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생명에게 준다 주는 일에 대하여 II 너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리라, 그러나 오직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리 라." 과수원의 나무들, 목장의 가축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저들은 자기가 살기 위 해서 준다. 주지 않고 아끼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에. 분명한 것은, 밤과 낮을 맞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너희로부터 무엇이나 받을 자격이 있다. 생명의 큰 바다에서 마실 만한 사람이면, 너희의 작은 시냇물로 그 잔을 채울 만하다. 또 한 받을 줄 아는 저 용기와 자신감, 아니, 그보다도 받아주는 저 자비심 외에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한가? 또 남의 가슴을 찢고 자존심을 벌거벗겨서 그들의 형편없이 된 가치와 부끄러 움 모르는 자존심을 바라보는 너희는 대체 누구인가? 무엇보다 먼저 너희 자신이 줄 자격이 있는가, 주는 심부름꾼이 될 자격이 있나를 생각하라. 사실은 생명이 생명에게 주는 것이요, 스스로 주는 자라고 생각하는 너희는 하나의 증인에 불과할 뿐. 그리고 너희 받는 자들아, 물론 너희는 모두 받는 자이지만,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를 생각 지 말라. 그러면 너희 자신에게도, 주는 자에게도 멍에를 씌우게 된다. 그보다 주는 자와 함 께 그의 선물을 날개 삼아 날아 오르라. 지나치게 빚진 생각을 하는 것은, 아낌없이 주는 땅 을 어머니로 삼고 신을 아버지로 삼는 그의 넓은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자비와 봉사, 베푸는 일을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세상을 보 라. 거기 아무런 자비도, 봉사도, 베풂도 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말들을 사용해 오 긴 했지만, 그들의 그 아름다운 말들은 장님이 빛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그 속에 진실이 없다. 알무스타파는 그대의 삶을 탈바꿈시키는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말한다. 너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리라, 그러 나 오직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리라." 이것이 바로 세상의 종교들이 가르치는 것이 다. 불교 경전들을 보라. 오로지 불교인만 받을 자격이 있으니 불교인에게만 주라는 가르침 으로 가득 차 있다. 또 바라문들의 경전에는, 부족하고 굶주리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바라문에게만 나누어주고 봉사하라는 가르침 일색이다. 바라문만이 받을 자격이 있다 는 것이다. 이들이 인류를 현혹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세상이 되었다. 알무스타파는 지금 그대에게 가장 근본적인 통찰력, 신선하고 물들지 않은 통찰력을 심어 주고 있다. 이것은 어디서 빌려온 진리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경전에 도 이러한 진리가 없다. 이것은 진실한 체험이다. 과수원의 나무들, 목장의 가축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풍성하면 언제나 준다. 나무에 열매가 잔뜩 매달려 있 으면, 아무도 그 열매를 따가는 이가 없어도 그 나무는 열매들을 땅으로 되돌려 준다. 잔뜩 매달고서, 풍성함에 짓눌려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여, 자신이 풍성할 때 주라. 저들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준다. 주지 않고 아끼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에. 생명은 끝없는 운동이고 흐름이다. 그 흐름이 정지할 때 거기 죽음이 찾아온다. 가득 차 정지하는 것은 곧 죽음이다. 생명은 가득 차서 정지하는 것을 모른다.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 은 자신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준다. 주지 않으면 그것이 썩어 버리기 때문에 준다. 또 그것 의 썩음과 함께 그 자신 역시 썩는다. 종교적인 사람은 나누어 갖는데, 이것은 남들에 대하 여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받는 사람이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대를 죽일지 모를 무거운 짐을 그가 덜어 주기 때문이다. '저들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준다. 주지 않고 아끼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에.' 그대 자신의 체험은 어떤가? 주는 순간이 가장 기쁜 순간이다. 아무런 차별 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이 찾아온다. 누구에게 주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대 가 지금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넘쳐흐르는 것이 곧 주는 것이다. 또 넘쳐흐르는 것은 생명의 춤이요, 존재계의 노래다.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을 움켜쥐면 죽음으로 간다. 생 명은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운동을 필요로 한다. 두려움 때문에... 그것이 되돌아올 지 안 올지 누가 아는가?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움켜쥐는 것은 자살하는 길이다. 그대가 계속해서 숨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의식하든 못하 든 숨쉬는 것은 곧 숨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이 줄수록, 최대한으로 줄수록 그대 는 더 건강해지고, 더 젊어진다. 보통 우리가 매우 얕게 숨을 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의 폐에는 거의 6천 개에 달하는 작은 구멍들이 있지만, 폐 전체를 다 사용하여 숨을 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가장 건강한 사람도 고작해야 2천 개 정도의 구멍으로 숨을 쉴 뿐, 나머지 4천 개의 구멍에 는 생명이랄 수 있는 산소가 전혀 없다. 운동과 달리기. 수영 등이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좀더 깊이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숨을 쉬려면 먼저 그대 의 폐에 모아진 이산화탄소를 내보내야 한다. 폐 전체가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면 그대는 죽 는다. 여기 그대들 주변에 있는 나무들 역시 숨을 쉬는데, 이 나무들은 이산화탄소로 숨을 쉰다. 따라서 그대가 숨을 내쉬는 것은 곧 나무들에게 숨을 주는 것이다. 나무들은 이산화탄 소가 필요하다. 그대들이 없이는 나무는 살지 못한다. 또 나무들은 산소를 내뿜으니, 나무 없이는 그대들은 살지 못한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자르 는 것인지도 모르고 계속 나무들을 자르고 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세밀히 관찰해 왔는데, 구두쇠일수록 얕게 숨을 쉰다. 자신에 게 죽음을 안겨 주는 이산화탄소마저 아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이상한 짓, 이 상한 생각들을 만들어 왔다. 그것들을 너무 자주 반복하다 보니, 그것들의 이상함을 이상하 게 여기는 것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인류 역사상 성교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아 는가?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만은 없다. 사람들은 온갖 상황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심 장마비가 일어나지 않는 한 가지 상황은 섹스를 하는 동안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섹스 중에는 더 깊이, 더 충분히 숨을 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더 많이 주고 있는 것이며, 주는 것이 곧 생명이다. 받는 사람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구 두쇠들이나 관심 갖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두쇠가 아닌 사람들을 나는 많이 만나 보았다. 그 들은 심장마비 따위는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삶 전체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 의 유기체다.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즉각적으로 온갖 측면에서 그대의 인격과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알무스타파가 옳다. 분명한 것은, 밤과 낮을 맞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너희로부터 무엇이나 받을 자격이 있다. 존재계가 그 사람에게 기꺼이 생명을 주고 있는데, 그대가 그에게 차 한 잔 주지 못하 는가? 존재계가 그 사람을 예순 살, 여든 살까지 살게 하는데, 그러면서도 존재계는 그 사람 이 그럴 자격이 있나 없나를 따지지 않는데, 도대체 그대가 주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신경을 쓰는가? 사실을 말하면, 그대는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변명거리를 찾고 있 다. "내가 구두쇠라서 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못 주는 것이다." 생명의 큰 바다에서 마실 만한 사람이면, 너희의 작은 시냇물로 그 잔을 채울 만하다. 그 러나 바라문의 경전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바라문에게만 주라. 그래야 그것이 자비이고, 덕행이다." 그들은 절대 "수드라(sudra)에게, 불촉천민들에게 주라." 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사실 필요한 것은 그들이다. 하지만 힌두교의 그 더러운 계급제도에 따르면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이면 누구나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 실을 보지 못한다. 그가 도둑이든 살인자든, 도대체 그대가 뭐라고 그들을 심판하는가? 그들 의 자격을 논하는 것 자체가 그대의 비인간성을 보여 준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선사의 작은 오두막에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도둑이 들 었다. 그때 선사는 깨어 있었다. 그런데 선사에게는 갖고 있는 물건이 담요 한 장밖에 없었 다. 선사는 그 담요를 반으로 접어서 한쪽은 깔고 한쪽은 덮어서 사용해 왔다. 그날 밤 선사 는 벌거벗은 알몸을 그 담요로 덮고 있었다. 그에게는 다른 옷이 없었던 것이다. 문도 활짝 열려 있고 창문들도 모두 열려 있었기 때문에 달빛이 안으로 환하게 비쳐서 선사는 그 도둑 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도둑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선사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 고 있는 것을 도둑이 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이 가난한 선사의 집까지 무엇을 훔치러 올 정도라면 대단히 절실한 사정임에 틀림없었다. 선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는 담요로 몸을 덮고 있었다. "이 집에 그가 가져갈 만한 물건이 무엇이 있는가? 그는 이십 리 길을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삼 일 전에만 미리 알렸어도 내가 마을을 돌며 구 걸이라도 해서 뭔가를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이토록 가난한 사람의 집에 찾아오려면 미리 말을 했어야 하는데." 선사는 그가 도둑이라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그가 만족 스럽게 훔쳐갈 만한 물건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집안에는 어두운 곳이 있 었다. 그래서 선사는 도둑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고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촛불을 켜들고 도둑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도둑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고, 선사의 얼굴을 본 도둑은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었다. "만일 이 사람이 사람들에게 한 마디만 해도 마을 전체가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는 말했다. "두려워 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을 도와주러 온 것뿐 이요. 여기는 매우 어두운 곳이오, 게다가 나는 이 집에서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소. 나를 당신의 동업자로 삼아 주시오. 무엇이든 발견하면 50대 50으로 나눕 시다. 아니면 당신 혼자서 다 가진다고 해도 좋소. 나는 다른 것이 없어도 살수 있으니 말이 오. 발견하는 대로 뭐든지 당신이 가지시오." 도둑은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비'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평생 그것을 직접 체험하 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런 비난도, 심판도 하지 않고 이 선사는 지금 자기 집에 들어 온 도둑을 도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도둑은 말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선사님 여기가 선사님의 집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어떻게 감히 이곳엘 들어오겠습니까?" 선사 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빈손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오. 이 담요 한 장밖에 없소. 밖의 날씨가 추우니, 제발 이것이라도 받아가시오." 선사가 담요를 도둑에게 건네자 도둑은 선사가 알몸인 것에 깜짝 놀랐다. 선사가 가진 것은 정말로 담요가 전부였던 것이다. 도둑은 선사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지만... 선사는 말했다. "더이상 나를 가슴 아프게 하지 마시 오. 다음 번에 올때는 꼭 미리 알리시오. 그러면 내가 준비해 놓으리다. 그리고 특별히 필요 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말해도 좋소. 이 마을엔 나를 따르는 사람도 많고, 내 제자나 신자들 도 많소. 그러니 내 보장하리다. 이 담요가 낡은 것이라서 부끄럽소. 이것은 남에게 줄 만한 것이 못 되는데... 하지만 지금의 내 형편을 이해하시고 부디 너그러이 이것을 받아 주시오. 그러면 내 평생 당신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리다." 도둑은 난처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지금까지 그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둑은 선사의 발 아래 엎드려 절을 하고는 담요를 받아들 고 얼른 그 집을 뛰쳐나갔다. 계속해서 선사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많은 왕을 보았고 많은 장군을 보았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도둑의 뒤에 대고 선사는 소리쳤다. "기억하시오. 잊지 마시오.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소. 평생 동안 나는 거지였소. 단 한번도 남에게 주는 기쁨을 맛보지 못했소. 당신은 내 낡고 다 떨어진 담요를 받아 줌으로써 나를 거지에서 왕으로 바꾸어 놓았소. 고맙소. 당신은 참으로 마음이 깊고 이해심이 넓은 사람이오. 어느 때고 다시 오시오." 도둑이 떠난 뒤 선사 는 떨면서 앉아 있었다.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그러다 문득 창문 밖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고 선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지었다. 나는 왜 이리도 가난한가 오늘 도둑을 맞이하고서 야 내 가난을 절실히 느꼈네 불쌍한 친구, 그에게 저 아름다운 달을 줄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중요한 것은 그대가 뭔가를 줄 사람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 그것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이다. 사랑으로 주라.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라. 다른 사람의 인격을 다치지 말라. 또 받을 줄 아 는 저 용기와 자신감, 아니 그보다도 받는 저 자비심 외에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한가? 이것 은 진정으로 새로운 말이다. '받는 자비심' 그 누구도, 붓다도, 크리슈나도, 예수도, 이런 심 오한 진리를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주는 자비심'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대에게서 받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들의 용기와 자신감을 보라. 그들은 그대가 주는 것 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자비심을 보라. 그대는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과 같았는데, 그들이 그들 머리 위에 그 비를 내리도록 그대에게 허락하였다. 또 생각해 보라.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그 비를 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을 보았는가? 그 구름이 바 라문의 들판에는 더 많은 비를 뿌려주고, 가난한 노예의 들판엔 적게 뿌려주던가? 구름은 그런 것에는 무관심하다. 그 비를 기쁘게 맞아들이는 목마른 대지에게 구름은 그저 감사해 할 뿐이다. 게다가 그 기쁨은 푸르른 이파리들에게, 향기로운 꽃에게 전해진다. 메말랐던 대 지는 갑자기 생명으로 가득 찬다. 동시에 목마른 대지는 자비로운 일을 하였다. 구름의 짐을 덜어 준 것이다. 구름을 자유롭 게 해주었다. 이제 구름은 바람이 부는 대로 어디로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종교도 이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세상의 종교는 부자에게서 나오는 돈과 권력에만 관 심이 있다. 그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설득하여 부자들에게서 더 많이 얻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자비에 대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소위 종교적이라고 하는 사람 들의 마음이 너무나 교활한 것에 놀랐다. 나는 그 내용이 고타마 붓다 자신이 직접 말한 것 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 경전들은 모두 붓다가 죽은 뒤에 편집된 것이다. 또 붓다는 42년 동안 계속 가르침을 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종파들이, 정확히 32개의 종파들이 '이것이 바로 붓다의 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누구도 사실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을 읽든지, 맨 먼저 자비의 아름다움, 자비의 덕에 대하여, 그리고 이생에서 자비를 베풀면 다음 생에서 받게 되는 보상에 대하여 말을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끝을 맺 는다. "하지만 기억하라. 오직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라." 그러면서 누가 자격이 있는가 를 정의 내려놓았다. 오직 불교 승려들만이 적합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비구(bhikku), 즉 불교 승려에게만 주라. 물론 정확히 불교 승려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불교 승려에게만 해당 하는 정의를 내려놓았다. 이것은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종교도 받는 것의 자비로움 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받아낼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설득하 여 더 많은 기부를 하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이생에서 베풀면 다음 생에서 더 많이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여기 알무스타파는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의식 상태에 올라가 있다. 또 남의 가슴을 찢고 자존심을 벌거벗겨서 그들의 형편없이 된 가치와 부끄러움 모르는 자존심을 바라보는 너희는 대체 누구인가?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대가 주는 것은 돈 과 빵과 옷과 밤을 지세울 장소 등 세속적인 것이다. 언젠가 내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여행을 다닐 때였다. 그 지역에는 철도가 없었고, 또 내 운전사는 신참이어서 그곳의 지리를 잘 몰랐다. 마침 그곳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마을이 두 곳이 있어서 우리는 밤중에 엉뚱한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이슬람교도의 마을이었다. 나는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했 다. 가는 곳마다 맨 먼저 묻는 것이 "당신은 이슬람교도인가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 다. "꼭 이슬람교도여야 하는가? 나는 단지 당신의 집 처마 밑에서 하룻밤 자고 싶을 뿐인 데."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슬람교도라면 환영이다. 하지만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들의 성직자가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내 운전 사는 이슬람교도였다. 그가 말했다. "다음 집에서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계십 시오. 당신은 겉으로 봐서는 이슬람교의 성자를 닮았으니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계시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다음 집에 가서 내가 '이분은 나의 주인이 자 스승이신데 지금 침묵의 수행중이십니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해보 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먹혀 들어갔다! 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더욱이 내가 침묵의 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그 집을 떠나면서 나는 말했다. "이제 나는 당신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겠소. 나는 이슬람교도가 아니며, 침묵의 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오. 물론 내 운전사는 이슬람교도이오." 그들은 대단히 화가 났다. 온 마을 사람이 몰려들었다. 내 운전사가 말했다. "왜 괜히 문제를 일으킵니까? 1분만 더 침묵을 지켰어도 사람들은 당신을 위대한 성자로 여기고, 한 성자가 자기들의 집과 마을을 축복해 주었다고 기뻐했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어 젯밤 너무나 피곤하고 졸렸기 때문에 그대의 의견에 찬성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해 졌다. 운전사가 말했다. "어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 광신자들입니다." 누구든 지 조직화된 종교에 소속되면 편협한 광신자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자신의 종교만이 옳고 다른 종교는 틀려먹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겉 으로 그렇게 주장하든 안 하든 별개 문제다. 상황을 지켜 본 나는 어떤 곳에 제 시간에 가 야만 했고 또 농담이 이미 지나쳤기 때문에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정말 순진 하고 단순하다. 나를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슬람교도인 것을 모르겠는가?" 그들은 말했다. "그렇소. 당신은 정말 이슬람교의 성자처럼 보이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어젯밤이 내 침묵의 수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웃으면서 나를 껴안고 야단이었다. "언제든지 또 오십시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이곳을 지나칠 일이 있으면 어떤 집이든지 당신에게는 문이 열려 있느니, 꼭 들르십시오." 또 남의 가슴을 찢고 자존심을 벌거벗겨서 그들의 형편없이 된 가치와 부끄러움 모르는 자존심을 바라보는 너희는 대체 누구인가? 이것이 자비로운 행동인가? 이것은 자비가 아니 다. 자비는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며, 조건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한다. 자비는 그냥 주며, 또한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는 그대에게 감사해한다. 무엇보다 먼저 너희 자신이 줄 자 격이 있는가... 이 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대는 과연 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주는 심 부름꾼이 될 자격이 있나를 생각하라. 사실은 생명이 생명에게 주는 것이요, 스스로 주는 자라고 생각하는 너희는 하나의 증인에 불과할 뿐. 이 말보다 아름다운 말을 들어 보았는 가? 생명이 생명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자신이 주는 자라고 생각하면서 불 필요하게 그대의 에고를 부풀리고 있다. 어떻게 그대가 주는 자가 될 수 있는가? 그대는 아 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왔으며, 또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떠날 것이다. 그렇게 빈손으로 왔다 가면서 그대는 자신이 무엇을 소유한 자, 무엇을 주는 자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존 재계에 속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자는 생명이 생명에게 주는 데에 자신이 심부름꾼으로 이용될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는 하나의 증인일 뿐이다. 그리고 너희 받는 자들아, 물론 너희는 모두 받는 자이지만,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를 생각 지 말라... 알무스타파는 계속해서 그대에게 최고로 아름다운 장미꽃잎을 뿌려주고 있다. 그 리고 너희 받는 자들아, 물론 너희는 모두 받는 자이지만...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존재계로 부터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의 열매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으며, 물에게서 생 명을 받고 있다. 우리는 모두 받는 자들이다. "나는 주는 자이다."라는 그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라. 자신이 주는 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대는 받는 이에게 부담을 주고, 그를 비굴하 게 만든다. 실제로 이것은 아주 차원 높은 모독이다. 그리고 그는 그대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부담을 계속 안고 다닐 것이다.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를 생각지 말라. 그러면 너희 자신에게도, 주는 자에게도 멍에를 씌 우게 된다. 그보다 주는 자와 함께 그의 선물을 날개 삼아 날아 오르라. 지나치게 빚진 생각 을 하는 것은, 아낌없이 주는 땅을 어머니로 삼고 신을 아버지로 삼는 그의 넓은 마음을 의 심하는 일이 된다. 누구도 "나는 주는 자이다."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며, 또 누구도 그 사람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주는 자는 바로 생명이다. 그대들은 한 마리 새의 양쪽 날개 이다. 함께 높이 날아오르라. 주는 자와 받는 자를 구별하지 말라. 여기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나누어 가지라.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잊으라. 주는 자도 잊어야 하고, 받는 자도 잊어야 한다. 주는 자는 생명이기 때문에, 둘 다 생명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생명의 입장 에서 볼 때는 그대는 하나의 증인에 불과하다. 여기 알무스타파가 잊고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받는 자뿐만 아니라 주는 자 역시 하나의 증인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가 존재계와 생명의 극적인 드라마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사라지고, 아 울러 그 바다의 두 언덕 사이에서 생명이 끊임없이 물결칠 때, 그때 그대는 내가 신성이라 고 부르는 그것을 처음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는가? 잔마다 노래가 있게 하라 먹고 마심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여관 주인인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심에 대하여 말씀해 주 십시오.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 너희가 대지의 향기로만 살 수 있고, 풀처럼 햇빛으로만 살 수 있다면. 그러나 너희는 먹기 위하여 죽여야만 하고,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갓난 것에게 서 어미의 젖을 뺏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의 예배 행위가 되게 하라. 또 너희의 식탁을 제단으로 삼아, 그 위에서 산과 들의 깨끗하고 순결한 것들이 너희 속안의 더 깨끗 하고 순결한 것을 위해 희생하도록 하라. 너희가 짐승 하나를 죽일 때는 마음속으로 그 짐승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를 죽이는 바로 그 힘으로 나 역시 죽임을 당하며, 나 또한 먹힌다. 너를 내 손에 인도해 준 그 법칙이 또 나를 더 힘있는 손에 인도할 것이기에. 너의 피나 나의 피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나무를 키우는 수액일 뿐. 또 너희가 사과를 한 입 깨물 때에 그것에게 말하라. 너의 씨앗이 내 몸 속에서 살아있을 것이며, 너의 미래의 싹이 내 가슴속에서 피어나리라. 그리하여 너의 향기 가 내 숨결이 되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온 계절을 즐기리라. 또 가을이 되어 포도주를 짜기 위해 포도밭에서 포도열매를 따모을 땐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라. 나 역시 하나의 포도밭과 같으니, 나의 열매 또한 포도주 짜는 기계 속으로 거두어 지리라. 그런 다음 나 역시 새 포도주처럼 영원한 그릇에 담겨지리라. 그리하여 겨울이 되어 그 포도주를 따를 때면, 잔마다 하나의 노래가 너희 마음속에 있게 하라. 그리고 그 노래 속 에 그 가을날과 포도밭과 포도주 짜던 추억을 잊지 말라. 이제 질문이 노인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다. 칼릴 지브란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비가의 차원을 흘끗 보긴 했지만, 그 자신이 신비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이 노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는 말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서 노인은 전통적인 생각, 관습과 과거, 그리고 모든 죽은 이들을 대표한다. 하지만 그 래도 꼭 이런 방식으로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시인과 신비가의 차이가 여기에 나타난다. 여 기 이 말들은 칼릴 지브란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신이 말하는 손 길, 신이 미소짓는 눈짓이 아니다. 영원을 향해 열었던 창문이 잠시 닫혀 버렸다. 나는 앞에 서 시인과 신비가의 차이에 대하여 말했었다. 신비가는 언제나 같은 차원, 같은 높이, 늘 햇빛이 비치는 같은 봉우리에 존재하지만, 시인은 자꾸반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관 주인인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심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 너희가 대지의 향기로만 살 수 있고, 풀처럼 햇빛으로만 살 수 있다면. 하지만 이 말에는 깊이가 없다. 말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뭔가 빠져 있다. 이 제까지 그는 높은 봉우리 위에서 군중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군중 속에 서서, 군중의 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먹기 위하여 죽여야만 하고, 마른 목을 축이기 위 해 갓난 것에게서 어미의 젖을 뺏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의 예배 행위가 되게 하라. 이것은 타협이다. 또 이러한 타협 때문에 세상은 칼릴 지브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가상의 이름 알무스타파를 통하여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계속해서 밑바닥 으로 떨어져 내리며, 전통과 관습에 젖은 사람들의 의식, 기성사회, 또 그 사회에 뿌리깊은 낡고 추한 행동에 반대할 용기를 잃는다. 칼릴 지브란 같은 사람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에 찬성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채 식주의자가 아닌 사회에서 태어났으며, 그 사회의 굴레와 조건지어진 상황에서 완전히 자유 로워지지 못했다. 자유로워졌다면, 먹기 위하여 동물을 죽이고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하여 갓 난 것에서 어미의 젖을 빼앗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사냥꾼이었다. 또 산 짐승을 잡아먹는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은 확실히 생명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칼릴 지브란은 지금 자기 손안에 있는 노인의 입을 빌려 이러한 것을 말하고 있다. 폭력은 신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야만이다. 또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진리에 사 람들이 의문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인류 전체가 반쯤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살 아있는 생명체를 잡아먹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여서 음식으로 만든다면 머지않아 그대는 인간 존재 역시 쉽게 죽일 수가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생명은 다 똑같다. 노래하는 새 들의 생명이든 아름다운 사슴의 생명이든 위엄있는 사자의 생명이든 하나이다. 그들 역시 우리의 형제 자매이다. 식인종과 육식하는 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내 친구 하나가 아프리카에서 포로 가 되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사람 고기를 먹고, 먹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작은 부족이 살 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사람 고기가 충분했기 때문에 당장에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가축을 가두어 놓았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잡아먹듯이 그들은 그를 가두어 두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에게 먹일 다른 음식이 없었다. 그는 무척 배가 고팠으며, 뭔 가를 먹어야 했다. 결국 그들이 먹는 것을 얻어먹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간신히 한밤중에 어둠을 틈타 그곳을 빠져 나왔는데 나중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육식가였지만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배가 고팠고 너무 지쳤기 때문에 간신히 그것 을 먹었다. 먹으면서 그는 깜짝 놀랐다. 여지껏 먹어본 고기 중에 사람 고기가 가장 맛있었 던 것이다. 금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의 식인종들은 3천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3백 명으로 숫자가 줄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들이 사는 지역으로 들어가 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붙잡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의 자식과 아내를 잡아먹기 시작 한 것이다. 그래서 3천 명에서 3백 명으로 줄었다. 전세계 어디를 가나 인구 폭발에 따른 인 구문제가 가장 크다. 하지만 이 가련한 식인종들은 점점 줄어들어 머지않아 자취를 감출 것 이다. 그러나 이점을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대가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는 순간 그대가 죽 인 그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생명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형태이든 동물의 형태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기술이 발전하여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가 있고 그래서 더 이상 새나 짐승이나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리석 은 행동들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칼릴 지브란은 육식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무의식 속에 아직도 사회로부터 조건 지어진 그러한 습성이 남아 있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의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너희는 먹기 위하여 죽여야만 하고,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갓난 것에게서 어미의 젖을 뺏 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의 예배 행위가 되게 하라.' 예배의 행위가 되게 하라는 것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러한 습성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식인종들에 게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너희가 사람을 잡아먹을 때 그것이 하나의 예배 행위가 되게 하라." 육식가와 식인종의 차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랑과 이해와 자비가 넘치는 사 람은 채식가가 될 수밖에 없다. 또 나무들이 충분한 열매를 준다. 죽일 필요가 없다. 짐승 을 죽이는 것은 농사짓는 방법을 모르던 과거의 수렵시대에서 내려온 유물일 뿐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한 채식주의자의 공동 집단은 자이나교도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대는 놀 랄 것이다. 붓다가 채식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도들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무엇 때 문에 그렇게 되었는가? 불교신자들로 이루어진 아시아 전체가 어떻게 해서 육식을 하게 되 었는가? 그대는 여기서 인간의 교활한 생각을 보게 된다. 조금만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도 인간은 과거에 주저앉아 버리고, 탈바꿈을 하지 않는다. 마하비라와 고타마 붓다는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한 의식 상태로 성장해 가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육식을 하는 사람은 계속 무의식 상태에, 지상에 붙들려 있게 된다. 그는 의식의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다. 그 둘은 함께 존 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대는 더욱더 높은 의식 상태를 갖게 되든지, 아니면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조차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단지 입맛을 위해서 사람들은 짐승을 죽인 다. 짐승을 죽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맛좋은 음식을 구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전혀 불 필요한, 과거로부터의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붓 다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한 끼만을 먹도록 가르쳤다. 사실 한 끼만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과 학도 마찬가지로 하루에 한 끼의 식사를 권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게 먹을수록 수명이 길다 는 사실이 차츰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먹을수록 더 빨리 죽는다. 그 이유는, 맛을 위해 먹게 되면 강박관념이 되기 때문이다.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미국인들은 하루에 적어도 다섯 끼를 먹는 것이 평균이다.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천재들은 언제나 그렇다. 그는 당시의 증거만 가지고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 화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원숭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원숭이는 끊임없이 뭔가를 씹 고 있다. 다윈은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큰 간격을 메울 '잃어버린 고리'를 발견하는 데에 평 생을 바쳤다. 그래야 그의 진화론이 확고한 바탕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미국인들을 보면서 나는 다윈이 불쌍해 보였다. 거기 미국에 잃어버린 고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먹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3천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이 과식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 먹어대고 있다!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그대는 깨어있을 때는 하루 종일 원숭이처럼 행동할 수가 없지만, 적어도 껌이라도 씹는 다. 껌이란 그대에게 뭔가를 먹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잠잘 때조차도 그대는 이빨을 간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중에도 하루 종일 껌을 씹고 담배를 피우면서 뭔가를 끊임없이 먹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잠 속에서도 낮 동 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을 꾼다. 그래서 이빨을 가는 것이다. 여기 이상한 우연이 있다. 미국에서는 또한 3천만 명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다. 미국에서도 그들을 '거리의 사람들(street people)'이라 부른다. 이들 대부분은, 거의 전부가 흑인이다. 이들에게는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그리고 똑같은 숫자의 다른 3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너무 많이 먹어서 죽어가고 있다. 이드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부 백인이다. 따라서 6천만 명이 겪고 있는 이 문제는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만 이해해도 금방 풀릴 수 있 다. 그런데도 미국은 수많은 선교사들을 가난한 나라로 파견하고 있다. 간단한 논리다. 그들은 여기저기 가난한 나라로 가서 음식과 집과 옷을 준다. 가난한 사람 들은 쉽게 개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 3천만 명의 굶어 죽어 가는 미국인들은 이미 기 독교인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관심은 어떻게 하면 신 자 수를 더 늘리느냐에 있다. 최종적으로 숫자가 많은 쪽이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 이다. 또 한가지, 칼릴 지브란은 '갓난 것에게서 어미의 젖을 뺏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번은 내가 어떤 자이나교 집회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자이냐교야말로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채식가 집단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진실로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려면 우유를 마시거나 우유 제품을 먹는 것을 중지하라." 소 의 젖은 송아지의 것이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한 적이 있 는가? 다른 모든 동물들은 짧은 기간이 지나면 젖을 먹는 것을 중단하고 다른 음식을 찾는 다. 늙어 죽을 때까지 우유를 마시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것은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결과임 에 틀림없다. 첫째로 우유는 송아지를 위한 것이며, 송아지는 자라서 튼튼한 황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유에는 강한 황소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모든 영양분이 담겨 있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그 우유를 마신다면 결국 사람처럼 되지 않고 황소처럼 될 것이 아닌가! 게다 가 사람은 일부일처제이거나 때로 독신이지만, 황소는 독신생활을 모른다. 실제로 황소 혼자 서 수백 마리의 암소를 거느린다. 힌두교와 자이나교와 불교신자들은 우유가 가장 순수한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 지 않다. 또 이들은 우유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숭배하기까지 한다. 한때 나는 어떤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큰 아쉬람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 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가? 나도 이곳의 지도자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평범한 바보 같았다." 그들은 말했다. "그렇지 않다. 그는 위대한 성자이다. 그는 우유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둔다다리 바바(Dundadari Baba), '우유만 마시는 성자'로 불리 고 있다." 내가 말했다. "만일 그가 우유만 마신다면 '위험한 황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또 결국 그는 실제로 위험한 황소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유는 인간인 어머니에게서 나오 는 것이 아니라 동물 제품이다. 피와 마찬가지로 우유 역시 동물의 몸에서 나온다. 채식주의 자를 가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우유 제품을 먹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어린 동물의 새끼들이 먹을 것을 가로채는 일이다. 우유는 그들을 위한 것이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불교신자들이 육식을 하게 된 것은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붓다는 누구든지 구걸이나 탁 발을 한 때 먼 저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모든 제자들은 매일 마을로 구걸을 떠나 야 했는데, 누구라고 무엇을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었다. 요구를 하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주든지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승려가 와서 붓다에게 말했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붓다가 가르친 또다른 규칙에는, 탁발그릇에 사람들이 무엇을 담아 주든지 그것을 모두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 먹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양도 아니었다. 껌이나 담배 같은 것은 물론 없었으니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음식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너에 대한 존경심으로 준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 음식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릇에 담긴 것은 어떤 것도 버리지 말아 야 한다. 이 제자가 자기의 탁발그릇을 들고 와서 말했다. "저는 한 가지 궁지에 빠졌습니 다. 제가 탁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고기를 입에 물고 가다가 제 그릇에 그것을 빠뜨렸습니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 고기를 내버려야 합니까? 그러 면 아무 것도 버리거나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스승님께서는, 음식은 우리의 생명이니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고기 조 각을 먹어야 합니까? 그것 역시 고기를 먹지 말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고타 마 붓다조차도 눈을 감고 이 제자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양쪽 모두 위험하다. 그것을 버려도 된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례를 남기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마음대로 내버릴 것이다. 또 그것을 먹어도 된다고 말하면, 사람들 에게 고기 먹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된다. 붓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런 종류의 사건은 매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 팔십 평생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 러니 먹으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래서 붓다는 그 고기 조각을 먹으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되 었다. 그후 불교가 아시아 전체에 전파되자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근거로 삼아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아시아의 모든 불교신자들이 한 마리 멍청한 까마귀 때문에 고기를 먹게 되었 다. 그들은 붓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까마귀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와 마하비 라는 인간 존재가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동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인간은 채소나 그 밖의 과일들을 생산할 수 있으며, 현대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많은 기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련은 상호교배를 통하여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과일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이따금 그대도 순수한 자연식품이 아닌 것을 먹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단지 이 것이 교배에서 얻어진 식품이라는 것을 그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오렌지 를 즐긴다. 오렌지 역시 순수한 자연 열매가 아니다. 레몬과 모삼비(mossambi)의 교배로 얻 어진 것이다. 어떤 열매가 교배로 얻어진 것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매우 간단한 방법이 있다. 교배로 얻어진 열매는 씨앗이 쓸모가 없다. 그런 열매는 씨앗을 심어도 소용이 없다. 언제나 교배에 의해서만 번식할 수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잘못이 없다. 그리고 소련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수천 가지의 과일을 탄생시켰다. 갈수록 더 맛있고 영양가 있는 열매를 얻을 수가 있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라도 식인종이 될 필요가 없다. 내가 볼 때는 고기를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식인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자연의 아이들이다. 왜 식인종만 비난하고 그대 자신은 비난하지 않는가? 칼 릴 지브란은 자신이 자라고 교육받은 전통의 낡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를 깨달은 사람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 그는 매우 가까이 접근하기는 했어도 그 사원 안으로 아직 들어오지 못하였다. 눈부신 통찰력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긴 했어도, 아 직 사원의 문지방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하나의 예배 행위가 되게 하라'고 말한 다. 내 느낌으로는, 그 자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을 깊이 생각했어야 한다. 단지 은폐하 기 위하여 '그것은 하나의 예배 행위가 되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 의 모든 야만인들이 인간 존재를 희생시켰으면서도 그것이 '예배 행위'였기 때문에 식인 종 취급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캘커타의 커다란 깔리(Kali) 여신의 사원에 가면 매일같이 '예배 행위'로 동물들이 희생되고 있다. 또 일단 희생되면 그것들은 다시 신자들에 게 프라사드(prasad), '신의 선물'로 나누어진다. 그곳에 들어갔을 때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교활한가! 고기 를 먹고 싶으니까 그것을 '예배 행위'로 만든 것이다. 나는 캘커타의 깔리 대사원의 제사장 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것이 정말로 예배 행위라고 생각하는가? 동물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그가 말했다. "희생의 제물이 된 동물들은 축복을 받았다. 곧바로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을 제물 로 바쳐서 곧바로 천국으로 보내지 않는가?" 간단한 사실이다. 그대는 제물이 아니다. 왜 그 대 자신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가? 그런 지름길을 발견했다면 왜 동물만 제물로 바치는가? 그리고 언제 동물이 천국에 보내 달라고 부탁했는가? 그리고 세상에는 천국으로 가서 즐겁 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수천만 명이 있다. 그들을 제물로 바치라! 인도의 벵골 지역에 서는 주식이 쌀과 물고기이다.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같은 사람도 칼릴 지브란처럼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그것을 감추고 있다. 그들은 물고기를 물고기라고 부르지 않고 잘단디(jaldandi), '물의 꽃'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존재계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라마크리슈나가 살던 절엘 갔었다. 그곳엔 많 은 제자들이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라마크리슈나 교단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이름을 바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당신들은 물고기를 물꽃이나 꽃물로 바꾼 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무의식 상태에서는 이러한 갖가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또 너희의 식탁을 제단으로 삼아, 그 위에서 산과 들의 깨끗하고 순결한 것들이 너희 속안의 더 깨끗하고 순결한 것을 위해 희생되도록 하라. 나는 이 말을 통렬히 비난한다. 그는 말하고 있다. 숲 속의 짐승들은 순결하다. 그것들을 더 순결한 것을 위해 희생시키라. 그 더 순결한 것은 그대 안에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정 반대가 진실이다. 동물들이 사람보다 훨씬 순결하고 순진무구하다. 동물들이 세계대전을 일 으켰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떤 동물이 아돌프 히틀러처럼 되겠는가? 어떤 동 물이 돈을 긁어모아서 주식을 사 모으는가? 밤중에 남의 것을 훔치는 동물이 어디에 있는 가? 강간을 일삼는 동물이 어디 있는가? 어떤 동물이 정신과 병원에 찾아가 "나는 미쳐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가? 어떤 동물도 살인하지 않고 자살하지 않는다. 어떤 야생의 동물도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 는다. 이들에게는 성직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란 오히려 사람들을 성적으로 타락시 킨다. 그러면서 그들은 위선적인 철학적 전략으로 사람들에게 독신생활을 가르치는데, 독신 생활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성직자들은 독신생활을 가르쳐 왔지 만, 한편으로 그들은 온갖 종류의 성적 타락과 동성연애를 일삼아 왔다. 그리고 인류가 직면 한 최대의 질병인 에이즈(AIDS)는 동성연애에서 생겨났다. 그런데도 아무도 독신생활이 유 죄라고 용기 있게 말하지 않는다. 에이즈는 바로 독신생활의 산물이다. 동성연애는 여자들의 출입을 금지한 수도원과 남자의 출입을 금지한 수녀원에서 탄생하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은 거의 1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엄격 한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을 기본적인 규율은 일단 그곳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여자는 갓난아기라도 절대로 그 수도원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1천 년 동안 어떤 여자도 그 수도원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독신생활을 가르치는 것은 오줌 누는 것이 비종교적인 일 이니까 오줌을 누지 않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 리고 내 말하건대, 세상에는 그런 짓까지 할 준비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때 그대 는 이중인격을 갖게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는 오줌을 누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아무도 없 는 수도원 안에서는 오줌을 눌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오줌을 누지 않고 살겠는가? 정말로 오줌을 누지 않기를 바란다면 물을 전혀 마시지 말아야 한다. 만일 정말로 독신생활을 바란다면 음식이나 물이나 대기로부터 어떤 영양분도 섭취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 죽은 사람만이 독신생활을 할 수 있다. 살아있을수록 그대는 더 많은 에너지를 갖게 되며, 그 에너지는 주위에 나누어 주 여야 한다. 매일 같이 영양분으로부터 더 많은 에너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독신생활은 종 교가 인간에게 가르치는 것 중에서 가장 추한 것이다. 그 뒤에는 숨은 목적이 있다. 일단 인 간에게 확신을 줄 수만 있으면- 실제로 그들은 인류 전체에게 독신생활이 훌륭한 것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하나는 독신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이 은연중에 '우리는 그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독신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반쪽은 독신생활을 원하지 만, 나머지 반쪽은- 그리고 이 반쪽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더 강력하다- 그 에너 지를 발산할 방법을 찾게 된다. 그래서 이들 역시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한 가지밖에 하는 일이 없다. 즉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을 파괴하는 일이며, 불 필요하게 왜곡되게 만든다. 이 문장에서 칼릴 지브란은, 그가 매우 가까이 접근하긴 했어도 충분한 깨달음을 얻은 신 비가가 아니라는 내 말을 똑똑히 증명하고 있다. 그대가 그 깨달음의 사원에 가까이 왔느냐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원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면 몇 걸음 떨어 져 있든, 몇 십 리 떨어져 있든 마찬가지다. 너희가 짐승 하나를 죽일 때는 마음속으로 그 짐승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를 죽이는 바로 그 힘으로 나 역시 죽임을 당하며, 나 또한 먹힌다. 너를 내 손에 인도해 준 그 법칙이 또 나를 더 힘있는 손에 인도할 것이기에. 너의 피나 나의 피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나무를 키우는 수액일 뿐. 이것은 말에 불과하다... 이 문장이 없었다면 칼릴 지브란의 이 작품은 완 전무결했을 것이다. '너희가 짐승 하나를 죽일 때는'- 하지만 왜 짐승을 죽여야 하는가? 그것이 이상하다. 그대가 짐승을 죽이는 것은 게임이고 사냥이면서, 짐승이 그대를 죽일 때 는 아무도 그것을 게임이고 사냥이라고 하지 않는다. 짐승이 그대를 죽이면 사냥이 아니라 '재난'이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기준은 항상 교활한 마음에서 생겨난다. 육식가들은 칼릴 지브란 같은 사람이 자신들의 추악한 생활 방식을 옹호하기 때문에 대단히 기뻐할 것이다. 또 너희가 사과를 한 입 깨물 때에 그것에게 말하라. 너의 씨앗이 내 몸 속에서 살아있을 것이며... 이것 또한 이상하다. 왜 그대는 사자에게로 가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제발 나 를 먹어 주라. 나의 씨앗이 너의 몸 속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너의 미래의 싹이 내 가슴속 에서 피어나리라. 그대는 언제쯤 사자의 가슴속에서 피어날 것인가? 그리하여 너의 향기가 내 숨결이 되리라. 하지만 한 번만 입장을 바꾸어서, 그대의 향기가 한 마리 아름다운 사자 의 숨결이 되게 하라! 칼릴 지브란이 이 말까지 집어넣었다면 나는 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온 계절을 즐기리라. 대단히 좋은 일이다! 짐승에게 잡아먹혀서 그 짐승과 함께 온 계절을 즐기라! 사실 그 짐승은 인간보다 훨씬 잘 즐길 것이다. 또 가을이 되어 포도주를 짜기 위해 포도밭에서 포도열매를 따모을 땐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라. 하 지만 그대는 언제쯤 포도 짜는 기계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나의 열매 또한 포도주 짜는 기 계 속으로 거두어질라. 그런 다음 나 역시 새 포도주처럼 영원한 그릇에 담겨지리라. 이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그는 스스로 포도밭으로 가서 자신을 흙덩이에 섞어 포도밭을 기름 지게 하는 거름이 됨으로써 그것을 입증했어야 한다. 그래야 그 포도열매들이 그의 생명이 되고, 또 그 포도열매들이 포도주자 되었을 때 그는 그 포도주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을 철저히 부정한다. 그리하여 겨울이 되어 그 포도주를 따를 때면, 잔마다 하나의 노래가 너희 마음속에 있게 하라. 하지만 짐승을 죽이고 포도주를 따르는 쪽은 언제 나 그것이다. 이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 노래 속에 그 가을날과 포도밭과 포도주 짜던 추억을 잊지 말라. 하지만 먼저 그대가 포도주 짜는 기계 속으로 들어가라! 이 부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이중적인 기준이 있는 것에는 위선자들이 있다. 알겠는가? 삶의 가장 깊은 비밀 일에 대하여 I 그 다음은 농부 한 사람이 물었다. 우리에게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너희가 일을 하는 것은 대지와, 또 대지의 영혼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서다. 게 으름이야말로 계절을 외면하는 것이며, 장엄하고도 자랑스럽게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 의 행렬에서 벗어나는 길이기에. 너희가 일을 할 때 너희는 한 개 피리요, 그 피리 속으로 시간의 속삭임이 음악으로 변해 울려 퍼진다. 남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데 너 희들 중 누가 혼자서 벙어리 갈대 노릇을 하고 싶겠는가? 너희는 언제나 일이란 재난과 같 은 것이요, 노동이야말로 불행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일을 할 때는 대지의 가장 깊은 꿈의 한 조각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 꿈이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너희 몫으로 남겨진 그 한 조각을. 또 일을 통해서만 너희는 진실로 생명을 사랑하 게 되며, 또 일을 통해 생명을 사랑하는 길만이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게 되는 길이 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괴로운 나머지 세상에 태어남을 고통이라 하고 육신으로 살아감을 너 희의 이마에 씌어진 저주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너희들 이마에 흐 르는 땀만이 거기에 씌어진 저주를 씻어 줄 것이라고. 너희는 또 인생이 암흑이라는 말을 들어왔으며, 삶에 지친 나머지 너희 역시 삶에 지친 자들의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정열이 없을 때 인생은 진실로 암흑이며, 또 모든 정열은 깨달음이 없는 한 장님에 불과하다. 또한 모든 깨달음은 일하지 않는 한 쓸모 없는 짓이며, 모든 일은 사랑이 없는 한 헛된 것이다. 너희가 사랑으로 일할 때에 너희 자신 을 스스로에게 붙들어매고, 또 너희 서 로끼리 붙들어매고, 마지막엔 신에게 붙들어매게 된다. 여기 이 농부의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서 알무스타파는 창조의 가장 깊은 체험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오직 창조적인 사람에게만 생명이 있다. 생명이란 다름 아니라 더 많은 아름다 움, 더 많은 진리를 창조하기 위한 길고 끝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의식 상태를 창 조하여서 마침내는 그대 자신의 존재 속에 신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다. 창조를 모르고서 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창조성이야말 로 존재의 가장 큰 기쁨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이 말들을 머리가 아니라 그대의 가슴으로 들으라. 이 말들은 가슴에서 나온 말들이며, 또한 그것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되는 것 이 아니라, 그대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대화, 가장 깊은 대화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그러한 대화를 완전히 잊고 지냈다. 그 다음은 농부 한 사람이 물었다. 우리에게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너희가 일을 하는 것은 대지와, 또 대지의 영혼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 대는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 주변 어디에서나 존재계 전체는 끊임없이 창조를 계속하 고 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고 나서 7일째에 휴식을 취했다는 성경의 말은 터무니없다. 그 이후로는 창조에 대한 말이 없다. 하느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휴식을 취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무슨 휴식이 그러한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죽은 것이 틀림없다! 하느님이 엿새 동안에 세상 모두를 창조했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 나는 거의 20년 동안 전국을 여행하였다. 한 늙은 재단사가 내 옷을 만들어 주곤 했다. 어 느 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급히 옷 한 벌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엿새 동안에 꼭 그 옷을 만들어 주세요. 7일째에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늙은 재단사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반대하진 않습니다. 물론 준비가 되겠지요. 하지만 세상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에 이 큰 세상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혼란스러운 겁니다! 당신의 옷도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그러니 나중에 대해서 따지진 마십시오." 불과 엿새 동안에 모든 존재를? 나는 그 대에게 말한다. 창조는 끝이 없는 것이며, 7일째는 결코 오지 않는다. 나무들에게 휴일이 있고, 강물에 휴일이 있는가? 일요일(sunday)에 태양(sun)은 떠오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날은 태양의 날(day), 즉 태양의 휴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까지도 휴식을 취하 는데, 왜 가련한 태양만 계속 떠올라야 하는가? 존재계는 끊임없는 창조성 그 자체이다. 그 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창조되지 않았으며, 그 자체가 바로 신성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의 머 리와 가슴속에 신의 정확한 의미를 심어 주고 싶다. 신은 창조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창 조성 그 자체를 뜻한다. 또 내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바로 뭔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비창조적인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비창조적일수록 그대는 시작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자연으로부터, 대지로부터, 하늘로부터, 별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알무스타파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 '너희가 일을 하는 것은 대지와, 또 대지의 영혼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대의 일이 단지 그대에게 부담을 주고 짐이 된다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존재계 전체와 발걸음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대는 뒤로 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계와 박자를 맞추어 함께 물결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행복의 길이다. 다른 길이 없다. 그리고 대지와 하늘에 리듬을 맞추지 못하고 뒤쳐지는 것이 바로 불행이다. 인간은 자신을 낳아주고 계속해서 먹여 살리는 창조적인 힘과의 접촉을 상실했기 때문에 언제나 불행하고 또한 계속 불행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일하고 창조하고 존재계 전체와 춤추는 것보다 무덤 속에서 편안히 쉬는 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게으름이야말로 계절을 외면하는 것이며... 그토록 영광된 계절에 우리는 그토록 아름다운 존재를 부여받았다. 가을에 낙엽이 나무들에서 떨어지기 시작할 때 그대는 그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땅에 수북히 쌓인 낙엽들 위로 바람이 지나갈 때, 그 노랫소리를 그대는 들었는가? 죽은 나뭇잎이라 해도 인간처럼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 죽은 뒤에도 나뭇잎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저들은 나무가 자신들을 내버렸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저들은 자연 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마음이 가는 길이다. 불평도, 원망 도 없이, 다만 그대가 요청하지 않고 목표하지 않았어도 존재계가 그대에게 주는 모든 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비가 올 때 그대는 춤추어 본 적이 있는가? 아니다, 사람 들은 우산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은 비에 관해서 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존재계의 끊임 없는 창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많은 우산들을 만들었다. 대학에 다닐 때 나는 비가 오면 어김없이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교수들도 "비가 오면 저 학생을 붙잡을 수 없다. 저 학생은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그곳에는 하늘을 찌르는 높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가장 호젓한 길이 있었다. 그 조용하고 인적 없는 길에는 교수들과 교직원들을 위한 방갈로 몇 채가 있었다. 그곳은 한적 한 장소였으며, 그 길의 끝에 위치해 있었다. 맨 끝의 방갈로는 물리학과장의 집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내가 그곳에 나타나면 비가 오 고 있거나, 아니면 비가 오고 있으면 내가 그곳에 나타나리라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래서 우리는 서로 낯이 익었다. 그들은 '도대체 저 미친 학생은 누구일까?'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떨어지는 비와 춤추는 바람에 흠뻑 젖은 채... 그리고 그곳이 길의 마 지막 지점이었기 때문에, 나는 비가 계속 내리면 그곳의 나무 아래 앉아 있곤 했다. 그 집 가족들은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서 '저 학생이 누군가?'를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집 의 가장인 물리학과장은 다른 이유 때문에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대단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늘 도서관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도서관 안에 우리 두 사 람밖에 없는 날도 많았다. 그는 차츰 나에게 애정과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자네는 조 금 이상하네. 학생이 교실에서 수업을 들어야지. 어째서 맨날 도서관에만 있는가?" 내가 말 했다. "수업 시간에 듣는 교수의 강의는 거의 대부분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교수들은 자기들이 30년 전 대학에 다닐 때 배운 것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 30년 동안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나는 발전하는 지식, 지혜, 과학과 보조를 맞추고 싶습니다. 사실 도서관에서는 최근에 발견된 사실들은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토론을 벌이고 싶을 때만 수업에 들어갑니다. 교수들도 내가 도서관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수업에 들어가기만 하면 말썽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30년의 간격이 있고, 나는 모든 최신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언젠가 자네를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네. 자네를 내 아이들과 아내에게 소개시키고, 또한 대학에 학위를 따러 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배우 러 온 학생이 있다는 것을, 증명서나 우등상 취득이 목적이 아니라, 온갖 방면의 팽창하는 지식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온 학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네. 비록 내가 물리학과의 학과장이고 자네는 물리학에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때로는 자네가 나보다 물리 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네. 이제 30년의 간격을 메우기엔 너무 늦었네. 방법이 없어." 그래서 어느 날 그는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는 자기의 가족들이나를 만나 나와 대화를 나누고 내 이야기를 듣게 되면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매우 충격 을 받았다. 우리가 그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온 가족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집안으로 달아나 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전에는 식구들이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내 아내도 대학을 졸업하였고, 아이들도 교육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예의 없는 행동을 하다 니..." 내가 말했다. "당신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가족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 우 낯이 익습니다. 서로 말을 나눈 적은 없지만,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서로를 잘 알고 있었 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나는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네." 내가 말 했다. "그러니 당신의 가족들의 행동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끼거나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하는 행동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갔으며,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도대체 모두들 웃으면서 집안으로 달아난 이유가 뭐지? 이 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인가? 그리고 내가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올 테니 애정을 가지고 맞아야 한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손님을 좋아해 왔습니다. 비가 올 때면 이 학생은 우리 집 앞을 거닐면서 자기의 시간 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까지 빼앗습니다. 왜냐하면 이 학생이 떠날 때까지 우리 도 그를 바라보느라 우리도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이 학생은 매우 흥미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나는 종종 바람 속을 몇 마일씩 달리거나- 이때는 얼마나 많은 생동감을 느끼게 되는가-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지 않고 오랫동안 걷는 것 을 좋아한다는 것을. 무덥고 태양이 내리쬐는 날도 땀을 흘린 다음 호수로 뛰어드는 그 나 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날씨가 더우면 물은 얼마나 시원하게 느껴지는가?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는 뒤쳐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알무스타파는 매우 온건하게 '삶과 발걸음을 맞추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삶의 '앞에서' 춤추라고 가르친 다. 왜 삶이 앞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가? 삶으로 하여금 그대에게 발을 맞추도록 하 라. 그때 그대는 지구상의 나머지 수십 억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거대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게으름이야말로 계절을 외면하는 것이며, 장엄하고도 자랑스럽게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의 행렬에서 벗어나는 길이기에. 생명은 영원을 향해, 무한을 향해, 궁극의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 나가고 있다. 그 행렬에서 벗어날 때 그대는 단지 하나의 살아있는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웃을 수 없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이미 죽어 버린 것이다. 앞으 로 50년을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은 삶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미지의 세계를 향해 쉼없이 움직여 나가는 아름다운 생명의 행렬의 일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며,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도전이다. 너희가 일을 할 때 너희는 한 개 피리요, 그 피리 속으로 시간의 속삭임이 음악으로 변해 울려 퍼진다. 그대가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지, 그대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필요가 없다. 구두 한 짝을 만드는 일 속에 서도... 정열을 다해 완전히 몰입해서 구두를 만들 때 그대는 그 행위 속에서 사라지고, 그리 하여 그 어떤 대통령보다 훨씬 많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일속에서 그대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 그대는 존재계의 입술이 부는 한 개 피리가 된다. 그대의 모든 동작이 은총으로 변하 고, 그대의 모든 순간이 대지에게 천상의 음악을 들려준다. 그때 그대는 하나의 도구가 된 다. 남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데 너희들 중 누가 혼자서 벙어리 갈대 노릇을 하고 싶겠는가? 우주가 얼마나 넓은가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실로는, 우리의 우주는 어떤 경계선을 가진 고정된 우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 하고 있으며,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빛에 가까운 속도로 모든 별들이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오늘의 우주는 어제의 우주보다 훨씬 크다. 내일 그대는 훨씬 더 큰 우주에 살게 될 것이다. 존재계와 존재계의 팽창에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거대한 우 주의 하모니에 가락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나는 날마다 두세 명의 사람들을 본 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있는데도 무덤에서 갓 꺼내온 사람들 처럼 죽은 듯이 자리에 앉아 있다. 춤과 음악에 참여할 수 없다면 그들은 이곳에 오지 말았 어야 한다. 심지어 내가 합장한 손으로 인사를 보낼 때에도 그들은 죽은 듯이 뻣뻣이 앉아 있다. 너희는 언제나 일이란 재난과 같은 것이요, 노동이야말로 불행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인간은 그런 거짓말만 듣고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은 거짓말을 가르 친다. 이런 거짓말은 그대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의 무의식, 무지몽매에 서 그런 거짓말이 생겨났을 뿐이다. 이 나라에선 그러한 것을 잘 볼 수 있다. 이 나라는 지 난 5천 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 분열되어 있다. 그런데도 힌두 인들은 그를 위대한 성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은 마누(Manu)이고, 그가 쓴 책이 <마누 법전(Manusmriti)>이다. 이 책은 인간을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 놓았다. 가장 높은 계급 이 바라문(brahman)으로 이들은 절대로 일을 하지 않으며, 단지 예배나 기도만 할뿐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계급이 수드라(sudra)인 불촉천민으로, 이들의 노동으로 사회 전체가 지탱 된다. 바라문이 없어도 그대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 수 있다. 사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문 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수드라 없이는 그대는 살 수 없다. 그들이 없다면 누가 거리와 하수 도와 더러운 변소를 청소해 주겠는가? 사실 인도의 대부분의 집들엔 변소가 없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거리든 길바닥이든 아무 데서나 똥오줌을 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수준 높은 문명인이라고 자처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들에게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대해 왔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기본이다. 그들이 없이는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는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시내 안에서 살 수도 없으며 언제나 도시 밖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의 또다른 이 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안탸자(antyaja). '도시 밖에서 사는 사람'이다. 모든 수드라들은 손에 종을 하나씩 들고 다녀야 한다. 이것은 인도 북부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대는 자동차의 경적이 서양에서 발명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수천 년이나 지난 힌두교 사회의 발명품이다. 수드라들은 시내를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몇 군데에서만 그것이 허용되 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끊임없이 종소리를 내 며 다녀야 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가! 개나 원 숭이나 소들은 걸어다닐 수 있고 경찰도 걸어다닐 수 있지만, 수드라에게는 금지되었다. 그 의 그림자만 닿아도 목욕을 해서 자신을 청결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부 인도에서는 훨씬 더 악랄하다. 모든 수드라들은 등뒤의 허리띠에 긴 빗자루를 메고 다녀야 했고, 역시 손에는 종을 하나씩 들었다. 왜 긴 빗자루를 달아야 했는가? 그것은 땅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걸어가면 등뒤에 매달린 빗자루가 뒤에서 그의 발자국을 청소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 나라가 문명국가라고 생각하는가? 바라 문 계급에 속한 남자는 어떤 여자와도 결혼할 수 있다. 두 번째 계급인 무사 계급에 속한 여자든, 아니면 세 번째 계급인 바이샤(vaishya), 즉 상인 계급에 속한 여자든 상관이 없다. 심지어 네 번째 계급인 수드라에 속한 자와도 결혼할 수 있다. 물론 수드라 계급인 여자와 결혼하면 그는 가장 높은 계급에서 추방당해서 수드라 계급이 된다. 이것이 유일한 벌이다. 하지만 수드라는 자기 계급보다 높은 어떤 여자와도 결혼할 수 없다. 마누에 따르면 수드라 가 다른 계급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살인보다 더 나쁜 범죄이다. 아직도 마누는 힌두교인 들에게 입법자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만일 아무도 이러한 바보 천치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들을 제거 한단 말인가? 수드라에게는 어떤 교육도 허용되지 않으며, 어떤 종교 경전을 읽는 것도 금 지되어 있다. 사실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읽을래야 읽을 수도 없다. 내가 어려서 처 음으로 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몇 명의 아이들이 교실 밖에 앉아서 수업을 받는 것을 보 고 깜짝 놀랐다. 나는 선생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왜 이 아이들은 교실 밖에 앉 아서 수업을 받나요?" 선생이 말했다. "저 아이들은 수드라 계급이다. 아무리 법이 강요한다 해도 읽을 수가 없다. 몰래 종교 경전을 읽었다가 발각되면 사형이다. 종교 경전에 대해서는 아예 잊고 살아야 한다. 심지어 '들을' 수조차 없다." 어디선가 바라문이 베다서를 암송하 고 있어도, 수드라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사회가 일과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기생충들인 바라문들은 가장 높 은 계급이며, 그대는 그들의 발 아래 엎드려야 한다. '너희는 언제나 일이란 재난과 같은 것 이요..." 또 종교 성직자들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노동자와 일꾼을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먼저 그대 쪽에서 노동자와 일꾼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그의 자존심과 인격을 짓밟는다. 그래서 그는 다른 직업을 갖지도 못하게 된다. 힌두교 사회에서는 이동이나 교체가 없다. 바라문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태어난 다음에 도 중에 바라문이 되는 법이 없다.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현명하다 해도, 아무리 부처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바라문이 될 수 없다. 또 바라문 계급은 지금까지 단 한 명의 부처와 같은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다. 반면에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다. 수드라 계급은 거의 부처와 똑같 은 사람들을 많이 탄생시켰다. 물론 이들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 면, 까비르는 베짜는 직공이었으며, 베짜는 직공은 수드라 계급에 속한다. 그는 교육들 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고타마 붓다처럼 세련된 말솜씨를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단순하고 평범한 언어로 그가 말한 것들 속에서 똑같은 깊이의 통찰력이 담겨 있다. 때로는 그의 말이 훨씬 야생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타마 붓다는 잘 다듬어진, 잘 닦인 다이아몬드지만, 그대는 다이아몬드에 더는 손질을 할 수 없다. 까비르는 이제 막 광산에서 출토된 코히눌(Kohinoor), 즉 영국 황실에서 소장하 고 있는 인도산의 커다란 다이아몬드다. 이점을 상기하라. 코히눌이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그것은 현재 영국 여왕의 왕관에 꽂혀 있는 것보다 세 배나 컸다. 그런데 그것을 아름다운 모양으로 다듬고 광택을 내기 위해서 3분의 2가 잘려져 나간 것이다. 까비르는 잘려지지 않 은, 이제 막 발견된 오리지널 다이아몬드다. 그는 코히눌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들을 가지 고 있다. 라이다스는 구두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역시 같은 차원의 의식에 도달하였다. 그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종교 경전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그의 경우만 봐도 모 든 종교 경전들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두를 만들어 파는 라이다스 같은 사람 도 고타마 붓다와 같은 높이에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면 쓸데없이 종교 경전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무엇인가? 고라(Gora)... 이 사람은 옹기장이였다. 그 역시 불촉천민인 수드라 계급이었다. 하지만 까 비르, 라이다스, 고라의 시들은 대단히 아름답고 진실하며, 불필요한 미사여구가 없다. 순수 하고 소박하다. 바라문 계급은 라이다스와 고라와 까비르 같은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배출하 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 행세를 하고 있다. 또한 그들 은 가장 비생산적인 사람들이다. 전혀 일을 하지 않고, 창조라는 것을 모른다. 나는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그들은 기생충들이고, 피를 빨아먹는 모기떼들이다. 그들을 땅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일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 야 한다. 왜 그들은 까비르나 붓다 같은 사람을 배출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연과 존재계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 비창조적인 상태에서는 누구도 별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같은 곡조로 춤출 수가 없다. 너희는 언제나 일이란 재난과 같은 것이요, 노동이야말로 불행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 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일을 할 때는 대지의 가장 깊은 꿈의 한 조각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 꿈이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너희 몫으로 남겨진 그 한 조각을. 사랑과 헌신과 기 쁨으로 일하고 창조할 때 그대는 참여자가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는 존재계 전체 의 창조성의 한 부분이 된다. 그대의 삶은 거대한 은총과 축복에 젖는다. 존재계는 실현해야 할 꿈이 있다. 그 꿈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궁극적으로 신의 자리로 데려가는 일이다. 그 리고 이 꿈은 태초부터, '그 꿈이 생겨났을 때부터 너희 몫으로 남겨진' 꿈이다. 그대는 가 장 멀리 떨어진 별에 가닿기 위하여 쏘아진 존재의 화살인 것이다. 또 일을 통해서만 너희는 진실로 생명을 사랑하게 되며 생명에 대한 그대의 사랑을 어떻 게 나타낼 것인가? 여기 아름다운 수피(Sufi)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위대한 왕이 날마다 이 른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말을 타고 도시로 가곤 했다. 그것은 그에게는 좋은 운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도시가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으며, 그의 수도가 갈수록 훌륭한 도시로 변화해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그는 그 도시를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 운 장소로 만들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를 당황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는 늘 한 장소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아마도 1백 20살은 먹어 보이는 노인 하나가 매일 처럼 정원에서 씨를 뿌리고,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앞으로 몇 백 년이 지나 야 충분히 자라며, 또 수명이 4천 년이나 되는 나무들이었다. 그는 당황했다. 이 사람은 이제 무덤에 반쯤 발을 들이밀고 있는 나이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 씨앗을 뿌리고 있는 걸까? 그는 그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절대 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이 자신의 노동의 결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었다. 어느 날 왕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는 매일같이 이 앞을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같은 의문이 떠오릅니다. 이제 도저히 당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 나는 알고 싶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그 씨앗들을 뿌립니까? 이 나무들은 당신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열매 를 맺을 겁니다." 노인은 왕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만일 나의 조상들도 그렇게 생각 했다면 나는 이 나무의 열매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이 아름다운 정원도 존재하지 않을 것 입니다. 나는 여러 세대를 위해 이 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조상들이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나는 그 열매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내 자식들과, 자식의 자식들은 어 떻게 하란 말인가요? 만일 그애들 역시 당신과 같은 의견이라면, 그때는 정원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먼 곳에서도 이 장소를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수 천 년 된 나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씨앗을 심어 놓으면... 봄이 와서 초록색 이파리들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 너무나 기뻐서 내 나이를 까맣게 잊게 됩니다. 내가 계속해서 창조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나는 언제까지나 젊게 살수가 있습니다. 죽음은 쓸모 없는 사람들을 데려 갑니다. 그 때문에 내가 이 나이가지 살아있고, 아직도 젊어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내가 자 연과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기 때문에 죽음의 신이 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없으면 자연은 나를 그리워할 것이고, 나를 대신할 다른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아 무도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젊은데도 불구하고 다 죽어 가는 사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비창조적이기 때문입니 다." 생명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은 더 많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고, 그 생명을 더 아름답 고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다. 그대가 태어났을 때보다 이 지구를 조금이라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한, 그대여 지구를 떠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내가 아는 유일한 종교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창조성의 종교를 가르친다. 또 더 많은 생명을 탄생시킬수록 그대의 존재는 탈바꿈한다. 왜냐하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신의 한 부분, 신성의 한 부분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일을 통해 생명을 사랑하는 길만이 삶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게 되는 길이다.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이 무엇인가?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형태와 모습만이 변 할 뿐이다. 오래된 이파리는 떨어지고, 새 이파리가 나온다. 늙은 나무는 사라지지만, 사라지 기 전에 그 나무는 이미 수만 개의 씨앗을 사방에 퍼뜨렸다. 인도에는 다음과 같은 나무가 있다. 아마도 저 뒤쪽에도 그 나무가 있을 것이다. 그 나무 의 이름은 쎄말(samal)이다. 그 나무는 매우 지성적인 나무다. 왜냐하면... 이 나무는 어찌나 큰지, 그 그늘 아래에 수천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다. 자연히 다음과 같은 걱정이 뒤따랐다. 만일 씨앗들이 나무 바로 아래에 떨어지면 햇빛을 받지 못하니까 싹을 틔우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 그 씨앗들을 가능한 한 멀리까지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 래서 쎄말 나무는 솜털로 둘러싸인 씨앗을 만들어 내었다. 이 보드라운 솜털은 아름답기 그 지없다. 이 솜털 때문에 씨앗들은 땅으로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바람에 날려 멀리까지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나무는 씨앗들이 맘놓고 자랄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해 주는 것이다. 이 나무는 어리석지 않다. 바로 그 지성이 신의 다른 이름이다. 이 쎄말 나무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지만, 죽기 전에 자신의 자식들인 수천 그루의 어린 쎄말 나무들이 비와 태양과 바람 속에서 춤추면서 똑같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괴로운 나머지 세상에 태어남을 고통이라 하고 육신으로 살아감을 너 희의 이마에 씌어진 저주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너희들 이마에 흐 르는 땀만이 거기에 씌어진 저주를 씻어 줄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그런 거짓말을 사람들에게 해 왔다. 사람들이 믿을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 바로 성직 자라는 직업인 것 같다.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네가 어떤 일을 해도 너희 운명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것은 너의 이마에 적혀 있다." 그대의 이마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 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내용이 적혀질 뿐이다.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 또 설령 그곳에 어떤 것이 적혀 있다 해도,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 땀방울이 그것을 씻어 줄 것이다. 설령 그곳에 어떤 것이 씌어져 있다 해도 말끔히 씻겨 버리도록 강한 정열을 가지고 창조적이 되라." 물론 실 제로는, 그 곳엔 아무 것도 씌어져 있지 않다.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게 세상에 왔다. 그대가 무엇이 되느냐는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바보들만이 점쟁이들을 찾아가고, 바보들만이 사 주팔자를 따진다. 지성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 자신의 삶을 창조한다. 점쟁이들이 나 사주팔자 때문에 괜히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히려 삶을 더 많이 사랑하고,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배우라.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행하라. 너희는 또 인생이 암흑이라는 말을 들어왔으며, 삶에 지친 나머지 너희 역시 삶에 지친 자들의 말을 되풀이한다. 여기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종교 경전들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나고 있다. 세상의 종교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암흑이고, 인생은 형벌이다. 너는 전생 에 악한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모든 불행과 고통을 겪는 것이다." 이 사람들 자신이 비창조적이고, 삶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이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세상의 성자라고 하는 이들을 보라. 그들이 기독교의 성자든, 힌두교의 성자든, 이슬람교 나 자이나교의 성자든 아무 차이가 없다. 그들은 모두 삶에 반대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대는 삶을 버리고 떠나야 하며, 그래야만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을 버리고 떠나면, 그대는 자연히 비창조적이게 된다. 그래서 소위 성자라고 하 는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창조적인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낙원이 되었을 것 이다. 그들이 삶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비참해졌기 때문에, 불행에 지쳤기 때문에, 그들은 삶에 뭔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삶에는 아무 것도 잘못이 없으며, 잘못된 것은 그들 성자들이다. 그대 의 성자들은 모두 병자들이며, 정신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정신치료를 받게 하는 대신에 그대는 그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에고를 충족시켜 준다. 그들은 심지어 더 슬픈 표정을 짓는다. 슬픔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에고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에고를 충족시키기 위해 싸우고 투쟁해야 한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수많은 경쟁자가 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직업이 아니다. 하지만 성자에게는 경 쟁자가 없다. 성자의 직업이야말로 경쟁자가 없는 유일한 직업이다.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물구나무선 요가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아무도 경쟁하러 오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고, 몇 달 동안 금식할 수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와 그대를 숭 배할 것이다. 그대에게 꽃을 바치고, 발아래 엎드려 절하고,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그 가르침은 병든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을 오히려 병들게 한다. 인류는 지금까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그들은 아직도 권세를 가지 고 있다. 또 사람들은 어떤 나무도, 어떤 산도, 어떤 바다도, 어떤 강물도, 어떤 별도 성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인다. 오직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병들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만일 병든 사람을 숭배하기 시작하면, 그자는 그대 에게 똑같은 병을 가르칠 것이다. 삶은 빛이다. 삶은 기쁨이고, 삶은 축복이다. 삶을 등진 자 가 아니라, 삶을 체험한 자에게 질문하라. 삶을 등짐으로써 그들은 존재의 가장 깊은 비밀과 신비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온갖 종류의 바보들을 보았지만, 그 들은 세상에서 숭배하는 성자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바보의 최고 경지에 오른 자 들이다. 노래하는 자들, 춤추는 자들, 화가와 시인들, 이들의 마에 귀 기울이라. 삶을 질적으 로 향상시키고, 뭔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 삶에 반대하는 자들 의 삶을 듣지 말라. 삶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장사다. 그들을 떠나라! 그들을 숭배하지 말라. 그대의 숭배로 인해서 그들은 계속 병들게 된다. 아무도 그들을 숭배 하지 않으면 그들은 머지않아 이렇게 깨들을 것이다. "나에게 뭔가 잘못이 있다." 이런 이 야기가 있다. 어떤 개 한 마리가 성자가 되었다. 그 개는 마을의 모든 개들에게 끊임없이 다 음의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쳤다. "우리는 지금까지 높은 의식 상태로 진화하지 못했는데, 그 것은 우리가 서로 짖어대는 불필요한 일을 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짖는 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다. 이제부터는 짖는 것을 중지하라!" 그러자 모든 개들이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것에는 뭔가 일리가 있다. 우리는 정말로 불필요하게 짖어대고 있다. 심지어 달을 보고는 짖는다." 태초부터 개들은 달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보름달이 뜬 밤이면 개들은 잠조차 잘 수 없 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짖어대는 일에 낭비되고 있다." 는 말은 매우 논리적이었 다. 그래서 모든 개들이 그 개를 숭배하기 시작했으며, 더 높이 숭배할수록 그 개의 권위는 날로 높아져갔다. 모든 개들이 믿을수록, 그 개가 말하는 것이 분명히 옳다는 믿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많은 개들은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 우 리의 역사상 첫 번째 성자!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가 가버리면 다시 짖어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보름달이 높이 뜬 날 밤, 개들은 결정을 내렸다. "단 하룻밤만이라도 어떤 유혹이 와 도, 경찰관이 자나가거나 다른 마을의 낯선 개가 지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눈을 꼭 감고 짖 지 말자. 그리고 앞으로 일 년에 하룻밤만은 우리의 성자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자." 그래 서 그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스승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을 전체가 침묵에 잠겼으며, 한 마 리의 개도 짖어대지 않았다. 그는 마을을 돌아다녀 보았다. 모든 개들이 숨을 수 있는 장소 를 찾아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숨어 있었다.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하룻밤만 참 으면 될 일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맹렬히 짖어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결심 했으니 그 결심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성자는 매우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가 자신의 성자의 위치가 위협을 받지나 않 을까? 모든 개들이 짖어대기를 멈춘다면, 이제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그의 유 일한 사업은, 짖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한밤중이 되자 그 스승 개는 목이 간지러웠다. 그 개는 말했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지? 다른 모든 개들은 침 묵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나는 마구 짖어대고 싶어지는군." 사실 그 개는 지금까지 마을 전체를 돌면서 다른 개들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계속 짖었기 때문에 자신의 짖고 싶은 욕 망을 채울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그 개의 목은 잠시도 쉴 날이 없었다. 이제 처음 으로 여섯 시간 동안 그 개는 짖어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개인지라, 그 개는 어두운 골 목으로 가서 짖어대기 시작했다. 개 한 마리가 약속을 어겼다는 것을 알자 다른 개들도 유혹을 견딜 수 없었다. 마을 전체 가 떠나가도록 모든 개들이 지금까지보다 더 맹렬히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스승 개 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종족의 불행이다. 안 그러면 우리는 인 간보다 더 높이 진화했을 것이다. 짖는 것을 멈추라! 짖는 것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문제이 고, 죄이다!" 사람들이 성자들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이 개들의 성자와 같은 처지 가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그대에게 가르친 것과 정반대로 행동을 할 것이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라.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숭배하고 있다. 그들 주위에는 언 제나 사람들이 들끊는다. 언제나 대만족이다. 그들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인가? 그들의 자 격이란, 그들의 삶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삶과 사랑과 웃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정열이 없을 때 인생은 진실로 암흑이며... 별들에 도달하려는 정열이 죽었을 때, 그대의 삶은 암흑이다. 또 모든 정열은 깨달음이 없는 한 장님에 불과하다. 지혜 와 명상, 깊은 침묵에서 솟아나오는 정열이 아니라면, 그것은 장님에 불과하다. 또한 모든 깨달음은 일하지 않는 한 쓸모 없는 거이며... 비창조적이고, 비생산적인 지식은 쓸모가 없 다. 공허할 뿐이다. 모든 일은 사랑이 없는 한 헛된 것이다. 사랑이 없이 일한다면, 그대는 노예처럼 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일할 때 그대는 왕처럼 일을 한다. 일이 그대의 기 쁨이고, 일이 그대의 춤이다. 일이 그대의 시다. 너희가 사랑으로 일할 때에 너희는 너희 자신을 스스로에게 붙들어매고, 또 너희 서로끼 리 붙들어매고, 마지막엔 신에게 붙들어매게 된다. 사랑을 바탕으로 일할 때,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고, 다른 사람에게 더 가까워지며, 마지막엔 신에게 더 가까워진다. 기 억하라.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만일 합창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시간이 있 으니, 어서 함께 노래부르라! 알겠는가?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 일에 대하여 II 그러면 사랑으로 일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의 심장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짓는 것이 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그 옷을 입기라도 하듯이. 그것은 애정으로 지을 짓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그 집에 살 것처럼. 그것은 정성으로 씨를 뿌려서 기쁨으로 거두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그 열매를 먹기라도 하듯이. 그것은 너희가 만드는 모든 것들 속에 너 희 자신이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 그리하여 모든 축복 받은 죽은 자들이 너희 주위에 서서 너희를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너희가 마치 잠꼬대처럼 하는 말을 들었다. "대리석을 가지고 일하면서 돌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는 자는 땅을 가는 자보다 더 귀하고, 무지개를 잡아 헝겊 위에 인간의 형상을 그려내는 자는 우리의 발에 신는 신발을 만드는 자보다 더 높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잠 속에서가 아니라 활짝 깬 대낮의 정신으로. 바람은 키 큰 참나무라 해서 하찮은 풀잎보다 더 다정하게 속삭이지 않는다. 또 자신의 사랑으로 바람 소리를 변화 시켜 더 다정한 노래로 만드는 자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다. 일은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난 것. 너희가 만일 사랑으로 일하지 못하고 싫은 마 음으로 일할 수밖에 없거든 차라리 일을 버리고, 사원 문 앞에 앉아, 기쁨을 일하는 이들에 게 구걸이나 하라. 왜인가? 너희가 만일 무관심 속에서 빵을 굽는다면, 너희는 인간의 배고 픔을 반밖에 채우지 못하는 쓴 빵을 굽는 것이고, 또 원한에 차서 포도를 밟는다면, 너희의 원한이 그 포도주 속에 독을 뿜는 것이다. 또 너희가 천사처럼 노래하면서도 자신이 그 노 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람들을 귀멀게 하여 낮의 소리, 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할뿐이다. 알무스타파는 대단히 아름다운 것을 말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이것 이 시인의 불행이다. 시인은 가능한 한 깊이 접근하지만, 중심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신비가 만이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 이 문장 전체가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긴 하지 만, 뭔가 빠졌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라. 이제 내가 무엇이 빠졌는지 말해 주리라. 나는 시인이 아니다. 나는 시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신비가 이다. 나는 내 중심, 내 존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나는 알무스타파의 가르침을 그대가 이해하게 되기 를 간절히 바란다. 비록 그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대가 중심에 도달하는 데에 이 가르 침은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무스타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칼릴 지브란에 대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었다. 몇 년 동안 나는 그의 시에 새로운 피와 새로운 생명을 주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 할 때마다 과연 깨달은 사람도 아닌데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염려가 되었다. 그는 매우 접근하기 했지만, 아무리 가까이 접근해도 거기엔 거리가 있는 것 이다. 한몸이 되지 않고서는 거리가 남아 있다. 하지만 마침내 나는 칼릴 지브란과 그의 대 변인 알무스타파를 완벽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결심했다. 그러면 사랑으로 일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의 심장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짓는 것이 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그 옷을 입기라도 하듯이. 이것은 일에 대한 매우 애정어린 태도이 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가 분리되 어 있기 때문이다. 또 오늘 사랑하는 이는 내일이면 사랑하는 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가 알고 있는 사랑은 쉽게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 대개의 사랑은 양쪽 날을 가진 칼과 같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혹은 신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어느 순간에 미움으로 변할지 모른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말했다. "저는 열렬히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전에도 그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대는 하느님에 대하여 언제나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변했는가?" "전에는 저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 문에 불평을 했습니다. 저는 10년 동안이나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지만, 하느님은 제 기 도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 는다는 것이 저에게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입니다. 바로 어제 저에 게 예쁜 자식이 하나 태어났습니다. 맨 먼저 당신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10년 동안의 제 고통을 잘 아시니까요. 저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존재하십 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하느님께서는 결정내리는 것을 미루긴 하지만, 오 늘이 아니면 내일,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는 아직도 너 무 성급하다. 그 아이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그대의 애정과 신 뢰와 믿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느님은 그 아이와 함께 탄생했다. 그 아이와 함께 가버릴 것이며, 그대는 전보다 더 심하게 하느님을 증오할 것이다. 전에는 하느님이 단순히 그대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는 것이지만, 이제는 그대가 그토록 기 다리던 아이를 앗아간 것이니까 말이다." 그가 말했다. "제발 그런 말씀을 말아 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그대를 일깨우기 위해서 는 말해야만 하겠다. 하느님에 대한 그대의 사랑은 철마다 변하는 것이다. 철마다 피는 꽃과 같다. 몇주 동안은 바람에 나부끼다가 몇 주 뒤에는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대의 사랑은 그대 존재의 중심에서 솟아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이 아니라, 뇌물에 불과하다." 이 나라에서 뇌물을 없애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나라 사람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신 에게까지 뇌물을 바쳐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원으로 가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바라는 것이 실현되기만 하면 당신에게 꽃과 과일을 갖다 바치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 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실현될 때 당신의 존재도 증명됩니다." 그래서 나는 칼릴 지브 란이 아직 신비가가 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먼저 알무스타파의 말을 들어보자. 그것은 너희의 심장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짓는 것이다. 심장은 머리보다 낫지만, 그대는 심 장이 아니다. 그대는 심장보다 더 깊은, 영원한 존재이다. 머리가 죽는 순간 그대의 심장도 따라서 박동을 멈출 것이다. 머리와 심장은 육체에 속하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대만 이 완전한 순수의식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흐름에 속한다. 그대만이 신에게 속한다. 사랑하 되, 어떤 이유도 없이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되, 그대가 사랑으로 흘러 넘치기 때문에 사랑 해야 한다. 그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그대의 사랑은 굴곡 이 심하다. 한때 적이었던 자가 친구가 되고, 친구였던 자가 적이 된다. 그대의 사랑은 대상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언제나 대상에 얽매여 있다. 어떤 대상에도 얽매임이 없이,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대의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것일 때만이 그대의 사랑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때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영원하 다. 신이 존재하든 안 하든, 사랑하는 대상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그대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누구를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대 자신을 사랑하느냐의 문제다. 그 사랑은 심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원천-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 러나와서 주변의 모두를 적신다.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든, 자격이 없는 자든, 가치가 있는 자 든 없는 자든, 그 모두를 아낌없이 적신다. 전혀 차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그대가 사랑하는 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사랑은 그대가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 도달했기 때문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 사랑은 명상에서 나온다. 칼릴 지브란은 바로 이것을 놓치고 있다. 그렇지 않았 다면 이 시는 매우 아름다운 시이며, 그가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을 것 이다. 그것은 애정으로 집을 짓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그 집에 살 것처럼. 이것이 시인의 빈곤함이다. 이따금 시인은 별들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지만, 다시 또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그의 시는 복합적이다. 어떤 때는 날개가 달려 드넓은 하늘로 날아가지만, 어떤 때는 땅바닥을 기어다닌다. 그대여, 명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다. 왜냐하면 그의 단어는 언제나 아름답고 찬란하기 때문이다. 보라. 그는 말하고 있다. '그 것은 애정으로 집을 짓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어디서 그 애정을 끌어낼 것인가? 또 그런 '마치...처럼'이라고 말한다. '마치...처럼'이라고 하는 이 두 단어를 기억하라. 이것은 전부 상상에 불과하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그 집에 살 것처럼.' 마치...처럼- 그대는 지금 그대 주변에 환각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저녁놀을 바라볼 때 그대는 " 보라, 저녁놀은 '마치' 아름다운 것 같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치...처럼'은 그대의 의심을 나타내며, '마치...처럼'이라는 것은 단지 그대의 추측에 불과하다. 한번 생각해 보라. 그대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치자. "나는 마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 습니다." 이런 말로 그 여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녀가 위선적인 숙녀가 아 니라 진짜 여자라면, 그녀는 그대의 뺨을 후려칠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것 같다구? 그 차이는 분명하다. 신비가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시인은 항상 가정과 추측에 바탕을 두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 매우 유명한 철학자가 쓴 매우 훌륭한 책이 있다. 그 책의 이름은 <마치...처럼(As if)>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매우 충성스럽다. 그는 "신은 존재한다."라 고 말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마치...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마치...처럼'과 같은 이러한 추한 말들을 조심하라. 사랑하든지, 사랑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지, 어중간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정성으로 씨를 뿌려서 기쁨으로 거두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그 열매를 먹 기라도 할 듯이. 말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 내용은, 그 알맹이는 불안정하다. 이 '마치...하 듯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서도 바람이 그 집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바람은 그대의 뜻에 따라 부는 게 아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마치...처럼'이라 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철학자나 시인이 사용한다. 장님만이 '마치'빛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빛을 본 적이 없고, 단지 빛에 대하여 듣기만 했을 뿐이다. 모두가 빛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대를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대를 구속할 뿐 이다. 그것은 그대를 꿈꾸는 사람으로 만들며, 꿈꾸기 위해서는 잠과 무의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너희가 만드는 모든 것들 속에 너희 자신이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 그리하여 모든 축복 받은 죽은 자들이 너희 주위에 서서 너희를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적 어도 이 도시에서만은, 죽은 자들이 도시인 이곳에서만은 이 말이 사실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축복 받은 죽은 자들'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축복이 한 가지밖 에 없으며,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죽은 자들을 '축복 받은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순전 히 상투적인 표현이고, 예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왜 이곳에 있는가? 왜 어서 빨리 죽어서 축복 받지 않는가? 살아있는 것은 저주받은 일이고, 그 저주받은 사람도 죽으 면 '축복 받은 자'가 된다. 전날 나는 이곳이 살아있는 신의 사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오는 사람은 온 몸과 마음 전체로 와서 사람들의 기쁨과 노래에 함께 참여하라. 그런데도 나는 아직 한 숙녀가 죽은 듯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의자를 치웠는가? 나는 그녀를 여성이라 부르지 않 고 숙녀라고 부른다. '여성(woman)'은 높임말이지만, '숙녀(lady)'는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여성을 죽어지내도록 하기 위해 베푼 뇌물일 뿐이다. 여기엔 죽은 사람들이 없는데, 한 가련 한 숙녀만이 따로 떨어져서 영혼으로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에고를 버리기를 겁내고 있다. 이 강의를 마치고 떠날 때 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볼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는 지 일어나지 않는지... 예수가 나자로를 부르자, 나흘 동안 죽은 것처럼 살아있던 나자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저 죽은 숙녀가 살아있는 여성이 되려면 두 시간이나 남았다. '숙녀'가 추한 단어라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그것은 잘 누워있다는 것이다. 숙녀라면 섹스를 할 때 가만히 잘 누워 있어야 한다. 거의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도 말고, 좋은 표정 을 짓거나 소리도 지르지 말고 가만히 누워있어야 한다. 이것은 남자 쪽의 교묘한 작전이다. 남자는 여자가 오르가슴을 여러 번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남자에게는 단 한번 오르 가슴이 있을 뿐이다. 남자의 사랑은 단 이삼 분 안에 끝난다. 그때까지 여자는 몸이 뜨거워 지지도 못한다. 수천 년 동안 여자들은 그런 교활한 방식으로 이용당해 왔다. 다들 여자에 게 이렇게 말했다. "죽은 것처럼 누워서, 모든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여자다운 태도다." 그 래서 모든 여성이 섹스 할 때 눈을 감는 것이다. 여자는 참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두 여인이 만나서 하나로 녹아드는 가장 아름다운 춤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표현에 찬성할 수 없다. '그리하여 모든 축복 받은 죽은 자들이 너희 주위에 서서 너희를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에서는...칼릴 지 브란은 기독교 개종자이다. 그의 선조들이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었다. 인도 밖 에서 탄생한 모든 종교는 인간에게 단 한 번의 삶밖에 없다고 믿었다. 한 번의 삶이 끝나 면 모든 종교는 인간에게 단 한 번의 삶밖에 없다고 믿는다. 한 번의 삶이 끝나면 그대는 나무 위에 앉아서-축복 받은 죽음 속에서- 또는 원한다면 서서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영원한 시간을 지켜보고 있게 된다. 예수는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언제 심판의 날이 옵니까?" 그의 제자들은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그 자신도 어떤 환상 속에 살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곧 온다. 너희 생전에 너희는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나는 나의 아버지 하느님 곁에 서서 나를 따르던 자들이 누구였던가 손짓해 보일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들여보낼 것이다. 나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의 어둠 속으로 떨어지게 되리라." 이 짧은 한 마디 말 때문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철학자 러셀(Bertrsnd Russell)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Christian)>라는 책을 썼다. 그가 제시한 많은 이유들 중에서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즉, 기독교는 전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번의 인생에서 그대는 과연 얼마나 많 은 죄를 저지를 수가 있는가? 먹고 마시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고 70년 동안 쉼 없이 매 순간 죄를 저지른다 해도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만큼은 되지 못한다. 영원히 벌을 받다 니! 벌을 내려도 공정하게 내려야 한다. 그래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죄라고 하는 행위들을 많이 저질렀으며, 또한 역시 죄라고 비판받을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 한 행위와 생각을 한데 묶어 나에게 벌을 내린다 해도 고작해야 사오 년 정도 감옥에 보낼 수 있을 뿐이다." 출구도 없는, 전혀 빠져나올 길이 없는,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은 어리석 고 불합리한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칼릴 지브란 같은 사람도 아직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인도 내에서 탄생한 모든 종교들은 이런 의미에서는 보다 합리적이다. 그들은 단 일한 삶이 아니라, 전생 윤회를 믿는다. 그대는 계속해서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난다. 시작 도 끝도 없이 영원한 시간이 그대의 삶에 주어진다. 나는 때때로 너희가 마치 잠꼬대처럼 하는 말을 들었다. '마치...처럼'이 계속되고 있다. 그 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확신이 없다. 단지 '마치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이라고 추측할 뿐 이다. "대리석을 가지고 일하면서 돌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형태를 발견하는 자는 땅을 가 는 것보다 더 귀하고..." 위대한 작품을 남긴 시인과 문학가는 노벨상을 받는다. 생명을 창조 하고 생명을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사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보았는가? 밭을 일 구어 사람들 모두들 먹여 살리는 농부가 노벨상을 받은 적이 있는가? 아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살다가 죽을 뿐이다. 이것은 매우 추한 차별일 뿐이다. 모든 창조적인 영혼들은, 그가 무엇을 창조하든지, 마땅 히 존경받고 상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심지어 정치인들까지, 영리한 범죄자에 불과한 사람 들까지 노벨상을 받는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혈 사태는 이러한 정치인들 때문이며,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핵무기를 개발하여 지구 전체를 자멸로 치닫게 하고 있 다. 진실하고 정직한 인간 사회에서는 모든 창조적인 작업이 존경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창 조적인 영혼은 신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지개를 잡아 헝겊 위에 인간의 형상을 그려내는 자는 우리의 발에 신는 신발을 만드는 자 보다 더 높다." 우리의 미적 감각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떠오른다. 그는 구두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자 연히 모든 귀족들이 당황하고 화가 났다. 링컨이 얼마 안 가 암살당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 치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구둣방 아들이라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상원에서 취임연설을 하는 첫날, 그가 들어와 단상에 서자 한 추한 귀족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 링컨, 어쩌다 당신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예전 에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우리 식구들의 구두를 만들어 주기 위해 우리 집을 드나들곤 했다 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 바라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는 많은 상원의원들이 있소. 그러니 당신의 출신을 잊지 마시오." 그는 링컨에게 모욕을 주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에이브러햄 링컨같은 사람에게 모욕을 줄 수는 없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소인배들이나 모욕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위대한 인간 존재들은 모욕의 차원을 초월해 있 다. 링컨은 모두의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하였다. "내가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기 직전에 나에게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게 해주어서 감사합 니다. 나의 아버지는 매우 멋지고, 창조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구두 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든, 내 아버지만큼 위대한 대통령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나는 결코 나의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 귀족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나의 아버 지가 만들어 드린 구두가 여러분의 발에 잘 맞지 않거든, 나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이 조금 있으니 나에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훌륭한 제화공은 아니지만, 최소한 여러분의 구두는 수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연락만 주십시오. 그러면 언제라도 여러분의 집으로 달려가겠습니 다." 상원의원들은 쥐죽은듯이 잠잠해졌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모욕을 준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링컨은 창조적인 작업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대가 그림을 그리든, 조각을 하든, 구두를 만들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정원사 든, 농부든, 어부든, 목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갓은 그대가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가 창조한 그것은 신의 숨결을 담고 있게 된다. 창조성 없이는, 신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잠 속에서가 아니라 활짝 깬 대낮의 정신으로. 바람은 키 큰 참나무 라 해서 하찮은 풀잎보다 더 다정하게 속삭이지 않는다. 존재계는 만물을 똑같이 대한다. 태 양은 부자들을 위해서만 떠오르지도 않으며, 보름달은 세상의 대통령이나 수상들을 위해 헌 정된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어와 향기를 전할 때에는, 그대가 유명인사든 하찮은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존재계는 순수환 사회주의다. 모두를 평등하게 취급한다. 성자와 죄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우물물은 죄인에게 "너는 죄 인이기 때문에 목을 축여선 안 된다. 나는 성자들을 위해서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 다. 존재계로부터 배우라. 존재계야말로 유일한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성스러운 경 전을 나는 보지 못했다. 자연은 순진 무구하고, 순수한고, 더 성스럽다. 만일 우리가 자연에 게 귀기울였다면 인간도 이 심오한 평등성을 터득하여, 모두를 존경하고 생명을 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진리에서 멀어져 완전히 비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 간의 불행은 비자연적으로 된 데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다. 또 자신의 사랑으로 바람 소리를 변화시켜 더 다정한 노래로 만드는 자야말로 위대한 사 람이다. 하지만 역사책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알렉산더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전세계를 정복하려고 한 살인자가 아니기 때문이 다. 이러한 정복자들은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인물이 다. 하지만 알렉산더나 징기스칸, 타멜레인(Tamerlane), 나디르 샤흐(Nadir Shah) 같은 사람 들의 이름이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단지 파괴뿐이다. 나는 나디르 샤흐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인도를 침략했는 데, 매일 밤 미인과 술을 요구했다. 낮에는 내내 사람들을 죽이고, 밤에는 축제를 베풀었다. 어느 날 밤 그의 병 사들이 매우 아름다운 창녀를 데려왔다. 그녀는 춤을 추었으며, 나디르 샤흐는 매우 즐거웠 다. 한밤중에 그는 말했다. "나는 이제 피곤하다. 내일 아침 나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러 가 야 한다. 그러니 이제 춤을 멈추라." 하지만 그 젊고 연약한 처녀가 말했다. "이렇게 캄캄한 밤에 저는 산과 마을을 지나서 멀리 있는 저의 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하룻밤만 이곳에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침이 되어 날이 밝으면 가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대는 평범한 사람의 손님이 아니다. 그대는 바로 나디르 샤흐의 손님이다. 내가 지 금 당장 그대가 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 주리라!" 그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그 창녀가 마을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모든 나무들과 마을에 불을 질러 그녀가 집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창녀 한 명이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 사람 들이 잠자고 있는 스무 개의 마을이 불탔으며, 산 전체에 불이 붙어 대낮처럼 밝았다. 그녀 는 평범한 사람의 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이름들이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역사책에 는 겸허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칼릴 지브란이 옳 다. 또 자신의 사랑으로 바람 소리를 변화시켜 더 다정한 노래로 만드는 자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가슴이 없이는 위대함이 없다. 그리고 그대를 모두에게는 사랑하는 가슴 이 있다. 단지 사람들에게, 나무에게, 바다에게, 그대 주변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그것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그대들은 가슴을 지니고 있다. 일은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난 것. 무엇을 창조할 때, 그대는 그대의 사랑이 존재 를 드러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의 종교적인 성자들은 삶을 등지고 떠나라고 말한다. 인도에는 수십만 명의 승려들이 있다. 힌두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이들은 모두 비 창조적이다. 그들은 심지어 그림을 그릴 줄도, 시를 지을 줄도 모른다. 그들은 일과 노동을 비난한다. 삶과, 또한 삶의 창조성을 비난하는 이들을 사람들은 숭배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어딜 갑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쎄바(seva)하러 간다고 대답한다. 인도에서 는 성자에게 가는 것을 쎄바, 즉 '봉사'라고 한다. 그들은 성자에게 봉사하러 가는 것이다. 성자는 일도 못하고, 아무 것도 창조하지 못하고 가장 쓸모 없는 존재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정말 불필요한 짐이다. 누군가 항상 보살펴 주어야 하니까 말이다. 한때 나는 매우 아름다운 사람을 안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은 마가 바바(Magga Baba)이 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이 끝없이 찾아와 자기를 보살펴 주는 바람에 몹시 지쳤다. 모든 일 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그가 잠까지 잘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열 명의 사 람이 항상 그의 몸을 주무르는 것이었다. 그는 대단히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만 두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주 사라지곤 했었지만, 그 자신의 뜻에 따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끝없이 납치당한 사람은 세상에서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한 마을이 그에게 충분히 봉사하고 나 면, 다른 마을이 기회를 보았다가 그를 납치해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납치자들이 와서 "여기 이 인력거에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라고 말하면 그는 두말 없이 앉아 있곤 했다. 여러 차례나 그는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발견되어 다시 모셔져 오곤 했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지쳐 버렸다. 그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이따금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나는 단지 이 침묵을 지키 는 사람 곁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절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복 받은 사람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면 그는 내 귀에 뭔가를 속삭이곤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내 귀에 속삭인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되어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또 누가 당신을 납치해 가려는 낌새라도 있 나요?" "아니다 나는 나에게 봉사하는 이 사람들에게 완전히 지쳤다. 나는 잠도 잘 수가 없 다. 그래서 산 속으로 사라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 회는 조용히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그는 깨달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떤 역사책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 역사는 살인 자들과 권력가들, 세상에 온갖 불법을 자행한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듯 하다.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면 맨 먼저 할 일은 모든 역사책을 불태우는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러시아의 이반 대공,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 같은 사람들을 역사책에서 없애라. 아이들의 의식이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물들지 않도록 하라! 역사는 창조적인 사람들, 이름없는 사람들, 하지만 그 이름없음 속에서 신이 부는 텅 빈 대나무 피리가 된 사람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바람이 불면 그 피리는 바람을 노랫소리로 변화시 킨다. 이 사람들이 바로 존재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존재계를 아름답게 변화시키 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삶에 반대한다. 그들은 "삶을 버리라."고 말한다. 삶에는 일과, 사랑과,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삶을 떠나라. 삶을 떠나야만 죽은 다음에 그대는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죽은 '다음'일 뿐이다. 이들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은 내가 사람들에게 삶이란 바로 '지금 여기'이지 죽은 다음 이 아니므로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나에게 화를 낸다. 삶이란 사랑 속에 있고, 삶은 창조적인 일 속에 있으며, 삶은 그대 내면의 존재를 이해하는 가운데에 있다. 오 직 그때만이 그대는 아름다움과 사랑과 즐거움이 끝없이 넘쳐흐르는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죽은 다음의 삶을 걱정하는가? 삶은 죽기 '이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만일 전체적으로 살 수 있다면, 그대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침묵에 들 어간 모든 이들의 체험이다. 그들은 가장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였다. 그들의 내면 존재, 그 들의 의식은 영원하다는 기적 말이다. 하지만 창조적인 사람만이, 그리고 사랑으로 창조하는 사람만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일은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난 것. 너희가 만일 사랑으로 일하지 못하고 싫은 마 음으로 일할 수밖에 없거든 차라리 일을 버리고, 사원 문 앞에 앉아, 기쁨으로 일하는 이들 에게 구걸이나 해라.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없거든, 그대 만일 일을 사랑할 수 없거든, 그 대 만일 삶을 사랑할 수 없거든,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그대가 거지가 되는 길뿐이다. 사랑하는 자는 왕이다. 창조하는 자는 황제이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그 사랑이 넘치는 단순한 창조성으로 인해 우주 전체에 스며든다. 하지만 그대 만일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사원 문 앞에 앉아 거지라도 되라. 왜 특히 사원 앞이라고 했는가? 왜냐하면 만일 그 사원이 살아있는 사원이라면- 내가 말 하는 사원이란 그곳에 스승이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그곳에는 구도자들과 사랑하는 이들과 창조적인 이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그들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인 것 을 보고는, 자신이 거지가 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아마도 어느 날엔가 그대는 자 리에서 일어나 사원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거지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는 구도가로서, 사 랑의 구도가로서, 창조의 방법을 배우는 제자로서 들어갈 것이다. 왜인가? 너희가 만일 무관심 속에서 빵을 굽는다면, 너희는 인간의 배고픔을 반밖에 채우 지 못하는 쓴 빵을 굽는 것이고, 또 원한에 차서 포도주를 밟는다면, 너희의 원한이 그 포도 주 속에 독을 뿜을 것이며, 또 너희가 천사처럼 노래하면서도 자신이 그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람들을 귀멀게 하여 낮의 소리, 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 노래는 끝이 없다. 새들이 노래부르고, 꽃들이 노래부른다. 그대가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는 꽃들이 어떻게 노래를 부르겠냐고 생각하는가? 그 대 자신이 귀머거리인 것을 생각하라! 나는 꽃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꽃들의 춤을 본다. 밤 의 어둠 속에서도 침묵은 하나의 노래이다. 그대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거든, 최소한 자연이 그대의 존재 속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라. 그것이 그대를 탈바꿈시킬 것이다. 나는 그 탈바꿈의 과학을 명상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여기에 앉아서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창조성으로 채워진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7년 전에도 나는 이 정원에서 살았었다. 그때 내 제자들이 작은 나무들을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이제는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다. 그냥 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앉아서 나무들이 서로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라. 여기, 대지와 하늘 사이에 끝없는 대화가 있 다. 그 속삭임을 듣는 순간, 그대의 가슴은 기쁨으로 춤출 것이다. 그 속삭임이 그대의 생명 의 노래가 될 것이다. 그 속삭임이 그대로 하여금 솔로몬의 노래, 아가서를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유태의 성경인 구약에는 한 가시 이상한 일이 있다... 유태인들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신약을 자신들의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구 약에서 영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부분은 바로 솔로몬의 노래인 아가서이다. 하 지만 유태인들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아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사원에서 그것에 대해 서 토론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삶을 등지고 버리 는 노래가 아니라, 삶을 즐기는 노래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노래이다. 구약에서 진실로 종교적인 부분은 이 아가서뿐이다. 솔로몬의 노래가 없다면 구약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모든 랍비가 교회당과 학자들은 구약에만 매달리면서 아울러 이 솔로몬의 노래가 거기에 포함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구약 전체의 핵심이며, 유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 는 부분은 바로 이 솔로몬의 노래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