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2 지은이:라즈니쉬/류시화 옮김 출판사:정신세계사 봉사자:삼육대학교, 한찬희 옮긴이의 글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둘째 권을 낸다. 젊은 날에 우리의 목 마른 영혼을 적셔 주던 칼릴 지브란의 시 <예언자>, 그리고 어느 날 갑 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 뜨겁고 감동적인 목소리로 진리를 역설하기 시 작한 영적인 스승 오쇼 라즈니쉬...... 늘 그렇지만 그의 책을 번역할 때마다 내가 가진 언어가 한없이 초라 하다.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표현해 내는 그의 살아있는 언어 앞에서, 나의 언어는 그것을 채 전달하지 못해 늘 남루할 뿐이다. 그의 언어는 무한 잎새가 피어나는 연꽃이요, 나의 언어는 죽은 꽃을 면치 못한다. 더구나 언어 사이에 놓인 그의 깊고 그윽한 침묵을 어찌 나의 언어가 붙 잡을 수 있으랴.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정신이 살아있음을 믿는다. 그 정 신이 얼음처럼 파랗게 살아서, 때로는 칼날처럼 매섭게 깨어서 나의 죽 은 언어를 되살려내리라 믿는다. 나의 죽은 꽃에 향기를 불어 넣어, 언 어 너머의 깊고 그윽한 침묵의 세계에 접근하리라 믿는다. 사실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제1권을 내고 나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애정을 받았던가? 거기에 힘입어 감히 제2권을 낸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번역의 초라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라즈니쉬, 그는 누구인가? 미국 언론에 보도된 대로 그는 부도덕한 종교의 교주이고, 라즈니쉬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이비 스승인가? 그는 왜 미국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이후 24개국으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했 는가? 영적 공동체를 구성하여 미국 오리건의 사막을 오아시스로 바꾸 어 불국토를 건설했던 그는 왜 아무런 죄없이 강제추방되었는가? 그럼 에도 불구하고 왜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를 찾아서 인도로, 봄베 이로, 뿌나로 몰려드는 것일까? 해답은 이 책에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진실한 독자의 마음속에 있다. 내가 열병에 걸린 것처럼 정신없이 이 책을 번역했듯이, 밤새워 이 책을 읽어가며 진리에의 열병에 시달릴 독자의 마음속에 해답이 있 다. 이 책에서도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세계의 모든 정치인들, 성직자들, 학자들에게 도전장을 던지면서 우리의 잠든 영혼을 깨운다. 그러면서 그는 외친다. "그대여, 늘 기억하라. 진리가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모든 것이 다 희생될 수 있어도 진리는 희생될 수 없다는 것을." 류시화 예언자 칼릴 지브란 집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어떤 돌 일하는 사람이 나와서 말하였다. 우리에게 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성벽 안에 집을 짓기 전에 너희는 먼저 광야에 너희가 상상하던 움막을 지으라. 너희가 황혼녘이면 집으로 돌아오듯이 너희들 속의 떠도는 나그네, 언제나 멀리 홀로 헤매는 나그네도 결국 돌아오리니. 너희의 집은 보다 큰 너희의 육체. 그 집은 햇빛 속에 자라며 밤의 고요 속에 잠든다. 또한 꿈꾼다. 너희의 집이 꿈을 꾸지 않던가? 꿈꾸며 도시를 떠나 숲으로, 언덕 위로 가지 않던가? 내가 씨뿌리는 사람처럼 너희의 집들을 내 손에 거두어 산과 들에 뿌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골짜기는 너희의 거리가 되고 초록길은 너희의 골목길이 되어, 너희가 포도밭 사이로 서로 찾아다니고 너희 옷깃에 흙냄새를 품어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다. 너희의 조상들은 두려움 때문에 너희를 너무 가까이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좀도 계속 되리라. 앞으로도 얼마간 너희의 성벽은 들판에서 너희의 집을 떼어 놓으리라. 오르펠리스 사람들아 내게 말해 다오. 이 집들 속에 너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문을 잠그고 너희가 지키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너희에겐 평화가 있는가, 너희의 힘을 드러내 줄 고요한 정열인 평화가? 너희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산봉우리들을 이어 주는 반짝이는 둥근 다리에 대한 기억을? 너희에게는 아름다움이 있는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물건으로부터 너희의 가슴을 이끌어내어 거룩한 산으로 인도해 주는 아름다움이? 말해 다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너희 집 속에 지녔는가? 그렇지 않으면 편안함과, 편안함에 대한 욕심뿐인가? 손님으로 찾아와서는 이윽고 주인이 되고, 드디어는 정복자가 되는 저 도둑 같은 편안함뿐인가? 그렇다, 그것은 너희를 길들이는 자가 되어 갈고리와 채찍으로 너희를 더욱 큰 욕망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그 손길은 비단 같을지라도, 그 속은 무쇠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너희에게 노래를 불러주어 잠이 들게 하나, 그러면서 침상 옆에 서서 너희 육체의 존엄성을 비웃는 자이다. 그 자는 너희의 건전한 감각을 업신여겨 금방 깨어질 그릇처럼 엉겅퀴 가시 속에 던져 버린다. 진실로 편안함을 탐하는 마음은 영혼의 정열을 죽이는 것, 그리고는 장례식장으로 웃음을 던지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허공의 아들들아, 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너희는 덫에 걸리지도, 길들여지지도 말라. 너희의 집은 닻이 아니라 돛대가 되어야 한다. 또 상쳐를 감추는 번쩍이는 껍질이 아니라 눈을 지키는 눈꺼풀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너희 날개를 접어서도 안 되고, 또 천장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여서도 안 되며, 벽이 무너져 내릴까 숨쉬기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너희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만든 무덤 속에 살지 말라. 또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더라도 너희의 집이 너희의 비밀을 감추어서는 안 되며, 너희의 소망을 가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 속에 있는 무한한 것은 하늘의 집에만 살기 때문이다. 아침 안개가 그 집의 문이요, 밤의 노래와 고요가 그 집의 창이다. 옷에 대하여 그러자 또 베짜는 직공이 말했다. 우리에게 옷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옷이란 너희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한다. 너희는 옷으로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그러나 도리어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알게 되리라. 너희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더 내놓아 햇빛과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생명의 숨결은 햇빛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니까 너희 중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옷을 지어 입힌 이는 북풍이다." 나도 말한다. 그래, 북풍이었다. 그러나 그의 베틀은 부끄러움, 그의 실은 연약해진 힘줄이었다. 그리하여 일을 다 마쳤을 때 바람은 숲 속에서 웃었다. 잊지 말라, 부끄러움이란 깨끗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그리고 깨끗지 못한 것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이란 마음의 족쇄, 마음의 더러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잊지 말라, 대지는 너희의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너희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사고 파는 일에 대하여 또 어떤 상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사고 파는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땅은 너희에게 자기의 모든 열매를 준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만 어떻게 손을 넣을지만 안다면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풍요와 만족이란 너희가 땅의 선물을 서로 잘 바꾸는 가운데 있다. 그러나 그 바꿈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어떤 자를 탐욕으로, 어떤 자를 굶주림으로 이끌 뿐이다. 너희들 바다와 밭과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자들이 장터에서 길쌈하는 자, 질그릇 굽는 자, 향료 모으는 자를 만나거든 간절히 빌라, 이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에게. 너희 가운데 와서 저울과, 서로의 값을 매기는 셈을 깨끗이 하여 주기를. 또 빈손으로 와서 말로써 너희의 수고를 사려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너희 거래에 끼이지 못하게 하라. 그런 자에게 너희는 이렇게 말하라. "자, 우리와 함께 밭으로 가자. 아니면 우리 형제와 함께 바다로 가서 그물을 던지자. 땅과 바다는 우리에게처럼 너에게도 넉넉히 주실 것이다." 만일 또 그곳에 노래하는 자, 춤추는 자, 피리부는 자가 오거든 그들의 선물도 팔아 주라. 그들 역시 열매와 향료를 거두는 자들이며, 그들이 가져온 것도 비록 꿈으로 엮은 것이긴 해도 역시 너희 영혼의 옷이며 밥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장터를 떠나기 전에 보라, 누가 빈손으로 돌아간 이가 없는가를. 땅을 주관하는 절대 영은 너희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도 그 필요한 것이 채워지기 전에는 바람 위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한다. 죄와 벌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그 성의 재판관 한 사람이 앞으로 나아와 말했다. 우리에게 죄와 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 영혼이 바람 속을 헤맬 때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이 홀로이기 때문에 너희는 남에게 죄를 짓고, 그래서 또한 너희 자신에게도 죄를 짓는다. 그리하여 그 저지른 죄 때문에 너희는 축복받은 이의 문을 두드려야 하며, 또 도무지 돌아보시는 기색이 없어도 한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너희의 신적 자아는 큰 바다와도 같다. 그것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벼운 공기처럼 날개가진 자를 들어올린다. 또한 너희의 신적 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그것은 두더지의 길을 모르며 뱀의 구멍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 속안에는 신적 자아만이 홀로 살고 있지 않다. 너희 속안의 많은 부분은 아직 사람에 불과하며, 또한 아직 사람에 이르지 못한 부분도 많다. 다만 스스로 깨어날 때를 기다리며 잠든 채 안개 속을 헤매는 형상 없는 난쟁임나이 있을 뿐. 그러니 이제 나는 너희 속안의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죄를 알고 죄에 대한 벌을 아는 것은 안개 속의 난쟁이도, 너희의 신적 자아도 아닌, 바로 그 속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너희가 잘못을 저지른 자를 마치 너희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이방인이며, 너희의 세계에 뛰어든 침입자인 듯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내 말하지만, 아무리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라도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있는 저 지극히 높은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는 것. 또 아무리 악하고 약한 자라도 너희들 갖자 속의 더없이 낮은 것보다 더 떨어질 수는 없다. 하나의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도 나무 전체의 묵인 속에서 가능하듯이 죄를 짓는 자도 너희들 모두의 숨을 뜻이 아니면 될 수 없는 법. 너희는 너희의 신적 자아를 향하여 마치 하나의 행렬처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너희의 길이요 또 길 가는 나그네. 그러므로 너희들 중의 누군가가 넘어진다면 그것은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것, 걸려 넘어지는 그 돌이 거기에 있음을 경고하기 위하여 넘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또 저보다 앞서 가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것도 된다. 비록 빠르고 확실한 걸음으로 앞서 갈지라도 아직 그 돌을 치우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또 비록 이 말이 너희 가슴을 무겁게 짓누를지라도 이 역시 사실이다. 죽임을 당한 자, 자신의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자신의 도둑맞음에 잘못이 없지 않다. 의로운 자라고 해서 악한 자의 행동에 결백하지 않고 정직한 자라고 해서 흉악한 죄인의 행위에 죄가 없지 않다. 그렇다, 죄인이란 도리어 피해자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다. 나아가 죄인이란 때로 죄없고 비난받을 것이 없는 자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자이다. 너희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검은 실이 끊어지면 천 짜는 자는 헝겊 전체를 들여다봐야 하고 베틀까지도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 중 누군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 남편의 속도 저울에 달아 보고 그의 영혼도 자로 재어 보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거든 그 죄와 대상이 된 자의 정신도 들여다보라. 너희 중 누군가 정의의 이름으로 벌을 내려 악한 나무에 도끼를 대려 한다면, 그 나무의 뿌리도 살펴보라. 그러면 분명 선과 악의 뿌리, 열매 맺는 것과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의 뿌리가 대지의 말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리라. 또 너희들, 정의롭게 재판하려는 자들아. 비록 육체적으로는 정직하나 정신적으로 도둑인 자에게 너희는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또 육체적으로는 살인자이나 정신적으로는 그 자신이 살은을 당한 자에게 너희는 어떤 형벌을 내릴 것인가? 또 너희는 어떻게 고소를 할 것인가? 그 행동으로 보면 남을 속인 자요, 억압한 자이지만 그 역시 학대받고 모욕당한 자를? 또 저지른 죄보다 뉘우침이 이미 더 커진 자를 너희는 어떻게 벌하려 하는가? 뉘우침이란 무엇인가? 너희가 기꺼이 따르는 그 법이라는 것을 통하여 정의를 집행하는 것도 바로 뉘우침을 심어 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물론 너희는 죄없는 자에게 양심의 가책을 심어 줄 수도 없고, 또 죄지은 자의 가슴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누구의 명령 없이도 양심의 가책은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고 스스로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 정의를 알려는 자들아, 모든 행위를 완전히 빛에 비춰 보지 않고 어떻게 정의를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그때에만 알게 되리라. 똑바로 섰느니 넘어졌느니 하는 것이 사실은 한 사람이 자기의 난쟁이 자아의 밤과 신적 자아의 낮 사이 어스름 속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또 사원의 머릿돌이 결코 바닥에 놓인 가장 낮은 주춧돌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법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법률가가 물었다. 그러면 스승이시ㅣ여, 우리의 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는 법을 세우기 좋아하면서 또 법을 깨뜨리기를 더 좋아한다. 마치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모래탑을 애써 쌓았다가는 또 웃으면서 허물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너희가 모래탑을 쌓는 동안 바다는 더 많은 모래를 기슭으로 밀어 보내고, 너희가 모래탑을 부술 때는 바다도 또한 너희와 함께 웃더라. 진실로 바다는 언제나 티없이 맑은 것들과 함께 웃는다. 그러나 삶이 바다와 같지 않은 자, 인간이 만든 법이 모래탑이 아닌 자에게는 무어라 할 것인가? 삶이 바위와 같은 자, 또 그 바위를 쪼아 그들 자신의 모습을 새기는 끌이 곧 법인 자에겐? 춤추는 자들을 질투하는 저 절름발이에겐 무어라 할 것인가? 저를 묶은 멍에만 좋다 하고 숲 속의 사슴과 노루를 보고는 떠도는 것들이라고 여기는 저 수소에게 무어라 할 것인가? 제 허물은 못 벗으면서 다른 모든 뱀들에게 벌거숭이이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소리치는 늙은 뱀에겐? 또 혼인 잔치에 먼저 가서 실컷 먹곤 싫증나면 돌아가면서, 모든 잔치는 다 위법이며 자니 손님들도 법 위반자라고 떠드는 자에겐? 내 이들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도 햇빛 속에 서 있건만 다만 태양을 등지고 선 것이라는 말밖에? 그들은 다만 자기의 그림자만을 볼 뿐. 또 그들의 그림자가 그들에게는 법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태양이란 무엇인가? 다만 그림자를 던져주는 것일 뿐. 그러나 너희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자들아, 땅 위에 그려진 어떤 그림자가 너희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인가? 너희 바람과 함께 여행하는 자들아, 어떤 바람개비가 너희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인가? 너희가 자신의 멍에를 부수되 다른 누군가의 감옥 문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인간의 법이 너희를 구속할 것인가? 너희가 춤추되 다른 누군가의 쇠사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법이 너희를 두렵게 할 것인가? 또 너희가 옷을 찢어 버리되 그것을 다른 누군가의 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너희를 재판할 것인가? 오르팰리스 사람들아, 너희가 북소리를 잠재울 수 있고 거문고 줄을 풀어 놓을 수는 있지만, 누가 과연 저 종달새에게 노래를 하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인가? 자유에 대하여 그 다음엔 한 웅변가가 말했다. 우리에게 자유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다. 성문 곁에서, 또 너희의 집 난로 곁에서 나는 너희가 꿇어 엎드려 너희 자신의 자유를 숭배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주인 앞에 스스로 머리 조아려 설령 자기를 죽일지라도 찬양해 마지않는 노예들처럼. 그렇다, 사원의 나무 숲 속에서, 성채 그늘 아래서 나는 보았다. 너희들 중 가장 자유롭다고 하는 자가 자유를 마치 멍에와 수갑처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 가슴은 내 안에서 피를 흘렸다. 왜냐하면 자유를 찾고자 하는 욕망조차 너희의 입을 막는 재갈이 되어서 더 이상 자유가 최후의 목적이며 성취라고 떠들 수 없을 때만이 너희는 비로소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낮에 근심이 없고 밤에 욕망과 슬픔이 없을 때 너희가 참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 그 모든 것이 너희의 삶에 휘감기는 중에도 그것들을 벗어던지고 얽매임 없이 일어설 때 그때 너희는 자유로우리라. 또 너희가 어떻게 낮과 밤을 뛰어넘을 수 있으랴. 너희 깨달음의 새벽에 지난 한낮의 시간을 묶었던 저 사슬을 끊지 않는다면. 사실 너희가 자유라 부르는 것은 그 사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슬인 것을. 비록 그 고리가 햇빛에 반짝거려 너희 눈을 부시게 하더라도. 또 자유롭기 위하여 너희가 내버리려 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곧 너희 자신의 부스러기가 아닌가? 옳지 못한 법을 너희는 내버리려 하는가? 그 법은 너희 손으로 너희 이마에 쓴 것. 너희가 아무리 법률책을 불사른다 해도, 또 재판관의 이마를 씻고 바닷불을 가져다 퍼붓는다 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으리라. 또 너희가 쫓아내고자 하는 것이 사나운 임금인가? 너희는 먼저 너희 내부에 세운 그의 옥좌를 부수었나부터 보라. 왜냐고? 아무리 폭군이라고 해도 어떻게 자유인과 긍지인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 자유 속에 억압이 들어 있지 않고, 그 긍지 속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들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또 너희는 근심을 벗어 던지고자 하는가? 그 근심은 너희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남이 너희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다. 또 너희가 두려움을 쫓아내고자 하는가? 그 두려움의 자리는 너희 가슴 안에 있지 그 두려운 자의 손에 있지 않다. 진실로 모든 것이 너희 존재 속에서 반쯤 뒤엉킨 채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 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꺼리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 좇아가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들이. 이 모든 것들이 너희 안에서 한 쌍의 빛과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돌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 남은 빛은 서성거리다가 또 새로 오는 빛의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자유도 족쇄에서 풀려나면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족쇄가 되어 버린다.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그러자 여사제가 다시 말했다. 우리에게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싸움터다. 그 위에서 너희 이성과 판단은 감정과 욕망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내가 너희 영혼에 평화를 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너희 내부의 모든 불화와 갈등을 다 쓸어버려 하나로 만들고 노래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으랴. 너희 스스로 중재자가 되지 않는다면, 아니, 너희 내부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희 이성과 감정은 바다 위를 달리는 너희 영혼의 키와 돛. 돛이나 키 중 어느 하나가 부러져도 너희는 정처없이 표류하거나 바다 한복판에 오도가도 못하고 멈추어 섰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이성이란 홀로 다스리게 내버려 두면 경직된 힘이요, 감정이란 제멋대로 두면 스스로 타 없어지는 불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영혼으로 하여금 이성을 감정의 높이에까지 이끌어올려 노래부르도록 하라. 또 이성으로 하여금 감정을 인도하게 하여, 너희의 감정이 날마다 스스로의 부활을 통해 살아가도록 하라. 마치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불사조처럼. 나는 너희가 판단력과 욕망을 너희 집에 온 두 사랑하는 손님처럼 대하기를 바란다. 진실로 너희는 어느 한 손님만을 다른 손님보다 더 높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한쪽만을 더 생각해 주는 사람은 결국 양쪽 모두의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리는 법이다. 언덕에 올라 은백양나무 서늘한 그늘 밑에 앉아 멀리 보이는 들과 숲의 평화와 맑음을 즐길 때면 가슴으로 하여금 고요히 말하게 하라. "산은 이성 속에 쉬신다."라고. 또 폭풍이 불고 거대한 바람이 숲을 흔들며 천둥 번개가 하늘의 위엄을 드러낼 때면 그때는 가슴으로 하여금 경외감에 차서 말하게 하라. "신은 감정 속에 움직이신다."라고. 너희는 신의 품안의 한 숨결이며, 신의 숲 속의 한 잎이니, 너희도 또한 이성 속에서 쉬고 감정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고통에 대하여 그러자 한 여인이 물었다. 우리에게 고통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고통이란 너희의 깨달음의 껍질이 깨어지는 것. 과일의 씨도 햇빛을 보려면 그 굳은 껍질을 깨야 하듯이, 너희의 고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만일 날마다 일어나는 삶의 기적들을 가슴속에 경이로움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너희의 고통도 기쁨 못지않게 경이롭게 보았으리라. 그러면 들판 위로 지나가는 계절에 언제나 순응했듯이 너희 가슴속을 지나가는 계절도 즐거이 받아들였으리라. 그리하여 너희 슬픔의 겨울 사이로 고요히 바라볼 수 있었으리라. 너희 고통의 대부분은 너희 스스로 선택한 것. 그것은 너희 내면의 의사가 너희의 병든 자아를 치료하는 쓰디쓴 약. 그러므로 그 의사를 믿으라. 그리고 말없이 침착하게 그가 내주는 약을 마시라. 왜냐하면 그의 손이 아무리 맵고 사정없을지라도 저 `보이지 않는 이'의 보다 부드러운 손길에 인도되고 있으므로. 그가 내주는 잔 또한 너희 입술을 채울지라도 저 '도공'이 자기의 신성한 눈물로 적신 흙으로 빚은 것이므로.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또 한 남자가 말했다.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가슴은 침묵 속에서 낮과 밤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의 귀는 가슴이 아는 것을 소리로 듣고자 목말라한다. 생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너희는 말로써 알고자 한다. 너희는 너희 꿈의 벗은 몸뚱이를 손가락을 만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너희 영혼의 보이지 않는 샘은 마침내 솟아올라 소리내며 바다로 흘러가야만 하는 것. 너희 내면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보물도 너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 미지의 보물의 무게를 결코 저울로 달려고는 하지 말며, 너희의 앎의 깊이를 자와 끈으로 재려고는 하지 말라. 자아란 잴 수 없는 무한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는 "나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노라."라고 하라. "나는 영혼의 길을 찾았노라."라고 말하지 말라. 차라리 "나는 내 길 위를 걷는 영혼을 만났노라."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영혼이란 모든 길을 다 걷는 것. 영혼은 하나의 길을 따라 걷는 것도, 또 갈대처럼 자라는 것도 아니다. 영혼은 무한 잎새의 연꽃이 피어나듯이 스스로 열리는 것. 1 홀로 광야를 헤매는 나그네여 집에 대하여 1 그러자 이번에는 어떤 돌 일하는 사람이 나와서 말하였다. 우리에게 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였다. 성벽 안에 집을 짓기 전에 너희는 먼저 광야에 너희가 상상하던 움막을 지으라. 너희가 황혼녘이면 집으로 돌아오듯이 너희들 속의 떠도는 나그네, 언제나 멀리 홀로 헤매는 나그네도 결국 돌아오리니. 너희의 집은 보다 큰 너희의 육체. 그 집은 햇빛 속에 자라며 밤의 고요 속에 잠든다. 또한 꿈꾼다. 너희의 집이 꿈을 꾸지 않던가? 꿈꾸며 도시를 떠나 숲으로, 언덕 위로 가지 않던가? 내가 씨뿌리는 사람처럼 너희의 집들을 내 손에 거두어 산과 들에 뿌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골짜기는 너희의 거리가 되고 초록길은 너희의 골목길이 되어, 너희가 포도밭 사이로 서로 찾아다니고 너희 옷깃에 흙냄새를 품어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다. 너희의 조상들은 두려움 때문에 너희를 너무 가까이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좀도 계속 되리라. 앞으로도 얼마간 너희의 성벽은 들판에서 너희의 집을 떼어 놓으리라. 그러자 이번에는 어떤 돌 일하는 사람이 나와서 말하였다. 우리에게 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에게 먼저 이 점을 일깨워주어야 하리라. 그것은 집과 가정이 완 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은 돌 일하는 석수이 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건물로서의 집을 짓는 일만 알 뿐이다. 집은 죽어 있다. 그대의 사랑으로, 그대의 침묵으로, 그대의 노래로, 그대의 춤추는 가슴으로 그 집이 충만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까지나 죽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사랑이 있고, 감사함이 있고, 축복이 깃들이는 순간 집 은 더이상 집이 아니다. 그때 그 집은 가정이 되는 것이다. 그 집은 죽음 에서 깨어나 생명을 되찾는다. 그 집은 숨쉬기 시작한다. 그대가 창조한 온갖 향기로 그 집이 가득 차게 된다. 그 다음의 단계가 또 있다. 바로 그 가정이 사원으로 탈바꿈하는 순간 이 있다. 하지만 가엾은 석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명상이 아주 깊어질 때 그대는 자신의 내면에서 신의 향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때 가정은 하나의 사원이 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오로지 '집`에서만 살아 가고 있다. 집이 가정으로 변하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어려워 보인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사원으 로 탈바꿈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신이 거주하는 곳으로서의 사원을 만 들고, 교회를 만들고, 성당을 만들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집이 가정으로, 가정이 사원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세상에는 교회나 절이나 사원이 필요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저 런 사원을 찾아가는데, 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사원은 바로 그들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들이 머무는 모든 장소가 성스럽고 신성한 장소로 탈바꿈해야 한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낙원을 찾아헤매던 추종자들은 모세 에게 끝없이 물었다. "하느님의 나라, 신성한 땅인 이스라엘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남았는 가? 왜 당신은 하느님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지 않는가? 당신은 우리에 게 당신이 신의 사자이며, 당신이 하는 말은 신의 메시지라고 하지 않 았는가? 이제 우리는 헤맬 만큼 헤매었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게 분 명하다." 모세는 말했다. "좋다. 내가 하느님을 만나러 가겠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따라와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절대적으로 혼자 있을 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태인 피난민들은 골짜기에서 기다리고 있고, 모세는 혼자서 시나이 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모세는 이상한 일을 겪게 되었 다. 그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 대신 한 가지 기적적인 일을 체 험하였다. 초록색으로 우거진 한 숲덤불이 불꽃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 이다. 그런데도 그 숲덤불은 여전히 초록색이었다. 그렇게 불꽃에 둘러 싸여 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불타 버렸을 터인데도 여전히 숲덤불은 향 기로운 꽃들을 매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더 잘 보기 위하여 그는 숲덤불로 가까 이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음성이 들렸다.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음성이 이렇게 말했다. "모세여! 네 신발과 너 자신을 이 성스러운 장소의 바깥에 벗어 놓아 라. 그래야만 너는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비유인 듯하며, 또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심오한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 신의 불꽃은 절대로 다른 것을 파괴하는 법이 없다. 그 불꽃은 오히려 서늘하며, 자양분을 준다. 둘째로, 이렇듯 고요하고, 서늘하고, 자양분이 되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그 장소는 신 성한 곳이 된다. 다시 말해, 사원이 된다. 또 당연히 그대는 그 신성한 장소의 바깥에 신발과 그대 자신을 벗어 놓아야 한다. 이것은 집 바깥에 신발을 벗어 놓고 들어갈 때 집이 곧 가정으로 탈바꿈한다는 이치를 보 여 주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발뿐 아니라 그대 자신까지 벗어 놓을 때 그 가정은 사원으로 변한다. 그때 그대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신성한 장 소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나는 이 이야기의 역사적인 사실성에 관심이 없다. 다만 그 이야기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진리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알무스 타파(Almustafa)가 집과 가정과 사원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 한 일이다. 그는 대답하였다. 성벽 안에 집을 짓기 전에 너희는 먼저 광야에서 너희가 상상 하던 움막을 지으라. 탈바꿈의 과학을 일깨우기보다 그는 먼저 광야에 움막을 짓는 일에 대하여 말을 꺼내고 있다. 하지만 그 움막들도 집이긴 마찬가지다. 또 모두가 광야에다 움막을 짓는다면 그곳은 더이상 광야라고 할 수가 없 을 것이다. 머지않아 레스토랑과 디스코테크와 극장이 들어서고, 매춘 부와 정치꾼들이 생겨날 것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언갖 집단들이 또 다시 주위에 도시 하나를 건설할 것이다. 인도에서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바드리 케다르나트(Badri Kedarn- ath)를 여행할 때 걸어서 여행을 하였다. 히말라야는 그만큼 순결하고 때묻지 않은 곳이었으며, 인간의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은 곳이었다. 말 그대로 처녀지였다. 그런데 길이 험하고 위험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 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았으므로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좋겠다 는 제안이 나왔다. 그래서 도로가 건설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걷지 않고 버스를 이용하 여 여행을 한다. 버스 정류장마다 레스토랑과 찻집과 온갖 종류의 물건 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다. 그들은 그곳의 아름다움을 파괴하였다. 이제 바드리 케다르나트는 더 이상 과거처럼 신성한 장소가 아니다. 신성하다 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장소를 신성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준비까지 된 그런 마음이다. 이제 버스를 타고 도로변의 온갖 편리한 시설물들을 이용하면서 사람 들은 여행을 한다. 매우 아름다웠던 곳이 오염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 곳을 오염시킨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제 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 바드리 케다르나트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이들은 그곳에 올 자격 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갖춘 자격이래야 단지 버스표 살 돈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다. 옛날에 걸어서 그곳으로 떠난 사람들은 온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받 았다. 왜냐하면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길은 위험하고 산은 험준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부름소리를 듣곤 했으며, 그럴 때마 다 그 부름에 따라 삶을 내던질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실로 용감 한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 히말라야의 침묵과 영원한 평화에 잠긴 봉우리들 속에서도 바드리 케다르나트는 매우 특이한 곳이었다. 그곳은 일종의 사원이었 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사원은커녕 가정조차 되지 못한다. 온갖 종류의 상인과 장사꾼들로 둘러싸인 하나의 '집`일 뿐이다. 필요한 것이면 뭐든 지 살 수 있는 슈퍼마켓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조금 모자라는 사람들이 나 여행자들만이 그곳엘 간다. 한때 그곳은 정신적인 순례지였다. 왜냐 하면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성벽 안에 집을 짓기 전에 너희는 먼저 광야에 너희가 상상 하던 움막을 지으라. 도시는 감옥이 되어 버렸다. 국가는 더 큰 감옥이다. 인류 전체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대는 자신이 사는 도시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곳은 감옥에 지나지 않 는다. "성벽 안에 집을 짓지 말고 광야에 머리 속에 그리던 움막을 하나 지 으라." 좋은 제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도시들은 감옥이기 때 문이다.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더 큰 감옥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대가 모든 감옥에서 탈출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지 광야 로 나간다고 해서 감옥을 탈출하는 좋은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만일 이 나라의 9억 인구가 너도나도 광야로 나간다면 광야는 파괴 되고 말 것이다. 도시들은 이미 파괴되었다. 산과 숲으로 떠나간 9억의 사람들은 또다시 집을 지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도시들이 생 겨날 것이다.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의사 가 필요하고 옷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밖에도 수천 가지가 필요할 것이 다. 그리하여 하나의 도시가 그대의 주변에 형성될 것이다. 도로를 건설 해야하고, 그 도로 위로 버스와 자동차들이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엄청난 부자들만이 광야에 움막을 지을 수 있다. 너무 비용이 많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전용 비행기와 비행장이 필요하게 될 것이 고, 온갖 넌센스가 그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손대지 않 고 남겨 둔 곳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곳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물론 칼릴 지브란이 권하는 대로 광야로 나가서 직접 움막을 지을 필 요는 없다. 오히려 이 도시에 갈면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싸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 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에 대해선 단 한치의 틈도 허용해선 안 된다. 너희가 황혼녘이면 집으로 돌아오듯이 너희들 속의 떠도는 나그네, 언제나 멀리 홀로 헤매는 나그네도 결국 돌아오리니. 인간은 본래 나그네였고, 방랑자였다. 그 시절은 힘들긴 했지만 대단 히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농경문화라는 것이 시작되기 전 인간은 단 순히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늘 떠돌아다녀야 했다. 도시들이 생겨난 것 은 농경문화 때문이다. 논밭과 과수원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한 장소에 정착해야만 했다. 하지만 수렵시절에는 동물들이 사람만 보면 다른 곳 으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늘 동물들을 따라 이동해야만 했다. 그러한 방랑자 기질, 나그네 기질이 아직도 사람들의 내면에 남아 있 다. 그 기질 때문에 관광객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관광객들이란 얼마나 추한가! 선글라스에 카메라를 목에 걸고 껌을 씹으면서, 그들은 실제로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단지 사진만 열심히 찍을 뿐이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가 멋진 앨범을 만든 다음에야 자신이 찍은 사진을 통해 타 지마할(Taj Mahal)영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실감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새로운 장소로 떠나고자 하는 염원이 있 다. 이러한 염원이 관광이라는 것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 그 염원이 타 지마할 영묘나 피라밋이나 유럽의 대성당들로 구경하러 가는 것으로 표 현될 수 있지만, 반면에 똑같은 염원이 내면으로 방향을 돌릴 수도 있 다. 그것이 바로 명상의 신비이다. 그대의 방랑 기질이 방향을 바꾸어 그대의 내면을 향해 새로운 여행 을 떠나는 순간 그리고 이 점을 잊지 말라. 그대의 내면은 결코 비 좁은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우주 전체의 크기와 똑같이 크고, 우주 전 체의 넓이와 똑같이 넓다. 왜냐하면 안과 밖이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계는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대의 작은 육체 속 이라 할지라도 그대는 우주 전체만큼 드넓은 의식차원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 우주 하나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방랑자가 내면으로 향하는 순간, 그대의 방랑 기질은 영적인 추구 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 영적인 추구에는 선글라스니 카메라니 하는 온 갖 장비들을 소지할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여행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여행 가방도 없이 그대 홀로 떠나야 한 다. 그대 내면에 그대의 진정한 자유가 있다. 그대의 의식은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존재의 주인은 오로지 그대뿐이다. 너희의 집은 보다 큰 너희의 육체, 이것은 평범한 말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그대가 자신의 집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집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 생각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사는 집을 보면 나는 그대에 대하여 많은 것 을 말할 수 있다. 그대를 전혀 몰랐다 해도 나는 그대의 집을 통하여 그 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수 있다. 그대의 마음속이 어지러우면 그대의 집 도 어지럽혀져 있다. 그대가 미적 감각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대 의 집도 지저분하다. 따라서 `너희의 집은 보다 큰 너희의 육체'라는 말 은 옳다. 그 집은 햇빛 속에 자라며 밤의 고요 속에 잠든다. 또한 꿈 꾼다. 너희의 집이 꿈을 꾸지 않던가? 꿈꾸며 도시를 떠나 숲으 로, 언덕 위로 가지 않던가? 시이긴 하지만 매우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다. 그대의 육체가 아름다워 지길 원하듯이 그대의 집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워지길 원한다. 그대의 집 또한 젊고 싱싱하길 바란다. 그대의 육체가 젊음을 요구하듯이 그대 의 집 역시 죽기를 싫어하고 영원히 젊기를 바란다. 그대의 집은 바로 그대의 꿈, 그대가 바라는 것, 그대의 내면 상태를 표현해 준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집, 내면의 평화를 찾은 사람의 집 앞을 지나쳐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집 앞을 지나가는 데에도 다른 집 앞을 지 나가는 것과 똑같은 기분이 들던가? 아니다. 그 집은 향기를 지니고 있 을 것이다. 내가 열서너 살 때 매우 이상한 노인 하나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 가 매우 학식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모셔온 것이다. 단 순히 학식만 있는 게 아니라, 그는 나름대로의 진실한 체험을 가진 사람 이었다. 그가 정신적인 깨달음까지 얻은 사람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주 오래 전 일이라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 지 않는다. 단지 그가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인 수피(Sufi) 중의 한 사 람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그를 모셔다가 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 으면, 그 사람 자신도 나에 대하여 뭔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모두가 나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집 안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이상한 아이라고 생 각했다. 실제로 그들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말없이 마루 끝에 앉아 있길 즐겼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 가 부엌에서 나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들 어디 가고 사람이 아무도 없지?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올 사람 이 필요한데." 내가 엄연히 앞에 있었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채소 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이 결코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두 번 식구들은 나 에게 심부름을 시키려 했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마침내 나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의 존재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어 머니는 나를 앞에 두고서도 채소를 사다 줄 사람이 필요한데 집안에 아 무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는 것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른 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정말이지 `나'에 대하여 정확한 표현을 해주셨어요. 나는 아무 사람도 아니에요.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 지금 집안에는 아무 사람 도 없어요. 다른 사람이 눈에 띄면 알려드릴게요." 한번은 나에게 바나나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다. 나는 한 번도 바나나를 사 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게 주인에게 그 방 법을 물었다. 그런데 마을 전체가 서서히 `이 아이는 우리의 세계에 소 속된 아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나를 속이기 위한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남의 말을 잘 믿는 아이였기 때문이 다. 내가 그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이 가게엔 좋은 바나나가 여러 종류가 있죠? 가장 좋은 것을 보여 주 시겠어요?" 그러자 그는 거의 썩어가는 가장 나쁜 것들을 보여 주면서 게다가 가 격도 가장 좋은 바나나의 두 배나 되는 금액을 불렀다. 나는 달라는 대 로 금액을 지불하고 그 바나나들을 모두 샀다. 그런데 냄새가 아주 고약 했다. 내가 말했다. "가장 좋은 바나나에서 이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다니 이상한 일이순 요. 이 냄새를 참을 수가 없어요." 어쨌든 나는 집으로 달려가 그것을 어머니에게 주었다. "가장 좋은 바나나들을 샀어요. 그래서 돈도 두 배나 들었어요." 내가 사온 바나나들을 보고는 어머니는 당신의 머리를 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서 이것들을 집 밖으로 내가거라. 온 집안이 썩은 냄새로 진동하잖 니!"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바나나라고 하던데." 어머니가 말했다. "한 가지만 더 심부름해라.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너에게 심부 름을 시키지 않을 테니." 마을에는 큰 나무 아래에서 사는 늙은 여자 거지가 있었다. "이 바나나를 그 거지에게 갖다 주고 오너라." 내가 그 바나나를 늙은 여자에게 갖다 주자, 그것들이 모두 썩은 것을 알고는 그 여자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을 썩 치우지 못하겠니! 내가 비록 거지이긴 해도 썩은 것을 먹지는 않아. 나도 사람이다!" 나는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렇다면 이것들을 누구에게 갖다 주지요?" 그 여자가 말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어서 썩 가져가라.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강가에 갖다 버렸다. 나의 아버지는 그 수피 철학자가 내 문제에 뭔가 도움이 되리라고 생 각하고서 그를 모셔온 듯하다. 그러나 막상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아버 지뿐만이 아니라 식구들 모두가 당황했다. 그는 나에게 나 혼자서만 쓸 수 있는 방을 하나 내주어 식구들이 나 때문에 골치 아파하지 않도록 하였다. 내가 그 방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한다면 식구들을 괴롭힐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식구들은 일을 하든 마당을 청소하든 뭔가를 하고 있을 것이고, 나는 눈 을 감고 명상만 하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식구들은 나에게 독립된 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으며, 출입구 도 독립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내 방으로 온 그 수피 철학자는 벽 이며 이 구석 저 구석 할 것 없이 냄새를 맡으며 돌아 다니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맙소사! 나는 너를 제 정신으로 돌려 놓기 위하여 저 사람을 데려왔 는데, 오히려 저 사람이 한술 더 뜨는구나!" 내 방에는 아무런 물건도 놓여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텅 빈 방이었 다. 나는 언제나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 텅 빈 방을 좋아한다. 비어있 는 것이 가장 깨끗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방안에 들여놓기 시작하면 머 지않아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 방에 아무 것 도 갖다 놓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와 그 수피 철학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편에서 그를 초대했으니 어쩔 수 없이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겠지." 사방을 냄새맡고 돌아온 그는 이번엔 나에게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지나친 행동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이 약간 비정상이라서 그것을 고치려고 당신을 불렀는데, 당 신은 오히려 더 비정상처럼 보이는군요." 그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이 방과 이 아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 냄새는 침 묵의 냄새, 침묵의 향기다. 이러한 아들을 두었다는 것에 대하여 그대는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 내가 이 아이의 냄새를 맡은 것은 그 향기가 이 아이 자신의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그 향기는 이 아이의 존재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방은 이 아 이의 존재로 충만해 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방해하지 말라." 아버지는 그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더니 혼자 다시 돌아와 나에게 이 렇게 말했다. "나는 너만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더 미친 사람이 있구나. 세상에, 방의 냄새를 맡다니!" 그러나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집은 그 속에 사는 사람 자신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집은 그 집에 사 는 사람을 대변하지요. 아버지가 모셔온 분은 분명히 깊은 지혜와 통찰 력을 지닌 무척 훌륭한 분이에요." 내가 씨뿌리는 사람처럼 너희의 집들을 내 손에 거두어 산 과 들에 뿌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골짜기는 너희의 거리가 되고 초록길은 너희의 골 목길이 되어, 너희가 포도밭 사이로 서로 찾아다니고 너희 옷 깃에 흙냄새를 품어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다. 칼릴 지브란, 이 사람은 실로 위대한 시인이고 통찰력이 있다. 마땅히 세상 전체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급격히 불어난 인구 때문에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다. 사람들을 위한 공 간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갈수록 더 많은 나무들이 잘려 나가고 있다. 갈수록 더 많은 초록색 숲이 파괴될 것이다. 고타마 붓다의 시대에는 지구 전체에 인구가 고작해야 2천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만일 인구가 그 정도라면 이러한 알무스타파의 꿈이 실현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씨뿌리는 사람처럼 너희의 집들을 내 손에 거 두어 산과 들에 뿌릴수 있다면.' 알무스타파는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인류는 수만 년 동안 이러한 꿈이 실현되기를 희망해 왔다. 그리하여 골짜기는 너희의 거리가 되고 초록길은 너희의 골 목길이 되어, 너희가 포도밭 사이로 서로 찾아다니고 너희 옷 깃에 흙냄새를 품어 돌아올 수 있다면. 아름답고 단순한 꿈이지만, 인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무능력해진 듯 하다. 인류는 계속해서 범죄자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다. 너희의 조상들은 두려움 때문에 너희를 너무 가까이 모아 놓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도시와 군중이라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 이다. 혼자 있으면 그대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군중 속에 있으면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 진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라. 그들 역시 똑같은 이유 때문에 군중을 형성하여 모여 있는 것이다. 1천 명의 겁쟁이들로 이루어진 군중이라고 해도 겁쟁이긴 마찬가지다. 겁쟁이들끼리 아무리 많이 모여 있다고 해 서 내면 세계가 달라지진 않는다. 너희의 조상들은 두려움 때문에 너희를 너무 가까이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좀더 계속되리라. 앞으로 얼마 간 너희의 성벽은 들판에서 너희의 집을 떼어 놓으리라. 그 두려움은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조금만 더 지나면 그 두려움 이 없어질 것인가? 조금만 더 기간이 흐르면 그러한 두려움이 자연히 없 어질 것인가? 아니다. 두려움은 절대로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 `좀더'라는 말에 위안을 느끼지 말라. 그대가 스스로 두려움을 떨 치고 일어나야 한다. `조금만 더 지나면'이라는 희망만으론 두려움은 절 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수만 년 동안 그렇게 해오지 않았는가? 인류는 아무 것도 변화 한 것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희망만 품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아 편과 같은 것이어서 어떤 약보다 해롭다. 병을 치료해 주지 않고 계속 고통을 겪게 하면서 `내일이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머지않아'하지만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이 `머지않아'가 수만 년 동안 흘러온 것이다. 우리 집 앞에 늙은 이발사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는 아편 중독자 이긴 했지만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무척 좋아했으며, 그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하였다. 그는 나의 할아버지 뻘이었지만, 또 실제로 그 이발사에게 나를 소개시켜 준 사람도 우리 할아버지였는데, 우리는 친구나 다름없었다. 그는 언제나 아편에 취해 있었다. 그는 매우 가난했다. 아무도 그에게 와서 이발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 다. 어쩌다가 여행자가 타지방 사람이 지나가다가 들를 뿐이었다. 그렇 다고 주위 사람들을 비난할 것은 못 되었다. 나는 여러 시간 동안 그와 함께 앉아 있곤 하였다. 왜냐라면 그가 엄 청난 것들을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지금 정부에서 아편과 마약 금지령을 내리려고 하는 모양인데, 만일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면 모든 아편 중독자들은 정당을 하나 만들어서 정부와 투쟁을 벌여야 하지 않겠니?" 내가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아편 중독자들이 정당을 만들어 정부와 싸우는 것은 약간 어려운 일이 될 거예요." 그가 말했다. "물론 어려운 일이 될 거야. 머리깎는 하찮은 일을 하는 데에도 어려 움이 많으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면도 좀 해주시오.'라고 말하면 나는 수염을 깎는다는 게 그만 머리를 면도하고 있지 뭐야. 머리 를 반쯤 면도하다 보면 그들이 깜짝 놀라 `멈춰!' 하고 비명을 지르곤 하지." "그럴 때면 어떻게 하나요?" "그럴 때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화 내실 것 없습니다. 면 도를 절반만 했으니 돈도 절반만 내시오. 정 화가 난다면 돈을 내지 않 아도 좋소.'라고 말이야."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그 당시엔 펑크족들이 없었다. 만일 그때에도 펑크족들이 있었다면 그 불쌍한 이발사는 새로운 펑크 스타일 창조자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가끔씩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어떠니? 너는 늘 여기 앉아 내 시간을 빼앗는데, 물론 일도 없지 만 말이야. 어떠니, 너의 머리를 면도해 줄까? 우정의 표시로 돈을 받지 않으마." 내가 말했다. "나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에요. 단지 이야기를 들으러 올 뿐이에요. 아편에 취하면 어떤 기분인가요?" "지금까지 수없이 말해 주었잖니. 어젯밤 나는 누군가 내 암소에게서 우유를 짜는 소리를 들었단다. 나는 등불을 들고 암소를 살피러 나갔지. 밤에는 훨씬 농도가 짙은 아편을 피우기 때문에 거동하기가 훨씬 힘들 단다. 힘들게 나가 보니 아무도 없지 뭐야. 그런데도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거야. 그러다가 나는 밖에서 어떤 사람이 오줌을 누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지.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알아보려고 다시 등불을 들고 밖으 로 나갔더니, 그 녀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 `당신 뭐하고 있는 거 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어떤 녀석이 내 암소의 우유를 짜가는지 알 아보려고 하고 있소.' 그러자 그가 말하는 것이었어. `맙소사! 나는 지 금 댁의 암소 젖을 짜는 게 아니오!'라고 말이야." 그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만큼 아편은 나에게 대단한 것이란다." 어느 날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편 맛을 조금만 볼 테냐?" 내가 말했다. "당신 혼자만으로도 충분해요! 온 마을이 피워도 남을 만큼 많은 아 편을 당신 혼자서 피우잖아요." 하지만 그는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가난했다. 아버지는 내가 늘 이발사 곁에 붙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벌써 자식 하나 버렸군. 어느 새 아편 맛을 들였으니 끝장이 난 거 야."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나를 불러다 앉혀 놓고 말했다. "그 아편 중독자와 함께 있는 것은 좋지 못한 짓이다.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라." 내가 말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 사람에 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너 역시 아편을 피우기 시작했니?" 내가 말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미래에 대해서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이미 신에 취했기 때문에 아편이나 다른 약물에 취할 필요가 없어 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말했다. "왜 그 사람에게 아편을 끊으라고 말하지 않니?" "그 사람은 이미 너무나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어요. 아 편은 그에게 꿈을 줄 수 있고 모든 문제를 잊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에 요. 그가 아편을 끊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이것이 온 인류가 처한 상황이다. 문제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 는 계속해서 희망에만 취한다.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추한 현실과 직면 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희망에 의존하는 것이다. 모든 희망을 내던진다면, 그것은 대단한 혁명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다. 알겠는가? 2 하늘의 집에 사는 것 집에 대하여 2 오르펠리스 사람들아 내게 말해 다오. 이 집들 속에 너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문을 잠그고 너희가 지키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너희에겐 평화가 있는가, 너희의 힘을 드러내 줄 고요한 정열인 평화가? 너희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산봉우리들을 이어 주는 반짝이는 둥근 다리에 대한 기억을? 너희에게는 아름다움이 있는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물건으로부터 너희의 가슴을 이끌어내어 거룩한 산으로 인도해 주는 아름다움이? 말해 다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너희 집 속에 지녔는가? 그렇지 않으면 편안함과, 편안함에 대한 욕심뿐인가? 손님으로 찾아와서는 이윽고 주인이 되고, 드디어는 정복자가 되는 저 도둑 같은 편안함뿐인가? 그렇다, 그것은 너희를 길들이는 자가 되어 갈고리와 채찍으로 너희를 더욱 큰 욕망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그 손길은 비단 같을지라도, 그 속은 무쇠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너희에게 노래를 불러주어 잠이 들게 하나, 그러면서 침상 옆에 서서 너희 육체의 존엄성을 비웃는 자이다. 그 자는 너희의 건전한 감각을 업신여겨 금방 깨어질 그릇처럼 엉겅퀴 가시 속에 던져 버린다. 진실로 편안함을 탐하는 마음은 영혼의 정열을 죽이는 것, 그리고는 장례식장으로 웃음을 던지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허공의 아들들아, 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너희는 덫에 걸리지도, 길들여지지도 말라. 너희의 집은 닻이 아니라 돛대가 되어야 한다. 또 상쳐를 감추는 번쩍이는 껍질이 아니라 눈을 지키는 눈꺼풀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너희 날개를 접어서도 안 되고, 또 천장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여서도 안 되며, 벽이 무너져 내릴까 숨쉬기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너희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만든 무덤 속에 살지 말라. 또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더라도 너희의 집이 너희의 비밀을 감추어서는 안 되며, 너희의 소망을 가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 속에 있는 무한한 것은 하늘의 집에만 살기 때문이다. 아침 안개가 그 집의 문이요, 밤의 노래와 고요가 그 집의 창이다. 칼릴 지브란처럼 위대한 사람이 기독교적인 성장 배경을 초월하지 못 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또한 그는 서양에서 살았기 때문에 인간 의 영혼이 살 진정한 가정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마치 `가정'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대의 집이 가정으로 탈바꿈하지 않는 한, 그대는 신의 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집은 그대의 인생에서 가장 피상적인 물건이다. 가정은 그대의 가슴을 건드린다. 하지만 그대의 가정이 신의 사원으로 탈바꿈하지 않는 한 그대는 절 대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비극이며 손실이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위대한 철학자였다. 더 구나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상의 깊이엔 한 계가 있다. 그것은 그가 그대의 내면에 있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 일하는 사람의 질문을 받고서 알무스타파는 계속 말하고 있다. 오르펠리스 사람들아 내게 말해 다오. 이 집들 속에 너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집안에 놓아 두고 소유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의 집이 계 속해서 집으로만 존재해 있는 한, 그것은 집이 아니라 그대의 무덤이 되 어 버린다. 그렇다, 집이 그대에게 어느 정도 안전과 안정감을 주는 것 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는 만큼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결국 그대는 그 집과 마차가지로 영혼이 빠져 달아난 존재가 되고 만다. 여기 고대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왕이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자연히 적도 많았 다.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똑같은 일이 자기에게도 벌 어질까봐 차츰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암살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는 창문도 없고 출입구가 단 한 개밖에 없는 아름다운 궁전을 지었다. 건축 재료는 최고의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그는 의심이 많고 또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한 명의 경비원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일곱 명의 경비원을 문에 세워 두고 특별한 지 시를 내렸다. 첫 번째 경비원은 두 번째 경비원이 감시하고, 두 번째 경비 원은 세 번째 경비원이 감시하는 식이었다. 그는 어떤 암살자도 궁전 안 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빈틈없는 지시를 내렸다. 그의 친구 중에 역시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있었다. 이 친구가 완 벽한 경호 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궁전을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궁전 을 보러 왔다. 친구를 만나자 왕은 무척 기뻤다. 그는 친구를 궁전 안으 로 데려가 구경을 시켜 주었다. 궁전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예술품이 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해 낸 경비 조직은 일찍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 을 만큼 완벽했다. 한 경비원이 다른 경비원을 감시하고, 그 경비원은 다른 경비원을 감시하고, 일곱 겹으로 이루어진 경비 체계였다. 손님으로 온 왕 역시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도 이것과 똑같은 궁전을 지어야겠소." 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궁전 밖으로 나왔다. 궁전 둘레에는 아 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한 거지가 정원 문 밖에 앉아 있 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궁전의 주인은 무척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거지에게 물었다. "웃는 이유가 무엇이냐? 웃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거지가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한때는 당신들처럼 한 나라 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통치하던 왕국은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소유한 왕국을 합친 것보다 컸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안전을 위하여 나 는 모든 궁전과 경비원들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지금은 거지이기 때문 에 나는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 다. 가난한 거지에게 누가 화살을 낭비하겠습니까? 우리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배에 탄 운명입니다. 다만 안전에 대하여 당신들의 생각과 나의 생 각이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생각 속에는 허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군요." 두 왕은 이 거지가 한때 자기들보다 더 위대했던 왕이라는 것을 믿을 수없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렇다면 그 허점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 거지가 말했다. "당신들의 궁전을 일곱 명 아니라 칠백 명의 경비원으로 중무장을 시 킨다 해도 문이 저기에 있는 한, 어느 순간에라도 죽음의 신은 저 문으 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절대적인 안전을 원한다면 궁전 안으로 십시오. 그렇게 되면 절대적으로 안전할 것입니다. 죽음의 신조차도 들 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왕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문을 모두 막아 버리면 죽음의 신이 들 어오기도 전에 숨이 막혀 먼저 죽겠다! 그렇게 되면 이 아름다운 궁전은 무덤이 되고 말 것이다. 문이 하나도 없다면 무덤과 다를 것이 없지 않 느냐?" 거지가 조용히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가 둔하지는 않군요. 이제 내가 왜 웃었는가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이젠 내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당신들은 안전을 위하여 모든 문과 창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만큼 생명이 당신 들에게서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제 문이 하나밖에 열려 있지 않으니 생 명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또 만일 문마저 막아 버리면 궁전이 무 덤으로 변하리라는 데에 당신들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99.9퍼센트는 이미 무덤이 되었습니다. 단지 0.1퍼센트의 문제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 다. 당신들은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몽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 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진정으로 안전을 원한다면 나같이 하십시오. 내가 왕이었을 때 내 인생 전체는 과대망상증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 습니다. 거지가 된 이래 나의 인생은 완전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으며, 아무런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니 누가 나를 죽이겠습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알무스타파  지금 오르펠리스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잠그고 너희가 지키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그대가 잃을까봐 걱정하고 있는 그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누구나 옷을 벗으면 태어날 때와 똑같은 알몸이며, 죽을 때도 알몸으로 돌아간다. 도 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걱정하는가? 그대가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그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너희에겐 평화가 있는가, 너희의 힘을 드러내 줄 고요한 정 열인 평화가? 너희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산봉우리들을 이어 주는 반짝이는 둥근 다리에 대한 기억을?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칼릴 지브란이 기독교적인 성장 배경을 떨쳐 버 리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마음의 봉우리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봉우리를 알지 못한다. 오직 캄캄한 골짜기만을 알 뿐이 다. 마음은 아름다움과, 침묵과, 평화와, 기쁨을 전혀 알지도 느끼지도 못 한다. 마음이 아는 것이라곤 정신병뿐이다. 훌륭한 유태 철학자의 한 사람인 조슈어 리어맨(Joshua Learman)이 <마음의 평화(Peace of Mind)>하는 책을 썼다. 내가 알기로는 아무도 이 제목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적으로 읽혔다. 그 책이 나에게 전해졌을 때, 나는 책의 제목을 보고는 저자인 조슈어 리어맨에게 책을 돌려보내면서 편지를 썼다. "책 제목자체가 이미 책을 쓴 사람이 마음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을 수가 없습 니다." `마음의 평화'--사실은 마음이 없는 곳에 평화가 있는 것이다. 따 라서 마음의 평화란 불가능하다. 마음은 늘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이 마 음의 속성이다. 마음이 바로 그대의 불안이고, 걱정거리이다. 그렇다. 그대는 `정상적인 정신병'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아무도 그것 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병에 걸려 있기 때 문이다. 정상적인 정신병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않으면 된다. 그 한계를 넘는 순간 그대는 급기야 정신병자로 취급받게 된다. 정신병자와 정신병자가 아닌 사람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결코 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그 정도의 차이라는 것도 심한 게 아니다. 누구 나 항상 경계선상에 있으며, 조금만 큰 일이 벌어져도 정상에서 이탈할 수 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어음이 부도났거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도망을 쳤거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우체국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우체국장에게 말했다. "제발 이 사실을 기록해 주십시오. 내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이레나 되 었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신고를 하러 왔습니다." 우체국장이 말했다. "진심으로 동정이 갑니다만, 나는 당신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우체국이지 경찰서가 아닙니다. 경찰서는 길 건너편에 있습니다. 그리 로 가십시오." 남자가 말했다. "안 됩니다. 나는 저곳에 갈 수 없어요." "갈 수 없다니요? 이상한 일이군요. 우체국에 와서는 신고를 하면서 어 째서 몇 걸음 떨어진 경찰서에 가서는 신고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문제가 있어서 그럽니다. 내 아내가 전에도 한 번 집을 나간 적이 있 었는데, 그때 나는 어리석게도 당장에 경찰에 신고를 했지요. 그랬더니 이튿날 경찰이 아내를 찾아주었습니다. 이번에 나는 이레나 기다렸습니 다. 설령 내 신고 없이 경찰이 자체적으로 내 아내가 집을 나간 것을 알 고 찾아준다고 해도 내 아내는 또다시 집을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고를 하러 온 것은 아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리석은 이웃사람 들 때문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 이웃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 혔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편네가 집을 나갔는데 너 는 어째서 즐겁게 앉아 피리만 불고 있느냐? 전에는 피리부는 소리를 통 듣지 못했는데,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냐?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 지 말고 정상적으로 행동해라. 어서 가서 신고를 해!'하고 말입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바보들이 하도 괴롭히는 바람에 이렇게 신고하러 온 것입니다. 제 발 아무 종이에나 제 신고를 접수하시고, 그 종이를 휴지통에 던져 버리 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어쨌든 제 신고를 받아들여야 이웃사람들이 나 를 괴롭히지 않을 겁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즐겨 본 역사가 없 습니다. 일주일이야말로 모든 걱정과 문제로부터 해방된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대 만일 아직 아내를 갖지 않았다면 걱정이나 문제라는 것을 이해 하기가 힘들다. 만일 아직 남편이 없다면 과연 어디서 그 온갖 종류의 문제와 질투심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들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나는 조슈어 리어맨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평화'와 `마음'은 공존할 수가 없다. 평화는 마음을 초월한 곳에 있다. 마음이든지 평화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둘 다를 선책할 수는 없다." 알무스타파는 지금 묻고 있다. 너희에겐 평화가 있는가? 평화란 시장이나 슈퍼마켓에 가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평화는 그대가 마음 속의 사념을 모두 초월할 때에 저절로 얻어지는 그 무엇이다. 마음속의 사념이 모두 정지하는 순간, 거기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하는 주체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던 그 마음이 이제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의 힘을 드러내 줄 고요한 정열인 평화가? 사실 평화는 힘이 아니다. 평화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상처입기 쉬운 것이다. 뜰에 핀 장미꽃 넝쿨이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아름답지 힘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시는 아름답지 못하지만 힘이 있다. 조금만 강한 바람이 불어도 장미꽃은 상처를 입는다. 붉은 꽃잎이 바닥에 떨어 져서 결국 왔던 곳으로, 애초에 그 꽃을 창조했던 근원으로 되돌아 간다. 한 떨기 장미꽃처럼 연약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을 본적이 있는 가? 그대는 장미꽃을 원하는가, 총을 원하는가? 명상가가 되고자 하는가,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가? 정치인은 힘이 있지만, 명상가에게는 어떤 힘이 있는가? 그러나 그대여, 한 떨기 장미가 가진 그 상처입기 쉬움, 그 연약함이 오히려 더 강한 힘이다. 정치인의 힘보다 명상가의 그 깊은 시선이 오히 려 더 큰 힘이다. 너희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산봉우리들을 이어 주는 반짝이는 둥근 다리에 대한 기억을? 여기에 칼릴 지브란의 불행이 있다. 그는 서양에서 태어나 기독교적 인 문화 배경 속에서 성장하고 서양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 에 비록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시인이긴 해도 마음의 속성을 제대로 이 해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칼릴 지브란의 한계라기보다는 서양의 한계이 다. `기억'이란 마음의 한 부분이며, 기계적인 기억 체계의 한 부분이다. 기억에 있어서는 차라리 컴퓨터가 훨씬 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는,`마음의 산봉우리들을 이어 주는 반짝이는 둥근 다리'는 마음의 속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반짝이는 활 모양의 다리가 있긴 하 지만, 그것은 마음의 사념이 더 이상 길을 가로막지 않을 때에만 나타난 다. 그대의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내면에 있다. 마음이 곧 그대의 적이다. 이 사회가 훈련시키고, 길들이고, 교육하고, 더 강하게 만 들려고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다. 모든 사람이 인생의 거의 3분의 1을 항상 자신의 적이 더 강해지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는 데에 시간을 쏟고 있다. 우리의 내면에는 마음이 아닌, 그 이상의 다른 것이 없을까? 아무도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초월한 것, 우리가 늘 이끌려 다니는 생각의 늪에서 해방된 것, 이러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을 거치면서 그 마음과 생 각이 더욱 강해지는 훈련만을 받아 왔다. 마음과 생각이 강해질수록 그 것을 초월하기는 더욱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명상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다. 명상 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명상이 어려운 게 아니라 마음이 너무나 강해져 서 그것을 뛰어넘기가 힘든 것이다. 어느덧 마음이 만리장성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마음과 생각에 의해 존경받기도 한다. 사람이 존경받으려면 그 마음과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과 생각 이 사라진 공간에 도달했을 때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대가 소위 지식이 라고 머리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그 모든 쓰레기들과 기억들에서 벗 어날 때, 그때 비로소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대가 어린애처럼 순진무구한 상태, 순수한 상태로 돌아갔을 때, 그 때 그대는 주위에 그 반짝이는 봉우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어디를 바라보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 지 않는 것은 그 자체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과 사념이 그대 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사념이 걷히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 이 신비가 되어 모습을 나타낸다. 사실 그대는 항상 그러한 기적적인 일들에 둘러싸여 있다. 굳이 다른 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명상하는 사람이 앉아 있는 장소는 어디나 신성하고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고 되풀이 말하는 것이 다. 그곳이 진정한 카바(Kaaba;이슬람교 사원의 성체 안치소)이다. 마음은 햇빛 찬란한 산봉우리가 아니라 어두운 골짜기만을 안다. 마음은 빛이 아니라 어둠만을 알 뿐이다. 마음은 생명을 모른다. 마음은 죽음만을 알 뿐이다.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존재계가 자신에게 부여한, 마음을 초월한 세계를 탐색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 초월의 세계는 로켓 을 타고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그 초월의 세계는 눈을 감고 마음을 초 월하는 연금술을 배움으로써만 탐색이 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초월적인 관찰'이라고 부른다. 그대의 마음을 끈기있게 관찰하면 어느 날인가 봄이 찾아온다. 마음 의 모든 사념이 사라지고 그대 둘레의 사방에 꽃들이 피어난다. 그 꽃은 영원의 꽃, 사랑의 꽃, 아름다움의 꽃이다. 알무스타파는 오르팰리스 사람들에게 다시 묻고 있다. 너희에게는 아름다움이 있는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물건 으로부터 너희의 가슴을 이끌어내어 거룩한 산으로 인도해 주 는 아름다움이? 이 말들 역시 아직은 기독교적인 배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어디서 얻어지는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누 구인가? 티 하나 없이 맑은 눈을 가진 사람, 눈에서 편견과 관념과 에고 라는 과거의 먼지가 맑게 씻겨 나간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순수한 눈만이 아름다움을 본다. 그리고 순수한 사람만이 인생을 가슴 으로 살 수 있다. 알무스타파는 `가슴'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자에게 "내 생각에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 다. 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각은 의심을 할 순 있어도 신뢰하거나 사랑하진 못한다. `너희에게 아름다움이 있는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물건으로부터 너희의 가슴을 이끌어내어 거룩한 산으로 인도해 주는 아름다움이?'어 디에 거룩한 산이 있는가? 힌두교도에게는 히말라야가 신성한 산이다. 자이나교도에게는 시카르지와 기르나르 산이 신성한 산이다. 또 유태인 에게는 시나이 산이 거룩한 산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마음의 감옥에서 한 걸음만 걸어나온다면, 그때 그대는 그대의 내면에 있는 거룩한 산을 오르는 것이 된다. 누구나 거룩한 히말라야 산을 가지고 다닌다. 아직 젊고, 푸르고, 결 코 녹지 않는 영원한 눈으로 뒤덮인 산이 모두의 내면에서 빛나고 있다. 모두의 존재 한가운데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다. 단지 마음이라고 하는, 자꾸만 걸려 넘어지는 돌을 디딤돌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말해다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너희 집 속에 지녔는가? 이 모든 것을 그대의 집 안이 아니라 그대의 내면 의식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말해 다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너희 집 속에 지녔는가? 그렇지 않으면 편안함과, 편안함에 대한 욕심뿐인가? 손님 으로 찾아와서는 이윽고 주인이 되고, 드디어는 정복자가 되 는 저 도둑 같은 편안함뿐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길들여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의 두 번째 속성이다. 처음엔 대상이 그대에게 접근하고, 나중에 그 대가 그 대상에 매달린다. 그대의 머리가 아름다운 말들, 위대한 철학자 들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그대는 여전히 인생의 작은 것들에 매달려 있 다. 나는 편안함 같은 하찮은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편안한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세상의 종교들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비난한 나머지 편안함 같은 작은 것까지도 죄로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렇게 가르친다. "너 자신에게 고통을 주라. 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곧 덕을 쌓 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왕국으로 너를 인도해 주리라."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것이 의문이었다. 천국에서 편안함을 인 정하고 또 모든 성자들에게 보상으로 편안함이 주어진다고 하면, 어째 서 이 지상에서는 똑같은 편안함이 죄로 취급되는가? 스와미 묵타난다(Swami Muktananda)라는 인도의 영적인 스승이 죽었을 때, 이튿날 그의 제자 한 사람이 이별의 슬픔을 견디지 못해 우 물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는 스승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천국의 문에 들어갔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잠시 동 안 그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도대체 이게 웬일인가? 모든 쾌락을 던져 버리라고 가르친 나의 위 대한 스승 묵타난다께서." 여태껏 한번도 맡아 보지 못한 향기를 간직한 꽃들이 가득한 아름다 운 나무 아래 스승 묵타난다가 알몸으로, 그것도 또다른 알몸의 여인과 함께 누워 있었다. 그 여인도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바로 헐리우드의 대 스타 마릴린 먼로였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까지도 끊임없이 그 여인 을 유혹했었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이 놓친 여자를 묵타난다는 손에 넣은 것이다! 자연히 그 제자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확실히 속세를 떠나고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는 일은 미국 대통령보 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얻게 되는구나." 그는 얼른 달려가 스승의 발 아래 엎드려 절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 았다. 어쩌면 자신도 여배우 하나쯤, 아니면 엑스트라 여배우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말했다. "스승님, 나는 당신이 큰 보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눈으로 당신이 드디어 보상을 받았다는 것 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벌거벗은 마릴린 먼로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입닥쳐, 이 멍청아! 내가 그에게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주어진 벌이야." 매우 간단한 사실이 아닌가? 만일 하늘에서 천국에서 모든 축복과 편안함이 주어질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 지상에서도 그대는 가능한 한 즐겁게 살아야 한다. 미래를 위한 훈련으로서도 그러한 것은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소위 세상의 성자라고 하는 이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평생 동안 그들은 스스로 편안하지 않는 것들에 길들여 져 왔다.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편안하고 황홀한 것들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된다면 천국과 지상이 반대되고, 적대적인 것이 되어 버린 다. 신은 지상과 천국을 동시에 창조하였다. 따라서 지상과 천국엔 일맥 상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편안함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편안함이 그대의 주인이 되어 그대를 노예처럼 이끌고 다니는 것엔 반대한다. 그렇다, 그것은 너희를 길들이는 자가 되어 갈고리와 채찍 으로 너희를 더욱 큰 욕망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외부세계 속에서 노예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주인이 되 라. 모든 것을 사랑하라. 하지만 어떤 굴레에도 얽매이지 말라. 인생이 그대에세 제공해 주는 모든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라. 하지만 거지가 아 니라, 황제처럼 행동하라. 알쿠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너희를 길들이는 자가 되어 그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의 욕망, 편안해지려는 마음, 화려하 게 살고자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너희를 길들이는 자가 되어 갈고리와 채찍으로 너희 를 더욱 큰 욕망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그대가 허락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한낱 물건이 살아있는 존재들, 의식을 가진 인간의 주인 이 될 수 있는가? 온갖 종류의 사치를 부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궁전에서 살지라도 그 러한 것들이 그대의 주인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그대의 삶을 진정으로 즐기라. 왜냐하면 삶이란 존재계가 그대에게 부여한 것이고, 죄책감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 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삶을 즐기되, 삶의 노예가 되지는 말라. 그 손길은 비단 같을지라도, 그 속은 무쇠로 만들어져 있 다. 맞는 말이다. 욕망의 포로가 되어 노예처럼 행동한다면 그대는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비록 `그 손길은 비단결처 럼 부드러울지라도 그 속은 무쇠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라. 욕망의 포로가 될 까닭이 있겠는가? 욕망을 그대가 부리라. 욕망은 그대의 머슴인 것이다. 과학이 발명한 모든 것은 그대에게 봉사하기 위 한 것이다. 인간의 천재성이 창조해 낸 모든 것들, 그것들은 그대의 삶 을 더 즐겁고,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데에 목적이 있다. 또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머슴이며, 여전히 주인의 권한은 그대에게 있다. 생각과 사념이 그대의 주인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때 그대는 감 옥에 갇히게 된다. 생각 너머의 것을 알지 못하면 그대는 결코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나는 그대가 생각을 머슴으로, 의식을 주인으로 삼 기를 바란다. 머슴의 역할을 할 때에는 생각과 사념은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주인 행세를 할 때 그것은 괴물로 둔갑한다. 모든 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세상의 종교들은 속세를 떠나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간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지금 여기 이 세상에 서 주인이 되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보물들을 머슴으로 사용할 줄 안다면 굳이 속세를 떠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노래를 불러주어 잠이 들게 하나, 그러면 서 침상 옆에 서서 너희 육체의 존엄성을 비웃는 자이다. 이 모든 일이 단 한 가지 원인 때문에 발생한다. 그대에겐 많은 문제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가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오로지 생각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대가 생각 밖으로 빠져 나가 면, 그 순간 생각은 그대의 머슴이 된다. 이것을 나는 나 자신의 체험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기쁨과 슬픔을 맛보았다. 하짐나 언 제나 생각과 사념 너머의 것을 추구해 왔다. 생각 너머의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생 전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생각도 육체의 일부분이다. 가슴도 마찬가지다. 죽 음이 그대의 육체를 두드리기 전에 그대의 내면에 있는, 죽음을 초월한 어떤 것을 발견해야 한다. 일단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대는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때 거기엔 속세를 초월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속세를 떠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겁 쟁이와 현실도피자나 하는 짓이다. 스스로 존엄성을 지니고 있고, 주인 의식과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니다. 그 자는 너희의 건전한 감각을 업신여겨 금방 깨어질 그릇 처럼 엉겅퀴 가시 속에 던져 버린다. 그대가 생각에 갇혀서 살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그것이 그대의 감각을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위선적인 성자들은 그대의 감성을 둔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또 자신을 둘러싼 모든 아 름다움과 신비에 둔감한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위식이 확장된 것, 그것이 바로 그대의 감각이다. 생각이 끼어들지 않을 때 그대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대의 귀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또 그 대의 손은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게 될 것이다. 생각이 끼어들지 않을 때 그대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대의 귀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또 그 대의 손은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게 될 것이다. 생각은 언제나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한편에서 생각은 육체를 파괴한다. 인도에 위대한 시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수르다스(Surdas)이다. 그 는 위대한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르다스'란 음악의 거장이란 뜻이다. 물론 그는 매우 예민한 사 람이었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모두가 예민하다. 동시에 그는 수도승이었다. 어느 날 그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 다. 탁발을 하던 중이었는데 어떤 집 안에서 그 여인이 나온 것이다. 그 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는 사람을 마취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그는 다시 그 집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두 눈을 뽑아 접시 위에 올려서는 그 여인에게 내밀었다. 두 눈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 었다. 여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큰 충격이었다. 여인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짓인가요?" 수르다스는 말했다. "그대 잘못이 아니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두눈의 잘못이오. 내 두 눈은 그대의 아름다움에 너무 매혹되었소. 그래선 안 되는 일이오. 경전에 이르기를, 감각적인 것에 끌려다니면 관능적인 욕망 때문에 인 생을 망치리라고 하였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두 눈을 빼어 버리고 나자 그 순간부터 위대한 성자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떠받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소위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그 들은 말한다. "감각을 죽이라. 감각에게 자유를 주면 그대는 노예가 되 리라." 하지만 그런 논리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눈을 빼어 버린다 해도 욕망 까지 없앨 수는 없다. 내 생각에 수르다스는 계속해서 그 아름다운 여인 에 대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꿈꾸는 데에는 눈이 필요없기 때 문이다. 안경조차 필요없다. 인류는 지금까지 그러한 헛된 생각 속에 살아왔다. 그러한 헛된 생각 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그래야만 신선한 눈으로 해와 달을 볼 수 있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맛 을 느끼며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자이나교의 근본 교리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맛으로 먹어선 안 된다 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바로 이 자이나교의 교리를 모방하여 자신 의 다섯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그 첫째가 아스와드(aswad), 즉 `맛을 보지 말 것'이다. 절대로 맛을 보면서 음식을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음식의 맛을 없애기 위하여 그는 니임(neem)이라는 나무의 쓴 이파 리를 모든 음식 속에 섞어서 먹었다. 그 이파리는 어찌나 쓴지 그 쓴맛 이 몇 시간씩이나 가곤 한다. 그것을 간디는 `종교적인 수련'이라고 생 각하였다. 마하트마 간디의 아쉬람에서는 사랑에 빠지는 것도, 차를 마시는 것 도 금지되었다. 차를 마시는 것 자체엔 잘못이 없지만 그것을 즐기는 것 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런 감각도, 아무런 육체도 없는 시 체처럼, 유령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한편에서는 감각을 파괴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그대가 주인이 되는 것을 방해한다. 진실로 편안함을 탐하는 마음은 영혼의 정열을 죽이는 것, 그리고는 장례식장으로 웃음을 던지며 걸어가는 것이다. 육체의 쾌락에 몰두하지 말고, 육체를 영적 추구의 첫걸음으로 삼으 라. 육체를 부정하라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희랍인 조르바'를 말하는 것이다. 강렬하게, 전체성을 갖고 살라. 그때 그대는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다. 그 순례는 끝이 없다. 그러나 너희 허공의 아들들아, 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너희는 덫에 걸리지도, 길들여지지도 말라. 알무스타파의 말이 옳다. 하지만 여기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웃어 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웃는 것은 아니다. 뭔가 웃을 거리를 제공해 줘야 웃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너희 허공의 아들들아 너희는 덫에 걸려서도, 길들여져서 도 안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길들여져 있고, 모두가 덫에 걸려 있다. 이제 문제는 길들여지지 않고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덫에서 빠져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조차도 덫에서 빠져 나 오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기독교인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았다. 그것이 그의 시의 큰 약점이다. 그는 자신이 시 속에서 한 말을 스스로도 이해 하지 못했다. 이해했다면 그는 기독교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어야 한다. 누구든지 사슬에 묶여선 살 수 없다. 그 사슬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 이라 해도 차이가 없다. 그 사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진 것이든, 고타마 붓다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사슬은 어디까 지나 사슬이다. 감옥은 어디까지 감옥이다. 그런데도 칼릴 지브란은 사슬에 묶여서 살았다. 더욱 유감으로 느끼 는 것은 그가 절대로 평밤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충분히 고타마 붓다가 될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가능성이 잠재해 있었 다. 그런데도 그는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 능성을 놓친 것이다. 너희의 집은 닻이 아니라 돛대가 되어야 한다. 물론 마땅히 집은 돛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가정이 되 고, 사원이 되어야 한다. 그때만이 집은 돛대가 될 수 있다. 또 상처를 감추는 번쩍이는 껍질이 아니라 눈을 지키는 눈 꺼풀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너희 날 개를 접어서도 안 되고, 또 천장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여서도 안 되며, 벽이 무너져 내릴까 숨쉬기를 두려워해서 도 안 된다. 비극은 카릴 지브란 자신이 이 말대로 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이따 금 그는 하늘로 비상해 올라가곤 했지만 다시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 다. 그는 날개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너희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만든 무덤 속에 살지 말라. 그런데 그 자신이 어디에 살았었는가? 교회는 무덤이 아닌가? 교회는 2천 년이나 된 무덤이다. 성경은 또 어 떤가? 그것은 죽은 자들의 손에 의해 씌어진 책이다. 다른 종교의 경 전들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들의 손에 의해 씌어진 책들이 앞으로 지상 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실제로 이 세상은 그러한 것들에 지배당하고 있다. 나는 몇몇 죽은 사 람들에 반대했다는 죄명으로 계속해서 법정에 서야 했다. 5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도 아직까지 숭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대의 어머 니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등에 업고 다니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깊은 슬픔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죽은 시체는 무덤에 들어가야 한다. 시체를 언제까지나 집 안에 두고 절을 할 수는 없는 것 이다. 그대의 생각, 그대의 마음은 어떤가? 그대의 머리 역시 무덤에 지나 지 않는다. 수만 명의 죽은 사람들이 그대의 머리 속에 살면서 그대의 인생을 지시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다. 또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더라도 너희의 집이 너희의 비밀 을 감추어서는 안 되며, 너희의 소망을 가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 속에 있는 무한한 것은 하늘의 집에만 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한한 것은 하늘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 속에 있 다. 그는 "죽은 자들에게 지배받지 말라."고 말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모든 죽은 사람들이 믿었던 대로 신이 하늘 높은 곳에 산다고 말하고 있 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신은 오로지 그대의 내면에 살 뿐이다. 다른 곳 에선 절대로 신을 찾을 수없다. 신은 그대의 생명, 그대의 의식의 핵심이요, 중심이다. 그대의 육체를 신의 사원으로 만들라. 왜냐하면 너희 속에 있는 무한한 것은 하늘의 집에서만 살 기 때문이다. 아침 안개가 그 집의 문이요, 밤의 노래와 고요 가 그 집의 창이다.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알맹이가 빠져 있다. 훌륭한 시이긴 하나 체험이 없다. 따라서 칼릴 지브란의 시든, 또는 다른 사람의 시든, 절대 로 표현의 아름다움에 속지 말라. 그대를 자유롭게 하고, 그대를 일깨우고, 존재와 생명의 불멸의 바다 로 그대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표현이 아니라 바로 진실한 체 험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