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죄인과 성자 죄와 벌에 대하여 2 때로 나는 너희가 잘못을 저지른 자를 마치 너희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이방인이며, 너희의 세계에 뛰어든 침입자인 듯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내 말하지만, 아무리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라도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있는 저 지극히 높은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는 것. 또 아무리 악하고 약한 자라도 너희들 갖자 속의 더없이 낮은 것보다 더 떨어질 수는 없다. 하나의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도 나무 전체의 묵인 속에서 가능하듯이 죄를 짓는 자도 너희들 모두의 숨을 뜻이 아니면 될 수 없는 법. 너희는 너희의 신적 자아를 향하여 마치 하나의 행렬처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너희의 길이요 또 길 가는 나그네. 그러므로 너희들 중의 누군가가 넘어진다면 그것은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것, 걸려 넘어지는 그 돌이 거기에 있음을 경고하기 위하여 넘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또 저보다 앞서 가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것도 된다. 비록 빠르고 확실한 걸음으로 앞서 갈지라도 아직 그 돌을 치우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또 비록 이 말이 너희 가슴을 무겁게 짓누를지라도 이 역시 사실이다. 죽임을 당한 자, 자신의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자신의 도둑맞음에 잘못이 없지 않다. 의로운 자라고 해서 악한 자의 행동에 결백하지 않고 정직한 자라고 해서 흉악한 죄인의 행위에 죄가 없지 않다. 그렇다, 죄인이란 도리어 피해자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다. 나아가 죄인이란 때로 죄없고 비난받을 것이 없는 자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자이다. 너희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검은 실이 끊어지면 천 짜는 자는 헝겊 전체를 들여다봐야 하고 베틀까지도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남을 심판한다는 생각 자체가 철저히 반 종교적이다. 그런데 세상 의 모든 종교는 남을 심판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모든 종교는 그대 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선하고 악한가에 대한 생각을 주입시킨다.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그대 는 편견으로 물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똑같은 행위가 어떤 경우엔 옳아 도 다른 경우에선 그릇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 하나만으로는 한 인간의 인생을 평가할 수 없다. 또 남을 심판하려고 하는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그대에게 남 을 죄인이다, 성자다라고 심판할 권리를 부여했는가? 그대는 사람들의 내면 존재나, 그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의식적 인 욕망과 혼란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대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사람들의 행동뿐이다. 그대는 그들의 의식세계를 볼 수 없으며, 의식세계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대가 내리는 판결은 피상적 인 것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남을 심판하려는 그 대의 노력은 비난하려는 욕망, 또는 칭찬하려는 욕망에서 우러나온 것 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을 비난하지만, 사실 그 사람이 한 행위는 그대 자신 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대는 결과가 드려워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그대는 겁쟁이다. 또 그대는 어떤 사람을 찬양 하지만, 사실 그대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대 역시 그러한 권 력과 특권과 명예를 갖고 싶어했다. 그대 자신을 한번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대가 내리는 판결은 심판받는 자보다 그대 자신에 대한 것을 더 많이 드러내 줄 것이다. 진실로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남을 심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권력이라든가 특권과 명예 따위에 대한 어떤 욕망에도 시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깨끗하고 순수하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남을 심판 할 수 있겠는가? 칼릴 지브란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때로 나는 너희가 잘못을 저지른 자를 마치 너희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이방인이며, 너희의 세계에 뛰어든 침입 자인 듯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가? 한 문화권에서 잘못으로 취급받는 것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옳은 것이 될 수 있다. 오늘 옳은 것이 내일도 옳은 것일 수는 없으며, 지금 순간에 옳 은 것이 다음 순간에도 옳을 수는 없다. 삶이란 끝없는 흐름이다. 방향도 바뀌고, 어떤 길을 잡아나갈지 알수 도 없으며, 지도도 안내자도 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강물이 그렇듯이 그대의 삶의 강물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중국의 왕이 노자를 궁정의 대법관으로 임명하였다. 노자는 왕 을 설득시키려고 애를 썼다. "나를 궁정의 대법관으로 임명하면 결국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왕은 매우 완강하였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노자를 위대한 현자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말했다.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소. 거절하지 마시오." 노자가 대법관이 된 첫날, 성에서 어떤 부자의 집을 털던 도둑이 현행 범으로 체포되어 끌려왔다. 사실 그 도둑은 현장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재판이 필요없었다. 증인들도 있었고, 도둑도 자신의 죄를 순순히 자백 하였다. 노자는 여기서 유명한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 판결은 전무후무할 정 도로 대단히 사려깊고 특이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도둑질을 한 자는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힐 것이며, 동시에 이 자가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던 부잣집의 주인도 똑같이 6개월을 감옥에서 살 아야 한다." 이 판결을 들은 궁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 들은 노자가 대단히 지혜로운 판결을 내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미친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발언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부자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 부자가 말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도둑맞은 사람은 난데, 내가 벌을 받아 야 하다니요? 왜 내가 도둑과 똑같은 처벌을 받아야 합니까?" 노자가 말했다. "첫번째 죄인은 바로 너다. 도둑은 두 번째 죄인이다. 너에게 6개월밖 에 형을 내리지 않은 것도 나의 자비심 덕분인 줄 알라. 너는 원래 도둑 보다 더 오래 감옥 생활을 해야 한다. 너는 지금까지 이 성안의 돈을 모 두 긁어 모았다. 그래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너는 무지무지 하게 나쁜 착취자다. 네가 가진 돈은 사실 그들의 돈이다. 저 도둑은 도 둑질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돈을 가져 가려고 한 것뿐이다. 너야말로 이 성안에서 가장 큰 도둑이다. 그러니 6개월 형을 받은 것에 감사하 라." 노자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한쪽에만 재물 을 쌓아 둔다면, 도둑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배고품과 질병 때 문에 더 이상 생존할 길이 없어서 도둑이 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그 책임을 지어야 하는가? 노자의 판결을 들은 궁정 전체가 침묵에 잠겼다. 부자가 말했다. "당신의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를 감옥에 보내기 전에 먼 저 왕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왕을 만난 부자는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는 궁정의 대법관으로 미친 사람을 임명하신 듯합니다. 제가 만일 큰 도둑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제가 감옥에 갇혀야 한다면, 왕께서 도 마찬가지입니다. 왕께서도 저와 함께 감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왕께 선 나라 전체를 도둑질한 겁니다. 그러니 왕께서 현재의 지위를 지키시 려면 당장에 이 사람을 파면하고 그가 내린 판결을 취소하도록 하여주 십시오." 왕이 말했다. "내 잘못이다. 이 사람은 내가 자신을 대법관에 이명하자 이렇게 말했 었다. '나를 그 자리에 앉히지 마시오. 당신들이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 과 내 방식은 완전히 다르오. 당신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장님처럼 살 고 있소. 또 부자에게는 동정을 보낼 필요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벌을 내려야 하오. 당신네 큰 도둑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법 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소.`이렇게 말하면서 이 사람은 대법관직을 사양했었다. 그런데도 그를 임명한 것은 무두 내 잘 못이었다." 노자는 결국 대법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왕이 말했다. "당신이 옳았소. 나를 용서 하시오.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 른 것 같소." 노자가 말했다. "그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우리의 생각 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하여 당신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우리의 사고방식은 절대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당신들이 문제의 현상만을 보려고 하는 반 면에 나는 그 문제의 뿌리를 들춰낸다는 점입니다. 왜 세상은 이토록 악 한가, 왜 이토록 잘못된 것이 많은가에 대하여 문제의 뿌리를 파헤쳐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들은 언제나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부를 모으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욕심과 탐욕은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노자는 말을 이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진작에 뭔가를 깨닫고 나를 대법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 은 당신에게 큰 행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머지않아 당신까지도 감옥 에 보낼 것이니까요. 당신이 감옥에 사는 것보다 나를 내보내는 것이 훨 씬 편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모든 범죄의 원인인데 당신은 전혀 벌을 받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가난한 희생자들만이 벌을 받고 있 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잘못되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구분하는 자는 과연 누구 인가? 자이나교에서는 폭력이야말로 가장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죄이다. 하지만 힌두교인과 이슬람교도와 기독교 인에게는 폭력은 삶의 한 방식이다. 음식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대는 얼마나 많은 생명체를 죽여 왔는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어떤 행동인가?`에 대하여 두 번도 생각하 지 않는다.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너무나 생각이 깊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있기 때문에 나  이따금 과연 인류가 현재의 암흑에서 벗 어날 수 있을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같은 사람도 물고기를 잡아먹었으며, 예수 같은 사람도 육식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편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신을 이야기하고, 온갖 차원높은 이야기를 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사랑에 대하여 말할 자격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에 대한 외경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술을 마시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조 차도 술을 마셨다. 힌두교의 성자라고 하는 이들은 수세기 동안 마약을 복용해 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떠받들고 있다. 마약 중독자는 성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약으 로 마약을 사용할 수는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하지만 상습 복용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매사가 다 그렇다.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또 누가 그 결 정을 내리는가?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대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결 정을 내리는가 하는 것이다. 남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 그들의 문제 는 그들의 문제다.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문제가 아니 다. 중요한 것은 그대 자신에 대하여 어떤 기준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종교는 그대에게 올바른 기준을 주지 못한다. 종교는 그대에 게 남을 판단하는 생각, 어떤 고정관념들을 심어 준다. 하지만 삶이란 절대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종교는 많은 계율들을 설정해 놓고 있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 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단순히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그 러한 계율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다. 그리고 전통에 맹목 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든 자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통찰 력을 가질 능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기준을, 잣대를 갖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그 상 황과 환경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주는 기준이 필요한 것 이다. 이것은 사실 너무나 간단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오 히려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소위 위대하다고 하는 사상가와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별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까 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멀리 떨어진 가상의 신, 사후의 낙원세계에만 못박혀 있다. 나는 세상에서 떠드는 각종 신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대가 죽 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나는 오로지 지 금 이 순간에만, 그대의 의식세계에만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그 의식세 계야 말로 현재에도, 죽은 다음에도 늘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옳은 것에서 그른 것을 분별해 내는 능력을 가진 것은 바로 그대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대를 보다 더 깨어있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고요하게 하고, 풍요 롭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대의 의식을 잠재우고, 비참하게 하고, 질투와 분노와 파괴적인 생 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나는 지금 그대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목록을 들려 주고 있 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매 순간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다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깨인 눈을 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 비추어 현 상들을 판단하지 말라. 왜 죽은 경전들에게 의견을 묻는가? 왜 그대 안의 살아있는 근원에게 묻지 않는가? 그대 자신야말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에 눈뜨지 않으면......매 순간 시도해 보라. 매 순간 기회가 찾아온다. 그리하면 죽은 것들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지 않아도 그대의 기준이 항상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자신의 깊은 의식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 화가 날 때 그대는 의식을 잃는다. 분노가 그대를 먹구름처럼 뒤덮는 다. 그래서 그대는 살인을 저지르고, 생명을 해친다. 하지만 그대가 사 랑을 느낄 때 그대의 가슴에서 기쁨의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의식이 깨 어나는 것을 느낀다. 만일 사랑 속에서도 의식이 잠든다면, 기억하라. 그것은 그대가 욕망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랑은 옳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은 그대를 성장시키고, 그대의 의식을 넓혀 주고, 그대의 잠재력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그대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에게 축복일 뿐만 아니라 존재 전체에 내리는 축복이다. 사람은 누구도 홀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뿌리가 서로 연결된 광대하고 무한한 대륙이다. 우리의 가지는 떨어져 있을지 라도 뿌리는 하나다. 저마다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선한 것이다. 잠재력을 꺾고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악 한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때로 나는 너희가 잘못을 저지른 자를 마치 너희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이방인이며, 너희의 세계에 뛰어든 침입 자인 듯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내 말하지만, 아무리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라도 너 희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있는 저 지극히 높은 것보다 더 높 이 올라갈 수는 없는 것. 또 아무리 악하고 약한 자라도 너희들 각자 속의 더없이 낮 은 것보다 더 떨어질 수는 없다. 이 존재 속에서는 아무도 이방인이 아니다. 죄인과 성자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진정한 성자는 자신의 내면에 하나의 관찰자가 있어서 자기 안의 성 자와 죄인을 관찰하면서 그 둘이 결국 한 동전의 양쪽 면이라는 것을 깨 달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전의 어느 한쪽 면만을 선택한 다. 하지만 기억하라, 다른쪽 면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어떤 죄인도 순식간에 성자가 될 수 있고, 어떤 성자도 순식간에 죄인이 될 수 있다. 그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존재의 나머지 절 반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성자 쪽이 죄인을 누르고, 죄인이 성자 쪽 을 누르고 있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자들에 의해서 씌어진 세상의 모든 경전들이 항상 죄인을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무척 놀란다. 왜 그들 은 그토록 죄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가? 그러기 보다는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존재의 완성을 노래불러야 한다. 그들이 도달한 세계의 아름다 움을 세상이 깨닫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획득한 빛과 향기를 세상에 내 뿜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죄인을 비난하는 데에 있 다. 마치 그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 즐기고 있는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한 여성이 가톨릭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또다시 강간을 당했습니다. 하느님께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신부가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아닙니까? 매주 일요일 마다 당신은 나한테 와서 강간당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상한 일입니다." 여성이 말했다. "사실은, 제가 강간당한 것은 딱 한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벌써 용서를 받았고 내가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습 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찾아와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겁니까?" 여성이 말했다. "그 사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왠지 쾌락을 느낍니다. 그 사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겉으로는 그 사건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지만, 솔직히 말쓰드려서 내면 깊은 곳에선 그 사건을 무척 즐기고 있습니다. 지난 3주일 동안 아무도 나를 강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즐거 움마저 느끼지 말라고 하시는군요." 내 느낌으로는 성자라고 하는 많은 이들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 갖 죄를 상세히 밝히면서, 그것에 대한 글을 쓰고 설교를 하는 것을 은 근히 즐기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죄인들은 어느 날인가 자신도 성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언젠가는 죄인이라는 이 추한 삶을 벗어던지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언제나 성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 역시 그가 억 압하고 있는 내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소위 성자라고 하는 이 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 못한, 자신들이 억압한 온갖 종류의 죄에 대하 여 꿈꾸고 있다. 죄인과 성자는 다른 것이 아니다. 죄와 덕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경전에서 말하는 죄들을 떨쳐 버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성자라고 부르지 말라. 떨쳐 버린 것이 아니다. 모두가 그의 무의식 속에 차곡 차곡 쌓여 있으며, 조만간 그것들이 앙갚음으로 솟구쳐 나올 것이다. 성자에 대하여, 그리고 죄인에 대하여 신경쓰지 말라. 그들은 같은 범 주에 속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대가 성자나 죄인이 아닌 내면의 관찰자 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그댈가 만일 어떤 판단도 초월하여 그대 내면의 죄인인 쪽과 성자인 쪽, 어두운 쪽과 밝은 쪽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때 기적이 일어 난다. 또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유일한 기적이다. 그때 성자와 죄인은 사라져 버린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되 면 다른 쪽이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한 몸이고,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그러니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되면 다른 쪽이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한 몸이고,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그러니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고 하지 말라. 나는 말한다. 선택을 초월하여 깨어있는 의식을 지키라. 그때 그대는 그 둘을 초월한다. 선과 악, 신과 악마의 이원론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초월을 통하여 그대는 한번도 꿈꾸어 보지 못한 꽃, 어떤 악기도 창조할 수 없는 음악,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내 말하지만, 아무리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라도 너 희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있는 저 지극히 높은 것보다 더 높 이 올라갈 수는 없는 것. 또 아무리 악하고 약한 자라도 너희들 각자 속의 더없이 낮 은 것보다 더 떨어질 수는 없다. 하나의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도 나무 전체의 묵인 속에서 가능하듯이 죄를 짓는 자도 너희들 모두의 숨은 뜻이 아니면 될 수 없 는 법. 이것은 매우 심오한 통찰력이다. 나뭇잎 하나가 노랗게 변하는 것도 모두 그 나무 전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 나뭇 잎 하나만을 비난할 수 없다. 나무 전체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악해진다면, 그것은 그대들 모두의 내면 존재가 그의 악한 행위 속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나무 한 그루에 매달린 나뭇잎들이다. 그대는 초록색인 데 다른 사람이 노랗게 변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지 말라. 어쩌면 그 노란 이파리는 새로운 이파리, 젊고 신선한 새 손님이 얼굴을 내밀 공간 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대는 나무에 더 매달려 있고 싶기 때문에 노랗게 변하는 데에 더 시간 이 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대가 노랗게 물들기 전에 다른 나 뭇잎 하나가 벌써 물들었다고 해서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나무 전체가 모든 작은 나뭇잎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통찰력이다.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우리 모 두가 그 살인 해우이에 책임이 있다. 모든 살인자와 강도와 도둑들에 대하 여 온 인류가 함께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변화 시킬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끝없이 그들을 비난해 왔으며, 그들에게 웃지 못할 벌을 내려 왔다. 살인자에게 사형언도를 내린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가 살인 행위에 또 다시 가담하는 것이다. 법이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 사람은 생명을 해쳤고, 그래서 이제 사회는 또다시 그 사람 의 생명을 해친다.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해서 살해당한 자의 생 명이 되돌아 오는가? 오히려 살해당한 자가 한 명 있었는데, 이제는 두명 으로 늘어난 셈이다. 위대한 정의,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다. 어떤 자가 누군가를 살해했다면, 우리 모두의 내면 깊은 곳에는 똑같 은 욕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욕구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는 것 이다. 우리는 법을 만들었다. 우리의 법은 다른 살인자와 똑같은 살인자 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단지 복수일 뿐이다.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 아래 복수극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법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살려둘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만일 그 살인자가 사 형당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시인, 또는 위대한 음악가, 또는 위대한 화가 가 될줄 누가 아는가? 우리는 그의 영혼이 성장할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애초에 그가 왜 살 인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 원인 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며, 오로지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을 보려고 한다. 어쩌면 그 사람은 이 사회의 무자비한 손에 무척 고통받다 가 결국 동물로 전락하여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구 든지 일단 동물이 되면 동물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는 한 사람의 희생자이며, 우리 모두가 그 원인이다. 그래서 나날이 법은 많아져 가고 있고, 새로운 법률이 추가되고, 새 법정과 새 판사와 경찰과 군대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범죄 의 숫자를 전혀 감소시키지 못하였다. 법이 많아짐과 동시에 오히려 범 죄가 증가하고 있다. 그 둘 사이에는 반드시 깊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 다. 법률 기구의 증가와 범죄의 증가는 비례한다. 이상한 우연의 일치 다. 수많은 경찰, 거대한 군대들, 대형화되어 가는 법정, 수많은 법률 전 문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 것도 방지하지 못하고 있 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의 한계이며, 마땅히 비난받을 점이다. 구조 전 체에 뭔가 큰 잘못이 있다. 살인자든 도둑이든 존엄성을 갖고 대해야 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인간 존재다.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 람이다. 병든 사람을 처벌할 순 없다.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내어 치료받 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감옥은 필요없다. 모든 감옥은 정신을 치료하는 편안한 장소로 바뀌 어야 한다. 그래서 착취와 욕심 등 이 사회의 추한 행위들 때문에 자신 의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 도록 해야만 한다. 정신적으로, 윳체적으로 치료받고 교육받아서 창조 적이고 생산적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 야만 그것이 올바른 법이고, 올바른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의 신적 자아를 향하여 마치 하나의 행렬처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판단하지 말라. 그대 내면의 신의 사원을 향하여 한 행렬을 이루며 걸어가라. 너희는 길이요 또 길가는 나그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너희는 길이요 또 길가는 나그네, 그리 고 너희는 목적지이고 근원이다." 사실 그대는 세상 전체이며, 세상의 축소판이다. 체험하지 못한 축복과 환희가 넘쳐날 것이다. 나는 그대를 믿는다. 그대의 가능성을 믿는다. 의식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너희는 너희의 신적 자아를 향하여 마치 하나의 행렬처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너희는 길이요 또 길가는 나그네. "또 너희는 목적지요, 근원이다." 왜냐하면 모든 순례 끝에 결국 그대 는 그대 자신에게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눈, 새로운 통 찰력, 새로운 의식세계를 가지고 그대 자신에게 도달할 것이다. 어둠 속 에서 출발하여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고 새들이 지저귈 때 그대는 집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 중의 누군가가 넘어진다면 그것은 뒤에 오 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것, 걸려 넘어지는 그 돌이 거기 에 있음을 경고하기 위하여 넘어지는 것이다. 그들을 비난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그렇다. 그는 또 저보다 앞서 가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것도 된다. 비록 빠르고 확실한 걸음으로 앞서 갈지라도 아직 그 돌을 치우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우리는 모두 연결된 전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이어져 있다. 우리는 빈틈없이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다. 따라서 종교와 나라와 이념 때문에 사람들을 서로 구분하고 나누는 자들은 실로 큰 범죄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조심스럽게 애정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들은 정신적으로 병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 비록 이 말이 너희 가슴을 무겁게 짓누를지라도 이 역시 사실이다. 죽임을 당한 자, 자신의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자신의 도둑맞음에 잘못이 없지 않다. 비난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똑같은 범죄를 그대 자신도 저지르고 있 다. 어쩌면 재수없는 사람만 붙잡히고 그대는 요행히 붙잡히지 않은 것 인지도 모른다. 두사람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그대는 내면에 살인자 를 데리고 다닌다. 그대 내면에 온갖 악한 행위와 더불어 별을 향해 올 라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함께 지니고 그대는 인류 전체를 데리고 다 니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하지 말고 도와 주라. 누군가 넘어지면 그에게 손을 내밀 어 일으켜 세우라. 남이 넘어지는 것은 곧 그대가 넘어지는 것이기 때문 이다. 또 누군가 비상해 오르면 축복해 주라. 그의 비상 속에서 그대도 함께 비상하는 것이니까. 의로운 자라고 해서 악한 자의 행동에 결백하지 않고 정직한 자라고 해서 흉악한 죄인의 행위에 죄가 없지 않다. 그렇다, 죄인이란 도리어 피해자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다. 나아가 죄인이란 때로 죄없고 비난받을 것이 없는 자의 짐 을 대신 지고 가는 자이다. 나는 인도의 감옥을 여러 군데 방문해 보았다. 가서 죄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간단한 명상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 가지 놀란 사실은, 그들이 매우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 다. 그들은 감옥을 지키는 간수나 경찰들보다 훨씬 더 순진하였다. 어쩌 면 그러한 순진성 때문에 그들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순수한 사람들일 지고 모르지만, 자신을 방어할 만한 수단을 갖지 못했거나 약했기 때문 에 감옥에 갇혔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나는 나 자신이 직접 감옥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무엇보 다도 이제 감옥 내부에서 그곳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좋았다. 미국의 여섯 개의 감옥으로 이송당하면서도 나는 늘 독방 신세였다. 각 감옥은 6백 명에서 1천명의 죄수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감옥의 간수와 경찰과 재판과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얼굴이 전혀 순진하 다고 할 수가 없었다. 매우 교활한 표정들이었다.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국 경찰에 끌려 감옥에 갇혔을 때, 감옥의 관리들은 내가 채식가인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또 감옥이 바뀔 때마 다 식사시간이 되자 그들은 내게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는 채소로 만든 음식이 없소."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과일을 좀 달라." 그러나 여전히 같은 대답이었다. "여기엔 과일이 없소."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었다. 감방은 나란히 붙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이 그 말을 들었다. 간수가 사라지자 옆방의 죄수들 이 말했다. "순전히 거짓말이오. 우리는 채소와 우유와 과일들을 받았소. 이것은 늘 나오는 메뉴올시다." 그러더니 죄수들은 자기들에게 배급된 과일을 모아 나에게 건네 주었 다. 또 자기들이 먹을 우유를 나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이것들은 그대들이 먹을 식사다. 나는 견딜 수 있다. 열흘쯤 굶는다 고 해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최대한 90일까지는 살수 있다. 그러니 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하지만 그들은 정이 넘치는 표정으로 고집을 부렸다. "아니오. 이 음식들을 받아 주시오. 우리는 어떤 것이라도 먹을 수 있 소. 우리는 채식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먹으면 됩니다." 또 내가 복도를 지나 감옥으로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그들은 쇠창살 뒤에 몰려서서 일제히 외치곤 하였다. "브하그완! 승리는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우리는 당신을 잘 알지 못하지만 텔레비젼에서 당신을 보았소. 당신의 눈빛만으로도 우리는 당 신의 진실됨을 알았소!" 모든 감방의 죄수들이 두 손가락으로 승리의 표시를 나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외쳤다. "우리는 참 기뻤소. 우리는 당신과 함께 하룻밤이라도 한 지붕 밑에서 지내게 된 것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저마다 편지를 써서 감방으로 전달하여 나에게 보냈다. "브하그완, 우리는 당신에게 애정을 느낍니다. 우리가 확신하건데, 일 주일이 지나면 당신은 석방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더라도 우 리를 잊지 마십시오." 그들은 신문에 난 내 사진을 오려서 나에게 보내 주기까지 하였다. "이 사진 밑에 서명을 해서 돌려 주십시오. 그래야만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루라도 같이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실로 수백 장의 사진에 나는 사인과 함께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들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그들은 그만큼 정이 많고, 의리있고, 인간적이었다, 재판관과 정부 관 리들의 눈에선 그러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얼마나 이상한 세상인가! 영리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법망에서 빠져 나가고 그렇지 못한 순진한 사람들, 자신을 방어할 힘을 갖지 못한 가련 한 사람들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법은 진리를 판가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선 늘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는 온갖 종류의 차별이 행해지는 야만적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여기는 과연 신의 사원인가, 아니면 경찰서인가? 우리에게는 아무도 이방인이 아니다. 인류 전체가 바로 우리이고, 지구 전체가 우리다. 나라와 종교간의 국경선이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 그 새로운 지구 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위해서 내가 희생된다면 나는 더 없이 기쁠 것 이다. 진리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없는 인생은 전혀 인생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르없다. 너희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지 말라. 차별하지 말라. 존재계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안다. 아름다운 무늬를 내기 위해선 검 은 실과 흰 실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옷감 짜는 사람이 알고 있듯 이. 만약 검은 실이 끊어지면 천 짜는 헝겊 전체를 들여다봐야 하고 베틀짜기도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만일 의식이 깨이지 못하 고 잠든 의식상태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다면 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일지도 모 른다. 그래서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병이 그 약한 부분에서 노출된 것 인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그 질병 자체인 것은 아니다. 부의 편중과 착취가 없다면 왜 도둑이 있겠는가? 사회와 관습이 결혼 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왜 강간이나 매음 같은 범죄가 발생하겠는가? 창녀들은 경찰과 정부에게 계속 탄압받고 시달림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회의 희생물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아내는 남 편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관습과 법 때문에 그들은 함 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남자는 창녀를 찾는 것이다. 사랑에는 '비료` 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성 매춘부에 대해서만 들어 왔지만, 영국과 미국 에서는 20년 전부터 남자 매춘부가 등장하였다. 우리는 실로 대단한 진 화를 한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나 무 위로 기어올라갈 것이다. 이것은 진화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 전체가 구조적으로 병들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단순히 제자들에게 명상이나 가르치면서 사회나 종교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당신을 감옥에 가도거나 괴 롭히지 않을 것이다. 적들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적은 사라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득권을 건드리 지 않고, 내 속에서 불타고 있는 변화의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아무 런 말썽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 모두가 불꽃이 되길 바란다. 내가 이 육체를 떠나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는 수백만 명이 세상 전체 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길 바란다. 알겠는가? 7 밤중에 찾아와 너희를 깨우는 자 죄와 벌에 대하여 3 너희 중 누군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 남편의 속도 저울에 달아 보고 그의 영혼도 자로 재어 보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거든 그 죄와 대상이 된 자의 정신도 들여다보라. 너희 중 누군가 정의의 이름으로 벌을 내려 악한 나무에 도끼를 대려 한다면, 그 나무의 뿌리도 살펴보라. 그러면 분명 선과 악의 뿌리, 열매 맺는 것과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의 뿌리가 대지의 말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리라. 또 너희들, 정의롭게 재판하려는 자들아. 비록 육체적으로는 정직하나 정신적으로 도둑인 자에게 너희는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또 육체적으로는 살인자이나 정신적으로는 그 자신이 살은을 당한 자에게 너희는 어떤 형벌을 내릴 것인가? 또 너희는 어떻게 고소를 할 것인가? 그 행동으로 보면 남을 속인 자요, 억압한 자이지만 그 역시 학대받고 모욕당한 자를? 또 저지른 죄보다 뉘우침이 이미 더 커진 자를 너희는 어떻게 벌하려 하는가? 뉘우침이란 무엇인가? 너희가 기꺼이 따르는 그 법이라는 것을 통하여 정의를 집행하는 것도 바로 뉘우침을 심어 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물론 너희는 죄없는 자에게 양심의 가책을 심어 줄 수도 없고, 또 죄지은 자의 가슴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누구의 명령 없이도 양심의 가책은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고 스스로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 정의를 알려는 자들아, 모든 행위를 완전히 빛에 비춰 보지 않고 어떻게 정의를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그때에만 알게 되리라. 똑바로 섰느니 넘어졌느니 하는 것이 사실은 한 사람이 자기의 난쟁이 자아의 밤과 신적 자아의 낮 사이 어스름 속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또 사원의 머릿돌이 결코 바닥에 놓인 가장 낮은 주춧돌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칼릴 지브란은 실로 아름다운 시를 썼다. 그러면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과녁에서 빗나가고 만다. 그는 훌륭한 시인이긴 하지만 좋은 궁수는 못 된다. 그는 한 사람의 의사와 같다. 의사는 병의 증상을 보고 그 증상을 치 료한다. 하지만 그 증상이 병의 원인은 아니다. 한 가지 증상이 치료된 다고 해도 병은 언젠가 다른 곳에서 또다시 얼굴을 내민다. 그는 행위의 근원보다는 행위 그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인가를 깊이 알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칼릴 지브란은 말하고 있다. 너희 중 누군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 남편의 속도 저울에 달아 보고 그의 영혼도 자로 재어 보라. 좋은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자비가 담겨있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 원 인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이 부족하다. 문제는, 그대는 누구이길래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만 충실하기를 요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충실하기를 요 구한다는 것은 노예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충실`이라는 좋 은 말 뒤에는 사람의 기쁨을 짓밟는 암적인 요소가 숨어있다. 그대가 도대체 어떤 권리를 갖고 있길래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자 신에게만 충실하기를 요구하는가? 칼릴 지브란은 진정한 문제에 접근하 지 못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결혼에 있다. 결혼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불변한다는 고정관념을 심어 주었다. 돌멩 이만이 불변할 수 있다. 죽은 사람만이 영원할 수 있다. 바보만이 변하 지 않는다. 좀더 지성적인 눈을 갖게 될 수록 그대는 삶이라는 것이 끝없 는 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충실하지 않다고 해서 아내와 남편을 비난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먼 저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충실하려는 마음과 사랑 이 그대 안에서 우러나던 시기가 있었다. 그대가 그러한 사랑과 충실함 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었다. 그러한 일들이 저절로 일어났다. 산들바람처럼 그것은 왔다가 다시 산들바람처럼 가버 린다. 그것이 오면, 마음껏 즐기라. 그리고 그것이 가면, 작별을 고하라. 그 산들바람이 그대 주위에서 춤추면서 또 그대를 춤추게 할 때, 그 산들바람이 그대를 감싸면서 그대를 노래부르게 할 때, 그 모든 아름다 운 날들에 대하여 감사하라. 그렇다. 그 산들바람이 가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죄는 아니다. 칼릴 지브란은 지금 정숙하고 충실한 것에 대한 낡은 관념을 되풀이 하고 있지만 그러한 충실함이란 노예 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수백만의 부부들이 이제 더 이상 자신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회적인 체면과 주위의 시선과 관습 등의 이유 때문에 서 로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가장하는 것, 그것이 진짜 죄다. 누군가를 사랑했었는데 그 사랑이 식었다면 비록 슬프고 가슴 아프긴 하지만 그대는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감사해야 한다. 그 사랑이 불과 며칠, 몇 달밖에 가지 않았다 해도 그 기 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달콤한 몇 달이 그대의 가슴을 오래도록 채워 줄 것이다. 그대의 아내가 진실되고 정직한 것에 감사하 면서 그대 역시 정직하고 진실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까지 인간을 무척 괴롭혀왔다. 인류를 그만큼 괴롭힌 문제도 찾기 힘들다.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온갖 추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는 끊임없이 감시를 하게 된다. 탐정처럼 그대 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그대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나 않을까 감시를 게울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만 충실해야 하는가? '사랑`자체가 충실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 식으 면 충실함도 사라진다. 칼릴 지브란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너희 중 누군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 남편의 속도 저울에 달아 보고 그의 영혼도 자로 재어 보라. 왜냐하면 사랑이나 미움은 두 사람의 마음속에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 이다. 여성은 가슴에서 사랑이 사라지면 남성의 가슴에서도 사랑이 사 라진다. 아마도 욕망은 남을 것이다. 욕망은 사랑보다 더 오래 간다. 욕망은 그대 존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생리적인 호르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 다. 욕망은 정신적인 현상이 아니라 순전히 생리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대단한 착각들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욕망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이쓴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 을 속이는 일이다. 그대는 아내 없이 살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사랑은 습관이 아니며, 사랑에는 경계선이 없다. 한 여성이 그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왜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단 말인가? 그녀는 그대보다 훨씬 더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서로 사랑하든 하지 않든 서로에게만 매달려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 래서 의심이 생기고,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며, 언젠가는 그러한 심리 상태들이 표면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대가 그대 가슴속의 사랑을 숨 길 수 없듯이 사랑이 식었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다. 불꽃을 숨길 수도 없으며, 불이 없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다. 불꽃이 있으면 그 주위는 빛으로 둘러싸인다. 불꽃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엔 어둠만이 남는다.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심판받거나 비난받게 되었을 때 다른 쪽도 저 울에 달아 봐야 한다는 칼릴 지브란의 말은 옳다. 왜냐하면 사랑은 두 개의 강둑 사이를 흐르는 강물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사라진다면 어느 한쪽 강둑에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에너지의 운동이다. 한 사람이 떠나고 없을 때 남은 사람은 그 떠난 사람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만, 그 욕망은 사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욕망이다. 욕망은 영원할 수 있다. 그래서 동물들의 세계에는 결혼도 없고 이혼 도 없는 것이다. 계절이 되어 새끼들을 낳을 때가 되면 동물들은 짝을 선택한다. 계절마다 짝이 바뀐다. 인간만이 영원히 사랑을 갈망하지만 아무도 영원히, 언제나 상대방을 사랑할 수 없다.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din)이 왕의 조언자로 발탁이 되었다. 조언자는 항상 왕 곁에 있어야 했다. 어느 순간에 어떤 문제가 닥쳐도 조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라 나스루딘은 스물네 시간 내내 왕과 함께 지냈다. 왕의 궁전에서 잠을 자고, 하루 종일 왕과 함께 자리 를 이동하였다. 나스루딘이 왕과 함께 지내게 된 첫날 저녁 만찬을 함께 들고 있었다. 그날 요리사가 매우 먹음직스러운 콩 요리를 내왔다. 왕은 그 콩 요리를 무척 좋아하던 차라 나스루딘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스루딘, 당신의 의견은 어떻소?" 나스루딘이 대답하였다. "예,폐하. 콩은 건강에 무척 좋은 식품입니다. 장수 식품이고, 게다 가 머리도 맑아집니다. 온갖 질병을 예방해 주지요. 옛 문헌에도 콩이야 말로 질병 예방에 가장 좋은 식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폐하의 요리사 는 매우 훌륭하군요." 이 말을 들은 요리사는 식사 때마다 매번 콩 요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날 왕은 그런대로 참았다. 세 번째 날은 콩에서 비린내가 나기 시 작했다. 네 번째 날은 도저히 콩이 입안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다섯 번째 날 왕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릇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요 리사를 불렀다. "너 미쳤냐? 내가 무슨 조랑말이냐? 식사 때마다 콩, 콩, 콩이니 이 나라엔 콩밖엔 없단 말이냐?" 요리사가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폐하의 조언자께서 콩이야말로 장수 식품이고 질병 예방에도 좋으며 머리까지 맑아진다고 하길래, 저는 폐 하께서 가능한 한 콩을 많이 드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왕이 나스루딘에게 물었다. "나스루딘, 당신은 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콩이라니요? 절대로 먹지 마십시오. 콩은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 닷새 전에는 콩이 몸에 무척 좋다고 하지 않았소?" 나스루딘이 말했다.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폐하, 저는 폐하의 신하이지 콩의 신하가 아 니옵니다. 폐하께서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저는 찬양할 것입니 다. 설사 그것이 독약일지라도 저는 그것을 벌꿀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또 폐하께서 싫어하는 것이라면, 설사 그것이 벌꿀이라고 해도 저는 그 것을 독약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폐하의 신하입니다." 그대는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고, 다양한 옷을 입고 싶어한다. 새로운 장소를 가보고 싶고, 새 친구를 만나고 싶다. 그런데 새로운 연인을 찾 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누가 그것을 부정이라고 말하는가? 부정하다 는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독재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일같이 콩만 먹으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말한다. 연인에게 충실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게 충실하 라. 사랑이 지속되고 있는 한 두 사람 모두 사랑에 충실해야 한다. 사랑 이 평생토록 지속된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평 생토록 지속되지 않아도 역시 좋은 일이다. 거기에 죄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소유욕은...... 인간은 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가? 태초부터 결혼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이란 남 자가 여자를 소유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제도이다. 여자를 원 할 때마다 여자가 옆에 준비되어 있기를 남자는 바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이다. 결혼함으로써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과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 또 충실한 아내는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이 론까지 생겨났다. 그래서 수많은 아내들이 죽은 남편을 따라 산 채로 흙 속에 묻히거나 화장용 장작더미에 던져졌다. 이 나라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충실하다는 사실을 나타내 기 위하여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 단 한 사람의 남편 도 죽은 아내를 따라 화장용 장작더미 속에 던져지거나 흙 속에 묻히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가? 모든 남 편들이 불충실하고 부정해서 그런가? 모두가 남자들이 만들어 낸 넌센스이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 여 남자들은 법과 도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죽은 뒤에도 남자들은 아 내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까봐 걱정한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자기는 이미 죽었으니 어쩔수도 없다. 그러니 자기를 따라서 죽게 만들 어야 한다. 또 사회는 그 아내에게 강제로 법을 행사한다.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 으면...... 사실 누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는가? 남편의 죽음이 슬 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지만 슬프다고 해서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녀가 그것을 거부하면 사회 전체가 그녀를 부정한 여자 로 낙인찍고 비난을 퍼부어댄다. 그녀는 결국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 차라리 남편을 따라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이 낳을 뻔했다는 생각 이 그녀를 지배하게 된다. 하지만 죽어서 받는 존경과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어느 한쪽이 부정하다고 심판받을 때면 다른 쪽도 똑같이 심판받아야 한다는 칼릴 지브란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대개 그 다른 쪽이란 남성이다. 아내를 부정하다고 법정에 세우는 것은 흔히들 남편이다. 칼 릴 지브란은 전체에 대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피상 적인 분석엔 동의할 수 없다. 부정하다는 생각 그 자체는 추하고 비인간 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는 거꾸로 되어 있다. 결혼은 쉽고, 이 혼은 어렵다. 결혼하는 데에는 어떤 증거도, 담보도 필요 없다. 하지만 이혼은 아주 까다롭고 추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이혼하기 위하여 부부는 서로 거짓말을 한다. 남편이 무능하 다고 말하든지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든지 핑계를 댄다. 사실은 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식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확실하고 논리적이고 법적 인 증거를 내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정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다. 일단 결혼한 사람은 어떻든지 함께 살아야 한다고 모든 문화는 규정 짓고 있다. 그래서 웃는 얼굴, 행복한 모습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특 히 아내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면 더욱 어렵다. 부부가 둘이 함께 있을 때면 웃는 일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웃음을 보낸다면 그것으로도 남편이 고함을 치기에 충분하다. 또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보낸다면......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앞을 지나가는데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몰인간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녀 를 바라보아선 안된다. 왜냐하면 아내가 옆에서 째려보고 있기 때문이 다. 다른 여인에게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생활에 파탄이 찾아온다. 우리가 만들어 낸 이 병적인 사회를 보라. 하지만 정부는 이 병적인 사회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사람 들이 더 불행해질수록 복종을 더 잘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아는 친구 하나가 어떤 기업체에 취직을 하려고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질문은 직업에 관련된 것이 전혀 아니고 엉뚱한 것 이었다. "결혼했습니까?" 그 친구는 나와 오랫동안 같이 지낸 사람이라서 그런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그런 질문이 어디 있습니까? 결혼이 이 기업체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에 내 자격증과 면허증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 들은 결혼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그러자 면접 시험관이 말했다. "진정하시오. 이 회사는 미혼인 사람은 채용하지 않습니다. 미혼인 사 람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복종할 줄을 압 니다. 노예가 될 줄 알지요. 이 회사는 노예를 원하지 주인이나 혁명가 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업이 잘 되어 나가길 원하기 때문에 항상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남편들은 집안에서 길들여지 고 훈련받았기 때문에 다루는 데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 친구는 나에게로 와서 말했다. "정말이지 그런 면접시험을 보고 무척 당황했다네." 나는 말했다. "이 사회는 혁명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착취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사회는 모두에게 복 종을 가르친다. 모든 교육체제도 복종을 가르친다. 복종이란 곧 너에게 는 생각하거나 결정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단지 따르기만 하라는 뜻 이다." 너희 중 누군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 남편의 속도 저울에 달아 보고 그의 영혼도 자로 재어 보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거든 그 죄의 대상이 된 자의 정신도 들여다 보라. 너희 중 누군가 정의의 이름으로 벌을 내려 약한 나무에 도 끼를 대려 한다면, 그 나무의 뿌리도 살펴보라. 그러면 분명 선과 악의 뿌리, 열매 맺는 것과 열매 맺지 못 하는 것의 뿌리가 대지의 말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 을 알게 되리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별개가 아니다. 어딘가 땅 속 깊은 어둠 속 에선 그 둘의 뿌리가 뒤엉켜 있다. 그러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비난하지 말라. 그것은 나무 탓이 아니다.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 는 것은 비료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매는 하늘에서 떨 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영양분이 필요하다. 어쩌면 더 큰 나무가 가로막고 있어서 햇빛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 고, 숨쉴 공간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빨리 심판하지 말 라.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엔 다시 한번 참고 깊이 생각하라. 어쩌면 그의 상황이 되면 그대 역시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 진실로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위치에 자신 을 놓아 보아야 한다. 모든 법과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이것을 기본적 으로 가르치고 있다. 누군가를 심판하기 전에 자신을 그의 위치에 놓아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한 여인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수피 성자인 파리드(Farid)를 찾아가 서 말했다. "성자님,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제 아이의 버릇을 고칠 수 없습니다. 이 애는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어 이렇게 살이 쪘습니다. 게다가 설탕은 무척 몸에 해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애는 도무지 제 말을 듣지 않아 요," 성자 파리드가 말했다. "보름 후에 이 애를 다시 데려오라." 여인이 말했다. "지금 당장 이 애한테 뭐라고 말씀해 주시면 안됩니까?" 파리드가 말했다. "아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판단하려면 최소한 보름 동안의 기간이 필 요하다." 여인은 당황했다. 그녀는 파리드가 인생의 여러 분제들에 대해 좋은 말씀을 들려 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어린애에게 단 것을 너무 많 이 먹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는 데에 보름 동안의 기간이 필요하다니, 여 인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보름 뒤에 여인은 다시 아이를 데려왔다. 그러자 파리드가 아 이에게 말했다. "꼬마야, 지난 보름동안 나는 나 자신을 너의 위치에 놓아 보았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단 것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낯을 하고 너에게 충고를 하겠느냐? 그래서 나는 지난 보름 동안 일체 단 것 을 먹지 않았다. 그랬더니 살이 빠지고, 몸이 훨씬 가볍고 건강해진 것 을 느꼈다. 너는 아직 어리고, 아직 인생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해라. 완전히 끊으라고 말하진 않겠다. 가 끔은 좋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진 말아라." 아이는 파리드의 발 아래 엎드렸다. 여인은 깜짝 놀랐다. 그런 행동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지금까지 누구 앞에서도 엎드 린 적이 없었다. 여인은 말했다. "정말 이해가 안가는 일이군요. 당신은 오늘과 같은 말씀을 아이에게 해주는 데에 보름이나 필요했습니다. 나도 이 아이도 당신이 단 것을 좋 아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 않습니까........" 파리드가 말했다. "그대나 이 아이가 그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거짓말로는 어떤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다. 먼저 나는 나 자신을 이 아이의 위치에 놓아 두어야 했다. 지난 보름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 아이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 아이에게 감사한다." 여인은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왜 파리드 성자의 발 아래 엎드렸니? 너는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지 않니? 게다가 우리는 힌두교인이고 저분은 이슬람교인이 아니냐?" 아이는 말했다.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어요. 다만 나에게 대답을 해주기 위해서 보름 동안 단 것을 먹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을 필요가 있어요. 이분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어머니께서 저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데려갔지만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똑같은 대답들을 하곤 했어요. 그들은 앵무새 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분은 달라요. 이분은 내가 어린아이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존중해 주고, 또 나 때문에 스스로 고통 을 겪었어요. 나는 이제 이분의 충고를 따르도록 하겠어요." 먼저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나 만일 심판을 해야만 하고, 또 심판하려는 유혹을 견딜수 없을 때면.......내가 그것을 '유혹`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그대가 누군가를 심판하려고 할 때 그대 는 항상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위에 놓으려고 한다. 마치 그 사람이 심 판대에 서 있기나 한 듯이 그대는 자신이 심판관이 된다. 그러면서 자신 의 인간성은 망각한는 것이다. 여기서 칼릴 지브란이 지적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곧 심판 하려는 그대 자신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살인자를 심판하기 전에 먼 저 그대 속의 살인자도 들여다보라. 현재로서는 그대 속의 살인자는 잠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라도 깨어날 수 있다. 지금 살인행위로 심판을 받게 된 그사람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인자가 아 니었다. 어렸을 때 내가 알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은 우리 집 근처에 체 육관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씨름선수였는데 매우 멋진 사람이 었다. 나는 육체를 가지고 씨름하는 데엔 관심이 없었다. 나에겐 내 나 름대로 하는 씨름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육체와 씨름을 할 때는 오로지 한 사람과만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인류의 과거 전체와 씨름하고 있다. 또한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씨름하고 있으 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류와도 씨름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씨름이다. 이따금 나는 그의 체육관에 가서 한쪽 구석에 앉아 구경을 하곤 했다. 그의 문하생들이 씨름 시합을 하거나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로 와서 이렇게 말을 걸곤 했다. "너는 참 이상한 아이다. 씨름에 참가하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 곳에 놀러오니?" 내가 말했다. "참여하고는 싶지 않지만, 관찰할수 있는 일라면 어떤 기회든지 활용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관찰자가 되는 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니까 요.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그는 말했다. "너는 정말 이상한 애다." 하지만 그는 나를 무척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살인자 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다지 늦은 시 각도 아니었다. 밤 열시쯤 되었을 때 였다. 나는 집 앞에 앉아서 책을 읽 고 있었는데 문득 그가 길 저쪽에서 걸어와 나무 뒤에 숨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영문을 몰랐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때 다른 사 람이 길을 걸어왔는데, 나무 뒤에 숨었던 그가 느닷없이 그에게 권총을 한 방 쏘는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 관찰자가 한 명 있었다는 사실을 알 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왜 그 사람을 죽였느냐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 문제 는,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사람이 살인자가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 는 어찌어찌해서 그를 면회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머지않아 사형에 처 해질 운명이었다. 나는 그에게 이 한 가지만을 물었다. "살인자가 당신 내부에 항상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그 사 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는 말했다. "나는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내가 그것을 의식했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버렸다. 나는 분노를 억제할 길이 없어서 그 사람을 죽 였다." 죽은 사람이 다른 체육관을 지어 그의 문하생들과 씨름대결을 하도 록 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죽은 사람은 돈이 많아서 자기의 문하생들에 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잔뜩 먹일 수 있었으며,그래서 이 가련한 씨름 선수로서는 그 사람과 대결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선수권 대회에서 자 기의 문하생들이 패배할 것이 뻔했다.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자를 죽 였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그때 너는 어디에 있었니?" 나는 대답했다. "여전히 똑같은 위치에 있었지요. 관찰하고 있었어요. 그것이 내가 삶 에 접근하는 방식이니까요. 나는 언제나 남과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남의 행동과 나 자신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우지요.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볼 수 없지만 나 자신의 마음은 볼 수 있고, 또 그것을 관 찰할 수 있지요."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는 욕망과 유혹이 떠오르거든 그것을 따르기 전 에 먼저 그대 자신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내부에고 똑같 은 사람이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을 심 판하고 비난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대 자신을 탈바꿈시키는 것이 진짜 문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 모두는 같은 배를 타고 dLTrl 때문이다. 또 너희들, 정의롭게 재판하겨는 자들아, 비록 육체적으로는 정직하나 정신적으로 도둑인 자에게 너희는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그는 모두에게 묻고 있다. 왜냐하면 모두가 심판관이기 때문이다. 남 을 심판하려는 것은 그대에게 있어서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대들은 끊임없이 남을 심판하고 있다. 칼릴 지브란은 또 묻고 있다. 또 육체적으로는 살인자이나 정신적으로는 그 자신이 살인 을 당한 자에게 너희는 어떤 형벌을 내릴 것인가? 세상의 모든 법률 체계는 아주 피상적이다. 정신적으로 살인을 당한 자가 있다고 해도 세상의 법은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지도 못한다. 또 사 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미 정신적으로 살인을 당했다. 누군가 신체를 해 쳐야만 세상의 법은 그 사실을 안다. 법이라는 것은 매우 차원이 낮은 것이다. 판사나 검사들에게는 그대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대의 내면 존 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능력이 없다. 또 너희는 어떻게 고소를 할 것인가? 그 행동으로 보면 남을 속인 자요, 억압한 자이지만 그 역시 학대받고 모욕당한 자를? 남을 속이고 억압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특정한 환경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살인자와 도둑과 착취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세상의 법률 은 과연 어떤 환경을 조성했는가? 우리는 실제로 제대로 된 법률 조직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만일 세상의 판사나 검사들이 명상이 무엇인지 안 다면,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면, 사람들의 존재 깊은 곳을 들여다볼 줄 안다면, 또 자신을 죄인의 위치에 놓고 그 죄인이 처한 상황을 느껴볼 줄 안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법과대학도 이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범죄들 이 갈수록 증가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책 임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해야 한다. 그것보다 더 큰 창조는 있을 수 없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먼저 자기 내면의 탈바꿈을 시도하기를 바란 다. 그런 다음에 이 사회의 어느 곳에서든 잘못된 것에 대하여 변혁을 피해야 한다. 또 저지른 죄보다 뉘우침이 이미 더 커진 자를 너희는 어떻 게 벌하려 하는가? 무엇보다도 벌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수 천 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벌이라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진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마치 범죄자 대학에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초범자라도 감옥데 들어가면 전문 범죄자들 을 만나 훈련을 받기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젊은 청년이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약방에서 약을 훔치다 가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그것이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 오히려 병든 사회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청년의 어머니가 죽어 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청년은 의사를 부르거나 약 을 살 돈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는가? 그는 3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방으로 가자 한 사람 이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다른 두 사람이 그에게 안마를 해주고 있었다. 그 누워 있던 사람이 물었다. "넌 몇 년 먹었어?" "먹다니요?" "몇년이나 여기에 있게 되냐 말이야." "3년입니다." "그렇다면 좋아. 그 문간 옆이 네 자리다. 우린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이곳에서 지내야 하니까 말이야. 이 친구는 20년이고 저 친구는 30년이 다. 3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니 더 이상 이 안으로 들어올 필요 도 없이 그 문간에 잠시 앉았다 나가란 말이야. 알겠냐?" 어떤 범죄자가 벌을 받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어 사회로 돌 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물론 변하긴 변했다. 죄를 저 지르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붙잡힌 것이 잘못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배 워가지고 나온다. 그만큼 영리해지는 것이다. 처음엔 아마추어였지만 이제 대학 졸업자인 것이다. 게다가 바깥에 나오면 사회 전체가 그를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는 다. 모두가 그를 전과자로 취급한다. 그러니 직업을 구하려고 해도 불가 능하다. 누가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는가? 머지않아서 그는 더 큰 범죄 를 저지를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 마을에 매우 좋은 사람이 한 명 살고 있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였 다. 나는 그에게 깊은 우정을 느꼈다. 우리 식구뿐 아니라 마을 전체와 학교선생들까지 그와 친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석 달을 감옥에서 살고 나오면 한달은 밖에서 살고, 다시 여섯 달을 감옥에서 보내고 두 달 나와 있다가, 또다시 3년을 감옥에서 지내곤 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바르탁 알리(Bartak Ali)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이제 막 5년 간을 감옥에서 보 낸 뒤였다. 이번에 그를 감옥으로 보낸 것은 우리 이웃에 사는 한 부자 였다. 그는 부자의 상점을 털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르탁 알리는 어떤 이유로도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돈이 없었다.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그는 마차를 한 대 세내었 다. 마부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당신에겐 집이 없잖소." 그는 말했다. "나에게 왜 집이 없단 말이냐. 나는 이제 막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인생의 4분의3을 나는 집에서 보냈고, 나머지 4분의 1을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모두가 삶 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다. 자, 나를 모디 씨의 상점으로 데려다 다오." 모디 씨의 상점이란 지난 번에 그가 물건을 털다가 붙잡힌 곳이었다. 그래서 모디는 온갖 수단을 써서 그가 5년동안 갇혀 있도록 했던 것이 다. 마부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별난 사람이군요." 그가 말했다. "그곳말고 내가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나의 가정을 파괴하 고 나를 감옥으로 보냈다. 나에겐 지금 이 마차삯을 지불할 돈조차 없 다. 모디 씨가 지불할 것이다. 그는 마땅히 돈을 지불해야 할 뿐만 아니 라 내가 지낼 숙소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는 그에게 훨씬 큰 피해를 입할 것이다. 영원히 내 집에서 지낼 수 있도 록 말이다." 내가 그와 마주친 것은 그가 그 마차에서 막 내릴 때였다. 모디는 바 르탁 알리를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르탁 알리는 매우 강한 사람 이었고,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그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래도록 잊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안녕하시오!"하고 말하자 모디는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는 가게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마부에게 돈을 지불하시오. 내겐 돈이 없으니까 말이오. 그리고 내가 묵을 곳을 주선해 주시고, 일자리도 하나 주시오. 아니면 봉급만 주시든 지." 나는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바르탁,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러다가 저 사람이 심장마비에 걸리겠 다. 우리 집이나 다른 사람의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지 않았는가? 그대 에겐 친구도 많을 텐데..." 그가 말했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의 집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요? 이 사람이 재판관 에 압력을 넣었으니 모두가 이 사람 책임입니다. 이 바르탁 알리에게 단 지 5년 형밖에 때리지 않다니! 나는 영원히 내 집에서 편안히 살고 싶었 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그의 책임입니다." 모디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아무 걱정 마시오." 그는 마차삯을 지불한 뒤 호텔에서 음식까지 주문했다. 그런 다음 바 르탁 알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겐 강가에 작은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곳에서 지내시면 어떻겠습 니까? 나는 그 집을 별로 사용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바르탁 알리가 물었다. "내 생활비는 어떻게 하구?" 모디가 말했다. "내가 다 내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너무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심장이 뛰어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여기 그 집의 열쇠가 있으니 어서 그곳으로 가십시오. 하루 두 번씩 음식을 배달해 두리겠습니다. 물론 식사 후에 드실 차도 제공해 드릴 것이고, 모든 것을 불편하지 않도록 해드리겠습 니다." 바르탁 알리가 말했다. "이것을 잊지 말라. 만일 하루라도 건너 뛰면 네 목숨을 싹 없애 버릴 것이다. 이제 나는 예전과 달리 어떤 것을 싹 쓸어없애는 데엔 훨씬 많 은 실력을 갖추었다. 그전엔 단순한 소매치기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제 나는 5년간의 범죄자 대학을 수료했다는 사실을 알아라." 세상의 감옥은 일종의 대학이다. 범죄를 육성하고, 훈련시킨다. 이것 은 벌이 아니라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벌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 라,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사회 전체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법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살인자에게 재판관이 사형 언도 를 내렸다. 그러자 그 살인자가 말했다. "이건 매우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저의 두 손에 있습니다." 재판관 역시 가볍게 대답했다. "좋다. 너의 말이 옳다. 너의 두 손이 그 사람을 죽였으니, 그 두 손을 감옥에 가두겠다." 그러자 죄인은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모든 죄인은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지요." 그러더니 그는 소매를 들추어서 자신의 두 손을 빼어 바닥에 내려놓 았다. 그의 두 손은 가짜 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두 손을 재판관에게 주 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재판관님. 이제 저는 가도 되겠죠?" 또 저지른 죄보다 뉘우침이 이미 더 커진 자를 너희는 어떻 게 벌하려 하는가? 만일 그가 후회하고 있고, 뉘우치고 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알고 있다면, 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긴다 면, 더 이상 어떤 벌을 그에게 내릴 수 있는가? 물론 칼릴 지브란이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기독교의 영향이다. 기독 교는 계속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교회로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 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용서할 것이다. 고백이 곧 뉘우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그대는 또다시 죄를 짓게 된다. 그런 다음 다음 주 일요일에 교회로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또 다시 용서를 받게 된다. 나는 단순한 회개나 뉘우침만으론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도 이해가 필요하다.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에 동물적인 것이 잠재해 있 으며,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그 무의식의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일상적인 의식, 그 무의식을 초월하여 존재의 더 높은 차원인 초 의식상태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짓이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명상학교를 다녀야 한다. 그래서 더 깨인 의식을 갖는 법을 스승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의식에는 여러 가지 높이의 봉우리가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선 범 죄나 그 밖의 잘못된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 뉘우침만으로는 불충분 하다. 칼릴 지브란은 지금 기독교 서적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래도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무의식적으 로 자신이 들어 온 사실을 적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성경에서 계속해서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죄 사람을 받 으리라!"라고 외치고 있다. 매우 간단한 공식이다. 하지만 너무나 간단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탈바꿈시켜 주지 못한다. 또 저지른 죄보다 뉘우침이 이미 더 커진 자를 너희는 어떻 게 벌하려 하는가? 뉘우침이란 무엇인가? 너희가 기꺼이 따르는 그 법이라는 것을 통하여 정의를 집행하는 것도 바로 뉘우침을 심어 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물론 너희는 죄없는 자에게 양심의 가책을 심어 줄 수도 없고, 또 죄지은 자의 가슴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확실한 것은, 세상의 재판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재판관이 더 개 입할수록 죄지은 자의 가슴은 더욱 단단해진다. 누구의 명령 없이도 양심의 가책은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 을 깨우고 스스로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 정의를 알려는 자들아, 모든 행위를 완전한 빛에 비춰 보지 않고 어떻게 정의를 알 수 있겠는가? 행위의 단편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 중간에 뜯어진 한 페이지만을 읽고 나서 그 소설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 소설이 훌륭한 걸작인 지 아니면 3류 작품인지 아직 평가하긴 이르다. 작은 행위만을 보고 어 떻게 다른 사람을 평가하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자기 자신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보지도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먼 저 그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라. 그대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그대 는 더 자비롭게 될 것이다. 그대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날 그대는 알 것이다. 거기에 더이 상 죄인도 성자도 없다는 것을. 죄인과 성자라는 것은 모두 잠든 사람들 이 펼치고 있는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그때에만 알게 되리라. 똑바로 섰느니 넘어졌느니 하는 것이 사실은 한 사람이 자 기의 난쟁이 자아의 밤과 신적 자아의 낮 사이 어스름 속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또 사원의 머릿돌이 결코 바닥에 놓인 가장 낮은 주춧돌보 다 높지 않다는 것을 아무도 더 낮지 않고, 아무도 더 높지 않다. 아무도 죄인도 아니고, 아무도 성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 하나의 전체다. 누군가 죄를 저질렀다면, 곧 우리 모두가 그 죄를 저지른 것이다. 또 누군가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 모두가 초월의 세계를 함께 맛본 것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