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지은이:오쇼 라즈니쉬 칼릴 지브란 아우렐리우스 펴낸이:권기상 펴낸곳:문화광장 1 배꼽 2 예언자 차례 배가 오다 사랑에 대하여 결혼에 대하여 아이들에 대하여 베품에 대하여 먹고 마심에 대하여 일에 대하여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집에 대하여 옷에 대하여 매매에 대하여 죄와 벌에 대하여 법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이성과 열정에 대하여 고통에 대하여 가르침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 대화에 대하여 시간에 대하여 선과 악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 쾌락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작별에 대하여 3 명상록 차 례 제1장:배움에 대하여 제2장:인생에 대하여 제3장:운명에 대하여 제4장:죽음에 대하여 제5장: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제6장:대자연의 이법에 대하여 제7장:우주의 지배적 이성에 대하여 제8장:선과 악에 대하여 제9장: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에 대하여 제10장:사회적 존재에 대하여 제11장:영혼에 대하여 제12장:도덕적 삶에 대하여  배꼽 우리들의 혼탁한 가슴을 표백시켜 줄 라즈니쉬의 철학우화 시간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인 엠마뉴엘 칸트에게 어떤 여인이 청혼을 했다. 우선 여자가 청혼을 했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 시대엔 청혼하는 사람은 항상 남자였다. 틀림없이 그 여자도 칸트가 먼저 청혼해 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청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었고, 가슴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인은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느끼고 먼저 청혼한 것이다. 칸트는 말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사랑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반응해야 할 상황이다. 가슴이 그렇다라고 하든, 아니다라고 하든 둘 중의 하나이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것은 사업상의 제안이 아니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그것이 사업상의 제안이었다. 생각이 너무 머리 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모든 일을 사업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그는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가서 사랑, 결혼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노트에 결혼에 대해서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모두 적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충분히 따져보고 결혼에 찬성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찬성 쪽이 반대 쪽보다 몇 점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논리적인 결정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 여인에게 청혼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 여인의 아버지가 나와서 말했다. <내 딸은 이미 결혼했소.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라오. 당신이 좀 늦게 왔구려> 마음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늦으며 상황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문을 두드릴 때 여인은 이미 가버린 뒤다. 그녀는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다. 이런 일이 매순간 일어나고 있다. 기억하라.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상각하지 말고 행동하라. 그대가 생각하기를 마칠 때까지 그 상황이 그대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반응할 준비가 되었을 때 반응할 대상은 이미 없을 것이다. 퍼즐 어느 아버지가 그의 아이들을 위하여 퍼즐을 사려고 완구점에 갔다. 그는 그것의 짝을 맞취 보려고 이리 저리 여러가지 방법으로 애써봤지만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상점 점원에게 물었다. <나도 이것을 맞추지 못하는데, 하물며 꼬마들이 어떻게 이것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어린아이들이 이것을 할 수 있으니라 생각합니까?> 그러자 점원은 말하였다. <아무도 그것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그냥 어린아이들에게 현대 생활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맞추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그것을 맞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부터 짝이 맞지 않도록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대가 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주 쓸모가 없기에 끝에 가서 그대는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이것저것 해서, 수백만개의 대안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거짓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애당초 실패작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것이다. 섬김 옛날 중국 하남성에 단하라는 선사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여행을 하던 중 혜림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는 하루 종일 눈을 맞으며 걸었기 때문에 매우 피곤했다. 차림도 오랜 여행으로 인해 남루했다. 그 절 주지스님이 반찬도 없이 찬밥 한덩어리를 차려 주고는, 그 추운 겨울인데도 꽁꽁 언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가 방안을 둘러 보니 한쪽 구석에 목불이 진열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 절에서 목불을 만들어 내다 파는 모양이었다. 단하 선사는 코가 얼 정도로 추운 방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도끼를 들고 부얶으로 나가 진열되어 있던 목불을 쪼개 불을 땠다. 단하선사는 따뜻하게 잠을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그 절을 떠났다. 절 원주가 일어나 승방을 열어보니 방안이 따끈따끈 했다. 원주는 깜짝 놀랐다. 목불을 모두 쪼개서 불을 땐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주는 화가 치밀어 올라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래 서 그는 그 길로 하산한 단하를 찾아 바삐 걸었다. 얼마 못가서 단하선사를 따라잡았다. 원주가 단하에게 말했다. <명색이 당신도 스님이 아니시오. 그런데 어찌하여 섬겨야 할 목불을 죄다 쪼개 땠소> 단하가 대답했다. <여래를 화장하면 사리가 나온다기에 사리를 받으려고 그랬소> 그러자 원주가 힐책하듯 말했다. <당신 참으로 모자란 소리를 하는구려. 어찌 목불에서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그러자 단하가 말했다. <사리가 안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요> 원주는 그 말을 듣고도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단하가 이어서 말했다. <사람 섬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부처를 섬긴단 말이오. 사람이 바로 산 부처요> 사람 섬길 줄도 모르면서 나무토막을 깎아 만든 부처를 섬겨서 뭘하겠는가? 사람이 산 하느님인데... 그래서 네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했는데... 건물 꼭대기의 십자가만 섬긴다고 신앙이 완성되겠는가? 당신도 신앙의 원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무지 어느 시골마을의 학교에서 선생이 학생들에게 라마의 이야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조는 것은 라마야나를 낭송할 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 때에는 어른들도 졸곤 했다. 그 이야기는 너무 많이 되풀이되어 들려졌기 때문에, 그 참뜻을 잃어버리고 새로움도 없었다. 선생은 그저 기계적으로 낭송할 뿐이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 선생 또한 졸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암기하고 있었고, 앵무새처럼 지저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 안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장학관이 시찰을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고 선생도 정신을 차렸다. 선생은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수업을 참관하고 있던 장학관이 말했다. <당신이 라마야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학생들에게 라마에 대해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장학관은 학생들이 부러진 활이야기나 전투 이야기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간단하게 질문을 했다. <학생 여러분, 상카라의 활을 부러뜨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디 누가 말해 보겠습니까?> 한 소년이 손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그건 제가 부러뜨린게 아닙니다. 저는 보름 동안이나 결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부러뜨렸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이 일을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제일 먼저 추궁을 받는 것은 언제나 저이기 때문이죠> 이 말에 장학관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가 선생 쪽을 돌아보니 선생은 금방이라도 회초리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놈이 그 활을 부러뜨린 범인임이 분명합니다. 이 놈은 우리학교 학생들 중에서 가장 말썽 많고 못된 놈입니다> 선생은 그 소년을 향해 고함쳤다. <만약 네가 한 짓이 아니라면 왜 일어서서 네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지?> 계속해서 선생이 장학관에게 말했다. <이 학생의 그럴싸한 얘기에 속지 마십시오> 장학관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듯싶어 그냥 교실을 나와 버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교실에서 있었던 사건 모두를 교장에게 얘기하기 위해 곧장 교장실로 갔다. 그는 교장이 이 일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교장은 장학관에게 이 문제를 더이상 끌고 나가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교장은 말했다. <누가 그 활을 부러뜨렸든 간에 이 문제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 학교는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조용했습니다. 그 전에는 학생들이 많은 비품을 부수고 불사르는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만큼 말썽을 피웠거든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오늘날 학생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대단히 곤란한 문제를 가져올 뿐입니다. 동맹휴학이나 단식투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장학관은 깜짝 놀랐다. 그는 학교 이사장에게 가서 오늘 일어났던 일을 모두 얘기했다. 교실에서는 라마야나가 가르쳐지고 있었고, 한 학생이 상카라의 활을 부러뜨린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말했고, 선생은 그 학생이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말했으며, 교장은 이 일을 추궁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고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할 우려가 있다면서 누구에게 책임이 있든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요청했다는 것 등 모두를 얘기했다. 말을 마친 장학관은 이 일에 대한 이사장의 견해를 물었다. 이사장은 교장의 방침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사장은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범인에 대해서는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누가 그 활을 부러뜨렸든지 이사회에서 수리해 줄 것입니다. 원인을 캐느니보다 고치는게 낫습니다>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는데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자만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인간의 약점이다. 라마야나 가운데 상카라의 활이 부러진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어느 상카라일까>라고 물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지를 인정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함정이었다. 이 약점은 자멸적인 것임이 판명되었지만,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 결과 자신들의 삶을 혼란시킨다. 우리가 자신들의 모든 문제에 주는 답은 전부 그 학생에 의해 주어진 답, 선생, 교장, 그리고 이사장에 의해 주어진 답과 같은 것이다. 질문을 이해하지 않고 대답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 이것은 분명한 자기기만이다. 장수의 비결 뮬라 나스루딘이 백 살이 되었다. 신문기자들이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가 그 도시에서는 처음으로 탄생 백 주년을 맞은 시민이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그에게 장수의 비결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장수의 비결입니다> 그때 옆방에서 무엇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문기자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뮬라가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일 겁니다. 아버지가 또 술에 취해서 하녀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뮬라의 아버지는 틀림없이 120세는 넘었을 것이다. 뮬라는 <나는 독신생활을 했고,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소>라고 장수의 비결을 말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뛰어 다니며, 술에 취해 여자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성을 탐닉할 수도 있고 독신을 즐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차이도 초래하지 않는다. 규율 트라피스트 수도승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은 정도의 업격한 규율 속에서 생할한다. 한 사람이 수도승이 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장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의 규율은 이렇다. 7년동안 한마디의 말도 해선 안된다. 그러나 7년이 지나면 필요한 한마디의 말을 할 수 있다. 그 후에 다시 7년동안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 사람은 규율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수도승의 계를 받고 자기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안으로 들어간 그는 창문의 유리창이 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말은 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7년 동안 그는 추위와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생활해야 했다. 깨진 유리창으로는 빗줄기가 몰아쳤지만 그 말을 하기 위해선 7년을 기다려야 했다. 7년을 기다린 끝에, 그는 수도원장을 찾아가서 말했다. <제 방의 유리창이 깨졌습니다> 수도원장이 말했다. <알았다. 다시 돌아가서 7년 동안 침묵을 지키도록 해라. 유리창은 우리가 수리해 주겠다> 유리창이 수리되었다. 그러나 7년 동안 끊임없는 비바람과 눈보라에 의해 매트리스가 완전히 낡아 버렸다. 문득 자신이 매트리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오, 하느님! 다시 7년을 기다려야 하다니!> 매트리스 밑에는 바퀴벌레와 거미와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들끓었고, 밤이면 그의 잠을 방해했다. 유리창이 깨져 있었기 때문에 매트리스 밑이 벌레들에겐 좋은 안식처였던 것이다. 벌레들에게 매일밤 시달리면서 다시 7년을 보냈고, 다시 수도원장을 찾아가 말했다. <유리창은 수리해 주셨지만, 매트리스가 완전히 썩었습니다> 수도원장이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새 매트리스가 도착할 것이다> 인부들이 와서 낡은 매트리스를 꺼내고 방은 깨끗이 청소했다. 그런데 새 매트리스가 너무 커서 방 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인부들이 억지로 매트리스를 방안으로 넣으려 하다가 그만 유리창을 깨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또다시 똑같은 상황이 시작되었다. 14년이 흘렀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첫날 그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제 그는 또다시 7년을 기다려야 했다. 또다시 비바람이 몰아치고, 그러는 사이 그는 늙고 병들었으며, 고열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서약한 것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 7년 후 그가 수도원장을 찾아가서, 유리창을 수리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도원장이 말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된 사람이 21년 동안 불평만 늘어놓는단 말이오? 끝없이 불평, 불평, 불평뿐이라면 당신같은 사람은 이 수도원에 있을 수 없소. 어서 여기서 나가시오!> 그리하여 그 친구는 늙고 병들고 지친 몸이 되어 쫓겨 났다. 21년 동안의 끝없는 고문 끝에... 그들의 행로는 매저키즘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금욕을 통한 삶의 길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자신을 학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다. 그것은 점진적인 자살행위, 점진적인 독약 투입 행위이다. 열정 옛날 인도에 신비주의자로 이름난 바바 샤이크 화리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왔다. 그때 그는 겐지즈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는 신비주의자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신을 찾을 수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화리드는 젊은이를 끌고 강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서 물속으로 쳐박아 버렸다. 그런 후, 물속에서 숨이 막혀 버둥거리다가 탈진 상태가 되어서야 그 젊은이를 끌어 내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화가 난 젊은이가 물었다. 성자 화리드는 젊은이를 향해 미소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동안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 같이 신을 찾을 때에 비로소 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이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인가? 권력인가? 모조품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이 백만달러에 팔렸다. 그림을 산 귀부인은 그것이 진짜 진품인지를 감정받기 위해 한 미술평론가를 찾아갔다. 미술평론가가 말했다. <이 작품은 진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피카소의 친구였던 것이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진품이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귀부인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피카소를 직접 찾아가 말했다. <나는 이미 이 그림을 샀기 때문에 모조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정말로 이것이 진품인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피카소는 그 그림을 보더니 이상한 대답을 했다. 그 미술평론가도, 그와 동거했던 애인도 그곳에 있었는데 그는 그 그림이 진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피카소의 애인이 말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은 이 그림을 그렸어요. 뿐만 아니라 이 평론가 선생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피카소는 말했다. <내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오. 하지만 그것은 진품이 아니오. 나는 과거에도 그와 똑같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소.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던 것이오. 진품은 지금 파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소.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사본에 불과하오. 누가 이 사본을 그렸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소. 설사 내 자신이 그 사본을 그렸다 해서 사본이 진품이 되지는 않는 것이오. 나에겐 첫번째 그림만이 진품이었소. 왜냐하면 그것은 내 존재의 침묵으로부터 탄생된 것이기 때문이오. 그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무아의 경지여서 내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소.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릴 때는 그렇지 않았소. 이것은 마음의 산물이지만 첫번째의 그림은 마음을 초월한 곳에서 탄생하였던 것이오> 그대의 침묵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다움과 진실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사본에 불과하다. 무지한 자들에게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다. 감자 팬케이크 한 젊은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가 과학을 연구하는 것에 크게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는 과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차라리 의사가 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니? 그게 더 실리적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게다> 결국 그는 아들을 설득했고, 젊은 과학자는 의사가 되었다. 그의 첫 환자는 폐렴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는 의학서적을 뒤적거리며 찾고 또 찾앗다. 환자는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말했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젊은 의사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은 아주 고약한 병에 걸렸습니다. 거의 희망이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병에는 치료법이 없습니다. 치료될 수가 없습니다> 재단사인 그 환자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두 주일 후에 그 의사는 우연히 재단사의 작업장 앞을 지나치다가 그 재단사가 건강하고 활기에 가득 차서 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놀란 의사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요. 나는 책들을 찾아보았고,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병이 나았습니까?> 그러자 재단사가 말했다. <당신은 내가 일주일 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고, 그래서 여생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습니다. 감자 팬케이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진찰실을 나와 곧장 레스토랑으로 가서 서른 두개의 감자 팬케이크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격렬한 에너지의 파동을 느꼈습니다. 이제 나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젊은 의사는 일기장에다 서른 두개의 감자 팬케이크는 심한 폐렴에 확실한 효과가 있다고 적어 넣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번째 환자의 병도 폐렴이었다. 그는 제화공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그 치료법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나가는 대로 서른 두 개의 팬케이크를 드십시오. 서른 두개 이하가 아니라면 당신은 완치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 이내에 죽을 것입니다> 일주일 후에 의사는 기쁜 마음으로 제화공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이웃사람에게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처방한 감자 팬케이크가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의사는 즉시 일기장에다 적었다. 서른 두개의 감자 팬케이크는 재단사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제화공에게는 효과가 없다 추상적인 마음을 가진 그는 실리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는 표면을 바꾸고 얼굴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내적인 유형은 그대로 남는다. 평균치 위대한 역사가이며 수학자 헤로도투스는 평균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다. 그 당시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으며, 헤로도투스는 그것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소풍을 갔다가 건너야 할 작은 강을 만나게 되었다. 아내는 아이들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헤로도투스가 말했다.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내가 강의 평균 깊이와 아이들의 평균키를 잴 테니. 5분이면 충분하오> 그는 자를 꺼내어 아이들의 키를 재어 평균치를 낸 다음 강으로 달려가 몇 군데의 지점을 돌면서 강의 깊이의 평균치를 계산했다. 그런 다음 드는 아내에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 아이들의 평균 키가 강의 평균 깊이보다 크니 익사할 염려는 전혀 없소. 얘들아, 어서 강을 건너자!> 그러나 강의 어떤 지점은 얕은 반면에 어떤 지점은 매우 깊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키가 컸지만 어떤 아이는 작았다. 평균치라는 것은 실제 상황에선 맞지 않는 법이다. 오직 수학적인 계산에서만 알맞은 것이다. 헤로도투스의 아내는 여전히 걱정이 되어 그녀 자신은 강을 건너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한 아이가 갑자기 물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앞서서 강을 건너고 있는 헤로도투스를 소리쳐 불렀다. <저걸 좀 봐요! 애초부터 걱정이 되더니, 역시 당신의 수학이라는 건 믿을 게 못되요!> 그러나 놀랍게도 헤로도투스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에게로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야만 했다. 헤로도투스는 자신이 계산을 했던 모래밭으로 달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검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계산은 틀린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대여, 존재계는 그대의 계산을 따르지 않는다. 생노병사 붓다는 힌두교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일반 대중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는 원하는 모든 것이 주어졌다. 그는 늘 아름다운 여성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스물 아홉살까지의 그의 삶은 온통 쾌락과 춤과 여자와 술에 둘러싸인 것이었다. 점술사들이 예언하기를, 그는 장차 위대한 성자가 되든지 세상의 위대한 정복자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이 성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붓다는 그의 외아들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그는 아들이 세상의 정복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점술사들에게 아들이 성자가 되는 것을 막는 방법을 물었다. 그 어리석은 점술사들은 온갖 쾌락으로 그를 물들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세상에 불행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가 결코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병과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를 음악과 춤에 취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둘러싸이게 하십시오. 철마다 다른 장소를 마련해, 여름에는 시원한 곳을, 겨울에는 따뜻한 곳을 제공하십시오> 그래서 붓다의 아버지는 소위 현자라고 하는 이들의 지시를 따랐다. 사실은 그들의 충고가 그를 성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29년에 걸친 끝없는 향락이 마침내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모든 게 지겹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병자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29년 동안 그는 병과 늙음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들을 목격하자... 29년동안 그의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시든 꽃,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창백한 낙엽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밤이면 모든 시든 꽃, 떨어진 낙엽들을 정원에서 깨끗이 치워야 했다. 뭔가 마지막이라는 것이 있음을 아들에게 보여주어선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상황이 그를 지치게 하고 지겹게 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너무나 많았다.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3백년을 산 사람처럼 늙어 있었다. 29년 사는 동안에 그는 모든 종류의 사치, 섹스, 방탕함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늙은이와, 운반되는 시체를 보고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그러한 것에 충격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29년 동안에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이다. 주검을 보았을 때, 그가 마부에게 물었다.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마부가 대답했다. <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사실 당신이 이 길을 지나갈 때면 모든 노인과 병자와 시체를 치우라고 명령이 내려졌는데, 어떻게 저 사람이 여기에 들어왔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거짓을 말할 순 없습니다. 저 사람은 죽었습니다> 곧이어 두번째 질문이 뒤따랐다. <저것과 똑같은 것이 나에게도 일어나는가?> 마부가 말했다.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누구라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오렌지색 승복을 입은 순례자를 보았다. 그는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왜 저런 옷을 입고 있는거지?> 마부가 말했다. <저 사람은 영원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삶이 순간적인 것이며 모두가 꿈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내면에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지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구도자입니다> 그때 붓다는 연례행사의 하나인 젊음의 축제의 개막식 테잎을 끊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마부에게 말했다. <나를 집으로 데려다다오. 나는 더이상 축제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속아왔다. 29년 동안 나는 진실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에 그는 집을 뛰쳐나왔다. 그래서 그의 깨달음 이후에 그를 추종한 자들은 성이야말로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붓다의 추종자들은 도피자가 되었던 것이다. 붓다 자신에게는 그것이 옳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도피가 아니라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러나 다른 자들에게는 그것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하나의 굴레다. 연설자 유명한 정치 지도자가 연설을 하는데, 거의 한밤중이 될 떄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청중들은 하나 둘 떠나갔고 마침내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 지도자는 그에게 감사해 하며 말했다. <당신은 진실을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며, 나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추종자요. 나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 당신은 아직 여기 남아 있으니 말이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게 아니오. 나는 다음 연설자요>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고 싶다면 그대는 그들이 그대를 지루하게 하는 것도 허용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대가 어떤 사람이 지겹다고 말할 떄에는, 곧 그 사람이 그대에게 다음 연설자가 될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창녀와 성인 한 성인과 창녀가 집을 마주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둘은 같은 날 죽었다. 창녀의 영혼은 천국으로 인도되었고, 성인의 영혼은 어찌된 일인지 지옥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을 데리러 온 사자들은 몹시 당황했다. <어찌된 일이지? 무슨 착오가 아닐까? 왜 성인을 지옥으로 데려가야 하지? 그는 성스러운 사람이었지 않은가?> 그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자가 말했다. <확실히 그는 성스러운 사람이었지. 그러나 그는 창녀를 부러워 하고 있었어. 매일 밤 창녀의 집에서 벌어지는 파티나 환락에 관해서 항상 깊이 생각에 빠져 있었어. 창녀의 집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음과 창녀가 발목에 달고 있는 방율 소리까지 그의 마음을 동요시켜 놓았던 거야. 그 창녀 앞에 앉아서 칭찬하고 있는 어떤 손님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는 성인만큼 마음이 동요되고 있지는 않았을 거야. 그의 모든 의식은 항상 창녀한테로 향해 있었어.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조차도 귀는 창녀의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향해져 있었단 밀일세. 그런데 창녀는 어떠했었느냐? 비참한 생활 속에서 헐떡거리면서도, 성자는 자기와는 전혀 다른 어떤 행복 속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성인이 아침 예배를 위해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창녀는 생각했지. 나도 언젠가는 절에 기도의 꽃을 바치러 가기에 어울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는지? 나는 이렇게 더럽혀졌고, 그래서 절에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아 성인은 결코 이 창녀만큼 향연 속에, 램프의 불빛 속에, 예배 목소리 속에 융합되어 있지는 못했어. 창녀는 항상 성인의 생활을 동경하고, 성인은 항상 창녀의 쾌락에 굶주려 있었단 말일세> 그 서로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이질적인 두 사람은 그 관심과 행동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일의 이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그 법칙이란 다름아닌 입장을 바꿔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머니를 바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 마음에는 당신의 것을, 내 마음 속의 것을 차고 담으려 한다는 말이다. 이는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그러니까 그 성인의 에고가, 그리고 그 창녀의 에고가 결국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수행방법 어떤 사람이 한 선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종교적 수행을 합니까?> 그가 대답했다. <나의 수행방식은 일상 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저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잡니다> 질문한 사람이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군요> 선사가 말했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질문을 한 사람이 여전히 혼란스러워, 또 물었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선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먹을 때 다른 많은 것들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먹으면서 생각하고, 꿈꾸고, 상상하고, 회상합니다. 당신은 단순히 먹기만 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먹을 때 단순히 먹기만 합니다. 거기에는 먹는 것만이 존재할 뿐,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순수합니다. 당신은 잘 때 수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면서 꿈꾸고, 싸우고,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내가 잘 때는 단순히 자기만 할 뿐, 거기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이 존재할 때는 오직 잠만이 존재합니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먹는 것이 존재할 떄는 오직 먹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걷는 것이 존재할 때는 오직 걷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걷는 것이 있을 때 나는 그저 걷기만 합니다> 일상적이되, 일상생활 안에 깨달음을 끌어넣어라. 같은 사정 어느 소문난 큰 부자가 강물에서 익사했다. 그런데 그의 유족들이 시체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실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후 누군가가, 건너 마을에 사는 아무개가 그 시체를 건졌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유족들은 급히 그 사람을 찾아가서 시체를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체를 건졌다는 사람은 상대가 큰 부자의 유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유족들은 하는 수 없이 당대의 석학 등석 선생을 찾아가서 이 어처구니 없는 일에 대해 의논했다. 등석선생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원 별 걱정을 다하는군. 그냥 내버려 두시오. 당신네가 사지 않으면, 그 시체를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겠소?> 이 말은 듣고 유족들은 다소 여유가 있었다. 유족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소극적이 된 것을 눈치챈 건너 마을 사람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별다른 방도가 없자 그 사람 역시 등석 선생을 찾아가 물었다. 건너마을 사람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잠자코 듣고 난 등석 선생은 능청스럽게도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는군. 그대가 끝까지 버티고 있으면, 유족들이 다른데서 시체를 사간단 말입니까?> 경우에 따라서 사정이 이렇게 상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늘 서두르는 초조한 사람들이다. 실체 두 절이 이웃해 있었는데, 두 절의 주지에게는 심부름을 하는 작은 소년이 하나씩 있었다. 두 소년은 절에서 필요한 채소나 물픔 등을 시장에 가서 사오곤 하였다. 그런데 이 두 절은 서로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소년들은 역시 소년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잊어버리고 길에서 만나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놀곤 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도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한쪽 절이 소년이 시장에서 돌아와 주지에게 말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시장에 가다가 저쪽 절에 사는 소년을 만나게 되어 그에게 어디 가는 중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애가 바람부는 대로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의 대답이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 절의 주지가 말했다. <우리 절의 사람은 누구나, 설사 하인까지도 저쪽 절의 사람들에게 져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너도 그 아이에게 이겨야만 한다. 내일 만나거든 다시 어디 가는 중이냐고 물어봐라. 그 아이가 바람부는대로라고 대답하면 너는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니?하고 말하여라> 그 소년은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여러번 되새겼다. 그가 물어보고 상대편 소년이 대답하면 그때 그는 준비한 질문을 할 것이다. 다음날 그는 길에서 소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소년을 만나, 그가 물었다. <어디 가는 중이니?> 그 소년이 대답했다. <발 가는대로> 그는 다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대답은 고정되어 있었고 상대의 대답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매우 침울하게 돌아와서 주지에게 말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바뀌었고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주지가 말했다. <내일 그 아이가 발 가는 대로라고 말하면 너는 네가 절름발이가 되거나 발이 잘려지면 어떻게 할래?하고 물어라> 다시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찌감치 나가서 길에서 그 소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 소년이 왔을 떄 그가 말했다. <어디 가는 중이니?> 그러자 그 소년이 대답했다. <시장에서 야채를 사오려고!> 그는 매우 혼란스러워져서 돌아와 주지에게 말했다. <그에게는 도저히 안되겠어요. 그는 계속 바뀌고 있어요> 삶이란 그 소년과 같다. 실체는 고정된 현상이 아니다. 그대는 현재에 존재해야 한다. 자녕스럽게 그 안에... 오직 그대의 반응만이 실체와 부합할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대답이 미리 고정되어 있다면 그대는 이미 죽은 것이며, 이미 놓친 것이다. 내일이 오면 그대는 내일을 맞지 못한다. 행복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왕이 있었다. 부와 명예와 힘, 그리고 건강까지. 그렇지만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왕은 왕좌에 앉는 것이 슬펐고 싫었다. 하루는 꼭 행복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한 왕이 전의를 호출하였다. <나는 행복을 갖고 싶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라. 그러면 그대에게 광장한 부를 주겠다. 대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그대의 머리를 내게 바쳐야 할 것이다> 전의는 당항했다.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왕은 몹시 흥분해 있었으며, 그를 정말로 죽일지도 몰랐다. 전의는 말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폐하. 내일 아침까지 경전들은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밤새도록 생각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왕에게 가서 말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가 밤새 수많은 책들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행복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린 것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폐하의 위엄이 바로 행복을 막는 문제입니다. 폐하꼐서는 행복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행복하게 되고, 행복이 무엇인지 아시게 됩니다> 왕은 기뻤다.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구해서 입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왕은 신하에게,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신하는 서둘러 나갔다. 그는 부자에게 가서 그의 속옷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부자는 말했다. <속옷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내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합니다. 나 역시 이제부터라도 행복한 사람을 찾기 위해 하인들을 내보낼까 합니다> 신하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어는 누구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맞이할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는 말했다. <왕이 행복하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목숨이라도 내놓겠다. 도대체 어떤 속옷일까? 나는 나의 생명을 바칠 수도 있지만 속옷은 마음대로 안되는군.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아> 신하는 이렇게 탄식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그는 과오를 저지르게 될 판이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행복한 사람을 알고 있소. 당시녿 그가 부는 피리소리를 들었을 것이오. 바로 저 강가에서 피리를 부는데, 당신도 틀림없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오> <그렇군요! 한밤중에 저도 그 피리소리에 매혹되곤 했지요. 얼마나 아름다운 운율이던지... 도대체 그가 누구인가요? 그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요?> <밤이 되면 우리 함께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는 매일 밤,언제나 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강가로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한 사람이 피리를 불고 있었다. 피리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왔고 그 음률은 행복에 넘쳐 있었다. 신하는 기뻐 소리쳤다. <이제야 그 사람을 찾았다!> 그들이 피리부는 사람에게로 다가가자, 그 사람은 연주를 그쳤다.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오?> 신하가 말했다. <당신은 행복하지요?> 그는 말했다. <그렇소. 나는 행복하고 즐겁소.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원하오?> 신하는 기쁨에 넘쳐 춤이라도 출 것 같았다. 그는 말했다. <당신의 속옷을 주셔야 겠소> 그러자 그 사람은 침묵했다. 신하가 말했다. <왜 아무말도 없는거요? 당신의 속옷을 주시오. 왕은 당신의 속옷이 필요하오> 그는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오. 왜냐하면 나는 속옷이 없기 때문이오. 어둡기 때문에 당신은 볼 수 없겠지만 나는 지금 벌거벗은 채 앉아 있소. 원한다면, 내 목숨도 줄 수는 있지만 어떤 속옷도 줄 수가 없는 거요> 신하가 물었다. <그런데 어쨰서 당신이 행복하단 말이오?> 그 사람은 말했다. <나는 모두 잃었소. 심지어 속옷까지도 말이오. 하지만 내가 모두 잃어버리자 나는 행복하게 디었소. 실제로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소. 나는 나 자신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또한 내가 이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나를 통하여 불고 있는 거요. 나는 비존재요. 나는 무이며 누구도 아니오> 이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뜻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 아무것도 아닌 자, 당신이 아무것도 아닐 떄 전체가 된다. 당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불행하게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긴 일 두 명의 정신과 의사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퇴근하는 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주 만나곤 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걸은 계속해서 반복되어 일어나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했다. 갑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언제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을이라는 의사에게 침을 뱉았고, 그러면 을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천천히 손수건을 꺼내어 침 묻은 곳을 닦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을이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혼자서 킥킥거리며 웃는 일도 있었다. 엘리베이터 걸은 날이 갈수록 호기심이 더해 갔다. 마침내 그 궁금증 때문에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녀가 을에게 물었다. <박사님, 박사님과 같은 일을 하시는 저 박사님은 왜 계속해서 박사님께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을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나도 그가 왜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모르오. 그건 그 사람의 문제니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리고 또 내가 왜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쓰겠소?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라오> 어떤 사람이 그대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그것을 그 사람의 문제다. 그대와는 아무 상과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만든다. 그리고는 기분 나빠하고 걱정을 한다. 심지어는 복수할 생각도 한다. 탈옥 혼디니는 여러번 수갑을 찼고, 여러 감옥에 투옥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매번 몇 초 내에 수갑을 벗고 감옥을 탈출하곤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이탈리아의 감옥에서 세 시간 동안 감옥을 빠져나오지 못해, 수천 명이 밖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제껏 그와 같은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경찰이 그를 투옥시키는데 성공을 했단 말인가? 경찰은 혼디니가 절대로 탈출하지 못할 어떤 훌륭한 장치를 착안했단 말인가? 마침내 그가 감옥을 빠져나왔을 때, 그는 완전히 지쳐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들이 물었다. <그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요. 그들은 나를 속였어요. 자물쇠가 없어져버린 거예요. 나는 항상 자물쇠만 열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문에 자물쇠가 없었어요. 그들이 나를 속인 거지요. 내가 한 시간 동안 자물쇠를 찾으려고 애쓰다가 지쳐서 쓰러졌을 때 비로소 문이 열린 거예요> 그대의 내적 존재에도 자물쇠는 없다. 그대는 자기자신의 합리화에 갇혀 있다. 만일 그대가 자유롭고 싶다면 합리화를 떨쳐 버려라. 초월 옛날 중국 어느 마을에 매우 부유한 미망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수도승을 삼십년 동안이나 온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 오고 있었다. 그 수도승은 깨달음을 얻은 자였고, 수양으로 인해 매우 안정되고 평화로와 보였다. 그 안정감은 삶이 깨끗하고 신선할 때 자연스럽게 오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미망인이 나이가 점점 들어감에 따라 노쇠해져서 이젠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와 오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거리의 창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명이 다하기 전에 꼭 한가지 알고 싶은게 있다. 그것은 내가 삼십년 동안이나 뒷바라지를 해 온 수도승이 과연 득도를 하였는지를 확인하고 싶구나> 미망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돈은 네가 원하는 대로 주겠다. 한밤중에 수도승이 도를 닦고 있는 암자로 찾아가거라. 그에게는 도둑맞을 물건이라곤 아무 것도 없은 것이니 암자의 문을 잠그지 않았을 것이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껴안아 보아라. 그런 후 그의 반응을 지켜 보아라. 그리고 내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해다오. 내가 죽기 전에 과연 참된 스님에게 봉사를 했는지 아니면 그동안 내가 괜한 헛수고를 했는지, 그것을 알고 싶구나> 미망인의 부탁을 받은 창녀를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수도승이 도를 닦고 있는 암자로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작은 호롱불이 켜져 있었다. 수도승은 눈을 감은 채 명상중에 있었다. 그런데 호롱불이 바람에 흔들리자 눈을 뜨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거리의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수도승은 놀란 나머지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는 창녀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네가 왜 이곳에 았느냐?> 창녀가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가 그를 껴안으려 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도망치려 했다. 창녀가 미망인에게 돌아와 수도승과의 일을 모두 고했다. 창녀의 말을 들은 미망인은 자기가 수도승에게 지어 주었던 암자를 불살라 버릴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나서 미망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가 도를 깨우쳤다면 창녀를 따뜻하게 대해 주고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다>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도 당신이 집착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노여움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도 당신의 깨우침이 자연스러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당신이 삶을 초월하게 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 자신마저 초월하게 된다. 찾은 삶과 찾은 나를 모두 지워버릴 때 비로소 모든 초월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펌프 사막을 지나던 한 여행자가 몹시 목이 말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길가에 펌프가 하나 있었다. 알다시피 펌프는 그냥 두면 물이 밑으로 빠지기 때문에 물을 퍼올리려면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펌프에 부어야 한다. 목이 마른 여행자는 무척 반가와서 펌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펌프 손잡이에 종이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부탁의 말씀.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몇 년이 흘러야 한두 명씩 이 곳을 지나갑니다. 펌프는 제대로 작동이 되지만 몇 년 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퍼올리려면 먼저 펌프에 물을 부어야 합니다. 물 한 병을 건너편 바위 밑에 숨겨 놓았습니다. 그 물을 마셔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마신다면 펌프를 작동시키기에는 물이 부족하게 됩니다. 이 말을 믿어 주십시오. 그 물을 전부 붓는다면 틀림없이 펌프가 물을 퍼올릴 것입니다. 그때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한 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당신이 떠나기 전에 반드시 도로 그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 그 바위 밑에 갖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사람이 펌프를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물병을 도로 채워서 바위 밑 원래 자리에 숨겨 놓으십시오 그 쪽지에는 서명까지 되어 있었다. 무려 이십년 전의... 그 남자는 흰 바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물병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그 펌프에 써 있는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그 글을 써 놓은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면? 혹은 누가 장난을 친 것인지도 모른다. 물을 부었는데도 펌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물만 낭비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지금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아닌가?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누가 아는가? 이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무턱대고 믿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그 글을 써 놓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이며, 서명을 해 놓긴 했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따랐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신뢰이다. 강박관념 어떤 남자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그 남자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장이 자기에게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이 별것이 아닌데도 그는 곧 화가 나고 구두를 벗어 사장을 때려 넘어뜨리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자기 사장을 때릴 수 있겠는가? 가끔 자기 사장을 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욕구가 일지 않는 고용인은 드물다. 어쨌든 그 남자는 사장을 때리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며 지냈다. 그런데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사장을 때려 눕힐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는 구두를 집에 두고 회사에 다녔다. 그러나 구두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사장을 볼 때마다 그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발로 내려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구두를 집에 두고 왔다. 자기가 어느 날 흥분하여 구두를 벗어 사장에게 냅다 던질 것 같았기에 맨발로 있는 것이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구두를 집에 벗어두는 것만으로는 구두로부터 자유로와지지 않았다. 구두는 늘 그의 마음속에 자리했다. 펜을 들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쉬는 시간에도 종이에 구두를 그렸다. 그의 생각은 온통 구두로 꽉 찼고, 언젠가 자신이 사장을 공격하게 될까바 매우 두려웠다. 그는 가족들에게 아무래도 직장을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그의 심리상태는 자기 자신의 구두가 필요없을 정도까지 되었다. 사장을 때리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의 구두라도 집어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그의 손은 동료들의 발을 향해 뻗치기까지 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의 가족들은 정신과 의사에게 벌써 진찰을 받아 보았어야 될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의사는 그의 병세가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며,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에게 사장의 사진을 집에 걸어놓고 매일 아침 구두로 다섯번씩 치도록 했다. 출근 전,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듯 그 사진을 쳐야하고, 게다가 단 하루도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아침 기도처럼 매일 해야 하며,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뒤에도 그 행위는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사의 치료법을 다 듣고난 후,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하고 생각했다. 그는 의사의 착상에 놀랐으나 매우 만족스런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사진은 걸려졌고 그는 지시받은 의식을 시작했다. 첫날, 사진을 다섯번 구두로 후려친 후 회사에 출근한 그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사장에 대하여 전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2주일 내에 사장에 대하여 매우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 사장도 그의 변화를 알아챘다. 물론 무슨 일이 행해지고 있는지는 몰랐다. 사장은 그에게 최근에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해졌다고 말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제발 그것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다시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지게 될 테니까요. 죄송합니다만 정말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 뒤에 숨어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사진을 걸어놓고 마음껏 때린다고 해서 실제로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 사진을 침으로써 사장을 구두로 떄리고 싶다는 가 남자의 강박관념이 간단히 해소되어 없어진 것이다. 무관심 어떤 사람이 수퍼마켓 앞에 차를 세워 놓았다.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의 차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누군가가 차를 들이받아 차 앞부분이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 그런데다 거기에는 그의 차를 망가뜨린 차의 조그만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낙담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앞유리창 와이퍼 밑에 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차를 망가뜨린 사람이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적어놓은 메모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꺼내어 읽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가 이 쪽지를 쓰고 있는 동안 적어도 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소. 그들 모두는 내가 나의 이름과 주소를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소.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소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그가 자기 주소와 이름을 적어서 와이퍼 밑에 끼워넣는 것으로 믿었다. 어느누구도 그 종이에 무엇이 씌여 있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돌맹이 던넌에게는 고집스럽게 묻고 또 묻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한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던넌이 그 제자에게 돌맹이 하나를 주면서 야채시장에 가서 팔아 오라고 하였다. 그 돌맹이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단, 그것을 팔려고는 하되, 팔지는 말아라> 하고 스승이 말하였다. 그리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그 야채시장에서 돌맹이 값으로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제자는 시장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가 돌맹이를 보고는, <이거 장식용으로 참 좋겠는데... 우리 아이들 장난감으로도 좋겠어. 아니면 야채를 저울질 하는데 쓰면 제격이겠는걸> 하고 그들 나름대로 흥정을 걸어왔다. 그러나 겨우 10페이스짜리 작은 동전 이상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 그 제자는 돌아와서 스승에게 고하였다. <10페이스 이상은 못받겠어요. 사람마다 반응은 달랐지만, 대략 2페이스에서 10페이스 사이였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렇다면, 이제 금 시장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단지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알아보기만 하여라>하고 말하였다. 그 제자는 금 시장에서 돌아와 흥분하여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최고입니다. 그들은 천 루피나 주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반응은 달랐지만 5백에서 천 루피까지 주려고 했습니다> 또다시 그 스승은 말하였다. <이제는 보석상으로 가 보아라. 그러나 절대 그것을 팔지는 말아라> 그는 보석상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직면했다. 사람들이 5천 루피나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팔려고 하지 않자, 상인들은 값을 더 올려 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값은 10만 루피까지 껑충 치솟았다. 그러나 그 제자는 팔지 않겠다고 하였다. 상인들은, <20만 루피, 30만 루피라도 주겠소.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주겠소. 그러니 그것을 제발 파시오>하고 졸라대었다. 그 제자는, <나는 팔 수 없습니다. 단지 시세를 알아보려고 왔을 뿐입니다>하고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야채시장에서 흥정하던 값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승에게로 돌아갔다. 스승은 돌을 집어올리며 말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 이해의 척도를 잴 수 있다면, 이제 너는 그 값이 네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대의 이해력은 그 야채시장의 수준과 일치한다. 그런데도 그대는 더 고귀한 가르침을 요구한다. 그대는 다이아몬드를 요구하고 있다. 먼저 보석상이 되라. 그런 다음 나에게 오라. 그때에는 나도 그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가르칠 수 없는 것 우파니샤드 시대의 스베타케투라는 어린 소년은 아버지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한 스승에게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는 수년동안 스승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 그는 모든 베다를 기억하였고, 그 당시에 접할 수 있는 모든 과학과 학문을 통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학자가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온 나라에 퍼졌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에게 가르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스승은 말했다. <그대는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았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스승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배우고, 꺠달음을 얻었으므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제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큰 자만심과 에고를 가지고. 그가 막 마을 어귀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 우달락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를 눈여겨 보았다. 매우 자만심에 찬 걸음이었다. 아들은 무거운 머리를 떠받치기라도 하듯 목과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매우 슬퍼졌다. 진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고의 지식에 도달한 사람은 무엇을 알았다는 표시가 없는 법이다. 집으로 돌아온 스베타케투는 자기 아버지가 매우 행복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가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어디를 가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행복해 하기는 커녕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 물었다. <왜 그리 슬픈 표정을 하고 계신지요?> 아버지가 말했다. <너에게 꼭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그것 하나를 앎으로 해서, 더이상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는 그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또한 그것 하나를 앎으로 해서 모든 고통이 끊겨지는 그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배울 수 없는 그것을 너는 배웠느냐?> 아들 또한 갑자기 슬픈 표정이 되었다. <아니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라. 그리고 너의 스승에게 돌아가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해라>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모순됩니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면, 스승께서 어떻게 저에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요?> 아버지가 말했다. <그것이 진정한 스승의 기술이다. 그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너에게 가르칠 것이다. 다시 돌아가거라> 할 수 없이 그는 다시 돌아가 스승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는 정말로 터무니 없는 것을 위해 저를 다시 스승님께 보냈습니다. 지금 저는, 제가 어디에 있으며 그리고 스승님께 무엇을 여쭈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저를 다시 돌려 보내시면서, 배워서는 알 수 없는 것을 배웠을 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요? 스승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으셨습니다> 그 스승이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 묻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그것을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 너는 미묘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그것은 너무도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있는 일이란, 간접적으로 돕는 일밖에는 없다. 이것을 한번 해 보아라. 내가 데리고 있는 적어도 사백 마리 이상 되는 소와 그 밖의 가축을 데리고 인적이 끊어진 아주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거라.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가축들과 함께 살아라.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 이 가축들은 너의 어떤 말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속 침묵을 지켜라. 사백 마리가 번식하여 천마리가 되거든, 그때 돌아오너라> 스승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숲속으로 가서 혼자 살아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그곳에서는 생각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물들은 너의 이런 생각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의 학자적인 자만심을 그곳에서 떨쳐버려라> 스베타케투는 스승의 말대로, 숲속으로 들어가 가축들과 함께 수 년 동안 살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무수한 잡념이 마음속에 떠돌아다녔다. 똑같은 생각들이 계속 맴돌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지겨워졌다. 사백여 마리의 가축과 새와 야생 동물과 나무와 바위와 강과 냇물만 있을 뿐, 거기에서 이야기를 나눌 대상은 전혀 없었다. 동물들 앞에서 자만심을 내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쓸모없는 짓이었다. 스베타케투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에고의 상태로 남아 있는다면 이 동물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을까?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거나, 냇가에서 낮잠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여러 해가 흘렀다. 이제는 자신이 언제 돌아가야 할 것인지도 까맣게 잊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사라졌다.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생각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침묵 속에 있게 되었다. 과거는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과거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미래 또한 떨어져 나갔다. 미래라는 것은 단지 과거의 투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이 말했던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그는 단지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할 뿐이었다. 그는 마치 동물과 같이 순간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이제 한 마리의 소가 되었다. 가축이 천 마리가 되었을 때는 가축 자신들이 불편함을 느꼈다. 가축들은 스베타케투가 스승이 계신 아쉬람으로 데리고 가길 원했다. 그러나 스베타케투가 잊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소들이 이 사실을 알려 주기로 결정을 하였다. <자, 이제 이만한 세월이면 충분하오. 우리들이 천 마리가 되었을 때 돌아와야 한다고 그대의 스승이 말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은 이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소. 지금이 바로 그때요. 우리는 돌아가야만 하오. 이제 우리들은 천 마리가 되었소> 그래서 스베타케투는 비로소 동물들과 함께 스승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스승은 스베타케투가 천 마리의 가축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자신의 오두막 앞에서 발견하고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보아라! 저기 천 마리의 짐승이 오고 있다. 스베타케투는 없다> 스베타케투는 이토록 침묵의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는 에고나 자아 의식은 없었다. 단지 한 마리의 가축이 되어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스승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스승은 기쁨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스베타케투를 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대에게 해야 할 말은 없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는데, 왜 나에게 왔는가?> 스베타케투는 말했다. <단지 스승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당신의 발을 만지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스승님은 저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스승은 어떤 것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간접적인 도움만이 가능한 것이다. 직접적인 인도가 있는 곳, 마음에다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는 곳에서는 진정한 종교가 싹틀 수 없다. 아귀 바루공양에 얽힌 몇 가지의 설화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귀에 대한 것이다. 이놈의 아귀는 살아 생전에 편안하게 놀면서 배불리 먹으려고만 한 사람들이 죽어서 된 귀신이다. 귀신이 될 수 밖에... 듣자하니 이 귀신의 입은 바늘구멍만하고 배는 또 남산만하다 하니, 아무리 먹어도 배부를 리 없다. 이 귀신들은 바루 소리만 나면 모여드는데, 공양하는 곳에서 지붕을 오르내리거나 방문을 넘나들면서 조바심을 내다가는 절수물을 받아마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형편이다. 그런데 만약 재수 없게도 이 물에 고춧가루 하나라도 끼어 있는 날에는 입을 꽉 막아버리니, 아귀는 더 먹을 수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식사를 할 때에는 밥알 하나라도 남기지 말고 깨끗이 먹어치워야 하는 것이다. 지옥 어느 성직자가 자신은 사후에 반드시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죽었고 마침내 그곳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그가 들어간 집은 너무나도 훌륭한 궁전같은 집이었다. 그리고 어떤 욕구가 일어나는 순간, 하인이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배가 고프면 그가 맛본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을 든 하인이 거기에 있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가 목이 마르면 그 욕구가 채 생각되기도 전에, 그것이 느낌으로만 있을 동안에 마실 것을 들고 하인이 나타났다. 이런 꿈같은 생활이 계속되었고, 그는 얼마동안은 무척 행복했다. 그러다가 그는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데, 가만히 의자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직 도를 행하는 사람만이 가만히, 언제까지라도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성직자는 이삼 일 동안은 행복했다. 모든 것이 쾌적했다. 살아 있었을 때 그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매우 많은 공적인 봉사와, 전도와 교회 일과, 설교로써 인도하는 일들을 했었다. 그는 사회의 여러 공동체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쉬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쉴 수가 있는가. 그는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때 하인이 나타나 물었다.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지금 당신은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불안해진 성직자는 말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여기 언제까지나 앉아 있을 수가 없소. 나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소> 하인이 대답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신의 욕망은 여기에서 우리들에 의해 충족되어질 것입니다> 다시 성직자가 물었다. <이 곳은 어떤 종류의 천국인가?> 하인이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이곳을 천국이라고 말했습니까? 이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곳이 천국이라고 말했지요?> 그곳은 정말 지옥이었다. 이제 그는 이해하게 되었다. 편안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곳은 지옥이다. 그는 머지 않아 미쳐버릴 것이다. 어떤 교제나 대화, 봉사,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할 이교도, 지혜롭게 만들어야 할 우매한 사람들이 거기에는 없었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도를 행하는 사람만이 지옥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다. 차 한때 나에게는 교수이자 말을 너무 사랑하는 이웃이 하나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자동차를 구입했는데, 그는 매일 아침 차를 깨끗이 닦았다. 하지만 그 차는 하나의 전시품에 불과했다. 결코 그것을 길 위로 끌어내는 법이 없었다. 수년동안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매일 아침 세차를 하고 광을 내느라고 많은 곤란을 겪곤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같은 기차의 객실에서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그 차에 무슨 고장이라도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밖으로 내놓지 않고 사용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언제나 당신의 차고 안에 그대로 놓여 있더군요> 그는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그것과 사랑에 빠졌어요. 내가 그것을 밖으로 끌어냈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전 그때문에 항상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고나 긁히는 일 같은, 어떤 식으로든 무엇인가 잘못될 수는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그것을 너무나 사랑한답니다> 자동차, 말, 그물, 그것들은 단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들과 사랑에 빠질 수 있으나, 그렇다면 그대는 결코 그것들을 사용할 수가 없다. 장미 만수르라는 성자는 평생을 거지로 살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만수로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엔 그의 스승도 있었다. 이 스승은 깨달음을 얻진 못했지만 매우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자였다. 사람들이 만수르에게 돌을 던지자, 그 스승도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뭔가를 던져야만 했는데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겠고 하여 장미꽃을 던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돌을 맞으면서도 울지 않던 만수르는 장미꽃을 맞자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돌로 치는 것보다 장미꽃으로 치는 것이 더 아프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실패한 인생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의사가 있었다. 그가 나이가 들어 은퇴하게 되자,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그의 제자들이 그의 은퇴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이 한창 기념파티를 하고 있는데, 웬지 외과의사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선생님은 성공적인 인생을 사셨습니다. 아무도 선생님과 비교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님은 행복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계십니다. 자, 선생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 세상 곳곳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슬퍼 하십니까?> 그는 말했다. <나는 결코 의사이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어렸을 때 나는 무용수가 되고 싶었다네. 이제 내 인생은 다 가버렸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데에 내 삶을 소모해 버렸어. 나는 분명히 성공했지만 만족할 수가 없네. 그건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그건 배고프지도 않은데 누군가가 자네에게 먹기를 강요한 것과 다름없네. 자네가 물을 마시기 원하는데 누군가가 자네에게 우유를 강요한다면, 확실히 물보다는 우유가 낫지만, 자네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물을 마시길 원했기 때문에 우유에 만족하지 못할 것일세> 이제 그의 모든 성공은 잘못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침묵 다섯 살 난 어린 소년이 그의 선생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너의 여동생은 이제 말하기를 배웠느냐?> 그 소년이 말했다. <네, 말하기를 배웠는데 이제 우리는 그 아이에게 조용히 하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이것은 불행이다. 그대는 말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것은 삶의 일부이니까. 그러나 그후에 그대는 침묵하는 법, 말이 없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신호등 붐비는 어느 거리에서 정신과 의사가 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댜. <저 건너편에 남자가 보이죠?> 그녀가 속삭였다. <그 남자가 제 남편이에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는 자신이 교통신호등이라고 생각해요. 남편은 밤새도록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깜빡깜빡 하거든요> 그 의사는 끄덕이며 말했다. <건너가서 그와 이야길 해봐야겠습니다> <아니에요. 기다리세요> 부인이 소리쳤다. <신호등이 지금 꺼져 있어요> 자기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남이 미쳤다는 것을 알기는 매우 쉽다. 남에 대해서 그가 미쳤다고 샌각하는 것은 바로 사고자의 미친 마음에서 연유한다. 훨씬 쉬운 일 멋쟁이이긴 하지만 빈털터리며 바람둥이인 사람이, 있는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추녀와 전격적으로 결혼을 하여 그의 친구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더욱 그의 친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결혼 후에도 그가 어디를 가든지 그가 가는 곳이면 반드시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친한 친구 중의 하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돈 때문에 저렇께 소름끼칠 정도로 못생긴 여자와 결혼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네. 그렇지만 자네가 외출할 때마다 그녀를 동반하는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네> 그러자 바람둥이가 설명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그것이 그녀에게 작별 키스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니까 말일세> 마찬가지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것은 매우 값싸고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도움 한 어린아이가 정원에 앉아 있는 아버지 곁에서 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너무나 커서 그 아이가 들어 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온 힘을 다 사용하고 있지 않구나> <아니에요. 저는 온 힘을 다 쓰고 있는 걸요.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잖니? 그것도 역시 너의 힘이란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데도 너는 나에게 도와 갈라고 청하지 않더구나. 그것이 네 힘을 다 사용하지 않는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테크닉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에너지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신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테크닉 만을 갖고 명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썰매 한 어머니가 그녀의 맏아들을 야단치고 있었다. <네 동생과 함께 썰매를 반반씩 나누어 타라고 했었지?>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했어요> 맏아들이 항의를 하였다. <언덕을 내려갈 떄는 제가 타고, 올라올 때는 동생에게 썰매를 주었단 말이예요. 꼭 반반씩 나누어 탔어요> 영리해지려고 애쓰지 말라. 그대가 세상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대 자신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아라! 탁월한 생각은 진리탐구에 있어 필요한 것이다. 원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여덟살 짜리 꼬마 아이가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선생님이 대답했다. <하느님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는것요?> 하고 꼬마가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꼬마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원에서 처음 시작되는 곳과 끝나는 곳이 어디 있어?> <이제야 조금 알듯 한데> 하고 처음 꼬마가 말했다. 만약 삶이 완전하다면, 원은 최초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원은 완성된다. 그러나 그 원이 완전하지 못함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빠져 있음을 느꼈다. 인간이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이 원은 완성되고, 인간 또한 완전해진다. 선에서는 말한다. 내가 도에 이르기 전에는 강은 강이었고 산은 산이었다. 내가 도에 깊이 빠져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졌다. 이제 강은 더이상 강 같지 않았고, 산 또한 더이상 산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거꾸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내가 마침내 도를 깨우쳤을 때는, 다시 강은 강이 되었고 산도 다시 산이 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어디에서 출발하든, 우리는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만약 원이 완성되고 여행을 다 마친 후 우리가 성취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도에서 끝을 맺는다면 모든 사물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다. 도둑 경찰서장이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자네는 이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 단 한명의 도둑도 잡아 내질 못했어> 그는 순찰 경관에게 호통쳤다. <기회를 한번 더 주겠다. 어떤 놈이 데이비스 선생 댁 사과를 훔쳐가고 있다. 어서 가서 그 도둑을 잡아 와!> 그래서 경관은 한밤중에 그곳으로 갔다. 그는 과수원에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도망치려는 복면의 사나이를 발견하고는 쫓아가 붙잡았다. 그가 보따리를 풀자, 값진 은화들이 쏟아졌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보따리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이것이 사과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지식은 결코 당신에게 통찰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을 장님으로 만든다. 지식은 당신을 눈몰게 한다. 앎은 통찰이며, 투명하고 순수하다. 지식은 낡은 것이다. 앎은 언제나 새롭고 젊다. 앎은 현재에서 일어난다. 지식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오, 하느님! 어떤 사람이 말을 사려고 목장으로 가서, 그 중 한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놈은 아주 아름답군요. 무슨 종입니까?> <팔로미노입니다> 목장 주인이 말했다. <저 말을 사겠소> 그런데 목장 주인이 그에게 한가지 주의를 주었다. <알려드릴 것이 있는데, 저 말은 교히의 전도사가 갖고 있던 것입니다. 말이 달리기를 원할 때는 하느님이라고, 멈추기를 원할 때는 아멘이라고 하십시오> <한번 시험해 보아도 될까요?> 그가 말에 올라타서 <하느님>하고 말했더니 말은 재빠리 달려서 즉시 산으로 질주해 올라갔다. 그는 <하느님, 하느님> 하고 계속 소리쳤고, 말은 정말로 빠른 속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가 낭떠러지의 끝에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려서 <워, 워!>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곧 그는 기억을 되살려서 <아멘>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말은 신기하게도 낭떠러지의 끝에서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 하느님!> <하느님>이라고 말하라. 그러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바다 어떤 물고기가 여왕 물고기를 찾아가서 물었다. <저는 바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바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다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여왕 물고기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바다에서 태어났으며 바닷속에서 살고 있다. 지금 바로 이순간에도 그대는 바닷속에 있고, 바다는 그대 속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대는 그 바닷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처하고 있는 상황과 똑같다. 바다는 늘 변함없이 존재하는데 물고기가 그것을 어이 알겠는가? 바다는 한순간도 그 물고기 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 바다는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 물고기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바다는 너무나도 투명하여 물고기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한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마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 물고기는 바닷속으로 녹아 들어갈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너무 가깝고, 또한 너무 멀다. 그리고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므로 너무 깊이 숨겨져 있다. 너무 쉽게 손에 닿는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 역시 에너지의 바닷속에서 살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태어나 그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속으로 분해되어 사라져갈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너무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한번도 그것을 놓쳐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에 있었다. 보다 민감해져라. 억압 어느 날 한 농부가 외출을 하려고 막 나서는데, 그를 찾아온 어린 시절의 소꼽친구와 맞닥뜨렸다. 농부는 오래간만에 만남 그 친구를 반기며 말했다. <여보게, 잘왔네. 그동안 어디서 무얼하며 지냈나? 어서 들어 오게나. 그런데 때마침 선약이 있어 외출을 해야 하는데 미룰 수도 없는 형편이니 돌아올 때까지 내 집에서 쉬고 있게. 한시간 내로 돌아오겠네. 그때 우리 그동안의 회포를 풀기로 하세> 친구가 말했다. <아, 그럴게 아니라 나도 가도 되는 곳이라면 우리 함께 가는게 어떻겠나. 비록 내 옷이 남루하여 좀 꺼림직하긴 하지만 자네가 내게 옷을 빌려줄 수 있다면 곧 갈아 입고 자네와 동행하겠네!> 그런데 농부는 언젠가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값비싼 비단 옷을 특별한 날에 입기 위해 장농 깊숙히 보관하고 있었다. 농부는 기꺼이 그 옷을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농부의 친구는 그 화려하고 멋진 옷을 차려입고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허리에 천을 매고 아름다운 신을 신었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마치 귀족이나 왕같아 보였다. 친구를 바라본 농부는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 그의 모습과 비교해보니 자신은 마치 하인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농부는 괜히 친구에게 비단옷을 내주었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자기 친구에게만 시선을 주고 자신은 그의 하인 정도로 여길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매우 언짢아졌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오직 신과 숭고한 것만을 생각하려 애쓰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값비싼 옷과 터번이 무슨 소용 있는가.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시켰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옷과 터번은 그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의 친구에게만 눈길을 줄 뿐, 농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는 점점 풀이 죽기 시작했다. 친구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그의 머릿 속에는 옷과 터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방문하기로 되어 있던 집에 도착하였다. <이 사람은 어릴적 나의 소꿉친구입니다. 매우 훌륭한 사람이죠> 그리고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갑자기 이렇게 내뱉았다. <그리고 이 친구가 입은 옷은 바로 내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의 친구는 물론 그들을 맞이하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농부는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곧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고 자신을 나무랐다. 그 집을 나오면서 그는 친구에게 사과를 했다. 친구는 말했다. <정말 놀랐네. 어떻게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미안하네. 내가 혀를 잘못 놀려 그만... 내가 잘못했네> 그러나 혀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언젠가는 입을 통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혀는 절대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날 용서해 주게나. 내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네> 농부는 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농부는 친구가 입고 있는 옷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또 마음먹었다. 그 가엾은 농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면 할수록, 그 옷이 자기 것이라는 의식은 내부 속으로 더욱 굳게 뿌리를 내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금욕할 것을 맹세한다면, 그의 성욕이 내부에서 필사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뜻한다. 또 한일 오늘부터 식사량을 줄이거나 단식을 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그가 먹고 싶다는 깊은 욕망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노력은 반드시 내적 갈등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욕망을 자제하려고 애쓰고, 또, 그것과 싸워 이겨내기 위해 결심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잠재의식 속에서의 갈등의 원인이 될 뿐이다. 내적 갈등에 얽매여 그 농부는 두번째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친구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나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주의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그도 얼른 알아챘다. 모두들 그의 친구와 친구가 입고 있는 옷을 외경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저것은 나의 옷이고 나의 터번이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그의 머리를 때렸다. 하지만 옷에 관한 말은 절대 하지 않기로 했던 사실을 다시 한번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옷은 시계추처럼 좌우를 왔다갔다하며 그의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친구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나의 소꿉친구입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신사입니다. 그리고 친구가 입고 있는 그 옷은 그의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런 식의 소개말은 이제껏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곳을 떠나면서 농부는 친구에게 전보다 더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하였다. 자신이 또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제 무엇이 해야 할 말이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인지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지금껏 옷에 대해 이렇게 집착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오, 신이시여!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의 친구는 크게 노하여 이제 더이상 함께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농부는 친구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이보게, 제발 그러지 말게. 옷에 대해서는 이제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네. 진심이네. 신에게 맹세코 옷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함세> 그러나 당신은 맹세하는 사람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무언가를 결심하는 경우에, 거기에는 뿌리깊은 무엇인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부분으로 나눈다면, 결심한 것은 그 중의 한부분일 뿐이고, 그것은 단지 상층부분에 불과하다. 나머지 아홉 부분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음의 한 부분이 금욕의 맹세를 세운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성을 구하려고 열광하고 있고, 신에 의해 인간에 심어진 바로 그것을 찾으려고 절규하고 있다. 그들은 세번째 집으로 갔다. 농부는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했다. 뭔가를 억제하는 사람은 매우 위험스럽다. 그의 내부에 활화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는 벗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몸부림치고 있다. 강제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대단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될 수도 완성될 수도 없다. 당신은 가끔 긴장을 풀고 휴식해야만 한다. 당신은 주먹을 꽉 쥔 채 얼마동안 있을 수 있는가? 12시간? 24시간? 주먹을 꽉 쥐면 쥘수록 피곤해지고 그만큼 빨리 손이 펴질 것이다. 심하게 일하면 일할수록 에너지를 많이 쓰면 쓸수록 당신은 더 빨리 피곤해진다. 작용에는 항상 반작용이 있다. 당신은 손을 쭉편 채로 있을 수는 있지만, 언제나 손을 꽉 쥔 채로 있을 수는 없다. 당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삶의 자연적인 부분일 수 없다. 무엇인가를 억지로 할 때는 휴식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농부는 옷에 대하여 절대 말하지 않도록 자신을 엄격하게 억제했다. 농부의 상태를 한번 상상해 보라. 만일 당신이 맹세를 해 본적이 있다면, 혹은 어떤 종교적인 이유로 자신을 억제했던 적이 있다면 그 가엾은 농부의 마음 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음 집으로 들어갔다. 농부는 긴장으로 많은 땀을 흘렸고, 극도로 지쳐 있었다. 그의 친구도 걱정하고 있었다. 농부는 불안한 나머지 온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는 소개의 말을 시작했다. <제 친구를 소개합니다. 제 오랜 친구입니다.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듯이 내뱉았다. <이 친구의 옷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옷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이 농부에게 일어났던 일은 그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을 엄격하게 억제하면 할수록 마음은 활하산이 되어 언젠가 폭발할 것이다. 애완동물 어떤 사람이 애완동물 가게에 들어갔다. 그는 여러 애완동물을 돌아보고 주인에게 물었다. <저 큰 개는 얼마요?> 그 개는 매우 사나워 보이는 독일종 세퍼드였다. 주인이 말했다. <500루피입니다> 그에게는 너무 비싼 값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다. <이 작은 놈은 얼마나 합니까?> 그것은 몸집이 작은 다른 종류의 개였다. 주인이 말했다. <1,000루피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여기 작은 놈은 얼마요?> <2,000루피입니다> 그 사람은 매우 당항해서 물었다. <그럼 내가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얼마를 내야 합니까? 개가 작아짐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는데, 내가 만약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도대체 얼마를 내야 합니까?> 그대의 두려움은 이런 식이다. 후퇴 앨버트가 또 학교에 지각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완벽한 변명거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정말 걷기가 힘들었어요. 한 걸음을 옮기면 두 걸음 뒤로 미끄러졌어요> 선생님이 물었다. <그러냐? 좋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지?> 앨버트가 말했다. <그래서 저는 학교로 오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역시 한 걸음 나아가면 두 걸음 후퇴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다보니 마침내 학교까지 후퇴했지 뭐예요> 변명을 만들지 말라. 그것은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이 변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것이다. 콜럼부스 역사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콜럼부스의 항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소년이 무아지경에 빠져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를 본 선생님은 그 소년에게 아메리카의 발견에 대한 글을 짓도록 하였다. 다음은 그 소년이 쓴 글이다. 콜럼부스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똑바로 세울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스페인의 왕이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대는 아메리카를 발견할 수 있는가?> 콜럼부스가 대답했습니다. <네, 저에게 배 한 척만 주십시오> 그는 몇 명의 선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아메리카가 있는 방향으로 항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은 아메리카 같은 것은 없다고 하면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한 선원이 소리쳤습니다. <선장님, 육지가 보입니다> 배가 해안에 다다르자 한무리의 원주민들이 보였습니다. <여기가 아메리카입니까?> 콜럼부스가 원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은 인디언이지요?> 콜럼부스는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네> 하고 인디언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혹시 당신은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고 콜럼부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인디언 추장이 그의 부하 인디언들을 향하여 크게 소리쳤습니다. <얘들아, 이제 우린 끝장이다. 결국 우리들은 발견되었다> 어린아이는 어린이다운 마음으로 듣고 그들 나름대로 해석을 내린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마음으로 듣는다. 즉 그저 듣고 있을 뿐이지,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가장 값싼 노동력 한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항상 결혼을 반대해 왔는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습니까?> 그는 말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번 겨울에 매우 추울 것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중앙난방은 내 능력에 닿지를 않으니 아내를 얻는 것이 더 경제적일 것 같아서요> 이것이 곧 논리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안락하고, 편리하고, 경제적이고, 더 싸게 먹히기 때문에 함께 산다. 혼자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내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주부, 요리사, 하녀, 간호사... 그녀는 전혀 보수를 받지 않고 매우 많은 일을 하는, 세상에서 가장 값싼 노동력이다. 그것은 하나의 착취이다. 넥타이 어느 남자의 60회 생일날이었다. 그와 아내는 싸움으로 거의 40여년간의 긴 결혼생활을 해 왔다. 그날 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가 생일선물로 아름다운 두 개의 넥타이를 선물로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그런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너무 놀랐다. 그녀가 두 개의 넥타이를 선물로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엇다. 그는 매우 행복해서 말했다. <저녁식사는 만들지 말아요. 잠깐 동안 준비를 할테니 시내의 가장 훌륭한 레스토랑으로 갑시다> 그는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선물로 준 타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 매었다. 그의 아내가 그런 그를 바라보더니, 화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뭐예요? 당신은 다른 타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요? 다른 타이는 그냥 버려둘 작정이예요?> 사람은 한번에 하나의 타이 밖에는 맬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어느 타이를 매었든지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싸움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녀는 날마다 싸울거리를 찾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대리석가게 앞을 지나고 있을 때, 거대한 대리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가게 주인에게 그 대리석의 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그 대리석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지난 10년간 그것을 팔려고 시도했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가게는 비좁은데 그것이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어서 아주 골칫거리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한다면 그냥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면 나는 다른 대리석을 몇 개 더 전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리석은 정말 쓸모가 없더군요>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을 집으로 가져갔다. 그 후 1년이 지나고, 미켈란젤로가 그 가게 주인을 집으로 초대했다. <와서 보십시오. 그 때 그 대리석이 꽃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중의 걸작품인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었다. 그것은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껴안고 있는 상으로, 예수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그녀의 무릎 위에 누워 있고, 그녀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 중의 하나였다. 가게 주인이 물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조각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내가 이 대리석 앞을 지나치려 하는데, 예수가 나를 불렀습니다. 나는 지금 이 대리석 속에 누워 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 내 모습이 드러나게 하라 대리석 안을 들여다본 나는, 어머니 무릎에 누운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이 안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 대리석은 그토록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쪼아냈을 뿐인데, 이러한 기적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조각상은 바티칸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약 10년 전에 한 미치광이가 망치로 예수와 마리아의 머리 부분을 깨뜨려, 그 아름다운 조각상은 망가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러한 조각상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는 자주 탄생하는 것이 아니니까. 경찰이 그 사람을 체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전처럼 되살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 미치광이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미켈란젤로가 아니기 때문에 그처럼 위대한 조각품을 탄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나의 이름이 역사에 남고, 내 자신이 신문전면에 실리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나는 성공했으니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재판관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단지 신문의 전면에 사진을 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종한 예술품을 부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창조했지만, 내가 그것을 파괴했습니다. 나는 교수대에라도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와 같은 눈을 가지면 모든 돌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보인다. 오직 미켈란젤로와 같은 사람만이 엑스레이처럼 돌 속을 투시할 수 있다. 그때의 그 돌은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예수가 될 수도 있다. 어느 두 수도승 두 승려가 자기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질 무렵, 두 승려는 어느 시냇가에 이르렀다. 그때 한 처녀가 냇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본 나이 많은 승려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계율을 잘 지키기로 이름난 그는 자신이 색정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래서 선배 수도승은 먼저 눈을 감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율을 잘 모르는 신출내기 젊은 수도승은 그 처녀에게 말을 건넸다. <왜 여기서 서성이고 있는 거요? 금방 어두워질 텐데. 더욱이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란 말이오> 처녀가 대답했다.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무서워서 그러니 좀 도와주세요> 마침 장마끝이라 물이 많이 불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젊은 승려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 등에 업히시오> 먼저 개울을 건넌 나이 많은 승려가 뒤를 돌아다 보고는 깜짝 놀랐다. 수행승이 여자를 등에 업고 있는게 아닌가. 그는 매우 당황하였다. 이것은 죄다 사실 그는 죄의식을 느꼈다. 자신이 선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젊은 수도승을 말렸어야만 했다. 이것은 명백한 죄이며 그 자신은 이것을 큰스님에게 고해야 한다. 개울을 다 건넌 젊은 수도승은 그 처녀를 내려놓고, 선배 수도승과 함께 절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절까지는 아직 시오리가 남아 있었지만 선배 수도승은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말없이 걸었다. 마침내 절 입구에 이르렀을 때, 선배 수도승이 입을 열었다. <자네 오늘 율법에 어긋나는 큰 잘못을 저질렀네. 그것은 금지된 짓이야> 젊은 중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요? 저는 계속 침묵을 지켰습니다.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걸요> 선배 중이 말했다. <개울에서 여기까지 함께 걸어온 동안을 말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가 개울에서 업어준 그 처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세> 그러자 젊은 중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저는 그 자리에서 처녀를 내려놓았는데 스님은 아직도 그 처녀를 업고 계시는군요> 참다운 신비주의자는 어떤 분별심도 품을 수 없다. 에고는 벽이다. 마음이 없으면 나눔도 없다. 모든 존재는 비이원적이다. 거기에는 어떤 분별도 없다. 그것은 전체이며 하나다. 그것은 조화이며 거기에는 어떤 경계도 없다. 초승달 수피 신비주의자 한 사람이 위대한 이란 왕의 명을 받고 사자로서 인도 왕에게 보내졌다. 이란 왕은 인도 왕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으므로 근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수피 신비주의자를 보내어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오해들을 풀고 서로의 이해를 돕고자 한 것이었다. 신비주의자는 인도 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보름달이십니다> 그가 왕에게 대왕께서는 보름달이십니다라고 말했다는 소식이 이란 왕에게 전해졌다. 그런데 그 신비주의자는 이란을 떠날 때 이란 왕에게 대왕께서는 초승달이십니다라고 말했었다. 이란 왕은 매우 화가 났다. 초승달이라고? 그것은 바로 이제 시작하는 초하루의 달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가 인도 왕에게는 보름달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란 왕에게는 큰 모욕이었다. <그를 소환하라!> 이란 왕은 분노하여, 그를 기다렸다. 신비주의자는 돌아오자마자 즉시 붙잡혀서 법정으로 보내졌고 문책받기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보름달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죽어가는 것이며 몰락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보름달은 과거는 있으나 미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도 왕에게 당신은 보름달입니다라고 말한 겁니다. 그러나 대왕이시여, 나는 대왕을 초승달이라고 불렀습니다. 대왕은 미래가 있고 가능성이 있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인도 왕의 위엄은 위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보라, 어떤 것이 과거를 가질 때 그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정신분석학자에게 간다면 그는 당신의 과거를 들추어 내려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모든 과거를 말하시오> 팝콘 어떤 정신분석가가 자기가 팝콘이라고 생각하는 한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이나 열심히 치료한 결과, 이제 거의 다 완쾌가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정신분석가가 환자에게 물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환자가 대답했다. <물론 사람이지요> 이제 다 나았다고 판단한 정신분석가는 환자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나간지 불과 오 분도 안되어, 그 환자는 공포에 질린 채 뛰어들어오면서 외쳤다.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밖에 병아리가 있다고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겨우 도망쳐 왔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이 팝콘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안그래요?> <물론 저는 알고 있지요. 하지만 병아리들은 그 사실을 모르쟎습니까?> 마음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지금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겉모양만 그럴 뿐이다. 때문에 또다시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그대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변형이 아니라 다만 위안일 뿐이다. 텅빔 언젠가 나는 인도에서 아주 부유한 사람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 집에서 가장 좋다는 방을 내주었는데, 그 방은 가구들 때문에 매우 난잡했다. 그 방은 무수한 가구들로 꾸며져 있어서 실제로 방은 없었고 드나들기조차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그 방이 마음에 드십니까?> 나는 말했다. <도대체 방은 없군요.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럭저럭 들어갔다 나왔다 하지요. 이건 방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는 가구들과 현대적인 가구들을 많이 수집해 놓고 있었다. 전축, 텔레비젼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방은 없었다. 방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그런 가구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무엇이 부족한 게 있습니까? 텔레비젼도 있고 전화도 있고 라디오, 전축도 있어요. 없는 게 뭐지요? 제게 말씀해 주시면 곧 주문하도록 하지요> 나는 말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가구 명세서에 지나지 않는 거요. 방은 사면의 벽 안에 있는 빈 공간이지요> 그 방이라는 말은 곧 텅 빔을 의미한다. 만약에 가구를 모두 치워 버린다면 그 사람은 방안에 들어왔을 때 방이 비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방은 곧 라디오, 전축, 텔레비젼 등등의 이러저러한 가구들이기 때문이다. 의심 소련의 우주비행사인 티토프가 우주여행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후루시쵸프가 그를 불러 은밀하게 물었다. <우주에서 누굴 만난 적은 없소?> <예, 저는 신을 만났습니다> 팉토프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후루시쵸프가 말했다. <난 자네가 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믿네. 그러나 우리 공화국에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말게> 그후 티토프는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대주교도 그에게 우주여행 중 누구를 만난 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티토프는 후루시쵸프의 명령 떄문에 거짓말을 했다. <아니오.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대주교가 말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신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니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신앙이나 종파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한결 같이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 의심은 종파에 대한 것도 아니요, 사회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어떤 사상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 의심은 순수하다. 그 의심은 단지 의심일 뿐이다. 당신은 이 순수한 의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의심은 의심이다. 의심은 당신을 구속한다. 당신의 자유를 제한한다. 그대들도 때로는 티토프처럼 당황할 때가 있을 것이다. 얼룩말이 검정말 틈에 끼어 뛸 땐 검정무늬 흰 말이 되고 반대로 흰말 틈에 끼어 뛸 땐 검정무늬 흰 말이 되어 알록달록하게 살아야 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잠시 동안은 편할지 모르지만 끝내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혼란을 일으킨다. 희든가 검든가 해야 한다.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해서는 뱉음을 당하기 일쑤다. 뱉어지기 전에 알아차리는 지혜가 있는 사람은 정상의 정중앙에서 두루 살필 수 있는 사람이다. 살라미 샌드위치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한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늘 자신의 부를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어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매우 값비싼 옷을 입고 최고급 레스토랑에 갔다. 그의 아내는 다이아몬드, 에메럴드 등의 보석을 주렁주렁 몸에 달고 있었다. 아름다운 보석으로 한껏 치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품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추하고 천박해 보였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하루 아침에 교양과 품위를 익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로 모든 추함을 산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벼락부자가 되는 순간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려고 메뉴를 보았다. 그런데 음식의 이름이 모두 불어로 적혀 있었다. 불어를 모르는 그들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불어에 대해 완전히 까막눈이란 사실을 웨이터에게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는 당황해 하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뭘 주문하시겠어요?> 그러자 그는 아내에게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말한 뒤 웨이터에게 말했다. <살라미 샌드위치 100달러 어치만 가져 오게. 100달러 어치 말일세> 웨이터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두 분께서 그것들을 모두 잡수실 생각입니까?> 에고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살라미 샌드위치를 100달러 어치나 주문하다니! 개런티 뮬라 나스루딘이 그의 아내와 함께 영화구경을 갔다. 그들은 적어도 20년간을 함께 살았다. 그 영화는 열정적이며 애로틱한 외국영화였다. 그들이 극장을 나설 때 그의 아내가 말했다. <나스루딘, 당신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죠?> 나스루딘이 말했다. <당신 미쳤소?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댓가로 얼마나 많은 개런티를 받는지 당신은 모른단 말이오?> 오직 이익이 될 때만 사랑한다면 어떻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은 간계가 아니며, 함께 있음도 아니고, 찬양도 아니다. 기껏해야 상대방에 대해서 참고 있을 뿐이다. 거울 속의 적 한 왕이 수백만개의 거울이 달린 커다란 궁전을 지었다. 모든 벽이 거울에 들러 싸여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개 한마리가 그 궁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개는 거울에 비친 수백만 마리의 개들을 보았다. 그 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음에 틀림없다. 그 개는 짖어대기 시작했고 그 개가 짖기 시작했을 때, 그 수백만 마리의 개들도 역시 따라서 짖기 시작했다. 아침에 그 개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개는 혼자 거기에 있었고, 사실 거기엔 싸움할 누구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거울 속에서 그 자신을 보았고 두려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싸우기 시작했을 때, 거울 속의 반영체들도 역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대는 그 개가 보낸 그날 밤의 지옥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대는 바로 지금 그 지옥에서 살고 있다. 거울들과 거울속의 개들이 그대 주위에서 짖고 있다. 모든 거울 속에서, 모든 간계 속에서 그대는 적을 본다. 말 어떤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아이는 열살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원인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의사들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뇌 기능은 정상입니다> 몸은 정상이었고 아이는 건강했다.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아이가 소리쳤다. <빵이 너무 탔어!> 어머니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소리쳤다. <아아, 네가 이렇게 말을 잘하다니! 그런데 왜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니? 우리가 그토록 달랬는데도 너는 말을 하지 않았어> 아이는 말했다. <그동안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처음으로 이 빵이 너무 구워져서 탔거든요> 만약 거기에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다면 그대가 왜 말을 하겠는가? 만일 잘못된 것이 없다면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정보 위나라에 응인이라는 한 신하가 있었다. 어느날 응인이 왕에게 물었다. <만약 누군가가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위왕이 대답했다. <그야 믿을 수 없지> <그렇다면 또 한 사람이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일단은 의심해 보겠지> 그래서 응인이 다시 한번 <만약 또 한 사람이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이번에는 위왕이 <그렇다면 역시 믿게 되겠지>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이 많은 정보 속에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좋은 정보는 때에 따라서는 무기보다 더 큰 파괴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근원 한 떼의 개미들이 먹이를 찾기 위하여, 어두운 땅속으로부터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개미들은 아침 이슬에 젖어 있는 초목 사이를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저게 뭘까? 저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한 개미가 이슬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인가 대답했다. <저것은 땅에서 오는 거야> 다른 개미가 말했다. <아니야, 저것은 바다에서 오는 거야> 곧 논쟁이 벌어졌다. 개미들은 바다 이론을 지지하는 집단과 땅 이론을 지지하는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현명하고 사려깊은 한 마리의 개미가 그들로부터 홀로 떨어져 서 있다가 말했다. <잠깐 멈추고 징표들을 찾아보자. 모든 사물은 근원을 향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야. 만물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하늘을 향해 아무리 돌을 던진다 하여도 그것을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 무엇이든 빛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것은 틀림없이 그 빛으로부터 기원하는 거야> 하지만 개미들은 아직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논쟁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나 해가 솟아오르자, 이슬들은 잎을 떠나 해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햇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떤 사물이든지 자신의 본래의 기원으로 돌아가며 또한 돌아가야만 한다. 만일 그대가 삶을 이해하게 된다면, 죽음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본래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감이며 죽음은 근원으로의 회귀이다. 죽음은 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그러나 죽음은 오직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삶을 짓누르고 억압하지 않고 산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삶을 아름답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분히 용감하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사랑하고, 춤추고,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너의 삶이 축복이었다면, 죽음은 축복의 절정이 될 것이다. 죽음 세 명의 노인들이 공원에 앉아 그들에게 다가올 필연적인 것, 죽음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었다. 일흔세살 난 한 노인이 말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인간이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브라함 링컨과 함께 묻히고 싶다> 그러자 다음 노인이 말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며 인도주의자이고 철학자, 평화를 사랑하는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묻히고 싶다> 그리고는 그들 둘은 아흔 살 난 세번째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번째 노인이 말했다. <나는 소피아 로렌과 함께 묻히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살아 있네!> 먼젓번 두 노인이 화가 나 노여워하면서 말하자 세번째 노인이 말했다. <나 역시 살아있다네!> 왜 삶이 죽음에 대하여 근심해야 하는가? 왜 삶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가? 그대가 살아 있을 때 어디에 그 문제가 있는가? 마음이 그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느 사형수 교수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뮬라 나스루딘이 교수대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멈추어 서서는 발을 떼지 않으려 했다. <어서 갑시다. 대체 무슨 일이오?> 간수가 독촉했다. 그러자 뮬라가 말했다. <어쩐지 이 계단이 부서져버릴 것 같아요. 안전하지 않아 보이는 군요> 그의 목은 곧 매달릴 것이다. 그런데 교수대 계단이 위태로워 보인다니! 죽음의 순간에서조차도 인간은 삶에 연연해 한다. 마지막까지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삶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양쪽을 모두 택하거나, 양쪽을 모두 버릴 수 있을 뿐이다. 죽음과 삶은 동시에 온다.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물항아리 속의 달 어느날 밤 위대한 회교시인 아와디 커만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항아리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샴스 에 타브리지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 시인의 행동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인이 대답했다. <물항아리 속의 달을 보고 있습니다> 샴스 에 타브리지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시인은 기분이 꺼림직해 졌고 마침내 그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시인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웃으며 나를 조롱합니까?> 샴스 에 타브리지가 말했다. <그대의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왜 곧장 하늘의 달을 쳐다보지 않는가?> 진실을 경전이나 철학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물에 비친 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어떤 이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너는 그릇된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오직 그의 삶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단코 두 개의 삶이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어떤 말을 하든지 그것은 그의 삶에 관한 것이다. 진짜 달은 저 하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저 달은 너의 달이고, 저 하늘은 바로 너의 하늘이다. 곧장 보라. 왜 너는 다른 사람의 눈을 빌리려 하는가? 너에게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이 있다. 직접 보라. 왜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빌리려 하는가? 명심하라.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깨달음일지라도, 네가 그것을 빌리는 순간, 너에게는 지식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 아니다. 시계바늘 헨리 워드비쳐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목사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빌리그레함처럼 설교를 아주 잘했다. 그런데 그의 교회에는 언제나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가 하나 있었다. 그 시계를 보는 사람들은 항상 불평을 했다. <목사님, 시계가 맞지 않아요> 사람들은 비쳐 목사를 만날 때마다 시계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비쳐 목사는 그 시계 앞부분을 아예 종이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그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시계바늘을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병은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시계바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계 내부의 부속에 있는 것이다. 시계바늘은 다만 내부의 부속이 태엽을 통해 시키는 대로 현상을 전달했을 뿐이다. 문제는 시계바늘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당신의 깊은 메카니즘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을 의심에서 신앙으로 옮기지 말라. 그것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병의 원인은 당신의 마음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당신의 내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라. 그것이 바로 진리를 찾는 당신의 진짜 삶으로 통하는 길이다. 부자가 되는 법 한번은 한 거부에게 가난한 사람이 물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부자가 말했다. <그것은 부모를 잘 고르는 것이다> 자궁을 잘 선택할 만큼 영리하다면, 그대는 벌지 않고도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극소수의 인간만이 그렇게 영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아무 자궁에나 들어가 버린다! 인간의 마음 옛날 중국의 위나라 임금은 미자하라는 소년을 특별히 귀여워했다. 어느 날 밤, 궁궐에 머물고 있는 미자하에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 미자하는 일의 앞뒤를 생각할 여지도 없이 임금님의 명령이라고 속이고는 임금이 타고 다니는 마치를 타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그 당시 위나라 법에는 임금의 마차를 몰래 탄 자는 월형(발을 자르는 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를 전해들은 임금은 미자하의 효심을 기특하게 여기며 <미자하는 진정 효자로다. 어머니를 위하느라 발을 잘리는 벌도 달게 발을 각오였구나>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미자하는 임금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면서 복숭아를 먹고 있었는데 맛이 어찌나 꿀맛이던지 다 먹지 않고 반을 남겨 임금에게 드렸다. 임금은 탄복하면서 <참으로 귀여운 녀석이구나. 맛이 좋은 것을 저혼자만 먹으려 하지 않고 내게도 나누어 주다니, 미자하는 어리지만 참으로 고운 마음씨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미자하의 귀엽던 얼굴빛이 시들고 임금의 총애도 날로 쇠퇴해 갔다. 어느 날 미자하는 아주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 임금은 심히 노여워 하면서 미자하를 꾸짖었다. <너는 본래가 그런 놈이다. 일찌기 나의 마차를 내 명령이라고 속여 탄 일이 있었는가 하면, 네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감히 내게 먹인 일도 있었다> 그리고 임금은 미자하에게 엄한 벌을 내릴 것을 명령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듯 수시로 들끓는다. 물에 바람이 닿으면 출렁이듯, 하늘이 개었다 흐렸다 하듯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 모두가 인간의 병든 마음이다. 노인과 아가씨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바닷가에 놀러 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 아가씨는 옷을 모두 벗었다. 그런데 그녀가 막 바다로 들어가려는 순간에 한 노인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가씨, 나는 이 마을의 경찰관이오. 이곳은 수영 금지 구역이라오> 그녀가 매우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옷을 벗기 전에 진작 그 말을 하지 않았죠?> 노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거야 옷을 벗는 것은 금지된 게 아니기 때문이오. 그래서 나는 저 나무뒤에 숨어서 아가씨가 옷을 다 벗을 때까지 구경하고 있었지요> 얼마나 멋진 노인인가! 바로 그러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또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마을에서 내가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그런 순진한 마음, 그런 순수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 내가 살았다는 것이 흐뭇하다. 사랑은 싸움? 구약시대에 유명한 노아늬 방주에서 배 안에 있는 동안 사랑의 행위가 금지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홍수가 끝나고, 온갖 동물들이 방주에서 쌍쌍이 줄을 지어 나갈 때, 노아는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코양이와 암코양이가 나왔는데, 그들 뒤로는 수많은 새끼고양이들이 뒤따라 나왔다. 노아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수코양이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사랑은 일종의 싸움이다. 사랑은 곧 싸움이다. 싸움이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의 에너지는 바로 싸움에서 싹튼다. 그러나 사랑이 반드시 싸움이나 투쟁만은 아니다. 사랑은 그 이상이다. 사랑은 싸움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초월한다. 싸움은 사랑을 파괴시키지 못한다. 사랑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지만, 사랑은 싸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빈 배 헨리 포드가 영국에 갔을 떄의 일이다. 그가 공항 안내소로 가서 영국에서 가장 싼 호텔을 묻자, 안내원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헨리 포드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매우 유명함 사람이었다. 바로 전날 그가 온다는 기사와 함께 신문에 그의 사진이 크게 실렸었다. 그런데 그가 낡은 코트를 입고, 가장 싼 호텔을 묻고 있는게 아닌가! 안내원은 믿기지가 않아서 물었다. <혹시 당신은 헨리 포드씨가 아닌지요? 나는 잘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의 사진을 보았거든요> <맞습니다> 안내원은 매우 놀랐다. 그래서 안내원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매우 낡은 코트를 입고 가장 싼 호텔을 찾고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 이곳에 온 것을 보았습니다만, 그는 최고급의 값비싼 옷을 입고 일급 호텔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헨리 포드가 말했다. <맞습니다. 내 아들은 아직 완숙해지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값비싼 일류 호텔에 묵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묵든 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가장 값싼 호텔에서도 나는 헨리 포드이며, 그런 것이 나를 다시 만들어 내진 않습니다. 내 아들은 아직 어립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값싼 삼류 호텔에 묵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 코트는 나의 선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입니다. 나는 새 옷이 필요없습니다. 내가 어떤 옷을 입든 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또 내가 벌거벗고 서 있다 해도 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대의 내면 세계가 진정으로 부유하다면 그대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교회에 갔을 때, 그대의 기도소리는 다름 사람들보다 조금 더 클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쇼맨쉽은 에고의 일종이다. 무엇을 겉으로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겉으로 드러내어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러면 거기 에고가 있고, 그대의 배는 비어 있지 않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빈 배이다. 합리화 합리화란 가식적인 추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이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생에 있어서 그대는 매일같이 합리화를 한다. 그대는 화가 난 채 귀가한다. 상사가 자기 비위를 거슬리게 했다해서 당장 그 자리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할 수밖에 없다. 상사가 아무리 야단을 쳐대도 그대는 화를 낼 수 없다. 그 자리에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생크림처럼 부드럽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대를 곤경에 빠뜨리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어떤 구실을 찾기 시작한다. 때마침 그대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장난치며 떠들어댄다. 그때 그대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얘들아 그만해. 조용히 하란 말이다. 이거 원 단 한순간이라도 마음 편할 때가 없잖아.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고 집이라고 들어와봤자 시장바닥처럼 이렇게 난장판이니. 이거야 원...> 이제 그대는 마치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난 것처럼 합리화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항상 그렇게 행동한다. 다만 그대가 오늘 화가 났기 때문에 그렇게 합리화하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아내가 준비한 저녁식사에 대해서도 불만을 터뜨린다. 사실 음식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다만 그대는 뭔가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음식이 잘 요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대는 아내에게 화를 내고 자신을 합리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진짜 이유를 보지 못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진실로 깨어나기를 원한다면, 모든 합리화를 떨쳐 버려라. 이러한 합리화는 모두 눈속임이다. 그대는 이 합리화 때문에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위장하기 위해 무수한 방법들을 생각해 낸다. 이러한 가식은 제거되어야 한다. 만일 화가 나면 그것이 분노임을 자신에게 분명히 인식시켜라. 그리고 아내에게 <여보, 난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소.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노를 삭여버려야만 할 것 같으니 제발 뭘 좀 잘못해 줘요>라고 말하라. 그 편이 훨씬 더 솔직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소리쳐라! 방바닥이 꺼지도록 뛰어. 뭔가를 좀 깨뜨려라. 아빠는 지금 화가 나서 너희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구나. 아빠를 도와주렴>하고 말하라. 이것이 훨씬 더 의식적인 행동이리라. 그대가 의식적으로 살기 시작한다면, 자신이 그 동안에 삶에 있어서 합리화를 얼마나 많이 해 왔는가를 차차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합리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행동방식 남미에는 특별한 종류의 벌레가 있는데, 그 벌레는 행동방식이 인간과 아주 흡사해서, 언제나 지도자를 추종한다고 한다. 한 과학자가 이 벌레들의 이상한 행동방식을 연구했다. 그는 테두리가 있는 둥근 쟁반에 지도자 벌레를 놓고, 뒤이어 다른 벌레들을 그 뒤에 원을 그리며 배치했다. 이제 벌레들은 원을 그리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쟁반 위에는 가야할 목적지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정지할 수도 없었다. 앞의 벌레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벌레들은 모두 그렇게 지쳐서 죽을 때까지 앞서 가는 벌레를 뒤쫓으며 원을 그렸다. 끝없이 돌고 돌아 마침내 벌레들은 하나씩 쓰러져 죽었다. 늙은 벌레가 먼저 죽고, 나중에 젊은 벌레가 죽었다. 그러는 사이 어린 벌레도 나이를 먹고 죽었다. 7일이 지나자 탁자 위는 온통 죽은 벌레의 시체 투성이였다. 그것을 연구한 과학자는 그 벌레들이 인간의 행동방식과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그러한 것이다. 부드러움 강한 남자와 연약한 여자가 만났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남자는 바위처럼 보이고, 여자는 풀잎에 맺힌 작은 아침이슬처럼 보인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최후의 승리자는 여자다. 여자는 부드럽고 남자는 단단하다. 역설적으로 여자는 굴복하지만, 굴복을 통해 정복한다. 남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그는 자신이 지고, 여자에게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처럼 가장 강한 남자들조차도 밖에서는 강하지만 가정에 돌아오면 결코 강하지 않다. 그때는 그들의 연약한 아내들이 더 강하다. 부드러움 속에는 강함이 있다. 성 성이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진리다. 또한 성은 사랑에 이르는 여로의 시작이며, 사랑의 기원은 성이다. 그러나 옛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을 인간의 적으로 적대시해 왔다. 모든 문화와 종교, 성직자들은 성을 맹렬히 공격해 왔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성의 강은 억눌린 채로 끊임없이 흘러왔던 것이다. 범인을 쫓는 고함소리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성은 죄악이다. 성은 비종교적이다. 성에는 독이 있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을 여행하면서 사랑의 바다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으로 성 자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은 성에너지가 변형된 것이다. 성이라는 씨앗으로부터 사랑의 꽃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 여기서 잠깐 석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석탄이 변형된 것이 바로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을 당신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석탄 덩어리 속에 있는 성분은 다이아몬드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본질적으로 그 둘은 다를게 없다.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석탄이 다이아몬드로 변화된 것 뿐이다. 그러나 석탄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석탄이 집안에서 땔감으로 보관될 때 다이아몬드는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목이나 가슴에 걸쳐진다. 만일 당신이 검은 매연 밖에는 주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석탄을 반대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석탄이 다이아몬드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은 끝나 버린다. 우리는 석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발전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끊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이다. 성 에너지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해 왔고, 지금 역시 반대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관념의 산물이다. 이제 새로이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여, 성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져야 할 때이다. 사랑에 도달하는 가르침이어야 하는 성이 사랑의 최고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하는데 곁길로 빠져 엉뚱한 지점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제 성을 바른 길로 이끌어 성의 본래의 목적인 사랑하는 법을 바르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사랑 며칠 전에 한 남자가 내게 와서,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며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사랑하고 있는데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몇 사람만 데려오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를 알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자기들은 모두를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도 자기들의 사랑을 받아들여 답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결국 그는 증인으로 단 한사람도 데려오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모두를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근본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삶의 궁극적인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을 한다면 사랑은 그대에게 응답하여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만약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사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라.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그대는 무엇인가 다른 짓을 하였을 것이다. 그대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서도 그대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들을 증오하며, 그 외에 그들을 귀찮게 하는 온갖 짓들을 다 한다. 그들 역시 그대에게 화를 내거나 그대를 증오하게 되면 그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런 일들을 나는 결코 선택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그대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의 선택이 틀린 것이다. 원인을 주시하라. 원인을 바꿔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어리석다. 지혜로운 마음은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어떤 결과를 원하지 않을 때에는, 지혜로운 마음은 원인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원인을 떨쳐 버린다.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게 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이든 모두 그대의 무의식 속에서 저질러진 것이다. 그 씨앗을 뿌린 사람은 그대인 것이다. 이제 그대가 그것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결정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결단을 결정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정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근본적으로 결정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점에서는 똑같다. 신세대는 후자, 즉 방임하는 쪽을 선택하였고 구세대는 전자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대가 뗏목을 타고 물결 흐르는 대로 맡겨 둔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 자신의 결정에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그대를 돕고 길을 가르쳐 주더라도 결정은 반드시 그대가 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그대의 정신은 그대의 결정을 통해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결정을 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완전에 가깝게 된다. 물론 그대가 그대를 책임지면 질수록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삶이란 원래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그대가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많지만,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우게 마련이다. 삶은 시행착오인 것이다. 그대가 결정해야만 한다. 결정은 숙명적이며 결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그대는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라. 그러면 그대는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며, 그대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대는 돌아올 수 있으며, 오히려 길을 잃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길을 잃어버린 것으로 그대는 수많은 것들에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로지 실패할 용기가 있을 때에만 수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만은 기억하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말라! 무위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자신이 바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대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적어도 담배라도 피워야 한다. 사람들은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담배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보충적인 것이다.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적어도 담배라도 피워야만 그대는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아무 할 일 없이 조용히 앉아 있으면 그대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대 앞에 나타났을 때 그대는 무엇인가를 읽는 체 한다. 그대는 이미 다 읽어버린 신문을 다시 읽는 체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저 신문을 들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대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대를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식을 꾸며댄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서양의 속담 중에 텅빈 마음은 악마의 활동무대이다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활동하는 마음이야말로 악마의 활동무대이다. 비어 있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해를 미치지 않는다. 히틀러는 결코 비어있는 마음이 아니다. 붓다는 비어있는 마음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온갖 터무니 없는 짓들은 바로 할동하는 마음에 의해 행해져 왔다. 무위의 마음은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다. 그대는 무위의 마음을 설득하여 아돌프 히틀러가 되게 할 수 없다. 무위의 마음은 그것을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비웃으며 왜?라고 반문할 것이다. 소유 주먹을 움켜쥐면 공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 공기는 손을 빠져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쥐었던 주먹을 펴면 공기가 다시 손바닥 위에 가득차, 당신은 공기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다시 주먹을 움켜쥐에 되면 공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공기는 모두 빠져나가고 당신의 손 안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설사 남았다 하더라도 아주 조금 밖에 남지 않는다. 주먹을 움켜쥐면 쥘수록 손 안의 공기는 존재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변화이며, 마음의 어리석은 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자기 자신에게 예속시키고 감금시키는 것만이 사랑을 얻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금하려 하면 할수록 사랑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랑은 오직 펴진 손에서만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생을 지나치게 사랑한다면 당신은 감금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 있다 하더라도 죽은 것과 다름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생에 대한 번뇌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시체에 불과하다. 목마름 사람은 거울을 사용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더듬는다. 어떤 동물도 자신의 모습을 그리지는 못한다. 오직 사람만이 자신을 영상 속에서 더듬어 보는 일을 되풀이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식이다. 이 자기 의식 속에서 에고가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의 자신보다는 반사된 영상에 더 큰 흥미를 갖는다. 당신의 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실제의 어떤 사건보다도 한편의 드라마에 더 큰 감동을 느끼며, 실제의 여자보다는 사진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사람은 진실보다는 허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실제보다는 영상에 더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매일같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자신을 알면 거짓은 사라진다. 허구 속에서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구보다는 진실에 더 흥미를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더욱더 자신과 멀어지게 될 것이다. 영상, 허구, 꿈, 이미지 등의 거짓에 흥미를 두는 것이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 수 없게 만드는 근본원인이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관심을 쏟기보다는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 역시 마음의 거울이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채, 남들이 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해서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하여 자신의 겉모습을 꾸미는 데만 열을 올린다. 당신이 쌓은 도덕과 선행의 탑은 남의 눈에 아름답고 선하고 정직하고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손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아 준다고 하여 당신이 종교적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제아무리 당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보아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당신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가식을 버리고, 남을 의식하지 말라.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보다는 실제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여라.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것보다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라. 생각은 결코 당신의 목마름을 풀어주지 못한다. 생각은 결코 당신의 배고픔을 해소시켜 주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산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안된다. 당신은 결코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배고픔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진짜 음식인데, 그림의 떡이 어떻게 당신의 배고픔을 해소시켜 줄 수 있겠는가? 목마른 당신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물인데, 물에 대한 사진이나 화학방정식이 어떻게 당신의 목마름을 풀어줄 수 있겠는가? 삶과 죽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침대는 죽음의 자리이다. 왜냐하면 탄생이 있은 후에,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행렬에서 조금 뒤쪽에 서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 죽고, 어떤 사람은 내일, 또 어떤 사람은 모레 죽는다.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인가? 조금 더 먼저 죽고 조금 더 나중에 죽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은 단지 삶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낼 뿐이다.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꿈이다. 그대들은 이것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죽음을 모르는 참된 삶을 찾는 것이다. 삶은 그것이 영원한 때라야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진실 우리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하찮은 자신만의 편견이나 과장딘 생각과 사이비 철학으로 우리 자신을 덮어씌워 왔다.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 찾지도 않은 채, 아무 호기심도 없이 기성의 가설들을 갖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인생은 헛되고 무의미하며 비참한 것이라고 가르쳐져 왔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헛되고, 목적도 없고, 비애로 가득차 있다고 믿도록 최면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생은 경멸해야 하는 고뇌의 길이며, 끝내는 온통 후회로써 장식되는 것이라고... 이 끝없이 반복되는 잘못된 생각은 우리의 숨통을 갈수록 더 세게 졸라매서 질식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인생이란 다만 커다란 잡음, 엄청난 소음, 불행의 온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다. 인간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로 기쁨과 사랑을 잃어온 것은 삶을 경멸하는 이러한 인식 때문이다. 인간은 이제 아무런 형태없는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거칠게 파도치는 비애의 바다이다. 그리고 이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더이상 인간이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된다. 왜 추한 덩어리 안에서 아름다음을 찾으려 하겠는가? 그리고 삶은 다만 흘려보내 버릴 것이고 거부되어야 할 것이라고 굳게 믿을 때, 삶 자체를 인정하고 삶을 더욱더 깨끗이 하고 아름답도록 하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모든 노력은 무의미해 보인다.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기차역에서 대합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들은 대합실에서 잠시 머물 뿐, 곧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대합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는 대합실 안에 비치된 물건을 아끼거나 돌보지 않는다. 아무데나 마구 침을 뱉고 더럽히며, 지각없는 행동은 서슴지 않고 한다. 어짜피 잠시 후면 떠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삶을 잠시 머물다 가는 임시 거처 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왜 삶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삶은 얼마 안 있어 끝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때에는 삶의 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집이나 몸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본질은 우리와 함께 남는다. 그것이 바로 자아인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절대 없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의 행동이 자신의 모습을 잘 만들 수도 있고, 망쳐 놓을 수도 있다. 행동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삶을 구성하기도 하며 영혼을 형성하기도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사는가, 사는 동안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미래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삶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는 그릇된 생각을 당장 그만둘 것이다. 그때 그의 존재는 슬픔에 가득차 있다는 것과 여러가지 일에는 아무런 계획성이 없다는 것이 잘못된 신념임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는 삶에 대립하는 것은 모두 비종교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삶의 부정을 배운다. 종교의 철학은 언제나 삶을 지향하는 대신에 죽음을 지향해 왔다. 종교는 삶의 뒤에 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죽음 전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무의미하다고 설교한다. 종교는 삶에 대하여 하등의 경의를 표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죽음을 숭배해 왔다. 삶의 꽃과 열매를 환희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이미 죽은 꽃에 완강히 매달린다. 우리의 삶은 꽃의 묘비에 새겨진 찬사의 말이다. 종교적인 고찰의 촛점은 언제나 죽음의 다른 측면, 즉 천국이나 열반에 맞추어져 있었다. 마치 죽음 전에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묻고 싶다. 만일 그대가 죽음 전에 일어나는 것과 더불어 살지 못한다면 삶 뒤에 오는 것에 대하여 어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를.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죽음이 오기 전,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죽음 뒤에 오는 것을 위하여 준비할 수도, 그것을 받아 들일 자격을 얻을 수도 없다.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준비는 반드시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도 지금의 삶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것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삶, 그 자체 외에는 어떠한 신도 없다고, 아니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나는 삶을 사랑하는 것은 한 인간의 사드하나(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며, 한 인간이 신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참된 종교는,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유익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삶 안에 존재하는 진리를 깨닫는 것은 해방을 향한 상서로운 첫걸음이다. 삶을 놓치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도 놓친다. 관련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먹고 있으며 먹히는 존재이다. 우리는 한쪽으론 얻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준다. 우리는 사과를 먹는다. 어느 날 사과나무는 우리의 육체를 먹을 것이다. 육체는 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먹고 있을 때 그대는 그대의 할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가 그 사과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대의 후손들이 그대를 먹을 것이다. 모든 것은 관련되어 있다. 이 관련되어 있음에 도라는 말이 뜻하는 어떤 것이 있다.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상호의존 한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도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에고는 부조리하다. 부분들은 나를 말할 수 없다. 오직 전체만이 나를 말할 수 있다. 만일 부분들이 나를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단지 언어적 형식으로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부분들은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대가 실존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존재할 때 그대는 고통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단절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책임질 수 없다. 거짓된 인생 자신을 방어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거짓말 투성이의 모습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전체가 거짓으로 뒤덮여 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고,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붓다, 노자 등은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내면을 볼 때마다 거짓말이 줄지어 서 있기 때문에 그대는 내면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대가 살아온, 그대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가식해 온 거짓들을 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자는 모든 거짓들을 떨쳐 버려야 한다.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이 된 뒤 내각 구성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선택할 때, 비서관에게서 어떤 사람을 추천받았다. 그 사람 이름을 듣자 링컨은 당장에 거절했다. 이유를 묻자 링컨은 말했다. <나는 그 사람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이유였다. 그래서 비서관이 반문했다. <하지만 그 삶을 자신의 얼굴 생김새에는 책임이 없지 않습니까? 얼굴이야 부모가 만들어준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요?> 링컨이 말했다. <아닙니다. 뱃속에서 나올 때는 부모가 만든 얼굴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얼굴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모든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링컨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마흔 살이 넘으면 그대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얼굴은 그대가 살아오고, 사랑하고, 걱정해 온 모든 것의 종합이다. 그대가 행동해 온 방식, 관계해 온 것들이 얼굴에 모두 나타나 있다. 얼굴은 바로 그대의 자서전이다. 따라서 나이 사십이 넘으면 마땅히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예! 사람들은 하지 마라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새롭게 일어나게 된다. 또한 먹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먹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부정적으로 흐른다. 아니 마음의 가장 큰 기능은 아니오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주시해 보라. 하루에 예, 아니오라고 몇 번이나 긍정하고 부정하고 있는지를 헤아려 보고, 그 수를 늘려 가거나 줄여가라. 그러면 머지않아 조금씩 아니오에서 예로, 예에서 아니오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예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몇 번이나 아니오라고 말했는지 헤아려 보라. 사람들은 아니오라고 말하기를 계속한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밖에 나가 놀아도 되요?>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즉각 <안돼>라고 말한다. <밖에 나가 놀면 왜 안돼요? 뭐가 잘못이에요?>하고 아이가 고집을 부리고 짜증을 내면 그제서야 <그래, 그럼 나가 놀아라>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예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나타나는 최초의 것은 아니오이다. 예는 거의 드물다. 어쩔 수 없이 예라고 말해야 할 때에만 예라고 말한다. 주시하라!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아니오는 떨쳐 버려라. 의지하는 마음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꿋꿋하게 홀로 서라. 의타심은 당신으로 하여금 망설이게 한다. 당신이 의타심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의타심은 당신을 군중 소긍로 끌어들인다. 의타심은 혼자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의타심은 당신이 당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판단력을 약화시킨다. 의타심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 따르도록 종용한다. 의타심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사악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달콤한 목소리로 당신을 유혹한다. 인생에는 쉬운 길이 있다. 탐구는 당신을 지치게 할 뿐이다. 결정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엇인가를 결정했을 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세상에는 당신이 책임지지 않고도 적당히 살아가는 편한 방법이 있다. 당신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그 방법을 택했다. 이제는 당신 차례다.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적당한 기회가 왔다. 당신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다 해 놓으면 그때 따라가라. 다름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서 아주 쉽게 걸어갈 수가 있다 늘 이렇게 유혹한다. 그러나 절대 속지 말라. 그것은 마음이 파 놓은 함정이다. 당신이 마음의 유혹을 못이겨 마음이 하자는 대로 따르면 잠깐동안은 편할는지 모르지만 궁극에 이르는 길은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남의 뒤를 따라가는 당신은 제아무리 빨리 뛴다 해도 결국 다른 사람의 뒷전에 있을 뿐이다. 마음은 환상과 같아 허망한 분별에 의해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은 바람과 같아, 붙잡을 수 없으며 형태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멈추지 않고 일어나자마자 곧 사라진다.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 인(모든 일의 씨앗)이 있어 연(모든 일의 대상)에 닿으면 불이 붙어 빛을 비춘다. 마음은 번개와 같아,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소멸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의 연기로 더럽혀진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움직인다. 마음은 그림 그리는 사람과 같아, 온갖 형태를 나타낸다. 마음은 존경에 의해, 혹은 분노에 흔들리면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비겁해지기도 한다. 마음은 도둑처럼 다름 사람의 삶을 훔쳐 간다. 마음은 불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화려함을 좋아한다. 마음은 전쟁터의 북처럼 소리를 좋아한다. 마음은 썩은 시체냄새를 탐하는 멧돼지처럼 타락의 냄새를 좋아한다. 마음은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개처럼 맛을 좋아한다. 마음은 기름 묻은 접시에 달라붙는 파리처럼 감촉을 좋아한다. 재물을 보면 갖고 싶어 탐을 내는 것도 마음이요, 권력의 칼로 천하를 휘어잡고 싶어하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은 번뇌하는 것도 싫어한다. 마음은 당신이 탐구자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탐구란 혼자서 걷는 고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남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결코 내면의 여행을 떠날 수가 없다. 당신의 삶은 당신만의 것이며, 당신이 찾는 진리 또한 다란 사람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허구 사람들은 지나칠 만큼 허구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보통때와 어떻게 달라 보이던가? 그들은 운다. 스크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금새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사랑으로 넘치지도 않는다. 그들은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악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랑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스크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빛과 그림자, 그리고 단순한 유희와 환상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관객들을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인간은 현실보다는 환영에 더욱 흥미가 있는 듯하다. 만약 당신이 환상 속에서 꿈꾸는 어떤 사람을 깨우려고 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화를 낼 것이다. 그는 우리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를 괴롭혔기 때문에, 그는 보복할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마음의 허구와 끊임없이 도피하려고 하는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기피하게 된다. 순수한 사랑 당신이 누군가에게 작은 사랑을 보여 준 뒤에 커다란 만족의 물결이, 커다란 기쁨의 전율이 당신의 온몸에 퍼져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만족의 가장 고요한 순간은 조건없는 사랑의 순간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순수한 사랑은 조건에 의해 뒤섞이지 않아야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조건이 붙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띄워 보낸 후의 만족감을 당신은 느껴본 적이 있는가? 부드럽고 온화한 미풍이 그것에 뒤따르지 않았는가? 당신이 지쳐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따뜻한 손길로 도와줄 때, 병든 사람에게 한아름의 꽃을 선사할 때, 고요한 기쁨이 당신에게 한없이 물결쳐 올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바로 당신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혹은 그녀가 당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아니, 상대방이 당신에게 특별한 존재여서는 안된다. 사랑은 우리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쳐 나와야 한다. 식물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 그대의 사랑은 항상 늘어가야만 한다. 폭풍 올바르게 뿌리를 내린 나무는 폭풍이 불어 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폭풍이 불어올 때 나무는 자신이 얼마나 뿌리를 잘 내렸는가를 알게되고, 힘과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무는 폭풍을 기다린다. 폭풍은 결코 적이 아니다. 모든 먼지와 좌절과 슬픔을 씻어가는 하나의 도전이다. 폭풍이 왔다가고 나면 나무는 다시 축제를 시작하고, 뿌리들이 살아있음을 느끼며 다시 젊어진다. 폭풍은 나무를 보다 젊게 만든다. 사랑의 가면 사랑에는 두가지의 형태가 있다. 하나는 고독으로부터 뛰쳐나가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려는 목적으로부터 얻어지는 사랑이다. 당신은 고독을 느낄 때 빈 가슴을 채우려는 욕구에서 상대방을 찾아간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상대방도 당신에게 사랑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랑받기 위한 행위로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상대적인 사랑이다. 말하자면 조건부 사랑인 것이다. 내가 사랑을 사랑해 준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하는 흥정이 전제된 사랑이다. 그러나 혼자가 되려고 하는 사랑은 다르다. 상대방을 결코 구속하지 않는 완전한 베품이다. 상대방의 자유를 허락하고 보장해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이다. 이것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결코 아무것도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다. 당신이 에로스적인 사랑을 구한다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구한다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주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태양이 누구에게나 빛을 주고 공기를 주고 시간을 주듯이 말이다.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걸인과 다름없지만 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제왕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아가페적인 사랑은 우리가 흔히 보고 겪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육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가페의 흐름은 육욕에서 사랑으로 굽이치는 가장 완전한 변형이다. 당신이 찾는 진리는 남의 것이 아니다. 궁극에 이르는 탐구는 당신 개인적인 것이다. 참된 사랑은 당신을 완전히 독립된 개인으로 만든다. 만약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독립된 개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위장된 사랑의 가면이다. 미움이 사랑인 양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인 체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 뒤에는 미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름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을 때 아담으로 하여금 만물에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고 한다. 신은 사자를 데리고 와서 아담에게 물었다. 이 동물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겠느냐? 또 그는 코끼리를 데리고 와서는 물었다. 이 동물에게 무슨 이름을 붙여 부르겠느냐? 그래서 아담은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였고, 그 이후로 사람들은 만물에 이름을 붙여 왔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은 표기된 것,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누둔가에게 이 꽃을 압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는 말할 것이다. 네 알구말구요. 그 꽃은 장미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이름일 뿐이다. 그대는 그밖에 무엇을 알고 있는가? 장미라는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 장미를 진정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이라는 말을 아는 것으로써 그대가 신을 아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말을 아는 것으로써 그대가 진정 사랑을 아는 것인가? 배꼽 친구 여러 명이 둘러앉아서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친구가 말했다. <난 나의 어머니만은 절대로 버릴 수가 없어. 어머니는 날 낳아 주셨고, 내 생명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거든. 내가 지금 가진 것 모두를 전부 버릴 수는 있어도 어머니만은 절대 버릴 수 없어> 또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나의 아내를 버릴 수 없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주어진 것이지만, 내 아내는 내가 직접 선택했거든. 나는 아내에게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다른 사람은 다 버릴 수 있어도 내 아내만은 절대 버릴 수 없다네> 어떤 친구는 자기 집만은 절대 버릴 수 없다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자기가 경영하는 회사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뮬라 나스루딘이 자기가 말할 차례가 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배꼽만은 버릴 수 없네. 배꼽 없이는 살 수가 없거든> 친구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배꼽이라니! 친구들이 그에게 설명하기를 재촉했다. 그러자 나스루딘이 말했다. <나는 일요일이면 푹신한 소파에 편히 기대앉아 감자를 먹는다네> 친구들이 일제히 합창하듯 말했다. <그런데 그게 배꼽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감자야 어느 누구든 먹을 수 있는 흔한 음식이 아닌가?>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군. 배꼽이 없으면 소금 놓을 것이 없어지거든> 그대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란 모두가 다 이렇게 어리석은 것이다. 그대의 내면의식 외에는 모든게 다 버려질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대는 모든 것을 비운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오쇼 라즈니쉬 약력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마드햐 플라데쉬에서 쟈이나 교도인 한 소박한 직물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세가 될 때까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1938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인구 2만의 읍인 그라데 와라로 가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1946년, 14세 때 라즈니쉬는 처음으로 사토리를 경험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명상실험은 깊어져 갔고, 그의 영적 탐구의 강렬함은 그의 육체적 건강을 손상시킬 정도였다. 1952년 3월 21일, 21세의 라즈니쉬는 인간의식의 치고정점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외적 전기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삶의 내적 규율을 갖고서 일체성이라는 무아의 경지에서 살아왔다. 외면적으로는, 사우가 대학교에서 학문을 계속하여 1956년 졸업할 때는 철학 부문의 최고상을 받았다. 그는 인도 토론대회의 우승자이며, 졸업반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7년, 라즈니쉬는 라이퓨어 시의 산스크리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1년 후 그는 자발퓨어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1966년 그는 현대인에게 명상 기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렸다. 1968년, 그는 봄베이에 정착해 살며 가르침을 계속했다. 그는 주로 고원의 피서지에서 정기적으로 명상캠프를 열었다. 그는 거기에서 혁명적인 다이나믹 명상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먼저 카타르스를 시도함으로써 상념의 정지를 돕는 기법이었다. 1970년부터 그는 애정적, 개인적 지도로써 사람들을 자기탐구와 명상으로 들어서는 길인 네오 산히야스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1970년, 라즈니쉬의 명성은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에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1974년, 그의 깨달음을 기리는 스물 한번째 기념일에, 푸나에서 아쉬람이 열렸다. 그의 영향력의 범위는 이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동시에 그의 건강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0년, 설법중인 라즈니쉬를 암살하려 한 기도가 어떤 전통적인 힌두파의 일원에 의해 일어났다. 동양과 서양의 공적인 종교, 교회들은 그를 반대했지만, 그때까지 라즈니쉬는 전세계에 25만명이 넘는 제자를 갖고 있었다. 1981년 5월 1일, 라즈니쉬는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됨에 따라 육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슴과 가슴의 침묵의 교감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1984년 10월, 라즈니쉬는 자신의 저택에서 소수의 그룹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85년 7월, 그는 라즈니쉬 만디르에서 매일아침 수천명의 구도자들에게 공개설법을 하기 시작했다. 1985년 9월 14일, 그의 개인비서와 공동체관리를 담당하던 몇명의 구성원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들에 의해 자행된 모든 비합법적 행위의 유형들이 밝혀졌다. 라즈니쉬는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미 당국자들을 시로 불렀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이 기회를 공동체에 반대하는 싸움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이용했다. 10월 29일 라즈니쉬는 노오스 캐롤라이나 주의 사로트에서 영장없이 체포되었다. 그는 12일 동안 감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는 40만 달러의 벌금을 물 것, 미국을 떠날 것, 5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다. 그래서 인도로 가서 히말라야 산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1985년 12월, 라즈니쉬는 비서와 반려자, 의사는 인도에서 떠날 것을 명령받았고, 그들의 비자는 취소되었다. 그는 네팔의 카트만두로 떠나 그곳에서 강의를 재개했다. 1086년 7월 29일, 라즈니쉬는 인도의 봄베이로 갔다. 그는 그곳의 친구집에서 은둔하며 매일 강의를 계속했다. 1987년 1월 4일, 라즈니쉬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푸나 아쉬람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푸나의 경찰서장은 시의 평화를 어지럽힐 염려가 있는 문제인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같은 날 봄베이의 고등재판소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8월, 자유세계의 정부들이 사실상 연금상태로 라즈니쉬를 고립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의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 함께 하기 위해 푸나로 향하곤 했다. 1990년 1월,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인도의 푸나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예언자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며 보다 높고 깊은 경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될 칼릴 지브란의 영혼서 배가 오다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자이며 가장 사랑받은 자, 또한 시대의 새벽이었던 그를 올펄레스 시에서 열 두해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워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마침내 열두 해째 되던 해, 수확의 달 이에룰 초이렛날에 그는 성벽 밖의 한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성벽 밖의 한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보았다. 그의 배가 안개에 싸여 오고 있는 것을. 그의 마음의 문이 열리고 기쁨은 바다 저 멀리로 날아갔다. 그는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고요한 영혼으로. 그러나 언덕을 내려오자, 그는 갑자기 슬퍼졌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어찌 슬픔도 없이 평화로이 떠날 수 있는가! 아니, 영혼의 상처 하나 없이, 결코 나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으리라. 내가 여기 성벽 안에서 보낸 고통의 낮들은 너무 길었고, 고독의 밤들 또한 너무도 길었으니, 어찌 아무런 후회 없이 이 고통, 이 고독과 이별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거리에 뿌린 수많은 영혼의 조각들, 벌거벗은 채 이 언덕들 사이로 헤매다니는 수많은 내 갈망의 아이들, 내 진정 근심과 고통 없이 이들을 떠날 수는 없다. 내가 오늘 벗어던지는 이것은 옷이 아니라, 바로 내 두 손으로 찢어낸 살. 또한 뒤에 남기고 가는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갈증과 기아로 더욱 부드러워진 하나의 심장인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부르는 바다가 날 부르니, 이제 배에 올라야 한다. 왜냐하면 머문다는 것은, 비록 밤새도록 시간이 불타오를 지라도, 굳고 결정되어 하나의 고정된 틀에 묶여버리는 것이므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목소리란 자신을 날려 보내는 혀와 입술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는 것, 오로지 홀로 창공에 이르러야 한다. 한 마리 독수리도 홀로 태양 저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 언덕 기슭에 이르자 그는 다시 한번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배가 고향사람들인 선원들을 뱃머리에 싣고 항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영혼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오랜 어머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얼마나 자주 나의 꿈 속을 항해하였는지. 그런데 이제 내가 깨어나려 하니 찾아오는구나. 그러나 이것은 더 깊은 꿈. 물론 떠날 준비는 되어 있다. 나의 갈망은 돛을 활짝 펴고 바람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고요한 대기 속에서 오직 한 번만 더 숨을 쉬면, 오직 한번만 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면, 나는 뱃사람 중의 뱃사람인 그대들 가운데 서게 되리라. 그리고 당신, 광활한 바다, 잠들지 않는 어머니여! 홀로 강과 시냇물에 평화와 자유를 주시는 이여! 오직 한 번만 굽이치면 이 시냇물은 이 숲속의 빈터에서 한번 더 속삿이며 흐를 것을... 그리하면 나는 당신에게로 가리라. 끝없는 바다에 끝없는 물방울로. 그는 걸으면서, 저 멀리에 있는 남녀들이 밭이나 포도밭을 떠나 성문을 향해 서둘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외침은 그의 배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중얼거렸다. 이별의 날이 곧 만남의 날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나의 저녁은, 사실 나의 새벽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저 밭에 쟁기를 버려둔 이에게, 또는 포도주 짜는 기계의 바퀴를 멈춘 이에게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내 가슴이 주렁주렁 열매를 단 나무가 되어 그 열매를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그러면 나의 갈망은 샘과 같이 넘쳐 흘러, 그들의 잔을 채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신의 손길이 퉁기는 하프, 또는 신의 숨결이 내 가슴으로 스치는 피리인가? 나는 침묵의 탐구자, 하지만 침묵 속에서, 어떤 보물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오늘이 바로 나의 수확의 날이라면 어느 들에, 어느 계절에 씨를 뿌렸단 말인가! 실로 지금이 등불을 켜들 시간이라 해도 저기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나의 불꽃이 아닌 것을... 나는 오로지 공허와 암흑으로써 나의 등불을 켜리라. 그러면 밤의 파수꾼이 나의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워 불밝혀 주리라. 그는 이런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미처 못다한 말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보다 깊은 비밀은 그 스스로도 말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도시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그를 만나려고 그에게 몰려와 일제히 소리쳐 말했다. 도시의 원로들은 앞으로 나와 말하기도 하였다. 우리 곁을 떠나지 마시오. 그대는 항혼 속에서도 한낮의 빛이었고, 그대의 젊음은 우리를 꿈에서 꿈으로 인도하였으니... 그대는 우리에게, 타인도, 손님도 아니오. 우리의 아들이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일 뿐이오. 그러니 그대의 모습을 그리는 우리의 두 눈을 괴롭히지 마오. 그러자 사제들도 그에게 말했다. 바닷물결이 우리를 갈라놓게 하지 마소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보낸 나날들을 기억하소서. 그대가 우리들 사이에서 늘 한 정신으로서 거닐었고, 그대의 그림자는 우리 얼굴에 비치는 빛이었음을 기억하소서. 우리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리의 사랑은 말이 없었을 뿐. 그렇다. 베일에 가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랑은 큰 소리로 외치며 그대 앞에 서리라. 사랑이란,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자기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 그러나 다른 이들도 나와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들은 보았다.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을. 그와 사람들은 사원 앞에 있는 광장을 향해 나아가지 시작했다. 그때 신전에서 알미트라라고 불리워지는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예언녀였다. 그는 다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 도시에 온지 하루 밖에 안되었을 때, 제일 먼저 그를 찾아와 믿은 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환영하며 말했다. 신의 예언자이시며, 끝을 찾아 헤매는 분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배를 찾아 먼 길을 헤매셨군요. 이제 배가 왔으니 당신은 떠나야 합니다. 추억의 나라와 보다 큰 욕망의 땅을 향한 그대의 갈망은 깊으니, 우리의 사랑으로 당신을 얽어맬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요구로 당신을 만류할 수도 없으리. 하지만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당신의 진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전하여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오. 당신은 고통과 고독 속에서도 우리의 날들을 지켜 주셨고, 잠들지 않고 늘 깨어 있어 우리 잠 속의 눈물과 웃음에 귀 기울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당신이 보았던 모든 것을 말씀해 주소서. 그에 그는 대답했다.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영혼 속에서 지금도 떠돌고 있는 것, 그것 외에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는 말했다.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들 위에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그는 목청을 돋우어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가파를 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안을 때는 사랑에 몸을 맡기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 듯 사라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무너뜨릴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빛나는 영예의 관을 씌우는 만큼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지만 또 그만큼 그대들을 잘라 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심지어 사랑은 그대들 속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햇빛에 떨고 있는 그대들의 가장 부드러운 가지를 어루만져 주지만, 또 한편 그대들 속의 저 밑 뿌리로 내려가 땅 속에 엉켜 있는 그것들을 마구 흔들어대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랑은 마치 곡식 다발처럼 그대들을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두들겨서 벌거벗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체로 쳐서 껍질들을 모두 털어버리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찧어서 하얗게 변하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부드러워질 때까지 반죽하며, 신의 고결하고 숭고한 향연을 위한 빵이 되도록 성스러운 불꽃 위에 올려놓는 것. 사랑은 이 모든 일들을 그대들에게 행하여, 그대들로 하여금 마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으로 삶의 가슴의 한 파편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두려움 속에서 사랑의 평화와 사랑의 기쁨을 찾으려 한다면, 차라리 그대들의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마당으로 나가는 게 나을 것이다. 계절도 없는 세상으로, 그대들이 마음껏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그대들이 마음껏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곳으로. 사랑은 저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저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 당하지도 않는 것. 사랑은 단지 사랑 하나로만 충분할 뿐. 사랑할 때 신은 나의 마음속에 계시다라고 말해서는 안되리라. 그보다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말해야 하리. 또한 절대 그대들이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닥 생각지 말라. 만약 그대들이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사랑은 그대들의 길을 지시할 것이므로. 사랑은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것. 그 외에 다른 욕망은 없다. 그러나 그대들이 사랑하면서도 또한 다른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없다면, 다음의 것들이 그대들의 욕망이 되게 하라. 녹아서, 밤을 향해 노래하며 흘러가는 시냇물이 되기를. 지나친 다정함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자기 스스로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상처입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기쁘게 피흘리게 되기를. 날개 달린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사랑의 하루를 향해 감사하게 되기를. 정오에는 쉬면서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생각하기를. 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무렵,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가하게 되기를. 그런 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 속 깊이 기도하고 그대들의 입술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잠들게 되기를. 결혼에 대하여 알미트라는 또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날개가 그대드릥 생애를 흐트러 놓아 사라지게 할 때까지 함께 하리라. 아!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도. 하지만 그대들의 공존에는 거리를 두라.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출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에 구속당하지는 말라. 차라리 출렁이는 바다를 그대들의 영혼의 기슭 사이에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 자기의 빵을 주되, 어느 한 편의 빵만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각자 고독한 기타줄처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각각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참나무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아이들에 대하여 그러자 한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여인이 물었다. 저희에게 아이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열망하는 삶의 딸이자 아들인 것. 그대들을 통해 왔을 뿐, 결코 그대들에게서 온 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이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까지 줄 순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대들이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영혼의 집마저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대들이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는 있을 지언정 영혼의 집마제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이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 속에서 조차도 가볼 수 없는 미래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대들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되, 아이들을 그대들과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왜냐하면 삶이란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들은 활, 그대들의 아이들은 마치 살아있는 화살처럼 그대들로부터 앞으로 쏘아져 나아간다. 그리하여 사수인 신은 무한의 길 위의 한 표적을 겨누고 활을 당긴다. 신의 화살이 보다 빨리, 멀리 날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 그대들의 사수인 신의 손길로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왜냐하면 그 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시는 만큼, 흔들리지 않는 활도 또한 사랑하시기 때문에. 베품에 대하여 이번에는 부자 한 사람이 물었다. 베품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이 가진 것을 베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오. 진실로 베푼다 하는 것은 그대들 자신이 베푸는 것. 사실 그대들 자신이 가진 것이란 무엇인가. 혹시라도 내일 필요할까 두려워 간직하고 지키는 것 이외에. 또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인 것이다. 그대들은 샘이 가득찼을 때에도 갈증을 풀 길이 없어, 목마름을 두려워 하지는 않는가? 가진 것은 많으나 아주 조금 밖에 베풀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알아주기만을 바라며 베푸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욕망은 그들의 선물마저도 불결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자들과는 정반대로, 가진 것은 조금밖에 없으나 그가 가진 전부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삶을 믿는 자들이며 삶의 자비를 믿는 자들로서,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비지 않는다. 또 세상에는 기쁘게 베푸는 자들이 있으니, 이 기쁨이 바로 그들의 보상인 것이다. 그러나 고통으로 베푸는 자들도 있으니, 이 고통이 바로 그들의 세례인 것이다. 또한 베풀되 기쁨도 찾지 못하고 고통도 무르며 덕을 베푼다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마치 저 계곡의 상록수가 그 향기를 공중에 풍기듯이 그렇게 베푸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의 손길 사이로 신은 말씀하시고, 이들의 눈 속에서 대지를 향해 미소짓는다. 요청을 받았을 때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요청을 받지 않을 때에도 헤아려 베푸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에겐 받을 사람을 찾는 것이 더 큰 기쁨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이 가진 것은 언젠가는 모두 주어야 하는 것들. 그러므로 지금 주라. 베품의 기회가 그대들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것이 되게 하라. 그대들은 가끔 나는 베풀리라. 그러나 보답이 있을만한 사람들에게만 베풀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들의 과수원에 있는 나무들이나 목장의 양떼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기 위해 자기 스스로 베푼다. 움켜쥐고 나누지 않는 것은 멸망하는 길이니까. 진실로, 낮과 밤을 맞이하여도 좋은 이라면 그대들로부터 다른 모든 것을 받기에 충분한 이들이다. 삶의 바다를 마셔도 좋은 이라면 그대들의 작은 시냇믈로 그의 잔을 채워도 괜찮은 일이다. 받아줌의 용기와 확신, 아니 사랑 속에 놓여 있는 것보다 더 큰 보답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대들은 어떠한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가슴을 쥐어뜯게 하고 자존심을 벌거벗게 하며, 그렇게 하여 형편 없게 된 가치와 상처입은 자존심을 보는 그대들은 어떠한가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대들은 스스로 베풀 수 있는 자로서 베풀 수 있는 그릇에 마땅한가를 생각하라. 실로 삶을 주는 삶, 그것뿐이다-단지 스스로 베푸는 자라고 생각하는 그대들은 그 증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받는 자들이여-물론 그대들은 모두 받는 자들이지만-얼마나 감사해야 할까를 생각지 말라. 그것은 베푸는 이에게도, 그대들 자신에게도 멍에를 씌우는 일인 것이다. 그와 함께 날개이듯 그의 선물을 타고 오르라. 그대들의 빚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그 넓은 마음의 대지를 어머니로, 신을 아버지로 한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에. 먹고 마심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여관 주인인 한 노인이 말하였다. 먹고 마심에 대해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이 대지의 향기로만 살 수 있다면, 마치 빛으로 살아가는 기생식물처럼. 그러나 그대들이 먹기 위해 죽어야 하고, 갈증을 달래기 위해 어미의 젖으로부터 갓난 것을 떼내야 한다. 그러므로 그 행위를 하나의 예배가 되게 하라. 그대들의 식탁을 제단으로 하고, 그 제단 위에 숲과 평원의 순수한 것들을 인간 속의 보다 더욱 순결한 것을 위한 제물이 되도록 하라. 그대들이 짐승을 살해 해야 할 땐 마음 속으로 속삭이라. 살해하는 똑같은 힘으로 나도 역시 살해당하며, 나 역시 먹히리라. 나의 손아귀 속으로 나를 인도하리라. 그대의 피와 나의 피는 하늘의 나무를 키우는 수액에 불과할 뿐인 것 그대들이 이로 사과를 깨물 땐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라. 그대의 씨앗은 내 몸 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그대의 미래의 싹은 나의 심장 속에서 꽃을 피우리. 그리하여 그대의 향기는 나의 숨결이 되어 우리 함께 온 계절을 만끽하리라 그리고 가을이 되어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그대들의 포도밭에서 포도알을 딸 땐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라. 나도 포도밭과 같으니, 나의 열매 또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거두어질 것. 그리하면 나 역시 새 포도주처럼 영원의 항아리 속에 담겨지리니 그리고 겨울이 되어 포도주를 따를 때면, 포도주 잔마다 하나의 노래를 그대들의 마음 속에 따르게 하라. 그리하여 그 노래 속에 가을날과 포도밭과 포도주 짜던 추억을 간직하게 하라. 일에 대하여 이번에는 농부 한 사람이 말했다.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들은 대지와 대지의 영혼과 함께 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나태야말로 계절에는 이방인이 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복종은 장엄하게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행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대들이 일할 때면 그대들은 피리가 되어, 그 속으로 시간의 속삭임은 음악으로 화해 울려퍼진다. 모두가 어울려 합창할 때, 그대들 가운데 어느 누가 말 못하는 벙어리 갈대가 되고자 할 것인가. 그대들은 일이란 재앙이요, 노동이야말로 불운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말하노라. 그대들이 일하고 있을 때 그대들은 대지의 가장 깊은 꿈의 한 조각을 채우는 것이라고. 오직 그대에게만 맡겨진 꿈을. 그대들은 노동함으로써만 진실로 삶을 사랑할 수 있으며, 노동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길만이 삶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게 되는 일이라고.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고통스러워 태어남을 불행이라 부르고 육신으로 살아감을 그대들의 이마에 씌어진 저주라 말한다면 나 대답하리. 그대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만이 그 저주를 씻어줄 수 있을 거라고. 또 그대들은 삶의 암흑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피로 속에서 그대들 또한 지친 자들의 그러한 말을 되풀이 한다. 그러나 내 말하노니, 강한 충동이 없을 때야말로 삶은 진정 암흑이며 어떤 깨달음도 노동이 동반되지 않을 때엔 쓸모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노동은 사랑이 없을 때엔 공허한 것이라고. 그대들이 사랑으로 일한다면 그대들은 그대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며, 끝내는 서로를 신에게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일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들의 심장에서 뽑아낸 실로 옷을 만드는 것. 마치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가 입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사랑으로 집을 짓는 것. 마치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가 그 집에서 살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자비로 씨뿌리고 환희로 거두어 들이는 것. 마치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가 그 열매를 먹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그대들이 형상화하는 모든 것에 그대들만의, 영혼의 숨결을 불어 넣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 곁에는 언제나 모든 축복받은 죽음들이 서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 것임을. 나는 가끔씩 그대들이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대리석을 깎으며 일하는 이, 그리하여 돌 속에서 제 영혼의 모습을 찾아내는 이는 흙을 가는 이보다 더 위대한 법. 그리고 무지개를 잡아 옷감 위에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이는 신발을 만드는 이보다 위대한 법이라고. 그러나 잠 속에서가 아니고 활짝 개어 있는 한낮에 나 말하노니, 바람은 작은 꽃잎에게보다 거대한 참나무에게 더 다정하게 속삭이지는 않는다고. 그러므로 바람소리를 자기만의 사랑으로, 보다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야말로 실로 위대하다고. 노동이란 보이는 사랑인 것. 만약 그대들이 사랑으로 일할 수 없고 혐오로써 일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일을 버리고 신전 앞에 앉아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편이 나으리라. 왜냐하면 만약 그대들이 사랑없이 빵을 굽는다면, 인간의 굶주림을 반도 채우지 못할 쓰디쓴 빵을 구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들이 원한에 차서 포도를 짓이긴다면, 그대들의 원한은 포도주 속에 독을 품으리라. 또한 그대들이 아무리 천사처럼 노래하더라도 노래함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낮과 밤의 소리에 대하여 인간을 귀멀게 하는 것이 될 뿐이다.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다음에는 한 여인이 말했다. 기쁨과 슬픔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이에 대답했다. 그대들의 기쁨이란 것은 가면을 벗은 그대들의 슬픔. 그대들의 웃음이 솟아오르는 그 샘이 때로는 그대들의 눈물로 채워진다. 그러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슬픔이 그대들의 내부로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대들의 기쁨은 더욱 커질 것이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속에서 구워진 그 잔이 바로 그대들의 포도주를 담는 잔이 아닌가? 조각칼로 후벼 파낸 바로 그 나무가 가대들의 영혼을 달래는 피리가 아닌가? 그대들이 기쁠 때 가슴속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이젠 슬퍼하고 있음을. 그대들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한 것이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슬픔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것이네> 하지만 나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슬픔과 기쁨은 결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 이들은 함께 오는 것. 한쪽이 혼자서 그대들의 식탁 곁에 앉을 때면 기억하라. 다른 한쪽은 그대들의 침대 위에서 잠들고 있음을. 그대들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 저울처럼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오직 텅 비어 있을 때에만 그대들은 멈추어 균형을 이룬다. 보물지기가 자기의 보물을 달려고 그대들을 들어 올릴 때, 그대들의 기쁨이나 슬픔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집에 대하여 다음엔 석공이 말했다. 집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들아, 성벽 안에 집을 짓기 전에 광야에 그대들 상상의 오두막을 한번 지어보라. 그대들이 해질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듯이, 그대들 마음 속의 멀고 고독한 방랑자도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다. 그대들의 집이란 것은 보다 큰 그대들의 육체. 태양 속에서 자라고 밤의 적막 속에서 잠들고 꿈꾼다. 그대들의 집은 꿈꾸지 않는가? 꿈울 꾸며, 숲이나 언덕의 정상을 향하여 도시를 떠나고 있지 않는가? 나 그대들의 집들을 내 손바닥에 거두어 씨뿌리는 이와도 같이 숲과 초원에 뿌릴 수 있기를 바라노니. 그리하여 골짜기는 그대들의 거리가 되고 초록 길들은 그대들의 오솔길이 되어 포도밭 사이로 그대들 서로서로를 찾아내어 옷깃에 대지의 향기를 품어 온다면...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일찌기 존재하지도 않은 일. 그대들의 조상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대들을 너무 가까이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좀더 지속되리니, 그대들의 성벽은 그대들의 집을 들판으로부터 떼어 놓으리라. 그러니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내게 말해 다오. 이 집 속에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을 굳게 잠그고 그대들이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그대들의 힘을 보여줄 말없는 충동인 평화를 지니고 있는가? 그대들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반짝이는 아치 문을 회상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가슴을 위대한 산으로 이끌어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가? 말해 다오. 그대들은 그대들의 집 안에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는가? 혹은 그대들은 안락에의 열망만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손님으로 찾아와서 주인이 되고 결국엔 정복자가 되는 음흉스런 자의 안락을? 그리하여 정복자가 된 그는 채찍으로 더욱 큰 욕망의 꼭두각시가 되게 한다. 그자의 손이 비단결처럼 부드러울지라도, 그 자의 가슴은 차가운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그자는 그대들의 침대 곁에서 단지 잠재우기 위해 그대들을 어루만진다. 또 그자는 그대들의 신선한 감각을 비웃고, 그리하여 깨지기 위운 그릇처럼 엉겅퀴 가시 속에 눕힌다. 안락에의 열망은 영혼의 정열을 죽이고는 장례식장으로 이죽거리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이들인 그대들, 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그대들은 덫에 걸리거나, 길들여지지 말라. 그대들의 집은 닻이 아니라 돛대이게 하라. 또 상처를 덮는 번쩍이는 거미줄이 아니라, 눈을 보호하는 눈꺼풀이 되게 하라. 또한 문을 지나가려고 날개를 접지 말고, 그대들의 머리를 천정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지도 말며, 벽이 부서져서 무너져 내릴까 호흡을 두려워 하지도 말라. 그대들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만든 무덤 속에서는 살지 말라. 그리고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함에 차 있을지라도 그대들의 집이 그대들의 비밀을 간직하게 하지 말며, 동경을 가지게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들 내부의 무한한 것은 하늘의 저택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아침 안개가 문이고 밤의 노래와 고요가 창인 그 저택 속에. 옷에 대하여 그러자 한 직공이 말했다. 옷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의 옷이란, 아름다운 것은 많이 가리지만 추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들은 옷으로써 각자의 자유를 누리려 하지만, 오히려 옷이야말로 갑옷이 되며 쇠사슬이 됨을 알게 되리. 그대들은 옷을 좀 덜 입음으로써, 그대들의 살이 좀더 태양이나 바람과 접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노라. 왜냐하면 삶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삶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기에. 어떤 이는 말한다. <우리의 옷을 짠 이는 북풍이다>라고. 난 말한다. 그래 북풍이었다. 그러나 그의 베틀은 수줍음, 그의 실은 약해진 힘줄. 그리하여 일을 다 마쳤을 때 바람은 숲속에서 웃었다. 수줍음이란 불결한 자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임을 잊지 말라. 그리하여 불결한 자가 더이상 있지 않게 될 때, 수줍음이란 마음의 더럽힘, 또는 족쇄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들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들 머리카락과 장난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매매에 대하여 이번에는 한 상인이 말했다. 매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대지는 그대들에게 자신의 모든 열매를 허락하고 있다. 그러니 그대들이 손에 넣을 방법만 안다면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풍요와 만족은 대지의 선물을 교환함으로써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의 교환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만 그대들을 탐욕이나 굶주림으로 인도할 뿐이리라. 장터에서, 바다와 들판과 포도밭의 일꾼들인 그대들이, 직공들과 도공들이나 향수 수집가들을 만날 때면, 대지를 주관하시는 절대 신에게 간절히 빌라. 그대들의 마음 속에 왕림하시어 저울과 서로의 값을 재는 계산을 성스럽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리고 빈 손으로 와서 그대들의 거래에 끼어드는 자들을 절대 용서치 말라. 그자들은 그대들의 노고 대신에 말을 팔려고 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 들로 나갑시다. 아니면 우리 형제와 함께 바다로 가서 그물을 칩시다. 대지와 바다는 우리에게처럼 그대에게도 관대하리라> 만약 노래하는 자, 춤추는 자, 피리부는 자들이 그곳으로 온다면, 그들의 선물도 사라. 그들 역시 유향을 거두는 자들이며, 그보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비록 꿈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대들 영혼의 옷이며 음식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시장을 떠나기 전에 보라. 아무도 빈손으로 가는 이는 없음을. 대지를 주관하시는 절대 신은 그대들의 가장 작은 요구가 채워지기 전에는 바람 위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죄와 벌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재판관 한 사람이 나와 <죄와 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그대들의 영혼이 바람 속을 헤매고 다닐 때, 홀로, 지켜주는 이도 없는 그대들은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다. 심지어 그대들 자신에게조차도.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 지은 죄 때문에 천국의 문 앞에서, 어느 누구도 봐주는 이 없이 한동안 그렇게 문을 두드리며 줄곧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신적 자아는 대양과 같다. 그것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으며, 창공과도 같이 날개가 있는 것만 안아 올린다. 또한 그대들의 신적 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그것은 두더지의 길도 알지 못하며 뱀 구멍도 찾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들의 신적 자아는 그대들의 존재 내부에 홀로 살고 있지는 않다. 그대들 내부의 많은 것들은 아직 인간에 불과할 뿐이며, 또한 많은 것들은 아직 인간에 이르지도 못하고 있다. 단지 스스로 깨어남을 찾아, 잠든 채 안개 속을 헤매는 초라한 난장이 만이 있을 뿐. 나는 이제 그대들 내부의 바로 그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죄와 그 죄에 대한 벌을 아는 사람은 안개 속의 난장이도, 그대들의 이 신적 자아도 아닌 다만 그이기 때문에. 그대들이 죄인에 대하여, 마치 그가 그대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대들 세계에 침입한 낯선 이방인인 듯이 말하는 것을 가끔 듣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하고 성스러운 사람일지라도 그대들 한사람 함사람 속에 있는 지고의 것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악한 자일지라도 그대들 한사람 한사람 속의 가장 밑, 그 이하로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단 하나의 나뭇잎도 나무의 말없는 이해 없이는 갈색으로 변하지 않듯이, 죄를 저지르는 자도 그대들의 숨은 뜻 없이는 저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신적 자아를 향해 일렬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대들은 길인 동시에 나그네. 그리하여 그대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이 넘어진다면, 그것은 장애물이 있음을 알리는 경고로써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넘어지는 것이다. 그는 또 앞서가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셈이기도 하다. 비록 빠르고 정확한 걸음으로 갈지라도 아직 장애물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 역시 그러하리라. 비록 이 말이 그대들의 가슴에 무겁게 드리울지라도... 살해 당한 자는 자기가 살해당함에 대해 책임이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또한 자기가 도둑맞음에 대한 책임이 없지 않다. 정의로운 자, 사악한 자의 행위에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 중죄인의 행위에 완전 결백할 수 없다. 그렇다. 죄인이란 때로 피해자의 희생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죄인이란 죄없는 자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것이다.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직한 자,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 없다. 왜냐하면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이들은 태양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에. 만일 흰 실이 끊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직공은 헝겊 전부를 잘 살펴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옷감을 짜는 기계 역시 검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정한 아내를 심판하고자 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녀 남편의 마음도 저울에 달게 하고 영혼도 자로 재어 보게 하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는 자로 하여금, 죄지은 자의 영혼도 살펴보게 하라. 그대들 가운데 누군가가 정의의 이름을 빌어 벌하려 한다면, 그리하여 악의 나무에 도끼를 대려 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 나무의 뿌리를 살펴보게 하라. 그러면 그는 선과 악의 뿌리, 열매 맺는 것과 맺지 못하는 것의 뿌리란 대지의 말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리라. 그렇다면, 정의롭게 재판하려는 그대들이여, 비록 육체적으로는 정직하나 정신적으로 도둑인 자에게 어떠한 판결을 내릴 것인가? 또 육체적으로는 살인자나 정신적으로는 그 자기자신이 살해당한 자에게는 어떠한 벌을 내릴 것인가? 또 겉으로는 사기꾼이며 박해자이지만 역시 자신이 박해받고 폭행당한 자를 어떻게 고발할 것인가? 그리고 뉘우치고 반성함이 이미 지은 죄보다 더 큰 자들은 어떻게 벌하려 하는가? 그대들이 기꺼이 봉사하는 그 법에 의해 집행되는 정의란 바로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물론 그대들은 죄없는 이에게 뉘우침을 강요할 수도 없고, 타인의 가슴으로부터 뉘우침을 빼앗을 수도 없을 것이다. 뉘우침은 청하지 않더라도 한 밤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워, 스스로를 응시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정의를 깨닫고자 하는 그대들이여! 이 모든 행위를 충만한 빛 속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어떻게 깨달으려 하는가? 오직 그때에만 깨닫게 되리라. 의로운 자와 의롭지 못한 자란 소아의 밤과 신적 자아의 낮 사이의 희미한 빛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불가한 것이라는 것을. 또한 사원의 주춧돌이 결코 바닥에 놓인 가장 낮은 돌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법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법률가가 말했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법을 제정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그 법을 어기는 것을 더욱 좋아하면서. 마치 바닷가에서 끊임없이 모래성을 쌓았다가는 그것을 허물어 버리며 노는 어린아이들처럼. 그러나 그대들이 모래성을 쌓는 동안, 바다는 보다 많은 모래를 기슭으로 밀어 보내고, 그대들이 모래성을 허물 때면 바다는 그대들과 함께 미소짓는다. 진실로 바다는 늘 천진난만한 이와 함께 웃는다. 그러나 삶이 바다와 같지 않은 자에게, 인간이 만든 법도 모래성과 같지 않은 자에겐 어떠한가. 삶이란 단지 바위이며, 법이란 그 바위에 그들 자신의 모습을 새기는 조각칼일 뿐인 사람에겐? 춤추는 자들을 시기하는 절름발이에겐? 자기의 명예를 사랑하면서 또 길 잃은 사삼, 또는 정신없이 방황하는 것들을 생각하는 황소에겐? 제 허물을 벗을 수 없다고, 다른 모든 뱁들을 벌거숭이이며 수치심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큰소리치는 늙은 뱀에겐? 또한 결혼 피로연에 일찌감치 나타나서는 실컷 먹어대고 돌아가면서, 모든 잔치란 법에 걸리는 것이며 피로연에 참석한 모든 손님들은 법을 어긴 법률 위반자라고 떠드는 자에겐? 내가 이들에 대해 무어라 말해야 할는지. 햇빛 속에 서 있지만 태양을 등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 외엔? 그들은 단지 그림자만을 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법인 것을. 그렇다면 태양이 그들에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늘을 드리우는 것 외에. 그러므로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엎드려 대지 위에 그들의 그림자를 쫓아가는 것 외에? 그러나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그대들이여, 어떤 풍향계가 그대들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인가? 만약 인간이 만든 감옥의 문이 아니라 자기의 멍에를 부수는 것이라면, 어떤 인간의 법이 그대들을 묶을 수 있을 것인가? 그대들이 인간이 만든 쇠사슬에 결코 비틀거리지 않고 춤출 수 있다면, 어떠한 법이라도 그대들을 두렵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의 옷을 찢는다 해도 그것을 인간의 길에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을 판결할 자는 없다. 올펄레스 시민들이여, 그대들은 북소리를 약하게 할 수도 있고, 하프의 줄을 늘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연 어느누가 저 종달새에게 지저귀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인가. 자유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연설가가 말했다. 우리에게 자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성문 옆이나 그대들의 집 난롯가에서, 나는 그대들이 엎드려 자기 자신들만의 자유를 비는 것을 보았다. 마치 압제자 앞에 스스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설사 자기를 죽일지라도 찬양해 마지 않는 노예들과 같이. 그래, 나는 보았다. 사원의 뜰이나 성채 그늘 밑에서 그대들 중의 가장 자유스러운 자가, 자유를 마치 멍에나 수갑처럼 차고 있는 것을. 그 때 나의 내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왜냐하면 그대들 자유에의 욕망이 그대들에게 재갈을 물릴 때만이, 또 자유가 최후의 목적이며 기쁨이라고 떠들기를 그만둘 때만이 진실로 그대들이 자유로울 것이므로. 욕망도 슬픔도 없는 밤이 아니라 근심으로 가득찬 낮에, 또한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그대들의 삶을 구속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이 이 모두를 벗어던지고 해방되어 이들 위로 일어설 때만이 실로 그대들은 자유로우리라. 그리하여 그대들이 깨달음의 새벽에, 지난 한낮의 시간을 묶었던 쇠사살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들이 낮과 밤 저편으로 일어설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실로 자유라 부르는 것은 이 사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슬인 것이다. 비록 그 고리가 햇빛에 반짝이고 눈을 어지럽게 할 지라도. 그리하여 그대들이 자유로와지기 위해 버리려 하는 것은? 그대들 자아의 파편 외에 무엇이겠는가? 만약 그대들이 버리려는 법이 부정한 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대들의 이마에 그대들의 손으로 씌어진 것. 그대들이 아무리 법전을 불사른다 하더라도, 재판관의 이마를 씻고 바닷물을 퍼붓는다 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으리라. 그대들이 내쫒고자 하는 자가 폭군이라 한다면, 그대들 내부에 있는 그의 옥좌가 무너져 있는가를 우선 보라. 아무리 폭군이라 할지라도 자유 속에 일말의 포악함도 깃들어 있지 않고 긍지 속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들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자유인과 긍지인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그대들이 벗어버리려 하는 것이 근심이라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강요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대들이 선택한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없애려 하는 것이 공포라면, 공포의 자리란 두려운 자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다. 실로 모든 것은 그대들 존재 내부에서 반쯤 엉켜 버린 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갈망하는 것과 두려운 것, 불쾌한 것과 그리운 것, 추구하는 것과 벗어나고 싶은 것들이. 이것들은 그대들 안에서 한쌍의 빛과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채 움직인다. 그리하여 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면, 남은 빛은 또다른 빛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그대들의 자유도 자기의 족쇄를 잃어버릴 때 비로소 보다 큰 자유의 족쇄가 되는 것이다. 이성과 열정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여사제가 말했다. 이성과 열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들의 영혼이란, 떄로 이성과 판단력이 열정과 욕망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쟁터이다. 내가 만약 그대들 영혼의 조정자가 될 수만 있다면, 그대들 내부의 모든 불화와 적대를 하나로 만들고 노래로 화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대들 스스로가 조정자가 되지 않는 한, 아니 스스로가 내부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대들의 이성이나 열정이란 것은 바다 위를 달리는 그대들 영혼의 키이며 돛이다. 돛이나 키가 망가진다면, 그대들은 버려진 채 표류하거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멈추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홀로 지배하기엔 힘이 부족하며 버림받은 열정이란 다만 스스로를 부수어 불태워 버리는 불꽃이 될 뿐이기에. 그러므로 영혼으로 하여금 이성을 열정의 높이에까지 이르게 하고 노래하게 하라. 그리하여 이성으로써 열정을 인도하게 하라. 자기의 재 속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불사조처럼, 그대들의 열정이 날마다 스스로의 부활을 통해 살아가도록. 그대들의 판단력과 욕망을, 집으로 초대한 귀한 손남처럼 생각하기를 내 바라노라. 실로 그대들은 어느 한 손님만을 다른 손님보다 높이 대할 수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어느 한쪽에만 신경을 써준다면 결국 두 사람 모두의 사랑과 신뢰를 잃을 것이기 때문에. 그대들이 언덕 사이 흰 백양나무들의 시원한 그늘에 낮아 먼산과 들과 숲의 평화를 즐기고 있을 때면, 가슴으로 하여금 고요히 말하게 하라. 신은 이성을 믿으신다라고. 그리하여 폭풍이 몰아치고 거센 바람이 온 숲을 뒤흔들고 천둥번개가 하늘의 장엄함을 소리칠 때면 가슴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며 말하게 하라. 신은 열정으로 움직이신다라고. 그러면 신의 세계 속의 한 숨결이며, 신의 숲속의 한 잎인 그대들 또한 이성을 믿고, 열정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고통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여인이, 고통에 대해 말씀해 달라 했다.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의 고통이란, 그대들 오성의 껍질이 깨어지는 것이니 과일의 씨도 햇빛을 쬐려면 부서져야만 되듯이, 그대들은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거늘. 만일 그대들이 매일매일의 삶의 기적들을 가슴속 깊이 경이로움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고통도 기쁨 못지 않게 경이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들판 위로 지나가는 계절에 언제나 순응했듯이, 그대들 가슴의 계절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들은 슬픔의 겨울 사이로 조용히 바라보게 되리라. 그대들이 느끼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은 스스로 선택한 것. 그대들 내부의 의사가, 병든 치아를 치료하는 쓰디쓴 약. 그러므로 의사를 믿고 침착하게 그가 주는 약을 말없이 먹으라. 왜냐하면 그의 손은 아무리 차갑고 딱딱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보다 부드러운 손길에 인도되고 있기 때문에. 가르침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교사 한 사람이 말했다. 저희에게 가르침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어떤 이도 그대들이 깨달음의 새벽에 이미 반쯤 잠들어, 누워있는 것 외엔 어떤 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 제자들에 둘러싸여 사원의 그늘 밑을 거니는 스승이라면 그대들에게 신념과 사랑을 줄 순 있을 지언정 지혜를 줄 수는 없는 법이니.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는 그대들에게 자기의 지혜의 집으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지는 않으리라. 그보다 그대들로 하여금 그대들 자신의 마음의 문으로 인도케 하리라. 천문학자는 그대들에게 그가 알고 있는 우주에 대한 지식을 말해 줄 순 있을지라도, 자기의 깨달음을 말해 줄 수는 없다. 음악가는 그대들에게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리듬을 노래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리듬을 포착하는 귀마저, 그것을 울려내는 목소리마저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수학자도 질량과 길이의 세계에 대하여 말할 수는 있을 지라도 그대들을 그리로 인도할 수는 없는 법. 왜냐하면 인간의 상상력이란 타인으로부터 그 날개를 빌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누구나 혼자서 신을 깨달아야 하듯이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와 떨어져서 혼자 신을 깨닫고 홀로 대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우정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젊은이가 말했다. 우정에 대해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의 친구란 그대들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존재이다. 사랑으로 씨를 뿌려 감사로써 수확하는 그대들의 들. 또한 그대들의 식탁이며 아늑한 집이다. 그대들은 굶주린 채 친구에게로 와서 안식을 구한다. 그대들의 친구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그대들은 자기만의 생각으로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렇지라는 말을 억제하지도 말라. 그가 말없을 때라도 그대들의 가슴은 그의 가슴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라. 말없이, 우정 속에서는 모든 생각, 모든 욕망, 모든 기대가 갈채받지 않아도 기쁨으로 태어나고 나누어지는 것. 친구와 이별할 때에도 슬퍼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들이 친구에게서 가장 사랑하는 점은, 그가 없을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마치 산을 오르는 이에게 산은 벌판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듯이. 그리고 우정에, 영혼의 심화 외에 결코 어떤 목적도 두지 말라. 왜냐하면 자기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 외에 또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므로. 단지 던져진 그물에 지나지 않을 뿐. 오직 무익한 것만이 걸려드는 그물. 그러므로 그대들의 친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그가 그대들 마음의 조수의 썰물 때를 안다면 밀물 때도 알게 하라.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찾는 친구, 그런 친구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언제나 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친구를 찾아라. 그대들의 요구를 만족시킴은 곧 그의 요구도 만족시키는 것, 결코 그대들의 공허를 채우는 것은 아니기에. 그리하여 부드러운 우정 속에 웃음이 깃들게 하고 기쁨을 나누라. 하찮은 이슬방울 속에서도 마음은 아침을 찾아내고 다시 불타 오르기에. 대화에 대하여 이어서 한 학자가 말했다. 대화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평화롭지 않을 때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대들의 가슴이 더이상 외로움을 참을 수 없을 때 떠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 말이란 기분전환이 되고 소일거리나 되는 것. 그리하여 그대들이 말을 하고 있을 땐, 생각이란 건 거의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우주를 나는 새, 말의 우리 속에선 날개를 펼 수 있을지라도 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대들 중에서는 단지 혼자 있기가 두려워 이야기 상대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고독한 침묵은 벌거벗은 자신을 눈앞에 드러나게 하고, 그리하여 달아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대들 가운데는 자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를 인식도 예견도 없이 드러내어 떠드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자기 내부에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로 떠들지 않는 이들도 있으니, 영혼은 이같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생동하며 말없이 머무는 것이다. 길거리나 시장에서 친구를 만나거든, 그대 내부의 영혼으로 하여금 입술을 움직이게 하고, 혀를 이끌게 하라. 그대 목소리 안의 목소리로써 그의 귓속의 귀에게 말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그대 가슴의 진실을 마치 잊을 수 없는 포도주처럼 간직할 것이기에. 비록 그 빛깔이 잊혀지고, 그 잔 또한 더이상 기억되지 않을 때에도. 시간에 대하여 그러자 다음엔 천문학자가 말했다. 스승이시여, 시간에 대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잴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을 재려고 한다. 그대들의 행위를 시간과 계절에 맞추려 하고, 심지어는 그대들의 영혼의 길마저 인도하려 한다. 시간을 강물로 만들어, 그 둑에 앉아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내부의 영혼은 시간의 영원을 깨닫고 있다. 그리하여 어제는 단지 오늘의 추억이고, 내일은 오늘의 꿈이란 것을 안다. 그리하여 그대들 속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것은 아직도 허공에 뿌려지던 최초의 순간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대들 중에서 무한한 사랑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그 누구인가? 또 누가 아직 그 사랑을, 비록 무한함에도 존재의 핵심에 둘러싸여 사랑의 생각에서 생각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의 행위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무한하며,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것. 그러나 그대들의 생각으로 계절에 맞추어 시간을 재야겠다면, 각 계절로 하여금 다른 모든 계절들을 둘러싸게 하라. 그리하여 오늘로 하여금 추억으로써 과거를, 동경으로써 미래를 포옹하게 하라.  선과 악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이 도시의 원로인 한 사람이 나와 말했다. 선과 악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 대해 그는 말했다. 내가 그대들 안에 있는 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악에 대해선 말할 수 없노라. 대체 악이란 무엇인가. 단지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는 것 외에. 실로 선이 굶주릴 때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컴컴한 동굴 안에서도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를 때는 썩은 강물이라도 달게 마시는 법인 것을. 그대들이 자아와 한몸이 되어 있을 때는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비록 자아와 한몸이 되어 있지 않을 때라 하여 악한 것은 아니다. 내분이 심한 가정이라고 해서 도둑의 소굴은 아닌 것. 다만 그것은 내분된 집일 뿐. 또한 키없는 배가 위험스런 섬 주위를 정처없이 떠돌지라도 아주 가라앉는 것은 아닌 것. 그대들이 스스로를 베풀고자 노력할 때 그대들은 진실로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할 때에도, 그대들은 대지에 엉켜 그 심장을 빠는 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뿌리에게 <나오 같으라. 무르익고 가득 넘쳐, 언제나 그대의 풍요를 주라>고 요구할 수는 없으리라. 뿌리는 언제나 받아야 하고 열매는 언제나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들이 깨어나 말할 땐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의 혀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비틀거리며 잠들고 있을 때라 하여 악한 것은 아니다. 더듬는 말일지라도 허약한 혀를 튼튼하게 해줄는지도 모르게 때문에. 그대들이 목적지를 향해 확고한 걸음으로 걸어나갈 때, 진실로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절룩거리며 저편으로 갈 때라도 악한 것은 아니다. 절룩거린다고 뒤로 물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나 강하고 재빠른 그대들이여, 보라, 그대들은 절름발이 앞에서 결코 절름거리지 않는 것을. 그것이 친절한 행위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들은 선하다. 그러나 선하지 않을 때라도 악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대들이 게으른 것일 뿐. 가엾게 여겨라. 숫사슴도 거북이에게 빨리 달리는 법을 가르칠 수 없음을. 그대들이 대아를 갈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그 갈망은 그대들 모두의 가슴속에 있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언덕의 비밀과 숲의 노래를 이끌어 힘차게 바다로 흘러가는 급류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잔잔한 강물로서, 바다에 이르기 전의 강물에서 스스로를 잃고 헤매인다. 그러나 열렬히 갈망하는 이로 하여금 갈망하는 것이 없는 이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느리고, 머뭇거리기만 하느냐라고 묻게 하지 말라.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란 헐벗은 이를 보고 <당신의 옷은 어디에 있소>라고 묻지 않으며, 또한 집없는 이에게 <당신의 집은 어떻소>라고도 묻지 않는 법이기에. 기도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여사제가 나서서 말하였다. 기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말하였다. 그대들은 마음이 괴로울 때나 무엇인가가 필요힐 때만 기도한다. 그러나 기쁨이 넘쳐 흐를 때에도, 나날이 풍요로울 때에도 늘 기도하기를 바라노라.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하늘 속에 그대들 스스로를 활짝 펴는 것. 안락을 위해 공중에 그대들의 어둠을 쏟아버림은, 또한 기쁨을 위해 그대들 가슴의 새벽빛을 쏟아내는 것. 그리하여 영혼이 그대들을 기도에로 인도할 때 그대들이 울지 않을 수 없다면, 기도는 다시 비록 울고 있을지라도 그대들을 격려하리라. 기어이 웃음을 보일 때까지. 그대들이 기도할 때면, 바로 그 시간에 기도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 허공에 일어서야 한다. 기도 속에서가 아니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그러므로 그대들의 보이지 않는 사원으로의 방문을, 황홀과 달콤한 영교를 위한 것 외엔 아무 뜻도 없이 하라. 그대들이 비록 구하는 것 외엔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기에. 또한 다만 겸양하고자 들어간다 해도, 결코 그대들은 구원될 수 없는 것이기에. 심지어는 그대들이 타인의 행복을 빌기 위해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의 기도는 들어지지 않으리라. 보이지 않는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할 뿐. 내가 그대들에게 어떠한 말로써 가르쳐야 할지를 가르칠 순 없다. 신은 결코 그대들의 말을 듣지 않으시는 법. 다만 그분 스스로가 그대들의 입술을 시켜 말씀하실 뿐. 그러므로 난 수많은 숲과 산과 바다의 기도를 그대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그대들이 숲과 산과 바다에서 태어난 그들만이 가슴속에서 그들의 기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깊은 밤의 고요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침묵 속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이시여, 날개달린 우리의 자아여, 명하는 것은 우리 안의 당신의 뜻이 명하는 것이옵니다. 욕망함은 저희 안에서 당신의 욕망이옵니다. 당신의 것인 저희의 밤을, 역시 당신의 것인 낮으로 변하게 하는 것도 저희 안의 당신의 강한 충동이옵니다. 저희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청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속에 욕구가 생기기 전에 벌써 당신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저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당신은 저희에게 모든 것을 주시옵니다> 쾌락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일 년에 한 번씩 그 도시를 방문하는 한 사람이 나와서 말했다. 저희에게 쾌락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쾌락이란 자유의 노래.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닌 것. 쾌락이란 그대들의 욕망의 꽃이 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열매가 아닌 것. 쾌락은 정상을 향해 소리치는 심연. 그러나 그것은 심연도, 정상도 아닌 것. 그것은 날개 달린 새가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것. 그러나 사방이 둘러싸인 공간은 아닌 것. 그렇다. 사실 쾌락이란 자유의 노래.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로 하여금 가슴 가득히 노래하게 하고 싶다. 그러나 그대들이 노래하느라 기운이 빠지게 하지는 않겠다. 젊은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쾌락이 전부인 양, 쾌락만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심판받고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들을 심판하거나 질책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쾌락을 찾게될 땐, 결코 쾌락만을 찾게 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쾌락의 자매는 일곱, 그중 가장 어린 형제도 쾌락보다 아름다운 것. 그대들은 하찮은 뿌리를 캐다가 땅 속에서 보물을 찾은 이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는가? 또한 노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처럼, 후회로써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후회란 마음의 벌이 아니라,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을날의 수확같이 감사한 마음으로 쾌락을 추억해야 하리라. 그러나 후회가 그들을 위로한다면 그로부터 위로를 받아라. 또한 그대들 가운데서 쾌락을 찾게에 젊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회상할 만큼 늙지도 안은 이들도 있다. 그들은 쾌락을 찾는 것도, 회상하는 것도 두려워서 일체의 쾌락을 피한다. 혹 영혼을 돌보지 않게 되거나 죄를 짓지 않도록. 하지만 이런 도피 속에서도 쾌락은 있는 법. 비록 떨리는 손으로 뿌리를 캘지라도 역시 보물은 찾게 마련. 그러니 영혼을 어기려는 자가 누구인지 내게 말해 주오. 나이팅게일이 밤의 고요를 거역하는가, 개똥벌레가 감히 별을 거역하는가. 또 그대들의 불꽃이나 연기가 바람을 괴롭힐 것인가? 생각해 보라. 그대들의 영혼이 막대기 따위로 휘저을 수 있는 고요한 연못인가를. 그대들은 때로 스스로 쾌락을 거부하면서도 그대들 존재 내부의 깊은 곳에 욕망을 감춰 둔다. 누가 아는가. 오늘은 없는 듯 보이지만 그것이 실은 내일을 기다리고 있음을? 그대들의 육체조차 제가 물려받은 바와 당연한 요구를 알고 있으니, 결코 속지는 않으리라. 그러므로 그대들의 육체는 그대들 영혼의 하프. 그로부터 달콤한 음악을 울리게 하든, 혼란한 음악을 울리게 하든, 그것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묻는구나. <쾌락 안에서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선이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그대들의 숲, 그대들의 정원으로 가 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알게 되리라. 꽃에서 꿀을 모으는 것이 벌의 쾌락인 것을. 또한 벌에게 꿀을 바치는 것이 꽃의 쾌락인 것도. 벌에겐 꽃이 생명의 샘이기에. 그리고 꽃에게 벌은 사랑의 사자이므로. 그리하여 벌과 꽃, 그들에겐 쾌락의 줌과 받음이 필요이며 황홀한 기쁨인 것을. 올펄레스의 시민들이여, 바라건대 부디 꽃과 벌처럼 행복하기를.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시인이 나와 말했다.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어디에서 아름다운을 찾는가. 또한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아름다움 그 자체가 그대들의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것인가. 아름다움이 그대들의 말을 엮지 않는다면. 고통스럽고 상처받은 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친절하고 자비로운 것이다. 마치 자신만이 지닌 큰 축복이 약간은 부끄러운 젊은 어머니처럼. 아름다움은 우리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또 정열적인 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힘차고 무서운 것. 마치 폭풍우처럼 아름다움은 우리 발 밑의 대지를 뒤흔들고 머리 위의 하늘을 흔든다> 피곤하고 일에 지친 자는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부드러운 속삭임. 아름다움은 우리들의 영혼 속에서만 말한다. 마치 그림자가 두려워 떠는 가느다란 빛처럼, 아름다움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침묵에 따르며> 또한 불안한 자는 말한다. <우리는 산속에서 아름다움이 절규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말굽소리, 날개치는 소리, 사자의 포효도 함께 들었다> 밤이 되면 도시의 순찰대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새벽빛과 더불어 동녘에서 떠오르리라> 그리고 낮이 되면 노동자들과 나그네들은 말한다. <우린 아름다움이 해질녘의 창으로부터 대지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겨울에 눈 속에 갇힌 이는 말한다. <봄이 오면 아름다움은 언덕 위로 뛰어오른다> 또 여름날 뙤약볕 아래서 추수를 하는 이는 말한다. <우린 아름다움이 낙엽과 함께 춤추며 뒹구는 걸 보았다. 그 머리카락 사이로 눈발이 휘날리는 것도> 이 모든 것들은 그대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 그러나 실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욕망에 대해 말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욕망이 아니라 다만 환희. 그것은 갈증으로 타는 입술도 아니고 구걸하기 위해 내민 빈손도 아니다. 오히려 불타는 가슴이며 매혹된 영혼이다. 그것은 그대들이 보았던 영상도 아니고, 그대들이 들었던 음악도 아니다.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보이는 영상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음악이다. 그것은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도 아니고 날카로운 발톱에 매달린 날개도 아니다. 늘 꽃이 만발한 정원이며, 언제나 날아다니는 천사의 무리.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아름다움이란 거룩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걷어버린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삶인 동시에 베일. 아름다움은 홀로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영원인 동시에 거울인 것을... 죽음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가 말했다. 이제 죽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죽음의 비밀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들 삶의 중심에서 죽음을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낮에는 눈멀고 밤만을 볼 수 있는 올빼미는 결코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는 것. 그대들이 진정으로 죽음의 혼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들의 가슴을 삶의 몸을 향하여 크게 열라. 삶과 죽음 하나, 강과 바다가 한몸이듯. 희망과 욕망의 저 깊은 곳에서, 그대들은 말없이 미지의 나라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눈 속에서도 꿈꾸는 씨앗들처럼 그대들의 가슴도 봄을 꿈꾼다. 꿈속에야말로 영원에의 문이 숨겨져 있으니, 꿈을 믿으라. 그대들이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영광스럽게도 왕앞에 서게 된 양치기의 떨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양치기는 떨면서도 왕의 주목을 받게 됨이 기쁘지 않겠는가? 과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바람 속에 벌거벗고 서서 태양 속으로 녹아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숨이 끊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한 숨결이 끊이지 않는 자기의 조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높이 오르고 퍼져서, 어떤 번민도 없는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은 침묵의 강물을 마실 때에야 실로 노래하게 되리라. 또 그대들은 산의 정상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대지가 그대들의 몸뚱이를 요구하게 될 때, 그때서야 그대들은 진실로 춤추게 되리라. 작별에 대하여 마침내 저녁때가 다 되었다. 예언녀 알미트라가 말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당신의 영혼이여, 축복받으소서. 이에 그는 대답했다. 말한 자가 나였던가? 나는 듣는 자가 아니었던가? 이윽고 그가 사원의 계단을 내려갔다.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배에 다다르자 그는 갑판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바람은 내게 그대들 곁은 떠나라고 명하는구려. 내 바람보다 서두르지는 않겠지만, 이제 떠나가야 하리. 언제나 보다 고독한 길을 찾아 길떠나는 방랑자인 우리들은 하루를 끝낸 그 자리에서 다음날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새벽도 황혼이 우리를 이별했던 그 곳에서 우리를 찾아내지는 못한다. 대지가 잠들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길을 떠난다.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 나무의 씨앗, 그리하여 우리가 무르익고 가슴 가득해지면, 우리의 몸은 바람에 맡겨지고 이윽고 하나 둘 흩어진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참으로 짧기도 하구나. 내가 한 말들은 더욱 짧았다. 그러나 나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귓전에서 사라지고, 나의 사랑이 그대들의 추억 속에서 지워지면, 나 그때 다시 오리라. 그리하여 나는 말하리라. 보다 풍요한 가슴, 보다 풍요한 입술로, 보다 영혼에 순종하면서. 그렇다. 나는 조수를 따라 반드시 돌아오게 되리라. 죽음이 나를 가로막을지라도, 보다 거대한 침묵이 나를 포용할지라도 나는 또다시 그대들의 이해를 구하리라. 그러나 결코 헛되이 구하지는 않으리라. 내 말에 일말이라도 진리가 담겨져 있다면, 진리는 보다 명쾌한 목소리로, 보다 그대들의 생각에 가까운 말로 스스로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나 바람과 함께 간다. 그러나 나 허공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오늘 그대들의 욕망과 나의 사랑이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면, 오늘로써 다음날을 기약하기를... 인간의 욕망은 변하지만, 사랑은, 또 사랑이 충족시켜 줄 욕망은 변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인식하라. 보다 거대한 침묵으로부터 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들과 숲에 이슬을 남기며 새벽을 배회하는 안개도, 공중으로 솟아올라 구름을 만들어 비로 내리는 것을. 나 또한 그 안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으니. 고요한 밤 나는 그대들의 거리를 거닐었고, 내 영혼은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그대들의 심장의 고동은 내 가슴속에서 울렸고, 그대들의 숨결은 내 얼굴을 스쳤으며, 그리하여 나는 그대들 모두를 이해하였다. 그렇다. 나는 그대들의 모든 기쁨과 고통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대들 잠 속의 꿈은 바로 나의 꿈이었다. 또한 나는 때로, 마치 산속의 한 호수처럼 그대들 가운데 있었다. 나는 그대들 안의 산꼭대기의 모습을 비추었고, 비탈진 기슭고 심지어는 그대들을 스치는 생각과 욕망의 무리까지도 비추었다. 그러면 나의 침묵을 향하여 강물과도 같이 그대들의 웃음소리가 밀려왔고, 또 강물처럼 젊은이들의 욕망이 밀려왓다. 마침내 나의 심연에 이르렀을 때에도 시냇물과 강물은 결코 노래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웃음소리보다도 달콤하게, 욕망보다도 위대하게 나를 찾아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대들 속의 무한. 광활한 인간인 그이 속에서 그대들이란 다만 세포이며 힘줄에 지나지 않는 것. 또한 그의 노래 속에서 그대들의 노래란 다만 소리없는 고동에 지나지 않는 것. 광활한 그 인간으로 하여금 그대들 광활하고, 그를 봄으로써 나 그대들을 보았다. 또한 사랑하였다. 사랑이라고 어떻게 머나멀고 광활한, 하늘에도 없는 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환상, 어떤 소망, 어떤 추측 따위가 사랑을 보다 높이 날아오르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꽃으로 덮인 거대한 떡갈나무처럼 광활한 그 사람은 그대들 속에 있다. 그의 힘이 그대들을 대지에 묶고, 그의 향기가 그대들을 허공에 오르게 하며, 그리하여 그의 영원 속에서 그대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존재란 마치 사슬과도 같아, 그대들의 고리 중 가장 약한 고리만큼 허약하다는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의 진실은 반 정도일 뿐. 그렇다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고리 중에서 가장 튼튼한 고리만큼 튼튼하기도 한 것. 지극히 사소한 행동으로 그대들을 평가하려 하는 것은 덧없는 거품으로 대양의 힘을 재려 하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실패로써 그대들을 재판하려 하는 것은, 단지 쉽게 변한다고 계절을 원망하는 것과 같은 것. 그렇다. 그대들은 대양과도 같다. 비록 크나큰 배가 그대들의 기슭에서 조수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대들이 그대들의 조수를 재촉할 수는 없다. 또한 그대들은 계절과도 같다. 비록 그대들이 겨울이 간 뒤 봄이 오는 것을 부정할지라도, 봄은 그대들 속에 누워 편안하게 미소지으며, 화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한 말들이 그대들 서로서로 그는 우리를 찬미했다. 그는 우리의 선한 면만을 보았다라고 말해도 좋음을 얘기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말라. 나는 다만 그대들이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깨닫고 있는 것을 말로 한 것 뿐이다. 그런데 말의 인식이란 무엇인가. 단지 말없는 인식의 그림자가 아니라면. 그대들의 생각과 나의 말이란 굳게 봉인된 추억으로부터 물결치는 파도. 거기에 우리들의 과거가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물론 대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던 태고의 낮과 혼돈으로 어지럽던 대지의 밤이 기록되어 있다. 현명한 이들은 그대들에게 지혜를 주고자 온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이 지혜를 뺏고자 왔다. 그런데 내가 지혜보다 더 위대한 것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그대들 속에서 언제나 불타고 있는 영혼. 그러나 그대들은 퍼져가는 불꽃에도 관심없고 시들어가는 날만을 슬퍼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육체 속에서만 살고자 하는 삶에 있어 무덤은 두려운 것. 그러나 여기에 무덤은 없다. 이 산과 이 들, 숲은 요람. 그대들의 조상을 묻은 들을 지나칠적마다 잘 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보게 되리라. 거기에서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의 아이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춤추고 있는 것을. 실로 그대들은 가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즐거워 한다. 다른 이들이 그대들에게 왔으나, 그대들의 신앙을 이룬 귀중한 약속을 위해 그대들은 다만 부귀와 영화와 권력만을 주었다. 내가 한 약속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대들은 내게 더욱 관대하였다. 그대들은 내게 보다 깊은, 삶을 향한 목마름을 주었다. 실로 인간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으니, 자기의 모든 목적을 타오르는 입술로, 모든 삶을 샘물로 변하게 하는 것. 결국 이 속에만이 나의 영광과 보상이 들어 있는 것. 내가 샘물을 마시는 동안, 샘물 또한 나를 마심을. 그대들 가운데 어떤 이는 나를 거만하고, 그래서 선물받는 것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삯을 받기엔 자존심이 너무 강하나 선물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 그대들이 나를 그대들의 식탁에 앉히고자 할 때, 내 비록 들판에서 딸기를 따먹었을지라도. 또 그대들이 내게 잠자리를 주고자 할 때, 내 비록 사원의 문간에서 잠들었을지라도. 내가 늘 달콤한 양식을 먹고, 꿈꾸며 잠들 수 있었음은 나의 매일을 사랑하는 그대들의 염려 덕분이 아니었던가. 이로 인해 나 그대들을 무엇보다 축복하노라 그대들은 끝없이 베풀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베풀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실로 거울 속으로 자신만을 응시하며 행하는 친절이란 무익한 것으로 변하며, 또 스스로를 찬양하기 위한 선행은 재앙이 될 뿐이다. 또 그대들 가운데 어떤 이는 말한다. 내가 너무 멀리 있으며, 자기만의 고독에 취해 있다고. 그리고 그대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숲의 나무들과는 다정하게 속삭여도 사람들과는 그렇게 하지 않아. 그는 산의 정상에 올라 앉아 그저 우리의 도시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라구> 하긴 내가 산을 오르고 먼 곳을 돌아다녔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높이, 그렇게 멀리서가 아니었더라면 내 어찌 그대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멀리 있지 않고서는 진실로 가까이 있을 수 없는 법. 또 그대들 가운데 어떤 이는 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낯선 분이시여, 닿을 수 없는 곳이나 사랑하는 분이시여, 그대는 왜 독수리들이나 집을 짓는 산꼭대기에서 사십니까? 그대는 어찌하여 불가능을 추구하십니까? 그대는 어떤 폭풍우를 그물로 낚으려 하십니까? 그대는 어떤 덧없는 새를 공중에서 잡으려 하십니까? 오셔서 우리들과 하나가 되십시오. 내려오셔서 우리의 빵으로 그대의 배고픔을 달래고, 포도주로 그대의 갈증을 푸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고독이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알았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대들의 기쁨과 그대들의 고통의 비밀을 찾고 있었을 뿐임을. 또한 허공을 떠도는 그대들의 보다 넓은 자아를 좇아 내 오직 헤맸을 뿐임을. 그러나 사냥꾼이란 사냥을 하는 동시에 사냥을 당하는 자. 내가 쏜 화살들은 기어이 내 가슴을 찾아왔구나. 또 나는 자는 동시에 기는 자. 내 날개가 태양 소겡 펼쳐졌을 때, 땅 위에 비친 그림자는 거북이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동시에 날 의심하는 자. 때때로 나는 나의 상처에 스스로 손가락을 찔러대야만 했다. 그대들에게서 보다 큰 믿음을, 그대들의 보다 큰 지혜를 얻기 위하여. 그리하여 내 이 믿음과 깨달음으로 말하는 것은, 육체가 그대들을 가두는 것은 아니며, 집 또는 들판이 그대들을 가두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산 위에 살며 바람따라 헤매는 그대들. 따뜻함을 찾아 햇빛 속을 기어다니거나, 안전한 곳을 찾아 어둠 속에 구멍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유로운 것, 그것은 대지를 품에 안고 창공을 날으는 하나의 영혼. 비록 이 말들이 모호하다 하더라도 결코 명백하게 말하려고 애쓰지 말라.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시초. 그러므로 그대들이 언제나 나를 시초로서 기억해 주기를 바라노라. 삶, 또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란 결정으로부터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어지는 것. 그러나 결정이란 것도 다만 사라지는 안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어느 누가 알겠는가? 그대들이 나를 기억할 때면 다음 날도 함께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대들 속의 가장 연약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튼튼하고 강인한 것임을. 그대들의 뼈대를 꼿꼿하게 세우고 튼튼하히 하는 건 그대들의 숨결이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도시를 건립하고, 거기에 일체를 이룸은 일찌기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꿈이 아닌가? 그대들이 만약 그 숨결의 흐름만 볼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소리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하기사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 그대들의 눈을 가진 베일은 그것을 짰던 손이 벗겨 주리라. 또한 그대들의 두 귀에 가득한 진흙도 처음에 반죽해 넣었던 손이 파내 주리라. 그럼 그대들은 보게 될 것이며, 듣게 되리라. 그럼에도 그대들은 자기 자신이 눈멀었음을 한탄하지도 않으며, 귀먹었음을 후회하지도 않으리라. 그날이 오면, 그대들은 만물에 깃들인 비밀의 목적들을 깨닫게 될 것이므로. 그리하여 그대들은 빛을 축복하듯 어둠도 축복하게 되리라. 그가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배의 선장이 키 옆에 서서 가득 부푼 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말했다. 선장이여, 그대는 참으로 끈기가 있구나. 이렇게 바람이 부니 돛은 잠들지 못할 것이고, 키도 명령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선장은 묵묵히, 내가 어서 말을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있구나. 또한 여기, 보다 위대한 바다의 합창을 들어온 나의 선원들이여, 그들 또한 끈기 있게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더는 기다리지 못하리라. 물론 나도 준비 되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렀고, 위대한 어머니는 다시 한번 자기 아들을 가슴에 안는다. 잘 있으시오,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날은 끝났다. 마치 내일을 향해 눈 감는 수련처럼 우리들 위로 눈 감는다. 우리가 여기서 얻은 것을 언제까지나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되리. 만일 그로써 충분치 못하다면, 우린 다시 와서 함께 시혜자에게 손 내밀어야 하리라. 나 언젠가는 그대들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니, 잊지 말기를. 잠깐, 그러면 나의 갈망은 먼지와 거품을 모두어 다른 몸을 이루게 되리라. 바람 위에 잠깐 동안의 휴식이 오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안녕 그대들이여. 안녕 내 함께 보낸 청춘이여. 우리가 꿈속에서 만났던 것도 어젯일. 내가 외로울 때 그대들은 날 위해 노래 불러주었고 그대들이 갈망하여 난 하늘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우리의 잠은 달아나고 꿈도 사라져 갔다. 새벽도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한낮이 닥쳐와 우리의 희미하던 잠은 완전히 깨어져 버렸으니, 이제 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우리가 기억의 새벽빛 속에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또 하나의 탑을 세우게 되리라.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선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들은 곧 닻을 걷어 올리고 정박지로부터 빠져 나와 동쪽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로부터 울음소리가, 마치 한 사람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듯 일제히 터져나왔다. 그리고 울음소리는 황혼 사이로 떠올라, 마치 거대한 나팔소리처럼 바다 위로 울려퍼졌다. 그러나 알미트라 만은 말이 없었다. 배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면서. 이윽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돌아갈 때까지도, 그녀는 홀로 방파제 위에 서 있었다. 그가 한 말들을 가슴 속 깊이 되새기면서. 바람 위에 잠깐 동안의 휴식이 오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칼릴 지브란 칼릴 지브란은 1883년 레바논의 베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두 번 결혼했는데, 지브란은 그녀의 두번째 남편으로부터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경력을 보면 재미있는데, 그녀는 첫 남편과 결혼하자 브라질로 이주했고 남편은 거기서 병을 얻어서 죽었다. 그녀는 첫 아들 피터를 데리고 외할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목축업자와 결혼하게 되어, 지브란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사업의 규모는 꽤 컸고 그래서 집은 부유했다. 그가 열 두살이 되던 해 이복 형 피터가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는 바람에 전 가족이 보스턴으로 이주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사실상 레바논에 남아 있었다. 보스턴에서 학교에 다닌 그는 불과 2년 후 레바논으로 고집을 부려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는 베이루트의 유명한 학교, 마드라셋 알 히크마에 들어갔으며 5년 후 그곳을 졸업하자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그 길로 유럽으로 갔다. 그 때가 1902년으로, 그 후 그는 다시 조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를 여행하였다. 1908년엔 파리의 아카데미 오브 화인 아트에 들어가서 미술공부를 했으며, 이 시기에 유명한 조각가 로댕을 만났고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는데, 로댕은 지브란의 위대한 미래를 예언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3년간 미술을 공부한 뒤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브란은 1931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글을 썼는데, 예언자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와 영어로 쓴 최초의 작품이다. 그의 예언자는 40년 동안 세게적인 베스트셀러로 현대의 성서라는 이미지를 굳혔으며, 20개국어 이상으로 번역되었다. 지브란은 문학의 표현 수단으로써 영어와 아랍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예언자는 그의 영어 작품 중의 최고의 작품으로 흔히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의 최초의 소설 더 브로큰 윙즈는 아랍어로 씌어졌고, 따라서 이 두 작품은 지브란의, 각기 다른 언어로 씌어진 2대 걸작으로 뽑혀지기도 한다. 지브란의 이러한 특수한 상황은, 그래서 두 세계로 나뉘어진 그의 찬미자들로 하여금, 아랍어로 씌어진 것은 아랍어로 번역하게 했다.  명상록 사색하는 생할인으로서, 영원히 낡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아우렐리우스의 고매한 양심의 목소리 제1장 배움에 대하여 나는 어머니에게서 신을 경외함과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그리고 사악한 행동을 삼가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생각조차도 멀리하는 절제와, 나아가서는 부자들의 일상적인 생할과는 전혀 다른 검소한 생활 태도를 배웠다. 나는 아폴로니우스에게서 요행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이성 이외에는 어떠한 것에 단 한순간이라도 의지하지 말며, 설령 어떠한 극도의 고통을 당하거나 자식을 잃거나 오랜 병고에 시달린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한결같이 태연한 태도로 대해야 함을 배웠다. 또한 나는 그를 통해서, 인간이 때에 따라서는 격렬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자들에게는 성급함이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아낌없이 가르쳐야 함을 배웠다. 또한 철학 교육의 실제 경험이나 재능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 중에서 가장 보잘것 없는 재능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보게 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친구가 호의를 보일 때에는 비굴하지 않게, 그렇다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잘 받아들이는 방법도 그에게서 배웠다. 섹스투스에게서 친절한 마음과 어버이다운 인자한 사랑으로써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의 본보기를 보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생활의 참된 의미와, 친구의 관심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우정과, 무식한 사람들이나 무분별하게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참아주는 태도를 배웠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서 그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어떠한 아첨보다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와 사귀는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또한 인생의 요령이 있으면서도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는 분노나 그밖의 격정을 전혀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면서, 모든 감각을 초월한 평온한 마음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는 칭찬의 말을 할 때에도 결코 떠들썩하게 과시하지 않았으며, 성원한 학식을 몸에 지녔음에도 결코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남을 헐뜯어서는 안되며, 남이 문법에 어긋난 말을 구사하거나 틀리게 발음하거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라도 그를 심하게 핀잔한다거나 꾸짖지 말고, 그 말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이나 확인 또는 암시로써 그 문제 자체를 함께 논의하며, 또는 적절한 암시로써 올바른 표현을 재치있게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렉산더에게서 배웠다. 플라톤 학파 알렉산더에게서 바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거나, 또는 그런 말을 연설이나 서신에 자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여, 이를 끊임없이 사과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배웠다. 카룰루스에게서, 친구가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을 때에는 비록 그 비난이 터무니 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그 친구의 우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한편 스승에 대해서는 도미티우스와 아테네도투스와의 사이가 그러했듯이 언제나 진심으로 칭송해야 할 것과, 자기 자녀에 대해 순수한 애정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형님 세베루스에게서 나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또한 나는 그에게서 철학에 대한 확고하고 일관된 마음가짐을 배웠다. 그리고 타인에게 기쁜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고, 늘 희망을 품고 낙천적으로 살며, 친구의 사랑을 신뢰할 줄 알며, 나아가서는 타인을 비난하는 사람에 대하여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음으로써 사람드링 자기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막시무스에게서 극기의 정신과, 확고부동한 목표를 가짐으로써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병이 들거나 어떤 불우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언제나 명랑한 마음을 잃지 않고, 상냥함이나 위엄이나 어떠한 도덕적 성격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면서 자신 앞에 닥친 일을 불평없이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믿는 바에 따라 말하고, 옳다고 판단되는 것은 행동으로 옮겼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러한 것을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고 믿었다. 그는 결코 당황하거나 경탄하거나 서두르거나 일을 지지부진하게 뒤로 미루거나 낙담하는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억지로 명랑하게 하지도 않았고 격정에 사로잡히거나 의심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남에게 관대하게 대했고 모든 거짓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 아니라 그의 타고난 강직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구도 그에게서 업신여김을 받았다거나, 자신을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제때에 유머를 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온화함과, 신중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결단코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수행하는 단호한 인품을 배웠다. 그리고 세속적인 명예에 허영심을 갖지 말고 근면과 강인한 인내를 가져야 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포상은 공적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과, 긴장해야 할 때와 긴장을 풀 때를 판단하는 탁월한 기지를 배웠다. 그는 국사를 떠난 개인적인 사교도 중요시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식사를 하거나 외출할 때에도 함께 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친구들이 다른 용무 때문에 그를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변함없이 그들을 대했다. 또한 그는 국사를 심의할 때에도 그의 앞에 제세되는 문제를 놓고 철저히, 그리고 끈기 있게 검토했다. 그의 우정은 변덕스럽다서나 헤프게 애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친구를 귀하게 여기고 금방 싫증을 내는 일이 없고, 늘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쾌활했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내다보고 사소한 일에도 미리 대비를 해 두었으므로 어떤 경우가 닥쳐 와도 감당해 냈다. 또한 그는 나라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국가재정을 아꼈으며, 그로 인해서 야기되는 비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신에 대해 미신적인 생각을 품지 않았고, 동료 시민 앞에서 비굴하게 굴어 인기를 구하거나 대중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절도 있고 건실하게 추구해 나갔다. 그의 운명이 물질적 풍요를 제공했지만 그것을 자만하거나 가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있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이용했고, 없을 때에는 그것을 갈구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궤변가라거나 경박한 사람이라거나 현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아첨에 무관심하고 자기자신과 타인을 모두 지배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철학자들을 존경하고 사이비 철학자에 대하여 비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미혹되지도 않았다. 사교에 있어서는 늘 명랑하고 다정했으며 거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것이 생에의 지나친 집착이나 외모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고 돌봤기 때문에, 좀처럼 치료를 받거나 약을 먹는 예가 없었다. 그는 변론이나 법률, 윤리 등의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시기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들 개인의 재능에 알맞는 명성을 얻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국가의 제도나 법률에 따라 행동했는데, 이것을 국민이 알아줬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다. 그는 변화와 불안정을 싫어해서, 항상 같은 지위에서 언제나 변함없는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두통이 심한 발작을 일으킬 경우에도 곧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고 일상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그는 비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설령 비밀이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었으며, 그것도 거의가 국사에 관계되는 공적인 것뿐이었다. 그는 공식적인 행사나 공공건물의 건축, 구호금품의 분배 등의 행사에 매우 신중하고 절도를 보였다. 이 경우에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만 주력할 뿐, 그런 일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욕하는 일이 없었고, 건축물을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먹는 음식은 까다롭지 않았으며, 옷감이나 색깔이나 재단 등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노예들의 미모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언제나 변함없었다. 그는 무례함이나 난폭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항상 여유를 보이면서 모든 일에 침착하고 요령있게,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분석하며 평가하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심약하기 때문에 절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향락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절제할 때는 절제하고 즐길 때는 즐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력을 삼가기도 하고 순수히 향락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완전하고 불굴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훌륭한 할아버지, 훌륭한 부모, 훌륭한 여동생, 훌륭한 스승, 훌륭한 친구, 훌륭한 친척 등 훌륭한 벗들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신 신들께 나는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기회만 있었다면 과오를 저질러서 위의 분들의 노여움을 살 수 있었는데도, 신의 은혜로 누구와도 반목하지 않았다는 것에 신께 감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신들의 은총에 의하여 시험에 맞부닥친 일은 없었다. 또한 내가 할아버지의 소실 밑에서 오랫동안 양육되지 않도록 해 주신 것을, 또한 내 청춘의 꽃을 오래도록 간직하여 나의 순진성이 보존되고 성인으로 향한 완만한 발전에 만족햇었다는 것에 대하여도 신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모든 자존심을 없애 주신 황제이신 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으로 호위병이라든가 화려한 옷, 횃불, 동상 등 외형적인 화려함 없이 살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과 더불어 평민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이로 인하여 용기와 품위를 잃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신들께 감사한다. 또 착하고 바른 성품으로 나를 일께워 주고 존경과 애정으로 나를 즐겁게 해 준 형님을 내세 주신 신께 감사하고, 우둔하거나 불구 자식을 내게 주시지 않은 신들께 감사한다. 또한 내가 수사학, 시 및 그밖의 다른 학문에 조예가 깊지 않은 것을 신들께 감사한다. 만일 그것들에 대한 연구가 쉽다고 느꼈더라면 나의 시간은 온통 그런 것에 빼앗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스승들을, 서둘러서 그들이 원하고 그들의 능력에 맞는 지위에 앉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젊기 때문에 얼마 후에는 내가 그렇게 해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또한 내가 아폴로니우스, 루스티쿠스, 막시무스와 사귈 수 있게 해주신 신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어떤 삶인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고 그것을 자주 실감하게 된 것을 신들께 감사한다. 사실 신들과 신들의 은총, 도움, 영감에 의지하고 있는 한, 내 비록 불완전하고 신들의 직접적인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자연에 따르는 생할에 아무 것도 방해할 수 없고 나의 육체는 이미 이러한 생활을 오랫동안 감당하 오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신들께 감사하고 있다. 또한 내가 베네딕타나 테오도투스와 같은 여자들에게 말려 들지 않고, 뜨거운 연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지만 곧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일에 대하여 신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루스티쿠스와 자주 의견의 충돌이 있었지만 후회할 정도로 반목하지 않은 것을 신들께 감사한다. 나의 어머니는 젊어서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 전 몇 해 동안을 나와 지낼 수 있었던 것을 나는 감사한다. 그리고 가난하고 고난에 처한 이들을 도와주려 할 때, 언제나 그들을 도와줄 방법을 생각했고, 나 자신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곤궁에 처한 적이 없었던 것을 신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온순하고 다정하며 꾸밈이 없는 아내를 가진 것을, 나의 자식들을 위해서 훌륭한 스승들이 있었던 것을 신들께 감사한다. 또 꿈을 통하여 각혈과 현기증에 대한 치료법을 배운 것을, 그리고 내가 철학에 간심이 있을 때 소피스트들에게 현혹되지 않은 것을 신들께 감사한다. 또 삼단논법을 분석하거나 천체 현상을 관측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아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해 준 것에 대하여 신들께 감사한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신들과 운명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라누아 강 기슭에 자리잡은 구아디족의 마을에서- 제2장 인생에 대하여 아침에 자리에서 눈을 뜨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오늘도 나는 호기심에 가득찬 사람이나 배은망덕한 사람, 오만불손한 사람, 협잡꾼이나 시기심이 많은 사람, 이기주의자 등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사람들은 선과 악을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질이 고귀하다는 것, 악의 본질이 천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악을 행하는 자들의 본성은 나와 같은 근원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이성과 신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들로부터 어떤 해도 입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은 누구도 나로 하여금 추악한 것을 추종하게 할 수 없고, 또한 나의 이웃에게 화를 낸다거나 미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마치 두 개의 손이나 발처럼, 또는 아래위의 눈꺼풀이나 윗니 아랫니처럼 서로 협력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위반하는 일이다. 그리고 남을 괴롭히거나 질시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바로 상대방을 배반하는 행위인 것이다. 나는 단지 한 덩이의 살점과 호흡, 그리고 나를 지배하는 이성에 불과하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책을 버린다거나 그대 자신을 혼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지금 죽음의 문전에 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육체를 생각지 말라. 그것은 피와 뼈에 지나지 않고, 신경과 혈관과 동맥으로 짜여진 그물 같은 세포조직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 가닥의 공기일 뿐이며, 더우기 항상 일정하지도 않다. 매순간 토해내고 들이마시는 것이다. 자신을 지배하는 이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라. 그대는 이제 늙었다. 그대는 더이상 자신을 노예로 만들지 말라. 더이상 비사회적 일에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하지 말고, 현재 그대의 운명에 불만을 품지 말고, 미래에 대해 비탄하지 말라. 그대에게 닥쳐오는 외적인 세상사들이 그대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가? 그렇다면 새롭고 선한 일을 배울 조용한 시간을 스스로 마련하고, 공연히 우왕좌왕 헤매지 말라. 그러나 완전히 다른 길로 끌려가서는 안된다. 많은 일들을 하느라고 인생에 지치고, 아직도 모든 행동이나 모든 사고에 목적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는지를 몰라서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자기의 정신활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다. 만물을 피상적으로 관찰하고 어떤 시인의 말처럼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사물을 검사하거나 남의 마음속이나 들여다보려고 하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이성을 섬기고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이성을 섬기고 존중한다는 것은, 정욕과 목적없는 방황과 신과 인간이 행하는 일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께서 하는 일은 그 탁월성과 위대함 때문에 우리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며,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 형제애나 동포심이라는 이유에서 우리의 호의를 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때로는 선과 악의 비관에 대한 인간의 무지라는 이유에서 일종의 동정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결함은 선악을 가려내는 능력을 빼앗는 경우보다 도리어 더욱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다음과 같은 경우 스스로를 괴롭힌다. 첫째, 영혼 자체가 일종의 종기일 때, 말하자면 우주의 부스럼이 되는 경우이다. 즉 만물의 속성은 자연의 어느 한 부분에 속해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사건에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을 배격하고, 화난 사람의 영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악의적인 의도를 품고 그에게 반목하는 경우이다. 셋째로, 쾌락이나 고통으로 인하여 절제심을 잃는 경우이며, 넷째는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진지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영혼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목적을 두고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떤 일인가에 대해 아무런 분별도 없이 행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이성을 가진 동물의 목적은 가장 존종하여야 할 고도와 정체의 이성가 원리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그가 점유하는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물질은 유동하는 것이며, 감각은 희미하게 둔해지고 육체는 부패할 것이며, 영혼은 산란한 회오리바람과 같다. 운명은 헤아릴 길 없이 암담하고, 명성은 불확실하다. 그리하여 이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육체에 속하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고 영혼에 속하는 것은 꿈이요, 연기이며, 인생은 전쟁터이며 나그네의 일시적 행로이며, 후세에 남는 명성은 망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이끌어준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바로 철학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신을 모독하거나 해치지 않고 모든 쾌락과 고통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하며, 목적 없이는 어느 일에도 손대지 않으며, 위선과 허위를 멀리하고 남이 행동하기를 기대하거나 행동하지 않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모든 운명이나 사건을 나 자신이 나온 그 근원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받아들이고, 최종적으로 죽음은 모든 생물을 만들어내는 원소의 그 구성분자로 환원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릴 때 비로소 철학이 가능한 것이다. 개개의 사물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 원소 자체에서 조금도 해악한 것이 아니라면, 과연 인간이 모든 원소의 변화와 분해를 두려워한 까닭이 있을까? 제3장 운명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나날이 소멸되어서는 마침내 줄어들고 있다는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남보다 오래 살 경우에, 과연 사물을 파악하는 충분한 이해력도 그만큼 지속되고 신과 인간에 대한 관조의 힘도 지닐 수 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노령으로 접어든다 해도 호흡, 소화능력, 상상력이나 식욕 같은 것들은 쇠퇴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거나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모든 현상을 명백히 가려내는 힘, 지금 이순간이 인생을 하직할 때냐 아니냐 하는 것을 판별하는 힘, 그 밖에 훈련된 이성이나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힘 등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나 주의력이 먼저 소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자연에 따라 창조되어진 어떠한 사물도 우리에게 큰 즐거움과 매력을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빵을 구울 때 빵의 한부분이 부풀어서 군데군데 갈라지는 때가 있다. 이렇게 갈라진 부분은 빵굽는 사람의 의도와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그 나름으로 하나의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어, 이것이 오히려 식욕을 돋구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무화과 열매는 잘 익으면 갈라져서 벌어지고, 더 자란 올리브나무도 썩기 바로 직전에 그 열매는 각별한 아름다움을 띠게 된다. 고개 숙인 벼이삭, 사자의 주름잡힌 눈매, 멧돼지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거품, 그리고 그 밖의 여러가지 것들-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따로 떼어서 살펴본다면 아름답다고 일컬을 것까지는 없지만-은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에 부수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을 돋보이게 하고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이 우주안에 창조된 사물에 대하여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력을 지닌다면, 이러한 사물들에 의한 즐거움을 못 누리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호랑이나 사자의 으르렁대는 입을 볼 때에도 화가나 조각가가 그 실물을 모방하여 그려놓은 작품을 보듯 찬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늙은 노파나 남자에게서도 일종의 원숙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어린아이들의 귀여운 매력도 순결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든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자연과 그 작품에 진실로 애정을 갖는 사람에게만 기쁨을 주고 있다. 공익을 위한 일이 아닌 한, 공연히 남의 일에 관심을 가져서 남은 생애를 허비해선 안된다. 이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우리를 지배하는 힘인 이성을 혼란케 하는 온갖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 우리는 다른 일을 할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사념의 방향이 부질없고 무익한 환상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리하여 갑자기 당신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그대의 대답을 들으면,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단순하고 선량하며 그대가 쾌락이나 감각적 행락에 무관심하고, 적대감이나 질투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당신이 마음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서라도 결코 낯을 붉힐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해야 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은 사제나 신의 종복과 같아서, 자기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신성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쾌락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어떠한 고통으로도 해를 입지 않으며, 어떠한 모욕도 개의치 않고, 나쁜 일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가장 위대한 투쟁을 하고 있는 투사로서, 어떠한 정념에도 정복당하지 아니하고 마음 속 깊숙히 정의감으로 충만해 있고 온갖 심혈을 기울여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 자기에게 맡겨지는 일을 모두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만을 염두에 둔다. 허다하게 많은 일 중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을 숙고하여, 자기의 임무를 훌륭히 마칠 수 있도록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 운명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이성적 피조물의 동포애를 잊지 않으며, 따라서 만인을 돌보는 일은 인간으로서 당연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또 그가 따라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여론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자연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 밤이나 낮에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어떠한 사람들과 어울려 나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눈여겨 잘 새겨두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아도 초라한 사람들이어서, 이들에 대한 칭찬이나 호의적인 평가는 그들에게 하등의 가치도 없다. 오락삼아 일을 하여서는 안된다. 일은 언제나 스스로 해야 하고, 공공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며,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당신의 감정 속에 가식적이고 지나친 세련미를 가미하지 말 것이며, 수다를 떨거나 쓸데 없는 일로 소란을 피워서도 안된다. 또한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신성을 인생의 수호신으로 삼아라. 그리하여 남자답게, 성숙한 나이가 되면 정치문제에 관여하고, 로마인으로서 또는 지배자로서 자기의 직분을 수행할 때자신의 생명을 던질 각오를 가진 사람답게 어떠한 맹세나 증인도 필요없을 만큼 담담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항상 쾌활한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남의 도움이나 남이 주는 안식을 바라지 말라. 남에게 의지하여 서려고 해서도 안된다. 사나이답게 스스로의 힘으로 똑바로 서야 한다. 신용의 타락, 자존심의 실추, 증오, 의혹, 저주, 불성실 등 휘장이나 커튼으로 가려야 할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얻어지는 이득을 중요시하지 말아라.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이성과 신령을 따르고 신령의 탁월함을 예찬하는 사람들치고 비극적 역할을 맡는 일은 없다. 그들은 불평하지 않으며, 고독하지도 않고, 많은 교제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죽음을 추구하거나, 또 기피하는 일이 없이 초연하게 살아간다. 자기의 영혼을 육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기간이 길든지 짧든지간에 그러한 일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당장 이 세상을 떠나야 하더라도 품위와 절도를 지키며 예삿일을 치르는 것처럼 담담하게 떠날 것이다. 그들은 평생을 통해서 지적 동물임과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 걸어가야 할 행로에서 이탈하여 그의 정신이 다른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오로지 깨끗한 생활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부패나 부정, 그밖의 상처 같은 것은 전혀 발견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언제 죽음이 가까이 올지라도, 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막이 내리기도 전에 무대를 떠나는 배우처럼 불완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는 노예근성이나 허세도 없고 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없는 반면 너무 멀리하는 마음도 없다. 그리고 비난 받을 만한 일이나 피신처를 찾을 일도 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몇가지 진리만을 지키도록 하라. 인간은 누구나 찰나에 불과한 현재를 살고 있을 뿐이며, 그밖의 인생은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속하거나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불학실한 것임을 명심하라. 이처럼 인간의 삶의 시간은 찰나적이고 머무르는 지구는 좁다. 그리고 죽은 후의 명성도 잠시 동안만 이어질 뿐니고, 이러한 명성조차도 결국은 곧 사라질 것이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터에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자의 일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육체, 영혼, 이성-육체에는 갖가지 감각이, 영혼에는 욕구가, 이성에는 원칙이 잠재해 있다. 감각을 통하여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물에게서도 볼 수 있다. 감각을 통하여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물에게서도 볼 수 있다. 야수라든지 동성연애자라든지, 팔라리스, 또는 네로 같은 사람은 모두 충동의 지시에 순종한다. 신을 믿지 않고 조국을 등지며 문을 걸어잠그고 남몰래 불결한 짓을 하는 자들도 적당한 일을 하는 지침으로써 이성을 갖고 있다. 내가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 만인에게 있다 할지라도 선인의 특별한 특성, 즉 어떠한 일이든 운명의 신이 그를 위해 짜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더럽히거나 무수한 상념으로 산란하게 만들지 않으며, 자기 마음 속의 신성을 신으로 여겨 이에 따르고 진리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은 일체 하지 않음으로써 신성을 조용히 간직하는 특성만이 남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성실하고 겸손하며 선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해도 결코 화를 내지 않으며, 오히려 순결하고 고요하게 죽음에 대비하고 조금의 무리도 없이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면서 삶의 목표로부터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제4장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전원이나 해변이나 산속에 있는 집을 은신처로 삼기를 원한다. 그대도 이러한 것을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고 그대 자신 속으로 은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도 자기 자신의 영혼 속보다 더 평화롭고 온갖 근심 걱정으로부터 풀려나는 한적한 은신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것에 의지하기만 하면, 곧 완전한 안정을 가질 수 있는 사상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마음의 안정이 바로 정연히 정리된 정신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 마음속의 은신처에서 조용히 휴식하며 자신을 쇄신하라. 그리고 그대의 생의 원칙은 간결하고 근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곧 그대의 영혼은 맑아지고 그대가 주목하는 것들에 대한 불만이 씻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불만은 무엇인가? 인간의 악에 대한 불만인가? 이성이 있는 모든 동물들은 서로를 돕기 위해 존재하며, 서로 인내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과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중에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간에 적의나 의심, 원한과 갈등 때문에 무덤 속에 들어가고 재로 변했는지를 기억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로부터 그대가 할당받은 일을 그대는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자만이 있어서 사물의 우연한 집합만이 있을 뿐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상기해 보라. 그리고 세계는 일종의 정치적으로 묶여진 결합체임을 증명하는 이론을 상기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이 그대를 속박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신이 초연히 분리되어 그 자신의 힘을 인식하기만 하면 호흡이 순조롭든 격렬하든 간에 정신은 호흡과 섞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고통과 쾌락에 대하여 지금까지 듣고 긍정해온 모든 것을 상기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부질 없는 명예욕이 그대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대는 모든 일이 얼마나 빨리 잊혀지는가를 생각하고,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로 뻗어나간 시간 속에 영원이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과, 갈채의 허무함과 우리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얼마나 공정하지 못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얼마나 좁은가를 생각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찾을 것이다. 지구 전체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며, 그 속에 살고 있는 그대의 주거지는 작은 구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또한 그대를 찬양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리하여 결국은 그대 자신의 작은 영지로 물러갈 것을 잊지 말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혼란시키지 말며 긴장하지 말라. 또한 자유로워야 하며,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죽어야 될 숙명을 짊어진 한 피조물로서 인생을 관조하라. 그대 주위에서 그대의 그대의 관심을 끄는 것에 대하여는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하라. 첫째, 사물은 밖에 있고 고정된 것이므로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마음의 동요는 오직 마음속의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 둘째로, 눈앞에 보이는 만물은 순식간에 변화하여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러한 우주의 변화를 이미 얼마나 많이 목격햇는지를 항상 명심하라. 우주는 변화이며, 인생은 관념일 뿐이다. 죽음의 본질은 출생과 같은 것이며, 자연의 신비이다. 오직 동일한 원소의 결합과 동일한 원소의 분해가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것을 부끄럽게 여길 일이 못된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 인체의 구조의 원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제 분수에 맞는 적당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필연적인 일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무화과 나무에서 수액이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지 간에 머지않아 죽는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라. 그리고 그대의 이름조차 잊혀지게 될 것이다. 사람을 본래의 상태보다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생애를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이며, 밖에서든 마음속에서든 그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당성을 띠고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가 관심 깊게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만 사물의 인과관계적인 지속성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게 할당할 가치를 분배하는 신의 섭리로부터 나오는 것 같은 공정하고 정당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선하다는 것과 관련하여 누구든지 그것이 선한 일임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어떤 행동을 하든 이 점을 명시하라. 그대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나, 그대에게 해를 끼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말고, 진리에 비추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그대는 지금까지 한 부분으로서 전체 속에 존재해 왔을 뿐이다. 이제 그대는 생성한 것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대는 생성의 본원 속으로 귀속될 것이다. 같은 제단 위에 떨어지는 유향의 낱알들일지라도, 먼저 떨어지는 것과 나중에 떨어지는 것이 있다. 그러나 결과로 본다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대가 마치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죽음은 언제나 그대 곁에 있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생명과 능력이 있는 동안, 선한 일을 행하라. 이웃사람이 무슨 말을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스스로 정의롭고 부끄럼 없는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간에 있어서나 수고에 있어 크게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웃 사람에게서 약점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기의 길을 걸어가라. 죽은 후의 명성에 연연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억해 줄 사람도 얼마 안 있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 못하는 사람이다. 또 이들의 뒤를 이을 사람도 곧 죽게 되고, 마침내는 이를 칭송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바보같은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다가 그 모든 기억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깊이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설사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또 기억 자체가 영원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죽은 자에게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아니, 단순히 죽은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말이다. 칭송이 확실한 효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과연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대가 지금 이성보다 다른 일에 집착하고 있는 나머지, 자기에게 주어진 자연의 선물을 거부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어떤 것이든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울 뿐이지 찬탄이 그 본질의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찬탄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좋아지는 것도 없고, 또 나빠지는 것도 없다. 나는 대중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일반적인 물건이나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법칙, 진리, 자비, 겸손, 예의 등도 그러하다. 이러한 것들 속에서 찬탄을 받았다고 해서 아름다와지고,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있는가? 에메랄드는 찬탄받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가? 또 황금이라든가, 상아, 하프, 관목 등이 그 미를 잃겠는가? 쓸데없이 헤매지 말고 어떤 행동을 하든 진리를 존중하고 어떤 인상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라.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면 많은 일에 파묻혀서는 안된다고 철학자는 말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라. 꼭 해야 할 일, 사회인으로서의 그대의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이성에 따라 실천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야만이 훌륭한 행동을 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안정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만 하는 데서 생기는 마음의 안정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만 물리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여가를 갖게 되고 불안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행위의 한 단계에 이를 때마다 이것은 불필요한 행동이 아닌가?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또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도 억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았는가? 그러면 이번에는 이런 일들을 보라.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오직 평온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져라. 누가 당신에게 해를 입히는가? 그는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결과밖에 안된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상관하지 말아라. 태초부터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주로부터 그대에게 부여된 것이고 그대의 운명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대의 인생은 짧다. 그대는 이성과 정의의 도움을 얻어 오늘을 활용해야만 한다. 긴장을 풀었을 때에도 진지하라. 기억하는 우리들이나 기억되는 것이나 모두가 순간의 일이다. 만물은 변화에 의하여 생성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우주의 본성은 지금 존재하는 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존재를 다시 만들어내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라.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장차 존재하게 될 사물의 씨앗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대지와 자궁에 뿌려지는 씨앗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통속적인 편견이라는 것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그대는 얼마 안있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아직 소박하지 않으며,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하지도 못했으며, 외부로부터 해를 입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아직도 모든 사람에게 자비롭지 못하며, 그대는 아직도 정의로운 행동을 위해서만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주 안에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우주에 대한 문외한이라 한다면, 우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 또한 문외한이다. 사회적인 이성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자는 도피자이다. 이해의 눈을 감은 사람은 소경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생활에 유용한 모든 것을 지닐 수 없는 사람은 거지이다. 이 세상에서 야기되는 일에 불만을 느끼고 우리들의 보편적인 본성인 이성으로부터 물러나 이성을 포기하는 사람은 우주에 생긴 종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본성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대 자신도 탄생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을 유일한 이성적 동물의 영혼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자는 국가로부터 떨어져나간 보잘것없는 하나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대의 육체라는 껍질의 변모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그대 속, 악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능력이 존재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능력이 그런 생각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하라. 그러면 만사가 순조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가장 가까운 것, 즉 덧없는 육체가 깊은 상처를 입거나 화상을 입고 곪아 썩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일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부분만은 냉정해야 한다. 또한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자연에 위배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자연에 부합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일어나는 일은 자연에 합당한 것도, 자연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이를테면, 갖가지 사건으로 형성되어진 강과 같고, 그 흐름은 격렬하다. 어떤 사물이든 눈에 띄었는가 하면 어느새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이것 또한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사물의 연속에 있어서, 뒤에 오는 것은 선행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은 단순히 필연적인 순서에 따라 분리된 사물을 그저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이 조화를 잘 이루며 결합되어 있듯이 앞으로 존재하게 될 사물들 역시 단순한 연속에 그치지 않고 서로 놀라운 연관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죽어서 무덤 속에 있지만 과거에는 환자들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많은 의사들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점성가들이 남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죽어갔는가를,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과 불멸에 대하여 끝없는 논쟁을 벌이다가 죽었는가를, 얼마나 많은 장군들이 수만명을 살해하고 죽고, 얼마나 많은 폭군들이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며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세하며 폭력을 휘두르다 죽어갔는가를, 또 얼마나 많은 도시들이 폐허로 변했는가를 생각해 보라. 또한 그대가 일찌기 알고 있던 사람들을 상기해 보라. 이 사람은 그 사람을 묻어주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묻힌다. 이것도 잠시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다. 인간사란 얼마나 덧없고 무상하며, 어제의 조그마한 점액이었던 것이 내일은 미이라나 재로 변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짧은 인생이나마 자연에 순응하며 살다가 만족 속에서 여생을 마쳐야 한다. 익은 올리브가 자연을 찬양하고 지금까지 키워준 나무에 감사해 하면서 떨어지는 것처럼. 끊임없이 파도에 부딪혀도 꿋꿋하게 버티며 노여운 물결을 다스릴 줄 아는 바위처럼 살아야 한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나는 얼마나 불행한가? 아니다. 도리어 이러한 일이 나에게 닥쳐왔다 하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으며, 현재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며 미래로 인해 고심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경우에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누구에게는 행복이 되는 것이, 누구에게는 오히려 불행이 되는가? 어떤 일이 자기의 본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불행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대는 본성의 의도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당신의 올바른 행동을 방해하는가? 즉,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현명하고, 사려깊고, 솔직하고, 겸손하고, 자유롭고, 그 밖의 인간본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가? 그대가 비탄에 빠질 경우, 이것은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을 꿋꿋하게 버티고 견디어내는 것이 행운이라는 원리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지름길로 달려라. 지름길은 자연스런 것이다. 지름길은 모든 것을 가장 건전한 이성에 따라 말하고 행하게 한다. 지름길은 고난과 투쟁 뿐 아니라 모든 농간과 속된 허세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킬 것이다. 제5장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아침에 일어나는 게 짜증스러울 때는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난다고. 내가 인간다운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불평, 불만을 터뜨려야 되겠는가? 아니면 나는 잠옷을 입고 이불 밑에 누워 뜨뜻하게 지내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단 말인가? 물론 이렇게 지내는 것이 보다 안락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떤 일이나 노력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쾌락이나 안락만을 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그대는 작은 식물과 작은 새, 개미, 거미, 꿀벌 등이 우주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며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분주히 일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그런데도 그대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려는가? 당신의 본성에 알맞은 일을 서둘지 않으려는가? 물론 휴식이 필요하다.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휴식에도 자연이 규정한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자연은 먹고 마시는 데에도 한계를 정해 놓았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 한계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일과는 달리, 그대의 행동에 있어서 그대는 그대의 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하려고 한다, 결국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의 본성과 그 의지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기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목욕도 식사도 하지 않고 지칠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일에 땀을 흘린다. 그런데 그대는 녹로공이 녹로 기술을, 무용가가 무용을, 수전노가 돈을, 허영심이 가득한 허세가가 하챦은 순간의 명예를 숭배하는 정도도 그대 자신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일에 열중할 때에는 침식을 잊고 기술을 완벽하게 향상시키려고 일에 몰두한다. 그대의 안목으로는 사회공익에 유용한 활동이 전심전력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가? 귀찮거나 부적당한 생각을 떨쳐버린 다음, 당장 평온을 누리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대에게 조화로운 것임을 생각하라. 남들의 비난이나 비판 때문에 주저하여 일을 뒤로 미루지 말고 어떤 말이나 행동이 옳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되거는, 그 일이 가치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이한 지도 원리를 갖고 특이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한 비판의 말에 딴 데로 눈길을 돌리지 말고 그대 자신의 본성과 보편적인 자연의 길을 따라 똑바로 걸어가라. 결국은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나는 쓰러져서 영원히 잠들 때까지 자연의 길을 여행하겠다. 그리하여 내가 날마다 들이마신 공기 속에 마지막 숨결을 토해낼 것이며, 아버지가 씨를, 어머니가 피를, 유모가 젖을 얻었던 대지에 깊이 묻히리라. 오랫동안 그곳에서 음식을 공급받고, 그 위를 짓밟고, 여러 목적을 위하여 남용하엿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해 준 대지 위의 일을 나를 영원히 잠들 때까지 체험하련다. 그대는, 사람들이 그대의 뛰어난 재능을 칭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는, 나는 그런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또다른 여러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그대의 능력 안에 있는 모든 장점, 즉 성실, 근엄, 인내력, 쾌락에 대한 염오, 운명에 만족하고 허욕을 물리치는 마음, 자비심, 솔직, 검소한 생활, 대범하고 자유로운 정신 등을 보여주라. 그대는 지금 당장에 보여줄 수 있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이러한 장점들은 원래 무력하다든가 부적당하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자진해서 저급한 차원에 머물려고 하는가? 태어날 떄부터 결함이 있었다고 불평을 하고, 인색하게 굴고, 아첨을 떨고, 남들의 비위나 맞추고, 허세를 부리며 마음속으로는 불안에 떨면서 평생을 살려는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것으로부터 해방되었어야 했다. 그대가 그대의 우매한 이해력을 뉘우치기만 했더라도 자신을 개선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노력을 멀리하고 오히려 우매함을 즐기고 있다. 지금 내 영혼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모든 행동을 할 때마다 이런 관점에서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하며, 이성이라고 불리는 나의 이 부분을 어떤 이렝 사용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지금 내 영혼은 어떤 빛깔이며 어떤 향기의 영혼인가? 어린아이의 영혼인가? 아니면 젊은이의 영혼, 연약한 여자, 폭군, 가축 혹은 야수의 영혼인가? 나는 형상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존재다. 이러한 구성분자는 비존재로부터 존재가 생겨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존재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은 변이 과정을 거쳐 우주의 어떤 부분으로 환원되고, 다시 우주의 다른 부분으로 변화하며, 이 운동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나는 존재하며, 나를 낳은 부모도 그러하다. 이 경우는 앞에 말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원히 계속된다. 가령 우주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순환된다 할지라도 앞의 주장을 가로막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개인에게 속하지 않는 사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이 야속한 것도 아니며, 인간의 본성을 완성시키는 수단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이 그러한 사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목적달성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 중 어느 것이 인간에게 속해 있다고 해서 이를 경멸하고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참된 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도 칭찬받을 자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나 비슷한 다른 것들을 제거해 버릴 수록, 또는 이것들 중의 어느 것이 없을 때 이 상실을 참고 견디어 내면 견디어 낼수록 그만큼 그 사람은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대의 정신은 그대의 사상과 보조를 같이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사상에 의해서 염색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사상으로 그대의 영혼을 염색하라. 예컨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에서는 올바른 생할이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궁전에서 살지 않으면 안될 때에도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개개의 사물은 어떤 목적을 행하여 나아가고 그 목적은 개개의 사물이 지향하는 곳에 있으며, 그 목적이 있는 곳에 개개의 사물의 우월성과 선이 있다고 생각하라. 그런데 이성이 있는 인간의 지고의 선은 사회이다. 우리가 사회를 위하여 태어났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약자는 강자를 위해 존재하고 강자는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생명이 있는 피조물은 생명이 없는 피조물보다 우월하고, 생명이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우월한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다. 사물 자체는 영혼과 접촉하지 못하는 법이다. 또한 사물 자체는 영혼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지 못하며, 영혼의 방향을 바꾸거나 영혼을 흔들어 움직이게 할 수도 없다. 그 나 영혼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자신의 방향을 바꾸고 움직이며, 자신이 인정하는 판단기준에 따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에게 합당하게 적응시킨다. 내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또 그들과의 생활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누가 나의 영역에 속한 행동을 방해한다면, 그는 태양이나 바람이나 야수와 마찬가지로 나와 전혀 무관한 존재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나의 행동을 방해할 수는 있어도, 조건과 환경에 따라서 행동하고 변화하는 능력을 가진 나의 감수성과 나의 뜻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정신이란 모든 활동의 장애물을 피하며 오히려 그의 주된 목표를 증진시키도록 전용시킬 수 있어서, 그 활동의 장애요소는 오히려 행동의 촉진제가 되며 그 진행로를 막는 장벽도 전진에 도움이 된다. 지금 존재하는 것과 새로이 생겨나고 있는 것, 이 모두가 얼마나 빨리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가라져 가는지, 그 속도를 가끔 생각해 보라. 물질은 영원히 흐르는 강과 같고 그것의 활동은 영원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며, 그것의 원인 또한 영원히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어서, 단 한가지의 사물도 정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과거와 미래라는 무한한 심연을 생각해 보라. 그 심연 속으로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물을 소유했다고 즐거워하고 그것을 잃었다고 괴로워하는 자,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그러한 사물들이 그대를 괴롭히는 시간은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의 실체를 생각해 보라. 당신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미소한가. 우주적 시간을 생각해 보고, 당신에게 할달된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 촌음에 불과한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 속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부분인가? 그대는 지금까지 신에게, 부모 형제에게, 자녀에게, 스승에게, 벗, 친척, 하인들에게 어떻게 다해 왔는가? 나는 결코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그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는 말은 듣기에 부끄럼 없는 행동을 해 왔는가를 생각해 보고 반성하라. 그대의 생이 끝나가고 그대의 봉사도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당신이 이제까지 본 아름다운 것들과, 당신이 체험한 쾌락과 고통을 상기해 보라. 남들이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얼마나 멸시해 왔고, 심술궂고 경박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친절을 베풀어 왔는가를 반성해 보라. 어찌하여 재주도 지식도 없는 영혼들이 슬기로운 영혼을 괴롭히는가? 어떤 영혼이 슬기로운가? 그것은 만유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는 영혼, 모든 존재에 편재하고 영원히 정해진 주기에 따라 우주를 다스리는 법을 아는 영혼이다. 그대는 머지 않아서, 재나 앙상한 해골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름만이 남을 것이다. 아니다, 그 이름조차 잊혀지고 말 것이다. 이름은 그저 공허한 소리일 뿐이요,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매우 소중히 여기던 사물도 헛된 것이며, 더럽고 보잘것 없는 쓰레기일 뿐이다. 우리들은 서로 장난하는 강아지나, 웃다가도 금새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애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성실과 겸손, 정의와 진리는 광활한 대지를 버리고 올림푸스 산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도대체 무것이 그대를 이 세상에 묶어두는가? 감각의 대상은 쉽게 변하고, 결코 지속되지 않으며, 감각기과은 더욱 애매한 것이어서 쉽게 착각을 일으키고, 가엾은 영혼조차도 피로부터 토해 낸 수증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소멸이든 다른 세계에로의 이주이든 간에, 그대는 어찌하여 그대의 종말을 태연자약하게 기다리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때가 올 때까지 어떻게 해야 만족할 수 있는가? 신을 섬기고 기도를 드리며, 이웃에게는 선행을 베풀고, 관용과 인내를 실행하는 것, 이 길 외에 또 다른 길이 있을까? 연약한 육체와 호흡의 한계를 넘어선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의 것이 아니며, 그대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바른 길을 걷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한다면, 그대는 행복의 조용한 흐름 속에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것으로부터 파괴되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온 정열을 쏟아, 모든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두 가지는 신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에 공통되는 것이며, 이성이 있는 모든 피조물의 영혼에 공통되는 것이다.  제6장 대자연의 이법에 대하여 우주의 실체는 온순하고 유연하다. 그리고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은 악을 저지를 요인을 갖고 있지 않다. 이성은 악을 행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 만물은 이 이성을 따라 만들어지고 완성된다. 그대가 그대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면 춥든 덥든, 졸립든 충분히 잠을 잤든, 남들에게 모욕을 당하든 칭찬을 듣든, 죽음에 직면해 있든 다른 일을 하고 있든 개의치 말라. 우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행위에 있어서도 눈앞에 닥친 일을 잘 처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라.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 사물의 고유한 특질과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최선의 복수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 각성하고, 방향을 정하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형성할 뿐 아니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눈앞에 나타내는 것이다. 우주는 혼돈, 만물의 교착산란, 이산이거나 아니면 통일, 질서, 섭리의 통합체이다. 만일 우주가 전자에 속한다면, 만물의 우연한 결합과 무질서 속에 생존하고 싶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가 흩어져 버린다면 나는 무엇때문에 마음의 불안을 느끼겠는가? 그러나 만일 후자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나는 우주의 지배적인 권능을 경배하고 확고히 서서 그 권능을 신봉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주위환경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질 때에는 지체 없이 자기자신으로 되돌아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옴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좌우하는 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서둘러서 존재하려 하고 어떤 것은 서둘러서 사멸하려 한다. 어떤 것은 마가 존재를 향해 생성되는 과정에 있으면서, 그 일부는 이미 사멸하고 있다. 시간의 끊임없는 흐름이 영원한 시간을 항상 새롭게 하는 것처럼, 운동과 변화는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한다. 그렇다면 멈출 수 없는 이 흐름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중요시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날아가는 제비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미 제비는 시계 밖으로 사라져버린 경우와 같다. 인생이란 피의 증발, 공기의 흡입과 같은 것이다. 공기를 들이 마시고 다시 내뱉는 것, 즉 죽음은 우리들이 순간마다 겪는 일이다. 일생동안 호흡능력 전체를 생각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가 어제나 엊그제 태어날 때 받은 호흡능력 전체를 그대는 본래의 대기의 원소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식물이나 가축이나 야수와 같이 호흡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 없는 일이다. 또한 사물의 현사을 통해 받는 인상도, 꼭두각시들을 실로 조종하듯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도,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가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음식물 중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떼어서 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일?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칭찬은 혀 끝에서 나오는 것이다. 명예라고 불리는 이러한 무가치한 환상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가치있는 것으로 무엇이 남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그대의 고유의 본질에 따라서 행동하고 자제하는 것이다. 모든 일과 기술도 이러한 본질에 따르고 있다. 모든 기술은 어떤 목적에 알맞는 기능을 갖도록 물건을 만드는 데에 그 목표가 있는 것이다.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포도재배자나, 말이나 개의 조련사도 이러한 목적을 추구한다. 그러나 젊은이에 대한 교육과 훈련의 목적은 다르다. 바로 여기에 교육과 훈련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좋은 것이라면 그대는 이것 이외의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뜻밖의 많은 것을 소중히 여기려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자신의 주인도 될 수 없고, 남들로부터 자립할 수 없으며 격정에서 벗어날 수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러한 것을 그대에게서 빼앗아갈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와 의심을 품을 것이며, 그 사람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원하는 사람은 마음 속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어 불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신을 자주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 자신의 정신을 존중하고 존경한다면 마음의 평화를 얻어 스스로 만족하게 되고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신과의 화해를 이룰 것이다. 신들이 부여하고 명령한 모든 것을 찬양할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가? 그들은 자신드로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며, 보지도 못했고 아직 본 적도 없는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소중하다고 생각며 칭찬받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선인들이 그대를 칭찬하지 않는다 해서 불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라 해서,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맞는 일이라면 그대 자신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 운동경기 중에 상대방이 그대를 손톱으로 할퀴거나 그대와 머리를 부딪쳐서 상처를 입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분개하거나 모욕을 느껴서는 안된다. 경기할 때 우리는 상대방을 경계하지만, 이것은 원수로서가 아니고 의심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의 공격을 조용히 피할 뿐이다. 인생의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처신하는 것이 좋다. 운동경기장에서 상대방과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다만 피하는 것 뿐이며, 의심이나 악의를 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생각이나 행동이 옳지 못하나는 것을 일깨워 준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겠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며, 그것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오류와 무지에 굳어 있는 사람은 해를 입을 것이다. 이성이 없는 동물, 일반적으로 이성이 없는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서, 넓은 도량과 관용으로 대하라. 왜냐하면 그대에게는 이성이 있는 반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이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은애로써 대하라. 그리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신에게 기도로써 도움을 구하고, 기도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라.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똑같은 순간에 우리 모두의 육체와 영혼 양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하나이면서 전체적인 것 속에 모든 것이 동시에 숨쉬며 존재한다고 해도 그대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란 감각에서 비롯된 인상의 정지, 욕망을 일으키던 충동의 정지, 정신활동과 육체에 대한 봉사의 정지다. 이 세상에서 그대의 육체가 굴복하지 않았는데 영혼이 먼제 굴복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수치다. 맑고 건전한 정신으로 돌아가서 진정한 당신 자신을 찾아라. 잠에서 깨어나라. 그리고는 그대를 괴롭히던 것들은 꿈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그대 주위에 있는 것들을 둘러보라. 꿈속의 일과 어떻게 다른가를. 손이나 발로 하는 노동은, 발이 해야 할 일을 발이 하고 손이 해야 할 일을 손이 하는 한, 자연에 위배되는 일이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의 본분을 다하는 한,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도,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주 속에서 아시아나 유럽은 우주의 작은 모퉁이에 불과하다. 모든 바다는 우주 속의 물방울이며, 아토스 산은 우주의 작은 흙덩이이며, 현재란 영원 속에서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보잘 것 없고 가변적이며, 소멸한다. 만물은 보편적으로 지배력으로부터 직접 생기거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쩍 벌린 사자의 입도, 유독한 것도, 가시나 진흙처럼 해로운 것도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의 모조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도 그대가 경배하는 절대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만물의 근원에 관한 올바른 사유를 형성하라. 이 순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을 본 사람은 태고적부터 존재해 왔던 모든 것과 영원히 존재하게 될 모든 것을 본 것이다. 만물은 같은 핏줄이며, 같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의 관련성과 그 상호관계를 자주 생각하라. 어떤 의미에서 만물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얽혀 있으며, 이런 점에서 만물은 상호 애호 속에서 깊은 유대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활발한 운동과 상호협조, 실체의 통일성 때문에 사물은 질서정연하게 순리에 따라 나타난다. 그대의 운명이 그대의 몫으로 부여한 일에는 적응하라. 그리고 그대와 같은 운명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라.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대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좋다, 나쁘다 하고 분별할 때, 그대에게 해로운 것이 나타나고 이로운 것이 사라지면 그대는 반드시 신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증오할 것이다. 그러한 신이나 사람들의 불행이나 실패의 원인이거나 그 원인일지라고 모른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분별함으로써 많은 부정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아그이 개념을 엄격히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만 국한시킨다면 신들을 탓하거나 인간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의 목적을 의식하면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일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잠자는 사람조차도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의 실현자요 협력자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은 잠잘 때에도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협력하고 있다. 세상 일을 비난하고 반대하는 자, 심지어 방해하는 자까지도 훌륭히 협력을 하고 있다. 우주는 이러한 사람들까지도 협력자로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가 어떤 종류의 일꾼인가를 알아야 한다. 만물을 다스리는 자는 분명히 그대를 협력자의 한 사람으로서, 또 유일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일꾼의 한 사람으로서 받으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시푸스가 말한 바와 같이, 극 중의 야비하고 우스꽝스러운 역할은 맡지 말라. 태양이 비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많은 별들은 또 어떠한가? 별들은 각기 다르면서도,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협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쾌활해지고 싶거든, 그대의 친구들의 장점을 생각하라. 예컨대 어떤 친구들의 적극성, 겸손, 관용, 그밖의 다른 친구들의 장점들을. 함께 생활하는 친구들의 장점이 풍부하게 나타날 떄만큼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명예를 탐내는 자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감각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자는 자신의 행위를 가장 선한 것이 이용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습관을 길러라. 가능한 한 말하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같이하라. 만일 선원들이 타수를 믿지 않고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앟는다면,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타수가 어떻게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으며, 의사는 어떻게 한자의 병을 고치겠는가? 그대가 그대의 본성의 이법에 따라 사는 것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의 이법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남에게 아첨하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무슨 까닭에 아첨을 하는가? 시간이 얼마나 빨리 만물을 거두어 들이는가를,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미 거두어 들였는가를 보라. 제7장 우주의 지배적 이성에 대하여 악이란 무엇인가? 그대가 이제껏 수없이 보아오고, 지금도 자주보고 있응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생길 경우에도 그것이 자주 보아온 일임을 잊지 말라. 천상천하 어디에도 똑같은 것이 있을 따름이다. 고대사와 중세사, 그리고 현대의 역사가 이 동일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현재의 도시들과 집들도 그것들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만물은 옛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진부하고 순간적인 것일 따름이다. 우리의 원리에 대응하는 인상(사상)이 소멸하지 않는 한,우리의 원리 또한 소먈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상을 끊임없이 불타오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될 모든 일에 대하여, 나는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나의 마음이 동요를 하는가? 마음에서 떠나 있는 것은 마은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대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좀더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삶을 새롭게 할 힘이 있다. 그대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물들을 다시 한번 보라. 그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공연한 과시, 연극, 양떼와 소떼, 투창연습, 강아지에게 던져준 뼈, 연못에 던져진 빵부스러기, 짐을 지고 땀흘려 일하는 개미의 근면, 겁먹은 생쥐의 쩔쩔매는 모습, 실로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 이러한 것들 속에서도 훌륭한 유머를 보여 주어야 한다. 거만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목표에 정진하는 만큼, 그만큼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하라. 토론을 할 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할 때는 매 순간마다 그대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즉각 깨달아야 하고 토론에 있어서는 그것의 진의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이 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나의 이해력으로 그 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만일 이해력이 충분하다면 자연이 내게 준 도구로써 그 일에 이용한다. 그러나 충분치 못하다면 그 일에서 물러나, 나보다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양보한다. 또는 나의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일반적 선에 적합하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는 이의 도움을 빌어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한다. 혼자서 하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하든 나의 일은 사회에 유익하고 적합한 것이어야만 한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라. 성을 공격하는 병사처럼 의무를 다하는 것이 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만일 그대가 불구자여서 성벽을 올라갈 수 없는 경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올라갈 수 있다면 그대는 어찌하겟는가? 미래의 일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이성으로써 미래의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연하라. 혼자의 힘으로 안된다면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의연해져라. 신체의 각 부분이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인 것처럼, 개별적인 이성적 존재도 상호협조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이성적 존재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관계는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한낱 한 부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대는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고 인간들은 위해 자비를 베푸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단순히 예의상 자비를 베풀 뿐, 그대 자신에게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나는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 금이나 에메랄드, 또는 자줏빛 조개가 누가 어떤 행동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나는 에메랄드이며, 나의 빛깔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언제나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성은 자신을 어지럽히는 법이 없다. 즉 두려움과 괴로움과 격정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가 이성에게 공포와 고통을 안겨준다면 내버려 두라. 이성은 이러한 상태에 결코 빠져들지 않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가능한 한 고통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만액 고통받는다면 신음하라. 그러나 영혼 자체는 공포나 고통을 받기는 하지만 이러한 것에 대하여 의견을 형성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법이 없다. 이성은 스스로 결함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아무런 결함이 없다. 따라서 이성은 스스로 자신을 어지럽히거나 방해하지 않는 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교란되거나 방해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라. 그대는 변화를 두려워하는가? 그러나 변화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우주의 본성에 대해 보다 만족스럽고 적합한 것은 무엇인가? 장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따뜻한 목욕을 할 수 있겠는가? 곡식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영양을 섭취할 수 있겠는가? 유익한 것은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 자신에 있어서도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며, 우주의 본성에 있어서도 변화는 필연적인 것임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 원하지 않는 일을,인간의 본성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이다. 머지 않아 그대는 모든 일을 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 또한 그대를 곧 망각할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그들도 그대와 같은 형제이며, 무지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악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얼마 안 있어 죽게 될 것이며, 특히 잘못을 저지른 자로 인해 그대의 이성이 조금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을 떄 그대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찡그린 얼굴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주 찡그리면 모든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결국에는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잆을 정도로 굳어버린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이성에 어긋난다는 결론을 내려라.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다는 관념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더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대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으뜸되는 최상의 것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에, 만일 그것마저 소유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것을 갖고 싶어 했을지를 생각해 보라. 동시에 그러한 사물을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는 나머지 그것을 잃어버릴 경우에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 한상을 버려라. 꼭두각시가 되지 말라. 현재에 충실하라. 그대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이해하라. 모든 대상을 원인과 결과적 산물로 나누고 분류하라. 그대의 최후를 생각하라.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잘못이 저질러진 곳에 그대로 남겨두라. 선과 악 사이에 놓여 있는 것에 관심을 깅ㄹ이지 말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연마하라. 인류를 사랑하라. 신이 정해준 길을 걸으라. 어떤 시인은 법칙이 만물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법칙이 만물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고통에 대하여,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은 넋을 잃게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고통은 참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로부터 초월한 정신은 스스로를 흐트리지 않음으로써 평온을 유지하고, 이성의 힘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으로 인해서 해를 입은 부분(육체)은, 가능한 한 고통에 대한 의견을 갖추고 있는 것이 좋다. 안티스테네스의 말, 선을 행하고 욕을 먹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외면상으로는 이성이 명하는 대로 온순하고 단정하고 침착하면서도, 마음이 단정하고 침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비열한 사람이다. 분노는 사물에 통하지 않는다. 사물은 그대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벼 이삭이 익으면 거둬들이듯이 삶도 거둬들여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은 태어나고, 어느 한 사람은 죽는 법이다. 비탄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눈물 흘리지 말며, 격정에 휘말려 들지도 말라.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노라. 그대의 생각은 옳지 않다. 위대한 사람은 삶과 죽음의 위험을 헤아리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또 선인의 일인가 악인의 일인가만을 고려하면 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선한 나의 벗이여, 고매하고 선한 것이 자신과 남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일 같은 것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게. 적어도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네. 생에 집착해서는 안되네. 운명은 신에게 맡기고,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여인들의 말이 옳다고 믿으며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훌륭하고 가치있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추구해야 될 문제라네. 그대도 별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별들의 운행을 살펴보라. 변화하는 원소들의 율동을 끊임없이 생각하라. 이러한 생각은 지상생활의 더러운 때를 깨끗이 씻어줄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라. 정치적 지배권에 얼마나 많은 지배권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가? 그대는 미래의 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일은 과거의 일과 같은 형태일 것이며,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0년간 인간의 생활을 관조한 것은 1만년 동안 관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관조할 것이 더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현재 일어나는 일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하고, 세밀한 검토 없이는 어떤 것이든 그대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대를 연마하는 것, 이런 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이성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 말라. 어떤 본성이 그대를 인도하는지에 시선의 촛점을 두라.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하여 나타나는 우주의 본성과, 그대가 해야 할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는 그대 자신의 본성을 직시하라. 사람은 본성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한다. 모든 사물은 인간이라는 이성적 존재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비이성적 사물에 있어서, 약자는 강자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성적 존재는 상호협력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으뜸가는 특질은 사회적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육체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감각이나 육체적인 욕마읭 충동에 압도외지 않는 것은, 이성과 지성의 특수한 역할이다. 감각과 육체적인 욕망은 동물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 작용은 우월성을 요구하고, 다른 작용에 압도 당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훌륭한 이유가 있다. 이성적 작용은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사물을 이용하도록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 본질의 첫째 원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기만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견지하면서, 정진하라. 그러면 이성은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나는 시체다. 오늘로써 나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대의 남은 삶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라.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 그리고 그대의 운명의 실에 짜여지고 있는 것만을 사랑하라. 이것이 최상의 길이다. 어떠한 곤경에 처하게 되면, 같은 곤경을 당한 이웃의 경우를 생각하라.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했고 얼마나 분노하고 경악햇으며, 얼마나 원망했는가를. 그런데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그들의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자연을 교란시키는 자와 교란에 동요하는 자들로부터 왜 그대는 떠나지 않는가? 왜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용하는 올바른 길로 들어서지 않는가? 그대는 그들을 이용하고 그대가 하는 일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자신을 보라.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선량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라. 그리고 명심하라. 그대 자신이 마음을 살펴보라. 마음에는 선이 샘솟는 샘이 있으리라. 이 샘은 아무리 퍼올려도 마르지 않고 샘솟을 것이다. 건강해야 한다. 그리하여 행동이나 태도에 있어서 불규칙적인 생태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신은 지적이고 품위있고 절도 있는 표정을 유지할 때 제 얼굴이 드러나는 법이다. 이것은 육체 전체에도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식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기술은 무용가의 기술보다는 레슬러의 기술에 가깝다. 불시에 공격을 당했을 때 쓰러지지 않으려면 항상 꿋꿋하게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대가 어떠한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항상 생각하라. 그들의 의견과 욕망의 본질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을 뿐더러,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고통을 겪게 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라. 고통은 수치가 아니며, 지배적인 지성을 해치는 것도 아니라고. 지성이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한, 지성은 고통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말과 같이, 그대의 고통에는 그 한계가 있다. 환상적인 과장에 빠지지 않는 한,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것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많은 것들, 예컨대 졸립다거나 매우 무덥다거나 혹은 식욕이 없다는 등의 일들도, 사실은 고통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따라서 이러한 일로 불쾌감을 느낀다면, 고통에 항복했다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라. 비인간적인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된다. 그대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은 지성과 사물의 구성을 혼란하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다. 신성한 인간이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점을 항상 기억해 두라.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참으로 사소한 것이라는 점도 명심하라. 그리고 변증법이나 자연에 간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자유롭고 겸손하고 사히적이며 신의 의지에 순종하면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온세상이 그대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야수들이 그대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는다 해도, 그대는 모든 강제를 거부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라.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정신이 평온을 유지하고 주위의 사물들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현존하는 대상을 훌륭하게 이용한다면 무엇이 방해할 것인가. 그리하여 판단력은 그가 관찰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사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사람들의 견해로는 여러 종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대들은 물질이다. 그리고 대상을 이용하는 능력은 그 수중에 장악된 것에 대하여, 너는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무엇이 정신을 방해할 것인가? 현존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 사회적 미덕을 발휘할 훌륭한 소재이다. 즉 인간과 신에게 속하는 기수르이 제료인 것이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과 인간에게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것도 아니고 다루가에 벅찬 것도 아니며, 오히려 친숙하고 다루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인격의 완성은 하루하루를 그 날이 임종인 것처럼 살고,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무기력하지도 않으며, 또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서 살 때 완성된다. 자기자신 속에 있는 악마로부터 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악마를 보지 못하고, 피할 수 없는 남들 속의 악만 피하려고 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그대가 선을 베풀어서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도움을 받았다면, 그대는 그것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선행을 베풀었다는 칭찬을 바라는가? 아니면 어떠한 대가를 바라는가? 제8장 선과 악에 대하여 그대의 전 생애를, 혹은 그대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 철학자로서 생애를 보낸다는 것은 이미 힘들게 되었고, 많은 다른 사람들과 그대 자신조차도 철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덧없는 명예욕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미 속세의 때가 묻었기 때문에 철학자라는 직함을 쉽게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면, 남들이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말고 그대의 남은 생애를 그대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라. 그대는 그대의 본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애써야 하고, 그밖의 어떤 일로 번민하거나 정신이 산만해져서는 안된다. 삼단논법이나 부, 명성, 쾌락이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경험을 벌써 잊었는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은 인간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데에 있다.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 자신의 욕구와 행동을 규제하는 엄격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그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원리다. 인간을 정의, 절제, 남자다움, 자유로 이끌지 않는 것은 선이 아니며,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이끌지 않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신념이 바로 그 원리이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이 행동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러한 행동을 한 후의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것인지를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라. 얼마 안있어 나는 죽을 것이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리고 신과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지금 나는 그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탄에 빠져 있을 때에도 세상 사람들은 같은 일을 여전히 되풀이 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물은 우주의 본성을 따르며, 얼마 안 있으면, 그대도 하드리아누스나 으우구스투스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쨰는 그대가 하는 일을 직시하고 그 정체를 파악하라. 동시에 선량한 사람이 되어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 요구하는 것을 지체없이 행하라. 그리고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하라, 따뜻한 호의와 겸손된 마음으로 거짓없이. 그대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 사회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그대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지만, 잠은 이성이 없는 동물에게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각자의 본성과 화합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참되고 본성에 맞는 일이며 유쾌한 일이다. 그대가 어느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자문해 보라. 쾌락, 고통, 인과간계, 명예와 불명예,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가 이러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더라도 나에게는 조금도 놀랍거나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을 나는 명심하면 된다. 사과나무에 사과 열매가 열린다고 놀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처럼, 세계가 당연히 일어날 일을 야기시킨다 해서 놀라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의사가, 환자가 열이 있다고 놀란다거나 키잡이가 역풍을 보고 놀란다면 이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말이나, 포도나무 등 모든 사물은 어떤 목적을 갖고 존재한다. 놀랄 필요가 없다. 태양도 말을 할 줄 안다면,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상식이 이런 생활을 허락할 것인가 생각해 보라. 자연은 만물의 시작과 과정 뿐 아니라 그 최후까지도 섭리한다. 예컨대 공을 던지는 사라므이 경우와 같다. 공이 위로 올라간다 해서 좋은 일이고, 공이 아래로 내려오다가 마침내 땅에 떨어 진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거품이 일었다고 해서 좋은 일이고, 거품이 없어졌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명의 등불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의 실상을 확인하라. 나이 먹고 병들게 되면 육체가 어떻게 되고, 죽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 지를. 칭찬하는 자와 칭찬받는 자, 기억하는 자와 기억되는 자 모두 덧없는 세월을 살 뿐이며, 이러한 일은 모두 이 지구의 작은 구석에서 일어나는 것이다.그런데도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니! 지구 전체도 한낱 미소한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의견이든, 행동이든, 말이든, 그대 앞에 닥친 문제를 직시하라. 그대가 역경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오늘보다 내일을 더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목욕을 하면서 올리브 유, 땀, 때, 더러운 물 등에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일상 생활의 각 구석이나 만물의 각 부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루실라는 베루스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나 마침내 루실라도 죽었다. 세쿤다는 막시무스가 죽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쿤다도 죽었다. 에피틴카누스는 디오티무스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에피틴카누스도 죽었다. 안토니우스는 파우스티나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안토니우스도 죽었다. 저 예지에 가득찬 사람들, 저 예언자들, 저 거만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루살이처럼 벌써 오래 전에 죽었구나. 어떤 사람은 죽자마자 곧 잊혀져 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전설에서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작은 살덩어리인 그대 자신도 분해되어 버리고, 그대의 갸냘픈 호흡도 끊기어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인간이 인간다운 일을 할 때 참된 기쁨을 느낀다. 같은 인간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고 감각적 충동을 경멸하며, 그럴듯한 현상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 그리고 우주의 본성과 우주안에 있는 사물의 본성을 관조하는 것이 바로 인간본연의 일인 것이다. 그대와 다른 사물과는 세가지 관계가 있다. 첫째는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육체와의 관계, 들째는 만물이 생성되는 원인과의 관계, 셋째는 그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고통은 육체에 해롭거나-육체에 해로운 경우는 육체로 하여금 스스로의 고통을 말하게 하라-영혼에 해롭다. 그러나 영혼은 스스로 평온을 유지하면서, 고통이 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모든 판단과 감정, 욕망가 혐오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악은 그리 높은 절정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떠한 악도, 어떠한 욕망이나 마음의 동요도 나의 영혼 속에서 서식처를 찾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해 그들의 본성을 가려내고, 그 가치에 따라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다. 자주 이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모든 환상을 버려라. 그리고 자연이 그대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었다는 점을 명심하라. 부와 재산을 자만심 없이 받아들여라. 그리고 언제든지 아낌없이 버릴 각오를 하라. 몸뚱이로부터 손과 발과 머리가 잘려 나가 따로따로 나뒹구는 것을 그대는 본 적이 있는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이기적인 일마능ㄹ 하는 사람의 상태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대가 자연의 통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상상해 보라. 그대는 자연의 일부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스스로 자연과의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다. 신은 인간 이외의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분리되고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결합시키는 능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는 언제든지 자연의 통일성 속으로 되돌아올 수가 있다. 신의 은총을 항상 생각하라.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도록 배려하였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을 지라도 다시 돌아와 결합하고 자연의 구성원으로서의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는가? 우주의 본성이 이성적 존재에게 능력이란 장비를 부여받았을 때, 인간이 우주의 본성으로부터 받은 한 가지 능력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주의 본성은 본성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을 모두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오게 해서 자신의 일부로 삼는 것처럼, 이성적 존재에겐 모든 방해물을 예정된 목적을 달성하는 재료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대의 전 생애를 생각해 보고 괴로워하지 말라. 그대에게 닥칠지도 모를 여러가지 고난을 한꺼번에 생각하지 말라. 어떤 일에 부딪힐 때마다, 이 일에는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는가? 하고 자문하라. 그렇다고 자인하면, 그대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다음에는 미래나 과거도 아닌 오직 현재만이 그대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러나 이것도 그대가 한계를 정해 놓는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마저도 그대가 참을 수 없다면 그대 마음을 질책하라. 그대를 괴롭힌다고 생각되는 것을 털어버린다면, 그대는 안전할 것이다. 이러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이성이다. 그러나 나는 이성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성 자체가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대의 다른 부분(육체)이 고통을 받는다면 고통에 대한 의견을 갖도록 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후세의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후세의 사람들도 그가 지금 싫어하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후세의 사람들 역시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대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든, 어떠한 생각을 하든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를 묶어서 그대 마음대로 내팽개쳐 보라. 나는 본성에 맞게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한, 어디서든지 평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장소의 이동으로 인해 나의 영혼이 불행과 악화와 위축과 타락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그대는 찾아낼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다. 황소에게는 황소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고, 포도나무에게는 포도나무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돌에는 또한 돌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모든 사물에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왜 그대는 불평하는가? 본성은 그대가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은 일으키지 않는다. 외부적인 것으로 인해 고통을 느낀다면, 그대를 괴롭히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대의 판단이다. 그대는 이러한 판단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 마음 속의 어떤 것으로 인해 고통을 느낀다면, 누구도 그대가 의견을 바로잡는 데 방해하지 않는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못함으로써 그대가 고통을 받는다면, 누구도 그대가 의견을 바로잡는데 방해하지 않는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그대가 못함으로써 그대가 고통을 받는다면, 왜 불평을 중지하고 행동하지 않는가?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이 그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일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그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슬퍼하지 말라. 그러나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삶의 보람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충분한 일을 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삶처럼 장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만족한 마음으로 세상을 하직하라. 최초의 인상에 나타나는 그 이상의 것에 마음쓰지 말라. 누가 그대에 대해 험담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하자. 이것은 그저 전해들은 말이지 그대가 이 험담 때문에 해를 입었다는 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나의 아들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가 위독한지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언제나 최초의 인상만을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마음에 덧붙여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안전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논평을 하든지. 오이의 맛은 쓴가? 그러면 버려라. 길 한복판에 가시덤불이 있는가? 그러면 피해서 돌아가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세상에 이런 것들이 생겨났을까 하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면 자연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목공이나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대팻밥이나 가죽 조각들이 널려 있다고 그들을 탓하면 그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대팻밥이나 가죽 조각을 버릴 곳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주의 본성에는 여분의 공간이 없다. 그러나 자연 안에 있는 사물이 늙고 시들어 무용지물로 보일지라도 자연은 그것을 자신 안에서 변화시켜 새롭게 창조한다. 외계로부터 어떤 물질도 요구할 필요도 없고, 쓰레기장을 찾을 필요도 없다. 자연은 현재의 공간, 현재의 재료, 현재의 기술로 만족한다.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지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었는지, 존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찬양의 박수갈채를 바라거나 비난을 피한다면, 그대는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대는 매시간마다 세번씩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의 칭송을 받고 싶은가? 그대는 자기자신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은가? 자신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나의 이웃의 자유의지는 그의 호흡과 육체와 마찬가지로 나의 자유의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는 각별히 상호협력하는 존재이지만, 우리들 각자의 이성은 독자성을 갖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웃사람의 악이 나에게도 해를 끼칠 것이다. 신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죽음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감각의 상실이나 다른 종류의 새로운 감각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대는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대가 다른 종류의 새로운 감각을 얻게 된다면, 다른 종류의 생물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생존이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서로 협력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가르쳐서 향상시켜라. 아니면 인내하라. 화살과 정신은 움직이는 방식에 있어서 각기 다르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거나 연구에 몰두할 때에 정신은 화살처럼 그 목표를 향하여 직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