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달래는 피리 소리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그 다음에는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너희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너희의 슬픔. 너희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우물이 때로는 너희의 눈물로 채워진다. 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슬픔이 너희의 존재 속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너희는 더 많은 기쁨을 거기에 담을 수 있다. 너희의 포도주를 담는 그 잔이 바로 도공의 가마 속에서 구워진 그 잔이 아닌가? 너희의 영혼을 달래는 그 피리가 바로 칼로 후벼 파낸 바로 그 나무 아닌가? 너희가 기쁠 때 너희 가슴속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너희에게 슬픔을 주었던 바로 그것이 너희에게 기쁨을 주 고 있음을. 너희가 슬플 때에도 가슴속을 다시 들여다보라. 그러면 너희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너희가 지금 울고 있음을 알게 되리라. 너희들 중 어떤 이는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하다."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아니다. 슬픔 이야말로 더 위대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그 둘은 서로 나뉠수 없는 것. 그 들은 언제나 함께 오며, 하나가 너희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으면, 기억하라. 다른 하나는 너 희의 침대에서 잠들고 있다. 진실로 너희는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저울추처럼 매달려 있다. 너희가 텅 비어 있을 때에만 너희는 정지하여 균형을 이룬다. 저 보물지기가 자신의 금과 은을 달고자 너희를 들어올릴 때, 너희의 기쁨, 또는 너희의 슬픔은 오르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칼릴 지브란은 때로는 그대 존재의 중심을 건드린다. 하지만 때로는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간다. 따라서 시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가 햇빛 찬 란한 봉우리 위에 있을 때와 어두운 골짜기에 있을 때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 가 그대와 함께 어두운 골짜기에 서 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매우 심오하게 들리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공허할 뿐이다. 오늘 읽게 되는 이 문장들도 바로 그 범주에 속한다. 아름다운 시이긴 하나, 전혀 알맹이가 없다. 칼릴 지브란에 대한 나의 주석은 새로운 종류의 주석의 시초가 될 것이다. 세상에는 힌두 교의 성경인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에 대한 주석서가 수천 종이 있는데, 이것들은 서 로 내용이 다르다. 바다라야나(Badarayana)의 브라흐마수트라(Brahmasutra)와 같은 다른 경 전들도 마찬가지여서 수세기에 걸쳐서 계속 조금씩 내용이 다른 주석이 가해지고 있다. 하 지만 옳지 못한 문장과 피상적인 문장을 가려내는 주석서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그것들 모두가 추종자들의 주석서이며, 추종자들은 언제나 눈이 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가바드기 타에 적혀있는 모든 내용이 당연히 옳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새로운 종류의 주석의 시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의 추종자 도 아니다. 진리를 발견하면 나는 그것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누가 얘기한 것이든, 신발 만드는 사람이었던 라이다스(Raidas)가 한 말이든, 아니면 힌두교의 위대한 성 자 바다라야나가 한 말이든 상관이 없다. 또 피상적인 말을 발견하면 나는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뭔가 거짓된 말을 발견하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 그대에게 보여준다. 모든 옛날의 주 석서들은 어떤 의미에선 거짓된 것들이다. 그 주석서들에 따르면 전부 옳다. 마치 '어떻게 바다라야나가 틀릴 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인 것 같다. 그래서 그 주석서들은 단어들 을 확대해석하고,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색깔을 갖다 붙여서, 바다라야나가 시종일관 옳다는 생각을 지켜나간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만일 진리가 거기에 있다면 나는 누구와도 동의한다. 그리고 진 리가 아니라면 누구와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래되고 아무리 존경받는 인물이라 해도, 나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그 책을 누가 썼느냐의 문제가 아 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진리 편에서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모순을 감추기 위해 진리 아닌 것을 허용하는 그런 자세는 중요하지 않다. 칼릴 지브란은 모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 면 그는 위대한 시인이긴 하지만, 시인에 불과할 뿐, 신비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실체 를 완전히 보지 못했다. 그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언어에 관한 한 마술 사다. 여기 이 문장들 속에서도 그의 마술은 심오하다. 하지만 의미가 빠져 있다. 그 다음에는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너희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너희의 슬픔. 너희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우물이 때로는 너희의 눈물로 채워진다. 단어마다 아름다움이 있고, 표현도 대단히 시적이지 만, 의미의 깊이가 없다. 이 문장은, 깊이 잠들어 있고 무의식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만 진실 이다. 이 문장은 진리가 아니다. 단순히 그대의 잠과 무의식을 드러낼 뿐이다. 아직 무의식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기쁨이야말로 가면을 벗은 슬픔에 지나지 않는다. 왜 냐하면 무의식의 사람은 모순 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의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쪽 면이다. 그의 웃음과 눈물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같은 우물'에서 나온다. 프리드리 히 니체가 한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는... 이 시점에서 니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브란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바로 니체에게서 많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니 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영향을 받아 <예언자>를 쓰기 시작한 것 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니체는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이 웃지 않고 울기 시작할까봐, 그것이 겁나서 웃는다. 내 웃음은 내 눈물을 감추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 다." 그대는 뚱뚱한 사람들이 언제나 남보다 더 많이 웃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관 찰한 적이 있는가? 그 이유가 뭘까? 뚱뚱한 것은 절대로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렇다. 뚱뚱한 사람은 점점 더 몸이 보기 흉해지며, 따라서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해진다. 그는 자신이 보기 흉하다는 것을 알 며, 아름다워질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는 더 많이 웃고, 언제나 즐거워 보이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 자신이 이러한 심리현상을 자각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무의식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그대에게 유태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가 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동시에 유태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받아 온 민족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인도의 농담을 찾아보려고 해보았지만, 결국 성 공하지 못하였다. 모든 농담은 다른 곳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농담이 있긴 하지만 그 기원은 인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유태인들에게서 유해하였다. 이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거의 4천 년 동안이나 나라도 없이 온갖 방법으로 박해받고, 학살당하고, 고통받아온 민족이면서도 그 들은 아직도 가장 세련된 농담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 뒤에 숨은 심리적인 현상은, 바로 자 신들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불행을 잊고자 하는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 강제수용소에 갇힌 적이 있는 내 제자한테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는 유태인이 아니었다. 하지 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마당에 누가 그것을 일일이 확인해 주겠는 가? 그는 유태인 가정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었다. 그 는 자신이 유태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 가?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강제수용소에서 가장 이상한 현상을 나는 목격했습니 다. 그곳에서는 수천 명의 유태인들이 사상 유례 없는 방법으로 모욕당하고, 박해를 당했습 니다. 먼저 모든 소지품들이 압수되었습니다. 손목시계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입고 있던 옷들 이 전부 압수되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일렬로 서서 몇 시간씩이나 의료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웃고 농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 서 서로에게 농담을 지껄였습니다." 그들은 죽을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까지 목숨이 붙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 는 상황이었다. 가스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그들은 가스실에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살아 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스실로 들어간 뒤 에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가스실의 굴뚝이 검은 연기를 내뿜는 것을 보아 왔다. 그들 모두 가 기술적으로 재빨리 처형되었던 것이다. 가스실로 들어가기 5분 전, 그들은 이것이 아름다운 세상과 나무와 꽃과 사람들과 자식들 과 아내, 어머니, 늙은 아버지를 볼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 히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황했다. 그는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 해할수 없었다. 그는 공부하기 위하여 독일로 갔던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져 그를 자기 집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체포된 것이 다. 하지만 가스실이나 강제수용소, 또는 온갖 종류의 비인간적인 처사보다도 가장 그를 당 황케 한 것은 '유태인이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인가? 지금이 웃을 시간인가?'라는 것 이었다. 인도는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그 자신의 농담을 갖고 있지 않다. 인도는 유태인들이 당했던 방식으로 고통받아 본 경험이 없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고통 을 받아도 종교가 그들에게 그 고통을 신이 내린 벌로서, 전생의 업보로서 받아들이도록 가 르쳐 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 고통을 받아 들이라. 그리하면 너희는 다음 생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다음 생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이생만이 있을 뿐이다. 이 터전만이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계속해서 고통 받아 왔다. 처음에 유태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받았다.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자기 민족인 유태인들을 선동 하여 혁명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것은 실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랫동 안 불행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저 거대한 피라밋들을 보라. 그것들은 이집트인에 의해 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물론 이집트의 왕과 왕비들을 위해서 세워지긴 했지만, 유태인 노예 들의 손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러한 거대한 돌들을 옮긴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불가사의하다. 현대에도 그 돌들을 피 라밋 꼭대기에 들어올릴 기중기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수천 년 전에 이집트인들은 그것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집트인들의 공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집트의 왕과 왕비들은 비 난받아야 마땅하다. 피라밋은 그들의 무덤이지만, 그 왕이나 왕비가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수천 명의 유태인들이 그 피라밋 무덤을 만들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집트 병사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유태인들은 그 거대한 돌들을 어깨로 져서 날랐다. 돌 이 어찌나 무거운지 그 무게에 깔려서만도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돌에 깔려서 죽은 시 체는 길가에 버려지고, 다른 유태인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돌 하나를 피라밋 꼭대기에 올리 는 데에 수천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지만, 일이 강행되었다. 양쪽에는 이집트 병사들이 서서 끝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이 게으름뱅이들아! 돌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게으르게 때문에 속도가 느린거야!" 채찍에 맞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은 동물들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모세는 그들을 설득했다. "그대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며, 나는 그대들을 해방하러 왔다." 나는 그것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확실히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왜 냐하면 그 당시 유태인들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 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에게 확신을 불어 넣어야만 했다. "그대들은 사람이다.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최고의 인간들이다. 나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자. 그러면 내가 그대들에게 하느님께서 그대들을 위하여 마련해 둔 아름다운 땅 이스라엘을 보 여 주리라."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효과를 발휘해 유태인들은 이집트를 탈출 하였다. 이스라엘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40년 동안 그들은 먹고 마실 것도 없이 거지들처럼 중동의 사막을 방황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이 어디 있는가? 그 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는가?" 내가 보기엔 이렇다. 피곤에 지친 모세는 마침내 어떤 장소에 도착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곳은 황무지였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며, 처음에 함께 이집트를 탈출했던 사람들의 90퍼센트가 세상을 떠났다. 40년은 긴 세월이다. 더구나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더욱 길게 느껴진다. 시간은 매우 탄력성이 있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매우 짧게 느껴진다. 다정한 벗과 함께 있을 때는 몇 시간이 흘러도 몇 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배고픔과 갈증 속에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에덴 동산은 없고 사막일 뿐일 때는, 누구나 쉽게 늙는다. 모세가 이스라엘이라고 이름 붙인 장소에 도착하였을 때, 모세의 주변에는 거의가 새로운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오는 도중에 태어났다. 따라서 큰 세대차이가 있었다. 오 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세대차이를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최초로 느꼈던 것이다. 그 새 세대 들은 모세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으며,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땅을 새로 운 세대에게 맡겨두고, "나는 사막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다른 부족을 찾아나서겠다."는 핑 계를 대며 그곳을 떠났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 유태인 부족이 도중에서 길을 잃어 인도의 카슈미르 땅에 도착하였다. 또한 카슈미르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하느님의 정원에 가까워 보 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으며, 부족의 다른 무리들은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였다. 모세는 말년에 그들을 발견하였다. 그는 카슈미르에서 죽었다. 나는 그의 무덤 에 가본 적이 있다. 인도에는 히브리어로 묘비명이 새겨진 무덤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모 세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무덤이다. 그 두 무덤은 같은 장소에 있다. 바로 카슈미 르의 파할감(Pahalgam)이라는 곳이다. 파할감은 '양치기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가 늘 "나는 양치기요, 너희는 양떼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진정한 집, 전정한 나라로 데려가 주리라."라고 말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유태인들이 없는 인도 땅에서 모세와 예수가 죽어야 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유태인이었다. 기억하라. 예수는 '기독교인(Christian)'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알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는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Messiah)'라고 부르곤 했다. '그리스도(Christ)'는 메시아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그 추종자들을 우리는 '기독교인 (Christian)'이라고 부른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나, 유태인으로 살았으며, 유태인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처형당했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모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그들을 오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하긴 했지만, 그는 그들을 황무지에 던져두고 도망쳤다. 그 상황을 생각해 보라. 40년 동안 헤맨 끝에, 결과가 그것이었다. 유태인들은 아직도 가장 잘 웃는다. 그들은 여전히 멋진 농담을 찾는다. 그 배후에 깔린 심리는 간단하다. 그들의 온 존재는 눈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그 눈물을 세상에 보이고 싶지 않다. 웃음거리가 조금만 있어도 그들에게는 충분하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칼릴 지브란의 이 문장들이 피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웃음과 눈물, 슬픔과 기쁨사이의 이러한 모순은 인간의 마음의 한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늘 모순 속에서 살고 있다. 칼릴 지브란은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초월해 있 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따금 그는 중간에서 멈추는 가슴의 기능을 흘낏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의 참 존재가 아니다. 물론 가슴은 마음보다는 낫지만, 그것에 속지 말라. 그것 역시 마음처럼 같은 신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죽는 순간 그대의 마음과 가슴도 죽어 버린다. 죽지 않는 것을 발견하라. 그때 그대는 그곳에 모순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이다. 고타마 붓다가 웃을 때, 그 웃음은 눈물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고타마 붓다 같은 사람이 울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는 그 눈물 속에서 똑같은 웃음과 똑같은 미소, 똑같은 향기를 발견할 것이다. 그 웃음은 슬픔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슬픔을 감추기 위한 것도 아니고, 슬픔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넘치는 기쁨에서 나오는 것이다. 저 너머의 것을 안 사람, 깨달은 사람에게는 웃음도 기쁨이고, 눈물도 기쁨이다. 너희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너희의 슬픔. 너희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우물이 때로는 너희의 눈물로 채워진다. 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 겠는가?' 칼릴 지브란은 묻고 있다. "그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슬픔이 너희의 존재 속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너희는 많은 기쁨을 거기에 담을 수 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칼릴 지브란은 미국에서 살았다. 레바논에서 태 어났지만 미국에서 살았다. 동양만이 명상의 비밀을 알고, 서양은 그것에 대하여 전혀 깨닫 지 못한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만일 칼릴 지브란이 동양에서 살았다면 그 역시 노자나 보리달마(Bodhidharma)와 같은 높은 의식 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다. 또 그는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보다 더 예술적이었다. 만을 그가 그러한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러한 시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 지만 이들은 진리를 알고 있다. 그는 말하고 있다. '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 만에, 지금까지 그렇지 않아 왔다! 나는 말한다. 충분히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찾을 준비가 된 자, 추구할 준비가 된 자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림이나 조각이 하나의 재능이 듯이, 시도 재능이다. 하지만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은 그대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어떤 정부, 어떤 핵무기에도 간섭받을 수 없는 그대의 유일한 기본 권리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파괴할 수 있지만, 그대를 초월한 것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그대를 초월한 것은 존재계 전체의 일부 분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절대로 모순이 없다. 고타마 붓다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바다 의 어디서 물을 떠오든 그 맛은 언제나 같다." 칼릴 지브란은 명상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슬픔이 너희의 존재 속으로 깊이 파고들수 록, 너희는 더 많은 기쁨을 거기에 담을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명상의 가능성을 알지 못 하는 사람은 칼릴 지브란의 이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전 적으로 이 말을 부정한다. 조금도 타협이나 협상을 벌일 여지가 없다. 그는 잘못되었다. 그 는 그대 존재 속에, 깊은 슬픔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념을 침묵시킴으로써, 그대의 가슴을 사랑으로 채움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하나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한 침묵, 사랑으로 가득한 그러한 침묵 속에서만 영원한 기쁨과 생명과 아름다움이 꽃피어난다. 그대 그대는 자신에게 잠재해 있던 가능성을 실현하게 된다. 그때 그대는 히로 시마나 나가사키의 원자폭탄도, 히틀러의 가스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진정으로 그대의 것이 아닌 것만을 빼앗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진정으로 그대의 것은 파괴하지 못한다. 그대의 몸과 마음과 가슴은 그대의 부 모에 의해서, 다른 육체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대의 부모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 것 이 바로 그대의 존재이다. 그대의 존재는 수많은 육체의 수많은 마음과 수많은 가슴속에서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설령 이 지구가 권력을 가진 바보들에 의해서 파괴된다 해 도 그대의 존재는 다른 어떤 별에서 역사를 계속할 것이다.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하는 별이 5만 개나 있다. 명상하는 사람은 전혀 두려움이 없다. 너희의 포도주를 담는 그 잔이 바로 도공의 가마 속에서 구워진 그 잔이 아닌가? 아름다 운 말이다. 칼릴 지브란을 비난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말장 난에 불과하다. 그는 말하고 있다. '너희의 포도주를 담는 그 잔이 바로 도공의 가마 속에서 구워진 그 잔이 아닌가?' 그대가 아니라 '잔'이 도공의 가마 속에서 구워졌다. 그렇다면 어 떤 식으로 도공의 가마 속에서 구워진 그 잔의 슬픔이 그대 속에 기쁨을 담을 수 있는 깊 이를 만들어 준단 말인가? 잔이 아니라 '그대'가 도공의 가마 속에서 구워져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잔은 깨어질 수 있지만, 그대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잔은 던 져질 수 있어도, 그대는 던져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잔이 아닌 것이다. 또 이상하게도, 그 대는 잔의 불행과 고통 덕분에 기쁨을 얻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불길을 통과하려 하지 않는다. 명상은 확실히 불을 통과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명상은 그대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쓰레기들을 태워 주기 때문이다. 명상은 그대의 가슴을 청소해 줄 것이고, 그대가 자신의 보물이라고 여기면서 집착하고 있는 것들 을 불태워 준다. 명상은 그대를 벌거벗긴다. 왜냐하면 그대가 입고 있는 옷들은 바로 그대의 고통과 불행, 불안과 분노이기 때문이다. 명상의 불을 통과하면 그대의 진정한 참모습이 아 닌 것들, 남에게서 빌려온 것들은 모두 불살라진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고, 불멸의 것이다. 죽음조차도 그것을 파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도 불을 통과하려 하지 않 는다. 힌두교의 신의 화신인 라마(Rama)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라마는 자신의 적인 라마나 (Ramana)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라마나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시타(Sita)를 훔쳐가 아름 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라마나는 시타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않았다. 존경심을 갖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해주었으며, 왕비처럼 대접하였다. 전쟁은 라마와의 전쟁이었지 시타와의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라마는 마침내 적을 쳐부수고, 시타를 구출하였다... 시타를 구출한 뒤 라마의 첫 질문은 모든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던지는 바로 그 질문이다. "당신은 순결한가? 만일 순결하다면 불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먼저 불길 속을 통과하라. 그래서 살아남으면 나는 당신을 받아들일 것이다. 살아남지 못한다면 받아들일 필요조차 없다." 인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경전인 라마야나(Ramayana), 즉 라마의 이야기 가운데 이것이 가장 추한 장면이다. 그는 지금 시타의 순결을 묻고 있다. 그는 자신의 순결에 대해서는 어 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여자가 금욕생활을 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여자 는 매달 자신의 성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어렵다. 남자에게는 그러한 배출 방법이 없다. 성 에너지가 계속 쌓이기만 하면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는다. 힌두교인들은 라마를 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그가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그는 시타의 손을 잡고 순결을 증명하기 위하여 나란히 불길을 통과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성 우월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며, 모든 종교도 남성 우월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종교들은 남자에 의해서 만들어져 남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순진무구한 시타는 이 렇게 묻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서 3년 간 떨어져 있는 동안, 당신 역 시 나에게서 3년 간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똑같은 상황이었다. 사실 나는 감옥에 갇 혔으며, 나를 옥에 가둔 당신의 적은 인도에서 가장 학식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내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또 나는 왕비처럼 대접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가장 좋은 정원과 궁전을 주었다. 하지만 당신은 자유로운 몸이었다. 당신은 과연 순결한가?" 아니다. 시타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겸허함이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며, 우아함이다. 라마는 시타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불길 을 통과하였다. 이렇게 불의 시험을 주고 나서도 라마는 시타와 함께 자기 나라의 수도에 돌아와서도 야만적인 행동을 하였다. 한 세탁부의 아내가 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 에 그녀가 돌아오자 세탁부는 이렇게 외쳤다. "썩 나가거라! 나는 3년 동안이나 적의 손아귀 에 있었던 아내를 받아들인 라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한 세탁부가 당신을 비난하였 다."라는 것이 당장에 라마에게 보고되었다. 시타는 수천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한 세탁부의 비난에 직면하자 라마는 임신까지 한 그녀를 숲 속의 바라문 생도들 집단에 던져 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을 두고 이 나라에서는 수세기 동안 이렇게 말해 오고 있다. "라마는 얼마나 희생적인 사람인가!" 놀랄 수밖에 없다. 희생적이라니! 이것이 희생인가? 아니면 왕국을 손에 넣고 있으려는 탐욕인가? 이것이 과연 희생인가, 아니면 존경받고자 하는 욕심인가? 그는 겁쟁이에 불과하 다! 그는 그녀를 따라 불길 속을 통과하지도 않았으며, 그녀를 따라 숲 속으로 가지도 않았 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만일 나의 백성들이 나를 의심한다면 나는 이 왕국을 포기하겠다. 하지만 수천 명의 증인들 앞에서 불길 속을 통과한 여자를 포기할 수는 없다." 왕국에 대한 욕심, 존경받고자 하는 욕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누가 희생되었는가? 바로 시타가 희생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라, 라마는 얼마나 희 생적인가?" 남을 희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만일 그가 그 자신과 왕국을 희생하였다면 나는 그를 가장 위대한 인물, 위대한 영혼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누군가 와서 나에게 그를 신의 화신으로 받아들이길 요구한다면 나는 거부할 것이 다. 신의 화신은커녕 그는 인간 이하다. 너희의 영혼을 달래는 그 피리가 바로 칼로 후벼 파낸 바로 그 나무 아닌가? 그는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대의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차라리 질문을 한 그 여성에게 "다른 사람을 찾아 그 질문을 하라.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알무스타파가 말했더라면, 훨씬 위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시로 써 자신의 무지를 숨기려 하고 있다. "너희의 영혼을 달래는 그 피리가 바로 칼로 후벼 파 낸 바로 그 나무 아닌가? 그대의 심장, 그대의 존재가 아니라 '피리'가 칼로 후벼 파내졌 다. 따라서 그것이 영혼을 달래줄지라도, 그것은 영적인 성장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그것은 그대의 영혼을 달래주지도 못한다. 단지 그대의 머리를 달래줄 뿐이다. 또한 칼 때문도 아니고, 피리가 통과해야만 하는 고통 때문도 아니다. 어떻게 그대는 피리와 잔에 연결되는가? 칼릴 지브란과 같은 사람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또한 아무도 그가 말한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칼릴 지브란이 자각하지 못한다면 전세계에서 칼릴 지브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그의 아름다운 말들, 아름다운 시, 사람들은 여기에 취하고 있다. 칼릴 지브란은 제자가 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것 을 놓치고 있다. 그는 스승이었던 적이 없다. 그래서 완전한 진리를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 는 결코 신비가가 아니었다. 단지 훌륭한 시인이었을 뿐이다. 아름다운 단어들에 속지 말라. 언제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알맹이가 있는지 보라. 그릇에는 신경 쓰지 말라. 그릇은 매우 아름답고 훌륭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은? 그 안에는 어둠과 공허함뿐이다. 칼릴 지브란은 강의하기에 적당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때때로 그는 독수리처럼 태양을 향 해 날아가지만, 때로는 둥지에 앉아 있다. 그대로서는 그 차이를 인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라도 그대를 속일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이름이라도 그대를 겁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마하비라 같은 사람이, 고타마 붓다 같은 사람이 틀릴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기쁠 때 가슴속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너희에게 슬픔을 주었던 바로 그것이 너희에게 기쁨을 주고 있음을. 그렇다, 세상에는 이 두 가지 철할밖에 없다. 한 때 지금은 사라진 이교도의 철학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먹고, 마시고, 즐겨라.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하기 때문이다. 너의 인생을 끝없는 쾌락과 여인과 술로 즐겨라. 그 외에는 다 른 진리가 없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하지만 이들 이교도들의 철학은 자취를 감추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성직자들이 그들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옳다면 누가 절과 사원과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교회에 가서 한번 보라. 그러면 그대는 슬픔에 둘러싸일 것이다. 가련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 줄곧 매달려 있으며, 그대는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춤출 수 없다. 그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교회 안에 서는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다. 교회는 거의 무덤과 같다. 교회 안에 서는 죽은 것처럼, 슬픔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종교적인 사람으 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왜 위대한 성자는 카드놀이를 해서는 안 되는가? 그렇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는 속임수 없이 카드놀이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성자들이 춤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춤출 수 없는 성자라면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오래 전 에 죽은 시체일 뿐이다. 전염되기 쉬우니까 그런 사람들 곁에는 가까이 가지 말라. 그들은 전염병을 갖고 있다. 슬픔도 하나의 병이다. 웃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고, 춤출 수 없다면 그대는 결코 젊어지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떤 도시에 있을 때 열 살 먹은 한 소년이 자이나교의 승려가 되는 계를 받고 있었 다. 나는 아이의 부모에게 말했다. "당신들 미쳤는가? 당신들은 지금 아이에게서 청춘을 빼 앗고 있다. 승려가 되는 순간 아이는 열 살에서 금방 일흔 살이 될 것이다. 60년이라는 인생 이 사라져 버린다. 그는 사랑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당신들은 그를 늙은이로 만들고 있다! 당신들은 모두 살인자들이며, 그러면서도 자 랑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그 자랑스러움 때문에 이 순진무구한 아이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조차 모르면서 승려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화를 내면서 그 절을 떠 라나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이곳은 절이 아니다. 나는 경찰에 가서 몇 사람이 열 살 먹은 소년을 죽이고 있다고 알 리겠다. 그 아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라. 그가 그 자신의 하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라.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 그가 더 아름답고 젊음이 넘치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면, 입술에 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두 발이 춤추도록 하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면, 그때 그는 성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완전히 눈이 멀었기 때문에 인생의 단순한 진리조차 보지 못한다. 모든 종교들은 말한다. "아니다. 슬픔이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대의 눈물이 그대의 죄를 씻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 나의 아버지도 언제나 그것이 골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이제 너도 어린애 가 아니다. 그러니 절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물었다. "무엇 을 위해서죠?" "너의 죄를 씻어 없애기 위해서다." 내가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씻어내죠?" 나는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한 국민학교에서 어떤 기독교 목사가 어린 학생들 앞에서,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면 다음 세상에서 엄청난 보상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런 다음 그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한 아이가 일어나서 말했다. "먼저 죄를 짓는 겁니다." 목사라 말했다. "뭐라구? 몇 시간 동안 죄를 회개하라고 가르쳤는데 시간만 낭비했 군!" 아이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요. 그러니 있지도 않은 죄를 어떻 게 회개한단 말인가요? 먼저 모든 죄를 짓게 해주세요. 제발 저희들에게 죄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충분히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그 죄를 회개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겠어요." 그것으로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너희들 중 어떤 이는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하다."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아니다, 슬픔 이야말로 더 위대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그 둘은 서로 나뉠 수 없는 것. 또 다시 그는 같은 관점에 서 있다. 기쁨과 슬픔이 나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쁨도 더 위대하지 않고, 슬픔도 더 위대하지 않으며, '그 둘은 서로 나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눈먼 사람들, 잠들고 무의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진리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깨 어 있는 사람은 그 둘을 초월할 수가 있다. '그 둘은 서로 나뉠 수 없는 것'- 그래서 슬픔 을 초월하는 순간 그대는 기쁨도 초월한다. 그 초월 속에 침묵이 있고, 평화가 있고, 축복과 은총이 있다. 칼릴 지브란은 이러한 피상적이고 지적인 이해를 초월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 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 너머로 비상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꾸만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오며, 하나가 너희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으면, 기억하라, 다른 하나 는 너희의 침대에서 잠들고 있다. 평범하고, 잠든 사람들에 관한 한 그의 말이 옳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에 관한 한 그의 말은 옳지 않다. 진실로 너희는 기쁨과 슬픔 사이 에서 저울추처럼 매달려 있다. 너희가 텅 비어 있을 때에만 너희는 정지하여 균형을 이룬다. 저 보물지기가 자신의 금과 은을 달고자 너희를 들어올릴 때, 너희의 기쁨, 또는 너희의 슬 픔은 오르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만이 균형을 취할 수 있다. 그대의 슬픔과 기쁨이 균형 을 이룰 때 그대는 자신이 정지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말하고 있 는 춤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말하고 있는 환희가 아니다. 이 정지는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규모 면에서 균형을 이루었을 뿐이다. '저 보물지기가 자신의 금과 은을 달고자 너희를 들어올릴 때, 너희의 기쁨, 또는 너희의 슬픔은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이것은 넌센스다. 그대가 정지 상태에 있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50퍼센트의 기쁨과 50퍼센트의 슬픔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과 슬픔의 초월이 아니다. 자연히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게 된다. 일종의 무관심, 권태를 나타낼 것이다. 이 무관심과 권태는 영정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활기없는 사람들이 그대 주위에는 많다. 그들은 완전히 지친 표정들이다. 차라리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면, 차라리 눈물로 가득 차 있다면 살아있다는 표시가 나타날 것이다. 피상적으로라도 웃고 즐거워한다면, 차라리 그것 이 정지해 있는 것보다는 낫다. 정지해 있을 때 그대는 삶을 권태로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인 생은 권태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러한 정지 상태에 도달한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삶과 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단지 기쁨과 슬픔 사이의 그의 내적인 균형과 상관이 있다. 권태를 느낀다면, 바로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권태를 느낀다는 것은 그대가 정지했으며, 더 이상 숨쉬지 않고, 그대의 가슴이 더 이상 맥박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피상적으로 살기 원한다면 기쁨이든지 슬픔이든지 아무 것이다 선택하라. 왜냐하면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다른 것 역시 선택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즐거우면 내일은 슬플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언제나 균형을 찾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적인 성장은 기쁨과 슬픔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성장이란 모든 모 순을 초월하는 것을 뜻한다. 모순적이지 않고, 이중적이지 않은 바로 그 공간에서 그대는 진 리를 체험하게 되고, 그대 내면에 감추어진 신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매우 가까이 있다. 조금만 지성이 있으면... 놀라운 것은 세상의 어떤 종교도 지성이 종교와 관계가 있다는 말 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시력을 버리면서 세상의 모든 종교 경전을 읽었지만 지성 이 매우 중요한 특성이라고 말하는 문장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모두가 믿음과 신앙만이 가 장 근본적인 특성이라고 말한다. 둘 다 지성에 반대되는 것일 뿐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