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비의의 심리학 저자명: 오쇼 역자명: 이하정 출판사명: 도서출판 황금꽃 출판년도: 1998 출판사 전화: 02-711-4227 묵자책의 페이지: 297 @ff 역자 소개 이하정 1957년 서울 출생 1980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졸업 현재 원불교 김제 교당 교무 오쇼의 산야신으로 프렘 조티(Prem Jyoti)라는 이름을 받았음 @ff 비의의 심리학 서문 진화의 과정은 의식의 발전 속에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나무들은 바위들보다 더 의식 적이다. 동물들은 나무들보다 더 의식적이다. 인간은 동물들보다 더 의식적이다. 붓다 들은 인간보다 더 의식적이다. 불성, 그리스도 의식, 깨달음, 모두가 같은 의식의 꽃 피어남을 의미한다. 물질은 전체적으로 무의식적이다. 하나의 붓다는 전체적으로 의식 적이다. 인간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지 옥의 변방'이라는 하나의 상태 속에서 산다. 더 이상 그는 과거의 '그'였던 것도 아니 고, 아직은 앞으로 그가 될 수 있은 '그것'도 아닌 것이다. 오쇼는 "무의식적인 진화는 인간으로 끝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의식적인 진화가 시작된다. 그러나 의식적인 진화는 반드시 어떤 특정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 니다. 의식적인 진화는, 그대가 시작하기로 선택할 때에만 시작된다." 삶은 움직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있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의 더 높은 의식 수준으로 진화하든지 아니면 퇴행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선택을 안 할 수가 없다. 선택하지 않는 것 보다도 하나의 미묘한 선택이다. 많은 사람들은 망각-무의식으로의 회귀-을 찾는다. 그들은 알콜과 마약들을 통해서, 일을 통해서, 성을 통해서, 감각적인 자극을 통해서 그것을 찾는다. 더 높은 의식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기로 선택한 극소수의 사람들, 바 로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오쇼는 '비의의 심리학'에 담겨 있는 강의들을 들려준다. 그는 서양 심리학이 멈춘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프로이드를 넘어서고, 융을 넘 어서고, 인간의 잠재력으로 가능한 움직임을 넘어선다. 만약 프로이드의 심리학이 병 리학의 심리학이고, 매슬로우의 심리학이 건강한 인간의 심리학이라면, 오쇼의 심리학 은 깨달음의 심리학, 불성의 심리학이다. 오쇼는 단지 깨달은 스승일 뿐만 아니라 또 한 정통 심리학자이다. 그는 존재의 층들을 벗겨내고, 내면에 숨겨져 있는 내적인 깊 이들을 밝혀낸다. 그는 육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한 걸음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는 기지에서 시작해서 불가지로 나아간다. 그는, 우리가 앞으로 될 수 있는 그 곳으 로 데려가기 위해 우리가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동양에서,"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심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문 제이다. 그것은 정신 건강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의 문제이다. 그 문제는 그대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다. 그 문제는 그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오쇼가 이 강의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인간 창조이다. 그의 노력 전체가, 불성이 꽃피어나기 시작할 수 있는 하나의 분위기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간을 그의 전체성 속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합리적인 거, 비합리적인 것, 그 어느 쪽도 거부되어서는 안된다. 가학 적인 것, 종교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을 흐르는 채로, 유동적인 채로, 한쪽 극 에서 다른 한족 극으로 움직일 수 잇는 채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마음은 논리적, 합 리적인 방식으로 훈련되어만 한다," 그는 말한다."그러나 동시에 비합리적인, 불합리 적인 명상 속에서도 훈련되어야만 한다.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훈련되어야만 한다. 의 심과 감성이 동시에 훈련되어야만 한다. 의심과 감성이 동시에 훈련되어야만 한다. 의 심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신뢰 역시 있어야만 한다. 비합리적인 것을 거부한 사람, 합리적인 것을 거부한 사람, 그 어느 쪽도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전체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성장할 수가 없다." 오쇼는 하나의 철학자가 아니다. 그의 말들은 더 많은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려 는 하나의 시도가 아니다. 그 말들은 우리를, '말들을-넘어서는-그것'이라는 하나의 직접적인 체험들 족으로 우리를 밀고 나아가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 말들은 우리 자 신의 내적인 진화, 우리 잠재력의 궁극적인 실현, 우리의 씨앗이 지닌 가능성 쪽으로 우리를 밀어 주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차례 1. 내적인 혁명 2. 명상의 신비 3. 성, 사랑 그리고 기도:신성으로 가는 세 단계 4. 쿤달리니 요가:뿌리로의 회귀 5. 비의의 게임들:성장에 대한 하나의 장애물 6. 꿈의 심리학 7. 일곱가지 신체를 초월하기 8. '되는 것' 그리고 '존재하는 것' 9. 지식의 오류 10. 신성으로 가는 창들 11. 올바로 질문하기 12. 합리와 비합리의 균형 맞추기 @ff 1. 내적인 혁명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미래 언젠가는 인류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늘날 인간은 어떤 진화 지점에 있습니까? 인간으로, 자연적이고 자동적인 진화 과정은 끝이 난다. 인간은 무의식적인 진화의 최 종 산물이다. 인간과 더불어, 의식적인 진화가 시작된다. 많은 것들이 고려되어야 한 다. 첫째, 무의식적인 진화는 기계적이고 자연적이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다. 이러한 진 화의 유형을 통해서 의식이 진화한다. 그러나 의식이 생겨나는 순간 무의식적인 진화 는 멈춘다. 왜냐 하면 그것의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진화는 의식이 생겨나는 지점까지만 필요하다. 인간의 의식적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자연을 넘 어서 버렸다. 이제 자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자연적 진화를 통해서 가능했던 최종 산물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인류는 진화할 것인가. 진화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 정하는데 있어 자유롭게 된다. 두 번째, 무의식적인 진화는 집단적이다. 그러나 진화가 의식적이 된 순간 그것은 개 인적인 것이 된다. 집단적이고 자동적인 진화는 인류보다 더 앞서 나아갈 수 없다. 지 금부터는 진화가 하나의 개인적인 과정이 된다. 의식은 개인성을 창조한다. 의식이 진 화하기 전에는 개인이란 없다. 오직 생물 분류학상의 종이 존재할 뿐, 개인성은 존재 하지 않는다. 진화가 아직 무의식적일 때, 그것은 자동적인 과정이다. 즉, 그 과정에 불확실성이란 없다. 일들은 인과율을 통해서 일어난다. 존재는 기계적이고 확실하다. 그러나 인간으 로 인해, 의식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생겨나게 된다. 이제 확실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 다. 진화는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잠재력은 존재하지만, 그 선 택은 전적으로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것이 바로 불안이 인간적인 현상인 이유이 다. 인간 이하의 존재에게 불안이란 없다. 선택이 없으므로 선택하는 자도 없다. 선택 하는 자가 없을 때, 불안은 불가능하다. 누가 있어서 걱정할 것인가? 누가 있어서 긴 장한다는 말인가? 선택의 가능성과 함께 불안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모든 것들을 지금 선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의식적인 노력이다. 그대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 실패하면 그대가 실패하는 것이다. 실패는 그대의 책임이다. 만약 성공하면 성공도 그대가 하는 것이다. 성공 역 시 그대의 책임이다. 따라서 모든 선택 하나 하나가 어떤 의미에서 궁극적이다. 그대 는 그것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도 없고, 그것을 잊어버릴 수도 없고, 그것을 취소할 수 도 없다. 그대의 선택이 그대의 운명이 된다. 그 선택이 그대와 함께 남을 것이고, 그 대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의 선택은 항상 일종의 도박이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선택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 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불안으로 괴로워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자신의 뿌리에 이르기까지 걱정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이다. '무선택'이란 불가 능하다. 만약 그대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무선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택이다. 따라서 그대는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선택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지도 않다. 선 택하지 않는 것은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의식이 인간에게 있어서 존엄성, 아름다움과 영광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부담 이기도 하다. 영광과 부담은 그대가 의식하는 순간 동시에 찾아온다. 모든 걸음은 이 둘 사이의 움직임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선택과 의식적 개인이 존재하게 된다. 그대 는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진화는 개인적인 노력이다. 그대는 붓다가 될 정도 로 진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은 그대의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형태의 진화가 있다. 집단적인 진화와 개별적이고 의식적인 진화가 그 것이다. '진화'는 무의식적이고 집단적인 과정도 포함하므로,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 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인간으로 인해 혁명이 가능해진다. 혁명,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단어인 '혁명'인, 진화를 향한 의식적이고, 개인적인 노 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인의 책임을 하나의 절정에 이르게 한다. 오직 그대만이 그 대 자신의 진화에 책임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그 자신의 진화에 대한 자신의 책 임으로부터, 그리고 선택의 자유라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거기에는 자유에 대한 켜다란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그대가 하나의 노예일 때, 그대의 삶에 대한 책임 은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책임진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예속 은 대단히 편리하다. 거기에 부담은 없다. 이런 면에서, 예속은 하나의 자유이다. 의 식적인 선택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그대가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대는 그대 자신만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아무도 그대에 어떤 것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모든 대안들이 그대에게 열려 있다. 그 때 마음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유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이데올로기들의 매력의 일부는,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이 개인 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개인의 책임으로부터 물러설 곳을 제공한다는 점 이다. 책임이라는 부담이 개인으로부터 제거되고, 사회가 책임을 지게 된다. 무언가 잘못되는 경우에 그대는 항상 국가나 단체를 지적할 수 있다. 그때 인간은 단지 집단 적인 구조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면서, 파시즘과 공산주 의는 인류 진화의 가능성 또한 부정해 버린다. 그것은 그 혁명이 제공하는 엄청난 가 능성 즉, 인류의 전체적인 변화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그대는 궁극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한다. 그대는 뒷걸음질쳐서 다시 동물들처럼 된 다. 나에게, 더 앞으로 가는 진화란 개인적인 책임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대 홀로 에게만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은 커다란 축복이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인의 책임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선택 없는 각성에 이르게 될 그 투쟁이 찾아온다. 우리에게 낡은 형태의 무의식적인 진화는 끝났다. 그대는 다시 그 속으로 물러날 수도 있지만, 그 속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대의 존재가 거역할 것이다. 인간은 의식 적이 되었고, 그 의식을 유지해야만 한다.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 오로빈도(주1) 같은 철학자들이 도피자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러한 철학 자들은 집단적인 진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성이 내려올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깨 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가능 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그대 지신이 개인적으 로 노력하지 않고 깨닫게 된다면, 그 깨달음은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깨달음은 그대의 노력의 결실인 환희는 주지 않을 거이다. 그것은 그대의 눈이나 손, 그대의 호흡 체계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 기관들은 대단한 축 복이지만, 실제로 아무도 그 기관들을 높이 평가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주1 오로빈도: 인도의 신비가로, 폰디첼리에 은거하면서 요가 수행과 지도, 저작에 힘썼다.) 오로빈도의 약속처럼, 언젠가 당신도 깨달은 채로 태어날 있다고 하자. 그것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많은 것은 갖게 되겠지만, 그것은 그대의 노력없이, 수고로움 없 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의의는 상실될 것이다. 의식적인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취는 노력 그 자체만큼 중요하지 않다. 노력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쓰는 과정이 그것에 중요성을 가져다준다. 내가 보는 바로는, 신성의 선물로서 집단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깨달음은 불 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대가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 노력을 통해서, 그대는 찾아오는 그 지복을 보고, 느끼고, 잡을 수 있는 능 력을 창조해 낸다. 무의식적인 진화는 인간으로 끝나고 의식적인 진화, 혁명이 시작된다. 그러나 의식적 인 진화는 어떤 특정한 개인 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대가 그것을 시작하기로 선택 할 때에만 그것은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듯이, 그대가 그것을 선택하 지 않는다면 그대는 대단히 긴장된 여건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가 그와 같다-갈곳도 없고, 성취될 것도 없다. 이제 의식적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될 수 없다. 그대는 무의식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 문은 닫혀 버렸고, 다리도 끊 겨 버렸다. 진화하기 위한 의식적인 선택은 하나의 거대한 모험, 인류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모험 이다. 길은 고달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잘못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실패도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 하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마음속에 긴장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대의 정체서이 상실되었다. 그 상황은 그대가 자살하게 되는 그런 지점에까지 이를 지도 모른다. 자살은 인간에게 잇는 현상이다-그것은 인간의 선택으로 찾아온다. 동물은 자살을 감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동물들에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태어남도 무의식적이고, 죽음도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무지한 인간, 진화되 지 못한 인간이라도, 인간에게는 한 가지가 가능하다. 그것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대의 탄생은 그대의 선택이 아니다. 그대의 탄생에 관한 한, 그대는 무의 식적인 진화의 손아귀 안에 있다. 사실 그대의 탄생은 결코 인간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속성에 있어서 동물적이다. 왜냐 하면 탄생은 그대의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선택으로 인해서 인간다움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대는 -결단적인 행위인-그대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자살이 명백한 인간적인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그대 가 의식적인 진화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자살을 감행하는 쪽은 선택하게 될지도 모를,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그대는 적극적으로 자살을 감행할 용기가 없을 수도 있지만, 느린, 지연된 자살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우물쭈물하면서 죽기를 기다 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진화에 대해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게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그대에게 힘을 준다. 이제 그대는 성장함, 진화함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우리가 신들을 창조하거나 혹은 구루(주2)들에게 위안을 구한다면, 우리 자신들의 삶과 우리 자신들의 진화에 대해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책임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어딘가에 떠넘기려고 한다. 우리가 어떤 신이나 구루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중독 혹은 마약 등을 통해서, 어떤 것이 되었든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만드는 것들을 통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책임을 거부하는 이러한 노력들은 어리석고, 미숙하고, 유치하다. 그러한 노력들은 오직 그 문제를 미루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것들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대는 죽을 때까지 미 룰 수도 있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되고, 그대의 새로운 탄생도 같은 방식 으로 계속될 것이다. (주2 구루: 인도어로 스승을 뜻함) 일단 그대가 홀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어떤 무의식적인 유형을 통한 회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가 회피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어리석다. 왜냐 하 면 책임은 진화를 위한 하나의 커다란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 노력에서 '그것'이 창조 되고, 새로운 그 무언가가 진화할 수 있다. 각성하게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그대의 신마저도 그대에게 달려 있다. 왜 냐하면 신은 그대의 상상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그대의 일부이고, 그대가 그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그대 의 변명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항소할 법정도 없고, 모든 책임은 그대의 것이 다. 그대는 홀로이며, 절대적으로 홀로 이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가 의 식적이 되는 순간, 그는 홀로가 된다. 그 의식이 커질수록 그대가 홀로 라는 각성도 커진다. 그러므로 사회나 친구들이나 협회나 군중을 통해서 이 사실을 회피하려 하지 말라. 그것에서 도망가지 말라!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현상이다. 진화의 전 과정이 이 쪽 방향으로 작업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의식은, 그대가 자신이 홀로임을 아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오직 '홀로 있음'속에서 그대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나는 외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외 로움이라는 느낌은 홀로 있음에게 도망가고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 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홀로 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면, 그대는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어떤 군중을, 혹은 그 속에서 그 대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잇는, 어떤 취할 수 있는 수단을 찾을 것이다. 외로움은 잊어 버림이라는 고유의 마술을 창조한다. 만약 그대가 단 한 순간이라도 홀로 일 수 있다 면, 전적으로 홀로 일 수 있다면 에고는 죽을 것이다. '나'가 죽을 것이다. 그대는 폭 발해 버릴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에고는 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그 것은 다른 사람들에 관련해서 존재할 수 있다. 그대가 홀로일 때는 언제나 하나의 기 적이 일어난다. 에고가 약해지는 것이다. 이제 에고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홀로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할 수 있다면, 그대는 차 츰 에고가 없어질 것이다.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식적이고 신중한 행위로서, 자살보다 더 신중한 행위 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데, 자살 속에서는 에고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더 자살하기 쉽다. 자살은 항상 누군가 다른 사람과 관 련된 것이다. 그것은 결코 홀로 있음의 행위가 아니다. 자살에서 에고는 고통받지 않 는다. 오히려 에고는 더욱 자신을 잘 표현할 것이다. 에고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새로 운 탄생 속으로 들어가 것이다. 홀로 있음을 통해서 에고는 산산조각이 난다. 에고는, 관계를 맺을 아무것도 없기 때 문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홀로 있을, 동요하지 않고 홀로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도망가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그저 홀로 있음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기회가 된다. 그 때 그대는 마치 그 속에 많은 잠재력을 가진 하나의 씨앗과 같다. 기억하라, 그 식물이 자라나기 위해서 씨앗은 스 스로를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에고는 하나의 씨앗, 하나의 잠재력이다. 그것이 산산 조각이 날 때 신성이 태어난다. 신성은 '나(?)'도 아니고, '당신(thou)'도 아니다. 그 것은 하나이다. 홀로 있음을 통해서 그대는 이 일원성에 도달한다. 그대는 이 일원성에 대한 가짜 대체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힌두교도들을 하나가 되 고, 기독교도들은 하나가 되고, 이슬람교도들은 하나가 된다. 인도도 하나이고, 중국 도 하나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일원성에 대한 대체물일 뿐이다. 일원성은 전체적인 홀로 있음을 통해서만 찾아온다. 하나의 군중은 자기 자신을 '하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원성은 항상 그 무 언가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 군중이 그대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대는 편안해한다. 이 제 그대는 더 이상 책임지지 않는다. 그대는 혼자서 회교 사원을 불지르거나, 혼자서 사원을 부수지 못하지만, 한 군중의 일부로서는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그대는 개인적으로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책임이 있기 때문에, 특정 한 그 누군가에게는 책임이 없다. 개인의 의식은 없고, 오직 하나의 집단 의식만이 있 다. 그대는 하나의 군중 속에서 퇴보해서 동물처럼 된다. 대중은 일원성이라는 느낌에 대한 가짜 대체물이다. 그 상황을 인식하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며,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따르는 어렵고 힘든 과제를 인식하는 사람은, 결코 어떤 가짜 대체물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 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는 어떤 허구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대의 종교들과 그대 의 이데올로기들은 허구에 불과하며, 일원성이라는 착각의 느낌을 만들어 낸다. 일원성은 오직, 그대에게서 에고가 없어질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며, 에고는 그대가 전 체적으로 홀로 일 때에만 죽는다. 그대가 철저하게 홀로 일 때,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 다. 바로 그 순간이 폭발의 순간이다. 그대는 무한 속으로 폭발한다. 이것이 그리고 오직 이것만이 진화이다. 나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무의식적이 아 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서 에고가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유일하고, 진정한 혁명이다. 많은 용 기가 필요하다. 오직 붓다만이 홀로이고, 예수나 마하비라(주3)만이 홀로이다. 그것은 그들이 가족을 떠났거나.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부정 적으로 어떤 것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행위는 긍정적이었다. 그것은 홀로 있음을 향한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떠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홀 로 있음을 찾고 있었다. 그 탐색 전체는, 사람이 홀로 있을 때 그 폭발의 순간을 위한 것이다. 홀로 있음 속에 지복이 있다. 오직 그 때에만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 역시 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집단들, 가족들, 사 회들, 국가들을 만들어 낸다. 모든 국가, 모든 가족, 모든 집단이란 홀로 있을 수 있 을 정도의 충분한 용기가 없는 겁쟁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3 마하비라: 자이나교의 시조) 진정한 용기란 홀로 있을 수 있는 용기이다. 그것은 그대가 홀로 있다는, 그리고 그대 가 달리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대는 그대 자 신을 속일 수도 있고, 혹은 이 사실과 더불어 살 수도 있다. 그대는 자신을 여러 생에 걸쳐서 계속 속일 수 있지만, 그대는 그저 하나의 악순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대가, 홀로 있음이라는 이사실과 더불어 살 때에만 그 고리가 부서지고 그 대는 그 중심에 이르게 된다. 그 중심이 신성함, 전체, 성스러움의 중심이다. 나는, 모든 인류가 이것을 타고 난 권리로서 성취할 수 있을 때를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의식은 개인적이다. 오직 무의식만이 집단적이다. 인류는, 개인들이 될 수 있는 의식 의 지점에 이르렀다. 인류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적인 인간들만이 있 을 뿐이다. 인간 각자가 그 자신의 개인성을 각성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첫 번째로 우리가 해야만 할 것은 홀로 있음을 기본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어떠한 허구들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만 약 그대가 허구들을 만들어내면, 결코 그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허구들은 그대가 있는 그대로를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투사되고 창작된, 조장된 진실들이다. 그대의 홀로 있음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살라. 그대가 이 사실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면, 그대와 이 진실 사이에 아무런 허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때 그 진실이 그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 그대가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사실이 그 진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책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대가 홀로 라는 사실과 더불어 살라. 그대가 이 사실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면, 그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힘겹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어려움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받아들임을 통해서, 그대는 그 폭발의 지 점에 이른다. 오직 그 때에만 지복이 있다. 그것이 이미 만들어진 채로 그대에게 주어 진다면, 그 지복은 그대가 힘들여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그 러면 그대는 그 지복을 느낄 능력이 없다. 이 능력은 오직 수행을 통해서만 찾아온다.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면, 수행은 저절로 그대에게 찾아온다. 그대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책임지면 수행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수행은 외부로부터 그대에게 강요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안에서 찾 아온다. 그대가 짊어진,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책임으로 인해서, 그대가 내딛는 한 걸 음 한 걸음이 수행이다. 그대는 한 마디 말조차도 무책임하게 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 가 그대 자신의 홀로 있음을 각성한다면, 그대는 다른 이들의 고뇌도 각성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단 한가지도 무책임한 행동을 범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 대의 홀로 있음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면, 모두가 다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된 다. 그러면 이들은 아버지가 외롭다는 것을 알고, 아내는 남편이 외롭다는 것을 알고, 남편은 아내가 외롭다는 것을 안다. 일단 이것을 알게 되면, 그대는 자비롭지 않을 수 가 없다. 사실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유일한 요가이고, 유일한 수행이다. 일단 인간의 상황에 대해 전체적으로 각성하게 되면, 그대는 종교적이 된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 대한 스 승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찾아오는 금욕은 억지 고행자의 금욕이 아니다. 그것 은 강요된 것이 아니어서, 보기 흉하지 않다. 그대는 이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 고,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면 그대는 사물들을 포기한다. 그대는 무 소유가 된다. 소유하려는 충동은 홀로 있지 않으려는 충동이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친구를 찾는다. 그러나 타인이라는 친구는 믿을 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대신 물건이라는 친 구를 찾는다.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차와 함께 사는 것은 그리 어렵 지 않다. 그래서 결국 소유욕은 물건들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대는 심지어 사람들을 물건화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들의 인격과 개인성 을 잃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틀에 넣으려고 한다. 아내는 하나의 물건이지 하나의 사람 이 아니다. 남편은 하나의 물건이지 하나의 사람이 아니다. 그대의 홀로 있음에 대해 각성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홀로 있음에 대해서도 역시 각성하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침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그대는 이전에는 결코 긍정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다. 그때의 포기는 그대의 홀로 있음에 대한 부정적인 그림자가 된다. 무소유가 되라. 그러면 그대는 한 사람의 아내 혹은 한 사람의 남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연인이 된다. 이러한 무소유와 함께 자비와 금욕이 찾아온다. 천진남만함이 그대에게 찾아온다. 그 대가 삶의 사실들을 부정할 때는 천진난만할 수가 없다. 그대는 교활해진다. 그대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한다. 그러나 그대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과 더불어 살 만 큼 용감하다면, 그대가 천진난만해진다. 이러한 천진난만함은 양성된 것이 아니다. 그 대가 천진난만함, 그 자체이다. 내게 있어서, 천진난만해지는 것이 성취되어야 하는 전부이다. 천진난만하라. 그리고 언제나 신성은 그대를 향해서 지복스럽게 흐르고 있다. 천진난만함은 신성의 일부가 될 수 있는,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천진난만하라, 그러면 그 손님이 그 곳에 있 다. 주인이 되라. 이 천진난만함은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양성'은 언제나 고안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산된 것이다. 그런 천진난만함은 결코 계산될 수 없다. 그것은 불 가능하다. 천진난만함은 종교성이다. 천진난만해진다는 것은 진정한 실현의 절정이다. 그러나 진 정한 천진난만함은 오직 의식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찾아온다. 어떠한 집단적이거나 무 의식적인 진화를 통해서도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홀로이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삶이 든 죽음이든, 실현의 환희이든, 소위 말하는 삶의 비참함이든 선택함에 있어서 인간은 자유롭다. 사르트르는 어딘가에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말했다. 그대는 천국이 나 지옥을 택할지도 모른다. 자유란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 대가 천국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지옥 이라는, 선택이 없는 천국은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선택이란 항상 '둘 중의 하나/또 는'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가 오직 좋은 것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유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잘못 선택한다면, 자유는 비난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올바르게 선 택한다면, 그것은 지복이 된다. 그대의 선택이 그대의 자유를 비난으로 바꾸어 놓느냐 아니면 지복으로 바꾸어 놓느냐 하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 선택은 전체적으로 그대의 책임이다. 만약 그대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대의 깊은 곳에서 하나의 새로운 차원이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은 혁명의 차원이다. 진화는 끝났다. 이제 저 너머에 있는 것까지 그대를 활짝 열어 줄 혁명이 필요한다. 그것은 개인의 혁명이요, 안으로의 혁명이다. @ff 2. 명상의 신비 명상이란 무엇입니까? 명상이란 인도식의 어떤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기술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배울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성장이다. 그대의 전체적인 삶에서 나오는, 그대 의 전체적인 삶의 성장인 것이다. 명상이란, 지금의 그대에게 덧붙일 수 있는 그 무엇 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변형, 변이를 통해서만 그대에게 찾아올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꽃피어남이고, 하나의 선장이다. 성장이란 언제나 전체적인 것에서 나온다. 그 것은 덧붙여진 것이 아니다. 그대는 명상을 향해서 성장해야만 한다. 인격의 이러한 전체적인 꽃피어남이 올바르게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 는 자신과의 게임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정신적인 속임수에 사로잡히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속임수들이 있다! 그대는 그것들에 의해서 속임을 당할 뿐만 아니 라,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뿐더러 실제적 의미에서 해를 입을 것이다. 명상에 어떤 요 령이 있다는 바로 그 태도 즉, 명상을 하나의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속임수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할 때 바로 그 마음의 질이 타락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현재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은 명상적인 것이 아니다. 명상이 일어날 수 있기 전에 전체적인 마음이 바뀌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존재하는 그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마음은 항상 말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대는 단어들을 알 수 있고, 언어를 알 수 있 고, 사고의 개념적 구조를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사고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고 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그대는 꽃을 보고 말하고, 길을 건너는 사람을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한다. 마음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단어로 바꿀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그 단어들이 울타리가 되어, 그 안에 갇힌다. 사물을 단어로, 존재를 단어로 바꾸는 이 끊임없는 바꾸기 작업이 하나의 명상적인 마음에게는 장애물인 것이다. 그래서 명상적인 마음으로 향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 조건은, 그대가 끊임없이 말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그 일을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사물들을 보기만 하 고, 말로 표현하지 말라. 그것들의 현존을 의식하라. 그러나 그것들을 단어로 바꾸지 는 말라. 언어 없이 사물들이 존재하게 하라. 언어 없이 사람들이 존재하게 하라. 언 어 없이 상황들이 존재하게 하라.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것과 같은 상황은 인위적인 것인데도, 우리가 그것에 너무 습관화되어서, 그 것은 너무도 기계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체험들을 끊임없 이 단어로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을 각성조차 못하고 있다. 일출이 그 곳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보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 사이의 간격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대는 태양을 보고 느끼고는, 즉 각 마로 표현한다. 보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 사이의 간격은 놓치고 만다. 일출이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 들이 반드시 각성하게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고, 하나의 현존이다. 마음 은 자동적으로, 체험을 단어로 바꾼다. 그리고 나면 이 단어가 그대와 그대의 체험 사 이에 끼어든다. 명상은 단어들 없이 사는 것, 비언어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씩 그 현상이 저 절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면, 현존이 언어가 아니라 느낌으로 느껴진 다. 연인이 친밀하면, 그들은 침묵하게 된다. 그것은 표현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곳에는, 표현되어야 하는 하나의 압도적인 양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단어 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들은 사랑이 사라졌을 때에만 찾아온다. 두 연인이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죽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제 그 빈 공간을, 그들은 단어들로 메우고 있다. 만약 사랑이 아직도 싱싱하다면, 단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바로 그 존재가 너무도 압도적이고 너무도 꿰뚫는 힘이 있기 때문에 언어, 단어의 벽을 넘어선다. 그래서 대개, 오직 사랑이 있을 때에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다. 명상은 사랑의 절정이다. 그 사랑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존 재를 향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명상은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전 존재와의 살아 있 는 관계이다. 그대가 어떤 상황과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때 그대는 명상 속에 존재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마음의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하나의 방법 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의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기계적으로 표현하는 그대의 습관, 존재를 단어들로 바꾸는 이 기계적인 습관을 그대가 이해하는 순간, 그 사이에 간격이 생겨난다. 그것은 우연히 찾아온다. 이해하고 나면 그것은 그 림자처럼 따라 온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명상 속에 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왜 명상 속에 살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명상이라는 바로 그 과정은 부정적이다. 명 상은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덧붙여져 온 무언가를 없애 는 것이다. 사회는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언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존재는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반드시 언어 없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는 언어를 사용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표현하는 그 기계 장치 를 켤 수도 있고 끌 수도 있어야만 한다. 그대가 하나의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갈 때, 언어라는 기계 장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대가 존재와 더불어 홀로 있을 때는, 그것을 반드시 끌 수 있어야 한다. 그 기계 장치를 끌 수 없다면, 기계 장치는 반드시 끌 수 있어야만 한다. 그 기계 장치를 끌 수 없다면, 기계 장치는 계속 작동하는데 그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면, 그대는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마음은 하나의 도구이어 야지 주인이어서는 안된다. 마음이 주인일 때는, 비명상적인 상태가 존재한다. 그대가 주인일 때는, 그대의 의식 이 주인이고, 명상적인 상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명상이란, 마음이라는 기계 장치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그리고 마음의 언어적인 기능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대는 마음 너머에 있 고, 존재는 마음 너머에 있다. 의식은 언어학 너머에 있고, 존재는 언어학 너머에 있 다. 의식과 존재가 하나일 때, 그들은 교감 속에 있다. 이 교감이 바로 명상이다. 언어는 떨쳐 버려져야만 한다. 나는 그대가, 그것을 억누르거나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 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단지, 언어가 그대에게 하루 24시간의 습관 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걸을 때는 그대가 다리를 움직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앉아 있을 때도 그대가 계속 다리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 그대는 다리를 멈출 수 있어야만 한다. 같은 식으로, 그대가 다른 사람과 말하지 않을 때는 언어가 그것에 없어야 한다. 그것은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한 기술이다.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 을 하고 있지 않을 때는 언어가 그 자리에 없어야 한다. 그대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명상을 향해 성장해 나갈 수 있다. 명상은 하나의 성장 과정이지 어떤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언제나 죽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은 그대 에게 덧붙여 질 우 있지만, 과정은 항상 살아 있다. 과정은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이 다. 언어는 필요하지만 그대가 항상 그 속에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말로 표현함'이 없는 순간, 그대가 그냥 존재하는 그런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그저 흐 리멍텅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의식이 잇다. 그 의식은 더 날카롭고 더 생생 하다. 왜냐하면 언어는 의식을 무뎌지게 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반복적이기 마련이므 로 지루함을 만들어 낸다. 언어가 그대에게 중요해질수록, 그대는 더욱더 지루해질 것 이다. 존재는 결코 반복적이지 않다. 모든 장미가 다 새로운 장미이므로, 그 전체가 다 새롭 다. 그것은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고,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장미'라고 부를 때, '장미'라는 단어는 하나의 반복이다. 그 단어는 지금가지 그 곳에 있어 왔고, 언제나 그 곳에 있을 것이다. 낡아 있다. 언어를 통해서, 그대는 존재를 회피하고 삶을 회피한다. 왜냐 하면 언어는 죽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가 언어에 빠져들면 들수록, 그것으로 인해 그대는 더욱 무뎌질 것이다. 바라문(주1) 학자는 완전히 죽어 있다. 왜냐 하면 그는 언어, 단어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1 바라문: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 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 사르트르는 그의 자서전을 '단어들'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단어들 속에서 살고 있다. 즉,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결국에는 축적된 단어들의 연속일 뿐이다. 단어는 마치 사진과 같다. 그대가 살아 있는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으면, 그 사 진은 죽은 것이다. 그대는 죽은 사진들로 된 사진첩을 만든다. 명상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마치 죽은 사진 앨범과 같다. 오직 말로 된 사진들, 기억들만이 그 곳에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그저 말로 표현되어 왔을 뿐이다. 명상은 전체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대가 침묵할 때에만 전체적으로 살 수 있다. '침묵한다는 것'으로 나는, '무의식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대는 침묵하면서도 무의식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침묵이 아니다. 그대는 다시 한번 놓쳤다. 만트라를 통해서 그대는 자신에게 자기 최면을 걸 수 있다. 한 단어를 단순히 반복하 면, 그대는 마음 속에 너무도 많은 지루함을 만들어 내서 마음이 잠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잠 속으로 빠져들고, 무의식 속으로 빠져든다. 계속적으로 '람, 람, 람'을 외운다면, 마음은 잠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어라는 장벽은 그곳에 없지 만, 그대는 무의식적이다. 명상이란, 언어가 그 곳에 없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대는 의식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교감은 없다. 어떤 만트라도 도움이 안되고, 염송도 도움이 안된다. 자기 최면은 명상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최면 상태 에 있는 것은 일종의 퇴행이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로 떨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트라를 떨쳐 버리고, 이러한 모든 기술들을 떨쳐 버려라. 언어가 존 재하지 않는 순간들이 존재하도록 하라. 만트라를 가지고 단어들을 없앨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그 과정이 바로,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어들을 가 지고 언어를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 사실,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는 결코 아 무것도 할 수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대의 현재 위치에서 나을 수 있을 뿐이다. 그대가 혼란스럽고, 그대가 명상 속에 있지 않고, 그대의 마음이 침묵하 지 않는다면, 그대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로지 더 많은 혼란을 만들어 낼 뿐이다. 바로 지금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각성하기 시작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저 각성하라. 각성하는 것은 단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존재적인 행위이지, 정신적인(mental) 행위가 아 니다. 그래서 첫번째는 각성하는 것이다. 그대의 정신적인 과정, 그대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각성하라.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각성하는 그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이 아니다. 각성이란 바로, 그대가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연 한, 하나의 지켜보는 자인 것이다. 더 많이 각성하게 될수록, 그대는 체험과 단어들 사이의 틈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틈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대가 너 무 무의식적인 탓에 그것들은 결코 보여진 적이 없다. 두 단어 사이에는, 지각할 수 없을 정도이고 아무리 작을지라도, 언제나하나의 틈 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두 단어가 둘로남아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음악의 두 음표 사이에는 언제나 틈, 침묵이 있다. 두 단어든, 두 음표 든 그들 사이에 틈이 없다면, 그들은 둘일 수가 없다. 침묵이 항상 그 곳에 있지만 그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각성하고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대가 더 많이 각성할수록, 마음은 점점 더 느려진다. 그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그대가 덜 각성할수록, 마음은 점점 더 빨라진다. 그대가 마음을 더 많이 각성할 때, 마음은 느려지고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은 넓어진다. 그러면 그대는 그것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영화와 같다. 영사기가 천천히 돌려지면, 그대는 그 간격들을 볼 수 있다. 만약 내가 손을 들어올리면, 이것은 천 개의 부분으로 찍혀야만 한다. 각각의 부분들은 낱장의 사진이 될 것이다. 각각으로 된 이 수많은 사진들이 그대의 눈 앞에 서, 그대가 그 틈들을 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가면 그대는, 손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느린 동작에서는 그 틈들이 보일 수 있다. 마음은 마치 하나의 영화와 같다. 틈들이 그 곳에 존재한다. 그대가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점점 더 많이 그 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게쉬탈트 (gestalt) 그림과 같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이미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그림 말이다. 그 그림에서는 한 형상이 보이거나 다른 형상이 보일 수는 있으나, 두 개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늙은 여인의 그림이기도 하고 동시에 젊은 여인의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 나 만약 그대가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면,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다른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면, 처음 것을 놓치게 된다. 비록 그대가 두 개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마음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단어들을 본다면, 그대는 그 틈 들은 볼 수 없고, 그대가 틈들을 본다면, 그 단어들은 볼 수 없다. 모든 단어에 틈이 뒤따르고, 모든 틈에 단어가 뒤따른다. 그러나 그대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없 다. 그대가 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단어들은 잃어버릴 것이고, 명상 속으로 들어 간다. 단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의식은 비명상적이고, 틈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의식만이 명상적이다. 그대가 틈을 의식하게 될 때면 언제나, 단어는 잃어버릴 것이다. 그대가 주의해서 관찰한다면, 단어들을 발견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틈들만을 발견할 것이 다. 그대는 두 단어 사이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지만, 두 틈의 차이는 느낄 수 없다. 단어 들은 항상 '복수'이고, 틈은 항상 '단수'이다. '그'틈인 것이다. 그것들이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 명상은 틈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그러면 '전체 형태'가 바뀐다. 또 한 가지가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게쉬탈트 그림을 바라보면서 그대의 주의 가 늙은 여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다른 하나의 그림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대가 그 늙은 여인에게 계속 집중한다면, 다시 말해서, 계속 그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 고, 전체적으로 그 여인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초점이 바뀌면서 갑자기 늙은 여인은 사라져 버리고 다른 하나의 그림이 그 곳에 오는 순간이 찾아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왜냐 하면 마음은 오랫동안 끊임없이 초점이 맞춰져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다. 마음은 변하거나, 아니면 잠자러 갈 것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대가 어느 것 하나에 계속 집중한다면, 마음은 잠들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정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없다. 마음은 하나의 살아 있는 과정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이 지루해지도록 내버려 두면, 마음은 그대 초점의 고정된 정체성에서 도망가기 위해 잠자러 갈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꿈 속에서 계속 살아 있 을 수 있다. 이것이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주2)식의 명상이다. 그것은 평화롭고 상쾌하며, 그대의 육체적인 건강과 전인적인 안정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똑같 은 일이 자기 최면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다. 인도어의 '만트라'라는 단어는, 그 어 느 것도 아닌 '제안'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을 하나의 명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중대 한 잘못이다.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대가 그것을 명상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진정 한 명상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그러한 수련들 그리고 그러한 수련을 선전하는 자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진정한 해로움이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그대 자신에게 마약을 주는 것이다. (주2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 인도에서 태어난 요가 수행자로, 초월 명상 TM을 전 세계 에 보급시켰다.) 그러므로 길에서 벗어나는, 단어들을 강요하는 어떤 만트라도 사용하지 말라. 그대가 단지 단어를 각성하게 되면 그대 마음의 초점이 자동적으로 틈들 쪽으로 바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단어들과 동일시되면,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뛰어다니게 되고 그 틈은 놓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단어는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이다. 마음은 계속 바뀔 것이다. 초점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단어들과 동일시되지 않고, 멀찌감치 덜어져서 단어들이 일렬로 지나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전체의 초 점이 바뀌어서 그 틈을 각성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옆을 지나가는 사람 들을 지켜보면서 길에 서 있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지나가고 아직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 거기에 틈이 있다. 길거리가 비어 있는 것이다. 지켜보고 있으면, 그대는 그 틈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그 틈을 알게 되면, 그대는 그 속에 있다. 그대는 이미 그 속으로 띄어들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이다. 대단히 평화를 주고, 대단히 '의식 창조적' 이다. 그 틈 속에 존재하는 것이 명상이다. 그것이 변형이다. 이제는 언어가 필요치 않다. 그대는 그것을 떨쳐 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떨쳐 버림이다. 그대는 그 침묵, 그 무한한 침묵을 의식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의 일부이고, 그것과 하나이 다. 그대는 심연을 '다른 그 무엇'으로 각성하지 않는다. 그대는 심연을 그대 자신으 로 각성한다. 그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대가 앎이다. 그대는 그 틈을 관찰 하고, 이제는 관찰자가 관찰된다. 단어들과 생각들에 관한한, 그대는 분리되어 있는 하나의 지켜보는 자이고, 단어들은 '다른 그 무엇'이다. 그러나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가 그 틈이다. 그러면서도 그대는 그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여전히 각성하고 있다. 그대와 그 틈 사이에, 의식과 존재 사이에 이제는 아무런 장벽이 없다. 오로지 단어들이 장벽일 뿐이다. 이제 그대 는 존재적인 상황 속에 있다. 이것이 명상이다. 존재와 하나로 존재하는 것, 그 안에 전체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여전히 의식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이제 그대는, 의식적이면서도 그것과 하나인 상황을 안 것이다. 보통, 우리가 어떤 것을 의식할 때, 그것은 '다른 그 무엇'이 된다. 우리가 그 무엇과 동일시되면,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의식하 고 있지 않다 분노 속에서나 성행위 속에서처럼 말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일 때에만 하 나가 된다.. 성은 대단한 호소력을 갖는다. 성행위 속에서 한 순간 동안 그대는 하나가 되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 순간 속에서 그대는 무의식적이다. 그대는 무의식을 찾는다. 왜냐하 면 그대가 일원성을 찾고 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대 는 더욱더 의식적이 된다. 그러면 그대는 성의 지복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 지복은 무의식에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의 순간 속에서 그대는 무의식이 될 수 있었다. 그대의 의식이 떨쳐졌다. 단 한순 간 동안 그대는 심연에 있었지만, 무의식적이었다. 그대가 무의식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것은 점점 더 많이 상실된다. 마침내 그대가 성행위 속에 있을 때, 더 이상 무의식 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심연도 잃어버렸고, 지복도 잃어버렸다. 그런 후 에 그 행위는 어리석은 것이 된다. 그것은 단지 기계적인 방출이다. 이제 그것에 영적 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무의식적인 일원성만을 알고 있다. 한번도 의식적인 일원성을 알고 있었 던 적이 없다. 명상은 의식적인 일원성이다. 그 일원성은 성의 다른 한쪽 극이다. 성 이 하나의 극, 무의식적 일원성이라면 명상은 다른 하나의 극, 의식적 일원성이다. 성 은 일원성의 가장 낮은 지점이고, 명상은 절정, 일원성의 가장 높은 정점이다. 그 차 이는 각성된 의식의 차이이다. 서구적인 마음은 이제 명상에 대해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이 호소력을 잃어버렸기 때 문이다. 언제든지 한 사회가 성적으로 비억압적이 되면, 명상이 뒤따를 것이다. 왜냐 하면 금지되지 않은 성은 성의 매력과 낭만을 죽여 버릴 것이고, 성의 영적인 면을 죽 여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이 있지만, 그대는 그 속에서 계속 무의식적인 채로 있을 수 없다. 성적으로 억압된 사회는 성적인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억압되지 않은, 비억압적 인 사회는 영원히 성욕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초월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 서 어떤 사회가 성적이면, 명상이 뒤따를 것이다. 나에게는,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회 가 구도와 추구를 향한 첫 걸음이다. 그러나 물론, 추구가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추구가 부당하게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동양에 의해 부당하게 이용되고 있다. 구루들은 공급될 수 있다. 그들은 수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출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들 구루를 통해서 는 오직 요령만을 익힐 수 있다. 이해는 삶을 통해서, 사는 것을 통해서 찾아온다. 이 해는 주어질 수도, 전해질 수 없다. 내가 그대에게 나의 이해를 줄 수는 없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 을 그대에게 줄 수는 없다. 그대가 그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대가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대는 잘못을 해야 하고, 실패를 해야 하고, 많은 좌절을 거쳐 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실패들과 잘못들, 좌절들을 통해서, 실제 삶과의 마주침 을 통해서만 그대는 명상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명상을 하나의 성장이라고 말하 는 이유이다. 무언가가 이해될 수 있지만,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찾아오는 이해는 지 적인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이것 때문에 크리슈나무르티(주3)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를 지적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은 지적인 이해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크리슈나무르티 의 노력이 불합리한 이유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진실하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 지 적인 이해 이상을 요구할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올 수 없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전달될 수 없다. 그러나 지적인 이해로 충분할 수가 있다. 만약 그대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말해지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대는 틈들 -내가 말하지 않은 것, 내가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이해는 지적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지성 이 그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적일 수는 없다. 영성(spirituality)은 내면의 성지이다. (주3 크리슈나무르티: 인도의 신비가로, 신지학회에 의해 미륵불로 준비가 되었으 나, 그 마지막 순간에 교단을 해체했으며 어떤 형식의 단체나 추종세력을 만드는 것을 배척했다.) 나는 지적으로 그대에게 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때는 말해지지 않은 것도 느껴질 수 있다. 단어들 없이 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을 때, 침묵들 역시 사용하고 있다. 그대는 그 둘을 다 각성해야 할 것이다. 오직 단어들만이 이해되고 있다면 그 때 그것은 하나의 '전달 (communication)'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 틈들 역시 각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교감(commuion)'이다. 어디서부터든 시작을 해야 한다. 모든 시작은 그릇된 시작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 작해야 한다. 그 그릇됨을 통해서, 그 더듬는 것을 통해서 문이 발견된다. 올바른 시 작이 그 곳에 있을 때에만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시작하지 못할 것이 다. 비록 그릇된 한 걸음이라도 그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한 걸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걸음이고, 하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둠 속에서 더듬기 시작 하면, 더듬는 것을 통해서 문이 발견된다. 그 때문에 언어적 과정 -단어들의 과정- 에 각성하고 그 틈들, 그 틈들에 대한 각성 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 쪽의 어떤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그 틈들을 각성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성과의 마주침이고, 존재적인 것(the exis tential)과의 마주침이다. 언제든 하나의 마주침이 있을 때, 거기서 도망가지 말라. 그것과 함께 있어라. 그것은 처음에는 두려울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미지 와 마주칠 때마다, 두려움이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미지란 죽음이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하나의 틈이 있을 때마다, 그대는 죽음이 그대에게 찾아오고 있음을 느 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채로 있으라! 그냥 그 속에 있고, 그 틈 속에서 완전히 죽 어라. 그러면 그대는 부활될 것이다. 침묵 속에서 그대의 죽음을 죽음으로써, 생명이 부활된다. 그대는 처음으로 살아 있고, 진정으로 살아 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명상이란, 하나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다. 명상을 하 나의 기술이 아니고 하나의 이해이다. 명상은 '가르쳐질(be taught)'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가리켜질(be indicated)' 수 있을 뿐이다. 그대에게 그것에 대한 정보가 알려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정보도 진정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는 밖에서 나온 것이고, 명상은 그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찾아라, 한 사람의 구도자가 되라. 그리고 한 사람의 제자는 되지 마라. 그러면 그대는 어떤 구루의 제자가 아니라, 삶 전체의 제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 는 단순히 단어들만을 배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영적인 배움은 단어들이 아니라 그 틈들, 항상 그대를 감싸고 있는 침묵들에서 온다. 그것들은 심지어 군중 속에도, 시장 속에도, 저자 거리 속에도 있다. 그 침묵들을 구하라. 안과 밖의 그 틈들을 구하라. 그러면 어느 날 그대는, 그대가 명상 속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명상은 그대에게 찾아온다. 그것은 항상 찾아온다. 그대가 그것을 가져올 수는 없 다. 그러나 그것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가 찾으려고 할 때에만 그대는 그것에 대해 열려 있고, 그것에 대해 상처 입기 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것에 대해 하나의 주인(host)이다. 명상은 하나의 손님(guest)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 해 하나의 주인(host)이 기다릴 수 있다. 그것은 붓다에게 찾아오고, 예수에게 찾아오 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열려 있고, 찾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다른 곳에서 배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속을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더 쉬운 무언가를 찾는다. 이것이 착취의 근원이 된다. 그러면 구루들 과 '구루의 무리(gurudom)'들이 있게 되고, 영적인 삶이 독에 중독된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누군가의 영적인 충동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사람이다. 만약 어 떤 사람이 그대의 부를 강탈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 람이 그대를 저버려도 그것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대를 속여서 명상을 향한, 신성을 향한 그대의 충동을 죽여 버리거나 미루기라도 한다면, 그 때 그 죄는 대단히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각성하라. 그리고 누구에게도 "명상이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명상하는가?"하고 묻지 말라. 대신 무엇이 장애물들이고 무엇 이 방해물들인가를 물어라. 왜 우리가 항상 명상 속에 있지 못하는지, 어디에서 성장 이 멈춰졌는지, 어디에서 우리가 불구가 되었는지 물어라. 그리고 구루를 찾지 말라. 왜냐하면 구루를 역시 불구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대에게 이미 만들어진 공식들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친구가 아니라 적이다. 어둠 속에서 더듬어라. 그 이외의 어떤 것도 행해질 수 없다. 바로 그렇게 더듬는 것이 그대를 어둠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이해가 될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진리는 자 유이다." 이 자유를 이해하라. 진리는 항상 이해를 통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그대가 만나고 마주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성장해서 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항상, 이해의 추구 속에 있어라. 왜냐하면 그대가 더 많이 이해될수록, 그대는 진리에 더욱 더 가까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미지의, 기대되고 예측할 수 없는 - 이해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속에서 그대는 심연 속에 있게 된다. 그대는 더 이상 존 재하지 않고, 명상이 존재한다. 그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는 명상 속에 존재한다. 명상은 그대보다 조 금 나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그대를 넘어서 있다. 그대가 심연 속에 있을 때 명상이 그 곳에 존재한다. 그러면 예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대가 존재하 지 않는다. 그러면 존재(being)가 존재한다. 그것이 종교들이 '신'이라고 할 때 의미 하는 것 즉, 궁극의 존재이다. 그것은 모든 종교, 모든 추구의 본질이지만, 이미 기성 화된 곳에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것에 대해 주장하는 사람을 각성하라. 계속 더듬어라.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를 인정하되, 같은 실패를 다 시 범하지는 말라. 한 번이 전부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진리 추구 속에서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항상 용서받는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의 약속이다. @ff 3. 성, 사랑 그리고 기도 -신성으로 가는 세 단계- 성 에너지의 영적인 의의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 에너지 를 승화시키고 영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하나의 명상으로, 더 높은 의식 수준으로 향한 발판으로서 성 관계를 갖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가능합니까? 성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없다. 에너지는 하나이고, 똑같다. 성은 에너지에 있어 하 나의 출구이고, 하나의 방향이다. 그것은 에너지가 응용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생명 에너지는 하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드러날 수 있다. 성은 그것들 중의 하 나이다. 생명 에너지가 생물학적이 될 때 그것이 성 에너지가 된다. 성은 생명 에너지의 한 가지 응용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승화'라는 문제가 없다. 만약 생명 에너지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면, 거기에 성이란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 의 승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변형이다. 성이란, 생명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흐름이며, 그 에너지의 가장 낮은 응용이다. 성은, 생명이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 이 그 기초이지 그 절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낮은 것이다. 성이 그 전체성이 되면, 그 전체 삶은 하나의 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기초를 다지는데, 그 기초가 본래 의도되었던 건물은 결코 짓지 않고, 계속 기촐르 다지기만 하는 것과 같다. 성은 생명 에너지의 더 높은 변형을 위한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 그것이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성이 전체가 될 때, 생명 에너지의 유일한 출구가 될 때, 그 때 그 것은 파괴적이 된다. 성은 수단이 될 수 있을 뿐, 목적은 아니다. 그리고 수단은 목적 들이 성취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인간이 그 수단을 잘못 쓰면, 목적 전체가 파괴된 다. 만약 성이, 이미 그래 왔던 것처럼 삶의 중심이 된다면, 그 때 수단은 목적으로 바뀐다. 성은 생명이 존재하고, 존속하기 위한 생물학적인 기초를 창조한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이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이 목적이 되는 순간, 영적인 차원은 상실된다. 그러나 성이 명상적이 된다면 그 때 그것은 영적인 차원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징검다리, 하나의 발판이 된 다. 그 곳에 승화는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에너지는 성적이지도 영적 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중립적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에는 이름이 없 다. 그 이름은, 그것이 통과해서 흘러가는 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이름은 그 에너 지, 그 자체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가 취하는 형태의 이름이다. 그대가 '성 에너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적인 출구, 생물학적인 출구를 통해서 흐르는 에너지 를 의미한다. 똑같은 이 에너지가 신성으로 흐를 때 그것이 영적 에너지인 것이다. 에너지 그 자체는 중립적이다.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표현될 때 그것이 성이다. 에너 지가 감정적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사랑이 되기도 하고, 증오가 되기도 하고, 분노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지적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과학적인 것이 도기도 하고, 문학적 인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몸을 통해서 움직일 때,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된다. 그 것이 마음을 통해서 움직일 때, 그것은 정신적인(mental)것이 된다. 그 차이는 있는 그대로의 에너지의 차이가 아니가 그것이 응용되어 나타난 것들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성 에너지의 승화'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성'이라는 출구가 이용되지 않는다면 에너지는 다시 순수해진다. 에너지는 언제나 순수하다. 그것이 신 성한 문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은 영적인 것이 되지만, 그 형태는 에너지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대는 성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어떤 것이든, 성에 대해 직접적 으로 행해지는 것은 하나의 억압이다. 그대가 성 에너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오 히려 신성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을 때, 그대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그 문 쪽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성은 흡수된다. 하나의 더 높은 지복이 가능할 때면 언제나, 더 낮 은 지복의 형태들은 부적절한 것이 된다. 그대는 그것들을 억누르거나 그것들에 대항 해서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시들어 버릴 뿐이다. 성이 승화된 것이 아 니라, 초월된 것이다. 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 에너지를 변형시키지 않을 것이 다. 그러기는커녕 그것은 그대 안에, 파괴적인 갈등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대가 에너 지와 싸울 때, 그대는 그대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에서는 아무도 이길 수 없다. 한순간 그대는 그대가 이겼다고 느낄 것이고, 그 다음 순간 그대는 성이 이 겼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일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가끔씩 성이 존재하 지 않을 것이고, 그대는 그것을 통제했다고 느끼겠지만, 그 다음 순간 그대는 다시 성 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낄 것이고, 그대가 얻었던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상실될 것 이다. 그 자신의 에너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의 에너지가 어디가 다른 곳, 좀 더 지복스러운 곳에서 필요하다면 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가 승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그것에 무언가를 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커다란 지복을 향한 하나의 새로운 길이 그대에게 열렸고, 자 동적으로, 저절로 그 에너지가 그 새로운 문을 향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돌들을 쥐고 있는데 갑자기 다이아몬드가 그대 수중에 들어오면, 그대 는 자신이 그 돌들을 떨어뜨렸다는 것조차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마치 그대가 그것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대 는 그것들에 대한 그대의 포기를, 그대가 그것들은 던져 버렸다는 것을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가 승화된 것이 아니다. 행복의 더 커다란 원천이 열렸고, 그보다 덜한 원천이 저절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자동적이고 너무도 저절로 일어나서, 성에 반대하는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필요치 않다. 어떤 에너지에 대해서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그대가 행하고 있 을 때면 언제나 그것은 소극적이다. 그 진정한, 적극적인 행동은, 성에는 연결조차 되 지 않고 명상에 연결된다. 그대는 성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것에 의해 흡수되었다. '승화'는 추한 단어이다. 그것은 그 안에 대립의, 갈등의 어감을 지니고 있다. 성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생명이 존속하기 위한 생물학적 기초일 뿐이 다. 그것에 어떠한 영적인 혹은 반 영적인 의미도 부여하지 말라. 단순히 그 사실을 이해하라. 만약 그대가 그것을 생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것에 어떤 영적인 의미가 부여될 때에만 그대는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말라.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어떠한 철학도 만들지 말라. 단지 그 사실들을 보라. 그것에 찬성하는 또는 반대하는 어떤 것 도 하지 말라. 그저 있는 그대로 그것을 내버려두어라.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 들여라. 그것에 대해 비정상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라. 그대가 손과 눈을 가진 것과 똑같이, 그대는 성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눈과 손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에 반대하지 말라. 그러면, '성에 대해 무 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무관하게 된다. 성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이분법을 만 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하나의 주어진 사실이다. 그대는 성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고, 다시 성을 통해 탄생을 주는, 하나의 내장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거대한 연속성의 일부이다. 그대의 몸은 죽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자신을 대신을 또 다른 몸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내장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확실하다. 그 때문에 성이 그토록 강박 관념적인 것이다. 그대는 이 곳에 영 원히 있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대는 어떤 더 새로운 몸으로, 그대의 복제품으로 대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성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 자연이 그것을 고집하기 때 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성이 자발적인 것이 라면 지구상에 한 사람도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성은 그토록 강박 관념적이고, 그 토록 강제적이며, 성적 욕구는 그토록 강렬하다. 왜냐하면 전 자연이 그것을 찬성하기 때문이다. 성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성이 종교적 구도자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너무도 비자발적이고 너무 도 강제적이고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개인 안에서 생명 에 너지가 신성과 마주쳤는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이 신 성과 마주쳤다는 것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 우리가 어떤 사람이 다이아 몬드들을 가졌는지를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 돌들을 던져 버렸는지는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돌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성을 초월했 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성은 너무도 충동적이고, 너무도 비자발적이며, 그것은 너무도 커다란 힘이기 때문 에 그것은 어떤 사람이 신성을 얻게 도리 때까지는 초월될 수 없다. 그래서 '브라마차 리야'(주1)가 한 사람이 신성에 이르렀는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은, 정상적인 존재들에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주1 브라마차리야: 성을 초월한 경지를 이르는 산스크리트어.) 이것은 성을 떨쳐 버림으로써 신성을 얻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역은 하나의 오 류이다.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사람이 그가 지니고 다녔던 돌들을 버리지만, 그 역은 진실이 아니다. 그대가 그 돌들을 던져 버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가 그것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때 그대는 그 중간에 있게 된다. 그대는 초월된 마음이 아니라 억압된 마음을 갖 게 될 것이다. 성은 그대 안에서 계속 부글부글 끓어서, 내면의 지옥을 만들어 낼 것 이다. 이것은 성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이 억압되면, 그것은 추하고, 병들 고 신경증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왜곡된다. 소위 말하는 성에 대한 종교적인 태도란, 왜곡된 성욕, 성적으로 완전히 신경증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나는 그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성은 하나의 생물학적인 사실이 다. 그 안에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그것과 싸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왜곡될 것이며, 왜곡된 성은 앞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아니다. 그것은 정상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 이상을 향한 한 걸음인 것이다. 그 억압이 너무 도 강렬해져서 그대가 더 이상 그것을 끌고 갈 수 없을 때, 그 때 그것은 폭발해 버린 다 - 그리고 그 폭발 속에서 그대가 상실될 것이다. 그대가, 인간이 지닌 모든 질이며, 모든 가능성이다. '성'이라는 정상적인 사실은 건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정상적으로 억압될 때, 그것은 건강하지 않은 것이 된다. 정상적인 것에서는 신성을 향해 아주 쉽게 움직일 수 있지만, 신경증적인 마음 에서는 신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지고,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해진다. 우선 그대 가 건강하고 정상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성이 초월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면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 성을 알라! 그 속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여 가라! 이 것이 하나의 새로운 문을 활짝 여는 비밀이다. 그대가 성 속으로 무의식적으로 들어가 면, 그대는 단지 생물학적 진화의 손아귀 안에 있는 하나의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만 약 그대가 성행위에서 의식적일 수 있다면, 바로 그 의식이 하나의 깊은 명상이 된다. 성행위는 너무도 비자발적이고, 너무도 충동적이어서 그 안에서 의식하고 있기란 어 렵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성행위 속에서 의식하고 있을 수 있다면, 그 때 삶 속에서 그대가 의식할 수 없는 어떤 다른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 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도 성만큼 깊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성행위 속에서 각성하게 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심지어 죽음 속에서 도 그대는 각성할 것이다. 성행위의 깊이와 죽음의 깊이는 같고, 평행하다. 그대는 같 은 지점에 이른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성행위 속에서 각성할 수 있다면 그대는 굉 장한 것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귀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을 하나의 명상의 행위로서 이용하라. 그것과 싸우지 말고, 그것에 대항 하지 말라. 그대가 자연과 싸울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의 부분이고, 그것의 일부이다. 그대는 성을 향해 친밀한, 연민의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성은 그대와 자연 사이의 가 장 깊은 대화이다. 사실, 성행위는 실제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여자를 통한, 남 자와 자연 사이의 대화 그리고 남자를 통한, 여자와 자연 사이의 대화이다. 그것은 자 연과의 대화이다. 그것은 자연과의 대화이다. 한순간 그대는 그 우주적 흐름 속에 존 재하고, 천상의 조화 속에 존재하고, 전체와 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남자는 여자를 통 해서, 여자는 남자를 통해서 채워진다. 남자는 온전하지(whole) 않고, 여자도 온전하지 않다. 그들은 하나의 전체에서의 두 조각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행위를 통해서 하나가 될 때마다, 그들은 사물들의 가 장 깊은 본성과의 조화, 도와의 조화 속에 존재할 수 있다. 이 조화가 새로운 존재를 위한 생물학적인 탄생이 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각성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오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각성하고 있다면, 그 행위는 그대를 위한 탄생, 영적인 탄생이 될 수 있다. 그대는 그것을 통해서 두 번째로 태어난다. 그대가 그것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순간, 그대는 하나의 지켜보는 자가 된다. 그리 고 일단 그대가 성행위 속에서 지켜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 그대는 성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켜봄 속에서 그대는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충동은 그 곳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무의식적인 참 여자가 아닐 것이다. 일단 그대가 그 행위 속에서 지켜보는 자가 되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한 것이 다. 이제 그대는 그대가 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대 안에 있는 지켜보는 힘이 그것 너머의 무언가를 알게 된 것이다. 이 '너머(beyond)'는 그대가 내면 깊숙이 존재할 때에만 알려질 수 있다. 그것은 표 면적인 마주침이 아니다. 그대가 시장에서 물건을 흥정하고 있을 때에는, 그대의 의식 이 그렇게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행위 자체가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인 간에 관한 한 성행위는 대개, 사람이 그것을 통해서 그 내면의 깊은 곳에 대해 지켜보 는 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다. 그대가 성을 통해서 명상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성이 더 적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 이다. 명상이 그것에서부터 자라날 것이고, 그 자라나는 명상에서 하나의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고, 성은 시들어 버릴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승화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는 마른 잎들과 같다. 그 나무는 심지어, 그 잎 들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똑같은 식으로, 그대는 심지어, 성에 대한 기계적인 충동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성에서 명상을 창조하라. 성을 하나의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라. 그것을 하나의 사원 으로 다루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하고 변형될 것이다. 그 때 성은 그 곳에 존 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어떤 억압이나 어떤 승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성은 단지 무관해지고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대는 그 너머까지 성장해 버렸다. 그것은 이제 그대 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마치 성장하고 있는 아이와 같다. 이제 장난감들은 의미가 없다. 그는 아무 것도 승화시키지 않았고, 아무 것도 억압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성장한 것뿐이다. 그 가 성숙해진 것이다. 장난감들은 이제 의미가 없다. 그 장난감들은 유치하고, 이제 그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똑같은 식으로, 그대가 명상을 하면 할수록, 그대에게 성의 호소력이 점점 떨어진 다. 그리고 머지않아, 성을 승화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에너지는 흘러갈 하나 의 새로운 근원을 저절로 갖게 된다. 성을 통해서 흘렀던 똑같은 에너지가 이제는 명 상을 통해서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명상을 통해서 흐를 때, 그 신성한 문 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대는 '성'과 '사랑'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해 왔다. 대개 우리는 두 단 어들 모두를, 그것들이 어떤 내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사용한다. 그것들은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은 성이 사라져 버렸을 때에만 찾아온다. 그 전에, 사랑은 하나의 미끼, 하나의 전희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행 위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에 대한 서문이고, 머리말일 뿐이다. 그 러므로 두 사람 사이에 성행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적은 사랑이 존재할 것이다. 왜 냐하면 서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랑 속에 있고, 만약 그들 사이에 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많은 낭만적 인 사랑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성이 들어오는 순간, 사랑은 밖으로 나간다. 성은 너무도 돌발적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너무도 폭력적이다. 그것은 서문이 필요하다. 전희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랑은 성이라는 적나라한 사실에 입힌 옷일 뿐이다. 그대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곳에서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서 있는 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항상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사랑이 말을 하고 있지만, 성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위 '사랑'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성에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오직 하나 의 서문으로서만 말이다. 만약 성이 찾아오면, 그 때 사랑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 것이 바로, 결혼이 낭만적 사랑을 죽여 버리는, 완전히 죽여 버리는 이유이다. 두 사 람은 서로를 잘 알게 되고, 전희 즉, 사랑은 불필요해진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의 서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향기이다. 그것은 성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존재한다. 그것은 머리말이 아니라 맺음말이다. 만약 그대가 성을 거쳐 왔고, 상대방에 대해 자비를 느낀다면, 그때 사랑이 발전한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성 행위 속에서 명상을 한다면, 그 때 그대의 성행위 상대는 단지 그대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닐 것이다. 그대는 그 혹은 그녀에게 감사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들 두 사람은 깊은 명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행위 속에서 명상을 할 때, 어떤 새로운 친밀함(friendliness)이 그대들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를 통해서, 그대는 자연과의 교감 속 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서로를 통해서, 그대는 실재라는, 미지의 깊은 곳으로의 일 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대는 서로에게 감사와 자비를 느낄 것이다. 그 고통에 대한 자비, 그 구도에 대한 자비. 즉, 동료 여행자에 대한 자비를 말이다. 만약 성이 명상적이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 뒤에 남는 향기가 존재한다. 성을 위한 전희가 아니라 어떤 성숙함, 어떤 성장, 어떤 명상적인 실현이라는 느낌이 존재 한다. 그래서 만약 성행위가 명상적이 되면, 그대는 사랑을 느낄 것이다. 사랑은 감사 함, 친밀함 그리고 자비의 결합이다. 만약 이 세 가지가 그 곳에 있으면, 그 때 그대 는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발전하면, 그것은 성을 초월할 것이다. 사랑은 성을 통해 발전하지 만, 그것을 넘어간다. 마치 한 송이 꽃처럼 그것은 뿌리를 통해서 나오지만, 그것을 넘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되돌아옴이란 없다. 그래서 만약 사랑이 발전하면, 성은 그 곳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실 그것이, 사랑이 발전 했는지를 아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성은 마치 계란 껍질, 사랑이 뚫고 나와야 하는 껍질과 같다. 사랑이 나오는 순간, 그 껍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깨지고, 버려질 것이다. 성은, 오직 명상이 그 곳에 존재할 때에만 사랑이 이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 명상이 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성이 반복될 것이고, 그 대는 지루해질 것이다. 성은 점점 무감각해질 것이고, 그대는 상대에게 감사함을 느끼 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대는 속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대는 그에게 적대감을 느낄 것이다. 그가 그대를 지배한다. 그가 성을 통해서 그대를 지배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대에게 하나의 필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의 노예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대는 성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의 노예가 되어 버린 그 누군가에 대 해 그대는 결코 친밀하다고 느낄 수 없다. 두 사람 다 똑같이 느낄 것이다. 상대방이 주인이라고 말이다. 지배가 거부될 수도 있고 싸움을 걸어 볼 수도 있지만, 성은 여전히 반복될 것이다. 그것은 매일의 일과가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성행위 상대와 싸운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그대는 싸우고, 그리고 나서 다시 그대는 화해한다. 사랑이란 기껏해야 그저 하나의 조정 장치에 불과 하다. 그대는 친밀하다고 느낄 수 없다. 자비가 없는 것이다. 그 대신에 잔인함과 폭 력이 존재할 것이다. 그대는 속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노예가 되었고, 성 은 사랑으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을 통해서 가라!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두려움은 어느 곳으로도 인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것을 두려워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두려움 그 자체 에 대한 것이다. 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과 싸우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 역시 일 종의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싸울 것인가(fight), 달아날 것인가(flight)' -싸울 것인 가, 도망갈 것인가- 이것들이 두려움의 두 갈래 길이다. 그러므로 성을 회피하지 말 라. 그것과 싸우지 말라. 그것을 받아들여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라. 그 속으 로 깊이 들어가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알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명상하라. -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할 것이다. 성행위 속에서 그대가 명상하는 그 순간 하나 의 새로운 문이 열린다. 그대는 하나의 새로운 차원- 전혀 미지의, 한 번도 그것에 대 해 들어본 적이 없는 -을 우연히 만나고, 더 커다란 지복이 그것을 통해 흐른다. 그대는 너무도 지복스러운 그 무언가와 마주치게 되어 성은 무관해질 것이고, 그것 은 저절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제 그대의 에너지는 더 이상 그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것이다. 에너지는 항상 지복을 향해 흐른다. 지복이 성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에너 지가 그것을 향해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더 많은 지복 -성을 초월하는 성은 넘어서는 지복, 보다 충족적이고(fulfilling), 보다 깊고 보다 커다란 지복-을 찾는다면, 그 때 저절로 에너지는 성을 향해 흐르는 것을 멈출 것이다. 성이 하나의 명상이 될 때 그것은 사랑으로 꽃피어나며, 이 꽃피어남이 신성을 향한 하나의 움직임이다. 그것이 사랑이 신성한 이유이다. 성은 육체적이고, 사랑은 영적이 다. 그리고 만약 사랑이라는 꽃이 그 곳에 있다면, 기도가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뒤 따라올 것이다. 이제 그대는 신성에서 멀지 않다. 그대는 집 가까이에 서 있는 것이 다. 이제, 사랑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라.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교감의 순간이 그 곳에 있을 때, 사랑의 순간이 그 곳에 있을 때 명상하기 시작하라. 그 속으로 깊이 들 어가라. 그것을 각성하라. 이제 육체들은 만나고 있지 않다. 성 속에서는 육체들이 만 나고 있었지만, 사랑 속에서는 영혼이 만나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만남,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이다. 이제 사랑을, 그대가 성을 보던 것처럼 보라. 그 교감, 그 내면의 만남, 그 내면의 육체 관계를 보라. 그러면 그대는 심지어 사랑도 초월할 것이며 기도에 이르게 될 것 이다. 이러한 기도가 그 문이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만남이지만,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은 아니다. 그것은 그대와 전체 사이의 교감이다. 이제 한 사람으로서의 상대방은 떨쳐진다. 그것은 비 개인적인 상대 -전체 존재- 그리고 그대이다. 그러나 기도도 여전히 하나의 만남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그것 역시 초월되어야 만 한다. 기도 속에서, 헌신자와 신성은 다르다. 즉, 박타(bhakta)와 바그완(bhagwan) 은 다르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만남이다. 그것이 미라(주2) 혹은 테레사가 그들의 기도 체험에 대해 성적인 용어를 쓸 수 있었던 이유이다. (주2 미라: 인도의 여류 시 인이며황태자비. 크리슈나를 열렬히 사랑해서 시적인 찬미의 노래들을 남겼다.) 사람은 기도와 같은 순간들 속에서 명상을 해야만 한다. 다시, 그것에 대해 하나의 지켜보는 자가 되라. 그대와 전체 사이의 그 교감을 보라. 이것은 가능한 한, 가장 미 묘한 각성을 요구한다. 만약 그대가 그대와 전체 사이의 그 만남을 각성할 수 있다면, 그 때 그대는 그대 자신과 전체, 두 가지 모두를 초월한다. 그러면 그대가 전체인 것 이다. 그리고 이 전체 속에 이원성은 없고, 오직 일원성만이 존재한다. 이 일원성이 성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추구된다. 이 일원성이 ' 갈망되어진 것'이다. 심지어 성 속에서조차, 이 갈망은 일원성을 향한 것이다. 지복이 찾아온다. 왜냐하면 단 한순간 동안, 그대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은 사랑으로 깊어지고, 사랑은 기도로 깊어지고, 기도는 전체적인 초월, 전체적인 일원성으로 깊어 진다. 이렇게 깊어지는 것은 항상 명상을 통한 것이다. 그 방법은 항상 똑같다. 수준들이 다르고, 차원들이 다르고, 단계들이 다르지만 그 방법은 똑같다. 성 속으로 파고 들어 가다 보면 그대는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사랑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기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기도 속으로 파고 들어가다 보면 그대는 일원성으로 폭발할 것이 다. 이 일원성이 전체이며, 이 일원성이 지복이며, 이 일원성이 환희이다. 따라서 싸우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사실 속에, 시선은 현존한다. 그것은 의상이 입혀져 있을 수도, 옷이 입혀져 있을 수도 있지만, 그대는 그 의상을 벗기고, 그 옷을 벗겨야만 한다. 그대는 여전히 더 미묘한 의상들을 발견할 것이다. 또 다시, 그 옷을 벗겨라. 그것의 전체적인 벌거벗음 속에서 일원성을 마주치 지 않는다면 그대는 만족을 찾지 못할 것이고, 그대는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의상이 벗겨진 '하나', 옷이 벗겨진 '하나'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그것과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그대가 '벌거벗음'을 알게 될 때 그것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있다. 사 람은 다른 사람들의 문을 두드림으로써 자신의 집을 발견해야만 한다. 실재의 옷이 벗겨진 그 순간 그대는 그것과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오직 의 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옷들이 그 장벽이므로, 그대 자신의 옷을 벗지 않는 한, 실 재의 옷을 벗길 수가 없다. 그것이 명상이 이중적인 무기인 까닭이다. 그것은 실재의 옷을 벗기고, 게다가 그대의 옷도 벗긴다. 실재는 벌거벗게 되고, 그대도 벌거벗게 된 다. 그리고 옷도 벗긴다. 실재는 벌거벗게 되고, 그대도 벌거벗게 된다. 그리고 전체 적인 벌거벗음, 전체적인 비어 있음의 순간 속에서 그대는 그 하나가 된다. 나는 성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성에 찬성한다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너머를 밝히는 데 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 너머는 항상 그 곳에 있지만, 대개 성은 '치고 달리기(hit-and-run)'식의 성이 어서, 아무도 깊이 가지 못한다. 만약 그대가 깊이 갈 수 있다면 그대는 신성에, 성을 통해서 하나의 문이 열리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마약 성이 단지 치고 달리기일 뿐이라면 그대는 그대가 더 커다란 그 무언가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교활해서 성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오는 거짓 사랑을 만들어 왔 다. 그것은 길러 낸, 인위적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충족될 때 사랑이 상실되는 것 을 느끼는 이유이다. 사랑은 단지 그 서문이었는데, 그 서문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항상 성 너머에 존재하며, 그것은 성 이면에 숨어 있다.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그 속에서 종교적으로 명상하라. 그러면 그대는 사랑스러운 (loving) 마음의 상태로 꽃피어날 것이다. 나는 성에 반대하지도 않고, 사랑에 찬성하지도 않는다. 그대는 여전히 그것을 초월 해야만 한다. 그것에 대해 명상하고, 그것을 초월하라. '명상'이라는 말로 나는, 그대 가 충분히 깨어 있고, 각성한 채로 그것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커다란 지복이 그 곳에 있지만, 그대는 눈먼 채로 그 옆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커다란 지복이 그 곳에 있지만, 그대는 눈먼 채로 그 옆을 지나가고 그것을 놓칠 수 있다. 이 '눈멀어 있음'이 변형되어져야만 하고, 그대가 눈을 뜨게 되어야만 한다. 눈 을 뜬 상태에서, 성은 그대를 일원성의 길 위로 데리고 갈 수 있다. 그 물방울은 대양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모든 물방울들의 가슴속의 갈망이다. 모든 행위 속에서, 모든 욕망 속에서, 그대는 똑같은 갈망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 고, 그것을 따르라.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모험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 나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행해질 수 있다. 그것은 힘겹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것은 예수 같은 사람에게, 붓다 같은 사람에 게, 마하비라 같은 사람에게 가능했으며, 그것은 다른 누구에게도 가능하다. 이 강렬함을 가지고, 이 깨어 있음을 가지고, 이 예민함을 가지고 성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그것을 초월할 것이다. 어떤 승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초월할 때, 어떤 성도 심지어 승화된 성조차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 기도 그리고 일 원성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랑의 세 단계이다. - 육체적인 사랑, 정신적인(psychic) 사랑 그리 고 영적인 사랑.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초월될 때 신성이 존재한다. 예수가 "신은 사랑 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가능한, 가장 가까운 정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을 향한 길 위에서 알게 되는 마지막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것 너머에 미지의 것이 존재하며, 그 미지의 것은 정의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최종적인 실현인 사랑 을 통해서 신성을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랑의 지점 너머에는 체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체험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 물방울은 대양이 된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라. 그러나 친밀한 태도를 가지고, 어떤 긴장도 어떤 투쟁도 없 이, 그저 깨어 있음을 가지고 가라. 깨어 있음은 삶의 그 캄캄한 밤 속에 있는 유일한 빛이다. 이 빛을 가지고, 그 속으로 들어가라. 모든 구석구석을 찾고 축하라. 모든 곳 에 신성이 존재하므로, 어떤 것에도 반대하지 말라. 그러나 또한 어떤 것에 머물러 있지 말라. 넘어가라. 왜냐하면 여전히 더 큰 지복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정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성 가까 이에 있다면 성을 이용하라. 만약 그대가 사랑 가까이에 있다면 사랑을 이용하라. 억 압이나 승화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말고, 싸운다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말라. 신성은 그 어떤 것 뒤에도 숨어 있을 수 있으므로 싸우지 말라.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망치지 말 라. 실제로, 그것은 모든 것의 뒤에 존재하므로 그대가 어디 있는지, 가장 가까운 문 을 취하면 그대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어떤 곳에도 정체되어 있지 말라. 그러면 그 대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모든 돌 밑에 하느님(the Lord)이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돌들 만을 본다. 그대는 돌이 많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그대가 성을 하나의 적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의 돌이 된다. 그 때 그것은 불토명해지고, 그 대는 그것 너머를 볼 수가 없다.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러면 그 돌은 마치 유리처럼 될 것이다. 그대는 그 뒤쪽을 볼 것이며, 그 유리를 잊어버릴 것 이다. 그 유리 뒤에 존재하는 것이 기억될 것이다. 투명해지면 어떤 것이든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따라서 성을 하나의 돌로 만들지 말 고,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은 명상을 통해서 투명해진다. @ff 4. 쿤달리니 요가 -뿌리로의 회귀- 쿤달리니 요가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서양을 도울 수 있습니까? 쿤달리니를 일 깨우는 당신의 방법은, 왜 전통적인 통제된 방법들과 비슷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혼돈 스러운 것입니까? 존재는 에너지이고, 아주 많은 방법들과 아주 많은 형태들로 된 에너지의 움직임이 다. 인간 존재에 관한 한, 이 에너지는 쿤달리니 에너지이다. 쿤달리니란, 인간의 몸 과 인간의 정신(psyche)에 초점이 맞추어진 에너지이다. 에너지는 드러난 채로 혹은 드러나지 않은 채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씨앗 속에 남아 있을 수도 이쏙, 하나의 드러난 형태로 싹틀 수도 있다. 모든 에너지는 씨앗 속 에 있거나 그 드러난 형태 속에 있다. 쿤달리니는 그대의 전체적인 잠재력, 그대의 전 체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씨앗이다. 그것이 그 잠재력인 것이 다. 쿤달리니를 일깨우는 방법들이란, 그대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쿤달리니는 특이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 간 에너지일 뿐이다. 그러나 대개 그것의 일부, 극히 미세한 부분만이 작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 부분마저도 조화롭게 작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갈등 속에 있다. 그것 이 비참함이고, 고뇌이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조화롭게 작용할 수 있다면, 그 때 그대는 지복을 느낀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갈등 속에 있다면 - 만약 그것이 그 자신 과 대립하고 있다면, 그 때 그대는 비참하다고 느낀다. 모든 비참함이란 그대의 에너 지가 갈등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모든 행복, 모든 지복이란 그대의 에너지가 조 화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전체 에너지가 오직 잠재적일 뿐, 현실적이지 않은가? 일상 생활에 관한 한, 그 것은 필요하지 않다 - 그것은 요구되지 않는다. 요구되고 도전받는 부분만이 작용하게 된다. 일상 생활은 그것에 대한 도전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미세한 부분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작은, 드러난 부분마저도 조화롭지 않다. 왜냐 하면 그대의 일상 생활이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요구들은 갈등 속에 있다. 사회가 어떤 것을 요구하는데 그대의 본능은 아주 모순되는 어떤 것을 요구한다. 사회적인 요구들과 개인적인 요구들이 갈등 속에 있다. 사회는 자신의 요구들을 가지고 있고, 도덕성과 종교는 그 들의 요구들을 가지고 있 다. 이러한 갈등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조화로운 전체가 되는 것을 가로막아 왔다. 그 것들이 인간을 단편적으로 만들어 왔다. 아침에는 어떤 것이 요구되고, 오후에는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된다. 그대의 아내는 그대로부터 무언가를 요구하는데 그대의 어머니는 아주 상반되는 그 무언가를 요구한 다. 그러면 일상 생활이 그대에게 있어서는 상반되는 요구이다. 따라서 드러나게 된, 그대의 전체 에너지의 그 미세한 부분마저도 그 자신과의 갈등 속에 있다. 거기에는 또 다른 갈등도 있다. 드러나게 된 부분은 항상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 과의 갈등 속에 있게 될 것이다.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과 언제나 갈등 속에 있을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현실적인 것은 그것을 억누 를 것이다. 심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무의식은 언제나 의식과의 갈등 속에 있다. 의식은 그 것을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언제나 무의식이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는 위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통제하에 있고 잠재력 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그대가 의식은 조종해 볼수 있지만, 무의식의 폭발에 대해서는 그대는 불안정한 상태 이다. 그대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이 의식이 갖는 두려움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 다른 갈등으로, 첫번째 것보다 더 크고 더 깊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갈 등이고, 이미 드러난 에너지와 드러나기를 바라는 에너지 사이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의 두 유형이 그대가 조화 속에 있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대가 조화 속에 있지 못하면 그대의 에너지는 그대와 대립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는 움직임 을 필요로 하고, 그 움직임은 항상 드러나지 않은 것에서 드러난 것을 향해, 씨앗에서 나무를 향해, 어두운 것에서 빛을 향해 존재한다. 이 움직임은 억압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움직임, 그 조화는 파 괴되고, 그대의 에너지는 그대에게 하나의 적이 된다. 그대는 그것 자체에 대항해서 분열된 집이 되어 버리고, 그대는 하나의 군중이 된다. 그 때 그대는 하나가 아닌, 여 럿이 된다. 인간에 관한 한, 이것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추함과 비참함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지복과 아름다움은 그대의 생명 에너지가 움직임 속에, 편안한 움직임, 이완된 움직임 - 억압되지 않고 제재받지 않는, 통합되 고 단편적이지 않은, 자신과의 갈등 속에 있지 않지만, 하나이며, 유기적인 - 속에 있 을 때에만 찾아올 수 있다. 그대의 에너지가 이러한 조화로운 합일에 이를 때를 '쿤달 리니'라고 한다. 쿤달리니란, 그대의 전 에너지가 합일 속에, 움직임 속에, 조화 속에 어떤 갈등도 없이 존재할 때 그리고 그것이 협조적이고 보완적이며 유기적일 때 그것 에 대한 기술적인 용어이다. 그러면 그 곳에, 독특하며, 알려지지 않은 변형이 존재한 다. 에너지가 갈등 속에 있을 때 그대는 그것을 해소하고 싶어한다. 그대의 갈등하고 있 는 에너지들이 해소되고, 내던져질 때 그대는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들 을 내던져 버릴 때마다 그대의 생명 에너지, 그대의 생기는 아래쪽으로 또는 바깥쪽으 로 움직인다. 아래쪽으로의 움직임이 바깥쪽으로의 움직임이고, 위쪽으로의 움직임이 안쪽으로의 움직임이다. 그대의 에너지가 올라갈수록 그 에너지들은 안으로 들어가며 그 에너지들이 내려갈수록, 그것들은 밖으로 움직인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갈등하는 에너지들을 밖으로 내던져 버리면 해소감은 느끼겠지만, 그것은 마치 그대의 생명을 조각들과 파편들로, 여러 번에 걸쳐서 내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자살과 같다. 우리의 생명 에너지가 하나가 되고, 조화롭게 되고, 그 흐름이 내적인 것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살하는 것과 같다. 그대가 에너지를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있을 때 그대는 해소된다고 느끼겠지만, 그 러한 해소는 일시적이기 마련이다. 왜냐 하면 그대는 에너지의 지속적인 원천이기 때 문이다. 에너지는 다시 축적되고, 그대는 다시 그것을 제거해야만 할 것이다. 일반적 으로 '쾌락'이라고 알려진 것은 갈등하는 에너지들을 내던져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쾌락이란, 그대가 하나의 부담에서 해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언제나 부정적 이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지복은 긍정적이다. 그것은 그대의 에너지들이 충 족되었을 때에만 찾아온다. 그대의 에너지들이 밖으로 내던져지지 않으면서도 내적인 흐름을 갖게 될 때, 그대 가 그것들과 하나가 되고 그것들과 갈등 속에 있지 않을 때, 그 때 내적인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 움직임은 끝이 없다. 그것은 점점 더 깊어져서, 그것이 깊어질수록, 그 것은 더욱더 지복스럽게, 더욱더 환희롭게 된다. 따라서 에너지는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첫번째는 단순한 해소, 그대에게 하나의 부담이 된, 그대가 사용하지 못했던,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그대가 창조적이 지 못했던 에너지들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반 쿤달리니이다. 인간들의 평상시의 상태는 반 쿤달리니이다. 에너지는 그 중심에서 그 주변을 향해 서 움직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대가 움직이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는 바로 정반대를 뜻한다. 힘, 에너지들이 주변에서 그 중심을 향해 움직인다. 안으로의 움직임, 중심 지향적인 움직임은 지복스럽고, 그 반면에 바깥쪽으로의 움 직임은 행복과 불행, 둘 다를 준다. 순간적인 행복과 영속적인 비참함이 있을 것이다. 행복은 그 틈들 속에서만 찾아올 것이다. 그대가 희망할 때에만, 그대가 기대들을 가 질 때에만 그 틈들이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결과는 항상 비참함이다. 행복은 기대 속에, 희망하는 것 속에, 욕망하는 것 속에, 꿈꾸는 것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며, 그 행복은 전체적으로 소극 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행복이란 없고, 오직 순간적인 불행의 부재가 있을 뿐이다. 그 러한 부재가 행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이 '생명'인 것이다. 즉, 생명력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그러한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그대 는 죽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 역설이다. 그대는 계속 에너지를 만들어 내면서도 그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질 때 그대는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질 때 그대는 그것을 내던져 버리고, 그것이 만들어지지 않을 때 그대는 비참하고 병들었다고 느낀다. 생명력이 만들어지지 않는 그 순간, 그대는 병들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 어질 때, 그대는 또 다시 병들었다고 느낀다. 첫번째 병은 약함에서 오는 병이고, 두 번째 병은 그대에게 하나의 부담이 되어 버린 에너지에서 오는 병이다. 그대는 그것을 조화시키지도, 그것을 창조적으로 만들지도, 그것을 지복스럽게 만들지도 못한다. 그 대가 그것을 만들어 왔으면서 이제 그대는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것을 그저 내던져 버린다. 그리고 나서 그대는 다시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든다. 이것은 불합 리하지만, 이 불합리함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뜻하는 '인간존재'이다. 즉, 끊임없이 부 담이 되는, 그리고 그대가 끊임없이 해소해야만 하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성이 그토록 중요하고, 그토록 의의가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대 자신에게서 에너지를 제거해 주는 가장 커다란 수단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그대는 그것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더 많은 근원 들을 갖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더 성적이 된다. 왜냐 하면 그대는 해소해야 할 더 많 은 긴장들을 갖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에너지를 내던져 버리는 일이 존재한다. 만약 충분 히 지성적이고, 충분히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것의 어리석음, 그것의 전적인 무의미함 을 느낄 것이다. 그는 삶의 무목적성을 느낄 것이다. 그대가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내던져 버리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가?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대체 존재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 속에서 단순히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내던져지는 하 나의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인가? 그래서 더 예민한 사람일수록, 그는 우리가 알고 있 는 삶의 무의미함을 더 많이 느낀다. 쿤달리니는 이 어리석은 상황을 하나의 의미 깊은 것으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쿤달 리니의 과학은 가장 미묘한 과학들 중의 하나이다. 물리학 역시 에너지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물질적인 에너지이지 심령적인 에너지가 아니다. 요가는 심령 에너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과학이며, 초월적인 그것을 다루는 하나 의 과학이다. 과학이 관심을 갖는 물질적인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이 심령 에너지는 창조적이 될 수도 있고, 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것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파괴적이 된다. 만약 그것이 사용된다면, 그것은 창조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비창조적 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것을 창조적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은 첫째로, 그대의 잠재 력의 일부만을 각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약 일부가 각성되고, 그 나머지, 그대가 가진 잠재력의 주요 부분이 각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창조적일 수가 없는 상황이다. 반드시 그 전체가 인식되어야만 한다. 그대의 잠재력 전체가 현실화되어야만 한다. 그 잠재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고, 그것을 일깨우는 방법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잠자고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이 쿤달리니 즉, '독이 있는 커다 란 뱀(serpent)'의 힘, 한 마리 잠자는 독사라고 이름 붙여져 왔다. 만약 그대가 한 마리 독사가 잠자고 있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것은 바로 그것처럼 생겼다. 그것은 또아리를 틀고 있다. 거기에 움직임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 러나 독사는 그 꼬리를 똑바로 설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에너지로 인해 서 있는 것 이다. 그 때문에 독사가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그대의 생명 에너지 역시 또 아리를 틀고 있고,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똑바로 서 있게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완전한 잠재력이 현실화된 채로 깨어 있게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삶과 죽음이란, 에너지의 두 가지 상태일 뿐이다. 삶이란 기능하고 있는 에너지를 의미하고, 죽음이란 기능하고 있지 않은 에너지를 의미한다. 삶이란 깨어나 있는 에너 지를 의미하고 죽음이란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간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쿤달 리니 요가에 의하면, 그대는 대게, 부분적으로만 살아 있다. 현실화된 그대 에너지의 부분이 그대의 생명인 것이다. 그 나머지 부분은 깊이 잠들어 있어서 마치 없는 것처 럼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깨워질 수 있다. 그 잠재력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쿤달리니 요가에서 시도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프라나야마(pranayama) 즉, 호흡 조절은 잠자는 에너지를 망치로 두드리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호흡을 통해 망치로 두드리 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 하면 호흡은 그대의 생기 즉, 그대의 프라나(prana), 그대의 활력의 본래 근원과 그대의 현실적인 존재 사이의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재적 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다리이다. 그대의 호흡 체계를 바꾸는 순간, 그대의 전체 에너지 체계가 바뀐다. 그대가 잠들 어 있을 때 그대의 호흡은 바뀐다. 그대가 깨어나 있을 때 그대의 호흡은 바뀐다. 그 대가 화가 날 때 그대의 호흡은 다르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그대의 호흡은 다 르다, 그대가 성적인 열정 속에 있을 때 그대의 호흡은 다르다. 모든 마음의 상태마 다, 한 가지 생명력의 특정한 속성이 존재해서, 그대의 호흡이 바뀌는 것이다. 그대가 화가 날 때, 그대는 그 주변에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만약 그대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 그대가 공격해야만 하거나, 혹은 그대 자신을 방어해야만 한다 면 - 그 주변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진다. 에너지가 중심에서 신속하게 주변으로 몰려갈 것이다. 성행위를 하는 동안 그대 몸에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급히 방출되기 때문에 그 후 에 그대는 탈진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화를 낸 후에도 역시 그대는 탈진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순간이 지난 후에 그대는 탈진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상쾌함을 느낄 것이다. 기도 후에 그대는 상쾌함을 느낄 것이다. 왜 그런 반대 현상이 지금까지 일어나 왔는가? 그대가 사랑스러운 순간에 있을 때에는 그 대의 에너지가 주변에 필요하지 않다. 왜냐 하면 아무런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 가 편안하고 이완되어 있어서, 에너지가 안으로 흐른다. 에너지가 안으로 흐를 때 그 대는 상쾌함을 느낀다. 깊은 호흡을 하고 난 후에 그대는 상쾌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 하면 에너지가 안으 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안으로 흐를 때 그대는 활력과 충족감을 느낀다. 그대는 하나의 행복감을 느낀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에너지가 안으로 향할 때, 그대의 호흡이 하나의 다른 질을 갖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완되고, 운율적이고 조화로울 것이다. 그대가 호흡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될, 마치 호흡이 멈추어 버린 것처럼 느끼게 될 순 간들이 있을 것이다. 호흡이 너무도 미묘해진다!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호흡 이 멈춘다. 사마디(주1) 속에서, 환희 속에서 사람은 호흡이 완전히 멈춰 버렸음을 느 낀다. 에너지가 밖으로 흐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호흡이 불필요하다. (주1 사마디: 삼매.자아와 마음의 한계를 넘어 우주 의식과 합일된 상태를 일컫는 말.) 프라나야마를 통해서 그대 안에 있는 이 잠재적인 에너지가 체계적으로 일깨워진다. 그것은 아사나(asana) 즉, 요가의 자세들을 통해서 접근이 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그대의 몸은 모든 지점에서 에너지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자 세는, 이에 상응하는 한가지 영향을 에너지의 근원에 미친다. 붓다가 사용했던 자세는 파드마산(padmasan) 즉, 연꽃 자세로 불리워진다. 그것은 가장 소량의 에너지가 필요한 자세들 중의 하나이다. 만약 그대가 똑바로 앉는다면,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균형을 이루어서 그대는 대지와 하나가 된다. 거기에는 중력의 끌어당김이 없다. 그리고 만약 그대의 손과 발이 하나의 닫힌 회로가 형성되는 자세 속에 있으면, 생체 전기가 하나의 회로 속에서 흐를 것이다. 붓다의 자세는 둥근 자세 이다. 에너지가 순환하게 되어 에너지가 밖으로 내던져지지 않는다. 에너지는 항상 손가락, 손, 발을 통해 밖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둥근 모양을 통해서 는 에너지가 흘러 나갈 수 없다. 그것이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 하고, 더 오래 사는 이유이다. 몸이 둥글면 둥글수록 에너지가 밖으로 덜 흐른다. 여성들이 성행위 후에 그다지 탈진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생식기 형태가 둥글고 흡 수적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더 탈진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의 생식기 형태 때문 에 더 많은 에너지가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에너지뿐만 아니라 심령 에너 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너지의 모든 출구들이 파드마산에서는 한데 연결되어, 어떤 에너지도 밖으로 이동 할 수 없다. 양쪽 발이 교차되고, 두 손이 두 발과 맞닿고, 그 두 발이 성 센터에 닿 는다. 그리고 그 자세가 아주 곧기 때문에 중력의 끌어당김이 없다. 이 자세에서는 몸 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다. 왜냐 하면 생명 에너지가 밖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두 눈 역시 완전히 감거나 반쯤 감고, 눈동자도 정지시킨다. 왜냐 하면 두 눈 역시 에 너지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출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꿈 속에서도 그대는 눈의 움직임을 통해서 많은 에너지를 내던져 버린다. 사 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한 가지 방법은 그의 눈에 손을 대 보는 것이다. 만약 두 눈이 움직이고 있다면 그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다. 그를 깨워 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가 꿈을 꾸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눈동자가 움직이 고 있지 않다면, 그는 깊은, 꿈 없는 잠 즉, 수슈프티(sushupti) 속에 있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안으로 움직일 것이고,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가지 않고 있다. 아사나들, 프라나야마 - 그것을 통해서 에너지들이 안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는 수 많은 방법들이 있다. 에너지들이 안으로 흐르면 그것들은 하나가 된다. 왜냐 하면 중 심에는 하나 이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안으로 흐르면 흐를수 록 더 많은 조화가 있게 된다. 갈등들은 떨어져 나간다. 중심에는 갈등이란 없다. 그 곳에는 '전체'라는 하나의 유기적인 합일이 있다. 그것이 지복감이 느껴지는 이유이 다. 다른 하나는, 아사나들과 프라나야마는 신체적인 도움들이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중 요하지만,그것들은 단지 육체적인 도움들일 뿐이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갈등 속에 있 다면 그 때 그것들은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몸과 마음은 실제로 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두 부분이다. 그대는 몸과 마음이 아니고, 몸/마음이다. 그대는 정신/신체(psycho/somatic) 혹은 신체/정신(somato/psychic)이 다. 우리는 몸을 하나의 어떤 것으로 그리고 마음은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이야기하는 데, 몸과 마음은 하나의 에너지에 대한 두 개의 극들이다. 몸은 거칠고, 마음은 미세 하지만 에너지는 같다. 양극에서 작업을 해야만 한다. 몸에 대해서는 하타 요가(주2)로서 아사나들, 프라나 야마 등이 있고, 마음에 대해서는 라가 요가(주3)와, 기본적으로 그대의 정신적 자세 들과 관련된 다른 요가들이 잇다.(주2 하타 요가: 호흡법과 좌법을 위주로 하는, 육체 에 변형을 주는 요가. 주3 라가 요가: 라자 요가를 뜻하는 듯함.) 몸과 마음은 하나의 에너지이다. 예를 들어서, 만약 그대가 화가 났을때 그대의 호 흡을 조절할 수 있다면 화는 없어질 것이다. 만약 그대가 리듬감 있게 계속 호흡할 수 있다면, 성적인 열정이 그대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이 거기 있긴 하겠지만, 드러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대조차 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이 억제될 수 있고, 화도 억제될 수 있다. 리듬감 있 는 호흡을 통해서 그대는, 그대 자신마저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성이나 화를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화나 성은 아직도 그 곳에 존재할 것이다. 몸이 그것을 억제해 왔지 만, 그것은 그 안에,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몸과 마음,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한다. 몸은 요가적인 방법론을 통해 서, 마음은 각성을 통해서 훈련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요가를 수련한다면, 그대 는 더 많은 각성을 필요로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일들이 더욱 미세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화가 나 있다면, 그대는 보통 그것에 대해 각성하게 된다. 왜냐 하면 그 것이 대단히 거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프라나야마를 수련한다면, 그대가 화를 각성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각성, 더욱 날카로운 예민함을 필요로 할 것이다. 왜 냐 하면 이제는 화가 더욱 미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그것에 협조하지 않고 있 어서, 그것에 대한 신체상의 표현은 없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각성 기법들을 수련하면서 동시에 요가의 방법들을 수련한다면, 그들 은 각성의 더욱 깊은 영역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거칠음만을 알 게 된다. 만약 그대가, 거칠음은 변화시키고 미세함은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대는 궁지에 빠질 것이다. 이제는 갈등이 새로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고집할 것이다. 요가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은 단지 일부분이다. 그 다른 한 가지 부분은 붓다가 ' 성성한 깨어 있음(mindfulness)'(주4)라고 부르는 것이다.(주4 mindfulness: 붓다가 썼던 언어 팔리어의 사티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몸이 리듬감 있게 될 수 있고 그대 의 내적인 움직임들에 협조적이 될 수 있도록 요가를 수련함과 동시에 성성한 깨어 있 음을 수련하라. 호흡에 대해 성성히 깨어 있어라. 요가에서 그대는 호흡 과정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성성한 깨어 있음 속에서 그대는 호흡을 있는 그대로 각성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저 그것을 각성하라. 만약 그대가 그대의 호흡을 각성할 수 있게 되면 그대는, 그대의 생 각의 과정을 각성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각성할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의 과정을 직접 각성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낼 수 없을 것 이다. 그것은 대단히 힘들고 지루할 것이다. 호흡은 마음으로 가는 문이다. 만약 그대 가 그대의 호흡을 단 한순간이라도 멈춘다면, 그대의 생각들 역시 멈출 것이다. 호흡 이 멈출 때, 생각의 과정도 멈춘다. 만약 그대의 사고가 혼돈스럽다면, 그대의 호흡 역시 혼돈스러울 것이다. 호흡은 그대의 생각의 과정을 동시에 반영할 것이다. 붓다는 아나파나사티(주5) - 들어가고 나가는 호흡을 각성하는 요가 - 에 대해 이야 기를 한다.(주5 아나파나사티: 영어로는 mindfulness of inhalation and exhalation 으로 번역된다.) 그는 말한다, "여기에서 시작하라."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시작이다. 반드시 호흡에서 시작해야지, 결코 생각의 과정, 그 자체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 그대 가 호흡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각의 미세한 움직임들도 느 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의 과정을 각성하는 것은 마음의 질을 바꿀 것이다. 아사나들, 프라나야마는 몸 의 질을 바꿀 것이다. 그러면 그대의 몸과 마음이, 전혀 어떤 갈등도 없이 하나인 순 간이 찾아온다. 그것들이 일치될 때, 그대는 몸도 마음도 아니다. 처음으로 그대는 자 신을 '자아(the Self)'로서 알게 된다. 그대는 초월한다. 그대는 아무런 갈등이 없을 때에만 초월할 수 있다. 아무런 갈등 없이 몸과 마음이 하나인 이런 조화로운 순간 속에서, 그대는 두 가지 모두를 초월한다. 그대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제 그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 - 사물이 아 닌 것(no-thing) - 이다. 그대는 단순한 의식이다. 무언가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성 그 자체이다. 어떤 것도 각성하지 않는 이러한 각성,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의식이 폭 발의 순간이다. 그대의 잠재력이 현실화된다. 그대는 하나의 새로운 영역 - 궁극 - 속 으로 폭발해 들어간다. 이 궁극이 모든 종교들의 관심사이다. 이 궁극에 이르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쿤달리니에 대해, 그것이 비물질적이 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쿤달리니란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그대는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쿤달리니'라는 단어가 의미하고 있는 것 은, 어떤 방식으로 혹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내적인 에너지 흐름으로 그 곳에 존재 하기 마련이다. 이런 내적인 흐름이 유일한 혁명이고 유일한 자유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더 많 은 지옥을 계속 만들어 낼 것이다. 왜냐 하면 그대가 바깥쪽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그 대는 그대 자신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면 질수록, 그대는 더욱 더 아프고 질병에 걸리게 된다. 쿤달리니는 모든 생명의 원천인데, 그대는 수많은 방식으로 그것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그 때 그대는 그대 자신에 대해 하나의 국외자가 되어 버리고, 그대는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돌아오는 것이 요가의 과학이다. 인간의 변형에 관한 한, 쿤달리니 요가가 가장 미묘한 과학이다. 그대는, 전통적 방법들은 대단히 체계적인데 왜 나의 방법은 혼돈적인지 질문했었 다. 전통적 방법들이 체계적인 것은 그 방법들이 계발되었던 그 이전 사람들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하나의 아주 새로운 현상이다. 어떤 전통적 방법도 정확하 게 있는 그대로는 사용될 수 없다. 왜냐 하면 현대인은 이전에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 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모든 전통적 방법들이 적절하지 않게 되어 버렸 다. 예를 들어서, 몸이 대단히 많이 변했다. 몸은 이제, 파탄잘리(주6)가 그의 요가 체 계를 계발했던 시대에 그랬던 것만큼 자연스럽지 않다.(주6 파탄잘리: B.C 2세기경 인 도의 요가 수행자로, 요가를 집대성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몸은, 너무 많 은 약물들이 주입되어 어떤 전통적인 방법도 도움이 될 수 없다. 과거에는 하타 요가 수행자들에게 약이 허용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았 다. 왜냐 하면 화학적인 변화들은 그 방법들을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 즉, 공기, 물, 사회, 생활 여건들이 지금은 인위적이다. 자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인위성 속에서 태어나서, 그 안에 서 발전해 나간다. 따라서 전통적 방법들이 오늘날에는 해롭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것들은 현대 상황에 따라서 변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파탄잘리가 살았던 시대 에는 인간의 인격의 중심이 두뇌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슴이었다. 그리고 그 인전에는 가슴조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아래쪽, 배꼽 근처였다. 하타 요가는 인격의 중 심이 배꼽이었던 사람에게 의미있고, 유용한 방법들을 계발해 냈다. 그 다음에 그 중 심은 가슴이 되었다. 그 때서야 박티 요가(주7)가 사용될 수 있었다. 박티 요가는 중 세 시대에 계발되었다. 왜냐 하면 그 때가 인격의 중심이 배꼽에서 가슴으로 바뀐 때 이기 때문이다. (주7 박티 요가: 산스크리트어로 같이 나눈다는 의미로 종교적인 헌신을 추구하는 요 가) 하나의 방법은 그것이 적용되는 사람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박티 요가마저 도 적절하지 않다. 그 중심이 배꼽에서 훨씬 더 멀어졌다. 지금 그 중심은 두뇌이다. 그것이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과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이유이다. 어떤 방법도 필요하지 않고, 어떤 기법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이해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단지 말뿐인 이해, 단지 지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것도 변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하나의, 지식의 축적물이 된다. 나는 체계적 방법들보다 혼돈적 방법들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혼돈적 방법은 중심을 두뇌에서 아래쪽으로 밀어내는 데 대단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체계적 방법을 통해서는, 중심이 아래로 밀려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체계화가 두뇌의 작용이 기 때문이다. 하나의 체계적 방법을 통해서는, 두뇌가 더욱 강화될 것이고, 더 많은 에너지가 거기에 보태질 것이다. 혼돈적 방법들을 통해서는, 두뇌가 무용지물이 된다. 두뇌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 다. 그 방법이 대단히 혼돈스러워서, 그 중심이 자동적으로 뇌에서 가슴으로 밀려난 다. 만약 그대가 다이나믹 명상(주8)이라는 나의 방법을 격렬하게, 비체계적으로, 혼 돈적으로 한다면 그대의 중심이 가슴으로 이동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의 정화가 있다. 하나의 정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대의 가슴이 그대의 두뇌로 인해 너무도 억압되 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뇌가 그대 존재의 너무 많은 부분을 점령해 버려서, 두뇌가 그대를 지배하고 있다. 가슴을 위한 장소가 없어서, 가슴의 갈망들은 억압되어 있다. 그대는 결코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살아 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어 떤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두뇌가 항상 끼어들어서 체계화시키고, 일들을 수학적인 것 으로 만들어 버려서 가슴은 억압되어 있다. (주8 다이나믹 명상: 오쇼에 의해 고안된 역동적인 명상으로 혼돈된 호흡과 정화의 과 정, 점프등을 통해 침묵에 이르는 5단계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의 혼돈적 방법이 의식의 중심을 두뇌에서 가슴쪽으로 밀어내 는 데 필요하다. 그리고 나면 가슴의 부담을 덜어 내기 위해, 억압을 털어 버리기 위 해, 가슴이 열리도록 하기 위해 정화가 필요하다. 만약 가슴이 가벼워지고 부담이 덜 어지면, 그 때의 의식의 중심이 훨씬 더 아래쪽으로 밀려서, 배꼽은 활력의 근원이고, 다른 모든 것 -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것 - 이 나오는 씨앗이 되는 근원이다. 나는 이 방법을 대단히 사려 깊게 사용하고 있다. 체계적 방법론은 이제 도움이 되 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뇌가 그것을 자기 자신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 다. 또한 바잔(주9) 염송만으로는 이제 도움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슴이 너무나 짓눌려 있어서 그것이 진정한 염송으로 꽃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염송은 단지 그것 에 대한 하나의 도피일 뿐이다. 기도도 단지 하나의 도피가 될 수 있다. 가슴은 기도 로 꽃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슴이, 억압들로 인해 지나치게 짓눌려 있기 때문이 다. 나는 진정한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기도 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주9 바잔: 찬가, 신을 찬양하는 노래) 의식은 그 근원, 그 뿌리에 이를 때까지 아래로 밀려나야만 한다. 그 때 비로소 변 형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의식을 두뇌에서 아래쪽으로 밀어내는 데 혼돈적 방 법들을 사용한다. 그대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는 언제나, 두뇌가 작용을 멈춘다. 예를 들어서, 만약 그대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대 앞에 뛰어들면, 그대는 너무 도 순식간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것은 두뇌의 작용일 수가 없다. 두뇌는 시간이 필요하 다. 두뇌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따라서 사고의 가 능성이 있어서 그대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면 언제나, 그대는 그대의 배꼽 주위에 하나 의 감각을 느낀다. 마치 반응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대의 배인 것이다. 그대의 의식은 그 사고 때문에 배꼽까지 밀려 내려간다. 만약 그 사고가 미리 계산될 수 있었다면, 두뇌가 그것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사고에 처하게 될 때는, 미지의 어떤 것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의식이 배꼽까지 이동했다는 것을 주목하 게 된다. 만약 그대가 선승에게, "당신은 어디에서 생각을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의 두 손을 자신의 배에다 갖다 댄다. 서양인들이 처음으로 일본 승려들을 접촉하게 되었 을 때,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어떻게 당신이 당신의 배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선의 대답은 의미가 깊다. 의식은 몸의 어떤 중심도 사용할 수가 있는데, 그 본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중심이 배꼽인 것이다. 두뇌는 그 본래의 근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만약 생명 에너지가 밖으로 움 직이고 있다면 의식의 중심은 두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생명 에너지가 안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배꼽이 그 중심이 될 것이다. 혼돈적 방법들은 의식을 그것의 뿌리로 밀어내는 데 필요하다. 왜냐하면 오직 그 뿌 리로부터만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계속 말로 표현할 것이 고, 아무런 변형도 없을 것이다. 단지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대는 그 뿌리를 변형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대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옳은 것에 대해 알면서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는 이중 으로 긴장하게 된다. 그는 이해는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해는 오직 그 것이 배꼽에서, 그 뿌리에서 나올 때에만 의미있다. 만약 그대가 머리에서 이해한다 면, 그것은 변형시키지 않는다. 궁극은 두뇌를 통해서 알려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두뇌를 통해서 작용하고 있 을 때 그대는, 그대가 나온 그 뿌리와의 갈등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문제 는, 그대가 배꼽에서 멀어져 왔다는 점이다. 그대는 배꼽에서 왔고, 그것을 통해서 죽 을 것이다. 그 뿌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돌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쿤달리니 요가는 생명 에너지와 그것의 내적인 흐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몸과 마 음을, 초월이 가능한 하나의 지검으로 가져오는 기법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한다. 몸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사는 것 또한 다르다. 그것은 단지 삶일 뿐이다. 달구지가 유용하긴 하지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지금은 그대가 자동차를 운전하 고 있기 때문에, 달구지에 사용되었던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그 기술은 달구지에 는 유용했지만, 자동차에는 적절하지 않다. 전통적 방법들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그 방법들이 너무나 오래 된 것들이고, 수많 은 사람들이 과거에 그 방법들을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들이 우리에게 는 부적절한 것이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붓다, 마하비라, 파탄잘리 혹은 크리슈 나(주10)에게는 부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방법들은 의미가 있었고, 도움이 됐다. 옛날 방법들이 지금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붓다가 그 방법들을 통해서 깨달음 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방법들은 매력을 갖는다. 전통주의자들은, '만약 붓다가 이 방 법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면, 왜 나는 못 하겠는가?'라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 는 지금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 전체적인 생각의 범위가 바뀌 어 버렸다. 모든 방법은 하나의 특정한 상황, 하나의 특정한 마음, 한 특정한 개인과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주10 크리슈나: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중요한 신으로 비쉬누 신의 화신. 바가바드 기 타에서 아르쥬나에게 가르침을 펴는 인물) 반대쪽 극단이 크리슈나무르티의 그것이다. 그는 모든 방법들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는 붓다를 거부해야만 한다. 그것은 같은 동전의 다른쪽 면이다. 만 약 그대가 방법들을 거부한다면, 그 때 그대는 붓다를 거부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붓다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 때 그대는 그의 방법들을 거부할 수 없다. 이것들은 극단의 것들이다. 극단들은 언제나 옳지 않다. 그대는 하나의 그릇됨을, 그것에 대해 하나의 극단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반대쪽 극단이 여전히 하나의 그릇됨으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제나 정확히 그 가 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는, 옛날 방법들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떤 방법도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방법들, 그 자체 가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심지어 무방법도 하나의 방법이다. 어떤 이에게는 오직 무방법만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나의 방법은 언제나, 한 특정한 개인에 관해서 진실인 것이다. 그것은 결 코 일반적이지 않다. 진실들이 일반화될 때, 그것은 거짓이 된다. 그래서 무언가가 사 용되거나 혹은 무엇가가 말해질 때에는, 항상 한 특정한 인간 존재 - 그의 관심, 그의 마음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그 - 에게 말이 건네진다. 이것 역시 지금은 어려워졌다. 옛날에는 언제나, 한 분의 선생님과 한 사람의 제자 사이에 일대일의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개인적인 관계, 하나의 개인적인 의사 소통이었다. 오늘날 그 관계는 언제나 비개인적이다. 군중에게 이야기해야만 하기 때문에, 일반 화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일반화된 진실들은 거짓이 된다. 어떤 것은 한 특정한 개인 에게만 의미가 있다. 나는 이러한 어려움을 매일 겪는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와서 무언가를 묻는다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에게 답을 한다. 다른 시간에 어떤 다른 사람이 내게 와서 무언가를 묻는다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답을 한다. 이 두 가지 답들은 심 지어는 모순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질문을 한 그 두 사람이 서로 모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그대를 돕고자 한다면, 나는 특정한 그대에게 말을 해 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특정한 개인 각자에게 말한다면, 나는 많은 모순되는 것 들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이야기를 해 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일관적일 수 있다. 그러 나 그 때 그 진실은 거짓이 된다. 왜냐하면 진실된 모든 말들은 한 특정한 개인에게 건네진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영원하다. 그것은 결코 새 것이 아니고, 결코 낡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그 실현이고, 목표이다. 그 수단은 언제나 어떤 특정한 사람, 어는 특정한 마음, 어떤 특정한 태도에 대해 적절하거나 혹은 부적절하다. 나는 상황을 보는 바로는, 현대인은 너무 많이 변해서 새로운 방법들, 새로운 기법 들을 필요로 한다. 혼돈적 방법들은 현대의 마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의 마음은, 그 자체가 혼돈적이기 때문이다. 현대인 속에 있는 이러한 혼돈, 이러한 반역성은, 사실은 다른 것들의 반역이다. 마음에 반대하고, 그것의 억압들에 반대하는 몸의 반역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요가의 용어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두뇌의 반대하는, 가슴 중심과 배꼽 중신의 반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중심들은 두뇌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두뇌가 인간 영혼의 전 영역을 독점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이상 용납될 수가 없다. 그것이 대학들이 반역의 중심이 되어 온 이유이다. 그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전체 사회가 하나의 유기적인 몸으로 생각되어진다면, 그 때 대학은 그 머리, 그 두뇌이다. 현대의 마음이 갖는 반역성 때문에, 그 마음은 느슨하고 혼돈적 방법들에 대해 너그 럽기 마련이다. 다이나믹 명상은 의식의 중심을 뇌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결코 반역적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반역 의 원인이 충족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편안해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명상이란 개인을 위한 하나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개인을 위한 하나의 변형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전체 사회의 변형, 현재 모습에서의 인간 존재의 변형을 위한 기초 작업을 제공할 수 있다. 인간을 자살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에너지를 변형시키든지, 둘 중에 한 가지를 해야만 할 것이다. @ff 5. 비의의 게임들 성장에 대한 하나의 장애 몸과 마음, 물질과 의식,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구분이 있습니까? 영적인 의식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첫 번째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은, 몸과 마음 사이에 구분은 전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 구분에서 시작한다면, 그대는 그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 이다. 거짓된 시작은 그 어느 곳으로도 인도할 수 없다. 그 어느 것도 그것에서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단계는 자체적으로, 진화하는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에서 나올 것이고, 세 번째는 두 번째에서 나오는 식으로 계속 된다. 거기에는 어떤 논리적인 연속성이 있다. 그래서 그대가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대는 어떤 면에서는 모든 것을 선택할 것이다. 첫 걸음이 마지막 걸음보다 더 중요하고, 시작이 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은 단지 하나의 결과, 하나의 성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시작에 대해서가 아니라, 항상 결과에 대해서 걱정한다. 항상 수단이 아니라, 결과에 신경을 쓴다. 결 과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해진 탓에 우리는 시앗의 자취, 시작의 자취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꿈을 꿀 수는 있지만, 결코 실재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어느 구도자에게든, 이런 구분된 개인의 개념, 이런 이중적인 존재의 개념 - 몸과 마음,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 은 잘못된 걸음이다. 존재는 구분되어 있지 않다. 모든 구분들은 단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마음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바로 그 방 식이 이중성을 만들어 낸다. 마음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바로 그 방식이 이중성을 만들 어 낸다. 구분하고 있는 그것은 바로, 마음이라는 감옥이다. 마음은 그 밖에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마음은 두 개의 모순을 '하나'로, 반대 극들을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어떤 억제하기 어려운 욕망, 일종의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로서는 빛과 어둠이 어떻 게 해서 하나인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비일관적이고, 역설적이다. 마음은 반대되는 것들 - 신과 악마,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 을 만들어 내야만 한 다. 어떻게 그대가 사랑과 증오를 하나의 에너지로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마 음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구분한다. 그러면 어려움은 끝난다. 증오는 사랑의 반대이고, 사랑은 증오의 반대이다. 이제 그대는 일관적일 수 있고, 마음은 편 안할 수 있다. 따라서 구분이란 마음의 편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의 진리가 아니 고, 하나의 실제가 아닌 것이다. 그대 자신을 몸과 그대, 둘로 구분하는 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그대가 구분하는 순 간, 그대는 잘못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대가 다시 돌아와서 그 첫 걸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대는 많은 생동안 방황할 수도 있으며, 거기에서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 다. 왜냐하면 잘못된 한 걸음이 더욱더 잘못된 걸음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올바른 시작을 하라. 그대와 그대의 몸이 둘이 아님을 기억하다. 그 둘이라는 것은 일종의 편의일 뿐이다. 존재에 관하나 한, 하나로 충분하다. 그대 자신을 둘로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실제로 그대는 항상 그대가 하나 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 다. 만약 그대의 몸이 다치면, 바로 그 순간속에서 그대는 결코 그대가 둘이라고 느끼 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와 몸이 하나라고 느낀다. 나중에서야, 그대가 그것에 대해 생 각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현재순간 속에 구분이란 없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의 가슴에 단검을 들이댄다고 하자. 그 순간 속에 구분이란 없다. 그대는 그 사람이 그대의 몸을 죽일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 사람이 그대를 죽일 것인지를 생각한다. 나중에 서야, 그 일이 기억의 부분이 될 때, 그대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대는 사태를 바라볼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자체 에서는 그대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대가 느낄 때면 언제나, 그대는 일월성을 느낀다. 그대가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 대는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적대감이 만들어진다. 만약 그대가 몸이 아니라면, 떤 투쟁이 전개된다.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누가 주인인가? 몸인가 아니면 나인가?' 그러면 에고가 상처 입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대는 몸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그리 고 그대가 몸을 억압할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혼란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자멸적이 된다. 비록 그대가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대가 실제로 그대의 몸을 억압할 수는 없다. 어 떻게 내가 나의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을 억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둘인 것처럼 보 이지만, 같은 에너지가 양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만약 그들이 정말 둘이라면, 그 때 억압은 가능하다. 그리고 억압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파괴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같은 에너지가 양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면, 어떻게 내가 나의 왼손을 억압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단지 그런 척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나의 오른손으로 하여금 나의 왼손이 밑에 있도록 만들고는 나의 오른손이 이긴 척할 수 있지만, 그 다음 순간 나는 나의 왼손을 들어올릴 수 있 있으며, 아무것도 그것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게임이다. 그것은 계속 이어진다. 때로는 그대가 성을 누를 수 있고, 또 어 떤 때는 성욕이 그대를 누를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악순환이 된다. 그대는 결코 성 을 억압할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을 변형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억압할 수는 없다. 그대와 그대의 몸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억압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만약 그 대가 변형을 추구한다면,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변형은 전체를 전체로 이해하는 것에서 찾아올 수 있다. 억압은 전체를 구분된 부분들로 잘못 이해하는 것에 서 찾아온다. 만약 내가 양 손이 내 것임을 안다면, 그 중 하나를 억압하려고 노력하 는 것은 어리석다. 그 투쟁은 어리석어진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억압할 것 인가? 누가 누구와 싸울 것인가? 만약 그대가 그대의 몸에 대해 편안하게 느낄 수 있 다면, 그대는 올바른 걸음이 될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그러면 구분, 억압은 찾아 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과 그대의 몸을 구분하면, 많은 것들이 자동적으로 뒤따라올 것이다. 그대가 몸을 억압하면 할수록, 그대는 점점 더 좌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 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휴전에는 이를 수 있지만, 그리고 나면 또 다시 그대가 패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좌절하면 할수록, 그대와 그대 몸 사이의 구분 은 더욱 커지고, 틈은 더욱 넓어진다. 그대는 점점 더 몸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기 시 작한다. 그대는 몸을 억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 자, 이제 좀 더 힘을 내서 싸워야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모든 것이 자신만의 논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만약 그 대가 그릇된 전제에서 시작하면, 끝까지 계속 갈 수는 있지만, 결코 어느 곳에도 도달 하지 못한다. 모든 투쟁은 그대를 또 다른 투쟁으로 이끌고 간다. 마음은, '몸은 힘이 센데 나는 약하다. 몸을 좀 더 억제해야만 한다.'라고,아니면 '이제 내 몸을 약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라고 느낀다. 모든 금욕은 단지 몸을 약하게 만들려는 논력일 뿐이 다. 그러나 그대가 몸을 약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대 자신이 점점 더 약해진다. 그 대와 그대 몸 사이에는 언제나, 똑같은 상대적인 힘이 유지된다. 그대가 약해지는 순간, 그대는 더욱더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제 그 대가 더 쉽게 패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대가 점점 약해질수록, 몸의 끌어당기는 힘을 극복할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에 그 대는 몸과 더 많이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구분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의식과 물질, 이런 구분은 단지 언어상의 오류일 뿐 이다. 말도 안 되는 모든 것들이 언어에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만약 그대가 뭐라고 말하면, 나는 '예' 혹은 '아니오'를 말해야 한다. 우리는 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는 언제나 절대적이고, '아니오' 역시 절대적이다. 어떤 언어에도 중립적인 단어는 없다. 그래서 드 보노(주1)는 '포(po)신 조어를 만들어 냈다.(주1 드 보노:이탈리아의 장군. 파시즘으로 전향해서 정당의 창당 자인 무솔리니를 도와 권력을 장악하도록 도와 주었다. 파시즘 체제 아래에서 단어의 신비주의적인 힘을 신뢰하는 연금술 운동이 시 부분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는, 포'가 중립젖ㄱ인 단어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나는 너의 견해를 들었다. 그것에 대해 나는 '예'도 '아니오'도 말하지 않는다." '포'를 사용하라. 그러면 가능성 전체가 변한다. '포'는 드 보노가 가설이나 가능성 혹은 시에서 따온 인위적인 단어이다. 그것은 그 안에 어떤 평가도, 어떤 비난도, 어 떤 찬양도, 어떤 약속도, 찬성도 반대도 없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 를 모욕하면, 그저 '포'락 말하라. 그리고 나서 그대 안에서 그 차이를 느껴 보라. 단 하나의 단어가 너무도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대가 '포'라고 말할 때, 그 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다. 이제 이것이 나에 대한 당신의 태도라는 것을 알겠다. 당신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나는 평 가를 하지는 않겠다." 언어는 구분을 만들어 낸다. 심지어 위대한 사상가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언어 적으로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만약 그대가 그들에게, "마음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다면, 그들은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무엇이 물질인가?" 하고 묻는다 면, 그들은 "그것은 마음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물질도 마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물질을 마음에 의해 정의하고, 마음을 물질에 의해 정의한다. 그 뿌리는 알려 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 그것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더 위안이 된다. 우리가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라고 말할 대, 우리는 편안하다고 느낀다. 마치 무 언가가 정의된 것처럼 아무것도 정의된 것은 없다. 마음과 물질 두 가지 모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은 에고를 위축하는 것이다. 구분하 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무지한 것에 대해서 아주 정통한 사람이 되었 다고 느낀다. 철학의 99퍼센트가 언어에 의해 만들어져 있다. 다른 종류의 언어들은 다른 종류의 철학들을 만든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언어를 바꾸면, 철학이 바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이 번역 가능하지 않은 이유이다. 과학은 언제나 번역이 가능하지만, 철학은 그렇 지 않다. 그리고 시가 훨씬 더 변역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는 언어의 독특한 신선 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언어를 바꾸는 순간, 그 독특한 맛이 상실된다. 그 맛이 상실된다. 그 맛은 단어들의 독특한 배열, 단어들의 독특한 사용에 달려 있 다. 그것들은 번역될 수 없다. 따라서 첫 번째로 기억할 것은 분리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그대가 올바르게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이다.'라는 개념에서 시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다시 그대는 하나의 개념에서 시 작하는 것이다. 그저 무지 속에서, 겸허한 무지 속에서 시작하라. '나는 모른다.'라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시작하라. 그대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해 서 "나는 하나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 술 역시 구분을 전제하고 있다. 그대는 '하나' 하고 말하지만, 그대는 '둘' 이라고 느 끼고 있다. 둘이라는 느낌과는 반대로, 그대는 일원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또 다시 하나의 미묘한 억압인 것이다. 따라서 '아드바이트(advait)', 비이중성의 철학에서 시작하지 말라. 개념들에서가 아니라, 존재에서 시작하다. 깊은, 개념화되지 않은 의식에서 시작하라. 그것이 내가 의미하는 올바른 시작이다. 존재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라. '하나' 혹은 '둘' 을 말 하지 말라. '이것' 혹은 '거짓' 을 말하지 말라. 존재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 음이 거기 없을 때, 개념들이 거기 없을 때, 철학들과 교리들이 거기 없을때 실제로, 언어가 거기 없을 때에만 그대는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어가 없을 때 그대 는 존재 속에 있다. 언어가 있을 때 그대는 마음 속에 있다.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다른 마음이 가질 것이다. 너무도 많은 언어들 이 있다. 언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말이다. 내 옆에 공산주의 자가 앉아 있다면, 그는 전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언어 속에 살고 있다. 바로 내 맞은편에, 카르마(karma)를 믿는 어떤 사람이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공산주 의자와 이 사람은 서로 만날 수 없다.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쩌면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을지 도 모르지만, 여전히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서로 다른 우주 속에 살고 있다. 언어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인 우주 속에 살고 있다. 언어가 없다면, 그대들 모두는 그 공통 언어 즉, 존재에 속한다. 이것이 내가 의미하는 '명상'이다. 개인적인 언어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서 비언어적인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비언어적이고, 자연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전혀 필 요하지 않다. 만약 그대가 성에서 언어를 사용하면 그대는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에 반대할 것이다. 왜 냐하면 성에서는 그대가 절대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지 말라. 존재 그 자체 속으로 깊이 움직여가라. 무엇이든 지 사용하라. 그러나 비언어적 수준, 의식의 수준으로 다시, 또 다시 돌아오라. 나무 와 더불어, 새들과 더불어, 하늘, 태양, 구름들, 비와 더불어 모든 곳에 있는 비언어 적인 존재와 더불어 살라. 그리고 그대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대는 그 속으로 더욱 더 깊이 들어가고, 이중성(twoness)에 반대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원성(oneness) '을 더욱더 느낄 것이다. 그 일원성은 단지 둘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대륙과, 대양의 수면 아래에서 대륙을 연결해 주는 섬과의 일원성이다. 그 둘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 대가 그들을 둘로 보는 것은, 그대가 단지 그 표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언어가 그 표면이다.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언어의 모든 유형들은 표면 위에 있 다. 그대가 비언어적 존재와 더불어 살 때, 그대는 수학적인 일원성이 아니라 존재적 인 일원성인, 하나의 미묘한 일원성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구분되어 있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같은 말장난을 하지 말라. 그것들을 떨쳐 버려라! 그것들은 재미있지만, 쓸모가 없다. 그것들은 어느 곳에 도 이르지 못한다. 비록 그대가 그 안에서 어떤 진리를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단 지 말로 된 진리일 뿐이다. 그것들로부터 그대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수천 년 동안, 그대의 마음은 이 게임을 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치하다. 어떤 종류의 말장난이든 지 유치한 것이다. 아무리 심각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대 는 그대의 입장을, 많은 의미들을 뒷받침해 주는 여러 가지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겠 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게임이다. 일상적인 일에 관한 한, 언어는 유용하다. 그러 나 그대가 언어와 더불어 더 깊은 영역들 속으로 움직여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영역들은 비언어적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저 하나의 게임이다. 만약 그대가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이 것 사이에서 어떤 연관성을 발견한다면, 그 이유는 그대가 어떤 중요한 비밀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 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중요해 보이는 많은 연관성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들 은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 그것들을 무의식 적으로 창조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디서든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들은 모두 비슷한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서, 'mother어머니'에 대한 단어는 모든 언어에서 우연히도 비슷한다. 그것에 어떤 의미심장한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 라, '마ma' 라는 소리가 모든 어린아이에 의해서 가장 쉽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이 기 때문이다. 일단 소리가 거기 존재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다른 단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이다. 어린아이는 그저 '마' 라는 소리를 낼 뿐인데,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단어로 알아듣는다. 때로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인 한 가지 유사성이 발견될 수도 있다. 'God신' 란 단어는 'dog개' 라는 단어를 거꾸로 배열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우연의 일치 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의미 있는 것임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개 는 뭔가 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는 'God신' 이란 단어를 거꾸로 배열한 것 이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해석이다. 어쩌면, 'God' 에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가 ' dog' 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이 이름을 개들에게 주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둘은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그대에게는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대는 어떤 것에서든 유사성들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대는 무한한 유사성들 로, 단어들로 된 하나의 광대한 대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monkey(원 숭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대는 이 단어를 가지고 놀면서 어떤 연관성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다아윈 이전에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인 간이 원숭이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단어 게임들을 할 수 있는 것 이다. 우리는 'monkey(원숭이)'를 'man- key(인간-열쇠)' 즉, 인간에 대한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다른 사람들은 이 두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연결해 왔다. 그들은 원숭이와 인간은 마음 때문에 관련이 있다고 즉, 인간이 'monkeyish(원숭이 같은)' 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연관성을 만들어 내서는 그것을 즐길 수 있고, 그것을 좋은 게임이 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게임이다. 그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무엇이 실재하는 것이고 무엇이 단지 하나의 게임인지를 도중에 잊어버리게 되어 미쳐 버릴것이다. 단어들을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그대는 더 많은 연관성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 리고 나서 그저 책략과 술책으로, 그대는 그서에서부터 철학 전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심지어 람다스(주2)조차 이 일을 아주 많이 해 왔 다(주2 람 다스: 4대 시크교의 구루). 그는 이런 식으로 'monkey'라는 단어를 가지고 놀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dog'와 'God'를 비교했다. 그것은 괜찮다.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만약 그대가 하나의 게임을 하면서 그 것을 즐기고 있다면, 즐겨라-그러나 결코 그것에 속지 말라. 그런데 그대가 실제로 속 을 수 있다. 만약 그 게임이 너무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그대는 그것을 계속하게 되 고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어들 사이에 너무도 많은 유사성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다른 언어들이 나오게 된 근원적인 언어가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들이 있 는 것은 어떤 공통적인 언어 때문이 아니다. 유사성들이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유사성들 때문이다. 전세계에 걸쳐서, 좌절한 사람들은 같은 소리들을 낸다, 사 랑 속에 있는 사람들은 같은 소리를 낸다. 인간들 사이의 기본적인 유사성이 우리들의 단어들에도 어떤 유사성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말라. 왜냐 하면 그렇게 되면 그 속에서 그대 자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대가 그 속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근원들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하고 무관하 다. 영적인 구도자에게 그것은 핵심을 벗어난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란, 무언가를 조사하러 갈 때, 우리가 한 가지 선입견에서 시 작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만약 내가 회교도들이 나쁘다고 느낀다면, 그 때 나는 내 주장을 뒷받침하고, 궁극적으로는 내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할 어떤 것을 끊임없이 찾게 된다. 그리고 나서 내가 회교도를 만날 때마다, 단점들을 찾아 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무도 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내가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 다. 누군가가 그 같은 사람에게 한 가지 반대되는 개념을 가지고 올 수 있다. 만약 회교 도라는 의미가 그 사람한테는 좋은사람이라면, 좋다. 증거가 동일한 이 회교도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좋고 나쁜 것은 반대되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공존한다. 인간은 어느 한쪽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대가 그 사람한테서 무엇이든 찾으려고만 한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들에서 그는 좋을 것이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는 나쁠 것이다. 그대가 그를 판단할 때, 그것은 상황 그 자체보다는 그 대의 정의에 더 많이 좌우된다. 그것은 그대가 어떻게 이것 혹은 저것을 보느냐에 따 라 좌우된다. 한 예로서, 만약 그대가 흡연을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그때 그것은 나쁜 것이 된다. 만약 그대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 된다. 만약 우리가 이 곳에 앉아 있는데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어떤 사람 이 잠을 자고 있다면, 만약 그대가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그 러나 실제로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어떤 다른 태도를 가진 누군가는, 이 똑같은 일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만약 누군가가 친구들 사이에 누워서 잠이 든다면, 그가 그렇게 할 정도의 자유를 느낀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의 태도에 달려 있다. 나는 A.S. 닐(A, S, Neill)이 그의 학교, 서머힐(Summerhill)에서 시도했던 실험들 중 몇 가지에 대해 읽고 있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자유인, 새로운 유형의 학교를 실험 했다. 그가 교장이었지만, 규율은 없었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아파서 교장인 그가 아이들에게, 그 날 밤에는 선생님에게 방해가 되는 어떤 말썽도 일으키지 말라고 말했 다. 그러나 그 날 밤, 학생들은 아픈 선생님의 바로 옆 방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닐이 2 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아이들은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자 조용해졌고, 공부하 기 시작했다. 닐은 창문을 통해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잠잘 준비를 하는 척하고 있 고 아이 하나가 고개를 들어 창가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소 리쳤다. (얘들아, 닐밖에 아무도 없어, 자, 그만둘 필요가 없어. 닐뿐이야.) 그래서 아이들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닐은 그 학교 교장이었다. 닐은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걱정 할 것 없어, 닐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너무 행복했다.) 그는 그것에 대해 기분 좋아했지만, 다른 교장 선생님이라면 기분좋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교장 선 생님들은 아무도 없다! 역사에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대에게, 그대가 일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닐은 그것 을 사랑으로 느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가 내린 정의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찾 고 있는 것을 찾는다. 만약 그대가 진지하게 찾는다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찾 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찾는 데 고정되어 버린 마음으로 시작하지 말라. 그저 시작하라! 탐구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저 찾아나서는 것이다. 미리 생각해 둔 관념들 없이, 찾으려고 결정한 어떤 것도 없이, 그저 찾아나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참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그대가 말하는 순간 그대가 나뉘어 진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 니고, 그들이 조금일지라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순간, 혼란 이 거기에 존재한다. 그대가 무언가를 입 밖에 내는 순간, 그대는 나뉘어진다. 오직 침묵만이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참는 데 그들의 생을 허비해 왔다. 무언가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면, 그대는 아주 쉽게 그대의 삶을 허비할 수 있다. 단어들을 가지고 노는 일은 에고 충족적이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의 삶을 그 일을 하는 데 허비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흥미롭다고 - 좋은 게임이고, 재미있다고 - 하더라도 영적인 구도자에게 는 쓸모 없는 것이다. 영적 탐구는 하나의 게임이 아니다. 같은 게임을 숫자들을 가지고도 할 수 있다. 그대는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다. 그대 는 왜 1주일이 7일인지, 7개의 음표, 7개의 행성(주3), 7개의 신체가 왜 있는지를 알 아 낼 수 있다(주3 7개의 행성; 고대 점성학에서 말하는 일곱 개의 신성한 행성). 그 리고 나서 그대는 그것을 중심으로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이런 철학은 단지 그대의 상상력의 산물일 따름이다. 때때로 일들은 아주 순수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 예로, 계산이 시작된 방식을 들 수 있다. 아홉 개의 아라비아 숫자가 있는 이유는 단지 인간의 손가락이 열 개이기 때 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최초의 계산은 손가락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10이 한계로 선 택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왜냐 하면 그 다음은 계속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아홉 개의 아라비아 숫자가 있는 것이다. 일단 아홉으로 고정이 되고 나자, 어떻게 아홉 이상 혹은 아홉 이하로 전개해 나갈 수 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하가 사용될 수 있다. 아홉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습관일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아라비아 숫자 - 1,2 그리고 3-만을 사용했다. 아홉 개만큼이나 세 개의 아라비아 숫자로도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두 개의 아라비아숫자 - 1과2 -만을 사용했다. 그러면 계산은 이 렇게 된다. - 1,2,10,11... 우리들에게는, 거기에 여덟 개의 공백이 있는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그 공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일 뿐 이다. 우리는 3은 반드시 2 다음에 와야 한다는 하나의 고정된 태도를 갖고 있다. (반드 시)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혼돈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2 더하기 2는 언제 나 4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내재적인 필연성을 없다. 만약 그대가 두 개 의 아라비아 숫자 체계를 사용한다면, 2 더하기 2는 11이 된다. 그러나 그 때 (11)과 (4)는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의자 두 개와 의자 두 개를 합하면 의자가 네 개라 고 말할 수도 있고, 혹은 의자가 열한 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체 계를 따르기로 결정하든지, 존재적으로는, 의자의 숫자는 똑같은 채로 남아 있다. 그대는 모든 것에 대한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 왜 1주일은 7일인지, 여성의 월 경 주기는 왜 28일인지, 왜 음계에는 7개의 음이 있는지, 왜 일곱 개의 행성이 있는 지, 그리고 이들 중 몇몇은 그 이면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고 모른다. 예를 들면, (멘스)라는 단어는 (한 달)을 의미한다. 여성의 월경 주기에 따라 남성 이 처음으로 한 달을 계산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왜냐 하면 자연스러운 여성 주기는 고정된 시간 주기 즉, 28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달이 지나갔다는 것 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대의 아내가 월경을 시작할 때, 한 달이 지나간 것이다. 혹은 그대는 달에 따라 한 달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우리가 (한 달)이라 고 부르는 시간 주기는 일로 바뀐다. 달은 15일 동안 점점 커지고, 15일 동안은 작아 진다. 따라서 30일이면 달은 자신의 완전한 주기를 거친 것이다. 우리는 한 달이라는 것을 달에 고정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한 달이 30일이라고 말한 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한 달을 금성에 의해 혹은 월경 주기에 의해 결정한다면, 그 것은 28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28일 주기로 구분하고, 7일로 이루어진 1주일 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함으로써 그 불일치를 해소할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일단 이러 한 구분이 마음에 고정되면 다른 것들도 자동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그것이 내가 의미 하고자 하는 바이다 -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고 있다. 일단 그대가 7일로 이루어진 1주일을 갖게 되면, 그대는 7로 된 다른 유형들을 발견할 수 있고, 7은 하나 의 의미심장한 숫자, 하나의 마법의 숫자가 된다. 그렇지 않다. 삶 전체가 마법적이든 가, 혹은 아무것도 마법적이지 않든가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상상력을 위한 하나의 게임이 된다. 그대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놀 수 있고, 거기에는 많은 우연의 일치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너무도 넓고, 너무도 무한하고, 너무도 많은 일들이 매초마다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우연의 일치들이 모두 더해지기 시작하 고, 마침내 그대는 너무도 긴 목록을 만들어 내게 되어 그것으로 의해 납득을 당한다. 그 때 그대는 의아해한다. (왜 항상 7일까? 거기엔 틀림없이 어떤 신비가 있다.)그 신 비라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 그 우연의 일치들을 보고, 그것들을 하나의 논리적인 방식 으로 해석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구제프(주4)는, 인간이 달을 위한 하나의 음식이라고 말했다.(주4 구제프;1872~194 9. 그리스계 아르메니아 사람으로 동양의 여러 가지 명상 비법을 배워 서양인에게 알 맞게 개조 유럽에 소개했다) 이것은 완벽하게 논리적이다. 그것이 논리의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삶 속의 모든 것은 어떤 다른 것에게 좋은 것이다. 그래서 구제프가 문득 아주 창의적인 생각을 해낸 것이다. - 인간 역시 어떤 것을 위한 하나의 음식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이 무엇을 위한 음식인가?) 하는 것이 물어봐야 하는 한 가지 논리적인 질문이 된다. 태양은 인간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왜냐 하면 태양 광선들은 다른 것들, 식 물들을 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간은 다른 종들보다 낮은 사다리의 칸 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 - 인간 자신에 따르면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태양을 위한 음식이 될 수는 없 다. 달은 어떤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구제프가 말한 그런 방식 은 아니다. 달은 여성의 월경 주기와 미묘하게 관련되어 있다. 달은 조수,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과 관련되어 있다. 보름날에 더 많은 사람들이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달 을 뜻하는 (lunar), 이것에서 (lunatic(미치광이))이라는 단어가 유래한 것이다. 달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에 최면을 걸어 왔다. 구제프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달 을 위한 음식이어야만 한다. 왜냐 하면 음식은 자신을 먹는 자에 의해 쉽게 최면에 걸 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 특히 뱀들은 처음에 자신의 먹이들에게 최면을 건다. 그들은 잡아먹힐 수 있게 마비된다. 이것이 구제프가 가지고 논, 또 하나의 우연의 일 치이다. 시인들, 미치광이들, 탐미주의자들, 사상가들은 모두 달에 의한 최면에 걸려 있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의 음식이어야만 한다. 그대는 이런 관념을 가지고 놀 수 있다. 구제프 같이 창의력이 풍부한 마음을 가지 면, 일들은 계속 논리적인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구제프는 그것들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들인지에 상관 없이, 그것들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의미 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는 천재였다. 그는 이러한 이론을 확실한 것으로 가정했고, 그리고 나자 그의 상상력은 많은 연관성들, 많은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체계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논점을 왜곡하고, 입증하는데 논리를 사용 한다. 체계를 만들어 내는 사람 모두가 말이다! 진리와 함께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은 체계들을 만들 수 없다. 예를 들어서, 나는 결코 하나의 체계도 만들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내게 있어서는, 바로 그 노력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 속에서 단편적일 수밖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틈들이, 다리가 놓여질 수 없는 것들 이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있으며, 그대는 한 지점에서 그 다음 지점으로 도약해야만 할 것이다. 체계는 아주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왜냐 하면 그 틈들이 상상력에 의해 메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체가 아주 깨끗하고, 말끔하고, 논리적이 된다. 그러나 그것 이 논리적이 됨에 따라,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서 점점 더 멀리 움직인다. 그대가 알면 알수록, 그대는 메워질 수 없는 틈들이 있다는 것을 더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존재는 결코 일관적일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의 체계는 일관적이 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존재 그 자체는 결코 일관적이지 않다. 따라서 어떤 체계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체계들을 만들어 내 온 곳이라면 인도, 그리스, 중국, 그 어디서든지, 인간은 개인들을 만들어 냈다. 만약 그대가 첫 걸음을 진실로서 받아 들이면, 그 때 체계 전체가 완벽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 첫 걸음을 받 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전체 구조물이 내려앉는다. 그 전체 구조물은 하나의 상상 속 에서의 연습이다. 그것은 좋고, 시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일단 하나의 체계가, 자 신이 각색한 존재를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이 된다. 진 리에 대한 이러한 체계들은 시들이다. 그것들은 아름답지만, 단지 시에 불과하다. 많 은 틈들이 상상력에 의해 메워져 왔다. 구제프는 특정한 진리의 단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이론을 한두 가 지 단편들에 기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그는 많은 단편들을 끌어모았다. 그런 후에 그는 이 단편들을 일관성 있게 하나의 체계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는 틈 들을 메우기 시작한 거시다. 그러나 그 틈들이 메워지면 질수록, 실재는 점점 더 상실 되어 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체 체계가 틈을 메우고 있는 그것들 때문에 무너진 다. 한 선생의 인격에 매혹당한 사람은 그의 이론 속의 틈들을 알아차리게 되지 않을 수 도 있지만, 반면에 매혹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진리의 단편들이 아니라 오직 그 틈들만 을 볼 것이다.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붓다는 하나의 붓다, 하나의 깨달은 자이 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붓다는 혼란을 만들어 낸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오직 그 틈들만을 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그 모든 틈들을 한데 결합한다면, 그것은 파 괴적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진리의 모든 단편들을 한데 결합한다면, 그것은 그 대의 변형을 위한 하나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진리는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너무도 무한해서, 그대는 유한한 마음을 가지 고는 전체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전체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고집한 다면,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낸다면, 그대는 결코 그대의 마음을 잃어버 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때 그대의 마음이 그 틈들을 메우기 때문이다. 그 체 계는 말끔하고 깨끗해진다. 그것은 인상적이고, 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결코 그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힘, 그대를 변형시켜 줄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힘은 단편적인 일별들을 통해서만 찾아올 수 있다. 마음은 너무도 많은 체계들, 너무도 많은 방법들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만약 내 가 지금 영위하고 있는 삶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뭔가 더 깉은 것이 발견될 텐데."라 고 생각한다. 이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계속, 티벳에 있는 어딘가에서, 메루 프라바트에 있는 어딘가에서, 그 어딘가에서 (참된 어떤 것)이 틀림없이 일어나 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가슴은 (어떻게 거기에 가지? 거기서 일하고 있는 스승들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을까?)하는 갈들 속에 있다. 마음은 언제나, 어떤 다른 곳에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지, 결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무언가를 찾지 않는다. 마음은 한 번도 여기에 있지 않다. 그리고 각각의 이론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 (메루산(주 5)에서, 바로 지금 참된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주5 메루산: 힌두교 신화에 등 장하는 황금산 우주의 중심에 서 있으며 세상의 축이라고 전해진다) 그 곳에 가서 그 곳의 스승들과 접촉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변형될 것입니다. ) 그러한 것들에 대해 희생자가 되지 말라. 비록 그들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다 하더 라도, 그러한 것에 금방 넘어가지 말라. 누군가 그대에게 진정한 어떤 것을 이야기해 줄 수는 있지만, 그대가 거기에 끌리는 그 이유가 잘못되었다. 실재하는 것은 여기 그 리고 지금이고, 그것은 지금 그대와 함께 있다. 그저 그대 자신을 대상으로 작업하라. 심지어 메루산의 봉우리들을 전부 갔다 온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야만 한다. 궁극적으로는, 메루산이 여기라는 것, 티벳이 여기라는 것을 발견한다. - (여기, 내안 에.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온갖 곳을 헤매고 또 헤매고 있었다.) 그 체계가 이성적이면 이성적일수록, 그것은 더 많이 산산조각이 나므로, 비이성적 인 어떤 것이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비이성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순 간, 마음은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체계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그 저 지금 그리고 여기로 뛰어들어라. @ff 6 꿈의 심리학 '꿈'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일곱 개의 신체가 있다. 육체적인 것, 에테르적인 것, 아스트랄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우주적 것 그리고 열반적인 것이다. 각각의 신체에는 나름대 로의 꿈의 유형이 있다. 육체(physical body) 는 서양 심리학에서 의식으로 알려져 있 고, 에테르체(etheric body) 는 무의식으로, 아스트랄체(astral body) 는 집단 무의식 으로 알려져 있다. 육체는 그 자신만의 꿈들을 만들어 낸다. 만약 당신의 위장에 탈이 나면, 특정한 꿈 의 유형이 생성된다. 만약 그대의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열이 나게 되면, 육체는 그 자신만의 꿈의 유형을 만들어 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꿈은 어떤 불-편함(dis-e ase) 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불쾌감, 육체적인 불-편함이 고유한 꿈들의 영역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육체적인 꿈은 심지어 외부에서도 자극될 수 있다. 그대는 잠을 자고 있다. 만약 젖은 천 하나가 그대의 다리 주위에 놓여 있다면, 그대는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강을 건너고 있는 꿈을 꿀지도 모른다. 만약 베개가 그대의 가슴 위에 놓여 있 다면, 그대는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누군가가 그대 위에 앉아 있는, 혹은 하나의 돌이 그대 위로 떨어지는 꿈을 꿀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육체를 통해서 찾아 오는 꿈들이다. 두 번째 신체, 에테르체는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꿈을 꾼다. 이 에테르적인 꿈들이 서양 심리학에서 많은 혼란을 초래해 왔다. 프로이드는 에테르적인 꿈들을 업압된 욕 망들에서 기인한 꿈들로 오해했다. 억압된 욕망들로 인한 꿈들이 있긴 하지만, 이 꿈 들은 첫번째 신체, 육체적인 것에 속한다. 만약 그대가 육체적인 욕망들을 억압해 왔 다면-그러면 예를 들어서, 만약 그대가 단식을 해 왔다면-그러면 그대가 아침 식사에 관해서 꿈을 꾸게 될 모든 가능성이 있다. 혹은 만약 그대가 성을 억압해 왔다면, 그 때 그대가 성적인 환상들을 꿈꾸게 될 모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꿈들은 첫번 째 신체에 속한다. 에테르체는 심리학적인 연구 범위 밖에 있다. 그래서 그것이 꾸는 꿈들은 첫번째 신체, 육체적인 것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혼란이 만들어진다. 에테르체는 꿈들 속을 여행할 수 있다. 에테르체가 그대의 몸을 떠날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있다. 그대가 그것을 기억할 때는 하나의 꿈으로 기억되지만, 그 꿈은 육체 의 꿈들과 같은 의미의 꿈이 아니다. 에테르체는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 그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대의 육체는 거기 있을 것이지만, 그대의 에테르체는 밖으로 나가서 공간 속을 여행한다. 그것을 한정하는 공간은 없다. 그것에 거리의 문제는 없다. 이것 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에테르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무 의식의 영역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나서 생리적으로 꿈꾸는 것은 '의시적'이라 부르고, 에테르적으로 꿈꾸는 것은 '무의식적' 이라 부른다. 그것은 무의식적이지 않다. 그것은 생리적으로 꿈꾸는 것만큼이나 의식적이다. 그러나 다른 수준에서 의식적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 의 에테르체를 의식하게 되면, 그 영역과 관련해서 꿈꾸는 것은 의식적이 된다. 생리적인 꿈들이 외부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에테르적인 꿈들 또한 만들어질 수 있고, 자극될 수 있다. 만트라는 에테르적인 영상들, 에테르적인 꿈들이 남들어질 수 있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의 특정한 만트라나 하나의 특정한 나다 (nada) 즉, 에테르의 중심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하나의 특정한 단어가 에테르적인 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소리는 그것들 중의 하나이다. 수피들은 에테르적인 영상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향수를 사용해 왔다. 모하메드(M ohammed) 자신이 향수를 대단히 좋아했다. 하나의 특정한 향수가 하나의 특정한 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색깔들 역시 도움이 될 수 있다. 리드비트(주1)는 한때 청색, 청색 일색이면서도 특 정한 음영을 띤 에테르적인 꿈을 꾸었다. 그는 전 세계의 시장을 뒤져서 그 특정한 청 색을 찾기 시작했다. 몇 년을 찾은 끝에, 그것은 마침내 이탈이아의 한 상점에서 발견 되었다- 그것은 그 특정한 음영을 띤 벨벳 천이었다. 그것은 물론 그 이후에 다른 사 람들에게서 에테르적인 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사용되었다. (주1 리드비터 1847-1934: 한때 신지학회의 지도자였으며,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굴한 인물) 그래서 누군가가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색갈들을 보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향수와 소리와 음악을 체험할 때, 이것들 역시 꿈들, 에테르적인 꿈들이다. 소위 말하는 영적 인 영상이라는 것들은 에테르체에 속하는 것들이고, 에테르적인 꿈들이다. 구루들이 자신의 제자들 앞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다만 에테르적인 여행, 에테르적인 꿈 을 꾸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의 한 가지 수준에 불과한 생리적인 것에 서만 마음을 찾아 왔기 때문에, 이 꿈들은 생리적인 언어로 해석되거나, 버려지고 무 시되어 왔다. 혹은, 무의식속에 집어넣는다. 무엇이든 그것이 무의식의 부분이라고 말한다는 것 은, 실제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 하나의 속임수이다. 아무것도 무의식적이지 않지만, 보 다 더 깊은 수준에서 의식적인 것은 모두 그 이전 단계에서 보면 전부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육체에게 있어 에테르적인 것은 무의식적이고, 에테르적인 것에서 있어 아스트 랄적인 것은 무의식적이고, 아스트랄적인 것에게 있어 정신적인 것은 무의식적이다. ' 의식적; 이란 알려져 있는 그것을 의미한다. '무의식적' 이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것, 미지를 의미한다. 아스트랄적인 꿈들도 있다. 아스트랄적인 꿈 속에서 그대는 그대의 탄생 이전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꿈을 꾸는 것의 세 번째 차원이다. 가끔씩 하나의 일반적인 꿈 속 에, 에테르적인 것의 일부 혹은 아스트랄적인 것의 일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 꿈은 하나의 뒤범벅 상태, 하나의 혼란이 된다.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대 의 일곱 가지 신체들은 동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한 영역의 어떤 것이 다른 영역 속을 통과 할 수도 있고, 그것을 꿰뚫을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일반적인 꿈들에서 조차도 에테르적인 것 혹은 아스트랄적인 것의 단편들이 있을 수 있다. 첫번째 신체, 육체적인 것에서 그대는 시간, 공간, 그 어느 쪽도 여행할수 없다. 그 대는 신체적인 상태와 존재하는 특정한 시간- 말하자면, 밤10시- 에 한정되어 있다. 그대의 육체는, 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꿈을 꿀 수 있지만, 그 너머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에테르체에서 그대는 공간 속을 여행할 수 있지만,시간 속에서는 그 럴 수가 없다. 그대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시간은 아직도 밤 10시이다. 아스트랄 의 영역에서, 세 번째 신체에서 그대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여행 할 수 있다. 아 스트랄체는 시간의 장벽을 넘나들 수 있다. 그러나 오직 과거로만 향할 뿐, 미래로 향 하지는 않는다. 아스트랄적인 마음은 과거의 무한한 연속들 전체 속으로, 아메바에서 안간까지 들어갈 수 있다. 융 심리학에서, 아스트랄적인 마음은 집단 무의식이라고 불리워져 왔다. 그것은 그 대 개인의, 탄생의 역사이다. 때로는 그것이 일반적인 꿈들 속으로 뚫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건강한 상태들에서보다는 병적인 상태들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있어서, 처음의 세가지 신체가 그 일상적인 구분을 잃어버린다. 정신 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이전 탄생들에 대해서 꿈을 꿀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그를 믿 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신도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단지 하나의 꿈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수준에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스트랄적인 꿈을 꾸는 것이다. 그리고 아스트랄적인 꿈을 꾼다는 것은 많은 의미, 많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신체는 오직 과거에 대해서만 꿈을 꿀 수 있을 뿐, 장차 이어날 것에 대해서는 꿈꾸지 못한다. 네 번째 신체는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과거 속으로 그리고 미래 속으로 여행할 수 있다. 급박한 비상 사태에서, 때로는 일반인도 미래에 대한 하나의 일별을 가질 수 있다. 만약 그대에게 가깝고 소중한 누군가가 죽어 가고 있다면, 그 메시지가 일반적 인 꿈 속에서 그대에게 전해질 수도 있다. 그대는 꿈을 꾸는 것에 대한 어떤 다른 차 원도 모르기 때문에, 나머지 가능성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그대의 일반적인 꿈꾸는 상태를 꿰뚫는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그대의 일반적인 꿈꾸는 상태의 일부가 되기 전에 넘어야 할 장 벽들 때문에, 그 꿈은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장벽은 무언가를 제거하고, 무언 가를 변형시킨다. 각각의 신체는 고유의 상징 체계를 갖기 대문에, 하나의 신체에서 또 다른 신체로 꿈이 넘어갈 때마다, 그것은 그 신체에서의 상징 체계로 해석된다. 그 리고 나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다. 만약 그대가 네 번째 신체에서 분명한 방식으로 - 다른 신체를 통하지 않고 네 번째 신체 그 자체를 통해서 - 꿈을 꾼다면 그 때 그대는 미래를, 그러나 오직 그대 자신의 미래만을 꿰뚫 수 있다. 그것은 아직도 개인적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미래를 꿰뚫 을 수는 없다. 네 번째 신체에서, 과거는 미래가 현재인 것만큼이나 현재이다.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가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이 하나의 지금 - 뒤쪽을 꿰뚫는 지금, 앞쪽을 꿰뚫는 지 금 - 이 된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시간은, '현재' 로서이긴 해도, 여전히 하나의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그대는 아직도 그대 마 음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대는 과거쪽을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대의 마음을 그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미래와 현재가 일시적인 중단 상태에 머물 것이다. 그 대가 미래를 향해서 초점을 맞출 때, 나머지 두 가지 - 과거와 현재 - 는 존재하지 않 을 것이다. 그대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로서가 아니 다. 그리고 그대는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꿈들,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그대에게 속해 있는 꿈들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 영체(spiritual body)는 개인의 영역과 시간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이제 그대는 영원 속에 있다. 꿈을 꾸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그대와 관련된 것이 아 니라, 전체(the whole)의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제 그대는 전 존재의 과거를 낱낱 이 안다, 그러나 미래는 그렇지 못하다. 이 다섯 번째 신체를 통해서 모든 창조의 신화가 발전되어 왔다. 그들은 전부 같다. 그 상징들이 다르고, 그 이야기들이 조금씩 디르지만, 기독교든 힌두교든 유대교든 이 집트든,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창 조의 신화들은 모두 방향이 같다. 그 신화들은 그 저변에 유사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대홍수라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 세계적으로 존재한다. 그것들에 대한 역사적 인 기록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기록이 존재한다. 그 기록은 다섯 번째 신체, 영체에 속한다. 다섯 번째 신체는 그 이야기들에 대한 꿈을 꿀수 있다. 그대가 내면으로 뚫고 들어가면 갈수록, 꿈은 점점 더 실재에 가까이 다가간다. 생 리적인 꿈을 꾸는 것은 그다지 실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자체의 실재를 갖고 있지 만, 그것은 그다지 실재적이지 않다. 에테르적인 것이 훨씬 실재적이고, 아스트랄적인 것이 그보다 더 실재적이며, 정신적인 것은 실재에 근접하고, 그리고 마침내, 다섯 번 째 신체에서 그대는 그대의 꿈을 꾸는 것 속에서 진정으로 실재적이 된다. 이것이 실 재를 아는 길이다. 그것을 '꿈꾸는 것' 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합하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것은 꿈꾸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실재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유의 객관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인 체험으로 찾아온다. 다섯 번째 신체를 각성한 두 사람은 동시에 꿈을 꿀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섯 번째 이전에는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는 하나의 공통된 꿈을 꿀 수 있는 방법은 없 다. 그러나 다섯 번째 신체 이후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꿈을 동시에 꿀 수 있 다. 그렇기 때문에 그 꿈들은 어떤 면에서는 객관적이다. 우리는 기록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다섯 번째 신체에서 꿈을 꾸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똑같 은 신화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화들은 어떤 개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 다. 그것들은 함께 작업하는 특정한 학교들, 특정한 전통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꿈꾸는 것의 다섯 번째 유형은 더욱 실재적이 된다. 앞서의 네가지 유형들은 어떤 의미에서의는 비실재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 람이 그 체험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것이 하나의 환상인지 아닌지, 그 체 험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환상이란 그대가 투사해 온 그 무엇이고, 꿈이란 있는 그대로는 존재 속에 없지만, 그대가 알게 된 그 무엇이다. 그대가 내면으로 들어 감에 따라, 꿈꾸는 것이 덜 환상적이고, 덜 상상적인 - 더 개관적이고, 더 실재적이 며, 더 진실한 - 것이다. 모든 신학적인 개념들은 다섯 번째 신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언어에 있 어서나, 개념화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같다. 그것들은 다섯 번째 신체의 꿈들인 것이다. 여섯 번째 신체, 우주체(cosmic body)에서 그대는 의식적인 것/무의식적인 것, 물질 /마음의 문턱을 넘어간다. 그대는 모든 구별들을 잃어버린다. 여섯 번째 신체는 우주 에 대해 꿈을 꾼다. 그대는 의식의 문턱을 넘어가고, 무의식적인 세계 역시 의식적이 된다. 이제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의식적이다. 심지어는 소위 물질이라 부르 는 것조차도 의식의 일부가 된다. 여섯 번째 신체에서, 우주적인 신화들에 대한 꿈들이 실현된 것이다. 그대는 개인을 초월한 것이다., 그대는 개인을 초월한 것이다, 그대는 의식을 초월한 것이다,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언어는 가능하다. 그것은 그 어떤 것 쪽 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을 지목하고 있다. 브라마 의 의론들, 마야, 일 원성의, 무한성의 이론들은 모두 꿈꾸눈 것에 대한 여섯 번째 유형에서 실현된 것이 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꿈을 꾸어 왔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위대한 체계들, 그 위 대한 종교들의 창조자들이었다. 마음의 여섯 번째 유형을 통해서, 꿈들은 유의 관점에 있지, 무의 관점에 있지 않 다. 긍정적 존재의 관점에 있지, 비존재(non-existence)의 관점에 있지 않다. 거기에 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집착 그리고 비존재에 대한 하나의 두려움이 아직도 있다. 물 질과 마음은 하나가 되었지만, 존재와 비존재, 유와 무는 아니다. 그것들은 아직도 분 리되어 있다. 이것이 그 마지막 장벽이다. 일곱 번째 신체, 열반적인 것은 긍정의 경계를 넘어가서 무 속으로 뛰어든다. 그것 은 그 자신의 꿈들 - 비존재의 꿈들, 무의 꿈들, 공의 꿈들 - 을 가지고 있다. 그 예 는 이제 뒤에 남겨지게 되었고, 이제는 그 아니오조차도 하나의 아니오가 아니다. 그 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더욱더 무한한 것이 다. 긍정은 분명히 경계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한 할 수가 없다. 오직 부정만이 경계들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일곱 번째 신체는 그 자신만의 꿈들을 갖는다. 이제는 상징들도 없고, 형상 들도 없다. 오직 형상 없음이 있을 뿐이다. 이제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 없음이 있다. 절대적인 침묵이 있다. 이 침묵의 꿈들은 전체적이고 끝이 없다. 이것들이 일곱 개의 신체들이다. 그들 각각이 그 자신만의 꿈들을 갖고 있다. 그러 나 이 꿈들의 일곱 가지 차원들이 실재의 일곱 가지 유형을 아는 데 하나의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대의 생리적인 신체는 그 실재를 아는 한 가지 방법과 그것에 대해 굼꾸는 한 가 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음식을 먹을 때는 이것이 하나의 실재이지만, 그대가 음식을 먹는 것을 꿈꿀 때는 그것은 하나의 실재가 아니다. 그 꿈은 실제 음식의 대용 물이다. 그래서 생리적인 신체에는 그 자신만의 실재가 있고, 그자신만의 꿈꾸는 방법 이 있다. 이런 것들이 생리적인 것이 작용하는, 두 가지 다른 방법들인데, 그들은 서 로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대가 중심을 향해 가면 갈수록, 그대가 보다 높은 신체 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꿈 과 실재는 서로 점점 더 가까워진다. 가장자리에서 원의 중심 쪽으로 그려진 선들이 그 중심에 접근할수록 서로 가까워지고, 가장자리 쪽으로 갈수록 더 멀어지게 되는 것 처럼, 꿈과 실재도 그대가 그대의 중심 쪽으로 갈수록 그것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그대가 가장자리 쪽으로 갈수록 그것들은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생리적인 신체 에 관한 한, 꿈꾸는 것과 실재는 멀리 떨러져 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크다. 꿈들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분리가 에테르체에서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꿈과 실재가 보다 가까워질 것 이므로, 무엇이 실재하는 것이고 무엇이 하나의 꿈인지를 아는 것이 생리적인 신체에 서보다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알려질 수 있다. 만약 그대의 에테르적인 여행이 실제 여행이었다면, 그것은 그대가 깨어 있는 동안에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지금까지 하나의 꿈이었다면, 그것은 그대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일어날 것이다.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대가 에테르체 속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그대의 에테르체에서 각성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하나의 만트라의 반복인 자파 처럼 내적인 작업을 하는 모든 방법들은, 그대를 외부세게로부터 단절시킨다. 만약 그 대가 잠들면, 계속적인 반복이 하나의 최면적인 잠을 만들어 낸다. 그 때 그대는 꿈을 꿀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대의 자파를 각성하는 채로 남아 있을 수 있고, 그 것이 그대 안에 하나의 최면 효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그 때 그대는 에테르체에 관한 한, 실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신체, 아스트랄적인 것에서는 그 차이를 알기가 훨씬 더 어렵다. 왜냐 하면 그 두 가지가 훨씬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아스트랄적인 꿈을 꾸는 것 이 아니라 진정한 아스트랄체를 알았다면, 그때 그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람은 자신의 불멸성을 안다. 그러나 만약 아스트랄적인 것이 하 나의 꿈이고 실재가 아니라면, 그 때 그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기력해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구별점이고, 시금석이다. '영혼은 불멸하고, 영혼은 계속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라고 스스로를 확신시키고 있는 사람은, 무엇이 아스트랄체에서 실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아스트랄적인 꿈 인지 구별할 수 없다. 불멸성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알기 전에, 그것에 대한 의심들, 그것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그대 가 실제로 그것을 아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것을 투사해 왔던 것인지를 알 것이다. 만약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이 그대의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그대의 아스트랄적인 마 음을 꿰뚫을지도 모른다. 그 때 그대는 꿈꾸기 시작할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어떠한 믿음도 없이 단지 알고자 하는, 무엇 이 발견될지도 모르고,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도 없는, 탐구하고자 하는 하나의 갈증만 을 가지고 있다면, 만약 그대가 하나의 진공 속에서 탐구만 하고 있다면, 그때 그대는 그 차이를 알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멸, 전행들을 믿는 사람들, 신앙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스트랄적인 ㅅ준에서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며,실 재를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네 번째 신체, 정신적인 것에서는 꿈과 실재가 이웃들이 된다. 그들의 얼굴들은 너 무도 비슷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 판단될 모든 가능성이 있다. 정신체는 실재만큼이 나 실재적인 꿈들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꿈들을 만들어 내는 요가적인, 탄트 라적인 그리고 기타 다른 방법들이 있다. 단식, 독거, 어둠을 수련법으로 하는 사람은 네 번째 유형의 꿈들, 정신적인 꿈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꿈들은 너무도 실재적이 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실재보다도 더 실재적이다. 네 번째 신체에서 마음은 전체적으로 창조적이다 - 어떠한 객관적인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물질적인 경계들에 의해서는 방해받지 않는다. 이제 마음은 창조하는 데 있어 전적으로 자유롭다. 시인들, 화가들, 모두가 꿈을 꾸는 것의 네 번째 유형에 서 산다. 모든 예술은 네 번째 유형으로 꿈을 꾸는 것에 의해서 창작된다. 네 번째 영 역에서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자 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네 번째 신체에서 사람은, 정신적으로 창조된 것은 어떤 유형이라도 각성할 수 있어 야 한다. 어떤 것도 투사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투사될 것이다. 어떤 것도 바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바램이, 충족되어 버릴 모든 가능성이 있 다. 내면적으로뿐만 아니라 외면적으로고 그 바램은 충족될 수 있다. 네 번째 신체에 서 마음은 매우 강력하고, 수정처럼 대단히 투명하다. 왜냐 하면 네 번째 신체가 마음 에게는 마지막 집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무심이 시작된다. 네 번째 신체는 마음의 원천이어서, 그대는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다. 바램도 없고, 상상도 없고, 이미지도 없다는 것, 신도 없고 스승도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 모두가 그대로부터 만들어질 것이다. 그대는 창조자 가 될 것이다.! 그것들을 본다는 것이 너무나 지복스럽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들을 만 들어 내기를 갈망한다. 이것이 사다카 즉, 구도자에게는 마지막 장벽이다. 만약 이것 을 넘으면, 더 큰 장벽을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각성하고 있다면, 만약 네 번째 신체에서 그대가 그저 하나의 지켜보는 자일 수 있다면, 그 때 그대는 실재를 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계속 꿈을 꾼다. 그리고 어떤 실재도 이 꿈들과 견줄 수 없게 된다. 그 꿈들은 환희롭다. 어떤 다른 환희도 견줄 수가 없다. 따라서 환희를, 행복을, 지복스러움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유형의 이미지도 끊임없이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있게 되는 순간, 네 번째 마음은 하나의 꿈 속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그 다음 이미지로 인도하고, 그대는 계속 꿈을 꾼다. 꿈꾸는 것의 네 번째 유형은 그대가 하나의 지켜보는 자일 때에만 예방될 수 있다. 지켜보는 것이 차이를 만든다. 왜냐 하면 만약 꿈꾸는 것이 그 곳에 있다면, 그대가 그것과 동일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신체에 관한 한, 동일시가 꿈꾸는 것이다. 네 번째 신체에서 각성과 지켜봄이 실재로 향하는 길이다. 다섯 번째 신체에서 꿈과 실재는 하나가 된다. 모든 형태의 이중성이라는 허물이 벗 겨진다. 이제는 어떤 각성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그대가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대는 그대의 비각성을 각성할 것이다. 이제 꿈을 꾸는 것은 그저, 실재의 반영에 불과하게 된다. 하나의 차이는 있지만, 구별은 없다. 만약 내가 거울 속에서 내 자신을 본다면, 나와 그 반사된 것 사이에는 구별은 없지만 하나의 차이는 있다. 나는 실재이고 반사된 것은 실재가 아니다. 다섯 번째 마음은, 만약 다른 개념들을 양성해 왔다면 자기 자신을 안다는 하나의 착각을 가질 수 있다. 왜냐 하면 그는 거울 속에 반사된 자기 자신을 보아 왔기 때문 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오직 반사 된 그대로. 이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것은 위험하다. 그 위험이 란, 그대가 반사된 것에 만족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 같은 이미지 실재로서 여겨질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 그 자체에 관한 한, 만약 이것이 일어난다면 실제 위험은 없다. 그 러나 여섯 번째 신체에 관한한, 그것은 하나의 위험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을 거 울 속에서만 보아 왔다면, 그 때 그대는 다섯번째의 경계를 넘어 여섯 번째로 갈 수 없다. 그대는 거울을 통해서는 어떤 경계도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다섯 번째에 계속 남아 잇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무한한 영혼들이 있고, 각각의 영혼은 그 자신의 개인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이러한 사람들은 다섯 번째에 계속 남 아 있어 왔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알기는 아는데,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가 아니 다 - 오직 하나의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인 것이다. 이 거울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거울은 '나는 영혼이다. 영원하고, 불멸이다. 죽음 을 넘어서 있고, 태어남을 넘어서 있다.' 라는 개념을 양성하는 것을 통해서 온다. 그 것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을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의 거울을 만들어 내는 것 이다. 그러면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이 아닌, 그대의 개념들을 통해서 비춰 진 그대를 알 것이다. 그 유일한 차이는 이것일 것이다 - 만약 지식이 하나의 거울을 통해서 오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꿈이고, 만약 그것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어떤 거울도 없이 오면, 그때 그것은 실재이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이면서, 하나의 큰 차이 이다 - 그대가 넘어왔던 신체들에 관해서가 아니라, 아직 더 뚫고 나아가야 할 신체들 에 관해서는 말이다. 자신이 다섯 번째에서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실재를 살고 있는지 어떻게 각성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 - 모든 형태의 경전을 떨쳐 버리는 것, 모든 형태 의 철학을 떠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구루는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구 루는 하나의 거울이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그대는 전적으로 홀로이다. 어는 누구도 하나의 안내자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안내자가 거울이 될 것이 다. 이제부터는 홀로 있음이 전체적이고 완전하다. 외로움이 아닌 '홀로있음' 이다. 외 로움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연관되어 있지만, 홀로 있음은 자기 자신과 연관되어 있 다. 나는, 나와 어떤 다른 사람과의 연결 고리가 없을 때 외로움을 느끼지만, 내가 있 을 때에는 홀로 있음을 느낀다. 이제 사람은 말, 개념, 이론, 철학, 교리들에서, 구루, 경전들에서, 기독교, 힌두교 에서, 붓다, 예수, 크리슈나, 마하비라 등, 모든 차원에서 홀로이어야 한다. 사람은 이제 홀로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의 거울이 될 것이다. 붓다는 이제 하나의 거울이 될 것이다. 대단히 소중하지만, 대단히 위험하 다. 만약 그대가 절대적으로 홀로라면, 그대가 반사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 다. 그러므로 '명상' 은 다섯 번째 신체를 위한 단어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홀로이고, 모든 유형의 '정신 작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심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거기에 어떤 유형이든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거울이 되 어, 그대가 반사될 것이다. 이제는 생각함도, 묵상도 없는 하나의 무심이어야 한다. 여섯 번째 신체에서 거울은 없다. 이제 우주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가 상실 된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없다. 꿈꾸는 자는 없다. 그러나 꿈꾸는 자가 없이도 그 꿈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꿈꾸는 자 없이 하나의 꿈이 있을 때, 그것은 진 짜 실재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마음이 없고, 생각하는 자도 없다. 그러므로 알려져 있 는 것은 무엇이든 다 알려진다. 그것은 그대의 지식이 된다. 창조의 신화들이 찾아온 다. 그것들이 옆에서 떠다닌다. 그대는 없다. 이런저런 것들이 그저 옆에서 떠다니고 있다. 판단할 그 누구도 없다. 꿈꿀 그 누구도 없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하나의 마음이 여전히 있다. 하나의 개체로서가 아니라 우주적 인 전체로서 소멸된 마음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대는 없다, 그러나 브라마는 있다. 그 래서 세상 전체가 하나의 꿈, 마야이다. 어느 개인의 꿈이 아니라 그 전부, 그 전체의 꿈이다. 그대는 없지만, 그 전체가 꿈을 꾸고 있다. 이제 그 유일한 구별은 그 꿈이 긍정적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긍정적이라 면, 그것은 환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꿈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오직 부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형상 없음의 일부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그 본래 근원으로 돌아갔을때, 그 때 모든 것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없다. 긍정이 남 아 있는 유일한 요소이다. 그것도 뛰어넘어야만 한다. 그래서 만약 여섯 번째 신체에서 긍정이 상실되면, 그대는 일곱 번째속으로 꿰뚫고 들어간다. 여섯 번째의 실재가 일곱 번째의 문인 것이다. 만약 거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 - 어떤 신화도, 어떤 이미지 - 도 없다면, 그러면 꿈이 멈춰 버린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오로지 있는 그것 - 여여함(주3) 만이 있다. 이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만이 있다. 사물들은 없지만, 그 근원은 있다. 그 나무는 없지만, 그 씨앗은 있 다. (주3 여여함: 각각의 존재. 각각의 사물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 이것을 안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마음을, 씨앗을 가진 사마디 - 사마디 사베즈 - 라 고 불러 왔다. 모든 것이 상실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그 본래 근원, 우주적인 씨앗으 로 되돌아왔다. 그 나무는 없지만, 그 씨앗은 있다. 그러나 그 씨앗에서도 꿈꾸는 것 은 아직도 가능하다. 따라서 그 씨앗마저도 파괴되어야만 한다. 일곱 번째에서는 꿈도 없고 실재도 없다. 그대는 오직 꿈꾸는 것이 가능한 그 지점 까지만 실재하는 어떤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그 곳에 꿈들에 대한 어떤 가능 성도 없다면, 그 때는 실재적인 것도, 환영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곱 번째가 그 중심이다. 이제 꿈과 실재가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는 차이가 없다. 그대는 무에 대해 꿈을 꾸든지 무를 알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무는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만약 내가 그대에 대해 꿈꾼다면, 그것은 환영적인 것이다. 만약 내가 그대를 본다 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대의 부재에 대한 꿈을 꾼다거나, 혹은 내가 그대의 부재를 본다면 거기에는 차이가 없다. 만약 그대가, 어떤 것이든 그 것의 부재에 대한 꿈을 꾼다면, 그 꿈은 부재 그 자체와 똑같은 것이다. 오직 무언가 긍정적인 것의 관점에서만, 하나의 실재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신체까지 는 하나의 차이가 존재한다. 일곱 번째 신체에서는 오직 무만이 남는다. 심지어 그 씨 앗도 부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니르베즈 사마디 즉, 씨앗 없는 사마디이다. 이제 꿈을 꿀 가능성이란 없다. 그러므로 일곱 가지 유형의 꿈들과 일곱 가지 유형의 실재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꿰뚫는다. 이것 때문에 많은 혼란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 일곱 가지를 구별한 다면, 만약 그대가 그것에 대해 분명해진다면 그것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심리학 이 꿈들에 대해 알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심리학이 아는 것은 기껏해야 생리적인 것 에 대해서, 그리고 이따금 에테르적인 것에 대해 아는 정도이다. 그러나 에테르적인 것 역시 생리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융이 프로이드보다 조금 더 깊이 뚫고 들어갔지만, 인간의 마음에 대한 그의 분석은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취급당한다. 아직도 그는 그 씨앗을 갖고 있다. 만약 서 양 심리학이 발전한다면, 그것은 프로이드가 아니라 융을 통해서이다. 프로이드는 그 선구자였다. 그러나 스스로의 진보들에 대한 애착이 하나의 집착이 되면, 모든 선구자 는 더 앞으로 전진하는 데 하나의 장벽이 된다. 비록 지금은 프로이드가 구시대적이라 하더라도, 서양 심리학은 아직도 그 프로이드적인 시작에 사로잡혀 있다. 프로이드는 이제 역사의 부분이 되어야만 한다. 심리학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실험실의 방법들을 통해서 꿈꾸는 것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 많은 꿈 실험실들이 있는데, 사용되는 방법들은 생리적인 것에 관련된 것들뿐이다. 꿈 들의 세계 전체가 알려지려면 요가, 탄트라 그리고 다른 비의적인 훈련이 도입되어야 만 한다. 모든 유형의 꿈은 그것에 상응하는, 한 가지 유형의 실재를 가지고 있으며, 만약 마야 전체가 알려질 수 없다면, 만약 환영들의 세계 전체가 알려질 수 없다면, 그러면 실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재가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환영적인 것 을 통해서뿐이다. 그러나 내게 말해 온 것을 하나의 이론이나, 하나의 체계로 받아들이지 말라. 그저 그것을 하나의 시발점으로 삼고 의식적인 마음을 갖고 꿈을 꾸기 시작하라. 오직 그대 가 그대의 꿈들 속에서 의식적이 될 때에만 실재가 알려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각성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 오직 어떤 부분이 병들었을 때에만 우리는 각성하게 된다. 건강한 몸을 각성하게 되어야만 한다. 병에 걸린 몸을 각성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응급 조치일 뿐 이다. 그것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하나의 내장되어 있는 과정이다. 그대의 마음은 몸 의 어떤 부분이 병들었을 때 각성해야만 한다. 그 부분이 보살펴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괜찮아지는 순간 그대는 그 부분에 대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된 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몸 - 그것의 작용들, 그것의 미묘한 느낌들, 그것의 음악, 그것 의 침묵들 - 에 대해 각성하게 되어야만 한다. 때로는 몸은 침묵하고 있고, 때로는 소 란스럽고, 때로는 이완되어 있다. 각 상태에서 그 느낌이 너무도 다른데, 우리가 그것 을 각성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대가 잠자러 갈 때, 그대의 몸에는 미묘한 변화들이 일어난다. 그대가 아침에, 잠 밖으로 나올 때, 다시 변화들이 있다. 사람은 그것을 각성하게 되어야만 한다. 그대가 아침에 눈을 뜰 때, 즉각 눈을 뜨지 말라. 그대가 잠이 끝났다는 것을 각성했다면, 그대의 몸을 각성하게 되라. 그러나 아직 눈은 뜨지 말라.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고 있다. 잠이 그대를 떠나고 있고, 깨어남이 찾아오고 있다. 그대는 아침해가 '떠오 르는' 것은 보아 왔지만, 결코 그대의 몸이 '일어나는(rise)'(주4) 것은 보지 못해 왔 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대의 몸에는 하나의 아침과 하나 의 저녁이 있다. 그것은 산디야 즉, 변형의 순간, 변화의 순간이라고 불리워진다. (주4 rise: rise는 떠오르다와 일어나다 두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대가 잠자러 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용히 지켜보라. 잠이 찾아올 것 이다, 잠이 찾아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각성하라! 그럴 때에만 그대는 그대의 육체를 진정으로 각성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각성하게 되는 순간, 그대는 생 리적인 꿈을 꾼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면 아침에 그대는 무엇이 생리적 인 꿈이었고 무엇이 아니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내적인 느낌 들, 내적인 욕구들, 그대 몸의 내적인 리듬들을 안다면, 그것들이 그대의 꿈들에 반영 될 때 그대는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왔다. 몸은 그 자신만의 지혜를 갖 고 있다. 그것은 수 - 천년의 체험을 갖고 있다. 내 몸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 고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등등의 체험을 지니고 있고, 내 몸의 씨앗이 지금의 모습 으로 발전되어 온 수 - 세기를 지니고 있다. 내 몸은 그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 있다. 우선 그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대가 그것을 이해할 대, 그대는 생리적인 꿈이 무엇 인지를 알 것이다. 그리고 나면 아침에 그대는 생리적인 꿈들과 비생리적인 꿈들을 가 려 낼 수 있다. 오직 그런 후에야,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이 활짝 열린다 - 그대의 에테르체를 각성 하는 것이다. 오직 그 이후이지 그 이전은 아니다. 그대는 좀더 예민해진다. 그대는 소리들, 향기들, 빛들의 더 미묘한 수준들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걸을 때 생리적인 신체가 걷고 있고, 에테르체는 걷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 차이는 명료 하다. 그대가 먹고 있다. 생리적인 신체가 먹고 있는 것이지 에테르체가 먹고 있는 것 은 아니다. 에테르적인 갈증, 에테르적인 굶주림, 에테르적인 갈망들이 있지만, 이러 한 것들을 육체가 완전히 알려질 때에만 보여질 수 있다. 그러면 차츰 차츰, 다른 신 체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가장 커다란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 고, 알려지지 않았고, 숨겨져 있다. 그것은 비밀스런 지식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제는 비밀스런 모든 것들이 공개되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지금까지 숨겨져 왔던 모든 것 들은 이제 더 이상 숨겨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위험스러운 것임이 입 증될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어떤 것들이 비밀스러운 채로 남아 있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 하면 무지한 사람들의 손에 지식이 들어가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양의 과학적 지식 에 일어난 일이다. 이제 과학자들이 그 위기를 각성하고 비밀의 과학들을 만들어 내려 고 한다. 핵무기들은 정치가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발견들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인간이 능력을 갖추게 되어 그 지식 이 공개되더라도 위험스럽지 않을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비슷한 경우로, 영적인 영역에서는 많은 것이 동양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무지한 사람들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위험한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그래 서 그 열쇠가 감춰졌던 것이다. 그 지식은 비밀로, 비의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개인에 서 개인으로 조심스럽게 건네졌다. 그러나 이제는 과학적인 진보로 인해서, 그것이 공 개되어야 할 순간이 왔다. 만약 영적인, 비의의 진실들이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게 되면, 과학은 위험한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그것들이 공개되어야 영적인 지 식이 과학적인 지식과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꿈은 가장 큰 비의의 영역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그대가 각성하기 시작할 수 있도 록 그것에 대해 뭔가 말을 해 왔지만, 그 과학을 전부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요 하지도 않고 도움도 안 될 것이다. 나는 틈들을 남겨 왔다. 만약 그대가 안으로 들어 가면 이 틈들은 자동적으로 메워질 것이다. 내가 말해 온 것은 단지 외부의 층이다. 그대가 그것에 대해 하나의 이론을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그대가 시작하기에는 충분하다. @ff 7. 일곱 가지 신체를 초월하기 당신은 우리에게 일곱 개의신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에테르체, 정신체 등이라고 말입니다. 그 인도말을 서양 심리학적인 용어에 맞추는 것이 가금씩은 어렵습니다. 우 리 서양에는 이것에 대한 이론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 다른 이 신체 들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습니까? 영적인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에테르적인 것은 어떻습니까? 아스트랄적인 것은 어떻습니까? 단어들은 번역될 수 있지만, 그대가 그 단어들을 찾아보려고 한적이 없었던 근원들 에서 번역될 수가 있다. 융은 표면적인 의식을 넘어선 탐구에 관한 한은 프로이드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융 역시 하나의 시작이다. 이 일곱 가지 신체에 대해 더 많은 것들 은 슈타이너의(주1) 인류학이나 신지학회(주2)의 저술들에서 얻을 수 있다. 마담 블라 바츠키의 '비밀 교리', '베일이 벗겨진 이시스'와 다른 저술들 혹은 애니 베사트(주3) 리드비터 알코트 대령의 저술들이 그 예이다 그대는 장미십자회(주4) 교리들에서 하나 의 일별을 얻을 수 있다. 서양에도 역시 에세네파의(주5) 비밀 저술들이나 처음에 그 리스도가 입문되어졌던 연금술 동지회 같은 하나의 훌륭한 연금술의 전통이 있다. 그 리고 더욱 근래에는, 구제프나 오스펜스키가(주6)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것 이 몇가지 단편들로 발견될 수 있고, 이 단편들이 함께 모여질 수 있다. (주1 슈타이너: 1861~1925. 독일의 사상가. 한때 독일의 신지학협회 회장을 지냄. 주2 신지학회: 남북 전쟁의 영웅 알코트 대령과 러시아의 여성 신비가인 마담 블라 바츠키에 의해 1875년 창시된 신비주의 단체. 주3 애니 베산트: 1847~1933. 신지학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힘쓴 인물로 크리슈 나무르티가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4 장미 십자회: 17~18세기경 유럽에 있었던 신비주의 비밀 결사 조직으로 장미 와 십자가가 그 상징이었다 주5 에세네파: 기원전 2세기 경에 팔레스타인에 유행했던 종파. 유태교에 기원을 두 고 있으면서도 불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다. 주6 오스펜스키(1878~1947): 러시아인으로서 구제프의 제자. 오랫동안 구제프와 함 께 일했으며, 죽기 몇 년 전부터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말해 온 것은, 나는 그대들의 용어로 말해 왔다. 나는 서양의 용어의 부분이 아닌 것이라고는 단 한 단어 - 열반적인 것 - 만을 써 왓다. 다른 여섯 가지 용어들 - 육체적인 것, 에테르적인 것, 아스트랄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그 리고 우주적인 것 - 은 인도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서양 용어에 속해 있 다. 서양에서 일곱 번째는 한 번도 이야기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것에 대해 알았던 사람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곱 번째가 전달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에게 이 용어들이 어렵다면, 그대는 단순히 '첫째', '둘째', '셋째' 등을 사용해도 좋다. 그것들을 묘사하려고 어떤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 그저 그것들을 묘사 하라. 그 묘사로 충분할 것이다. 용어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이 일곱 가지들은 수많은 방향에서 접근될 수 있다. 꿈에 관한 한, 프로이드(주7), 융(주8), 아들러(주9)의 용어들이 사용될 수 있다. 그들이 의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첫번째 신체이다. 무의식은 두 번째이다 - 꼭 같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것에 가깝다. 그들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 번째이다 - 다시 말하는데, 꼭 같지는 않지 만 그것에 근접한 것이다. (주7 프로이드(1856~1939):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성 본능을 중시하여 모든 것의 원인을 성에 귀결시키는 이론 체계를 세웠다 주8 융(1875~1961): 스위스의 정신 분석학자. 집단 무의식 이론을 내세워 집단적인 무의식이 유전적으로 전달된다고 믿었다. 주9 아들러: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우월감과 열등감의 개념을 도입해서 우월하고 자 하는 욕구를 인간 활동의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만약 용법에서 공통되는 용어가 없다면,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 진 수 있다. 그것이 언제나 났다. 사실, 새로운 용어는 낡은 개념을 내포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 새로운 용어가 사용될 때는, 그대가 이전의 연관 관계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용어가 더욱 의미심장해지고 더 깊이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에테르적인 것은 하늘과, 그리고 우주와 관계된 그것을 의미한다. 아스트랄적인 것 은 가장 미묘한 것 즉, 숙쉬마(sukshma), 가장 최후의 것, 원자적인 것, 물질이 더 이 상 존재하지 않는 곳을 넘어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인 것에는 어려움들이 없 다. 우주적인 것에 있어서도 역시 어려움들이 없다. 그 다음으로 그대들은 일곱 번째, 열반적인 것에 도달한다. 열반적인 것이란 전체적 인 중지, 절대적인 공을 의미한다. 이제는 씨앗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것이 멈 춰 버렸다. 언어상으로 그 단어는 '불꽃의 꺼짐'을 의미한다. 그 불꽃이 껴져 버렸다. 그 등불이 껴져 있다. 그러면 그대는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물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다. 열반은 꺼져 버린 불꽃을 의미한다. 이제 그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모든 곳에 있다. 그것은 존재의 특정한 지점을 갖고 있지 않고, 존재의 특정한 시간이나 순간을 갖고 있지 않다. 이제 그것은 공간 그 자체이고, 시간 그 자체이다. 그것은 존재이거나 비 존재이다. 그것에는 차이가 없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그대는 둘 중 어느 용어를 사용해도 좋다. 만약 그것이 어떤 곳에 있다면, 그것은 어떤 곳에 있을 수 없 으므로, '아무곳도 아닌 곳'과 '모든 곳'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곱번째 신 체에 대해서 그대는 '열반의'라는 단어를 사용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해 당하는 더 이상 좋은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단어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체험들만이 의미가 있다. 만약 그대 가 이 일곱 가지 신체 가운데 어떤 것을 체험했을 경우에만 그것이 그대에게 의미 있 을 것이다. 그대를 돕는, 서로 다른 방법들이 각수준마다 있다. 육체적인 것에서 시작하라. 그러면 다른 단계들 모두가 그대에게 열린다. 그대가 첫 번째 신체를 대상으로 작업하는 순간, 그대는 두 번째에 대한 일별들을 갖는다. 그러 니 육체적인 것에서 시작하라. 순간순간 그것을 각성하라. 그리고 외면적으로만 각성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몸을 내면에서도 각성하게 될 수 있다. 내가 내 손 을 바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을 각성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에 대한 내 적인 느낌도 있다. 내가 눈을 감을 때 그 손은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재적인 느낌은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그대 몸을 밖에서 보여지는 것으로서 각성 하지 말라. 이것은 그대를 내면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 내적인 느낌은 아주 다른 것 이다. 그대가 내면에서부터 몸을 느낄 때, 그대는 처음으로 몸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몸을 바깥에서만 볼 때는 그대는 그 비밀들을 알 수 없다. 그 대는 오직 바깥 경계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만을 안다. 만약 내가 내 몸을 바깥에서 본다면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으로서 본다. 그러 나 내 몸을, 나에게 있는 그대로 안 적은 없다. 그대는 그것에 대한 지식을 나와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보여지는 내손은 내면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 은 공공의 재산이 되었다. 그대는 그것을 나만큼이나 잘 알 수 있다. 내면에서 그것을 보는 그 순간에만 그것은 함께 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내 것이 된다. 그대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대는 내가 내면에서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 수 없다. 그대는 내가 내면에서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 수 없다. 나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모두에게 알려져 있는 몸이고, 실험실에서 내과 의사가 알 수 있는 몸이다. 그것은 존 재하는 몸이 아니다. 오직 사적이고, 개인적인 앎만이 그대를 내면으로 인도할 수 있 다. 공적인 지식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이 외부로부터의 관찰인, 생리학이나 심리학이 우리의 내적인 신체들이라는 하나의 지식으로 인도하지 못한 이유이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많은 딜레마들이 만들어져 왔다. 어떤 사람은 내면에서 아름답 다고 느낄 수 있는데, 우리는 그에게 자신이 추하다고 믿도록 강요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집단적으로 그것에 동의하면, 그 역시 동의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내면에서는 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내적인 느낌은 언제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 다. 이 외부적인 느낌은 실제로는 전혀 하나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유 행, 외부에서 부과된 하나의 기준이다. 한 사회에서 아름답다는 사람이 다른 사회에서 는 추할 수도 있다. 역사의 한 시기에서는 아름다운 사람이 다른 시기에는 그렇지 않 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의 느낌은 언제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외부의 기준들이 없다면, 추함이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해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때문에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다. 그 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없다. 만약 우리 모두가 장님이 된다면, 아무도 추한 사람이 없 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름다울 것이다. 따라서 내면에서부터 몸을 느끼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상황이 다르면, 몸이 내면 에서 다르게 느낄 것이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어떤 특정한 내적인 느 낌을 갖는다. 그대가 증오를 느낄 때 그 내적인 느낌은 다르다. 만약 그대가 붓다에게 묻는다면 그는, "사랑이 아름다움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의 내적인 느낌 속에서 그는, 그가 사랑스러울 때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증오, 분노, 질투가 있을 때, 그대가 추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가 내적으로 일어 난다. 따라서 그대는, 다른 상황들, 다른 순간들, 다른 마음의 상태들에서 그대 자신 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가 게으르다고 느끼고 있을 때는 그대가 활동적이라고 느끼고 있을 때와 차이가 있다. 이 차이점들이 분명하게 알려져야만 한다. 그때서야 그대는 그대 몸의 내적인 삶에 친숙해진다. 그 때 그대는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 속에서의 내면의 역사, 그대 내면의 지리를 안다. 내면에서 자신의 몸을 각성하게 되는 순간, 두 번째 신체가 자동적으로 시야에 들어 온다. 이 두 번째 신체는 이제 바깥에서부터 알려질 것이다. 만약 그대가 첫번째 신체 를 안에서부터 알면, 그 때 그대는 두 번재 신체를 바깥에서부터 각성하게 될 것이다. 첫번째 신체의 바깥에서는 그대가 두 번째 신체를 결코 알 수 없지만, 첫번째 신체 의 안에서는 두 번째 신체의 바깥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두 가지 차원들 -안과 박- 을 갖고 있다. 하나의 벽이 두쪽 면 -바깥쪽을 바라보는 면과 안쪽을 바라보는 도 하나의 면- 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경계, 하나의 벽을 갖고 있다. 만약 그대가 안에서부터 첫번째 신체를 알게 되면, 그대는 바깥에서부터 두 번 째 신체를 각성하게 된다. 그대는 지금 그 사이 -첫번째 신체의 안과 두 번째 신체의 바깥의- 에 있다. 이 두 번째 신체, 에테르체는 마치 짙은 안개와 같다. 그대는 어떤 장애물도없이 그것을 통 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투명하지 않다. 그대는 바깥에서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첫번째 신체는 단단하다. 두번째 신체는 모양에 관한 한, 첫번째 것과 아주 비 슷하지만, 단단하지는 않다. 첫번째 신체가 죽을 때, 두 번째는 13일 동안 살아 있는 채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 대와 함께 여행한다. 그런 후, 13일 후에는 그것 역시 죽는다. 그것은 흩어지고, 증발 한다. 만약 그대가, 첫번째 신체가 살아 있을 동안 두 번째 신체를 알게 되면, 그대는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각성할 수 있다. 두번째 신체는 그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가끔, 명상하는 동안 이 두번째 신체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리고 그대는 중력이 그대를 끌어당기지 않는다고, 그대가 지상을 떠났다고 느낀다. 그러나 눈을 떠 보면, 그대는 땅 위에 있어서, 그대가 내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대가 떠올랐다는 이 느낌은, 첫번째 신체가 아닌 두 번째 신체 때문이다. 두번째 신체에게 중력이란 없으므로, 그대가 두번째를 아는 순간, 육체에게 알려진 적이 없는 어떤 한가지 자유를 느낀다. 이제 그대는 그대의 몸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두 번째 신체에 대한 체험들을 알고 싶다면, 이것이 두번째 단계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저 그대의 몸 밖에 잇기를 바라라. 그러면 그대가 그 바깥에 있다. 그 바램 자체가 그 충족이 것이다. 두 번째 신체에 대해서는 어떤 노 력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중력의 끌어당김이 없기 때문이다. 첫번째 신체 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중력의 힘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대의 집에 가고 싶다면 나는 그 중력의 힘과 싸워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대의 집에 가고 싶다면 나는 그 중력의 힘과 싸워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중력이 없다면, 그 대는 그 단순한 욕망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에테르체는 최면시에 작용을 받는 신체이다. 첫번째 신체는 최면시에 개입되지 않는 다. 개입되는 것은 두 번째 신체이다. 그것이 완벽한 시력을 가진 사람이 최면을 통해 장님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만약 최면술사가 그대가 장님이 되었다고 말하면, 그대 는 단지 그것을 믿는 것만으로 장님이 된다. 지금까지 영향을 받아 온 것은 에테르체 인 것이다. 그 암시가 에테르체에게로 간다. 만약 그대가 하나의 깊은 최면 상태에 있 다면, 그대의 두 번째 신체가 영향을 받아 온 것은 에테르체인 것이다. 그 암시가 에 테르체에게로 간다. 만약 그대가 하나의 깊은 최면 상태에 있다면, 그대의 두 번째 신 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아무 문제 없는 사람이 "그대는 마비되었다."라는 암시만 으로도 마비가 될 수 있다. 최면술사는 의심을 일으키는 말은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 만약 그가 "그대는 장님이 된 것 같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최 면술사는 절대적으로 암시에 대해 확신을 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그 암시가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신에게서는 단지 "나는 몸 밖에 있다."라고 말하라. 그저 그 밖에 있기를 바라라. 그러면 그대가 그 바깥에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잠은 첫번째 신체에 속한다. 이완하는 것은 바로 첫 번째 신체 -하루의 노동, 일, 긴장으로 지친- 이다. 최면 상태에서 잠재워지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신체이다. 만약 두 번째 신체가 잠재워 지면 그대는 그것에 대해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대가 어떤 병으로든 병들게 될 때, 그 병의 75%는 두 번째 신에게서 생겨서 첫번 째 신체로 퍼진다. 두 번째 신체는 너무도 암시에 걸리기 쉬워서 의과 대학 1학년 학 생들은 항상 연구 중인 병에 걸린다. 그들은 그 중상들을 갖기 시작한다. 만약 두통이 토론되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서, "내게 두통이 있 을까? 내가 이런 증상들을 갖고 있을까?"라고 묻는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에테르체 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암시에 걸리고, 두통이 투사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출산의 고통은 첫번째 신체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번째 신체의 것이다. 따라서 최면을 통해서 절대적인 무통 분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저 암시만으로 말이다. 여 성들이 분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원시사회들이 있다. 왜냐 하면 그런 가능성이 그들 의 마음속에 들어간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유형의 문명은 모든 사람 의 기대들의 부분 그리고 일부가 되고 마는, 공통의 암시를 만들어 낸다. 최면 상태 아래에서는 고통이 없다. 심지어 수술도 아무런 고통 없이 최면 상태에서 행해질 수 있다. 왜냐 하면 두 번째 신체가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암시에 걸리면, 그 때는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한, 모든 유형의 고통, 모든 유형의 즐거움 역 시 두 번째 신체에서 와서 첫번째 신체로 퍼진다. 그러므로 만약 암시가 바뀌면, 지금 까지 고통스러웠던 그 똑같은 것이 즐거워질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암시를 바꿔라, 에테르적인 마음을 바꿔라,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그저 전 체적으로 바라라. 그러면 그것이 일어날 것이다. 전체성이, 바램과 의지사이의 유일한 차이이다. 그대가 무언가를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그대의 모든 마음으로 바라면 그것 이 의지력이 된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생리적인 신체 밖으로 나가기를 전체적으로 바라면, 그대는 그 것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면 내면에서부터 두번째 신체를 알 수 있는 가능성 이 있다, 그렇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그대가 그대의 생리적인 신체 박으로 나갈 때, 그대는 더 이상 그 사이 -첫번째 신체의 안과 두 번째 신체의 바깥의- 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두 번째 신체 안에 있다. 첫번째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마치 그대가 내면에서 그대의 첫번째 신체를 각성하게 되었던 것과 마 찬가지로, 내면에서부터 그대의 두 번째 신체를 각성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의 내적인 작용들, 그것의 내적인 작동 원리, 내적인 삶을 각성하라. 그대가 처음 시도할 때는 어렵지만, 그 이후에 그대는 항상 두 신체들 -첫번째와 두 번째- 안에 있다. 그대의 주의력의 초점은 인제 두 영역, 두 차원에 있을 것이다. 그대가 두 번째 신체 안에 있게 되는 순간, 그대는 세 번째 신체, 아스트랄적인 것 의 바깥에 있을 것이다. 아스트랄체에서는 심지어 어떤 의지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안에 있고자 하는 바램으로 충분하다. 지금은 전체성의 문제는 없다. 만약 그대가 안 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그대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잇다. 아스트랄체는 두 번째 신체처럼 하나의 증거이다. 그러나 아스트랄체는 투명하다. 따라서 그대는 밖에 있는 순간, 안 에 있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계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아스트랄체의 크기는 처음 두 신체들의 크기와 같다. 다섯 번째까지는 크기가 같다. 내용물은 바뀔 것이지만, 크기는 같을 것이다. 여섯 번째에서는 크기가 우주적일 것이 다. 그리고 일곱 번째에서는 크기가 전혀 없어서, 우주적인 크기조차도 없다. 네 번째 신체에는 적대적으로 벽이 없다. 세 번째 신체의 안에서부터는 하나의 투명 한 벽조차도 없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경계일 뿐, 벽이 없어서 들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고, 어떤 방법도 필요 없다. 따라서 세번째를 얻은 사람은 네 번째를 아주 쉽게 얻 을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를 넘어가는 데는 첫번째를 넘어갈 때 있었던 만큼의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 하면 이제는 정신적인 것이 멈추기 대문이다. 다섯 번째는 영체이다. 그 곳에 도달하기 전에 다시 하나의 벽이 있다. 그러나 그 벽은 첫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있었던 벽과 같은 의미의 벽이 아니다. 이제 그 벽은 다른 차원들 사이에 놓여 있다. 그것은 다른 수준의 것이다. 아래쪽의 네개의 신체는 모두 하나의 수준에 관련되어 있다. 그 구분은 수평적이었 다. 이제 그 구분은 수직적이다. 그래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이에 있는 벅은 그 아 래 단계에 있는 어떤 두 가지 신체 사이의 벽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우기가 일반적으 로 보는 방법은 수평적이지 수직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면에서 다른 면으로 움직이며 보지, 위아래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에서 다섯 번째로의 이동 은 하나의 낮은 단계에서 하나의 높은 단계로의 이동이다. 그 차이는 안과 밖의 차이 가 아니라, 위와 아래의 차이이다. 그대가 위를 바라보기 시작하지 않는 한, 그대는 다섯 번째 신체 속으로 이동할 수 없다. 마음은 항상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것이 요가가 마음에 반대하는 이유이다. 마음은 물처럼 아래로 흐른다. 물은 결코 어떤 영적인 체계의 상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물의 속성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은 수많은 체계들의 상징이 되어 왔다. 불은 위로 향한다. 그것은 결코 아래로 향하지 않는다. 그것이 네 번째 신 체에서 다섯 번째 신체로 움직일 때 불이 그 상징인 이유이다. 사람은 위를 바라보아 야만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한다. 어떻게 위를 바라보는가? 무엇이 그 방법인가? 그대는, 명상 중에 눈은 위로 향해서 아즈나 차크라를(주10) 쳐다보고 있어야만 한다는 말을 틀림없이 들은 적이 있을 것이 다. 눈은, 마치 그대가 자신의 두개골 안을 보려고 하는 것처럼, 반드시 위쪽에 초점 이 맞춰져 있어야 한다. 눈은 단지 상징적일 뿐이다. 실제 문제는 시각의 문제이다. 우리의 시각, 우리의 보는 능력은 눈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눈은 그것을 통해 심지 어 내면의 시각이 일어나는 수단이 된다. 만약 그대가 눈을 위로 향하게 하면 그대의 시각 역시 위로 가게 된다. (주10 아즈나 차크라: 척추 맨 밑의 회음부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일곱 개가 있다고 여겨지는 차크라(에너지 센타)중 여섯 번째로 미간에 위치하며 제 3의 눈 차크 라라고도 한다) 라자요가는(주11) 네 번째 신체에서 시작한다. 오직 하타 요가만이 첫번째 신체에서 시작한다. 다른 요가들은 다른 어떤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지학은 두 번째 신체에서 시작하고, 그리고 다른 체계들은 세 번째에서 시작한다. 문명이 네 번째 신체를 향해 계속 나아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생 에서 아래 단계의 세 가지 신체를 통해 작업을 해 온 경우에만, 네 번째가 사용될 수 있다. 아래의 세 가지 신체를 통해 수련했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한 채, 경전들로부터 혹은 스와미(주12)들이나 구루들로부터 라자 요가를 배우는 사람들은 환멸을 느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네 번째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 세 가 지가 반드시 거쳐져야 한다. 그런 후에라야 네 번째가 찾아온다. (주11 라자 요가: 마음을 수련하는 요가 주12 스와미: 승려를 뜻하는 인도어) 네 번째 신체는 시작이 가능한 마지막 신체이다. 네 가지의 요가가 있다. 하타 요가 는 첫번째 신체에 대한 것, 만트라 요가는 두 번째 신체에 대한 것, 박티 요가는 세 번째 신체에 대한 것이고, 라자 요가는 네 번째 신체에 대한 것이다. 고대에는 누구나 가 첫번째에서 시작했어야 했지만, 지금은 수많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이전 새에 두 번째까지 닦았고, 또 다른 이는 세 번째까지 닦은 식으로 말이다. 그러 나 꿈꾸는 것에 관해서는 첫번째 신체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꿈 의 전체 범위, 그것의 전체 영역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네 번째 신체에서, 그대의 의식은 마치 불처럼 - 위로 올라가는 - 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점검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만약 마음이 성을 행해서 흐 르고 있다면, 그것은 아래로 흐르는 물과 같다. 왜냐 하면 성 센터가 아래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신체에서는 눈을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으로 방향을 맞추기 시 작해야 한다. 만약 의식을 위로 향하게 하려면, 그것은 눈의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에 위치한 하나 의 중심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움직임이 위로 향할 수 있는 중심은 눈 위쪽에 오직 하 나 있다. 아즈나 차크라인 것이다. 이제 눈은 제3의 눈을 향해서 위쪽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제3의 눈은 수많은 방법들로 기억되어 왔다. 인도에서는 결혼한 여성과 미혼 여성의 구별이, 결혼한 여성의 제3의 눈 자리에 색깔 있는 표시를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미혼 여성은 성 센터를 향해서 아래쪽을 내려다보기 마련이지만, 결혼하는 순간 위쪽을 쳐 다보아야 한다. 성은, 성욕에서 성욕 너머의 것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그녀가 위를 쳐다보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색깔 있는 표시, 틸락이 제3의 눈에 사용되고 있다. 틸락 표시는 수많은 유형의 사람들 즉, 산야신(주13)들, 숭배자들의 이마에 사용되 고 있다. -수많은 종류의 색깔 있는 표시들이 말이다. 혹은 찬단 - 백단 나무 가루를 짓이긴 것 - 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대의 두 눈이 제3의 눈을 향해서 위쪽을 쳐다 보는 순간, 그 중심에 하나의 엄청난 불이 생성되고, 타는 듯한 감각이 있다. 제3의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시원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백 단나무 가루를 짓이긴 것이 사용된다. 그것은 시원할 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신체 그리 고 그것의 초월과 관련된 특별한 향기를 갖고 있다. 그 향기의 시원함과 그것이 놓인 특별한 지점이 제3의 눈을 기억하게 하고, 위로 시선을 끌게 된다. (주13 산야신: 구도의 길에 입문한 사람) 만약 그대가 눈을 감고 있는데, 내가 그대의 제3의 눈 자리에 내 손가락을 올려놓으 면, 내가 실제로 그대의 제3의 눈 그 자체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대는 그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 정도 압력으로 충분하다. 겨우 닿을락 말락 한 접촉, 단지 손가락을 올려놓으면, 내가 실제로 그대의 제3의 눈 그 자체를 건드리고 있는 것 이 아닌데도 그대는 그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 정도 압력으로 충분하다. 겨우 닿을락 말락 한 접촉, 단지 손가락을 부드럽게 갖다대는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그 향기, 그것의 미세한 접촉 그리고 그것의 시원함으로 족하다. 그러면 그 대의 주의는 항상 그대의 두 눈에서 제3의 눈으로 흐르고 있게 된다. 그래서 네 번째 신체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유일한 한 가지 기술, 한 가지 방법이 있 는데, 그것은 위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쉬르샤산 즉, 물구나무서기, 몸을 거구로 하는 자세가 이것을 행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용되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눈은 일 반적으로 아래쪽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물구나무를 선다면 그대는 여전 히 아래를 보겠지만, 그 아래가 위인 것이다. 아래쪽을 향하던 그대의 에너지의 흐름 이 위쪽으로의 흐름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명상 중에, 심지어 그것을 모르면서도 거꾸로 서는 자세들 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쉬르샤산을 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 하면 에너지의 흐 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래쪽으로의 흐름에 너무도 조건화되어 왔기 때문 에, 에너지가 방향을 바꿀 때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물구나무서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다시 편안하게 느낄 것이다. 왜냐 하면 에너지의 흐름이 다시 아래쪽으로 움직이고 있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아래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아래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대의 중심 들, 그대의 차크라들과 관련해서 보면, 에너지는 아직도 위쪽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 다. 그래서 쉬르샤산은 그대를 네 번째 신체에서 다섯 번째로 데려다 주는 방법의 하나 로서 사용되어 왔다. 기억되어야 할 주안점은 위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트라탁 - 태양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기타 여러 가지 대상들을 통해서 하나의 고정 된 대상을 응시하는 것 - 을 통해 행해질 수 있다. 내면으로 그것을 하는 편이 더 낫 다. 그냥 눈을 감아라! 그러나 먼저, 처음 네 가지 신체들을 건너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도움이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것이 방해가 될 수도 있고, 온갖 종류의 정신적인 질병들을 일으킬 수도 있다. 왜냐 하면 그 체계의 모든 조절이 분산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네 개의 신체들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대의 내적인 마음은 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분열증이 초래될 모든 가능성이 있다. 나에게, 정신분열증은 그러한 것의 결과이다. 그 때문에 일반 심리학에서는 정신분 열증을 깊이 파헤칠 수가 없다. 정신분열증적인 마음은 정반대 방향에서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 밖에 서 있으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고, 밖에 서 있으면서 위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체계 전체가 조화 속에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육체 를 내면에서 알지 못해 왔다면, 그 때 그대의 의식은 반드시 아래를 향해 있어야 한 다. 그것이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런 조절이 옳은 것이다. 그대는, 바깥쪽으로 움직 이고 있는 마음을 위쪽을 향하게 하려고 절대 노력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정신분열 증, 분리가 초래된다. 우리의 문명과 종교들이 인간의 분열된 인격에 대한 기본적 원인이 되어 왔다. 그들 은 전체적인 조화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육체 안에 있지도 않 은 사람들에게 위쪽으로 움직이는 방법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있다. 그 방법은 작용 하기 시작해서, 그 사람의 일부는 그의 몸 밖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반면에 두 번째 부분은 위쪽으로 움직이고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둘 사이에 하나의 분열이 있을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떤 때는 이 사람, 또 어떤 때는 저 사람이고, 지킬과 하이드인 것이다. 한사람이 동시에 일곱 사람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있다. 그때는 완전히 분열 된 것이다. 그는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에너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일부는 첫번 째 신체에 집착해서 아래쪽으로 움직이고, 다른 부분은 두 번째 신체에 집착하고, 또 다른 부분은 세 번째 신체에 집착한다. 한 부분은 위쪽으로 올라가는데, 다른 부분은 어딘가 다른 쪽으로 가고 있다. 그는 자신 안에 전혀 중심을 갖고 있지 않다. 구제프는 그런 사람을, 주인은 부재중인데 모든 하인이 자기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집과 같은 격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주인 자신이 부재중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와서 그 집 문을 두드릴 때, 누구든 가까이 있는 하인이 주인이 된다. 그 다음날은 문을 열어 준 또 다른 하인이 자기가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정신분열증은 어떤 중심도 없는 채로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것과 같다! 우리 는 우리 자신을 사회에다 맞춰 왔다. 그게 전부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 인은 부재중이거나 잠들어 있어서, 우리의 모든 부분이 소유권을 주장한다. 성 충동이 그 곳에 있을 때, 성이 주인이 된다. 그대의 도덕, 가족, 종교-모든 것이 거부될 것이 다. 성이 그 집의 전체적인 소유주가 된다. 그런 후에 성이 사라지고 나면, 좌절이 뒤 따른다. 그대의 이성이 주도권을 장악하고서,"내가 이 집의 주인이다." 라고 말한다. 이제는 이성이 그 집 전체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의 안식처이기를 거부할 것 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집에 대한 권리를 전체적으로 주장한다. 화가 그 곳에 있을 때는, 화가 주인이 된다. 이제 거기에는 이성도 없고, 의식도 없다. 그 밖의 어떤 것도 화를 간섭할 수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스 러웠던 사람이 화가 나게 되면, 갑자기 그 곳에 사랑은 없다. 이제 우리는 그가 사랑 스러운 사람인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인지 이해하는 데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 사랑은 그저 하나의 하인이었을 뿐이고 그 화도 단지 하나의 하인이었다. 주인은 부재 중이다. 그것이 그대가 일반적으로 그대 이외의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는 그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어떤 하인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는 하나가 아니고, 그는 하나의 합일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누구든 처음 네가지 신체들을 건너가기 전에는 위쪽을 바라보는 기법들을 가지고 실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리를 놓는 것이 불 가능한 하나의 분열이 만들어져서, 그 사람은 다시 시작하려면 다음 생을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처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법들을 수련하는 것이 더 좋다. 만약 그대가 과 거의 탄생들 속에서 처음 세 가지 신체들을 통과했다면, 그것들을 다시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거기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 영역을 알고 있다, 그대는 그 길을 이미 알고 있다. 순식간에, 그것들이 그대 앞에 찾아온다. 그대는 그것들을 알아본다-그러면 그대는 그것들을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대는 계속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주장은 언제나 첫번째 신체에서 시작하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네 번째 신체에서 이동하는 것은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다. 네 번째 신체까지 그대는 인간이다. 이제부터는 초안이다. 첫번째 신체에서 그대는 그저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 다. 오직 두 번째 신체에서 인간성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네 번째에서 그것은 완전히 꽃피어난다. 문명은 결코 네 번째 너머까지 가 본 적이 없다. 네 번째 너머는 인간을 넘어서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의 인간으로 분류할 수 없다. 붓다 같은 사람, 마하비라 같은 사람, 크리슈나 같은 사람들은 인간을 넘어서 있다. 그들은 초인이다. 위쪽을 바라보는 것은 네 번째 신체로부터의 도약의 한 가지이다. 내가 첫 번째 신 체의 바깥에서 내 첫번째 신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한 마리 동물에 불과하다. 그 유일한 차이는, 나는 인간이 될 수 있고 동물은 그 럴 수 없다는 것뿐이다. 현재 상황에 관한 한, 우리는 둘 다 인간 이하, 준인간(subhu man)이다. 그러나 나는 그 너머에 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신체에서부터 그 이후로는, 인간 존재의 꽃피어남이 일어난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네 번째 신체에 있는 누군가조차도 초인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 렇지 않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 혹은 볼테르 같은 사람은 초인처럼 보이지만, 그들 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인간존재가 완전히 꽃 피어난 것이고, 우리는 인간 이하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보다 위에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간보다 위에 있지는 않다. 오 직 붓다 같은 사람, 그리스도 같은 사람, 짜라투스트라 같은 사람이 인간 이상이다. 위쪽을 바로봄으로써, 그들은 마음의 경계를 넘어갔고, 정신체를 초월한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우화들이 있다. 모하메드(Mohammed)는 위쪽을 바라 보면서, 위에서 어떤 것이 그에게로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위(above)를 위치적인 것으로 해석해서, 하늘이 신의 거처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위쪽으로(upward)'라는 것 이 하늘을 의미하고,'아래쪽으로(downward)'라는 것은 땅 아래에 있는 층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 상징이 이해 되지 않은 것이 다. 모하메드가 위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하늘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 다. 그는 아즈나 차크라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위에서 어떤 것이 그에게로 왔다고 말할 때, 그의 느낌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위(up)'가 우리에게는 하나의 다 른 의미인 것이다. 모든 그림마다 짜라투스트라는 위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은 한 번도 아래를 향하 지 않는다. 그가 처음으로 신성을 보았을 때 그는 위를 보고 있었다. 신성은 그에게 불로서 찾아왔다. 그래서 페르시아인들이 불을 숭배해 온 것이다. 불이라는 이 느낌은 아즈나 차크라에서 온다. 그대가 위를 바라볼 때, 그 지점은 마치 모든 것이 타고 있 는 것처럼, 불처럼 느껴진다. 그 타오름 때문에, 그대가 변형된다. 낮은 차원의 존재 가 타 버리고, 그것은 존재하기를 멈춘다. 그러면 높은 차원의 존재가 태어난다. 그것 이 '불을 뚫고 지나가기(passing through fire)'가 의미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 이후로도 그대는 계속 다른 영역, 또 다른 차원속으로 이동한다. 첫 번째 신체에서 네번째 신체까지는 밖에서 안으로의 이동이다. 네번째에서 다섯 번째로 의 이동은 아래에서 위로의 이동이고, 다섯번째부터는 에고(ego)에서 '에고없음(non-e go)'으로 간다. 이제는 그 차원이 다르다. 안,밖,위 혹은 아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 는'아(I)'와 '비아(non-I)'의 문제이다. 문제는 이제, 중심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과 관계된다. 사람은 다섯 번째 신체에 이르기까지는 중심이 없는 채로 있다-여러부분으로 분열되 어 있다. 오직 다섯 번째 신체에게는 하나의 중심-하나의 합일, 일원성-이 있다. 그러 나 그 중심이 에고가 된다. 이제 이 중심이 더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도움이 되었던 한 걸음 한걸음이 더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하나의 장 애가 된다. 그대는, 그대가 건너는 모든 다리를 버려야 한다. 그것은 건너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면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하나의 중심이 만들어져 왔다. 구제프는, 다섯번째 중심을 결 정화(crystallization)라고 말한다. 이제 하인들은 없다. 주인이 전부 인수해 버린 것 이다. 이제는 주인이 정말 주인이다. 그는 깨어났고, 돌아왔다. 주인이 있을 때, 하인 들은 잠잠하다. 그들은 조용해진다. 따라서 그대가 다섯 번째 신체로 들어갈 때, 에고의 결정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제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결정화가 다시 상실되어야만 한다. 공으로, 우 주적인 것 속으로 사라져라. 오직 가진 자만이 잃을 수 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신체 이전에 '에고 없음(egolessness)'을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고, 엉터리이다. 그대가 하나의 에고를 갖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을 잃을 수 있는가? 혹은 그대 가, 그대는 많은 에고들을 가지고 있는데, 모든 하인은 하나의 에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대는 다중-에고적이고, 하나의 다중-인격이고, 하나의 다중-정신(p syche)이지만, 하나의 합일된 에고는 아니다. 그대는 에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잃을 수가 없다. 부자는 그의 부들을 포기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그는 포기할 그 무엇도, 잃을 그 무 엇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포기에 대해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부자는 포 기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는 놓아야 할 어떤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 난한 자는 언제든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그는 준비가 되어 있긴 하지만, 포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섯 번째 신체는 가장 풍요롭다. 그것은 하나의 인간 존재에게 가능한 모든 것의 최고조이다. 다섯 번째는 개인성의 절정, 사랑의, 자비의 절정, 가치 있는 모든 것의 절정이다. 가시들은 모두 잃어버려졌다. 이제는 꽃 역시 잃어버려져야만 한다. 그러면 거기에는 단순히 향기만 있을 뿐, 꽃은 없을 것이다. 여섯 번째는 향기, 우주적인 향기의 영역이다. 꽃도 없고, 중심도 없다. 가장자리는 있지만, 중심은 없다. 그대는, 모든 것이 하나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고, 혹은 이제 중 심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저 하나의 확산된 느낌이 있을 뿐이다. 어떤 분열도, 어 떤 구분-심지어는 개인에서의 '아'와'무아'의 구분, 심지어 '나'와 '상대'와의 구분- 도 없다. 구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은 둘 중 한 가지 방식으로 잃어버려질 수 있다. 그 하나는 정신분열증 적인 것으로, 많은 하위의 개인들로 분열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주적인 것이다-궁극으로 사라져 버리고, 더 큰 것 속으로, 가장 큰 것, 브라마(주2) 속으로 사라지는 것, 확장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이제 그 꽃은 없지만, 그 향기가 있다. (주2 브라마: 힌두교의 삼위일체인 비쉬누, 쉬바 ,브라마의 하나로서. 창조의 신이 다) 그 꽃 역시 하나의 방해물이지만, 오직 향기만 있을 때에만 그것은 완벽하다. 이제 는 근원도 없고, 그래서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죽지 않는다. 하나의 근원을 가진 모 든 것은 죽게 되겠지만, 이제 그 꽃이 없으니 근원도 없다. 그 향기는 원인되어진 것 이 아니므로 죽음도 없고, 그것에는 경계도 없다. 꽃은 한계가 있으나, 향기에는 한계 가 없다. 그것에는 장벽이 없다. 그것은 가고 또 가서 그 너머로 간다. 따라서 다섯 번째 신체부터는 위,아래,옆,안,밖이 문제가 안다. 에고가 있는 채로 있느냐, 에고가 없는 채로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고가 잃어버리기 가장 어려운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에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과 정이 에고 충족적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적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 나 다 하나의 결정화된 인격을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모든 사다카, 모든 구도자는 다 섯 번째 신체까지는 잘 나아갈 수 있다. 다섯 번째 신체 너머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유형의 방법이 란 것이 에고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의 방법을 사용하는 순간, 에 고가 강화된다. 다섯 번째를 넘어가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무방법(no-method)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방법 없음(methodlessness), 무기법(no-technique)을 이야기한다. 이제 '어떻게'는 없다. 다섯 번째부터는 어떤 가능한 방법도 없다. 그대는 다섯 번째까지는 하나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어떤 방법 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용하는 자가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 가 어떤 것이든 사용하면 사용하는 자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의 에고가 결정화를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화의 핵이 될 것이다. 그 때문에 다섯 번째 신체에 머물러 온 사람들은 무한한 영들, 무한한 혼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개개의 영혼을, 마치 그것이 하나의 원자인 것처럼 생각한다. 두 원자는 서로 만날 수 없다. 그들은 창문도 없고, 문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바깥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닫혀 있다. 에고는 창문이 없다. 그대는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 다. 다섯 번째 신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단자-창 없는 원자-이다. 이제 그대는 홀 로이고, 홀로이고 또 홀로이다. 그러나 이 결정화된 에고는 잃어버려져야 한다.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잃어 버릴 것인가? 길이 없을 때 그것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도망 갈 것인가? 문은 없다. 선승들은 문없는 문에 대해 말한다. 이제 문은 없다, 그런데 아직도 사람은 그것을 넘어가야만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이 결정화에 동일시되지 말라. 그저 '나'라고 하 는 이 닫혀 있는 집을 각성하라. 그저 그것을 각성하라-어떤 것도 하지 말라- 그러면 그 곳에 하나의 폭발이 있다! 그대는 그 너머에 있게 될 것이다. 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병 속에 거위 알이 하나 들어 있다. 그 거위가 알에서 나와 자라기 시작하는데, 병 주둥이가 너무 작아서 거위가 그 병 속에서 나올 수가 없다. 거위는 점점 더 자라고, 병은 너무 작아서 이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자, 이제는 거위를 구하기 위해 병을 부 수든지 해야 한다. 아니면거위가 죽을 판이다. 구도자들은 질문을 받는다-"어떻게 해 야 되는가? 우리는 어느 것도 잃고 싶지 않다. 거위도 살려야 하고 병도 건져야 한다. 자, 어떻게 할까?"이것이 다섯 번째 신체의 질문이다. 나갈 길은 없는데, 거위는 자꾸 자라고 있다. 결정화는 더욱 견고해 가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구도자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오직 두 가지만이 가능해 보인다-병을 부수고 거위를 구하든지 아니면, 거위를 죽게 내버려 두고 병을 건지는 것이다. 그 명상가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는 뭔 가를 생각해 내지만, 그 다음 순간 그것은 퇴짜를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선생은 좀 더 생각하라고 그를 돌려보낸다. 몇 , 몇 밤을 두고 그는 계속 생각하지만, 그것을 해낼 방법이 없다. 마침내 생각하 는 것이 멈추는 하나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는 소리치면서 달려나간다. "유레카!(주1 4)거위는 밖에 있다!"스승은 '어떻게'라는 질문은 결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전 부가 단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주14 유레카: 나는 그것을 찾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로 아르키메데스가 왕관 의 금의 순도 측정법을 발견했을 때 지른 소리) 그래서 다섯 번째 신체에서부터 움직이려면, 문제는 하나의 선의 공안이 된다. 그는 결정화에 대해 그저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그러면 거위는 밖에 있다! 그대가 밖에 있 게 되는 하나의 순간이 찾아온다. 거기에 '나'는 없다. 그 결정화는 얻어졌다가 잃어 버려진 것이다. 다섯 번째 신체에 있어서는 결정화-중심, 에고-가 본질적이었다. 하나 의 통로로서, 하나의 다리로서 그것은 필요 불가결했다. 그렇지 않고는 다섯 번째 신 체를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네 번째를 통과하지 않고 다섯 번째를 얻은 사람들이 있다.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은 다섯 번째를 얻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결정화를 진행해 왔다. 한 나라의 대통령 이 된 사람은 어떤 면에서 결정화를 진행해 온 것이다. 히틀러 같은 사람, 무솔리니 같은 사람은 어떤 면에서 결정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 결정화는 다섯 번째 신체 안에 있다. 만약 아래의 네가지 신체가 그 결정화와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 때 그 결정화는 하나의 질병이 된다. 마하비라와 붓다 역시 결정화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결정화는 다르다. 우리 모두는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하고자 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욕구 때문에 에고 를 충족시키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의 지름길을 택한다면, 그러면 결 국에는 우리가 상실도리 것이다. 가장 빠른 길은 부, 권력, 정치를 통한 것이다. 에고 는 얻어질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잘못된 결정화이다. 그 결정화는 그대의 전체적 인 인격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의 발에 생긴 티눈이 결정화된 것과 같다. 그 것은 하나의 그릇된 결정화, 하나의 비정상적인 성장이며, 하나의 병이다. 만약 다섯 번째 신체에서 거위가 밖에 있다면, 그대는 여섯 번째에 있는 것이다. 다 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는 신비의 영역이다. 다섯 번째까지는 과학적인 방법들이 사용 될 수 있다. 그래서 요가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요가는 하나의 방법론이며 하나의 과학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에서는 선이 대단히 도움이 된다. 그것은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로 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선은 일본에서 꽃을 피웠지만,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선의 뿌리는 요가이고, 요가는 선으로 꽃피어났다. 선이 서양에서 대단히 인기를 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양인의 에고가 결정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은 세계의 주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에고는 잘못된 과정을 통해서 결정화되어 왔다. 그것은 처음 네 개의 신체 들의 초월을 통해서 발전되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선이 서양에서 인기는 끌게 되었지 만, 그 결정화가 잘못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구제프는 첫번 째 신체에서 다섯 번째 신체에 이르기까지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가 서양에 훨씬 도움 이 될 것이다. 다섯 번째를 넘어서면 그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직 다섯 번째까지, 결정화까지 만이다. 그의 기법들을 통해서 그대는 적절한 결정화를 이룰 수 있다. 선의 뿌리가 서양에는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일시적 유행이 되어왔다. 동양에서 선은, 하타 요가에서 시작해서 붓다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대단히 오랜 과정을 통해 서 발전되었다. 수-천년의 겸손을 통해서 이루었다. 그러나 에고에서 나온 것이 아닌 수용성에서 나온 겸손이다-여성적인 마음, 수용적인 마음에서 나온 오랜 인내를 통한 것이다. 서양은 남성적-공격적이고 적극적-인 데 반해서 동양은 항상 여성적이었다. 동양은 하나의 개방성, 하나의 수용성으로 존재해 왔다. 선은 동양에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들, 다른 체계들이 아래 네가지 신체를 대상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 네가지가 그 뿌리가 되어 선이 꽃피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 선이 일본에서는 거의 무의미해졌다. 그 이유는 일본이 절대적으로 서구화 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일본인들은 가장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겸 손은 그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겸손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깊은 내면의 핵심이 아 니다. 그래서 선은 일본에서 뿌리뽑혀져 왔고, 이제 서양에서는 대중화되어 있다. 그 러나 이 대중성은 단지 에고의 그릇된 결정화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다섯 번째 신체에서 여섯 번째로 가는데에는 선이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때 뿐, 그이전도, 그이후도 아니다. 선은 다른 신체들에는 절대적으로 무용하고,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 대학 수준의 과정들을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도움이 안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해로울지도 모른다. 만약 선이 다섯 번째 신체 이전에 사용된다면, 그대는 사토리를(주15) 체험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미디가 아니다. 사토리는 거짓 사마디이다. 그것은 사마디의 일별이지만, 그것은 그저 하나의 일별에 불과하다. 네 번째 신체-정신체-에 관한 한, 사토리는 그대를 더욱 예술적으로, 더욱 예술적으로, 더욱 심미적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하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만들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행복 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화에는 하나의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 다. 그것은 그대가 네 번째 신체에서 다섯 번째 신체로 이동하는 것을 돕지 못할 것이 다. (주15 사토리: 일본 선의 용어. 순간적인 깨달음의 섬광. 깨달음의 세계를 힐끗 보 는것) 결정화를 넘어서야만 선이 도움이 된다. 거위는 어떠한 방법도 없이 병 바깥에 있 다. 그러나 선은, 다른 수많은 방법들이 사용된 이후, 오직 이 시점에서만 수련될 수 있다. 화가는 눈을 감고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는 마치 그것이 하나의 게임인 것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배우는 마치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연기할 수 있다. 사실, 그 연기는 오직 그것이 연기처럼 보이지 않을 때에만 완벽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수년 간의 노력이 들어가야 하고, 수년 간의 수련이 필요하다. 이제 그 배우는 완전히 편안하지만, 그 편안함은 하루 아침에 얻어 진 것이 아니다. 그 편안함에는 그 나름대로의 방법들이 있다. 우리는 걷고 있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만약 누가 그 대에게 어떻게 걷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나는 단지 걸을 뿐이다. 그것에 어떻게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는 어떻게가 생기게 된다. 그는 배운다. 만약 그대가 그 어린아이에게 걷는 데 방법은 필요없다-"그냥 걸어라."- 고 말하려 했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일 것이다. 그 아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왔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가 진 어른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대는 걸을 수 있다. 그냥 걸어라!"라고 말한다. 사람들 은 귀담아 듣는다. 그들은 매혹된다. 쉽다! 아무런 방법 없이 걷는다는 것은, 그러면 누구나 걸을 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서양에서 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단지 이것 때문에 말 이다. 만약 그대가 하타 요가나 만트라 요가, 혹은 박티 요가, 혹은 라자 요가, 혹은 탄트라를 본다면 그것이 대단히 길고, 매우 힘들고, 어려워 보인다. 수세기의 노고가 필요하고, 태어나고 또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기다릴 수가 없다. 어떤 지 름길, 뭔가 인스턴트적인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크리슈나무르티가 그들 의 흥미를 끈다. 그는, "그저 걸어라. 신 속으로 걸어가라. 거기에 방법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방법이라는 것이 가장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는 것, 말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 걷고 있지 않은 것처 럼 노력없이 걷는 것은 오랜 노력에 그 기반을 둔 것이다. 수고와 노력은 필수적이다. 그것들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의 한계를 가 지고 있다. 그것들은 다섯 번째 신체까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로 갈 때는 소용이 없다. 그대는 그 어디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거위는 결 코 밖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도의 요가들에게 있는 문제다. 그들은 방법에 매혹되었고, 방법에 최면이 걸려 있기 때문에 다섯 번째를 건너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항상 방법을 가지고 작업해 왔다. 다섯 번째까지는 하나의 명백한 과학이 있어서 쉽게 나아갔다. 그것은 하나의 노력이었다-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조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 섯 번째에서 그들은 방법의 영역에서 무방법의 영역으로 건너가야만 한다. 이제 그들 은 어쩔줄 몰라 한다. 그들은 주저앉아 버리고 멈추어 버린다. 그래서 수많은 구도자 득에게 다섯 번째가 그 끝이 된다. 그래서 일곱 개의 신체가 아니라 다섯 개의 신체가 있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까지만 간 사람들은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 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 그 사람은 개인(individual)에서 비개인(non-individual)으 로 옮겨가야만 한다. 선, 혹은 선처럼 노력없이 행해지는 방법들은 도움이 될 수 있 다. 좌선(Zazen)이란, 그저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것을 행해 온 사람은 이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한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간디 같은 사람은 그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그는, "나는 물레를 돌리 겠다. 무엇이든 행해져야만 한다. 이것이 나의 기도요, 나의 명상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무위(non-doing)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뜻한다. 무위는 그 나름의 영 역, 그 나름의 지복, 그 나름의 조절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로 갈 때의 일이다. 그것은 그 이전에는 이해될 수 없다.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는 심지어 무방법조차도 없다. 방법은 다섯 번째에서 잃어 버려지고, 무방법은 여섯 번째에서 잃어버려진다. 어느날 그대는, 그대가 일곱 번째에 있다는 것을 그저 발견할 뿐이다. 우주조차 사라졌다. 오직 무만이 있다. 그것은 그저 일어난다.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는 하나의 일어남이다. 원인되어진 것도 아니고, 알려지지도 않은 것이다. 오직 그것이 원인되어진 것이 아닐 때에만, 그것은 앞서 왔던 것과 비연속적이 된 다. 만약 그것이 원인되어진 것이라면 그 때 그것은 하나의 연속성이고, 그 존재는 심 지어 일곱 번째 신체에서도 잃어버려질 수 없다. 일곱 번재 신체는 전체적인 '무(non- being)',열반, 공, 비존재이다. 존재에서 비존재로 이동하는 데에는 어떤 연속성의 가능성도 없다. 그것은 그저 하 나의 도약이며, 원인되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원인 되어진 것이라면 하나의 연속성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마치 사마디 여섯 번째 신체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여섯 번째 신체에서 일곱 번째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될 수조차 없 다. 그것은 하나의 불연속성이고, 하나의 틈이다. 무언가가 있었고, 무언가가 지금 있 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도 없다. 무언가가 그저 멈춰 버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막 들어왔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관 계도 없다. 그것은 마치 한 손님이 한쪽 문으로 나가고, 다른 손님이 또 다른 문으로 들어온 것과 같다. 하나가 나가고 다른 하나가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들은 관계되어 있지 않다. 일곱 번째 신체가 궁극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대가 인과 관계의 세계 마저도 건너 버렸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본래의 근원까지.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그것 그리고 소 멸 이후에 존재하게 될 그것까지 간 것이다. 그래서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는 심지어 무방법조차도 없다.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장 애가 될 수 있다. 우주적인 것에서 무까지는 원인되어지지 않고, 준비되지 않고, 요구 되지 않은, 하나의 일어남이 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단 한 가지가 기억되어야만 한다- 여섯번째에 절대 집 착해서는 안 된다. 집착은 그대가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로 이동하는 것을 막을 것 이다. 일곱 번째로 이동하는 데에는 어떤 긍정적인 방법도 없다. 그러나 하나의 부정 적인 장애물은 있을 수 있다. 그대는 브라마, 우주에 집착할 수 있다. 그대는, "나는 도달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도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곱 번째까지 갈 수 없 다. "나는 알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여섯 번째에 머문다. 그래서 베다를(주16) 쓴 사람들은 여섯 번째에 머물렀다. 오직 붓다 같은 사람만이 여섯 번째를 건넌다. 왜냐 하면 그는,"나는 모른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궁극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하기를 거절한다. 그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안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붓다는 이해될 수가 없었다. 붓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아니다, 우리 선생님 들은 알았다. 그분들은 브라마가 있다고 말한다."붓다는 일곱 번째 신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선생도 자신이 일곱 번째 신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대가 말하는 순간, 그대는 그것과의 접촉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그것을 알면, 그대는 말할 수 없다. 여섯 번째 신체까지는 상징들은 표현될 수 있지 만, 일곱 번째에 대한 상징은 없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비어있음(emptiness)'이다. (주16 베다: 신화적 제식문학을 집대성한 인도의 성전) 중국에는 전체적으로 비어 있는 사원이 하나 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떤 상도, 경전들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맨벽, 벌거숭이 벽만 있다. 승려조차도 밖에 서 기거한다. 그는,"승려는 오직 사원 바깥에만 있을 수 있습니다. 안에 있을 수는 없 습니다."만약 그대가 승려에게 신위(deity)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면 그는, "그것을 보 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비어있음'이 있고, 아무도 없다. 그는, "그것을 보 시오! 여기! 지금!"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곳에는 오직 벌거벗은, 아무런 꾸밈이 없 는 텅 빈 사찰이 있다. 만약 그대가 대상들을 찾는다면, 그 때 그대는 여섯 번째 신체를 건너 일곱 번째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부정적인 준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부정적인 마음이 필요하다. 모크샤조차도, 구원조차도, 열반조차도, 진리조차도, 그 어떤 것도 갈망하 지 않는 하나의 마음, 신조차도, 브라마조차도, 그 어떤 것도 기다리지 않는 하나의 마음이 말이다. 그것은 그저 있다, 어떤 갈망도 없이, 어떤 욕망도 없이, 어떤 바램도 없이. 그저 '있는것(is-ness)'.그러면 그것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주마저 사라져 버린 다. 그래서 그대는 차츰 차츰 일곱 번째 속으로 건너간다. 육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에 테르체를 뚫고 나아가라. 그런 후에 아스트랄적인 것, 정신적인것, 영적인 것의 순으 로 가라. 다섯 번째까지는 그대가 작업을 할 수 있고, 그런 후 다섯 번째 이후부터는 그저 각성하고 있어라. 행하는 것(donig)은 그 때는 중요하지 않다. 의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는 의식마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있는 것(is-ness), 존재하는것(being). 이것이 우리가 가진 씨앗들의 잠재력이다. 이 것이 우리의 가능성이다. @ff 8. 되는것(becoming) 그리고 존재하는것(being) 일곱 개 신체의 긴장과 이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긴장의 근본 원인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뭔가가 되려고 노력하 고 있다. 아무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 대해 편안해하지 않는다. 그 존재는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그 존재는 거부된다. 그리고 어떤 다른 것이, 되어야 할 하나의 이 상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근본적인 긴장이, 지금 그대의 그것과 그대가 되기를 갈망하 는 그것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무언가가 되고자 욕망한다. 긴장이란, 그대가 지금의 그대에 기뻐하지 않 고, 그대가 아닌 것이 되려고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긴장은 이 둘 사이에서 만들어 진다. 그대가 되고자 욕망하고 있는 그것은 상관없다. 만약 그대가 부유해지고, 유명 해지고, 권력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면, 혹은 자유롭고 해탈되어지기를, 신성해지고 불 멸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구원, 모크샤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 때에도 긴장은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대에 반대해서, 미래에 충족되어야 할 무언가로 욕망되는 것은 무 엇이나, 긴장을 만들어 낸다. 그 이상이 불가능하면 할수록, 긴장이 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유물론자들은 대개 종교적인 사람만큼 긴장이 심하지 않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사람은 불가능한 것, 아주 먼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너무 커서 오 직 하나의 긴장만이 그 틈을 메울 수 있다. 긴장이란, 지금의 그대와 그대가 되기를 원하는 것 사이에 있는 하나의 틈을 의미한 다. 만약 그 틈이 크면 긴장이 클 것이다. 만약 그 틈이 작으면, 긴장이 작을 것이다. 만약 거기에 조금도 틈이 없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금의 그대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대는 지금의 그대 외에는 어떤 것이기를 갈망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그때 그대의 마음은 그 순간 속에 존재한다. 긴장해야 할 것은 아무것 도 없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편안해하고 있다. 그대는 도속에 있는 것이다. 나 에게는, 만약 어떤 틈도 없다면, 그대는 종교적이다. 그대는 다르마안에 있다. 그 틈에는 여러 층들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 갈망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그 긴장 은 육체적일 것이다. 그대가 특정한 몸, 특정한 체형을 찾는다면-만약 그대가 육체적 인 수준에서, 지금의 그대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갈망한다면 -그 긴장은 그대의 육체 속에 있게 된다. 사람은 더 아름다워지고 싶어한다. 이제 그대의 몸은 긴장하게 된다. 이 긴장은 그대에 첫번째 신체, 생리적인 신체에서 시작되지만, 만약 이것이 꾸준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점점 깊이 들어가서 그대 존재의 다른 층들로 퍼져 나갈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심령적인 힘들을 갈망하고 있다면, 그 때 그 긴장은 심령적인 수준에서 시작되어 펴져 나간다. 그렇게 퍼져 나가는 것은 마치 그대가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질 때와 같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지점에 떨어지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진동들은 무한 속으로 계속 퍼져 나날 것이다. 따라서 긴장은 그대의 일곱가지 신체의 어디에서든 시작될 수 있지만, 그 본래의 근원은 언제나 같다.-지금의 상태와 갈망되 고 있는 상태 사이의 틈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특정한 유형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 을 변형시키고 싶다면-만약 그대가 더 영리하고 더 지적이고 싶다면 - 그때 긴장이 만 들어진다.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만 긴장이 없다. 이 전체적인 수용이 그 기적, 그 유일한 기적이다. 자기 자신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온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뿐이다. 존재 그 자체는 무긴장이다. 긴장은 언제나 가설적인 존재적이지 않은 가능성들 때 문에 존재한다. 현재에는 긴장이 없다. 긴장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이다. 그것은 상상 에서 비롯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지금의 그대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상상되어 왔던 이러한 잠재력이 긴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상상력이 풍 부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긴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때 상상력은 파괴적이 된다. 상상력은 또한 건설적, 창조적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상상할 수 있는 그대의 모든 능력이 미래가 아닌 현재에, 그 순간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그때 그대는 그대가 존재 하는 것을 시로서 보기 시작할 수 있다. 그대의 상상은 하나의 갈망을 만들어 내고 있 지 않다. 그것은 사는 데 쓰여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현재에 사는 것은 긴장을 넘 어서 있다. 동물들은 긴장하고 있지 않다. 나무들도 긴장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긴장의 아래쪽에 있으며, 그 너머에 있지 않다. 그들의 긴장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그것은 현실화되지 않아 왔다. 그들은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긴장이 그들의 존재 안에서 폭발할 한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미래를 갈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상상력 이 활발해지는 것이다. 첫번째로 상상력이 활발해지는 것은 미래에 관해서이다. 그대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 는데 그것에 해당하는 실재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하는 실재들이 없기 때문 에 그대는 점점 더 많은 이미지들은 계속 만들어 낸다. 그러나 현재에 관한 한 그대는 대개 현재에 관련된 상상은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대가 현재속에서 상상에 잠길 수 있겠는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현재 속에서 의식적으로 현존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대의 상상력 속에 서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때 그 상상력은, 현재 그 자체 내에서 자유롭게 창조를 할 것이다. 오직 올바른 초점이 필요할 따름이다. 만약 그 상상력이 실재에 초점이 맞 춰진다면 그것은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 창조는 어떤 형태든 취할 수 있다. 만약 그대 가 시인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시의 폭발이 된다. 그 시는 미래에 대한 하나의 갈망이 아니라 하나의 현재의 표현이다. 또는 만약 그대가 화가라면, 그 폭발은 그림의 폭발 일 것이다. 그 그림은 그대가 상상해 온 어떤 것이 아닌, 그대가 알고 있던, 그대가 살아온 것으로서의 그림일 것이다. 그대가 상상 속에 살고 있지 않을 때 현재라는 순간이 그대에게 주어진다. 그대는 그 것을 표현할 수 있다. 혹은 그대는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이제, 연습된 하나의 죽어 있는 침묵이 아니다. 이 침묵 역시 현 재 순간의 표현의 한 가지이다. 그 순간은 너무 깊어서 이제 그것은 오직 침묵을 통해 서만 표현될 수 있다. 시조차도 적절하지 않다. 그림도 적절하지 않다. 어떤 표현도 가능하지 않다. 이 침묵은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꽃피어남이 다. 무언가가 그대 안에서 꽃피어났다. 침묵의 꽃이 말이다. 그리고 이 침묵을 통해서 그대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이 표현된다. 두 번째 역시 이해되어야 할 점이다. 상상력을 통한 현재의 표현은 미래에 대한 상 상도, 과거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체험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하지'의 체험 - 그대가 그것을 살고 있는 그대로 의 그것이 그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 이다. 살았던 체험이 아니라, '체험 하기'는 하나의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때 그대의 체험과 '체험하기'는 두 가지 것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이고 똑같다. 그때 거기에 화가는 없다. '체험하기'그 자체가 그 그림이 된 것이다. '체험하기'그 자체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창조자가 아니다. 그대는 창조성, 하나 의 살아 있는 에너지이다. 그대는 하나의 시인이 아니다. 그대가 시이다. 그 체험은 미래를 위한 것도, 과거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미래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과 거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 그 순간 자체가 영원이 되어 버렸고, 모든 것이 그것에서 나온다. 그것은 아나의 꽃피어남이다. 이 꽃피어남은 일곱개의 층들을 가질 것이다. 긴장이 일곱개의 층들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모든 신체 속에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그것이 생리적인 수 준에서 일어나면, 그대는 아주 새로운 의미에서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형 상이 아닌 '형상없음'의 아름다움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그대의 몸에서 이 긴장 없음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행복감, 하나의 적극적인 행복감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소극적인, 우리가 아프지 않을 때 우리가 건강하다고 말하는 의미에서의 소 극적인 행복감의 상태들을 알아왔다. 이런 건강은 단지 하나의 질병의 부정에 불과하 다. 그것에 대해 적극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단지 질병이 거기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건강에 대한 의학적 정의는, 아프지 않으면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러 나 건강은 하나의 적극적인 차원도 갖고 있다. 그것은 단지 질병의 부재가 아닌, 건강 의 현존이다. 그대의 몸은 오직 그대가 순간순간의 존재를 살고 있을 때에만 무긴장일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먹고 있는데, 그 순간이 영원이 되어 벼렸다면, 그 때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먹고 있는 바로, 그 과정이 존재하는 전부이다. 그대가 무언가를 행하고 잇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그 행함이 된 것이다. 거기에 긴장은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의 몸이 충족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혹은 만약 그대가 성적인 교감 속에 있다면, 그 때 그 성은 단지 성적인 긴장의 해 소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 만약 그 순간이 전체적이고, 전부가 되어 버려서 그대가 그 속에 완전히 존재한다면 - 그 때 그대는 그대의 몸에서 적극적 인 행복감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달리고 있는데 그 달리기가 그대 존재의 전체성이 되어 버린다면, 만약 그대가 실제고, 그대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 감각들이라면, 그 감각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 감각들과 하나라면, 만약 미래도 없고, 이렇게 달리는 데 대한 목표도 없고, 달리기 자체가 목표라면 - 그 때 그대는 적극적인 행복감을 알게 된다. 그 때 그대의 몸은 무긴장 상태이다. 생리적인 수준에서 그대는 긴장없이 사는 하나의 순간 을 안 것이다. 그리고 일곱개의 신체 각각에 있어 이와 똑같은 것이 사실이다. 첫번째 신체에서 무 긴장의 순간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에서 가능한 두가지 - 질병 즉, 하나의 적극적인 병, 소극적으로 정의된 행복감 즉, 병의 부재 - 를 이미 알고 있 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제3의 가능성 한 가지 를, 적극적인 행복감의 가능성, 건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두번째 신체, 에테 르적인 것에서 무긴장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좀더 어렵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것 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은 이해될 수가 있다. 꿈들은 기본적으로 두 번째 신체, 에테르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따가서 보통 우 리가 꿈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에테르체의 꿈들인 것이 다. 그러나 만약 그대의 육체가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 때 많은 꿈들이 그것으로 인해 만들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암약 그대가 지금까지 배가 고팠다거나 혹은 단식 중이었다면, 그 때 특정한 유형의 꿈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생리적인 꿈을 꾸는 것이 다. 그 꿈은 에테르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에테르체는 그 나름대로의 긴장이 있다. 우리는 꿈에서만 에테르체를 안다. 그래서 만약 에테르체가 긴장하고 있다면 그 꿈은 하나의 악몽이 된다. 심지어 그대의 꿈 속 에서조차 그대는 이제 긴장할 것이다. 긴장이 그대를 따라다닐 것이다. 에테르체에서의 첫번째 긴장은 그대의 욕망들의 충족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 대한 꿈들을 가지고 있다. 성은 생리적인 것이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 은 육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에테르체에 관련된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때에는 육체까지도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그대의 육체만이 충족되어야만 하는 욕구들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에테르 체 역시 욕구들을 갖고 있다. 에테르체도 그 나름대로의 배고픔들이 있다. 그것 역시 음식을 필요로 한다. 사랑이 그 음식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 대해 계속 꿈을 꾸지만, 우리는 결코 사랑 속에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사랑에 대해 꿈을 꾼다. -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것이 누구하고여야 하는 지 -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속에서 좌절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꿈을 꾸든지 아니 면 좌절 속에서 과거에 대해 꿈꾸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사랑 스럽지 않다. 에테르체에는 물론 다른 긴장들이 있지만, 사랑이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다. 만약 그대가 그 순간 속에서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때 에테르체에 무긴장의 상황 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대의 사랑에 대한 요구 사항들, 기대들, 조건 들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그 순간 속에서 사랑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요구 사항들, 그대들, 조건들은 미래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우리의 명세서들 너머에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대는 미래 에 대한 기대득 -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을 가질 수가 있다. 사랑도 역시 하나의 ' 당위'가 되어 버렸다 사랑은 언제나 '~이어야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대의 사랑이 하나의 기대, 하나의 요구 사항이 아닐 때에만, 오직 그것이 무조건적일 때에만, 그대 는 현재속에서 사랑스러울 수 있다. 또한 만약 그대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사랑스럽고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면, 그 때 그대는 결코 현재 속에서 사랑을 할 수 없다. 만약 그대의 사랑이 하나 의 관계이지, 하나의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면, 그대는 현재 속에서 사랑을 할 수 없 다. 왜냐하면 아주 미묘하게, 그것 역시 하나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는 그대에게만 사랑스러울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그대가 없을 때는 나는 사랑스 럽지 않을 것이다. 스물 세시간 동은 나는 사랑스럽지 않을 상태에 있고, 내가 그대와 함께 있는 단 한 시간 동안만 사랑스러울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한순간 은 사랑의 상태에 있다가 다른 순간은 사랑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다. 만약 내가 건강하다면, 나는 스물네 시간 동안 건강한 것이다. 한 시간 동안 건강하 다가 나머지 스물세 시간 동안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건강은 하나의 관 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 상태이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 안의 마음의 상태이다. 만 약 그대가 사랑스럽다면, 그대는 모두 -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사물들에 - 에 대해 사 랑스럽다. 사랑은 그대에게서 대상들로도 움직인다. 심지어 그대가 혼자 있을 때에도, 아무도 없을 때에도 그대는 사랑스럽다. 그것은 마치 숨쉬는 것과 같다. 만약 내가 당 신과 함께 있을 때에만 숨을 쉬겠다고 맹세하한다면, 오직 죽음이 뒤따라올 수밖에 없 다. 숨쉬는 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계에 매여 있지 않다. 그리고 에테르 체에게 사랑은 마치 숨쉬는 것과 같다. 사랑이 그것의 숨이다. 따라서 그대는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인류가 만들어 낸 사랑의 형태는 아주 위험하다. 심지어 질병도, 이런 소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 어 낸 것만큼, 말도 안되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이 잘못된 사랑의 관 념 때문에 전체 인류가 질병에 걸려 있다. 만약 그대가 누구든 상관 없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스러울 수 있다면, 그 때 그대 의 두번째 신체는 행복감의 느낌, 긍정적인 마음편함을 가질 수 있다. 그 때 악몽들은 없다. 꿈들은 하나의 시가 된다. 그 때 그대의 두번째 신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서, 그 향기가 그대에게만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며들게 된다. 그대 가 어디 있든지, 그대의 사랑의 향기가 퍼져 나간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 감응, 그 나름대로의 메아리를 갖는다. 진정한 사랑은 에고의 작용의 한 가지가 아니다. 에고는 언제나 권력을 요구하고 있 다. 그래서 그대가 사랑을 할 때조차도 - 그대의 사랑은 진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에고의 일부이기 때문에 - 그것은 폭력적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는 언제나 그것은 하나의 폭력, 일종의 전쟁이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남편과 아내 -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은 적들로 뒤바꿔 놓았 다. 그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고, 그들이 싸우지 않을 때에만 우리가 그것을 사랑이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정의는 소극적이다. 두 전투 사이의 하나의 틈, 하나의 평 화 기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전쟁 사이에 평화의 가능성은 없다. 소위 말하는 그 평화란 다 가오는 전쟁에 대한 하나의 준비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두 질병 사이에 있을 때 건 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두 싸움 사이에 있을 때 사랑이 존 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싸움들 사이에 있는 하나의 틈일 뿐이다. 그대는 스물네시간 동안 계속 싸울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 그대는 그 대의 적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사랑은 하나의 관계로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단지 하나의 마음의 상태로 서는 가능하다. 만약 사랑이 하나의 마음의 상태로 그대에게 찾아온다면, 그 때 그대 의 두번째 신체 - 에테르체 -는 편안해지고, 무긴장 상태가 된다. 그것은 이완되어 있 다. 두 번째 신체에 있는 긴장에 대한 다른 이유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가장 쉽게 이 해될 수 있는 한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될 수가 있는 것이다. 세번째 신체는 아스트랄체이다. 그것은 그 나름의 긴장들을 갖고 있다. 그 긴장들은 단지 이번 생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대의 이전생들과도 관련되어 있다. 세번째 신체에 있는 긴장은, 지금까지 그대였던 그 모든 것 그리고 그대가 갈망해 왔던 그 모 든 것들의 축적 때문이다. 그대의 전체적인 갈망, 수천 년 또 수천 년의 생들, 그리고 그 생들의 반복적인 갈망들이 아스트랄체 속이 있다. 그리고 그대는 항상 갈망해 왔 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상관 없다. 그 갈망이 거기 있는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그대의 전체적인 갈망들, 그대의 전체적인 욕구들의 창고이다. 그것이 아스트랄체가 그대의 존재 둥에서 가장 긴장된 부분인 이유이다. 그대가 명상 속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아스트랄적인 긴장들을 각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명상은 세번째 신 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명상을 통해서 이 긴장들을 각성하게 된 사람들은 내게 와 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 긴장들이 늘어났습니다." 긴장들이 늘 어난 것이 아니라, 그대가 이제 그 긴장들을 각성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대는 이전에 는 각성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아스트랄적인 긴장들이다. 그것들은 수많은 생들의 본질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어떤 특정한 단어로도 묘사될 수가 없다.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슨 말로도 그 것들에 대해서 말해질 수 없다. 그것들은 살고 나서야 알려질 수 있을 뿐이다. 욕망한다는 것, 그 자체가 그 긴장이다. 우리는 결코 그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에 대 한 욕망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욕망 없음'을 욕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적인 불합리함이 된다. 세번째 신체, 아스트랄체에서 그대는 욕망이 없기 를 욕망할 수 있다. 실제로 욕망이 없기를 바라는 그 욕망이, 가장 강한 욕망들 중의 아나이다. 그것은 지금의 그대와 그대가 되고 싶어하는 것 사이에 가장 커다란 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따라서 그대의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그리고 너무도 많은 생들 내내 너무 도 많은 욕망들을 지녀왔다는 것을 알라. 그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욕망해 왔고, 그 전부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번째 신체 - 아스트랄체- 에 대해서는 그대의 욕망 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그것들과 싸우지 말라. 욕망들에 반대되는 하나의 욕망을 만들어 내지 말라. 그저 그것들을 인정하라 그대가 욕망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고, 그것과 더불어 편안해하라. 그러면 그대는 아스트랄체에서 무긴장 상태가 될 것이 다. 만약 그대가 이런 욕망들에 반대되는 하나의 욕망을 만들어 내지 않고, 그대 안에 그 욕망들의 무리를 받아들인다면, 만약 그대가 그 욕망들의 무리속에 있을 수 있다면 - 그것들은 그대의 축적된 과거 전체이다. - 그리고 그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다면, 만약 이 받아들임이 전체적이 된다면, 그 때, 단 한순간만에 그 무리 전체가 사 라진다. 그 욕망들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욕망하는 것이라는 하 나의 배경에 반해서 지금의 모습이 아닌 어떤 것이 되기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에 반 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욕망의 대상은 상관 없다. 그것은 무관하다. 심지어 욕망 없음을 욕망하라, 그러면 그 배경이 거기에 존재한다, 그 무리 전체가 거기 존재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욕망을 인정한다면, 욕망 없음의 한 순간이 만들어진다. 그대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이제 욕망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거기에 없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심지어 그대의 욕망들조차도 인정하라. 그러면 그 욕망들은 증발해 버린 다. 그것들에 대해 행해져야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스트랄체가 편안해져서, 그것은 적극적인 행복감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 때서야 비로소 그대는 네 번재 신체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재 신체는 정신체이다. 아스트랄체에 욕망이 있는 것처럼, 정신체에는 생각들 - 모순되는 생각들, 그 생각들의 무리 전체, 자신이 전체라고 주장하는 각각의 생각 들, 마치 자신이 전부인 것처럼 그대를 사로잡는 각각의 생각들 - 이 존재한다. 그래 서 네 번째 신체의 긴장은 생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생각들 없이 존재하는 것 - 잠들 어 있지도 않고, 무의식적이지 않으면서도 생각이 없는 의식 - 그 건강이고, 네 번째 신체의 행복감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이 없으면서 의식적일 수 있겠는가? 매순간 새 로운 생각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매순간 그대 과거의 어떤 것이 그대 현재의 어떤 것 과의 갈등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대가 과거에는 공산주의자였는데 지금은 카톨릭교 도여서, 다른 어떤 것을 믿고 있지만, 과거는 아직도 거기에 있다. 그대는 카톨릭교도 여서, 다른 어떤 것을 믿고 있지만, 과거는 아직도 거기에 있다. 그대는 카톨릭교도가 될 수 있지만. 그대의 공산주의를 벗어 던질 수는 없다. 그것은 그대 안에 남아 있다. 그대는 그대의 생각들을 바꿀 수 있지만, 버려진 생각들이 항상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대는 배웠던 그 생각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생각들은 그대의 깊은 곳 속에 도달한다. 그것들은 무의식 속에 도달한다. 그대가 그것들을 버렸기 때문에 그 생각들 은 그대에게 스스로를 보여 줄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기회를 기다리면서 그 곳에 남 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올 것이다. 심지어 24시간이라는 하나의 기간 속에 도, 그대가 다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그 후에 다시 카톨릭교도가 되는 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계속되고 또 계속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할 것이다. 그래 서 그 전체적인 결과는 혼란일 것이다. 따라서 정신체에 있어서, 긴장은 혼란 - 모순 되는 생각들, 모순되는 체험들, 모순되는 기대들 - 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혼란스 러운 마음으로 마감되어 버린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은, 만약 그것이 혼란을 넘어 가려고 노력한다면 점점 더 혼란스러운 마음은, 만약 그것이 혼란을 넘어가려고 노력 한다면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혼란의 상태에서 '혼란 없음 이 얻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혼란스러워한다. 영적인 구도는 그대에게 그대의 혼란에 하나의 새로운 차원 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대의 다른 모든 혼란들이 여전히 그 곳에 있는데, 이제 하나 의 새로운 혼란이 첨가된 것이다. 그대는 이 구루를 만들고, 그리고 나서 저 구루를 만나고, 그리고 나서 또 다음 그루를 만난다. 그런데 각각의 구루가 그대에게 하나의 새로운 혼란을 가져온다. 예전의 혼란이 아직 그 곳에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새로운 것이 더 첨가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정신 병원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네 번째 신체, 정신체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 곳에서는 혼란이 그 긴장이다.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어떻게 멈출 수 있는가? 만약 그대가 다른 한 가지 특정한 생 각을 찬성하면서도 신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 그대는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멈출 수 있 다. 만약 그대가, 그대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긴장들을 계 속 가중시키는 것이다. 각성은 무선택이어야만 한다. 그대는 그대 생각의 전체적인 진행 과정, 전체적인 혼 란을 모두 각성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대가 그것을 각성하게 되는 순간, 그대는 그것 이 모두 혼란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선택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집이 통째로 버 려져야만 한다. 일단 그대가, 그것이 단지 하나의 혼란에 불과하다는 걸을 알고 나면, 그 집은 언제라도 버려질 수 있다. 그것을 버리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그대의 마음을 각성하기 시작하라. 선택하지 말라. 무선택인 채 로 있어라. "나는 유신론자이다." 혹은 "나는 무신론자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나 는 기독교이다." 혹은 "나는 힌두교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선택하지 말라. 때로는 공산주의자이고, 때로는 성자이고, 때로는 기독교도이고, 때로는 성자이고, 때로는 조인인 것을 그저 각성하고 있어라. 어떤 때는 한 가지 이데올로기가 그의 흥미를 끌 고, 어떤 때는 다른 것이 흥미를 끌지만, 이것들은 모두 변덕들이다. 그것에 대해 전체적으로 각성하고 있어라. 그대가 그대 마음의, 정체성의 순간이다. 그 때 그대는 그대의 마음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처음으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마음으 로서가 아니라 의식으로서 알게 된다. 마음 그 자체가 그대에게 하나의 대상이 된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각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대는 그대의 마음, 마음의 과정을 각성 하게 된다. 이제 그대가 이런 각성 - 마음과 동일시되지 않은 - 이다. 네 번째 신체, 정신체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동일시되어 있다 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몸이 병들었는데 누군가가 그대에게 그대가 병들었다고 말하 면 그대는 불쾌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대의 마음이 병들었는데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이 병들었군요. 당신은 미칠 것처럼 보이네요.." 라고 말하면 그대는 불쾌해한다. 왜 그런가? 누군가가, "당신의 몸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하면 그대는 그 사람이 그대를 동정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병에 대해 얘기하면 - 당신의 마음에 관한 한, 당신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고,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 그러 면 그대는 불쾌해한다. 왜냐 하면 몸보다 마음과의 더 깊은, 하나의 동일시가 존재하 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대는, "이것이 내 손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이 내 마음이다." 라고 말할 수 없 다. 왜냐 하면 그대는 "나의 마음이 나를 의미한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대의 몸을 수술하고자 하면 그대는 허락할 것이지만, 내가 그대의 마음을 수술 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아니, 이것은 너무하다! 나의 장가 상실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마음은 훨씬 더 깊이 동일시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이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과 동일시된다. 우리는 육체를 넘어선 어떤 것 - 마음 - 을 안다. 그것이 육체와 비동일시 될 수 있 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넘어선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 다. 오직 그대가 생각들을 각성할 수 있게 될 때에만, 그대는 마음이 하나의 진행 과 정, 하나의 축적물 - 하나의 기계 장치, 하나의 창고, 그대의 과거의 체험들, 그대의 과거의 배움들, 그대의 과거의 지식들이라는 하나의 컴퓨터 - 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그것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마음은 수 술될 수 있다.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로부터 내던져질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가능성들이 있다. 언젠가는 심지어 그대의 마음도 다른 누군가 에게 이식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심장이 이식될 수 있는 것처럼, 조만간 기억이 이 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은 완전히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기억은 보존되어 새로운 어린아이에게 이식될 수 있다. 그 어린아이는 그 사람의 모든 기억을 얻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잔신이 한 번도 거쳐 본 적이 없는 체험들에 대 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알고 있었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죽은 그 사람이 알고 있었던 것을, 그 아이는 알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그 사람의 마음 전체가 그 아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험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상실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음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 가능성은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인류 가 그것에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우리가 아니고, "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각성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나의 신장이 그런 것처럼 똑같이 나의 몸의 한 부분이다. 마치 내가 새로운 신장을 이식받고도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은 채 로,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은 채로 이식받은 마음 을 가지고도 이전의 자아로 계속 지낼 수 있다. 마음이란 것도 하나의 기계장치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과 동일시되기 때문에 긴장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네 번째 신체에서는 각성이 그 건강이고, 각성하지 않음이 그질병이다. 각성 이 무긴장이고 각성하지 않음이 긴장이다. 생각들 때문에, 그것과의 동일시 때문에 그 대는 그대의 생각들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하나의 장벽이 그대와, 존재에 기반을 둔 그대의 존재 사이에 형성된다. 그대의 손이 미치는 범위 안에 한 송이 꽃이 있지만, 그대는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대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꽃은 죽을 것이 고, 그대는 꽃에 대해 계속 생각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그대와 그 체험 사이에 하 나의 엷은 막 - 투명하긴 하지만 그렇게 투명하지는 않은, 투명함에 대한 하나의 환영 일 뿐인 - 을 형성해 놓았다. 예를 들어서, 그대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데 정말로 듣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 른다. 만약 그대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그대는 듣는 것을 멈춘 것이다. 그 때 그대는 앞서 가 있든지, 아니면 뒤에 가 있는 것이다. 그대는 나 와 함께 있지 않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될 과거든지 혹은 그 과거를 통해서 투사된 미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내가 한 말 그대로를 그대가 반복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대의 기계 장치가 그것을 녹음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한 말을 반복할 수 있고, 재생할 수도 있다. 그러 면 그대는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만약 내가 당신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것을 재생해 낼 수 있습니까?"그러나 녹음기는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 은 마치 하나의 기계처럼 계속 작용할 수 있다. 그대는 지금 이 곳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대는 필요치 않다. 그대는 계속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마음 - 네 번째 신체, 정신체 - 이 하나의 장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대와, 존재하는 그것 사이에 하나의 장벽이 있다. 그대가 접촉하게 되는 그 순간, 그대는 그 체험으로부터 물러난다. 그대가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 그대는 물러난다. 내가 나의 손으로 그대의 손을 잡는다. 이것은 존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곳 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대는 놓친 것이다. 그대는 알게 되었다. - 그대는 접촉 했고 체험했다. -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생각들 속에 있었다. 따라서 네 번째 신체에서는 하나의 전체로서 받아들여지는 자신의 생각의 과정을 각 성해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각성하게 되면, 그대는 그것과 비동일시된다. 그리고 마 음이라는 기계 장치와의 비동일시가 무긴장이다. 다섯 번째 신체는 영체이다. 영체에 관한 한,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가 그 유일한 긴장이다.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그대는, 그대가 그대 자신을 ㅁ르고 있다는 것을 완 벽하게 잘 알고 있다. 그대는 삶을 통과할 것이고, 그대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 이며, 그대는 이런 저런 것들을 얻겠지만,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무지의 느낌이 끊임없이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 에 대해 잊어버리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대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하나의 지속적인 동반자가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무지로부터 도망칠 수 없 다. 그대는 그대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수준에서의 질병이다. 델피 신전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썼던 사람들은 다섯 번째 신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는 다섯 번째 신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섯 번 째 신체에서는 아트마 기야나 즉, 자기-지식이 유일한 지식이다. 마하비라는 말했다.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전부를 안다."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 을 앎으로써 전부를 알수는 없지만, 그 말을 반대로 하면 옳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 함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균형을 맞추기 우해 마하비라가. "그대 자신을 앎으로써 그대는 전부를 알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내가 모든 것을 다 안다 할지라도,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모른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만약 내가 내 자신 초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면, 기본, 바탕, 궁극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섯 번째 신체에 있어서, 그 긴장은 앍과 무지 사이에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앎과 무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식 과ㅏ 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경전들에서 모을 수가 있다. 앎은 어느 곳에 서도 모을 수 없다. 이 오류, 지시과 앎 사이의 오해 아래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 들이 있다. 앎은 항상 그대의 것이다. 나는 나의 앎을 그대에게 옮길 수가 없다. 나는 단지 나의 지식을 ㅇㄻ길 수 있을 뿐이다. 경전들은 지식을 전하지, 앎을 전하지 않는 다. 경전은, '그대는 신성하다.', '그대는 아트만이다.', 그대는 자아이다.' 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앎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이 지식에 집착한다면, 커다란 긴장이 그 곳에 있개 될 것이다. 이 거 짓된, 얻어진 지식과 정보 - 빌린 지식 - 와 나란히 무지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대 는 무지하지만, 그대는 자신이 안다고 느낄 것이다. 그 때 많은 긴장이 있다. 무지한 채로 있으면서, "나는 무지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완벽하게 아는 것이 훨씬 좋다. 그러면 긴장이 있어도, 그렇게 크지는 않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은 지 식으로 자신을 현혹시키지 않는다면, 그 때 그대는 그대 자신 안에서 찾고 구할 수 있 으며, 앎이 가능하다.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 그대가 그 무엇이든 그대는 존재한 다. 이것은 부인될 수 없다. 다른 한 가지는, 그대가, 알고 있는 누군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안다는 말일 수도 있고, 그대가 오직 환영들만을 안다 는 말일 수도 있고,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 쨌든 그대가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 그대의 존재와 그대의 의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것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인격은 세 가지 차원을 통해서 생각될 수 있다. 존재, 의식, 지복(bliss) - 사트(sat) - 치트(chit) - 아난드(anand)로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 - 의식 그 차체 - 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지복이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대의 내면을 찾아본다면 그 세 번째 것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거기 있다. 그 지복스러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환희가 그 곳에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 자신을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지복이 알려지지 않는 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완전히 알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복 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계속 도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일종의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도망치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상대 - 지향적이 되 는 이유이다. 비록 한 사람이 종교적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 상대로서 신을 만들 어 낸다. 그는 다시 상대 - 지향적이 된다. 같은 오류가 되풀이된다. 그래서 다섯 번 째 단계에서는, 내면에서부터 자신에 대한 추구 속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의 추구가 아니고, 하나의 '추구 속에 존재하는 것' 이다. 다섯 번째 신체까지만 그대가 필요하다. 다섯 번째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쉬워지고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여섯 번째 신체는 우주적이다. 그 긴장은 그대 즉, 개인성이라는, 한계성이라는 그 대의 느낌과 그 무한한 우주 사이에 있다. 심지어 다섯 번째 단계에서도 그대는 그대 의 영체 속에 구현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이 여 섯 번째에게는 긴장일 것이다. 따라서 우주와의 무긴장 상태에 있는 존재를 얻으려면, 우주와 '합일되려면' 그대는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을 멈추어야만 한다. 예수는 말한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잃는 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구 절은 여섯 번째 신체에 관한 것이다. 다섯 번째까지는 이것이 이해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이것은 완전히 반 수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부터는 자기 자신을 잃 는 것, 이것이 유일한 수학이고, 유일한 이성적인 가능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상시켜 왔고, 우리 자신을 결정화 시켜왔다. 다섯 번째 신체 까지는 결정화, 개성, 개인성이 지녀질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하나의 개인 이기를 고집한다면, 그는 다섯 번째에 머문다. 많은 영적인 체계들이 다섯 번째에서 멈춘다. 영혼은 그 자신이 개인성을 가지고 있고, 그 개인성은 심지어 하나의 해탈된 상태 속에서 머물 것이라고 즉, 그대가 그대의 개성에 구현되어 나타난 하나의 개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어떤 체계든지 다섯 번째에서 멈춘다. 그런 체계 속에서는 신이란 개념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 신이 란 개념은 오직 여섯 번째 신체와 함께 찾아온다. '신' 이란 우주적인 개인성을 의미 한다. 혹은 우주적인 무개인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 라는 것이 존재 속에 있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왔던, 내 안에 있는 그 전체의 합을 말한다. 나는 그저 하나의 점이고, 존재의 무한한 연결 고리들 가운데 하나의 연결 고리에 불과하다. 만약 태양이 내일 떠오르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존재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 불꽃이 꺼져 버릴 것이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태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멀리 떨 어져 있지만, 그것은 아직도 나와 연결되어 있다. 만약 너무도 많은 행성들이 사라졌 듯 이 지구가 사라진다면, 그 때 나는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생명은 지구의 생명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존재의 사슬 속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섬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양이다. 여섯 번째에서는, 개인성이라는 느낌이 대양 적인 느낌 - 한계가 없는 느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느낌, 나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 - 에 반대되는 유일한 긴장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긴장이다. 그리고 그 '우리'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기적인 존재들뿐만 아니 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존재 그 차체의 의미이다. 따라서 '나' 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대가 그대의 에고를 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대는 지금 당장에는 그것을 이해 할 수 없겠지만, 만약 그대가 다섯 번째를 얻는다면 그것 은 쉬워질 것이다. 그것은 장난감에 애착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것을 버릴 수 있을까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년기가 가 버리는 순간, 장난감 은 내던져진다. 그는 결코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섯 번째에까지는 에고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다섯 번째를 넘어서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지금 까지 갖고 놀았던 하나의 장난감처럼 되어 버린다. 그대는 에고를 그냥 내던져 버린다. 어떤 어려움도 없다. 만약 그대가 다섯 번째 신체를 하나의 갑작스런 깨달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점진적 과정으로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 유일한 어려움일 것이다. 그 때 여섯 번째 에서 '나' 를 완전히 내던져 버리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다섯 번째를 넘어서면, 갑작스런 그 모든 과정들이 도움이 된다. 다섯 번째 이전에는, 점진적인 과정들이 쉬 워 보이지만, 다섯 번째를 넘어서면 점진적인 과정들은 하나의 일곱 번째 신체는 열반적인 것이다. 일곱 번째 신체에서의 긴장은 존재와 비존재 사 이에 있다. 여섯 번째에서, 구도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존재를 잃어버 린 것은 아니다. 그는 존재한다 - 하나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주적인 존재로서. 존재가 거기에 있다. 여섯 번째에서 멈추는 철학들과 체계들이 있다. 그것들은 신 혹 은 모크샤 즉, 해탈에서 멈춘다. 일곱 번째는 심지어 존재마저도 비 존재 속에서 잃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사신을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잃 는 것이다. '존재적인 것'이 '비존재적인 것' 이 된다. 그러면 그대는 오든 존재가 왔 다가 가는 원천에 도달한 것이다. 존재가 그 곳에서 나오고, 비존재가 그 곳에서 다시 돌아간다. 존재 그 자체는 단지 하나의 국면이다. 그것은 반드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마치 낮이 오면 밤이 뒤따라오고, 비존재가 오면 존재가 뒤따라온다. 만약 사람이 전 체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그 때 그는 비존재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전 체적인 원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비존재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심지어 우주적인 것마저도 전체적이지 않다. 왜냐 하면 비존재가 그것 너머에 있기 대문이다. 그래서 신마저도 전체적이지 않다. 신은 그저 브라만의 일부이고, 신이 브라만 그 자체는 아 니다. 브라만이란 모든 빛과 어둠이 결합된 것, 죽음과 삶이 결합된 것, 존재와 비존 재가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신은 죽음이 아니다. 신은 오직 삶을 뿐이다. 신은 비존 재가 아니다. 신은 오직 존재일 뿐이다. 신은 어둠이 아니다. 신은 오직 빛일 뿐이다. 그는 전체적인 존재의 일부분일 분, 전체의 합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생리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일곱 가지 신체에 있는 긴장들이 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생리적인 긴장, 그것의 해소, 그것의 행복감을 이해한다면, 그 대 그대는 아주 쉽게 일곱 가지 신체들 모두로 나아갈 수 있다. 첫번째 신체에서 편안함을 깨닫는 것은 두 번째로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된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두 번째에서 무언가를 깨닫는다면 - 만약 그대가 무긴장 상태의 에테르적인 순간을 느 낀다면 - 그 대 세 번째로 향하는 걸음이 내디뎌진 것이다. 각각의 신체에서, 만약 그 대가 행복감에서 시작하면, 그 다음 신체를 향한 문이 자동적으로 열리다. 그러나 만 약 그대가 첫번째 신체에서 귀머거리가 되면, 더 앞쪽에 있는 문들을 열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첫번째 신체에서 시작하고, 다른 여섯 가지 신체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육체 속에서 완전히 살라. 그러면 그대는 하나의 새로운 문이 열렸다는 것을 문 득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계속 더 앞으로 나아가라. 그러나 다른 신체들은 절 대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그것이 방해를 하고, 긴장들은 만들어 낼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 - 잊어버려라! @ff 9. 지식의 오류 당신은 무엇을 가르치며, 당신의 교리는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무의미하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며, 나의 마음은 반철학적이다. 철학은 그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못했고, 그 어느 곳으로도 인도할 수 없다. 생각하는, 질문하는 마음은 알 수가 없다. 너무도 많은 교리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교리란 하나의 허구, 인간의 허구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 아니고 하나의 발명이다.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체계들과 교리 들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지만, 이론들을 통해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 식으로 꽉 채워진 마음은 무지한 채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계시는 지식이 멈추는 순간 찾아온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무언가에 대 해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우리는 존재에 기반을 둔 채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점점 멀리 움직 인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것과의 접촉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르치는 것은 반 교조주의적, 반 철학적, 반 사색적인 체험이다. 어떻 게 존재할 것인가? 열려 있는 것, 상처입기 쉽게 되는 것,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그 것이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식은 오직 허구로, 사물들을 투사하는 것으로 인도할 뿐이다. 그것은 진리의 달성 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진리를 알고 나면 지식은 의사 소통을 하는, 알지 못하고 있는 그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일 수 있다. 그 때 언어, 교리들, 이론들이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적합 하지 않다. 그것은 잘못되기 마련이다. 존재적으로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 전체적으로 표현될 수가 없다. 그대는 그것을 가 리킬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안 것을 내가 표현하는 순간, 그 단어는 그대에게 가지만, 의미는 뒤에 남겨진다. 죽어 있는 단어가 그대에게 도달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무 의미하다. 왜나 하면 그 의미는 체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은 표현의 매개체가 될 수 있지만, 실현의 성취를 향한 수단은 될 수 없 다. 그 '안다'는 마음이 하나의 장애이다. 왜냐 하면 알고 있을 때 그대는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지식들로 꽉 채워져 있다면, 그대 안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받 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 마음이 비어 있게, 텅 비어 있게 되어야만 한다. 하 나의 자궁이, 전체적인 수용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식은 그대의 과거이다. 그것은 그대가 알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기억이 고, 그대의 축적물, 소유물이다. 그 축적물이 하나의 장벽이 된다. 그것은 그대와 새 로운 것들 사이에, 그대와 미지의 것들 사이에 온다. 겸손할 때에만 미지의 것들에 대해 열려 있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아직 도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각성하고 있어야만 한다. 기억들, 정보, 경전들, 이론들, 교리들, 교죠들에게 기반을 둔 생각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겸 손하지 않다. 지식이 그대에게 겸손함을 줄 수 없다. 오직 광대한 미지만이 그대를 겸 손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기억이 멈춰야 한다. 그렇다고 그대가 기억 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 아 니다. 그러나 앎의 순간 속에서, 체험하는 순간 속에서, 기억은 그 곳에 존재하지 않 아야만 한다. 그 순간 속에서는, 하나의 열려 있고 상처 입기 쉬운 마음이 요구된다. 비어 있음의, 공의 이 순간이 명상 즉, 디야나(dhyana)이다. 체험 그 자체가 하나의 교리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그 체험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고,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는 말할 수 있다. 언어는 그것이 무엇 이 아닌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내가 말할 때 언어는 그것을 표현 할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내가 말할 때 언어는 그것을 표현 할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내가 그것에 대한 어떤 교리도 가 능하지 않다고 말할 때, 그것이 나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이다. 나는 그 무언가를 단언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무언가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오'가 말해질 수 있지만, '예'는 말해질 수 없다. 그 '에'는 반드시 깨달아져야만 한다. 만약 지식 속에 남아 있는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공을 성취하는 데, 명상을 성취하 는 데, 하나의 방해가 될 것이다. 우선 과거의 지식, 기지(the known)의 지식, 마음의 지식의 쓸모없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미지에 관한 한, 진리에 관한 한, 그런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알고 있던 것과 동일시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에 대해 하나의 지 켜보는 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동일시도 없다면 - 만약 그대가 그대의 기억들에 대해 초연한 채로, 분리된 채로, 그것들과 동일시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면, 그 때 그대는 스스로를 그대의 기억들과는 다른 그 무언가로서 각성한다. 이 각성이 미지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 된다. 그대가 그대의 지식에 대해 하나의 지켜보는 자가 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대가 그대 자신을 아는 자로서 동일시하는 일은 점점 적어지고, 그대의 에고가, 이 지기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은 점점 적어진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기억들과 다르다면, 그 때 그 기억들은 그저 일종의 축적된 먼지일 뿐이다. 그것들은 체험을 통해서 와서 그대 마음의 부분,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은 다르다. 기억하는 자는 기억되 는 '그것'과 다르다. 즉, 안 자와 알려진 그것은 다르다. 만약 그대가 이 구별에 대해 분명하다면, 그대는 점점 더 공에 가까이 간다. 비동일시되면 그대는 열려 있을 수 있 고, 그대와 미지 사이에 끼어드는 기억들 없이 존재할 수 있다. 공은 얻어질 수 있지만, 만들어질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만들어 내면, 그 것은 그대의 낡은 마음에 의해, 그대의 지식에 의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 문에 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방법이란 오직 그대의 축적된 정보로부터 나올 수 있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어떤 방법이든 사용하려고 하면, 그대 의 낡은 마음의 연속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지는 하나의 연속성으로서 그대에 게 찾아올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불연속적인 공백으로서 찾아올 수 있을 뿐이 다. 그럴 때에만 그것은 기지 너머에, 그대의 지식 너머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도, 어떤 방법론도, 있는 모습 그대로는 있을 수 없다. 오직 "나 는 내가 축적해 온 그것과 떨어져 있다."라는 것에 대한 이해만이 있을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이해되면, 그 때는 공을 양성할 필요가 없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대가 '비어 있음(emptiness)'이다! 이제 그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사람이 공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만들어진 공은 공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래의 창작에 불과할 것이다. 그대의 창작이 결코, 무, 공일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경계들은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대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없고, 그것은 그것을 만들어 낸 마음 이상의 것이 될 수 없 는 것이다. 그대가 공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이 그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대는 공을 받아들이는 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부정적인 방법으로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준비되어질 수가 있다. 그대가 그의 지식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준비된다는 것이며, 그대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의 쓸모없음과 무의미 함을 이해했다는 의미에서 준비된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각성만이 '존재하는 그것(that which is)'이 그대를 압도하는, 그리고 '존재하는 그것'이 항상 현존하는 하나의 틈 속으로 그대를 던져 버 릴 수 있다. 이제 그것과 그대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없다. 그대는 그 순간과 하나 가, 영원과 하나가, 무한과 하나가 되었다. 이 순간을 지식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다시 기억의 부분, 일부가 된다. 그러면 그것은 상실된다. 그래서 결코 "나는 알았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미지는 미지인 채 로 남는다. 얼마나 많이 그것을 체험했든지, 미지는 여전히 알려져야 할 것으로 남는 다. 그것의 매혹, 그것의 아름다움, 그것의 매력은 똑같이 남아 있다. 앎의 과정은 영원해서, "나는 도달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결코 이를 수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다시 기억의 패턴, 지식의 패턴 속으로 빠 진다. 그러면 그는 죽어 있게 된다. 지식이 단언되는 그 순간이 죽음의 순간이다. 삶 이 멈춘다. 삶은 언제나 미지로부터(from) 미지를 향해(toward) 존재한다. 그것은 그 너머에서 와서 그 너머를 향해 간다. 그래서 내게 있어, 종교적인 사람이란 지식을 주 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신학자나 철학자일지는 몰라도, 결코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다. 종교적인 마음은 그 궁극의 신비, 그 궁극의 불가지성(unkno wableness), 그 궁극의 무지의 환희, 그 궁극의 무지의 지복을 받아들인다. 명상의, 비어 있음의 그 순간은 만들어질 수 없다. 그것은 투사될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정지하게 만들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취하게 만들었거나 아니면 그대의 마음에 최면을 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 이 아니다. 공은 찾아온다. 그것은 결코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법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방법들도 없고, 기법들도 없고, 교리 들도 없다는 의미에서, 나는 하나의 선생이 아니다. 당신은 나를 확신시켰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 확신을 하나의 체험으로 변형시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란 없다. 왜냐 하면 '어떻게'라는 것은 하나의 방법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오 직 '깨어남(awakening)'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대 안에서 그 무언가가 깨어나며, 그 때 그 체험이 그대에게 일어날 것이고, 그대는 그 무언가를 느낄 것이다. 나는 그대를 확신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적인 확신은 전혀 확신이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하나의 사실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말한 것에 의해서 왜 그대가 확신되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 다. 나의 논점에 의해서 그대가 확신된 것이거나 아니면 그대가, 내가 하나의 사실로 서 말한 것 속에서, 그대 자신 안의 진실을 본 경우이다. 나의 논점이 하나의 확신이 된다면, 그 때 그대는 '어떻게'를 묻겠지만, 만약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그대에 의해 체험되어진다면, 만약 그대가 그대 안에서 그것이 진실인 것을 깨닫는다면, 그 지식은 나와는 별개이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지식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말하 고 있는 동안에 그 체험 자체가 일어나고 있다. 지성이 확신될 때 지성은 묻는다 - 어떻게? 무엇이 그 방법인가? 지성은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어떤 교리도 주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대에게 나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기억은 하나의 축적물이라고 - 그 것은 죽은 것이고, 과거로부터의 잔재일 뿐이라고 -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 것은 그대에게 달라붙어 있는 과거의 일부이지만, 그대는 그것과 별개라는 것이다. 내 가 의미하는 것의 그 느낌이 그대에게 이르게 되고 그대가, 그대와 그대의 기억 - 그 대의 의식과 그대의 기억 - 사이의 그 거리를 일별하면, 그 때 '어떻게'라는 것은 없 다. 그 무언가가 일어났고, 이 무언가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대를 계속 꿰뚫을 수 있 다 - 어떤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대의 각성, 그대의 끊임없는 기억을 통해서 말이 다. 이제 그대는 의식과 의식의 내용물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만약 이것이 순간순간의 각성이 된다면 - 그대가 걸으면서, 말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잠자는 동안에 - 그 때 는 그 무언가가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끊임없이, 마음은 그저 기억들이 축적하기 위 해 전산화된, 하나의 내장되어 있는 과정이며, 그대 존재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각 성하면 이 각성만으로도, 이 무방법(no-method)만으로도 그대 안에 이 '무언가'가 일 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도 언제 그것이 일어날지, 어떻게 그것이 일어날지, 어디에서 그것이 일어날지 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각성이 지속되면 저절로 그것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 것은 하나의 자동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지성에서 가슴으로 가고, 그것은 지성에서 그 대의 직관적인 마음으로 가며, 그것은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어느 날, 그대는 전체적으로 깨어나게 된다.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의 '양성(c ultaivation)'으로서가 아니라, '기억하는 것(remembering)'의 부산물의 하나로서 말 이다. 어떤 교리의 양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하나의 내면의 사실, 하나의 내면 의 비전(vision)에 대해 깨어났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그대 안으로 깊이 들어간 것이 다. 그 순간이 찾아올 때, 그것은 완전히 전례없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찾아온다 - 하 나의 폭발로서. 그 폭발의 순간에 그대는 완전히 비어 있다.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존재하기를 멈춘다. 지성도 없고, 이성도 없고, 기억도 없다. 단순히 의식만이 존재한다. 무의 의식, 공의 의식인 것이다. 그 공 속에 지식이 존재한다. 그 러나 그것은 완전히 또 다른 의미에서의 지식이다. 이제 거기에는 아는 자도 알려진 것도 없다. 오직 앎(knowing)이 있을 뿐이다. 그 앎은 존재적이다. 공 속에 존재하는 것, 공인 것은 전해질 수 없다. 오직 그 통로, 그 과정만이 전해 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될 수 없고, 그것은 연습 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아니다. 연습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기억하든지, 그 렇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준비로서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이 있다면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그대가 각성하게 되는 순간, 그대의 전체 삶, 그대의 전체 삶의 방식이 바뀔 것이 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연습되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무언가를 연습하는 순간, 그것은 그 속에 있는 중요한 것을 모두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이든지 저절로 일어나야만 한다. 어떤 것이 연습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는, 그대가 공을 욕망할 수 없다는 것을 다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용어상의 모순이 아니라, 존재적인 모순이 다. 그대는 그것을 욕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욕망이 그대의 낡은 마음에서, 그대의 지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대가 무엇인지 각 성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대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각성하게 되는 순간 하나의 분리가 생기고, 하나의 구분이, 하나의 분할이 생긴다. 그대의 한 부분이 그대의 나머지 부분 들과 비동일시된다. 그러면 두 가지가 존재하게 된다 - '나(I)' 그리고 '대상으로서의 나(me)'이다. 그 '대상으로서의 나'는 기억이고 마음이며, 그 '나'가 의식이고 아트만(atman)이다. 그대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그대의 내적인 마음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 다. 이 과정은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그대의 '대상으로서의 나'의 일부, 그대의 축적물의 일부, 그대의 지식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보 다 더한 지식 - 그 '어떻게', 그 '방법'에 대한 - 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 떤 방법이 보여지면, 그것 역시 그대의 지식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대의 '대상으로서 의 나'는 강해지고, 더욱 아는 것이 많아질 것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그대의 '대상으로서의 나'에 있지 않으며, 나는 그대의 '대상으 로서의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의 '대상으로서의 나'가 들어오 면, 그 때 '전달(communication)'은 하나의 교감(communion)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토론일 뿐, 하나의 대화가 아니다. '대상으로서의 나'가 없을 때 에만 그것은 하나의 대화가 된다. 만약 그대의 '대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그대가 이 곳에 있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의 문제는 없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진 리로 또는 하나의 비 진리로 보여지든지, 하나의 사실로 또는 하나의 속임수 교리로 보여지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그저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말하는 것에 의해서 혹은 침묵에 의해서 혹은 그대를 혼란시켜서. 나의 목적은, 그대의 '나'가 그대 밖으로 나 오게 해서, 그 '나'가 그대의 '대상으로서의 나'너머에 오게 하는 하나의 상황을 만들 어 내는 것이다. 나는 너무도 많은 상황들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이것 역시 상황의 일종이다. 나는 그대에게 불합리한 것을 말하고 있다. 나는 무언 가를 얻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어떤 방법도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불합 리하다! 어떻게 내가 무언가를 말하면서, 여전히 그것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이 그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불합리함, 그 자체이다. 만약 내가 그대를 확신시키면, 그것은 그 상황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대의 '대상으로서의 나'의 부분, 그대의 지식의 부분이 될 것이다. 그대의 '대상으로 서의 나'는 계속 묻는다 - 어떻게? 그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그 방법은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변형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면 그 상황이 너무도 비이성적인 것이 되기 때문 에 그대의 마음은 만족되지 못한다. 오직 그 때에만 저 너머로부터의 그 무언가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항상 나는 상황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적인 사람들에게는, 불합리함이 틀림없이 그 상황이다. 그 연속성이 붕괴되는 현상이 만들어질 때에만 각성이 찾아온다. 바로 그 상황의 불합리함과 분별 없음(unreasonableness)이 하나의 틈을 만들어 내서, 각성 의 지점에 이르도록 그 개인을 산산조각 내고 어지럽힐 것이다. 붓다 생애의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날 아침 붓다가 어떤 마을에 찾아왔다. 그가 그 마을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다 가와 하는 말이, "나는 하느님(the Supreme)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이 존재하는 그렇 지 않은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붓다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했다. 그가 말하기를, "신이란 없다. 신은 존재한 적 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가!" 그 남자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 상황은 만들어졌다. 그 날 오후에, 다른 사람이 붓다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붓다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했다. 그가 말하기를, "신이란 없다. 신은 존재한 적 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터무니 없는 말을 하고 있는가!" 그 남자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 상황은 만들어졌다. 그 날 오후에, 다른 사람이 붓다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신이 존재합니까?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붓다 가 말하기를,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남자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자 그 날 저녁에 세 번째 사람이 붓다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는 불가지론자입 니다. 나는 믿지도 않고 안 믿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신이 존재합니 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붓다는 침묵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 남자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한 승려, 늘 붓다와 동행했던 아난다(Ananda)는 훨씬 더 산산조각이 났다. 아침에 붓다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었고, 오후에 그는 "오직 신만이 존재 한다."고 말했었고, 저녁에 그는 침묵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 날 밤 아난다가 붓다에 게 말했다. "주무시기 전에 제 질문에 답을 해 주십시오. 당신은 저의 평화를 깨뜨렸 습니다! 저는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 불합리한, 모순되는 답들로 당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붓다가 말하기를, "그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너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왜 그것에 귀를 기울였느냐? 그 대답들은 각각 질문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만약 그 대 답들이 너를 어지럽혔다면, 좋은 일이다. 그것이 너의 대답이다." 따라서 상황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 선승은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그가 그대를 그의 방에서 떠밀 수도 있고, 혹은 뺨을 때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대가 한 가지를 물었는데, 그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답을 한다. 누군가가 "그 길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데, 선승의 답변은 그 길과 전혀 관련 되어 있지 않다. "그 강을 보라!"든가 "저 나무를 보라! 그것이 얼마나 큰가!"라고 그 는 대답한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마음은 연속성을 찾는다. 그것은 불합리함들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것,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리는 지적 작용의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연역법 도 귀납법도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의 결론이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전달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저 하나의 상황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 때, 전달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전달된다. 그러 니 '어떻게'를 묻지 말라. 그저 존재하라. 만약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각성하 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때에는 그대의 무각성을 각성하라. 존재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때에는 그대의 부주의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면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 일은 일어난다. '하나의 불합리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으로 당신은 한 사람이 반드시 어떤 식 으로 동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십니까?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동요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동요되어 있기 때문에 그 들은 그들의 동요들과 그들 자신을 동일시해 버렸다.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마음 편하 게 된 것이다. 그 동요들이 습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미 동요되어 있다! 동요되어 있지 않으면서 진리를 모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요가 우리의 정상적인 상황이어서, 내가 그대를 동요시킬 때, 그대의 동요가 동요 된다. 그러면 그 동요는 부인된다. 그대는 처음으로 평온해진다. 내가 하나의 불합리 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어떤 결과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 니라 본질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어떤 결과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인 것이다. 그대는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하고 묻는다. 말해진 것이 진리로 여겨지지 않 으면 그것에 대해 무언가가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시적인, 신비적 인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내게 있어, 모든 종교 경전은 하나의 신화이며, 그 일어남을 겪은 사람에게서 나온 그 모든 단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가 아니다. 그것 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진리가 알려지기 전에는 그 '가리 키는 것'은 잊혀져야만 한다. 침묵만이 존재하는 그 너머의 경계들을 가리키는 세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은 사 트, 치트, 아난드 즉, 존재, 의식, 지복이다. 체험은 하나지만, 우리가 그것의 개념을 정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그것은 항상 하나로 체험되지만 이 세 가 지들로 개념화된다. 이 전체적인 존재, '사트', 이 전체적인 있음속에서 그대는 홀로 존재한다. 그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대는 어느 것과도 동일시되지 않는다. 순수한 있음만 이 존재할 뿐이다. 두 번째는 의식, '치트'이다. 이것은 의식적인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식적인 마음은 더 거대한 무의식적인 마음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대개 우리가 의식적일 때 우리는 무언가를 의식한다. 그 의식은 객관적이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치 트'는 순수한 의식, 무의 의식이다. 어떤 대상도 없다. 의식은 그 어떤 것 쪽으로도 방향을 두고 있지 않다. 그것은 무방향적이다. 그것은 무한하고 순수하다. 마지막으로 '아난드', 지복이다. 해복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지복이다. 행복이란 불행의 상태 '그것에 대한 기억, 그것과의 대비'를 포함한다. 기쁨 역시 그것에 대한 어떤 긴장을, 해소되어야 하고, 가라앉아야 하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지복이란 어떤 불행의 흔적도 없는 행복이며, 그것은 그 주위에 어떤 심연도 없는 기쁨이다. 그 것은 어떤 긴장도 없는 행복이다. 지복은 한쪽 극단에 있는 기쁨과 다른 한쪽 극단에 있는 슬픔 사이의 중간점이다. 그것은 중간점, 초월점이다. 그것은 슬픔의 깊이와 기쁨의 높이를 모두 갖고 있다. 기 쁨은 높이는 있지만 깊이가 없고, 반면에 슬픔은 깊이, 심연의 깊이는 있지만, 절정이 없다. 지복은 기쁨의 높이와 슬픔의 깊이 두 가지 모두를 갖고 있어서, 그 두 가지를 초월한다. 오직 그 중간점만이 그 두 극단의 전체적인 초월일 수가 있다. 이 세 가지 용어, 사트, 치트, 아난드가 그 경계이다. 즉 말해질 수 있는 최대치이 며 체험될 수 있는 최소치이다. 이것이 표현될 수 있는 마지막이며, 그 곳에서 '표현 할 수 없는 것'속으로 도약하는 경계이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 다. 사트치트아난드는 오직 하나의 표현일 뿐 그 실재가 아니다. 만약 이것이 기억되어 지면 어떤 해로우모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 트 치트 아난드'라는 표현이 하나의 실재가 도어 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중심으로 하 는 이론들, 교리들을 형성하고, 마음은 폐쇄적이 된다. 그러면 어떤 도약도 없다. 이 것이 인도에서 일어났다. 그 전통 전체가 이 세 단어를 중심으로 짜여져 온 것이다. 그렇지만 실재는 사트 치트 아난드가 아니다. 실재는 그것 너머에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단어들로 옮겨질 수 있는 그 정도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여져 야 한다. 모든 종교적인 문헌은 하나의 우화이며, 상징적이다. 그것은, 본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심지어 '사트 치트 아난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 하면 마음 이,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는 순간, 그것은 질문하고 요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러면 그것은 사트 치트 아난드를 요구한다. 그리고 만트라들을 가지고, 기법들을 가지 고, 방법들을 가지고, 그 요구에 응하는 선생들이 따라온다. 모든 요구가 응해질 수 있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요구는 불합리한 방식으로 응해진 것이다. 모든 이론들과 모 든 '구루의 무리'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궁극을 어떤 욕망의 목표로 만들지 않도록 항상 각성해야만 한다. 궁극을 하나의 소 원으로, 하나의 성취되어야 할 대상으로, 혹은 하나의 여행해야 하는 목적지로 만들지 말라.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이다! 만약 우리가 각성할 수 있게 되면 그 폭발이 일어 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가까이에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우 리는 계속 아득히 먼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는 기나긴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오지만, 우리는 결코 그 것을 보지 않는다. 왜냐 하면 우리의 눈길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기 때문이 다. 삶은 반드시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노자의 이런 말이 있다. "구하라. 그러면 그대 는 놓칠 것이다. 구하지 말라. 그러면 찾는다." @ff 10. 신성으로 가는 창들 인도 철학에서 궁극적 진리의 본성은 진, 사티얌, 선, 쉬방, 미, 순드람으로 묘사되 어 왔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신의 질입니까? 이것들은 신의 질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신에 대한 우리의 체험들이다. 그 것들은 있는 그대로는 신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지각들이다. 신은 단독 으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질이기도 하고, 혹은 전혀 어떤 질도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체질적으로 세 가지 창을 통해서 신성을 체험할 수 있다. 그대 는 아름다움을 통해서도, 진실을 통해서도, 선함을 통해서도 일별을 가질 수 있는 것 이다. 이 세 가지 차원들은 인간의 마음에 속해 있다. 그것들이 우리의 한계들이다. 그 틀은 우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신성 그 자체는 틀이 없다. 그것은 이와 같다. 우리는 그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다. 그 창문은 하늘 주위의 틀인 것처럼 보이 지만, 하늘 그 자체는 그 주위에 아무런 틀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무한하다. 오직 그 창문만이 하나의 틀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똑같은 식으로 아름다움, 진실, 선함 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신성을 일별할 수 있는 창문들이다. 인간의 인격은 세 가지 층으로 나누어진다. 만약 지성이 우세하다면 그 때 신성은 진실이라는 형상을 취한다. 그 지성적인 접근은 진실이라는 창문, 진실이라는 틀을 만 들어 낸다. 만약 마음이 감성적이면, 만약 머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 실 재에 이르면 -그 때'신성은 아름다움이 된다. 그 시적인 질은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 다. 그것은 그 틀일 따름이다. 지성은 그것에 진실이라는 틀을 부여하고, 감성은 그것 에 아름다움이라는 틀을 부여한다. 그리고 만약 그 인격이 감성적이지도 않고 지성적 이지도 않다면-만약 행동이 우세하다면- 그 때 그 틀은 선함이 된다. 그래서 여기 인도에서 우리들은 신성에 대해서 이 세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박티 요가'는 헌신의 길을 뜻하고, 그것은 감성적인 유형을 위한 것이다. 신은 아름다움으 로서 보여진다. '즈나나 요가'는 지식의 길이다. 신은 진실로서 보여진다. 그리고 '카 르마 요가'는 행동의 길이다. 신은 선함이다. 'God'라는 단어가 바로 'good'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이 단어가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지녀 왔다. 왜냐 하면 인류의 대부분이 행동적인 것이 우세하고, 지성적이거 나 감성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성이나 감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이 우세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극소수가 지성적이고, 아주 극소수가 감성적이다. 인류의 대다수가 행동적인 것이 우세하다. 행동을 통해서 신은 '선한 것' 이 된다. 그러나 반대쪽 극 역시 틀림없이 존재해서, 만약 신이 선한 것으로 지각된다면 그 때 악마는 나쁜 것으로 지각될 것이다. 행동적인 마음은 악마를 나쁜 것으로 지각할 것이고, 감성적인 마음은 악마를 추한 것으로 지각할 것이며, 지성적인 마음은 악마를 진실하지 않은 것, 가공의 것, 거짓된 것으로 지각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질들인 진실, 선함, 아름다움 그 자체로는 신성의 주변에 틀 지워진 인 간의 범주들이고, 신 그 자체로는 틀이 없다.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신 성의 질들이 아니다. 만약 인간의 마음이 어떤 것이든지 네 번째 차원을 통해서 지각 할 수 있다면, 그 때 이 네 번째 차원 역시 신성의 한 가지 질이 될 것이다. 신성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이 선함이, 우리에 의해 선택되 고 우리에 의해 보여지는 하나의 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존 재하지 않았다면 신성은 선하지 않을 것이고, 신성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고, 신성은 진실하지 않을 것이다. 신성함은 한결같이 존재할 것이지만, 우리에 의해 선택된 이런 질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인간이 지각한 것들일 뿐이다. 우 리는 신성을 다른 질들로도 지각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들이 신성을 지각하는지 어떤지를 모르며, 그들이 사물들을 어떻게 지각 하는지를 전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이 신성을 인간의 용어로 지각하지 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신성을 조금이라도 지각한다면, 그들은 우리와 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느끼고 지각할 것이다. 그들이 지각하는 질들은 우리에 게 지각되는 질들과 똑같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지적인 면이 우세하다면 그는, 어 떻게 그대가 신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 바로 그 개념이 그의 마음에는 절대적으로 낯설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진실이 아름다움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할 수가 없다. 진실은 아름다움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단순히 지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 의 시인에게, 하나의 화가에게, 가슴의 관점에서 세상을 지각하는 한 사람에게, 진실 이란 아름다움이 없는 하나의 적나라한 것이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지적인 범주일 뿐 이다. 따라서 만약 하나의 특정한 마음이 지적인 것이 우세하다면, 그 마음은 감성적인 마 음을 이해할 수 없고, 그 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많은 오해와 너무도 많 은 정의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단 한 가지의 정의도 전체 인류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다. 신은, 그대 자신만의 용어로 그대에게 찾아와야만 한다. 그대가 신을 정의할 때, 그대는 그 정의의 일부일 것이다. 그 정의는 그대에게서 나올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신은 정의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창문을 통해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 자신을, 그들 자신의 정의들을 신성에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격 속에 있는 이런 세 가지 차원들을 초월해 버린 사람에게는 신성을 보는 한 가지, 네 번째 길의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인도에서 우리는 그 네 번째에 대한 하 나의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투리야', 네 번째라고 부른다. 그대가 지적이지도 않고, 감성적이지도 않고, 활동적이지도 않으면서 단지 의식하고 있을 뿐인, 의식의 한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그 때 그대는 어떤 창문을 통해서 하늘 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집 밖으로 나왔고, 그대는 창문이 없는 하늘을 안다. 거기에는 어떤 '정해진 형태'도 없고, 어떤 틀도 없다. 그 네 번째를 깨달은 의식의 유형만이 나머지 세 가지 것들의 한계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 나머지 것들 사이에서 이해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아름다움, 진실함과 선함 사이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오 직 네 번째만이 이해할 수 있고, 너그럽게 봐 줄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유형들은 언 제나 논쟁을 할 것이다. 모든 종교들은 이들 세 가지 범주 가운데 한 가지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 이 논쟁을 해 왔다. 붓다는 이 대립에 참여할 수가 없다. 그는 네 번째 유형에 속한 다. 그는, "그것은 전부 말도 안 된다. 당신들은 신성의 질들에 대해 논쟁하고 있지 않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창문들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하늘은 어느 창문에서 봐도 똑같은 채로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신성의 질들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 의해 지각되어진 신성의 질들 이다! 만약 우리의 창문들을 파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성의 '질-없음'즉, 니르구나 로서 알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질들을 넘어간다. 그 때서야 비로소 인간의 투사가 끼 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 어떤 것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신성에 대해 말해지는 것 은 모두, 그 창문들을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다. 왜냐 하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하늘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그 창문들에 대해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창문들 너머를 볼 때, 하늘은 너무도 광대하고, 너무도 무한하 다. 그것은 정의될 수가 없다. 모든 단어들이 적용 불가능하고, 모둔 이론들이 부적당 하다. 그래서 네 번째에 있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언제나 침묵한 채로 있어 왔으며, 신성 에 대한 정의들은 처음 세 단계에서 나온 것이다. 혹시 네 번째에 있는 사람이 조금이 라도 말을 했을지라도, 그는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용어들 로 말을 해 왔다. 그는 모순된 말을 한다. 그 모순을 통해서 그는 그 무엇을 보여 주 려고 노력한다. 그 무엇은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다. 비트겐슈타인은(주1) 이런 구분을 지어 왔다.(주1 비트겐슈타인: 오스트리아의 철학 자로, 언어 철학 분야를 주로 연구했다) 그는, 말해질 수 있는 진리들이 있고, 말해질 수는 없지만 보여질 수 있는 진리들이 있다는 말을 했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물들과 관계될 수 있고, 비교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항상 '하나의 책상은 하나의 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그것이 확대 해석되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면 다른 어떤 것이 시작되는 하나의 경계 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는, 오로지 그 경계만이 정의된다. 하나의 정의란 다른 어떤 것들 모두가 시작되는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성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신성은 전체의 합이어서, 거기에는 경계가 없다. 그 곳에서부터 다른 어떤 것이 시작되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다. '다른 어떤 것'이란 없다. 신성에는 경계가 없어서 정의될 수가 없다. 네 번째는 오직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오직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그것 이 네 번째가 항상 신비로운 채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네 번째가 가장 참된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인간의 지각에 의해 물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 한 성인들은 그저 가리켜 왔을 뿐이다. 그들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아 왔다. 예수든 붓다든, 마하비라든 크리슈나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저 그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 그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손가락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는 어려움이 항상 거기에 존재한 다. 그 손가락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이 그대의 눈을 사로잡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대가 달을 보고싶다면, 그 손가락은 절대적으로 잊혀져야만 한다. 신성에 관해서는 이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 되어 왔다. 그대는 그 표시를 본다. 그리 고 그대는 그 표시, 그 자체가 진리라고 느낀다. 그 때 목적 전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그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달은 그 손가락에 의해 가리 켜질 수 있지만, 그 손가락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만약 기독교도가 성경을 잊어버릴 수 없고, 힌두교도가 기타를(주2) 잊어버릴 수 없다면, 그 때 바로 그 목적이 파괴되 어 버린다. 그 전체가 목적이 없어지고 무의미해지며, 어떤 면에서는 비종교적, 반종 교적이 된다. (주2 기타: 바가바드 기타를 줄여 부르는 말로 신의 노래라는 뜻이다) 신성에 다가갈 때면 항상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각성해야만 한다. 만약 마음을 통해서 신성에 다가가면, 신성은 그것으로 인해 물들게 된다. 만약 그대가 마음 없이, 그대 없이, 인간적인 것들의 개입 없이 신에게 다가간다면, 만약 그대가 신성을 하나의 '비 어 있음'으로, 하나의 공으로, 하나의 무로-어떤 편견도 없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 을 보려는 어떤 성향도 없이-신성에 다가간다면, 그 때 그대는 신성의 '질-없음'을 안 다. 그렇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신성에 부여하는 그 모든 질 들은 우리 인간의 창문들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신성에 부과하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하늘을 보기 위해 창문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 까? 아니다. 전혀 바라보지 않는 것보다는 그 창문에서 바라보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그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은 그 창문이 없는 하늘과 비교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창문 없이 어떻게 그 방에서 하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하늘로 가기 위해 그대가 그 창문을 통과할 수는 있지만, 그대가 그 창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창문은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 창문은 뒤 에 남겨져야만 한다. 그것은 통과되고 초월되어야만 한다. 일단 하늘 속에 있으면 어떠한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그 방 안으로 되돌아올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 때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군요.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이전의 그와 같을 수가 없다. 그 는 '정해진 형태가 없는 것', 무한을 안 것이다. 그 때에는 심지어 그 창문에서도, 그 는 하늘이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고, 창이 나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그 창문 뒤에서도 그는 속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 창문이 닫혀 있어서 방이 어두워진다 해도, 그는 그 무한한 하늘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그는 다시는 같을 수가 없다. 일단 그대가 무한을 알면, 그대는 무한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 왔던 것, 우리 가 느껴 왔던 것인 것이다. 일단 그대가 무한함, '경계-없음'을 알고 나면, 어떤 면에 서 그대는 무한해진다. 그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안다는 것 은 사랑이 되는 것이고, 기도를 안다는 것은 기도가 되는 것이고, 신성을 안다는 것은 신성이 되는 것이다. 앎은 실현이고, 앎은 존재함이다. 이 세 개의 창문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다. 각각의 창문은 그 전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창문은 변하지 않았다. 그 대가 변한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감성적이라면, 그는 그 창문을 통해서 나갔다가 들 어올 것이지만, 이제 그는 다른 창문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들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그 나머지 것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다 른 창문들 역시 같은 하늘에 도달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일단 그대가 하늘 밑에 있게 되면 그대는, 나머지 창문들도 같은 집의 일부라는 것 을 안다. 이제 그대는 다른 창문들을 기웃거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한 개의 창문으로도 충분하다. 만약 한 사람이 라마크리슈나 (주3)같은 사람이라면, 다른 창문들을 통해서도 같은 하 늘이 보이는지 보려고 다른 창문들을 기웃거릴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다른 창문들을 통해서 바라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주3 라마크리슈나 1834~1886: 인도의 신비가) 그런데 실제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늘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사람은 물어 볼지도 모르고,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 때 그는 다른 창문들을 통해서 바라볼 것이다. 지금껏 여기저기 기웃거린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 나 일단 한 사람이 열린 하늘을 알게 되면, 그는 다른 창문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 다. 그는 그들의 창문들도 같은 것에 대해 열려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할 것이다. 따라서 하늘을 안 사람은 종파적이 아니라 종교적이 된다. 종파적인 마음은 창문 뒤에 남아 있다. 종교적인 마음은 그것 너머에 있다. 하늘을 본 사람은 여기저기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창문들도 역시 가 볼지 도 모른다. 무한한 창문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이 주된 유형들이지만, 그들만이 유일한 창문들은 아니다. 가능한 수없이 많은 조합들이 존재한다. 모든 의식, 각각의 인간에게 하나의 창문이 있습니까? 그렇다. 어떤 면에서 각각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창문에서 신에게로 찾아간다. 그리 고 각각의 창문은 기본적으로 다른 어느 것과도 다르다. 무한한 것이 창문들이고, 무 한한 것이 분파들이다. 각 사람이 자신만의 분파를 하나 갖고 있다. 두 사람의 기독교 도는 같지 않다. 한 사람의 기독교도는 다른 기독교와 힌두교가 다른 만큼이나 다르 다. 일단 그대가 하늘까지 오면, 그대는 모든 차이점이라는 것이 그 집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결코 그대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가 그 안에 살 았던, 그대가 그것을 통해서 보았던, 그대가 그것을 통해서 느꼈던 그 집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그대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대가 하늘 아래로 올 때, 그대는 그대 역시 - 단지 벽돌 안에서 살고 있었던 - 하늘의 일부였다는 것을 안다. 집 안에 있는 하늘은 집 너머의 하늘과 다르지 않다. 일단 우리가 밖으로 나오면 우리는 그 장벽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벽조차도 하늘에게는 하나의 장벽이 아니다. 벽이 하늘을 조금이라도 나눈 적은 없었 다. 벽은 하늘이 나누어져 있는 것 같은 하나의 겉모습을 만들어 낸다 - 이 집은 내 것이고, 저 집은 당신 것이라는, 그리고 내 집 안에 있는 하늘은 내 것이고, 당신 집 안에 있는 하늘은 당신 것이라는 - 그러나 일단 그대가 하늘 그 자체를 알게 되면 차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 개체들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들은 잊 혀지고 오직 대양만이 남는다. 그대는 다시 내면으로 돌아올 것이지만, 이제 그대는 하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늘까지 갔다가 이런 개념으로 다시 돌아온 기독교도들은 너무도 소수인 것 같습 니다. 몇 사람 있다 - 성 프란시스(주4), 에크하르트(주5), 뵈메(주6)... 그들은 우리에게 그것은 같은 하늘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4 성 프란시스 1182~1226: 이탈리아 출신의 기독교 신비주의자 주5 에크하르트 1206?~1327: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주6 뵈메 1575~1624: 독일의 신비주의 철학자)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늘은 항상 같지만,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하늘에 대한 보고를 할 수는 없다. 하늘에 대한 보고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고되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보고된 것은 그 자체에 대해 알지 못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그 보 고가 전부일 것이다. 그때 그 차이점들은 심해진다. 그러나 보고된 모든 것은 그저 하 나의 선발된 것, 하나의 선택된 것일 뿐이다. 전체가 보고될 수는 없다. 전체의 일부 만이 보고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보고될 때, 그것은 죽은 것이 된다. 성 프란시스는 오직 한 사람의 성 프란시스가 보고할 수 있는 만큼만 보고할 수 있 다. 그가 마호멧처럼 보고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그 보고는 하늘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보고는 '정해진 형태'에서, 개인 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마음 - 기억, 교육, 체험들, 단어들, 언어, 종파, 삶 - 에서 나온다. 보고는 그 모든 것에서 나온 다. 그 의사 소통이 성 프란시스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 하면 보 고라는 것은 결코 개인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적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 면 그 보고는 전적으로 실패일 것이다. 만약 내가 나만의 개인적인 언어로 보고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다. 내가 하늘을 체험했을 때, 나는 사회 없이도 그것을 체험했다. 나는 앎의 순간에 철저히 홀로였다. 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어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보고할 때, 나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보고한다. 나는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 나는 나의 앎에 우선해서, 나에게 알려져 있는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해 야만 할 것이다. 성 프란시스는 기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내가 보는 바로는, 종교들이란 단지 서로 다른 언어들일 뿐이다. 내게 있어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원을 둔 하나 의 특정한 언어이다. 힌두교는 또 다른 언어이고, 불교도 또 다른 언어이다. 그 차이 는 차이는 항상 언어의 차이이다. 그러나 만약 언어만 알고 있고 체험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면, 그 차이는 엄청나기 마련이다. 예수는 '신의 왕국'이라고 말했다. 왜냐 하면 그는 그의 청중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용어들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국'이라는 단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해 가 되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못 이해되었다. 십자가가 뒤따랐다 - 십자가형 이 뒤따른 것이다. 예수를 이해했던 사람들은 '신의왕국'으로 의미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가 하나의 지상의 왕국을 논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붓다의 단어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 붓다는 '왕국'이란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차이에는 너무도 많은 이유들이 있다. 예수는 가난한 집 출신이다. 그의 언어는 가난한 사람의 언어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왕국'이라는 단어 는 아주 잘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붓다에게는 그 단어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 하면 붓다 자신이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 단어가 붓다에게는 무의 미했지만, 예수에게는 의미가 깊었다. 붓다는 하나의 거지가 되었고, 예수는 하나의 왕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머 지 한 극이 의미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 미지의 극은 그 미지에 대해 표현적인 것이 된다. 붓다에게 걸식은 가장 미지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미지의 형태, 걸인의 형태를 취했다. 그에게 있어 비구(bhikku) 즉, '걸인'이 가장 의미심장한 용어가 되었 다. '비구'라는 단어는 결코 인도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곳에는 수많은 걸 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스와미(swami)'즉 '주인'이라는 단어를 사 용한다. 어떤 사람이 산야신이 될 때, 그가 포기할 때, 그는 하나의 스와미, 하나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붓다가 포기했을 때, 그는 하나의 비구, 하나의 걸인이 되었다. 붓다에게 이 단어는, 예수에게는 전할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전해 주었다. 예수는 유태인의 문화에서 빌려 온 용어들로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그 무엇을 바꿀 수 있었지만, 그 언어 전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했더라면 아 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성 프란시스가 등장했을 무렵, 하나의 기독교 문화가 이미 그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발 전해 있었다. 따라서 성 프란시스는 그리스도 그 자신보다 더 기독교적이었다. 그리스 도는 유태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전 생애는 유태적이었다. 그렇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대가 기독교도로 태어난다면, 그 때 기독교는 그대에게 표현적인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대에게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대가 그것을 알면 알수록, 그것은 그대에게 덜 의미 있게 된다. 신비가 상실된다. 기독교도에게 힌두교의 태도는 더 의미 있고, 더 의미심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지에 대해 표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내가 보는 바로는, 태어날 때의 종교와 함께 남아 있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태어날 때 그에게 주어진 태도들과 믿음들은 언젠가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 험은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내어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미지의 구석들까지 가 보아야 하고,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흥분을 느 껴 보아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한다. 기독교도는 그가 기독교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 장벽이 된 다. 불교도는 그가 불교를 알기 때문에 불교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 다'라는 바로 이 느낌이 방해가 된다. 오직 미지만이 자력적인 것이 되고, 불가해한(o ccult) 것이 될 수 있고, 비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사람은 그의 출생 상황을 초월해야만 한다. 기독교도로 태어나고, 힌두교도로 태어 나는 것은 그저 상황적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출생 여건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종교에 관한 한, 사람은 두 번 태어나야만 한다. 사람은 반드시 미지의 구석들까지 가 보아야만 한다. 그러면 그 전율이 거기에 있다. 종교들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보완적이다. 그들은 다른 것들을 위해 일해야만 한 다. 그들은 다른 것들을 인정해야만 한다. 기독교도나 힌두교도나 유태교도는 개종의 전율을 알아야만 한다. 개종의 전율은 변형을 위한 바탕을 만들어 준다. 누군가가 서 양에서 동양으로 올 때면 언제나, 거기에 새로운 그 무엇이 있다. 동양적인 태도는 너 무도 달라서 낯익은 범주들에 넣을 수가 없다. 그 태도 전체가 그대가 낯익은 것과는 너무도 반대여서, 만약 그대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대 자신이 변해야만 할 것이다. 동양에서 온 누군가가 서양으로 갈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반드시 일어 나야 한다. 사람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하나의 변화를 창조해 낼 것은 바로 미지의 것이며, 낯선 것이다. 인도에서 우리는 기독교 같은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우리는 하나의 신학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바티칸 즉, 교황청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사원들 은 있지만, 교황청은 없다. 동양적인 마음은 기본적으로 비논리적이어서 어떤 의미에 서는 혼돈스럽기 마련이다. 그것은 개인적이기 마련이다. 그것은 조직적일 수가 없다. 카톨릭 사제는 아주 다른 그 무엇이다. 그는 하나의 조직의 일부가 되도록 훈련된 다. 그는 계급 조직의 그 어딘가에 속한다. 그리고 그런 방법이 통한다. 하나의 제도, 하나의 계급 조직은 논리적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 다. 힌두교는 누구든 개종시키려고 한 적이 없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스스로 개종을 했 다 할지라도, 힌두교는 그 사람과 더불어 편안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개종의 종교이 고, 비조직적이다. 카톨릭에 존재하는 의미에서의 성직자는 없다. 힌두교의 승려는 그 저 하나의 떠돌아다니는 개인이다 - 어떤 계급도 없고, 어떤 제도에도 속함이 없다. 그는 절대적으로 뿌리가 없다. 바깥 세상에 관한 한, 이러한 접근은 하나의 실패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개인에 관한 한, 내면적 깊이에 관한 한, 그것은 하나의 성공이 기 마련이다. 비베카난다(주7)는 기독교에 대단히 매료되었다. 그는 카톨릭 사제의 형식에 기반을 두고 라마크리슈나의 체제를 만들었다. 이것은 동양에는 아즈 이질적인, 아주 이국적 인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서구적이다. 비베카난다의 마음은 전혀 동양적이 아니 었다. 그리고 내가 비베카난다를 서양적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에크 하르트와 성 프란시스를 동양적이었다고 말한다. 시본적으로 그들은 동양에 속했다. (주7 비베카난다 1863~1902: 근대 인도의 종교 및 사회 개혁 지도자로 라마크리슈나 의 제자였다) 예수 자신은 동양에 속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동양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양에 속한다. 예수는 기본적으로 동양적이었다. 그는 반 교회적이었고, 반 조직적이었다. 그것이 그 투쟁이었다. 서양적인 마음은 논리, 이성, 체계, 논쟁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것은 아주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그 표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광범위할 것이지만, 결 코 강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조직화된 종교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커튼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없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창문을 가리고 있다. 그들은 장애물들이다. 동양적인 마음이 확장되어 온 것처럼 서양적인 마음도 확장되어야 합니까? 서양적인 마음은 과학에 관한 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의식에 있 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종교적인 마음이 태어날 때는 언제든, 거기가 서양일지라도 그 마음은 동양적이다. 에크하르트에서, 뵈메에서 그 마음의 질은 바로 동양적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마음이 동양에서 태어날 때는 언제든, 그것은 서양적이기 마련이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은 지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을 의 미하고, 동양은 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을 의미한다. 서양은 안정(equiliblium)을 의미하고 동안은 불안정을 의미한다. 서양은 이성적인 것을 의미하고 동양은 비이성적 인 것을 의미한다. 터튤리언(주8) 은 서양에서 가장 동양적인 마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내가 신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신을 믿는 것은,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기본적인 동양의 태도이다.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도 서양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서양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이성적 일 때에만 당신이 그 무엇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하나 의 믿음이고, 하나의 미신이다. (주8 터튤리언 155/160?~220?: 서구 기독교의 사상과 용어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던 초기 기독교 신학자) 에크하르트 역시 하나의 동양적인 마음이다. 그는, "만약 당신이 가능한 것들을 믿 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증명(argument)을 믿는다면, 그것은 종교 가 아니다. 이것들은 과학의 일부들이다. 오직 당신이 불합리한 것을 믿어야만, 마음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 당신에게 찾아온다."라고 말한다. 이 개념은 서양적이지 않다. 그것은 동양에 속한다. 반면에 공자는 하나의 서양적인 마음이다. 서양에 있는 사람들은 공자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은 결코 노자를 이해할 수는 없다. 노자는, "당신은 하나의 바보이다. 왜 냐 하면 당신은 합리적이기만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분별 있는(reasonab le)'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합리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그것만의 자리가 있 어야만 한다. 오직 한 사람이 합리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이기도 해야만, 그가 분별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은 결코 분별이 있을 수가 없다. 이성은 그 자신만의 비합 리적인 어두운 구석을 갖고 있다. 하나의 아이는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다. 하나의 꽃은 어둠 속에서, 땅 밑의 뿌리 속에서 태어난다. 어둠이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그 것이 그 기반이다. 그것은 가장 의미심장하고, 생명을 주는 최대의 것이다. 서양적인 마음은 세상에 기여할 그 무엇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 다. 동양적인 마음은 오직 종교로만 기여할 수 있고, 과학기술이나 과학은 기여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완적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차이점들과 그들의 보완점 모두를 안다면, 그때 더 나은 세계 문화가 그것에서 태어날 수 있다. 만약 과학이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서양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만약 서양이 어떤 것이든 종교를 만든다면, 그것은 신학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서양에서는 신을 입증 하기 위해서 그대 자신에게 증명들을 제시한다. 신을 입증하기 위한 증명들을 말이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대는 신을 입증할 수 없다. 바로 그 노력이 무의미한 것이다. 입증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신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과학적 결론일 것이다. 동양에서 우리는, 신선이란 입증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그대의 증거들에 지칠 때, 체험 그 자체 속으로 뛰어들어라. 신성 그 자체 속으로 뛰 어들어라. 서양적인 마음이 사이비 -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양적인 마음은 사이비 - 과학적일 수밖에 없다. 서양에서는 하나의 위대한 신학을 만들어 냈지만, 종 교적인 전통은 만들어 내지 못했다. 똑같은 방식으로, 동양에서 우리가 과학 쪽으로 어떤 시도를 할 때마다, 우리는 기술자들만을 만들어 낼 뿐, 과학자들,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은 만들어 내지 못하고, 혁신가들, 창조자들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서양적인 마음을 가지고 동양에 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오로지 오해만 할 것이다. 그 때 그대는 그대의 오해를 하나의 이해로서 가지고 다닐 것이다. 동양에서의 태도는 범주로 볼 때 정반대이다. 반대적인 것들만이 보완적이다 - 남성적 인 것과 여성적인 것처럼 말이다. 동양적인 마음은 여성적이다. 서양적인 마음은 남성적이다. 서양적인 마음은 공격적 이다. 논리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기 마련이다. 종교는 마치 하나의 여성처럼 수용적 이다. 신은 오직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결코 발견되거나 발명될 수 없다. 사람은 하나의 여성처럼 되어야만 한다. 전체적으로 수용적인 것, 그저 열려 있고 기 다리는 것. 열려 있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명상'이라는 말로 의미되는 것이다. 라마크리슈나는, 박티의 접근법이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 니까? 그렇지 않다. 라마크리슈나는, 박티 요가가 그에게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 장 적합한 접근이라고 말했다. 박티 요가는, 하늘 아래에서 그가 거쳐왔던 기본적인 창문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시대에 접합한 혹은 부적합한 접근법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시대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다. 여러 세기들은 동시대적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현대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20세기 전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적으로 과거인 것 은 없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현재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미래인 것도 없다. 누군가 에게 그것은 현재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현재 또한 없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과거이 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아직 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대로의 시대에 대해서는, 범주적으로 어떤 단언도 할 수 없다. 라마크리슈나는 하나의 헌신자였다. 그는 기도와 사랑을 통해서, 감성을 통해서 신 에게 찾아갔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실현해 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것이 모든 사람 에게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그의 방식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려 울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공감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들의 체험들에 비추어서 다른 사람들을 본다. 그래서 라마크리슈나에 게, 그 길이 박티 요가 즉, 헌신의 길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싶어한다면, 이 사대는 최대로 지적이고 최대로 과학적이고 최대로 과학 기술적이면서, 최소로 헌신적이고 최소로 감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라마크리 슈나가 옳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옳은 것이었으며,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 들에게는 옳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결코 더 큰 세상에는 영 향을 미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촌락에, 비과학 기술적이고, 비과학적인 마음에 속한 다. 그는 교육받지 못했고, 더 큰 세상을 접하지 못한 촌부였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그의 시골스러운 언어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지성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감 성이 전부였던 소작농 세계의 일부였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 고 있었던 것은, 그가 활동했던 세계에서는 전부 옳았다.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세계 에는 그렇지 못하다. 지적인 것, 활동적인 것, 감성적인 것, 이 세 가지 유형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 남 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에 항상 균형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들 사이에는 항상 하나의 균형이 존재할 것이다. 그 균형은 오랫동안 상실된 채로 있을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상실되면, 곧 되찾아질 것이다. 서양은 그 균형을 잃어 왔다. 지성이 우세한 요소가 되었다. 그대가 균형을 잃어 왔 기 때문에 라마크리슈나가 말한, "헌신이 이 시대를 위한 길이다."라는 말이 그대의 주목을 끌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베카난다는 그 반대를 말한다. 동양 역시 균형을 잃 어 왔기 때문에 그에게는 지적인 것이 우세하다. 이것은 단지 존재하고 있는, 극단적 인 상태의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완적이다. 라마크리슈나는 감성적인 유형이었고, 구의 수제자는 지적인 유형이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짝짓기인 것이다. 라마크리슈나 는 절대적으로 여성적이다. 비공격적이고, 수용적인 것이다. 성은 오직 생물학에만 존 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모든 분야에, 언제나 양극이 있을 때는 성이 있고, 그 반대편이 매력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비베카난다는 어떤 사람이든 지적인 사람에게는 결코 매력적인 것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반대극이 아니었다. 뱅갈(bengal)에는 지적인 거장들이 있었다. 비베카난다는 그들을 방문하러 가서는 빈 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매력적 이지 않았던 것이다. 라마크리슈나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지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비베카난다가 그렇지 못했던 모든 것, 그가 찾고 있었던 모든 것이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의 정반대였다. 그래서 그가 라마크리슈나의 이름으로 가 르쳤던 것은,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그 자체와 같은 정신 속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든지 비베카난다를 통해서 라마크리슈나에게 가는 사람은 결코 라마크리슈나에게 는 갈 수 없다. 라마크리슈나에 대한 비베카난다의 해석을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든 라 마크리슈나 자신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 해석은 반대극들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사람들이, "비베카난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결코 라마크리슈나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옳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비베카난다 가 없었다면 라마크리슈나에 대해서는 결코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베카난다로 인해 라마크리슈나에 대해 알려진 것은 모두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잘못 된 해석이다. 이것은 그의유형이 라마크리슈나의 유형과 아주 상반되기 때문이다. 라 마크리슈나는 결코 논쟁을 하지 않았고, 비베카난다는 논쟁적이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무식했고, 반면 비베카난다는 지식인이었다. 비베카난다가 라마크리슈나에 대해 한 말 은 비베카난다라는 거울을 통해서 말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짜가 아니었다. 그 럴 수가 없었다. 이것이 언제나 있어온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붓다는 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마하비라와 예수는 영적으로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을 매 료시킨다. 이런 반대되는 것들이 그 다음에는 조직, 체제를 만든다. 그들은 해석을 할 것이다. 그 제자들이 바로 왜곡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 는 일이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ff 11 올바로 질문하기 이론적인 질문들을 하지 말라. 이론들은, 해결은 더 적게 하고 혼돈은 더 많이 일으 킨다. 이론들이 없다면, 문제들도 더 적어질 것이다. 이론들이 질문들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질문들은 이론들에서 나온다. 그리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지 말라. 철학적인 질문들은 보기에는 질문처럼 보이지 만, 그렇지 않다. 그것이 지금껏 답변이 가능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만약 하나의 질문 이 진정한 질문이라면, 그것은 답변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언어 상의 혼동일 뿐이라면 그 때 그것은 답변될 수 없다. 철학은 수세기를 거듭하면서 대 답을 계속해 왔지만, 그 질문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 철학 적인 질문들에 대답을 하더라도 그대는 결코 그것에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질 문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은 본질적으로 답변이 불가능한 그런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을 하지 말라. 예를 들면, 만약 그대가'누가 세상을 창 조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답변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불합리하다. 형이상 학적인 질문들이 진정한 질문들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답변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질문들은 해결될 수는 있지만, 답변될 수는 없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존재에 근거한 질문들을 하라. 사람은 자신이 진짜 묻고 있 는 것이 무엇인지를 각성해야만 한다. 그 질문이 진짜 그대에게 대단한 것을 의미하는 그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답변되면 그대에게 하나의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인가? 그 대의 존재에 그 무엇이 더해질것인가? 그것을 통해서 그대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변 형될 것인가? 오직 그러한 질문들만이 종교적이다. 종교는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질문들에 관심을 가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은 그저 호기심에서 나온 것일 수 있지만, 하나의 문제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대가 그것 에 개입된 것이다. 그것은 그대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든 질문하기 전에 깊이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고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그 무엇, 그대가 혼동하고 있는 그 무엇, 그대 가 개입되어 있는 그 무엇을 질문하라. 그때에만 그대가 진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미리 운명지워져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철학저인 질문이다. 우리의 삶은 미리 운명 지워져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그렇다'이기도 하고, '아니다'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가지 답 모두가 삶에 대한 모든 질문들에 대해 정답이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 그대 안에 있는 신체적, 물질적인 어 떤 것이든, 정신적인(mental) 어떤 것이든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바로 그대의 의식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신체와, 그대의 물질적인 존재와 동일시되면, 같은 비율만큼 그 대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그 때 그대는 하나의 기계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 가 그대의 물질적인 존재와, 몸 혹은 마음 중 어느 한쪽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 만 약 그대가 그대 자신을 분리되어 있는 다른 그 무언가로 그리고 몸-마음(body-mind)위 에 있는, 초월해있는 그 무엇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 때 그 초월적인 의식은 미리 결 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며, 자유롭다. 의식은 자유를 의미하 고, 물질은 예속(slavery)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어떻게 정 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그대가 "나는 몸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때 그대에 대한 모든 것은 완전히 미리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오직 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의식과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또한 미리 결정되어 있다 는 것을 믿지 않는다. 종교적이고 의식을 믿는 사람들이 대개,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아주 모순된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 경우이다. 의식을 알게 된 사람은 자유를 안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영적인 사람만이 미리 결 정된 것이란 결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각성은 그대가 몸과 완전히 비동일시 되어 있을 때에만 찾아온다. 만약 그대가 그대를 그저 하나의 물질적인 존재라고만 느 낀다면, 그 때 어떤 자유도 가능하지 않다. 물질과 함께, 자유는 가능하지 않다. 물질 이란 자유로울 수 없는 그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반드시 인과의 사슬안에서 흘러가야 만 한다. 일단 그 누군가가 의식, 깨닮음을 얻게 되면, 그는 인과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는 완전히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대는 그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는 매순간을 살기 시작한다. 그의 존재는 원자적이(atomic)된다. 그대라는 존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과거에 의해 결정된, 하나의 강과 같은 사슬이 다. 그대의 미래는 실제로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부산물의 한 가지일 뿐이다. 그대의 미래를 결정하고, 형성하고, 공식화하고, 조건화시키는 것은 오직 과거이다. 그것이 그대의 미래가 예측 가능한 이유이다. 스키너(주1)는, 인간이 다른 그 무엇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유 일한 어려움은, 그 사람의 전체적인 과거를 알 수 있는 수단을 고안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과거를 알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작업해 왔던 사람들에 근거한다면 스키너가 옳다. 왜냐하 면 그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가 지고 실험을 해왔고, 그들이 모두 기계적인 존재들이라는 것, 그들의 내면에 자유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주1 스키너 1904~: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그러나 그의 연구는 한정되어 있다. 어떤 붓다도 그의 실험실에 연구대상으로 간 적 이 없다. 만약 단 한 사람이 자유롭다면,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기계적이지 않고 예 측할 수 없는 존재라면, 스키너의 전체이론은 무너진다. 만약 인류 역사 전체에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고 예견될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은 잠재적으로 자유롭고,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가능성 전부는, 그대가 그대의 몸에 주안점을 두느냐, 아니면 그대의 의식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그대가 삶의 외부적인 흐름의 하나에 불과 하다면, 그 때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 그대가 또한 어떤 내적인 존재 이기도 한 것인가? 미리 공식화된 답은 주지 말라. "내가 영혼이다."라고 말하지 말 라. 만약 그대가 그대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면, 그 때 그 점에 있어서 정직하라. 이 정직함이 의식이라는 내면의 자유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그대는 모든 것이 단지 외부의 일부분이라 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몸은 바깥에서 왔고, 그대의 생각들도 바깥에서 왔고, 심지어 그대의 자아조차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대에게 주어져 온 것이다. 그것이 그 대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 왜냐하면 그들이 그대의 자 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의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대에게 주어진 것인데, 그 안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대란 외부의 것들이 겹겹이 축 적된 층들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온, 이런 그대의 인격과 동일시 되면, 그때에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바깥에서 온 모든 것을 각성하게 되고, 그것들과 동일시되지 않는 상태가 되라. 그 때 외부적인 것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어떤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진공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 진공이 외부와 내부 사이의 통로, 문이다. 우리는 진공을 너무 두려워해서 외부의 축적물에 집착한다. 축적물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날 정도로, 진공 속에 남아 있을 정도로 충분히 용감해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충분히 용감하지 않다면, 그대는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이 그대를 채우게 될 것 이다. 그러나 진공 속에 존재하는 이 순간이 명상이다. 만약 그대가 충분히 용감하다 면, 만약 그대가 이 순간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곧 그대의 전 존재가 자동적으로 내면으로 방향을 돌릴 것이다. 바깥에서 온 것 중에,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대의 존재는 내면으로 방향 을 돌린다. 그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온, 모든 것들을 초월한 그 무엇이 그대라는 것을 처음으로 안다. 이제 그대는 '되는 것(becoming)'과는 다른 어 떤 것이다. 그대는 '존재(being)'인 것이다. 이 존재는 자유롭다. 아무것도 그것을 결 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이다. 어떤 인과의 사슬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의 행위들은 과거의 행위들과 관련되어 있다. A는 B가 가능해지는 하나의 상황 을 만들어 냈다. B는 C가 꽃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대의 행위 들은 과거의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이 시작도 없는 시작으로 돌아가서, 끝도 없는 끝을 향해서 계속된다. 그대 자신의 행위들만이 그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위들도 그대의 행위들과 하나의 연속성을 갖는다. 그대의 사회, 그대의 역사,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대의 현재 행위들과 관련되어 있다. 전체 역사가 그대 안에서 꽃피어나게 된 것이다.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이 그대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대의 행위는 분명하 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 그림에서 너무도 미세한 부분인 것이다. 역사 는 너무도 활기찬 살아있는 힘이고, 그대 개인의 행위는 그것이 너무도 작은 부분이 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상태들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다.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와 그 사회의 상태들이다. 위대한 인간들이 위대한 사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인간들을 만드는 것은 위대한 사회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가 옳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들을 결정해왔다. 그대는 그저 그것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을 뿐이다. 전체 진화의 과정은 그대의 생물학적 세포들을 만드는 데 종사해 왔다. 그대 안에 있는 이 세포들은, 그리고 나면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대는 그대가 아버 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체의 생물학적인 진화가 작용해서, 행위하도록 그대를 통해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체 진화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위들이 다른 과거 행위들과의 관련 속에서 발생하는 한가지 방식이다. 그 러나 한 사람이 깨닫게 될때,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행위들은 과 거의 행위들과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다. 어떠한 행위도 이제는 오직 그의 의식으로부 터 나온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깨달은 사람이 예견될 수 없는 이유이다. 스키너는, 만약 그대의 과거 행위들이 알려진다면 그대가 무엇을 할것인지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당신은 한 마리의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그가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고 한 옛날 속담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대는 말이 물을 먹도록 강요할 수 있다. 그대는 말이 물을 먹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분위기를 만 들어 낼 수 있다. 말은 강요될 수 있고, 그대 역시 강요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의 행위들은 상황들에 의해, 형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대가 한 사람의 붓다를 강가로 데려갈 수 있다 하더라고, 그가 물을 먹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대가 그를 강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불가능해질 것이다. 어떤 더위도 그가 그 렇게 하도록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천 개의 태양이 그를 내리쬐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붓다는 한 가자 다른 행위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 근원은 다른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의식적으로 행위할 것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 때 그대가 행 위하는 매순간마다, 그것은 다른 행위들과의 연장선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자유 롭다. 이제야 그대는 행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그대가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를 말할 수 없다. 습관들이란 기계적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반복한다. 그대가 무언가를 반복하면 할수 록, 그대는 더욱 효율적이 된다. 효율성이란 이제 의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을 의미한다. 타자를 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된다는 뜻이다. 비록 그가 어떤 다른 것 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타자치는 것은 계속된다. 몸이 타자를 치고 있고, 그 사 람은 필요하지 않다. 효율성이란 그 일이 너무도 확실해서 노력이 가능하지 않다는 뜻 이다. 자유에 있어서는, 노력이 항상 가능하다. 하나의 기계는 잘못들을 할 수 없다. 잘못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대의 행위들이 그대의 이전 행위들과 하나의 사슬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정되어 있다. 그대의 유년기가 그대의 청년기를 결정하고, 그대의 청년기 가 그대의 노년기를 결정한다. 그대의 탄생이 그대의 죽음을 결정한다. 모든것이 결정 되어 있다. 붓다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원인을 제공하라. 그러면 그 결과가 거기 있 을 것이다." 이것이 모든것이 결정되어 있는 인과의 세계이다. 만약 그대가 전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행위한다면, 하나의 전혀 다른 상황이 존재한 다. 그 때 모든 것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존재한다. 의식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것은 정지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변한다. 그것은 생생하 게 살아 있다. 그것은 확장을 계속 한다. 그것은 새롭고, 신선하고, 계속 젊어진다. 그 때 그대의 행위들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선 일화가 하나 떠오른다. 어떤 선사가 그이 제자에게 특정한 질문 한 가지를 했다. 그 질문에 꼭 맞는 정확한 답이 나왔다. 그 다음 날 선사는 제자에게 꼭 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저는 어제 이 질문에 답을 했습니다."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선사가 말했다. "이제 내가 다시 너에게 묻고 있다."제자는 같은 답변을 반복했다. 선사가 말하기를,"너는 모르고 있다." 제자가 물었다. "하지만 어제 제가 같은 식으로 답했을 때,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셨 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답이 맞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지금은 왜 마음을 바꾸 셨습니까?" 스승이 답하기를, "무엇이든 반복될 수 있는 것은 너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 다. 그 답은 너의 기억에서 나온 것이지, 너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진정으로 알았다면, 그 답은 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 이다. 나는 어제 너에게 질문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모든 상황이 다르다. 너 역시 다른데, 답은 같다. 나는 다만, 네가 그 답을 반복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기 위 해서 다시 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반복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덜 반복적이 된다. 오직 죽은 사람만 이 일관적일 수 있다. 산다는 것은 비일관성이고, 삶은 자유이다. 자유는 일관적일 수 가 없다. 무엇과 일관적이라는 말인가? 그대는 오로지 과거와 일관적일 수 있을 뿐이 다. 하나의 깨달은 사람은 오직 그의 의식 속에서만 일관적이다. 그는 결코 그의 과거와 는 일관적이지 않다. 그는 전체적으로 행위 속에 있다. 아무것도 뒤에 남겨져 있지 않 으며, 빠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행위가 끝마쳐지는 그 다음 순간, 그의 의식은 다 시 새롭다. 의식은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 러나 각각의 행위는 마치 이 사람이 이 특정한 상황에 처음 존재하는 것처럼, 완전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대의 질문에'그렇다'와'아니다'둘 다로 답한 이유이다. 그대가 의식 인지, 아니면 하나의 축적물, 하나의 육체적인 존재인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종교가 그대에게 자유를 주는 이유는 종교가 의식을 주기 때문이다. 과학이 물질에 대해 알면 알수록, 세상은 더욱 노예화될 것이다. 물질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의 현상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이 주어지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면-그 때 모든 것이 결정될 수 있다. 금세기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인류의 진로 전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결정되고 있 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재앙은 핵 전쟁이 아니다. 그것 은 그저 파괴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진짜 재앙은 심리학 분야의 과학들에서 나올 것이 다. 그 과학들은 하나의 인간 존재가 완전히 통제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 다. 우리는 의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결정된 방식들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으로서의 우리는, 우리에 대한 모든 것들이 결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힌두교 도이고, 다른 어떤 사람은 회교도이다. 이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지, 자유가 아 니다. 부모가 결정해 왔고, 사회가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의사이고, 어 떤 사람은 기술자이다. 이제 그의 행동은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끊임없이 조종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방법들은 아직도 원시적이 다. 더 새로운 기술들은, 영혼이 있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게될 정도까지 우리의 행동 을 결정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의 모든 반응이 결정되어 있다면, 영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대의 반응들은 몸의 화학 작용들에 의해 결정될 수 잇다. 만약 알콜이 그대에게 주어지면 그대는 다르게 행동한다. 그대 몸의 화학 작용이 달라지고, 그대는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일찍이 궁극적인 탄트라의 기법은, 취하게 하는 것을 복용하고도 그대 로 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무의식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 구하고 그 사람이 그대로 의식적으로 남아 있다면, 그 때서야 비로소 탄트라는, 그 사 람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깨달은 것이 아니다. 만약 몸의 화학 작용이 그대의 의식을 변호시킬 수 있다면,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 겠는가? 만약 주사 한 대가 그대를 무의식으로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그렇게 되면 그 주사에 들어 있는 화학 약품이 그대 자신의 의식보다 더 강력한 것 이다. 탄트라에서는, 그대를 취하게 하는 모든 물질을 초월해서 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극이 주어졌지만, 반응은 그 곳에 없는 것이다. 성은 하나의 화학적인 현상이다. 특정한 호르몬 일정량이 성적인 욕망을 일으킨다. 그대가 그 욕망이 된다. 그대 몸의 화학 작용이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오고 나면 그 대는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회는 무의미하다. 다시 그 호르몬들이 그 곳 에 있게 될 때, 그대는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또한 성을 가 지고 실험을 했다. 만약 전체적으로 성적인 상황에서 그대가 아무런 성적인 욕망을 느 끼지 않는다면, 그 때 그대는 자유롭다. 그대 몸의 화학 작용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몸은 거기 있지만, 그대는 그 몸 안에 없다. 분노 역시 몸의 화학 작용에 불과하다. 생화학자들은 머지 않아 그대를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하 나의 붓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붓다는 화를 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화를 낼 수 있었지만, 분노의 결과가 거기에 없었다. 만약 그대 몸의 화학 작용이 통제된다면, 그대는 화를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대 에게 분노를 느끼도록 만드는 화학적 조건이 그 곳에 없어서, 분노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또는 만약 그대의 성 호르몬들이 그대의 몸에서 제거되면, 그대는 성적 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그대가 성적인지 아닌지, 혹은 화가 나는지 아 닌지가 아니다. 실제 문제는, 무의식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상황에서 어떻게 각성하고 있을 수 있는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상황 속에서 그 대가 어떻게 의식적일 수 있는가이다. 그러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대에게 하나의 커다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질투를 느끼면,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이 때가 올바른 순간이다. 그대 몸의 화학 작용이 그대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이 그대를 무의식 적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마치 미친 것처럼 행동하게 만들 것이다. 자, 의 식하라. 질투가 존재하게 내버려 두라, 그것을 억제하지 말라, 다만 의식하라. 즉, 그 것에 대해 하나의 지켜보는 자가 되라. 만약 분노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하나의 지켜보는 자가 되고, 성욕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하나의 지켜보는 자가 되라. 그대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든지 그냥 내버려 두라, 그리고 그 모든 상황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라. 점차, 그대의 의식이 점점 깊 어짐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결정될 가능성이 그대에게는 점점 더 적어진다. 그대는 자 유로워진다. 모크샤, 자유는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자유로 워서,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그 의식을 결정할 수 없는, 하나의 의식을 의미할 따름이 다. 신성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은 사람은 사랑을 어떻게 체험합니까? 먼저 나는 그 질문 자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대는 그 질문을 하려고 기다려 왔음 에 틀림없다. 지금 막 그 생각이 그대에게 떠올랐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대가 미리 그것을 질문하기로 결정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질문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것이 질문하도록 그대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대의 의식이 아닌, 그대의 기억이 질문하 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바로 지금 의식하고 있었다면, 그대가 순간속에 있었다면, 이 질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내가 지금까지 한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면, 이 질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질문이 그대 속에 현존해 왔다면, 그대가 내가 지금까지 한 말 중 한마디라도 들었을 가능성이 없다. 끊임없이 마음 속에 현존하고 있는 하나의 질문은 하나의 긴장 을 만들어 내고, 그 긴장 때문에 그대는 이 곳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그대의 의 식이 자유롭게 행동하 수 없는 이유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 때 우리 는 그대의 질문을 채택할 수 있다. 그 질문 자체는 좋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해 온 그 마음은 병들어 있다. 각성은 행 동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질문들 속에서도, 모든 몸짓 속에서도 순간순간 존재해야 한 다. 만약 내가 내 손가락을 들어올린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습관일 수 있다. 그 때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바로 지금 나의 의식 속에 현존하 고 있는 어떤 것에서 저절로 일어난 하나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전혀 다르다. 기독교 성직자의 모든 몸짓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 그는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 왔 다. 나는 언젠가 기독교 신학교에 갔었다. 이 학교를 5년 다니고 나면, 그 학생이 신 성에 대한 박사가 된다. 말도 안 된다! 신성 박사라는 것은 순전히 천치 같은 짓이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설교대 위에 서는 법, 예배를 시작하는 법, 찬송가를 부르는 법, 청중을 바라보는 법,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틈 혹은 간격을 두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모든 것들을! 이 어리석은 예행 연습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 것은 하나의 커다란 불행이다. 따라서 순간 속에 존재하라. 어떤 것이든지 미리 결정하지 말라. 그 질문이 그대 안 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각성하 라. 그대는 내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 단지 이 질문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의 질문에 이야기 하기 시작할 때 그대의 마음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대는 또 놓칠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하 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 이제 그 질문으로 들어가자. 사랑이 존재할 때는 언제든지, 그것은 신성하다. 따라서 '신성한 사랑'이라고 말하 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언제나 신성하다. 그러나 마음은 영악하다. 그것은, "우 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 우리는 단지 신성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뿐이다."라 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조차도 모른다. 그것은 가장 미지의 것들 중의 하나이 다. 그것에 대한 말은 너무 많지만, 결코 그렇게 산 적은 없다. 이것이 마음의 속임수 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 음악, 시, 춤 - 모든 것들이 사랑을 축으로 해서 돌아간다. 만약 사랑이 실제 로 존재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에 대 해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다. 존재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의 대체물이다. 이야기함으로써, 언 어로, 상징들로, 예술로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하나의 환영을 만들어 낸다. 사랑 을 결코 안 적이 없는 사람이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보다 더 좋은 시를 쓸지도 모른 다. 왜냐 하면 공허가 훨씬 더 깊기 때문이다. 그것이 채워져야만 한다. 사랑의 자리 에 무엇인가가 대신 놓여져야만 한다. 어떤 사랑이 먼저인지를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왜냐 하면 그대가 신성한 사랑에 대해 물을 때는 사랑이 알려져 있다는 말로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알 려져 있지 않다. 사랑이라고 알려진 것은 다른 어떤 것이다. 실재, 진실을 향한 걸음 을 내딛기 전에 거짓이 알려져야만 한다. 사랑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은 그저 도취일 뿐이다. 그대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 한다. 만약 그 누군가가 전체적으로 그대의 것이 되면, 사랑은 곧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거기에 장벽들이 있다면, 만약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질 수 없다면, 그 사랑은 강렬해질 것이다. 장벽들이 더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강렬 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혹은 연인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면, 그 사랑은 영원해진다. 그러나 그대가 쉽게 연인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때 그 사 랑은 쉽게 죽어 버린다. 그대가 어떤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데 그것을 얻을 수 없을 때, 그대는 그것을 얻는 데 대해 열정적이 된다. 더 많은 장애물들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대의 에고는 더욱더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대가 거부당하면 당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더 도취된다. 이 긴장을 그대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일단 허 니문이 끝나고나면, 사랑이 낡은 것이 되어 버리는 이유가 그것이다. 심지어는 그 이 전에도 그대가 사랑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에고의 도 취, 에고의 긴장 즉, 하나의 투쟁, 하나의 갈등이었다. 고대 인간 사회들은 대단히 영악했다. 그들은 사랑이 지속되게 하는 방법들을 고안 해 냈다. 만약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오랫동안 볼 수 없으면, 도취가 만들어질 것 이고, 긴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면 한 남자는 일생을 한 명의 아내와 함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서양에서는, 결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량의 마음이 더 성적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도취가 축적될 여지가 없어서이다. 성이 너무도 쉽게 충족될 수 있어서 결혼이 존재할 수가 없다. 사랑 역시 이런 종류의 자유와 함께 존재 할 수 없다. 만약 하나의 사회가 성적으로 완전히 자유롭다면, 그 때에는 오로지 성만 이 존재할 수 있을뿐이다. 권태는 도취의 또 다른 한 측면이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면 도취는 깊어져 간다. 그러나 그 남자나 여라를 얻으면, 권태를 느 끼고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도취/권태,사랑/증오,매력/혐오같은 많은 이 중성이 있다. 도취로 인해 그대는 매력과 사랑을 느끼고, 권태로 인해 혐오와 증오를 느낀다. 어떤 매력도 실제적으로 사랑일 수 없다. 왜냐 하면 혐오가 찾아오기 마련이기 때문 이다. 다른 측면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은 바로, 사물들의 본질 속에 있다. 만약 그대 가 그 반대편이 찾아오게 하고 싶지 않다면, 장벽들을 만들어 내서, 도취가 결코 끝나 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매일매일의 긴장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러면 도취가 계속된다. 이것이, 전체 고대 사회의 체계가 사랑하기 위한 장벽들을 만들어 낸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머지않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 결혼은 죽을 것이고, 사랑도 역시 죽을 것이다. 그것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깊숙이 물러갈 것이다. 성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은 홀로 설 수 없다. 그것은 너무 기계적인 것이 된다. 니 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금세기 안에 죽게 될 실제적인 것은 성이다. 내가 의 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성적이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적이겠지 만, 극도로 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라질 것이다. 성은 다른것들 - 소변을 보는 것, 먹 는 것 - 처럼 하나의 일상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의미가 깊지 않을 것이다. 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장벽들 때문에 그것이 의미가 깊었던 것이다. 그대가 사랑이라고 불러 온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성이 연기된 것일 뿐이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이 그것에 끼어들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내게 있어 사랑은, 명상적인 마음의 부산물이다. 그것은 성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드야나(dhyana) 즉, 명상과 관계가 있다. 침묵에 잠기면 잠길수록, 그대는 더욱더 자 신과 더불어 편안해질 것이고, 더욱더 충족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대 존재 에서 하나의 새로운 표현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대는 사랑하기 시작할 것이다. 특 정한 어떤 사람에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과 일어날 수도 있겠지 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대는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그대 의 존재 방식이 된다. 그것은 결코 혐오로 바뀔 수가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나의 매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구분을 이해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그 실제적인 느낌은 그에게서 어떻게 사랑을 얻을까 하는 것이다. 사랑이 그대에게서 그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 그에게서 그대에게로 올 것이라는 하나의 기대이다. 그것이, 사랑이 소유가 되는 이유이다. 그에게서 어떤 것을 얻기 위 해 그대는, 누군가를 소유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소유적이지도 않고, 어떤 기대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그저 그대가 행동하는 방식이다. 그대는 너무 도 침묵하게 되었고, 사랑스럽게 되어 이제 그대의 침묵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간다. 그대가 화가 날 때, 그대의 화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간다. 그대가 미워할 때, 그대 의 증오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간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그대의 사랑이 다른 사 람들에게로 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대는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하다. 한순간 사랑이 있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증오가 있을 것이다. 증오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증오는 그것의 부분, 일부이고 하나의 연속성이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해 왔다면, 그 다음에는 그를 미워할 것이다. 그대가 그 것을 인정할 만큼 용감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그를 미워할 것이다. 함께 있을 때 연인들은 언제나 갈등 속에 있다. 그들이 함께 있지 않을 때, 서로에게 사랑 의 노래를 불러 줄지는 모르지만, 함께 있을 때 그들은 항상 싸우고 있다. 그들은 홀 로 살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살 수도 없다. 상대가 없을 때 도취가 만들어지 고, 그 둘은 다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상대가 있을 때, 도취는 사라지 고 다시 증오를 느낀다.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그대가 너무도 침묵하게 되어 이제 거기에 분노도 없고, 매력도 없고, 혐오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제 사랑도 없고, 증오도 없다. 그 대는 이제 전혀 타인-지향적이지 않다. 상대방이 사라졌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홀로 있다. 홀로 있음의 이 느낌 속에서 사랑은 마치 하나의 향기처럼 찾아온다. 상대로부터 사랑을 구하는 것은 추하다. 상대에게 의존하고,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구하는 것은 항상 속박, 괴로움, 갈등을 만들어 낸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충분해야 만 한다. 내가 의미하는 명상이란 자기 자신으로 충분할 수 있는 존재의 상태를 말한 다. 그대는 하나의 원, 홀로가 되었다. 만달라가(주2) 완성되었다. (주2 만달라: 원래는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 를 도형화한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낱낱의 살이 속바퀴측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를 이루듯이,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뜻의 윤원구족으로 번역된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달라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 남자는 여자와 함 께, 여자는 남자와 함께. 어느 지점까지는 그 선들이 만난다. 그러나 미처 그들이 만 나기도 전에 분리가 시작된다. 오로지 그대가 온전한(whole), 그대 자신으로 충분한, 하나의 완벽한 원이 될 때, 사랑이 그대 안에서 꽃피어나기 시작한다. 그 때 그대는, 그대 가까이에 오는 그 무엇이든지 사랑한다. 그것은 전혀 하나의 행위가 아니다. 그 것은 그대가 행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바로 그대의 존재, 바로 그대의 현존이 사랑이 다. 사랑이 그대를 통해서 꽃피어난다. 만약 그대가 이런 상태에 도달한 사람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묻는다 면, 그는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행함(doing)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오로지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자유와 함께 찾아온다. 자유는 그대가 갖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그대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이다. 명상이 내면에서 일어날 때,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 자유는 내적인 느 낌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는 느껴질 수가 없다. 때로는 그대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곤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그들 은 그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그 대는 그들에게 하나의 골칫거리, 하나의 성가신 존재일 것이다. 왜냐 하면 그대는 예 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 다 음에 그대가 무슨 일을 할까? 그대가 뭐라고 말할까?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대 주위의 사람들 모두가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 그대는 이제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대는 죽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 은 결코 그대와 더불어 편안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대의 자유를 느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그들은 자유와 같은 것에 대해서 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것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심하게 속박 속에 있어서 자유가 무엇인지 상상 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새장 속에 갇혀 있어 왔고, 열린 하늘을 알지 못해 왔기 때 문에, 그대가 비록 그 열린 하늘에 대해 그들에게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그 하늘이 전달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의 사랑을 느낄 수는 있다. 왜냐 하면 그 들은 지금까지 사랑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새장 속에서도, 그들의 속박 속에서도 그들은 사랑을 찾고 있었다. 오직 그들은 사랑을 찾는다는 구실로 그 속박 전체 - 사람들과의 속박, 사물들과의 속박 - 를 만들어 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쩌다 자유로와질 때는 언제나, 그 사람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 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사랑 속에는 아무런 흥분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자비로서 느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널리 퍼질 것이다 - 아무런 열기도 없고, 심지어는 온기조차도 없는 채로, 그 안에는 어떤 흥분도 없다. 그것이 있다는 것, 그 것이 전부이다. 흥분은 왔다가 간다. 그것은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붓다의 사 랑 속에 흥분이 있다면 붓다는 다시 증오 속으로 움직여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흥분 은 거기에 없을 것이다. 절정들은 거기 없을 것이고, 골짜기들도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랑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카루나(karuna) 즉, 자비로서 느낄 것이다. 자유는 바깥에서는 느껴질 수 없다. 사랑만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오 로지 자비로서 느껴질 뿐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현상 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깨달은 자의 자유는 불편함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자비이 다. 그것이 사회에서, 언제나 이들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이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만들어 낸 불편함만을 느껴 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적 으로 안정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비가 필요치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 건강, 부, 존경,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가진 자들'은 그리 스도에 반대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의 불편함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지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에 찬성할 것이다. 왜냐 하 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비를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다. 아 무도 그들을 사랑한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한 사람의 그리 스도에게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죽으면 모든 사람이 그의 자비를 느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제 불편함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조차 편안하다고 느낄 것이고, 그들은 그를 숭배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살아 있을 때, 그는 하나의 반역가이 다. 그리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반역가이다. 사회에 어떤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가 한 사람의 반역가인 것은 아니다. 그런 반역 성은 정치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사회가 바뀌면, 반역적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 정통 파가 될 것이다. 이런 일이 1917년에 일어났다. 가장 혁명적이었던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반혁명적인 파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은 사람들이 권 력을 갖게 되는 순간, 그들은 가장 반혁명적인 지도자들이 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진정으로 반역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만 반역 을 한다. 일단 그 상황이 전복되면, 그들은 그들이 전복시키려고 싸웠던 자들과 같은 자들이 된다. 그러나 한 사람의 그리스도는 항상 반역적이다. 어떤 상황도 그의 반역의 불꽃을 끌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의 반역은 어떤 사람에 대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의식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그가 하나의 장벽을 느끼면, 그는 반역을 느낄 것이다. 반역은 그의 혼이다. 그래서 만약 예수가 오늘날 온다면, 기독교 도들은 그와 더불어 편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 체재의 일부이기 때 문이다. 그들은 지금 안정되어 있다. 만약 예수가 시장 속으로 찾아간다면, 그는 그들 이 가진 전부를 부숴 버릴 것이다. 바티칸 즉, 교황청은 예수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오로지 예수 없이 가능할 뿐이다. 깨달음을 얻은 모든 선생은 반역적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전통은 전혀 반역적이지 않다. 그 전통은 그의 반역, 그이 자유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오직 그의 자비, 그의 사랑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 때 그것은 무력해진다. 사랑은 자유 없이, 반역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대가 붓다만큼 자유롭지 않다면, 그대는 붓다만큼 사랑스러울 수 없다. 불교 승려 는 그저 자비로우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 자비는 무력하다. 왜냐 하면 자유가 거기 없 기 때문이다. 자유가 그 원천이다. 마하비라는 자비롭지만, 자이나교(주3) 승려는 전 혀 자비롭지 않다. 그는 비폭력적으로, 자비롭게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실제로 자비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약삭빠르다. 심지어 그의 자비 속에서도 그것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도 약삭빠르다. 거기에는 자비가 없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주3 자이나교: 마하비라에 의해 제창된 종교로 불교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고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인간의 의식 속에 자유가 일어나면 언제나, 자유가 안에서 느껴지고 사랑이 바깥에서 느껴진다. 이 사랑, 이 자비는 사랑과 증오, 두 가지 모두의 부재이다. 완전한 이 원 성이 부재하는 것이다. 매력도 혐오도 없다. 따라서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대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대가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사랑을 주고 잇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 는 사랑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주 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는 완전히 열려 있고, 매순간 주고 있다. 심지어 아무 도 현존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 사랑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막 속에 있는 한 송이 꽃과 같다. 그것이 꽃피어나서 자신의 향기를 밖에 주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를 수 있지만, 그 꽃은 향기를 줄 것이다. 그 향기는 어떤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주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 꽃 이 피어났기에 그 향기가 거기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꽃을 지나가고 안 지나가고 는 아무 관계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지나가는데 그가 예민하다면, 그 향기를 받아들 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죽어 있고 무감각하다면, 그는 그 곳에 한 송이 꽃 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이 있을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오직 사랑이 없을 때에만 상대가 그대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혹은 그대에게 사랑을 허용 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이 있다면, 자비가 있다면, 신성한 것과 신성하지 않은 것 사 이의 구분은 없다. 사랑은 진정으로 신성하다. 신은 사랑이다. @ff 12. 합리와 비합리의 균형 맞추기 어떤 요인들 때문에 서양의 젊은이들이 반항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애 그토록 많은 서양의 젊은이들이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까? 마음은 아주 모순적인 것이다. 그것은 반대극들 속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 각하는 논리적인 방법은, 한쪽은 택하고 나머지 한쪽은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 는 비모순적인 방식으로 나아가고, 마음은 모순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마음은 반대 방향에서 작용하고, 논리는 일직선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마음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다. 즉, 화를 내는 것과 침묵하는 것이 다. 그대가 화를 낼 수 있다고 해서, 또 다른 극단으로 말해서 그대가 또한 화를 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가 소란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가 침묵할 수 없 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은 양쪽에서 계속 작용한다. 만약 그대가 사랑스러 울 수 있다면, 그대는 증오로도 가득 찰 수 있다. 한쪽이 다른 쪽을 거부하는 것이 아 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하면 미워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다. 그러면 증오는 안에서 계속 쌓여 가서, 그대의 사랑스러움이 정점에 달할 때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다. 그대는 증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그리고 이성적인 마음만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역시 그렇게 작용한다. 서양은, 합리적인 사고의 한 정점에 이르러 있다. 이제 마음의 비합리적인 부분이 보 복을 할 것이다. 비합리성은 표현을 거부당해 왔고, 지난 50년 동안 그것은 너무도 많 은 방식으로 복수를 해 오고 있다. 예술, 시, 드라마. 문학, 철학을 통해서, 그리고 이제는 심지어 생활을 통해서 말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의 반항이란 실제로는, 지나친 합리성에 반대하는, 비합리적인 마음 부분의 반항의 하나인 것이다. 동양은 서양에 사 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 하면 동양은 마음의 또 다른 한 부분 즉, 비 합리성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동양 역시 하나의 정점 즉, 비합리성의 한 정점 에 도달했다. 이제 동양에 사는 젊은이들은 종교보다는 공산주의에, 비합리적인 삶보 다는 합리적인 사고에 더 많은 흥미를 갖고 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이제 그 추의 방 향이 바뀔 것이다. 동양이 서양처럼 될 것이고, 서양이 동양처럼 될 것이다. 언제든, 마음의 한 부분이 하나의 정점에 이르면, 그대는 그 반대쪽으로 옮겨간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지금, 명상이 더 의 미가 있다. 시가 하나의 새로운 위력을 얻을 것이고, 과학은 쇠퇴해 갈 것이다. 현대 서양의 젊은이들은 반기술적, 반과학적일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자동적인, 극단의 균형 맞추기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닌, 양쪽 극을 결합한 하나의 인격을 발전 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한 부분을 선택해서, 그 반대쪽 부분은 배 고프고 굶주린 채로 남아 있다. 그러면 반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 일해 온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날 것이고, 마음은 다른쪽 극으로 옮겨 갈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 전체를 통해 일어난 일이며, 이것은 변증법적인 것 이 되어 왔다. 이제 서양에는 명상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의미가 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이란 ' 생각함이 없음(no-thinking)'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이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고, 불교가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고, 요가가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삶에 대한 비합리적 태도들이다. 그들은 개념화 작업, 이론들, 신학들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각함 속으로가 아니라, 존재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하나의 묘미를 강조한다. 내가 보는 바로는, 과학 기술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잡을수록 다른쪽 극이 더 찾아오기 쉬워질 것이다. 서양에서 젊은이들의 반항은 아주 의미가 깊고, 아주 의미심장하다. 지금이 변화하 는, 의식이 송두리째 변화하는, 하나의 역사적인 시점이다. 이제 서양은 지금까지 그 래 왔던 것처럼 계속해 나갈 수가 없다. 하나의 깊은 위기의 시점이 찾아왔다. 서양은 이제,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만 한다. 지금 서양에서는 사회 전체가 풍요롭다. 이전에는 개인들은 풍요로웠지만, 사회 전체 가 그런 적은 없었다. 한 사회가 풍요로워질 때, 부자들은 그 의미를 잃는다. 그들은 사회가 가난할 때에만 의미가 잇다. 그러나 가난한 사회에서조차도, 누군가가 실제로 풍요로워지면 그는 권태로워진다. 더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 금방 권태로워진다. 한 사 람의 붓다는 그저 권태로울 뿐이다. 그는 모든 것을 떠난다. 현대 젊은이들의 태도 전체는 공허한 풍요에 대한 권태로움 가운데 하나이다. 젊은이 들이 사회를 버리고 떠나는데, 그 사회 전체가 가난해지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그 사 회를 떠날 것이다. 사회가 가난해지면 그들은 떠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떠남, 이러한 포기는 오직 풍요로운 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극단에 이르면, 그 사회는 쇠퇴할 것이다. 그러면 과학 기술은 진보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이것이 계속되면 서양은 오늘날의 동양처럼 될 것이다. 동양에서는 젊은이들이 다른쪽 극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그들은 서양 사회와 꼭 같은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동양은 서양으로 방향을 돌리고, 서양은 동양 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지만, 그 병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보는 바로는, 불균형이, 한쪽은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거부하는 것이 그 병이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그것의 전체성 속에서 꽃피어나도록 허용한 적이 한 번도 없 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한쪽을 희생해 가면서, 그 다른 한쪽에 반대되는 한 부분만을 선택해 왔다. 이것이 그 비참함이 되어 왔다. 그래서 나는 동양의 방식도 서양의 방식 도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두 가지 모두에 반대한다. 왜냐 하면 그 방식들이 편파적인 태도들이기 때문이다. 동양도 서양도 선택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둘 다 실패했다. 동 양은 종교를 선택함으로써 실패했고, 서양은 과학을 선택함으로써 실패했다. 둘 다 선 택되지 않는다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는 바꿀 수 있다 - 한 극단에서 다른쪽으로 말이다. 만약 그대가 일본에 가서 불 교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떤 젊은이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과학 기술 에 관심이 있고, 그대들은 선불교에 관심이 있다. 인도에서 젊은 세대는 종교에는 조 금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경제, 정치, 과학 기술, 공학, 과학 - 종교를 제외한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다. 서양에서 젊은이들은 종교에 관심을 갖는 반면 동양에서 젊은이 들은 과학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그 부담감을, 한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교체 하는 것에 불과하다. 똑같은 오류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전체적인 마음,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닌, 그저 인간적인 마음 즉, 지구적인 마음에 관심이 있다. 마음의 한 부분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대가 양쪽 부분 모두를 가지고 살고자 한다면, 그대는 아주 일관적이지 않은 삶 - 물론 겉으로 보기에 비일관적인 - 을 살아야 할 것이다. 좀 더 깊은 층에서 그대는 하나의 일관성, 하나의 영적인 조화를 가질 것이다. 그 반대극 또한 자신의 일부로서 함께 할 수 없다면, 인간은 영적으로 가난한 채로 남는다. 반대극이 함께하면, 그대는 풍부해진다. 만약 그대가 단순히 예술가이기만 하 고 아무런 과학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대의 예술은 빈곤해지기 마련이다, 풍부함은 반대극이 함께 존재할 때에만 찾아온다. 방 안에 오직 남성들만 있으면 그 방에는 뭔가 부족하다. 여성들이 들어오는 순간, 그 방은 영적으로 풍부해진다. 이제 는 반대극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 전체가 더 커진다. 마음이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수학자가 예술의 세계 속으로 움직여 갈 수 있다면 그 는 더 풍부해질 것이다. 만약 그의 마음이, 그의 주된 고착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 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면, 그는 더 풍부한 수학자일 것이다. 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의 교배가 일어난다. 그대는 사물들을 하나의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 작한다. 그대의 전체적인 관점이 더 풍부해진다. 과학적인 훈련과 더불어 종교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고, 종교적인 수행과 더불어 과학 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불가능성도 찾을 수가 없 다. 그와 반대로, 나는 마음이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마음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명상이란, 모든 방향으로 깊 이 움직일 수 있는 능력, 고착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만약 내가 지나치게 논리적이 되면, 나는 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논리가 하나의 고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시에 귀를 기울일 때, 나의 고착이 거기 존재한다. 시가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시가 불합리하기 때문이 아니 라, 내가 논리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논리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불합리하다. 다 른 한편으로, 만약 내가 시에 고착된다면, 그 때 나는 논리를, 그 안에 어떤 깊이도 없는 그저 하나의 실용적인 것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논리에 대해 닫혀 있 게 된다. 이렇듯 다른 한편으로, 한쪽을 부정하는 일이 역사 전체를 통해서 벌어져 왔다. 모든 시기, 모든 국가, 세계의 모든 부분, 모든 문화가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고, 그것을 중 심으로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 왔다. 그 인격은 보잘것 없고, 많은 부분이 결여되고 있 다. 동양도 영적으로 풍요하지 않았고,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 다. 풍요함은 반대되는 것들을 통해서, 내적인 변증법을 통해서 찾아온다. 내게 있어 서는 동양도 선택할 만한 가치가 없고 서양도 그렇다. 마음의 서로 다른 질이 선택되 어야만 한다. 내가 의미하는 그 질이란, 선택함이 없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휴식을 취 하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가지 하나만 남겨 놓고, 나무의 모든 가지 를 다 잘라 버려서, 그 나무가 한쪽 방향으로만 성장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아 주 초라한 나무, 아주 보기 흉한 나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무는 심각한 난관에 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나무 가지 한 개만으로는 혼자서 성장할 수 없기 때 문이다. 그것은 나무 가지들의 한 무리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그 나무 가지가 막 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성장 할 수 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실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나무가 모든 방향으로 성장하도록 허용되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그 나무는 풍요롭고 강해질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한 그루 나무처럼 모든 방향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우리에게서, 반대 방향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그 개념이 떨쳐져야만 한다. 실제로, 우리는 오직 반대 방향들로 성장할 경우에만 성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은 전문적이어야 하고, 사람은 특정한 한 방향으로만 나가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렇게 되면, 추한 그 어떤 것이 벌어진다. 특정한 한 방향으로만 성장하면,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그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하나의 나뭇가지가 된다. 그리고 이 가지마저도 초라할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마음의 가지들만 잘라 온 것이 아니라, 뿌리들마저도 잘라 왔다. 우리는 오직 한 개의 뿌리와 오직 한 개의 가지만 허용한다. 그래서 아주 굶주린 인류로 발전하는 일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져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서 말이다. 사람은 자 신에게 부족한 것에 끌리기 때문에 동양 사람들은 서양에, 서양 사람들은 동양에 끌린 다. 몸의 요구 때문에 동양은 서양에 끌리기 시작했다. 영혼의 요구 때문에 서양은 동양 에 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위치를 바꾸고, 태도를 바꾼다 할지라도, 그 병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위치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관점 전체를 바꾸는 문 제이다. 우리는 온전한 인간을 인정했던 적이 없다. 어떤 곳에서는 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다른 어떤 곳에서는 세상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감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비난하지 않고 인정하고, 인간이 모든 방향으 로 성장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충분히 강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대가 반대 방 향들로 성장하면 할수록 성장, 풍부함과 내적인 풍요로움이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의 전체적인 관점이 반드시 변해야만 한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 동양에서 서양으로 가 아니라,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가 아니라 - 움직여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힘겨운 문제이다. 왜냐 하면 우리의 분열이 너무나 깊어져 있기 때문 이다. 내가 나의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나의 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나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나의 전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무언가 가 거부되어야 하고, 내가 던져져야만 한다. 이것은 악하고, 이것은 나쁘고, 이것은 죄이다. 나는 가지들을 계속 잘라 버려야만 한다. 머지않아 나는 전혀 한 그루의 나무 가 아니고, 하나의 살아 숨쉬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내가 거부한 가지들이 다 시 그 자리에서 솟아나고, 다시 자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거기에 있다. 나는 모 든 것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병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 하나의 슬픔, 하나의 죽음 이. 우리는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단편적인 삶들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전체적인 인간의 잠재력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어떤 비일관성도,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고, 자 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정점으로 끌어올려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진심으 로 화를 낼 수 없다면, 그대는 사랑스러워질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런 태도 가 아니었다. 우리는 한 사람이 화를 내지 못한다면, 그가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가 벽 바로 옆에서 자라고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벽이 있기 때문에 그 가지들은 자랄 수 없습니다. 그 벽이 사회일 수도 있고 그에게 존재하고 있는 상황 들일 수도 있습니다. 나무 옆에 벽이 있을 때, 어떻게 자랄 수 있습니까? 많은 벽들이 있다. 그러나 그 벽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 나무들에 의해 만들 어져 왔다. 나무들이 그 벽들을 지탱해 왔다. 그 벽들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나무들의 협조를 통해서인 것이다. 그 나무들이 벽을 지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순간, 그 벽들은 떨어져 나가고,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그 벽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지닌 태도들 때문에, 우리가 이 벽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예를 들면, 그대가 그대의 아이에게, 화 를 내면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아이가 화를 내지 못하도록 가르친 다. 그 때 그대는 그 아이가, 화를 억누르면 사랑할 수 있는 그의 능력도 동시에 파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아이 주위에 아이에게 화를 억눌러야만 한다고 말하 는 벽들을 만든다. 분노와 사랑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뻗어나온 두 개의 가지들이다. 만약 그대가 가지 하나를 자르면 다른 가지도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같은 수액이 모든 가지를 통해서 흐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진정으로 그대 아이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 아이를 훈련시키고 싶다 면, 그대는 그가 진실로 화를 내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대는 "화내지 말라." 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네가 화가 난다고 느끼면, 진정으로 화를 내고 전체적으 로 화를 내라. 그 화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말라." 고 말할 것이다. 그에게 화내지 말라고 말하기보다는 그가 올바로 화를 내도록 훈련시켜라. 화를 내야 할 올바른 순간 이 오면, 그는 진실로 화를 내야만 한다.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순간에서는, 화를 내 서는 안 된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올바르지 않은 순간이라면, 그는 사랑스러워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랑과 화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 진실한 것과 진실 하지 않은 것의 문제이다. 화는 표현되어야만 한다. 아이가 정말로 화를 낼 때, 아이 는 아름답다 - 에너지와 삶의 갑작스런 분출은 아름답다. 만약 그대가 화를 죽이면, 그대는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의 삶 전체 동안 그는 생생하게 살아있지 못 할 것이다. 그는 마치 하나의 죽은 송장처럼 움직일 것이다. 우리는 벽들이 되는 개념들을 계속 만들어 간다. 우리는 벽들을 만들어 내는 이데올 로기와 태도들을 발전시킨다. 이런 벽들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창조 물들이다. 우리가 각성하는 순간, 그 벽들은 사라진다. 그들은 우리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장애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 다면 변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 입니다. 장애자들은 문제가 안 된다. 전체 사회가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치 료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은 분석해서 도와 줄 수 있다. 그들은 도움을 받아야만 한 다.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가 그들의 무력함에 한 몫을 하 고 있다. 예를 들어서, 창녀의 아들은, 우리의 도덕적인 개념들 때문에 장애자이다. 그는, 그 에게 전혀 책임이 없는 어떤 것에 대해 깊은 죄의식을 느낀다. 그의 어머니가 창녀였 다는 것을 그가 어떻게 피할 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러나 사회는 그 소년에 대해 계속 다르게 행동한다. 우리가 성에 대해 다른 태도를 갖 기 전에는, 창녀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결혼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춘은 하나의 죄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춘은 결혼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전체 체계의 일부분이다. 인간에게 마음이 존재하는 한, 영속적인 관계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 은 오직 법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같은 사람하고 계속 살 것이다. 그것이 법이 어서는 안 된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을 오늘 사랑하고 있는데. 같은 사람을 내일도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본성의 요구가 아니다. 내일 그 사랑이 거기 있을 것이라는 것에는 어떤 본질적인 필요성도 없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면 할 수록, 그것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그 때 매춘이 뒷문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자유로 운 관계를 허용하는 하나의 사회를 갖지 않는 한, 우리는 매춘을 끝낼 수 없다. 어떤 하나의 관계가 계속되면, 그대는 그것에 대해 기분좋아한다. 그대의 에고가 기 분좋아한다. 그대가 성실한 남편 혹은 만족스러운 아내라는 그대의 에고를 충족시키기 위해 창녀는 비난받아야만 한다. 그러면 창녀의 아들은 비난받아야만 하며, 그것이 하 나의 질병이 된다. 그것이 하나의 질병이 된다. 하나의 병이 그사람 안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들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학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병이 들면 우리가 그를 도와야 하고, 치료해야만 한다. 그러나 전체 사회란 그렇지 않 다. 99퍼센트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고, 퍼센트는 예외이다. 그 1퍼센트조차도 그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대의 생리 기능이 그대의 마음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정해지는지, 우리는 아직 결 정할 수가 없다.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불확실해진다. 많은 질병들 이 단지 그대의 마음 때문에, 그대 몸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마음이 자유 롭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 병이 몸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질병들이 단지, 인간에게 있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그 질병들은 동 물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동물들은 더 건강하고, 질병에 덜 걸리고, 덜 추하다. 왜 인간이 좀 더 생생하게 살아 있지 못하고, 점 더 아름답지 못하고, 좀 더 건강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만 년 동안 우리가 겪어 온 훈련, 이 기나긴 마음의 훈련이 아마도 그것의 근원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 스스로가 그 러한 방식의 일부일 때. 그대는 이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많은 육체적인 질병들이, 불구가 된 마음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사 람의 마음을 불구로 만들고 있다! 어린아이의 삶 중 처음 7년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그대가 그 마음을 불구로 만들면, 그 다음에 그것을 바꾸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 나 우리는 불구로 만드는 일을 계속하다. 그것도 떳떳한 마음으로 말이다. 심리학이 마음의 뿌리를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부모들은 더욱더 범죄자로 보인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채, 선생들과 교육체제들이 더욱더 범죄자로 보인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테로, 그들 역시 그 이전 세대로 인해 고통받았다. 그들은 단지 그 질병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 처음으로, 특히 서양에서, 인간 은 그의 매일 매일의 욕구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가지고 실험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이 실험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냐 하면 육체적인 욕구들은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고, 그것들이 너무도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깊은 혁명, 인류 역사에서는 결코 만난 적이 없는 그런 혁명의 문턱에서 살고 있다. 하나의 의식의 혁명이 지금 가능하 다. 더 많은 편리함을 알고 이해하면,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 만약 우리가 과감하다면, 만약 우리에 게 용기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현실이 될 수 있다. 전체 인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든지, 하나의 새로운 미래로 가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제 3차 세계 대전의 문제가 아니고,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다. 하나 의 새로운 위기가 가까이에 있다. 우기가 하나의 새로운 의식을 갖고 그것을 위해 일 하고 싶은지. 아니면 뒤떨어져서 과거의 방식들로 퇴행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할 것이다. 퇴행 역시 가능하다. 하나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퇴행이 마음의 경향이다. 그대가 직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직면할 때마다. 그대는 퇴행한다. 예를 들어, 만약 이 집에 갑자기 불이 났다면, 그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집에 불이 났을 때, 그대에게는 더 많은 성숙함,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고, 더 각성하는 방식으 로 행동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그 대신에 그대는 다섯 살 정도로 돌아가서 그대 자 신에게 더 많은 위험을 만들어 내는 그런 방식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 슬픈 가능성은, 만약 우리가 하나의 신인간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우리 에게 전혀 새로운 하나의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거기에서 우리가 퇴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퇴행을 설교하는 예언자들도 있다. 그들은 과거가 다시 돌아오 기를 원하다. "과거에는 황금기가 존재했었다. 돌아가라!" 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것은 자멸적이다. 우리는 미래 속으로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 하고 어려울지도 모른다. 삶은 미래로 움직여야만 한다. 우리는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희망적이다. 그리고 서양에 이것이 일어나는 토대 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 하면 동양은 3백 년 전의 서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계와 생존의 문제가 동양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지 만, 서양은 이런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서양에서 젊은이들이 나에게 올 때, 나는 그들이 진보할 수도 있고, 퇴행할 수도 있 다는 가능성을 항상 각성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들은, 지금가지 퇴행해 왔 고, 마치 원시인처럼, 어린아이처럼 행동해 왔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들의 반 항은 좋지만, 그들은 원시인처럼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인간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 내면에 하나의 새로운 의식을 위한 가능성들을 창조해 내야만 한다. 그러는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저 마약이나 먹이고 있을 뿐이다. 원시적인 마 음은 항상 마약에 매혹되고, 그것으로 인해 초면에 걸린다. 만약 서양에서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원시인들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반역이 아니라, 하나 의 반작용이고, 하나의 퇴행이다.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인류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그들은 전체적이고 전 지구적인 그리고 인간 안에 잇는 모든 불연속적인 잠재력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새로운 의식을 향해서 전진해야만 한다. 동물들과 인간의 차이점은, 동물들은 고정된 잠재력을 갖는 반면, 인간은 무한한 잠 재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오직 가능성들일 뿐이다. 인간은 성장할 수 있지만, 이 성장은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센터들을 세계 도처에 열어야만 한다. 마음은 논리적, 합리적인 방식으로 훈련되어야만 하지만, 동시에 비합리적, 불합리 적인 명상 속에서도 훈련되어야만 한다. 감성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러 가면서, 이성 이 훈련되어서는 안 된다. 의심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신뢰 역시 있어야만 한다. 어떠한 의심도 없이 신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신뢰도 없이 의심을 품는 것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공식들은 이제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건강한 의심, 지속적인 의심, 신뢰하는 마음과 동시에 존재하는, 회의적인 마 음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래서 내면적인 존재가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만 한다 - 의심에서 신뢰로 그리고 다시 의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객관 적인 연구에서는, 의심을 품어야 하고, 회의적이고, 신중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 가 까이에, 의심이 아닌 신뢰가 그 단서들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반대극들을 동시에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이다. 나는 계속 의심을 만들어 낼 것이고, 계속 신뢰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나 는 그 속에서 어떤 본질적인 비일관성도 보지 못한다. 왜냐 하면 내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동, 한 극에서 또 다른 극으로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쪽 극에 고착되면 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면, 서양에 서 그대는 활동성을 양성해 왔다. 그러나 그대는 잠을 잘 못 잔다. 그대가 잠들 때, 마음은 활동성에서 비활동성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 그대는 계속 잠자리에서 뒤척이고, 마음은 계속 활동중이다. 잠자기 위해서, 그대는 안정제를 복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강요된 잠은 그대에게 큰 휴식을 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표 면적일 뿐이다. 깊은 곳에서는, 소란이 계속되고 있다 잠은 하나의 악몽이 되어 버린 다. 그 반대의 것이 동양에서 일어나고 있다. 동양은 잠은 잘 자는데, 활동적이지 못하 다. 심지어는 아침에도 동양은 무기력하다고, 졸립다고 느낀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잠을 잘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대들은 많은 것을 해냈지만, 불안함, 불 - 편함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불-편함 때문에 그대들이 해낸 모든 것 들이 소용이 없다. 그대는 잠조차 잘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활동적일 수 있도록, 비활동적일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움직일 수 있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 그래서 그대 가 그 두 가지 사이를 이동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음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 도록 훈련될 수 있다. 어떤 활동을 하다가도, 단 한순간만에 나는 비활동성으로 이동 할 수 있다. 내가 몇 시간 동안 여러분과 말하고 있다가도, 단 한순간만에 나는, 말이 이어지지 않는 깊은 내면의 침묵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이 그대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대의 성장은 막힐 것이다. 미래는 내적인 극들 사이에 하나의 깊은 조화가 있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극들 사이 의 이러한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의 탐구는 끝나 버린다. 그대는 더 이상 앞으로 움직일 수 없다. 동양도 지쳤고, 서양도 지쳐 있다. 그대는 이 둘의 관점을 바 꿀 수 있지만, 그리고 나면 2세기 안에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한 가지 태도를 다른 것으로 교체할 뿐이라면, 그대는 한 원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 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면, 무엇이 삶에서 열망해야 할 올바른 목표들 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목표에 대한 추구가 바로 합리적인 과정의 부분이다. 미래는 오직 이성 때문에 존재 한다. 그 때문에 동물들에게는 미래도 없고 목표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살고 있지만, 목표는 없다. 이성이 이상들을 만들어 낸다. 이성이 목표들을 만들어 낸다. 이성이 미 래를 만들어 낸다. 진짜 문제는 무엇이 올바른 목표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 는 목표들을 가질 것인가, 가지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신세대는 목표들을 가질 것인가, 가지지 않을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대가 하나의 목표를 갖는 순간 그대는 삶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대의 목표를 갖는 순간 그대는 삶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대의 목표들에 따라 삶을 틀에 맞추기 시작 한다. 현재는, 의미가 덜해진다. 그것은 틀에 맞춰져야만 하고, 미래에 맞춰져야만 한 다. 목표 지향적인 마음은 이성이고, 삶 지향적인 마음은 '이성 없음' 이다. 따라서 그 것은 어떻게 올바른 목표들을 갖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성이 마음 의 유일한 현상이 되지 않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성은 목표들을 가져야만 한다. 그 목표들 없이는 이성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독재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나무 가지만의 성장이어서는 안 된다. 이성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목표를 가질 수 없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동물들처럼 존재할 수 있는 텅 빈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필 수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목표를 가질 수 없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동물들 처럼 존재할 수 있는 텅 빈 부분, 이 비합리적인 부분이 삶, 사랑, 예술의 더 깊은 영 역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이성은 계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부분 도 동시에 계발되어야만 한다. 아주 깊은 종교적인 인격을 가진 과학자들이 존재해 왔다. 이런 현상은 두 가지 방 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깊은 조화이거나 혹은 어떤 조화도 없이 단지 하나의 구명을 막아 버리고 다른 한 구명을 여는 것이거나, 그 둘 중 하나일 수 잇다. 나는 과학자이면서, 나의 과학적인 세계를 떠나서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갈 수 있다. 그 때에는 과학자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의 조화가 아니다. 그 것은 구 갈래로 깊이 나누어 놓는 것이다. 과학자와 숭배자 사이에는 어떠한 내적인 대화도 없다. 과학자는 전혀 교회에 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연구실에 돌아갈 때, 거 기에 숭배자는 없다. 이 둘 사이에는 깊은 구분이 있어서, 그들은 겹쳐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 속에서 그대는 하나의 조화가 아니라 이분법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그 자 신이 말했던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하나의 숭배자로서의 자 신의 마음에 반대되는 말들을 과학자로서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정신분열증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일부는 한 가지인 데, 또 다른 일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이것은 내가 말하는 조화가 아니다. '조화'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어는 한쪽에도 결코 닫혀있지 않은 채로, 그대가 한쪽에서 다른 족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과학자가 기도하러 가는 것이고, 종교적 인 사람이 실험실에 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구분도, 어떤 공백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두 사람이 된다. 보통 우리는 여러 사람이다, 우리는 다중 인 격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한 가지에 동일시되었다가는, 변속기어를 바꾸어서 다른 어떤 것이 된다. 이렇게 변속 기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조화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깊은 긴장을 그대의 존재 안에 만들어 낸다. 그대는 너무도 많은 정체성과 더불어 편안해할 수가 없다. 반대극들로 이동할 수 있는, 구분되지 않은 하나의 의식은, 우리가 인간 존재에 대해 본질적인 '하나' 로서 개념을 가질 때 - 반대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없을 때 - 에만 가능하다. 의심은 과학자의 작업의 이부이다. 신뢰 역시 한 부분이다. 그것들은 똑같은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는 두 가지 측면들이다. 따라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기도를 할 수도 있다. 거기에는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다. 의심 역시 그의 작업의 일부, 그의 작 업의 도구이고, 신뢰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본질적인 이분법은 없다. 쉽게, 원 활하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심지어 그 움직임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대는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어떤 장애물이 있을 때, 움직임이 느껴질 뿐이다. 하나의 깊은 조화가 있을 때는 어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 가지 더, 내가 '동양'과 '서양' 이라고 말할 때, 서양에 어떤 동양적인 마음도 없었고, 동양에 어떤 서양적인 마음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 된 흐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지리적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구분된 세 계사를 써야만 한다. 그 안에서,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많은 면들을 얻게 될 것이고,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많은 면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양에 그 두 가지 경향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 는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서양에서의 주된 흐름이 합리적 성장을 지향하고 있고, 심 지어 종교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회가 대단히 우세해진 것이다. 예수는 비합리적인 사람이었지만, 성 바울은 아주 과학적인 마음, 아주 합리적인 마 음을 가졌다. 기독교는 성 바울에 속해 있지, 예수에 속해 있지 않다. 그토록 무정부 주의적인 사람에게는 그토록 큰 조직체의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는 동양적이었지만, 성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과학과 교회 사이에 한 가지 갈등이 있어 왔다. 둘 다 합리적이다. 두 가지 모두 종 교적인 현상들을 합리화하고자 노력했다. 교회가 패배할 수 밖에 없다 왜냐 하면 종교 적인 현상들, 그 자체가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한 한, 이성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교회가 패배하고 과학이 승리한 이유이다. 동양에서는 지금까지 과학과 종교 사이에 어떤 싸움도 없었다. 왜냐 하면 종교가 이 성의 영역 안에서 어떤 것도 주장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으므로, 그들 사이에 싸움이란 없다. 종교가 합리적이 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종교 그 자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체계화되어야 할 때마다 그 현상이 일어난다. 붓다나 예수 같은 사람은 어떤 이상도 뒤쫓지 않는다. 그들은 저 절로 일어나는 대로 삶을 산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마치 야생의 나무들처럼 성장한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야생의 나무들이 그들의 추종자들에 게는 이상이 된다. 추종자들은 방식들, 좋고 나쁨, 진리들, 비난들을 갖기 시작한다. 종교는 두 부분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저절로 일어나는 대로 사는 깊은 종교적인 인 격이고. 두 번째는 그 이상에 따라 신조, 교리, 계율을 만들어 내는 추종자들이다. 그 때 한 가지 이상이 불교도들에게 존재한다 -'사람은 붓다처럼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억압들이 만들어진다. 그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대 자신을 파괴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그래야만 그대가 그 이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의 모조품이 되어 야만 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범죄이다. 종교적인 인격은 아름답지만, 종교적 신조는 단지 합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의 비합리적인 현상을 마주치고 있는 이성에 불 과하다. 붓다는 합리적인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까? 그는 아주 합리적이었지만, 아주 비합리적인 틈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비합리적인 것에도 역시 편안해했다. 붓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은 실제로 붓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전통들에서 나온 개념이다. 붓다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다.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 붓다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불교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들 은 2천 년이라는 오랜 전통을 만들어 왔고, 붓다를 아주 합리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대가 존재 속 깊이 있다면. 합리적일 수가 없다. 그대는 여러 번 비합리적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붓다는 정말로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전통 전체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붓다를 직접 만나야 한다. 그것은 아주 어렵긴 하지만, 일어날수 잇다. 만약 내가 합리적인 사람에게 말을 하고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그는 합리적이지 않 은 모든 것을 버린다. 그러나 만약 내가 시인에게 말을 하고 있다면, 같은 문장 그리 고 같은 단어들이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합리적인 사람은 단어들에서 시를 보지 못한다. 그는 오직 논리, 논쟁만을 볼 수 있다. 시인은 단어들을 한 가지 다른 방식으 로 바라본다. 그 단어들은 하나의 색의 농도를, 어떤 논쟁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 하나 의 시를 지닌다. 그래서 붓다의 모습들은 그를 보고 있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붓다는 나라 전체가 비합리적인 모든 것- 베다들, 우피니샤드들, 신비주의전체- 으로 인해 하나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시기에, 인도에 있었다. 이 모든 것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아주 대단했는 데, 붓다가 있었던 비하르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 붓다는 카리스마적이었고, 최면적이었다. 사람들은 붓다로 인해 감명을 받았다. 그 러나 붓다에 대한 해석은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붓다가 역사의 또 다른 시기에 살았었다면. 신비주의에 반대하지 않는 세계의 일부에서 살았었다면, 하나의 지성으로 서가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신비가로 보여졌을 것이다. 알려진 모습은 특정한 시기의 역사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내가 붓다를 보는 바로는, 그는 우선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았다. '니르바나'라는 개 념 전체가 신비적이다. 그는 우파니샤드는 영혼의 윤회에 대해 말하지만, 붓다는 영혼 이 없는 윤회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더 신비적이다. 우파니샤드는 해탈에 대해 말하 지만, 그대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 된다. 만 약 내가 존재의 그 궁극적 상태 속에 있을 수 없다면, 그러면 그 노력 전체가 소용이 없고, 비논리적인 것이다. 붓다는 그 노력이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대는 거기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무이다. 그 개념이 더 신비적이다. 당신이 퇴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사회에 의해 만들어져 온, 사회적으로 인정 될 수 있는 어떤 이미지와 비교해 보았을 때의 퇴행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다. 다른 어떤 것이다.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이 성장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퇴행하고 있고 뒷 걸음질치고 있다. 나는 글들이 따라야 하는 어떤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따 라야 할 이미지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 한 이미지에 맞춰지는 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다 시 과거로 퇴행하고 있고, 미래를 향해 성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나는 나무가 어떻게 성장했으면 하고 바라는 어떤 이미지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성장해 야만 한다, 그것은 퇴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성장이냐 퇴행이냐의 문제이지, 어떤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퇴행하고 있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그들이 지나지게 합리적 사 회에 대항해서 반작용을 하고 잇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반작용은 다른 쪽 극단으 로 간다. 그것은 같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 이성은 흡수되어야지, 제외되어서는 안 된 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제외시키면, 그대는 비 합리성이 제외되었을 때와 같은 오류 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는 그저 하나의 겉치레, 하나의 가면에 불과한 사람을 만들어냈다. 그 는 내면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행동의 한 유형, 얼굴은 더 갖추고 존재는 덜 갖춘 매너리즘의 한 유형이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모든 것 의 판단 기준으로 오직 이성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비합리적인 것, 무정부적인 것, 혼돈스러운 것은 배척되었고, 억압되었다. 이제 그 무정부주의적인 부분이 복수를 하 고 있고 그것은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파괴적이거나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파괴적이면, 그것은 퇴행적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거부에 의한 똑같 은 방식으로 복수를 할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부분을 거북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 는 마치 미숙한 어린아이처럼 된다. 그대는 뒷걸음질친다. 만약 무정부주의적인 측면이 창조적이라면, 그것은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 다.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과 더불어 이성을 흡수해야만 한다. 그러면 존재 전체가 성 장할 것이다. 비합리적인 것을 거부한 사람, 합리적인 것을 거부한 사람, 그 어느 쪽 도 성장하고 있지 않다. 만약 그대가 전체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성장할 수 없다. 나는 성장에 대 해 말하고 있다. 나는 사람이 무엇으로 성장해 나가야 할 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갖 고 있지 않다. 서양적인 마음의 많은 문제점들이 기독교에 있는 '죄와 죄의식 (sin-and-guilt)'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죄'라는 개념은 그 주위에 아주 다른 하나의 의 식을 만들어 낸다. 이 개념이 동양적인 마음에는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동양에서는 그것이 '무지'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동양의 의식에서 모든 악의 뿌리는 죄가 아니라 무지이다. 악이 있는 것은 그대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죄가 아니라 수 행의 문제이다. 그대는 더 많이 각성해야 하고, 거 많은 앎이 있어야 한다. 동양에서 지식은 변형이다. 그리고 명상은 그 변형을 위한 도구이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죄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만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원죄이다. 그대는 죄라는 개념으로 짐 지워진다. 이것이 죄의식, 긴장 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기독교가 실제로 명상적인 기법들을 발전시킬 수 없었던 이유 이다. 기독교는 오직 기도만을 발전시켰다. 죄와 싸우기 위해서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대는 도덕적일 수 있고 기도를 잘 할 수 있다! 동양에는 십계명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지나친 도덕적 개념이 없다. 그래서 동양에 서의 문제들은 서양과는 다르다. 서양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죄의식이 문제이다. 깊은 곳에서 그들은 죄의식을 느낀다. 심지어 반항해 온 사람들조차 죄의식을 느낀다. 그 것은 심리적인 문제로서, 마음과 더 많이 관련되어 있고 존재와는 더 적게 관련되어 있다. 첫째로, 그들의 죄의식이 해소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서양이 심리분석과 고해성사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러한 것들이 동양에서 발전되지 않았던 것은 그 런 것들이 결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그대는 고해성사를 해야만 한다. 그 때서야 비로소 그대는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죄의식이 내던져질 수 있도록 심리 분석을 겪어야만 한다. 그 러나 그것은 결코 영구적으로 버려지지 않는다. 왜냐 하면 '죄'라는 개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죄의식이 다시 쌓여 갈 것이다. 따라서 심리 분석과 고해성사는 오직 일시 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고해성사를 거듭해서 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용인되어 온 어떤 것들에 저항하는 일시적 도움들에 불과하다. 그 질병의 뿌리 -죄라 는 개념- 가 용인되어 온 것이다. 동양에서 그것은 심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그것은 정신 건강의 문 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의 문제다. 그대가 사물들을 더욱 각성하게 되려면 영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대의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 아니라, 그대 의 의식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행동이 뒤따라온다. 기독교는 그대의 행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행동은 그저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대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다. 만약 그대가 하고 있는 것을 계속 변화시킨다면, 그대는 실제로 아무 것도 변화시 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똑같은 채로 남아 있다. 외부적으로 그대는 성자일 수 있지만, 내면에서는 여전히 똑같다. 서양에서 오는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죄의식 때문 이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보다 깊은 문제 -정신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 를 단 지 각성하도록 만드는 데도 그들과 씨름을 해야만 한다. 불교와 자이나교 역시 죄의식 을 만들어 냈다. 같은 종류의 죄의식이 아니라 한 가지 다른 방식의 죄의식이다. 특히 자이나교는 아주 깊은 열등감을 만들어 냈다.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죄의식은 거기에 없다. 왜냐 하면 죄라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람이 어떤 것을 넘 어서지 않는 한, 열등하다는 한 가지 깊은 느낌이 있다. 이 깊은 열등감이 죄의식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자이나교는 어떤 명상적인 기법들 또한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다른 공식 들 -저것을 하라- 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저것을 하라. 이것을 하지말고... 개념 전 체가 행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이나교 승려는 그의 행동에 관한 한, 이상적 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적 존재에 관한 한. 그는 아주 초라하다. 그는 계속 하나의 꼭 두각시처럼 행동한다. 그것이 자이나교가, 죽게 죈 이유이다. 불교는 자이나교와 같은 방식으로 죽지 않았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다른 주안점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리적 부분은 그저 명상적인 부분의 결과에 불과하다. 만약 행동이 변화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저 명상에 도움이 되는 한 가지로서 일 뿐이다.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 기독교와 자이나교에서는 행동이 그 자체로서 의미가 깊 다. 만약 그대가 선하게 행동하면, 그 때 그대는 선하다. 불교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 니다. 그대는 내적으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선하게 행동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일부분이 될 수 있지만, 그 중심은 명상이다. 그래서 그 셋 중에서, 불교도들만이 깊은 명상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불교에서 다 른 모든 것은 단지,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도움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대는 그것을 버 릴 수도 있다. 만약 그대가 어떤 다른 도움 없이도 명상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 나머 지를 버릴 수 있다. 그런데 힌두교는 훨씬 더 깊다. 그것이 힌두교가 탄트라처럼, 다른 여러 가지 차원 들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대가 죄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탄트라에서는 활용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힌두교는 아주 건강하다- 그러나 물론 혼돈스럽기도 하다. 건강한 것은 무엇이든 혼돈스럽기 마련이다, 그것은 체계화될 수 없다. @ff 오쇼에 대해 오쇼는 인도의 마디야 쁘라데쉬(Madhya Pradesh) 주에 있는 꾸츠와다(Kuchwada)에서 1931년 12월 11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오쇼는 반역적이고, 독립적인 영혼을 지 녔던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진 지식과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고자 했다. 오쇼는 21살에 깨닫고 난 후 학업을 마치고, 여러 해 동안 자발뿌르(Jabalpur) 대학 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후 오쇼는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중을 상대 로 강의를 하고, 공개 토론에서는 정통 종교 지도자들에 도전했으며, 전통 신앙 체계 에 이의를 제기했다. 오쇼는 현대인의 심리와 신앙 체계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기 위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1960년대 후반에 오쇼는 자신만의 독특한 명상 테크닉 인 '다이나믹(Dynamic) 명상' 을 고안하여 발전시켰다. '현대인들은 현 시대에 맞지 않는 과거의 전통과 현대 생활의 불안감 등으로 너무나 많은 부담감을 받기 때문에, 사념이 없는 편안한 명상 상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만 한다' 고 오쇼는 말한다. 1970년대 초에 서양인들이 처음으로 오쇼에게 오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인도의 뿌 나(Poona)에 코뮨이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하나 둘씩 찾아오던 서양의 방문객들은 곧 홍수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오쇼는 인간 의식의 성장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강의했다. 오쇼는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인 직접 체험을 통해 서 현대인의 영적인 탐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정수만을 뽑아냈다. 오쇼는 어떠한 전통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적인 의식의 시작이다' 라고 오쇼 는 말한다. '나를 과거와 연계시키지 말라. 과거는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전세계로부터 온 제자와 구도자들을 상대로 한 강의는 600권이 넘는 책으로 출판되 어 나왔으며,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오쇼는 말한다. '나의 메시지는 교리도 철학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하나의 연금술이며, 변형의 과학이다. 현재 자신의 모 습은 죽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 시 태어나고자 하는 이들만이 나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몇몇 용기 있는 사람 들만이 나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말을 듣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메시지를 듣는 것은 새로운 탄생으로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나의 메시지는 겉 포장을 하고, 과시를 하기 위한 철학이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그대를 괴롭히는 의 문들에 대한 해답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종교 교리가 아니다.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언어를 통한 전달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과 새로운 탄생이다.' 오쇼는 1990년 1월 19일에 육체를 떠났다. 인도에 있는 거대한 오쇼 코뮨은 전세계 에서 가장 큰 구도와 명상을 위한 센터이다. 수만은 외국의 구도자들이, 명상과 치료 요법(therapy), 보디워크(bodywork), 창작예술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고 붓다장(buddhafield)을 체험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ff 오쇼 코뮨 인터내셔널 (Osho Commune International) - 인도, 푸나 - 코뮨은 내적인 탐구를 위한 신비 학교이다. 코뮨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커다란 모험이며, 가장 큰 춤이다. 그대가 여행해야 할 길. 그 길은 혼자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홀로 여행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커다란 용기를 준다. 완전히 다른 비전,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진 삶이 존재하는 작은 오아시스, 목적과 의미가 있는 삶, 체계가 있는 삶, 자각과 의식과 깨어 있음이 존재하는 삶. 단지 우연 한 삶이 아니라, 분명한 방향을 향해 성장해 가기 시작하는 삶이 있는 곳. 이 곳은 인도의 아쉬람이 아니다. 이 곳은 국제적인 코뮨이며, 동양과 서양이 만나 는 곳이다. 이 코뮨은 인류 전체를 상징한다. 과거의 인류가 아닌, 미래의 인류를... 우리의 노력은 각각의 모든 사람들에게 명상이 가능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명상을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명상은 사람들 각자의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휴식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휴식이 그의 명상이 되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침묵 속에 앉아 있으라. 그 때 봄은 오고, 풀은 저절로 자란다.' 이 말이 그의 명상이 될 것이 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여러 명사의 차원을 찾아 내야 한 다. 그리고 그 명상의 방식은 너무 엄격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똑 같은 사람은 아 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혁명이다. 개인이 방식에 맞춰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방 식이 개인에 맞춰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그처럼 많은 명상법들이 행해지고 있는 이유이다. 명상법은 능동적일 수도 있고, 수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 제가 아니다. 그 목적은 같다. 그 목적은 '어떻게 모든 생각이 사라져, 단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느냐?'이다. 오쇼 멀티버시티(Mutiversity) 오쇼 코뮨에는 최소한 50여 가지의 요법 그룹들이 행해지고 있으며, 거기에는 분명 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단지 수천 년에 걸친 억압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기독교도로서, 힌두교도로서, 불교도로서 스스로를 억눌러 온 모든 것들 을 밝은 빛 아래로 끌어내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당신에게 자행된 수백 년 묵은 상 처를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이 요법 그룹들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당신의 명상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판단이나 동일시없이,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수동 적으로 지켜보는 것, 그것이 명상이다. 매일의 하이라이트는 음악과 춤의 축연, 침묵의 명상, 오쇼의 강의로 이루어진 두 시간 동안의 저녁 모임(Meeting of the Osho White Robe Brotherhood) 이다. "이것은 강연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그대가 침묵하도록 하기 위 한 장치일 뿐이다. 왜냐 하면 그대에게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침묵하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매우 곤란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대의 침묵을 자각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처음으로, 나의 말은 그대 안의 침묵을 창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오쇼- @ff 문의 및 안내 오쇼의 명상법, 명상 음악 CD, 테이프 혹은 비디오, 오디오 강의 테이프, 영어 원서 의 구입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연락처로 연락바랍니다. 한국: 도서출판 황금꽃 전화 02-711-4228, 8 팩스 02-711-4229 E-mail: oshok@chollian.net 오쇼 웹사이트(www.osho.com) 오쇼의 명상, 책, 테이프, 오쇼 코뮨으로의 인터넷 여행, 전 세계의 오쇼 정보 센터, 선별된 오쇼의 강의들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오쇼 코뮨 인터내셔널(Osho Commune International) 17 Koregaon Park Pune 411 001(MS), India Tel: +91 (20) 628 561 / 562 / 563 Fax: +91 (20) 624 181 E-mail: osho-commune@osho.com 오쇼 인터내셔널(Osho International) 570 Lexington Ave New York, N. Y. 10022 USA E-mail: osho-int@osho.com Tel: +1-212-588-9888 Fax: +1-212-588-1977 웹사이트: www.osho. com @ff 비의의 심리학 지은이 오쇼 펴낸곳 도서출판 황금꽃 펴낸 이 장두석 교정 당계현 출판 등록 1998년 2월 2일(제 16-1596)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3가 286-3(2층) 전화 02)711-4227, 8 팩스 02)711-4229 천리안 ID dshok E-Mail oshok@chollian.net 초판 1쇄 인쇄 1999년 9월 10일 초판 1쇄 발행 1999년 9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