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날개와 갑옷 옷에 대하여 옷에 대하여 그러자 또 베짜는 직공이 말했다. 우리에게 옷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옷이란 너희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한다. 너희는 옷으로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그러나 도리어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알게 되리라. 너희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더 내놓아 햇빛과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생명의 숨결은 햇빛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니까 너희 중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옷을 지어 입힌 이는 북풍이다." 나도 말한다. 그래, 북풍이었다. 그러나 그의 베틀은 부끄러움, 그의 실은 연약해진 힘줄이었다. 그리하여 일을 다 마쳤을 때 바람은 숲 속에서 웃었다. 잊지 말라, 부끄러움이란 깨끗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그리고 깨끗지 못한 것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이란 마음의 족쇄, 마음의 더러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잊지 말라, 대지는 너희의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너희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무스타파는 다시금 하늘로 비상하여 별들의 언저리에까지 도달하 고 있다. 내가 `언저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본질적인 것을 몇 가지 놓 치고 있기 때문이다. 과녁에서 빗나가지만 않았다면 그는 그 본질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이 되는 법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대가 전체 와 연결되려면 그대의 눈을, 그대의 선입견을 말끔히 씻어야 한다는 것 이다. 눈이 완전히 씻어지기 전에는 전체 비밀이 그대에게 드러나지 않 는다. 그것은 존재계가 구두쇠이기 때문이 아니다. 존재계는 매우 공정하다. 존재계는 그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준다. 그대가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단계가 아니면 존재계는 그대에게 진리를 보여 주지 않음으로 써 그대를 보호한다. 그대가 아직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되어 있는 데 존재계가 그대에게 사랑의 모든 신비를 열어 놓는다면 그것은 그대에 게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통찰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눈멀게 할 것이다. 장님이 눈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금방 햇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며칠 동안 지내야 한다. 만일 장님이 눈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금방 "이제 집으로 가도 좋소. 이제 태양과 나무들과 새 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보아도 좋소."라고 말한다면 그는 금방 눈에 화상을 입어 다시 장님이 되어 버릴 것이다. 또 재수술은 훨씬 더 어려 운 것이다. 존재계는 매우 느리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대를 위한 것이 다. 존재계는 그대가 소화할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진리에 아주 가까이 다가 갔다. 하지만 아직 과녁을 똑바로 맞추지는 못하였다. 그의 말은 진리이 지만, 아직은 단편적인 진리이다. 또 이 점을 기억하라. 단편적인 진리 는 때론 거짓말보다 더 위험 하다는 것을. 왜냐하면 단편적인 진리는 한 사람을 평생 동안 속일 수 있지만 거짓말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하기 때 문이다. 따라서 나는 알무스타파가 말하는 단편적인 진리를 완전한 것으로 만 들고자 한다. 또 어째서 내가 알무스타파의 말을 단편적인 진리라고 말 하는지 그 점을 일깨워 주고 싶다. 그러자 또 베짜는 직공이 말했다. 우리에게 옷에 대하여 말 씀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칼릴 지브란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아주 평범한 것들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만일 철학자에게 옷에 대하여 질문하면 그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거야 직공이나 양복장 이에게 가보시오. 철학은 옷과 아무런 상관이 없소." 하지만 삶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그대의 통찰력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 이다. 그대의 통찰력이 분명해지는 순간, 그대의 눈이 순수해지는 순간 강가의 작은 조약돌 하나라도 하늘의 별들처럼 신비롭게 느껴진다. 그 것은, 조약돌이나 별이나 똑같은 신비의 근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하였다. 옷이란 너희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한다. 옳은 얘기다. 하지만 단편적인 진리이다. 왜냐하면 옷 자체가 발명된 것은 바로 아름답지 못한 것을 감추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동물이 나 새들은 옷을 입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옷을 발명한 것은 오로지 인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옷을 발명했는가? 피상적으로 보면 비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하지만 모든 동물들과 나무들이 옷 없이도 보호받을 수 있는데 인간만 이 옷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 옷은 인간을 비와 추위로부터 보호해 준다. 그러나 그만큼 인간은 나약해졌 다. 수천 년 동안 옷을 사용해 오면서 인간은 태오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부여받은 강인함을 상실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처음부터 옷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첫 번 째 이유는 성경에서 시사하는 바대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순수함을 잃어 버리고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했기 때문 이다. 또 아름답지 못한 사람일수록 옷에 더 집착하기 마련이다. 아름다 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아름다움을 옷으로 감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인도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 은 마하비라(Mahavira)의 상이다. 마하비라는 40년 평생 동안 언제나 벌거벗은 채 살았다. 희랍에서 감히 알몸으로 살아갈 용기를 가졌던 사람은 단 한 사람, 바 로 디오게네스였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과 동시대인이었다. 알 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 대하여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디오게네스 에 대한 소문이 끝없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디오게네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흥미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궁중 안의 사람들이 알렉산 더의 호기심을 막았다. "디오게네스를 초대 하면 안됩니다.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닙 니다." 그러다가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인도를 정복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던 도중에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가 사는 강가를 지나치게 되 었다. 이제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군사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것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그 이상한 사람을 한 번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경호원이자 수상 격인 사람이 동행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는 거절 하였다. 대왕인 자신이 벌거벗은 거지를 만났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까 봐 망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디오게네스를 보자 그는 당장에 이 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육체를 본 적이 없다. 이 사람을 만 나고 나니 옷이란 것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발명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옷이란 너희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리면서도. `많이'가리는 것 정도가 아니라 거의 99퍼센트를 가린다. 그대 자신 조차도 그대의 육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대는 한번도 자신의 몸을 들 여다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서만 사람들을 알아볼 뿐이다. 몸 전체는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이며, 몸 전체가 아름답지 않고서는 얼굴만 가지고는 속임수일 가능성이 크다. 얼굴은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서양의 미인 선발대회에서 여인들이 벌거벗은 몸을 수만 명의 사람들 앞에 내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동양인들은 웃음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 서 동양인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교양있는 문화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벌거벗은 몸 자체에 외설적이고 음탕한 것이 있어 서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를 억압하기 때문에 벌거벗은 몸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꿈속에서 그대는 벌거벗은 여인의 몸을 본다. 생각 속에선 벌거 벗은 몸을 보고 싶어한다. 나는 그대의 꿈과 생각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 다. 자신을 억압하는 그 태도를 비난하는 것이다.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이 문화인이고 교양인이라고 자신을 속 이기 쉽다. 모든 어린이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난다. 인류의 유년기엔 모든 사람이 알몸이었다. 구약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실성을 가졌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식을 갖게 되자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부끄럽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엔 바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빅토리아 왕조 시대엔 개들까지 옷을 입어야 했다. 러셀(Bertrand Russel)은 어린 시절에 본 그러한 광경을 회상한 바 있다. 그는 거의 1세기를 살았으며, 그동안 일어난 수 많은 변화들을 목격했던 것이다. 개에게 옷을 입히지 않고 나타났다간 교양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또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개에게 는 반드시 옷을 입혀야 했다. 그래서 개를 위한 옷이 특별히 제작되었 다. 특히 영국에선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할 때 반드시 끈으로 묶어 데리고 다닌다. 그것은 개들이 아직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멋진 암캐를 만나면 개들은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주인 없는 개는 모두 사살되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하지만 어리석음엔 끝이 없다. 사람들은 의자 다리에까지 멋진 천을 입 혔다. 의자 다리도 `다리'이며 다른 사람에게 성적인 충동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확실히 미친 것일까? 그런데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세상엔 여성 미인대회만 있지 남성 미 인대회는 없다. 왜냐하면 미인대회 자체가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생 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왜 남성 미인대회는 없는가? 또 미인대회를 심사 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성적으로 훔쳐보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 이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은 이렇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도 심사하기를 원한다. 마땅히 남성 누드 콘테스트도 있어야 한 다. 그래서 모든 심사와 관람을 여성이 맡아야 한다." 만일 이렇게 주장한다면 여성 미인대회도 사라질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몸매에 있어서 여 성보다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남성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기독교에 오염되기 전에 이탈리 아를 가보았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당시 로마의 문화는 절정에 달했 었다. 당시의 모든 조각상들은 아름다운 청년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로 마의 조각상에는 여성 조각상이 단 하나도 없다. 옷은 남성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파괴하였지만, 그 파괴의 정도는 여 성보다 남성 쪽이 더 심했다. 왜냐하면 여성은 보다 육체 지향적이기 때 문이다. 여성은 자신의 육체를 보호한다. 그 이유는 생리학적인 것이다. 알무스타파의 말이 옳다. 옷이란 너희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한다. 너희의 옷으로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 하짐나, 그러나 도 리어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알게 되리라. 옷은 절대로 그대에게 사생활의 자유를 주지 않는다. 옷은 그대 주위 에 그대가 겨우 걸어다닐 만큼의 매우 비좁은 감옥을 만들어 그대 스스 로 자신의 감옥을 데리고 다니게 만든다. 태양 아래 알몸을 내놓아 태양이 그대에게 퍼붓는 영양분을 온 몸으 로 맞이하라. 바람 속에 온 몸을 내맡기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감옥 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공공 장소나 거리를 벌거벗은 알몸 으로 뛰어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가 장님이고 귀 머거리이기 때문에, 모두가 가슴을 잃어 버리고 피로에 지쳐 있기 때문 에 그들은 그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주위로부터 보호받는 장소를 발견할 때면 옷으로부터 해방되 어 자유를 즐기라. 러셀이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학교에 대하여 많은 소문이 떠돌았다. 그는 늘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는 인물이 었던 것이다. 사실 진실로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침내 그 지역의 주교 한 사람이 학교를 방문하여 교실문을 두드 렸다. 그러자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알몸으로 문을 여는 것이었 다. 주교는 놀라서 눈을 감고 외쳤다. "오, 하느님!" 하지만 그 소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모두를 알몸으로 만드셨어요!" 우리는 신이 옷을 사용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사실 하느님 자신도 알몸일 것이다. 또 소위 성령이라고 하는 존재들은 어떤가? 성스 럽든 성스럽지 않든 유령들은 옷을 사는 법을 모른다. 너희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더 내놓아 햇빛과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인간은 코 뿐만 아니라 피부 전체로 숨을 쉰다는 것은 생리학적인 사 실이다. 몸 전체에 두껍게 페인트를 발라 놓아 숨구멍을 막아 버리면 비 록 코로 숨을 쉴 구 있다 해도 몇 시간 안에 그대는 생명을 잃는다. 코만 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코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몸은 70억 개가 넘는 살있는 세포로 구성 되어 있다. 그 세포들 모두가 산소를 필요로 하며 동시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해야 한다. 그런데 옷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옷은 인간의 친구가 아니다. 지난 수 천년 동안 옷을 사용했 왔기 때 문에 인간은 무척 허약해졌으며, 그래서 앞으로도 옷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끔씩 날씨가 적당하고 또 주변에 도덕군자가 있지 않을 때면 신이 그대를 이세상에 보낸 그대로의 모습으로, 옷을 모두 벗어던 진 모습으로 지내 보라. 그러면 그대는 훨씬 새로운 생명 에너지, 새로 운 젊음과 신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태양이 그대의 친구이다. 바람이 그대의 친구이고, 비가 바로 그대의 친구이다. 옷은 그대의 적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대가 너무 약해졌 기 때문에 옷을 입어야 하리라. 인간은 자연계에서 가장 허약한 동물이 되어 버렸다. 옷을 입으라. 하지만 가끔은 몸 전체가 자연적인 빛을 맞 이할 기회를 주어라. 너희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더 내놓아 햇빛과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생명의 숨결을 햇빛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 으니까. 이렇게 느껴본 적이 있는가? 햇빛 속에서 생명의 숨결을 느끼고, 바 람 속에서 생명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그대는 감옥에 갇 혀 사는 인간이다.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생명의 적나라한 춤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대지에 닿는 맨발의 감촉에서 생명의 고동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그대는 옷과 신발과 우산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나약한 인간이다. 너희 중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옷을 지어 입힌 이는 북풍이다." 나도 말한다. 그래, 북풍이었다. 그러나 그의 베틀은 부끄러움, 그의 실은 연약해진 힘줄이 었다. 끝없이 어떤 생각이 내리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대의 몸은 추한 것 이고 저주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옷을 벗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여긴다. 알무스타파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 의 베틀은 부끄러움'이다. 그대의 옷은 전부가 부끄러움이라는 베틀에 서 짜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나무들도 알몸이고, 동물들도 알몸이 다. 모든 새들도 알몸이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또 옷은 그대의 건강과 아름다움에 막대한 피해를 주어 왔다. 그대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차 단시켰으니 말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옷을 입지 않고 있다. 그런데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대의 몸은 그대의 사원이며, 신이 거주하는 장소이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었다. 진정한 종교인은 자신은 육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육체 는 신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를 부끄러워한다 는 것은 존재계를 모독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일을 다 마쳤을 때 바람은 숲속에서 웃었다. 이제 인간을 부끄럽게 만드는 작업이 끝났다. 그리하여 그대가 자신 을 부끄러워하도록 만든 바로 그 에너지가 "숲속에서 웃고 있다."고 알 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실제로 모든 나무들이 그대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모든 새들이 그대 를 보면서 웃고 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상하기도 하지! 어째서 자 신의 몸을 감추려 애쓰는 걸까?" 작은 찔레장미는 자신의 몸이 작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레바 논 삼나무는 자신의 키가 50미터, 80미터가 넘는다고 해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또같은 자연 법칙이 키 작은 찔레장미를 만들었고, 키 큰 삼나무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같은 원천에서 나왔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을 모독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을 준 그 원칙을 모독하는 일이다. 잊지 말라. 부끄러움이란 깨끗지 못한 이의 눈길을 가리는 방패일 뿐. 지금까지 그대는 부끄러움이야말로 참으로 좋은 것이라는 말을 수없 이 들어왔다. 이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부끄러움이란 `깨끗지 못한 이 의 눈길을 가리는 방패'일 뿐이다. 동양에서는 여성의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높이 칭찬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방패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에선 여성이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하고 자립할 수 있기 때문에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 동양의 여성들에게는 수천 년 동안 부끄러움과 수줍음 이 강요되어 왔다. 그래서 이제 부끄러움은 여성의 장식품처럼 되어 버 렸다. 알무스타파는 대단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부끄러 움이란 깨끗지 못한 이의 눈길을 가리는 방패일 뿐'이다. 그렇다면 깨끗 지 못한 이는 누구인가?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본능과 욕망을 승화하지 못한 채 위선적으 로 억압하고 억제만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러한 내면의 불결함을 씻 어내기 위하여 성스러운 갠지스 강에서 매일같이 목욕을 하지만 갠지스 강만 오염될 뿐이다. 그들의 불결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더러 운 것은 그들의 육체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직장에서 은퇴한 세 사람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그들 의 일상적인 습관이었다. 매일같이 그들은 그 공원으로 와서 벤치에 앉 아 있곤 하였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황금빛 과거 에 대한 추억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오락이자 즐거움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때처럼 그들 세 사람이 나란히 벹치에 앚 아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일흔다섯이고, 다른 사람은 여든 다섯, 마 지막 사람은 아흔다섯 살이었다. 가장 젊은 일흔다섯 살의 노인이 말했 다. "나는 지금 우울합니다. 몹시 슬퍼요." 그러자 나이 많은 다른 두 친구가 물었다. "무슨 일이요? 어서 말해 보시오." "한 아름다운 여성이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왔습니다. 그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열쇠 구멍으로 몰래 들여다보다가 어머니에게 들켰 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창피하고 슬픈 일입니까?" 그러자 다른 두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시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기 마련 이오. 또 열쇠 구멍이라는 것도 훔쳐 보기 위한 목적에서 있는 것이니까 말이오." 그 사람이 말했다. "당신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요. 그것은 어렸을 때 일어난 일 이 아니라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라니까요!" 이 사람은 언제나 심리적인 억압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유로워진 적이 없다. 그래서 늘 그 일이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의 내면은 언제나 불결하고 깨끗지 못한 상태이다. 그가 만일 전체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는 이 모든 욕망을 초월하여 완전히 깨끗해 졌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종교와 사회 관습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결 한 것을 심어 놓았다. 사람들은 늘 여성에게 `깨끗지 못한 이의 눈길'을 방어하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낯선 남자가 손님으로 찾아오면 눈을 내 리깔고 바닥만 내려다보도록 교육시킨다. 건강한 인간 사회에는 방패라는 것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깨끗지 못 한 이의 눈길'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잊지 말라, 부끄러움이란 깨끗지 못한 이의 눈길을 가리는 방패일 뿐. 그리고 깨끗지 못한 것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이 란 마음의 족쇄, 마음의 더러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심리적으로 억압받아 온 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라질 때 부끄러움이 란 쓸모없는 것, 오히려 자신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고 만다. 이슬람교도 들은 여성이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 변의 심리적으로 억압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이다. 하지 만 거기에 심리적으로 억압된 사람들이 없을 때 얼굴을 가리는 그러한 베일은 족쇄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의 더러움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사 라질 것이다. 어떠한 방패도 없이, 어떠한 장벽도 없이 마음을 활짝 열고 여성과 남 성이 한 사람의 인간 존재로서 서로 얼굴을 대하게 될 때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또 잊지 말라, 대지는 너희의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 람은 너희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존재계 전체가 그대의 기쁨을 기뻐한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와 함께 노래하고, 그대와 더불어 춤추기를 원한 다. 또 어떤 이가 정신적인 깨달음을 성취할 때 존재계 전체가 그것을 축하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따로 떨어진 개별적인 존재들이 아니 기 때문이다. 우리 모드는 하나의 우주적인 전체이다. 알겠는가? 4 너희가 장터를 떠나기 전에 사고 파는 일에 대하여 사고 파는 일에 대하여 또 어떤 상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사고 파는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땅은 너희에게 자기의 모든 열매를 준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만 어떻게 손을 넣을지만 안다면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풍요와 만족이란 너희가 땅의 선물을 서로 잘 바꾸는 가운데 있다. 그러나 그 바꿈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어떤 자를 탐욕으로, 어떤 자를 굶주림으로 이끌 뿐이다. 너희들 바다와 밭과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자들이 장터에서 길쌈하는 자, 질그릇 굽는 자, 향료 모으는 자를 만나거든 간절히 빌라, 이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에게. 너희 가운데 와서 저울과, 서로의 값을 매기는 셈을 깨끗이 하여 주기를. 또 빈손으로 와서 말로써 너희의 수고를 사려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너희 거래에 끼이지 못하게 하라. 그런 자에게 너희는 이렇게 말하라. "자, 우리와 함께 밭으로 가자. 아니면 우리 형제와 함께 바다로 가서 그물을 던지자. 땅과 바다는 우리에게처럼 너에게도 넉넉히 주실 것이다." 만일 또 그곳에 노래하는 자, 춤추는 자, 피리부는 자가 오거든 그들의 선물도 팔아 주라. 그들 역시 열매와 향료를 거두는 자들이며, 그들이 가져온 것도 비록 꿈으로 엮은 것이긴 해도 역시 너희 영혼의 옷이며 밥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장터를 떠나기 전에 보라, 누가 빈손으로 돌아간 이가 없는가를.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은 너희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도 그 필요한 것이 채워지기 전에는 바람 위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한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어떻게 해야 사람을 탈바꿈시킬 수 있는가를 전 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아름다운 말을 주기란 매우 쉬 운 일이다. 하지만 그 필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 말은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칼 릴 지브란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위대한 시인들, 사상가들, 철학자들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마치 그 필요한 것이 누구나 맘만 먹으면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간단한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라. 자비를 가지라. 친절하라. 즐겁게 나누어 가지라." 하지만 이것은 공허한 말이다. 읽기는 좋지만 일종의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락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탈바꿈이다.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진정한 문제는 어 떻게 해야 지신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의 꽃을 피 워 낼 방법, 기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모두들 "사랑하라."고 말하 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여기 이 말들은 대단히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운 만큼 공허하다. 마 치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먹어라.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라고 말 하는 것과 다름없다. 문제는 어디에 그 영양가 있는 음식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배고픈 사람이 그 음식을 손에 넣을 수 있 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난 몇 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궤변인데도 아무도 그것에 대 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하비라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 다.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비폭력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 에서 출발하였으며, 따라서 그 본능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해야 인간은 그 폭력성을 제거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인간은 그 폭 력성의 에너지를 비폭력성으로 탈바꿈 시킬수 있는가? 아무도 이것을 묻지 않으며, 모두가 아름다운 말에만 취해 있다. 말은 옳지만,그렇다 고 해서 그것이 새로운 인류의 새벽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철저히 실패하였다. 과거의 모든 위대한 인간 존재들이 한 가지 관점에서 볼 때는 모두가 실패하였다. 그리고 왜 아무 도 그러한 것을 질문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무도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또 그들의 추종자 가 된다는 것은 멋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대의 에고를 강화시켜준다. 만일 그대가 진실로 그대의 에너지를 탈바꿈 시키는데에 관심이 있었다 면 그대는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모두 옳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길을, 방법을 제 시해 달라."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별에 대하여 이야기한 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듣는 이들은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하며 별에 가 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릴 지브란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 무척 안타까운 것은 그 자신이 새롭 게 탈바꿈한 인간 존재로 변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단히 예술적이고, 그의 말은 훌륭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그의 말이 과연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꿈과 욕망과 바람을 반영할 말인지 살펴볼 것이다. 모든 꿈꾸는 자들은 인류 에게 큰 희망을 주어 왔다. 또 바로 그 희망으로 인해 그들은 인류의 의 식이 변혁을 꾀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다려왔다. 또 그들은 인류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그 필요를 자신들이 채워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사람 들에게 심어 주어 왔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인류에게 필 요한 것은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대가 다시 태어나지 않고 서는 단지 말장난이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나는 여기에 나의 시간과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사고 파는 일을 하기 위해 칼릴 지브란을 강의하고 있 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상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사고 파는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땅은 너희에게 자기의 모든 열매를 준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만 어떻게 손에 넣을지만 안다면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한때는 이것이 사실이었다. 적어도 수천 년 전에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칼릴 지브란이나 우리의 시대에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지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먹여 사릴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 게도 너무나 많은 인구를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나무의 열매는 더 이상 이 인류라는 거대한 무리를 먹여 살릴 재간이 없다. 한때는 가능했 었다. 그때 인구는 겨우 몇 백만에 불과했으며, 각 사람마다 수천 그루 의 필요한 과실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지로 인해 우리는 질 낮은 신문용지를 만들기 위해 그 나무들을 잘라 버렸다. 고작해야 신문 조각을 만들기 위해 수백만 그루의 나무들이 베어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 과거에 한 번 네팔을 가본 뒤에 이번에 다시 가보고 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온갖 거대했던 나무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나무들은 몇 날 몇 주일 만에 자라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년생 초목들이 아니 다. 그 나무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자라난 것들이다. 그런데 불과 몇 초 만에 잘려져 나간 것이다. 다른 것으로 그것들을 대체할 방법이 없다. 네팔은 가난한 나라다. 그래서 그들은 그 크고 장엄한 나무들을 잘라 소위 강대국에 판다. 전기톱에 의해 매일같이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자 취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자연에게 행한 것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는 사실에 아무도 눈돌리지 않는다. 자연은 이미 복수를 시작하고 있다. 20세기인 지금에 `땅은 너희에게 모든 열매를 준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만 어떻게 손에 넣을지만 안다면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모두가 어떻게 손에 넣을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 에 나무가 있고, 어디에 열매가 있는가? 풍요와 만족이란 너희가 땅의 선물을 서로 잘 바꾸는 가운 데 있다.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지구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 었지만, 인간은 지구에게 그 보상으로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힌두교이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화장을 한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는 짓이다. 사람의 몸은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대의 육체란 도대체 무엇인가? 자연이 그대에게 음식을 주었으 며, 태양이 그대에게 생명을 주었고, 공기가 끊임없이 영양소를 공급해 주고 있다. 따라서 그대가 죽었을 때 그 육체는 본래의 근원으로, 흙ㅇ[ 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하자면 그대의 다음 세대를 위하여 그대는 거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구를 너무도 오염시켰기 때문에 지구는 그 풍요로운 보화를 상실하였다. 이제 우리는 기술적으로 모든 화학적인 요소들을 지구에 되돌려 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늘 죽은 과거에 살고 있다. 자신이 지금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 하고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 한번은 내가 어떤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무척 존경받는 힌두 승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르파트리(Karpatri) 였다. 그의 유일한 재능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 로 그의 이름의 뜻이기도 했다. `카르(Kar)'는 손이라는 뜻이고 `파트리 (parti)'는 밥그릇이라는 뜻이다. 그것말고는 그를 평가할 만한 다른 것 이 없었다. 그가 구걸을 하여 음식을 얻으면 손으로 그것을 먹는다는 단 지 그 사실 때문에 그는 힌두교 성자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그곳을 여행할 때 그는 마침 종교적인 강연을 하는 중이었다. 나 는 친구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가 듣고 싶었던 것이 다. 차 안에 앉아서 나는 잠시 그의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는 놀랐다. 자 체의 대학을 가지고 있고, 병원과 농과대학까지 있는 그 문화적인 도시 에서 단 한 사람도 그 바보에게 반대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그때 마침 매우 큰 저수지를 완성시켰다. 땅이 메마르고 비는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수지를 만들고 댐을 세워 수많은 마을과 공장에 전기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점차로 사막화되어 가고 있는 땅에 충분한 물을 댈수 있었다. 이제 공사가 다 끝나고 마지 막 남은 일은 인도 대통령이 와서 준공 테이프를 끊는 일뿐이었다. 사실 인도의 수상과 대통령이 하는 일이라곤 다리와 도로와 저수지 등의 준 공식 테이프를 끊는 일뿐이다. 그들은 심지어 영화관이나 식당의 개관 에도 참석해서 큰 가위로 테이프를 끊는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는 온갖 종류의 바보들이 통치를 하고 있다. 준공 테 이프를 끊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수지는 이제 완성되었고, 또 땅 은 메말라 있다. 그러나 한시바삐 물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워낙 약속이 많은 사람이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다른 약속이라는 것도 종류가 같은 것들이다. 그는 작은 도로의 개통식에도 참석해야 한 다. 그래야만 국민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카르파트리가 수천 명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지 말라." 나는 차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사람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고, 땅도 메말랐다. 모든 것이 황 폐해져가고 있으며, 초목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왜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지 말라는 걸까? 나는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의 근거라는 것이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 게 말하고 있었다. " 그 물을 사용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물은 전기가 빠져 달아난 물이 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런 기력도 없는 물이다. 전기야말로 물의 진짜 힘인데, 그것이 빠져 달아난 물을 농업용수로 쓰게 되면 곡식들까지 기 력이 없는 것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그 곡식을 먹는 사람들도 기력이 없 게 된다." 당연히 누구나 무력해지길 원치는 않는 법이다. 그곳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사람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 는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사는 이문화적인 도시에서 저런 바보 같은 말을 종교 강연이라고 할 줄은 몰랐다. 저 사람은 지금 단순히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물은 기력이 빠져 달아나지 않으 며, 또 전기는 물의 효능이 아니다. 물의 효능은 대지의 목마름을 채워 주는 일이다. 그 증거로 이제 물을 대주기만 하면 대지는 다시 푸르러질 것이다." 카르파트리는 힌두교의 종교적인 성자일 뿐 아니라 힌두교 정당의 당 수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표를 던진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 계속해서 대지를 착취해 왔다. 대지에서 열매를 얻고 곡식을 얻으면서도 똑같은 보상을 대지에게 해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 았다. 여기 이시는 참으로 좋은 시다. 하지만 인간은 좋은 시만으로는 살 수 없다. 그는 말한다. 풍요와 만족이란 너희가 땅의 선물을 서로 잘 바꾸는 가운 데 있다. 그는 지금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던 인류의 초기 시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때 사람들은 물건과 물건을 맞바꾸었으며, 교환의 수단으로 화 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에게 암소가 한 마리 있는데 그대는 그 암소한테서 그대가 필요 한 양보다 훨씬 많은 우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대에겐 옷이 없다. 그래서 그대는 옷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우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서 사방을 돌아다녀야 한다. 이것은 시간과 기운 낭비일뿐더러 쉬 운 일도 아니다. 말이 한 마리 필요하면 적당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 다. 그대가 다른 것을 주는 교환조건으로 말을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사 람을 찾아 이 마을 저 마을 수소문해야 한다. 지구상에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살 때는 그러한 일이 가능했다. 이제 교환이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졌다. 생각해 보라. 필요한 것을 얻으 려면 적당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라 전체를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른 다. 이러한 큰 곤란을 덜기 위하여 인간이 발명한 훌륭한 것이 바로 돈 이다. 그대가 우유를 필요러 하든지 필요로 하지 않든지, 말을 한 마리 갖고 있든지 안 갖고 있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우유가 필요하면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며, 말을 팔기 원하는 사람은 돈 받고 팔 면 그만이다. 돈이 그 지름길인 것이다. 주머니에 돈이 몇 푼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실제로 얼마나 많은 것을 그대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이 되는가? 책을 사고 싶다면 그 책이 그대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담배를 원한다면 그것도 주머니 속에 있는 셈이다. 영화를 보고 싶다면, 그것도 주머니 속에 있 다. 물론 돈 몇 푼으로 이 많은 것을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대는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돈과 지폐를 맨 처음 발명한 것이 서양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3천년동안 그들은 지폐를 사용해 왔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도착하여 지폐를 보았을 때 그는 믿을 수 없었 다. 유럽에도 돈이라는 것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황금 동전이었다. 따라 서 1천 냥의 금화를 들고 다니면 그 무게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지만 강 도를 만나기 십상이다. 당장에 남들이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무거운 짐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 부에서 발행한 간단한 종이 한 장이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그 대신 황 금은 금고에 넣어 두면 된다. 확실히 당시의 사람들은 매우 현명했던 것 같다. 마르코 폴로는 유럽 으로 돌아가면서 중국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갔다. 당시 중국에서는 인 쇄기계가 발명되었다. 인쇄기계가 없다면 어떻게 지폐를 찍어 내겠는 가? 그는 지폐를 몇 장 가지고 돌아가서 교황에게 보여 주었다. 당시는 교황이 서양의 세력권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이하 모든 사람들 이 마르코 폴로를 놀렸다. "그대는 이것을 돈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우리를 속이지 말라." 교황은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금화는 떨어지 면서 소리를 내었다. 교황은 마르코 폴로에게 물었다. "이제 그대가 가지고 온 그 지폐를 던져 보아라. 그것은 종잇조각일 뿐이다. 그대는 속은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온갖 방법으로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했다. "제가 속은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전체가 언제나 이 지폐를 화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구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물물교환 체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돈이 출현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거운 금화였따. 그러다가 금화가 사라 지고 은화가 나타났다가 마침내 지폐가 출현하였다. 칼릴 지브란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꿈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 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그것은 다만 어떤 자를 탐욕으로, 어떤 자를 굶주림으로 이끌 뿐이다. `그 바꿈이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대는 진실로 사랑이라는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사랑하는 가슴을 지니고 있는가? 그대는 어제나 남에게 사랑을 요구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남에게 주어 본 적이 없다. 그대의 내면에서 과연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에너 지를 강렬하게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할 때 조 차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단지 생리학적인 욕구 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 그대라 사랑한 여자가 내일이면 그대의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은 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이 `사랑으로'교환을 실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 는가? 그들에게는 사랑의 체험이 전혀 없다. 그들은 남을 사랑해 본 적 이 없다. 그렇다. 그들은 욕망에 대한 체험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랑'이라 는 매우 아름다운 말로 그 `욕망'이라는 추한 말을 가리는 것이다. 이런 일이 기억난다. 내가 철학과 교수러 재직하던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나는 대학의 부총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부총장은 나를 무척 좋아하였 다. 그래서 내가 복도를 지나갈라치면 사환을 보내어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들이곤 했다. 그는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매우 철학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날도 내가 그와 함께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대학원생인 여학생 한명이 울면서 부총장실로 들어왔다. "저는 어떤 남학생으로부터 줄곧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요. 저와 같은 학과에 다니는 학생인데 온갖 방법으로 저를 괴롭히고 있어요." 부총장이 말했다. "그 남학생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말해 보라." 그 여학생이 대답했다. "어떤 때는 제 자전거의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놓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 몰래 저한테 돌을 던져요. 또 줄곧 편지를 보내고 있어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저는 그것이 그 남학생 짓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의 필체를 알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 남학생에게 받았다는 편지를 삼사십 통 꺼내 놓았다. 부총장이 말했다. "나도 그 남학생을 안다. 또 그에게서 괴롭힘을 당한 것은 학생이 처 음이 아니다. 그는 이 대학에서 5년을 다녔는데 계속해서 똑같은 짓을 해오고 있다. 이제 나도 지쳤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벌을 주었지만 고 쳐지지 않고 있다. 그러지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를 대학에서 추방 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가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과연 누가 추방되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부총장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내 말은, 내가 추방되어야 할지 아니면 당신이 추방되어야 할지, 아 니면 이 여학생이 추방되어야 할지, 그 남학생이 추방되어야 할지를 생 각해 보자는 겁니다. 이 일에는 지금 네 사람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부총장이 말했다. "당신은 갑자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오?" 내가 말했다. "당신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계십시오. 내가 이 여학생과 대화를 해보겠 습니다." 나는 그 여학생에게 말했다.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하라. 그대는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실제로 즐 기고 있지 않은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이 멎었다. 내가 물었다. "만일 아무도 그대의 자전거 바람을 빼놓지 않고, 아무도 그대에게 돌 을 던지지 않으며, 아무도 그대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 면 만족하겠는가?" 그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는 그런식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해서 만족스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번 솔직하게 말해 보자. 그대가 여기에 찾아와서 그런 하소연 을 하는 것은 은연중에 자신이 가장 잘 생긴 여학생이라는 것을 내세우 기 위한 것이 아닐까? 게다가 그대는 그 증거품까지 이곳에 가지고 왔 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이것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간단한 심리적인 문제이다. 여 성은 누구나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을 때 가장 심리적인 고통을 받 는다. 나는 그대의 눈물 속에서도 어떤 자랑스러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남학생은 잘못한 것이 없다. 다만 그는 여학생을 유혹하는 방 법을 잘 모를 뿐이다." 나는 부총장에게 말했다. "당신은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남학생을 나에게 보내십시오. 내 가 그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겠습니다." 부총장이 말했다. "여기는 지혜의 요람인 대학이오." 나는 다시 그 여학생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 것을 원하는가? 그대가 그 남학생이 퇴학당하길 원한다 면 당연히 그는 학교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여학생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가 퇴학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실 그가 없 는 대학은 저에게 공허하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는 멋진 남성입니다." 부총장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 그가 멋진 남성이고 또 그 학생 없이는 살 수 없다면 어째서 와서 불평을 늘어 놓았지?" 내가 말했다. "단순한 선전일 뿐입니다." 나는 다시 그 여학생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 남학생을 호출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그녀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가 제 자전거의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놓긴 해도 그는 바람 넣는 펌프를 갖고 다니면서 저를 도와 줍니다. 또 그가 보 내는 편지에는 잘못된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쩌면 교수님의 말씀이 옳을지 모릅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제가 한 남학생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부총장에게 말했다. "이 문제는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당신은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 일 당신이 그 남학생을 퇴학시킨다면 내가 전교생을 모아 놓고서 당신 이 사랑에 반대하기 때문에 그를 퇴학시켰다고 말하겠습니다. 결국 부총장은 여학생을 돌려 보내고 그 남학생의 문제에 더 이상 개입 하지 않게 되었다. 그대의 내면에 가득 차 있는 관념들을 모두 비워 버릴 때, 그때 그 빈 공간 속에서 사랑의 꽃, 기쁨의 꽃, 펴오하의 꽃이 피어난다. 존재의 아름 다운 모든 꽃들이 피어난다. 또 그대가 사랑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있 겠는가? 그대의 손도 비어 있고, 그대의 가슴도 비어 있다. 칼릴 지브란은 계속해서 매우 아름다운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아 름다움 속에서도 어디서 어떻게 그것들을 발견할 것인지 분명히 이해하 고 넘어가야 한다. 일단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나면 그것이 마술적으로 체험과 직결될 것이다. 단순히 변화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의자 까지도 사랑으로 만진다. 비록 의자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또 그 의지는 우리와 다른 종류의 감수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해도 사랑 없이 행동할 수가 없다. 또 정의는 사랑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정의롭 지 못하게 행동할 수가 없다. 오히려 정의를 심판하는 판사와 검사가 사 랑을 알지 못할 뿐이다. 정의는 사랑의 부산물이다, 정의는 법과대학게 가거나 법에 대하여 공부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판검사가 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는 사랑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완 전히 잊어 버렸다. 단지 말만이 남아 있다. `신'이라는 말이 그렇듯이 모 두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입을 열어 `신'을 말하지만 그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만 생겨난다. 사랑은 명상적인 가슴을 채우는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그대가 공간을 마련할 때 그 공간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그대의 생각들, 그대의 편견과 선입견들과 관념을 비워야 한다. 그래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정의에 대한 문제도 해결된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누구에게도 정의롭게 못하게 대할 수가 없다. 원수에게조차도 정의롭지 못할 수가 없다. 칼릴 지브란은 지금 매우 아름답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꿈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그것은 다만 어떤 자를 탐욕으로, 어떤 자를 굶주림으로 이끌 뿐이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엔 정의가 없으며, 사랑도 없 다. 오직 탐욕과 굶주림만이 있을 뿐이다. 그 굶주림은 탐욕 때문이다. 몇사람이 돈에 최면을 당해 끝없이 돈을 긁어 모으기 때문에 이디오피 아에서, 인도에서, 동양의 가난한 여러 나라에서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 이 굶주리고 있다. 탐욕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탐욕(greed)이라는 영어 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는데, 산스크리트어의 모든 단어에는 다른 언 어가 갖지 못한 특정한 의미와 깊이가 있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독수리를 `기드하(giddha)'라고 하는데, 그 독 수리는 사람과 동물과 새들의 시체를 먹어치운다. 영어의 `탐욕(gree- d)'이라는 단어는 이 기드하가 여러 과정을 거쳐 탈바꿈한 것이 다. 탐욕에 빠진 사람은 그 탐욕이 다른 곳에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을 낳는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칼릴 지브란의 말은 옳다. 탐욕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두 부류로 나누 어질 것이다. 갖지 못한 자와 가진자. 이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독수리가 그런 짓을 한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인간이 지금 그런 문제를 만들고 있다. 그대 만일 사랑을 안다면 정의가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대 만일 사랑과 정의를 안다면 욕심을 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대의 욕심이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 바다와 밭과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자들이 장터에서 길쌈하는 자, 질그릇 굽는 자, 향료를 모으는 자를 만나거든 간절히 빌라 이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에게. 너희 가운데 와서 저울과, 서로의 값을 매기는 셈을 깨끗이 하여 주기를. `이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에게 간절히 빌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신앙인들은 이러한 일을 지난 수세기 동안 되풀이해 왔다. 인도에서는 그것이 일상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하늘의 영에게 빈다. 그런데 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또 너무 많은 비가 와서 홍수가 나 수많은 마을 이 잠겨도 그들은 다시 하늘의 영에게 빈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빈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도 수세기 동안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같은 행위를 되풀이 하고 있다. 또 빈손으로 와서 말로써 너희의 수고를 사려는 자들이 있 으면 그들을 너희 거래에 끼이지 못하게 하라. 누가 과연 빈손을 가진 자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성자들, 승료 들, 영적인 안내자들, 이들이야 말로 빈손을 가지고 거래에 끼여들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며,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류에게 짐이 될 뿐이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모든 종교마다 그대의 노동에 의 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실로 더부살이를 하는 자들이다. `또 빈손으로 와서 말로써 너희의 수고를 사려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 을 너희 거래에 끼이지 못하게 하라.' 승려와 목사들, 그들은 무엇을 가 지고 있는가? 단순히 남에게 주워들은 말뿐이다. 또 그들은 그 공허한 말을 그대의 노동과 맞바꾸려 하고 있다. 그대는 물건을 만들고, 생산하 고, 창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인 자들이 그대의 지도자가 되고, 그대와 신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속 임수꾼들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을 그들은 수세기 동안 판매해 왔다. 이제 그들을 우리의 거래에 더 이상 끼여들지 못하게 해야한다. 승려 와 목사들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인류는 한결 짐을 덜게 될 것이다. 죄책감과 두려움의 짐을 덜게 될 것이다. 또 욕심이 짐을 덜 게 될 것이다. 천국이라는 것도 욕심이 사후에까지 커져서 나타나는 것 이기 때문이다. 또 지옥이라는 짐도 덜게 될 것이다. 지옥이라는 것은 사후에까지 두려움이 연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들은 매우 능란하고 기술적이다. 그것은 그들의 사업이 수세기 동안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너희는 이렇게 말하라. "자, 우리와 함께 밭으로 가자. 아니면 우리 형제와 함께 바 다로 가서 그물을 던지자. 땅과 바다는 우리에게처럼 너에게도 넉넉히 주실 것이다." 이 말의 본질적인 의미에는 나도 찬성한다. 하지만 `바다로 가서 그물 을 던지자.'는 말 자체엔 반대한다. 그것은 또다시 산 생명체를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아까 말한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정의는 어디로 갔는 가? 그래서 나는 칼릴 지브란의 꿈이 매우 아름다운 꿈이긴 하지만 의식 이 활짝 깬 영혼이 직접 체험한 그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다. 그는 실로 위대한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정상까지 가끔씩 비 상하다가 다시금 바닥으로 추락한다. 만일 또 그곳에 노래하는 자, 춤추는 자, 피리부는 자가 오 거든 그들의 선물도 팔아 주라. 그는 다시금 비상하여 높이 올라가고 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 다. 그는 다시금 대단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만일 또 그곳에 노래 하는 자, 춤추는 자, 피리부는 자가 오거든 그들의 선물도 팔아주라.' 왜냐하면 그들 역시 창조자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 속에 신비가 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신비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자이다. 그들의 창조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각가처럼 눈에 보이는 조각품을 창조하 는것도 아니고, 시인처럼 읽을 수 있는 시를 짓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질그릇 굽는 자도, 춤추는 자도, 노래하는 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 은 무엇을 창조하는가? 그들은 사람을 창조한다. 진정한 사람, 인류의 식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창조한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것이 바로 신비가들에 의해서 창조되어 왔다. 하 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칼릴 지브란은 그 신비가들에 대하여 잊고 있다. 나는 그들을 잊을 수 없다. 신비가들은 시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가 신비가 들에게로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장에서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 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어떤 상품을 가지고 시장에 나타날 것인가? 피리부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뭔가를 가져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 득시킬 수 있다. 그는 오락을,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온 것이다. 하지만 신비가는 과연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수 있을 것인가? 그의 손은 비어 있지만, 그의 영혼은 충만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려면 그대가 신비가들에게 찾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열망이 내면에서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람만이 뭔가를 이해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열매와 향료를 거두는 자들이며, 그들이 가져온 것도 비록 꿈으로 엮은 것이긴 해도 역시 너희 영혼의 옷이며 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그 꿈들은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다. 그 꿈들은 잘해야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육신이 배고픔을 느낄때는 음악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때는 빵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배고픔을 느낄 때 역시 음악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때는 명상 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너희가 장터를 떠나가 전에 보라. 누가 빈손으로 돌아간 이가 없는가를.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은 너희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 도 그 필요한 것이 채워지기 전에는 바람위에 평화롭게 잠들 지 못한다. 칼릴 지브란이 말하는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이란 신을 염두에 둔 말인 듯하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그의 의도 자체는 좋은 것이다. `너희 가 장터를 떠나기 전에 보라. 누가 빈손으로 돌아간 이가 없는가를.' 그 러나 `절대 영이 평화롭게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영은 언제 나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그대가 여기에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다. 절대로 잠에서 깨어나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빈손으로 돌아간 이 의 영혼은 평화롭게 잠들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배고픔 속에서 평화롭 게 잠들 수 있는가? 칼릴 지브란을 생각할 때 마다 참으로 불행으로 여기는 것은 그가 한 쪽 눈밖에 뜨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눈 모두 뜨지 못했기 때문에 불균 형이 있는 것이다. 균형있는 접근이 가능하려면 두 눈이 필요하다. 마치 두 날개가 필요하듯이.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다. 뛰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날지는 못 한다. 한쪽 눈만 뜬 사람도 볼수는 있지만 그의 시야는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또 물론 내면 세계에 관한 한 때로는 절반의 시야가 더 위험할 수 있다. 지금 그는 빈손으로 돌아간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다. 대신 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도 그 필요한 것이 채워지기 전에는 바람 위 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하는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다. 때로 그는 자신의 말에 취한 듯하다. 그래서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다. 한 단어가 다른 단어를 이끌고 나온다. 그래 서 그는 자신이 진리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먹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가 하는 말은 좋은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낳은 위대한 시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물론 나의 강의는 새로운 강의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이 나 나름대로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그것을 말했든지 간에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내 강의에 화를 낼 것이 다. 세상에는 칼릴 지브란을 사랑하는 이들이 무척 많다. 그들은 내 강의를 듣고 매우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람들이 화내는 것에 신경써야 하는가, 아니면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가에 신경써야 하는가? 어떤 상황이든지 나는 진실만을 말할 것이다. 세상 전체가 나한테 반대한다 해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진리의 편에 서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 다. 나는 진리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알겠는가? 5 영혼이 바람 속에 헤맬 때 죄와 벌에 대하여 1 죄와 벌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그 성의 재판관 한 사람이 앞으로 나아와 말했다. 우리에게 죄와 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 영혼이 바람 속을 헤맬 때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이 홀로이기 때문에 너희는 남에게 죄를 짓고, 그래서 또한 너희 자신에게도 죄를 짓는다. 그리하여 그 저지른 죄 때문에 너희는 축복받은 이의 문을 두드려야 하며, 또 도무지 돌아보시는 기색이 없어도 한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너희의 신적 자아는 큰 바다와도 같다. 그것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벼운 공기처럼 날개가진 자를 들어올린다. 또한 너희의 신적 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그것은 두더지의 길을 모르며 뱀의 구멍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 속안에는 신적 자아만이 홀로 살고 있지 않다. 너희 속안의 많은 부분은 아직 사람에 불과하며, 또한 아직 사람에 이르지 못한 부분도 많다. 다만 스스로 깨어날 때를 기다리며 잠든 채 안개 속을 헤매는 형상 없는 난쟁임나이 있을 뿐. 그러니 이제 나는 너희 속안의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죄를 알고 죄에 대한 벌을 아는 것은 안개 속의 난쟁이도, 너희의 신적 자아도 아닌, 바로 그 속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 그는 대중적인 시인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인간 의식 의 최고봉을 이룬 사람들에 어울릴 만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도 그는 그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바탕이 시인이면서도 이따금 꿈속에서 그는 의식의 햇빛 찬란한 봉우 리를 보곤 하였다. 그는 그 꿈이 자신에게 실현되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 다. 하지만 꿈이 진리를 가져다 주진 않는다. 아무리 좋은 꿈이라도 그것은 호수에 비친 보름달에 불과하다. 호수 에 물결도 없고 바람도 없이 잔잔할 때면, 호수는 거울이 되어 그 거울 에 비친 달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의 달은 아 니다. 단지 물속에 비친 달의 모습일 뿐이다. 그 호수에 작은 조약돌 하 나만 덩져도 은빛 달은 물결 속에 흩어져 조각날 것이다. 불행히도 칼릴 지브란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달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지만 그 달은 실제로는 물에 비친 달의 모습이다. 물에 비친 달의 모습은 실제의 달과 거의 비슷하다. 때론 더 아름답다. 호수가 그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호수를 둘러싼 침묵과 고요 함이 그 꿈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하지만 아무리 그 꿈이 풍성하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일 따름이다. 또다시 시인과 신비가의 차이 를 말한다면, 시인은 기껏해야 물에 비친 달의 모습을 볼뿐이지만, 신 비가는 그 달을 본다. 그래서 그 둘은 매우 가깝게 느껴지고, 또한 때로 는 시인이 그 달을 훨씬 더 실체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속 는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신비가가 갖지 못한 언어의 기교를 갖추고 있 다. 그래서 모두가 속는 것이다. 신비가는 있는 그대로를 표현에 담지만 시인은 그 언어적 기교에 맞추어 자신의 꿈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다. 내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슬퍼하고 유감으로 느끼는 것은 그가 호 수에 비친 달의 모습에 만족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모습의 실체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대단히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있고, 또 그 꿈이 그의 언어에 마술적인 힘을 준다. 그는 매번 진 리에 아주 가까이 접근하지만, 그러면서도 과녁에서 빗나간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성의 재판관 한 사람의 앞으로 나아와 말했다. 우리에게 죄와 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 영혼이 바람 속을 헤맬 때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이 홀로이기 때문에 너희는 남에게 죄를 짓고, 그래서 또한 너희 자신에게도 죄를 짓는다. 진실로 진리를 꿰뚫어본 사람이라면, 실제로 달을 바라본 사람이라 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이라면 이것과 정반대의 말 을 할 것이다. 다시금 칼릴 지브란은 각자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면 서도 핵심을 놓치고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이토록 안타깝고 슬프 게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칼릴 지브란은 매우 많은 가능성을 지닌 사 람이었다. 그런데도 그 가능성을 자신이 알지 못하였다. 그는 말한다. 너희 영혼이 바람 속을 헤맬 때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이 홀로이기 때문에 너희는 남에게 죄를 짓고, 그래서 또한 너희 자신에게도 죄를 짓는다. 사실은 완전히 혼자서 `바람 속을 헤맬 때' 그대는 비로소 선이 무엇인지, 덕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완전히 홀로일 때 사람은 절대로 타인에게나 자기 자신에게나 죄를 짓지 않는다. 군중 속에, 군중과 함께 있을 때 죄를 짓게 된다. 군중 속 에서 군중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책임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큰 기계 속의 하나의 부속품일 뿐이다. 그는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할 뿐이다."라고 쉽게 말한 다. 인도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 자이나교인과 이 슬람교인들 사이에 끊임없이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살던 어떤 도 시도 다른 것은 별 볼일 없는데 매일같이 일어나는 이 폭동으로 유명해 진 곳이었다.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곤 하였 다. 그 도시는 특히 이슬람교인과 힌두교인의 숫자가 거의 비슷했기 때 문에 갈등이 더욱 심했다. 또한 하찮고 어리석은 행동들을 일삼으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종교적이고 영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힌두교인이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면서 이슬람교 사원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살인극이 벌어지고 수십 채의 가옥이 불타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폭동의 첫 번째 희생자는 언제나 여성이었다. 이슬람교 인들은 맨 먼저 여성을 납치해 가는 것이다. 힌두교인들은 이슬람교인 에게 납치당한 여자를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납치당하지 않았더라 도 이슬람교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만으로도 힌두교인들은 그 녀에게 가혹한 벌을 내린다. 그녀의 영혼과 정신이 더럽혀졌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그녀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지난 20년동안 끊임없이 벌어지는 이러한 폭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왜 갑자기 돌변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근거 없는 소문만으로도 살인과 폭력이 시작되는 것이 다. 한 대학교수가 있었다. 그 역시 매우 애정이 가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힌두교 사원에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보고 나는 충 격을 받았다. 폭동이 가라앉고 화재가 진압된 다음에 나는 그에게 물었 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그토록 폭력적인 행동을 하리라곤 상상 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 다. 하나는, 당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은 힌두교 사원에 당신 혼자서도 불을 지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되물었다. "왜 그런 것을 묻습니까?" "나는 지금 범죄 심리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혼자서는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수 없습니다. 군중 속에서는 누구나 군중의 일원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원에 화염병을 던지고 있을 때 면 내면에 잠자고 있던 폭력과 파괴의 본능이 깨어납니다." 군중 속에 있으면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철저히 망각하고 거대한 기 계 속의 부속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가 하는 행동은 그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군중의 무의식에서 파생된 행동이다. 군중에 의해서 밀려 다니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완전한 홀로 있음 속에서 '바람속을 헤맬 때`죄를 짓 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듯 하다. 사람들이 행하는 범죄는 군중심리의 일부분이다. 의식은 물과 같 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은 언제나 같은 높이를 유지하려고 애를 쓴 다. 그대가 군중의 한 사람일 때 그대의 의식도 물처럼 같은 높이, 같은 심리, 같은 우매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홀로 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에베레스트 산이 된다. 의식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군중 속에서는 절대로 의식이 고양되지 않는다. 군중이 함께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 위에 올라갈 능력을 가진 것은 언제나 하나의 개체이지 군중이 아 니다. 한 마리의 독수리가 더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하여 태양을 가로질러 서 홀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군중이란 겁에 질린 사람들, 두려움으로 꽉 찬 사람들, 노예들로 구성 되어 있다. 사자는 절대로 무리를 지어 이동하지 않는다. 위엄과 자존심 과 힘을 간직한 채 사자들은 언제나 홀로 서 있다. 양떼들만이 죽음을 겁내면서 무리를 지어 몰려 있다. 양이 혼자 있는 것을 보았는가? 혼자 버려지면 양은 길을 잃고 만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력을 잃는다. 군중심리가 언제 나 양을 지배한다. 죄는 홀로 있는 사람에게서 생겨나지 않는다. 죄는 홀로 있을 능력이 없는 겁쟁이들 속에서 생겨난다. 군중을 이루고 있으면 안전감과 편안함이 찾아온다. 양떼들이 어떻게 이동하는가를 자세히 보라. 양떼들은 바싹 붙어서 상대방과의 사이에 약간의 공간도 남겨 놓지 않는다. 서로의 몸을 부딪히면서 전체가 마치 하나의 의식체인 것처럼 움직인다. 개체성을 잃어버린 그러한 행동 속에 서 양떼들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죄는 홀로 있는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죄는 바람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보지 못한 사람들, 완전한 홀로 있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자신을 상실할까봐 두려움 때문에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사람 들에게서 생겨난다. 칼릴 지브란의 생각은 오해되기 쉬운 생각이고, 명 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뒷부분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전체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이 뒷부분은 `호수에 비친 달'이다. 너희는 남에게 죄를 짓고, 그래서 또한 너희 자신에게도 죄 를짓는다. 내가 진짜 달이라고 하지 않고 `호수에 비친 달'이라고 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진짜 달이 아니고 호수에 비친 달일 때는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거울 앞에 서 보라. 그러면 오른쪽 눈이 거울 속에서는 왼쪽 눈이 되고, 왼쪽 눈은 오른쪽은 눈이 된다. 마찬가지의 변화를 이 문장 속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장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의 모습 을 거울에 비추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는,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을 때 그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 기 전에 이미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짓지 않고서는 남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칼릴 지브란이 지금 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 수에 비친 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미 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을 미워하겠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남에 대한 미움도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또 자기 자 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이 먼 저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고 있는 똑같은 행동을 남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은 칼릴 지브란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홀로 있음 속에서 그대의 자유가, 그대의 독립이 탄생한다. 홀로 있을 때 그대의 의식은 바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홀로 남겨질 때 의식은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달리 관심을 둘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원을 그리면서 자신의 원천으로 방향을 돌릴 때, 그대 의 삶은 더 이상 낡고, 무의식적인 삶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방향을 바 꾼 의식이 구석구석에서 모든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대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찰 때 그대는 처음으로 신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저지른 죄 때문에 너희는 축복받은 이의 문을 두드려야 하며, 또 도무지 돌아보시는 기색이 없어도 한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축복받은 이의 문 앞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홀로 있을 때 그대는 '축복받은 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산스크리트어의 브 하그완(bhagwan),'축복받은 자`의 의미이다. 하지만 예수 같은 사람도 자신이 하는 말, 자신이 하는 행동을 철저히 자각하지 못하였다. 예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어린 양이오, 나는 양치는 목자이다." 이것은 굴욕적인 발언이다. 인간을 양에 비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 엄성,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고, 인간을 군중의 한 부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렇게 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양 떼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양치기를 찾아가겠는가? 목사와 신학자와 정치가들은 그대가 양이길 원한다. 하나의 군중이길 원한다. 그래서 그 들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개체성, 그대의 홀로 있음을 파과하려고 노력 한다. 그것은 홀로 있을 때 그대가 사자가 되기 때문이다. 또 사자에게 는 양치기가 필요없는 것이다. 나는 군중의 한 부분이라고 조건지어진 상태에서 그대가 빠져 나오길 바란다. 아니다, 그대는 군중의 한 부분이 아니라 단지 그대 자신일 뿐 이다. 그리고 그대는 양이 아니라 사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고타마 붓다의 차이다. 고타마 붓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들어올수 없는 자신의 영혼 속으로, 명상 속으 로, 완전한 홀로 있음 속으로 들어갈 때 거기서 사자의 포효가 들린다." 고타마 붓다는 이 말을 통해서 그대에게 위엄을 되돌려 주고 있다. 그 대를 양의 세계에서 사자의 영광된 세계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사자가 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군중으로서가 아니라 사 자의 무리로서, 각각 서로의 개체성을 간직한 채 서로에게 공간을 허용 하면서 함께 만날 수 있다. 세상이 온갖 종류의 압제와 탄압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예수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물론 예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 람이다. 하지만 양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양의 무리들 속에서 혁명 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양떼는 군중의 뜻에 복종하며, 양치기에게 순종한다. 양치기는 양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양들을 망가뜨렸다. 또 자신 은 양치기이고 다른 사람들을 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뿌리깊은 에고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꺠달음 속에서는 에고가 사라진 다. '나`라고 하는 것이, 남보다 우월해지고 성스러워지고자 하는 생각 이 사라진다. 칼릴 지브란의 오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해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지브란은 예수를 사랑하였으며, 그의 언어와 문장은 비록 훨씬 더 시적 이긴 하지만 예수를 모방하고 있다. 그의 표현 방식은 훨씬 더 아름답 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표현이라 해도 표현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아름다운 표현을 걷어내고 나면 그 속에서 발견할 것은 아무 것도 없 다. 발견한다고 해봐야 어둠과 오해와 무지뿐이다. 진리를 추구한 사람들은 언제나 혼자였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 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늘 아무도 들어올수 없는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 갔다. 바깥에서도 혼자이고 내면에서도 혼자일 때, 그때 그대는 사자처럼 포효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수많은 양떼들은 그대에게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자처럼 포효할 수 없고, 독수리처럼 비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중들은 그대가 우연히 탄생한 것처 럼,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처럼 믿는다. 군중의 일원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진정한 개성을 되찾지 못한다. 항상 위조된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세상의 거의 모든 언어에 '사자가죽을 쓴 양`이라는 뜻의 표현이 있 다. 이것은 진리를 간파한 통찰력에서 생겨난 표현이라기보다는 수세기 동안에 걸친 무지의 소산이다. 나는 그 표현을 이렇게 바꾸고 있다. "사 람들은 누구나 사자이지만 양의 탈을 쓴 채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다." 축복받은 이를 찾아가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다. 그렇다, 이미 그 축 복받은 이가 그대의 내면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는 누구든 그 대를 그곳으로 인도해 줄 수없다. 오직 그대만이 그대를 내면으로 인도 할 수 있다. 양에서 사자로 변신할 때, 그때 '그대`가 바로 축복받은 이 가 될 것이다. 너희의 신적 자아는 큰 바다와도 같다. 그것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칼릴 지브란의 아름다움이다. 비록 다시 또다시 추락하 지만 언제나 그는 다시금 비상해 오른다. 그는 인생의 거의 전부를 미국에서 보냈다. 모든 미국인들의 인생관 은 '시도하고 시도하고 또 다시 시도하라.`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나 그 밖의 다른 저자의 글을 잃을 때면 이 점에 깊이 유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옳으면 그가 '언제나`옳고, 틀리면 '언제나`틀리다 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것 은 인류에게 커다란 재난이었다. 성자는 언제나 성자이고, 죄인은 언제 나 죄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은 아니다. 죄인이라고 해도 성자가 되는 순간이 있고, 성 자에게도 공휴일이 있는 법이다. 서양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재난에서 벗어나 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두 가지 범주만 인정하였다. 옳든지 그르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옳은 것과 그릇된 것 사이에 수많은 지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또 그는 이쪽 관점에서는 옳은 것이 저쪽 관점에서는 그릇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였다. 특히 칼릴 지브란 같은 사람의 최면에 빠지기 쉬운 글을 읽을 때엔 무 척 조심해야 한다. 그 글은 자장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비록 잘 못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매우 그럴싸하게 들린다. 글들이 너무나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대는 그 속으로 빠져들어 쉽게 잠들어 버린다. '너희의 신적 자아는 큰 바다와도 같다.' 옳은 말이다. 그대의 존재는 절대로 육체 속에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대의 존재는 육체라고 하는 그대가 살고 있는 살과 뼈 속에 갇힐 수가 없다. 그대의 존재는 대양 처럼 광활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강은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폐물들을 담고 있다. 수백 리 길을 달리기 때문이다. 또 수만 년 동안 그 강물들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바다는 더럽혀진 적이 없다. 이것을 그대는 꼭 기억해여 한다. 이것은 그대의 기억 속에 황금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행위든 나쁜 행위든 온갖 종류의 행위를 해왔 다. 옳게 행동한 적도 있고, 나쁘게 행동한 적도 있다. 온갖 밤과 온갖 낮을 겪어 왔다. 사원에 간 적도 있고, 창녀촌에 찾아간 적도 있다. 하지 만 그대의 존재는 거대한 대양처럼 더럽혀진 적이 없다. 그대는 너무나 광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하찮은 일들로는 오염되지 않는다. 이 절대적인 진리를 기억하라. 그대가 어떤 행동들 하든지 그대의 내 면 존재는 오염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대의 존재를 더럽히고, 그 대의 영혼을 오염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대의 내면 존재를 들여다 보는 순간 그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놀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욕을 먹어 왔으며, 나 스스로 자신을 질책해 왔다. 그런데 나의 진정한 내면 존재는 때묻지 않았다. 언제나 순수하고 순결한 상태이다."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를 그대에게 들려주고 싶다. 아주 오래 전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발미크(Valmik) 였다. 그의 직업은 강도였으며, 필요하기만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조차 그는 서슴지 않았다. 자기가 요구하는 돈이나 물건을 내놓지 않으면 그 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람들의 목숨을 해쳤다. 그는 실로 무서운 인 간이었다. 당시 그는 발미크가 아니라 '빌라 빌(Valya Bhil)`로 알려져 있었다. 빌(Bhil)은 원시 부족의 이름이다. 그런데 발랴 빌이 발미크라는 존칭 으로 불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실로 무서운 강도였으며, 살인자였고, 누구나 그를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사는 산 속을 함부로 지나다니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그 산길은 아무도 지나가기만 하면 가진 것을 몽땅 털리거나 목숨을 잃기 십 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렵 그곳에 음악가이며 시인인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 하 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라다(Narada)였다. 나라다는 걸어다닐 때에도 아주 간단한 악기 하나를 늘 가지고 다녔다. 이 점을 기억하라. 간단한 악기일수록 그것으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는 에크타라(ektara)라고 하는, 줄이 하나밖에 없는 시타르(sitar)를 가지고 다녔다. 줄이 여러 개인 악기라면 음악을 연주하기가 자연히 쉬 운 법이다. 각 줄마다 다른 음을 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크타라 는 줄이 하나밖에 없었다. '에크타라`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줄이하나` 라는 뜻이다. 에크(ek)는 '하나`를 뜻하고, 타라(tara)는 '줄`이라는 뜻 이다. 에크타라는 차츰 나라다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나라다의 초상화 나 조각상을 보면 그곳에 언제나 에크타라가 함께 그려져 있다. 그는 음악의 거장이고, 또 위대한 시인이었다. 또 그는 인도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존재의 유머를 알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가 산길을 떠나려 하자 마을 사람들이 말렸다. "가지 마시오. 그 산길을 넘다간 에크라타라를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강도 발라는 상대방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약탈을 합니다. 당신이 에 크라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면 그놈은 당신의 목을 자르려 둘 것입 니다. 조금 멀긴 해도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라다가 말했다. "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다른 길로 갔을지도 모른다.하 지만 이미 빌랴와 나라다 사이에 대결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다. 당신들 모두를 이토록 겁에 질리고 두렵게 만든 그자를 만나고 싶 다. 그 한 사람 때문에 통행로 전체가 쓸모없어질 정도가 되었다.틀림 없이 그는 산 속에 사는 무서운 사자와 같은 존재다. 전에는 수많은 사 람들이 그 길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길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길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고 싶다." 나라다는 길을 떠났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잔인함보다 음악을 더 신 뢰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동물적인 잔인함을 탈바꿈시 키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라다는 산길을 가면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한 줄짜리 에크타라를 손에 들고 그는 온 존재를 다하여 음악을 연주하였다. 발랴가 그 음악을 들었다. 아주 매혹적인 음악이었다. 그 음악 속에는 마술적인 힘이 깃들여 있는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혼자서 산길을 걸어오고 있는 나라다를 보았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에크타라말고는 아무런 소지품도 없이 걸어오고 있는 나라다를 보았다. 발리야가 보기에 그 사람은 음악보다도 더 아름 다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창조자는 원래 자기가 창조한 창조물보 더 훨씬 위대한 법이다. 창조물이 창조자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생전 처음으로 발라는 망설였다. 이 아름다운 사람을 그냥 지나가게 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외를 만든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물건을 털리거나 목숨을 잃지 않고서는 이 산길을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이 곧 세상에 알려진 그의 명성이기도 했다. 따라서 예외를 낳는다는 것은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위대한 음악가에게 경고를 보냈다. "경고한다. 길을 돌아가라. 돌아가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소지품을 몽 땅 빼앗길 것이다. 반항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너에게 아 무런 짓도 하고 싶지 않다. 너의 악기를 빼앗고 싶지도 않고 목숨을 해 치고 싶지도 않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서 길을 돌아가라," 하지만 나라다는 계속해서 에크타라를 연주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길 을 지나가지도 않고 날카로운 칼을 손에 들고 있는 발랴 곁에 앉는 것이 었다. 그런 뒤에 나라다는 말했다. "그대는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물건을 들고 있는 가?" 발랴가 말했다. "달리 어쩌란 말인가? 나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게다가 힌두교에서 가장 하층 계급인 불촉천민이다. 나는 사원에도 들어갈 수 없고, 도시에 도 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보살펴야 할 늙은 부모님과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 나라다가 말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내가 그대의 집으로 가서 식구들에게 한번 물어 보 겠다. 그대는 지금까지 온갖 잔인한 짓들을 서슴지 않고 저질러 왔다. 그렇다면 그 행위들에 대하여 누가 벌을 받을 것인가? 그대는 늙은 부모 를 위해서 그러한 행위를 저질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의 죄를 함께 나누어 갖겠습니까?` 라고 그대의 늙은 부모에게 물어 보라. 그대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내가 한 행위는 모두 너희를 위해서 였다. 그러니 나의 죄를 함께 나누어 갖겠는가?`라고 물어 보라." 발랴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실로 매우 영리하고 교활하구나! 내가 그것을 물어 보러 집으 로 들어가면 재빨리 도망을 치려는 게지? 아무도 이 발랴를 속일 수 없 다." 나라다가 말했다. "속이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믿지 못하겠으면 나를 나무에 묶어 두 라.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대도 잘 알 것이다. 나는 나무 에 묶여서 기다리겠다. 그런 다음 그대가 원하는 대로 어떤 행동을 해도 좋다. 하지만 먼저 집으로 가서 식구들에게 대답을 듣고 오라." 발랴는 지금까지 그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집 으로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식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죄를 나누어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너의 의무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먹여 살리는가에 대해선 우리는 관심이 없 다. 네가 하는 행위는 모두가 너의 책임이다." 발랴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부모와 아내와 자식 들인데, 그들을 위해 그가 온갖 종류의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는데, 이 제 와서 그들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살피는 것은 너의 의무다. 너의 죄를 우리가 나누어 지어야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 나라다를 풀어 주고는 발 아래 엎드려 절 을 하였다. "질문 하나로 당신은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나에게는 이제 가족이 없 습니다. 그들이 나의 죄를 나누어 질수 없다면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환상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내가 가져다 주는 돈만을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단 한 사람도 '내가 너의 죄를 나누어 지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제 나에게는 어떤 가족도 없습니다." 발랴는 숲 속으로 칼을 던져 버리고는 나라다에게 물었다. "저를 제자로 입문시켜 주십시오.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당신의 얼굴 에 나타나는 똑같은 음악과 똑같은 시와 똑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나라다는 말했다. "많은 것은 필요없다. 다만 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라. 신의 이름인 '람`을 외도록 하라." 이 이름은 내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자기의 아내에게 추한 행동을 한 라마(Rama) 왕과는 다른 이름이다. '람`은 '라마`보다 훨씬 오래된 이름으로, 힌두교에서는 신과 동격으로 취급된다. 나라다는 말했다. "이렇게 하라. 조용히 자리에 앉아 '람, 람, 람`을 반복하라. 그래서 그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서서히 '람`으로 대체되도록 하라. 일단 모 든 것이 '람`으로 대체되기만 하면 그 '람`까지도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촛불을 켜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초가 없으면 불꽃도 존재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불꽃은 서서히 초를 사라지게 하며, 초가 다 타버리면 불 꽃도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말했다. "간단한 방법을 택하라. 그대는 단순하고 또 용기있는 사람이기 때문 에 복잡한 방법을 택해선 안된다. 몇 달뒤에 내가 다시 돌아오겠다. 그 래서 그대에게 다른 것이 필요하면 그때 가서 또다시 방법을 일러주겠 다." 발랴는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아직 미개한 인간이었다. 그는 신뢰심 을 갖고 '람`이라는 만트라를 외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남 보다 쉽게 신뢰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는 "람......람......람......람......람......" 하고 되풀이 외기 시작하였다. 나라다는 발랴에게 말했다. "더 빨리 외라. '람`과'람`사이에 조금의 틈도 주지 마라." 그런데 그 불쌍한 친구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 혼동 을 하고 말았다. 그는 "람(Ram),람(Ram),람(Ram)......"하고 왼다는 것이 두 음절을 붙여서 외다 보니 그만 "마라(Mara),마라(Mara),마라(Mara) ......"하고 외게 되었다. '마라`는 바로 죽음의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이야기는 실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적인 것을 체험하기 위 해서는 먼저 그대의 에고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비록 실수로 "죽음, 죽음, 죽음......"하고 외긴 했어도 석 달 뒤에 나라다가 다시 찾아가자 발랴는 완전히 탈바꿈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존재 전체에서 새로운 에너지와 함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라다조차도 주눅이 들 정도였다. 평생동안 나라다는 신의 이름을 외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해 왔지만 그 자신은 발랴와 같은 경 지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발랴는 빛 그자체였다. 그의 둘레에는 빛의 오라(aura)가 둘러쳐져 있었다. 나라다는 더 이상 그를 '발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발랴`는 하층계 급의 사람에게나 쓰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발랴`가 '발미크(Valmik)`로 변하게 된 것이다. 나라다는 발미크에게 말했다. "그대는 기적을 이루었다. 똑같은 신의 이름을 나도 평생 동안 외워 왔지만 그대는 불과 석 달만에 나를 능가하였다. 이제 내가 그대에게서 배워야 할 차례이다." 발미크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것 외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마라,마라,마라...`라고만 외웠습니다." 나라다가 말했다. "세상에! 나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대에게 '람`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발미크가 말했다. "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평생동안 나는 강도와 살인만 일삼아 왔습니다. 그래서 '람`을 '마라`로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대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실로 순진무구하다. 어떤 욕심 도, 천국에 가고자 하는 욕망도 없다. '마라,마라.....`를 외긴 했지만 이제 그대는 새 사람이 되었다. 걱정하지 말라. 그대로 계속하라. 어떻 게 하든 그대에게는 그것이 옳은 일이다." 발미크가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저지른 살인 행위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죽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또 내가 저지른 강도짓은 어떻게 됩니까?" 나라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 모두를 잊으라. 이제 그대는 그대 존재의 바다에 도달하였다. 그 바다의 빛이 사방에 비추고 있다. 눈먼 사람까지도 그 빛을 볼 수 있다. 아니면 최소한 그 향기와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대가 과거에 한 행위 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그 행위들은 모두가 하찮은 것들이다. 진흙으로 얼룩진 작은 강줄기에 불과하다. 이제 그 강물은 바다에 이르 렀다. 그렇다고 해서 바다가 더럽혀지진 않는다. 바다는 영원히 더럽혀 지지 않는다." 너희의 신적 자아는 큰 바다와도 같다. 그것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벼운 공기처럼 날개가진 자를 들어올린다. 또한 너희의 신적 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그것은 가벼운 공기처럼 날개가진 자를 들어올린다......' 필요한 것 은 날개이다. 안내자도 없이, 지도도 없이, 아무런 표지판도 없이 드넓 은 하늘을 홀로 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와 날개만이 필요하 다. 그 때 하늘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또한 너희의 신적 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그대의 내면 존재는 다 른 각도에서 보면 태양과도 같다. 그것은 두더지의 길을 모르며 뱀의 구멍을 찾지 않는다. 태양은 매일같이 모두에게 빛을 나누어 주고,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 하기 위하여 떠오른다. '그것은 두더지의 길을 모르며 뱀의 구멍을 찾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뱀이 구멍에서 나오고, 두더지 가 굴에서 나오면 된다. 그대의 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그것은 활짝 열려 있다. 하지만 그대는 굴 속에서, 구멍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태양이 그대의 문을 두드리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태양은 그대의 내 면에 존재한다. 그대가 모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생명의 향기가 그대에게 쏟아져 내리고, 그대가 항상 갖고 있는 생명의 빛이 뿜어져 나오게만 하면 된다. 그러나 너희 속안에는 신적 자아만이 홀로 살고 있지 않다. 너희 속안의 많은 부분은 아직 사람에 불과하며, 또한 아직 사람에 이르지 못한 부분도 많다. 그대 속안의 많은 부분은 아직 잠들어 있다. 그 부분은 신적인 경지가 아니라 아직 인간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또 아직 많은 부분이 사람의 차원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동물에 뿌리를 둔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 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신을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인 개념으로 묘사 하고 있다. 세상 전체가 "도대체 그런 신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하고 그것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 내면의 심리를 상징한 것이다. 그대의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아직 동물이다. 또 더큰 문제는, 그 절반의 인간은 깊이 잠들어 있는데, 절반의 동물은 활짝 깨어 있다는 것 이다. 다만 스스로 깨어날 때를 기다리며 잠든 채 안개 속을 헤매 는 형상 없는 난쟁이만이 있을 뿐. 그대 속안의 '인간`은 꺠어나려고 애를 쓴다. 이따금 밤에 악몽을 꿀 때면 잠에서 깨어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를 체험해 보았을 것이다. 눈을 뜰 수 없고 팔을 움직일 수도 없다. 마치 마취당한 듯한 기분이다. 악몽의 충격은 대단하기 때문에 불과 몇 초의 경험인데도 마 치 죽음을 체험한 듯하다. 꺠어나서 그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잠들어 있을 때에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마비된다. 깨어나서도 잠시 동 안 정신이 멍하고 온몸에 땀이 나 있다. 밤공기는 차갑지만 악몽이 너무 나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대의 신체가 그것을 실제의 상황으로 받 아들인 것이다. 신체는 실제의 상황과 상상의 상황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움으로 땀을 내보낸다. 또한 아직까지 심장이 쿵쿵거린다.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아지곧 악몽의 영향이 남아있다. 코끼리가 문 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긴 했지만 아직 꼬리는 방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는 너희 속안의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죄를 알고 죄에 대한 벌을 아는 것은 안개 속의 난쟁이도, 너희의 신적 자아도 아닌, 바로 그 속안의 사람이기 때문이 다. 여기서 칼릴 지브란은 가설을 말하고 있다. 그 자신은 아직 확실히 알 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말의 어떤 부분은 옳지만 어떤 부분은 옳지 않다. 죄를 알고 죄에 대한 벌을 아는 것은 안개 속의 난쟁이도, 너희의 신적 자아도 아닌, 바로 그 속안의 사람이기 때문이 다. 그는 지금 그대를 세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난쟁이인 동물 성이고, 두 번째는 잠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하는, 아직 잠든 상태에서 해 메는 인간성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적 자아이다. 이러한 구분은 잘못 된 것이다. 거기, 신적 자아란 없다. 오직 활짝 깬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신적 자 아란 활짝 깬 인간을 달리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타마 붓다 같은 사람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전혀 탐구를 하지 않은 무신론자들의 주장 이라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 같은 사람의 말을 무시할 순 없다. 그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 신이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인 간`이라고 부른다. 또 인간이 깨어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 다. 인간의 깨어남이 바로 신의 상태이다. 다른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 따라서 굳이 세가지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동물과 인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동물은 잠들어야 하고, 그 인간은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사실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 깨어난 인간을 그대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웰즈(H. C. Wells)라는 사람이 세계사를 쓸 때였다. 그런데 고티마 붓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을 때 그는 붓다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하긴 했지만 무척 당황하였다. 과연 이 고타마 붓다에 대하여 어떻게 표 현해야 하는가? 그는 마침내 이런 표현을 남겼다. "고타마 붓다는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무신론자 였지만, 동시에 그 누 구보다도 신적인 인간이었다." 금세기 들어 고타마 붓다를 표현한 말 중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 를 담고 있는 말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대가 깨어 있기만 하다면 어떤 신도 필요없다. 잠에서 깨어날 때 그대는 웃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신을 찾아왔는데, 이제 보니 그 신은 내 속안에 숨어 있었다." 여기에 짧은 이야기가 있다. 짧지만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을 창조한 다음에 하느님은 처음 얼마 동안 지상에서 살았다. 하 지만 결국 지치고 말았다. 이른 아침부터 인간들이 몰려와 하소연을 늘 어 놓기 때문이었다. 어떤 자는 자식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어떤 자는 자 식이 죽었다고 하소연을 해대는 것이었다. 또 어떤 자는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가 반대한다고 하소연하였다. 모든 인간이 저마다 문젯거 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쌍하게도 하느님은 한 분뿐이었던 것이다. 게 다가 낮에 그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한밤중에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조언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 사람들이 결국에 가서는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 도대체 나를 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언제나 오만 가지 문제 를 들고 찾아온다. 인간들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나는 그 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모든 지성과 능력을 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 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면서 '왜 우리가 고통받아야 합니까? 당신이 먼저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창조했으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조언자는 하느님의 귀에 대고 속 삭였다. "사람들이 도저히 찾아오지 못할 장소가 한 곳이 있습니다. 그리로 숨 으십시오." 하느님이 물었다. "그곳이 어디인가? 어서 말해다오." 조언자가 말했다. "사람들의 내면으로 숨으시면 됩니다. 그들은 당신을 찾아서 온 세상 을 다 뒤지고 다닐 것이지만, 자신의 내면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곳에서라면 당신은 편히 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신은 그곳에서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알려면 한번 그대의 내면으로 들 어가 보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