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3 라즈니쉬/길연 옮김 정신세계사 삼육대학 사회복지학과 3학년 천미현 1 친구가 너희의 썰물을 알아야 한다면 우정에 대하여 그러자 한 젊은이가 말했다. 저희에게 우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가 대답 했다. 너희의 친구란 너희의 요구에 부응하는 자이다. 친구란 사랑으로 씨를 뿌려 감사로써 수확하는 들판. 또한 친구란 너희의 식탁이며 아늑한 난로 곁. 너희는 굶주린 채 그에게로 와 평화를 찾는다. 너희의 친구가 속마음을 얘기할 때 너희는 "아니" 하고 말하기를 두려워 말며, "그래" 하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그가 침묵할 때라도 너희 가슴은 그의 가슴의 소리를 듣도록 하라. 말없이, 우정 속에서는 모든 생각, 모든 욕망, 모든 기대가 갈채받지 않 아도 기쁨으로 태어나고 나누어지는 것. 너희의 친구와 헤어질 때 아쉬워하지 말라. 왜냐하 면 너희의 친구에 대한 사랑은 그가 없을 때 더욱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산을 오르는 이가 벌판에서 산을 더욱 선명히 보듯이. 그리고 우정에는 영혼의 깊이 말고는 아무 런 목적도 두지 말라. 왜냐하면 스스로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말고 또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다만 던져진 그물에 불과할 뿐, 오직 백해무익한 것만이 잡히는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 친구가 너희의 썰물을 알아야 한다면 밀 물도 알게 하라. 다만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찾는 친구, 그런 친구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언제나 시간을 살리기 위하여 친구를 찾아야 하니, 너희 요구를 채우는 것은 곧 그의 요구 도 채우는 것, 결코 너희의 공허를 채우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달콤한 우정 속에 웃음이 깃들이게 하고 기쁨을 나누라. 하찮은 이슬 방을 속에서도 가슴은 아침을 찾아내고, 다시 생 기를 되찾게 하기에.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다. 칼릴 지브란은 내가 볼 때, 이따금 진리와 신성을 실어 나르는 수레일 뿐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나는 그가 언제나 의식의 절정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곧 어두운 골짜기로 내 려 앉아 버린다. 비록 그의 말씨가 똑같다 하더라도, 그리고 시구가 똑같은 아름다음을 지니 고 있다 하더라도 곧장 진리를 잃어버린다. 그의 말씨가 몹시 빼어나서 그대가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그가 어디에서 계곡으로 추락하고, 어디에서 높은 정상으로 떠오르는지 그 차이를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조르바와 붓다는 아직 유기적인 합일체가 아니다. 물론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 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그는 보통 평범한 사람들처럼 들로 갈라져 있다. 그토록 천재적인 사람이 그 둘을 하나로 합치지 못하다니... 칼릴 지브란은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눈은 새처럼 전체를 조망하지는 못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추락할 때마다 뛰어난 지성과 말솜씨로 그것을 숨기려 한다. 나는 그가 좀더 완전하게 구체화되지 못했음이 아쉽다. 우리는, 단지 그가 유기적 합일이 뮈가 뮌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기 때문에, 또다른 고타마 붓다를 놓친 것이다. 그 자신은 이런 모순을 깨닫지 못했고, 그대들 또한 마 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기에 나는 그에게 솔직하고 싶다. 사랑은 볼꽃 같은 것이다. 사랑은 모든 거짓을 불태우고 오로지 진실만을 남긴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말했다. 저희에게 우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친교(friendship)와 우정(friendliness)은 전혀 격이 다른 말이다. 친교라는 말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규정하고 한계짓는 말이다. 그대는 단지 몇몇 사람하고만 친교를 맺는 다. 그러나 우정은 광범위한 것이다. 그대는 산과 나무, 별들과 우정을 나눌 수도 있다. 또 한, '친교'와 같이 '관계'를 나타내는 모든 말들은 피상적인 것들이다. 친교란, 따라서 관계를 맺은 사람을 속박하면서 동시에 속박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정은 자유스럽다. 그대는 누구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친교는 특정한 대상이 필요하지만, 우정이란 그대의 사랑이 무조건 전존재를 향해 흘러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 둘은 전혀 같은 뜻이 아니다. 친교는 언 제든지 역전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소의 친구라는 것은 그대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 나 우정은 특정한 거주지가 없다. 우정은 전존재에로 향한 것이기에 역전될 수 없다. 기억하라. 무엇이든 쉽게 역전될 수 있는 것은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듯이-모 두 매우 표면적인 것들이며, 하나의 거짓된 대용물일 뿐이다. 우정이 쓰라린 것으로 바뀔 가 능성은 없다. 우정에 있어서는 그대가 주인이다. 그러나 친교에 있어서는 그대가 주인이 아 니다. 그것은 마치 결혼처럼 인위적인 관계이다. 하지만 우정은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 자체 이다. 그리하여 그가 대답했다. 너희의 친구란 너희의 요구에 부응하는 자이다. 이는 아름답지 못한 말이다. 하지만 그가 근본적인 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므로 그 대 답은 하나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는 친교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우정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다. '너희의 친구란 너희의 요구에 부응하는 자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 니와 이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 우정이란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정은 예외 없이 모두에게 그 향기를 그냥 준다. 그리고 우정은 그것을 주는 것 속에서 만족한다. 우정은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흘러넘치는 사랑이다. 그대는 나무와 더불어, 별과 더불어 우정을 나눌 수 있다. 우정은 그대에게 어마어마한 보물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 두 단어의 뜻을, 그 차이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친교는 감옥이다. 우정은 절대적 자유이다. 그대의 풍족함 속에서 주라 우정은 요구가 아니다. 물론, 존재계는 아무조건 없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존재계는 그대의 요구를 돌보아 주지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대의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단지 그대의 깊은 무의식이 '친 교'에 얽매여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너희의 친구란 너희의 요구에 부응하는 자이다. 이 말은 다분히 사업가적인 언어이다. 하지만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사랑은 그대 영 혼의 노래이다. 우정은 그 사랑의 향기이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그 향기를, 바다 건너 산 너머 멀고 먼 별들에까지 싣고 갈 것이다. 사랑은 취하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이다. 우정 또한 그렇다. 친구란 사랑으로 씨를 뿌려 감사로써 수확하는 들판. 좋은 말이다. 칼릴 지브란은 아름다운 언어를 찾는데는 천재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시구가 아름다울지라도 거기에는 어둠과 무의식이 있다. 친구가 그대의 들판인가? 그리고 씨를 뿌려 그 들판을 일구다니? 그대의 사랑은 친구에게 있지 않다. 그대의 사랑은 그 수확을에 있다. '감사로써 수확하는...'친구는 두 개의 육체에 깃들인 하나의 영혼이라 했다. 거기에는 감사 의 마음 따위는 필요없다. 침묵 속의 이해가 있을 뿐. 어색한 예의상의 감사와는 전혀 다르 다. 친구를 경작하려 하면서 어떻게 사랑으로 씨앗을 뿌릴 수 있겠는가? 그대의 사랑은 가면 이고, 뇌물이고, 설득이다. 그대의 그 사랑 때문에 친구는 그대를 위한 들판이 되어줄 것이 다. 그러나 그대의 진정한 관심은 씨를 뿌린 후 수확하는 데 있다. 그대의 감사는 공허하다. 만약 친구가 그대에게 아무 것도 베풀 수 없다면, 그대의 감사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주라, 사랑과 함께 나누라, 언젠가는 돌려받으리라는 아무련 욕방 도 가슴에 담지 말라. 그러면 새로운 차원의 감사를 느끼게 되리라. 또한 친구란 너희의 식탁이며 아늑한 난로 곁. 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그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기에 이 말은 나를 아프게 한다. 그대는 친구의 식탁이 되어야만 하고 난롯가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친교'와 '우정' 의 다른 점이다. 나는 '친교'에 대해 물었던 젊은이는 용서할 수 있으나, 대답하고 있는 칼릴 지브란은 용서하고 싶지 않다. 너희의 친구가 속마음을 얘기할 때 너희는 "아니"하고 말하기를 두려워 말며, "그래"하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왜 친구를 두려워해야만 하는가?-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적과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친 구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아니야"라고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친구는 이 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이란 무엇인가?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지 못한 다면, 발가벗지 못한다면, 우정에 있어서 그대는 단지 교활한 비즈니스맨일 뿐이다. 그대는 "아니"하고 말하고 싶다 하더라도, "아니" 하고 말하는 바람에 친교가 깨어질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친구가 그대의 요구이고, 식탁이며, 들판이라니... 그대는 식인종인가? 이것은 교활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 친구가 그 대답을 좋아 할 것이 확실한 경 우에만 "그래" 혹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솔직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그대가 친구에게 정직하지 않다면 누구에게 정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정이 더 욱 높고 큰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내가 강조하는 이유이다. 우정은 아무 두려움 없이 "아 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친구가 이해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는 그대가 속이지 않은 것을 기뻐하리라. 우정은 서로 숨김없이 드러내고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믿기 때문이다. 반면에 친교한 매무 빈약하다. 그가 침묵할 때라도 너희 가슴은 그의 가슴의 소리를 듣도록 하라. 이것이 칼릴 지브란의 분열된 모습이다. 알무스타파의 등장은 매우 정치적이다. 그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알무스타파를 통해서만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알무스타파는 단지 허구일 뿐 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은 보호막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시로, 아름다운 허구로만 여 기게 된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라는 이 작은 책자 때문에 전세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아마도 그가 정직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내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결코 마음을 넘어서 보지 못했다. 우정은 사랑처럼 마음을 초월한 것이다. 사실 우정 은 사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간다. 우파니샤드에 이런 엄청난 이야기가 있다. 동양에는 결혼 할 때 아내와 함께 현자의 축복을 받으러 가는 전통이 있다. 현자-해탈한 사람은 이런 말로 그들을 축복한다. "열 명의 아이를 낳으라. 그리고 남편은 너의 열한번째 아이가 될 것이 다." 이것은 어쩐지 어리석어 보인다. 남편이 열한번째 아이가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대는 충분히 사랑을 했고 열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사랑을 넘 어설 차례인 것이다. 그리고 우정 속에 녹아들라. 그 사랑이 우정이 될 때까지 정화시켜 가 라. 그러면 그대는 더 이상 아내가 아니고 더 이상 남편이 아닌, 우정안에 함께 지내는 두 영혼이 될 것이다. 모든 기대가 갈채받지 않아도 기쁨으로 태어나고 나누어지는 것. 사랑이나 우정은 기대를 갖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우정의 아름다움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기대할 때는 언제나, 바로 뒤에 좌절이라는 그림자가 뒤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미래를 조종할 수 없다. 그대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내일 그대가 어디에 착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약속도 비종교적이다. 그것은 미래를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보여 준다. 종교적인 사람은 결코 '기대'하지 않고-기대 역시 미래에 대한 관심이므로 -'약속'도 할 수 없다. 종교적인 사람은 순간 속에서 산다. 너희의 친구와 헤어질 때 아쉬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의 친구에 대한 사랑은 그가 없 을 때 더욱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약간의 진실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 로 당연하다는 마음이 없을 때에만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된다. 어떤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전생애를 우정도 사랑도 없이 산 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죽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고, 자기자신은 언제나 살아있으리라 여긴다. 그러므로 그대는 삶을 연기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삶을 연기하고 있다.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 순간을 살라. 어떤 약속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가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점을 확 실히 해두라. '그대는 미래의 소요자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모든 것에 대해 약속하는 사 람이 있다. 그들은 연인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소." 이러한 약속이 스스 로를 가두어 버린다. 그대의 친구와 연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한 번에 한 순간만이 내게 주어져 있다. 두 순 간이 함께 주어지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이 순간 나는 확실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일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제 나는 당신과 더불어 사랑 속에 있지 않았다. 내일의 사랑은 향기만을 남긴 채, 올 때처럼 아무런 흔적 없이 떠날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내 약속에 얽매여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약속을 하고 언약을 지키는 것... 전인류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지금 이순간을 온전히 살라. 그대에게 있는 것은 '지금'뿐이다. 확실하게 그대 손에 있는 것은 오직 '지금'이다. 그 러나 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안다. 만약 그대가 연인에게 "나는 지금 이 순간 당신 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다음 순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나는 당신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어떤 기대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좌절의 연속일 것이 다."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우정에는 영혼의 깊이말고는 아무런 목적도 두지 말라.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목적이다. 세상에 대해 그토록 명료한 눈을 가진 이들도 가끔 자 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곤 한다. 처음에 그는 "영혼의 깊이를 구하라."고 말해 놓고는 다시 "우정에 아무런 목적을 두지 말라."로 한다. 이 또한 목적이다. 사실 어떤 목적 도 없다면 영혼의 깊이는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 문장은 서 로 모순되어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말고 또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다만 던져진 그물에 불과할 뿐, 오직 백해무익한 것만이 잡히는 것이니. 왜냐하면 사랑은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여는 방법은 없다. 사랑은 나무의 뿌 리와도 같다. 땅 속 깊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향기와 꽃들, 무성한 잎사귀들, 그 푸 르름을 한껏 즐기는 것은 좋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에서 이 많은 색채와 향기, 아름다움이 나오는지를 알기 위해 그 나무를 뽑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무를 뽑는다면 죽고 말 것 이기 때문이다. 뿌리는 감추어진 비밀로, 신비로 남아야 한다. 그대가 원하는 게 그게 아닐 지라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대의 향기를 나누라, 그대의 꽃을 나누라. 달빛 속에서, 바람 속에서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온갖 먼지를 다 떨어내고 다시 새롭고 신선해졌다는 것을? 그러나 뿌리는 신비롭게 남아 있어야 한다. 그대가 한번 뿌리를 드러내면 사랑은 죽어 버린다. 불행하게도 그대의 연 인과 벗들은 그대의 신비로운 비밀에 호기심을 갖는다. 연인들은 끊임없이 다툰다. "당신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어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여성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성 들은 대지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눈은 하늘에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바고 달에 가려는 바보 천치 같은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화성에 가려는 노력으로 바뀌어 어 렸지만 말이다. 그대는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평화스럽고 고요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그대는 국경도 인종 차별도 없이,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을 평생 창녀로 사들이지 않고, 사랑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한다. 그대는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눈은 달에 고정되어 있다. 그대는 영어의 루너틱(lunatic ; 광기에 찬) 이란 말을 아는가? 그것은 달을 뜻하는 루너(lunar)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은 루너틱(lunatic)하다. 사실 연인의 신비를 밝혀 내려는 사람은 치한처럼 추하다. 자연은 그대의 신비를 벗겨 내 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비 안에서 사랑이 꽃피고 우정이 춤추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 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좋다. 서로를 지적으로 이 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서로의 비밀과 신비가 감추어질 수 있도록 충 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신비스러움 때문이다. 만 약 그대가 여인의 신비를 벗겨 낸다면 사랑 또한 사라질 것이다. 지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신비는 심오한 것이다. 그 신비에 대해 궁금해하라.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말라. 그때 그대의 우정과 사랑은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그대가 가 까이 다가갈수록 신비는 점점 더 깊어질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계속 혼란스러운 것 같다. 당연하다. 이따금 그가 어마어마한 진실을 말하는 번쩍이는 섬광의 순간이 있다. 이따금 어 둠 속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그는 바보처럼 중얼거린다. 모든 시구에서 그대는 그것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친구란 너희의 요구에 부응하는 자이다.' 그리고 나 서 그는 말한다. "거기에 아무런 목적도 없어야 한다." 목적이 없다면 요구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갑자기 그는 예외를 만들어, 단지 영혼의 깊이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 한다. 존재에게는, 진실 속에는 예외란 없다. 단지 영혼의 깊이 말고는 목적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부산물이다. 또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의 맥을 잊었다. 무익한 것?-이는 시인의 언어가 아니라 거의 사업가의 언어이다. 무익한 것은 그대를 존재의 가장 높은 경지고 끌어올리며, 이익이 되는 것은 깊은 땅 속의 무덤으 로 끌어내린다. 그러므로 너희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는 좌충우돌하고 있다. 나는 그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능력이 한마디 말 속에 있는 단순한 어떤 것 - 그러나 그 맛은 완전히 다른 것 -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 히 해두려는 것이다.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친구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친구를 위한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그대가 결정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의 가슴을 열고 친구를 받아들이라. 그가 무엇을 그의 것으로 선 택하든지 상관 없이 말이다." 친구가 너희의 썰물을 알아야 한다면 밀물도 알게 하라. 아주 당연한 말이다. 그대는 완전하게 가슴을 열어야 한다. 밀물 때나 썰물 때나 모두 그 에게 허용되어야 한다. 다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는 친구, 그런 친구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든 친구들은 서로서로 그런 식이다. 그들은 시간을 죽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공허하고, 홀로 있는 방법을 모르며, 홀로 있는 것을 즐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나 시간을 살리기 위해 친구를 찾아야 하니...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다. 이것은 위대하고 빛나는 말이다. 그러나 칼릴 지브란은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달려가는 시계추와도 같은 사람이다. 비록 그는 황금 의 언어를 세공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긴 하지만, 깨어있는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 실하다. 너희 요구를 채우는 것은 곧 그의 요구도 채우는 것, 결코 너희의 공허를 채우는 것은 아 니다. 내가 그를 시계추라고 하는 까닭을 이제 알겠는가? 그러나 칼릴 지브란 자신은, 그의 문 장이 곧 다음 문장과 모순되어 버린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이것을 이해해야 만 한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는 홀로 있고 싶지 않다는 것, 공허를 채우려 하는 것이다. 누 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무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그는 점점 더 자신의 공허를 의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들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공허란 그 대의 가장 큰 요구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그대는 끊임없이 관계에 얽혀 들려고 하는 가? 그것은 공허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다. 그대는 공허하다. 동양에는 이것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해답이 있다. 공허란 채워져야만 하는 부정적인 무 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갖 쓰레기들로 공허를 채우려 들지 말라. 공허는 신성으로 충만한 그대의 사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원은 여전히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이 란 하나의 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빛으로 가득 채우라. 그래도 그것은 텅 비어 있을 것이 다. 침묵으로 그 공허를 채우라 - 그 어두운 공허는 밝고 긍정적인 현상으로 변화될 것이 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기적을 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달콤한 우정 속에 웃음이 깃들이게 하고 기쁨을 나누라. 칼릴 지브란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 열쇠는 주지 않은 채 말만 끊임없이 되풀이 하 고 있다. 어떤 바보도 그대의 정원으로 들어와 "자, 당신의 정원을 가꿔 보시오. 장미꽃과 연꽃으로 가득 찬 연못으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푸르 름이 무엇인지 장미나 연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열쇠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는 칼릴 지브란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모두 그런 식이다. 그들은 "화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분노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데. " 질투하지 말라." 어떻게 질투를 없앨 수 있는가? " 경쟁하지 말라." 참으로 터무니없는 계명 이다. 침묵은 아름답다. 그러나 침묵하도록 하는 명상이 먼저여야 한다. "질투하지 말라." 그 러나 그대의 가슴을 태워 버리는 질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질투란 다른 누구도 아 닌 그대 자신만을 다치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대는 경쟁욕을 사라지게 하겠는가? 왜냐하면 종교인들은 "경쟁하지 말라."고 하 지만, 한편으로는 "무엇인가가 되어라."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상형을 하나 만든 다. 이를테면 "예수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한다. 수백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모두 그렇게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경쟁이다. 또 그들은 "질투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한 남 자에게 한 여자만을 묶어 두려 하는 것에서 질투심이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이혼을 위하는 한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법정에 섰다. 이혼이 거의 불가능하고 부도덕하게 여겨졌던 때였다. 판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 서로 사랑하시오. 죽음 이 당신들을 갈라 놓을 때까지 함께 하시오." 여자가 대답했다. "충고는 고맙습니다. 그러나 내가 증오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 또한 그를 증오하니까요 그러니 제발 저희에게 증오가 사랑으 로 변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판사는 말했다. "맙소사, 나는 그런 것은 모르오. 그러나 당신들은 함께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겠다는 맹세를 해야만 하오. 사회에 부도덕 한 전례를 남기지 마시오." 여자가 말했다. "나는 맹세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내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러자 그 판사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오. 당신 아들의 머리가 아니 라, 성경책에 손을 얹으시오." 그러자 그 여자가 말했다. "나는 어머니이고 나의 종교는 모 성입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당황합니까? 내가 이 법정에서 당신에 대해 폭로하길 바랍니 까? - 내 아들이 당신의 아이라고." 우리는 얼마나 위선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가. 한번은 내가 자발푸르의 법정에 섰던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교회가 하나 있었다. 1974년에 영국 정부가 떠난 이래, 그 교회에서 예배를 보던 영국인들도 모두 고국으 로 떠났다. 그 교회는 10여 년 동안 잠겨진 채였고, 그곳에 있던 멋진 정원은 완전히 황폐해 버렸다. 그 교회는 영국 교회에 속해 있었고 그들의 재산이었다. 내 친구들 중에는 기독교도인이 몇몇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바보들이다. 너희들의 구세주는 10여 년 동안 교회가 아니라 감옥 속에 갇혀 있다. 그리고 그는 아마 그 속에서 전생애를 마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젊은 기독교인 몇몇을 모아서..."그 건물이 영국 교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무척 두려워했다. "염려하지 마라. 내가 교 히 문을 열겠다. 교회란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다. 그것은 재산이 아니 다. 너희들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곳이 바로 너희들의 교회다." 매우 타당한 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그럭저럭 자물쇠를 부수고, 교회를 수 리하고 정원을 청소했다. 그리고 어느 일요일. 나는 교회를 개방했다. 다른 기독교인들이 즉작 이 사실을 영국 교회에 알렸다. "이것은 무단 침입이다. 무단 침 입일 뿐 아니라, 사유재산을 훔친 것이다. " 그것은 꽤 큰 재산이었다. 거의 20에이커에 달 하는 땅에 세워진 몹시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국 교회는 그들을 대표하는 주교를 나그푸르로 보냈다. 그리고 나그푸르의 시장은 그들 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그들을 - 특히 나를,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모두 법정으로 끌어 내시오" 증인석에 서서 나는 판사에게 요청했다. "진실을 말할 것을 맹세하기 전에, 몇 가지를 분 명히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맹세한 후에 분명히 해두기가 좀 힘든 것입니다." 그는 말했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군요. 먼저 맹세를 하시오." 나는 대답했다. "내가 말하려는 것 은 그 맹세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허락할 수 없습니까? " "좋소, 말하시오. 그러나 이 것은 관례에 어긋난 것이오." 나는 말했다. "첫째, 나는 당신이 사창가에 드나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온 도시가 당신이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에 게 어떤 존경도 표시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에게 '존경하는 판사님'이라고 말한다 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만약 당신이 맹세 할 것을 요구한다면, 내가 가슴속에서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만을 말하도록 허락해 주십시 오. 둘째, 내가 어디에다 손을 얹고 맹세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는 말했다. "성경이나 혹은 힌두교의 기타, 어떤 종교의 경전이라고 좋소." 내가 대답했다. "그것들은 모두 거짓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은 한번이라도 그 책들을 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거짓으로 가득 찬 책 위에 손을 얹고 진실을 맹세해야 하다 니...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나요? 그리고 맹세를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내게는 혐 오스러운 일입니다. 맹세 없이는 거짓말을 하리라는, 그리고 오직 맹세를 해야만 진실을 말 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모욕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존재가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수천 년 동안이나 묵어서 썩어 버린 책들 - 나는 그 어느 책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만약 이 거 짓으로 가득찬 책 중 하나에 손을 얹고 맹세해야만 한다면, 나는 끊임없이 거짓 증언을 하 겠습니다. 나는 책을 따를 것입니다. 먼저 당신이 이 책들이 진실임을 증명하십시오. 먼저 당신이 '존경하는 판사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당신이 그 맹세가 바보짓이 아님을 내게 확신시켜 주십시오. 이런 짓들은 오직 맹세를 했을 때만 진실을 말하고, 나머지의 내 전생애에서는 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지 성적인 사람입니다. 평생동안 거짓을 말한 사람은 맹세를 한 후에도 거짓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막을 수 있을까요?" 나는 계속 말했다. "나는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미신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는 즉시 말했다. "다음 증인을 부르시오." 나는 다시 말했다. "아직 분명히 해둘 것이 남았습니다. 사원이란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사 람들의 것입니다. 사원이란 땅의 한 부분도 아니고 집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닙 니다. 영국 교회는 그 교회를 소유할 권리가 없습니다. 교회란 그곳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한 주인입니다. " 판사는 몸을 떨며 말했다. " 당신의 말은 다 들었소. 하지만 그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 느니 차라리... 다음 증인을 부르겠소." 이 세계는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대들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 무도 진정한 삶을 허락받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 말고는... 그리하여 달콤한 우정 속에 웃음이 깃들이게 하고 기쁨을 나누라. 그러나 어떻게? 그대는 미소지을 능력조차도 파괴해 왔다. 만약 그대가 웃음을 깃들이게 하고 기쁨을 나누기를 원한다면 - 그 의도만은 훌륭하다 -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말해야만 한다. 어떻게 그들이 삶을 부화시킬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들의 춧음과 춤과 기쁨을 나누는 방법도. 모든 종교는 기쁨에 반대한다. 모든 종교는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라. 그러면 죽은 후에 천 배가 되어 네게 돌아올 것이다." 이 얼마나 순수한 사업인가! 사실 사업이라기보다는 투기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나 사원도 웃음과 움과 노래 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짓밟아 거의 시체로 만들어 놓았다. 칼릴 지브란의 문제는 그가 굉장히 지성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데 있다. 그의 모든 문장 은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그의 이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그가 경험에서 우러난 말을 했다면, 그는 열쇠를 가졌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에게 가해진 모든 것들을 어떻게 원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하찮은 이슬 방울 속에서도 가슴은 아침을 찾아내고, 다시 생기를 되찾게 하기에. 그는 빛나는 언어를 쓴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된 존재들이 진정으로 웃지도 못하는데. 모든 종교는 가르친다. " 세상을 버리라. " 그럴 마음만 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부인했어야 하는데... 그 어떤 종교도 그대에게 기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어떤 종교도 웃음을 허락하지 않는 다. 그 어떤 종교도 그대가 삶의 작은 일들을 즐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어떤 종교도 그대가 삶의 작은 일들을 비난한다... 아주 작은 것들을. 하지만 삶이란 그런 것들로 이루어 진 것이다. 종교는 신에 대해 말한다. 꽃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천국에 대해 말한다. 영양가 많 은 음식에 대해서가 아니다. 지상은 벌을 받는 곳이다. 그대는 감옥에 집어넣어지듯 지상으 로 던져졌다. 칼릴 지브란은 그 언어에 있어서는 위대하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서 그는 겁쟁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여야만 했다. "가르치려는 자들은 그대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적이다. 모든 종교, 모든 성직자, 모든 정치가들은 인간의 적이다." 그러나 이런 구절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가 전세계로부터 칭송받는 이유이다. 그는 누구도 괴롭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외면해 버린 간격을 채우 고, 그가 의식하지 못한 말들의 의미를 바꾸면서 말이다. 그는 아름답다. 그러나 용기가 없다. 그는 여전히 순한 양일 뿐, 셰펴드나 사자가 아니다. 그는 사자처럼 포효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위인은 죽었다. 교황의 블랙리스트에 자기 책을 올려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알겠는가? 2 목소리 안의 목소리로 말하라 대화에 대하여 그러자 한 학자가 말했다. 대화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가 대답했다. 너희 는 생각이 평화롭게 잠잠할 때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너희 가슴이 고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떠들기 시작하니, 말이란 하나의 기분전환이나 심심풀이일 뿐. 그리고 너희가 떠 들 때 생각은 거의 사라져 버린다. 생각은 공간을 나는 새,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날개를 펼 지라도 날 수는 없기에. 너희 가운데에는 홀로 있는 것이 두려워 이야기 상대를 찾는 이들 이 있다. 고독한 침묵은 벌거벗은 자신을 눈앞에 드러나게 하며, 그리하여 달아나고 싶어지 는 것이다. 또한 너희 중에 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를 지식도 예견도 없이 드러내 떠드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또한 너희 중에 진리를 지녔으면서 말로 떠들지 않는 이들도 있으니, 영혼은 그와 같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율동적인 침묵으로 머무는 것. 길가에서, 시장 에서 너희의 친구를 만나거든, 너희의 영훈으로 하여금 입술을 움직이게 하고, 혀를 조정하 게 하라. 너희 목소리 안의 목소리로 그의 귓속의 귀에게 말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의 영혼 은 너희 가슴의 진실을 마치 잊을 수 없는 포도주처럼 간직할 것이기에. 비록 그 빛깔이 잊 혀지고, 그 잔 또한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때에도. 칼릴 지브란은 가장 심오한 것을 말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몇 가지를 빠뜨린다. 그리고 그 빠뜨린 것들이 정말 핵심이기에, 모든 깊은 의미가 파괴되어 버린다. 이 또한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 아님을 드러내 준다. 첫째, 그는 언제나 마치 질문이 허공에 던져졌던 것처럼 대답한다. 진리를 아는 자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에게 대답한다. 그러나 칼릴 지브란은 질문자를 잊어버 린다. 둘째, 그는 가슴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가슴은 그대의 존재가 아니다. 그대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사념의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듯이, 그대의 느낌, 감정, 감상 의 교모한 벽으로도 둘러싸여 있다. 조금은 부드럽지만 여전히 단단한, 때로는 사념보다도 더 깨뜨리기 힘든 강한 벽이다. 그대가 이 두 개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아무리 아름다 문 말을 한다 해도 그것은 생명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자 한 학자가 말했다. 학자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 을 아는 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빌린 지식을 발판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수세기나 뒤떨어 져 이미 곰팡이가 난 지식들을 말이다. 그들의 머리는 가득 차 있고, 가슴은 텅 비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존재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지식이라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지식은 그대 안에 가장 깊이 자리잡은 태풍의 눈이 경험 한 것이다. 아무리 멋지게 꾸며진 사상이라 할지라도 단지 태풍의 외부에 불과하다. 그대의 존재는 완전무결한 침묵, 정적이다. 거기에는 어떤 사념이나 느낌, 감정도 없다. 그 것은 단지 하나의 고결한 있음(isness) 이다. 존재의 바로 그 순수함이 그토록 처녀 같으 니... 그대조차 그대의 정결한 영혼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학자란 각종 쓰레기를 수집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거의 모든 종교의 신학자들을 만나 보 았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만났다. 그들은 매우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야기 한다. 학자들은 거짓을 진리로 믿어 왔다. 그들은 뿌리를 살펴보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 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져가는 것이 장미 봉오리인지 플라스틱으로 만든 어떤 것인지 알고 자 하지 않는다. 그래도 외견상으로 그들은 완벽하게 행복하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그들을 존경하고, 그렇게 계속해서 그들의 이기적 자아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기적 자아가 채워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더 많은 쓰레기들을 모아들인다. 지성은 꽤 힘든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어두운 그대 안의 고독으로 들어가 삶의 중심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대가 중심을 찾는 순간 잠자고 있던 것이 깨어난다. 우리는 꺠어 난 사람을 진전한 인간이라고 여겨 왔다. 우리는 그를 자이나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자 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붓다라고 부른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 리는 그를 선각자라고 부른다. 지금, 바로 지금 처음으로 그가 눈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전 에는 그 역시 장님이었다. 알무스타파가 처음부터 학자들을 내리쳤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질문의 빈곤함을 비라 보았더라면 더욱 훌륭했을 텐데. 그러자 한 학자가 말했다. 대화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오직 앵무새 만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라고? 그 학자는 말할 줄 모르는 갓난아기인가? 알무스타파는 이렇게 지적했어야 했다. " 너의 질문은 어리석다. 그리고 너는 아주 어리석은 학자구나." 그러나 그는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는 질문한 사람에게 어떤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나 는 그대들에게 되풀이해 말한다. 질문한 사람에 대한 답이 아니라면, 질문 자체에 대하 답은 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질문이란 묻는 사람에게서, 그의 무지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대는 먼저 그의 존재 안에 촛불을 밝혀야만 한다. 아마도 그 다음에야 비로소 그대 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 한 문제이다. 칼릴 지브란의 매우 심오한 문장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시로서 널리 읽혀져 온 것 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도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사람들은 그 의 말 자체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시적이고 음악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 치 아름다운 여인에게 그녀의 옷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굉장한 미인입니 다. 단신의 옷은 정말 아름답군요. 당신의 장신구도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구요." 그대는 그 녀의 눈, 그녀의 얼굴에 대하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따뜻함이나 그녀를 감싸고 있는 다정함 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는 화가 나서 말할 것이다. "당신은 보석상이거나 의류상인가 보죠. 나는 옷도 아니고 장신구도 아닙니다. 당신은 진짜 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는군 요." 너희는 생각이 평화롭게 잠잠할 때 대화를 시작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 그대는 대화를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말 할 것인가? 모든 생각이 평화롭게 잠잠할 때, 그대는 잠에 곯아떨어지지 않는가? 나는 이렇 게 말하고 싶다. 그대의 마음이 의식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때 그대는 대화한다. 혹은, 대화할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대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문제를 일으키고 싶 다면, 대화하라. 만약 평화롭고 고요한 즐거움 속에 남아 있고 싶다면, 대화하지 말라. 이런 미친 세상에서 어떤 진실을 말한다면 모든 바보들이 싸우려고 덤벼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들의 거짓말이 폭로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란 꼭 생각이 평화롭게 잠잠할 때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결코 평화로울 수 없다. 생각이 있거나 말거나. 칼릴 지브란은 확실히 진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좀 불분명하다. '생각이 평화롭게 잠잠할 때' 라는 그의 시구는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대는 생각을 하고 있 거나 평화롭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언제나 그대의 의식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생각이 평화롭게 잠잠할 때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너희 가슴이 고독을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왜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하는가? 전세계를 통틀어 모든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꼭 한 번, 이 자구상의 모든 말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이렇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신의 말씀을 듣고 싶다면, 태양이 하늘의 중산에 왔을 때, 단 1 분간, 즉 너희의 시계가 12시를 알리며 째깍거릴 때의 1분간만 멈추어라! 너희가 신의 목소 리를 듣고자 한다면." 이것은 장자가 말한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장자는 중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1분 동안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거기에 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 해 불평하지 않았다. 장자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내게 실망했는가?" 사람들은 말했다. "아닙니다. 그 순간 우리는 고요해졌습니다. 바로 그 고요를 들었습니다. 저희 가슴 안의 작은 속삭임을, 저희 존재 안에 작은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희가 당신께로 가서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한번도 생각을 멈추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 1분간도 말입니다. 신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소리치지 않았다. 그는 속삭였다. 연인 들이 서로 속삭이듯이, 비밀이 귓속말로 속삭여져 전해지듯이. 알무스타파는 '너희는 생각이 평화롭게 잠잠할 때 대화를 시작한다.' 고 말한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는 나 나름대로 그대들에게 뜻을 풀어 주지만, 그대들은 다른 의미로도 새겨 보아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생각에 잠겨 있지 않을 때 도, 너희는 고요한 채 있을 수 없다." 그대들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도대체 그대들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치 바늘이 제자리에 걸린 레코드처럼 끊임없 이 지껄이는 기계 같은 것, 그래서 날마다 똑같은 일, 똑같은 생각, 똑같은 두려움, 그리고 똑같은 지점에서 멈춘다. 그는 말하기를, 그대들은 생각이 허용되지 않을 때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그 대 마음속에서 축구 시합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대는 다른 누군가와 축구 시합을 시작 한다. 대화란 무엇인가? 그저 축구공처럼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다. 그대는 어느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대화를 이어갈 만한 단어를 몇 개 주울 뿐이다. 그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듣지 않는다. 그 또한 문 밖에서 기다리 는 중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적당한 단어를 찾아 그는 다시 말을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소위 대화라 는 것이다. 이는 단지 축구 시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 가슴이 고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떠들기 시작하니, 말이란 하나의 기 분전환이나 심심풀이일 뿐. 그대가 침묵 속에서 살 수 없을 때, 그대의 모든 삶은 그대의 입에 집중된다. 이는 기분전 환이나 심심풀이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의 시간을 피괴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이들 의 시간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기 기만이 다. 그리고 너희가 떠들 때 생각은 거의 사라져 버린다. 사고에는 고독과 독존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그대는 올바른 길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끊임없이 생각을 놓쳐 버린다. 왜냐하면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대화에서 낭 비하기 때문이다. 생각없이 지껄이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읽었던 신문을 그대로 따라 말하고, 자기들이 보았던 영화, 집에서 했던 싸움을 되 풀이한다. 모두 쓰레기들이다. 알무스타파는 생각이란 묵상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묵상할 때 그대는 고요해져야 한 다. 묵상이 그대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아니다. 묵상보다 뛰어난 것은 명상이다. 그대 안에는 세 개의 층이 있다. 말하는 것, 이것은 그대의 생각을 없애 버린다. 묵상하는 것, 이것은 그대에게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조만간 이것은 잡념의 수준으로 떨 어져 버린다. 명상, 이것이야말로 그대를 침묵과 고독의 중심으로 끌어올려 준다. 생각은 명 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명상가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을 하인처럼 부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기계처럼 다룰 수 있다. 보통 이와는 반대이다. 마음이 그대의 주인이다. 그래서 그대 내부의 공간은 생각으로 가 득 차 있다. 그래서 묵상조차 어렵고, 명상은 꿈도 꾸지 못한다. 생각은 공간을 나는 새,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날개를 펼지라도 날 수는 없기에. '생각은 공간을 나는 새...'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각이 공간을 흘러가는 진동이라는 것을 과학이 밝혀낸 것만 보더라도 이는 정말 놀라운 통찰력이다. 만약 그대에게 진동을 잡 아낼 도구만 있다면, 그대는 생각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언어는 울타리가 되었다.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날개를 펼지라도 날 수는 없기에' 그대는 언어 속에 있는 울타리를 깨달았어 야 했다. 너희 가운데에는 홀로 있는 것이 두려워 이야기 상대를 찾는 이들이 있다. 내가 살던 마을, 우리집 바로 옆길은 가로등이 없는 캄캄한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귀신들이 우글거린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적어도 밤에만은 우리집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근처에 사는 몇몇 성직자들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들도 반신반의했다. 누가 알랴? 귀신이 진짜 있는지.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거기에서 살아 왔다. 그래서 나같 이 조그만 소년이 온 마을에 퍼뜨린 소문에 농락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트 라를 외치며, 그 길을 빠르게 달려갔다. "하레 크리슈나! 하레 라마!" 나는 놀랐다. " 그것 참 이상하구나. 왜 그들이 만트라를 외치는 것일까? 낮에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서."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자기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그대는 보통 누군가에 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깊은 연산작용이다. 나는 대나무 막대기를 사용하여 그들 중 한 사람이 그 길로 다니는 것을 그만두게 만들었 다. 나는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대나무 막대기를 길의 양쪽 나무에 걸쳐서 가로 놓았 다. 한 성직자가 " 하레 크리슈나! 하레 라마!"를 외치며 걸어왔다. 그리고 넘어졌다. 그러자 그는 달려가면서 말했다. "맙소사, 그 소년이 옳았어!" 그는 무엇이 자신을 가로 막았는지를 확인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들은 다시는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그 길은 다시 조용해졌고 평화로워졌다. 나는 거기서 명상을 하곤 했다. 밤이 오면 그길은 신성한 느낌이 들 정도가 되었다. 어떤 사원도 그처럼 고요하지 않았다. 내가 밤늦게 몇 시 란이고 거기에 앉아 있은 후부터, 그 성직자들은 또다른 소문을 퍼뜨렸다. 내가 귀신과 결탁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길을 지나다니지 못하지만, 그 소년은 거기 멏 시간이고 앉 아 있고, 귀신들은 그들 괴롭히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내게 캐묻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 내게 물었 다. "나는 여러 소문을 들었다. 처음에는 거기서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해가 지면 아무도 못 다니는 길에 네가 한밤중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도 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이냐?" 나는 대답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이 누구에게 말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제가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도와드릴 수도 없게 됩니다. 그 귀신들은..." 그는 말을 막았다. " 그건 너만 알고 있어라. 비밀은 지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 나이니까." 나는 말했다. "기꺼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는 빠지고, 선생님께서 그 귀신들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되니까요. 스스로 선택하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냥 나가거라. 그리고 네가 만약 어떤 말썽을 일으키더라도-네가 그런 일 을 일으키지 않는 날이 드물지만- 너의 선생을 하여금 다시는 내 방으로 보내지 않도록 하 겠다. 비밀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너는 어린애인데 만약 네가 입을 열기라도 하면... 그땐 나는 끝장이다. 나는 자식이 있고, 부인이 있고, 늙은 부모님도 계시다. 불쌍히 여겨다오!" 그대는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친밀해지기 위해, 우정을 위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대는 혼 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이들의 시간을 파괴한다. 모든 여성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안다. 남편이 화를 낼 때마다 여성들은 열쇠를 던지며 말 한다. "나는 나갈 거예요." 그러면 곧 모든 분노가 잠잠해진다. "친정으로 가겠어요." 그때 남자들은 자신이 홀로 남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이런 여성은 목에 걸린 가시 같 은 존재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어떤 처방도 없는 남자의 운명이다. 목 에 걸린 가시를 없애는 약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두통에는 약이 있다. 그 러나 이런 종류의 고통은 심리적인 것이다. 약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은 아내가 집으러 돌아온다. 그대는 꽃과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귀가할 것이다. 어떤 여자는 자기에게 마음을 써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어떤 여자는 그대가 무슨 음모를 꾸미 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왜 아이스크림을 사왔지요? 뭔가 숨길 일이 있나요? 다른 여 자가 생겼나 보지요? -왜냐하면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기 때문이다.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정신을 팔기 시작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꽃과 사탕, 아이스크림을 사오고, 아이들을 위해 초콜릿을 사오는 것이다. 어쨋든 이런 것은 여자마다 다르다. 그 결과도 남자마다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 다. 아무도 홀로 남겨지기를 원치 않는다. 홀로 있음은 존재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가장 훌륭한 선물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과 그 의식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독존 속 에서만 그대는 꽃피어날 수 있다. 독존 속에서만 그대 삶의 원천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그 대의 빛이며 웃음이다. 고독한 침묵은 벌거벗은 자신을 눈앞에 드러나게 하며, 그리하여 달아나고 싶어지는 것이 다. 말하는 것, 영화 구경을 하고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는 것 모두 한 가지 방식으로 도움을 준다. 이것들은 모두 알코올이나 마약이다. 그대가 이해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것들은 알코올 이나 마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추함, 질투, 불안, 경쟁심, 야비함, 탐욕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 목록은 몹시 길다.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그들은 술을 마신다. 사람들은 잊기 위해 말하고, 잊기 위해 말 속으로 빠져든다. 당연히 그들의 마음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 또한 너희 중에 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를 지식도 예견도 없이 드러내 떠드는 이 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빌려 온 것, 어쩌다가 얻어 들은 것을 말한다. 그들은 그것이 진실인지조 차 알지 못한다. 그대는 우연히 길에서 다이아몬드를 주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여러 변 으로 깎고 다듬기 전까지 그대는 그것이 진짜 다이아몬드임을 알 수 없다. 그대는 기껏해야 그것이 아름다운 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것을 길 위에서 그냥 치 워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맨 처음 진리를 찾아낸 사람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 이 진리를 밝혀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다르게 표현되어 왔다. 그대 가 우연찮게 그것을 알게 되어 진리에 관해 말하기 사작한다 해도, 그대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리란 그대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너희 중에 진리를 지녔으면서 말로 떠들지 않는 이들도 있으니... 그들은 신비가이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을 지킨다. 영혼은 그와 같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율동적인 침묵으로 머무는 것. 그들은 이 지상의 소금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잠든 자들 을 깨우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깨어있으나. 온 세상이 잠들어 있다는 것에 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그대를 쿡쿡 찌르지도 흔들지도, 차가운 물을 그대의 눈에 끼얹지도 않는다. 진리를 찾았지만, 그들은 진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 어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비가들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범주가 있다. 칼릴지브란은 완전히 이것 을 잊고 있다. 아마도 그는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것 같다. 신비주의자와 도인의 범주를 말 이다. 신비가들은 그들 자신의 성장에 관한 한, 정상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건조한 영혼과 같다. 어둠 속에서 버둥거리며 찾고 또 찾는, 불행뿐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도인은 진리가 표현하기 힘든 것임을 알지만, 온갖 노력을 다하는 신비가이다. 심지어는 못박히고, 돌에 맞아 죽고, 독살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이 있었다.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마자 주인 여 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 우리에겐 아주 좋은 백과사전이 있어요. 저 책상위에 있는 게 보이 지요? 그러니 이제 다시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지 마세요." 그 남자는 책상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 저것은 백과사전이 아니라 성경책입니다." 여자가 말했다. "당신은 마술사인가 보죠. 이렇게 멀리서 어떻게 저 책이 성경책이라고 하 는 거죠?" 그가 말했다. "책 위에 쌓여 있는 먼지가 아무도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도 남지요." 그것들은 손댈 수 없는 책들이다 모든 성스러운 책은 손대기 힘들다. 그것을은 먼지만 모 아들인다. 어쨌든 그대가 누군가의 잠을 방해한다면 당연히 그는 화를 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 에게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 미치광이 같은 사람 들의 일에 말려들지 않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 었다. 나는 지금부터 더욱 심하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나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싸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광대한 바다와 같은 저 인류를 믿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얼마 안 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 특별히 내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 그들을 위해 나는 말해야 한다.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인류, 새로운 지구를 위해 나는 말해야 한 다. 미래의 세대를 생각하면 어떤 희생도 큰 것이 아니다. 나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고자 한다. 길가에서, 시장에서 너희의 친구를 만나거든, 너희의 영혼으로 하여금 입술을 움직이게 하 고, 혀를 조정하게 하라. 영혼이 움직이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 이 단순한 문장이 지켜진다면, 온 세상이 깊은 고요 속에 잠길 것이다. 할 말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러 머리 속 에 모아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일 뿐이다. 너희 목소리 안의 목소리로 그의 귓속의 귀에게 말하게 하라. 그는 말하기를, "그대 목소리 안의 목소리로 말하게 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바깥에서 들 을 수 있는 목소리가 있고, 그것이 들리기 전에 그대가 안에서 듣는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안에서 듣는 소리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오직 그것만 이 말할 가치가 있는 소리이며, 들을 가치가 있는 소리이다. 그러나 그대가 듣는 순간 단지 바깥의 귀로만 들으려 한다면, 그 소리는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그대가, 내부에 숨겨져 있 고 그대의 존재와 직접 연결된 귀로 듣지 않는다면... 모든 그대의 감각은 두 개의 면을 갖 고 있다. 그 하나는 안으로 들어간 뿌리이고, 다른 하나는 가지이며 잎이며 줄기인, 밖으로 뻗은 부분이다. 만약 뿌리가 없다면, 제발 말하지 말라. 그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면 플라스 틱일 것이다. 내부의 소리로 말하라. 그것이 자신의 날개를 펴고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라. 듣는 일에 있 어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저 흘려 듣지 말고 귀를 기울이라. 그것이 존재의 뿌리에까지 이르게 하라. 그때 합일이 이루어진다. 길가에서, 시장에서 너희의 친구를 만나거든, 너희의 영혼으로 하여금 입술을 움직이게 하 고, 혀를 조정하게 하라. 너희 목소리 안의 목소리로 그의 귓속의 귀에게 말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너희 가슴의 진실을 마치 잊을 수 없는 포도주처럼 간직할 것이기 에.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사나이가 술집에 들어와 말했다. "나는 여기서 술마 시는 모든 이들에게 내기를 걸겠소, 이것은 천 달러요. 내 눈을 가리고 어떤 포도주건 가져 오시오, 그러면 나는 그 포도주의 이름과 제조회사. 산지, 그리고 만든 해까지 알아맞히겠소. 만약 틀리면, 이돈은 당신들 것이오. 내가 성공하면, 누가 내기를 걸었고, 누가 포도주를 가 져다 주었건 간에, 이 천달러 위에 또다른 천달러를 올려 놓으시오, 르러면 재기는 점점 어 커질꺼요. 그때는 2천 달러가 걸리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3천, 5천으로 액수가 올라가는 것이라오." 모든 사람들이 흥분했다. 내기를 걸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만든 해와 나라, 포도주의 이름, 제조회사까지 말한다는 것은, 단지 맛만 조금 봐서는 알아맞히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이겼다. 아홉 명이 돈을 잃고, 만 달러의 지폐 더미만 남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컵을 가져와, 그 사나이는 거기 담긴 것의 맛을 보았다. 그는 잠시 놀라 더니, 다시 한번 맛을 보고는 눈가리개를 품고 말했다. "대체 누구요? 이것은 사람의 오줌이 지 포도주가 아니오"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알아맞혀 보시오, 그 렇지 않으면 당신이 지는 것입니다. 그거 신선한 것이니, 날짜에 신경 쓸 필요는 없소. 그러 나 누구 것인지 말해 보시오," 그러나 전문가가 하나 있다 모라지 에사이가 그곳에 있었다 면, 그것이 신선한지 아닌지도 알아 맞혔을 텐데, 그것이 힌두교도의 것인지 이슬람교도의 것인지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것이 어떤 왕족의 것인지 수드라 천민의 것인지, 혹 은 간디의 숭배자인지 그 반대자, 오쇼 라즈니쉬의 것인지도. 알겠는가? 3. 허공에 별이 뿌려지던 그 순간은 시간에 대하여 칼릴지브란은 그 자신 속에서 하나의 범주를 이루고 있다. 바로 그것이 그에게서 가장 놀 랍고도 신비스러운 부분이다. 그는 어느 순간 가장 높은 순위의 신비가-고타마 붓다, 예수, 소크라테스 같은 -로 보인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신비가는 사라지고, 아름답지만 알맹이 없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만 남는다. 그는 황금의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에는 진 정한 경험이 없고, 존재의 맛이 없다. 평범한 사람은 칼릴 지브란이 신비가일 때와 단순한 시인일 때를 구별하기가 몹시 어렵 다. 이따금 그가 그냥 시인일 때가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그는 시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노 래하는 강물과도 같다. 어떤 때 강물은 매우 깊어진다. 그러나 그때 거기에는 오직 침묵이 있을 뿐이다. 위의 시구들은 완전히 헤라클레이토스나 장자, 혹은 나가르주나의 입에서 나올 법한 것들 이다. 만약 붓다가 이런 말들을 했다면 전혀 놀랄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칼릴지브란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기적 같은 방법으로 오 직 깨달은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높이와 깊이를 가진 말을 했는지 놀랍다. 바로 그 자신 속에 하나의 범주를 이루고 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비가와 시인의 이상야릇한 혼합... 어떤 위대한 신비가도 시인으로서의 칼릴지브란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신 비기로서의 그는 아주 가끔씩만 열린 하늘로 날개를 펴고, 가없는 무한에 도달한다. 어떤 두 려움도 없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의 영혼에는 시인과 신비가가 둘 다 들어 있다. 그는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시인으로 깨어있을 때가 더욱 많고, 신비가로서는 어쩌다가 그럴 뿐이다. 그러나 이 둘의 혼합은... 칼 릴지브란을 제외하고는 오직 타고르만이 속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 이상야릇한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로는 이 두 사람밖에 모른다. 이따금 그의 신비성이 조금 깨어날 때, 하나의 창문이 미지의 세계로 열린다. 그는 하나의 번쩍이는 섬광을 본다. 그리고 그 번쩍이는 섬광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언어로 표현해서 그 스스로도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런던 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영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하나인 콜 리지의 시를 강의하다가 어떤 부분에서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 교수는 굉장히 정직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보통, 교수들은 전혀 정직하지 않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어도 이해하고 있는 척한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모른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교수는 드물다. "용서하시오. 나는 이 말들을 이해 할 수 있지만 그 말 뒤에 숨은 뜻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그는 콜리지를 찾아갔다. 그 노인은 정원에서 그의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 교수는 말했다. "이 부분이 내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던 부분입니다. 밤새도록 나는 이것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그 속에 몇 겹의 층이 있음을 알았지만,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물으러 왔습니다. 도대체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콜리지가 말했다. "당신은 매우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요. 내가 이 시를 썼을 때, 두 사람 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교수는 매우 기뻤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군요.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상 관없으니, 당신은 그저 내게 그 뜻만을 말해 주십시오." 시인은 대답했다. "당신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어요. 내가 그 시를 쓰고 있을 때, 두 사 람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었고, 신이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름다운 언어들, 그러나 본질 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용서해야만 해요. 어디선가 신을 만난다면, 신에게 물 어 보십시오.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물어 주십시오. 왜냐하면 나 역시 매우 난처하기 때문입 니다. 내게 와서 물어 분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입니 다. 시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 부분이 그들이 걸리는 곳 이라고 합니다. 이 막힌 구절은, 분명하지만 공허한 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위대한 시인 중의 하나이다. 독특한 재능을 가진, 그는 이따금씩 신비가로 변 신한다. 그리고 그 신비가가 말할 때, 칼릴 지브란은 말하지 않는다. 콜리지의 말에 의하면, "신이 말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매개가 되어 존재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도록 한다. 만약 그대가 그를 찾아간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이 말했던 많은 것들을 그 대에게 잘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이전에는 결코 그렇게 아름답게 말해질 수 없었던 구절들을 말이다. 그러자 이어 점성가가 말했다. 스승이여,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점성가는 끊임없이 시간의 실체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고, 그의 탐색의 전 부이다. 그가 대답했다. 너희는 잴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을 재고자 한다. 그는 그대의 노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그대는 '잴수도, 헤아릴 수도 없 는 시간을 재고자 한다. ' 이런 발상은 그대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삶에는 잴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차원 이 있다. 시간이란 그 중 한 면에 불과하다. 그런데 영어의 재다(measure)라는 단어가 산스크리트어에서 물질을 뜻하는 마트라(matra) 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트라란 잴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질은 잴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은 잴 수 없는 것이다. 영혼, 사랑, 시간과 같은 것들은 질로서 사실상 이것들을 재는 방법은 없다. 그대는 그것 들을 경험할 수는 있으나, 어떤 종류의 자로도 그 경험을 나타낼 수는 없다. 그대는 누군가 에게 그대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할 수 있는가? 1킬로미터? 2킬로미터? 혹은 1그 램? 2그램만큼? 그대는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늘 전체라 할지라도 너무 작아보일 것이다. 모든 잣대는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당신을 많이 사랑해." 하고 말할 때는, 그는 자기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이'라는 말은 양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신을 사랑해."로 충분하다. 아니면 아ㅖ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대의 눈이 사랑을 드러내도록 하고, 그대의 손이 사랑을 말하게 하고, 그대의 노래가 암시를 주고, 그대의 춤이 사랑을 보여 주게끔 하라. 사랑의 광대함을 하나의 작은 단어로 한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갇혀버리고 만다. 날개는 잘려 나가고 그것은 죽은 단어가 되어 버린다. 수많은 제자들로 인한 나의 경험은 고타마 붓다가 놓쳐 버린 이상야릇한 통찰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누구인가에게 "사랑해." 라고 말하는 순간... 주의하라! 그것 은 아마도 종말의 시작이 될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그것은 들린다.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대를 에워싼 모든 진동이 그대가 봄 속에서 꽃피며, 바람과 태양과 비 속에서 춤추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사랑 하고 있는 사람은 걸어가지 않고 춤춘다. 오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만이 걸어간다. 사랑이 그대의 존재에서 꽃피는 순간, 그 현상은 그대의 모든 것을 바뀌 놓을 만큼 압도 적이고 위대하다. 그대의 눈은 더 이상 예전처럼 멍하거나 죽어 있지 않다. 돌연 두 눈에서 불꽃이 튄다. 돌연 그대의 눈에서는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존재하게 된다. 천박한 표정은 사 라지고 깊이 이상의 깊이가 생긴다. 그대가 누구인가를 만지면, 그 손은 더 이상 물질적인 손이 아니다. 손을 통해 무엇인가 비물질적인 따뜻함이 흐르게 된다. 그대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느꼈을 것이다. 몇몇 사람과 손을 잡을 때는 마치 죽은 나뭇가지들과 악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드물게는, 손을 잡았을 때 단순한 악수가 아니라 두 에너지가 흘러들어가고, 상대방으로부터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다. 거기 에는 하나의 의사소통이, 하나의 영적 교섭이 있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너희는 잴 수도 없는 것을 재고자 한다." 부디 그렇게 어리석은 짓 은 하지 말라. 그러나 수세기 동안 점성가들은 그런 짓을 해왔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시간과 계절에 맞추고자 하며, 심지어 너희 영혼의 길마저 인도하 려고 한다. 점성가들은 수천 년 동안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왔다. 그들의 강박관념은 자기 자신들의 행동을 천문학적 계산에 맞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언제 결혼하게 될 것인가... 고대 인도의 점성술 책에 언제 부인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지, 그 시간까지 점성가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심지어는 그대의 잉태와 탄생까지도 별들과 그 움직임에 따라 결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도 - 언제 먹 어야 하고 언제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적어도 만 년 동안 자이나교도는 밤에는 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해가 떠 있을 동안에만 음식을 먹었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시간과 계절에 맞추고자 하며, 심지어 너희 영혼의 길마저 인도하려고 한다... ' 그대는 행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조차도 시간의 계 산과 별들에 의존하다. 바로 며칠 전에 스물한 살의 젊고 아름다운 자이나교 비구니가 자신이 머물던 사원에서 도망쳐 나왔다. 누구인가가 그녀를 유괴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진실은 달랐다. 이틀 후 그녀 의 부모가 그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나는 이제 성인입니다. 이제 스물한 살이 되었고, 내 인생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비구니가 되어 세상을 버리도록 강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점성가가 말하기를, 내가 아홉 살이 되는 특정한 달의 특정한 날에 비구니가 되면 내가 해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모도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인도에서 딸은 처음에는 짐일 뿐이다. 곧 그들 은 그녀를 결혼기켜야 한다. 결혼은 이 나라에서 몹시 추한 것이다. 신랑 아버지는 여자 쪽 에 돈을 요구한다. 만약 그 청년이 의사라면, 그의 교육에 들어간 모든 비용을 요구할 것이 다. 어떤 딸의 부모라도 자기 자식이 좋은 집안으로 가기를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딸이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도록 하기 위해서 집을 팔고 땅을 판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좋은 기회이다. 뀡도 먹고 알도 먹는 기회이다. 결혼 걱정은 끝난 것 이다. 비구니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낼 것이고, 또한 해탈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까지 있다. 왜냐하면 점성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경전은 그대의 아들이나 딸이 해탈하면, 그대가 축복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해탈한 아들이 나 딸을 가진 것으로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축복을 받는다. 게다가 그들의 의식속에서, 그것 은 자신들의 피와 뼈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은 사람의 영광이 그들 부모의 삶에 반영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 딸에게 그렇게 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무슨 일이 일 어나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그 얄팍한 어리석음의 진상 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녀는 도망쳤다. 그리고 그녀는 부모를 위협했다. "만약 당신들이 나 를 찾아 그곳으로 되돌려보내려 한다면, 나는 내가 당한 온갖 고문을 폭로해 버릴 것입니다. 내가 받은 모든 박해와 변태적인 대우들을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들 종교의 수도승과 비구 니들, 그리고 당신들의 , 소위 청렴과 독신을 보호하고 싶다면, 나를 완전히 잊어 주십시오. 나를 찾으려 하지 말아 주십시오." 별들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너희는 시간을 강물로 만들어 둑 위에 앉아 그 흐름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의 방식이며 사색가의 방식이다. 그에게 시간은 그저 강물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강둑에 앉아 그 흐름에 대해 계속 사색한다. 저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 는가... 그러나 진실은 전혀 다를 것이다. 시간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우리가 오고, 우리가 가는 것이다. 시간은 그대로 있다. 언 제나 그대로 있었다. 시간은 흐름이 아니다. 우리가 흘러간다. 시간은 흐름일 수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물리학이 칼릴 지브란을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문제의 초점을 공간의 차원, 4차원의 공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이 4차원의 공간이라면, 이는 공간이 어디로 가지 않고, 시간 역시 어디로도 가 지 않음을 의미한다. 계절은 오고 가며, 사람도 오고 간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 면 나무들이 옷을 벗는다.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간다. 그러나 기억하라. 공간과 시간은 어디 로고 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전에는 아무도 시간을 흐름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모든 문화와 문명, 모든 세대가 시간을 하나의 흐름으로 여겨 왔 다. 거기에는 어떤 심리적인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왜 전체 인류가 언제나 같은 방식(흐 름)으로 시간을 생각했을까? 내가 보기에 - 나는 매우 의미 깊은 심리적 측면을 본다 - 그것은 우리가 흐름이기를 원 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히 여기, 이 순간이고 싶어한다. 계절이 바뀌고, 아침이 오고, 저녁이 찾아오며, 밤이 낮으로 바뀌고, 낮이 밤으로 바뀐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 간다. 다만 우리만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미지의 것에 대한 우 리의 두려움... 왜냐하면 변화는 그대를 미지의 세계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변화는 반드시 그 대를 미지의 세계로 들여보내게 되어있다. 우리는 어린 세대가 변화하는 것을 본다. 젊은이와 중년 노인들이 변해 가는 것도 보지만, 그러한 변화에 우리는 그대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변화한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안다. 우리는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기를 두려워한다. 참된 명상가는 자신의 육체 속에서,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의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변화하는 모든 것을 의식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은 변화를 계속하고, 그대의 감정은 변 화를 계속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핵심인 태풍의 눈, 곧 그대의 영혼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왔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영혼을 '시간'으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는 마하비라였다. 그는 영혼을 사마야(samaya), 즉 시간이라고 불렀 다.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시간 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계속 흘러간다. 그대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크쉬(sakshi ; 지켜보는 자), 변하지 않고 지켜보는 자가 있다. 이 지켜보는 자가 다름 아닌 시간이다. 그러나 인간 역사를 통틀어 오직 한 사람만이 영혼 을 시간이라고 불렀다. 만약 그대가 그대 밖이나 안, 주위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지켜보는 자가 된다면, 조만간 무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 지켜봄은 영원하다. 그 지 켜봄은 그대의 불멸성이다. 그 지켜봄은 죽음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 속의 영원은 생명의 영원성을 알고 있으니, 바로 이것이 칼릴 지브란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점이다. 어 쨌든 그는 마하비라와 같은 범주의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정확하게 마하비 라와 똑같다. 그는 말한다. '하지만 너희 속의 영원은 생명의 영원성을 알고 있으니...' 왜냐 하면 그대가 시간을 흐름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대는 그것을 무한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대는 시간과 변화를 동의어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기 내부에 있는, 변하지 않는 무한한 존재의 가장 깊숙한 핵심을 의심하고 있다. 또한 모든 변화가 표면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죽음에 있어서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똑같다. 단지 바로 그 생각만으로 도 웅장한 고요와 침묵이 그대에게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란 다만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인 것을 알라. 시인들이 이런 말을 하리라고 기대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차원이 아니다. '어제란 다만 오늘의 추억...' 뒤에 남아 있는 어제는 없다. 그것은 다른 역을 뒤에 남겨두고 다음 역 으로 가야만 하는 기찻길 같은 것이 아니다. 어제는 그대와 함께 왔다. 뒤에 남지 않고, 추 억으로서 그대와 함께 도착했다. 오늘의 추억- 내일도 그것과 똑같을 것이다. 내일은 그대를 만나기 위해 어디선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이미 그대의 꿈속에, 상상 속에 내일을 가지고 있다. 어제는 그대의 추억이다. 미래는 그대의 꿈이다. 그러나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오 늘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 속의 노래와 묵상이 허공에 별이 뿌려지던 그 최초의 순간 속에 여전히 살 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굉장한 가능성을 지닌 말이다. 그는 말한다. "바로 이 순간, 너희 속에 살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너희는 별들이 하늘에 뿌려지던 처음 그 순간, 그 태초를 떠나지 않 았다. 그 태초의 순간이 여전히 너희 안에 있다. 너희의 추억으로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나, 논리적으로 자명한 결과가 아닌 가... 별들이 하늘에 뿌려지던 처음의 순간이 그대속에 살고 있다면, 뿌려졌던 모든 별들이 그물 속으로 다시 끌어올려져 사라질 마지막 순간 역시 그대 속에, 그대의 꿈속에 살고 있 는 것이다. 그대는 영원 전체를 바로 이 순간 속에 담을 수 있다.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가 이 작은 순간 속에 담겨 있다. 순간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가 순간의 무한성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너희 중 누가 그 무한한 사랑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는 단지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 안에서 사랑을 향한 무한한 힘을 느 낀다. 그러나 그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무한이 존재 할 수 있는가? 그대는 레오 톨스토이의 유명한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 가>를 읽었을 것이다. 그대의 무한은 어느 정도 크기일 것 같은가? 이 작은 육체 속에 무한한 것이 있음을 그대는 의식한다. 그는 사랑을 예로 든다. 왜냐하 면 그것이 좀더 대중적이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간 또는 그 무 한성을 지닌 채 그대 안에 있다. 언어학적으로는 옳지 않을지 모르지만 - 그러나 나는 언어네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진실 에만 관심이 있다. - '사랑이 내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사랑 속에 있 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때 그대의 한계는 사랑의 한계가 될 수 없다. 아마 도 그대는 사랑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식도 없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대 가 의식을 지니고 사랑했었다면, 그대는 '사랑이 내 가슴속에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 다. 사랑은 그대 가슴속에 없다. 그대의 가슴이 사랑속에 있다. 사랑이 그대를 에워싸고 있다... 무한한 사랑이, 어떤 연인도 사랑하면서 만족을 얻지 못하 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무한하고, 무한한 반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연인은 한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사랑에는 어떤 한계도 없을 것이지만 사랑이 그대 속에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 사랑을 작은 것으로 만든다. 그대, 물고기가 바다에 살 듯이 그렇게 사랑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때 그대는 아 무 두려움 없이 그대의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대는 사랑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 을 알게 된다. 사랑 때문에 그토록 불행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사랑이 그대를 감싸는 바다와 같은 느낌으로 이해된다면, 거기에 질투란 없을 것이 다. 질투는 모든 사랑과 그 기쁨을 죽이는 독약이다. 질투는 그대의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다. 우리는 사랑 또한 양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다. 만약 그대가 사랑하 는 상대방이 다른 사람도 사랑한다면... 그대는 곧 두려워진다. 상대방은 그대를 2킬로그램만 큼 사랑했었는데, 지금은 1킬로그램만큼이다. 그리고 내일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발견한다 면, 오직 0.5킬로그램만... 이런식으로 그대의 사랑은 사라져 갈 것이다. 모든 질투는, 사랑이 나누어 질 수 있는 양의 개념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랑은 하나의 질이다. 그대느 주고 싶은 만큼, 주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온세상 모두에게 줄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그대의 원천은 마르지 않는다. 질투를 일으키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 내 꿈속에 있는 미래의 인류는 그런 모습을 갖고 있다. 나는 그렇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안다. 질 투도, 분노도, 사소한 일로 인한 다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소중한 보물인 사랑 을 가졌는데, 누가 그런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보이겠는가? 사랑은 그대에게 다른 만족이 필요 없는 만족이다. 사랑은 바로 그대의 영혼을 살찌우는 영양분이다. 질투 없는 사랑이 가능한 날, 우리는 신의 왕국을 지상으로 날라오게 될 것이 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누가 아직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비록 무한한 것이지만 존재의 한가운데에 안겨 있는 사랑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둘레는 하늘보다 더 크고, 그 중심은 바로 우리의 존재 안에 있다. 사랑의 생각으로부터 사랑의 생각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 의 행위로 움직이지 않는 그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사랑은 흐름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랑의 생각에서 다른 사랑의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한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의 행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행위나 생각이나 감정은 모두 사랑의 대양 속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그대로이다. 영 원하고, 불멸하며, 궁극적인 상태인 채로...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나눌 수 없는 무한함이 아닌가? 알무스타파는 자기 결론을 아름다운 귀결로 이끌어냈다.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내 생각 엔 점성가가 그의 말을 이해했을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점성가란 바보의 한 범주이기 때 문이다. 거기에 수많은 범주가 있지만, 점성가는 매우 특이한 범주이다. 그들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칼릴 지브란의 전체적인 논의는 사랑과 시간의 동시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시간을 논의 하기란 힘들다. 누구의 경험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나눌 수 없는 무한함이 아닌가? 하지만 너희의 생각으로 계절에 맞 추어 시간을 재야 하겠다면 각 계절로 하여금 다른 모든 계절들을 둘러싸게 하라. 그는 말한다. "나는 너희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아마도 너희는 그러한 깊이와 높이에는 이 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시간을 재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기억하라. 시 간을 계절에 맞추어 재려 한다면 각 계절로 하여금 다른 모든 계절들을 둘러싸게 하라. 너 희의 탄생과 죽음을 하나로 여기라. 탄생과 죽음을 나누지 말라. 가을과 봄을 하나로 여기 라. 그것들을 나누지 말라." 그대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대는 죽어 가기 시작한다. 그대는 70년 후의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이 완성되는 순간 죽음 또한 완성된다. 그들은 함께 이 세상으로 와서 함께 사라진다. 그들은 다른 두 개의 것이 아니다. 각 계절로 하여금 다른 모든 계절들을 둘러싸게 하라. 그리고 오늘로 하여금 과거를 추억 과 더불어, 미래를 갈망과 더불어 맞이하게 하라. 만약 그대가 그것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면 - 가장 좋은 것은 분리 될 수 없는 것이지 만, 존재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그대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 다음을 기억하라. '오늘로 하여금 과거를 추억과 더불어, 미래를 갈망과 더불어 맞이하게 하라.' 현재의 이 순간 속에서 그대의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가 만나게끔 하라. 모든 과거와 모 든 미래를 담고 있는 이 순간만이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실재이다. 현재 이순간은 시간 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항상 현재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은 일화가 하나 있다. 법조계에 저명한 무신론자가 있었는데 그는 언제 나 신에 대한 토론을 즐겼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너뜨리기 쉬운 것은 신이다. 신이란 가장 무방비한 가설이다. 그는 언 제나 신의 문제를 화제에 올려, 친구 혹은 낯선 사람과 토론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이 늘 쉽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날씨 얘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채식 얘기 를 한다. 어떻게 신을 끄집어 낼 것인가?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궁리를 해냈다 그는 자기 뒤 에 있는 벽에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썼다. "신은 어디에도 없다(GOD IS NOWHERE)." 따 라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호기심이 나서 이렇게 묻게끔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하군요, 왜 거기다 그런 글을 써 놓았습니까? 당신 은 신을 믿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의 응접실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그와 신에 대해 토론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논쟁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느 날, 이제 막 글씨를 배우기 시작하여 겨우 짧은 단어를 읽을 수 있는, 하지만 긴 단 어는 발음할 수 없는 그의 어린 아들이 두세 명의 낯선 손님과 함께 그 방에 앉아 있었다. 손님들은 벽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도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전부터 그 집에 살았지만 그 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 글씨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 처 음 무엇을 배우려 할 때는 그것에 숙달하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곤 한다. - 아이는 그 글씨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 신... 은... "모든 사람들이 그가 읽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nowhere)는 그 아이에게 너무 힘겨운 단어였다. 그래서 아이는 'nowhere'를 두단어로 나누어 읽었다. "신은 지금(now) 여기에(here)있다. "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방에 들어왔었지만 아무도 '어디에도'를 '지금, 여기에'로 만들지 않았었다. 페르시아의 어느 수피는 "그대가 이해할 수 없을 때, 신은 때때로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그대에게 말한다."고 했다. 그대는 어린아이와 논쟁할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가 아 니라 '어디에도'라고 읽어야 해."하고 아이에게 말할 수 없다. 그 아이는 그것을 반복해서 읽 기 시작했다. "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날 밤 그 아버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들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아들과 논쟁하기란 어렵다. "신은 없단다"하고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이는 말했다. "만약 신이 없다면, 어떻게 신이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나요?"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신론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 녀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 적도 없었다. 내가 했던 모든 논쟁은 오직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에게 실존적 경험이 없다. 나는 명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한번도 '지금, 여 기에'가 의미하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만약 그대가 '지금, 여기에'의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신이 라고 불렀던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진리라 불러 왔고 어떤 이는 사랑, 어떤 이는 아름다움이라 불러 왔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건 상관없다. 그러나 '어디에도'와 '지금, 여기에 '사이에는 너무나도 막막하고 건너기 힘든 거리가 있다. 부정의 문장이 절대 긍정의 문장으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시간이 4차원을 공간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발견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이 란 시간이고 '여기'는 공간이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지금'과 '여기'가 함께 있는 곳에서 전 우주의 삼라만상은 그대 손안에 있다. 알겠는가? 4. 열매가 뿌리에게 하는 말 선과 악에 대하여 1 칼릴 지브란의 말 하나하나가 함축하는 모든 뜻이 이해되어야 한다. 왜 그 도시의 노인 이 질문했는가? 왜 젊은이가 아닌가? 왜 어린이는 아닌가? 어린이는 너무 천진난만해서 선과 악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러한 의문은 떠오 르지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깨달은 인간이 도달한 궁극의 경지와 비슷하다. 깨달은 자에게 선과 악은 없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 어떤 차이, 아주 커다란 차이를 갖고 - 다시 돌아간다. 그 어린이는 무지했 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참으로 순수하다. 그리고 무지와 순수 사이의 경계선은 아주 분명하 다. 그대가 선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또한 악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종교와 성자들의 가장 큰 분행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선을 선택했고, 악을 억눌렀다. 왜냐 하면 이런 분리는 그들 자신을 갈라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고 찢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인류 전체를 정신분열증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어린이가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젊은이가 그 질문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 삶은 강하게 그를 빨아들이는 것이고, 삶의 노래는 가득 채워지며, 그의 심장은 사랑으로 뛰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선 과 악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로지 나이 많은 이들...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텅 비어 버린 사람들... 그들은 할 일이 없다. 어린이들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젊은이들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만, 노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눈에 놀라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이 많기 때문에, 아무 것도 그를 놀라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랑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증오 로 변화시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는 살고 있지만 그것은 텅빈 삶이다. 그리고 이런 공허한 사람들은 판단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들은 아무일도 직접 할 수 없다. 그러나 적 어도 그들의 흔들의자에 앉아, 모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있다. - 누구는 선하고 누구는 악 하며, 누가 죄인이고, 누가 성자인지를. 성자와 죄인은 다른 범주가 아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다르지만, 그러나 그들은 같은 우 물에서 선택했다. 선이 온 곳에서 악이 온다. 그리고 그대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대는 고통 스러울 것이다. 선택은 괴로움을 가져다준다. 그대가 선을 선택한다면, 그대 안의 악이 끊임없이 갈등과 후회와 의심을 만들어 낼 것이다. "어쩌면 악을 선택한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선을 선택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것은 심각하고 진지한 것들뿐이다." 성자는 미소지을 수 없다. 성자는 춤을 출 수 없다. 그는 두려워한다. 노래가 그를 악으로 이끌지 않을까, 춤이 그가 버렸던 것들로 그를 몰고 가지나 않을까 해서. 그러나 단순히 버 림으로써 어떤 것을 제거할 수는 없다. 버린 것들은 그대의 무의식에 남아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보면, 한순간의 깨들음으로 죄인이 성자가 되어 버린 경우가 많이 있 다. 그리고 소의 성자라는 사람이 한순간 깨어있지 못함으로 인해 죄인으로 전락해 버린 경 우가 허다하다. 고타마 붓다의 제자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는 매우 건강하고, 아름답고, 상당히 교양 있는 젊은 승려였다. 그는 고타마 붓다처럼 왕족 출신으로 왕국을 버리고 출가 했다. 서양에서는 클레오파트라를 인류 역사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생각한다. 동양 의 클레오파트라는 암라팔리(Amrapali)이다. 그녀는 고타마 붓다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워서 그녀의 저택 대문 앞에는 언제나 황금마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왕조차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한낱 창녀에 불과했으나, 큰 부자가 되었기 때문 에 왕국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깊은 내부에서,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아름다운 육체에는 사랑을 갈망하는 아름다운 영혼도 역시 깃들여 있었다. 남자가 그녀의 육체를 사려고 오면, 그녀는 그를 몹시 사랑하는 체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 가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는 자기를 살 수 있는 대상, 물건 으로 사용하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들은 그녀를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다. 가장 치명적인 아픔, 상처는 그대가 죽은 물건으로 다루어지고, 그대의 성실성, 그대의 개 체성이 모욕당했을 때이다. 그 젊은 승려는 구걸하러 큰 도시로 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는 아름다운 말이 매어 진 수많은 황금 마차들 앞을 지나갔다. 그는 놀랐다. '누가 이런 저택에 살까? ' 그가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암라팔리는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가슴에 는 사랑이 솟아올랐다.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젊은 승려가 그녀를 본 순간, 그는 깊은 존경심에서 그녀에게 절을 했다. 그와 같은 아름다움은 존경받아야 하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감상되어야 할 존재의 위대한 선물이지 모욕당해야 할 그 무엇은 아니다. 이 아름답고 젊은 승려가 절을 한 순간, 갑자기 강렬한 에너지가 암라팔리의 내부에서 솟 구쳤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그녀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녀에게 인간으로서의 가치 를 부여해 주었다. 그녀는 달려 내려가 그 승려의 발을 만지면서 말했다. " 부디 다른 곳으 로 가지 마세요, 오늘은 저의 손님이 되어 주세요." 그는 말했다. "나의 비구니, 거지입니다. 당신의 훌륭한 저택 안에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왕들이 있는 곳에서 그것은 좋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 그녀는 말했다. "왕들 따위는 잊어버리세요 저는 그들을 증오해요! 저의 초대를 거절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제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와 왕들로부 터 수천 번 초대받았지만, 저는 아무도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디 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저의 첫 초대이니까요. 저와 함께 식사를 해주십시오." 그 승려는 승낙했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승려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붓다는 어디 를 가건 만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움직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눈을 의 심했다. 그 젊은 승려가 창녀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와 분노를 느끼며 그들 은 고타마 붓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 자를 이 공동체에서 내쫓아야만 합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계율을 깨뜨렸습니다. 그는 창녀에게 절을 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초대까지 받아들여 그 집으로 들어가 거기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 붓다가 말했다. "그를 데려오라." 우선 암라팔리는 그 승려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주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말 했다. "제가 부탁을 하나 드려도 좋을까요?" 젊은 승려는 대답했다. "나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내 능력이 닿는다 면 당신이 원하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흘이나 나흘 후면 우기가 시작될 것 입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비오는 계절에 넉달 동안 한 곳에 모무르는 것이 계율이었다. 1 년 중 8개월 동안은 끊임없이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지만, 비가 오는 4개월 동안은 피난 처를 구할 수 있는 곳에서 머무르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암라팔리는 "돌아오는 넉 달동안은 이 저택이 당신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편안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번 넉 달 동안은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그 승려는 대답했다. "스승께 여쭤 보아야만 합니다. 그가 허락한다면 머물 것입니다. 그 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를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저의 스승입니다." 그는 돌아갔다. 모두들 시기하고 화를 내며 붓다가 그를 벌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붓다 는 물었다. "모두 내게 말해 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는 붓다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그는 암라팔리의 이야기도 했다. 그는 '창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판단이다. 그대는 바로 그 단어로 이미 그녀를 비난했고, 그녀가 몸을 판다는 것을 비난했으며, 그녀가 사랑을 팔고, 그 사랑이 상품임을 비난해싿. 만약 그 대가 돈이 있다면, 그대도 그것을 살 수 있다. 그는 말했다. "암라팔리는 돌아오는 우기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스승께서 허락하신다면 저 는 그녀의 저택에 머물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여 명의 승려들 사이에 거대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고타마 붓다가 이렇게 말하리라고 생각지 않 았다. "암라팔리와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무 슨 말을 들었던 것인지? 세상을 버린 승려가 창녀의 집에서 넉 달 동안 머물 것이라니? 한 늙은 승려가 일어나 말했다. "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을 숨기고 있습니 다. 그는 암라팔리라는 여자가 자기 자신을 초대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 라 창녀란 말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창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 에 나는 그가 거기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그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판단도 비난도 없다. 그 자신은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스승에게 들으러 여기에 온 것이 다. 네가 거기에 머물어도 되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또다른 승려가 말했다. "이상한 결정이십니다. 우리는 승려 하나를 앓을 것입니다.! 그 여 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라 유혹적인 여자입니다. 이 사람은 넉 달 후에도 도덕적인 삶, 선한 삶, 성자의 삶을 완전히 잃게 될 것입니다. 넉 달 후에 그는 죄인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말했다. "넉 달 후에 그대는 여기에 있을 것이고, 나도 여기에 있을 것이 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 볼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볼 좋은 기회이 며, 불의 시험이다. 넉 달 동안 기다려 보자." 그 넉 달은 승려들에게 몹시 길었다. 하루하루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는지를 상상했고, 밤에는 그것에 대해 꿈을 꾸었다. 넉 달 후에 그 승려는 뒤따르는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돌아왔다. 그는 붓다에게 말했다. "이 여인이 암라팔리입니다. 그녀는 우리의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녀를 추천합니다. 그녀는 특별한 여자입니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상상하시는 것처럼 맑은 영혼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고타마 붓다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것은 만여 명의 승려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 다.! 붓다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번 넉 달이 매우 길었던 것을 안다. 그리고 너희는 몹 시 괴로웠었다. 낮이나 밤이나 그대들의 머리는 그와 암라팔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 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저 여인과 사랑에 빠져 하수구로 굴러떨어졌음에 틀림없다. 넉 달은 지나갈 것이고 비는 그칠 것이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무슨 낯 으로 돌아온단 말인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너희가 보았듯, 의식 있는 사람이 창녀의 집으로 들어갈 때, 변화하는 것은 창녀이지 의식 있는 사람이 아니다. 천박한 자가 지고한 이를 만났을 때, 변화되는 것은 언제나 천박한 쪽이다. 지고한 이는 타락할 수 없다." 그녀는 1백 평방미터쯤 되는 거대한 망고 숲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고타마 붓다에게 바쳤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저택과 막대한 재산을 붓 다가 설법을 펼치는 데 쓰라고 기증했다. 붓다는 그의 상가(sangha), 그의 공동체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이 창녀와 함께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두려움은 그 창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너희의 무의식 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너희는 성을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가 깨끗하다면, 거기서 모든 판단은 사라진다." 깨달은 이에게는 선과 악의 판단이 없다. 그리고 어린이는 구별할 수 없기에 판단이 없다.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경험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깨달은 이들이 다시 어린이가 된다 는 것은 진실이다. 무지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으로... 그러나 모든 나이 많은 사람들이 깨 달은 존재는 아니다. 사실은 깨달은 존재여야 한다. 삶을 올바르게 살아 왔다면 - 방심하지 않고, 기쁨과 침묵으로 이해하면서 살아왔다면 - 그대는 나이만 먹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영 적으로 성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두 개의 다른 과정이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 지만, 모든 사람이 다 성숙하는 것은 아니다. 성숙이란 영적인 현상이다. 늙어가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다. 그대의 육체의 늙어 가지만 그대의 존재는 그대로 뒤처져 있다. 그대의 존재 역시 성숙한다면... 그 차이를 기억하라. 우 리는 존재가 나이를 먹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결코 늙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높 이, 더 높이 성숙할 뿐이다. 존재는 언제나 젊음으로 남아 있다. 아침 햇살 속에서 연꽃잎 취에 빛나고 있는 이슬 방울처럼 신선하게. 내 너희 안에 있는 선에 대하여 말할 수는 있으나 악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구절이어서, 만약 그대가 이말을 이해한다면, 인간에 관한 그대의 모든 접근 - 판단 - 이 바뀌게 될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너희 안의 선에 대하여 말할 수는 있으나 악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 왜? 악이란 단지 선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부재하는 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하 겠는가? 그것은 어둠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빛에 대해 말할 수 있으나 어둠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 처음부터 어둠은 없었다. 그것은 부재였다. 촛불을 켜면, 어둠은 더 이상 거기에 없 다. 그리고 알무스타파는 그것에 관해 아름다운 얘기를 한다. 악이란 무엇인가, 다만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닌가? 어둠은 빛에 대한 굶주림이다. 그것은 빛에 대한 갈증이다. 왜냐하면 어둠은 공허하기 때 문이다. 그리고 선과 악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그것은 둘이 아니다. 선은 긍정의 존재를 지니고 있다. 죄인은 단지 성자가 되는 길을 찾는 사람일 뿐이다. 죄 인을 비난하지 말라. 그는 어둠 속에서 찾고 있다. 그를 도와주라 계속해서 그를 비판하고 벌하려 하지 말라. 그에게 이렇게 말하지도 말라. "너는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 가엾 은 사람은 빛이 있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애쓰는 중이다. 만약 그대가 종교적인 선생을 찾아가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악과 싸우지 말라. 왜 냐하면 악에 대항하는 것은 너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과 싸워선 빛을 만들 수 없다. 빛을 찾으라. 불을 밝히라. 그때 어둠은 사라질 것이다. " 알무스타파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나는 너희 안의 악에 대해서가 아니라 선에 대해 말할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통찰력으로 삶을 일깨운다. 악이란 무엇인가, 다만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닌가? 이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심오하다. 모든 아이들은 선하게 태어난다. 어떤 아이도 히 틀러나 스탈린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도 노력은 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미술학교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에게 피카소 같은 천재가 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최소한 좋은 화가는 되 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6백만의 사람들이 죽임 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술학교에서 거절당했을 때 그는 건축가가 되고가 생각했지만 다시 좌절했다. 우리는 씨앗이 아니라 꽃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우리의 인식은 너무 얕아서 씨앗 속에 있는 꽃을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모든 교육체계는 범죄이다. 그들은 그대가 활짝 피어난 꽃으로 향기를 뿜으며 오길 바란다. 그때 그대는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꽃이라면 왜 가겠는가? 내부에서 괴로워하는 씨앗은 자라나길 원하고, 푸른 잎을 틔워 햇빛 속에서 춤추길 원하고,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에게 기회를 주라. 또한 모든 꽃에게 장미가 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금잔화면 어떤가? 금잔 화가 장미가 되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금잔화일 수밖에 없다. 이돌프 히틀러의 노력은 창조성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거절은 상처를 주었 다. 그리고 그 상처가 그를 정치가로 바꿔 버렸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2차대전은 그를 거 절했던 사람들, 그의 창조성과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갈망을 박대했던 사람들 에 대한 복수극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창조성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파괴성이 되어 버린다. 그대가 사랑하지 않으면, 그대는 증오하게 된다. 그대가 그대의 선이 성숙되게 하지 않는다면, 그대 는 악의 어둠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실로 선이 굶주리면... 그대의 내면에 있는 핵심적 존재는 선을 원하지만, 음식도 없고 누구도 지지해 주지 않는 다면,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캄캄한 동굴에서라도 먹이를 찾고, 목마르면 썩은 물이라도 마셔야 하는 법. 그리하여 그대는 그를 비난한다. 그는 악하고, 살인자이며, 도둑이다. 그대는 그저 인간에 불과한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그대들의 전체 사회는 너무 강력해서, 만약 사회가 산 개인을, 그의 선을 말살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가능한 방법이 많다. 그대가 배고플 때 무엇이라도 먹으려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나무 뿌리를 먹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대는 나무 열매를 먹지만, 열매가 허용되지 않을 때는 뿌리를 먹기 시작한다. 극심한 기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식까지 먹으려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악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대는 그들을 악마라고 부르겠는가? 아니면 단순히 그들의 선이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 했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사막에서 목이 마르다면, 그대는 어떤 것이라도 마실 수 있 다. 하수도에 고인 물이라도... 그것이 하수도 물이라고 두 번 다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삶이란 그토록 귀중하다. 너희는 자아와 하나가 될 대 선하다. 그대의 어떤 종교들도 그대가 선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대가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를 둘로 나눈다. 그들은 말한다."이 것은 선하다. 그리고 저것은 악하다. 악한 부분은 무시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선한 부분만을 살려 두어야 한다. " 모든 종교는 인간의 즐거움과 기쁨을 파괴해왔다. 이상 하게도 그들은 온갖 종류의 광기, 자살 살인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를 두 개로 잘랐다. 그것은 마치 새를 두 부분으로 나눈 것과 같다. 그 새들은 날지 못한다. 나는 데는 날개 두 개가 모 두 필요하다. 그대의 선과 소위 그대의 악이라는 것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 그대의 인격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일 때, 그대의 삶은 황금빛을 발한다. 너희는 자아와 하나가 될 때 선하다. 하지만 너희가 비록 자아와 하나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악한 것은 아니다. 칼릴 지브란은 바로 그 뿌리로 파고들어가려 한다. '너희는 자아와 하나가 될 때 선하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자아와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 그 대가 자아와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그대에게는 단순히 선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악이라 부르지 말라. 바로 그 단어가 불필요하게 그대를 비난한다. 집이 어두울 때는 단지 빛이 필요한 것이다. 어둠을 비난하지 말라. 현자는 어둠까지도 즐길 것이다. 왜냐하면 어둠 은 빛이 가지지 못한 그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고요,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서는 이 작은 장소가 엄청나게 커진다. 왜나하면, 어둠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밝음 속에서 는 모든 것에 한계가 생기고, 분리된다. 어둠 속에서는 모두 하나가 된다. 지혜로운 이는 악이라고 불리는 것일지라도 그의 선과 교향곡을 이루게 하려는 사람이다. 인간이란 오케스트라이다. 만약 그대가 음악이라는 예술을 모른다면, 그 오케스트라는 엉망 진창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예술을 안다면, 서로 다른 악기의 음악은 하나로 합쳐진 음악이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를 창조한다. 그리고 이 하나가 알무스타파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분된 집이라고 해서 도둑의 소굴은 아니며... 그대가 하나가 아닐지라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 내분된 집은 다만 갈등이 있는 집 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 없는 배가 위험스런 섬 사이를 목적도 없이 떠돌지라도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 니. 악한 사람은 단지 길을 잃었을 뿐이다. 비판하지 말고, 그에게 친절하가. 길을 맇었던 사 람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스스로 베풀고자 할 때의 너희는 선하다. 그는 선을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제 그는 그 한계를 넓힌다. 그대가 무 엇을 가졌든지, 그대 스스로 함께 나누라. 그것은 노래, 그리고 침묵이 될 수 있다. 그대가 가진 것을 공유하라. 그대가 함께 나누면 나눌수록 그대의 의식은 커지고, 자라나고, 팽창한 다. 의식의 확장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경험이다. 하지만 너희가 얻고자 발버둥친다. 하여도 악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악이라는 관념을 완전히 버리라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은 수세기 동안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도록 조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선이라면, 당연히 하나가 아닌 것이 악이다. 함께 나누는 것이 선이라면 - 그대의 마음은 재빨리 말한다. -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은 악이다. 칼릴 지브란의 노력은 굉장한 라치가 있 다. 그는 말한다. '하지만 너희가 얻고자 발버둥친다 하여도 악한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그대가 그대 자신을 위해 얻지 않는다면, 어떻게 함꼐 나누겠는가? 그대가 무엇을 나눌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의 고타마 붓다는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누기 이전에 그는 고타 마 붓다가 되어야만 한다. 너희가 얻으려고 발버둥칠 때 너희는 다만 대지에 달라붙어 그 가슴을 빠는 뿌리에 불과 한다. 그의 언어의 아름다움은 흠잡을 데가 없다. 그는 말한다. "너희가 이기적일 때, 명상적일 때, 그것은 단지 너희의 존재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때 너희는 어머니인 대지의 젖을 빠는 나무 뿌리와 같다. " 무엇을 위해? 그 즙은 지치고 피곤한 이들을 위해 나무를 타고 올라가 푸른 잎들을 무성한 그늘로 만든다. 아름다움, 빛깔, 향기를 감상할 줄 아는 이들을 위해 꽃을 피울 것이다. 바고픈 이들을 위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뿌리는 어머니인 대지의 젖을 빤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결실을 나누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대들은 명상할 때 그대 자신의 뿌리를 향해 가라. 그대가 뿌리를 찾지 못하면, 그대는 꽃과 열매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뿌리는 공유할 수 없다. 그러나 뿌리 없이 꽃과 열매는 없다. 사실, 꽃과 열매는 단지 뿌리의 확장이다. 뿌리가 함께 나누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악이라 부르지 말라. 직접적으로 그들은 공유하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그들의 삶이란 모두가 함께 나눌 꽃과 열매에 즙을 공급해 주는 것일 따름이다. 참으로 열매가 뿌리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으리라. "나와 같이, 무르익고 가득 넘쳐 언 제나 너희의 풍요를 주어라." 왜 열매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가? 열매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열매는 받아야 하듯, 뿌리는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유기적 합일체이다. 만약 거기에 주는 것만 있고 받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누구 에게 줄것인가? 만약 거기에 받는 사람만 있고 주는 사람이 없다면, 누구에게서 받을 것인 가? 생명은 주고받는 사아의 조화이다. 뿌리는 대지로부터 받고, 열매와 꽃은 대지에게 되돌 려준다. 이는 하나의 순환이다. 인간은 그의 무지로 인해 수많은 곳에서 그 순환을 깨뜨리고 있다. 심각한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지로부터 받지 만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대지는 천천히 불모의 땅이 되어가고, 죽어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무에게는 뿌리가 있고 그것으로 대지의 즙을 빨기 때문에 그대는 나무가 대지에 의존한 다고 생각한다. 그대 역시 대지에 의존한다. 그 열매들과 꽃들은 궁극적으로 그대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대는 반드시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대는 걸을 수 있는 나무이다. 우리는 나무이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매 초마다 그대는 숨을 내 쉬고 들이쉰다. 내쉬지 않으려고 애써 보아라. 그러면 그대는 죽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나눔이 곧 생명이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주고 받음이 있다. 태양은 그대에게 생명과 비타민을 주고 있다. 달은 그대에게 배우 신비스러운 그 무엇을 준다. 마하비라를 제외한 모든 신비가들은 모두 보름 달이 뜬 밤에 깨달았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보통 때보다 두 배나 되는 사람들이 미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다. 보름달이 뜬 밤은 그런 것들과 중요한 관계가 있다. 깨달음에서부터 살인에 이르기까지... 보름달이 뜨는 밤은 그대를 어떻게든 자극한다. 만약 그대가 깊은 명상에 들어간다면, 보름달은 그대를 더욱 깊은 명상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그대가 누구인가를 죽이고 싶어한다면, 그런데 용기가 없었다면, 보름달은 그대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따라서 전에는 불가능했던 것이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가능해 진다. 구르지예프는 그것이 한 방향으로만 치우칠 후 없다는 대단한 통찰력을 가졌었다. 마치 나무와 우리가 주고받는 것처럼,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받아야 하며, 주어야만 한다. 달에게 주어야만 하고 달로부터 받아야만 한다. 주고받는 것은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정 확히 태양에게, 달에게, 무엇을 주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주어야 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만간 우리는 태양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어느 날 태양이 뜨지 않는다면, 그대는 일어날 수도 없고, 침대 속에서 아침 차를 끓여 마실 수조차 없게 된다. 그대는 끝장나는 것이다. 그대의 생명은 저 머나먼 별, 태양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생각한다. 증거는 없지만 나는 구르지예프의 말이 맞는다는데 동의한 다. 만약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죽는다면, 태양은 그 다음날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저 맏기만 하고 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태양 으로부터 받고 있다면, 우리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태양에게 생명을 주고 있어야만 한다. 우 리는 모두가 연결된 전체이며, 내면으로 연관된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결론으 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차원에서 풍부해 지라. 사랑으로 넘쳐 흐르도록 하라. 창조 적, 명상적이 되라. 그리고 함께 나누라. 그대가 더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존재들이 그대에게 기쁨과 황홀의 꽃들을 퍼부을 것이다. 오직 하나의 선은 통일성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속의 끊임없는 갈등 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등은 그대를 파괴하며, 함께 나누어야 할 에너지를 고갈 시키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일 때 에너지는 아주 풍부해져서 그대는 비를 잔뜩 머금은 구 름처럼 된다. 그리하여 구름은 여기 저기에 비를 뿌리고 싶어진다. 함께 나누는 것은 가장 귀중한 종교적 경험이다. 함께 나눔이 선이다. 그리고 알무스타파 는 말한다. "나는 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단지 선의 부내일 뿐이 기 때문이다. " 불행이 악이다. 필요하든 불필요하든 그대는 악을 움켜 쥔다. 그대는 삶의 가장 큰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 잃어버린 것이란 주는 것이다. 감사로써 받으라. 겸손으로 주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