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그리하여 그가 성 안에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만나러 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에 게 외치고 있었다. 이때 마을의 어른들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아직 우리를 떠나지 마시라. 당신은 우리가 황혼녘일 때에도 한낮의 빛이었고, 당신의 젊음은 우리에게 꿈을 주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낯선 자도, 손님도 아니며, 그보다도 우리의 아들이며 우리가 가장 사랑 하는 자이니, 아직은 우리의 눈이 당신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게하지 마시라. 그러자 남녀 성직자들도 말했다. 지금 바닷물결이 우리를 갈라놓게 하지 마시라. 그리하여 당신이 여기 우리와 함께 지낸 날들이 기억으로만 남게 하지 마시라. 당신은 우리 사이에서 언제나 빛나는 정신으로 걸었고, 당신의 그림자는 우리 얼굴에 비 치는 빛이었다. 우리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던가. 다만 우리의 사랑은 말이 없었고 너울에 가 려 있었을 뿐.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사랑이 소리 높여 당신에게 외치고 당신 앞에 모습을 나타내리라.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그 깊이를 모르는 법. 칼릴 지브란은 알무스타파의 이름으로 신비주의의 알맹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지금 어떤 종교를 선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지구상에 3백여 개의 종교가 난립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거기 3백 개의 화학과 물리학이 있을 수 없다. 단 3개도 있을 수 없다. 3백 개의 수학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둣 객관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주 분명하다. 과학은 하나이며, 하나일 수밖에 없고, 어떤 형용사도 그 앞에 붙을 수가 없다. 힌두교 과학, 이슬람교 과학, 기독교 물리학, 자이나교 수학이라고 말 하는 것은 우둔한 것이다. 바로 종교가 그래 왔다. 종교는 그대의 영혼, 그대 내면의 핵심, 그대의 주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 록 많은 종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종교성', 오직 이 하나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그것 을 '종교'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명사를 사용하는 순간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다. '종교 '는 뭔가 완전히 정지한 느낌을 준다. '종교성'이라는 말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꽃피고, 그대 에게 아직 드러나지 않고 꿈조차 꾸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비밀들을 가져다 준다 는 뜻이다. 종교는 바로 존재의 강물이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내가 그들의 거짓됨과 속임수, 그들의 가면을 폭로한다는 이유 때 문에 나에게 반대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릴 지브란은 알무스타파라는 이름을 선택하였 다. 그래서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신비가들의 체험을 이 이름을 빌려 표현하고 있 다. 인간은 제한된 사회에거 태어나고, 부모에 의해서 힌두교인, 불교인, 기독교인이라고 조 건지어지기 때문에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알무스타파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 는다. 알무스타파는 단순히 하나의 상징, 우리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잠에서 깨어난 그 영 혼들의 불꽃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알무스타파는 순수한 종교성의 가장 깊은 핵심을 대표한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는 어떤 종교를 선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떠날 시간이 오기 전에는 그는 이해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의심하였다. 그가 힌두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힌 두교인들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불교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교신자들은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조직화된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그러한 심오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의 인물을 선택하기보 다는 크고 넓은 가상의 이름, 누구에게도 해당할 필요가 없는 허구적인 이름을 선택한 것이 다. 그래서 모두가 그에게 해당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위치이기도 하다. 물론 알무스타파의 위치보다 훨씬 힘들다. 알무스타 파는 감옥에 갇힐 수가 없고, 독살당할 수가 없다. 알무스타파는 총에 맞아 죽을 수가 없다. 알무스타파는 십자가에 못박힐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알무스타파는 단지 가상의 인물에 지나 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신 그는 무시당할 수가 있다. 비록 그가 가장 깊은 내면의 체험 들을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그에게 돌을 던지지는 못했지 만, 그 대신 그는 '꿈꾸는 자'라고 무시당해 왔다. 그러나 이별의 시간이 다가와 그의 꿈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그러하여 그가 성 안에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만나러 왔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종교와 철학에 상관없이, 그 사소한 차이에 상관없이 그 에게로 모였다. 지금은 헛되이 낭비할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이고 불교 인이고 회교신자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 사람이 지금 떠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12년 동안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던 것이 이제 사실로 드러났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만나러 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잘못 알았었다. 그가 그들 사이에서 12년 동안이나 살아왔지만 그들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의 잘못을 들추어 내었으며, 서서히 그에 대하여 신경을 끊 었다. 그는 도무지 허튼소리만 하고 있었다. 존재 전체가 그대를 환영할 날이 올 것이라는 얘기를 누가 듣겠는가? 그대가 삶고 죽음의 비밀을 발견했으며 신의 문을 여는 황금열쇠를 발견했기 때문에 존재 전체가 춤을 출 날이 올 것이라는 얘기를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그 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아아, 만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한결같이 웃고 춤출 수 있었다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전쟁도 없고, 갈등도 없으며, 대학살도 없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 되었으리라. 그들은 함께 울부짖고 외치고 있었다. 그만큼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대 만일 운좋게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단 한 순간도 놓 치지 말라. 그가 그대 안에서 춤추게 하라. 그가 그대를 통해 웃게 하라, 한 목소리로. 그리 하면 이 지구가 바로 천국이 되리라. 단지 우리가 장님이라서 보지 못할 뿐이다. 이때 마을의 어른들이 앞으로 나아와 말했다. 이 문장이 내 가슴에서 계속 메아리 치고 있다. 인류가 아직 순수했고, 나라의 구분이 없 었으며, 사람은 하늘의 새처럼 자유로웠던 그 시절의 노래들이 메아리치고 있다. 새가 여권 을 갖고 다니며 6주 동안 체류를 허락한다는 비자를 받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인간은 지식이 적었을 때가 훨씬 더 아름다웠으며, 진실했고, 어린애처럼 순진했다. 우리 는 매우 오염되고 더럽혀졌으며 편견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고 있다. 이제는 어떤 어른들도 오지 않는다. 지금도 알무스타파는 존재하지만 어른들이 오는 대신에 경찰이 온다. 환영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고를 하기 위해서다. "당신은 30분 안에 이 장소를 떠나야 한 다!" 인류는 나이를 먹었지만 의식이 성장하지는 못했다. 더 순수해지지 못했다. 더 깊은 통 찰력을 갖지 못했다. 칼릴 지브란의 이 작품은 인류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왜냐하 면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를 떠나지 마시라. 이제서야 우리는 당신을 알아보았는데 당신은 떠나려 하고 있다. 너무 무정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이제 우리는 당신의 말을 귀담아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데 당신은 우리를 떠나려 하고 있다. '아직 우리를 떠나지 마시라.' 왜냐하면 우리는 질투와 불안과 분노와 근심 걱정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를 떠나려 하 는가? 지금이야말로 떠날 때가 아니라 돌아올 때이다! 우리들 사이에서 12년을 살았는데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우리를 용서하시라. 당신은 우리가 황혼녘일 때에도 한낮의 빛이었고, 당신의 젊음은 우리에게 꿈을 주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낯선 자도, 손님도 아니며, 그보다도 우리의 아들이며 우리가 가장 사랑 하는 자이니, 아직은 우리의 눈이 당신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게 하지 마시라.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는 당신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당신을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 알아보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얼굴은 우리에게 신의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떠 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당신이 이미 떠나버렸고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당신의 얼굴, 당신의 신비를 보았으며, 이제 우 리는 당신의 눈동자와 빛나는 광채를 보았다. 당신의 존재가 우리의 가슴에 전해졌으며, 수 천 송이의 꽃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피어났다.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이제 우리 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우리가 전에 생각했던 대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 지어 어느 때 어느 시기에 도착하리라는 저쪽 해안에서의 편지 한 통도 없이 무작정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한 미지의 배를 기다리는 약간 미친 사람이 더이상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대단히 순수했기에 "배가 오고 있다."고 계속해서 기다렸다. 당신의 기다림 은 틀림없이 신에게조차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길고 긴 기다림의 세월 속에서 당신은 마침내 하나의 자석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를 떠날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의 얼굴을 다 시 보고 싶어 못 견딜 것이다. 어디서 당신을 찾겠는가? 제발 우리에게서 떠나지 마시라. 인류의 어린 시절이 바로 그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아직도 그렇다. 어린아이는 신뢰하 고, 미지의 세계를 꿈꾸며, 희망 속에서 살고, 결코 비관하지 않는다. 만일 오늘 그 일이 이 루어지지 않았다면 내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어린아이는 믿 고 신뢰한다. 내 인생의 좌우명은 이것이다. 최고의 것을 희망하고 최악의 것을 기대하라. 어느 경우든 그대는 승리자이다. 그대의 희망이 이루어졌든 기대가 이루어졌든, 이루어진 것 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자 남녀 성직자들도 말했다. 여자 성직자가 언급되어 있다는 이 사실이 바로 알무스타파가 지금 황금빛 옛 시절에 대 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을 잘 말해 준다. 그때에는 남자냐 여자냐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자 라도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절 남자들은 아직 독재적이지 않았다. 여성이 자유로웠던 시절, 똑같은 기회를 가졌던 시절이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가장 오래된 책인 리그 베다(Rig Veda)에는 가르기(Gargi)라는 한 여성이 나온다. 그 나라의 왕이, 매년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라의 모든 현자들을 모아 인생의 의미를 토론하는 대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토론의 우승자에게 순금으로 뿔을 덮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1천 마리의 훌륭한 암소들을 선물하였다. 야그나발캬(Yagnavalkya)가 그 시절의 가장 훌륭한 선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적 스승은 아니었다. 반면에 가르기는 신비가였고 스승이었다. 그녀는 상에는 관심이 없었 다. 야그나발캬와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은 아침 일찍 도착하여 열띤 토론을 시작하였다. 야 그나발캬는 자신이 승리하리라고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도착했을 때 는... 아니, 그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처럼 약간 늦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5백 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왕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나말고 다른 토론자들에게는 이렇게 많은 추종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는 분명 대단한 흥행사였던 것 같다. 자신이 틀림없이 승리하리라는 그의 자신감은 그의 아집을 드러내 준다. 그대는 알무스타 파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내가 나의 진실, 나의 체험을 확신을 가지고 베풀 수 있을까?"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항상 망설인다. 바보들만이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이기 위해서는 약간의 지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절대 진리에 관한 한 인간의 머리는 너무나 빈약 하다. 그대는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또다른 위대한 성자 마하비라는 그러한 이상한 방식으로 질문에 대답하곤 했다. 아무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한 가지 질문에는 한 가지 대답이 필요하지만, 마하비라는 서로 모순 되는 일곱 가지 대답을 주곤 하였다. 누군가 그에게 "신이 존재합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 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샤요트(Shayot)...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 '어쩌면', 이 '그 럴지도 모른다'는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라는 말은 무한한데 그것을 표현하 는 머리가 빈약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머리는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 다. 그래서 그는 일곱 단계의 논리를 갖고 있었다. 서양 논리학의 아버지라는 아리스토텔레 스(Aristotle)도 마하비라에 비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그렇다'와 '아니다'의 이중 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인생은 무지개이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있게 '그렇다 ' 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고, 어쩌면아닐는지도 모르는 것이 다. 그래서 마하비라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깐! 이것은 한 면만 보고 말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대단히 빈약하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 만 잠깐! 어쩌면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결론내리지 말라... 어쩌 면 그럴지도 모르면서 동시에 뭐라 정의내릴 수 없고, 또한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면서 뭐라 정의내릴 수 없다. 또한 어쩌면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이면서 동시에 정의내릴 수 없다." 이는 모든 가능한 측면을 그대에게 보여 주려는 노력이다. 신은 한 가지 단어로 한정되어지 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정의내릴 수 없다'고 덧붙인 것이다. 아직도 훨씬 더 많은 측면들 이 있지만 더이상 그대를 혼란시키고 싶지 않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혼란스러우니까! 그러 나 야그나발탸는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나타났다... 때는 한낮인지라 햇볕이 따가웠고, 암 소들은 땀을 흘리며 궁전 앞에 매어져 있었다. 그의 자신감은 바로 지식이 많은 이들이 흔 히 갖는 자신감이었다. 그는 아는 게 대단히 많은 학자였다. 그는 한 제자에게 말했다. "이 암소들을 우리의 터에 갖다 매 두어라. 왜 불필요하게 이 불쌍한 암소들을 더위에 시달리게 하는가? 승리는 이미 확실하다." 그는 궁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상품을 취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뒤를 따라 가르기가 나타났다. 그녀는 혼자였으며,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계 속해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예상대로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친 야그나발캬가 왕에게 말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상품으로 받게 될 암소들은 저의 제자가 이미 끌고 갔습니 다." 그때 가르기가 일어났다. 만일 야그나발캬가 절대 진리에 대하여 그토록 어리석은 자신 감을 나타내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르기가 말했다. "기다리시오. 당신이 모든 사람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모두가 당신과 똑같은 지식인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증명된 것은 당신이 진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좀더 아는 게 많고 좀더 지적이라는 사실뿐입니다. 하지만 좀더 아는게 많다고 해서 당신이 진리를 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없이 앉아 지켜만 보았습니다. 만일 누군가 진리를 주장한다면 굳이 제가 나서서 말할 필요가 무엇이 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보니 너무 도가 지나쳤습니다. 내가 당신과 토론하리다." 정말로 멋 있는 시절이었다. 여성이면서도 그 나라의 가장 뛰어난 학자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단지 두세 가지의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야그나발캬는 코가 납작해졌다. 그녀는 물었다. "당신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무슨 근거로 당신은 그렇게 말합니까?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당신이 목격하기라도 했습니까? 어떤 경우든 당신은 틀린 것이 됩니다. 바로 당신의 그것을 목격했다면 세상은 이미 그 전 에 창조된 것이 됩니다. 바로 당신이 그곳에 있었고 당신은 세상의 한 부분이니까요.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것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무슨 근거로...?" 야그나발캬는 충격을 받았다. 수천 명의 다른 학자들도 충격을 받았다. 왕까지도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옳았다. 증거가 필요 하고, 목격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녀는 또 말했다. "논쟁의 목적을 위해서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쳐도, 나는 당신이 이 가설을 믿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야그나발캬가 말했다. "모든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되어야만 한다. 신이 바로 그 창조 주이다. 이 아름답고 거대한 세상이 그냥 무에서 솟아나왔을 리가 없다. 누군가 그것을 창조 했어야만 한다." 가르기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 말을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이 논쟁에서 졌습니다. 그 암소들을 도로 데려오십시오." 야그나발캬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녀가 말했다. "만일 모든 존재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면, 신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는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이 거 대한 세상에는 창조주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창조주는 우주보다 더 크고, 더 거대한 것임에 틀림없슴니다. 누가 그를 창조했을까요?" 이제서야 야그나발캬는 핵심을 알았으며, 이제는 이 여자를 떨쳐 버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신은 두 번째의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두 번째 신은 세번째의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 며... 하지만 어디서 이 고리가 끝날 것인가? 마침내 한가지 의문만이 남는다. 누가 그 맨 마 지막 신을 창조했는가? 가르기가 말했다. "만일 그 맨 마지막 신이 창조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왜 불필요하게 그런 가설을 세웁니까? 만일 신이 어떤 창조주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우주 전체가 창조주 없이 존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그나발캬는 대단 히 화가 났다. 완전한 패배, 학자의 자신감이 여지 없이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쳤다. "여자여, 입닥치지 않는다면 너의 목이 땅에 떨어질 줄 알아라!" 가르기가 말했다. "그것 도 하나의 논리입니까? 당신은 내 목을 자름으로써 자신이 승리하 게 되리라고 생각합니 까? 그것은 오히려 당신이 졌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해줄 뿐입니다. 어서 가서 암소들을 데려오십시오." 그래서 암소들은 한낱 여자에게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들은 여자에게 남자와 똑같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자이나교 (Jainism)는 여자가 남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남자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남자만이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까지도 독점되는 세상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여자가 세상에 얼굴을 내보이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그 들은 여자가 사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태인들은 여자를 따로 떨아진 장소 에 있게 한다. 여자들은 최소한 살피고 탐구할 동등한 기회조차 갖고 있지 못한다. 힌두교에 서는 여자가 베다(Veda)나 우파니샤드(Upanishad)를 읽는 것을 금한다. 그것은 큰죄라는 것 이다. 칼릴 지브란은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던 시절에 대하여 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남녀 성직자들도 말했다. 지금 바닷물결이 우리를 갈라놓게 하지 마시라. 지금까지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었다. 가지 마시라. 바다가 우리를 떼어놓게 하지 마시라. 그리하여 당신이 여기 우리와 함께 지낸 날들이 기억으로만 남게 하지 마시라. 우리와 함께 남아서, 당신이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눈빛을 우리에게 주시라. 당신이 알게 된 길을, 당신이 여행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라. 안 그러면 당신은 마치 꿈에서 본 듯 단순한 추억이 되어 버릴 것이다. 안 된다. 우리에게 단지 추억거리가 되지 마시라. 그것은 우리를 고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12년 동안 줄곧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정말로 후회스러운 일이다. 이제 당신이 그동안 말했던 것이 실현되었으니 우리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를 탈바꿈시켜 달라. 확실히 아주 오랜 옛날, 인류가 매우 순수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아직 성직자들은 사람 을 이용하거나 착취할 줄 몰랐고, 또한 자신들이 신과 인간의 중개자라고 주장하지도 않았 다. 그들은 모두 구도자, 겸허한 구도자였다.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어떤 종교든 간에, 너무나 타락하였다. 몇 달전 로마 교황은 누구도 하느님에게 직접 고백을 할 수가 없다고 선언했다. 반드시 신부에게 고백을 해야 하고, 그러 면 신부가 그것을 하느님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직자가 없이는 그대는 존재 전 체와 직접 만날 권리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누구든지 그 속에서 장삿속과 정치욕과 권력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신의 사자이 고 신이 자기를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며, 그대 역시 그들을 통하여 기도와 고백을 하느님 께 전해야 한다고 꾸며대지 않으면 도대체 성직자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이것은 완전한 장삿속이다. 그들은 더 이상 구도자가 아니라, 시장의 장사꾼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대 역시 그러한 상태로 끌어내렸기 때문에 그대는 신이나 존재에게 - 나에게는 신은 곧 존재의 다른 말이다 - 노래부를 수조차 없다. 그들은 그대가 나무에게, 별들에게 노래부르고, 보름달이 뜬 해변가에서 춤출 권리를 빼앗아 버렸다. 중개자가 필요하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맹꽁이들은 어떻게 노래부르는지, 어떻게 춤추는지를 모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가톨릭 신부가 유태인 랍비(rabbi)와 아주 친했다. 어느 날 그 들은 골프를 치러 가기로 했다. 그래서 약속한 시간에 랍비가 성당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언 제나 그렇듯이 성당에는 고해성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래서 신부는 랍 비를 고해성사실로 데려갔다. 고해성사실은 가운데 커튼이 쳐져 있고 이쪽에는 신부가 앉은 자리, 저쪽에는 죄를 고백하는 신자가 앉는 자리가 있었다. 신부가 랍비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날 좀 도와주시오. 그러면 금방 준비를 끝내 고 오겠소. 잠깐만 나 대신 이 자리에 앉아 있어 주시오." 랍비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 떻게 고해성사를 진행하는지 모르는데요." 신부가 말했다. "별 것 아니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두세 건의 고해성사를 처리해 보이리다. 아주 간단한 일이오. 상대방이 고백하는 내용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그의 죄에 따라 5달러, 10달러 하고 벌금 을 물리면 됩니다." 랍비가 말했다. "그것 참 간단하군요. 달러에 관해서라면 나도 잘 알 지요. 어서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그래도 신부는 그에게 두 사람의 고해성사 처리 과정을 보여 주었다. 한 사람에게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5달러! 그 돈을 성당의 회계에게 납부하 시오."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10달러!" 그러자 랍비가 말했다.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장사에 관한 한 우리 유태인을 따를 자가 있겠습니까? 어서 가서 빨리 골프장에 갈 준비를 하고 오십시오. 그동안 내가 이 고해자들 을 전부 처리하리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핵심이 뭡니까? 진짜 핵심은 달러 에 있습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긴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첫번째 사람이 들어 와 말했다. "신부님, 정말 부끄럽습니다. 지난 번 제가 여자를 강간했을 때 다시는 그런 짓 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지만,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또다시 그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 다. 어쩌구 저쩌구..." 랍비가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30달러!" 그 사람이 놀라서 말했다. "아니, 지난 번에 벌금을 물릴 때는 10달러였지 않습니까?" 랍 비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 30달러를 입금하되 20달러는 선불로 받아두는 거니까. 가 보시오." 이들이 바로 그대와 하느님 사이의 중개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거짓 말 중의 거짓말이며, 그들은 기생충에 불과하다. 성직자를 만날 때면 그들의 입을 잘 살펴보 라. 그들은 뿌나에 들끓는 모기떼와 똑같다. 만일 이 세상이 남자 성직자들로부터 해방된다면... 나는 여자가 성직자를 말하지 않는다. 이들 남자 성직자들이 모든 여자 성직자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중세기에는 수천 명의 여자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남자 성직자들이 이 여자들의 이름을 바꾸었다. 그들은 이들을 '마녀 ' 라고 부르면서 불태워 죽였다. 그래서 이제 남자 성직자들만이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 남자 성직자들이 앞으로 나아와 말하고 있다. '지금 바닷물결이 우리를 갈 라놓게 하지 마시라...' 이제는 문제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지 도 못했고, 심지어 당신에 대하여 신경쓰지도 않았다. 우리는 당신이 머리가 어떻게 된 사 람이라고 무시했다. 배가 와서 자기를 저쪽 해안으로, 진정한 집으로, 생명과 의식의 원천 으로, 신에게로 데려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당신 을 알아보았으니, 우리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시라. '그리하여 당신이 여기 우리와 함께 지낸 날들이' 단순히 기억으로만 남게 하지는 마시라. 우리는 여기에 있는 당신, 살아있는 당신을 원한다. 기억이란 점점 흐려지기 마련이고, 그래 서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가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알무스타파라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는 지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 역사가들의 태도이다. 그들이 고타마 붓다와 같은 사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데에도 30세기가 걸렸다. 서양 학자들이 쓴 역사책들을 보면 고타마 붓다는 단지 신화와 전설 속의 인물일 뿐이다.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존 재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들은 고타마 붓다에 대해서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 해서도 마찬가지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30세기 전만해도 역사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옛이야기가 서서히 사람들 마음속에 현실처럼 느껴지게 된 것 이라고 적고 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학교도 안 다니고, 가난한 목수 아들에 불과한 자가 그토록 대단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권위있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범한 말들도 그의 손에 쥐어지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를 반대하던 적들까지도, 그가 틀렸고 미친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도 그가 말하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하였다. 누 구도 그만큼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위를 갖고 말할 수 있는 가슴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 의 말에는 다른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말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자신의 말에 그토록 많은 기운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말한다. "사람이 예수와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고타마 붓다처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도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처럼 빛나는 존재를 가질 수가 없다. 분 명 이 사람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들이 지어낸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남녀 성직자들은 이렇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단지 기억으로만 남지 마시오. 당신이 우리 귀에 대고 소리치고 우리들 사이에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소. 당신이 가버리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가 꿈을 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 작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알무스타파와 같은 사람을 찾겠는가? 당신은 우리 사 이에서 언제나 빛나는 정신으로 걸었고, 당신의 그림자는 우리 얼굴에 비치는 빛이었다. 이제 떠나려는 순간에 그들은 그를 하나의 육체로서가 아니라 빛나는 정신으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당신은 우리에게 '빛나는 정신' 이었다. 우리를 용서하시라. 그렇기 때문에 우 리는 당신을 몰라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단지 당신의 육체만을 보았던 것이다. 이제서야 우 리는 당신의 정신에 매혹당했는데 당신은 우리를 떠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심 지어 '당신의 그림자조차 우리의 얼굴에 비치는 빛이었음'을 안다. 당신의 그림자조차 우리의 얼굴에는 하나의 빛이었다. 그러니 이제 더 무엇을 말하겠는 가? 당신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다. 당신은 그림자를 떨쳐 버리고 우리 앞에 순수한 빛이 되었다. 어쩌면 당신은 언제나 빛이었고, 그림자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나는 언제나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았다. 나는 단추가 없는 긴 겉옷을 두르고 다니곤 했다. 당시 나는 나라 안의 모든 토론대회에, 그것이 어느 대학에서 열리든, 우리 대학을 대표하 여 참석하였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 많은 우승컵과 상패들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우리 어머 니는 이렇게 불평하곤 하셨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잡동사니들을 맨날 가져 오니? 이 잡동사니들을 보관하려면 집을 한 채 더 지어야겠다." 대학의 교수나 총장은 대단히 기뻐하였다. 전국의 모든 상패들이 집합했으므로 자기들의 학교가 점차 유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총장이 직접 나는 데리고 사진관에 가서 신문과 잡지에 낼 기념사진을 찍어 주려고 했다. 세상의 그 어떤 학생도 그토록 많은 상패 와 우승컵을 탈 수 없음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총장은 매우 단정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엄격했다. 하루에 두 번씩 면도하는 것까지. 그가 나를 데리고 사진관에 갔을 때 사진사가 찍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문득 내 옷차림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옷에 단추가 없군?" 내가 말했다. "당신은 지금 내 사진을 찍으려는 겁니까, 아니면 당신 의 사진을 찍으려는 겁니까? 나는 별로 단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어쨌든 당장에 단추를 구해야겠다. 아니면 위에 입을 다른 옷을 구하든지." "그렇다면 차 라리 당신이 여기에 와서 당신의 사진을 찍으십시오. 내 사진은 어디까지나 내 사진이며, 나는 지금까지 단추를 단 적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거 참 이상하군. 자네는 어째서 단추를 달지 않지?" "나는 내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와 닿는 감촉을 좋아합니다. 나는 단 추가 싫습니다. 빨리 결정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니야. 좋 아. 자네 식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는 정말 희한한 친구구먼." 내가 말했다. "나는 희한한 친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뿐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단추에 대한 자 신의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려고 하다니 말입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아이들과 그들 세대 나 단추를 열심히 잠그십시오!" 시대가 많이 변했다. 권위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식으로 든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려고 애를쓴다. 그러나 이들 순진한 농부들과 일꾼들, 남자와 여자들 - 이들은 알무스타파에게 말한다. 우리 얼마나 당신을 사 랑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이제서야 우리는 우리가 당신을 언제나 사랑했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 속에 깊이 파묻혀 있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지 못했 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에게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신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이제서야 너무 많은 사실들이 우리의 존재 표면에 떠오른다. 당신의 깨달음은 당신만의 깨 달음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던가. 다만 우리의 사랑은 말이 없었고 너울에 가려 있었을 뿐. 베일 위에 베일이 또 쳐져 있어서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설령 전에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 이다. '다만 우리의 사랑은 말이 없었고...'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사랑이 소리 높여 당신에게 외치고 당신 앞에 모습을 나타내리라.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우리를 사이에 머물러 주시라. 그러면 당신은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도 표현될 수 있으리라. 말로 안 되면 행동으로... 당 신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도록 시간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무어라 생각하겠는 가? 12년 동안이나 당신은 우리들 사이에서 살았는데 아무도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다.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그 깊이를 모르는 법. 이것은 정말로 대단히 뜻깊은 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그 깊이를 모르는 법. 여기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고타마 붓다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렸다.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의 배가 도착한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물었 다. "내가 떠나기 전에 뭔가 물어볼 말이 있는가?" 1만 명이 넘는 산야신(sannyasin ; 구도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질문을 했다. 눈에 가득 눈물을 담고서... 그는 바로 그의 형 아난다(Ananda)였다. 아난다는 붓다와 함께 42년 동안을 밤낮으로 함께 살았으며, 붓다의 그림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붓다와 한 방에서 잠을 자고, 늘 함게 다녔다. 아난다만큼 붓다와 가까운 사람도 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만이 한 가지 질문을 갖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작별할 시간만큼은 질문으로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말 없이 앉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난다가 일어나 물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42년 동안이나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나중에 왔고 또 당신과 별로 오래살지 않은 사람들도 깨달음을 얻었는데, 나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은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붓다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육체를 떠나고 나면 24시간 안에 그대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아난다가 말했다. "그런 계산법은 이해가 안 갑니다. 42년 동안이나 당신과 함께 지냈으면 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당신이 가고 나면 24시간 안에 깨닫는다고요?" 고타마 붓 다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난다여, 그대는 나와 너무나 가깝고 나의 사촌형이기 때문에 나 를 당연한 존재로 여겨왔다. 오직 헤어지는 것만이, 나의 죽음만이 그대를 깨어나게 할 수 있다. 다른 것은 소용이 없다. 나는 온갖 시도를 했지만 그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의 형이며 늘 가까이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을 보살펴야만 한다.' 그리고 너무나 오랫 동안 함게 지냈기 때문에 그대는 언제나 잊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잊고 지내기가 쉽다. 사람은 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잊기가 쉽다. 헤어지는 순간에서야 그대는 그것을 떠올릴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그 깊이를 모르는법. 스승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대에게 깨어날 기회를 준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도 그러한 기회를 준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날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기회이다. 알겠는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고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달려와 간절히 청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 를 숙이고 있을 뿐. 가까이 서있던 이들은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그와 마을 사람들은 사원 앞 큰 마당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에 거기 사원에서 한 여인이 나왔다. 그 이름은 알미트라(Almitra), 바로 여자 예언자였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성에 와서 단 하루밖에 안 되었을 때 맨 먼 저 그를 알아보고 믿은 것이 바로 그 여인이었다. 여인은 기쁘게 그를 맞아들이며 말했다. 하느님의 예언자시여, 당신은 저 맨 끝을 찾자고 오랫동안 먼거리를 헤매며 당신의 배를 기다렸다. 이제 배가 왔으니 당신은 떠나야 하리라.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나라,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이 깃들인곳, 그곳에 대한 당신의 그리 움과 갈망은 깊고 깊으니, 우리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으로 당신을 묶어둘 수 없 고, 우리에게 당신이 필요하여도 그 필요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를 떠나기 전에 부탁이 있으니,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말씀해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하고, 아이들이 자라 또 자기의 아이들에게 전 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리라. 당신은 외로운 가운데 우리 시대를 지켜주었고, 우리가 잠 속에서 울고 웃고 하는 것을 당신은 늘 깨어있어 다 들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당신의 눈에 비친 탄생과 죽음 사 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씀해 달라.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오르팰리스 사람들아, 지 금 너희들의 영혼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바로 그것말고 내가 또 말을 새롭게 할 수 있으랴? 이 몇 마디 말로 칼릴 지브란은 영적 성장의 모든 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앞에 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 그에게로 오는 것을 보았다. 농부들, 일꾼들이 들녘에서 일손을 멈추고 그에게로 달려왔다. 진리가 도착했을 때, 그 진리를 알아보는 이들은 언제나 순수한 사람들이다. 이것을 생각 해 보았는가? 단 한 명의 랍비도 예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예수가 살던 시절은 유태인들의 지혜가 최고에 달했고, 또 예루살렘에는 학식있고 많이 배운 랍비 들이 세상의 어떤 도시보다 많았다. 그런데 예수의 말을 들으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못 배우고, 못나고, 가난한 농부와 어부와 머슴들, 목수들뿐이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상류사회에 속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 다. 종교인이나 학자나 교수는 한 명도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태 대학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 기 위해 멀리서부터 이 유태 땅으로 몰려왔다. 당시 예루살렘은 한창 피어나는 청년기였다. 하지만 이 학식있는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예수의 말을 들으러 오지 않았다. 왜인가? 그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경전을 읽었고, 과거의 훌륭한 가르침들을 줄줄 외고 있었다. 더 이상 들어갈 게 없을 정도로 그들의 머리는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지혜가 열리지는 않는다. 사실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될수록 그대가 진정한 그대 자신을 발견할 가능성은 더 줄어든 다. 지식은 그대에게 그대의 참된 존재를 찾게 해주지 않는다. 단지 아집만 강해질 뿐이고, 아집이 강한 사람은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로 갈 수가 없다. 아무런 자격증도 갖고 있지 않 은 예수라는 거렁뱅이가 도대체 무엇을 알겠는가? 단 한 사람만이 예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오늘날까 지도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학의 교수였는데, 니고데모(Nicodemus)가 그의 이름이 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낮에 예수를 만나러 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무어라 말할 것인가 두려웠던 것이다. 대학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교수인데, 그러한 그가 경전조차 읽은 적이 없는 무식한 젊은이를 찾아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모두 잠든,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잠이 든 한밤중에 예수를 만나러 왔다. 그는 예수를 깨우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대학의 종교학 교수입니다. 니고데모가 제 이름입니다. 잠을 깨운 것을 용 서해 주십시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나 역시 너의 더 깊은 잠을 깨 울 테니까. 하지만 너는 겁쟁이다. 그리고 이 길은 겁쟁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이 길에서 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며, 자신의 모든 지 식이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고, 남의 말을 따라서 외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느 사람이 다. 자신이 영혼의 침묵들 속으로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으며, 자신이 눈뜬 장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바로 그 깨달음이 중요한 첫걸음이다.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대는 이 미 진정한 앎으로 나아가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경전들 속에는 오직 죽은 단어들만이 있을 뿐이며, 진정한 구도자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아직 살아있는, 피와 살을 가진 단 어를 만나고 싶어한다. 경전이란 예수 같은 사람을 만날 용기가 없는 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는 그들을 후려쳐 잠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은 잠 속에서 배운 것이다. 너희들은 단지 기계적으로 경 전을 외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너희들 자신의 진짜 체험이 아니다." 진실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거짓만이 배워질 수가 있다. 수천 개의 도서관들은 온통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 아름다운 거짓말들... 그것들이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그말들도 살아있었으며, 한때는 그 말들 역시 진실을 발견한 사람의 가르침이었다. 그때에는 그 말들이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는 그 말들도 침묵과 사랑과 아름다움과 진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말의 향기는 금방 사라져 버린다. 꽃은 시들고, 꽃잎은 땅속에 묻힌다.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하지만 메아리는 멀리까지 퍼져 나가서, 학자들이 그것을 모아 경전 을 만들고, 연구자들이 거기에 해석을 붙인다. 그러나 어떤 짓을 하든 그것은 시체를 해부하 는 것과 같은 짓이며, 시체를 해부해서는 영혼을 발견할 수가 없다. 보라! 바보들이란 항상 그렇듯이 의학은 계속해서 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다. 어떤 의 과 대학을 가든지, 그들은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찾기 위하여 시체를 해부하고 있 다. 이들보다 어리석은 자들이 또 있을까? 게다가 그들은 매우 학식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시체에서 생명의 살아있는 원리를 발견할 수가 없으니까 그것을 부정해 버린다. 부정하기는 아주 쉽다. 아니라고 말하기는 쉬운 일이다. 의자에 앉아서도 그대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순례고 뭐고 필요없다. 하지만 찾고 탐색하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아무런 편견도 갖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남에게서 빌려온 지식은 언제나 편견만을 불러일으킬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눈이 열린 사람은 자신의 모든 지식을 제쳐 두고 순진무구한 어린애가 된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열려 있고, 가능성이 있으며, 받아들인다. 그의 눈은 언제나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고, 작은 것에도 신비를 느낀다. 그는 신기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앨리스(Alice) 만이 신기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신기한 나라에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한 말이다. 네가 바로 이 생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다시 어린이가 되지 않으면 너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알무스타파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랍비도, 교황도, 교수도 아니고 순진무구한 사람들이었다. 힌두교의 샹카라차랴(Shankaracharya)도, 목사도, 승려도 아닌 순진한 사람들, 자신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여 행을 떠나는 순간, 거기 여행자는 사라진다. 진리를 발견하는 날, 거기 발견자는 사라진다. 찾는 자는 없어지고, '찾음'만이 남는다. '아는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진정한 앎이 꽃피어난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달려와 간절히 청했지만... 다른 사람이라니, 이들은 누구인가?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달려와 간절히 청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다른 사람들'은 바로 대통령과 수상과 정부 관리들과 경찰들 이다. 모두 눈멀고 귀먹은 사람들이다. 오르팰리스 사람들이 이 미친 사람 알무스타파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자... 소위 군중의 지도자라고 하는 이 사람들은 실제로는 군중의 추종자들 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군중이기 때문이다. 군중이 모일 때마다 지도자 는 자신이 군중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는 군중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나를 계속해서 살핀다. 모든 지도자들은 사실 그들의 추종자이다. 세상이 불행하고 어리석은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달려와...' 알무스타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에 게는 대답을 하였다. "우리를 용서하시라. 지금까지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살았지만 당신의 얼 굴을 제대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데 바로 이날 당신은 떠나려 하다니, 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 12년 동안이나 당신이 우리들 사이에서 지냈는데 우리는 당신을 꿈꾸는 자로 만 여겼다. 우리를 용서하시라. 가지 말고, 우리와 함께 잠시만 더 있어 주시라. 이제 우리는 준비가 되었으니, 당신의 진리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라." 그런데 그때 장님과 귀머거리 인 똑똑한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모든 순박한 사람들과 자신들의 군중이 알무스타파의 존재 그 자체에 감동을 받은 것을 보고는 자기들도 따라서 알무스타파에게 간청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위선이다. 이는 진정한 부탁도 아니고, 가슴에서 우러난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군중에게, "너희들만 그를 알아본 것이 아니다. 우리 또한 그를 알아보았다."라는 것 을 보이기 위해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군중들에게 "우리는 너희들보다 앞 서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알무스타파는 속지 않았으며, 속을 수가 없다. '...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다만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 가까이 서 있던 이들은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는 것을 보았다. 이 눈물은 아직도 위장하고 가장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대답이다. 이제 작별의 순간에, 못 배우고 못나고 못 가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런데도 똑똑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 은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권력은 사람을 눈멀게 한다. 지식은 사람을 장님으로 만든 다. 그는 울고 있다. 자비의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세 상을 이끌어갈 것인가?" 캘리포니아 주의 주지사가 나를 만나려고 부하 직원을 보냈다. 내가 말했다. "누구나 언제든지 나를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부하 직원을 보낼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왔어야 했다. 나를 만나고 싶으면 직접 와야 한다. 그를 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라도 있단 말 인가? 나 같으면 그를 만나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서 그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니 그가 직접 와서 '내'문을 두드리게 하라. 누구든지 환영이다." 전 갈을 가지고 온 여자 부하 직원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주지사입니다." 내가 말했다. "주지사 아니라 하느님이라도, 나를 만나고 싶으면 직접 와야 한다." 하지만 권력과 특권과 존경이라는 것은... 인도의 대통령이었던 자키르후세인(Jakirhussain)이 의회의 원로 의원인 세트 고빈다스(Seth Govinddas)를 통해 나에게 전갈을 보냈다. 당시 나는 세트 고빈다스의 집에 손님으로 묵고 있었다. 그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내가 말했다. "용서하시오. 만일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기꺼이 만날 수가 있소. 하지만 나는 대통령이 사는 집까지 가야 할 일이 없소." 그가 말했다. "제 말을 이해 못하는군요. 그는 지금 무척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말했다. "평생 동안 나는 존재 그 자체를 신뢰했을 뿐, 누구의 도움에도 의지하지 않았소." 사실 이것은 세트 고빈다스에게 는 큰 문제였다. 나를 대통령에게 데려가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거절하 고 있으니... 그가 말했다. "대통령에게 뭐라고 전해야 합니까?" "내 말을 그대로 전하시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것이지, 우물이 목마른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목마른 사람이 대통령이 든 누구든 그것은 문제가 되니 않습니다. 거지든 황제든 목이 마르면 우물로 와야 합니다." 나 역시 많이 울었다. 내 앞에 너무나 많은 눈먼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제자들까지도 이따금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 "주지사나 수상이나 대통령이 당신께 호의를 가지게 된다면, 경찰 나부랭이들은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내가 말한다. "나는 장사꾼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이 말을 여러 번 했다. "이불을 머 리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것은 나쁘다. 건강상 좋지 않아." 그러나 밤의 어둠 속에서는 이불 을 뒤집어쓰고 울 수가 있다. 내 주변에서, 세상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리석음에 실컷 울 수가 있다. 알무스타파가 그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은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무 스타파와는 종류가 다른 사람이다. '다만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 지 않을 것이다. 내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나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가까이 서 있던 이들은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는 것을 보았다.' 이 눈물은 장님과 귀머거리들, 가슴 이 없는 자들을 위한 눈물이다. 이 눈물은 모든 바보들을 위한 눈물이다. 그런 다음 그와 마 을 사람들은 사원 앞 큰 마당을 향해 나아갔다. 칼릴 지브란,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다. 왜 그들은 사원으로 갔을까? 세 상에는 수천 수만 개의 절과 교회와 모스크(mosque)와 구루드와라(gurudwara)와 시나고그 (synagogue)가 있으며, 사람들은 매일 그곳에 기도를 드리러 간다. 그들의 기도는 앵무새가 지껄이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기들이 외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있다. 아니다. 사원의 기능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원의 기능은 이런 것이다. 알무스타파처 럼 본래의 집에 돌아온 사람들이 그 사실을 선포하는 곳이 바로 성전이고 사원이다. 알무스 타파가 사원으로 들어가자 그 사원은 성스러운 곳이 된다. 하지만 알무스타파가 없으면 그 사원은 그냥 텅 비고 무의미한 한 채의 집일 뿐이다. '그런 다음 그와 마을 사람들은 사원 앞 큰 마당을 향해 나아갔다.' 그대가 그럴 자격이 있을 때만이, 함께 나누어 가질 어떤 것을 가졌다고 느꼈을 때만이, 성스럽고 초월적인 어떤 것을 가졌을 때만이 그대는 성전에 들어가야 한다. 그때에 거기 사원에서 한 여인이 나왔다. 그 이름은 알미트라(Almitra), 바로 여자 예언자였다. 그대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칼릴 지브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여자는 남자보다 성스러운 것에 더 가깝다. 여자는 머리보다 가슴이 더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사랑할 줄을 안다. 그리고 사랑할 줄 모르고서 어 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기도는 사랑이 훨씬 순수해진 형태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 한 사랑은 받는 사람이 없다. 전체가 바로 그 대상이다. 알미트라는 여자 예언자였다. 칼릴 지브란은 여자에게 존경과 품위를 준 사람으로서 영원 히 기억되어야 한다. 소위 세상의 엉터리 종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여자를 비난하기만 한다. 내가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들까지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까지 영적 진화의 최고봉에 올라선 고타마 붓다까지도 여자를 별로 존경하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여자 를 입문시키기를 거절하였다. 마침내 20년 동안 거절하고, 모욕하고, 창피를 준 끝에 그는 다시 생각했다. 아주 이상한 상황 때문에 그는 결국 양보하여 여자를 입문시켰다. 그 순간에 도 그는 대단히 망설였던 것 같다. 그는 그 여성이 거의 자신의 친어머니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녀를 입문시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그의 진짜 어머 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친어머니는 그를 본 적이 없고, 그 역시 그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 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의 어머니의 여동생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바로 매우 드문 존재인 이 어린아 이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이 어린아이는 나면서부터 대단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점성술사들과 예언자들은 그가 전세계의 황제가 되든지, 아니면 세상을 버리고 떠나 인류가 낳은 위대한 각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여인이 그 아이를 키우고 보살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전부 희생하였다. 만일 자 기가 결혼하면 자신의 아이들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애정이 나누어지고 또 자신의 인생과 자녀들과 남편에 시간을 빼앗기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사랑을 온통 고타마 붓다에게 쏟기 위하여 시집도 가지 않았다. 그의 진짜 어머니라고 할 만한 그 여자가 늙어서 계를 받겠다고 찾아왔을 때 한참 침묵이 흘렀다. 무척 망설여지는 순간이었다. 20년 동안이나 여자를 입문시키는 것을 거절해 왔다... 하지만 어떻게 이 여자를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희생한 여 자,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제자로 입문시키는 것도 못해 준다? 그는 상당히 망설이면서 그 녀를 받아들였다. 그가 상당히 망설였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는, 그 직후 그가 이렇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내 종교를 5천 년 동안 계속될 것이었는데, 여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단 지 5백 년밖에 가지 못할 것이다." 마치 여자가 병적인 존재이며, 그래서 여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붓다의 종교는 병이 들 어 도저히 5천 년을 이어갈 수 없다는 듯한 말투다. 여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종교가 암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하고 있다. 참으로 추한 말이다. 이것은 마하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예수도 마찬가지며, 모하메드 도 마찬가지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인류의 영적 진화에서 최고 봉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칼릴 지브란은 훨씬 많은 인간미와 훨씬 깊은 통찰력을 가졌던 듯 하다. 모든 종교마다 예언자들이 있지만, 알미트라는 여자 예언자이다. 여자 예언자가 등장 하는 이유를 깊이 이해하고, 또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해야 한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성에 와서 단 하루밖에 안 되었을 때 맨 먼저 그를 알아보고 믿은 것이 바로 그 여인이었다. 12년 동안이나 그는 이 도시에 있었지만, 그를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자 한 사람뿐이었 다. 그것도 그가 이 도시에 온 바로 그날 그 여자는 그를 알아보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묻는다. "왜 여기에는 여자 산야신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마 치 산야스(sannyas)가 육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 듯한 말투다. 산야스와 육체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산야스는 영혼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은 논리가 아니라 사랑을 알기 때문에 훨씬 더 열려 있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사랑의 법칙은 삶에서 최고의 법칙 이며, 논리에 입각한 법칙은 가장 낮은 법칙이다. 남자는 먼저 지적으로 확인시켜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는 백만 명이 넘는 산야신 들이 있지만, 그 중의 75퍼센트가 여성이고, 25퍼센트가 남성이다.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붓다고, 마하비라도, 모하메드도, 예수도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는 먼저 논리적으로 확신시켜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출발한 다. 그래서 사랑의 열정에 도달하려면 긴 사닥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사랑은 논리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 나의 산야신들도 처음에는 머리로 확인하려고 한다. 이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고,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실질적인 것 같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의 머리 속에 온갖 의심이 일고,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러한 의심 과 부정들이 사라졌을 때, 그때 지식이라는 두꺼운 층이 벗겨지고 그들의 가슴이 열린다. 그러나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첫눈에 나와 사랑에 빠지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 틀릴 수가 없다." 그들의 접근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남자는 먼 길을 택한다. 불필요하게 멀긴 하지만, 그 길이 더 남자답고, 전투적이고, 힘들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오는 데 먼 길을 둘러서 온다. 여자는 지름길을 택한다. 바로 사랑의 길이다. 이 길은 한 걸음만으로도 충분하다. 두 걸 음도 필요없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집에 도착한다. 한 걸음이라는 것도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실제로는 한 걸음도 필요없다. 남자는 집에 돌아오기 위해서 수많은 걸음을, 몇 십 리를 걷는다. 그래서 지치고 기운없고 슬픈 모습으로 돌아온다. 성자들이 슬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멋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언 제나 머물고 있던 곳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불필요하게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실제로 여자는 단 한 걸음도 내디딜 필요가 없다. 여자는 단순히 사랑에 빠지며, 그것으로 이미 집에 도착한다. 그녀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이제 사랑이 그녀의 눈을 뜨게 한 것 이다. 알미트라는 알무스타파가 저쪽 해안에 속한 사람이며, 이곳에서는 이 방안이라는 것을 맨 먼저 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배에 대하여 꿈꾸는 사람으로 비치지 않았다. 그토 록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믿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깊은 사 랑 속에서 그의 꿈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 12년이나 뒤에 도착한 그 배는 알미트라에게는 실제로 바로 맨 첫날 도착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12년이라는 기간은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이토록 많은 여자들이 산야신이 되었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간 단하다. 그들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가지 언어밖에 모르는데, 그 언어가 바로 사랑이다. 여인은 기쁘게 그를 맞아들이며 말했다. 이 차이를 보라. 헤어질 때가 임박한 마지막 날에 가서야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들 사이에 저쪽 해안에서의 메시지를 가진 메 시아가 한 명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장님이고 귀머거리였으며, 이제는 때가 너 무 늦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치고 있다. "잠시만 더 있어 주십시오. 부디 잠시만 더... 우리는 진리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조금만 더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알미트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예언자시여, 당신은 저 맨 끝을 찾자고 오랫동안 먼 거 리를 헤매며 당신의 배를 기다렸다. 이제 배가 왔으니 당신은 떠나야 하리라. 우리의 사랑은 그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은 탐욕스럽다. 생각은 욕심 그 자체다. 모 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금만 더 있어 주시오..." 하지만 그대에게 말하노니, 만 일 알무스타파가 그들의 뜻에 따라 주었다면 그들은 또다시 그를 잊을 것이다. 또다시 그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서두를 필요가 무엇인가? 그리고 배가 만일 다시 오면, 그때가 서 또 그를 설득하면 되겠지. 우리와 함께 있어 달라고 말이다." 인간은 언제나 결코 오지 않는 내일 속에 살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현재와 만날 줄을 모른다. 언제나 과거 속에 살든 지 미래 속에 산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 얼마나 아까운 세월인가! 이제 그가 머물러만 준다면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그들도 그의 진실과 체험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만일 알무스타파가 떠나지 않고 그들 사이에 머문다면 그들은 도 다시 그를 잊을 것이다. 그러나 알미트라는 그에게 말한다. "그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당신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으며, 이 사람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이제 당신은 떠나야 하리라."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나라,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이 깃들인 곳, 그곳에 대한 당신의 그리 움과 갈망은 깊고 깊으니, 우리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으로 당신을 묶어둘 수 없 고, 우리에게 당신이 필요하여도 그 필요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바로 사랑의 아름다움이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 인가 아닌가를 재는 척도이다. 사랑이 그대의 성장을 막는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고통 스러워할 수는 있어도 질투하지 않는다. 사랑은 고통받기는 해도 상대방을 묶지 않는다. 알미트라는 말한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으로 당신을 묶어둘 수 없고, 우리에게 당신이 필요하여도 그 필요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당신이 필요 하다. 정말로 우린 당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에 12년 동안이나 있었다. 그것으 로 충분하다. 그동안 우리는 당신을 무시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은지도 모른 다. 나는 안다.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나라, 그곳에 대한 당신의 그리움과 갈망은 깊고 깊다.' 또한 이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도 깊고 깊지만, 당신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 다. 우리는 당신이 여기에 좀더 있기를 바라지만, 사랑으로 당신을 묶지는 않을 것이다. 우 리는 당신이 필요하지만, 당신을 몰라본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이다. '우리에게 당신이 필요 하여도 그 필요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를 떠나기 전에 부탁이 있으니,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말씀해 달라. 우리는 당신이 여기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과 필요와 당신의 자비 때문에 당 신을 감옥에 가두고 싶지 않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최소한 이것만 해달라. '우리에게 당신 의 진리를 말씀해 달라.' 기억하라. 진리는 언제나 개인적이다. 집단 전체의, 군중의 진리란 없다.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이슬람교... 집단은 거짓말밖에 갖고 있는 것이 없다. 집단은 거짓말밖에 갖고 있지 않다. 진리는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다. 진리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에서 체험된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 그대의 다정 한 친구, 누구도 그곳에 함께 들어올 수 없다. 그대 혼자 가야만 하며, 또 그대 혼자 있을 때에만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개인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조직화 된 종교가 필요 없다. 그렇다. 종교성은 필요하다. 조직화되지 않고, 각자의 가능성과 개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종교성은 필요하다. 진정한 인간 사회, 진정한 문명 사회라면 모든 개인이 각자 '자신의' 진리를 찾아 나가도 록 허용할 것이다. 고타마 붓다의 진리는 그대에게는 소용이 없다. 나의 진리 또한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대에게 진리가 하나의 가정 이 아니라 엄연한 실체이며, 그것이 사람들을 탈바꿈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나는 그대에게 '나의' 진리를 줄 수 없지만, 나의 존재가 그대에게 발심의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대가 저 마지막 성전을 찾는 여행을 떠나도록... 하지만 여자는 남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 여자의 마음은 생각에 기초를 두지 않 고, 느낌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알미트라는 왜 진리를 말해 달라고 하는가? 그녀는 말한 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하고... 이것은 욕심이나 탐욕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 또 자기의 아이들에게 전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리라. 우리는 당신의 불꽃이 영원토록 살아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 불꽃을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하리라. 당신은 외로운 가운데 우리 시대를 지켜 주었고, 우리가 잠 속에서 울고 웃고 하는 것을 당신은 늘 깨어있어 다 들었다. 알미트라는 말하고 있다. "당신이 그동안 우리를 지켜보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잠 속에서 웃고, 잠 속에서 말하고 잠 속에서 행동하였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우리는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당신의 눈 에 비친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씀해 달라.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그대 인생 의 원리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하느님이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잠들어 있기 때문에 모른 다. 그대는 태어나고 죽지만, 그 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둘 사이에 바로 그대의 진리가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오르팰리스 사람들아, 지금 너희들의 영혼 속 에서 움직이고 있는 바로 그것말고 내가 또 무슨 말을 새롭게 할 수 있으랴? 모든 스승들 은 단지 그대 자신의 참 모습, 그대 자신의 진리를 일깨워줄 뿐이다. 그대에게 어떤 다른 것 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지금까지 안을 들여 다보지 않은 것이다. 잠시 동안의 침묵, 잠시 동안의 명상만으로도 그대는 자신을 벗겨 나가 기 시작한다. 진리는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지극히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너희들의 영혼속에서 움직이고 있 는 바로 그것말고 내가 또 무슨 말을 새롭게 할 수 있으랴?' 나는 그 불꽃을 볼 수 있는 데, 너희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어서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라. 영원한 생명수를 발견할 때까지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가라. 알겠는가? 사랑이 너희를 손짓하거든 그러자 알미트라가 말했다.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사람들 머리위로 날개처럼 내렸다. 이윽 고 그는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너희를 손짓하거든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험할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너희를 품거든 그에게 자신을 온통 내맡기라. 비록 그 날개깃 속에 숨은 칼이 너희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그리고 사랑이 너희에게 말할 땐 그를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 듯 사랑 의 목소리가 너희의 꿈을 흩트려 놓을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은 너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지만, 또 너희를 십자가에 못박기도 하니까. 사랑은 너희를 성숙시키지만, 또 너희를 꺾어 버린다. 사랑은 너희의 꼭대기에 올라가 햇볕에 하늘거리는 그 연한 가지를 어루만져 주지만, 또 한 너희의 뿌리로 내려가 땅에 얽히지 못하도록 흔들어댄다. 사랑은 곡식 단을 거두듯이 너희를 자기에게로 거두어들이며, 사랑은 너희를 타작하여 알몸으로 만들고, 사랑은 너희를 키질하여 껍질을 털어 버리며, 사랑은 너희를 갈아 흰 가 루로 만들어, 사랑은 너희를 반죽하여 부드럽게 하며, 그런 다음 사랑은 너희를 자기의 거 룩한 불에 올려 거룩한 떡으로 구워 신의 거룩한 잔치에 내놓는다. 사랑은 이 모든 일을 너 희에게 베풀어 너희로 하여금 마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며, 그 깨달음으로 너희는 큰 생명 의 마음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만을 두려운 생각에 사랑의 평안과 사랑의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면, 차라리 너희 의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마당을 빠져나가는 게 좋으리라. 거기서 나가 저 계절도 없는 세상으로, 웃어도 채 웃지 못하며, 울어도 채 울지 못하는 그 곳으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 그들은 사랑을 이해하는 자에게만 말을 한다. 사랑이 바로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바로 자기 존재의 불꽃임을 깨달은 사람은 드물다. 그대를 먹여 살리는 것은 밥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그대를 먹여 살릴 뿐 아니라, 그대 에게 아름다움과 진실과 침묵, 그밖에도 수천 가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준다. 세상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세계와, 가격을 따진다는 것이 무 의미한 세계. 가격이라는 것은 물건에만, 단지 죽은 물건에만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죽은 것 속에는 생명이 없다. 이 단순한 질리, 이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랑까지도 돈 주고 산다. 매춘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 이것은 단지 매춘만의 문제가 아니 다. 사람들이 하는 결혼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 역시 영원한 매춘 제도가 아닌가? 기억 하라, 그대가 진실로 가치있는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진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 인생의 향기가 바로 사랑이다. 남자들은 모든 것을 돈 주고 사는 습관에 길들어 있기 때문에,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을 사고 팔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바로 그것을 죽이는 행위라는 것을 잊었다. 남편은 아 내를 샀기 때문에 아내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이건은 아내 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가격이 매겨지는 순간 사랑이 죽어 버린다 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사랑은 매우 미묘하고, 사랑은 매우 신성한 것이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물건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내는 하나의 물건이 되어 버린다. 그대가 만일 조금이 라도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아내를 여성으로 살아있게 하라. 남편 역시 살아있는 것이 아니 다. 남편에게 자유를 주라. 자유 속에서만 사랑은 꽃피어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치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였다. 심지어 하느님까지 돈 주고 사려고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여유'가 있다는 말을 염두에 두라- 자기 집에 사원을 꾸며 놓는 다. 그래서 불상이나 신상들을 사다 놓지만, 그래 봐야 우스운 짓일 뿐이다. 돈으로 사다 놓은 불상이나 신상은 살아있는 신이 될 수 없다. 또 그들은 불상이나 신상을 살 뿐 아니라, 대신 기도하고 염불을 해줄 목사나 승려들까지 돈으로 고용한다. 나는 성직자들이 열 군데가 넘는 집에서 기도를 해주기 위하여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뛰어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래야만 그들은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와 예배와 예불까지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매우 독실한 행위를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바로 죄인이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어떤 것,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대의 인생은 사막이나 마찬가 지다. 그대여, 과연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어떤 것을 그대는 갖고 있는가? 사람들은 심지 어 자신의 생명까지 판다. 군인들을 보라! 그 숫자는 지구 전체로 따지면 수천만 명이 넘 는다. 그들은 자신을 팔아 버렸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죽고 죽이는 일뿐이다. 하지만 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자신을 판 바로 그날, 그들은 이미 자신을 죽인 것이다. 아직 숨을 쉬고는 있겠지만, 그 숨 속에는 생명이 없다. 숨이야 나무도 쉬고, 채소도 쉬고, 양배추도 쉬고, 꽃양배추도 쉬지만, 그것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랑도 알지 못한 다. 그것들은 각자에게 해당하는 값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양배추가 좀더 싸고, 꽃양배추 가 더 비쌀 것이다. 꽃양배추는 소위 대학을 졸업한 양배추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짓을 인간에게는 하지 말라. 그리고 만일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라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대는 무지몽매하 게도 자신의 자식들을 소유하려고 하고, 그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유하려는 그 노력, "이 애는 나의 아이다."라는 생각 자체가 바로 아이를 죽이는 짓임을 깨닫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오지만, 그대가 아니라 우주에 소속되어 있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통로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과 똑같은 성, 똑같은 종교, 똑같은 정치 이념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는 무조건 그대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어느 날 인도 정부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학교의 군사훈련에 참 가하지 않으면 학위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필수과목이었다. 나 는 총장에게 항의하였다. "나는 차라리 학위를 받지 않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인간의 의식과 인생을 파괴하며, 사람을 숫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일에는 나 스스로 참가할 수가 없습니다." 군대에서는 누구나 죽으면 게시판에 이렇게 적힌다. "96번 손실." 이 문장은 그대의 가슴에 아무 것도 전달하 지 않는다. 왜냐하면 96번에게는 보살펴야 할 아내도, 자식도, 늙은 어머니도, 늙은 아버지 도 없기 때문이다. 숫자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이것은 대단히 교묘한 수법이다. 숫자가 아니라 이름을 보게 되면 누구나 그의 죽음에 슬픔을 느낀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 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자식들과 아내, 늙은 부모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96번일 뿐이다. 96번에게는 자식도 아내도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96번 으로 대체될 수 있다. 살아있는 인간 존재를 죽은 숫자로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군대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 나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대 주위의 군중들은 계속해서 그대를 하나의 숫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대를 소유하고, 이용하려 한 다. 그대는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하나의 물건인 것이다. 사랑은 시장에서 살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이해하려면 그대는 먼저 온 존재가 죽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두가 빛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랑으로 넘쳐 나고 있 다. 사랑을 체험하려면 그대는 먼저 정말 가치있는 그 세상을 알아야 한다. 알무스타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존 재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영혼을 잃어 버렸다. 어떤 자는 주지사가 되고, 어떤 자는 대통 령이 되었다. 대통령과 주지사와 수상들. 이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스탈린 (Josef Stalin)같은 자가 백만 명이 넘는 러시아인을 학살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학살 당한 이들은 자본가가 아니라- 러시아는 잘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매우 가난한 이들이 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도 소유당하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해서 억압에 항거하였 다. 처음에는 짜르(전체주의)들이 몇 세기에 걸쳐 그들을 학살하였는데, 스탈린은 짜르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하지만 이따금 나는 생각하기를, 그가 죽인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아돌프 히틀 러는 6백만 명을 죽였지만, 이 6백만 명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 의 영혼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어떤 자는 남편이 되었고, 어떤 자는 아내가 되었으며, 누구 는 아버지가, 누구는 또 어머니가 되었다. 자연계에서는 여자는 단지 여자일 뿐 숙녀가 아니다. 숙녀란 죽은 삶을 사는 여자다. 자연 속에는 단지 대지에 뿌리박은 싱싱한 진짜 남자만이 있을 뿐이지, 잘 다듬어진 신사란 있지 않다. 신사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위선자이다. 만일 그들이 진실로 살아있다면, 그들은 탄 생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을 알았을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대답하기를 거절하였다. 똑똑하고 부자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질문은 위선이다. 그들의 질문은 미국식이다. 그대에게 이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가짜(phony)'라는 말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이 말 은 '전화(telephone)'라는 말에서 생겨났다. 전화로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이 점 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목소리도 다르고, 억양도 다르며, 상대방이 친구인지 유령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정신과 의사가 어떤 백만장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치료비가 상당했지만 백만장자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부자는 계속해서 치료를 받았다. 일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정신과 의사의 진찰실에 앉아 터무니없는 얘기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이 터무니없는 것들은 그대의 머리 속에도 있 는 것들이다. 하지만 머리 속에 갖고 있는 것은 좋은데, 정신분석이라는 것은 그것을 밖으로 꺼내 놓으니까 문제인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이 환자에게 진절머리가 났지만 그에게서 거액의 치료비를 받고 있는 터라 서 그를 떨쳐 버릴 수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미국식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백만장자 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다른 환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한 번 오면 서너 시간씩 걸립니다. 당신은 시간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당신이 하는 말을 나 대신 듣도록 녹음기 한 대 갖다 놓겠습니다. 그러면 나도 서너 시간이 절약될 것이 고, 저녁에 시간이 있을 때 천천히 녹음된 내용을 들으면 될 겁니다." 그 부자가 말했다. " 대단히 좋은 생각이오!" 다음날 의사는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그 부자 환자가 벌써 진찰실 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니, 벌써 끝났습니까?" 그가 말했다. "아니오, 나 역시 녹음기 를 갖다 놓았소. 지금 내 녹음기가 당신의 녹음기에게 말하고 있는 중이오, 나라고 해서 서 너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겠소? 녹음기가 대신할 수 있다면 내가 매일 올 필요도 없지 않소?" 이런 식으로 인간은 점점 기계가 되어 버린다. 대화를 하고 생활을 하지만, 로봇과 다를 바가 없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로 테일 카아네기(Dale Carnegie)가 있다. 그 는 미국말고 다른 곳에서는 철학자로 대접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가 쓴 책 <동지를 이기 고 사람을 다루는 법(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다. 이 책은 전부 쓰레기 같은 내용뿐이다. 그는 세상의 남편들은 하루에 적어도 서너 차례씩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당신을 사랑해. 여보! 당신 없 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거야. 당신이 없는 인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정말로 그런 마음 인지 어떤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위선을 보라! 그대가 진실로 사랑에 빠졌다면,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조차 힘 들다. 말이란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계적으로 하루에 서너 차례씩 반 복한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진실한 마음이 아니게 된다. 그대는 단지 전축의 레코드판에 지나지 않는다. 판이 튀어서 똑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상태에서 계속 "당신을 사랑해, 여보!" 라고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아내 역시 응답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들 두 사람은 이 렇게 말하고 있다. "이 여자 때문에 내 자유가 구속되고 있다. 이남자가 나를 감옥에 가둬 두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는 "신은 곧 사랑이다."라 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그 말을 한지도 2천년이 지났다. 이제 그 말을 새롭게 바꿀 필요가 있다. 시대에 맞출 필요가 있다. 신은 사랑이 아니다.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사랑이 곧 신이다. 비록 같은 단어가 사용되긴 했어도 이 둘 사이 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이 곧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 신의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의 속성이라는 뜻이다. 즉, 신은 공정하고, 자비롭고... 그러나 "사랑이 곧 신이다."라고 말할 때는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이때는 신 자체가, 사 랑에 빠진 이들의 속성이 된다. 이대는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 신이란 단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가정을 만든 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태의 하느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분노하고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는 신사가 아니다! 기억하라, 나는 너희의 삼촌이 아니다! 나는 다른 신을 인정할 수 없 다!" 이슬람교도들이 이러한 유태인들의 하느님의 개념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사원들과 신상들. 아름다운 예술품들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신만 있어야 하고, 단 한 권의 성서와 한 명의 메시아, 즉 모하메드만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 로 독선적이고, 추하고, 비인간적인 짓이다. 수백만의 신이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무엇인 가? 오히려 세상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의 신에게만 매달려야 한단 말 인가?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하나의 신만을 믿는 종교들, 이들은 민주적이 아니라 대단히 독재적이다. 그 문제는 얼마나 큰가? 아마도 고타마 붓다가 최초의 민주적인 종교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말했다. 모든 사람은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지금 신이 되는 길을 걷고 있 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알무스타파는 그들에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눈물을 흘리고 흐느껴 울었다. 눈물 이 그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들의 질문은 진실된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것이었기 때문이 다. 그들은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것을, 지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질문하고 있었다. 지적인 질문과 솔직하고 순수한 의문의 차이를 그대 역시 잘 알 것이다. 자신의 지 식을 과시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순수한 의문이라는 것이 없다.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무식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질문도 던지기 전에 그 사람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그 대답이라는 것도 자신의 체험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빌려온 것이다. 고타마 붓다 생존시에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만나러 왔다. 그는 5백명이나 되는 추종자들 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붓다는 누가 찾아와도 거절한 적이 없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붓다 는 제자들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떠난다. 내 배가 도착했다. 그러니 어서 질문이 있으면 말하라. 나는 먼 훗날 이 고타마 붓다가 살아 생전에 사람들의 순수한 의문 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듣고 싶지 않다." 그 유명한 철학자가 어떤 질문을 던지자, 고타마 붓다는 이렇게 되물었다. "그것이 그대의 질문인가, 의문인가?" 철학자가 물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붓다가 말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의문은 정말로 목이 마른 것이고, 질문은 생각의 장난이다. 그대가 의 문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단지 질문에 지나지 않는 것 이라면 내 시간을 빼앗지 말라." 알무스타파는 함께 12년 동안을 살았으면서도 그에게 단 한 번도 무엇을 물어 본 적이 없는 그 사람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오르팰리스에 도착한 첫날에 그를 알아본 여인 알미트라가 물었을 때는 대답을 하였다. 그 리고 이 대답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대단히 아름답고, 대단히 지적이며, 대단히 진실된 대 답이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대답한 적이 없을 것이다. 제자 아르주나(Arjuna)의 질문에 대답을 했던 크리슈나조차도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르주나의 질문은 순수했지만, 크리슈나의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크리슈나의 모든 관심사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하 면 아르주나를 설득하여 전쟁에 참가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서로 모순되는 대답을 늘어 놓다가 마침내 자신의 대답이 아르주나를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고는 최후의 방법을 썼다. 마침내 크리슈나는 말했다. "네가 전쟁에 참가해야만 하는 것은 신의 뜻이다." 신이 아르 주나에게 직접 자신의 뜻을 말하지 않고 크리슈나에게 말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만일 내가 아르주나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싸우라는 것이 신의 뜻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모든 싸움을 포기하고 이 학살과 파괴의 현장을 떠나 히말라야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명상이나 하라는 것이 신의 뜻이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겁에 질렸다. 만일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마땅히 싸워야만 한다. 그는 지극히 단순한 한가지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왜 신께서는 항상 중개인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하는가? 신께서는 왜 직접 말하지 못하는가?" 사실 신이라는 것은 없다. 이 중개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사람들이다. 신의 이름으로 그들은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다. 자신의 논리만으로는 강요할 수 없 으니까 최종 수법으로 신을 끌어들인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이것이 의문스러웠다. 신이 너의 진짜 의문이냐? 다른 이들은 어떤가? 신은 철학적이고, 지적인 의문이며, 하나의 가정이다. 만일 신을 만난다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인 가? 그리고 신을 만난다는 것의 핵심이 무엇이냐? 아니다, 신은 인간의 진짜 의문이 아니다. 알미트라는 알무스타파에게 "우리에게 신에 대하여 말씀해 달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 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여성만이 사랑에 대하여 물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남자는 신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 거나 신이 되고자 한다. 이것은 일종의 권력 다툼이다. 사랑에는 권력 다툼이 없다. 사랑은 그대를 겸허하고, 단순하고 순진하게 하는 체험이다. 그리고 알무스타파는 어떤 대답을 주는 가? 여기에 대하여 깊이 명상하라. 단어 하나 하나가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 어다보아야 한다. 어떤 분위기인지, 사랑이 그들의 진정한 의문인지 보아야 한다. 알미트라 는 매우 근본적이 질문을 하였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그곳에 모 인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침묵이 사람들 머리 위로 날개처럼 내렸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알무스타파가 그들의 눈, 그들 의 얼굴을 바라볼 때 깊은 침묵이 그들을 감싸고 흘렀다. 그들 순진한 사람들은 알미트라가 질문한 것을 정말로 알고 싶어했다.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 질문을 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 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들은 순진했다. 그래서 알미트라가 그들의 대변자가 된 것 이다. 그녀는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것을 안 알무스타파는... 이윽고 그는 큰 목소 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너희를 손짓하거든 그를 따르라... 의심하지 말고, 부정하지 말라. 사랑이 지금 그대를 어떤 미지의 세계로 손짓해 부르고 있 다. 비록 그대가 그 씨앗을 갖고 있다고 해도 씨앗은 자신이 어떤 꽃이 될지 알지 못한다. "사랑이 그대를 손짓하거든. 그 사랑을 따르라." 그대는 축복받은 것이다. 비록 그 길이 어 렵고 험할지라도. 사랑은 장미꽃 수놓인 침대가 아니다. 사랑의 날개가 너희를 품거든 그에 게 자신을 온통 내 맡기라. 저항하거나 망설이지 말라. 마음을 반쯤만 내놓지 말라. 애매하 게 한 다리만 걸치고 있지 말라. 비록 그 날개깃 속에 숨은 칼이 너희에게 상처를 줄지라 도. 사랑은 확실히 상처를 준다. 그 상처는 수술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너무나 많은 미움 을 달고 살기 때문에, 그 미움을 모두 도려내야 한다. 잠시 동안은 상처를 느낄 것이다. 미 움이 있던 자리가 허전해진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너희에게 말할 땐 그를 믿으 라... 그이 말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의 말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으라고 알무스타파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차이다. 내가 그대에게 어떤 것을 말할 때.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은 머리에서 생긴 믿음 이며,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더 그럴 싸한 논리와 더 훌륭한 이론으로 정반대되는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생각 이 다시 변할 것이다. 알무스타파는 그이 말이 아니라, '그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깊이 있는 말이다. 스승이 말할 때, 그의 말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쓰지 말 라. 그 말이 그대로 하여금 스승의 진실됨을 믿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믿을 때, 그 믿음은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이 믿음은 논리가 아니다. 그대가 누구의 말을 믿을 때, 그 믿음은 머리에서 나온다. 이 믿음은 단지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논리가 아니다. 사랑은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두 가슴, 두 존재의 만남이며, 두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알무스타파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사랑의 목소리가 너희의 꿈을 흩트려 놓을지라도. 사랑은 그대의 꿈을 흩트려 놓는다. 사랑은 그대의 잠을 흩트려 놓고, 그대의 존재 자체를 흩트려 놓는다. 단지 말을 믿는 것으로는 그대의 어떤 것도 흩트려지지 않는다. 반대로 그대 는 더욱 똑똑해지고, 그대의 에고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페허로 만들 듯 사랑의 목소리가 너희의 꿈을 흩트려 놓을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은 너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지만. 또 너희를 십자가에 못박기도 하니까.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인간 존재의 탈바꿈의 연금술을 표현한 사람은 없 다. 사랑은 그대에게 왕관을 씌워 주지만, 동시에 그대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사랑은 지금까 지의 그대, 그대의 과거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앞으로의 그대, 그대의 미래에 왕관을 씌워준 다. 사랑은 왕관과 십자가. 둘 다이다. 이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사랑의 영광을 놓쳐 버 린다. 십자가의 처형이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면 왕관을 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그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진짜 그대는 왕관을 쓸 것이지만. 가짜 그대는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쪽에는 죽음이, 다른 한 쪽에는 부활이 있다. 사랑은 너희를 성숙시키지만, 또 너희를 꺾어 버린다. 그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추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길러왔다. 모두 가지를 쳐내야 한 다. 그리고 이 가지치기는 그대의 성장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대가 지금까지 그대 주변에 모아 놓은 추한 것들- 질투, 독재성, 남보다 높이 올라가려는 노력들- 때문에 그대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 문장을 읽으니 정원을 돌보는 나의 제자 묵타(Mukta)가 생각난다. 그녀는 정원의 나무 들의 가지를 쳐주고 있다. 나는 그녀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안다. 가지를 쳐주지 않으면 나무들은 성장을 못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내가 잠시 방 밖으로 나올 때면 전지가위를 감춘다. 묵타, 오늘부터는 가위를 감출 필요가 없다. 단지, 상장에 방해가 되는 가지만을 자르라. 나무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한다는 그대의 생각만으로 가지를 자르지는 말라. 나무를 그냥 내버려 두라. 나무에게 자유를 주라... 그리고 정원서가 나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랑해 주겠 는가? 나무가 더 무성해지고, 더 자라고, 잎과 꽃이 더 많아지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면 언제라도 가지를 쳐라. 나는 가지치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때 나는 묵타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한 적 이 있다. 6년 전 내 정원 뒤의 담장에는 아름다운 담쟁이덩굴이 있었다. 그것은 야생의 덩굴 식물이었다. 묵타는 그리스인이었는데, 그것을 잘라내기 위하여 그녀는 그것을 '괴물딱지' 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교활한 생각이다. 어떤 것을 파괴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먼저 그것에 이름을 붙힌다. 그래야 자신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 가련한 덩굴식물 은 괴물딱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식물이긴 했지만, 야생이라고 해서 괴물딱지는 아니다. 나 역시 야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들이 나를 잘라낼 수 있다고 생 각하는가? 나는 심지어 수염 한 오라기도 자른 적이 없다. 모두가 오리지널이다. 그대들은 모두 오리지널이 아닌 수염들을 달고 있다. 나는 내 수염의 한 터럭도 자른 적이 없다. 며칠 전 이런 질문이 들어왔다. "브하그완, 당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내 가슴에 와 닿 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늘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밥을 먹나요?" 이 질문의 의도를 나는 이해한다. 깎지 않은 수염이 내 입술을 모두 덮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들어온 것이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내 오리지 널 수염을 보호하기 위하여 언제나 혼자 식사를 한다. 약간 까다로운 일이긴 하지만... 사랑 은 너희의 꼭대기에 올라가 햇볕에 하늘거리는 그 연한 가지를 어루만져 주지만... 사랑이 그대의 꼭대기에 올라가 바람과 태양과 빗속에 춤추는 나뭇가지들을 부드럽게 어 루만질 때, 그대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쪽일 뿐이다. 또한 너희의 뿌리로 내려가 땅에 얽히지 못하도록 흔들어댄다. 그리고 그대는 어느 한쪽만 선택하고 다른 쪽을 외면할 수는 없다. 사랑은 복합적인 것이 기 때문에 어느 한 조각만을 취할 수 없다. 그대의 나무 꼭대기는 사랑으로 어루만져져야 하지만. 땅에 집착하려는 그대의 뿌리는 흔들려져야 한다. 모든 집착은 곧 감옥에 갇히는 것 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날 수 있는 날개를 주려고 한다. 얽히려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드넓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가 없다. 땅에얽히기 위하여 그대는 지금까지 굵 은 뿌리가 더 깊이 땅 속으로 들어가게 했으며, 그래서 아무도 그대를 흔들 수가 없다. 그것 은 어디까지나 두려움 때문이며, 두려움은 자유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도. 집착은 그대가 집착하는 바 로 그 사랑을 파괴할 것이다. 묶이려 하지 말라. 이런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어떤 위대한 자유 투사가 일요일에 산으로 휴식을 취하려 갔다. 도중에 그는 하룻밤 묵으러 어떤 여관에 들어갔다. 그 여관 주인은 아름다운 앵무새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걸맞게 보석으로 치장한 새장에 들어 있었다. 여관 주인역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앵무새에게 '자유'라는 말 한마디만 가르쳐 주었다. 하루종일 앵무새는 "자유! 자유!" 하고 외쳐대곤 했으며, 그 소리가 산골짜기에 메아 리쳤다. 그 자유 투사는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군. 나는 이 여관 주인을 잘 안다. 그는 나 의 친구이다. 나는 자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앵무새에게 '자유'라는 말을 가르쳐 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모순 아닌가. 만일 그가 진실로 자유를 사랑 한다면 이 앵무새에게도 자유를 주어야 한다. 아무리 보석으로 장식한 새장에 갇혀 있다해 도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한밤중에 앵무새가 다시 "자유! 자유!"하 고 소리쳤다. 사방이 고요했기 때문에 그 외침소리는 멀리까지 메아리쳤다. 그는 밖으로 나 왔다. 깊은 밤이었고, 여관 주인은 잠들어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새장의 문 을 열어 주고 나서 기다렸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앵무새이니 문이 열린 것을 보면 당 장에 하늘로 날아가리라. 그런데 하늘로 날아가는 대신, 앵무새는 황금 새장에 단단히 달라 붙었다. 하지만 그 자유 투사는 앵무새에게 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새장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앵무새를 꺼내려 했다. 그러자 앵무새는 손을 쪼고 할퀴면서 계속해서 "자유! 자유!"라고 소 리쳤다. 손이 온통 피로 물들었지만, 그는 간신히 앵무새를 꺼내 보름들이 휘영청 밝은 밤하 늘로 날려 보냈다. 손은 상처를 입었지만, 앵무새가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에 그는 깊은 만족 감을 느끼면서 잠자러 들어갔다. 아침에 그는 다시 "자유! 자유!"하는 똑같은 외침 소리에 잠이 깨었다. "세상에! 새가 다시 돌아왔군!"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새장의 문 은 열려 있는데 앵무새는 새장 안에 앉아 있었다. 사랑은 그대를 어루만져 주지만, 동시에 그대의 뿌리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대에게 자유 를 주기 위하여 그대를 흔들어댈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모순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자 유를 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무엇엔가 집착한다. 자유는 위험하다. 앵무새는 새장 안에서는 안전하고 보호받는다. 자유 속에서는 비록 자신의 존재, 드넓은 하늘을 얻는 다 해도 그러한 안전과 보호가 없다. 하지만 자유는 대단히 값진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대가라도 치러야 한다. 그리 고 사랑이 커가려면 자유가 필요하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하늘 전체를 자신의 집으로 삼 을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안전과 보호가 없는 곳을 두려워하며, 단지 말만으로 사랑을 외칠뿐 직접 체험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하는 결혼이다. 사랑은 희생되고, 그 대신 안전이 뒤따른다. 물론 결혼으로 안전한 것이며, 보호받을 수가 있다. 결혼을 하면 내일도 모레도 아내는 그대 옆에 있을 것이고, 남편은 그대를 보호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사랑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때 사랑은 공허한 말이 되어 버린다. 공허한 말을 조심하라. 특히 사랑과 같은 말에 대해서는. 사랑은 신보다 더 고귀한 것이 다. 신은 단지 사랑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 알맹이가 없는 빈 껍질을 달고 다니지 말라. 이 것이 바로 그대의 불행이고, 인류전체의 불행이다. 말만 늘어놓을뿐, 아무도 진실로 사랑하 지 않는다. 사랑은 위험한 것. 나는 말한다. 위험을 선택하라. 사랑 속에서는 단 한 순간이 영원에 맞먹는다. 그리고 사 랑이 없이는 영원을 산다 해도 무덤과 다를 바 없다. 아무 것도 꽃 피어나지 않는다. 안전하 긴 하지만, 그 안전 속에서 그대는 과연 무엇을 하겠는가? 사랑은 곡식 단을 거두듯이 너희 를 자기에게로 거두어 들이며... 하지만 그대가 어떤 것에 집착해 있고 매달려 있다면, 신이 나 사랑이 어떻게 그대를 거두어 들이겠는가? 사랑은 너희를 타작하여 알몸으로 만들고... 왜냐하면 그대는 너무나 많은 거짓 자신을 잔뜩 껴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얼굴은 본 래의 얼굴이 아니다. 수많은 가면을 겹겹이 쓰고 있다. 사랑은 너희를 타작하여 알몸으로 만들고, 사랑은 너희를 키질하여 껍질을 털어 버리며, 사랑은 너희를 갈아 흰 가루로 만들어... 이 '희다'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색깔이 아니다. 무지개 속에 는 모든 색깔이 있 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검은색과 흰색, 두가지 색이 빠져 있다. 왜 모든 신비가 들은 검은색을 비난하고 흰색을 찬양하는가? 흰색은 한 가지 색깔이 아니라, 색깔 전체이다. 무지개 속의 모든 색깔을 섞으면 흰색이 나타난다. 그래서 흰색은 기본적으로 인생의 모든 색깔의 위대한 종합이다. 그리고 모든 색 깔을 제거하면 검은색이 나타난다. 검은색은 부정이며, 거부이다. 검은색은 죽음이다. 흰색은 긍정이며, 신이다. 흰색은 사랑이다. 사랑은 너희를 반죽하여 부드럽게 하며, 그런 다음 사랑은 너희를 자기의 거룩한 불에 올 려 거룩한 떡으로 구워 신의 거룩한 잔치에 내놓는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금식을 가르쳐 왔다. 그런데 알무스타파는 잔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종교에 반대하여 나는 알무스타파와 뜻을 같이 한다. 삶은 금식이 아니라 계속되는 잔치이다. 축제이고, 빛의 향연이다. 사랑은 그대의 삶을 빛의 축제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삶이 축제와 잔치가 되지 않고서 는, 기억하라, 그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베풀어 너희로 하여 마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며, 그 깨달 음으로 너희는 큰 생명의 마음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만일 두려운 생각에 사랑의 평안과 사랑의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면, 차라리 너희 의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 마당을 빠져 나가는 게 좋으리라. 사람들은 사랑을 원하지만, 타작 마당과 불길을 통과할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 을 즐거움과 쾌락으로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그 이상의 것이다. 사랑은 축복이며, 무한한 은총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한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사랑의 달콤함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을 알지 못하 고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대의 모든 지식, 모든 보물들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알무스타파는 정확히 말하고 있다. 차라리 너희의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 마당을 빠져 나가는게 좋으리라. 거기서 나가 저 계절도 없는 세상으로, 웃어도 채 웃지 못하며, 울어도 채 울지 못하는 그곳으로. 그대는 어떤 것도 온전히 알지 못하리라. 웃음을 웃어도, 그 웃음은 피상적인 거죽의 웃움 이 되리라. 울음을 울어도 거짓 울움이 되리라. 그대의 삶은 언제나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현되지 못하리라. 그대는 잠과 무의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리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