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춤추는 자를 질투하는 절름발이 법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법률가가 물었다. 그러면 스승이시ㅣ여, 우리의 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는 법을 세우기 좋아하면서 또 법을 깨뜨리기를 더 좋아한다. 마치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모래탑을 애써 쌓았다가는 또 웃으면서 허물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너희가 모래탑을 쌓는 동안 바다는 더 많은 모래를 기슭으로 밀어 보내고, 너희가 모래탑을 부술 때는 바다도 또한 너희와 함께 웃더라. 진실로 바다는 언제나 티없이 맑은 것들과 함께 웃는다. 그러나 삶이 바다와 같지 않은 자, 인간이 만든 법이 모래탑이 아닌 자에게는 무어라 할 것인가? 삶이 바위와 같은 자, 또 그 바위를 쪼아 그들 자신의 모습을 새기는 끌이 곧 법인 자에겐? 춤추는 자들을 질투하는 저 절름발이에겐 무어라 할 것인가? 저를 묶은 멍에만 좋다 하고 숲 속의 사슴과 노루를 보고는 떠도는 것들이라고 여기는 저 수소에게 무어라 할 것인가? 제 허물은 못 벗으면서 다른 모든 뱀들에게 벌거숭이이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소리치는 늙은 뱀에겐? 또 혼인 잔치에 먼저 가서 실컷 먹곤 싫증나면 돌아가면서, 모든 잔치는 다 위법이며 자니 손님들도 법 위반자라고 떠드는 자에겐? 내 이들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도 햇빛 속에 서 있건만 다만 태양을 등지고 선 것이라는 말밖에? 그들은 다만 자기의 그림자만을 볼 뿐. 또 그들의 그림자가 그들에게는 법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태양이란 무엇인가? 다만 그림자를 던져주는 것일 뿐. 그러나 너희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자들아, 땅 위에 그려진 어떤 그림자가 너희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인가? 너희 바람과 함께 여행하는 자들아, 어떤 바람개비가 너희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인가? 너희가 자신의 멍에를 부수되 다른 누군가의 감옥 문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인간의 법이 너희를 구속할 것인가? 너희가 춤추되 다른 누군가의 쇠사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법이 너희를 두렵게 할 것인가? 또 너희가 옷을 찢어 버리되 그것을 다른 누군가의 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너희를 재판할 것인가? 오르팰리스 사람들아, 너희가 북소리를 잠재울 수 있고 거문고 줄을 풀어 놓을 수는 있지만, 누가 과연 저 종달새에게 노래를 하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자 이번에는 한 법률가가 물었다. 그러면 스승이시여, 우리의 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는 법을 세우기를 좋아하면서 또 법을 깨뜨리기를 더 좋아한다. 마치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모래탑을 쌓았다가는 또 웃으면서 허물어버리는 것처럼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 시에 대하여 깊이 명상하라. 먼저,'법을 세우 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법을 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허약한 자들 이다. 허약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수를 이루어 자신들이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또 자신들의 허약함을 감추기 위하여 대표를 통하여 법을 만 든다. 세상의 법은 사랑과 진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법은 두려 움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법이 만들어 지지만, 강자는 훨씬 더 영리하고 교활하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대 표단을 구성하여 법을 만들지만,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로 그 법은 힘있 는 자들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이용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대들이 법을 만들지만, 결국 그 법의 희생자가 된다. 강자들이 그 법을 이용하여 그대를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히틀러는 민주적인 방식을 통하여 나라의 통치자로 선출되었다. 하지 만 일단 통치자가 되자 그 자신이 곧 법이 되었다. 그 법은 그를 선출한 사람들에게 해로운 쪽으로 작용하였다. 세상엔 진정한 법이라는 것이 없다. 그것은 가장 기초가 되는 주춧돌 이 빠졌기 때문이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진정 한 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폴레옹 보니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곧 법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법률 그 자체다."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힘이 정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힘이 정의일순 없다. 정의는 힘보다 높다. 힘은 동물적인 것이고, 정 의는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의 군대라고 하는 것은 왜 존재하는가? 왜 일반인들은 무기를 소 지하지 못하는가? 경찰과 정부와 군대는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위 험하고 살인적인 무기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권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국민의 주인이 된다. 그 권력으로 국민의 존엄성과 자존심과 인간성을 파괴한다. 전세계가 무장해제를 할 필요가 있다. 소련과 미국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가 그래야만 한다. 국민이 무장하고 있지 않은데 정부와 군대가 그 모든 무기를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목적인가? 그것은 자기 들은 더욱더 강해지고 국민은 더욱더 약해지게 하기 위해서다. 국민은 싸울 수도 없고,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아무런 수단이 없는 것이 다. 정부는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서로에게 인간적으로 다 가가도록 하기 보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이용한다. 누구에게든지 힘센 자가 곧 정의인 것이다. 이솝 우화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새끼양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사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 왔다. 사자는 맛있는 아침을 즐길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사자는 새끼양에게 말했다. "너 참 뻔뻔스럽구나. 내가 여기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네가 거기서 흙탕물을 일으키면 쓰겠냐,이놈아?" 하지만 새끼양은 매우 영리했다. "아저씨, 물은 위애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에요. 아저씨는 위쪽에 있고 나는 아래쪽에 있는데 어떻게 내가 아저씨가 마시는 물을 더럽혔단 말 인가요? 물이 위쪽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에 요." 새끼양이 꽤 영리하게 나오자 사자는 갑자기 소리쳤다. "네 아비가 나를 모욕했다." 새끼양이 물었다. "언제 그랬나요?" "바로 그저께 그랬다."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는 여섯달 전에 돌아가 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저께 우리 아버지를 만났단 말인가요?" 사자는 새끼양으로 좋은 아침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아무래도 말 로는 당해 낼수가 없었다. 새끼양이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 아버지가 당신을 모욕했다고 해도 나는 아무 죄가 없 어요. 그러니 나에게 화를 내실 필요가 없어요." 사자는 당황했다. 이 영리한 새끼양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침내 사자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도대체가 어른에게 말버릇이 없구나. 너는 내 말에 일일이 말대 꾸를 하면서 주둥이를 놀리고 있는데 말야, 도저히 참을수가 없구나." 새끼양이 말했다. "왜 이런 승강이를 벌이죠? 나를 잡아먹고 싶은 게 아닌가요? 여러 말 말고 어서 잡아먹어요." 힘에는 토론이 필요없다. 처음엔 약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법을 만들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법을 위반하 는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법 앞에선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누군가 강자가 되면 법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것은 무엇인 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도 그 속에 거짓이 담길 수 있다. 세상의 어 떤 정부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 이것은 일 종의 기만이다. 그대들이 더 강하고 영리한 자를 국민의 대표로 선출해 놓으면, 그들은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흔든다. 그들은 그 권력을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다. 법을 만드는 자, 그들은 누구인가? 또 무슨 이유 때문에 법이 필요한 가? 정부와 군대가 경찰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민들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다.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 찬란한 상품은 아무리 기다려도 배달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관심을 법에서 사랑으로 돌려야 할 때다. 법은 도 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막대한 해를 끼친다. 사랑이 없이는 법이 있을 수 없다. 또 사람들의 가슴이 사랑으로 충만할 때, 거기 법은 전혀 필요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법률가가 물었다. 그러면 스승이시여, 우리의 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는 법을 세우기 좋아하면서 또 법을 깨뜨리기를 더 좋아한다. 그대는 그 법이 자신을 더 강하게 해주기 때문에 기뻐하며, 또한 자신 이 그 법을 위반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한 가지 숨길 수 없는 진실은 세상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법에 관한 한 전문가들이라는 것 이다. 세상의 가장 큰 범죄자들도 법률 전문가들이다. 법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법을 빠져 나갈 구멍까지 아는 것이다. 순진한 사람은 법률 용어 를 알아듣지도 못한다. 따라서 똑같은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바로 그 사람들이 범죄자를 보 호한다. 똑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법을 위반한다. 마치 장난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말하고 있다. 마치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모래탑을 애써 쌓았다가는 또 웃으면서 허물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너희가 모래탑을 쌓는 동안 바다는 더 많은 모래를 기슭으로 밀어 보내고, 너희가 모래탑을 부술 때는 바다도 또한 너희와 함께 웃더 라. 칼릴 지브란은 지금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 존재 계 전체가 인간의 끝없는 어리석음에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래성을 쌓으면서 '이 성이 영원히 파괴되지 말기를!'하고 바란 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법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어떤 법이든지 항 상 그 법을 위반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더 많은 법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온갖 종류의 법이 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범죄는 증가하고, 살인도 늘고, 자살도 늘고, 강간도 늘었 다. 법이라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말하고 있다. "바다와 대지와 달과 별들이 웃는다. 도 대체 인간들이란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인간은 우주 전체의 웃음거리 가 되고 있다." 진실로 바다는 언제나 티업시 맑은 것들과 함께 웃는다. 이 존재계 전체, 우주 전체의 순진무구한 것들이 인간을 비웃고 있다. 인간의 철없는 장난에 웃음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삶이 바다와 같지 않은 자, 인간이 만든 모든 법이 모래탑이 아닌 자에게는 무어라 할 것인가? 삶이 바위와 같은 자, 또 그 바위를 쪼아 그들 자신의 모습 을 새기는 끌이 곧 법인 자에겐?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 이후 모든 아버 지가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하고 있다. 자식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 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더라도 자신의 형상이 이 세상에 남아 혈통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상대방을 만들려고 애쓰는 순간부터 그대 는 사랑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상대방이 자기 본해의 얼굴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고, 대신 그대를 닮은 가면을 덮어씌우는 것 이다. 어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나는 그 집의 어린 소 년과 정원에 앉아 있데 되었다. 내가 그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소년이 말했다. "아마도 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될 거에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를 바란단 말이냐?"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아빠는제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 고, 엄마는 기술자가 되길 바라고, 또 삼촌은 교수가 되길 바라고, 할아 버지는 정치인이 되길 바라고...... 모두가 저를 자기들이 생각하는 사람 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아무도 제가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이 무엇 인가를 묻지 않아요. 자연히 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될 거에요. 의사 도 조금 되고, 기술자도 조금 되고, 교수도 조금 되고, 이것 저것 조금씩 될 테니까요." "너는 매우 똑똑하다. 아무도 너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수 없을 것이 다. 오늘 밤 내가 너의 부모와 친척들에게 말을 해주마." 소년이 말했다. "에초부터 그래 왔어요. 제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 애는 눈이 아빠를 닮았군 요. 코는 엄마를, 피부색은 삼촌을 닮고...... 그렇다면 나 자신의 고유한 것은 무엇이죠? 저는 단지 머리카락은 누구 것......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조금씩 미치게 하고 있어요." 이 모든 범죄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하느님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 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본래의 그 자신이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반항과 분노와 폭력과 마음속 깊은 좌절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범죄를 낳는다. 만일 사람들에게 본래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그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한다면 지상 에서 범죄는 사라진다. 범죄와 함께 정치인들과 판검사들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자연히 그러한 막대한 값을 치르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대 속안에 잠자고 있는 혁명의 기질을 일깨우기 때문 이다. 그들은 그것을 자꾸만 그대의 무의식 속으로 잠재우려고 한다. 반 면에 나는 그것을 자꾸만 그대의 의식의 표면으로 꺼내어 그대가 초의식 차원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돕는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선 더 이상 좌절도 분노도 폭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다. 그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폭력도 행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기본적인 법칙을 잊지 말라. 외부에서 그대에게 행해지고 있 는 것을 그대는 그대로 사회에다 행한다. 그대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것은 사회가 그대에게 범죄적인 어떤 것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5천 명이 모여 5년을 지냈다. 그런데도 우리에겐 재 판관이나 법정이 필요없었다. 싸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서 로의 공간,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하여 서로들 감사해했다. 그러니 어떻게 폭력이라는 것이 행사될 수 있는가? 폭력과 불법과 범죄는 매우 깊은 원인에 뿌리를 둔 증상이며, 그 원인 은 모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대가 행복할 수 있 고, 축복을 느낄 수 있으며, 어떻게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가? 춤추는 자들을 질투하는 저 절름발이....... 춤추는 자들을 미워하는 절름발이에게 법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 는가?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미국 정부가 우리에게 화를 낸 것은 그들은 절름발이이고, 우리는 춤추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은 우리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장님이었는데 우리는 무지개의 색 깔과 햇빛과 달빛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우리 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었겠는가? 의학계에선 이미 굳어진 사실이지만 정부에서 통제하기 때문에 일반 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다. 정부에선 마약과 마리화나를 반대하 지만, 마리화나는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다는 것이다. 마리화나는 사람 을 좀더 이완시키고 즐겁게 만들어 줄 뿐이지 부작용이 없다. 하지만 마 리화나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술은 허용되고 있다. 술은 사람을 파 괴하고, 일찍 죽게 만들 수도 있다. 마리화나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거 꾸로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은 범죄이고, 술은 마음껏 마실 수 있다. 그것은 마리화나가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인 듯하 다. 춤추지 못하는 절름발이는 다른 사람이 춤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다. 행복을 느낄수 없는 불행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견디지 못 한다. 술은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불행을 잊게 해줄 뿐이다. 하지만 내일이면 그 불행이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밀려올 것이 다. 게다가 두통과 후유증까지 겹친다. 이것을 법은 허용하고 있다. 반 면에 마리화나는 불법이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단 한 사람 올더스 헉슬리(Aldus Huxley)만이 과 감하게 용기를 갖고서 마리화나를 합법화하고 음주를 불법화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는 마리화나가 고대의 베다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이 라고 말했다. 고대 인도의 베다 시대에는 '솜라스(somras)'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마약으로 히말라야 지역에서 구할 수 있 었다.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그것의 효과는 마리화나의 그것과 매우 비 슷하다. 올더스 학슬리는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충분한 기 술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어떤 마약에서든지 인체에 해로운 성분을 뽑 아내어 해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안정을 주고 초월적인 세계 에 대한 체험을 줄 수 있는 마약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는 과학 기술로 이룩해 낼 그마약을 '솜라스`에 따라서 이름을 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인 리그 베다(Rig Veda)에는 제사장들이 기 도를 드리기 전에 솜라스를 약간 복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복 용하면 훨씬 더 잘 춤추고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우리 인류가 언젠가는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은 일종의 합성 마약을 만 들어서 스물네 시간 안에 깨끗이 그 효과가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 다. 그는 그것을 고대의 선구자들을 따라 '소마(soma)'라고 이름 붙였 다. 소마는 '솜(som)'의 즙이라는 뜻이다. '솜'은 달을 의미한다. 솜라스는 복용하는 순간 세상이 보름달이 뜬 밤처럼 아름답게 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솜라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인류는 중요한 말을 경청 하는 데에 있어서 언제나 굼뱅이처럼 꾸물거린다. 나는 1950년대에 이미 이 나라에서 산아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 하였다. 사람들은 나에게 돌을 던졌다. 아이들이란 신으로부터 오는 것 이기 때문에, 나의 그러한 발언이 종교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인도는 인구가 4억이었다. 그때부터 어떤 조치를 취했다면 지금처럼 인 구가 많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두배가 넘는 9억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금세기 말 이 되면 이 나라에서만도 5천만 명이 굶주려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에 대 해선 관심이 없다. 거리나 집이 시체로 뒤덮일 것이다. 사실 5천만의 시 체가 있는 곳이라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그들을 화장시키거나 매장시킬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5천만 명이 주위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대는 웃을 수 있겠는가? 춤 출 수 있겠는가? 잔치 분위기일 수 있겠는가? 춤추는 자들을 질투하는 저 절름발이에겐 무어라 할 것인가? 천재들을 미워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 알 힐라지 만수르 (Al-Hillaj Mansoor)를 돌로 쳐죽인 자들, 소크라테스를 독살한 자들, 이들 모두가 절름발이는 남이 춤추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이 간단한 문 장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테네 시민들은 문명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구래도 소 크라테스의 천재성에 비하면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처럼 높이 날아오를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이 자를 없애자. 이자는 우리가 절름발이라는 것을 자꾸만 상기시키 고 있다."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춤추는 자를 절름발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법이 과연 무엇인가? 아돌프 히틀러가 6백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을 학살한 이유는 무엇인 가?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유태인들이 부자고, 영리했기 때문 에 그 자신은 어디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 지고 군인들이 모자라자 그는 군대에 들어갔다. 아무런 자질도 갖추지 않았고, 남에 비해 월등한 점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던 이 자는 돈 많고, 교육받고, 문화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잔뜩 증 오심을 품고 있었다. 노벨상의 40퍼센트가 유태인들에게 돌아갔다. 하 지만 유태인들은 소수민족이었다. 따라서 절름발이인 아돌프 히틀러로 서는 이 유태인들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온갖 방법으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자 아돌프 히틀러가 첫 번째로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독일은 점점 몰락해가고 있고 전쟁에도 졌다. 그 이유는 바로 유태 인들 때문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그는 그 말을 계속 되풀이 했고, 그래서 독일 시민들은 차츰 그 말을 믿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독일의 몰락은 '자전거' 때문이다. 모든 자전거를 없애라. 그럼녀 우 리는 전세계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는 독일 아리안족의 우월성이라는 이름 아래 그러한 학살을 자행하 였다. 그 자신은 그러한 우월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보다 더 바보스럽게 생겼다. 독일 민족은 에고의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에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되 었다. "이 사람의 말이 옳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민족만이 선택받은 민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유태인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자기네들이 신으로부 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해 왔다. 만일 우리 독일 아리안족이 선택 받은 민족이 되고 전 세계의 통치자가 되려면 반드시 저 유태인 놈들이 우리의 적이 될 것이다. 저들을 싹 쓸어버려야 한다. 유태인 같은 종족 이 지상에 살았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히틀러는 사람들을 세뇌시켰으며 그리하여 6백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당했다. 물론 그들이 가진 돈과 집은 없애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공장도 보존시켰다. 그것들을 독일인이 가졌으며, 그들은 매우 행복해했다. "이거야말로 정말 좋은 일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인을 부자로 만들었다." 유태인을 죽여서 그들의 돈을 모두 빼앗을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의 천재성, 어떤 사람의 정신을 빼앗지는 못한다. 아무리 유태인의 돈을 강 탈했어도 히틀러는 여전히 난쟁이고, 불구자며, 더러운 돼지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절름발이가 노래부르는 사람을 파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 는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비록 절름발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어느 정 도의 재능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를 도와서 그의 재능을 실현하고 그 것이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 절름발이라 해도 그림을 그릴수 있고, 명 상할수 있다. 파괴하는 데에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교육과 편의시설 을 제공하여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열등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해야한다. 저를 묶은 멍에만 좋다 하고 숲 속의 사슴과 노루를 보고는 떠도는 것들이라고 여기는 저 수소에게 무어라 할 것인가? '저의 멍에를 좋아하는 수소......'그대는 '수소'와 '황소'의 차이를 아는가? 황소는 힘과 기운의 상징일 정도로 위엄과 영광스러움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 황소를 거세하면 수소가 되는 것이다. 여기 기억해 두 어야 할 사실이 있다. 세상엔 많은 황소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황소 한 마리로도 수백 마리의 암소를 임신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그 만큼 황소는 힘이 있다. 황소에세는 재갈을 씌울 수도 없고, 울 안에 가 둘 수도 없다. 멋진 암소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황소는 만사를 젖히고 고삐를 끊고서 달려나갈 것이다. 뭐든지 우선이 있는 것이다! 황소는 더 많은 황소를 낳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실제적인 쓸모가 없 다. 모든 황소는 태어나면 자신의 힘을 깨닫기도 전에 거세를 당한다. 그리하여 영광된 황서가 가련한 일개 수소로 변하여 수레나 끌고 다니 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더 편안하다. 어제나 충분한 음식이 주어지고, 비와 더위를 피할 우리도 있다. 자연히 그 수소는 숲 속의 아름다운 사 슴과 노루를 보고는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수소는 주인에게로 가서 "왜 우리를 거세시켰는가?"라고 따 지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신 수소는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숲 속의 사슴과 노루들이 쓸데없이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레라도 끌고 다니니까 최소한 쓸모가 있는 존재다. 그런데 저 것들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인가?" 그리하여 멍에와 고삐가 그에겐 오히려 안정과 편안함을 주는 물건이 된다. 황소들을 거세시키지 말라.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야생동물들은 스스로 식량을 구하며,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 간다. 또한 그것이 훨씬 행복하다. 황소들 역시 산과 들에서 야생적으로 살아 갈 수가 있다. 이 비유적인 문장속에서 칼릴 지브란은 노예 상태가 그대에게 편안 함과 안정을 줄지 모르지만 동시에 그대는 자유와 존엄성과 영광을 상 실한다고 말한다. 제 허물을 못 벗으면서...... 뱀은 매년 낡은 허물을 벗는다. 그래서 새롭고 젊은 피부를 갖는다.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죽은 이파리는 떨어뜨리고 머지않아 새로운 이파 리와 꽃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나 늙은 뱀은 나이 때문에 더 이상 낡은 껍 질을 벗어던질 기운이 없다. 그러면서도 늙은 뱀은 스스로를 합리화시 킨다. 제 허물은 못 벗으면서 다른 모든 뱀들에게 벌거숭이이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소리치는 늙은 뱀에겐? 그대가 춤추고, 그대가 노래부르고, 사랑할 때 모든 절름발이들은 화 를 낸다. 그것은 그들이 그대처럼 춤출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에게는 그대의 춤을 멈추게 할 힘이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그대를 가두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춤을 멈춘다 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노래와 춤과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삶도 아니다. 벌거벗은 것을 음란한 행위라고 규정짓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다. 1천 명의 사람들이 알몸으로 서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들의 추한 모습에 놀 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옷으로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아름다운 알몸을 드러내면 그들은 참지 못한다. 그것 은 자신들의 추한 모습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다. 아무리 옷으로 감추고 있어도 그들 자신은 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 을 어떻게 속이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옷을 벗는 것을 음란한 행위라 고 규정짓는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 모든 새들은 알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더러 알몸으로 거리를 걸어다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럴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대 주변에 절름발이들이 너무 나 많기 때문에 거리에서 춤추어서도 안된다. 그것이 그들의 분노와 질 투를 자극할 것이니까. 그들에겐 그런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때가 너무 이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장님과 귀머거리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라. 이 미친 세상에 당분간 따라야 한다. 하지만 불구자 상태에서 초연히 일어선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때는 가능하다. 또 혼인 잔치에 먼저 가서 실컷 먹곤 싫증나면 돌아가면서, 모든 잔치는 다 위법이며 잔치 손님들도 법 위반자라고 떠드 는 자에겐? 겉으로 보기엔 중요한 말이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엔 실로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모든 정치 지도자들과 관료주의자들, 음주자와 흡연가 들을 알고 있다. 법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 때에도 이 나 라의 정치가라고 하는 모라르지 데사이(Morarji Desai) 주변에는 술을 마시는 자들이 많았다. 모라르지 잘못인가? 더구나 술은 곡류로 만든 것 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다분히 비정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든 병 이 오줌을 마시면 치료된다고 믿고 있다. 오줌만 마시면 어떤 의과대학 도, 의사도, 약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어떤 토론회 석상에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오줌을 마신다고 어떻게 그 병이 치료되는 지 말해 보라. 결핵을 어떻게 오줌으로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오줌은 몸 안의 모든 독성을 밖으로 배출해 내는 것인데, 그것을 다시 마신단 말인가! 또 음주를 금지하려면 모든 사람에게 그 법을 적용하라. '나는 예외다. 나는 인도의 수상이다. 모든 수상은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 라고 말해선 안된다. 나는 당신의 내각에 소속된 의원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술을 마신다. 당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 는 이유가 뭔가?" 마하트마 간디는 네 자녀의 아버지였다. 네 자녀를 낳은 뒤에 그는 독 신생활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적어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 어야 한다. 결국 그러한 독신생활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독신 생활은 자기 억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일흔 살이 넘어서 그는 벌거 벗은 처녀와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성자 대접을 받울 수 없기 때 문이다. 일흔 살이나 되어서 성자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연한 일 때문에 그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게 되었다. 간 디의 개인 비서가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 비서는 젊은 인텔리였으며, 또 훌륭한 작가였다. 간디는 그 연애를 금지하다가 마침 내 이런 최후 통첩을 내렸다. "독신생활을 하든지,아니면 이곳을 떠나라. 자네가 결혼을 하는 것에 대 해선 반대하지 않는다. 결혼을 원하면 결혼하라. 하지만 결혼을 하더라 도 독신으로 지내라." 이상한 논리다. 주위에 온갖 종류의 맛있는 음식을 즐비하게 늘어놓 고서 금식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식한다는 것이 자연히 훨씬 어려워진다. 항상 앞에 있는 음식 생각만 하게 되고 또 냄새에 자극되어 끝없이 배가 고파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간디의 비밀을 폭로한 것은 바로 그 비서였다. 내 생각에 그는 복수를 한 것이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전기를 쓰면서 거의 1백 페이 지를 할애하여 독신생활의 비합리성에 대하여 폭로하였다. 게다가 오랜 독신생활 끝에 간디는 죽기 직전에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썼다. 지금도 간디의 추종자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 간디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그런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간디와 매우 가까웠던 제자들은 그 비서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발 그 비밀만은 덮어 두시오." 이런 자들이 바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자들이다. 내 이들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도 햇빛 속에 서 있건만 다만 태양을 등지고 선 것이라 는 말밖에? 남을 비난하고, 남을 비판하고, 그러면서 내심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자들,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바로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자 들이다. 그들은 태양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둠에 매 우 만족하고 있다. 그들의 어둠은 매우 오래된 것이며, 그것이 그들의 철학, 그들의 종교, 생활 방식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바꾸길 원 하지 않는다. 바꾸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180도 돌아서서 태양을 향하 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찾아온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들을 태양 쪽으로 돌려세워도 이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그들은 얼굴을 자신의 그림자 쪽으로만 향하고 있다. 항상 그림자만 바라보고 있고, 그 그림자가 그들의 법이다. 처음에 한 법률가가 알무스타파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법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알무스타파는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다만 자기의 그림자만을 볼 뿐, 또 그들의 그림자가 그들에게는 법이다. 그들의 법은 어둠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들에게 태양이란 무엇인가? 다만 그림자를 던져 주는 것일 뿐. 그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던져주는 것'일 뿐이 다. 등을 돌리고 서 있으면 자연히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 법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땅에 엎드려 자신의 그림 자를 좇아가는 것일 뿐. 그들에게는 빛이 없고, 단지 그들 자신의 그림자뿐이다. 그래서 무엇 이 남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법을 따른다는 것은 '땅에 엎드려 자신의 그림자를 좇아가는 것'일 뿐이다. 또 땅위의 자신의 그림자만 좇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너희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자들아, 땅 위에 그려진 어떤 그림자가 너희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인가?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그대가 태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면, 땅 위 에 그려진 그림자가 그대를 붙잡을수 있을 것인가?" 태양이 그대의 법 이다. 사랑이 그대의 유일한 법이다. 사랑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지 말 라. 사랑이 인도하는 곳이면 따르라. 그때 그대는 언제나 순진무구한 상 태로 있게 될 것이다. 너희 바람과 함께 여행하는 자들아, 어떤 바람개비가 너희 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인가? 단순히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된다. 바람이 그대를 운명에 따라 부 드럽게 인도해 갈 것이다. 너희가 자신의 멍에를 부수되 다른 누군가의 감옥 문을 부 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인간의 법이 너희를 구속할 것인 가?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자유인이 되느냐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 는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대를 사랑한다고 하는 자들이 그대 에게 노예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슬을 끊으라. 모든 멍에를 벗어 던지라. 그리고 그대 자신의 본성을 따르라. 그 본성이 인도하는 곳, 그곳이 바로 낙원이다. 어느 곳이 낙원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본성을 따르기만 하면, 그대가 가 닿는 곳이 바로 낙원이다. 너희가 자신의 멍에를 부수되 다른 누군가의 감옥 문을 부 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인간의 법이 너희를 구속할 것인 가? 너희가 춤추되 다른 누군가의 쇠사슬에 걸려넘어지지 않는 다면, 어떤 법이 너희를 두렵게 할 것인가? 이것은 특히 그대에게 하는 말이다. 춤추라.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사슬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 누군가 쇠 사슬에 묶여 있길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자유다. 또 너희가 옷을 찢어 버리되 그것을 다른 누군가의 길에 버 리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너희를 재판할 것인가? 그대가 옷을 벗어 던지는 것, 굴레를 벗어 던지고 한 개인이 되는 것 을 누가 막을 것인가? 하지만 그대의 벗은 옷을 다른 사람의 길에 던지 지는 말라. 오르팰리스 사람들아, 너희가 북소리를 잠재울 수 있고 거 문고 줄을 풀어 놓을 수는 있지만, 누가 과연 저 종달새에게 노래를 하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의 위선자들이 바로 그렇게 한다. 알겠는가? 9 이 침묵 속에서 자유에 대하여 그 다음엔 한 웅변가가 말했다. 우리에게 자유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다. 성문 곁에서, 또 너희의 집 난로 곁에서 나는 너희가 꿇어 엎드려 너희 자신의 자유를 숭배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주인 앞에 스스로 머리 조아려 설령 자기를 죽일지라도 찬양해 마지않는 노예들처럼. 그렇다, 사원의 나무 숲 속에서, 성채 그늘 아래서 나는 보았다. 너희들 중 가장 자유롭다고 하는 자가 자유를 마치 멍에와 수갑처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 가슴은 내 안에서 피를 흘렸다. 왜냐하면 자유를 찾고자 하는 욕망조차 너희의 입을 막는 재갈이 되어서 더 이상 자유가 최후의 목적이며 성취라고 떠들 수 없을 때만이 너희는 비로소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낮에 근심이 없고 밤에 욕망과 슬픔이 없을 때 너희가 참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 그 모든 것이 너희의 삶에 휘감기는 중에도 그것들을 벗어던지고 얽매임 없이 일어설 때 그때 너희는 자유로우리라. 또 너희가 어떻게 낮과 밤을 뛰어넘을 수 있으랴. 너희 깨달음의 새벽에 지난 한낮의 시간을 묶었던 저 사슬을 끊지 않는다면. 사실 너희가 자유라 부르는 것은 그 사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슬인 것을. 비록 그 고리가 햇빛에 반짝거려 너희 눈을 부시게 하더라도. 자유, 그것은 외부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정한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정신적이고 영 적인 문제다. 정치적인 자유는 어느 순간에라도 빼앗길 수 있다. 경제적 인 자유 역시 아침의 햇샇에 이슬이 증발하듯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 다. 그러한 자유는 그대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대의 손에 달린 것 이 아니라면 절대로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가 없다. 진정한 자유는 언제나 정신적인 것이다. 그대의 깊숙한 내면 존재와 관계가 있다. 그 내면 존재는 아무도 사슬로 묶을 수 없고, 아무도 수갑 을 채울 수 없다. 아무도 감옥에 가둘 수 없다. 그렇다. 그대의 육신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제약을 받을 수 있지만, 그대의 영혼은 본래부터 자유롭다. 영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필요도 없고, 누구에게 요청할 필요도 없다. 이미 그 자유는 이 순간에도 거기 에 있다. 그대가 내면으로 향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슬과 감옥과 모든 종 류의 구속물들이 사라진다. 구속물들은 많지만 자유는 하나뿐이다. 마 치 진리는 하나지만 거짓은 수천 가지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 다음엔 한 웅변가가 말했다. 우리에게 자유에 대하여 말 씀해 주십시오. 웅변가는 말을 다루는 데에 능하다. 그는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사랑 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선에 대하여 말한다. 하지만 단지 말뿐이다. 그의 웅변술은 생각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진 것에 불과하다. 웅변가는 실 체엔 관심이 없다. 그의 세계는 오로지 말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그 말들 은 알맹이가 없는 빈 껍질이다. 그의 기술은 그 알맹이 없는 말들을 적절히 구사하여 사람들이 말에 현혹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웅변가가 알무스타파에게 "자유에 대하여 말해 달 라."라고 요청했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자유는 정확히 어떠한 것인가? 진정한 자유는 과거로부터의 자유, 미래로부터의 자유다. 그대를 과 거에 묶어 두고 있는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대를 항상 뒤로 잡 아 끌고 있는 기억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다. 뒤로 향하는 것은 존재계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 어떤 것도 뒤로 향하지 않는다. 또 진정한 자유는 욕심과 상상과 갈망으로부터의 자유다. 이것들은 그대를 미래로 향하게 한다. 거기, 과거도 존재하지 않고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 손에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짐을 벗고 현재에 사는, 지금 이 순간 속에 사는 사람 은 자유의 맛을 안다. 그에겐 사슬이 없다. 기억의 사슬, 욕망의 사슬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영혼을 묶고 있는 사슬이며, 그것들은 그대 가 지금 이 순간 속에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본다. 명상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서양에서 '파라다이스(paradise)', 즉 '낙원'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인도어에선 '모크샤(moksha)'다. 모크샤는 자유를 뜻한다. 파라다이스 는 자유를 뜻하지 않는다. 이 말은 페르시아어인 '피르다우스(phirdaus)' 에서 나왔다. 그것은 '담이 둘러쳐진 동산'이라는 뜻이다. 이점을 기억 하라. 동산이긴 하되 '담이 둘러쳐진 동산'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산 이긴 하지만 일종의 감옥이다. 구약성서에 보면 화가 난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 밖으로 추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어디로, 어느 곳으로 추방했단 말 인가? 나에게 묻는다면, 그 하느님의 저주 속에는 가장 큰 자유와 가장 큰 축복이 숨겨져 있었다고 대답하겠다. 그들은 감옥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이 곧 인류의 시작이었다. 이제 온 하늘과 온 땅이 그들의 것이었으 며, 그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만드느냐는 그들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그 런데 그들이 자유로운 세상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이었다. 우리가 몸 담고 사는 각각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 또 다시 담 이 둘러쳐진 감옥이 된 것이다. 담이 둘러쳐진 동산조차 되지 못했다. 어떤 작은 학교에서 종교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성서에 기록된 세상 의 시작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어린 학생이 손을 들었 다. 선생이 물었다. "뭘 알고 싶으냐?"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추방했다(drove out;차로 외 출한다는 뜻이 있음)'라고 되어 있는데 그때 하느님께선 어떤 차를 사용 하셨나요?" 틀림없이 자동차의 첫 번째 기종인 포드T모델을 사용햐T을 것이다. 기 독교에선 하느님이 인간을 벌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 렇지 않다. 하느님 자신도 자신이 인간을 벌주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 만, 사실 하느님 자신은 아직도 담이 둘러쳐진 동산에서 살고 있다. 또 그는 저주를 내렸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한 축복이었다. 그의 의도는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전체 인간의 진화를 가져왔다. 그진 화가 바라는 대로 빨리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대리인이라 고 일컫는 자들, 모든 종교인들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가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 견했을 당시...... 겉으론 그렇게 보이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오 히려 정반대로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관찰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많은 이유와 증거와 이론을 바탕 으로 논문을 썼다. 당시 그는 고령의 나이였다. 아마 일흔 살이나 일흔 다섯 살 정도였을 것이다. 게다가 병이 들어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이었 다. 늘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그런데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라. 그들은 그 늙고 병든 사람을 교황이 있는 재판정 앞으로 끌어내었다. 교황은 말했다. "너는 실로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 성서에서도 말하고 있고 또 만인이 알고 있듯이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 자, 너의 견해를 수정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라." 매우 늙고 병들긴 했어도 갈릴레오는 유머 감각을 갖춘 대단히 멋진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말했다. "재판관님,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쓰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글을 쓰든지 지구나 태양이 그것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와 태양 은 옛날부터 그래왔듯이 언제나 제 갈길을 가고 있을 겁니다. 지구는 앞으로도 태양 둘레를 돌 것입니다. 당신께서 나의 책을 불태우셔도 좋 고, 또 내가 당신의 뜻대로 새로운 논문을 발표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논문을 수정하라." 그는 논문을 수정하여 이렇게 썼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고 교황에 따르면, 또 평범한 인류의 의견에 따 르면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사실은 그 정반대다. 나로선 어찌할 수 없다. 나는 지구가 성경에 따 라서 움직인다고 확신할 수 없다. 태양이 성경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확 신할 수 없다. 지구와 태양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 주석은 그가 죽은 다음에야 발견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기독 교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예수가 십 자가에 처형당한 것에 대하여 그토록 떠들어대고 있는 자들이다. 아주 유명한 기독교 선교사인 스텐리 존스(Stanley Johnes)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황은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가? 과학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으면 마땅히 성경을 수정해야지 과학이 수정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스텐리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만일 성경의 한 구절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문장들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누가 보장하겠 습니까?" 성경은 말 그대로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온 성스러운 책이다. 아 무 것도 고쳐선 안 되며, 아무 것도 재편집하거나 수정해선 안된다. 하 지만 지난 3백년 동안 인류는 성경의 기록에 어긋나는 것들을 수없이 발 견하였다. 사실, 의식이 성장할수록 2천년 전에 씌어진 것들, 5천 년전에 기록된 것들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관을 찍어야만 한다. 하지만 종교계에 부족한 것은 용기다. 진리의 편에 서고 자 하는 용기의 부족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힌두교와 이슬 람교의 유태교와 불교와 자이나교 등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다. 정신에 있어선 별 차이가 없다. 자유로운 사람은 과거로부터 자유롭다. 또 자유로운 사람은 미래로부 터도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욕망을 계속 간직할 수 있겠는가? 어떤 늙은 사람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유태인이었으며, 따 로 나가서 살고 있는 그의 네 아들도 당연히 대단한 부자들이었다. 아버 지가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자 그들은 황급히 달려왔다. 아버지의 목숨은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내 쉬고 있는데 침상 곁에 모여 앉은 아들들은 시신을 묘지로 옮기는 방법 에 대하여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분만 더 있으면 아버지는 영원히 저 세상으로 갈 사람이었다. 다시는 만 날 가능성도, 서로를 알아볼 가능성도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어떻게 시신을 옮길까?"라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 다. 가장 어린 아들이 제안했다. "아버지께선 생전에 늘 롤스 로이스를 갖고 싶어하셨다. 이젠 아버지 에게도 충분한 돈이 있고, 또 우리도 돈이 충분히 있다. 또 아버지의 그 러한 순수한 바람을 거부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최소한 시신만큼은 롤스 로이스로 옮기자. 살아선 롤스 로이스를 탈수 없었지만 죽어서라도 한번 타보게 하면 좋지 않은가?" 둘째아들이 말했다. "너는 아직 젊어서 돈에 관한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순 전히 낭비일 뿐이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롤스 로이스로 옮기 든 트럭으로 옮기든 아버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버지는 그러한 것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돈을 낭비한단 말이냐? 게다가 롤스 로이스 택시를 빌리면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굳이 그것을 살 필요가 무엇인가?" 그래서 둘째아들은 말했다. "나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값싼 트럭을 구하자. 트럭으로도 롤스 로이스만큼 훌륭하게 시신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겐 아무 런 차이가 없다." 셋째아들이 말했다. "너 역시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 이만한 일에 뭐하러 트럭씩이나 구 하니? 거지가 죽으면 시에서 무료로 장의차를 제공한다는 것을 모 르냐? 시신을 그냥 길에다 버리자. 아침이면 시에서 장의차가 달려와 무료로 우송해 줄 것이다. 아버지가 죽어서 공짜 차를 타보게 하자. 죽 은 사람에게 시의 트럭이든 빌린 트럭이든 롤스 로이스든 무슨 관계가 있니?" 바로 그 순간 노인이 눈을 뜨고 말했다. "내 신발이 어디 있느냐?" 아들들은 모두 놀랐다. "신발은 왜 찾으세요? 아버지는 곧 돌아가실 텐데 왜 신발을 낭비하 세요?" 노인이 말했다. "나는 아직 죽은 게 아니다. 몇 분은 더 살수 있을 것 같다. 어서 신 발을 가져다 다오. 내 발로 걸어서 무덤까지 가겠다. 그것이 가장 돈이 덜 들고 옳은 방법이다. 너희는 모두 낭비벽이 심해!"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돈이 족쇄가 되어 버린다.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수갑이 되어 버린다. 마치 인류 전체가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슬을 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온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사슬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사슬은 어 디까지나 사슬이다. 외부세계에서의 자유란 인류전체에 대한 정치인들 의 끝없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는 그대의 개인적인 문제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그대 만일 과거의 모든 쓰레기들과 미래의 모든 욕망과 야심을 버린 다면, 바로 이순간 그대는 자유롭게 된다. 날개를 되찾은 새처럼 온 하 늘이 그대의 것이다. 하늘 조차도 그대를 가둘수 없다. 어째서 노예가 아니라 웅변가가 알쿠스타파에게 자유에 대하여 묻고 있는가? 노예가 우리에게 자유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 다면 더 적절했을 것이다. 웅변가가 자유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훨씬 효과적이고 기술적으로 자유에 대한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는 자유로워지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자유에 대하여 훌 륭한 웅변가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종류의 사슬에 묶여 있고, 종교와 정치인과 부모와 사회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자 유에 대한 훌륭한 연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웅변가는 자신의 연설을 더 멋진 말로 장식하기 위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한 질문이 아 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진실이다. 알무스타파는 대답했다. 성문 곁에서, 또 너희의 집 난로 곁에서 나는 너희가 꿇어 엎드려 너희 자신의 자유를 숭배하는 것을 보았다. 그대가 힌두 사원에 갔을 때, 또는 이슬람교의 모스크(mosque)나 기 독교의 교회나 유태교의 시나고고(synagogue)에 갔을 때, 그대는 그곳 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곳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이 만든 것을 숭배한다. 여기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엿볼 수 있다. 먼저 그대는 신의 조각상을 만 들고는 그 다음에 그 앞에 꿇어 엎드린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종교다. 왜 그대 자신의 발 아래 엎드리지 않는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14세기 전 아랍인들은 365개의 신상을 섬기고 있었다. 카바(Kaaba)가 그들의 사원이었으며, 날마다 하나씩 다른 신상 앞에서 사람들은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교육을 받지 못한 모하메드조차도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이 그 조각상을 만들고서는 그것들을 숭배한다는 것은 실 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서 모하메드는 그 365개의 신상을 모두 없애 버렸다. 365개의 신상이 놓여 있던 그 카바에는 정사각형의 큰 돌이 하나 있 었다. 그것은 평범한 돌이 아니라 운석이다. 매일 밤 우리는 별이 떨어 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실제로는 별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별이 안 떨어지는 것은 다행이다. 왜냐하면 별들은 어떤 것이든지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것들이 지상에 떨어졌다간 지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다. 우리가 별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작은 돌에 지나지 않는다. 달이 지구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엔 지구는 딱딱한 고 체가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한 고체가 아니다. 지층 속으로 들어가 보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이 있다. 그것이 지상 으로 분출되면 화산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지층이 고체가 되었다. 처음 엔 그것도 고체가 아니었으며, 액체인 지구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한 바퀴 회전하는 데엔 24시간이 걸린다. 또 지 구는 태양 둘레를 돈다. 한 바퀴 도는 데엔 365일이 걸린다. 이 두가지 운동이 교차하는 가운데 액체인 지층의 어떤 부분들은 운동의 힘에 의 해서 바깥으로 떨어져 나갔다. 오늘 날 바다로 남은 지역이 바로 거대한 흙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간 곳이다. 그것들이 한데 뭉쳐 지금의 달이 되 었다. 이 달은 끝없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 때로 지구에는 하루 24시간 동안에 3천 여개가 넘는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린다. 낮엔 태양이 너무 밝기 때문에 그것들을 볼 수가 없지만, 밤에는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중 력에 이끌려 지구를 향해 떨어져 내리며, 속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불이 붙는다. 그 불빛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때는 매우 큰 돌이 떨어져 내린다. 카바의 돌멩이도 여태껏 떨어져 내린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에 속한다.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365개의 신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 보낸 선물이라 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것을 사원의 중앙에 놓았다. 물론 그 사원은 365명의 손님을 수용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매우 넓었다. 별 다섯 개 가 붙은 호텔인 것이다! 카바의 돌이 그 곳에 떨어진 것은 순전한 우연의 일치였다. 모하메드는 모든 신상을 부수었지만, 인간의 기억을 부술 수 는 없었다. 인간의 환상을 깰 수는 없었다. 신상을 숭배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그 큰 돌멩이를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두려워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하소연과 기도를 들어 줄 하늘에 계신 어떤 아버지를 원 하고 있다. 자신을 돌봐줄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길 원하는 것이다. 하 늘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면 부모 잃은 고아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이 것은 심리적으로 볼 때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다.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꿇어 엎드려 숭배하는 것을 보아 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마치 거울 앞에 서서 두 손을 깍지 끼고서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히브리어로, 산스크리트어로, 아랍어로, 그리스어로, 라틴어로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아는 말로 하면 너무 싱겁고 평범하게 느껴 진다. 모르는 언어를 사용해야 더 신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마치 주인 앞에 스스로 머리 조아려 설령 자기를 죽일지라 도 찬양해 마지않는 노예들처럼. 그대의 예배와 숭배는 마치 노예들이 자신을 인간이 아닌 노예로 만 든 폭군을 찬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폭군은 노예를 어느 순간에라 도 죽일 수 있다. 왜냐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원의 나무 숲 속에서, 성채 그늘 아래서 나는 보 았다. 너희들 중 가장 자유롭다고 하는 자가 자유를 마치 멍 에와 수갑처럼 차고 있는 것을. 지난 수천 년동안 수 많은 종류의 구속물들이 그대로 하여금 자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어 왔다. 자유라는 것은 그대가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나온 권리요, 최고의 축복인데도 말이다. 세상의 사원들, 교회와 절과 시나고그와 모스크들은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구속됨의 상 징이다. 압제자의 상징이다. 그런데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여전히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하트마 간디는 전세계적으 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자는 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평생동안 비폭력을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동시 에 그는 쉬리마드 바가바드기타(Shrimad Bhagavadgita)를 숭배하였 다. 이것은 힌두교의 성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폭력을 가르 치는 유일한 경전이다. 내가 보기에 간디는 그 모순점조차 깨닫지 못한 듯하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Krishna)는 아르주나(Arjuna)에게 계 속해서 말하고 있다. "네가 전쟁에 나가 적들을 쳐부숴야 하는 것은 신의 뜻이다." 하지만 그 전쟁은 친척간의 전쟁이었으므로 형제와 조카들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양쪽에 다 서로의 친척들이 있었다. 모두 한 식구들이었 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양쪽 모두에게 궁 술을 가르친 스승도 어느 한쪽을 택해야 했다. 당시 비쉬마(Bhishma)는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이다. 또 활의 명인 드로나차랴(Dro -nachrya)는 아르주나를 무척 사랑하였다. 아르주나야말로 활의 명인 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자 비쉬마와 위대한 궁수 드로나차랴는 아르주나와 아르주나의 형제들 편을 들지 않고 반대 편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아르주나 쪽은 형제가 다섯 명뿐인데 반하여 반대편은 형제가 1백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드로나차랴와 비쉬마의 선 택은 지혜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장삿속이었다. 형제가 1백명이나 되고 더 강한 것을 보고는 그쪽을 선택한 것이다. 강자의 편에 서는 것 은 언제나 좋은 일이니까. 거의 나라 전체가 두 쪽으로 분열되었다. 저쪽에도 친구가 있고, 이쪽 에도 친구가 있었다. 크리슈나 자신 조차도 선택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 다. 그는 그들 모두의 영적인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어, 아르주나와 두리오다나(Duryodhana)를 불러 놓 고 선택하도록 했다. "나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나의 군대를 선택하라." 당연히 두리오다나는 크리슈나의 큰 군대를 선택하고, 아르주나는 크 리슈나를 선택하여 그의 마부가 되었다. 드디어 전쟁의 날이 왔다. 1백만이 넘는 양쪽 군대가 들판에 대치하 였다. 실로 이상한 전쟁이었다. 양쪽 모두가 서로에게 친척들이었다. 아르주나는 말했다. "이 전쟁은 승리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의 친척들을 죽이 다니, 말도 안 된다. 저쪽엔 나의 할아버지와 스승과 친구와 친척들이 있고, 이쪽 역시 나의 형제나 친구들이다. 양쪽 다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들의 시체를 밟고 서서 승리를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왕국과 금관을 손에 넣기 위해서 이들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지금 매우 슬프다. 내 눈에는 진리가 보인다. 나는 차라리 이 속세를 떠나 히말라야의 수도승이 되고 싶다. 차라리 내 조카와 형제 들이 나라를 통치하게 하자. 그러면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내 스승을 죽일 것인가? 어떻게 할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일 것인가?" 그때 크리슈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전사에게는 싸우는 일이 곧 종교다. 너는 지금 감상에 젖고 인정에 끌리고 있다. 전사에겐 인정이 필요없다." 하지만 어떤 논리로도 아르주나를 설득할 수 없었다. 마침내 최후 수 단으로 크리슈나는 말했다. "네가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신의 뜻이다." 만일 매가 아르주나였다면 그 순간 나는 당장에 이렇게 물었을 것이 다. "만일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왜 그는 나에게 직접 그 뜻을 전하지 않 고 당신을 통하여 전달하는가? 신은 나에게 직접 말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는 수도승이 되어 산 속으로 들어 가 명상이나 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어제나 전달자를 인정하는 버릇이 있다. 하느님은 교 황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크리슈나를 통해서만 자신의 뜻 을 전한다. 마치 정해진 패턴과 같다. 신은 절대로 직접 말하는 법이 없 는 듯하다. 왜 그럴까? 바가바드기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에 대한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신조차도 폭력의 편을 들고 있다. 나는 평생동안 비폭력을 가르친 마하 트마 간디께서 늘 바가바드기타를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을 이해할 수 없 었다. 그는 바가바드기타를 무척 숭배하였다. 매일 아침 간디의 아쉬람 에서는 바가바드기타를 암송하였다. 그는 그 책이 공개적으로 폭력을 찬양하면서 신까지 그 속에 끌어들이는 세상에서 유일한 책이라는 사실 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인간의 우매함은 한계를 모르는 듯하다. 수천 년 동안 그대는 족쇄가 채워지고 수갑이 채워진 채 살아왔다. 그 래서 이제 그것들이 장신구처럼 되어 버렸고, 또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그대는 믿고 있다. 그대의 부모는 절대로 그대의 적이 아니다. 따라서 부모가 그대를 교회나 절로 데려간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그대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그들 역시 그들의 부모에 의해서 그곳으로 이끌려갔기 때문이다. 로봇처럼 기계적인 과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서히 노예 근성이 그대의 살과 피 와 골수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 크리슈나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그대는 당장에 그 사람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이것은 노예 근성일 뿐이다. 누군가 예 수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그대는 당장에 화를 낸다. 그대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하여 그가 좋지 않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사 람은 그대를 묶고 있는 사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로부터, 거의 모든 종교로부터 비난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노예 근성에 반대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감옥을 아름답게 치장하면 서 계속해서 그 안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들의 부모도 그러했고, 부모의 부모도 그러했으며...... 노예들의 긴 행렬이다. 어떻게 그들이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유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노예 근성뿐이다. 또 비록 그들이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 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세 명의 랍비(율법학자)가 자신들의 시나고그에서는 예배 시간 에 내가 설교를 행할 때에도 사람들은 담배를 피거나 서로 잡담을 나눌 수도 있다. 나는 신자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다른 두명의 랍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번째 랍비가 말했다. "그것을 당신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의 시나고그에 한번 와 보라. 나는 신자들에게 음주를 허용하고 있으며, 그들이 술에 취한 채 와서 서로 고함을 지르고 싸움을 해도 나는 설교를 계속한다. 이것이야 말로 자유다." 시나고그에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앉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남자석 과 여자석 사이엔 장막이 쳐져 있다. 두 번째 랍비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의 시나고그는 장막까지 치워 버렸다. 이제 남자와 여자가 합석할 수 있다. 나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신자들이 부부끼리 앉아 있든 그 렇지 않든 개의치 않는다. 연인들이 와서 서로 입을 맞추고 껴안고 온갖 짓을 다해도 나는 예배를 계속 진행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자유 시대 로 돌입한 것이다." 세 번째 랍비가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가끔 시간이 나면 나의 시나고그 를 방문해 보라. 나는 시나고그 앞에 커다란 게시판을 설치해 놓고, 거 기에다 모든 유태교의 축일엔 시나고그도 문을 닫는다고 적어 놓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는가? 적어도 일요일만큼은 사람들이 오락과 휴식을 즐기도록 해야 한다. 쓸 데없이 시나고그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할 필요가 없다." 이것들은 자유가 아니다. 이들 모두는 아직도 유태인이다. 유태교, 힌 두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렸을 때, 그대가 과거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더 이상 죽은 것에게 지배를 받지 않고 더 이상 알수 없는 미래에 의해 이끌림을 받지 않게 되었을 때만이 그대는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니라 지금 이순간 속에 사는 것을 말한다. 그때 그대는 모든 짐을 벗어 던진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사슬이 벗겨진다. 그대가 비록 그 무게에 익숙해져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것을 그대에게 자신있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 자신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슬을 벗어던지는 순간 그대에겐 하늘로 날아오를 날개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때 별들로 가득 찬 온 하늘이 그대 의 것이다. 그때 내 가슴은 내 안에서 피를 흘렸다. 왜냐하면 자유를 찾고자 하는 욕망조차 너희의 입을 막는 재갈이 되어서...... 매우 심오한 말이다. 자유에 대한 욕망 그 자체마저도 족쇄가 될 수 있다. 모든 욕망이 그대를 제약한다. 자유도 예외가 아니다. 욕망이란 미래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유나 구속에 대한 생각조차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자유를 즐길 뿐이다. 자유는 그의 존재 자체가 된 것이다. 그때 내 가슴은 내 안에서 피를 흘렸다. 왜냐하면 자유를 찾고자 하는 욕망조차 너희의 입을 막는 재갈이 되어서 더 이상 자유가 최후의 목적이며 성취라고 떠들 수 없을 때만이 너희는 비로소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목적은 미래와 관련된 것이고, 미래에 어떤 것을 성취하고자 하 는 욕망은 현재의 불행을 감추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일은 계속 해서 그대에게 희망을 준다. 오늘 하루만 지나면, 이 순간의 고통만 참 으면 내일 나는 자유로워지리라...... 하지만 내일은 결코 오지 않으며, 온 적이 없다. 그대는 결코 자유롭 지 못할 것이다. 내일이란 현재의 위안거리일 뿐이다. 내일은 그대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는 대신에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대는 노예로 살아왔다. 현재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말한다. 현재야말로 유일한 실체다. 미래는 그대의 상상속에나 존재하고, 과거는 기억 속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의 이 순간이다. 현재에 활짝 깨어있는 것, 그대의 의식을 과거와 미래에서 가져와 현 재에 집중할 때, 그때 비로소 그대는 자유를 맛보게 된다. 낮에 근심이 없고 밤에 욕망과 슬픔이 없을 때 너희가 참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그러한 속임수에 걸려드는 것 같다. 인간은 하늘의 새보 다도, 숲 속의 동물들보다도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에게는 수많은 구속 물들이 있으며, 또 인간은 그것들을 받아들여 왔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의 그대의 근심이 무엇인가? 지금 이순간 그대의 불안이 무엇인가? 바 로 지금 이 순간 그대의 분노가 무엇인가? 이 침묵 속에서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다. 낮이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밤 역시 슬픔에 시달리지 않는다. 왜 냐하면 낮에 있었던 것이 밤까지 그대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만일 낮 동 안 내내 불안하고 걱정하고 좌절하고 욕망에 시달렸다면, 밤엔 악몽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 만일 매 순간을 강렬하게 존재 전체로 살았 다면 그대의 밤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리라. 꿈 조차도 그대를 방해할 수 없으리라. 꿈이란 충족되지 못한 생활, 억압된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심리학, 특히 정신 분석학은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갔다. 정신 분석학은 꿈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꿈 자체만을 분 석한다. 꿈의 근원은 바로 그대가 깨어있는 시간 속에 있다. 그대는 종 교와 도덕성과 예절과 올바른 행동거지라는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은 무의식 속으로 스며들 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일 충분하게 산다면...... 프로이트가 만일 동양을 방문해서 깊은 산 속에 사는 원주민들을 만 났다면 무척 놀랐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가장 놀 라운 사실은 그들이 전혀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삶의 진정 한 깊이와 평화를 알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아침이면 그들은 매우 활기 있고 기운차게 하루를 맞이하여 또다시 충분한 하루를 산다. 문명화된 인간이 처한 상황은 그것과 정바대다. 문명화된 인간은 밤에만 꿈을 꾸 는 것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몇가지 꿈들이 의식 속을 흘러 다닌다. 그대는 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대는 단지 삶을 꿈꾸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삶을 살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이 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 이 아니라 언젠가는 새벽이 찾아올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노예에 겐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다. 노예는 빛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어 둠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대가 삶이라고 말하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그 것은 전혀 삶이 될 수 없다. 그대는 반드시 변혁을 거쳐야 한다. 그 존재 의 혁명은 정치나 경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대의 정신, 자각과 관계가 있다. 그대의 내면 존재가 빛으로 가득 찰 때 외부 역시 빛나기 시작한다. 낮에 근심이 없고 밤에 욕망과 슬픔이 없을 때 너희가 참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 그 모든 것이 너희의 삶에 휘감기는 중에도 그것들을 벗어던지고 얽매임 없이 일어설 때 그때 너희는 자유로우리라. 그것들은 그대에게 아주 오래된 동료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대를 부자유하게 만들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언제나 깨어있어서 그것들을 초월해야 한다.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영 원히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갑자기 여기 이 아름다운 나무들 의 한 부분이 된다. 아름다운 장미, 아름다운 별들의 일부가 된다. 그것 들은 모두 자유롭다. 사람들을 제외하면 세상엔 노예가 없다.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구속물들이 그 대에게 달라붙어 있는게 아니라, 그대가 그 구속물들에 달라붙어 있다 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홍수가 난 어떤 큰 강가에 서 있었는데, 문득 담요 같은 것이 강 물위로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한 어부가 그 담요를 건지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담요를 손으로 붙잡자마자 그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살려줘요! 나를 건져줘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소리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담요가 너무 무거우면 놓아 버리시오!" 그는 소리쳤다. "이건 담요가 아니라 살아있는 늑대란 말이오! 등만 보고서 담요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대가 처한 상황은 이 어부의 상황과 다르다. 그대를 구속하고 있는 것들이 그대에게 달라붙어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살아있는 늑대가 붙잡고 놓아 주지 않기 때문에 어부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대를 묶고 있는 사슬은 전적으로 그대의 책임이다.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것이다. 활짝 깨인 의식으로 그것들에게 말하라. "잘가라! 너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 다. 우리는 헤어져야만 한다."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나는 한달이면 거의 스무 날 동안 나라 전역을 여행다녔다. 사실 그렇게 오랫동안 학교를 떠나 있는 것은 불가 능했다. 물론 나는 열흘이면 모든 강의를 끝내곤 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묻곤 했다. "자네들은 내게 불만이라도 있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저희는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별로 없으 면서 2년을 허비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으니까요. 2년이 아니라 6개 월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을 저희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부총장은 불안했다. 계속해서 내가 모습을 감춰 버 렸으니까 말이다. 나에겐 방법이 있었다. 그 학교에는 큰 숲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모 든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오직 한 그루의 나무만이 무성한 이파리 를 매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나무 그늘 아래에 차를 주차시키곤 했다. 한두 번 다른 차들도 그곳에 주차를 시도하곤 했지만 나는 학생들 을 시켜서 그 차들을 다른 곳으로 치우게 했다. 그래서 그곳은 늘상 내 가 주차하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운전수를 시켜 그곳에 차를 주차시켜 놓았 다. 그러면 부총장은 자기의 방에서 창문을 통해 내 차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학교에 있는 것으로 믿었다. 어느 날 그는 대학을 한 바퀴 시찰하다가 내 강의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는 어딜 갔지? 그의 차가 나무아래 세워져 있길래 그가 학교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쩐지 수상쩍더라니...... 신문에 보면 그가 어떤 때 는 캘거타에서, 어떤 때는 아므리짜르에서, 어떤 때는 마드라스에서 강 연을 한 것으로 되어 잇는데, 그의 차는 늘 나무 밑에 세워져 있었단 말 이야. 그래서 영문을 모르곤 했었지." 그래서 어느 날 내가 마드라스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부 총장은 나를 불러서 말했다. "당신은 마치 자신이 이 대학의 총장인 것처럼 행동하는군. 허락도 받 지않고 멋대로 강의를 빼먹으니 말이야." 내가 말했다. "종이 한 장만 주시오." 그리고는 그 종이 위에다 사직서를 썼다. 그가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내가 말했다. "그것이 나의 대답이오. 내 학생들이 내가 없다고 해서 손해를 입었나 요? 학생들이 당신에게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말하던가요? 2년 이나 그들의 시간을 낭비케 한다는 것은 넌센스요. 나의 직업은 학생들 에게 충분한 강의를 하는 것이오. 충분한 강의를 하는 데에 며칠이 걸리 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저녁에 부총장은 우리 집으로 날 찾아와서 말했다. "우리 대학을 떠나지 마시오." 내가 말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오. 나는 단순히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도 당신의 대학에 다시 들어갈 수가 없소. 당신이 보다시피 나는 이미 모든 자격증과 졸업증명서들을 불태워 버렸소. 왜냐하면 나는 모든 과 거와 단절했기 때문이오. 나에겐 앞으로 이 자격증들이 전혀 필요가 없 을 것이오. 이제 나는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름없소." 그가 말했다.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다."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오. 나는 실제로 교수직을 그만 두고 싶었지만, 때를 기다린 것이오. 내가 교수직을 그만두는 것은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결정할 일인 것이오."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차라리 그보다 그 모든 것이 너희의 삶에 휘감기는 중에도 그것들을 벗어 던지고 얽매임 없이 일어설 때 그때 너희는 자유로우리라. 나의 아버지도 걱정했고, 친구들도 걱정했다. 학생들이 찾아와서 말 했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에겐 이제 더 이상 너희들의 교수가 될 자 격증이 없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사직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도대체 자격증들을 모두 불태운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말했다. "그것들을 보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간직하고 있 으면 생활이 어려워질 때마다 욕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아버지께선 그것들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제가 받은 모든 교육으 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것들은 자격증이 아니라 저에게는 상처와 같습 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그 상처들을 몸에 달고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2년뒤에 부총장이 다시 나에게 부탁했다. "적어도 가끔씩은 우리 학교에 와서 강연을 해주시오." 그래서 나는 그 대학을 방문하였다. 그는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더 니 창밖을 내다보라고 말했다. 그곳에선 내가 차를 세워 놓곤 하던 나무 가 보였다. 그는 말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오. 옛날엔 저 나무만 살아 있었는데, 이젠 저것 도 죽고 말았소." 내가 말했다. "삶이란 신비한 것이오. 저 나무는 어쩌면 나와 사랑에 빠졌었는지도 모르오. 나를 위해서 살아 있었는지도 모르오. 왜냐하면 9년 동안 매일 같이 내 차를 저 나무 아래 세워두었었고, 나 역시 저 나무에게 깊은 애 정을 느꼈기 때문이오. 단순히 차를 그 나무 아래 세워서가 아니라, 나 는 늘 저 나무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소. 한번은 운전수가 '교수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왜 하찮은 나무에게 감사하다고 말합니까?'라고 물 었소.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소. 이 나무는 대단히 사랑스럽다. 다른 어떤 나무들보다도 아름답고, 또 붉은 꽃이 핀다, 봄이 오면 어찌나 많 은 꽃이 피는지 잎사귀도 보이지 않으며, 나무 전체가 온통 붉은 색이다. 나 역시 저 나무를 사랑하였고, 저 나무 역시 나를 사랑하였소." 다른 나무들이 모두 죽었지만, 그 나무는 9년 동안 내 곁에 살아있었 다. 지금도 다른 누군가가 그 곳에 차를 세워 두고 있지만, 아마 그 사람 들은 나무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러워졌을 때, 나무 곁에 앉아 나무에 게 뭔가를 속삭여 보라. 그러면 그대는 알 것이다. 나무가 그대의 속삭 임에 반응한다는 것을. 물론 그 반응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다. 어쩌면 나무는 그대에게 꽃잎을 뿌려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람 에 춤을 출지도 모른다. 또 매우 가까이 다가앉아 나무에 등을 기대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될 것이 다. 나무는 그대에 대한 사랑으로 떨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계 전체가 사랑으로, 자유로 충만해 있다. 가련하게도 인간만 이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바로 그대의 책임이 다. 또 이것은 그대가 서서히 구속물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 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로 와서 말한다. "당신의 말을 이해하겠습니다. 이제 서서히 나를 묶고 있는 구속물들 을 떨쳐 버리겠습니다." 하지만 구속물들이란 절대로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 해하는 순간 그대는 자유로워지며, 아니면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해하 는 척 꾸미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자유는 부분부분씩 오는 것이 아니며, 구속물들 역시 조금씩 떠나가 는 것이 아니다. 어두운 방 안에 불을 켜보라. 어둠이 부분부분씩 사라 지던가? 방의 이쪽 부분이 밝아지고, 다시 저쪽 부분이 밝아지고 그러던 가? 아니다. 불을 켜는 순간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가 무엇인가 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그때 그대는 자유롭다. 이것은 서서히 시간 을 두고 해결할 문제가 결코 아니다. 또 너희가 어떻게 낮과 밤을 뛰어넘을 수 있으랴. 너희 깨달음의 새벽에 지난 한낮의 시간을 묶었던 저 사슬 을 껂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대를 묶고 있는 이 사슬들, 이것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따라다닌 것들이다.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에 대한 애정 이라는 이름으로, 성직자에 대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선생에 대한 존 경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좋은 이름들인가? 하지만 그대 언제나 기억하라. 상표에 속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알맹이를 보라. 그때 그대는 놀랄 것이다. 온갖 미명하에 아이들이 구속당하고 있다. 그것들이 구속 물이 아니라 다만 그대가 그것들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 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다. 나의 아버지와 끝없는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아버지는 애정이 많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이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나는 이런 반응을 보이곤 했다. "아버지께선 '넌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실수가 없습니다. 다만 '네가 좋다면 이렇게 해라. 하지만 네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알아서 해라.'라고 제안하실 수는 있어요. 최종적인 결정은 제가 내리는 것이지 아버지께서 내리는 게 아녀요. 저는 진리와 자유를 위해선 모든 것을 희 생할 수 있지만, 다른 어떤 것의 노예가 될순 없어요. 아버지 께서 말씀 하시는 '해야만 한다'는 것은 저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어요." 아버지는 이내 내가 건방지다거나 불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 다. 그것은 내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저에게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는 말씀하시지 마세요. 저에게 가부를 결정할 여유를 주세요. 또 제가 반대를 한다고 해도 기분 나빠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 인생은 제가 사는 것이에요. 또 저는 제 나름의 방식대로 살 권리 를 갖고 있어요. 아버지께선 인생의 경험이 많으시니까 저에게 충고와 제안을 해주실 수는 있지만, 명령을 내릴 순 없어요. 어떤 대가, 어떤 결 과를 치르더라도 저는 남의 명령을 받고 살 순 없어요." 아버지는 서서히 '해야만 한다.'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이렇 게 말씀하셨다. "문제가 생겼다. 네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좀 도와다오. 물론 도와주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실 너희가 자유라 부르는 것은 그 사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슬인 것을. 비록 그 고리가 햇빛에 반짝거려 너희 눈을 부시게 하더라 도. 그대는 무엇을 자유라 부르는가? 대부분이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자유, 외부의 어떤 자유를 말한다. 그것들은 그대의 손에 달린 것이 아 니라 그대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들은 언제라도 남이 빼앗아갈 수 있다. 그대의 내면에서 자라난 것만이 빼앗기지 않는다. 그래서 알무스 타파는 말하는 것이다. 사실 너희가 자유라 부르는 것은 그 사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슬인 것을. 비록 그 고리가 햇빛에 반짝거려 너희 눈을 부시게 하더라 도. 우루과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나라의 대통령이 내 책을 읽고, 내 강의 테이프를 계속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우루과이에 영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정식으로 나를 초청하여 3년 간 의 영주권을 발급하였다. "3년만 이곳에 사시면 자동적으로 우루과이의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우루과이는 매우 작은 나라지만, 또 아주 아름다운 나라다. 나는 그에 게 물었다. "당신은 왜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오? 모든 나라가 나에게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내가 탄 비행기조차 공항 착륙이 금지되어 있소." 그는 말했다. "그들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서류에 대통령이 서명을 하는 날이었다. 그때까지 미국 대사관 측에서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어딜가나 CIA와 FBI요원들이 냄새를 맡으며 따라다녔다. 내가 3년 영주권을 받게 되고 그것이 자 동적으로 시민권 획득으로 연결된다는 정보를 받은 그들은 즉각적으로 레이건 행정부에 연락을 취했다. 레이건은 우루과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아니다. 36시간 안에 라즈니쉬를 추방 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약속한 차관 대출이 중지될 것이다." 그것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또 지금까지 빌려준 모든 차관을 상환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상환하 지 못할 것 같으면 이자를 두배로 늘리겠다. 결정은 당신에게 달려 있 다." 나는 여태껏 그토록 부드러운 가슴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브하그완, 저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우루과이에 도착 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자유로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 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경제적으로 노예 국가입니다. 우리의 독립과 자 유는 거짓된 것입니다." 그는 레이건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브하그완을 추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살인과 같은 중대한 범 죄를 저질렀을 때만 추방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건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다. 그를 추방하라." 대통령의 비서관이 나에게 달려와 말했다. "국제공항을 이용하지 말고 작은 공항에서 떠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 다. 지금 국제공항에는 미국 대사가 직접 나와서 당신이 추방되는가의 여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불법조치였다. 내가 말했다. "무슨 근거로 나를 추방하려 하는가?" 비서관이 말했다. "이것은 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에 관한 한 어떤 법도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내가 떠날 비행기를 주선해 주었다. 그는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시민권을 주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추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 대사관 관리들이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내가 타고 갈 비 행기가 국제공항이 아니라 다른 작은 공항에서 뜨는 것을 알고는 당장 에 달려와 대통령에게 추방에 필요한 서류들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두 시간 동안 이륙이 지연되었다. 서류들이 도착하고, 그들은 나를 추방한 다는 온갖 사항을 기재하고는 내 여권에 추방 도장을 꽝하고 찍었다. 내 여권은 실로 기념비적인 물건이다. 나는 한제자에게 그것을 잘 보 관하라고 일렀다. 21개국이 이 여권에 추방 도장을 찍었다. 그것도 아무 런 이유 없이. 내 변호사가 달려와서 말했다. "이것은 완전히 불법적인 일이다. 법정에서 따져 보자." 내가 말했다. "나는 눈물을 글썽일 줄 아는 사람, 그러면서 겸허하게 '우리는 미국 에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또 앞으로의 차관 원조도 거부할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싸우지 않는다." 정치 제국들은 그대들이 자유투쟁을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 다. 그들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대들을 노예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서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 그러면서 그대들이 독립되고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거짓된 환상을 심어 준다. "그들은 늘 '원조'라는 아름다운 말을 쓴다. 삼사 년 전만 해도 가난 한 나라들은 '미개발 국가'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이 '미개발'이라는 말 이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래서 이제는 '개발도상국'이라는 말을 쓴다. 말은 바뀌었지만, '개발도상국'이라는 말 속에는 많은 상처들이 감추어 져 있다. 그들의 실상은 모두 경제적으로 노예 국가들이다. 인간의 일생은 짧다. 다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대의 영혼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그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