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무한 잎새의 연꽃이 피어난다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또 한 남자가 말했다.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가슴은 침묵 속에서 낮과 밤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의 귀는 가슴이 아는 것을 소리로 듣고자 목말라한다. 생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너희는 말로써 알고자 한다. 너희는 너희 꿈의 벗은 몸뚱이를 손가락을 만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너희 영혼의 보이지 않는 샘은 마침내 솟아올라 소리내며 바다로 흘러가야만 하는 것. 너희 내면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보물도 너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 미지의 보물의 무게를 결코 저울로 달려고는 하지 말며, 너희의 앎의 깊이를 자와 끈으로 재려고는 하지 말라. 자아란 잴 수 없는 무한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는 "나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하라. "나는 영혼의 길을 찾았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차라리 "나는 내 길 위를 걷는 영혼을 만났노라."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영혼이란 모든 길을 다 걷는 것. 영혼은 하나의 길을 따라 걷는 것도, 또 갈대처럼 자라는 것도 아니다. 영혼은 무한 잎새의 연꽃이 피어나듯이 스스로 열리는 것. 칼릴 지브란..... 나는 그를 사랑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도 드물다. 그러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참으 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무한히 사랑한다. 그가 옳지 않을 때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랑 때문이다. 사실 여러 군데의 문장에서 그는 옳지 않다. 또 옳을 수가 없었다. 그 래서 나는 더욱 그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그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알지 못했다. 대 부분의 시간을 그는 시인으로, 꿈꾸는 자로 남아 있다. 그의 시는 아름 다우며, 그의 꿈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진 리가 아니다. 때로 나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칼릴 지브란 의 뛰어난 능력이 오히려 그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고...... 독자들로서는 그가 어디쯤에서 땅 위를 걷고 있으며, 어디쯤에서 하 늘을 날고 있는지 발견하기 어렵다. 나는 땅 위도 걸어 보았고, 인간에 게 가능한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도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꼭대 기에 대하여 꿈만 꾸었을 뿐이다. 만일 그가 그토록 뛰어난 시인이 아니 었다면 그는 진리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실로 예외적인 경우다. 진리를 발견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것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은 정반대다. 그는 진 리를 발견하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시가 마치 진정한 지혜의 샘 에서 솟아나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을 그렇지 않다. 왜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지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또 한 남자가 말했다.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 십시오. 먼저 이점에 주목하라. 남성이 질문할 때와 여성이 질문할 때의 차이 를 느끼겠는가? 여성은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하여 묻는다. 그만 큼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남성은 방랑자다. 남성은 많은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또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 여성의 경우는 몇가 지 기본적인 사실만 알면 만족한다. 그것만으로도 여성의 존재는 변화 한다. 하지만 남성의 호기심은 한계를 모른다. 이 질문은 질문자가 명상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지금 이 질문자는 누구도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이 질문자는 틀림없이 학식있는 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지금 전시효과를 노리고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학자가 평범하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겠는가? 학자는 마땅 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서 이 질문을 던졌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의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내 주고 있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가슴은 침묵 속에서 낮과 밤의 비밀을 알고 있다. 칼릴 지브란은 결코 가슴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가슴은 그대 가 아니며, 또 가슴은 자기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머리보다 나을지는 몰라도, 자기를 아는 일은 머리와 마음을 동시에 뛰어넘고, 생각과 느낌 을 동시에 초월하는 일이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침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머리는 침묵을 알지 못한다. 머리는 온종일 시장바닥이다. 가슴도 침 묵을 모른다. 왜냐하면 가슴은 감정과 느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슴은 단지 속삭이기만 할 수 있을 뿐이므로 그 속삭임을 듣기란 어렵 다. 가슴은 교육받지 못했으므로 그다지 인위적이지 못하다. 머리는 표 현의 훈련을 받았지만 가슴은 늘 무시되었다. 따라서 나는 칼릴 지브란 이 끝없이 가슴을 강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가슴은 간이역일 뿐이 지 종착역이 아니다. 종착역은 그대의 존재다. 거기서 길이 끝난다. 거 기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질문자는 지금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묻고 있다. 그런데 대답은 질문에 부합되지 않는다. '너희의 가슴은 침묵 속에서 낮과 밤의 비밀을 알고 있다.'이것은 질문과는 동떨어진 대답이다. 낮과 밤의 비밀은 자 기를 아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대답이 벽에 부딪 히리하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의 귀는 가슴이 아는 것을 소리로 듣고자 목말 라한다. 목말라하는 것은 귀가 아니라 그대의 존재다. 귀는 호기심에만 목말 라할 뿐이며, 거기엔 깊은 의미가 없다. 또 어떻게 가슴이 귀에게 말을 할 수 있는가? 가슴 자체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가슴은 그대에게 아름다운 꿈을 줄 수 있을 뿐이며, 그 아름 다운 꿈들은 진리를 향한 그대의 순례에 큰 방해가 될 뿐이다. 칼릴 지 브란조차도 그러한 꿈들을 믿는 듯하다. 그 꿈들은 아름답게 보일지 모 른다. 또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곳이 매우 아름다운 장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 머물자,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가슴이 아니다. 가슴도 육체의 한 부분이며, 그대는 단 지 그것을 지켜보는 자일 뿐이다. 바깥세계를 지켜보고, 또 자신의 끝없 이 이어지는 생각을 지켜보듯이...... 그대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것일 뿐인데도 "나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라고 생각한다. 가슴은 그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머지않아 그대는 꿈에 지칠 것 이다. 왜냐하면 꿈에는 알맹이가 전혀 없으며, 그대들에게 자양분이 되 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길이 없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야만 그곳이 끝이다. 그때만이 그대는 자신 이 누구인가를 안다. 시인들은 그것에 대하여 노래를 부르고, 꿈을 꾸고, 그것을 글로 쓰지 만, 그것은 호수에 비친 달을 보면서 달을 묘사하는 것과 같다. 달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의 달이 아니다. 그 달 가까이 가려고 호수로 뛰어 드는 순간 그 달은 사라져 버린다. 물결이 이는 호수는 달을 비추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소용돌이가 이는 가슴은 아름다운 시를 창조하지 못 한다. 물론 가슴은 머리보다 '자기를 아는 것'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긴 하 지만, 그것 자체가 '자기를 아는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너희는 말로써 알고자 한다. 이 문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진리는 절대로 말로써 알 수 있는 것 이 아니며, 또 진리는 절대로 생각 속에 공식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은 머리에 속한 것이며, 말 또한 머리에 속한 것이다. 머리는 철학을 할 수 있고 가슴은 시를 쓸 수 있지만, 신비가의 고향 은 그대의 존재 속이다. 그곳에서는 말도, 생각도 잊혀진다. 사람들은 대개 침묵이 말과 생각과 소음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 각하며, 또 그것이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침묵을 부정적 으로 알고 있는 것이며, 진정으로 침묵을 아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그 자체가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침 묵은 생각도 아니며, 생각의 부재도 아니다. 생각과 꿈들은 그것을 바라 보는 순간 자취를 감춘다. 생각과 꿈이 부재하는 것이 침묵이라고 사람 들은 쉽게 속지만, 그러한 침묵은 공허한 침묵이다. 그러한 침묵속에는 춤도, 축복도 없다. 그것은 무덤의 침묵이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하지 못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침묵의 경지를 획득했다고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그 본질에 있어서 거의 음악에 가깝다. 마치 정원의 꽃들이 언 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로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의 침묵과 같다. 과학자들은 꿀벌들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 인간 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꿀벌들의 행동을 보면 거기에 우리와 다른 어떤 통신 체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연구를 수년 간 계속해 오고 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이 많다. 벌 한 마리가 정원으로 가서 꿀이 많은 꽃밭을 발견한다. 그 벌은 곧 돌아가 다른 벌들 앞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춤을 춘다. 그러면 그 벌들이 정원으로 모인다. 춤을 통해서 벌은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 벌이 방향과 거리와 꽃의 종류를 말하 는지 아직까지 발견해 내지 못하였다. 모든 벌들이 정원으로 몰려갈 때 까지 그 벌은 춤을 춘다. 그래서 마지막 벌이 날아갈 때 그 뒤를 따라서 정원으로 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벌이 좋은 꽃밭을 발견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도 그 벌은 다시 춤을 춘다. 그 두 종류의 춤의 차이를 구별하기란 무척 어려 운 일이다. 그 춤을 보고 한 마리의 벌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좋은 꽃 밭이 없다는 것을 춤을 통해 전달한 것이다. 매우 정교한 관찰기계로도 우리는 그 두가지 춤의 차이를 알아내지 못한다. 우리의 눈에는 똑같은 춤으로 보이지만, 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다. 침묵은 말과 생각의 부재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음악이요 춤이며, 언어로 만들어지지 않은 노래다. 가슴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작용한 다. 어떤 사람과 깊은 사랑에 빠지면 가슴끼리 통한다. 머리는 그것을 이 해하지 못한다. 머리는 침묵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 런 악기 없이 생겨나는 음악을, 눈에 보이지 않는 춤을 머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가슴은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비밀이다. 스승의 발아래 앉아 있어 보라.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전달된다. 머리는 그 위대한 전달이 이루어 진 것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러나 가슴의 침묵이 비록 자기 인식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이 긴 해도 그것 자체가 자기 인식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인식으로 향하는 문에 불과할 뿐이다. 너희는 말로써 알고자 한다....... 이것은 터무니 없는 넌센스다. 세상의 어떤 신비가도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으로 늘 알고 있던 것을 말로써 알게 되리라는 것, 이 것은 철학이지 신비주의가 아니다. 철학은 말과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완전히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이다. 너희는 너희 꿈의 벗은 몸뚱이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싶어하 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넌센스는 없다. 손가락으로 자기 인식을 만질 수 있는 가?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은 물건이며, 마땅히 남에게도 그것 을 보여 줄수 있다.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다면 먼저 그것을 밖으로 꺼 내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라. 육체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 내면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내면의 세계는 육체에 속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단지 육체 속에서 살 뿐이다. 육체란 집에 불과하다. 꿈이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오 아시스가 보인다. 눈만 속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까지도 속는다. 왜 내하면 실제로 물이 보이고, 호수가 보이기 때문이다. 호숫가에선 나무 들이 물속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물이 없다면 나무 그림자가 반사될 까닭이 없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신기루는 사라져 버린다. 가까이 가 보면 물도 없고 호수도 없다. 모두가 햇빛의 반사각에 의해 서 생겨난 신기루일 뿐이다. 그대의 꿈도 마찬가지다. 꿈은 '자기를 아 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바로 꿈이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 람의 꿈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 다. 꿈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 꿈을 이해 하는 자신은 누구인가? 확실히 꿈으로는 다른 꿈을 이해할 수 없다. 하 나의 꿈이 다른 꿈을 분석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또 그 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대의 모든 꿈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그 꿈들 은 실체 였는가? 꿈이 실체라면 그 꿈을 통해 그 사람을 해부할 수 있을 것이며, 깊숙히 감추어진 뭔가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꿈이란 실 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기가 바로 시인들이 과녁에서 빗나가는 부분이다. 시인들은 자신들 의 말에 도취하고, 또 그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취한다. 그러나 말에 도취해서는 절대로 진리를 알 수 없다. 나는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다. 너희 영혼의 보이지 않는 샘은 마침내 솟아올라 소리내며 바다로 흘러가야만 하는 것. 어떻게 영혼이 갑자기 솟아오르는가? 칼릴 지브란은 지금 가슴과 영 혼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가슴은 육체에 속한 것이지만, 영 혼은 그렇지 않다.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긍정적인 침묵, 긍정적인 고요, 활동적인 환희다. 너희 영혼의 보이지 않는 샘은 마침내 솟아올라 소리내며 바다로 흘러가야만 하는 것...... 영혼은 소리내며 어느 곳으로도 흘러갈 필요가 없다. 머리와 마음은 항상 어느 곳인가를 향해 소리내며 달려간다. 영혼은 이미 바다의 한 부 분이다. 영혼에 도착하는 순간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의 영혼은 단지 '그대 의' 영혼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영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육체는 그대의 것이다. 머리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고, 마음은 생리적, 화학적, 심리적인 현상에 소속되어 있다. 영혼은 영원한 생명에 속해 있다. 영혼 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한 부분이며, 다른 곳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다. 시적인 의미로 볼 때는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말이다. 너희 영혼의 보이지 않는 샘은 마침내 솟아올라 소리내며 바다로 흘러가야만 하는 것...... 영혼은 이미 바다 그 자체다. 너희 내면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보물도 너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의 눈은 물체만을, 물질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물질이라는 뜻의 영어 'matter'와 불어'meter'는 다같이 산스크리트어의 'matra'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matra'는 '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게 아니 다. 그는 말하고 있다. 너희 내면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보물도 너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눈은 단지 바깥세계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물체는 측량할 수 있으 며, 그래서 물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존재는 측량이 불 가능하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질이지 양이 아니다. 사랑을 만 질 수 있는가? 사랑을 측정할 수 있는가? 또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몇 미터짜리인지 잴 수 있는가? "나는 당신을 20킬로미터만큼 사랑하오!" 라고 말해보라. 상대방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질은 측정이 불 가능하다. "나는 당신을 20마일만큼 사랑하오!" 어떤 도구로도 그것이 불 가능하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가 있다. 한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대단히 지성적이었지만, 불행히도 몹시 추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한쪽 팔은 길 고, 다른 팔은 짧으며, 게다가 애꾸였다. 다리도 각 길이가 달랐다. 어느 날 궁전에서 대토론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그 청년의 아버지인 매우 유명한 학자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토론회는 아무리 해도 결 론이 나지 않았다. 특히 그것이 학자들의 토론회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 을 것이다. 두 명의 깨달은 사람이 만나면 토론이라는 것이 벌어지지 않 는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미 결론이 내려진다.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 토론은 결론이 날 리가 없다. 시간이 너무 늦어지자 그 청년의 어머니가 청년을 토론회장에 보냈다.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아라. 그리고 네 아버지한테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음식이 식기 전에 오시라고 해라." 그래서 청년은 토론회장으로 갔다. 그는 다리의 길이가 달랐기 때문 에 걸을 때마다 몹시 절룩거렸다. 마치 낙타처럼 보였다. 그의 이름은 아슈타바크라(Ashtavkra)였다. '아슈라바크라'란 신체의 여덟 부분이 기이하게 굽었다는 뜻이다. 팔도 똑바르지 않고 중간에서 휘어져 있었 다. 그는 또 목이 굽었기 때문에 머리를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그는 확 실히 곡마단이나 박물관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 같았다. 모든 대학자들이 궁전에 모였다. 그가 들어가자 모든 사람이 웃기 시 작했다. 여태껏 그렇게 희한하게 생긴 생물체를 본 것이 없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지성적인 인물이었다. 또 나중에는 고타마 붓다 처럼 대단히 깊은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다. 사람들이 모두 웃고 조롱하 자 청년의 아버지는 창피했다. 도대체 이곳에 왜 나타났단 말인가? 아슈타바크라는 곧장 왕에게로 가서 말했다. "내가 보기엔 왕께서 지금 이곳에 온통 무두장이들만 모아 놓은 듯합 니다." 차마르(chamar), 즉 무두장이란 가죽으로 제품을 만드는 일에 종사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바보 천치들을 어서 돌려 보내십시오. 그들은 내 피부와 내 육체 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장님입니다. 그들에게는 가슴이 없습 니다. 사랑도 자비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 인식과 자아 실 현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아와 육체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순간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가 말한 것이 절대적으로 옳았기 때문이 다. 아슈타바크라는 말했다. "나는 이 무두장이들을 보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나의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청년이 부끄러워하거나 충격을 받지도 않 았으며, 또 그가 한말은 지금까지 대학자들이 토론하던 주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던 때문이다. "나는 나의 육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나의 육체만을 볼 뿐입니다. 그들이 진실로 자기 인식에 도달했다면 그들은 나의 육체를 보고 웃지 않았을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존재를 느꼈을 것입니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무리가 해산되고 나서 왕은 아슈타바크라에게 말 했다. "내일부터 이곳으로 와서 나는 가르쳐다오. 나는 그대의 제자가 되고 싶다." <아슈타바크라기타(Ashtavakragital)>라는 책에는 아슈타바크라의 노래가 모아져 있다. 그 노래들은 그가 왕에게 들려 준 가르침이다. 구 절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금강석들이다........ 너희 내면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보물도 너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니다. 그 보물은 그대의 눈을, 귀를, 육체를, 머리를, 마음을 잊을 때 드러난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며, 스스로 존재한다."그렇다, 이것이 바로 자아다."라고 증명해 줄 눈이 필요없다. 눈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러자 너희들, 미지의 보물의 무게를 결코 저울로 달려고 는 하지 말며...... 앞에서도 말했듯이 칼릴 지브란은 산꼭대기로 올라갈 능력을 충분히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땅 위를 걸으면서 보낸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꼬리를 매단 공작새와도 같다. 그 어떤 새도 갖지 못한 찬란한 색채의 꼬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날개가 있지만 그는 독수리처럼 높이 날지 못한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뛰어다닐 수 있을 뿐이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다닐 때 그 중간에서는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그 순간만은 위대한 통찰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곧 그는 또다시 다른 나무에 내려 앉는다. 한편에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내면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보물도 너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금방 다른 나무로 건너 뛴다. 그러나 너희들, 미지의 보물의 무게를 결코 저울로 달려고 는 하지 말며....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느꼈다. 눈은 측량할 수 있는 물체만을 볼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얼른 말을 바꾸어 이 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 미지의 보물의 무게를 결코 달려고는 하지 말며, 너희의 앎의 깊이를 자와 끈으로 재려고는 하지 말라. 자아란 잴 수 없는 무한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말을 바로 잡았다. 그러나 또다시...... "나는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는 "나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하라. 매우 겸손하고 이해가 깊은 듯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그렇게 보인 것 일 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나'라는 것은, '나'의 에고는 진리 를 발견할 수 없다. 그보다는 "진리가 나를 발견했노라."라고 말하라. '나'가 장애물이 되어 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진리는 발견되었 지만, 나는 '나'를 잃었다. 이렇게 되었으면 훨씬 통찰력이 있는 문장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다른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그보다는 "나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하라. 그는 '나'라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를 '한 가지'의 진리라는 말로 바꾸었을 뿐이다. 또다시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다. 진리 는 언제나 진리다. '하나의'진리? 그렇다면 많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 을 뜻한다. 어떻게 많은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많은 거짓말이 존재할 순 있지만, 많은 진리가 존재할 순 업사. 진리는 하나여야 한다. 진리는 마땅히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라. "진리가 나를 발견했노라.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잃어 버렸노라. 나와 진리는 공존할 수 없도다." 그대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 나'인 것이다. 진리의 빛이 비추어지면 모든 어둠이 사라진다. 진리의 불꽃속에서 모든 거짓이 불태워진다. "나는 영혼의 길을 찾았노라." 라고 말하지 말라. 차라리 "나는 내 길 위를 걷는 영혼을 만났노라." 라고 말하 라. 칼릴 지브란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의식을 열어 놓 고 있지 않으면, 그대 자신이 칼릴 지브란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 지 않으면, 그대는 그의 언어에 속아 넘어갈 것이다. 그의 언어는 황금 빛이다. 첫 번째 문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진리란 하나만 존재할 뿐이지 여러 개의 진리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한 가지'의 진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고타마 붓다의 진리, 보리달마(Bodhidharma)의 진리, 틸로빠 (Tilopa)의 진리, 나로빠(Naropa)의 진리...... 이러한 진리는 없다. 진 리는 모두에게 보편적이다. 찾는 사람은 많지만 '찾아지는'것은 하나다. 찾는 일의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찾는 대상'에 가까이 갈수 록 그대는 점점 녹아서 없어진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 그는 또다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영혼의 길을 찾았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차라리 "나는 내 길 위를 걷는 영혼을 만났노라."라고 말하 라. "나는 기껏해야 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 길 위를 걷고 있 는 영혼을 발견하였다." 여기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하지만 5천 년전에 있었던 이 이야기를 아무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나는 저번 날에 전투에 나가는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이야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말했다. "너는 겁쟁이다. 이 싸움에서 달아나는 것은 현실 도피다. 사람들은 너를 '도피자'라고 부를 것이다." 만일 크리슈나가 '히피(hippie)'라는 단어를 알았다면 '도피자'대신 에 '히피'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히피는 바로 도피자를 의미한 다. 사회에 등을 돌리고서 모든 고민과 문제를 잊으려는 사람을 가리킨 다. '히피'라는 단어 자체가 '엉덩이(hip)'에서 나왔다. 사회에 엉덩이 를 돌려대고 달아난다는 뜻이다. 마침내 크리슈나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아르주나를 설득했다. 자신 의 논리가 아무리 해도 먹혀들지 않자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싸워야만 한다는 것은 신의 뜻이다. 남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지 말라. 영혼은 절대로 죽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또 전투에서 패배할까 염려하지 말라. 내 눈은 볼 수 있다. 적들은 지금 죽음을 기다 리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밀어 붙여도 시체가 들판에 즐비할 것이다. 그 러니 아주 간단한 일이다. 걱정하지 말라. 절대로 겁을 먹지 말라. 신의 뜻을 따르라. 그대의 뒤에는 언제나 신이 계신다." 이것은 논리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르주나의 의식 속에 주입된 신에 대한 믿음을 이용한 것일 뿐이다. 드디어 전투가 벌어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누 구나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아르주나에겐 형제가 네 명이 있었다. 그리 고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가 있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문 경 우다.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린 남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드로파디(Dra- upadi)는 다섯 명의 남편을 거느린, 전 세계에서 유일한 여자다. 그 러나 이것이 존경이나 사랑에서 생겨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그 당시엔 왕의 딸들이 남편감을 고를 때 어떤 특정한 방법을 사용하 곤 했다.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서 각 나라의 왕과 왕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곤 했다. 드로파디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크리슈나의 여 동생이었다. 그녀는 신랑감을 고를 때 매우 어려운 방법을 사용했다. 그녀는 높은 천장에 양철로 만든 물고기를 걸어 놓고서 원을 그리며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회전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쳐다보면 물 고기가 보이지 않고 원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매우 아름 다운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은 물결하나 일지 않고 고요했다. 드로파디는 이렇게 선언했다. 만일 누구라도 연못에 비친 물고기의 모습을 보면서 천장에 대고 화살을 쏘아 물고기를 맞히는 사람이 있다 면 그를 남편으로 맞이할 것이라고. 수많은 왕들이 시도했지만 그토록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물고기를 맞 히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궁수라도 선풍기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물고기를, 그것도 호수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정확히 쏘아 맞 히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두 번의 기회라는 것도 없었다. 단 한 번의 시도로 통과해야만 했다. 활 쏘는 실력이 대단하다고 자부하는 수많은 왕자들이 몰려 왔지만 그 들은 생전 처음 보는 장치에 어리둥절했다. 어떤 자들은 시도하기 전부 터 포기를 했다. 불가능한 일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도전했다. 그는 궁술의 대인 드로나차랴(Dronacharya)의 수제자였다. 그는 너끈히 물고기를 쏘아 맞혀서 드로파디를 손에 넣었 다. 그런데 그곳으로 함께 갔던 아르주나의 네 형제들은 몹시 질투를 느 꼈다. 아르주나는 맏형이 아니었다. 그의 맏형은 인도 전역에서 가장 덕 이 높은 인물로 유명했다. 그러나 덕만 가지고 드로파디를 차지할 순 없 었다. 어쨌든 활을 쏠수 있어야 했다. 또다른 형제인 빔(Bhim)은 당시 의 가장 훌륭한 씨름선수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씨름만 잘 한다고 해 서 될 일이 아니었다. 먼저 활쏘기의 명수가 되어야 드로파디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모두 몹시 화가 났다. 도대체가 즐겁지가 않았다. 그 들은 자신들이 궁술에 있어서 아르주나를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까지 함께 간 것은 모두 신랑 후보자들이 모인 다음에야 그러한 시험 방법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시험 방법이 발표 되자 나머지 네 형제는 '우리는 끝났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주 나만이 참가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참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시험에 통과하여 드로파디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집 안에 있었다. 아르주나는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쳐 말했다. "어머니, 어서 문을 여시고 제가 가져온 선물을 보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보겠다. 우선 그 선물을 나누어 네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어머니는 '선물'이라는 것이 여자인 줄 몰랐던 것이다. 부모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네 형제들 은 뛸 듯이 기뻤다. 그들은 말했다. "잘 된 일이다. 우리가 하루씩 돌아가면서 드로파디를 아내로 삼자. 그렇게 해서 닷새가 지나면 나머지 이틀은 드로파디에게 주말을 즐기게 끔 해주고, 그 다음 주일엔 또 다시 하루씩 돌아가면서 데리고 가자." 문을 연 어머니는 그만 자신이 한 어처구니없는 말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형제들은 그녀를 나누어 갖는 방법에 합의를 본 것이다. 그들은 전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사는 것이 아 니다. 그들에게도 죽어야 할 시간이 다가왔으며, 마침내 모두가 죽었다. 내가 오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 기는 이 뒤수분의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모두 죽어서 그들은 천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국이 어찌나 높은지 올라갈수록 히말라야 봉우리처럼 눈이 잔뜩 쌓여 있었 다. 형제들이 하나씩 미끄러져 눈 속으로 사라져 녹아 없어졌다. 아내도 눈 속에 실종되었다. 가장 많은 덕을 갖추었다는 맏형 유디스티라(Yudhisthira)만이 자신 이 기르던 개를 끌고 무사히 천국 문 앞에 도착하였다. 문이 열리고 문 지기가 말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개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유디스티라가 말했다. "나의 형제들과 아내가 눈 속에 실종되었다. 이 개가 그들보다 훨씬 많은 덕을 갖추었다. 이 개는 끝까지 나의 동료가 되어 주었다. 나는 그 를 떼어 놓고 혼자서 들어 갈 수 없다. 문을 닫으라. 나는 혼자서는 들어 가지 않겠다." 문지기는 난처해졌다. 그래서 문지기는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경비 대장이 말했다. "둘 다 들어오게 하라. 유디스티라는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가 '나는 이개와 함께 들어가든지, 아니면 함께 바깥에 있겠다.'라고 했다면 그는 그 말 그대로 실행할 것이다. 유디스티라를 들어오지 못하 게 하면 우리는 곧 훨씬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신께서 이 사실 을 알면 전직원이 야단을 맞을 것이다. 그러니 함께 들어오게 하라. 개 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또 그 개는 확실히 유디스티라의 형제들 과 아내보다 훨씬 덕이 많다." 그래서 유디스티라와 개는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해 왔다. 덕이 많으면 개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 어갈 수 있다. 하지만 덕이 부족하면 아르주나처럼 아무리 세계 제일가 는 궁수이고, 빔처럼 세계 제일가는 씨름 선수라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천국으로 가는 도중에서 실종되고 만다. 이것이 힌두교에서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늘 이러한 해석을 믿을 수 없었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나는 이런 해석을 내릴 수 있다. 그대가 진정한 천국, 그대 존재의 낙원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대는 눈처럼 녹아 없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유디스티라와 개만이 녹아 없어지지 않 고 하나의 개체로서 천국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진리 추구가 무 엇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개는 진리에 관심 이 없다. 따라서 개가 녹아 없어질 필요는 없다. 개는 진리를 무사통과 하거나 아니면 진리에 대고 오줌이나 갈길 수 있을 뿐이다. 오줌 누기에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곤 망설임 없이 오줌을 눌 것 이다. 힌두교인들은 유디스티라가 매우 덕이 많은 인물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힌두교인들은 그를 '다르마라지(Dharmaraj)', 즉 종교의 왕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를 종교적인 인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노름을 하다가 자신의 왕국과 모든 재물을 날렸으며, 마지막 남 은 소유물인 아내까지도, 노름에 지어서 빼앗기고 말았다. 이상한 사람들 이다. 그들은 전혀 자비심도 없고 인간 존재에 대한 존경심조차 갖추지 않은 이러한 사람을 종교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 느낌으로는 유디스티라와 개가 도착한 곳은 아마도 가짜 천국의 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이 아쉬람에 와서 가짜 청중 행세를 하면서 염탐 을 하고 있는 경찰들처럼...... 진실로 덕이 있는 자는 아르주나 같은 사람이다. 그는 전쟁을 원치 않 았으며, 크리슈나가 신의 뜻이라고 우겨댔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했다. 또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도 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 다시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친척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속 깊이 슬픔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이 모든 터무니없는 짓 거리들을 내던지고 히말라야로 가서 명상하며 앉아 있기를 원했다. 내 해석은 이렇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대는 눈처럼 녹아서 없어진다. 진리가 발견되었지만, '나'라고 하는 그대는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영혼의 길을 찾았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차라리 "나는 내 길 위를 걷는 영혼을 만났노라."라고 말하 라. 우리는 길이며, 우리가 신으로 하여금 그 길 위를 걷게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의미다. 저항 없이 신으로 하여금 우리 안으 로 들어오게 하는 것,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 다. 여기서 칼릴 지브란은 실로 심오한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길이며, 그 길 위로 우리의 영혼이, 또는 우주의 영혼이 걸어간다. 길이 깨끗하 고, 어떤 장애물도 없어야 한다. 우리의 길은 환영과 애정의 길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모든 길을 다 걷는 것. 영혼은 하나의 길을 따라 걷는 것도, 또 갈대처럼 자라는 것도 아니다. 영혼은 무한 잎새의 연꽃이 피어나듯이 스스로 열리는 것. 이제 칼릴 지브란이 별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곤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날개가 있다. 하지만 그 날개는 충분히 튼튼하지 못하다. 그에게는 통찰력이 있다. 하지만 그 통찰력은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 다. 그는 진리를 바라보지만, 흘낏 넘겨다볼 뿐이다. 이따금 그는 깨달은 신비가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다시금 평 범한 시인의 생활, 습관적인 생활 태도로 돌아간다. 그러나 지금 이말은 대단히 심오하다. 고타마 붓다라도 이 말에 무릎 을 쳤을 것이다. 영혼은 하나의 길을 따라 걷는 것도, 또 갈대처럼 자라는 것도 아니다. 영혼은 한가지의 길만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영혼은 무한 잎새의 연꽃이 피어나듯이 스스로 열리는 것.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대는 어떻게 그대의 영혼이 무한 잎새의 연꽃 처럼 피어나듯이 스스로 열리게 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선 칼릴 지브 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뛰어난 천재다. 알지도 못하고 경험도 없으면서 그는 그 경험 자체에 매우 가까이 접 근하는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전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칼릴 지브란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아 는 자라고 믿게 만든다. 그는 충분히 자기 자신을 알 능력이 있었다. 그 러나 미국으로 가는 대신에 그는 인도나 동양으로 왔어야 했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뿌리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났어 야 했다. 내가 미국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수만 통의 전보와 전화와 텔렉스가 간수에게로 날아들었다. 첫 번째로 전보를 친 사람은 일본에서 온 한 선사였다. 그는 전보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가 지금 붙잡아 두고 있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선원에서는 그 사람의 책을 가지고 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들 중 의 누구도 그 사람처럼 통찰력 있게 선을 해석할 수 없다." 간수가 그 전보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 고 있으며 도를 깨쳤다고 알려진 그 선사가 첫 번째로 전보를 보내리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대통령에게도 같은 전보를 보냈다. "너희는 그 사람을 이해할 안목도, 경험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를 괴 롭히지 말라. 너희는 그 사람의 발에도 못 미친다. 너희는 심지어 명상 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미국으로 간 것이 칼릴 지브란에겐 큰 불행이었다. 그토록 많은 가능 성을 지닌 인물은 마땅히 동양으로 왔어야 했다. 그래서 더 깊숙히 들어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일개 시인으로 전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인류 역 사상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인식 되었을 것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