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내가 사랑한 책들 저자:오쇼 라즈니쉬 류시화 옮김 제1부: 19 제2부:101 제3부:211 누구에게나 밤을 지새워 책을 읽지 않은 경험이 있으랴. 토로할 수 는 답답함에 불밝힌 새벽이나 막연한 희망에 들뜬 봄 햇살 아래를 지 나오면 누구나 운명처럼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게 된다. 밤을 지새지 않 고는 읽을 수 없는 그 책들은 그렇게 한 권씩 책꽂이에 쌓여가는 겄이 다. 감동을 주고 삶의 허무를 일깨우고 때로는 저 너머의 세계를 손짓해 보이는 책들, 칠흑같은 밤 검은 바다에 부호처럼 반짝이는 등대보다도 아름다운 그 책들의 비밀스런 서가를 오쇼 라즈니쉬가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지상의 어떤 들판보다도 넓고 어떤 나무보다도 무성한 그의 서가 에는 노자, 장자, 석가, 예수 등의 성인들의 불같은 말이 가득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톨스토이도, 카잔차키스도, 니체도, 심지어는 마르크스 도 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책을 사랑했던 그가 이제 우리를 향해 그 책들을 집어던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책 하나하나에 가슴 을 맞고 쓰러지는 일이다. 이 책을 옮기는 동안 내 기억 속의 묵은 책들을 봄 햇살 앞에 꺼내 놓 았다. 어디 하나 성한 게 없는 책들, 제각기 나름대로 상처입은 문장들 을 바라보며 살아온 날들이 참 힘들었구나 생각했다. 또한 괜히 상처를 꺼내 놓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 눈 부신 봄 햇살 앞에 부끄러운 게 어디 그것뿐이랴. 류 시 화 내가 사랑한 책들 제1부--------------------------------------------------------p19 1 흰 국화가 피었다, 오늘. 손님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흰 국화, 흰 장미...여기 말이, 언어가 필요없는 순간이 있다. 손님도, 주인도, 밀이 필요없다. 오직 침묵뿐. 그러나 침묵은 그 자체의 언어가 있다. 침묵은 그 자체의 노래가 있다. 기쁨과 평 화와 아름다움, 그리고 축복의 노래가.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는 노자의1) [도덕경] 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B.C.4-5세기 초나라 사람으로 도가의 시조이며 장자의 스승으로 일컬어진다. 죽 음을 히말라야에서 맞이하기 위해 중국을 떠나다가 함곡관의 수비대장 윤희의 청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 그의 유일한 저서 [도덕경]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도덕경]은 그의 무위자 연 사상과 "행함이 없으면서도 행하지 않음이 없는" 자유 자재한 인간상을 제시 하고 있다. 노자에 따르면 우주의 법칙에 따라 생겨나고 지배되는 자연의 조화 에 인간이 손을 대면 댈수록 그 조화는 깨어지고 만다. 또 무리하면 할수록 문 제는 더욱 커진다. 가볍든 무겁든, 건조하든 습하든, 또는 느리든 빠르든 모든 만물은 그 안에 독자적인 성질을 갖고 있고,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반드시 혼란 이 일어난다. 천지 만물의 배후에 작용하는 것을 노자는 '도'라고 불렀다. 예수의 [산상수훈]2)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의 산 위에서 행한 인간의 덕에 관한 설교.신약성서 마태 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요"로 시작해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로 끝나는 예수의 대표적 가르침이 여기에 포 함되어 있다. 침묵의 언어로 씌어진 책들. 그 책들이 시집처럼 편집되진 않았지만 나는 그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시라고 여긴 다. 그 책들은 늘 이방인이다. 언제나 문밖으로 밀려난다. 어떤 면에선 그럴 수밖 에 없다. 그것들은 세상의 어떤 기준, 어떤 공식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어떤 잼대 로도 그것을 잴 수 없다. 그 책들은 이 모든 기준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무시당하곤 한다. 표도르 도스토엡스키 3)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몇 부분은 순수한 시 그 자체 다. 3)1821-1881. 모스크바의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처음에 는 휴머니스트 작가로 등장했으나 형무소 생활과 군대 생활로 인해 세계관이 바뀌 었다. 그의 휴머니즘은 사회적 항의의 성격을 잃고, 생활 고민을 최고의 필연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기성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모든 투쟁을 개인주의적 허무주 의 입장에서 부정하고 기독교적 겸양과 인내를 러시아 국민의 미덕이라 여겼다. 그러나 작품은 그의 사상의 허무주의에도 불구하고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광인 프리드리히 니체 4)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몇 귀절 도 마찬가지다. 4)1844-1900. 독일의 철학자. 아버지는 목사였으나 5세 때 사망, 조모의 집에서 자랐으며 본과 라이프찌히의 두 대학에서 문헌학을 연구하였다. 그리스 정신에 매혹되었으며,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바그너에 심취했다. [비극의 탄생]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다루 었는데, [반시대적 고찰]에선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채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고독에 침잠하기를 좋아한 니체는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삶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한 긍정적 인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 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역설했다. 다른 책을 전혀 쓰지 않았다 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것만으로 도 니체는 인류에게 무한한 공헌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값진 작업을 했다. 인류 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짜라투수트라 5)를 발굴한 것이다. 5)페르시아의 예언자이며 짜라투스트라교의 개조. B.C. 5세게 중엽에 리디아의 그 리스 역사가 크산투스는 짜라투스트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원전은 없어 졌고 일부가 B.C. 1세기경의 인용문에 남아 있을 뿐이다. 페르시아에 전하는 전 설에 따르면 짜라투스트라는 알렉산더 대왕 이전 285년에 히스타스페스 왕을 귀 의 시켰다고 하였고, 그때 나이 42세이며, 7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선악 이원론을 체계적으로 세운 최초의 사람이라 생각되어지고 있다. 선의 힘은 오르므즈드와 그 일곱 천사로 되어 있는데, 악의 힘은 그 이름 이 금기시되어 분명하게 전해지진 않고 다만 그아래의 악령의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윤리적 이원론과 그 발전으로서의 짜라투스트라교는 이란 고원 오아시 스의 반농반목의 정착민 사회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러한 정착민을 외부로부터 위 협하는 유목민을 악의 힘이라 하고 스스로를 선의 힘이라 한 것이 아닌가 추측죄 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멀리 중국에까지 미쳐 도교의 신비서 [황금꽃의 비밀]에 까지 영향을 남겼지만 그후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들어 니체가 발 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탄생 시켰다. 짜라투스트라를 재등장시키고, 그에게 불후의 생명과 부활을 준 자가 바로 니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앞으로 미래의 성서가 될 것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 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럽다. 미소를 지을 수는 있 어도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에 대해 웃음을 터뜨렸단 말인 가? 웃음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농담에 갓난아기 짜라투리트라는 웃음을 터뜨렸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적인 농담이다. 이 존재계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우 주적인 농담에 그는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렇다. 그대의 노트에 우주적인 농담이라고 쓰고 밑줄을 그어라. 나는 그대가 밑 줄을 긋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다. 내 귀가 얼마나 좋은지 아는가? 내가 원할 때면 나는 연필 굴러가는 소리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도 들을 수 있다. 원할 때면 나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을 때면 나는 전혀 듣지 않을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린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전생애가 하나의 웃음이었 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잊었다. 고통 속에서 삶을 산 사람은 오래 기억되지만, 삶이 하나의 환희가 되고 넘치는 웃음이었던 사람은 금방 잊혀진다. 영어권에서 그의 이름을 조로아스터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괴물같은 이름 인가! '짜라투스트라'는 장미 쫓잎과 같은 향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 는 기계 냄새가 나고 죽은 이름이다. 짜라투스트라까지도 자기의 이름이 '조로아스 터'로 바뀐 것을 알면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그러나 니체가 그 책을 쓰기 전 까지는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교도들의 강압에 못이겨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은 회교도로 개종했다.극히 소 수의 사람들만이 인도로 탈출했가. 인도 말고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인도 는 여권이나 비자 없이도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살인자 회교도들의 탄압을 피해 아주 적은 숫자의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만이 인도로 탈 출했다. 현재 그들의 숫자는 십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자, 불과 십만 명 정도의 추종자밖에 갖지 않은 종교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겠는 가? 그들 대부분이 인도에 살고 있을 뿐이고, 그것도 봄베이라는 한 도시 주변에만 모여 산다. 그들 자신 조차도 짜라투스트라를 잊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함께 살아 가야 할 힌두교인과 타협한 것이다. 늪을 피해서 달아났지만 결국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도 더 깊은 진흙 웅덩이에 한쪽에는 늪, 다른 쪽에는 진흙 웅 덩이, 그 중간에만 '길'이 있다. 붓다는 그 길을 중도라고 불렀다. 줄 위를 걷는 광 대처럼 정확히 중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위대한 공헌은 짜라투스트라를 현대에 되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크니큰 잘못은 아돌프 히틀러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그는 둘다를 동시애 했다. 물론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선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니체의 초인 사상을 잘못 해석한 것은 히틀러 자신이었다. 그것은 니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다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잘못 해석하는 것은 사람 들의 자유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종의 정신박약아, 지극히 볼품없는 인간이었다. 정말 추한 인 간이었다. 그의 얼굴 생김새를 보라. 왜소한 수염, 사람을 겁주려고 노력하는 그 잔뜩 겁먹은 눈, 그리고 긴장한 이마. 그는 너무나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평생동안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야 하 는 것이다. 히틀러는 사랑을 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의 독재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불행하게도 많은 남편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성을 하녀 부리듯 명령하고 지시하고 속이고 온갖 작전을 썼지만 그는 사랑할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 다. 사랑은 지성을 필요로 한다.그는 심지어 자신의 애인까지도 밤에 단둘이 그의 방에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토록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누가 아는가? 애인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애인이 적의 스파이인지도 모 르는 일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평생동안 혼자서 잠을 잤다.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아무런 느낌 도, 감정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가슴이 없었다. 그에게는 여성적인 면이 전 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 속의 여성을 죽여 버렸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외 부의 여성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외부의 여성을 사랑하기 위해선 그대 내면의 여 성을 키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외부적인 행위는 내면에 있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사소한 이유 때문에 애인을 총살하기까지 했다. 애인이 어느날 병든 어 머니를 방문하겠다고 하자 히틀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외출하자 애인은 몰래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히틀러가 돌아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그 러나 히틀러는 경비원을 통해서 그녀가 외출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는 그 것만으로도 사랑을 끝장내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사랑뿐만 아니라 그 여성까지도! 그는 "만일 네가 내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너는 나의 적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녀를 총으로 사살했다. 그것이 그의 논리였다. 복종하는 자는 친구이고 복종하지 않는 자는 적인 것이다. 찬성하는 자는 자기 편이고 반대하는 자는 자기 편이 아니다. 나는 그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책은 단 지 몇 권에 불과하다.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내 도서 목록에 오를 첫번째 책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 했다]이다. 표도로 도스토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 두번째 책이다. 제3권은 [미르다드의 서] 6) 6)미킬 나이미가 쓴 소책자며, 나이미는 칼릴 지브란과 가까웠던 인물로 1889년 레바논 출신의 문학 비평가이며,극작가. 제4권은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제5권은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제6권은 [장자] 7)이다. 7)노자와 함께 동양사상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물.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학문 이 넓어서 그 사고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문장을 잘 쓰고 언변에 능해서 당시의 이름난 학자들도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었다. 말과 행동은 너무나 크고 당황하며 자기 중심적이라서 왕이나 고위관리들에게 도저히 훌륭한 인물로는 여 겨지지 않았다. 쓸모있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세상에서 쓸모없음의 위 대함을 강조했으며, 세상에 절대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병신처럼' 사는 것이 최고의 삶임을 가르쳤다. 공자나 맹자 따위의 형식주의자는 상당한 인물이 못 된다고 여겼다. 그의 언행을 기록한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의 세 권으로 이 루어졌다. 장자야말로 더없이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우화들을 엮은 이 책에 견줄만 한 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제7권은 예수의 [산상수훈]이다. 성경 전체가 정말로 탁월한 정신으로 가득차 있 으나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들로,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언어의 보고이 다. 제8권은 크리슈나 신의 8) 노래 [바가바드 기타] 9)이다. 8)시바 신 다음으로 중요한 힌두교의 신. 고오타마 붓다 이전의 신의 화신. 언제 나 피리부는 소년으로 화신해서 많은 연인들과 사랑을 속삭인다. 성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제자 아르쥬나에게 '작은 나'를 버리고 신의 철저한 도구가 되어야 한 다는 차원높은 가르침을 편다. 이 크리슈나와 그의 연인 라디와의 사랑 이야기는 인도 무용의 주된 소재이다. 9)고대 인도의 2대 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라타] 속의 한 권으로, 역사시라는 성격상 그 성립 연대를 확정짖기는 곤란하지만 다른 문헌과의 관계나 문체로 보 아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측된다. 내용의 특징은 유일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이며, 기존의 사회재도에 입각하여 각자의 본분을 사심없이 수행할 것을 설하는 것이다. 훔볼트가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단 하나의 진정학 철학 시편"이라고 절찬한 이래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의 대 표적인 고전으로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인도 사상가들에게 있어서도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크리슈나가 잘못 전해진 단어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조로아 스터'로 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크리슈나'는 의식의 가장 높은 차원을 의미하며, 크리슈나의 노래인 [바가바드 기타]는 존재의 최고 차원에 도달한 의식의 표현이다. 제9권은 [기탄잘리]이다.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이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10)의 작품이며, 그는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10)인도 문예부흥의 중심지였던 벵갈 지방의 캘커타에서 한 명문 집안의 열두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에는 새로운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었 다.하나는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교리로 가득찬 종교의식을 타파하고 진실한 정신 적 탐구의 길을 여는 종교개혁운동으로, 이것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 정통 힌두교인들에게는 일종의 정면 도전이었다. 둘째는 벵갈 문학의 개혁 운동이다. 타고르 자신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자기 표현은 정신적인 이상 에서만이 아니라 문학표현에 있어서도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문학 은 창조적 생명을 잃었다. 생명이 없고 율동이 없는 아름다운 수식에만 매달려 있다. 묘비명이나 죽은 자의 안정성을 믿는 정통파에 반항해야 한다. 언어에서 장황한 형식의 짐을 벗기고 우리의 문학을 오랜 잠에서 깨워야 한다. "그의 대 표작 [기탄잘리]에는 생의 애수와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한 기쁨의 음률이 물결치고 있다. 인도의 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이를 두고 "유한에서 무한으로 이어지는 영혼의 노래"라고 말하고 있다. 제10권은 밀라레빠의 11) 노래들이다. 11)초인적인 고행과 아름다운 시로 유명한 밀라레빠는 티벳 불교사에서 가장 높이 선 봉우리이며, 그의 전기와 노래는 티벳 국민의 중요한 재산으로 여겨지고 있 다. 티벳과 네팔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태어난 밀라레빠의 전설적인 생애는 7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 후견인으로 지명된 큰아 버지는 그의 전재산을 강탈했으며,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거지와 같은 생활로 전락했다. 이 원한을 풀기 위해 유명한 마술사의 제자가 된 젊은 밀 라레빠는 흑마술로써 큰아버지의 집을 파괴하여 친척을 몰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자신의 까르마를 깊이 깨달은 밀라레빠는 정도를 구하기 위해 스승을 찾 았다. 마침내 38세의 나이에 그는 인도에서 밀교를 배워온 당대의 스승 마르빠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에 대한 깊은 신앙과 인내가 인정되어 마침내 스승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은 밀라레빠는 동굴에서 홀로 명상하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그 수행 과정을 노래로 불렀으며, 그것이 바로 [미라레빠 십만송]이다. [밀라레빠 십만송], 티벳에서는 그 책을 그렇게 부른다.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다 손님도, 주인도, 흰 국화도 아아,너무도 아름다운 시간이다.저 흰 국화.....아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초라한 것이다. 내 앞에 다가온 이것을 설명할 길 없다. 흰 국화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다 손님도, 주인도, 흰 국화도 이 아름다움 때문에 내 귀에는 바깥의 소음들도 들리지 않는다. 내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다. 눈물, 그것은 미지의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다. 침묵의 언어. 2-----------------------------p33 어제의 목록에서 몇 권의 중요한 책들을 빠뜨렸다. 그 점을 미안하게 여긴다. 짜 라투스트라와 미르다드, 장자, 노자, 예수, 크리슈나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것들 보다 훨씬 중요한 책들을 잊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칼릴 지브란 1)의 [예언자]를 빼놓을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믿어지 지 않는다. 1)1883년 레바논에서 태어나 열 두 살이 되던 해 전가족과 함께 미국의 보스톤으 로 이주하였다가 2년 후에 고집을 부려 혼자 레바논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베 이루트의 유명한 '지혜의 학교'를 다닌 후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여행하면서 그 림을 그렸고, 그 길로 유럽으로 갔다. 1908년에는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이 시기에 유명한 조각가 로댕을 만나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로 댕은 지브란의 위대한 미래를 예언하기도 했다. 3년간 미술을 공부한 뒤 미국으 로 돌아온 지브란은 1931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의 한 아파트 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예언자]와 [부러진 날개], [사람의 아들 예수], [예언자의 정원] 등 지브란 특유의 종교적 색채의 작품과 그림을 발표하였다. [에언자]는 지 브란의 대표작으로 현대의 성서라고 불리울 만큼 20여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 인에게 읽혀 오고 있다. 지브란이 영어로 쓴 최초의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인 이 [예언자]는 그가 베이루트의 '지혜의 학교'를 다닐 때인 열 다섯 살 때에 최초로 구상되어 1924년 세상에 발표될 때까지 26년간 수없이 다시 써졌다. 지브란만의 독특한 황색 노트에 쓰여진 이 작품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영향을 받아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를 대변자로 내세웠듯이 가상의 영적 스승 '알무 스타파'의 입을 빌어 사랑과 결혼과 노동 등 삶의 여러 현상들에 대한 심오한 통 찰과 진리를 역설한다.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아직도 나를 부담스럽게 하고 있다. 그 부담에 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누구에게 미안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저 최고의 책인 수피2)의 [더 북]을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 2)회교 신비주의 수도승과 그 신비가를 지칭하는 말로 원래 '수프'는 '양털'이란 뜻이다. 그들이 무더운 사막지방에서 두꺼운 양털옷을 입고 내면의 '서늘한 곳' 으로 침잠하는 수행을 실천했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루미, 하킴 사 나이, 아타르 등 불후의 시인들과 만수르, 이븐 엘 아라비 등의 위대한 스승들을 탄생시켰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세상의 소유가 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그들은 지적인 탐구와 경전 연구를 통한 신에의 접근이 아니라 삶 속에서 헌신과 가슴의 열정을 통한 신과의 만남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러한 그들의 종교는 13세기 인도로 건너가 즈나니(지) 위주의 종교였던 힌두교 에 깊은 영향을 미쳐 박티(애) 중심의 새로운 민중종교의 불씨가 되었다. 아마도 내가 그 책을 빼놓은 것은 그것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텅빈 백지들로 만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천 2백년 동안 수피의 수도승들은 대단 한 존경심으로 그 책을 전수해 오면서 그것을 읽고 연구했다. 아무 글씨도 써져 있 지 않은 백지인데 무엇을 읽고 연구한다는 것인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텅빈 백지를 오랫동안 주시해 보라. 그러면 그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 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연구이며, 진정한 작업이다. 내가 어떻게 [더 북]을 빼놓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이제 누가 나를 용서할 것인가? [더 북]은 맨 나중이 아니라 첫번째로 언급되었어야 할 책이다. 그 이상의 책이 있 을 수 없다.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책, 무를 담고 있는 책, 그리고 나아가 무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을 그 어떤 책이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노트에는 무를 기록해야 한다. '무'는 '없음'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가득차 있음'이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수냐타(공)라는 독특 한 말로 표현한다. 동양에서는 '수냐타'가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충만, 가득참을 의미한다. 너무 나 충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더 북]의 메세지이다. 이 책을 반드시 내 도서 목록에 포함시켜야 하리라. 오늘의 제1권은 수피의 [더 북]다. 제2권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이다. 내가 이것을 빼놓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작품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모방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토록 형식적 이고, 예의를 중시하는 거짓말장이들인 것이다. [예언자]가 아름다운 책인 까닭은 그것이 짜라투스트라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제3권은 [열자]이다. 나는 이미 노자를 말했다. 장자를 말했다. 그런데 열자3)을 잊었다. 3)장자와 함께 중국 전국 시대의 도인으로 이름은 어구였다. 그의 책 [열자]는 노 자의 사상에 기초를 두고 우주의 본체는 허무라 여겨, 이것을 황당무계한 이야기 에 붙여서 설명하면서 허무자연의 생활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 였다. 하루는 열자가 제자들과 위나라로 가는 도중에 길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 다. 길 곁에는 백년도 넘어 보이는 해골이 뒹굴고 있었다. 열자는 쑥대를 뽑아 그 해골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직 저 죽은 자와 나만이 알 것이다. 참으로 그대들, 일찍이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는 것이다. 죽은 자는 과연 행복한가? 살 아 있는 우리가 과연 행복한가?" 열자는 노자와 장자의 종합이며 극치다. 열자는 그 삼대에 속한다. 노자의 제자가 장자이며, 장자의 제자가 바로 열자이다. 열자는 제자의 제자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그를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은 더없이 아름다우며, 반드시 [ 내가 사랑한 책들] 목록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제4권, 이것 역시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잊고 말았다. 내가 이 책을 잊은 것은 아마도 플라톤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은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평범한 철학자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실로 가 치있는 책이며, 그것을 빼놓아선 안된다. 제5권. 나는 또 [달마조사어록]을 잊었다. 고오타마 붓다에 대해 말할 때면 나는 언제나 보리달마 4)를 잊는다. 4)고오타마 붓다에서 마하가섭으로 전수된 선의 전통을 중국에 전한 인물.527년 중국 남방에 도착하였고 그 즉시 양 무제에 의해 수도인 남경으로 초청되었다. 독실한 불교도인 황제를 알현하는 중에 황제는 "내가 즉위한 이래 무수히 많은 절을 지었고 무수히 많은 경전을 만들었고, 수많은 승려를 먹여 살려 왔는데 이 모든 것이 무슨 공덕이 되겠소?" 라고 묻자 "전혀 공덕이 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아울러 불교의 거룩한 교리 중에서 첫번째 원칙이 무엇이냐고 황제 가 묻자 거룩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마침내 화가 난 황제가 "내 앞 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요?"라고 묻자 모르겠다고 말하고는 신발 한 짝을 머리에 얹고서 가버렸다.그후 하남지방의 숭산으로 가서 소림사에 머물며 9년 면벽 끝에 혜가를 첫 제자로 받아들였다. 536년 달마는 자신의 입적이 기까왔음 을 느끼자 네명의 제자를 불러 깨달음에 대한 심득을 점검한 다음 혜가에게 법 통을 물려 주고는 다시 히말라야로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그것은 보리달마를 그의 스승 붓다의 일부분인 것으로 느끼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보리달마는 스승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섰다. 그는 위대한 제자였다.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스승조차도 그에게 질투를 느꼈을 정도다. 보리달마 자신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몇몇 제자들, 이름을 밝히지 않 았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몇몇 제자들이 보리달마의 가르침을 기록했다.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이 기록들은 코히누르 5)보다 더 값진 것이다. 5)인도산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로 영국 황실의 왕관에 장식되어 있다. '코히누르'의 뜻을 아는가? 그것은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다. '누르'는 빛이고, '코히'는 세상이다. 코히누르를 비유로 사용하라고 한다면, 그렇다, 나는 주저없이 보리달마의 이름없는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이 소책자를 택할 것이다. 제6권. 나는 또한 [루바이야트]를 빼놓았다. 내 눈에 눈물이 어린다. 다른 것들을 잊은 것에 대해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루바이야트]에 대해선 그럴 수 없 다. 오직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오직 눈물로써 미안함을 표현할 수 있을 뿐, 언어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오마르 카이얌 6)의 [루바이야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책 중 의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6)11세기 후반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카이얌'이란 이름은 '천막 제조 업자'라 는 그의 부친의 직업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나라의 봉급을 받아 가면서 수학 연구에 전념했고 1074년에는 당대의 통치자의 도움을 받아 달력 개 혁에 필요한 천문학 관측을 하기도 했다. 카이얌은 수학과 천문학 이외에도 철 학, 법학 및 역사학의 권위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12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명성이 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은 그가 썼다고 하는 [루바이](사행시라는 뜻 으로,'루바이야트'는 루바이의 복수형)덕분이다. 카이얌은 모두 1천 편에 달하는 루바이를 썼는데 이 시들을 통해서 자기의 불가지론적인 인생철학과 철저한 현실 긍정의 생활 태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번역상으로는 의미가 통하지만 그 정신은 완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 이책의 번역 자는 그 정신을 살려내지 못했다.[루바이야트]는 대단히 상징적인 작품인데, 그 번 역자는 아주 고지식하고 상상ㅇ력 없는 영국 친구였다. [루바이야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루바이야트]는 오로지 술과 여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술과 여자를 찬양하는 노래다. 여기에서 이 책의 많은 번역자들은 모두 핵심에서 빗나가고 말았다. 빗나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저자 오마르 카이얌은 한 사람의 수피였다. 타사우프의 사람, 즉 앎에 도달한 사람이었다.따라서 그가 여자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곧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수피들은 신을 그런 방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님이여,아아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그들은 언제나 신을 여성으로 표현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세상의 그 누구도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신을 여성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오직 수피들만이 신을 '님 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내가 님과 함께 있을때 그곳에 '술'이 있는 것이다. 이때의 '술'은 알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하는 이와 그 대상이 만날 때, 스승과 제 자가 만날 때, 찾는 자와 그 찾음의 대상이 만날 때, 헌신자와 신이 만날 때 그곳 에 연금술이 일어난다.탈바꿈이,하나의 발효가 일어난다. 그것이 술인 것이다. [루바이야트]는 세상에서 크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그냥 지나쳐을 것이다. 제7권은 잘랄루딘 루미 7)의 [사행시편]이다. 7)수피즘(회교 신비주의)이 낳은 위대한 시인을 꼽으라면 당연이 루미다. 루미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인 '발크'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몽고족의 침입을 피해 오랜 여행 끝에 터어키의 '코냐'에 정착했다. 루미는 대부분의 생 애를 이 코냐에서 보냈다. '루미'라는 이름도 '터어키 지방 출신'이란 뜻이다. 루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와 신학자, 법률학자의 집안이었다. 루미도 부친의 뒤를 이어 왕실의 후원 아래 전통적인 종교 교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36세 때인 1244년에 늙은 수도승 샴스를 만나면서 루미는 완전히 다른 삶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미는 전통에 입각한 평범한 종교학자요, 절제를 중요 시하는 금욕주의자였다. 루미를 만난 샴스는 루미의 책들을 모두 우물 속에 집어 던져 충격을 주었으며, 두 사람은 일주일이 넘도록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루미 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 내가 신으로 생각했던 존재를 오늘 나는 한 사람 속에 서 만났다."샴스를 만나기 전에는 루미는 시인이 아니었다. 샴스와의 만남을 통 해 루미는 시인이 될 수 있었고, 그의 시는 회교 신비주의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말했다. "신으로 가는 데에는 많은 길이 있다. 그 중 에서 나는 춤과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작은 우화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위대한 것은 오직 우화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예수는 우화를 빌어 이야기했으며, 이 [사행시편]도 마찬가지다. 왜 내가 이 책을 잊었던가? 나는 우화를 더없이 사랑한다.예수의 우화, 장자의 우화 그리고 루미의 우화.... 내가 이 책을 뺀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지금까지 나는 이 책의 우화들을 수없이 인용해 왔다.아마도 이 책이 나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새삼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그러나 그것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나는 루 미에게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다. 제8권은 [이사 우파니샤드]이다.내가 왜 이 책을 잊었는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나는 그것을 마셨다.그것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그것은 곧 나 자신이다. 나는 수천 번도 넘게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책은 무척 짧은 우파니샤드 8)이다. 8)고대 인도의 철학서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가까이 앉는다'라는 뜻 이며,스승과 제자가 마주앉아 비교진의를 전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일본에선 보통 [오의서]라고 번역한다.현재 200여종이 전해지고 있으며,성립연대는 B.C. 600-300년경이다.각각의 우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동일 작가가 일정한 형식 아래 서술한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결집되고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수행과 고행에 의해 철저한 범아일여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윤회의 사슬에서 해 탈하며 불멸의 세계에 사는 것을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삼았다.여기서 관념론,실 재론,유신론 등의 여러 체계가 생기고 많은 갈래의 인도철학이 탄생하였다. 우파니샤드에는 108종류가 있는데 [이사 우파니샤드]는 그중에서 가장 짧은 우파니 샤드로서 우편엽서 한 면에 충분히 인쇄될 수 있을 만큼의 적은 분량이다.하지만 그 안에는 나머지 107가지 우파니샤드의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따라서 그 나머지 107 가지의 우파니샤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그것들의 정수가 곧 [이사 우파니샤드]인 것이다. '이사'는 신성을 뜻한다.놀라운 일이지만 인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 고 부르지 않고 이사라고 부른다.이사는 아람어의 '예수아',그리고 영어의 '요수 아'에 훨씬 가까운 말이다.예수의 부모는 예수를 '이에수'라고 불렀을 것이다.'이 에수'가 너무 길기 때문에 그 이름은 인도로 건너오면서 짧아져서 '이수'로 변했 다.인도인들은 '이수'가 '신'이라는 뜻의 '이사'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그를 '이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사 우파니샤드]는 깊은 명상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이들의 가장 차원 높은 가르침이다. 제9권....조지 구제프 9)와 그의 책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는 잊었다. 9)1872-1949.러시아명으로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구르지예프.그리스계 아르메니 아 사람으로 신비에 싸여 있음.서양인으로선 처음으로 동양의 종교와 신비에 관 심을 갖고 동양을 순례.티벳,인도,중국,중동 등지의 힌두교,불교,수피 사원을 찾 아가서 각기 다른 종교의식과 명상 비법을 배움.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서양 인에게 알맞게 개조하여 유럽에 소개했다.그의 명상법은 수피 무용을 중심으로 구제프 자신이 음악을 만들어 동작과 소리를 통하여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켜 주 는 데 특징이 있다.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그 룹 활동들이 서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다.대표작으로는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 긴 [모든 것]이 있는데,그 1권이 [벨제붑이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고,2권 이 [위대한 만남]이다.2권은 제목 그대로 그가 만난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자서 전적 기록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그의 사후 신비에 싸인 생애를 밝히기 위한 여 러 연구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최근 그의 스승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추적한 [구제프의 스승들]이 발간되었다.저자 라피엘 레포트가 터키,이란,이라크,아프가 니스탄,바그다드,다마스커스,예루살렘,카이로 등지를 여행하면서 찾아낸 구제프 의 스승들은 양탄자 직공,서예가,구리 그릇 제조가 등 수많은 세속인들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이 책이 실로 이상한,읽을 수도 없는 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나 를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 이다.나는 지금까지 많은 구제프의 추종자들을 만났지만 [모든 것]을 끝까지 읽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든 것]은 1천 페이지에 달하는 실로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이사 우파니샤드] 와 정반대되는 책인 것이다.그리거 구제프는 대단한 장난꾸러기 성자였다.내가 '장 난꾸러기 성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이해해 달라.그는 그런 식으로 책을 쓰기 때 문에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한 문장이 몇 페이지씩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그래서 문장 끝에가면 앞부분의 내용을 잊고 만다. 그리고 구제프는 나처럼 자신이 만든 단어를 곧잘 사용한다.그것도 이상한 단어들 이다.예를 들어 그는 쿤달리니 에너지 10)에 대해 쓰면서 그것을 '쿤더버퍼'라고 불렀다.'쿤달리니'가 그에게서는 '쿤더버퍼'로 변하는 것이다. 10)인체에는 여섯 개의 챠크라(에너지 저장고)가 있다고 한다.이 여섯 개의 챠쿠 라 가운데 가장 낮은 챠크라로부터 냉각 상태에 있던 에너지가 기체화되면서 여 섯 개의 챠크라를 뚫고 상승하는 것,또는 에너지의 상승 자체를 쿤달리니라 한 다.구렁이 또는 뱀으로 고대로부터 상징되어 왔다. 구제프의 [모든 것]은 실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하지만 이 책 속의 다이아 몬드들은 평범한 돌들 틈에 숨겨져 있다.그 다이아몬드들을 발견하기 위해선 수없 이 찾고 뒤져야 한다. 나는 이 책을 한번 읽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었다.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이 책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더욱 더 그의 '장난끼'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진정한 앎에 이르지 못한 평범한 자들의 눈에 띄지 못하도록 그가 교묘히 숨겨놓은 보석들을 갈수록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앎이란 아직 그것을 받아드릴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용지물인 것이다.앎은 경 솔한 속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추어져야 한다. 오직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드러나야 한다.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구제프가 이책을 그토록 이상한 방식으로 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구제프의 [모든 것]만큼 이상하고 기이한 책은 세상에 없으며,이 책은 제목 그대 로 확실히 모든 것 그 자체다. 제10권....나는 이 책을 염두에 두었었다.하지만 저자가 오펜스키 11)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았다. 11)1878년 모스크바 태생.저널리즘 계통에서 일을 하다가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껴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저서들을 쓰기 시작했다.이후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영적 스승을 찾다가 결국 실패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1915년 집 근처 카페에서 위대한 인물 조지 구제프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그후 8년간에 걸쳐 제자로 수행하다가 스승을 떠나 런던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했다.베네트 등과 함께 구제프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1947년 런던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 다. 오스펜스키는 구제프의 제자였는데 나중에 그를 배반했다.스승에 대한 배반 때문에 나는 이 책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 책은 그가 스승을 배반하기 전에 쓴 작품이다.그래서 마침내 나는 그것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책의 제목은 [기적을 찾아서]이다.실로 아름다운 책이다.그것이 한 사람의 제 자에 의해서,아직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한 제자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 에 더욱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그는 한 사람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배반자 유다의 역할까지 했다.스승 구제프를 배반한 것이다.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만,원래 이상한 일들로 가득찬 것이 세상이 아니던가! 오스펜스키의 책은 구제프 자신이 쓴 책보다 훨씬 분명하게 구제프의 가르침을 설 명해 준다.어쩌면 어떤 차원에서는 구제프가 오스펜스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그를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그것은 내가 기트 바르티 12)를 나의 매개체 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지금 바르티는 내 이야기를 기록해 나가고 있고,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완전히 감은 눈으로도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나는 지켜보는 자,언덕 위에서 지켜보는 자이다.지켜보는 일 외에 다른 할 일이 나에겐 없다. 제11권,이 책은 스승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다.월트 휘트먼 13)의 [풀잎]이 그것이다.그러나 어떤 신비의 영이 이 시인의 의식 속으로 뚫고 들어갔음에 틀림없다.이 시인은 한 자루의 텅 빈 대나무 피리의 역할을 했다.그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곡조는 피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곡 조의 주인공은 피리가 아니다.월트 휘트먼은 한 자루의 미국 대나무 피리에 불과 했던 것이다. [풀잎]은 실로 아름다운 시집이다.신에게서 흘러넘친 무엇인가가 이 시인을 사로 잡았음에 틀림없다.내가 아는 한 월트 휘트먼을 빼고는 어떤 미국인도 그러한 것에 사로잡혀 시를 쓸 수가 없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방해하지 말라!잠자코 기록이나 하라.나중에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 이다.이것을 빠뜨리고,저것을 빠뜨렸다고.받아적는 일에만 열중하라.시간이 되면 내 스스로 이야기를 멈출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는가? 사실 나에게 있어서 시간이 끝난 지는 이미 오래다.오늘이 아니라 25년 전에 모든 것이 끝났다.나는 현재 '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마치 편지의 P.S.(추신)처럼. 하지만 P.S.(추신)가 편지의 본문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아아,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 높은 곳에서도 저 골짜기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어쨌든 좋은 일이다.그 웃음소리는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연결시켜 준다. 아아,이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 수는 없는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나를 배반하지 말라. 인간은 유일한 겁장이가 아닌가. 제자들은 유다가 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시간이 되었다면 이제 끝을 맺어야 할 것이다. 아아,좋은 시간이...... 3----------------------------------P47 다시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참으로 골치아픈 일이 벌어졌다.어젯밤 나는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밤새 내 방문을 두들겨대는 것이었다.왜 자기의 책을 빼놓았느냐는 항의였다. 그중에서도 내 방문을 가장 요란하게 두들겨댄 것은 중국의 현자 승찬 1)이었다. 1)?-606.보리달마의 법통을 이어받은 혜가의 제자.나이 40에 이르러 풍병에 걸렸 다가 혜가를 만나 문답을 주고받은 끝에 '본래 풍병에 걸릴 수 없는 본체'를 깨 달아 혜가의 문하에 출가했다.나중에 불교 탄압 정책을 피해 산으로 숨었다가 어 느날 모인 대중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건네 주고는 홀연 세상을 떠났다."차별하고 분별하지 않으면 도에 이르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다"라고 시작되는 그의 [신 심명]은 선종 최고의 경전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심지어 문을 걷어차기까지 했다.이 신비주의자들은 아무도 못 말린다.어느 순 간에 그들이 그대의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그대가 애인 과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승찬이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그들은 언제나,어느 시각에나 찾아올 수 있다.그들은 에티켓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승찬은 나를 찾아와 무슨 말을 했던가?그는 나에게 따졌다. "왜 내 책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가?" 아아,그렇다.그것이 사실이었다.내가 그의 책을 내 도서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즉,그의 책은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다.따라서 그 의 책을 이야기하고 나면 더 이상 다른 책들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의 책만으로도 충분하다.그의 책은 [신심명]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신'은 영어의 '죄sin'와 같은 철자가 아니라 'hsin'으로 써야한다.이제 그대는 중국어의 미묘함을 이해할 것이다. 신 씬밍....... 승찬이여,좋다,당신의 책을 포함시키기로 하겠다.승찬의 책이 오늘의 첫번째 책 이다.사실 이 책이 맨 먼저 언급되었어야 할 책이다.그런데 나는 벌써 스무 권의 책을 이야기했다.승판에겐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그러나 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든 하지 않든,승찬의 [신심명]은 최상의,제1의 책이다. [신심명]은 길이가 아주 짧은 책이다.만일 먼훗날 구제프가 [모든것]이라는 방대 한 책을 쓰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승찬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을 겄이다.왜냐하면 [ 모든것]이라는 제목은 사실 승찬의 작은 책에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구제프는 그 제목으로 1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썼지만,승찬의 몇 개 안 되는 단어들 이 그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의미깊다.그 단어들은 곧바로 그대의 가슴을 파고든 다. 나는 그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그 단어들이 그대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소리 를. 승찬의 책은 [이사 우파니샤드]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짧은 길이의 책이다.하지만 훨씬 더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이렇게 이야기하면 가슴이 아프다.왜냐하면 나는 [이사 우파니샤드]가 최고의 책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하지만 할 수 있는가?승찬 이 그 책을 물리쳤다.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내린다.[이사 우파니샤드]가 졌기 때문 이다.그리고 또한 승찬이 이긴 것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기도 하다. 승찬의 책은 아주 작기 때문에 그 전부를 손바닥에 적을 수도 있다.그러나 정말로 손바닥에 적으려면 오른손에 적지 말고 왼손에 적으라.사람들은 "오른쪽은 옳고,왼 쪽은 그르다"고 말하지만,나는 왼쪽이 옳고 오른쪽이 그르다고 말한다.왼쪽은 그대 내면의 아름다움을 뜻한다.따라서 승찬은 왼쪽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다.나는 그 것을 잘 안다.지금까지 나는 사람들의 왼손을 통해서,왼쪽을 통해서,그들의 여성적 인 측면,그들의 음기운을 통해서 수많은 이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양기운을 통해선 나는 누구의 내면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양'이라는 단 어 자체가 접근금지의 느낌을 준다.그것은 "물러나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정 지!들어오지 마시오.개조심!"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오른쪽이 바로 그렇다.오른쪽은 그대 의식의 잘못된 부분에 해당된다.그것은 쓸모 가 있긴 하나 하인과 같은 것이다.오른쪽이 절대로 주인이 되어선 안 된다.따라서 승찬의 [신심명]을 손바닥 위에 적으려면 왼손에 적으라는 것이다. [신심명]은 실로 아름다운 책이다.단어 하나하나가 황금니다.어떤 단어도 삭제할 수가 없다.진리를 전하는 데 꼭 필요한 단어만이 그곳에 적혀 있다.승찬은 틀림없이 대단히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적어도 그가 [신심명]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나는 이 책에 대한 강의를 여러날 한 적이 있다.그때만큼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없 었다.승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그때가 내 수많은 강의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 던 순간들이다.말과 침묵이 동시에 그곳에 있었다.말을 하면서도 그곳에 말이 없었 다.승찬은 오직 '말없음'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언어의 인간이 아니라 침묵의 인간이었다.그는 오직 꼭 필요한 것만을 말했다. 승찬선사여,당신을 잊은 것을 용서해 달라.당신 때문에 나는 내 잠을 방해하면서 까지 방문을 두드린 몇 사람들을 기억하게 되었다.따라서 그들에 대해서도 언급하 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의 제1권은 승찬의 [신심명]이다. 제2권은 오스펜스키의 [테르티움 오르가눔]이다.그가 구제프를 알기도 전에 이 책 을 썼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 지도 목하는 상태에서 이 책을 썼다.그 자신은 나중에 구제프를 만난 후에야 자신 이 쓴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구제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가 한 첫 마디 말은 이러한 것이었다. "당신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테르티움 오르가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 니다.비록 내 자신이 그 책을 쓰긴 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즉,그 책 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영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매개체로 해서 쓴 것이라고." 아마도 그를 통해서 이 책을 쓴 것은 바로 그 장난꾸러기 구제프였을 것이다.아니 면 수피들이 '가장 경지 높은 장나꾸러기'라고 부르는 누군가가 오스펜스키를 통 해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제목의 뜻은 '제3의 논리학'이다.오스펜스키가 [테르티움 오르가눔]을 쓴 것은 기 적이다.세상의 언어로 된 책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이다. 사실 세상에는 위대한 책이 세 권 있다고 한다.첫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학]이고,두번째는 베이컨의 [신논리학]이다.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오스펜스키의 [ 테르티움 오르가눔]이다.'테르티움'은 '세번째'라는 뜻이다. 책의 서문에서 오스펜스키는 자만심이 아니라 아주 솔직하고 겸허하게,그리고 장 난스럽게-오직 현자만이 장난을 칠수 있다-말했다. "세번째가 존재하기 전에는 첫번째도 존재하지 않았다.첫번째가 세상에 나오기 훨 씬 전부터 이미 세번째는 존재했었다." 오스펜스키는 [테르티움 오르가눔]을 쓰면서 에너지를 전부 써버린 것 같다.그 책 이후로 그는 두번 다시 똑같은 경지를 보여 주지 못했다.[기적을 찾아서]라는 책에 서 구제프의 가르침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다시는 그러한 깊은 통찰력을 나타내지 못 했다. 구제프를 배반하고 나서 오스펜스키는 생애 마지막으로 [테트리움 오르가눔]을 능 가하는 대작을 쓰려고 무한히 노력했다.마지막 시도로서 그는 [제4의 길]이라는 제 목의 책을 썼지만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다.그 책은 좋은 책이긴 하다.대학의 한 교 과 과목으로 선정하기엔 딱 알맞은 책이다.어떤 것을 낮게 평가할 때 나는 이런 표 현을 쓴다. [제4의 길]은 대학 강의의 한 과목으로 선정될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그 책은 오스펜스키의 저서 중에서 가장 형 편없는 책이다.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서였다. 위대한 것을 창조하는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노력하면 그대는 실패하고 만 다.그것은 노력없음을 통해서,무위를 통해서 찾아온다.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테트리움 오르가눔]에서 오스펜스키에게 그 일이 일어났지만 오스펜스키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테트리움 오르가눔]에 적힌 말들은 너무나 힘있기 때문에 그것을 쓴 저자가 아직 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며,아직도 스승을 찾고 있고,아직도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나는 하루종일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매우 가난한 대학생이었 다.보수는 형편없었지만 그것이 당시 내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자리였다.그러나 나는 진리 탐구의 강렬한 욕구가 있었기에 밤이면 어김없이 학교를 갔다.낮에는 하 루종일 신문사에서 일을 하고 밤이면 학교를 간 것이다.어떻게 보면 내 이름도 밤에 관계가 있는 이름이다.내 이름 '라즈니쉬'는 달을 의미한다.'라즈니'는 밤이고,'이 쉬'는 신이다.즉 '밤의 신' 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웃으면서 말하곤 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너는 낮에는 하루종일 일을 하고 밤이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니,네 이름을 완성하려는 것인가?" 이제 나는 그 질문을 대답할 수 있다.그렇다.이 말을 대문자로 적으라.그렇다.나 는 평생에 걸쳐 내 이름의 의미를 완성하려고 추구해 왔다.보름달이 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그래서,그 시절 한 가난한 학생으로서,나는 낮 동안에는 하루종일 일을 해야만 했다.하지만 나는 어차피 미친 자,가난은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에게서 책을 빌려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사실 도서관에서조차 책을 빌리는 것을 싫어했다.도서관의 책들은 매춘부와 같은 것이다.나는 책에서 다른 사람들이 해놓은 표시나 밑줄을 발견하는 것이 싫엇다.언제나 나는 새로운 것,겨울 의 흰 눈처럼 때묻지 않은 신선한 것을 사랑해 왔다. [테르티움 오르가눔]은 무척 비싼 책에 속했다.당시 인도에서 내 한 달 봉급은 70 루삐 2)에 불과했다. 2)인도의 화폐단위.1루삐는 약35원. 우연히도 그 책의 정가 역시 70루삐였다.하지만 나는 그 책을 샀다.책방 주인이 놀 라서 말했다. "부자들조차 이 책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지난 5년 동안 나는 이 책을 진 열했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사람들은 책의 정가를 보고는 살 마음을 포기 했다.그런데 낮에는 하루종일 일을 하고 밤에만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인 자네가 어떻게 이 책을 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말했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나는 이 책을 살 것입니다.첫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진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책값이 얼마가 되더라도 살 것입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내가 읽은 첫번째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제3의 논리학이다.오직 세 가지 논리학만이 존재한다.첫번째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것이고,두번째는 베이컨의 것이다.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나의 것이다." 나는 "이 세번째의 것은 첫번째의 것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오스펜스키의 대담성에 전율을 느꼈다.내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그 문장이었다. 나는 책방 주인에게 내 한 달 월급을 몽땅 주었다.그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 이었다.왜냐하면 그 한 달 동안 나는 거의 굶고 지내야만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그 아름다웠던 1개월의 시간들을 나는 기억한다.먹을 것도 없고,입을 것도 없던,심지어 잠잘 곳조차 없었던 그때를.방세를 낼 수 없었기 때문 에 나는 내 작은 방에서 쫓겨났다.하지만 나는 이슬이 내리는 밤하늘 아래서 [테르 티움 오르가눔]과 함께 있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고백하건대,나는 그 책을 거의 가로등불에 의지해서 읽었다.그 책이 곧 나의 삶이 었다.실로 아름다운 책이었다.그리고 이제와서 생각하건대 그 책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책의 저자가 자신이 쓰고 있는 내용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그러한 책을 쓸 수 있었을까?그것은 틀림없이 신의 음모였을 것이다.저 너머의 세계에서 무엇인가가 날아온 것이다.어떤 대행자가 있었을 것이 다. 수피 성자들은 그 대행자를 '키즈라'라고 부른다.키즈라는 안내자가 필요한 사람들 을 안내하는 존재를 일컫는다. [테르티움 오르가눔]이 오늘의 제2권이다. 제3권은 [기트 고빈다],즉 '신의 노래'이다.이 시집을 낸 시인은 인도인들에게 많 은 비난을 받았다.신의 노래인 [기트 고빈다]에서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늘 사랑에 반대하는 인도인들이 이 위대한 시집을 좋아할 리 없었다. [기트 고빈다]는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서 노래로 불러야 한다.이 시집 에 대한 그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하다.이 시집은 어느 바울 3)의 노래,어느 미친 자의 노래다. 3)인도 민중신비주의자를 지칭하는 말 그것을 노래부르고 춤출 때만이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시집의 지은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의 이 름이 무엇이든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겠는가?내가 그의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가 붓다들의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 문이다.하지만 그는 위대한 공헌을 했다. 제4권은......인내를 갖고 듣기 바란다.왜냐하면 나는 열 권을 채워야 하기 때문 이다.그 이상은 셀 수가 없다.왜 열 권까지인가?그것은 내가 열 개의 손가락을 갖고 있어서다.십진법이 만들어진 것은 손가락이 열 개인 것과 관련이 있다.인간은 자신 의 손가락을 사용해서 숫자를 세기 시작했기 때문에 십진법이 기본이 된 것 이다. 제4권은 쿤쿤다의 [사마야사르]이다.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책에 대해 강의한 적이 없다.수차례 결심했었지만 번번이 포기하고 말았다.이 책은 자이나교가 탄생 시킨 책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다.하지만 지나치게 수학적인 책이다.그래서 나 는 이 책에 대한 강의를 포기했던 것이다.나는 시를 사랑한다.만일 이것이 시적인 책이었다면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을 먼저 강의했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강의를 했었다.하지만 아무리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수학자나 논리학자인 사람에 대해서는 강의하지 않았 다.수학은 너무 딱딱하고 논리는 사막과 같다. 쿤드쿤다의 책은 아름답다.하지만 나는 단지 그 정도만 말할 수 있다. 그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은,그것이 너무 수학적인 책이기 때문이다.수학 역시 그 자체의 아름다움 그 자체의 리듬을 갖고 있다.그래서 나는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그것은 그 자 체의 진리를 갖고 있다.하지만 너무 답답하고 너무 '오른손'에만 쏠려 있다. [사마야사르]는 '본질'이라는 뜻이다.그대 만일 우연이라도 쿤드쿤다의 [사마야사 르]를 갖게 되면 절대로 그 책을 왼손에 들지 말라.오른손으로 그 책을 들라.[사마 야사르]는 오른손에 해당하는 책이다.그 점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이 책에 대해 강의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물론 눈물을 머금은 상태에서, 왜냐하면 나는 그 책을 쓴 사람의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이다.나는 쿤드쿤다를 사랑한다.동시에 나는 그의 수학적인 표현법을 무척 싫어한다. 제5권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it 4)의 `처음과 마지막 자유The First and the Last Freedom'이다. 4)(인도 마드리스 근처의 마다나폴이라는 작은 마을에 서 태어났다. 여덟번째 아이로 태어난 그는 힌두교 전통에 따라 인도의 신 비시누의 여덟번째 화신인 크리슈나의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열 한 살 때 어머니가 죽고 나서 신지학회의 회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신지학회 본부 내에서 살기 시작했다. 열 다섯 살인 1909년 마드라스의 해변가에서 놀다가 신지학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 던 영적 신비가 리드비터 Leadbeater에게 발견되어 미래의 구세주(마이트레이야,재 림 예수)가 내려올 육신으로 선택되면서 인생의 전환을 맞이했다. 수많은 신도들의 숭배를 받으면서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유체이탈을 통해 여러 신비의 영적 스승들 을 접견한 그는 `동방의 별의 교단'을 이끌면서 영국, 인도, 유럽, 네덜란드, 호주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무렵 `대사의 발 아래' 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러나 교단내의 암투와 허구성에 염증을 느끼고 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35세 때 어느 강연회에서 "진리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 어떤 길,어떤 종교, 어떤 종파로도 진리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별의 교단 해체 선언문'을 발표하여 충격을 던진 채 홀로 교단을 떠나 전세계를 여행하면 서 진정한 구도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이후 그의 강연과 대화집은 수십 권의 책으 로 발간되어 독자들을 사로잡았으며, 1986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오자이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어떤 형식의 단체나 추종세력을 만드는 것을 배척하면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벗'으로 남기를 원했다.) 나는 크리슈나무르티를 사랑한다. 동시에 나는 그를 싫어한다.그가 진리의 대변자 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지성 때문에 나는 그를 싫어 한다. 그는 너무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다. 어쩌면 그는 저 괴물같은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의 논리 그것을 나는 싫어한다. 그의 사랑, 그것을 나는 존경한다. 여하튼 그의 책은 실로 아름답다. 이 책은 그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첫번째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 책이 기도 하다. 다른 많은 책들이 그 이후에 쏟아져 나오긴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 첫 번째 책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예언자'를 썼다. 그후 그는 평생에 걸쳐 그것보다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오스펜스키 역시 구제프를 만나 수년 동안 함께 생활하고 작업을 했지만 `테르티움 오르가눔'을 능가 하는 책을 쓰지 못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책`처음과 마 지막 자유'는 말 그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제6권은 또다른 중국 선사의 책이다. 그것은 `전심법요The Book of Huang Po'이다. 이 소책자는 논문이 아니라 짧은 단상 모음집이다. 진리는 논문으로 쓰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진리 에 대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다. 어찌보면 박사학위라는 것은 진리 를 알지 못하는 바보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황벽선사5)는 짧은 단상들을 남겼다. 5): ?-850.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선원의 규율을 체계화시킨 백장의 제 자이며, 임제의 스승이다. 그는 본체를 마음, 즉 일심이라고 보았다. 이 마음이 유 형의 모든 것의 창조자요 진정한 지혜의 원천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구도자가 이 근 본 마음을 만들고, 자기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으며, 수도생활에 있어서 현상과 수 행에 얽매이기 숩다는 것이었다. 선종사에 있어서 황벽의 중요성은 그의 견해가 가 장 분명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강한 개성과 철저한 방법이 제자 임제에게 깊은 영향 을 주었다는 것이다. 제자 배휴에 의해서 기록된 `전심법요'와 완능록'이 있다. `전 심법요'는 두 가지 영역본이 있으며, `완능록'은 황벽이 여러 제자들과 나눈 대화집 이다.) 겉으로 보면 그 단상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렇지 않다.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것에 대해 명상할 때 그대는 그것들의 연결성 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쓰여진 책 중에서 가장 명상적인 책이다. `전심법요'는 `황벽선사의 가르침The Teachings of Huang Po'이라는 영어식 제목 으로 번역되었다. 그 번역은 틀린 것이다. 황벽과 같은 사람은 절대로 가르침을 펴 지 않았다. 이 책속에 가르침 따위는 없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깊은 명상 속 으로, 한없이 깊은 침묵 속을 여행을 떠나야 한다. 제7권은 `회해선사어록'이다. 이 책 역시 영어로는 `회해선사의 가르침 The Teachings of HuiHi'라는 제목으로 번 역되였다. 불쌍한 서양인들은 인생에서 가르침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한다. 특히 서양 여자를 조심하라! 조심하지 않으면 학교 선생에게 붙잡힌 꼴이 되고 말 테니까. 회해6)와 황벽은 둘다 스승이었다. 6):백장회해를 말함. 720-814. 최초로 체계화한 `백장청규'를 만들었다. 백장의 사 원 제도의 독특한 점은 농사짓는 의무를 도입한 데에 있다. 백장 이전에는 승려들이 생산에 종사토록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백장의 좌우명은 `하루 일 안하면 하루 먹지 않는다.'였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다. 그의 말년에 관해서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즉 제자들은 백장이 너무 나이 많음을 염려해서 경작 일을 그만하도록 권유를 했는데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연장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백장 은 사방으로 찾으려다 찾지 못하자 연장을 돌려줄 때까지 단식을 했다.) 그들은 함 께 나눌 뿐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회해선사의 가르침'을 말해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8권....이 책이 오늘의 마지막 책이다. 그리고 영원히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른 다. 내일 일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또다른 귀신들이 밤새 내 방문을 두드릴지 모른다. 지금까지 나는 지상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적어도 십만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이상일 수는 있어도 그 이하는 아니다. 왜냐하면 십만 권 이 상이 되면서부터 나는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내일 어떻게 될지 나 는 모른다. 어쨌든 오늘의 제8권은....앞에서 말한 `기트 고빈다'에 대해서 약간의 미안함이 느껴진다. 그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저자의 이름을 말하겠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제8권을 설명하겠다. 나에게 무한히 깊은 감동을 안겨준 이 제8권은 약간 이상한 책이다. 분명히 이상한 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이 책은 나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이 무엇인가 알면 그대는 그대는 놀랄 것이다. 짐작해 보라, 어떤 책일지.... 아마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산스크리트 책도, 일본 책도, 아랍책도 아니다. 그대는 이 책을 잘 알고 있 다. 대부분의 집에 이 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서에 수록된 솔로몬의 오래, 즉 아가서'이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모든 유태인 의 책 중에서 나는 오직 이 `아가서'만을 사랑한다. `아가서'는 그동안 대단히 잘 못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소위 심리학자라고 하는 자들, 특히 프로이드 학파의 이 론가들 때문이다. 그들은 `아가서'를 가능한 한 최악의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들 은 그것을 성적인 노래라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그렇지않다. `아가서`는 관능적이긴 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대단히 관능적이다. 하지만 성적이진 않다. 넘치는 생명력이 그곳에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관능적인 것이다. 하지만 성적이진 않다. 성 이 아 노래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잘못 된 이해를 심어 주어선 안 된다. 심지어 유태인들조차도 이 책을 멀리해 왔다. 그들 은 그것이 구약성서에 포함된 것은 다만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은 `아가서'야말로 구약성서 전체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유일한 부분이다. 나머 지 다른 것들은 불 속에 던져 버려도 아깝지 않다. 내 시간이 다 되었는다? 안 됐 군. 그대는 `그렇다'하고 말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어쨌든 아름다 운 날이다. 감사하다. 옴 마니 팟메 훔 이 아름다운 순간에 이야기를 끝맺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 `아니다'는 인도인들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하는 말이다. 깨 달음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더 이상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아 니다, 아니다,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체험이 있고 난 후에 더 이상 생을 계속할 이유가 무엇인가? 4 이제 다시 받아적을 준비를 하라 기트 바르티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세상은 그 만큼 가난해졌을 것이다. 플라톤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붓다나 보리달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 역시 제 자들의 기록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마하비라1)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고오타마 붓다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었던 자이나교의 해탈자. 인도 바이샬리 지방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결혼해서 딸까지 낳았으나 양친이 세상 을 떠난 후 형의 동의를 얻어 가산을 정리하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12년간의 온 갖 방랑과 고행 끝에 대각을 이루었다. 마하비르, 또는 마하비라는 그의 존칭으로서 번뇌를 물리치고 해탈을 얻은 자라는 뜻이다. `지나'라고도 불리웠는데, 그것은 `승 리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서 `자이나교'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나는 왜 그런 이 야기가 전해지는지 이해한다. 실제로 마하비라가 말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 다. 그것은 그가 직접 세상에 대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오직 제자들의 기록을 통해서 세상과 만났던 것이다. 도를 깨친 자가 어떤 글을 쓴 경우는 역사상 에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에게는 깨달음이 마지막 사항이 아니다. 그 너머가 있다. 더 초월적인 경지가 있다. 그 경지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 아닌 것도 없다. 그러한 의식 상태에서는 제자는 오직 개인적인 교감을 통해서만, 대화가 아니라 영적 교감을 통해서만 스승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제 받아적을 준 비를 하라. 지난 번 이야기에서 나는 마지못해 시집 `기트 고빈다'의 지은이 이름을 말하려고 했었다. 처음에 나는 말하지 않으려고 마치 내가 그 이름을 잊은 것처럼 가장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부담스럽게 한다. 온종일 나는 자야 데바2)에 대해 약간이나마 걱정을 했었다. 2):(또는 자이데브라고 함. 12세기 인도의 힌두교 개혁 자이자 시인. 그가 사용한 귀절이 후에 시크교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자야 데바는 종교 의식이라든가 검소한 생활 따위는 "지성으로 신의 이름을 되뇌이는 것"에 비하 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원래 회교의 가르핌이지만 자야 데바가 힌두교에 응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크교의 창시자 나나크가 등장하기 전에 길을 닦은 인물로 평가되며, 시크교의 성전`그란트'에 남데브,까비르등과 함께 그 의 시가 실려 있다.) 자야 데바가 바로 `기트 고빈다'의 저자 이름이다. 왜 나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기를 꺼렸는가? 그 자신을 위해서다. 그는 깨달음의 근처에도 가 지 못했다. 나는 `미르다드의 서'의 저자인 미킬 나이미를 언급했었다.칼릴 지브란 도 언급했다. 그밖의 많은 사람들, 이를테면 니체, 도스도엡스키,월트 휘트먼의 이 름들도 언급했다. 그들 역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 거의 문턱까지 갔던 자들이다. 조금만 밀어주면 그들은 사원 안으 로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은 지금 사원의 문 앞에 서있다. 문을 두드릴 용기가 그들 에게는 없다. 하지만 문은 잠져 있지 않다. 약간만 밀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이미 반쯤 열려 있다. 한번만 밀어주면 된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자야 데바는 사원 근처에도 가지 못했 다. `기트 고빈다'가 그에게로 내려온 것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신의 신비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기억하라, 신은 존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단지 표현상의 한 방법일 뿐이다. 아무도 존재의 신비를 알지 못한다. 그 풍성함을.... 때로 그것은 황무지에도 비를 뿌리지만, 때로는 비옥한 땅에도 비를 뿌리지 않는다. 왜 그러한지 이유는 없다. 아무도 그것을 설명할 길 없다. 자야 데바는 황무지였다 그런데 이 무한히 아름다운 시집, `신의 노래'인 `기트 고빈다'의 비가 그에게로 뿌 려졌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 시들을 쓰고, 노래를 불렀 을 것이다. 사원 근처 어느 곳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을 말하면, 그것이 그의 에고를 더욱 강하게 해줄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그 자신을 위해서'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가련한 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 자신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아이를 탄생시켰다. 아이의 이름을 말하려면 그 아버지의 이름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사람들은 그 아이를 사생아라고 여길 것이다. 아버지는 사생아였을지언정 그 아 이는 사생아가 아니다. 자야 데바에 관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무척 홀가분하다. 그런데 지금 문밖에는 또다른 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내가 지금 얼마나 큰 곤 경에 빠졌는지 모를 것이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왜냐 하면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며, 또한 일에 뛰어들기 전에 심사숙고하는 형의 인 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일단 뛰어든 다음에 생각한다. 처음에 나는 단 지 열권의 아름다운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저토록 많은 다른 책들이 나를 붙들고 늘어질지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어서 자기들도 끼워달 라고 아우성이다. 따라서 열 권을 더 이야기하자. 오늘의 제1권은 헤라클레이토스3)의 `단편'이다. 3):(B.C. 540년 경 사람. 그리스 의 철학자. 속세에 관한 것뿐 아니라 기존학자들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홀로 고고하 게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잠언푸으이 잡다한 표현을 즐겼으므로 어두운 사람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에 의하면 겉으로 보이는 다양한 현상도 그 본질에 있어선 하나이 며 잡다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도 상호간에 아름다운 조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시 시각각의로 생성변화하므로 유전이야말로 만물의 실상이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말 은 "만물은 유전한다"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이다.) 나는 이 사람 헤라이클레이토스를 좋아한다. 이 말을 꼭 적어 넣으라. 나는 모두 를 사랑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사랑하는 만큼 자야 데바를 사랑한다. 하지만 헤라클레이도스에 대해서는 좋아한다고 주저없 이 말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드문 덧이 아니라 아무도 없다. 지금 나는 그 동안 늘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아무도 못 미칠 곳에 서있다. 위험할 정도로 깨어 있고, 자신이 말하는 것의 결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 는다. 그의 저서 `단편' 역시 한명의 기트 바르티, 즉 한 명의 제자에 의해서 기록 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글을 쓰지 않았다. 거기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있을 것이다. 깨달음에 이른 자들이 책을 쓰지 않는 이유가..... 하지만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자. `단편'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그대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말한다. "아니다. 그대는 단 한 번도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실로 아름답고, 진 리 그 자체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는 어찌나 빠른지 그대는 같은 강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단 한 번도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강물은 끝없이 흐르고 있다. 흐르고 흘러 바다로 달려가고 있다. 무한을 향해 줄달음쳐주고 있다. 미지의 세계로 사라져가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책, 이것이 오늘 저녁 나 의 첫번째 책이다. 제2권은 피타고라스4)의 `황금시편'이다. 4):(B.C.6세기 경의 철학자, 수학자, 종교가.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이집트 기타 각지에 유학하여 지식 을 얻고 귀향하였으나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종교단체 겸 학술단체를 세우고 당시 일어난 종교 부흥 운동에 학문을 결합 시켜 이를 자극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박해를 받고 다른 곳으로 도피하여 그곳 에서 죽었다. 그의 교파는 그후에도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세력을 유지했으나 B. C.440년 경 심한 박해를 받아 정치적으로 무력해지고 많은 교도는 죽거나 또는 그 리스로 망명하여 정치면에서 손을 떼고 종교와 학문세계에 침잠하었으며 그 학풍이 플라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상에는 철학적 우주론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이 섞여 있다. 우주론에 있어선 수가 우주의 변함없는 본질이며, 만물로 하여금 질서있는 코스모스이게끔 하는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적인 면에선 영혼의 불멸 과 윤회, 사후의 인과응보를 믿으며 영혼의 정화를 위해 금욕과 계율에의 복종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이 영혼을 진정시키는 음악과 영원불변의 진리를 가르치는 수학 의 연구에 정진하였다.) 분명 피타고라스는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사람 중의 하 나다. 지식을 가지면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대부분이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조차도 피타고라스 를 잘못 이해했다. 심지어 그의 `황금시편'을 기록한 제자들까지도 그를 잘못 이해 했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그의 말을 기록했을 뿐이다. 단 한 명의 제자도 피타고라 스와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단 한 명의 제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희랍인들은 철처히 그를 무시했다. 희랍인들은 언제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자들 을 무시했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플로티누스5)가 바로 그들이 다. 5):(204-269. 신플라톤 학파의 대표자. 알렉산드리아 암모니오스에게 10년간 배 운 뒤 40세 때 로마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50세 전에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구 술시켰으나 그 이후는 집필도 하여 54편의 논문이 있다. 만무르이 가장 근본적인 실 체를 일자라 하여 자신은 일체를 초월하고,`존재의 피안'이며 선과 악을 초월한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는가 하면 또 어디에서도 존재한다. 인간은 영성을 높여 수행에 힘쓰면 일자와 하나가 되어 해탈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철학은 일자와 하나인 영원 한 생명으 얻고다 하는 것을 긍극의 목표로 삼는 신비주의이며 종교철학이다.)그들 은 소크라테스까지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너무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독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무시하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러나 피타고라스는 완전히 무시당했다. 피타고라스는 고오타마 붓다, 예수, 혹은 다 른 깨달은 이들과 똑같은 열쇠를 갖고 있다. 어떤 면에서 예수도 붓다도 노자도 피 타고라스만큼 그 열쇠를 갖고 있다. 어떤 면에서 예수도 붓다도 노자도 피타고라스 만큼 그 열쇠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한적이 없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피타고라스는 가장 진실한 구도자였다.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썼다. 그는 그의 시대에 알려진 모 든 세계를 여행했으며 온갖 종류의 스승들 밑에서 배웠다. 온갖 종류의 신비학파에 입문해 모든 과정을 배웠다. 역사상 그러한 인물은 실로 그 한 사람뿐이다. 제3권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 그의 조국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사라하6)이며, 그의 책은 `사하라의 노래'라는 티벳어 제목으로 불리워 지고 있다. 6):(탄트라 불교를 최초로 정립시킨 인믈이며, 대승불교의 창시자 나가르주나의 스 승이다. 불기 346년에 남인도 마하 하수트라 지방에서 태어났다. 또다른 자료에 의 하면 불기 30년에 베나레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전통적인 바라문 가정에서 5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5형제 모두 베다에 통달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라하는 베다의 최고 통달자가 되었다. 그후 그는 마하팔라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아울러 왕 궁의 최고 법정관을 겸임했다. 왕은 물론 인도 전역이 사라하의 깊은 지혜에 고개 숙였으나 차츰 지식의 세상에 싫증을 느낀 그는 왕궁을 떠나 바라문 대사제에서 불 교 승려가 되었다. 험한 구도여행 끝에 쉬리 키르티를 만났는데, 쉬리 키르티는 붓 다로부터 정통으로 내려온 불교 탄트라의 제3조로서 당시 최고의 명상가였다. 바라 문 대학자 사라하는 쉬리 키르티를 만나 그가 배운 베다의 모든 지식을 버리고 명상 에만 몰두하여 그 비법을 전수받았다. 이후 명상마저 버리고 화장터에서 춤과 노래 로 세월을 보내면서 그를 찾아온 왕과 왕비마저 출가시켰다. 누가 이 책을 기록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하 라는 그것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것을 노래로 불렀을 뿐이다. 그 책 속에는 노래의 향기가 남아 있다. 그가 깨달은 것들, 그가 얻은 것들의 향기가.. ... 그 노래는 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한 신비가의 깨달음이다. 단지 몇 줄밖에 되지 않지만 놀라운 깊이와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별들조차도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이다. `사라하의 노래'라는 티벳어 제목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누가 이 책을 기록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라하는 그것을 쓰 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것을 노래로 불렀을 뿐이다. 그 책 속에는 노래의 향기가 남아 있다. 그가 깨달은 것들, 그가 얻은 것들의 향기가......그 노래는 시 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한 신비가의 깨달음이다. 단지 몇 줄밖에 되지 않지만 놀라운 깊이와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별들조차도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이다. `사하라의 노래'는 번역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티벳의 한 라마승으로부터 들었다. 아아, 나 는 그 노래를 다시 또다시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라마승에게선 너무나 고약한 냄 새가 풍겼기 때문에 나는 한 번 듣고 나서 고맙다고 말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라마승들은 목욕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몹시 냄새가 난다. 냄새에 알레르기가 있는 나 로서는 그 라마승의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그 노래 전체를 끝까지 듣는 것도 고역 이었다. 그 냄새 때문에 천식이 도질까봐 걱정이었다. 사라하에 대해서 나는 많은 강의를 했었다. 그는 탄트라7)학파의 근본이다. 7):탄트라는 원래 타트바 즉 진실과 만트라, 즉 언어가 합쳐진 말로서 곧 진실의 언어, 또는 인간의 언어라는 뜻이다. 탄트라라는 말은 4세기 이래 철학적인 용어로 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탄트라는 넓힘, 계속, 번식을 뜻하기도 한다. 다 시 말해서 지혜를 넓히고 계속하고 번식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밀교, 곧 탄트라 불교라는 말이 생겨났다. 탄트라 불교란 인도 불교 사상가 속에서 나타난 밀교 가운 데 후기 밀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8세기 이후 인도에서 꽃피어 티벳과 몽고에 이르 기까지 널리 전파된 대승 불교의 한 종파이다. 밀교라는 말은 불교 사상사 속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미묘하게 사용되어 왔다. 그러 나 여기서 말하는 밀교란 8세기 이후 꽃피어 인도 전역을 휩쓴 후기 밀교 곧 탄트라 불교를 가리킨다. 이는 다시 티벳으로 전파되어 독특한 교리체계와 함께 만달라와 만트라를 사용하는 주술적인 의식, 그리고 수행법 등을 발전시켰다. 탄트라 불교는 한 마디로 사고가 아니라 감각으로서 지혜를 넓히는 구도의 길을 추구하며, 따라서 모든 감각의 집합인 성을 중요시했다. 또한 본존불로서 석가모니불이 아닌 비로자니 을 신앙하며, 각 사람의 마음 속에 불심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우리나라와 일본 에는 이와는 달리 8세기 이전 초기와 중기의 밀교가 중국을 통해서 전래되었다. 제4권은 틸로빠8)의 책이다. 8):988-1069. 사라하에서 시작된 탄트라 불교를 티벳 밀교의 형태로 크게 부흥시킨 인물. 그것은 다시 나로빠에게, 나로빠는 마르빠에게,마르빠는 밀라레빠에게 전수되 었다. 틸로빠는 깨달음을 얻은 후 그깨달음을 전할 제자를 찾아 인도 전역을 헤매였 으나 실패하고 히말라야 너머의 티벳으로 가서 제자 나로빠를 만났다. 그에게 들려 준 처음이자 마지막 노래가 바로 틸로빠의 `무하무드라의 노래'이다. 이 책 역시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그 제자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것을 놓쳤을까!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간 이들은 그것이 옳은 말인지 틀린 말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리 가능한 한 스승의 말을 그대로 적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어려운 작업 이었다. 스승은 미친 자와 같아서 어떤 말이든지 할 수 있다. 노래를 부르든지, 아 니면 침묵을 지킬지도 모른다. 다만 손짓으로 뭔가를 표시해 보일지도 모른다. 따라 서 제자는 그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기록할 수 있다. 메허바바가 30년에 걸쳐 끊임없이 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손짓으로 무엇인가 를 가리켜 보이기만 했다. 제5권.....이제 내가 말할 이 사람은 세상에선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으로 알려 져 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본다. 이 사람의 이름은 스즈키 다이세츠9)이다. 9): 1870-1966 동경대학 재학시부터 참선을 하는 한편 대승기신론을 영역하고 영문 으로도 많은 글을 남겼다. 특히 선의 연구에 있어서 독자성을 확보했으며, 서구 세 계에 최초로 선을 소개하여 지성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동경 제국대 학에서 교편을 잡고 10여 년에 걸쳐 영문 잡지 `이스턴 붓디스트'를 발행했다. 스즈 키 다이세츠 전집 30권이 있다. 현대 세계에 선과 명상을 소개한 공로는 이 사람을 따를 자가 없다. 스즈키는 평생 에 걸쳐 서양에 선을 소개하는 일에 전념했다. `선'은 `명상'이라는 뜻의 산스크 리트어 `드히야나'가 전해진 말이다. 고오타마 붓다는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 았다. 그 언어가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이유 때문에 그는 그 언어를 기피 했다. 그 대신 붓다는 네팔의 작은 마을에서 민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택했다. 그 언어는 팔리어였다. 팔리어에서는 `드히야나'가 `자나'라고 발음된다. 교육받지 못 한 민중은 복잡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단순화시켜서 사용하기 마 련이다. 그것은 돌 하나가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둥글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언어 도 그렇게 해서 처음엔 복잡했던 것이 점차 단순해지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는다. `드히야나'는 평범한 민중이 발음하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자나' 라고 발음했다. 그것이 중국으로 가서는 `찬'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선'이 되었 고, 일본에서는 `젠'이 되었다. 이제 보았듯이 언어는 사람들에 의해서 점차 단순해 졌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선과 일본문화'가 제5권이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인류에 게 무한한 봉사를 했다. 이 점에 있어선 그를 따를 자가 없다. 전세계가 그에게 빚 을 졌으며, 그 빚은 실로 오랫동안 갈 것이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도 드믈지만, 자신의 깨달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가진 자는 더욱 드물다. 제6권으로, 한 프랑스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말에 놀랐을 것이다. 속으로 그대 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프랑스인이라고?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스즈키 등 의 계열에 프랑스인을 포함시키다니, 저 양반이 미친 게 아닐까?" 그렇다. 지난 25 년 동안 나는 한번도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다. 그 이전에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신에게 감사드린다. 이것이 하나의 표현방식일 뿐임을 다시 기억 하라.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다 이것을 재차 강조하는 것은, 나의 제자들이 신 을 숭배하고 나아가 나를 신으로 숭배할 가능성이 있디 때문이다. 신은 존재한 적도 없다.오직 신성만이 있을 뿐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의 말은 틀린 것이다. 신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다. 죽으려면 먼저 살아 있었어야 한다. 싸르트르도 이 점에서 빗아갔다. 그는 니체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내가 "신에게 감사드린다"라고 말하면서 `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대신 쓸 다른 말이 없기 때 문이다. "신에게 감사드린다"는 단지 좋았다는, 아름다웠다는 뜻이다. 제6권은 프 랑스인 위버 베노아10)가 쓴 `렛 고우'이다. 이 책은 명상을 추구하는 모든 구도자 들의 책꽂이에 꽂혀 있어야 할 책이다. 누구도 그처럼 과학이면서 동시에 시적으로 쓰지 못했다. 모순이지만 그는 그 모순을 훌륭히 해냈다. 위버 베노아의 `렛 고우' 는 현대 서구세계에서 탄생한 최고의 걸작이며, 동양을 제외하고 서양만 따질 때 금 세기 최고의 책이다. 제7권은 성자 라마크리슈나11)의 `우화집'이다. 알다시피 나는 성자라는 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그들을 혐오한다. 성자라는 이들 은 거짓과 위선 투성이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다르다. 이 점에 대해 다시 신에 게 감사드린다. 라마크리슈나의 `우화집'은 아주 단순하다. 우화는 단순해야 한다. 예수의 우화들을 보라. 라마크리슈나의 우화들도 마찬다지다. 우화가 어렵다면 우화 로서의 쓸모가 없다. 우화는 무릇 어린아이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내가 말하는 어린아이란 모든 연령의 아린아이를 다 포함한다. 열 살의 어린아 이, 여든 살의 어린아이 등등....여든 살의 노인도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모으는 어린아이임에는 다를 바 없다. 라마크리슈나의 아름다운 책 `우화집'이 제7권이다. 10): `형이상학과 정신분석' `사랑의 여러가지 얼굴들' `최상의 교리'`내적 실현의 길'의 저자. 폭넓은 지식과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평가받았던 금세 기 중엽의 프랑스인. 대학에서 의학과 음악을 공부한 후 (낸시 폰설바토리에서 수상 한 경력까지 있는 실럭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12년간 의사생활을 했다. 그후 정 신분석에 관심을 가졌으며 35년간 파리에서 정신분석의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유럽 과 미국 등지에서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스즈키 다이세츠의 선에 관한 프랑스 판 저서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위버 베노아를 지두 크리슈나므르 티의 경지와 비교하기도 했다. 11): 인도 벵갈 지역의 위대한 성자. 본명은 차페르지로 벵갈의 후글리 지방의 가 난한 정통 바라문 계급에서 출생. 부친이 죽은 후에 켈커타의 한 절의 탁발승이 되 고 칼리 여신에게 열렬한 신앙을 바쳐 우주 및 자기 어머니로 삼았다. 12년간 삼림 속에서 고행하고 신과의 합일에 의해서 삼매경의 경지에 들어갔으며, 요가 수련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고 `라마크리슈나'로 이름을 바꾸었다. 더욱 고행, 명상을 거듭 하여 이슬람교, 기독교 등을 흡수하고 근대 유럽 사상의 섭렵을 통해 모든 종교의 귀결처는 오직 하나의 진리이며,제각기 다른 길을 거쳐 동일한 신에 이른다는 세계 일화적 경지에 도달하였고, 무아 무차별의 인격에서 나오는 빛과 사랑으로 많은 제 자를 얻었다. 그는 끝내 책을 집필하지 않았으나 제자들에 의해 그의 언행이 기록되 어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사후 제자 비베카난다가 뒤를 리어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창설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시켰다. 제8권은 `이솝 우화집'이다. 이솝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다. 사실 `이솝 이화집'에 등장하는 우화들은 붓다가 그의 설법에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하면서 그 우화들이 서양으로 건너갔다. 물론 붓다의 이름을 포함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붓다는 `보디사트바'라는 이름으로 도 불리워졌다.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깨달음에 이른 각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아르하트와 보디사트바가 그것이다. 아르하트는 자신의 불성을 자각했느나 다른 중 생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는다. 반면에 보디사트바는 남을 이끌기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은 다한다. `보디사트바'는 알렉산더와 함께 서양으로 건너가서 `보디사트'라 는 말로 바뀌었으며, 그것이 다시 `조세푸스'로 변했다. `조세푸스'는 다시 `이솝' 으로 변했다. 이솝은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은 아니지만 그 이름 아래 묶인 우화들 은 실로 중요한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제9권은 나가르주나12)의 `중론본송'이다. 12): 150년경-250년경. 인도의 초기 대승불교의 터전을 닦은 사람. 용맹, 용승이 라고도 번역된다. 남인도 바라문 집안에서 출생하여 인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당시의 여러 학문에 정통하였다. 현자의 `대당서역기' 등 외에 티벳에도 그의 생애 의 전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들은을 나가르주나의 재능과 박식함을 너무 추켜세 워 신화적 전설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부 믿기는 힘들다. 저서는 250권에 달하며 그 속에 담긴 높은 이상, 깊은 사색, 투철한 논리, 강한 실천적 태도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법화, 화엄, 정토, 진언밀교, 선 등에 이르는 초기 대승경전의 사상 모두 가 그 속에 담겨 있으며, 그밖의 다른 학문과 이론 등에 관해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소위 대승불교는 눈부신 초석을 완성하게 되었으며, 나가르주나는 인도, 중국, 한국 및 일본에서 여러 종파의 개조로서 모든 불교도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 었다. 나는 나가르주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 철학자 타입이고, 나는 반 철학적이다. 그러나 그의 `중론본송'은 중요한 책이다. 제목의 뜻은 글자 그대로 `중도의 본질'인데, 이 책에서 나가르주나는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가장 깊은 곳까 지 파고든다. 나는 이 책에 대해 강의한 바 없다. 본질에 대해 말하는 가장 좋은 방 법은 전혀 말을 하지 않는 일이다.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너 어쨌든 나가르주 나의 이 책은 대단히 가치있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제10권. 오늘의 마지막 책은 조금 이상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포함시키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티벳 신비가 마르빠13)의 책이다. 13): 티벳불교의 카규파의 시조. 1011-1096. 인도의 불교 경전을 가져다 티벳어로 번역한 공로가 크며 티벳불교의 찬란한 봉우리인 밀라레빠의 스승으로 큰 역할을 했 자. 마르빠의 추종자들조차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 이 책은 읽는다기보다는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해야 한다. 깊이 명상할 때 이 책의 내용물은 사라지고, 오직,`지켜보는 자'의 의식만이 남는다. 마르빠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 다. 그의 스승 나로빠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마르빠에게 경배하노라" 어떤 스승도 제자에 대해 그렇게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마르빠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한번은 누군가 마르빠에게 말했다. "만일 네가 너의 스승 나로빠를 믿는다면 불속 에 뛰어들어 보라" 그러자 마르빠는 당장에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달려 와서 불을 끄느라 야단이었다. 불을 다 끄고 보니 마르빠는 불길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르빠에게 물었다. "무엇이 좋아서 웃고 있는가?" 마르빠는 대답했다. "불조차도 믿음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디에 웃 는 것이다." 이 사람의 단순한 노래들로 엮어진 `마르빠의 서'가 오늘의 제10권이 자 마지막 책이다. 5 "아타토 브라흐마 지기야사.... 이제 저 절대의 것을 찾아가자." 바드라야나1)는 이렇게 자신의 책을 시작한다. 실로 위대한 책.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인 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말할 첫번째 책은 바드라야나의 `브라흐마 수트라'이다. 그는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한다. 1): 기원전1세기 인도인. 그의 대표적 저서 `브라흐마 수트라'는 4편 16장으로 구 성되어 있으며 베단타학파의 근본 성전으로서 이 책이 써지기 전에는 베단타 학파의 내부에 각 `우파니 샤드'의 군데군데에 관한 해석이나 형이상학적 근본 사상에 대 하여 학자들간에 많은 이설이 있었다. `브라흐마 수트라'는 그들의 각종 해석과 해 설을 요약하고 정리 비판하여 하나의 체계로 조직한 것이다. 이 책은 `우파니샤드' 의 각종 사상을 종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후대의 베단타 학파뿐만 아니라 인도의 모 든 학파에도 통하는 성전으로 간주되며,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와 더불어 3학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극도로 간결하여 수트라 본문만으로 는 거의 이해할 수 없고 또 최고 계급의 바라문만이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하여 비밀의 가르침으로 전수되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자유로운 해석을 받아들이는 결과 를 낳았다. 그래서 베단타 학파의 중요한 철학자는 각기 독자적인 입장에서 주석서 를 저술했다. "이제 저 절대의 것을 찾아가자. 더 나아갈 수 없는 길을 향해 떠나자." 동양에 서는 거의 모든 경전이 `아타토',즉 `이제'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른 방식으로 시작 하는 법이 없다. 바드라야나는 잘못 이해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는 너무 심각 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것은 신비가로선 좋은 성격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삼 천 년 전 바라문 성직자들 틈에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그 자신 역시 한 사람의 바라문이었다. 바라문 성직자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사람들이었다. 놀라운 일이 지만 인도에는 유우머라는 것이 없다. 이토록 큰 나라에 유우머가 없다는 것이 이상 하지 않는가? 이토록 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 유우머가 없다니..... 바라문 성직자들 은 농담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저속하고 세속적인 반면에 그들은 대단히 성스 러운 자들인 것이다. 나는 바드라야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가 너 무 심각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책을 내 도서목록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놓고 나는 한참 망설였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의 심각한 성격 때문이었 다. `미르다드의 서'에 대해선 망설이지 않았다.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에 대해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드라야나와 그의 저서 `브라흐마 수트라'에 대 해선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에선 그의 저서를 가장 위대한 역작으로 평가하 고 있으며, 사실이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심각한 책들을 읽었다. 장난꾸러기 성자 조지 구제프의 `모든 것' 까지도 읽었다. 그러나 심각성에 대해선 바드라야나 의 `브라흐마 수트라' 따라갈 책이 없다. 그는 심각한 점에 있어선 끝까지 들어갔던 인물이다. 아아, 그가 약간의 웃음이라도 가졌더라면!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한번도 웃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바드 라야나라면 그럴 법하다. 그는 평생 한번도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심각성은 이 루 말할 수 없다. 그의 저서보다 심각한 책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 `브라흐마 수트 라'에 대해선 지금까지 수천 권의 해설서들이 쓰여졌다. 진리는 해설이 필요없다. 그러나 진리가 `심각함'이라는 옷속에 가두어질 때 당연히 해설이 뒤따르고 내노라 하는 해설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바드라야나의 책은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심각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걸작을 남겼다. 바드라야나는 끝 까지 갔던 인물이다. 갈 수 있는 곳까지 다 가본 인물이다. 날카로움과 과학적인 능 력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인도에는 `아차리아'2)라는 칭호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 세 권의 책에 해설서를 쓴 사람에게만 붙이는 칭호이다. 첫번째는 108권의 `우파니 샤드', 두번째는 크리슈나의 바가다드기타',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바드라야나의 `브라흐마 수트라'이다. 나는 바드라야나에 대해 강의한 바가 없지만 오랫동안 아차 리야로 불리워 왔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 세 권의 책에 대해 해설서를 썼느냐고 묻 곤 했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오직 농담만을 말할 뿐이다. 내가 아차리야로 불리우는 것은 하나의 농담이다.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브라흐마 수트라'.....`브라흐마'는 `신'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것은 틀린 해석이다. 브라흐마는 기원전 4천4년에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기독교적인 신의 개 념과는 아무관계가 없다. 바드라야나조차도 그 얘기를 들었다면 웃음을 터뜨렸을 것 이다. 그의 심각성을 벗어 던졌을 것이다. 브라흐마는 `신'의 뜻이 아니라 존재계 전체에 깃든 `신성'을 뜻한다. 그리고 `수트라'는 `지나간 자국'을 뜻한다. 브라흐 마에 대해선 많은 말이 불가능하다. 그대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하나의 발자국, 하나의 힌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의 발자국이, 하나의 작은 암시가 큰 다리 역 할을 할 수 있다. 바드라야나는 그의 책에서 그 다리를 완성시켰다. 바드라야나의 심각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나는 심각한 것을 도무지 싫어하 기 때문에 `바드라야아의 심각한 성격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을 탄생시킨 공로가 있기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 `성경'조 차도 바드라야나의 `브라흐마 수트라'에는 한참 못 미친다. 2):영적인 교사 또는 구루를 지칭하는 힌두교 용어 제2권은 나라다의 `박티 수트라'이다. 나라다는 바드라야나와 정반대되는 인물이 다. 나는 정반대되는 것들으 나란히 놓는 것을 좋아한다. 나라다와 바드라야나를 한 방에 집어넣고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고 싶다. 나라다는 언제나 `에크타라'라 는 이름의 악기를 들고 다녔다. 그것은 줄이 하나밖에 없는 악기였다. `에크'는 하 나를 뜻하고, `타라'는 줄을 뜻한다. 나라다는 항상 에크타라를 들고 다니면서 그것 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온갖 종류의 성격을 참을 수 있지만 바드라야나는 참 지 못하고 나라다에게 중지하라고 고함쳤을 것이다. 나라다는 바드라야나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바드라야나를 약올리기 위해 더욱더 큰 소리로 연주하 고 노래불렀을 것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을 한 방에 집어넣고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 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두번째 책으로 나라다의 `박티 수트라'를 선택 했다. 그의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타토 박티 지기야사......이제 사랑을 찾아 가자." 사랑을 찾는 것, 그것만큼 위대한 추구가 없으며, 그것만큼 위대한 탐험이 없다. 어떤 것도, 원자폭탄의 에너지조차도 사랑을 따를 수 없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라 해도 사랑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추구가 불가능하다. 또한 사랑이 전부는 아니다. 사랑에 깨어있음이 뒤따라야 한다. 이때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추구가 된다.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사랑과 깨어있음--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 잔 힘든 일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지만 무의식 속에서 사랑을 한다. 그들의 사 랑은 생리적인 것이며, 지구 중력적인 것이라서 늘 땅쪽으로 끌려내려간다. 그러나 나라다가 말하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사랑이다. 명상으로서의 사랑, 깨어있음으로서 사랑인 것이다. 혹은 과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중력에 반대되는 `공중부양'으로서의 사랑이다. 중력은 죽은 자들에게나 적용되게 하라. 그대는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라. 사랑으로 들려올라갈 때, 별을 향해 들려올라갈 때, 그것이 바로 `아타토 박티 지기 야사'이다. 나는 나라다의 책을 더없이 사랑했다. 그 책에 대해 강의까지 했으나 영어로는 하지 않았다. 영어는 나의 모국러가 아니다. 나아가 영어는 너무 과학적이 고 수학적이며 현대적이다.나라다에 대한 강의를 나는 나의 모국어인 힌두어로 했다 힌두어로는 더욱 쉽게 노래부를 수 있으며, 그것이 내 가슴에 더욱 와닿는다. 내 대학교수 주의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외국어로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또한 싸움도 불가능하다." 싸움을 하려면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말로 소리쳐야 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더욱더 가슴의 언어를 요구한다. 더 깊이 들어 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영어로 말하려면 걸림이 많다. 이중 작업이 되기 때문 이다. 아직도 나는 일단 머리 속에서 힌두어로 문장을 구성한 뒤 그것을 영어로 옮 긴다.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어로 곧바고 말하는 일은 아직 가능하지 않다. 오 히려 이 점에 대해 신에게 감사드린다. 나라다에 대한 나의 힌두어 강의가 누군가에 의해 번역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동안 필요에 의해서 영어가 아니라 힌두어 로 강의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영어로는 강의 가 불가능한 내용들이었디 때문이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힌두어로 표현이 어려운 많은 것들을 나는 영어로 강의 했다. 이 점에서 나의 작업은 기이하다 아니할 수 없다. 만일 내 모든 책들이 힌두 어에서 영어로, 그리고 영어에서 힌두어로 번역되어 세상에 나오면 정말 볼 만할 것 이다..그대는 훨씬 더 오리무중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미소를 짓고 있겠지. 그때에 내가 육체를 갖고 살아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는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 대가 당황해서 머리를 흔드는 꼴을 보면서 나는 우주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언어를 가지고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강의를 했다. 내가 어떤 것을 영어 로 강의한 것은 힌두어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이 있어서다. 제3권은 파탄잘리3)의 `요가 수트라'이다. 바드라야나는 지나치게 심각했고, 나 라다는 또 지나치게 심각성이 없었다. 파탄잘리는 그 중간이다. 정확히 그 중간 위 치다. 심각한 것도 아니며,심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의 정 신을 파탄잘리는 갖고 있었다. 3): B.C. 2세기 경 인도사람으로 기존의 전수되어 오던 모든 요가 자료를 집대성하 여 `요가 수트라'를 완성했으며, 아울러 요가 학파인 샹카학파를 창시했다. `요가 수트라'는 4장 194경으로 이루어졌으며, 원전은 `베나레스 산스크리트 시리즈'No. 75에 실려 있다. 야마, 즉 욕망을 없애는 다섯가지 맹세, 니야마, 즉 자기 수련의 규칙을 지킴, 프리나야마, 즉 호흡 조절, 크라티아하라, 즉 모든 감각 대상으로부터 감각을 거두어 들임, 다라나, 즉 집중, 드히야나, 즉 명상, 마지막으로 사마디에 들 어 마음은 텅 비고 객체에 대한 인식도 주체에 대한 인식도 없이 유일자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역설하면서 그 실천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 대해선 이미 10권의 책으로 강의한 바 있으니 새삼 그를 설명하는 일이 군더더기다. 책 10권의 분량을 얘기한 다음엔 무엇을 덧붙이는 일이 오히려 어렵다. 오직 한 가지, 내가 이 사람을 더없이 사랑한다는 말이 있을 뿐이다. 제4권은 까비르4)다. 4): 1440-1518.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의 베나레스에서 어느 힌두교 수도승과 과 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태어난 직후 길에 버려졌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어느 회교 도 부부가 그를 주워다 키웠으며, 그래서 까비르 역시 양부모의 직업을 따라 평생 을 베짜는 직공으로 살았다. 젊어서 인도 민중종교 운동(박티 운동)의 지도자인 라 마난다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헌신과 사랑의 찬란한 시들을 탄생시켰다. 그는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기에 제자들이 그의 시를 바다 적었으며, 타고르와 마하 트마 간디가 극찬한 인도 시문학의 최고봉인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 힌두교와 회교 신도들에 의해 널리 애송되고 있다. 그의 시는 타고르에게 영향을 미쳐 `기탄잘리' 를 탄생시켰고, 타고르 자신이 영역한 `까비르의 백 편의 시'에 의해 세상에 알려 졌다. `까비르의 노래' 세상에 까비르의 노래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까비르 그 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를 표현할 언어는 세상에 없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문맹이었으며 베짜는 직공으로 태어나 이름없는 삶을 살았던 까비르. 까비르를 낳 자마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갠지스 강가에 버렸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것이 무엇인가? 합법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사 생아로 태어나긴 했지만 사랑 속에서 태어났으며,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법이다. 까 비르에 대해서도 나는 여러 권의 강의를 했다. 따라서 다시 또다시 이 말을 덧붙이 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까비르여, 나는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한 다." 제5권. 이제 한 사람의 여성을 소개할 차례다. 여성을 먼저 소개하는 것에 대해 많이 망설였다. 수많은 남성들이 아직도 내 방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 그들은 전혀 신사답지 못하다. 여성에게 자리를 비켜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여 성이겠는가! 이 여성의 이름은 마담 블라바츠키5)이다. 5): 1831-1891. 러시아 여성 신비가로 1875년에 신지학회를 창립했다. 어려서부터 보이지 않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유령에 자주 놀라곤 했다. 17세에 결혼했으 나 불행으로 끝나고 그후 그녀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를 폭넓게 여행했다. 인도와 티벳을 여행한 후 영적으로 존재하는 신비의 대사들에게서 비법을 전수받았 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 대사들의 도움으로 많은 저서들을 쓰게 되었다고 믿었으 며, `숨은 교리'외에 `신지학의 열쇠,' `침묵의 소리'등의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남겼다. 그녀의 공헌은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종합하고, 그것을 통해 보편적인 신 비 전통을 이해하는 골격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항상 `마담 블라 블라'라고 부른다. 그녀는 그렇게 허풍떠는 데 있어서 일인자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갖고 온갖 것을 이야기하며, 사마귀 하나 를 갖고 산처럼 꾸며댄다. 그녀가 첫번째 여성으로 등장하리라는 것을 내 이미 짐작 했었다. 그녀는 그만큼 강하고 대가 세다. 파탄잘리와 까비르와 마드라야나 등을 밀 치고서 그녀는 자신의 저서 `숨은 교리'일곱 권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이것이 오늘의 제5권이다. 이 책은 거의 대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엔사이 클 로페디아 에소테리카'라 할 수 있다. 신비주의에 있어서 블라바츠키와 경쟁할 자가 없다. 물론 나를 빼고선. 나라면 7권이 아니라 7백 권이라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 유 때문에 나는 블라바츠키의 `숨은 교리' 일곱 권에 대한 강의를 포기했다. 일단 강의를 시작하면 적어도 7백 권 이상의 분량이 쏟아져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강의한 분량이 이미 3백 36권이나 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은 정말 로 자비로우시다! 나는 그 책들을 읽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 중 어떤 책도 나는 읽 지 않았다. 그러나 블라바츠키라면 그 자리서 어떤 신비 이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신비주의라는 것이 그것이다. 336권이라......3 더하기 3은 6이다. 그러면 66이 되고, 6 더하기 6은 12......1더하기 2는 3. 다시 3이 되었다. 이 3이라는 숫 자만 갖고서도 신비주의자들은 그대가 상상하지 못한 온갖 신비한 문을 열어 보일 것이다. 가련한 여인 블라바츠키! 나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면서 동시에 그녀를 사 랑한다. 물론 그녀의 얼굴은 사랑하거나 좋아할 얼굴이 아니다. 어린아이들도 그 얼 굴을 보면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블라바츠키는 그토록 못생겼지만 나는 그녀를 좋 아한다. 남성 위주의 사회, 남성들이 주도해 가는 이 사회 속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여성이 창시한 첫번째 종교를 시작하고 이끌었다. 그것이 바로 신지학6)이다. 그녀 는 붓다, 짜라투스트라, 마호멧 등과 겨루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그녀에게 감사드 린다. 누군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그들을 그들을 물리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 대해 그녀에게 고맙데 여긴다. `숨은 교리'는 소위 신비주의라는 이름 아래 많은 허접쓰레기들이 모여진 있긴 하지만 군데군데 진기한 보석과 연꽃이 박혀 있다 그녀는 수집광이었기 때문에 온갖 쓰레기가 없을 수 없다. 그 쓰레기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것이 쓸모있는지 없는지 판단하지도 않고 온갖 장소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모든 쓸모없는 것들을 체계적으로 늘어 놓는 데 있어서 그녀는 가히 천재 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몇 개의 보석들도 함께 발견된다. 전체로 말하면 이 책은 별로 가치가 없다. 내가 이 책을 포함시키는 것은 몇 사람의 여성들도 포함시켜서 내가 남성 우월론자라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남성 권위자가 아니다. 오 히려 여성 우월론자 쪽이지 남성 우월론자는 절대로 아니다. 6): 1975년 미국에서 강신술과 최면술에 관심을 가진 남북전쟁의 영웅 헨리 스틸 올코트 대령과, 반대파에선 완벽한 사기꾼으로,신봉자들에게선 높은 영적 세계로부 터 신비의 힘을 받는 현자이며 기적을 행하는 이로 숭배받던 러시아 여인 헬레나 페 트로바 블라바츠키에 의해 창시되었다. 이 학회는 세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첫 째, 종족과 교리와 신분과 피부색과 성의 구별없이 우주 형제단의 구심체를 만드는 일. 둘째, 종교 철학 과학의 비교 연구를 후원하는 일. 셋째, 드러나지 않은 자연 법칙과 인간 내면에 깃든 힘들을 조사하는 일. 1882년 신지학회는 미국에서 인도로 이사했으며, 그때부터 신지학회는 급속도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1889년 블라바츠키 는 신지학회를 설립한 진정한 복적이 세계의 교사(구세주)가 지상에 내려올 때 그 가 들어가 살 인간 육체를 준비하는 데 있다고 발표했다. 그 육체로 선텍된 것이 바 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였다. 신지학회는 그후 영국인 애니 베산트와 리드비터가 중 심이 되어 이끌어갔으나,크리슈나무르티의 `별의 교단'해체 선언 이후 급속히 쇠퇴 했다. 현재 그 본부가 인도의 마드라스에 있다. 제6권은 `미라의 노래'이다. 블라바츠키 다음에 미라7)를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 는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블라바츠키는 너무 무게가 키기 때문에 균형을 맞 추려면 다른 가벼운 여성 몇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 그렇게 하겠다. 7): 또는 미라바이라고 함. 1498년 인도 델리 근처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전쟁에 참가중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늘 크리슈나 신에게 헌신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크리슈나의 신상에 지 집착했다. 그녀의 시에는 "크리슈나여,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의 나의 사랑을 아는가 "라는 귀절도 보이며, 실제로 꿈에서 크리슈나와 결혼하는 일도 있었다. 세상을 떠 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육체가 녹아 없어져 신상과 하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 해진다. 그녀의 시집 제목은 `미라바이 헌신의 신'이다. 그래서 제6권은 `미라의 노래'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에 의해서 불리워진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여기에 있다. 그 노래를 인간 세상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 라는 말한다. "마인 토 프렘 디바니" 그것은 이런 뜻이다. "나는 사랑에 미쳤노 라. 너무나 사랑에 빠졌기에 나는 미쳐 버렸노라!" 이 문장만으로도 그녀의 노래가 어떠한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녀는 공주였고 왕비였다. 그러나 왕궁을 버리고 그녀는 거리의 거지가 되었다. 비나를 연주하면서 시장바닥에서, 마을에서 마을로 춤추면서 다녔다. 자신의 가슴을 쏟아부으면서 존재 전체로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미라에 대해서 나는 힌두어로 강의한 바 있다. 어느날인가 어느 미친 자가 나와서 그것을 번역할지도 모른다. 7권은 또다른 여성의 책이다. 저 무거운 마담 블라 블라바츠키와 균형을 맞추려 고 나는 노력하고 있다. 블라바츠키는 말 그대로 무겁기 짝이 없다. 아마도 족히 120킬로그램은 될 것이다. 여성이 120킬로그램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무하마드 알 리라도 일격에 그녀에게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소위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을 그녀는 깔아뭉갰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에겐 추종자들만이 있었을 뿐 연인이 없었다. 그녀 가 밀어부치면 사람들은 그녀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블라바츠키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제7권은 `사라조의 노래'이다. 사하조8)는 그 이름조차도 시적이다. 사하조 의 의미는 `자연스러움의 극치'이다. 나는 역시 힌드어로 사하조에 대해 강의한 바 있다. 영어로는 그러한 시적 표현이 불가능하다.영어라는 언어는 그다지 시적이지 않다. 시집이라는 것들도 읽어 보면 어찌나 비시적인지 왜 누군가 나와서 영어를 보 다 시적으로 개혁하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영어는 갈수록 과학자와 기술자의 언어,정확히 표현하면 테크놀로지스트의 언어가 되어간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 다. 다만 바라건대 먼훗날 누군가 나와서 사하조에 대한 나의 강의를 번역하여 세 상에 널리 알렸으면 한다. 8): 미라와 더불어 역시 인도의 여류 신비가. 제8권 역시 또다른 여성의 책이다. 아직도 저 무거운 헤비급 챔피온 블라 블라바츠키와 균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여성이라면 이제 그럭저럭 맞을 것이다. 이 여성은 한 사람의 수피Sufi 신비가로서 이름은 라비야 알 아다비야Rabiya-al-Ada- biya이다. '알 아다비야'는 '아다비야 마을 태생'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라비야가 그녀의 이름이고 알 아다비야는 그녀의 주 소인 것이다. 라비야가 살아 있을 때 그 마을이 바로 메카Mecca 가 되었다. 전세계에서 여행자들이 모이고 도처의 구도자들이 라비야의 오두막집을 찾았다. 그녀는 정말로 불꽃같은 신비가였 다. 누구의 머리라도 부술 것처럼 손에는 쇠망치를 들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많은 이들의 머리를 부숴 그 안에 숨은 본질을 꺼내었다. 한번은 하산Hassan이 그녀를 찾아왔다. 이른 아침 하산은 아 침 기도를 드리기 위해 그녀에게 코란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라비야가 자신의 코란을 그에게 빌려 주었다. 하산은 기겁을 하 고 놀라서 소리쳤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이 무슨 불경죄인가?" 라비야는 코란의 많은 부분을 고쳐 놓았던 것이다. 여기저기 서 많은 단어들을 삭제하고, 어떤 부분에선 한 페이지 전체를 빼 버리기도 했다. 하산이 말했다. "이런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코란을 마음대로 고쳐선 안 된 다. 누가 예언자의 말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신의 마지막 메신 저의 말을!" 회교도는 마호멧을 그렇게 부른다. 신의 마지막 메신저! 마호 멧 이후에는 다른 예언자가 존재할 수 없다고 그들을 믿는다. 그 러니 누가 그의 말을 고칠 수 있겠는가? 라비야는 웃음을 떠뜨리면서 말했다. "종교적 전통에 대해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신을 일 대일로 만났다. 그리하여 나의 체험에 따라서 그 책을 바꾸었다. 이것은 나의 책이다." 그녀는 또 하산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항의할 권한이 없다. 이것은 내 물건이다. 오 히려 그대는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체험이 아니라 내 자신의 체험에 충실해야 한다." 이 사람이 바로 라비야, 정말 믿어지지 않는 여성이었다. 라비야를 [내가 사랑한 책들] 목록에 포함시킨다. 그녀는 마 담 블라바츠키를 물리치기에 충분하다. 라비야의 노래 역시 그 녀가 직접 글로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라비야 는 문득문득 존재의 환희에서 터져나온 노래들을 불렀을 것이 고, 그 노래들을 제자들이 한자 한자 받아적었을 것이다. 그 노 래들을 나는 사랑한다. 미라Meera는 아름답긴 하지만 짠 맛이 없다. 그냥 달콤하기 만 하다. 그러나 라비야는 아주 짜다. 알다시피 나는 당뇨가 있 기 때문에 미라의 단맛은 즐길 형편이 못된다. 라비야는 문제가 없다. 나는 원하는 만큼 라비야의 짠맛을 즐길 수 있다. 사실 나 는 설탕을 좋아하지 않으며, 사카린은 더욱 싫어한다. 인공 설탕 은 당뇨에 치명적이다. 소금이라면 문제가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라비야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라비야여, 그대는 세상에 존재한 모든 여성의 소금이다." 제9권은 시크교Sikhism의 창시자 나나크(9)의 노래이다. /(9)1469년 현재는 파키스탄 지역인 라호레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상 인 계급인 힌두교도였으며, 어려서부터 조숙하였고 천부적인 시인 Bakta 였다. 너무 명상과 종교적인 사색을 좋아하여 보모가 바라는 목동이나 점원의 직업에는 적합치 않았으나 결국 행정부서에 취직하여 결혼하고 두 아이를 두었다. 그러나 저녁이면 나나크는 자기의 '창조주'에게 찬송 을 부르는 일로 시간을 보냈으며, 친구인 음유시인 마르다나도 찾아와 합세했다. 마르다나는 원래 회교도였지만 이후 나나크의 활동에서 중요 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 두사람을 중심으로 점차 조그만 종교집 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나나크는 인도 북부와 서부지방을 널리 여 행하면서 마르다나만을 동행으로 하였다. 나나크가 노래를 부르면 마르 다나는 레베크rebeck라는 작은 현악기로 반주를 했다고 한다. 두 나그네 는 인도뿐 아니라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여러 성지를 비롯해서 주요 순 례지를 방문하였고, 종교 지도자들의 거부와 푸대접에도 아랑곳없이 나 나크는 시장이나 광장, 거리 모퉁이에서 쉬지않고 노래하며 설교했다. 그렇게 해서 시크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나나크는 단 한명의 추종자인 마르다나Mardana를 데리고 당시 알려진 영적 세계를 전부 유람했다. '마르다나'는 '진실로 용감 한 자'라는 뜻이다. 추종자가 되기 위해선 용감해야 한다. 마르 다나가 시타르sitar를 연주하고 나나크는 노래를 부렀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도道의 향기를 뿌리면서 세상을 유람했다. 나나 크의 노래는 더없이 아름답다. 그노래들이 나를 눈물짓게 한다. 나나크의 노래 때문에 새 언어가 탄생했을 정도이다. 그는 문 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바탕으로 펀잡어Pun- jabi가 탄생했다. 펀잡어는 마치 매서운 칼날처럼 강력하기 그지 없는 언어다. 제10권. 나는 늘 상카라차리아(10)Shankaracharya 에 대해 말하 고 싶었다. /(10)788-820. 남인도에서 출생하여 [베다]를 배우고 수많은 사원을 건설 하였다.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논쟁에 참여하고 교단을 세워 그 확장 에 힘썼다. 샹카라의 사상 체계는 비이원론非二元論advaita이라고 불리운 다. 세계(프라크리티)와 개개의 자아(지바), 그리고 브라흐만이 절대로 하 나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 르지 않은', '둘이 아닌' 실재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비인 격적이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브라흐만은 인간 체험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초경험적이라는 것이다. 그 영원 불멸하고 존재로 충만한 브라흐만 이외의 모든 것은 흘러가는 강물, 타오르는 불꽃처럼 덧없고 혼탁하며 실체가 없고 바나나처럼 골조도 없으며,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신기루, 일장춘몽이라는 것이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바드라야나의 [브 라흐마 수트라]에 주석을 단 [브라흐마 수트라 바이샤Brahma Sutra Bhaisya]이다./ 현재의 상카라차리아가 아니라 제1대 상카라차리아 를 말하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저서 [비베크 추다마니Viver Chudamani]에 대해 강의하기로 나는 결정을 내렸었다. [비베크 추다마니]는 '깨달음의 보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나는 미치광이라서 마지막 순간에 그 결정을 철회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사랑보다는 논리가 앞선 책이며, 나는 그 논 리가 지겨웠다. 이 책은 결코 작은 분량이 아니다. 방대한 양이 기 때문에 8개월을 쉬지않고 강의해야 했다. 그것은 길고 긴 여 행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되 었다. 그러나 내가 꼽고 있는 위대한 책들 목록에 마땅히 이 책 을 포함시켜야 한다. 상카라차리아의 저서 [비베크 추다마니]는 두말할 필요없이 여기저기에 보석, 꽃, 별이 빛나고 있다. 동시에 힌두교 바라문 성직자의 쓸데없는 잔소리가 길게 이어져서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은 위대하다. 많은 돌과 진흙이 있다고 해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문닫을 순 없는 법이다. 제11권이자 제1부의 마지막 책은 하즈라트 마호멧Hazrat Mohammed의 [코란Koran](11)이다. /(11)또는 꾸란. 이슬람교의 성전. 읽어야 될 책이라는 뜻. 이슬람교들에게 있어서 신성한 말인 아라비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본래 번역이 금지되 어 있다./ 코란은 눈으로 읽어야 할 책이기라기보다는 노래로 불러야 할 책이다. 눈으로 읽는다면 그 맛을 잃을 것이다. 노래로 부를 때 신이 돕는다면 그 정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코란은 학자나 철학자에 의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마호멧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름 석자조차도 쓸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신이 들려 버렸다. 그의 순진무구함 때 문에 그는 신에게 선택받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바로 [코란]이다. 나는 아라비아어를 모르지만 [코란]만큼은 이해한다. 그 리 듬을, 그 리듬의 아름다움을, 아랍어의 그 사운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 송이 꽃을 볼 때 "이 꽃의 의미가 무었인가?"라고 묻는가? 꽃만으로도 충분하 다. 하나의 불꽃을 바라볼 때 "이 불꽃의 의미가 무엇인가?"라 고 그대는 묻는가? 불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의 아름다움이 곧 그것의 의미이다. 바로 그 '의미없음無意味'이 의미이다. 내가 제1부의 마지막을 [코란]으로 장식하게 된 것에 대해 신 에게 감사드린다. 인살라Inshallah!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의ㅣ를 초월해 있고, 가장 중요한 책, 그러면서도 인류 역사를 통털어 가장 비논리적인 이 책[코란]이여! 제 2 부 6 이제 제2부의 시작이다. 1부에서 나는 50권의 책을 말했다. 원래 그것으로 끝날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되 었다. 그리고 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생의 매순간이 끝이 아니가? 처음에 내가 50권을 정한 것은 그 숫자가 마음에 들어서다. 어쨌거나 사람은 때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모든 결정은 변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결정을 내리고 신은 그 결정을 바꾼다 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사실 내가 제1부로써 [내가 사랑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 주 끝내려고 했을 때 나를 붙잡고 늘어졌던 [기트 고빈다]의 자 야 데바, [숨은 교리]의 마담 블라 블라바츠키를 비롯한 그 일 당들은 쾌재를 부르면서 사라졌다. 그때 나는 예수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착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의 것이다." 예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 "끝에 서있는 자, 앞서려고 남을 밀치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 도다." 맨 뒤에 서서 끝까지 기다리는 자, 그에게 복이 있다. 남을 밀 치고 앞으로 나선 그 악당들이 쾌재를 부르며 사라진 다음 나는 뒤에서 말없이 기다리는 그 복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제 2부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고오타마 붓다Gautama Buddha의 [법구경法句經The Dha mmapada(1)]을 어떻게 해서 빠뜨리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납득 이 가지 않는다. 고오타마 붓다가 줄의 맨끝에서 조용히 눈을감 고 앉아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1)'진리의 말씀'이란 의미로 팔리어로 기록되었으며, 초기불교의 교단 내 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던 붓다의 시를 모아서 편집한 것이라 고 여겨진다. 불교 성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불교의 윤리적 교리를 가르치고 있어서 불교 입문의 지침서다. 뿐만 아니라 주옥같은 문자로 붓다의 참뜻을 전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예로 부터 가장 널리 불교도 사이에 애송되어 왔으므로, 이것보다 오랫동안 또 널리 불교도에게 읽혀진 성전은 달리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 누구보다도 붓다를 나는 사랑한다. 평생에 걸쳐서 나는 그 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이에 대해 말할 때도 나느그의 이 야기를 했다. 이것은 나의 진실한 고백이니 꼭 적어 넣으라. 붓 다를 끌어들이지 않고선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붓다를 끌어들이지 않고선 마호멧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했건 안 했건 그것은 중요하 지 않다. 나로선 붓다를 말하지 않고서 다른 무엇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나의 살이요, 뼈이며, 나의 골수骨髓다. 그는 나의 침묵이며 동시에 나의 노래이다. 맨 뒷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러한 것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사과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과를 뛰어넘는 문제였다. [담마파다]는 문자상으로 '진리의 길'이란 뜻이며, 더 정확히 는 '진리의 발자취'라는 뜻이다. 이 말의 모순됨을 알겠는가? 걸어들어가고 걸어나오지만 수면에는 발자취 하나 남지 않는구나 여기 길 안내자도 필요없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발자취란 없다. 하늘을 나는 새는 허공에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모든 붓다 들은 하늘의 새와 같다. 그러나 붓다들은 항상 모순된 말을 한다. 최소한 그들은 어떤 말을 해야 한다. 따라서 모순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 진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 이다. 말하지 않는 것 역시 모순이다. 말하지 않는다 해고 이미 그 침묵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 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표현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붓다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책에 [담마파다]라는 이름을 붙 였다. 그것은 모순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다. 그는 너무 많은 모 순으로 가득찬 인물이기 때문에 나를 제외하곤 누구도 그를 물 리칠 수 없다. 물론 붓다는 나에게 지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아버지는 이따금 아들에게 지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아들이 아 버지 배 위에 올라타서 이겼다고 기뻐할 때 아버지는 아들이 승 리감을 맛보도록 허락한다. 모든 붓다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자에게 지고 싶어한다. 나 역 시 제자들이 나를 이기고, 나는 뛰어넘길 원한다. 한 제자가 나 를 능가하는 것을 보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고오타마 붓다는 [담마파다] 그 이름으로 설법을 시작한다. 그의 설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설명이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는 대단히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 하여 [담마파다]는 히말라야와도 같은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상엔 수많은 산들이 있지만 히말라야의 높이를 따를 산은 없다. 붓다가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또 그곳에 다 른 이들도 있었다. 순하고 아름다운 이들.... 그들은 "나를 들어 가게 해주시오!"라고 소리치면서 주먹으로 문을 두들겨대는 블 라바츠키 같지가 않았다. 마하비라도 벌거벗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진리는 옷을 모두 벗은 알몸이기에 그는 그곳에 알몸인 채로 깊은 삼매경 속에 서있었다. 그 옆에는 그의 제자들이 그의 책을 들고 서 있었다. 제2권은 [자이나 경經Jaina Sutras](2) 이다. '승리자의 경전'이 다. '자이나'는 아름다운 단어이다. 그것은 정복자, 승리자를 뜻 한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자'라는 뜻이다. /(2)자이나교에는 성전聖典Agama, Siddhanta라고 불리는 것이 46개 있다. 마하비라는 당시의 종교계에 전하는 교리를 정리하여 자기의 체계를 세 워 포교하다가 기원전 447년 경에 열반했으나, 가르침은 구전으로 전수 되었다. 그 특징은 인도에 아리아인이 침입하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생 각되는 출가 해탈주의의 종교의 흐름을 전하는 것으로, 교리는 불교와 는 달리 자아自我라는 영속적 존재를 인정한다. 또 단식을 특징으로 하 는 고행으로써 윤회로부터 해탈한다고 하고, 윤회는 자기의 행위의 결 과에 따라 생기는 까르마에 의해 일어나며, 고행은 이 까르마를 없애는 것이다. 종교생활과 수행은 철저한 불상생과 무소유를 그 신조로 삼으 며, 아무리 하찮은 미물까지도 인정하는 이 가르침은 불교의 중도中道에 비해 지나치게 탈세속적이고 극단적이다. 따라서 불교와 같은 대승적 견지의 발전은 없으나 고대의 과학, 전설, 역사 등도 받아들여 교리 체 계를 이루고 있다. / 나는 이 경전에 대해 여러 권의 분량으로 강의를 했다. 그러 나 그것들은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이 [자이나 경]을 제2부에 포함시키는 바이다. 마하비라만큼 침묵이 깊었던 자도 없고, 마하비라만큼 벌거 벗고 산 자도 없다. 침묵만이 벌거벗을 수 있다. 나는 '누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알몸'을 말하는 것이다. '누드'라는 표현은 외설적이지만 '알몸'은 자신을 감추지 않은 완전히 열린 상태를 말한다. 갓난아이를 보라. 그들은 누드가 아니라 알몸일 뿐이다. 알몸인 상태의 마하비라는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전하는 바로는, 마하비라는 자신의 경전을 누구에게도 설하 지 않았다. 오직 가까운 수제자들만이 그의 곁에 앉아서 내적으 로 그 경전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기적이 아 닐 수 없다. 마하비라 주위에는 11명의 수제자들로 구성된 비밀 조직이 있었으며, 그들은 동시에 같은 말을 내적으로 전해 들었 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마하비라가 입을 통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을 기록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마하비라는 은밀한 방식으로 염파를 통해 가르침을 전수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나경]은 세상의 어떤 책과도 다른 방식으로 기 록되었다. 스승은 침묵을 지켰지만 11명의 수제자는 동시에 같 은 말을 들었다. 이 '동시에 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을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자이나 경]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책이 세상에 또있겠는가? 이보다 더 환상적인 저술 방법은 없거니와, 이 책은 인간이 얻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빛,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비결을 수록하고 있다. 제3권.....그 다음에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수많은 생동안 나는 한 사람의 여행자로서 많은 길을 여행했 고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많은 신비학파를 경험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전혀 생소한 사람이다." 알고 보니 그는 한 사람의 스승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몰라 본 까닭이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를 이 시리즈에 포함시켜야 한 다. 나는 언제나 그의 책을 사랑했다. 어떻게 해서 그의 책이 제1 부에서 빠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그리스인으로 이름은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3)이며, 바로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의 저자이다. 그의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는지 도 모르지만 [희랍인 조르바]는 걸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작품을 남긴 사람은 한 사람의 붓다도 아니고 한 사람의 마하비 라도 아니었으나 그러한 경지에 오를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자 였다. 이미 충분히 익어서 시기가 되면 언제라도 떨어진 그러한 자였다. /(3)알버트 슈바이쩌, 토마스 만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비평가와 학자들 로부터 금세기 최고의 재능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 1883년 크레테 섬에서 태어나 아테네 대학에서 법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파리 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문하생이 되어 철학을 전공했으며, 4년간은 독일 과 이탈리아에서 문학과 미술을 공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전까 지 많은 시간을 에게 섬에서 보내면서 철학과 문학 작업에 몰두했다. 1945년에 잠시 그리스 문교부장관을 역임했으며 그리스 문인협회 회장 을 지내기도 했다. 후반의 생애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보냈다. 1957년 독 일에서 사망. [희랍인 조르바],[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희랍인의 열 정]등의 대작을 남겼으며, 소설가이면서 극작가, 번역가, 시인, 여행 작 가이기도 했다. 앤소니 퀸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그의 대표작 [희랍 인 조르바]는 생에 대한 열정과 광기를 갖고 살아가는 '조르바'라는 인 물을 통해 생은 심각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누려야 할 즐거움'이라고 역설한다. 조르바는 나의 연인의 한 사람이다. 나는 기인奇人을 사랑한 다. 조르바는 아주 이상한 기인이었다. 비록 실존 인물이 아니고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나에게는 그가 실존 인물 이상이다. 그는 에피쿠로스Epicurus, 차르바카스Charvakas 등 세상의 모든 유물 론자를 대표한다. 단순히 그들의 대표일 뿐 아니라 그들의 완벽 한 모습이 바로 조르바이다. 어느 곳에선가 조르바는 그의 사장에게 말한다. "보스, 당신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에서 멀어져 있 다. 그것은 당신 안에 약간의 광기狂氣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 이다. 약간의 광기를 가질 수만 있다면 당신은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조르바를 이해한다. 조르바뿐 아니라 '약간의 광기'를 지녔던 역사상의 모든 조르바를 이해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약 간'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완전히, 끝까지 미친 자이다. '약간' 미친 자는 약간의 삶만을 맛볼 뿐이다. 물론 전혀 맛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지만. 조르바.....가난하고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막일꾼이었던 조 르바, 그는 분명 몸집이 거대하고 강인한 체격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광기'로 눈이 빛났을 것이다. 그는 그를 채용한 광산의 보스에게 말한다. "약간의 광기를 가져라." 그러나 나로선 약간의 광기만으로 부족하다. 미치려면 완전 히 미쳐라! 오나전히 미치려면 명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그대는 말 그대로 돌아 버릴 것이다. 오히려 광기 때문에 에 너지가 완전히 소모될 것이다. 명상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그 광기가 그대를 태워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르바 붓다Zor ba the Buddha(4)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든 것이다. /(4)붓다이면서 산속에 있지 않고 시장속에 있는자, 시장 속에 있으면서 붓다인 자를 일컫는 말로 오쇼 라즈니쉬가 예언하는 신인간이다./ 조르바 붓다는 일종의 종합이다. 위대한 걸작품을 남긴 것에 대해 나는 카잔차키스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아직 그는 어둠 속에 있다. 카잔차키스여, 그대에겐 '약간의 명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무엇인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제4권의 주인공으로, 더없이 아름다운 한 사람을 나는 보았 다. 나는 그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지만 제1부의 50권 속에는 그 의 이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알 힐라즈 만수르 Al-Hillaj Mansoor(5)이다. 만수르는 책을 쓰진 않았으나 몇 마디 의 말을, 아니 그보다는 몇 개의 선언을 남겼다. 만수르 같은 사 람은 오직 선언할 뿐이다. 그것은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 니다. 그에겐 에고라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날 하 크Ana'l haq!"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곧 신이다. 다른 신이 있지 않다"라는 뜻이다. /(5)수피의 성자로 평생을 거지로 살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다가 돌 에 맞아 죽었다. 여기 슬픈 일화가 있다. 만수르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 에 그의 스승도 있었다. 이 스승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 매우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였다. 사람들이 만수르에게 돌을 던지자 그 스승도 사람 들의 눈치 때문에 뭔가를 던져야 했는데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장미 꽃을 던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돌을 맞으면서도 울지 않던 만수르는 장 미꽃을 맞자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는 한다. 그래서 돌로 치는 것보다 장 미꽃으로 치는 것이 더 아프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회교도들은 그러한 그의 선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들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과연 알 할라즈 만수르 같은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군중이 그를 죽일 때, 죽어가면서도 만수르는 웃었다.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왜 웃는가?" 그는 대답했다. "그것은 그대들이 나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오 직 이 육체를 죽일 수 있을 뿐, 거듭 거듭 말하지만 나는 육체가 아니다. 아날 하크! 나는 신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세상의 소금이다. 알 힐라즈 만수르는 어떤 책도 쓰지 않았다. 그가 행한 몇 개 의 선언만이 그를 사랑하는 이들과 친구들에 의해서 수집되었 다. 나는 추종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만수르 같은 사람 은 추종자와 모방자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사 랑하는 이와 친구만을 받아들인다. 제1부에서 만수르를 까맣게 잊은 것에 대해 미안하다.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만수르여, 당신은 나의 난처한 처지를 이해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들은 것보다 훨씬 많은 책 을 읽었다. 10만권 이상의 책을 나는 읽었다. 이제 그 중에서 50 권을 추려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눈물을 머금 고 많은 주인공들을 제외시켜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들 모두를 다 집어 넣고 싶지만, 이 한정된 시간에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 가? 어쨌거나 당신을 제2부에 포함시키노라. 제5권의 주이공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사람이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는 글으 ㄹ쓴 적도 없으며 말을 한 적 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마하가섭磨河迦葉Mahakashya pa(6)이다. 그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일화만 전해질 뿐이다. /(6)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던 붓다의 상수上首제자. '가섭'이란 바라문 계급 의 성으로, 가섭 가문에서 출가한 자들이 붓다의 제자보다 많았다. 엄격 한 두타행頭陀行(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으로 두타 제1이라 일컬어짐. 마갈타국의 바라문 출신. 이름은 필파라畢波羅 Pippali. 부모가 필파라 나무의 신에게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라 한다. 붓 다의 출현과 함께 불제자가 되었고, 항상 누더기 옷을 걸쳐 승려들에게 멸시 받았으나 붓다는 그를 옆에 앉혀서 그의 위대한 점을 대중에게 알 렸다. 처음에는 머리도 깎지 않아 모든 승려들 중에 유독 한자서 머리를 기르고 지냈다. 붓다가 입멸하자 가섭은 제자들 중 가장 연장자였기 때 문에 붓다의 다비식을 거행하고 장례 후 500인의 아라한들을 집결하여 왕사성에서 제1차 결집(불전편집회의)을 개최, 그 의장이 되어 붓다의 가 르침을 결집하여 그것을 후대에 전했다./ 어느날 붓다가 아침 설법을 하러 나오면서 연꽃 한 송이를 손 에 들고 나왔다. 붓다는 그 꽃을 응시하면서 한 마다의 말도 하 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10만 명의 대중들이 어리둥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은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우선 붓다는 지금까지 손에 무엇을 들고 설법 석상에 나온 적이 없었으며, 두 번째로 붓다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설법을 시작했던 것이 다. 그런데 그날은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손에 든 연꽃 만 응시할 뿐이었다. 모두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이 들은 붓다가 드디어 미쳐 버렸다고 생각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이것을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이 마하가섭이다. 붓다는 눈을 들어 함께 미소지으면서 마하가섭을 불러 그에게 연꽃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그 자리에 모인 대중에게 설법이 끝났음을 알리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말로써 많은 것을 전달하려고 애 썼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 나는 침묵 속에서 말을 했으며, 마하가섭은 그것을 이해했음을 미소로써 보여 주 었다." 이 신비한 방식으로 법통法統을 이어나갈 후계자가 결정되었 다. 마하가섭이 붓다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이상한 방식으로. 마하가섭의 제자들이 마하가섭에 대해 몇 가지 일들을 기록 했으며, 굳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마하가섭의 저서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마하가섭은 책을 쓰지 않았으며, 그의 제자들 역시 책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모두 익명으로 행세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기록된 것은 무한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 다. 몇 줄에 지나지 않지만 보름달의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을 한데 모으면 다시 보름달이 나타난다. 그것들을 한데 모으는 일 이 곧 명상이다. 마하가섭에서 시작된 전통이 바로 선禪이다. 그는 '드히야나 dhyana', 즉 석의 제1대 조사祖師이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붓 다가 아니라 제자인 마하가섭이 제1대 조사가 된 것이다. 그것 은 붓다는 40년 동안 연설을 했지만 마하가섭은 한 마디의 연설 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낸 소리라곤 웃음소리뿐이다. 물 론 그 웃음소리 역시 하나의 언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문 제다. 어떤 면에선 웃음 역시 하나의 언어이다. 존재계 전체가 하나의 농담거리임을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존재계 전체가 하나의 농담거리임을 이해하는 순간 그대는 깊은 앎知에 도달한 것이다. 다른 앎이, 다른 깨달음이 있지 않 다. 그밖의 다른 것들은 거짓된 것이다. 제6권.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를 나는 보았다. 그는 깨달음 에 도달한 자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 존재였다. 그러나 그에게 는 시적인 표현 능력이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인 [싯달타Siddhartha]를 쓸 수 있었다. 싯달타는 고오타마 붓다의 원래 이름으로, 부모가 지어 준 것 이다. 고오타마는 그의 성姓이고,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그의 부모는 점성가들과 상의한 끝에 그에게 싯 달타라는 이름을 주었다. 싯달타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싯달타 역시 '참의미를 획득한 자'라는 뜻이다. '싯다Siddha'는 '얻은 자, 획득한 자'의 뜻이고, '아르타artha'는 '참의미'의 뜻이다. 그 둘을 합치면 '삶의 참의미를 발견한 자'라는 뜻이 된다.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준 부모와 점성가들은 무척 지혜로운 자들이었 던 것 같다. 깨달음을 얻진 못했어도 최소한 깊은 지혜를 가졌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는 약간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같은 차원에서 붓다의 생애를 다시 서내려가고 있다. 헤르만 헤세가 이 책은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헤세 자신 은 '싯다'가 되지 못했다. 여전히 한 보잘것 없는 작가였다. 물론 노벨상을 수상하긴 했으나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진 않는다. 한 사람의 붓다가 노벨상을 받는 것을 보았는가? 그는 웃으면서 그것을 멀리 내던졌을 것이다. 하여튼 이 책은 무척 감 동적이고 아름다운 책이다. 그것을 여기에 포함시킨다. 제7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주 전통적이고 배 타적인 유태교 안에도 깨달음에 이른 몇 명의 스승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깨달음을 초월하기까지 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알 셈 토브Baal Shem Tov이다. 그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용서받을 수 없으며, 용서를 구할 사람도 나에겐 없다. 바알 셈 토브. '토브'는 그가 살았던 마을의 이름이다. 그의 이 름은 '토브 읍셍서 온 바알 셈'이란 뜻이다. 따라서 그를 바알 셈 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하시디즘Hassidism(7)에 대해 강의할 때 나는 수없이 그를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나는 본질에 접근한 것들에 대해선 모조 리 강의를 했다. 도道, 선禪, 수피즘, 하시디즘.... 건드리지 않 은 것이 없다. 나는 어떤 한가지 신비 전통에 소속된 사람이 아 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모든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심지어 나느 지도조차도 필요 없다. /(7)유태교의 한 분파로 시작된 신비주의 수도승들(랍비)로, 18세기 동유럽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폴란드로 이주한 위대한 스승 바알 셈이 하시디 즘의 창시자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병든 자를 낫게 하 여 군중을 사로잡았으며, 경전을 새롭고 신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는 또 위대했던 신비가들이 그러했듯이 진정한 깨달 음은 자기 속의 신과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나는 그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 은 고행이나 단식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며, 단 자신의 품안에서 춤추며 기뻐하는 일이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실 긍정의 새로운 종교 운동은 불길처럼 동유 럽 전역에 번져 유태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결국 기존의 교리 중심 적인 정통 유태교의 박해와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 정책으로 그 운동 은 지하화되고 축소되었다. '하시드'는 은총을 의미하며, 그들의 종교는 은총과 기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삶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이므로 그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은 은총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역설하고 있다. 춤추고, 노래부르고, 소리지르고, 술을 마시는 것을 종교적인 의식으로 삼기도 했던 그들은 춤과 노래와 외침과 술 속에서 존재의 환희를 체험 하고 황홀한 무아경에 도달하고 또 그것을 통해 신을 만나고자 했다. / 걸어들어가고 걸어나오지만 수면에는 발자취 하나 남지 않는구나. 여기 길 안내자도 필요없다. 바알 셈 토브는 어떤 경전도 쓰지 않았다. 신비주의 세계에서 경전이란 추한 단어이다. 그대신 그는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이 야기들을 들려준다. 그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한 여인이 바알 셈을 찾아왔다. 그 여인은 자식이 없었기에 자식을 낳기 원했다. 그래서 날마다 바알 셈을 찾아와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면서 애원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합니다. 부디 나를 축복해 주세요. 나에게 자식 하나늘 점지해 주세요." 결국 여인의 애원에 지친 바알 셈은 여인에게 물었다. "아들을 원하는가, 딸을 원하는가?" 여인은 너무나 기뻐서 소리쳤다. "물론 아들을 원합니다." 바알 셈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잘 들어라. 나의 어머니 역시 자식을 낳지 못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을의 랍비를 붙들고 날마다 애원했다. 자기에게 축복을 내려서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마침 내 랍비는 어머니에게 먼저 예쁜 모자를 하나 선물하라고 말했 다. 어머니는 예쁜 모자를 만들어서 랍비에게 선물했다." 그 모자는 정말로 멋있었다. 그래서 바알 셈의 어머니는 말했 다. "저는 어떤 보상도 원치 않습니다. 이 멋진 모자를 쓰고 계신 랍비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감사를 느낍니다." 바알 셈은 그 여인에게 말했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여인은 말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내일 저도 멋진 모자를 갖고 오겠습니 다." 다음날 여인은 정말로 아주 멋진 모자를 들고서 나타났다. 바 알 셈은 그 모자를 받긴 했지만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여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참을 수 없어서 물었다.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요?" 바알 셈이 말했다. "아이에 대해선 잊어 버려라. 이 모자는 정말 멋지긴 하지만 그대는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잊었는가? 나의 어머니는 랍비에 게 모자를 선물한 대가로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임 신을 하게 되었고 나 같은 아이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무엇을 얻겠다는 욕망을 갖고 왔다. 이 모자를 선물하는 대가로 바알 셈 같은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이에 대해 선 잊으라. 그리고 다시는 이곳을 찾아오지 마라." 오직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된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바 알 셈은 아주 근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다. "요구하지 말라, 그러면 주어질 것이다." 요구하지 말라. 이것이 근본 조건이다. 바알 셈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일어난 하시디즘 운동은 종 교의 역사에서 피어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유태교는 모든 면에서 하시디즘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시디즘은 그 물줄기 가 크진 않지만 아직도 살아서 흐르고 있다. 제8권의 인물은 파리드Farid(8)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 나는 전 에 여러날 강의한 적이 있다. 물론 영어가 아니라 힌두어 강의였 다. 파리드는 수피의 신비가로 까비르, 나나크 등과 동시대 인물 이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의 노래에서 그는 자신을 '파리다 Farida'라고 부른다. 언제나 그는 자신을 향해 노래부른다. 남을 향해 부르는 법이 없다. 항상 그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파리다여, 그대는 듣고 있는가? 파리다여, 잠에서 깨어나라! 파리다여, 이렇게 저렇게 하라?!" 힌두어에서 '파리드'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이름에는 존경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파리다'라고 하면 존경의 뜻이 전혀 없 다. 노예나 하인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른다. 파리드가 자기 자신 을 '파리다'라고 부른 것은 자기의 육체는 하인이며 자기가 주 인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 아크바르Akbar가 파리드를 방문해서 그의 노래를 귀기울여 듣곤 했다. 한번은 아크바르가 매우 값비싼 선물을 받 았는데, 그것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가위였다. 아크바르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파리드에게 좋은 선물이 되 리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그 값비싼 황금 자위를 파리드에게 주었다. 파리드는 그 가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다시 아크바 르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소.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 다면 바늘을 가져오시오." 아크바르는 이해가 안 가서 물었다. "왜 하필이면 바늘이오?" 파리드가 말햇다. "가위는 물건을 조각낼 때 쓰이지만 바늘은 조각난 것을 한데 합칠 때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오. 나의 작업 역시 가위가 아니라 바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오. 나는 종합하고 통합하는 일을 하고 있소." 파리드는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정신분석과 같 은 작업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분석이란 그 황금 가위 처럼 모든 것을 조각내는 일이다. 오히려 파리드는 아싸지올리 Assagioli와 같은 정신통합psychosynthesis에 찬성했을 것이다. 분열되고 조각난 것들을 하나로 만드는 일. 내 눈에 눈물이 어린다. 이 눈물은 파리드를 위한 것이다. 아 니, '파리다'를 위한 눈물이다. 그에겐 거짓된 존경의 표시가 통 하지 않는다. 그는 황금 가위가 아니라 눈물을 이해할 것이다. 아아, 만일 아크바르 황제가 파리드의 발 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 릴 수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승에게 바치는 진정한 선물이 었을 것이다. 파리드는 책을 쓰지 않았으나 그의 노래들이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의 노래는 더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단, 그 노래들은 펀잡어Punjabi로 들어야 한다. 그는 펀잡 지방에 살았 기 때문에 그의 노래 역시 힌두어가 아니라 펀잡어이다. 펀잡어 는 힌두어와 아주 다르다. 힌두어는 온건한, 소위 사업가의 언어 이다. 반면에 펀잡어는 칼날과 같아서 전사戰士의 언어이다. 펀 잡어는 깊숙히 찌르고 들어온다. 파리드의 펀잡어로 된 노래를 듣는 순간 그대는 심장이 멎을 것이다. 펀잡 지방을 여행할 때 나는 사람들에게 묻곤 했다. "파리드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가?" 그렇게 해서 이따금 나는 파리다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 을 만나 열차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그들의 노래를 감동적으 로 듣곤 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가수였다. 아아, 얼마나 아름 다운 순간이었는가! 펀잡어는 그 자체의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펀잡어는 확실히 날카로운 비수와 같다. 제9권 역시 시인이며, 춤추는 자이고, 노래 부르는 자의 책이 다. 곧 시바Shiva 신의 [비그야나 브하이라바 탄트라Vigyana Bhairava Tantra]가 그것이다. 나는 이책에 대한 뜨거운 강의를 한 바 있다. 이 책은 아주 작은, 불과 112개의 짧은 경經에 지나 지 않는다. 책의 한 페이지나 기껏해야 두 페이지에 다 적을 수 있는 분량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수천 페이지가 넘는 다섯 권의 책으로 강의를 했으며, 그 강의 시리즈의 제목은 [비법秘法의 서書The Book of the Secrets]이다. 이 [비그야나 브하이라바 탄트 라]에 압축되어 표현된 내용을 능가할 다른 책을 나는 알지 못 한다. 시바신의 경전인 이 책의 모든 경이 저마다 하나의 비법이 다. 제10권. 언제나 나는 우마 스와티Uma Swati와 그의 책에 대 한 강읠르 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우마 스와티는 한 사람의 신비가다. 하지만 매우 건조한 신비가다. 지금 내 입술처럼 전혀 물기가 없이 건조할 뿐이다. 그는 절대 진실에 대해 매우 건조하 긴 하나 진리에 입각한 설명을 했다. 그의 책의 제목은 [타트바 수트라Tatva Sutra]이다. '타트바'는 '궁극의 실체'를 의미한다. '타트Tat'는 곧 영어의 '그것that'에 해당하는 것으로 궁극의 것 을 상징한다. '이것'은 눈앞의 것을, '그것'은 궁극의 것을 가리 킨다.(9) /(9)우파니샤드에서는 "그대는 그것이다Tatwamasi"라고 말한다. 이 말이 나오는 부분을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기로 한다. 옛날 어느 마을에 스베 타케투라는 이름의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우탈라카는 어느 날 소년에게 말했다. "스베타케투, 나의 아들아. 집을 떠나 은밀한 지혜를 터득했을 때, 우리 는 성스런 바라문이라 불려질 수 있느니라." 소년은 [베다]를 배우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때 소년의 나이는 열두 살 이었다. 그로부터 12년 후 소년은 많은 지식과 나름대로의 사색을 얻고 자랑스럽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우탈라카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스베타케투, 나의 아들아. 너는 많은 배움을 얻은 듯하구나. 너는 많이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구나. 그런데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며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러한 이치를 공부하였는가?" "어떻게 그런 가르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버지?" 스베타케투가 반문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여기 진흙이 있다고 하자. 흙으로 빚어진 모든 것은 진흙의 본질을 알 때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니라. 그것이 도자기 이건 물그릇이건 항아리이건, 그것들은 단지 말에서 파생되어 변질된 이름일 뿐이다. 진리는 흙, 바로 그것뿐이니라." 스베타케투가 말했다. "아마 나의 스승님은 그런 것들을 알지 못했나 봅니다. 스승이 아셨다면. 어찌 그것을 저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아버지, 저에게 가르 쳐 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아, 내 너를 위해 말하리라. 저 무와과나무의 열매를 내 게 따오너라."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그것을 반으로 자르라." "잘랐습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아주 작은 씨앗이 있습니다." "그 씨앗을 다시 반으로 자르라." "잘랐습니다, 아버지." "그 안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우리들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씨앗 속의 미세한 본질이 바로 이 무화과나무를 만들었느니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보 이지 않는 이 미세한 본질이 이 우주의 본체이니라. 그것은 실재實在이 니라. 그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아버지." "그렇게 하리라, 나의 아들아. 이 물그릇에 소금을 담았다가 내일 아침 내게 가져오너라." 스베타케투는 아버지의 분부대로 물에 소금을 넣었다가 다음날 아침 아 버지에게로 가져갔다. "어젯밤에 네가 넣었던 소금을 내게 가져오너라." 스베타케투는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소금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미 소금은 물에 용해되었기 때문에. "그릇의 이쪽으로 물을 마셔 보라. 그 맛이 어떠한가?" "이것도 소금물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저쪽에서 마셔보라." "이것 역시 소금물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금을 찾아서 내게 가져오너리." "저는 소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물만 보일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이와 마찬가지로 너는 사트sat有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사트가 이 우주이니라. 그것은 실재요. 진리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요." "그렇게 하리라, 내 아들아. 여기 어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간다라 스의 자기집에서부터 누군가에 의해 눈을 헝겊으로 가리운 채 집에서 먼곳으로 끌려갔다. 그는 동서남북을 떠돌면서 집을 찾았으나 찾을 길 이 없었다. 그는 눈이 가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좋은 사람 이 있어서 그의 눈을 가린 헝겊을 풀어 주고, 그에게 간다라스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자. 만약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는 간다라 스의 자기집에 닿을 때까지 마을마다 사람마다 그곳에 이르는 길을 물 어서 기어이 집을 찾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마치 스승에게 물어서 사트 의 대지를 찾아가는 구도자와 같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자유를 얻을 때까지 이세상을 유랑하리라. 그러나 내가 집에 닿으면 나 의 여행은 끝나리라'고, 이와같이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본질이 이 우주의 사트이니라. 그것은 실재로, 진리이니라, '네가 바로 그것'이다."([챤도갸 우파니샤드4])/ [타트바 수트라]는 매우 훌륭한 책이며 나는 이책에 대해 강 의하려고 여러차례 마음먹었지만 번번이 뒤로 미루었다. 이 책 은 쿤드쿤다의 [사마야사르]처럼 지나치게 수학적이다. 자이나 교의 신비가들은 한결같이 너무 건조하고 삭막하다. 나는 건조한 사막이 아니라 히말라야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 나 나의 제자들 때문에 히말라야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내가 어디에 살든 나 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창조할 것이다. 어떤 도전을 받는지 그것을 이룰 것이다. 제11권이자 제2부의 마지막 책이다. 오늘로서 마지막이란 뜻 이다. 내일에 대해 누가 알겠는가? 여기 이 마지막 책은 사실 맨 처음에 언급되었어야 할 책이다. 그것은 [나로빠의 노래Song of Naropa]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강으도, 아무런 해설도 가하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해선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나로빠 의 노래]는 나의 가슴이 되어 버렸다. 내가 이 책을 언급하는 것 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자들이 그것을 스스로 탐구해 나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로빠의 그 시와 노래들, 나를 잠 못 이루게 했던 그 춤들..... 그시와 노래와 춤은 곧 나의 시이 며, 나의 노래이며, 나의 춤이기도 했다. 옴 마니 팟메 훔 Om Mani Padme Hum 연꽃 속의 보석이여! 7 그대가 노트를 펼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다시 나의 시간이 되었다. 나의 시간은 60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70분 이 될 수도 있고, 90분이 될 수도 있으며, 100분이 넘을 수도 있 다. 숫자라는 것을 초월할 수도 있다. 시간이 나를 구속할 순 없 다. 제2부가 계속된다. 오늘의 제1권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책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말루카Maluka이다. 그는 인도 신비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원래 말루크다스Mal- ukdas인데, 그는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말루카'라고 불렀다. 아니,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린아이였 다. 나는 그에 대해서 역시 힌두어로 강의한 바 있다. 그러나 그 것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기까진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 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루카는 그만큼 기이한 존재이며, 신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주석가와 학자와 판디트pan- dit(1)등으로 가득찬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 아무도 말루카에 대 해 주석을 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말루카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는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서 나 같은 사 람을 기다려야 했다. 내가 말루카를 강의한 첫번째 인물이며, 또 나로서 마지막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1) 힌두교 율법학자를 지칭하는 말./ 보기를 하나 들어 보자. "아즈가르 카라이나 차카리 판치 카라이나 감 다스 말루카 카 하 가예 사브 케 다타 람Ajgar karai na chakari panchhi karai na kam das Maluka kaha haye sab ke data Ram....." 이제 그것을 번역해 보겠다. 물론 정확한 번역은 불가능하지 만 그것은 내 침임이 아니다. 세상의 빈약한 언어로는 그러한 함 축미 있는 내용을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말루카는 말하고 있다. "뱀은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새들 역시 일하러 나가지 않는 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존재계가 모든 것을 그들에 게 제공하고 있다." 말루카는 조르바 같은 사람이 좋아했을 타입이다. 그는 '약간 의 광기', 그리고 깊은 명상을 함께 지니고 있다. 깊은 명상 상태에서 그는 말한다. "말라 자폰 나카르 자폰 지브야나 람, 수미란 메라 하리 카라 인 마인 파야 비스람Mala japon na kar japon jibhya na Ram, su miran mera Hari karain main paya bisram." 그는 말하고 있다. "나는 신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는다. 또 나는 염주를 돌리며 예배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는다. 그러한 어리 석은 것들에 대해 신경쓸 일이 무엇인가?" 그는 또 계속해서 말한다. "사실 신이 내 이름을 기억한다. 내가 그를 기억할 하등의 이 유가 없다." 이것을 이해하겠는가? 약간의 광기와 깊은 명상....말루크다 스야말로 깨달음의 차원까지 초월한 인물이라고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이다. 그는 선禪의 십우도十牛圖(2)의 맨마 지막 열번째 그림이 된 것이다. /(2)도道를 깨치는 일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열 개의 그림. 중국 곽암선사郭巖禪師가 그린 것이다./ 제2권은 시크교Sikh의 책으로 [구루 그란타 사히브Gura Gra- ntha Sahib](3)이다. 이 책은 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 기 때문에 그 저자가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여러 세대 에 걸쳐 전해지면서 완성되고 종합된 것이다. 따라서 이책은 모 든 근원에서 흘러나온 사상의 물줄기들을 종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어떤 책보다 독특하다. /(3)시크교 제5대 구루 아르잔Arjan, 1581-1606이 편찬한 시크교 경전. 아르 잔은 시크교도가 예배에서 사용하는 송가들이 유실될 우려가 있음을 깨 닫고 그것을 한데 모아 집데성했다. 아르잔 자신도 재능있는 시인이어 서 여기에 담긴 송가 절반은 아르잔이 직접 지은 것이다. 나머지는 주로 나나크의 작품이고, 또 자이 데브, 남데브, 까비르 등이 지은 것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이 성전은 시크교 안팎을 불문하고 즉각 유명해졌다. / [구약]은 유태교만의 것이고 [신약]은 기독교만의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교만의 것이며 [법구경]은 불교만의 것, 그리고 [자이나 경]은 자이나교만의 것이다. 그러나 [구루 그란타 사히브]는 세상의 모든 사사의 흐름을 종합한 책이다. 그 물줄기는 힌두교에서, 회교에서, 자이나교에서, 불교와 기독 교에서 다 모였다. 이만큼 이 책은 자기의 것만을 주장하지 않고 활짝 열려 있다. 이 제목 [구루 그란타]는 '스승들의 책' 또는 '마스터북the Master Book'이란 뜻이다. 이 책 속에서 그대는 까비르를, 나나 크를, 파리드를 발견할 것이다. 서로 다른 전통에서 소속된 신비 가들의 길고 긴 도맥道脈과 법통法通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수천 갈래의 강물이 한 바다에서 만나는 것과 같다. [구루 그란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대양大洋이다. 이 책에 나오는 나나크의 가르침 중에서 한 마디만을 번역해 보겠다. 나나크는 시크교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말 들도 이 [구루 그란타]속에 실려 있다. 그는 말하자면 시크교 의 첫번째 스승이다. 그의 뒤를 이어 9명의 스승들이 맥을 이었 다. 따라서 시크교는 10명의 스승에 의해서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가 단 한 명의 스승에 의해서 창시되었다는 점에서 시크교는 드문 종교이다. 나나크는 말한다. "진리는, 궁극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나 를 용서해 달라. 나는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노 래로 표현하겠다. 만일 그대가 음악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대 가슴에 그것이 전달될 것이다. 진리의 전수는 언어 를 초월해 있다." [구루 그란타 사히브]....시크교도들은 이 책에 '사히브Sah- ib'라는 존칭을 붙였다. 그만큼 그들은 그 책을 존중한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마치 스승의 산 정신을 대하는 것처 럼. 그러나 책은 어디까지나 책일 뿐이며, 스승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 그 책은 이미 죽은 것이고 책에 적힌 말들도 죽은 것이다. 그 후에 사람들은 다만 아름다운 시체를 찬양하고 다닌 뿐이다. 세상의 종교들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점을 기억하라. 종교는 오직 그 스승이 살아 있을 때만이 가치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말 그대로 '종교'가 될 뿐이다. 스승이 떠나면 그것은 하나의 교 리로 전라갛고, 교리는 추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한 학자가 종파 연구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다. 두말 할 필요없이 그들은 첫번째 연구 대상으로 나를 지목했다. 나는 네델란드 제자들을 통해 그에게 전했다. "우리는 당신의 세미나에 참석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어떤 종파도 아니며 교리라는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살아 있는 종교이다. 종파나 교리에 속하는 것들은 기독교, 불교, 유태교, 힌두교, 회교들이다." 그 세미나 주최자는 불안을 느꼈다. 그는 네덜란드의 내 제자 들에게 협력해 달라는 편지를 여러번 보냈다. 제자들은 다시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내 생각을 전했다. 그 세미나가 진정한 종교의 정 신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에 참가할 이유가 없 다." [구루 그란타]는 10명의 살아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엮은 책 이다. 10명의 깨달음을 얻은 스승의 말씀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거듭 말하지만 어떤 책도 이 책을 능가할 수 없다. 아주 독 보적인 책인 것이다. 나나크는 말한다. "에크 옴카르 사드하나Ek omkar sadhana." 그것은 이런 뜻이다. "오직 한 가지 것만이 진실하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동양에선 그것을 '옴카르omkar'라고 부른다. '옴om', 오직 그 것만이 진실한 것이다. 소리 없는 소리, 소리가 사라진 다음에 스며드는 침묵과도 같은 것....에크 옴카르 사드하나! 제3권은 마벨 콜린스Maqbel Collins의 [길을 밝히는 빛The Lig- ht on the Path]이다. 가장 차원 높은 삶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원 하는 자는 누구나 [길을 밝히는 빛]을 이해해야만 한다. 분량으 로 따지자면 이 책은 불과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작은 책이 지만, 그 내용의 깊이로 따지자면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책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이 책은 현대에 쓰여졌다. 이 책의 저자 마벨 콜린스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 다. 저자는 자신의 이름 마벨 콜린스를 그대로 쓰지 않고 다만 M.C.라고만 썼다.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 에 M.C.의 몇몇 친구들을 통해서다. 왜 그는 자기의 이름을 약자로 M.C.라고 적었는가?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한다. 글을 쓰는 작가는 다만 하나의 도구일 뿐인 것 이다. 특히 [길을 밝히는 빛]과 같은 경우에는 거욱 그렇다. 아 마도 수피의 길 안내자로서 사람들을 배후에서 이끌어 주는 영 적 전재 키즈라Khijra가 M.C.의 배후에서 일을 했을 것이다. M.C.는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원이었다. 그가 여자인지 남자인 지도 나는 모른다. 어쨌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수 피의 영적 안내자 키즈라의 안내를 받은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안내자를 신지학회에서 말하는 영적 안내자로 바꾸 면 M.C.는 더욱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신지학회에서는 그 안내 자를 K.H.라고 부른다. 어떤 이름이라도 상관없다. 신지학회식 으로 K.H. 대사라고 하든 수피식으로 키즈라라고 하든 결국 같 은 뜻이다. 이 책은 무척 도움이 된다. 누가 그 책을 썼으며 어떤 영이 그 저자를 안내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는 이 책이 하나 의 황금탑처럼 우뚝 서있다는 것이다. 제4권은.....내가 이렇게 숫자를 정확히 기억한다고 해서 놀 랄 필요는 없다. 어쩌다 우연히 맞추는 것일 뿐이니까. 오늘의 제4권의 주인공은 캐시미르의 여인 랄라 Lalla(4)다. 캐 시미르 지방 사람들은 얼마나 랄라를 사랑하는지 그들에게는 오직 두 단어, 즉 알라신과 랄라만이 있다고 그들 스스로 말할 정도이다. 캐시미로 지방에는 99퍼센트가 회교를 믿는다. 그래 서 그들은 알라신과 랄라, 두 단어밖에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4) 평생을 나채로 살았다고 전해지는 중세시대 인도의 여성 신비가./ 랄라는 책을 쓴 적이 없다. 그녀는 글을 배우지 못한 문맹이 었으나 대단히 용기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평생동안 나체로 살았다. 동양에서 그것도 수백년 전에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더욱이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개시미르의 여인들은 누구나 미인이다. 인도에서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들은 바로 캐시미르에 모여 있다. 셩경에 기록된, 모세가 잃어 버린 부족이 바로 캐시 미르 사람들이다. 따라서 본래 그들은 유태인이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이스라엘을 향해서 떠났다. 왜 굳이 이스라엘을 찾아서 떠났는가?미치광이 는 어디까지나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설명이 있을 수 없다. 모세 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미치광이였다. 그는 자기 민족이 편안 히 살 장소를 찾아서 길고 긴 여행을 떠났다. 그는 사람들을 이 끌고 40년 동안이나 사막에서 헤맨 끝에 마침내 이스라엘을 발 견했다. 그 도중에서 그는 부족 하나를 잃어 버렸다. 그 부족은 다른 길을 헤매다가 마침내 캐시미르 지방에 도착했다. 때로는 길을 잃는 것이 행운을 가져다 줄 때가 있다. 모세는 그 잃어 버린 부족을 찾아서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모세 역시 마침내 캐시미르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모세 는 캐시미르에서 죽었다. 그의 무덤은 이스라엘에 있는 것이 아 니라 바로 캐시미르에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세도 캐시미르에서 죽었고 예수 도 캐시미르에서 죽었다. 나는 그야말로 수차례 캐시미르 지방 을 여행해 보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안다. 캐시므르에선 누구나 이렇게 소리치게 된다. "아아, 내가 지금 이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캐시미르인들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가난하지만 더없이 아름 다운 사람들......랄라는 캐시미르 여인으로서 배우진 못했으나 노래부를고 춤출 줄 알았다. 그녀가 부른 노래 몇 편이 다행히 주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녀의 그 노래들을 제2부의 책들 속에 포함시키고 싶다. 제5권은 또다른 신비가이며 칸트리카tantrika(5)였던 고라크 Gorakh(6)의 책이다. 그는 탄트라의 모든 수행 체계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여러 종류의 사업에 손을 대는 사 람을 고락단다Gorakhdhandha라고 부른다. 즉 '고락과 같은 사 업가'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한 가지 사업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고라크는 모든 방향, 모든 차원을 섭렵했다. /(5)탄트라 수행자./ /(6)탄트라의 대가인 중세시대의 인도 신비가. 현재까지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고락나트 파가 있다./ 고라크의 이름은 본래 고락나트Gorakh-Nath이다. '나트'는 '주인'의 뜻이므로 아마도 제자들이 그 이름을 붙인 것이라 생 각된다. 고라크는 내면의 신비 세계로 들어가는 모든 열쇠들을 설명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설명한 장본인이다. 아주 끝장을 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끝장을 모른다. 세상은 끝장을 내지 않고 언제 까지나 계속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말하는 도중에 문장 을 끝맺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내가 그 문장 을 어떤 식으로 끝맺으려 했는가를...... 나는 고락나트를 한없이 존경한다. 나는 그에 대해 많은 강의 를 했다. 언젠가 그것들도 번역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에 대해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리라. 제6권은 아주 드물게도 혼자서 두 권의 걸작을 남긴 사람의 책이다. 그 주인공은 위버 베노아Hubert Benoit이다. 이것이 이 프랑스인 이름의 정확한 발음인지는 모른지만 어쨋든 상관없다. 조금씩 틀리게 발음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평생 동 안 나는 엉터리 발음을 계속해 왔다. 이 사람 위버 베노아의 첫번째 책 [렛 고우]에 대해선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 사실 두번째 채이 있었다. [렛 고우]를 쓰기 전에 그는 [최상의 교리 The Supreme Doctrine]란 제목의 책 을 썼다. 이 책 역시 나의 도서 목록에 포함시키고 싶다. 이 책 을 빼놓는다면 나는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이 책은 대단히 뛰어나긴 하지만 무척 읽기 어렵다. 그리고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그래도 베노아로선 가능한 한 쉽게 쓰려고 최선을 다한 것이다. 제7권. 7은 가장 신비한 숫자가. 따라서 가장 신비한 인물인 힌두교의 시바신shiva의 책을 제7권으로 삼고 싶다. 시바의 이 름으로 된 책이 여러 권 있으나 그 대부분이 다만 존경의 뜻으 로 이름만 갖다 붙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중 가장 진 실된 책이다. 이 책의 이름은 [시바경 shiva sutra]이다. 나는 이 [시바경]에 대해 힌두어로 강의했다. 영어로도 강의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며 날짜까지 정해 놓았다. 그러나 내 성격을 아지 않는가?언제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 나 자신도 모른다. 이 책 [시바경]은 모든 명상 수행법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 에 실려 있지 않은 명상법은 세상에 없다. 따라서 [시방경]은 명상가들에겐 성경과 같은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독 특하고 유례없는 책이다. 제8권은 인도 신비가 고랑Gaurang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고 랑'은 '흰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그처럼 아름다운 정신을 가지 인물이었다. 지금 그가 내앞에 서있는 것 같다. 눈처럼 흰 사람. 그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마을의 처녀들이 모두 그 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신으로 살았다. 수백명의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그대는 알 것이다. 내 가 독신으로 지내는 이유를! 고랑은 자신의 메시지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의 메시지는 언어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것이었다. 고랑은 한 권의 책도 쓴 바 없다. 그의 연인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백 명에 달하는 연인들이 그의 노래를 주위 모았다. 그의 노래집이 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 도 나는 그와 같은 노래들을 잡한 적이 없다. 그 노래들에 대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것인가 ? 단지 내가 그 노래들을 더없이 사 랑한다는 말밖에는. 제9권 역시 또다른 인도 신비가의 책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는 '다두Dadu'라고만 불리워졌는데, 다두는 '형제'라는 뜻이다. 그가 너무도 멋있는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의 본명을 잊어 버리고 그를 단순히 형제라고만 기억하게 된 것이다. 다두의 노래들은 수천 편이 넘 지만 그것들은 다두 자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정원사가 정원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 모으듯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수집 해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다의 경우는 모든 성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성자들은 글 쓰는 대신에 노래하고 말하고 춤춘다. 어떤 것을 글로 표현한다 는 것은 너무도 답답한 일이다. 단어는 극히 제한적인 뜻만을 전 달할 수 있을 뿐이다. 드넓은 하늘 공간처럼 한계가 없는 것, 성 자들의 체험은 그것에 비교할 수 있다. 나 자신만 해도 글을 쓴 적이 없다. 다만 나와 아주 가까운 사 람들에게 보낸 편지 몇 통이 고작이다. 내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한 잔의 차A Cup of Tea]뿐이다. 그 책은 내 편 지 모음집이다. 그 책 말고는 내가 직접 쓴 책이 없다. 다두의 노래 역시 그런 식으로 수집되어 책으로 엮어졌다. 나 는 그에 대한 강의를 한 바 있다. 그는 사람들 누구나가 꿈꾸는 최고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제10권이자 마지막 권. 오늘의 마지막 권은 이 지상에 존재했 던 가장 기이한 사람인 사르마드Sarmad의 책이다. 그는 수피 신 비가였으나 다른 회교 군주에 의해 모스크mosque 안에서 살해 당했다. 살해 이유는 회교 경전에 나오는 기도문 때문이다. 그 기도문은 "알라 라 일 알라 Allah la il Allah-----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다.!"라는 내용이다. 회교 신자들은 그것만으로 부족해서 마 호멧이 신의 유일한 예언자라는 말을 덧붙였다. "알라 라 일 알라, 마호멧 비스밀라Allah la il allah, Moh- ammed bismillah ----알라신이 유일한 신이며, 마호멧이 신의 유 일한 예언자다!" 수피 신비가들은 마호멧이 신의 유일한 예언자라고 하는 이 두번째 부분을 부정한다. 사르마드가 범한 죄가 그것이었다. 분 명 누구도 신의 유일한 예언자가 될 수 없다. 마호멧도 예수도 모세도 붓다도 그만이 신의 유일한 예언자일 순 없다. 사르마드는 인도의 회교 군주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 살해 음모에는 당연히 회교 성직자들이 개입했다. 죽어가면서도 사르마드는 웃음을 떠뜨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죽은 후에도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다. 누구도 신의 유 일한 예어자가 될 수 없다." 델리Delhi의 거대한 회교 사원인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안에서 사르마드는 살해되었다. 델리에 가면 아직도 그 사원을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인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아주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사람들이 목을 자르자 그의 머리가 자마 사원의 계단을 굴러내렸다. 그곳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들은 그 머리가 굴러내리면서 "알라 일 라 알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 고 전율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또 그것은 사실이어야 한다. 사르마드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일이 안일어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사르마드가 죽은 후 그가 한 말들을 모아 책으로 엮 었다. 사르마드가 핵심적으로 주장한 것은 이런 내용이다. "신과 그대 사이에는 예언자가 필요없다. 신과 그대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필요없다." 중개자가 왜 필요한가? 신은 언제든지 그대가 직접 받아들이 고 대화할 수 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약간의 광기'와 깊은 명상 뿐이다. 여기에 대해 더 말할 것이 있긴 하나 이것으로 끝맺겠다. 그 것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과거에도 그것은 설명된 바 없고 미래에도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저녁해가 기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새들은 집을 찾아들고 저녁의 첫 별이 떠오른다. 하늘에 번지는 저 빛깔.... 내 얼굴의 미소, 그대여, 그것을 보는가? 8 제2부가 이어진다. 오늘의 제1권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권력의 의지The Will to Power]이다. 그는 생전에 이 책을 출판하지 않았다. 이 책은 그 의 사후에 출간되었으며, 출간되기 전에 그 내용은 소위 뛰어나 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수없이 도용되었다. 예를 들어 알프렛 아들러Alfred Adler(1)는 위대하다고 하는 심 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프로이드, 융과 함께 심리학계의 3거두이다. 아들러는 자신의 모든 심리학 체계를 프리드리히 니 체에게서 도용했다. /(1)1870-1937.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드의 제자. 프로이드의 성 용설에 반대하고 우월욕구를 인간활동의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인간 은 열등감정을 극복하고 이를 보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상에는 좋은 보상과 지나친 보상이 있으며, 실패 또는 도피가 있다 고 주장했다. /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은 '권력을 향한 의지'다." 훌륭한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속았으며, 그리하여 아들러는 위대한 심리학자의 한 삶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는 열등한 인간에 불과하며,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다. 그의 사 상이라는 것은 모두 니체의 것을 모방한 것일 뿐이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2)역시 자신의 철학 체계 를 니체에게서 훔쳤다. 노벨상까지 수상한 이 위대한 G.G.S., 조 지 버나드 쇼가 말한 내용은 모두 니체의 [권력의 의지]에 실린 것들이다. /(2)1856-1950. 영구의 극작가, 비평가. 젊어서부터 사회적 관심이 깊었는 데 칼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후 많은 변화를 체험했다. 극작가로 서는 유머와 위트로써 관습적인 사회의 허위를 폭로했다. 그는 우주에 는 '생명력'이라는 의지의 힘이 있으며, 이에 의해서 인간은 한없이 진 화한다는 낙관론을 전개하였다./ 인도의 위대한 성자라고 하는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3) 역시 아들러나 버나드 쇼와 다를 바 없다. 그는 금세기 최고의 성자로 전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그 역시 '초인超 人Superman'의 개념을 [권력의 의지]원고에서 도용했다. 스리 오로빈도는 이류 학자에 불과하며, 전혀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인물이다. /(3) 1872-1950. 인도 신비가, 철학자, 그리고 시인이었다. 캠브리지 대학에 서 공부하고 인도로 돌아가 민족주의 혁명가로 활약하였다. 감옥 생활 도중에 신비적인 체험을 하여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석방된 후 마드 라스 근처의 폰디체리로 가서 전통적인 요가를 공부했다. 이것을 뿌르 나 요가Purna Yoga의 새로운 철학으로 종합 완성시켜 이 사상을 따르는 교단을 만들었다. 그의 사후 제자들이 벵갈만 근처에 오로빌Auroville이 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영적 가르침에 따르는 생활을 시 작했다. / 니체의 책은 그의 사후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비로소 출간되었 다. 그의 누이동생이 사실 그 책의 출간을 조종했다. 그녀는 대 단한 사업가 기질이 있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 출간 된 책들을 판매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권력의 의지]가 가장 잘 팔릴 때를 골라서 이 책을 출간했다. 사실 그녀는 니체의 사 살이나 철학, 나아가 인류에의 기여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 었다. 그렇다면 왜 니체 자신은 살아 있을 때 이 책을 출간하지 않 았는가?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책의 내용이 그 자신의 판단하기 에도 너무 시대에 앞서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니체 자신은 깨달 음을 얻지 못했다. 책 출간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니체는 겁을 먹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잠잘 동안에도 그 원고를 베개 밑에 넣고서 잤다. 그것이 나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까봐 늘 두려워했다. 사람들 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그다지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러나 삶이란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겁쟁이에게도 때로 별들 의 축복이 쏟아져 내린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모든 사상의 기반을 니체에게서 차 용했다. 히틀러는 정당한 일을 행할 위인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 한 바보는 독일이 아니라 차라리 인도에서 태어나 묵타난다 Muktananda(4)의 제자가 되었어야 한다. 그를 위해 내가 멋진 이 름을 지어줄 수 있다. '바보난다'가 그것이다. 그는 그만큼 어리 석은 위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니체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니체를 이해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니체는 그만큼 깊고 심 오하다. 그의 사상은 '바보난다'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4) 스와미 묵타난다Swami Muktananda. 1970년대까지 인도 봄베이에서 활 동했던 영적 스승. 1908년 인도 망갈로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물질적인 면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었지만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거리에 서 놀다가 우연히 길을 가는 한 성자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후 집을 떠나 히말라야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승의 사약을 하였으며, 25년간 맨 발로 인도 전역을 순례하였다. 이 순례중에 그는 수많은 경전들과 다양 한 요가 철학을 섭렵했으며 60명의 성자를 방문했다. 30대에 이미 묵타 난다는 영적인 능력이 대단하여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추종하였으나 방 랑생활을 계속하다가 40대가 다 되어서 자신이 열 다섯 살에 거리에서 우연히 보았던 그 성자를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성자가 바로 '니티아난다Nityananda'라는 스승이었다. 니티아난다는 당시 인도 최고 의 성자로서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언제나 침묵을 지키며 상고 있었다. 니티아난다의 지도 아래 강렬한 명상 수련을 시작한 묵타난다는 마침내 1956년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1965년부터 몰려오기 시작한 서양 인 제자들로 큰 명상센터를 이루게 되었다. 1982년 세상을 떠났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최고의 작품을 사후에만 출판하도 록 조치를 취했다. 내가 이미 그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 했다]를 나의 도서목록으로 언급했지만 [권력의 의지]앞에선 그 책도 빛을 잃는다. 이 책은 체계적으로 작성된 철학 논문이 아니라 짧은 메모와 단락들로 이루어진 격언들이다. 따라서 읽 는 사람이 그 연결성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누구에 게 읽히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출판되었다 해도 그 다지 많이 읽히지 않았다. 누가 애써 문맥을 연결해 가면서 책을 읽겠는가? 또한 [권력의 의지]는 이해하는 데 대단한 노력이 든다. 프리 드리히 니체의 정신의 핵심이 이 책에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나아가는 니체는 광인狂人이었다. 니체를 이해하려 면 함께 광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이 바로 오늘 내가 첫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책이다. 제2권으로 또다시 오스펜스키의 책을 끼워 넣고 싶다. 이미 그의 책 2을 언급한 바 있다. 한 권은 그가 스승 구제프를 만 나기 전에 쓴 [테르티움 오르가눔]이었다. 이 [테르티움 오르가 눔]은 특히 수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이 책을 쓸 당시 오 스펜스키 자신이 수학자였기 때문이다. 두번째 책은 [기적을 찾 아서]였다. 여러해 동안 구제프와 생활하고 나서 그는 이 책을 썼다. 여기 오스펜스키의 세번째 책이 있다. 이 책은 앞의 두 권 사 이에 쓰여진 것으로, 저술 시기는 [테르티움 오르가눔]을 쓰고, 난 후와 구제프를 만나기 직전 사이가 된다. 이 책은 거의 알려 지지 않았다. 책의 제목은 [우주의 신모형宇宙新模型A New Model of the Universe]이다. 이 책은 아주 이상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오스펜스키는 스승을 찾아서 전세계를 여행했는데 특히 인도 를 집중적으로 헤매다녔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인도에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스펜스키는 수년동안 인도를 여행했으며, 봄베이 같은 곳 에 와서도 스승을 수소문했다. 이 무렵 그는 대단히 뛰어난 책 [우주의 신모형]을 썼다. 이책은 어찌 보면 시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스펜스키 자신은 글을 쓰면서도 자신이 쓰 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매우 가깝게 접근했다. 이 '가깝다'는 표현을 기억하라. 아무리 가깝다 해도 거기 털오라기만큼의 차이가 있으면 아직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는 수없는 추구를 계속했지만 아직 진리와 한 몸이 되지 못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추구한 바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모스크바의 한 카페에서 기이하게 이야기가 끝난다. 이 카페에 서 그는 구제프를 만났던 것이다. 구제프는 정말 희한한 스승이 었다. 그는 곧잘 카페에서 글을 쓰곤 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 고 떠들고 아이들은 소란하게 뛰어다니며 거리의 소음과 자동 차 경적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서 구제프는 자신의 걸작 [모든 것]을 썼다. 오스펜스키는 이 사람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어떻게 이 감정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죽은 사람이나 돌로 만든 사람이 아니고선 스승을 보고 사랑이 빠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구제프를 바라보는 순간 오스펜스키는 직감했다. 이 사람이 야말로, 이 사람의 두 눈이야말로 자신이 인도의 더럽고 먼지 자 욱한 길을 돌아다니면서 그토록 찾아헤맨 바로 그 눈이었음을! 오랜 세월 동안 이역만리를 찾아헤매였건만 정작 진정한 스승 을 만난 것은 바로 모스크바의 자기집 옆에 있는 카페에서였다. 이따금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헤맨 것을 바로 옆에서 발견할 때 가 있다. [우주의 신모형]은 대단히 시적인 내용이며 진리에 아주 가 깝게 접근한 책이다. 제3권의 주인공은 하킴 사나이 Hakhim Sanai(5)의 책이다. 사나 이 같은 사람은 논쟁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그냥 말할 뿐이다. 그 들은 주장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깨달음의 증거다. 그밖의 다른 증명이 필요없다. 와서 나의 눈을 보라, 그 러면 주장할 필요도 굳이 애써 증명할 필요도 없음을 알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5)[하디가The Hadiqa],즉 '진리의 정원'의 저자. 수피 신비가, 유명한 궁 중시인으로 대접받다가 회교 군주인 바람샤흐Bahramshah의 인도 정복 길에 동행하였다가 도중에 위대한 수피 신비가인 라이쿠르Lai-Khur를 만나 새로운 차원을 체험하고 이 [하디카]를 읊었다./ 하킴 사나이, 이 사람은 나의 연인이다. 그에 대해서 과장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하킴 사나이는 수피즘의 에센스 그 자체다. 수피즘Sufism이란 말은 '타사우프tasawuf'의 영어식 표현이 다. 타사우프는 '순수한 사랑'이란 뜻이다. '수피즘'이란 명칭은 양털을 뜻하는 '수프suf'에서 나왔다. 따라서 수피란 곧 양털옷 을 입은 사람이란 뜻이다. 하킴 사나이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다녔다. 흰 양털옷에 검은 모자,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는 나와 같은 광인어었던 것이 다. 이사람에 대해선 이유를 물을 수 없다. 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를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그것은 사 람들의 자유다.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그것은 그대의 선택이 다. 이러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금방 여인이 되든지 적이 되든 지 둘 중의 하나다. 하킴 사나이는 논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깨달음을 말할 뿐 이다. 왜냐고 물을 수 없다. 왜냐고 물으면 그는 소리칠 것이다. "입 닥쳐라! 거기 왜라는 것은 없다.!" 장미에게 "왜?"라고 물을 수 없다. 겨울에 내린 눈에게 "왜?"라고 물을 수 없다. 별에게 "애?"라고 물을 수 없다. 하킴 사나이 같은 사람에게도 왜냐고 물을 수 없다. 그는 별, 꽃, 눈의 세계 속에서 산다. 그는 논쟁하지 않는다. 나는 하킴 사나이를 사랑한다. 내가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말 하지 않은 것은 그를 잊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를 내 마음 안에만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가슴 안에만 두고 싶었다. 그 러나 제1부(본론)가 끝나고 제2부(추신)가 되면 가슴 안에 있는 말들도 쏟아 놓기 마련이다. 나의 아버지도 나에게 항상 그런 식으로 편지를 쓰곤 했다. 항상 본론은 별 내용 없이 흘러가다가 끝맺는 인사까지 해놓고 선 '추신'란에 정작 중요한 말들을 쏟아 놓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때론 추신에 추신을 덧붙여서 본론에서 할 수 없었던 말 을 길게 써내려가곤 했다. 추신이 없는 편지는 얼마나 싱거운가! 아버지는 추신에서 아주 사적인 내용까지 털어 놓았으며, 추신 의 추신에선 더 개인적인 일까지 말하곤 했다.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 문득 나 는 내가 아버지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사진 을 볼 때면 나 역시 일흔 다섯 살의 나이가 된 기분이다. 그 나이 가 되면 나 또한 그런 얼굴이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배반하 지 않게 된 것이 기쁠 따름이며,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 나 는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나는 몸이 아플 때조차도 아버지를 닮았다. 그 점을 자랑스럽 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기관지 천식에 시달렸는데 나 역시 그 병 에 시달릴 때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내 육체는 빈틈없이 아버지 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 역시 당뇨병이 있었으며 나 역 시 그렇다. 아버지 역시 말하기를 즐겨했으며, 나 역시 평생에 걸쳐 말하는 일 이외엔 한 것이 없다. 모든 면에서 나는 아버지 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라서 이런 말 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으면서도 나에게 엎드 려 절을 하고 나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다. 어떤 아버지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이 타락한 지구상 에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제자 가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붓다의 아버지는 붓다의 제자가 되 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 다. 오히려 붓다의 아버지가 붓다의 제자가 되는 일이 더 쉬웠을 것이다. 붓다는 당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존경받고 인정 받는 성자였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의 제자가 되는 일은 아버지 로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떤 범주로도 용납되는 성 자가 아니다. 그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어떤 범주에 갇히는 일을 끔찍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서도 만일 소 위 성자라고 하는 무리들이 그곳에 모여 있으면 나는 발길을 되 돌릴 것이다. 그러한 무리들은 이 세상에서 한둘이 아니게 보았 다. 나는 성자가 아니다. 나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인간이다. 그 별종의 인간을 나는 '조르바 붓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회의 존경받는 위치에 선 모든 사람들로부터 맹비난이 나 에게 퍼부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주저없이 나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처음에 아버지가 내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했을 때 나 자신도 놀랐다.그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물론 내 방에서의 일이었기 때문에 아 무도 그 눈물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눈물이 내 눈에 서 흘러내리고 있다 아버지가 나의 제자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침묵했다. 예스라고도 노 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영어에선 그것을 '기습당하다 taken by surprise'라고 표현한다.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완전히 기습당한 것이다. 이제 몇권째 이야기할 차례인가? ("제4권째 할 차례입니다.") 제4권의 주인공은 디오니시우스Dionysius(6)이다. /(6)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에크하르트 등이 영향을 받은 고대 아테네 사 람. 사도 바울의 인도로 로마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신약성서 사도 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초본질적인 빛 속에 신비적으로 침작하여 신과 합일되는 황홀경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했다. 대표적 저서는 [신비 신학 Theologia Mystica]. 그러나 그가 썼다는 작품들은 모두가 A.D.350-500 년에 걸쳐 기록된 것으로 실은 누군가 알지 못할 저자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것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바울과 동시대 사람의 이름을 딴 것으로 믿어진다. / 이 사람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나는 강의한 바 있다. 그의 가 르침이란 것도 제자들이 모아 놓은 몇 편의 글에 불과하지만 나 는 세상이 디오니시우스 같은 사람을 잊어선 안 된다는 뜻에서 그를 강의했다. 참인간眞人 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참인간은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참인간은 실 체를 꿰뚫어본 사람, 외부의 물질계 차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내적 공간에서 실체와 만난 사람을 뜻한다. 디오니시우스는 붓 다들의 위대한 세계에 서있다. 이 살마은 책은 책이라고 할 수 없다고 다만 몇 마디의 말이라고 해야 적당할 것이다. 제5권....이제 이 시리즈의 가장 기이한 순간이 다가왔다. 여 기 [대사大師의 발아래At the Feet of the Master]라는 제목의 책 이 있다. 저자의 이름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라고 되어있지만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은 자기가 이 책을 썼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인, 크리슈나무르티가 불 과 열 살 남짓할 때 쓰여졌다. 그 어렸을 때의 일을 정확히 기억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은 가치있는 책이다. 나는 최조로 세상에 진실을 밝히는 바이다. 이책의 진짜 저 자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니라 애비 베산트Annie Besant(7)이다. 그렇다면 베산트는 왜 이 책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밝히지 않았 는가? /(7)신지학회의 창시자인 러시아 여인 블라바츠키가 쓴 두 권의 방대한 저 서 [숨은 교리]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았다가 곧바로 신지학으로 전향했 다. 그전에도 이미 그녀는 파란만장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스무 살에 성공회 목사와 결혼하여 6년 뒤에 헤어졌고 생각과 표현의 자유, 여성 의 권리, 산아제한 등에 앞장섰다. 처녀 때 대단한 미인이었으며 늙어서 도 독특한 매력을 잃지 않았다. 많은 글을 썼고 연설 솜씨 또한 뛰어났 으며, 1893년에 처음으로 인도에 발을 디뎌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을 자 신의 놀라운 재능과 에너지를 인도에 봉사에 바쳤으며 신지학을 전세계 에 전파하는 데 쏟았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 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베산트는 크리슈나무르티를 유명한 영적 스승으로 만들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 들에 대한 어머니의 욕심같은 것이었다. 베산트는 인도 마드라 스 해변가에서 놀던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견하여 어렸을 때부터 자식처럼 키웠으며, 늙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크리슈나무르티 를 세계의 교사, 즉 자가트 구루Jagat Guru로 만드는 일이었다. 따라서 크리슈나무르티가 세계의 교사가 되려면 세상에 대고 뭔가를 말해야만 했다. 이 책 [대사의 발 아래]를 베산트는 그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책의 저자가 아니다. 그 자신은 그것을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나 아직도 이 책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이름으로 판매 되고 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마땅히 이 일을 중지시켰어야 했 다. 자신이 이 책의 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출판사에 분명히 통 보했어야 한다. 출판사가 이 책을 계속 찍어내기 원한다면 차라 리 익명으로 하라고 요구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크리슈나무르티가 선의 십 우도의 아홉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 신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마땅히 부정해야 한다! 자 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책은 훌륭한 책이다. 사실 누구라도 이 책 을 썼다면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구도의 길을 걷는 자라면 당 연히 [대사의 발 아래]를 공부해야 한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니 라 공부해야 한다. 롭상 람파Lobsang Rampa(8)의 영적 소설 같은 책들은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날 그러한 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수요가,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누구라도 스승이 될 수 있다. /(8)원래는 시실 호스킨Cyril Hoskin이란 이름의 영국인으로 1948년 동양인 의 생활 방식에 매력을 느껴 이름을 중국식인 '권수오Kuon Suo'라고 바 꾸었다. 그후 극심한 환상과 정신착란 증세에 시달리다가 1949년 마당 에서 가벼운 사고로 뇌진탕 증세가 계속되더니 모든 기억을 잃고, 대신 티벳 사람으로서의 갓난아이 때부터의 완벽한 기억이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그의 육체 속에 들어온 영은 '튜즈디 롭상 람파'라는 티벳 승려였다. 이 롭상 람파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일련의 [제3의 눈The Third Eye]시리즈로 한때 유럽에서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바바 프리존Baba Freejohn(9)과 같은 자를 보라. 웃 음이 절로 나온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이제 그는 자신을 바 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서 '바바'라는 명칭을 떼 어 버렸다. 그가 한동안 자신을 '바바'라고 불렀던 것은 그가 한 때 바바 묵타난다Baba Muktananda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9)다 프리존Da Freejohn또는 러브아나다Loveannada등으로 이름을 바꾸 면서 제자들을 거느련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 어려서부터 신비한 영적 능력이 있었으며,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깨달음을 얻은 상태라고 주장한다. 한때 묵타난다의 제자였으며, 지금은 피지섬에서 거의 나체 로 생활하면서도 시도 쓰고 연설도 하고 있다./ 인도에선 존경심으로 스승을 '바바'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바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남을 모방하는 일인 것 같아졌다. 그래서 그는 그 명칭을 떼어내고 이제 자신을 다다 프리존Dada Freejohn이라 부르고 있다. 다다든 바바든 다를 바 없다. 모두 해괴망측한 짓일 뿐이 다. 이러한 자들이 세상에 수없이 널려 있다. 그들을 조심하라. 분명한 중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기 십상이다. 제6권은 또다른 수피 신비가 쥬네이드 Junnaid의 책이다. 쥬네 이드는 알 힐라즈 만수르의 스승이다. 만수르는 살해되었기 때 문에 유명해졌으며, 그 결과 스승 쥬네이드는 그늘에 가려졌다. 그러나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쥬네이드의 몇 마디 말은 대단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알 할라즈 만수르 같 은 위대한 제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겠는가? 불행한 것은 단지 몇줄의 글만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신비가의 방식이 실상 그러하다. 신비가는 단편들을 엮어 전 체를 만드는 일에 신경쓰지 않는다. 신비가는 꽃다발을 엮는 것 이 아니라 꽃잎을 뿌려줄 뿐이다. 꽃잎을 줍는 것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쥬네이드는 제자 만수르에게 말했다. "네가 안 사실들을 안에 감추어 두라. 큰 소리로 '아날 하크 Ana'l Haq!나는 신이다!'라고 외치지 말라. 그런 식으로 외치면 아무도 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은 쥬네이드를 제대로 이해하기 못했다. 사람 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진리를 알기는 쉬운 일이며, 그 것을 말하기도 쉬운 일이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그것을 말하지 않고, 선언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 안에 묻어두는 일이다. 원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대 존재의 우물, 그대 침묵의 우물로 와서 물을 떠마시게 하라. 제7권은 쥬네이드가 좋아했을 만한 사람의 책이다. 그의 이름 은 메허 바바Meher Baba(10)이다. 그는 3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토록 오랜 세월 침묵을 지킨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기록에 의 하면 마하비라도 고작해야 12년간 침묵을 지켰을 뿐이다. 30년 에 걸친 침묵! 메허 바바가 세계 신기록이다. /(10) 금세기 중엽 인도에서 활동한 영적 구루의 한 사람. 그는 말을 하는 대신 손짓을 사용했다. 내가 말을 할 때 손으 로 뭔가를 표시하는 것처럼. 오직 손짓에 의해서만 전달될 수 있 는 것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메허 바바는 언어를 버렸지만 손 짓은 버릴 수 없었다. 그 점이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그와 가 까이서 생활했던 사람들이 그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글로 적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30년간의 침묵 생활 끝에 탄생한 책에는 [신은 말한다God Speaks]라는 이상한 제목이 붙여졌다. 메허 바바는 침묵으로 살다가 침묵으로 생을 마쳤다. 그는 말 을 하지 않았으나, 침묵이 곧 그의 말이고 표현이며 노래였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이 [신은 말한다]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선禪에 대한 어떤 책을 보니까 "꽃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적 혀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꽃도 말을 한다. 물 론 그것은 영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다. 꽃은 꽃의 언어로 말 한다. 꽃은 향기를 통해 말을 한다. 나는 냄새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안다. 수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꽃이 말하는 것 을 나는 들을 수 있다. 따라서 꽃이 말한다는 것은 시적인 표현 이 아니라 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꽃은 꽃만의 언어 를 갖고 있다. [신은 말한다]는 것이 어떻게 들리든 그것은 메 허 바바에게 있어서 엄연한 진실이다. 제8권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저자가 조지 버나드 쇼 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책 의 제목은 [혁명가를 위한 격언Maxims for a Revolutionary]이 다. 버나드 쇼의 다른 모든 책들은 유명해졌지만 이 책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나같은 광인만이 이 책을 알아볼 수 있다. 버 나드쇼의 다른 책들에 대해선 나는 잊어 버렸다. 그것들은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다. 다른 말이지만, 여기 나의 제자 한 사람의 이름이 보디가르바 Bodhigarbha이다. '가르바'는 잉태했다는 뜻이며, 이 이름은 '붓 다를 잉태하다'는 뜻이다. 붓다로 태어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 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보디가비지Bodhigarbage라고 부른 다. 오히려 나는 이 이름을 더 좋아한다. 그렇다. 불성佛性을 얻 은 자는 쓰레기garbage속에서도 신을 본다. 반면에 불성을 얻지 못한 자에겐 모든 것이 쓰레기일 뿐이다. 나는 조지 버나드 쇼의 이작은 책 [핵명가를 위한 격언]을 사랑한다. 모두가 이 책을 잊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늘 이상 한 물건, 이상한 사람, 이상한 장소를 택한다. [혁명가를 위한 격언]은 버나드 쇼가 썼다기보다는 그에게 이 책이 내려왔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그는 한 사람의 회의론자에 불과했다. 그는 성자도 못되었으며, 깨달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그러한 단어조차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버나드 쇼가 한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와 결혼 하고 싶어했지만 여자 쪽에선 결혼보다는 도道를 추구하길 원했 다. 그래서 여자는 진리를 찾아 인도로 떠났다. 이 여자가 다름 아닌 애니 베산트이다. 버나드 쇼가 그녀를 아내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는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애니 베산트가 그의 아내로 전락했담면 우리는 무한한 재능을 지닌 한 여성을 잃엇을 것이다. 그녀의 통찰력, 그녀의 사랑, 그 지혜....그렇 다, 그녀는 차라리 마녀魔女에 가까웠다. 아니, 마녀 그 자체였 다. '마녀witch'는 아름다운 말이다. 그것은 지혜wise를 뜻한다. 세상은 남성 위주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이 지혜로워지면 붓 다나 그리스도나 예언자라고 부르지만 여성이 지혜를 얻으면 마녀라고 부른다. 이 얼만나 불공평한 일인가! 그렇긴 해도 그 단어의 본래 뜻은 아름답다. [혁명가를 위한 격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 황금률Golden Rule이란 없다. 이것이 첫번째 황금률 이다." 그렇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된다. 절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절대 진리다. 그 나머지 부분은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라. 공부하라는 것은 곧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는 뜻이다. 그냥 읽으라고 할 때는 명상이 필요없다. 제9권....숫자가 맞는가, 기트 바르티? ("예, 맞습니다.") 맞는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 적어도 지난 40년 동안 나는 주위에서 맞는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살았다. 식구들도 내 가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틀렸다. 이 점에 대해 신 에게 감사드린다. 사람들의 관점에 비추어 옳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학교 선생들도 언제나 내가 틀렸다고 말 했다. 항상 나는 틀려먹은 인간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나는 벌을 받기 위해 교장선생에게 불려갔다. 반장이 나를 교장에게 데려가면 교장은 그날 하루 내가 어떤 행 동을 했는가를 일일이 물었다. 차츰 교장은 질문조차 하지 않았 다. 그냥 내가 들어가면 뺨을 한 대 후려갈기곤 그것이 끝이었 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아예 묻지도 않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반장이 나쁜 짓을 한 것이다. 담임 선생은 장난으 로 나에게 반장을 교장선생에게 데려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 는 반장을 끌고 교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교 장은 늘 하던대로 내 뺨을 후려갈겼다. 기가 막혀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교장이 물었다. "왜 웃는 거야?" 내가 말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이 아이가 뺨을 맞아야 합니다. 이 아이 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내가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내 뺨을 때리는 거죠?" 교장은 그 자리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만으로 안 됩니다. 내가 당신의 뺨을 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교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제 그 노인은 무덤 속에 들어가 있다. 그의 뺨을 때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때 그의 뺨을 그다지 세게 때리진 않았다. 아주 부드럽게, 산들바람이 소나무 위름 스쳐 지나가듯 그렇게 살짝 때렸다. 때로 내가 옳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제8 권이었던가? 아니, 제9권이었지,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냥 해본 소리다. 내가 제9권으로 고른 것은 중국의 혜능慧能Hui Neng(11)의 책 이다. 혜능은 보리달마普리達摩의 뒤를 이은 선의 조사祖師이다. 혜능의 어록 [법보단경法寶壇經The Teachings of Hui Neng]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만 번역이 되었다. /(11) 638-713노자, 장자, 공자, 맹자와 더불어 중국이 낳은 뛰어난 천재. 그의 제자들이 [법보단경]이란 제목 아래 기록한 그의 설법과 대화는 중국인이 저술한 불교 문헌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걸작품에 속한다. 공 자나 맹자처럼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난 그는 광동의 영남 출신으로 속성은 노씨盧氏. 젊은 시절에 시장에서 땔감을 팔아 어머니와 자신의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갔으며, 읽고 쓰는 것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다. 어느날 땔감을 운반하다가 우연히 어떤 사람이 읽는 [금강경金剛經]을 듣는 순간 깨달은 바가 있어 어머니를 하 직하고 스승을 찾아나섰다. 황매산의 홍인선사弘忍禪師밑에서 한동안 부엌일을 하다가 다른 승려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의 법통을 이어받았 다. 661년 그의 나이 불과 23세 때였다. 그후 수많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어 중국 선종이 혜능으로 인해서 활짝 피어나게 되었다./ 혜능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의식의 정접에 올라섰던 인물 이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몇가지 힌트만을 줄 뿐 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발자국과 마찬가지로 그것 을 따라가면 목적지에 이른다. 혜능의 가르침은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과 대동소이하지만 그 방식은 그 자신만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했으며, 이것이 그가 목사나 신부들 처럼 앵무새가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혜능의 가르침을 요약히가란 쉬운 일이지만 오직 용기있는 자만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잇다. 그가 말한 전 내용은 "생각으로 무엇을 추구하지 말라. 존재하라!"는 것으로 쉽게 요약될 수 있 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데는 높은 지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면 수십 번의 생이 걸리는 일이다. 높은 지성을 지녔다면 지금 이 순간 그것이 가능하다. 이미 그대는 그러한 재능을 갖고 있 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방해는 다른 사 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하고 있는 것이다. 제10권.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책이다. 약간 겁이 난다. 사실 이 책을 말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놓고 한없이 망설여 진다. 이 책 은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din(12)에 관한 책이다. 사실 그는 내가 지어낸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수피의 신비가였으며 그의 무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무덤 속에서도 농담을 지껄일 그 러한 인물이었다. /(12) 수피의 신비가의 이름인데 오쇼 라즈니쉬가 그의 이름만 따서 많은 우 화들을 들려주었다. '물라'란 회교의 율법학자를 말한다. 오쇼 라즈니 쉬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어리석은 자의 지혜]라는 우화집을 낸 일 이 있다.] 그는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비석 대신 그 자리에 문 을 하나 세워라. 그 문을 잠그고 나선 열쇠를 바다 속에 던져 버 려라. 이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무덤을 찾아간 사 람들은 무덤 주위를 빙빙 돌게 되었다. 문만 하나 뎅그라니 서있 을 뿐 벽이 없기 때문이엇다. 그리고 그 문은 잠겨 있었다. 이 광 경을 보고 물라 나스루딘은 무덤속에서 배꼽을 잡고 웃을 것이 다. 나스루딘만큼 내가 사랑한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는 종교와 웃음을 결합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종교와 웃음은 따로 놀았을 것이다. 나스루딘은 종교와 웃음의 적대 감정을 없 애 버리고 둘을 친구로 만들었다. 종교와 웃음이 만날 때, 명상 이 웃음이 되고 웃음이 명상이 될때,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기 적중의 기적이 일어난다. 나에게 2분만 시간을 더 달라. 나는 항상 모든 일을 그 절정에서 끝내기를 좋아한다. 9 이제 다시 나의 시간이다. 제21부가 이어진다. 오늘의 첫번째 책은 하아스Haas의 [이성理性의 운명The Des- tiny of the Mind]이다. 이 저자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정확 한지 모르지만 나는 내 식대로 '하아스'라고 발음한다. 이 책은 너무 깊은 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저자 하아스는 독일인임에 틀림없다. 그렇더 라도 그는 대단히 중요한 책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 아니며 마치 수학자처럼 책을 썼다. 나는 그에게서 '릴로시아philosia'라는 단 어를 배웠다. 철학philosophy은 '지혜의 사랑'을 의미한다. '필로philo'는 사 랑이고, '소피아sophia'는 지혜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全體를 바 라보는 동양의 방식인 다르샤나darshana(1)에 비교될 수 없다 필로소피는 차원이 낮다. /(1)견해, 이해, 관점, 이론 등을 뜻하는 이 단어는 보다. 응시하다. 이해하 다는 뜻의 'drs'라는 어근에서 나왔다./ [이성의 운명]에서 하아스는 다르샤나에 해당되는 말로서 '필로소피'대신에 '필로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필로' 는 사랑이고 '오시아osia'는 진리, 실체, 궁극의 진리를 뜻한다. 따라서 지식이나 지혜의 사랑이 아니라 진리의 사랑인 것이다. 그 진리가 입맛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하아스의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을 가깝게 접근시켰다. 물론 이 책이 동서양을 하나로 만들진 못한다. 책은 어디까지나 책일 뿐 이라서 그 이상의 역할은 할 수 없다.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려 면 책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한데 하아스는 그 적임자가 아니었 다. 그의 책은 뛰어났지만 그 사람 자신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 다. 동서양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선 붓다와 같은 사람, 보리달마 와 같은 사람, 예수와 같은 사람, 마호멧이나 바알 셈Baal Shem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명상이 필요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사람 하아스는 명상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다 만 어떤 것을 깊이 고찰하고 사색할 줄은 알았을 것이다. 독일인 은 특히 사색에 강하다. 그래서 그들은 유태인 강제 수용소의 명 칭을 '생각의 집중'을 뜻하는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라고 붙였다. 내가 이곳에서 명상 캠프를 열고 있는데 반 해서 그들은 '콘센트레이션 캠프'를 열었던 것이다. 독일인은 사색엔 강하지만 명상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따금 독일인 명상가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에크하르트 Eckhart(2)나 뵈에메 Boehme(3)같은 경우가 그 예외에 속한다. /(2) 마이스터 요하네스 에크하르트Meister johannes Eckhart: 1260년경-1327 도미니크회에 속한 스콜라 학자로서 독일 신비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신은 어떤 규정에도 불가능한 무無, 즉 신성神性이며, 세계의 생성은 이 신 이 자기에 대하여 자기를 계시하는 인식 과정이고 인간 생활의 목적은 신과의 신비적 합일ecstacy에 있다고 하면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선 신이 인간 속에서 작용하는 소중한 '영혼의 불꽃'에 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사상은 범신론적 경향을 띠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았 다. 그는 라틴어 외에 독일어로도 저서를 써 이후 근대의 독일어로 학술 서를 스는 계기를 주었다고 알려진다. 다이세츠 스즈키가[에크 하르트와 선禪]이란 책을 쓴 바 있다./ /(3)뱌콥 뵈에Jakob Boeme. 1575-1624.독일의 신비주의 철학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천성적으로 사색과 독서를 즐겨 독학으로 뛰어난 저술가가 되었다. 1612년 [오로라Aurora]를 써서 대평판을 받았으며 그 가 주장하는 인간과 신의 동일성同一性은 교회로부터 격렬히 비난받았 다.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이며, 우주는 선악을 비롯한 대립과 모순의 세 계인데, 오직 신으로부터의 인스피레이션을 통해서만 이 대립 모순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늘의 제2권은 에크하르트의 책이다. 그가 동양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독일인 사회에서 태어나 절대의 것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러나 이 가난뱅이 에크하르트는 그 일을 해냈다. 그것도 완벽하 게 해냈다. 역시 독일인답다. 독일인은 무엇을 하든지 완벽하게 한다. 지금도 저 밖에서 한 독일인 제자가 망치질을 하고 있다. 얼마나 완벽한 망치질인가! 이 침묵 속에서 그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퍼지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신비가 대부 분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교육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음 에 틀림없다. 높은 교육을 받은 신비가는 왜 없는가? 교육이 인 간의 무엇인가를 망쳐 놓고, 그래서 인간이 신비가가 되는 것을 막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교육만큼 인간을 망쳐 놓는 것도 없다. 유치원에서부 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25년간 교육은 의도적으로 인간 속의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해 나간다. 학위라는 것 때문에 내면의 연 꽃이 짓뭉개진다. 소위 선생과 교수와 학과장이라는 자들 때문 에 내면의 장미는 여지없이 꺾여진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얼마 나 그럴싸한 직함들을 앞가슴에 달고 있는가? 진정한 교육제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제 그것이 시작 되어야 한다.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의 교육이어야 한다. 인 간 내면의 남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적인 측면을 육 성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남성 위주인 독일 사회에서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이 가슴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 다.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무 런 위치도 갖지 못한 일개 걸인이었던 그가......그러나 그는 진 정한 부자였다. 진정한 부자가 된 사람은 많지 않다. 존재 전체 로 부자가 된 사람..... 이 '존재BEING'라는 말을 대문자로 적으로, 이 '있음being'과 '됨becoming'의 두단어를 잘 이해해야 한다. '됨'은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이다. 그러나 '있음'은 과정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단순 히 지금 여기에 '있음'이다. '있음'은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 니다. 하나의 초월이다. 이 '초월TRANSCENDENCE'이란 단어 역시 대문자로 적으라. 그것을 황금의 문자로, 순금으로 적어 놓 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에크하르트는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몇 마디 말로도 추잡한 성직자들과 교황을 기분 상하게 하기에 충 분했다. 그들은 당장에 에크하르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은 그에게 이런 말은 하고 저런 말은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바 보천치들의 명령에 귀기울이지 않으려면 나처럼 아예 미치광이 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의 명령에, 권위에 복종했다. 독일인은 역시 독일인이다. 그 들은 "좌로 갓!" 하면 좌측으로 가고, "우로 갓!" 하면 당장에 우 측으로 간다. 나는 대학의 군사훈련 시간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교관이 "우로갓!"하고 명령할 때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것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이 교관의 명령 에 따라 즉각적으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나 혼자만 그 자리에 서서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교관은 당황한 나 머지 소리쳤다. "왜 그러는 거야? 내말이 안들리는가? 귀가 잘못되었나?" 그러면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왜 내가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돌아 야 하는 것이죠? 그럴 이유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왼쪽 으로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도는 이 바보들도 결국엔 내가 서있 는 자리로 되돌아오지 않습니까?" 자연히 교관은 나를 군사훈련에서 제외시켰다. 나는 더할 나 위 없이 기뻤다. 모두가 나를 동정했지만 그것은 동정받을 일이 아니라 부러움을 살 일이었다. 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저 애는 쫓겨나면서도 즐거워하니 미친 애가 틀림없어." 에크하르트는 명령에 따랐다. 그래서 독일인은 완전한 도인 이 되지 못한다. 무척 힘든 일이다. 아마도 비말키르티Vimalkirti 가 첫번째로 깨달음을 얻은 독일인이었을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매우 가깝게 접근했다. 한 걸음만 더 내디뎠더라면 결론이 났을 것이다. 문이 열렸을 것이다. 초월의 문이 비록 한 사람의 독일이었고 나아가 교황의 압력이 십했음 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진리의 향기가 배어 있다. 그래서 그를 여기 에 포함시키는 바이다. 제3권. 또다른 독일인 봬에메Boehme의 책이다. 그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 것이 정확한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무 슨 상관인가? 독일인들은 다른 식으로 발음하리라는 것만은 확 실하다. 그러나 나는 독일인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도 누구와 타 협하지 않는 것이 내 성격이다. 나는 언제나 그를 '부마이'라고 불러왔다. 그 자신이 직접 나에게로 와서 "내 이름은 그게 아니 라 부에메다!"라고 주장한다 해도 나는 오히려 큰소리칠 것이 다. "썩 꺼져라! 나에겐 부마이가 너의 이름이다. 너의 이름은 부 마이여야 한다." 이상하게도 아프피타Arpita(4)가 내 방에 들어올 때면 늘 뵈에 메가 떠오른다. 아마 단순한 연상작용 때문일지도 모른다. 뵈에 메도 구도 만드는 제화공이었고, 아르피타도 제화공이다. 어쨌 든 아르피타여, 그대에게는 독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물인 뵈에메가 연상된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4) 오쇼 라즈니쉬의 제자의 한사람./ 뵈에메 역시 아주 가난했다. 마치 가난해야 현자가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진 그랬을지 모르지만 나 이후로는 그렇지 않을 것 이다. 나 이후로는 도인이 되기 위해선 부자가 되어야 한다. 다 시 한번 반복하거니와 깨달음을 얻으려면 부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그것은 과거에나 그랬다. 이제부턴 가 장 부유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 라. 나의 말과 예수의 말은 같은 내용이다. 서로 모순된 것이 아 니다. 예수의 '가난함'과 나의 '부유함'은 같은 뜻이다. 예수는 에고를 버린 사람을 가난한 사람으로 표현했을 뿐이며, 나는 그 를 부자로 표현할 뿐이다. 과거엔 특히 서양에서는 뵈에메 같은 사람이 부유한 집안에 서 태어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동양에선 그렇지 않았다. 붓다 는 왕자로 태어났으며, 마하비라 역시 왕자였다. 자이나교의 24 명의 티르탕카라傳法者tirthankara(5)역시 모두 왕이었다. 크리슈 나도 왕이었고 라마Rama(6)도 왕이었다. 모두가 최상류 계층 출 신치었다. 여기엔 뭔가 의미가 있다. 내가 말하는 부유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에고를 버릴 때 사람은 부자가 된다. '나'라는 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나'가 찾아진다. 뵈에메는 짧은 글만을 남겼다. 그는 여러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글 중에서 내가 인용하고 싶은 문장 하나는 이것이다. "가슴이 곧 신의 사원寺院이다." 그렇다. 뵈에메여, 신의 사원은 가슴이지 머리가 아니다. /(5) 마하비라 이전의 자이나교의 24명의 전법자를 말함. 평생 벌거벗고 살 았다./ /(6) 인도 최고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의 주인공으로 비쉬누 신의 화신./ 제4권. 이드리스 샤흐(탁월한 수피 문헌의 번역가, 해석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로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책들은 여러나라 말로 출판 소개되었으 며, 특히 수피즘과 그 참모습을 범 세계적인 것으로 전하는 데 있어서 그의 선구적 인 노력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수피 신비가들]외에 [수피의 길],[동양의 사상가] [배우는 법을 배우는 법] [꿈의 대상들]등이 있다.)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저서 중 어느 한 권만을 말하고 싶지 않다. 그의 모든 책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모 든 저서를 오늘의 제4권에 넣겠다. 겁먹지 말라. 나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어떤 것도 나를 정신들게 할 수 없다. 그 러나 이드리스 샤흐의 저서 중 유독 한권만이 탁월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모든 책이 다 훌륭하고 모두를 다 언급하고 싶지만 이 책 한 권만은 다이아몬드와 같다. 제목은 [수피 신비가들]이다. [수피 신비가들]에서 그가 행한 작업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물라 나스루딘을 서양에 소개한 사람이 바로 이드리스 샤흐이며, 그밖에도 그는 무한한 공헌을 했다. 그에게 진 빚을 우리는 아무리 해도 다 갚을 수 없다. 서양은 세세토록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드리스 샤흐는 나스루딘의 짧은 우화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는 우화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 의미깊고 날카롭게 하는 재능도 겸비했다. 그의 모든 책을 여기에 포 함시키는 바이다. 제5권으로 또다른 사람 알란 와츠(영국에서 태어나 1938년에 미국으로 이주함. 이후 편집자, 목사, 대학교수 등의 직업을 거치면서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 접하여'깨달음' 의 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동양적 의미의 '스승'으로서, 특히 선불교와 도교를 비롯한 인도, 중국 철학 일반에 대한 탁월한 해석자로 널리 알려졌고, 비트족 운동에 이어 하피 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캠브리지 ,코넬 하와이 대학 초청강사를 역임했으며, 5년동안 교회와 군부대, 노스웨스턴 대학 교 등지에서 종교담당 카운셀러를 지냈다. 또한 그는 일반 대중은 물론 미국 정신 의학협회와 스위스 쮜리히의 융 연구소, 그리고 미국의 여러 병원 의료진에게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미국 동양학 아카데미의 학장을 맡기도 했다. 자신의 암자인 샌프란시스코 북쪽 타말파스 산 기슭에 외따로 자리잡은 조그만 오두막 에서 명상과 사색, 그리고 집필 활동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973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시적이고 예리한 필치로 20여권의 책을 썼는데 , 주요 저서로는 [선의 길], [도 를 이야기하다]등이 있다.)와 그의 모든 저서를 포함시키고자 한다. 나는 이 사람 역시 무척 사랑한다. 내가 붓다를 사랑하고 솔로몬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 이다. 그들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알란 와츠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으며, 한 사람의 미국인이었다. 미국인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단지 미국인이 되고자 원해서 미국으 로 이주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가치있는 책들을 남겼다. [선의 길]을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이것이 그것]역시 많은 가치와 통찰력이 깃든 저서다. 아직 도를 깨치지 못한 사람이 그러한 책을 썼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있는 일이다. 깨달음에 이르면 어떤 말을 해도 아름답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깨달음 을 얻기 전 상태에서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갈 때는 창문으로 스며드는 작은 빛으로도 열광하기 마련이다. 알란 와츠는 알콜 중독자이긴 했으나 진리에 아주 가깝게 접근 했다. 그는 한때 정식 기독교 목사였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러나 곧 그는 그것 을 버렸다. 성직자의 위치를 포기할 만한 용기를 지닌 사람은 아주 드물다. 성직자 에겐 세상의 모든 것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알란와츠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돌이가 되었다. 떠돌이란 얼마나 좋은가! 보리달마가 그러했고, 바쇼(이뀨와 더불어 일본의 유명한 선승이자 하이꾸 시인.)가 그러했고, 중국의 임제선사(임제의현 ?-866. 중국 선사들 중에서 가장 개성있고 철저하며 열렬히 진리를 추구했던 인물. 지금의 산동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으며 효성이 지극했고, 승려가 되어서는 경건한 성품 과 아울러 진지한 구도자 였다. 수많은 고승들을 만나면서 처음에는 주로 계율과 화엄 경을 공부했으나, 이러한 공부로는 불교의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홀 연히 방랑의 길을 떠났다. 스무살 무렵에 당시 가장 이름을 떨쳤던 황벽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비범한 재주를 인정받고 선의 비밀을 참구하여 대각에 이르렀다. 후에 진주의 작은 선원에 머물면서 선원을 임제원이라 이름짓고 크게 선풍을 휘날렸다. [임제록] 1권이 전해진다.)가 그러했다. 알란와츠가 붓다가 디는 일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래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다음 생에선 곧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제 6권...... 조금 전 나는 임제선사의 이름을 언급했다. 오늘의 여섯번째 책은 [임제록]이다. 임제의 중국식 발음은 린치이며, 일본에서는 린자이라고 부른다. 나는 린자리이른 일본식 발음이 더 감각적으로 들린다.[임제어록]은 뭐랄까, 다이나 마이트 같다고나 할까,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임제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부처를 추종하는 그대 어리석은 자들이여, 부처를 떠나라! 부처를 떠나지 않으면 그를 발견할 수가 없다." 임제는 붓다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다. 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오타마 붓다의 이름을 들먹이기 전에 이 사실을 알라. 그 이름은 실체가 아니다. 불당 안의 부처는 실체가 아니다. 진짜 부처는 그대들 안에 있다. 그 진짜 부처를 그대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바깥의 부처를 죽이고 안의 부처를 얻으라." 임제는 말한다. "교리라는 것도 없고 가르침이란 것도 없으며 부처도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붓다의 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임제야말로 붓다의 진정 한 제자였다. 선의 꽃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한 것이 바로 임제선사였다. 그는 선의 정신을 일본의 언어로, 언어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로 피어나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다도와 꽃꽃이와 도예와 궁도 등이 탄생했다. 한 사람에 의해서 나라 전체의 생활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제7권은 임제선사처럼 높은 깨달음에 이르진 못했어도 가까이 접근하긴 했던 하즈 라트 이나야트 칸(아들과 함께 현대 수피즘의 대표적인 인물. 음악가이기도 했으며, 이드리스 샤흐와 더불어 수피즘을 서양에 널리 소개한 공로가 크다.)의 책으로, 이 사람은 수피즘을 서양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는 직접 책을 쓰진 않았으나 그가 서양 에서 행한 강연들이 12권의 책으로 엮어졌다. 그 책들의 여기저기에서 보석들이 발견 된다. 책 전체가 보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이따금 특히 그가 수피의 우화를 이야기할 때만 보석이 빛난다. 그는 또 음악가 이기도 했다. 음악에 있어선 정말로 대가였다. 영적 세계에선 스승 이 못되었지만 음악 세계에선 분명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영적 세계에 있어선 때로 구름 위를 치솟아 비상했다가도 한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무척 고통받았을 것이다. 제8권은 하즈라트 이나야트 칸의 아들의 책이다. 그의 이름은 서양의 구도자들 사이 에선 잘 알려진 하즈라트 비라야트 알리칸이다. 그는 아주 아름다운 사람으로 아직도 살아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비라야트는 아직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뜻한다. 단순히 숨쉬고 먹고 마시는 일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비라야트의 모든 책을 여기에 포함시킨다. 비라야트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음악가다. 그리고 더 많이 침묵에 가깝다. 제9권. 칼릴 지브란의 또 한권의 책을 포함시키고 싶다.[사람의 아들 예수]가 그것이다. 이 책은 거의 무시당한 책 중의 하나다.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 책을 철저히 무시했다. 무시했을 뿐 아니라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정한 예수에 대해 신경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기독교인들 스스 로가 비난하는데 기독교 밖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겠는가? 칼릴 지브란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시리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사실 아직도 시리아의 산악 지대에선 예수가 썼던 언어닌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시리아 삼나무들을 바라볼라치면 아무리 바보라ㄷ 신비와 경외감에 사로 잡힌 다. 칼릴 지브란은 삼나무들이 별까지 가닿는 그곳 시리아의 한 지방에서 태어난다. 그는 누구보다도 진정한 예수에 가깝게 접근했다. 오히려 복음서를 쓴 4인의 사도들 보다 더 잘 예수를 표현하고 있다. 4복음서는 가스펠이 아니라 가십에 불과하다. 칼릴 지브란이 훨씬 더 가깝게 접근했다. 그러나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 표현했다고 해거 기독교인들은 화를 내었다. 나는 이 책[사람의 아들 예수]를 사랑한다. 이 책은 예수와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일꾼, 농부, 어부, 심지어 세금 걷는 사람까지 남녀노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치 칼릴 지브란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예수에 대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가 아니라 진정한 예수에 대해 질문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 책에서 실린 이야기들은 실로 감동적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에 대해 깊이 명상할 필요가 있다.[사람의 아들 예수]가 오늘의 아홉권째 책이다. 제10권. 칼릴 지브란의 또 다른 책[광인]이다. 나는 이 책을 멀리 치워버리고 싶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책을 멀리 치워 버리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 칼릴 지브란 이 말하는 광인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안할 수 없게 되었다. 칼릴 지브란은 광인의 본질에 대해 깊이있고 진지하게 파헤쳐 나간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광인은 보통의 미치광이가 아니라 붓다, 까비르, 임제선사와 같은 광인을 가리 킨다. 어떻게 칼릴 지브란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다. 그 자신은 그러한 광인이 아니었다. 그 자신은 도를 깨치지 못했다. 그는 시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불행히도 미국에서 생활했다. 놀랍고 놀라운 일이다. 이 신비를 풀 길이 없다. 어떻게 그는 그러한 광인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었을까? 아마도 다른 어떤 존재가, 수피 신비가들이 말하는 카즈라나 또는 신지학자들이 말하는 K.H. 대사, 즉 쿠트후미가 그에게 내려왔을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 늘 그러한 영적 존재의 통로였던 것은 아니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그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사실 보통의 평범한 인간보다 더 평범했다. 질투심이 강하고 화 잘내고 온갖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 갑자기 그는 구름을 뚫고 찬란하게 비상하곤 했다. 높은 차원에서 어떤 영이 그에게로 내려온 것이다. 그 영이 그를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제2부에서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이야기했는가? ("서른 권이라고 생각됩니다.") 서른 권? 다소 안심이 된다. 아직도 많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천 권의 책에서 한 권을 뽑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제2부의 연속이다. 제1권은 장 폴 싸르트르(1905년 출생.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이며 작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중심 인물. 교수 자격을 얻은 후 한때 베를린에서 독일 철학을 연구했다. 종전 후 잡지[현대]를 주간하면서 문단과 논단에서 활약했다. 그의 철학은 헤겔, 훗셀,키에르케골,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존재와 무]에서 자신의 존재론을 전개 하였다.)[존재와 무]이다. 먼저 나는 이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겠다. 그는 금세기의 대표적인 속물근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를 속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그가 실존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실존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가치가 있다. 내 제자들보다 약간 더 미친 자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읽기가 그만큼 어렵다. 남보다 약간 더 미친 자에게는 이 책이 효과가 있다. 미친 자를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책이 이 책이다. 이것을 꼭 적어 넣으라. 모든 정신 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이 책을 꼭 읽히고 학습시켜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도 제정신 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1단계의 미친 자들, 즉 철학자와 교수와 학자라고 하는 자들에게 이 책은 효과가 있다. 장 폴 싸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명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싸르트르가 '존재'에 대해 말하고 '무'에 대해 말한다. 존재와 무는 둘이 아니다. 존재가 곧 무이며, 무가 곧 존재이다. 그래서 붓다는 존재를 '아나타', 즉 무아라고 불렀다. 자아를 '무아'라고 표현한 인물은 역사상 고오타마 붓다 한 사람뿐이다. 나는 1천 1가지의 이유 때문에 붓다를 사랑하지만, 이것이 그중의 한가지 이유이다. 나머지 1천 가지의 이유에 대해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 시간이 나면 그 1천 가지의 이유에 대해서도 하나씩 설명하려고 한다. 나는 장 폴 싸르트르를 싫어한다. 단지 싫어할 뿐 혐오하진 않는다. '혐오'라는 단어는 너무 강하다. 그 단어는 제2권을 위해 남겨 두겠다. 장 폴 싸르트르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철학적인 말장난, 지적인 훈련을 즐겼다. 사실 이 책은 훌륭한 지적 훈련이 된다.[존재와 무]의 10페이지라도 읽을 수 있다면 그대는 미치든지, 아니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읽기가 힘들다. 대학교수 시절에 나는 이책을 많은 학생들에게 권했으나 끝까지 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0페이지를 읽은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첫 페이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사실은 1단락만으로도 너무하다. 그런데 책은 1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나는 싸르트르를 싫어하며 그의 철학도 싫어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반철학이라고 부르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철학이란 점에는 다를 바 없다. 존재 그 자체는 철학적이도 반철학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나의 도서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가 실로 엄청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기술과 논리로 쓰여진 기념비적인 책을 그는 남겼다. 제2부에서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이야기했는가? ("서른 권이라고 생각됩니다.") 서른 권? 다소 안심이 된다. 아직도 많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천 권의 책에서 한 권을 뽑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제2부의 연 속이다. 제1권은 장 폴 싸르트르(1905년 출생.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이며 작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중심인물. 교수 자격을 얻은 후 한때 베를린에서 독일철학을 연구했다. 종전 후 잡지 [현대]를 주관하면서 문단과 논단에서 활약했다. 그의 철학은 헤겔, 훗셀, 키에르케골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 [존재와 무]에서 자신의 존재론을 전개하였다)의 [존재와 무]이다. 먼저 나는 이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겠다. 그는 금세기의 대표적인 속물근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를 속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그가 실존 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실존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가치가 있다. 내 제자들보다 약간 더 미친 자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읽기가 그만큼 어렵다. 남보다 약간 더 미친 자에게는 이 책이 효과가 있다. 미친 자를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책이 이 책이다. 이것을 꼭 적어 넣어라. 모든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이 책을 꼭 읽히고 학습시켜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도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1단계의 미친 자들, 즉 철학자와 교수와 학자라고 하는 자들에게 이 책은 효과가 있다. 장 폴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명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 하는 싸르트르가 '존재'에 대해 말하고 '무'에 대해 말한다. 존재와 무는 둘이 아니다. 존재가 곧 무이며, 무가 곧 존재이다. 그래서 붓다는 존재를 '아나타' 즉 무아라고 불렀다. 자아를 '무아'라고 표현한 인물은 역사상 고오타마 붓다 한 사람뿐이다. 나는 1천 1가지의 이유 때문에 붓다를 사랑하지만, 이것이 그중의 한가지 이유이다. 나머지 1천 가지의 이유에 대해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 시간이 나면 그 1천 가지의 이유에 대 해서도 하나씩 설명하려고 한다. 나는 장 폴 싸르트르를 싫어한다. 단지 싫어할 뿐 혐오하진 않는다. '혐오'라는 단어는 너무 강하 다. 그 단어는 제2권을 위해 남겨 두겠다. 장 폴 싸르트르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철학적인 말장난, 지적인 훈련을 즐겼다. 사실 이 책은 훌륭한 지적 훈련이 된다. [존재와 무]의 10페이지라도 읽을 수 있다면 그대는 미치든지, 아니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읽기가 힘들다. 대학교수 시절에 나는 이 책을 많은 학생들에게 권했으나 끝까지 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0 페이지를 읽은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첫 페이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사실은 1단락만으로도 너무하다. 그런데 책은 1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나는 싸르트르를 싫어하며 그의 철학도 싫어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반철학이라고 부르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철학이란 점에는 다를 바 없다. 존재 그 자체는 철학적이도 반철학적이지도 않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책을 나의 도서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가 실로 엄청난 작업을 했 기 때문이다. 대단한 기술과 논리로 쓰여진 기념비적인 책을 그는 남겼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은 일개 평범한 사회주의자였다. 이 점 때문에도 나는 그를 싫어한다. 존재에 대해 깊이 안 사람은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다. 존재계에 평등이 불가능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곧 존재계의 방식이다. 어떤 것도 같지 않으며, 같을 수가 없다. 평등은 어리석은 자의 한낱 꿈일 뿐이다. 존재 계는 다양한 차원에서 펼쳐지는 '서로 다름'의 파노라마인 것이다. 제2권...... 잠시 기다려야겠다. 기트 바르티의 만년필이 잉크가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그런 싸구 려 만년필을 갖고 다니는가? 마치 아담과 이브 시절에 만들어진 것 같다. 또 그 만년필은 왜 그 렇게 소음이 나는가? 하기야 이 '노아의 방주' 안에는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제2권은 마르틴 하이데거(1889년 출생. 독일의 현대철학자. 남독일의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28년 훗셀이 은퇴하자 그의 뒤를 이어 모교의 정교수가 되었으며, 그후 나치스 당원이 되고 대학 총장에 취임했으나 얼마 후 사임했다. 종전 후 강단에서 추방되어 산장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953년 추방이 해제되자 다시 모교에 복귀했다. 그의 철학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모든것이 무너져가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싹터 나치스의 허무적이고 자학적인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했다. 고전과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뛰어난 말쏨씨를 종횡무진 구사하고 있으나 그것이 철학을 지나치게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도 있다. 전후엔 특히 문학방면에서 싸르트르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으며, 카프카나 만년의 릴케를 비롯한 현대 독일 시인들은 무의식적으로나마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의 [시간과 존재]이다. 나는 이 사람 하이데거를 혐오한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의 추종자인 파시스트였다. 독일인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토록 천재적이고 재능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바보 같고 저능아 같은 히틀러를 지지한 것이다. 다만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 [시간과 존재]는 가치가 있다. 역시 내 제자들 보다는 훨씬 더 미친 사람들에게 이 책은 권할 만하다. 만일 그대가 완전한 미치광이를 자처한다면 [시간과 존재]를 읽으라. 이 책은 정말로 읽기 힘든 책이다. 책을 읽노라면 망치로 머리를 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몇 군데 반짝이는 귀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 그대의 머리를 망치로 치면 순간 적으로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것과 같다. 몇 개의 별들이 군데군데 반짝인다. 이 책은 완성작이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제2부를 쓰기로 약속했다. 평생에 걸쳐 그는 그 약 속을 다짐하고 재다짐했지만 끝내 제2부는 탄생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신에게 감사드린다. 내 생각에 그 자신도 자기가 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에 대해 제2부 를 쓸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제2부야말로 자신의 사상의 집대성이 될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책을 쓰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안그러면 웃음거리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제2부를 탄생시 키지 못하고서 세상을 떠났다. [시간과 존재]제1부만 해도 세상의 미친 자들에게나 효과가 있 다. 그리고 미친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제3권. 이 책이야말로 정말 완전히 미친것, 어떤 정신분석이나 약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미치광 이에게 알맞는 책이다. 이 책 역시 독일인의 작품으로 저자와 이름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 1889년 비엔나 출생. 어려서부터 음악가 클라라 슈만 은 그의 집에서 비공식적인 연주회를 가졌고, 구스타부 말러는 자주 드나드는 방문객이었고, 요하네스 브라암스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이러한 예술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란 그는 일생동안 음악에 대한 정열과 재능을 스스로 가꾸어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기도 하고 지휘자가 되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또 기계에 대한 관심도 커서 "말년에 이르러서도 박물관에 있는 그가 아끼는 증기 기관들을 만지면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으며, 고장난 기계를 수리한 몇 가지 일화도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영국으로 건너가 항공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점차 순수학문에로, 그 다음에는 수학의 기초에로 관심이 옮겨갔다. 그리하여 철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러셀의[수학의 원리]를 읽고 캠브리지 대학에 등록하여 러셀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와 오랫동한 대화을 나누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있는 지적 모험중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의 한사람인 무어와도 사귀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비트겐슈타인은 장교로 복무하다가 포로생활을 했으며, 이 전쟁중에 여러가지 기본적인 논리적 개념들에 대해 메모하여 그것이 군 휴가중 완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논리철학논고]이다. 전쟁 후 은둔생활을 하다가 시골국민하교 교사가 되어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한적한 시골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일에 종사했다. 수도자의 방처럼 햐얗게 칠이 된 작은 방에서 살았으며, 어떤때는 시골집에 있는 헛간이나 학교주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저녁에 그는 독서를 하거나 클라리넷을 연주하곤 했으며, 때때로 그는 창문에서 몇 시간이고 별을 응시하곤 했다. 한번은 부서진 증기기관을 짧은 시간내에 수리해서 그 지방의 방직 공장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얼마 후 캠브리지 대학과 철학으로 돌아온 그는 영국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게 될 강의를 시작했다.)이고 책의 제목은 [트락타투스 로지코 필로소피쿠스]이다. 줄여서 [트락타투스]라고 하자. 아마도 이 책은 세상에 존재하는 책들 중에 가장 어려운 책일것이다. 위대한 영국 철학자 무어(1873년에 출생한 영국의 철학자. 캠브리지 대학 철학교수를 지냈다.)나 또다른 위대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1895년에 출생한 영국의 논리학자. 철학자, 사회평론가. 캠브리지 대학 교수로 제1차 대전중 반전운동에 가담. 화이트헤드와 함께[수학의 원리] 로도 유명하며, [서양철학사]를 썼다)같은 이도 비트겐슈타인이 자기들보다 훨씬 천재적 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그의 책은 아니다. 그의 책은 지적 훈련감에 불과하다. 어쩌다 이따금만 빛나는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한 문장들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에 대해선 침묵을 지켜야 한다." 옳은 말이다. 세상의 성자나 시인, 신비가들도 이 문장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적인 방식으로 짧은 문장들을 써내려간다. 긴 단락은 그의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마치 경전들처럼 짧은 문장의 연속이다. 아주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자에게는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한 개의 날카로운 못처럼 존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를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줄지도 모른다. 루히비드 비트겐슈타인은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의 가장 권위있는 철학교수직을 권유받았지만 사양했다. 내가 좋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시골로 내겨가서 농부와 어부로 지냈다. 이 사람의 멋있는 점이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이 실존주의 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이 장 폴 싸르트르보다 더 실존적이다. 실존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실존이 된다. 그렇지 않고선 실존이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무어와 버트란드 러셀 밑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쓰여졌다. 영국과 독일의 두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배웠으니 [트락타투스 로지코 필로소피쿠스] 가 탄생할 법하다. 그 제목을 번역하면 '비트겐슈타인, 무어, 러셀'이란 뜻이 된다. 내가 보기엔, 비트겐슈타인이 우어나 러셀보다는 구제프의 발치 아래서 배웠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마땅히 그랬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놓쳤다. 아마도 다음 번에는 가능할 것이다. 다음 생을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다음 생이란 있지 않지만 그에겐 적어도 한 번의 생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무어나 러셀이나 화이트헤드(알프렛 노쓰 화이트헤드. 1861-1947. 영국의 수학자이며 철학자. 런던대학 수학교수로 있다가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를 지냈다. 데카르트에 견줄 만한 20세기의 철학자로 평가 되고 있다.)가 아니라 구제프나 장자, 보리달마와 같은 이에게서 배워야 한다. 제대로 된 사람이 제대로 되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 것이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제대로 되지 못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들과 어울리면 따라서 제대로 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사람이 막 되어먹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그 사람도 망쳐진다. 물론 이것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이다. 도를 깨친 사람은 남에게서 영향받지 않는다. 도인은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다. 예수는 창녀 막달레나와 어울렸으며, 붓다는 9백99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자와도 어울렸다. 이 살인자는 1천명의 사람을 죽이겠다고 공언했으며, 그 마지막 한 사람이 붓다였다. 그래서 그는 붓다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살인자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사람들이 그에게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뼈로 목걸이를 만들어서 걸고 다니는 자'라는 뜻이다. 이 살인자가 그러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면 그 손가락을 잘라서 목걸이에 꿰어 넣었다. 자기가 죽인 사람의 숫자를 기억하기 위해서 였다. 이제 9백99개의 손가락뼈가 모였다. 다시 말해 1명만 더 죽이면 되었다. 그때 붓다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붓다는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앙굴리말라가 소리쳤다. "멈추어라." 붓다가 말했다. "훌륭하다. 내가 사람들에게 말해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멈추어라!' 그러나 듣는 사람이 없다." 앙굴리말라는 순간 어리둥절 해졌다. 이 자는 미친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붓다는 앙굴리말라를 향해서 걸어갔다. 앙굴리말라가 다시 소리쳤다. "멈추어라! 너는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앙굴리말라이다. 나는 1천명의 사람을 죽이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이제 1명만 더 죽이면 그 맹세가 실현된다. 나의 어머니 조차도 나를 보면 도망가는 판이다. 가까이 오면 널 죽이겠다.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 보이니까 지금 도망치면 너만은 살려 주겠다." 붓다가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라. 나는 평생동안 도망쳐본 적이 없다. 그리고 멈춘 것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미 40년 전에 완전히 멈추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내 안에 움직이는 자는 없다. 또 나를 죽이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모든 태어난 자는 죽기 마련이다." 앙굴리말라는 이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앙굴리말라는 붓다를 바꿀 수 없었지만 붓다는 앙굴리말라를 바꾸었다. 창녀 막달레나는 예수를 바꿀수 없었지만 예수는 그 여인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선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은 충분히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잘못된 동반자를 만났다. 그러나 이책[트락타투스]는 한번쯤 읽을 가치가 있다. 특히 3류의 미치광이들에게 제정신들게 하는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제4권. 이 저자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나는 존재계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이제부터 내가 말할 사람은 숫자라는 것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비말키르티이여, 그의 저서는 [니르데쉬 수트라]이다. 물론 우리의 비말키르티(우리의 비말키르티란 독일 왕족 출신으로 오쇼 라즈니쉬의 제자가 되었다가 70년대 말 세상을 떠난 자를 말한다.)는 이 비말키르티가 아니다. 사실 내가 그에게 비말키르티라는 이름을 준 것은 이 저자 때문이다. 비말키르티의 책은 흔히 [비말키르티 니르데쉬 수트라]라고 불리운다. '니르데쉬 수트라' 는 '안내서, 지침서"라는 뜻이다. 비말키르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이다. 붓다 조차도 그에게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붓다의 제자이긴 했으나 결코 형식적인 제자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는 형식적으로 제자 입문식을 거치지 않았다. 그가 어찌나 무서웠는지 붓다의 다른 제자들까지도 그를 두려워했다. 다른 제자들은 그가 제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길에서 마주치거나 인사를 나눌라치면 그는 갑자기 충격적인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충격을 주는 것, 그것이 비말키르티의 방법이었다. 구제프라면 이 사람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제프라 해도 이 사람을 직법 만나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비말키르티는 그만큼 진정으로 무섭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가 병이 들어서 붓다가 사리푸타에게 병문안을 가라고 말했다. 사리푸타가 말했다. "지금까지 저는 당신의 명령에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만, 이번 만큼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저는 비말키르티에게 가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비말키르티는 정말 골치아픈 사람입니다. 숨이 넘어가면서도 그는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붓다는 모두에게 부탁했지만 단 한 사람 만주스리외에는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만주스리는 붓다의 제자로서 첫번째로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다. 만주스리는 붓다의 요청에 따라 비말키르티를 만나러 갔다. 이 책이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이 책은 바로 죽어가는 비말키르티와 만주스리의 대화집인 것이다. 만주스리가 죽어가는 비말키르티에게 질문을 던진 내용, 오히려 질문을 받은 내용이 바로 [비말키르티 지르데쉬 수트라]이다. 실로 위대한 안내서이다. 아무도 이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이 책이 어떤 특정종교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책은 불교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는 붓다의 형식적인 제자가 되기를 끝내 거부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형식을 중히 여기지 때문에 알맹이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 책을 모든 구도자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구도자라면 이 책속에서 큰 다이아몬드 광맥을 발견할 것이다. 제5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그대의 기억속에 다시금 데려 오고 싶다. 책의 제목은 [삶에 대한 주석서]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일기다. 이따금 그는 일기 형식으로 뭔가를 적곤 했다. 아름다운 일몰 광경, 오래된 나무, 아니면 새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단순한 저녁 풍경, 바다로 달려가는 강물 등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들을 적어내려 가곤 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탄생했다. 이 책은 일기라서 체계적인 글은 아니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세계로....... 내 눈에 어린 눈물이 보이는가? 얼마동안 이 책을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눈에 눈물이 어린다. 그만큼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인간의 손에 쓰여진 가장 아름다운 책이 이것이다. 앞에서 나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처음과 마지막 자유]를 그의 최고의 책이라 평가했었다. 물론 책으로 따지자면 그것이 최고이지만 [삶에 대한 주석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책이 아니라 일기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아름다운 일기책을 여기에 포함시키는 바이다. 제6권 역시 [주석서]라는 제목의 책으로, 모리스 니콜(구제프의 수제자 중의 한사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꾸미지 않아야 하듯이 다른 사람도 꾸미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꾸미지 않게 될 때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도 꾸미지 않게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죽을 때까지 스승을 떠나지 않고 충실한 제자로 남았다.)의 다섯 권에 달하는 역작이다. 나는 그를 '니콜'이라고 부르지만 오늘 저녁 확인한 바로는 정확한 영국식 발음은 '니클'이었다. 아뿔싸, 나는 평생동안 그의 이름을 '니콜'이라고 발음해 왔다. 스펠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콜은 구제프의 제자였으나 같은 제자였던 오스펜스키와는 달랐다. 니콜은 스승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유다가 아니었다. 마지막 숨을 거둘때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 그는 진정한 제자로 남았다. 니콜의 [주석서]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제7권 역시 구제프의 또 다른 제자인 하르트만의 책으로, 제목은 [구제프와 함께 보낸 시절들] 이다. 이 사람의 이름 역시 '하르트만'이 정확한 발음인지 나는 자신이 없지만 발음이 꼭 중요한 것이겠는가? 하르트만과 그의 아내는 둘다 구제프의 제자였다. 하르트만은 음악가였는데 구제프의 춤을 위해 연주를 하곤 했다. 구제프는 명상의 일종으로 춤을 사용했다. 춤을 추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춤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좋은 명상이었다. 구제프가 뉴욕에서 최초로 이 명상법을 선보였을때 하르트만은 피아노를 연주했고 다른 제자들은 춤을 추었다. 도중에 구제프는 '스톱!"하고 소리쳤다. 이것은 일종의 '스톱 훈련'이었다. 구제프가 스톱을 외치자 춤추던 무용수들은 말 그대로 춤 중간에서 완전히 정지했다. 그때 그들은 마침 무대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동작을 정지하자 모두 바닥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래도 그들은 동작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관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스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제자들의 태도에 감동받았다. 하르트만이 쓴 [구제프와 함께 보낸 시절들]은 제자에 의해 쓰여진 스승에 대한 아름다운 기록이다.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자 누구에게나 이 책은 도음이 될 것이다. 다음이 몇 권째인가? ("이제 막 일곱번째 책을 말씀하셨습니다.") 제8권.......그리고 그대는 내 가르침의 방식을 이해하겠는가? 때로 내가 그대를 화나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대가 지금 이 순간 깨닫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지금은 느끼지 못해도 언젠가 나에게 감사해 할 것이다. 제7권.......숫자가 맞는가? ("제8권입니다.") 스승이 제자에 의해 바로잡아지는 것은 정말로 기분좋은 일이다. 제자가 스승을 바로잡을 때 스승은 언제나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대들에게 이따금 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이제부터 말하려는 제8권은 힌두교 신비가인 라마누자(11세기 후반 수피즘의 영향을 받은 인도의 힌두교는 모든 것의 가장 위에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놓게 되었다. 그러자 제례 의식과 그 권위만을 과시하던 바라문 사제 계급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이 소요의 틈에서 순수한 민중 신앙운동이 일어났다. 지적인 추구가 아닌 신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자각한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상이 하나의 서민층 신앙운동으로 불붙은 것이 바로 박티운동인데, 이 운동을 남인도에서 파급시킨 사람이 바로 라마누자이다.)에 의해 쓰여진[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한 주석서이다. [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해선 많은 주석서가 전해진다. 이미 바드라야나의[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해서 말한 바 있지만, 이 [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한 라마누자의 주석서는 그 나름대로 아주 독특하다. 본서 [브라흐마 수트라]는 마치 사막처럼 건조하기 이를 데업다. 물론 사막도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라마누자는 이[슈리 파샤]에서 그 사막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오아시스로 만들었다. 라마누자의 이 작품을 나는 사랑한다. 라마누자 자신에 대해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 전통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주의자, 정통을 따지는 자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그들은 광신자와 다를 바 없다. 이따금 광신자들도 아름다운 일을 행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책을 포함시키는 것을 이해애 달라. 제9권. 나는 오스펜스키라는 사람에 대해선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저서들은 늘 사랑해왔다. 그는 스승이 아니라 마치 교장선생처럼 생겼다. 교장선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학교를 다닐 때 나는 여러번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중고등학교 때도 실패했고 대학에서도 실패했다. 학교 교장을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뿐만 아나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특히 교장이 여성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여자교장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떤 바보들은 여자교장과 결혼까지 한다! 나는 오스펜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교장선생 타입이었다. 구제프의 가르침에 대해 강연을 할때도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교장선생이었다. 백묵을 손에 들고 칠판앞에 선 모습....... 안경을 쓴 폼하며 모든것이 학교의 교장선생이었다. 게다가 말하는 방식까지도. 그가 황금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왜 사람들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둘째로, 나는 그가 유다였기 때문에 그를 싫어한다. 나는 배반자를 사랑할 수 없다. 스승을 배반한다는 것은 영적인 자살을 의미한다. 유다조차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막힌지 스물 네 시간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스펜스키는 나의 연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그는 글을 쓰는 데 있어선 대단한 능력을 지닌, 가히 천재적인 솜씨였다. 내가 이제 언급할 이 책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는 생전에 이 책이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마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책의 내용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은 분량이 많지 않다. 책의 제목은 [인간 미래 심리학]. 그는 유언서에다 이 책을 그의 사후에만 출판하라고 못박았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책에서 그는 나와 내 제자들의 작업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가 예견한 미래의 심리학이 바로 내가 지금 이곳에서 행하고 있는 작업인 것이다. 미래의 인간, 신인간이 그것이다. 이 책은 소책자이지만 모든 구도자들이 일독을 해야 한다. 제10권....... 숫자가 맞는가? ("예, 맞습니다.") 제10권으로 삼고 싶은 이 책은 수피의 책인 [바하우딘의 서]이다. 수피 신비가의 원조격인 바하우딘은 수피즘의 전통을 세웠다. 이 소책자에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소책자는 하나의 씨앗이다. 사랑, 명상, 삶, 죽음의 씨앗....... 이 책에 대해 명상하라.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지금까지 제2부에서 몇 권의 책이 이야기되었는가? ("40권입니다.") 다시 제2부가 이어진다. 제1권은 콜린 윌슨(1931년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열네 살 때 [과학편람]전6권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고, 1956년[아웃사이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신실존주의'라 이름붙였으며, 이에 대해 [실존주의를 넘어서]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의 [아웃사이더]이다. 금세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책이 바로 이 [아웃사이더]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단지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자일 뿐이었다. 물론 책의 중간 중간에 빛나는 귀절들이 등장한다. 콜린 윌슨으로 말하자면 그는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었다. 아웃사이더란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사랑하는 것이다. 저자 자신은 자기가 말하는 차원에 올라서지 못했지만 그래도 진리에 아주 가깝게 접근했다. 그러나 이 점을 기억하라. 진리 에 아무리 가깝게 접근했다 해도 '가깝다'는 것은 아직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리이거나 진리 가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이지 그 중간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의 세계를 그야말로 외부에서 바라보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이 다. 왜냐하면 콜린 윌슨 자신은 아웃사이더가 아니었으며, 아웃사이더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아웃사이더의 세계를 '아웃사이드'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열쇠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어느 정도는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콜린 윌슨은 열쇠구멍을 통해 많은 것을 들여다보았다.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공부가 아니라 단지 읽기만 하면 된다. 한번 읽고 휴지통에 던져 버려라. 진정한 아웃사이더의 세계에서 탄생한 책이 아니라면 단지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2권은 공자의 [논어]이다. 나는 공자를 전혀 좋아하지 않으며,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 해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말하게 되어서 마음이 편하다. 공 자와 노자는 동시대 인물이었다. 노자가 약간 더 나이가 많았다. 공자는 어느날 노자를 만나러 갔 다가 진땀을 흘리고 몸을 떨면서 돌아나왔다. 제자들이 이유를 물었다. "노자의 암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토록 몸을 떠십니까? 스승님과 노자 두 사람만이 그곳 에 있었지 않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저 사람 노자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는 용이다. 그는 나를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간신히 나는 도망쳤다. 그는 정말 위험한 인물 이다." 공자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와 같은 사람은 그대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당장에 죽일 수 있다. 죽지 않고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자는 이 거듭남을 두려워하여 도 망친 인물이다. 나는 이미 노자의 책을 꼽은 바 있다.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공자는 아주 평범하고 세속적인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꼭 적어 넣어라. 그는 속물 에 불과하다. 그가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어쨌거나 당시의 중국은 영국 과 다를 바 없었다. 당시의 영국에는 야만인들만 난리를 칠 뿐 가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공자는 더없이 영리하고 약삭빠른 정치가였다. 실제로는 아무런 지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지성 이 있었다면 그는 노자의 발 아래 엎드려 절하고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노자를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침묵을 두려워했다. 노자와 침묵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공자의 가장 유명한 책을 여기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논어] 는 그의 대표작이다. 나에게는 이 책이 나무의 뿌리와 같다. 추한 것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것이 다. 세상에서 말하는 '필요악'이라는 것이 이것이다.[논어]는 하나의 필요악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정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현실적인 일들에 대해 말한다. 한번은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스승님, 침묵은 무엇입니까?" 공자는 갑자기 화가 나서 소리쳤다. "입 닥쳐라! 침묵이라고? 침묵이란 무덤 속에나 있는 것이다. 삶에는 침묵이 필요없다.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침묵이니 뭐니 떠드는 것이냐?" 이것이 공자의 인생관이었다. 내가 왜 그를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아, 그는 노자를 만나는 위대한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그에게 한없는 동정심을 느낄 따름이다. 제3권. 칼릴 지브란은 자신의 모국어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예언자]나 [광인]등 영어로 쓰여진 대표작들은 널리 알려졌으나 그가 모국어로 쓴 작품들은 몇 편밖에 번역되지 않았다. 물 론 번역이 원본을 따를 순 없겠지만 칼릴 지브란의 위대성은 번역 작품을 통해서도 느껴지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 나는 그 몇 권의 번역 작품을 꼽고자 한다. 제3권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의 정원]이다. 이 책을 나는 번역 작품으로 읽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위대한 현자 에피쿠로스(B.C. 341-270.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이며 유물론자. 아테네에 학교를 세우고 이것을 '정원 학교'라고 불렀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가 외세의 침입을 받아 그 지배하에 있었던 시대로 그리스 본래의 문화에 외국문화가 혼합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리스의 고전적인 철학도 그 모습이 퇴색되어 주로 개인적인 인생문제가 주된 관심이었다. 에피쿠로스도 이 인생 문제를 사색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자율성을 지닌 원자론을 주장하여 데모크리토스의 기계론적 결정론에 도전했으며, 인식에 대해서는 감각론을 주장하고 감각은 그 호소로 참을 전한다고 말하면서 오류가 생기는 것은 감각을 해석하는 방법에 잘못이 있기 때문 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지나 미신에 기초한 신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얻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것을 평안하고 자율적인 심신의 안정 상태, 즉 '아타락시아'라 하고, 이것을 쾌락이라 칭하였다. 그가 주장한 쾌락주의란 일반적으로 오해되듯 물질주의적인 쾌락이 아니었다.)를 떠올려 주었다. 나말고 에피쿠로스를 위대한 현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지 모르겠다. 그는 옛날이나 지금이 나 비난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군중이 어떤 사람을 비난할 때는 그 사람에게 어떤 위대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의 정원]에서 나에게 에피쿠로스를 생각나게 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신 의 공동체를 '정원'이라고 불렀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곧 그 사람을 대변한다. 플라톤은 자 신의 공동체를 '학원'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학자였고 매우 지적인 철학자였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공동체를 '정원'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나무 아래서, 별 아래서 살았다. 한 번은 왕이 에피쿠로스를 만나러 왔다. 이 '정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왕은 무엇 때문에 그들이 행복한지 알고 싶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었다. 왕은 당황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 고 정말로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왕이 말했다. "에피쿠로스여,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오. 다음에 올 때는 당신들에게 선 물을 가져오고 싶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에피쿠로스는 왕에게 말했다. "다시 이곳에 온다면 버터를 약간 갖다 주시오. 여러 해 동안 이곳 사람들은 버터를 구경하지 못했소. 우리는 버터 없이 빵을 먹고 있소.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음에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 구 경꾼으로 서있지 마시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시간만큼은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시오. 우리와 하 나가 되어 춤추고 노래하시오. 그밖에는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원하는 것이 없소." 칼릴 지브란의 책은 나에게 에피쿠로스를 생각나게 한다. 에피쿠로스의 책을 나의 도서목록에 포함시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나로선 어쩔 수 없는 것이, 그의 책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모 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입수 가능한 모든 책이 이미 수백년 전에 아깝게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칼릴 지브란의 책 [예언자의 정원]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 기를 이 시리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제4권 역시 칼릴 지브란의 또다른 영어 번역 작품으로 [스승의 목소리]이다. 역서의 군데군데 아름다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서는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영어 번역은 원어를 따 라갈 수 없다. 칼릴 지브란이 사용한 언어는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에 아주 가까운 것이었다. 그 두 언어는 이웃간이었다. 칼릴 지브란의 조국은 레바논이다. 그는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솟아 있는 레바논의 언덕배기에서 태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들이 바로 이 레바논 삼나무들이다. 레바 논 삼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반 고호의 말이 실감난다. "나무는 별에 가닿고자 하는 대지의 꿈이다." 그렇다. 레바논 삼나무들은 별에 닿을 만큼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아 있다. 칼릴 지브란은 어떤 면에서 예수를 대변한다. 그는 예수와 같은 차원이다. 그 자신은 비록 그리 스도가 되지 못했지만 충분히 될 수도 있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회를 놓쳤다. 지브란은 생정에 스승을 찾아서 떠날 수 있었다. 또 그 시대에는 훌륭한 영적 스승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는 뉴욕의 더러운 거리를 배회하는 가련한 인간으로 전락했다. 그는 마땅히 그 시대 위대한 스승 이었던 라마나 마하리쉬(1950년에 세상을 떠난 금세기 최고의 스승. 남인도의 가난한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17세에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그 해결책을 찾아 나섰으며 결국 혼자서 죽음의 본질을 이해해야 함을 깨닫고 삶이 크게 달라졌다. 속세의 일들에 흥미를 잃은 그는 집을 떠나 아루나찰나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44년 동안 살다가 육체를 떠났다. 그래서 그는 '아루나찰나의 성자' 로 불리워졌다.)를 찾아갔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5권은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으로 하자. 이것은 책이라기보다는 [나는 누구인 가]라는 제목은 작은 팜플렛이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학자도 아니었으며 많은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17세에 집을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진정한 집을 발견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세속의 집으로 돌아가겠는가? 라마나 마하리쉬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존재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 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야말로 금세기의 깨달음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 는 이 깨달음 운동의 선구자로 자처하는 엉터리 미국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책은 그다지 눈에 띄는 책이 아니지만 라마나 마하리쉬 자신은 실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지 금까지 평범한 인간에 의해 쓰여진 훌륭한 책들을 많이 이야기했지만 라마나 마하리쉬의 경우는 그 정반대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했지만 몇 페이지에 불과한 팜플렛 형식의 작은 책만을 썼 다. 사실 그는 늘 침묵이었다. 어쩌다 이따금씩만 말할 뿐이었다. 칼릴 지브란이 라마나 마하리쉬를 만나러 갔다면 인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칼릴 지브란은 천재적인 작가인 반면에 라마나 마하리쉬는 전혀 글솜씨가 없었고, 또 칼릴 지브란은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라마나 마하리쉬의 위대성은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이 만났다면 세상은 더없는 축복을 누렸을 것이다. 제6권은 무어헤드와 라다크리슈난(1888년에 태어난 인도의 철학자. 마드라스 대학의 기독교대학에서 배운 후 캘커타, 베나레스 등지의 여러 대학교수를 지냈다. 한때 부통령을 지냈으며, 인도 정계의 1인자이기도 했다. 저서로 [인도 철학자]2권이 있다.)공저의 [인도의 마음]이다. 무어헤드는 인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그것은 라다크리슈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인도의 모든 전통을 훌륭히 대변하는 아름다운 책을 썼다. 물론 이 책 속 에 인도 정신의 높은 봉우리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불도저가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히말라 야의 봉우리를 평지로 만들어 버리듯이 두 사람은 정확히 불도저와 같은 작업을 했다. 진정한 인 도의 정신-나는 인도의 '마음'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제목이 [인 도의 무심]으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 책이 인도 최고의 정신적 봉우리들을 대표하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낮은 차원의 인도는 썩 잘 표현하고 있다. 사실 99.9퍼센트의 대중은 이 낮은 차원에 속하니까 그것도 무리라 곤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인도를 거의 대부분 소화해 내었다고 하겠다. 이 책은 잘 쓰여지 긴 했지만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라 상상에 의한 작업이었다. 한 저자는 영국인이었고, 다른 저자 는 인도 정치가였다. 이 얼마나 멋드러진 만남인가! 제7권. 이제 우리의 길고 긴 도서목록의 끝부분에 이르러 비로서 나는 진작에 언급 했어야 할 두권의 책을 소개하는 바이다. 그것은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의 [ 이 상한 나라의 앨리스]5)이고,제8권으로는 같은 저자의 [거울 속의 앨리스alice thro ugh the looking glass이다. 5)"어느날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에 앨리스가 흙장난을 하며 놀고 있는데 조끼를 입은토끼가 시계를 꺼내 보면서 급한 걸음으로 지나가더니 구멍 속으로 뛰어들어갔 습니다.앨리스도 뒤따라 뛰어들어갔는데...."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영국 작가 루이스 캐롤의 꿈과 환상과 자유룰 노래한 이야기이다. 두 권 다 심각하지 않다.그래서 나는 이 책들을 높이 평가한다.두 권 다 신비와 아 름다움과 재미와 여러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짧은 우화들로 가득차 있다.예를 들 어 여기 늘 즐겨 인용한 우화가 있다. 앨리스가 여왕을 만나러 왔다.여왕이 앨리스 에게 물었다."이곳으로 오는 길에 나를 만나러 오는 다른 사람을 못 보았니?" 앨리 스는 대답했다."아무도요nobody."그러자 여왕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아직 오지 않았으니 웬일이지?"앨리스는 속으 로 웃음이 나왔지만 영국 아가씨답게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왕에게 말했다."여 왕님,`아무도'는 아무도 아니라는 뜻이에요."여왕이 심각하게 말했다."물론 나도 ' 아무도'가 아무도 아니라는 뜻임을 안다.그런데 왜 `아무도'라는 사람이 이렇게 늦 은 것이지?세상에 너보다 걸음이 느린 사람이 누가 있겠니?이런 아름다운 작은 우화 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속의 앨리스]에는 수없이 널려 있다.그리고 더욱 이상한 사실은 루이스 캐롤이 저자의 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더욱 이 상한 사실은 루이스 캐롤이 저자의 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는 수학자이며 학교 교장이었기 때문에 필명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본명은 완전히 잊혀졌다.수학자이 면서 학교 교장이었던 사람이 이토록 아름다운 책을 쓸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놀라 운 일이다. 내가 왜 이 두권의 책을 포함시키는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나는 세상 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싶어서 두 권을 집어 넣는 것이다.즉,나에게는 장 폴 싸르트 르의[존재와 무]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동격이다.[이상한 나라 의 앨리스]가 비록 짧은 동화이지만 싸르트르의 그 작품에 뒤질 것이 하나도 없다. 사실 나더러 두 권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을 선 택하고 [존재와 무]는 아궁이 속에 던져 버릴 것이다.누구도 꺼낼 수 없도록 아궁이 깊숙히 구겨 넣을 것이다.나에ㅔ게는 루이스 캐롤의 이짧은 동화 두편이 무한한 영 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나는 지금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제9권 .다 시 또다시 나는 칼릴 지브란에게로 돌아온다.그만큼 나는 그를 사랑하며,그를 도와 주고 싶다.나는 그가 이생에서 다시 태어나길 기다려왔지만 아직도 그는 태어나지 않고 있다.아마도 그는 미래의 다른 어떤 스승을 만나야 할 것 같다.[방랑자the wo nderer]가 내가 꼽은 제 9권의 책이다.우화는 심오한 것을 표현하기 위한 아주 오래 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말로 직접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우화를 통해 전달될 수 있다.[방랑자]는 그러한 작은 우화들의 모음집이다. 제10권 역시 칼릴 지브란의 또 다른 책[영적인 말씀the spiri-tual sayings]이다.이제 나는 그가 비록 더 없이 사 랑하는 지브란이긴 하지만 반대의견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그는 [영적인 말씀]을 쓸 자격이 없다.책이 비록 아름답긴 해도 제목을 [아름다운 말씀]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영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은 터무니 없다.그렇긴 해도 나는 이책 을 사랑한다.나는 모든 터무니 없는 짓거리를 사랑하니까! 테르툴리안tertullian6) 이 생각난다. 6)155-222.카르타고 출신으로 플라톤과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배우고 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서구 유럽 신학의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그노시스gnosis파에 대해 신 앙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아직 그의 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그의 책 전부를 포함시키는 것은 나로선 불 가능 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이름만은 언급할 수 있다.테르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있다."크레도 쿠아 압수르둠credo qua absurdum_나는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그 것을 믿는다." 이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 세상에 있는지 의심스럽다.그만큼 대단한 통찰 력이다.그리고 테르툴리안이 누구인가하면,그는 카톨릭 성자의 한 사람이었다!그렇 다.,나는 비록 그가 카톨릭에서 추앙받는 성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진실로 아름다운 점이 있으면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인정한다.크레도 쿠아 압수르둠!이 문장은 순금 활자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활자로 새겨져야 한다.요즘은 세상에 흔한 것이 금이다.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는다." 얼마나 의미깊은 말인가!테르툴리 안 정도면 [영적인 말씀]을 쓸 수 있어도 칼릴 지브란은 아직 그럴 위치가 못된다. 칼릴 지브란은 명상을 해야 한다.지금이 그가 명상할 시간이다.내가 이제 말을 끝 내야 할 시간이 된 것처럼....그러나 제2부의 50권을 다 채운 다음에 막을 내려야겠 다. 제10권....숫자가 맞는가?("사실 조금 전 열번째 책으로 50권이 다 채워 졌습니 다.")그렇다면 51권째를 이야기하겠다.이 책을 빼놓을 순 없다.숫자가 붙이든지 말 든지 마음대로 하라.아니면 일부러 숫자를 잘못 적든지 하라.어쨌든 이 책은 이야기 해야 하겠다. 제11권.사무엘 케트samuel beckett7)의[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 odot}이다.`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듯이 사실 베게트는 신이란 단어 대신 고도란 단어를 기발하게 생각해 냈다.모든 인ㄴ간이 신을 기다리는 것은 실체가 없다.모두가 다만 기다리고 기다리 고 또 기다릴 뿐이다.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 는다.그래서 나는 50권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고도를 기다리며]를 포함시키 고자 하는 것이다. 12..................................................p213 이제 제2부가 끝나고 제3부가 시작이다.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나는 지난 반세기를 걸쳐 밤으로 책을 몇 권을 추려낸다는 것은 불가 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이미 시작한 일을 어찌하겠는가? 제1권은 마르틴 부 버martin buber1)의 책이다. 1)1878 독일의 비인에서 출생한 유태계 종교학자,어려서부터 유태교 신비주의를 따 르는 가정에서 자라난 그 유산의 보존과 소개에 힘썼다.종교학,윤리학,사회철학 분 야에서 활약했으며,성경 번역에도 종사했다. 마르틴 부버의 책을 빼놓았다면 나는 영원히 용서받지 목했을 것이다.이렇게 늦게 느즈막이 그를 말하는 것이 미안스럽기 짝이 없다.그런 의미에서 그의 저서 두 권 을 한꺼번에 올려놓는다. 첫번째 책은[하시디즘 이야기tales of hassidism]이다.다 이세츠 스즈키가 선을 세상에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듯이 마르틴 부버는 하시디즘을 그렇게 했다.두 사람 모두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엄청난 공헌을 했다.그러나 스즈키는 말년에 이르러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섰지만 불행이도 부버는 그렇지 못했다. 부버는 위대한 작가이며 철학자이고 사상가였다.그러나 그러한 것 들은 전부 갖고 노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이름에 표하면서 그의 책을 [내가 사랑한 책들]목록에 포함시키는 바이다.그가 없었다면 세 상은 `하시드hassid'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부버는 하시드 가정에서 태 어나어렸을 때부터 하시드 신비가들 사이에서 성장했다.하시드즘은 그의 살이 되고 뼈가 되고 골수가 되었다.따라서 그가 하시드즘 이야기를 할 때는 비록 그것이 그의 체험이 아니라 그가 들은 바를 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더없이 진실되고 느껴진다. 또 그는 정확히 들었다.이것을 꼭 기록해야 한다.듣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나아 가 자기가 들은 것을 훌륭하게 해냈다. 스즈키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부버 는 아니었다.반면에 스즈키는 그다지 훌륭한 작가가 못되었지만 부버는 실로 위대한 작가였다.글쓰는 일에 관한 한 부버가 월등히 높다.그러나 스즈키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부버는 알지 못했다.부버는 자신이 성장했던 그 신비 전통을 전하 고 있을 뿐이다.물론 성실하게 전하고 있다. 도를 추구하는 이들은 마땅히[하시디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여기에 실린 작은 이야기와 우화들은 깊은 맛을 지니고 있 다.그것들은 선의 이야기와 또 다르고,수피즘의 이야기와도 다르다.누구도 모방하지 않은,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그 자체의 독특한 맛이 있다.하시드 수도승들은 웃 고 춤추고 소리지른다.그것이 그들의 종교의식이다.그들의 종교는 금욕이 아니라 축 제의 종교이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제자들과 하시드 수행자 사이에 어떤 연관 성을 느낄 수 있다.많은 유태인들이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그리고 그들은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나는 유탯교의 본질을 사랑하며,그 본질 이 바로 하시디즘인 것이다.물론 모세는 하시디즘이란 단어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 역시 하시드 신비가였다.그가 그 명칭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나는 그 명칭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나는 그가 한 사람의 하시드 신비가였다.그가 그 명칭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나는 그가 한 사람의 하시드 신비가였다고 선언하는 바이다.마찬가지로 붓 다,크리슈나,나나크,마호멧 셈baal shem에서부터 시작되었다.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이다.마르틴 부버의 두번째 책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이기도 한[너와 나i and thou]이다.이 책으로 그는 노벨상을 수산했다.그러나 미안 한 일이지만 나는 이 책의 내용에 공감하지 않는다.내가 이 책을 포함시키는 것은 그것이 진지하고 성실하게,그리고 아주 예술적으로 쓰여진 아름다운 작품이기 때문 이지만,이 책속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다.마르틴 부버 자신에게 영혼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니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집어 넣겠는가?[나와 너]는 유태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유태인들은 그 책 이 자신들의 종교를 대변해 준다고 생각한다.이 책은 유태교든 힌두교든 세상의 어 떤 종교도 대병하지 않는다.다만 마르틴 부버라고 불리우는 저자의 무지를 대변할 뿐이다.하지만 그는 분명 위대한 예술가였고 천재였다.천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비록 그것이 자신이 모르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걸작을 남기기 마련이다. [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부버는 이것이 신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한다.그 래서[너와 나]라는 것이다.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대화도 있 을 수 없다.오직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대화라고?신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달러 가치의 하락?아니면 아랍의 못 되먹은 지도자에 대해서?도대체 신과 무슨 내용의 대 화를 할 것인가?그대가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경외감에 깊은 침묵을 지킬 수 있 을뿐이다.그 침묵 속에 `나'라는 것도 없고 `너'라는 것도 없다.따라서 나는 이 책 의 내용 뿐 아니라 [너와 나]라는 제목 까지 못마땅하다.[너와 나]라는 것은 아직도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아니다,신과 그대가 만날때 그때는 연꽃 위의 이슬이 바 다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너와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나'가 있든지`너'가 있 든지 둘 중의 하나다.그러나`나'가 없으면 `너'라는 것도 없다.`너'라는 것이 없으 면 `나'라는 것도 없다.따라서 실제로 하나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지금 이 침 묵이 오히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해 준다.그의 [나와 너 ]는 실패작이다.실패작이긴 해도 걸작임에 틀림이 없다. 제3권......마르틴 부버는 유태인이었다.그리고 여기 다른 유태인 하나가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세상에!아직도 저렇게 많은 인물들이 기다리고 ㅇ있다니!불쌍한 기트 바르티여,어쨌든 그대도 먹어 야 사니까 빨리 이야기를 끝내도록 하겠다.내 이야기만으로 살 수는 없으나까 그대 의 식사시간을 위해 가능한 한 저 인물들을 쫓아 버리겠다.그러나 몇 사람은 아주 고집이 세어서 내가 자기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떠날 자세들이 아니다.마르틴 부버의 다음의 인물은 고집센 것으로 유명한 자다.물론 나보다는 약하지만 아마도 나 는 전생에선가 유태인었던 적이 있었나 보다.이 고집쟁이의 이름은 칼 마르크스이며,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자본론]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해로운 책이 이 책이다. 그러나 수천만의 사람을 지배했으니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전 세계의 절반이 공산주의자며,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확신 할 수 없다.공 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마음 깊은 곳에선 공산주의의 어떤 점이 좋다는 것을 인 정한다. 공산주의에 좋은 점은 하나도 없다.그것은 위대한 꿈을 빙자한 인ㄴ간 착취 일 뿐이다.칼 마르크스는 전혀 경제학자가 아니라 몽상가였다.꿈꾸는 자,시인이었다 .그것도 3류시인이었다.그는 훌륭한 작가도 되지 못했다.아무도[자본론]을 읽지 않 는다.나는 많은 유명한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만나 보았ㄷ지만 그들에게 "자본론을 읽어 보았는가?"라고 물어 볼 때마다 모두 시선을 피하고 얼버무렸다.그들은 말했다 ."앞의 몇 페이지만 읽었을 뿐이다.우린 지금 할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두꺼운 책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지만 모두 잡동사니일 뿐,전혀 논리 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마치 미친 자의 글 같다.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조건 써내려갔다.수천 권의 책들로 둘러싸인 대영도서관에 앉아서 계속 써나갔다.날마다 도서관 문이 닫히는 시간에 마지못해 끌려나가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직원들이 강제로 그를 끌어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밤새도록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을 것이며 혼이 나서 쫓겨 난 적도 있었다.이제 그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여기 신성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삼위일체가 있다.칼 마르크스와ㅑ 프리드리히 엥겔스,그리고 레닌이 그들이다.이 세 인물은 지구의 수천만 인구에게 신적인 존재 가 되었다.하나의 재난이 아닐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읽으라는 뜻이 아니라 읽지 말라는 뜻에서다.이 날에 밑줄을 그어라.이 책을 읽지 말라! 세상엔 읽어야 할 책이 너무도 많다.[자본론]까지 읽을 필요는 없 다. 제4권.칼 마르크스 역시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여기 유태인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제 4권은 또다른 유태인인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역작인[정신분석 강 의]이다.나는 `분석'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으며,이 사람에 대해서도 좋아하지 않는 다.그러나 그는 칼 마르크스와 마찬 가지로 하나의 큰 운동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 다.이 사람 역시 금세기를 지배한 주요 인물 중의 하나다. 유태인은 언제아 세계 지배를 꿈꾸어 왔다.실제로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금세기를 지배한 대표적인 세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드,그리고 알버트 아인슈 타인이다.세 명 모두 유태인이다. 유태인 들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자신들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그러나 경제 원리에 관한 한 마르크스는 틀렸다.프로이드 역시 빗 나갔다.인간의 마음은 분석 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래서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상대성이론에 관한 한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옳았으나 루즈벨트 대통 령에게 원자폭탄 제조를 제의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어리석음을 드러냈다.히로시마 와 나가사키에거 산 채로 불타 죽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알버트 아인슈타인인을 손 가락질해 보이고 있다.미국의 원자폭탄 제조를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아인슈 타인이다.그후 그는 자신을 결코 용서 할 수없었다.이것이 이 사람의 좋은 점이다. 적어도 그는 깊은 절망감 속에서 죽었다.죽기전에 그는 말했다."나는 다시는 물리학 자로 태어나지 않겠다.차라리 납땜공으로 태어나겠다."아인슈타인은 인류 역사를 통 틀어 가장 뛰어난 지성이었다.그러한 그가 왜 물리학자가 된 자신을 비관했는가?왜 그랬는가? 그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그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이 무엇을 했는가를 알고 났을 때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깨어 있지 못한 인간은 늘 그런 식이 다.너무 늦게 깨닫는다.깨어 있는 인간은 사전에 이미 안다. 제5권.......너무 많은 유태인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버려야 할지 판단 이 안 선다.그리고 알다시피 유태인들은 다루기가 만만치 않다.골치를 썩느니 차라 리 모두 내쫓는 편이 나을 것 같다.따라서 유태인이 아닌 다른 인물로 건너가겠다. 당분간은 유태인에 대해서 잊도록 하자.모두 사라져라....이것은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라 유태인들에게 한 말이다. 제5권 구제프의[위대한 만남]을 누락시킬까봐 진작 부터 걱정했다.제3부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좋은 책이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이 다.구제프는 오누 세상을 두루 여행했다.그는 티벳까지 올라갔으며,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지난번 달라이 라마2)의 선생까지 지냈다.티벳에서 그는 도르젭이란 이름으 로 불리워졌다. 2)`라마'는 직역하면 윗사람의 뜻으로 라마교의 승려를 말한다.본래 학식과 덕이 높은 승려,대사원의 장로를 가르키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라마교의 큰 스님을 일컫 는 말이다.티벳에서는 라마는 불,법,승 보다더 존경되며 라마에 대한 정신적 물질 적 봉사는 곧 불도 성취의 길로 인정된다.라마는 일반인과 구별되지만 라마 사이 에는 일반 승려와 귀족 승려의 구별이 있다.귀족 승려는 덕이 높은 자의 화신이라 하여 특별대우를 받는데,이 귀족 승려,즉 화신 라마의 최고 위ㅣ치에 있는 자가 달 라이 라마이다.달라이 라마는 정치와 종교 양권을 지배하고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하여 크게 숭배받는다.라마교는 불교가 7세기초에 티벳으로 들어가 변형된 종교이 다. 많은 이들은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르젭이 바로 조지 구제프다. 구제프가 티벳에서 여러해 동안 지냈으며 라싸의 궁전에서도 몇해를 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 자 영국 정부는 구제프가 영국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그는 본래 영국에 머물고 싶 어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구제프는 하나의 회상으로서[위대한 만남]을 썼다. 그가 인생을 살면서 만난 온갖 기이한 인물들에 대한 실로 애정 가득한 회상이다.수 피의 수도승,인도의 신비가,그리고 티벳의 라마승과 일본의 선승 등이 등장한다.그 는 이 책에서 자기가 만난 모든 인물을 언급하진 않았다.많은 인물들을 빼놓았다.책 이 시장에서 팔려야 하고 독자의 구미에 맞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의 구미 에도 맞추지 않는다.나는 시장성을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다.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지적하는 것이다.구제프는 이 책에서 진정으로 위대하고 뛰어난 인물들과의 만남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그렇긴 해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 다.아직도 그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아름다운 것과 마주칠때면 내 눈은 눈물로 가득찬다.그것말고 다른 존경의 표시는 없다.이 책은 단순히 읽고 끝낼 것이 아니라 깊이 파고들어야 할 책이다.영어에는 그런 단어가 없지만 힌두어에는 `파트' 라는 단어가 있다.그것은`같은 것을 평생에 걸쳐 날마다 읽는다'는 뜻이다.이때의 읽는다는 뜻은 서양에서 문고판을 일고서 전철 안에 두고 내리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공부한다는 말로도 부족하다.`파트'는 읽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이상의 것이다.그것은 즐겁게 반복해서 읽는 것이며,숨쉬는 일 그 자체가 되도록 가 슴 곳까지 받아들이는 일이다.이일은 평생이 걸린다.구제프의[위대한 만남]과 같은 진정한 책을 이해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미국 친구 카롤로스 카스타네다3)가 쓴 [돈 후앙의 가르침]시리즈에 나오는 돈 후앙처럼 가공 인물이 아니다. 3)1935년 브라질의 상파울로 태생으로 1951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UCLA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던 중 약초에 대한 정보 수집차 멕시코 근방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신비의 스승 돈 후앙을 만나 4년 동안 여러 신비체험을 겪으며 가르침을 받은 뒤 그 체험을 책으로 써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친구 카스타네다는 인류에게 참으로 나쁜 기여를 했다.영적인 내 용을 허구의소설로 쓰면 안 된다.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영적인 허구의 것으로 생각 하기 때문이다.[위대한 만남]은 논픽션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이다.구제프가 언급한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생존해 있다.내 자신이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중요한 인물들을 빼놓은 것에 대해선 구제프는 용서받을 수 없댜ㅏ.시장성이라는 것과 타협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토록 강인한 사람이 왜 그런 얄팍한 상업상과 타협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왜 그는 정말로 중요한 인물들을 제외시켰는가? 나는 그가 책 에서 빼놓은 몇몇 인물들을 직접 만나 보았다.그들은 나에게 구제프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현재 그들은 모두 아주 고령의 나이다.어쨌거나 이 책은 불완전하긴 하 지만 가치있는 책이다. 제6권.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책,익명의 저자로 된 책을 난,언제나 사랑해 왔다.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이 책은 단순히 까르비르의 제자가 썼다고만 알려져 있다.저자가 누구든 그는 틀림 없이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다.이것 만큼은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작은 시집으로 꾸밈이 이를 데 없다.아마도 저자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인물인것 같다.그러나 그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으ㅡ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다. 이 시집은 출판되지도 않았다.시집의 소 유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의 출판을 반대하는 것이다.나는 그들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으며,그들의 뜻에 찬성한다.그들은 그것이 책으로 출판을 원치 않은 것이다.그 시집을 읽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직접 손으로 베껴 가라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다.그렇게 해서 생겨난 필사본이 현재 인도 전역에 돌아다니고 있다. 필사본의 소유자들이 그것을 출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출판이란 확실히 책을 망친다.출판은 너무 기계적이다.그래서 인쇄와 출판 과정을 거치면서 책의 정 신은 사라지고,책은 죽은 시체가 되어 버린다.이 시집은 제목이 없다.책으로 출판되 지 않았으니 제목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나는 원본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이 원고를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가?"그들은 대답했다."그란타" 이제 이[그란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그란타'는 책이 종이 위가 아니라 나뭇잎사귀 위에 쓰여 지던 먼 옛날에서 유래된 단어다.그 시절엔 나뭇잎사귀를 묶는다'는 뜻인것이다. 이 책에는 대단히 가치있는 말들이 많이 적혀 있다.그중에 몇가지만 소개하겠다.첫째.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그것에 대해선 신경쓰지 말라.그것은 진리가 아니다.진리 는 말로 설명될 수 없다." 둘째. "신은 어떤 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셋째. "명상은 정신작용이 아니다.그것은 생각의 작용이 아니다.명상을 하려면 오히려 생각을 버려야 한다."등등 수없이 많다.내가[그란타]를 나의 도서목 록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 내용의 가치말고도 그것이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 고 번역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제7권.....숫자가 맞는가?("예,맞습니다.") 나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반대하지만 두 사람 공저의[공산주의 선언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기억하라,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나보다 더 열렬 한 반공주의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 소책자 [공산주의 선언]을 사랑한다.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쓰여진 방식을 사랑한다. 내용 말고 형식을 사랑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나는 여러 차원의 기호를 갖고 있다.내용은 별볼일 없어도 형식이 뛰어나면 나는 그것까지도 깊이 음미한다.형식을 논하면 붓다는 눈을 감아 버릴것이다. 마하비라도 멀리 달아날 것이다.그러나 나는 나만의 스타일을 갖고 있 다.그렇다,나는[공산주의 선언]이 쓰여진 형식을 사랑하며,그 내용은 싫어한다.내 말을 이해 하겠는가? 옷은 좋아하되 그 옷을 입은 사란은 싫어할 수 있는 법이다.내 경우가 정확히 그렇다.[공산주의 선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세상의 프 롤레타리아 계급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승리할 경우엔 세상을 얻는다." 그 문장 형식을 이해하겠는가? 대단히 힘없는 목소리로 그들은 말 한다."하나로 단결하라!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며,승리할 경우 세상을 얻는다."내가 나의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물론 나는`단결하라!'라는 말 대신에 `존재 하라!'라고 말한다.그리고 잃을 것은 그대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쇠사슬 뿐이라고 말 한다.그리고 나는 세상에 대해 승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왜 세상에 대해 신경쓰는 가?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알렉산더 대왕,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아돌프 히틀러,조셉 스탈린,모텍동....이러한 바보천치들이 한 줄로 길게 서있다.나는 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승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승리할 아무런 것 도 없다.단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그것이 나의 선언뭉이다.존재하라,그 속에서 그대는 이미 모든 것을 얻었다. 제8권은 가브리엘 마르셀4)의 저서 [시지프스의 신 화]이다. 4)프랑스의 현대 철학자.프랑스 실조ㅓㄴ주의의 선구자이며 기독교 실존주의의 대표 적 인물.그의 철학은 체계적 형식을 취하지 않고 실존적 체험의 자유로운 묘사에 의 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평범한 의미에서의 종교인이 아니다.나는 내 자신의 방식에 있어서 종교적이다. 따라서 내가 종교적이지 않은 책들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 다.물론 그 책들은 종교서적이 아니지만 깊이 파고들어가면 뛰어난 종교성을 발견하 게 될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는 고대의 신화로 마르셀이 그것을 자신의 책에 빌어 다 쓰고 있다.그 이야기를 해보자. 시지프스의 본래 신이었는데 최고신의 명령에 따 르지 않은 죄로 하늘에서 추방당했다.그에게 내려진 벌은 큰 바위를 골짜기에서 산 꼭대기로 옮기는 일이었다./그런데 산꼭대기의 자리가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그가 바위를 굴려서 아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그러면 시지프스는다시 바위를 산 정상으 로 옮겨야 했다.이일은 끝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이었다.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시지프스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 이었다. 이것이 모든 인간 의 상황이다.이 책을 깊이 파고들어가면 순수한 종교성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 것 이 그 때문이다.이것이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이며,과거에도 그래 왔다.그대는 무엇 을 하고 있는가?또다른 인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바위를 정상까지 굴려올라가지 만 매번 더 깊은 골짜기로 굴러떨어진다. 다음 날 아침 그대는 다시 그것을 반복한 다.그리고 그대는 안다.그것이 또다시 굴러 떨어지리라는 것을. 아름다운 신화가 아닐 수 없다. 마르셀은 이 이야기를 다시 소개하고 있다.그는 매우 종교적인 인간 이었다.사실 장 폴 싸르트르가 아니라 마르셀이야말로 진정한 실존주의자였다.그는 슬로건을 앞세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앞줄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살면서 조용히 글을 쓰다가 조용히 죽었다.그러나 그의 책[시지프스의 신화 ]는 더없이 감동적이다.[시지프스의 신화]야말로 현대문학이 탄생시킨 위대한 걸작 이다. 제9권. 이유를 모르겠지만 버트란드 러셀의 저서를 포함 시켜야 한다는 생각 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나는 언제나 이 사람을 좋아해 왔다.물론 나는 그가 나 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다는 것을 잘 안다.아마도 그것이 이유일 것이다.정반대 되는 것끼리는 서로 잡아당기기 마련이니까.다시금 내눈에 어리는 눈물을 보는가? 이 눈물은 버트란드 러셀을 위한 것이다.그는 친구3들 사이에 버티라는 애칭으로 불 리워지곤 했다. 제9권은 그의 [서양철학사]이다.서양철학에 관한 한 누구도 이만한 작업을 하지 못했다. 오직 한 철학자만이 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역사가들이 여럿 시도를 했으며 또 실제로 여러 권의 철학사를 썼지만 그들 자신은 철학자가 아니었 다.이 책은 버트란드 러셀이라는 철학자가 쓴 최초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는 솔직했기 때문에 자신의 책을 [철학사]라고 제목 붙이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동 양 철학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버트란드 러셀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철학사뿐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나는 철학을 좋아하지 않지만 러셀의 책은 철학서일 뿐 아니라 예술 작 품이다.그만큼 체계적이고 문학적이며 마름다운 창작품이다.아마도 구것은 러셀이 본래 수하가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에는 아직도 버트란드 러셀 같은 사람이 필 요하다. 그래서 인도의 역사와 철학사를 다시 써야 한다.그동안 많은 역사서들이 있어 왔지만 모두가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에 의해 쓰여진 것들이었다.역사학자 는 어디까지나 역사학자일 뿐이다. 역사학자는 변천하는 사상의 물결 속에 깃든 깊 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라다크리슈난이 버트란드 러세셀의 저서에 버금가는 책 을 만들겠다는 의도로[인도철학사]를 쓰긴 했지만 그것은 도둑질한 원고에 불과하 다.[인도철학사]는 원래 라다크리슈난이 도용해서 책으로 만든 것이다. 사건이 법 정으로까지 갔지만 그 학생은 너무 가난하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소송에 승리할 수 가 없었다.문제삼지 않는 조건으로 그 학생은 라다크리슈난에게서 충분한 돈을 받았 다. 자,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인도철학을 논하겠는가? 인도와 중구,특히 이 두 나 라는 버트란드 러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서양은 다행히도 버트란드 러셀 같은 인 물이 필요하다.서양은 다행히도 버트란드 러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서양은 다행 이도 버트란드 러셀 같은 혁명적인 사상가가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자기 자신 에 자기 자신에 이르는 모든 서양철학사를 아름답게 기술할 수 있었다. 제10권. 이 제 내가 제10권으로 꼽을 책은 소위 종교서적이라는 것에 반대되는 책이다.그 내용 에 대해 명상할 때만이 그것이 종교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깊이 명상했을 때만이.....이 책은 아직 힌두어로만 남아 있을 뿐 어떤 언 어로도 번역되지 않고 있다.책의 제목은[다야바이의 노래]이다. 지금까지 라비야,미 라,랄라,사하조 등을 언급했으면서 이 여성을 빼놓은 것에 대해 상당히 미안함을 느 낀다.이제 다소 마음이 편안하다. 다야바이는 미라,사하조 등과 동시대 인물이었으 며,나아가 그 두 여성보다 훨씬 사상이 깊었다.다야바이는 진실로 우위를 가릴 수 없는 차원을 지니고 있다. 다야바이는 한 마리의 작은 뻐꾸기였다.인도에선 뻐꾸기 를 `코얄'이라고 부른다.다야바이는 인도의 코얄처럼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 다.인도의 여름밤이 되면 멀리서 뻐꾸기 울음이 들린다.다야바이가 그러했다.이 세 상의 무더운 여름날 멀리서 다야바이의 노래가 들리는 것이다.나는 다야바이에 대해 강의 한 바 있다.언젠가 그것이 번역될 것이라 믿지만 번역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서 약간 두렵다.누가 다야바이 같은 시인의 노래들을 번역할 수 있을 것인 가?동양의 언어는 순수시 그 자체이지만,서양의 언어는 산문에나 어울린다.영어로 쓰여진 진짜 시를 나는 만나지 못했다.때로 나는 서양의 위대한 클래식 작품을 듣곤 한다.그저께는 베에토벤을 듣다가 중간에서 음악을 꺼버려야 했다.동양의 음악을 들 어 보라.그러면 세상에 그것에 비교할 음악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인도의 대나무 피리소리를 들어 보라.그러면 모든 음악이 빛을 잃을 것이다. 내가 힌두어로 강의한 이 동양의 시인과 노래 부르는 자들의 작품이 과연 영어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모른다.그래도 약간의 희망을 걸고 나는 그들의 이름 석 자만이라도 언급하는 것이다. 13................................................p231 오늘의 첫번째 책은 어빙 스톤의[삶의 열정]이다.이것은 빈센트 반 고호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어빙 스톤이 이 책에서 기울인 노력은 그야말로 타 의 추종 을 불허한다.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토록 가까이 접근해서 글을 쓴 적이 없 다.마치 자기 자신에 대해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삶의 열정]은 단순 한 소설이 아니라 영적인 책이다.나의 시각에서 볼 때 영적인 책이라는 뜻이다.삶의 모든 차원은 하나의 종합으로 묶여질 수 있어야 하며,오직 그때만이 영적이라는 칭 호를 붙일 수 있다.이 책은 너무도 아른다워서 어빙 스톤 자신도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작품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책 이후 그는 많은 작품을 썼으며,오늘의 두번째 책 역시 어빙 스톤의 작품이 될 것이다.그러나 내가 그 책을 두번째의 위치 에 놓은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삶의 열정]보다 훨씬 뒤처지기 때문이다.그 책의 제목은[고뇌와 환희]이다.역시 마찬가지로 또다른 인생 스토리를 주제로 한 작품이 다.아마도 어빙 스톤은 자신이 또다른 [삶의 열정]을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 같다.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실패하긴 했으나 능히 두번째의 위치를 차지할 만 ㅎ다. 세상에는 시인과 화가와 음악가 등의 삶의 소재로 한 소설들이 수 없이 많 지만 어빙 스톤의 이 두번째 작품을 능가할 만한 것도 없다.그러니 첫번째 작품은 말해서 무엇하랴!두 작품 모두 아름답지만 첫번째 작품은 아름다움 이상이다. 두번 째 작품은 약간 처지지만 그것은 어빙 스톤의 잘못이 아니다.[삶의 열정]같은 뛰어 난 작품을 쓰고 나면 누구나 인간인 이상 그것과 비슷한 작품을 쓰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그러나 모방하는 순간 본래의 창의성은 사라진다.처음에[삶의 열정]을 썼 을때는 어떤 작품도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처녀림을 걷는것과 마찬가지였다.그러나 [고뇌와 환희]를 쓸 때는 모방 심리가 있었다.두번째 책에서 느껴지는 것이 그것이 다.그렇긴 해도 첫번째 작품의 뛰어난 점이 어느 정도 되살려져 있다.그래서 이 책 을 포함시키는 것이다.[고뇌와 환희]가 누구의 인생을 소재로 한 것인가를 잊었다. 작품이 너무나 생생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그 실제 주인공을 잊고 말았다.이 역시 드 문 일이다.나는 쉽게 용서하는 성격이지만 쉽게 잊는 성격은 아니다.이 소설이 누구 를 소재로 한 작품이었더라?고갱이었던가?("미켈란젤로입니다.")미켈란젤로?그렇다 면 어빙 스톤은 제대로 그의 인생을 묘사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고갱이었다면 몰라 도 미켈란젤로라면 미안하지만 그의 위대한 삶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그러나 어 빙 스톤은 매우 아름답게 묘사했다.그의 산문은 시와 같다. 두번째 책이[삶의 열정] 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빈센트 고호와 같은 인물이 없 기 때문이다.이 네덜란드 친구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다. 그는 홀로 우뚝 서 있다. 별들 가득한 밤하늘에 그는 멀리 떨어져서 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그러한 인물 에 대해서 위대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이다.미켈란젤로에 대해서 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빙 스톤은 자신의 첫 작품을 모방하려고 했기 때문에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다.절대로 모방자가 되지 말라.누구도 추종하지 말라. 그대 자신조차도. 불쌍한 체타나1).....나는 그녀에게 내 옷을 눈처럼 희게 빠라고 말했다. 1)오쇼라즈니쉬의 제자의 한 사람 체타나는 나의 제자로 내 옷을 세탁하는 일을 맡고 있다.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 한다.그래서 오늘 나는 한 없이 행복하다.눈처럼 흰 옷을 입으니 내가 다시 히말라 야에 온것 같다.나는 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히말라야에서 죽고 싶었다.히말라야에서 죽는것이 훨씬 더 멋있는 일이다.눈은 히말라야의 순수성,그 순결성을 상징한다.내 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그러므로 내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언제나 오늘에 살 라,바로 이 순간 우리는 히말라야의 세계속에 있는 것이다.미켈란젤로는 흰 대리석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그는 그 대리석으로 예수의 상을 조각했다.누구도 그러한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더욱 중요한 실수는 그가 자신의 첫 작 품을 모방하려 했다는 것이다.아아,만일 그가 첫번째 작품을 잊었더라면 또다른[삶 의 열정]을 탄생 시킬 수 있었을 텐데! 제3권은 레오 톨스토이의[부활]이다.전생애 에 걸쳐 레오 톨스토이는 예수에 대해 무관한 관심을 가졌다.그래서 [부활]이란 제 목을 붙인 것이다.그리고 레오 톨스토이는 실로 위대한 걸작을 썼다.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성경책과 같은 것이다.젊었을 때 나는 늘 톨스토이의[부활]을 옆에 끼고 다 녔다.아버지조차 걱정하게 되었다.어느날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왜 날마다 그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냐?넌 이미 그 책을 읽지 않았느냐?" 나 는말했다."예,물론 다 읽었어요.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읽었죠.그래도 계속 들고 다닐래요."마을 사람 전체가 그것을 알았다.내가 언제나 [부활]이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미친놈이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나는 왜 날마다[부활]을 들고 다녔는가?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그 책을 옆 에 두고 잤다.그만큼 나는 이 책을 사랑했다.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레오 톨스토이 의 방식을 사랑했다.도마를 제외하곤 네명의 사도들도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해낸 것 이다.도마에 대해선[부활]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성경에 수록된 4복음서는 예수 의 정신에서 멀어졌다.[부활]이 훨씬 가깝다.톨스토이는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으 며,사랑은 마술과 같아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면 시간이 사라진다.톨스토이가 예수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은 동시대 인물이 되어 버렸다.그 시간 간격은 2천 년 이나 되는 큰 것이었지만 톨수토이와 예수 사이에선 그것이 사라졌다.아주 드물게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다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책을 손에 들고 다니지 않는다.그 책은 이미 내 가슴안에 있 다.제4권은 다섯번째 복음서이다.이것은 성경에 수록되지 못했다.도마에 의해 쓰여 진 이[도마복음서]는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이 기록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나 는 그것에 대해 영어로 길게 강의한 바 있다.도마의 복음서는 아주 단순하기 때문 에 부정확한 기록일 수가 없다.그만큼 직접적이고 꾸밈이 없어서 도마는 사라지고 예수만이 남아있다.도마가 첫번째로 인도에 도착한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 는가?인도의 기독교는 바틴칸보다 더 오래된,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 다.도마의 시신이 아직도 인도의 고아라는 해변도시에 보관되어 있다.고아는 이상한 장소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들,소위 히피라고 하는 자들이 이곳으로 몰리 는 것이다. 도마의 시신이 아직도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어떻게 그것이 보관되었는 가는 기적이 아닐 수 없다.현대에는 시체를 냉동시켜서 보관하는 기술이 있지만 도 마의 시체는 냉동된 상태가 아니다.이집트와 티벳에서 사용된 어떤 고대의 방법이 도마의 경우에도 사용되었다.과학자들도 아직 그 비밀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어 떤 화학약품을 썼는지,아니면 약품을 쓴 것인지 아닌지조차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 다.과학자들이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들인가!그들은 달에 도착하는 로케트를 만들면 서도 잉크가 새지 않는 만년필 하나 못 만들고 있다.작은 것들에 있어선 맥을 못춘 다.제5권역시 레오 톨스토이의 작품이다.세상의 모든 언어로 쓰여진 작품중에서 가 히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할 수 있는[전쟁과 평화]이다.걸작일 뿐 아니라 수천 페이 지에 달하는 대작이다.나 말고 그러한 대작을 읽는 사람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그만 큼 이 작품은 장편이라서 두께를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게 만든다. 그러나 톨스토이 의 작품은 장편일 수밖에 없다.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전쟁과 평화]는 인간 의 식의 긴 역사이다.따라서 몇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 큼 독자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 준다.고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그렇다,말 그대로 고전이다. 제6권. 오늘은 마치 내 주위에 러시아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 같다.여섯번째는 박심 고리키의 소설[어머니]이다.나는 고리키를 좋아하지 않는다.그는 공산주의자였으며,나는 공산주의자를 싫어한다.그러나 싫어하 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고 그의 작품[어머니]는 감동적이다.평생동안 나는 이 책을 사랑해 왔다.내가 이 책을 여러권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말했다."너 미쳤 냐? 한 권이면 충분하지 뭣하러 똑같은 책을 또 주문하는 것이냐?소포가 와서 뜯어 보면 맨날 막심 고리키의[어머니]가 들어있으니 정말 너 미친게 아니냐?" 나는 아버 지에게 말했다."예,그래요.막심 고리키의[어머니]에 관한 한 나는 완전히 미쳤어요. 나의 어머니를 볼때마다 고리키의 이 작품이 떠오른다.고리키는 마땅히 서계 최고의 작가로 손꼽혀야 한다.특히[어머니]에서 그는 문학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그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그는 히말라야 봉우리처럼 우뚝 서있다.[어머니]는 읽고 또 읽어 야 한다.그때 서서히 이 작품의 세계가 그대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그때 서서히 어 떤 느낌이 찾아올 것이다.그렇다,생각이 아니라 느낌이,그때 이 작품은 더 이상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느낌이 그때 이 작품은 더 이상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살이 있는 사람처럼 다가올 것이다. 제7권은 또다른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의 소설[아버지와 아들]이다.나는 그동안 수많은 책들,수천 권의 책들을 사랑해 왔지만 이제 고백하건 대 투루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만큼 사랑한 책이 없다.나는 나의 불쌍한 아버지에 게 이 소설을 읽으라고 강요하곤 했다.아버지는 지금 세상을 떠나고 없다.살아 계셨 다면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왜 나는 아버지에게 이 소설을 읽으라고 강요했는가?그 것이 아버지와 아 사이의 거리감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그러 나 아버지는 정망 멋있는 사람 이었다.내가 권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그리고 이 소설을 읽었을 뿐 아니라 최소한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갭에 하 나의 다리가 놓여졌다.우리는 더이상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었다.아버지와 아들,어머 니와 딸이라는 그 추한 관계는 사라지고 아버지는 나와 친구가 되었다.자신의 아버 지 혹은 자신의 아들과 친구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투루게네프의 소설[아버지와 아들]은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한다.모든 사람이 어떤 종류의 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아버 지와 아들,남편과아내,형과누나 등 등 끝이 없다.아울러 그 관계들은 구토를 일 으킨다.내 사전에 `가족'이란 단어는 구토를 의미한다.그러나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서 아름다운 관계니 뭐니 떠들어댄다. 제8권은 로렌스의 작품이다.진작부터 이 책 을 말하고 싶었지만 발음에 자신이 없었다.그러니 웃지 말라.평생동안 나는 이 책을 [푀닉스]라고 발음해 왔다.스펠링이 그렇기 때문이다.오늘 아침 누군가에게 물었더 니 정확한 발음이`피닉스'라는 것이었다.나는 놀라서 말했다. "뭐라고?피닉스라고? 평생동안 나는 푀닉스라고발음해 왔는데...." 이 책[불사조]가 오늘의 여덟번째 책 이다.좋다,이제부턴`피닉스'라고 발음하겠다.[불사조],이 책은 수십 년 만에 어쩌 다 나타나는 훌륭한 작품이다. 제9권은 로렌스의 또다른 작품이다.[불사조]도 뛰어 난 작품이긴 하지만 나의 최종적인 선택은 아니다.최종적인 선택은[정신분석과 무 의식]이다.이 책은 거의 읽히지 않고 있다.나 같은 미치광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책 을 읽겠는가?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도 이 책을 읽지 않으며,정신분석과 관계된 사 람들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로렌스를 정신분석학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는다.나는 소설가들의 열광적인 독자도 아니고 정신분석에 미치지도 않았다.나는 두 세계 어느 쪽으로부터도 자유롭다.나는 완전한 자유인이 다.나는 이 책을 사랑 한다.[정신분석과 무의식]은 그동안 내가 아껴온 책 중의 하 나다.이제 더 이상 내가 책을 읽지 않고 있지만,만일 내가 다시 책을 읽는다면 그 첫번째 책이 바로 이 책이 될 것이다.베다 서나 성경이 아니라[정신분석과 무의식] 을 첫번째로 읽을 것이다.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가?이 책은 정신분석에 반대하는 내용이다. 로렌스는 진정한 혁명가이고 반역자였다.그는 지그문트 프로이드보다 훨 씬 더 혁명적이었다.프로이드는 중간밖에 되지 않는다.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내 가 말하는`중간'이란 곧 모든 저속한 것들을 가르킨다.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혁명가가 아니었다.로렌스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다. 제10권은 아놀드의[ 아시아의 빛]이다....몇 권 더 이야기하고 끝내야 하겠다.생의 마치는 한이 있어도 이야기는 끝내야 한다. 제11권음ㄴ[비자크]이다.`비자크'는 까비르의 시모음집이 다.`비자크'는 `씨앗'이란 뜻이다.물론 이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이다.그것 이 싹이 트고 나무가 되기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 제12권. 허버트 마 르쿠제의[일차원적 인간]이다.나는 그 내용에 반대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책을 썼 다.인간은 일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적으로 뻗어 나갔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반대하는 것이다.[일차원적 인간]은 현대인의 이 야기다. 제13권은 중국의 신비서[주역]. 제14권이자 오늘의 마지막 책은 아직 영 어로 번역되지 않은 힌두어 소설이다.나 같은 사람이 이러한 소설을 말하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언급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다.힌두어 제목은[나디케 드 빕]이며,[강안의 섬]이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저자는 사치다난드 바트샤야나] 이다.명상을 배우고자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가치있는 소설이다.말하자면 명상 가가 쓴 소설이다.톨스토이나 안톤 체홉의 소설들도 이 소설들도 이 작품에 비교될 수 없다.그것이 힌두어로 써졌다는 것이 불행한 일일 따름이다. 오늘의 첫번째 책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다. (임어당은 1895년에 중국에서 태어 난 학자) 임어당은 중국인이다. 그의 책은 내 책 죽음의 예술을 떠오르게 한다. (죽음의예술은 유태교 신비주의 하시디즘 강의이다) 임어당은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인이면서도 그는 오 염된 중국인, 즉 기독교인이었다. 오염이란 그런 것이다. 오염된 나머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된다. 임어당은 이 책 생활의 발견에서 많은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묘 사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곧 삶이 제외되어 있음을 의미 한다. 죽음을 내쫓지 않고 받아들일 때 만이 삶이 찾아온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 쪽면이다. 어느 한면만 인정하고 다른 면을 거부 할 순 없다. 그러나 그는 매우 아 름답게, 예술적으로 쓰고 있다. 그는 분명 현대의 뛰어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쓰든지 그것은 상상, 순전한 상상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것들 에 대한 꿈일 뿐이다. 때로 꿈은 아름다운 것일 수가 있다. 꿈마다 악몽인 것은 아 니다. 생활의 발견은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발견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긴 하나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어 나가노라면 그 속에 몰입할 수 있다는 뜻 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마치 깊은 숲에서 길을 잃듯이 하늘에도 별들이 빛나고 사바에 나무들이 있으며 길마저 없고 가야 할 곳도 없다. 이 책은 독자를 어느 곳 으로도 인도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좋은 책임을 발견한다. 왜인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잊고 현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어당이 명상에 대해 무엇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불행히도 그는 기독교이었 기 때문에 도교의 사원이나 불교의 절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대신 그는 세상에서 가장 3류급인 성경 만을 열심히 읽었다. 구약의 솔로몬의 노래과 신약의 산상수훈을 제외하면 성경은 잡지책에 불과하다. 아아, 만일 임어당이 붓다와 장자를 알았다면 나가르주나와 까비르와 알 힐라즈 만수르를 알았다면, 이 모든 미치광이들을 접했다면 그의 책은 예술적이긴 하나 진실되진 않다. 솔직하진 않다. 제2권은 임어당의 또다른 책 중국의 지헤이다. 그는 뛰어난 글솜씨를 갖고 있었기 에 중국의 지혜뿐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대표하는 노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함에 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혜와 같은 내용의 글까지도 쓸 수 있었다. 물론 임어당은 노 자의 가르침 몇 줄을 인용하긴 했으나 자신의 기독교적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들만 뽑아서 썼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전혀 노자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는 장자에서 도 몇 줄 인용했지만 자연히 합리적인 내용들뿐이었다. 장자는 합리적인 인물이 바 로 장자였다. 장자야말로 나의 연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 기하노라면 자연히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나에게는 어떤 것도 과장이 될 수 없 다. 장자의 우화 한 편 한 편은 나라와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그러한 우화 들을 수백 편 썼다. 우화마다 솔로몬의 노래이고 바가바드 기타이다. 각각의 우화가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따지기도 불가능하다. 임어당은 장자을 인용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한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입장에 서 인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으며 그의 책 중국의 지혜는 버트란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또는 무어헤드와 라드크리슈난 공저 인도의 마음등과 같이 한 나라 전체를 대표한 몇 안 되는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 다는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이 책은 신비서가 아니라 역사서지만 아름 답게 기록되었고, 그리고 문법이나 그밖의 모든 면에 있어서도 정확하다. 임어당은 기독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도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는 것만큼 큰 불행이 어디있겠는가? 따라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임어당 은 모든 점에서 옳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나 같은 미치광이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모든 점에서 틀리다. 그렇긴 해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재능이 있 다. 나는 그가 천재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그에게는 재능이, 뛰어난 재느이 있다. 그 이상은 묻지 말라. 천재는 아니다. 나는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제3권은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을 같지 않은 책이다. 그 책이 자꾸만 코를 들 이민다. 물론 유태인들의 책이다. 그렇지않다면 그렇게 긴 코를 어떻게 갖겠는가? 제목은 탈무드이다. 왜 나는 그것을 피하고 싶어했는가? 날마다 나는 유태인들을 비난하는 발언을 해왔다. 그래서 단 하루만이라도 유태인을 잊고서 휴일을 즐기고 싶다. 이 책을 피하고 싶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책에 읽을 만한 문장은 이 귀절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따라서 그 문장을 여기에 인용하겠다. 탈무드는 말한다. "신은 잔인하다. 그는 그대의 삼촌이 아니다. 신은 전혀 다정하 지 않다." 탈무드 전체에서 오직 이 문장만을 나는 사랑한다. 나머지 부분은 전부 헛소리다. 무두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저절로 집어던지게 된다. 집어던질 때는 이 문장만을 건져라. 그것을 욕실에 적어 놓으라. 그대가 아내에게 또는 아이들에게 어리석은 직을 행할 때마다 이 귀절을 생각하라.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것이다. 제4권 나는 아주 작은 자이나교 종파를 따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종파는 어떤 미치광이가 그 창시자였는데, 그는 나보다 약간 덜 미친 자였다. 나보다는 더 미쳤 다곤 할 수 없다. 이제 그의 두 권의 책을 소개하겠다. 이 책들은 아직 영어로 번역 되지 않았으며, 힌두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이 불가능한 것이다. 정확히 미치 광이의 방식으로 그는 언어를 사용한다. 제4권은 그의 책 "수냐 스바브하반" 이다. 그뜻은 '공의 본질.' 이 책은 몇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장마다 경전귀절이다. 그러나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내가 어떻게 그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우선 마틴 부버가 하시디즘의 가정에서 태어났 듯이 나는 이 미치광이의 전통 속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타란 타란이다. 이것 은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누구도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다. '타란 타란'은 단순히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된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그의 노래를을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겐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노래들이 아름다웠고, 그 춤이 아름다웠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른이 되어서 그 노래들을 들었다면 그것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어렸을 적부터 그 노래를에 둘러 싸여 자란 사람은 굳이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존재 깊은 곳에서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타란 타란을 이해한다. 머리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나아가 나는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안다. 내가 설령 그를 추종하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나는 그를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수많은 전통을 이해 하며, 내가 그 모든 전통들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수많은 미치광이를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수많은 전통을 이해하며, 내가 그 모든 전통들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수많은 미치광이를 이해한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 많은 미치광이를 이해하려다가 자신이 먼저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라! 그들 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초월해 있다. 어쨌거나 나는 타란을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존재를 못랐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를 추종하는 집단은 그 규모가 아주 작았으며, 그것도 인도 중부지방에서나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세력이 약한 것을 두려워하여 남에게 자신들이 타란의 추종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그냥 자신들이 자이나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이나교가 숭배하는 마하비라가 아니라 자기네 종파의 창시자인 타란을 몰래 믿는다. 자이나교 자체도 규모가 작은 종교이다. 신자수는 3백만 명에 불과하 다. 자이나교에는 두 개의 대표적인 종파가 있는데 디감바라와 스베탐바라가 그것이 다. 디감바라파는 마하비라가 나체의 성자였다는 사실을 믿는다. '디감바라'라는 말 자체가 '하늘의 옷'이라는 뜻으로 '나체'를 상징한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종파이다. '스베탐바라'의 뜻은 '흰옷'으로, 이 종파는 마하비라가 나체로 살긴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흰옷의 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힌두교와의 타협 과정에서 생겨안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타란의 추종자들은 디감바라파에 속했으며 이들이 자이나교 전체에서 가장 혁명적이다. 그들은 심지어 마하비라의 상까지도 숭배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원은 인간 내면의 공성을 상징하기 위해 텅 비어 있다. 우연히도 타란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그 가정에서 태어나기 위해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모든 고생은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잊혀질 수 있다. 그 가정은 나에게 인도 최고의 신 비가를 소개해 준 것이다. 그의 책 '수냐 스바브하바'는 미치광이의 중얼거림처럼 한 가지 사실만을 반복해서 말한다. 그대들은 알다시피 나 역시 지난 25년 동안 똑같은 것만을 말해 왔다. 즉, 나는 언제나 "깨어있으라!" 라고 말해 왔다. 타란이 '수냐 스바브하바'에서 말한는 것도 그것이다. 제5권은 타란의 두번째 책 '싯디 스바브하바'이다.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란 뜻이다. 아름다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도 타란은 똑같은 말만을 반복 한다. "비어 있으라!"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누구도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다. "깨어 있으라! 비어 있으라!" 영어의 '조심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깨어 있으라' 합쳐져서 생긴 말이다. 깨어 있는 것, 그것이 곧 조심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순간 그대는 '집'에 돌아온다. 이밖에도 타란의 저서가 많으나 이 두 권의 책이 그의 메시지 전체를 담고 있다. 한 권은 그대가 누구인가를, 그대가 순수한 공의 상태임 을 보여주고, 다른 한 권은 어떻게 그 상태에 도달하는가를 보여 준다. 깨어 있음으 로써 가능한 것이다. 두 권 모두 몇 페이지에 불과한 소책자들이다. 제6권... 늘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모자라서 빼먹을까 두려웠다. 원래 나는 늘 그렇듯이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처음엔 50권의 책만 말하려고 했으나 어느새 제2부가 시작되고, 또다시 50권의 책이 지나갔으나 아직도 많은 아름다운 책들이 남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제3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도스토엡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기록'이다. 이 책은 저자 와 마찬가지로 매우 이상한 책이다. 겉으로 봐선 각각의 단락들이 아무런 연결성이 없으나 실제론 하나의 큰 맥락이 밑에 흐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깊은 명상하면 서 읽어야 한다. 그 이상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문학사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걸작 중의 하나다.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메모에 불과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 문에 아무도 이 작품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명상적이지 않은 눈으로 보면 각각의 메모들이 아무런 의미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도자들에겐 이 책이 깊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구도자라면 그 소게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제7권. 어디선가 갑자기 이 책에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이 책을 말할 생각이 없 었으나 그것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렇다고 두려워하진 말라. 책의 저자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으로 역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메모삼아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은 저 자 사후에 '철학적 탐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인간의 모든 뿌리깊은 문제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물론 여성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이 없다면 남성의 뿌리깊은 문제가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남성의 진정한 문제는 여성 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인이면서 착한 여성은 정말로 드물다. 그런 여성과 결혼한다면 하늘이 준 행운인 줄 알라."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명확성, 투명성, 그리고 그 빈틈없는 합리성을 나는 사랑한다. 그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한다. 진리의 길을 탐구하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의 책장을 하나하나 통과하기를 나는 바란다. 제8권은 아싸지울리의 '정신통합'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을 창안함으로 써 위대한 업적을 나기긴 했으나 그것은 반쪽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아싸지올 리가 행한 '정신통합'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반쪽의 작업에 불과하다. 나의 작업은 '정신정립'이다. 정신분석과 정신통합, 이 두 과학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정신통합은 아싸지올리가 프로이드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거의 읽혀지 지 않고 있다. 그는 프로이드에 미친진 못했으나 모든 구도자들이 읽어야 할 책을 썼다. 사실 프로이드와 아싸지올리를 함께 읽었을 때만이 두 사람의 작업이 가치가 있다. 제9권. 언제나 나는 칼릴 지브란을 찬양해 왔다. 이제 그를 비난하기 전에 한번 더 그를 찬양하고자 한다. 걱정하지 말라. 나는 단순한 의미로 '비난'이란 단어를 쓴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9권은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이다. 실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현대에 와선 라빈드라나드 타로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러한 산문시를 쓰지 못했다. 지브란과 타고르 둘다 영어권 밖의 작가라는 점이 신기하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아름다운 시어들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국어는 원래 영어가 아니었다. 칼릴지브란은 아랍어가 모국어였 는데 아랍어는 대단히 시적으로 순수시 그 자체다. 그리고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벵갈어가 모국어였다. 벵갈어는 아랍어보다 더 시적이다. 실제로 벵갈인들이 벵갈 어로 싸우는 광경을 보면 마치 사랑의 말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싸울 때조차도 벵갈어는 시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벵갈 지역에 갔다가 한번은 사람들이 싸우 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시를 읊는 것과 같았다. 얼마나 놀랐던가! 그러다가 이곳 마하라슈트라 지방에와서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잡담하는 것까지 마치 싸우는 것 같아서 놀라고 했다. 마라티어 자체가 원래 그렇기 때문에 달콤하고 부 드러운 말을 속삭일 수 없다. 매우 거칠다. 싸움하는 언어인 것이다. 영국인들이 칼릴 지브란과 라빈드나드 타로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그들의 성공 비결을 배우지 못 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들의 '시적인 감수성'이었다. 제10권. 이것은 내가 그를 더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싶지 않았 던 칼릴 지브란의 작품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의 말이 진리에서 어긋난다면 나는 그를 비난해야 한다. 그 책은 '사색과 명상'이다. 나는 이 제목에 동의 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책으로 인해 칼릴 지브란이 명상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이 책에서의 '명상'은 명상이 아니라 '사색'알 뿐이다. 나는 사색에 반대한다. 따라서 이 열번째 책에 반대하는 바이다. 또한 칼릴 지브란이 서양적인 의미에서 '명상'이란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대한다. 서양에서는 명상이 아니다. 동양에 선 명상이 사색이나 생각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명상은 '무엇에 대한'것이 아니 다. 명상은 대상이 없다. 명상에는 객체가 없으며 순수한 주체뿐이다. 쇠렌 키에르케골은 말했다. "인간 존재의 핵심은 순수 주체 그 자체다." 명상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첫번째 권으로 선정하고자 하는 책은, 내가 설마 그런 사람의 책을 좋아하 리라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의 저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하드라 간디의 저서전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이다. 그의 진리에 대한 실험을 논하는 것은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이 적절한 시간인 것 같다. 기트 바르티여, 그 대가 나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다시 마하트마 간디를 비난하 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이 불쌍한 사람을 부드럽게 대할 수 있도록 나를 일깨워 달라. 지금까지 나는 한번도 간디에 대해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아마도 그대의 도 움을 받는다면 마하드마 간디와 같은 사람에도 나는 약간 부드럽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러나 나는 몇가지 아름다운 사실에 대해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누구도 간디처럼 진실하고 솔직하게 자서전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은 모든 자서전들 가운데 가장 솔직한 글이다. 자서전이란 무척 이상하다. 자기가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따라서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겸손을 부린다. 후자 역시 광장이긴 마찬가지다. 그것에 대해선 제2권에서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마하트마 간디는 어느 쪽도 아니다. 그는 단순하다. 그냥 사실 그대로를 기록해 나 가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의 과학자인양.... 그것이 자신의 자서전이란 사실을 전 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흔히들 남에게 감추고 싶어하는 모든 사실들을 있는 그대 로 다 말한다. 잘못된 것은 책의 제목이다. 진리를 갖고선 실험할 수 없다. 진리를 알든지 모르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 그것을 갖고 실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험이란 단어 자체가 객관적인 과학세계에 속한 것이다.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성을 갖고 실험할 수은 없다. 이것을 적어 넣으라. "주관성은 어떤 실험 과 관찰 대상으로 전락될 수 없다." 주관성은 존재계의 가장 신비한 현상이며, 그것 의 신비는 그것이 언제나 뒤켠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관찰하든지 그 관찰되어지는 대상은 관찰하는 자와 다르다. 그 관찰하는 자와 다르다. 그 관찰하는 자, 그 주시자를 의식하는것,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진리를 갖고 실험할 순 없다. 실험이란 의식이 아니라 물건, 물체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심 으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명상가는 아니었다. 명상가가 못 된다면 좋은 사람이라도 가치가 없다. 그는 평생에 걸쳐 실험했지만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더없 이 무지한 상태에서 생을 마쳤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토록 진실하고 정직한, 그리고 진리를 알려는 부타는 욕망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기란 결 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욕망이 장애물이 되었다. 진리는 진리 따위 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그러한 것에 관심조차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 내다. 신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 해도 나는 문을 열러 나가지 않을 것이다. 신 스스로 문 여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그러한 게으른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깨달음으로 인도 하는 게으른 자의 안내서'라고(이것은 원래 타데우스 골라스가 쓴 책의 제목으로, 인쇄소 견습공 출신의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명상서다)불러왔다. 이제 나는 그것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 완전하게 하고 싶다. 나는 깨달음 아닌 것으로 인도하는 게으른 자의 안내서이기도 한다. 나는 깨달음을 초월해 있다. 나는 항상 간디를 비난해 왔다. 정치관, 그의 사회상, 시대의 바퀴를 거꾸로 돌리 려는 그의 어리석은 노력.... 세상에선 그것을 '실잣는 물레'라고 부르겠지만.... 그는 인간이 원시사회로 되돌아가길 원했다. 그리하여 모든 기술 문명, 심지어 철 도건설과 전신전화, 우편제도 따위의 기본적인 것들조차도 그는 반대했다. 과학이 없다면 인간은 침팬지에 불과하다. 매우 힘세긴 하지만 침팬지는 침팬지일 뿐이다.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책 제목일 뿐 아니라 그의 전생애를 요약해 준다. 그는 자신이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완벽한 인도, 영국인이랑고 생각했다. 완전한 빅토리아인이라고. 지옥에 떨어질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이 빅토리아인들이다! 그는 모든 에티켓과 매너 온갖 종류의 영국식 어리석음들을 잔뜩 갖고 있었다. 체타나(오쇼 라즈니쉬의 제자) 는 이 말에 상처받을 것이다. 체타나는 나를 용서하라. 그ㅡ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그리고 그대는 나를 알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후려칠 소재 를 발견하는데에 있어서 천재적이다. 그러나 체타나는 운이 좋다. 그녀는 영국 숙녀 가 아니라 소위 라즈니쉬 광이다. 그녀는 가난한 영국 가정 출신이다. 아주 좋은 일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부였고 단순했다. 그녀는 다른 영국 숙녀들처럼 속물이 아니다. 영국 숙녀들은 남성들보다 코를 높게 하고 다닌다. 마치 하늘의 별이라도 보려는 것처럼. 그들에게선 속물근성의 썩은 냄새가 난다. 간디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것이 그를 망가뜨린 것 같다. 만일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훨씬 나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진리에 대해 실험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진리를 체험했을 것이다. 진리를 실험한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우습기 짝이 없다!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직접 체험해야 한다. 제2권은 성 어거스틴(초대 기독교회의 가장 유명한 교부신학자)의 '고백록'이다. 어거스틴은 두려움 없이 자서전을 쓴 최초의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다른쪽 극단으로 달려갔다. 내가 간디를 찬양하는 까 닭이 여기에 있다. 고백록에서 어기스틴은 너무 많은 것들을 고백한다. 심지어 자신 이 저지른 적이 없는 죄까지도 고백한다. 단순히 고백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서다 세상을 향해 "내가 짖지 않은 죄는 하나도 없다. 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죄 를 저질렀다"라고 자랑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어떤 인간 이라도 모든 죄를 저지를 순없다. 인간은 물론 신조차도 그럴 능력이 없다. 신은 말 할 것도 없고 악마초차도 어떻게 하면 어거스틴이 고백하는 그 많은 죄들을 즐길 수 있는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과장이 대단했던 것이다. 과장은 성인이 라고 하는 자들의 공통된 병이다. 그들응 모든 것을, 심지어 그들이 지은 죄까지도 과장한다. 그리하여 자연히 그들의 선한 행위까지 과장하면 자연히 그것을 배경으로 작은 선이라도 아주 크게, 아주 빛나 보인다. 먹구름 속의 번개와 같아지는 것이다. 그 먹구름들 때문에 번갯불이 더 돋보인다. 따라서 죄를 짖지 않고선 성인도 될 수 없다. 죄가 클수록 더욱 위대한 성인이 된다. 단순한 산수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를 내가 사랑하는 책들의 목록속에 포함시킨다. 아름답게 쓰여 진 책임엔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사람이다. 이것을 꼭 기록해 두라. 어떤 자가 비록 거짓말을 할지라도 그 거짓말이 아름다우면 나는 그것을 찬양 할 것이다.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것이 거짓말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 인가? 아름다우면 그만이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즐기고 감상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고백록은 거짓말의 걸작품이다. 온통 거짓말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업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수행한 것이다. 내가 완벽에 가깝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누군가 또다시 그 일을 더 완벽하게 수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이다. 어쨌든 어거스틴은 그 일을 99퍼센트 완벽하게 해냈으며, 다른 사람이 따라잡 을 여지를 별로 남겨놓지 않았다. 그렇다, 그 이후 많은 이들이 시도했다. 심지어 레오 톨스토이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시도했다. 그의 책 부활과 전쟁과 평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평생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고백록을 썼지만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톨스토이 같은 사람조차도 어거스틴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여, 낙담 하지 말라. 이제 당신의 책을 또다시 이도서목록에 포함시켜 주겠다. 제3권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이다. 짧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소설이다. 왜 내가 이 책을 포함시키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미친 자이기 때문 이다. 나는 온갖 종류의 것들을 좋아한다. 안나 카레리나는 내가 자장 사랑한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 책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내용을 생생히 기억하 며, 원하다면 소설 전체의 내용을 들려줄 수도 있다. 보라! 기트 바르티가 금방 한 숨을 쉬었다. 그녀는 걱정이 된 것이다. 이제 이 미친 사람이 안나 카레리나의 전 내용을 들려 주려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다. 다른 많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만일 내가 바다에 빠 져 세상의 수만 권 소설 중에서 단 하나의 소설을 선택하게 한다면 나는 안나 카레 리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 아름다운 책과 함께 있는 일은 더없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이 책은 읽고 또 읽고 해야 할 책이며, 그래야만 최소한 그 작품의 진가를 느끼고, 냄새맡고, 맛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책들과는 다르다. 간디가 결국 각자가 되지 못 했듯이 톨스톨이 역시 각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톨스토이은 위 대한 소설가였다. 간디는 그 솔직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앞으로도 그 럴 것이다. 금세기에 그만큼 솔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끝에다 '진저으로 당신의 것' 이라고 쓸 때 그것은 말 그대로 진심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당신의 것 이라고 쓸 때는 그대도 알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알듯이 그것은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진정으로 당신의 것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솔직성, 그것은 인간을 종교적으로 인도하는 초석이다. 톨스토이는 종교적 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는 아주 열심히 노력했다. 나는 그의 노력에 무한한 동정을 느끼는 바이다. 하지만 그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 는 최소한 몇 생을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의미에선 그가 묵타난다와 같 은 종교인이 되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나, 그리고 그밖의 여러 편의 위대한 작품들을 만나지 못했 을 것이다. 그때 그는 또 하나의 '스와미 바보난다'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제4권. 아지트 무케르지(탄트라 연구에 있어서 세계 최고봉인 인도 학자) 의 책이다. 그는 탄트라에 대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내 도서목록에 그이 두 권의 저서를 포함시키고자 한다. 제4권은 아지트 무케르지의 탄트아 예술. 제5권은 그의 또다른 저서 '탄트라 미술'이다. 이 저자는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나는 늘 이 두권의 책을 사랑했다. 이 두 권의 책은 실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이 책들에 수록된 그림들, 예술품들, 그리고 그가 그 예술품들에 단 주석들 하나하 나가 훌륭하다. 그의 서문은 그 가치가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저자 자신은 한 사람의 보잘 것 없는 벵갈인이었던 것같다. 바로 며칠 전 그가 델리에서 내 제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자리서 그가 고백하기를, 사실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탄트라 수집품들을 나에게 기증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탄트라 그림들과 미술품들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내 제자에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스승에게 바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두렵웠다." 그는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스승과 관계를 갖게 되면 나는 많은 두설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내 펴생에 걸친 수집품들을 인도정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늘 그의 두 저서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 사람, 아지트 무케르지, 아지트 새앙쥐인지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 겁쟁이를! 그런 두려움을 갖고서 어떻게 탄트라를 이해하겠는가? 불가능하다! 그가 책에 쓴 것은 지식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것은 가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가슴이 없었던 것이다. 생리학의 관점으로 말하자 면 생쥐에게도 가슴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가슴이 아니라 허파일 뿐이다. 허파 이상의 것, 즉 가슴을 가진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그리고 가슴은 오직 용기와 사랑과 모험 속에서만 커나간다. 얼마나 가련한 사람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책을 높이 평가한다. 생쥐가 실로 위대한 작업을 한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언제까지나 탄트라에 있어서, 그리고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아지트 생쥐, 아니 아지트 무케 르지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아지트 무케르지여, 내가 그대에게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세상 누구의 적도 아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들의 적 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나는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지트 무케르지여, 그대가 탄트라에 대해 훌륭한 일을 했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 다. 탄트라는 많은 학자, 철학자, 화가, 작가, 시인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고대의 지혜가 현대에 되살아날 수 있으며, 그대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역할을 한 것이다. 제6권. 이 책에 대해 나는 늘 강의하고 싶었다. 아침에 영어로 강의하기로 시간까 지 짜놓았었다. 나는 힌두어로 그것에 대해 강의한 바 있으며, 그것을 영어로 번역 하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아디 상카라차리아의 책이다. 지금의 그 바보 상카라차 리아가 아니라 진짜 상카리차리아를 말한다. 이 책은 1천 년이나 되었으며, 사실 작은 노래에 불과하다. 브하지 고빈담 무드 마테. "오, 바보천치여!" 기트 바르티, 주의깊게 들으라. 나는 그대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이 그런 뜻이다. "브하지 고빈담, 주의 노래를 부르라. 무드 마테, 오, 바보천치여, 바보천치여, 주의 노래를 부르라!" 그러나 바보천치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귀머거리들이다.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저능아들이다. 이해한다 해도 따르지 않는다. 따르지 않고선 무의미하다. 실천할 때만이 그 이해는 값진 것이다. 상카라차리아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이 노래 브하지 고빈담 무드마테 만큼 아름다운 책이 없다. 나는 이 제목의 네 개 단에 대해 거의 3백 페이지 분량의 강의를 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노래부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영원히 이 책에 대한 강의를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선 이 책의 제목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자. 제7권.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또다른 책이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내가 사랑한 사람중의 하나다. 책의 제목은 '철학산책' 이다. 그것은 한 권의 저서라기보다는 여러차례에 걸쳐 자신이 발표했던 글들의 모음집이다. 각각의 글들이 아름답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논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또한 산문을 쓰면서도 시를 표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 적이 없지만 그는 내가 보건대 일류 시인이다. 그는 칼리다스(인 도의 시인), 세익스피어, 밀톤, 괴테와 동등한 위치의 시인이다. 제8권. 폴 렙스(미국 태생의 시인이자 화가)의 '선육선골'이 여기있다. 이 책은 폴 렙스의 창작품은 아니자만 대단히 가치있는 책이다. 그의 원작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번역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 선의 일화들과 경전의 번역이다. 지금까지 나는 선에 대해 쓰여진 거의 모든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폴 렙스의 책에 버금갈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 자신이 선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임제선사나 바쇼와 같은 진가를 갖고 있다. 저자 폴 렙스는 캘리포니아의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이 작은 책에 선의 일화뿐 아니라 시바 신이 연인 파르바티에게 불러준 11개의 경인 비그야나 브하이라바 탄 트라를 번역 수록했다. 이 경에서 시바 신은 모든 가능한 명상비법에 대해 이야기하 고 있다. 명상에 대해 비그야나 브하이라바 탄트라보다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112개의 열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에 한 가지가 덧보태어져서 113개가 되어도 그것은 별 쓸모가 없다. 112, 이 숫자는 진실로 신비하고 아름답다. 이 책은 아주 얇다.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닐 수도 있다. 문고판 정도의 책이다. 하지만 그대는 주머니 속에 코히누르를 넣고 다니는 것이다. 물론 코히누르는 영국 왕실의 왕관에 부착되어 있어서 그댜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순 없다고 하겠 지만 폴 렙스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이 책을 엮고 번역하명서 자신의 말을 한 단어 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번역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번역했을 뿐아니라 선의 꽂을 영어에 옮겨 심었다. 그 꽃은 선에 대해 글을 쓴 다른 영어권 저자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 스즈키 아이세츠조차도 일본이었기 때문 에 그렇게 할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긴 했지만 스즈키는 자신의 깨달음의 향기를 영어 속에 옮기지 못했다. 스즈키의 영어도 물론 아름답지만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전가가 흐르긴 하지만 대광명은 아니다. 폴 렙스는 거의 불가능한 작업을 해냈다. 미국인이었지만 거듭 말하건대 선의 모든 진가를 터득했으며,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위해 그것을 선육선골에 옮겨적었다. 세상은 영원토록 그에게 감사해 야 한다. 비록 그 자신 도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9권. 나는 그대가 좀더 높이 비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나는 최고의 경지 에 해당하는 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좋은 것... 그러나 그 상태에 머물지 말라. 좋다는 거은 중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고, 또 나아가라. 즉 체라베디, 체라베디를 의미한다. 내가 아홉번째로 꼽고자 하는 책은 크리스마스 험프리의 선불교이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체라베디, 체라베디' 의 벅역인 '나아가라, 나아가라' 또는 '전진하라, 전진하라'였다. 하지만 영국인 어디까지나 영국인이다. 저자는 결국 애초의 생각을 버리고 그 책에 선불교라는 제목을 붙였다. 책 자체는 훌륭하지만 제목은 형편없다. 선은 어떤 '교' 어떤 '이즘'과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니다. 그냥 선만으 로 충분했을 것이다.험프리는 일기에 자신이 원래 '체라베디, 체라베디'를 제목으로 생각했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 제목이 너무 낯설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제목을 추하게도 선불교라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훌륭하다. 이 책 은 수많은 서양인들에게 선의 세계를 소개했으며, 그 점에서 대단히 공헌을 했다. 이 사람 험프리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제자였으며, 특히 서양에선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스승을 잘 모셨다. 그는 평생에 걸쳐 스즈키에게 헌신적이었다. 험프리는 진정한 제자였다. 그는 스즈키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리고 자신의 생이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에게 충실했고 복종했다.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책 속에서 흔들림 없는 그 충실한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제10권. 오늘의 마지막 권은 아주 작은 책이며 몇몇 사람에게만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에게 널리 알려질 필여가있다. 그것은 '찬디다스의 노래'이다. 찬디다스는 벵갈의 한 미치광이, 한 사람의 바울이었다. 바울은 광인을 의미한다. 찬디다스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춤추며 노래불렀다. 누가 그의 노래를 수집 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찬디다스의 노래 나는 경이로움을 감출 길 없다. 찬디다스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는 얼마나 위대한가! 수많은 시인들이 있어 왔지만 찬디다스는 솔로몬과 같은 위치다. 솔로몬에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찬디다스이다. 찬디다 스는 오묘한 것들, 존재하지 않는 신에 대한 것들을 노래부른다. 찬디다스 역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신을 노래불렀다. 그의 신은 곧 존 재계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곧 존재계 그 자체가 신이다. 찬디다스는 또 명상에 대해 노래부른다. 명상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무시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는 말한다. "명상은 곧 무심이다." 얼마나 중요한 공식인가! 공식을 좋아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조차도 찬디다스에 질투를 느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은 찬디다스에 대해, 그리고 명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인 그가 명상에 대해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해 깨달았다. 찬디다스의 노래는 사랑의 노래, 깨달음의 노래, 아름다움과 자연의 노래이다. 그리고 거기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순수한 기쁨, 노래 그 자체의 즐거움에 관련된 노래들도 몇 편 실려 있다. 이것이 오늘의 열번째 책이자 마지막 권이다. 16 -------- p 273 제3부에서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설명했는가? "40권입니다." 40권? 알다시피 나는 고집센 사람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50권을 채우고 끝을 맺 겠다. 그렇지 않으면 제4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고집은 나에게 실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세상에 가득찬 온갖 종류의 허위의식과 싸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세상 어디서나 인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속물근성으로 부터 나의 지성을 보호하는 데 그 고집이 실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내가 고 집센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조금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이런 방식으로, 대단히 고집센 인간으로 만들어준 신에게 감사한다. 이제 [내가 사랑한 책들] 시리즈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의 첫번째 책은 영국인, 완벽한 영국인 베네트Bennett의 책이다. 이 책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한 인 도 신비가 시바 푸리 바바Shiva Puri Baba에 대한 것이다. 베네트의 책을 통해서만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시바 푸리 바바는 매우 드문 꽃이다. 수많은 바보들이 마하트마mahatma로 위장하 고 있는 인도에선 특히 그렇다. 인도에서 시바 푸리 바바와 같은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은 큰 행운이거나 아니면 무척 고생스러운 수소문을 통해서나 가능하다. 인도에는 50만명이 넘는 마하트마가 있다. 그것이 실제 숫자다. 이 대집단 속에서 진정한 신 비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베네트는 많은 점에서 행운이었다. 그는 구제프를 발견한 첫번째 사람이기도 했다. 구제프를 최초로 발견한자는 오스펜 스키도, 모리스 니콜도 아니고 바로 베네트였다. 베네트는 터어키 콘스탄티노플의 한 피난민 수용소에서 구제프를 발견했다. 그 당 시는 러시아 혁명기여서 구제프는 조국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탈출하기 전에 그는 두 번 총격을 당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상하게도 운명은 같은 게임을 반복하는지 도 모른다. 피난민 수용소의 구제프! 그것을 상상해 보라. 인류가 그토록 저차원으로 전락한 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들은 붓다를, 구제프를, 예수를, 보리달마를 마구 잡이로 피난만 수용소에 집어 넣는다. 베네트가 그를 발견했을 때 구제프는 식사 배급을 타기 위해 대열에 서있었다. 음식이 하루 한 차례씩만 배급되었고, 그 대열은 길기만 했다. 러시아를 탈출한 피 난민 수천 명이 그곳에 수용되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구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들은 1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학살 했다. 베네트는 어떻게 구제프를 발견했는가? 제자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구제프를 알 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베네트는 누더기옷을 걸치고 여러날 씻 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베네트는 그 대열에 서있는 구제프를 알아보았는가? 그 눈...... 그 두 눈은 숨길 수 없다. 그가 왕좌에 앉아 있든 피난 민 수용소에 서있든 그 눈은 같다. 그리하여 베네트는 구제프를 서양에 소개했다.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이 가련한 베네트에게 감사히 여기지 않는다. 거기엔 이유 가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신념이 약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구제프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베네트는 그를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감히 그럴 수도 없었다. 구제프의 두 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눈의 힘을 베네트는 두 번 목격했다. 그는 그 사 건을 구제프에 관한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구제프에 관한 그의 책은 대단한 것이 못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도서목록에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잠시 언급할 뿐이었 다. 베네트는 그 사건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구제프에게 갔다. 나는 병에 걸려 몹 시 아팠고 내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기 전에 그의 두 눈을 마 지막으로 보기 위해서 그를 찾아간 것이다." 베네트는 구제프의 방으로 들어갔다. 구제프가 그를 쳐다보고는 일어나 가까이 다가와 그를 껴안았다. 베네트는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구제프의 방식이 아니었다 . 만일 그가 베네트의 뺨을 후려갈겼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를 껴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포옹 이상의 것이었다. 구제프의 손길이 닿는 순간 베네트는 엄청난 에너지 상승작용을 느꼈다. 동시에 그 는 구제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구제프는 그 자리에 잠시 주저앉 았다가 무척 힘들게 일어나 욕실로 가면서 베네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10분 뒤면 내가 정상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베네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자신이 이러한 힘, 이러한 건강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치 무슨 일이라 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마약, 즉 LSD나 마리화나의 효과에 의해서도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느낀다. 한 여성은 자신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뉴욕의 30층 건물의 창문 에서 뛰어내렸다.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뻔한 일이다. 베네트는 말하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나폴레옹의 유명 한 말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를 이해했다. 단순한 이해만이 아니라 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구제프 의 자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어가고 있는 나를 그가 살려낸 것이다." 그러한 일이 몇 년 뒤 또 한 번 일어났다. 동양에선 그것을 '전등傳燈'이라고 부 른다. 에너지가 한 등불에서 다른 꺼져가는 등불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런 놀라운 체험에도 불구하고 베네트는 신념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스펜스 키처럼 스승의 생전에 스승을 배반하고 떠나진 않았으나, 구제프가 죽자 역시 그를 배반했다. 구제프 사후에 베네트는 다른 스승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베네 트에게 불행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을 위해선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그는 시바 푸리 바바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바 푸리 바바 역시 위대하긴 하지만 구제프에는 비교가 안된다. 나는 베네트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베네트는 과학자였고 수학자였는데, 여기서 그의 어 리석은 행동의 이유를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과학자는 과학 외적인 분야에선 거의 언제나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정의내리기를 "과학은 점점 더 작은 것들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아는 것 "이며, 종교는 "점점 더 많은 것들에 대해 점점 더 적게 아는 것"이라고 했다. 과학 의 최종적인 결과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될 것이지만, 종교의 최종적인 결과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아 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대하여'가 아니라 그냥 안다. 과학은 무지속 에 끝날 것이고, 종교는 깨달음 속에 끝난다. 위대한 과학자들조차도 과학 외적인 분야에서는 다방면에서 어리석게 행동해 왔다 . 그들은 때로 너무도 유치하게 행동한다. 베네트는 어느 수준에 도달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신념이 부족했고 과녁에서 빗나갔다. 그는 다시 또다른 스승을 찾기 시작했으며 결국 시바 푸리 바바에게서도 떠났다. 시바 푸리 바바는 베네트가 만났을 때 아주 고령의 나이였다. 그때 이미 110살에 가까웠다. 그는 정말 강철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거의 한 세기 반을 살았다. 키도 육척 장신이었으며, 150살이 되어서도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육 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의 결정에 따라 죽음이 이루어졌다. 시바 푸리는 침묵의 스승이었다. 그는 가르침을 펴지 않았다. 특히 구제프와 같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접한 사람으로선 시바 푸리 바바를 따르는 것이 지극히 평 범한 일이다. 베네트는 그에 대한 책을 쓰자마자 또 다른 스승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는 아직 시바 푸리 바바가 생존해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인도네시아에서 베네트는 수부드 무브먼트Subud Movement의 창시자인 모 하멧 수부드Mohammed Subud를 만났다. '수부드'는 '수실-붓다-다르마Sushil-Buddha- Dharma'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베네트는 모아멧 수부드 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부드는 무척 좋은 사람이긴 했으나 스승이 아니었 다. 시바 푸리 바바와도 비교가 안 되었다. 그러니 구제프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 다. 베네트는 모하멧 수부드를 서양에 데려와 그를 구제프의 후계자처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는 실로 어리석음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베네트는 아름답고 수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글을 쓰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저서는 [시바 푸리 바바Shiva Puri Baba]이다. 베네트는 바보이긴 했지만 때로 한 마리 원숭이를 타자기 앞에 앉혀 놓으면 뜻밖에 훌륭한 문장을 만드 는 경우가 있다. 여기 저기 자판을 두들겨 도인만이 할 수 있는 그런 멋진 말을 만 드는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 자신은 그 문장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베네트는 이런 방식을 계속해 나갔다. 머지않아 그는 모하멧 수부드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또다시 다른 스승을 찾기 시작했다. 불쌍한 친구, 그의 전생애 는 불필요한 찾고 찾음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미 구제프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났으 며, 그의 가르침은 훌륭하고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어둠이었고 전 혀 빛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책을 여기에 포함시킨다. 내가 얼마 나 편견없는 사람인가를 알 것이다. 제2권. 이것은 기이한 책이다. 아무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 그대는 이 책의 제목 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빌헬름 라이히 Wihelm Reich(1)의 [들어라, 소인들아Listen, Little Man]이다. 작은 소책자이지만 예수의 [산상수훈]이나 노자의 [도덕경],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등을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 (1) 대기중의 기를 응집하여 인체에 활용할 수 있는 특별한 상자까지 고안했던 금세 기 미국의 기인이며 심리학자. 특히 주위의 모든 사람을 '소인'이라고 불렀기 때문 에 동료 심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결국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사실 라이히는 그러한 책을 쓸 만한 자격이 아니었다. 분명 어떤 미지의 영이 그 에게 들어왔음이 틀림없다. [들어라, 소인들아]는 사람들 사이에 라이히에 대한 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그가 모든 사람을 '소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실로 위 대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위대했는가? 그렇다. 한 사람의 붓다의 의미에선 아니지만 지그문트 프로이드, 칼 구스타브 융, 아싸지올리 같은 의미에선 그렇다. 그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위대했다. 물론 아직 인간 이고 초인은 아니지만 위대했다. 또한 이 책은 그의 예고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그는 이 책을 써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여성이 임신을 하면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 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는 이 책을 자기 안에 수년 동안 넣고 다니면서 그것을 쓰 려는 생각에 저항했다. 그 책을 쓰면 삶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실제로 그랬다. 책의 출판 이후 그는 사방에서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이 세상에선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이 일종의 죄다. 인간은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소크라테스, 그들은 그를 죽였다. 라이히, 그들은 또 그를 죽였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들은 라이히를 정신병자라고 낙인찍고 정신병동에 감금시켰 다. 그는 정신병자로 처리된 채 쇠창살 안에서 죽었다. 그는 구름 위로 비상할 능력 을 가졌지만 인간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은 아직도 배워야 한다. 소크라 테스, 예수, 붓다와 같은 각자들과 함께 사는 법을. 모든 구도자들은 이 책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 무조건하고 이 책을 나의 도서목록 에 포함시키는 바이다. 제3권은 버트란드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공동집필한 책이다. 아무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의 제목은 [수학의 원리]이다. 제목만으로도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일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느라고 무척 고생을 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 려움이 뒤따랐다. 이 책은 매혹적이고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만 구도자들에겐 권 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을 멀리하라! 나는 이 책의 수천 페이지를 독파했지만 결국 수학 계산 이외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수학에, 특히 고등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가 이 책을 포함시키는 이유는 그것이 수학에 있어 서 하나의 걸작이기 때문이다. 제4권...... 놀라겠지만 나의 네번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나는 아 리스토텔레스와 타고난 원수지간이다. 나는 이 자의 병을 치료가 불가능한 '아리스 토텔레스씨병'이라고 부른다. 그에겐 치료할 약이 없다. 편두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 니다. 아리스토텔레스씨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알라! 그것은 암 중의 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철학과 논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단지 쓸모없는 철학과 논리학에 대해서만 그러할 뿐, 진정한 것에 대해 선 전혀 그렇지 않다. 진정한 것은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플로티누스, 디오게네 스, 디오니수스로부터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는 한 권의 아름다운 저서를 남겼는데, 그리고 이 책은 아리 스토텔레스 학파의 학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유일한 책으로, 그 제목이 [시학]이 다. 나는 이 책에 도달하기까지 그의 수많은 지겨운 책들을 독파해야 했다. 나는 다 만 이 사람에게도 뭔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학]을 발견하여 몇 페이지 읽자마자 나는 몸을 떨었다. 이 사람 역시 가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모든 책은 머리로 썼지만 [시학]만큼은 가슴으로 썼다. 물 론 이 책은 시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말 그대로 시학이다. 시의 본질은 곧 사랑의 본질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지식의 향기가 아니라 직관의 향기다. 나는 이 책을 기꺼이 추천한다. 제5권. 아직도 너무 많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책을 선택할지 무척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필립 카플로(2)의 [선의 세 기둥]을 고르기로 하겠다. (2) 뉴욕 로체스터 선원의 설립자. [선-동양과 서양의 만남]의 저자이기도 함. 젊은 시절에 법률을 공부했고, 법원 취재기자로 활약했다. 제2차대전 직후 국제전범 재판 취재차 일본에 갔다가 선에 매료되었다. 1953년부터 과거의 경력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아서 선수행을 시작했다. 야스타니 선사에게서 인가를 받고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 다. 1966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뉴욕시에 로체스터 선원을 세웠다. 이 선원은 미국, 중남미, 유럽, 캐나다 등지에 지부를 갖게 되었다. 최근 1986년 후계자에게 선원을 인계하고 여러 선원을 여행하면서 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스즈키 다이세츠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선에 대한 책을 썼 지만 [선의 세 기둥]이야말로 선에 '대해서' 쓰여진 단연 으뜸가는 책이다. 그러나 내가 '대하여'를 강조하는 것은 필립 카플로에겐 선의 적접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이 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을 더욱 훌륭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체험도 없이, 다만 책을 통해 배우고 일본의 선원들을 방문함으로써 카플로는 하나의 걸작품을 탄생시켰다. 단 한 가지, 내가 카플로에게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선에는 세 기둥이 없다 는 사실이다. 한 개의 기둥조차 없다. 선에는 기둥이라는 것이 없다. 선은 사원이 아니다. 만일 이 책을 다시 출판한다면 책의 제목을 바꿔야만 할 것이다. [선의 세 기둥]은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선의 정신에는 걸맞지 않는 제목이다. 그러나 이 책 은 매우 과학적인 방식으로 선을 설명하고 있다. 선을 지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 람이 있다면 이보다 좋은 책이 세상에 없다. 제6권. 이번에 내가 선택한 책은 한 기이한 사람의 책이다. 그는 자신을 그냥 'M' 이라고만 불렀다. 나는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알리려 하 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마헨드라나드이다. 그는 벵갈 지역 출신이며 라마크리슈나의 제자였다. 마헨드라나드는 아주 여러 해 동안 라마크리슈나의 발 아래 앉아 있으면서 스승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서]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무명으로 남길 원했다. 그것이 진정한 제자의 태도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전혀 눈에 띄지 않게 했다. 라마크리슈나가 죽은 날, 믿기지 않겠지만, M 역시 죽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삶 의 목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라마크리슈나가 죽자 그로서는 사 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스승 없는 삶보다 오히려 죽음이 더욱 큰 기 쁨이었을 것이다. 많은 스승들이 존재해 왔지만, 스승에 대해 M처럼 기록한 제자는 한 명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자신은 어디서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야기를 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자신과 라마크리슈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라마크리슈나에 대해서만 전하고 있다. 그 스승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람과 그의 책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자신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 는 그 무한한 노력에 감동한다. M과 같은 제자를 발견하기란 실로 힘든 일이다. 이 점에서 라마크리슈나는 예수보다 운이 좋았다. 나는 그의 진짜 이름을 안다. 나는 벵갈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라마 크리슈나가 지난 세기 말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본명이 마헨드라나드 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제7권...... 금세기 초에 살았던 한 인도 신비가가 있다. 나는 그가 깨달음을 얻 은 자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세 가지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실수들을 제외하면 그가 엮은 책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순수 시집이다. 그러나 그 세 가지 실수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이름은 라마티르타였는데, 이 위대한 사람 조차도 그토록 어리석은 실수들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했는데 대단히 카리스마적인 사람이었으며 많은 숭배 를 받았다. 인도로 귀국했을 때 그는 먼저 베나레스를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베나레 스는 힌두 종교의 아성, 힌두교인들의 에루살렘이며 메카이다. 그는 미국인들이 그 를 그토록 존경했으니 당연히 베나레스의 바라문 승려들도 그를 신처럼 떠받들 것이 라고 확신했다. 베나레스에서 그가 연설을 하는 도중에 한 바라문 승려가 일어나 물었다. "연설을 계속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당신은 산스크리트어를 할 줄 아시오?" 라마티르타는 그때 막 우주의 본질에 대해, 궁극의 실체에 대해 연설을 하고 있었 다. 그러자 이 바라문 승려가 그에게 물은 것이다. "당신은 산스크리트어를 아시오? 산스크리트어를 모른다면 궁극의 실체에 대해 말 할 자격이 없소. 먼저 가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시오." 그 바라문 승려는 잘못되지 않았다. 세상 어디서나 바라문 승려들은 그런 식이다. 내가 놀란 것은 그러자 라마티르타가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 는 충격을 받았다. 라마티르타는 마땅히 그 바라문 승려에게 말했어야 한다. "너의 모든 베다 서와 산스크리트어를 갖고 당장 꺼져라!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진리를 안다. 왜 내가 산스크리트어에 신경써야 한단 말인가?" 라마티르타는 산스크리트어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또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 필요성을 느꼈다. 이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그의 첫번째 실 수이다. 그의 책들은 더없이 시적이며 생명력 넘치고 환희에 차있다. 그러나 그 사 람 자신은 어디선가 과녁에서 빗나가고 있다. 두번째로 그의 아내가 멀리 펀잡 지방에서부터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을 때 그 는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다른 어떤 여성의 방문도 거부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자기의 아내를 물리쳐야 했는가? 그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집착하고 있었다.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아내를 떠났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세번째로 그는 자살로써 생을 마쳤다. 비록 힌두교인들은 그것을 '자살'이라고 부 르지 않고 '갠지스강과 하나가 되다'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자살은 자살이다. 추 한 것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추한 것이 아름다워지진 않는다. 이 세 가지 점을 제외하면 라마티르타의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사실을 잊으면 사람들은 그를 깨달음을 얻은 자로 착각할 것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도를 깨친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도를 깨친 것처럼'일 뿐이 다. 제8권. 무어의 [프란시피아 에티카].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이것은 논리학에 대 한 훌륭한 연습이다. 그는 "선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장장 2백페이지 이상을 소비 한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선이란 결국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다. 정말 대 단하다! 그는 숙제 풀듯이 논리를 전개해 나갈 뿐이지 신비가들이 하듯이 얼른 결론 으로 비약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답게 아주 천천히, 단계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결국 신비가들이 내린 것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선'은 정의내릴 수 없다. '미'도 마찬가지, '신'도 마찬가지다. 사실 가치를 지 닌 모든 것은 정의내리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것을 꼭 메모하라. 만일 어떤 것이 정 의내려질 수 있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임을 뜻한다. 정의내릴 수 없는 것에 도달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 가치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제9권...... 지금까지 [내가 사랑한 책들]의 목록 속에 [라힘의 노래]를 포함시키 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라힘은 회교도였지만 그의 노래들은 힌두어로 쓰여졌다. 그래서 회교도들은 그를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갖지도 않는다. 또 힌두교인들은 그가 회교도였기 때문에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를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라힘의 완전한 이름은 라힘 칸 카나이다. 그의 노래들은 까비르, 미라, 차이타냐 의 노래들과 같은 경지, 같은 깊이를 지녔다. 왜 그는 힌두어로 작품을 썼는가? 회 교도였으니까 우르두어로 쓸 수도 있었으며, 우르두어가 힌두어보다 훨씬 아름다운 언어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힌두어를 택했다. 회교의 독단성에 반기를 든 것이 다. 제10권. 위대한 우르두어 시인 미르자 갈리브가 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우르두어 시인일 뿐 아니라 어쩌면 세상의 어떤 언어권에도 그와 견줄 만한 시인은 없을 것이 다. 그의 시집은 [디반]이라고 불리운다. [디반]은 단순히 시 모음집이란 뜻이다. 그의 시는 읽기 어렵지만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무한한 보상이 뒤따른다. 마치 각각의 싯귀가 책 한 권의 내용을 담고 있 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우르두어의 아름다움이다. 그토록 작은 공간 속에 그토 록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언어를 나는 우르두어말고는 알지 못한다. 책 한권을 담는 데 단 두 줄이면 충분하다. 가히 마술적이다! 미르자 갈리브는 언어의 마술사이다. 제11권이자 마지막 책...... 알란 와츠의 저서 [책]이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그 것을 아껴왔다. 알란 와츠는 한 사람의 붓다가 아니었으나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 었다. 그는 매우 가까이 접근했다. [책]은 더없이 중요한 책이다. 이것은 그의 경전이며, 선사들과 선의 고전들에 대 한 그의 모든 체험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는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술을 즐겼다. 지성과 술의 만남이 이 신선한 [책]을 탄생시켰다. 나는 [책]을 늘 사랑해 왔다. 그리고 마지막을 위해 그것을 남겨두었다. 예수가 한 말, "마지막 줄에 선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이 책은 복받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축복하는 바이며, 나아가 이 [내가 사랑한 책들]시리즈를 알란 와 츠에 대한 기념으로 삼고 싶다. 류시화 시인, 가타 명상센터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