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내 활시위를 떠난 무수한 화살들 이별의 말 4 너희 중 어떤 이는 또 내가 너무 냉담하며 자기만의 고독에 취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희는 말한다. "그는 숲의 나무들과는 속삭여도 인간들과는 말하지 않고..." 이와 같이 모든 신비주의자들은 깊은 잠에 빠진 자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남을 판단하는 데 열심인 자들에게 오해받아 왔다. 신비주의자라면 누구나 군중으로부터 덜 어져 홀로 있는 자, 혼자인 자기 자신에게 취한 자라고 비난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바로 홀 로 있는 것, 그대가 혼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취하는 것이 명상이 뜻하는 바이다. 세상에서 살라,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는 말라. 사람들과 함께 있으라, 그러나 그들이 그대 의 일부가 되게 하지 말라. 수피 신비주의자 주나이드(Junnaid)을 떠나던 날, 그의 가족들은 한편으로는 울면서도, 다 른 한편으로는 자식중의 하나가 진리를 찾으로 간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진리를 찾는 일에 자기 자신의 전생애를 바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므로 당연 히 주나이드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이요, 영광이었다. 그가 숲에 이르렀을 때 스승이 그를 보고 말했다. "군중은 모두 밖에 남기고 들어오너라." 주나이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였기 때문이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시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주나이드는 스승에게 말했다. "저는 혼자 왔습니다. 가족, 친구들과는 먼 고향어귀에서 작별했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뒤돌아보지 마라. 눈을 감고 네 안을 들여다보아라. 군중이 거기에 있다!" 주나이드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가 멀리 떠나온 친구들, 어머니, 아버지, 형제 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자기 안에 있었다. 비록 지금은 기억일 뿐이지만 온 마음이 떠 나온 사람들에 대한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나이드는 눈을 떴다. 그리고 스승에게 용서 를 구했다. 그는 자기는 이 길에 처음 들어선지라 스승이 쓰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옳습니다. 내 머리는 떠나온 사람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러면 문 밖에서 기다려라.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네 마음에서 군중이 사라졌고 느끼는 날, 너는 들어올 수 있다. 명심하라. 너는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것 을..." 주나이드는 거의 1년 동안 문 밖에서 기다렸다. 생각을 없애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다. 군 중을 떠나서 숲으로 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그대 밖에 있는 군중 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는 군중이다. 그들은 그대를 따라 숲까지 오기 때문이다. 그대는 혼 자가 아닐 것이다. 모든 기억들이 그대를 에워쌀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있엇 기억은 실제 상상과 같이 현실로 느껴진다. 주나이드는 정말 끈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스승을 만나러 신을 벗어 놓고 들 어가는 문 밖에 앉아 있었다. 그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벗어 놓은 신발 들을 닦아 주곤 했다. 신발을 닦아 주는 일이 그의 명상이 되었다. 그런데 주나이드가 신발 을 닦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깊이 빠져들게 되자, 그의 마음 안에 있던 군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리고 드디어 주나이드가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축 복의 날이 왔다. 그러나 그가 사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스승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스승은 말했다. "축하한다. 너는 정말 참을성이 많구나. 뿐만 아니라 너만의 명상도 고안 해 냈구나. 방금, 나는 네게서 군중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모든 소음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이제 나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너를 사원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대가 모든 일에 초연해지고, 독존에 취하게 될 때에야 비로서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로 이끄는 위대한 순례가 시작된다. 그리고 너희는 말한다. "그는 숲의 나무들과는 속삭여도 인간들과는 말하지 않고..." 신비가들이 인간보다는 나무나 산과 강, 그리고 동물들을 더 가까이 느낀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 간의 심리상태는 흐릿하며 마음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고 감각들은 둔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주의자는 나무나 동물, 새와 이야기하는 것을 훨씬 쉽게 느낀다. 기독 교가 낳은 최대의 성자 성 프란체스코는 종종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강둑에 서 물고기들을 부르곤 했다. 그는 나무에게 아가가 마치 친구의 손을 잡듯 나무를 안고서,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신비주의자들이 숲의 나무드로가 이야기했다 해도 놀랄 필요는 없다. 신비주의자들은 항 상, 성장하는 것들은 살아있으며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감수성이 있다는 것을 아 록 있었다. 그대가 가까이 가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무는 춤을 출 것이다. 그대가 가까이 가면 나 무는 그대를 위해 향기를 내보낼 것이다. 그대가 나무를 만져 보면 더 이상 예전의 차가운 느낌이 없어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무는 따뜻하게 그대를 반길 것이다. "...언덕 위에 홀로 앉아 우리의 도시를 내려다보기만 할뿐이다." 하기야 내가 산을 오르고 먼 곳을 돌아다녔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그렇게 높이, 그렇게 멀리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너희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멀리 있지 않고서야 진실로 어떻게 가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알무스타파가 말했다. "너희는 나를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꼭대기에 올라 앉아서 언덕과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만약 그대가 도시와 친해지고 싶다면 그대는 도시에 있어야 한다. 그대는 거리들을 거닐어 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 그러나 알무스타파는 "자연의 법칙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대가 높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서는 도시를 볼 수가 없다. 또, 그들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것이 프로이트와 고타마 붓다의 차이점이다. 프로이트는 사람들 속이서 그들과 같이 살 면서 사람들을 이해하려 했고, 고타마 붓다는 산꼭대기에서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와 높이가 필요하다. 더 높이 자만이 낮은 자를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위대한 학자였으나, 자기가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자기 자 신도 똑같이 안고 있었다. 그 역시 남들과 똑같이 경쟁심, 우월감, 이기적 자아를 가지고 있 었다. 그래서 누구든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자기와 비슷한 수준이 되려고 하면 그는 자기 학파에서 쫓아냈다. 처음에는 칼 구스타프 융이 프로이트의 계승자가 되리라고 모두 예상했었다. 그러나 융은 거의 프로이트의 수준에 가까이 다가갔다. 때때로 융은 프로이트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는 프로이트보다 이론에 더 밝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프로이트는 그런 제자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는 융이 자신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융은 젊고 프로이트는 점점 늙어 가는데, 프로이트가 가고 나면 융은 정신분석학 연구 전 체를 프로이트의 방식대로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방향으로 바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살아있는 동안에만 지배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까지도 지 배하기를 원한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융은 자기와 다른, 때로는 더 훌륭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로이트 는 그의 정신분석 연구 모임에서 융을 제외했다. 프로이트의 뒤를 이을 사람이 내쫓긴 것이 다. 그후 융은 분석심리학이라는 다른 학파를 세웠다. 그러자 전혀 다른 방향을 추구하던 새로운 인물인 알프레드 아들러가 프로이트의 뒤를 이 을 만한 후보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아들러 역시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 이 전부라는 프로이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들러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권력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더 높은 권력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성도 희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도 알다시피 그것은 사살이다. 정치가나 성자들은 성을 포기할 수 있고, 재벌들은 너 무 바빠서 성을 즐길 시간이 없다. 성 대신에 아들러는 '권력에의 의지'에 기초한 새로운 심 리학을 내놓았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아들어 역시 자기의 연구 모임에서 쫓아냈다. 이후에 아들러는 새로운 학파를 세웠다. 고타마 붓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낮은 자가 더 높은 자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붓다라는 존재의 높이는 산꼭대기와 같고,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가 멀어 서 어느 누구도 "누가 당신의 뒤를 이을 겁니까?"라고 물어 본 적이 없었다. 고타마 붓다 밑에는 학식이 뛰어난 제자들도 많았고 깨달은 제자들도 몇 명 있었지만 붓 다가 워낙 높이 있는 존재라서 깨달은 제자들조차 그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고타마 붓다의 뒤를 잇지 못했고, 어느 누구도 마하비라의 뒤를 잇지 못했다. 아예 그런 질문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들처럼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 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곳에 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알무스타파의 말이 맞다. 하기야 내가 산을 오르고 먼 곳을 돌아다녔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그렇게 높이, 그렇게 멀리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너희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멀리 있지 않고서야 진실로 어떻게 가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마치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대는 아주 멀리 있을 때에만 가까 이 있을 수 있다. 거리는 자석같이 끌어당기는 힘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잠시 한번 가까워졌다가는 다시 멀어지는 것이다. 보통 그대는 타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을 하거나 우 정을 나누게 되면, 또는 제자의 길을 가다 보면, 어떤 시점에서 그대는 타인에게 매우 가까 이 갈 수 있다. 이는 멀리 갔다가 가까이 오고, 다시 멀리 가는 유동적 현상이다. 어떤 관계를 늘 신선하고 젊게, 새롭게 간직하고 싶다면 유동성의 비밀을 배워야 한다. 남 편과 아내가 몇 년 동안 같이 살게 되면, 같은 얼굴, 같은 지리에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그 대가 너무 바보라서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계속 잊어비린다든가, 그대에게 기억장치가 아예 없다든지 하지 않는 한,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같은 여자, 같은 남자를 탐험할 수 있겠 는가? 그대에게는 아직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 멀리 갈 수 있는 유동적 관계가 계발되지 않았 다. 이것은 인류의 불행 중 하나이다. 나는 고정되거나 죽은 관계가 아닌 유동적 관계라는 개념을 미래의 인류에게 제시하고 싶다. 그대, 멀리 있지 않고서는 진정 가까이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대가 항상 멀리 있다면 사랑 은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항상 가까이 있어도 사랑은 사라질 것이다. 사랑은 djEJs 속박 도, 어떤 구속도 없이 끊임없이 흐르는 관계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너희 중 어떤 이는 나를 소리없이 부른다. "낯선 이여, 낯선 이여,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랑하는 이여, 왜 당신은 독수리들이나 둥지를 트는 산꼭대기에서 사십니까? 당신은 왜 불가능을 추구합니까? 무슨 폭풍을 당신의 그물에 담으로 합니까? 어떤 환상의 새를 하늘에서 잡으려 합니까? 오셔서 저희와 하나가 됩시다. 내려오십시오. 그리고 저희의 빵으로 당신의 굶주림을 달래고, 저희의 포도주로 당신의 갈 증을 푸소서." 알무스타파는 말했다. "너희의 초대는 고맙다. 그러나 나는 그 초대에 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지만 너희 중의 한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추구는 다르고, 나의 도전은 도달하기 어려운 높은 곳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 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 내면에 있는 군중을 다 쓸어 내고 그대를 하나의 독립된 존재, 스 스로의 봉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대는 다른 봉우리들과 이야기하거나 함께 앉아 있을 수 있고 그들과 삶을 나눌 수 있 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독존이 때묻지 않았을 때만 참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 다면 거는 노예나 수레바퀴의 한 톱니밖에 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세상을 상대 로 해서 싸우는 싸움의 주제이다. 모든 종교는 사람들을 가톨릭교도, 기독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이들 모두 군중이다- 로 전락시켰다. 나의 제자들은 군중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스스로의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대에게 어떤 규율이나 이상, 의무를 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대에게 어떻개 깨어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만을 설명해 줄 뿐이다. 그대의 깨어있음 속에서 그대는 그대의 의무를, 그대의 이상을, 그대의 길을, 그대의 목표 를, 그대의 원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독립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영혼의 순 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홀로 날아가는 비행이다. 그것은 집단적 현상이 아니다. 종교는 집 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이 해하기는 힘들다. 고독한 영혼으로 그들은 이런 거슫ㄹ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독이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내 오직 너희의 기쁨과 너희의 고통의 비밀 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음을 알았을 것을.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좀더 깊이 들어갔다면, 그대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단지 나의 삶과 기쁨과 고통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대의 삶과 기쁨과 고통의 원천이라 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에서 모든 강물이 하나가 되듯, 근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이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일은 오랜 세월 동안 거대한 강들이 무수히 바닷속으로 흘러들어갔는 데도 바다의 짠맛을 덜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강물들은 바닷물을 단맛으로 바꾸지 못했 다. 바다는 너무다 크기 때문에 그 무수한 강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도 바다의 짠맛을 조 금도 바꿔 놓지 못했다. 바다는 그대로 남아 있고 모든 강들은 이 하나의 근원 속으로 사라 져 버린다. 우리는 모두 다른 속도로 다른 땅들을 지나가지만, 항상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들이다. 바다에 이르면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될 것이고, 그대와 떨어져 있던 강들이 더 이상 떨어 져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허공을 거니는 너희의 보다 큰 자아를 잡으려 했다는 것을.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너희들은 내게 묻는다. '왜 당신은 높은 꼭대기로 올라가십니까? 거기서 당신이 홀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알무스타파가 말한다. "허공을 거니는 너희의 보다 큰 자아를 잡으려 했다. 왜냐하면 너희 의 광대한 자아는 내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찾으면서 너희를 찾고 있었 다." 하지만 사냥꾼이란 또한 동시에 사냥당하는 자. 이 말은 매우 뜻깊은 말이다. 자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일생 동안 오직 한 가지 말만 되풀 이해 왔다. "관찰자는 관찰되는 것이고 아는 자는 알려진 것이다. 이 둘은 둘이 아니다." 그대가 그것을 둘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대는 어둠과 무지 속에 있는 것이다. 사냥꾼이 곧 사냥당하는 자라이며 사냥꾼과 사냥당하는 자, 아는 자와 알려진자, 관찰자와 관찰되는 자, 나와 그대 사이에는 이원성이 없음을 그대가 알게 되는 순간, 그들 사이의 거리는 환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원에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활시위를 떠난 수많은 화살은 오직 내 가심을 찾기 위한 것.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 과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후에 내가 쏜 화살들이 바로 내 가슴을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집에 오기 위해, 내가 늘 있던 자리로 오기 위해 멀리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대의 추구는 근본적으로 깨어남의 문제이다. 만약 그대가 밤에 잠을 자다가 로마에 있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누가 와서 갑자기 그대를 깨웠다면, 그대는 다음과 같이 말했겠는가? "기다려 줘. 지금 나는 로마에 있으니까 뿌나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라고. 그렇게 대 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로마는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깨어나는 순간, 그대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있으며 로마에는 간 적도 없다는 것 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제 상황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어딘 가에 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대는 단지 그대가 멀리 가 있 다고 꿈구고 있을 뿐이다. 그대가 깨어나는 순간 홀연히 그대는 언제나 여기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늘 여기에 있을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만이 유일한 실존이다. 그 이외에 어떤 다른 실존은 없다. 날아가는 자는 또한 기어가는 자. 왜냐하면 내 날개가 태양 속에 펼쳐질 때 땅에 비친 그 그림자는 거북의 모습이었기 때 문. 매우 아름다운 은유이다. 나의 날개가 하늘 저 멀리 태양 아래에 있을 때 땅 위에 비친 그림자는 단지 거북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나의 그림자였다.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그 그림 자는 나의 것이었다. 문제는 그대가 거북 모습의 그림자를 자기라고 여기고 그대의 실재인 '태양 아래서 나는 자'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대가 자기의 그림자를 그대 자신인 줄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유일 한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이야기 한 가지가 있다. 이른 아침, 여우는 배가 몹시 고파 먹을 것을 찾으러 구멍에서 나 왔다. 해가 떠오르자, 여우는 자신의 긴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여우가 말했다. "세상에! 아 침식사로 코끼리 두무리가 없다면 한 마리라도 먹어야겠구나." 여우는 코끼리를 찾아 보았지만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오가 되어 해가 그의 머 리 위에 떴을 때 여우는 다시 한번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무 그림자도 없었다. 그림자는 단지 여우 발 밑에, 여우보다 훨씬 작은 크기로 드리워져 있었다. 여우가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 배가 고파서 이렇게 작은 짐승이 되었나? 이제는 토끼 한 마 리만 잡아도 충분하겠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무엇과 동일시하고 있는가? 모든 동일시를 던져 버리라. 그리하면 그 순간 그대는 그대의 실재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인 나는 또한 의심하는 자이니... 사람들은 어떤 믿는자, 어떤 이는 의심하는자, 이렇게 둘로 나눈다. 사람들은 그대가 의심 하지 않으면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않지 못한다. 만약 그대가 의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그대가 믿지 않는다면 무엇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믿는 것과 의심하 는 것,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믿는 자들 모두는 의심이 일어나면 믿음으로 억눌러 왔고, 의심하는 자들 모두는 믿음이 일어나면 의심으로 억눌러 왔다. 이 둘은 차이가 없다. 진정한 차이는 그대의 마음이 완전히 침묵하고 비어 있어서 그대 내면의 고요한 속삭임이 들리게 될 때에만 일어난다. 지금 이 순간 그대의 마음은 가득 차 있고 그대의 가슴은 비어 있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은 비어서 통로가 되어야 하고 가슴은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마음은 단지 가 슴의 하인으로 있어야 한다. 그때 마음은 하나의 아름다운 메커니즘이 된다. 그러나 마음이 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매우 추한 상황이다. 때때로 나는 내 상처에 스스로 손가락을 찔어넣어야만 한다. 너희보다 큰 믿음을, 너희보 다 큰 지혜를 얻지 않을까 하고.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너희는 계속 너희의 상처를 숨겨 왔지만 내게는 숨길 수 없다. 너 희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느끼기 위해, 너희가 어떤 종류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지 알기 위해 때때로 나는 내 상처에 스스로 손가락을 찔러 대야만 한다." 그러나 왜 그대에게 꽃이 아니라 상처가 있어야 하는가? 상처는 그대의 운명이 아니다. 봄날에 활짝 꽃피어나는 것이 그대의 운명이다. 그리하여 나의 이 믿음과 지혜로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몸과 함께 갇혀 있는 것이 아니며, 집이나 들이 너희를 가두어 놓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산 위에 살며 바람 따라 헤매는 너희. 나는 산과 숲에 가 보았으므로 말할 수 있다. 그대는 그대 육체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대 의 참된 존재는 광대하다. 그 존재는 그 안에 하늘전체를 담을 수 있다. 따스함을 찾아 햇빛 속을 기어가거나, 안전을 찾아 어둠속에 구멍을 파는 생명이 아닌, 다 만 자유로운 생명, 대지를 감싸고 창공을 흐르는 하나의 영혼. 그대는 오직 자유의 본질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대가 이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거대는 삶 을 낭비한 것이다. 동양에서 궁극적 체험을 가리키는 최상의 단어는 모크샤(mok놈)이다. 모 크샤란 절대적 자유, 모든 구속-몸과 마음 그리고 그대를 가두는 생각, 편견, 지식-으로부터 의 자유를 뜻한다. 오직 순진무구함만이 하늘처럼 광대하다. 왜냐하면 순진무구함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들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말라. 이 말을 기억하라. 신비주의자들은 어쩔 도리 없이 애매모호한 말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 다. 말이란 너무 미약해서 신비주의자들의 광대한 체험을 표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매모호한 말이나 상징, 은유, 시 우화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말들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말라.' 이 세상에는 오 직 한 가지 일, 즉 신비주의자의 말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만드는 작업만 하는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신비를 파괴하고 있다. 말의 애매모호함 속에 신비가 깃들 여 있다. 종잡을 수 없고 흐릿한 것이야말로 만물의 끝이 아니라 시초이니, 너희는 언제까지나 시 초로서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노라. 참된 신비주의자,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내가 마지막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단 지 "나는 시작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마지막까지 가 본 사 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 마지막이란 불가능하다. 오직 성장, 그리 고 또 성장만이 있다. 그대는 늘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지만 결코 마지막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른 아침이 아름다운 것처럼 시작은 아름답다. 그리고 지혜에 관한 한 일몰 은 없다. 너희는 언제까지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노라. 생명, 그리고 또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결정체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는 것. 하지만 누가 알랴, 결정체 또한 사라지는 안개가 아니던가? 그대의 신비를 기억하라. 과학이 저지른 죄과 중의 하나는 바로 다음과 같다. 과학적 지식의 전체 프로그램은 모든 것을 명확히 아는 것, 아주 투명하게 해두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과학은 존재의 탈신 비화이다. 그러나 과학은 존재를 탈신비화함으로써 모든 아름다움과 진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파괴했다. 과학은 객관적 세계에서만 쓸모가 있다. 과학이 아직 그대 안에 영혼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그대를 해부하여 조각조각 자른 다음 그대의 영혼을 손에 잡고 꺼낸 다음에야 영혼을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되서야 그들은 말할 것이다. "맞다, 영혼이 존재한다." 바로 그의 해부가 아름다움을 망가뜨렸다. 바로 그의 해부가 인간의 영혼을 파괴했다. 아 름다운 모든 것,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과학 너무에 있는 것이다.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종교가 시작된다. 알무스타파의 말이 맞다. '너희는 언제까지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노라.' 종교란 그런 것이다. 종교란 항상 시초이다. 종교는 항상 일출이며 거기에 일몰은 없다. 알겠는가? 17. 강물은 바다에 이르다 이별의 말 5 알무스타파는 자기와 함께 12년 동안을 살아 온 이들에게 마지막 말을 한다. 현자의 자비 는 이와 같다. 현자는 비록 사람들에게 무시되고 조롱당하며 때로는 비난받으면서도 자신을 늘 그렇게 취급한 이들에게 여전히 사랑과 자비를 느낀다. 수피 신비주의자인 알 힐라즈 만수르가 광신도들과 교조주의자들에 의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인간이 저렇게 무참하게 죽어 가면서도 -예수도 그 보다는 덜했다- 어쩌면 그토록 초연할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먼저 만수르의 다리와 손을 자르고 그의 눈을 하나씩 빼냈다. 만수르는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동 안에도 미소만 짓고 있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왜 웃는 거요?" 만수르는 대답했다. "너희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희는 깊은 잠에 빠 져 있다. 만약 너희가 깨어있다면 내 웃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웃은 이유는 너희가 죽이 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몸을 파괴할 수 있을지는 몰 라도 나를 파괴할 수는 없다. 너희는 단지 너희 가운데 있었던 미래의 영광과 성장, 실현된 미래의 본보기를 파괴할 뿐이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너희를 깨워 줄 수 있었던 사람을 너희 존재로부터 없애 버렸다는 뜻이다. 너희는 너무 두려워한다. 너희는 잠에서 깨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는 내가 모든 사람을 깨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 문에 나를 죽이려 한다. 너희는 너희의 잠과 꿈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왔다. 그 래서 진리를 알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그들에게 어떤 불만도 없었다. 오직 그들을 향한 깊은 자비심만이 있을 뿐 이었다. 모든 신비주의자들은 이와 같다. 바로 3년 전에 나는 경고했었다. 만약 그대가 인간의 에너지와 성, 인간의 자연스로운 성 장에 대한 낡아빠진 생각들을 바꾸지 않으면 인류의 3분의 2가 에이즈로 죽을 것이라고. 내 가 세계언론회의에서 이같이 말했을 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내 생각이 옳다는 걸 보여줄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아마 몇몇은 에이즈로 죽을지 모르지만 설마 인 류의 3분의 2까지 죽겠는가?" 바로 오늘 나의 주치의 암리토는 내게 보낸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학계에서 최초로 당신의 경고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만도 에이즈로 인한 사망 률이 70퍼센트까지 이른 곳이 여러 곳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예상은 단지 66퍼센트였었다. 그리고 같은 일이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의학 적 조사가 행해진다면 아프리카의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는 전혀 진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진리를 알게 되는 시기가 오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게 된다. 이제 떠날 시간, 알무스타파는 그의 배 갑판 위에 섰다. 이제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거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알무스타파는 그들과 12년을 함께 지냈다. 그동안 아무도 이 낮선 자가 가슴속에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를 오르팰리스 시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 았다. 12년을 그곳에 머물렀지만 알무스타파는 이방인이었다. 미국에서 나의 공동체가 문을 닫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어떤 교도소에 사흘 동안 감금되 었는데, 그곳의 교도관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정부가 꾸민 음모를수행하는 일원 이 아니었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나를 자기들의 음모에 맞추어 다른 교도소에 집어넣었다. 그때 나는 법정에서 말했다. "교도소를 바꾸어 달라. 내가 보석으로 풀려 나오든 못 나오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도소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이 도시에는 두 개의 교도소가 있다고 들었다. 나는 다른 교도소를 택하겠다. 이곳 사람들은 내게 베개도 담요도 주지 않는다. 철제 의자만 주면 서 그 위에 갈 것조차 주지 않는다." 나는 다른 교도소로 옮겨졌다. 그곳의 교도관이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당신에 대한 모든 소송절차에 관해 들어 보았지만 당신을 체포할 이유를 전혀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신은 이곳에선 이방인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죄입니다." 나와 교도관은 점점 친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얼마나 오랫 동안 아메리카에서 살았는가? 3세대? 아니면 4세대인가? 레이건은 얼마나 오랫동안 아메리 카에서 살았는가? 2세대? 아니면 3세대? 왜냐하면 미국의 역사는 3백 연도 채 안 되기 때 문이다.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이다. 아니, 사실상 당신은 당연히 나보다 더 이방인 디ㅏ. 왜냐하면 당신이 이곳에 더 오래 있었으니까. 당신은 백 년동안 이방인이었고 나는 단 지 3년 동안만 이방인이었다. 이것은 간단한 논리이다." 교도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그들은 아메리키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특정한 집단수용소, 감옥 또는 밀림지대로 몰아넣 었다. 그들은 그런 곳들을 보호구역이라고 부른다. 원주민들은 오직 보호구역 내에서만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주민이야말로 진정한 아메리카의 주인이며 그들만이 아메리카인이다. 아메리 카인인 척하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단 한 명도 진짜 아메리카인이 없다. 자칭 아메리카인 들은 모두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스페인에서, 포르투갈에서, 그리고 어떤 이는 영국에서, 이탈리아에서, 독일에서 왔다. 그 사람들 모두 이방인이다. 나는 계속해서 교도관에게 말했다. "당신은 2백 년 동안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 어떤 특 권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신참 이방인이고 당신은 고참 이방인이다. 그런데 무슨 적대 의식이 있을 수있는가? 우리 모두 이방인들이다. 사실상, 당신들은 침략자이자만 우리는 아 니다. 당신들은 강제로 그들의 땅을 건네받았지만 우리는 땅을 구입했다. 우리는 대가를 지 불했다." 교도관이 말했다. "우리도 한 번쯤은 대가를 지불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도 안다. 은 30냥으로 뉴욕 전체를 사들인 것 말인가? 그것을 대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을 합당한 거래라고 할 수 있는가? 당신들은 은 30냥으로 가난한 사 람들을 강제로 땅에서 내쫓았다. 그것은 유다가 예수를 팔아 유태인으로부터 받은 것과 같 은 값이다. 단 한 사람을 위하여 은 30냥을 지불했을 것이다. 그것을 대가라고 부를 수 있는 가?" 교도관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걸 대가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누군가 이방인이라는 것은 죄이다. 만약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한다면, 누구와 친구가 되고 누구와 형제애를 나누구 누구에게 그대의 사랑을 보여 주겠는가? 오르팰리스 사람들은 알무스타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당신은 이방인입니다. 그 러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아요. 우리에게 이야기하려거든 차라리 나무에게 하십시오. 우리와 함께 있으려 하지 말고 산꼭대기로 가십시오. 당신은 이 지방 사람이 아닐뿐더러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대부분의 시간에 침묵하고, 대부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대답한다 해도 모두 우리의 전통이나 관례, 긜고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무스타파는 화내지 않았다. 그내는 어떤 신비주의자도 화나게 할 수 없다. 그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에게 독을 먹이거나 죽인다 해도- 그는 그대에게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뼈대를 곧게 세우고 굳건히 하는 것은 너희의 숨결이 아니던가? 그대는 숨결이 어디서부터 오는지조차 모르지만, 그대의 뼈를 튼튼하게 하고 그대의 피를 순환시키며, 쌓이면 그대를 죽음에 이르게 할 모든 독소와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것이 바 로 숨결이다. 그대에게 산소와 생명을 주는 것도 숨결 아닌가? 그러나 숨결은 이방인다. 고타마 붓다는 마치 숨결처럼, 봄바람처럼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너희의 도시를 세우고 사회를 이루는 것은 일찍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꿈이 아니던가? 한 가지 기억하라. 프로이트가 꿈에 대해서 무엇을 말했든 그것은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 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건축물들, 그 중에서도 타지마할은 분명히 어떤 독창적인 예 술가의 마음에 나타난 꿈이었을 것이다. 황제는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아시아 전역을 뒤져 뛰어난 조각가과 석공을 불러모았다.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데는 거의 30년이 걸렸다. 천 명 의 조각가과 천 명의 석공들이 3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다. 그러나 이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을 때 과연 그들에게 무엇이 돌아왔는가? 아무 그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만든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것이다. 타지마할은 보름달이 떠오를 때 꿈속의 궁전이 된다. 그때 그대가 타지마할을 본다면 꿈인지 현실인지 가능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타지마할을 만들어낸 천 명의 조각가들은 황제에 의해 손을 잘렸다. 왜냐하면 황제는 앞으로 타지마할보다 더 훌륭한 건물, 아니 그와 미슷한 건물이 세 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돌아간 보답이었다. 그대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 -과학적 진보나 기술, 훌륭한 건축물이나 정원도 한때는 꿈 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늘, 그대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다 해도 그내는 두 젊은 친구, 즉 라이트 형제의 꿈 속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를 비난했다. 그들은 경험도 없었고 이제 겨우 갓 스물을 넘은 풋내 기 청년들이었다. 밤에 이 두 형제는 지하실로 숨어들어가 버려진 자전거 부품들로 비행장치를 만들려고 시 도했다. 가족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비웃었지만 라이트 형제는 굽히지 않고 계속 작업을 해나갔다. 첫 번째 비행장치가 완성되던 날, 라이트 형제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가 두려웠 다. 그래서 모두 잠든 밤에 장치를 집 밖으로 끌어내어 해가 뜨기 시작할 때 최초의 시험비 행을 하였다. 비행장치는 그렇게 멀리 날지 못했다. 겨우 60피트 높이로 날았고 단지 1분 동안 상공에 더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했다. 원리가 발견된 것이다. 만약 이 장치가 60피트가지 올라갈 수 있다면 6천 피트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1분 동안 상공에 머물 수 있다면 몇 시간 동안도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기본원리는 발견된 것이다. 라이트 형제는 이 사실을 온 마을에 알렸다. 온 마을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라이트 형제 는 다시 한번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러자 비행장치에 관심있는 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라이트 형제의 집은 거의 메카처럼 되었다. 위대한 과학자들도 라이트 형제에게 존경을 표시하면서 말했다. "우리 또한 이런 것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에 대한 확신 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예외였습니다. 당신들은 자신의 꿈을 믿었고 신뢰했습니다.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은 바로 당신들의 믿음입니다." 알무스타파가 말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단순한 몽상가라고 무시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배가 올 것이라고 말했을 때 너희는 나를 비웃었다. 너희는 나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언제 당신의 배가 오나요? 벌써 1년, 2년, 11년이 지나갔습니다. 언제 당신의 배가 옵니까?" 하지 만 나는 나의 꿈을 믿었다. 내가 언제인지 날짜를 예언해 주지는 못했지만 이제 보라, 배가 왔다. 그리고 꿈이 현실이 된 지금에서야 너희는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 때가 늦었다. 나는 안다. 내가 떠나면 너희가 나를 기억하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다음과 같 이 나를 기억하라. 너희 중 가장 연약하고 흔들리는 것이 가장 강하고 굳세다는 것을. 꿈은 매우 연약하고 개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꿈에 그대의 믿음을 불어넣는 다면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대에게는 꿈을 현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다. 너희 숨결의 흐름만 볼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또한 너희 꿈의 속삭임만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대가 그대의 가슴속에서 날개짓하는 꿈의 속삭임을 듣기 시작하면 다른 어떤 소리도 들 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 소리에 사로잡혀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루기 어려운 어떤 것을 꿈꿀 때에만 인간이다. 개와 고 양이도 꿈을 꾸지만 그들의 꿈이란 한낱 하루살이의 꿈일 뿐이다. 한번은 개와 고양이가 말다툼을 했다. 고양이가 말했다. "지난 밤 나는 수많은 쥐들이 하 늘에서 쏟아지는 꿈을 꾸었어." 개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바보야, 비가 올 대는 언제나 뼈다귀가 떨어지지 쥐가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어. 나도 어젯밤 꿈을 꾸었어.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 나는 이 두 눈 으로 뼈다귀가 온 사방에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대 역시 꿈을 꾼다. 그런데 그대의 꿈은 그대를 그대 너머로 이끄는 꿈인가? 아니면 그 대의 꿈은 단지 돈이나 명예, 혹은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대는 뼈 다귀와 쥐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이루기 어려운 것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꿈이 아침이 되어서도 꿈으로 잊혀지지 않고 그대의 삶, 그대의 추구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 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이는 그대가 이루기 어려운 것을 찾아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그대는 하나의 완전한 존재, 독립적인 개인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명심하라. 이루기 어려운 것을 꼭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도전함으로써 그대 안에서 잠자고 있던 것들이 움직이고 지금까지 전혀 쓰이지 않았 던 것들이 총동원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루기 어려운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대는 전체적 이어야 하고, 열정적이며 민첩하고 강해야 한다. 나는 그대가 거기에 도달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도달하려는 과정에서 그 대는 잠재되어 있는 그대의 모습, 진면목이 된다. 그대의 존재는 활짝 꽃핀다. 하지만 너희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니, 이는 당연한 귀결.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너희는 보지 못한다. 너희는 듣지도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너희가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너희의 두 눈을 가린 베일은 그것을 짰던 손이 벗겨 주리라.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눈이 베일로 가려졌다면 기다리라! 그것을 걷어 줄 손을 발견할 것이다. 나  그렇게 할 수 있었으나 그대가 허락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나를 기억하라. 다른 땅, 저 너무 먼 곳에서 또다시 이방인들이 오면 그때는 그대, 멀리 있지 말라. 그에게 가까이 가라. 그로 하여금 그대를 눈멀게 하는 베일을 걷게 하라. 또한 너희의 두 귀에 가득한 진흙도 처음 반죽해 넣었던 손가락이 파내 주리라. 나를, 항상 그대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라. 비록 그대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 해도... 나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나의 신뢰는 무한하기 때문 이다. 오늘 그대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일 혹은 모레가 되면... 그대에겐 두 눈 이 있으니, 곧 보게 되리라. 그대에겐 두 귀가 있으니 곧 듣게 되리라. 너희는 보게 되리라. 그리고 듣게 되리라. 그럼에도 너희는 눈멀었음을 한탄하지 않고... 이것이 바로 자비이다. 이 '자비'라는 작은 단어 안에는 무한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알 무스타파는 말한다. '그럼에도 너희는 눈멀었음을 한탄하지 않고...' 그대는 결코 한번도 한탄 한 적이 없다. 결코 참회한 적이 없다. ...귀먹었음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아무 그것은 그대 성장의 일부였으리라. 아마 그대에겐 그것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그대의 눈과 귀는 봄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를 비난하지 않는다. 또한 그대가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번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과 긍지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그대가 보게 되고 듣게 될 때, 진리를 찾아 먼 하늘의 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 할 때, 특별한 성장이나 진보도 없었던 지난날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 아마 그때 그대는 준비하는 과정이었고, 힘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대에게는 그런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은, 후회하지 말라는 자비의 말이다. 왜냐하면 그날이 오면 너희 만물에 깃들인 비밀의 목적들을 알게 될 것이므로, 그리하여 빛을 축복하듯 너희 어둠도 축복하게 되리. "그대가 이해하게 되는 바로 그날, 동이 터 오는 그날이 오면, 그대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빛이 필요하듯이 어둠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그대는 빛과 어둠 두 가지 모두를 축복할 수 있으리라. 그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것이니, 어느 하나 없이는 존 재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을 하고 나서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배의 키잡이가 키 옆에 서서 이제 가 득 부푼 돛과 도 먼 곳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알무스타파가 말했다. 끈기있고 또 끈기있도다, 선장이여. 바람이 분다, 이제 돛은 쉬지 못한다. 키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선장은 묵묵히 나의 침묵만을 기다리고 있구나. 그리고 위대한 바다의 합창을 들어 온 나의 선원들, 그들 또한 끈기있게 내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어이상 기다리지 못하리. 나 또한 떠날 준비가 되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렀고, 위대한 어머니는 다시 한번 자기 아들을 품에 안는다. 누구나 올바른 때가 오기 전에는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다. 누구도 운명이 정해 준 것보 다 먼저 이룰 수는 없다. 그런 점을 이해할 때 무한한 인내심이 생긴다. 알무스타파가 선장에게 한 '끈기었고 또 끈기있도다.'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의 존재를 두 고 한 말이다. 몇 생이 지나가도, 그대의 존재는 결코 성급함을 보이지 않는다. 존재는 그대 스스로 이제 여행을 시작해야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대가 어떤 말이드나. 할 말을 다하고, 어떤 일이든 해야 할 일을 다할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하더라도 다 살아 볼 때까지 그대의 존재는 기다린다. 그대가 '이젠 준비가 되었다.'라고 느끼는 순간까지 존재는 무한한 신뢰 속에서 기다린다. 그때가 언제든 상관치 않고 말이다. 그러나 그대가 "나는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는 깨달음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준비되었을 때, 강물은 바다에 이르렀고, 위대한 어머니는 다시 한번 자기 아들을 품에 안는다. 강물은 자기가 왔던 바다로 사라져 버린다. 종교란 그대 본래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을 찾는 것이 아니 라 그대가 떠나온 어떤 것을 다시 찾으러 가는 것이다. 종교란 그대의 내면 깊숙히 들어가 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불꽃이 양분을 얻는 곳은 여전히 같은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대 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 양분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밖에서 찾는 자는 헛수고만 하는 것이다. 밖에서 찾는 데 지치고, 거듭되는 실패에 지친 자만이 눈을 감고 내면을 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대의 온몸으로 뻗어나가는 생명이 시작된 원천을 그대의 내면에서 발견하는 순간, 그대 의 중심을 발견하는 순간, 신성으로 가는 문을 발견하는 순간, 그대는 자기가 대양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거대한 힘으로 '나는 준비되었다.'는 생각이 그대를 사로잡으면 강물은 자신의 원천, 끝없 는 망망한 대양 속으로 뛰어드는 커다란 도약을 할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이 작은 책자는 어떤 종교의 경전보다도 훨씬 고귀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시로서만 읽지 말라. 이 책은 그대를 위해, 특히 이루기 어려운 것을 추구하러 이곳에 온 자 들, 꿈을 가지고 이곳에 온 자들,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우주가 그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진지하 동경과 순수한 열망으로 이곳에 온 자들을 위해 신비의 문을 열어 주는 책으로 느끼며 읽으라. 그대가 그대 내면의 씨앗 속에서 갈망하는 그 무엇, 싹트고 자라 나무가 되고 곷과 향기 로 가득 차기를 원하는 그 무엇이 되는 순간에만 비로소 지복이 있다. 그러기 전에는 그대 는 지복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지복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날 죽었다 해도, 그런 사람은 그 사이를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깨달음의 절정에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그대는 스스로의 가 능성에 등을 돌린 것이다. 그대는 장난감만 가지고 놀다가 진짜 보물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대가 꿈에 도달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대가 그대의 꿈에 한 걸음씩 가까이 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단지 그대가 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본래의 참모습이 될 것이다. 꿈은 하나의 구실일 뿐이다. 알겠는가? 18.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이별의 말 6 잘 있으라. 오르팰리스의 사람들이여. 오늘은 끝났다. 마치 내일을 향해 눈을 감는 수련처럼 오늘은 우리 위로 가 버린다. 여기서 얻은 것을 우리는 간직하리. 만약 그로써 충분치 못하다면, 그때 우리 다시 함께...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절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신비주의자 는 만성 낙천주의자이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그대를 향해 외치고 있을 리 없다. 그대가 그 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 고통과 괴로움, 비난과 십자가가 아닌가? 그럼에도 신비주의자는 희망에 또 희망을 건다. 왜냐하면 그대를 생명의 샘으로 이끌고자 하는 갈망이 너무도 간절 하기 때문이다. 그대 모두가 덤빈다 해도 결코 그 갈망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십자가에 매달고, 독약을 먹이고, 그 들에게 돌을 던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축복의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잘 있으라, 오르팰리스 사람들이여. 오늘은 끝났다. 이번 생애는 끝나 가고 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그대의 무지는 끝이 없고 신비주의자들의 자비와 사랑, 신뢰는 그보다 더 크다. 바로 이것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벽에 대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말한다. 그대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계속 문을 두드린다. 그대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줄 알면서도 왜 그 이방인들은 그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것일까? 어쨋든 저쪽 세계로부터 온 그 이방인들이 그대를 향해 보내는 사랑을 멈추게 하기란 불 가능하다. 그대는 그들의 사랑을 죽일 수 없고 그들의 자비를 십자가에 매달 수도 없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까지도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했다. "걱정하지 말라. 곧 다시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치 십자가형이 하찮은 일인 것처럼. 고타마 붓다가 죽어갈 때 수많은 제자들이 울며 애통해하자 붓다가 말했다. "눈물을 그쳐 라. 언제든 너희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들이 기도하거나 명상할 때 너희 중에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 마하비라도 육체를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에 다섯 명이 함께 모여 명상할 때면, 보이지는 않지만 나의 현존이 또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너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희를 볼 수 있다는 점 이다. 나는 82년 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내가 육체에 거할 때에도 너희는 계속 나를 놓쳤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육체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나의 현존을 더 강하게 느끼 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를 구름처럼 감싸고 너희 가슴을 뒤덮는다. 이처럼 모든 기운이 갑 자기 달라지면 내가 왔음을 알게되리라. 내가 너희 안에 현존하는 순간 너희는 존재하지 않 는다. 나의 현존은 마치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너희의 현존을 몰아낼 것이다." 마하비라는 수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 바고 그 자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배경은 다르지 만 이와 똑같은 이야기들이 계속 되풀이되어 왔다. 인간은 참으로 고집이 센 것 같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은 그보다 더욱 고집이 세다. 그대 가 무슨 일을 해도 그들은 막을 수 없다. 그들은 그대의 의식의 진화를 위하여 계속 작업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대는 전에 해왔던 어리석은 짓들 은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은 사랑과 삶의 단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밖에 줄 것이 없다. 군중과 신비주의자들 사이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왜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독약을 먹였을까? 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았을까? 왜 만수르를 죽여야 했을까? 군중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알아차렸다면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는 잠에 빠진 채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추한 짓을 계속 되풀이 하 고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그대가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초의식으로부터 그대에게 계속 꽃을 뿌려 주고 있다. 잘 있으라, 오르팰리스 사람들이여. 오늘은 끝났다. 나는 간다... 내 배는 준비되었고 나도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나는 그대들 속에서 충분히 머 물렀다. 누구인가 듣지 않을까, 느끼지 않을까, 혹은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그대 가슴 속의 가슴이며 그대의 바깥뿐만 아니라 내면에도 존재하는 자라는 것을 누군가 알게 되지 않을까를 희망하면서. 마치 내일을 향해 눈을 감는 수렴처럼, 오늘은 우리 위로 가 버린다. 알무스타파는 태양과 더불어 꽃피는 수련에 아름답게 비유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수 련은 꽃잎을 열기 시작한다. 해가 중천에 뜨면 수련은 꽃입을 확짝 펼친다. 그러다가 해가 지면 수련은, 알무스타파가 말했듯이 '내일을 향해' 꽃잎을 닫는다. 그러나 해는 내일이면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이 지나간다 해도 잃은 것이 없 다. 그러므로 오늘 그대의 가슴을 열지 못했다고 걱정하지 말라. 내일 해가 떠오를 때 그대의 가슴이 열려 그대는 한 떨기 수련이 될 수 있으니. 여기서 얻은 것을 우리는 간직하게 되리. 만약 그로써 충분치 못하다면 그때 우리 함께 다시 시혜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리라. 주는 자는 하나, 바로 존재이다. 오늘 우리가 이루지 못했다면, 우리는 언젠가 만나리라... 그때 우리 함께 다시 시혜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리라.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모두 나의 말이 아니요, 나의 것이 아니 로다. 나는 단지 지고한 존재로부터 온 메시지를 전하는 사신일 뿐, 그러나 설령 너희가 그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그들이 혹시 후회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알무스타파가 그들에게 준 마지막 축복이었다. 알무스타파는 자기가 떠난 후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생각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우리 어느 날인가 함께 시혜자에게 손을 내밀게 되리라.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다. 날은 오고가지만 우리는 항상 여기 있으리라. 그러므로 가버릴 것은 가게 내버려두라. 내 너희의 가슴에 미지의 것,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한 동경의 씨앗을 뿌렸다면 그것으로 충분 하리라. 어느 날엔가 우리 다시 만나 함께 시혜자의 손을 내밀지니..." 내 너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잊지 말라. "너희들은 매우 잘 잊어버린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나 또한 곧 너희 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런 사람이 정말 있었던가, 혹은 잠시 환 각에 빠졌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여기에 살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 모두 한번쯤 어떤 섬광 을 보지만 그것을 환상이나 백일몽으로 여기고 기억 저편으로 밀어놓는다. 한번도 그 섬광 이 그대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해 저 너머의 존재로부터 온 빛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알무스타파가 옳다. 내 너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잊지 말라. 잠시, 내 갈망이 먼지와 거품을 거두어 다른 몸으로 태어나리라. 잠시, 바람 위로 한순간의 휴식이 오면,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칼릴 지브란은 매우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멀 리 있지는 않다. 아마 한 것음만 더 내딛으면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순 수하고 진실해서, 때로는 그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예수조차도 여자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한 마을의 시장터에서 적은 수의 군 중을 향해 설교하고 있을 때였다. 둘러싼 군중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예수여, 너희 어 머니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자 무슨말이 예수의 입에서 나온 줄 아는가? 누구도 예수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믿 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깎아내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에게 말하라 - 그는 어 머니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 내 아버지는 하늘 저 높은 곳에 계시다고." 예수의 어머니는 이 말에 매우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는 유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지극한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제자나 전도자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가까운 추종자로 의심 받으면 자기도 십자가의 운명을 지게 될 까봐 그곳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 여인들 - 예수가 ' 그 여자' 라고 불렸던 그의 어머니, 모든 유태인의 비난 을 받았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다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않은 것은 물론 예수 가까이에 남아 있다가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지자 그 몸을 돌보고 돌굴에까지 옮겨 놓 았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인들은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여성의 몸에서 나온 자들, 그의 피와 뼈, 골수 등 모든 것을 어머니로부터 받은 자들이 한 결같이 여성을 비난해 왔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고타마 붓다, 그에게서 비난할 점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 한 그의 태도를 생각한다면... 그는 20년 동안 줄곧 어떤 여성도 산야신으로 입문하게끔 허 락하지 않았다. 어느 여성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이상한 종류의 남성우월주의 적 태도이다. 고타마 붓다나 예수, 혹은 마하비라 같은 이들에게서 그런 것을 발견한다는 것 은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여성을 비난하는 이상한 병을 가지 고 있다. 그들이 여성을 비난하는 데는 분명히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대는 무엇인가 두려워할 때만 여성을 비난한다. 아직도 여자가 그대를 사로잡을 수 있고 그대가 여자에게 이끌리기 때문에 여성이 두려운 것이다. 그들은 여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파멸되고 길을 잃게 될 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어쨌든 그들의 사상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 그런 데 기적 같은 일은, 교회나 사원 어느 성전에도 여성 신도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대에게 이르노니, 교회나 사원, 성전이나 모스크에 들어가는 것은 그대의 존엄성에 위배 되는 일이다. 그 종교의 창시자들이 바로 수천 년 동안 여자를 비난해 온 자들이다. 이제야 말로 지구상의 반을 차지한 여성들이 모든 성직자들과 경전들 그리고 사원으로부터 등을 돌 려야 할 때이다. 비난당하는 것은 지금까지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알무스타파는 여성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잠시, 바람 위로 한순간의 휴식이 오면,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안녕, 그대들이여, 또 함께 보낸 청춘이여. 우리가 꿈길에서 만난 것도 다만 어제의 일. 내가 홀로 있을 때 너희는 노래를 불러 주었고, 너희가 갈망하여 나는 하늘에 탑 하나를 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 잠은 사라지고 꿈도 끝났으며, 새벽도 가버렸다. 한낮이 닥쳐와 우리의 희미하던 잠이 깨어 버렸으니, 이제 헤어져야만 하리. 만약 기억의 새벽빛 속에서 우리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우리 다시 함께 이야기를 나 누고, 너희는 더 그윽한 노래를 내게 불러주게 되리라. 알무스타파는 다시 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너희들은 내게 보다 그윽한 노래를 불러주게 될 것을... 그들은 알무스타파에게 어떤 노래도 불러 준 적이 없다. 단지 그를 약간 정신나간 떠돌이 쯤으로 대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리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 해도 알무스타파 같은 이들은 결코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대가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일을 가지고 그대를 칭찬한다. 그렇게 하면 혹시 그대가 그 일을 해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내가 홀로 있을 때 너희는 노래를 불러 주었고, 너희가 갈망하여 나는 하늘에 탑 하나를 세웠다. 이 말은 알무스타파의 자비심과 갈망, 그리고 그대에게 주는 격려일 뿐이다. 만약 기억의 새벽빛 속에서 우리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우리 다시 함께 이야기를 나 누고, 너희는 더 그윽한 노래를 내게 불러주게 되리라. 준비하라... 나를 잊지 말라. 우리 다시 만날 날이 오리니, 그때 그대의 노래는 더 그윽해 질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의 두 손이 또다른 꿈속에서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또 하나의 탑을 세우게 되리라. 그가 뱃사람들에게 신호하자, 그들은 이내 닻을 올리고 항구를 빠져나가 동쪽을 향해 나 아가기 시작했다. 배가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을 기억해 두라. 동양은 수세기 동안 - 아마 영원토록 그럴 것이다. - 신성한 생명의 원천으로 존재해 왔 다. 태양만 동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다. 고타마 붓다고 동쪽에서 떠올랐다. 동양은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을 낳았다. 그에 비하면 서양은 보잘 것 없다. 서양이 위대한 과학자들을 탄생시켰다면 동양은 위대 한 존재의 탐험가들을 탄생시켰다. 가장 타락한 어둠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동양은 구도자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 자신을 알고자 하는 이들 은 갑자기 동양에 매력을 느낀다. 그 매력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서양은 끊임없이 일과 사물을 연구하고 훌륭한 기술을 창조해 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바 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완전히 잊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깊은 슬픔 속에서 눈을 감았다. 왜냐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죄책 감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 장본인이었다. "당신네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이기려면 그들을 쳐부술 수 있는 보다 우수한 에너지 자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원자폭탄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원자폭탄은 전혀 새로운 차원입니다. 기존의 폭탄들을 딱총 정도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사실 단 한 개의 원자폭탄으로 10만 인구의 히로시마가 몇 초 만에 간단히 파괴되었다. 똑같은 일이 나가사키에서도 일어났었다. 루즈벨트는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다. 그리고 곧 아인슈타인을 미국에 초청 했다.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에게 왜 그런 편지를 보냈을까? 아인슈타인의 무의식 속에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유태인이었고 독일은 100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히틀러는 이인슈타인에게 "당신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약속했지 만, 그는 수백 만의 동족들이 가스실의 연기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히틀러라는 인 간이 한 약속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 원 자폭탄이 만들어지면 나 역시 가스실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로 사라질 것이다. 그래, 독일 인들이 원자에너지의 기술을 모두 배우기 전에 이 비밀문서를 가지고 탈출하자. 안그러면 히틀러가 전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아린슈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루즈벨트에게 그런 편지를 쓴 것은 분명 그의 복수였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이 실제 사용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원자폭탄을 만들고, 만약 독일과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그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을 뿐이다. 그 정도의 위협으로 충분했다. 사실 원자폭 탄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독일은 원자폭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데 항복했고, 독일의 그림자였던 일본 역시 길어야 1주일 이내에 독일의 결정을 따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트루먼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원자폭 탄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그것을 사용해보고 픈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트루먼 휘하의 장군들조차 원폭 투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죄없는 사람들인 시민, 어 린이 , 노인들을 죽이는 전혀 쓸데없는 파괴행위 라고 말했다. 그들의 패배가 확실한데 왜 그들을 죽여야 하는가? 그러나 트루먼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까지도 원자폭탄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편지를 트루먼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때는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에 게 첫 번째 편지를 보내자마자 초청받은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권력은 다른 대통령의 손 안에 있다. 아마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휴지통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깊은 슬픔과 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명확하 게 의식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동양인들의 말처럼 내생이 있다면, 나는 다시는 과학자가 되고 싶지 않다. 물리학자가 되느니 차라리 배관공이 되겠다." 과거 동양에는 거의 오늘날의 수준에 이르는 기술들이 개발되어 왔으나 신비주의자들의 의식적 개입으로 중단되었다. 예를 들어, 인쇄기는 3천 년 전에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 고, 화약 역시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노자와 장자 그리고 열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발명품들은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런 종류의 연 구는 중지해야 한다. 그런 연구를 계속하다가는 결국 온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 2천 5백년 전에 이 말을 듣고서 중국인들은 모든 연구를 중단했다. 인도 사람들도 수학의 모든 기초를 발견해 내었지만 갑자기 연구를 중단하였다. 이상한 일이다. 왜 중단했을까? 그들에겐 뛰어난 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양인들이 지금에 와서야 발견한 것들을 이미 그 옛날에 발견하였다. 고대 인도 의학에는 뇌수술까지 포함하 여 온갖 종류의 수술에 대한 매우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런 의학 연구 역시 중단 되었다. 그들은 말한다. "그런 연구는 인간을 더욱더 외부 세계로 이끄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어지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인간이 이 지상에 존재하 는 근본 이유는 원자폭탄이나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것 이다." 배가 동쪽을 향해 움직였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마치 한 사람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듯 사람들로부터 울음소리가 일제히 터져나 왔다. 울음소리는 황혼 사이로 떠올라 마치 거대한 나팔 소리처럼 바다위로 울려퍼졌다. 신비주의자들은 살아있을 때 비난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람들은 그들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만약 어떤 신비주의자가 살아 있을 때 숭배받는다면... 기억하라, 그는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그는 숨은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 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먹고 마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삶은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과 나무들의 노래, 기쁨에 넘쳐서 나오는 새 들의 지저귐, 꽃과 춤, 사랑과 명상... 삶은 거대한 보고이다. 삶은 단지 숨쉬고 먹고 잠자는 것만은 아니다. 만약 살아서 숭배받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라. 그들은 이미 죽은 자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정말 살아있다면 사람들이 숭배할 리가 없다. 사람들은 성자가 죽었을 때만 숭배한다. 죽은 자는 사랑할 수 없고, 춤출 수 없고 노래할 수 없다. 죽 은 자는 삶을 즐길 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른다. 죽은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로지 알미트라만이 말이 없었다. 안개 속으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버린 뒤에도 그녀는 여전헤 홀로 방파제 위에 서 있었다. 가슴속 깊이 그의 말을 새기면서. 알무가타파는 말했었다. '잠시, 바람 위로 한순간의 휴식이 오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 으리라.' 칼릴 지브란은 여성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여성은 모든 것의 어머니이므 로. 여성은 생명의 근원에 남성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가 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민감하고 분별력이 있다면, 여성을 존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신비주의자들은 여성의 자궁으로 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인과 가수, 화가와 과학자 그리고 신비주의자 모두의 어머 니이다. 그런데도 모든 사회에서 여성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무시당해 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것도 여성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말이다. 여성해방운동은 단지 평등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평등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다. 어떤 남성도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어떤 남성이 자기 의 자궁 속에 아이를 배고 긴 밤과 낮의 고통을 지나 극심한 아픔 속에서 아무 불평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성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새로운 탄생 이, 새 생명이, 미지의 손님이 그녀에게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치있는 일이다. 그 모든 고통은 겪을 만한 가치가 있다. 누가 아는가? 그 미지의 손님이 고타마 붓다나 칼릴 지브란, 타고르나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톨스토이가 될는지, 여성 은 생명의 탄생을 위해 묵묵히 고통을 참으며 기다릴 줄 안다. 알미트라는 알무스타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하면서 기쁨에 젖었다. '잠시, 바람 위로 한 순간의 휴식이 오면,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누가 그를 낳든지, 낳는 자는 여성이리라. 그러면서도 알미트라는 이 세상 여성 모두가 자 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그를 낳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그를 낳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성이 다시 한번 신의 사신을 낳으리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