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찾아서(I) 지은이: 오쇼 라즈니쉬 출판사: 계몽사 잠자는 뱀을 깨워라. 나는 그대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른다. 아마 그대들 또한 이유를 모를 것이 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왜?'라고 자문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고 삶 전체를 덧없이 낭비한다. 그러므로 그대들 모두가 목적도 모르면서 여기에 왔다 해도 그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몇몇 사람은 그 목적을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우리는 깊은 잠과 같은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간다. 걷고, 보고, 듣는 것 모두 가 그런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분명하게 말해진 것을 듣지 못한다.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 명한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대들이 이유도 모르면서 무의식적으로 여기에 왔다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이유를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나 무의식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숨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 가 그대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문은 수많은 생동안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수많은 생을 거치면서 노력한 후에야 지복, 평화, 진리, 신 또는 모크샤 나르바나라고 불리는 세계를 힐끗 엿보게 된다. 그 세계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그대의 자유다. 사실, 이 세 상에 그것을 표현할 단어는 없지만. 그대는 수많은 생을 거친 후에야 그 세계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발견한 후에는 완벽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일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 없는 착각이다. 그 세계를 얻은 후에 그들은 새로운 노 동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엔 새로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으 며 휴식할 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것을 발견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던 사람들이 일단 그것을 발견한 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려고 사방으로 달려간 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붓다가 여러 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무하 비라가 우리의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초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궁극의 세계와 접촉한 후에는 새로운 과제가 시작된다. 사실,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모든 것은 그대가 그것을 발견한 후에 즐거움과 지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지복의 세계 또는 신의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축복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활짝 핀 꽃이 그 향기를 널리 퍼뜨리듯이, 구름이 비를 뿌리고 파도가 밀려와 해안을 포옹하듯이, 누군가 저 너머의 것을 발견했 을 때 그의 영혼은 사방으로 달려나가 그 향기를 퍼뜨리기를 갈구한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완전히 깨어 있다. 나는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잘 알 고 있다. 만일 그대들과 내가 똑같은 이유로 여기에 있다면, 똑같은 차원에서 서 로 만난다면, 그 때 우리의 만남은 깊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 리는 서로 스쳐 지나가는 사이일 분 만남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만일 그대들이 나와 똑같은 이유로 여기에 있지 않 다면, 아무리 육체적으로 가까이 있다 해도 우리 사이엔 만남이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그대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어떻게 이것을 못 보는지 놀라울 정도다. 혹시 그대들이 의도적으로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일부러 눈과 귀를 닫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것을 놓칠 수 있겠는가? 예수는 수차례 이렇게 말했다. 눈있는 자가 보지 못하고 귀 있는 자가 듣지 못한다고. 눈 없는 자만 못보고, 귀먹은 자만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멀쩡하게 눈 있는 자가 보지 못하고, 멀 쩡하게 귀 달린 자가 듣지 못한다. 그들 역시 장님이며 귀머거리이다. 너무나 가 까이 있는 것,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대가 보는 방식에는 어떤 장애가 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한 사실 이다. 그런데 그것 아주 사소한 장애일 뿐 심각한 것이 아니다. 마치 눈에 박힌 작은 먼지가 산 전체를 못 보게 하는 것과 같다. 작은 티끌 하나가 그대를 장님 으로 만들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산 전체를 못 보게 하는 장애물은 거 대한 것이여야 한다. 산술적으로 본다면, 산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은 산보다 더 거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물은 미세한 먼지 알갱이 하나에 불과하다. 먼지가 우리의 눈을 덮고 있기 때문에 산 전체가 가려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도 산처럼 거대한 것이 아니 다. 그것은 작은 먼지 알갱이에 불과하다. 그것이 우리를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하찮은 장애물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진리를 보지 못하 도록 막고 있다. 지금 나는 육체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착각하지 말라. 인식할 수 있는 진리만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다. 우리의 지각 능력은 그 진리를 이해하고 포착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바다 가 아무리 큰 소리로 부른다해도 귀가 없는 사람은 듣지 못할 것이다. 설령 바다가 포효한다 해도 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듣는 귀가 없 다면 바다의 포효는 무의미하다. 찬란한 햇살이 문간을 비춘다 해도 눈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손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만질 수 없 다. 아무리 그가 만지기를 원한다 해도. 신과 지복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전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사원과 교회,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과 긴밀한 교류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 가 그를 보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느끼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다. 마치 우리는 신에 대해 끝없이 떠들기만 하면 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귀머거리가 평생 동안 음악에 대해 떠든다 해도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 다. 장님이 영원토록 빛에 대해 떠든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나는 장님도 아니고 귀머거리도 아니다.'라는 착각에 빠질 가능성 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계속 떠들어댐으로써 그들은 소리가 무엇이고 빛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구 방방곡곡에 건설한 사원, 교회, 모스크들은 바로 이런 착각을 만 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가진 것은 환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신을 믿을뿐, 직접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믿음은 끝없는 말장난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릴 때 그 말을 믿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반면, 우리는 그에 대항해서 신의 부재를 증명 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자. 그럴 때 우리는 패배감을 느끼고 신을 인정하기 시작 한다. 그러나 믿음이 '앎'은 아니다. 우리가 빛에 대해 아무리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해도 장님은 그 빛을 알 수 없다. 그에게는 볼 눈이 없다. 나는 '앎'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의 내부에는 어떤 센터(center)가 있다. 비록 지금은 활동하지 않지만 센 터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센터를 통해 그리슈나가 앎에 도달 했으며 환희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수가 앎에 도달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아 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나이다.'라고 외친 것도 그 센터를 통해서이다. 마하비라도 이 센터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고 타마 싯다르타 또한 이 센터를 통해 붓다가 되었다. 우리의 내면에 이러한 센터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센 터는 곧 내면의 눈이며 귀다. 다만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특히 이 센터를 일깨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의 머리위에는 전구가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발전소와 연결된 전선을 끊어 버리면 전구는 빛을 발할 수 없다. 전구에 도달하는 전기의 흐름이 차단되면 이 자리에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자리잡을 것이다. 전구 자체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할지라도 전구로서의 역할을 해 낼 수 없을 것 이다. 전구를 통해 전기가 끊겼기 때문이다. 전기가 흐리지 않는 전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는 어떤 센터가 있으며 그 센터를 통해 신이 알려진다. 그러나 지금 그 센터는 활동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다. 그 곳에 생명의 에너지가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눈이 아무리 정상이라 해도 생명 에너지가 도달하여 활 성화시켜 주지 못하면 그 눈은 아무 쓸모 없게 되는 것과 같다. 한 번은 젊은 처녀가 친척들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어떤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명망있는 가문의 규수였으며, 그녀의 연인은 바로 옆집에 사는 젊은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서로를 볼 수 있 었다. 그런데 처녀의 가족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지붕위에 근 벽을 둘러쳐 놓았 다. 문자 그대로 진짜 벽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날부터 이 처녀는 눈이 멀어버렸다. 처음에 부모는 혹시 그녀 가 꾀병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처녀를 꾸짖고 다그쳤다. 그러나 아무리 협박해도 그녀의 눈은 낫지 않았다. 그 때서야 이게 무슨 일인 가 싶어 의사에게 보였다. 의사들은 그녀의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처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진짜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이것이 일종의 심인성 시각 장애기 때문에 전혀 손을 쓸 수 없다고 실토했다. 그녀의 눈으로 흐르는 생명 에너지가 끊겨 버린 것이다. 이것이 육체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눈이 멀어 버린 이 유였다.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 데려왔다. 나는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그녀의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그녀가 기억을 돌이켜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를 볼 수 없다면 이 눈은 아무 쓸모 없어요. 이 눈은 그를 보기 위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차라리 장님이 되어 버리는 것이 나아요. 지붕위에 벽이 둘러쳐지는 날, 나의 마음은 오로지 이런 생각 하나로 가득했어요. 그리고 그 날 부터는 눈이 멀어 버린 거죠. 내눈에 있어서 그를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자 모든 것이었어요. 내 눈은 그를 보기 위해 있는 것이니까요. 그를 보지 못할 바 엔 장님이 되어 버리는게 낫지요.' 그 젊은 처녀의 마음은 장님이 되어 버리자는 생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스스 로 장님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으로 흘러들어가던 생명 에 너지가 중단되었다.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보는 능력을 부여하던 생명 에 너지가 끊겨버린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어떤 센터가 있다. 신이 알려지고 진 리에 대한 일별함을 얻는 곳, 이 삶의 근원적인 에너지와 접촉하는 곳이 그 센 터이다. 이 센터를 통해 천상의 음악, 악기도 없이 연주되는 음악이 들린다. 이 지상에 서는 맡을 수 없는 향기,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만큼 황홀한 향기가 그 센터를 통해 흘러나온다. 또한 이 센터는 부자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 센터는 절대적인 자 유로 가는 문이다. 또한 이 센터는 우리를 저 너머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세계 는 아무 걸림 없이 무한정으로 펼쳐져 있으며 슬픔도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 다. 지복이 넘치는 곳, 오로지 지복으로 충만한 세계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생명 에너지는 그 센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 센터 로 가는 통로 어딘가에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어딘가 꽉 막혀 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 하면 앞으로 3일 동안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 는것은, 위에서 언급한 센터에 생명 에너지를 흐르게 하는 작 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센터를 통해 꽃이 피어나고 등불이 빛을 발하고 제3의 눈이 열리 수 있다. 그 센터를 통해 초감각이 활성화 될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진리 또는 신(그 것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을 본 것도 이 센터를 통해서이다. 이 센터를 기준으로 보면 모든 인간에게 진리를 볼 권리가 있다. 그러나 모든 씨앗이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모든 씨앗은 나무가 될 가능성은 가고 있다. 하지만 씨앗 전부가 나무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토양이 마 련되고 그 위에 씨앗이 뿌려져야 한다. 씨앗은 분해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씨앗 은 자기를 죽여야한다. 그래야만 나무가 될 수 있다. 흙 속에서 자기를 분해시킬 준비가 된 씨앗만이 나무로 변형된다. 그러나 나무와 씨앗을 나란히 놓고 본다면 그 작은 씨앗이 거대한 나무가 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처럼 보인다. 이 작은 씨앗 하나가 어떻게 거대한 나무가 될 수 있겠는가? 오랜 옛날, 크리슈나와 붓다 같은 인물을 보았을 때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느꼈을 것이다. 크리슈나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자기가 그와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신이지만 저희들은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어찌 저희가 당신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아바타르(avatar), 신의 화신이지만 저희 들은 그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미물에 불과합니다. 당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붓다나 마하비라가 지나갈 때도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말했다. "당신은 티르탕카라며 아바타르입니다. 당신은 신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우리 는 미천한 중생에 불과합니다." 만일 씨앗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나무에 대해서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 다. "당신은 거대한 신이지만 저는 미천한 씨앗일 뿐입니다. 어찌 제가 당신 같은 존재가 될 수있겠습니까?" 씨앗이 자기 안에 그토록 거대한 나무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 가? 그러나 오늘 거대한 자태를 지닌 나무도 한때는 씨앗이었다. 그리고 오늘 작 은 씨앗에 불과한 것이 언젠가는 거대한 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것을 잊고 살아왔기 때문에 경정이나 성인들이 아무리 가르쳐도 소 귀에 경읽 기와 같다. 어찌 보면 이것은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무작정 믿는 것은 순전히 자기자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신이 없는지 모 른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소수의 선각자들은 알았다. 그리고 소수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선각자 들과 교류함으로써 삶 전체를 변형 시켰다. 그들은 사방에서 축복의 꽃비가 내 리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단지 그들을 숭배함으로써 그와 같은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불행하게도 모든 죵교는 숭배 의식과 더불어 그 생명이 끝난다. 씨앗이 나무를 숭배한다고 나무가 되겠는가? 강이 바다를 숭배한다고 해서 바 다가 되겠는가? 알이 새를 숭배한다고 해서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 수 있겠는 가? 알은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먼저 알로서 자기를 부숴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아기 새는 자기가 하늘을 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다. 드넓은 창공을 비상하는 다른 새들을 보면서도 그는 자기 또한 날 수 있다 는 것을 믿지 않는다. 어미 새가 하늘을 날면서 '너도 하늘로 날아 보렴.'하고 아 무리 부추겨도 아기 새는 자신이 없다. 그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떤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아기 새가 광대한 창공을 그렇게 오랫동안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앞으로 3일 동안 그대들 또한 둥지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것을 잘 안다. 내가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대들은 내 말 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자신감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새가 어떻게 비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 길이 없다. 둥지를 박차고 뛰어올라야 한다. 미지의 세계로 과감 하게 돌진해야 한다. 생소한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수영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수영을 모르는데 어떻게 강물로 뛰어들란 말 인가?'하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그것은 옳은 말처럼 들린다. 헤엄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어떻게 강물로 뛰어든단 말인가? 그러나 수영을 가르치는 선생은 강물로 뛰어들지 않으면 수영을 배울 수 없다 고 말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수영에 대한 논쟁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선생은 무작정 물에 뛰어들라고 말할 것이다. 물에 뛰어들지 않고는 수영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옳다. 수영은 물에 뛰어드는 것으로 시작되니 까. 사실, 수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로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수영을 배 운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수 영하는 법을 안다. 다만 효율적으로 적절하게 움직이는 법을 모를 뿐이다. 그대는 물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적절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 그것 은 아주 하찮은 재주에 불과하다. 처음에 그대는 손발을 아무렇게나 마구 휘저 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함에 따라 더 기술적이 된다. 손발을 휘젓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할 줄 알지만 훈련을 하면 더 효율적으로 휘저을 수 있게된다. 그러므로 수영을 아 는 사람은 그것이 전혀 새로운 분야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 은 다만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을 아는 사람은 그 경험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불과하 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신을 알게 되는 날, 우리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이건 수영과 똑같다! 우리는 언제라도 수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용기가 없기 때문에 강둑에 서서 머뭇거렸던 것이다." 먼저 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일단 뛰어들고 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말하는 센터는 뇌 안에 숨어 있다. 뇌 전문의에게 물어 보라. 그들 은 뇌의 아주 적은 일부만이 활용된다고 말할 것이다. 대부분이 아무 활동 없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 많은 부분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뛰어 난 천재라고 해도 뇌의 일부분만을 사용할 뿐이다. 나머지 부분은 활용되지 못 하고 휴면 상태에 있다. 뇌는 우리가 초감각이라고 부르는 것, 육감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제 삼의 눈 이라고 부르는 것이 거주지다. 지금 이 센터는 봉쇄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이 센터다 열리면 우리는 삶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보게 될 것이다. 물질이 사라지고 신이 나타날 것이다. 형 상이 사라지고 형상 없는 자가 드러날 것이다. 죽음이 사라지고 불사의 문이 열 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센터는 닫혀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센터를 열고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전기가 흐르지 않으면 전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전기 가 흘러야 전구가 제 기능을 발휘한다. 전구는 언제나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 리고 있다. 한편 전선을 타고 달려간다 해도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모습을 드 러내지 못한다.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전기뿐만 아니라 전구가 있어야 한다. 우리안에 있는 생명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생명 에너지 자체만으로는 겉으로 현현될 수 없다. 그 에너지가 센터에 도달해야 비로소 제 기능이 발휘된다. 우리는 명목상으로만 살아 있을 뿐이다. 그대는 삶이 단지 숨쉬기 운동에 불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음식을 소화하는 것이 삶인가?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고 아침이면 깨어나는 것이 삶인가? 아이가 성장해서 젊은이가 되고, 그 다음에 늙 은이가 되고, 결국 죽음을 맞는 것이 삶인가? 삶이란 다만 탄생과 죽음으로 이 루어진 것일까? 몇 명의 자손을 남기고 떠나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그런 일은 기계도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어렵다 해도 언젠가는 기 계가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머지않아 시험관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날이 올 것이다. 유년기, 청춘기, 노년기는 기계적인 과정이다. 기계 또한 청년기와 노년 기를 거친다. 시계를 사면 '이 시계는 10년간 성능을 보장합니다.'라는 보증서가 첨부되어 따라온다. 시계도 청년기와 노년기를 거쳐 죽어 갈 것이다. 모든 기계가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계 장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삶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전구가 있다고 하자. 그는 이런 상태를 삶으로 생각 할 것이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를 흔들어 놓으면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 이다. '나는 살아 있다! 이렇게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난생 처음 전기가 흘러 들어왔을 때 전구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이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 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데 지금은 나의 존재 전체가 빛으로 충만하고, 그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씨앗은 어느 날엔가 나무가 되어 있는 자신을보고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도무지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나 는 작은 씨앗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 힘으로 이런일이 일어났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 는다. 그들은 다만 이렇게 말한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엔 아무 연결 고리가 없다. 예전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있었을 뿐인데 지금은 온통 빛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가시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향기로운 꽃이 만발하지 않은가? 예전에 나는 꽁꽁 얼어붙은 채 죽어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삶이 흐름으로 넘실대고 있다." 앎에 도달한 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그의 은총에 의해 빚어진 일이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을 깨달은 사람이 그 모 든일을 신의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은총에 도달하기 위 해선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노력이란 어떤 것인가? 노력이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찮은 것이고, 다른 의미에서 보면 대단한 것 이다. 노력이 하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면의 센터가 그리멀리 있지 않기 때문 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보도록 시야를 열어주는 내면의 눈이 있다. 그런데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는 지점과 이 눈이 열리는 지점은 멀지 않다. 기 껏해야 2, 3피트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키는 5, 6피트에 지나지 않 는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 구조 전체가 이렇게 작은 범주 내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는 곳은 쿤다(kunda)다. 즉 섹스 센터와 가까운 곳 에 있는 연못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에너지를 '쿤달리니'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 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지점이 또아리를 틀고 잠자는 뱀의 형상과 닮았기 때 문이다. 잠자는 뱀을 관찰해 보면, 머리를 맨 위로 한 채 또아리를 틀고 누워 있다. 그 런데 잠자는 뱀을 방해하면 뱀은 또아리를 풀고 머리를 바짝 치켜들 것이다. 이 에너지를 '쿤달리니'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생명 에너지의 연 못, 이 생명의 씨앗은 섹스 센터 근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곳으로부터 생명이 사방으로 확산되어 간다. 우리가 성행위를 통해 얻는 쾌락은 사실 섹스를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생명 에너지가 쿤다 안에 일어나는 진동에서 오는 것이다. 잠들어 있던 뱀이 성행위에 의해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우리는 그 성적인 쾌 감을 전부인 양 착각한다. 만일 그 뱀이 완전히 깨어나서 육체의 모든 층을 완 전히 관통한 후에 뇌 안의 마지막 센터까지 도달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 리는 모른다. 우리는 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삶을 사다리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첫 번째 단계에서 살고 있다. 다른 더 높은 단계들이 있으며, 그 단계들이 우리를 신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 몸 안의 2,3,피트라는 거리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대단히 먼 거리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자연과 신의 거리며, 죽음과 영생불멸간의 거리다. 그 거리는 실로 매우 길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거리는 매우 짧다. 명상 에 의해 쉽게 이 에너지를 깨우고자 한다면 이것을 알아야 한다. 휴면 상태인 에너지를 깨우는 것은 잠들어 있는 진짜 뱀을 깨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사실, 잠자는 뱀을 깨우는 것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뱀 중 97퍼센 트가 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마리의 뱀중에 97마리는 쉽게 갖고 놀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뱀에 물려 죽는다면 그것은 그가 뱀에게 물렸기 때문 이 아니라 '나는 벰에 물렸다.'는 생각 때문에 죽는 것이다. 뱀 중 97퍼센트는 아 무도 죽일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뱀에 물려 죽는다. 그것은 '뱀 에 물렸으니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는 생각 때문이다 일단 어떤 믿음에 사 로잡히면 그 믿음은 현실이 된다 독뱀을 갖고 노는 것 또한 크게 위험하지 않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육체를 내 주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갖 고 노는 것은 실로 위험하다.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 위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그대 안의 에너지가 깨어나면 지금의 그대가 죽고 전혀 다른 인간이 태어날 것이다. 전에는 존재한 적도 없는 인간이 태어날 것이 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막는다. 이것은 씨앗이 나무 가 되지 않고 씨앗으로 남으려는 것과 똑같은 두려움이다. 씨앗이 직면하고 있 는 가장 큰 위험은 땅속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물과 거름을 빨아들이고 결국 죽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알이 성장해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똑같은 위험이다. 알 은 자기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새가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과 정에 있다. 우리는 새가 되어야 하는 일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알의 상태가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 안주하려 든다. 이 에너지가 상승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살아 남을 길이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대는 카비르(kabir)가 시에 서 묘사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부닥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바다 깊이 헤엄쳐 들어간 자. 오직 그만이 그것을 발견했도다. 그러나 아아, 나는 어리석도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두려워 해변가에 앉아 있었을 뿐이니.' 그것을 발견한 자들은 깊이 헤엄쳐 들어감으로써 목적을 달성했다. 물에 빠져 죽을 각오, 미련 없이 사라져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각오가 필수적이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목숨을 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로서 살 아남을 뿐 , 결코 새가 되어 날지 못할 것이다. 그는 씨앗으로 목숨을 이어갈 뿐, 길손에게 편안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가 되지 못할 것이다. 씨앗으로 생명 을 부지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차라리 죽는게 낫다. 이렇게 역에는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나는 살아남 지 못할 것이다. 에너지가 깨어나면 이 에너지는 그대를 완전히 변형시킬 것이 다. 새로운 센터들이 깨어나고 새로운 인간이 출현할 것이다. 전혀 새로운 경험 이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 질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맞을 준비가 되 어있다면 그대는 용기를 내어 낡은 세께와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러나 낡은 세계는 사방에서 우리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다. 그 낡은 세계가 우리를 너무나 강하게 결박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 에너지가 위로 상승하지 못하 는 것이다. 신을 향해 가는 길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위험천만한 세계로 뛰 어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삶의 꽃, 아름다움의 꽃은 오직 위험 속에서 피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여행길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말해야겠다. 먼저 나는, 내일 아침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 에너지를 일깨우는 일을 시작함 에 있어서 그대들이 모든 것을 내걸고 전력투구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작은 도 박이 아니다. 모든 것을 내걸고 뛰어드는 사람만이 이길 것이다. 조금이라도 미 진한 구석을 남기는 사람은 이 엄청난 도박에서 패자가 될 것이다. 씨앗이 자신의 일부는 씨앗인 채로 유지하면서 나머지 부분만 나무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죽기로 작정한 씨앗은 완전히 죽어야 한 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로 결정한 씨앗은 모든 부분이 완전히 살아있어야 한 다. 부분적인 죽음이란 없다. 그러므로 조그만 부분이라도 내던지지 않고 지키려 한다면 그대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이다. 부디 바라건대, 그대 자신을 완벽 하게 내던져라. 전체적으로 투신하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아껴 두 고자 하는 부분이 있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콜로라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을 때 전 미국인이 그곳으로 몰려갔다. 좁은 땅 뙈기 하나만 사도 금을 캘 수 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콜로라도의 땅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 백만장자도 전 재산을 팔아서 콜로라도에 땅을 샀다. 그리고 거대한 채굴 장비를 동원하여 금맥을 찾기 시작했다. 소시민들이 작은 땅뙈기에서 금을 찾는 라고 열을 올리는 사, 이 백만장자는 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산 자체를 파 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일생은 열심히 일했지만 황금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겁이 덜컥났다. 전 재산을 이 일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완전히 지쳐서 가족들에게 파산 선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전 재산을 쏟아부었는데 황금의 그림 자도 보지 못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의 재산이라도 건져야 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신문에다 광 고를 냈다. 그가 소유한 대지 전체와 채굴장비를 판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가족들은 매우 비판적으로 말했다. "세상에 어느 얼빠진 작자가 그 땅을 사겠는가? 그 땅에 금이 없다는 것은 누 구나 아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수백만 달러를 날리고 알거지가 될 지경에 있 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마 그 땅을 잘사주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러자 백만 장자가 말했다. "하지만 누가 아는가? 세상에 나 같은 작자가 또 있을지." 그런데 정말로 그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섰다. 백만장자는 그에게 '그건 완 전히 미친 것이니 그만두시오.'' 그건 완전히 미친짓이니 그만 두시오.'하고 충고 해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땅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땅을 팔았다. 그러나 매매가 완전히 끝난 후에 백만장자는 참았던 말을 내 뱉었다. 정말이지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오? 내가 그 빌어먹을 땅 때문에 패가 망신했다는 것을 모르시오? 구매자가 말했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소. 그러니 함부로 속단하지 마시오 당신이 파 본 곳에는 금이 없겠지만 당신이 땅 전체를 판 것은 아니 잖소. 다를 곳에도 금 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이르오." 그 말에 백만장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가끔씩 그런일이 일어나듯이, 정말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전 주인이 파 보았던 곳 바로 한 발짝 아래에서 금맥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이 금맥은 산 전체를 덮고 있지 않은가? 이 소식을 들은 전 주인이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 그가 새로운 주인을 방문하 여 행운을 축하했다. 그러나 새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것은 행운이 아니오. 당신은 이 일에 전력투구하지 않았소. 충분히 파 보기도 전에 포기했단 말이오. 더 깊이 파 보았더라면 금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의 삶에는 날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나는 신을 발견하겠다고 파고드는 사람들을 많이 안다. 그러나 그들은 전력투구하여 모든 곳을 파헤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절망에 부딪친다. 그렇게 좌절하고 마는 것을 그들의 탐구가 표피적인 차원에 그치기 때문이다. 때로는 1인치만 더 파고 들어도 신을 발견할 터인데 그 직전에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나는 구도자들이 성공하기 일보직전에 그만두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러니 이것을 명심하라. 아무것도 미진하게 남겨두지 말라.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라. 우리가 신에 상응할 만큼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신을 탐구함에 있어서도 인색하기 짝이 없다. 이런 종류의 탐 구에는 인색함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의 사원에는 구두쇠가 발붙일 곳이 없다. 그 곳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거기에 내걸만 한 대단한 것을 작고 있지도 못하다. 우리가 무엇을 작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의 모든 것을 거기 에 투자하는냐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투자하자마자 우리는 센터에 도달 하기 때문이다. 그 센터에 생명 에너지가 잠자고 있으며, 그 곳으로부터 에너지 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내가 모든 것을 내걸으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명상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면의 저수지에 저장되어 있는 에너지가 우리를 돕기 위해 깨어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절대 안 된다. 그 전까지 이 에너지는 비로소 쿤다 안에 잠들어 있 다. 우리의 에너지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계속 그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다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아야 비로소 쿤달리니 에너지가 사용되기 시작한 다. 그제야 이 생명의 에너지가 필요해진다. 그 센터는 우리가 모든 것을 내걸어야만 비로소 활성화된다. 다른 에너지를 모두 써 버려야만 내면의 저수지, 그 센터에 저장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불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내가 그대에게 전력을 다해 질주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는 있 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그대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것 이 아니다. 물론, 그대는 전력을 다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 다. 그 다음날, 그대가 경주에 참가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대는 전날보다 더 빨 리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왜 그런가? 전날보다 더한 힘은 어디에 서 나오는 것인가? 전날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은 경 쟁 심리로 인해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러나 이것도 전력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누군가 권총을 들고 쫓아온다면 그대는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릴 것이다. 그대 자신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도망칠 것이다. 이제 그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에너지는 어디 에서 오는 것일까> 이 에너지 또한 그대의 것이다. 다만 그대 안에 잠자고 있었 을 뿐이다. 그러나 명상을 위해서는 이 정도의 에너지로 충분하지 않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달릴 때도 그대는 전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 중에는 이보다 더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대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최 대한으로 쏟아부어야 한다. 에너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쏟아부었을 때, 그대는 어떤 에너지와 연결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 안에 잠자던 에너지가 깨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돌연, 그대는 이 초월적인 에너지가 깨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리라. 이것은 갑 자기 전기에 감전되는 것과 같다. 그대는 저 밑의 섹스 센터로부터 어떤 에너지가 상승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에너지는 불꽃처럼 뜨거운가 하면, 아침의 산들바람처럼 시원하다. 그것은 가시처럼 예리한가 하면, 꽃잎처럼 부드럽다. 이 에너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에너지가 솟아오 를 때는 부디 그대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말라. 완전히 내맡겨라. 강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것처럼 하라. 한 마디로 한다면 '완전한 내맡김(let go)'이 핵 심이다. 자, 이제 두 번째로 유의할 사항을 말하겠다. 첫 번째 유의 사항 은 그대의 모 든 것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적인 내던짐의 결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어떤 것'의 수중에 그대 자신을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 이것 이 두 번째로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저항하지 말고 내맡겨라 강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듯이 하라. 강물이 그대 를 어디로 데려가든 그냥 흘러가라. 어느 정도까지는 에너지를 자극해서 일깨워 야 한다. 그러나 일단 에너지가 깨어나면 그냥 에너지의 흐름에 그대 자신을 맡겨라. 그대보다 더 큰 힘이 그대를 인도한다. 그러니 걱정할게 없다. 그냥 흐름에 맞기 고 저항하지 말라.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에너지의 상승 현상과 더불어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 두려워하며 움츠리지 말라. 새로운 경험은 두렵다. 아이가 태어날 때, 엄마의 포근한 자궁안에 있다가 밖 으로 나올 때 아기는 두려워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트라우마(trauma), 심리 적 외상이라고 부른다. 트라우마는 아이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 평생 동안 쫓아 다니는 경험을 말한다. 그는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 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가 모든 것을 대신 해 주었다. 그래서 아기는 완벽하게 편안하고 휴식하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자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전혀 새롭고 낯선 세계와 직면한다. 이 것이 그가 경험하는 첫 번째 충격이다. 삶의 문턱에 발을 내딛자마자 공포가 그 를 사로잡는다. 이런 까닭에 모든 사람이 새로운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이 낡은 것에 매 달리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것은 우리를 심각한 문제 상황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첫 번째 경험이다. 이 세상보다는 엄마의 자궁 이 훨씬 좋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날마다 사용하는 일상 용품을 엄마의 자궁 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쿠션, 소파, 자동차, 거실 등 모든 것이 엄마의 자궁 을 흉내내어 만들어진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엄마의 자궁처럼 편안하고 안락하게 만들려고 한다. 실제로 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엄마의 자궁 밖에서 겪는 첫 번째 경험은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다. 그런데 쿤달리니 에너지의 깨어남은 그보다 훨씬 더 새로운 경험이다. 출산은 다만 육체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은 영혼 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탄생이다. 그래서 이런 경험 을 통과한 자를 브라민(brami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브라민은 두 번 태어난 자라라는 뜻이다. 그는 또한 드위즈라고도 불리는데, 이것 역시 두 번 태어난 자라라는 뜻이다.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은 두 번째 탄생이다. 이 두 번째 탄생의 순간에 그대 는 엄마인 동시에 아기다. 그대 혼자서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그대 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출산의 고통, 그리고 불안전에 대한 트라 우마의 고통이 그것이다. 이것은 매우 끔찍한 경험이 될 것이다. 불안전에 대한 트라우마의 경험과 아 울러 엄마가 갖는 출산의 고통이 병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는 순간에 엄마와 아기는 따로떨어져 있지 않다. 그대는 출산하는 엄마 인 동시에 태어나는 아기다. 그대의 탄생이 그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건너기 어려운 고통이 될 것이다. 나는 명상 중에 마구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가 마구 울부짖고 소리지르도록 놔 두어라. 그의 내면 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자신만이 안다. 여성은 출산할 때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그런데 출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 는 여성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지? 아기가 태어나면 그냥 나오게 놔두면 괴 잖아. 저렇게 울고불고 하는 이유가 뭐야?"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출산의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출산 도중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한다. 남성은 그 고통에 대해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남성은 그런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남성으로서는 그 런 고통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명상 중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없다. 어떤 면에서 남성과 여성은 모두 엄마가 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분만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억 누를 필요가 없다. 누군가 땅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고,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른다 해도 그 를 제어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베 멋대로 일어나게 놔 두어 야 한다. 모든 것을 그냥 일어나도록 방임하라. 절대 억누르자 마라. 온갖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공중으로 뜨는 것을 느낄 것이며, 어떤 사람은 몸이 팽창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가지각색의 새로운 경험이 가능하다. 내가 그것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온갖 일이 일어 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경험이 일어난다 해 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내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오후에 개인적으로 면담을 신청하라. 그대 들끼리 토론을 벌이지 말라. 내가 토론을 금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대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사람에 게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그대의 경험을 말한다면 그는 그대를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 그대를 미쳤다고 놀릴지도 모른 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기는 옳고 다 른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은 그대를 비웃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 같 은 경험이 없는데...'하고 말하면서 불신의 눈길을 보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경험은 매우 개인 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토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대의 부인이나 남편에게도 발설하지 말라.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해도 그들 의 경험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단 두사람의 경험도 같지 않다. 그리고 이런 분야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다.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누구 든지 그대를 보고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그대 홀로 가라. 사람들은 예수나 마하비라를 용서하지 않았다. 마하비라가 벌거벗고 길가에 섰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그를 미쳤다고 비난했다. 마하비라에게 있어서 그것 은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본래 면목그대로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사람 들에게 그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했다. 그러니 그대의 경험을 놓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말라. 그대가 자신의 경 험을 말했을 때 상대방은 조용히 듣고만 있을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 것 이다. 그는 즉각 어떤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그대의 경험에 끼어들 것이다. 그의 말은 하나의 제안이나 권유처럼 작용할 것이고 , 그대가 새로운 경 험을 하는데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무슨일이 일어나든 내게 와서 직접 말하라.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하지 말라. 그대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나와 함께 토론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다. 내일 아침, 명상하러 이 자리로 나오기 전에 차나 우유 같은 유동 식품은 섭 취해도 좋다. 그러나 고형 식품은 먹지 마라. 아침을 먹지 말고 나와라. 차나 우 유 같은 유동식은 괜찮다. 그러나 차나 우유도 마시지 않고 올 수 있다면 더 좋 다. 그러면 더 쉽게 명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정 시간인 아침 7시 30분 보다 5분 일찍 이 자리에 나와라. 필요할 경우, 7시 30분 부터 8시 30분까지 우리는 토론 시간을 가질 것이다. 나는 강의보다는 토론을 하기로 결정했다. 강의는 너무 비개인적이기 때문이다. 강의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대 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내일 아침에는 멀리 떨어져 있지 말고 너와 가까운 곳에 앉도록 하라. 가능한 나와 가까운 곳에 앉아라. 그리고 오늘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의문 사항 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물어도 좋다. 우리는 그 질문들에 대해 한 시간 동안 대 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 다음에는 8시30분부터 9시 30분까지 명상을 할 것이 다. 명상하러 올 때에는 고형식을 섭취하지 말고 빈 속으로 와야 한다는 것을 잊 지 말라. 음료수조차 마시지 않으면 더 좋다. 그러나 배 고픈 것을 잊지 말라. 음료수조차 마시지 않으면 더 좋다. 그러나 배 고픈 것을 참지는 말라. 굶기가 힘들다면 간단한 차나 우유를 마시는 것이 좋다. 또한 목욕을 하고 헐렁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단 한 사람도 목 욕하지 않고 오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반드시 목욕을 하고 오도록 하라. 그리고 옷은 가능한 헐렁하게 입어라. 꼭 끼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허리를 졸라 매어도 안 된다. 몸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헐렁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명상하는 동안에는 온 몸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하라. 옷은 우리의 몸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옷은 많은 장애를 만들어 낸다. 에너 지가 상승하기 시작할 때 그 에너지의 흐름을 가로막는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명상으로 들어가기 최소한 30분 전부터 침묵을 지키라 는 것이다. 이번 명상 캠프가 진행되는 3일동안 완전히 침묵을 치킬 수 있는 사 람은 그렇게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침묵을 방해하지 말라. 침묵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캠프기간 내내 침묵을 지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완전히 침묵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최소한의 말만 하라. 마치 전보를 치는 것처럼 가능한 한 말을 적게 하라. 전보를 칠 때는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한다. 기껏해야 여덟 단어를 넘지 않는다. 쓸데없는 말은 빼고 가장 중요한 말만 쓴다. 왜냐 하면 단어 하나를 쓸 때마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꼭 필요한 단어 만 쓰고 가능한 한 말을 줄여라. 마찬가지로 감각기관도 최소한으로 사용하라. 예를 들어, 눈을 사용하는 횟수 를 줄여라. 눈을 아래로 깔고 땅바닥을 내려다보거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또는 바다를 바라보라. 그러나 가능한 한 사람들은 보지 말라. 왜냐 하면 인간의 얼굴은 우리의 마름 속에 떠오르는 연상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무나 구름, 바 다를 보라. 그런 것들은 그대 안에 어떤 생각도 떠올리지 않는다. 반면 인간의 얼굴은 마음속에 온갖 생각을 떠오르게 만든다. 걸을 때에는 눈을 낮게 내려 깔고 발 끝에서 4피트 정도를 내려다 보라. 눈을 반쯤만 뜨고 코 끝에 시선을 모아라. 그리고 다른 사람 들도 가능한 한 적게 보 고 적게 들을 수 있도록 그들과 협력하라. 라디오나 카세트 같은 물건은 켜지 말라. 명상 캠프 기간 동안에는 그런 물건 들을 멀리 하라. 그리고 신문도 갖고 들어오지 말라. 가능한 그대의 감각 기관이 편안하게 쉬게 하라. 그래야 더 많은 에너지가 명 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 것이 다. 우리들 대부분은 마구잡이로 사격을 하듯이 에너지의 총탄을 쏘아댄다. 그리 고 결국 빈 탄창 만 남게 된다. 하루 종일 모든 에너지를 써 버리고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밤에 잠을 자면서 얻은 약간의 에너지도 침대에서 일어나자마 자 신문을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마구 써 버린다. 우리는 에너지의 보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 야 많은 에너지를 보존하는지 모르겠다. 명상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에너지를 보존해 놓지 않으면 그 대는 명상중에 금방 지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 시간 동안 명상한 후 에 지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상때문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대가 이미 모든 에너지를 낭비하고 고갈될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 사물을 볼 때도 에너지 가 소모되고, 귀를 쫑끗 세우고 소리를 들을 때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생각할 때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말할 때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나 밤에는 에너지를 저축할 수 있다. 모든 행동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몰 론, 꿈을 꾸면서 약간의 에너지가 소모되긴 하지만, 어쨌든 밤에는 약간의 에너 지가 저축된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앞으로 3일 동안 그대들은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에너지가 명상 을 위해 사용될 수있다. 내가 이렇듯 상세하게 지시하는 것은, 앞으로 3일 동안 다시는 이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오후에 나는 그대들과 함께 앉아 한 시간 동안 침묵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지금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는 침묵을 통해 그대들 과 교류할 것이다. 그러니 3시까지 이 자리에 모이도록 하라. 3시 이후에 오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늦게 오는 사람은 우리의 침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 다. 3시에서 4시 사이에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두 가지를 명심하라. 첫째, 내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라. 그대들 이 나를 볼 수 있는 지점에 앉으라는 게 아니다. 내가 그대들을 볼 수 있는 지 점에 앉으라는 말이다. 그 다음에는 눈을 감아라. 만일 눈을 뜨고 있는게 편하다 면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눈을 감는게 더 좋다. 이 침묵의 시간 동안 우리는 고요히 앉아서 미지의 손님을 기다릴 것이다. 누 가 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손님이 올 것이다 무엇을 듣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 든 무엇인가 듣게 될 것이다. 무엇을 보게 될지는 그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무엇 인가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서 침묵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전혀 본 적 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미지의 손님을 기다리면서. 앉든 눕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러나 어떤 자세를 취하든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하라. 한 시간 동안 수용성 그 자체가 되어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철저하게 수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라. 예민 하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기다려라. 한 시간 동안 나는 침묵을 통해 그대들과 교류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이 있다면 침묵을 통해 전달할 것이다. 아마 그대들은 언어로는 이해하지 못하 는 것을 침묵을 통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나는 그대들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다시 한 시간 동안 명상이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3일 동안 아홉 번의 모임을 가질 것이다. 바로 내일 아침부터 그대들은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아홉 번째인 마지막 모임까지 그대의 모 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모임 이외의 여가 시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들 모두 침묵해야 한다. 단지 말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해결 된다. 저쪽에 해변이 있으니 거기에 가면 가만히 누워 있거나 파도 소리를 들어 라. 해변가에서 잠자고 싶은 사람은 침구를 가지고 가서, 나무 밑에서 잠을 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친구나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라. 친구의 무리를 만들려고 하 지 말라. 가능한 한 혼자 지내라. 앞으로 3일 동안은 그대들 각자가 홀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신을 만나고자 한다면 혼자 가야 한다. 아무도 동반할 수 없는 것을 명심하라. 이것은 홀로 있는자를 향해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그러니 가능한 한 그대 혼 자 지내라. 그리고 마지막 지시 사항을 명심하기 바란다. 절대로 불평하지 말라. 아무것에 대해서도 투덜거리지 말라. 앞으로 3일 동안은 절대 불평하지 말라. 음식이 형편 없어도, 밤에 모기에 물어뜯겨도 불평하지 말라. 3일 동안은 모든 일에 대해 철저하게 수용적인 자세를 가져라. 모든 것을 있 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대를 물어뜯는 모기는 무엇인가 얻을 것이다. 그런 아무 불평도 하지 않는 다면 그대는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좋지 않은 음식은 유체에 해롭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에 대해 불평한다면 그 보다 더 큰 해가 돌아갈 것이다. 불 평하는 마음은 결코 평화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평은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불평으로 인해 우리 는 많은 것을 잃는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라. 앞으로 3일 동안은 절대 불평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전적으로 수용하 라.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3일 동안 아주 멋진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3일 동안 사소한 문제들을 무시하고 지낸다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 들인다면, 그대는 앞으로 남은 여생동안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불평하는 일 이 없게 될 것이다. 불평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평화롭고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3일 동안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지내라. 질문이 있는 사람은 내일 아침에 하도록 하라. 그리고 질문을 할 때는 그 질 문이 공통적인 관심사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질문이라면 무엇이든지 물어도 좋다. 앞에서 나는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도 나와 똑같은 이유로 이 자리에 왔 기를 희망하면서 내일 아침 그대들과 만날 것이다. 사실, 우리의 습관은 매우 추하다. 붓다가 우리를 찾아와 문턱에서 있어도 우 리는 그를 내ㅉ으려고 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찾아오는 사람 모두가 뭔가를 요 구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주려고 찾아온 사람을 냉대하면서 당장 떠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우리는 중대한 실책을 범한다. 정말 엄청난 실수다! 나는 그대들 모두 가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 3일 동안 우리는 중대한 변형이 일어날 수도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 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런 변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그대들 각자에게 달렸다. 앞으로 3일 동안 이 소나무숲 전체가 신비한 에너지로 가득 차게 하자. 나무, 모래알, 이 바람과 바다 전체가 새로운 생명 에너지로 충만하게 만들자. 우리 모 두 그 일에 협력하자.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명상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 다. 그냥 구경만 하는 방관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떠들지 두려워하지 말라. 그래야 그대 홀로 신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때 그대는 카비르(kabir)의 한탄을 되풀이하지 않고 이렇게 마랄 수 있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크나 큰 사랑으로 조용히 내 말을 들어 준 그대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대들 각자 안에 거주하는 신에게 절한다. 부디 나의 인사를 받아 주기를. 물질과 신은 하나다. 우주는 에너지의 팽창이다. 그리고 생명은 그 에너지가 결정화된 것이다. 우리 가 물질로 보는 것, 돌처럼 보이는 것 또한 에너지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보는 것, 생각이라고 경험하는 것, 의식이라고 경험하는 것도 에너지가 변형된 현상이 다. 바다에 이는 파도, 숲 속의 소나무, 해변가의 모래알,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들, 이렇게 우주의 모든 것은 똑같은 에너지가 각양 각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난다고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우 리의 육체가 어디에서 끝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육체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육체는 그저 육체로서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태양이 차갑게 식는다면 우리 또한 얼어붙어 죽음을 맞을 것이다. 이것은 태양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양은 우리 몸의 일부다. 태양이 열을 잃어버리는 즉시 우리 또한 멸망할 것 이다. 태양은 곧 우리 몸의 열이다. 우리는 사방을 둘러싼 공기로부터 생명 에너지를 얻는다. 만일 공기를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이쉬는 숨 은 자신 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와도 연결된다. 육체는 어디에서 끝나는가? 만일 그대가 철저하게 탐구했다면 우주 전체가 곧 우리의 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의 몸은 무한하다. 그리고 올바르게 탐구 한다면 그대는 센터가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생명은 모든 곳으로 팽창한다. 그러나 이것을 얼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생생한 에너지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안에 정체되어 있는 에너지를 해방시켜 흐르게 하는 모든 방법을 지칭하는 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명상 안에 깊이 들어가면 그대 안에 숨어 있던 에너지가 상승할 것이다. 그 에너지는 외부의 에너지와 연결될만큼 막강한 기세로 솟아오를지도 모른다. 이러한 연결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불어 오는 바람 앞에 바들바들 떠는 사람 들은 이 경험을 말로 옮기려고 애썼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찾아해맸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헤매는 가운데 나를 잃었다. 그를 발견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어떻게 그것을 말 할 수 있겠는가? 카비르는 이러한 경험을 시로 표현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그 표현법을 바꾸 었다. 처음으로 신을 경험했을 때 그는 이슬 방울이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 그의 말을 옮겨 보자. "오, 친구여, 카비르는 찾고 또 찾다가 자기를 잃어버렸네. 이슬 방울 하나가 바다로 흘러들었네. 그러니 어떻게 이슬 방울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카비르는 탐구의 과정에서 자기를 잃어버렸다. 이슬 방울이 그 넓은 바다로 흘 러들었다. 그러니 이슬 방울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키비르는 나중에 위의 시구를 바꾸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다. 그는 나중에 '전에 내가 말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것은 오류였다.'고 말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이슬 방울이 바다로 흘러들어간 것이라면 그 이슬 방울은 다시 불러 들일 기회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가 이슬 방울 안으로 흘러들었다면 이슬 방울을 다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슬 방울이 바다로 흘러들어간 경우 에 이슬 방울을 다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슬 방울이 바다로 흘러들어간 경 우에 이슬 방울은 뭔가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 자체가 이슬 방 울 안으로 흘러들었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카비르는 자신의 시를 이렇게 고쳐 썼다. '오, 친구여 찾고 또 찾다가 카비르는 자기를 잃어버렸네. 바다가 이슬 방울 안으로 녹아들었네. 그러니 어떻게 이슬 방울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이슬 방울이 바다 안으로 흘러들었다고 말한 것은 실수 였다. 우리가 순수한 에너지의 진동인 채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 의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가 에너지의 진동 자체가 되었을 때 무한한 에너지의 바다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그 때는 무슨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언어적인 표 현과 경험 자체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앎에 대한 우리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러나 언어 표현에는 한계가 있다. 대단한 경험은 제쳐 두고라도 아주 사소한 경험조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 우가 있다. 예를 들어, 두통을 느낄 때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말로 표 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 때문에 가슴이 아플 때도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 기는 힘들다. 아주 사소한 경험조차 이렇다. 그러니 신이 우리를 찾아 내려올 때는 어떻겠는가? 그것을 언어로 옮기기는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분명하게 안다. 다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신을 알기위해서는 순수한 에너지의 진동으로 살아 있어라. 그러면 우 리 몸의 열과 심장 박동, 숨결 하나하나가 참기 힘든 갈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는 갈증 그 자체가 되어 애절하게 갈구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하라. 그래야만 신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어제 말했듯이, 이 만남은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잠자는 뱀, 잠자는 센터가 우리 안에 있다. 생명 에너지가 솟아올라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도 이 센터를 통해서다.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꽃과 씨앗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생기기 위해서는 그 둘 사이에서 나무가 가지를 뻗고 잔 가지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꽃은 씨앗 속에 잠재해 있다. 어딘가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꽃을 연결시키는 나무가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꽃이 그러하 듯이 나뭇가지 역시 씨앗으로부터 뻗어나갈 것이다. 우리 안의 에너지도 씨앗의 형태로 잠재해 있다. 그 에너지가 솟아오르기 위 해서는 나뭇가지가 필요한데, 그 나뭇가지 역시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흔히 척추로 알고있는 부분의 밑에서부터 씨앗이 싹터 꽃이 된다. 이 꽃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이 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천 개의 잎 을 가진 연꽃으로 묘사한다. 우리의 뇌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천개의 잎을 가진 연꽃처럼 피어난다. 그러나 이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밑바닥에서부터 상승하여 뇌 안 의 가장 높은 센터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상승하기 시작한 에너지는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구도자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뒤흔들 것이다. 그 때 이 지진을 멈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지진에 동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지진을 저지하려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 중 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려워한다면 어떠한 진보도 불가능하다. 두려움이야 말로 가장 비종교적인 마음이다. 공포심보다 더 한 죄악은 없다. 두려움이야말로 구도자의 길에 놓인 가장 큰 장애물이다. 두려움은 구도자의 목을 내리누르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바윗돌이다.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터무니없고 무가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변 사람들 이 무엇이라고 말할지 두렵다고 내게 호소한다. 그러나 대중의 눈에 대한 두려 움 때문에 신과의 만남을 놓칠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마음놓고 웃지 못한다.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한다. 그는 어떤 감정 이나 느낌에 푹 젖어들지 못한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중간한 상태에 있 다. 그는 일종의 림보 상태에 있다. 울거나 웃을 때 그는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 남자들은 눈믈을 흘리며 맘껏 울지 못한다. 그들은 울음이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울음이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 을 알지 못한다. 울음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 수 없는 사람의 삶에는 뭔가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 빠져 있다. 삶의 한 부분이 영원히 불구자처럼 무겁게 그를 짓누를 것이다. 에너지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 궁극적인 에너지의 사원을 향해 순례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몸이 떨리거나 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야 한다. 요가의 모든 자세는 여러 가지 명상의 상태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 자세 들은 곰곰히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다. 먼저, 명상 중에는 몸이 상황에 따라 상이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 다음에 명상가는 그것을 요가 자세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몸의 자세는 자동적으로 마음의 상태를 따른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몸이 특정한 마음의 상태를 취하면 마음도 그에 상응하는 상태로 변화한다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울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우리의 눈은 눌물로 가득 찬다. 눈물이 가득 차면 우리의 내면에 울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눈물과 울음은 똑같은 현상 의 두 측면이다. 우리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본능적으로 주먹을 쥔다. 이빨을 악물고 눈이 붉게 충혈된다. 그리고 뭔가를 때리기 위하여 팔이 올라간다. 반면, 사랑의 감정 으로 충만할 때는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그 때 우리는 주먹을 쥐지 않는다. 이 빨을 악물거나 눈이 붉게 충혈되지도 않는다. 사랑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불끈 쥐었던 주먹이 풀리고 악다문 이빨에도 힘이 빠진다. 붉게 충혈되었던 눈도 정 상으로 돌아와 고요해진다. 이렇게 사랑에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상의 다양한 상태에 따라 몸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 다.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몸의 특정한 상태가 방해받 으면 마음의 동조 상태도 즉시 방해받는다. 누군가 그대에게 주먹을 쥐거나 이 빨을 악물지도 않고, 눈에 힘을 주고 크게 뜨지도 않은 채 화를 낸다고 한다면 그대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화를 내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육체기관 의 동조가 없다면 어떻게 화를 표현할 수있겠는가? 그대는 화를 내기가 불가능 할 것이다. 육체 기관의 동조가 없다면 어떻게 화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몸에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화를 내라고 하면 그대는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그대에게 눈에 어떠한 다정함도 나타내지 말고 사랑하라 고 요구한다면, 손을 통해 흐르는 사랑의 전류도 없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거 나 호흡의 변화도 없이 사랑하라고 요구한다면, 몸에 어떠한 징조도 나타내지 말고 사랑해 보라고 한다면 그대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렵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명상 도중 그대의 몸이 회전하거나 꼬인다 해도 그냥 놔 두어라. 그 것을 제어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을 의도적으로 제어하려고 하면 내면의 명상 상태에 큰 해가 갈 것이고, 어떠한 진보도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요가 자세는 다양한 명상 상태를 통해 유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가 의 무드라도 명상을 통해 자연히 도출된 것이다. 그대는 불상마다 여러 가지 무드라고 짓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무드 라 또한 특정한 마음의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무드라를 다루는 경전이 탄생했으며, 무드라의 상태를 관찰함으로써 구도자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일 을 예측하는 것이 용이해졌다. 왜냐 하면 무드라는 인위적인 행동이 아니라 명상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겼을 때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동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상 중에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을 제어하지 말라. 나의 이해에 따르면, 춤은 명상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나는 삶에 있어서 중요 한 의미를 갖는 그 모든 것은 명상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한다. 미라는 춤을 배우기 위해 아무데도 간 적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라가 춤 을 통해 신을 발견한 것처럼 오해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라가 신을 발견하자, 자신도 모르게 춤이 솟아난 것이다. 춤을 통해 신을 발 견한 것이 아니라, 신을 발견했을 때 춤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거대한 바다 전체가 이슬 방울 안으로 흘러들어왔을 때, 그 이슬 방울이 춤추 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엄청난 보물을 발견한 거지가 덩실덩실 춤 추는 것 외에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문명에 의해 불구가 된 나머지 춤을 잃어버렸다. 이 세상을 다 시 한 번 종교적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인간의 삶을 즉흥적이고 편안한 자연 상 태로 되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나의 이해다. 그러므로 명상중에 에너지가 솟아올라 그대의 존재 전체가 춤추기 시작하면 그 춤을 방해하지 말라. 그대 몸의 움직임을 억제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어떠 한 진전도 없을 것이다. 일어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움에 목을 매달고 사는 것 같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춤을 추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아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로 제 옆에 앉아 있는 아들놈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춤을 추기 시작하면 제 남편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그는 '저 여편네 미쳤군!"하고 말할 것입니다." 명상 중에는 아사나와 무드라 외에도 많은 일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것 을 명심하라. 나는 사상가 한 명을 안다. 그는 수많은 신야신과 사두, 수도원 아쉬람을 찾아 다닌 인물이다. 여섯 달 전쯤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 음에도 아무 경험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그대가 그 경험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그가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아마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도하는 명상에 참여했을 때 누군가 비명지르는 소리를 들으면 저는 정신을 차리려고 바싹 긴장합니다. '나도 저런 꼴이 되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럴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가? 그대가 죽음의 문 앞에서 서 있을 때 그들이 그대를 구원해 주겠는가? 그대 가 불행할 때 그들이 불을 밝혀 주겠는가? 그대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그들이 불을 밝혀 주겠는가? 오히려 그대가 불을 밝히려는 찰나 그들은 훼방 을 놓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기에? 진정 그대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대는 자신의 두려움을 불특정 다수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대는 자 신의 두려움을 사방에 투영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았을 때 나에 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바짝 긴장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는 한 달 동안 조용하고 외진 곳에 가서 생활하라. 그리고 그대 안에 무 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그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설명했다. "만일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소리치고 싶으면 그렇게 소리질러라.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춤추고 싶으면 춤추 고, 달리고 싶으면 달려라. 미치고 싶으면 한 달 동안 완전히 미쳐라." 그러나 그는 내 의견에 반대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대로 하다가 내가 진짜로 미쳐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 말대로 나 자신을 완전히 방임하고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상태로 돌아갔다가 진짜 미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가 자신의 광기를 억누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런다고 해서 광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광기가 겉으로 표현되도록 허용하라. 그러면 광기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누른다면 광기는 영원히 그대를 ㅉ아다닐 것이 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억눌러 왔다. 우리는 마음놓고 울거나 웃지 못한다. 달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춤추지도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억눌러 왔 다. 우리는 안에서 모든 문을 꽁꽁 걸어 잠갔다. 우리들 스스로가 죄수며 간수다. 밖으로 나가 신을 만나고자 한다면 모든 문은 활짝 열어 젖혀야 한다. 하지만 그 때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억눌러 왔 던 모든 것들이 표면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눈물을 억눌러 왔다면 눈물 이 터져나올 것이고, 웃음을 억눌러 왔다면 웃음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것들이 밖으로 터져나오게 내버려두라. 그것들이 씻겨 나가도록 놔 두어라. 오리가 있는 이 곳은 매우 외진 곳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초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기의 이 소나무들이 우리를 보고 흉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 은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소나무들은 그대들과 더불어 기뻐할 것이다. 그대들이 어떻게 행동 하든 저바다에 이는 파도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울부짖고 싶으면 울부짖는다. 잠자고 싶으면 조용히 잠잔다. 또한 여기 에 있는 모래 밭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방임하라. 그대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일어나 게 내버려 두어라. 저항하지 말라.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소리지르고 싶으면 소 리질러라. 달리고 싶으면 달려라. 바닥에 쓰러져 뒹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 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 자신을 개입시키지 말라. 모든 일이 그냥 일어나도 록 방임하라. 그러면 어떤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면서 솟구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떤 힘이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닫혀 있던 모든 문이 열리면서 길이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순간에 공포심에 휩싸이지 말라. 그 내면의 움직임과 한가 되어라.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의 춤에 자신을 내맡겨라. 그 안에 그대 자신을 함몰시켜 라. 그래야 기대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일은 매우 쉽게 일어난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 지 않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대는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어느 날엔가 정점에 도달하면 그대는 그토록 사소한 것에 매달려 왔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거대한 것이라면 그런 대로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질문이 있는 사람은 지금 질문하라. 잠시 동안 그 질문에 대해 토의하고 명상 을 시작할 것이다. 어떤 질문이든 좋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목적 없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유독 인간만이 목적 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까? 만일 모든 목적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그대가 자연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완벽한 성공이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자연에서 어긋났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이 필요하다. 즉 자연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목적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임하라 그런데 우리는 수많은 목적들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 목적들을 포기하는 것 조차 또 하나의 목적이 되어야 할 판이다. 우리는 너무나 강하게 목적들을 움켜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목적들을 놓아 버리는 데도 큰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거 기엔 어떤 노력도 불필요한데 말이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포기하고자 한다면 거기에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어느 곳에도 목적은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연이 맹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은 존재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꽃을 예로 들어 보자. 꽃은 어는 누구를 위해 피어나지 않는다. 꽃은 시장에서 팔려나가기 위해 피 어나는 것도 안고, 지나가는 행인을 유혹해 향기를 맡게 하려고 피어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꽃은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피어나는 것도 아니며, 파드마쉬 리같은 장식품이 되려고 피어나는 것도 아니다. 꽃은 그냥 피어난다. 왜냐 하면 피어남 자체가 목적이며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꽃은 아무 목적 없이 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 목적이 없어야만 활짝 피어날 수 있다. 목적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장애가 따르기 때문 이다. 꽃이 행인의 눈에 뜨이기 위해 피어난다고 하자. 지나가는 행인이 없으면 어 떻게 될 것인가? 꽃은 피어나지 않고 행인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피어나기를 거부한 꽃은 막상 행인이 지나갈 때도 피 어나지 못할 것이다. 꽃봉오리를 닫고 있는 상태가 습관처럼 굳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은 아무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또한 이같이 되어 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적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어려움이다. 인간은 완전히 자연에서 어긋났다. 인간은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그 돌아감 또한 일종의 목적이다. 내가 말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경우와 비교된다. 발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다른 가시를 이용해 그 가시를 빼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내 발에는 가시가 박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빼야 한단 말입니 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시를 빼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왜 내게 자문을 구하는가?" 발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다면 질문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가시가 박혀 있다면 다른 가시를 이용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가시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또 다른 가시로 찔러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첫 번째 가시가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시는 다른 가시가 없으면 빼낼 수 없다. 물론, 두 번째 가시가 계속 박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첫 번째 가시 를 빼내 주었다고 해서 고마워하며 간직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일단 첫 번째 가시가 제거되면 두 개의 가시 모두를 버려야 한다. 우리의 비자연적인 삶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자연이나 비자연이라는 개념마저 버려야 한다. 그래야 완벽하게 자연적이다. 자연에 대한 생각조차 그대를 비자연 적으로 만들 것이다. 지금 나는 목적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내가 목적을 갖 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내가 목적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그대 가 이미 자신의 삶에 수많은 목적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살갗에는 수 많은 가시가 박혀있다. 그러므로 이 가시들을 제거하는 다른 가시가 필요하다.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또 이렇게 물었다. 마음(mana), 지성(buddhi), 치타, 에고(ahankara)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 아니 면 같은 것입니까? 이런 것들은 아트만과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까? 또한 이런 것들은 의식입니까, 무의식입니까?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 떻게 구분됩니까? 물질과 의식은 독립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 은 잠들어 있는 의식이며,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깨어 있는 물질이다. 물질과 마음은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똑같은 것의 다른 표현 양태일 뿐이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 그 하나가 신 또는 브라흐만(brahman)이다. 이것을 어 떤 이름으로 부르건 상관없다. 그 하나가 잠들어 있으면 물질로 나타나고, 깨어 있으면 마음 또는 의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마음과 물질을 별개의 독립된 실체로 생각하지 말라. 물질과 마음이라 는 말은 실용적인 개념 뿐이다. 실제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과학자들조차 물질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50년 전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제 과학은 지금부터 50년 안에 이렇게 선언해야 할 것이다. "신은 죽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물질은 분명히 죽었 다." 고학은 물질을 계속 파고들어 그 밑바닥까지 도달했다. 그 때 과학은 물질이 사라지고 에너지만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자의 분열 후에 남는 것은 에너지의 입자뿐이다. 우리가 전자, 양자, 중성자 로 부르는 것은 전기의 입자들이다. 사실, 그들을 입자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입자는 물질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퀀타(quanta)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야 한다. 퀀타는 입자와 파장 둘 다를 가리킨다.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입자인 동시에 파장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퀀타는 입자와 파장 둘 다다. 퀀타 는 때로는 입자로 작용하고 때로는 파장으로 작용한다. 입자로 작용하면 물질이 나타나고, 파장으로 작용하면 에너지다. 과학은 깊이 파고 들어감으로써 오직 에너지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 다. 그리고 정신적인 탐구자들은 오직 아트만(atman)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 다. 이 아트만은 에너지다. 그러므로 과학과 종교의 종합이 이루어질 날도 멀지 않았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이 사라질 것이다. 물질과 신 사이의 간격이 착각으로 판명되는 날, 과학과 종교의 간격도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구분은 마음과 물질이라는 구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물질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어떻게 종교와 과학이 둘일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오직 하나가 존재한다. 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원성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물질이냐 마음이냐 하는 문제도 떠오르지 않는다. '물질'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물질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마음' 또는 '의식'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의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의식'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왜 그런가? 언제나 더 높은 것, 더 잠재성 이 많은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더 낮고 가능성이 적은 단어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가령, 오직 씨앗이 존재할 뿐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하자. 나무는 씨앗의 변형된 형태이므로 이렇게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씨앗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씨앗이라고? 그렇다면 왜 우리가 나무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냥 씨앗으로 살아가자. 우리 본연의 모습 그대로 살도록 하자." 그러므로 오직 나무가 존재할 뿐, 씨앗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더 낫 다. 그렇게 말하면 씨앗이 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이 남으니까. 나는 의식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래야 잠들어 있는 것이 깨어 날 수 있다. 그래야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유물론자와 유심론자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물질이나 마음 중 어 느하나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유물론자가 원초적인 것을 택함으로써 궁극적인 것에서 멀어지는 반면, 유심론자는 궁극적인 것을 받아들 임으로써 그 안에 원초적인 것을 포함시킨다. 궁극적인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어느 것 하나 배제하지 않는다. 나는 '의 식'이라는 단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이 의식이라고 말한다. 의식이 잠들어 있으면 물질로 나타나고, 의식이 깨어 있으면 의식 그대로 나타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의식이다. 마음(mana), 지성(buddhi), 치타(chitta), 에고(ahankara)는 서로 다른 것입니 까? 아니다. 그것들은 똑같은 마음의 여러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아 버지, 아들, 남편이 다른 사람인지 묻는 것과 같다. 똑 같은 사람이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부인에게는 남편이 된다. 또 그의 아버지가 보면 아들이 된다. 그와 우정을 맺은 사람이 보면 친구고,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이 보면 적이다. 어떤 사람이 보면 아름답고, 다른 사람이 보면 추하다. 한 인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주인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인이 된다. 그러 나 그는 같은 인물이다. 누구는 어떤 집을 가리키며 '저 집에는 내 주인이 살고 있다.'고 말하고, 다른 가람은 그 집에 자기 하인이 산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젊 은이는 그 집에 자기 아버지가 산다고 말하며, 어떤 여인은 저 집의 주인이 자 기 남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대는 그 집에 주인, 하인, 아버지, 남편 등 많은 사람이 산다고 혼동 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실은 동일 인물이 각기 다른 사람들과 의 관계속에서 여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교만함에 물들어 자기를 최고로 여길 때, 그 마음은 에고로 나타난다. 에고는 마음의 양식 중 하나다. 마음이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다! 누구든지 내 앞에 서면 별볼일 없는 인물이다.'하고 말하면 그 마음은 에고다. 반면, 마음이 곰곰이 심사숙고할 때 그 마음은 지성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무 방향 감각도 없이 우왕좌왕할 때,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리저리 헤맬 때 그 마음은 치타라고 불린다. 지성은 방향 감각을 가진 마음이다. 과학자가 실험실에 앉아서 원자 분열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는 그 마음이 지성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무 목적 없이 젖어 있을 때, 백만장자나 대통령이 되는 망상에 젖어 있을 때 그 마음은 치타다. 이 때 그 마음은 마구잡이로 물결칠 뿐, 질서도 없고 조직적이지도 않다. 반 면, 마음이 질서정연한 생각의 체계를 따라 움직이면 그 마음은 지성이다. 이렇게 마음의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마음이다. 마음, 지성, 치타, 에고는 아트만과 다른 것입니까? 바다에 파도가 친다고 하자. 그대는 이 파도가 바다와 따로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다가 요동칠 때 우리는 파도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아트만이 동요되어 술 렁거리면 그것이 마음이다. 그리고 마음이 잠잠해지면 그것은 다시 아트만이 된 다. 그러므로 아트만이 동요된 상태가 마음이며, 마음이 고요하게 평정된 상태가 아트만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의 의식이 동요하여 소란이 일어난 상태가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트만을 깨달을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명 상 속에서 마음이 멈추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마음이 멈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아트만의 바다에 거세게 몰아치던 파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는 뜻이다. 그 때야 비로소 그대가 아트만이라는 것 이 가능하다. 동요된 상태에 있는 한 그대는 자신을 마음으로 인식한다. 동요된 마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때로는 에고로 나타나고 때로는 지성으 로 나타나고, 때로는 치타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이 동요된 마음의 여러 얼굴이 다. 아트만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아트만과 몸도 마찬가지다. 왜냐 하면 본질적인 실체는 하나며, 이 모든 것이 그 실체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실체를 알면 몸이나 마음과의 갈등이 사라진다. 모든 마찰이 끝난다. 일단 하나 의 실체를 깨달으면 그 때는 오로지 실체만이 존재한다. 라마안에 실체가 거주하듯이 리바나안에도 실체가 깃들어 있다. 이 때 오직 라마를 숭배하고 라바나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둘 다를 숭배하거나 둘 다를 죽일 것이다. 라마와 라바나 안에는 똑같은 실체가 거주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의 표현 양태는 무한하다. 진리는 하나지만 그 형상은 무궁무진하다. 오직 일자가 존재하는데 그의 무드라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접근 해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체험적으로 접 근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나의 모든 말은 전적으로 이런 사실을 '설명'하기 위 함이다. 나의 설명이 그대의 앎, 그대의 체험이 될 수는 없다. 그대 스스로 알아 야 한다. 진리의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 그대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오! 신이여! 내가 몸이라고 알았던 것도 당신이며, 내가 마음이라고 알았던 것도 당신입니다. 또한 내가 아트만이라고 알았던 것도 당신입니다." 앎에 도달하면 오직 하나가 남는다. 이 하나는 너무나 광대해서 아는 자와 알 려진 것, 그리고 앎 사이의 간격이 사라진다. 아는자와 알려진 것이 하나가 된 다. 우파니샤드의 선지자는 이렇게 묻는다. "아는 자는 누구며 알려진 자는 누구인가? 보는 자는 누구며 보여진 자는 누 구인가? 경험한 자는 누구며 경험된 자는 누구인가?" 아는 자와 알려진 것에 대한 구분이 남지 않는다. 더 이상 이원성이 남아 있 지 않다. 경험자조차 사라진다. 모든 구별과 간격, 모든 분리가 일거에 사라진다. 모든 구별과 간격, 모든 분리가 일거에 사라진다. 그런데 생각은 분리와 구별을 만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생각은 구분지 어야만 한다. 생각은 '이것은 나의 몸이고 저것은 나의 마음이다. 이것은 나의 아트만이고, 저것은 신이다.'라고 말한다. 마음은 몸과 마음을 구별하고, 아트만과 신을 구별한다. 생각은 존재하지도 않 는 기분을 만들어 낸다. 왜 그런가? 생각은 존재계 전체를 한꺼번에 포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은 아주 작은 창문이다. 그 창문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부분 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건물에 작은 창문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다면 건물 전체를 볼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의자가 보일 것이고 그 다음에는 책상 이, 그 다음에는 집주인이나 그의 사진 또는 벽에 걸린 시계가 보일 것이다. 작은 창문을 통해서는 부분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집 안 전체를 한눈에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벽을 허물어 버리고 집 안에 들어서면 한동안 집 안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은 아주 작은 창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창문을 통해 진리를 보려고 한 다. 이런 식으로 보면 모든 것이 조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각을 버리고 무념의 차원에 들어서면 전체가 한눈에 들어 온다. 이것이 명상이다. 그렇게 전체를 보 는 순간, 그대는 무궁무진한 형상들이 실상은 모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 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당신이 명상에 들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습니까? 명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찰나지간의 문제다. 문 밖에서는 수 많은 생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지만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난다. 사실 은 이 '순간'이라는 말조차 적당하지 않다. 일 초도 노무 길다. 수천 분의 일 초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정확한 계산은 아니다. 사실, 명상은 시간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간이 멈출 때 명상이 일 어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나는 1년 동안 명상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 이다. 진실로 명상에 들었을 때는 시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명상 속에는 더 이 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상은 시간을 초월한다. 물론, 그대는 명상의 사원 밖에서 수많은 생을 소모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원 밖에서 방황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다. 나 또한 명상의 사원 밖에서 배회하며 수많은 생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사 원으로 들어가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사원 안으로 들어간 것은 시간 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일어났다. 그것은 무시간 차원에서 이러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매우 어렵다. 만링 사원 밖에서 헤매며 보낸 시간을 계산한다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생애를 계산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 것은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원 안으로 들어간 사건 그자체를 계산한다면 시간적인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가고 다음 순간이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두 순간 사이의 틈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일어난 다. 그러므로 나는 명상에 들어가기전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말할 수 없다. 사시르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다. 시간을 통해서는 절대로 명상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 너머의 것'을 시간을 통해 아는 것은 볼가능하다. 나는 그대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 그대는 원하는 만큼 사원 밖을 배회할 수 있다. 그것은 원을 따라 도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여기에 원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원의 중심에 닿으려고 한다. 만일 원주를 따라 돈다면 억겁을 몰아도 결코 중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 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는 결코 중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는 결코 중심에 닿을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가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가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원주를 돌고 있는 한 그것은 에너지를 낭비하 는 꼴밖에 안 된다. 그는 중심에 닿지 못한다. 그리고 원주에 머무는 한, 그가 어디에 있다 해도 중심과 그의 거리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이 달렸느냐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가 원주에 있는 한 중 심과의 거리는 항상 똑같다. 아무리 달려도 소용없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이나 후나 중심과의 거리는 항상 똑같다. 중심에 도달하려면 원주 위에서 달리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가 중심에 도달했을 때 누군가 '원주 위를 얼마 동안 달려서 중심에 도달했습 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는 '나는 원주를 수도 없이 돌았지만 중심에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긴 시간을 여행했습니까?' 하고 묻는다 면 그는 '그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리 원주 위를 돌아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고 말할 것이다. 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모든 여행을 포기하고 그냥 뛰어들었다. 그 때서야 중심에 도달할 수 있 었다." 명상의 차원에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문제가 없다. 명상은 시간 안에서 일어 나지 않는다. 우리는 명상에 들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허비해 왔다. 그러나 명상이 일어나는 날 그대는 명상에 들기까지 얼마나 짧은 시간이 걸렸 는지 말할수 없는지 알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상의 차원에서는 시간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천국에서 우리가 얼마나 머물 수 있을 까요?" 예수가 말했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다. 그 곳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시간을 계산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우리의 불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라. 지 복의 상태에서는 시간이 멈춘다. 시간의 양은 불행의 양과 비례한다. 그대가 불 행한 만큼 시간도 늘어난다. 가족 중의 한 명이 한밤중에 침상에 누워 맞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대는 그 밤이 한정없이 길게 느껴질 것이다. 벽에 걸린 시계나 달력은 예전 그대로다. 그러나 침상 옆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다리는 자에게 그 밤은 거 의 끝이 없을 만큼 길게 느껴질 것이다. 세계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 그러나 혹 시 시계가 멈춘 것은 아닌가. 혹시 느리게 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것 이다. 거의 날이 밝아올 시간이 되어도 그는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처 럼 생각될 것이다. 버트런트 러셀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은 죄,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은 죄까 지 포함해도 나는 4년이나 5년 이상을 선고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죄를 지은 자는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불공정한 일이다. 마음 속에 품었던 죄까지 포함시킨다해도 가장 엄격한 판사도 4년이나 5년 이상을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법정은 나를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로 밀어 넣는다. 이것은 너무 심하다." 러셀은 이미 죽었다. 만일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나는 그에게 '당신은 예 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뜻은 이렇다. 단 한순간을 고통 속에 산다 해도 그 순간은 영 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불행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것 이 불행의 본성이다. 불행이 시간을 길게 연장하는 반면 행복은 시간을 짧게 단축시킨다. 그것이 우리가 '행복은 잠깐'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행복이 반드시 일순간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일순간이라고 느낀다. 왜냐 하면 행복 안에 서는 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이다. 행복이 항상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긴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일순간이라고 느끼는 것은 행복 안에서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 이다. 가령,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고 하자. 이 때 그대는 만나 자마자 헤어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꽃이 피어나기가 무섭게 지는 것처럼 느 껴질 것이다. 그렇듯 행복은 항상 화살처럼 일순간에 지나간다. 행복 안에서는 시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시계와 달력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그것들은 그대의 행복에 영향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의 행복은 시간을 짧게 만든다.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지복의 상태에서는 시간이 완전히 사라진다. 시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는 말이 아니다. 지복 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복의 상태에서 그대는 시 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시간과 불행은 똑같은 것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 다. 그러므로 시간과 불행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시간은 불행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지복이 시간 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간 너머에 있는 것을 시간 안에서 발견하는 것 은 불가능하다. 나 또한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방황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방황 이 너무나 길기 때문에 누가 더 많이 방황했는지 가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하 비라와 붓다는 2천 5백년 전에 깨달음을 얻었고, 예수는 2천년 전에 깨달았다. 그리고 샹카라는 천 년 전에 깨달았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샹카라는 당신보다 천 년을 적게 방황했군요.'하고 말한 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원주 위를 달리는 이 방황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봄베이로부터 100마일을 여행하여 이 곳 나르골(Nargol)까 지 왔다고 하자. 그러나 무한하게 떨어져 있는 별이 그대를 보면 그대가 한 발 짝도 움직이지 않은 것과 같다. 별의 입장에서 보면 그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에 있다. 그대가 봄베이로부터 100마일을 이동했다 해도 아무 차이도 없다. 별의 눈으 로 보면 그대는 결코 움직인 것이 아니다. 봄베이에 있을 때나 나르골에 있을 때나 별까지의 거리는 변함이 없다. 별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100 마일이라는 하찮은 거리는 아무 차이도 없다. 우리의 여행, 삶과 죽음을 통과하는 이 여행은 엄청나게 길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2천 5백년 전에 깨달았고, 어떤 사람은 2천년 전에, 또 어떤 사람은 1천 년 전에 깨달았다 해도 거기엔 아무 차이가 없다. 원의 중심에 도달하는 날 우 리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오, 저기 붓다가 들어오는 군. 예수와 마하비라도 지금 막 들어오네. 우리도 지금 막 들어오는 참인데!" 그러나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문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간 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시간은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 다. 그래서 '명상에 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까?' 하는 질문이 나 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질문을 하지 말라. 시간에 대해 말하지 말라. 구리고 방 황을 멈추어라. 방황에는 시간이 걸린다. 사원 밖을 배회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 가라. 그러나 우리는 사원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두려워 한다. 우리는 사원 밖에 있는 것들과 익숙해져 있다. 친구, 아내, 친척, 남편, 아이들, 집, 가게 등등 모든 것이 사원 밖에 있다. 우리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원 밖에 있다. 그리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그대 혼 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의 사원에는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 없다. 그대의 집, 아내, 아이들, 재산, 지위 , 신분 등을 갖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 하 다.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두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차라리 사원 밖에서 좀더 방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다. 우리는 사원의 문이 좀더 넓게 열려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사원의 문은 반드시 한 사람만이 들어갈 만큼만 열린다. 오직 한 사람 만 들어갈 수 있다. 그대의 지위나 신분을 갖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 의 지위나 신분을 갖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둘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대와 그대의 지위가 한꺼번에 들어가려 한다. 명상의 사원 에는 이름조차 갖고 들어갈 수 없다. 그것 또한 두 사람(그대와 그대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떠한 짐도 갖고 들어갈 수 없다. 완전히 빈 손이어야 한다. 완전히 발가벗고 혼자여야 한다. 그래야만 명상의 사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는 막사를 짓고 주변을 어슬렁 거린다. 그러면서 우리는 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그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사원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건 수 천 마일이 떨어져 있건 아무 차이가 없다. 밖에 있다는 사실은 똑같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수천 분 의 일 초 사이에 들어갈 수 있다. 아니, 수천 분의 일 초라는 말도 틀렸다. 그대 는 한순간도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진정한 앎은 무념의 상태에서만 얻어지는 것입니까? 생각을 통해서는 앎이 불 가능한 것입니까? 그리고 생각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는 앎이 사라집니까? 진정한 앎은 생각이 없을 때 얻어진다. 생각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에 앎이 찾 아온다. 그리고 일단 그대안에 일어난 앎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앎은 생각의 와중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획득한 앎을 잃는 것은 불 가능하다. 그럴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런 앎을 얻는 것은 오직 무념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왜 그런가? 생각의 물결은 마음이 거울처럼 맑게 비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자. 그대는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 카메라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그러나 일단 사진을 찍고 나면 카메라를 아무리 흔들어도 상관없다. 카메 라를 이리저리 휘둘러도 되고 춤을 추어도 좋다. 사진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진정한 앎은 마음 속에 아무 동요가 없을 때, 모든 것이 고요하게 가라앉았을 때 일어난다. 그럴 때만 앎이라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사진을 찍 은 후에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춤을 추어도 사진기를 마구 흔들어도 된다. 그래 도 사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앎은 무념의 상태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일단 앎을 얻은 후에는 아무리 생각 의 물결이 밀려들어도 어려울게 없다. 일단 얻어진 앎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통해 앎을 얻겠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생각은 앎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다. 하지만 일단 앎을 얻은 후에 생각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 다. 그 때 생각은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앎을 얻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고요한 마음의 상태가 필요하지만 일단 앎을 얻은 후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오는 일이다. 나중에 와야 될 것이 먼저 와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안으면 그대에게 큰 해를 미칠 것이 다. 그대는 '나중에 생각이 문제될 게 없다면 왜 지금은 문제가 된단 말인가?' 하 고 생각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사진을 찍으면서도 카메라를 마구 흔들 것이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물론, 카메라를 흔들어도 사진을 찍을 수는 있 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사진이 아니다. 생각을 통해서도 우리는 앎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마음이 마구 흔들리고 요동치면서 모 든 것을 왜곡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 달이 떠 있고, 그 밑에 넘실대는 바다가 있다고 하자. 물결 치는 바다도 달을 비출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엔 달이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하늘에는 하나의 달이 떠 있는데 바다에는 수많은 달이 흩어져 있 다.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진짜 달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다에 비 친 달을 보고는 정확한 달의 형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진짜 달을 보 는 대신 수천 개로 나누어진 달 조각을 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왜곡된 그림자를 보고 진짜 달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물결치는 바다, 마구 흔들리는 바다는 달을 정확하게 비출 수 없다. 그러나 이 미 달의 정확한 형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바다 위에 널린 수많은 달 조각을 보 고도 진짜 달을 인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진리 또는 신에대해 정확한 앎을 얻어야 한다. 일단 진정한 앎 이 없으면 어디에 있어도 신을 보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어디를 사든 신과 만 난다. 다만 그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겠다. 그 다음에 명상을 시 작할 것이다. 한 힌두교 수행자가 사이 바바와 가까운 곳에 살았다. 사이 바바는 모스크에 살았다. 하지만 그가 힌두 교인이었는지, 이슬람 교인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 그의 웃음은 아무것도 말해 주 지 않았다. 질문자가 어리석다는 것 외에는. 앞에서 말한 수행자는 힌두 교인이었기 때문에 모스크 안에 사는 것이 불가능 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 밖의 사원을 거처로 정했다. 그는 사이 바바를 너무나 흠모했으므로 날마다 음식을 만들어서 모스크로 가져갔다. 그리고 사이 바바에 게 음식을 대접한 후에야 사원으로 돌아와서 자기도 끼니를 때웠다. 어느 날 사 이 바바가 힌두교 수행자에게 말했다. "이렇게 날마다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는냐? 네가 사는 곳에서 내게 음식을 대접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사는 곳을 지나가니 말이 다." 수행자가 놀라서 물었다.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제가 사는 곳을 지나가신다고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죈 적이 없습니다." 사이 바바가 말했다. "잘 살펴보거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사는 곳을 지나간다. 내일도 나 는 그곳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그 곳에서 내게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라.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다." 다음 날, 힌두교 수행자가 정성을 다해 요리를 하고 사이 바바가 올 때를 기 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이 바바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2시가 넘자, 그는 걱정이 되었다. "나도 배가 고픈데 그분은 얼마나 시장하실까?" 그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음식을 싸들고 모스크로 달려갔다. 그가 사이 바바에게 말했다. "저는 아침부터 줄곧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은 오 시지 않았습니다." 사이 바바가 말했다. "무슨소리냐? 나는 오늘도 너를 찾아갔다. 그런데 네가 나를 냉대하고 내쫓지 않았더냐?" 수행자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당신을 내쫓았다고요? 저는 오늘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개 한 마리 밖에는!" "그 개가 바로 나였느니라." 이 말을 듣고 수행자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 다. "아, 당신이 손수 저를 찾아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했다니! 이 어리석음을 어찌 하오리까? 내일은 절대 실수하지 않겠으니 부디 다시 들러 주십시오." 그런나 수행자는 또 사이 바바를 알아보지 못했다. 만일 사이 바바가 전날처 럼 개의 모습을 하고 갔다면 수행자는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 랐다. 수행자가 사이 바바에게 바칠 음식 준비하는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문 둥이 한 명이 나타났다. 수행자가 소리쳤다. "저리 비켜, 이 문둥이야! 나는 지금 위대하신 사이 바바님을 위해 음식을 만 드는 중이란 말야!" 그러자 문둥이가 빙그레 웃고 사라졌다. 그 날도 수행자는 오후2시가 넘도록 기다렸지만 사이 바바는 끝내 오지 않았 다. "오늘도 저는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사이 바바가 말했다. "오늘도 나는 너를 찾아갔다. 그런데 너의 망음이 너무 분주해서 나를 알아보 지 못했다. 날마다 그렇듯이 말이다. 오늘 문둥이 한 명이 너를 찾아갔을 것이 다. 그런데 너는 그에게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이제 와서 내가 슬프지 않았 다고 불평을 하다니..." 이 말을 듣고 수행자가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그가 눈물을 쏟은 말이다. "또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사이 바바가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 그대는 눈앞에있는 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형상 안에 있는 나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일단 진리를 일별하면 거짓은 간단하게 사라진다. 한 번이라도 신을 보면 그 다 음부터는 오직 신이 존재할 뿐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의 내면이 고요할 때만 가능하다. 그 때는 모든 의문이 자 취를 감출 것이다. 사념, 느낌, 욕망등 모든 것이 신에 계속한다. 도든 것이 신 안에서 떠오르고 신 안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념, 느낌. 욕망 등 모든 것이 죽어야 산 다. 그래야 신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명상할 시간이다. 오쇼, 다이나믹 명상을 지도하다 I 각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서라. 옆 사람이 누어도 불편함이 없게 거리를 유지 하라. 아무도 말하거나 수군거리지 말라. 옆 사람과 거리를 두고 조용히 서라. 이 곳은 공간이 충분하다. 그러니 서로 충분한 간격을 두어라. 만일 명상 중에 누군가 그대 위에 쓰러진다면 그것은 불필요하게 명상을 망치는 일이 될 것이 다. 그러니 옆 사람이 쓰러져도 그대와 상관 없을 만큼 거리를 두어라... 가능한 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자, 이제 나의 지시를 따라라. 첫 번째 스테이지: 10분간 깊은 호흡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시작하라. 가능한 한 깊게 들이쉬고, 힘껏 내뿜고... 호 흡 그 자체가 되어라. 그대 자신을 완전히 격리시켜라. 더 깊게 들이마시고, 더 깊게 내 뿜어라. 그래야 휴면증인 에너지가 깨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깊게 들이쉬고, 힘껏 내뿜어라. 한껏 들이마시고, 한껏 내뿜어라. 10분 동안 이 깊은 호흡을 계속하라. 숨쉬는 기계가 되어라. 10분 동안 오직 들이마시고 내쉬 는 일에만 몰두하라. 그 다음에 두 번째 스테이지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오로지 깊은 호 흡에 전념하라. 깊이 들이마시고 한껏 내쉬어라. 내던지듯이 뿜어내라... 그대 자신을 완전히 고갈시켜라. 숨쉬는 기계가 되어라. 한껏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힘차게 내던져라. 이것을 계속하라... 온 몸의 세포가 호흡으로 진동하게 하라. 깊게 들이마시고 힘 껏 내뿜고... 깊이, 더 깊이 숨쉬는 악기가 되어라. 모든 에너지를 호흡에 쏟아 부어라. 호흡에 집중하라. 깊이 들이마시고, 힘껏 내뿜어라. 이제 깊은 숨이 들어오고 힘차게 뿜어져 나간다. 이것을 주시하라. 숨이 들어 가고 나가는 것을 관찰하라. 모든 에너지를 깊은 호흡에 집중하라. 주시하라.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주시하라. 거기에 관심을 집중하라. 계 속 들이마시고 힘껏 내뿜어라. 그리고 끊임없이, 힘차게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하여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 오직 그대 자신에게만 집중하라... 호흡 에 온 에너지를 쏟아라. 그대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깊이 들이마시 고 힘차게 내던져라. 동시에,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관찰하라... 숨이 어떻 게 들어오고 나가는지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전력을 다해 숨쉬어라. 그래야 저 깊은 밑바닥, 내가 쿤다라고 부르는 곳에서부터, 그 저수지로부터 에너지가 올라올 것이다... 이 공간 전체가 호흡으로 가득차게 하라. 이 공간 전체가 그대와 더불어 숨쉬 는 것처럼 느껴라. 깊이 들이마시고 힘껏 내뿜어라. 더 깊이, 더 깊이, 그대의 존 재 전체가 폭풍처럼 흔들리게 하라... 깊이 빨아들이고, 힘껏 내뿜어라. 깊이, 깊 이, 더 깊이... 깊이, 깊이, 더 깊이... 그리고 그대의 내면을 주시하라. 안을 관찰하라. 호흡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라. 하나의 호흡이 들어오고 다른 호흡이 나간다. 힘을 아끼지 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강렬한 호흡의 진동이 그대 안의 어떤 에너지를 깨우기 시작할 것이다. 깊이 들이마시고 완전히 내뿜어라... 있는 힘껏 숨쉬어라. 그대 안에 잠자고 있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더 깊게 들이마셔라. 더 힘차게 내뿜어라. 숨쉬는 기계가 되어라. 호흡의 도구가 되어라. 그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호흡의 도구가 되어라. 그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호흡이 들어오고, 호흡이 나간다. 전력을 다하라. 모든 힘을 쏟 아부어라. 모든 에너지를 호흡에 집중시켜라. 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온 힘을 다하라. 깊이 들이마시고, 세게 내 뿜어라. 혼신의 힘을 다하라.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저 아래 뿌리에서부터 흔들 릴 정도로... 그대의 존재 전체가 떨리게 하라. 태풍처럼 몰아치게 하라... 호흡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버려라. 전력을 다하라. 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있는 힘을 다 쏟아부어라. 이 첫 번째 스 테이지가 절정에 달해야만 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갈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하라. 깊게, 깊게, 깊게... 그대 자신을 고수하지 말라. 단 한 조각 도 간직하려 들지 말라. 그대 안에 잠자고 있는 에너지다 깨어나야 한다. 그러니 혼신의 힘을 다하라. 깊은 호흡, 더 깊게, 더 깊게... 그대 자신을 고수하지 말라. 단 한 조각도 간직 하려 들지 말라. 그대 안에 잠자고 있는 에너지가 깨어나야 한다. 그러니 혼신의 힘을 다하라. 깊은 호흡, 더 깊게, 더 깊게... 그대 자신을 완전히 내던져라. 그대 안에 동면 중인 에너지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깊고 강렬한 호흡이 필요하다. 온 몸의 세포가 펄펄 살아나게 하라. 세포 하나하나가 진동하고 떨리게하라... 혼신의 힘을 다하라. 깊게, 깊게, 깊게, 더 깊게. 이제 2분 남았다. 전력 투구하라. 그 다음에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갈 것이 다. 이 공간 전체를 전기와 같은 에너지의 파장으로 가득 채워라. 깊게 들이마시 고 강렬하게 내뿜고... 깊은 들숨, 그리고 강렬한 날숨... 전력을 다하라. 깊게, 깊게, 깊게... 아직 충분하지 않다. 더 깊고 강렬하게 숨쉬어라... 이제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갈 것이다. 1분마다 더 깊은 호흡을 계속하라. 깊게, 더 깊게... 깊이 들이마시고, 힘차게 내뿜어라. 다른 사람에게 신경쓰지 말 라. 오로지 그대 자신에게 전념하라. 깊게, 깊게, 더 깊게. 두 번째 스테이지: 10분 동안 카타르시스(catharsis) 이번 스테이지에서는 그대의 몸에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든 그대로 방임해야 한다.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라. 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라. 눈물이 흘러나오면 흘러나오도록 놔 두어라. 눈물이 그대의 눈을 씻어 내게 하라...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리면 그렇게 떨 림이 일어나도록 놔 두어라. 몸이 전율하고 맴을 돈다해도 그냥 놔 두어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움직임이라도 자유롭게 놔 두어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 관하지 말라. 자연스럽게 놔 두어라. 거기에 개입하지 말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게. 10분 동안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몸이 제멋 대로 움직이게 방임하라. 몸이 특정한 아사나(asana)와 무드라(mudra)를 취한다 면 그렇게 놔 두라. 땅바닥에 쓰러져 구르고 싶다면 그러게 하라. 몸이 어떤 동작을 취하든 모든 것을 허용하라. 그리고 주시자, 관찰자로 남아 라. 어떤 식으로든 그대의 몸을 방해하지 말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몸을 완 전히 방임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그것을 방해하지 말라. 이제 10분 동안 깊은 호흡을 하면서 몸을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놔 두어라. 어떤 동작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몸이 제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도록 하 라. 절대 망설이거나 주춤거리지 말라.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힘껏 내뿜어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눈물이 나오면 그대로 흐르게 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몸을 완전히 방임하라. 몸이 제 스스로 떨릴 것이다. 저절로 회전할 것이다. 그대의 내면의 에너지가 용솟음칠 때 몸은 저절로 떨리고 움직이며 반응할 것이 다. 안에서 에너지가 솟구치면서 몸이 깨어날 것이다. 그것을 자유로운 상태로 방임하라... 깊은 호흡을 계속하며 몸을 이완시켜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절대로 억제하거나 조종하지 말라. 조금도 저항하지 말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은 호흡, 더 깊게 숨쉬어라. 더 강렬 하게... 명심하라. 어떤 식으로든 몸을 제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을 허용하라. 그것 이 에너지가 제 스스로 절정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육체의 흐름을 방해하지 말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버려 두어라. 그리고 깊은 호흡을 계속하라. 숨쉬는 속도를 늦추지 말라. 깊은 호흡, 육체를 자유롭게 방임하라. 쓰러지고 싶으면 쓰러져라. 서 있고 싶 으면 그렇게 하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절대로 간섭하거나 끼 어들지 말라. 그리고 호흡을 멈추지 말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은 호흡...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내던져라. 나는 그대가 집 착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는 너무 많이 집착하고 있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내던져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게... 육체를 자유롭게 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허용하라. 웃음이 일어나면 웃어라. 울음이 일어나면 그 울음이 터져나오게 하 라.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 저항하지 말라.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육체를 자유 속으로 내던져라... 방임하라. 에너지가 솟아오르고 있다... 그러니 호흡을 깊게 하고 육체를 자유 안에 내던져라. 아무것도 금기하지 말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에너지가 깨어나면 육체에 많은 일이 일어 날 것이다. 육체는 울고, 떨리고 , 회전하고, 춤출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외칠 것이다. 육체가 맘껏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락하라. 육체를 내버려 두어라. 절대 로 끼어들지 말라. 깊은 호흡을 계속하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호흡에 쏟아부어라. 그리고 육체 가 제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표현되게 하라. 망설이거나 주춤거리지 말라. 절대 육체에 저항하지 말라. 그리 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 지 말라. 그대의 육체에 자유를 주어라. 에너지가 깨어나 상승하기 시작하면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사지가 마구 움직이고 무드라가 형성될 것이다. 몸이 위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모든 일을 허용하라. 이 곳에는 그대 혼자다. 그대 외에는 아무도 없다. 자, 이제 세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가기까지 1,2 분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전에 절정에 도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몸을 완전히 방임하라. 어떤 식 으로든 개입하지 말라. 아직도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지 말고 방임하라. 최대한 그대 자신을 방임하라. 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라. 절대 주저하지 말라. 소리지르고 싶으면 있 는 힘을 다해 외쳐라. 억누르지 말라. 육체가 서기를 원하면 서게하라. 어떤 식 으로든 육체의 움직임을 조작하지 말라. 몸이 팽이처럼 돌면 그대로 돌게 하라. 육체에 모든 것을 맡겨라. 그래야 잠자는 에너지가 통로를 찾을 수 있다. 육체를 완전히 방임하고 깊이 숨쉬어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온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라.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게 더 깊게... 그대의 존재 전체가 진동하고 요동치게 하라.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허용하라. 완전히 방임하라. 전력을 다하라. 그 안에 몰입하라. 호흡을 더 깊게, 조금 더 깊게. 그대의 몸 전체가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느껴 질 것이다... 그런 상태로 내버려두어라... 자, 이제 두 번째 스테이지가 거의 끝나간다.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라. 그래야 세 번째 스테이지가 열릴 것이다.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게. 최대한으로, 전력을 다하라. 곧 세 번째 스테 이지가 시작된다...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게, 조금 더 깊게. 자, 이제 세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간다. 세 번째 스테이지: 나는 누구인가? 깊은 호흡이 계속된다. 육체의 자유자재한 움직임도 계속 될 것이다. 거기에 세 번째 단계를 더하라. 속으로 이렇게 물어 보아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대의 내면에 이 물음을 떠올려라. 나는 누구인가? 그대의 호흡 전체를 이 한가지 물음으로 가득 채워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깊고 빠른 호흡을 계속하라. 그리고 안으로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어라. 육체의 움직임은 그대로 방임하고 안으로는 나는 누구 인가? 하고 물어라. 중단하지 말고 이 물음을 계속 유지하라. 틈을 두지 말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 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쏟아 부어라. 10분동안 이 물음에 온 힘을 쏟아 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미친 듯이 물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 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물어라. 이 물음이 그대의 존재 전체에 울려 펴지게 하라. 강한 호흡을 멈추지 말고 육체의 움직임을 방임하라. 어떤 일이 발생하든 그 대로 허용하라. 그리고 물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10분 동안 최선 을 다하라. 그 다음에 우리는 휴식할 것이다. 그러니 전력을 다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온 힘을 쏟아라. 절대 머뭇거리지 말라. 이 물음이 그대 안에 울려 퍼지게 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이 질문이 그대 안에 폭풍처럼 불어닥치게 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호흡을 깊게 하라. 그리고 이 물음이 깊은 곳까지 뿌리 내리게 하라. 나는 누구인가?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이 공간 전체가 이 질문으로 가득차게 하라. 해변가의 모래알 하나하나. 광활한 하늘과 울창한 나무들, 그 모든 것을 이 물음으로 가득 채워 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전력을 다해 물어라. 그 다음에 우리는 휴식할 것이다. 전력을 다할수록 더 많 이 휴식할 수 있다. 내면에 더 강렬한 폭풍이 일어날수록 더 깊은 명상의 세계 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혼신의 힘을 다하라. 네 번째는 명상의 단계다. 전력을 다하라. 그대는 절정에 도달해야 한다. 그대 의 능력이 닿는 한 모든 것을 하라. 나중에 무엇인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고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호흡을 깊게 하라. 더 깊이... 그대 안에 오직 하나의 물음이 울려 퍼지게 하 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물어라. 이 물음이 말로 튀어 나온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라. 내면에 이 질문이 계속 이어지게 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이 질문에 총력을 기울여라. 있는 힘을 다 쏟아라. 그리고 육체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몸이 쓰러지면 쓰러지게 하라.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 비명이 터져나오게 하라. 그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완전 히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계속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이 질문이 태풍처럼 몰아치게 하라. 이제 2분 남았다. 그러니 총력을 기울여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그대로 방임하 라. 전력을 다해 물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 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 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자, 이제 1분 남았다. 그러니 전력을 다하라. 곧 휴식 단계가 올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육체에 어떤 일이 발생하든 그대로 방치하 라... 호흡을 깊게 더 깊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몸이 떨리거나 춤을 춘다면 맘껏 표현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거기에 개입하지 말라. 몸을 자유롭게 놔 두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네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전력 을 다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껴 두지 말라. 전력을 다하라.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네 번째 스테 이지로 들어갈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그 질문의 바다에 자신을 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 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 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 인가? 이 질문에 모든 에너지를 투자하라. 조금도 미진한 부분을 남겨두지 말라. 힘 을 아끼지 말라. 그대 자신을 완고히 고갈시켜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호흡을 깊게 하라. 깊게, 깊게, 더 깊게. 자, 이제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네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간다. 완벽한 이완과 휴식의 단계로 글어간다. 네 번째 스테이지: 10분 동안 전적인 휴식 이제 질문도 없고 격렬한 호흡도 없다. 모든 노력을 포기하라. 10분 동안 죽은 듯이 누워 있어라.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을 맡기고 누워라. 모든 것을 포기하라. 10분 동안 모든 노력을 내던지고 누워서 '그'를 기다려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지도 말고 깊게 숨쉬지도 말라.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 고 누워 있어라. 바다의 포효가 들린다. 소나무 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새들이 지저 귀는 소리, 그 소리는 들어라. 10분 동안 시체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느 껴라. 자, 이제 천천히 눈을 떠라. 서서히, 서서히... 눈이 떠지지 않으면 손바닥을 눈 에 대라. 쓰러져서 일어나기 힘든 사람은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일어서라. 서두르지 말 라. 급히 일어나서는 안 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나라. 심호흡을 하고도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은 좀 더 누워 있어도 좋다. 하지만 심호흡을 계속하라.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일어나 앉 았다가 서서히 일어나라. 눈을 떠라... 아직도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라. 그 다음에 천천히 일어나라. 몇가지 전할 말이 있다. 오전 3시부터 4시까지 우리는 여기에 모여 침묵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나도 그대들과 함께 이 자리에 나올 것이다. 그대들은 3시 5분 전까지 이 자리에 나 와야 한다. 나는 정확하게 3시에 이 자리에 나올 것이다. 잡담을 나누거나 수군거리지 말라. 단 한 마디도 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침묵을 지켜야 한다. 나도 그대들과 함께 침묵을 지키며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을 것이다. 내 가까이 와서 앉고 싶은 사람은 2분 동안 내 곁에 있는 것 을 허용한다. 2분 후에는 제자리로 돌아가 앉도록 하라. 2분 이상 내 곁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도 차례가 돌아갈 것이다. 한 시간 동안 차례를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 있어라. 이번 캠프가 진행되는 3일 동안 오로지 명상에만 전념하라. 해변가나 어디를 가든 홀로 가라. 그 곳에 홀로 앉아 명상에 잠겨라. 자, 오늘 아침은 그만. 쿤달리니 에너지를 깨우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그 위험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위험한 일이라면 쿤달리니 에너지를 깨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엔 분명 커다란 위험이 있다. 어쩌면 그대가 '삶'이라고 간주하는 모든 것 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쿤달리니에서 깨어난 후에 그대는 지금과 같은 상태 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변할 것 이다! 우리의 인간 관계, 감정, 살아가는 세계 등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이 변화는 대단한 위험을 내포한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로 변형을 시도하는 석 탄은 석탄으로서의 자신을 죽여야 한다. 거기엔 위험이 있다. 그것은 석탄에 큰 위험이다. 그래야 다이아몬드가 탄생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와 석탄은 총체적으로 볼 때 다른 점이 없다. 기본적으로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동일한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석탄이 다이아몬들 변형되기 위해 서는 아주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보면 기본적인 차이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아몬드가 되기를 원하는 석탄은 자기 자신을 죽여 야 한다. 석탄은 커다란 위험과 직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도 위험에 직면한다. 그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죽여야 한다.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은 커다란 위험과 맞부딪친다. 강물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도망칠 길이 없다. 우리가 말하는 위험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사라짐을 의미한다. 사라질 준비가 된 사람, 죽을 각오가 된 사람만이 신을 향해 여행할 수 있다. 죽음도 명상만큼 우리를 완벽하게 제거하지는 못한다. 죽음은 다만 우리로부 터 하나의 육체를 빼앗고 다른 육체와 연결시킬 뿐이다. 죽음에 의해서도 그대 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옷을 바꿔 입을 뿐이다. 그대는 똑같은 상태로 남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위험은 아니다. 명상은 죽음보다 훨씬 큰 위험이다. 죽음이 그대의 옷을 벗겨 가는 데 그치는 반면, 명상은 그대로부터 그대 자신을 벗겨가기 때문이다. 명상은 완벽한 죽음이다. 앎에 이른 자들은 명상을 완벽한 죽음, 전체적인 죽 음이라고 말했다. 명상 안에서는 겉옷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변한다. 바다가 되기를 염원하는 강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사실, 바다와 만나다 해도 강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오히려 강은 바다로 성장한다. 석탄 또한 다이아몬 드가 되었을 때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다이아몬드로 성장한다. 그러나 석탄이 석탄으로서 자신을 고집한다면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두 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물이 강물이기를 고집한다면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을 물리치기 힘들다. 강물은 바다와 만남으로써 드넓은 바다가 된다. 그러나 강물이 이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 겠는가? 명상과 관련하여 볼 때, 인간 또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질문자는 '그렇게 분명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 까?'하고 물었다. 여기, 내가 말하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라. 더 많은 위험을 감 수할수록, 모험에 가득 찬 삶을 살수록 우리는 더 생생하게 살 수 있다. 두려워할수록 우리는 더 시체에 가깝다. 사실, 죽은 사람은 어떠한 위험과도 직면할 필요가 없다. 죽은 자들이 직면한 위험은 다시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죽을 수 있다.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일수록 더 강렬하게 죽음과 만날 수 있다. 여기 바윗돌 하나 있고 그 옆에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는 중이라고 하자. 바위는 꽃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넌 참 어리석구나.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피어나려는 것이지? 넌 황혼 녘이 되기도 전에 지고 말 텐데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은 실로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바위에는 아무 위험도 없다. 꽃은 저녁이 되면 시들겠지만 바위는 끄덕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바위는 그런 위험을 맞을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바위는 이미 죽 어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살아 있을수록 위험도 그만큼 크다. 살아 있는 정도와 위험의 정도는 비례한다. 생생한 삶으로 고동치는 사람일수록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명상은 가장 큰 모험이다. 왜냐 하면 명상은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삶의 절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질문자는 묻는다. "그렇게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왜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대는 그 곳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 의 대답이다. 위험이 없는 곳으로 가지 말라. 절대 그런 곳으로는 가지 말라. 거 기에는 죽음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험이 있는 곳을 찾아가라. 위험이 있는 곳에는 삶의 가능성 또한 풍 부하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안전을 구한다. 안전하지 못한 곳이라고 판단되면 무서워하면서 도망친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한 삶을 잃어버린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보존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삶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삶을 아끼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위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안다. 명상의 세계에는 실로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세계 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위험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명상은 가장 큰 모험이다. 사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것도 명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별로 위험하지 않다. 달나라에 가는 것 또한 그렇게 위험 하지 않다. 최근에 우주 비행사 몇 명이 사라진 일이 있다. 죽는다 해도 기껏해야 육체가 바뀌는 것밖에 더 있는가? 명상의 위험은 달나라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왜 우리는 위험을 두려워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종류의 두려움 뒤에는 무지가 숨어 있다. 우리는 종말을 맞거나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안전 지대를 확보하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안전 지대를 확보하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 려고 애쓴다. 위험에 대비해 높은 성벽을 쌓고 모든 입구를 봉쇄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왕이 커다란 성을 지었다. 그런데 그 성에는 출입구가 단 하나밖에 없었 다. 사전에 모든 위험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야 적이 들어올 통로가 없 을 테니까. 그러므로 그 성은 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덤에 가까웠다. 왕은 그 하나의 문마저 믿지 못했다. 혹시 그 문으로 자객이 침투할 수도 있 지 않은가? 그래서 왕은 그 문 주위에 수천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철통같은 경 비를 세웠다. 이웃 나라의 왕이 완벽할 정도로 안전한 이 성에 대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어떤 한 위험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방비 태세가 되어 있는 성을 보고는 감 탄하여 자기도 똑같은 성을 지어야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이웃 나라의 왕이 떠날 때가 되었다. 그는 성밖으로 나온 후에도 그토 록 아름답고 안전한 성을 지은 것에 대해 경탄의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도 똑같은 성을 갖고 싶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이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그들이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이웃 나라 왕의 마차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길옆에 앉아 있던 파키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왕이 파키르에게 물었다. "무엄한 놈! 감히 왕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다니! 냉큼 그 이유를 말하라!" 파키르가 말했다. "폐하, 제가 보기에 이 성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성이 건설되 기 시작할 때부터 여기에 앉아서 이 말을 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성에는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 결점이 무엇이냐?" 파키르가 말했다. "폐하는 안전을 고려하여 문을 하나밖에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만, 사실은 그 것도 매우 위험합니다. 물론, 경비가 삼엄하기 때문에 그 문으로는 아무도 들어 갈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죽음은 쉽게 그 문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 안에 들어가셔서 이 문도 봉쇄하십시오. 그러면 절대 안전 할 겁니다. 출입구가 없으니 죽음도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왕이 말했다. "미친 놈이로구나! 네 말대로 하면 죽음이 성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을 것 이다. 이 문마저 봉쇄하면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집은 곧 나의 무덤 이 될 것이다. " 파키르가 말했다. "문 하나만 제외하면 이 집은 이미 무덤과 다를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마저 봉해버리면 완벽한 무덤이 되리라는 것은 폐하께서도 이미 인정하셨습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파키르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한 때 밀폐된 집에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저는 밀폐된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이 하나의 문까지 봉해 버리면 이 성이 무덤이 되어 버린다는 것은 폐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제가 살던 집의 벽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지금은 드넓은 하늘을 지붕삼아 살고 있습니다. 완전히 밀폐된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무 방어벽도 없이 완전히 트인 곳에는 삶이 충만할 것이라는 말과 같습 니다. 물론, 거기에는 위험이 뒤따를 겁니다. 그러나 풍요한 삶이 흘러 넘칠 것 입니다." 거기엔 위험이 있다. 이것이 그대가 위험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다. 위험 은 일종의 도전이다. 그대는 이 도전에 응답해야 한다. 위험을 맞는 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석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강이 위험에 처하는 것이지, 바다가 위험한 지경에 빠지는 게 아니다. 위험에 처하는 것은 그대의 예고지, 그대안의 신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대는 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신을 만 나기 원한다면 그대 자신을 버려야 한다. 누군가 예수에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대 자신을 버리면 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자기를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요, 자기를 구하려는 자는 영원히 잃을 것이 다." 다른 질문이 있으면 해도 좋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깨어나기 시작할 때, 그 흐름을 막고 상승을 방해하는 장 애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쿤달리니 에너지를 다시 상승시킬 수 있을까요? 쿤달리니 에너지의 상승의 장애가 나타나는 원인은 많지 않다. 거기엔 단 한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우리가 쿤달리니 에너지를 자극하여 일깨우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항상 불완전하고 미지근하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열의 없이 대충 해치운다. 아무것에도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이 쿤달리니 에너지의 상승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 외에 다른 장애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대충 해치우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결코 전력을 다하지 않는 다. 사랑을 할 때도 우리는 미지근하게 한다. 한편에 사랑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는 미움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때, 그를 위해 한평생 바치기를 원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그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연인을 죽이고 싶지 않 은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들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분열되어 있다. 항상 어중간한 상태다. 그리고 둘로 분열 된 마음은 언제나 반대 방향에서 서로를 잡아당긴다. 우리의 두 다리는 똑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여 간다. 그런데 분열된 마음은 이 다리처럼 나아가지 않는다. 분열된 마음은 반대 방향에서 서로를 잡아당긴다. 이것이 긴장과 갈등에 시달리는 원인이다. 우리의 마음은 전체적으로 통합된 평화의 상태를 모른다. 우리는 항상 어중간한 상태로 분열되어 있다. 한 젊은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20년 동안 자살을 꿈꾸어 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아직 자살을 하지 않았는가? 자살할 마음을 먹는데 20년이란 세 월이 필요한가? 도대체 언제 자살할 것인가? 그대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설 마 목숨이 다해 죽은 뒤에 자살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 청년은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자살을 못하도록 당신이 설득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는 20년 동안 자살을 생각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가 왜 그 대를 설득해야 된단 말인가?" 그가 말했다. "제가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살하지 말라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가 이렇게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로 미적거리는 것은 그렇 게 설득한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죽든지 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만일 살기를 원한다면 자살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철저하게 살아라. 그리고 자살을 원한다면 삶에 대한 미련을 버 리고 철저하게 죽어라." 그 젊은이는 2, 3일 동안 나와 함께 지냈다. 나는 날마다 이렇게 말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20년 동안 자살을 꿈꿔 왔다면 무엇을 망설이는 가? 지금 당장 죽어 버리는게 났다." 3일째 되는 날, 그가 말했다. "왜 자꾸 이러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저는 살고 싶단 말입니 다." 내가 말했다. "내가 언제 자살하라고 윽박지르기라도 했단 말인가? 20년 동안 자살을 꿈꾸 어 왔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그대 아닌가? 그대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 가? 이것은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이 20년 동안 자살을 꿈꾸면서도 아 직 죽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 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어중간한 상태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 다. 우리는 언제나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런 상태가 습관적인 패턴으로 굳어졌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절친한 친구도 아니고 철천지 원수도 아닌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전체적으로 행하지 못한다. 어중간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게 더 행복하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엇이든지 완벽하게 행하면 기쁨이 뒤따른다. 어떤 일에 완전히 몰입하면 잠 자던 에너지가 깨어나 그대에게 협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분열되어 있다면 그대는 자신과의 갈등과 싸움에서 벗어날 길 이 없다. 그러므로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하지 않는 이유는 그대의 어중간한 태도에 있다. 이것은 그대가 한편으로는 에너지가 깨어나길 원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사원으로 가는 중이면서도 사원 안에 들어갈 용기가 없다. 그대는 동 시에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 그대는 명상을 준비중이지만 그 안에 뛰어들 용 기가 없다. 그대는 수영을 배우고 싶어하면서도 강둑에 앉아 '어떻게 할까?' 하 고 생각만 하고 있다. 그대는 수영을 배우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속 에 뛰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 누워 팔다리 를 휘저으면서 수영의 즐거움을 맛보려는 것과 같다. 소파에 누워서 수영을 즐기겠다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순전히 어리석은 짓이다. 수영의 즐거움은 물 속의 위험과 연관되어 있다. 거기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어중간한 태도는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쿤달리니 에너지가 어딘가에서 막혔다고 느끼는 이유다. 만일 쿤달리니 에너지가 어디에서 막혀 있다고 느낀다면 이 한 가지를 명심하 라...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합리화시킬 핑계를 구하지 말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럴 듯한 핑계를 찾아 낸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 모두 가 전문가다. 가령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 생의 업 때문이라든지,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든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등의 핑계를 찾아낸다. 그러나 이중 어는 것도 타당한 이유가 아니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막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대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만일 어딘가에 장애가 나타난다면 그대가 완전히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다음에 전력을 다해 뛰어들어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내걸어라. 그래야 쿤달리니 에너지가 어느 센터에서도 막히지 않을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한순간에 전체 여정을 완결지을 수도 있고,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것은 얼마나 전력을 다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만일 확고한 의지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면 쿤달리니 에너지의 여행 전체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완 결될 수도 있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어딘가에서 막힌다는 것은 그대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쿤달리니 에너지의 상승에 최대한 협조하라. 거기에 혼신의 힘 을 기울이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무한한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든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표피적인 삶 을 살고 있다. 깊은 곳까지 파고들지 않는다. 존재의 뿌리를 파고들어 일깨우려 는 노력이 없다. 그것이 쿤달리니 에너지의 상승을 제거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 외에 다른 원인은 없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배고픔, 졸음, 갈증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에 대해서는 똑같은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신에 대한 갈증 또한 우리의 탄생과 더불어 온다. 다만 그런 가증이 있다는 것을 아는 데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예를 들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성욕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알기까지 는 14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 태어날 때부터 성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각하기까지 14년이 걸리는 것이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아이의 내면에는 이미 욕망이 들어 있 다. 그런데 아이의 몸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몸이 섹스할 만큼 성숙해지려 면 14년이 걸린다. 그렇게 육체가 준비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욕망이 깨어난다. 그 전까지 욕망은 휴면 상태로 잠재해 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에 대한 갈망을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몸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몸이 준비가 되면 즉시 그 갈망이 솟아난다. 쿤달리니는 몸의 준비 작업이다. 그대는 '왜 쿤달리니는 제 스스로 깨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간혹 쿤달리니가 제 스스로 깨어나는 경 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이런 식으로 이해하라. 인류의 진보 과정을 살펴보면, 어 떤 것이 처음에 개인적으로 일어났다가 그 다음에 무리로 확산된다. 베다를 예로 들어보자. 베다를 읽어 보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냄새나 향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전세계를 통틀어 리그베다와 같은 시기에 씌어진 어떤 경전을 들춰 봐도 후각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론, 꽃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향 기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자들은 리그베다 시대에는 사람들의 후각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시대에는 후각이 휴면 상태에 있었다. 그 당시에 후각이 작용하는 사람은 극소 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오늘까지도 후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후각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후각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 만 의미가 있다. 후각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미개발된 사회일수록 후 각은 별 의미가 없다. 오늘날에도 몇몇 족족은 '향기'에 해당하는 언어가 없다. 후각은 처음에 몇몇 개인에게서 작동되다가 점타 집단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후각과 마찬가지로, 점차 인간의 인식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된 것들이 많다. 현 재에는 존재하지만 과거에는 없었던 것들이 많다. 색에 대한 감각을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시대에 그 리스 사람들은 세 가지 색깔 밖에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다른 색깔을 인식하 게 되기까지는 매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오늘 날에도 그대의 눈에 보이는 색깔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도 그대가 인식하지 못하는 색깔들이 많다. 우리의 감각은 아직 개발이 미숙하다. LSD나 메스칼린(mescaline), 하시지(hashish), 마리화나에 취했을 때 전혀 새로 운 색깔을 보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색깔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되기까지 색깔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발전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색맹인 사람들이 많다. 지금 이 자리에 천 명의 청중이 있다고 친 다면 그 중 50명은 색맹일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모르 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초록색과 노란색을 구분할 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은 제쳐두고, 소위 위인으로 이름난 사람들 중에도 색맹이 있다. 버나드 쇼우(Bernard Show)같은 사람도 초록색과 노란색을 구별할 줄 몰랐다. 그는 60살이 될 째까지 초록색과 노란색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그가 초록과 노랑이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60번 생일, 어떤 사람이 그 에게 옷 한 벌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그 옷은 초록색이었다. 그런데 넥타이가 빠 져 있었다. 선물을 한 친구가 옷 색깔에 맞춰 넥타이를 사는 것을 깜빡 잊은 것 이다. 그래서 버나드 쇼우는 옷색깔에 맞는 넥타이를 사러 가서 노란색 넥타이 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점원이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손님 초록색 옷에는 노란색 넥타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놀란 버나드 쇼우가 자기의 옷과 노란색 넥타이는 잘 어울린다 고 말했다. 그러나 점원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버나드 쇼우가 유머 감각 이 풍부한 재담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원이 말했다. "농담이시겠죠? 이 노란색 넥타이와 선생님의 옷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세 요?" 이 말을 듣고 그는 점원이 말하는 노란색이라는 게 어떤 색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의사를 찾아가 눈을 검사해 보고서야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다. 인간이 노란색을 볼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노란색은 인간에게 알려진 가 장 최근의 색깔이다. 몇몇 다른 색깔들도 그렇다. 음악의 경우를 보더라도, 음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음악의 깊은 맛을 아는 사람 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음악은 소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 들의 귀에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음악적인 화음을 인 식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음악은 모든 인 류의 공통적인 경험이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음악의 진가를 맛본다. 감각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이러하니 신에 과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은 모든 감각을 초월한 궁극적 사람들만이 깨달음을 얻는 이유다. 모든 인간이 태 어날 때부터 깨달을 능력을 갖고 태어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사람이 깨달을 때마다 그의 깨달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의 깨달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도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잠자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우리들 중에서 크리슈나(Krishna)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 면, 그의 현존 자체가 우리안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그 무엇을 깨우기 시작한 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신에 대한 열망, 신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갈망은 아직 잠들어 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다수의 군중이 그 런 갈망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그런 갈망이 일어나면 그는 즉시 억누르기 시작한다. 그는 그것을 일종의 광기로 생각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돈과 명예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종교적 열망은 미친 짓처럼 보일 것이다. 종교를 갈망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제정신이 아 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갈망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을 억누르기 시작한다. 이 갈망은 용솟음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사방에서 억압 정치가 가동된다. 우리가 만들어 낸 세상에는 신이 설 자리가 없다. 왜냐 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에 신이 설 자리를 남겨 놓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 험을 회피하기 위해 그의 몸으로 조금의 공간도 남겨 놓지 않는다. 부인들은 남편의 삶에 신이 들어올까 봐 두려워한다. 남편의 삶에 신이 끼어 들면 부인은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편들 또한 부인의 삶에 신이 들어올까 봐 두려워한다. 지금까지는 남편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신이 들어오면 남편은 설 자리가 없 다. 부인의 삶에서 남편이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신이 발붙일 곳을 남겨 놓지 않았다. 신이 이 세상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는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전복시킬 것이 다. 그는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우리의 포근한 잠자리를 방해할 것이다. 신의 출현과 더불어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고, 우리의 삶은 지금 같은 상태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을 추 방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신에 대한 갈망이 솟아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우리는 가짜 신들을 만들어 놓았다. 신장 따위를 만들어 놓고 숭 배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갈망이 진짜 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 문이다. 우리는 도처에 사이비 신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신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교활성과 음모를 드러낸다. 신의 출현을 저지하려는 음모의 전형적인 예가 이 인공적인 신들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갈망이 진정한 탐구로 이어지지 않고 껍 데기뿐인 사원과 모스크 주변을 배회하다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사원과 모스크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 사람은 절망한다. 사원과 모스크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집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나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도대체 사원과 모스크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는 실망하여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는 사원과 모스크가 인위적으로 만들 어진 사장 기만적인 발명품이라는 것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저녁, 악마가 풀이 죽어 집에 돌아왔다. 그가 맥빠진 얼굴로 아내에게 말했다. "난 실직했어, 이제 할 일이 없다고." 남편이 실직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그러하듯이 악마 의 아내도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실직했다고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실 직해도 당신 일은 영원한 것 아닌가요? 사람들은 신에게서 멀어지도록 이간질하 고 타락시키는 일은 영원히 계속되는 일이잖아요? 그것은 결코 멈추지 않는 일 이라고요! 그런데 실직했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악마가 말했다. "그러니까 더 기가 막힌 일이지. 나도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사원과 모스크에 있는 성직자 놈들이 내 일을 뺏어갔다고! 이제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내가 인간들을 신성한 길에서 이탈시키는 것 외에 무슨 일을 하겠어? 난 그걸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일했어. 그런데 이젠 아무도 신성한 실로 가는 자들이 없어. 사원과 모스크에 있는 놈들이 인간을 신성한 길에서 모조리 끌어 내렸어. 그놈들이 내 고객을 빼앗아 간 거란 말이야! 이제 나는 인간들을 신에게 서 멀어지게 할 기회조차 없어. 그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 왔는데... 망할 놈 들 같으니라고!" 신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에 대해 교육받았다. 이 교육이 커다란 해를 미쳤다. 신을 체험하기도 전에 신에 대 한 환상이 주입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신을 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갈 증을 느끼기도 전에 물을 먹도록 강요받은 것과 같다. 이것이 권태와 두려움을 낳고, 신을 짜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신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머릿속은 기타코란, 성경 등의 구절들로 가득차 있다. 수 많은 성자들이 이름과 말들이 우리의 마음을 답답할 만큼 꽉 채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구역질을 느끼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런 환경에서 신에대한 탐구의 열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다. 사회 전체가 신에 반대한다. 신에 대한 갈망을 느끼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간혹 그런 갈망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는 다소 정신이 이상한 사 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즉시 정신병 환자로 판정된다. 그는 우리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 시작한다. 숨쉬는 것까지 포함하여 삶의 방 식 전체가 완전히 변한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다. 그는 무리의 일원이 되기를 거 부하고 이방인이 된다. 우리가 만든 세상은 신에게 반대한다. 여기엔 우리 모두의 음모가 숨어있으며, 지금까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 왔다. 우리는 신을 완전히 추방하는데 성공했다. 어이없게도 우리는 신의 소유인 세 상에서 신을 추방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이 다시 우리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 걸었다. 그러니 어떻게 신에 대한 갈망이 솟아나겠는가? 우리는 신에 대한 갈망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안과 공 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평생동안 우리를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명성을 얻은 사람도 마음 속으로는 심한 공허감을 느낀다. 엄청난 부를 축적 한 사람도 뭔가 빠져 있음을 느낀다. 뭔가 모자란 느낌이다. 사람을 얻은 사람도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아도 무엇인가 공허하다. 그렇게 항상 미진함으로서 남아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갈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갈망을 억눌러 왔다. 이 갈망이 솟아올 라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억눌러도 이 갈망은 기회만 있 으면 고개를 쳐든다. 어디를 가든 끝까지 쫓아다니며 의문 부호를 던진다. 이 갈망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엄청난 명성을 쌓았지만 사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너는 모든 것을 이 루었지만 여전히 공허하다." 이 갈망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가 삶의 어떤 고지를 점령할 때마다 이 갈망 이 불쑥 나타나서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성적으로 세상 일에 몰두한다. 그래야 갈망의 작은 속삭임을 묻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더 많은 돈과 많은 명성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이 유다. 그들은 귀를 꽉 틀어막고 미친 듯이 세상 속으로 돌진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절망적인 중얼거림을 듣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절망적인 소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신에 대한 갈망을 잠재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런 노력이 없 다면, 아이들이 배고픔과 갈증, 성욕을 갖고 태어나듯이 신에 대한 갈망 또한 자 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결코 요원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일념으로 신을 추구하는 구도자들이 그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구도자들이 그 일을 할 것이 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말해 왔던 우리 모두 의 공모, 신에 대한 음모를 폭로하고 물리쳐야 한다. 신에 대한 갈망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인간은 신에 대한 갈망을 억압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을 개발해 왔다. 수천 년 동안 중국에서는 여성의 발을 작게 하려고 쇠신발을 신겼다. 작은 발 이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발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인정받았다. 발이 너무 작아서 걷기 힘든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몸은 계속 성장하는데 발은 발육 부진 상태로 남아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걷 지도 못할 정도로 발이 작은 여성들이 양반집 규수로 여겨졌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에게는 그런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큰 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양반집 규수들은 걷지 않아도 시종의 도움을 받아 이동할 수 있었다. 그 들은 장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중국의 어떤 여성도 그런 풍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현대 중국 여성들은 그런 풍습을 받아들인 과거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야만적인 풍습이 수천 년이나 이어졌다. 어떤 것이든 일단 대중화되면 그 어리석음을 간파하기가 힘들어진다. 모든 대 중이 추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여성의 발에 쇠신발을 신기는 것이 일반화되자 모든 여성이 그런 관습으로 받아들였다. 만일 당시에 어떤 여성이 그런 관습을 거부했다면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천한 여성으로 강등되고, 좋은 남편을 만나기가 힘들 었을 것이다. 그녀는 양반 가문의 며느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발이 큰 여성 은 무식하고 천한 여자로 여겨졌다. 농사일을 하는 천한 여자들만 발이 크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양반집 규수들은 발이 작아야 했다. 이런 관념이 수천 년 동안 중국 여성들을 불구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을 순전히 미친 짓으로 보는 시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야만적인 관습이 오랜 세 월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관습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것이 완전히 미친 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 다. 전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에 관해서도 인류 전체의 마음은 완전히 불구가 되었다. 신에 대한 갈망, 신에 도달하려는 염원은 온갖 수단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런 갈망이 솟아오르는 것 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 그런 갈 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대비해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모조품들이 만들어 졌다. "신을 원하는 사람은 사원에 가라. 기타, 코란, 성경을 읽어라. 그러면 신을 발 견할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낱말 외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사원에서는 석상외에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신에 대한 갈망 자체가 가짜였나 모다.'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갈망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느낌들 중 하나다. 사원에 들어가자마자 그대 의 열망은 자취를 감춘다. 기타를 읽자마자 신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다. 점차 그 대의 열망은 억압되고 시들해진다. 충족될 기회를 갖지 못한 열망은 서서히 죽 어 가다가 결국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은 육체의 배고픔과 같다. 단식을 해 보라. 첫째 날에는 배가 고플 것이다. 둘째 날에는 더 심해질 것이 고, 셋째 날에는 바늘로 찌르듯이 예리한 통증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넷째 날 부터 허기가 무디어진다. 그리고 15일 후에는 아무 허기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 다. 만일 한 달 동안 단식을 계속한다면 그대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될 것이다. 체내에 축적된 양분으로 지탱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고 몸무 게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배고픔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한 달 동안 배고픔 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그 욕망은 확실하게 죽어 버릴 것이다. 카프카의 단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여러 가지 공연을 펼치는 대규모의 서커스단이 있었다. 그 중에 단식가가 한 명 있었다. 그의 묘기는 오랫동안 단식하는 것이다. 그는 작은 움막에 기거했다. 관람객들은 생소한 야생 동물을 보는 것도 구경거리였지만 이 단식가를 지켜 보는 것 또한 흥미있는 일이었다. 그는 한 달 이상 아무것도 먹고 살 수 있었다. 한 번은 3개월 내내 단식을 헌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려고 몰 려갔다. 그러나 사람들의 흥미에고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한 번은 어떤 도시에서 서커스가 6-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2주에서 한 달 동 안만 해도 단식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해졌다. 이것이 '쇼맨과 성자들은 정기적으로 장소를 옮겨 야 한다.' 는 말이 전해지는 이유다. 그래서 그들은 2, 3일 마다 장소를 옮겨다닌 다. 다른 마을을 찾으면 움막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단식가는 오랜 기간의 단식 때문에 너무 쇠약해져서 단장에게 자신 의 상황을 알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 만큼 쇠잔해 있었다. 그러니 마냥 누워서 지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또한 그 서커스단은 매우 큰 규모였기 때문에 그는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서커 스 단원들조차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너 달이 흘렀을 때 누군가 문득 그를 기억해 내고 그의 안부를 물었 다. 그 소식을 듣고 단장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또한 단식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식가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는 불안감을 안고 움막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움막에는 단식가가 누웠던 건초 더미만 흩어져 있을 뿐 인간의 자취가 없었다. 단장이 단식가를 소리쳐 불러 보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건초더미 를 걷어 냈을 때 단장은 깜짝 놀랐다. 뼈다귀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단식가가 거기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눈을 보니 아직 살아 있음이 역력했다. 단장이 말했다. "정말 면목이 없네. 자네를 잊고 있었다니 내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일세. 하지 만 자네도 나처럼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관람객의 발길이 끊어지면 당연히 음 식을 먹어야 했을 게 아닌가?" 단식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식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전혀 배가 고프지 않단 말입니다. 그 리고 나는 더 이상 단식 묘기를 공연하는 배우가 아닙니다. 지금 나는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이젠 사람들이 굶주 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전혀 허기가 느껴지지 않습 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오랜 기간 동안 단식하면 허기가 사라진다. 그것은 분 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신에 대한 갈망이 깨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보다 더 우리를 교란시키는 것은 없다. 그것이 우리가 신이 우리의 삶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모 든 예방 조치를 취하는 이유다. 우리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 신의 길을 차단한다. 그가 우리의 세상이 침 입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신에 대한 갈망을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이 갈망에 깨어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부나 명예 등을 향한 다른 욕망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신에 대한 갈망 외에 다른 욕망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신에 대한 갈망과 다른 욕망은 공존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부, 권력, 성, 지위등 다른 욕망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신 에대한 갈망을 억누르는 것이다. 영적인 갈망이 솟아오르는 순간, 다른 욕망들도 자취도 없이 사라지거나 그 영적인 갈망 안에 흡수되고 만다. 오직 영적인 갈망 이 남을 것이다. 신은 질투심이 아주 강하다.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른 것들이 자신과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진짜 신이 그대를 거처로 삼으면 모 든 사이비 신은 자리를 떠나야 할 것이다. 사이비 신들은 더 이상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다. 그대 안에는 수많은 사이비 신들이 있다. 원숭이 신인 하누만을 비롯하여 수 많은 신과 여신들이 우글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이 출현하면 그는 이 모든 사이비 신들을 몰아 낼 것이다. 그 혼자만 왕관을 쓰고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는 질투심이 아주 강하다. 한 개인의 행동도 실제로는 신에 의해 행해지는 것입니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다. 한 개인의 행동자기를 고집하는 한 그 행위는 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가 '내가 행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그것은 신의 행위가 아 니다. 그가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행위자가 아니다. 이것은 저절 로 일어나는 해프닝(happening)이다.'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의 행위는 신의 행위 가 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행위자로 인식하는 한 그의 행위는 신의 행위가 될 수 없 다. 행동(doing)이 해프닝(happening)으로 변하는 날, 한 개인이 자신의 행동을 해프닝으로 경험하는 날 신이 임한다. 그 때는 신이 한 개인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룬다. 바람에 '너는 지금 줄고 있니?'하고 물어 보라. 바람은 '아니, 나는 불려 가고 있어.'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무에 '너는 성장하는 중이니?'학 묻는다면 나무는 '아니, 나는 성장하는 중이야.'하고 말 할 것이다. 파도에 '너는 해안으로 달려가 는 중이니?'하고 물어 보라. 파도는 '아니, 나는 해안가로 떠밀려 가고 있어.' 하 고 말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의 행동이다. 그러나 인간은 '내가 행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부터 인간은 신과 분 리된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에고가 힘을 얻고, 인간은 에고의 감옥에 갇히는 가 련한 신세가 된다. 이런 생각이 인간을 다른 모든 것과 분리시킨다. 따스한 산들바람처럼,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처럼,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처럼... 인간도 그렇게 움직여간다. 인간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말한다. 인간은 외딴 섬처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깨닫는 날 신이 임재한다. 이런 깨달음이 찾아오는 날, 비로소 신은 행위자가 된다. 우리 자신을 행위자로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환상이 우리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런 환상이 신과 우리 사이에 거대한 벽 을 쌓아올린다. 행위자가 그만두는 날 모든 환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오직 신이 남는다. 사실, 지금도 신만이 존재한다. 내 말은 '그대는 행위자다. 그러므로 그대는 신 이다.'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게 아니다. 자신을 행위자로 생 각한다면 그대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금도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 다만 그대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음의 경우에 비유될 수 있다. 오늘 밤 그대는 이 곳 나르골(Nargol)에서 잠자리에 들어 캘커타에 가는 꿈을 꾼다. 실제로 그대는 캘커타에 간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는 꿈 속에서 캘커타 에 도착하여 어떻게 나르골로 돌아갈까, 하고 궁리한다. 기차로 갈까, 비행기로 갈까, 아니면 걸어서? 이렇게 그대는 나르골에 있으면서도 나르골로 돌아갈 궁 리를 하여 지도책을 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면 그대는 이미 나르골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란다. 그대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단 잠에서 깨고 나면 길을 묻거나 지도책을 살펴보지 않을 것이다. 안내인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누군가 그대에게 캘커타를 떠날 것이냐고 묻 는다면 그대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마할 것이다. "캘커타를 떠난다고? 난 캘커타에 간 적도 없다! 다만 꿈 속에서 그렇게 착각 했을 뿐이지." 인간은 자신을 행위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행위자가 아니다. 그것 은 단지 착각이고 꿈이다. 그는 자신을 행위자라고 꿈을 꾸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일은 그저 해프닝일 뿐이다. 이 꿈이 깨지면 지혜 또는 깨달음이라 고 불리는 것이 해프닝으로 찾아온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의 행동은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해도 그대는 여전히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똑같은 환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위의 말은 그대가 분리된 개체라는 것을 전 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와 신 사이에는 여전히 간격이 있다. 이제 그대는 '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 또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제 그대는 '신은 명령자고 나는 그의 명령을 수 행하는 자다.'라고 믿는다. 이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진정으로 깨어난 사람은 '난 방금 전에 캘커타에서 돌아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그 곳에 간 적도 없다.'라고 말할 것이 다. 그대는 에고의 잠 속에서 '나는 행위자다.'라는 꿈을 꾼다. 이 에고의 잠에서 깨어나는 날, 그대는 '나는 신의 명령에 따라 행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 사실, 나는 존재한 적도 없다. 그것은 꿈이었으며 이제 그 꿈은 끝났다."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윤회를 거치며 수많은 생 동안 꿈꾸 어 왔다. 우리의 꿈에는 끝이 없다. 그리고 꿈에 관해 가장 놀랄 만한 사실은, 꿈꾸는 동안에는 그 꿈이 완벽한 현실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대는 수많은 꿈 을 꾸어 왔다. 그대는 밤마다 꿈을 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그것이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오늘밤 그대는 또 꿈을 꿀 것이고, 여전히 그것이 꿈이며 비현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다시 그것을 현실로 착각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또 그것이 현 실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가! 아침에는 허구로 보이던 것이 밤이 되면 다시 현실이 된다. 아침에는 꿈의 비현실성을 자각하지만 그 자각은 밤이 되면 까맣게 잊혀진다. 그것이 깊은 자각이 아니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매우 표피적 인 자각이다. 깊은 곳에는 똑같은 환상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이해는 매우 표 피적이다. 어떤 사람이 책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 모두가 신의 행동이다.'하는 구절을 읽었다고 하자. 그 순간 그는 이 구절을 이해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의 이해는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를 세게 때려 보라. 그는 격분해서 '감히 누가 나를 때려? 내가 누군지 모른 단 말이냐?' 하고 소리지를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는 '나는 행위자가 아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한 대만 맞 아도 그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그의 이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 진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지를 것이다. "아니, 네 놈이 감히 나를 때려?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순식간에 신이 사라지고 그의 '나'가 다시 자리잡는다. 30년 동안 히말라야에 은거한 수행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완전히 고 립된 장소에서 30년을 수행했으며 자신의 에고에 내해 완전히 잊었다. 에고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 타자가 없다면 어떻게 에고가 살 아남을 수 있겠는가? 에고에는 타자가 생명선과 같다. 에고는 제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만심을 갖고 타인의 눈을 들여다 볼 때 에고가 살아난다. 타인이 없다면 그대의 자존심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어떻게 자존심을 느끼 겠는가? 누구에게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하고 말하겠는가?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너'가 필수적이다. '나'라는 허구를 증명하려면 다른 허구가 있어야 한 다. 그 필수적인 허구가 바로 '너'다. 타자가 없으면 에고는 불가능하다. 하나의 허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물처 럼 얽혀있는 수많은 허구가 필요없다. 반면, 하나의 거짓은 홀로 존재할 수 없 다. 하나의 거짓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버팀대 역할을 하는 거짓이 필요하다. '나' 라는 허구를 구축하려면 '너', '그', '그들' 등의 수많은 허구를 구축해야 한다. 그 래야 이런 공모관계를 통해 '나'가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수행자는 싶은 산 속에서 홀로 지냈다. 타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도 없고 '그들'도 없고 '우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라는 감각을 잊었다.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는 고요한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자 평지에 사는 사 람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저 아래 마을에서는 지금 종교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마을로 내려오셔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십시 오. 이 산은 너무 멀고 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오기가 힘듭니다." 수행자는 '이제 에고가 사라졌으니 사람들을 만나도 크게 해롭지 않을 것이 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로 내려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마음은 '이제 에고가 없어졌으니 사람들 틈으로 돌아가도 해롭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한다. 수행자가 하산했을 때 마을에는 대규모의 종교 행사가 열려서 수많은 인파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수행자를 알지 못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등진 사람을 누가 알겠는가? 그는 까맣게 잊혀진 사람이었다. 그가 군중들 틈으로 들어갔을 때 누군가 그의 발을 밟았다. 단지 발을 밟았을 뿐인데도 수행자는 멱살을 잡고 소리질렀다. "감히 내 발을 밟다니! 네놈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냐?" 30년 동안 깊은 산 속에서 얻은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꿈결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30년 동안 수행하며 얻은 무아의 경지, 신과의 교류등 모든 것이 연기 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낯모르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외치고 있었다. "이런 무례한 놈! 감히 나를 몰라보다니!" 일순간 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깨닫고 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마저 잊고 지냈다. 나는 에고 를 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한순간에 그것이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나는 떠나도록 내버려 두시오." 사람들이 놀라 물었다. "왜 마을을 떠나십니까? 어디로 가시려고요?" 수행자가 말했다. "나는 산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찾아갈 것이오. 그 곳에서 사 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것입니다. 30년 동안이나 산 속에 묻혀 살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이 곳에서 한 사람을 만남으로써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는 사람들 이 사는 마을을 찾아갈 것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내가 존재하는지 존 재하지 않는지 탐구할 것입니다. 지난 30년간 나는 헛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젠 그 세월이 꿈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에고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환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환상은 아무 변화도 불러오지 못한다. 자, 이제 명상할 준비를 하자. 오쇼, 다이나믹 명상을 지도하다 2 자리에 앉아 명상할 준비를 하라. 내일부터 우리의 스케줄에 변동이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정되었던 스케줄대로 진행하자. 각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라. 하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서는 안된다. 오늘 아 침에 보니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멀리 있으면 이 곳에 창조되는 명상적인 에너지가 주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서로 거리를 두고 서되 너무 먼 곳까지는 가지는 말라. 이 곳에 창조 되는 에너지의 장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무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사람들은 더 가까이 오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는 서지는 말라. 눕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미리 누울 공간을 확보하라. 앉아서 명상하려는 사람 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대들 가운데 너무 넓은 공간을 남겨 두지는 말라. 아무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수군거리지 말라. 이 명상에는 말이 필요 없다. (이 때, 알 수 없는 방향에서 몇 개의 돌이 날아왔다. 그러나 오쇼는 차분하고 진지한 음성으로 계속 말한다.) ... 무슨 일인가? 돌이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것도 문제된 게 없 다. 이 돌멩이들을 환영하라. 누군가 사랑의 돌을 던지는 모양이다...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즉각 입을 다물어라. 여기 있고 싶으면 조용히 있든지 아니면 이 자리를 떠나라. 이 자리에는 아무도 구경꾼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래도 구경만 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로 떠들지 말고 앉아 있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말라. 어떤 친구가 몇 번 돌을 던진 것 같다. 꼿 그렇게 돌을 던지고 싶으면 나에게 던져라. 다른 사람에게 던지지 말라. 첫 번째 스테이지 자, 제자리에 앉아 눈을 감아라.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총력을 다 해야 한다.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시작하라. 바다가 얼마나 힘차게 숨쉬고 있는지 보라. 소나무들은 얼마나 힘차게 숨쉬고 있는가! 그들처럼 숨을 쉬어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깊이 들이쉬 고 힘차게 내뿜어라. 10분동안 오직 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하라. 깊이 들이쉬고 힘차게 내뿜어라. 빠 른 속도로 호흡을 계속하라. 그리고 내면으로는 그대 자신을 주시하라. 놓치지 말고 주시하라. 호흡이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지 관찰하라. 10분 동안 이 호흡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호흡과 하나가 되어라... 자, 시작하라. 깊이 들이마시고 힘차게 내뿜어라. 허파를 완전히 비워라. 그 다음에 다시 깊 이 들이쉬고, 힘차게 내뿜고...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거기에 모든 힘을 기울여라. 이 저녁 맞이한 것을 감사하라.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겨라. 이런 기회는 또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그러니 총력을 기울여라. 힘을 아끼지 말라. 미진함을 남기지 말라. 위대한 일은 총력을 기울여야만 일 어난다. 그대 자신을 아끼지 말라. 조금도 미진한 구석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깊고 강하게 숨쉬는 기계가 되었다... 망설이지 말라. 머뭇거려서는 안 된 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오직 그대 자신에 전념하라. 각자 가 자기에게만 몰두하라. 가능한 깊고 강하게 숨쉬어라. 10분 동안 오로지 숨쉬는 일에만 전념하라. 깊 이 들이마시고 강하게 내뿜어라. 그리고 안으로는 주시하는 것을 잊지 말라. 호 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하라. 숨이 들어오고 나간다. 또 들어오고 나간 다... 전력을 다하라. 혼신의 힘을 다하라. 나는 곧 10분 동안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강렬한 호흡을 멈추지 말 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내가 깊이 호흡하라고 말할 때만 깊이 호흡하고 그 다 음에 호흡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10분 동안 호흡에 전념하라. 총력을 기울여라. 들숨이 깊이 들어오고 날숨이 강하게 뿜어져 나간다.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온 몸의 세포가 진동할 정도로 깊고 강하게,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게 들이쉬고 강하게 내뿜어라. 힘차게 내쉬 어라. 10분 동안 그대의 몸을 숨쉬는 기계로 만들어라. 바다가 포효하고 바람이 불어 온다. 그들 모두가 숨쉬고 있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라. 그들과 더불어 숨쉴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오직 깊게 강하 게 숨쉬는 일에만 전념하라. 들이쉬고, 내쉬고... 내면에서는 주시하는 것을 잊지말라. 온 에너지를 호흡에 쏟아부어라. 오직 호흡에 집중하라. 숨이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지 관찰하라. 깊은 호흡이 들어오고 강한 날숨이 나간다. 그대 자신을 아끼지 말라. 힘을 저축하지 말라. 최대한으로 힘을 쏟아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아직은 모자라다. 더 깊게. 이 순간에는 깊은 호흡만이 존재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깊게, 깊게, 깊게. 아직은 모자라다. 더 깊게, 더 깊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힘을 아끼지 말라. 멈추지 말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더 깊고 강하게.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가기 전에 전력을 다하라. 있는 힘을 다하라. 깊고 강 하게 호흡하라. 깊게, 깊게, 깊게, 더 깊고 강하게. 오직 호흡만이 존재한다. 그대는 호흡자체 가 된다. 깊고 강하게 호흡하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게, 깊게, 더 강하게. 그리고 안으로는 호흡이 들어 오고 나가는 것을 주시하라. 그대는 주시자다. 이것을 명심하라. 호흡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보일 것이 다. 그것을 주시하라. 주시하고 또 주시하라. 그리고 강렬하게 숨쉬어라. 더욱 강 하게 호흡하라. 더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르게.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가기 전에 더 힘차게 호흡하라. 그대들의 강렬함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는 그대들의 두 번째 스테이지로 인도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라. 전력을 기울여라. 호흡을 깊게, 깊게, 더 깊게 하라. 오직 호흡만이 남는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지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더 깊게, 더 깊게, 더 깊게, 더 깊게, 더 깊게, 더 깊게, 더 깊게, 더 깊 게, 더 깊게. 모든 에너지를 호흡에 쏟아 부어라... 오직 호흡만 남는다. 오로지 호흡만 남는다. 두 번째 스테이지 자, 이제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간다.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몸을 방임하 라. 몸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게 하라.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원하는 대로 놔 두어라.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떨리고 맴을 돌건 그대로 방치하라. 몸에 자유를 주어라. 몸이 울고 싶어하면 울게 하라. 몸에 완벽한 자유를 주어 라. 깊은 호흡을 멈추지 말고 몸을 방치하라. 몸이 쓰러지기를 원한다면 그대로 쓰러지게 하라.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면 그 대로 일어나게 하라. 춤추기를 원하면 맘껏 춤추게 하라. 몸에 완벽한 자유를 선 사하라. 무슨 일이든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 조금도 간섭하지 말고 자유롭게 놔 두어라. 몸을 제어하지 말라. 몸이 맴돌면 맴돌게 하라. 쓰러지면 쓰러지게 놔 두어라. 울음을 터뜨리면 맘껏 울게 하라. 웃음이 나오면 그냥 웃게 하라. 무슨 일이 일 어나든 완벽하게 방치하라. 그리고 깊은 호흡을 게속하라. 몸이 쓰러지기를 원한다면 쓰러지게 하라. 몸이 다시 일어나고 싶어한다면 일 어나게 놔 두어라. 몸이 춤을 추고 싶어한다면 춤추게 하라. 몸이 하고 싶은 대 로 하라. 무엇을 원하든 맘껏 하도록 놔 두어라. 아무것도 간섭하지 말라. 몸에 자유를 주어라. 몸이 맴돌면 그렇게 하라. 쓰러 지거든 쓰러지게 놔 두어라. 울음이 나오면 맘껏 울게 하라. 웃음이 터지면 맘껏 웃게 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라.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몸에 자유를 주어라. 10분 동안 육체를 완전히 방치하라. 깊게 호흡하면서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그대로 방치하라. 몸이 울기를 원한다면 맘껏 울게 하라. 비명을 지르고 싶어한다면 맘껏 지르게 하라. 소리치고 싶어하면 목청껏 소리치게 하라. 모든 것을 허용하라. 조금도 억누르거나 제어하지 말라. 저항하지 말라. 육체 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협조하라. 어떤 일이든 그대로 일어나게 놔 두어라. 육체는 여러 무드라(mudra)를 취할 것이고 마구 맴돌 것이다. 내면의 에너지 가 깨어날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비명이나 울부짖음이 터져나올지도 모른다. 그 러나 걱정하지 말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방치하라. 육체를 완전히 지치 게 해야 한다. 육체가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 전에 자기를 완전히 표현하게 하라. 육체의 움직임에 동조하라. 호흡을 깊게 하라. 깊게, 깊게, 깊게, 깊게, 깊게, 깊게, 깊게, 깊게, 깊게, 깊게, 깊게... (이 때, 녹음기가 충격을 받아 작동을 멈추었다. 그러나 오쇼는 평상시처럼 계 속 명상을 지도한다. 명상에 참석한 사람들은 깊은 호흡을 계속하며 육체를 방 치한다. 그리고 절정에 이르자, 오쇼 는 참석자들에게 세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 갈 것을 주문한다.) 세 번째 스테이지 (오쇼는 참석자들에게 깊은 호흡을 계속하며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대 로 방치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거기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추가하라 고 말한다. 그는 10분 동안 이 질문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오쇼는 모든 것을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깊은호흡과 육체 의 움직임을 멈추고 전적인 휴식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네 번째 스테이지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오쇼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깊은 호흡과 육체 의 움직임,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까지 내던지고 편안하게 누워서 휴식하라 고 말한다. 그는 참석자들에게 마치 죽은 것처럼,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완전한 휴식으로 빠져들라고 한다. 그는 바다의 파도 치는 소리, 소나무 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속삭임, 새 들이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기다림의 상태에서 휴식하라 고, 미지의 세계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10분 동안 명상은 매우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파도 치는 소리, 소나무 사이 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 새들의 노랫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참석자들은 명상에 깊이 빠져들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 네 번 째 단계의 끝 부분에서 오쇼는 참석자들에게 서서히 눈을 뜨고 일어 나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눈을 뜰 수 없는 사람은 심호흡을 하면서 손바닥을 부드럽게 눈에 대라고 한다. 명상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내 면에 녹아들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내면에 열린 미지의 세계에서 나 올 줄을 모른다. 서서히 사람들이 거처로 돌아갔다. 그래도 일부는 여전히 명상에 젖어 있다. 한 시간 반, 또는 두 시간 이상 명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한 참 후에 그 들 또한 명상의 장을 떠나 거처로 돌아갔다. 신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 명상의 경지는 신의 은총에 의해 얻어지는 것입니까? 이것은 지금까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문제다. 그러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이해하는게 좋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명상의 경지가 신의 은총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아무것 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신의 은총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대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것 이다. 이런 오류에서부터 또 하나의 오해가 파생한다. 그것은 신이 만인에게 평등하 지 않다는 생각이다. 신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신의 은총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신에게 선택받은 자는 없다. 만일 신에게도 좋고 싫음이 있다면 이 세상에는 정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의 은총이라 는 말을, 신이 어떤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친절하다는 말로 해석하지 말라. 터무니없는 해석이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신의 은총에 의해 명상의 경지에 든다는 말은 정확하게 옳다. 그러나 이 말은 아직 명상을 모르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그들이 이렇 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명상의 경지에 든 다음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을 돌이켜 보면 너무나 하찮게 보인다. 너무나 엄청난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것을 나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그는 너무나 엄청난 성과에 압도되어 이렇게 말한다. "이토록 엄청난 것이 어떻게 나의 노력을 통해 올 수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얻 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도대체 내가 무슨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내가 무엇 을 희생했는가? 이 엄청난 성과에 비하면 나의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노력이랄 것도 없다." 엄청난 지복이 무한한 힘으로 밀려들어올 때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오, 내 위에 쏟아지는 이 무량한 축복, 이것은 순전히 님의 자비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한없는 은총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 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직 지복의 경지에 든 자,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깨닫지 못한 초심자가 이 말에 집착하면 영원히 잘못된 길로 접어들 것이다. 노력이 있어야 한다. 노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된지 않는다. 우리의 노력이한 어둠이 가득찬 방의 문을 열고 햇빛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과 같다. 태양이 찬란하게 떠올라도 문을 꼭 닫고 있으면 방 안은 항상 어두울 수 밖에 없다. 문을 여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문을 열고 기다리면 햇빛은 스스로 찾아 들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노력은 필요 없다. 햇빛을 상자에 담아서 집 안으로 가 지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을 열어 놓으면 햇빛은 저절로 들어온다. 아이로니컬한 일은, 노력은 통해 햇빛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지만 햇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있다는 점이다. 문을 꼭 닫아 놓거 나 눈을 감아 버리면 아무리 찬란한 햇빛이 비쳐도 무용지물이다. 태양의 찬란 한 영광과 은총도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한 무기력하다. 우리는 햇빛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할 수는 있지만 그 빛을 안 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다. 문을 활짝 열어라. 그러면 햇빛은 제 스스로 찾 아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내가 햇빛을 안으로 가지고 들워왔다.'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문을 열어 놓았더니 햇빛이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방 안이 밝아진 것은 순전히 햇빛의 친절함 때문이다. 우리가 한 일이란 문을 닫지 않는 것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신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우리의 노력은 그것이 전부다. 신이 들어오는 것은 순전히 그의 자비에 달렸다. 그리고 그의 자비는 무한하다. 그의 자비는 현판 앞에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다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신은 모든 사람의 문 을 두드리지만 아무 응답도 없이 꽉 닫혀 있는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 만다. 우리는 문을 꼭 닫고 열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대고 합리화하면서 어두운 방 안에서 만족하려고 한다. 내가 들려 주기를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백명도 넘는 성직자가 기거하는 커다란 사원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우두머리 성직자가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신이 나타나 '내일 너희 사원을 방문하겠노라.'하고 말했다. 그러나 우두머리 성직자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성직자보다 불신이 깊은 사람을 찾아보 기는 힘들다. 그가 자신의 꿈을 믿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사원을 하나의 사업체처 럼 운영하는 사람들은 절대 종교를 믿지 않는다. 종교를 생계 수단으로 삼는 사 람보다 불신이 깊은 사람들은 없다. 그래서 우두머리 성직자는 신이 진짜로 사 원을 방문하리라곤 전혀 믿지 않았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성직자 노릇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왕림을 믿지 않았다. 왜냐 하면 오랫동안의 성직 경험에 비추어 보아 신이 한 번도 사원을 찾아온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날마다 신에게 바칠 공양을 준비했지만 사실은 그 음식이 자신의 입 속 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기도를 거르지 않았지만 부 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언제나 바람결에 실려 공허 하게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보아 그는 지난 밤의 계시도 꿈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에 하나, 꿈이 현실로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경우도 있고, 우리가 꿈이 라고 생각했던 것이 꿈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꿈으로 판명되는 수도 있다. 만일 이 꿈이 현실로 드러나면 그 때는 어떡 하지? 그래서 그는 측근 성직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지 모르지만 이 말을 해야 되겠소. 지난 밤 꿈 속에 신이 나타 나 오늘 우리를 찾아오겠다고 말씀하셨소." 다른 성직자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세상에! 꿈을 믿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닙니까? 어쨌거나 다른 사람 들에게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두머리 성직자가 말했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를 해 두는게 좋겠소. 만일 그가 오 지 않는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소? 그리고 그가 진짜로 온다면 이미 준비를 해 두었으니 트집잡힐 일도 없을 테고..." 그래서 성직자들은 사원 전체를 쓸고 닦고 하면서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저기 꽃으로 장식하고, 불을 밝히고, 향불을 살랐다. 그리고 온갖 음식을 장 만해 공양 준비를 했다. 성직자들은 하루 종일 준비를 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사원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찾아오는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들은 실망해서 말했다. "제기랄, 우리도 참 한심한 사람들이군. 그까짓 꿈을 믿고 난리를 치다니. 꿈은 그냥 꿈일 뿐이야. 신은 오지 않을 거야. 그런 꿈을 믿다니 우리도 참 바보같은 사람들이야. 신도들에게 알리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한 일이야. 만일 알렸다면 웃 음거리가 될 뻔했어." 저녁때가 되자, 성직자들은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 "배고파 죽겠으니 저녁이나 먹읍시다. 신을 위해 진수성찬을 준비했으니 오늘 은 실컷 맛있는 음식을 즐겨 봅시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 야 결국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 꿈을 믿다니 우리가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더 웃기는 일은, 신이 온 적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 서도 우리가 바보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난리를 쳤다면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들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이런 일은 어리석은 신도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 까?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 사원에 있는 신상은 그저 돌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돌조각을 숭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직업이니 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하다가 이렇게 우스운 처 지가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위해 준비했던 음 식을 배불리 먹어치운 다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부산을 떨었던 탓 인지 피곤이 몰려 왔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마차 하나가 달려오더니 사원 문 앞에 멈추어 서는 소리 가 들렸다. 잠결에 그 소리를 들은 우두머리 성직자가 벌떡 일어나 소리질렀다. "이봐, 일어나라고! 신이 왔어. 방금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어!" 그러자 다른 성직자들이 못마땅한 어조로 투덜댔다. "또 그소리입니까? 입 다물고 잠이나 잡시다. 하루 종일 우리를 바보로 만들 어 놓고 또 뭐가 부족해서 그러십니까? 그만하면 충분하잖아요? 피곤해 죽겠으 니 제발 잠 좀 자게 내버려 두세요. 그건 마차 소리가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라 고요!"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잠에 곯아 떨어졌다. 그 때 마차에서 누군가 내리더니 사원 문을 두드렸다. 성직자 중 한 명이 그 소리를 듣고 깨어 일어났다. 그가 동료들에게 외쳤다. "일어나요! 누가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그 분이 틀림없어!" 그러나 다른 성직자들이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도대체 왜 자꾸 그러는 거요? 당신 제정신이야? 왜 잠도 못 자게 난리법석이 지? 그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라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문 밖에 나가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원으로 들어오 는 계단 위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상한 발자국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밤중에 누군가 문 앞까지 왔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길 위에는 마차 의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젠, 밤중에 마차가 문 앞까지 왔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후회 막급했다. 그들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가슴을 쳤다. 그리고 마차가 멈추었던 지점으로 내려가 마구 몸을 굴리며 한탄의 눈물을 흘렸다. 이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사원으로 몰려왔다. 가슴을 치며 성직자들이 원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당황해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우두머리 성직자가 말했다. "말도 마시오. 생각만 해도 원통해 죽겠습니다. 간밤에 신께서 우리 사원을 찾 아오셨는데, 우리는 핑계만 대며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마차가 달 려왔는데 우리는 그것을 천둥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문을 두드 렸을 때는 그것을 바람 소리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우 리는 그저 잠을 자고 싶은 마음에 그럴 듯한 핑계를 가져다 대느라 바빴던 것입 니다." 신은 모든 사람의 문을 두드린다. 그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가 문을 열어 주기 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해도 우리는 즉시 그럴 듯 한 핑계를 대며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옛말에 '손님은 신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다. '신은 손님이다.'라고 고쳐 말해야 옳다. 신은 손님으로 우리를 찾아와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다. 그의 은총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그러니 명상의 경지가 신의 은총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냐고 묻지 말라. 그것 은 오직 신의 은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란 문을 열고 길 위의 장애물을 치우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신은 스스로 우리를 찾아온다. 당신은 다이나믹 명상의 네 단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처음의 세 단계는 그 자체로 명상이 아니라 다만 명상으로 가는 디딤돌에 지나지 않는다. 네 번째 단계가 명상이다. 다른 세 단계 가 현관의 계단이라면 너 번째 단계는 현관문이다. 계단 자체는 문이 아니다. 다 만 문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네 번째 단계가 명상으로 들어가는 문이 다. 명상은 완전한 휴식인 동시에 방임이다. 명상은 텅 비어 있는 공이다. 명상은 완벽한 귀의다. 명상은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명상은 죽음이다. 처음의 세 단계는 육체를 최고의 긴장 상태까지 끌고 가 휴식을 쉽게 한다. 이것이 그 단계들의 유용성이다. 이것은 낮에 열심히 일한 사람이 밤에 쉽게 잠들 수 있는 것과 같다. 열심히 일한 사람일수록 더 깊은 잠을 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과 잠은 정반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잠을 잘 수 있 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보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군 사람이 밤에도 깊은 잠을 잘 수 있 어야 옳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낮에 마냥 놀던 사람은 밤에 쉽게 잠들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 더 안락해질수록 휴식이 사라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생 활이 더 안락해 질수록 잠이 줄어든다. 그런데 우리는 생활이 편안해질수록 쉽 게 잠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활을 안락하게 만드는 온갖 편의 시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것이 편안하게 잠자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 대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문명과 레져 생활이 발달할수록 잠이 줄어들 것이다. 깊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전제 조건이다. 잠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노동의 양이 늘어날수록 잠도 깊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긴장이 최고에 달했을 때 그는 더 수월하게 깊 은 휴식에 빠져들 수 있다. 네 번째 단계가 진정한 명상이다. 그런데 처음의 세 단계는 네 번째 단계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단계까지 우리는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거의 광기와 같은 혼란을 창조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사람이 어떻게 쉴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긴장을 통해서만 휴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 휴식은 긴장의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은 봉우리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계곡이 있는 이치와 같다. 봉우리가 높을 수록 계곡도 그만큼 깊다. 산이 있으면 반드시 계곡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계곡 없는 산은 있을 수 없다. 산이 솟아오를 때 그 주변에는 자동적으로 계곡 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내면에 긴장을 창조할 때 그대는 다른 한편에서 휴식을 위한 에너지 를 모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긴장이 최고에 달하도록 전력을 다하라고 요구 하는 까닭이다. 김장의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대는 끝도 없는 밑바닥으로 가라 앉을 것이고, 그 곳에서 휴식을 발견할 것이다. 이 깊은 순간에 명상이 일어난 다. 중요한 것은, 먼저 긴장의 최고 정상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다 음에 긴장을 버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긴장이 없으면 휴식이 불가능한지 묻는다. 그렇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만일 긴장 없이 가능한 휴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름뿐 인 휴식이다. 물 속 깊이 다이빙하기를 원한다면 높은 점핑보드(jumping board) 에 올라가야 한다. 점핑 보드가 높을수록 깊이 다이빙할 수 있다. 여기 이 소나무들을 보라. 이 나무들은 키가 족히 40피트 이상 된다. 이렇게 높이 자라기 위해서는 그만큼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나무가 클수록 뿌리도 깊다. 반대로 생각하면 뿌리가 깊을수록 높이 자랄 수 있다. 그런데 나무가 '내가 뿌리를 6인치만 내리면 무엇이 해롭단 말인가?'하면서 반 문 한다고 하자. 물론,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아도 아무 해는 없다. 그러나 지금 처럼 키 큰 나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나무가 될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다. 니체(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의 정상에 오르려는 자들은 지옥 깊이 들어가야 하리라." 참으로 대단한 통찰력이다. 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지옥 밑바닥까지 들어가야 한다. 종종 죄인들이 종교의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어중간한 일반 대중에게는 그런 경우를 찾아볼 수 없는 까닭 이 여기에 있다. 죄악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갈수록 미덕의 높은 경지에 오를 가 능성이 높아진다. 명상은 극단을 통한 변형의 기술이다. 모든 변형은 극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어난다. 어떤 현상이 극단에 달했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시계추를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시계추는 왼쪽의 극단에 도달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대는 주의 깊게 관찰한 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계추 는 왼쪽으로 갔던 양만큼 오른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대 마음의 시계추도 이와 같다. 긴장의 극단까지 간 마음은 반탄력을 얻어 가장 깊은 휴식의 공간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긴장의 극단까지 가지 않 는 한 휴식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질문을 갖고 나를 찾아온다. 그들은 씨앗을 뿌리지 않 고 꽃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들판에 씨앗을 뿌리거나 작물을 돌보 지도 않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해가 있겠는가? 그러나 육체의 움직임을 그토록 두려워한다면 내면의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 할 때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육체의 떨림을 제어하고자 한다면 쿤달리니 에 너지가 상승할 때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는 내면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 나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세련되고 문명화된 모습, 그대가 생각 하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남기를 원한다. 그대는 내면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밀랍 인형 같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일단 내면의 에너지가 솟 아오르면 밀랍 인형이 논아 없어진다는 것을 그대는 모른다. 밀랍 인형은 미지 의 어떤 것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질 것이다. 긴장이 절정에 달하도록 전력을 다하라. 그래야만 휴식의 절정에 도달할 수 있다. 그 때는 휴식이 제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그대가 할 일은 긴장을 불러일 으키는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 다음에 평화는 신의 은총으로 찾아들 것이 다. 그대가 할 일은 긴장의 폭풍을 최절정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저절로 폭풍이 가라앉고 평화가 찾아들 것이다. 폭풍 뒤에 찾아오는 평화보다 더한 평화는 없다. 폭풍 뒤에 찾아오는 평화는 생기가 넘친다. 그러나 이 생생한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명상법의 모든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한 단계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깊은 호흡을 꼭 해야만 하는가? 몸을 떨거나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 없이 명상할 수는 없는가?"하는 등의 질문을 갖고 나 를 찾아오지 말라. 이 명상법의 어느 부분도 삭제해서는 안 된다. 이 명상법의 처음 세 단계는 긴장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그대를 인도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편이다. 내가 하나의 스테이지가 절정에 달해야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자동차를 몰 때 기어를 바꾸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동차를 몰 때 그대는 1단 기어에서 최고 속력을 낸 다음 2단 기 어로 바꾼다. 그리고 2단 기어에서 속도가 불충분하면 3단 기어로 바꾸지 않는 다. 기아 변속은 항상 최고 스피드에서 이루어진다. 내면의 변형도 마찬가지다. 강렬함이 최고에 달했을 때 변형이 일어난다. 이 명상법의 처음 3단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라. 첫 번째 단계는 깊고 빠른 호흡이다. 그대는 가능한 한 깊고 빠르게 호흡해야 한다. 첫 번째 스테이지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스테이지와 세 번째 스테이지도 될 수 있는 한 깊고 빠른 호흡 이 이어져야 한다. 이 깊고 빠른 호흡이 들숨과 날숨 다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호흡법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호흡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신비한 요소다. 호흡을 매개체로 육체와 영혼이 연결된다. 호흡은 영혼과 육체 사이에 놓인 다리다. 그러므로 호흡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살아 있다. 그리고 호흡이 끊기는 순간 생명은 종말을 맞는다. 최근에 나는 한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집에는 아홉달 동안 혼수 상태 에 빠져있는 한 여성이 누워 있었다. 의사들은 그녀가 앞으로 3년정도는 더 살 겠지만 의식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주사기로 약물과 영양을 공급받으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무의식 상태였다. 아홉 달 동안 한 번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당신 딸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아녜요! 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은 있어요.'하고 반박했 다. 의사들은 전혀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누가 아는가? 의사의 말이 항 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의사들마저 포기한 환자가 회복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쩌면 그녀도 의식을 회복할지 모른다. 아직 호흡이 살아 있으니 희망을 버릴 수 없다. 호흡은 다리다. 아직 다리는 붕괴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돌아올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호흡은 육체와 영혼을 잇는 가교다. 깊고 빠른 호흡을 하면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진동한다. 예를 들어, 선반 위에 장기간 방치된 병이 있다고 하자. 그 병에는 어떤 액체가 들어 있으며 오랫동안 흔들린 적이 없다. 그러면 그 병과 내용물은 따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치 하나처럼 보일 것이다. 이제 병을 흔들어 보라. 그러면 병과 함께 그 내용물 또한 흔들릴 것이다. 그제 야 내용물의 분리가 분명해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호흡이 절정에 달하면 그대의 내면에는 폭풍이 일어난다. 그 폭풍은 그대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뒤흔든다. 그 순간에 그대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느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호흡을 깊게 하지 않으면 어떤 손해가 있습니까?" 호흡을 깊게 하지 않으면 육체와 그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할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손해다. 내가 호흡에 기본적인 조직을 내세우고 그것을 주시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 기에 있다. 그대는 깊이 호흡함과 동시에 들숨과 날숨을 주시한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 는 것을 주시할 때 그대는 육체뿐만 아니라 호흡까지도 그대 자신과 있다는 것 을 알게 된다. 그대자신과 육체의 분리는 호흡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그러니 첫 번째 단계에서는 깊은 호흡과 주시를 잊지 말라. 이것은 세 번째 단계까지 계속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 나는 육체를 방임하라고 요구한다. 깊은 호흡과 더불어 육 체를 방임하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중 몇가지를 설명하겠다. 첫째, 그대의 육체에는 엄청난 긴장이 쌓여 있다. 이 긴장은 그대 스스로 축적 한 것이다. 다만 그대가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문명은 우리를 너무나 비자연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날 때도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육체는 그대의 위선을 이해하지 못한다. 육체는 주먹을 쥐고 상대방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대는 미소를 흘리며 주먹이 쥐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때 주먹을 움켜쥐려고 하던 육체의 신경 계통은 큰 어려움에 처한다. 육체는 도대 체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육체는 혼란에 빠진다. 분노에 대해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분노를 억제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나 역 시 같은 입장이다. 거짓 웃음을 흘리지 말라. 만일 상대방이 앞에 있다면 책상 밑으로 주먹을 쥐어라. 5분동안 주먹에 힘을 꽈 쥐고 있다가 풀어보라. 이것이 그대의 긴장을 해소시켜줄 것이다. 이 때 그대는 밝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웃음은 거짓 미소와 전혀 다르다. 육체는 인간이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육체는 기계처럼 작용한다. 그런 데 인간은 육체에 많은 금지를 가했다. 이런 금지가 그대의 육체를 긴장의 저장 창고처럼 만들어 버렸다. 엄청난 긴장이 육체 안에 쌓여 있다. 그리고 지나친 긴장은 콤플렉스의 원인이 된다. 내가 육체를 방임하라고 말하면 그 말에 따라라. 그러면 어린 시절부터 형성 되어 온 콤플렉스가 녹아 없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 콤플렉스의 용해가 필수 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를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콤플렉스의 용해와 더 불어 그대의 육체는 꽃처럼 가볍게 될 것이다. 아마 그대는 마하비라(Mahavira)에게 부여된 멋진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은 '니르그란타(Nirgrantha)'다. 이 이름은 문자 그대로 '콤플렉스가 없 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갖고 있다. 니르그란타는 모든 콤플렉스가 녹아 없어 진 자를 일컫는다. 그는 내면의 매듭이 풀린 사람, 철저하게 단순하고 순수해진 사람이다. 육체는 모든 콤플렉스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대는 그것을 허용하 지 않는다. 그대의 문화적인 경향, 교육, 습관, 금기 사항. 누군가의 부인 또는 남편이라는 위치, 사회적 지위 등 모든 것들이 그대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다. 그 래서 그대는 자신에 육체를 놓지 못한다. 오늘 아침 어떤 여성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명상 도중에 다른 사람의 손이 자기 몸에 닿을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지금도 이 가련한 여성은 그대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가면 어디까지 가겠는가? 명상 도중 누군가 마구 구르다가 그 녀의 몸을 건드린다면 그녀는 또 명상을 방해받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이 접근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서 명상을 해도 되는지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오디로 자리를 옮기든 누군 가 그대 곁에 다가갈 것이다. 이 사람들 모두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누군가 그대 곁에 다가갈 것이다. 이 사람들모두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자 리를 옮길 필요가 없다. 누군가 그대의 몸을 건드린다 해도 그것이 무슨 해가 있단 말인가?" 여성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신을 만나도 그가 몸을 만지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떨어질 것이다. 여성의 육체는 콤플렉스로 가득 차 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성들은 육체 를 마치 참고 견뎌야 하는 질병처럼 대하도록 배웠다. 여성들은 육체와 더불어 사이좋게 살지 못한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마지 못해 끌고 다녀야 하는 거추장 스러운 짐과 같다. 하루종일 어떻게 보호할까 하고 걱정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사소한 일에 대한 집착이다. 그것은 명상의 길에 방 해가 된다. 오늘, 고등 교육을 받은 신사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이런 일은 감정적인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성인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몇몇 교육 과정을 마쳤다고 해서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머 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가 울겠는가? 그가 여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는가? 그 는 지성인이다! 그는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애인과 키스할 때도 망설일 것이다. 혹시 균이 옮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는 자신의 감정을 허용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기 전에 책을 찾아보고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지적인 능력은 일종의 절벽이 되었다. 거기엔 마땅히 있 어야 할 향기가 없다. 우리는 학위를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질병을 자랑 하는 것과 같다. 지적인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 은 감정적인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감정적인 것이 잘못인가?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모든 일은 지성이 아니라 감성을 통해 일어난다. 물론, 수학이나 회계 같은 일은 지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중요한 의미가 없다. 놀랍게도, 가장 지적인 학문이라고 일컫는 과학에 있어서도 위대한 업적은 지 성이 아니라 감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인슈타인에게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는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모릅니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매우 종교적인 말이다. 큐리(Curie)부인에게 어떻게 리듐(Radium)을 발견했는지 물으면 그녀는 이렇 게 말할 것이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 이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모두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것은 내 연구에 의해 얻은 성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 너머의 세계에서 왔 고, 나는 그저 중개인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매우 종교적인 말이다. 감성에는 심오한 깊이가 있다. 그러나 지성은 표피적이다. 지성은 실용적이라 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지성은 고위 관리가 행차할 때 오토바이를 타고 앞서 가면서 길을 터 주는 교통순경과 같다. 교통 순경을 고위 관리로 착각하지 말라. 지성은 고위 관리의 차가 방해받지 않고 갈 수 있도록 교통 정리를 해 주는 안내인에 불과하다. 고위 관리는 그 뒤에 온다. 이 고위 관리가 바로 감성이다. 주인은 하인의 뒤에 오는 법이다. 감성이 주인이고 지성은 하인이다. 삶에 있어서 중요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감성에서 흘러나온다. 그런데 교통 경찰을 고위 관리로 착각하고 예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적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교통 경찰을 고위 관리로 모신다." 그들이 굳이 원한다면 그렇게 말하도록 내버려 두라. 교통 경찰도 그들의 어 리석음을 비웃을 것이다. 몸을 떨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마음이 약한 자나 하는 짓이지 강한 자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것은 모르는 소리다. 사실은 그 정반대다. 이 명상법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한 시간 내내 이 명상법을 행하려면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야 한다. 약한 사람은 안된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1, 2분 동안 깊고 빠른 호흡을 하다가 포기해 버린다. 그런데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은 이 명상법이 의지가 약한 사람 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허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빠른 호흡 을 한 시간도 계속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 10분 동안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지속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가짜 얼굴을 포기할 용기가 없다. 이것은 명상에서 도피하려는 핑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고를 지키면서 지 적인 꾀를 쓰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의지가 약한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 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중요하고 위대한 모든 업적 은 강한자들에 의해 성취되었다. 약한 자들은 아무 공헌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명상은? 명상이야 말로 최고의 강인함을 요구한다. 소위 지적인 사람은 이런 일이 약 한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작 그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옆에서 큰 소리로 울고 있는 사람을 볼 때 '내가 저런 추태를 보이 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 까?'하는 두려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도저히 울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큰 소리로 우는 사람은 옆에서 누가 지켜보건 말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 그런 몰입은 대단한 강 함을 필요로 한다.약한 자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니 아무 근거도 없이 에고를 보호하려고 하지 말라. '나는 지적이고 의지 가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은 발광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의 허약함을 미화시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명상을 맛볼 수 없 을 것이다. 단지 '내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직시하라. 엄 연한 사실을 미화시킬 필요가 없다. 그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것은 그대가 허약하고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허약함 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노력하라. '나는 마음이 강하고 지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 그대의 허약함을 강 인함으로 착각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물었다. "여기 모인 사람은 모두가 집단 히스테리(hystery)에 빠진 것 같습니다. 왜 이 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우리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는 이것을 집단 히스테리로 봄으로써 자신의 에고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는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본다. 그리고 자기는 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도 저히 저들처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눈에는 붓다, 마하비라, 예수, 소크라테스, 루미, 만수르도 모두 미치광이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소위 정상인이 되기보다는 이 미치광이들 과 어울리는 것이 더 낫다. 그들은 정상인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졌기 때 문이다. 에너지가 솟구치면 그대 안에 강력한 태풍이 일어난다. 이것은 광기가 아니다. 만일 이것이 광기라면 다시 평정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단계를 마친 후에 평정을 되찾는다. 이것은 이 세 단계가 히스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히스테리에 빠진 사람에게 평정을 되찾으 라고 말해 보라.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 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리의 통제 안에 있다. 우리의 협조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협조를 그만둔다면 곧 모 든 일이 중단될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리는 단 하나의 기준이 있다. 그대가 주인의 위치에 있으 면 정상이고, 주인이 아닌 상태에 있으면 비정상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기 분이다. 내가 여기 모인 참석자들에게 이제 평정을 찾으라고 하면 그들은 즉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위 정상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의지가 강하고 지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릴랙스(relax)하고 생각을 멈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 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이 미쳤다는 증거다. 그들이야말로 비정상적이고 미친 사람들이다.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주인의 입장에서 자 신을 다룰 수 있는 사람들만이 건강한 정상인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신념의 스위치를 끄고 켤 수 있다면, 그대가 '이제 그만!' 하고 말하는 순간 마음이 즉각 멈춘다면 그대는 정상인이다. 그대는 매우 건강 한 사람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그대는 '이제 그만!'하고 말하는데 마음은 이렇게 말 한다. "흥, 네가 뭐라고 하든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 으로 간다!" 그대는 온갖 수단을 다 써보지만 마음은 들은 체도 안하고 자기하고 싶은 대 로 한다. 그대는 사원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는데 마음은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 고 있다. 그대가 아무리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해도 마음은 계속 영화를 본다. 마 음은 그대의 호소를 들은 척도 안 한다.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넌 너하고 싶은 대로 기도해. 난 여기 앉아서 영화나 볼테니까." 인간은 교활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약점을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은 깎아내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제 교활함을 경계하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함부로 단정짓지 말라. 삶은 신비하다. 그러니 함부 로 판단하지 말라. 그대 자신에게만 충실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대 자신이 정상인지 미쳤는 지, 허약한지 강한지 살펴보라. 오직 그대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습관적으로 타인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체를 방임하면 억압된 긴장이 해소된다. 육체의 장애와 콤 플렉스가 용해된다. 둘째로, 육체가 그대의 개입없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대와 육체간의 분리가 드러난다. 그대는 육체가 떨리는 것을 주시한다. 이 때 그대는 떨고 있는 것은 육체지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그대 자신 과 육체가 별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 그대는 나이를 먹고 쇠잔해지는 것 은 육체지 그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감각이 점점 깊어지면, 죽는 것은 그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직 육체가 죽을 뿐 그대 는 죽지 않는다. 명상 도중 육체가 기계처럼 회전할 때, 그대는 육체와 그대가 별개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러한 앎은 오로지 육체를 완전히 방임했을 때 얻어진다. 육체의 움 직임에 개입하지 말고 완벽한 자유를 주어라. 그러면 앎에 도달하리라. 세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다. 자신이 육체도 아니고 호흡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해도 그대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모른다. '나는 육 체도 호흡도 아니다.'라는 것은 부정적인 접근 방식이다. 그것은 긍정적인 앎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은 이 긍정적 앎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 질 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이 우리의 내 면에 메아리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날, 그대의 내면에서 해답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그대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볼 때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존 재한다면 그대 자신이 누구라는 앎 또한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질문이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 가야 한다. 예를 들어, 땅 속 깊은 곳에 물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땅 위에 앉아서 갈증을 달래고 있다. 갈증을 해소하려면 물이 있는 곳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 에 있다. 물론, 그 곳까지 파고 들어가는데는 많은 지층이 막혀 있을 것이다. 그 층을 제거해야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질문에 실 린 힘이 강할수록 우리는 더 깊이 파고 들어간다. 이 질문에 온 힘을 쏟아야 한 다.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한 친구는 지난 이틀 동안의 아침 명상 시간에 이상한 경험을 했다. 이에 대한 언급이 그대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그는 전력을 다해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었다. 정말이지 그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마음에는 수많은 층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었고, 몇 번은 이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의 표피적인 층이 이 질문을 반복하는 동안 그의 내면 어디에선가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것이지?'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과 동시에 그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이 떠올랐다. 이 의구심을 나타내는 자는 누구인가? 그대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던 짐과 동시에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것이지?'하고 묻는다. 마음의 한 층이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데도 또 다른 층은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인가. 이것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그냥 조용 히 있는 게 낫다." 이렇게 마음이 둘로 쪼개져 있으면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전력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음 전체가 이 질문에 완전히 몰입해야 한다. 이 하나의 질문이 화상처럼 내 면을 뚫고 들어가면 즉시 답이 솟아오를 것이다. 단 1초도 걸리지 않고 즉각적 인 답이 솟아날 것이다. 이 답은 그대 안에 있다. 지혜는 그대 안에 내재해 있다. 그런데 그대는 한 번도 그 지혜를 일깨운 적 이 없다. 그대 안에 잠자고 있는 지혜는 언제라도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대 안에 잠자고 있는 지혜는 언제라고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세 단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들은 명상의 사원으로 인도하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디딤돌은 사원 밖에 있다. 이 세 단계의 역할은 그대를 사원의 문 앞까지 데려다 주는 것 으로 끝난다.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네 번째 단계에 가서야 가능하다. 하지만 처음의 세 단계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러니 내일의 명상에서는 전력을 다하라. 내일은 이번 명상 캠프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처음의 세 단계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 그러면 네 번째 단계는 저절로 열린다. 그대가 네 번째 단계로 들 어갈 필요도 없다.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처음의 세 단계를 완벽하게 생각하라. 그러면 네 번째 단계가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네 번째 단계가 찾아오면 앞의 세 단계가 떨어져 나갑니까? 네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이런 의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이 필요한지 저 절로 알게 될 것이다.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계속 그러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력을 버릴 것이다. 언제 전반의 세 단계가 떨어져 나갈지에 대해 서는 말한 적이 없다. 사전에 미리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번째 단계로 들 어가기도 전에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보여 준다. 그대는 전반부의 세 단계를 회피하려고 한다. 그대는 전반부의 세 단계를 삭 제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세단계가 떨어져 나가거나 불필요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 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대는 전반의 세 단계에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반의 세 단계가 끝나는 것은 오직 네 번째 단계로 들어갔을 때다. 시작부터 그런 문제를 논해서는 안 된다. 마음은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기만한다. 그대는 질문을 하면서도 왜 이런 질 문을 던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 질문의 배후에는 전반의 세 단계를 삭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세단계를 없애면 네 번째 단계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다면 절대 네 번째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전반의 세 단계 를 두려워하는가? 거기엔 분명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전반의 세 단계는 두려움 을 씻어 없앨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그대는 육체가 어떻게 행동할 지 모른다. 그대가 원하지도 않는 현상이 나타 날 수도 있다. 여기에 두려움이 있다. 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육체는 춤추고, 울고, 소리지르고, 바닥에 쓰 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첫 번째 단계에서는 깊고 빠르게 호흡하라. 두 번째 단계에서는 깊고 빠른 호 흡과 아울러 육체를 방임하라.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추가될 것이다. 거기엔 아무 장애도 없다. 춤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 다. 의지를 개입시켜 인위적으로 행동하면 장애가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인위적으로 춤추면 호흡이 방해받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제 스스로 춤추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대가 인위적으로 노 력하지 않았음에도 육체가 스스로 춤추기를 원한다면 맘껏 춤추게 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개입하지 말고 방임하라. 그런데 우리는 인위적으로 어떤 동작을 취하려고 한다. 또는 어떤 현상을 제 어하려고 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도 제 스스로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개입하려고 한다. 우리는 인위적으로 춤을 추거나 춤을 막으 려고 한다. 우리는 인위적으로 춤을 추거나 또는 춤을 막으려고 한다. 아무것도 그냥 놔두지 못한다. 자연 발생적인 현상을 허용하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다. 우리의 문화 전체는 매우 억압적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많은 것을 억눌러 놓 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될까 봐 두려워한다. 판도라(pandora)의 상자가 열릴까봐 두려워한다. 이것은 화산의 분화구를 막고 앉아 있는 꼴이다. 실로, 우리는 많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단지 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 다. 우리의 두려움은 아주 뿌리 깊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억누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의 밑바닥 에서 무엇이 뛰쳐나오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밖으로 표출될까 봐 두려 워한다. 남편은 아내를 교살하고 싶어하면서도 겉으로는 '당신이 없으면 한순간 도 살 수 없소.'하고 말한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살의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밖으 로 표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구제프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가 르침을 받으러 올 때마다 15일 동안 날마다 술을 마실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술 취한 상태를 보고는 그들을 연구했다. 그런 과정 없이는 아무도 입문시키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취중에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무엇을 억눌러 왔는지 관찰했다. 그런 연후에야 그에게 적합한 수행법을 제시했 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제프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거부하면 구제프는 즉시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술을 마신 스승은 구제프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었다. 그는 우 리가 내면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억누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억누르고 있다. 거기엔 끝이 없는 것 같 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러한 억압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에 억눌려 있는 것이 밖으로 표출될까 봐 두려워한다.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이 드러날까 봐 고심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하자. 그가 명상 도중 '나는 누구인가?'하 고 물으면 마음은 '너는 도둑놈이다. 치사하고 음흉한 장물이다.'하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입 밖으로 발설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는 '나는 누구인 가?'하고 묻는 것을 두려워한다. 설령 묻는다 해도 아주 작은 소리로 묻는다. 그 는 자신이 도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들통날까봐 두 렵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억누른다. 그는 행여 '나는 도둑놈이다!'하 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까 봐 무서워한다. 실제로 그 런 말이 입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 는 이 세단 계를 행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된다. 그대는 이 세단 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물론, 이 세 단 계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 단계들은 완전히 통과한 다 음의 일이다.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밖으로 토해 내라. 그것을 억압하지 말라. 그대 안에는 온갖 오물이 가득하다. 그것을 밖으로 쏟아 내라. 지금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진짜 얼굴이 아니다. 우리가 두 려움에 벌벌 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은 그 화장을 지우는 것이 두렵다. 화장을 지우면 추하고 못생긴 얼굴이 드러날 것이 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진짜 얼굴을 볼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거 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새롭게 디자인한다. 만일 그가 화장을 그만두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일단 끔찍한 얼굴을 들키고 나면 아무리 화장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할 수 있어도 화장만은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화장한 얼굴만은 지키려 들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모두 화장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진짜 얼굴이 아니다.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진짜 얼굴을 드러낸 상태하고 생각하지 말라.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분장술이 있으며, 우리의 분장은 매우 뿌리 깊다. 화장품이 필요 없 을 정도다 .그만큼 우리의 분장술은 교묘하다. 그래서 그대는 명상중에 자신을 완전히 방임하면 가면이 벗겨질까 봐 두려워 한다. 누군가 그대의 진짜 얼굴을 볼까 봐 겁낸다. 그러나 명상에 있어서 두려움은 매우 위험하다. 두려움은 그대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이 두려움을 버려라. 삭티파트(Shaktipat), 즉 에너지의 전이 현상이란 무엇입니까? 신성한 에너지 를 전해주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무도 에너지를 전해 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전이의 매개체가 될 수는 있 다. 에너지를 전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이 다. 삭티파트(shaktipat)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누군가를 통해 에너지의 전이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내면을 텅 비우고 신성한 에너지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 사람이 있다면 그의 현존을 통해 삭티파트가 일어날 수 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개체 또 는 촉매 역할을 한다. 신의 무한한 에너지가 그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된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개체가 되기 위 한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이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야 한다는 것이 다. 에고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에고는 그대로부터 삭티파트의 매개자가 될 자격을 박탈한다. 에고가 있으면 신성한 에너지의 매개자가 될 수 없다. 신성한 에너지는 에고가 있는 사람을 통해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가 완전히 씻겨나간 사람이 있다면, 내면이 텅 비어서 전적인 공 의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의 의도적인 행위도 없는 사람이 있다 면, 그의 비어 있음을 신의 에너지가 그대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 전이 속도는 매우 빠를 수도 있다. 내일 명상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올 때는 이 사실을 명 심하기 바란다. 삭티파트는 신의 에너지가 그대에게 하강한다는 의미다. 두 가지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대로부터 에너지가 솟아올라 신의 에너지와 융화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의 에너지가 하강하여 그대를 통해 흐르는 것이다. 길은 달라도 결과는 같다. 이것은 동일한 현상을 상이한 측면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현상은 같은데 시각 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잔에 물이 반쯤 차 있을 경우, 어떤 사람은 '잔이 반이 나 찼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잔이 반이나 비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들이 철학자라면 논쟁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두 가지 입장 모두 맞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위로부터 내려올 수도 있 고, 그대로부터 위로 솟아오를 수도 있다. 그대 안에 잠자는 에너지가 신성한 에너지와 만날 때 폭발이 일어난다. 이 폭 발은 예측을 불허한다. 또한 그 결과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없다. 이 폭발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오라! 와서 직접 이 폭발을 경험하라. 그러면 이 폭발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삭티파트는 에너지의 하강을 의미한다. 사실, 이 에너지는 날마다 하강한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내면이 텅 비어있는 사람, 에고가 부재한 사람을 매개체로 선택한다. 그는 에너지의 운송 수단이 된다. 그러나 에고의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내가 에너지를 끌어왔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매개체가 될 수 없다. 그 때는 에너지가 그를 통해 흐르지 않 을 것이다. 내일 아침과 저녁의 명상을 위해 두 가지 사항을 명심하기 바란다. 내일은 이 번 캠프의 마지막 날이며, 많은 가능성이 있는 날이다. 그러니 내일은 새로운 가 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명상에 임하기 바란다. 첫째, 육체에 새로운 감각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은 기립 자세로 명상에 임 하라. 육체에 아주 조그만 변화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내일 명상 시간에 선 자세 로 임하라. 기립 자세를 취하면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명상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하비라는 기립 자세로 명상하곤 했다. 기립 자세를 취하면 에너지의 흐름이 가속화된다. 지금까지 내가 기립 자세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에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앉아서 명상하는 것조차 주춤거렸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기립 자세 를 요구할 수 있었겠는가? 기립 자세에는 에너지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증대될 것이다. 기립자세에는 그 야말로 완전히 미친 듯이 춤출 수 있다. 이것은 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다. 우리들 중에 열 명이나 스무 명 정도는 이미 명상의 깊은 경지에 들어섰다. 특히 그들은 내일 명상시간에 일어선 채 임해야 한다. 여기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겠다. 그들 스스로 알아서 일어 설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일어서서 명상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물론, 명상 도중 일어서 고 싶은 느낌이 드는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억압받지 말고 그대로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둘째, 오후의 침묵 명상 시간에는 내 주변에 더 넓은 공간을 남겨 놓도록 하 라. 내 곁에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차례대로 내 앞에 와서 앉아라. 그러면 그 대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방임하라. 그대는 비명을 지르고 손발을 부들부들 떨지도 모른다. 또는 땅 바닥에 쓰러 지거나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설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허용하 라. 절대 억제하거나 저항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가 아침 명상 시간에 행하는 바 와 유사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 앞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해 놓아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침 명상에서 내내 기립 자세로 임하라. 내가 나오기 전 에 각자 위치를 정하고 조용히 서서 기다려라. 나무에 기대거나 하지 말고 똑바 로 서 있어라. 아무데도 기대서는 안 된다. 그대는 삭티파트에 대해 물었다. 이 기립 자세는 에너지의 전이가 일어날 수 있는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이 곳은 이미 매우 고무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이 분위기를 십분 활용 해야 한다. 내일은 마지막 날이니 전력을 다해 명상에 임하기 바란다. 방금 전 당신은 다이나믹 명상의 세 단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단계 들이 우리의 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심장과 뇌, 마음에 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때 누군가 '심장마비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까?'하고 물었으며 사방에 웃음 소리가 일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냥 심장이 멈추도록 내버려 두어 라. 그대가 아무리 보호하려고 애를 써도 심장은 어느 날엔가 멈출 것이다. 왜 심장을 보호하는 문제에 매달리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내버려 두 라. 가만히 놔 두어도 심장은 어느날엔가 멈출 것이다. 그러니 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심장이 멈추는 것은 큰 축복 아닌가? 그대는 다이나믹 명상의 전반부 세 단계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 었다. 이 명상 실험은 육체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많은 질병이 사라질 것 이며, 수명 또한 연장될 수 있다. 몸 속에 많은 화학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고 휴면중인 여러 분비선들이 활성화될 것이다. 생물 학자와 심리 학자들은,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육체에 어떤 독성 물질이 분비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들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육체적으로 어떤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는지 발견하지 못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육체에 는 감로수와 같은 물질이 분비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랑은 매우 희귀한 현상이다. 진정 사랑으 로 충만한 사람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직 그런 사람이 과학자의 연 구실을 방문한 적이 없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현상을 연구할 수 없었던 이유다. 명 상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면 육체 안에는 영원 불멸을 상징하는 비밀의 감로 수, 앰브로시아(ambrosia)가 흐르기 시작한다. 실로, 명상은 육체에 지대한 화학적 변화를 초래한다. 깊은 명상의 경지에 든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없는 매혹적인 색채를 보기 시작한다. 그는 흔히 맡을 수 없는 향기를 느끼고,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다. 때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빛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보거나 천장에서 울려퍼지는 신성한 음악 소리를 듣 는다. 이 모두가 명상의 화학적인 효과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상적인 색채가 보일 것이다. 실제로 육체의 화학적인 구조 전체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 다. 육체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기 시작한 다. 육체 속에 흐르는 기 순환에 일대 변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육체에 일어나는 변화만큼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서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니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나중에 개별적으로 나를 찾아오기 바란다. 그 변화의 정도는 실로 대단하다. 깊은 호흡은 심장과 두뇌 또는 그 밖의 기관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깊은 호흡을 시작하자마자,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변화를 일으킨다. 우 리 몸에는 일정량의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있다. 그런데 깊은 호흡이 그 비율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율이 바뀌면 뇌, 신경 계통등 육체 전반에 걸 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우리의 기반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그 비율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전문적인 문제기 때 문에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질문자는 나중에 개별 적으로 나를 찾아오기 바란다. 이 명상 실험은 최면과 같은 것입니까? 포괄적으로 볼 때, 이 명상법은 자기 최면과 동일한 점이 많다. 그러나 마지막 지점에서 그 길을 달리한다. 처음의 세 단계는 최면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주시의 단계는 최면과 전혀 다르다. 이 명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처음 부터 끝까지 주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빠짐없이 의 식하고 있어야 한다. 호흡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 몸이 떨리거나 회전하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주시해야 한다. 언덕 위의 관찰자로 남아야 한다. 이 주시는 최면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이 최면과 유일하게 다른 점인 동시에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주시를 제외 한 나머지 과정은 최면과 같다. 그러나 그 최면의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주시가 없는 최면은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주시가 첨가되면 명상이 된다. 최면술만 사용한다면 그대는 무 의식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최면과 더불어 주시를 사용하면 그대의 의식이 깨어날 것이다. 따라서 이 차이점은 실로 엄청나다. 최면과 명상은 내내 같은 길을 가다가 마지막 단계 에 가서 갈라진다. 아직 몇 개의 질문이 남아있지만 그 질문들은 내일 저녁에 다루기로 하자. 오쇼, 다이나믹 명상을 지도하다 3 오늘의 명상 실험에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라.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결의와 신념을 갖고 임하라. 태양이 떠올라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듯이, 그대의 내면에 빛이 충만해질 것 이다. 이른 아침 꽃이 만개하듯이 그대의 내면에도 지복의 꽃이 활짝 피어날 것 이다. 이런 신념을 갖고 임하는 자는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타는 듯한 갈망으로 다가서는 자는 신을 만나리라. 선 자세로 명상하고 싶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 자세를 유지해도 좋 다. 그리고 그들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 위에 쓰러져서 해를 입지 않도록 충분한 공간을 확보해 두도록 하라. 선 자세에서는 동작이 커질 것이고, 육체는 엑스터시(ecstasy)에 사로잡혀 춤 을 출 것이다. 그러니 서 있는 사람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충분한 거리를 두도록 하라. 자, 이제 오늘의 명상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라. 아무것도 아끼지 말라. 첫 번째 스테이지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시작하라. 깊이 들이마시고 힘차게 내뿜으면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주시하라. 깊이 들이마시고 강하게 내뿜어라... 깊은 들숨, 강한 날숨, 더 깊고 강하게, 더 깊고 강하게,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10분 동안 오로지 숨쉬는 일에만 전념하라. 깊이 들이마시고 강하게 내뿜고...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고 강하게. 전력 투구하라. 깊이, 더 깊이, 더 깊이,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내면의 주시를 잊지 말라. 날 숨과 들숨 하나하나를 주시하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그와 동시에 호흡을 관찰하라. 주시자로 남아라.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주시하라. 깊이, 더 깊이. 아직 모자라다. 더 깊이. 10분 동안 전력 투구하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주시하라. 숨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라. 호흡에 전력을 다하라. 힘을 아끼지 말라. 최대한으로 에너지를 쏟아라. 깊이, 깊이, 더 깊이, 육체 안에 에너지를 소용돌이가 일어나게 하라. 오로지 호흡만 남게 하라. 육체가 사라지고 기의 흐름만 남게 하라. 깊고 강하 게 숨쉬어라. 깊이, 깊이, 더 깊이... 깊은 호흡, 깊은 호흡, 더 깊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 호흡에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라. 더 깊이, 더 깊이... 이제 5분 남았다. 그러니 완전히 탈진할 정도로 전력투구하라. 그래야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갈 수 있다. 깊이, 깊이, 더 깊이, 더, 더. 육체를 하나의 기계, 숨쉬는 기계로 만들어라. 호 흡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 더 깊이, 더 깊이. 아직 미진하다. 더 깊이. 온 힘을 쏟아라.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 오직 호흡만 남도록 하라. 오직 호흡만. 머뭇거리지 말라. 노력을 아끼지 말라. 아무것도 아끼지 말고 전력투구하라. 온 힘을 다하라. 전력을 다해 숨쉬어 라. 깊은 호흡에 온 에너지를 다하라. 움츠러들지 말라. 미지근한 자세로 임하지 말고 전력을 다하라. 최선을 다하 라. 그러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전력투구하라. 그러면 반드시 선공할 것이 다... 깊고 강하게 호흡하라. 깊이, 깊이, 더 깊고 강하게, 더, 더. 전력을 다하라. 한순간도 꾀를 부리지 말라. 나는 지금 그대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 고 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전력을 다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야 그대들이 나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전력을 다해 호흡하라. 더 깊고 빠르게, 더 강하게. 전력경주하라. 있는 힘을 다하라. 깊이, 더 깊이. 아직 모자라다. 더 깊이, 더 깊고 빠르게. 호흡이 깊을수록 에너지를 일깨우는 것이 수월하다. 그 때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하기 시작할 것이다. 더 깊이 호흡하라. 깊이, 깊이, 더 깊이. 쿤달리니 에너 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호흡을 더 깊고 빠르게 하라. 깊게, 깊게, 더 깊게... 에너지가 상승할 것이다. 호흡을 깊고 빠르게 하는 데 전념하라.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가능한 한 깊게 호흡하라. 이제 2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전력을 다하라. 그래야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갈 것이 다. 호흡을 깊게, 깊게, 더 깊게... 무엇인가 솟아오르면 그냥 솟아오르게 내버려 두어라... 이제 마지막 1분이다. 온 힘을 쏟아라. 그런 연후에야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 어갈 것이다... 호흡을 깊고 빠르게... 온 힘을 다하라. 있는 힘을 다해 호흡하라. 그대의 내면 에 에너지가 솟아오르고 있다. 그러니 힘을 아끼지 말고 전력투구하라. 호흡을 깊게, 더 깊게. 아직 미진하다. 더 깊게. 호흡에 온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깊고 빠른 호흡으로 내면을 강타하라. 그러면 에너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호흡을 깊게, 깊게, 더 깊게.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호흡을 더 깊고 강하게 하라. 더 깊게, 더 깊게. 나는 호흡에 전력을 다하라고 그대들 각자에게 요구한다. 깊은 호흡, 깊은 호흡, 깊은 호흡, 호흡을 깊게, 깊게 더 깊게. 자, 이제 두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간다. 두 번째 스테이지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육체를 방임하라. 육체에 어떤 일이 방생하든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어라. 울음이 나오면 맘껏 울어라. 웃음이 터져 나오면 맘껏 웃 어라.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용하라. 육체가 춤추고 싶어한다면 그것을 허락 하라... 육체를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방임하라.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 락하라. 완벽하게 방임하라. 사지에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허용하라. 10분 동안 육체를 완전히 방임하라. 아무것도 억누르거나 조작하지 말라... 육 체를 완전히 방임하라. 철저하게 놓아라. 육체는 춤추고 뛰어오를 것이다. 육체 가 제 스스로 움직이도록 자유를 주어라. 내면에서 에너지가 솟아오르면 육체는 춤과 점프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려 들 것이다... 그것을 막지 말라. 완벽하게 허용하라. 방임! 이것이 핵심이다. 육체를 방임하고 깊은 호흡을 계속하라. 내부의 에너지가 솟아 오르면 육체가 춤추고 점프하고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무슨 현상이 일어나든 그대로 내버려두 어라. 육체는 땅바닥을 구르거나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을 것이다. 그것을 막지 말라. 육체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완벽하게 방임하라. 육체를 단지 기의 도구로 전재하게 하라. 육체가 춤추고 점프하고 전율한다... 그대로 방임하라. 육체가 울고 웃는다. 육 체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그대는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 육체를 방임하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든 그대로 방치하라. 개입하지 말라... 육체가 완전히 탈진해야 한다. 육체에 협조하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용하라... 육체가 완전히 지쳐야 한 다... 방임하라. 완벽하게 놓아라. 무슨 일이 벌어지든... 놓아라, 놓아라, 저항하지 말라. 철저하게 방임하라. 이제 5분 남았다. 육체를 완전히 방임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육체와 협력하 라. 육체가 어떤 일을 하든 그에 협조하라. 육체가 웃음을 선택했다면 웃게 내버려두어라. 육체가 울기를 원한다면 울게 하라. 육체가 춤을 원한다면 춤추게 하라. 아무것도 막지 말라. 육체가 원하는대 로 하게 하라. 완전히 방임하라. (마이크가 잠시 작동을 멈추었지만 다당 기사마저 명상에 참가 중이었으므로 오쇼는 명상을 인도해야 했다.) 육체를 철저하게 방임하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전적으로 허용하라. 아무 조건 없이 방임하라. 이제 2분밖에 남지 안았으니 육체를 완전히 방임하라... 육체는 그대와 분리되어 있으며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용하라... 2분 동안 육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 다음 에 우리는 세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갈 것이다... 방임하라. 완전하게 육체를 방임하라. 깊은 호흡을 계속하면서 육체를 방임하 라. 육체를 완전히 지치게 하라... 방임, 방임, 방임하라. 숨을 깊게 쉬면서 육체를 방임하라... 육체가 춤을 원한 다면 그렇게 하게 하라. 완벽하게 방임하라... 세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가기 전에 전력을 다하라. 육체를 방임하라. 방임하라. 이제 1분 남았다. 그러니 육체를 철저하게 방임하 라... 그리고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용하라. 1분 동안 철저하게 방임하라. 방임하고 또 방임하라. 육체가 소리지르고 울고 웃게 하라. 완벽하게 방임하 라... 육체가 어떤 일을 원하든 맘껏 하도록 내버려두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대와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육체를 철저하게 방임하라. 그런 다음 우리는 세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갈 것 이다... 방임하라. 방임하라... 육체에 협력하라. 육체를 방임하고 세 번째 스테이지로 들어가라. 세 번째 스테이지 내면으로부터 이 물음을 떠올려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10분 동안 육체가 춤추고 맴돌도록 방임하면서 깊은 호흡을 계속하는 동시에 내면의 물음을 유지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전력을 다해 질문을 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전력을 투구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계속 물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온 정렬을 다해 질문을 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계속 물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대의 에너지 전부를 이 질문에 쏟아 부어 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그대의 육체의 움직임에 쏟아 부으면서 질문을 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제 5분 남았다. 그러니 이 물음에 완전히 몰입하라. 그런 다음 우리는 휴식 의 단계로 들어갈 것이다. 육체를 완전히 방임하고 내면의 질문을 계속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젖먹던 힘까지 쏟아 부으면서 물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대가 지닌 에너지 전부를 쏟아 부으면서 물 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대 자신을 완벽하게 이 질문에 몰입시켜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최대한 힘을 다하여 질문을 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제 3분 밖에 남지 않았다. 3분 후 우리는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러니 전력 을 다해 물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기진 맥진할 때까지 계속하라. 내면의 에너지 가 솟아오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제 2분 밖 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물음을 계속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계속하라. 나는 누구 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2분 동안 전 력을 다한 다음 우리는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러니 전력을 다하면서 물음을 계 속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면의 에너지가 깨어나고 있다. 육체가 충만 한 에너지로 춤추게하라. 완전히 방임하고 질문을 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내면의 에너지가 완전히 깨어나게 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완전히 미쳐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휴식으로 들 어가기 전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제 1분 남았다. 나는 누구인가? 육체가 충만감으로 춤추게 하라. 춤을 원한 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휴식의 단계 로 들어가기 전에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불태워라. 마지막 1분 동안 전력투구하 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있는 힘을 다하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라. 그런 다음에 휴식을 취할 것 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네 번째 스테이지 이제 끝났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 모든 것을 버려라. 호흡도 버리고 질문도 버려라. 모든 행동을 중지하고 그 자리에 누워라. 서 있던 사람들은 서 있어도 좋다. 앉거나 눕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 모든 것을 고요함 속에 묻 어 버려라. 텅 비어있는 침묵... 묻지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냥 누워 있어라. 죽은 사람처럼,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폭풍은 지나갔다. 내면의 평화를 뒤에 남기고... 모든 것이 백지 상태다... 모든 것이 침묵에 잠겼다. 태풍은 갔다... 그러니 누워서 편히 쉬어라. 10분 동안 편히 쉬어라. 이 침묵 속에, 이 공을 통해 그가 온다. 우리가 애타게 찾고 있는 그가... 그냥 누워서 고 요하게 쉬어라. 더 이상 깊은 호흡도 없고 더 이상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도 없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모든 것을 포기하라. 서 있는 사람은 그냥 서 있어라. 땅에 쓰 러진 사람은 그대로 쓰러져 있어라. 누워있는 사람은 그냥 누워 있어라. 10분 동 안 죽은 사람이 되어라.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폭풍은 가고 사방에 평 화가 넘친다. 침묵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이 비어있음 안에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꽃이 피어나고 평화의 샘물이 솟아오를 것이다. 축복의 음악이 들릴 것이다. 이 공을 통해서 신이 온다. 그를 기다려라. 그가 오기를... 편안하게 누워서 기다려라.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 이 텅 비었다... 이제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기다려라. 이제 나도 10분 동안 침묵에 잠길 것이다. 이 10분 동안 그대들은 고요히 누워 있도록 하라. 그대는 죽었다. 이미 사라졌다. 오직 공이 남았을 뿐, 모든 것이 고요하다. 모 든 것이 평화와 침묵에 잠겼다. 이 침묵을 통해 신이 온다... 이 비어있음이 신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문이다. 기다려라. 그저 기다릴 뿐...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서, 이미 사라져 버린 사 람처럼... 폭풍은 가고 또 기다려라. 그것이 전부다... 이 침묵의 순간을 통해 무슨 일인가 일어난다. 고요하게 기다려라. 모든 것이 텅 비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내면에서 누군가 깨어 일어난다. 모든 것이 텅 비어있지만 내면에는 빛이 환하다. 그 빛 스스로가 보고 알고 이해한다. 그대는 소멸되었지만 내면에 서 어떤 실체가 깨어난다... 내면의 빛으로 충만하다. 지복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신은 아주 가까운 곳에 와 있다. 기다려라. 시계처럼 누워서 기다려라.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처럼, 이슬 방울이 바다로 사라지듯이 그대 자신을 사라지 게 하라... 그리고 조용히 기다려라... 이 사라짐을 통해 무엇인가 얻는다. 그저 기다려라. 내면에 고요한 침묵의 빛 이 환히 비치고 있다. 그대의 내면에 지복의 빛이 환히 비치고 있다. 지복의 강 물이 흐르고 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그대의 내면 에 지복의 물결이 흐르고 천상의 빛이 내려올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미 사라져버린 사람 처럼. 모든 것이 텅 비어있다. 이 비어있음을 통해 그대는 신과 만난다. 이 공안에서 그대는 신을 일별한다. 이 비어있음 안에서 그대는 신을 얻는다. 기다려라.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내면을 들여다보라. 누군가 찾아오고 있다. 누군가 깨어나고 있다. 내면을 보라.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복이 밀려들고 있다. 보라. 그대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 지상의 것이 아닌 어떤 것으로 충만해지고 있다. 기다려라... 이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지복만 남았다. 이젠 빛이 홀로 남았다. 평화만이 홀 로 남았다. 기다려라. 그냥 기다리기만 하라. 이 침묵의 순간에 그가 온다. 이 침묵을 통 해 그대는 신을 친견한다. 기다려라. 그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기다리는 일밖에... 지금껏 그 대가 애타게 찾아온 그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신이 마치 손에 닿을 것처럼 가 까이에 있다. 그러니 기다려라. 고요하게 기다려라.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 다. 자, 이제 지복의 세상에서 돌아오라. 서서히, 서서히, 빛의 세계로부터 돌아오 라. 서서히 내면의 세계를 벗어나라. 천천히 눈을 떠라. 아주 천천히. 눈이 떠지 지 않으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천천히 뜨도록 하라. 서두르지 말라.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든 힘든 사람은 먼저 심호흡을 한 다 음 천천히 일어나라. 고요하게 몸을 일으켜라. 아무 소리도 없이, 아무 말도 하 지 말고, 그리고 서 있는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서서히 눈을 떠라. 명상의 세계 로 부터 돌아오라. 자, 오늘 아침 명상은 이것으로 마친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지난 3일 동안 많은 질문이 들어왔다. 오늘은 간략하게라도 가능한 한 많은 질문에 대답하도록 노력하겠다. 비베카난다가 라마크리슈나에게 '신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라마크리슈나는 '그렇다. 지금 그대를 보고 있듯이 나는 신을 본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신께 똑같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먼저, 비베카난다는 이 질문을 하기 전에 라마크리슈나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 다. 그는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이런 질문을 해도 좋은가 하고 묻는다.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비베카난다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 고 명심하라, 라마크리슈나의 대답은 특별히 비베카난다에게 한정된 것이다. 다 름 사람에게는 똑같이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혼의 세계에 관한 한 모든 대답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 대답들은 특정한 개인을 위해 나온 것이다. 물론, 누가 대답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대답이 누구의 질문에 대한 것이냐 하는 문제도 그에 못지 않게 중 요하다. 대답을 주는 자도 중요하지만 그 대답을 받는 자, 그 대답을 이해해야 하는 자 또한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 달라고 부탁한다. 라마크리슈 나가 비베카난다를 만졌을 때처럼 그들도 똑같은 무아의 체험을 얻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 또한 라마크리슈나의 손이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비베카난다와 똑같은 체험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모른 다. 비베카난다에게 일어났던 경험은 전적으로 라마크리슈나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반은 라마크리슈나의 영향이지만 나머지 반은 비베카난다의 몫이 다. 그 경험은 50대50의 합작품이다. 그리고 만일 라마크리슈나가 다른 날 비베카난다를 만졌다면 이런 경험이 일 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경험은 아주 특별한 순간에 일어났다. 따라서 그 순간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대는 24시간 내내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24시간 동안 그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으로 변하다. 그리고 비베카난다의 경험은 특별한 순간의 결과다. 그 특별한 순간에 비베카난다가 물었다. "신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비베카난다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금방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은 신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하는 질문은 겉으로 보면 초등학교 1학년생 도 만큼 간단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건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그리고 라마크리슈나는 단순히 질문에 대답 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비베카난다의 진리에 대한 갈증, 그 열망에 응답한 것이다. 깨달은 자는 그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의 목마름, 그대의 열 망에 응답한다. 비베카난다는 신에 대해 타는 듯한 갈증, 불타는 열망을 갖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라마크리슈나는 단순히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니다. 그 질문 뒤에 숨 어 있는 구도자에게 응답한 것이다. 어느 화창한 날 아침, 붓다가 한 마을을 방문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신이 있습니까?" 붓다가 대답했다. "아니, 신은 없다." 한낮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이 와서 물었다. "저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 니까?" 붓다가 말했다. "신은 존재하다." 저녁때가 되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물었다. "저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붓다가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라." 붓다와 동행하고 있던 제자는 스승이 똑같은 질문에 각기 다른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붓다에게 물었다. "저는 스승님의 대답을 듣고 제가 미치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혼란스러웠 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 똑같은 질문을 던졌 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아침에는 '없다.' 하시고, 한낮에는 '있다.' 하셨으며, 저녁때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가 제자에게 말했다. "그 중 어느 대답도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대답들은 다만 그 때 질 문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대답들은 그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왜 그 대답들에 신경을 쓰는가? 그대가 묻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대답할 수 있 겠는가? 다음에는 그대 스스로 질문을 갖고 오라. 그러면 그대 또한 대답을 얻 으리라." 제자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모든 대답을 들었습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 대답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아침에 왔던 자는 유신론자였다. 그 래서 그는 내가 자신의 신앙을 확인시켜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는 다만 내가 자신의 신앙을 지지해 주기를 바랐으며 그를 통해 에고의 만족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는 나의 지지와 인정을 받기 위해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 신은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를 뿌리째 흔들 어 놓은 것이다. 그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진술을 알았다면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으로 '아는 자'는 타인의 인정을 구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온 세상이 신을 부정해도 그는 '신은 존재한다. 그를 부정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나를 찾아왔던 사람은 여 전히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앎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내가 그 에게 '신은 없다.'고 말한 이유다. 현실적으로 볼 때 그는 이미 탐구를 중단한 사 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다시 탐구를 시작하도록 충격 요법을 써야 했다. 한낮 에 찾아온 사람은 무신론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신은 존재한다.'고 말한 것 이다. 그 또한 탐구를 중단한 사람이다. 그는 내가 자신의 무신론적 신념을 지지 해 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저녁때 온 사람은 무신론자도 유신론자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를 어떤 믿음으로 결박해 놓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둘 다 결박이다. 그래서 나는 '만일 진실한 답을 원한다면 침묵을 지켜 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에 관한 한 아직 나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대는 아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종교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다. 그것은 사랑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연인에게 사랑의 말을 할 때 그것을 세상에 대고 방송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다. 세상에 대고 선포하는 사랑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진리도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 진리는 오직 개인 대 개인으로 전수된다. 그것은 대중에게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비베카난다처럼 되는 날, 그와 똑같은 갈망을 지니게 되는 날, 비로소 그대는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비베카난다는 질문을 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얼마 잔에 한 천년이 내게 와서 물었다. "제가 산야스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할 생각이라면 산야스를 받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왜 이런 문제로 나는 골치 아프게 하는가? 그대가 산야스 를 원한다면 받아라. 원하지 않는다면 안 받으면 그뿐이다. 이것은 그대가 결정 할 문제다. 온 세상이 반대해도 산야스를 더 이상 연기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 는 날, 그 때 가서야 비로소 기쁨에 넘치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 전에는 안 된 다." 그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말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문을 구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만큼은! 그 리고 만일 자문을 구해야 한다면 나는 내 내면의 존재에 물을 것이다. 왜 타인 에게 자문을 구하는가?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 의 충고에 의존하지 말라. 그대가 무엇을 하든 다른 사람의 충고에 매달리지 말 라." 내가 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대는 라 마크리슈나가 비베카난다에게 준 대답을 책에서 읽는다. "그렇다, 나는 신을 보고 있다. 지금 내 앞의 그대를 보고 있는 것보다 더 분 명하게." 그러나 이 대답이 그대에게 무슨 변화를 일으키겠는가? 그대는 자신의 질문과 내 대답을 기초로 해서 책을 쓸 수도 있다. 그대가 물었더니 내가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대를 보고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신을 보고 있다.'고 말하더라는 내용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령 수천 권의 책이 '신은 존재한다.' 고 말한다 해도 그 모든 책이 무용지물이다. '신은 존재한다.'는 대답이 그대의 내면에서 나오지 않는 한, 타인들에게서 온 모든 대답은 아무 가치 없다. 남에게서 빌려 온 대답은 무의미하다. 물론 빌려 온 것들도 삶의 다른 영역에 서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신에 관한 한 아무 쓸모가 없다. 그대는 왜 내게 묻는가? 내가 신의 존재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대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반드시 물어야겠다면 그대 자신에게 물어라. 그리고 그대 자 신으로부터 아무 대답이 나오지 않는 다면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침묵 속에서 기다려라. 아무 대답도 기대하지 말고 순수한 무지 속에 살아라. 그러면 어느 날엔가 불현듯 대답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올바르게 묻는 법을 안다면, 올바른 질문의 예술을 안다면 모든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그리고 올바르게 묻는 법을 알지 못하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질문 해도 부질없는 짓이다. 비베카난다 같은 사람이 질문하고 라마크리슈나가 그에 답했을 때, 비베카난 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라마크리슈나의 대답이 아니다. 비베카난다는 절실한 마 음으로 물었다. 그래서 라마크리슈나의 대답은 라마크리슈나의 것이 아니라 비 베카난다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 대답은 비베카난다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비베카난다가 도움을 얻은 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대답을 얻건 아무 쓸모 없다.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질문이 솟아올랐을 때, 거기에 생명을 걸만큼 절박 한 질문일 때, 그 때는 어떤 대답을 얻든 그 자신의 것이 된다. 그 대답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다. 이 때 대답을 제사한 상대방은 질문자를 비추는 거울일 뿐 이다. 빌 문자 자신의 대답을 비추는 거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고 말한 사람은 라마크리슈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라 마크리슈나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비베키난다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우 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것은 진정한 대답이 되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를 통해 울려 퍼지는 자기 내면의 음성을 들었다. 라마크리슈나의 대답은 메아리였을 뿐이다. 비베카난다에게 있어서, 라마크리슈 나는 비베카난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바로 마하리쉬 데벤드라나드(Maharshi Devendranath)라는 사람으로, 유 명한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위 대한 구도자를 뜻하는 '마하리쉬'로 불렸다. 그는 갠지스 강에 배를 띄워 놓고 그 안에서 밤을 보내며 수행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초승달이 떠오른 캄캄한 밤중에 비베카난다는 강물을 헤엄쳐 건너 데벤드라나드의 배에 올랐다. 그는 느슨하게 닫혀 있던 선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데벤드라나드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비베카난다가 데베드라나드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깨웠다. 데벤드라나드는 웬 젊은 청년이 물에 흠뻑 젖은 채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그 때는 깜깜한 밤중이었고, 배가 이리저리 요동치고 있었다. 비베카난다는 다짜고짜 물었다. "신이 존재합니까?" 데벤드라나드는 일단 진정하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이 젊은 청년의 질문에 대 해 잠시 망설였다. 상상해 보라, 조용한 은거 지에 난데없이 웬 청년이 침입해 들어왔다. 그가 깜 깜한 밤중에 강을 헤엄쳐 건너와 '신이 있습니까?'하고 불쑥 묻는다. 마치 권총 을 겨누는 것처럼! 이 때 데벤드라나드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잠시 진정하고 기다리게. 먼저, 자네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문제가 무엇인가?" 그러자 비베카난다가 멱살을 쥐었던 손을 풀고 선실을 나가더니 다시 강물 속 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데벤드라나드가 '이보게, 젊은이!'하고 소리쳤다. 비베카난다가 강을 헤엄쳐 돌아가며 외쳤다. "당신의 망설임이 이미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겠습이다." 맞는 말이다. 데벤드라나드의 망설임이 이미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런 태도는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나중에 그는 매우 당황했다고 고백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에게 그렇듯 무례한 태도로 질문하는 사람을 대한 적 이 없었다. 사원의 대중 집회에서 사람들은 신에 대해, 종교에 대해 묻곤 했으 며, 그 때마다 데벤드라나드는 베다, 우파니샤드, 기타(Gita)를 인용하면서 설명 해 주곤 했다. 그러므로 그가 비베카난다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나중에 그는 당시에 매우 곤혹스러웠으며, 그 젊은이가 질문을 던졌을 때 아 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젊은이가 찾아왔을 때 나는 자신의 망설임을 통해 난생 처음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아무 대답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물어라. 그러나 질문할 준비가 되었을 때 물어라. 철저하게 준비를 갖추어라. 왜냐 하면 문제는 대답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마크리슈나가 대답했을 때, 그 대답을 들은 자는 이미 질문을 했던 자와 같 은 사람이 아니었다. 질문을 했던 사람은 나렌드라나드(Narendranath)였지만 라 바크리슈나의 대답 후에 그는 더 이상 나렌드라나드가 아니었다. 그는 비베카난 다가 되었다. 그는 나렌드라나드로 갔다가 비베카난다가 되어 돌아왔다. 그대 또한 물어라. 그러나 혁명적인 변화, 그대의 삶 전체에 일대 변동을 일으 킬 각오를 해야 한다. 그대는 대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나렌드라나드가 집에 돌아갈 때 나렌드 라나드로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는 비베카난다가 되어 돌아갔 다.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대를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그분을 보 고 있다. 나는 그대를 보고 실체가 아니라고 말할지언정, 그분에 대해서는 그렇 게 말할 수 없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비베카난다는 ' 아, 훌륭하신 대답입니다. 내 답안지에 당 신의 말을 써먹어야겠군요.'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과 같은 사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라마크리슈나의 대답은 나렌드라나드라는 인물을 끝장냈다. 이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대답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대답을 주건 아무 어려움이 없다. 어려움에 처한 것은 그대 자신이다. 이 질문에 대해 아주 절실한 마음이 들 때 다시 오라. 비베카난다처럼 거친 태도로 물어온다면 더 멋진 일이 될 것이다. 깜깜한 밤중에 쳐들어와 내 멱살을 잡고 물어라. 그러나 명심하라. 내 멱살을 잡을 때쯤이면 그대는 이미 올가미에 걸려든 것 이다. 이 때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질문과 대답으 로 끝나는 학문적인 토론이 아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그대는 목 숨을 걸어야 한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인간 이 신성(神性)의 씨앗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즉각 신성으로 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말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 니까? 그렇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기까지 시간이 걸 린다. 그러나 그것은 발아(發芽)에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씨앗이 분해되고 해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발아(發芽)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그것은 폭발과 같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씨앗이 파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대의 에고가 해체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신은 결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한순간에 나타난다. 물을 끓이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끓는점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일단 끓는 점에 도달하면 물이 수증기로 되는 데는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비약이다. 물이 사라지고 수증기가 나타난다. 물이 단계 적으로 나누어서 수증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은 한순간에 수증기로 변한다. 물론, 물이 끓는점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백 도에 도달하기까지 물은 여전히 물이다. 99도에 도달했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물의 형태를 유지한다. 신은 하나의 폭발이며 도약이다. 그는 끓는점이다. 이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그대는 인간으로 남는다. 물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대의 노력이 99도까지 도달했 다 해도 그대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러나 끓는점에 이르렀을 때 그대는 신이 될 것이다. 그대가 끝나는 지점에 서 신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이 순간이란 무슨 뜻인가? 끓는점까지 도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면 언제라도 한순간에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큰 솥 안에 들어온 후로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지 않은가? 우리는 수많은 생을 거치면서 열을 얻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백 도까지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이미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으면서도 아직 끓는점에 도달하는 예술을 모른다. 99도까지 도달했을 때도 우리는 즉각 후퇴하여 차갑게 식어 버린다. 끓는점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번 명상 캠프 중에도 나는 많은 사람들이 99도까지 도달했다가 물러서는 것 을 목격했다. 그대가 사소한 일에 얽매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 다. 마치 그대 자신이 원점으로 복귀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이 봄베이에 가려고 기차역에 나갔다. 그런데 어떤 두 사람이 목청 을 높여 떠드는 것을 보고는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내심 그는 봄베이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여행 중에 그 정도의 사소한 혼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일 그 가 꼭 봄베이로 가야만 한다면 그 정도 사소한 혼란에 여행을 포기하는 일은 없 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렇게 무익한 잡담에 귀 기울이지 않고 더 빨리 길 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이유로 명상을 포기한다. 남이 조금 밀었 거나, 누군가 그의 몸에 닿았거나 또는 어떤 사람이 땅바닥에 쓰러져 울기 시작 했다는 핑계로 말이다. 그는 마치 명상을 포기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 래서 그럴 듯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작은 비명만 내도 그가 명상을 중단할 수 있는 훌륭한 구실이 된다. 그 비명이 그와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사소한 일을 핑계로 내세 움으로써 무엇을 잃고 있는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 한 친구가 길에서 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제발 여기 있는 이 사람들에게 너무 흥분하지 알라고 타이르십시오. 그들에게 조용하게 명상하라고 이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 인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니까 두사람이 명상 중에 벌거벗고 돌 아다녔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명상 중에 두 사람이 옷을 벗어 던졌기 때문에 일부 사람 들이 매우 분개했으며, 당연히 내가 그 두 사람을 제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옷안에는 벌거벗고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 점에 대 해 화를 내지는 않는다. 옷 안쪽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벌거벗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이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그런데 명상 중에 두 사람이 옷을 벗어 던 지자 모든 사람이 방해를 받았다. 이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만일 누군가 그대의 옷을 벗겼기 때문에 화를 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제 옷을 벗는데 왜 그대가 화를 내는가? 누군가 그대의 옷을 강탈해 갔다면 화를 낼 만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 또한 무의 미한 일이긴 하지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그대의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까지 내 주어라. 그러면 그는 수치심 때 문에 더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대의 옷을 벗겨 간다면 그에 항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다. 그러 나 남이 제 옷을 벗는데 왜 그대가 정신이 산란해져야 하는가? 그대는 마치 누군가 옷을 벗어 던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것을 구실로 명상을 늦출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대는 모든 책임을 그 사람에게 전가한다. 다른 사람이 나체가 되는데 그대의 명상이 방해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 대는 남이 나체가 되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는가? 그대는 과연 제대로 명상하고 있었는가? 사실 그대는 누가 옷을 벗어 던지는지, 그대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지 알 필요도 없었다. 그대는 자기만의 명상에 전념해야 했다. 그대는 세탁부 또는 옷 만드는 사람인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옷에 그토록 관 심이 많은 것인가? 그대의 걱정은 아무 근거도 없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제 옷을 벗어 던진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대 자신이 옷을 벗어 던져 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대 또한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그대는 그 가 옷을 벗어 던진 데는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일어나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 아마 그는 거액을 준 다 해도 옷을 벗어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것도 받지 않 고 제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대는 불필요하게 동요되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무엇인가 강력한 동기가 일어나 그렇게 하도록 자극했음에 틀림없 다. 그 때문에 동요하는 우리는 아직 삶을 이해와 관심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 지 못한 것이다. 마하비라(Mahavira)가 처음으로 옷을 벗어 던졌을 때, 그는 돌팔매질을 당해 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위대한 성자로 추앙 받고 있다. 그를 추앙하는 사람 들은 거의가 옷을 파는 사람들이다. 나체의 성자 마하비라를 숭배하고 받들어 모시는 사람들 거의가 의류상인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마하비라에게 돌을 던졌던 바로 그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그것이 이 사람들이 지금 옷을 팔고 있는 이유다. 아무도 나체가 되지 못하도록 말이다. 마하비라 자신은 나체로 살았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의류상인이다. 옷을 벗어 던지고 나체가 외었을 때 마하비라는 가는 곳마다 쫓겨나야 했다. 어느 마을도 그에게 거처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름샬라에서도 거절당했고 마을 밖의 화장터에서조차 쫓겨났던 그 사 람이 지금은 성자로 추앙 받고 있다. 사람들은 마하비라가 자기네 마을에 묵지 못하도록 사나운 개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마하비라가 나체라는 사실이 문제였 다. 그 외에는 문제될 게 없었다. 어떤 사람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를 두려워한다. 이 두 려움은 실로 엄청나다. 왜 그런가?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우리의 내면은 너무나 헐벗고 가난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벌거벗을 것을 보면 우리의 내적인 빈곤함이 생각나고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 외 에 다른 이유는 없다. 순진무구한 벌거벗음과 가난에서 비롯된 헐벗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 라. 마하비라를 보라! 어느 누구도 그가 빈곤 때문에 헐벗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반면, 우리는 아무리 훌륭한 옷과 장신구를 걸쳐 도 헐벗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빈곤함을 감출 길이 없다. 그대는 명상 중에 옷을 벗어 던진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는가? 한두 번 곁눈질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눈길을 오래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면 그대가 그토록 동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상 황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를 만났던 이 친구는 특히 여성들이 이 문제 때문에 매우 당황해했다고 말 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여성들은 다만 어떤 남자가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을 구경하러 여기에 왔단 말인가? 그들은 명상하러 여기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몰래 관찰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을 관찰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벌거벗은 사람들을 엿보고 기웃거리기에 바빴다. 이런 현상 자체가 폭발적인 상황을 만든다. 누가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주라 고 했는가? 그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 벌거벗었다는 것이 무슨 문제인 가? 벌거벗은 그 사람은 그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차라리 벌거벗은 사람이 내 게 와서 여성들 때문에 매우 난처하다고 불평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모인 여성들은 그로 인해 폭발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이것 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를 꼭 보아야 했다면 아주 주의 깊게 보아야 했다. 그랬다면 그대의 마음이 그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 그대는 그가 얼마나 순진무구 하고 천진한 상태인지 알았을 것이다. 거기엔 얻을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를 주 의 깊게 보았다면 그대의 마음은 무거운 짐을 덜고 한결 가벼워졌을 것이다. 그 것은 그대를 변화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으로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거부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항상 해로운 것만을 껴안으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비정상적인 관념에는 끝이 없다. 명상 중에는 어떤 상황이 다가온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하게 옷 을 벗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 그들이 옷을 벗어버린 것은 나의 승낙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니 불평하고 싶다 면 나에게 하라. 여기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몸을 드러낸 사람들은 모두 나의 승낙을 얻었다. 그들은 내게 와서 말하기를 , 명상 중에 옷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내면에서 무 엇인가 막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옷을 벗어 던지고 계속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왜 그대가 걱정하는가? 만일 누구라도 그들에게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훈계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 주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대들은 그럴 권리가 없다. 명상 중에 순진무구한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때는 많은 것들이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옷은 가장 강력한 금기 중 하나다. 옷은 가장 강력한 금기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옷은 인간에게 가장 깊이 뿌리 박힌 맹목적인 관습을 대표한다. 옷은 인간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옷이 우리의 문명 전체를 상징한다. 그러나 마음이 옷을 불필요하게 느끼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극소수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봇다는 평생 동안 옷을 입고 다녔다. 예수도 그랬다. 그런데 마하비라는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마하비라처럼 옷을 벗어 던진 여성도 있었다. 마하비라에게 는 남성보다 여성 제자가 더 많았다. 그러나 어느 여성도 감히 옷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마하비라의 생존 당시 그의 제자들은 만 명이 남성이었고 4만 명이 여성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여성도 옷을 벗을 용기가 없었다. 마하비라는 이 여성들이 남성으로 다시 환생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해탈할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옷을 벗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육체를 떠나는 것 또한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하비라는 여성은 신성한 지복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여성이 해탈하기 의해서는 먼저 남성의 육신을 취해야 한다. 마하비라가 이 원칙을 선포한 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 이것이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용감한 여성이 있었다. 카슈미르(Kashmir)의 랄라 (Lalla)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만일 마하비라가 랄라를 만났다면 여성 해탈 불가(解脫不可)라는 원칙 을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랄라는 마하비라처럼 옷을 벗어 던졌다. 카슈미르 사람들에게 랄라에 대해 물 어 보아라. "우리 카슈미르 사람들은 오직 두 개의 이름을 안다. 하나는 알라(Allah)고, 다 른 하나는 랄라다." 랄라는 벌거벗고 살았다. 카슈미르 전체가 그녀를 찬양하고 사랑했다. 그녀의 알몸에서 사람들은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순진무구함을 보았다. 그녀에게서는 어 린아이와 같은 기쁨과 순진무구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만약 마하비라가 그녀를 보았다면 그는 여성에 반대하는 결점을 지니지 않아 도 되었을 것이다. 여성의 몸으로 해탈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마하비라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랄라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마하비라에 대한 비난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성들 탓이지 그 자신의 탓이 아니다. 여자들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옷에도 이렇게 집착하는 여자들이 어떻게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겠 는가?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이렇게도 강하다면 그들에게 내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나는 그대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옷을 벗어버 린다면 어떤 명목으로도 그를 제지할 이유가 없다. 명상 캠프에서 이 정도의 자 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 이런 자유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명상 캠프는 구도자를 위한 것이지 구경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을 간섭하지 않는 한 전적인 자유가 보장된다. 만일 누군가 벌거벗고 그대를 건드렸다면, 그래서 그대가 상처를 입었다면 당연히 그에게 항의할 이유 가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대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그 대는 이견을 제시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명사의 장애물로 생각하는 것들은 알고 보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벌거벗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명상이 방해받는다. 이렇게 허약하고 중심 없는 명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명상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대는 '옷을 벗은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명상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 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소한 일을 핑계삼지 말라. 그런 태도를 버려라. 수행, 즉 사드하나(Sadhana)는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 리는 이 곳에서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우리 자신을 낱낱이 벗겨 내야 하기 때문 이다. 깊은 의미에서 보면, 사드하나는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알몸과 만나는 것 이다. 반드시 옷을 벗어 던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야 만 하는 상황이 온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외부에서 그것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 그대에게는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 지 추리하고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대가 누구기에? 이런 상황이 암시하는 바를 그대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 대가 누구기에 끼여드는가? 그대는 마하비라에게 돌을 던지며 마을 밖으로 쫓아 낸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들도 그대처럼 문명화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마하비라가 사회에 들어오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직 벌거 벗었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하게도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길에서 나를 만났던 친구는 아주 우호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로 내게 말했다., 그는 내가 사람들이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을 금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앞 으로 봄베이에서 열릴 명상 캠프의 참가자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충고 했다. 수가 줄어들게 놔두어라! 한 사람도 안 와도 좋다! 그릇된 태도를 지닌 사람들 은 명상 캠프에 올 필요가 없다. 단 한 사람이 온다할지라도 내게는 아무 차이 가 없다. 또한 그 친구는 여성들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지 않게 놔두어라. 누가 그들에게 와 달라고 부탁했는가? 오든 말든 그들 스 스로 결정할 문제다. 그들이 캠프에 참가한다면 나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명상 캠프가 그들의 요구대로 운영될 수는 없다. 만일 내가 그대들이 제시하는 조건대로 명산 캠프를 연다면, 그런 명상 캠프 에는 절대 참가하지 말라. 그 때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 명상 캠프는 내 의도대로 운영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여 기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 은 내게 지시를 내릴 위치에 있지 않다. 이미 세상을 떠난 구루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죽 은 구루는 그대 멋대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구루는 불가항력이 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구루는 그대에게 크나큰 어려움을 안겨 준다. 그것이 살 아 있는 구루는 배척당하고 죽은 구루가 추앙받는 이유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은 구루는 전세계에서 추앙받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구루는 골칫거리다. 왜냐 하면 그대 마음대로 다룰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눈으로 보면, 그대들이 여기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명상뿐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누가 오든, 누가 오지 않든 그것은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오는 사람 모두가 왜 여기에 오는지, 무엇 때문에 오는지 충분한 이해를 갖고 오기를 바란다. 인위적인 노력의 개입 없이 순간마다 자연 그대로 응답하는 요가, 무위(無爲) 를 바탕으로 하는 사하자 요가(sahaja yoga)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하자요가는 여러 요가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요가다. 사하자의 상태, 인위적 인 노력 없이 자연적인 무위(無爲) 상태로 존재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사하자(sahaja)'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하자'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거기에 저 항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 어떤 사람이 벌거벗었다고 하자. 그에게는 이것 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하자의 상태는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사하자의 상태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거기에 지적인 해석을 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성이 개입되는 즉시 자연 그대로의 상재인 사하자는 중단된다. 그리고 비자 연적인 아사하자(asahaja)의 상태가 시작된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 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죽가가 자연을 거스르고 비자연적인 상태가 되기 시작한다. 존재하고 발생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러 운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하자 요가가 가장 어려운 요가라는 점이다. 개념적으로만 생각해서 그것을 쉽다고 착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흔히 사하자 요가를 아주 쉬운 수행 법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은 흔 히 다음과 같은 카비르(Kabir)의 말을 인용한다. '사드호, 사하자 사마디 브하리(Sadho, Sahaj samadhi bhali; 구도자여, 자연스 러운 황홀경의 상태가 최고로다).' 물론, 그것이 최고다. 하지만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자연 그 대로 존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 인간은 비자연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멀리 벗어났다. 그래서 이제는 비자연적으로 되는 것은 매우 쉽고,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몇 가지 사실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 내가 가르치는 것은 다름아니라 사하자 요가기 때문이다. 삶에 어떤 교리나 도그마(dogma)를 부과하는 것은 삶을 변질시키는 것과 같 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그런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교리 와 도그마라는 짐을 부여한다. 폭력적인 사람이 비폭력주의자가 되려고 애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유순해 지려고 애쓴다. 거친 사람이 상냥해지려고 노력한다. 도둑이 관대해지려 하고, 사악한 사람이 성자처럼 되려고 애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부정하 고 항상 그 위에 무엇인가 부과하려고 애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나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노력 이 성공했을 때도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왜냐 하면 도둑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관대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자선을 베풀고 자신이 관대해졌다는 환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자선 행위를 통해서도 무엇인가 훔쳐 낼 수 있는 길을 발 견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에크나스라는 성자가 순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가 막 길을 떠나려고 하 는데, 그 마을에 사는 도둑 하나가 그와 동행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자기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갠지스 강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그 죄를 씻고 싶다는 것이 었다. 에크나스가 말했다. "그대의 요청을 거부하지는 않겠다. 나와 동행할 사람들은 온갖 도둑들로 구성 되어 있으니 그대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려운 점이 있다. 여기 있는 이 다른 도둑들은 내가 그대를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대가 그들의 물건을 훔칠까 봐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순례 여행 중에는 절대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러면 우리와 동행할 수 있다." 도둑이 말했다. "맹세합니다. 순례 기간 중에는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이 도둑은 에크나스의 순례단에 끼어서 길을 떠났다. 그들 모두가 온 갖 부류의 도둑들이었다. 도둑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는 않다. 어떤 부류의 도둑 은 행정관으로 일하고, 어떤 도둑은 변호사로 일하고, 어떤 도둑은 그 밖의 다른 일을 한다. 여행이 시작되자, 이 가련한 도둑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에크나스에게 맹세 하긴 했지만 도둑으로서 몸에 밴 습관을 참아 내기 힘들었다. 낮에는 그럭저럭 견뎌 낼 수 있었지만 밤에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다른 순례자들이 깊이 잠든 밤에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같으면 밤이야말로 본격 적으로 일을 시작할 때가 아닌가? 어쨌든 하루 이틀은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삼 일 째부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여행은 몇 달 동안 계속 될 텐데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더구나 가장 곤란한 문제는, 이렇게 몇 달 동안 도둑질을 하지 않는 상태로 보내면 내 생계 수단인 기술을 잊어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집으로 돌아간 후에 어떻게 먹 고산단 말인가? 평생 동안 순례 여행만 하면서 살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삼일 째 밤부터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는 도둑질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한 순례자의 물건을 훔쳐서 다 른 순례자의 짐 속에 넣어 두었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순례자들 사이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 잃어버렸으며, 그 잃어버린 물건이 다른 사람의 짐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들 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없어진 물건은 하나 도 없었다. 그런데 온통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에크나스는 순례 여행에 합류하기를 간청했던 그 도둑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몰래 지켜보기로 했다. 밤이 이슥해졌을 때 에크나스는 그 도둑이 순례자들의 짐에서 물건을 빼내 다 른 짐 속에 넣는 것을 보았다. 에크나스가 그를 붙들고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도둑이 말했다. "제가 도둑질을 하기 않기로 맹세한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맹세는 유효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다만 이 물건들의 위치만 바꿔 놓았을 뿐입니다. 제가 차지한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 는 분명히 맹세를 지킨 것입니다." 나중에 에크나스는 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도둑은 아무리 변신을 시도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리하 여 우리의 삶은 비자연적인 요소로 가득 차게 된다. 사하자 요가는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그대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지 말라. 그대가 어떤 존재 인지를 알고 그에 충실하게 살아라. 만일 그대가 도둑이라면, 그대가 도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 충실하게 살아라." 그러나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도벽(盜癖)을 극복하려 고 노력한다.'는 생각을 통해 위안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는 도벽 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비록 오늘은 도둑이지만 내일은 도둑이 아니라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는 '비록 지금은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지만 언젠가는 도둑이 아니라 존경받는 자선 사업가가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렇게 내 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그는 오늘도 도둑질을 계속한다. 사하자 요가는 말한다. "만약 그대가 도둑이라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라. 도둑질을 하더라도 그 사 실을 알고 하라. 내일은 도둑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도둑질을 하지 말 라." 그대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면,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받아 들이고 그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내적인 혁명은 지금 당장 일어날 수도 있다. 만일 도둑이 '나는 도둑이다.'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다면 그는 오 랫동안 도둑으로 머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는 실제로는 도둑이 아닌 데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환경이 나아지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도둑으로 계속 남아 있으려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은 위안을 얻으려는 속임수일 뿐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에 대해 청렴 한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둑질을 계속한다. 비폭력을 맹세하면서 계속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닌데 주변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한다. "상대방이 나를 모욕했기 때문에 잠시 자제심을 잃었다. 그런 일만 없다면 나 는 절대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내 부아를 돋구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한편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한다. "용서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그런 상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나는 그렇게 저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자존심, 그의 에고가 회복된다. 사실, 모든 후회는 에고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성을 낸 사람은 용서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에고를 지킨다. 사하자 요가는 말한다. "너 자신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라. 그리고 실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말 라. 조금도 그 실상과 달라지려고 하지 말라." 그 실상의 죄악과 불행, 고통을 완전히 자각하는 순간, 자신이 지옥의 화염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즉시 그대는 그로부터 뛰쳐나올 것이다. 그대는 즉각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도둑이 자신이 도둑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마음 솔에 '언젠가 나는 도둑질을 그만둘 것이다'라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면, '오 늘 나는 도둑이며, 내일은 더 큰 도둑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24시간 동안 나의 도둑질하는 습관은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안다면, 이렇게 자신 의 성향을 충분히 자각하고 이해한다면 그가 얼마나 더 도둑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도둑이다.'라는 자각이 총알처럼 그이 가슴에 박힐 것이고, 이렇게 총알 이 박힌 상태로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자각의 총알이 박히는 그 순간에 변형이 일어난다. 바로 그 순간에! 그러나 우리는 매우 교활하다. 우리는 아주 교활한 방편을 개발해 냈다. 우리 는 도둑이지만 박애주의자가 되는 꿈을 꾼다. 이 꿈이 우리를 영원히 도둑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돕는다. 실제로 이 꿈은 기차의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 와 같다. 완충 장치가 충격을 흡수하고 승객은 그 충격을 인식하지 못한다. 꿈은 자동차의 충격 흡수 장치와 같다. 자동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릴 때 그 장치가 충격을 흡수하고, 차에 탄 사람은 상처를 입거나 불편을 느끼는 일로부 터 해방된다. 우리가 만들어 낸 교리와 이념은 삶에서 이런 충격 흡수 장치로 작용한다. 도 둑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념을 따른다. 폭력적인 사람이 '비폭력'을 모토 (motto)로 삼는다. 그대는 비폭력이야말로 지고의 종교적 덕목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대의 총 격 흡수 장치다. 이 장치가 그대로 하여금 폭력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도록 돕는 다. 자신의 폭력성과 직면할 때마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폭력적이라고? 나는 비폭력을 믿는다. 비폭력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종 교다. 내가 간혹 거기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내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내가 믿는 이상을 성취할 것이다. 이 생에서 실패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비폭 력을 달성할 것이다. 어쨌거나 비폭력이 내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다!" 비폭력의 깃발을 들고 전세계를 누비면서도 그대는 내적으로 여전히 폭력적일 수 있다. 이 깃발을 그대의 폭력성을 지탱해 주는 원조 장치다. 비폭력이 지고의 덕목이라고 씌어 있는 스티커를 본다면 그 주변에 폭력적인 사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라. 그렇지 않고는 그런 스티커가 거기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비폭력의 깃발이나 스티커는 항상 폭력적인 사람들과 함께 다닌다. 그것은 폭력을 감추고 영구화시키는 방패와 같다. 인간은 온갖 속임수와 방편 을 만들어 냈다. 오로지 속임수와 방편만 남고 인간 자신은 실종되었다. 사하자(sahaja)의 상태, 즉 자연스럽게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 태를 의미한다. 그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대는 이 상태 그대로 살아야 하고, 이 상태대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지옥에 던져진다면 그대는 무엇을 할 것 인가? 그대는 꿈의 도움을 받아야만 그것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눈을 감고 꿈에 몰두할 것이다. 단식을 해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오직 음식에 관한 꿈을 꾸면서 그 날들을 견뎌야 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음식에 관한 꿈이 단식을 이겨내도록 돕는다. 이 꿈이 그치면 단식 또한 즉각 중단될 것이다. 내일 아침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꿈꾸면서 그대는 단식의 고통을 이겨낸다. 대학에서 나와 동료로 지냈던 한 교수가 생각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지 냈다. 장기간 함께 지내면서 나는 그가 난데없이 음식 이야기를 꺼내곤 하는 것 에 주목했다. 나는 그가 주기적으로 음식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알고 주의 깊게 그를 관찰 했다. 그리고 그가 토요일마다 게걸스럽게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토요일, 나는 그를 만나자마자 물었다. "오늘도 자네는 틀림없이 음식 이야기를 하겠지?" 그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내게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 내가 말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자네를 눈여겨보았더니 토요일마다 음식 이야기를 늘어놓더 군. 토요일마다 단식을 하나?" 다시 한 번 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누가 말해 주던가?"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말해 줄 필요도 없네. 이것은 내가 관찰해서 얻은 결론이네." 그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 나는 토요일마다 단식을 하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 내가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잘 먹고 지내는 건강한 사람은 자네처럼 토요일마다 음식 이야기 를 꺼내지 않는 법이지. 자네가 잘 먹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아네. 그런데 자 네는 토요일만 되면 어떤 구실을 달아서든 음식 이야기를 꺼내더군." 그가 내 말을 인정했다. "자네 말이 맞아. 토요일만 되면 나는 음식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어. 하루 종 일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하고 계획을 세운다네. 이런 식으로 단식일을 견디어 내는 것이지." 나는 그에게 음식에 대한 생각 없이 단식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불가능하네. 그렇게 되면 나는 단식을 포기해야 할 것이네. 내가 단식 기간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음식에 대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단식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네. 그런 희망이 없다면 단식은 불가능했을 것이네." 폭력적인 사람은 '언젠가 나는 비폭력인 사람이 될 것이다.'는 희망을 품고 계 속 폭력적인 상태에 남아 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어느 날엔가 나는 관대하 고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는 희망의 힘을 빌어 계속 화를 내는 상태에 머 문다. 도둑은 '언젠가 나는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될 것이다.'는 생각을 품고 계 속 도둑으로 남아 있다. 죄인은 '내일 나는 선량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희망 하면서 계속 죄인으로 남아 있다. 이런 희망은 비종교적이다. 그런 희망을 버려라. 그대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것이 그대의 실상이라는 것을 알고 그 실상대로 살아라. 이것을 엄연한 현실이다. 그 현실을 살아라. 그대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나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아주 고 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에 큰 상처 를 준다. 그래서 성적인 사람이 브라흐마차리야(Brahmacharya), 성초월(性超越) 에 관한 책을 읽는다. 이것이 그가 성욕을 지키는 비결이다. 그는 성욕으로 불타고 있다. 그런데 그는 책을 읽으면서 자신을 성초월을 지 향하는 구도자로 생각한다. 브라흐마차리야에 관한 이 책이 그를 계속 성적인 존재로 남아 있도록 돕는다. 날마다 그는 '오늘만 성을 탐닉하고 내일부터는 금 욕의 서약을 지키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을 위로하고 합리화 시킨다. 한 번은 어느 집에 손님으로 머문 적이 있다. 그 집의 노인은 세 번이나 독신 수행자로 입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물었다. "독신 서약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어떻게 세 번씩이나 독신 서약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모두가 내게 경의를 표했소. 내 행동에 대해 이런 식으로 질문한 사람은 당신 외에 아무도 없었소." 내가 말했다. "독신 서약은 단 한 번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세 번이나 할 수 있단 말 입니까?" 그가 말했다. "첫 번째 서약을 지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두 번째로 서약을 했소. 그런데 두 번째 서약마저 깨지는 바람에 세 번째 서약을 해야 했소." 내가 물었다. "네 번째 서약은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말했다. "그 당시 나는 이미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소. 자신감을 잃어버렸지." 서약을 지킬 수 있을 무렵 그는 이미 예순 살이었다. 그는 독신 서약의 도움 을 빌어 성적인 시기를 통과한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실제로 행하는 것은 '아사하자 요가 (asahaja yoga)', 비자연적인 요가다. 우리는 계속 성적인 상태로 남아 있으면서 성초월에 관한 책을 읽는다. 성초월에 관한 책이 우리의 성욕에 완충 역할을 한 다. 그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아무도 나를 보고 성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은 성초월 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지금 다소 성을 탐닉하는 것은 내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의 카르마(業) 때문이거나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일 것 이다. 곧 이 시기가 지나고 나는 성을 초월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성초월을 믿는다." 이런 식으로 성과 독신 서약이 함께 붙어다닌다. 우리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믿도록 훈련되었다. 한편에는 성에 대한 가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브라흐마차리야에 관한 맹세가 있다. 둘이 함께 붙어다닌다. 브라흐마차리야에 대한 믿음이 충격 흡수 장치로 작용하고, 우리는 덜컹거리 는 요동 없이 계속 성(性)의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성의 여행 이 평안하게 계속된다. 이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상태다.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완충 장치를 제거해야 한다. 길 위에 움푹 파인 곳이 있다면 그대 스스로 그것 을 인식해야 한다. 내면의 자동차에는 완충 장치나 충격 흡수 장치가 없어야 한 다. 그러면 첫 번째 파인 곳에서 그대는 죽음을 맞거나 뼈가 부러질 것이다. 그 대는 밖으로 퉁겨져 나가 자동차와 영영 이별할 것이다. 다시는 그 차를 몰 수 없을 것이다. 스프링을 모두 제거하고 차를 운전하라. 첫 번째 웅덩이가 그대를 넘어뜨릴 것이고 그대는 자동차와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다시는 그 차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자동차 밑에 있는 완충 장치가 있기 때문 이다. '사하자 요가'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자연적이 되려고 하 지 말라. 여여(如如)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라. 그 때 틀림없이 혁명이 일어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변형된다. 그러면 독신 서약을 하고 60평생 성적인 삶을 사는 일 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독신을 맹세하면 그대는 그로부터 빠져 나가 는 길을 발견할 것이다. 독신 서약은 성을 지키는 방편이다. 그대가 화가 치밀어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나서 사과를 하기는커녕 이렇게 말 한다고 하자. "나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다음에 나는 또 화를 낼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사과한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나와 계속 친구로 남고 싶다면 이 점을 명 심하라."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대가 친구와 우정을 유지할 수 있겠 는가? 친구들 모두가 등을 돌릴 것이다. 모든 인간 관계가 깨지고 그대는 계속 화를 내면서 혼자 살아야 할 것이다. 분노가 그대의 유일한 친구가 될 것이다. 그대의 분노를 용납해 줄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그대는 분노와 더불어 철저하게 고립 될 것이다.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대는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하고 말하 면서 분노로부터 뛰쳐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각을 차단하는 교묘한 방편들을 개발해냈다. 아침에 남 편이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사무실에 나간다. 그리고 오 후에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이스크림과 비단옷을 사 가지고 돌아온다. 그 러면 부인은 남편이 예전처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남편은 후회를 통해 부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스크림과 옷을 손에 넣은 부인은 다시 예전의 좋은 아내로 돌아간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면 아침에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될 것이고, 밤중에 남편은 무릎을 끓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도 다르 지 않다. 날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런 일이 평생 계속된다. 남편도 아내도 그들의 실상, 그들의 진실을 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문제의 실체, 날마다 반복되는 거짓과 기만(欺瞞)을 똑바로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잠시도 이런 문제를 점검해 보지 않고 계속 서로를 속인다. 이런 부부처럼 우리는 평생 동안 서로를 속이면 살아간다. 그리고 더 나쁜 것 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속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기만한다는 것이다. 사하자 요가는 그대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어떤 사람 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여라. 그러면 즉 각 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변형이 일어난다. 변형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집에 불이 난 것을 아는 사람이 계속 집안에 남아 있겠는가? 그가 내일을 기다리겠는가? 그는 총알처럼 집에서 뛰쳐 나올 것이다. 우리의 삶은 불난 집과 같다. 이 섦을 있는 그대로 아는 순간 즉각 변형이 일 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기만적인 술수를 쓰고 있다. 집에 불이 났는데도 우리는 그 집 을 화려한 꽃으로 치장하고 있다. 우리의 손은 사슬에 묶여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슬을 황금으로 도금하고 있다. 우리는 황금에 눈이 멀어 사슬을 사슬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상처투성이면서 그 상처들을 화려한 색깔의 반창고로 가리고 있다. 우리는 그 화려한 색깔을 볼 뿐 그 뒤에 가려진 상처를 보지 못한다. 이런 기만이 너무나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대문에 우리는 평생을 허비하고도 변형의 순간을 맞지 못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순간을 연기(延期) 한다. 결국, 죽음이 찾아올 뿐 연기된 그 순간은 오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우리 는 변화되지 않는다. 사실, 변형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사하자 요가는 이렇게 말한다. "있는 그대로 살아라. 그러면 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진리 자체가 변화를 일으킨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모른다. 우리는 거짓과 허위 곳에 살아간다. 그리고 우 리는 그 거짓과 허위를 있는 그대로 살기보다는 화려하게 치장하려고만 한다. 거짓은 속박을 가져다주고, 진리는 그대를 해방시킨다. 기쁨을 주는 거짓보다 고통스러운 진리가 더 낫다. 기쁨을 주는 거짓은 매우 위험하다. 이 거짓이 그대를 속박한다. 진리는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해방을 가져다준다. 고통마저 그대를 해방시킨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진리와 함께 살아 라. 아무리 기쁨을 준다 해도 거짓의 항구에 정박하지 말라. 이것이 사하자 요가의 전부다. 이것이 삼매(三昧)를 가져올 것이다. 삼매를 추 구할 필요가 없다. 삼매는 스스로 찾아온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라. 웃고 싶을 때는 웃어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일어나게 허용하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서 한 스승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조의를 표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는 아주 이름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에 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사실 스승이 알려진 것은 그 제자 때문이었다. 이 유명한 제자가 문 밖에 않아 애통하게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우는 것을 보고 우리는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깨달 은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십니까?" 그가 말했다. "어리석은 자들아. 그대들이 나를 깨달은 자로 추켜세운다고 해서 내 눈물이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울음은 깨달음과 상관없는 문제다. 그 따위 깨달음은 그 대들이나 가져라! 내게는 그런 깨달음이 필요 없다." 사람들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울음을 그칠 수 없다면 안에 들어가서 우십시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울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소문 이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궁극적인 지혜, 완벽한 평정 상태에 도달했다 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아무것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대들은 완전히 틀렸다. 깨닫기 전에는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는 무감각하고 둔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나 예민하게 영 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나는 내 가슴이 만족할 때까지 울 것이다. 그대들이 뭐라 고 말하든 나는 관심없다. 나는 그대들이 말하는 깨달음에는 관심없다. 그런 깨 달음은 그대들이나 갖든지 아니면 내다 버려라!" 그러니 추종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설득하려고 노 력했다. "이 일 때문에 받게 될 불명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굳이 울어야겠다면 남들이 없는 곳에 가서 몰래 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에 나쁜 소문이 퍼질 것 입니다." 그 추종자들 중 한 명이 도전적으로 나섰다. "당신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슬퍼하십니까?" 그 현자가 말했다. "누가 영혼 때문에 운단 말인가?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영혼 때문에 우는 것 이 아니다. 내가 우는 것은 스승님의 육체 때문이다. 스승님의 육체는 너무나 사 랑스러웠다. 이제 그 육체가 스승님을 떠났고 두번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 을 것이다. 스승님의 영혼이 거주하던 사원도 그 영혼 못지 않게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두번 다시는 그 육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우는 것은 그 육 체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힐난했다. "육체 때문에 운다고요? 그렇다면 실컷 우십시오!" 그가 말했다. "그대들은 우는 것에도 조건을 달 것인가? 그냥 울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가?" 진실한 마음, 진리 안에 사는 마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진실한 마음이란 울 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우는 마음을 뜻한다. 화를 내야겠다면 그 분노에 진실하라. 화가 날 때는 분노 자체가 되어라. 그대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 들이 '아, 이게 분노구나!'하고 느낄 정도로 완벽하게 분노 자체가 되어라. 이 분노가 그대를 해방시킬 것이다. 즉각 그대를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평생 동안 미지근하게 조금씩 화를 내기보다는 단 한 번에 완벽하게 화를 내라. 그 분노의 불길이 그대와 주변 사람들을 태우고 진정으로 분노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가져다주게 하라. 그럴 정도로 완벽하게 화를 내라. 일반적으로 우리의 분노는 미지근하고 어중간하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분 노가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화를 낸다. 전체적이지 못하다. 이렇게 부분적인 분노가 그 분노를 진실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은 한 걸음 은 앞으로 내딛고 한 걸음은 뒤로 물러서는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그냥 한 장소에 정체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행이라고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식물처럼 한 곳에 묶여 있다. 사하자 요가는 말한다. "삶에 무엇이 일어나든 그대로 받아들여라. 있는 그대로 알고 그 앎에 따라 살 아라." 이런 수용성과 앎, 이런 삶을 통해 변형이 일어난다. 이 변형이 그대를 신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하는 일이 바로 사하자 요 가의 길이다. 이 곳에서 그대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대 자 신을 완전히 방임하고, 저절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용한다. 교육받고 문명화된 사람들, 교양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미친 것처럼 울고, 소리지르고, 껑충껑충 뛰고, 거칠게 춤춘다. 이런 모습은 이 곳이 아니라면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이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일이다. 단순히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그러나 그들이 여기에 동참했다면 그들 또한 똑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 런데 그들은 그것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비웃음은 단순히 방어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웃는다. 그들의 냉소는 '나는 당신들 같은 짓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들의 웃음은 그들을 편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들의 웃음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말해준다. 그들의 웃음은 그들 또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의 냉소는 만일 여기에 동참 한다면 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자신을 옭아매고 억눌러 왔다. 그들은 웃음과 눈물을 억압해 왔다. 춤과 기쁨을 억제해 왔다. 버트런드 러셀(Burtrand Russell)은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문명은 인류로부터 아주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갔다. 그 중 하나가 춤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주장하고, 선조들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트라팔가르 광장 중앙에 서서 춤추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자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기쁨을 느끼는 곳에서 춤출 자유가 없다. 만일 내가 춤을 추면 즉시 경찰이 달려와 교 통 방해죄로 체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치광이로 취급할 것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원시 부족을 방문해 그들이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에서 춤추는 장면을 목격 할 때마다, 나는 문명화된 인류가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상실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우리는 문명을 통해 적은 것을 얻고,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었다. 문명화된 인 간은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잃었다.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온갖 변태의 희 생양이 되었다. 명상은 그대를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만드는 방편이다. 명상은 그대의 자연적 인 본성을 되돌려 준다. 마지막으로 나는, 3일 동안 이 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독특한 경험을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경험을 일별(一瞥)했 다. 물론,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험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진일보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지성인이다.'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 람이 최선을 다했다. 사실,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지성이 뒤지는 사람들이다. 다만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 많을 뿐이다. 그럼 사람들을 제외사고는 모든 사람이 명상에 참여했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는 특별한 에너지가 창조되었으며 의미 심 장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날마다 한 시간씩만 이 명상에 바치면 그대의 삶에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라.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한 시간 동안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 두어라.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완전히 나 체가 되어라. 그리고 선 자세로 명상하라. 그리고 다치지 않도록 바닥에 매트리 스를 깔아 놓아라. 서서 명상하라. 그러나 사전에 가족들에게 방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도 염려하지 말도록 말 해 두어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방해하지 말도록 사전에 일러 두어야 한다. 다음 명상 캠프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날마다 한 시간씩 이 명상을 행하라. 각자 자기만의 공간에서 날마다 이 명상을 행하라.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나는 다 음 번에 따로 명상 캠프를 열 것이다. 그 명상캠프에서는 많은 정보가 가능할 것이다. 이 명상법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참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 러나 그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그대가 일보 전진하면 신이 그대를 향해 백보 전진할 것이다. 신은 언제나 그대에게 다가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한 걸음도 옮기지 않는다면 그대를 도울 길은 전혀 없다. 그러 니 집으로 돌아가거든 이 명상법을 정기적으로 행하라. 열성적으로 행하라. 나는 많은 방해가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대의 아이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 다. "아빠가 어떻게 된 거지?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아빠는 항상 무겁고 심각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빠는 춤추고, 펄쩍펄쩍 뛰고, 소리를 지른다. 우리 가 집안에서 큰 소리로 떠들 때마다 아비는 야단을 치고 벌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빠 자신이 그 짓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대를 비웃을 것이다. 그대는 과거에 그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대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 게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잃지 말라고 말해 주어라. 이것이 장차 그들 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 일찍 늙은이로 만들어 버 린다. 가족들에게는 그대가 방안에서 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지 기웃거리거나 꼬 치꼬치 묻지 말라고 말해 놓아라.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 어라. 분명하게 못박아 두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면 그 대도 익숙해 질 것이고, 그대를 혼자 내버려 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상은 그대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능하다면 명상만을 휘한 방을 따로 마련하라. 오직 명상을 위해 그 방을 사 용하라. 다른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말라. 작은 방이라도 좋다. 그 방에 자물쇠를 채워 두어라. 그리고 가족 중에 도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허용하되, 명 상 외에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하라. 따로 방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따로 방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이득을 준다. 명상만을 위해 사용되는 방은 명상적인 에너지로 채워진 다. 그러면 날마다 방에 들어갈 때마다 그 에너지를 느낄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우리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우리는 정신적 에너지를 주변에 내 보낸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공간은 그 에너지를 흡수한다. 이것이 몇몇 장소가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신성한 장소로 보존되는 이유 다. 마하비라, 붓다, 크리슈나 같은 사람이 앉아 있던 곳은 특별하고 강력한 진 동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진동의 영향력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진다. 그런 장소 에서는 다른 세계, 영적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유복한 사람들은 나는 유복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단 하나의 기준을 갖고 있 다. 나의 기준에 따르면 집 안에 사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유복한 사람이다. 그렇 지 않으면 그는 빈민이다. 취소한 방 하나 정도는 사원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방 하나는 다른 세계로 들 어가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 방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라. 고요하게 그 방에 들어가라. 오로지 명 상을 위해 그 방을 사용하라. 가족 중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명상에 관심을 갖 게 될 것이다. 그대 안에 일어난 변화가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 다. 이제 사람들은 여기에서 변화를 체험한 몇몇 참가자들을 찾아가 '당신에게 무 슨 일이 일어났습니까!'하고 묻기 시작했다. 이 참가자들은 내게 와서 어떻게 대 답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아이들, 부모, 친구들도 그대의 변 화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 또한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대가 오랫동안 수행을 계속하면 그대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사간이 일어날 날이 멀지 않다. 우리는 그 위대한 일을 위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행을 거쳐 왔다. 그리고 많은 생을 허비했다. 앞으로 도래할 몇 십 년간은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이제 소수의 영적인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주의라는 수렁에 서 이 세상을 구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앞으로 도래하는 시기는 인간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다가 오는 50년 동안이 결정저인 시기로 작용할 것이다. 종교가 살아남거나 아니면 종교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 살아 남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50년이 붓다, 마하비라, 크리슈나, 예수, 모하메드, 라마(Rama)등의 선각자 들이 일구어 놓은 일을 결정할 것이다. 천칭 저울로 비교한다면, 이 빛나는 존재 들은 우리 쪽에 있고, 다른 쪽에는 비정상적인 정치가들, 유물론자들, 그리고 망 상과 무지에 찬 사람들이 있다. 우리 쪽에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 쪽에는 엄청나게 않은 사람들이 있다. 오랫동안 계속 되어 온 이 투쟁이 곧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대도 알고 있듯 이, 우리 쪽에는 소수의 사람들밖에 없다. 지금 상태로는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인 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간단하고도 자연스러우면 쉬운 것이 발견될 것이라고 믿 기 때문이다. 현대는 소수의 사람들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대는 한 사람이 깨닫는 것 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 시점에서 소수의 사람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대규모의 영적인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 운동만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핵심 토대를 이루고 일을 시작한다면 인도는 이 중요한 싸움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가 아무리 가난하고 불행하며 타락했다 해도, 이 나라가 아무리 노예화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해도, 이 땅은 잘 보존된 보물을 간직하고 있 다. 유사이래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이 이 땅 위를 걸었던가! 그들의 빛과 향기, 그 들의 염원은 아직도 공기 속에 살아 있다. 이 땅의 풀 잎 하나에도 그들의 자취 가 남아 있다. 이 나라의 인간들이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이 땅은 여전히 붓다 의 발자국을 기억한다. 이 나라의 인간들은 그릇된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나무들은 한 때 마하비라 가 그들의 그늘 아래 서 있었다는 것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인간은 그릇된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 땅을 둘러싼 바다는 과거에 들었던 전혀 다른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분명히 인간은 길을 잃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하늘은 여전히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인간이 본래의 집으로 돌아오는 이만 남았 다. 근래에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집단적인 폭발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이 일에 그대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대의 삶에 이런 폭발이 일어난다면 그대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일이다. 그대는 자신의 램프에 불을 밝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의 램프에도 불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희망을 갖고 기도하면서 작별 인사를 고한다. 지난 3일 동안 넘치는 사랑과 진지함으로 내 말을 들어 준 그대들에게 감사한 다. 그리고 그대들 모두의 내면에 거주하는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부디 나의 인 사를 받아 달라. 쿤달리니와 삭티파트 강렬한 호흡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쿤달리니가 깨어나서 몸의 여러 차크라(chakra)를 통과하는 과정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둘 사이의 관련은 아주 깊다. 호흡은 몸과 영혼을 연결 시킨다. 호흡은 육체와 영혼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호흡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생명이 중단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뇌가 손상 을 입어도 생명은 계속된다. 눈이 없어지고 사지가 절단되어도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나 호흡이 멈추면 더 이상 살아 있을 수 없다. 호흡은 육체와 영혼 사이의 연결 고리다. 육체와 영혼이 만나는 지점, 그 곳에 쿤달리니(kundalini)라고 불리는 에너지가 놓여 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그것은 똑같은 에너지다 그 에너지는 육체와 영혼이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이 에너지는 두 가지 양상을 갖는다. 육체를 향해 흐를 때 이 에너 지는 섹스(性)가 된다. 그리고 영혼을 향해 흐를 때 이 에너지는 쿤달리니가 된 다. 이 에너지는 육체를 향해 움직일 때는 하강하고, 영혼을 향해 움직일 때는 상 승한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상승하는 에너지라면, 섹스는 하강하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쿤달리니가 놓여 있는 지점을 깊고 강한 호흡에 의해 자극할 수 있다. 섹스를 하면서 호흡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 섹스가 즉각 호흡의 변화를 가져온다. 성적으로 흥분되자마자 호흡이 고조된다. 호흡이 섹스 ㅅ터를 자극하지 않으면 서 에너지가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호흡에 의한 자극과 타 격이 없으며 성적인 삽입은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쿤달리니가 호흡에 의해 타격 받지 않으면 사마디(samadhi) 와 법열(法悅)이 불가능하다. 사마디는 상승하는 에너지의 최고 정점이고, 성행위는 하강하는 에너지의 최 하층부다. 그러나 호흡은 두 방향 모두 안에서 동등하게 작용하다. 한 번 실험해 보라. 마음이 섹스로 가득 차 있을 때 호흡을 이완하고 차분히 가라앉혀 보라. 마음이 분노나 다른 격정에 사로잡혀 있을 떼 호흡을 느리게 하 고 이완시켜 보라. 그러면 섹스나 분노 등의 격정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호흡이 가라 앉으면 이런 격정은 유지될 수 없다. 이런 격정을 유지 시켜 주는 에너지는 호 흡을 통해 오기 때문이다. 호흡의 지원이 없으면 이 에너지는 작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호흡을 느리고 안정되게 유지하면서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기적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호흡이 가라앉고 이완되는 즉시 분노는 사라진다. 느리고 이완된 호흡을 하면 서 성적으로 흥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호흡의 이완과 더불어 성욕이 사라진다. 마음이 섹스나 분노, 다른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호흡을 느리게 하고 이 완시켜라. 반면, 마음이 명상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를 때는 호흡을 가속시켜라. 깊고 강한 호흡으로 쿤달리니를 자극하라. 내적인 염원과 호흡의 타격에 힘입어 에너지가 명상을 향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깊은 호흡은 쿤달리니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프라나야마(pranayama), 즉 요가의 호흡법은 아무렇게나 개발된 것이 아니다. 긴 세월 동안 실험과 경험을 거치면서, 호흡의 도움을 받으면 많은 일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다. 호흡이 쿤달리니를 타격하면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깊고 빠 른 호흡을 통해 많은 일이 가능해진다. 호흡의 타격이 강할수록 에너지의 움직 임도 빨라진다. 우리처럼 그많은 생 동안 쿤달리니가 잠자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강렬하고 거 센 타격을 가할 필요성이 더 크다. 잠자는 쿤달리니 에너지에 강력한 충격을 주 기 위해서는 호흡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쿤달리니 에너지의 기본 센터는 깊고 강렬한 호흡에 의해 자극된다. 경험이 깊어지면 그대는 호흡이 어느 지점을 강타하는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것이 다. 강렬한 호흡의 타격에 의해 성욕이 일어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대의 육 체는 오로지 성적인 경험에 익숙하다. 따라서 호흡이 가속화되고 '쿤다(kunda)' 를 때리면, 습관처럼 육체는 익숙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깊은 호흡이 즉각 섹스 센터를 자극한다고 느끼는 구도자들이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구제프(Gurdjieff)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자연스러 운 일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구제프의 근처에 있을 때 섹스 센터가 자극되는 것 을 느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구제프의 잘못이 아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때문에 크게 오해되고 비난받았다. 그를 비난하 는것은 잘못이다. 진실은 이렇다. 쿤달리니가 깨어난 사람의 진동은 주변 사람들의 쿤달리니에 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대의 쿤달리니는 섹스 센터 부근에 잠들 어 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의 진동이 그대의 섹스 센터를 때리는 것이다. 이것 이 첫 번째 접촉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깊고 빠른 호흡은 쿤달리니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차크라(chakra)' 라고 부르는 모든 센터는 쿤달리니의 이동 경로에 위치한 정거장이다. 바로 이 센터들을 통해 쿤달리니 에너지가 지나간다. 우리가 셀 수 있는 센터들은 많이 있으며, 그 숫자를 세는 데는 여러 가지 이 견이 있다. 그러나 대충 헤아려서 말한다면, 쿤달리니 에너지가 잠시 휴식하기 위해 정지하는 중요한 센터는 일곱 군데가 있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그 센터들과 접촉했을 때 효력을 미친다. 그 첫 번째 효과 는 그 중에 가장 활동적인 센터에서 느껴진다. 가령, 어떤 사람이 끊임없이 머리 를 쓰는 일을 한다면 깊은 호흡이 그의 머리를 무겁게 만들 것이다. 그에게는 뇌 센터가 가장 활동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호흡의 첫 번째 충격을 머리에서 느낀다. 성적인 사람은 성욕이 증가한 다.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의 사랑이 자극되고 고양될 것이다. 그리고 감정적인 사람은 더 감정적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 안에서 가장 활동적인 센터가 쿤달리니 에너지의 첫 번째 표 적이 된다. 뒤이어 다른 센터들도 영향받기 시작한다. 이 때 그는 자신의 퍼스낼 리티(personality)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예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많은 퍼스낼리티가 거주한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가장 활동적인 센터에 거주하는 하나의 퍼스낼리티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다른 센터가 열리면 마치 기존의 퍼스낼리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예전과 같은 사람으로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집 전체 중에 방하나 밖에 모르는 것과 같다. 이 때 그대의 마음 은 오로지 이 방 하나에 대한 인상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문이 열리고 다른 방이 나타난다. 이 때 집에 대한 마 음 속의 지도가 바뀔 것이다. 집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로운 개념이 들어설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센터들이 자극 받고 활성화될 때마다 그대의 퍼스낼리티에 새 로운 차원이 나타나 스스로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센터가 활성화되 면, 에너지가 센터 모두를 통해 원활히 흐르게 되면,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우리 의 퍼스낼리티 전체, 즉 전체적인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살지 못한다. 우리는 부분적인 삶을 살아간 다. 흔히 우리가 위치한 센터보다 상위의 센터들은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 다. 이 때 깊은 호흡이 그 센터 모두를 자극하고 활성화시킬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 또한 우리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아는 데 도움을 준 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다른 방향에서 센터들을 가격한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깊고 빠른 호흡의 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은 쿤달리니에 어떤 작용을 미치는 것 일까? 눈을 감고 나체의 여자를 상상하면 섹스 센터가 즉각 자극받는다. 그대는 상 상을 했을 뿐인데 섹스 센터가 활성화된다. 왜 그런가? 실제로 각 센터는 고유한 상상의 영역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어떤 상상 을 떠올리면 그 상상과 관련된 센터가 자극받는다. 그 센터가 즉시 활성화된다. 섹스를 생각하자마자 섹스 센터가 작용하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벌거벗은 실제의 여자보다 상상 속의 여자가 더 흥분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 이유는, 벌거벗은 여자에 대한 생각이 그대를 상상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그 상상이 섹스 센터를 즉각적이고도 강력하게 타격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벌거벗고 서 있는 여자는 그대를 이런 상상 속으로 끌고 들어가지 못 한다. 그녀는 너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녀의 현존은 외적인 영향밖에 미치 지 못한다. 그리고 이 영향은 상상의 영향만큼 깊지 못하다. 실제의 여자가 외부에서 그대를 자극하는 반면, 상상 속의 여자는 내부에서 그대를 자극한다. 그리고 외부에서의 공격은 내부의 공격만큼 강하지 못하다. 상상 속에서는 정력적이지만 실제의 여자 앞에서는 무능한 남자들이 많다. 상 상 속에서 그들의 정력은 끝이 없다. 상상의 힘은 내부로부터 센터에 직접 작용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여자가 주는 외적인 충격은 센터를 직접 건드리 지 못한다. 따라서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다. 인간은 마음 속에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통해 이 센터들을 더 효과적 으로 작용시킬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을 때 그대는 자신의 상상에 무엇인가 묻고 있다. 그 대는 의문을 일으킨다. 이 질문은 어떤 센터를 건드릴 것인가? 분명히 어떤 센 터를 건드린다. 그대가 질문을 던지고 의문으로 가득 찰 때, 그대의 세포 전체가 알고자 하는 갈증으로 타오를 때, 이 때 그대는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어떤 센터가 이 질문에 의해 타격받고 활성화 된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은 전에는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이미 알려지고 활성화된 센터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전에 그대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결코 이런 의문을 떠올린 적이 없 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갈망으로 불탄 적이 없다. 항상 '저 사람 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물었을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은 오랫동안 제기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지금까지 알려진 적도 없고 건드려진 적도 없는 센터를 가격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알려지지 않은 센터는 매우 기본적인 센터다. 왜냐 하 면 이 질문 자체가 매우 기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은 매우 기본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우리의 존재 전체와 그 깊은 심연에 연관되어 있다. 이 질문은 그 대를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데려갈 것이다. 과거의 모든 생을 넘어선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 질문은 그대가 존재했던 태초의 상태로 데려갈 것이다. 이 질 문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심오하다. 이 질문에 의한 내면의 여행 또한 깊고 심원하다. 따라서 이 질문은 가장 깊고도 기본적인 센터, 즉 쿤달리니를 타격할 것이다. 깊은 호흡이 신체적 영향으로 미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정신적으 로 영향을 준다. 이 질문이 마음의 에너지로 쿤달리니를 치는 반면, 깊은 호흡은 신체적 에너지로 쿤달리니를 친다. 두 가지 타격이 동시에 행해지면서 강한 효 과를 미친다. 보통의 경우, 센터를 가격하는 방법에는 이 두 가지밖에 없다. 다른 방법들도 있긴 하지만 다소 복잡하다. 이 일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의 현존 앞에서 이 일을 행하면 더 신속하고 강력한 효과가 발휘될 것이다. 그대가 감지하지 못 하는 제3의 방향에서 타격이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타격은 아스트랄 계에서 온다. 아스트랄 계에서 오는 이 타격은 신체적인 타격과 심리적인 타격보다 더 미묘하다. 강렬한 호흡은 신체적으로 센터를 가격 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심리적으로 센터를 가격한다. 그리고 그대의 아스트랄 체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사람의 현존 앞에서 이 일을 하면 제3의 여 행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혼자 명상하는 것보다는 50명이 함께 명상하는 것이 더 강력한 효과 를 미친다. 50명의 진지한 염원이 그들의 강렬한 호흡과 어울려 아스트랄의 분 위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새로운 전기적 진동이 사방에 흐르기 시작하고, 이 진 동이 다른 방향에서 그대를 가격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분명한 방향에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신체적인 방향 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방향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깊은 호흡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미친다. 이 질 문은 깊은 호흡보다 더 강하게 센터를 가격한다. 그러나 우리는 호흡으로 시작한다. 왜냐 하면 호흡은 육체에 속하는 일이므로 행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은 다소 어렵다. 이것 은 마음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몸으로 시작한다. 몸이 진동으로 가득 차면 그대의 마음은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을 준비가 된 다.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적당한 상황이 필요하다.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때나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은 별 효력이 없다. 모든 질문은 적당한 상황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그대의 몸 전체가 부들부 들 떨고 진동하기 시작하면 그대의 내면에 자동적으로 '이것이 무슨 일이지? 내 가 무엇을 하는 것이지?'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대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그대는 발을 들어올리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 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이 일어난다. 이렇듯 아무 노력 없이 모든 일 이 저절로 일어나면 육체와의 동일시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 때 '나는 누 구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이 모든 일이 육체가 행하는 것이고 나의 행위가 아니라면 누가 이 일을 행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그대와 육체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이 간격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 문이 그대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이것이 이 질문을 위한 적당한 상황 이다.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순간이 필수적이다. 모든 질문에는 적당한 타이밍(timing)이 있다. 적당한 순간을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아무렇게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사전 준비도 없이 아무때나 묻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아무렇게나 '나 는 누구인가?'하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허공 중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허공 중에 흩어질 것이다. 질문이 그대 안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틈, 열린 공간이 필요하다. 그 틈이 필수적이다. 깊은 호흡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타격이 쿤달리니를 일깨 운다. 그리고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과 더불어 이상한 경험들이 나타나기 시작 할 것이다. 그대가 과거 생에 겪은 경험 전부가 쿤달리니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 이다. 이 경험 전부가 쿤달리니에 축적되어 있다. 한때 그대는 나무였으며, 한때 는 물고기였고, 한때는 새였다. 이렇게 무한한 진화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얻은 경험 전부가 쿤달리니에 흡수 되어 있다. 따라서 쿤달리니 에너지가 깨어나면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대 는 이 경험들과 동일시될 것이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 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많은 미묘한 경험들이 쿤달리니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령, 나무 한 그루가 정원에 서 있고, 강한 비바람이 정원을 휩쓸고 지나간 다. 이 나무는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비와 바람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나무가 비를 어떻게 느끼는지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 은 불가능하다. 설령 나무 가까이 서 있다 해도 우리는 나무와 같은 방식으로 비바람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방식에 따라 비바람을 경험한다. 그러나 진화의 과정 중에 그대는 한때 나무였다. 그대내부에는 한때 나무로서 살았던 경험이 집약되어 있는 지점이 있다. 이 지점에 쿤달리니 에너지가 도달 하면 돌연 그대는 나무가 비바람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때 그 대는 두려워질 것이다. 큰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바다와 공기에 대해서도 똑같은 느낌을 경험할 것이 다.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미적인 감각과 다른 능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 이다. 반 고흐(Van Gogh)의 그림 중에 하늘을 뚫고 올라갈 만큼 큰 나무를 그린 작 품이 있다. 그 나무는 어찌나 높은지 별과 태양, 달이 저 아래에 놓여 있다. 그 들 모두가 나무의 발치에 놓여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만이 고독하게 무한정으로 뻗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누군가 반 고흐에게 물었다. "당신은 제정신인가? 어떻게 나무를 이렇게 그릴 수 있는가? 어떻게 나무가 별보다 높이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반 고흐가 대답했다. "당신은 나무를 알지 못한다. 당신은 나무의 내면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그러 나 나는 나무의 내면을 안다. 나는 나무의 깊이를 안다. 나무가 하늘의 별과 태 양, 달에 닿을 수 없다 해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거나 모든 나무 가 그렇게 높이 자라기를 갈망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무가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 것은 부당하다. 나무는 엄청난 염원과 갈망을 갖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을 맡큼 엄청난 갈망이다. 물론, 나무가 그렇게 높이 자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나무의 한계다. 그러나 나무의 영혼은 항상 더 높은 곳 을 비상하면서 가장 높은 하늘에 가 닿는다. 나는 그것을 안다." 반 고흐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나무는 하늘에 닿으려는 대지의 염원을 상징한다. 나무는 대지의 열망이다. 나무를 통해 대지는 하늘로 손을 뻗는다." 쿤달리니를 통해 우리는 나무와 같은 방식으로 비를 알게 된다. 물론, 이것은 지금 나무가 경험하는 것처럼 분명한 앎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모든 경험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한때 나무였든 여러가지 다른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명상 중에는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고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일별(一瞥)도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 에 무엇이 될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 쿤달리니의 길에 들어서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우주 의식(Universal Consciousness)의 역사가 된다. 개인의 삶이 끝나고 전체적인 의식의 갊이 펼쳐진다. 스리 오르빈도도 이런 견지에서 이야기하곤 했지만 이해가 가능하도록 분명하 게 말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쿤달리니의 길에 진입하여 우리의 삶은 한 개인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 의식 자체의 삶이다. 이 때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과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이 그대와 연결된다. 그 무한성 전체가 그대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 초의 씨앗이 끝도 없이 무한하게 자신을 표현해 내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무제한 으로 팽창한다. 이 팽창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뒤로도 무한하고 앞으로도 무한하다. 이렇게 자신이 끝도 없이 팽창하는 것을 알면 그대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대와 관계된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쿤달리니 안에 숨어 있다.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색채들이 그대 앞에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이 경험에 직면하면 그대는 밖에 있는 색채보다 내면에 있는 색채가 더 많다는 것 을 발견할 것이다. 무산한 생을 통과하는 동안 그대는 이 내면의 색채들을 경험했다. 전혀 다른 상황들 속에서, 전혀 다른 식으로, 그대는 이 색채들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하늘 을 나는 솔개와 땅위에 사는 우리는 전혀 다른 식으로 색채를 본다. 우리가 색채를 보는 방식과 미술가들이 색채를 보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우 리가 한 가지 색채를 보는 곳에서 그는 수천 가지 색채를 볼 것이다. 예를 들어, 초록은 한 가지 색이 아니다. 명암에 따라 수많은 초록색이 있다. 단 두개의 명암도 똑같지 않다. 모든 명암이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초록색은 초록색일 뿐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색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대략적이고 포괄적이다. 그 이상의 개념이 없다. 그러나 실제는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르다. 초록은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실 제로 그것은 수천가지 색이다. 모든 색이 그 안에 수많은 색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내면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는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감각적 지각의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매우 열등한 피조물이다. 동물과 새들 이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동물과 새들의 감각 기관은 매우 우수하다. 그들 의 감각적 지각은 깊이와 높이의 양 측면에서 아주 훌륭하다. 다만 그들의 약점 은 그것들을 의식 안에서 통합시키고 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의 감각과 예민함, 그들의 경험은 매우 깊고 심오하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가 있다. 이 새는 지진이 일어나기 24시간 전에 마을을 떠난다. 만일 마을에서 이 새가 보이지 않으면 주민들은 24시간 안에 지 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즉각 알게 된다. 우리가 가진 첨단 장비도 지진이 여섯 시간 앞으로 다가오기 전에는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새들의 예측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그들의 감각 능력은 너무나 뛰어나고 정확하다. 이 새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새기 때문에 그들이 사라지면 주민들은 지진이 오 고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린다. 이것은 이 새들이 임박한 지진의 미묘한 진동 을 감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마을을 떠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전생에 이 새였던 적이 있다면 쿤달리니의 수행 중에 전에는 느 껴 보지 못한 진동을 느낄 것이다. 사실, 그대는 오래 전에 그 진동을 경험했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쿤달리니의 각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대의 전생에서 일어났던 일 이다. 그렇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는 전에 본 적이 없는 색채를 보게 될 것이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카비르는 이것을 '나드(naad)', 죽 미묘한 소리라고 부른다. 카비르는 말한다. "오, 수행자여, 춤을 추어라. 감로수가 부어지고 있다." 그러자 수행자가 묻는다. "어디에서 감로수가 부어진단 말인가?" 카비르가 말하는 이 감로수는 밖에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적인 경험이다. 카비르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오, 수행자여, 들어 보라. 거대한 북의 나드(naad)를?" 다시 수행자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카비르가 그 소리를 들어보라고 계속 말하지만 수행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다. 그대 또한 카비르가 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대 또한 전에는 경험하 지 못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미묘한 느낌과 경험 전부가 쿤달리니와 관련되어 있다. 그대 또한 전에는 경 험하지 못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미묘한 느낌과 경험 전부가 쿤달리니와 관련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이 살아나 고 깨어나 사방에서 그대를 향해 밀어닥칠 것이다. 이것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 떤 사람이 미친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우리는 조용히 앉아 있는데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웃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비명을 지 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보통의 경우, 쿤달리니 에너지를 깨우는 데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베 번째의 길은 흔치 않다. 이 세 번째의 길이 삭티파트(shaktipat), 즉 에너지의 전이(轉移) 현상이다. 이것은 아스트랄계에 속하는 길이다. 이 깃에는 매개체(medium)가 필요하다. 매개체의 도움이 있을 때 그대는 더 강력한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매개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의 현존 (現存)만으론 충분하다. 그의 현존이 촉매로 작용한다. 무한한 에너지가 지금도 사방에서 침투해 들어오고 잇다. 무제는 그 에너지와 어떻게 접촉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붕에 피뢰침을 세워 둘 수 있다. 번개가 치면 그 에너지는 피뢰침을 통해 땅 속으로 흡수되고, 우리의 집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피뢰침이 없어도 번개는 집을 강타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 면 집이 파손될 것이다. 번개는 까마득한 시절부터 있었지만 피뢰침은 근래에 들어서 개발되었다. 번 개의 삭티파트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우리가 피뢰침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근 래의 일이다. 인간은 사방에서 무한한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다. 이 에너지를 영적인 성장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이 에너지를 실용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물론, 그대 자신이 직접 매개체 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입문 단계에서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삭티파트가 너무 강력해서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대 몸의 예민한 감각 기관 중 일부가 다칠지도 모른다. 모든 에너지는 일종의 전압(電壓)과 같은 힘을 갖는다. 이 전압을 그대가 견딜 수 있는 정도로 조절해야 한다. 이 때 매개체가 되는 사람은 그대가 견딜 수 있 는 정도에 맞추어 전압을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삭티파트의 매개체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이미 신성한 힘이 부 여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그대의 능력에 맞추어 그가 삭티파트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해야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필요한 것은 그의 현존이 전부다. 그의 현존 자체가 매개체로 작용한다. 매개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 는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전이를 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삶이 있다면 그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 삭티파트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 의 현존을 통해 삭티파트가 일어나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여기에 모인 구도자들이 어느 정도 깊은 명상의 경지로 들어가면 삭티파 트가 막강한 힘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코 어 렵지 않다. 이것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삭티파트는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돌연 그대는 생소한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에너지는 그대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쿤달리니의 상승을 경험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그대의 안에서 솟아오른다고 느 껴질 것이다. 그러나 삭티파트를 경험할 때는 그것이 외부에서 밀려드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물이 위에서 부어지는 경우와 저 아래로부터 차 오르는 경우처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대가 강 바닥에 서 있다고 하자. 발치로부터 물이 차 오르고 그대는 물에 잠긴다. 이것이 쿤달리니의 경험이다. 쿤달리니의 경험은 항상 이런 식으로 느껴 진다. 그대는 강물에 잠긴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엇인가 솟아오르고 그대는 거기에 잠겨 버린다. 그러나 삭티파트의 경험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다. 이것이 카비르가 '오, 수행자여, 감로수가 부어지고 있다.'고 말한 뜻 이다. 저 위에서 감로수가 쏟아져 내려 그대를 흠뻑 적신다. 이 두 가지 과정이 병행되면 그대의 진보는 한층 가속화될 것이다. 위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밑에서는 강물이 차 오른다. 그대는 양 방향에서 물에 잠기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거기에 어려 움은 없다. 삭티파트의 효력은 일시적입니까, 아니면 지속적입니까? 단 한 번의 삭티파트 가 우리를 여행의 목적지로 데리고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이상의 삭티파트 가 필요합니까? 그대 자신의 쿤달리니에서 솟아난 것만이 지속적인 효과를 가진다. 삭티파트 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삭티파트가 그대의 토대를 형성할 수는 없다. 삭티파트 는 결코 그대의 기본 토대가 될 수 없다. 그대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정한 자산이다. 오직 그대 안에서 솟아난 것만이 그대의 기본 자산이다. 삭티파트가 그대의 자산에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자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차이점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삭티파트로 인해 그대의 재산이 증대되지 는 않는다. 그러나 재산을 증대시키는 능력은 분명히 강화된다. 이렇듯 삭티파트는 그대의 자산이 아니다. 이것은 다음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대가 달리고 있는데 내가 권총을 들고 쫓아간다. 이 때 나의 권총은 그 대의 달리는 힘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를 더 빨리 달리게 만든다는 것은 분명하다. 달리는 것은 그대 자신이다. 달리기에 쓰이는 에너지는 그대의 에너지다. 그러나 권총의 영향을 받은 그대는 평소에 사용되지 않던 에너지까지 끌어올리게 될 것이다. 권총이 그대에게 에너지를 주지는 않는다. 또한 권총이 잃는 것도 없다. 조금 의 에너지도 손실되지 않는다. 나중에 실험해 보면 그대는 권총이 전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권총의 영향이 그대를 더 빨리 달리게 만 든다. 전에 그대는 한가하게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쏜살같이 달려간다. 이렇듯 삭티파트는 그대의 에너지 양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에너지가 팽창하고 증가하는 데 공헌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삭티파트의 작용은 번갯불과 같다. 반개가 그대의 길을 내내 밝혀 주지는 못 한다. 번개는 손에 든 램프와 다르다. 번개는 그저 순간적인 섬광을 줄뿐이다. 앞에 놓인 길과 주변 환경을 일별(一瞥)하는 기회를 줄 뿐이다. 그러나 이 찰나간의 일별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그대의 발걸음에 힘을 준 다. 그대의 의지가 강화된다.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결심이 강해진다. 잡시나마 그대는 길을 보았다. 이제 그대는 거기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자 신이 무작정 헤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순간적인 섬광에 의해 그대는 자신 이 가야 하는 깃을 일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목적지로 삼는 사원이 어느 방향 에 있는지 감지한다. 이 섬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대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에 묻힐 것이다. 그러나 번개가 치기 전과 똑같은 지점에 서 있다 해도 이제 그 대는 다른 사람이다. 이제 그대는 자신감을 갖는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 다는 것을 안다. 이제 그대는 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눈에는 보이지 않 지만 사원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그대는 확신을 갖는다. 자신감과 확신 이 생기고, 이 확신이 그대의 의지를 강화시킨다. 이렇듯 삭티파트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여러 번의 삭티파트가 필 요하다. 한 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두 번째 섬광으로 인해 길이 더 분명해질 것이고, 세 번째 섬광은 이보다 더 분명한 길을 보여 줄 것이다. 첫 번째 번개가 칠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섬광에서 보여질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대의 확신이 더 강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섬광이 그 대의 의지를 강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삭티파트를 통해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대 스스로 길을 걸어야 한다. 삭티파트가 없어도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이다. 삭티파트의 섬광이 없으면 그대의 자신감이 저하될 것이다. 용기와 힘을 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의심과 두려움이 몰려오고, 그대는 자신의 길과 방향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삭티파트가 실로 결정적인 도움 을 준다. 그대들이 좀더 진보하면 이 삭티파트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일어난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삭티파트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에게만 국한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삭티파트는 한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집단 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에 어려움은 없다. 왜냐 하면 한 사람이든 만 명이 든 그 곳으로 하강하는 에너지는 똑같은 양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걸리는 시간 도 똑같다. 인원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매개체와의 접촉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 삭티파트의 효과도 사라집니까? 그 효과는 당연히 감소한다. 영향력이 점차 줄어든다. '영향'이 라는 말 자체가 외적 요인에 의한 효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내부에서 솟아난 에너지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에너지는 그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온 에너지는 감소하고 사라진 다. 그러나 그대의 내부에서 온 것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남을 것이 다. 삭티파트의 영향력 아래 솟아오른 에너지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그대의 기 본 자산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나 삭티파트의 영향력은 사라진다. 주변의 좋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기본 에너지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 까? 그 때 우리는 더 낮은 상태로 추락합니까? 추락하거나 퇴보할 길은 없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추락하거나 퇴 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그대가 도 달한 지점에서 더 위로 올라가거나, 그 상승이 방해를 받는 것은 가능하다. 그 자리에 그냥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도달한 지점에서 그대를 끌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엔 이 유가 있다. 위로 상승할 때 그대는 완전히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이미 이루 어진 성장을 취소하거나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에서 후퇴나 퇴보는 불 가능하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교사가 그를 가 르쳐 2학년 때 배운 것을 잊어버리게 할 수는 없다. 아이가 2학년에 올라간 후 우둔한 친구들과 있게 된다면 그 영향으로 인해 계속 낙제를 할 수는 있다. 그 러나 우둔한 친구들이 그를 1학년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가 3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계속 2학년에 머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를 다시 1학년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3학년 으로 올라가는 데 낙제하고 2학년에 머물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영적인 삶의 길에 퇴보는 없다. 다만 진보나 정체(停滯)가 있을 뿐이다. 그대 가 추락이나 퇴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정체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퇴보 는 일어나지 않는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정체(停滯)가 최악의 경우다. 삭티파트와 은총(grace)은 다른 것입니까? 다르다. 실로 큰 차이점이 있다. 삭티파트와 은총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삭티파트는 일종의 테크닉(technique)이다. 이 테크닉은 조정과 계획이 가능하 다. 삭티파트는 계획되고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 말 뜻을 이해하는가? 삭티파트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 따른 다. 구도자가 그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올바른 상태에 있어야 하고, 매개체가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 두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삭티파트가 일어 난다.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다. 반면, 은총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현상, 뜻밖의 현상이다. 은총을 불러들이 는 것은 불가능하다. 은총은 우리가 계획을 세우거나 일을 꾸밈으로써 일으킬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은총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일어난다. 은총은 저절로 일 어나는 현상이다. 삭티파트와 은총의 차이점은 전기와 번개에 비교될 수 있다. 삭티파트가 전깃 불이라면 은총은 번갯불이다. 전기 스위치를 누르면 즉시 불이 켜진다. 그러나 번갯불은 저절로 일어난다. 번개의 에너지는 전기불 안에서 작용하는 에너지와 동일한 에너지다. 그러나 번개를 일으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 안의 전기는 도구나 기술에 의해 조정할 수 있지만 번갯불은 조정이 불가능하 다. 은총은 하늘의 번갯불과 같다. 아주 드물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일어난다. 그 순간에 그대가 수용적인 상태로 있다면 은총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삭티파트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에너지는 동일하지만 은총은 삭티파트와 매우 다르다. 또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은총에는 매개자가 필요없다. 은총은 그대에게 직접 내려온다. 그 중간에 매개체 역할을 하는 다른 명상가가 필요없다. 은총은 그대 를 향해 직접 내려온다. 그리고 은총은 돌발적인 현상이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 이다. 은총을 위해 어떤 준비를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삭티파트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준비를 갖출 수 있다. 나는 '삭티파트를 위해 내일 오후 다섯 시에 적당한 준비를 하고 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은총은 경우에, 오후 다섯 시에 오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은총은 경우에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은총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 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밖에 있다. 우리가 다루거나 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차이점을 제외하면 삭티파트와 은총은 똑같다. 삭티파트가 무아(無我)의 상태에서만 일어난다면 어떻게 삭티파트를 위한 준 비가 가능합니까? 무아의 상태에서 준비가 행해질 수 있다. 에고는 이 준비와 무관하다. 에고 없 는 상태에서의 준비는 분명히 가능하지만 에고는 이 준비와 전혀 상관없다. 가 령, 우리가 내일 아침 다섯 시에 삭티파트를 준비하기로 결정했을 때, 구도자들 에게는 에고 없는 무아의 상태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매개체에는 그것이 요구된다. 그는 무아의 상태라야 한다. 무아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어떤 때는 에고가 있고, 어떤 때는 에고가 없 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대에게 에고가 없다면 영원히 에고가 없는 것이다. 만일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니라면 그대는 에고가 있는 것이다. 지금 내게 에고가 있으 면 있는 것이고, 지금 내게 에고가 없으면 없는 것이다. '내일 아침 다섯 시에 나는 무아가 될 것이다.'하고 결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럴 방법이 없다. 지금 당장 네게 에고가 없다면 나는 내일 아침 다섯 시에도 에고가 없을 것이다. 그 순간에 내가 삭티파트를 계획하든 말든, 그대들이 오든 말든, 내가 잠을 자든 깨 어 있든 상관 없다. 이런 상황과 관계없이 나는 에고가 없을 것이다. 만일 지금 내게 에고가 없다 면 나는 내내 무아의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에고가 있다면 나는 에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등급(degree)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무아는 등급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체온이 화씨 98도일 때 우리는 그가 정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체온이 99로 올라가면 우리는 그에게 열이 있다고 말한다. 98도 역시 열이 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상적인 열이라고 부른다. 99도에 이른 열은 비정상 이다. 98도로 내려와야만 정상이다. 정상과 조금만 차이가 나도 문제가 된다. 98 도 역시 열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정도의 열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정상이라고 불린다. 우리의 에고도 이와 마찬가지다. 에고는 우리의 열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 른 사람들과 똑같은 정도의 에고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겸손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상 온도인 98도에서 조금만 차이가 난다면....... 가령 어떤 사람이 99도의 에고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에고이스트(egoist) 고 건방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면, 어떤 사람의 에고가 97도로 내려간 경우에 우리는 그를 겸손한 사람, 위대한 마하트마(mahatma)로 부른다. 그러나 에고와 무아는 서로 전혀 다른 상태다. 등급이나 정도의 문제가 아니 다. 이것은 열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지, 98도냐 99도냐 하는 문제가 아니 다. 사실, 우리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만 열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몸이 살아 있는 한 열은 반드시 있다. 다음에 그 열이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98도는 정상 이고 99도는 비정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열의 경우 우리는 신체적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병으로 경험한다. 에고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이 있다. 어떤 사람의 에고가 우리의 에고에 상처 를 주면 우리는 그를 에고이스트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에고가 우리 의 에고를 편하게 하고 만족시켜 줄 때 우리는 그를 에고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우리가 그것을 아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내세우며 거만한 태도로 말하면 우리는 그를 에고이스트라고 말한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 내게 와서 엎드려 절하면 우리는 그를 겸손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측정하는 기준 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에고를 측정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 있다. 우리의 에고에 상처를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에고'다. 만일 누군가 우리의 에고에 상처를 주면 그는 에고이스트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에고를 만족시키면 그는 성자고 겸손한 사람이다. 언제나 우리의 에고가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다른 사람이 에고이스트인 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에고다. 우리가 진정한 무아(無我)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우리는 오직 정도나 등급의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 에고에 관 해서고 마찬가지다. 등급이 없는 것에서 우리는 이해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무 아를 아는 것이 어려워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삭티파트에서 매개체는 에고가 없어야(egoless) 한다. 사실, 이 'egoless'라는 단어는 옳지 않다. 매개체는 무아(no-ego)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 다. 명심하라. 그런 사람에게는 하루 24시간 내내 은총이 쏟아져 내린다. 그는 그 대 또한 그 은총을 맛볼 수 있는 기호를 마련할 것이다. 그 자신에게는 끊임없 이 은총의 감로수가 쏟아져 내린다. 이것이 그가 그대를 준비시킬 수 있는 이유다. 그대가 잠시 동안 문을 열어 놓았을 때 그 열린 틈을 통해 한두 방울의 감로수가 그대안으로 흘러든다. 그는 이렇게 그대를 준비시켜서 감로수를 맛보게 한다. 직접적인 은총의 효과는 영구적입니까? 그 효과가 우리를 궁극적인 경지로 이 끌 수 있습니까? 직접적인 은총은 궁극적인 경지에서만 쏟아져 내린다. 그 전에는 안 된다. 그 대의 에고가 사라져야만 은총이 찾아온다. 에고는 궁극적 달성으로 사는 길에 놓인 유일한 장애물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달성의 경지에는 더 이상 달성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쿤달리니 수행은 신체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영적인 것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신체적인 행위다. 그러나 음식을 먹 지 않으면 조만간 영혼이 육체를 떠날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안다. 영혼이 육체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 육체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쿤달리니는 신체적 현상이지만 그대가 영혼 에 도달하려면 쿤달리니가 적합한 상태에 놓여야 한다. 쿤달리니가 적합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영혼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 라서 쿤달리니는 신체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쿤달리니 자체는 영적인 것이 아니다. 누군가 쿤달리니를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이 것은 먹는 행위를 영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먹는 행위는 신체적 행위 다. 그러나 그 행위는 영혼을 위한 토대로서 봉사한다. 호흡은 물리적 행위다. 생각 또한 그렇다. 호흡과 사념은 물질이다. 그러나 이 것은 구도자가 영적인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한다. 그들은 다이빙 을 위한 도약대로 작용한다. 이것은 물에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이 점프대에 서 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점프대는 물이 아니다. 물에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이 왜 그 위에 서야 하는 가? 물 속에 서면 안 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물로 뛰어들려면 먼저 점프대에 서야 한다. 점프대를 이용해야 물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런데 점프대는 우리가 뛰어드는 물 과 전혀 별개다. 점프대는 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육체와 마음을 통해 영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점프가 행해져야 한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지점으로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몸과 마 음을 점프대로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점프가 행해지면 그대는 영적인 세 계에 도달할 것이다. 당신은 명상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초기에는 우리에게 이완과 평정, 침묵과 주시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강렬한 호흡법을 사용하면서 여기 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의 명상법을 수행해 온 구도자들은 지금의 이 방편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어렵다고 느낍니다. 두 가지 방편 중 어느 쪽이 좋습니까? 여기에 좋고 나쁨의 문제는 없다. 나는 그대가 말하는 요점을 이해한다. 그러 나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방편이 더 많은 평화와 진보를 가져다주는지 그대 스스로 찾아내라. 모 든 사람이 똑같을 수는 없다. 사람마다 적합한 명상법이 다르다. 지칠 때까지 달리기를 한 후에야 릴랙스(relax)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 고 이런 과정이 필요없이 즉각적으로 릴랙스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런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곧장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것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릴랙스하기 전에 상당한 움직임과 긴장의 과정이 필수적으 로 따른다. 그러나 두 가지 방편의 목적은 똑같다. 두 방편 모두 그대를 똑같은 목적지로 인도한다. 릴랙스되는 것이 그 목표다. 깊고 빠른 호흡을 설명하면서 당신은 이것이 극단을 통한 변형의 방편이며, 완벽한 이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긴장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쿤달리니 사드하나(sadhana)를 긴장의 방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것은 긴장의 사드하나(sadhana)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긴장을 통한 수행법 이다. 사실, 모든 '삭티 사드하나(shakti sadhana), 에너지를 일깨우는 모든 수행 법은 긴장을 통한 수행법이다. 에너지 자체가 긴장을 의미한다. 에너지는 긴장을 통해 창조된다. 우리는 원자(atom)를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긴장 상태를 초래함으로써 막대 한 에너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에너지 수행법은 긴장을 통한 수행법이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긴장 자체가 에너지다. 당신은 두 종류의 사드하나, 즉 능동적 사드하나와 수동적 사드하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쿤달리니 사드하나는 어느 쪽입니까? 이것은 능동적인 수행법이다.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사드하나다. 붓다가 쿤달리니와 차크라(chakra)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 까? 이 질문이 오늘 저녁 강의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사실, 붓다의 말 모두가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장 큰 문제다. 붓다의 가르침 중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기록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그 의 가르침이 기록된 것은 붓다가 죽은 후 5백 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이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붓다의 제장니 비구들 (bhikkhus), 그 가르침의 수호자였던 비구들은 그것을 글로 기록하는 것을 5백 년 동안 거부했다. 그 다음에 이 비구들이 지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때가 왔다. 그래서 대규 모의 회합이 열려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비구들을 통해 기록을 남 겨 놓지 않음은 붓다의 가르침이 영원히 사라질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오랫동안 기억을 통해 구정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제자 들은 그 가르침을 기록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마하비라와 예수의 경우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주 필수적인 일이었다. 붓다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이 기록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입을 통해 가르침을 폈으면,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수준의 구도자들에게 서로 다른 말들이 행해졌다. 그리고 초심자에게는 그 말들 전부가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말들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우리보다 앞선 단계에 대한 가르침이 귀에 들어 오 면, 그 가르침은 배우는 자로서의 우리 위치를 흔들어 놓을 뿐이다. 앞 단계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정작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과제를 무시해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첫 단계조차 제대로 내딛지 못한다. 문제는 또 있다. 첫 단계에는 핵심적이었던 많은 것들이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릇되고 무용(無用)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진보한 수행자들에게 가르쳐진 것을 초심자들이 너무 일찍 알게 됨을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가르침을 진지하고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앞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단계에 정체될 것이다. 자신이 처한 단계에서 주어지는 가르침을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만 올바르게 배우고 앞으로 진보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알파벳을 배울 때 우리는'God의 G'라고 말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 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G'는 goblin(악귀, 도깨비)에도 속하는 알파벳이다. 그리고 신과 도깨비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은 같은 단체에 속하지 않는다. 사 실, 'G'는 God나 Goblin어느 쪽과도 무관하다. 그러나 알파벳을 배우는 아이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이 멍청아! 'G'가 God하고 무슨 상관이야? G자가 들 어 있는 단어는 수없이 많아. God에만 속하는 글자가 아니란 말이다!'하고 말한 다면 아이는 결코 알파벳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이에게 'God의 G'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G자와 상관있는 다른 단어들은 버려라. 아이는 God의 G자를 배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중에 아이는 무수한 단어들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G자가 God에만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G자가 들어 있는 단어는 God 외에도 수없이 많다. 그 때가 되면 아이는 'God'라는 단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G자를 알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길에는 각기 다른 수준에 속하는 것들이 무수하게 많다. 그리고 그것 들 중에는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들도 있다. 지금 내가 그대들에게 하는 모든 말은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대중을 상대로 말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말할 것 이다. 붓다는 많은 말을 했지만 그 말들 모두가 기록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내 가 하는 말도 모두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모든 말이 기록될 수는 없다. 대중을 상대로 할 때 나는 기록으로 남아도 아무 해가 없는 말만 할 것이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보존되어야 하는 것들은 결코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일정한 자격을 갖춘 개인들에게만 전해 줄 것이고, 그들은 그것 을 기억 속에 보존할 것이다. 당신 말씀은 쿤달리니와 차크라에 대한 문제가 비밀로 다루어져야 하고 결코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문제는 다른 사항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 며칠 동안 쿤달리니와 차크라에 대해 내가 말한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거기엔 아무 어려움이 없다. 나의 어려움은 붓다와 우리 사이에 2천 5백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점이다. 이 간격이 큰 차이를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의 의식이 성장했다. 나는 붓다가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 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천 5백 년 동안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나는 붓다가 비밀로 지켰던 많은 것 들이 이제는 공개적으로 가르쳐질 수 있다고 본다. 지금 내가 비밀로 여기는 것들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 끊임없이 진보한다면 이 비밀들도 2천 5백 년 후에는 공개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가? 설령 붓다가 돌아온다 해도 그는 예전에 비밀로 지켰던 많은 것들을 대중에게 공개할 것이다. 붓다의 탁월한 이해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예가 있다. 그는 열한개의 질문을 뽑아 놓고,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 정해 놓았다. 이런 질문이 제기되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틀린 대답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고, 옳은 대답 을 내놓는 것은 질문자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명이 불가능한 열한 개의 질문을 금지시켰다. 붓다가 마을로 들어가기에 앞서 '아무도 이 열한 가지 질문은 한가지도 물어 서는 안 됩니다. 붓다는 거기에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발표가 이루어졌다. 아무도 붓다를 난처하게 하지 말라는 공표가 있었다. 붓다가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를 거부한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만일 그가 답했다면 그 답은 질문자에게 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답하지 않을 경 우에 붓다는 자신이 진리를 숨기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러 므로 최선의 길은 애초부터 그런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 비구들은 사전에 마을을 돌면 북소리로 붓다의 방문을 알렸다. 그리고 이 열 한 가지 질문은 붓다를 난처하게 만들 것이니 절대 묻지 말라고 일러 두었다. 모든 사람이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대답될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되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붓다를 반대하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고집하면 붓다는 '얼마 동안 수행하면서 기다려라. 그대가 자격을 갖추면 그 때 가서 대답해 주겠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이런 질문에 답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붓다를 비난하 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트집잡았다. 자이나 교인과 힌두 교인들은 붓다가 이런 질문에 응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붓다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경전에는 모든 해답이 나와 있다.'고 말했다. 사실, 붓다가 마음만 먹는다면 경전에 나온 해답을 되풀이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옳은 대답은 경전에도 씌어 있지 않다. 그 대답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진실이 다. 그러니 붓다가 쿤달리니와 차크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를 묻지 말라. 이제 명상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최근 열린 나르골(Nargol)명상 캠프에서 당신은 쿤달리니 사드하나가 몸을 준 비시키는 방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 니다. 먼저, 깊은 곳에서 볼 때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둘 사이의 차 이점은 매우 표피적이다. 이에 관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경험하면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보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보게 된다. 실제로, 영혼 중에서 감각에 의해 감지되는 부분이 육체고, 육체중에서 감각적 으로 인식되지 않는 부분이 영혼이다. 육체의 비가시적인 부분이 영혼이고, 영혼의 가시적인 부분이 육체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궁극적 경험에 도달했을 때만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육체와 정신이 동일하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irony)한 일이다. 이 일반적인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혼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는 육체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환상과 보편적인 믿음도 위에서 말한 기본적인 진리에서 나왔다. 이 환상의 배후에는 진리가 숨어 있다.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 깊은 곳에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하나라는 것을 알수 있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라는 이 보편적 개념은 두 가지 개념은 두 가지 오류에서 나왔다. 한편에는 '오직 영혼이 존재할 뿐 육체는 없다.'고 주장하는 유심론자들 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차르바크와 에피쿠르스처럼 '오직 육체가 존재할 뿐 영 혼은 없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들이 있다. 두 가지 오도된 개념,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가지 개념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 되어 있지 않다는 동일한 인식에서 나왔다. 그리고 유물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지하다고 일컫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을 육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내면의 여행이 시작되면 육체와 영혼이 동일하다는 믿음은 산산 이 부서질 것이다. 그대는 그 둘이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것이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그대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된 실체로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행의 중간 단계에서 일어나는 경험이다. 더 깊이 들어가 궁 극적인 경험에 도달하면 그대는 육체와 영혼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다. 그들은 하나며 동일하다. 그들은 똑같은 실체의 다른 형상일 뿐이다. 이것은 내가 두 손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 나의 왼손과 오른손 이 하나며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그의 말은 틀린 것이 된다. 왜냐 하면 왼손과 오른손은 분명히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손이기 때문이다. 내 게 더 가까이 와서 보는 사람은 나의 왼손이 오른손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오른손이 아플 때 왼손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 오른손이 잘 려가도 왼손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두 손은 분명히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내면으로 들어와서 보는 사람은 내가 한 사람이며 두 손 모두 내 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왼손이 부러져도 상처를 입는 것은 '나'고, 오른 손이 부러져도 상처를 입는 것은 '나'다. 왼손이 위로 올라가면 그 손을 들어올 린 사람은 '나'고,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도 그 손을 들어올린 사람은 '나'다. 궁극적인 경험 속에서 육체와 영혼은 별개가 아니다. 육체와 영혼은 동일한 진리의 양 측면일 뿐이다. 이것은 두 손 모두 내게 속하는 것과 같다. 내가 이런 예를 든 것은 그대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 중 어느 쪽에서라도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육체로부터 출발해서 깊이 들어간 사람은 궁극적으로 영혼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나의 오른손을 잡고 흔드는 것과 같다. 조만간 그는 나의 왼손에 도달할 것이다. 다른 방향을 원하는 사람은 영혼으로부터 직접 출발할 수 있다. 마지막에 그는 육체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매우 어렵다. 왜 냐 하면 우리는 영혼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육체적인 차원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로부터 출 발해야 한다. 영혼에서 곧장 출발하는 방편들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방 편들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용하다. 백만 명 중 한 사람 정도가 이런 방편 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육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여행은 오직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부터 출발이 가능하다. 육체로부터 출발하는 이 여행의 토대가 쿤달리니다. 쿤달리니는 육체에 관한 한 가장 깊은 경험이며, 육체적 경험의 가장 기본적 중심이다. 사실, 육체는 우리 나라 생물 학자들이 아는 차원에 국한되자 않는다. 육체는 그 이상이다. 선풍기를 예로 들어보자. 선풍기를 분해해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대는 전기 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지적인 사람은 선풍기를 분해해 보고 '선풍기 안에 전기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는 선풍기의 어는 부분에서도 전기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을 때 그 선풍기는 분명히 전기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전기가 끊기는 즉시 선풍기는 멈춘다. 생물 학자들은 육체를 분해해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쿤달리니를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쿤달리니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쿤달 리니라고 부르는 전기적인 에너지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선풍기가 전기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같다. 외부적인 해부에 의해서는 절대를 쿤달리니를 발견할 수 없다. 분해의 과정 중에 이 에너지가 해체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는 내적 경험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육체를 아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육체를 해부하는 생물 학자들처 럼 외부에서 아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길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내부로부터 육체를 아는 것이다. 육체의 내부로 깊이 들어간 사람은 그 내부로부터 육체를 안다. 내부로부터 육체를 알기 시작한 사람은 ...명심하라. 우리는 오직 외부로부터 육체를 안다. 우리 자신의 육체조차 오직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대가 자신의 왼손을 안다 해도 그것은 그대의 눈이 보는 바에 의해 아는 것이다. 따 라서 자신의 왼손에 대한 그대의 앎은 생물 학자들의 앎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고 나의 왼손을 느낀다면 이 내적인 느낌은 나만의 경험 이다. 내부로부터 자신의 육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곧 육체의 모든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진원지, '쿤다(kunda)' 라고 불리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이 쿤다에 잠들어 있는 에너지가 쿤달리니다. 육체의 내부로 들어간 사람은 모든 것이 이 곳에서 솟아 나와 몸 전체로 퍼져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작은 등불 하나가 방 전체를 밝히는 것 과 같다. 방 전체에 퍼져 있는 빛의 진원지를 살펴보면 그대는 등불과 마주칠 것이다. 그 하나의 불꽃에서 보든 빛이 퍼져 나왔다. 한 곳에 놓여 있는 등불이 방 전체에 빛을 뿌려 준다. 이 곳에서 우리는 생명의 에너지가 솟아올라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특정한 지점을 찾고 있다. 이 생명의 에너지는 중심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떠한 에 너지도 진원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태양은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지만 그 빛은 우리에게까지 도달한다. 우리는 이 빛을 증거로 삼아 빛이 발산되는 진원지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에너지도 근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증상이 없다면 어떻게 원 이 있을 수 있겠는가? 원이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중심이 있다. 우리의 몸이 에너지의 집합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다른 증거가 필요 없다. 일어서고, 앉고, 움직이고, 정지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이 에너지의 집합 체다. 이 에너지가 항상 일정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활동적이고 정력적 이지만, 때로는 침체되고 무기력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을 때 그대는 평 소에 엄두도 못 내는 커다란 바윗돌을 번쩍 들어 던질 수 있다. 두려움을 느낄 때 그대는 올림픽 선수도 시기할 만큼 쏜살같이 도망갈 수 있다. 이렇듯 그대의 에너지는 항상 똑같은 상태에 있지 않다. 이 에너지는 그대를 둘러싼 주변 여건에 따라 다르게 가능하다. 이것은 에너지의 저장 창고가 있음을 증명한다. 이 저장 창고로부터 필요에 따라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거나 가라앉는다. 필요할 경우 에너지는 활성화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곳에서 휴면 상태로 존재한다. 그대는 비상 상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이 진원지에서 에너지를 끌어올린 다. 그러나 이 에너지의 저수지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항상 만수위로 차 있 다. 이 저수지를 고갈시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백 퍼센트 활용하지 못한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분야를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천재로 알려진 비범한 사람들도 그들이 가진 에너지의 15퍼센트 이상 활용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역사에 커다란 업적 을 남긴 위대한 사람들도 이 15퍼센트라는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일반인 들은 이 에너지를 2퍼센트에서 2.5퍼센트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한다. 나머지 98 퍼센트는 그대로 남는다. 잠재된 에너지의 양으로 보면 비범한 사람과 일반인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 다. 그 에너지의 활용 정도가 다를 뿐이다. 똑같은 에너지가 아주 평범한 사람들 에게도 들어 있다. 다만 사용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이란 자신의 에너지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자신 이 가진 에너지를 자극하고 활용화시키지 않았다. 그는 표면에 나타난 에너지에 만족하고, 그것을 자신이 지닌 에너지의 최대치로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 은 최소치에 불과하다. 막대한 잠재력이 그대로 묻혀 있다. 위험한 순간에는 평 범한 사람도 엄청난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그런 순간 에 처해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잠재력에 대해 알게 된다. 우리 안에는 이 에너지가 잠복해 있는 센터가 있다. 이 에너지는 씨앗의 형태 로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발현될 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에너지가 휴먼 상태로 존재하는 곳을 우리는 '쿤다(kunda)'라고 부른다. 이 '쿤다'라는 단어는 의미 심장하다. 이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잔물결 하나 없는 고요한 연못'을 뜻한다. 잔물결 하나만 일면 에 너지가 활성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쿤다'라는 말은 그 안에 담긴 에너지가 아무 움직임 없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모든 것이 깊이 잠들어 있다. 완벽하게 수동적이고 고요하며 휴식에 잠긴 상 태다. 다른 하나의 의미는 '모든 것이 깊이 잠들어 있지만 언제라도 깨어날 수 있는 곳'을 뜻한다. 쿤다는 메마르고 텅 빈 연못이 아니다. 죽은 연못이 아니다. 그곳은 가득 차 있다. 지금 당장은 잠들어 있지만 언제라도 활성화되고 역동적으로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에너지를 감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는 활성화되고 각성된 에너지만을 감지한다. 이 에너지의 활성화된 부분만이 우 리의 의식에 들어오고, 활성화되지 않은 부분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 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그 위대함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이 에너지를 자각하지 못했다. 마하비라, 붓다, 크리슈나, 예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위대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잠재성을 알지 못했다. 그런 까닭으로 내면에 돌연한 각성이 일어난 사람은 그것을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은총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 선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 선물이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만일 스승이 가장 가까이 있다면 그는 이 선물이 스승에게서 왔다고 말할 것 이다. 그리고 신상이 가장 가까이에 있다면 그는 그 신상에게 모든 영광을 돌릴 것이다. 내적인 사건의 바로 전에 선행하는 것이 이 사건의 진원지로 여겨질 것 이다. 붓다 또는 하늘의 신이 그 진원지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근원에서 나온다. 다만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근원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스승이나 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외부의 대리인에게서 이 선 물이 왔다고 여긴다. 어제 나는 한 일화를 읽었다. 두명의 농부가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산골 사람인 그들은 생일이 같았 다. 그들이 생일을 맞았을 때 마을 사람들은 가장 좋은 생일 선물이 무엇일까? 하고 궁리했다. 마침 가까운 지방에 기차가 들어왔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 기차 여 행을 시켜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농부는 기차표 두 장을 선물로 받아 생애 최초의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신기하고 흥 미로웠다. 기차가 역에 정차했을 때 음료수를 파는 노점 상인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일단 한 병을 사서 나눠 마시기로 했다. 맛이 좋으면 한 병을 더 살 심산이었다. 한 병이 먼저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가 절반 정도 마셨을 때 기차가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한 명은 친구가 자기 음료수까지 다 마셔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가 병을 낚아채면서 소리쳤다. "다 마시지마!" 그러자 먼저 음료수를 마신 사람이 말했다. "손대지마! 이건 독약이야. 이걸 마시고 내 눈이 멀어 버렸어!" 기차가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사방이 깜깜해졌고, 농부는 이 음료수 때문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음료수, 즉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눈을 멀게 한 원인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것은 자유로운 일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선행하는 것이 그 사건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근원을 모른다. 그리고 에너지가 깨어있 지 않는 한 그 에너지를 아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이 에너지의 근원이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 에너지가 얼마만큼 활용될 수 있는지 모른다. 이 잠자는 에너지, 즉 쿤다 중에서 각성된 부분이 '쿤달리니'라고 불린다. 쿤다 자체는 무의식적이다. 그것은 잠들어 있다. 그러나 쿤달리니는 의식적이며 깨어 있다. 쿤다로부터 깨어나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쿤달리니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쿤다의 전부는 아니다. 쿤달리니는 쿤다의 연못에 이는 작은 물결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탐험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각성된 에너지인 쿤달리니는 그 대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근원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쿤달리니는 그것을 알려주는 전령일 뿐이다. 쿤달리니, 즉 쿤다에서 나온 한 줄기 빛은 그 뒤를 따라 무한정의 빛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각성된 쿤달리니는 그대의 몸에 있는 에너지를 의식 하게 만든다. 이 각성된 에너지를 갖고 그대는 육체의 센터들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센터 들을 통해 육체의 비 가시적인 부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기가 쉬 워진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에너지다. 이 에너지가 특정한 센터를 통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귀도 그런 센터 중 하나다. 우리는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 다. 그러나 귀에 이상이 생기면 소리를 듣는 것이 어려워진다. 귀에 도달하는 것 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 에너지는 다시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서서히 에너 지는 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중단한다. 에너지는 자신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곳 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의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귀가 먹은 사람이 손가락을 통해 들을 수 있기를 강렬하게 염원하면 실제로 그의 손가락이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이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귀가 아닌 다른 기관을 통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눈이 아닌 다른 기관을 통해 사물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까 마득한 시절부터 인간은 사물을 보기 위해 눈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부분을 사용 해 왔다. 인류 최초의 인간이 사물을 보려는 목적으로 이 부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신체의 다른 부분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신체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는 동물들이 있다. 그 결과 그들의 눈은 신 체의 다른 부분에 달려 있다. 동물과 새, 곤충들 중에서 진짜 눈과 가짜 눈을 가진 것들이 있다. 그들은 진 짜 눈을 통해 보고, 가짜눈은 적을 속이는 역할을 한다. 적의 공격에 의해 눈이 다쳐도 진짜 눈은 살아남는다. 집 안에서 흔히 보는 파리는 천 개의 눈을 갖고 있다. 하나의 눈은 실제로는 천 개의 눈을 갖고 있다. 하나의 눈은 실제로는 천 개의 눈이 모인 집합체다. 파리가 보는 능력이 놀라울 만큼 뛰어난 까닭이 그것 이다. 어떤 물고기는 꼬리를 통해 사물을 본다. 적이 뒤쪽에서 공격하는 것을 방 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의 눈을 연구하면 우리는 눈이 반드시 지금과 같은 위치에 놓여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귀도 마찬가지다. 귀가 지금과 같은 위치에 달려 있는 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 다. 귀 또한 아무데나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눈과 귀가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그 지점을 통해 듣고 보는 것을 수없이 되풀이한 결과다. 자연히 그 지점 에 관한 기억이 의식 속에 깊이 각인 되었고, 육체가 그 특정한 지점에 보고 듣 는 기관을 발전시킨 것이다. 만일 많은 감각 기관 중에 하나를 잃는다면 우리는 그 기관을 통해 인식하는 세상의 일부를 놓칠 것이다. 눈을 잃으면 우리는 빛의 세계를 알 수 없을 것이 다. 빛에 대한 경험이 사라질 것이다. 귀와 손 등 다른 기관이 아무리 예민해도 빛의 세계가 닫혀 버릴 것이다. 쿤달리니가 깨어나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그 에너지는 신체의 다른 문을 두드 린다. 그 문은 일상적인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는 이 초감각적인 문을 통해 일반적인 감각 기관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쿤달리니가 그대의 내적인 감각 기관 을 두드리고 일깨우는 것이다. 지금도 쿤달리니 에너지는 눈과 귀 등 일상적 감 각 기관을 통해 작용하고 있다. 아주 소량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이 외부적 감각 기관을 작용시킨다. 그런데 이 에너지의 양이 증가하면 그대는 다른 센터들을 작동시킬 수 있는 여분의 에너지를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이 마루바닥에 소량의 물을 쏟아붓는다고 하자. 이 물은 하나의 수 로를 만들 것이다. 더 많은 물이 따라서 흐를 수 있도록 하나의 통로를 만들 것 이다. 그러나 물의 양이 갑자기 증가하면 이 수로는 여러 갈래로 분산된다. 기존 의 수로만으로는 그 물 전부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은 기존의 수로가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에너지를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에너지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경로와 문을 찾을 것이다. 그 결과로써 새롭고 미묘한 감각들이 깨어나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 초월적인 센터들은 그들에게 텔레파시나 투시 능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대 는 눈과 귀로는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듣기 시작할 것이다. 전혀 새로운 감각 기관이 작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새로운 감각들의 활성화에 따르는 가 장 중요한 결과는, 그대의 몸속에 숨어 있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다. 그대의 몸 중에서 가장 미묘하고 자각하기 힘든 부분, 우리가 아트만(atman) 또는 영혼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알게 된다. 쿤달리니의 각성과 더불어 그대의 성장 가능성은 크게 배가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먼저 육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말하지 않은 또 하나의 길이 있다. 흔히 우리는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쿤달리니가 쿤다의 전부는 아니다. 쿤달리니의 각성 과는 다른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말할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이 길을 걷는다. 이 길에서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일깨우는 대신 쿤다 자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에너지의 작은 물질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쿤다 안으로 의식 전체 를 집어넣는 것이다. 이 길에서는 새로운 감각이 열리는 일이 절대 없다. 초감각 적 경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혼에 대한 경험도 없을 것이다. 이 길에서 그대는 신을 향해 직접 들어간다.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해 오는 첫 번째 경험은 영혼에 대한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대는 자신의 영혼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흔히 존재계에 다수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혼의 개체성을 믿는다. 그들은 지상에 살아 있는 생명체만큼이나 많은 영혼이 있으며, 모든 인간은 독립된 영혼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쿤다 안으로 직접 들어간 사람들은, 개별적인 영혼은 없으며 오직 신 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수가 아니라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쿤다 안으로 뛰어들 때 그대는 자기만의 쿤다 속으로 뛰어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만물의 쿤 다, 우주적인 쿤다다. 쿤다는 하나다. 내 쿤다, 당신의 쿤다, 그의 쿤다가 있는 게 아니다. 개별적인 쿤다가 있는게 아니다. 쿤다는 하나다. 그러므로 쿤다의 에너지는 무한하다. 아 무리 많은 에너지를 퍼내도 조금도 줄지 않는다. 쿤다는 언제나 만수위를 유지 한다. 쿤다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그런데 쿤다에서 에너지를 퍼냈을 때 우리는 그 에너지를 '내 에너지'라고 부 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바닷물을 퍼서 작은 그릇에 담아 놓고 '내 바닷물'이 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그릇에 담긴 바닷물과 우리의 그릇에 담긴 바닷물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다에 직접 뛰어든 사람은 바다가 하나라는 것을 안다. 각기 다른 그릇에 담긴 바닷물도 같은 바다의 일부며, 결국은 같은 근원으 로 돌아갈 것이다. 그릇에 담긴 바닷물을 영원히 그대의 것으로 간직할 수 없다. 그 물은 태양열이 닿는 즉시 증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물은 구름이될 것이다. 그리고 비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실제로 그 물은 근원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 그럴 수가 없다. 쿤달리니가 깨어난 사람들은 초감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초월적이 고 심령적인 경험이다. 그들은 황홀한 체험을 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영혼이 신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앎에 도달하며, 이 부분을 통해 전체를 깨달으려고 노 력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바다와 접촉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쪽에서 바다와 접촉하고, 그대는 수백만 마일이나 떨어진 저쪽에서 바다와 접촉 하고 있다. 이 때 그대 또한 똑같은 바다와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 해안'이라고 생각하는 이쪽에서 바다를 만지고, 그대 역시 '내 해안'이 라고 생각하는 저쪽에서 바다를 만진다. 이것은 내가 인도양을 내 바다로 생각 하고, 그대가 대서양을 그대의 바다로 생각하고, 다른 제삼의 인물은 태평양을 자신을 바다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보면 모든 바다는 하나다. 지구를 덮고 있는 드넓은 바다는 하나다. 그 러나 부분적으로 접근하면 그것을 알기 어렵다. 이 때 우리는 광대한 하나의 바 다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제한적인 우리의 시각에 따라 바다를 나누고 경 계선을 그을 것이다. 바다뿐만 아니라 해안선까지 나눌 것이다. 영혼에 대한 경험은 이처럼 한 지점에서 바다를 만지는 것과 같다. 광대한 에 너지의 바다에 쿤달리니의 작은 물결이 이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대한 경험을 얻 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길에 접어든 구도자는 언젠가 영혼 또한 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영혼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행이 중도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아직 완결된 여행이 아니다. 영혼에 대한 자각이 전부는 아니 다. 영혼을 옆으로 밀어 두고 쿤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쿤달리니를 통해서 가면 더 쉬워진다. 이 길이 더 수월하다. 돌아서 가는 길이 더 쉽고 지름길이 가장 험난하다는 것은 수없이 증명된 바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다. 돌아서 가는 길이 더 쉽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가까이 가려면 다른 매체를 통과해야만 한다. 내 얼굴을 보 려고 할 때 직접 내 얼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울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 수적이다. 이것은 쓸데없이 길고 빙빙 돌아가는 길처럼 보인다. 먼저 내 얼굴이 거울에 비춰지고 그 영상이 내게 돌아온 다음에야 내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 떤 사람은 '굳이 그렇게 길고 우회적인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는가?'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내 얼굴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 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내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쿤달리니 에너지의 일부를 각성하는 것이 긴 우회 노선이라 해도 이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내적인 감각의 세계가 열리고 아트만 (atman)에 도달한다. 그 다음에는 이로부터 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길고 우 회적인 노선이 일순간의 도약을 수월하게 만든다. 먼저, 자기 자신을 알게 됨으로써 어떤 지복이 오고, 이 지복은 가장 높은 경 지의 지복을 갈구하도록 그대를 자극하고 촉구한다. 자기 자신을 알고 깨닫는 것은 분명히 기쁜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지복이다. 그것이 최고의 지복이다. 그대 자신을 알 게 된 후에는 오직 한 가지 고통이 남는다. 그것은 존재 자체의 고통이다. 자신 이 누구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자신에 대한 앎을 얻었을 때 모든 고통이 사라지겠지만 하나의 고통은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존재의 고통(pain of being)이다. 이제 그대는 자신의 존재에 관 해 의문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대는 '왜 나는 존재하는가? 나의 존재는 왜 이런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제 그대는 존재 또는 불필요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 이 때 그대는 존재에서 비존재(non-being)로 도약을 시도할 것이다. 어는 날엔가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존재를 알았다. 이제 나는 비존재 또한 알고 싶다. 나는 빛을 알았다. 이 제 나는 어둠 또한 알고 싶다." 아무리 광대한 빛일지라도 거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어둠은 무한하다. 존재 가 중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비존재는 한 계가 없다. 비존재는 무한하다. 사람들이 붓다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 '해탈한 후에도 제가 남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붓다는 이렇게 말했 다. "아니다. 그대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대 자신이 그대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 대답에도 불구하고 질문자는 또 이렇게 물었다. "해탈의 경지에 욕망, 고통, 죄악 등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저의 존재는 어떻 게 되겠습니까? 최소한 저의 존재만큼은 원래대로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이에 붓다가 말했다. "아니다. 해탈의 경지에서 어떻게 그대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욕망과 고통, 죄악이 사라져도 한 가지 고통은 남는다. 바로 존재의 고통이다. 이 때는 그대의 존재 자체가 고통을 주기 시작할 것이다." 욕망의 소멸 후에 그대의 존재 자체가 그대를 괴롭히기 시작한다는 것은 흥미 로운 일이다. 욕망이 살아 있는 한 존재 자체가 그대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그대의 존재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지위와 명성 을 추구한다면 그대의 존재는 이름을 얻고 출세하는 데 몰두해있다. 그러나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욕망이 사라졌을 때, 지위와 섹스를 바라는 욕 망조차 사라지고 아무것도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을 때, 행위 자체가 중단되었을 때, 이 때 그대의 존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때는 그대의 존재 자체가 직접 그대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존재 자체가 그대를 흔들어 놓을 것이며, 그대는 이 존재마저 불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붓다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등불이 꺼진 뒤에 불꽃이 어디로 가겠는가?" 붓다가 임종을 맞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물었다. "여래는 죽은 뒤에 어떻게 됩니까? 당신이 죽은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 까?" 이에 대해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다음에 무엇이 남겠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 는다. 등불이 꺼지면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등불이 꺼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묻지 않는다. 불꽃이 꺼지면 그저 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트만(atman)을 얻는 것은 아트만을 버리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 다. 우리가 아트만을 얻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버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길이 더 쉽다. 욕망이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 쿤다 속으로 들어가 그 자신을 완전히 버리라고 하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우리 자신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자신이 사라지면 그 모든 일이 완 수되지 못한 채 남을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예를 들어, 그대가 집을 짓기 시작했 는데, 그집이 반밖에 완성되지 못했다고 하자. 그대는 '이 집이 완성된 후에 나 는 언제든지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집이 완성될 때 쯤이면 다른 많은 일들이 미완성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무엇인가 하 고자 하는 욕망은 그것을 완결 짓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욕망이 끝없이 우리를 부추긴다. 그러므로 아트만을 버리는 것이 가장 짧은 지름길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이 지 속되는 한 아트만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욕망이 사라져야만 아트만을 버릴 수 있다. 욕망이 없다면 아트만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불행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지복을 버리라고 말해 보아라. 그러면 그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는 '당신 미쳤소?'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 가고 지복만 남아 있는 사람은 지복과도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욕망이 가 버렸을 때 그가 지복을 갖고 무엇을 하겠는가? 지복(ananda)마 저 버릴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궁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슬픔을 버릴 준비는 누구나 되어 있다. 그러나 지복 또한 버릴 준비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 다. 이 순간이 그대를 인도한다. 절대적 존재(supreme being)속으로 용해되어 합 일을 이루는 경지로 그대를 인도한다. 이 일은 직접 일어날 수도 있다. 단숨에 쿤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렵다. 점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더 쉽다. 서서히 욕망이 사라지고 마음이 중단된다. 행위가 멈춰지고 그대를 받쳐 주던 모든 버팀목이 쓰러진다. 결국 아무 토대나 지지대 없이 그대만 남는다. 이 때 그대는 이렇게 느낀다. "이제 이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제 나는 나 자신마저 놓아 버리겠다." 이 때 그대는 쿤다 안으로 뛰어들어 용해된다. 이렇게 쿤다 안으로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열반이다. 쿤다 안으로 직접 뛰어들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쿤달리니는 그의 길이 아 니다. 그것이 일부 영적인 전통이 쿤달리니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다. 쿤달 리니의 길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쿤다와의 직접적인 합일을 가르친 사람들은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따르면 이 직접적인 길은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 두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꽃 한 송이가 피었다고 해서 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우리 자신의 집에 도달하기 위해서 는 몇 번이고 다른 사람들의 집을 두드려야 한다. 자신의 집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다른 사람들의 집을 거쳐야 한다. 그대 자신의 얼굴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타인들의 얼굴을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까지 많은 타인들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누가 그것을 방해하겠는가? 그대 자신의 집으로 곧장 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수많은 타인들의 집을 방문 하기 전까지는 그대의 집을 발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기 전까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것을 깨우치기 힘들다. 내가 말하는 쿤달리니 사드하나는 육체가 없는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육체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으로 들어가기 위해 육체를 준비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활용하는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영혼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에너지는 일상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 다. 사실, 그 에너지의 양은 일상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그 에너 지는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날마다 하루 일과를 끝낼 때쯤이면 거의 기진맥진 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유리가 활용하는 에너지는 하루 일과를 꾸려 나가기에도 모자라다. 에너 지의 공급량이 매우 빈약하다. 그러므로 이 공급량이 빈약한 에너지를 갖고 영 혼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출가(sannyas:出家)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쓰이는 에너지를 다른 일을 위해 보존하자는 것이 출가의 이유였다. 우리가 활용하는 에너지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를 다른 목 적,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그래서 구도자들에 게 상점문을 닫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권장되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이런 태도는 잘못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 소비하는 에 너지는 아주 소량이다. 보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 에너지를 보존 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도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보다 그 분노를 억누르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싸우면서 소모하는 에너지보다 싸움을 피하기 위해 소모하는 에너지가 더 많은 경우가 적지 않다. 나는 이것을 옳은 길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구두쇠에게나 합 당한 길이다. 이런 종류의 산야스는 자신이 가진 빈약한 에너지를 보존하려는 인색한 사람 들의 길이다. 이렇게 인색하고 옹졸한 접근 방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저기 에서 조금의 에너지를 저축하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우리 안에 잠 자는 에너지, 그 풍부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일깨워야 한다. 왜 에너지를 보존하는 데 급급한가? 더 많은 에너지를 일깨우면 된다. 더 많 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면 무한한 저수지에서 그 에너지를 퍼 올려라. 그대 는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 설령 그대가 원한다 해도 그 에너지를 갖고 있 다. 설령 그대가 원한다 해도 그 에너지를 전부 소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 나 에너지를 보존하는 문제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아내를 사랑하면 신을 사랑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가진 약간의 에너지가 아내를 사랑하는데 모두 소모될까 봐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버리면서까지 그 에너지를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나 에너지를 지키려는 행위 자체가 두 배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에너 지를 보존하기 위해 그는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고, 그 싸움에는 상당한 에너지 가 소모될 것이다. 게다가 아내를 사랑하는 데 사용되는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신에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신은 고사하고 아내를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에너 지다. 그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신에게 도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대는 그 에너지를 갖고 연인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도 실패했다. 그대 는 빈약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연인 의 가슴에 가 닿는 것조차 실패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찮은 에너지를 갖고 신에게 가는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가? 어림없는 일이다. 에너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문제는 없다. 그대 안에 누워 잠자는 거대한 에너 지를 일깨우는 것이 문제다. 이 에너지는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 무한하다. 절대 로 고갈되지 않는다. 일단 이 에너지가 깨어나면 더 많은 에너지가 깨어날 가능 성이 높아진다. 계속해서 에너지가 솟아난다. 일단 시작되기만 하면 이 에너지의 흐름은 끝이 없다. 그것을 고갈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젠 더 이상 깨울 에 너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에너지를 무한하다. 그대는 이 무한한 원천으로부터 무 제한으로 에너지를 퍼올릴 수 있다. 그리고 퍼올리는 에너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에너지를 일깨우는 그대의 능력 또한 강화된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흘러넘칠 만큼 많을 때, 이 때 비로소 그대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때 비로 소 그대는 지도에도 없는 미지의 길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내 말을 이해하는가? 일반 세상에서도 우리는 과다한 부(富)를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 이용한다. 과다한 부를 축적한 나라는 달나라 여행을 생각한다. 달 나라에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리 잃어도 표시가 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과다한 부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대는 일상 생활을 꾸려 나갈 만큼 또는 그 이하의 돈을 갖고 있다. 이 때 그대는 지출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할 것이다. 단돈 천 원을 쓸 때도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이미 알려진 세계, 기존의 친숙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남아 돌 만큼 풍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쿤달리니는 이렇게 풍부한 에너지로 그대를 가득 채울 것이다. 이 때 이 남아 도는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명심하라. 풍부한 에너지를 갖고 있을 때 돌연 그대는 기존의 에너지 통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이제 그 통로들은 과다한 에너지의 흐름을 견디 어 낼 수 없다. 이것은 바닷물이 강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강줄기가 바닷물에 덮여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강은 자신이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를 것이다. 분노, 섹스 등의 통로가 돌연 기능을 잃고 사라진다. 이 에너지의 홍수가 밀려드는 순간 기 존의 선착장과 둑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탄 생한다. 그대는 지금까지 축적하고 모아 왔던 것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깜짝 놀랄 것 이다. 그대의 하찮은 노력들, 금욕 수행이나 분노의 억제, 이런저런 것들이 자취 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기존의 수로와 강이 사라지고 바다 전체가 나타났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을 때 그대는 돌연 이 에너지가 전혀 새로운 여행의 장을 열어 주는 것을 알게 된다. 에너지는 끊 임없이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결코 멈출 수 없다. 에너지는 계속 움직 여야 한다. 이 에너지의 여행은 끝이 없다. 일단 이 에너지를 일깨우는 것이 문제다. 에너지가 새로운 출구를 찾고 미지 의 세계로 흐르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그대가 살아 온 방식은 무의미해진다. 이 때 그대는 초감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초감각적인 문이 열리자마자 그대는 육체의 비육체적 부분인 아트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쿤달리니 사드하나는 비육체적인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육체 를 준비하는 과정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르골(Nargol)에서 말한 것은 이 런 의미에서였다. 쿤달리니 에너지의 상승과 하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먼저 상승이 일 어나고 그 다음에 하강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쿤달리니 에너지의 하강은 쿤다 안으로 용해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이 상승과 하강 현상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실제로, 쿤다 안으로 용해되는 현상은 상승도 아니고 하강도 아니다. 쿤다 안 으로 용해되는 것은 상승이나 하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소멸의 문제, 무 (無)로 돌아가는 문제다. 바다로 들어가는 물방울은 상승하지도 않고 하강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다 안 에서 사라질 뿐이다. 물론, 태양열을 받은 물방울은 수증기가 되어 상승한다. 그 리고 차가운 공기와 만나 구름이 되고, 결국은 비가 되어 땅으로 하강한다. 그러 나 이 물방울이 바다로 가는 여행은 상승도 아니고 하강도 아니다. 단지 바다 안으로 용해되고 사라지고 죽는 것이다. 상승과 하강의 문제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제기된다. 우리가 일깨운 에너지는 쿤다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 에너지를 계속 근원으로 환원시킨다. 이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여기엔 많은 이유가 있다. 하나의 중대한 이유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다한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에너지는 근원 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에너지가 깨어나면...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행복을 감당하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고통을 견디는 능력, 에너지를 견디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충격이 주어지면 신체와 정신의 통합적인 상관 관계가 붕괴된다. 이것은 매우 해로운 일이다. 과다한 에너지가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방편의 문제다. 내가 말하는 방편의 경우에 이렇게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단 한 번의 모든 에너지를 일깨우는 방편이 있다. 이 방편은 '돈오(頓悟)'의 길 이라고 불린다. 이런 방편에는 항상 위험이 내재한다. 그대가 감당할 수 있는 능 력 이상의 에너지가 밀려들지도 모른다. 그대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일 수도 있다. 전압이 너무 높으면 전구가 터져 버리거나 선풍기가 타 버릴 수 있다. 또는 퓨즈가 나가거나 자동차에 불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가르치는 방편에는 이런 위험이 없다. 이 방면은 먼저 그대 안에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길 러 주고, 그 다음에 에너지를 일깨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해 보라. 커다란 댐이 일순간에 터져 버리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댐의 물이라도 수로를 만들고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체계적으로 방류하면 매우 유용할 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의 삶에 독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신지학회의 특수 멤버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쿤달린 사드하나 과정 전체를 거쳤 다. 여러 가지 실험이 그에게 행해졌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에 대해 명확한 기억이 없다. 그는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깨달음의 바다가 이미 그의 수로로 흘러들어 온 이후의 순간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신이 영적인 삶을 준비하고 있었던 단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깨달음에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이 엄청난 준비 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이것은 그전까지 지구상 에 한 번도 행해진 적이 없었던 방법이었다. 준비 작업을 행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이 준비 작업은 그들 스스로 행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준비 작업이 행해진 것은 크라슈나무르티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크라슈나무르 티를 위해 일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물론,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깊은 의미에서 보면 타인은 타인이 아 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표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 이다. 그래서 이 타인들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크리슈나에 대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산지학회 사람들은 크라슈나무르티의 내면에 위대한 영혼이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위대한 영혼을 불러들이는 것이었고, 크 리슈나무르티는 이 일을 위한 매개체로 준비되었을 뿐이다. 크리슈나무르티라는 매개체를 통해 수로(水路)가 놓이고 에너지가 깨워졌다. 그러나 이것은 예비 단 계에 불과했다. 주요 과제는 아직 수행되지 않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 일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다른 영혼이 들어와 거주할 수 있도록 그의 내면에 공간을 창조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성공할 수 없었다. 이 계획은 실패했다. 내면의 수로를 통해 물이 밀려들자 크리슈나무르티는 수 단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이 과거에 이런 실험이 한 번도 행해지지 않은 이유다. 항상 이런 두려움이 따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이 목적이 될 수 있는 상황 속으로 들어간다면 왜 다른 사람을 위한 방편이 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크리슈나무르 티는 이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다음의 경우와 같다. 내가 그대에게 집 열쇠를 주면서 내일 오기로 되어 있는 손님을 위해 집을 정 돈해 놓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열쇠를 건네 구고 떠난 뒤에 그대는 주인이 된다. 그대는 '내가 이 집의 주인이다.'하고 말하면서 손님을 거부할 수 있다. 열 쇠가 그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열쇠는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집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제 열쇠는 그대의 수중에 있다. 그대는 이 집의 문을 어떻게 여는지 안다. 이것이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일어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준비되고, 전생에서부 터 준비된 다른 사람이 그를 통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스스 로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먼저 준비가 된 다음에 깨달음이 오는 것이 순서다. 먼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지고 그 다음에 더 많은 물이 수로로 흘러들 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수용 능력이 견딜 수 있는 정도에 한해서만 에너지가 깨어나도록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과도한 에너지를 일깨우는 방편들이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미쳐 버린 이유다. 사람들이 종교를 두려워하게 된 것도 이런 수행법 때문이다. 미국의 전력 공급 장치에 일어난 사고를 보면 우리의 내적인 영역에서도 일어 날 수 있다. 미국은 잘 정비된 전력 공급 체계를 갖고 있다. 특정한 지역에 전력 이 남아 돌면, 그 잉여분은 더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다른 지역으로 자동 전 환된다. 가령, 어느 날 밤 한 지역의 전력 수용량이 공급에 미치지 못하면 그 여분의 전력은 자동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금의 전 력이라도 사용되지 않고 낭비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잉여분의 전력은 더 많 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다른 지역으로 즉각 전환된다. 예를 들어, 어떤 공장에 노사 분규가 일어나 문을 닫았다면 그 공장에 할당된 전력은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전력은 전력의 부족으로 애를 먹는 다른 공 장으로 즉각 방향을 돌린다. 한 지역의 전력 공급망이 상호 연결되어서 잘 정비 되어 있기 때문에 전력이 남아 도는 곳도 없고 전력이 부족한 곳도 없다. 그런데 몇 년 전, 미국의 동부 지역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다.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 정도 전기가 끊기고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것이다. 사방에서 극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전기의 자동 전환 장치 때문에 생 긴 일이었다. 한 도시의 전기 공급 장치에 이상이 생기자, 그 지역 상호 연결망 에 남아 돌던 전기가 자동적으로 그 도시를 향해 밀어닥쳤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전기의 충격으로 인해 그 도시의 퓨즈 전체가 타 버렸고, 이 사태는 그 지역의 상호 연결망 전체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전력 공급 장치 전체가 붕괴되고, 연결망에 속해 있는 모든 지역이 갑자기 2천 년 전과 같 은 시대로 돌아갔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고 모든 사회 활동이 정지되 었다. 열두 시간 동안 이런 상태가 계속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류는 능률성과 효율성을 위한 시도가 부메랑(boomerang) 처럼 돌아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도시마다 독립 된 전력 공급 장치를 갖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처럼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이 시스템 안에 있는 에너지 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이동한다. 그러므로 항상 커다란 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 안에도 전력의 순환과 같은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대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흘러들면 매우 위험하다. 그대 안에 흐르는 에너 지의 양을 증가시키는 방편들이 있다. 가령 그대가 50명의 사람들과 함께 여기 에 앉아 있다고 하자. 특정한 방편을 사용하면 이 50명의 에너지가 그대 한 사 람을 향해 흐르게 할 수 있다. 에너지가 배출되는 오십 명의 사람들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고, 그대는 에너지의 중심 기둥이 될 것이다. 그대는 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많은 위험이 있다. 그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에너지 가 흘러들지도 모른다. 또한 정반대의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같은 경로를 통해 그대의 에너지가 그 50명의 사람들을 향해 흘러가고, 그대의 에너지 전체가 빨 려 나가는 것이다. 이런 모든 실험이 과거 행해진 바 있다. 과다한 에너지가 한꺼번에 흘러들 때 그 잉여 에너지를 근원으로 환원시키는 방편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기법에 관한 한 이런 방편은 필요 없 다. 이런 방편은 전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기법에서는 그대가 감 당할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해서 에너지가 깨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공간을 창조한 다음에 그 곳을 채울 에너지를 일깨울 것이다. 그 러므로 우리는 잉여 에너지를 근원으로 환원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은 벌 어지지 않는다. 물론, 어느 날엔가 그대 자신이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대는 쿤다 안으로 뛰어들어 용해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상승과 하강이라는 이 개념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스리 오르빈도 (Sri Aurobindo)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 우리는 신성한 에너지를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에너지 를 우리 위의 하늘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에너지가 밑 바닥 깊은 곳에, 깊은 심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천정(天頂)과 천저(天低)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적 질서에 과한 한 이 상승과 하강이라는 개념, 정상과 밑바닥이 라는 개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개념은 아무 타당성이 없다. 다만 우리가 사 유하는 방식을 대변할 뿐이다. 우리는 이 강당의 지붕이 우리 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 다. 굴착기를 이용해 이 지점을 계속 뚫고 들어가면 어느 날엔가 우리는 미국으 로 뚫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관찰하는 사람은 이 지붕이 우리 밑 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의 머리 아래에 지붕이 있는 것이지, 지붕이 우리 위에 있는 게 아니다. 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쉬르스아사나(shirsasana), 즉 물구나무서기 수행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일 것이다. 이 지붕은 변함이 없다. 다만 어디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동쪽과 서쪽이라는 우리의 개념도 오류다. 동쪽이 어디에 있고, 서 쪽이 어디에 있는가?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서쪽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서 쪽으로 계속 가면 동쪽에 이를 것이다. 서쪽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서 동쪽에 닿 는다면 왜 그 방향을 서쪽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모든 개념은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비실제적이다. 그것은 그 저 실용적인 가설(假說), 상상 속의 개념일 뿐이다. 그러나 개념은 유용하긴 하 지만 거짓이다. 동쪽이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말할 수 있는가? 동쪽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캘커타? 랑군(Rangoon)? 동경? 서쪽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어 어디 에서 끝나는가? 이 모두가 지구를 구분 짓기 위해 우리가 편리한 대로 만들어 낸 개념이다. 실용적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와 아래, 정상과 밑바닥이라는 것도 실용적인 개념일 뿐이 다. 동쪽과 서쪽이 수평적 개념이라면 위와 아래는 수직적 개념이다. 그저 개념 일 뿐이다. 실제로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우주는 지붕도 없고 마루도 없다. 우주는 광 대하고 무한하다. 그러므로 위와 아래, 상승과 하강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그러나 위와 아래라는 이 실용적인 개념은 종교적인 영역까지 침투해 들어왔 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을 위해서 내려오는 존재로 경험하고, 다른 사람은 아 래에서 솟아나는 존재로 경험한다. 신이 위에서 내려오는 경우는 에너지가 하강 하는 것이고, 신이 아래에서 솟아나는 경우는 에너지가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보면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신을 위와 아래 어느 쪽에 놓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편리에 달린 문제다. 그러나 임의적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하강보다는 상승이라는 개념을 택하겠다. 상승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유용하다. 여기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상승이라는 개념을 택했을 경우 그대는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강이라는 개념을 택할 경 우에는 기도 외에 아무 할 일이 없다. 그러나 하강이라는 개념을 택할 경우에는 가도 외에 아무 할 일이 없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발전해 왔다. 명성에 기초하는 종교가 있다. 기도 를 내세우는 종교는 신이 위에 있다고 믿는다. 신은 하늘에 있다. 우리는 그를 끌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를 발견하려면 우리가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높이 올라간다면 우리 자신이 신이 될 것이다. 우리는 높이 올라갈 수 없다. 우 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 신이여, 부디 저희에게로 내려오소서.'하 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다른 한편에는, 우리의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믿는 종교들 이 있다. 그들은 우리 내면에 무엇인가 깊이 잠들어 있으며, 우리 스스로의 노력 에 의해 그것이 깨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종교는 기도에 등을 돌리고 명상을 택했다. 그들은 명상의 종교가 되었 다. 이렇게 위와 아래라는 개념이 기도와 명상이라는 차이점을 만든다. 기도의 종교는 신이 위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명상의 종교는 신이 거주에 존재하며, 그가 그 곳에서 위로 올라와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명심하라. 지금 기도의 종교는 토대를 잃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그 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러나 명상의 종교는 날로 성장하고 있다. 그들 앞에는 무한한 미래가 열려 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여행은 아래에서 위로 가는 길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이 상승과 하강이라는 개념에는 다른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신을 위에 있는 존재로 믿는다 해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이에 대해 아무 곤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믿는다면 그대는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방금 전에 나는, 동쪽으로 계속 가면 결국 서쪽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서쪽에 도달하고 싶으면 동쪽으로 가야 한다 는 뜻이 아니다. 서쪽에 당도하려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동서(東西)라는 개념이 무의미하다 해도 우리는 서쪽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동쪽으로 계속 가면 서쪽 에 당돌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 때 그대의 여행은 불필요하게 길어질 것 이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는가? 명상가(sadhak)와 헌신자(bhakta) 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헌신자의 신은 하늘 위에 있다. 그러므로 헌신자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면서 기다린다. 반면, 명상가의 신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잠 들어 있다. 따라서 명상가는 신을 깨우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마음 속에 새겨야 하는 다른 해석도 있다. 신이 아래에도 있고 뿌리에 도 있다고 믿을 때는 그의 현존이 모든 곳에서 느껴진다. 심지어 우리가 천박하 다고 말하는 본능과 감정 속에서도 신이 느껴진다. 이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천박하고 저질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 다. 신이 아래의 영역에 살아 있다면 우리가 삶에서 가장 저급하다고 말하는 영 역에도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섹스의 영역에도 신이 존재한다. 섹 스의 차원에서도 신이 깨어날 수 있다. 즉, 신이 발견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곳에 신이 존재한다. 만일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서도 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신이 높은 하늘 어딘가에 있다고 믿으면 그대 자신을 향해 즉 각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 때, 낮은 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난받는다. 그 곳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저급 하게 보는 시각이 생긴다. 그리고 심리적으로는 자기 비난과 죄책감이 따라온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대가 두 발로 꿋꿋하게 서고 싶다면 에너지가 아래에서부터 올라와야 한다. 그 에너지가 그대의 다리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에너지가 위에서 내려온다면 이 에너지는 그대의 머리를 건드릴 뿐이다. 이 에너지가 효율적으로 작용하려면 뿌리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오는 에너지는 언제나 낯설고 생소하 게 느껴진다. 기도를 통해 도달한 사람들이 '신과 우리는 하나다.'라고 믿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모하메드 교인들은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신과 인간이 똑같을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 하면 신은 하늘 위에 있고 인간은 여기 땅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만수르(Mansoor)의 목을 베고 사 르마드(Sarmad)를 처형했다. 모하메드 교인들에게 있어서 '나는 신이다.'라는 말 보다 더한 신성 모독은 없다. 신은 가장 높은 하늘에 있는 신성한 존재고, 인간 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존재다. 이렇게 저열한 인간이 어떻게 가장 높은 산과 맞먹는단 말인가? 이런 믿음의 근간에는, 신이 높은 곳에 있고 인간은 저급한 피조물이라는 생 각이 깔려 있다. 신과 인간은 따로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이 이런 믿음을 탄생시켰다. 이슬람 교가 수피(Sufi)들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수피들은 '인간과 신이 하나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을 천상의 옥좌에 올려놓는 즉시 이 지상의 삶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 삶은 죄악이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과거에 지은 죄악의 결과가 된다. 그러나 신을 뿌리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면 이 지상의 삶은 축복과 은총이 된 다. 우리의 삶은 죄악의 결실이 아니라 신의 자비로운 선물이 된다. 이 때는 가 장 어두운 곳에서도 신의 빛이 느껴질 것이다. 가장 비열한 인간, 가장 사악한 인간의 내면에도 신이 현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성(神性)을 아래로부터 상승하는 힘으로 믿으라고 말한다. 비 록 상승과 하강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 해도 이렇게 믿는 것이 좋다. 진리를 아는 자는 이 두 개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 두 가 지 개념이 무용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영적인 길을 가야 하는 우리는 더 쉬운 길 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이 에너지가 아래로부터 솟아나와 계속 위로 올라간다는 이해를 갖고 출발하기를 바란다. 위로 가는 여행을 선택한 사람들이 불(火)을 신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유가 그 것이다. 불은 항상 위로 향하기 때문이다. 램프의 불꽃은 끊임없이 위로 향한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불을 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불은 항상 위로 향한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 즉 시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불은 잠깐 동안 눈에 보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상가 또한 위로 올라간다. 그는 잠시 눈에 보이다가 곧 비 가시적인 세계로 사라져 버린다. 내가 에너지의 하강 보다 상승을 강조하는 이 유가 그것이다. 나르골(Nargol)의 명상 캠프에서 당신은 '깊은 명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 고 강렬한 호흡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의해 우리의 몸을 완전히 탈진시 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들어가기 위해서는 넘쳐 날 정도로 풍부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지쳐 버린 몸과 마음을 갖고 어떻게 명상으로 들 어갈 수 있겠습니까? '탈진시킨다"는 말이 에너지의 부족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대 자신을 탈 진시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그대 자신(yourself)'이란 무슨 뜻인 가? 여기에서 '그대자신'이라는 말은 일상 생활을 우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 가 흐르고 있는 감각 기관들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그대 자신'이란 생물학적 유기체(organism)를 뜻한다. 나는 지금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그대를 말하는 것인지, 그대 내면의 참자아를 말하는게 아니다. 그대가 자신을 지치게 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몸과 마음을 포함한 모든 감각이 지쳐서 더 이상 에너지를 실어 나르는 것을 거부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도 그대는 지쳐 버렸을 때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모든 행동을 중단한다. 그대는 '나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방편은 한편으로는 몸과 마음, 감각 기관들을 지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 로는 그대의 쿤달리니를 계속 두드린다. 한편에서 그대는 탈진하지만 다른 한편 에서 그대는 잠자던 에너지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편으로 그대는 탈진하지만 다른 한편 에서는 에너지가 깨어난다. 그러나 이 때 그대는 그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다. 무엇인가 보고 싶어도 지쳐 버린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마음이 너무 지 쳐서 생각할 수도 없다. 다리가 완전히 지쳐서 걸음을 옮기는 것을 거부한다. 이 런 상황 속에서 걷기를 원한다면 눈이 아닌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기관들이 완전히 탈진했기 때문이다. 과로에 지친 모든 기관은 더 이상 일하기 를 거부한다. 그러나 한 편에서 새롭게 깨어난 에너지는 급히 무슨 일인가 하기를 원한다. 이제 이 에너지는 지금껏 사용되자 않고 밀폐되어 있던 다른 문들을 급히 두드 려야 한다. 이 다른 문들은 항상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대는 모든 에너지를 외부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만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지쳤고, 한편에서는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가 솟아올라 활 동할 차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눈과 귀 같은 기존의 감각 기관들은 그 에너 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눈이 보기를 거부하고 귀가 듣기를 거부한다. 이 때 그대는 새로운 에너지를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그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 존재 의 완전히 새로운 부분이 가능하기 시작할 것이다. 영적인 시각(視覺)의 센터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그대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과거에 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센터를 통해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 센터는 항상 존재해 왔다. 다만 작동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제 이 센터가 생전 처음으로 기회를 부여받았다. 내가 그대를 탈진시키는 데 역점을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대의 몸과 마 음, 지금 그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탈진해야 한다. 그래서 진실한 그대의 모습, 진정으로 그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활성화될 수 있다. 새롭게 솟아난 신선 한 에너지는 할 일을 요구한다. 그대의 존재는 그 에너지에 할 일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에너지는 제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낸다. 귀가 완전히 지쳐 버린 상황 에서, 새롭게 깨어난 에너지는 '나다(nada)'라고 불리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것 이다. 이 '나다'를 듣는 데는 외부의 귀가 필요 없다. 눈이 완전히 지쳐 버린 상황에서, 새로운 에너지는 내면의 빛을 볼 것이다. 내 면의 소리를 듣고 내면의 빛을 보는 데는 육체적인 눈과 비가 필요 없다. 이 에 너지는 보통의 코로는 맡을 수 없는 미묘한 향기를 느낄 것이다. 이렇게 미묘한 감각들, 흔히 초감각(超感覺)이라고 불리는 것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감각 기관들은 저마다 그에 상응하는 초감각 기관과 연결되어 있다. 외부의 소리를 듣는 귀가 있는가 하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외부의 소 리를 듣는 귀가 있는가 하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 이 내면의 귀는 작동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 이제 외부의 귀가 탈진해서 더 이상의 일을 거부하면 새로운 에너지는 내면의 귀 근처로 모여든다. 이 내면의 귀는 지금까지 무시된 채 버려져 있었다. 이제 새로운 에너지가 이 귀를 작동시킬 것이다. 과거에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이 귀를 활성화시킬 것이다. 그대는 전혀 새로운 것을 보고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이런 경험을 친구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네 제정신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자네는 지금 환상에 빠 져 있거나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내면에서 듣는 비나 소리는 지금까지 외부 세계에서 들어본 어 떤 비나 소리보다도 분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찌나 선명하고 확실하게 들리는 지 이 소리를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대는 '만일 이 소리 가 가짜라면 외부 세계의 비나 소리는 열 배는 더 가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면에 새로운 분들을 열기 위해서는 처음에 감각들을 탈진시키는 것이 필수 적이다. 일단 이 문들이 열린 다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 때 그대는 스스로 비교할 수 있다. 그대는 '무엇인가 보아야 한다면 내면에서 보는 것이 훨씬 낫 다. 그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내부 세계와 비교하면 외부 세계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런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 당장은 외적인 인식만 이 가능하다. 지금은 외적인 것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내면의 눈이 열리 면 그대는 분명한 선택권을 갖게 된다.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중에 선택이 가 능하다. 이 때 그대는 무엇이 보고 싶을 때마다 항상 내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대는 단 한 번의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외부 세계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라비야(Rabiya)의 삶에 얽힌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해가 지고 있을 무렵 그녀가 오두막 안에 앉아 있는데 하산(Hassan) 이라고 하는 파키르가 찾아왔다. 하산이 아름다운 석양을 보고 밖에서 라비야를 불렀다. "라비야, 오두막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소? 전에 없이 아름다운 석양이 물들고 있소. 이렇게 아름다운 석양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오. 어서 나와 석양을 감상 하시오." 라비야가 오두막 안에서 대답했다. "어리석은 사내여. 언제까지 바깥의 태양을 쳐다보고 있으려는가? 그대가 이 안으로 들어오라. 나는 지금 여기에서 태양을 만든 분을 보고 있다. 지금 나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태양, 미래에 창조될 태양을 보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안 으로 들어오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하산은 라비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라비야 같은 여성은 극히 드물다. 라비야는 인류의 역사에서 몇 명 안 되 는 중요한 여성 중 한 명이다. 그러나 하산은 라비야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산은 라비야에게 재촉했다. "빨리 밖으로 나오시오. 당신은 지금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을 놓치고 있소." 라비야가 응답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외부의 태양에 정신이 팔려 내면의 진짜 아름다운 태 양을 놓치고 있다. 지금 그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 아는가?" 라비야와 하산의 이 대화는 서로 전혀 다른 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 대화에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두 종류의 감각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내면 의 감각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대에게는 외부 세계가 전부다. 내가 외부의 감각 기관들을 탈진시키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 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다이나믹 명상에서 '탈진'이란 말은 에너지의 상실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이 명상법을 수행하는 동안 줄곧 에너지가 솟아오 른다. 이 명상법은 그대 안에 잠들어 있는 에너지를 깨우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 명상법의 모든 과정은 그 에너지를 깨우기 위한 것이다. 물론, 감각 기관이 탈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감각 기관 자체는 에너지가 아니다. 감각 기관은 에너지가 지나가는 문일 뿐이다. 이 문들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다른 그 무엇이다. 그대는 다만 그 문들을 지나갈 뿐이다. 이 문들이 지치면 그대에게 '나를 지나 가지 마시오.'하고 요구한다. 그들은 완전히 탈진했기 때문이다. 눈이 그대에 의 해 사용되는 것을 거부한다.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입문 단계에서는 감각 기관을 완전히 탈진시키는 것이 매우 유용하 다. 만일 이 명상법이 에너지를 일깨우는 방편이라면 탈진한 느낌보다는 신선함이 느껴져야 옳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명상법은 탈진한 느낌만을 가져다줍 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그대는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신선함과 생기를 느낄 것이다. 처음에는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그대가 신체의 감각 기관들과 동일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감각 기관들을 그대 자신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체의 감각 기관 이 지치면 그대는 '나는 지쳤다.'고 말한다. 이런 감각 기관과의 동일시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그대가 말을 타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대는 말과 지나치게 동일 시되어 있다. 그래서 말이 지치면 그대 자신이 지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동 일시되어 있는 모든 것들의 피곤함을 우리는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대가 말과 동일시되어 있다면 말이 지쳤을 때 그대 또한 지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순간 전혀 새로운 생기가 찾아온다. 이 때 그대는 '지친 것은 감각 기관들이지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 다. 신체의 감각 기관들이 지치면 많은 에너지가 그대로 보존된다. 육체에 의해 쓸모없이 낭비될 수도 있었던 에너지들이 내면의 저수지에 그대로 저장된다. 이 때 그대는 '에너지의 저장'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알게 된다. 이 저장된 에 너지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다. 빠져 나갈 출구를 찾지 못한 이 에너지는 그대의 세포 하나하나, 그대의 존재 전체로 퍼져 나간다. 이 에너지 가 그대다. 이것을 이해했을 때 그대는 차이점을 알게 된다. 서서히, 명상 후에 그대는 엄 청난 생기와 활력을 경험할 것이다. 그대가 생기를 느낀다는 말도 옳지 않다. 이 보다도 그대가 생기 자체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그대가 생기를 느끼는 게 아니라 그대 자신이 생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육체와의 동일시가 무너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지금 그대는 말을 타고 있는 상태며, 말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평생 동안 이런 동일시를 유지해 왔다. 그러므로 '나는 말이 아니라 기수(驥手)다'라고 알기 까지는 다소 걸릴 것이다. 그러나 말이 지쳐서 쓰러지면 이것을 이해하기가 더 쉽다. 이 때 그대는 자신 의 발로 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발로 걸을 때 그대는 자신이 말과 분리되 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대는 너무 오랫동안 말 등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걸을 수 있다는 사 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말이 지쳐서 쓰러지게 만드는 것이 좋다. 호흡의 연금술 러시아의 신비주의자 조지 구제프(George Gurdjieff)는 자신의 정신적 탐험을 회고하는 <위대한 사람과의 만남>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수피 탁발승과 요가의 프라나얌(pranayam)과 아사나(asana)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강한 인상 을 받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탁발승은 어떤 종류의 호흡법도 수행하지 말라 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자연스러운 호흡을 변형시키려는 모든 시도가 심신의 부 조화를 초래하며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프라나암과 여타의 호흡 구행법에 대한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사실, 진실 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모든 거짓은 그 안에 진실의 요소를 담고 있다. 이 소량의 진리가 그 거짓을 인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소량의 진리로 인해 거짓이 신뢰를 얻고 계속 유지 되는 것이다. 가능하면 삶의 자연스러운 기능들을 방해하거나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진 실이다. 이렇게 간섭하고 방해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호흡, 걸음걸이, 앉거나 서는 방식 등에 간섭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즉시 변화가 일어나기 시 작한다. '잃음'도 변화를 의미하고 '얻음'도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을 명심하라. 둘 다 변화를 뜻한다. 그러므로 지금 상태 그대로 머물기를 원한다면 그대의 호흡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디론가 가야 한다면, 그대의 삶에 변화를 원한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호흡 패턴(pattern)을 변화시키면 그대의 생활 방식 전체가 변화 한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지금 상태에 만족한다면, 지금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 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무엇인가 충분치 않다고 느 낀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 때 호흡의 변화는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호흡하는 방식을 변화시키자마자 그대 안에서 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 운 것들이 태어난다. 수많은 실험을 거친 후에, 호흡 수련을 통해 무엇이 떨어져 나가고 무엇이 새 로 탄생하는지 밝혀졌다. 이제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나 다름없이 인정되고 있다. 이 중 몇 가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화 가 나면 호흡에 변화가 일어난다. 호흡이 똑같은 상태로 유지되지 않는다. 평온 함과 침묵에 젖어 있을 때도 호흡이 변화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평상시와 같은 호흡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호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안다면 그대는 호흡을 거기에 맞게 조절함으로써 침묵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마음과 호흡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 속에 성욕이 일어나면 즉시 호흡이 바뀐다. 그러므로 성욕이 일어날 경우 호흡이 바뀌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성 욕은 즉각 사라질 것이다. 섹스에 대한 욕망이 멈출 것임. 그 욕망은 더 이상 유 지될 수 없다. 인간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특정한 상황을 필요로 한다. 다른 부분 과 일치되는 상황이 조성되어야만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을 때 호흡을 느리게 하면 분노가 증발해 버린다. 그렇게 느린 호흡 속에서 분노는 자기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호흡 수련은 매우 중요하다. 호흡의 변화는 즉시 마음에 변화를 일으 킨다. 각기 다른 호흡 세태 속에서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이미 과학적으 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호흡법을 수련하는 데 위험은 없다. 이 실험을 처음으로 행한 사람 들에게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새로운 탐구의 실험 단계에는 항상 위험 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온갖 실험을 거친 후에 모든 것이 명백하게 밝혀지 면 그것은 과학적인 법칙으로 굳어진다. 이 때 위험은 사라진다. 가령, 화를 내면서 호흡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노와 고요한 호흡은 공존할 수 없다. 이 반대의 현상 또한 가능하다. 화가 났을 때 하는 방식 처럼 호흡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얼마 후 마음 속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따라서 프라나얌은 호흡을 통해 마음을 변화시키는 많은 방편을 개발해 왔다. 인위적인 호흡과 자연스러운 호흡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이해해야 한 다. 사실, 우리가 자연스러운 호흡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것 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그대는 자연스러운 호흡이라는 것도 습관화된 인위적 호 흡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호흡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그대는 이런 식의 호흡에 익숙해져 있다. 이것이 그대의 습관, 제 2의 찬성이 되었다. 실제로 그대는 자연스러운 호흡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대는 낮 시간과 밤에 다른 식으로 호흡한다. 낮에 그대의 호흡은 인위적이 다. 그러나 밤이 되어 잠이 들면 그대의 습관과 무관한 자연스러운 호흡이 찾아 온다. 수면중에 작용하는 호흡은 낮 시간의 호흡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우리는 낮에 일하는 동안 자연스럽지 못한 습관적 호흡법을 갖고 있다. 여기 엔 이유가 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대는 군중 속에 있을 때와 홀로 있을 때 호흡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군중을 떠나 혼자 있게 되는 순간, 즉시 호흡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군중 속에 있을 때 특정한 방식으로 호흡한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호흡한다. 군중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대의 마음은 긴장되 어 있다. 따라서 그대의 호흡은 빠르고 얕게 진행된다. 숨이 깊이 들어가지 못한 다. 그러나 홀로 앉아서 릴랙스되면 숨이 다시 깊어진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 리에 들면 호흡이 완벽하게 깊어진다. 낮 동안에는 이렇게 깊이 숨쉬지 못한다. 수면중에는 숨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호흡이 깊어진다. 그러나 낮에 깨어 있 는 동안에는 그렇지 못하다. 흔히 우리가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호흡이 아니다. 그것은 습관하된 호흡일 뿐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몸에 밴 호흡이다. 어린아이들은 숨쉬는 방식이 다르다. 잠자는 아기를 관찰해 보아라. 그는 배로 숨쉰다. 숨쉴 때 배가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나 성인은 가슴으로 숨쉰다. 성인 은 호흡할 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만일 그대가 아이들과 같은 식으로 호흡하기 시작하면 그대의 마음 또한 서서 히 아이와 같은 상태로 접어들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아이처럼 순진무구해질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보면, 순진무구해졌을 때 그대는 아이들처럼 배로 숨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불상(佛像)이 인도의 불상과 다른 이유다. 인도의 불상은 배가 작고 가슴이 크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불상은 이와 반대 로 가슴이 작고 배가 크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일본과 중국의 불상은 아주 이 상하게 보인다. 우리는 이 불상이 잘못 만들어졌거나 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불상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호흡법이다. 붓다처럼 순수한 사람은 가슴으로 숨쉬지 않는다. 가슴으로 숨쉬는 것은 부자 연스럽고 인위적인 호흡법이다. 배로 숨을 쉬면 복부가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불상의 큰 배는 훌륭한 상징이다. 실제로 붓다가 그렇게 큰 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불상의 표현법은 옳다. 큰 배는 붓다의 순수함을 상징한다. 붓다와 같은 사람은 배로 숨쉰다. 그 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졌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면 우리는 자연스러운 호흡 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현재 우리의 호흡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럽게 호흡하지 말라는 탁발승의 말은 틀렸다. 우리는 이미 부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우리의 호흡도 점점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호 흡이 완전히 자연스러워지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 내부로부터 전개되면서 실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때로는 갑작스럽고 인위적인 호흡법이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 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얻는 것 이 있으면 잃을 위험도 많다는 사실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이득을 얻는 것만 큼 손실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도박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승자가 될 수도 패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득을 얻을 확률과 손해를 입을 확률은 언제나 똑같다. 그러므로 호흡에 간섭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탁발승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 말은 진리의 반쪽일 뿐이다. 위험이 있는 만큼 가능성도 많다. 이것은 도박이다. 얼마 동안 완벽하게 부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 여기에서 부자연스럽다함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호흡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다. 이렇게 완벽하게 부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 우리는 내면에 전혀 새로운 상황이 창조되는 것을 느 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미칠 수도 있고 해탈을 얻을 수도 있다. 미칠 가능 성과 해탈의 기회가 공존된다. 거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 취소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위험은 없다. 그대가 상황을 중단시킬 수 없을 때만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 면 즉시 중단할 수 있다. 이 상황은 그대의 통제 아래 있다. 이 상황 속에서 매 순간 그대는 자신이 어 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 자신이 지복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불행을 향해 가고 있는지, 자신이 평화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위험한 상황 속으로 들어 가고 있는지 안다. 매 단계마다 그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 식한다. 그러므로 위험은 없다. 호흡의 패턴에 돌발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 그대의 내적인 상황 전체 가 변화를 겪게 된다. 습관적인 호흡 방식을 통해서는 우리 자신이 육체와 분리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우리 안에 각인된 호흡 방식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습관화된 호흡이 육체와 영혼 사이의 다리로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당연히 하나로 여기는 데 익숙해졌다. 이것은 날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대는 자동적으로 대문을 향해 운전대를 돌리고, 곧 이어 현과 문 앞에 서 있는 자신 을 발견한다. 그대는 이런 과정에 대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평상시처럼 왼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는데 바퀴가 오른쪽 으로 움직였다고 하자. 익숙한 길이 사라지고 갑자기 전혀 생소한 길이 나타났 다면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대는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당황할 것이고, 다니지 않았던 생소하고 낯선 환경 속에 놓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퍼뜩 그대를 깨어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환경이 무의식적 패턴에 빠져 있던 그대를 흔들어 놓는다. 이 런 환경이 그대를 심리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조직화되고 안 정된 세상,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세상에서는 그대의 무의식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적인 상황, 생소한 상황이 벌어져 야만 그대의 무의식이 파괴된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그대를 무의식 밖 으로 끌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 테이블이 말하기 시작한다면 여기에서 무의식 상태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 수가 없다! 나의 천마디 말도 그대를 무의식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테이블 한 마디 만 한다면 대는 즉각 깨어날 것이다. 이 테이블의 한마디가 그대를 각성의 상태 로 밀어 넣을 것이다. 왜 그런가? 테이블이 말을 한다는 것은 생소하고 기가 막힌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 생소함이 그대의 내면을 전복시킨다. 이 생소 함이 그대 내면의 고정된 패턴을 붕괴시킨다. 호흡의 변화로 야기되는 이런 경험들은 그대를 미지의 세계, 새롭고 생소한 세계로 데려간다. 이런 경험들이 영적인 성장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그대를 각 성(awareness)으로 가득 채운다. 이 때 그대는 진정한 눈으로 무엇인가 보게 된 다. 만일 의식적으로 미칠 수 있다면 이것은 훌륭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경험은 없다. 그러나 미친 와중에도 각성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고안한 다이나믹 명상은 내적으로 완전히 깨어 있는 동시에 외적으로는 완벽하게 미쳐 버리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내면에서 그대는 자신이 춤추고 있 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춤을 추었다면 그대는 그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대 자신을 미치광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그대 는 자신이 춤추고 맴도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 어난다. 자각하는 동시에 미치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한 그대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표면 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미친 사람과 똑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대가 육체와 분 리되는 생소한 순간이 온다. 그대가 자신을 육체와 분리시키는 게 아니다. 저절로 분리가 일어난다. 그대는 돌연 육체와 분리된 자신을 발견한다. 육체와 그대 사이의 모든 연결선이 끊어 지고 다리가 붕괴된다. 기금까지 잘 정돈되어 있던 모든 것이 전복된다. 질서정 연했던 모든 것이 혼란된다. 일상적인 패턴이 산산조각 난다.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손이 움직인다. 울고 싶지 않은데도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멈추고 싶은데도 계속 웃음이 터 져 나온다. 이렇게 이상한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의식의 각성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호흡을 통해 가장 신속하게 창조된다. 다른 방법을 사 용할 때 몇 년이 걸린다면 이 호흡법은 십 분 안에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호흡이 우리의 존재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흡에 가벼운 충 격만 가해도 그 반향이 우리의 존재 전체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예로부터 매우 가치있게 여기는 호흡 수련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 는 프라나얌이나 여타의 체계적인 호흡법에 별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대 가 어떤 호흡법을 체계화시키자마자 그 호흡법은 생소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한 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쉬고 한동안 참은 다음, 다른 쪽 콧구멍으로 숨을 내쉬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체계적인 호흡법을 수련한다면 이것은 기계적인 습 관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습관화되고 규격화된 호흡이 그대를 육체에 얽매이게 만든다. 내가 가르치는 호흡법은 전혀 체계적이지도 규칙적이지도 않다. 여기엔 아무 규칙이 없다. 체계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참아야 하는 문제도 없다. 이 호 흡법은 그대 안에 생경한 느낌을 창조하는 방편이다. 그대를 즉각적인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밀어 넣어 마음이 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이 호흡법의 목적이다. 마음은 매우 교활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가 시간을 주면 마음은 신속하게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어떤 호흡법을 규칙적으로 행하면 이 호흡법은 하나의 체계로 굳어지고, 마음은 이 체계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 호 흡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새로움과 생소함을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의 뿌리 전부, 그대의 동일시 전부를 단숨에 잘라 버리 는 것이다. 문득 아무 뿌리도 없고 아무 아이덴티티(identity)도 없는 자신을 발 견하는 날이 와야 한다. 나는 그대가 이렇게 미친 것처럼 보이는 터무니없는 상황에 빠지기를 원한다. 만일 노력을 통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에 들어간다면 그대는 정말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갖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이런 상황으로 들 어간다면 그대는 결코 미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대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 다. 그대는 언제라도 이런 상황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나는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이 호흡법을 수련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자신이 스스로 광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이 광기를 없애는 법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광기가 그를 사 로잡고 있었다. 그는 광기에 대해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 명상법은 광기를 만들어 내고 제거하면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지 가르쳐 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아무 지식도 없이 당해야만 했던 광기 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보여 줄 것이다. 물론, 이 명상법은 위험하다. 그러나 위 험한 만큼 가능성도 많다. 이 다이나믹 명상을 통해 광기가 치료될 수 있다. 이 명상법은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데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 나는 보통 사람이 이 명상법을 수행하면 결코 정신 질환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광기가 어떻게 창조되 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스위치 켜는 법을 안다. 그러므로 이 스위치를 끄는 법 또한 안다. 이제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그는 광기와 온전함의 비밀을 안다. 내가 말하는 호흡법은 아무 리듬도 없고 체계도 없다. 어제 했던 호흡법을 오 늘 다시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호흡법을 반복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 니라, 오늘 이 호흡 실험을 행하면서 첫 부분과 끝 부분도 같을 수 없다. 매 순 간 호흡이 달라질 것이다. 이 호흡법의 유일한 목적은 마음의 습관과 고정된 패턴을 와해(瓦解)시키는 것이다. 신체와 정신적 구조의 너트와 볼트가 느슨해 질 것이라는 탁발승의 말 은 옳다. 실제로, 그대를 이루는 구조물의 너트와 볼트가 느슨해져야 한다. 지금 이 구조물은 너무나 단단하게 죄어 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불가능하다. 이 구조물이 느슨해져야만 그대 안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그것은 육체와 결합되어 있지만 분리가 가능하다. 이 불규칙한 호흡을 통해 너트와 볼트가 느슨해진다. 하지만 이 명상의 마지 막 부분에서 다시 죄어 진다. 이것을 죄기 위해 그대가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 는 없다. 저절로 다시 조립이 이루어진다. 만일 이 호흡법이 강박 관념처럼 되어서 하루 스물 네 시간 계속 된다면, 호 흡이 그대의 통제를 벗어나 비정상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위험 한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하루에 한 시간만 하고 그만둔다면 이 명상법이 끝나 자마자 모든 것이 저절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다음에는 경험에 대한 기억만 이 남는다. 그대는 자신이 어떻게 육체와 분리되었는지, 어떻게 다시 일상적인 상태로 돌 아와 결합이 이루어졌는지 기억될 것이다. 이제 평상시처럼 육체와 다시 결합된 후에도 그대는 자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안다. 명상이 끝나고 다시 육체와 결합 된 상태에서도 그대는 자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이 호흡법은 매우 중요하다. 이 호흡법이 없이는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없다. 호흡에 간섭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탁발승의 말은 옳다. 실로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진실로 풍요한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만큼이 나 위험 또한 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런 위험과 직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위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예기치 않게 우리를 덮치는 위험이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초대하고 만들어 내는 위험도 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다. 예를 들어, 이 명상을 하는 동안 그대는 온갖 행위와 동작을 취한다. 어떤 사 람은 비명을 지르고, 어떤 사람은 춤추고 노래부른다. 그러나 내가 '정지!'하고 외치는 순간 모든 것이 중단된다. 그들은 즉각 정지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의식적으 로 외치고 춤추는 상황과 전혀 다르다. 길에서 춤추는 광인을 생각해 보라. 이 춤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따라서 그는 춤을 멈출 수 없다. 나는 이 명산법이 당장은 아닐지라도 가까운 장래에 중요한 치료법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본다. 이 명상법이 정신적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방편 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 명상법을 행하게 하면 그들은 평생 동안 미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 질병에 대해 면역성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포함하여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주인이 될 것이다. 구제프와 호흡법에 관해 이야기한 탁발승은 전혀 다른 길을 걸은 사람이다. 그는 호흡 수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방편을 통해 내면에 생소함 (strangeness)을 창조한 사람이다. 이것이 문제다. 하나의 길을 아는 사람이 즉각 다른 길들을 틀렸다면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방법론에 따라 달라 진다. 이 길에서는 옳은 것이 저 길에서는 완전히 틀린 것이 된다. 가령, 우마차의 바퀴에는 핀(pin)이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이 핀이 전혀 쓸모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자동차에는 이 핀이 쓸모없다. 그러 나 우마차에 관한 한 이 핀은 자동차의 차축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듯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실수가 반복한다. 수피의 탁발승은 다른 길을 통해 목적지 에 도달했다. 그는 전혀 다른 방법론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피는 호흡이 아니라 잠을 방편으로 삼는다. 그에게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는 몇 달 동안 잠을 자지 않는다. 단식과 호흡을 통해 생소한 상황이 창조되듯 이,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 다.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지내면, 깊고 혼란된 호흡을 통해 발생하는 광기 와 똑같은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호흡이 그렇듯이 수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수피는 수면이라는 자연 현상에 정면 공격을 가함으로써 매우 생소하고 이상한 상황을 창조한다. 이 불면법(不眠法) 또한 나름대로 위험이 내재해 있다. 혼란된(chaotic) 호흡보 다 더 위험하다. 불면법은 기나긴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루나 이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는 효과가 없다. 몇 달 동안 잠을 자지 말 아야 한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잠을 자지 않은 후에 어떤 이상(異狀)이 생긴다면 그 이상은 1초나 2초 안에 치료될 수 없다. 그러나 10분 동안의 호흡 후에 생긴 이상은 단 1초 안에 회복될 수 있다. 두 달 동안 잠을 자지 않은 후에 생긴 이 상 증세는 하루만에 회복할 수는 없다. 두 달 동안 불면 수행이 끝나도 그대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수피의 길은 더 위험하다. 물론, 이 불면법이 유용하기는 하다. 수피는 잠을 자지 않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끈기있게 기다린다. 구제프와 만난 탁발승 은 이런 길을 걸은 사람이다. 수피가 사용하는 다른 하나의 방편은 춤이다. 춤 또한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 키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춤은 미리 배우거나 훈련된 춤이 아 니여야 한다. 훈련된 춤은 아무 효력이 없다. 앞에서 나는 프라나얌이라는 호흡 법이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프라나얌은 체계적이기 때문이 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리 훈련된 춤을 반복하는 사람은 육체와 동일시 된다. 그러나 춤출 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자. 내 말을 듣고 그가 갑자기 팔 다리를 휘저으면서 뛰기 시작한다면 그는 어떤 지점 에 도달할 수 있다. 자신을 춤과 동일시 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창조된다. 이 런 상황 속에서 그대는 '나는 춤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불면과 춤, 이것이 수피들이 사용하는 두 가지 방편이다. 다른 방법들 또한 사 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수피들은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서 털옷을 입고 지낸다. 이것은 육 체와 반대하는 방법 중 하나다. 단식하는 사람 또한 육체에 반대한다. 어떤 사람 은 날카로운 못 위에 한 쪽 발을 올려놓은 체로 서 있고, 어떤 사람은 가시 침 대에 누워 잠을 잔다. 이 모든 것이 생소한 심리적 상황을 창조하려는 방편들이 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수 있다. 특정한 방편을 따르는 구도자가 '다른 방편에 의해서도 똑같은 상황이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세프와만난 탁발승은 프라나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만일 그가 프라나 얌을 수행한다면 해를 입을 것이다. 아주 큰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마 차와 바퀴를 자동차에 달아놓은 것과 같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불면 수행을 하는 사람이 프라나얌을 행하면 그는 즉각 미쳐 버릴 것이다. 하루 밤도 넘기지 못하고 정신이 돌아 버릴 것이다. 그대의 존재는 불면법과 프라나얌의 두 가지 효과를 한꺼번에 견디기는 역부 족이다. 이것이 자이나 교의 승려들이 프라나얌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다. 그들은 단식을 통해 생소한 상황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만일 단식과 프라나얌을 병행했 다면 그들은 심각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그 위험은 실로 크다. 자이나 교 승려는 프라나얌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프라나얌이 아무 효과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프라나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 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는 '내가 가는 길에 프라나얌은 설 자리가 없 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프라나얌을 통해 얻는 것을 그는 단식을 통해 얻는다. 자이나 교 수행자들이 요가 아사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단식을 하는 사람에게 요가 아사나는 심각한 해를 미칠 수도 있다. 아 사나를 수행하는 사람은 우유, 버터, 그이처럼 부드럽고 지방질이 많은 음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단식은 그대 안의 모든 것을 건조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위장의 열이 너무 심해져서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나를 행하는 것 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이 불이 두뇌까지 올라가 그대를 미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이나 교 수행자들은 요가 아사나가 아무 실용성이 없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요가 아사나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아사나는 엄청난 가치 를 지닌다. 올바른 음식과 아사나를 병행하면 실로 경이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 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몸이 기름칠을 한 것처럼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 따 라서 부드럽고 기름기 있는 음식이 무척 중요하다. 뼈와 근육 모두가 변형된 동 작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충분히 부드럽고 유연하지 않으면 어딘가 부러질 수도 있다. 몸이 지나칠 만큼 유연해야 한다. 이 요가 아사나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취하지 않는 이상한 몸동작을 요구한다. 이것은 생소한 육체적 환경을 창조하려는 방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동작이 마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번민과 근심 에 시달리는 사람은 머리를 긁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긁는 것과 근심 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긁지 못하게 하면 그는 근심할 수 없게 된다. 근심의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손을 머리로 가져가야 한다. 그러나 머리에 손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면 그는 근심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손이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어야 한다. 모든 번민은 특정한 몸동작과 상관되어 있다. 몸이 특정한 동작을 취해야만 번민이 활성화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동작은 특정한 마음 상태와 연관되어 있 다. 이것은 오랜 실험과 경험에 의해 얻은 결론이다. 오늘 아침에 말했듯이, 우리가 여기에서 행하는 명상 중에 특정한 아사나와 무드라(mudra)가 형성될 것이다. 수천 번의 실험을 거친 끝에, 특정한 마음 상태 에서는 특정한 무드라가 형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반대 현상 또한 진실 이다. 특정한 무드라를 취함으로써 특정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 이다. 예를 들어, 붓다와 같은 자세로 앉으면 그대는 붓다가 도달할 것과 똑같은 마 음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왜냐 하면 마음의 상태는 몸의 상 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붓다처럼 걷고, 앉고, 호흡하면 붓다의 마음 상태 에 도달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그 역순 또한 진실이다. 그대가 붓다와 같 은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대의 걷고 앉는 방식이 붓다와 비슷해 질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구제프(Gurdjieff)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 힘들다. 그들에게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구제프는 구도의 방랑 중에,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스무 명 이상의 신비주의자 들을 만났다. 그는 그들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서 한데 모았다. 그의 앎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그의 앎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여러 부품이 조합된 것이다. 이 부품들이 원래의 자리에 있을 때는 완벽하게 옳았다. 그러나 이 부품들을 한 군데 모았을 때 이상한 조합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의 방편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효력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작용하지는 못한다. 구제프와 함께 한 사람들 중에는 어느 누구도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왜냐 하면 구제프가 가르친 것은 여러 가지가 뒤죽박죽된 멀티 시스템(multisystem)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 중 어 느 한 가지 방편이 구도자에게 작용을 미치기 시작하면 그는 열정을 갖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가 다음 단계에서 즉각 취하게 되는 다른 방편은 그 에게 역작용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것은 구제프가 완성된 수행 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체계 는 다차원적이기는 하지만 통합되어 있지 않다. 이 멀티 시스템 안에는 서로를 이어 주는 필수적인 연결 고리들이 빠져 있다. 구제프가 수집한 대부분의 정보는 수피들에게 온 것이다. 그는 티베트 요가 (Tibetan yoga)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하타 요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가 하타 요가에 대해 가진 모든 정보는 하타 요가를 반대하는 수피 탁발승들로 부터 얻은 것이다. 그는 하타 요가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요가와 쿤달리니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정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쿤달리니에 관해 그의 견해는 터무니없다. 그는 쿤달리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쿤 달리니를 계속해서 '쿤다 버퍼(kunda buffer)'라고 부른다. 이 '버퍼'라는 용어는 좋은 개념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앎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가 쿤달리니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쿤달리니가 그대와 궁극적인 앎 사이에서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이 장애물을 완전히 파괴하고 넘어서야 한다. 구제프에 따르면 우리는 쿤달 리니를 깨우는 문제를 고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구제프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안에는 완충 장치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 면서 여러 가지 충격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이런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달리니는 완충 장치가 아니다. 쿤달리니 자체가 하나의 충격이다. 쿤 달리니는 실로 가장 큰 충격이다. 그러나 구제프는 이것을 모른다. 깨어나는 쿤 달리니는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대 안에는 완충 장치가 있지 만 이 완충 장치는 쿤달리니와 적혀 다른 것이다. 충격을 흡수하는 이 완충 장 치가 파괴되어야 한다. 그런데 구제프는 쿤달리니 자체를 완충 장치로 생각한다. 그는 쿤달리니에 대 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쿤달리니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는 쿤달리니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늘 어놓고 있는 것이다. 구제프와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사람들이 이런 모순의 희생자다. 그들은 쿤달 리니 같은 용어와 에너지의 뒤에 숨어 있는 비밀에 대해 체계적인 지식이 없다. 사실, 이런 진실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한 번의 생으로는 불가능하다. 수십 번의 생을 통해 여러 가지 다양한 수행 체계를 접해 본 사람만이 이런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이렇게 수십 번의 생애를 통해 여러 가지 수행법을 배운 사람만이 마지막 생 애에서 다양한 체계를 종합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종합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흔히 한 사람은 한 가지 방편을 통해 궁극에 도달하고, 그런 다음에 그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게 된다. 그의 목적이 달성 되었다. 그의 삶이 성취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수행법의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세계의 다양한 수행법 사이에 종합이 가능하다고 느낀다. 이것 은 대단히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수행법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근하고 한데 모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똑같 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선사들 중에는 구도자를 찬 밖으로 집어던지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구도자 안에 생소한 상황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선사는 프라나얌이 아무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 브라스트리카 프 라나얌(bhastrika pranayam), 즉 풀무질처럼 격렬한 호흡이 무용(無用)하다고 말 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은 '브라스트리카 호흡이 아무 효과가 없다면 당신처럼 사람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것은 무슨 효과가 있는가?'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붓다가 마하비라 같은 사람에게 가서 '어떤 사람이 창문 밖으로 떨어진 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하고 말해 보라. 그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대꾸할 것이 다. 사람들이 지붕이나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일은 날마다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 중에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것과 창문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 붕에서 추락하는 것은 미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몇 사람이 그대를 들어올려 창 문 밖으로 집어던지고, 그대가 자신이 집어던져지는 것을 안다면 이 때 어떤 상 황이 창조된다. 그대는 생소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대는 자신이 창문 밖으로 집 어 던져지고 땅바닥에 뒹굴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것 이 그대에게 육체와 분리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선사들은 느닷없이 지팡이로 구도자의 머리를 내려친다. 이것 또한 이상 한 일이다. 그대가 합장 인사를 올리고, '저는 마음의 평화를 구합니다.'하고 말하 는 순간 선사는 주장자로 그대의 머리를 내려친다. 구도자는 갑자기 이상한 순 간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인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만일 그대가 누군가를 내리친다 면 그는 즉시 반격을 가할 것이다. 그는 싸우려고 덤빌 것이다. 이런 일은 일본 같은 나라에서나 가능하다. 그런 나라에서는 이런 방편이 잘 알려져 있다. 사람 들은 선사의 이상한 행동 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구도자를 내려침으로써 선사가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선사는 그대를 보자마자 그대의 어머니와 누이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대를 어이없는 상황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대는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 믿고 그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대뜸 욕설을 퍼붓는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만일 그대가 이런 상황을 자각하고 있다 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 대는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전통에서는 이상한 상황을 창조하기 위해 욕설과 상소리까지 사 용되어 왔다. 가다르와라(Gadarwara) 근처의 사이케라(Saikhera)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 한 피키르(fakir)가 있다. 그를 찾아간다면 그가 그대를 어떻게 대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뜸 욕설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그는 온갖 미친 짓을 다할 수 있다. 어쩌면 방문객 앞에 서서 오줌을 갈길지도 모른다. 그대는 기가 막힐 것이다. 이것이 그대 안에 생소한 공간을 창조한다. 그가 그 대를 때리려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그대가 도망가면 몇 마일씩 그대를 쫓아올 것이다. 그를 방문해서 이해한 사람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이 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친 인간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를 이해한 사람들은 많은 도움을 얻었다. 몇 마일씩 도망가야 하는 사람은 아주 이상한 처지에 놓인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 라. 그대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도망가고, 스승은 맹렬하게 추격한다. 그리 고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참으로 이 상한 상황이 창조된다. 여러 가지 전통과 테크닉, 방편들이 이런 상황을 창조해 낸다. 그러나 하나의 전통에 속하는 사람은 다른 전통들 또한 고유한 방법으로 똑같은 상황을 창조해 낸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밖에도 다른 어려움이 있다. 내가 그렇듯이, 다른 방편에 의해서도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하나의 방편을 설명할 때, 나는 그 방편을 최상의 것으로 언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방편이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다른 방편에 의해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직 내가 말하는 방편만을 통해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으며, 다른 방편으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올바르게 이해할 만큼 지성적이지 못하다. 내가 '모든 방편은 똑같은 목적지로 인도한다.'고 말하면 이 말은 그대를 혼란시킬 뿐이다. 그대는 특별히 효과적인 방편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목적을 이룰 방편은 어디에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게다가 모든 방편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대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지혜를 얻은 사람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무지한 자들의 언어로 말해야 하 는 까닭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이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 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나는 다른 길을 통해서도 목적이 달성될 수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종종 나는 큰 곤경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쿤달리니가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어제 당신께서는 에너지의 저수지인 쿤다(kunda)가 각 개인마다 틀리고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쿤달리니 에 너지는 타인이 아니라 구도자 개인의 쿤다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쿤다는 각 개인 안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직 하나의 쿤다가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이것은 그대의 집에도 우물이 있고 내 집에도 우물이 있는 것과 같다. 분명히 두 개의 우물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우물에 물 을 공급하는 지하 수맥은 똑같다. 그리고 이 지하 수맥은 하나의 바다와 연결되 어 있다. 우물물이 솟아오르는 지하 수맥을 따라가면 그대는 내 우물과 다른 우물들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거대한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쿤 달리니의 여행은 개인에게서 시작되지만 마지막에는 개인이 없는 곳에서 끝난 다. 그 때는 오직 하나의 전체, 절대계, 하나의 우주적 실체가 있을 뿐이다. 그것 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이 여행의 출발점에서 그대와 나는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적 지점에는 그대도 없고 나도 없다. 그대와 나는 둘 다 이 여행의 궁극적 지점에 존재하는 '여여(如如)한 실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깨어날 때, 처음에는 그 에너지가 그대에게 속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대 한 개인의 소유물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대는 자신의 우물 안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달리니가 상승하고 팽창하면 서서히 그대는 자신의 우물이 다른 우 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아 경험이 깊어질수록 그대의 개 인적인 우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바다가 나타난다. 그리고 궁극적 경 험에 이르렀을 때 그대는 이 쿤다의 우물이 모든 이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쿤다는 하나며 우주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쿤다는 우주적인 에너지의 저수지다.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각기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각도에 서 이해해 보자. 하나의 나뭇잎이 갑자기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하자. 이웃에 있는 나뭇잎들이 자신과 분리된 타인처럼 보일 것이다. 다른 나뭇가지에 달린 이파리들을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른 나뭇가지의 잎들은 고사하고, 같은 가 지에 달린 이파리들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바로 옆에 있는 이파리도 타인처럼 보일 것이다. 이 나뭇잎의 의식은 개인적인 의식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 나뭇잎이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옆에 있는 이파리들과 자 신이 같은 가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한 경로를 통해 즙을 얻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이 속한 가지뿐만 아니라 이웃에 있는 가지들도 똑같은 나무의 일부며, 동일한 근원을 통해 생명의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뿌리까지 도달 했을 때 이 나뭇잎은 모든 가지와 이파리 가 하나의 나무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더 깊이 들어가 땅 속까지 파고들면 다른 나무의 뿌리들과 만날 것 이다. 이 때 나뭇잎은 모든 나무가 하나의 대지, 한 명의 에너지를 가진 아이들 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에서 여행을 더 계속하면 이 나뭇잎은 궁극적 으로 우주 전체가 자신의 확산된 모습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작은 나뭇잎 하나가 이 엄청난 우주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파편으로서 자신을 인식할 때 이 나뭇잎은 분리된 개인이 된다. 그러 나 자신을 거대한 전체로서 인식하면 이 나뭇잎은 개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개인이 사라진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될 때 처음에 그대는 자신을 '아트만(atman)'으로 경험 한다. 그러나 궁극적 단계에서는 자신을 '파라마프만' 또는 신 자체로 경험한다. 쿤달리니가 깨어난 첫 번째 단계에서 중단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면, 자 신의 우물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안주한다면, 이 때 그대는 아트만의 단계에 정 체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아트만의 단계에 묶여 있다. 그들은 아트 만 또는 영혼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이 아트만은 궁극적인 경험이 아니다. 이 종교들은 여행의 반절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여기서 계속 나아가면 아트만 마저 사라지고 파라마트만(paramatman), 신 또는 전체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신마저 사라지고 결국에 는 공(空), 니르바나(nirvana)만 남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무(無)가 남는다고도 할 수 있다. 신을 넘어선 사람들은 니르바나에 도달했다. 이것을 그들은 궁극적인 허(虛) 또는 절대적인 무(無)라고 말한다. 그들은 거기에 무(無)가 남는다고 말한다. 궁 극적으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또는 무(無) 자체가 남는다고 말할 수 있다. 전체(the All)를 깨달음과 동시에 그대는 무(無) 또는 공(空)을 깨닫는다. 절대 (絶對;the Absolute)는 공(空)이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 보자. 제로와 전체, 무(無)와 전체, 공(空)과 절대 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두 가지 이름일 뿐이다. 이 두 가지 단어는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 의미는 같다. 제로는 또한 전체다. 공(空)은 또한 충만함이다. 무 (無)는 또한 전체성이다. 반쪽 자리 공(空) 또한 반쪽짜리 제로를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제로를 두 개의 반쪽으로 나눈 수 없다. 제로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나눈 수 있 다면 그것은 제로가 아니다. 둘을 반으로 나눌 수도 있고, 하나를 반으로 나눌 수는 있다. 그러나 제로는 안 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제로를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은 불 가능하다. '0'이라는 숫자는 상징일 뿐이다. 그대가 '0'이라고 쓰자마자 그것은 이 미 제로가 아니다. 그대가 선으로 경계선을 만들고 울타리를 쳤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에게 물어 보면 그는 '제로는 길이도 없고 넓이도 없다.'고 말할 것이 다. 제로를 아무리 작게 그려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점으로 표시한다 해도, 거기에는 길이와 넓이가 있다. 그러므로 종이 위에 쓴 '0'이라는 숫자는 하 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의 제로가 아니다. 길이와 넓이를 갖고 있는 한 그것은 제로가 될 수 없다. 우파니샤드(Upanishads)에서는, 허공(the void)에서 허공을 빼면 여전히 허공 이 남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공(空)에서 아무것도 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대 가 허공을 훔쳐내도 뒤에는 허공이 남을 것이고, 결국 그대는 모든 노력이 헛되 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공(空_은 제거될 수 없다. 항상 똑같이 남는다. 제로에 대해 적용되는 이런 사실이 전체 또는 절대에 대해서도 작용된다. 사 실, 공(空)을 통하지 않고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전체는 아무것도 빼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절대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없고, 공(空)에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없다. 전체나 공(空)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 은 애초부터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전체에는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경계선이 그어진 것은 전체가 아니기 때문 이다.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은 경계선 밖에 무엇인가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계선이 있는 곳에 전체성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대 집의 경계선이 시작되는 곳에서 내 집의 경계선이 끝난다면, 이것 은 내 집이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만일 내 집이 전체라면 그대의 집까 지 포함해야 한다. 그대의 집이 내 집 바깥에 있어서는 안 된다. 전체에는 한계 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는 무한하다. 누가 경계를 정한 것인가? 경계선을 정하려면 밖에 있는 이 웃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체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전체만이 홀로 존재한다. 전체에는 경계선을 그을 이웃이 없다. 명심하라. 경계를 정하려면 둘이 필요하다. 둘이 경계를 만든다. 내가 끝나고 다른 사람이 시작되는 곳에 경계가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없이 나 홀로 그 곳 에 존재한다면 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라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전체에는 한계가 없다. 누가 경계를 만들 것인가? 마찬가지로 공(空)에도 한계 가 없다. 경계선이 그어진 것은 '어떤 것(something)'이지 더 이상 '아무것도 아 닌 것(nothing)'이 아니다. 오직 '어떤 것'만이 한정될 수 있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대는 공과 전체가 언어적인 표현 방식만 다를 뿐 똑같다는 것을 알 것이다. 종교적인 순례자는 두 가지 길 모두를 따라갈 수 있다. 전체가 되는 길을 갈 수도 있고, 공(空)이 되는 길을 갈 수도 있다. 두 가 지 길 모두 그대를 궁극적인 목적지, 모든 것의 목적지로 데려갈 것이다. 전체의 강을 가는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사람의 길은 긍정적인 길이다. 그는 '내가 브라흐만(brahman)이다. 내가 절대자다.'라고 말한다. 그는 '내가 신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다. 나를 넘어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존재하지 않 는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너'를 포괄한다. 이렇게 무한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는 목적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는 '나' 또한 사라져야 한다. '너'가 없다면 어떻게 '나' 를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 는 '너'가 있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너'가 없으면 '나'는 무의미하다. 브라흐만이 되었을 때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말은 '브라흐만'과 '너'라는 두 가지 존재 방식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나'의 소멸과 더불어 브라흐만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 때는 침 묵을 지킬 수 밖에 없다. 아무 말도 필요 없다. 이 외에 자신을 무(無)로 돌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다른 길이 있다. 위에서 말한 첫 번째 길에서 그대는 '나는 브라흐만이다. 내가 모든 것이 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길에서는 '나는 무(無)다. 모든 것이 절대적 인 공(空)이다.'라고 말한다. 이 두 번 째 길 역시 그대를 궁극적인 목적지로 데 려간다. 그리고 그 곳에 도달했을 때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는 '나'라는 현존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목적지에서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나'마저 사라진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말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과 '공(空)'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지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수밖 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느 길을 통해 여행을 시작하든 상관없다. 전체를 통해 출발하건 공(空)을 통 해 출발하건 그대는 아무 말도 남지 않는 절대적인 침묵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 다. 그러므로 어느 길을 통해 여행을 시작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목적지다. 우리가 궁극 적으로 도달하는 곳, 그 곳이 중요하다.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거기에 도달했다면 그 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던 옳은 길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옳은 길도 없고 그른 길도 없다. 그대를 목적지로 인도하는 길은 무엇이든지 옳다. 목적지 는 하나다. 그러나 초입부에서 그대는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초지 단계에서의 경험은 언제나 '나'를 지향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기 때문이다. 이 '나'가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이다.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대가 쿤달리니를 깨우건, 명 상 속으로 들어가건, 아니면 침묵 속으로 들어가건, 초기의 경험은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경험이 '나'를 지향할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이 '나'라는 개안으로서 일어난다. 여행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개인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개인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경험이 깊어질수록 개인 의 용해(溶解)도 그만큼 깊어진다. 그러나 내면의 여행에서 벗어나 외부에서 방 황하면 우리의 '개인', 우리의 에고가 증가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물 옆에 서 있다고 하자. 우물 안으로 들어가 계속 깊이 물을 따라가면 어느 날엔가 그는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결국 그는 우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우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다를 힐끗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에 불과 하다. 거대한 바다를 향해 뚫린 작은 구멍일 뿐이다. 우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다를 조우할 수 있는 작은 통로다. 우물 안에 있는 물을 우물물이라고 보는 것은 틀린 생각이다. 우물 안에 있는 물은 바다 자체다. 그 물은 바다에서 왔다. 우물은 우리가 바다를 들여다보는 작은 틈 바구니일 뿐이다. 이 틈이 커질수록 더 많은 바다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멀어진다면 서서히 그대는 물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땅에 뚫린 구멍과 그 담장만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바 다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 그대는 바다와 우물이 하나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내면을 향한 여행이 단일함과 유일(唯一)의 세계로 그대를 데려간다면, 외부로 의 여행은 분열과 다양성의 세계로 그대를 데려간다. 외부로의 여행은 그대를 다수(多數)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모든 경험의 초기 단계에는 개인이라는 우물이 있지만 그 끝 단계에는 비개인적인 바다 또는 신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에너지의 쿤다가 하나며 우주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대 가 더 깊이 들어간다면 쿤다는 더 이상 그대의 쿤다가 아니다. 오직 우주적인 쿤다가 있을 뿐이다. 그 때는 아무것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자연의 이치상 그럴 수가 없다. 당신께서는 깊은 호흡에 의해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변한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쿤달리니의 각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 오.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의 잠재성과 삶의 잠재성이 있다.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산소는 삶의 잠재성이고, 이산화탄소는 죽음의 잠재성이 다. 몸 안의 산소가 점점 감소되어 사라지고 이산화탄소만 남는다면 그대는 시 체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무 조각이 타는 것과 같다. 산소가 있는 한 나무는 계속 탄다. 산소 가 있는 한 나무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 그러나 산소가 다 소모되면 나무는 죽어서 재가된다. 이 재가 탄소(炭素)다. 탄소는 불이 죽고 뒤에 남은 흔적이다. 이 두 가지 원소가 우리 몸 안에서 작용한다.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높을수록 우리는 무기력해진다. 이것이 대낮보다 밤에 잠들기가 더 쉬운 이유다. 밤에는 산소가 감소하고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태양으로 인해 공기 중의 산소량이 증가한다. 모든 것이 활발하게 살아난다. 그러나 해가 지자마자 산소량이 현저하게 감소한다. 어둠과 밤이 게으름, 불활성(不活性), 무지, 죄악의 상징이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반면, 태양은 빛과 삶, 에너지의 상징이다. 태양은 생명을 가져오기 때문이 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쇠퇴한다. 꽃봉오리가 닫히고 잎이 시든다. 살아 있는 생 명체 모두가 잠자리에 든다. 말하자면, 지주 전체가 일시적인 죽음의 상태, 가사 (假死)상태에 빠진다고 할 수 있다. 아침이 되면 다시 꽃이 피어나고, 나무가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이파리들이 살 아난다. 새들이 날기 시작하고 모든 생명체가 깨어난다. 지구 전체가 활발한 축 제 마당이 된다. 밤 동안의 가사 상태가 가고, 지구에 다시 삶이 돌아온다. 이와 똑같은 일이 그대 안에도 일어난다. 산소량이 증가하면 그대 안에 잠자 던 에너지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잠자던 에너지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 수적이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도 산소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 동 안 살아 있을 수 있다. 산소 마스크만 떼면 그는 즉시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산소를 주입받으면 그는 며칠이나, 몇 달, 심지어는 몇 년까지도 살아 있을 수 있다. 극도로 약화된 생명력이 산소의 힘으로 유지된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도 산소의 도움을 받아 생명의 불꽃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는 이런 식으로 산소를 주입받으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산소 호흡기가 없다면 그들은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지금 서양에서는 안락사(安樂死)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대두되 고 있다. 안락사 문제는 필요할 경우 인간에게 죽을 권리가 있음을 뜻한다. 산소 호흡기와 다른 장비들을 이용해 의사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 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의사의 문제는,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죽음을 허용하면 살인죄로 기소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혀 가망이 없는 여든 살 먹은 노인도 산소를 주입해 살려 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인죄로 기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는 콧구멍에 산소 튜브를 꽃아 놓고 이 꺼 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유지시킨다. 프라나얌과 브라스트리카(bhastrika)같은 수행법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내가 말하는 깊은 빠른 호흡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이 방편에 의해 그대는 강렬한 생명의 힘을 흡입한다. 그래서 그대 안에 잠자 던 에너지가 깨어날 힘을 얻게 된다. 동면 중이던 에너지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대 안에 깊게 자리잡은 불활동(不活動)의 패턴, 잠의 패턴이 깊고 빠른 호흡에 의해 파괴된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4년 전쯤 스리랑카에서 한 비구 승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3년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상태로 지내 오고 있었다. 온갖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불교 인들 가운데 성행하는 아나판사티(anapansati)요가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판사티 수행법은 24시간 내내 깊은 호흡을 관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승려에게 아나판사티 요가를 가르친 사람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하루 24시간 내내 깊은 호흡을 관조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잠이 불 가능해진다.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은, 이 승려가 아나판사티 요가를 수행하는 동시에 수 면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약이 잠을 유도하고, 다른 한편에 서는 지속적인 호흡의 관조가 그를 깨어 있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의 몸 안에 일종의 교착 상태, 갈등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자동차의 가속 폐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을 때 이 승려는 커다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그가 광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어 려운 상황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즉각 아나판사티 요가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기를 원한다. 그 는 깊은 호흡을 끊임없이 지켜보는 것이 체내의 산소량을 증가시켜서 육체를 잠 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만일 아나판사티 요가를 그만둘 수 없다면 수면제 복용을 중단하 고 잠 없이 지내라고 말했다. 아나판사티 요가를 계속한다면 잠 없이 지내는 것 은 쉬운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 해도 없는 일이었다. 이 승려는 아나판사티 요가를 중단했다. 그리고 8일 만에 잠이 찾아왔다. 약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잠의 가능성을 높여 준다. 이산화탄소는 이 미 잠들어 있는 에너지를 더 깊은 잠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의 무의식이 깊 어진다. 한 사람 몫으로 돌아가는 산소량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나치게 많은 무리의 무의식이 날로 증가한다. 어쩌면 깨어 있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최저로 떨어지는 날이 곧 올지도 모 른다. 그대는 아침에 상쾌함을 느낀다. 숲 속이나 바닷가에 가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끓는 시장에 가면 멍하고 둔감해진다. 왜 그럴까? 이산화탄소가 많고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산소는 항상 생산 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많은 군중 때문에 산소의 부족 현상이 일어난다. 극장이나 사원 등 군중이 운집하는 곳에가 보아라. 그대는 곧 멍하고 둔감해질 것이다. 그러나 산이나 정원, 강가에 가면 의식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활기가 솟아나고 행복이 느껴진다. 체내의 산소량을 증가시키는 데는 중요한 목적이 있다. 이것은 내면의 균형 (balance)을 변화시킨다. 그대를 더 깨어 있게 만드는 한편 잠과 무의식을 줄어 들게 한다. 그리고 산소량이 갑자기 비약적으로 증가하면 내면의 균형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별안간 천칭 저울의 한 쪽이 위로 올라가고 다른 한 쪽은 아래로 떨어 지는 것과 같다. 내면의 균형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대는 이 변화를 강 력하게 느낄 것이다. 점진적인 변화는 느끼기 힘들다. 이것이 내가 빠르고 강렬한 호흡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대는 단 십분만에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동함으로써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 때 그대는 변 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급격한 변화만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동기에서 청년기로, 청년기에서 노년기로 나아간다. 그러 나 이 과정이 너무나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하게 언제 청소년이 되었는지, 언제 노인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정확하게 어느 날에 노인이 되었는지 묻는다면 이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아무 도 없다. 그리고 노인이 된 사람도 이제 자신이 노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다. 청년기와 노년기 사이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간격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청년이 된 다음에도 자신이 청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 래서 그는 마냥 아이처럼 행동한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는 분명히 청년 이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부모는 그가 성인으로서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을 어린아이로 생각한다. 이것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매우 느리고 조용하게 진행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인은 자신을 아직 젊은이로 착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자신 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깨닫지 못한다. 어떻게 그가 알겠는가? 변화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변화가 신속히 급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특정한 날, 정해진 시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혼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제 당신은 성인이다.'하고 상기 시켜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명상법을 통해 급격하고 강력한 변화를 추진한다. 이것은 그대로 하 여금 잠든 의식과 깨어 있는 의식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가치 있는 앎이다. 이 앎은 그대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방편들을 선호 한다. 만일 변화가 일어나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면 그대는 변화를 눈치채지 못 할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미 변화가 일어난 것을 모른다면 그대의 이해가 깊 어지지 못할 것이다.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영적인 경험에 도달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이때는 변화가 너무나 느리고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때 그대는 이미 오류가 되어 버린 과거의 시각에 따라 그것 을 해석하려고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새로운 시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적 경험에 가까이 근접했다가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낡은 시각으로 해석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은 변화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버팔로(buffalo)를 들어올릴 수 있는 사람을 안다. 버팔로는 상당히 크고 무거운 동물이다. 그의 농장에는 버팔로가 많다. 이 사람은 새끼 버팔로를 들어올리기 시작해서 긴 세월 동안 매일 그 일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버팔로가 성장하는 만큼 그가 들어올릴 수 있는 능력도 증가했다. 이제 그는 다 자란 버팔로도 거뜬히 들어올 릴 수 있다. 이것은 기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것을 기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다. 그는 오랜 기간을 통해 서서히 이런 능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 현상으로 기적으로 감지 할 수 있는 시각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이 사람처럼 버팔로를 거뜬히 들어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기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이 강력하고 역동적인 명상법을 가르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산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대의 몸이 더 많은 산소로 채워질수록 육체에서 영혼으로의 이동이 더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그대는 육체가 그대의 존재 중에서 죽어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육체는 고형화(固形化)되어서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부분이 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다. 반면, 그대 존재의 다른 부분인 영혼은 고형화되어 있지 않다. 영혼은 공개처 럼 끊임없이 흐른다. 너무나 미묘해서 손으로 잡을 수 없다. 산소는 그대에게 각성과 삶을 가져다 준다. 이 산소가 육체와 영혼 사이에 간 격을 창조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육체와 영혼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대'라는 같은 존재의 부분이지만 전혀 별개다. 쿤달리니를 깨우는 데 있어서 호흡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쿤달리니는 잠들어 있는 에너지다.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쿤달리니를 깨울 수는 없다. 오히려 더 깊이 잠들 뿐이다. 그러나 산소는 쿤달리니를 깨우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우 리가 아침 명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침에는 약간의 호흡으로도 많은 양의 산소를 흡입할 수 있다. 해가 뜨고 나 서 한 시간 동안 지구는 매우 독특한 상태에 있다. 전 세계에서 명상하기 가장 좋은 시간으로 아침을 선택하는 것은 이런 상황의 이점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깊고 강렬한 호흡으로 내려치면 쿤달리니는 더 빨리 깨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호흡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호흡의 중요성을 별로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한다. 이것이 문제다. 가령, 우리가 불붙은 양초나 등불, 성냥개비를 본다고 하자. 우 리는 불꽃과 그 주변의 빛을 볼 뿐, 실제로 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 모든 현상의 핵심적인 요소는 산소다. 불타면서 빛을 내는 것은 산소다. 연 료가 기름이든, 양초든, 성냥개비든 중요하지 않다. 기름은 등잔의 눈에 보이는 부분이다. 기름이 육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등잔 의 영혼을 형성하는 것은 산소다. 실제로 불타고 있는 것은 이 산소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날 저녁, 온 가족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외출하면서 아이에게 집을 보 라고 했다. 그 집에는 신을 모시는 작은 제단이 있었고, 신상 앞에는 등불이 타고 있었다. 이 등불은 하루 24시간 내내 꺼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 등 불이 꺼지지 않도록 특별히 유의하라고 아이에게 일러두었다. 아이는 혼자 집을 보고 있다가 강한 바람이 불어 안으로 들어오자 등불이 염 려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리로 등불을 덮어 버렸다. 등잔은 보호되었지만 불꽃은 즉시 꺼져 버렸다. 등불을 바람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소 의 부족은 견디어 낼 수 없었다. 불꽃은 즉시 죽어 버렸다. 산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소가 불꽃의 생명이다. 우리가 생명 이라고 부르는 것은 산화(酸化) 작용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등불이 타 오르는 것과 같다. 과학적인 개념으로 말한다면, 생명은 타오르는 산소다. 인간 이든, 등잔이든, 태양이든, 산화 작용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산화 작용이 활발할수록 그대 생명의 불꽃은 더 밝아진다. 쿤달리니 가 이 생명의 불꽃이다. 그리고 싶은 호흡을 통해 산소의 작용이 활발해질수록 쿤달리니의 불꽃이 더 커진다. 쿤달리니를 깨우는 데 있어서 산소는 매우 큰 역 할을 한다. 요가 수행자들 중에는 산소가 희박한 산 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 다. 그렇다면 이것이 삼매를 얻는 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만일 이런 사전 준비가 없 다면 동굴 속의 요기(yogi)는 결코 삼매(三昧)를 얻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그의 무의식이 증가할 것이다. 그가 얻는 것은 삼매가 아니라 심화된 잠과 무의식뿐 이다. 프라나얌 수행을 통해 자신을 산소로 가득 채운 사람, 이런 사람만이 동굴을 이용할 수 있다. 프라나얌 수행을 깊게 해서 온 몸의 피 한 방울, 세포 하나까지 산소로 충만 해진 사람은 땅 속에 매장되어도 8일을 견딜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8일 동안 생존하기에 충분한 산소를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여분의 산소를 갖고 있지 못하다. 만일 프라나얌 수행을 통해 여분의 산소를 축적하지도 않고 요기를 따라 땅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면, 8일이 지난 후에 요기는 살아 나오겠지만 그대는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요기는 땅 속에 매장되어서 8일을 견딜 만큼의 산소를 축적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명상을 위한 장소로 동굴을 이용할 수 있다. 산소에 관한 한 그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동굴만이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 다. 여러 가지로 구도자를 보호해 준다는 점에서 동굴은 매우 유용하다. 동굴은 바깥 세상의 소음과 혼잡함을 차단해 줄 뿐만 아니라, 요기에게 해를 미칠 수도 있는 여러가지 진동을 막아 준다. 특별한 종류의 돌로 만들어진 동굴은 큰 의미 를 갖는다. 예를 들어 대리석 같은 돌은 여러 가지 진동이 동굴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 준 다. 사원을 짓는 데 대리석이 폭넓게 쓰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대리석으로 인 해 어떤 진동들이 사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사원을 짓는 데 대리석이 사용된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장식용 목적 만은 아니다. 여기엔 오랫동안의 실험을 통해 발견된 실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특정한 종류의 진동을 흡수하기 때문에 사원 안에서 사용될 수 없는 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진동을 차단해 주는 다른 돌로 있다. 그리고 어떤 돌은 정신 적 수행에 보탬이 되는 진동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과거에는 동굴이 특정한 형태와 규모로 조성되었다. 동굴의 디자인 또한 사드 하나에 중요한 영향으로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이에 관한 모든 과학이 실종되었다. 우리는 자동차를 특별한 모양으로 만든다. 이것은 자동차의 속도를 염두에 두 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공기와의 마찰이 적은 형태로 만들어져야 한다. 자동차의 앞부분을 평면으로 만들면 공기와의 마찰이 커질 것이고 당연히 속 도가 둔화될 것이다. 따라서 화살처럼 공기의 저항을 적게 받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자동차는 공기를 가르고 달리기 때문에 차의 뒷부분에 진공 상태 가 형성되고, 그 진공 속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면서 차의 속도를 높여 준다. 알라하바드(Allahabad)의 갠지스(Ganges) 강에 놓인 다리를 본 것이 있는가? 그 다리는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건설되었다. 강물의 흐름이 너무 거세어서 교 각이 버티어 낼 수 없었다. 어렵사리 공사를 진척시켰지만 하나의 교각이 문제 였다. 이 교각을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다른 교각들이 다 세워진 다음에 도 이 교각은 계속해서 현대의 기술을 조롱하고 있었다. 고심하던 차에 어린아 이처럼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 교각을 신발의 형태로 만들었다. 그 러자 교각은 거센 강물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신발을 관찰해 보면 그 형태가 걷기에 편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것이 다. 신발은 공기를 가르면서 저항을 덜 받도록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신발 모 양의 교각은 지금도 갠지스 강의 거센 물결을 견디어 내고 있다. 이것이 여러 동굴들이 특별한 형태와 규모, 그리고 특정한 종류의 돌로 만들 어진 이유다. 구도자는 특정한 범위 내에서 자신의 진동을 방출한다. 실험을 통 해 그는 자신의 사드하나를 위해 얼마 만큼의 공간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예를 들어, 그가 자신의 진동으로 64평방 피트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만큼의 공간이 안전한 범위로 여겨지고, 그는 딱 그만큼의 공간을 마련 할 것이다. 그에게서 방출되는 진동이 그 공간을 채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가 능한 한 문을 적게 만든다. 하나면 충분하다. 이 하나의 문도 특정한 형태와 크기를 가져야한다. 구도자의 진동을 보존하는 동시에, 원하지 않는 진동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구도자들이 동굴을 수행 장소로 사용하면 그 동굴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된 다. 새로운 구도자들이 그 동굴로 인해 큰 혜택을 입을 수 있다. 그런 동굴에는 특별한 진동이 보존되어 있다. 어떤 동굴들이 수천 년 동안 수행 장소로 이용되 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잔타의 동굴군(洞窟群)이 처음으로 발견되었을 때는 모든 동굴이 진흙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여기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물론, 이 동굴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모든 동굴이 진흙으로 조심스럽게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겉으로 보면 전혀 동굴 같지 않았다. 그리고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들이 평범한 암석처럼 보이는 이 동굴들을 가리고 있었다. 이 동굴들을 흙으로 가득 채워서 가린 이유는 그 안에 형성된 특별한 진동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동굴에서 수행하던 구도 자들이 떠나면서, 미래에 찾아올 다른 구도자들을 위해 진동을 보존하려는 목적 으로 동굴을 봉쇄한 것이다. 지금 아잔타의 동굴들은 관광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 동 굴군은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이 동굴 안에 있는 소 중한 것들을 파괴해 버렸다. 이제 이 동굴들은 정신적인 가치가 없다. 동굴은 산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다른 면에서 혜택을 준다. 사드하나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거기엔 여러 가지 면이 있다. 진보된 구도자들에게 동굴은 유 용하다. 구도자들이 하루 종일 동굴 안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때로 동굴 밖 으로 나왔다. 어떤 수행은 동굴 밖에서 행해지고, 어떤 수행은 동굴 안에서 행해 졌다. 그들은 동굴의 안과 밖을 모두 이용했다. 사원과 모스크(mosque)는 구도자의 성장에 보탬이 되도록 진동과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간혹 어떤 장소를 방문하면 갑자기 생각이 바뀌 는 일이 일어난다. 그대는 그 장소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대는 이 변화가 저절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어떤 사람의 현존 앞에서 그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대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 중에서 전혀 다른 면이 전방으 로 돌출한다. 이 때 그대는 이것을 기분이 바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 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런 쪽으로 상당한 연구가 행해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pyramid)를 예로 들 수 있다. 피라미드가 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심도 있는 연 구가 행해졌다. 황폐한 사막에 이렇게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만큼의 돈과 인력이 소모되었을까? 단순히 시체를 집어넣기 위해 그렇게 거대한 피라미 드를 세운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낭비 아닌가? 그러나 사실 피라미드는 영적인 목적을 위해 특별히 건설된 것이다. 피라미드 는 사드하나가 쉽게 행해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 의 시체가 안치된 것도 영적인 목적이 있었다. 티베트(Tibet)에서는 위대한 보디사트바들의 시신이 깊고 비밀스러운 동굴 속 에 보존되어 왔다. 그 중의 일부는 수천 년이나 된 것도 있다. 붓다가 가졌던 육체는 평범한 육체가 아니다. 그 육체가 비록 물질이라 해도, 위대한 붓다의 영혼과 80년 동안 연결되어 있던 육신은 평범하지 않다. 그 육신 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 이 육체는 80년 동안 붓다의 비범한 진동을 흡수했다. 이런 일이 지구상에 또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하기 힘들다. 예수가 처형당한 후 그의 시신은 동굴 속에 보관되었다. 그 시신은 다음 날 매장될 예정이었으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아직도 신비로 남아 있다. 그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부활에 관한 전설에 의하면, 예수는 처형당한 며칠 후에 몇몇 제자들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부활한 후에 예수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언제 다시 죽었을까? 처형 후의 예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신비한 일이다. 기독교 인들은 부활한 다음의 예수에 대해 아무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 예수의 시신은 너무나 소중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는 곳으로 즉각 옮겨졌다. 그리고 이 사실은 비밀로 지켜졌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서 예수 같은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위치, 구조, 특별한 형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부분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에 답하시면서 오쇼는 '그것은 다른 문제 니 따로 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육체가 비활동적이 되고 호흡이 가늘어집니다. 이것은 신체 내의 산소량을 저하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명상이나 삼매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호흡이 가장 강렬한 단계에 도달하면 그대와 육체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대 의 잠들어 있는 부분과 깨어 있는 부분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이 때 그대는 깨어 있는 부분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육체는 더 이상의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육체가 마치 죽은 것처럼 비활동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생명의 에너지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향해 움직이 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육체다. 영혼은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하 는 말을 이해하는가? 육체는 산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생명의 힘이 영혼을 향해 흐르면 육체는 최 소한의 산소만을 필요로 한다. 그저 살아남을 정도의 산소만 있으면 된다. 만일 이 단계에서 육체에 더 많은 산소가 공급되면 그대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호흡이 느려지고 미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에너지를 일깨우는 데는 호흡이 유용했다. 그러나 일단 에너지가 깨어나면 호 흡의 유용성은 사라진다. 이제 육체는 최소한의 호흡을 요구한다. 그리고 언젠가 호흡이 완벽하게 중단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호흡이 중단되어야 한다. 삼매라고 불리는 정확한 균형의 상태에 도달하면 실제로 호흡이 멈출 것이다. 그러나 이 호흡의 정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지금 당장 호흡을 멈춤으로써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의도적으로 호흡을 멈춘 다고 해서 경험적으로 그것을 알 수는 없다. 이것은 깊은 명상 속에 있을 때와 똑같은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두 가지 방식의 호흡에 익숙하다. 하나는 숨을 내쉬는 것이고, 다 른 하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이 최고에 달했을 때 들숨과 날숨 의 중간 지점에 호흡이 멈추는 때가 온다. 이런 순간이 오면 그대는 자신이 죽 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틀림없이 이런 순간이 온다. 명상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호흡이 점점 느려진다. 마치 호흡이 거의 죽어 버 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깊은 명상 속에서 더 이상의 산소가 필요 없기 때 문이다. 초기 단계에는 산소가 필요했다. 이것은 문을 열기 위해 자물쇠에 열쇠 를 끼우는 것과 같다. 자물쇠가 열린 후에도 열쇠를 계속 돌릴 필요가 있을까? 이제 열쇠는 무용지물이다. 열쇠는 자물쇠에 매달려 있고, 그대는 방 안에 들 어섰다. 이 때 왜 열쇠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대 는 이미 방 안에 있다. 열쇠는 그 역할을 다했다. 열쇠는 방으로 들어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쿤달리니가 깨어나지 않았을 때 그대는 호흡이라는 열쇠를 사용해야 한다. 그 러나 쿤달리니가 깨어나자마자 호흡은 불필요해진다. 내면의 여행길에 들어섰을 때 그대의 몸은 거의 산소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 다. 호흡을 멈추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다. 저절로 호흡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은 순간이 올 것이다. 날숨과 들숨의 중간 지점에 호흡이 멈춰 버린 이 순간,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삼매가 온다. 이 순간에 그대는 생명(life)이 아니라 존재(existence)를 안다. 이 생명과 존재의 차이점을 이해하라. 삼매 안에서 그대는 생명이 아니라 존 재를 안다. 이 존재의 차원에서 호흡이 불필요하다. 존재는 참으로 엄청나다. 이 존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대, 산, 별, 모든 공간이 여기에 포함된다. 존재의 차원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모든 것이 진지 한 채 휴식하고 있다. 이 존재의 바다, 평온하고 고요한 이 바다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다. 그 순간에 호흡이 완전히 멈춘다. 호흡이 저절로 멈춘다. 왜냐 하면 호흡은 이 고요 한 차원, 이 공(空)의 차원을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호흡은 고사하고 생명조차 이 차원을 뚫고 들어 갈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 초월의 차원은 생명까지도 초월한다. 명심하라. 죽음을 초월한 것은 생명 또한 초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살 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죽음의 가능성을 추월해 있 는 신을 살아 있는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명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둘 중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신에게는 생명이 없다.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는 존재 자체다. 그러나 우리에 게는 생명이 있다. 존재로부터 나오면서 우리는 생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죽 음은 다시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은 바다에 이는 파도와 같다. 파도가 일기 전에는 바다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파도가 일어나면서 생명이 시작된다. 그 일어남이 파도의 생명 이다. 그리고 파도가 잠잠해지는 것, 그것이 파도의 죽음이다. 일어나는 것이 파 도의 생명이요, 잠잠해지는 것이 파도의 죽음이다. 그러나 바다는 파도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파도가 일어났을 때도 바다는 있었 으며, 파도가 사라진 후에도 바다는 있을 것이다. 이 항구불변의 존재, 이 고요 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 삼매(三昧)다. 그러므로 삼매는 생명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삼매는 존재의 경험이다. 삼매는 실존적 경험이다. 여기에는 호흡이 필요없다. 삼매에 관한 한 호흡은 무의미하 다. 호흡이 있건 없건 삼매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모든 것이 정지한 지점, 거기 에 삼매가 있다. 그러므로 한 구도자가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깊은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 그를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아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에 그를 도와 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삼매라고 알려진 그 무한한 차원으로 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적절한 보호 가 취해지지 않으면 존재의 차원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는 종종 이런 상태에 도달했다. 그는 며칠 동안 삼 매에 빠져 있곤 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존재의 차원에 흡수되어 있었다. 이 삶 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어려웠다. 라마크리슈나는 매우 존경받는 성자다. 그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세 상을 위해 라마크리슈나를 보호해 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 다. 라마크리슈나의 조카 중 한 명이 같이 기거하고 있었다. 라마크리슈나가 삼 매에 빠질 때마다 밤을 새워 가며 그를 돌봐 준 사람이 바로 그 조카였다. 그는 라마크리슈나의 입을 벌리고 물과 우유 등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라마 크리슈나가 질식하는 것 같을 때마다 호흡을 회복시키기 위해 열심히 몸을 주물 러 주었다. 그는 라마크리슈나를 지키려고 온갖 정성을 다했다. 세상이 라마크리슈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비베카난다를 통해서다. 그러나 세 상을 위해 라마크리슈나를 지켜 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라마크리슈나를 위해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삼매의 경험은 지복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거의 불 가능하다. 그 순간에 존재의 차원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짙다. 이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은 삼매와 아 주 가깝다. 수행 단체와 수도원, 아쉬람(ashram)이 생긴 것은 이 지점에 도달한 구도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단체와 아쉬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수행자들은 깊은 삼매를 경험하는 데 실패했다. 파리브라자카(parivrajaka)라고 알려진 이 떠돌이 수행자들은 가장 깊은 경험 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체가 필요하다. 깊은 명상으로 들어가기 의해서는, 그리고 이렇게 깊이 들어간 구도자들을 죽 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도움을 주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파리브라자카들은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한 장소 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에 집착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단 기간 내도 집 착을 일으킬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3개월 묵은 집착과 3일 묵은 집착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3일 묵은 집착이 다소 약할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무엇인가? 정도가 다를 뿐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 리브라자카들은 요가와 삼매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호할 단체나 공동 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매에 들어가는 것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명상의 단계에 오르는 것은 아무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일단 삼매가 일어난 다음에는 상당한 보호가 필요하다. 돌아올 수 없 는 지점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시급하다. 저 너머의 세 계로부터 메시지를 갖고 올 수 있도록 그를 구해 내야 한다. 삼매를 통해 그 안 으로 들어간 사람, 그 세계를 일별(一瞥)한 사람만이 메시지를 갖고 올 수 있다. 우리가 저 너머의 섹메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삼매에서 돌아온 사람들 을 통해 얻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피안의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몰 랐을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생각이나 사색에 의해 그 세계를 아는 것은 불 가능하다. 직접 그 세계를 접하고 경험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 세계를 접한 사 람은 이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는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길이 끝나고 돌아갈 다리가 끊어진 지점, 끝없는 공(空)의 차원으로 뛰어들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 순간에 주의 깊은 보호가 필요하다. 많은 일이 행해져야 한다. 최근에 나는 삼매를 위해 그대들을 준비시키면서 단체나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개인들이 아니라 단체가 필요하다. 그대의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삼매로 들어간 사람들을 보호할 단체가 필요하다. 그들이 그런 상태로부터 돌 아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 궁극적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가 잘 보존되 도록 지켜 주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경 험 또한 사라질 것이다. 사하즈 사마디(sahaj samadhi) 안에서는 호흡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녹아들어간 사람의 호흡은 매우 리드미컬(rhythmical)하고 조화롭게 된 다. 호흡이 음악적으로 된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하루 24시간 내 내 사하즈 사마디 안에 있는 사람, 마음이 고요하고 평정해서 잔물결 하나 일어 나지 않는 사람, 생명이 아니라 존재에 정착하여 그와 하나가 된 사람, 이런 사 람의 호흡은 저절로 어떤 리듬을 갖게 된다. 그가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을 때, 먹 거나 말하거나 걷는 중이 아닐 때, 이 때 그에게 있어서 호흡은 넘쳐나는 지복 이 된다. 단순히 존재하고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쁨과 지복이 일어난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이런 지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의 호흡은 매우 리드미 컬하고 조화롭다. 그의 호흡은 소리 없는 소리, 한 손에서 나는 손뼉 소리가 된 다. 특정한 호흡법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경험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호흡 수행법이 개발되어 온 이유다. 만일 사하즈 사마디에 잠긴 사람처 럼 호흡을 리드미컬하고 조화롭게 만든다면 그대는 고요함과 평정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프라나얌을 비롯한 여타의 호흡법은 삼매에 든 사람들의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개발된 것이다. 유사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다. 이런 호흡법은 큰 도움이 된다. 삼매의 상태에서는 호흡이 최저로 감소한다. 삼매 안에서는 생명이 존재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매에 잠긴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호흡과 같은 기능들이 필수적이지 않는 차원, 생명이 아니라 존재에 속하는 차 원이 열린다. 이제 그는 이런 차원에 영원히 머물 수 있다. 그는 존재의 차원에 있다. 이제 그는 우리와 연결될 필요가 있을 때만 육체를 사용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육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먹고, 잠자고, 목욕하고, 옷을 입는 등 육체적인 일을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와 연결되기 위함이다. 이런 행위는 우리와 관계를 맺으려는 방편일 뿐이다. 우리와의 관계를 제외한다면 그는 육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호흡이나 여타 의 기능이 필요없다. 그 자신에 관한 한 육체와 그 기능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의 호흡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그는 육체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호 흡한다. 그러므로 그는 산소가 극히 희박한 곳에서도 쉽게 살아갈 수 있다. 고대 의 사원과 동굴들은 문과 창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통풍구가 없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너무나 구시대적인 유물처럼 보인다. 건강과 위생학적으 로 상식에 어긋나는 구조기 때문이다. 이 고대의 동굴과 사원에는 마땅히 문이 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곳도 없다. 통풍구가 전혀 없는 동굴들이 있다. 어떻게 공기가 유입되는지 의심스러울 정 도다. 그러나 여기엔 이유가 있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은 많은 공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너무 많은 공기가 유입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공 기에 실려 온 외부 세계의 진동이 동굴 안에 형성된 아스트랄(astral) 진동을 파 괴할 수고 있기 때문이다. 통풍 장치가 없는 것은 아프티랄 에너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식의 사원과 동굴이 불가능하다. 다시 이런 사원을 지으려면 오랫동안의 호흡 수련이 필요하다. 삼매에 도달한 사람이 있어야만 이 런 사원이 가능하다. 불교의 아나판사티(anapansati) 수행법, 즉 끊임없이 호흡을 주시하는 이 방편 은 신체 내의 산소량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아나판사티는 신체 내의 산소량에 실로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질문이다. 이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삶의 모든 활동, 신체의 모든 기능은 그대가 주의를 집중할 때 더욱 활성화된 다. 대개의 신체 기능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주의를 집중하면 큰 영향을 받는다. 가령, 의사가 진맥을 하려고 손가락을 대면 그대의 맥박에 변화가 일어난다. 맥박이 다소 빨라진다. 이것은 맥박에 주의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심, 의사와 그대의 관심이 맥박을 빠르게 만든다. 의사가 이성(異性)이라면 맥 박은 이보다 더 빨라질 것이다. 더 많은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실험을 해 보라. 먼저 맥박을 체크한 다음 십 분 동안 맥박에 관심을 쏟아라. 그리고 나서 다시 맥박을 재어 보라. 그대는 맥박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맥박이 더 빨라졌다. 그대의 관심이 맥박을 높이는 촉매 역할을 한다. 신체의 다른 기능도 마찬가지다. 아나판사티 수행법은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이것을 호흡을 주시하는 방편 이다. 그대는 호흡에 대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호흡에 간섭하거나 특별한 방법으로 호흡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저 호흡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그뿐 이다. 그러나 그대가 관찰하기 시작하자마자 호흡이 다소 빨라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관찰과 더불어 호흡에 변화가 일어난다. 호흡이 전보다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나판사티의 주된 목적은 호흡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주요 목적은 호흡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꾸준히 호흡을 관찰하면 그대는 호흡과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대와 호흡 사이에 간격이 벌어진다. 무엇인가를 관 찰하는 즉시 관찰자는 관찰의 대상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어떤 것을 관찰하는 순간 그대는 관찰의 대상과 분리된다. 호흡을 관찰하면 이 관찰 자체를 통해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호흡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대 자신을 호흡과 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 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자신이 육체 밖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험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신체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아나판사티 요가는 여러 가지로 행해질 수 있다. 가령, 걸음걸이를 관찰해 보아라. 오른쪽 다리가 올라와 서 앞으로 나가고, 그 다음에 왼쪽 다리가 올라와서 앞으로 나간다. 다리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지켜 보라. 그러면 2주 안에 자신이 다 리와 분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다리는 관찰의 대상으로서 외부에서 움직이고, 그대 자신은 관찰자로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리는 그저 기 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그대 자신은 다리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걷는 중에도 내가 걷는 게 아니다. 말을 할 때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먹을 때도 내가 먹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중에도 내가 잠자는 게 아니다." 그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언덕 위의 주시자가 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걷는 행위를 주시하 는 사람은 , 실제로 걷고 있을 때도 자신이 걷는 게 아니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이 해하기란 힘들다. 자신의 말을 주시하는 사람은 말하는 동안에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시자로 남는다. 아나판사티는 중요한 방편이다. 이 방편은 그대를 주시자로 만든다. 그러나 이 것은 쿤달리니와 다른 길에 속한다. 깊고 빠른 호흡이 허파에 많은 산소를 유입해서 해를 미치지는 않을까요? 호흡하는 동안 허파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다. 호파에는 대략 육천 개의 공기 주머니가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이 정상적 으로 호흡할 경우 천 오백에서 이천 개의 주머니가 채워질 뿐이다. 나머지 주머 니는 이산화탄소로 차 있다. 따라서 필요량보다 많은 산소를 흡입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필 요한 산소량을 흡입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허파의 많은 부분은 사용되지 못한 상태로 남는다. 허파 전체를 산소로 채울 수 있다면 이것은 실로 대단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대의 의식이 크게 팽창될 것이다. 그대는 허파 안에 지닌 산소량만큼 삶을 경 험한다. 산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삶도 더 팽창한다. 만일 허파 전체를 산소로 채 울 수 있다면 그대의 삶은 정상에 도달할 것이다. 건강과 질병은 산소에 의해 판가름된다. 병든 사람은 호흡을 통해 흡입하는 산소량이 적다. 병든 사람이 인공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산소를 제공받아야 하 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대로 놔 두면 그는 죽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산소의 함유량에 의해 건강한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다. 달리기는 건강에 좋다. 달리기는 상당량의 산소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이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체내의 산소량을 증가시키는 모든 행위는 건 강에 좋다. 그리고 산소량을 감소시키는 모든 행위는 건강에 나쁘다. 그것은 병 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허파를 가득 채울 만큼 호흡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 이 없다. 지금 그대는 허파의 용량에 달하는 산소도 흡입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필 요 이상의 산소를 흡입한다는 문제는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허파의 용량 이 상으로 산소를 흡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파의 용량을 채우는 것조차 매우 어렵다. 우리는 호흡을 통해 산소뿐만 아니라 질소와 수소 등의 다른 기체도 흡입합니 다. 이런 기체 모두가 명상에 보탬이 됩니까? 호흡을 통해 흡입하는 이 기체 모두가 명상에 도움이 된다. 공기 중에는 산소 뿐만 아니라 다른 기체도 있다. 이 기체 모두가 명상에 보탬이 된다. 그대가 살아 있는 것은 이런 기체들 때문이다. 이런 기체가 적당한 비율로 섞 여 있지 않은 행성에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기체가 생명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강렬하고 기운차게 호흡할수록 그대는 더 많은 혜택을 입을 것이다. 깊고 빠 른 호흡을 통해 최대량의 산소가 신체 내로 유입된다. 그리고 산소 외의 나머지 기체는 밖으로 배출된다. 공기 중에 있는 여러기체의 비율은 생명에 유용하도록 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산소 외의 다른 기체들도 삶에 유용한 성분이다. 그 기 체들은 해롭지 않다. 깊고 빠른 호흡 후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 다이나믹 명상을 한 후에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 을 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일종의 무거움(heaviness)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 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몸에 대한 자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병든 사람은 몸이 무거운 느낌을 갖는다. 그가 아무리 마른 사람이라 해도 그 렇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아무리 뚱보라도 몸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무겁다고 느끼는 것은 몸 자체가 아니다. 몸에 대한 인식이 무거움으 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괴로울 때만 몸을 인식한다. 발에 상처가 났을 때 우리는 발을 인식한다. 두통이 있을 때 우리는 머리를 인식한다. 아무 통증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몸을 느끼지 못한다. 몸에 통증이 심할수록 이런 느낌이 강해진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을 '몸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이 육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육체에 대한 느낌이 없는 사람이 건 강한 사람이다. 만일 그가 신체의 어느 부분에 동일시되어 있다면 그 부분이 병들었다는 증거 다. 산소량이 증가하고 쿤달리니가 깨어날 때 그대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것은 육체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영혼 또는 아트만에 대한 경험이다. 이 미묘한 경험으로 인해 그대는 가벼움을 느낀다. 무게가 전혀 없는 것처럼 느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공중 부양 현 상이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느낌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게가 없는 느낌 때문에 땅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눈을 떠 보면 그대는 여전히 땅바닥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장 깊은 곳에서 보면, 마음은 영상 언어, 상징의 언어밖에 모른다. 그대가 무게 없음을 경험할 때 마음은 그것을 영상 언어로 표현한다. 마음은 '나는 무게가 없어졌다.'라고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땅에서 떠오르는 영상을 떠올린다. 그래서 마음은 이것을 공중 부양 현상으로 느낀다. 우리의 깊은 마음, 무의식적인 마음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 상과 상징을 이용한다. 꿈 속에 오로지 영상만 있고 언어가 거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꿈꾸는 마음은 경험과 생각을 비롯한 모든 것을 영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 런 까닭에 아침에 일어나면 간밤에 꾼 꿈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낮에 사용하는 일상 언어와 꿈 속의 영상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 이 두 가지 언어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그래서 꿈을 해석해 주는 심리 학자, 정신 분석가 가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우리는 꿈을 이해할 수 없다. 가령, 야망에 가득 찬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야망은 꿈 속에서 어떤 식으 로 나타나는가? 그는 하늘을 높이 나는 새가 될 것이다. 그는 세상 전체를 내려다보는 새가 될 것이다. 야망은 꿈 속에서 비행(飛行)의 형태로 나타난다. 야망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그러나 이 꿈 속 어디에도 '야망'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아침 에 깨어난 후 그들은 왜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꾸었는지 궁금해한다. 꿈 속에서 나는 새가 되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들의 야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깊은 명상 속에도 이런 영상 언어가 있다. 무게가 없는 듯한 가벼움을 경험할 때, 이 가벼움은 땅에서 몸이 떠오르는 영상으로 전환될 것이 다. 이 가벼움이 영상화되려면 공중 부양 현상으로 그려져야 한다. 그 외에는 이 가벼움을 영상화시킬 방법이 없다. 무게가 없다는 느낌이 극히 강할 때는 실제로 공중 부양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매우 드물다. 가끔씩 명상 중에 내면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런 느낌이 매우 두렵습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당연히 두려움을 느끼겠지만. 상당한 열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대 내면의 메커니즘(mechanism) 전체가 변 화를 겪기 때문이다. 육체와의 접속 관계 전부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 다른 관계 가 형성되기 시작한날. 낡은 다리가 무너지고 새 다리가 건설된다. 낡은 문이 닫 히고 새로운 문이 열린다. 이렇게 집 전체가 완전히 변한다. 내면에서 많은 것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메커니즘 전체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진다. 변화의 과도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통해 새로운 질서가 태어난다. 이 새로운 질서는 기존의 질 소와 전혀 다른 독창적인 것이 될 것이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한 질서 가 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전부터 있었던 질서가 부서졌다는 것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질서가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설령 그대가 기존의 질서를 기억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상태를 견뎌 내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는지 경악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이 가능하다. 삭티파트(shaktipat), 즉 에너지의 전이 현상이 일어난 후에도 깊은 호흡과 '나 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런 호흡과 질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날까요? 호흡과 질문이 자연스럽게 되면 이런 의문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 문 자체가 비자연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되면 이런 의 문도 끝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도 마음은 계속해서 이렇게 속삭일 것이 다. "이젠 그만해도 된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났다! 이젠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 다." 마음이 계속해서 속삭이는 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 는 질문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 마음이 거기에 있다.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 마음이 그대를 설득하며 꼬 드기고 있다. 돌연,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그 대가 원한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을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날 이런 질문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터무니없게 느껴질 것이다. 그대는 자신 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문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일단 문을 알게 되면 모든 질문이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이 때, 그는 질문을 해 야 하는지 그만두어야 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가 묻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 순간 질문 은 끝난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아는 순간 모든 질문은 사라진다. 초월의 세 계,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다음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 때는 무엇을 하든 명상이 된다. 걷는 것도 명상이고, 앉아 있는 것도 명상이다. 침묵을 지켜 도 명상이고 말을 해도 명상이다. 그 때는 싸움조차 명상이다. 무엇을 하든 차이 가 없다. 삭티파트의 충격하에서는 깊고 빠른 호흡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때로 는 몸이 이완되고 호흡이 잠잠해집니다. 이런 순간에도 깊고 빠른 호흡을 계속 해야 될까요? 진실로 그런 순간이 온다면 좋은 일이다. 깊고 빠른 호흡이 계속되느냐 잠잠 해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깊고 빠른 호흡이 중단된다 해도 그 것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대가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다. 중요 한 것은 그대의 노력이지, 노력의 결실이 아니다. 모든 것을 내걸고 최선을 다했 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마음은 아주 교활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탈출구를 찾아낸다. 마음은 자 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못하는 일이 없다.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 당장 노력을 그만둬." 마음은 수많은 탈출구와 핑계, 수많은 구실을 찾아 낸다. 이런 일에 마음은 능 숙하기 이를 데 없다. 마음은 이렇게 소리지른다. "당장 그만둬! 더 이상하면 안돼! 여기서 계속하면 너는 질식해서 죽어 버릴 거야."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라. 마음에 이렇게 말하라. "네가 질식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아주 잘된 일이군!" 깊고 빠른 호흡이 저절로 멈추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대 쪽에서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말라. 조금이라도 아껴 두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 그 조금 아껴 둔 것이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낙타의 등에 짚을 싣는다고 하자. 어느 지푸라기가 낙타를 무릎 꿇게 만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많은 짚을 실어도 낙타가 그대로 서 있으면 소용없다. 낙타를 무릎꿇게 만드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아직 싣지 않았다. 낙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 때까지 계속 짚을 실어야 한다. 마지막 지 푸라기가 낙타를 무릎 꿇게 할 것이다. 그 하나의 지푸라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첫 번 째 지푸라기가 아니라 마지막 지푸라기다 어쩌면 99.99파운드를 실었는데도 낙 타를 앉히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 낙타는 0.001파운드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이해해보라. 그대는 망치로 자물쇠를 부수려 하고 있다. 그러나 99번을 내리쳐도 자물쇠는 부서지지 않는다. 이제 기진맥진한 그대가 100번째로 가볍게 내리친다. 그런데 이 가벼운 100번째 타격에 의해 자물쇠가 부서진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단 하나의 가벼 운 지푸라기가 낙타를 무릎 꿇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했음에도 표적을 1인치 차이로 빗나갔다고 말하지 말라. 1인 치 차이로 빗나갔든 1마일을 빗나갔든 아무 차이가 없다. 빗나간 것은 빗나간 것이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친구가 암리차르(Amritsar)의 명상 캠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고등 교 육을 받은 박사다. 그는 열심히 명상했지만 아무 일도 일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왔다.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를 만난 적도 없었다. 마지막 날, 이 명상법을 설명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물은 백 도에 달해야만 수증기가 된다. 물을 99도까지 끓이고 그만둔 사람이, 단 1도 때문에 물이 수증기로 되지 못했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99도까지 끓 여도 물은 여전히 물이다. 99.5도까지 끓여도 물은 변화를 거부할 것이다. 백 도 를 넘어야만 비로소 수증기가 된다. 이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법칙은 법칙이 다." 그 날 저녁 그가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현상을 예로 들면서 한 말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적당히 노력하면 내가 명상을 통해 얻는 것도 그 노력에 상응하는 만큼 은 될 것이다. 어쨌든 무엇인가 얻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 다. 물이 수증기로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백 도가 되어야 한다. 온도가 올라 감에 따라 그에 비례하는 만큼의 물이 수증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98도까지 올라갔다고 일부는 수증기가 되고 일부는 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 다. 물 전체가 백도에 달해야 한다. 백 도에 도달하기 전까지 물은 여전히 물이 다. 그 날 아침 그는 내 말을 듣고 명상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자신 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전까지 3일 동안 그 가 기울인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그 동안 그가 얻은 것이라곤 피곤함뿐이었다. 그러나 이 날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실로 놀라운 체험을 얻었다. 체험을 얻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다른 차이점은 없다. 누가 마지 막 지푸라기를 실었느냐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하나의 지푸라기가 모든 차 이점을 만든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명상 중에 옆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고 그대는 그가 아무 진전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의 독단적인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틀렸다. 그의 백 도와 그대의 백 도는 다르다. 그대의 백 도가 다른 사람의 백 도와 같 지 않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그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 른다. 그는 그대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에너지 전부를 사 용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비유를 예로 들 수 있다. 어떤 삶이 5백 루피 갖고 있는 데 3백 루피를 내기에 건다. 그리고 5루피밖에 없는 그대는 4루피를 내기에 건다. 이 때 그대는 3백 루피를 건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건 것이다. 그러나 3백 루피를 걸었든 4 루피를 걸었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얼마를 걸 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비율이 문제다. 그대가 가진 5루피를 몽땅 내걸었다면 그대는 승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5백 루피 중에 499루피를 건 사람은 태자가 될 것이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5백 루피 전부를 걸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대 자신을 몽땅 내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 1온스(dunce) 의 에너지와 노력도 아껴 두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내일 다시 하자.'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결코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생각 하는 순간 그대는 이미 퇴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 이 종종 일어난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찰나 마음이 그대를 유혹하 고 나선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나타나 그대가 무(無)로 사라지지 못하도록 겁을 준다. 이 때가 에고로서의 그대에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러나 영혼 으로서의 그대에게는 가장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마 음이 들어와 그대에게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그만하면 충분히 하다! 물이 이미 뜨거워질 만큼 뜨거워졌다. 이제 언제 라도 수증기가 될 수 있다." 마음이 임박한 위험을 감지하고 급하게 외친다. 이 순간을 명상에 있어서 가 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 위대한 성취의 순간으로 인식하라. 아무 위험이 없을 때 마음은 그대에게 계속 나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끓는 지점에 도달하면 마음은 그대가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려고 온갖 짓을 다한다. 마음은 그대에게 당장 중지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이미 완전히 지쳤어. 더 이상 나아갈 힘도 없어!"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을 경계하라. 이 순간에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행동 에 쏟아부어아 한다. 이 순간을 놓치면 몇 년을 더 허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다시 99도까지 도달하는 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때로는 거의 백 도에 도달했다가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목적지 를 놓치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도 아끼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지를 놓칠 것 이다. 너무 심한 압력 때문에 혈관이 손상을 입지는 않을까요? 손상을 입게 놔 두어라! 혈관을 지켜서 무엇을 얻겠는가? 어느날엔가 혈관은 어차피 파괴될 것이다. 혈관을 지킨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무지한 상태로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혈관을 지키는 데 연연한다면 그대는 무지한 상태로 죽을 것이다. 혈관을 지 켜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말인가? 우리는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의 안전을 염려 한다. 이것이 문제다.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어찌 합니까? 나는 그대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 다. 만일 그대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졌 을 것이다. 그 때 그대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벌거벗은 사람이 옷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이 두려 움은 그에게 '나는 무엇인가 갖고 있다.'라는 허구적인 만족감을 준다. 그는 '나는 옷을 갖고 있다. 나는 벌거벗지 않았다.'라는 착각을 통해 만족을 얻는다. 실제로 옷을 갖고 있다면 그는 옷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 다. 결국 옷은 옷일 뿐이다. 잃으면 잃는 것이다. 옷을 잃는 것이 대수인가? 그 런 두려움은 버려라. 내 말은 그대의 혈관이 실제로 손상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만일 혈관이 손 상된다면 그것은 명상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이 혈관을 파괴시킬 것이다. 혈관을 비롯한 여러가지를 파괴시키는 주범은 바로 그대의 두 려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점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 자체 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는 긴장되어 있고, 번민에 시달리고, 두려움에 떠는가? 그렇다면 이런 감 정 자체가 혈관을 비롯한 많은 것을 손상시킬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염 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명상에 대해 염려한다. 그러나 명상은 아무 해도 입히지 않는다. 명상은 그대가 이미 받은 손상마저 치유한다. 우리는 두려움에 집착한다. 우리는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피신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저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하고 염려한다. 그래 서 우리는 명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온갖 수를 다 쓴다. 만일 이런 식이라면 왜 명상의 길을 걷는가? 이 두려움과 망설임, 이 갈등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이 명상의 길 근처에도 오지 말라. 명상에 대해서 인연을 끊 는 게 더 낫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중간 지점에서 우왕좌왕한다. 우리는 양쪽 모두를 원한다. 명상을 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명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실제로 우리는 파괴하는 것은 이런 갈등이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갈등을 겪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 그들은 신을 찾아다니는 동시에 신과 마주칠까 봐 두려워한다. 이 분열된 마음, 이중적 인 마음이 문제다. 마음의 한 부분은 원하고 다른 부분은 원하지 않는다. 의심과 갈등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어떤 것을 전체적으로 원하 는 경우가 없다. 무엇인가를 전체적으로 원한다면 아무것도 그대의 길을 가로막 지 못할 것이다. 그 때 삶은 막힘 없이 역동적으로 흐를 것이다 그대의 삶은 지 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역동적인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빠져 있다. 우리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딛 는 즉시 다른 발을 뒤로 물린다. 집을 지으려고 벽돌을 쌓고는 다음 순간에 그 벽돌을 제거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집을 짓는다는 기쁨과, 집을 짓지 못했다는 슬픔을 동시 에 느낀다. 우리는 하루 종일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고는 밤이 되면 제 손으로 허물어 버린다. 그러면서 집을 짓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며 한탄하다. 이 마음의 이중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는 단 하나의 길 은,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감수하는 것이다. 혈관이 파손된다는 상상은 최악의 경우에 속한다. '좋다! 혈관이 망가지면 망가지는 것이다. 그게 대 수인가?'하고 생각하라. 삼, 사십 년 동안 혈관을 안전하게 지켜서 무엇을 하겠 는가? 기껏해야 사무실에서 일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대는 먹고, 잠자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이 아이들이 자라나 남편이나 부인 이 될 것이고, 그대처럼 이런저런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 또한 혈관이 망가질까 봐 걱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그들을 남겨 두고 어느 날엔가 그대는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이 밖에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삶에는 사실 지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알 아야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 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아무것도 걸릴 게 없다. 이 때 그대는 모든 것을 감수할 것이다. 혈관이 터진다 해도 대수롭지 않다. 실제로 혈관이 파손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것은 최초의 사건이 될 것이다. 2권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