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너희는 삶이면서 또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삶에는 진선미, 오직 이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뿐이다. 아마 이것이 신의 세 얼 굴, 진정한 삼위일체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신만큼이나 정의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심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이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나 사상가나 철학자들은 결론적인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덕주의자는 선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철학자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시인은 무엇이 아름다움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시인 뿐만 아니라 음악가, 무용가, 조각가 등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창조성과 창조적인 능력에 관심이 있는 사 람은 반드시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시인은 말한다. 저희에게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시인이 아름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 질문을 무지, 또는 빌려 온 지식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실제적인 경험에서 우 러나온 것이다. 시인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몸 전체로 안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인 타고르가 노벨상을 받은 후에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타고르가 대답했다. "관심이라고요? 나는 아름다움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아름다 움이 무엇인지 압니다. 나는 아름다움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 맛과 그것 에 취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나의 시는 모두 실패작입니 다. 나는 계속해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려 했지만 실패를 거듭했을 뿐입니다. 나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는, 불가 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아름다움이 무엇이지 아는 시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사랑하 고 그것의 신비함을 직접 느껴 왔다. 그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춤추어 왔다. 그의 낮과 밤은 더욱어 깊어가는 아름다움의 끊임없는 흐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정 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시인의 질문은 배우 진지하고 꾸밈없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대답하려 한다. 그는 아름다움의 정의에 가까이 가서 닿는다. 그럼에도 그는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그는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킨다. 그는 달 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토록 가까이 간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금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무어(Moore)는 <윤리학 원론>을 썼다. 250페이지에 달하는 그 책은 매우 정교하고 난해한 논리를 동원하여 단 한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책을 읽어 나감에 따라 그대는 그가 해 답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심오한 깊이까지 뛰어드는가 하면 높은 곳을 날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선이 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기나긴 탐구를 종결짓는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대들의, 소위 종교적이라는 사람들도 그만큼 정직하지는 않다. 그들은 심지어 신에 대한 정의도 내리려 한다. 그들은 진리, 아름다움, 선에 대해 끊임없이 정의를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정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부정직 함을 드러낼 따름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과 교묘한 주장을 사용한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 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시인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아름다움을 정의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패 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가장 신비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대는 장미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대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대는 어린아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아름답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의 어떤 것을 맛보고 느낀다. 그리고 시인이나 화가, 음악가는 더 많 은 것을 안아. 그들은 아름다움을 마시고 취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에게 물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칸트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소. 당신 은 사랑해 본 적이 있소?" 그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칸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이지 내게 말해 주시오." 그가 말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의 기쁨과 축복을 맛보고 그것 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칸트가 말했다. "나 또한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소. 내 가 그것들을 끊임없이 경험하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이 오. 나의 전생애는 탐구의 연속이었으며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오. 그러나 나는 그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두렵소. 왜냐하면 사람들은 즉시 '그러면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시오.' 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정의는 항상 빗나간다오." 칼릴 지브란은 매우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대답한다. 그리하여 그가 대답했다. "너희,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것인가? 아름다움 스스로가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름다움을 찾을 것인가?" 아름다움은 저기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여기, 안에 있는 무엇인 것이다. 그대는 아름다움을 찾아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가 이미 아름다움을 알고 있지 않다면 어떻 게 그것을 찾을 것인가? 고대 이집트 속담 중에는 "그대가 이미 신을 찾았을 때에만 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아 름다운 말이 있다. 이 말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지만 진실이다. 그대가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의문을 떠올리 기보다는 아름다움 스스로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도록 하라. 선사들은 제자에게 공안을 주곤 했다. 공안은 사념을 제거하도록 도움을 주는 독특한 선 의 방법이다. 공안은 너무나 애매모호해서 그대가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 는다. 여러 가지 공안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공안은 '한 손뼉에서 나는 소리는 무 엇인가?'하는 것이다. 자, 이것은 분명히 넌센스이다. 한 손뼉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 한 손으로 어떻게 손뼉 을 칠 수 있겠는가? 소리가 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손이 필요하다. 한 선사가 제자에게 이 공안을 안겨주며 말했다. "한 손뼉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나에게 오라!" 제자는 열심히 수행에 몰두했다. 그는 명상에 잠겨 있다가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는 스승에게 달려가 그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승은 무엇을 들었는지 묻지도 않고 그의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 "썩 꺼져라, 가서 다시 명상하라!"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스승은 제자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스승은 어김없 이 그를 후려치고 밖으로 내쫓았다. 점점 제자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해 갔으면 다른 사념 모두가 사라졌다. 사념은 초대받지 않는 한 결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리는 사념을 없애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념은 불청객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념이 오는 것은 그대가 사념을 불러들이지 때문 이다. 그대의 한 부분은 사념을 초대하고 다른 부분은 사념을 없애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그대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제자의 존재 전체는 한 지점에 초점을 맞추어 갔다. 그리고 모든 사념이 사라지고 절대적 인 침묵만이 남았을 때, 그는 한 손뼉에서 나는 소리를 알았다. 그러나 그는 스승에게로 달 려가지 않았다. 스승은 제자를 찾아 나섰다. 제자는 숲 속의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 고요하여 거 기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스승이 찾 아왔는데도 그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승이 다가가 그 앞에 앉았다. 그럼에도 제자는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스승이 말했다. "제자여! 나의 뺨을 후려쳐라. 그대는 그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대가 그것 을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말할 수 없다. 자, 이제 나의 뺨을 갈겨라! 나 는 그대를 너무 많이 때려 왔다." 경험으로만 남아 있을 뿐,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경험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표현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가슴속에는 나누어 주고자 하는 깊은 열망이 존재한다. 나누어 주고자 하는 충동, 그것은 위대한 특성이자 영적인 현상이다. 나무는 꽃과 과일을 줌으로써 제나름대로의 나눔을 실천한다. 시인은 시를 나누어 주고 음악가는 음악을 나누어 준다. 그들 모두는 제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 불가능한 어떤 것 을 나누어 준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너희,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것인가?" 칼릴 지브란이 옳다. 아름다움에게는 주소나 거주지가 없다. 그대는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를 내릴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아름다움을 발견 할 것인가? 설령 아름다움에 가까이 간다 해도 그대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 스스로 그대의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 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아름다움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하지 말라. 그보다는 아름답게 살라. 아름다움 의 길 위를 걸으라. 주변을 둘러보라. 모든 것이 아름답다. 작은 반딧불에서부터 커다란 별까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정의를 내리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아름다움이 그대를 에워싸도록 허 용하라. 아름다움이 그대를 지배하게 하라. 그대는 아름다움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 자신이 아름다움의 정의가 될 수는 있다. 어떻게 빛이 스스로를 정의 내릴 수 있는가? 빛의 현존, 그것이 빛의 정의이다. 정의는 언 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바로 그대의 현존 안에 존재한다. 더욱더 감각적이 되라. 우리의 감수성은 무뎌졌다. 우리의 부모와 선조는 감각적으로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 하면 감각적으로 된다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대의 감수 성이 완전히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될 때뿐이다. 그러나 사회는 절대적 인 자유를 허용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의 타고난 권리이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 한 재능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특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자고 있으 며, 그것에게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대는 점점 그런 사실을 잊어 간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철학적인 의문만이 떠오른다.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아름다움의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를 물을 필요 없이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의미를 묻는 사람들은 시 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삶은 흘러간다. 그들은 결코 의미 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단지 죽음만을 발견할 것이다. 칼릴 지브란 역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대의 삶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라. 그대의 손과 눈에, 그대의 침묵과 사랑 안에 아름다움이 존재하게 하라. 아름다움이 그대의 안내자 가 되게 하라. 그러면 어느 날 그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대가 아름다움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다. "아름다움 스스로 너희 말을 엮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것인가?" 그대가 아름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 그대의 언어에서조차 그것이 흘러 넘치지 않는다면 그대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말한다 해도 아름다움의 정의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의 손과 눈, 그대의 언어와 침묵에 깃들인 아름다움이 모두에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 이다. 그대와 똑같은 신비, 똑같은 포도주를 맛본 사람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고통받은 이와 상처받은 이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상냥하고 자비로운 것." 이는그들의 요구사항일 뿐이다. 무의식 속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 밑에 자기 자 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곧 꽃피는 봄이 오고 고통과 상처는 희미한 기억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게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희망을 정의하고 있다 "스스로 누리는 축복에 조금 수줍은 젊은 어머니처럼 아름다움은 우리 사이를 거닌다." 아름다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아름다움이 아득히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라면 지금 이 삶의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아름다움은 고통받고 상처받은 자에게 꿈을 준다. 한밤중에 그대가 갈증을 느낀다면 그대는 수정처럼 맑은 호숫가에 앉아 물을 마시는 꿈을 꿀 것이다. 이 꿈은 하나의 투영에 불과하다. 거기에 꿈이 없다면 그대의 잠은 방해받을 것 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꿈이 잠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꿈과 수면에 관한 최근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꿈은 잠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꿈은 잠을 보호한다. 그대가 배고픔을 느낀다고 치자. 그때 꿈이 그대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그대는 깨어 일 어날 것이고 배고픔은 그대가 잠들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꿈은 그대를 왕국으로 초대하고 왕과 함께 만찬을 즐기도록 할 것이다. 이제 그대는 배고픔에 대하여 깡그리 잊어 버리고 편안하게 잠잘 수 있다. 몸은 배고프겠지만 마음은 꿈에 의해 위로받는다. 또한 정열적인 이는 말한다. "아니, 아름다움이란 강하고 두려운 것." 열정에 가득 찬 사람들, 그들에게 아름다움은 강하고 두려운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움을 상품처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권력이 고 돈이며 강함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강함은 항상 옳다. 그들은 권력을 동원해 아름다움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깊이 생각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 라, 필요에 의해 이용되는 것이다. 권력은 아름다움을 강하고 두려운 것으로 정의한다. 아름다움은 권력을 동원해 강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정의는 정의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어떤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정열적인 이는 말한다. "아니, 아름다움이란 강하고 두려운 것. 폭풍우처럼 아름다움은 우리 발 아래의 대지와 머리 위의 하늘을 뒤흔드는 것." 그대가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에 대한 것 이다. 그대가 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대와 그대의 심리 상태에 관한 것이다. 그대의 관찰은 주관적이며,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으 라. 그대가 무엇을 말하는지, 왜 말하는지 지켜보라. 그러면 그대의 내면에서 그 원인을 발 견할 것이다. 지치고 피곤한 이는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부드러운 속삭임. 아름다움은 우리 영혼 속에서만 말한다. 마치 그림자가 무서워 떨고 있는 가느다란 빛처럼 아름다움의 목소리는 우리의 침묵을 따르는 것." 이 말은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들을 자석처럼 강력한 힘 으로 유혹하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그림자가 무서워 떨고 있는 가냘픈 빛처럼 쇠약해졌다. 그러나 불안한 이는 말한다. "우리는 산 속에서 아름다움의 외침 소리를 들었노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말발굽 소리, 날개 치는 소리, 또한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었노라." 불안한 사람들은 항상 악몽에 시달린다. 그들에겐 잠조차도 휴식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낮과 밤은 불안의 연속이다. 그들은 평생 동안 편안한 휴식의 경험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들 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산속에서 울려퍼지는 아우성 소리와 같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말발굽 소리... 마치 전쟁터처럼, 날개 치는 소리, 또한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 그대는 별난 정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의 정의에 대해 물어본 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정의를 내릴 것이다. 밤이 오자 도시의 파수꾼을 말한다. "아름다움은 동쪽의 새벽빛과 더불어 솟아오르리라." 파수꾼은 아침을 기다린다. 한밤의 파수꾼, 그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밤의 끝인 동시에 낮 의 시작이다. 한낮에 노동자와 나그네는 말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석양의 창문으로부터 대지를 향해 몸을 구부리고 있는 것을 보았노 라." 하루 종일 일에 지친 사람들은 석양이 질 때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석양 이다. 석양 무렵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휴식할 수 있다. 한겨울 눈 속에 갇힌 이는 말한다. "봄이 오면 아름다움은 언덕 위로 뛰어오를 것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매서운 추 위가 엄습해 올 때 그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여름의 뙤약볕 밑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아름다움이 낙엽과 함께 춤추는 것을 보았으며 아름다움의 머리카락 사이로 눈발이 휘날리는 것도 보았 노라." 칼리 지브란은 여러 가지 욕구와 희망, 그리고 위안 등 다양한 각도에서 아름다움을 표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너희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 온 것, 하지만 너희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만적스러운 욕구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닌지. 아름다움은 욕구가 아니라 황홀경. 이 문장을 통해 칼릴 지브란은 아름다움의 정의에 매우 가까이 다가간다. '아름다움은 욕 구가 아니라 황홀경'이다. 아름다움은 그대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삶의 춤으로 흘러넘칠 때, 그대가 엄 청난 축복에 휩싸여 모든 존재를 축복해 줄 때 그대의 내면 깊숙한 곳엔 아름다움이 존재 한다. 그대가 모든 것에 그대 자신의 축복을 뿌려 주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존재가 아름답게 된다. 그대는 거지처럼 욕망의 눈을 통해 보아서는 안 된다. 그대는 의식의 최고 정점으로부터 보아야 한다. 그것이 칼리 지브란이 말하는 황홀한 기쁨의 의미이다. 그떄 모든 존재는 아름 다움의 대양이 된다. 내면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 거지가 아니라 황제처럼 충족되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황홀경은 아름다움을 향해 그대의 눈을 열어 준다. 아름다움은 목마름에 타는 입술도 아니며 앞으로 내미는 빈손도 아니다. 오히려 불타는 가슴이며 매혹된 영혼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너희가 보았던 영상이 아니며 너희가 들었던 노래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두 눈을 감아도 보이는 영상이며 두 귀를 막아도 들리는 노래. 아름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 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과 귀를 닫고 마치 육체가 사라진 것처럼 침묵 속에 앉 아 있을 때, 그 순수한 의식과 황홀경 속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아름다움은 주름진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도 아니며, 날카로운 발톱에 달린 날개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항상 꽃이 피어 있는 정원이며 언제나 날아 다니는 천사의 무리인 것을. 아름다움은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것은 단지 아름다움에 대한 투영일 뿐이다. 달은 항상 똑같지만 호수에 비친 그림자는 변화한다. 조그만 조약돌아리도 던지면 달의 그 림자는 수천 개로 부서진다. 모든 투영은 변화한다. 그러나 투영된 실재는 그대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결 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영원의 춤이다. 오르팰리스 사람들이여, 아름다움은 신성한 얼굴을 가린 베일을 벗어 버린 삶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아무도 자신의 본디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 는다. 가면은 싸구려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노력도 필요치 않다. 가면이 낡았을 때 그대는 얼마든지 그것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시장에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본디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엄청난 탐구 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대는 사회에 의해 창조된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존재계 그 자체에 의해 주어진 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대 내면의 순수하고 영원한 공간,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 그대의 실재가 있다. 한번 그것을 알고 나면 그대는 열정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대는 타오르는 불꽃이 된다. 그 대는 군중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대는 신처럼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희는 삶이면서 또한 베일. 아무도 그대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대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본디 모습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가면에 너무나 많은 것을 투자하고 있다. 그대는 얼굴에 집착하고 있 으며 그 뒤에 본래의 얼굴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해골만이 존재하는지 두려워하고 있다. 그대는 어떤 얼굴도 갖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거짓된 얼굴이라도 갖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대를 가로막는 두려움이다. 아름다움은 홀로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이다. 하지만 너희는 영원이며 또한 거울. 칼릴 지브란은 시인에게 말한다. "밖에서 아름다움을 찾지 말라. 밖에서 너희는 아름다운 사물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름다움 그 자체는 아니다." 어떠 사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대 내면의 아름다움이 그 사물에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대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실제로는 반사된 것이다. 석양은 거울일 뿐이다. 그대가 끊임없이 지나가는 사념에 방해받지 않고 침묵에 잠겨 석양을 응시 한다면 그때 석양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움은 그대 안에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 되도록 자유를 허용한다면 그는 거울처럼 될 것이다. 그대가 누구인가에게 "당신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대 는 그를 거울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그를 사진기의 필름처럼 만든다. 거울은 항상 비어 있다. 거울이 무엇인가를 영원히 투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다. 그러나 사진기의 필름은 단 한 번의 투영으로 끝나 버린다. 필름은 투영에 집착하기 때 문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결혼 하는 순간 상황은 어렵게 변화한다. 왜냐하면 결혼과 더불어 소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대가 한 여성을 손에 넣지 못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이 거세질 수록 여성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나 일단 그녀를 소유하고 나면 도전은 사라진다. 더 불어 그녀의 아름다움도 함께 사라진다. 한 정신분석가가 정신병원을 방문했다. 어떤 방에서 한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정신분석가는 안내인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러죠?" 안내인이 대답했다.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실연당했습니다. 그후 저렇게 미쳐 버렸 답니다." 정신분석가는 옆방으로 갔다. 거기엔 한 사내가 머리를 벽에다 찧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정신분석가가 물었다. "저 사람은 왜 또?" 안내인이 대답했다. "그는 그 여자와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대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단지 그것이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장 너머 옆 집의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웃 또한 그대와 똑같은 문 제에 빠져 있다. 그의 눈에는 그대의 정원이 더 푸르게 보인다. 그러나 이는 참된 아름다움 의 경험이 아니다. 오로지 붓다와 같은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것도 요구 하지 않으며 소유 또한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알겠는가? 10. 새벽에서 새벽으로 열리는 창 종교에 대하여 1 사제들은 이 세상에서 종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유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신 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결코 직업이 될 수 없다. 사제는 창녀와 똑같은 부류에 속한다. 창녀들조차 사제보다는 나을 것이다. 창녀는 몸과 욕적을 팔 뿐이지 사랑은 팔지 않는다. 그러나 시제들은 신앙이라는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 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신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신에 '대하여'아는 것은 빌려온 지식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빌려 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의 갈증, 나의 행복을 그대 에게 건네줄 수 없다. 나는 그대를 나의 내면에 숨쉬는 영혼의 세계로 초대할 수 없다. 그곳은 절대 독존의 세계이다. 사제들은 신을 훌륭한 직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마 그들은 창녀보다 더 나쁠 것이다. 사 제가 없다면 창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도, 특히 남부 인도에서는 사원마다 창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에 달하는 창녀들이 사원마다 있었다. 그들은 데바다시스(devadasis), 즉 신의 하녀로 불 렸다. 그러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들의 실제적인 역할은 사람들을 사원으로 유혹하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뛰어난 미모의 창녀를 소유한 사원은 번창했고 많은 돈을 축적 할 수 있 었다. 사제들은 그 도시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신에게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신은 실제로는 동상에 불과한다. 사실 아름다운 소녀들은 사제에게 제공된 것이었다. 사 제들은 이 여인들을 성욕의 대상으로 이용했으며 그녀들은 나중에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한 선전물이 되었다. 그리고 부유한 고객들은 창녀와 즐기기 위하여 사원을 애용했다. 사제들은 자신이 포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전세계에서 일어 났다. 윤락행위는 강압적인 결혼제도의 부산물이다. 그리고 결혼제도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바 로 사제들이다. 세상에는 사제들이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신을 정의함으로써 스스로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가 된다. 거기에 중개자가 있어 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대는 신의 자손이다. 어린아이가 자신과 부모 사이에 중개자를 요구하던가? 사제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이라는 관념을 조작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쓸모없는 가설 중의 하나이다. 아무도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신성을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은 의식의 최고 정점에 이른 신성한 존재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제들은 신성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신성은 그대의 영혼 안에서 그대 스스 로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제들이 요구하는 것은 하늘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신이다. 일단 이런 관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대는 사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신은 너무나도 멀리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대는 신을 본 적도 없고 그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신을 정의해 줄 수 있는 누구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대를 신에게로 인도하는 예식을 치러 주는 안내자가 필요한 것이다. 신은 헛된 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안내자를 자청하는 사제들은 신을 필요로 한다. 신이 없 다면 어떻게 인류를 착취할 수 있겠는가? 다른 명분보다도 신이라는 이름 밑에서 훨씬 더 많은 범죄가 자행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단지 신이라는 허무맹 랑한 이름 아래, 그러나 사제들은 그 허무맹랑한 이름을 필요로 한다. 신이 없다면 사제들의 직분과 사원, 종교의식, 경전 모두가 사라질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짓과 진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진실은 오랜 세월동안 계속해서 반복된 거짓이고, 거짓은 새롭게 등장한 진실이라는 것이다." 사제들은 신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자유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살 수 있다.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을 꼼짝 못하게 축소한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든지 끊임없이 두려움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그가 즐기고, 아름다움 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은 비난당하기 때문이다. 뿌나의 경찰서장은 나의 제자들이 아쉬람 안에서든 밖에서든 추잡한 행위를 해서는 안된 다고 우리에게 명령했다. 그대는 캄캄한 동굴 안에 숨어살아야 한다. 그대는 햇빛 찬란한 곳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그대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어서도 안 되고 지저귀는 새들과 더불어 노래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추잡한 것이다. 그리고 권총을 차고 다니는 경찰서장은 추잡하지 않다.!" 이 세상에는 죽음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사제, 경찰, 군인과 같은 직업에 매력 을 느끼는 사람들, 그들은 죽음의 봉사자들이다. 그들은 삶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들의 직업, 그들의 마음 자체가 추악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아름다움을 추잡하다고 한다. 장 미꽃이 벌거벗었다는 이유로 추잡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상에는 온갖 바보 천치들이 존재한다. 중세기에는 개에게도 옷을 입혔었다. 심지어 의자 의 다리까지 천으로 감쌌다. 왜냐하면 의자의 다리도 다리이니까! 다리를 내놓지 말라. 그것 은 추잡한 것이다. 그리고 가련한 의자여... 사제들은 독극물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인류를 분열시킨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비정상 적인 관념은 주입시킨다. 여기서 늙은 사제는 묻는다. 저희에게 종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종교'라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 그 말의 어원은 '함께 어울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제들 은 정반대의 일을 해왔다. 그들은 인간 안에 분열을 창조했다. 종교라는 말은 인간 안에 유기적인 합일을 창조함을 의미한다. 종교는 신과 무관하다. 종 교는 그대와 관련된 것이다. 종교는 숭배가 아니라 그대 의식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그대의 내면에 갈등과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무엇을 하든지 전체적으로 행위 해야 한다. 그대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가슴 전체로 행위 한다 면 그것이 바고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을 건강하고 통일된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기존의 종교는 인간을 병들게 하 고 분열시켜 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건강하고 전체적인 인간은 노예화되거나 착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의 개성과 고유한 삶의 방식을 가진다. 그는 기독교인 이나 힌두교인, 또는 이슬람교도가 아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단지 이 광대 한 우주의 자손일 뿐이다. 아무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거기엔 귀족도 노예도 없다. 그때 사제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대답했다. 내가 오늘 그것말고 다른 무엇을 말했단 말인가? 알무스타파는 사제에게 말한다.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그 외에 무 엇을 말해 왔던가? 사랑과 창조, 의식의 각성과 자유에 대해 말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제는 이런 것을 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신, 천국, 지옥, 윤회, 부활 따위를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알맹이 없는 말일 뿐이다. 종교는 살아있는 실재이다. 종교는 그대가 살아가는 매일매일, 매 순간마다 살아 숨쉬는 실재이다. 그대는 종교적으로 살 수도 있고 비종교적으로 살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명심하 라. 종교에 대한 정의는 사제가 아니라 신비가로부터 와야 한다. 만일 그대가 사제에게 "종교적인 삶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를 구실로 한 로터리 클럽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기능을 갖는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무엇을 하겠는가? 그리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그대에게 존경을 가져다준다. 사제들이 가르쳐 온 종교는 실재와 아무런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종교는 허구적 인 관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칼릴 지브란이 종교에 대해 말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와 묵상이 종교가 아닌가? 문제는 숭배가 아니라 삶 자체이다. 그대의 행위와 생각 모든 것이 종교적으로 되어야 한 다. 그러나 결코 사제에게 질문하지 말라. 그대가 아름다움과 사랑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 도 사제는 그것을 종교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행위가 자비심과 존재 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사제는 그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 다. ... 놀라움과 경탄이 없다면 그것은 행위도 묵상도 아니다. 행위는 그대 존재의 가장 외곽에 존재한다. 생각은 그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다. 그러 나 더 깊은 영역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놀라움과 경탄이다. 어떤 종교도 놀라움과 경탄이 종 교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말하노니, 아름다운 꽃을 보며 경이 로움으로 가득 찬 눈보다 종교적인 것은 없다. 아무 향기도 없고 색깔도 없는 땅에서 푸른 잎을 가진 나무가 솟아오르고 갖가지 색깔과 향기를 가진 꽃들이 피어 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무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더 높 이 솟아오른다. 나무는 별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나무는 끊임없이 종교적인 존 재가 되어 간다. 동물들조차 경이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동물들 또한 그 나름대로 무 엇인가를 추구한다. 종교는 광활한 것이다. 종교는 교회나 사원 또는 경전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종교는 그대 의식의 문제이다.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경이로 가득차 있는가? 만일 어떤 것도 그대를 놀라 게 하거나 경탄을 자아낼 수 없다면 그대는 죽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계 전체 가 그대의 사원이다. 내가 이해하는 한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종교는 시적이고 신비적인 것이다 종교는 순진 부구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다. 손으로 둘을 깎고 베틀을 만지는 동안에도 영혼에서 솟아나는 놀라움과 경탄이 없다면 그 것은 행위도 묵상도 아니다. 그대가 어떤 행위를 하는 동안에도 그대의 가슴은 명상에 잠길 수 있다. 위대한 신비가인 까비는 베를 짜는 직공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거듭 그에게 말하곤 했다. "우리의 스승이신 당신께서 여전히 베 짜는 일을 계속하고, 장날마다 시장에 나가 옷을 파는 것을 좋지 않게 보입니다. 우리기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대신 해 드릴 수 있습 니다." 까비르는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외부 세계에서 일어 나는 일만을 보기 때문이다. 옷감을 짤 때,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내가 신을 위해 일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의 가슴은 내가 시장에 나가야 함을 안다. 왜냐하면 신은 손님으로 변장을 하고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 오든지 그는 신의 형상을 하고 온다. 가슴속의 침묵과 기도로 옷감을 짜는 것, 이것이 나의 종교이다." 그렇다. 그대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누가 행위와 신앙을, 직업과 신념을 나눌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런 일이 전세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그대의 신앙은 그대의 행동이 아니다. 그 대의 신념은 그대의 직업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들을 분리한다. 그대의 행동이 그대의 신앙이 되지 않는 한, 그대의 노력이 사랑과 기도로 충만하지 않는 한, 그대는 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대가 알고 있는 종교는 가짜이다. 그대가 알고 있는 사제들은 진정한 종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대들의 교황, 샹카라차랴, 호메이니, 그들은 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누가 시간을 뿌리며 "이것은 신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혼을 위한 것이며 이것은 육체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구별해서 생각하는 마음은 종교적이지 않다.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가려내는 마음은 비종교적이다. 그대는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저것은 신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신을 아 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어디에서도 자기 자 신을 찾아낼 수 없다. 거기엔 그대와 신이 공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만약 그대가 존재한 다면, 그때 그대의 신은 가짜이다. 그대의 부재만이 신을 실재로 만든다. 그대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는 신 안 에서 서로 만난다. 호흡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호흡은 영혼이 아니라 몸의 기능이다. 또한 영혼이 없다면 육체는 살 수 없다. 몸은 죽어서 근본적인 요소로 돌아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체가 없다면 영혼은 단 한순간도 살아있을 수 없다. 영혼과 육체는 둘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 안 에서 만나며 신에 의해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육체를 위한 것이고 저것은 영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대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그대의 영혼을 존중하듯이 육체 또한 존중하라. 영혼이 신성한 것처럼 육체 또한 신성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모든 것에 신성함이 고동치고 있다. 모든 시간은 자아에서 자아로 허공을 나는 날개이다. 그대는 순간마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움직인다. 몸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은 깨 어있다. 그대는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모기를 쫒기 위해 손을 움직인다. 몸은 나름대로의 의 식을 가지고 있다. 나의 친구 중에는 몸의 기능에 대해 연구해 온 과학자가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몸이 행하는 기능을 대신 하려면 복잡한 기계와 컴퓨터로 가득 찬 사방 1마일의 거대한 공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도 그것이 성공하지는 미지수이다. 기존의 종교는 육체를 비난해 왔다. 그들은 육체를 돌보는 것이 비종교적이라고 말한다. 먼저, 내면에서 그대의 몸과 하나가 되면 그 다음엔 존재계 전체와 하나가 된다. 그대 심 장의 고동소리가 우주와 조화를 이룰 때 그대는 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 전에는 결 코 종교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가장 좋은 옷으로서의 도덕을 입으려는 이는 벌거벗는 것이 나으리라.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도덕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도덕성은 종교 적인 사람에 뒤따르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 반대는 진실이 아니다. 그대가 먼저 도덕적이 되 면 자연히 종교적으로 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사제들은 그대에게 "먼저 도덕적 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쳐 왔다. 그들은 황소 앞에 수레를 묶어 놓았다! 그대의 의식이 종교적인 경지까지 올라간다면 도덕성은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도덕성은 나무의 잎처럼 돋아나는 것이다. 그대는 다만 나무에 물을 주고 뿌리를 돌보면 된다. 그대는 나무에서 잎사귀를 잡아당길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한다면 잎사귀는 파괴될 것이다. 잎은 떄 가 되면 저절로 싹튼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소위 사제라고 불 리는 자들은 도덕성을 가르친다. 그것이 사람들이 위선자가 되는 이유이다. 나는 위선적이지 않은 도덕주의자를 본 적이 없다. 오로지 종교적인 사람만이 진정한 도덕성을 갖는다. 가장 좋은 옷으로서의 도덕을 입으려는 이는... 사람들은 도덕을, 존경을 얻기 위한 장식품처럼 사용한다. "그는 차라리 벌거벗는 것이 낫 다."고 말할 때 칼릴 지브란은 옳다. 벌거 벗었을 때 최소한 그는 위선자는 아닐 것이다. 그 는 자연스런 존재일 것이다. 자연적인 존재가 되는 것에서부터 그대는 종교적인 존재로 나 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위선자는 어디에서도 움직일 수 없다. 위선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었다. 결코 위선자가 되지 말라. 그대가 무엇이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 위선은 싸구려이다. 그대는 위선을 위해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위선적일 때 그대는 그대의 영혼과 그 성장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햇빛도 그의 살에 어떤 구멍도 만들 수 없으리라. 걱정하지 말라. 그대가 벌거벗었다 해도 바람과 비와 태양은 그대의 살갖에 구멍을 뚫지 못할 것이다. 위선은 그대가 진실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위선은 하나의 장애물이다. 물론 위선을 통해 그대는 존경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나 존경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행위를 도덕에 묶는 이는 지저귀는 새를 새장 속에 가두는 것. 그대 자신의 본성에 귀를 기울이라. 소위 사제와 전도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에 귀기 울이지 말라. 그들은 그대에게 도덕성이라는 아름다운 옷을 선사하지만 그대 존재의 중심을 파괴할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대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 자 신을 놓치 않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자유로운 노래는 막대기나 쇠줄을 타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묶이고 구속된 상태에서는 자유의 노래가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자 유만이 노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그대의 자유로부터 솟아나는 기도이다. 그리고 열렸다가 곧 닫히는 창처럼 예배드리는 이, 그런 이는 아직 새벽에서 새벽으로 창 이 열리는 영혼의 집에 가 보지 못한 자이다. 종교는 창문이 아니다. 종교는 일요일에만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그대는 한 시간 동안 종교적인 시간을 보낸 뒤 나머지 스물 세 시간 동안 온갖 비종교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그 대는 거짓된 종교의 한 시간이 진실하고 거짓 없는 나머지 스물 세 시간을 이길 수 있다고 행각하는가? 결국 자기의 숭배가 공허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해도 그대 자신을 제외한 어 느 누구에게도 그 책임은 없다. 그대의 기도와 명상은 새벽에서 새벽으로 날마다 일어나야 한다. 고타마 붓다의 삶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 중의 하나인 아난다는 붓다를 보살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그림자처럼 붓다를 따라다녔으며 같 은 방에서 잠자곤 했다. 그에게는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붓다의 잠자는 자세 에 대한 것이었다. 붓다로 인해 그 자세는 사자의 자세로 알려졌다. 붓다는 밤새도록 똑같은 자세를 유지했으며 조금도 뒤척이지 않았다. 아난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관찰해 보곤 했지만 붓다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 었다. 어느 날 아난다는 물었다. "저는 한 가지 의문 때문에 몹시 괴롭습니다 이토록 어리석 은 질문을 하게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제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 고 계속 저를 괴롭힙니다. 밤새도록 당신은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무 시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붓다가 대답했다. "육체는 피로를 느끼므로 잠을 잔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잠들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잠자고 있다 해도 나의 한 부분은 계속 깨어서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가장 올바른 자세, 가장 휴식에 적합한 자세를 발현했다. 그러므로 나는 자세를 바꿀 필요가 없다." 그대의 마음속에 불안이 있다면 그대는 밤새도록 뒤척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이 이완된다면 자세를 바꾸는 횟수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마음을 초월해 있다 면 그대는 붓다와 같은 자세로 잠잘 수 있다. 침묵 속에서 그대는 존재계의 언어와 친숙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계가 이해하는 유일 한 단 하나의 언어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존재계는 침묵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이해하 지 못한다. 마치 그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침묵에 잠겨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나는 그 것을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부재할 때 그대는 신성하다. 종교적으로 된다 는 것은 그러한 신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거기에 경정이나 사원은 필요치 않다. 신성은 그대 안에 현존한다. 그렇다, 다시 한번 그대에게 이르노니,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 알겠는가? 11. 나무들 사이에서 손을 흔드는 이 종교에 대하여 2 참된 종교가 파괴되어 온 것은 불행한 일 중의 하나이다. 그 파괴자들은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니라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 그리고 천국과 지옥 등 온갖 넌센스를 믿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정한 종교는 사후의 보상에 대한 탐욕 도 아니며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진정한 종교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다만 현재,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 진정한 종교 는 사원이나 교회에 있지 않다. 거기에서 종교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 간을 포함한 존재계 전체를 있게 한 그 어떤 것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대는 신을 조각품으로 만들 수 없다. 신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삶의 근원 바로 그 자체 이다. 신은 자신의 고유한 얼굴과 손, 그리고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가 침묵과 평화에 잠기고 사랑을 흘러넘치게 할 때 돌연 그대의 손은 새로운 에너지의 근원과 더불어 전율하기 시작한다. 그대의 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대의 눈은 신의 눈이 된다. 신은 존재계와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삶의 길, 삶의 방식이다. 신은 특정한 무엇이 아니 라 그대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재계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다. 진정한 종교는 사랑과 자유, 해방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나날의 삶이야말로 너희의 사원이며... 우리는 사원을 짓는다. 우리가 만든 사원은 신이 사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하여 사원을 만들었다. 신은 모든 것에 존재한다. 그러나 매 순간 홍수처럼 밀려드 는 신과 함께 흐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열린 가슴이 필요하다. 이런 삶을 피하기 위 해 우리는 사원을 지어 왔다. 이 사원들은 신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타고르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말했다. "나는 신을 찾아 헤아릴 수 없이 많 은 전생을 헤매고 다녔다. 이따금 먼 별에서 신의 섬광을 얼핏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별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도달하면 신은 저만치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신 의 춤을 보았고 그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신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신의 집에 도달했다. 나는 그동안의 여행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제 남아 있는 문제는 몇 걸음만 더 걸어가 문을 두드리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막 문을 두드리 려는 순간 나의 손은 마비된 것처럼 멈추었다. 왜냐하면 돌연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 다. '만약 신이 문을 연다면 그를 만난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의 전생애는 끊임 없는 탐구의 연속이었다. 신과의 만남은 내게 죽음이 될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어떻 게 탐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과의 만남은 탐구의 끝이 될 것이다. 도전이 없는 삶 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신발을 벗어 들고 도망쳤다. 행여 신이 내 발소리를 들을 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도망쳐 나온 후에도 나는 계속 신을 찾아 헤매었다. 나는 신 이 어디에 사는지 안다. 그래서 신이 사는 곳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끊임없 이 찾고 질문하면서...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신을 만난다면 그대는 신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대는 신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은 막다른 길이 될 것이다. 신은 그대 의 무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신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열정과 갈망이 사라질 것이다. 아마 이것이 모든 사람이 신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신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집만을 빼놓고 온 우주 를 찾아 헤맨다. 그대가 신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신 또한 그 집에 살지 않는다. 어떤 바보 천치가 문을 두드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인격체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 자체가 넌센스에 불과하다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한 개인으로서의 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원과 교회는 신의 집 이 아니다. 간교한 사제들에 의해 조작된 것들은 사실 종교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나날의 삶이야말로 너희의 사원이며...' 이 소박한 사실을 받아들이 라. 이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지 금까지 행해 왔던 방식대로 행위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곳이 신성한 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매 순간 신과 만난다. 그대는 낡은 습관을 따라 행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언제나 사원 안에서 행위하고 있고, 그대의 행위 하나하나는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매 순간 그대는 신에게 둘러싸여 있 다. 신의 현존은 그대의 아내와 친구, 또는 남편과 심지어는 적에게서도 느껴질 것이다. 왜 냐하면 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 전체를 사원과 종교로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구도자가 가야 할 오직 하나의 길이다. 참된 구도자는 성스러운 책에 매달리지 않는다. 어떠한 책도 그대에게 종교의 맛을 전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꽃은 그 참된 종교의 향기를 전해 줄 수 있다. 하늘을 나는 새, 그리고 태양 아래 춤추는 나무들은 그 참된 종교를 보여줄 것이다. 존재계 전체가 성스러운 경전이다. 그것을 읽으라. 거기에 귀를 기울이라. 그때 그대는 서서히 예전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에너지에 둘러 싸여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물고기의 경우로 설명될 수 있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산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바다에서 죽을 것이다. 파도와 마찬가지로 물고 기는 바다의 일부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바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가 바다를 알게 되는 것은 낚시꾼에 의해 뜨거운 무래밭에 던져졌을 때뿐이다. 그때 물고기는 진정한 자기 의 집에 대해 알게 된다. 바다 밖으로 건져 올려졌을 때 물고기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살아 왔는지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낚시꾼처럼 그대를 삶의 바다 밖으로 건져 올리기 때문이다. 삶의 바다에서 나오는 순간 그 대는 깨우친다. "맙소사! 나는 삶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 왔구나. 나는 춤추고 노래 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만 이제껏 영원한 삶의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에너지와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대 매일의 일상생활이 그대의 사원이며 종교이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행동하라. 그러면 자연히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삶에 대한 전경이 곧 종교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에너지의 다양한 표현이라는 것 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의 근원에서 볼 때 우리는 동물, 나무, 새들과 형제이며 자매 이다. 그리고 그대가 이러한 형제애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먼저 그대는 종교의 맛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에 들어갈 때마다 너희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가라. 쟁기와 풀무, 그리고 망치와 피리, 필요에 의해서든 기쁨을 위해서든 너희가 만들었던 모 든 것을 가지고 가라. 왜냐하면 몽상 속에서는 너희가 성취한 것 이상으로 오를 수 없으며 너희가 실패한 것 이 하고 내릴 수도 없기 때문. 어떠한 것도 더러운 것이라고 버리지 말라. 쟁기와 풀무, 망치와 피리, 그대가 무엇을 갖 고 일하든 그것을 존중하라. 그러나 사람들은 같은 인간들조차 존경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마치 물건처럼 취급한다. 그대는 아내와 날마다 같이 생활함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제 그대는 서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녀는 하나의 물건이 되었다. 그대 또한 아내에게 물 건이 되었다. 그대가 아내를 이용하듯이 아내 또한 그대를 물건처럼 사용한다. 그대들은 서 로를 파괴하고 있다. 그대는 상대방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있다. 참된 종교는 사물에게까지도 생명의 영혼을 부여한다. 그대는 의자를 만질 때도 사랑과 존중으로 대할 수 있다. 거기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에게 삶에 대한 통찰력을 안겨 줄 것이다. 종교적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유일한 마술사이다. 그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나 생명을 지니게 된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만지느냐가 아니라 그가 그 안에 무엇을 쏟아 붓느냐 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그의 삶 자체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존재를 포기하고 산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 로 그것은 겁많고 무기력한 자들의 소행이다. 그것은 불구자들의 길이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신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만큼 지성적이지 못하다. 삶을 포기할 때, 그대는 신을 포기하는 것 이다. 깨달음은 모든 존재가 신성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신의 사원이며 모 든 사람이 신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 신이 깨어있든 잠자고 있든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 잠들어 있는 사람도 찬물 을 조금 끼얹기만 하면 금방 깨어날 것이다. 처음에 그는 화가 나서 소리칠지도 모른다. 사 람들은 자명종 시계를 집어던지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왜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그토록 분노합니까?"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받아왔다. 그 때마다 나는 말하곤 했다. "그것은 이해할 만하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자명종 시계가 울리 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나는 보통 자명종 시계가 아니다. 나는 마치 씨름이라도 할 것 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를 침대 밖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설령 그가 화를 낸다 해도 걱정할 게 없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분노가 옳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어 돌아왔을 때 그는 부인인 야소다라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음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또한 당신이 나를 용서해 줄 만 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소. 내가 온 것은 당신에게 사과하기 위함이오." 야소다라는 말했다. "당신을 용서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용서를 구했고 그것으 로 충분해요. 내가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당신은 진리를 발견했습니 다. 그렇다면 여기 궁전 안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나요? 산 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 꼭 필요했나요? 거기에만 진리가 있고 여기에선 진리를 구할 수 없었나요?" 붓다는 그녀의 항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궁전을 떠날 때,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소. 그러나 이제 나는 진리가 모든 곳에 있음을 아오. 진리를 찾기 위해 특정한 장 소로 갈 필요는 없소. 그러나 포기하고 떠날 무렵 나는 전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소. 나는 무지했었소." 그대는 이 이야기가 암시하는 바를 이해하는가? 모든 포기는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들에겐 포기가 아니라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가 암시 하는 내용이다. 모든 포기는 마치 잠자면서 걷는 것처럼 무의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깨어나는 순 간,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불교도들은 단순한 이유로 인해 이 이야기를 무시해 왔다. 만 약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누가 세상을 포기하겠는가? 2천 5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포기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 자신의 진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대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에너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 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날 때 그 에너지는 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대가 깨우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에너지는 항상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떠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그 여행은 여기 에서 저기로, 여기에서 히말라야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 내면의 여행은 무의식에서 의식 으로, 무지에서 각성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삶이라는 사원에 들어갈 때마다 그대는 그대의 도구를 지니고 들어가야 한다. 그대가 음 악가라면 악기를, 의사라면 의료기구를 갖고 들어가야 한다. 그대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대의 모든 것을 거기에 쏟아부으라. ...너희가 만들었던 모든 것을 가지고 가라. 왜냐하면 몽상 속에서는... 그대가 저 너머의 어떤 것을 맛볼 때, 그것을 일본의 선사들은 '사토리(satori)라고 부른 다. 그리고 칼릴 지브란은 그것을 '몽상'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완전히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조금 깨어나게 되는 것 - 마치 새가 지저귀고 창문 으로 햇살이 비치는 이른 아침,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 바로 그것이 '몽상'이다. 그대는 깨어났지만 좀더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대는 새가 노래하고 햇살이 비치며 신선한 공기가 방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한가로운 순간을 좀더 즐기고 싶어할 것이 다. 그대는 깨어났지만 완전히 깬 것은 아니다. 그대는 반은 깨어있고 반은 잠들어 있다. 사람들은 사토리와 사마디(samadhi)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거듭해서 묻곤 한다. 사토리는 반은 깨어있고 반은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디는 완전하 깨어남이다. 그대가 반쯤 깨어있다면 완전히 깨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스승이 몽 둥이로 그대의 머리를 조금만 내리쳐도 그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몽상 속에서는 너희가 성취한 것 이상으로 오를 수 없으며 너희가 실패한 것 이 하로 내릴 수도 없기 때문.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삶 안에 완전히 드러내 놓는다 해도 그대는 그대가 성취한 것보다 높이 오를 수 없으며 그대가 실패한 것보다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질 수도 없 다. 그대가 신이 무소부재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신은 정상뿐만 아니라 깊은 심연에도 존 재한다. 신은 그대의 성공 속에도 있으며 그대의 실패 속에도 있다. 사실, 성취하는 것도 신이고 실패하는 것도 신이다. 왜 그대가 걱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 대는 그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존재계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그만이다. 그때 그대는 긴장과 책임감,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이 다. 존재계가 별과 산, 바다와 강을 보살핀다면, 그대를 보살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대는 자기 자신의 실패를 감추고 가장 훌륭한 면모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불안과 공 포 속에 살아간다. 최상의 부분만을 드러내 놓기 위해서는 엄청난 긴장이 요구된다. 만일 그 대가 연극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얼마 동안 그대는 절정에까지 올 라갈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거기 머물 수는 없다. 연애가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다. 연애중에 그대는 자신의 절정만을 나타낸다. 해변에서 만났을 때, 그대와 연인은 절정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짝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절정은 오직 해변가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 이다. 만약 그대가 삶 전체에서 단지 정상만을 보여 주고 깊은 심연을 감추려는 연기로 일관한 다면 그대는 곧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더 어두운 면을 감추 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계조차도 그것을 감출 수 없다.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기 마 련이다. 그대는 그것을 숨길 수 없다. 그리고 봄이 오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날 것이 다. 밤이 오면 어둠이 밀려올 것이다. 그대가 눈을 감는다고 해서 그것이 감추어지지는 않는 다. 삶은 골짜기와 정상, 둘 다로 이루어진다. 종교는 인간을 파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정상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골짜기는 죄인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며 미덕을 갖춘 사람은 오 로지 정상에 존재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존재계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모든 정상은 나름대로의 골짜기를 갖는다. 정상과 골짜기는 항상 공존한다. 골짜기 없는 정상도 없으며 정상 없는 골짜기도 있을 수 없다.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둘 다를 받아들인다. 그런 수용성 안에서 그는 조화로운 합일을 이 룬다. 그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함께 가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들의 희망보다 높이 날 수 없으며 그들의 절망보다 낮게 너희를 낮출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을 존재계와 분리된 현상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대 안에는 모든 인간이 숨어 있다. 이미 죽은 사람들,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 그들 모두가 그대 안에 존재한다. 그대는 모든 과거와 미래 전체를 품고 있다.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그대는 하나의 우주이다. 그대 안에서 죄인이 있는가 하면 성자도 있다. 그대 자신을 전쟁터로 만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삶은 지옥이 될 것이다. 그 것이 종교가 해온 일이다. 그들은 그대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대는 그대 안의 죄인을 물리 치기 위해 싸우고 그대 안의 성자를 칭송한다. 들 다 그대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며 그대 는 그 둘을 적대적인 위치에 놓는다. 그리고 그들의 투쟁과 갈등 속에 그대는 파괴된다. 그 대의 삶 전체는 비극이 되어 버린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함께 가라. 맞는 말이다. 최정상의 인간 역시 그대의 가능성이며 가장 밑바닥의 인간 또한 그대의 가 능성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정상에 도달한 사람들인 고타마 붓다, 마하비라, 예수, 짜라투 스트라 - 그들 모두가 그대 안에 있다. 그리고 거물 범죄자들인 징기스칸, 스탈린, 히틀러, 레이건 - 이들 또한 그대 안에 있다. 둘 다를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대는 결코 전쟁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둘 다를 받아들일 때, 그대 안에는 묘한 조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칠판과 분필의 관계와 같다. 칠 판 위에 분필로 쓰여진 글씨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칠판의 어둠은 글씨를 돋보이게 하는 밑 바탕이 된다. 흰색 칠판 위에 흰색 글씨를 쓰거나 검은 칠판 위에 검은 글씨를 쓴다면 그대 는 그것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을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의 목적이다. 그대의 이중성으로 부터 음악을 창조하는 것, 바로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만약 너희가 신을 알고자 한다면 수수께끼 푸는 사람이 되지 말라. 신을 철학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문제로 다루지 말라. 내가 그대에게 "신을 만난다면 그대 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고 가정해 보자. 틀림없이 그대는 무엇을 물을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해답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신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문제 들을... 그러나 칼릴 지브란은 "너희가 신을 알고자 한다면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은 침묵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온갖 문제와 질문들을 가져간다 해도 그 대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어떠한 기도도 대답을 받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신은 아무런 언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이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는 침묵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다가갈 때에는 나무와 개울을, 바다에 다가갈 때에는 그대 가슴의 침묵 을 가지고 가라, 그러면 그대는 어떤 교류가 일어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의 수수께끼와 문제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신은 그대의 의문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 안에서 그 의문들은 저절로 용해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보다 너희의 주위를 둘러보라. 그러면 그분이 너희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이 문장은 매우 이상하지만 진실이다. 그러나 누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가? 누가 아이 들을 관찰하는가? 사업적인 관심으로만 가득 찬 눈은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거기 신이 현존함을 보지 못 한다. 신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함 속에 현존한다. 나무가 침묵을 지키며 서 있을 때, 개울물이 노 래를 부르며 바다를 향해 흘러갈 때, 신은 거기에 현존한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사업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귀는 막혀 있다. 바로 그것이 매 순간마다 수많은 방식으로 나타나 는 신을 놓치는 이유이다. '만약 너희가 신을 알고자 한다면... 그보다 너희 주위를 둘러보라. 그러면 그분이 너희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그대는 어린아이의 눈을 들 여다 본적이 있는가? 그대 진정한 성자를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눈 을 들여다볼 때 그대는 성자의 눈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물론 성자의 눈은 어린아이 의 눈보다 더 깊고 심오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눈 또한 성자의 눈이 지닌 무엇인가를 가 지고 있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을...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분이 구름 속을 걸어다니며... 신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칼릴 지브란의 모든 노력은 신이 한 개인이라는 관념을 파괴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그대에게 신이 하나의 현존임을 이해시키려 한다. 어린아이가 웃고 있을 때 신은 거깅 있다. 어린아이의 웃음은 너무 순진무구해서 신이 거기 있지 않다고 하 기는 불가능하다. 그대가 깨닫게 될 때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2의 탄 생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그대의 눈은 어린아이와 같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다.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나비를 좆아 뛰놀고 싶어한다. 그대는 해변가에서 조개껍질 을 줍는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일본의 위대한 선사인 호테이(Hotei) 화상은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과 과자를 가득 담은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다녔다. 그가 거리에 나설 때마다 사람들은 그에게 "우 리에게 종교에 관한 법문을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라. 그러면 너희는 법문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산불처럼 퍼져 나가자 사방에서 어린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왜냐 하면 그는 항상 이상한 장난감과 맛있는 과자를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기 때문이 다. 거기에는 웃음이 있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또한 아이들과 더 불어 춤추었다. 그 자리에 있던 군중들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그가 위해한 성자라고 들어 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저 사람은 미친 것 같구나!" 그의 전생애는 그런 행동의 연속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마디 법문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온갖 행동을 통해 신을 이끌어내 었다. 신은 과자를 손에 들고 여기 있다. 신은 여기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는 여 기서 웃고 춤춘다. 그러나 너희는 눈이 멀었다. 너희는 귀머거리이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결코 말로 표현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이 순진무구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창조했 다. 행위 안에 순진무구함이 존재할 때 신은 거기에 있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분이 구름 속을 걸어다니며 번개 속에서 팔을 뻗고 빗속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 태도의 변화만이 유일한 문제이다. 비가 내릴 때는 빗속에서 춤추라. 그대는 진흙으 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대는 빗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름이 비를 뿌 릴 때 그대가 맛볼 기쁨에 비하면 그대의 옷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온갖 종류의 우산을 가지고 다니며 그대 자신을 보호한다. 너희는 그분이 꽃 속에서 미소지으며 나무들 사이에 서서 손을 흔드는 것을 보게 되리라. 태도를 바꾸라. 그대는,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구름 또한 구름일 뿐이며 비는 그저 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름은 구름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으며 비와 나무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이 런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대의 삶은 기쁨과 은총, 그리고 축복으로 가득 찰 것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