평화를 구한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하다. 그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아들의 취직을 원했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이다. 종교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직업을 원하는가? 이리 오라. 내가 직업도 주고 마음의 평화도 주겠다. 여기로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직업을 구할 것이며 재산이 늘어날 것이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종교라는 상점에 모여든 몇몇 사람들이 그대에게 '내 아들이 직업을 구했다.'고 말할 것이며 , 어떤 사람은 ' 돈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종교 사업을 위해 고용된 사람도 아니고 알선 업자도 아니다. 그런 일은 없다. 천명이 취직을 원했다면 그 중의 열 명 정도는 직업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 나머지 9백 9십 명은 떠나고 열 명이 남는다. 이 열 명이 기적을 선전한다. 그리고 날로 군중이 모여 든다. 이렇게 모든 종교 상점에는 세일즈맨과 선전원들이 있다. 그들의 아들이 직업을 구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들이 상번 주인에 의해 파견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아들이 직업을 갖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어딘가에 취직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이 직업을 구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다른 스승을 찾아 이미 오래 전에 떠났다. 그리고 욕망이 성취된 사람들은 이 상점의 단골 손님이 된다. 날마다 군중이 늘어가고, 이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주변에 그룹이 형성된다. 그 다음부터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런 말을 듣고 그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내 소원도 성취될 것이다.'하고 생각한다. 이제 이것이 미끼다. 그대를 낚아채는 낚시 바늘은 미끼 안에 숨어 있다. 요구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걸려들 것이다. 그대 스스로 준비를 다하고 나머지 일은 하늘에 맡겨라. 때가 무르익으면 저절로 은총이 일어날 것이다. 만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삭티파트를 얻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무 해도 없을까요? 그대가 계속해서 삭티파트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아직 궁극적인 해프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삭티파트의 경험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 그대는 다른 매개체를 통해 똑같은 경험을 얻고 싶을 것이다. 만일 첫 번째 삭티파트가 성공적이었다면 문제는 거기에서 끝난다. 이것은 병이 아직 낳지 않은 사람이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 그는 당연히 의사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병이 완전히 낳은 사람에게 의사를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는 없다. 삭티파트를 통해 얻은 가장 희미한 일별도 이런 문제를 없애 버린다. 일단 어떤 사람을 통해 이런 일별을 얻고 나면,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일별을 얻는다 해도 아무 차이가 없다. 그것은 똑같 근원에서 나오는 똑같은 에너지다. 다만 매개체가 다를 뿐이다. 이것은 아무 차이점을 만들지 못한다. 태양에서 나온 빛이건, 전구에서 나온 빛이건, 등잔에서 나온 빛이건 모두 똑같은 빛이다. 일단 해프닝이 일어났다면 여러 명의 매개체를 전전해도 아무 차이가 없다. 그것은 아무 해가 없다. 그러나 해프닝을 구하지 말라. 만일 그대의 길에 해프닝이 일어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라. 그것을 구하지 말라. 그것을 구하면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협잡꾼들을 만날 뿐,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진전으로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대가 구하지 않을 때 나타난다. 그대가 완전히 준비되었을 때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 그를 찾는 것은 잘못이다. 무엇인가 바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때가 되면 저절로 해프닝이 일어날 것이고, 수천 가지 길에서 빛이 찾아올 것이다. 모든 길이 그와 똑같은 근원의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근원은 똑같다. 다만 사방에 나타나는 겉모습이 다를 뿐이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말했다. 그가 사두(sadhu)를 찾아가서 '진리는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고 말했더니 사두가 이 말을 부정하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지혜는 항상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개에게 그 지혜를 전달하고, 그 아무개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달한다. " 그래서 나는 이 친구에게 크리슈나의 경험은 그 자신의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크리슈나가 '이러저러한 사람이 아무개로부터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 의미는, 그에게 계시된 지혜가 그에게만 계시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지혜는 그에 앞서 다른 사람에게도 계시되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 해프닝을 알려 주었으며, 그 다른 사람에게도 이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단지 말에 의해 이 계시가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말로 표현된 것은 해프닝이 일어난 다음의 일이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대에게 전하는 이 지혜는 내게 왔던 지혜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대 안에 똑같은 지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이 지혜가 일어났을 때, 그대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를 구걸하지 말라. 진리는 특정한 사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준비하라. 그러면 사방에서 진리가 몰려올 것이다. 해프닝이 일어나는 날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눈이 멀었다. 나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눈먼 사람은 등잔이나 전깃불을 만나도, 밝은 태양아래에 나서도 결코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시력이 회복되면 그는 자신이 항상 빛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랄 것이다. 해프닝이 일어나는 날, 그대는 사방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일 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진리의 일별을 얻는 모든 곳에서든 그것을 얻어라. 그러나 거지처럼 구걸하지 말라. 진리는 구걸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구걸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장사꾼들이 달콤한 제안으로 그대를 유혹할지도 모른다. 이 때부터 영적인 착취가 시작된다. 항상 그대는 자신을 준비하고, 꾸준하게 그대의 길을 가라. 일별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그에 대해 감사드리고 계속 나아가라. 완벽한 성취가. 일어나는 날, 그대는 특정한 사람에게서 그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에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모두로부터 그것을 얻었다. 어떤 사람에게 다가가든 나는 그로부터 그것을 얻었다" 이 때가 그대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존재계 전체에 감사드릴 것이다. 삭티파트의 효과는 감소합니까? 그렇다. 그 효과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타인을 통해 얻은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일별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에 의존하지 말라. 그것이 직접 그대 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외부에서 온 모든 영향력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적인 것이다. 내가 돌을 공중으로 던진다고 하자. 그 돌은 내가 던지는 데 사용한 힘만큼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돌 자체는 아무 힘이 없다. 그러나 공기를 뚫고 날아가는 돌은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자기를 멈추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때 돌은 어떤 힘이 자기를 날게 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돌은 배후에 어떤 손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돌은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10피트까지 올라가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20피트까지 올라갔을 때 떨어질 것이다. 어쨌든 돌은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온 영향력은 한계가 있다. 그 효과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외부적인 영향이 주는 유일한 이점이 있다. 찰나적인 일별을 순간의 그대가 자신의 근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럴 때 외부적인 영향은 아주 유용하다. 이것은 내가 성냥을 켜는 것과 같다. 그 불꽃이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이제, 그대는 성냥불이 켜진 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첫째로, 그대는 내 성냥불에 의존하면서 방 안에 그냥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잠시 후 성냥불은 꺼질 것이고, 어둠이 더 깊어질 것이다. 두 번째로, 성냥이 켜진 순간에 그대는 문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밖으로 나간 후에 그대는 더 이상 내 성냥불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밖으로 나왔다. 성냥불이 있건 없건 아무 차이가 없다. 이제 그대는 태양이 환히 빛나는 곳에 도착했다. 무엇인가 확고하고 지속적인 것이 그대를 비추고 있다. 삭티파트를 통해 일어나는 모든 해프닝은 단 한 가지 점에서 유용하다. 외부적인 도움을 통해서, 그대 스스로 내적인 일을 할 수 잇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프닝을 기다리지 말라. 성냥불은 타오르다가 꺼질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것이 습과처럼 굳어질지도 모른다. 그대는 성냥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성냥불이 켜지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성냥불이 켜졌을 때는, 다시 성냥이 꺼지고 어둠속에 던져지는 순간이 올까 봐 두려워 할 것이다. 성냥불이 켜진 순간에도 그런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이 악순환처럼 반복될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성냥불에 매달리지 말라. 성냥이 켜진 순간에 그대는 길을 보고 가능한한 빨리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이것이 성냥불의 유용성이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이것이 영구적인 이득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이득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그렇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일 매개체가 지혜롭고 현명하다면 그는 그대에게 '여기에 머물러라. '하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성냥불이 켜졌으니 빨리 달려나가라. 이 성냥은 곧 꺼질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만일 매개체가 '여기에 머물러라. 이 곳에서는 나만이 성냥을 켤 수 있다. 내게 귀의하고 충성을 맹세하라.'하고 말한다면 종속적인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대에게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그대가 다른 곳으로 가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금지한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런 사람은 크게 해롭다. 차라리 그가 성냥불을 켜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차라리 어둠만 있었다면 어느 날엔가. 그대 스스로 출구를 찾아 밖으로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그의 성냥불에 매달림으로써 스스로를 곤경이 몰아넣었다. 이때 그대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이 사람은 어딘가에서 성냥을 훔쳐 왔다. 이 성냥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 성냥의 올바른 용도를 알았을 것이다. 성냥의 용도는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나오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지, 그들을 묶어 두거나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어디선가 훔쳐온 성냥이다. 이제 그는 '내 성냥을 통해 일별을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되며 내게 충성해야 한다.' 선언한다. 이것으로 끝이다! 처음에는 어둠이 길을 방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승이 길을 막는다. 대가를 요구하는 스승보다 차라리 어둠이 더 낫다. 최소한 어둠은 그대를 정지시키려고 손을 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이라는 장애물은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이다. 그러나 이 스승은 적극적으로 그대의 길을 방해한다. 그는 '이것은 배신이며 은혜를 모르는 짓이다.!'하고 말하면서 그대의 손을 붙들고 길을 막을 것이다. 바로 어제 한 여자가 내게 와서 말했다. 그녀의 스승이 그녀가 내게 오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그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속하듯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제자가 스승을 버리는 행위는 큰 죄악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훔쳐온 성냥이다. 성냥을 훔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많은 경전 속에 성냥이 들어 있다. 훔쳐 온 성냥이 타오를 수도 있습니까? 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눈앞에 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제로 빛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는 무엇이 빛나고 있는지 안다. 또한 그는 그것이 실제로 빛을 내고 있는지, 아니면 그렇게 상상하도록 자기가 꾀임에 빠진 것인지 안다. 그대가 빛을 보는 순간, 이 세상에 있는 스승들의 99퍼센트는 어둠의 친구며 빛의 적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이 위험한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둠의 대리인이다. 일곱 가지 신체와 차크라의 신비 어제 강의에서 당신은 '구도자(sadhak)는 먼저 자신의 수용적인 능력을 키우도록 힘써야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sadhak'라는 말의 의미가, 그가 가는 샤드하나(sadhana)의 길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수용적이 되는지 모릅니다. 올바른 안내자를 만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입니까? 탐구(seek)하는 것과 요구(ask)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실제로, 탐구를 원하지 않는 사람만이 요구한다. 탐구와 요구는 똑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 되는 것이다. 탐구를 회피하려는 사람만이 요구한다. 탐구의 과정과 구걸은 전혀 다르다 요구할 때는 타인, 즉 '주는 자'에게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나 탐구에서는 그대 자신, 즉 '받는 자' 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 영적인 성장의 길에 장애물이 있다는 말은 , 구도자 자신의 내면에 장애물이 있다는 뜻이다. 구도의 길은 내면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장애물을 이해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이 장애물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제거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제 나는 일곱 개의 신체에 대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이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아볼 것이다. 이것이 그대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일곱 개의 신체가 있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차크라(chakra)가 있다. 각 차크라는 그에 대응하는 신체와 특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육체(physical body)에 대응하는 차크라는 '물라다르(muladhar)'다. 이것이 첫 번째 차크라다. 이 차크라는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물라다르 차크라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첫 번째 가능성은 탄생과 명상에 의해 얻어진다. 이 차크라의 자연적인 가능성은 육체의 성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구도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의문은, 이 기본적인 충동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차크라가 가진 또 하나의 가능성은 브라흐마차리야(brahmacharya), 성초월이다. 이 브라흐마차리야는 명상을 통해 얻어진다. 섹스가 자연적인 가능성이라면, 브라흐마차리야는 그 자연적인 특성의 변형(transformation)이다. 마음이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브라흐마차리야에 도달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이제 우리는 자연에 의해 주어진 상황을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자연이 부여한 조건대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적인 성장이 시작될 수 없다. 다른 한 가지는 자연이 부여한 상황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 변형의 길에 놓인 유일한 위험은, 우리가 자신의 자연적인 센터(center)에 대항해 싸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구도자의 길에 놓인 실제적인 위험은 무엇인가? 첫 번째 위험은 자연적인 본성에만 탐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육체, 즉 물질적 신체의 궁극적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없다. 그는 출발점에 머물고 만다. 한편에는 욕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억압이 명상의 길에 놓인 장애물이다. 이것이 첫 번째 차크라의 장애물이다. 억압이 있으면 변형이 일어날 수 없다. 억압이 장애물이다. 이것이 첫 번째 차크라의 장애물이다. 억압이 있으면 변형이 일어날 수 없다. 억압이 장애물이라면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해가 그 해결책이다. 그대가 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내면에 변형이 일어난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모든 자연적인 본성은 우리의 내면에서 무의식적으로 잠들어 있다. 우리가 이 본성들을 의식하는 순간 변형이 시작된다. 각성(awareness)이 변형의 핵심 열쇠이다. 각성이 이 본성들을 변화시키는 연금술이다. 전체적인 느낌과 이해로 성적인 욕망을 자각하면 그대 안에서 섹스를 물리치고 브라흐마차리야가 태어날 것이다. 첫 번째 신체에서 브라흐마차리야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른 센터들의 잠재성을 깨우는 것이 힘들다. 전에도 말했듯이, 두 번째 신체는 감정적인 신체, 이텔체다. 이 두 번째 신체는 스와디쉬탄(swadhishthan) 차크라와 연결된다. 이 차크라 또한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이 차크라의 자연적인 잠재성은 두려움, 미움 , 분노, 폭력이다. 이런 속성 모두가 스와디쉬탄 차크라의 자연적인 잠재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대가 두 번째 신체에서 정지하면 변형을 통해 나타나는 정반대 되는 속성들, 즉 사랑, 자비, 대담함, 친밀함 등의 속성이 자리잡지 못한다. 두 번째 차크라에서 구도자의 길에 놓인 장애물은 미움 ,분노, 폭력이다. 이것을 변형시켜야 한다. 여기에서도 똑같은 실수가 저질러진다. 어떤 사람은 분노를 터뜨리고, 어떤 사람은 분노를 억압한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을 억누른 채 용기를 과시한다. 이 두 가지 모두 변형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는 그 두려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억압하거나 숨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면에 폭력이 들끓고 있을 때 비폭력이라는 거창하나 구호가 내면의 폭력 상태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대의 내면은 여전히 폭력 상태로 남는다. 이것이 자연에 의해 그대의 두 번째 신체에 주어진 속성이다. 섹스에 의미가 있듯이, 이 두 번째 신체에 주어진 상황도 유용성이 있다. 그대는 섹스를 통해 다른 육체를 탄생시킨다. 하나의 육체가 소멸하기 전에 자연은 다른 육체의 탄생을 준비해 놓고 있다. 두려움, 폭력성, 분노, 이 모든 것이 두 번째 차원에서는 필수적이다. 이런 속성이 없었다면 인간은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은 그대를 보호한다. 분노는 그대를 타인에 대항해서 싸우게 하고, 폭력성은 다른 사람의 폭력에 대항해 그대 자신을 지키도록 돕는다. 이 두 번째 신체의 속성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단계에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두려움의 본직을 이해한 사람은 두려움 없는 차원에 도달한다. 폭력의 본질을 이해한 사랑은 비폭력을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노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용서라는 특성을 개발한다. 사실, 분노와 용서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들 서로가 상대방의 뒤에 숨어 있다. 이 동전이 뒤집어져야 한다. 동전의 한 면을 완벽하게 알고 나면 자연히 우리는 다른 쪽 면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갖게 된다. 이런 식으로 동전이 뒤집어진다. 그러나 동전을 숨기고 두려움과 폭력성이 없는 것처럼 가장한다면, 우리는 용기와 비폭력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충분히 탐구한 사람은 곧 두려움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질 것이다. 그의 호기심이 동전의 다른 면을 보도록 부추길 것이다. 동전을 뒤집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폭력은 자비로 전환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두 번째 신체의 잠재성이다. 구도자는 자연에 의해 부여된 특성들을 변형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그대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탐구하고 물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분노와 두려움이 장애물이라는 것을 안다. 겁쟁이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 그는 진리를 구걸하며 돌아다닐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얻기를 바랄 것이다. 세 번째 아스트랄체다. 이 또한 두 가지 가능성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세 번째 신체는 의심과 생각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속성이 변형되면 의심은 신뢰(trust)가 되고, 생각은 비베크(vivek), 즉 이해가 된다. 흔히 우리는 의심을 억누르고 무조건 믿으라는 충고를 들어왔다. 그러나 의심이 억눌려 있으면 결코 신뢰에 도달할 수 없다. 의심을 억누른 사람은 결코 신뢰하지 못한다. 아무리 억눌러도 의심은 내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의심은 암세포처럼 번식하면서 그대의 생명력을 먹어 치울 것이다. 믿음(belief)은 회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속에 이식된 것이다. 우리는 의심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 의심을 인정하고 파헤쳐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엔가 우리는 의심 자체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의심 자체를 의심하는 순간 신뢰가 시작된다. 우리는 생각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한 명확한 판단(discrimination)에 도달할 수 없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에게 생각하지 말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생각하지 말라. 모든 생각을 버려라.'하고 말한다. 생각을 멈춘 사람은 무지와 맹목적인 신앙에 빠진다. 이것은 명확한 인식이 아니다. 명확한 판단력은 가장 정교한 사유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얻어진다. 비베크(vivek)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각 속에서 의심은 항상 현존한다. 생각은 언제나 우유부단하다. 그러므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생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야 결정이 가능하다. 결정은 사유를 초월한 명료함에서 온다. 생각은 결정(decision)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항상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은 결코 결정에 도달하지 못한다. 생각의 지배를 덜 받는 사람의 삶이 아주 확고한 반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결단력이 부족하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위험하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하기로 결정한 것은 무작정 밀고 나간다. 그 간단한 이유는, 내면에 의심을 일으킬 사유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이념을 따르는 사람과 광신주의자는 매우 활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들에게는 의심의 문제가 없다. 그들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천 명의 사람을 죽여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그 전에는 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우유부단함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생각만 할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생각의 문을 닫아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맹목적인 신앙뿐이다. 이것은 크게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구도자의 길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방적인 식별력과 명확한 사유다. 이것이 우리에게 결단을 가져다준다. 이것이 비베크(vivek)의 의미다. 이것은 생각의 힘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의심이 없어질 정도로 정교한 사유의 과정을 통과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제 순수한 결정, 그 핵심만이 남는다. 세 번째 신체에 속한 차크라는 마니푸르(manipur) 차크라다. 의심과 신뢰가 이 차크라의 두가지 속성이다. 의심이 변형되면 신뢰가 탄생한다. 그러나 신뢰는 의심과 반대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신뢰는 의심이 가장 순수하고 궁극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신뢰는 의심의 최고 절정이다. 이 절정에서 의심은 사라진다. 이 단계에서는 의심 자체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의심이 자살하고, 이때 신뢰가 탄생한다. 네 번째 차원은 멘탈체 또는 프쉬케(psyche) 차크라다. 이 차원의 자연적인 성질은 상상과 꿈이다. 상상과 꿈, 이것이 마음이 항상 하는 일이다. 마음은 밤에도 꿈꾸고 낮에도 꿈꾼다. 상상이 완전히 개발되면, 즉 상상이 극한까지 완벽하게 개발되면 이 상상은 결단력(determination), 확고한 의지가 된다. 완전히 개발된 꿈은 사이킥 비전(psychic vision)으로 전환된다. 한 인간의 꿈꾸는 능력이 완전히 발달하면 그는 눈을 감고서도 사물을 볼 수 있다. 이 때 그는 벽을 통해서도 사물을 볼 수 있다. 처음에 그는 벽 너머에 있는 것을 상상할 뿐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실제로 벽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 그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추측하는데 그치지만, 변형이 일어난 다음에는 실제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사이킥 비전이란 일상적인 감각 기관의 도움 없이도 보고 듣는 능력을 뜻한다. 이 비전을 개발한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그대는 멀리까지 여행한다. 그대는 봄베이에 있으면서 캘커타에 가는 꿈을 꾼다. 비전을 통해 멀리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엔 큰 차이점이 있다. 꿈속에서 그대는 자신이 어디로 간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러나 비전의 차원에서는 실제로 그 곳에 간다! 네 번째 신체, 사이킥 신체가 실제로 캘커타에 현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네 번째 신체의 궁극적인 가능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꿈에 대한 개념을 무시해 버렸다. 고대인들은 꿈속에서 인간의 신체 중 하나가 밖으로 나와 여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웨덴보르그(Swedenborg)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몽상가'로 알려졌다. 그는 천국과 지옥이 꿈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그가 잠을 자다가 '도와주시오! 내집이 불타고 있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불길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깨워서 '이것은 꿈일 뿐이다. 불의 위험은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이 불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집은 그 곳에서 3백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그 시간에 실제로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2,3일 후에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집은 불타서 재가되었다. 그가 잠을 자면서 소리치고 있을 무렵, 그의 집은 실제로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것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하나의 비전(vision)이다. 3백 마일이라는 거리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스웨덴보르그는 3백 마일 밖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과학자들도 네 번째 신체에 거대한 사이킥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제 인간이 우주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런 방면에 대한 연구가 더 중요해졌다. 기계 장비가 아무리 믿을 만해도 이런 장비에 완전히 의존할 수는 없다. 우주선의 무선 통신 장비가 고장나면 우주 비행사는 지구와 교신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들은 이런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사이킥 신체의 텔레파시와 비전을 개발하는데 열심이다. 우주 비행사가 네 번째 신체를 개발하면 텔레파시로 직접 교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주 여행이 훨씬 안전해진다. 이 방면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0년 전에 한 사람이 남극 탐험에 착수했다. 그는 무선 통신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대비책이 더 있었다. 만일의 경우 이 탐험가로부터 교신을 받기 위해, 네 번째 신체가 기능하는 초능력자 한 명이 준비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악천후로 인해 무선 교신이 실패했을 때도 이 초능력자가 아무 어려움 없이 탐험가로부터 소식을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탐험 일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무선 통신에 의해 전달받은 소식은 잦은 교신 중단으로 인해 정확도가 72퍼센트를 넘지 못한 반면, 초능력자가 받은 신호는 80퍼센트에서 95퍼센트까지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미국과 러시아는 텔레파시, 투시, 염력 같은 분야에 대해 열성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모든 것이 네 번째 신체의 기능이다. 꿈꾸는 것이 네 번째 신체의 자연적인 특성리라면, 진리를 알고 실체를 보는 것은 이 신체의 궁극적인 가능성이다. 이 네 번째 신체의 차크라가 아나하트(amahat) 차크라다. 다섯 번째 차크라는 비슈드히(vishudhi) 차크라다. 이 차크라는 목구멍에 위치한다. 다섯 번째 신체는 영체(spiritual body)다. 비슈드히 차크라가 이 다섯 번째 신체와 관련된다. 처음의 내 가지 신체와 그 차크라들은 이원적인 성질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신체에서는 그런 이원성이 끝난다. 전에도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는 네 번째 신체까지만 유지된다. 네 번째 신체 이후로 이런 구분은 끝난다.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이 모든 이원성은 남성과 여성에 속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서 모든 이원성이 중단된다. 다섯 번째 신체는 비이원적이다. 이 신체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가능성을 갖는다. 이 신체의 차원에서 구도자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차원에는 자연적인 속성과 반대되는 것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 자연적인 성질과 반대되는 가능성들은 없다. 오직 하나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네 번째 신체까지 도달했다면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가는 것이 매우 쉽다. 그만큼 많은 능력과 힘을 개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간 사람은 무의식이 완벽하게 제거된다. 그는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 그는 잠잔다. 그러나 그의 육체가 잠잘뿐, 내면의 누군가는 영원히 깨어 있다. 잠자다가 돌아누워도 그는 그것을 안다. 돌아눕지 않을 때도 그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을 때도 그는 그것을 안다. 이불을 덮지 않을 때도 그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의 각성 상태는 잠 속에서도 결코 느슨해지지 않는다. 그는 이십사시간 내내 깨어 있다. 그러나 이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의 상태는 정반대다. 잠 속에서 그는 잠잔다. 그리고 때어 있을 때도 그의 일부는 잠들어 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만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매일 저녁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대는 대문 앞에서 좌회전해서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대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런 일은 순전히 습관의 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주의 깊게 깨어나는 것은 어떤 위험이 있을 때뿐이다. 큰 위험이 있을 때 우리는 각성을 늦출 수 없다. 우리는 깨어 있다. 예를 들어, 이떤 사람이 가슴에 칼을 들이대면 그대의 의식이 퍼뜩 깨어난다. 즉각 그대는 의식의 차원 속으로 뛰어든다. 가슴에 들이댄 칼이 잠시동안 그대를 다섯 번째 신체 안으로 유도한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삶을 몽유병 환자처럼 살아간다. 아내는 남편의 얼굴을 온전하게 본 적이 없다. 남편도 아내의 얼굴을 온전하게 본 적이 없다.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해도 윤곽만 희미할 뿐이다. 이 얼굴이 지난 삼십 년 동안 보아 온 얼굴과 같은 얼굴인지 말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대는 결코 분명하게 본 적이 없다. 분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그대의 내면에 깨어 있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은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내적으로 잠들어 있다. 그는 꿈꾸는 상태다. 모든 것이 이 꿈속의 일이다. 그대는 화를 내고 나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났습니다. 사실, 나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한다. 그대는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할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험악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하고 말한다. 그대는 험악한 말을 뱉어 놓고는 그런 말을 할 의도가 없었다고 부인한다. 범죄자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동 인형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말을 하고,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저녁때, 그대는 내일 아침 네시에 일어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네 시가 되면 그대는 자명종을 끄고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너무 많이 잔 것이 대해 후회한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결심을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인간은 저녁때 결심한 것을 다음 날 아침 에 어긴다! 아침 네 시에 결심한 것이 저녁때가 되기 훨씬 전에 바뀐다. 이런 식으로 수천 번도 더 바뀐다. 이런 결심, 이런 생각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꿈과 같다. 부풀었다가 터져 버리는 비누 방울이다. 그 배후에는 깨어 있는 사람이 없다. 의식적이고 주의 깊은 사람이 없다. 영적인 차원이 시작되기 전에는 잠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 전까지 잠은 필연적인 조건이다.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가기 전까지 인간은 몽유병 환자다.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가야만 깨어 있음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네 번째 신체가 완전히 성장한 후에야 그를 붓다(buddha)라고 부른다. 이제 그는 깨어 있다. 붓다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의 이름이 아니다. 그가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후에 붙여진 이름이 붓다다. 고타마 붓다는 잠에서 깨어난 고타마를 뜻한다. 그의 이름은 고타마였다. 이것은 잠들어 있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고타마가 떨어져 나가고 붓다만 남았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하면서 이런 차이점이 생긴다.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그 행동은 믿을 수 없다. 사랑을 맹세하던 남자가 다음 순간에는 애인의 목을 졸라 죽일 수도 있다. 평생동안 동반자가 되겠다는 그의 약속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남자를 비난할 수 없다. 잠 속에서 한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꿈속에서 그대는 '나는 평생동안 이 관계를 지키겠습니다. '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그대는 '그것은 그저 꿈이었다.' 고 말하면서 그 약속을 부인할 것이다. 잠자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잠자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수많은 혼란과 마찰, 다툼, 카오스(chaos)가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잠자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잠자는 사람과 깨어 있는 사람 사이에는 또 하나의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을 마음 속에 새겨라. 잠자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이렇게 노력한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과시하려고 한다. 때로 그는 정치 권력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하고 선언한다. 때로는 큰 집을 지음으로써 부를 과시한다. 때로는 높은 산에 올라감으로써 자신의 강인함을 보여 준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 모든 노력은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려는 무의식적 시도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네 번째 차원을 넘어서기 전까지 그 해답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섯 번째 신체가 '영체'로 불리는 이유는 우리가 이 단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답을 얻기 때문이다. '나'라고 불리는 것이 이 차원에서 완전히 멈춘다. '나는 이러저러한 인간이다. ' 라는 주장이 즉각 사라진다. 이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에게 '당신은 이러저러한 사람이다.'하고 말하면 그는 웃을 것이다. 이제 그의 입장에서는 모든 주장이 멈추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 이제 그가 누구라는 사실은 확고하다. 이 다섯 번째 차원에서 모든 갈등과 문제가 끝난다. 그러나 이 차원에도 나름대로 위험이 있다. 이제 그대는 자신을 알았다. 이 앎이 지복과 충만감을 준다. 그래서 그대는 여기에서 여행을 마치고 싶을 것이다. 여행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고통과 번뇌의 위험이 있었다. 이제는 지복이라는 위험이 시작된다. 다섯 번째 단계는 너무나 지복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그대는 이 단계를 벗어나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들어간 사람은 지복에 매달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대가 더 나아가는 것을 지복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지복이 최절정에 달한다. 지복이 심오한 깊이를 갖는다. 이제 내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번뇌와 고통도 기쁨만큼 우리의 길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지복이 큰 걸림돌이다. 처음에는 세속의 혼란과 군중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사원의 아름다운 비나(veena) 소리를 버리는 것은 수천 배나 더 어렵다. 이것이 많은 구도자들이 자신에 대한 앎(Atma Jnan)에서 멈추고, 우주적 실체에 대한 앎(Brahma Jnan)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우리는 이 지복을 경계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지복에 얽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지복이 우리를 끌어당겨 익사시킨다. 우리는 그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간다. 이 지복 안으로 빨리 들어가지 말라. 이 지복 또한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아라. 행복도 하나의 경험이었고 불행도 하나의 경험이었다. 이제 이 지복 또한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이 지복의 바깥에 서서 지켜보라. 주시자가 되어라. 경험이 있는 곳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다. 아직 최종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궁극적 경지에서는 모든 경험이 사라진다. 슬픔과 기쁨이 끝나고, 지복 또한 끝난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가 신을 '진리-의식-지복(Sat-chit-ananda)'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것이 절대 자아(supreme self)의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지복이다. 언어는 다섯 번째 차원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다섯 번째 차원에 대해서는 '여기에 지복이 있다. 완벽한 깨어있음(awakening)이 있다. 자기에 대한 앎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묘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섯 번째 단계에 머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신비가 없다. 그들의 말은 매우 과학적으로 들릴 것이다. 신비의 차원은 이 다섯 번째 단계 너머에 있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종교들을 흡수할 것이라고 믿는다. 과학 또한 아트만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에 들어선 구도자들은 주로 진리가 아니라 지복을 찾는다. 번뇌와 고통으로 좌절한 그는 지복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지복을 찾는 사람은 틀림없이 다섯 번째 단계에서 멈출 것이다. 지복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라. 그러면 이 단계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의문이 떠오른다. "여기에 지복이 있다. 이 지복은 참으로 좋다. 나는 나 자신을 안다. 이것 또한 참으로 좋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파리고 꽃일 뿐이다.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지복으로 충만하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 솟아났는가? 내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내 존재의 깊은 심연은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이 파도는 어느 바다에서 솟아올랐는가?" 만일 그대의 의문이 진리에 대한 것이라면 그대는 이 다섯 번째 신체에서 더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그대는 지복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그대의 여행은 다섯 번째 단계에서 쉽게 끝나고, 그대는 그곳에서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의문이 진리에 대한 것이라면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지복이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것은 우리가 긴장과 고통, 번뇌로 가득 찬 세상에서 왔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이 지복의 사원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엑스터시(ecstacy)로 춤추고 싶은 욕망, 이 지복의 상태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곳은 그대가 사라질 곳이 아니다. 그렇게 사라질 수 있는 단계가 올 것이다. 그 단계에서는 사라지려고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간단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단계에서는 그대가 원한다 해도 그대 자신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대는 사진이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다섯 번째 신체에서도 그대는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는 그대의 노력이 아직 작용하고 있다. 에고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성(I-am-ness)'은 아직 지속된다. 에고와 '나의 존재성'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해야 한다. 에고, 즉 '나(I)'라는 느낌은 죽겠지만 '존재(am)'라는 느낌은 죽지 않을 것이다. 'I am '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 'I'는 에고고 'am'은 아스미타(asmita), 존재의 느낌이다. 그러므로 이 다섯 번째 차원에서 'I'는 죽겠지만 'am'은 남을 것이다. 나의 존재성(I-am-ness)은 남을 것이다. "무수한 영혼들이 있으며, 각각의 영혼은 서로 다르고 분리되어 있다." 이 차원에서 구도자는 무수한 영혼들을 경험할 것이다. 그는 아직 '존재(am)'라는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인과 분리된 느낌을 준다. 만일 그대의 열망이 진리에 대한 것이라면 이 지복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단없는 지복은 지겨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가락은 지루해진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은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구원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천국에 지복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지복 하나만 있다면 그 곳은 매우 단조로운 곳이 될 것이다. 만일 그 곳에 오직 지복이 있을 뿐이고 불행, 고통, 긴장의 그림자도 없다면, 우리가 그런 지복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겠는가? 지복에 묻혀 버리는 것이 다섯 번째 차원에 위험이다. 이 위험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때로는 많은 생애가 걸리기도 한다. 처음의 네 단계를 극복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다섯 번째 단계는 매우 어렵다. 이 지복에 권태를 느끼기 위해서는, 아트만에 지겨움을 느끼려면 많은 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신체 전까지는 고통, 미움, 폭력성,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다섯 번째 신체 이후에는 자기(self)를 제거하는 것이 주된 탐구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어떤 것(something)으로부터의 자유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 이 자유가 완성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self)로부터의 자유다. 여기에서부터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 여섯 번째는 브라흐마 샤리르(Brahma sharir), 코스믹체(cosmic body)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여섯 번째 차크라는 아즈나(ajna)차크라다. 이 차원에는 이원성이 없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지복의 경험이 강해지고, 여섯 번째 차원에서는 존재의 경험이 강해진다. 이제 아스미타(asmita)가 사라질 것이다. 'I am'에서 'I'는 다섯 번째 차원에서 사라지고, 'am'은 다섯 번째 차원을 넘어서자마자 사라질 것이다. 이제 '있음(is-ness)'이 느껴질 것이다. 타트하타(tathata), 여여가 느껴질 것이다. 이젠 'I'도 없고 'am'도 없다. 오직 여여한 실상(that which)만 남는다. 그러므로 이 차원에는 실체와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있을 것이다. 의식에 대한 지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식은 '나'로부터 자유롭다. 이 의식은 더 이상 '나의 의식' 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의식일 뿐이다. 더 이상 '나의 존재'가 아니라 그저 존재일 뿐이다. 어떤 구도자들은 이 브라흐마 샤리르, 코스믹체에 도달한 후 멈춘다. 그들은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나는 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나는 없고 오직 브라흐만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찾겠는가? 더 이상 찾을 것이 있는가? 찾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젠 모든 것을 얻었다. 브라흐만은 전체를 의미한다. 이 경지에 서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브라흐만이 궁극적 진리며 우주적 실체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떤 구도자들은 이 단계에 멈춘다. 그들은 수많은 생을 되풀이하며 이 단계에 정체한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브라흐마 즈나니(Brahma jnani), 브라흐만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여기에 머물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 이 단계를 넘어서는 것은 무척 어렵다. 건너갈 곳이 없다. 모든 것이 밝혀졌다. 어디론가 건너가려면 거기에 공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방 밖으로 나가려면 방밖에 어떤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젠 방이 광대해졌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만큼 무한해졌다. 경계선이 없다. 이젠 갈 곳이 없다.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찾겠는가? 찾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무한한 생 동안 이 단계에서 여행이 중단될 가능성이 많다. 브하르만이 최후의 장애물이다. 구도자의 길에 놓인 마지막 장애물이 브라흐만이다. 이젠 존재(being)만 남았다. 그러나 비존재(nonbeing)는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존재, 즉 있음(is-ness)은 밝혀졌지만 비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못했다. 비존재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차원은 니르바나 카야(nirvana kaya), 열반체다. 이에 해당하는 차카라는 사하스라르(sahasrar) 차크라다. 이 차크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섯 번째 차크라까지다 사실, 그것도 매우 힘든 일이다. 나중에 그 말 중의 대부분이 틀린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매우 과학적인 탐구가 진행된다.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그런데 여섯 번째 차원으로 접어들면서 윤곽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모든 말이 무의미해 보인다. 아직까지 암시를 주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부러지고, 더 이상 암시가 가능하지 않다. 그대의 존재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브라흐만, 절대적인 존재는 여섯 번째 신체와 차크라를 통해 알려진다. 브라흐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미간에 위치한 아즈나 차크라에 대해 명상한다. 이 차크라는 코스믹체와 연결되어 있다. 이 차크라르 완벽하게 작용시킨 사람들은 그들이 목격하는 광대함, 그 무한한 팽창을 '제삼의 눈'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제삼의 눈이다. 이 눈을 통해 그들은 우주적 존재, 무한한 존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하나의 여행이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비존재로 가는 여행이다. 존재(existence)는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인 비존재가 있다. 빛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어둠이 있다. 빛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어둠이 있다. 삶이 하나의 면이라면 다른 면에는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나머지 비존재, 공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존재와 비존재 둘 다 알아야만 궁극적인 진리가 밝혀진다. 존재가 완전히 알려지고 비존재도 완전히 알려져야만 비로소 앎이 완성된다. 이 때 우리는 전체를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앎은 불완전하다. 브라흐마의 경지(Brahma Jnan)에는 아직 불완전함이 있다. 이 경지에서는 비존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브라흐만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비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하는 것이 진리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허구다. 그런 것은 없다. 따라서 비존재를 알아야 한다는 문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니르바나 카야(nirvana kaya)는 수냐 캬야(shuna kaya), 즉 공을 의미한다. 이 공의 차원에서 우리는 존재로부터 비존재로 뛰어 든다. 코스믹체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남아 있다. 이것 또한 알려져야 한다. 존재하는 것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일곱 번째 차원은 궁극적이 죽음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니르바나는 불꽃의 소멸을 뜻한다. 'I'였던 것이 소멸한다. 'am'이었던 것이 소멸한다. 그대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됨으로써 다시 존재한다. 이제 그대는 브라흐만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 또한 버려야한다. 마지막 단계로 뛰어들 준비가 된 사람은 존재뿐만 아니라 비존재 또한 알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일곱 개의 신체와 일곱 개의 차크라다. 이 안에는 방편뿐만 아니라 장애물 또한 놓여 있다. 장애물은 외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물을 이유가 없다. 만일 누군가에게 묻거나 이해를 구하러 간다면 구걸하지 말라. 이해하는 거소가 구걸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대는 항상 탐구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듣고 이해한 모든 것이 다시 그대의 탐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맹목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구걸 행위에 불과하다. 그대가 내게 무엇인가 묻고, 나는 대답을 준다. 이 때 그대가 적선하러 왔다면 그대는 내 대답을 자루에 넣고 보물처럼 간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구도자가 아니라 거지다. 거지가 되지 말라.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이 다시 그대의 탐구가 되어야 한다. 나의 말이 그대의 탐구를 촉진하고 호기심을 유발시켜야 한다. 내 말이 그대를 더 큰 곤경에 몰아넣고 더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말을 통해 그대 안에 새로운 의문이 떠올라야 한다. 그래서 그대가 새로운 발견의 길에 착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그대는 내게 적선하러 왔던 것이 아니다. 그대는 내말을 이해했다. 내 말이 그대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면, 이 때 그대의 물음은 구걸이 아니다. 알고 이해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탐구를 계속하라. 그대만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탐구의 길을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구도의 길을 걸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도달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하려고 힘써라. 이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힘써라. 이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그대 자신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함으로써 그대의 이해가 완성되었다고 착각하지 말라.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 그보다는 모든 것을 의문으로 돌려라. 모든 것을 해답이 아니라 의문으로 돌려라. 이 때 그대의 여행은 계속 될 것이다. 그것은 구걸이 아니라 탐구의 길이 될 것이다. 탐구가 그대를 마지막 지점까지 인도한다. 자신의 내면으로 파헤치고 들어갈 때 그대는 각 차크라의 양면을 발견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의 속성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분노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용서는 그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섹스는 자연이 준 것이고, 브라흐마차리야는 그대 스스로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꿈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고, 비전(vision)은 그대가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응적 속성에 대한 탐구는 네 번째 차크라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 차크라부터는 비가시적인 것, 비이원적인 것을 탐구하게 된다. 여기에서 탐구를 계속하라. 여여한 것(that which)은 그대의 다섯 번째 신체에 들어와 있는 것과 다르다. 지복을 얻었을 때는 지복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라. 여섯 번째 차원에서 그대는 브라흐마에 도달한다. 그러나 탐구를 계속하라. '브라흐마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하고 물어라. 그러면 어느 날엔가. 그대는 일곱 번째 신체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차원으로 들어설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인 경지다. 이 상태에 대해서는 전달할 방법이 없다. 우리의 경전이 다섯 번째 신체의 단계에서 끝나거나, 기껏해야 여섯 번째 신체까지만 언급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섯 번째 신체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무한한 우주적 실체가 거기로부터 시작된다. 수피(sufi)같은 신비주의자들은 다섯 번째 너머의 차원에 대해 말한다. 이런 차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모순되는 말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수피가 말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그대는 '이 사람은 미쳤군.'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고 어떤 때는 저렇게 말한다. 그는 '신은 있다. '고 말하는가 하면 '신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그를 보았다.'고 말하는 동시에 '어떻게 그를 볼 수 있겠는가?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하고 말한다. 이런 신비주의자들은 많은 의문점을 일으킨다. 그대는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묻고 있는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신비주의(mysticism)는 여섯 번째 차원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가 없는 종교는 다섯 번째 차원에서 끝난다. 이렇게 알면 된다. 이 신비주의 또한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궁극적인 단계는 공이다. 무가 궁극적인 단계다. 신비주의로 끝나는 종교는 여섯 번째 신체에 머문다. 공이 마지막 차원이다. 이 차원 이후에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이렇게 '아드와이트(Adwait)', 비이원성에 대한 탐구는 다섯 번째 신체와 더불어 시작된다. 대응하는 속성에 대한 모든 탐구는 네 번째 신체에서 끝난다. 모든 장애물이 우리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장애물들은 유용하다. 이 장애물이 변형되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편이 된다. 바위 하나가 길 위에 놓여 있다고 하자.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바위는 장애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이해하는 날 이 바위는 사다리가 된다. 바위 하나가 길 위에 놓여 있다.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대는 '바위가 내 길을 막고 있다. 어떻게 내가 앞으로 전진하겠는가?'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해했을 때 그대는 바위를 타 넘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대는 바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나는 네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너를 타 넘은 후 나는 더 높은 차원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나는 더 높은 단계로 전진하는 중이다. 나는 너를 장애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너는 좋은 방편이었다. " 길이 바위로 막혀 있다.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바위를 타 넘어라. 이런 식으로 분노를 타 넘어라. 분노를 타 넘고 용서에 도달하라. 용서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섹스를 뛰어넘어 브라흐마차리야에 도달하라. 브라흐마차리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 때 그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준 분노와 섹스에 감사할 것이다. 길위에 놓인 모든 바위는 장애물인 동시에 방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바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바위와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바위와 맞서 싸우면 그대의 머리만 깨진다. 이 때 바위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의 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대가 싸우기 위해서는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물건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 근처에 멈추어 서야 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섹스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섹스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는 섹스에 탐닉하는 사람만큼이나 섹스에 얽매인다. 사실, 그는 섹스에 더 얽매인다. 섹스에 탐닉하는 사람은 어느 날엔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맞서 싸우는 사람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는 계속 섹스의 주변을 맴돈다. 분노와 맞서 싸우면 그대는 자신에 대해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퍼스낼리티 전체가 분노로 가득 차고, 그대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분노로 진동할 것이다. 그대는 사방에 분노의 진동을 퍼뜨릴 것이다. 우리가 읽은 성자와 고행주의자들의 이야기 중에 두르와사(Durwassa) 같은 사람들은 맹렬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분노와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주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은 인격 전체가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다. 그들은 바위와 맞서 싸움으로써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그들은 자신이 맞서 싸우는 것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단번에 성자를 타락시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런 일은 그가 성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는 싸우고 또 싸우면서 힘이 빠진다. 이 때 성은 안전한 장소에 대피해서 그가 지쳐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올 가능성은 없다. 선녀들이 구도자를 괴롭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섹스가 억눌렸을 때는 보통의 여자도 천상의 선녀가 된다. 마음은 밤에 성적인 꿈을 꾸고, 낮에도 성적인 생각을 한다. 마음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찬다. 구도자는 싸우려드는 경향성을 경계해야 한다. 그는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서 '이해'라는 말은 자연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것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통해 그대는 '아직 얻지 못한 것 '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출발점에서부터 도망가면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섹스로부터 도망친다면 어떻게 브라흐마차리야에 이를 수 있겠는가? 섹스는 자연에 의해 주어진 문이다. 그리고 브라흐마차리야는 이 문을 통해 착수해야 하는 과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데로도 구걸하러 갈 필요가 없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가 전부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워라. 모든 사람들의 말을 들어라. 그리고 궁극적으로 내면에 있는 그대 자신을 이해하라. 방금 당신께서는 일곱 가지 신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열반체, 코스믹체 또는 영체에 도달한 사람들의 이름을 말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이런 문제에 신경 쓰지 말아라.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무의미한 일이다. 설령 내가 말한다 해도 그대는 그것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가능한 한 여러 사람을 비교하거나 대조하는 일을 피하라.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관심은 버려라. 다섯 번째나 그 이후의 신체에 도달한 사람도 사후에 다시 물질적인 형상을 갖게 됩니까?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다. 죽기 전에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천상의 가장 높은 영역에 다시 태어난다. 그 곳에서 그는 신들의 차원에 산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그 영역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후에는 물질적인 육체로 탄생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다른 신체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신(deva)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얻은 신체의 종류를 의미한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후에 '신'이라는 신체를 얻는다. 그러나 여섯 번째 신체 후에는 신마저 없다. 이 때 우리는 이슈와르(Ishuwar)로 불리는 전대 존재(supreme being)를 얻는다. 그러나 이 모두가 역시 신체다. 어떤 종류의 신체인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일곱 번째 차원 이후에는 신체가 없다. 다섯 번째 차원 이후부터 신체는 점점 더 미묘해진다. 그리고 일곱 번째 차원 후에는 신체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지난번 강의에서 당신은 은총과 가까운 삭티파트를 선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은총과 가까운 삭티파트일수록 더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삭티파트의 과정에 점진적인 진보와 발전이 가능하다는 뜻입니까? 즉, 삭티파트에서 질적인 진보가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많은 일이 가능하다. 본질적으로 오직 은총만이 유효하다. 매개체 없는 은총이 가장 순수하다. 은총을 불순하게 만드는 자가 끼여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내 눈으로 직접 그대를 보는 것과 같다. 이때 그대의 형태가 가장 순수하게 보일 것이다. 그 다음에 내가 안경을 쓴다고 하자. 시각이 그렇게 순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매개체도 있고 불순한 매개체도 있다. 어떤 안경은 색깔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안경은 투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렌즈의 질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므로 매개체를 통해서 오는 은총에는 불순함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불순함은 매개체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가장 순수한 은총은 매개체 없이 직접 오는 은총이다. 가령 그대가 눈 없이 불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순수한 시각이 될 것이다. 눈도 하나의 매개체며 어떤 장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색맹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시력이 약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눈에 다른 문제를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 모두가 난점이다. 시력이 약한 사람은 안경이라는 매개체가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안경은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뚜렷한 시각을 줄지도 모른다. 이제 안경은 또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이제 눈과 안경이라는 누 개의 매개체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매개체는 첫 번째 매개체의 약점을 보완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통해 오는 은총에는 매개체의 불순함이 섞여 있다. 이제 매개체의 불순함이 구도자의 내면에 있는 불순함에 대해 역작용을 미친다면 이 두 가지 불순함이 서로를 상쇄시킬 것이다. 이 때 은총과 가장 가까운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경우에 따라 달리 판단해야 될 일이다. 따라서 나는 직접적인 은총을 선호한다. 매개체에 대해 신경쓰지 말라. 간혹 매개체를 통해 일별이 온다 해도 구도자는 이런 문제를 염려하거나 걱정해서는 안 된다. 구걸하지 말라. 전에도 말했듯이 그대가 구걸하면 '주는 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때는 매개체가 어리석을수록 더 불순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진정으로 주는 자는 '나는 준다.'는 의식이 없어야 한다. 이 때 삭티파트가 순수해진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은총은 아니다. 그대는 여전히 매개체 없이 직접 은총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대와 신 사이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 항상 이것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이 그대의 염원이며 추구가 되어야 한다. 구도의 길을 가는 도중에 많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무데서도 멈추지 말라. 이것이 그대에게 필요한 전부다. 이렇게 멈춤 없이 나아갈 때 그대는 차이점을 느낄 것이다. 양적 차이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질적 차이가 있다. 이렇게 질적 차이가 생기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매개체를 통해 삭티파트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을 통해서 오는 삭티파트만큼 순수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아스미타(asmita), 'am-ness'가 아직 살아 있다. 'I'는 죽었지만 'am'이 아직 남아 있다. 이'am'이 자기 만족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am' 또한 죽는다. 오직 브라흐만이 있을 뿐이다. 존재의 상태에는 도달했지만 아직 비존재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존재 또한 아주 미묘한 장막이다. 아주 투명하긴 하지만 어쨌든 장막이 거기에 있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보다. 여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을 통해서 오는 삭티파트가 어 낫다. 이 삭티파트는 직접적인 은총에 매우 가깝다. 그러나 아무리 가깝다 해도 여전히 거리가 있다. 아무리 작은 가격이라도 간격은 간격이다. 그리고 소중한 것일수록 아주 미세한 거리도 거리가 된다. 은총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그러므로 아주 미세한 장막도 장애물로 작용한다.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 사람을 통해서 얻은 삭티파트가 가장 순수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은총은 아니다. 가장 순수한 삭티파트는 일곱 번째 신체를 통해서 온다. 여기에서 삭티파트는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한다. 매개체에 관한 한 아무 장막이 없다. 그는 공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대 쪽에는 여전히 장애물이 있다. 그대는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할 것이다. 그대의 장막이 최후의 장해를 낳는다. 매개체는 공과 하나다. 그는 아무 장해도 없다. 그러나 그대는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 내가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내가 공에 도달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떤가? 그대는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볼 것이다.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이 시각이 마지막 장애물이다. 아무 형상도 통하지 않고, 무형을 통해 해프닝이 일어나야만 이런 시각을 제거할 수 있다. 이 때 그대는 이 해프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해프닝의 진원지를 발견할 수 없을 때 ,인격체에 대한 개면이 떨어져 나간다. 아무 근원도 없이 해프닝이 일어나야 한다. 햇빛이 올 때 그대는 태양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빛이 올 때, 구름도 없이 비가 내릴 때, 이 때 비로소 인격화 때문에 생긴 최후의 장막이 떨어져 나간다. 그대가 계속 나아갈수록 간격이 점점 더 미묘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와 신 사이에 아무도 없을 때 궁극적인 은총이 일어난다. 중간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장애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두 사람이 있는 한 많은 장해가 있다. 그대가 있고 타인이 있다. 심지어 타인 없을 때도 '그대'는 있다.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타인의 존재가 느껴진다. 아무 근원도 없이 내려오는 은총, 어느 곳애도 진원지가 없는 은총이 최고다. 공으로부터 오는 은총 안에서 그대의 '개체성'은 씻겨져 나갈 것이다. 만일 매개체가 있다면, 그는 그대를 위해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 자체가 그대의 '개체성'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서 그대는 더 큰 평화를 경험한다. 숲 속에서 그대는 더 큰 평화를 맛본다. 그 곳에는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의 'I'는 확고하게 강하게 유지된다. 방안에 두 사람이 있을 때는 긴장의 물결이 서로 부딪친다. 그 두 사람이 싸우거나 다투지 않아도, 심지어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아도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도 각자의 '나(I)'는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 곳에서 공격과 방어가 한창 진행중이다. 이런 일이 암암리에 일어난다. 직접 부딪칠 필요도 없다. 두 사람의 현존만으로도 방안에 긴장이 감돈다. 그대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다면, 그대느 그 방이 둘로 나누어져 있으며 두시람 각자가 서로 다른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것이다. 두 사람에게서 나오는 에너지의 진동이 전쟁터의 적처럼 마주보고 있다. 타인의 현존이 그대의 '나'를 강화시킨다. 타인이 떠나면 방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그대는 릴랙스(relax)한다. 칼날처럼 곤두서 있던 그대의 '나'가 릴랙스된다. 이제 그대의 '나'는 쿠션에 기대어 휴식한다. 편안하게 숨쉰다. 이젠 타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것은 그대의 에고를 방임하고 릴랙스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보다 나무 곁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남녀간의 긴장이 심각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애완 동물과 함께 지내는 경향이 더 많다. 사람들보다 동물과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쉽다. 동물들은 '나'가 없기 때문이다. 개는 줄에 묶어서 끌고 다녀도 마냥 행복해 한다. 그러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묶어 놓을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서로를 묶어 놓으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말이다. 아내는 남편을 묶어 놓고, 남편은 아내를 묶어 놓는다. 그리고 둘 다 마냥 행복해 한다. 이런 줄은 아주 미묘하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각자가 줄을 끊고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하지만 개는 다르다. 개는 꼬리를 흔들면서 마냥 행복하게 걷는다. 따라서 개는 그대에게 다른 사람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준다. 다른 사람은 그대의 에고를 상기시키고 이 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점점 더 타인과의 관계를 끊고 사물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사물은 다루기가 쉽다. 날마다 사물이 늘어간다. 집안도 사람보다 물건이 더 많다. 타인은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사물은 걱정을 안겨 주지 않는다. 의자는 항상 내가 놓은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내가 그 위에 걸터앉아도 의자는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나무, 강, 산은 내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 가까이에 있을 때 평화를 느낀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우리 앞에 강하게 버티고 서 있는 '나' 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나'가 없다. 그래서 우리도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타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의 '나'가 무슨 소용인가? 그때는 그대의 '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인기척만 느껴져도 그대의 '나'가 벌떡 일어난다. 이 '나'가 자신의 안정을 걱정한다. 다음 순간에 대해 정보가 부족한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이 '나'는 줄곧 만일이 사태를 대비한다. 에고는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 사람을 만났을 때도 에고는 그를 경계한다. 그런 사람 앞에서 간혹 에고는 지나칠 정도로 긴장한다. 그대는 보통 사람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상처를 준다 해도 그대의 부상은 그렇게 깊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나 그 이상의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깊은 수술을 행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했다면 그의 수술 역시 그대의 다섯 번째 신체까지 뚫고 들어간다. 그래서 그대는 바짝 긴장한다. 그대는 그의 주변에 깊은 심연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느낀다. 그대는 긴장하고 경계한다. 그대는 그의 주변에서 깊은 심연을 느낀다. 그리고 '그의 곁에 다가가면 이 깊은 심연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예수, 크리슈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태어났을 때 우리가 그들을 죽여 버린 이유가 그것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거대한 혼란을 심어 준다. 그들의 곁에 다가가는 것은 의도적으로 위험한 곳에 접근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그들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이젠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황금으로 그들의 동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합장하며 '오, 위대한 스승이시여!'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있을 당시 우리는 그들을 다른 식으로 대했다. 그 때 우리는 그들을 매우 두려워했다. 이것은 미지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무서워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일수록 더 깊은 심연이 된다. 이것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고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 현기증이 일어난다. 그런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두려움을 낳는다. 우리의 머리가 현기증을 느낀다. 모세(Moses)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하즈라트 모세(Hazrat Moses)는 신을 본 후에 결코 얼굴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베일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다녔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위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마다 도망쳤다. 그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사람들이 그의 눈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미지의 깊은 심연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의 눈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갈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의 마지막 차원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할 것이고, 그대와 그 사이에 장벽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삭티파트는 순수해질 수 없다. 그대가 그런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생각을 버려야만 삭티파트가 순수해진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대의 '나'가 사라져야만 가능하다. 에고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대는 모든 곳에서 삭티파트를 얻을 것이다. 이때는 삭티파트가 누군가 특정한 사람을 통해 오지 않는다. 그것은 근원도 없는 곳에서 온다. 그것은 은총이 되었다. 군중이 많을수록 그대의 에고는 더 강하고 단단해진다. 그래서 에고를 버리기 위해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지내는 수행법이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이상하다. 나무 아래 오래 머문 사람은 나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나무를 '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바다 근처에 오래 머문 사람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나'는 살아 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이 '나'는 그대가 어디를 가든 '타인'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무생물과도 감상적인 관계를 맺을 것이다. 무생물을 인격체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마지막 단계에 근접했을 때, 그는 자신의 '나'를 지키기 위해 신을 타인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신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신과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는 그고 우리는 우리다. 그는 신이고, 우리는 그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존재다." 헌신자들은 이런 말밖에 하지 않는다. 신과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면 에고를 버려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들을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된단 말인가? 그는 위대하고 절대적인 분이지만 우리는 비천한 무리다. 이런 우리가 감히 어떻게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헌신자는 자신의 '나'를 지키기 위해 '너'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박타(bhakta),즉 헌신자는 결코 네 번째 차원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그는 다섯 번째 차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는 네 번째 차원에 머문다. 네 번째 차원에서 일어나는 최선의 가능성 모두를 발견한다. 따라서 그의 삶에는 기적 같은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네 번째 차원에 머문다. 참 자아를 추구하는 아트마 사드하크(atma sadhak), 고행을 하는 하타 요기(hatha yogi), 그외에 이와 비슷한 수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다섯 번째 차원에 도달한다. 이런 수행자들의 기본적인 욕망은 지복을 얻는 것이다. 모크샤(moksha)를 얻는 것,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이런 욕망 뒤에는 '나' 가 숨어 있다. 그는 '나는 해방을 원한다.' 고 말한다. 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나의 해방이다. 그는 '나는 자유를 원한다. 나는 아름다워지고 싶다.' 고 말한다. 항상 그의 '나'가 농축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다섯 번째 차원 이상을 넘지 못한다. 라자 요기(raja yogi)는 여섯 번째 차원까지 도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브라흐만이 존재한다. 내가 아니라 그가 존재한다. 그가 모든 것이다." 그는 에고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버릴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는 말한다. :"나는 브라흐만의 부분으로서 살아 남을 것이다. 나는 그와 하나다. 내가 브라흐만이다. 나는 나 자신을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내적인 존재는 브라흐만 안에 녹아들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런 구도자는 여섯 번째 차원까지 도달할 수 있다. 붓다 같은 구도자만이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브라흐만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과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말한다. "무엇이 남건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보존할 욕망이 없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릴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얻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가 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열반체에 도달한다. 이 때 그대는 죽음까지 알 준비가 되어 있다. 삶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여섯 번째 차원에 멈출 것이다. 그러나 죽음까지 탐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다. 네 번째 차원에서 사이킥 비전(psychic vision)을 비롯하여 많은 능력을 얻은 사람들이 과학자들처럼 달과 태양, 지구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점과 관련하여 서너 가지 이해하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과학적인 사실 중 많은 부분이 이런 사람들에 의해 밝혀졌다. 예를 들어, 이 사람들이 제시한 지구의 나이와 과학자들이 밝힌 지구의 나이는 조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이 정확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과학자들 스스로가 이 수치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지구의 형태는 영원히 변한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는 고대와 똑같지 않다. 달과 지구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는 예전과 똑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한때 아프리카는 인도와 붙어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지금도 여전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과학이 발견하고 있는 것들을 네 번째 차원의 사람들이 벌써 오래 전에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또 한가지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네 번째 차원의 사람에게는 수학적인 언어다. 그는 비전(vision)의 언어, 이미지(image)와 심벌(symbol)의 언어를 갖는다. 그의 언어는 상징적이다. 꿈속에는 언어가 없다. 비전 속에도 언어가 없다. 낮 동안에 한 일을 밤에 꿈으로 재현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상징과 심벌을 매개체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꿈속에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서고 싶은 야망으로 가득 찼다면, 그대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꿈을 꿀 것이다. 그대는 다른 새들보다 더 높이 나는 새가 될 것이다. 꿈속에서 그대는 자신의 야망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꿈속에서는 언어 전체가 바뀐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전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영상이다. 프로이트와 융(jung), 아들러(Adler) 이후로 꿈의 해석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꿈의 의미를 알아 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네 번째 차원의 사람들이 말한 것들은 아직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꿈이라는 현상도 철저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이킥 비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이킥 비전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우리는 네 번째 차원의 사람들이 비전을 통해서 보는 것들의 의미, 그들이 말하는 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다윈(Dawin)은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한다. 이 때 그는 과학의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힌두교의 화신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는 이것이 다윈의 진화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똑같은 이야기가 수천 년 전에 상징적인 형태로 말해진 것이다. 첫 번째 화신은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였다. 다윈 또한 인간의 첫 번째 형태가 물고기였다고 말한다. 고대의 경전이 첫 번째 화신은 마트시야 아바타르(matsiya avatar), 즉 물고기였다고 말할 때,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화신과 물고기! 이것은 과학의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생명의 원소가 첫 번째 물고기 안에 들어왔으며 그 다음에 다른 형상들이 뒤따랐다고 다윈이 말할 때, 우리는 이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이 말이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방법과 탐구는 과학적이다. 비전을 본 사람들은 신(divine)이 처음에 물고기로서 탄생하는 것을 보았다. 비전을 보는 사람들은 우화의 언어로 말한다. 두 번째 화신은 거북이다. 이 피조물은 땅과 물 양쪽 모두에 속한다. 물에서 땅으로 올라오는 생명의 변천 과정이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과도기적인 중간 상태가 있어야 했다. 진화하는 모든 피조물이 물과 땅 둘 다에 속해야 했다. 그 다음에 거북의 후손들은 땅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고, 수중 생활과 결별하게 되었다. 힌두교의 화신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다윈이 발견한 것을 우리가 이미 수천 년이나 앞서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그대는 놀랄 것이다. 마지막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반은 동물이고 반은 인간인 상태, 나르신 아바타르(narsin avatar)가 있다. 모든 동물이 단번에 인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인 중간 단계를 거쳐야 했다. 동물이 인간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빠져 있다. 그것이 '나르신(narsin)'이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인 상태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이해하면, 우리는 다윈이 과학적 용어로 말한 것을 네 번째 차원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에 푸라나의 언어로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힌두의 신화적 경전들은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푸라나가 무지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푸라나는 과학자들의 수중에 있지 않았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우리가 푸라나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암호 해독 시스템이 없다. 그래서 어려움이 따른다. 이제 과학자들은 인류가 기껏해야 4천 년 동안 지구상에 더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푸라나의 여러 부분에서도 이 세상이 5천년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예언한다. 과학은 다른 언어로 말한다. 그들은 태양의 빛과 열이 점점 감소하여 4천 년 안에 차갑게 식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때는 지구상에 생명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푸라나는 다른 언어로 말한다. 과학자들이 4천 년이란 시한을 제시하는 반면, 푸라나는 5천 년을 제시한다. 과학자들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 시한은 5천 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푸라나의 예언이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과학의 계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전에는 결코 오류가 없다! 과학이 항상 자신의 이론을 개선해 나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은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한다. 그리고 모레는 다르게 말한다. 과학은 날마다 변해야 한다. 뉴턴이 이렇게 말하면 아인슈타인은 다르게 말한다. 5년마다 과학은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 더 나은 이론이 출현하게 때문이다. 과학의 최종 결론이 푸라나의 비전과 다를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설령 이 둘이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지금 우리가 과학을 통해 알고 있는 것과 비전을 본 사람들의 말을 토대로 성급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삶은 말할 수 없이 심오하다. 오직 비과학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과학이 지난 백 년 동안 발견한 것들을 조사해 보면, 우리는 백 년 묵은 그 이야기들이 푸라나의 전설처럼 씌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그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다. 시간의 과정 속에서 더 나은 발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푸라나에 실린 진리를 해독할 암호문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만일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첫 번째 결과는 교육받고 문명화된 사람들의 멸망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직 교육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 살아 남을 것이다. 아지바시(Adivasi), 코알(Koal), 브힐(Bheel)족처럼 인도의 깊은 산중과 정글에 사는 원시 부족은 아무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반면, 봄베이나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항상 가장 큰 도시가 파괴된다. 그런 도시가 공격당한다. 그러나 인도의 바스타르(Bastar) 지방에 사는 원주민은 살아 남을 지도 모른다. 그는 이이들에게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 대해 들려주겠지만 잘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물체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왜 날아왔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에게는 암호 해독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해독문은 봄베이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죽었다. 한두 세대 동안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 그 물체를 보았어요?'하고 의문을 표할 것이다. 그러면 어른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들었다. 우리의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선조에게 그렇게 들었다. 한때 하늘에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 전쟁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서서히 아이들은 '비행기가 어디에 있어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비슷한 모양이라도 보요 주세요.'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후에 아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이 만들어 낸 상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하늘을 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나라에서 사이킥 마인드(psychic mind)에 의해 얻은 모든 지식은 마하바라타(Mahabharata) 전쟁에서 소멸되었다. 이제 이것은 전설로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라마(Rama)가 스리랑카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단 말인가?'하고 의심한다. 그 당시의 유물 중에 자전거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마다에 비행기라니? 이것은 전혀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책에도 비행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실, 마하바라타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지식은 이 전쟁을 통해 소실되었다. 그리고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만이 보존되었다. 그러므로 고대의 지식을 분류하는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므리티(smuriti)'고 ,다른 하나는 '쉬루티(shruti)'다. '스므리티'는 '전통적으로 기억되고 나중에 씌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쉬루티'는 '전통적으로 구전되고 그 다음에 기록된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들은 기억되고 구전된 지식들의 종합이다. 증명되고 검증된 사실들이 아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그 사람 또한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모아서 경전의 형태로 보전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지성인은 아주 극소수라는 것을 명심하라. 아인슈타인이 죽으면 상대성 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아인슈타인 자신이 '이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열 명이나 열 두명 정도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열 두명 마저 죽으면, 많은 사람이 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을 읽는다 해도 단 한 명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하바라타 전쟁은 그 시대의 탁월한 인물들을 몰살시켰다. 그 다음에 남은 것은 모두 설화나 전설이 되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인도인들은 불행하게도 이 방면에 대해 아무 연구도 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대략 4,5천 년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되었다. 그 곳은 공항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 장소에 대해서는 다른 추리가 가능하지 않다. 기계 장비가 없으면 도저히 건설이 불가능한 건축물들이 발견되었다. 실제로, 피라미드를 쌓는데 사용된 돌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크레인으로도 들어올리기가 불가능하다. 이 돌들은 인위적으로 그 곳에 놓여진 것이다. 이것 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돌들은 인간에 의해 들어올려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우수하고 정교하나 기계 장비를 갖고 있었거나 아니면 네 번째 신체를 사용했거나 둘 중 하나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실험을 해 보라. 한 사람을 바닥에 눕히고 네 명이 둘러선다. 다 명은 바닥에 누운 사람의 양 무릎 아래에 손가락을 넣고, 다른 두 명은 어깨 밑에 손가락을 넣는다. 오직 하나의 손가락만 넣는다. 손가락만으로 그를 들어올리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져라. 그리고 5분 동안 격렬하게 호흡하라. 그 다음에 숨을 멈추고 그를 들어올려라. 손가락만으로 그를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피라미드의 돌은 거대한 크레인에 의해 올려졌거나 아니면 사이킥 파워(psychic power)에 의해 들어올려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런 사이킥 파워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돌이 거기에 있고, 이 돌들은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사이킥 파워의 적용범위가 무한하다는 것이다. 네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이 반듯이 달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문제를 대단치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방면으로 연구를 완성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영혼이 존재하는지 알기를 열망했으며, 그 방면에서 앎에 도달했다. 이젠 과학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들은 사후에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물질 세계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지구의 지름을 재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아저씨는 유식하지 않아요. 아저씨는 이 인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옆집에 사는 애는 인형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요. 그는 모르는게 없어요.'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말이 옳다. 그들은 인형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어른은 이런 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다. 네 번째 차원에 진입한 사람의 탐구는 그 차원을 달리 한다. 그는 다른 것들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그는 사후에 영혼이 어떤 여행을 하게 되는지 알기를 원한다.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그는 어떤 길을 여행하는가, 이 여행의 원칙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 그의 탄생과 출생지를 점칠 수 있는가.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런 것들을 알고 싶어한다. 그는 달나라에 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 이런 문제는 관심 밖이다. 깨달음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그의 열망이다. 그에게는 이것만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는 아기가 잉태될 때 아트만이 어떻게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지, 올바른 자궁을 발견하도록 아트만이 어떻게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지, 올바른 자궁을 발견하도록 아트만을 돕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아트만이 태내로 들어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등을 알고 싶어한다. <티베트 사자의 서>라고 불리는 책이 있다. 티베트에서는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들이 한 가지 가제에 열중한다. 어떻게 하면 사후의 인간에게 최선의 도움을 주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다. 가령, 그대가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했다 해도 사후의 그대를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죽은 사람을 도와주고 안내하는 방편이 있다. 죽은 사람이 특정한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특정한 탄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완벽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다. 과학이 이것을 발견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과학도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다. 티베트인들은 이런 일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다음 생에 어디에 태어날 것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알아볼 수 있도록 어떤 상징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나라 전역에 걸쳐 그의 환생을 찾는 조사가 시작된다. 이 상징의 비밀을 말하는 아이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여겨진다. 이 비밀은 그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달라이 라나 또한 이런 식으로 발견되었다. 전임 달라이 라마는 어떤 상징을 남겨 두고 죽었다. 나라 전역에 특별한 포고문이 발표되었으며,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아이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받았다. 전임 달라이 라마의 영혼이 이 아이 안으로 들어갔다고 여겨졌다. 이 조사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아이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아주 비밀스러운 공식이었다. 오직 진짜 달라이 라마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네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의 호기심은 전혀 다른 방면으로 향한다. 우주는 무한하다. 이 우주의 신비와 비밀도 무한하다. 현대 과학이 발견한 것을 전부로 생각하지 말라. 앞으로 새로운 과학이 계속 출현할 것이다. 이 우주에는 수많은 분야가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발견되었을 때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를 비과학적인 세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알게 될 것을 지금 우리는 모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인들을 비과학적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그들은 관심 분야가 달랐을 뿐이다. 관심을 갖고 탐구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는 병을 고치는 많은 치료법을 발견했다. 그런데 네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이 사람들은 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그러나 아유르베다(Ayurveda)와 유나닉(Yunanic) 에 얼마나 많은 약초 요법이 기술되어 있는지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실험실에서 연구를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각 질병마다 적합한 치료법을 발견한 것일까? 이와 같은 일은 네 번째 신체를 사용함으로써 일어났을 가능성이 많다. 바이드야 루크만(Vaidya Lukman)에 관해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식물에 가까이 갈 때마다 '너는 어디에 쓰임새가 있니?'하고 묻곤 했다. 이제 오늘날에는 이런 이야기가 터무니 없어 보인다. 식물에 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허황된 것 같다. 50년 전만 해도 식물에는 삶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학도 식물에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3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식물이 호흡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식물이 숨쉰다는 것을 인정한다. 15년 전까지 우리는 식물에 느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5년 이내 우리는 식물에 느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대가 분노를 가지고 접근하면 식물의 상태가 변한다. 사랑을 가지고 접근하면 다시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앞으로 50년 이내에 식물과의 대화가 가능함을 알게 된다 해도 전혀 허황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발전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루크만은 오래 전에 이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대화 양식은 흔히 우리가 나누는 대화와 같지 않다. 식물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네 번째 신체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때는 식물에 묻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가 사용한 무수한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실험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렇게 거대한 실험실이 있었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 식물 모두를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면 한 가지 식물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도 평생이 걸린다. 그런데 루크만은 무수하게 많은 식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 과학은 그 중 많은 식물이 치료 효과를 갖는다고 인정한다. 이 식물들은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과거에 이루어진 모든 연구는 네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업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수천 가지 질병을 다루고 있다. 네 번째 차원에 도달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질병이란 없다. 왜 그것을 치료하는가?" 이제 과학은 이것을 이해하고 대증 요법에서 새로운 치료법을 쓰고 있다. 미국의 일부 병원에서는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가령, 똑같은 증세로 시달리는 열 명의 한자가 있다고 하자. 그 중 다섯 명에게는 물을 투여하고, 나머지 다섯 명에게는 통상적인 의학 요법을 사용한다. 그런 다음 결과를 보면, 두 그룹에서 동등한 치료 효과가 나타난다. 이것은 물을 투여받고 치료 효과를 본 사람들은 실제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나는 병에 걸렸다. '환상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사람들에게 통상적인 치료법을 쓰면 오히려 해가 된다. 그들에게는 아무 치료법도 필요 없다. 많은 질병이 불필요한 치료법 때문에 생긴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질병은 치료가 어렵다. 그대에게 실제로 병이 없다 해도 그 병에 대한 치료 약은 어떤 식으로든 작용을 미칠 것이다. 그 약은 그대의 몸에 독으로 작용할 것이고, 이로 인해 그대는 새로운 치료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병에 결렸다는 환상이 진짜 병을 안겨 줄 것이다. 90퍼센트의 질병은 심리적인 것이다. 50년 전만해도 과학은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현대 의학은 질병의 50퍼센트 정도를 심리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나는 그들이 40퍼센트를 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 번째 차원에 도달한 사람들은 많을 것을 알았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을 다시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이 얻은 지식을 과학적인 개념으로 재조명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유일한 난관이다. 일단 그런 일이 행해지면 그 때부터는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사용한 우화의 언어는 과학 개념과 크게 다르다. 오늘날 과학은 햇빛이 프리즘(prism)을 통과하면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일곱 가지 색깔이 나타난다. 그러나 베다의 리쉬(rish)들은 '태양의 신은 일곱 가지 색깔의 일곱 마리 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이것은 우화의 언어다. 그들은 '태양은 각기 다른 색깔의 일곱 마리 말을 갖고 있으며 그 말들을 타고 다닌다.'고 말한다. 이 말은 태양빛이 일곱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쉬들의 말이 우화라면 프리즘에 의한 설명은 과학적인 해석이다. 오늘날 과학의 언어를 이해하듯이 우리는 우화의 언어 또한 이해해야 한다.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과학이 나중에 이해하는 것을 훨씬 앞서서 예견한다. 그러니 이 예언은 모두 상징적인 언어로 이루어진다. 이 예언이 현대의 일반 언어로 설명되는 것은 과학이 똑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그 전에는 마땅한 언어가 없다. 과학이 최근에 생긴 것이라면 언어와 수학은 훨씬 전에 생긴 것이다. 모든 방면에서 연구 조사를 계속한다면 그대는 이것을 알고 놀랄 것이다. 언어와 수학을 개발한 사람들은 어떤 수단을 갖고 있었을까? 그 측량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데 1년이 걸리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 공전을 기준으로 해서 1년이라는 시간이 정해졌다. 그들은 아주 어래 전에 이것을 발견했다. 과학보다 훨씬 앞서서 이것을 알았다. 1년을 365일로 나눈 것도 마찬가지다. 이 고대의 선각자들에게 과학적인 수단이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이킥 비전이 있었다고 보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주 이상한 사실이 밝혀졌다. 한 아라비아(Arabia)인이 7백년 묵은 세계 지도를 갖고 있다. 이 지도는 세계 전체를 공중에서 내려다 본 모양으로 그려졌다. 땅 위에서 이런 지도를 그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지도에 대해서는 오직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7백년 전에 이미 비행기가 있었거나-이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아니면 어떤 사람이 네 번째 신체를 이용해 그런 고도까지 올라가서 지도를 그렸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7백년 저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대의 명의인 차라크(Charak)와 수쉬루트(Sushrut)를 연구해 보면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인체를 해부해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을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런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하나는 수술이 행해진 증거도 남지 않을 만큼 교묘한 수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수술 기구나 책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인체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해 놓아ㅆ. 이 고대의 의사들은 너무나 미세해서 과학이 오랜 후에야 발견한 부분들, 25년 전만 해도 과학자들이 그 실재를 부인했던 부분들까지 설명해 놓았다. 고대의 의사들이 이것을 알게 된 두 번째 가능성은 어떤 사람이 사이킥 상태에서 인간의 육체안으로 들어가 이런 부분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엑스레이(X-ray)가 인체를 뚫고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만일 백년 전에 인체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믿는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의 눈은 X선보다 더 싶은 곳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부를 해보고 만든 것보다 더 완벽한 인체도를 말들 수 있다. 수술이 서양에서 발달한 것은 그들이 시체를 매장했기 때문이다. 인도처럼 화장이 행해진 곳에서는 수술의 발달이 불가능했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이 수술에 대한 연구는 도둑들의 도움으로 행해졌다. 그들이 시체를 훔쳐다가 의사들에게 팔았고, 의사들은 이 시체로 연구할 수 있었다. 화장의 관습은 사이킥 차원에 도달한 사람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전생의 육체가 남아 있으면 영혼이 새 육체를 갖고 탄생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낡은 육체의 주변은 배회할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불타서 재가 되면 영혼은 이런 집착에서 벗어날 것이다. 일단 육체가 불타서 재가되는 것을 본 영혼은 다음 번의 육체에서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결국은 소멸되는구나.'하고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화장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인체를 해부할 길이 없었다. 서양에서는 도둑들이 무덤에서 시체를 훔쳐다가 팔았고, 과학자들이 이 시체를 갖고 연구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법률 문제를 비롯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시체를 도굴하는 것과 해부하는 것 둘 다 범죄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수하게 해부하고 나서 알게 된 것을 3천년 전의 책들은 통하지 않고도 밝혀 놓았다. 이것은 과학적인 실험 외에도 다른 앎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중에 그대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종교와 쿤달리니 어제 강의에서 당신은, 과학이 다섯 번째의 영체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시고는 네 번째 신체의 차원에서 과학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육체(physical body)라고 부르는 것과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로 동떨어진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어떤 연결 고리가 형성되어 있다. 항상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이 종교와 과학을 나누었다. 종교는 육체가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한다고 여겨졌으며, 과학은 영혼을 제외하고 육체의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이 서로를 부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학은 육체에 몰입했다. 과학은 '육체만이 실체다. 영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하고 말했다. 반면, 종교는 영혼이라고 불리는 내적인 실체를 추구했으며 '영혼이 실체다. 육체는 환상일 뿐이다.'하고 말했다. 종교는 육체를 마야(maya),환상으로 묘사했으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종교는 아트만(atman)을 실체로 보고 육체를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학은 아트만을 부정하고 '영혼이라는 개념은 허구다. 그것은 거짓이다. 육체가 전부다.'하고 선언했다. 이런 오류는 육체와 아트만을 두 개의 상반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나는 일곱 개의 신체에 대해 말했다. 첫 번째 신체가 물질적이라면 마지막 신체는 영적이다. 이때 그 중간의 다섯 가지 신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첫 번째 신체와 마지막 신체를 잇는 다리가 사라진다. 이것은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사람이 첫 번째 칸과 마지막 칸사이의 모든 칸을 없애 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첫 번째 칸과 마지막 칸 사이의 연결이 사라진다. 만일 사다리 전체를 본다면 그대는 첫 번째 칸과 마지막 칸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사다리를 좀도 면밀하게 관찰하면 마지막 칸은 첫번째 칸의 마지막 부분이요, 첫 번째 칸은 마지막 칸의 첫 번째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곱 가지 신체 전부를 한꺼번에 놓고 본다면 우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신체 사이에 연결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신체는 육체고, 두 번째 신체는 에텔체, 감정적 신체다. 에텔체는 물질적 육체의 미묘한 형태(form)지만 빗물질은 아니다. 이 에텔체는 너무나 미묘해서 물질적 수단으로는 충분히 파악하기가 힘들뿐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물질을 파헤칠수록 점점 더 빗물질적인 미묘한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대 과학은 물질을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전자가 도출된다고 말한다. 이 전자는 물질 아니라 전기의 입자다. 결국 물질적 실체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에너지가 남을 뿐이다. 지난 삼십 년 동안 과학은 경이적인 발견을 이룩했다. 과학은 물질을 실체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에너지만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과학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에너지에 의해 물질이라는환상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풍기가 빠른 속도로 돌고 있을 때 우리는 세 개의 날개를 분리시켜서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계속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원이다. 날개을 사이의 공간이 꽉 채워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날개가 너무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서 한 날개에 대한 잔영이 사라지기도 전에 두 번째 날개가 이미 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속한 움직임이 계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날개들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을 보지 못한다. 이런 속도로 날개를 돌리고 그대가 그 위에 앉아 있다면 그대는 밑에서 아무것도 움직인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두 날개 사이의 공간이 신속하게 채워진다. 하나의 날개가 그대 밑을 지나가는 즉시 다른 날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때 그대는 비어 있는 공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속도의 문제다.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회전할 때 그 에너지는 물질처럼 보인다. 현대에서 과학적 연구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원자 에너지의 결코 시각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에너지에 의해 나타나는 효과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텔체를 원자체(atomic body)로 본다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곁으로 나타나는 효과를 볼 뿐 에텔체 자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이 효과를 보고 우리는 에텔체 존재를 인정한다. 이 두 번째 신체는 첫 번째 신체의 미묘한 형태다. 그러므로 이 둘이 연관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육체는 거칠기 때문에 눈에 보인다. 그러나 에텔체는 미묘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에텔체를 넘어선 곳에 아스트랄체가 있다. 아스트랄체는 에텔체보다 더 미묘하다. 과학은 아직 아스트랄체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물질을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에너지가 남는다는 결론에는 도달했다. 이 에너지를 에테르(ether)로 부를 수 있다. 에테르를 더 미세한 성분으로 나누면 아스트랄이 남는다. 이 아스트랄은 에테르보다 더 미묘하다. 아직까지 과학은 아스트랄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차원에 도달할 것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과학은 물질만 인정하고 원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과학은 물질이 고형 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 과학은 고형 적인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고형 체로 보이는 벽도 사실은 그렇게 고형 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냈다. 벽에는 기공이 있으며, 그 기공을 통해 많은 것이 들락거린다. 우리는 '최서한 그 기공의 주변은 고형 적이다.'하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고형 체가 아니다. 원자 하나하나가 기공과 같다. 하나의 원자를 지구 만한 크기로 확대한다면 우리는 원자의 두원소 사이에 지구와 달 또는 지구와 태양만큼의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최소한 두 원소의 말단 부분은 고형 체가 아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 또한 고형 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기의 입자다. 이제 과학은 '입자'라는 단어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단어와 더불어 물질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입자는 물질의 부분은 의미한다. 그러나 원자의 구성 요소는 물질이 아니다. 물질은 고형 적인 것이며 그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원소들은 끊임없이 형태를 변화시킨다. 그들은 입자가 아니라 파장이다. 그들은 물결과 같다. 물 속에 하나의 물결이 일면 그대가 '이것은 물결이다.'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형태가 변한다. 물결은 끊임없이 오고가는 것이다. 그러나 물결 또한 물질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과학은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퀀타(quanta)'하는 단어다. 이 단어에 대응하는 힌디어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것은 많은 힌디 어가 그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를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브라흐만'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나의 단어가 형성되는 것은 어떤 내용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브라흐만'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서양은 이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브라흐만'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이런 단어를 만들어 낼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적 용어가 영어에서 마땅한 단어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가령, '옴(aum)'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번역될 수 없다. 이 단어는 깊은 영적 체험의 표현이다. 그런데 서양은 이런 체험이 없다. 따라서 이런 경험을 표현하는 단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퀀타'라는 단어는 최고의 과학적 경지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따라서 어떤 언어에도 이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 퀀타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단어가 입자와 파장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퀀타는 때로는 입자처럼 행동하고 때로는 파장처럼 행동한다. 그 행동 자체를 점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는 물질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이었다. 물질에는 어떤 확실성이 있었다. 그러나 물질을 궁극까지 파헤쳐서 발견된 원자 에너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원자 에너지의 행동 양식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 과학은 물질의 확실성을 근거로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과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고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이 확실성이 매우 표피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엄청난 불확실성이 있다. 이 불확실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불확실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의식(consciousness)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 없다. 불확실성은 의식의 일부다. 그러나 확실성은 물질의 일부다. 방안의 특정한 장소에 의자가 정확하게 똑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방안에 아이를 두고 나가면 우리는 똑같은 장소에서 아이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어느 곳에 있을지, 무엇을 하고 있을지 항상 의심과 불확실성이 있다. 우리는 물질에 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의식에 관해서는 결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과학이 원자의 행동 양식에 관해 불확실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물질에 있어서 의식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과 같다. 불확실성은 의식의 특성이다. 그러나 물질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불이 타오르기로 선택했을 때를 타오르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을 때는 타오르지 않는 것이 dksle. 물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아무 방향으로나 흘러가지 않는다. 자신이 원한다고 아무 온도에서나 끓어오르지 않는다. 물질의 작용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물질의 내부로 파고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이해해 보라. 봄베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 아는 것은 가능하다. 만일 봄메이의 인구가 천만 명이라면 우리는 1년의 사망 인구를 계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루에 몇 명이나 죽는지 대략 알 수 잇다. 이것은 거의 정확한 숙자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9억 명이라는 이 나라 전체의 사망률을 계산하면 하루에 죽는 사람의 숫자를 더 정확하게 유추할 수 잇다. 그리고 세계 전체의 사망 인구를 계산하면 더 확실한 숫자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단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사망률을 유추한다면 우리의 계산은 가장 불확실해질 것이다. 군중이 많을수록 더 구체적이고 물질적이 된다. 개인적인 현상이 두드러질수록 우리는 어 많은 의식을 발견한다. 사실, 하나의 물질은 수많은 원자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에 관해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자 안으로 뚫고 들어가 전자를 포착하면 우리는 그것이 개체적인 것임을 발견한다. 그 활동 과정을 점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자는 마치 자신의 의도대로 작용하는 것 같다. 견고한 바위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다른 곳에 갔다가 돌아와도 바위가 여전히 같은 장소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바위내무의 개인적인 원자 구조는 시종일관 똑같지 않다. 우리가 바위로 다시 돌아왔을 때쯤이면 바위 내부의 모든 원자가 그 위치를 바꾸고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했을 것이다. 물질의 내부로 깊이 들어갔을 때 불확실성이 시작된다. 과학이 그들의 입장을 확실성에서 가능성으로 바꾼 이유가 그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이것은 이러저러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보다는 이것이 더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한다. 이제 과학은 '이것이 그것이다.'하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과거에 과학의 모든 주장은 확실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과학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단정적인 것이었다. 과학의 탐구가 깊어지면서 이전의 모든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과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의 영역에서 에텔체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물질의 영역에서 에테르의 차원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 과학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은 물질의 두 번째 차원, 즉 에테르의 차원에 도달했다. 이런 현상은 나름대로 많은 가능성을 갖는다. 첫 번째 신체와 두 번째 신체 사이에 간격은 없다. 세 번째 신체인 아스트랄체는 더 미묘하다. 이 신체는 말할 수 없이 미묘하다 안일 우리가 에테르를 원자로 쪼갠다면......,지금 이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물질적 차원의 원자를 밝히는 단계에도 겨우 도달했다. 그러므로 에테르의 차원을 연구하려면 좀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에테르의 원자가 알려진다면 우리는 이 원자들이 다음 차원의 신체, 이름하여 아스트랄체라고 불리는 신체의 입자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물질적 원자를 쪼갰을 때 그 가장 미세한 입자들은 에테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테르의 원자를 쪼개면 그 가장 미세한 입자들은 아스트랄체의 차원에 속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세가지 신체 사이의 상관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신체들은 서로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령을 사진으로 찍는 데 성공한 이유가 그것이다. 유령에게는 물질적 신체가 없다. 유령은 에텔체부터 시작한다. 유령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 가능하다. 에텔체가 농축되면 민감한 사진기는 그 영상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신체인 에텔체는 육체보다 마음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 육체도 마음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신체가 미묘한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마음과 더 가까워진다. 아스트랄체는 마음에 의해 영향받는 정도가 에텔체보다 훨씬 더하다. 아스트랄체의 여행이 가능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방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아스트랄체를 갖고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대는 동시에 두세 장소에 모습을 나타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의 육체와 아스트랄체가 서로 다른 곳에 있다. 이것은 약간 훈련만 되는 문제다. 얼마든지 이런 일이 가능하다. 우리가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마음의 함은 점점 더 증가한다. 그리고 우리가 밖으로 나갈수록 그 힘은 분산된다.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등불을 밝혀 놓고 그 불꽃을 유리로 덮는 것과 같다. 하나의 유리를 덮어놓은 뒤에는 불꽃이 예전처럼 밝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유리를 덮으면 불꽃이 더 희미해진다. 이런 식으로 일곱 개의 덮개를 씌워 놓으면 불빛은 아주 침침하고 어두워질 것이다. 불빛이 일곱 개의 층을 모두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생명 에너지도 물질적 신체에 도달할 때쯤이면 아주 희미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육체에 대해 별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내면으로 여행을 시작한 사람은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한다. 이 능력은 그의 여행이 깊어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육체의 가장 미묘한 형태는 에텔체며, 에텔체의 가장 미묘한 부분은 아스트랄체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신체인 멘탈체가 온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해 왔다.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두 개의 독립된 실체로 생각해 왔다. 사실, 이 둘을 정의할 방법조차 없었다. '마음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우리는 '물질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물질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마음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외에 다른 정의가 없었다. 이렇게 항상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마음이 물질의 미묘한 형태라는 것을 안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물질은 마음의 가장 농축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아스트랄체의 원자들이 쪼개지면 그것은 사념의 파장이 된다. 퀀타와 사념의 파장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념이 물리적 실체를 갖는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대 주변의 진동에 변화가 일어난다. 생각뿐만 아니라 말 또한 특정한 진동을 갖는다.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유리판 위에 모래를 깔아 놓고 '옴'소리를 크게 되뇌어 보라. 모래에 나타나는 무늬의 패턴이 '라마'를 되뇌었을 때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만일 지독한 상소리를 뱉으면 무늬가 다시 변하다. 지독한 욕설을 내뱉을수록 더 흉한 무늬가 형성되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아름다운 말을 할수록 더 아름다운 무늬가 형성된다. 욕설은 혼란스러운 무늬를 나타낼 것이고, 아름다운 말들은 잘 정돈되고 균형 잡힌 무늬를 나타낼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진동을 창조하는 말을 찾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연구가 행해졌으며,그말은 가슴에 영향을 줄만큼 강력한 힘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 말은 곁으로 드러난 생각이다. 그러나 곁으로 드러나지 않은 말 또한 파장을 갖는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주변에 특정한 파장과 진동이 형성된다. 간혹 그대가 어떤 사람의 주변에 다가갔을 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슬픔을 느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는 한 마디의 부정적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와 만난 것을 즐거워하며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슬픔이 내부로부터 그대를 사로잡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대는 갑자기 유쾌함을 느낀다. 어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는 내면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성스럽거나 사악한 느낌이 그대를 사로잡는다. 어떤 순간에 그대는 평화와 고요함을 느끼지만 다른 순간에는 갑자기 불안감을 느낀다. 그대는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매우 평화로웠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불안감이 떠오르는 것일까?' 하고 의심한다. 그대의 주변에는 사념의 파장이 에워싸고 있다. 이 파장이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그대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최근에 프랑스의 한 과학자가 사념의 파장을 포착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어떤 사람이 접근하자마자 이 기계는 그의 내면에 들어 있는 생각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이 기계가 사념의 파장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만일 바보 천치를 이 기계 앞에 세우면 거의 아무 파장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바보는 거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을 앞에 세우면 이 기계는 그 사람의 사념이 만들어 내는 진동을 활발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아스트랄체의 미묘한 형태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미묘한 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과학은 에텔체에 도달했다. 그러나 지금 과학은 그것을 '원자적 차원' 또는 '원자 에너지의 차원' 어로 부르기를 고집하고 있다. 어쨌든 과학은 물질의 두 번째 차원에 도달했다. 세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필연적으로 세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 네 번째 차원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음은 육체와 분리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 일부 과학자들은 오로지 마음에 대해서만 연구하고 있다. 그들은 육체를 완전히 팽개쳤다. 그들은 네 번째 신체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전도체다. 우리의 사념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도 나의 생각은 그대에게 가 닿는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텔레파시 분야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 파야데프(fayadev)라는 과학자는 무전을 치듯이 수천 마일밖에 있는 사람에게 사념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을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주의를 집중하면 생각이 그곳에 도달한다. 그 순간에 상대방 또한 메시지를 전달받을 준비를 하고 그 방향으로 의식을 집중하면 생각이 그에게 수신된다. 집에서 간단한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사념의 파장을 매우 신속하게 포착한다. 그들은 감지력이 아주 예민하다. 어린아이를 어두운 방구석에 앉히고, 5분 동안 그대에게 집중하라고 말하라. '내가 침묵으로 무엇인가 말을 할 테니 그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 봐라.' 하고 말하라. 만일 아이가 무엇인가 들으면, 그 들은 내용을 반복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대는 하나의 단어를 선택하라. 이제 아이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반복하라. 그 단어가 안에서 울려 퍼질 때까지 계속하라. 입 밖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2, 3일 후에 그대는 아이가 그 단어를 알아맞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반대의 실험 또한 행할 수 있다. 일단 실험이 한 번 성공한 뒤에는 더 쉬워질 것이다. 이제 그대에게 정신을 집중하라고 아이에게 말하라. 아이가 마음속으로 한 단어를 생각하며 그 단어를 그대쪽으로 던져야 한다. 첫 번째 실험에서 아이가 단어를 알아맞혔을 때 그대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대가 아이의 단어를 알아맞히는 쪽에 서서 실험을 행하라. 이 실험이 성공했을 때 그대의 의심이 깨끗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대와 아이 사이에는 물질적인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사념은 그 내용상 기본적으로 물질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인 매개체에 전달될 수 없다. 마하비라(karma)가 행동마저 물질로 정의했다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가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마하비라는 이 행동의 미묘한 원자들이 찌꺼기처럼 그대에게 들러붙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행동 또한 물질적이다. 행동은 물질처럼 그대에게 들러붙는다. 마하비라는 이 행동의 축적된 오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니르자라(nirjara)'라고 불렀다. 그대 주변에 모여 있는 행동의 모든 원자들을 털어 내야 한다. 이것을 모두 털어 내는 날, 그대에게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만 남을 것이다. '니르자나'는 행동의 원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화가 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이 분노는 원자의 형태가 되어서 항상 그대에게 남는다. 육체가 죽어도 이 원자들은 해체되지 않는다. 이 원자들은 매우 미세하기 때문이다. 이 원자들은 그대의 다음 생까지 따라간다. 멘탈체는 아스트랄체의 미묘한 형태다. 그대가 알 수 잇듯이, 이 네 가지 신체 사이에는 갭(gap)이 없다. 각각의 신체가 선행하는 신체의 더 미묘한 형태다. 멘탈체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 과학은 심리학 분야, 특히 초심리학(parapsychology)분야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멘탈 에너지의 불가사의한 법칙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종교는 오래 전에 이 법칙들을 밝혀 놓았다. 이제는 많은 것들이 과학의 세계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몬테 카를로(monte carlo)에는 주사위 게임에서 절대로 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주사위를 던져도 자기가 원하는 숫자를 내놓는다. 처음에는 이 주사위가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주사위를 바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주사위는 정확하게 이 사람들이 원하는 숫자를 보여 주었다. 여러 번 주사위를 바꾸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심지어 눈을 가려도 이 사람들은 주사위를 던져 정확한 숫자를 내놓았다. 이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그 이유를 밝히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숫자를 얻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주사위를 던졌다. 생각의 파장이 그 숫자가 위로 올라오도록 주사위를 조종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사념의 파장이 주사위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이 파장 또한 물질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 작은 실험을 해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실험을 언급하는 것은 그대가 과학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컵에 물을 채우고 표면에 얇은 막이 형성되도록 글리세린(glycerine)이나 다른 기름기 있는 액체를 약간 부어라. 그런 다음이 기름막 위에 핀 하나를 띄워라. 문과 창문을 닫아라.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펴고 핀에 정신을 집중하라. 5분 동안 핀을 응시하면서 집중하라. 그런 다음 왼쪽으로 돌라고 말하면 핀이 왼쪽으로 돌 것이다. 오른쪽으로 돌라고 말하면 핀이 오른쪽으로 돌 것이다. 멈추라고 하면 멈출 것이고,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일 것이다. 이렇게 사념이 핀을 움직일 수 있다면 큰산을 움직이는 것 또한 가능하다. 크기의 문제가 다를 뿐, 기본적인 원리는 똑같다. 핀을 움직일 능력이 있다면 이미 기본적인 원리는 입증된 셈이다. 산이 움직이기에 너무 큰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다름 문제다. 그것은 움직일 수 있다. 사념의 파장이 물질을 건드려 변형을 일으킨다. 그대의 손수건만 갖고도 그대를 직접 본 것처럼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손수건이 그대 사념의 파장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이 파장은 극히 미묘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손수건이 남아 있다면 이 손수건은 아직도 그의 인격(personality) 에 대해 많은 사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파장은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그 물질로부터 사라지려면 수백만 년이 걸린다. 무덤과 사마디(samadhi)가 지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제 나는 인도에 화장풍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야신(sannyasin) 들의 시체는 태우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의 시체를 태우는 것은 그의 영혼이 육체 주변을 배회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산야신들의 시체는 화장되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육체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영혼이 육체에 집착할까 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의 육체를 보존하기를 원한다. 신성을 체험한 사람의 육체는 수천 년 동안 똑같은 사념의 파장을 내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매장지는 깊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 장소는 많은 효과를 낳을 것이다. 육체는 죽었다. 그러나 이 육체는 그의 영혼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영혼에서 퍼져 나온 상당량의 진동이 이 육체에 흡수되어 있다. 사념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모든 사념이 물질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그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심하라. 미묘한 사념의 파장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그대에게 남을 것이다. 이 파장의 수명에 비교한다면 그대의 육체적 수명은 아주 짧다. 이제 과학자들은 가까운 장래에 예수나 크리슈나 같은 사람들의 사념 파장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크리슈나에게서 나온 사념의 파장은 지금도 이 우주 공간에 살아 있다. 이것은 바다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바다에 떨어진 돌은 파문을 일으킨다. 돌은 표면에 오래 떠 있을 수 없다. 물에 닿자마자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충격으로 인해 형성된 파문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간다. 그 파문을 수평선 너머까지 계속된다. 얼마나 멀리 떨어진 해안에 그 파문이 도달할 지 누가 아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사념은 언제 태어났느냐에 상관없이 우주 속으로 퍼져 나간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간다. 겉으로 표현된 생각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 사념의 파장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학이 크게 발달하고 인간이 더 진보하면 어느 날엔가 우리는 그 소리들을 다시 한번 듣게 될 것이다. 델리에서 오는 라디오 뉴스가 봄베이가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소리가 전달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봄베이에 도착할 무렵, 그 소리는 더 이상 델리에 있지 않다.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인도에서 우리가 텔레비젼을 통해 뉴욕에 있는 사람을 본다고 가정해 보자. 뉴욕에서 그의 영상이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영상이 형성되고 그 영상이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그 틈에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그는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파장과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나오는 사념의 파장은 무수한 행성으로 퍼져 나간다. 만일 우리가 앞질러 가서 이 파장을 포착한다면, 이 파장은 아직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죽지만 그의 사념은 그렇게 빨리 죽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사념의 수명은 매우 길다. 우리가 표현한 사념보다 표현하지 않은 사념이 더 오래 간다는 것 또한 기억하라. 표현되지 않은 사념이 더 미묘하기 때문이다. 미묘한 것일수록 수명이 길다. 그리고 거친 것일수록 수명이 짧다. 사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물질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 사념의 효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이제 생물학자들은 식물에 포근하고 지겨운 음악을 들려주면 제철이 와도 꽃이 피지 않는다. 음악의 진동이 꽃을 건드린다. 젖소에게 특정한 음악을 들려주면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하고, 다른 종류의 음악을 들려주면 젖이 말라 버린다. 사념은 더 미묘한 에테르를 낳고, 이 에테르는 파문의 오라(aura)를 낳는다. 인간 개개인은 주변에 자기의 사념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나온 파장이 끝도 없이 퍼져 나간다. 이 사념의 파장 또한 물리적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물리적 에너지의 미묘한 형태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이런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파장은 연구와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까지도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깊게 잠자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는 장비를 갖고 있다. 맥박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잠을 측정하는 기계를 갖고 있다. 밤중에 특수한 장치를 머리에 고정시키고 거기에 나타나는 그래프를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의 잠이 언제 깊어졌는지, 그가 얼마 동안 잠을 잤으며 얼마 동안 꿈을 꾸었는지, 좋은 꿈을 꾼 시기는 언제고 나쁜 꿈을 꾼 시기는 언제인지. 그 꿈이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 그것이 성적인 꿈이었는지 아닌지...... , 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래프에 나타난다. 미국에는 사람들의 잠을 정밀하게 조사하는 연구소가 열 개 가량 있다. 우리는 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이것은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다. 삶의 삼 분의 일은 잠으로 소비된다. 잠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60년을 산다면 그 중의 20년은 잠으로 지나간다. 이 20년이라는 기간이 미지로 남으면 그는 자신의 삶 중에 삼 분의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20년동안 잠을 자지 않는다면 그는 40년 동안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은 필수적인 것이다. 60년 동안 깨어나지 않고 잠잘 수는 있지만, 잠자지 않고 살수는 없다. 잠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잠 속에서 우리는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마음이 다른 곳에가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측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잠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 아는 것이 가능하다. 꿈을 꾸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꿈꾸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꿈은 밤새도록 지속된다. 그대는 하나나 두 개의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기계 장비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꿈은 밤새도록 일어난다. 다만 그대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기억의 능력이 부재한다. 그대가 기억하는 꿈은 잠이 거의 끝나갈 무렵 꾼 마지막 꿈이다. 마지막 꿈이 그대의 생각 속에 남는다. 그대가 깨어 일어났을 때 꿈의 희미한 메아리가 아직 내면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대는 깊은 잠속에서 꾼 꿈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이제 깊은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꾸었는지 조사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깊은 잠 속에 일어난 꿈은 그 사람의 진짜 퍼스낼러티(personality)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진실하지 못하다. 흔히 우리는 '꿈속에 뭐가 있단 말인가? 꿈은 그냥 꿈이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해 깨어 있는 상태보다 더 많은 진실을 말해 준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위장한다. 만일 인간의 머리에 생각 전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을 만들어 놓는다면 인간의 마지막 자유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 때 인간은 꿈꿀 자유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꿈꾸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도덕성이라는 경찰관이 보초를 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찰관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꿈은 좋지 않다. 지금 너는 나쁜 꿈을 꾸고 있다. " 현재 인간은 이런 자유를 갖고 있다. 인간은 잠 속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잠의 세계에 대한 침입이 이미 시작되었다. 가령, 러시아는 이미 '수면 교육'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수면 중의 교육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가 저항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무엇인가 가르치는 것은 어렵다. 기본적으로 그는 배우는 것을 거부한다. 사실, 모든 인간이 배우는 것을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아이 또한 '당신이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하고 말하면서 거부한다. 그는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본 후에 상장이나 금메달을 주면서 아이를 매수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야망을 심어 주어야 한다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그를 계속 강요해야 한다. 이런 마찰 때문에 교육에 긴 시간이 걸린다. 아이가 단 두 시간이면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두 달에 걸쳐 그에게 주입시켜야 한다. 그래서 수면 교육이라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아이가 잠 속에서 훨씬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잠 속에는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잠자는 아이 옆에 녹음 테이프를 틀어 놓고 주입시킨다. '2 더하기 2는 4. 2더하기 2는 4......' 이런 식으로 테이프가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아침에 아이가 일어났을 때 물으면 그는 '2더하기 2는 4' 라고 대답할 것이다. 잠 속에서 이런 생각이 주입될 수 있는 것처럼 사념의 파장에 의해서도 마음속에 생각을 주입시킬 수 있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이제 우리는 사념의 파장에 대해서 안다. 전축의 레코드판에는 언어 자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디스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소리의 파장이다. 바늘이 디스크의 홈을 건드리면 똑같은 파장이 반복되면서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대가 '옴'을 영창 하면 모래 위에 특정한 패턴이 형성될 것이다. 이 패턴 자체가 '옴'은 아니다. 그러나 '옴'소리에 의해 이렇게 특정한 패턴이 형성되는 것을 알면 어느 날엔가 이 패턴을 다시 '옴'소리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패턴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옴'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 패턴과 '옴'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전축의 레코드판에는 언어가 없다. 다만 소리의 충격에 의해 홈이 파여 있을 뿐이다. 이 홈이 바늘과 접촉하면 그에 상응하는 소리로 환원된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생각의 기록 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념의 충격파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것을 기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때는 정말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 전체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만일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장차 생각할 내용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의 사념에서 일어나는 충격파 전체가 기계에 의해 포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잠, 꿈, 무의식에 대해 철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제는 마음의 과학적인 가능성이 베일을 벗고 있다. 이 가능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화가 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재래식 관념에 따르면 우리는 그에게 '분노에 휩싸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하고 충고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충고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람이 '그렇다. 나는 지옥에 가도 좋다.' 고 말한다면 우리는 손 쓸 도리가 없다. 이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일 이 사람이 더 나아가서 '나는 지옥에 가기를 열망한다.'고 말한다면 이 때 우리의 도덕적인 규율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그가 지옥을 두려워해야만 우리가 그를 조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와 더불어 우리의 도덕률도 무너진다. 이젠 아무도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지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하고 비웃는다. 그래서 모든 도덕룰이 종말을 고한다. 도덕률이 기초하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과학자들은 도덕률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과학은 육체의 특정한 분비 작용을 중단시키는 데 기반을 둔 다른 방법을 개발했다.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는 육체 안에서 특정한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분노 자체가 물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있을 때는 반드시 육체 안에 특정한 화학 물질이 분비된다. 그러므로 이 분비 작용을 중단시키면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 때는 직접 분노를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분비액이 중단되면 인간은 화를 내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섹스를 금하고 금욕 수행을 하라고 충고해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 때 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 효과도 없는 충고는 집어치워라! 우리가 어떤 분비선의 성장을 제어하면, 그들은 스물 다섯 살 전에는 성적인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마음이 과학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은 그 지식을 남용하기 시작한다. 과학은 혁명적인 사람과 정통적인 사람의 화학 성분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 발견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 화학 성분이 알려지면 우리는 혁명적인 사람을 순종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정통적인 사람을 혁명가로 만들 수도 있다. 도둑질과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화학 성분이 밝혀지면 감옥이나 집행 제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런 충동을 제거하는 수술이나 조치가 취해지면 된다. 문제가 되는 화학 성분을 제거하거나, 이 성분을 중화시키는 다른 화학 성분을 주입할 수 있다. 최근에 이런 연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과학이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하는 데 더 이상 많은 어려움이 없음을 보여 준다. 유일한 문제는, 상당 부분의 과학이 전쟁을 목적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분야에 대한 탐구는 일차적인 목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부수적인 문제로 여겨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야에 대해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졌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미라(meera)나 카비르(kabir)에게 일어났던 체험이 주사한 대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참으로 무모한 주장이다. 마하비라는 한 달 동안 단식하고 마음이 고요해졌다. 단식은 물리적인 행동이다. 만일 물리적 행동에 의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면 이 마음 또한 물리적인 현상이다. 한 달 동안 단식하면 온 몸의 화학 구조가 변한다. 영양 공급이 중단되고, 몸에 축적되어 있던 모든 것이 사용된다. 지방질이 용해된다.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는 파괴되고, 필수적인 요소는 보존된다. 이런 식으로 육체의 화학 구조 전체가 완전히 바뀐다. 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한 달 동안 그렇게 어려운 고난을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특수한 처방에 의하면 화학적 비율은 지금 당장 바뀔 수도 있다." 과학에 의해 이런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면 그대는 마하비라가 한 달간의 단식 끝에 체험했던 평화를 지금 당장 느낄 수도 있다. 한 달간의 단식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다이나믹 명상중에 격렬하고 빠른 호흡을 하라고 말한다. 삼십 분 동안 격렬한 호흡을 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안의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이 바뀐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외부적인 수단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삼십 분 동안 애 쓸 필요가 없다. 이 방안의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면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평화와 고요함,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이렇듯 과학은 다방면에서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더 깊이 뚫고 들어가는 중이다. 명상 중에는 다양한 체험이 일어난다. 그대는 생소한 향기를 맡고 생소한 색채를 본다. 이런 모든 일이 명상을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과학은 그대가 이런 체험을 하는 동안 두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알아냈다. 만일 그대가 아름다운 색채를 보는 동안 두뇌의 뒷부분이 자극 받는다면 과학적인 연구는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어떤 파장이 생성되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그대는 명상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전기 장치의 도움을 받아 그대 안에 똑같은 진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똑같은 색채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에 위험이 있다. 인간의 내부로 뚫고 들어가는 새로운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 위험성도 증가한다. 예를 들어, 이제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더 이상 자연의 수중에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지금 유럽과 미국에서는 죽음의 침상 위에 누워 목숨을 이어 가는 수천 명의 노인들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부르짖고 있다. 그들은 산소를 주입 받으며 목숨을 연명한다. 아흔 살 먹은 노인이 제발 죽게 내버려두라고 애원하지만 의사는 '우리는 그런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하고 말한다. 설령 이 노인의 아들이 '아버님이 너무 고통받고 있다. 이제 그가 죽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느낀다 해도 그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드는 기계 장비가 있다.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이어 간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법은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아무 장비도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이제 이런 법은 개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죽어 가는 사람을 억지로 살아 있게 만든다. 오랜 기간 불가항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람은 '이것은 폭력이다. 이것은 너무 잔인한 짓이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도대체 당신들은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하고 느낄지도 모른다. 범죄자를 교수형 시키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는 죽음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처벌을 가하는 시대가 온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처벌은 교수형보다 더 악랄한 처벌이 될 것이다. 죽는 것은 몇 초간의 문제지만 억지로 살아 있는 것은 몇 십 년에 걸친 문제기 때문이다. 내면 세계에서 어떤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은 그 발견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혜택을 입을 수도 있다. 어떤 힘이 올 때마다 그 힘은 항상 양면을 갖는다. 과학은 네 번째 신체의 차원에 도달했다. 앞으로 오십년 안에, 아니면 삼십 년 안에 과학은 네 번째 신체 안으로 더 깊이 뚫고 들어갈 것이다. 그대는 모를 수도 있지만, 특정한 세기에 행해진 모든 일은 그 세기의 끝 무렵에 절정에 달한다. 특정한 세기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그 세기의 끝 무렵에 완결된다. 이 세기는 많은 일을 해 왔다. 그 일들이 앞으로 삼십 년 안에 완결될 것이다. 이 세기의 가장 큰 과제는 인간의 프쉬케(psyche)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 과제는 곧 완결될 것이다. 다섯 번째의 영체는 네 번째 신체보다 더 미묘하다. 이 차원에는 사념의 진동뿐만 아니라 존재의 진동이 있다. 내가 내면에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절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으면 이 때 나의 존재가 어떤 진동을 창조한다. 이때 그대가 내 옆으로 가까이 온다면 그대는 내 진동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념의 진동보다 존재의 진동이 더 강하고 침투력이 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매우 강력해진다. 이 힘의 효과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존재의 진동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신체의 에너지 진동은 인간이 아는 가장 미묘한 형태의 에너지다. 마하비라의 경우에 보듯이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다. 마하비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아주 조금만 말하거나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와서 그의 앞에 앉았으며, 그들은 마하비라를 이해하고 돌아갔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지금은 이런 일이 매우 어렵다. 그대 자신이 무념의 상태로 들어가야만 영체의 깊은 진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사념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이 미묘한 진동을 놓칠 것이다. 이 진동이 그대를 그냥 스쳐 지나가고 그대는 그것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두 사람 모두가 무념의 상태에 있고 존재의 진동이 포착되면, 그 때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때는 아주 친밀한 차원에서 교류가 일어난다. 이 교류는 곧장 가슴을 치고 들어간다. 이 때는 아무 설명도 없다.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경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안다. 인간만 다섯 번째 신체의 진동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마하비라의 삶에 경이적인 현상이 있었다. 동물들까지 그의 모임에 참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이나 교 승려들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동물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의 언어를 잘 이해한다. 만일 내가 무념의 상태로 고양이 옆에 앉아 있으면...... 고양이는 이미 무념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말을 해야 한다. 그대를 고양이와 같은 무념의 상태로 데려가는 것은 참으로 긴 여행이다 동물과 식물, 심지어 돌멩이까지도 영체에서 시작되는 진동을 이해한다. 거기엔 아무 어려움이 없다. 이 영체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네 번째 신체를 통과한 다음에나 가능하다. 이제 과학은 여러 방면에서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과학은 영체의 차원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어려움이 생긴다. 다섯 번째 신체의 차원까지는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차원부터 어려움이 시작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잘 들여다보면, 과학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작업이다. 과학은 특정한 분야에 대한 선택이다. 과학은 가능한 한 협소한 분야에 연구를 제한하고 이 분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자 할 때 비로소 깊이 파고들 수 있다. 과학의 목적은 더 협소한 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의 양면성이다. 과학은 가능한 한 작은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 과학은 연구 주제를 가능한 한 협소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킨다. 옛날에 의사들은 몸 전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의사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일반의를 거의 보기 힘들다. 현대 세계에서 그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는 더 이상 믿을 만하지 않다. 그는 너무 많은 것에 대해서 안다. 그러므로 그는 한 가지도 충분히 알 수 없다. 이제는 안과 전문의가 따로 있고, 귀에 대한 전문의가 따로 있다. 그들은 믿을 만하다. 그들은 특정 분야에 대해 최대한의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눈에 대한 문헌만 해도 평생 읽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하다. 그러므로 가까운 장래에는 왼쪽 눈만 전문으로 하는 의사, 동공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 망막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생길 수도 있다. 지식의 양이 증가할수록 특수 연구를 위해 눈이 여러 부분으로 나뉠 것이다. 각 부분 하나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학의 목적은 가장 협소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은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과학은 다섯 번째 차원까지 도달할 것이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는 개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초점을 개체에 맞추고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차원부터는 우주적인 것(the cosmic)이 시작된다. 이것은 과학의 초점을 벗어난다. 코스믹체는 전체를 의미한다. 과학은 이 전체의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다. 과학은 작은 것에서 더 작은 것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오직 개체를 포착할 뿐이다. 과학이 우주적인 것을 포착하기는 매우 어렵다. 종교만이 우주적인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아트만(atman)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아무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브라흐만에서부터 어려움이 시작된다. 나는 과학이 브라흐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 브라흐만을 이해하려면 과학이 전문화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 문화를 버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그 때는 종교처럼 보편적이고 막연한 것이 될 것이다. 과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다섯 번째 신체짜지만 여행할 수 있다. 여섯 번째 차원부터는 과학이 실종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 일곱 번째 차원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과학의 모든 탐구는 오로지 삶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병을 줄이고 더 건강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 오래 살기를 바란다.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원한다. 과학의 목적은 삶을 저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더 건강하고, 더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궁극적인 죽음이다. 여기에서 구도자는 삶에 대한 추구를 넘어서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음 또한 알고 싶다. 나는 존재의 신비를 알았다. 이제는 비존재를 알고 싶다." 이 차원에서 과학은 아무 의미가 없다. 프로이트(freud)같은 과학자는 이것을 죽음에 대한 욕구하고 부를 것이다. 그는 '이것은 건강한 마음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자살에 대한 충동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해탈과 열반은 삶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념은 그대가 죽음을 원한다는 증거다. 그는 '당신은 죽음을 원한다. 당신은 병에 걸렸다.' 고 말한다. 과학자는 죽음에 대한 욕구를 반대한다. 과학은 살고자 하는 의지, 삶을 팽창시키고자 하는 욕구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갈기를 원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죽기를 원하는 순간이 와도 그는 여전히 건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죽기를 원하는 순간이 되도 그는 여전히 건강한 사람이다. 만일 이런 순간이 오기도 전에 죽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병든 상태다. 그러나 삶에는 죽음 자체를 목적으로 죽기를 원하는 순간이 온다. 어떤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건강한 상태고, 잠자는 것은 병든 상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밤보다 낮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내 주고 있다. 옛날에는 오후 여섯 시부터 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벽 두시부터 밤이 시작된다. 우리는 밤의 시간을 낮에게 주었다. 현대의 일부 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에서 밤을 완전히 없애 버리면 삶의 상당 부분이 낭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잘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잠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깨어 있는 동안에 즐거움이 있듯이 잠에도 즐거움이 있다. 깨어 있으려는 욕망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듯이 잠자고자 하는 욕망도 자연스럽고 건강하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에도 살아남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원하는 사람 또한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만일 어린아이가 죽음을 열망한다면 그는 정상이 아니다. 그는 병들었다. 그는 치료받아야 한다. 그리고 늙은 사람이 더 살아 남기를 열망한다면 그 또한 치료받아야 한다. 그는 병들었다. 삶과 죽음은 두 다리와 같다. 한 쪽 다리만 받아들이면 그대는 불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쪽 다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대는 불구를 면치 못할 것이다. 두 다리 모두 중요하다. 존재와 비존재 둘 다 중요하다. 존재와 비존재를 둘 다 받아들이고 포옹하는 사람이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다. 그는 '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았다. 이제는 비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비존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차원은 오로지 용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삶을 알고 이제 죽음을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 죽음을 탐험하고자 하는 사람들, 소멸의 상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열망한다. 소멸이 무엇인지, 비존재가 무엇인지 알기를 열망한다. 그들은 삶의 맛을 알았다. 이제는 죽음을 맛보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그대는 죽음이 일곱 번째 차원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죽음'으로 알고 있는 것은 일곱 번째 차원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삶'으로 알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차원에서 온다. 탄생은 물질과 더불어 시작된다. 탄생은 물질의 출발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물질적 육체가 엄마의 자궁 속에 제일 먼저 들어오고 다른 신체들이 나중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첫 번째 신체가 삶의 출발점이며, 마지막 신체인 열반체에서 죽음이 온다. 물질적 육체에 집착하는 사람은 죽음을 크게 두려워한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일곱 번째 신체를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점차 벗어날 때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다. 그 때 우리는 앎에 도달한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 삶과 죽음이 똑같은 하나의 두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삶과 죽음 둘다 초월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여섯 번째 신체까지 도달할 가능성은 있지만 일곱 번째 신체에 도달할 회망은 없다. 과학은 네 번째 신체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이제 과학이 다섯 번째 신체 까지 도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과학적인 마음과 종교적인 가슴을 겸비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출현하면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화는 매우 힘들다. 과학적인 훈련은 그대가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방해하고, 종교적인 훈련은 그대가 과학적으로 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 두 가지 훈련 방식은 공통 분모가 없다. 이것이 큰 어려움을 낳는다. 그러나 간혹 이런 조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조화가 일어날 때마다 최절정에 달한 새로운 지식이 탄생한다. 예를 들어, 파탄잘리 같은 사람이 있다. 그는 과학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종교에 귀의했다. 그는 요가(yoga)를 가장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지금까지도 이 경지를 능가하기 어렵다. 파탄잘리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그 후로도 이 분야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졌지만 파탄잘리만큼 과학적인 지성과 영적 수행의 내면 세계를 겸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파탄잘리보다 높은 여가의 경지로 올라가지 못했다. 스리 오로빈도가 시도하긴 했지만 파탄잘리를 능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스리 오로빈도는 과학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아마 파탄잘리보다 더 과학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양에서 교육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그를 외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성인이 될 때까지 인도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임종을 맞고 있을 때, 다른 가족들은 오로빈도를 불러들이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로빈도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죽기 전에 그를 보지 못해도 나는 상관없다. 그는 서양의 문화를 완전히 흡수해야 한다. 동양의 그림자가 그를 덮지 못하게 하라.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알리지 마라." 그는 참으로 용기 있는 아버지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오로빈도는 서양의 문화에 깊이 심취할 수 있었다. 만일 진정으로 '서양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오로빈도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도로 돌아온 후에 모국어를 다시 배워야 할 정도로 서양문화에 빠져 있었다. 그는 완벽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종교는 나둥에 이식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를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파탄잘리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깊이 뿌리박힌 서양적인 사고 방식이 장애물이었다. 그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과학적이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종교에 도입했다. 그는 서양에서 가져온 사고방식을 종교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종교에 관해 아무 통찰력이 없었다. 그 결과, 그는 방대한 과학적 저술을 남겼지만 이 저술에서 종교는 매우 표피적인 차원에 머문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차원의 신비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인 지성과 종교적인 마음이 균형을 이룰 때마다 높은 경지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동양은 과학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마저 잃어버렸다. 오히려 서양이 가능성이 더 많다. 서양에서는 과학이 극단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시계추가 극단에 도달하면 다른 쪽 극단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서양의 탁월한 지성인들이 기타(gita)를 관심 있게 읽는 이유다. 인도의 어디에서도 이런 관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처음으로 기타를 읽었을 때 이 책을 머리 위에 이고 춤추며 흥겨워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왜 이렇게 미친 것 같은 행동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책은 단순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춤출 가치가 있다. 나는 세상에 이런 식으로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내가 언어로 옮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 책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인도에서 기타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춤추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다. 기타를 기차 좌석에 놓고 깔고 앉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다. 금세기 말에 인류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시대적 요구가 생기면 세상에 있는 많은 힘들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에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과학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삶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과학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한 말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는 미쳐 있었다. "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말은 의미 심장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알아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한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과학으로 세상의 신비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등식으로 환원시켰다. 그러자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었다. 오히려 수학적인 문제만 점점 커져 갔을 뿐이다. 세상의 신비를 풀기는커녕 수학적인 문제 자체가 신비가 되었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현대 과학의 정상에 오른 소수의 사람들은 종교에 접근했다. 이젠 과학에서도 그런 가능성이 일어나고 있다. 과학은 두 번째 신체를 지나 세 번째 신체에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신체에 가까워졌을 때 종교의 메아리를 듣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과학은 자진해서 불확실성과 개연성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언젠가 과학은 미지의 세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과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비가시적인 것이 존재한다. 귀로들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백년 전만 해도 우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다르게 말한다. 이제 그들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영역은 아주 협소하고, 만질 수 없는 영역은 무한하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한함에 비한다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먼지처럼 작다. 실제로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의 눈은 특정한 파장만 포착한다. 우리의 귀 역시 특정한 파장만 감지한다. 이 파장의 위와 아래에 다른 파장들이 무수하게 많다. 간혹 이런 파장이 우리의 감각 기관에 포착되는 일이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추락하여 귀를 다쳤다. 그런데 그의 귀는 그 도시에서 방송되는 라디오 주파수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원에 있었으며 큰 어려움에 처했다. 처음에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미쳐 가는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하고 생각했다. 그가 의사에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이 병실에 라디오가 있습니까?" 의사가 말했다. "왜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여기에 라디오는 없습니다. " 그러나 그는 뉴스 소리가 들린다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들은 내용을 설명했다. 의사가 사무실로 달려가 라디오를 들었다. 놀랍게도 환자가 말한 것과 똑같은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그의 귀가 뉴스 전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산에서 추락하면서 귀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귀속에 작은 기계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전파를 직접 잡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우리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는 무한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리의 가청범위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큰 소리도 듣지 못한다. 우리는 귀의 가청 대역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나의 별이 떨어지면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만일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몸의 체온은 대략 화씨 98도에서 110도 사이에 위치한다. 체온이 화씨 98도 이하로 떨어지거나 110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우리는 죽는다. 우리 생명의 불꽃은 불과 10도나 12도 사이에서 깜박거리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계밖에 있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 한계밖에도 분명히 무엇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런 것들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알려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과학이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존재를 알며, 무슨 근거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틀렸다. 이런 질문은 제기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비존재를 아는가?'라는 질문은 배후에 '어떤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비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비존재에 대한 앎이 어떻게 전달됩니까? 전달(reporting)은 없다. 예를 들어, 그대가 밤에 잠잘 때... 그대는 깨어 있는 동안에 생긴 일들만 의식한다. 일단 잠이 들면 그대의 주변 환경을 망각한다. 그대는 깨어 있는 시간에 관해서만 보고할 수 있다. 잠들기 전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만 보고가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대는 정반대로 말한다. 그대는 '나는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대는 '나는 여덟 시까지 깨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대는 잠을 보고할 수 없다. 그대가 잠들었는데 누가 보고할 것인가? 보고는 다른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여덟 시까지 깨어 있었다. 여덟 시전까지 나는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여덟 시 이후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 다음에 나는 아침 여섯 시에 깨어났다는 것을 안다. 밤 여덟 시부터 아침 여섯 시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 동안에 나는 잠들어 있었다. " 이것이 본보기다. 그대는 여섯 번째 신체까지 무엇이 있는지 알 것이다. 그대는 일곱 번째 신체로 들어갔다가 다시 여섯 번째 신체로 나와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비존재를 체험했다. " 이런 설명은 오직 여섯 번째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왜 말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아주 소중한 말들을 남겼다. 그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말해 질 수 없는 것이 말해져서는 안 된다. " 그러나 낳은 사람들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했다. 이것이 우리를 어려움으로 밀어 넣는다. 그들은 또한 '그것은 말해질 수 없다. '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은 부정적 방법을 통한 보고가 된다. 이것은 마지막 경계선에서 전해진 소식이다. "나는 그 지점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지점 이후로는 알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알 자도 없었다. 보고도 없고 보고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내가 존재했던 특정한 경계선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이 경계선이 여섯 번째 신체의 경계선이다. 베다. 바이블, 우파니샤드, 기타는 여섯 번째 차원까지 도달한다. 일곱 번째 차원은 표현될 수 없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표현하기가 매우 쉽다. 여섯 번째 신체까지도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에는 아는 자도 없고 앎도 없다. 우리가 '남아 있는 자'로 암시하는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이 텅빈 차원에 대해 말하려면 부정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말라. 우리는 거기에 없었던 것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거기엔 아버지도 없고, 아내도 없고, 문제도 없고, 경험도 없고, 앎도 없다. '나'또한 없었다. 에고가 없었다. 거기엔 세상도 없고 이 세상을 만든 자도 없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 이런 말이 여섯 번째 신체의 경계선이다. 그 경계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브라흐만에 대한 소식은 보고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너머의 차원에 대해 전달하려면 부정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붓다의 경우가 그렇다. 붓다는 일곱 번째 차원을 설명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을 통해 전달했다. 따라서 이 나라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브라흐만에 대한 앎은 긍정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브라흐만은 '사트-치트-아난다(sat-chit-ananda)'로 표현되며, 이 긍정적인 표현은 잘 이해된다. 브라흐만에 대해서는 '이것이 존재한다. 저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일곱 번째 차원을 알리려고 열심히 노력한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이 나라는 붓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차원은 뿌리도 없고, 형상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최소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을 보여 달라." 그러나 붓다는 '그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붓다를 버렸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붓다와 마하비라는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붓다보다 마하비라를 더 잘 이해했다. 마하비라는 다섯 번째 차원까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섯 번째 차원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과학적인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섯 번째 차원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말이 애매모호하고 비논리적으로 되는 것을 느꼈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는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유사한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떠 있고, 그 섬에 단 한 종류의 꽃이 자라난다고 한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지나가던 배가 주민 중 한 명을 육지로 데려간다. 육지에서 그는 다양한 종류의 꽃을 본다. 그에게 있어서 '꽃'이란 말은 섬에 자라는 한 가지 꽃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육지에 도착한 후에 '꽃'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는 '꽃' 이라는 단어가 한 가지 꽃이 아니라 수천 가지 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장미, 백합, 연꽃, 자스민 등의 꽃을 보았다. 이제 그는 염려스럽다. 섬으로 돌아가면 '꽃'이라는 말이 한 가지 꽃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꽃들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의 섬에는 한 가지 꽃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이름이 없다. 그저 '꽃'일 뿐이다. 이제 그는 백합과 자스민 꽃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지 염려스럽다. 그가 섬으로 돌아간다. 어렵기는 하지만 방법이 있다. 최소한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한 가지 꽃은 있다. 이제 그는 이 한 가지 꽃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면서 다양한 색채와 모양, 향기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발견한 다른 꽃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이 꽃이 하얀 색인 것처럼 빨강, 분홍, 노란 색 등의 다른 꽃들이 있다. 여기 작은 꽃이 있듯이 연꽃처럼 큰 꽃도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섬에는 이미 한 가지 꽃이 있다. 이 꽃이 다른 꽃들에 대해 무엇인가 암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육지가 아니라 달에 갔다고 가장해 보자 꽃은커녕 아무 식물도 없고, 환경도 생소하고 기압도 다르다. 이제 이 사람이 섬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달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으면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 본보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에는 달에서의 경험을 보고할 수 있는 단어도 없고 상징도 없다. 다섯 번째 차원까지 우리는 설명 가능한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한 가지 꽃과 수천 가지 다른 꽃들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섯 번째 차원부터 언어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꽃과 수천 가지 다른 꽃들 사이의 차이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설명이 매우 어렵다. 하지만 부정이나 전체성(totality)의 언어를 사용하면 어떤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 그 곳은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경계에 익숙하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을 이용하면 '거기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모호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는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난다. 우리는 거기에 경계선이 없다는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계선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의 모든 경험은 경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경계 없는 차원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섬 주민들이 '그렇다. 우리는 이해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꽃'이다.'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수많은 꽃을 보고 돌아온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그 꽃을 표준으로 삼지 말라. 그 '꽃'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말하는 것들이 이 꽃과 같지 않다면 왜 그것들을 꽃이라고 부르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유일한 꽃이다. " 우리는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신은 무한하다. 한계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알았다. 우리는 이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오직 한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한계'라는 단어뿐이다. 우리는 이 단어에 '무'자 하나만 더해 놓고 무한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것을 상상하려고 시도해 보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아무리 무한을 그려보아도 여전히 한계는 남는다. 그대는 수억, 수천 억 광년 동안 달려간다. 그러나 그대가 멈추자마자 즉각 한계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한'의 의미는 엄청나게 확장한 한계에 불과하다. 아무리 확장된 한계라 할지라도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이 때 우리는 핵심을 놓친다. 여섯 번째 차원에 대해 무엇인가 말해지는 것이 가능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일곱 번째 차원으로 접어들면 '우리는 이해했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차원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불가능하다. 누군가 그것을 말하려고 시도하면 즉각 우리는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가?'하고 반박할 것이다. 그래서 일곱 번째 차원을 암시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말이 사용되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 무의미한 말이 사용되었다. '옴(aum)' 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단어는 아무 의미도 없다 무의미한 단어다. 그런데 우리는 일곱 번째 신체와 연관지어 이 단어를 사용해 왔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곱 번째 신체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면 우리는 '옴'이라고 말한다. 경전이 '옴 샨티(aum shanti)'라는 말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대는 이 의미를 아는가? 이 말은 이제 일곱 번째 차원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일곱 번째 차원이 나타나자마자 경전은 끝난다. 일곱 번째 차원의 시작이 곧 경전의 끝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전의 마지막 부분에 '끝'이라고 쓰는 대신 '온 샨티'라고 쓴다. '옴'이 일곱 번째 차원이 상징이다. 이 단어는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이 단어는 고요함과 평화에 잠기도록 우리를 촉구하다. 우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 아무 모티브(motive)도 없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만일 거기에 어떤 모티브가 있다면 이 단어는 쓸모가 없게 된다. 우리는 모든 모티브가 사라진 세계를 상징하기 위해 이 단어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모티브가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세상의 어떤 언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옴'이란 단어의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여러가지 실험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아무 의미 가없다. 기독교인은 기도를 끝내면서 '아면(amen)'이라고 말한다. 그는 '충분하다! 이젠 끝났다. 이후로는 평화가 있을 뿐이다. 이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옴'과 상응하지 않는다. 옴은 번역될 수 없다. 옴은 일곱 번째 차원을 상징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단어다. 사원에 이 '옴'이 새겨진 것은 우리에게 여섯 번째 차원에 머물지 말도록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일곱 번째 차원이 있다. 라마(rama)와 크리슈나의 초상화를 보면 그들 중간에 이 '옴'이 위치한다. 이것은 '옴'이 그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크리슈나가 이 '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옴이 크리슈나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옴은 광대하다. 모든 것이 옴으로부터 나와 옴으로 녹아 들어간다. 세상의 어는 것도 옴과 견줄 수 없다. 옴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다. 옴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차원이다. 옴 안에서 모든 것이 실종된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차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고될 수 없다. 다만 '이것은 이렇지 않다. 이것은 저렇지 않다.......'식으로 부정적인 언어에 의해서만 묘사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말 또한 여섯 번째 차원까지만 의미를 갖는다. 많은 선지자들이 일곱 번째 차원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이것을 말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말로 설명하는 도중에도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들은 청중들에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에 대해서 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고 반복해서 경고해야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은 애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곱 번째 차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에게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마땅한 언어가 없을 뿐이다." 세상에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말로 전달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난점이다. 그것을 아는 것은 가능하지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던 사람들이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후에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는 까닭이 그것이다. 이들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버렸을 때, 이 침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요하게 침묵하는 그들의 눈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 그대가 묻는 것과 같은 문제에 관하여 붓다 는 이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질문은 하지 말라. 이런 질문은 옳지 않다. 이런 문제가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주제는 정의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런 주제가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붓다는 말했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글을 남기라고 요구하지 말라. 내가 무엇을 쓰건 그것은 거짓이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글을 쓰건 그것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말년까지 그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작은 책자를 남기면서 첫 문장에 이렇게 썼다. '표현된 진리는 거짓이 된다.' 이것이 일곱 번째 차원의 진리다. 여섯 번째 차원에서 그것은 거짓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애매모호해질 뿐이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면서 그 표현이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우리의 말과 언어가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 또한 우리와 더불어 사라진다. 일곱 번째 차원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옴'을 선택한 데는 무슨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까? 옴을 선택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 어떤 의미도 줄 수 없는 단어를 찾아야 했다. 만일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라면 다섯 번째 차원으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무의미한 단어가 필요했다. 우리의 모든 단어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그 단어들을 사용하겠는가? 우리는 말하기 위해 이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말의 목적은 어떤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단어를 말하면 이 단어는 그대에게 특정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차원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만일 일곱 번째 차원을 표현하기 위해 특정한 의미가 담긴 단어를 사용하면 즉각 다섯 번째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이 단어들은 사전에 추가될 것이고, 사람들은 이 단어를 읽고 '나는 이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일곱 번째 차원은 무의미하다.'는 말, 또는 '그 차원은 모든 의미를 초월한다.'는 말이 가능할 뿐이다. 둘 다 같은 뜻이다. 모든 의미가 사라지고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차원을 상징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단어를 찾아야 했을까? 어떻게 그런 단어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이 단어는 위대한 통찰력과 비전(vision)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단어, 기본이 되는 단어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렇다면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 이 단어는 어떻게 발견된 것일까? 이 단어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깊은 의미에서 이 단어는 모든 것의 근원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우리말의 기본적인 세 가지 소리는 'a-u-m'이라는 소리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소리가 단어와 관계를 맺어야 의미가 형성된다. 'a'가 하나의 단어가 되면 의미를 전달한다. 'm'이 하나의 단어가 되면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이 소리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세 가지 소리가 뿌리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이세 가지 소리의 확장이며 조화다. 이 세 가지 기본적인 소리가 조합됨으로써 '옴'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이제 '옴'은 글로 씌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단어와 마찬가지로 '옴'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옴이 일곱 번째 차원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옴은 글로 씌어지지 않았다. 옴을 상징하는 특정한 형태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아무 글자도 사용되지 않았다. 옴은 회화적인 형태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래서 옴은 사전에 추가될 수 없었으며, 그 대신 시각을 자극하는 하나의 의문 부호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태어난 '옴'은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발견하려는 열망을 심어 줄 수 있었다. 산스크리트 어를 읽거나 고대 문헌을 연구할 때 이 '옴'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단어는 우리의 이해 안에 들어온다. 단어에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옴'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이 옴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왜 '옴'은 글자로 씌어지지 않은 것일까? 왜 그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옴의 모양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대는 이것이 세 부분으로 형성되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 세 부분이 a. u. m의 상징이다. 이 모양새는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흔한 모양이 아니다. 많은 연구가 항해였지만 이것은 흔한 모양이 아니다. 많은 연구가 행해졌지만 이 연구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행해지지 않았다. 이 연구는 네 번째 차원에서 행해졌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네 번째 신체로 들어가 무념의 상태에 있게되면 그들의 내면에 'a. u. m'이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고, 이 소리들이 결합하여 '옴'이라는 단어를 형성한다. 내면에서 사념이 사라지고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을 때 옴의 허밍(humming)이 내부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 소리는 사념과 언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네 번째 차원에서 포착되었다. 사념과 언어가 사라지고 남는 것이 '옴'이라는 소리다. 이런 식으로 '옴'이라는 소리가 포착되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모든 단어는 고유의 패턴(pattern)을 갖는다.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면 우리는 내면에 어떤 패턴이 형성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옴에 대해 명상하고 네 번째 차원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면, 이 소리에 대응하는 어떤 형상이 내면에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종자 만트라(bija mantra)'가 이런 식으로 발견되었다. 명상 중에 특정한 차크라의 울림이 포착되면, 그 차크라에 대응하는 종자 만트라가 드러난다. 종자 만트라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옴이 궁극적인 종자다. 옴은 특정한 차크라의 종자가 아니다. 옴은 무한하고 영원한 일곱 번째 차원의 상징이다. 이런 식으로 '옴'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수천 명의 구도자가 '옴'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자 그들은 이 단어를 받아들였다. 이 단어는 한 사람 또는 일단의 사람들의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다. 수많은 구도자의 내면에 똑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진실성을 수없이 검증한 후에 비로소 '옴'이라는 단어가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옴'은 어떤 종교나 조직체에 전해 내려오는 고대의 유산이 아니다. 불교인과 자이나 교인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옴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옴은 힌두 교의 독점물이 아니다. 삭티파트,에너지의 전이 현상 어제 당신은 일곱 번째 신체와 관련하여 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작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a와 u, m은 어떤 차크라에 영향을 줍니까? 그리고 이것이 구도자에게 어떤 도움을 줍니까? 어제 나는 '옴'에 대해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몇 가지 더 말아 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로, 옴은 일곱 번째 신체의 상징이다. 옴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일곱 번째 차원을 암시한다. 일곱 번째 차원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단어도 사용될 수 없다. 그래서 무의미한 단어,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내가 어제 말한 내용이다. 이 단어에 대한 조사는 네 번째 신체의 경험을 통해 행해졌다. 이것은 일상적인 탐구가 아니었다.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을 때, 언어의 아우성은커녕 사념의 잔물결 하나 일지 않을 때, 이 때는 공의 소리만 남는다. 이 공을 말한다. 공에는 고유의 소리가 들어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외딴 곳에 가서 있어 보라. 공에 고유의 음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외딴 곳에는 고유의 소리가 있다. 이 침묵 속에서 'a-u-m'이라는 기본적인 음만 남는다. 우리의 모든 멜로디와 선율은 이 기본적인 음을 적당히 배치하고 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단어와 소리가 사라졌을 때 이 기본적인 음만 남는다. 옴은 일곱 번째 차원, 일곱 번째 신체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소리는 네 번째 차원에서 포착되었다. 멘탈체의 공안에서 옴의 울림이 포착된다. 구도자가 이 옴을 사용하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전에도 말했듯이, 모든 차원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옴의 반복은 잠의 상태, 잠과 같은 트랜스(trance) 상태를 초래한다. 이런 상태는 어떤 단어로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면 졸음이 오듯이 특정한 단어의 반복되는 읊조림은 마음속에 똑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옴의 반복에 의해 이런 상태가 오면 그대는 꿈과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 꿈과 상상이 네 번째 신체의 자연적인 잠재성이다. 그대는 최면 같은 잠에 빠질 것이고 그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볼 수 있다. 천국이나 지옥으로 여행할 수도 있고 신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가 꿈속의 일이다. 그대는 지복과 평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꿈속에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실제가 아니다. 옴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옴 소리를 크게 내면서 그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주 쉽다. 이것은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다. 멘탈 차원의 자연적인 특성은 상상과 꿈이다. 마음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꿈꿀 수 있다. 네 번째 차원에서 이런 즐거움이 가능하다. 이 네 번째 차원의 다른 가능성은 의지력과 신에 대한 비전(vison)이다. 옴이 마음의 반복으로만 사용되면 그 효과는 최면 적인 잠을 불러온다. 옴의 반복에 의해 '요가 탄드라(yoga tandra)'로 불리는 상태가 창조된다. 그러나 내면의 주시자가 살아 있는 가운데 옴을 읊조리면, 그 소리에 빠져들거나 휘말리지 않고 철저하게 깨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면, 소리가 하나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그대는 청취자, 관찰자, 주시 자로서 다른 차원에 서 있다면, 이 소리에 대해 철저하게 자각하고있다면, 이때 비로소 네 번째 차원의 두 번째 다른 가능성이 시작된다. 이때 그대는 '요가 탄드라'가 아니라 '요가 자그리티(yoga jagriti)',각성의 상태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그대가 만트라의 사용에 빠져들지 않도록 시종일관 노력하고 있다. 나는 항상 어떠한 만트라도 사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만트라를 사용하면 십중팔구는 상상적인 트랜스 상태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네 번째 신체는 잠에 약하다. 이 신체는 잠밖에 모른다. 꿈의 길이 이미 잘 닦여 있다. 이 신체는 말마다 꿈꾼다. 이것은 방안데 물을 뿌려 놓는 것과 같다. 잠시 후 물이 마른 다음에도 흔적은 남을 것이다. 이때 다시 물을 뿌리면 이 물은 전에 있던 흔적을 따라 흐를 것이다. 찬팅(chanting)과 만트라를 사용하면 마음이 즉시 잠으로 향하게 될 가능성이 더 많다. 만트라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과정이 그대를 꿈의 세계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나 내면이 철저하게 깨어있는 상태로 이 '옴'소리를 주시한다면, 그 소리에 휘말려들지 않고 관찰한다면, 이 때 이 만트라는 내가 권장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졸린 듯한 상태로 반복될 뿐 거기에 주시가 없으면 '옴' 만트라의 반복과 같은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 그대는 꿈속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옴의 반복에 비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옴에는 아무 질문도 제기되지 않는다. 옴은 부드러운 다독거림과 같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에는 질문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다독거림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 뒤에는 의문 부호가 그대를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시킬 것이다. 마음속에 의문이 있으면 잠들기가 어렵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낮 동안에 마음속에서 어려운 문제가 소용돌이치고 있으면 이 문제는 밤이 되어서도 그대의 잠을 방해한다. 마음속의 의문은 그대가 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의문 부호가 불면을 가져온다. 마음속에 의문이나 근심, 호기심이 있으면 잠들기가 어렵다. 나는 옴 대신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권장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의문이다. 그리고 의문은 대답을 추구한다. 대답을 얻기 위해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옴에는 의문이 없다. 옴에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없기 때문에 그대를 자극하지 못한다. 옴은 완전히 둥글둥글하다. 거기엔 의문이 없다.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다독거림이 그대를 상상적인 트랜스 상태로 인도한다. 그러나 옴은 여성처럼 매끄럽다. 옴의 부드러운 다독거림이 그대를 빨리 잠들게 한다. 말에도 형태가 있으며 그대에게 미치는 효과가 다르다. 말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이 각각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안에는 선율이 없다. 이 질문을 갖고 잠들기는 어렵다. 잠자는 사람 옆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반복하면 그가 깨어날 것이다. 그러나 '옴, 옴....'하고 반복하면 그는 더 깊이 잠들 것이다. 말이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 이것은 옴이 아무 효과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가 옴을 반복하면서 그 배후에서 관찰자, 주시자로 남아 있다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나는 명상을 위해 옴을 사용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 여기엔 않은 이유가 있다. 옴을 위해 명상을 사용하면 이 옴은 필연적으로 네 번째 신체와 연결된다. 옴은 일곱 번째 차원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울림은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된다. 옴을 갖고 명상을 시작하면 이 옴과 네 번째 차원의 필연적인 관계가 더 이상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이것이 옴을 사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옴은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되지만 일곱 번째 차원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우리에게는 일곱 번째 차원을 상징하는 다른 말이 없다. 말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네 번째 차원 후에 끝난다. 우리는 일곱 번째 차원을 지칭하는 상징으로서 네 번째 차원의 마지막 말을 사용한다. 다른 대책이 없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 차원은 완전히 말이 끊긴 상태고, 일곱 번째 차원은 궁극적인 공이다. 네 번째 차원의 경계선에서 우리는 모든 말을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리는 말이 '옴'이다. 그러므로 '옴'은 언어의 영역에서 마지막 말인 동시에, 비 언어의 영역에서 최초의 말이다. '옴'은 언어와 비 언어 사이의 경계선 상에 놓여 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네 번째 차원에 속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일곱 번째 차원에 가까운 말은 없다. 다른 말 모두가 일곱 번째 차원과 한참 거리가 멀다. 따하서 일곱 번째 차원을 상징하기 위해 '옴'이 사용된다. 이 혼을 네 번째 신체와 연결시키지 말라. 옴은 분명히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옴은 일곱 번째 차원의 상징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명상을 위해 옴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명상을 위해서는 네 번째 차원과 멀리 떨러져 있는 방편을 사용해야 한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그렇다. 그대는 이 질문을 네 번째 차원에서 사용할 수도 있고 또한 버릴 수도 있다. 옴의 의미는 상징적으로 남아야 한다. 옴을 방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궁극적인 단계를 가리키는 상징이 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최후의 목적으로 남아야 한다. 절대적 차원을 가리키는 상징은 오직 깨달음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한다. 옴은 우리가 최후에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옴을 명상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과거에 이 옴이 방편으로 사용되었지만 해로운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옴' 소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흔히 네 번째 차원을 일곱 번째 차원으로 착각한다. 일곱 번째 차원의 상징이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되었을 때 구도자는 '나는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것을 여행의 끝으로 착각한다. 이 사이의 차원에서 큰 해악이 발생한다. 이 때 구도자는 여기에 머물고 만다. 네 번째 차원에서 보이는 비전(vision)이나 색채, 내면의 소리를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구도자들이 많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궁극적 차원의 상징이 이 네 번째 차원의 경계선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때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옴'소리를 수행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이 방편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신체에 아무 효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효과는 오직 네 번째 신체에서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신체에 필수적인 충격을 주기 위해 다른 단어가 사용되는 이유다. 'a-u-m'이라는 기본적인 음에 대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창조의 행위를 수행하지 않았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신이 '말'을 했다. 성경은 또한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며, 다른 모든 것은 그 뒤에 따라 나왔다. 인도에서 우리는 '말씀이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낳았다. 많은 사람들이 브라흐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말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오직 무언의 상태에서만 얻어진다. '말씀이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낳았다. 많은 사람들이 브라흐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말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오직 무언의 상태에서만 얻어진다. '말씀이 브라흐만이다.'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소리 중에 '옴'이 가장 미묘한 소리라는 뜻이다. 우주의 근원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면, 세상이 비롯된 공의 차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옴의 울림소리를 들을 것이다. 네 번째 차원으로 들어감에 의해 공에 더 가까워졌을 때 옴의 소리가 들린다. 이 곳에서 우리는 태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네 번째 신체에서 영체로 들어가고, 영체에서 코스믹체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반체로 들어간다. 마지막 두 신체 사이에 있는 공명도 또한 옴의 울림이다. 한 쪽에는 우리가 물질계(corporeal)로 부르는 네 가지 신체의 개체성이 있으며, 다른 한 쪽에는 브라흐만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비개체성이 있다. 이 둘의 경계선에서 울리는 공명이 '옴'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브라흐만으로부터 물질계가 형성될 때 옴의 공명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해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을 통해 모든 것이 탄생했다. 는 믿음이 있다. 이 '말씀'을 기본적인 요소로 쪼개면 우리는 'a-u-m'이라는 세 가지 음을 발견한다. 이 세 가지의 음의 조합이 '옴'이다. 이런 까닭에 '태초에 옴이 있었으며, 종말에도 옴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종말은 출발점으로 환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원이 완결된다. 나는 이 '옴'이 상징으로 사용되어야지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들은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옴'같은 순수한 소리가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옴의 순수함을 오염시키는 행위다. 많은 사람들이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게 와서 '옴의 영창을 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아마 그들은 나를 옴의 적으로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옴의 적이다. 그렇게 순수한 소리가 영적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는 혀는 이 소리를 발음할 자격조차 없다. 옴은 육체에 의해 발음되기는 너무나 순수한 소리다. 이 '옴'은 혀가 무의미해지고 육체가 쓸모 없어지는 차원에 위치한다. 그런 곳에 옴의 울림이 있으며, 이 울림은 제 스스로 진동한다. 옴을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옴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옴은 발음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옴을 방편으로 사용하면 그대는 이 단어의 기본적인 소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존재계로부터 저절로 그 소리가 솟아 나올 때 그대는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소리가 그 존재계의 소리를 눌러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이 기본적인 소리의 순수한 현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옴의 소리를 방편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결코 실제의 옴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로 옴의 울림이 왔을 때 그 위에 자신의 뉘앙스(nuance)를 덮어씌울 것이다. 이 때 그들은 옴의 순수한 울림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공의 직접적인 울림소리를 듣는 데 실패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만들어 낸 소리가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와 이미 친숙한 소리가 우리 안으로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옴과 친숙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옴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어느 날엔가 이 옴은 네 번째 차원에서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그 때 이 옴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네 번째 신체 안에서 옴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대가 네 번째 신체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대는 프쉬케의 차원, 언언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다. 마지막 말이 찾아왔다. 이제 그대는 말이 시작되었던 지점에 서있다. 그대는 창조의 시발점에 서 있다. 그 다음에 옴 고유의 멜로디가 시작된다. 그 아름다움은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것을 묘사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만든 최고의 음악도 이 멜로디의 가장 작은 메아리에 미치지 못한다. 외부의 귀로 이 침묵의 음악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소리네 대해 아무 선입견도 갖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이 소리네 어떤 형상이나 색채도 부여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에 사로잡힐 것이고, 이것이 장애물이 될 것이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생체 전기적인 차이점이 지속됩니다. 이것은 매개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또는 이 삭티파트에 차여하는 구도자가 남자인가 여자인가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설명해 주십시오. 이점에 관해서는 많은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네 번째 신체까지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네 번째 이후에는 차이가 없다. 다섯 번째 신체는 성적인 차별을 초월한다. 네 번째 신체까지 이 차이점은 아주 크다. 이 기본적인 차이점이 여러 가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먼저 남자의 신체를 알아보고 그 다음에 여자의 신체로 넘어가자. 남자의 첫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두 번째 신체는 여성이고, 세 번째 신체는 다시 남성이 되고, 네 번째 신체는 또다시 여성이다. 여자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다. 여자의 첫 번째 신체는 여성이고, 두 번째 신체는 남성이며, 세 번째 신체는 다시 여성이 되고, 네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이로 인해 현격한 차이가 생긴다. 이 차이점이 인류의 역사와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류의 문화에 특정한 질서를 부여했다. 남자의 신체에도 독특한 특징이 있고, 여자의 신체에도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런 특징이 서로를 보완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행위 안에서 그들은 결합해야 한다. 이 결합에는 두 종류가 있다. a라는 남자가 b라는 외부의 여자와 결합하면 아기가 탄생한다. 반면,a라는 남자가 자기 내부의 b라는 여성과 결합하면 브라흐만을 지향하는 창조가 일어난다. 외부적인 결합이 자연을 향한 여행이라면 이 내적인 결합은 신을 향한 여행이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든 섹스가 연관된다는 점은 똑같다. 남자의 신체가 외부적으로 여자의 신체와 결합하면 성교가 일어난다. 남자의 신체가 자기 내부의 여성체와 결합할 때도 섹스가 일어난다. 첫 번째 경우에는 에너지가 외부로 분산되고, 두 번째 경우에는 에너지가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섹스 에너지의 상승'이라고 알려진 현상이다. 이것은 내면의 이성과의 결합니다. 외부의 신체든 내부의 신체든 상관없이, 에너지는 항상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로 흐른다. 남자의 물질적 육체에 있는 성 에너지가 그의 내면에 있는 에테릭 여성체로 흐른다면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는다. 이 때 '브라흐마차리야(brahmacharya)'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에너지가 계속 위로 상승하여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한다. 네 번째 신체 이후에는 '브라흐마차리야'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 후에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 차원을 넘어선 후에 그대는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다. 이제 첫 번째 신체와 두 번째 신체에서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인 시바(shiva),즉 '아르드하나리쉬와르(ardhanarishwar)'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으로 남아 있었을 뿐 우리는 결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바도 불완전하고 파르바티(parvati)도 불안하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시바의 초상을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인 모습으로 그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이 나머지 반쪽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반쪽은 우리 각자의 배후에 숨어 있다. 그대의 한 면은 남성이고 다른 면은 여성이다. 이것이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다. 바깥 세상에서는 아무리 대담하고 강인한 사내라 해도,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히틀러처럼 세력 있는 남자일지라도, 직장에서, 가게에서, 시장에서 하루 종일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활동하던 남자도 저녁때 집에 돌아오면 단 한 명의 여자 앞에서 패기를 잃고 맥을 못 춘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무슨 이유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남자는 열두 시간이나 열네 시간 동안 자신의 남성체를 사용했다. 그 후에 그의 첫 번째 신체는 휴식을 원한다. 이제 두 번째 신체인 여성체가 전면으로 나서고 남성체는 뒤로 물러선다. 반면 그의 아내는 하루 종일 여성체를 사용했으며, 저녁때가 되면 그녀의 배후에 있는 남성체가 우세해진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하고 남자는 여자처럼 된다. 자기 내면의 이성체와 교접하는 것이 생명 에너지를 상승시키는 방법이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이 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내용이 잇지만 지금은 논의하지 않겠다. 에너지는 항상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로 흐른다. 남성체의 가장 큰 특징은 수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체는 항상 공격적이다. 남성은 주기만 할 뿐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성으로부터 남성에게로 가는 흐름은 없다. 항상 남성에게서 여성을 향해 흐른다. 여성은 수용적이다. 그녀는 받기만 할 뿐 줄 수 없다. 이로 인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둘다 알아 둘 가치가 있다. 첫 번째 결과는 , 여성이 수용적이기 때문에 삭티파트를 주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을 통해서는 삭티파트가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이 세상에 여자 스승이 극소수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붓다와 마하비라 같은 경지에 오른 여자 스승이 없는 이유다. 여성을 통해서는 누구에게도 에너지가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붓다와 마하비라, 크리슈나의 주변에는 많은 여성이 있었다. 그러나 크리슈나처럼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여성은 단 한 명도 탄생하지 못했다. 여성은 오직 '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이 있다. 크리슈나 같은 사람의 주변에는 남자들이 적고 여자들이 많을 것이다. 마하비라의 경우가 그랬다. 마하비라의 주변에는 남성 수행자가 만 명이었던 반면, 여성 수행자는 사만 명이나 되었다. 항상 4대 1의 비율이다. 마하비라의 주변에 남자가 한 명 있다면 항상 네 명의 여자가 있었다. 남자들은 마하비라에게서 여자들만큼 깊은 영향을 받지 못했다. 그들과 마하비라 양쪽 모두가 남자였기 때문이다. 마하비라에 의해 전수된 것을 여자들은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흡수력이 없다. 남자들의 수용성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종교를 창시한다면 그 종교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은 항상 여성이다. 이 세상에 종교를 보존하는 사람들은 여성이다. 남자는 종교의 선구자가 될 뿐이다. 여성은 수용적이다. 몸의 특성 자체가 수용적이다.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이런 특성을 갖는다. 여성은 아홉 달 동안 아기를 잉태해야 하고 그 후에는 아이를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당연히 수용적 이여야 한다. 자연의 이치상 이런 일은 남성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남성은 잠시 동안 아버지가 되었다가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일려난다. 여성은 정액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존한다. 이런 사실이 삭티파트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삭티파트에서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받는 위치에 놓일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를 말한다. 드물긴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겠다. 간혹 이렇게 예외적인 일이 일어난다. 여기엔 아주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삭티파트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이것을 여성 신체의 허약함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은 이 허약함을 보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삭티파트를 신속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강한 힘이 그것이다. 남자는 삭티파트를 주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남성으로부터 남성에게로 가는 삭티파트 또한 어렵다. 남성 구도자는 수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자의 특성이다. 그가 출발해야 하는 첫 단계부터 수용적이지 않은 남자가 버티고 서 있다. 남자가 자신을 여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영적인 수행을 하는 단체들이 있다. 이것은 남자를 수용적으로 만들기 위한 방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수용적으로 되지 않는다.. 여성은 아무 어려움 없이 수용적으로 된다. 그것이 자연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삭티파트에서 여성은 항상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여성이 직접 은총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잘 이해해야 한다. 삭티파트는 첫 번째 신체에서 일어난다. 만일 내가 삭티파트를 주도하면 그 삭티파트는 그대의 첫 번째 몸에서 일어난다. 에너지가 내 첫 번째 몸으로부터 나와 그대의 첫 번째 몸을 타격한다. 그대가 여성이라면 이런 일은 신속하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남자라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내면 어딘가 깊은 곳에서 그대는 완벽한 순종(surrender)의 상태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야만 삭티파트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는 순종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순종할 수 없다. 설령 그가 '나는 귀의한다.'고 말한다 해도 이 말은 호전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의 에고가 귀의라는 행동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의 에고가 '봐라! 나는 귀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배후에 숨어 있는 '나'가 떠나지 않는다. 여성은 순종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미 순종하고 있다. 그것이 여성의 본성이다. 내맡기고 귀의하는 것이 그녀의 첫 번째 몸이 갖는 특성이다. 여자는 매우 수용적이다. 그러므로 남성이 주도하는 삭티파트는 여성의 내면에 쉽게 영향을 미친다. 남성에게서 남성으로 가는 삭티파트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여성에게서 남성으로 가는 삭티파트는 어렵긴 하지만 가능하다. 만일 강력한 남자가 있으면 그는 다른 남자를 거의 여성과 같은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여성을 통한 삭티파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정적인 해프닝이 일어나는 순간에 여성의 생명 에너지를 자기 스스로 흡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첫 번째 몸은 스폰지와 같아서 모든 것을 안으로 빨아들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삭티파트에 대해 말했다. 은총의 경우에도 상황은 똑같다. 은총은 네 번째 신체를 통해 온다. 남자의 네 번째 신체는 여성이다. 그러므로 그는 은총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자의 네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그래서 여성은 은총의 경우에도 똑같은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녀는 직접적으로 은총을 받아들일 수 없다. 반면, 남자의 네 번째 신체는 여성이다. 그래서 모하메드, 모세, 예수 같은 사람들이 즉각 신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들 안에 있는 네 번째 신체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은총이 내려오자마자 즉각 그것을 흡수할 수 있었다. 여자의 네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이것이 여자가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여자는 직접 신의 메시지를 받을 수 없다. 지금까지 브라흐만을 알았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의 네 번째 신체인 남성체가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녀가 이 남성체를 통해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자는 은총을 직접 받는다. 삭티파트에서 보듯이,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그 자신이 장애물로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서의 경우에는 다르다. 여성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도 삭티파트를 받을 수 있다. 여성에 대해서는 아주 허약한 사람들도 삭티파트를 행할 수 있다. 아주 평범한 매개체들도 삭티파트에 성공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삭티파트는 매개체 자신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용성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성은 항상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매개체가 없으면 힘들다. 매개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이 창조될 수 있다. 여성 구두자가 어 적은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이 신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들도 신을 체험했다. 하지만 그 중간에 항상 매개체가 있었다. 무시해도 좋을 만큼 하찮은 매개체라 할지라도 어찌 되었든 항상 매개체가 있었다. 여성들은 매개체를 통해 경험을 얻었다. 그러나 흔치 않은 상황에 의해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젊은 여성에게 은총이 일어나는 것은 더 어렵다. 늙은 여성에게는 다소 쉬워진다. 삶 전체를 통해 우리의 성이 유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삶 전반을 통해 우리 안의 남녀 비율은 항상 동일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난다. 이 비율이 계속 변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말년에 코 아래와 볼에 털이 자라나는 일이 발생한다. 오십 살쯤 되면 그녀의 목소리까지 변해서 남자처럼 더 긁어진다. 여성적인 목소리가 사라질 것이다. 그녀 안의 남녀 비율이 변한다. 남성적인 요소가 출현하고 여성적인 요소는 쇠퇴한다. 실제로, 여성으로서 그녀의 역할은 끝났다. 마흔 다섯 살까지는 생물학적인 구속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구속력이 없다. 그녀는 더 이상 내면의 여성에게 묶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늙은 여성에게는 은총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신체에서 남성적인 요소가 증가하고, 그녀의 두 번째 신체에서 여성적인 요소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또한 네 번째 신체에서 남성적인 요소가 감소하고, 세 번째 신체에서는 남성적인 요소가 증가한다. 따라서 늙은 여성 안에 은총이 가능해 진다. 특정한 조건을 갖춘 아주 늙은 여성은 젊은 여성을 위한 매개체로서 활동할 수도 있다. 백 살 가까이 된 여성, 마음속에 '나는 여자다.'라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여성은 남자들을 위한 매개체로도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경우가 될 것이다.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늙으면 그의 여성적인 속성이 증가한다. 일반적으로 늙은 남성은 여자처럼 행동한다. 남자다운 속성이 떨어져 나가고 여성적인 속성이 발달한다. 이런 맥락에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네 번째 신체 안에서 은총을 받아들인 사람은 여성적인 속성이 발달한다. 예를 들어, 마하비라와 붓다의 몸, 또는 그들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를 관찰해 보면 그들은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처럼 보인다. 그들 안에 여성적인 수용성이 증가하면서 거기에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이 보태졌다. 공격적인 면이 사라지고 그들은 철저하게 비폭력적으로 되었다. 사랑과 자비가 충만해졌으며 분노는 영원히 사라졌다. 니체(nietzsche)는 예수와 붓다를 여자 같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남자 축에도 끼지 못하는 위인들이다. 그들에게는 남자다운 패기가 조금도 없다. 그들은 세상 전체를 여자처럼 약하게 만들었다." 일리가 있는 불평이다. 우리는 붓다, 마하비라, 크리슈나, 라마를 묘사할 때 수염을 그리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에게 수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퍼스낼리티는 여성적인 특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수염을 없애 버렸다. 그들의 여성적인 태도에는 수염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의 경우에도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처한 상황은 과학자들에게 유별난 경우로 지목 받았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중에 그의 추종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공공연히 떠들 수 있겠는가? 라마크리슈나는 젖이 커지고 월경을 시작했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의 개성 전체가 여성적으로 되었다. 그는 여자처럼 걷고 여자처럼 말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특별한 경우에는 여러 가지 다른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삭티파트를 행할 수 없다. 그의 퍼스낼리티 전체가 완전히 여성이 되었다. 붓다와 마하비라의 명상법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네 번째 신체에 도달했다. 그리고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하자마자 그들의 퍼스낼리티가 여성적으로 되었다. 내말은 그들의 본성 중에 수용적인 측면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공격성이 사라지면서 폭력과 분노도 소멸되었다. 대신 다정한, 사랑, 자비, 비폭력이 증가했다. 여성스러움이 이 나라 전체의 천성적인 본성으로 자리잡았다. 나는 이 나라에 대해 상당수의 침략이 행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웃의 남성적인 나라들 모두가 여성적 성격을 가진 인도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로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인도에서 우리는 네 번째 차원의 훌륭한 경험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신체의 차원에서 우리는 곤경에 처했다. 네 번째 차원의 보물을 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은 첫 번째 차원의 재물과 왕국을 얻었다. 그리고 네 번째 차원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첫 번째 차원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붓다와 마하비라 이후로 인도는 공격적인 성향을 잃고 수용적인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누가 침공해 들어오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누가 침략하건 우리는 그들을 우리 안으로 흡수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차별하고 막아내야 하다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공격하도록 놔두었다. 이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는 문제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도의 퍼스낼리티가 여성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찾아오는 사람 누구 나를 받아들이는 거대한 자궁이 되었다. 우리는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이 침략자들을 몰아 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호전적인 기질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나면서 그런 기질이 사라졌다. 일반 대중은 그 위대한 인물들을 따랐다. 대중은 그 인물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일반인들은 위대한 인물들이 비폭력과 자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그들이 이런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위대한 인물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공격에도 지켰다. 설령 그들이 싸우기를 원했다 해도 지도자가 없었다. 만일 세상의 역사가 영적인 시각에 의해 씌어진다면, 물리적인 사건을 고려하지 않고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려해서 역사를 쓴다면...이것이 진정한 역사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쓴다면 우리는 한 나라의 영적으로 변형될 때마다 여성스럽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한 나라가 여성스럽게 되면 덜 문화적인 나라, 가장 평범한 문화를 가진 다른 나라가 이 여성적인 나라를 굴복시킬 것이다. 인도를 정복한 사람들이 매우 낙후된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터키 족, 몽고족, 이들 모두가 여러 면에서 야만인이었다. 그들에게는 문화가 없었다. 그러나 야만족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그들은 남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수동적인 여성이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성의 신체는 흡수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남성의 신체가 에너지를 전달하고 직접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여성은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그런 까닭에 마하비라 같은 사람들은 '여자들이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한 가지 이유였다. 여성은 직접 은총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여성이 남자로 태어나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퍼스낼리티를 변형시키는 방법들이 있다. 그대의 두 번째 신체가 첫 번째 신체가 되고, 첫 번째 신체가 두 번째 신체의 위치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강인한 의지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방법에 의해 지금의 이 생에서 물리적인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자이나교의 티르탕카르(tirthankar)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티르탕카르 중의 한 명은 여성이었다. 스웨탐버(swetamber)파는 그녀를 말리바이(mallibai)로 부르고, 디감버(digaber)파는 말리나트(mallinath)로 부른다. 디감버파는 그녀를 남성으로 받아들였다. 여자는 해탈(moksha)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티프탕카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말리바이를 말리나트로 부른다. 인류 역사 어디에도 한 사람을 놓고 이런 논쟁이 벌어진 적은 없다. 다른 논쟁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어떤 사람이 5피트 6인치였는지 아니면 5피트 5인치였는지, 그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 사람의 성별을 놓고 이견이 생긴 적은 없었다. 한 종파는 말리마이를 여자로 믿고 다른 종파는 남자로 믿는다. 내 느낌으로는, 사드하나(sahara)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첫 번째 신체를 남성체로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녀가 티르탕카르가 된 것은 이런 일이 발생한 다음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를 여자로 믿는 종파는 그녀의 첫 번째 상태를 존경하고, 그녀를 남자로 믿는 다른 종파는 그녀의 두 번째 상태를 존경하는 셈이다. 둘 다 옳다. 그녀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로 변형되었음에 틀림없다. 마하비라가 가르친 사드하나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 사드하나를 행하는 모든 여성이 남자가 외어야 한다. 그의 사드하나는 헌신(bhakti)이 아니라 앎(jnan)의 길이다. 완전히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길이다. 그의 길은 수용의 길이 아니다. 만일 어떤 남자가 이라(meera)처럼 몇 년 동안 끊임없이 노래 부르고 춤춘다면, 잠을 잘 때도 크리슈나의 상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그를 연인으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이름만 남자로 남을 뿐 그의 의식은 완전히 여성으로 변형될 것이다. 첫 번째 신체가 변해서 여성이 되고, 두 번째 신체는 남성으로 변할 것이다. 이런 변형이 아주 깊이 들어가면 그의 육체에도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설령 육체가 변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똑같지 않을 것이다. 여성적인 의식이 발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특별한 경우에도 삭티파트의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다. 거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삭티파트는 남성만을 통해 일어나며, 그는 은총 또한 직접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직접 은총을 받는 것은 어렵다. 여성에게는 은총으로 들어가는 문이 오직 삭티파트를 통해서만 열려 있다. 이것은 사실(fact)일 뿐 가치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여기에 높고 낮음이나 열등함과 우월함의 문제는 없다. 사실이 그럴 뿐이다. 이것은 남자가 사정하고 여자가 정액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어김없는 사실이다. 여자가 남자 안에 사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의 이치상 그럴 수가 없다. 여기에 어느 쪽이 우월하고 어느 쪽이 열등한가 하는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대해서도 온갖 가치 평가가 행해졌다. 여성은 받는 쪽이기 때문에 열등한 위치로 내려가고, 주는 쪽인 남성의 가치는 올라갔다. 전세계에 만연한 남녀간의 불평등은 남자가 자신을 '주는 자'로 생각하고 여성은 자신을 '받는 자'로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받는 쪽은 왜 반드시 열등해야 하는가?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 받는 자가 없다면 주는 자가 무슨 소용인가?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주는 자가 없다면 받는 자가 무슨 소용인가? 이것은 열등함과 우월함의 문제가 아니다. 둘이 서로 보완적인 위치에 있다.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다. 그들은 서로 돕는 관계다. 서로가 연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쪽은 주고 다른 쪽은 받는다. 그러나 '주는 자'라는 개념이 대개의 경우 우리의 마음속에 우월함이라는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받는 자가 열등해야만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많은 현상이 이런 착각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의 위치는 남성에 이어 두 번째로 여겨졌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성들까지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실은 남녀 각자가 서로의 영역에서 첫 번째 위치에 있다. 남자는 남자로서 첫 번째 위치에 있고, 여자는 여자로서 첫 번째 위치에 있다. 두 번째 위치란 없다. 서로가 보완적인 관계다. 이제 이런 개념이 크고 작은 모든 일에 파급되었다. 우리의 문화전체에 이런 개념이 침투해 들어왔다. 남자는 공격적이기 때문에 사냥을 하러 나갔다. 그리고 여자는 집에 앉아 남자를 기다렸다. 여자는 남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남자는 밭에 나가 일하고 곡식을 수확했으며 가게를 보았다. 남자는 비행기를 몰았으며 달나라에까지 갔다. 그는 이런 모든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반면, 여자는 집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여자 또한 많은 일을 했지만 공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용적인 일이었다. 여자는 집을 가꾸고 살림을 장만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돈한다. 모든 문화권에서 안정이라는 원리는 여성에게서 기인한다. 만일 여자가 없었다면 남자들은 방랑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한 군데에 집을 짓고 정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는 고정 쇠와 같은 기능을 한다. 남자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은 고정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만일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남자는 결코 한 곳에 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는 도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 문화는 한곳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꾸려 나가려는 여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여자들은 항상 남자에게 이렇게 설득한다. "이만하면 충분해요. 여기서 멈춰요. 다소 어려움이 있다해도 더 이상 나아가지는 말아요." 여자는 땅을 파고 거기에 뿌리를 내린다. 이때 남자는 그녀의 주변에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도시가 생겨난 경위다. 모든 문화와 문명, 가정이 이런 식으로 생겨났다. 여자가 이런 것들을 아름답게 꾸미고 성스럽게 만들었다. 남자가 밖에서 무엇을 갖고 오건 여자는 그것을 보존한다. 남자는 보존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다. 남자는 무엇인가 벌어 오지만 거기에서 끝난다. 그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남자는 바깥 세상에서 싸우고 도전할 때만 의욕이 넘친다. 그의 관심은 항상 다른 곳을 정복하러 떠나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갖고 오든 간에 그것을 보존하고 저축하는 것은 여자다. 여자는 이모든 상황의 보완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그러나 여자는 무엇인가 구하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여자는 창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보다 뒤에 처진 것처럼 보인다. 아주 자잘한 일에도 이런 느낌이 들어오고, 여자는 모든 면에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 근거 없는 열등감이다. 이런 열등감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자는 상황이 다르다. 이 열등감을 부수기 위해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여자들 자신에게 아주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여자의 기본적인 퍼스낼리티를 어기는 일이다. 이것이 여자의 영환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제 여자는 남자들과 같은 자리에 서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와 똑같아질 수는 없다. 여자들은 기껏해야 지신을 이류 남자로 만드는 데 성공할 것이다. 여자는 결코 일류 남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여자들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여성다움(womanhood)에서 일류 여자가 될 수 있다. 여기에 가치 평가의 문제는 없다. 네 가지 신체의 관한 사실이 그럴 뿐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다.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의 사드하나에 차이점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사드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있다. 가령, 똑같은 방편이라 해도 남자는 공격적으로 임할 것이고 여자는 수동적으로 임할 것이다. 남자는 공격하고 여자는 순종할 것이다. 방편은 똑같지만 그 방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것이다. 남자는 사드하나를 행할 때 머리를 들고 저돌적으로 임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런 태도의 차이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남녀 사이에 이 이상의 차이점은 없다. 여자의 태도는 귀의와 순종이다. 신에게 도달했을 때도 여자는 '나는 신의 경지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참으로 행운이다. 신이나를 자기 품으로 이끌어 주셨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신이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는 신에게 도달했다.'고 느낀다. 차이점은 그들의 이해에 있다. 이런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까지만 그렇다. 네 번째 신체 이후에는 남녀의 문제가 없다. 당신은 옴의 찬팅이 나다(nada), 침묵의 소리를 가져다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자연적으로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느 쪽 나다가 더 좋습니까? 물론 자연적으로 오는 것이 더 가치 있다. 옴의 반복에 오는 나 다는 상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저절로 오는 것이 진실하고 가치 있다. 나다가 시작되면 그대는 주시자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 말려들면 안된다. 만일 나다 에 휘말리면 일곱 번째에 도달하기 전에 그대는 그 곳에서 멈취버릴 것이다. 그것이 브레이크로 작용할 것이다. 내면의 소리가 미세해질수록 우리의 주시 또한 정교해져야 한다. 우리는 끝까지 계속 관찰해야 한다. 이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명상가 안에서 삭티파트는 몇 번째 차원에서 일어나며, 은총은 몇 번째 차원에서 일어납니까? 그리고 만일 명상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신체가 완전히 개발되어 있지 않다면 쿤달리니의 각성과 삭티파트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나는 이미 앞에서, 삭티파트는 첫 번째 신체에서 일어나고 은총은 네 번째 신체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첫 번째 신체에서 삭티파트가 일어나면 쿤달리니가 깨어날 것이다. 아주 강력한 속도로 깨어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조심해야 한다. 흔히 몇 달에 걸쳐서 일어나는 일이 삭티파트를 통해서는 단 몇 초안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삭티파트 전에 처음의 세 가지 신체가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에게 갑자기 삭티파트가 일어나면 해로울 수도 있다. 따라서 삭티파트 전에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주 세심한 준비는 필요 없다. 그저 세가지 신체에 초점을 맞출 정도면 충분하다. 이것이 첫 번째로 할 일이다. 두 번째로, 이 세 가지 신체 사이에 어떤 연결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에너지가 어디에서도 막히지 않는다. 만일 삭티파트가 첫 번째 차원에서 막혀 버리면 위험할 수도 있다. 삭티파트가 세 가지 차원 전체로 퍼져 나가면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처 번째 하원에서 중단되면 매우 위험하다. 이것은 땅 위에 서 있다가 전기 충격을 받는 것과 같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나무 위에 서 있으면 안전하다. 이 때는 전기의 흐름이 그대의 몸을 통과해 지나가면서 하나의 순환(circuit)을 형성한다. 순환이 형성되면 아무 위험이 없다. 위험은 순환이 깨졌을 때 온다. 모든 에너지는 똑같은 법칙을 따른다. 에너지는 원을 그리며 계속해서 순환한다. 만일 이 순환이 깨지면 그대는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나무 위에 서 있으면 아무 충격도 받지 않는다. 명상가들이 나무 좌대를 사용한 것은 나무가 절연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사슴 가죽과 표범 가죽을 사용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명상가에게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충격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런 절연 물질이 좌대로 사용되었다. 이 전기 충격에 의해 인간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명상가는 나무 신발을 신었으며, 나무 침상 위에서 잠을 잤다. 그는 이런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단지 경전에 나온 규칙대로 따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몸이 편안하지 않도록 자신을 고문하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위험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명상가의 내면에 어느 순간에 해프닝이 일어날지 모른다. 일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그런 일이 닥쳐올 수 있다. 그러므로 명상가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의 처음 세 가지 신체가 완벽하게 준비되면 그가 받아들인 에너지는 그의 안에서 순환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에너지가 첫 번째 신체에서 막혀 버린다. 이것은 해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명상가가 하나의 순환을 만들 수 있도록 최소한의 준비가 행해져야 한다. 이 준비는 쉽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는다. 결코 어렵지 않다. 신성을 일별 하는 정도까지는 삭티파트가 유용하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삭티파트는 해롭다. 삭티파트를 통해 쿤달리니가 강렬하게 속구 친다. 이 쿤달리니의 상승은 네 번째 신체까지만 올라간다. 그러나 이 정도면 일별을 얻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 후에 따르는 여행은 철저하게 개인에게 달린 문제다. 어두운 밤에 번개가 치면서 잠시 길을 보여 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일단 길이 보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이제 그대는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삭티파트는 조금 앞을 보여 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자선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직접 삭티파트가 주어지면 그것은 해를 미칠 수도 있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준비되지 않은 일반 대중이 항상 삭티파트나 이와 유사한 것들을 바란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무엇인가 공짜로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공짜로 얻는 것은 없다. 공짜로 얻은 선물의 대가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든지 공짜로 얻으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항상 값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실제로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을수록 우리는 더 가치 있는 것을 얻는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치를 수 있는 가장 비싼 값이다. 이틀 전에 한 여성이 내게 와서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이를 먹었고 죽을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내가 언제 깨달음을 얻을까요? 내가 죽기 전에 뭔가 해 주십시오." 나는 그녀에게 며칠 동안 명상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명상 따위로 골치를 썩기 싫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무엇인가 해 주십시오." 이제 이 여자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무엇인가 얻으려 하고 있다. 이런 욕심은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무엇인가 잃을 것이다. 명상하는 사람은 이런 식의 허황된 기대를 갖지 말아야 한다. 먼저 받을 자격을 갖추어야만 받을 수 있다. 이것을 진리로 믿어야 한다.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얻는다. 그보다 못한 것을 얻지는 않는다. 이것이 존재계의 법칙이며 우주의 법칙이다. 그대는 준비를 갖춘 정도만큼만 얻는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을 불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의 준비가 덜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항상 우리에게 불공정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우리는 항상 '나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확신하면서 존재계에 대해 불평한다. 우리는 자격을 갖춘 정도에 상응하는 것을 얻는다. 자격을 갖추는 것과 무엇인가 얻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기대한다. 이렇게 우리의 노력과 기대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이 문제다. 이 간격이 자멸을 초래한다. 이것은 매우 해로울 수도 있다. 허황된 기대를 갖고 우리는 무엇인가 얻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이런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반드시 그들을 착취하려고 전면으로 나서는 교활한 자가 있다. 그는 사람이 공짜로 얻으려고 하는 것을 주겠다고 제안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는 거의 아는 게 없다. 그는 어딘가 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나타난다. 이 방법의 효과는 크지 않겠지만 그래도 해악을 미칠 수 있다. 가령, 삭티파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육체의 자기장을 이용해 약간의 삭티파트를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면의 다른 여섯 가지 신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육체는 고유의 자력을 갖는다. 그래서 특정한 상황이 조정되면 그대는 이 자력을 통해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고대의 구도자들이 잠자는 중에 머리를 어느 쪽에 드느냐 하는 문제에 신중을 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어리나 발을 특정한 방향으로 두는 것을 피했다. 지구에는 고유의 자력이 있다. 명상가는 이 자력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끊임없이 자화될 수 있도록 유념해야 한다. 이 힘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잠을 자면 그대 몸의 자기장이 흐트러진다. 반면, 이 흐름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누우면 지구에 자성을 주고 지축을 형성하는 이 힘이 그대 몸의 자력 또한 강화시킬 것이다. 이 힘이 그대의 몸을 자력으로 가득 채운다. 이것은 자석 앞에 놓인 쇳조각이 자화되는 것과 같다. 자화된 후에 이 쇳조각은 핀이나 바늘 등 작은 물건을 끌어당기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듯 몸에는 고유의 자력이 있다. 이 힘이 지구의 자력과 적절하게 일치하면 그 혜택은 매우 크다. 하늘의 별들 또한 자력을 갖는다. 특별한 경우에 특정한 별이 특정한 자성을 갖는다. 이것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만일 그대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자세로 앉으면 특정한 별이 그대의 몸이 자화되도록 촉진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누구에게든지 자기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삭티파트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삭티파트가 아니다. 몸에는 고유의 전기가 있다. 이 전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되면 그대는 전구를 손에 잡는 것만으로도 5와트나 10와트의 불을 밝힐 수 있다. 이런 실험은 이미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전구를 손에 잡는 것만으로도 불을 켤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몸 안의 에너지는 이보다 훨씬 더 무한하다. 20년 전에 벨기에(belgium)의 한 여성이 난데없이 전기를 띠게 되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녀와 몸이 닿은 사람들은 누구나 전기 쇼크를 받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 당했다. 남편은 그녀의 몸에 닿을 때마다 쇼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이혼은 전세계에 화제를 일으켰다. 많은 실험을 거친 결과 그녀의 몸이 전기를 과잉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몸에는 많은 배처리가 있다. 이 배터리가 질서 정연하게 제대로 작용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질서가 흐트러지면 상당량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그대는 음식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이 에너지는 몸 속의 배터리들을 충전한다. 그대는 이 배터리를 충전할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지쳐서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밤 동안의 충분한 휴식과 잠이 그를 재충전한다. 그러나 그는 밤중에 그를 재충전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잠자는 동안 어떤 힘이 그에게 작용한다. 많은 연구가 행해진 결과, 이제 우리는 잠 속에서 어떤 종류의 힘이 그에게 작용하는지 안다. 원하기만 하면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이 힘이 주는 이점을 활용할 수 있다. 이 때 그는 그대에게 에너지 충격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자력조차도 아니다. 이것은 신체의 전기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삭티파트로 착각할 수 있다. 가짜 삭티파트를 일으키는 많은 방법이 있다. 이들 모두가 가짜다. 이 방법들은 신성한 에너지의 전이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신체의 자력과 전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대의 몸에 흐르는 전기의 순환을 파괴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도 그대에게 에너지 충격을 줄 수 있다. 신체 전기의 순환을 파괴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이 순환이 방해받으면 그대는 쇼크를 받는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충격을 느낀다. 이것은 그대 신체의 전기에서 오는 충격이다. 전기의 흐름이 방해받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모든 것을 상세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런 것을 상세하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불완전하다. 나는 이 거짓된 방편들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방편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에게는 이런 방법을 시도해 보고 싶은 충동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호기심은 아주 피상적이다. 어떤 신비주의자는 호기심을 죄악으로 언급했다. 인간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지만, 호기심이 인간으로 하여금 많은 죄악을 저지르게 만든다. 성경의 일화가 있다. 신은 아담에게 한 나무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허락했다. 이제 이 한 나무에 대한 호기심이 아담을 궁지로 몰아 넣었다. 원죄는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아담은 너무나 궁금했다. 이 나무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숲 속의 맛있는 나무 열매는 모두 허용하면서 이 평범해 보이는 나무의 열매는 왜 금지한 것일까? 이 나무에 무슨 특별한 점이 있길래?이런 생각이 들자 이 나무가 특별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다른 모든 나무가 무의미해 보였다. 그의 마음은 항상 이 나무에 가 있었다. 이 금지된 나무 열매를 맛보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호기심이 그를 이겼다. 기독교는 이것이 인간의 원죄였다고 말한다. 특정한 나무 열매를 맛보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원죄는 인간의 호기심이었다. 우리는 마음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을 뿐 탐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탐구는 우리가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까지 성장했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명심하라. 호기심과 탐구에는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결코 탐구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뿐 어느 것 하나도 전체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그는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열 가지 다른 것들이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이 때 그는 탐구할 수 없다. 내가 가짜 방편들에 대해 말한 내용은 미비한 점이 많다. 나는 이 방편들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음은 이런 방법들을 행하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거짓된 구두자가 힘을 추구하면 그는 이런 힘을 주는 가짜 안내자를 만난다. 이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다. 앞서 가는 소경이 구덩이에 빠지고, 그 뒤를 따라오는 소경들 또한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한번의 생이 아니라 여러 생에 걸쳐서 해를 미친다. 어떤 것을 부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다시 제대로 세우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니 이런 방면에 호기심을 갖고 뛰어들지 말라. 올바른 방향에서 그대 자신을 준비하라. 그러면 그대에게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일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쿤달리니, 초월의 원리 어제 당신께서는 초반의 세 가지 신체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쿤달리니의 각성과 삭티파트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또한 명상가는 궁극적인 해프닝을 위해 육체와 에텔체, 아스트랄체 등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이 점에 관련해서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사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신체 사이의 완벽한 조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 신체 사이에 조화로운 연결 관계가 없다면 쿤달리니의 각성은 심각한 해를 미칠 수도 있다. 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몇 가지 일이 있다. 첫째, 우리가 육체에 대해 둔감하고 주의 깊지 못하면 이 육체는 다른 신체들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내가 말하는 '둔감한'이란 육체에 대해 완전히 깨어 있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걸음을 걸을 때, 서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있을 때도 먹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육체로 어떤 행위를 하건 우리는 몽유병 환자처럼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다. 이 육체에 대해서 의식적이지 못하다면, 내면의 다른 신체에 대해 우리는 두 배는 더 무의식적이다. 내면의 신체들은 더 미묘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육체마저 자각하지 못한다면 비가시적인 미묘한 신체들에 대해서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이 신체들을 자각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자가(awareness)가 없으면 신체들 사이의 조화가 있을 수 없다. 이 조화는 자각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는 모든 조와가 깨진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할 일은 육체를 자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그 행동을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필수적이다. 그대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 한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길을 걸을 때는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라. 오른발이 앞으로 나갈 때 그대는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밤에 잠을 자다가 몸의 방향을 바꿀 때도 그대는 그것을 의식해야 한다." 붓다가 아직 구도자였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한 동료와 함께 마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붓다의 목에 앉았다. 그는 동료와 계속 이야기하면서 팔을 들어 파리를 쫓았다. 그런 다음 갑자기 붓다는 걸음을 멈추고 동료에게 말했다. "방금 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붓다는 다시 팔을 들어 파리를 쫓는 시늉을 했다. 동료가 놀라는 투로 말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파리는 이미 날아가고 없다." 붓다가 말했다. "지금 나는 마땅히 행해야 했던 방식에 따라 파리를 쫓고 있다. 지금 나는 나의 행동에 대해 완전히 깨어 있다. 나는 내 팔이 올라가서 파리를 쫓으려고 목 쪽으로 가는 것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다. 그런데 방금 전에는 당신과 이야기하면서 기계적으로 행동했다. 나는 내 몸에 죄를 지었다." 이렇게 모든 행동을 철저한 각성 상태로 행하면 육체와의 동일시가 깨진다. 철저하게 의식하는 상태로 한 손을 들어올리면 그대는 자신이 손과 분리되어 있음을 느낄 것이다. 왜냐 하면 '들어올리는 자'와 '들어 올려지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에텔체를 자각하는 출발점이다. 그 다음에는 전에도 말했듯이 이 두 번째 신체 또한 철저하게 자각해야 한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오케스트라에는 여러 종류의 악기가 연주된다. 만일 청중 가운데 한 번도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북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이 악기가 가장 큰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을 알기 시작하면 서서히 그는 더 미세한 음을 포착하게 될 것이다. 그의 자각이 늘어나면 그는 가장 미묘한 음까지 들을 것이다. 그 다음에 그의 자각이 더 즐어나면 그는 음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두 음 사이의 간격, 그 침묵의 틈을 자각할 것이다. 이 때 그는 음각을 완전히 이해한 것이다. 음 사이의 간격, 그 틈이 마지막으로 이해된다. 이 때 음악에 대한 그의 이해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음 사이의 침묵은 공유의 의미를 갖는다. 사실, 모든 음은 이 침묵을 두드러지게 하게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침묵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강조하느냐 하는 것이 음악의 핵심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그림을 본적이 있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림이 차지하는 공간은 조금밖에 안되고, 나머지 공간은 그냥 비어있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그림을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명상적인 태도로 그림을 그린 화가는 다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사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어디에도 명상가가 그림을 그린 곳은 없었다. 만일 이 화가에게 '이렇게 작은 그림을 그리려면 이 종이의 8분의 1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큰 종이를 낭비했는가?'하고 물으면 그는 '종이의 8분의 7에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나머지 8분의 1에 그림을 그렸다.'고 대답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비율이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나무를 그릴 때는 캔버스 전체를 나무가 차지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무가 작은 한 귀퉁이에 서 있어야 한다. 광대한 하늘과 비교하면 나무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비율이다. 나무가 캔버스에서 이 비율에 맞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만 이 나무가 살아난다. 우리의 모든 그림은 이 비율에서 벗어났다. 명상가가 음악을 만들면 소리보다 침묵이 더 많을 것이다. 음을 연결시켜 주는 침묵에 비하면 이 음표들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소리는 공의 침묵에 대한 힌트를 준다는 의미에서만 유용하다. 음악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침묵에 대한 감각이 더 예민해질 것이다. 물질적인 육체의 목적은 우리의 더 미묘한 신체들에 대한 인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육체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를 이런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육체에 고정되어 있다. 육체와의 무의식적인 동일시가 깊기 때문이다. 우리는 깊이 잠들어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만일 육체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면 그대는 두 번째 신체를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두 번째 신체 또한 고유의 활동 영역이 있다. 그러나 육체의 행동을 완전히 의식하기 전까지는 이 에텔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에텔체는 육체보다 더 미묘하기 때문이다. 육체의 활동을 철저하게 자각하면 그대는 두 번째 신체의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항상 그대 안에서 활동하는 에테릭 변동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거이다. 분노를 예로 들어보자. 분노는 에텔체에서 생겨나 첫 번째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기본적으로 분노는 두 번째 신체의 활동이다. 첫 번째 신체는 이 분노의 표현을 의한 매개체로 사용될 뿐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이 분노가 첫 번째 신체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것이 억압을 통해 행해지는 일이다. 내가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그대를 몽둥이로 때리고 싶지만 꾹 참는다. 때리는 행위는 첫 번째 차원의 일이다. 이제 분노의 표현은 없다. 심지어 그대에게 이 소를 지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에 가득 찬 분노는 나의 두 번째 신체 전체로 퍼져 나간다. 우리는 표현의 차원을 억제한다. 이것이 분노의 억압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분노는 그 진원지인 두 번째 신체에 현존한 그대로 남아 있다. 육체에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면서부터 그대는 내면에 일어나는 사랑, 분노, 미움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이들이 현존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신체에서 떠 어르는 이런 감정들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감정들을 억압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대는 이 감정들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이 감정들이 첫 번째 신체에 도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대는 이 감정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조차 많지 않다. 그대는 이 감정들이 다른 사람의 몸에 가서 닿은 다음에야 이 감정들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대는 다른 사람의 뺨을 때리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닫는다. 우리는 이 정도로 둔감하다. 뺨을 때리고 난 다음에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모든 감정은 에텔체에서 솟아난다. 그러므로 나는 에텔체를 감정체로 부르기도 한다. 에텔체는 고유의 작용이 있다. 에텔체에는 분노, 사랑, 미움, 불안을 위한 고유의 움직임이 있다. 그대는 이 진동을 알게 될 것이다. 두려움을 느낄 때 에텔체는 위축된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느끼는 위축감은 첫 번째 신체의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신체는 변한 이 없다. 그러나 에텔체의 이 수축 현상은 그대의 걸음걸이, 앉는 방식 등에 영양을 미친다. 그대는 내내 위축된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똑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 말을 더듬거리고, 걸을 때는 다리가 떨릴 것이다. 글씨를 쓸 때는 손이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글씨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든지 식별할 수 있다. 결코 어렵지 않다. 여자의 글씨는 곧지 않다. 아무리 균형이 잡히고 잘 썼다 해도 거기엔 떨림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성적인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여자의 몸에서 온다. 여자는 항상 두려움에 떤다. 여자의 퍼스낼리티 자체가 겁이 많다. 그러므로 여자와 남자의 글씨를 구별하는 것은 아무 어려움이 없다. 또한 우리는 남자의 글씨를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겁이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손가락 구조는 다르지 않다. 그들이 펜을 잡는 방식도 똑같다. 첫 번째 신체에 관한 한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러나 두 번째 신체의 차원에서 보면 여자는 두려움이 많다. 현대의 여성들도 아직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우리의 사회, 문화, 사고 방식은 아직 여성을 대범하게 만들지 못했다. 여자는 항상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진동은 그녀의 퍼스낼리티 전체로 퍼져 나간다. 남자들의 대범함과 두려움의 정도도 그들의 글씨를 통해 알 수 있다. 두려움은 에텔체의 차원에 있다. 나는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에텔체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도 자각해야 한다. 사랑 안에 있을 때 그대는 자신이 확장된 느낌을 받는다. 사랑 안에서 느껴지는 자유는 이런 확장 현상 때문이다. 이제 그대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앞에 있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현존 안에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대가 가진 모든 능력이 활짝 피어난다. 사랑의 순간에 확장감이 경험된다. 육체는 변함이 없지만 에텔체가 꽃처럼 피어나고 확장된다. 명상 중에 에텔체가 경험된다. 명상가는 방안을 가득 채울 만큼 육체가 확장되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변함이 없다. 눈을 떴을 때 ,육체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란다. 하지만 이 확장의 느낌은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안다. 분명히 어떤 경험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온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것은 에텔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확장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에텔체는 감정에 따라 확장되기도 하고 수축하기도 한다. 에텔체는 지구를 가득 채울 만큼 확장될 수도 있고 원자 안에 들어갈 만큼 수축될 수도 있다. 이렇게 그대는 에텔체의 움직임, 그 확장과 수축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에서 확장이 일어나고 어떤 상황에서 수축이 일어나는지 주목하기 시작한다. 만일 구도자가 에텔체가 확장되는 상황 속에서 살기 시작하면 조화가 창조될 것이다. 반면, 에텔체가 수축되는 상황 속에서 살면 두 신체 사이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화장은 에텔체의 본성이다. 최대한으로 확장되고 피어났을 때 이 에텔체는 첫 번째 신체와 연결된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수축되면 에텔체는 첫 번째 신체와의 모든 연결이 끊어지고 따로 떨어진 채로 궁지에 몰린다. 이 두 번째 신체에 일어나는 다른 현상들이 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방법에 의해 알 수 있다. 가령,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말하면 그는 파랗게 질려 버릴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신체는 예전과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에텔체에 즉각 변화가 일어난다. 그의 에텔체는 육체를 떠날 준비를 한다. 따라서 두 신체 사이에 큰 간격이 벌어진다. 이렇듯 그대는 두 번째 신체의 미묘한 작용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에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의 움직임조차 관찰하는 데 실패한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난관이다. 육체를 관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 번째 신체의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신체의 작용에 대해 명확한 앎을 얻게 되면 이 앎 자체가 두 신체 사이에 조화를 창조할 것이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아스트랄체가 있다. 세 번째 신체의 작용은 더 미묘하다. 두려움, 분노, 사랑, 미움보다 더 미묘하다. 두 번째 신체에 대한 앎이 완성되지 않는 한 세 번째 신체의 움직임을 알기란 어렵다. 첫 번째 신체를 통해서는 세 번째 신체를 포착하는 것조차 힘들다. 간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 번째 신체에 대해서도 무의식적이다. 두 번째 신체는 첫 번째 신체와 좀더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번째 신체에 대해 몇 가지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신체는 우리는 옆집과 같다. 가끔씩 우리는 그릇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나 아이가 우는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세 번째 신체는 옆집의 옆집이다. 우리는 그 집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세 번째 신체에 일어나는 현상은 훨씬 더 미묘하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감정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농축된 감정은 행동이 된다. 아스트랄체의 진동은 감정의 파장보다 더 미묘하다. 그러므로 그대가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 한 나는 그대가 내게 화가 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나는 그대의 분노가 행동이 되었을 때만 비로소 이 분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행동화되기 전의 분노를 알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의 에텔체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분노에는 에텔체에서 오는 고유의 원자가 들어 있다. 이 원자들이 떠오르지 않으면 분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스트랄체를 진동의 집합체로 보아도 무방하다. 다음의 예를 보면 이 신체의 상이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물과 산소, 수소를 따로 분리시켜 볼 수 있다. 그런데 산소에는 물의 흔적이 없다. 물 속에도 산소의 자취가 없다. 수소도 산소도 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둘이 결합하면 물이 탄생한다. 이 둘이 결합되었을 때 각자 갖고 있던 숨은 성직이 표면화된다. 아스트랄체 안에서 분노와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미움과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진동을 가지며, 두 번째 신체와 결합되었을 때 이 진동이 현현된다. 따라서 그대의 두 번째 신체를 완전히 자각하면, 분노를 완전히 의식하면, 이 때 그대는 분노가 출현하기 전에 어떤 조짐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노가 출발점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분노는 이미 어딘가 에서 일어난 현상 다음에 오는 것이다. 호수 밑바닥에서 거품이 솟아오른다. 호수 바닥의 모래에서 거품이 솟아오를 때 우리는 이 거품을 볼 수 없다. 이 거품은 중간쯤 올라왔을 때도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표면 가까운 곳으로 올라와서야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 이 거품은 아주 작다. 그렇지만 표면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진다. 위로 올라올수록 물의 무게와 압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품은 위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깊은 곳에서는 물위 압력이 이 거품을 작게 만든다. 그렇지만 위로 올라올수록 압력이 줄어들고, 표면에 닿을 때쯤이면 거품의 크기가 최대한으로 더 가까워진 다음의 일이었다. 마침내 표면가지 떠올랐을 때 우리는 거품의 모습 전체를 볼 수 있었다. 그 리 고 다 음 순간 거품은 터져 버렸다. 분노의 거품은 첫 번째 신체에 도달할 즈음 최 대 한 으 로 부풀었다가 터져 버린다. 이 분노는 표면에 닿아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원하기만 하 면 그대는 이 분노를 두 번째 신체에서 정지시킬 수 있다. 이것이 억압이다. 에 텔 체 를 자 세 히 들여다보면 그대는 이 분노가 이미 어느 정도의 거리를 여행해 왔다는 것을 알 고 깜 짝 놀 랄 것이다. 분노는 본래의 장소에서 에너지의 진동 형태로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기 본 적 으 로 서로 다른 물질은 없다. 에너지의 입자는 똑같지만 그 조합이 다를 뿐이다. 석 탄 과 다이아몬드는 똑같다. 에너지 입자의 조합이 다를 뿐이다. 물질을 기본적인 구 성 요 소 로 나누어 보면 최후로 남는 것은 전기적 에너지다. 이 에너지의 상이한 조합이 서 로 다 른 물체를 형성한다. 모든 물체는 표면에서만 다를 뿐이다. 깊은 곳에서 보면 모 두 가 하 나 다. 만일 에텔체를 자가하고 감정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대는 돌연 아 스 트 랄 체 안 에 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 곳에서 그대는 분노는 분노가 아니고 용서는 용서가 아 니 라 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분노와 용서 안에서 똑같은 에너지가 진동한다. 사랑과 미 움 의 진동 안에 있는 에너지는 똑같다. 다만 진동의 성질이 다를 뿐이다. 흔히 사랑이 미 움 으 로 변하기도 하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기도 한다. 우리는 정반대 되는 것들이 어 떻 게 이 런 식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예를 들어,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 도 있 다. 이 때 그대는 '내가 속았다. 그는 친구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할 것 이 다. 어떻게 친구가 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정과 적 안에 진동하는 에 너 지 는 똑같다. 진동의 성질이 다를 뿐이다. 차이점은 파장의 구조에 있다. 우리가 아 침 에 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저녁에는 증오가 된다. 오후에는 사랑이 있었는데 저 녁 때 는 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한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는 아침에는 사랑하고 저 녁 에 는 미워한다. 프로이트( freud)는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 람 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으로 다른 신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다라서 그는 더 이 상 연 구 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매우 표피적이다. 그는 엄마와의 관계가 아 이 가 경험하는 최초의 관계라고 말한다. 엄마는 아이가 사랑하는 최초의 대상이다. 엄마가 관심을 쏟고 보살필 때 아이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러나 엄마가 꾸짖고 벌 을 주 면 그는 엄마를 미워한다. 이렇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두 가지 느낌이 아이의 마 음 을 채 운 다. 아이는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미워한다. 어떤 때는 엄마를 죽이고 싶고, 어떤 때 는 엄마가 호흡 같은 존재여서 그녀가 없으면 살구 없을 것 같다. 이런 이중적인 생 각 이 엄마를 사랑과 미움의 최초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런 연상 작용이 마음속에 깊 이 뿌 리 박혀서 나중에 그는 누구를 사랑하든 한편으로는 미워하게 된다. 이것이 매우 표피적인 발견이다. 이것은 표면으로 올라와 터지기 직전의 거품을 발견한 것과 같다. 만일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는 한편 미워할 수 있다면, 이 것 은 사랑과 미움의 차이가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라는 것을 의미하다. 사랑과 미움이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표현될 수는 없다. 이 두 지 감정이 공존하는 것은 서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두 가지 감정의 파장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왕래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마음속에 모순된 감정들이 가득 찬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세 번째 신체로 들어간 다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내게 와서 엎드려 절하며 '존경하는 스승님!'하고 찬양한다. 그가 저녁때 다시 와서는 내게 욕을 퍼부으며 '당신은 사탄이다!' 하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그가 다시 와서 '존경하는 스승님.'하고 부르면서 엎드려 절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내게 와서 '그가 당신을 신으로 부르건 사탄으로 부르건 개의치 마십시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하고 충고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지 않다. 그의 말은 똑같은 스펙트럼(spectrum)에 속한다. 그의 말들은 똑같은 사다리의 칸들이다.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음은 대립되는 한 쌍 중 하나를 붙잡는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가 어디로 가겠는가? 두 번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의 아래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이 제 스스로 지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 첫 번째 부분은 지쳐 버린다.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존경하는 스승님.'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가 지치는 즉시 두 번째 부분이 위로 올라와 '이 사람은 사탄이다.'하고 말하도록 그를 자극한다. 이제 이 부분들은 둘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다. 대립되는 감정들이 똑같은 에너지의 형태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 우리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한편 미워한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느끼면서 그를 죽이고 싶어한다. 깊은 곳에서 보면 우리의 친구는 한편으로 적이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다. 관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이것이 큰 문제로 대두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여러 가지 감정들의 밑에 흐르는 에너지는 똑같다는 것이다. 에너지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흔히 우리는 빛과 어둠을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틀린 시각이다. 과학적인 개념으로 보면, 어둠은 빛이 최소한으로 존재하는 상태다. 노력하기만 하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할 것이다. 빛이 없는 곳에는 어둠도 없다. 우리의 장비가 이것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의 눈은 어둠 속에서 빛을 식별할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똑같은 차원에 있다. 그들은 동일한 에너지의 다른 형태며 진동이다. 다른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쉽겠다. 우리는 빛과 어둠을 완전히 대립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차가움과 뜨거움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대립된다고 믿지 않는다. 한가지 재미있는 실험해 보라. 한 손은 날로 불로 뜨럽게 만들고, 다른 손은 얼음으로 차갑게 식혀라. 이제 양손을 실내 온도와 같은 물 속에 집어넣어 보라. 그대는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판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 손은 뜨겁게 느낄 것이고, 다른 손은 차갑게 느낄 것이다. 양손 모두 그대의 손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결정하기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사실, 차가움과 뜨거움은 두 개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상대적인 경험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차갑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더 뜨겁다.'는 의미밖에 없다. 어떤 것을 뜨겁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더 차갑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대상 사이의 온도 차이를 표현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이밖에 다른 의미는 없다. 사실은 뜨거운 것도 없고 차가운 것도 없다. 또는 차가운 것이 또한 뜨거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잘못된 개념이다. 우리의 '온도' 라는 개념으로 말해야 한다. 이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과학자들은 뜨거움과 차가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의 온도에 수많은 등급이 있다고 말한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시적인 용어다. 과학에서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용어는 아무 내용도 전달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방으로 들어와 '이 방은 춥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무슨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이 방은 결코 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열병에 걸렸기 때문에 춥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의 체온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한방의 온도에 대한 그의 평가는 무의미하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방이 더운지 추운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 다만 방의 온도가 몇 도인지에 대해서만 말하라." '섭씨 몇도'라는 표현에는 뜨거움이나 차가움이라는 암시가 없다. 다만 온도에 대한 정보를 줄뿐이다. 만일 온도가 그대의 체온보다 낮으면 그대는 차갑게 느낄 것이고, 그대의 체온보다 높으면 뜨겁게 느낄 것이다. 빛과 어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우리의 보는 능력에 달린 문제다. 우리에게는 밤이 어둡게 보이지만 올빼미에게는 그렇지 않다. 올빼미에게는 낮이 아주 어둡게 보인다. 올빼미는 인간을 낮이 아주 어둡게 보인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동물인가? 그들은 낮에 잠자고 밤에 깨어 있다!" 흔히 인간은 올빼미를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올빼미가 인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올빼미에게는 낮이 밤이고, 밤이 낮이다.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들 중에도 많은 현자가 있다. 그런데 이 현자라는 사람들까지도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낮이 되면 잠자리에 든다. 이 어처구니없는 동물들은 깨어 일어나서 활동할 시간만 되면 잠자리에 든다." 올빼미는 밤중에도 사물을 볼 수 있다. 올빼미에게는 밤이 어둡지 않다. 사랑과 미움의 진동은 빛과 어둠의 진동과 같다. 그들은 고유의 비율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차원을 깨닫기 시작하면 그대는 이상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사랑과 미움이 더 이상 그대의 선택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대는 사랑과 미움이 똑같은 것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를 선택하면 그대는 자동적으로 다른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선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세 번째 차원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요구하면 그는 미움 또한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대는 '아니오. 나는 사랑만 원합니다. 제발 내게 사랑을 주십시오.'하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미움의 진동이 갖는 또 다른 양상이다.'하고 응답할 것이다. 실제로 진동은 똑같다.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기쁨을 주는 형태고, 미움은 불쾌함을 주는 형태다. 그러므로 세 번째 차원을 자각한 사람은 대립되는 한 쌍들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다. 그는 지금가지 두 개의 대립물로 보아 온 것이 실제로는 하나며 똑같다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알게 될 것이다. 두 개의 대립되는 가지는 똑같은 나무 기둥에 속한다. 그는 하나의 가지를 지키기 위해 다른 가지를 파괴하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크게 웃을 것이다. 그 전까지 그는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며, 깊은 곳에서 나무는 똑같다는 것을 몰랐다. 이 세 번째 차원을 알려면 두 번째 차원을 자각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세 번째 신체는 매우 미묘한 진동을 갖기 때문이다. 거기에 감정은 없다. 진동이 있을 뿐이다. 세 번째 신체의 진동을 이해하면 그대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을 어떤 진동이 둘러싸고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진동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대 자신의 진동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신체에서 나오는 이 진동은 모든 사람의 머리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붓다, 마하비라, 크리슈나, 라마의 초상화에는 후광이 묘사되어 있다. 이 후광이 그들의 머리 부분에 나타나는 오라(aura)다. 이들의 오라는 특별한 색깔을 갖는다. 세 번째 신체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이 색깔들을 보게 된다. 이 색깔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대는 자신의 오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오라도 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의 내부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만큼 다른 사람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체밖에 모른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육체밖에 보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에텔체를 알게 되는 날 우리는 타인들의 에텔체도 보기 시작할 것이다. 화가 나기 전에 '나는 화가 날 것이다.'하고 미리 아는 것이 가능하다. 사랑을 표현하기에 앞서 '나는 사랑을 위해 준비중이다.'라는 것을 쉽게 점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느낌을 읽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체를 자각하면 타인의 느낌을 포착하는 것이 쉬워진다. 감정체의 진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원을 자각하면 상황이 아주 분명해진다. 이 때 우리는 퍼스낼리티의 색깔을 볼 수 있다. 사두(sadhus)와 산야신(sannyasin)의 옷 색깔은 세 번째 신체에서 본 색깔에 의해 결정되었다. 어떤 신체가 강조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이 선택되었다. 가령, 붓다는 노란색(yellow)을 선택했다. 그는 일곱 번째 신체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 사람의 오라는 노란 색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의 비구(bhikkhus)들을 위해 노란색을 선택했다. 불교의 비구들이 인도에 남아 있기 어렵게 된 것은 이 색깔 때문이었다. 노란 색은 죽음과 동일시된다. 실제로 노란 색은 죽음의 색이다. 일곱 번째 차원은 궁극적인 죽음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란 색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오렌지색은 삶의 느낌을 준다. 오렌지색 로브(robe)를 입은 산야신들은 노란 색 옷을 입은 산야신들보다 더 매력적이다. 그들은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오렌지색은 여섯 번째 신체의 오라 색깔이다. 이것은 떠오르는 태양의 색깔이다. 자이나교는 흰색을 선택했다. 이것은 다섯 번째 신체, 영체의 색깔이다. 자이나교는 신을 홀로 내버려두라고 강조한다. 신에 대해 토론하지 말고, 니르바나(nirvana)에 대해 논하지도 말라. 과학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수학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 이상 넘어가면 그는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오류가 될 수도 있는 차원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신비주의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마하비라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그 속으로 들어가 직접 그것을 경험하라.'고 말했다. 그는 다섯 번째 차원이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하얀 색을 선택한 이유다. 하얀 색은 다섯 번째 차원의 색이다. 세 번째 차원에서부터 그대는 내면의 미묘한 전동에서 비롯되는 색깔들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 색깔들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맨눈으로도 이 색깔들을 볼 수 있다면 카메라의 눈에도 이 색깔들이 잡힐 날이 멀지 않았다. 그 때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성향을 알아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루체프(luschev)라는 독일의 사상가가 있다. 그는 색깔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병원에서 그의 실험 결과를 응용하고 있다. 그대가 선택한 색깔은 그대의 퍼스낼리티를 말해 준다. 특정한 병에 걸린 사람은 특정한 색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건강한 사람은 전혀 다른 색을 선택한다. 평온한 사람이 선택하는 색깔도 다르다. 야심만만한 사람이 선택하는 색깔은 야심 없는 사람이 택하는 색깔과 크게 다르다. 그대가 선택하는 색깔은 그대의 세 번째 신체 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힌트를 준다. 그대의 세 번째 신체에서 나오는 색깔을 포착한 다음에 그대가 선호하는 색깔과 비교해 보면 동일한 색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그대는 자신의 세 번째 신체에서 방출되는 색깔과 유사한 색을 선택할 것이다. 색깔은 엄청난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다. 색깔이 그대의 퍼스낼리티를 알려 줄 정도로 의미 심장하다는 사실은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색깔이 그대 내면의 퍼스낼리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도 아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는 이런 사실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예를 들어, 붉은 색을 보자. 붉은 색은 항상 혁명과 연관된다. 붉은 색은 분노의 색이다. 이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붉은 색 깃발을 사용했다. 격분한 마음의 주변에는 붉은 색 오라가 있다. 이것은 피의 색이며 살인의 색이다. 분노와 파괴의 색이다.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붉은 색으로 칠하면 거기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의 혈압이 상승한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빨간 색과 더불어 살아가면 그의 혈압은 결코 정상이 될 수 없다. 파란색은 혈압을 떨어드린다. 파란색은 하늘의 색, 적대적인 평정의 색이다. 사방에 파란색이 있으면 그대의 혈압이 떨어질 것이다. 색깔은 인간뿐만 아니라 물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파란색 병에 물을 담아 햇볕에 놔두면 물의 화학 성분이 변한다. 이 물은 인간의 혈압에 효과가 있다. 마찬가지로, 노란 색 병에 물을 담아 햇볕에 놔두면 그 성질이 변한다. 파란색 병에 담긴 물은 며칠이 지나도 신선하지만, 노란 색 병에 담긴 물은 금방 상해 버릴 것이다. 노란 색 죽음의 색이다. 이 색은 사물을 분해한다.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서 이런 색깔들이 선회하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세 번째 차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세 가지 신체를 자각하면, 이런 자각 자체가 세 가지 신체 사이에 조화를 창조할 것이다. 이 때는 어떤 종류의 삭티파트도 해를 미칠 수 없다. 삭티파트의 에너지가 세 가지 신체의 조화로운 층을 통과해 네 번째 신체로 들어갈 것이다. 에너지가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이 길을 따라 순조롭게 여행할 것이다. 이런 길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많은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처음의 세 가지 신체가 강해지고 적합하게 조율되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야만 성장이 순조롭게 일어날 수 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또는 일곱 번째 차크라가 열린 사람이 죽으면 그드르이 차크라는 다음 생에서 어떤 상황에 놓일까요? 몇 번째 차원의 사람들이 사후에 모체의 높은 영역에 머물게 됩니까? 무체의 존재도 궁극적 깨달음을 얻으려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나는 일곱 가지 신체에 대해 이미 말했다. 이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우리는 존재 또한 일곱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일곱 가지 신체 모두는 항상 현존한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활동 중이건 동면 중이건, 추하건 아름답건 그들은 항상 존재한다. 쇳조각 하나에도 일곱 가지 신체 모두가 현존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잠들어 있다. 그들 모두가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쇳조각은 죽은 것처럼 보인다. 다음으로 식물을 보자. 식물 안에서는 첫 번째 신체가 활동하고 있다. 그 물질적인 육체가 살아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물 안에서 삶의 첫 번째 조짐을 본다. 그 다음으로 동물이 있다. 동물은 두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었다. 식물에 없었던 움직임이 동물로부터 시작된다. 식물은 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항상 그 곳에 머문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두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모든 움직임이 에텔체로부터 비롯된다. 물질적인 육체만 깨어나서는 움직일 수 없다. 식물은 한자리에 고정된 동물이다. 자고 움직이는 식물들이 있다. 그들은 식물과 동물의 중간 상태에 있다. 아프리카의 늪지대에는 1년에 20피트나 25피트씩 이동하는 식물들이 있다. 그들은 뿌리를 이용해 흙을 움켜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이동한다. 그들은 식물과 동물 사이의 혁명적인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 동물 안에서는 두 번째 신체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두 번째 신체가 자각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두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물은 이 두 번째 신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동물은 분노를 경험한다. 동물은 사랑을 표현할 수 도 있다. 그들은 달릴 수도 있고, 자신을 방어하기도 한다. 두려움을 경험하는가 하면 공격을 가할 수도 있고 자신을 은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두 번째 신체가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는 세 번째 신체가 활성화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적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갖고도 움직일 수 있다. 인간은 마음의 여행을 할 수 잇다. 인간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하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내일이 없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전부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조차 없다. 내일이 없는 그들에게 오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있는 것은 그저 있는 것이다. 인간 안에서 더 미묘한 움직임이 생겨난다. 마음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마음은 세 번째의 신체, 아스트랄체에서 온다. 인간은 마음의 도움을 빌어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사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서도 근심할 수 있다. 또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네 번째 신체는 소수의 사람들 안에서만 활동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네 번째 신체가 활성화된 후에 죽으면 그는 데바(deva)의 차원, 신들의 차원에 태어난다. 그 것에는 네 번째 신체가 활동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신체가 활동하는 데 그치면 인간은 그저 인간으로 남는다. 네 번째 신체부터 더 높은 차원에서의 탄생이 시작된다. 네 번째 신체의 차원이 갖는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네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면 물질적 육체를 얻을 가능성은 줄어들고 형상 없는 존재(bodiless being)의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그러나 내가 전에 말했듯이, 활성화(activation)와 의식(consciousness)의 차이점을 잊지 말라. 네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었을 뿐 의식적이지 못한 상태를 우리는 프레타(preta)의 차원,악령의 차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네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의직적인 상태를 우리는 데바(deva)의 차원, 성령의 차원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프레타와 데바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성령은 네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반면 악령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프레타는 네 번째 신체의 활동에 의해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 반면 데바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선한 행위를 할 것이다. 자각(awareness)은 오로지 좋은 혜택만 줄 수 있다. 다섯 번째 신체가 활성화된 사람은 데바의 차원을 넘어간다. 다섯 번째는 영체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 활성화와 각성은 하나며 같은 것이다. 각성이 없으면 아무도 다섯 번째 차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차원에서는 활성화와 각성이 동시에 일어난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각성이 없어도 도달할 수 있다. 그대가 깨어있으면 여행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 길은 데바의 차원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하면 그대의 여행은 악령의 차원으로 들어갈 것이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활성화와 각성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것이 아트만 샤리르(atman sharir)의 차원이다. 그리고 아트만에 관한 한 비각성은 통용되지 않는다. 아트만 자체가 의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트만의 다른 이름이 '의식'이다. 여기에서 무의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다섯 번째 신체부터는 활성화와 각성이 하나며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두 길이 분리되어 있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 잠과 깨어있음이라는 차이가 있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이원성과 마찰이 있다. 다섯 번째 차원부터 비로소 비이원성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통합적인 일원성이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다양성과 차별성이 있다. 다섯 번째 차원은 프레타의 차원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데바의 차원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프레타에는 다섯 번째 신체가 불가능하다. 프레타의 차원에는 무의싯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몸을 갖지 못한다. 그들에는 각성으로 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첫 번째 신체가 없다. 그러므로 프레타는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교하로에 서 있다. 데바의 차원은 인간보다 위에 있지만 인간을 초월하지 못한다. 인간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차원으로 돌아오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데바는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들의 존재에는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성된 존재이므로 고통이 없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명상에 대한 열망이 생길 수 없다. 고통이 없는 것에는 변형이나 깨달음에 대한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데바의 차원에는 아무 진보도 없다. 고통과 번뇌가 있는 곳에 성장을 바라는 염원이 있다. 고통은 우리를 자극하여 번뇌와 슬픔에서 해방되는 길을 발견하도록 부추긴다. 행복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추구가 끝난다.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하비라와 붓다의 삶에는 천상의 신들(devas)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들에게 내려왔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데바가 인간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데바는 인간보다 위에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천상의 존재는 고정되어 있다. 그 곳에는 아무 성장이 없다. 앞으로 점프하려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야 하듯이 , 데바는 인간의 차원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점프해야 한다. 행복에는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다. 이것이 행복이 갖는 하나의 특징이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행복은 지겨움을 낳는다. 행복만큼 권채를 불러 오는 것은 없다. 불행은 지겹지 않다. 불행한 마음은 결코 권태롭지 않다.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은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과 불행이 만연한 사회에는 불만이 없다. 행복한 사람이나 행복한 사회만이 불만을 느낀다. 인도는 미국처럼 불망에 가득 차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가난하고 불행한 반면 미국은 풍족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추구할 것이 없다. 더 성장하도록 그들은 부추길 고통이 없다. 게다가 행복은 반복적이다. 똑같은 기쁨과 즐거움이 계속 반복되면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데바의 차원은 권태의 절정이다. 우주에 이보다 지겨운 곳은 없다. 그 곳에는 극심한 권태가 있다. 그러나 권태가 개발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또한 권태는 개인의 감수성(sensitivity)에 의존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 빨리 권태를 느낀다. 그리고 둔감한 사람일수록 권태를 느끼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결코 권태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버팔로(buffalo)는 날마다 똑같은 풀을 먹지만 결코 질리지 않는다. 감수성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권태는 개인의 감수성과 비례한다. 감수성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날마다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감수성은 일종의 불안함이다. 뒤집어 보면 이것은 일종의 생동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데바의 차원은 죽음의 영역이다. 프레타의 차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데바의 차원이 더 죽어 있다. 프레타의 세계에는 상당량의 고통이 있다. 자신의 향락을 추구하고 타인을 괴롭히려는 시도가 있다. 고통을 부추기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그 곳에는 불안감을 일으키는 충분한 시도가 행해진다. 그러므로 권태가 있을 없다. 데바의 세계는 매우 평화롭다. 어떤 혼란도 없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데바의 영역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권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데바의 차원은 인간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곳에서는 감수성이 증가한다. 인간으로 융화된 삶에서는 몇 년이 지나도 지겹지 않은 향락이, 데바의 차원에서는 일단 한번만 즐기고 시들하고 지겨워진다. 푸라나(purana)에서 '신들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열망한다.' 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소리로 들린다. 지상에 사는 우리는 데바의 차원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데바가 여자와 사랑에 빠져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전성은 마음의 상태를 암시한다. 데바가 여자와 사랑에 빠져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전설은 마음의 상태를 암시한다. 데바의 영역에는 행복이 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지겨움이기도 하다. 고통과 슬픔의 자취도 없이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 있기 때문이다. 이 때 행복은 지겨워진다. 만일 슬픔의 그림자도 없는 무한한 행복과 고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데바의 영역에서 돌아와야 한다. 프레타의 영역에서도 돌아와야 한다. 인간은 교차로에 서 있다. 이 교차로에서 모든 방향으로 여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데로도 갈 필요가 없다. 그가 들어간 차원에는 더 이상 자궁을 통한 탄생이 없다 그는 엄마의 자궁을 통해 환생하지 않는다. 아트만을 얻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여행을 끝낸 사람이다. 다섯 번째 신체는 해탈(liberstion)의차원이다. 만일 그가 자기 안에서 만족을 느낀다면 무한한 세월 동안 이 차원에 머물 수도 있다. 이 곳에는 고통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속박도 없고 번뇌도 없기 때문이다. 그 곳에는 오직 그 자신의 존재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주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길 때까지는 이런 상태에 영원히 머물 수 있다. 탐구의 씨앗은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탐구심이 생시는 것이다. 만일 구도자가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처음부터 키워 나간다면 그는 다섯 번째 신체에 정착하고 마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곱 가지 신체의 과학에 대해 알고 있다면, 처음부터 그대는 자신의 탐구심이 궁극적인 완성의 단계에 이른 것으로 느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대는 핵심을 놓칠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 탄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안에 존재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떨러져 나왔지만 그 자신으로 남아야 한다. 그는 에고를 제거했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다(i am).'은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에고는 타인에 대항하는 하나의 주장(claim)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라. 내가 말하는 '나'는 '너'를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가 '너'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을 때 자만심이 생긴다. 다른 사람의 '나'에 의해 정복당했을 때 그대의 '나'는 불행해진다. '나'는 항상'너'를 지배하려고 노력하다. 그러므로 에고는 항상 타인과의 비교 아래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 다섯 번째 차원에는 더 이상 타인이 없다. 타인과의 비교가 없다. 이 '즉자성(즉자성: i-ness)', 아스미타(asmita)는 자족의 상태다. 이것이 에고와 아스미타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이차원에서 나는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나'에 대한 주장이 없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존재는 있다. 나는 더 이상 타인과 대항할 필요가 없다. 비교의 대상인 '너'가 없다.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는 여전히 있다. 에고는 'i'를 말할 것이고 존재는 'am'을 말할 것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i am'안에는 두 가지 개념이 들어 있다. 'i'는 에고고 'am'은 존재다. 즉자성이라는 느낌은 아무에게도 대항하지 않는다. 즉자성은 스스로 자족한다. 이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세상에 다른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3차 대전이 일어나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나는 살아 남아야 한다. 내 안에서 에고가 사라져도 '즉자성'이라는 느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내게는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대가 절대적으로 혼자고 타인이 없을 때도 그대는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섯 번째 신체에서 에고가 사라진다. 속박의 사슬을 잇는 가장 강한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즉자성이라는 느낌은 남는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경계가 없고, 아무 집착도 없는 '나'가 살아 남는다. 그러나 이 즉자성에도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 즉자성이라는 경계를 제외하고 모든 경계가 사라졌다. 여섯 번째 차원에서는 이 즉자성 또한 떨어져 나간다. 또는 초월된다고 할 수 있다. 여섯 번째는 코스빅체다. 자궁을 통한 탄생은 다섯 번째 신체에서 끝난다. 그러나 여전히 탄생이 일어나야만 한다.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하라. 하나의 탄생은 엄마의 자궁에서 오고, 다른 탄생은 그대 자신 안에서 온다. 이 나라에서 우리가 브라민(brahmin)을 드위즈(dwij),두 번 태어난 사람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이 용어는 브라흐마 기야니 (brahma gyani), 브라흐만을 아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깨닫지도 못한 사람을 브라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전혀 다른 종류의 두 번째 탄생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드위즈'로 불렀다. 깨달은 사람이 브라민으로 불려졌다. 하나의 탄생은 타인의 자궁을 통해서 오고, 다른 탄생은 그대 사진에게서 온다. 일단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하면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태어날 수 없다. 이제 그대는 다섯 번째 신체를 통해 여섯 번째 신체 안에 태어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대 스스로의 내적인 임신이며 내적인 탄생이다. 이 탄생은 외부의 자궁, 외적인 창조 수단과 아무 관계가 없다. 이제 그대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 그대 스스로 아버지고 어머니며, 그대 스스로 아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여행이다. 다섯 번째 신체를 통과해 여섯 번째 신체로 들어간 사람만이 '드위즈'로 불린다. 그 전에는 안된다. 그는 외적인 수단의 도움 없이, 외부의 자궁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다. 우파니샤드에서 한 리쉬(rishi)는 이렇게 말한다. "오, 주여. 실체가 숨겨져 있는 내면의 자궁, 이 자궁으로부터 황금의 껍질을 벗겨 주소서." 껍질은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이 껍질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 황금의 껍질을 보존하려고 애를 쓴다. '즉자성'이 우리를 덮고 있는 가장 소중한 껍질이다. 우리는 이 껍질과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이 껍질을 보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외적 장애물도 없다. 이 껍질은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리쉬는 말한다. "황금의 껍질을 벗겨 주소서. 그리고 두 번째의 탄생을 만드는 내면의 자궁을 열어 주소서." 브라흐마 기야니, 브라흐만을 아는 사람들이 '두 번 탄생한 사람'으로 불러졌다. 브라흐마 기야니는 여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다섯 번째에서 여섯 변째로 가는 차원에는 탄생이 있다. 그러나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로 가는 차원에는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에서 일곱 차원으로 가는 사람은 '드위즈'로 불리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드위즈'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 내 말을 이해하는가? 이젠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 차원으로 가는 길에는 자기 자신을 통한 탄생이 있다. 그리고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차원으로 가는 길에는 자기 자신을 통한 죽음이 있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태어났다. 우리느 다른 사람의 육체를 통해 태어났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오는 죽음 또한 타인의 영역에 속한다. 이 점에 대해 설명하겠다. 탄생이 다른 사람을 통해 온 것이라면 어떻게 죽음이 그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극단은 아무 연관이 없다. 타인이 내게 탄생을 두었다면 죽음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탄생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왔다면 죽음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처음에 그대는 하나의 자궁을 통해 출현하고 두 번째에는 다른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대가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 갈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죽음은 탄생에 선행한다. 그대는 전에도 어딘가 에서 죽었고, 어딘가 에서 태어났다. 탄생은 분명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대는 죽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태어났다. 그대는 육체를 얻었다. 이 육체가 70년이나 100년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1백 년 후에 이 도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도구가 작용을 멈추리라는 것은 이미 탄생의 순간부터 정해진 사실이다. 이 육체가 언제 소멸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육체가 반드시 소멸할 것이라는 점이다. 탄생과 더불어 그대는 죽기로 결정지어졌다. 그대를 탄생시킨 자궁이 탄생과 더불어 그대의 죽음 또한 가져왔다.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왔다. 탄생을 준 자궁 속에 이미 죽음이 숨어 있다. 다만 백 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있을 뿐이다. 100년 동안 그대는 이쪽 끝에서 저쪽으로 여행을 완결 지을 것이고, 그대가 왔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탄생이 일어남과 동시에 육체의 죽음도 들어왔다. 죽음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태어난 적도 없으며, 죽는 자도 그대가 아니다. 탄생에는 매개체가 있었으며, 죽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섯 번째의 영체에서 여섯 번째의 코스믹체로 들어갈 때 그대는 최초로 탄생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스스로 태어날 것이다. 자궁 없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의 죽음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궁 없는 죽음이 그대를 기다린다. 이 탄생이 이루어지는 곳마다 죽음이 그대를 훨씬 앞선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탄생은 그대를 브라흐만으로 인도하고 죽음은 그대를 열반으로 인도한다. 이 탄생은 훨씬 뒤로 연기 될 수 있다. 무제한으로 연기될 수 있다. 이 단계에 머무는 사람은 신이 될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여행해 온 의식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숭배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도를 드릴 것이다. 여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아바타르(avatar),이슈와라(ishwara), 신의 아들, 티르탕카르로 불린다. 그들은 원하는 만큼 그 차원에 머물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들은 훌륭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려고 최선을 다한다. 영원토록 열심히 노력한다. 이런 사람들이 주는 메시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된다. 그들로부터 작은 느낌이라도 받은 사람은 그들을 브하그완(bhagwan)으로 존경한다. 브하그완 이하의 단계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들은 브하그완이다. 그들은 브하그완이 되기에 전혀 부족한 점이 없다. 그들은 여섯 번째의 코스믹체에 도달했다. 다섯 번째 차원을 통해 여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 삶속에서 가능하다. 이 삶에서 여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을 우리는 붓다, 마하비라, 라바, 크리슈나, 또는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들을 신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붓다를 이슈와라(ishwara)로 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붓다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붓다는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다. 붓다고 우리처럼 감기에 걸린다. 우리처럼 병에 걸린다. 그도 우리처럼 먹고, 걷고, 말한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죽음을 맞는다. 그러므로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와 우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하고 주장할 것이다. 붓다를 알아보는 사람보다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더 많다. 그리고 붓다를 알아본 사람들은 꼬임에 빠졌거나 미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증거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 증거가 없다. 내 앞에 있는 이 마이크를 예로 들어보자. 그대가 이 마이크를 보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 마이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무리 말해도 그대에게 보는 눈이 없다면 나는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그대가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다. 우리는 깨달음조차도 다수결로 판단한다. 이런 방면에도 우리는 투표 제도를 도입했다.! 어떤 사람은 붓다를 신으로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붓다를 신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그는 슛도다나(shuddhodana)왕의 아들이다. 아무개가 그의 어머니고, 아무개가 그의 부인이다. 그는 고타마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그의 아버니조차도 고타마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붓다를 자신의 아들로 보고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 왕궁으로 돌아와라. 우리 왕국은 점점 쇠퇴해지고 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런데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돌아와 왕국을 보살펴라." 이 불쌍한 아버지는 붓다가 무한한 왕국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이들을 티르탕카르, 브하그완,신의 아들로 본다. 그들은 여섯 번째 신체로 들어간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그런 단어들을 사용할 것이다. 일곱 번째 신체는 이 육체 안에서는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 이 육체 안에서 우리는 기껏해야 여섯 번째 신체의 경계선에 설 수 있으며, 그 곳에 일곱 번째 차원을 본다. 텅빈 공의 세계, 그깊은 심연, 그 영원함... 우리는 여섯 번째 차원과 일곱 번째 하원의 경계선에 서서 이런 것들을 볼 수있다. 그러므로 붓다의 삶에는 두 가지의 니르바나가 언급되고 있다. 하나는, 니란자나(niranjana)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니르바나다. 이것은 그가 죽기 40년 전의 일이었다. 그날 그는 여섯 번째 신체의 외곽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40년 동안 그 차원에 머물렀다. 그가 죽은 날은 '마하파리니르바나'로 불린다. 그날, 붓다는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여래는 죽은 후에 어떤 일을 겪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붓다는 '여래는 없을 것이다.'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마하파리니르바나 안에서 붓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든 활동이 멈추는 곳, 모든 일이 멈추는 곳, 그 곳이 마하파리니르바나로 불린다." 여섯 번째 신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한, 이것은 존재의 차원이다. 이 너머에 비존재가 있다. 그러므로 붓다가 죽었을 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결코 존재한 적도 없다. 그는 꿈처럼 사라질 것이다. 모래 위에 그은 선처럼, 물위에 그은 선처럼 그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는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속이든, 아무리 먹거나 구석진 곳이라 해도 그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 차원에서 그는 무형이 된다. 그저 공이 된다. 일곱 번째 차원이 후에 새로운 형상을 가질 방법은 없다. 여섯 번째 차원의 경계선에 서서 일곱 번째 차원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깊은 심연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일곱 번째 차원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그렇게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알려 준 것이다. 이것은 저 너머로 가 버린 사람들이 들려 준 설명이 아니다. 그 곳에서 설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것은 파키스탄과 인도의 국경선에 서 있는 사람이 '저기에 집이 있다. 저기에 가게가 있고, 도로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하는 것과 같다. 그는 파키스탄 땅이 나무를 보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 삶은 인도 쪽 국경선에 서 있다. 여섯 번째 차원에서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최후의 죽음이다. 고대에는 아차리야(acharya)라는 칭호가 '최후의 죽음을 가르치는 사람'을 뜻했다. '아차리야는 죽음이다.'하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나치케타(nachiketa)가 죽음의 신에게 도달했을 때, 그는 아차리야와 만난 것이다. 죽음의 신은 죽음을 가르칠 뿐 그 밖의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아차리야는 오직 소멸과 분해, 멸망을 가르치는 사람의 칭호다. 그러나 이 죽음 전에 탄생이 있어야 한다. 지금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나 자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밖에서 밀려 온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없어진다해도 그대는 결코 그것의 소유주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떤 물건을 훔쳐다가 자선 사업에 기부하는 것과 같다. 그 물건은 애초부터 그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게 그대의 기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포기했다고 부르는 사람들은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 해부터 지기 것이 아닌 것을 포기했다.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진정한 포기는 여섯 번째 차원으로부터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갈 때 일어난다. 그 곳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을 포기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제외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그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버린다. 의미를 갖는 단 하나의 포기는 여섯 번째 차원에서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전에는 포기에 대한 모든 말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나는 내 것을 모두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나는 내 것을 모두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 또한 유치하다. 그는 자신이 소유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로지 우리 자신만이 우리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 여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면서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째 차원으로 진입하면서 그대는 그대 자신을 포기할 것이다. 그대 자신을 포기하는 순간, 더 이상 얻을 것이 남지 않는다. 더 이상 포기할 것도 없다. 이 때는 '무엇이 남는가?'하는 문제가 없다. 무한한 정적, 영원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지복이나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거시에 진리가 있다는 말도, 거짓이 있다는 말도 불가능하다. 거기에 빛이나 어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 이것이 일곱 번째 차원이다. 육체를 갖고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 어떤 형상을 갖고 태어납니까? 다섯 번째 신체를 얻는 것과 깨닫는 것(awakening)은 하나며, 똑같은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이전의 신체들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이제 그대는 다섯 번째 차원에서 일할 수 있다. 이제 그대는 각성된 존재다. 그러므로 아무 어려움이 없다. 이전의 신체들은 제 번째 신체에 도달할 때까지만 필요하다. 네 번째 신체가 활성화되고 각성되면 그대는 데바, 천상의 영혼이 된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가 태만하게 누워서 잠들어 있으면 그대는 퍼레타의 영역, 악령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두 가지 상태 모두로부터 그대는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대는 아직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알기 위해 그대는 아직 타인을 필요로 한다. 타인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대 자신을 알 수 있다. 지금 그대는 알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타인이 없으면 그대 자신을 알 수 없다. 타인이 어떤 범주를 형성하고, 그대는 이 범주로부터 자신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네 번째 차원까지는 어떤 상황 아래에서든 태어나야 한다. 다섯 번째 차원 이후로는 타인이 필요 없다. 타인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이전의 네 가지 신체가 없어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섯 번째 차원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탄생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여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것은 처음의 네 가지 신체와 상관없는 전혀 다른 문제다. 네 번째 차원에서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 다시 육체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까? 필요 없다. 만일 티르탕카르가 다시 태어나기를 열망한다면 그는 물질적인 육체를 가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티르탕카르가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면 아주 흥미 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죽기 전에 그는 네 번째 신체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그 방법은 티르탕카르가 되겠다는 열망을 갖는 것에 의해 성립된다. 네 번째 신체가 사라져갈 때 그는 살아 있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네 번째 신체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네 번째 신체가 떨어져 나가면 육체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때는 그대가 이 세상으로 올 때 건너온 다리, 그 연결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번째 신체를 통해 티르탕카르가 되겠다는 열망이 살아 있어야 한다. 티르탕카르가 될 자격을 갖춘 모든 사람이 티르탕카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티르탕카르가 되지 않고 곧장 자신의 길로 가 버린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티르탕카르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숫자는 사전에 정해져 있다. 특정한 시대에 얼마만큼의 티르탕카르가 필요한지 이미 정해져 있다. 티르탕카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아주 강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욕망이다. 이 욕망마저 사라지면 모든 일이 끝난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욕망의 씨앗이 아주 강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 줄 것이다. 나는 다름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이다."이런 느낌을 굳게 가져야 한다. 이 때 티르탕카르가 육체 안으로 내려올 수 있다. 이것은 네 번째 육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다섯 번째 신체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네 번째 신체 안의 못에 걸려 있다. 이 못은 언제든지 뽑힐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거기에 남은 것은 아주 어려운 과제다. 티르탕카르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티르탕카르를 신비학파에서 양성된다.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학교가 운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의 구도자들이 명상 수행을 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 티르탕카르가 될 소질이 많은 사람을 선발한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잘 표현하고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학파 전체가 그의 네 번째 신체를 위해 일한다. 그에게 네 번째 신체가 분해되지 않도록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장래에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네 번째 신체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 신체를 하라지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키고 보존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투자된다. 이 단계에서는 네 번째 신체가 용해되어 사라지도록 놔두는 것은 아주 쉽다. 모든 닻이 올라가고 바람을 가득 맞는다. 광대한 지복의 바닷가 손짓해 부른다. 사방에 지복이 넘실대는 바닷가 있다. 이 작은 못에 매달려 지탱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쉽게 상상이 가능하다. 티르탕카를 '가장 자비로운 존재'로 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티르탕카를 그렇게 부른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는 항해를 떠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돌아왔다. 아직 항해할 배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그는 돌아왔다. 이것이 그의 자비 중에서도 가장 큰 자비다. 그의 배는 완전히 준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진해서 이 해안의 고통을 겪는다. 그는 돌팔매와 욕설을 감수한다. 그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었다. 그의 배는 항해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괴롭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의 곁에 남았다. 여기에 개인적인 목적은 없었다. 순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 이렇듯 그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다. 이런 자비에 대한 욕망은 신비학파에서 가르쳐진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구도자들은 티르탕카르가 될 수 없다. 못이 사라져도 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배가 이미 항해를 떠나고 나서야 그들은 해안이 멀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섯 번째 차원에 도달한 사람들, 우리가 이슈와라(ishwara)로 부르는 사람들도 때로는 티르탕카르의 출현을 돕는다. 그들은 해안을 떠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마다 그를 세상으로 돌려보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선한 일에 도움을 주는 데바들도 이 일에 참여한다. 그들은 하나의 못을 보존하라고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못을 볼 수 있다. 너는 그 못을 보존해야 한다."세상은 무정부 상태처럼 무질서하지 않다. 깊은 이면에는 심오한 배려가 있다. 질서 안에 또 질서가 있다. 세상을 위해 온갖 노력이 행해진다. 그러나 크리슈나무르티의 경우에 보듯이, 때로는 계획이 어긋나기도 한다. 그를 못에 고정시키기 위해 큰 노력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일단의 구도자들이 크리슈나무르티의 네 번째 신체 안에 하나의 못을 보존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 노력에는 다른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뒤에는 데 높은 차원의 영혼, 여섯 번째 차원과 다섯 번째 차원의 인물들, 네 번째 차원의 각성된 사람들이 관계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일에 관여했다. 크리슈나쿠르티는 다른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티르탕카르가 될 소지가 많은 인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못을 고정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세상은 크리슈나무르티를 통해 가능할 수도 있었던 티르탕카르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이야기다... 탄트라의 신비 당신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이 다섯 번째 신체에서 끝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네 가지 신체의 음극과 양극이 어떻게 조정되어야 이런 해프닝이 일어납니까? 여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여자의 첫 번째 신체는 여성이고 두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다. 여자의 세 번째 신체는 다시 여성이벼 네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들에 대해 그대는 이미 이런 말을 들었다. 전에 나는 여성의 신체가 불완전하다고 말했다. 남자의 신체도 마찬가지다. 이 둘이 함께 모여 완전한 신체를 만든다. 이 결합은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외부의 남자가 외부의 여자와 결합하면 그들은 하나의 단위를 형성한다. 이 단위를 통해 자연의 일, 즉 출산이 이루어진다. 외적인 결합은 자연을 향한 여행이다. 반면 남자나 여자가 자기 내면의 이성과 결합하면 전혀 다른 종류의 여행, 신으로 가는 여행이 시작된다. 남자의 첫 번째 신체가 자신의 두 번째 신체인 에텔체, 그 여성체와 만나면 하나의 단위가 형성된다. 여자의 첫 번째 신체가 그녀의 두 번째 신체인 에텔체, 남성적 요소의 에텔체와 만나면 여기에서도 또한 하나의 단위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참으로 정의적인 통합(unity)이다. 외적인 결합은 순간적이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행복을 준다. 그 다음에는 훨씬 더 길고 큰 분리의 슬픔이 따른다. 이 슬픔이 똑같은 행복에 대한 염원을 가져오고, 이 행복은 또다시 순간적인 것으로 증명된다. 그 다음에 다시길고 고통스러운 분리의 슬픔이 따른다. 이렇게 외적인 행복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내면의 결합은 영원히 지속된다. 일단 결합이 일어나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내면의 결합이 일어나지 않는 한 슬픔과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내면의 결합이 일어나자마자 행복의 흐름이 시작된다. 이 기쁨은 섹스라는 외적 결합을 통해서 오는 기쁨은 그 지속 기간이 너무나 짧아서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 버린다. 아예 경험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요가(yoga)의 관점에 의하면, 내적인 성교가 가능해지는 순간 외적 성교에 대한 본능은 즉각 사라져 버린다. 그 이유는 내면의 결합이 완벽 만족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사원에 묘사되어 있는 성교하는 상들은 이것을 암시한다. 내면의 성교가 명상의 과정이다. 그래서 외적인 성교와 내적인 성교라는 개념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이런 대립은 내면의 성교 안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이 외적 성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여자가 자신의 남성 에텔체와 결합하면 거기에서 나오는 개체는 여성이 될 것이다. 반면, 남자가 자신의 여성 에텔체와 결합했을 때 산출되는 개체는 남성이 될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 신체가 두 번째 신체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체가 첫 번째 신체 안으로 녹아든다. 그러나 여기에서 산출되는 남성과 여성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남녀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부의 남자나 여자가 아니다. 외부의 남자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불안하고 만족해하지 못한 는 것이다. 외부의 여자 또한 불완전하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것이다. 이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의 발달을 조사해 보면 우리는 원시적인 유기체 안에 남성과 여성이 둘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메바가 그렇다. 아메바는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이보다 만족스러운 생명체는 없다. 아메바 안에는 불만의 그림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아메바가 진화하는 데 실패한 이유기도 하다. 아메바는 항상 아메바로 남는다. 생물학적인 발달 과정에 있어서, 초보적인 생명체는 성별에 따라 분리된 몸을 갖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이 한몸 속에 들어 있다. 여성의 첫 번째 신체가 그녀의 남성 에텔체와 결합하면 전혀 새로운 여성이 태어난다. 이 여성이 완벽한 여성이다. 우리는 완벽한 여성의 특징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우리가 아는 모든 여성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한 남성에 대한 평가 기준이 없다. 우리가 아는 모든 남성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반쪽이다. 이 통합된 하나의 단위가 완성되자마자 궁극적인 만족이 퍼져 나간다. 모든 불만이 소멸된다. 이 완벽한 남성과 완벽한 여성은 외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려울 것이다. 외부에는 반쪽의 남자와 반쪽의 여자밖에 없으며, 그들의 퍼스낼리티는 서로 조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의 두 신체가 내부에서 결합을 이룬 완벽한 남성은 같은 결합을 이룬 완벽한 여성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탄트라(tantra)는 이런 관계를 위해 많은 실험을 해 왔다. 그래서 탄트라는 많은 오해와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우리는 티르탕카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내부의 보완적인 신체와 통합을 이룬 남자와 여자가 탄트라적인 상황에서 섹스를 할 때도 우리의 눈에는 평범한 정사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다. 이것은 구도자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의 외적인 결합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통합으로 가는 여행이었다. 하나의 여행은 이미 끝났다. 불완전한 남자와 불완전한 여자가 완벽해졌다. 특별한 성취의 단계에 도달했다. 이젠 욕망에 대한 생각이 없다.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가 이런 식으로 만날 때,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지복을 경험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존재 전체가 통합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이 때 그들은 '만일 우리의 내면에서 이렇게 완벽한 결합이 일어난다면 무한정의 지복이 밀려올 것이다.'라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반쪽의 남자는 반쪽의 여자와 결합되었다. 그는 자기의 내면에 있는 반쪽의 여자와 결합되었고 무한한 지복을 체험했다. 그 다음에 완벽한 남자가 완벽한 여자와 결합되었다. 그러나 먼저 자신의 내면에서 완벽한 여자를 얻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래서 그는 내면의 완벽한 여자를 찾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세 번째와 네 번째 신체의 만남이 일어난다. 남자의 세 번째 신체는 남성이고 네 번째 신체는 여성이다. 반면, 여자의 세 번째 신체는 여성이고 네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탄트라는 남자가 첫 번째 완성이 성취된 후에 거시에 정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 안에는 많은 종류의 완성이 있다. 더 앞에 놓여 있는 완성과 비교해 보면 이전의 완성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전의 불완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이것은 완성이다. 이전의 불완전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앞에 놓여 있는 더 큰 완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것이 장애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놀라운 방법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이 방법들을 지금 당장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탄트라에서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가 성교를 하면 에너지의 손실이 전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안에 완벽한 에너지의 순환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파트너로부터 에너지를 빼앗는 일은 결코 없다. 그들은 생애 최초로 에너지의 손실 없이 기쁨을 경험한다. 육체적 결합을 통해서 얻는 기쁨을 물가 피하게 고통을 수반한다. 에너지의 손실에 따라는 우울함, 불안, 피곤함, 비애를 피할 길이 없다. 기쁨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손실된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24시간이나 48시간이 걸린다. 에너지를 다시 얻을 때까지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찬다. 탄트라는 사정없이 성교하는 경이적인 방법들을 개발했다. 이런 면에서 탄트라는 과감한 탐구를 계속했다. 이세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설명해야 할 것이다. 탄트라 수행은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탄트라의 과학 전체가 점점 비밀스럽게 된 것은 이 체계가 깨졌기 때문이다. 또한, 탄트라 수해에 대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도덕 관념이 이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든지 아는 체하는 소위 어리석은 '성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소중한 지혜를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탄트라 수행은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탄트라 실험은 비밀스럽게 은신해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는 탄트라의 지혜가 더 이상 분명하게 흐르지 못한다.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 사이의 성교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여기에는 에너지의 손실이 없다. 이 전혀 새로운 현상에 대해서는 암시만 가능하다. 불완전한 남자와 불완전한 여자가 만나면 둘 다 에너지의 손실을 겪는다. 성교 후에 에너지의 양이 상당히 줄어든다. 그러나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의 결합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성교 후에 에너지의 양이 크게 증가한다. 양쪽 모두의 에너지가 증가한다. 그들 안에 누워 있던 에너지가 상대방의 접근에 의해 깨어나고 활성화된다. 일상적인 성행위 안에서는 남녀의 결합에 의해 사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의 만남에서는 그들 자신의 에너지가 상대방의 현존 안에서 깨어나고 활성화된다. 각자 안에 숨어 있던 모든 것이 완전히 현현된다. 이 해프닝을 통해,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의 결합이 일어났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첫 번째 결합은 두 불완전한 존재의 결합이다. 이제 그들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신체를 통합하는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남자의 세 번째 신체는 남성이고 네 번째 신체는 여성이다. 여자의 세 번째 신체는 여성이고 네 번째 신체는 남성이다. 이제 세 번째와 네 번째 신체의 결합을 통해 남자 안에는 오직 남성만 남을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신체가 절대적으로 우세해질 것이다. 그리고 여자 안에는 여성이 우세하게 남을 것이다. 이 때 두 가지 완벽한 여성이 하나로 용해될 것이다. 이제 그 둘을 분리시키는 경계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남성체가 요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남성체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여성체가 필요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신체의 여성이 세 번째와 네 번째 신체의 여성과 만날 때, 그 만남의 순간에 그들은 즉각 하나로 용해될 것이다. 이 때 여자는 두 배로 완벽한 여성다움을 달성한다. 이보다 더한 여성다움은 가능하지 않다. 이후에는 더 이상 여성다움의 성장이 없다. 이것이 완벽한 여성다움의 상태다. 이것이 완벽한 여자다. 이 완벽한 여자는 완벽한 남자를 만나려는 욕망조차 없다. 첫 번째 완성의 상태에서는 두 번째의 완성된 사람을 만나려는 유혹이 있었으며, 이 만남이 더 많은 에너지를 창조했다. 이젠 그것마저 끝났다. 이젠 어떤 의미에서 신을 만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남자 안에 있는 두 남성이 하나로 용해될 것이다. 네 가지 신체가 결합되었을 때 남자 안에 남는 것은 남성이고, 여자 안에 남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신체부터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 네 번째 차원 이후로 일어나는 해프닝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띨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해프닝은 똑같지만 이 해프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남자는 여전히 공격적일 것이고, 여자는 여전히 순종적일 것이다. 네 번째 신체를 얻은 후 여자는 완벽한 방임에 도달한다. 그녀의 순종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이런 순종과 방임이 그녀를 다섯 번째 차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 여자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여자로 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지키고 고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수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을 완전히 방임한다면 우리는 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고수한다. 만일 여자가 평범한 남자에게라도 완전히 자신을 주어 버린다면 그녀의 안에 어떤 결정화(crystallization)가 일어날 것이고, 그녀는 네 번째 신체를 넘어설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평범한 남자에 대한 사랑만 갖고도 네 번째 신체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사티(sati)' 라는 단어에 이 밖의 다른 신비적 의미는 없다. 사티는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여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티는 다른 남자를 찾는 여성적 요인이 내면에 더 이상 없는 여자를 말한다. 만일 한 여자가 사랑 안에서 완벽하게 순종한다면, 설령 평범한 남자를 사랑한다 해도 그녀는 이렇게 긴 여정을 통과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네 가지 신체 모두가 결합되고 다섯 번째 신체의 문이 열릴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과한 여자들은 '남편이 신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실제로 남편을 신처럼 생각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남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섯 번째 차원의 문이 열렸음을 뜻한다. 이런 여자들의 말에는 잘못이 없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다른 명상가들이 고된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을 그녀는 사랑을 통해 쉽게 얻는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이런 단계로 인도한다. 시타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우리가 '시티'라고 부르는 여자들의 범주에 속한다. 시타의 순종은 특별하다. 순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완벽하다. 그녀의 순종은 전체적이다. 시타가 완전한 여성인 반면 라바나는 불완전한 남자다. 완전한 여자의 광채는 불완전한 남자가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다. 불완전한 남자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다. 불완전한 여자만 그의 눈에 성적으로 비친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전적으로 남자에게만 책임이 있지 않다. 이 여성의 불완전함에도 책임이 있다. 군중 속에서 남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만질 때, 남자에게는 책임의 반밖에 없다. 그런 행위를 유발한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여자가 그런 행위를 자극하고 유발했다. 여자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녀의 자극적인 공격은 쉽게 간과된다. 그리고 남자는 적극적이기 때문에 그가 여자를 만졌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다른 쪽에서 그럼 행위를 유발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라바나는 시타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시타에게 라바나는 무의미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후 라마는 시타가 정절을 지켰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불 속을 통과하는 시험을 받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시타는 거부하지 않았다. 만일 시험을 거부했다면 그녀는 '사티'로 불릴 자격을 잃었을 것이다. 그녀는 양쪽이 다같이 시험을 받자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떨어져 있었다면 하마 역시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여자를 만났는지 누가 아는가? 그러나 시타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기꺼이 불길 시험을 받아들였다. 만일 그녀가 한 번이라도 라마의 권위를 의심했다면 그녀의 사티의 자격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 의심이 있었다면 그녀의 순종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엇인가 다소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한 번이라도 그런 의심을 일으킨 다음 불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녀는 타 죽었을 것이다.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순종은 전체적이었다. 그녀에게는 라마 외에 다른 남자가 없었다. 우리는 시타가 무사하게 불실 속을 걸어나온 것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도 특정한 마음 상태에서 불실 속으로 들어가면 그는 불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불은 당신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최면을 걸면 그는 불 위를 걸어도 화상을 입지 않는다. 평범한 파키르(fakir)도 특정한 마음의 상태, 즉 내면에서 에너지의 순환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상태에서는 불 위를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이 일어나면 이 에너지의 순환이 깨진다. 한 번만이라도 의심이 일어나면, '나는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에너지의 순환이 깨지고 그는 틀림없이 화상을 입을 것이다. 두 명이 파키르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그대가 '이두 사람이 불 속으로 뛰어들어 아무 해도 입지 않는다면 나도 괜찮을 것이다.' 하고 느낀다고 하자. 이런 생각을 갖고 뛰어들면 그대 역시 불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모두가 화상을 입지 않고도 불 속을 통과할 수 있다. 의심하는 사람은 감히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옆으로 비켜서서 구경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무사하게 불 속을 통과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않는다면 불이 왜 내게만 해를 미치겠는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 속을 통과할 수 있다. 불이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의 순환이 완성되면 불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불이 시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불의 시험을 거치고 라마가 시타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을 때도 그녀는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의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순결을 증명했다. 그리고 궁궐 밖으로 쫓아냈을 때도 그녀는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의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순결을 증명했다. 그리고 궁궐 밖으로 쫓겨날 때도 그녀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의 순종은 이토록 전체적이고 완벽했다. 만일 완전한 여자가 한 사람에 대해 완벽한 사랑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녀의 영적 수해의 첫 번째 네 단계를 그냥 뛰어넘을 것이다. 남자에게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남자에게는 순종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성조차도 완벽해질 수 있다. 이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공격성이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요인이 여기에 연루된다. 그대 혼자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순종의 완성은 그대 혼자의 책임이다. 다른 요인들은 결코 문제가 안 된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그에게 말하지 않고도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대해 공격적이어야 한다면 마지막 결과에는 상대방 또한 연구될 것이다. 지금까지 삭티파트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대는 여성에게 무엇인가 다소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여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삶에는 보완의 원리가 적용된다. 여자들이 갖는 결점은 순종의 능력으로 보완된다. 남자는 어떤 사람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코 전체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공격적이고 순종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여자의 처음 네 가지 신체가 완벽해지고 하나의 단위로 용해된다면 그녀는 다섯 번째 차원에서 쉽게 순종할 수 있다. 여자가 네 번째 상태에서 내적 성교의 두 가지 단계를 통과하고 완벽해지면, 지상의 어떤 힘도 그녀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이 때 그녀에게는 신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첫 번째 네 가지 신체 안에서 사랑한 사람은 이미 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이다. 미라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한 번은 그녀가 브린다반(vrindavan)을 찾아갔다. 그 곳에 있는 큰 사원의 사제는 여자를 천시했으며, 그래서 여자는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 종을 들고 크리슈나에 몰입한 미라를 보고, 이 사원의 사제는 여자를 천시하기 때문에 여자는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서둘러 알려 주었다. 이에 대해 미라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나는 세상이 단 한 사람의 남자밖에 없다고 알고 있어요. 그분의 이름은 크리슈나입니다. 그런데 사제라고요? 이 다른 남자는 누구지요? 그가 어디에 있어요? 나는 그를 만나 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사제에게 달려가 미라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제가 급히 달려나오더니 미라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말했다. "세상에 단 한 명의 남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분을 '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라는 문제는 끝났습니다. 저는 이렇게 당신의 발을 만지며 용서를 빕니다. 저는 일반적인 여자들을 보면서 제 자신을 남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처럼 뛰어난 여자 앞에서 남자라는 제 신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남자가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하면 그는 완벽한 남자가 된다. 이 완벽함을 얻기 위해 그는 두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그 다음부터 그에게는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 그는 오로지 공격성(aggressiveness)의 힘이다. 이것은 네 번째 신체에서 완벽한 여성다움(womanhood)애 도달한 여자가 오로지 순종의 에너지가 되는 것과 같다. 이제 그들은 에너지일 뿐이다. 한 쪽은 공격성의 에너지고, 다른 한쪽은 순종의 에너지다. 이제 그들에게 남자와 여자라는 명칭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에너지일 뿐이다. 남자의 공격성은 다양한 여가 수행법을 개발했으며, 여자의 순종은 다양한 헌신의 길로 피어났다. 순종은 박티(bhakti)가 되고 진취성은 요가가 된다. 이제는 남성과 여성이 똑같다. 그들 사이에 아무 차이점이 없다. 이제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는 외적인 구분, 물질적 육체에 적용되는 구분일 뿐이다. 물방울이 바다로 떨어지건 바닷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건 결과는 똑같다. 남자라는 물방울은 바다로 뛰어들어 그 안에 용해될 것이다. 그리고 여자라는 물방울은 깊음 심연이 되어 자기를 가득 채우라고 바다를 부를 것이다. 여자는 순종할 것이고 바다 전체가 그녀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단계에서도 여자는 수용적이다. 그녀는 완벽한 수용성이다. 그녀는 바다 전체를 담을 수 있는 자궁이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그녀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이 단계에서도 수용적이 될 수 없다. 그는 여전히 강인함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바다 안에 뛰어들 것이다. 네 번째 신체의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존재 깊은 곳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가 숨어 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차원은 전혀 다르다. 여기에는 오직 영혼이 있을 뿐이다. 성별에 기초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여행은 모두에게 똑같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차이점이 있었다. 물방울이 바다로 들어가느냐, 바닷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느냐 하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다. 물방울이 바다로 들어가건 바닷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건 아무 차이가 없다. 어쨌든 네 번째 신체의 마지막 한계선까지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만일 여자가 바다로 뛰어들기를 원한다면 그녀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순종하기를 원하면 그는 큰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은 이전의 강의에서, 긴 시간 동안의 성교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전기 에너지의 순환을 형성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순환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처음의 네 가지 신체와 관련하여 이 순환은 어떤 유용성이 있습니까? 또한 명상과 관련하여, 위에서 언급한 현상은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여자도 반쪽이고 남자도 반쪽이다. 둘 다 에너지며 전기다. 여자는 음극이고 남자는 양극이다. 그리고 전기의 음극과 양극이 만나 순환을 형성할 때마다 빛이 창조된다. 이 빛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또는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순환이 형성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남녀간의 결합은 너무나 일시적이기 때문에 순환이 형성되자마자 곧 깨져 버린다. 그래서 성교 시간을 연장시키는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만일 성교가 한 시간 반 이상 지속되면 전기적인 순환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여러 번 사진으로 찍힌 바 있다. 원시 부족들 중에는 성적인 결합이 오래 지속되는 부족이 있다. 이 때 전기적인 순환이 형성된다. 문명 세계에서 이런 에너지의 순환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마음에 긴장이 많을수록 성교 시간이 짧아진다. 긴장이 많을수록 사정이 더 빨리 일어난다. 긴장한 마음의 성겨 자체가 아니라 배설을 통한 이완을 바라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섹스가 재채기 이상의 목적을 갖지 못한다. 긴장이 방출되고 무거운 짐이 덜어진다. 에너지가 방출될 때 그대는 나른함을 느낀다. 릴랙스되는 것과 나른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릴랙스된다는 것은 에너지가 안에 있는 상태에서 그대가 휴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른해지는 것은 에너지가 방출되고 그대가 지쳐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에너지의 손실을 입고 지쳐 버린 상태에서 '나는 릴랙스 되었다.'고 착각한다. 날로 긴장이 증가하고 있는 서양에서는 섹스가 긴장으로부터의 탈출, 내부에 쌓인 에너지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도피처가 되었다. 서양에는 섹스의 가치를 재채기 이상으로 고려하지 않는 사상가들이 있다. 콧구멍이 간지러울 때 그대는 재채기를 한다. 그러면, 마음의 후련함을 느낀다. 서양에는 섹스에 재채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은 옳다. 그들이 섹스를 하는 행위는 재채기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 사람들도 서서히 이런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양 또한 긴장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긴장되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려면 외딴 산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는 산과 개울, 나무들의 세계에 산다. 그는 아직 문명에 물들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는 아직도 성교를 하는 동안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고 있다. 누구든지 그런 에너지의 순환을 이룰 수 있는 탄트라 방편이 있다. 이 순환에 대한 경험은 참으로 놀랍다. 그대가 상대방과 일체감(oneness)을 경험하는 것은 이런 순환이 형성될 때뿐이다.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일체감을 느낄 수 없다. 두 사람이 성교를 한다. 에너지의 순환이 일어나자마자 이들은 더 이상 두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에너지가 된다. 똑같은 에너지의 흐름이 된다. 오고, 가고, 회전하는 어떤 것이 경험된다. 분리된 두 개체는 사라진다. 이 순환이 강해짐에 따라 성교에 대한 욕망이 감소한다. 욕망이 일어나는 횟수가 줄어든다. 일단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면 1년 내내 아무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섹스라는 행위가 없어도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자. 한 남자가 음식을 먹고 나서 토한다. 이 때 그는 음식으로부터 어떤 만족감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족감은 음식을 먹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소화시킴으로써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먹는 행위가 만족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만족감은 음식이 소화될 때 오는 것이다. 성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교는 음식을 먹고 토하는 행위에 불과 하다. 아무것도 소화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소화되면 그 만족감은 훨씬 더 깊어지고 오래 간다. 그러나 소화 흡수 작용은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에너지의 순환은 두 사람의 마음이 용해되고 서로의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다. 몸은 둘이지만 각자의 내부에 있는 에너지는 하나가 되었다. 에너지가 서로 뒤섞었다. 이런 성적인 흡수현상은 깊은 만족감을 남겨 준다. 이것이 내가 의미하는 뜻이다. 이것은 요가와 명상가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내부의 성교가 가능해지면 성에 대한 욕구가 크게 감소한다. 욕망이 일어나는 횟수가 줄어든다. 성욕이 일어나지 않는 기간동안 명상가는 자유롭게 내면의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내면의 여행이 시작되고 내부의 이성과 성교가 일어나면 외부의 이성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가정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브라흐마차리야(brahmacharya)라는 용어는, 배우자와의 성행위가 너무나 충족감을 준 나머지 몇 년 동안 섹스가 없는 기간을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브라츠마차리야 기간이 오고 내부를 향한 여행이 시작되면 외적 성교에 대한 욕구가 소멸된다. 가정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는 이렇다. 그러나 가정이 없는 사람들, 전통적인 산야스에 입문한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브라흐마차리야는 안타르마이툰(antarmaithum), 즉 내면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적 결함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내부의 성교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들은 자기의 내부에서 성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굴뚝같으면서도 여자를 피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여자를 멀리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오히려 성교를 하는 것보다도 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전통적인 산야신의 길은 약간 다르다. 가정이 있는 사람은 외부의 여자와 성적 결합을 갖는 것이 첫 단계고, 두 번째 단계에서 내부의 여자와 만난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야신은 자기 내부의 여자와 직접 결합한다. 그에게는 첫 단계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산야신으로 받아들이는 산야스의 개념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진정으로 전통적인 산야스를 위해서는 어떤 사람의 첫 번째 신체가 내부에 있는 두 번째 신체의 이성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럴 때만 진정한 산야스가 가능하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브라흐마차리야에 입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기를 초래할 뿐 그밖에 아무 결실을 얻지 못할 것이다. 무작위로 사람들을 입문시키는 구루들이 있다. 어떤 구루는 천 명의 산야신이 있고, 어떤 구루는 2천 명의 산야신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입문한 사람들이 명상적인 상태에서 내부의 성교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런 자세가 되어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내부의 성교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산야신이 나를 찾아올 때마다 섹스가 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만나는 가장들 또한 다른 문제를 갖고 있다. 아직도 나는 섹스가 문제의 전부인 전통적 산야신들을 만나야 한다. 가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섹스가 많은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야신에게는 섹스가 많은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야신에게는 섹스가 유일한 고민거리다. 그의 마음 전체가 이 한 지점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스승은 외부의 여자로부터 그를 지킬 수 있는 많은 방법을 알려 준다. 그러나 그는 명상가가 어떻게 내부의 여자와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따라서 외부의 여자를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기껏해야 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척 연극을 할뿐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생체 에너지는 어디론가 흘러야 한다. 그 에너지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만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그 에너지는 밖으로 흘러나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있는 여자건 상상 속의 여자건 아무 차이가 없다. 이 에너지는 상상 속의 여자를 통해서도 밖으로 흘러나간다. 이것은 여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다소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다. 여성 구도자에게는 섹스가 남성 구도자의 경우처럼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자이나교의 여승들과 안면이 많다. 그들에게는 섹스가 큰 문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여자들의 섹스가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성이 깨어나면 문제가 된다. 성이 깨어나지 않으면 여자들은 성적으로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고 평생을 살 수 있다. 여자는 성에 대해서조차도 입문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을 깨닫지 못한다. 일잔 남자를 통해 성에 눈을 뜨면 여자 안에 에너지가 날카롭게 솟아오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없으면 여자는 평생 동안 숫처녀로 남을 수도 있다. 여자에게는 이것이 매우 쉬운 일이다. 수동적인 본성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은 공격적이지 않다. 여자는 무한정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릴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결혼한 여자를 입문시키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낀다. 그녀가 자기 내부의 남자와 결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숫처녀를 입문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는 소년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녀는 성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까지 무한정으로 기다릴 수 있다. 그녀는 공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외부로부터의 침범이 없다면 서서히 외부의 여자와 그녀 내부의 남성이 결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녀의 두 번째 신체인 남성체는 공격적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성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쉽다. 내 말을 이해하는가? 여자의 두 번째 신체는 남성이고, 이 신체는 공격적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외부의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그녀에게는 문제될 게 없다. 만일 그녀가 외적 근원을 통해 섹스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내부의 남자가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녀의 에텔체가 그녀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이 때 그대는 내면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고 내부의 성교에 몰입하게 된다. 남자에게는 내부의 성교가 어렵다. 첫 번째 신체가 공격적인 반면 두 번째 신체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신체는 첫 번째 신체에 대해 자신을 내세우지 못한다. 이 여성체는 첫 번째 신체가 찾아왔을 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일단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조정해야 할 것이다. 가정을 가진 사람이 외부적 성교 한에서 에너지의 순환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면 이것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내부의 성교에서도 똑같은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된다.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성교를 하는 동안에만 이런 에너지의 순환이 그를 둘러싼다. 그러나 잠시 두 번째 신체와 결합한 사람은 하루 24시간 내내 이런 에너지에 둘러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에너지의 원은 각 차원이 열릴 때마다 더 커진다. 붓다의 사후 5백 년 동안은 붓다의 형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현상은 역사를 통해 여러 번 일어났다. 불상 대신 보리수나무가 조각되었으며, 이 나무가 사원에서 숭배되었다. 그러나 붓다가 앉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나무 밑의 장소는 그냥 비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제 역사와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나무 밑에 붓다의 형상이 조각되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한다. 왜 나무로 붓다를 상징한 것일까? 5백 년이 지나고 나서야 붓다의 형상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보리수나무 밑은 왜 비어 있는 공간으로 묘사된 것일까? 이것이 역사 학자와 신화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신비다. 실제로, 붓다를 깊이 관찰한 사람들은 '일심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면 붓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직 나무와 에너지의 오라(aura)가 남을 뿐이다. 그의 물질적인 육체는 사라졌다. 가령 그대가 나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나 또한 사라질 것이다. 오직 의자만 남을 것이다. 붓다를 주의 깊게 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눈으로 붓다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붓다를 깊이 들여다본 사람들은 '붓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후자가 더 믿을 만하다. 붓다의 사후 5백 년 동안은 '붓다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빈 공간이 있을 뿐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던 시대에만 통용되었다. 이 탁월한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붓다 없이 나무만 숭배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결국 붓다가 죽고 5맥 년 후에는 그의 사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매우 흥이로운 사실이다. 예수를 깊이 들여다본 사람들 또한 예수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빛을 보았을 뿐이다. 마하비라를 깊이 들여다본 사람들도 오직 빛을 보았다. 크리슈나의 경우도 그랬다. 철저하게 각성된 의식으로 이 위대한 갖자들을 관찰하면 오직 에너지의 빛이 보일 것이다. 형상을 가진 개체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 내부의 남성체와 여성체가 모두 만난 후에는 생명 에너지가 크게 증가한다. 네 번째 신체 후에 이 에너지가 완전히 충만해진다. 그리고 다섯 번째 신체에는 오직 에너지가 있을 뿐이다. 여섯 번째 신체에서는 이 에너지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째 신체에서는 이것마저 사라질 것이다. 먼저 물질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에너지가 사라진다. 명상가는 몇 번째 차원에서 무념의 상태에 도달합니까? 아니면 생각을 위해서는 대상과의 동일시가 필수적입니까? 완벽한 무념의 상태는 다섯 번째 신체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작은 일별은 네 번째 신체에서 얻어진다. 네 번째 신체에서 두 생각 사이의 틈이 관찰되기 시작한다. 네 번째 신체 이전에는 생각과 생각, 오로지 생각이 있을 뿐이다. 생각들 사이의 틈을 볼 수 없다. 네 번째 신체에서 생각들 사이의 틈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강조점이 변하다. 게쉬탈트 이미지(gestalt image)를 본적이 있다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층계에 대한 그림이 있다고 하자. 이 층계를 이상한 방식으로 그릴 수 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층계가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보면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흥미 있는 점은, 올라가는 층계와 내려가는 층계를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둘 중 하나만 볼 수 있다. 그대가 두 번째 그림을 관찰하는 순간 첫 번째 그림은 사라질 것이다. 두 얼굴이 마주보고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코와 눈, 수염까지 완벽하게 갖춘 얼굴이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제 얼굴을 검게 칠하고 그 사이의 공간은 하얀 색으로 놔둔다. 이때 그대는 얼굴 사이의 공간에서 꽃병을 보게 될 것이다. 코와 눈이 꽃병의 윤곽선이 된다. 그러나 그대는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을 볼 때는 꽃병과 보이지 않을 것이고, 꽃병을 볼 때는 얼굴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보려고 해도 게쉬탈트는 그 강조 점을 바꿀 것이다. 그대의 강조점이 얼굴로 이동하는 순간 꽃병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강조점이 꽃병에 놓이는 순간 얼굴이 사라질 것이다. 세 번째 신체까지 우리 마음의 게쉬탈트는 생각에 강조 점을 두고 있다. 생각 속에 라마(rama)가 들어온다. 라마가 보이고 라마의 들어옴도 보인다. 라마와그듸 들어옴 사이에 있는 빈 공간, 또는 라마가 들어오기 전과 라마가 간 후의 빈 공간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강조 점은 라마의 들어옴에 있다. 그 사이의 공간은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라마의 들어옴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의식이 갑자기 그대를 칠 것이다. 라마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빈 공간이 있었다. 라마가 가 버린 뒤에도 빈 공간이 있다. 그대의 인식이 이 빈 공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얼굴이 사라지고 꽃병이 나타난다. 빈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그대는 생각할 수 없다. 그대는 두 가지 중에 하나만 할 수 있다. 생각을 보는 한 그대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빈 공간을 볼 때 그대는 그 공간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때로는 두 얼굴을 보고, 때로는 꽃병을 볼 것이다. 즉, 때로는 생각을 보고, 때로는 생각 사이의 틈을 본다. 때로는 침묵이 오고, 때로는 사념이 올 것이다. 침묵(silence)과 공(emptiness)사이에는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 침묵은 아직 생각이 끝나지 않았지만 강조점이 변화한 상태를 의미한다. 의식이 생각으로부터 이동하여 침묵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의식이 이동했을 뿐이다. 의식의 초점이 사념으로부터 이동하여 침묵에 가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이 돌아오고, 이 생각이 그대의 관심을 잡아끈다. 다시 생각이 시작되고 침묵이 실종된다. 네 번째 신체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은 줄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가면 모든 사념이 사라지고 침묵만 남는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인 침묵이 아니다. 이 침묵은 사념과 말에 대조되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침묵은 말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은 침묵도 없고 말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얼굴도 없고 꽃병도 없다. 빈 종이가 있을 뿐이다. 이 때 누군가 얼굴과 꽃병 중에 어느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대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전체적인 무념의 상태는 다섯 번째 신체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네 번째 신체에서 우리는 이런 상태를 잠깐 일별 하다. 두 생각 사이의 틈이 산발적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무념의 상태가 확고해지고 사념이 사라질 것이다. 이제 그대의 질문 중에 두 번째 부분을 보자. "의식이 대상과 동일시되지 않고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니면 생각을 위해서는 대상과의 동일시가 필수적인 것입니까?" 세 번째 신체까지는 동일시와 사념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대의 동일시가 있고 생각이 있다. 이 둘 사이에 간격이 없다. 생각과 그대가 하나다. 둘이 아니다. 그대가 화가 났을 때 '나는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분노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 하면, 화가 나기 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것 또한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나는 내 손을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자. 이때 그대가 '이제 당신 손을 정지시켜라.'하고 나는 '그것은 불가능하다. 손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이대 그대는 '그렇다면 '나는 내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당신의 말은 무슨 뜻인가?' 하고 이의를 제기할 지도 모른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나는 '손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내가 손을 움직이고 있다면 나는 그 손을 멈출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손을 멈출 수 없다면 내가 그 손의 주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다. 세 번째 신체의 차원까지 그대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생각과의 동일시가 완벽하다. 세 번째 차원까지는 그대가 곧 생각이다. 세 번째 차원에서는 어떤 사람의 생각을 지적하는 것이 곧 그 사람 자신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대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말은 틀렸다.'고 말하면 그는 '내 말은 틀렸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는 틀렸다.'고 느낄 것이다. 언쟁과 싸움은 말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일어난다. 완벽한 동일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곧 그대를 공격하는 것과 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대는 '나는 거부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문제의 논점은 제쳐 두고 잠시 주장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이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나' 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이유가 없다. 그대가 어떤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그 견해를 제시한 사람이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견해를 그대의 경전, 그대의 원칙, 그대의 주장으로 제시했다. 세 번째 신체까지는 그대와 그대의 생각 사이에 간격이 없다. 그대가 곧 생각이다. 그러나 네 번째 차원으로 접어들면서 이 동일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생각이 별개라는 것을 일별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대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뿌리의 깊은 곳에 아직 어떤 연결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지 위에 있을 때만 그대는 사념과 그대 사이의 차이점을 느낀다. 그대는 이쪽 가지에 앉아 있고 사념은 다른 가지에 앉아 있다. 그대는 사념이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본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그대와 사념은 하나다. 가지 위에서는 사념들이 그대와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과의 연결 관계가 깨지기만 하면 사념이 정지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념은 정지하지 않는다. 더 깊은 곳에서 사념과의 연결 관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사념과 그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희미하게 알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도 없다. 아직도 생각이 기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대는 생각을 멈출 수도 없고, 생각을 가져올 수도 없다. 만일 내가 '분노를 멈추어라. 그래서 네가 분노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라.' 하고 말할 수 있다면 '분노를 불러와라. 그래서 네가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라.' 는 말도 가능하다. 이 때 그대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분노를 불러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대는 분노의 주인이다. 이때 그대는 언제라도 분노를 정지시킬 수 있다. 그대가 주인일 때는 분노를 불러오고 정지시키는 것 둘 다 그대의 수중에 있다. 그대가 분노를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을 정지시킬 수도 있다. 분노를 정지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분노를 불러오는 것은 더 쉽다. 이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분노를 불러오는 것으로 시작하라. 그것이 더 쉽다. 그대는 평정한 상태에서 분노를 불러 올 수 있다. 그러나 분노를 정지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그대는 이미 화가 나 있다. 그대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분노를 정지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분노를 정지시키는 것보다는 분노를 불러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더 쉽다. 예를 들어, 웃음이 터져나올 때 웃음을 멈추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웃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웃음을 불러오려고 하면 1,2 분내에 웃음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때 그대는 웃음의 비밀을 알 것이다. 웃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떻게 오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그대는 웃음을 멈추는 비밀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웃음을 멈추는 것이 가능하다. 네 번째 차원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과 사념이 별개라는 것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사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무념의 상태에서는 항상 주시가 일어난다. 그리고 생각이 있는 곳에서는 주시가 사라질 것이다. 생각 사이의 중간상태, 사념들 사이의 틈에서 그대는 자신이 사념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대와 사념 사이에 더 이상 연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때 그대는 아무 힘도 없는 관찰자에 머물 것이다. 이 네 번째 차원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관찰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 번째 신체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한다. 하나는 자연적인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을 통해 획득되는 가능성이다. 그대는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사념이고, 두 번째 가능성은 이해다. 이 두 번째 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 이해가 얻어지는 순간 네 번째 신체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마음과 의식의 동일시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대가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하면 두 가지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대가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하면 두 가지가 떨어져 나간다. 네 번째 신체와 이 동일시가 떨어져 나간다. 다섯 번째 신체의 차원에서 그대는 사념을 불러 올 수도 있고, 불러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사념과 동일시되지 않을 것이다. 사념이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분노를 불러오기 원한다면 그대는 분노를 물러 올 수 있다. 사랑을 불러오기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아무 사념도 불러오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반쯤 형성된 분노를 중단시키고 싶다면 그대는 즉각 분노에 정지하라고 명령할 수 있다. 그대는 어떤 사념을 원하건 그 사념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며, 그대가 원하지 않는 사념은 그대의 마음에 조금도 침입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구제프(gurdjieff)의 삶에 이런 여러 가지 예가 있다. 사람들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그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한사람은 극단적인 분노로 행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넘치는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의 태도가 어찌나 빨리 바뀌었던지 두 사람이 구제프를 두고 하는 말이 전혀 다를 정도였다. 두 사람이 그를 동시에 만났다 해도 한 사람은 '그는 아주 위험한 인물 같았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그는 사상으로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구제프와 같은 경우는 다섯 번째 차원에서 매우 쉬운 일이다. 구제프는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 있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즉각 얼굴에 나타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일 아니었다. 이것은 다섯 번째 차원에서 그대가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감정이든지 불러 올 수 있다. 이 때는 분노, 사랑, 미움, 용서, 그대의 모든 사념들이 단순히 장난감처럼 된다. 따라서 그대는 원할 때마다 릴랙스할 수 있다. 심각한 삶으로부터 릴랙스하는 것은 어렵지만 게임 후에 릴랙스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만일 내가 분노를 게임으로 즐긴다면 나는 그대가 방을 떠난 후에 화를 삭이며 앉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대와 말하는 것을 게임으로 즐긴다면 그대가 떠난 후에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에 동일시되어서 말이 호흡처럼 내게 붙어 있다면 나는 그대가 떠난 후에도 말을 계속할 것이다. 아무도 듣는 이가 없다면 내가 내 말을 들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말을 계속할 것이다. 말이 내 삶 자체가 때문이다. 이것은 한바탕 즐기고 나서 쉴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삶 자체가 이 말이나를 옭아매고 있다. 그런 사람은 밤중에도 말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떠들어댈 것이다. 꿈속에서도 그는 논쟁하고 싸울 것이다. 낮 동안에 했던 모든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는 하루 이십사시간 내내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이 일이 그의 삶이며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 차원에서 이런 동일시가 깨진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평화에 잠긴다. 텅빈 공간이 된다. 물론, 그대의 자유 의지는 그대로 살아 있다. 필요할 때마다 그대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 그대는 최초로 생각의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다섯 번째 신체 이전에는 생각이 그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신체 이후에는 그대가 생각을 이용한다. 그 전에는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 다섯 번째 신체의 차원에서 그대가 알게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대의 생각이 그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대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그대 자신의 생각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히틀러가 나타나자, 독일 전체가 그의 사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독일 국민 개개인은 그것을 자기의 생각으로 느꼈다. 다이내믹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킨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똑같은 생각의 메아리가 된다. 이 다이나미즘은 그 영향력이 매우 깊다. 예를 들어, 예수는 2천년 전에 죽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사념의 파장은 아직도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이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여긴다. 마하비라, 붓다, 크리슈나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이내믹한 사람의 사념은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간에 다른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타멀레인(Tamerlane)과 징기스칸의 사념이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크리슈나와 라마의 사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남긴 사념의 파장은 영원토록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 사념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특정한 마음의 상태로 인도한다. 아침에 아주 선량했던 사람이 오후가 되면 악해진다. 아침에 그는 라마(Rama)의 파장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오후에 그는 징기스칸의 파장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거지는 항상 아침에 구걸하러 온다. 아침 해가 뜰 무렵에는 악의 진동이 최소한의 효과밖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낮이 지나고 태양이 긴 여행에 지쳐 갈수록 악의 진동이 더 강한 영향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저녁때가 되면 거지는 다른 사람의 자선을 기대하기 힘들다. 아침에 거지로부터 2루피만 적선하라고 요구받은 사람은 대놓고 거절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날이 저물수록 거지의 요구에 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저녁때가 되면 이 사람은 하루 일과에 지쳐 버린다. 이제 그는 거지의 요구를 거부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그의 마음 상태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전체가 달라졌다. 이렇듯,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사념들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다섯 번째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그대는 사념이 오고가는 방식을 알고 깜짝 놀랄 것이다. 하나의 사념이 찾아 왔다가 가 버린다. 어떤 사념이 그대를 옭아매고 있다가 그대를 혼자 내버려 두고 떠나간다. 수천 가지의 사념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가 크게 모순된다. 따라서 그대의 마음 속에 칸 혼란이 일어난다. 모든 인간이 혼란되어 있다. 만일 이 사념들이 전적으로 그대의 것이었다면 혼란의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의 한 손은 징기스칸을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은 크리슈나를 잡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기념의 파장 모두가 그대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그대가 준비되는 즉시 이 파장들이 그대 안으로 침입한다. 온갖 종류의 파장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사념과의 동일시가 완벽하게 깨졌을 때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그대는 사념(thought)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유(thinking)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변화다. 사념과 사유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사념은 자동적인 현상이다. 사념은 항상 이방인처럼 왔다가 떠난다. 사념은 항상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그러나 사유는 우리의 것이다. 이 사유는 다섯 번째 신체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사념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 스스로 사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번째 차원에서의 사유는 결코 부담스러운 짐이 되지 않는다. 이 사유는 바로 그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 탄생하는 이 사유는 지혜 또는 분별력(discrimination)으로 불릴 수 있다. 어떤 이름이건 그대가 원하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 그대는 자기만의 고유한 직관, 고유한 이해, 고유한 지성을 갖는다. 외부에서 온 모든 사념의 영향력이 막을 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대는 자기만의 고유한 존재를 얻을 것이다. . 그대 자신이 될 것이다. 이제 그대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질 것이며, 그대만의 눈과 비전(vision)을 가질 것이다. 이후에는 그대가 원하는 것만 그대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제 그대는 원하는 데로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생각들은 결코 그대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주인이다. 여기에서 사념과 동일시라는 문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여섯 번째 신체에서는 사유 또한 필요 없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사념이 필수적이며, 다섯 번째 신체에서는 사유와 지혜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차원에서는 이것들마저 끝난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우주적 존재가 된다. 브라흐만과 하나가 된다. 이제 타인은 없다. 사실, 모든 사념은 항상 타인과 연관된다. 네 번째 신체까지 사념은 타인과의 무의식적인 연결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신체의 사념은 의식적인 연결이다. 어쨌든 여전히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사념은 왜 필요한가? 사념은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타인이 없다. 모든 관계가 끝나고 우주적 존재만이 남는다. 나와 네가 하나다. 이제는 사념이 존재할 공간이 없다. 사념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여섯 번째가 브라흐만이다. 이 차원에는 사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브라흐만 안에는 사념이 없다. 오직 앎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번째 신체까지는 무의식적인 사념이 존재한다. 이 사념 안에는 깊은 무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자기에 대한 무지와 싸우기 위해 우리에게 사념이 필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초원에는 자기에 대한 앎이 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 우리에게 타인으로 비치는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므로 다섯 번째 신체에서는 사유할 필요가 있다. 여섯 번째 차원은 안팎이 없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여섯 번째 차원에는 오직 앎이 있을 뿐 사념이 없다. 일곱 번째 차원에는 앎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아는 자도 없고 알려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차원은 앎에 반대하는 차원이 아니라 앎을 초월한다.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이것을 무지의 상태라고 부를 수도 있다. 궁극적인 의식에 도달한 사람과 절대적으로 무지한 사람이 똑같아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의 행동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 어린아이와 깨달음을 얻은 노인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 실제로는 똑같지 않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인다. 때로는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때로는 어린아이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성자와 같은 일면을 발견한다. 때로는 깨달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무지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만큼 바보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자는 앎을 초월한 차원에 있고, 아이는 앎 이하의 차원에 있다. 그러나 둘 다 앎의 밖에 있다는 접에서는 유사하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삼매는 어느 신체에서 얻어지는 것입니까? 여러 종류의 삼매가 있다. 하나의 삼매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신체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 삼매가 하나의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삼매는 항상 두 차우너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삼매는 여명기와 같다. 어떤 사람은 여명기가 밤에 속하는지 낮에 속하는지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명기는 밤에도 낮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밤과 낮 사이에 일어난다. 삼매도 이와 같다. 첫 번째 삼매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 삼매가 자신에 대한 앎, 아트마 기얀(atma gyan), 우주적인 앎을 가져다준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삼매가 있다. 이 삼매가 그대를 열반으로 인도한다. 일반적으로 진짜 삼매가 아니다. 일본의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사토리(satori)라고 한다. 사토리는 가짜 삼매다. 이것은 화가나 조각가, 또는 음악가가 자신의 예술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도달하는 상태와 같다. 그는 커다란 지복을 경험한다. 이것은 네 번째 신체, 사이킥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춤을 보거나 피어나는 꽃을 볼 때, 마음이 이런 일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가짜 삼매가 일어난다. 이런 가짜 삼매는 최면이나 거짓된 삭티파트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마리화나, LSD, 메스칼린, 하쉬시(ahshish) 등의 마약이나 술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네 종류의 삼매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삼매는 세 종류가 있으며, 이 삼매들은 차례대로 일어난다. 네 번째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삼매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거짓된 경험이다. 이 안에 실제적인 경험은 없다. 다만 삼매의 느낌이라는 착각이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토리에 빠져 잘못된 길로 접어든다. 이 가짜 삼매는 네 번째 신체, 사이킥 차원에서 일어난다. 신체들의 사이, 즉 신체들의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각각의 삼매가 하나의 문이며 통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신체 사이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삼매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자기 이완(self-relaxation)이 얻어진다. 우리는 이 단계에 머물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네 번째 신체의 가짜 삼메에서 정지한다. 그것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이 거짓 삼매는 거의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 없이, 아무 노력 없이 얻어진다. 그래서 대다수의 구도자들이 이 가짜 삼매에 머문다. 네 번째에서 다섯 번째 신체로 가는 여행 중에 일어나는 최초의 진짜 삼매는 아주 어렵다. 그리고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신체로 가는 중에 일어나는 세 번째 삼매는 가장 어렵다. 이 세 번째 삼매는 바즈라브헤드(vajrabhed)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번갯불을 뚫고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것이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은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이동이며, 삶에서 죽음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제적인 삼매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아트만 사마디'고 두 번째는 '브라하마 사마디', 세 번째는 '니르바나 사마디'다. 그러나 제일 먼저 '사토리'라고 불리는 가짜 삼매가 있다. 이 사토리를 경계해야 한다. 이 가짜 삼매는 무엇보다 쉽게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대의 삼매가 진정한 것인지 검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하나의 차원 안에서 삼매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가짜 삼매다. 진짜 삼매는 차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문일 뿐이지, 방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방밖에 있어야 한다. 다음 방과 연결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뱀이 선택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테오소피(Theosophy)에 의해 사용된 상징에서는 또아리를 튼 뱀이 제 꼬리를 입에 물고 있으며, 라마크리슈나 미션(Ramakrishna Mission)의 상징에서는 뱀의 꼬리가 머리에 닿아 있습니다. 이런 상징의 의미가 무어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뱀이 사용된 것은 아주 적절하고 의미 심장하다. 아마 이보다 더 나은 상징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여러 여정을 거치듯이 뱀의 상징적 형태 또한 많은 여정을 거쳐 왔다. 어떤 식으로든 뱀을 묘사하지 않는 종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뱀이 쿤달리니와 부합하는 여러 가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를 언급할 때 마음 속에 제일 먼지 떠오르는 이미지는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동작이다. 쿤달리니의 첫 번째 경험은 내부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대는 매부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뱀이 움직이는 느낌과 같다. 뱀을 생각할 때 마음 속에 떠오르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뱀이 다리 없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뱀은 이동 수단 없이 움직인다. 쿤달리니 또한 사지가 없다. 이동 수단이 없다. 쿤달리니는 순수한 에너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달리니는 여행한다. 뱀에 관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세 번째 이미지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앉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쿤달리니 또한 똑같은 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긴 것이 좁은 장소에 머물기 위해서는 또아리를 틀어야만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아주 거대한 힘이 아주 작은 센터 위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이 힘은 또아리를 틀 수밖에 없다. 뱀은 서서히 또아리를 풀고 일어난다. 뱀이 일어날수록 또아리가 풀린다. 마찬가지로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할 때 우리는 쿤달리니가 또아리를 풀고 일어서는 것처럼 느낀다. 가끔씩 뱀은 놀이를 즐기며 자신의 꼬리를 입에 문다. 이것 또한 의미 심장한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치 있는 상징으로 인정한다. 이 상징은 쿤달리니가 완전히 깨어나면 원을 그리며 순환을 형성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머리가 자신의 꼬리를 잡을 것이다. 쿤달린니의 뱀이 형성할 것이다. 뱀이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은 남성적인 수행을 상징한다. 이것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상징이다. 반면, 여성적인 수행을 상징하는 뱀은 그저 꼬리가 머리에 닿아 있을 뿐이다. 이 꼬리는 그저 복종할 뿐 입에 물려 있지 않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그 이상의 차이는 없다. 뱀의 머리 또한 의미 심장하다. 꼬리가 좁은 반면 머리는 아주 넓다. 완전히 깨어난 쿤달리니는 사하스라르(sahasrar)에 도달한다. 뱀의 턱처럼 크게 열리고 확장된다. 엄청나게 팽창한다. 마치 그 안에 수많은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 이 때 그 꼬리는 아주 작아진다. 뱀이 꼬리만으로 우뚝 서는 것은 경이적인 장면이다.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은 내부에 있는 바이탈 에너지(vaital energy)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뱀이 똑바로 설 수 있는 다른 실질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뱀은 의지력의 힘으로 우뚝 선다. 뱀이 자신을 기댈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은 없다. 쿤달리니가 깨어날 때도 마찬가지다. 쿤달리니는 물질적인 지지대가 없다. 쿤달리니는 비물질적인 힘이다. 이것이 뱀을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선택한 이유다. 다른 이유들도 있다. 예를 들면, 뱀은 순진무구한 동물이다. 힌두 교에서 '순진무구한 쉬바'라고 불리는 쉬바가 머리위에 뱀을 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뱀은 아무에게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방해받은 뱀은 크게 위험할 수도 있다. 똑같은 사실이 쿤달리니에도 적용된다. 쿤달리니는 매우 순진무구한 힘이다. 쿤달리니 자체는 그대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릇된 방식으로 쿤달리니를 방해하면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뱀이라는 상징은 쿤달리니를 그릇된 방식으로 방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뱀보다 나은 상징물이 없었다. 전 세계에서 뱀은 지혜를 대표하는 상징 동물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뱀처럼 영리하고 지성적이며 비둘기처럼 순수할지어다." 뱀은 아주 영리한 동물이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 주의 깊다. 그는 아주 예민하고 재빠르다. 이 모든 것이 뱀의 특성이다. 쿤달리니 또한 이와 같다. 그대는 쿤달리니를 통해 지혜의 정상에 도달한다. 쿤달리니는 매우 신속하면서도 강력하다. 옛날에 쿤달리니의 상징을 선택할 당시에는 뱀보다 나은 상징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이보다 더 나은 상징은 없다. 아마 미래에는 새로운 상징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로켓(rocket)이 쿤달리니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로켓을 상징으로 사용하면 쿤달리니라는 개념을 파악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 여정은 똑같다. 로켓은 하나의 하늘에서 다른 하늘로, 하나의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여행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 로켓이 쿤달리니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상징은 시대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다. 뱀이 상징으로 선택될 당시 인간은 동물의 왕국에 가까웠다. 그 당시의 모든 상징은 동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로부터 상징을 발견하려고 했다. 뱀은 쿤달리니를 정의할 수 잇는 가장 적합한 상징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쿤달리니가 전기와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5천 년 전에 쿤달리니를 전기라는 용어로 말하는 것을 불가능했다. 그 시대에는 전기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뱀은 전기와 같은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쿤달리니에 대한 경험뿐만 아니라 뱀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다. 우리에게 뱀은 아직도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최근에 영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70만 명이나 되었다. 소도 본 적이 없는 이 아이들은 아마 뱀에 대해서도 아무 개념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고 방식과 상징은 우리와 전혀 다를 것이다. 이제 뱀은 시대에 뒤떨어진 동물이 되었다. 우리의 삶에서 뱀은 더 이상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옛날에는 뱀이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뱀은 우리의 이웃이었으며 하루 이십사시간 내내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뱀의 민첩함과 지성, 그 움직임을 알고 있었으며, 뱀이 지닌 특성에 익숙했다. 사람들은 뱀이 얼마나 위험한 동물이 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기를 보호하는 뱀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만큼 뱀은 무해한 동물이다. 또한 뱀에 물려서 격노한 사람이 뱀을 죽여 버린 전설도 있다. 뱀은 그렇게 위험할 수도 있다. 뱀은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갖고 있다. 뱀과 가까이 지내던 당시 인간은 뱀을 아주 자세히 관찰했을 것이다. 쿤달리니라는 주제 또한 같은 시대에 관찰되기 시작했으며, 둘 사이의 유사성이 발견되었다. 모든 상징은 의미를 갖고 있다. 어떤 상징이 오랜 시대를 통해 전해 내려왔다는 것은 그 상징에 적합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그 적합성은 깨질 수밖에 없다. 뱀이라는 상징은 오랫동안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쿤달리니를 뱀과 같은 힘으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뱀이 어디에 있는가? 뱀은 더 이상 우리의 이웃이 아니다. 우리는 뱀과 아무 연관이 없다. 길에서 뱀을 보는 것은 매우 힘들다. 우리는 뱀과 아무 연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뱀이 쿤달리니의 유일한 상징으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없었다. 깨어난 쿤달리니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에는 의미가 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쿤달리니가 깨어나면 실제로 육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육체 안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날 때마다 육체의 기존 성분이 완전히 변한다. 당연히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육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 많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구두쇠를 예로 들어 보자 인색함은 마음의 특성이지만 그의 육체 또한 구두쇠과 된다. 그의 유체는 장래에 필요할지도 무르는 성분들을 수집하기 시작할 것이다. 육체는 아무 이유 없이 그 성분들을 축적할 것이다. 결국 괴롭고 불편한 지경에 처할 때까지 계속 그 성분들을 긁어모을 것이다. 겁 많은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육체가 두려움에 떨기를 원하는데 필요한 분비선과 호르몬이 없다고 하자. 이 때 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육체는 필수적인 성분들을 저장한다. 육체는 그대의 요구를 알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사람의 육체는 그가 두려움에 빠져드는 것을 촉진하기 위하여 두려움의 분비선들을 활성화시킨다. 겁에 질려 땀을 흘리는 사람은 땀분비선의 기능이 아주 강하다. 그는 땀을 많이 흘리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런 사전 조치가 필수적이다. 그는 하루 중에도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우리의 마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많은 것을 저장하고 있다. 육체는 마음의 요구력 이상으로 저장한다. 마음이 변하면 육체 또한 변한다. 쿤달리니가 솟아오르면 육체에 전체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 변형을 통해 그대의 살이 빠지고 혈액량도 감소할 것이다. 정확하게 그대에게 필요한 만큼 감소할 것이다. 이렇게 육체가 전체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다. 육체에 꼭 필요한 만큼의 살과 피만 남고 나머지는 타서 없어진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그대는 가벼움을 느낀다. 그대는 내면의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질문에서 인용한 말은 정확하게 옳다. 구도자는 특수한 식이 요법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쿤달리니가 솟아오르면 내부에 상당량의 열이 발생한다. 쿤달리니는 전기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는 아주 높은 전압을 가진 에너지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는 불이 쿠낟ㄹ리니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불 또한 훌륭한 상징이다. 쿤달리니는 그대의 내부에서 불처럼 타오를 것이고, 그 불길이 아주 높이 치솟을 것이다. 많은 것이 불에 탈 것이다. 큰달리니의 각성으로 인해 일종의 건조함(dryness)이 초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비해 그대의 퍼스낼리티가. 아주 조화롭게 되어야 하고, 윤택한 특성들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어떤 수로가 개발되어야 한다. 화가 많은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렇지 않아도 그는 메마르고 거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내부에 불이 치솟기 시작하면 그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화학적인 조화가 훌륭하다. 그의 내부에는 부드러운 화학적 조화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쿤달리니 각성으로 인한 역효과가 없을 것이다. 쿤달리니에 관해 예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말은 이런 점들을 상세하게 고려하여 말해진 것이다. 물론 그 말들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이것은 고대에 표현법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접근 방식 또한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진실이다. 피와 살, 골수가 불 탈 깃이고, 그대는 완전히 변화될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대의 패턴과 화학 성분이 변화를 겪을 것이다. 구도자는 이것을 마음 속에 새기고 자신을 합당하게 준비시켜야 한다. 니르바나, 궁극의 차원 당신은 나르골(Nargol) 명상 캠프에서 아사나(asana), 프라나얌(pranayam), 무드라(mudra), 반드하(banadha) 등의 요가 수행법이 명상의 상태에서 개발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상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아사나가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역으로 특정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특정한 내면의 상태를 이룰 수 있습니까? 다양한 아사나, 프라나얌, 무드라, 반드하를 사용함에 의해 명상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 다양한 방법의 유용성과 의미는 무엇입니까? 명상의 체험이 먼저 왔다. 그리고 이 명상이 체험을 통해 육체가 여거 가지 자시를 취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실제로 마음이 특정한 상태에 놓이면 몸은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취한다. 예를 들어, 그대가 사랑으로 충만한 얼굴이 그것을 표현한다. 화가 나 있을 때는 전혀 다르다. 화가 났을 때 그대는 이빨을 갈고 주먹을 쥔다. 몸이 싸울 준비를 한다. 그러나 관대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때는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손바닥이 펴진다. 관대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람은 결코 주먹을 쥐지 않을 것이다. 주먹을 쥐는 것은 싸울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먹을 풀고 손을 펴는 것은 싸우려는 의사가 없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다. 그러나 주먹을 쥐는 것은 상대방을 위협하는 것이다. 몸은 마음의 상태에 일치하여 기능한다. 그것이 몸의 본성이다. 몸은 마음을 따른다. 몸은 항상 마음의 뒤를 따른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는 화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지,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깊은 마음의 상태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마음 속에 깊은 상태가 창조되면 육체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무드라, 몸짓, 아사나, 자세 등이 나타난다. 이것이 내면에 일어난 변화를 말해 준다. 사실, 아사나는 특정한 내면의 상태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무드라는 나중에 형성된다. 무드라는 내면의 상태에 관한 정보를 준다.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면 육체도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모색해야 한다. 내부에서 쿤달리니가 깨어나면 육체는 에너지의 통로를 만들기 위하여 온갖 비일상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가 상승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척추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굽어질 것이다. 머리도 다른 동작을 취할 것이다. 몸이 전에 없던 동작을 취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는 몸이 기립 자세를 취하고, 우리가 잠잘 때는 누워야 하는 것과 같다. 날 때부터 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결코 눕지 않을 것이다. 30년 쯤 지난 후에 그가 잠자기를 원한다면 그의 몸이 생애 최초로 누울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이런 면에 관해 그의 마음 상태가 변화했으며, 그는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자세에 상당히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의 몸은 전에 한 번도 이런 자세를 취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는 앉고, 서고, 걸어 본 적은 있지만 한 번도 누워 번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는 누워야 한다. 그래야 잠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마련된다. 몸이 누우면 마음은 특정한 상황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눕는 방식이 다르다. 각자의 마음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시 부족은 베개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인은 베개가 없이 잠자기가 힘들다. 원시 종족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머리로 흘러 들어가는 혈액의 양이 훨씬 적다. 잠을 자기 위해서는 머리로 흘러드는 피의 양이 가능한 한 적어야 한다. 너무 많은 피가 머리로 흘러들면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뇌신경이 릴랙스되지 않으면 그대도 릴랙스 되기 힘들다. 피가 뇌 속으로 계속 흘러들 것이고, 그대는 자꾸 베개를 더 높이 할 것이다. 더 교육받고 문명화된 사람, 문화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머리 밑에 받히는 베개의 수가 많아진다. 피가 뇌 속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해 고개가 거의 수직이 되어야 한다. 몸의 자세는 마음의 상태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내부에서 에너지가 깨어나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아사나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각 차크라가 열림에 따라 몸이 취하는 아사나도 달라진다. 이렇게 다양한 자세가 형성된다. 내면에 특정한 상태가 창조되면 손과 얼굴,눈의 표현 방식이 달라진다. 명상중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 결과로써, 사람들은 그 역작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이런 아사나를 행하면 명상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명상 중에 이런 일련의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구도자 모두에게 동일한 육체적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구도자들의 육체와 마음의 상태는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모든 구도자가 똑같은 아사나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어떤 구도자의 머리로 흘러드는 피의 양이 적다고 하자.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 데 뇌 속에 더 많은 피가 필요하다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즉각 쉬르시아사나(shirshasana), 물구나무서기 자세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구도자가 이런 자세를 취하지는 않는다. 머릿 속으로 흘러드는 피의 양이 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필요한 혈액의 양이 각자 다르다. 그러므로 구도자 각자에게 필요한 정도에 따라 다른 아사나가 형성될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아사나를 선택하여 수련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아사나가 우리에게 유용하거나 필수적인지 모른다. 아사나는 도움이 될 수 있는 만큼 해가 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맞는 아사나는 도움이 되겠지만 부적합한 아사나를 행하면 해를 입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게 어떤 아사나가 맞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어려움은,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동시적으로 외부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나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적으로 어떤 동작을 취할 때 , 그것은 육체적인 행위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가 나면 자동적으로 주먹에 힘이 간다. 그러나 주먹을 움켜쥔다고 해서 반드시 화가 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화가 난 동작을 취해도 마음 속에서 전혀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분노를 일으키고자 할 때 주먹을 쥐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먹을 쥔다고 해서 반드시 분노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 어는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주먹을 쥐는 쪽이 더 낫다. 이런 약간의 도움이 가능하다. 마음이 평정한 상태에서는 손이 특정한 무드라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무드라를 취한다고 해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육체의 특정한 상태가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한다. 몸이 협조할 준비를 갖춘 다음, 마음에 필요한 일을 하라고 자신을 위임한다. 그러나 몸의 변화가 반드시 마음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상태가 몸의 상태보다 선행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변화하면 몸이 그 변화에 발을 맞춘다. 최초의 육체적 변화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높여 준다. 그러나 여기에 확실성은 없다. 그러므로 속을 위험성이 항상 잠복해 있다. 특정한 아사나와 무드라를 행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아사나와 무드라를 행하면서 '우리는 요가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요가라는 개념에 묻혀 명상이 점점 사라져갔다. '요가 수행'이라는 말과 더불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사나와 호흡법 등이다. 어떤 사람에게 요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좌법과 호흡법 따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이렇게 주장한다. 구도자에게 필요한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특정한 몸의 자세가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확실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항상 나는 외부적인 작업보다 내적인 작업을 선호한다. 내면에서 어떤 일이 시작되면 우리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명상하는 자세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는 그가 내심 울기를 원하면서도 꾹 참고 있다고 느낀다. 만일 그가 10분 동안만 운다면 정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는 울음이 터져나올까 봐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억제하고 있다. 이제 내가 그에게 '참지 말고 맘껏 울어라.'하고 말하면 처음에 그는 우는 흉내만 낼 것이다. 그는 내심 울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울음의 과정이 장벽을 깰 것이다. 밖으로 흘러나가야 할 것들이 그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다. 어떤 구도자는 춤추고 싶은 마음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자제한다. 그에게 춤추라고 말하면 그는 춤추는 동작을 취하겠지만 그 춤은 그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춤을 추기 시작하면 내면의 춤이 밖으로 터져나올 기회가 생길 것이다. 곧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고, 내면의 춤이 외부적인 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면에 춤의 동기가 없다면 그가 아무리 춤춘다 해도 그것은 몸동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춤을 통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수많은 조건이 있다. 이런 조건들을 마음 속에 새기면 그대는 이해할 것이다. 이런 조건들로 마음의 부담을 안고 싶지 않다면 내면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외적인 현상에 머물지 말라. 그 현상에 맞서 싸우지도 말라. 그러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현재 당신이 주도하고 있는 명상 실험에서, 앉거나 서는 자세에 따라 생기는 육체적, 심리적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 자세가 큰 차이점을 만든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육체의 상태는 특정한 마음의 상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누워 있는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하면 그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 것이다. 서 있는 사람이 깨어 있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서 있는 사람에게 잠자라고 말하면 그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 것이다. 반면. 누워 있는 사람이 잠자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이 명상 실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의 측면은 최면이다. 이 최면 속에선느 구도자가 졸음을 느끼거나 잠이 들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다. 서 있는 자세가 이런 염려를 떨쳐 버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 있는 자세에서는 졸음을 느낄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 실험의 두 번째 측면은 주시하는 태도, 의식의 각성 상태다. 누워서 각성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서 있는 자세로 각성을 유지하는 것은 쉽다. 서 있는 동안 그대는 깨어 있는 한편 주시자가 될 것이다. 최면의 초기 단계에서 트랜스(trance)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는 서 있는 자세에 의해 이런 위험성이 크게 줄어든다. 두세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서 있는 자세에서는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누워 있을 때는 그대의 움직임이 그렇게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앉아 있는 자세에서는 몸의 절반이 움직임에 동참한다. 다리가 춤추기를 원하는데 그대가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다리는 춤출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다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를 것이다. 앉아 있는 자세에서는 다리가 자신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미묘한 힌트를 포착하는데 실패한다. 서 있는 자세에서는 다리가 자신을 들어올리기 시작할 것이고, 그대는 다리가 춤추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앉아 있는 자세에서는 이런 힌트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명상을 위해 앉는 자세를 취하는 전통은 몸의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었다. 명상을 배우기 위해 싯디아사나(siddhasana),파드마사나(padmasana), 수크아사나(sukhasana)등 여러 가지 요가의 좌법을 수련해야 했다. 이것은 몸의 움직임을 재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내면에서 에너지가 솟아오를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결과로 많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대는 춤추고, 노래하고, 점프하고,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런 감정적 행동은 항상 광기와 관련되어 있다. 미친 사람은 울고, 웃고, 춤추고, 펄쩍펄쩍 뛴다. 명상가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미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구도자는 사회에서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좌법을 훈련해 했다. 이런 좌법은 몸의 움직임을 컨트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 구도자는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요가의 좌법은 다리를 뻣뻣하게 고정시킨다. 땅과 멀어질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반면, 땅과 가까이 있으면 몸이 무거워진다. 그대의 하체가 사원이나 피라미드처럼 무거워진다. 밑 부분은 넓고 꼭대기는 좁아진다. 그래서 움직임의 가능성이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거의 제로에 가까워진다. 서 있는 자세에서는 움직임의 가능성이 최대한으로 늘어난다. 그대를 고정시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때는 부동의 기반이 형성된다. 몸의 상당 부분이 중력에 의해 고정된다. 손 또한 움직임의 가능성을 최소화시키는 방식으로 놓인다. 등뼈도 곧게 펴져서 고정된다. 예전에는 명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런 좌법을 오랫동안 수련해야 했다. 그러나 나의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나의 시각에 의하면 우리와 미친 사람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없다. 우리 모두는 억눌린 광인들이다. 우리의 광기는 억압된 광기다. 우리는 정상적으로 미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미친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조금 더 미친 사람들이 문제에 빠질 뿐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광기가 잠복해 있으며 , 이 광기는 항상 출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화가 났을 때 그대는 일시적으로 미친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 그대는 평소에 꿈조차 꿀 수 없었던 행동을 한다. 그대는 상소리를 내뱉고, 돌을 집어던지고, 가구를 부순다. 지붕 위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미친 사람이 이런 짓을 했을 때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하는 반면, 소위 정상적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면 우리는 단순히 '그는 화가 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도 광인과 다를 바 없다. 만일 그의 내면에 광기가 없었다면 이런 행동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모든 광기가 우리의 내면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광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명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밖으로 집어던져야 한다. 이런 광기를 덜어낼수록 그대의 마음이 더 가벼워질 것이다. 기존의 좌법이 효과를 거두는 데 몇 년이 걸리는 반면, 이 새로운 방법은 단 몇 달만에 똑같은 결실을 낳는다. 기존의 방편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많은 생이 걸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방법은 단 몇 달밖에 안 걸린다. 내면의 광기가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방편에서는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육체 안에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에텔체 안에서 실행된다. 이것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웃음, 울음, 춤 등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으며, 이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몇 시간 동안 절대적인 고요에 잠기도록 육체를 훈련하면 에텔체를 통해 카타르시스가 일어난다. 이 카타르시스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대만이 안다. 이제 그대는 사회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그대다 춤추고 노래한다 해도아무도 그것을 무를 것이다. 그대는 내면에서만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이 춤과 노래는 꿈과 같다. 그대는 내면에서 춤추고, 울고, 웃는다. 그대의 육체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의 단서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들어내지 않은 체 육체는 고요하게 앉아 있을 것이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사소한 일 때문에 많은 문제를 겪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명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년씩 육체적 수련으로 허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런 수련에는 또 하나의 위험성이 있다. 육체를 통제하고 완벽하게 억압하는 데 능숙해지면 에텔체 안에서 어떤 진동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에텔체가 완전히 무기력해질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진보된 과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석상처럼 앉아 있는 데 성공할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내면에 억압된 상황에서는 미쳐 버릴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구도자들이 미쳐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내가 권장하는 이 방법은, 설령 미친 사람이라도 한두 달 동안 행하면 광기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이 방법을 행함으로써 정상적인 사람이 미칠 가능성은 전무하다. 나의 방법에서는 내면의 광기를 억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광기를 밖으로 내던진다. 기존의 명상법은 많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아름다운 말로 은폐되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그는 광적인 황홀경의 상태에 빠졌다. 그는 신에 취했다. 그는 성자가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은폐해도 그가 미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내면에 억압했고, 급기야 그것들은 그의 통제권을 벗어났다. 내가 권하는 이 방법은 두 가지 작용을 한다. 첫 번째 작용은, 그대의 내면에 쌓여 있는 모든 쓰레기를 밖으로 집어던지는 것이다.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먼저 그대는 무게를 덜어야 한다. 내면에 광기의 흔적조차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야 한다. 그 다음에 그대는 내면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 이 방편에서 광기 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 그대를 모든 광기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그대 안에 쌓여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내면의 부담스런 짐들, 긴장과 불안 이 밖으로 던져져야 한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광기가 그대를 찾아왔을 때 그대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 스스로 광기를 일으켰을 때는 그대가 광기의 주인이다. 일단 그대가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광기가 절대로 그대를 사로잡지 못한다.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해 춤추고, 노래 부르고, 웃고, 소리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미친 사람이나 할 법한 모든 짓을 한다. 그러나 여기엔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미친 사람에게는 그런 현상이 저절로 일어나지만, 명상가는 스스로 그런 현상을 일으켰다. 명상가의 전적인 협조가 없으면 이런 광기는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그는 언제라도 이런 광기를 중단시킬 수 있다. 이 명상가는 절대로 미치니 않는다. 그는 광기고 살고, 광기를 보았으며, 광기와 친숙해졌다. 이런 광기는 그의 의도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광기는 그의 통제권 안에 들어왔다. 사회는 우리를 이상한 방식으로 훈련시켜서 광기가 우리의 통제권을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광기는 우리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광기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나는 미래의 인류에게 이 명상법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문명은 날로 광기를 향해 치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광기를 제거하기 위해 이 방편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그대가 한 시간 동안 명상하면서 이렇게 광기를 밖으로 집어던지면 다른 사람들도 점차 이병상법에 익숙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람은 명상을 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면 그는 감옥에 수감될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 분노를 발산하면 그의 모든 인간 관계가 끊어질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 광기가 표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광기가 표출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허용한지 않으면 이 광기는 수많은 출구를 발견할 것이다. 간혹 그대는 술에 취해 엉망이 된다. 광기를 표출하기 위해서다. 때때로 그대는 광란의 춤을 통해 광기를 표출한다. 이런 소란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트위스트 같은 새로운 유형의 춤이 등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볼 때, 육체는 움직이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육체가 움직일 공간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래서 육체는 스스로를 위해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살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명상법은 이런 대책에 의존하지 않고 광기를 내던진다. 이 명상 안에서 우리는 아무 대책도 만들지 않고,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면에 어떤 것이 있으며 무엇을 내던져야 하는지 안다. 우리는 이런 앎을 갖고 내던진다. 어린아이들에게 이 명상법을 가르치면 미친 사람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광기를 영원히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미친 사람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가 진보할수록 광기도 점점 더해질 것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억압을 가르친다. 예의 범절은 우리가 큰 소리로 울거나 웃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할 때 춤추거나 소리지르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는 사방에서 우리는 압박한다. 그 결과로, 우리의 내면에서 발산되어야 할 모든 것이 억압되어 있다. 이 억눌린 감정들이 폭발하는 날 겉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명상법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첫 단계다. 이 카타르시스르 통해 우리는 내면에 억압된 모든 감정을 해방시킨다. 나는 이 명상 실험 중에 서 있는 자세를 권장한다. 그래야 내면의 작은 움직임도 자각할 것이며, 그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명상을 행하는 구도자는 밀폐된 방에 들어가라. 그냥 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벌거벗고 서야 한다. 조금도 걸치적거리는 것이 없도록 옷을 몽땅 벗어야 한다.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도 그것을 허용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자유로워야 한다. 움직임을 방해하는 조금의 장애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때 그대는 신속한 진전을 이룰 것이다. 하타 요가(hatha yoga)나 다른 요가를 통해서는 몇 년 또는 몇 번의 생을 필요로 하는 일이 이 명상법을 통해서는 단 며칠만에 일어날 것이다. 긴 세월을 필요로 하는 요가 방편은 이제 이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제 사람들은 며칠, 심지어는 몇 시간도 여유가 없다. 우리에게는 신속한 효과를 낳는 방편이 필요하다. 만일 1주일을 어떤 방편에 전념한다면 그 1주일의 마지막 기간 중에 '내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1주일 안에 그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곱 번을 다시 태어나야 효력을 발휘하는 방편이 있다면 아무도 그 방편을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방법들은 수많은 생을 거친 후에야 효과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번 생에서 이 방법을 수행하라. 그러면 다음 생 언젠가 틀림없이 효력이 나타날 것이다. " 참으로 인내와 끈기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음 생 언젠가 효과가 나타난다고 약속되어 있는 명상법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도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누가 내일을 기대하겠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이후, 우리에게 있어서 내일 사라졌다. 미국에서는 많은 청소년이 대학에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교육을 마칠 때까지 이 세상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대학 교육을 시간 낭비라고 느낀다. 그들은 학교에서 도망친다. 그들은 부모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우리가 대학에서 6년을 보낸 후에도 세상이 그대로 존재할 것인가? 그것을 보장할 수 있는가? 이 6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우리의 삶을 위해 활용하면 안 되는가?" 내일조차 불확실해진 마당에 여러 번의 생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도 이런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명상법을 행하고 당장 효과를 느껴라.'하고 말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명상 실험을 하기 위해 한 시간을 내게 맡긴다면, 그는 이 한 시간이 지난 후에 즉각 효과를 느껴야 한다. 그래야만 내일도 그는 한 시간을 내게 할애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내일도 이 명상법을 행할지는 불확실하다. 지금은 시대적인 요구 사항이 변했다. 우마차가 사용되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명상 또한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트기가 날아다니는 시대다. 이젠 명상 또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스피드를 높여야 한다. 성스러운 사람에게 굴복하며 땅바닥에 엎드리는 행위, 머리나 손을 그의 발에 갖다 대는 행위, 신성한 장소를 숭배하는 행위, 신성한 사람이 구도자의 머리나 등을 만짐으로써 축복을 내려 주는 행위, 시크 교도와 모하메드 교인들이 사원에 들어갈 때 머리를 가리는 행위, 이런 것들이 쿤달리니 에너지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이런 행위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 상대방을 때리고 싶어한다. 우리는 그의 머리를 우리 발아래 두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차선책을 택한다. 즉 신발을 그에게 집어던지는 것이다. 5피트 6인치나 되는 사람을 우리 발아래 두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머리에 신발을 집어던진다. 이것은 우리 안에 분노가 일고 있다는 표시다. 그러나 이렇게 신발을 집어던지는 행위 뒤에 어떤 이유가 숨어 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특정한 집단이나 한 나라에만 국한되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행위다. 인간은 어떤 사람에 대해 화가 날 때마다 그의 머리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원시적인 시대에는 적의 머리에 발을 올려놓은 다음에야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아직 신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대는 분노를 느낄 때 상대방의 머리를 그의 발아래 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 반대의 경우 또한 진실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느낄 때 자신의 머리를 그의 발아래 놓고 싶어한다. 적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많은 이유가 있다. 스스로 굴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대를 향해 바이탈 에너지가 흘러드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실제로, 어떤 종류의 흐름을 받아 들고자 할 때마다 그대는 꿇어 엎드려야 한다. 강으로부터 그대의 주전자를 채우고자 한다면 그대는 몸을 숙여야 한다. 모든 흐름은 낮은 곳을 향해 흐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다면 그대가 머리를 숙일수록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두 번째로, 에너지는 사람의 뾰족한 말단 부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그렇다. 에너지가 모든 곳으로부터 흘러 나오지는 않는다. 바이오 에너지(bioenergy), 삭티파트 에너지 또는 육체로부터 흘러나오는 어떤 에너지건 손가락과 발가락 끝으로 흘러나온다. 에너지는 몸 전체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말단 부분에서만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스승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에너지를 주는 스승은 제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이것은 매우 신비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흉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목적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의 발아래 머리를 갖다 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미도 없이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 이런 식으로 아주 심오한 원리가 점차 단순한 형식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어떤 형식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당연히 반발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무슨 넌센스인가?당신의 머리를 어떤 사람의 발아래 놓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저 머리를 만지는 것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99퍼센트의 경우는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1퍼센트의 경우는 여전히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행위의 백 퍼센트 전부가 의미를 갖는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난 행위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무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발을 만진 것이 아니었다. 간혹 어떤 사람의 발 밑에 엎드려야 한다고 느낄 때는 그것을 자제하지 말라. 엎드려라! 그가 그대의 머리 위에 반듯이 손을 올려놓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그의 손이 너무 무거워지고 무엇인가 손으로부터 빠져나갈 준비가 되었을 때만 일어난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만 그의 손이 상대방의 머리 위에 놓였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단순한 형식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형식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무의미해진 형식은 비판받기 마련이다. 이런 비판은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이 전통의 배후에 숨어 있는 과학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매우 의미 심장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스승이 있고 수용적인 제자가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붓다나 마하비라의 발 밑에 무릎을 꿇는다. 그는 독특한 기쁨을 경험한다. 그는 자기 위에 은총의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외부에 서 있는 사랑은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한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경험을 한 사람에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증거를 요구하면 그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것이 모든 신비적인 현상이 직면하는 어려움이다. 그는 분명히 어떤 경험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제시할 증거가 없다. 그 때 이 사람은 맹목적인 신봉자처럼 보인다. 그는 '분명히 어떤 이이 내게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 말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이 사람은 큰 환상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의 발 밑에 엎드린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것은 모두 넌센스다!'하고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물통이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뚜껑이 열린 물통은 강에서 돌아와 '나는 물에게 엎드려 절했고 이제 가득 찼다.'고 말한다. 이제 뚜껑이 닫힌 다른 물통도 그렇게 시도한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강속으로 들어가도 그는 텅 빈 채로 돌아올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이렇게 선언할 것이다.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 강속으로 들어가 가득 찬 물통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강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런 현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대가 텅 비고 열려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보다 그대의 수용성, 그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인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대가 충분히 열려 있다면, 설령 그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에너지가 없다 해도 그대는 에너지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근원에서 에너지가 그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가 완전히 열려 있기만 하면 에너지가 그대에게 부어진다. 설령 앞에 있는 사람이 그대에게 줄 것이 전혀 없다 해도 그대는 그로부터 에너지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다. 이 에너지는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매개체일 뿐이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그대는 머리를 가리고 구루드와르(gurudwar)나 모스크(mosque)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많은 파키르(fakir)들이 머리를 가리고 명상한다. 이것은 나름대로 유용성이 있다. 에너지가 깨어나면 머리가 아주 무거워진 수도 있다. 이 때 천으로 머리를 감싸면 이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이 에너지가 그대 안에서 순환을 창조할 것이고, 그대의 명상을 더욱 강렬하게 한다. 머리를 감싸는 이 행위는 크게 유용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머리를 감싸고 명상하면 그대는 즉가 차이점을 느낄 것이다. 이 때는 15일 걸려야 이루어지는 것이 단 5일만에 성취될 수도 있다. 에너지가 머리에 도달하면 그 에너지가 분산되고 흩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때 에너지가 통합되고 순환이 형성되면 그대의 경험이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스크와 구루드와르에서 머리를 가리는 관습은 형식에 불과하다.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관습의 배후에 상당한 의미가 잠재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어떤 사람의 발을 만지거나, 축복을 내리는 그의 소에 의해 에너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무덤 앞이나 사원의 상 앞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은 무엇을 얻는가? 여기에도 또한 많은 이유가 있다. 상을 만드는 행위의 배후에는 아주 과학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 내가 임종을 맞는 자리에 몇몇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하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 안에서 무엇인가 본 사람들, 내 안에서 무엇인가 발견한 사람들이 내 임종을 지키고 있다. 이제 이 사람들은 '우리가 당신을 어떤 식으로 기억해야 합니까?'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어떤 상징이 정해질 수 있다. 조각상, 돌, 나무, 심지어는 기차역, 또는 내 무덤, 내 옷 조각, 또는 내가 신던 슬리퍼 등 무엇이든지 이런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징은 우리 사이에서 사전에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 사이에 어떤 이해와 합의가 있어야 한다. 어느 한 쪽에 의해 독단적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 상징을 정하기 위해서는 나의 승인이 필수적이다. 그 다음에 나는 '이 상징 앞에서 나를 생각하면 나는 육체 없는 상태로 나타날 것이다.'하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약속을 해야 하고, 모든 일이 이 약속에 따라 일어난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세상의 사원들 중에는 살아 있는 사원과 죽어 있는 사원이 있다. 죽은 사원은 어느 한 쪽에 의해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상대측으로부터의 보장과 약속이 없다. 붓다의 사원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다. 이것은 죽은 사원이 될 것이다. 붓다는 이에 관해 어떤 약속도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살아 있는 사원도 있다. 신성한 사람의 선언이 이 사원의 기초를 이룬다. 티베트에는 지난 2천 5백년 동안 붓다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장소는 어려움에 처했다. 5백명의 라마승으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죽으면 그의 자리를 메우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 5백 명이라는 숫자가 지속되어야 한다.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된다. 그들 중 한 명이 죽으면 한 사람을 더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나머지 4백 99명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안 된다. 5백 명의 라마승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붓다 푸르니마(Buddha Poornima), 즉 붓다의 탄신을 기념하는 5월 보름날 밤에 특정한 산에 모인다. 그리고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붓다의 음성을 듣는다. 다른 곳에서도,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도 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은 사전의 약속에 따라 정확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밤중에 '내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야지.'하고 결심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결심이 굳으면 그대를 깨울 자명종 시계가 필요 없다. 정확하게 다섯 시가 되자마자 그대는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시계를 갖고 체크해 보라. 시계가 틀릴지언정 그대는 틀리지 않는다. 결심이 확고하면 그대는 확실하게 다섯 시에 일어난다. 만일 그대가 어느 해, 어느 날에 죽기로 굳게 결심하면 지구상의 어떤 힘도 그대를 막지 못한다. 그대는 미리 작정한 그 순간에 죽을 것이다. 그대의 결의가 확고부동하면 그대는 죽은 다음에도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가 사후에 다시 나타난 경우가 그렇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그들은 예수가 다시 출현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부활한 것인 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것은 예수가 특정한 제자들에게 한 약속이었고, 이 약속은 사후에 지켜졌다. 실제로,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지금도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 장소들이 있다. 그런 장소는 순례를 위한 성스러운 장소로 변해 갔다. 그 다음에 서서히 그 약속은 잊혀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단 한 가지 사실만 남게 되었다. 이런 장소를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남았다. 그것이 전부다. 모하메드가 준 약속이 있고, 샹카라(Shankara)가 준 약속도 있다. 붓다, 마하비라,크리슈나에 의해 주어진 약속도 있다. 이런 약속은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대, 특별한 순간과 관련된다. 우리는 아직도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장소에 다시 경의를 표해야 하고 완전히 귀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신성한 장소, 사원, 무덤, 이 모두가 유용하다. 그러나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이렇게 유용한 장소도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서 쓸모 없게 된다. 이렇게 쓸모 없게 장소는 부셔 버려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이 주어지고, 이 약속이 새로운 순례지, 새로운 상, 새로운 사원을 만든 게 해야 한다. 낡은 것은 붕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나무 인도에 한 요기(yogi)가 있었다. 영국인 여행자가 그를 찾아왔다가 떠나면서 말했다. "이제 저는 떠나는 중이며, 아마 다시는 인도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보고 싶을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기가 자신의 사진을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밀폐된 방에 들어가 5분 동안 눈도 깜빡거리지 말고 이 사진에 모든 것을 집중하라. 그러면 내가 거기에 나타날 것이다. " 이 영국인은 여행하는 동안 내내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서 이 실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요기의 약속은 아스트랄체의 차원에서 지켜졌다. 이런 일은 어렵지 않다. 깨달은 자는 죽은 후에도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초상화와 동상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어떤 약속이 지켜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상과 동상을 만든 배후에는 완벽한 과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상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그 뒤에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 자이나 교 24명의 티르탕카르 상을 관찰해 보면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들 모두가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을 상징하는 무늬가 다를 뿐이다. 마하비라의 무늬가 다르고, 파르쉬와나트(Parshwanath)의 무늬가 다르고, 네미마트(Nemimath)의 무늬가 다르다. 이런 무늬를 없애 버리면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이 실제로 똑같은 얼굴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아마 그들은 첫 번째 티르탕카르의 상을 원형으로 삼아 자기들의 상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각기 다른 상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티르탕카르를 가리키는 하나의 상이 있었고, 이 상이 모든 티르탕카르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각기 다른 티르탕카르를 모시는 헌신자들은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가 모시는 티르탕카르에게 다른 티르탕카르들과 구별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상징이나 표식을 남겨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티르탕카르마다 각기 다른 무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상은 똑같다. 어떤 티르탕카르는 사자 무늬를 갖고 있으며, 다른 티르탕카르는 다른 무늬를 사용한다. 그들의 무늬는 각기 다르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이다. 특정한 무늬를 가진 하나의 상이 특정한 티르탕카르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상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 상징들이 통용된다. 가령, 예수의 상징은 십자가다 . 이 상징은 누구에게나 통용될 것이다. 무하메드는 자신의 상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 사실, 모하메드의 시대에는 너무나 많은 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는 추종자들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상징을 주고 싶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동상을 만들지 말라. 나는 동상 없이 그대들과 관계를 맺을 것이다. 내 동상과 초상화를 만들지 말라. 나는 그런 것들 없이 그대들과 연결될 것이다. " 이것은 참으로 심오하고 대범한 방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모하메드와 연결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하메드가 죽은 후에 그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성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들은 직접 모하메드와 연결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성자들의 무덤을 만듦으로써 모하메드와 관계를 맺고자 했던 것이다. 모하메드 교인들처럼 무덤을 숭배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모하메드와 직접 연결을 맺을 수 있는 아무 상징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하메드의 상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성자들의 상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 상들을 통해 모하메드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과학적인 현상이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면 기적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따르면 자멸을 초래할 뿐이다. 프라나 프라티쉬타(prana pratishtha), 즉 우상을 설치하면서 행하는 의식에는 어떤 신비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상당한 의미가 있다. 프라나 파라티쉬타, 우상을 설치하는 신비적 의식은 우리가 옛날의 약속에 기초하여 새로운 상을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징조를 통하여 옛날의 약속이 충분히 이행되었는지 조사해야 한다. 우리측에서는 예전의 합의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우상을 단순히 우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체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우상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어떤 암시와 징조를 포착하기 시작할 것이며, 이런 암시와 징조에 의해 우상을 설치하는 신비적 의식이 성공리에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부분에 관한 지식은 완전히 사라졌다. 만일 이런 징조가 없다면 우리가 우상의 설치를 끝냈다 해도 그것은 성공적인 작업이 아니다. 우상의 설치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특정한 신비적 암시가 정해졌다. 이런 징조가 발견되면 우상의 설치가 신비적인 힘에 의해 용인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제 이 우상은 살아서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대의 집에 무선 장비를 설치했다고 하자. 첫째로, 장비 자체의 상태가 좋아야 한다. 모든 부품이 제자리에 놓여 있어야 한다. 전원을 연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전파도 잡지 못한다면, 이것은 무선 장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지 장비는 수리를 받아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장비로 대체해야 한다. 우상 또한 일종의 수신기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죽은 각자가 이 수신기를 통해 살아 생전에 했던 약속을 이행한다. 그러나 그대가 이 수신기를 지키고 있다 해도, 설치 작업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시켜 주는 징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대는 이 수신기가 작동하는지 안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우상의 설치 과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 측면은 사제에 의해 이행된다. 사제는 만트라(mantra)를 몇 번 명송해야 하는지, 실을 몇 개나 묶어야 하는지, 이 우상을 모시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어떤 종류의 의식이 거행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 의식의 두 번째 부분은 다섯 번째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에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다. 이 사람이 '이 우상은 살아 있다.'고 선포해야만 비로소 그 우상이 살아난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사원들은 상아 있지 못하다. 오늘날의 새로운 사원들은 완전히 죽은 장소가 되었다. 살아 있는 사원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원이 파괴된다고 하자. 이것은 그대가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겼던 그 사원이 실제로는 죽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예를 들어, 소마나트(Somanath) 사원이 그렇다. 이 사원이 파괴된 경위는 아주 이상하다. 이 이야기는 사원의 과학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 사원에는 5백명의 사제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사원 안에 있는 우상을 살아 있는 존재로 믿었다. 그들은 그것이 파괴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사제들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했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행위였다. 그 우상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실제로 알아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주변의 왕과 족장들이 사원에 전갈을 보냈다. 모하메드교의 침입자인 가자나위(Gajanawi)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경고였다. 그들이 사원을 보호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사제들은 '이 우상이 모든 것을 보호한다. 이 우상은 당신들이 보호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고 말하면서 이 제의를 거절했다. 이 말을 듣고 족장들이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였다. 그 우상은 죽은 우상이었던 것이다. 사제들은 이 우상의 배후에 엄청난 힘이 지키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 우상이 살아 있는 존재며 막강한 힘을 가졌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보호하려는 생각조차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가자나위가 쳐들어와서 단칼에 이 우상을 네 조각내 버렸다. 이런 일을 겪은 후에도 사제들은 이 우상을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이 우상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살아 있는 우상에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사원 안에 있는 우상이 살아 있었다면 벽이 무너져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 사원이 살아 있는 사원이었다면 침범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원은 살아 있는 사원이 아니다. 사원을 살아 있게 지키는 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사원이 살아 있는 것은 큰 기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과학을 아는 사람이 없다.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할 사람이 없다. 오늘날에는 사원을 상점처럼 경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설령 이런 과학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사원에 입장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원은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거의 모든 사원이 죽어 있다. 이것은 성직자들의 이득에 부합한다. 살아 있는 사원은 성직자들에게 이득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가두어 둘 수 있는 죽은 신을 원한다. 거기에 자물쇠를 채우고는 그 열쇠를 자기가 간직하기를 원한다. 만일 사원이 더 높은 차원의 힘과 연결되어 있다면 성직자들이 그 곳에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죽은 사원을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왜냐 하면, 이것이 훌륭한 돈벌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살아 있는 사원은 극소수다. 사원을 살아 있도록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행해졌다. 그러나 종교에 몸담고 있는 성직자들, 사원에 거주하는 성직자들이 너무 많아서 이 일이 매우 어려웠다. 결국은 항상 이런 일이 발생한다. 세상에 이토록 사원이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사원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사원과 신성한 장소들이 완벽하게 죽어 있었으며, 그 주변에 사제들이 진을 치고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원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원을 짓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늘날에는 마하비라의 사원마저 죽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주변에 사제들이 진을 치고 있다. 종교의 살아 있는 원리들이 보존되었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교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원리들을 보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온갖 부류의 훼방꾼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어 이 원리들이 갖는 모든 잠재성을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한 쪽에서 지켜야 할 조건이 깨지면 상대방의 약속 또한 깨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양측의 이해에 따라 도출된 합의다. 우리는 우리측의 합의 사항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측에서도 약속을 지킨다. 그렇지 않으면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고, 모든 일이 거기에서 끝난다. 가령 내가 육체를 떠나면서 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를 기억하라. 그러면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 그대가 나를 조금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 초상화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약속이 얼마나 유지되겠는가? 그대 쪽에서 약속을 깨면 나도 그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 항상 이런 식으로 약속이 깨진다. 우상을 모시는 신비 의식은 깊은 의미를 지킬 필요가 없다. 항상 이런 식으로 약속이 깨진다. 우상을 모시는 신비 의식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우상의 설치가 성공적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다양한 검증과 징조에 바탕을 둘 때만 의미가 있다. 어떤 사원에서는 우상 위로 가는 물줄기가 자연적으로 흘러내립니다. 이것은 그 사원이 살아 있다는 징조입니까? 아니다. 살아 있는 사우너에 대한 검증은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물줄기는 그 밑에 우상이 있건 없건 흘러내릴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전혀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보고 그 사원을 살아 있는 사원으로 간주한다.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는 곳에도 살아 있는 사원이 있을 수 있다. 수행 과정에 있어서 디크샤(deeksha:입문)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의식은 특정한 조건하에서 거행됩니다. 붓다와 마하비라도 디크샤를 주곤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디크샤가 있습니까? 디크샤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디크샤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디크샤에 대해 다소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디크샤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디크샤는 해프닝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마하비라 곁에 머문다면 입문(initiation)이 일어나기까지 몇 년이 걸린다. 마하비라는 그에게 '내 곁에 있어라. 나와 함께 걸어라. 이런 식으로 서라. 이런 식으로 앉아라. 이런 식으로 명상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가 완전히 준비되는 때가 온다. 이 때 마하비라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아니, 그를 매개체라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깊은 의미에서 보면 그는 증인일 뿐이다. 이 증인 앞에서 입문이 일어난다. 입문은 항상 신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이 입문은 마하비라의 현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제 입문하는 사람은 그의 앞에 있는 마하비라를 볼 뿐 신을 볼 수 없다. 마하비라 앞에서 입문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는 마하비라에게 감사한다. 이 감사는 옳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그의 감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하비라가 그의 감사함을 받아들이려면 '내가 그를 입문시키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입문이 있다. 하나는 해프닝으로 일어나는 입문이다. 나는 이것을 '올바른 디크샤'라고 부른다. 이 디크샤 안에서 그대는 신과 관계를 맺는다. 이 때 삶을 통한 그대의 여행이 전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대는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대 안의 모든 것이 변형된다. 그대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았으며, 새로운 일이 그대에게 일어났다. 그대 안에 빛이 들어왔다. 이제 그대 안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 진정한 디크샤에서 구루(guru)는 옆에 서 있는 증인일 뿐이다. 그는 디크샤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는 이 디크샤의 전 과정을 본다. 그러나 그대는 반밖에 보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만 본다. 하지만 구루는 디크샤가 내려오는 차원, 입문이 일어나는 차원을 본다. 그대는 이 해프닝의 완벽한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대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이 전부다. 진정으로 입문이 일어났는지, 그대가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입문한 뒤에도 여전히 의심이 들것이다. "내가 받아들여졌는가? 내가 선택되었을까? 신이 나를 받아들였을까? 이제 내가 신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해도 될까? 내 쪽에서는 귀의했지만 그는 나를 받아들였을까?" 입문 절차가 끝나고 단번에 이것을 알 수는 없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긴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은 즉시 이것은 안다. 그는 양쪽에서 이 해프닝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디크샤는 주어질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다. 진정한 입문은 신으로부터 온다. 그대는 수혜자일 뿐이다. 이제, 다른 종류의 디크샤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짜 입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디크샤는 주어질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다. 이 곳에는 신이 부재한다. 구루와 제자가 있을 분이다. 스승이 주고 제자가 받는다. 그러나 제삼의 요인, 결정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 스승과 제자, 이 두 사람밖에 없는 디크샤는 가짜다. 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스승, 제자, 그리고 신이 있어야 한다. 디크샤는 이 신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렇게 세 사람이 있을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디크샤를 주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이 가짜 입문의 환상으로 인해 진정한 입문이 일어날 수 없게 된다. 그대는 '이미 입문이 일어났다.'는 착각에 빠져 살아갈 것이다. 한 구도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어떤 사람에 의해 입문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이러저러한 구루에 의해 입문했습니다.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명상을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입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명상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입문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그대가 받은 것은 이름과 옷이 전부다. 아직도 명상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그대의 입문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진정한 입문은 명상이 일어난 다음에 비로소 일어난다. 입문 후의 명상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전히 의사를 찾아다니며 약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입문은 명상 다음에 얻어지는 자격이다. 입문은 그대의 자격에 대한 인정이며 승인이다. 그대가 신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을 신이 인정했다. 입문 의식은 이런 사실에 대한 확인 절차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입문은 사라졌다. 나는 이런 입문을 되살려야 한다고 느낀다. 스승이 주고 제자가 받는 입문이 아니니 신이 주는 입문이 되살아나야 한다. 이런 입문이 가능하다. 진정한 입문은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의 입문 식에서 증인으로 남아 있다면 나는 그의 스승이 되지 않는다. 그의 스승은 신이다. 그가 내게 감사하건 말건 그의 일이다. 감사를 요구하는 것은 몰지각한 짓이다. 그 감사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새로운 형태의 입문 의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구루돔(gurudom)이 형성되었다. 귀에 몇 가지 단어를 속삭이고, 만타라가 주어진다. 아무나 스승 노릇을 하며 아무나 입문시킨다. 스승 노릇을 하는 사람마저 진짜로 입문했는지 의심스럽다. 신이 그를 받아들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 그 또한 엉터리 방식으로 입문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귀에 만트라를 속삭였고, 그 또한 다른 사람의 귀에 마트라를 속삭인다. 그리고 이 다른 사람 또한 스승이 되어 또 다른 사람의 귀에 만트라를 속삭인다. 인간은 모든 것을 거짓과 기만으로 물들여 놓았다. 특히 신비적인 일에 대해서는 더 많은 사기극이 판을 치고 있다. 이런 방면에는 실제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런 방법을 쓸 예정이다. 열 명에서 스무 명의 사람들이 이 일을 위해 준비중이다. 그들은 신으로부터 입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증인이 될 것이다. 이들의 일은 이 입문이 신에 의해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대는 이 해프닝을 경험하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장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은 그대에게 아주 생소하다. 어떤 해프닝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대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일에 대한 확인은 깨달은 사람의 현존에 의해 가능하다. 이것만이 이 일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최고의 구루는 파라마트만(paramatman) 신뿐이다. 구루가 끼여들지 않았다면 입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구루가 중간에 끼여들어 고정 배역을 맡고 있다. 그는 신처럼 행세하며 뽐낸다. 그의 에고가 의기양양해진다. 이 에고를 둘러싸고 온갖 종류의 입문식이 주어진다. 이런 입문식은 아무 가치가 없다. 영적인 개념으로 보면 이것은 범죄 행위다. 만일 영적인 범죄까지 처벌하는 날이 온다면 이들은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둔한 구도자는 자기가 입문했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는 어떤 스승에게 입문하고 만트라를 받았다는 사실을 뽐내며 돌아다닌다. 그는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정한 해프닝을 위한 탐구가 전면 중단된다. 봇다는 사람들을 즉각 입문시킨지 않아다. 때로는 입문이 일어나기 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붓다는 그들에게 이런저런 수행을 하라고 권하면서 입문 식을 계속 연기했다. 그리고 알맞은 때가 되어서야 붓다는 그들에게 입문 식에 참여하라고 말했다. 붓다의 입문 식에는 세 부분이 있었다. 입문을 위해 온 사람은 삼귀의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첫 번째로 그는 '붓담 사라남 가차미(Buddham sharanam gachchhami : 나는 붓다에게 귀의합니다).'하고 말한다. 여기에서 '붓다'는 고타마 붓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깨달은 자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다. 한 번은 어떤 구도자가 붓다를 찾아와서 '저는 봇다에게 귀의합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붓다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이 사람이 '저는 붓다에게 귀의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잠자코 듣고만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붓다가 말했다. "그는 내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내 전에도 많은 붓다들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많은 붓다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깨달은 자에게 귀의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누구기에 그를 중단시킨단 말인가? 만일 그가 내게 귀의한다면 나는 당장 그를 중단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깨달은 자에게 귀의한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 두 번째 귀의는 더 놀랍다. 두 번째로 이 사람은 '상감 사라남 가차미(sangham sharanam ghchchhami: 저는 붓다의 공동체에 귀의합니다.).'하고 말한다. 여기에서 ' 공동체(assembly)'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것은 고타마 붓다의 공동체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다. 이 '공동체'라는 말은 모든 깨달은 자들을 의미한다. 고타마 붓다만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많은 붓다들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많은 붓다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 이제 불교도들은 이 '공동체'라는 말을 불교인이라는 집단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삼귀의 중에서 첫 번째 기원에 대해 붓다는 '이 구도자는 깨달은 자에게 귀의하는 것이지, 한 인격체에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기원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밝혀 놓는다. 두 번째 기원은 더 명확하다. 두 번째 기원에서 기도자는 깨달은 사람들의 공동체에 귀의한다. 먼저 그는 눈 앞에 있는 각자에게 엎드려 절한다. 바로 앞에 있는 각자에게 접근하고 말하는 것이 쉽다. 그 다음에 그는 깨달은 자들 모두에게 귀의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미묘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세 번재 귀의는 담마(dhama), 진리에 대한 것이다. 세 번째로 구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담맘 사라남 가차미(dhamma sharanam gachchcami: 저는 담마에 귀의합니다.)." 첫 번째 귀의는 깨달은 자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귀의는 깨달은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귀의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상태, 담마에 대한 것이다. 개인도 없고 공동체도 없는 상태, 오직 담마만 있는 우리의 본성에 대한 귀의이다. 그는 '저는 그 담마에 귀의합니다.'하고 말한다. 이 세 가지 귀의가 완수된 다음에 비로소 입문이 인정되었다. 붓다는 이 입문의 증인이었을 뿐이다. 이 삼귀의는 단순한 염송의 문제가 아니었다. 봇다는 삼귀의가 완수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으며, 이것이 완수된 다음에야 비로소 입문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붓다는 스승이 되지 않고 이 일의 목격자로 남았다. 나중에 붓다는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깨달은 자라고 해서 무조건 내 말을 믿지 말라. 내가 유명하다거나 추종자가 많다고 해서 무작정 내 말을 믿지 말라. 내 말이 경전과 일치한다고 해서 무조건 내 말을 믿지 말라. 오직 그대 스스로 이해한 것, 그 내면의 이해가 말해 주는 것만 믿어라. " 붓다는 결코 스승이 되지 않았다. 임종을 맞으면서 유언을 부탁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그대 자신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라. 다른 사람을 쫓아가지 말라. 그대 스스로를 밝히는 빛이 되어라. 이것이 내 마지막 말이다." 붓다 같은 사람은 스승이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증인이다. 예수는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심판의 날, 내가 그대의 증인이 되리라." 즉, 마지막 날에 예수가 이렇게 증언할 것이다. "그렇다. 이 사람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신에게 귀의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예수의 말이 상징하는 뜻이다.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나는 그대의 증인이지 스승이 아니다.'하는 뜻이기도 하다. 스승은 없다. 누군가 그대의 스승으로 행세하는 입문을 경계하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신과 연결되는 입문, 그런 입문이 진정한 입문이다. 이런 입문에서 집을 떠나 출가할 필요가 없다. 힌두교인, 모하메드교인, 기독교인이 될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게 구속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대 자신으로 남을 것이고, 변화는 오직 그대의 내면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입문에서 그대는 종교에 구속된다. 그대는 힌두교인, 모하매드 교인, 또는 기독교인이 된다. 그대는 조직의 일원이 된다. 어떤 신앙이나 종교적 계율, 이념,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스승이 그대를 속박할 것이고, 그들이 그대의 자유를 파괴할 것이다. 자유를 주지 않는 입문은 입문이 아니다. 절대적인 자유를 주는 입문, 그런 입문만이 진정한 입문이다. 당신은 붓다가 마하파라니르바나(magaparinirvahna)에 도달했으며, 그가 인간의 형태로 다시 돌아와 '마이트레야(Maitreya)'로 알려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르바나에 도달한 후에 인간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부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다소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어제 이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는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지금은 대략적인 설명을 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한 후에 다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곱 번째 신체 후에 환생은 없다. 그 곳은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다. 귀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붓다가 마이트레야(Maitreya)의 형태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 역시 진실이다. 이제 이 두 가지는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일곱 번째 신체 후에 다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붓다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여기엔 다른 방법이 있다. 이제 그대는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죽으면 육체만 소멸된다. 나머지 여섯 가지 신체는 우리에게 그대로 남는다. 어떤 사람이 다섯 번째 차원에 도달하면 이전의 네 가지 신체가 떨어져 나가고 세 가지 신체만 남는다. 즉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신체만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 신체, 세 번째 신체, 네 번째 신체를 지키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이 결심이 아주 강하면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붓다 같은 사람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두 번째 신체, 세 번째 신체, 네 번째 신체를 영원히 남겨 둘 수 있다. 붓다의 이 신체들은 에너지의 집합체처럼 공간 속에서 계속 움직인다. 무수한 생을 살면서 붓다가 느꼇던 모든 것들은 두 번째 신체, 즉 에텔체에 속한다. 그리고 붓다가 무수한 전생에서 가졌던 카르마(karma)의 인상들은 세 번째 신체인 아스트랄첼에 축적된다. 네 번째 신체는 붓다의 마음이 이룬 모든 것을 간직한다. 마음을 초월해서 그가 달성한 모든 것도 마음을 통해 표현되었다. 모든 표현은 마음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또는 일곱 번째 신체에서 얻은 것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은 네 번째 신체를 사용해야 한다. 네 번째 신체가 표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말을 가장 잘 들은 사람들은 네 번째 신체의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붓다가 생각하고, 살고, 알았던 모든 것이 그의 네 번째 신체에 모여 있다. 처음의 세 가지 신체는 쉽게 분해된다.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가면 이 세 가지 신체가 파괴된다. 그리고 일곱 번째 신체로 들어가면 이전의 여섯 가지 신체 전부가 파괴된다. 그러나 다섯 번째 차원의 사람이 강렬하게 열망하면 그는 이 세 가지 신체의 진동을 공간 속에 남길 수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공간 속에 인공 위성을 띄어 놓는 것과 같다. 붓다의 두 번째 , 세 번째 ,네 번째 신체의 집합체는 마이트레야라는 이름을 밀어 한 개인 속에서 현현될 때까지 계속 공간 속을 떠돌 것이다. 마이트레야가 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태어나면 붓다의 이 세 가지 신체는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붓다의 천성을 얻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신체에는 붓다의 경험, 감정, 욕망, 활동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3,4년 전에 미국에서 한 사람이 수백만 달러를 남기고 죽었다. 그는 과학이 죽은 육체를 다시 소생시키는 비법을 발견할 때까지 자신의 육체를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데 사용된다. 그의 시신은 과학적으로 처리되어 보존되고 있다. 언젠가 시체를 되살리는 데 성공하면 이 육체는 다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다를 것이다. 같을 수가 없다. 육체는 똑같을 것이다. 그의 눈, 피부색 , 얼굴 모습, 걸음걸이, 육체적인 습관 등 모든 것이 같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은 사람이 다시 이 육체 안에 나타날 것이다. 만일 이 사람이 다른 차원의 신체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로지 물질적 육체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육체를 보존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다른 영혼이 들어와 그처럼 행동할 수 있다. 이 영혼은 죽은 사람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며, 과학자들은 그가 다시 돌아왔다고 말할 것이다. 두뇌 속에 저장되었던 그의 기억이 다시 한 번 깨어날 것이다. 그는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와 아들의 사진을 알아볼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 죽은 장소, 그리고 예전에 그가 알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두뇌의 내용은 똑같다 해도 영혼은 다를 것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기억을 이식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언젠가 이런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기억 전부가 나와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나의 임종시에 내 기억 전부를 저장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안구를 보존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과 같다. 내일은 어떤 사람이 내 눈을 갖고 사물을 볼 것이다. 나만이 내 심장을 갖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심장을 갖고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 심장은 영원히 당신 것입니다. '라는 사랑의 맹세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먼 훗날에는 이 심장이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맹세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기억 또한 이식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아주 복잡한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을 은행에 맡기듯이, 미래에는 기억을 맡아 놓는 은행이 등장할 것이다. 내 기억을 이식 받은 어린아이는 내가 배워서 알던 모든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이미 많은 앎을 가지고 커갈 것이다. 내 기억이 그의 두뇌 일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상, 나의 기억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어떤 문제들에 관해 그는 나와 똑같은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가 내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붓다는 다른 방향으로 실험했다. 그의 실험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비적인 것이었다. 특정한 방법에 의해 그의 두 번째 신체, 세 번째 신체, 네 번째 신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이제 붓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안에 살던 영혼은 일곱 번째 차원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영혼이 일곱 번재 차원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 세 가지 신체를 죽지 않게 하려는 조치가 취해졌다. 붓다가 결심하고 약속한 원동력은 아직도 이 신체들 안에 살아 있다. 이것은 내가 오십 마일까지 날아갈 수 있도록 돌을 던지고 나서 바로 죽는 것과 같다. 내 죽음도 돌의 움직임을 막지는 못한다. 돌은 내가 부여한 힘을 갖고 있다. 내가 있건 없건 돌은 오심 마일까지 날아갈 것이다. 내가 쏟아 부은 힘이 돌을 계속 날아가게 한다. 붓다는 이 세 가지 신체에 힘을 부여했으며 이 신체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는 또한 이 신체들이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제 마이트래야가 태어날 때가 무르익었다. 붓다의 세 가지 신체를 얻을 수 있도록 크리슈나무르티(Krishunamurti)에 대해 실험이 행해진 바 있다. 먼저 이 실험은 크리슈나무르티의 형인 니트야난다(Nityananda)에게 행해졌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통과하기 힘든 과정이다. 니트야난다의 두 번째 , 세 번째 , 네 번째 신체를 분리시키고 그 자리를 마이트에야의 신체로 대신하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그러나 니트야난다는 죽어 버렸다. 그 다음에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서도 똑같은 실험이 행해졌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한두 명에 대해 더 실험이 행해졌다. 조지 아룬데일(George Arundale)이 그 중 한명으로, 이 신비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실험이 행해졌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 마담 블라바츠키(Madam Blavatsky)는 오컬트의 과학에 관한 한 가장 심오한 지식을 지녔던 사람이다. 애니 배산트도 그 중 한 명이다. 리드비터 또한 오컬트에 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붓다의 세 가지 신체 뒤에 숨어 있는 힘이 곧 소멸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이트레야가 탄생하지 않으면 이 신체들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제 그 신체들의 힘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이제 누군가 이 세 가지 신체를 흡수하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누가 이 신체를 흡수하든 그는 어떤 면에서 붓다의 환생이 될 것이다. 붓다의 영혼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영혼이 붓다의 신체들을 취할 것이고, 그가 이 신체의 작용에 맞춰 일할 것이다. 이 사람은 즉각 붓다의 사명에 몰두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지는 않다. 그가 누구든간에 그는 최소한 붓다와 거의 같은 의식 수준에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 붓다의 세 가지 신체를 흡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죽어 버릴 것이다. 이런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붓다의 이 세 가지 신체를 흡수하려고 애쓰는 소규모의 그룹들이 있다. 그러나 이젠 이 일에 대해 대대적인 선전을 벌이지 않는다. 그런 선전이 해로운 것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 신체들이 크리슈나무르티 안으로 하강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으며 이 일이 널리 선전되었다. 이 선전은 선의의 믿음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 붓다가 출현했을 때 속히 인정받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선전은 또한 붓다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적이 있으면서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전생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분이 똑같은 분이구나.'하고 알아볼 수 있게 하려는 묵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선전은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음 속에 반감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조용하고 정숙하며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로서는 군중속에서 지내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만일 이 실험이 외딴 곳에서 조용히 진행되었다면 , 아무도 이 일에 관해 알지 못했다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신체를 버리고 붓다의 세 가지 대체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오컬트 과학에 있어서 큰 불행이었다. 티베트를 제외하고는 세상 어이에서도 그토록 대대적이고 난해한 실험이 행해진 적이 없었다. 티베트에서는 오랫동안 이 실험이 행해져 왔으며, 많은 영혼이 다른 사람들의 몸을 빌어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그대가 이해했기를 바란다. 간혹 그대는 내 말이 모순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말에 모순은 없다. 나는 다른 각도에서 말했다. 따라서 그대는 무엇인가 모순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말에 모순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