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니 사랑에 대하여 2 사랑은 저 자신밖에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없고, 저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누구의 소유가 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충분한 것. 사랑할 때 너희는 "신이 나의 마음속에 계신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도 "나는 신의 마 음속에 있다."하라. 또 너희가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다 생각지 말라. 너희가 자격이 있 다 여겨지면 사랑이 너희의 길을 지시할 것이므로. 사랑은 바라는 게 없고 다만 사랑 자체 를 채울 뿐. 그러나 너희가 만일 사랑하면서도 또다시 어떤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거든 이 것이 너희의 바람이 되게 하라. 서로 녹아서 흘러가며 밤을 향해 노래부르는 시냇물처럼 되 기를. 너무나 깊은 애정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스스로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 상처받게 되기 를. 그리하여 기꺼이, 즐겁게 피 흘리게 되기를. 낮에는 쉬며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명상할 수 있기를. 저물 무렵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기를. 그리고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입술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잠들게 되기를. 알무스타파는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 누구도 그러한 통찰력이 보여 준 적이 없다. 여기 이 시는 철학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신비가의 체험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가상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사람은 칼릴 지브란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지브란은 자신의 이름을 써서 직접 말할 수 도 있었다. 알무스타파를 중개자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칼릴 지브란은 종교를 탄 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종교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것이긴 해도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왜냐하면 지금까지 종교의 이름 아래 사람들에 게 온갖 잔인한 행의, 피비린내나는 짓들이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수천만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다. 어떤 종교든 일 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는 순간 귀중한 생명을 가진 이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그때 그 종교는 더 이상 신에게로 가는 길이 아니라, 싸움과 전쟁에 대한 변명이 되어 버린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들이 자기를 숭배하지 못하도록, 더 이상 과거의 추한 짓들을 되풀이 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알무스타파라는 이름 뒤에 숨기고 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직접 말하는 대신 그는 알무스타파라는 장치를 개발했다. 세상의 그 어느 책보다도 가장 성 스러운 책이면서도 알무스타파라는 이름 때문에 이 책은 종교 서적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이 책에 비하면 다른 신성하다고 하는 종교 서적들은 형편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자신의 책이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 하나의 시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는 알무스타파를 내세 웠다. 이것이 그의 자비이고, 그의 위대함이다. 신성하다고 하는 경전들을 보라. 그 속에는 이처럼 생생하게 그대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히는 말들이 없다. 그들 성스러운 경전들 속에 남아있는 것은 잔인하고 무가치한 것들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을 감고 살기 때문에 알무스타파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만 생각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 하나를 잊었다. 여기 이 진리들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칼릴 지브란은 나에게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미지의 들녘에, "어느 기억 못하는 시 절에" 씨앗을 뿌렸다. 나는 지금 제때에 수확을 거두기 위하여 여기에 있다. 그대가 바로 수 확이다. 그대가 열매이고 꽃이다. 칼릴 지브란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대에게 그대의 씨앗에 대하여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칼릴 지브란이 태어난 나라에 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그 나라는 바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가운데 하나인 레 바논이다. 이 나라는 두 가지 때문에 유명하다. 바로 칼릴 지브란과 수백 년 묵은 삼나무들 이 그것이다. 이 나무들은 아직도 별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칼릴 지브란 역시 별을 향해 발 돋음하고 있었다. 레바논의 삼나무들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칼릴 지브란은 성공했다. 언젠가는 그 삼나무들도 별에 도달할 것이다. 네덜란드의 매우 중요한 화가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있다. 깊은 통찰력 과 이해력에 관한 한 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화가이다. 그의 모든 그림에는 언제나 나무 들이 별보다 더 높이 자라나 있다. 별들이 나무들 뒤에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으로 여겼다. 그는 늘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별보다 더 높게 자란 나무들을 어디서 보았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말했다. "나 역시 그런 나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무들 곁에 앉아 있노라면 나는 나무들의 그러한 소원을 듣게 된다. 나는 씨앗을 뿌리기도 전에 그 꽃을 그린다." 그가 그린 별들은 모두 이상하다. 그는 별들을 나선형으로 그렸다. 화가들 까지 그를 비웃었다. "당신은 미친 게 틀림없다. 별들은 나선형이 아니다." 빈센트 반 고흐 는 말했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꿈속에서 뿐만 아니라 깨어 있을 때에도 내 가슴은 별 들이 나선형임을 느낀다." 평생동안 그는 단 한 작품도 팔지 못했다. 누가 그런 이상한 그림 을 사겠는가? 그리고 그는 자신의 피로, 자신의 생명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매주 동생으 로부터 하루에 두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생활비를 받았다. 그러면 그는 사흘을 굶은 돈으로 물감과 캔버스를 사곤 했다. 그 어떤 화가도 그처럼 깊은 정열과 사랑으로 그림을 그린 적 이 없다. 그는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살다가 서른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몇 달 전 물 리학자들은 별들이 나선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흐보다 1백 년이다 뒤늦게 안 것이다. 시인은 확실히 어떤 것을 아는 데에 필요한 미지의 지름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고, 이론가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은 그보다 몇 백 년 씩 뒤떨어져 있다. 진실로 동시대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인도의 수 상 라지브 간디(Rajiv Gandhi)는 "인도를 21세기로!"라는 슬로건 때문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도 9억의 인구를 가진 이 넓은 나라에서 단 한 사람도 그에게, 인도는 아직 20세기에도 들 어서지 못했음을 지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수천 년 지난 미신과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어둠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여기 이 말들을 새겨 들으라. 이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살아있는 불꽃이다. 순 수한 불꽃... 만일 이 불꽃이 그대를 다 태워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는 제대로 이 시를 이해 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저 자신밖에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없고, 저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다. 얼마나 심오한 말인가.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신선하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이 말은 여 전히 신선하게 들릴 것이다. 그대 만일 이 말을 이해 할 수 있다면, 그대 만일 이 말대로 살 수 있다면, 미래 전체가 그대의 것이 되리라. 이것은 그대 앞에 놓여 있는 미지의 세계로 들 어가는 문이 되리라. '사랑은 저 자신밖에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없고...'그대 역시 사랑에 빠지면 뭔가를 준다. 꽃과 아이스크림과 보석.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업이고 장사 다. 어떤 작은 학교에서 선생이 한 시간 동안이나 예수의 위대함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그 학교는 교회에 딸린 학교였으며,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었다. 한 시간 뒤 선생은 학생들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누구지?" 미국 아이가 일어나 말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선생은 기가 막혔다. 한 시간 동안이나 학생들의 머리 속에 예수 그리스 도가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는 사상을 집어 넣었는데, 이 바보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생은 말했다. "네 말도 틀리지 않았지만 정확한 대답은 아니에요. 앉아요." 이번엔 여자아이가 일어나 대답했다. "윈스턴 처칠!" 선생은 더욱 기가 막혔다. 하 지만 그 학교는 영국에 있는 학교였으며, 윈스턴 처칠이 당시의 수상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그 대답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말했다. "좋아요. 정답에 더욱 가까워 졌어요." 그때 아주 어린 꼬마아이가 손을 들었다. 이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이 소년은 전에 는 질문에 대답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말이 없던 아이였다. 선생이 물었다. "너는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니?" 소년이 말했다. "그건 질 문도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에요." 선생은 더 충격을 받았다. 그 소년은 유태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소년에게는 상장이 기다 리고 있었다. 정답을 말하면 상장을 주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업이 끝난 뒤 선생은 상 장을 들고 교문을 빠져 나가는 그 소년을 뒤따라가 이렇게 물었다. "얘야, 너는 유태인이 아 니니?" 소년은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나요? 왜 저를 따라오시나요?"선 생이 말했다. "너는 유태인이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고 말할 수가 있니?" 소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아. 예. 마음 깊은 곳에선 저도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장사는 어디까지나 장사예 요." 사랑은 장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남자들은 사랑을 장사의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사 랑은 오로지 사랑 자체만을 준다. 왜냐하면 거기,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여,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을 아는가? 더 가치있는 것을 아는가? '사랑은 저 자신밖에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없고, 저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다.' 꼭 이해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사랑은 오로지 주는 것만을 안다. 주는 대신에 무엇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신비가 있다.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은 수천 배가 되어 되돌아온다. 거지일 필요가 없다. 사랑은 그대를 왕 으로 만단다. 사랑은 사랑 자체를 주며, 신기하게도 그 사랑은 수천 곱절이 되어 사방에서 돌아온다. 더 많이 줄수록 그대는 더 많이 받는다. 인류는 우주의 법칙을 잊었기 때문에 그토록 빈곤한 것이다. 주는 대신에 항상 거지가 되 어 끊임없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내는 "나를 사랑해 줘요. 나는 당신의 아내예요."라고 매달린다. 남편 역시 자기에게 애정을 달라고 요구한다. 모두가 자기에게 사랑을 달라고 요 구한다. 그러니 모두가 거지들인데 누가 사랑을 주겠는가? 그대는 나처럼 왕이 될 수 있다. 주고 또 주지만 바닥나지 않는다.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나는 더 놀란다. 내 사랑이 더 많아져서 더 많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키우던 개가 죽었다. 그는 그 개를 무척 사랑했었다. 그 개는 아름다운 예술품처럼 생긴 매우 희귀한 개였다. 보통 개가 아니라 수세대 동안 교배시 킨 끝에 탄생한 개였다. 그는 몹시 슬펐다. 그래서 그는 그 개를 샀던 가게로 가서 더 나은 개를 찾았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개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인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매우 희귀한 개가 있는데, 값도 무척 쌉니다." 주인이 보여주는 개는 확실히 여태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개였다. 철학적인 얼굴에 사랑스런 눈동자, 아름다운 몸매를 한 기막히게 예쁜 개였다. 그는 말했다. "값이 얼마라도 이 개를 사겠소." 주인은 말했다. "지금 은 이 개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일단 사간 뒤에야 이해할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개를 샀다. 얼마나 값이 싼지, 똥개보다도 싼 값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면서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난 그는 개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세상에! 개가 어디로 간 걸까? 대문도 잠갔 는데 어디로 빠져 나갔을까?" 가게로 달려갔더니 개가 그곳에, 자기 자리에 태연히 앉아 있 었다. 주인이 말했다. "왜 그렇게 싼지, 이제 이해하겠습니까? 이 개는 언제나 돌아옵니다. 수백 번도 더 팔았는데 충성이지요. 당신이 이 개를 키울 수는 있지만, 그래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은 값을 치를 필요가 없으며, 그러면서도 언제나 수천 배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그 대는 더욱더 부자가 된다. 참으로 신기한 존재계의 경제법칙이다. 사랑은 저 자신밖에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없고, 저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누구의 소유가 되지도 않는다. 어떤 것을 소유하는 순간 그대는 그것을 죽여 버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들 손으로 사랑을 죽인다. 모두가 지신의 손을 한 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의 손은 그들 자신의 사 랑의 피로 얼룩져 있다. 이제 그들은 비참하다. 그들은 결코 죽이기를 원하거나,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서 그들은 소유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들은 그 사람을 전부 소유하기를 원한다. 남편은 아내를 소유하고, 아내는 남편을 소유하고, 부모는 자식을 소유한다. 선생들은 온갖 방법으로 학생들을 소유하려고 노력한다. 정치인들 은 국민과 나라를 소유하려고 애쓴다. 종교는 수천만의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살인자들이다. 왜인가?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대는 그것 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자유 속에서만 활짝 피어난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대는 사랑하는 이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소 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대의 영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소유 를 허락하는 순간, 그대는 자살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살해당하거나 자살을 한다. 사 람들은 거지처럼 깡통을 들고서 사랑과 애정을 구걸하며 시체들 사이를 걸어다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회, 미친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이 정신병에 걸리고 신경에 이상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간단하다. 그들의 영혼이 영양분을 받지 못한 것이다. 사랑이 바로 영양분이다. 그대가 세상의 모든 부를 차지할 수는 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대는 가장 빈곤한 사람이다. 쓸데없이 재산과 궁전과 지위를 짊 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는, 소유하지도 소유당하지도 않는 사랑의 비밀을 아는 이는 진실로 다시 태어난다.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그는 인생의 모든 아름다운 체험들, 존재의 크나큰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사랑이 그대의 가슴속에서 커나 갈 대, 그대는 신을 잉태한 것이다. 그대 내면에 자라고 있는 것은 바로 신이다. 서서히 그 대는 사라질 것이며, 오직 순수한 신성만이 남게 될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은 그것을 느꼈다. 마하비라나 붓다가 신 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얘기다. 사람들은 그들이 무신론자였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신을 믿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 자신이 신이었기에. 그대의 신은 하늘 높은 곳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대는 신을 믿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땅 위를 기어다니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붓다가 신을 믿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신 이 그의 내면에 있었으며, 그 자신이 바로 신의 사원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신의 존재를 부 정했다 해도, 그들의 부정은 무신론자들의 부정과 다르다.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논리적 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까 부정하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사랑도 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 역시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많은 무신론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에 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 그들은 당황해한 다. "왜 당신은 주제를 바꿉니까? 우리는 지금 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나는 말한다. "주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제에 더 가까이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말한다. "물론입니다. 사랑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대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 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그들은 말한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 그렇다면 이제 그만 신을 부정하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대는 지금까지 신을 부정해 오지 않았는가?" 고타마 붓다 같은 사람만이 신을 부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제 신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세상에서 고타마 붓다와 마하비라 두 사람만이 비폭력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그들은 사랑을 비폭력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잘못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단어를 피한 것이다. 사창가에 찾아가서도 그대는 "난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한다. 사랑이 시궁창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다른 말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 만 '비폭력', 이 말은 곧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덧붙여 나는 이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하늘에 계신 신을 믿는 이들은 비폭력이지 않다. 이슬람교, 유태교,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20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 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 숫자를 세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슬람교도들은 14세기 동안 계속 해서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된 사람들은 진리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다수이기 때문에 믿는다. 이슬람교도들은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꾸란(Holy Koran)을 들고 찾아왔다. "선택하라 어떤 논리도 필요없다. 칼이 곧 최상의 논리이다." 용기있는 사람들만이 겁에 질려 코란을 선택하는 대신에 죽음을 택했 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믿지 권총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누구의 소유가 되지도 않는다. 사랑할 때 너희는 "신이 나의 마 음속에 계신다."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에고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무스타파 는 말한다. 그보다도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다." 하라. 그는 첫 번째 말을 더 낫게 고쳤지 만, 두 번째 말 역시 더 낫긴 해도 좀 더 고쳐야 한다.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권한 다. "사랑이 있으며, 나는 없다." 또 너희가 사랑의 길을 지시 할 수 있다 생각지 말라. 너희 가 자격이 있다 여겨지면 사랑이 너희의 길을 지시할 것이므로. 마음을 놓고 사랑을 믿으라. 사랑이 너희를 데리고 가게 하라.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이, 너희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모든 작은 물줄기들은 우주로, 궁극의 진리로, 신에게로 흘러간다. 사랑은 바라는 게 없고 다만 사랑 자체를 채울 뿐. 그러나 너희가 만일 사랑하면서도 또 다시 어떤 것을 바라지 않 을 수 없거든 이것이 너희의 바람이 되게 하라. 그러나 너희가 만일 사랑에 전부를 내맡길 만큼 강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소원을 갖게 된다면,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최소한 다음과 같은 소원을 거져라. 서로 녹아서 흘러가 며 밤을 향해 노래부르는 시냇물처럼 되기를. 너무나 깊은 애정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스스 로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 상처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즐겁게 피 흘리게 되기를. 새 벽에는 날개 달린 마음으로 일어나 또 하루, 사랑의 날을 보내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되기를. 낮에는 쉬며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명상할 수 있기를. 저물 무렵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기를. 한꺼번에 하기가 어렵거든, 서서히, 한 단계씩 감사하는 마음으로 향해 가라. 그리고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입술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잠 들게 되기를. 알겠는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결혼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가 다시 물었다. 스승이시여, 결혼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 는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너희의 생애를 흩어 버릴 때에 도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렇다,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도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러 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거문고 의 줄들이 한 가락에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 함 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는 말라. 성전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알무스타파는 사랑에 대하여 말했다. 당연히 그 다음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결혼은 그대가 알고 있는 그런 결혼이 아니다. 세상이 따르고 있는 그런 결혼이 아니다. 세 상의 결혼은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외면하기 위하여 이 사회와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을 외 면하기 위하여 이 사회와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교묘한 제도이다. 그래서 옛날 에는 조혼이 성행했다. 그리고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는 오늘날에도 그 제도가 남아있다. 어 린이들은 인생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며,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 순진무구 함 속에서 모든 문명과 문화는 어린이들을 이용할 좋은 기회를 발견하였다. 그들의 가슴속 에 사랑이 싹트기 전에 이미 그들은 속박당했다. 기존의 결혼제도는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 아닐뿐더러, 사랑에 반대한다. 그 제도는 너무나 파괴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기쁨, 인간의 즐거움, 인간의 유머를 그 어떤 제 도보다도 더 많이 손상시켰다. 조혼에서는 결혼할 당사자인 어린애들에게는 의견을 묻지도 않는다. 점성술사들과 손금장이들에게 대신 묻는다. 주역과 점괘에 의견을 묻는다. 결정은 이제 결혼을 할 어린애들의 인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양쪽의 부모에게 달려 있다. 사랑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혈통과 사회적인 지위, 소녀의 부모가 소년의 부모에게 줄 돈 등 부 모들이 나름대로 판단기준을 갖고 있다. 이제 결혼을 할 당사자들, 함께 긴 인생을 살아갈 두 사람은 철저히 무시당한다. 이것은 저울에 달고. 자로 재는 장사이다. 예를 들어, 왕가에서는 자식들이 다른 왕족과 결혼할 때만 허락을 내린다. 이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장사이고, 전략이다. 유럽의 왕족들을 보라. 그들은 결혼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갈등과 침략을 막아준다. 결혼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자식들을 통하여 네다섯의 왕족과 끈을 맺으면 다섯 배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생리 학이나 현대의학이 밝혀낸 사실에 완전히 어긋나는데도, 마치 왕가의 피는 보통 사람의 피 와 다른 어떤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결혼이 계속되고 있다. 유럽의 모든 황실이 유전병을 가지고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이 황실 출신에는 단 한 사 람도 천재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마땅히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어야 하는데도, 가장 멍청하다.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엄연한 과학적인 사 실이다. 그대가 힌두족이면 힌두족과는 결혼하지 말라. 이슬람교인이나 기독교인이 더 낫다. 그대가 유태인이면 힌두족을 찾으라.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 예전에는 이들 모두가 매우 가 까운 사이였으니까. 지금은 관계가 멀게 느껴질 것이다. 나무를 보라 잔가지일수록 더 많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하나의 둥치, 하나의 뿌리가 나온다. 모두가 같은 근원 에서 나온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려면 화성이나 다른 별에 사는 사람을 찾으라. 그 들과 지구상의 인간이 결혼하면 슈퍼맨이 탄생할 것이다. 훨씬 수명이 길고, 건강할 것이다. 두뇌 역시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가지 부모들이 결혼 결정을 내려왔으며, 결정을 위해 그들은 바보들과 점성술사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별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대는 너무나 작은 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별들은 그대의 별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별들은 너무나 멀리 있다. 어떤 별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와 같은 별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빛은 엄청난 속도를 갖고 있다. 거의 최고의 속도이다. 지구가 있기 전에 수천 수만의 별 들로부터 빛이 여행을 시작하였다. 지구를 향해 떠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빛 방출 이다. 그러나 아무리 빛의 속도가 최고라고 해도 그 별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빛 보다 빠른 속도는 없다. 빛은 1초에 18만 5천 마일을 여행한다. 1분간의 거리를 생각해 보 라. 여기에 60배를 해야 한다. 하루에 이동한 거리를 계산하려면, 다시 거기에 60을 곱한 다 음 24를 곱해야 한다. 그러나 1년간의 거리를 생각해 보라! 거기에 다시 365배를 해야 한다. 그러니 마일(mile)로는 올바른 측정을 할 수 없다. 그랬다간 책 한 권을 써야 할 것이다! 가 장 가까운 별의 거리를 말하는 데에도 수천만 개의 동그라미(0)를 쳐야 한다. 가장 가까운 별이 보낸 빛이 지구에 오는 데에도 4년이 걸린다. 따라서 그대가 보는 그 별은 지금의 별 이 아니라 4년 전에 그곳에 있던 별이다. 그러니까 밤에 그대는 완전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보고 있는 별들은 지금 그곳에 존재하는 별들이 아니다. 어떤 별은 수백만 마일을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더 멀리 떨어진 별들도 있다. 그 별들의 빛은 아직 지구에 한 번도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별빛이 지구에 도착할 때쯤이면 지구는 존재하지 않을는 지도 모른다. 이 무한한 우주에서 지구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너무나 작다. 태양 만해도 지 구보다 수천 배나 크다. 그리고 우리의 태양조차도 아주 평범한 친구다. 그것보다 수천 배가 더 큰 태양들이 수없이 있어서, 우리 눈에는 그것들이 별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게 보이는 것이다. 이토록 작은 지구, 그런데도 우리는 그 지구를 다 시 수백 조각으로 나누었다. 그래서는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을 서로 외국인으로 만들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보라. 1947년 전만 해도 파키스탄에 사는 사람들은 외국인이 아 니었는데, 지금 그들은 외국인이다. 방글라데시에 사는 사람들은 외국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외국인이다. 정치인들은 갈등과 싸움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 들이다. 그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것이고, 각 구역은 그곳의 사람들을 자기 영역 안 에 묶어 두려고 한다. 우리가 이슬람교권의 여자나 힌두교권의 남자와 결혼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실이라든가, 국민의 복지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권력 이다. 그리고 권력이란 가장 열등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권력을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토록 난리인가? 어째서 자 기가 꼭대기에 올라가 모두를 지배하기를 원하는가? 바로 열등감 때문이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지신이 어떤 특별하고 남다른 존재 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그의 하찮음과 평범함을 눈치챌까봐 겁을 먹고 있다. 진실로 강한 사람은 권력욕이 없다. 권력욕은 내면의 허약함에서 생긴다. 물욕은 내면의 빈곤함에서 생긴다. 부모는 자식들이 기쁘고 행복한 데에 관심이 있다. 연줄이 좋아야 권력 의 사다리를 더 높이 올라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처럼 결혼 은 권력에 목마른 사람들이 고안해 낸 가장 추한 제도였다. 알무스타파는 그대가 아는 결혼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연애 결혼에 대하 여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연애 결혼이란 개화된 나라의 최근의 발전 사항에 지나지 않 는다. 조혼이 사라진 대신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결혼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을 모른다. 사랑의 신비를 전혀 모른다. 사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욕망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소위 연애 결혼은 맹목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결코 맹목적이지 않다. 혼란이 찾아오고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은 '맹목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은 가장 분명한 통찰력, 신선한 눈을 준다. 욕망 은 생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확실히 맹목적이다. 그것은 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러자 알미트라가 다시 물었다. 스승이시여, 결혼은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그녀는 알무스타 파를 '스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헤어질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사랑에 대하여 말했지만, 그 모든 것은 진실로 아는 사람, 자신의 체험을 통해 아는 영적 스 승만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는 대답하였다. 너희는 함께 태어났으니... 이 문장을 오 해하지 말라. 그는 지금 모든 남자가 어딘가에 장래의 아내와 함께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 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너희는 함께 태어났다." 너 희는 사랑 속에서 함께 태어났다. 사랑 속에는 너희는 전에 없이 새로워졌고, 신선해졌고, 젊어졌고, 노래가 되고, 춤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함께 하리라. 그대들이 사랑으로 거 듭나면 그대들의 함께함은 욕망에 따른 것이 아니며, 그대들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져 간 다. 욕망은 모든 것을 나날이 줄게 한다. 욕망이라는 생리현상은 그대들이 함께 있느냐 떨 어져 있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의 관심은 번식에 있다. 번식에는 사랑이 필요 없다. 사 랑 없이도 그대들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온갖 동물을 관찰해 왔다. 나는 숲과 산 속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동물들은 성교를 할 때 매우 슬퍼 보인다는 사실이다. 동물들 이 즐겁게 성교를 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마치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성교를 하도록 그들을 강요하는 것 같다. 그들의 선택이나 자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뭔가에 의해 강압적으 로 그들은 성교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 보이는 것이다. 사람에게서도 나는 같은 현상을 보았다. 길을 걸어가는 남편과 아내를 본 적이 있는가? 그냥은 그들이 남편과 아내인지 알 기 어렵지만, 그들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면 그들은 틀림없는 부부다. 내가 델리에서 스리나가르로 기차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냉방장치가 된 칸막이실에는 좌석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내 자리였다. 그때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한 좌석에 둘이 앉을 수 없었으므로 남자는 여자를 남겨 두고 다른 칸으로 갔다. 하지만 그는 매 정거 장마다 과자와 과일과 꽃들을 들고 여자를 만나러 왔다. 나는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며 앉 아 있었다. 나는 단지 구경만 했다. 그러다가 내가 여자에게 물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 었는가?" 그녀가 말했다. "꼭 7년째입니다." 내가 말했다. "거짓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은 속 일 수 있어도 나만은 속일 수 없다. 너희는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지 금까지 대화도 나누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 사람이... 내가 말했다. "별 것 아니다. 그가 그대 의 남편이라면 그는 한번 가면 끝이다. 내릴 역에서 그가 그대를 찾아온다면 행운이다." 그 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저를 모르고, 저도 선생님을 모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옳 습니다. 그는 나의 애인입니다. 그는 내 남편의 친구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무슨 잘못된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순전히 욕망이다. 머지않아 그대들은 서로 진절머리가 난다. 종족 보존이라는 생리현상에 속 았지만, 곧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맨날 똑같은 얼굴, 똑같은 구조, 똑같은 지형... 얼마나 많이 그곳을 흝고 지나갔던가? 결혼 때문에 전 세계가 슬퍼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랑은 가장 신비한 현상이다. 그 사랑에 대하여 지금 알무 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사랑이 그대의 가슴속에 싹트는 순간 그대는 다시 태어난다. 그것이 그대의 진정한 탄생이다. "그리고 너희는 영원히 함께하리라." 이것은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 다. 그대들은 싫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욕망이 아니므로. 일단 자식을 낳고 나면 생리현상이 그대를 떠나므로 그대는 자신이 웬 낯선 사람과 같이 살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여자는 그대가 알고 있는 여자가 아니다. 이 남자는 그대가 아는 남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대들이 하는 일이란 서로 다투고, 잔소리를 늘어 놓고, 괴롭 히는 일뿐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명상의 결실이다. 명상은 많은 보물을 가져다 준다. 아마도 사랑이 명상의 덤불에서 피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너희의 생애를 흩어 버릴 때에도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렇다,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도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이 문장을 기 억하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함께 있되 지배하려 하지 말라. 서로를 소유하고 서로의 개성을 파괴하려 하지 말라. 어디서나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왜 여자는 결혼을 하면 남자의 성을 따라야 하는가? 그녀 역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개 성이 있다. 남자가 여자의 성을 따른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남자든 반대할 것이다. 여자가 연약하고 힘이 없다고 해서 마구 파괴하는 것이다. 왜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야 하는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면 안 되는가? 여자의 집안에 아들이 없을 경우에 가끔 남자가 결혼하여 여자의 집안에 들어가 산다. 하지만 그 남자는 모두의 놀림을 받는다. 마치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여자는 비 웃음을 받지 않는다. 사실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 더 마땅하다. 여자는 연약하다. 그녀가 자란 집, 그 녀가 익숙해 있는 환경에서 그녀를 빼내는 것은 파괴의 시작이다.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결 코 한 개인이 될 수 없다. 그저 뿌리뽑힌 머슴일 뿐,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식모일 뿐이 다. 세상 어딜 가나 여자는 그렇게 취급받는다. 내 제안은 이렇다. 여자와 남자가 같이 살기로 결정하면 자신들의 집을 가져야 한다. 아무 도 다른 한쪽의 집으로 가서는 안 된다. 다른 한쪽의 집으로 가는 사람은 머슴이 되기 때문 이다. 머슴은 즐거울 수 없다. 자신의 개성과 본질을 잃는다. 자신을 팔아 버린 것이다. 그러 나 함께 살되, '거리를 두라.' 남편이 늦게 집에 들어온다. 아내는 남편이 어디에 있었는 지, 왜 늦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남편은 남편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로운 한 개인이다. 두 자유로운 개인이 함께 살고 있으며, 누구도 서로의 공간을 침범해서는 안 된 다. 아내가 집에 늦게 들어와도 "당신 어디에 갔었어?" 하고 물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도 대체 누구인가? 아내는 아내 자신의 영역과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매 일같이 모든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소한 일들을 놓고 그들은 매일 부부 싸움을 벌인 다. 근본 원인은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에 있다. 취미가 다르다. 남편 이 좋아하는 것을 아내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싸움의 원인이 거나, 부부이니까 같은 취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궁리 한다. "아내가 뭐라고 했을까? 나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지?" 아내는 자신이 이렇게 물으면 남편이 어떻게 대답할지를, 그리고 그 대답이 모두 거짓임을, 남편이 자기를 속이고 있음을 안다. 이렇게 언제나 의심하고 질투하는 이것은 도대체 무슨 종류의 사랑이란 말인가? 아내가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면, 남편은 기분이 상해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웃 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으면서 즐겁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남편이 보면, 그것만으로도 태풍이 불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을 모 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랑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으며, 절대로 시기하지 않는다. 사랑 은 절대로 상대방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는다. 사랑은 결코 자신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 는다. 사랑은 자유를 주며, 그 자유는 함께 있으면서도 거리를 둘 때만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칼릴 지브란의 아름다운, 대단한 통찰력이다. 사랑이란, 자신의 여자가 다른 사람과 있으면서 행복해하면 자신도 행복을 느껴야 한다. 사랑은 자신의 여자가 행복해지기 를 바라니까. 사랑은 남편이 기뻐하기를 바라니까. 남편이 다른 여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 쁨을 느낀 다면, 그 아내도 마땅히 행복을 느껴야지, 다툴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을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같이 산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마치 모든 남 편과 아내가 서로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파괴하기 위해서 같이 사는 것 같다. 그 이유 는, 그들이 사랑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서로에게 더 많은 공간을 줄수 록 더 많이 함께 있게 된다. 서로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할수록 더 가까워진다. 가까운 적이 아니라 가까운 동반자가 된다.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너무 많 이 함께 있고, 자유를 위한 거리를 남겨 놓지 않을 때 사랑의 꽃이 시든다는 것은 존재의 근본 법칙이다. 그대가 그 꽃을 짓이기고, 자라날 공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동물에게 영토 본능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개들이 전봇대나 기둥 에 오줌을 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가? 그렇지 않다. 개들은 지금 자기의 영토 표시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여기는 내 영역이 다." 그 오줌 냄새가 다른 개들이 그 영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다른 개가 그 영 토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면 그 영토의 임자인 개는 가만히 있는다. 하지만 한 발만 영토 안 으로 들어와도 싸움이 일어난다. 야생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사자라 해도 그대가 그이 영토를 자나가지만 않으면 그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대는 무사한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의 영 역을 지나가기면 하면 그대가 누구든지 사자는 그대를 죽일 것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의 영토 본능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 그것을 느낀 적이 있 을 것이지만, 아직 이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봄베이 같은 도시의 열차를 타보라. 열차는 항상 만원이다. 몇 명만 자리에 앉아 있을 뿐 모두 서 있다. 그런데 서 있는 그 사람 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 매우 가까이 서 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몸이 닿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인구가 더 많아질수록 정신병자와 자살 인구와 더불어 살인자가 늘고 있다. 이 것은 그들이 자신들만의 공간을 갖지 못한 때문이다. 최소한 사랑하는 이들만은 민감해야 한다. 그래서 그대가 지신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아내 역시 자신의 공간이 필요하다 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책 중에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마지막 시' <아카리 카비타(Akhari Kavita)>가 있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소 설이지만, 깊은 통찰력으로 가득한 아주 이상한 소설이다. 한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은 결혼하기를 원했다. 여자가 말했다.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대단히 세련되고, 교양있고, 또 부자였다. 남자가 말했다. " 어떤 조건이라도 좋소. 나는 그대 없이는 살 수가 없소." 그녀가 말했다. "먼저 조건을 듣고 나서 결정하세요. 이것은 평범한 조건이 아닙니다. 조건은, 우리가 한 집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나에게는 넓은 땅이 있고, 아름다운 나무들로 둘러싸인 연못과 정원과 잔 디밭이 있어요. 당신을 위해 내가 사는 집 반대편에 집을 한 채 지어 주겠습니다." 그가 말 했다. "그렇다면 결혼하는 의미가 없잖소?" "결혼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공간을 줄 것이며, 나 역시 내 공간을 갖고 있겠습니다. 이따금 정원을 산 책하다가 우리는 서로 마주칠지도 모릅니다. 이따금 연못에서 보트를 타다가 우연히 만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때로 내가 당신을 초대하여 차를 대접할 수도 있고, 또한 당신이 나 를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오." "그렇다면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지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사 랑이 커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신선하고 새롭게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래야만 서 로가 서로를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내 초대를 거절할 권리를 갖 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의 초대를 거절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서로 의 자유가 침해당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자유 속에서만 아름다운 사랑이 커나갈 수 있습 니다." 물론 남자는 이러한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라 빈드라나드 타고르는 칼릴 지브란과 똑같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동시대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만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다 면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사랑은 주든지 받든지 순수한 선물이어 야지 어떤 요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있다 해도 그대들은 별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된다. 그대들은 연결할 다리가 없다. 다리를 놓을 공간마저 남겨 놓지 않 은 것이다.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고정되고, 정해진 것으로 만들지 말라. '그보다 그대의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 를 놓아 두라.' 사랑과 자유를 함께 가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 그것을 위해 그대는 태어난 것이다.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칼릴 지 브란은 지금 함께 있으면서 거리를 둔다는 이 모순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대에게 이해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대단히 미묘 한, 하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지적이다.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무시하지 말라. '마치 거문고의 줄들이 한 가락에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거문고의 줄들은 서로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줄들은 "한 가락에 울린다." 떨어져 있음, 자기만의 공간을 가짐, 이것이 바로 줄의 개성이다. 그리 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 녹아 없어지는 것이 바로 가락이다. 그 가락이 바로 사랑이다. 서로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주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사랑은 조건 없이 준다. 사랑은 서로의 마음을 주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 두지는' 않는 다.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 무 가까이는 말라. 매우 조심해야 한다. 함께 서 있되, 서로를 파괴하지는 말라. 너무 가까이 붙어 있지 말라. 공간을 두라. 성전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고... 이 기둥들을 보라. 기둥들은 서로 떨어져 서 있으면서도 한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여기 공간이 있고, 개성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기둥들은 서로 만나고 녹아서 한 지붕을 받들고 있다.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그래서 많은 공간이 필요한 것이 다. 상대방이 그대의 그늘 밑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라지 못한다. 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계속해서 화를 내고 슬퍼하는가? 자신의 성장이 방해받기 때문이다. 둘 줄의 하나가 하늘을 다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한쪽은 햇빛과, 바람과, 비를 맛을 공간이 없 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이고 독재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은 속도, 같은 높이로 성 장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둘이 함께 태양과 바람과 빗속에서 춤추기를 바란다. 두 사람의 함께 있음은 예술이어야 한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존재의 예술이다. 알겠는가? 너희 아이는 너희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에 대하여 그러자 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 오." 그는 말했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저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은 저들 의 생각이 있으므로.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줄려고 하지 말라.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너희가 아이들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너희는 활이요, 그 활에서 너희의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그래서 활쏘는 이가 무한의 길에 놓인 과녁을 겨누고, 그 화살이 빠르고 멀리 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너 희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너희는 활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분은 날아가 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또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기에.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이 작품에는 일정한 내적 인 흐름이 있다. 처음에 그는 사랑을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는 결혼으로, 결혼에서 아이들로 - 이것이 바로 삶의 강물이 흐르는 방식이다. 그러자 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칼릴 지브란에 대한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의 세 질문은 모두 여자가 한 것이다. 남자들 역시 질문을 하지만, 그 질문은 언제나 추상적이다. 그들은 '신'에 대하여 묻는다. 도대체 이 '신'이라는 친구는 누구인가? 남자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외에 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신, 천국과 지옥 등등의 수천 가지 질문들은 솔직한 질문이 아니다. 모두 추상적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삶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신이 없이도 그대 는 아주 잘 살 수 있다. 사실 그대는 잘 살아가고 있다. 신이 존재하든 안하든 그대는 아무 런 차이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만났다.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의견이 정반대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을 보면 똑같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 그들이 겪는 문 제는 다 똑같다. 사랑에 대한 문제, 결혼에 대한 문제, 아이들에 대한 문제... 그러나 책 속에 서는, 철학 속에서는 그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차이를 느낀 적이 있는가? 여자는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세속적이다. 여자는 땅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공허한 말장난이나 수수께끼가 아니다. 심지어 수 세기 동안 여자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질문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 있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 덤까지 매순간 부딪쳐야만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라나데(Ranade)박사라고 하는 현대 인도의 최고의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가장 존경받고, 가장 학식 있는 학자요, 이론가였다. 그는 알라하바드 대학의 학과 교수였다. 인도에는 거의 1만개의 대학이 있는데, 알라하바드 대학의 철학과는 인도 최고의 철학과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나는 그를 만났었다. 그는 이제 매우 늙고, 정년퇴직을 했는데도 멀리서, 인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질문하고 탐구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오고 있었다. 나 는 그를 찾아가 마주앉았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 질문인가?" 내가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찾아왔는가?" 내가 말했다. "그냥 당신을 보기 위해 서입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당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왔 습니다." 나는 여섯 시간이 넘도록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추상적인 질문만을 던지고 있었다. "신은 존재합니까? 영혼은 실체입니까? 사후에도 삶이 있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것들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이었다. 여섯 시간 가량이 자난 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이가 많고 나는 젊습니다. 그 러니 나에게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는 다시 못 만날 것 같습 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평생을 시간 낭비만 했습니다. 이 여섯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이 어떤 식으로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 사 람들은 멀리서 왔고, 또 당신은 인생을 많이 살았지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제가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말아 주십시오. 당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제 비록 당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앞으로는 그것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으니. 뭔가 진실된 것을 탐구하십시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늙었고 그대는 젊지만, 그대의 말이 옳다."사후 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 죽은 다음에도 그대가 살아있을 것인지 아닌지, 진정한 의문은 그 런 것이 아니었다. 신이 사랑인지, 정의로운지, 자비로운지, 진정한 의문은 그런 게 아니 다. 진정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가?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가? 자비가 무엇인지 아는가? 당신은 이 귀한 존재의 보물들을 맛본 적이 있는가? 영혼이 존재 하는지 않는지, 이것은 진정한 의문이 아니다. 진정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가 그곳에 내면의 실체가 있는지, 아니면 당신이 단지 알맹이 없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 지 탐구해 본적이 있는가? 칼릴 지브란은 추상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추상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삶의 진 정한 문제들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겁쟁이들이지 철학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겁쟁이들이 세계의 사상을 주름잡고 있으니... 이 질문들 모두가 여자에게서 나왔다. 거기 겁 쟁이들도 있었다. 배운 사람들, 성직자들, 철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물었을 때, 알 무스타파는 그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자가 바보 천치라면 그 어리석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트라가 성전에서 나와 질문을 던지자, 알무스타파는 지금까지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같은 철학자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철학자들이지 유치원 선생이 아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이라고? 그것이 철학적인 질문인가? 결혼? 이것 이 철학적인 질문인가? 세상의 위대한 철학 논문이라고 하는 것들을 보라. 거기에는 사랑이 나 결혼이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 모든 훌륭한 논문들은 삶의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지나 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는 신의 존재에만 관심이 있었지,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못하였 다. 그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었다. 이것들은 하찮은 문제이고, 그들은 위대한 철학자들인 것 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건대, 그들은 겁쟁이들이다. 한 여성이 임마누엘 칸트에게 물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여자가 자진해서 자 신의 마음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천박한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인생 은 짧다. 너무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 게다가 청춘은 더 짧고, 아름다움이란 아침에 피었다 가 저녁에 시드는 꽃과 같다. 마침내 기다리다 못한 그 여성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임마누 엘 칸트에게 물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고 대답만 해주신다면 저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 었다. 그는 말했다. "먼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결혼에 반대하 거나 찬성하는 온갖 종류, 온갖 나라의 책들을 뒤지는 데에 3년이 걸렸다. 그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반대하는 의견과 찬성하는 의견들이 거의 비중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인이 한 명 있었다. 이 하인은 평생 동안 그와 함께 살았다. 이 하인이 3년 내내 그를 지켜본 뒤에 이렇게 말했다.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철학자도 아니고, 그저 당 신의 하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 을 당신에게 하려다가 몇 번을 참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용기를 냈습니다." 하인은 말 을 이었다. "당신이 대학에 강의하러 나가시면, 나는 당신이 모아 놓은 결혼 찬성과 결혼 반 대의 메모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모두 그럴싸해서 당신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당신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당신은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론들은 아무런 힘이 없으며, 당신에게 어떤 체험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미력하 나마 저는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양쪽이 똑같은 비중이라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긍정'쪽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직접 체험을 해볼 수 있으니까요. '부정'쪽은 체험할 기회를 닫아 버립니다." 칸트는 왜 진작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후회했다. 그는 당장에 달려가 여자 집의 문 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 노인이 나왔다. 칸트는 자신을 소개하며 말했다. "나는 임마누엘 칸 트입니다. 당신은 그 여자의 부친되시는군요. 그녀에게 대답을 해주러 왔습니다." 노인은 말 했다. "너무 늦었네 그 애는 벌써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일세. 딴 데 가서 알아보게." 하지만 그는 겁쟁이였기 때문에 다른 여성에게 접근할 용기가 없었다 그의 위대한 철학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다. 다른 위대한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들의 심리를 들여다 보지 못했다. 왜 그들은 터무니없고 무의미한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며, 삶을 진정한 문제에 는 관심을 갖지 않는가? 진정한 문제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위대한 철학자가 된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여자가 어떻게 위대한 철학자가 되겠는가? 여자는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결혼과 사랑에 대하여 알고 싶어한다. 여자는 보다 솔직하다. 그래서 언제나 삶의 작은 문제들, 인생에 더 밀접한 문제들. 매 순간 부딪쳐야 하는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 정말 큰 손실이다. 세상은 겁 과 두려움에 바탕을 둔 어리석은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여자의 말에 귀기울였다면, 여자의 질문이 인정되고 그래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면 인류는 훨씬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남자의 질문에는 가심이 필요 없다. 어떻게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 그대의 가슴과 연결되 겠는가? 사후의 삶은? 이것들은 모두 머리 속의 생각일 뿐이다. 이 점을 기억하라. 칼릴 지 브란의 <예언자>는 철학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주며, 인생의 작은 문제들을 존중하고 가 치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작은 문제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을 풀 지 못한다면 큰 문제들은 잊어 버려라. 어떻게 큰 문제를 풀겠는가? 그대는 삶의 실제적이 고 진정한 문제들에 눈뜨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큰 질문들을 묻는 것이다. 아주 주의해 서들으라. 세상의 어떤 문학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한 아름다움과 진실과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는 물건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를 소유할 수 없 다. "이 애는 '나의' 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생명은 결코 누구에게 소유 당할 수 없다. 생명을 그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는 있으나, 주먹을 쥐 는 순간 생명은 빠져나간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아 이들을 파괴해 왔다. 아이를 소유할 수 있는가? 그대는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그런데 어 떻게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가? 생명은 어디까지나 풍요로운 존재의 선물이다. 그대가 그 생명이 탄생하는 도구로 선택된 것에 감사하라. 아이는 그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대에게 소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통로였을 뿐이다. 만일 부모들이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아이들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산과 숲과 들판을 통하여 흐르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온 아이는 그대 이전에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왔었다. 아이의 과거와 미래에는 영원히 놓 여 있다. 아이는 여러 집, 여러 도시, 어려 낯선 장소에서 살았었다. 그 수백만의 통로들 중 에서 그대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아이를 존경하라. 지금까지 세상의 어 떤 사회도 아이들을 존경하지 않았다. 나이 먹고, 늙고, 거의 죽은 사람들만을 존경해 왔다. 모두가 무덤에만 존경을 표시하지, 요람에는 존경을 보내지 않는다. 아이는 가장 순수한, 전 혀 물들지 않은 생명이다. 알무스타파의 말이 옳다. '아이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 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초로부터 나왔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를 그리워는 큰 생명의 아들딸임을 '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다. 아이는 노인이 다. 생명의 근원에 더 가깝다. 노인은 죽음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은 존경 하고 숭배하면서도 생명은 온갖 방법으로 억압하고 파괴한다. 아이들이 자기를 통하여 세상 에 나오지만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어떤 부모도 자신의 종교와 정치 이념과 생각을 순진 무구한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백지 상태로 세상 에 나오는데, 부모들이 서둘러서 저들을 기독교인으로, 힌두교인으로, 불교신자로 만들어 버 린다.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다. 우리 부모는 당연히 자신들이 믿는 절이나 종교집회 에 갈 때면 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나는 부모에게 말했다. "그것은 부모님의 종교이고, 부모님의 절입니다. 저에 대해서는 좀더 인내를 가지시 고,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저는 저 자신의 종교와 저 자신의 절을 찾겠습니다." 부모님 은 말씀하셨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아이들은 모두 자신이 태어난 가문의 종교를 믿어야 한다." 내가 말했다. "다른 아이들이야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습니다. 저 는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겠습니다. 저는 아직 세상의 종교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시고, 제가 혼자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저를 불구자로 만 들지 마세요, 저를 파괴하지 마십시오. 진리가 있다면 제가 그것을 찾겠습니다. 남에게서 진 리를 빌려 오지는 않겠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저에게 진리를 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은 별 로 행복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절대로 내 이름 옆에 나의 종교를 적지 않았다. 내가 다 른 아이들보다 늦게 학교에 들어간 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자식이 우 리 어머니 한 분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아주 깊은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그 동네 사 람들은 기차나 자동차를 본 적이 없었다. 동네에는 그것들이 지나다닐 만한 도로가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자네가 내 딸을 아내로 데려간 뒤부터 우 리 내외는 적적해서 살 수가 없네. 그러니 첫애를 우리와 살게 해주게. 어찌나 외로운지 사 는 즐거움이 없다네." 나의 어머니는 불과 일곱 살 때에 결혼을 하셨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그것이 관습이었으 며, 그 마을에서는 아직도 그렇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딸은 우 리의 기쁨이었고, 우리의 노래였다네. 우리의 인생이었지... 그리고 얘가 아직 어리니,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거야. 그러니 아이를 우리에게 맡기게. 물론 어느 정도 크면 도로 데 려가게. 그리고 앞으로 아이를 더 낳을게 아닌가." 그것이 나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친할머니께서는 아버지가 결혼할 무렵에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열 살 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스무 살이었고, 어머니는 열일 곱 살이었다. 부모님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당황하셨다. 그래서 좋은 기회를 얻어, 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손에서 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다. 절도 없 고, 성직자도 없었다. 나에게는 계속된 행운이었다. 나는 거의 야생화처럼 자라났고, 그래서 지금까지 야생화처럼 살아왔다. 내가 일곱 살 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일곱 살이면 자 신의 생각을 갖기에 충분한 나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모르고 지냈다. 오직 외할머니만 알고 살았다. 태어나서 처음의 7년 동안은 인생의 기초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 고 학교에 가서 입학원서를 작성할 때였다. 나의 종교관을 쓰려고 할 때 나는 아버지를 제 지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다 '아직 어떤 종교에도 가입하지 않았음. 앞으로 알아볼 것임.' 이라고 쓰세요."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매우 이상하게 보일 텐 데."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이상하게 보여도 진실은, 실제로는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 에요. 그리고 거짓은. 아무리 익숙해 보여도 실제로는 익숙한 것이 아니에요. 거짓은 존재하 지 않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내가 한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올라 갈 때마다 언제나 문제였다. 인도에서는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당연시되 고 있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다. 어떻게 종교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의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대 역시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가 되려 면 충분한 교육과 실습을 거쳐야 한다. 그때만이 의사가 될 수 있다.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 해서는 그대는 아이가 의사로 태어나거나 교수로 태어나는 게 아님을 잘 안다. 그런데 어 떻게 아이가 신비가로 태어날 수 있는가? 입학원서나 서류를 채울 때마다 문제가 발생하였다. 직원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김없 이 다 써야 합니다. 빈칸이 있으면 안 돼요." 내가 말했다. "빈 칸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나는 내 종교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몇 번이고 나를 교장 앞으로 데려갔다. "이 학생을 어쩌면 좋지요? 빈칸이 없이 서류를 채우라고 되어 있는데, 이 학생은 아직 자 신의 종교를 모른답니다." 내가 말했다. "내 원서를 받지 않아도 좋고, 입학을 거부해도 좋 습니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들은 나를 설득했 다. 부드럽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서류일 뿐이네. 자네 아버지는 종교를 가지고 있 겠지?" "이 서류는 나에 관한 서류이지, 우리 아버지에 관한 서류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종 교를 적으라면 이름까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습 니다." 그들은 내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말했다. "사실은 당신들이 종교를 묻 는 이런 형태의 서류를 없애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교육부 장관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전에 그는 어 떤 대학의 부총장이었는데, 토론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내가 여러 차례 그 대학엘 갔었던 것이다. 나는 그 대학의 모든 상장과 상패를 휩쓸었으며, 그래서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세 번 연속적으로 우승하면 그 상패는 영원히 우승자에게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 으면 일 년 뒤에는 반납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우승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 다. "자네는 이상한 사람이야. 이 상패들은 이 학교가 세워진 지 지난 50년 동안 계속 이 학 교에 남아 있었지. 아무도 연속 3년을 우승한 적이 없었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군. 매 년 우리는 새로운 상패와 우승컵을 사야 하게 생겼네. 자네가 졸업하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 만 말일세..." 그가 교육부 장관이 되었을 때 나는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나는 대학 교원 자격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전체 대학에서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어서 나에게 합당한 대학을 지정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절차를 따라야 하네. 먼저 신청서를 써내게." 또다 시 같은 문제가 생겼다. "자에의 종교는?" 내가 말했다. "나의 교수 자격과 종교가 무슨 상 관이 있습니까? 나는 아무 종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를 거부한다면 나는 첫 번 째 기자회견을 갖겠습니다." "그런 짓은 하지 말게. 그냥 아무 종교나 넣으면 되지 않는가. 아무렇게나 적게. 아무도 그것을 읽어보지 않을 테니. 어쨌든 서류를 완성해야 하니까." 내 가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지금까지 내 서류의 종교란은 계속 비어 있었다. 아직도 그 칸은 비어 있다. 나는 종교성은 발견했지만, 어떤 종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도 나에게 자신들의 사상, 자신들의 신, 자신들의 존재관을 강요하지 않은 것을 큰 행복 으로 생각한다. 모든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부모들에게 억압당하고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어떤 부모든지 아이를 강제하고 조건지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찾고, 탐구하고, 추구 할 근본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세상에선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 그대의 부모를 기억하는가? 그들은 그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었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사랑 을 이용하여 그대에게 자신들의 종교, 자신들의 정치 이념, 자신들의 국적과 사상을 강요하 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왜 분열되었는가? 누가 죄인인가? 왜 이토록 많은 국가가 생겨났는가? 왜 이토록 많은 종교가 난립하는가? 인류는 하나다. 진리도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의 자신의 본래 얼굴을 찾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가면이 씌워지고, 사람들은 이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인 것으로 착각 한 채 평생을 산다. 그대는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적이 없다. 그리스도, 고타마 붓다, 마하비라, 노자, 짜라투스타라, 이들 중 누구 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은지 선택할 기회도, 선택권도 그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대의 종교는 그대를 묶는 밧줄이다. 그대의 감옥이다. 그대의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그것들은 육신이 아니라 그대의 영혼을 묶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을 팔아 버린 사람이다. 모 든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이 이제는 노예제도가 없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래도 그대는 노예 이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렇다. 노예제도는 형태를 달리했을 뿐이다. 더 위험해졌다. 그대가 나에게 수갑을 채운다 해도 내 정신은 자유롭다. 내 발에 사슬을 채워도 내 영혼은 자유롭다. 내 몸을 못쓰게 만들어도, 내 영혼은 자유롭다. 하지만 힌두교와 불교와 이슬람 교와 기독교로 그대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그대의 정신을 묶는 것이 다. 이것이 더 큰 죄다. 지금까지의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은 저들 의 생각이 있으므로. 저들의 생각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아직은 씨앗의 형태이다. 저들은 아직 가능성의 상태이다. 하지만 저들에게 자유와 사랑을 주면 저들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실체화된다. 그대 자신의 생각이 실체화되었을 때 그대의 존재는 너무나 큰 기쁨과 충족감 과 축복을 느낀다. 그대는 꿈속에서도 그러한 것을 체험할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어떤 관 념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사고 능력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그대의 가슴에서 자라 고, 그대의 가슴에서 꽃피어나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좋은 의 도 아래에서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죽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영혼을 죽여 버렸다.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 는 내일의 집에. 그대는 과거에 속해 있고, 그대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니 그대의 죽은 경전 들을 아이들에게 짐 지우지 말라.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가질 것이고, 저들 자신의 성자들을 가질 것이다. 저들 자신의 부처, 저들 자신의 그리스도를 가질 것이다. 왜 저들이 과거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가. 그들의 미래는 활짝 열려 있다. 그대 만일 그대의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대의 손길을 거두라. 저들이 강해지도록 사상을 주입시키지 말라. 그대의 사상은 저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대의 사상 때문에 저들은 자신의 길을 잃을 것이다. 그대는 저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지켜보고, 저들 의 뚜렷한 통찰력을 보라.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작은 학교에서 기독교 목사가 아이들에 게 하느님이 엿새 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으며, 7일째에 쉬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철도는 누가 창조했나요?" 목사는 당황했다. 분명 신약과 구약에는 하느 님이 철도를 창조했다는 말이 적혀 있지 않았다. 또다른 아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이 물었 다. "너도 질문이 있느냐?" 아이가 말했다. "아니요. 저는 그 질문에 답하고 싶어요."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 어린아이가... 그는 말했다. "좋다. 한 번 해봐라. 대답이 뭐지? 지금 이 아니는 철도를 누가 창조했느냐고 묻고 있다." 아이가 말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땅에서 기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마땅히 기차도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분명한 통찰력과 눈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 록 그대의 눈에는 먼지가 낀다. 그리고 모두가 그대에게 충고를 한다. 충고란 세상에서 누구 나 주면서 아무도 받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어린아 이들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알무스타파가 옳다.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 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그대는 어제에 살고 저들은 내일에 산다. 그대가 줄 수 있는 한 많은 사랑을 주어라. 현재는 만남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별의 장소이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현재에서 그대들은 헤어지기 시작한다. 나날이 그 대와 그대의 아이들의 간격은 더욱더 커진다. 사람들은 세대 차이에 대하여 말한다. 금세기에 일어난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 바로 세대 차이라는 것이다. 그 차이가 더욱 커지도록, 서로 연결이 안 될 만큼 커지도록 온 노력을 기 울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평생 동안 시체들을 짊어지고 다닐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25세기 전에 죽었다. 예수는 2천 년 전에 죽었다. 사람들이 미친 것일까?왜 죽은 시체를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가? 그대는 25세기나 후대 사람이다. 인간의 진화가 고 타마 붓다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다. 고타마 붓다는 25세기 전의 사람이다. 그대가 그 죽은 시체들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대 자신의 부처를 탄생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 만일 과거로부터 자유롭다면, 그대는 더 높은 의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나 붓다보다 더 높은 의식을. 우리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별들을 향해 높 이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자명한 진리를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과거는 그대의 인생에 가장 큰 장벽이다. 이슬람교도들은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다. 그것을 비난하려면 그들의 종교까지 비 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경인 꾸란에서 모하메드는 네 명이나 그 이상의 아내를 거 느릴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성들은 남자의 성욕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 데도 나더러 그것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인가? 만일 모하메드가 여자에게도 네 명이나 그 이 상의 남편을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나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 대하 여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공정했어야 했다. 지금 보면 그는 남성 우 월주의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 변태성욕이 생기게 한 원인이었다. 자연은 똑같은 수의 남자와 여자를 탄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당행히 자연은 이슬람교나 꾸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왜 나는 '다행히'라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한 명의 여성으로도 그대를 끝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남자에게 네 명의 여자가 돌아간다면 모든 집에서 십자가에 매달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한 도둑이 도둑질을 하다가 집안에서 붙잡혔다. 판사가 물었다. "몇시에 그 집안으로 들어 갔는가?" 도둑이 대답했다. "밤 열시오." "그렇다면 밤새 뭘 했나? 너는 아침 여섯시에 붙잡 히지 않았는가?" 도둑이 말했다. "참으로 길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먼저 판사님께 이말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저에게 어떤 벌을 내리셔도 좋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내려도 달게 받겠습 니다만, 제발 두 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라고 판결을 내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판사가 말했 다. "너는 참 이상한 녀석이다. 밤새 너는 그 집안에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훔친 것이 없이 집안에서 붙잡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두 명의 여자와 같이 살라는 판결일랑 내리지 말아 달라고? 그런 벌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말아라. 어서 자초지종 을 말해라." 도둑이 말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내가 그 집에 들어간 것은 재수가 없었 습니다. 그 집엔 아내가 둘이었습니다. 한 아내가 1층에서 살고, 둘째 아내는 2층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들은 남자를 각기 자기 층으로 데려가려고 잡아당기고 있 었습니다. 층계에서 한 여자는 위층으로, 한 여자는 아래층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나 흥미가 있던지 나는 내가 그 집에 들어간 본래 목적도 잊었습니다. 또 사실 물건을 훔친다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남자는 울부짖고 있었고 여자들도 고함치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그러니 제발 이 벌만을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자연은 똑같은 수의 남자와 여자를 세상에 내보낸다. 이슬람교의 주장은 자연 법칙에 어긋난다. 따라서 누구도 내가 그것을 비 난하고 비판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들은 나약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대답을 못하니까 총 으로 누군가를 막으려고 한다! 모하메드 자신도 아홉 명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여자에 대 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자가 무슨 물건인가? 일용품인가? 가축인가? 이것이 14세기 전 에 있었던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바로 20세기에도 하이 드라바드의 니잠(Nizam)은 5백 명의 아내를 거느렸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을 비난하지 말 기를 바라는가? 하지만 이 가련한 니잠도 힌두의 크리슈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크리 슈나는 1만 6천 명의 아내를 거느렸다. 니잠이나 모하메드는 최소한 여자들의 부모에게 동 의를 얻어 결혼했으니 그래도 봐줄 만하다. 힌두인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이 크리슈나는 아름다운 여자면 아무나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 그 여자들 대부분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 자였다. 그들에게는 자식과 남편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돌보아야 할 가정과 가족이 있었다. 이 죄받을 짓을 보라. 힘과 군대를 갖고 있었기에 그는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다. 그의 군 사들이 아무 집이나 들어가 그가 원하는 여자를 납치해 왔다. 이런 식으로 그는 1만 6천 명 의 여자를 수집했다. 대단한 여자 수집가다. 하지만 그들 1만 6천 명의 가족은 어떻게 되는 가? 그들의 자녀, 그들의 남편, 남편의 늙은 부모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어떤 종교를 비난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대답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 대답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짓이 과연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그대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 람의 행동인가? 그렇다는 것을 그대가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나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먼 저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라. 그것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 기 위해서 나더러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과거는 나의 과거며, 내가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의 과거, 나의 유산을 비난할 권리가 있다. 추하고,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를 볼 때마다 나는 마땅히 가장 강력하게 그것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가 비판받는 것을 원 치 않는 사람들은 그 종교를 떠나라.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 내 평생 동안 나는, 내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한 적이 없다. 사실 나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비판하라.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과거를 비판할 수 없다면, 추하고 타락한 과거를 비판할 수 없다면 우리가 어 떻게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겠는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을 들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면 역사는 절대로 반복되진 않지만, 종교라는 이름 아래 같은 짓을 계속 반 복하면... 부모들은 자신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생각은 이미 시대 에 뒤진 것이다. 아이들은 저들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나무들이 훨씬 잘 안다. 가 을이면 낡은 이파리들은 떨어져 흙 속으로 사라져서는, 더 푸르고, 더 젊고, 더 싱싱한 새 이파리가 자라날 자리를 준다. 만일 낡은 이파리들이 계속 나무에 매달려 있기를 고집한다 면, 새 이파리들이 자라날 공간이, 가능성이 없게 된다. 그대여, 이 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왜 지금 시대에는 붓다와 노자, 장자, 까비르, 예 수, 짜라투스트라 같은 사람들이 탄생하지 않는가? 무엇 때문인가? 인류는 이제 힘을 모두 써린 것일까? 아니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치고,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과거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자연히 하루가 지날수록 또 하루가 과거에 첨가된다. 그리하여 이제 과거는 인간의 나약한 가슴 위에 히말라야처럼 버티고 서 있다. 이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는 그처럼 아름다운 존재들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그런 사람이 나타 나도 너무나 낯선 이방인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참지 못한다. 수천 명의 깨달은 사람들이 존재하던 시대의 풍취를 완전히 잊은 것이다. 그대는 아무도 화내지 않았다. 사람 들은 늘 감사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음속에 가득한 짐 들 때문에 그대는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과거의 죽은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대의 부패한 과거를 그대의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지 말 라. 저들에게는 저들의 미래가 있다. 저들 자신의 가능성에 따라 자라나게 하라. 너희가 아이들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여기서 칼릴 지브란은 대단히 심오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 는가? "하느님께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 그 이후 모든 아버지들이 아이들 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알무스타파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희가 아이들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왜냐하면 저들은 미래의 사람들이고, 저들은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대보다 존재의 근원에 더 가깝다. 그대에게는 죽음 밖에 일어날 것이 없지만, 자들에게는 수백만 가지의 일이 일어나리라. 사랑이 찾아오고, 명 상이 찾아오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리라. 제발 그대의 아이를 그대의 복사본으로 만들려 는 유혹을 버리라. 아이를 그대의 복사본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아이를 죽 이는 일이다. 아이들은 자기 본래의 얼굴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본래의 얼굴에는 아름다움 이 있다. 본래의 얼굴에는 신성한 어떤 것이 있다. 본래의 얼굴은 위엄을 가지고 있다. 복 사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너희는 활이요, 그 활에서 너 희의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어디를 행해 날아가는가? 미지의 알 수 없는 세계를 행해 날아간다. 저들을 방해하지 말라. 저들에게 힘을 주라. 저들에게 사랑을 주라. 그래서 저들이 가장 먼 별까지 닿을 수 있도록 하라. 그래서 활쏘는 이가 무한의 길에 놓인 과녁을 겨누고, 그 화살이 빠르고 멀리 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너희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존재계는 그대가 그대의 아이들 앞에서 활처 럼 구부러지기를 바란다. 저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야 하고, 그대는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 기 때문이다. 너희는 활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대의 아이가 그대로부터 떠 나갈 때, 그대의 아이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한 개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기뻐 하라. 그가 순종적인 바보가 되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기라. 바보가 아니면 아무도 순종하지 않는다. 지성은 언제나 반역을 꾀한다. 그대가 낳은 아이가 반역의 정신을 가진 것을 기뻐하 고, 축복해 주라. 이것이 그대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그것을 불안해한 다. 너희는 활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또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기에. 존재계는 그대들 둘 다 사랑한다. 그대들은 같은 존재계의 아이들이다. 단지 그대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화살들에게 자리를 비켜주 고, 저들을 축복하라. 알겠는가? 너희가 너희 자신을 줄 때 주는 일에 대하여 I 그러자 이번에는 부자 한 사람이 말했다. 주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 래서 그는 대답했다. 너희가 너희 가진 것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주는 것은 너희가 너희 자신을 줄 때이다. 너희가 가진 것이란 무엇인가? 내일 모자랄까 두려워 하여 간직하고 지키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또 내일이라는 것은, 순례자들을 따라 거룩한 도시로 가면서 자취도 없는 모래밭에 뼈다귀를 묻어 두는 조심성 많은 강아지에게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 줄 것 같은가? 또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 아닌가? 집에 우물이 가득 찼는데도 목마를까 두려워한다면 그 목마름은 영원히 채 울 길이 없지 않은가? 세상에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조금밖에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주되 남이 알아주 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기 때문에, 그 숨은 욕심이 그나마의 주는 일마저 추한 것으로 만 들어 버린다. 또 가진 것이 조금밖에 없으면서 그 가진 전부를 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생 명을 믿고, 생명의 아낌없이 줌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궤짝은 비는 날이 없다. 세상에는 또 기쁨으로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고통이 바로 이들의 세례. 그러나 주되 고통 도 모르고, 기쁨도 찾지 않으며, 덕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들은 마 치 저 골짜기의 상록수가 공중에 향기를 날리듯 그렇게 준다. 이런 이들의 손을 통해 신은 말씀하시고, 이들의 눈 속에서 신은 대지를 향해 미소짓는다. 부탁을 받고서 주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탁 받기 전에 다만 이해함으로써 주 는 것, 그것은 더욱 좋은 일. 그리고 아낌없이 주려는 이에겐 받을 사람을 찾는 기쁨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크다. 또 너희가 움켜쥐고 있을 만한 것이 무엇인가? 너희가 가진 것은 언젠가 는 모두 다 주어야 하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주라. 주는 때가 너희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것이 되게 하라. 이제 알무스타파는 남자의 세계, 특히 부자인 남자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이 심오한 이 야기를 논하기 전에 몇 가지를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지금까지 인간 모두는 인생의 욕심에 의해서 타락해 왔다. 욕심보다 더 강력한 독약은 없다. 욕심은 그대를 죽이며, 죽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숨쉬게 만든다. 욕심은 그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다. 어머니의 젖과 함께 모든 아이들에게 욕심이 흘러 들어간다. 맨 처음부터 아이의 인생은 파괴의 원리를 바탕으 로 시작된다. 욕심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없다. 부모와 선생, 성직자, 이웃사람들, 소위 그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부터 그대는 계 속 특별한 사람, 중요한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 리고 돈만큼 그대에게 많은 권력을 주는 것도 없다. 정치인들까지도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상품이다. 돈만 있으면 그대는 그들을 살 수 있다. 사실 많은 정치인들이 거부들의 손에 팔 려서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거부라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특 별한 존재, 권력 있는 존재가 되긴 했지만, 자신의 영혼을 상실하였다. 내면에는 공허와 어 둠뿐이다. 왜 그런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욕심은 사다리와 같아서, 그대의 위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있다. 언제나 경쟁적이다. 그대는 줄곧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방법만을 생각한다. 그 방법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상관이 없다. 남보다 영리하면 그대 는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여, 욕심의 세계에서는 성공이 곧 실패다. 그대는 남보 다 더 높고, 남보다 더 성스럽고, 남보다 더 부유한 위치를 찾느라 자신의 전 인생을 허비 하였다. 인생을 다 허비한 뒤에야 목적을 이룬 것이다. 욕심의 마지막 발판에 올라선 자는 저주받은 사람이다. 이 야심이 자나깨나 그의 꿈이었 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다리의 마지막 발판에 올라서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것에 놀라 고 충격을 받는다. 평생 애쓴 것이라곤 단지 경쟁하고 싸우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것은 보통 의 경쟁이 아니라, 목숨을 내건 필사의 경쟁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파괴했는가는 중 요한 게 아니다. 그의 눈은 오로지 멀리 있는 목표물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속담은 바보들이 만든 것이 틀림없다. "하나가 성공하면 만사가 성공한다." 이것은 진실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가 성공하면 만사가 실패한다." 그대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인생 전체가 사라졌다. 다 른 것에는 눈 돌릴 시간이 없었다. 심지어 제대로 숨쉬고, 웃고, 사랑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로봇이나 기계와 같은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제 바라 던 목적지에 도달한 그대는 깊은 좌절을 느낀다. 그곳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것이 사람들을 진정한 삶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사회의 전략이라고 용기 있게 말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회 전체가 진정한 삶, 사랑, 노래, 춤에 반대한다. 나 무들이 훨씬 행복하고, 꽃들이 더 즐겁다. 예민한 사람은 돌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 하 지만 아무리 세상의 모든 부를 차지했다 해도 그대는 그것을 먹을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삶과 영혼에 아무런 자양분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그대를 부유한 거지로 만들며, 풍 요로움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대 존재의 중심에는 구걸하는 밥그릇이 있게 만든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떤 왕이 있었다. 그는 대단히 세력 있는 왕이었다. 어 느 날 아침 그는 자신의 드넓은 정원을 산책하기 위하여 궁전 밖으로 나왔다. 걸어가다가 그는 동냥그릇을 든 거지와 마주쳤다. 그 거지가 말했다. "이렇게 당신을 직접 만나게 되어 저로서는 큰 행운입니다. 그렇지 안으면 저는 당신과 만날 약속을 얻기 위해 몇 달을 기다 려야 했을 것입니다. 또 누가 저 같은 거지에게 왕을 만나게 해주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저는 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작은 동냥그릇에 당신이 위대한 왕으로서 귀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아무거나 가득 채워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 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형편없는 거지일 따름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물건으로 이 밥그릇을 채워 주십시오," 왕은 이런 거지를 만 난 적이 없었다. 다른 거지들은 배가 고프다거나 목마르다거나 먹고 살 것이 없다고 구걸하 기 마련이었다. "당신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베푸는 선물은 한 위대한 왕의 표시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이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왕은 당장에 수상을 불렀다. 왕이 수상에게 어떤 말을 하기 전에 거지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한 가지 조건은, 이 동냥그릇을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걱 정 말아라. 나는 이 넓은 나라와 철철 넘치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너의 작은 동냥그릇 쯤이야 문제가 아니다. 너는 내가 그 동냥그릇을 채우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느냐?" 거지에 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왕은 수상에게 말했다. "이 거지의 동냥그릇을 다이아몬드와 루 비와 에메랄드 등 보석으로 가득 채워 주어라. 그래서 그가 평생 동안 한 위대한 왕을 만났 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라."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궁전에는 다이아몬드와 온갖 종류의 진기한 보석들이 가득 있었 다. 그런데 당장에 문제가 생겼다. 수상이 거지의 동냥그릇을 채워 주었으나, 그 동냥그릇에 어떤 것을 집어넣든지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릇을 가득 채운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왕 역시 고집 세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또 많은 영토를 가진 정복자였다. 왕 은 말했다. "내 나라 전체가 없어진다고 해도 나는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어서 저 동냥 그릇 을 가득 채워라." 서서히 왕이 가진 보석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금 다음엔 은... 하지만 여전 히 흔적 없이 사라지기만 할뿐이었다. 그리하여 저녁쯤엔 왕 자신이 거지가 되어 있었으며, 동냥그릇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빈 그릇이었다. 거지가 말했다. "정말 놀랍군요, 그토 록 세력 있는 왕께서 이 작은 동냥그릇 하나를 채워 주지 못하시다니요!" 사람들이 하루종 일 이 광경을 지켜보았으며, 나라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나라의 전재산이 그곳에 모여들었 으니,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먼 산골짜기에서도 사람들이 달려왔다. 왕은 거지의 발 아래 쓰 러지면서 물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나를 용서하여라. 나를 용서한다면 내 온 나라를 집어삼킨 너의 그 동냥그릇의 비밀을 말해 다오. 내 전재산이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 그것이 요술 그릇이냐? 너는 마술사냐?" 그 가난한 거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닙니다. 나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동냥그릇을 살 돈조차 없었던 어느 날 우연히 죽은 사람 의 두개골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잘 닦아 밥그릇처럼 만들었습니다. 비밀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의 두개골은 아주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세력 있는 왕조차도 그것을 채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마술은 바로 인간의 머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밥그릇 때문에 나 역시 매일 배가 고픕니다. 뭐든지 집 어넣기만 하면 사라져 버리니, 배고픔은 늘 마찬가지입니다." 사다리의 맨 위칸에 올라섰을 때 그의 삶 전체가 가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아무 것도 없다. 하 지만 뒤따라서 꼭대기를 향해 올라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는 데에는 용기 가 필요하다. 고타마 붓다는 아무 이유 없이 왕위를 포기하였다. 마하비라도 아무 이유 없이 왕을 포기하였다. 자이나교의 위대한 스승들인 24명의 티르탕카라(teerthankara)들도 왕위 를 포기하였다. 그들 모두가 미친 걸까? 아니다. 그들은 진실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아 버지는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남의 눈에만 성공한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들 의 내면을 볼 수가 없었다. 내면에서는 그들은 아직 거지들이었다. 맨 처음이 욕심의 여행 을 출발할 때보다 더 심한 거지가 되어 있었다. 모든 교육제도, 좋은 의도를 가진 모든 부 모들이 실제로는 모두 눈이 멀었다는 것을 그대가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거기 되돌아 갈 길이 없다. 그대의 청춘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 사랑의 꽃이 다시금 그대에게 피어나게 할 방법이 없다. 그대는 이미 메마르고, 딱딱하고, 죽어 버렸다. 그 경쟁이 너무나 난폭했 고, 또 성공하기 위해서는 난폭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돈만이 그대의 유일한 명상이 되었 다. 첫 번째 질문이 부자에게서 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자 한사람이 말했다. 주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부자는 묻고 있다. "나는 더 많이 갖기 위하여 투쟁하고 나 자신을 파괴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나는 내 인생이 애초부터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부디 '베푸 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이제 더 많이 갖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더 많이 갖겠다는 이 온통 어리석은 생각이 나를 서서히 죽였습니다. 이제 남에게 베풀면 조금이나마 다시 생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금 사랑의 산들바람이, 한 줄기 빛 이 내 어두운 영혼 속으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더 많이 얻겠다고 노력해 왔 습니다. 이제 주는 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아마도 올바른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속세를 떠나는 것을 인생의 기본으로 삼는 동양의 사람들은 역사 이래 다음과 같은 지혜를 물려받았다. '만일 너의 가슴에 춤과 노래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면, 만일 너의 영혼 속에 평 화가 깃들이기를 바란다면, 가진 것을 모두 주라.' 소위 모든 종교의 종교적인 선생이라는 자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쳤다. 이들은 그 밑바탕에 깔린 심리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위대한 스승들이 모든 재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는, 어떤 중대한 비결이 '포기'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수세기 동안 그들은 재산과 삶과 속세에 반대하는 가르침을 펴왔다. 그 결과가 어떤지는 오늘날의 동양에서 볼 수 있다. 동양은 점점 더 가난 해졌다. 포기할 것이라면 애초에 모을 필요가 무엇인가? 그래서 동양은 거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갖지 않고서 어떻게 포기를 하겠는가? 마하비라는 무한한 기쁨 속에 살았다. 고타마 붓다는 끝없는 환희 속에 지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포기할 것이 없는 거지는... 겉으로 봐서 그는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욕망이, 쾌락을 바라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픈 더 많은 욕망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 고 타마 붓다 같은 사람들은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 그들의 평화, 그들의 고요 를 보노라면 이 학자들과 선생들의 가르침으로부터는 아주 잘못된 결과가 생김을 알 수 있 다. 이들은 계속해서 삶에 반대되는 가치관을 가르치고 있다. 어떤 것을 갖고 있을 때만이 그대는 그것을 포기할 수 있다. 이것은 간단한 계산이다. 갖 고 있지도 낳으면서 어떻게 포기하는가... 한 사람은 포기하였고, 한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겉으로는 같아 보인다. 둘 다 같은 상태인 것 같지만, 심리적으로는 같지 않다. 정 신적으로는 같은 차원이 아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내 말을 오해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선 '가지라'고 가르쳐 왔다. 그런 다음 그대의 지성이 살아있다면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지만 내면에서는 더 많은 욕망이 자라나고 있다. 그들은 포기에 대하여 말하지만, 실상은 포기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포기는 먼저가 아니라 '나중'의 단계인 것이다. 먼저 누리고 즐기는 것이 첫 단계인 것이다. 종교란 자신들의 욕망이 어리석은 것이고 아 무 곳으로도 데려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그대 지신이 그러 한 체험을 해야 한다. 바로 그 체험을 통하여 소유하려는 심리가 사라진다. 그때 아름다움이 찾아온다. 25세기가 지났지만 동양은 다른 부처를 탄생시키지 못했다. 왜인가? 대단히 잘못 된 논리 때문이다. 부자는, 또 부자만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주는 일에 대해 가르쳐 주십 시오." 가난한 자는 "받는 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한 그대는 가난하다. 더 많이 갖겠다는 이 정신 나간 생각이 그 대를 아무 곳으로도 데려다 주지 않으며 단지 그대의 인생만 낭비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날, 오로지 그때만이 다음과 같은 질문은 진실성이 있다. 주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서 그는 대답했다. 너희가 너희 가진 것 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칼릴 지브란의 말은 순금 위에 씌어져야 한다. 그대의 소유물을 베푸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 한다. 소유하려는 욕망 자체를 버린다고 생각하라. 소유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그 대는 궁전 안에서 살 수도 있지만 궁전이 그대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궁전은 그대를 의식하 지도 못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는 '나의' 궁전이다!" 라는 데에 있다. 바로 그 소유한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궁전을 포기하든 안하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너희가 너희 가진 것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주는 것은 너희가 너희 자신을 줄 때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인도의 첫 번째 수상인 네루(pandit Jawaharlal Nejru) 가 영연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유럽 방문길에 올랐다. 내각의 서열 2위는 마울라나 아 자드(Maulana Abul Kalam Azad)였다. 어떤 특별한 정치 지도력이 있어서 그에게 두 번째 서열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막강한 정치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슬람 교도는 두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대다수는 무하마달리 지나(Muhammadali Jinnah)를 따랐는데, 독립국가 파키스탄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세력인 마울라나 아자드는 민족회의 의 일원이었는데 종교적인 지위 때문에 역시 많은 이슬람교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울라나(Maulana)는 이슬람교에서의 최고로 높은 지위이다. 마울라나 아자드가 대단한 연설가였지만 그는 인도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쓰이는 아랍말 인 우르두 말밖에 할 줄 몰랐다. 사람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일수록 더 차원이 높은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성직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랍비들은 히브리어로 말을 하는데, 유태인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깊 은 감동을 받는다. 쉬운 말로 번역하면 그것들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정확한 출처 를 찾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랍비'라는 말 자체가 '쓰레기(rubbish)'라는 말에서 나온 것처 럼 늘 느껴진다. 힌두교의 학자라면 산스크리트어로 말할 것이다. 그가 외는 말을 번역해 봐야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일 뿐이다. 모든 종교적인 선생들은 자기네들의 종교 경전들이 번역되는 것을 반대해 왔다. 일단 그 것이 사람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되면 성직자의 권한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성 직자가 베다에서 따온 구절을 산스크리트어로 외고 있는 소리를 들으면 그대는 감명을 받겠 지만, 일단 그 내용을 번역해 놓고 보면 그대는 졸음에서 깬 듯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베 다에는 4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모두를 합쳐도 겨우 2퍼센트 정도만이 가치가 있을 뿐, 나 머지 98퍼센트는 잡동사니일 뿐이다. 이것은 불교나 자이나교나 기타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 지다. 마울라나는 대단히 존경을 받았으며, 이 사람 때문에 인도는 파키스탄이 독립된 지금 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이다. 어떤 나라도 인도만큼 이슬람교 신자가 많지 않 다. 확실히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모든 성직자들처럼 매우 어리석었다. 서열 2위로 지명되자 그는 무척 화가 났다. 내심으로 그는 인도 수상을 노리고 있었던 것 이다. 그를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수상이 되면 매우 난처해진다. 이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질 것이다. 파키스탄 도 이슬람교 수상을 갖고 있는데, 이 나라까지 이슬람교가 수상을 맡으면 힌두교도들이 가 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이 나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러니 이 인도 땅은 숫자가 많은 힌두교에게 맡겨라."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서열 2위를 받아들였다. 파키스탄이라면 그는 발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적어도 서열 2위를 누릴 수 있지 않는가. 하지만 이 나라의 수상이 되려는 욕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네루가 외국 순방길에 오르자 그는 네루의 운전수에게 명령했다. "네루가 이 나라에 없는 동안은 내가 수상이다. 나는 수상을 대행할 수 있는 내각의 서열 2위이다." 그래서 그는 수상의 경 호원을 대동하고, 수상의 차에, 수상의 깃발을 꽂고 다녔다. 수상과 똑같이 몇 대의 차량이 앞뒤에서 그를 경호하였다. 내각의 다른 의원들이 말했다. "수상을 대행하는 것 같은 일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수상 은 정부의 공식적인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외유중이라면 부통령이 당분간 대 통령직을 대행할 수 있으나, 수상은 어딜 가나 수상이다. 어떤 나라의 헌법에도 수상 대행에 대한 조항이 없다. 그러니 그런 어리석은 짓 그만두라." 하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네루가 런던에서 그 소식을 듣고 당장에 마울라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어리석은 짓 을 당장 중지하라. 전세계가 웃는다. 그런 경우가 어디 있는가? 만일 당신이 수상 행세를 하 고 있다면 여기 수상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나는 뭐가 되는가? 그리고 나라의 공식적인 대 표자인 대통령이 그곳에 있지 않은가? 어서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 지성인답게 행동하라." 하지만 그대의 무의식적인 마음이 욕망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한 지성적으로 행동하기는 어렵다. 고타마 붓다에게는 어떤 욕심도 없었다. 그는 그것의 정체를 보았던 것이다. 하지 만 고타마 붓다와 자이나교의 스물네 명의 티르탕카라, 힌두교의 신의 화신인 라마, 크리슈 나 등은 모두 이 나라의 최고 부자인 왕족 출신들이었으며, 그것이 나라 전체에 재난을 몰고 왔다. 사람들이 가난을 숭배하게 된 것이다. 동양이 가난한 것은 이러한 오해 때문이 다. 수세기 동안 동양인들은 이러한 어리석은 논리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진실로 종교적이고 싶다면 열심히, 강렬하게 속세의 삶을 살라. 그래 야 어느 날엔가 그대는 그것이 모두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이 덧없고 무의 미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대 자신이 직접 깨닫는 순간, 소유하려는 욕망 자체가 사라 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베푸는 것에 대하여 묻지 않을 것이다. 베푼다고 하는 생각 속에는 아직 에고와 무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베푸는 그대는 누구인가? 알무스타파는 지 금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 가진 것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주는 것은 너희가 너희 자신을 줄 때이다.' 그대가 소유라는 관념에서 해방 되는 순간 에고가 사라진다. 그대 자신을 준 것이다. 너희가 가진 것이란 무엇인가? 내일 모자랄까 두려워하여 간직하고 지키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이것은 내 것이다. 저것은 내 것이다." 라는 모든 소유 관념은 두려움에서 생긴다. 바로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소유에 집착하지 않으면 내일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내일이라는 것은, 순례자들을 따라 거룩한 도시로 가면서 자취도 없는 모래밭에 뼈다귀를 묻어 두는 조심성 많은 강아지에게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 줄 것 같은가? 자신들의 재산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순례자들을 뒤쫓아가고 있는 개가 모 래 속에 뼈다귀를 감추고 있다. 그 개는 내일이면 순례자의 행렬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다시는 그 뼈다귀를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오늘은 오늘 자체로 충분하다. 또 내일은 내일이 돌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뢰이다. 이 런 신, 저런 신, 이런 성경, 저런 성경을 믿는 것과는 다르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숭 배하는 대신에 존재계 자체를 신뢰한다. 숭배는 빈 껍데기일 뿐이다.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 은 존재 자체를 신뢰하며, 이것을 안다. "만일 존재계가 오늘 나를 돌봐 주었다면 내일도 돌 봐 줄 것이다. 오늘처럼 존재계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내일도 나를 돌봐 주리라." 또 모 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 아닌가? 집에 우물이 가득 찼는데도 목마를까 두려워한다면 그 목마름은 영원히 채울 길이 없지 않은가? 세상에는 많 은 것을 가졌으나 조금밖에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주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기 때문에, 그 숨은 욕심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대의 이 숨은 욕심을 이용해 왔다. 언젠가 나는 프라야그에서 열린 한 종교 집회에 참석했다가. 샹카라차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지금 1루삐를 기부하면, 다른 세상에서 1천 루삐를 받는다." 이것은 순 전히 장사다! 모든 힌두 경전들이 그런 약속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조금 베풀면 천국에서 너희는 더 많은 것을 받으리라."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의 정신 나간 소유욕을 없애 주지 못한다. 남에게 1루 삐를 베푼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자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가 거지에게 1루삐를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숨은 욕심을 알지 못한다. 그는 죽은 뒤에 1 천 루삐를 받을 수 있도록 지금 그 돈을 저금하고 있다. 신의 은행에 예금을 해놓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높은 이자율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다른 세상에서 더 많이 받게 되기를 보장받기 위해서 약간을 베푼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도 남이 알아 주고 존경을 한다. 남들은 그들을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간디의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인 브하베(Vinoba Bhave)는 인도 전역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땅의 6분의 1을 기부하라고 역설하였다. 그렇게 해서 수백 만 에이커의 땅을 기부 받았다. 나중에서야 그 땅들 대부분이 전혀 쓸모 없는 황폐한 땅이 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 땅을 기부한 자들은 존경을 받고, 의회의 의석을 차지하였 다. 그들은 사용할 수도 없는 땅을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순전히 말뿐이었다. 실제 로는 아무 것도 기부하지 않았다. 그 땅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 한 사람들이 그 땅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땅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에고가 존경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생각해 낸 방법이다. 세상에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조금밖에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주되 남이 알아주 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기 때문에, 그 숨은 욕심이 그나마의 주는 일마저 추한 것으로 만 들어 버린다. 칼릴 지브란은 보기 드물게 진실하고 솔직한,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 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베푸는 것은 종교적인 게 아니다. 추한 짓이다." 또 가진 것이 조 금 밖에 없으면서 그 가진 전부를 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생명을 믿고, 생명의 아낌없이 줌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궤짝은 비는 날이 없다. 내가 교수직을 사퇴하고 대학을 떠났을 때, 당연히 나의 아버지는 걱정이 대단했다. 그는 120마일이나 떨어진 마을에서 달려와 나에게 말했다. "내일의 일을 생각해 보았니? 병 들었 을 때를 생각해 보았어? 또 나이 먹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니?" 내가 말했다. "나는 내가 태 어날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젊었을 때를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가지 나를 돌봐 준 생명의 원천이 앞으로도 나를 돌봐 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필요하지 않다면 나 를 돌봐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데려가고, 필요한 다른 사람이 그 자리 를 대신할 겁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 를 설득시킬 수 없었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이 점을 잊지 마세요. 나는 아버지한테서 단 한 푼도 유산으로 물려받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저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주셨어요. 아버지께서 저에게 베푸신 사랑과 자유는 정 말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 나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많은 재산을 내 이름으로 이전시켰다. 내가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재산에는 세금을 내야 하기 마련이 다. 그래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세금 독촉장을 받았다. 내가 내 몸에 대해 세금을 내야만 하는가? 내가 걸치고 있는 이 옷들도 내 옷이 아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모두가 내 제자들이 갖다 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영원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사용하기 위해 서 받아들인다. 언제라도 제자들은 이것을 도로 가져갈 수 있다. 이것은 그들 것이니까. 나 는 하루 24시간 동안 시계를 차지 않는다. 단지 강의시간에만 사용할 뿐이다. 나에게는 시 간 관념이 없기 때문에 끝낼 줄 모르고 말을 계속할지 모른다... 이따금 시계 보는 것을 잊 은 경우에는 계속해서 말은 한다. 한번은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다. "시간이 되면 저희가 신 호를 보낼까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 나는 간섭받고 싶 지 않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는 존재계 자체를 신뢰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 는, 내가 나 자신을 꾸려 나가는 것보다 존재계가 훨씬 더 잘 나를 돌봐 주었음을 스스로 입증해 왔다. 세상에는 또 기쁨으로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기쁨이 바로 이들의 보상. 모든 종교는 그 대에게 거짓말을 해왔다. 그들은 그대를 속였다. 그들은 그대가 이생에서 베풀면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천국이 있다는 것조차 증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곳에 간 수백만의 사람들로부터 "그렇다, 목사님 말씀이 맞다."는 엽서를 단 한 통도 받지 못했다. 그대가 주는 돈은 모두 성직자들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보상받고자 하는 욕망이 그대를 눈 멀게 하여 이 단순한 진리를 못 보게 한다. 주는 그 자체에서 그대는 많은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 외에 어떤 더 많은 보상이 필요한가? 이것이 바로 내가 가장 강조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즉, 각각의 행동에는 보상이든지 벌이든지 반드시 그 대가가 동시에 따라온다. 그 대의 행동 자체가 보로 보상이거나 벌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에게 판단 기준을 준다. 만일 그것이 보상이라면 그것은 좋은 행동이고, 벌이라면 그것은 죄다. 다른 사람에게 물으러 갈 필요가 없다. 하루 24시간 내내 '각각의 행동'이 그대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세상에는 또 기쁨으로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기쁨이 바로 이들의 보상. 또 고통 속에 주 는 사람이 있으니, 그 고통이 바로 이들의 세례. 여기에 바로 칼릴 지브란의 아름다움이 있 다. 고통조차도 종교적인 탈바꿈이 된다. 기쁨이 아니라 고통 속에 베풀지라도, 그 고통이 그대를 정화해 줄 것이다. 그 고통은 불처럼 그대 속의 잘못된 것을 불태울 것이다. 그 속에 서 그대는 더 진실 되고, 더 인간적이고, 더 종교적으로 탄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이다. 기독교 목사들이 말하는 세례가 아니다. 나는 이제 그것을 비판하려 한다. 갓난아이의 이마에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은 세례 가 아니다. 순전히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름난 카톨릭 신부가 이름난 랍비의 집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자연히 서로 늘 경쟁적이었다. 종교인들도 마찬가 지다. 어느 날 랍비는 아침에 집밖으로 나왔다가 신부의 차고에 최신 모델인 멋진 시보레 차가 있는 것을 목격했다. 마침 신부가 그 차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갔다. 도대체 이 바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신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 무엇을 하고 계시오?" 신부가 말했다. "세례 중이오. 이제 이 차는 카톨릭 신자입니다." 랍 비는 그 새 시보레 차 때문에 무척 기분이 상했다. 그날 밤으로 그는 충분한 돈을 모아 시 보레보다 훨씬 등급이 높은 링컨 콘티넨털을 한 대 구입했다. 미국에서 시보레는 가난한 사 람이나 타는 차다. 링컨 콘티넨탈이 최고의 차이고, 부자들의 차다. 신부가 집 앞에서 그 차를 보았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세상에, 이 랍비가 무슨 일을 저 질렀군!" 그는 랍비의 집으로 찾아가 물었다. "이 차가 누구의 차입니까?" 랍비가 말했다. "누구의 차냐구요? 물론 내가 샀지요, 최신형 링컨 콘티넨털입니다." 그러자 신부가 물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요?" 랍비는 정원용 가위를 들고서 차의 배기 파이프를 자르고 있었던 것이다. 랍비가 말했다. "예, 보시다시피 할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이 차는 유태인입니다." 이런 바보들은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에 실재로 존재한다. 진정한 세례는 그대가 통과해야만 하는 그 불꽃, 그대가 통과해야만 하는 그 고통 이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아직 그대는 존재 자체를 신뢰한다. 만일 존재 계가 그대에게 고통을 준다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대가 순수해질 수 있도록 그대 가슴속의 뭔가를 태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되 고통도 모르고, 기쁨도 찾지 않으며... 이들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다. 덕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들은 모든 종교에서 베푸는 것이 덕 있는 행동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마치 저 골짜기의 상록수가 공중에 향기를 날리듯 그렇게 준다. 이들은 꽃이 바람에 향기를 날리듯, 바람에 내 맡겨 어디로든지 흘러가게 하듯이, 그렇게 베푼다. 이들은 누구에게 베풀었는지조차 알지 못 한다. 거기엔 관심이 없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덕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순수한 사 랑에서 베푸는 것이다. 이들이 최고의 베푸는 자들이다. 이들은 준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 는다. 이런 이들의 손을 통해 신은 말씀하시고, 이들의 눈 속에서 신은 대지를 행해 미소짓 는다. 이들은 존재계와 하나가 되었다. 이들의 손이 신의 손이고, 이들의 눈이 신의 눈이다. '이런 이들의 손을 통해 신은 말씀하시고, 이들의 눈 속에서 신은 대지를 향해 미소짓는다.' 이들의 의식과 아름다움과 사랑의 최고봉에 서 있는 이들이다. 모든 사람이 신의 손, 신의 눈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또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그대는 인생의 의미를 잃고 만다. 부탁을 받고서 주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탁 받기 전에 다만 이해함으로써 주는 것, 그것은 더욱 좋은 일. 왜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부탁하도록 강요하는가? 그것은 추한 짓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것이 필요하고 또 그대가 상황을 이해하여 그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라.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매달 2백 루삐를 받곤 했다. 그 사 람이 누군지 알아내려고 온갖 방법을 다 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매달 초하루면 돈이 나 에게 송금되었는데, 보낸 사람의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났 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그는 다름아니라 바로 내가 다니던 대학의 설 립자였다. 나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의 부인이 말했다. "내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나는 걱정하지 않아요. 누구나 때가 되면 죽기 마련이니까요. 걱정이 되는 것은, 앞으로 학생에게 보낼 2백 루삐를 어디서 구하는가 하는 것이에요." 내가 말했다. "세상에, 부인의 남편께서 나에게 돈을 보내셨군요? 나는 그런 부탁을 한 적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는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으니까요. 또 숙식까지 모두 제공받고 있습니다." 부인이 말했다. "나도 여러 차례 남편에게, 왜 학생에게 매달 2백 루삐를 보내느냐고 물었어요. 그때마다 남 편은, '그에게는 그 돈이 필요하다. 그는 책을 많이 읽기 때문에 책 살 돈이 필요하다. 그 리고 그는 음식보다 책이 더 필요하다.'라 고 말했어요." 그는 매우 드문 사람이었다. 평생 동안 그는 자신이 번 돈을 모두 자기의 고향에 있는 그 대학에 바쳤다. 인도에는 1천 개가 넘는 대학이 있으며, 나는 많은 대학을 가보았다. 그의 대학은 장소도 크지 않고, 아주 작 은 대학이다. 하지만 또한 매우 아름답다.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연꽃이 만발한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그 호수는 어찌나 큰지 건너 편 호숫가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나는 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 대학에 바쳐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작은 장 소에 그토록 훌륭한 대학이 탄생하게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널리 아는 법 률 전문가였다. 런던과 뉴델리, 북경 등지에 그는 자신의 법률 사무실을 갖고 있었으며, 그 래서 늘 여행을 다녔다. 한번은 내가 그에게 물었다. "왜 이 장소를 선택했습니까?" 그가 말했다. "전세계를 돌아 다녔지만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작은 언덕과 큰 나무들, 이토록 많은 연꽃이 핀 멋진 호수 를 본 적이 없었다..." 호수 전체가 연꽃과 연꽃 이파리로 뒤덮여 있다. 이른 아침이면 밤새 내린 이슬이 연꽃 이파리 위에 방울을 이루고...아침이면 호수는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 이다. 그 모든 이슬방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는 나를 데리고 그 장소를 구경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장소의 아름다움 때문에 나는 이곳 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에게 이름도 밝히지 않고 매달 2백 루삐를 보내 주리라 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표시조차 하지 못했다. 부탁을 받고서 주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탁을 받기 전에 다만 이해함으로써 주는 것, 그것은 더 좋은 일. 그리고 아낌없이 주려는 이에겐 받을 사람을 찾는 기쁨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크다.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모두가 세속적인 것뿐이다. 진정으로 베 푸는 이는 주는 기쁨에 관심 갖지 않는다는 알무스타파의 말은 옳다. 그의 기쁨은 받을 사 람을 찾는 데에 있다. 그가 주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열려있고, 기분 상하지 않을 사람 을 찾는 데에 있다. 또 너희가 움켜쥐고 있을 만한 것이 무엇인가? 너희가 가진 것은 언젠가는 모두 다 주어 야 하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주라.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 생명이 그대에게 주었으니, 생명이 다시 그것을 가져가리라. 왜 주는 기쁨 을 맛볼 기회를 놓치는가? 왜 신의 손, 신의 눈이 될 기회를 놓치는가? 주는 때가 너희 뒷 사람의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것이 되게 하라. 사람들은 자식과 후손을 위해 재산을 모 은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는 베풀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스스로 돈을 벌 기회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아 이들 양쪽을 파괴하는 짓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