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삶의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자유에 대하여 2 또 자유롭기 위하여 너희가 내버리려 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곧 너희 자신의 부스러기가 아닌가? 옳지 못한 법을 너희는 내버리려 하는가? 그 법은 너희 손으로 너희 이마에 쓴 것. 너희가 아무리 법률책을 불사른다 해도, 또 재판관의 이마를 씻고 바닷불을 가져다 퍼붓는다 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으리라. 또 너희가 쫓아내고자 하는 것이 사나운 임금인가? 너희는 먼저 너희 내부에 세운 그의 옥좌를 부수었나부터 보라. 왜냐고? 아무리 폭군이라고 해도 어떻게 자유인과 긍지인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 자유 속에 억압이 들어 있지 않고, 그 긍지 속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들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또 너희는 근심을 벗어 던지고자 하는가? 그 근심은 너희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남이 너희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다. 또 너희가 두려움을 쫓아내고자 하는가? 그 두려움의 자리는 너희 가슴 안에 있지 그 두려운 자의 손에 있지 않다. 진실로 모든 것이 너희 존재 속에서 반쯤 뒤엉킨 채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 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꺼리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 좇아가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들이. 이 모든 것들이 너희 안에서 한 쌍의 빛과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돌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 남은 빛은 서성거리다가 또 새로 오는 빛의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자유도 족쇄에서 풀려나면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족쇄가 되어 버린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지, 자아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사전이 영혼과 자아를 동의어로 해석하고 있지만, 사 실은 그렇지 않다. 영혼은 그대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자아는 그것에 대한 대체물로서 그대에게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사회가 만들어 준 것이다. 영혼을 추구하는 데에는 오랜 기 간의 영적 순례와 탐구가 걸리며, 따라서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누구 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공허하게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회 는 그대에게 자아라는 것을 심어 주는 것이다. 자아를 심어 주는 의도 자체는 사랑이다. 그래서 그대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신이 누구라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하기 도 힘들고 자신을 남에게 말하기도 어렵다. 이렇듯 자아의 개념을 심어 준 사람들은 원래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 문에 결국 인간이 만든 자아로만 살다가 인간이 만든 자아로서 죽었다. 그들은 어떤 존재계가 자신들을 창조했으며, 무엇을 위해 창조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대의 영혼은 존재계의 한 부분이다. 그대의 자아는 일종의 사회 제도일 뿐이다. 따라서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 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진정 누군가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대 자 신의 자아를 부수는 근본적인 변화를 거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아를 부수어 영혼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정신분열증'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분열된 채 생활할 것이다. 때로는 자아처럼 행동할 것이고, 때로는 영혼처럼 행동할 것이다. 끝없는 긴장 속에 생활할 것이 다. 그대의 삶은 극심한 불안과 동요로 시달릴 것이며, 그런 식으로 인 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회와 교육제도와 부모들과 성 직자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대에게 강한 자아를 심어 주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 자아 밑에 숨겨진 영혼을 결코 알지 못한 채 살아간 다. 영혼은 멀리 있지 않지만, 그것을 찾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임에 틀림 없다. 자아는 간단한 구조가 아니라 매우 복잡하다. 그대는 한국인이고, 학 생이며, 의사고, 대통령이고, 잘생겼고, 자식이 많고, 부자다. 이모든 것들이 자아를 구성하고 있다. 또 자아는 계속해서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특권, 더 많은 존경을 모으려고 노력한다. 자아의 욕심은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대는 계속해서 더 많은 자아의 층을 만들어 나간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 근본적인 불행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바로 누구라고 믿고 있다. 만일 그대가 의사라면, 그것은 그대의 기능과 직업일 뿐이지 그대의 실체가 아니다. 그대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것은 구두닦이와 마찬가지로 그대의 기능일 뿐이다. 구두닦이가 자신을 모르듯이 대통령 역시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른다. 부모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그 순간부 터 그 아이가 누구라는 개념을 심어준다. 이 거짓된 에고, 거짓된 자아 가 그대의 실체가 되어 버리며, 진정한 실체는 잊혀진다. 영어의 '죄(sin)'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단어는 본래 완전히 다른 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원래 '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단어는 어떤 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대가 잊어 버린 그대의 실체 와 관계가 있다. 그대가 그대의 실체를 잊어버리고 거짓된 대체물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대의 모든 행동은 위선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웃음을 웃지만, 그 웃음은 그대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매우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은 그대 존재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다. 모든 행동이 몽유병자와 같다. 뉴욕의 한 몽유병자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믿을 수 없을지 모르나 세 상엔 몽유병자들이 무척 많다. 전체 인구의 10퍼센트가 몽유병자다. 그 들은 밤에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의사가 먹지 말라고 한 음식 들을 마구 먹어치운다. 낮 동안에는 그런대로 자신을 억제할 수 있었지 만, 밤에 의식이 잠들어 버리면 무의식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을 개 시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걸려 넘어지지 않고 길을 잘 찾는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의사도 염려한다. "너는 음식 조절을 해야 한다. 너무 뚱뚱해서 음식을 자꾸 먹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음식을 먹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나 밤이 되면 냉장고에서 음식이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고 그 사 람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침이면 아무 것도 기억하 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뉴욕 사건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이다. 이 사람은 50 층 건물의 맨 위층에서 살고 있었다. 밤이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 다로 나가 옆 건물로 건너 뛰곤 하였다. 그 거리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건너 뛸 수 없을만큼 먼 거리였다. 그런데 그는 매일 밤마다 그 짓을 되풀이하였다. 사람들이 곧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밤마다 그 광경을 보려고 건물 밑으로 모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막 점프를 하려는 찰나에 군중들이 그에게 환호성을 보냈 다. 그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그는 점프 를 시도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건너편 베란다에 도착하지 못했다. 사실 매일 밤 그는 건너편 베란다로 거너갔다가 다시 돌아와 자기 방 에서 잠을 자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 의식이 돌아와 자기가 하는 행동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건너편 건물을 향해 몸을 날렸 던 것이다. 그는 50층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인간의 자아는 잠든 상태이고, 영혼은 깨어있는 상태다. 그 자아를 지키기 위하여 사회는 특정한 규칙을 정해 놓고 사람들을 훈련시킨다. 예를 들어, 모든 어린이들에게 이 사회는 많은 야망을 심어 놓는다. "너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어떤 대 단한 이상들을 주입시킨다. "석가모니 부처처럼, 아인슈타인처럼, 대통령 처럼 되어라. 지금의 너 자신 그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 자아는 많은 학위를 탐내고, 남이 자기를 알아 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아는 생존할 수가 있다. 자아는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또 속세를 떠난 승려나 구도자들까지도 그들의 자아를 버리지 않는다. 속세를 떠나기는 쉬운 일이지만, 자아를 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직업, 그대가 교육받은 것, 그대의 이름 등에 대해선 잘 안다. 하지만 그대는 원래 어떤 이름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원래 아무 것 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 상태였다. 그 백지 위에 그대의 부모와 선생과 성직자들이 뭔가를 쓴 것일 뿐이다. 그대는 평생 동안 그 자아를 믿고 살아간다. 그 자아는 힘이 없기 때 문에 부서지기 쉽다. 힘이 없다는 것은 곧 가짜라는 뜻이다. 그래서 에 고이스트는 화를 잘 내는 것이다.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산책을 하였다. 그때 마다 어떤 노인 한 명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면서 도 나는 그의 나이를 존중해서 그에게 아침 인사를 하곤 하였다. 무척 이른 시간이라 산책로에는 늘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어느 날 내가 아침 인사를 하는 것을 잊자, 그가 말했다. "어이! 오늘은 인사하는 것을 잊어먹었나?" 내가 말했다. "뭔가 이상하군요! 나는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침마다 당신에게 인사를 한 것은 단순히 노인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매일 이사를 해야 한다는 계약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나에게 인사를 받음으로써 자기의 에고를 만족시켜 왔던 것이 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지만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 다. 그래서 내가 아침 인사를 하지 않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 다. 나는 말했다. "나는 다시는 당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인사 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나쁜 곳으로 인도하니까요." 그대는 아무런 이름도 갖지 않고서 이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누군가 그대의 이름을 무시하는 말을 하면 `나는 이 세상에 이름이 없이 나왔 다. 이 이름은 가짜 상표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금방 싸울 태 세를 취한다. 그대는 어떤 이름도 갖고 있지 않다. '이름 없음'이 바로 그대의 참모 습이다. 속세를 떠난 사람들은 성직자로 높임을 받지만 그들의 에고는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산속에 시독교 수도원이 세 곳이 있 었다. 어느 날 각 수도원에서 온 세명의 수도승이 나란히 길을 걷게 되 었다. 그들은 잠시 나무 그늘 아래 쉬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첫 번째 수드승이 말했다. "나는 내가 사는 수도원이 자랑스럽다. 너희들이 사는 수도원 사람들 보다 똑똑하진 못한지라도, 검소하게 생활하는 면에 있어서는 우리를 따를 수도원이 없다." 두 번째 수도승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검소한 생활이라니, 그 따위 것에 대해선 잊어 버려라! 검소한 생활 이라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고대의 경전 들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아무도 우리를 따를 자가 없 다. 우리의 수도원이 가장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모든 경전이 소장되어 있다. 또 우리 수도원의 사람들은 모두 학식이 높다. 검소한 생활이라구? 하루에 한 끼씩 먹는 것? 또는 금식을 행하는 것? 그따위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바보천치나 그런 짓을 한다. 그렇게 해서 어떤 지혜를 얻었 단 말인가?" 말없이 듣고 있던 세 번째 수도승이 말했다. "당신들 둘 다 옳습니다. 한쪽은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면서 매우 고되 고 힘든 수행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또 한쪽은 훌륭한 학자들이 아닙니까?" 두 수도승이 물었다. "당신의 수도원은 어떤가?" "우리의 수도원 말입니까? 아,예, 우리의 수도원은 겸손함에 있어서는 최고지요." 겸손함의 최고라! 그들의 에고는 더욱 커지고, 종교적인 의상도 더 화려해진다. 그래서 나는 죄인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성직 자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죄인은 자신이 검소하게 살지 않았고, 지혜도 갖추지 않았고, 겸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에고가 덜 커졌기 때 문에 자신의 영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지금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냥 흘려 듣지 말 라. 귀담아 들으라,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또 자유롭기 위하여 너희가 내버리려 하는 것, 그것은 무엇 인가? 곧 너희 자신의 부스러기가 아닌가? 진정한 자유는 정치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것이다. 만일 자유가 그러한 것들이었다면 라 마크리슈나(Ramakrishna)와 같은 사람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 시에 그가 살던 인도는 영국의 통치를 받던 식민지 국가였으니까 말이 다.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또한 그러한 심오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자유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그대의 자아는 노예가 될 수 있어도, 영혼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대의 자아는 남에게 팔 수 있어도, 영혼은 그렇지 않다. 알무스타파 는 말하고 있다. 그대 만일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먼 저 그대의 자아를 내버려야 한다. 자신의 종교, 자신의 이름을 떨쳐 버려 야 한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상 생활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지 그대의 실체가 결코 아니다. 또 그대가 가진 지식을 모두 잊어야 한다. 지식이 라는 것은 남에게서 빌려 온 것이지, 자신의 체험이 아니다. 세상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몰라도 그대의 내면 깊은 곳은 어 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그대의 내면에 작은 불씨마저 없는데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자아의 부스러기들이 사라질 때 그대는 무한한 하늘을 깨닫게 된다. 그 내면의 하늘은 바깥의 하늘처럼 드넑고 무한하다. 존재계는 언제나 균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안과 밖이 언제나 조화와 균형을 이 루고 있다. 그대의 본질은 신체의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대의 진정한 영혼은 그대의 육체가 불태워진 뒤에도 불태워지지 않을 것이다. 크리슈나는 말했다. "나이남 친단티 샤스트라니(Nainam chhindanti shasrtani)...... 어 떤 무기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 나이남 다하티 쁘라바카(Nainam daha- ti pravaka)...... 어떤 불도 나를 태울 수 없다." 크리수나는 지금 신체, 두뇌, 자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 다. 그것들은 쉽게 파괴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 그대 속에는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불멸의 것이 있다. 그것은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 했고, 그대가 태어난 후에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 정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곧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모든 감옥으로부터 해방 되는 길이다. 육체의 감옥, 생각의 감옥, 그대의 외부에 존재하는 감옥 들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다. 옳지 못한 법을 너희는 내버리려 하는가? 그 법은 너희 손 으로 너희 이마에 쓴 것. 법률과 헌법은 계속해서 변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봐도 법률은 절대 적인 진리일 수가 없으며, 어떤 헌법도 영원할 수 없다. 인간의 이해가 커나감에 따라서 법률과 헌법과 정부를 바꿔 나가야만 한다.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 현재에 옳지 못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힌두 사회의 법률이 그렇다. 인간을 네가지의 카스트(caste)로 나누는 것은 비합법적이고 공정치 못한 일이다. 거기엔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 도 없다. 바라문 계급에서 태어나도 바보 천치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 바라문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고 주장할 근거 가 어디에 있는가? 힌두 법률에 따라 가장 하층 계급인 수드라(sudra), 불촉천민 계급에 서 태어났어도 대단히 지성적인 사람들을 나는 많이 만났다. 인도가 영 국치하에서 독립했을 때 인도의 헌법을 기초한 바바사헤드 암베드카르 (Babasahed Ambedkar)도 수드라 출신이었다. 법률에 관한 한 그를따를 자가 없었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자였다. 아무도 바라문이나 샹카라차랴(shankaracharya)에게 "당신들은 우리 보다 우월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의 헌법을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암베드카르가 어렸을 때 어떤 부자가 그의 가능 성을 알아채고서는 그를 영국에 유학 시켰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도에 서 수드라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으로 금지되 있었다. 뿌리에서부터 가능성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법률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그가 인도로 돌아왔을 때 인도는 마 침 독립을 맞이했으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헌법에 관한 한 그와 비 교할 말한 사람이 없었다. 지난 5천 년 동안 힌두 사회는 변화의 여지가 없었다. 어떤 개혁이나 변화도 용납되지 않았다. 고타마 붓다도 바라문 계급이 아니었다. 그는 바라문보다 낮은 두 번째 계급 출신이었다. 그리고 바라문 계급에서는 지금까지 단 한 명의 각자도 출현하지 않았다. 힌두 법전을 쓴 마누(Manu) 는 바라만 계급이었다. 따라서 그는 편견에 사로잡힌 법률을 만들었다. 바라문 계급들은 온갖 문명시설을 이용하지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악조건 속에서 가장 힘들게 일하면서도 그러한 혜택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이들이 더 많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라문들이 없어도 사회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이들 가난한 사람들이 없이는 사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늘 비난과 무시를 받고 있다. 차라리 동물이 낫다. 그들은 동물 이하의 존재로 취급받는다. 그들의 그림자를 밟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가 더러워진다고 사람들은 생각 한다. 이러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상한 차별에 대하여 아무도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가 지고 항의할 수 없다. 교육이나 지혜나 깨달음으로도 사회의 고정된 틀 을 부술 수 없다. 절대로 자신의 출신 계급 이상을 올라갈 수 없는 것이 다. 높은 계급에서 태어난 자들, 그들이야말로 범죄자들이다. 그들이 하 는 일은 죄다 불필요한 것들뿐이다. 그들은 비창조적이고 비생산적이면 서 사회 전체를 착취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걸터앉아 피를 빨아먹고 있으며, 그런데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5천년 전에 마누가 힌두교 법률을 작성했을 때, 그때 그대들 모두가 그 일에 개입했었다." 왜냐하면 똑같은 피와 똑같은 뼈, 골수가 계속해서 모두에게 유전되 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 역시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다른 사람이 그러한 불공정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 그대 역시 책임을 느껴야 한다. 칼릴 지브란은 지금, 인간 사회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유 기체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한 행위는 다른 쪽도 마땅히 그 책임이 있 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하고 있다. 최소한 그대가 그것을 지지했거나 묵 인했다. 반대를 하지 않은 것만으론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물론 그대는 그곳에 없었지만 다른 어느 곳엔가 있었다. 마누는 마땅 히 반대를 받아야 했지만 지난 5천년 동안 반대를 받지 않았다. 만일 내가 오늘 그에게 반대한다면 나는 곧 나 자신의 선조들에게 반대하는 것이지 다른 누구에게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다. 정부는 나에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공정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 비판할 것이 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것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것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공정치 못한 것을 알면서 그것을 비판하지 않는 다면 나도 그것에 동조하는 것이 된다.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겠지만 인간 존재의 깊은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를 추방시키려고 애쓰는 이 뿌나의 경찰국장의 말 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나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 자신이 물려받 은 유산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치 못한 어떤 것을 내가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나 역시 행동으로든 침묵으로든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 는 것이다. 또 나는 인류전체가, 현재의 인류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 래의 인류전체가 한 덩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나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 무자비하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내가 나 자신을 비 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기독교인이다, 불교인이다, 이슬람교인이다 하는 것이 모두 인위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내 속에는 모세도 한 부분, 짜라투스트 라도 한 부분, 마하비라도 한 부분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재산이 아 니다. 아무도 고타마 붓다를 혼자서 독점할 수 없다. 그는 나의 것이기 도 하면서 똑같이 그대의 것이다. 또 내가 무자비해지지 않으면 우리가 물려받은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것들을 바로잡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불태우려고 한다! 그리고 이 점을 기억하라. 그것들을 불태우면서 나는 내 자신 속 에 있는 어떤 것을 불태우는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법률책을 불사른다 해도, 또 재판관의 이마 를 씻고 바닷물을 가져다 퍼붓는다 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으리라. 법률서적을 불태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재판관들에게 바 닷물 전부를 갖다가 퍼붓는다 해도 종교라는 이름, 국가라는 이름, 재산 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진 범죄를 씻어 버리진 못한다. 작은 구실로도 충분하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싸우는 것이다. 마치 누구나 싸울 구실 을 찾아서 돌아 다니는 것 같다. 한번은 법정에서 이런 소송이 있었다. 판사까지도 놀랐던 것이, 법정 에 선 두 남자는 아주 막역한 친구로 도시 전체에 소문이 난 사람들이었 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서로 때리고 머리를 부딪쳐 피 가 흐르기까지 하였다. 판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당신들은 이 도시에서 우정의 상징으로 여겨져 오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 사람이 "네가 설명 해."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네가 설명해!"라고 서로 미루기만 했다. 판사가 소리쳤다. "나는 누가 설명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무슨일이 있었는지에 관심이 있는거야!" 한 친구가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그때 해변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이 친구에게, 나는 물소 한 마리를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물소를 실제로 산 것이 아니었다. 사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말했다. "나는 아름다운 땅을 사서 농사를 지을거야. 그렇게 되면 너의 물소 가 내 땅으로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야. 우리의 우정은 우정이지 만, 너의 물소가 내 곡식들을 망가뜨리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 야. 그 놈을 당장에 총으로 쏘아서 죽여 버릴 거야." 이야기가 이렇게 되자 처음에 얘기를 꺼낸 친구가 소리쳤다. "뭐야? 내 물소를 죽여 버리겠다구?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는 모래사장에 손가락으로 금을 그어 작은 땅을 표시한 다음에 이 렇게 말했다. "이것이 네가 농사짓는 땅이다." 다른 친구가 말했다. "좋아. 이제 네 물소가 들어오게 해봐." 금을 그은 친구는 또 한번 같은 손가락으로 모래밭에 금을 그으면서 말했다. "내 물소가 지금 너의 밭으로 들어가고 있다. 자, 네 맘대로 해봐! 내 물소를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그들은 물소와 밭따위는 잊어 버리고 서로 엉 겨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 치고받기 시작했으며, 결국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나는 물소를 갖 고 있지도 않았고, 이 바보 녀석도 밭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서로의 우정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까지도 드 러내고 말았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판사는 지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좋다. 실제의 문제에서 생겨난 것이든 상상의 문제에서 생겨난 것이 든 모든 싸움이 바로 그런 것이다. 문제는 어떤 구실로 당신들이 싸웠느 냐가 아니다. 어떤 구실로도 싸움은 성립될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다. 마치 마음이 온통 미움 과 증오와 폭력으로만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사랑이나 우정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법률서적을 태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법률서 적들은 그대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힌두 사회의 기본 사상체계의 바탕이 된 <마누법전>을 불태울 수 있다. 수천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신봉하는 꾸란을 불태울 수도 있고, 인류의 절반이 믿는 성경을 불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불사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책들은 이미 그대 의 피 속에, 그대의 머리 속에 들어온 지 오래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그 모두를 담고 있는 '머리'를 부수지 않는 한, 자신의 거짓된 자아를 불태우지 않는 한, 세상에 진정한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또 너희가 쫓아내고자 하는 것이 사나운 임금인가? 너희는 먼저 너희 내부에 세운 그의 옥좌를 부수었나부터 보라. 수천 년동안 인간은 시장에서 노예를 사다가 부려먹었다. 이제는 그 러한 노예제도가 사라졌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형태 를 바꾸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훨씬 더 훌륭한 노예를 훨씬 싼 비용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노예를 가지려면 먼저 그를 사야만 한다. 그것은 일종의 투자다. 또 그런 다음엔 그를 먹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노예가 일을 하 겠는가? 잠잘 곳과 옷을 제공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어떻게 노예가 봉 사를 하겠는가? 병이 들면 보살펴야 하고, 의사를 부르거나 약을 먹여야 한다. 노예가 죽어 버리면 그동안의 투자가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때문 이다. 노예를 지키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투자를 지켜야만 한다. 따라서 이것은 매우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직원을 갖는 것이 더 간단하고, 쉽고, 경제적이다. 또 표면상으로 보 기에 그쪽이 더 인간적이다. 시장이나 경매장에 가서 사람을 산다는 것 은 비인간적이고 추한 짓이다. 사람은 상품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 일자리를 구하려 찾아온다면 굳이 노예를 사러 갈 필요가 없다. 이쪽이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상대방이 취직을 원하고 있고, 따라서 투 자할 필요도 없다. 그가 병들면 내쫓으면 된다. 늙으면 사표를 쓰게 하 면 된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씩 봉급을 지불하면 된다. 이것은 새로 운 형태의 노예제도이다. 어쨌든 직원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사장에게 유리한 제도이다. 인도는 2천 년 동안 남의 지배를 받아왔다. 주인은 계속해서 바뀌었 지만 지배를 받는 국민은 한 가지였다. 우리 가족들 모두가 독립투쟁에 참여했었다. 모두 구속되고 처벌을 받기도 했다. 나는 끊임없이 아버지 와 삼촌과 싸웠다. 당시 나는 매우 젊었었다. "이 간단한 사실이 안 보이나요? 작은 나라도 아니고 엄청나게 큰 대 륙인 이 나라가 2천년 동안이나, 영국처럼 우리나라의 작은 주에도 못미 칠 나라들에게 통치를 받고 지배를 받아 왔으니, 말이 되나요? 한두 번이 아니에요. 무갈 제국, 투르크족, 몽고족, 흉노족 등등...... 누구든지 이 나라 를 집어 삼키려고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노예가 되었어요." 진정한 문제는 그대의 지배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그대의 내면에서 노예가 된 그 자와 싸우는 것이다. 그대의 내면에 노예 가 없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떻게 소수의 사람 들이 이렇게 큰 나라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겠는가? 분명히 모두의 내면 에 노예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 다음에 오늘날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 유를 되찾은지 40년,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가? 자유를 누리다가 중국 이 갑자기 인도를 침략하자 첫 번째 수상이었단 자와하랄 네루는 머리 끝까지 화를 내었다. 그래서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중국은 결국 히말라야 산맥의 수백 마일이나 되는 아름다운 지 역을 빼앗았다. 이쪽 군대가 패배하자 네루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그 땅은 아무 쓸모없는 땅이다. 그곳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굳이 수만 명의 군대를 보내어 죽거나 부상하게 만들었 는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쓸모없는 땅을 지키기 위해서? 또 너희가 쫓아내고자 하는 것이 사나운 임금인가? 너희는 먼저 너희 내부에 세운 그의 옥좌를 부수었나부터 보라. 왜냐고? 아무리 폭군이라고 해도 어떻게 자유인과 긍지인 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대의 아이들이 복종과 노예 근성이 아니라 긍지를 갖도록 가르치 라. 그들이 자유롭도록 도와 주라. 인생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보다 더 높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라.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 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그들이 알도록 하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또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세상은 끝없 이 히틀러와 스탈린과 마오쩌뚱 같은 자들에 의해 고통받을 것이다. 수 많은 압제자들과 독재자들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가 없다. 사실 내면 깊 은 곳에서 그대는 그들을 환영하고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 그대는 누군 가가 그대의 삶을 지시하고 통제하기를 바라고 있다. 무엇보다 실수를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대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대는 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것이 바로 살 아가는 방식이다. 수없이 그대는 넘어질 것이다. 그것은 전혀 나쁜게 아니다. 다시 일 어나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우라. 더 의식을 깨어있게 하라. 앞으로도 많은 실수를 저지르겠지만 똑같은 실수는 다시 저지르지 말라. 이렇게 해서 사람은 지혜를 얻고 현명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개성 을 갖게 되고, 별을 향해 솟아오르는 삼나무들처럼 긍지를 갖게 되는 것 이다. 난쟁이가 되지 말라. 그대가 오를 수 있는 최대의 높이까지 오르려고 노력하라. 또 너희는 근심을 벗어 던지고자 하는가? 그 근심은 너희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남이 너희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대의 근심은 무엇인가? 그대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 대가 그것들을 선택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것들을 그대에게 강요한 것 이 아니다. 아는 게 더 많고, 가진 게 더 많고, 힘이 더 많은 사람을 누 가 질투하라고 하였는가? 왜 그대는 스스로 그런 질투 속에 빠져드는 가? 그 질투는 그대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파괴할 것이다. 질투를 갖기보 다는 그 에너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창조할 수 있을까를 생 각하라. 또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그 나름대로의 독 특한 능력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다. 누구에게나 존재계를 더 풍요롭게 할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능력이 있다. 쓸데없이 세상에 나온 사 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한번 보라. 아이들은 주먹 을 쥔 채 세상에 나온다. 왜 주먹을 쥐고서 나올까? 그것이 미스테리다.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아무도 모른다. 또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한번 보라. 사람은 죽을 때...... 주먹을 쥔 채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 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죽을 때는 언제나 손을 펴고 죽는 다. 이것이 하나의 상징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사람을 질투할 필요가 없다. 나는 누구를 질투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노자 든 모세든 크리슈나든 붓다든, 나는 질투를 느껴 본 적이 없다. 다만 나 는 몇몇 사람이 세상에 나와 살면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실현했다는 그 사실에 무한한 기쁨을 느꼈을 뿐이다. 또 그것은 나에게 큰 자극제가 되 었다. "너도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그토록 높은 경지에 올랐다면 너 또한 오를 수 있다. 어쩌면 너는 더 높이 올라갈지도 모른 다. 왜냐하면 지난 25세기는 헛되이 흘러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그 어떤 부처보다 더 풍성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25세기 동안이 너에 게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까비르(Kabir), 나나크(Nanak), 예수, 라마크리슈나 등이 같은 경지에 올랐다. 그러니 너라고 안 될 이유가 무 엇이냐? 너 자신만 아니면 아무도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없다." 또 너희는 두려움을 쫓아내고자 하는가? 그 두려움의 자리 는 너희 가슴 안에 있지 그 두려운 자의 손에 있지 않다. 남이 그대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기껏해야 목숨이 다. 그 목숨은 남이 빼앗아가지 않아도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또 너 희 목숨을 빼앗아감으로써 그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망설일 이유가 무엇 인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라!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서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채 세계를 여행하였 다. 그러면서 나는 핵무기를 가진 자들과 투쟁하였다. 이상한 것은, 나 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들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끔 이 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들이 미친 걸까, 아니면 내가 미친 걸까? 그 들은 언제라도 나를 죽일 수 있는 온갖 무기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것을 죽이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심 지어 개미 한 마리도 죽여선 안 된다. 나의 철학은 생명 외경 사상이라 고 부를 수 있다. 진실로 모든 것이 너희 존재 속에서 반쯤 뒤엉킨 채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 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꺼리는 것과 소중 히 여기는 것, 좇아가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들이. 그대의 삶은 단순한 이유 때문에도 지옥이다. 그대 내면의 어떤 것도 전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가 분열되어 있다. 그래서 그대는 모순 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대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어떤 것에 마음이 무척 끌리면 서도 동시에 그것에 다가가기를 겁낸다. "붙잡으려고 좇아가는 것과 피 하고 싶은 것들이......" 그대는 그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한번 관찰해 보라. 어떤 것을 비난할 때 그대 내면을 한 번 들여다 보라. 분명히 내면 한 구석에서 그대는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그것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또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그 사랑의 뒤, 사랑의 그늘을 보라. 거기에 반드시 미움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끝없이 싸우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조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모든 싸움은 사랑으로 끝난다. 그러한 것에 길들여져 마침내는 서로 싸우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게끔 되어 버린 다. 인간은 그 내면에서 분열되어 있다. 어떤 것을 가슴 전체로 행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껴안고 있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평화와 침묵과 기쁨을 창조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너희 안에서 한 쌍의 빛과 그림자처럼 달라 붙어 돌아가고 있다. 이쪽엔 빛이 있지만, 저편에서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 남은 빛음 서성거리다가 또 새로 오는 빛의 그림자가 되어 버 린다. 그대의 내면에는 여러 층이 있다. 한 층을 걷어내면 새로운 층이 나타 난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자유도 족쇄에서 풀려나면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족쇄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실로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여행은 끝이 없다. 이 순례가 어 느 곳에선가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하나를 제거하면 문득 또다 른 새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다. 또다시 족쇄에 걸린다. 그것을 제거하면 이번에는 더 교묘하고 여태껏 본 적도 없는 더 새로운 족쇄가 앞을 가로 막는다. 동양에 사는 우리는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사념이 양파 껍질과 같다는 것을 안다. 한 층을 벗겨내면 또다른 층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왜 시간을 낭비하는가? 사념을 뛰어넘으면 된다. 한 사람을 15 년 동안 정신분석으로 치료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전혀 변함이 없다. 서 양은 정신분석으로 접근하지만, 동양은 사념을 초월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사념 밖으로 걸어나오는 수련이다. 사념을 뒤에 그냥 내버려 두라. 사념의 껍질들을 하나씩 벗기며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대의 본질이 육체가 아니듯이 사념도 아니다. 그대는 불멸의 생명의 한 부분이다. 그대의 육체와 사념은 거짓된 자아에 집중되어 있다. 그 거짓된 자아 를 뛰어넘을 때 그대는 갑자기 끝도, 한계도 없는 하늘을 발견하게 된 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부라흐마 (Brahman)라고 부르지만, 가장 좋은 표현은 고타마 붓다와 마하비라의 표현이다. 그들은 그것을 '모크샤(moksha)'라고 불렀다. 모크샤는 '완 전한 자유'를 뜻한다. 그대를 묶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거짓 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죽을 운명에 놓여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그러한 거짓되고 생명없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 간 불멸의 문이 그대 앞에 활짝 열린다. 베다(Veda)문학에서는 그대를 '아므리타샤 푸트라(amritasya putrah)' 라고 선언하였다. 즉, 그대는 불멸의 아들과 딸인 것이다. 명상이 없이는 그곳에 도달할 길이 없다. 명상의 기회를 놓치는 사람은 삶의 전체적인 율동을 잃는 사람이다. 나는 그대가 영원의 춤과 노래와 음악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알겠는가? 11 매 순간 불사조의 얼어남처럼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그러자 여사제가 다시 말했다. 우리에게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싸움터다. 그 위에서 너희 이성과 판단은 감정과 욕망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내가 너희 영혼에 평화를 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너희 내부의 모든 불화와 갈등을 다 쓸어버려 하나로 만들고 노래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으랴. 너희 스스로 중재자가 되지 않는다면, 아니, 너희 내부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희 이성과 감정은 바다 위를 달리는 너희 영혼의 키와 돛. 돛이나 키 중 어느 하나가 부러져도 너희는 정처없이 표류하거나 바다 한복판에 오도가도 못하고 멈추어 섰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이성이란 홀로 다스리게 내버려 두면 경직된 힘이요, 감정이란 제멋대로 두면 스스로 타 없어지는 불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영혼으로 하여금 이성을 감정의 높이에까지 이끌어올려 노래부르도록 하라. 또 이성으로 하여금 감정을 인도하게 하여, 너희의 감정이 날마다 스스로의 부활을 통해 살아가도록 하라. 마치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불사조처럼. 나는 너희가 판단력과 욕망을 너희 집에 온 두 사랑하는 손님처럼 대하기를 바란다. 진실로 너희는 어느 한 손님만을 다른 손님보다 더 높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한쪽만을 더 생각해 주는 사람은 결국 양쪽 모두의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리는 법이다. 언덕에 올라 은백양나무 서늘한 그늘 밑에 앉아 멀리 보이는 들과 숲의 평화와 맑음을 즐길 때면 가슴으로 하여금 고요히 말하게 하라. "산은 이성 속에 쉬신다."라고. 또 폭풍이 불고 거대한 바람이 숲을 흔들며 천둥 번개가 하늘의 위엄을 드러낼 때면 그때는 가슴으로 하여금 경외감에 차서 말하게 하라. "신은 감정 속에 움직이신다."라고. 너희는 신의 품안의 한 숨결이며, 신의 숲 속의 한 잎이니, 너희도 또한 이성 속에서 쉬고 감정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인간은 분열된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더 많이 고통받는다. 인간은 서로서로 유기체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전체다. 기본적으로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 쪽의 부분을 따로 분리시켜 놓고서 축복된 상태를 유지할 길은 없다. 그렇다,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지만 만일 그 다양한 악기들을 한 흐름 속에 이끌어 들일 줄 모른다면 음악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음에 불 과하며, 소음은 그대의 영혼을 달래 주지 못한다. 오히려 혼란을 가져다 줄 뿐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분열의 역사다.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버리면서,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해 왔다...... 그때 그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 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인간을 포함한 존재 전체가 갈등 없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춤출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이러한 정신분열증의 상태를 초래했는가?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그대를 지배하기를 원하고, 그대를 착취하려는 사람들, 그대를 영원히 노예 상태로 있게 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장치 다. 전체적인 사람은 억압당하지 않으며, 착취될 수도 없고, 노예로 전 락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권력에 대한 야심만으로 가득 차 있 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권력이 곧 삶의 이유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정신병원에서 인생을 마쳤다. 그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었다....... 의사와 성직자들과 그의 가족 친구들까지도 그가 미쳤다 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정신병원에서 위대한 책을 썼다. 그 책의 제목은 <권력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다. 그 책을 읽고 나면 사람들이 그를 정신병원에 집어 넣은 것은 그가 미 쳐서가 아니라 놀라운 통찰력을 지닌 한 천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 다는 사실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그의 예리한 비판력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완전히 잊혀지고 무시되기를 원했다. 분명히 그는 미친게 아니었다. 그가 진짜로 미쳤더라면 그의 가장 위대 한 작품이 정신병원에서 씌어졌을 리가 없다. 그 책은 그의 사후에 출판 되었기 때문에 그 자신은 그 책의 출판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 <권력에의 의지>에는 그의 여러 저서 에 표현된 이야기들이 총 종합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각 문장이 깊은 함축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그것을 썼다는 것은 불가 능한 일이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대단히 심오하다. 따라서 아무런 편견 이나 선입견이 없이 그 책을 읽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의 하 나가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자에 의해서 저술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사회의 낡은 규범들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의 죄라는 것도 그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노 예가 되지 않으려 했다는 것뿐이다. 자유를 아는 사람, 자유롭게 사는 사람을 만나면 노예들은 참지 못하는 법이다. 그의 행동과 말은 자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노 예들은 불안해하면서 그에게 화를 내었다. 그들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 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산꼭대기에서 외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소위 편 안하다고 하는 골짜기 맨 밑바닥에서 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 는 사람들이 지혜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그것들의 어리석음을 입증하였다. 칼릴 지브란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니체는 <권 력에의 의지>에서 인류의 가슴을 열어 보였다. 인류의 가슴속에는 왜 음 악이 없고 고통뿐인가? 그 이유는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과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 는 정치인들이 권력에 눈이 먼 나머지, 사람들이 내면의 조화와 통합과 전체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이 머슴이 되고, 머슴이 주인이 되었다. 주인인 가슴이 머 슴이 되고, 머슴인 머리가 주인이 되었다. 가슴은 소리치지 못한다. 다 만 속삭일뿐. 그러나 머리는 큰 소리로 외치기 때문에 가슴의 메시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만든다. 이러한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칼릴 지브란은 가상의 신비가이며 철학 자인 알무스타파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그전에 나는 늘 의문이 갔었 다. 왜 그는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제 그 이유를 분명 히 안다. 그는 피리드리히 니체가 당했던 고통을 또다시 당하고 싶지 않 았던 것이다. 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니체는 산문 형식으로 썼다. 물론 그의 산문은 대단히 아름다운 문체이기 때문 에 시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인류에게 직접적으로 말 을 했던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가공의 인물이다. 따라서 칼릴 지브란은 정신병자라는 의심을 받은 적도 없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지도 않았다. 왜냐하 면 그는 가공의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이고, 또 기껏해야 시인에 불과했 기 때문이다. 그는 알무스타파라는 가공의 인물 뒤에 숨어 자신을 보호 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점을 기억시키고 싶다. 알무스타파가 하는 말은 곧 칼 릴 지브란의 말이라는 것을. 그러자 여사제가 다시 말했다. 우리에게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머리와 가슴에 대하여, 논리와 사랑 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인간은 이것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권력과 힘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사람들에 게 만일 이 둘의 말을 다 들으면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고 말해 왔다. 그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성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권력을 손에 넣을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 내면은 공허하다. 감정과 사랑과 가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내면이 아름다움과 축복과 향기로 불타지만, 반면에 외부적으로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지금 여사제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에게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는 이 둘에 대하여 어떤 접근 방식을 갖고 있는가? 인간에게는 둘 다 존재한다. 그리고 적어도 피상적으로 보면 그 둘은 서로 모순적이 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두 마리의 말 위에 동시에 올라탄 것과 같은 꼴이 될 것이며, 결국 재난을 초래할 것 이다. 지금 이 질문을 던지는 여사제는 칼릴 지브란이 돈과 권력을 지닌 세 상의 성직자들과 정치인들보다 훨씬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을 알지 못했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싸움터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 존재의 뿌리로 내려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성은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는데, 가슴은 다른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그대는 고통받을 것이고, 불행에 빠 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 존재의 절반은 언제나 굶주린 채,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그 두 부분의 간격은 더 커질 것이 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 자신은 날카로운 전기톱에 두 부분으로 잘려 진 것과 같은 꼴이 된다...... 이렇게 분열된 사람들은 끝없이 내면 속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 들의 내면은 실로 하나의 전쟁터다. 그 내면의 싸움 때문에 인간은 끝없 이 에너지를 소비하여 나약해진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러한 사람을 지 배할수 있다. 시간이나 정열을 내면의 싸움에 다 허비하기 때문에 억압 과 착취에 대항하여 혁명을 꾀할 여유가 없다. 이것은 실로 아주 교묘한 심리적인 거세다. 인간은 아주 교묘한 방법에 의해서 무능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만 일 그대가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대는 독자적인 개성을 갖게 되고 그대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자들과 싸울 에 너지를 갖게 된다. 만일 인류 전체감 그러한 통합적인 존재가 된다면 독 재자는 당장에 사라질 것이다. 제대로 된 인간 사회에서는 정치꾼들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 제대로 된 문명 사회라면 법이나 법정이 필요할 이 유가 무엇인가? 재판관들과 경찰 관리들은 모두 권력을 잃고 말 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끝없이 그대를 분열된 상태로 만들어야만 한다. 니체는 그러한 사실을 대놓고 말했다. 그래서 고통을 당했다. 니체야 말로 권력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희생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 들은 칼릴 지브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칼릴 지브란 의 말을 아름다운 시로서 읽을 뿐이지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싸움터다. 그 위에서 너희 이성과 판 단은 감정과 욕망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내가 너희 영혼에 평화를 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너희 내 부의 모든 불화와 갈등을 다 쓸어버려 하나로 만들고 노래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으랴. 너희 스스로 중재자가 되지 않는다면, 아니, 너희 내부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존재계로부터 받는 것에는 무엇이나 숨겨진 목적이 있다. 그 대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생각할 능력과 옳은 것을 분별해 내는 능력,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 또 그대는 가슴과 감정을 가지고 있 다. 가슴은 노래하는 법, 춤추는 법, 사랑하는 법을 안다. 가슴은 과학과 기술을 창조할 줄 모르며, 이성은 사랑과 평화와 침묵을 창조할 줄 모른 다. 사랑과 평화와 침묵은 그대로 하여금 평범한 인간 존재의 상태를 초 월하도록 해주는 것들이다. 가슴은 그대에게 초월의 날개를 선사해 주며, 비상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준다. 가슴이라는 문을 통해 그대는 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성은 그러한 것을 할수 없다. 이성은 돈을 만들고, 수만 가지의 외 부적인 물건들을 만들지만,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능력은 전혀 없다. 따라서 그 두 세계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이성은 객관 세계에 서 기능하며, 가슴은 주관 세계에서 기능한다. 따라서 그대가 만일 깨어 있고, 명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쉽게 그 둘의 조화를 유 지할 수가 있다. 나는 가슴을 조르바(Zorba)라고 부른다. 그것은 지성의 날아오름이다. 이것은 고타마 붓다라고 할 수 있는 이성 에너지가 정제된 것이다. 둘 다 부족한 점이 있다. 붓다는 조르바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다. 마찬가지로 조르바 역시 붓다에게 그 자신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엔 많은 조르바들이 있어 왔지만, 그들의 웃음과 기쁨에는 깊이 가 없다. 그것은 아주 피상적인 웃음과 기쁨에 지나지 않는다. 또 깊고 심오한 웃음들을 지닌 붓다들이 존재해 왔다. 하지만 거기, 언제나 조르 바와의 끝없는 갈등이 있다. 왜냐하면 조르바라고 굶주리는 것을 좋아 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 둘을 친구로 만들어 마침내 완벽한 하나로 만드 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두 명의 거지가 있었다. 한 거지는 앉은뱅이라서 걸을 수가 없었고, 다른 한 거지는 장님이라서 걸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은 서로 경쟁자 의 관계였다. 얻어 먹고 사는 것도 엄연한 사업이며, 따라서 끝없이 경 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나도 한번은 그러한 일을 겪었다. 나는 늘 여행을 다녔으며, 따라서 매번 기차 정거장을 드나들곤 하였다. 그러다가 한 늙은 거지와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사실 그는 나와 알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 여행 에서 도착했을 때나 다른 곳으로 떠날 때면 그 정거장을 거치기 마련이 었고, 그때마다 나는 그 거지에게 1루삐씩을 주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1루삐를 주었 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인도에서 거지에게 1루삐는 무척 큰 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츰 모든 것이 그저 당연한 일로 받아들 여졌다. 이젠 감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정해진 일정이었다. 이제 내가 1루삐를 주지 않았다간 그 늙은 거지는 화를 낼 것이다. 나는 한번도 그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늙은 거지는 어디로 가고, 대신 그 자리에 젊은 친구 가 앉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1루삐를 잊지 마십시오." 나는 물었다. "어떻게 1루삐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지?" "아,아직 모르시는군요. 저는 그 늙은 거지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늙은 거지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말했다. "그는 딸의 지참금으로 이 정거장 전역에서 구걸할 권리와 모든 고객 의 명단을 저에게 주었습죠. 그 명단의 첫 번째가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정거장을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늘 1루삐를 주셨더군 요." "뜻밖의 일이로군! 거지들에게도 영토가 있군." 거지들에게도 영토가 있으며, 사위에게 지참금으로 물려줄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일이야! 그래, 그 늙은 거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 젊은 거지가 말했다. "병원 근처에 새 자리를 마련했습죠. 거기에 있던 거지가 한 명 죽었 거든요. 그 사람은 늙어 보이긴 하지만 매우 힘이 세답니다. 그래서 아 무도 시비를 걸지 않지요." 거지들도 고객을 놓고 끝없이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두 거지도 서로 경쟁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마을 밖의 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산에 불이 났다. 아무도 그 들을 구해 줄 사람이 없었다. 앉은뱅이는 불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걸을 수가 없었다. 장님도 뜨거운 불 기운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너는 볼 수 있지 않느냐!"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싸움을 모두 잊고 서로 타협하였다. 장님이 앉 은뱅이에게 말했다. "내 등에 업혀라. 그래서 우리 둘이 한 사람이 되자. 나에겐 너를 업 고 달릴 힘이 있다. 또 너에겐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있는 눈이 있 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이 불길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두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불길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마을 사람들은 그 두 거지가 걱정되었지 만, 감히 누구도 불이 붙은 산 속으로 그들을 구하러 뛰어들 수 없었다. 한 거지는 걷지 못하고, 또 한 거지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고 있었지만, 그들이 한몸이 될 가증성에 대해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두 거지가 살아서 산을 걸어내려오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가? 이것은 아주 오래 된 이야기다. 인도에는 이러한 우화들만 모아 놓은 아주 오래된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은<팡하 탄트라(Panch Tantra)>다. 이 이야기도 <팡하 탄트라>에 실려 있다. 또 이 이야기는 바로 그대의 이야기, 그대에 대한 이야기다. 집에 불이 붙어서 생명이 위험하다. 하 지만 그대는 아직 한몸이 되지 못했다. 그대는 아직 내면에서 둘로 갈라 지어 싸우고 있다. 이성은 불 수 있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슴 은 느낄 수 있지만, 느낌만으로는 많은 도움이 못 된다. 보는 일과 느끼 는 일이 더 이상 경쟁자가 되지 않고 한몸이 되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 는 모험에 합류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것이 바로 칼릴 지브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 스스로 중재자가 되지 않는다면, 아니, 너희 내부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조르바와 붓다의 만남, 동양과 서양의 만남, 과학과 종교 의 만남, 논리와 사랑의 만남, 안과 밖의 만남을 역설해 오고 있는 것이 다. 그러한 만남 속에서만 우리는 평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 면 여전히 싸움터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현재 불행한 처지라면, 그 불 행이 그대의 내면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서 오는 것임을 명심하라. 세상엔 훌륭한 조르바들이 많이 있어 왔다. 먹거, 마시고, 기뻐하라!" 는 것이 그들의 단순한 철학이다. 그들은 외친다. "죽으면 끝이다. 신이란 교활한 성직자들이 만들어 낸 모조품에 지나 지 않는다.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인생은 짧은 것이다." 인도에는 '차르바카(charvakas)'체계라고 하는 철학이 있다. 아마도 차르바카야 말로 가장 분명한 조르바일 것이다. 그들은 아주 설득력 있 게 이러한 주장을 편다. "신이 존재한다거나 사후의 인생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 다. 목격자도 없다. 네가 불멸의 영혼을 갖고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 다. 그러한 말들에 현혹되지 말라. 그러한 것들은 너의 내면에 갈등을 일으며 너를 기독교인, 힌두교인, 자이나교인, 불교인, 이슬람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는 또 위대한 부처들이 많이 탄생한 나라다. 그들은 세상이 환상 이라고 말한다. 내면에 있는 것만이 진리며, 바깥에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어떤 욕망이나 욕심에 이끌려 시간을 낭비하 지 말라고 한다. 그것들은 모두 꿈과 같이 허망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잠시라도 그대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 속에서 신의 사원을 발견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처들의 말에 귀기울이면, 그 말이 옳다. 또 조르바들의 말을 들으 면, 그 말이 옳은 듯하다. 그래서 그대는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에 그 둘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싸움터가 아니라 중재자가 되길 바란다. 그대의 이성과 감정이 친구가 되게 하라. 그래서 외부에서 얻을 수 있 는 것도 즐길 수 있도록 하라...... 많은 것들을 외부에서 얻을 수 있다. 그것들은 환상이 아니다. 부처들의 행동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도 음 식이 필요했다. 음식은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또 물이 필요했다. 바깥에서 물을 찾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중 얼거리고 있다. "외부에 있는 것은 모두 환상이다." 또 조르바들은 자신들이 오로지 바깥 세상에서만 살고 있다고 말하지 만, 그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안이 있을 때만이 밖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 니다. 안은 없고 바깥만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한쪽 면만 있는 동전을 보았는가? 아무리 얇은 동전이라도 반드시 두 면이 존재한 다.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먼저 긴장을 풀고 그대의 몸과, 그대의 가슴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접근 방식이 다. 그 둘 사이에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말고, 그 둘을 가까이 접근시키 라. 지금까지 우리는 그 둘을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게 했었다. 그 둘 이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대는 조르바나 붓다 중 어느 한 사람이 되는 것 이 아니라,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전체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 한 전체성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축복이 있고, 진리가 있다. 너희 이성과 감정은 바다 위를 달리는 너희 영혼의 키와 돛. 그 둘의 합일을 이해했을 때, 거기 더이상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갑자기 그대 안에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 의 영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그대의 육체, 이성, 가슴에 아무런 갈등 이 없다. 이제 그대는 저 너머의 것, 즉 영혼을 볼 시간과 침묵과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대는 삼각형이다. 이성, 가슴, 그리고 영혼........ 하지만 영혼에 도달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모두가 싸움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 이다. 영혼을 탐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조르바 가 잡아당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붓다가 잡아 당긴다. 이것은 그대를 단 순한 기계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너희 이성과 감정은 바다 위를 달리는 너희 영혼의 키와 돛. 돛이나 키 중 어느 하나가 부러져도 너희는 정처없이 표류 하거나 바다 한복판에 오도가도 못하고 멈추어 섰을 수밖에 없으리라. 인류 전체가 지금 정처없이 표류하거나, 바다 한복판에 정지해 있다. 이것은 아직 살아있다고 해도 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이란 홀로 다스리게 내버려 두면 경직된 힘이 요...... 이성은 한계가 있다. 이성은 한계가 없는 무한한 것을 받아들이는 능 력이 없다. 감정이란 제멋대로 두면 스스로 타 없어지는 불길이기 때문 이다. 감정은 그대의 불이다. 그대 인생의 불길이다. 그러나 그 불길을 그냥 내버려 두면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똑같은 불이라도 이성이 사용하면 한계를 부수는 데에 이용될 수 있다. 그래서 하늘 전체를 그대의 것으로 할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영혼으로 하여금 이성을 감정의 높이에까 지 이끌어올려 노래부르도록 하라. 감정은 한계를 모른다. 그대의 에너지는 고갈되지 않는 원천을 가지 고 있다. 그것은, 그대의 에너지가 곧 우주 전체의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을 감정의 높이에까지 이끌어올려 노래부르도록 하라. 이성이 노래부르고 춤추는 사람은 축복받은 자다. 이성은 호기심과 의심과 질문만 안다. 노래부르고, 춤추고, 잔치를 베푸는 것에 대해선 모른다. 이것들은 가슴에 속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대의 영혼이 그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것들은 서로 동반자가 되어 노래부르고, 춤출 것이 다. 그리하여 그 이원성이 사라질 것이다. 이원성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거기, 갈 등도 없고 싸움도 없다. 그때 삶은 에덴 동산이 된다. 지금까지 적이었 던 것들이 그대의 내면에서 낙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왔다. 그대가 기독교를 믿거나, 힌 두교를 믿거나, 불교를 믿거나 하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나 는 말한다. 그대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싸움터가 사라지는 순간, 그대의 가슴과 이성이 한 가락에 맞추어 춤추는 순간, 천국이 그 대에게로 들어온다. 천국은 지금 이 순간도 그대에게로 들어가기 위하 여 기다리고 있다. 침묵과 평화와 기쁨 속에서 천국이 그대에게로 들어 온다. 그대가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실로 터무니 없는 생각이다. 그대의 바깥에 천국이란 없고, 그대의 바깥에 지옥이란 없다. 내면에서 끝없이 싸우고 갈등을 일으킬 때 그대는 곧 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다. 또 그대의 내면에 절대적인 침묵이 있고, 그대의 존재 전체에서 노래가 울려퍼질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또 이성으로 하여금 감정을 인도하게 하여, 너희의 감정이 날마다 스스로의 부활을 통해 살아가도록 하라. 칼릴 지브란이 말하고 있는 이것을 잊지 말라.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 다. 이것은 그대를, 새들이 노래부르고, 꽃들이 피어나고, 천국의 문을 두드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 씨앗이다. 천국은 바 깥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여기에 왔다. 너는 준비가 되었는가?" 칼릴 지브란은 먼저, 그대가 이성을 감정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성이 '노래부르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의 것은 더 중요하다. '이성으로 하여금 감정을 인도하게'하라는 것 이다. 그래서 장님처럼 개천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눈이 없는 상태에 서 높은 곳에 올라가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른 눈먼 사람들과 골짜기 밑바닥에 있는 것이 더 낫다. 그때는 떨어져도 죽 지는 않을 것이다. 상처가 나고 긁히긴 해도 죽지는 않는다. 이성으로 하여금 그대의 감정을 인도하게 하라. 이성으로 하여금 그 대의 감정의 눈이 되게 하라. 그때 그대는 기독교인들이 왜 십자가의 처 형 뒤에 부활을 말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 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는 심리적인 죽음, 정신적인 죽음에 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매 순간 그대의 감정은 죽는다. 왜냐하면 감정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 선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래나 과거라는 것은 이성과 관련된 것 들이다. 감정은 오직 이 순간만을 알 뿐이다. 매 순간 죽는다. 따라서 만 일 이성의 눈에 의해 인도를 받는다면, 매 순간 부활이 일어날 것이다. 감정은 죽어서 더욱 신선하고 젊고 세련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다. 마치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불사조처럼. 신화속에 등장하는 새, 불사조는 그대가 매 순간 죽으면서 또 매 순 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대의 삶은 끝없는 죽음과 끝 없는 부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대는 정신적인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먼지가 잔뜩 쌓여 서른 살, 마흔 살이 채 안되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게 된다. 히피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서른살이 넘은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 서른살이 넘으면 사람들은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30 년, 40년을 더 산다고 해도 그것은 사후의 삶이나 다름없다. 히피 문명은 기존 사회에 대한 반동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늙은 히피 를 본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서른 살에 이미 다 죽어 버린다. 그런 다음 느긋하게 사후의 인생을 살아간다. 불사조, 이것만큼 중요하고 심오한 상징도 없다. 지금까지 나는 이것 처럼 의미깊고 강력한 상징을 발견한 적이 없다. 모든 종교가 바탕을 이 것에 두고 있다. 죽으라.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나라. 그때 그대는 늘 신선 하고, 늘 새로운 불길 속에 살게 될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게 될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 늙으며, 나무들도 늙 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나이를 먹으면서도 늘 서른 살 이하인 것처럼 젊 음을 유지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항상 꿈에 가득 차서, 임종의 자리에서도 지구를 떠난다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순 례가 시작되는 것에 무한한 흥분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죽음도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 문이다. 이것은 이성과 감정이 하나로 될 때만이 가능하다. 그대의 조르 바와 붓다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끌어 안을 때만이 가능하다. 나는 너희가 판단력과 욕망을 너희 집에 온 두 사랑하는 손 님처럼 대하기를 바란다. 진실로 너희는 어느 한 손님만을 다른 손님보다 더 높여서 는 안 될 것이다. 한쪽만을 더 생각해 주는 사람은 결국 양쪽 모두의 사랑과 믿음을 잃어 버리는 법이다. 두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두 여자 모 두 남자로부터 확답을 받기를 원했다. "당신이 누구랑 결혼할 것인지 정직하게 말해요." 남자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한 여자는 빼어난 미모였지만 재 산이 없었고, 또 한 여자는 못 생긴 반면에 재산이 많았던 것이다. 그대 도 이 남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은 보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일광욕을 즐기러 나갔 다. 그때 갑자기 재산이 많은 여자가 소리쳤다. "여기서 배를 멈춰요.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 어서 결정을 내 려요. 우리 둘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말해요!" 그 남자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나는 당신들 두 사람을 상대방보다 훨 씬 더 사랑한단 말이야." 그래서 두 여인은 대단히 만족했다고 한다. 언덕에 올라 은백양나무 서늘한 그늘 밑에 앉아 멀리 보이 는 들과 숲의 맑음을 즐길 때면 가슴으로 하여금 고요히 말하게 하라. "신은 이성 속에 쉬신다."라고. 또 폭풍이 불고 거대한 바람이 숲을 흔들며 천둥 번개가 하 늘의 위엄을 드러낼 때면 그때는 가슴으로 하여금 경외감에 차서 말하게 하라. "신은 감정 속에 움직이신다."라고. 너희는 신의 품안의 한 숨결이며, 신의 숲속의 한 잎이니, 너희도 또한 이성 속에서 쉬고 감정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종합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인류 는 바로 이 종합을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그대가 모든 상황 속에서 신 을 즐기길 바란다. 낮이면 신이 곧 빛이며, 밤이면 신이 곧 어둠이다. 그 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 일단 그대의 내면에서 싸움터가 사라지면, 그 순간 그대의 내면은 사 원이 된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신의 조각상을 사들이지 않을 것이다. 내면이 신성하고 성스러운 장소로 탈바꿈한 사람에게는 살아있는 신이 늘 드나든다. 그대는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대는 필요한 모든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한 가능성을 놓친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의 책임이지, 다른 사람 의 책임이 아니다. 신은 지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이 그토록 시 끄러우니 누가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또 그가 문을 두드린다 해도 그대 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계속해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문 두드리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또 그대의 문에는 강한 초인 종조차 달려 있지 않다. 신은 언제나 구식 방법대로, 손등으로 그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 방법을 통해서 신은 그대가 그를 맞아들일 준비 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다. 과연 그대는 그를 손님으로 맞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알겠는가? 12 보이지 않는 이의 손길 고통에 대하여 그러자 한 여인이 물었다. 우리에게 고통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고통이란 너희의 깨달음의 껍질이 깨어지는 것. 과일의 씨도 햇빛을 보려면 그 굳은 껍질을 깨야 하듯이, 너희의 고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만일 날마다 일어나는 삶의 기적들을 가슴속에 경이로움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너희의 고통도 기쁨 못지않게 경이롭게 보았으리라. 그러면 들판 위로 지나가는 계절에 언제나 순응했듯이 너희 가슴속을 지나가는 계절도 즐거이 받아들였으리라. 그리하여 너희 슬픔의 겨울 사이로 고요히 바라볼 수 있었으리라. 너희 고통의 대부분은 너희 스스로 선택한 것. 그것은 너희 내면의 의사가 너희의 병든 자아를 치료하는 쓰디쓴 약. 그러므로 그 의사를 믿으라. 그리고 말없이 침착하게 그가 내주는 약을 마시라. 왜냐하면 그의 손이 아무리 맵고 사정없을지라도 저 `보이지 않는 이'의 보다 부드러운 손길에 인도되고 있으므로. 그가 내주는 잔 또한 너희 입술을 채울지라도 저 '도공'이 자기의 신성한 눈물로 적신 흙으로 빚은 것이므로. 알무스타파는 지금 질문자에게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 그 자 체에만 대답하고 있다. 물론 알무스타파의 대답은 지극히 옳은 내용이 다. 하지만 뭔가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알무스타파는 이 질문이 여성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대답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고,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 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의 여성이 받고 있는 고통은 남자가 받는 고통의 몇 천배다. 그래서 나는 알무스타파가 질문자에게 대답을 한 것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에만 대답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질문자에게 대답하지 않는 한, 그 대답은 피상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심오하게 들릴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피상적이다. 다시 금 말하지만, 나는 내 느낌과 통찰력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자 한다. 단 한 줄의 문장과 단 하나의 단어만 덧붙여져도 훨씬 깊은 의미로 변화될 수 있다면...... 알무스타파의 이번 대답은 대단히 철학적이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에 게 해온 행위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그것은 어제 오늘의 문 제가 아니라 수천 년이나 된 문제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선 전혀 언급 이 없다. 반대로 그는 성직자들과 도덕군자들이 늘상 해오고 있듯이 위 안의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아름다운 말들 뒤에는 위로와 위안만이 있 을 뿐,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위안은 절대로 진리를 대신할 수 없 다. 그러자 한 여인이 물었다......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데, 남성들은 아무도 고통에 대하여 묻지 않았 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다. 절 대로 그렇지 않다. 여성이 "우리에게 고통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물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여성만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상처 를 받았으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얼마나 수모를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지를 안다. 여성은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상처를 받고 있다. 남성들은 그 깊은 고통이 여성의 존엄성과 긍지와 인간성 자체를 파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알무스타파는 말했다. 너희의 고통이란 너희의 깨달음의 껍질이 깨어지는 것. 아주 피상적인 문장이다. 이럴 때면 나는 칼릴 지브란에게 유감을 느 낀다. 누구라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다. 칼릴 지브란만의 독특한 통찰 력이 여기엔 없다. '너희의 고통이란 너희의 깨달음의 껍질이 깨어지는 것이다.' 매우 간단하고 일반적인 표현이다. 과일의 씨도 햇빛을 보려면 그 굳은 껍질을 깨야 하듯이, 너희도 고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러한 말을 싫어한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만 한 다는 사상을 지지하고 있다. 그것은 상투적인 말이지 진리가 아니다. 물 론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씨앗은 엄청난 고통을 통과해야만 한다. 고 통 속에서 씨앗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나무가 탄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파리와 꽃들의 아름다움이 모습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껍질이란 무엇인가? 시인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현실에서 도피한다. 그는 마땅히 그 껍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야만 한다. 모든 지 식들, 그대가 주입받은 여러 가지 조건들, 그대의 성장환경, 교육받은 것, 그대가 몸담고 사는 사회와 문화...... 그것들이 바로 그대를 가두고 있는 껍질이며, 그 껍질 속에 그대의 깨달음이 갇혀 있다. 그런데도 그 는 지금 '껍질'의 의미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지금까지 어떤 종교의 사람들도 칼릴 지브란을 비난하지 않았다. 만 일 그가 조금 더 정직하고 성실했다면 그 자신이 고통이 무엇인가를 알 았을 것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쓴 아름다운 시들에 대하여 칭찬만 받았 다. 칭찬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영혼의 어둠 속 어딘가에 겁쟁이가 숨어 있게 만든다. 만일 그가 "너희의 종교, 너희의 철학, 너희의 정치 이데올로기, 너희 의 국적, 너희의 민족, 이 모든 것들이 너희를 고통의 감옥에 가두고 있 다." 라고 말했다면 그는 전세계적인 존경과 흠모를 받은 대신 모든 종 교,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 의해 지탄받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 이 바로 그러한 고통을 겪어 왔다. 따라서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체헴에 서 우러난 말이다.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너희의 고통이란 너희의 깨달음의 껍질 이 깨어지는 것.' 맞는 말이다. 하지만 '껍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 했더라면 더 진실되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 한 단어가 바로 '껍질'이기 때문이다. 전체의 의미가 바로 이 단어에 달 려 있다. 그 '껍질'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한 편의 시로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눈이 '껍질'이라는 단어를 읽고 지나가도 아무도 그것에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껍질에 그대의 과거 전체가 담겨 있다. 과거로부터 그대 자신을 단 절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대의 삶은 언제나 고통뿐이다. 그 껍 질은 바로 그대의 과거다. 따라서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떤 깨달음의 가능성도 없다. 이것은 물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지만, 특히 여성에 게 해당한다. 왜냐하면 모든 과거는 남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 문이다. 여성은 단지 그림자였을 뿐, 전혀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 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신의 화신은 모두가 남성이다. 게다가 그 들은 동물까지도 신의 화신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단 한 명의 여성도 신의 화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은 완전히 무시당했으며, 전혀 계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세상의 절반 인구를 차지하면서도 몇 천 년 동안 투표권조차 없었다. 중국에선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니 고통에 대해선 두말할 필요 조차 없다. 집안의 가구를 부술 때 그 가구가 고통받는다고 생각하는가? 탁자를 때린다고 해서 그 탁자가 눈물을 흘리리라고 생각하는가? 중국 에선 수세기 동안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했다. 따라서 중국의 도덕 관념 에서 자기의 아내를 죽이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니었다. 아내는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짓이든지 할 수가 있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고타마 붓다도 남자였으며, 그의 훌륭한 제 자들인 마하가섭, 사리자, 수보리 등이 모두 남자였다. 여성으로서 그들 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가? 고타마 붓다 자신도 여성 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마치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 하의 동물인 것처럼 말이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너희는 고통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여성이 깨달음에 이를 없다면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 어야 하는가? 여성은, 불 속에 넣는다고 해서 더 순수해지는 황금이 아니지 않은 가? 너희가 만일 날마다 일어나는 삶의 기적들을 가슴속에 경이 로움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너희의 고통도 기쁨 못지않게 경이롭게 보았으리라. 이것은 진리다. 하지만 진리도 때로는 아주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양날이 있는 칼처럼, 한쪽 날은 방어를 해주지만, 다른 쪽 날은 자신에 게 상처를 입힌다. 그대의 두 눈에 경이로움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모든 고통 속에도 그 자체의 놀라움과 기쁨과 달콤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는 것은 사실이다. 고통 역시 기쁨 그 자체만큼 놀라운 일이다. 한가지 이상한 사실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어린애 같고, 놀라움을 더 많이 느낀다고 하는 것이다. 남성은 언제나 지식을 추구한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놀라움을 없애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과학은 존재 계의 신비를 해부하여 그 신비를 없애는 데에 주력하고 있으며, 과학이 라는 말 자체가 지식을 의미한다. 더 많이 알게 될 수록 놀라움이 적어진 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아침에 어린아이와 함께 산책을 해보라. 나의 아버지는 이른 새벽부터 나를 잠자리에서 끌어내곤 하셨다. 아 직 해가 뜨려면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나는 아 버지에게 여러 번 말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앞뒤가 바뀐 것만 같아요.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 데에도 저는 억지로 잠자리에 들어야만 해요. 밤하늘에 별이 가득 하고, 그래서 강가로 나가려고 하면 못 가게 막으시면서, 새벽에는 아직 해가 뜨기 전인데도 저를 잠자리에서 끌어내니 말예요. 저는 억지로 새 벽 산책에 끌려가야만 해요. 저는 산책을 하는 게 아니라 질질 끌려가는 거에요. 이건 전혀 산책이 아니에요. 이 이상한 논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언어에 남아 있는 고대의 격언을 인용하셨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다." 나는 "정말 이상한 논리군요."라고 항변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아 버지는 끝내 나를 새벽 산책에 끌곤 하셨다. 어둠이 걷히고, 새들이 지 저귀기 시작한다. 그러면 새날이 밝아온다. 어제의 낡은 태양은 죽고, 새로운 태양이 떠 오른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곤 하였다. 그 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내 입을 막으셨다. "산책을 할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는 말했다. "한가지 조건을 들어 주시면 조용히 하겠어요." "조건이라니?" "아침에 저를 때우지 말아달라는 조건이에요. 선택을 하세요. 영국 사 람들이 아침 산책에 개를 끌고 다닌다고 하던데, 저는 개가 아니에요! 그러니 아버지 혼자서 산책을 다니시든지, 아니면 저를 데리고 다니시 려면 제 질문에 답변할 준비를 하세요. 그리고 저는 호기심 때문에 질문 을 던지는 거에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언제까지나 잠을 자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나는 너의 인생의 중요한 토대를 만들어 주려는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은 좋은 습관이다. 공기도 맑고, 햇빛도 신선하고, 또 모두가 아직 잠들 어 있기 때문에 침묵을 느낄수 있다. 이따금 새들이 지저귈 뿐이다. 그 지저귐도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침묵을 더욱 깊게 해 준다." 내가 말했다. "저는 결심했어요." "좋다. 우리 타협을 하자." "타협이라뇨? 제가 옳든지 틀리든지 둘 중의 하나예요. 타협이라 니,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나한테 달린 일이다. 나는 너를 새벽 산책에 데리고 다닐 것이다. 너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맘껏 질문을 던져라.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아요."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옷을 잡아당기고 팔꿈치로 치 면서 온갖 질문을 던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입을 다물고 계시다가 마침 내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도대체 너는 어떻게 생겨먹은 애가 그러냐? 넌 내 산책까지도 방해 하는구나!" 나는 말했다. "아버지께선 제 아침 잠을 방해하셨잖아요." 마침내 아버지는 포기하셨다. "좋다, 너는 잠을 자라. 나 혼자서 산책을 다닐 테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대는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 버리고, 점점 둔해진다. 그 이유는 그대가 많은 것을 미리 속으로 알아가기 때문 이다. 그대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머리 속엔 남에게서 주워들 은 지식으로 가득 찬다. 그래서 그 쥐워들은 지식 밑에는 어둠과 무지뿐 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인도에는 '마하트마(mahatma)', 즉 위대한 영혼이라고 알려진 사람 이 두 명뿐이다. 한 사람은 마하트마 간디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마하트마 브하그완딘(mahatma Bhagwandin)이다. 마하트마 브하그완딘은 이따금 우리 집에서 지내곤 하였다. 그는 늘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토록 해박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아는 것이 어 찌나 많은지 아홉번째 세계 불가사의에 해당할만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 와 함께 새벽 산책을 나가곤 했다. 그는 산책길에서 내가 필요했다. 왜냐 하면 그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누군가 끝없이 질문을 던져댈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선 나에게 말씀하셨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내가 너를 산책에 데려가려고 할 때는 그렇게 힘들더니, 마하트마 브하그완딘만 오면 네가 먼저 그분을 잠자리에서 끌어내니 말이다." 새벽 산책을 가자고 내가 깨울 때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다!" 그러면 나는 말했다. "너무 이른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이를수록 더 건강해지니까요." 그는 내가 산책에 따라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왜냐하면 내가 끝없 이 질문을 던져댔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나무들의 이름은 물론, 그 나 무들이 어떤 병에 쓸모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실로 놀라운 인 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우정은 금이 가고 말았다. 내가 잘못 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죽기 직전에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 실을 깨닫긴 했지만............ 그가 죽기 사흘전에 나는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침대에 누워 고백 하였다. "그대가 옳았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이제 기운이 다했다. 이제 며 칠, 아니 몇 시간 후면 내 인생은 끝이 난다. 마침 잘 와주었다. 나는 그 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나는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 다. 그때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나는 당신이 나무에 대하여, 별에 대하여, 땅에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요. 내가 무엇을 질문할 때 마다 당신은 모른다고 대답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나요? 이 질문에 대답을 해 주세요. 그리고 어린이 를 속이진 마세요. 그것만큼 큰 죄는 없으니까요. 당신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또 두 번째 질문이 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그 지식들이 당신 자신을 아는 데에 어떤 도움 을 주었나요? 아니면 그 모든 지식은 단지 남에게서 주워들은 것에 불과 한가요? 어떤 나무의 학명을 알고, 그 잎사귀와 뿌리와 꽃의 의학적인 용 도를 아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나요? 당신 스스로 그것들을 발견했나요, 아니면 여러 정보를 주워모은 것에 불과한가요?" 그는 내 질문에 화를 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당신이 화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에요. 당신은 전에는 화 를 낸적이 없어요. 그것은 내가 당신이 주워모은 정보에 대해서만 질문 을 했기 때문이죠. 당신은 걸어 다니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이에요. 하 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죠? 죽음이 당신의 문을 두드릴 때 이 모든 지식도 사라질 것이고,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거예 요." 그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아버지에게 말했다. "내일 부터는 나 혼자서 산책을 나가겠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저 애를 조심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 쓸데없이 피곤한 일을 당하십니까?" "어제까지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었소. 그런데 오늘 저애는 확실히 나 를 피곤하게 만들었소. 하루 종일 그가 던진 질문이 내 귓가에 맴돌고 있소." 죽기 직전에........ 아주 여러 해 뒤였다. 그는 1960년에 죽었다. 내가 그의 임종에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죽기 직전에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병상에 누워 이 렇게 말했다. "참 잘 와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는 화를 낸 것에 대하여 그대 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대가 옳았다. 나의 모든 지식은 쓸모가 없었 다. 세상 전체에 대하여 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모두가 쓸모없는 지식이다. 목적지도 없이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이나 마 찬가지다." 그는 계속 말했다. "나는 이제 죽는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그대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그대의 질문이 늘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지만 나는 어떻 게 해야 나 자신을 아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 너무 늦었다. 내일이면 나 는 떠날 것이다." 내가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내일 세상을 떠 날수 있습니다. 아 무리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라도 내일 세상을 떠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 입니다. 물론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간단한 명상이 당신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지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당신의 내적 중심으로, 그 침묵의 세계로 들어갈 가능성이 더 커졌습니다. 그 내적 중심만이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육체를 떠나기 전에 그 내적 중심을 조금 이라도 맛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더 높은 차원의 새로 운 삶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알무스타파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어린이에 가 깝다. 그것이 여성의 아름다움이고, 순진함이다. 여성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남성들이 여성의 지식을 방해하였다. 여성은 집안을 치우고 밥 을 짓고 어린이를 키우는 사소한 것들만 안다. 그래서 여성은 내 말을 들을 때 훨씬 깊이, 친근감 있게 애정으로 듣 는다. 그러나 남성은 처음부터 주저하고, 경계하고, 자신의 지식이 허물 어질까봐 겁을 먹는다. 아니면 영악한 사람은 내가 말하는 것을 전부 자 신의 지식에 비추어 해석하면서, "이건 별로 새로운 얘기가 못 된다. 나 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에고, 자 신의 단단한 껍질을 보호하기 위한 수법이다. 그 껍질을 깨고 나와서 자 신이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소위 영혼이라는 자기 존재의 진실한 공 간을 누릴 가능성이 없다. 전세계 어디서나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 여성들이 내 말을 들을 때는 그들의 눈빛에서 반짝이는 기쁨과 놀라움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반응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그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내려가 있 다. 그러나 우리의 칼릴 지브란은 여성이 이 질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사실 남성들은 질문하기를 두려워 한다. 질문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이 <예언자>에서 가장 좋은 질문들은 여성이 하고 있 다. 사랑에 대하여, 결혼에 대하여, 아이들에 대하여, 기쁨과 슬픔에 대 하여........ 그들은 신에 대하여, 철학적인 체계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니 라, 삶 그 자체에 대하여 묻는다. 굉장한 질문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 도, 그것들은 실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고, 그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자다. 그런데 지금 알무스타파는 이 질문 을 던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고 있다. 질문 그 자체에만 대답하 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시각이 다르다.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그 질문자 자신이라고 믿는다. 왜 이 질문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서 나왔는가? 그것은 여성이 끝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노예나 다름없이 천대받고, 경제 적으로도 남성에 의존해야 하고, 또 게다가 출산의 고통까지 겪어야 한 다. 뱃속의 아이는 여성이 맘대로 무엇을 먹지도 못하게 만든다. 먹기만 하면 토할 것 같으니 먹을 수도 없다. 또 출산할 때는 여성을 거의 녹초 로 만든다. 출산했다고 해서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키 워야 한다. 또다시 남성이 임신을 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여성은 아이 만드는 공장 같다. 그렇다면 남성은 어떤 일을 하는가? 남성은 여성의 고통에 전혀 참여 하지 않는다. 아홉 달 동안 여성은 고통을 겪고, 또 출산시에도 고통을 겪는데, 남성은 무엇을 하는가? 남성은 여성을 자신의 향락과 성욕을 충 족하는 대상으로만 취급할 뿐이다. 여성에게 어떤 결과가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생각이 없으며, 입으로만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할 뿐이다. 만일 남성이 진실로 여성을 사랑했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넘 쳐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완전히 공허한 단어다. 입 으로는 그렇게 하면서 그는 여성을 짐승 취급하고 있다. 아닌가? 그러면 들판위로 지나가는 계절에 언제나 순응했듯이 너희 가슴속을 지나가는 계절도 즐거이 받아들였으리라. 진리의 말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질문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리지만, 질문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한다면 진리가 아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볼때만 진리다. 너희 가슴속을 지나가는 계절도 즐거이 받아들였으리라. 어떤 때는 즐거움이, 어떤 때는 고통이, 어떤 때는 고통도 즐거움도 아닌 무심한 마음이 찾아온다. 칼릴 지브란은 말하고 있다. "너희의 들 판 위로 지나가는 계절들을 언제나 받아들였듯이 너희의 가슴속을 지나 가는 계절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피상적으로 볼 때는 옳은 말이다. 어떤 것이든지 받아들이는 마음은 평화를 주고, 안정을 준다. 어떤 고통이 찾아와도 곧 지나갈 것이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된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은 다르다. 여성은 언제나 하나의 계절 속에서만 산다. 바로 고통의 계절이다. 언제나 고통의 연속 이다. 여성의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지 않는다. 여성의 삶은 실로 어렵다. 물론 오늘날엔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도 발전된 나라에서 만 그렇다.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사실 개발도상국이란 무 엇인가? 개발도상국이란 말뿐이지, 실제로는 미개발 국가다. 말만 바뀌 었을 뿐이다. 미개발 국가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개발이 되 어가는 도중에 있는'국가라고 교묘하게 말만 바꾼 것이다. 인간의 교 활한 생각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발전하지 않고 있다. 인도 국민의 80퍼센트는 시골에서 살고 있다. 시골에서의 여성의 생 활이 얼마나 힘든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여성들은 수십 세기 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은 바뀌 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을 직시한다면 칼릴 지브란의 이 말이 전혀 벽혁 의 의지를 담고 있지 않은 말임을 알 것이다. 단지 일종의 위안에 지나 지 않는다. "인간의 굴레를 받아들이시오. 인간의 숙명으로 알고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시오." 힌두교인들이 숭배하는 위대한 성자 중에 툴시다스(Tulsidas)라고 하는 자가 있다. 그는 힌두교인 대부분이 읽은 라마(rama)신의 생애를 썼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은 때려야 소리가 나듯이......" 물론 북은 때려야 소리가 난다. 안 그러면 소리가 날 리 없다. 그런데 툴시다스는 같은 범주 안에 북과 불촉천민과 동물과 여성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들을 끝없이 때리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잘못 이 있든 없든 여성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끔 이따금씩 신나게 얻어맞 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 툴시다스는 힌두교의 위대한 성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 서 사람들은 나더러 이 자를 비난하지 말라고 한다. 이 자는 성자가 아 니라 범죄자다. 이것은 비난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을 북의 범주에 넣는 자가 어찌 성자인가? 툴시다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 아내 가 아니었다면 툴시다스는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 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툴시다스는 정력이 강한 남자였음에 틀림없다. 한번은 그의 아내가 부모를 만나기 위해 오래간만에 친정으로 다니러 갔다. 며칠뿐인데도 툴시다스는 아내 없는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의 친정집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툴ㅅ시다스의 집과 아내 의 친정집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런데 때는 장마철이어서 물이 어찌나 불었는지 건너편 강둑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반중에 정욕에 못이겨 잠에서 깨어난 툴시다스는 아내의 친정집으 로 가기 위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강물에 시체 하나가 떠내 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욕망은 사람을 장님으로 만든다. 그는 그 시체를 통나무라고 생각했다. 그 통나무에 매달려 그는 강물을 건넜다. 너무 늦은 밤중이라서 그는 감히 떳떳이 대문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 었다. 그래서 그는 집 뒤편으로 갔다. 그의 아내가 이층에서 자고 있다 는 것을 그는 알았다. 마침 밧줄 하나가 이층에서 아래층으로 걸쳐져 있 었다. 그는 그 밧줄을 잡고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은 밧줄이 아니라 뱀이었다. 욕망에 눈이 먼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층에 올라간 그는 아내의 방문을 두드렸다. 등불을 들고 문을 연 아 내는 툴시다스가 손에 들고 있는 뱀을 보았다. 그녀는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 뱀을 손에 들고 있어요! 왜 한밤중에 뱀을 들고 나타난 거죠? 강물이 저렇게 불었는데 어떻게 건너 왔죠?" 그는 말했다. "아뿔싸! 밧줄이 아니라 뱀이었군! 내가 강물을 건너올 때 타고 왔던 것도 통나무가 아니라 사람의 시체였는지도 몰라! 썪는 냄새가 지독했 거든!"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런 정열로 신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했다면 당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에요. 부끄러운줄 아세요! 어서 돌아가요. 내 남편이 나 없이 며칠 밤도 혼자서 잠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창피해요. 더구나 욕정에 눈이 어두워 시체를 통나무인 줄 알고, 또 뱀을 밧줄로 알다니 정말 부끄러워요. 어서 돌아가세요. 그리고 이 정도의 정열과 기 운이라면 신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모욕을 당한 그는 돌아섰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는 힌두 교의 성지인 베나레스를 여행하였다. 그는 속세를 떠났다. 속세를 떠났 기 때문에 그는 성자로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라마 신의 일생에 관한 아름다운 책을 썼다. 그 책은 아주 쉬웠기 때문에 전 혀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은 힌두교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 되었으며, 그는 위대한 성자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추한 행동을 했는가를 보라! 그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마 음을 갖도록 해준 것은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가 그를 성자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화가 나서 성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북이 때려 야 소리가 나듯이, 여자도 끝없이 때려야 한다."라고 쓴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이것은 내 아내에 관한 말이다."라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그는 모든 여성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늘 그렇게 작용한다. 한 사람이 그대를 속이면, 그대는 인류전체를 불신한다. 툴시다스는 마땅히 자기의 아내를 숭배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여성 전체를 싸잡아서 북과 동물과 불촉천민 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들을 때려라. 더 잘 때릴수록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고, 그대의 명력에 복종하게 된다." 여성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도 알무스타파는 지금 누가 이 질문을 하고 있는가를 잊었다.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계절이 도무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수용이 아니라 이제 변혁이 필요하다. 남성은 지구상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동물이다. 모든 동물 세계에는 수컷이 암컷에게 관심을 갖는 시기가 따로 있다. 그 시기는 어떤 때는 몇 주간, 어떤 때는 몇 달이 되지만, 일단 그 기간이 지나면 일년 내내 섹스에 대하여 잊는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는 숫자가 넘쳐나지 않는 것 이다. 일년 내내 섹스를 하는 것은 남성뿐이다. 미국에선 밤낮이 없이 섹스를 한다. 그런데도 여성에게 고통을 받아들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러한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남에 의해 서 주어지는 고통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여성에겐 변혁이 필요하다. 남성이 여성을 북처럼 취급한다면, 여성도 마땅히 남성을 북처럼 취 급해야 한다. 여성도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 남성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도록 두들겨 패라. 그리하여 너희 슬픔의 겨울 사이로 고요히 바라볼 수 있었 으리라. 왜 바라만 보는가? 바꿀 수가 있는데 왜 바라만 봐야 하는가? 바꿀수 없을 때에만 바라보라. 자연스러운 것일 때에만 고요히 바라보라. 그런 것이라면 고요히 관 조하는 사람이 되라. '고요히 바라볼 수 있었으리라.'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시적인 속임 수가 깃들여 있다. 만일 칼릴 지브란이 자신의 아내한테서 끝없이 얻어 맞았다면, 그래도 '고요히 바라보라.'라고 말했을까? 자연적인 현상일 경우에는 고요히 관조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어지는 모든 고통에 대해선 과감히 바꾸라. 그사 람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성직자든 교수든, 정부든 사회든 과감히 혁명을 일으키라! 혁명적인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있 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 고통의 대부분은 너희 스스로 선택한 것. 이것은 사실이다. 그대의 모든 불행, 모든 고통...... 그것들의 많은 부분은 남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남에 의해서 강요되는 고통에 대 해서는 변혁을 일으키고, 자신이 선택한 고통을 떨쳐 버리라. 그것들을 고요히 바라볼 필요가 전혀 없다. "이 고통은 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들은 내던지라. 그대 가 내던지는 것을 다른 사람이 고요히 지켜보게 하라! 그대가 자신의 고 통을 내던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왜 쓸데없이 고통받는가? 내 이웃이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내던지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질투, 그대의 분노, 그대의 욕심...... 이 모든 것들이 고통을 불러온다. 그대의 야망, 그것이 모든 고통을 부른다. 그것들 모두가 그 대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너희 내면의 의사가 너희의 병든 자아를 치로하는 쓰디쓴 약. 그는 또다시 그대를 위안하려 하고 있다. 그는 지금 분명한 구분을 내 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부과된 고통이 있다. 그러한 고통들에 대해선 혁명을 일으키라. 또 자연적인 고통이 있다. 그것들은 관조하라. 고요히 관조하라. 왜냐하면 그 고통은 그대 내면의 의사가 그대의 병든 자아를 치료하는 쓴 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사를 믿으라, 그리고 말없이 침착하게 그가 내주는 약을 마시라. 하지만 기억하라. 이것은 의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그대의 남편 이나 정부를 신뢰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대를 치료하는 것이 아 니라 그대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그대를 더 많이 파괴하고, 짓누르려 하고 있다. 그대가 더 많이 파괴될수록 다루기가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연적인 것은 치료를 해준다. 그때 는 관조하면서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엄 격히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손이 아무리 맵고 사정없을지라도 저 '보이 지 않는 이'의 보다 부드러운 손길에 인도되고 있으므로. 자연은 보이지 않는 신의 보이는 부분이다. 그의 손이 아무리 맵고 사 정없을지라도 존재계의 본질 그 자체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다. 따라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가 내주는 잔 또한 너희 입술을 태울지라도 저 '도공'이 자기의 신성한 눈물로 적신 흙으로 빚은 것이므로. 자연적인 것일 때에는, 인위적인 게 아닐 때에는 그 고통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라. 그것은 그대를 치료하고자 하는, 그대를 더 높은 의식 상태 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다. 어떤 종류의 노예적인 생활이든, 그것에 복종한다는 것은 곧 그대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다.노예로 사느니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왜냐하 면 그 죽음이 차라리 자신의 존엄성을 살리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러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 늘날까지도 그 존엄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쉽게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재판관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왜냐하면 재판관 역시 이 사람이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순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투표를 통해 소크 라테스의 유죄가 결정되었다. 별 차이는 없었다. 49퍼센트가 소크라테 스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51퍼센트가 유죄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법이 란 우둔한 것이다. 어쩌면 어리석고 파괴적인 인물들일지도 모를 2퍼센 트의 사람들이 더 많이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주장했다고 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버렸다. 그 이후 그리스는 더 이상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계석해서 몰 락의 길을 걸었다. 오늘날 누가 그리스의 영광과 권력을 인정해 주는가? 가장 높은 의식 차원에 올라간 사람을 단 한 명 죽임으로써 그들은 그러 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그가 달콤한 말이 아니라 쓰디쓴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말했다. "낡은 것은 제거해 버려라. 그래야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너희들 내 면의 목소리를 신뢰하라.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쓰레기다." 재판관은 소크라테스를 죽이는 것이 유감이었다. 예수를 죽일 때의 본디오 빌라도의 심정과 같은 것이었다. 빌라도는 보다 교양있고 보다 인간적인 사람이었으며,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태적인 편견을 갖 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그리스인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높은 경지에 기분이 상 했다. 등이 굽은 낙타들을 산꼭대기에 데려가면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 다. 그래서 낙타는 절대로 산에 올라가지 않고 사막에서만 사는 것이다. 사막이 곧 그들의 산인 것이다. 재판관이 말했다. "선택원을 주겠다. 죽기 싫거든 아테네를 떠나라. 아테네 밖이면 어디 서든지 살아도 좋다. 어서 떠나라. 아테네를 벗어나면 당신을 아끼는 사 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도 않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아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진리보다 목숨을 보존하는 데에 더 관심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재판관이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아테네에 남아 있되, 앞으로는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라. 진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 침묵을 지켜라."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만일 내가 진리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목적이 무엇이 겠는가?" 재판관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나를 꼼짝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뿐이다.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대가 제안한 것들 중에서 그쪽이 가장 좋아 보인다. 그렇게 하면 나는 최소한 존엄성을 갖고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도 나 를 가치있는 인간으로 기억해 줄 것이다." 그 이후 그리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존엄성을 갖춘 인물을 더 이상 배출 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더불어 그 나라의 영혼의 알멩이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늘 기억하라. 진리가 목숨보다 더 높다는 것을. 모든 것이 다 희생될 수 있어도 진리는 희생될 수 없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