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삶 한가운데서 죽음을 찾으라.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가장 신비로운 것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존재 안에서 가장 허위적인 현상이 다. 모든 삶은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에게 말하노니, 결코 아무도 죽지 않는 다. 죽음은 외부에서 본 현상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죽는 사람은 항상 그대가 아닌 다른 누 구이다. 어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만 죽는 것으로 비칠 뿐이다. 죽는 사람 자신 의 눈으로 보면-만약 그가 깨어있다면-그는 단지 이 삶에서 저 삶으로 옮아가고 있을 뿐이 "다. 그는 존재계 안으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해 고통받아 왔다. 사람들은 공포 때문에 죽음이라는 문제 자체를 회피해 왔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린다. 이들 보통 사람 들만이 그러는 것이 아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인물도 너무나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 지,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죽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무덤을 만든다. 그것은 죽 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장례식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죽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와 삼촌은 내게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 는 사람이다. 왜 그의 장례 행렬을 따라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하느냐?" 나는 말했다. "나는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내가 발견한 이상한 사실은 죽은 사람에 게 작별을 고하는 사람들조차 화장하는 장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 은 불타는 시신을 등지고 서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 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라면 언젠가 내 차례가 오리라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구가 있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묻지 말라. 그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니...." 교회의 종이 울릴 때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묻지 말라. 그 종은 그대를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그대에게 그대 역시 죽으리라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날마다 종말은 더 욱 가까이 온다. 그리고 죽음 너머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그대는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 어날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항상 군중 속에서 살아 왔고 죽음을 그대를 홀로 내 버려둘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 홀로 있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만이 죽음의순간에 깨어있을 수 있다. 그렇 지 않다면 죽음의 충격은 너무 커서 99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될 것이다. 그 러나 무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엄청난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대에게 삶 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나 날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죽음을 마치 그대의 그림자처럼 항상 그대 곁에 있다. 그대는 태어나는 날부터 죽기 시작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그대는 삶에 정신을 빼앗겨 죽음 또한 그대와 더불 어 자라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죽음은 하나의 성장이다. 절정의 순간, 삶과 죽음은 만난 다. 삶과 죽음은 항상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그대의 삶이 최고의 절정에 이를 때는 삶과 죽 음이 '공존'한다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그 둘은 하나이다.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죽음 또한 이해해야 한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결 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라온 환경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사람들은 아이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이고 문을 닫는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의 아이들이 종말, 또는 새로운 시작이 될지 도 모르는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친숙해지도록 놔두라." 한편에서 보면 죽음은 종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 리고 모든 시작은 종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삶만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 준 다. 왜냐하면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심판의 날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삶 이전에 무엇이 존재했는지 알 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삶이 무로부터 나왔다는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삶이라는 여행 은 바뀌어서 계속된다. 삶은 존재의 바다에 도달할 때까지, 우주적인 이해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 거기에 도달할 때 그대는 육체라는 작은 새장 속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때 그대는 하나의 순수의식으로서, 전체의 부분으로서 살 수 있다. 그대는 새를 통해 노래할 것이다. 그대는 꽃 속에서 피어날 것이다. 그대는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다. 그대는 대지와 하늘, 그리 고 별이 될 것이다. 그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한번 그러한 이해가 떠오르면 그대는 수많은 세월 동안 갇혀 잇던 새장으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그대는 날개를 펴고 활짝 열린 하늘로 날아오른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을 때 그대는 전체적으로 살기 시작한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대는 전체적으로 살 수 없다. 그대의 삶은 항상 죽음의 그림자 밑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죽음은 어느 순간에라도 올 수 있으며 그때 그대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은 사전 경고 없이 닥쳐온다. 죽음은 하나의 손님으로 찾아온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손님'이라는 단어 와 어울리는 말은 '아티티(atithi)'이다.그 말은 사전에 날짜를 알리지 않고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을 의미한다. 죽음에 대해 '아티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대는 죽음에 관해 아 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대가 죽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죽음이 일어나고 있을 때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 공포로 인해 무의식적이 된다. 자연에는 하나의 짜 맞춰진 체계가 있다. 거기에 하나의 허용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한 계를 넘어설 때 무의식에 빠질 것이다. 수술이 진행될 때 환자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그 고통은 참기 힘든 것이다. 그래 서 환자를 무의식 족으로 빠뜨리기 위해 마취제가 사용된다. 만약 수술 도중 환자가 제 정 신으로 깨어있다면 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고통으로 인해 죽고 말 것이다. 그 고통은 참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인내의 한계에 달하는 순간 그대를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 는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인도 바라나시의 왕이 수술을 받아야만했다. 위장을 열어 암세포를 제 거해야 했다. 그러나 왕은 의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마취제를 써서 는 안 된다. 나는 깨어있고 싶다." 의사가 말했다. "그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당신이 죽는다면 우리 의사들은 살인죄 누 명을 쓰게 됩니다." 왕이 말했다. "이것은 나의 뜻이며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음을 문서로 남겨주겠 다. 왜냐하면 나는 죽니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왕은 위대한 명상가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명상에 들 것이다. 명상의 순간 나는 내 몸 과 세상에 대하여 모든 것을 잊는다. 나는 순수의식이 된다. 그리고 나는 수술도구가 그 순 수의식을 건드리거나 그것에 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은 명상 속에 빠졌고 두 시간이 지났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왕은 눈을 뜨고 말했다. "죽음조차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영원한 삶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죽음을 막다른 길로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들에게 있어 서 죽은 뒤에 일어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일은 심판뿐이다. 그날이 오면 무덤 속에서 잠 자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깨어 일어날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군중이 심판의 장소에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친구와 가족, 친척, 부인, 남편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 소란의 와중에서 신은 한 사람마다에게 심판을 내려야 한다. 단 하루 만에 그 심판이 가능 하겠는가?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동양의 모든 천재들은 삶과 죽음의 신비를 푸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이 육체 라는 옷을 바꾸어 입는 데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삶을 더욱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더 깨어있어야 하고, 더 명상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죽음이 닥쳐왔을 때 죽음을 통해 더욱 성숙 해져야 한다. 죽음은 매번 그대를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알미트라가 말했다. 이제 저희는 죽음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대답했다. 너희는 죽음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 하지만 너희가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찾지 않는 한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으랴? 죽음은 그대 안에서 자라난다. 그대는 죽음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삶의 중심부로 파고드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대는 죽음을, 삶의 그림자를 발견할 것이 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그림자를 가진 어떤 사람을 잡는다면 그대는 그림자까지도 잡는 것 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직접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죽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그대 안에서 자라난다. 죽음은 그대의 삶과 더 불어 동시에 성장한다. 밤에만 보이는 눈을 가진 올빼미는 낮에는 눈이 멀어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다. 사방에 빛이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올빼미는 눈을 뜰 수 없다. 올빼미는 매우 예민한 눈 을 가지고 있다. 올빼미가 눈을 뜰 수 있는 것은 어둠 속에서뿐이다. 빛은 너무나도 눈부실 것이다. 비록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그대가 눈을 뜨지 않는 한, 빛은 그대에게 도 움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삶으로 충만한 존재이며, 또한 죽음으로 충만한 존재이다. 그러나 내면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 한 그대는 다른 누구인가의 죽음에만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하 지만 어느 누구도 죽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에서 바라본 시각일 뿐이다. 삶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삶의 비밀을 알 때, 그대는 죽음 의 비밀 또한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가지의 다른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가지 비밀의 양면이다. 죽음은 그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 봉사한다. 죽음은 그대가 낡고 쇠약한 육신 을 벗고, 더 젊고 새로운 육신을 입도록 도와준다.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대 는 단지 집을 바꾸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죽음을 통해 더 훌륭한 집으로 들어간다. 삶과 죽 음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강렬하고도 전체적이며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아야 한다. 사실 '삶과 죽음'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삶죽음(lifedeath)'이라고 말하는 것 이 더 나을 것이다. 만약 너희가 진실로 죽음의 영혼을 볼 수 있다면, 생명의 육신을 향해 너희 가슴을 활 짝 열라. 그대가 진실로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생명의 육신을 향해 그대의 가슴을 활짝 열라. 죽음에 대해서는 잊도록 하라.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말 그 차제가 진리를 볼 수 없도 록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육체의 생명에 대하여 자신을 활짝 열면 그만이다. 삶에 대한 이해가 싹틀 때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대는 죽음 또한 이해하게 된다. 강과 바다가 하나인 것처럼, 삶과 죽음은 하나, 너희가 희망과 욕망의 심연에 저 세상 침묵의 지식이 누워있다. 기대와 희망,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대는 투명한 눈을 가질 수 없다. 그대의 눈은 수많은 먼지의 층으로 겹겹이 덮여 있다. 그대의 눈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 이 바로 명상이 하는 일이다. 생각과 희망, 욕망을 떨쳐 버리라. 그때 그대는 투명한 눈을 지니게 된다. 그대의 눈은 완 벽한 거울이 된다. 그때 그대는 저 너머의 비밀을 알게 된다. 마치 눈 밑에서 꿈꾸는 씨앗처럼 너희의 가슴은 봄을 꿈꾼다. 꿈을 믿으라, 그 속에 영원에의 문이 숨겨져 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칼릴 지브란이 말하는 꿈은 프로이트가 여러 책에서 다루고 있는 꿈과 같은 것이 아니다. 꿈에 대해 연구하면서 프로이트가 알게 된 사람은 병든 사람들뿐이 었다. 병든 사람은 병든 꿈만 꾼다. 그들의 꿈은 억압된 욕망일 뿐이다. 그럼 꿈들이 모든 꿈을 대표한다고 생각한 것은 프로이트의 가장 큰 실수였다. 칼릴 지브란이 말하는 꿈은 억압되지 않은 사람들의 꿈이다. 프로이트는 그런 사람을 만 난 적이 없다. 그들이 왜 프로이트에게 가겠는가? 병든 꿈을 가진 사람들만이 프로이트 같 은 정신분석학자에게 갈 것이다. 그러나 칼릴 지브란처럼 아무런 억압도 없는 사람들은 그 렇게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시인은 꿈꾼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병들지 않았으며 정신분석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의 꿈은 씨앗과 같다. 봄이 오면 그 씨앗은 수많은 꽃을 피울 것이다. 그 리고 고타마 붓다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병든 꿈이든 건전한 꿈이든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다. 그들의 잠은 너무나 깊고 고요해서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병든 꿈을 가진 사람들, 건전한 꿈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모든 욕망과 희망을 초월했기 때문에 아무런 꿈도 없는 사람들-이 세 부류의 사람들 모두를 이해한다면 심리학은 완벽한 학문이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너희의 두려움은, 자기에게 영광스럽게 내려진 왕의 손길 앞에서 양치기 가 떠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양치기의 떨림은 왕의 은혜를 입고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가? 그럼에도 그가 떨기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는 가난한 양치기에 지나지 않는다. 왕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그를 떨게 하기에 충분하 다. 그러나 떨림의 밑바닥엔 기쁨이 있다. 왕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얹고 그를 축복했다. 그는 선택받은 자이다. ...양치기의 떨림은 왕의 은혜를 입은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과 떨림의 배후에는 기쁨이 숨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와 같은 것이다. 그대 의 친구와 연인, 아이들, 그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대는 알려 지지 않은 미지의 공간 속으로 홀로 들어간다. 그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기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미지의 세계로 들어 가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며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친구와 연인, 새로운 삶, 이 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이다. 죽음이란 바람 속에서 알몸으로 서서 태양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육체는 대지로 흡수될 것이다. 그대의 몸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오로지 영원 불멸하는 순수의식만이 그대와 함께 남을 것이 다. 그 순수의식이 바로 그대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두려워하 지 말라. 왜냐하면 죽음은 이 삶의 끝이지만 또한 더 나은 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살은 끊 임없이 진화한다. 그리고 진화의 유일한 방식이 바로 죽음이다. 숨이 멈춘다는 것은, 끊임없는 조수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숨쉬는 것... 현대의학은 죽음을 정의할 수 없다. 그들이 아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숨과 심장의 박동, 그리고 맥박이 끊기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하지만 순수의식은 호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심장의 박동과 맥박도 필요치 않다. 현대의학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꿀 날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 다. 미국에는 최소한 열 구의 냉동된 육체가 존재한다. 그들은 엄청난 부자들로, 냉동상태에 서 다시 깨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의료과학이 자기 생명을 다시 되돌려줄 것을 고대하며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냉동상태가 되었다. 나는 그들을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깨어난다 해도 그때에는 크다란 세대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작해야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될 것 이다. 그들은 불필요하게 10년이란 세월을 낭비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 했다면, 현대의학이 치료 방법을 발견했을 때쯤 이미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되어 있을 것이 다. 그들은 더 젊고 훌륭한 육체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가 늙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마치 뱀이 해마다 허물을 벗듯이 그대의 육체가 쓸 모 없어질 때. 의식은 다시 신선해지고 젊어지기 위하여 낡은 육체를 버리고 해로운 육체, 해로운 자궁 안으로 들어간다. 숨이 멈춘다는 것은, 끊임없는 조수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숨쉬는 것이 아닌가? 죽 음은 영혼이 솟아올라 가없는 신을 찾는 것이 아닌가? 호흡은 그대의 육체와 영혼을 잇는 연결고리이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대의 영혼은 부 담스러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신과 우주의 영혼을 찾아간다. 매번의 죽음은 하나의 기회이 다. 그대는 넓게 펴져 나가 우주와 하나가 되거나 또 다른 육체에 들아가거나 둘 중의 하나 이다. 삶은 학교와 같다. 만약 강의가 끝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 나 배움의 과정을 끝마쳤다면 그대는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다. 그대는 육체라는 새장 속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다. 그때 그대는 존재계 전체로 그대의 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사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대 자신을 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계로 확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종교의 중심과제이다. 오로지 너희는 침묵의 강물을 들이켤 때 감동어린 노래를 부르리라. 그대는 침묵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노래는 표면적이며, 불 만스럽고, 무의미하.다. 만약 그대가 침묵의 강물을 마신다면, 나는 그것을 명상이라고 부르겠다. 그때 그대로부터 솟아나는 노래는 그대의 노래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매개일 뿐이다. 그때 노래는 우주 전체 를 담고 있다. 그때 노래는 끝없는 깊이를 가진다. 노래는 그대가 영원히 오를 수 있는 정상 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야 오르기 시작하리니. 사람들은 계곡에 있을 때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등산은 산꼭 대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대가 우주와 하나가 될 때, 그대의 참된 삶이 시작된다. 그 때서야 참된 춤과 노래, 참된 기쁨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대지가 너희늬 손발을 요구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진실한 춤을 추게 되리라. 그대의 육체가 대지로 되돌아갈 때, 그때서야 그대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 진정한 춤을 시작한다. 아름답고 위대한 모든 것은 그대의 내면에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대의 육체 속에 갇혀 있다. 그대는 갇혀 있는 광채이다. 그대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 내면의 광채가 그대가 신이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그대는 잠들어 있는 신이었고, 이제는 깨어있는 신 이다. 유일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생각일 뿐이다. 모든 존재는 신이 될 능 력을 갖고 있다. 세상을 창조한 것이 신의 의지라면 그 이전에는 왜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 단 말인가? 그리고 갑자기 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신은 변덕쟁이 폭 군임에 틀림없다.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는 또한 별 이유 없이 이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다. "신은 죽었으며 인간은 자유이다."라는 프리디리히 니체의 말을 내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신이 살아있다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때 인간은 진 훍으로 만들어진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 단어 '휴먼(human)'은 '후무스(humus)'에 서 유래한다. '후무스'는 진흙을 의미한다. 아랍어의 '아그니(agni)'또한 진흙으로부터 유래했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로 인간은 '마누샤(manushya)'인데 그것은 진흙으 로부터 유래한 말이 아니다. 그 단어는 '의식'에서 유래한다. 결코 의식은 창조될 수도 없으 며 파괴될 수도 없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히브리어가 신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힌두인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신의 언어로, 이슬람교도들은 아랍어라고 생각한다. 유일신, 유일한 언어, 유일한 예언자, 유일한 경전...이 것은 그대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신성하다. 모든 존재는 신성하다. 아무도 그들을 창조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 들을 파괴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여기에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형상은 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깨어있느냐 하는 것 이다. 알겠는가? 13.나는 저 바람과 함께 간다 이별의 말 1 칼릴 지브란은 비유로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유일한 방법이 리라. 비유를 통해서, 우화를 통해서 그대에게 간접적으로 보여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진리 가 무엇인지를 그대에게 직접 전해줄 수는 없다. 그대가 이 말들을 대하는 동안 이 모든 말 들이 하나의 비유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리고 이제 저녁이 되었다... 알무스타파는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것은 그저 창밖이 어두워졌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 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저녁이 깃들인 것이다. 어둠이 그들 위로 내리 덮치기 시작한 것이다. 알무스타파의 현존은 그대에게 있어서 태양과 같다. 그들은 그 빛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 지 그 빛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가장 확실한 것일수록 가장 어려운 것이 된다는 것이 인생 의 여러 비극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가장 유용한 것은 오히려 그대의 두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때는 오로지 떠나는 것만이 그대를 잠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저녁이 되었다. 여자 예언자 알미트라가 말했다. 그녀는 알무스타파를 알아본 첫 번째 사람이다. 또한 그가 12년 전에 오르팰리스 시에 왔 을 때, 그녀는 삶과 사랑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서 중요한 질문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당 연히 그녀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말을 했다. 이 말들은 감사의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당신의 영혼 위에 축복이 내리길. 이 말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축복의 말이다. 축복받은 사람이 언제 어디서 말을 하든지 그 말들은 더 이상 보통 말이 아니다. 그 말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또한 성스럽다. 만약 그대 가 그 말들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대를 먼 별세계나 그대 안에 있는 알지 못했던 곳으로 데려간다. 그것은 그대가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지니고 다닌 말이다. 구르지예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대한 궁전과 많은 보물을 갖고 황제로 태어나지만 그 저 현관에서 살다 갈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현관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절대적 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왕궁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계에게 이렇게 질문하지 않는다. "내 운명이 무엇인가?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 이런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은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우연히 자신에 게 던져진 것들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결코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런 세속적인 삶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도자가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아침에 일어나 밥먹고 직장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잠자는 생활이, 태어나서 무덤에 갈 때가지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 는 삶이 전부란 말인가? 그대는 이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진부한 삶이 그대에게 노래하고 춤추는 마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대가 조금만이라도 지성을 가지 고 있다면 그대는 이런 삶을 거절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삶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식물 의 삶일 뿐이다. 식물이 되지 말라. 삶을 위해 분투하라. 인도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어떤 어머니도 아이가 울지 않으면 젖을 주지 않는다." 아이 는 요구해야 한다. 울지 않으면 배고프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엄마는 젖을 주지 않는다. 존재계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그대는 울며 보채야 한다. 그대가 태어난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대가 삶을 살아 가야 할 타당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요구해야 한다. 금세기 최고의 여류시인으로서 높은 의식에 도달한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은 임 종 직전에 갑자기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해답이 무엇이지?" 모인 사람들이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은 먼저 질문부터 한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답부터 찾은 것이다. 아마 그녀는 질문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녀의 전생 애가 이제 막 끝나려 하고, 그녀는 질문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삶의 저녁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해답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한 친구가 물었다. "스타인, 먼저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잊어버렸습니 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답을 먼저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질문이 뭐죠?"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죽은 것이다. 이 작은 사건은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해답도 모르고, 더욱이 질문도 모른 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또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 자신을 마구 끌고 다닌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상황이다. 거의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다. 알미트라가 '오늘, 여기...축복이 내리길'하고 말했을 때 그녀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항상 권위 있는 질문들을 들어 왔기 때문에 권위있는 해답들을 찾고 있다. 하지만 해답이란 단순 한 말이 아니다. 해답은 살아있어야 하며, 그저 사고작용에서 나온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 것은 알무스타파의 답처럼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오늘 이곳에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당신의 영혼 위에 축복이 내리길... 그리고 알무스타파가 한 말은 너무나 의미심장해서 충분히 기억해 둘 가치가 있다. 그토 록 많은 질문에 대답했지만 그는 인간의 삶 전체를 대신해 줄 말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 은 것처럼 말했다. 말하는 자가 나였던가? 나 또한 듣는 자가 아니었던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고 존재계 그 자체가 말했다. 나 또한 그대들처럼 듣는 자이다. 그러니 나를 말하는 자라고 부르지 말라. 나는 존재계와 그대가 직 접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게끔 제시해 줄 뿐이다. 비록 내 입술이 사용되고 내 손과 눈이 사용되었지만 그것들은 그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나는 존재계 전체에 나 자신을 바쳤을 뿐이다. 나의 노래는 이것이다.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의 손에 완전히 나를 맡겼노라." 이것이 그가 '말하는 자가 나인가? 나 또한 듣는 자가 아니었던가?'라고 말한 이유이다. 고타마 붓다, 노자, 장자, 까비르, 나니크, 알 힐라즈만수르 같은 사람들과 수천 명의 다른 신비주의자들이 알무스타파의 말에 동감할 것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헸든지 그들은 말하는 자가 아닌 단지 한 사람의 듣는 자로서 말했다. 말하는 자가 동시에 듣는 자가 될 때, 우주 적인 영혼은 그를 통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알무스타파는 웅변가가 아니다. 나는 어떤 신학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신학대학 학장이 나를 데리고 캠퍼스를 둘러보며 수업 광경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 게 물었다. "예수가 어느 신학대학을 나왔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그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예수는 어떤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읽고 쓰는 것조차 교육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여기서 졸업한 사람이 수천 명이 넘지만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없 습니다." 내가 말했다. "이곳을 졸업한 선교사는 위선자들임에 틀림없소. 그들 중에는 철학이나 심 리학, 종교학 따위의 대학원 과정에 있거나, 이미 박사학위를 딴 사람도 있소. 그들 모두는 잘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이오. 하지만 울음과 웃음을 훈련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아 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소." 나는 학장에게 물었다. "우리가 참관했던 마지막 수업에서 그 불쌍한 선교사들은, 언제 큰 소리로 외쳐야 하고 언제 속삭여야 하는지, 언제 손짓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말을 할 때는 어떤 몸짓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듣고 있었소. 당신은 배우를 훈련시키고 있소? 당신 은 기독교회를 연극학교로 생각하는 거요?" 그는 말했다. "정말 곤란합니다. 나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의 당황이 그 질문의 대답이오. 당신은 이 신학대학의 학생들이 단순한 꼭두각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은 학생들에게 예수가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고, 몸 짓마저 본뜨라고 가르치고 있소. 물론 말과 동작은 똑같이 흉내낼 수 있겠지요. 아니 그 이 상으로 잘 할 수도 있을 것이오. 왜냐하면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교육받거나 교 양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에게는 진실성이 없소. 연기 연습을 하는 한 거기에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오. 나는 또 하나의 마지막 수업을 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무슨 마지막 수업을 얘기하는 겁니까? 우리는 학교를 전부 둘러보았습니 다." "내가 말하는 마지막 수업이란 당신이 학생들에게 십자가형을 받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말하오. 연습만으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모든 학생이 십자가에 못박 혀 죽어야 한다는 말이오? 그들은 전세계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내가 말했다. "그들이 무슨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이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면 당신은 결코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의 전부이며 본질이오. 사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란 있을 수 없소." 제아무리 예수를 흉내낸다고 해도 예수처럼 될 수는 없다. 예수의 말에는 깊은 진실이 담 겨져 있다. 그는 철학이나 신학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바로 자기 생 명을 쏟아내었다. 그의 말은 교수나 학자들의 죽은 말과는 다르다. 그의 말은 살아 숨쉰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대는 아름다운 말을 배우고 또 그대 자신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말 을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존재계에 그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 계를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존재계가 말하고 싶어하면 말하라. 존재계가 침묵하고 싶어 하면 침묵하라. 그렇게 하면 만사 형통이다. 존재계가 노래하고 싶어하면 그대는 목소리를 빌려 주라. 존재계가 춤을 추고 싶어하면 그대는 몸을 빌려주라. 가슴을. 그대의 전존재를 존재계에 바치라. 오직 그 시간만이 거룩한 시간이며, 그대가 말하고, 앉고, 침묵하고, 춤추 는 바로 그곳이 거룩한 곳이다. 이윽고 그는 사원의 계단을 내려갔고 사름들은 모두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자신의 배 에 이르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자기가 찾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그 어딘가로 떠나는 알무스타파와 같은 사람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를 오해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 다. "그는 괴짜다. 그는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방인이며 꿈속에서 사는 사람 이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 지 않는다. 그는 결코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 때 문에 깊은 슬픔에 빠져 그곳을 떠날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어둠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실패했다. 사람들은 눈을 뜨지 않았고 어둠은 물러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떠나는 마지막 날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신의 예언자이며 메시아라는 것을.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오르팰리스의 사람들이여! 바람이 나로 하여금 너희로부터 떠나게 하는구나. 배는 떠날 준비가 되었고 바람은 바다를 향해서 불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바람만큼 급하지 않건만... 나는 떠나려고 서둘지 않는다. 비록 12년간이나 기다려 왔지만 이제 조금 더 기다릴 것이 다. 아마 누군가 내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구도자가 생긴다면, 그들이 진리를 찾아 방황한다면... 내 마음은 바람만큼 급하지 않건만 이제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도 이곳에 영원히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 난다. 그러므로 이 점을 명심하라. 그대가 나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것을 미루지 말라. 만 약 그대가 나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오늘은 너무 바빠서 내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 일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 방황하는 무리들은 더욱 외로운 길을 찾아서 떠난다. 그리고 하루를 마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다음날을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석양이 지는 곳에서 우리를 놓친 태양은 아침이 되어도 그곳에서 우리를 찾 아내지 못하리라. 대지가 잠든 시간에도 우리는 길을 간다. 그는 영적 방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집이 어딘지 모른다. 그리고 한순간 이라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다. 깊은 잠 속에서도 구도자는 찾고 있다. 그가 깨어난다면 또 다시 모든 방향, 모든 차원을 어떠한 편견도 없이 찾아 헤맨다. 그는 모든 문을 두드리고 있 다. 어떤 문이 옳은 문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명의 바퀴를 멈추지 않는 나무의 씨앗들이니, 무르익고 그득해지면 우리를 바람에 맡겨 바람이 부는 대로 흩어지리라. 그대는 문을 닫고 있으려고만 한다. 안으로 들어오는 어떠한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 서 봄이 그대를 지나가지만 그대가 죽은 채로 있는 것은 그대에게 씨앗이 없기 때문이다. 봄이 씨앗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만약 그대에게 씨앗이 있다면 봄은 엄청난 일을 할 것이 다.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리더라도 그대가 씨앗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대는 황폐한 채 로 남아 있다. 스승과 함께 있는 것은 그대가 씨앗을 심을 수 있도록 단지 그대의 가슴을 허락하는 것이 다. 지금 당장 그대는 씨앗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씨앗은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은 잠재력일 뿐이다. 그것은 열매가 아니다. 언젠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그것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슴을 열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우리는 항상 공포만 갖고 살아 왔다. 거기 에는 신뢰도 없고 사랑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은 굳게 닫혀져 있고 어떤 씨앗도 그 속 에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는 거듭 말했다. "한 농부가 씨앗을 뿌렸을 때 어떤 씨앗은 바위에 떨어져 자라지 못 하고, 어떤 씨앗은 길 위에 떨어져 자라지만 곧 밟혀 죽게 된다. 복받은 자의 씨앗은 돌도 없고 사람들이 지다 다니는 길도 아닌 좋은 밭에 떨어져 봄이 찾아오면 아름다운 식물로 자 라기 시작하고 비가 내리면 기쁨으로 춤춘다. 그 비는 생수와 같아서 더 많은 생명을 얻게 해주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큰 나무가 되어 하늘 높이 꽃들을 피우며 과실을 맺고 자신의 본분을 실현한다." 자신의 본분을 실현하는 사람들은 그 수가 매우 적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 때문에 황폐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면 사실 그들은 잃을 것이 없다. 아무런 꽃도 열매 도 줄기도 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진정으로 자기 것을 가진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속한 것은 그 누 구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대에게 속하지 않은 것만을 빼앗아 갈 수 있다.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그 언제라도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은 잃어버릴 수 있다. 오직 그 대의 것만 그대와 함께 남는다. 그대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대의 것은 그대와 함께 남는다. 그대가 태어날 때 가고 나온 것은 죽음도 빼앗지 못한다. 그대가 외부로부터 어떤 것을 끌어오는 것이 바로 종교가 말하는 행위이다. 행위 없는 종 교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그대를 완전히 발현시키는 것, 그대 속에 있는 잠재 력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출발은 존재계를 신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대는 존재계로부터 탄생했다. 그렇지만 그대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대를 매 순가 호흡시키는 존재계를 그대는 믿지 못 한다. 그대는 존재계를 먹고 마신다. 그런데 그대는 그것을 믿지 못한다. 그대는 누구를 믿 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한번도 보지 못한 신을 믿는다. 하지만 그 신을 본 사람은 아무 도 없다. 나는 그대가 존재계를 신뢰하길 원한다. 나는 그대가 이교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무를 믿고 바다를 믿고 산을 믿고 별들을 믿고 자신을 믿는 이교도 말이다. 사실 거기에는 어떤 믿음도 필요 없다. 그것들은 실재이며 존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겐 실재와 허상을 구별할 수 있는 작은 식별력이 필요하다. 그 리고 실재하는 것을 신뢰하라. 그러면 아무도 그러한 그대의 성장을 방해할 수 없다. 그대가 성장할수록 그대는 더 많은 의식의, 존재의, 신성의 보물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신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자질이 다. 그것은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다. 짧기도 하였어라, 너희아 함께 지낸 나의 날들은. 그리고 너희에게 해준 나의 말들은 더욱 짧았노라. 그대는 시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불행할 때 시간은 매우 천천히 지나간다. 만약 그대가 죽은 사람 곁에 앉아서 밤을 지새운다면 그 밤은 너무나 길게 느껴 질 것이다. 아마 영원히 동이 트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너무 고통스 럽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과 축복받은 사람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그대가 즐거울 때 시간은 빨리 지나 간다. 시계는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똑같이 돌아간다. 하지만 괴로운 사람은 그 바늘이 천천히 돌아간다고 느낄 것이며 즐거운 사람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알무스타파는 이렇게 말한다. 짧기도 하였어라, 너희와 함께 지낸 나의 날들은, 그리고 너희에게 해준 나의 말들은 더욱 짧았노라. 그러나 내 목소리가 너희의 귓전에서 사라지고 내 사랑이 너희의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출 때면 나는 다시 올 것이다. 알무스타파느 이 세상의 모든 신비주의자를 대표한다. 그들은 모두 알무스타파처럼 이야 기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번에 듣지 못하면, 그리고 내가 한 말을 또 잊어버린다면, 내가 한 이야기 를 마치 꿈처럼 생각하여 그것이 희미해져 버린다면 그때 나는 다시 올 것이다." 이 말은 하나의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붓다도 어떤 예수도 다시 올 수 없다. 비록 그들이 다시 오리라고 말했지만, 어떤 크리슈나도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다시 올 수는 없다. 사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이 세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있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가 다시 오겠다고 한 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다시 올 것을 기다리고 있고, 유태인들 역시 마지막 약속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가 자기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예수의 잘못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무식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온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예수가 저지른 죄가 있다면, 그것은 유태인들에게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가 자기라고 말한 죄밖에는 없다. 그는 너무도 순진했었다. 그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부숴 놓는 말이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이 모 든 고난에서 구원해 줄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와서는 말한다. "내가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던 별이다. 나는 너희들을 모든 불행에서 구원하겠다." 예수의 죄는 사람들의 희망을 허물어뜨린 죄이다. 그는 그들의 불행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죽은 지 2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행하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의 희망은 아편처럼 작용한다. 그들은 희망 덕택에 참을 수 있다. 며칠만 더 지나면 메시아가 올 것이 라는 희망 때문에 말이다. 기독교인들도 같은 형편이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곧 다시 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제 누군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유 태인들이 예수에게 했던 똑같은 일을 그에게 행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다. 그가 그들의 희망을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희망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만큼 고통 속에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희망의 부산 물이다. 아무도 그 누구를 불행에서 구원할 수 없다. 단지 그대가 그대의 불행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대를 거기서 직접 끄집어내지는 못한다. 그대 자 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대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 고타마 붓다도 그렇게 말했고 크리슈나도 같은 말을 했다. 그러므로 그 말은 비유로서 이 해해야 한다. 아무도 다시 올 수 없다. 깨달은 사람조차도 다시 올 수 없다. 그 길은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이다. 그대는 다시 젊어질 수 있는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 대가 원할 수는 있지만 그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늙지 않을 것이다. 모둔 사람들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늙었다고 느낀다면 다시 젊은이로 되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대는 항상 앞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대가 한번 깨달음을 얻으면 다시는 태어날 수 없다. 태어나는 것은 낮은 단계이며 그대는 그것을 지나 가 버렸다. 그러면 다시 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신비주의자들의 육체는 다른 것일까? 그러나 그들의 몸 역시 우리와 똑같다. 그래서 크니슈나도 그리스도도 되돌아올 수 없다. 붓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우주의 정신 에게 바쳤다는 의미이다. 정신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같은 육체를 갖고 다시 올 수 없다. 그러나 동일한 우주의 의식은 열려 있 고, 쓸 만한 어떤 몸을 다시 찾을 수는 있다. 이것이 그 말의 정확한 뜻이다. 그대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기다 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다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언어로, 동일한 삶이 우주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 들은 눈이 멀었다. 그들은 그 생김새가 다르고 쓰는 언어가 틀리기 때문에 그를 알아볼 수 없다. 힌두교도들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고 이슬람교도들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며 불교도 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들이 먼저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리고 풍부한 가슴과 입술을 가지고 영혼에 순종하면서 너희에게 말하리라. 그렇다, 다시 찾아오는 조수를 따라 돌아오리라. 이 사람들은 항상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설명한 방식 대로 온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의 영혼이 누구를 통해서 말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내가 모든 종교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선 입견을 갖게 한다. 그 선입견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의 음성을 왜곡해서 듣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자신의 현주소를 알 수 있도록 우주의 영혼 은 다시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말일 수도 있다. 그 몸짓 역시 다를 수 있 다. 하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비록 죽음이 나를 가리고 거대한 침묵이 나를 감싸더라도 나는 너희를 이해시키기 위 해서 다시 오리라. 그리고 나의 열정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진리는 더 분명한 목소리와 너희의 생각에 더 가까운 말로 너희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시간은 변한다. 이제 붓다가 말하던 옛날 방식으로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아무도 예수와 같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구식인 것이다. 우주의 영혼이 말할 때 그것은 항상 신선하 다. 그것은 항상 새롭고 이 순간에 적합한 말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꽃이지만 향기는 동일하다. 꽃을 보지 말라. 향기를 이해하는 데 그대의 초점 을 맟추라. 그는 바람과 함께 간다, 하지만 오르팰리스 사람들이여! 허공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아니다. 오늘 너희의 욕구와 나의 사랑이 충족되지 못했다면, 다음날을 기약하자. 오늘 충분하지 않다면, 그대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올 것을 약속한다. 내 사랑을 그대에게 충분히 줄 수 없었던 것은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한 까닭이다. 인간의 욕망은 변하지만 그의 사랑과 사랑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은 변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내가 거대한 침묵으로부터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라.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약속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대 마음이 계속해 서 겉모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같을 수가 없다. 그대는 본질을 바라보아야 한 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이뤄지지 않은 약속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왔다가는 가고 또다시 온다. 그대를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그들은 지칠 줄 모른다. 그들은 그대를 좀더 밝은 빛 속에서, 좀 더 많은 사랑 속에서 춤출 수 있도록 도 와주려고 쉬지 않고 노력한다. 그것은 그대에게 움직일 수 있는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를 보게 하려고 도와주려는 것은 그대가 장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느낄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은 그대의 가슴속에 심장이 힘차게 고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로 사 랑이 억수같이 쏟아지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알겠는가? 14. 너희 심장의 고동은 내 가슴속에서도 이별의 말 2 알무스타파는 사람들을 떠나기 전에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것은 마치 죽어 가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생애를 담고 있는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의 떠남을 슬픔과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게 만들 수 있는 몇 마디 말을 할 시간은 있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몇 마 디라도 말해야 했다. 그것은 그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그 말들을 경청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오르팰리스의 사람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떠날 때 듣는 말은 듣는 사람의 존재 속에 씨앗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그대 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 속에 새겨진다. 이제 그대는 떠나는 사람의 말을 더 이상 미 룰 수 없기 때문이다. 배는 떠날 준비가 다 되었다. 사람들은 다시는 알무스타파를 볼 수 없 을 것이다. 이 사람은 그들 속에서 12년 동안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를 비웃고 부정했다. 이제 그들은 슬픔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봄 이 그들에게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문을 열지 않았다. 오늘, 봄은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은 갑자기 그것을 깨달았다. 명심하라. 봄은 갑자기 사라 지지 않는다.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간다. 몇 송이의 꽃들이 지고 또 몇 송이가 서서 히 지고 있다. 꽃이 피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꽃이 완전히 사라지고 향기가 가신 후에야 갑자기 봄이 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그것을 깨닫고 그들이 문을 열기 시작할 때 이미 봄은 가고 없다. 한 사람이 죽거나 떠나갈 때, 바람이 그를 실어 수평선 너머로 실어갈 때 그들은 메울 수 없는 틈이 있음을 느낀다. 비록 알무스타파는 가고 없지만 그의 말은 계속해서 그들의 마음 과 귓가에서 울리고 있다. 새벽이 되어 들판에 이슬만 남겨놓고 사라지는 안개는 구름을 따라 올라가 비가 되어 내 린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밤 동안 나뭇잎과 대지 위에 모여 있던 안개는 태양이 떠오르면서 증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날엔가 비구름이 된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에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비가 그대의 모든 가식 위로 내릴 때 그대는 드디어 비와 함께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춤출 것이다. 그때 그것은 어 떤 경전이나 위대한 시구에 묘사되어 있는 것 이상임을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아니 그대 자신이 춤추는 존재계의 일부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안개와 다르지 않다. "비록 지금은 내가 떠나고 있지만 곧 나는 비가 되어 다시 올 것이다." 만약 그대들이 나 를 이번에 놓친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내가 다시 비가 되어 찾아올 때 깨어있으라. 그때 나에게 그대를 숨기지 말고 그저 그대의 가슴을 열기만 하라. 내가 밤의 고요함 속에서 너희의 거리를 지날 때 나의 영혼은 너희의 집을 방문했다. 그 리고 너희 심장의 고동은 내 가슴속에 있었고 너희의 숨결은 내 뺨 위를 감돌았으며 그리하 여 나는 너희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잠들어 있음을 이해하는 자는 깨어있는 자이다. 물론 잠자는 자는 자신이 잠들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깊은 밤에 그대의 거리를 걸어갔고 그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나의 가슴의 고동은 그대의 그것이 되었으며 그대의 숨결은 내 뺨을 스쳤다. 그리고 나는 그대의 전부를 알았다. 이제 나의 가슴의 고동을 그대 가슴의 고동이 되게 하라. 이제 그대의 영혼이 나의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나의 숨결리 그대의 뺨에 머무르게 하라. 내가 그대의 모든 것을 알았듯이 이제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결 합은 완전함에 이르게 된다." 아, 나는 너희의 즐거움과 고통을 알았고, 잠 속에서 너희가 꾸는 꿈은 나의 꿈이 되었다. 내가 그대 속에 남긴 모든 것은 나의 꿈이다. 그대의 무의식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라. 바 로 그때 그대는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산 속에 있는 호수처럼 그대들 속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대의 이기적 자아는 너무나 강해서 결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대가 아 래로 내려다보았다면 그대는 호수면에 비친 그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대는 호수를 내려다보아야 한다. 제발 이기적 자아로 똘똘 뭉쳐서 그대로 굳어 버리지 말 라. 허리를 굽혀서 절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허리를 굽혀 호수를 바라보라는 말이다. 내가 그대를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의 본래 얼굴과 대면하게 해주는 것밖에 없다. 한번 그대 가 본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 속에서 그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의 산정을 비추었고 비탈진 기슭과 너희를 스치는 생각과 욕망의 구름떼까 지도 비추었다. 그리고 나의 침묵 속으로 냇물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밀려왔고, 또 강물처럼 젊은이들 의 야망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마음의 심연에까지 다다랐을 때에도 냇물과 강물은 노래를 그치지 않 았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대의 냇물은 나에게 도달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대는 변화되지 않 은 채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 냇물에는 거리에서 뛰노는 그대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고, 강물처럼 그대들 젊은이들의 야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내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나는 그대들 아이들이 웃는 웃음소리를, 순수함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대들의 젊은이들이 가진 꽃들 역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은 일방 통행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그 대 역시, 내가 그대 속에서 노래하도록, 춤추도록, 그대의 존재가 되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웃음소리보다 더 달콤한 것이, 야망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 나를 찾아왔다. 비록 그대가 잠들어 있지만 그대의 현존은 어떤 웃음소리보다, 어떤 야망보다 더 달콤하 고 위대한 것이다. 그대가 잠들어 있고 또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것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나는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대에게 더욱 연민을 느끼고 그 대가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왕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거지처럼 살고 있기 때 문이다. 제발 나의 거울 속에 그대 자신을 비춰 보라. 그대는 그대의 왕궁을, 신의 나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너희 속에 있는 무한함이었다. 드넓고 광활한 그분의 품속에서 너희란 단지 세포이며 힘줄. 그분의 노래 속에서 너희의 노래는 다만 소리 없는 고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광활한 그분은 바로 우주의 영혼이며 다른 말로는 신이다. 광대한 우주의 영혼 속 에서는 그대와 남이 서로 다르지 않다. 그대는 전체의 일부이며, 그대가 분리되었다고 느끼 는 것은 그대의 잠 때문이다. 그대가 깨어나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혁명이 일어난다. 그대는 나무 속에 있고 나무는 그 대 속에 있다. 그대는 바다 속에 있고 바다는 그대 속에 있다. 그대는 구름 속에 있고 구름 은 그대 속에 있다. 이것은 존재계의 유기적인 결합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려는 모든 신비주의에서 가장 위대 한 절정의 순간이다. 그대가 알든 모르든 그것은 실재이다. 그대가 그것을 창조할 필요도,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단지 그대는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한 사람이 고타마 붓다에게 왔다. 그는 장님이지만 철학자이며 논리가였다. 모든 마을 사 람들이 그에게 빛이 어떤 것임을 확신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의 논리는 매우 예리했다. 그는 말했다. "만약 내 앞에 빛을 갖고 온다면 나는 그것을 만질 수도 있고 북처럼 칠 수도 있다. 나는 빛의 소리를 듣고 싶고 혹은 그것이 내가 먹을 만한 것인지 맛도 보고 싶다. 아니면 적어도 냄새라도 맡고 싶다." 물론 아무도 빛을 만지거나 듣거나 맛보거나 냄새맡을 수 없다. 빛은 오로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장님 논리가는 웃으면서 말하곤 했다. "빛에 대한 내 생각이 내가 장님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당신들도 모두 장님이다. 그 빛은 당신들의 상상일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당황했다. 빛은 어디에나 있는데 빛을 증명하라니... 그 장님은 사람들의 증 명을 모두 꺽어 버렸다. 사실 빛은 눈이 아니고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의존재가 아 니고는 신에 대한 증명이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신의 존재를 논리로써 증명하려는 사람은 그 마을 사람들처럼 어리석다. 빛을 눈으로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처럼 신은 논리 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눈이지 논쟁이 아니다. 붓다가 그 마을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 장님을 데리고 왔다. "우리는 빛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가장 현명한 사람인 당신은 이 사람에게 빛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붓다는 그 앞에서 빛을 증명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붓다는 말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을 잘못 데리고 왔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라 의사이다. 빛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빛을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고쳐주어야 한다." 6개월이 지난 후 그 장님은 눈을 고쳤고 사방으로 다니며 꽃과 나무를 보며 아름다운 색깔들을 즐겼다. 무신론자들은 논쟁에 관한 한 항상 이겼다. 어떤 유신론자들도 무신론자들의 질문에 대답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은 궁극적인 빛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눈이 다. 그대가 신을 알든 모르든 거기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바로 거기에 머물려고 한다. 그들은 신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 은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빛이 있다고 믿는 장님들이다. 그 믿음은 그들의 눈을 치료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신념체계에 반대한다. 그 신념체계들은 모두 중 독성이 강하고 파괴적인 것들이다. 결코 신을 믿지 말라. 그것은 신을 발견하는 데 있어 커다란 장애물이다. 신을 볼 수 있는 눈과 기쁨으로 춤출 수 있는 각성을 찾으라. 그 각성 속에서 존재계가 지성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의미이다. 존재계는 바보가 아니다. 존재계는 지성이 없는 기계가 아니다. 존재계는 의식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산들조차 자신들의 의식을 갖고 있고 나무 역시 의식을 갖고 있다. 의식의 존재 형태가 다를 뿐이다. 그대가 한번 그대의 의식을 인식한다면 천천히 그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의식의 바다 에 대해서 감각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춤추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종교도 그대를 그토록 기쁘게 하지는 못했다. 그대는 종교를 믿어 왔지만 전혀 종교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이다. 그 광활하신 분 속에서 너희도 광활하고, 그분을 보듯 내 너희를 보았고, 또 사랑했다. 지브란은 '광활하신 분'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신'이란 수세기 동안 사람들을 이용하고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온 성직자들에 의해 잘못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활하신 분'이란 말이 신과 다름없이 존재계의 무 한함을 표현해 주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그 광활하신 분 속에서 너희들도 광활하고...'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항상 열등감으로 시달 릴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조차도, 그대가 말하는 소위 강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열등감 을 감추기에 바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낀 사람이었다. 그의 키는 160센티미터도 채 못 되었다. 그의 경호원들은 모두 그보다 키가 컸고, 그들을 보면서 그는 열등감을 느꼈다. 어느 날 그는 벽에 걸린 그림이 비뚤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그 런데 손이 닿지 않았다. 그의 경호원이 말했다. "각하. 기다려 주십시오. 고생하실 필요 없습 니다. 제가 각하보다 더 높으니 제가 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뭐가 더 높다고? 말을 바꿔. 너는 단지 키가 큰 것이지 높은 것이 아니야." 그는 높다는 말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심리학자들은 권력에 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권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 에게도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히틀러가 죽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불태웠다. 히틀러는 적의 손에 시체가 남 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주검을 아무도 해부할 수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열등감으로 뭉친 몸이었다.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다. 그는 어떤 사람도 지배하거나 죽이거나 노예로 삼을 필요가 없다. 그는 열등감뿐만 아니라 우월감도 없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만족한다. 그는 더 이상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할 필요도 없다. 삶은 다 채롭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대는 완전히 만족해야 한다. 삶은 그대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계는 결코 필요없는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광활한 우주 속에 사랑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이 있겠는가? 한번 그대가 그대의 광활함을 인식한다면, 그때 사랑은 아무리 먼 곳에라도 닿을 수 있다. 사랑에는 거리가 없다. 천문학자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가장 멀리 떨어진 별에까지도 그대의 사랑은 닿을 수 있다. 과학에는 한계가 있지만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전체와 하나가 됨을 느낄 때 그대의 사랑은 전체로 퍼진다. 더 이상 꽃과 가시를 구별하지 않게 된다. 그런 무한 한 사랑을 가진 이를 우리는 '깨달은 사람'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어떤 환상, 어떤 기대감이 그 사랑을 보다 높이 날아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전체에 대한 사랑의 비상은 궁극적인 비상이다. 과학자들은 빛이 가장 빠르다고 말한다. 그것은 1초에 86마일을 달리며 그 속도는 궁극적인 속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사랑의 여행에서 한 별로부터 다른 별에 이르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내가 사랑의 눈으로 그대를 바라볼 때, 사랑이 그대에게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 각하는가? 빛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물질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하지만 사랑은 물질 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다. 한 별에서 다른 별로 옮기더라도 시간은 지나가지 않는다. 사 실 그대가 전체성을 인식하는 순간 갑자기 그대의 사랑은 존재계 전체에 퍼진다. 그것은 여 행이 아니다.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사랑과 그 속도를 이해하지 못한 다.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파묻힌 떡갈나무와도 같이 드높고 광활한 그분은 바로 너희 속에 있 다. 그분의 힘이 너희를 대지에 묶고, 그분의 향기가 너희를 허공에 오르게 한다. 그리하여 그 분의 영원 속에서 너희는 불멸하리라. 그대가 오랜 세월 동안 수천 번씩 태어나면서 열망해 온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불 멸이다. 존재계는 그대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존재계 자체가 불멸이기 때문이 다. 혼자 분리되어 남아 있을 때 그대는 죽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과 하나가 될 때 그대 역시 불멸이 된다. 너희는 들었으리라. 너희는 마치 쇠사슬의 고리 중 가장 약한 고리처럼 약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반쯤만 옳을 뿐, 너희는 그 쇠사슬 중에서 가장 강한 고리만큼 강하기도 한 것이다. 그대는 골짜기이며 동시에 봉우리이다. 그대는 캄캄한 밤이며 밝은 대낮이다. 그대의 이중 성이 적대관계가 아닌 깊은 우정으로, 서로 도와주는 관계로 만날 때 그것들은 그대 속에서 기쁘게 춤을 춘다. 그대의 가장 약한 부분은 가장 강한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그대는 둘 다이다. 그리고 그것 은 좋다. 왜냐하면 약한 부분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 따로 있고 가장 강한 부분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둘 다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겨워질 것이다. 그대는 모든 가능성을 다 갖추 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무지개의 모든 색깔들이 하나를 이 루듯 약함은 더 이상 약함이 아니고 강함도 더 이상 강함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로 녹아 들었다. 가장 사소한 행위로 너희를 재려는 것은 덧없는 거품으로 대양의 힘을 재려는 것과 같다. 너희들의 실패로 너희를 심판하려는 것은 계절이 바뀐다고 해서 계절을 책망하는 것과 같 다. 겉모습은 쉽게 부서지고 잘 변한다. 겉모습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이 순간이 지나 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바다를 거품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멀리서 해변가를 바라보면 높은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딪혀 파도가 마치 왕관을 쓴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흰 눈 덮인 산봉우리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그것은 단지 물거품에 지나지 않 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순간적인 현상이다. 왔다가는 가고, 갔다가는 다시 올 것이 다. 인간의 육체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산야신 중에 최고의 모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예쁜 아가씨였다. 나는 그녀 에게 가얀(Gayan)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가얀은 노래를 뜻한다. 얼마 전에 그녀는 자기 사 진을 내게 보내 왔다. 그녀는 한창 모델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명상을 함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녀 내면의 침묵이 그녀의 얼굴을 통해서 발산되었기 때문이 다.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한 왕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옛날에 한 왕이 자신의 다이아몬 드 반지 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말을 새겨 달라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신하들은 며칠 밤을 고민했지만 이 세상에서 어떤 말이 가장 지혜로운 말인지를 알 수는 없었다. 의 논 끝에 그들은 산 속에 사는 한 신비가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그는 아주 작은 종이에 한 문장을 써 주면서 말했다. "그것을 접어서 반지 속에 넣으시오. 만일 호기심에 그것을 펼 쳐보면 그 말은 사라질 것이오." 그들은 그 작은 쪽지를 반지알 밑에 끼워 넣어 왕에게 바치면서 신비가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겼다. 왕은 매우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보름이 지났을 때 이웃 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다. 왕은 전투에서 패배해 혼자 산 속으로 말을 타고 도망쳐 버렸다. 뒤에서는 적들이 쫓아오고 앞에서는 길이 차츰 사라지더니 절벽 이 나타났다. 왕은 실로 급박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갑자기 반지 생각이 났다. 그는 얼른 반지를 열어 쪽지에 써 있는 말을 읽어보았다. 쪽지에는 매우 간단한 문장이 씌어 있었다. "이번에도 지나갈 것이다." 커다란 고요가 그를 내리덮쳤다. 그는 혼자 말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는 거기서 기다렸다. 적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다른 길로 지나가 버렸다. 그는 다 시 돌아와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았다. 그가 입성하는 날 성 안에 는 축제가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고 그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자존심에 들 떴다. 그때 갑자기 반지에 적힌 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의 마음은 숙연해졌고 겸손을 되찾았다. 가얀은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꽃이 피고 나면 지듯 그녀의 아름다움도 결국 지나갈 것이다. 아름다움 역시 겉모습이고 추함도 일시적인 것이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대의 모든 행위 역시 하나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다는 광대하다.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판단한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죄인과 성자... 하지만 삶을 이해 하는 자는 살인자나 성자나 모두 존재계의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깨달은 사람 은 높고 살인자는 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을 이해하는 자는 판단하지 않는자. 그는 그대가 성자이건 죄인이건 가리지 않고 사랑 한다.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라. 전체성을 갖고 온몸으로 부딪 치라. 존재계가 무엇을 원하든지 그것을 허용하라. 때때로 봄은 일찍 오기도 하고 늦게 오기도 한다. 때때로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홍수가 나 기도 하고 전혀 내리지 않아서 가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판단하지 말라. 그것들은 스스로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존재계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계는 필요하기 때문 에 하는 것이다. 한 가지만 기억하라. 존재계는 그대보다 현명하다. 그것은 모든 지성의 집 합이다. 한 사람의 지성이 존재계 전체의 지성보다 결코 뛰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 너희는 대양과도 같다. 비록 좌초된 큰 배가 모래톱에서 조수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너희는 조수를 재촉할 수 없다.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대양이다. 그러나 그대는 조수를 재촉할 수 없다. 그들은 존재계의 지성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 모여진 존재계의 지성을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너희는 또한 계절과도 같다. 비록 너희가 한겨울에 봄을 부정하더라도 봄은 너희 속에 누 워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화를 내지 않는다. 겨울은 봄을 알고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의 겨울은 그대의 봄을 부정한다. 그들은 결코 함께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밤은 그대의 낮과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대에게 속해 있다. 한겨울에도 봄은 그대 속에 잠들어 있다. 나른함 속에서 깨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 고 그대의 부정에 미소짓는다. 그대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화내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로 하여금 "그는 우리를 칭찬했네. 그는 우리 속에서 선 만을 보았네." 하는 말을 서로 주고받게 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나는 너희가 스스로 깨닫고 있는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니. 그런데 말의 지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말없는 지식의 그림자일까? 칼린 지브란은 말한다. "그대 또한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을 알고 있다. 단지 분명하게 느 끼지 못할 뿐이다." 고타마 붓다도 이미 그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대가 그것을 표현할 적 절한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의 침묵하는 가슴은 이미 이해할 것이다. "그가 한 말은 이전에 내가 들었던 것이며, 나는 그 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물론 명확하지 않고 강하지 않아서,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어렴풋하다. 만약 그대가 침묵 속에 있다면 그대는 모든 예언자들이, 모든 스승들이 하는 말을 금방 이해하게 될 것 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과 현존을 통해서 그들은 침묵 속으로 그대를 이끌고 있다. 너희의 생각들과 말들은 우리의 과거를 지켜주는 추억의 파도이다. 우리는 물론 대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태고의 낮과, 혼돈으로 어지럽던 대지의 밤이 거기 에 기록되어 있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내가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 하 지만 그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는 그대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고 그대가 도달할 것에 대해서 꿈꾸었다. 하지만 그대는 일상의 사소 한 일에 매달려 존재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영어에서 죄를 뜻하는 단어인 '신(sin)'을 매우 좋아한다. 기독교인들은 그 단어를 잘 못 사용했다. 그 단어 본래의 의미는 '망각'이다. 죄인(sinner)은 자신의 진실을 잊어버린 사 람이다. 그를 저주하거나 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그는 개선할 수 없는 인간 으로서 지옥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실 성직자들은 매우 교활하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말을 무서운 단어로 바꿔 버렸다. 망각은 인간의 본성이다. 죄인과 깨달은 자의 차이가 있다면 깨달은 자는 기억을 해냈다 는 것이고, 죄인은 아직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타마 붓다는 항상 삼마사 티(sammasati)를 말했다. 그 말은 '올바른 기억'이란 뜻을 갖고 있다. 성자와 죄인의 차이는 크지 않다. 종이 한 장 차이다. 성자는 기억하고 있고 죄인은 곧 기 억할 것이다. 그에게는 기억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죄인을 비난하는 성자는 결코 성자가 아니라고. 죄인을 존경하는 성자만이 진짜 성자이다. 그는 이 렇게 말할 것이다. "나와 죄인과는 차이가 없다. 나에게 일어난 각성이 곧 그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오늘 내가 성자라면 그는 내일 성자가 될 것이다." 죄인을 저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역시 천부당만부당하다. 모든 판단은 추한 것이고 정죄 역시 추하다. 하지만 그대의 경건은 온통 저주와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모든 추한 것들을 내던져 버리라. 좀더 인간적으로 되어 좀더 자비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라. 그대가 그런 분위기를 만든다면 아마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이것 이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작업이다. 나는 그대를 어떤 사상이나 십계명 같은 것으로 변화 시키거나 새롭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 - 이런 일은 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일이다. 나는 성직자가 아니다. 나는 단지 그대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기억해 냈고 그대 역시 기억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때 나도 자신을 잊고 있었으며, 어 느 날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망각도 알고 각성도 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망각만 안다. 좀더 이완되고 좀더 고요해지면 작은 각성이, 작은 의식이 생길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죄인은 사라지고 성자가 탄생한다. 망각이 그대의 죄악이면 각성은 그대의 덕이다. 기억하라. 그리고 꽃피우라. 알겠는가? 15. 목마른 샘이 나를 마시리니 이별의 말 3 칼릴 지브란은 지금 심오한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말들을 단지 읽어 내려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그것을 마시어 그대의 피, 그대의 뼈와 골수가 되게 하지 않는 한 그대는 그것의 전체적 의미와 아름다움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 첫머리에 나오는 말은 가장 중요한 말이며, 이런 말은 그 어디에서도 찾기가 쉽지않다. 현명한 자들은 너희에게 지혜를 주려고 오지만 나는 너희에게서 지혜를 뺏으려고 왔다. 보통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자신들에게 스승의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하고 또 생 각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스승은 그대가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 을 없애 버리는 사람일 뿐이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빌려온 지식일 뿐이다. 그것은 지혜처 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조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진정한 스승이나 현자는 그대 속에 있는 모든 가짜들을 없애 버린다. 그대의 지혜도 가짜 이며, 그대의 지식도 가짜이다. 그대는 삶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공허하고 진부한 것들뿐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부 모나 선생, 성직자들을 통해서 그대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들을 귀중한 보물인 양 간직하고 있다. 사실 그것들은 그대가 자유 속에서 존재의 열린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막는 짐들이다. 스승은 그대 속에 있는 모든 가짜들을 제거해 버린다. 그대 속에 가짜가 아닌 것이 무엇 인가? 그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성격들은 이 사회가 만들어 준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순수 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단지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욕망만을 갖고 나왔다. 그 래서 이 사회는 모든 종류의 지식으로 그대의 마음을 채워 주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명 심해야 할 것이 있다. 지식은 그대 속에서 자랄 수 있으며 그것이 자라서 그대를 중독시키 고 그대를 죽이기까지 한다. 한번 살펴보라.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그대 속에서 자라지 않는가? 그리하여 그것 이 그대를 마음대로 부리지 않는가? 그것이 외부의 조건에서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그대 존 재로부터, 그대 삶의 샘물로부터 솟아난 것인지를 스스로 살펴보라. 그대는 자신의 존재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자는 그대의 모든 지 혜를 없애 버린다. 그리고 그대가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가 되게 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저 궁금해하기만 하는 어린아이로 말이다. 거기서부터 그대의 진정한 여행이 시작될 수 있다. 위대한 신비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보리달마(Bodhidharma)가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거 의 1,400년 전에 그는 중국에 갔다. 거기서 그는 중국의 황제인 무제의 초대를 받았다. 무제 는 거의 국경선까지 그를 마중나갔다. 당시 그의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그는 보리달마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 때문에 결국 보리달마는 무제의 나 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의 질문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오늘날 소위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일 그런 질문 을 하고,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 질문에 꾸준히 대답해 주고 있다. 무제는 이렇 게 물었다. "나는 부처님을 위해서 수천 개의 절을 지었고, 그리고 수천 명의 학자들에게 불 경을 번역하게 했소, 나는 많은 승원을 열고 중국 전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도록 했소. 여기에 대해서 나는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겠소?" 보리달마는 무제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무제가 놀라서 물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오?" 보리달마가 말했다. "당신이 행한 일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에 이미 당신 의 보상이 들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엄한 절을 세 우고 아름다운 불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당신의 보상이 아니라면, 그리고 당신께서 다른 보 상을 원한다면 당신은 사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당 신의 행동 자체가 이미 보상이나 벌이 됩니다. 나는 당신이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데 문을 여는 역할을 한 것을 잘 알지만, 당신은 내세에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보상으로 극 락에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존재계와 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사업가 가 아닙니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초청했습니다." 무제가 말했다. "나는 많은 승려들을 초청했고 그들은 모두들 나의 공덕이 너무 커서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소." 보리달마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밖에 머무르겠습 니다.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 상이나 벌이 된다는 것을 당신이 이해하는 날 나는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며 당신은 내게 올 수 있습니다." 그후 보리달마는 국경 밖에서 9년을 머물렀다. 그는 매우 기이한 사람이었지만 사실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진실하며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제는 그날 밤 한잠도 이룰 수 없었다. 동이 터 오자 그는 보리달마를 다시 찾아와서 말 했다. "나를 용서하시오. 대사께서는 내게 충격을 주었고 나는 그것이 필요했소. 나는 환상 속에서 살았고 대사는 내 환상을 깨트려 주었소. 이제 나는 배울 준비가 되어 있소." 보리달마가 말했다.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배운 것을 잊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 다. 당신이 나와 관계 맺기를 원한다면 잊어버릴 준비를 하시오.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그대의 모든 성직자들과 선생들은 그대에게 계속 말하고 있다. 배움을 통해 지혜가 생긴다고 말이다. 그러나 보리달마나 소크라테스, 붓 다 같은 사람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칼릴 지브란의 말에 동의할 것이 다. 참된 스승의 역할은 그대가 새롭게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 록 돕는 것이다. 9년 후 보리달마가 인도로 돌아왔을 때 수천 명의 사람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중국 에서 네 명의 제자를 뽑아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 네 명 중 한 사람이 중국에서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었다. 그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수천 명의 제자들이 거기 앉아 있었 다. 그 네 사람이야말로 모두가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보리달마는 첫 번째 제자에게 물었 다. "지혜의 본질을 말해 보아라." 그가 대답했다. "지혜의 본질은 극락정토가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보리달마가 말했다. "너는 내 가죽을 얻었다." 두 번째 제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고 그 제자는 대답했다. "지혜의 본질은 명상이며 그 것은 절대적인 침묵입니다." 보리달마가 말했다. "너는 내 살을 얻었다. 하지만 나의 후계자는 될 수 없다." 세 번째 제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지혜의 본질은 불성을 계발해서 활 짝 꽃피우게 하는 것입니다." 보리달마가 말했다. "너는 내 뼈를 얻었다. 하지만 역시 내 후계자는 될 수 없다. 너는 매 우 가깝게 접근했지만 아직도 거리가 있다." 그는 네 번째 제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제자의 이름은 혜가였다. 그는 스승이 묻는 말 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보리달마가 말했다. "나는 너의 침묵을 알 수 있다. 여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도 그대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대의 경 지를 말로 표현해 보라." 혜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모릅니다." 보리달마가 말했다. "너는 내 골수를 얻었다. 이제 너는 나의 후계자가 되었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지혜의 문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너의 순수함, 너의 알지 못함 이 지혜의 시작인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현명한 자들은 너희에게 지혜를 주려고 오지만 나는 너희에게서 지혜를 뺏으려고 왔다. 그들은 진정으로 현명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대에게 구태의연한 지식만을 주었다. 그 들은 전해 내려온 지식을 다음 세대로 옮길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체험도 없다. 진정한 스승이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그대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대가 알고 있던 것들을 빼앗아간다. 그는 그대를 어린아이와 같 은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완전히 벌거벗긴다. 바로 거기서부터 진정한 성장이 시작된 다. 그리고 나는 너희 속에서 지혜보다 더 위대한 것을 찾아내었다. 지혜보다 더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함이다. 지혜는 텅빈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은 그대의 존재 전체를 변화시킨다. 마치 목욕을 해서 그대의 모든 때를 벗기는 것처럼 말이다. 순수함의 신선함이 깊어질수록 그대는 불명을 인식하게 된다. 학자나 성직자나 설교가들, 그리고 샹카라차랴 모두는 진정한 구도자에게는 필요없는 존재 들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신은 지식이나 경전 따위를 주워모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대상물이다. 그러나 신은 진정 한 구도자들에게 있어서 지혜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이다. 그 대와 신이 둘이 아닐 때, 그대가 지식에 의해서 신과 분리되지 않을 때 그대의 모든 숨결은 신성의 향기가 되고 그대 심장의 고동은 궁극의 음악이 된다. 지식은 값싼 존경을 받고 싶 어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존경이나 노벨상 같은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것이다.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사랑을 아 는 것은 사랑을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대는 도서관에 가서 사랑에 대해 써 놓은 모든 것을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에 관한 위대한 문헌들을 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가슴은 여전히 공허하다. 그대의 머리는 사랑에 대한 말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대의 가슴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대의 가슴 은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사랑을 하지 않고 그것을 알기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그것은 너희 속에서 스스로 불타고 있는 영혼이다. 지혜는 그대가 경전이나 고상한 책들로부터 모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꽃 이며 영혼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그대의 존재이며 그 자체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대가 지식 적이지 않을 때 그대는 그대의 존재 속에 깊이 뿌리박는다. 그리고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궁 극적인 꽃이 거기에서 피어난다. 깨달음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이다. 하지만 너희는 그 불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흘러가 버리는 너희의 시간들만 슬퍼하 고 있다. 육체 안에서만 만족하고자 하는 삶은 무덤을 두려워한다. 구도자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삶이다. 더욱 완전한 것을 향한 춤이며 더욱 깊은 침묵이다. 깊은 침묵 속에는 소리 없는 노래가 있다. 어떤 악기도 흉내낼 수 없는 존재의 노래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대 내부에서 자라난 어떤 것이다. 모든 존재는 신을 잉태하고 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기가 자라듯이 신은 그대의 존재 속에서 자란다. 그대의 신이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그대는 모든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라. 존재계가 그대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텅 빈 공간이다. 그 외에 어떤 것도 필요 없다. 그러나 여기엔 무덤이 없다. 기억하라. 무덤이 없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저기 저 산과 들은 그대들의 요람이며 디딤돌이다. 너희 조상들이 묻혀 있는 들판을 지날 때마다 잘 보라. 그러면 너희와 너희의 아이들이 거기서 손잡고 춤추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대가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은 불멸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서 그대는 그대의 선조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 며 또한 그대의 자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삶은 과거와 미래 양쪽 모두에 퍼져 있다. 그 대 속에 있는 현재의 순간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담고 있다. 만약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면, 어떤 사념도 어떤 혼란도 없이 전적으로 그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면 그대는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연결점은 거 슬러 올라가 태초부터 있던 그대의 조상들과 이어지며, 앞으로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대의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들의 씨앗이 바로 거기에 있다. 현재를 아는 것은 과거 를 아는 것이며 또한 미래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여기엔 무덤이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 영원한 생명만이 있다. 무덤은 우리의 무지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는 결 코 우리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생명 바깥 에 머물러 있었다. 무덤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덤은 없을 것 이다. 참으로 너희는 알지 못하면서 즐거워한다. 그것은 너무나 심오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대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이 한번 폭발하면 그대 삶의 영원함이 그대의 기쁨으로, 그대의 춤으로, 그대의 노래로 드러난다. 그대는 그대 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은 그대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위대한 화가가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모르듯, 그 리고 위대한 시인이 자신의 손으로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듯 영원한 생명이 그 들의 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대가 춤을 출 때 춤에 열중하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온 어떤 것이 아니다. 그대 속에 잠 자고 있던 것이 그대의 춤 속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것은 그대 속에서 넘쳐나고 있다. 이런 일은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 한 번은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을 알지 못한 다. 만약 그 희귀한 순간을 안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 되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 대의 삶 전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대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봄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를 안다면, 그대를 둘러싼 구름 같은 향기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안다면, 그리고 그대가 그것의 근원에 도달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삶뿐만 아니라 존재계 전체의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삶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은 삶이 이 별에서 저 별로, 이 생명체에서 저 생명체로 흘러 다니는 순수한 생명의 흐름임을 안다. 다른 이들이 너희의 믿음을 위해 황금 같은 약속을 주려고 왔지만 너희는 다만 부와 권력 과 영광이라는 선물만으로 보답했다. 황금의 약속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부와 권력과 영광을 그 들에게 바쳤다. 내가 준 약속은 너희에게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너희는 내게 더욱 관대했다. 너희는 삶에 대한 깊은 목마름을 내게 주었다. 칼릴 지브란이 그대에게 관대했다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가 말한 의미는 바로 이 런 것이다. "그대들은 나에게 삶에 대한 깊은 목마름을 주었다. 그대들 가운데 존재하고 싶 은 마음이 일어났다. 나는 더욱 더 열렬한 구도자가 되었다. 그대들은 나에게 삶에 대한 목 마름을 주었다는 사실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이 잠들어 있음을 보았고 그 대들을 깨우고 싶은 욕망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대들이 단지 식물처럼 살아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대들 때문에 나는, 그대들처럼 내 삶을 허비해서 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나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나는 삶의 근원을 찾아야 한 다." 그대는 그의 아름다움을 보았는가? 아무도 그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내가 준 약속은 보잘것없지만... 나는 그대들에게 어떤 것도 주지 않았 다... 하지만 그대들은 내게 더욱 관대했다. 그대들은 나에게 부와 권력과 영광을 주지 않았 다. 대신 그대들은 나에게 삶에 대한 깊은 목마름을 주었다. 내가 그대들을 지켜볼수록, 그 리고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깨달을수록 나는 삶의 비밀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진리들을 그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나는 보통사람들처럼 죽는 것이 아니다. 나 는 더 심오한 삶을 찾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비록 그대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 지만 그대들은 나에게 이것을 주었다." 오늘 아침 아난도가 나에게 신문을 갖다주었다.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 대하고 또 찬성하는지에 대한 조사 결과가 실려 있었다. 조사는 남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실시되었는데, 남자들 중 60퍼센트가 나를 반대했고 여자들은 90퍼센트나 되었다. 여자들 중 단지 10퍼센트만이 나를 찬성했다. 여자들이 나를 그토록 반대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남편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조만간 그 들의 남편이 내 그물에 걸려들 것이고 한번 걸려들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두려 워한 것이다. 둘째, 내 주위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질투심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남편들이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두려워한 것 이다. 뿌나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를 좋아하는 40퍼센트의 남자들은 틀림없이 아내에게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전생애 동안 몸바쳐 해온 일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사람 들의 적을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전세계가 나를 반대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들은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것은 한 박자가 늦다. 나는 미국에 있는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에이즈에 대해 경고했다. 거기서 5천 명의 산야신 들이 검사를 받았다. 그것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그대의 자비심일 뿐이다. 그런데 이 소식이 전해지자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에서 모두들 조롱거 리로 삼기 시작했다. 내가 불필요한 공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와 같은 검사가 전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내가 그런 단체 검사를 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당시에 나를 비웃었던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을 비웃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 역시 똑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나는 1951년, 인도의 인구가 4억일 때부터 연설을 하고 다녔다. 나는 돌팔매질을 당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암리사르 역에 도착할 예정 인 기차가 단지 내가 탔다는 이유 때문에 2시간 동안이나 연착한 일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거기에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플랫폼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산아제한에 대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만약 그때 인도가 내 말을 들었다면 지금쯤 인구는 5억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도의 인구는 약 9억이다. 그리고 2005년이 되면 지금의 두 배 로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산아제한을 이야기하는 것은 반 종교적이다... 나는 우리가 21세기에도 살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기어다니 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빛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살았 던 나머지 눈이 부셔서 그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눈을 감을 것이고 다시 어둠 속 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너희는 삶에 대한 깊은 목마름을 내게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그것을 주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을 지켜보면서 알무스타 파는 자신이 죽은 군중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역시 죽기 전에 삶의 근원을 발 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확실히 인간에게 자기의 모든 목표를 타오르는 입술로 바꿔주고 삶 전체를 샘물이 되게 해주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 나의 영광, 나의 보상이 있으니... 아무도 나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성적이라면 그대가 알지 못하는 사 이에 그는 그대의 잠으로부터, 무의식적인 행동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삶을 살려고 할 것이다. 자연히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리고 여기에 나의 영광, 나의 보상이 있으니...' 그대는 그대에게 사후에 받을 황금 같은 약 속을 해준 사람들보다 나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었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약속도 주지 않았다. 내가 찾는 샘물을 만나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는 샘물 자신도 살아있어 스스로 목말라하 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내가 샘물을 마실 때 샘물 역시 나를 마시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말이다. 그는 말하고 있다. "나는 목말라하는 샘물에게 갈 때마다 그것을 마시고, 그것 또한 나를 마신다. 그것을 마시고자 하는 것은 나의 욕구이 며 동시에 샘물의 욕구이기도 하다." 그것은 항상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인 현상 같은 것 은 있을 수가 없다. 너희 중 어떤 이는 내가 오만하리만큼 결백해서 보상받기를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해 왔다. 보상을 받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 강하지만 너희가 준 선물인 샘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내가 자존심이 센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나는 어떤 보상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람의 선물을 받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대의 종이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친구로서 사랑의 풍부함 을 나누어준다면 나는 항상 고맙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너희의 식탁에 앉혔을 때, 내 비록 언덕에서 딸기를 먹었을지라도, 또한 너희가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을 때, 내 비록 성전의 문 곁에 누워 있었을지 라도, 나 언제나 달콤한 음식을 먹으며 희망에 차서 단잠을 잘 수 있었음은 나의 낮과 밤을 보 살펴 준 너희의 사랑 덕분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대의 식탁에서 먹고 그대의 집에서 잠을 자라는 그대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 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의무감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무감은 결국 사슬처럼 나를 묶어서 결국은 기대감으로 변해 간다. 그러나 그대의 초대는 나에게 단잠을 자게 해주었다. 나의 낮들은 아름다웠고 나의 밤들은 꿈과 비전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최고의 축복이 내리길 바란다. 너희는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자기가 무엇을 베풀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진실로,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친절은 돌로 변하고 스스로를 달콤하게 부르는 선행은 저주를 낳는 부모가 된다. 그대가 어떤 선물을 줄 때 그것을 준다는 생각 없이 준다면 그것은 가장 훌륭한 선물이 다. 준다는 생각이 끼여드는 순간 그 선물은 변해 버린다. 그대는 어떤 선행을 할 때마다 책임감보다는 사람의 마음으로 그 일을 하라. 나는 많은 모임에 가서 연설하곤 했다. 한번은 로터리 클럽네 갔었다. 그들은 '우리는 봉사한다.'라는 표어를 써붙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봉사에 관해서 말하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내가 여기에 무엇하러 왔는지 잊어버렸다. 어쨌든 나는 저 표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만약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봉사를 알고 있다면 그것 은 봉사가 아니다.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얽어매는 교활한 방법이다. 나에게 '의무'란 말은 추하고 낡은 단어이다." 책임감 때문에 일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자신을 노예로 만든다. 그의 주체는 그대가 아니 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온 어떤 명령에 조종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이 사회에 구속되 고 강제로 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대, 오직 사랑으로부터 나온 행동을 하라. 그때만이 그 대의 행동은 아름다운 것이며 축복받은 것이다. 진실로,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친절은 돌로 변하고 스스로를 달콤하게 부르는 선행은 저주를 낳는 부모가 된다. 그대는 보상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대를 알아주고 고마워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 서는 안 된다. 그대는 어떤 일을 할 때, 일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하며 그 일을 함으로 써 그대의 보상은 완성된 것이다. 그 행위를 벗어난 그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 지 않다면 가장 훌륭한 행동도 추해지고 만다.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도 계속해서 거울을 들여다본다면 돌로 변할 것이다. 여자들이 핸드백 속에 거울을 갖고 다니면서 그것을 들여 다볼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그것은 자신이 못생겼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는 것이며, 자신 도 자기가 못생겼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물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0분에 한번씩 들여다보는 것은 강박관념이다. 자신이 못생겼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다. 완전히 벌거벗었다고 하더라도 아 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왜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을 그토록 싫어할까? 그들은 많은 이유를 내세운 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등등 말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이 너무 추해서 견딜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그대가 입고 있는 옷은 추위로부터 몸을 감 싸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그대의 몸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위장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 다. 어떤 사회든지 아름다운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옷을 적게 입는다.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 다. 가린 부분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이상심리 중의 하나다. 차도르로 얼굴 을 가린 여인을 본다면 사람들은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녀 는 정말로 못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베일이 환상을 만들어 낸다. 베일 뒤에 가려진 모습이 어떤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이슬람 여성들이 결혼할 때마다 남편에게 던지는 첫 번 째 부탁은 집안에서는 차도르를 벗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실 가족이 모두 함께 있을 때에는 집안에서조차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한다. 그녀의 남편이 허락하는 사람 앞에서만 차도르를 벗을 수 있는 것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결혼하던 날 그의 아내가 같은 부탁을 했다. 그는 말했다. "먼저 당신 얼 굴을 보고 나서야 누구누구 앞에서 차도르를 벗을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물라 나스루딘은 사실 그녀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해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 의 아내가 가리고 있던 베일을 걷자 그는 너무나 놀라 이렇게 말했다. "가려라, 가려라. 나 를 빼놓고 누구 앞에서든 차도르를 벗고 있어도 좋다. 하지만 나만큼은 용서해 다오. 이 세 상에 대해서 마음껏 복수해라. 하지만 나는 당신의 가엾은 남편이 아닌가? 제발 내 앞에서 만큼은 차도르를 벗지 말아 다오. 당신은 완전히 자유롭다. 내 앞에서만 빼놓고는." 사람은 자신이 선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많이 인식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 다면 그 인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유명한 이집트의 수피 신비주의자인 준눈 (Junnun)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은 준눈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선 준눈을 찾아와서 말했다. "나는 신이다. 그대가 어떤 능력을 원하든지 그것을 줄 수 있다. 자,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 준눈이 말했다. "나는 단 한 가지 능력을 원합니다. 내가 지나가는 곳에 있는 나무는 즉시 푸른 잎과 꽃을 피우고, 마른 샘이 있다면 샘물이 다시 솟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반드시 내가 그 자리를 떠난 후에 일 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그 기적을 모르고 사람들도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몰라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띈 채 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이 조건을 약속할 수 있다면 그때 내게 그 능력을 주십시오." 나는 이 이야기를 사랑한다. 이것은 단지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알무스타파가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