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1 지은이:라즈니쉬/류시화 옮김 출판사:정신세계사 봉사자:삼육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이지영 이 시대의 새벽빛이었던 그는 알무스타파(Almustafa), 저 선택된 자이며 사랑받는 자, 자기 시대의 새벽빛이었던 그는 오르팰리스(Orphales) 성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워 자기가 났던 섬 으로 데려다 줄 배가 돌아오기를. 마침내 열두 해가 지난 이엘룰(Ielool)의 달, 곧 추수의 달 7일째에 그는 성밖 언덕에 올라 멀리 바다 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배가 안개에 싸여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가슴의 문이 활짝 열리고 기쁨은 날개를 쳐서 멀리 바다 위로 날았다. 그는 눈을 감고 영혼의 침묵들 속에 기도 드렸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올 때 문득 슬픔이 밀려와 그는 마음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어찌 편안히 떠날 수 있으랴, 슬픔도 없이? 아니다, 영혼의 상처 없이는 나는 이 성을 떠날 수 없다. 내 여기 성벽 안에서 보낸 고통의 날들읕 너무 길었고, 또 외로운 밤들도 너무 길 었으니, 이 고통과 외로움을 한 점 후회 없이 작별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이 거리거리에 뿌린 내 무수한 영혼의 조각들, 벌거벗은 채 이 언덕들 사이로 헤매는 내 숱한 갈망의 아 이들, 내 어찌 무거운 생각 없이, 아픔없이 이들을 떠날 수 있으랴? 오늘 내가 벗어 버리는 이것은 한낱 옷이 아니라, 내 손으로 벗기는 살이요, 또한 내 뒤에 남기고 가는 이것은 한 낱 생각이 아니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더욱 부드러워진 심장인 것을. 칼릴 지브란...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황홀하고 기쁘다. 그에게 견줄 만한 다른 이름을 떠올린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단순히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 가슴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과 맞닿아 있다. 칼릴 지브란, 그는 순수한 음악, 하나의 신비이다. 오직 시인만이 그를 이해한다. 그것도 어쩌다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세상이 여러 번 바 뀌고,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칼릴 지브란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앞 으로도 과연 그처럼 인간의 영혼 깊은 곳을 꿰뚫어볼 줄 알고, 또한 우리를 둘러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간직한 인물이 나타날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칼릴 지브란, 그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인간의 언어로 비록 한 조각이나마 미지 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인간의 언어와 의식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지금 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신비가, 시인, 창조적인 영혼들이 칼릴 지브 란을 통하여 손을 맞잡고 노래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이 진리 전체가 아니라, 진리를 흘끗 들여다본 것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대여, 진리를 흘끗 들여다 보는 일이 바로 그대를 궁극의 진리, 절대 진리, 우주적인 진리로 인도하는 순례의 첫걸음이 다. 역시 아름다운 사람인 클로드 브래그든(Claude Bragdon)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이렇 게 말했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그 힘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 웅 장하고 찬란한 언어는 오로지 칼릴 지브란 자신의 것이다." 나는 브래그든의 이 말을 좋아 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별 들이 찬란한 하늘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충분히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동 의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둔다. 그리고 만일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라면, 그는 깨인 사람이다. 만일 그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른다면, 그는 아직 원시적이고 미개 한 의식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브래그든이 한 말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한다. 동시에 나는 그가 한 말이 단지 추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는 말한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 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체험의 뿌리가 없다. 그는 생각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칼릴 지브란을 통하여 흘러나온다는 것을 느끼지만, 확신할 수가 없 다. 또한 확신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다.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칼릴 지브란 의 아름다운 언어에 무한한 감명을 받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였다. 그러나 그 자 신은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 그 자신은 그것을 맞보지 못했다. 그는 칼릴 지브란을 사랑하지만, 칼릴 지브란으로 살지는 못한 것이다. 나에게는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그대에게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먼저, 그는 확실히 위대한 시인이다. 어쩌면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는 신비가가 아니다. 시인과 신비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쩌다가 시인은 문득 신비가의 자리에 있게 된다. 그 드문 순간에, 장미꽃이 그에게 쏟아져 내린다. 매우 드문 그 경우에, 시인은 거의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와 같은 깨달은 사람이 된 다. 하지만 기억해 두라, 나는 '거의'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드문 순간들이 왔다가 가버린다. 그는 그 드문 순간들의 주인일 수가 없다. 그 순 간들은 산들바람과 향기처럼 왔다가, 그대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가버린다. 시인의 천재성이란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언어로 포착하는 일이다. 그러한 순간들은 그대 의 삶 속에도 역시 찾아온다. 그것들은 거저 나누어 주는 존재의 선물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대 내면에 진리 추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섬광이다. 언젠가는 그러한 순간이 바 로 그대의 삶 자체가, 그대의 피와 뼈와 골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것으로 숨쉬게 될 것이며, 그대의 심장은 그것으로 고동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절대로 잃어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대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시인은 몇 순간만 신비가이며, 신비가는 영원히 시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의 문을 낳는다. 아무도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여기 한 가지 해답이 있다. 이 의문은 수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만을 체험하는 데에도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과 그토록 많은 시를 창조할 수 있다. 그의 손이 가 닿는 순간 단어들은 생명을 얻고 살아난다. 그런데 신비가들은 어째서 그러한 시들을 쓸 수가 없었는가? 그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밤낮으로 그러한 창조적인 상태 속에 서 지내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시인 같은 아름다움이 없다. 심지어 고타마 붓다나 예수 그리 스도의 말도 칼릴 지브란이나 미하일 나이미(Mikhail Naimy),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같은 시인의 말에는 훨씬 못 미친다. 이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단지 몇 순간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것을 창조하는데, 자나깨나 우주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왜 그렇지 못한가? 왜 그들은 칼릴 지브란과 같은 시를 쓸 수 없었는가? 그 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만일 어떤 거지가 금광을 발견한다면, 그는 좋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왕이라면 그렇지 않다. 시인은 잠시만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잠시만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가는 잠깐만 우주의식과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주의식 자체가 되어 버렸다. 되돌아올 길이 없다.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들은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단지 이슬방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신비가는 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침묵이 곧 그의 노래이다. 모든 말이 무력해지며, 어떤 식으로든 그의 체험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 고 그 바다는 너무나 넓으며, 그는 계속해서 그 바다와 하나다. 자연히 그는 자신이 그 바다 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하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노래부르기 위해서는, 노래부르 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비가는 노래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의 존재 자 체가 그의 시이다. 그대는 그것을 인쇄할 수도, 그것을 그릴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을 마실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을 만나는 것과 신비가를 만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시인과의 만남부터 시 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만일 이슬방울조차 맛보지 못했다면, 바다는 아직 그대에 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그대가 아직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그 이슬방울만으로도 드넓은 바다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칼릴 지브란에 대 하여 말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시 자체이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그림 그 자체이다. 여기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양의 어떤 왕이 나라 안팎의 모든 화가들에게 실물과 똑같이 보이는 그림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만일 그대들이 문을 하나 그린다면, 단순 한 그림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 문인 줄 착각하고 그곳으로 들 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그림을 나는 갖고 싶다. 그만큼 사실적이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그림 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원하 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왕국 전체를 원한다면 그것도 기꺼이 주겠다." 수천 명의 화가들이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그렸다... 그러나 어떻게 실제와 똑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 화가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그림을 그 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누구도 방해하 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그려야 한다는 시간적인 제약도 없어야 한다. 또한 종이 위에 그 그림을 그리지도 않을 것이다. 궁전 안의 큰 벽에 그리겠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는 누구 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 완성된 그림은 왕이 맨 먼저 보게 될 것이다.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거의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제 왕은 많이 늙었지만,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왕은 약속을 지켰다. 6년이 지난 뒤, 화가가 왕에게로 와서 말했다. "이제 들어와도 좋습니다." 화가가 왕을 방으로 데리고 갔다. 왕은 믿을 수가 없다. 정말로 사실과 똑같은 그림이 벽 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있고, 그 나무들 사이로 좁은 오솔 길이 나 있었다. 왕이 물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가?" 화가가 말했다. "당신이 직 접 걸어가 보십시오..." 이 이야기를 믿든지 안 믿든지 -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 이다 - 화가는 왕과 함께 그림 속의 길로 걸어들어갔으며, 영영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은 실제 사실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이 것은 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진실된 이야기이다. 참된 화가는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아 없어지며, 참된 시인은 자신의 시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창조는 신비가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신비가는 자신이 창조한 것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신의 그림에 또는 자신의 시에 서명조차 할 시간이 없 다. 시인은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잠시 창문이 열려 그 너머를 보고 난 뒤 다시 창문이 닫혀 버리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은 30권 가까이 되는 책들을 썼다. 이제부터 우리가 읽어나갈 이 <<예언자 (The Prophet)>>는 그의 첫 번째 책이다. 그 나머지는 전부 휴지 조각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가 이 작품을 썼을 당시 그는 아주 젊은,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였다. 따라서 갈수록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만하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했다. 평생 동안 그는 글을 썼지만, 그 어떤 작품도 <<예언자>>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어쩌면 창문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우연한 기회에 신비가가된다. 그것 은 단지 우연에 의한 것일뿐이다... 산들바람이 불어오지만, 그대가 불어오게 한 것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 이 <<예언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 더 나은 것을 쓰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바로 여기서 그는 실패한 것이다. 그에게 매우 간단한 진리 한 가지를 말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그의 불행이 었다. "그대가 <<예언자>>를 썼을 때 그것은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 절로'써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대는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것 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지, 그대가 '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 일이 일어나는 그릇 이었을 뿐이다. 그대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이... 어머니가 그 아이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단지 통로 역할만을 했을 뿐이다. <<예언자>>는 그대의 행위, 그대의 머리, 그대 자신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흘러나온 매우 드문 작품이다. 실제로 그대가 사라질 때만이, 그러한 일이 저절로 일어나도 록 그대가 내버려 둘 때만이, 그대가 도중에 가로막고 있지 않을 때만이 그러한 일이 가 능하다. 긴장을 다 풀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방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은 그토록 귀하고 드문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대는 칼릴 지브란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우주가 자신을 통해 흘러나오도록 내맡겼다. 그는 단순히 하나의 그릇, 통로였다. 피리 부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텅 빈 피리 였다. 내 체험에 의하면, <<예언자>>와 같은 책은 그대가 말하는 소위 성스러운 책들보다 훨씬 성스러운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은 순수한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 종교를 탄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책은 그대에게 어떤 의식 절차도 주지 않는다. 어떤 계율도 교리도 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체험을 그대에게도 순간이나마 맛보게 해줄 뿐이다. 그 체험 전부터는 말로 표현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약간은... 어쩌면 장미 전체는 아닐지라 도 몇 개의 꽃잎만큼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장미가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 다. 다만 그대의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따금 산들바람이 꽃잎들을 불어다 줄 수 있다. 그대의 존재 속으로 부는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그 꽃잎들은 실제로 미지의 세계로 의 초대이다. 신이 그대에게 긴 순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순례를 떠나지 않는 한 그대 는 여전히 무의미한 삶 속에서 질질 끌려가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사는 것 이 아니다. 그대의 가슴 속에는 웃음이 없다. 칼릴 지브란은 '알무스타파(almustafa)'라는 가상의 이름을 지어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시작이다. 알무스타파가 바로 그 예언 자이다. 알무스타파, 저 선택된 자이며 사랑받는 자, 자기 시대의 새벽빛이었던 그는 오르펠리스 (Orphales) 성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워 자기가 났던 섬으로 데려 다 줄 배가 돌아오기를. 위대한 진리는 비유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다. 알무스타파는 단지 가상의 이름일 뿐이 다. 왜 그를 '선택된 자이며 사랑받는 자'라고 했을까? 왜 그를 '그의 시대의 새벽빛'이라 고불렀을까? 그것은 그가 12년동안이나 기다렸기 때문이다... 알무스타파의 모든 비밀은 기다림에 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으며, 요구하지도 않았다.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기다리기만 했다. 기다리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지 그냥 내맡겨 두겠다는 대단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대의 기다림이 완전한 기다림이라면, 언젠가 그대의 배가 와서 그대를 그대의 근원으로, 생명과 사랑과 웃음의 근원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씨앗은 이 한 가지를 배워야만 한다. 봄이 와서 싹이 틀 적당한 시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 라. 씨앗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씨앗이 봄을 데리고 올 수는 없다. 봄은 누가 오라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씨앗이 너무 많은 노력을 한다면, 노력 그 자체가 방해 가 되어 씨앗은 수용적인 자세가 되지 못하고 닫혀 버린다. 씨앗은 그저 받아들이고, 열려 있고, 기다려야 한다. 언제 봄이 오든지... 그 씨앗은 언젠가는 봄이 오리라는 것을 가슴 깊 숙한 곳에서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씨앗은 정원 가득히 피어 있던 꽃들을 본 젓이 있 기 때문이다. 그대는 고타마 붓다라는 꽃을 보았지만 그러한 확신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는 예수를 보았지만 그러한 확신이 없다. 아직도 많은 의문이 있다. 많은 의심과 불신이 있다. 마침내 열두 해가 지난 이엘룰(Ielool)의 달, 곧 추수의 달 7일째에... 씨앗을 뿌리는 시기가 있고, 그 열매를 거두는 시기가 있다. 이엘룰의 달, 곧 거둘 시기가 된 것을 안 알무스타파는... 성 밖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 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배가 안개에 싸여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거의 이런 식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그대의 신뢰가 더욱 자 라서 마침내 그대 내면에서 무르익게 되고, 그때 그대는 그대의 근원지로 돌아갈 시간이 다 가왔음을 확신할 수 있다. 신을 찾는 것은 앞에 있는 어떤 목적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그 것은 근원을 찾는 것이며, 그대가 나온 자리를 찾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이런 뜻이다. 그대 는 요구하지 않으며,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깊어짐에 따라 그대 는 근원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가게 되며, 그 근원은 바로 그대 존재의 한가운데에 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단어는 푸루스(purus)이다. 푸루스는 '도시'를 뜻하는 푸르(pur)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칸푸르(Kanpur), 낙푸르(Nagpur), 자발푸르(Jabalpur)처 럼 푸르(pur)가 붙은 도시 이름이 많은 것이다. 그대는 성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도시이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대의 도시 한가운데에 바 로 그대의 근원지가 있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그대가 떠나왔다. 어느 날인가 그대는 그대의 근원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근원지에서 나올 당시 그대는 무의식 상태였다. 종교는 일종의 돌아가는 여행이다. 그리고 그대들 누구나 돌아가는 차표를 가지고 있다. 돌아갈 때는 떠나 올 때와는 다르다. 돌아갈 때 그대는 완전히 깬의식 상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순 례의 목적이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영원으로 한 주기를 완성 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는 문득 배가 안개에 싸여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당연히, 무의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대는 반드시 안개로 가득 찬 시기를 거쳐야 만 할 것이다. 마취를 당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대는 이것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마취당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유명한 의사인 내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수술도 하지 않는데 마취를 왜 하지?" 내가 말했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그리고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바뀌는 주기를 알고 싶어서 그러네. 나 자신은 그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무의식 상태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 쉬운 예가 필요하거든." 그가 말했다. "그건 의료법에 어긋나는 짓이야. 정말 이상한 소릴 다 듣겠군..." 내가 말했다. "누가 지금 의료법을 따지자는 건가? 그리고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테 니 걱정하지 말게."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걱정 말래두... 그리고 만일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자네가 나를 마취시켜 주었다고 소문을 내고 말겠네." "이건 순전히 공 갈이군!" "공갈이 아니라 협박이야! 할 텐가 안 할 텐가?" 그가 말했다. "좋아, 만일 자네가 사람들 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가 그 말을 진짜로 믿겠지. 그러니 차라리 진짜로 자네를 마취시 켜 주는 편이 낫겠어." 그래서 그는 나를 수술실로 데려가 마취 주사를 놓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하나에서부터 계속 숫자를 세어 나가게." 나는 숫자를 세었다. 내가 쉰하나까지 세었을 때 그가 말했다. "멈추게! 나는 여지껏 일곱, 여덟, 아홉을 넘은 사람을 본적이 없어." 내가 말했다. "마취량 이 적은 게지. 다른 사람보다 적어도 세 배는 써야 할걸." "세상에... 처음에는 쓸모도 없는 마취제를 놓아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보통 사람의 세 배라구! 하지만 좋아... 내가 '멈춰!'라 고 했더니 금방 눈을 뜬 것을 보면 마취량이 적은 것도 같군." 결국 그는 나에게 다섯 배의 마취제를 놓아야 했지만, 그것은 좋은 체험이었다. 줄곧 깨어있기만 한다면 그대는 이 전과정을 지켜볼 수가 있다. 깨어있지 않았다고 해도 이 것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의식이 돌아올 때 그대는 자신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 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체험에서도 그런 식으로 일이 일어난다. 무의식에서 빠져나오고 있을 때, 거기 안개 의 시기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 그러자 가슴의 문이 활짝 열리고 기쁨은 날개를 쳐서 멀리 바다 위로 날았다. 그는 눈을 감고 영혼의 침묵들 속에 기도 드렸다. 배가 도착한 것을 보는 순간, 멀리서 배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 문이 활짝 열렸다." 만일 그대가 침묵 속에 기다릴수만 있다면, 어느 날 그 손님이 와서 그 대의 문을 두드린다. 배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언제나 온다. 그리 고 그대가 꿈꾸고 있지 않다면, 그대가 환각에 빠져 있지 않다면, 맨 먼저 그대의 마음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는 열려 있다." 라는 말은 피상적인 말이었다. 이 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 기쁨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넘치는 기쁨이 마음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한 알의 씨앗, 그것이 기쁨으로 문을 열 때, 그것은 한 송이 꽃이 된다. 그대는 이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거기 수많은 밤이 있었고, 수많은 불안과 악몽이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그대 의 기쁨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은 대양 전체에 뿌려진다. 그 기쁨 자체가 대양과도 같 다. 이것이 바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말한 '대양 속에 사는(oceanic)' 느낌이다. 금세기의 심리학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인간의 내면 존재를 약간, 단지 약간만 엿보았 다. 그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도,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도 아 니고,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도 아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 는 윌리엄 제임스이다. 그는 종교적인 체험을 "대양 속에 사는 것" 이라고 정의내렸다. 그것 은 단지 논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논리와 이론과 정신분석을 통해서는 '대양 속에 산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이 사람이 뭔가 거대하고 드넓은 어떤 것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러한 언어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양 속에 산다'라는 말은 윌리엄 제임스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가 그 말을 만들 어 낸 정본인이다. '대양'과 '대양 속에 산다'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는 눈을 감고... 이것은 단순한 일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대단한 의미가 있다. 그러한 대양과 같은 기쁨을 내면에서 느낄 때 그대는 반드시 눈을 감게 될 것이다. 이제 바깥에는 눈으로 바라볼 가치가 있는 것들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그 사람을 이제 그대는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아름다운 모든 것, 그대를 둘러싼 모든 것, 그대가 항상 바라던 모든 것들 이 빛을 잃는다. 그것들은 이제 쓸모가 없다. 따라서 눈이 감겨질 수밖에 없다. 마하비라(Mahavira), 아디나타(Adinatha), 파라슈냐타(Parashunyatha) - 이들의 조각상을 바라보면서 그대는 의아해했을 것이다. 왜 이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을까? 그들은 바깥을 봐 왔지만, 이제는 자신들 존재의 중심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 이다. 그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질적으로 종류가 다른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실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세상이 환상이라고 말한다. 왜 냐하면 그들은 돌멩이와 물건들과 산과 별들보다 더 실제적인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 일이 그 사람의 진실됨을 보여 준다. 칼릴 지브란은 지금 철학적으로 사변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는 눈을 감는다는 표현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고...' 그리고 매우 중요한 사실은, 영혼의 침묵들 속에 기도드렸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영혼의 침묵 속에서 기도드리지 않는 다. 단지 말로 할 뿐이다. 기독교식의 말, 힌두교식의 말, 모하메드 식의 말, 히브리어와 산 스크리트오와 아랍어... 말로 이루어진 기도는 전혀 기도가 아니다. 진실한 기도는 오직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점을 잊지 말라. 칼릴 지브란은 단순히 "그는 영혼의 '침묵' 속에서 기도 드렸 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영혼의 '침묵들' 속에서 기도 드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 해서 그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문법적으로 따지면, "그는 영혼의 침 묵 속에서 기도 드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존재에 관해서는 그것은 틀 린 말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내면에는 '하나'의 침묵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 기 수많은 층의 침묵들이 있다.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거기 일곱 층의 침묵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육체의 일곱 개의 센터들과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센터들이 침묵하고 있다. 그래 서 그는 '침묵'이라는 단수 표현을 쓰지 않고, '침묵들'이라고 복수 표현을 쓴 것이다. '침묵들'이라는 표현을 맨 처음 사용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 랄 것이다. 수많은 위대한 시인들이 있어 왔지만, 그들은 언제나 '영혼의 침묵'이라는 말을 썼다. 당연히 그들은 대대로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는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 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칼릴 지브란의 '영혼의 침묵들'이라는 말은, 그가 단순히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자신이 그러한 침묵들 속에 빠져 본 사람이다. 그는 한 가지 침묵만을 본 것이 아니다. 거기 여러층 의 침묵들이 있다. 또 각각의 침묵들은 자체의 향기를, 자체의 맛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대는 거것들을 구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올 때 문득 슬픔이 밀려와 그는 마음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단히 뜻깊은 이야기이다. 따라서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불 가능하다. 무한한 기쁨이 바다 전체로 날아가는 것을 체험한 뒤에, 또한 깊은 침묵들 속으로 들어간 뒤에, 왜 갑자기 슬픔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이 간다. 기쁨의 극치에 다다르면, 그대는 반드시 슬픔과 마주 치게 된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올 때 문득 슬픔이 밀려와... 여기 단어 하나마다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단어 하나하나가 상징적이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산을 오르는 체험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히말라야의 햇빛 비치는 산꼭대기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다. 그는 내려와야만 한다. 그리고 자연히 그토록 컸던 기쁨을 뒤돌아보고는... 그리고 이제 창문이 닫히기 시작하며, 꽃은 다시 봉오리를 다물고, 꽃잎들은 춤이 끝난 후처 럼 닫히고 있다. 갑자기 저녁이 밀려오고 사방에 어둠이 가득 차 있다. 생의 꼭대기로부터 골짜기 밑바닥으로 내려올 때, '문득 슬픔이 그에게 밀려와...' 하지만 그의 슬픔은 어떤 것 을 깨달은 모든 이들의 슬픔이다. 비록 진리 전체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단지 단편적인 체험일지라도, 여기 이 말들은 칼릴 지브란의 체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리에 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모들 이의 체험과 관련된 것이다. 내 어찌 편안히 떠날 수 있으랴, 슬픔도 없이? 그는 배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그대는 인간의 약점, 인간이 처한 문제를 보게 된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지만, 배는 아직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배 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진리의 순례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대의 마음속에 수없이 이런 의문이 떠오르지 않던가? '이 순례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 인가? 내 어찌하면 슬픔도 없이 편안히 떠날 수 있을까? 지상으로 내려옴에 따라, 바깥세상 에 가까워짐에 따라, 꽃들과 별들의 세계로 되돌아옴에 따라 한 가지 문제가 그에게 생긴다. '내 어찌 편안히 떠날 수 있을까... 슬픔도 없이?' 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 배 는 분명하게 보이지도 않고,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 어떻게 배가 그대를 데리고 갈 저 쪽 해안, 피안의 세계를 볼 수 있으랴. 그것은 절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저쪽 해 안이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저쪽 해안으로 간 사람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으며, 따라서 그대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내 어찌 편안히 떠날 수 있으랴.' - 여기서 그는 갈라놓는다. '슬픔도 없이?'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아니다, 영 혼의 상처 없이는 나는 이 성을 떠날 수 없다. 우리의 체험의 세계, 육체적인 쾌락의 세계, 사념의 세계... 어떻게 이들을 떠날 것인가? 이쪽에는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고, 분명한 세계가 있다. 나는 그것들을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미지의 불투명한 안 보이는 세계를 향해 이 모든 것들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자신이 그의 입장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 보 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사느냐, 죽느냐?"의 불안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대의 모든 것, 그대의 뿌리는 바로 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내 여기 성벽 안에서 보낸 고통의 날들은 너무 길었고... 그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이 도 시에서 고통과 불안과 번민의 날들은 너무 길었다. 또 외로운 밤들도 너무 길었으니..." 하 지만 모든 명상 수행자들은 이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이 육체 속에서 아마도 수많은 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불행에 익숙해 져 있다. 불행 없이, 고통 없이, 불안 없이, 그대는 그대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 그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인데, 이것들을 없애고 나면 그대에게 무엇이 남 을 것인가? 그래서 비록 그대가 그것들을 바라고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 속에서 여러 세기를 살아왔고, 그것들은 그대의 제2의 본성이 되어 버렸다. 칼린 지브란은 이 시대의 그 어떤 심리학자보다 더 깊은 심리학적인 통찰력을 주고 있다. 이 고통과 외로움을 한 점 후회 없이 작별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이상한 말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는 그대들 모두의 체험이다. 똑같은 고통, 똑같은 불행... 그대는 그것들이 너무 힘겹다는 것을 알며,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것들과 함께 지냈다. 불행과 친구 가 되고, 불행과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그대의 모든 고통들을 떨 쳐 버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떨쳐 버리기로 결심한 그날, 나는 그것을 떨쳐 버렸다. 나는 아무에게도 "어떻게 그것을 떨쳐 버립니까?"라고 물으러 가지 않았다. 어떻게 고통을 떨쳐 버리느냐고 묻는 사람은 그 것을 떨쳐 버리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다. 그 "어떻게"가 더 많은 불행을 몰고 올 것이다. 전세계 어딜 가나 불행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수요가 있으면, 언제나 공급이 뒤따르기 마 련이다. 그대는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가 이렇게 묻는다. "나는 불행을 떨쳐 버리기를 원합니 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떨쳐 버리지요?" 그들은 말한다. "물구나무를 서라!" 그대의 육체를 학대하라. 이것이 바로 요가(yoga)이다. 그러나 그것을 떨쳐 버리는 데에 수십 생이 걸릴 것이다. 계속해서 물구나무를 서고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불행 판매자들, 장사치들을 따르지 않는 것이 참 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간 온 세상이 서커스 단체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만일 온 세상이 요가에 감명을 받게 된다면, 도처에서 그대는 볼 만한 구경거리들을 만나게 될것 이다. 불행을 어떻게 떨쳐 버리는가를 묻는 순간 그대는 자신이 그것을 떨쳐 버리기를 원하 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불 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불행해지지 말라! 그러면 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나를 불행하 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일단 결정을 내린 것은 내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거리거리에 뿌린 내 무수한 영혼의 조각들, 벌거벗은 채 이 언덕들 사이로 헤매는 내 숱한 갈망의 아이들, 내 어찌 무거운 생각 없이, 아픔 없이 이들을 떠날 수 있으랴? 오늘 내가 벗어 버리는 이것은 한낱 옷이 아니라, 내 손으로 벗기는 살이요, 또한 내 뒤에 남기고 가는 이것은 한낱 생각이 아니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더욱 부드러워진 심장인 것을. 알겠 는가? 한없는 한 방울이 한없는 큰 바다로 그러나 나는 더 머뭇거릴 수 없다. 온갖 것을 다 자기에게로 불러 가는 저 바다가 나를 부른다. 이제 나는 배에 올라야 한다. 시간이 아무리 밤새껏 타오른다 해도, 머문다는 것은 얼어서 굳어 버리는 것이고, 틀에 묶 이는 것이니까. 내 마음이야 여기있는 모든 것들을 데려가고 싶지만 내 어찌 그럴 수 있으 랴? 목소리란 자기를 날려 보내는 혀와 입술까지 데려갈 수는 없는 것, 홀로 창공을 날아가 야 한다. 독수리도 둥지는 버리고 홀로 해를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언덕 아래 이르렀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자기 배가 항구로 다가오고 있는 것과, 뱃머리에 자기의 고향 사람인 뱃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영혼은 그들을 보고 외쳤다. 우리 옛 어머니의 아들들아, 그대들 물결을 타고 온 자들아, 그대들은 얼마나 자주 내 꿈 속을 항해했었는가!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내가 깨어있을 때 나를 찾아왔으니, 깨어있는 어 깃은 나의 더 깊은 꿈. 떠날 준비가 끝났다. 내 마음은 잔뜩 돛을 달고 바람만 기다리고 있다. 이제 한 숨만 더 이 고요한 대기 속에서 숨쉬면, 이제 한번만 더 애정어린 눈길로 뒤돌아보고 나면, 그러면 그 다음엔 나는 그대들 속에, 뱃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서게 되리라. 그리고, 그대 망망한 바다, 잠든 어머니여, 모든 강물과 시냇물이 한 번만 더 굽이돌면, 한 번만 더 이 숲 사이에서 속삭이면, 그러면 그 다음엔 나는 그대에게로 가리라, 한없는 한방 울이 한없는 큰 바다로. 알무스타파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더 머뭇거릴 수 없다. 온갖 것을 다 자기에게로 불러 가는 저 바다가 나를 부른다. 이제 나는 배에 올라야 한다.' 자신의 참모습에 눈뜬 이들, 영적인 완성을 이룩한 이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일이다. 그들자신에 관한 일은 이제 완성되 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가능 한 한 오래 머뭇거린다. 그것은 에너지가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곧 그대가 그대 자신을 아는 순간 그대의 정열이 - 그대를 계속해서 끌고 다니던 바로 그 에너지가 새로운 힘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서 자비 라는 말이 나온다. 정열(passion)이 자비(compassion)로 바뀌고, 욕망이 사랑으로 변하다. 정 열은 수천 가지 문제를 일으키지만, 자비는 한 가지 문제밖에 갖고 있지 않다. 고타마 붓다가 생각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아름답고 또한 뜻이 깊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때는 보름달 이 떠오른 밤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였다. 지금까지 그는 수많은 문제 들에 직면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문제들이 사라진 지금, 별들을 향해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마지막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러한 의문에 직면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 다. 그것은 바로 자비에 관한 것이었다. 해탈하게 되자 그 자신의 모든 걱정과 불안들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마치 악 몽을 꾸었던 것처럼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는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모든 꿈들 이 사라졌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것이 - 너무나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 갑자기 그의 온 존재를 사로잡았다. 자비가 바로 그것이다. 정열 속에 담겨 있던 모든 에너지가 순수해지고 맑아진 것이다. 그 것은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아직도 어둠과 무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단순히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을 수가 있을까? 친구와 적들, 사랑하는 이들과 그를 미워한 자들, 평생 그를 먹여 살린 이들과 그를 파괴하려 했던 자들... 하지만 자비가 일어나면 친구와 적의 차이는 사라진다. 이제 모두가 한 배를 탄 사람들이고, 모두가 동료 여행자들이다. 뒤를 돌아볼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 우주적인 환희 속에 녹아 없어질 것인가? 그 는 이제 더 이상 그를 가로막는 것이 하나도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는 한 마리 독수리처 럼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 - 사트암(satyam), 쉬밤(shivam), 순데람(sunderam)의 드넓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가 있다. 하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그들은 그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지금까지 수차례 그를 없애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자비가 일어나는 순간, 지금까지 온갖 노력으로 그를 없애려고 했던 자들, 그의 메시지를 파괴하려 했던 자 들, 그를 철저히 파괴하여 그의 이름까지 잊혀지게 하려고 했던 자들에게까지도 똑같이 자 비가 느껴진다. 그들 역시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문제, 똑같은 질투심을 가진 인간 존재들이 며, 똑같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천국의 문 앞에 섰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 하여 평생을 다 바쳐왔다. 이제 그 문이 열렸다. 그 때 축복의 음악이 울려퍼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문은 아주 가끔 열리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만 천국의 축복을 받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나타난다. 문지기가 말했다. "이제 드디어 도달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 오." 그러나 그들은 깜짝 놀랐다. 붓다의 얼굴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순 간 천국과 축복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르면서 깊은 슬픔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천만의 영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 낙원에 대해서는 잊을 것인가? 그곳의 즐거움, 그곳의 영원한 생명, 축복이 흘러넘치는 매 순간들을 모두 잊을 것인가? 그는 온갖 어려움 끝에 그것을 성취하였다. 이제 드디어 그것을 발견하였고, 낙원이 그를 맞아들이기 위해 축 복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추 한 일이 될 것이다. 고타마 붓다와 같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는 문지기에게 말했다. "제발 그 문을 다시 닫아 주시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낙원으로 들어갈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그 문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들어가고 나면 또다시 그 문이 열릴 필 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좋습니다 내 눈 에는 수많은 슬픈 얼굴들, 눈물로 가득 찬 가슴들, 웃음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 들이 보입니다. 그들의 인생이 바로 지옥의 불길입니다. 안 됩니다. 제발 그 문을 닫아 주시 오. 나는 두렵습니다. 그 문이 계속해서 열려 있으면 내 약한 마음이 어느 순간 안으로 들어 가려는 유혹에 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붓다는 아직도 낙원의 문밖에 서 있다. 우리 모두가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들과, 과거의 수천만의 존재들, 앞으로 올 수천만의 존재들이 아직도 찾고 있기 때문이 다. 이것은 단지 아름다운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진리가 담겨 있다 . 알무스타파도 같은 상황이다. 그의 배가 도착했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그 래도 그는 아직 이 세상에 좀더 머물고 싶다. 그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 비록 이곳엔 어두운 밤들이 있긴 하지만, 또한 아름답게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도 있는 것이다. 그곳엔 가시가 있 지만 아름다운 장미꽃도 있다. 그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다. 그가 한마디만 해도 그들은 그를 따를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온 몸과 마음으로 그에 게 이렇게 말했다. 붓담 샤라남 가차미(Buddham Sharanam gachchhami) - 나는 깨달은 이의 발 아래로 갑 니다. 상감 샤라남 가차미(Sangham sharanam gachchhami) - 나는 깨달은 이의 발 아래 뿐만 아니라 그이의 주변에 생겨난 진리의 공동체, 모든 구도자들의 공동체에게로 갑니다. 담맘 샤라남 가차미(Dhammam sharanam gachchhami) - 나는 붓다와 그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기, 역시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붓다는 문 앞에서 머물렀다. 아마도 모든 신비가들의 생애 속에는 이와 똑같은 상황이 일 어날 것이다. 하지만 존재 자체는 보편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어서 결코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매우 뜻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존재 자체는 붓다든 붓다가 아니든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 다. 도달했으면 도달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체험으로 그것을 안다. 거기, 낙원으로 들어 가는 문도 없고 문지기도 없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알무스타파는 좀더 머 물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는 가야만 한다. 가슴에 깊은 슬픔을 안고서 그는 가야만 한다. 그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와 침묵과 평정을 얻었다. 그는 수천 송이의 꽃으로 만발하였다. 그의 봄이 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나머지 사람들은 씨앗의 상태에 있다. 수천만의 사람들 은 자신들이 씨앗이며, 성장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모든 깨달은 영혼들은 좀더 머물고 싶어할 것이다. 말로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적어도 말로 할 수 없다면 보여 주기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 면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라도. 그는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적어도 그에게 가능했던 것을, 그의 향기와 그의 존재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좀더 머물고 싶어할 것이다. 불과 몇몇 사람들이라도 그의 눈동자 와 그의 존재, 그의 은총으로부터 뭔가를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좀더 머물려고 할 것이 다. 이제 그는 서로 연결할 수 없는 이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법칙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조금 더 머물고 싶어한다 해도 그는 가야만 할 것이다. 온갖 것을 다 자기에게로 불러 가는 저 바다가 나를 부른다. 이제 나는 배에 올라야 한다. 우주가 그대를 부를 때 그 부름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는 우주의 일부분 이다. 그대의 맥박은 우주의 맥박과 다르지 않다. 그대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단지 그대의 무지 속에서만 그대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대가 깨달았을 때, 그대의 내면이 빛으로 가 득 찰 때, 한 가지 충격과 놀라움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주가 나를 부르 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가야만 한다. 나는 배에 올라야 한 다." 이것은 종류가 아주 다른 슬픔이다. 그대는 이기적인 슬픔을 알고 있다. 어떤 대상을 잃었을 때, 연인과 친구와 부모를 잃었을 때, 그대는 슬픔을 느낀다. 그대가 느끼는 슬픔은 언제나 잃어 버리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잃은 슬픔이다. 그대의 슬픔은 뭔가를 잃은 것에 대한 이기적인 슬픔이다. 그의 슬픔은 다른 이들을 위한 슬픔이다. 그는 뭔가를 할 수 있지만, 이미 배가 왔으며,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고, 존재 자체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배에 올라야만 한다. 그의 가슴에는 기쁨이 충만해 있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 그가 오랫동안 함 께 고통받으면서 살았던 모든 이들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과 거의 한 몸이 되었었다. 시간이 아무리 밤새껏 타오른다 해도, 머문다는 것은 얼어서 굳어 버리는 것이고, 틀에 묶 이는 것이니까. 그의 문제는 두 가지다. 그는 더 이상 머물 수가 없다. 그것은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설령 존재 자체가 예외를 허락한다 해도 더 머물 수가 없다. 이 세계에 머무는 것이나 저 세계에 머무는 것이나, 한 곳에 머무는 것은 그를 망각 속에 묻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아무리 밤새껏 타오른다 해도, 머문다는 것은 얼어서 굳어 버리 는 것이고, 틀에 묶이는 것이니까.' 거기 오직 두 가지 길밖에 없다. 되돌아가서 남을 위해 자신이 결코 살고 싶지 않던 삶을 살든지, 아니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머물러 있다간, 그대는 틀 속에 굳어질 것이고, 돌부처로 변하고 말 것이다. 삶은 순간이며, 하나의 흐름이다. 그것은 강물이며,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움직이 기를 멈추는 순간, 그것은 더러워지고, 진흙밭이 되고, 그래서 죽어 버린다. 언제나 흐르고 있으면, 그것은 젊고, 신선하고, 늘 신이 나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언 제나 모험에 가득 차 있다. 존재는 언제나 흐르는 것만을 안다. 언제나 움직이며 멈출 줄을 모른다. 멈춘다는 것은 죽 음의 다른 말이다. 어떤 방향, 어떤 차원으로든 정지하는 순간 그대는 죽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이 완전하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것이다. 만일 신이 완전하다면, 신은 죽었 다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이 옳다. 일단 어떤 것이 완전해지면 거기 더 이상 행할 것이 없다. 더 이상 나아갈 곳도, 더 이상 성장할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신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니체는 신이 죽었다 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니체 역시 단순한 철학자였다. 대단히 명석했지만, 명상이 없었다.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의 신이 죽었는가 살았는가는 오로지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계속 흐르라, 그러면 그대의 신은 살아있는 것이다. 멈추라, 그러면 그대의 신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날개를 가진 새와 똑같다. 날개가 계속 해서 움직일 때 그 새는 살아있는 것이다. 날개가 움직이기를 멈출 때, 새는 지상으로 떨어 져 죽을 것이다. 운동이란 생명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움직이지 않는 불변의것은 죽음과 동 의어다. 오직 죽은 것만이 움직이지 않는다. 생명은 운동말고는 다른 법칙을 알지 못한다. 여기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아름다운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떤 위대한 왕이 꿈에 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꿈속인데도 그는 대단한 공포를 느 꼈다. 겨우 용기를 내어 그 검은 그림자에게 물었다. "넌 누구며, 왜 내 꿈에 나타났는냐?" 그림자가 말했다. "목적이 있어서 왔소.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해가 지면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러 온 것뿐이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대책을 세우시오." 그림자는 계속 말했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오. 아무도 죽기 전에 이런정 보를 받은 적이 없소. 죽음은 아무런 예고 없이 닥쳐올 뿐이오.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훌륭 하고 멋진 왕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소. 당신은 어떤 나라도 침략하지 않았고,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소. 아무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소. 이 점을 생각하고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의 규칙을 어기기로 한 것이오. 이제 당신에게 미리 죽음을 예고하니, 남은 하루 동안 당신 자신을 지키시오. 어서 뭔가를 하시오!" 그러한 꿈을 꾸고 나면 누구 라도 더 잠을 잘 수가 없다. 왕은 당장에 근위대원들을 깨웠다. 그에게는 늙은 신하가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신하가 돌보고, 나라를 지켜 주고, 그가 적당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를 왕위에 앉혔던 것이 다. 당연히 그는 그 노인을 불렀다. "나는 이러이러한 꿈을 꾸었소. 그래서 경비를 강화시켰소. 또 무슨 수단을 써야 하오? 시 간이 너무 촉박하오. 어째서 이렇게 빨리 시간이 흐른단 말이오?" 노인이 말했다. "경비를 강화시킨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폐하의 꿈속에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지금 당장 나라 안의 모든 현명한 자들, 점성술사 와 철학자들, 학자들, 위대한 승려들을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들의 조언을 구하십시 오. 신은 단지 늙은 신하일 뿐입니다." 당장에 수도 안의 모든 현명한 이들이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전과 책들을 들고 와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밤이 가고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그리고 해가 떠올랐으니, 자연 히 해가 질 시간도 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든 현명한 자들, 철학자와 점성술사와 기타 사 람들은 서로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논쟁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늙은 신하가 왕에게 말 했다. "이 사람들을 떠나십시오. 그들은 몇세기 동안 논쟁밖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두 명의 철학자만 모여도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저렇게 두꺼운 경전들과 책들 을 들고 왔으니, 그들 모두는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이론과 가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들이 토론하게 그냥 내버려 두시고, 어서 가장 좋은 말을 타고 가능 한 한 빨리 이 궁전을 떠나시라는 겁니다.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달리십시오. 그러면 폐 하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 생각이 그럴듯해 보였다. 티벳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왜 개들은 밤낮으로 서로를 보고 계속해서 짖는가? 이 속담 에 따르면, 그 개들은 전생에서 철학자였기 때문에 아직도 서로에게 짖어대던 버릇을 못 버 리고 계속해서 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짖어대는 일만을 알 뿐이다. 그리고 이상 하게도 그들은 달을 보고도 짖는다. 개가 달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짖는 것일까? 그들은 우 주 비행사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달의 아름다움을 토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 게는 그것이 짖는 소리로 들리지만, 그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것이다. 그래서 그 늙은 신하는 말했다. "폐하께서도 그 옛날 속담을 알고 있겠지요? 이 점성술사 들과 철학자들은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이런 식으로 계속 짖어댈 것 입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폐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죽음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에만 관심이 있 을 뿐입니다." 왕은 궁전을 빠져 나왔다. 그것이 올바른 방법 같았다. 죽음이 궁전에 나타났었으니 가능 한 한 멀리 궁전에서 달아나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그는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말을 한 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그를 싣고 국경 밖으로 달렸다. 그는 매우 기뻤다. 해가 뉘엿뉘엿 질무렵, 그는 어떤 아름다운 망고나무 숲에 도착했다. 조용하고 시원해서 쉬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하루종일 달렸기 때문에 그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목이 마른 것도 참았다. 하루쯤 안먹고 안 마신다고 해서 죽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에 반쯤 걸리었다. 나머지도 조금 있으면 완전히 넘어가 버리리라. 곧 밤이 올 것이고, 게다가 그는 매우 아름다운 장소를 발견한 것 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밤을 지내기엔 이곳이 적당한 장소군." 그는 말에서 내려 말잔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다. 말이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으리라 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장하다!" 그가 말을 칭찬하고 있을 때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 그때 그는 한 손이 자기 어깨에 얹히 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꿈속에서 본 그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림자가 말했다. "나 역시 당신의 말에 감사해야 하겠군. 당신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훌 륭한 말을 가졌소. 왜냐하면 나는 걱정을 했었거든. 이곳이 바로 당신이 죽기로 되어 있던 장소였으니까. 나는 당신이 제 시간에 오지 못할까봐서 걱정을 했었소. 하지만 당신은 마침 제시간에 와주었고, 당신이 멈추는 순간 내가 나타났소. 이제 내 일은 끝났소." 멈추는 순간, 그것이 바로 죽음의 지점이다. 시간이 아무리 밤새껏 타오른다 해도, 머문다는 것은 얼어서 굳어 버리는 것이고, 틀에 묶 이는 것이니까. 그대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일단 배를 보고 나면, 일단 바다가 그대를 부르는 소리 를 듣고 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이야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을 데려가고 싶지만 내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이것은 실로 위대한 통찰력이다. 삶에는 고통과 불행고 분노와 불안이 있지만, 즐거운 순간, 사랑 의 순간들도 있다. 그것들을 나누기란 어려운 일이며,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삶은 완전히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거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몇 개의 별들도 있다. 사실 삶이 어두울수록 더 많은 별들이 빛난다. '내 마음이야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을 데려가고 싶지만...' 아무 것도 데려갈 수가 없다. 그리고 데려갈 것이 너무나 많다! '내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이 생의 경계선을 지나 우주 적인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대는 모든 것을 뒤에 놓고 가야 한다. 그대 자신을 제외 하고는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현자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을 발견한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대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유일한 것이고, 또 저 세상으로 가져갈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세상에 속한 것이다. 아무 것도 그대에게 속한 것이 없다. 목소리란 자기를 날려 보내는 혀와 입술까지 데려갈 수는 없는 것, 홀로 창공을 날아가야 한다. 비록 혀와 입술이 목소리를, 노래를, 시를 탄생시키기는 하지만, 그 노래는 그 입술과 혀를 데리고 갈 수 없다. 그 노래는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한다. '홀로 창공을 날아가 야 한다.' 단지 홀로 이 무한한 영원 공간을 날아가야 한다. 독수리도 둥지는 버리고 홀로 해를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그대의 둥지를 갖고 떠날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편안했었다. 비가 올 때, 겨울이나 여름에, 그것은 그대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데리고 떠날 수는 없 다. 그대를 사랑한 사람들을 데리고 떠날 수 없다. 없으면 못 살 것만 같았던 사람들도 데리 고 갈 수 없다. 그들은 그대가 사랑한 둥지였을 뿐이다. 홀로, 완전히 혼자서만 독수리는 ' 해를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독수리가 둥지를 갖고 날아오를 방법이 없다. 이러한 모든 생각들이 갑자기 아주 분명해졌다.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전에는, 그 는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 정신병원에서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를, 어떻게 하 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 미친 군중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순간들이 찾아왔으며, 문득 그대는 그대가 완전히 홀로 떠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전에는 그대가 혼자인 적이 없었다. 그대는 가족과 사회와 전통과 종교와 국 가 속에서 태어났다. 그대는 수천만의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대는 귀하고 천한 것 구별 없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나야만 한다. 포기라는 생각이 바로 이러한 체험에서 일어난다. 마하비라(Mahavira)는 왕국을 포기하였 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예정이었다. 그의 동생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형 님은 이제 곧 왕이 될 몸입니다. 왜 떠나려 하십니까?" 마하비라는 대답했다. "그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누구든지 어느 날인가는 홀로가야만 한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 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떠나려는 것이다. 네가 여기서 왕이 되리라. 네가 바로 왕이다." 그는 아주 철저히 버렸기 때문에 심지어 옷도 다 버렸다. 그래서 그는 알몸으로 떠났다. 기억해 둘 가치가 있는 이름은 셋뿐이다. 하나는 인도의 마하비라, 다른 하나는 희랍의 디 오게네스(Diogenens)이다. 세번째는 카슈미르의 라일라(Laila)이다. 그들은 한 가지 단순한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다. 어떤 이유인가? 어차피 빼앗겨 버릴 것이라면 미리 던져 버 리는 것이 더 나은 일이다. 내 것이 아니고 어차피 두고 떠나야 할 것이 분명한데, 왜 쓸데 없이 그것들을 짊어지고 다니는가? 또한 그것들을 짊어지고 다님으로써 생기는 여러 문제들 과 고통들을 겪을 필요가 무엇인가? 이 세 사람 중에서 라일라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는 벌거벗는 일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여자로서는, 특히 아름다운 여자로서는... 카슈미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라일라를 탄생시켰다. 카슈미르는 라일라를 대단히 사랑하였 다. 이는 이슬람교도들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카슈미르는 인구의 90퍼센트가 이슬람 교도들이다. 그런데 라일라는 힌두교인이었다. 하지만 카슈미르의 이슬람교도들은 이런 금언 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직 두 단어만을 숭배한다. 바로 알라신과 라일라이다. 이 두 단어만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라일라를 신과 똑같은 위치에 끌어올린 것이다. 심지 어 이슬람교(모하메드교)의 창시자인 하즈라트 모하메드(Hazrat Mohammed)에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라일라는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용기, 우아함, 아름다움, 마 치 한 마리 독수리처럼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겠다는 그 녀의 단호한 결심이 그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이것은 기억해 둘 가치 가 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순간,그대는 우주 전체를 갖게 된다. 그대 하늘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언덕 아래 이르렀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자기 배가 항구로 다가오고 있는 것과, 뱃머리에 자기의 고향 사람인 뱃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는 갈수록 더욱더 힘들어진다. 처음에는 배가 안개에 둘러싸여 멀리 있었다. 그때 만 해도 차라리 미지의 세계에 신경쓰지 말고 이미 알고 있는 현실 세계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언덕을 내려오다가 그는 다시 되돌아보았다. 그랬더니 그 배가 이미 항구 가 까이 와 있었으며, 배 위에 있는 '그의 고향 사람인' 많은 뱃사람들이 보였다. 여기, 모든 구절이 다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칼릴 지브란은 알무스타파의 입을 통하여 이러한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 일단 미지의 세계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 기존의 현실 세 계를 선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기 고향 사람들을 보는 순간, 이제 그 미지의 세계가 현실 세계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것은 그다지 위험한 세계가 아니다. 그는 그 사람 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을 알아본 것이다. 이제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언덕 아래까 지 내려왔을 때 그는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마음으로 알았다. 이제 어떤 것도 그를 방해할 수 없다. 그를 방해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는 그 배가 미지의 세계라는 것, 그 배가 낯설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고향 사람들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가 이제 자신의 생명의 진정한 근원을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그는 이방인이었고, 아웃사이더였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속여 왔다. "나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힌두교인이다. 나는 이슬람교도이다. 나는 기독교인 이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소속될 수 없는 이 낯선 땅에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 낸 속임수, 가짜 신분증일 뿐이다. 본래는 아무도 힌두교인이 아니며, 아무도 이슬람교도가 아니다. 아무도 기독교인이 아니 다. 본래는 영국사람, 한국사람, 일본사람이라는 것이 없다. 이것들은 가짜 신분증이고, 의지 하기 위한 목발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들을 진짜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외로워질 것이다. 본래는 아무도 남편이 아니고, 아내가 아니다. 단지 불 옆에 앉아 주례를 보는 성직자가 산스크리트어로 만트라를 외면 - 만트라를 외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만트라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 - 불과 몇 분 전에는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부부가 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인도에서는 기본이 의식 절차이다. 성직자가 그 의식을 이끌어간다. 신랑과 신부가 성스러운 불 주위를 일곱 바퀴 돌 고 나면 그들은 마치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부부가 되는 것이다. 내가 대학교수였을 때, 다른 교수 하나가 아내 때문에 무척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실제로 그를 때리기까지 했다. 마침내 그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를 잘 몰랐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저 사람은 이상한 생각을 많이 갖고 있으니 어쩌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 모른다."고 말해 준 것이다. 그는 말했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더니 그는 나에게 웃옷을 벗고 등을 보여 주었다. 바로 그날 아침 그의 아내가 그를 몽둥이로 때렸던 것이다. 등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바보 요! 어떻게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았소?" "어떻게라니요? 불 주위를 일곱 바퀴 돌고 나서 부부가 되었지요."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불 주위를 거꾸로 일곱 바퀴 도시오! 아주 간단하군. 불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당신들이 시계 방향으로 일곱 바퀴를 돌았다면, 이번 에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 될 것이고, 그런 다음 아내에게 작별을 고하면 될 것 아니오? 걱정할 것 없잖소?" 내가 말했다. "나를 당신에게 보낸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이상한 생각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했는데, 역시 그 말이 맞군요. 정말 그런 간단한 해결책이 있 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곱 바퀴를 돈 것이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만들 수 있다면, 거꾸로 일곱 바퀴를 돌면 그 관계가 끝나겠군요. 정말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와 함께 가 주셔야만 합니다." 내가 말했다. "왜 나까지 문제에 끌어들이려고 하오?" "하 지만 성직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가지요." 그런데 그가 물었다. "당신은 산스크 리트어를 할 줄 압니까?" "걱정 마시오. 결혼할 때 당신의 성직자나 당신이나 당신의 부인 이나 모두 그 뜻을 모르지 않았소. 그리고 지금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하니, 내가 히브리 어로 의식을 진행하리다." 그는 히브리어라는 단어를 듣고는 다시 물었다. "당신의 유태인이 오?" "그렇지 않소, 단지 나는 산스크리트어가 당신들을 남편과 아내로 만들었다면, 헤어지 게 할 때는 히브리어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것뿐이오. 어쨌든 뭐든지 거꾸로 해야 하오." 그 러자 그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내게 잠시 시간을 주시오..." 내가 말했다. "당신은 부인한테 서 또다시 매를 맞을 것이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한 아내의 생각이 어떤지를 물어 보기 위 해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랬다간 또다시 그녀한테 매를 맞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함께 가지 않겠소. 그녀가 당신을 때릴 수 있다면 충분히 나까지... 게다가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고 하니 같이 얻어맞기 십상이오. 나는 불필요하게 여자에게 얻어맞고 싶지 않 소." 우리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가장하기 위해 우리는 친구들과 수많은 관계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하든 모두 가짜다.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안다.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아무리 삼사십 년을 아내와 함께 산다고 해도, 그대가 그녀를 알지 못하고 그녀도 그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불과 5분 동안이라도 멋진 대화 를 나눌 수가 없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아내를 피하기 위해서 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아내들은 신문과 책을 집어 던지고, 텔레비전과라디 오를 꺼 버린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은 집에 오자마자 신문만 들여다보기에요? 나를 외면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어떤 집이든지 가 보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아내는 한쪽에 있고, 남편은 신문만 들여다본다. 그는 사실 신문 만 들여다본다. 그는 사실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쩌면 이미 여러 번 읽은 신문인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접착제란 없다. 그것이 독일제 접 착제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의 영혼은 그들을 보고 외쳤다. 우리 옛 어머니의 아들들아, 그대들 물결을 타고 온 자 들아, 그대들은 얼마나 자주 내 꿈속을 항해했었는가!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내가 깨어있을 때 나를 찾아왔으니, 깨어있는 이것은 나의 더 깊은 꿈.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더 좋 아 보이고, 더 좋은 세계에서 살 수 있다. 그대들은 얼마나 자주 내 꿈속을 항해했었는가!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내가 깨어있을 때 나를 찾아왔으니, 깨어있는 이것은 나의 더 깊은 꿈. 명상을 할 때 그대는 의식이 여러 층을 지나게 될 것이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 서 집단 무의식으로, 집단 무의식에서 우주 무의식으로 여행하게 된다. 이것은 그대의 어두 운 측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대는 이상한 꿈들, 이상한 현상들을 만난다. 서양의 심리학은 순전히 존재의 무의식적인 측면, 존재의 어두운 면에만 열중하고 있다. 심리학은 계속해서 그대 존재의 어두운 부분만을 파헤치고 있으며, 그래서 꿈밖에 찾 아내는 것이 없다. 그것이 바로 심리분석, 꿈의 분석이다. 동양에서는 무의식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똑같은 노력이면 존재의 다 른 측면, 더 밝은 측면, 구름 없는 하늘에서 태양이 밝게 비치는 생명의 대낮으로 여행해 들 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에서 초월의식으로, 초월의식에서 집단 초월의식으로, 집단 초 월의식에서 우주 초월의식으로... 이 우주 초월의식 상태가 바로 의식이 활짝 깬 순간이다.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을 나의 밤중에 보았었다. 이제 나 는 그대들을 활짝 깬 의식 상태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가장 깊은 꿈이다. 나 자신을 깨닫고, 본래의 나 자신이 되고, 잠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깊은 꿈이나 비록 내가 활짝 깬 상태에서 그대들을 보고 있지만, 그것 역시 내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려 는 나의 가장 깊은 꿈, 가장 깊은 갈망이다. 이제 이쪽 해안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갈수록 더 어려워졌다. 떠날 준비가 끝났다. 내 마음은 잔뜩 돛을 달고 바람만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제 바람이 나를 본래의 집으로 데려다 주기를 기다리고 잇다. '떠날 준비가 다 되었다. 내 마음은 잔뜩 돛을 달고 바람만 기다리고 있다.' 이제 바람만 불어주길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돛을 단 나 의 배는 바람을 잔뜩 안고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갈 것이며, 나는 내 근원으로, 내 가장 깊은 꿈의 나라로, 가장 깊은 각성의 상태로 돌아갈수 있다. 이제 한 숨만 더 이 고요한 대기 속에서 숨쉬면, 이제 한 번만 더 애정어린 눈길로 뒤돌 아보고 나면, 그러면 그 다음엔 나는 그대들 속에, 뱃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서게 되리 라. 바람이 아직 고요하고 잔잔하기 때문에 배는 움직일 수 없다. 이 잠시동안의 시간을 나 는 사용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이 낯선 세계에 대한 마지막 기억을 숨쉴 수 있다. '이제 한 번만 더 애정어린 눈길로 뒤돌아보고 나면...' 다정한 눈길로 나는 내가 살았고, 사랑했고, 고통받았고, 즐겼던 이 세상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다. 이제 나는 이 세상이 큰 여인숙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름다운 옛 추억들이 있기에... 한 숨만 더 쉬면 나는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엔 나는 그대들 속에 뱃사람 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서게 되리라.' 그리고 그대 망망한 바다, 잠든 어머니여, 모든 강 물과 시냇물에게 유일한 평화이며 자유인 그대여, 이제 이 시냇물이 한 번만 더 굽이돌면... 칼릴 지브란은 확실히 마술적인 손을 가지고 있다. 어떤 단어든지 그의 손이 닿기만 하 면... 그대가 사용하는 평범한 단어들도 일단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황금으로 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강물은 바다에 합류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면서 뒤돌아가 고 싶어한다. 산골짜기에서 시작된 그 긴 여행,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던 그 모든 경험 들... 이제 이 시냇말이 한 번만 더 굽이돌면, 한 번만 더 이 숲사이에서 속삭이면, 그러면 그 다음엔 나는 그대에게로 가리라... 나에게 바로 그만큼의 시간만 달라. 그리하면 가리라... 한없는 한 방울이 한없는 큰 바다로. 나는 준비가 다 끝났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다. 내가 친구라고 생각 했던 사람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들이라고 생각했던 이 낯선 사람들, 이 낯선 세계를 두 번 다시 방문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 번만 뒤돌아보면 끝이다. 그리고 아직 바람이 잔 잔하기 때문에 시간이 있는 것이다. 바람이 배의 돛을 부풀리기 시작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그는 모든 진리의 탐구자들이 어느 날인가는 도달하게 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대 역시 이와 똑같은 지점에 이르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이제 한 번만 뒤돌아보고 나면 강물이 바 다로 흘러들어가 바다가 되는 바로 그런 지점에... 한없는 한 방울이 한없는 큰 바다로. 알겠는가? 침묵을 찾는 자 그리고는 그가 걸어 내려갈 때 저 멀리 남자와 여자들이 들녘과 포도밭을 떠나 서둘러 성 문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또 그들의 목소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며, 밭에서 밭 으로 서로 외치면서 그들은 그의 배가 오고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혼자서 생각했다. 헤어지는 날이 곧 모이는 날이어야 하는 것인가? 또 내 마지 막 저녁이 정말로는 내 새벽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밭을 갈다 말고 쟁기를 밭고랑에 내던 지고 오는 사람, 포도주 짜는 틀을 밟다 말고 바퀴를 내려놓고 오는 사람에게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내 가슴이 열매 달려 휘늘어진 나무 되어 그 열매를 따 그들에게 줄 것인 가? 또 내 소원이 샘물처럼 넘쳐 흘러 그들의 잔을 채울 것인가? 내가 거문고 되어 전능 하신 이의 손길이 나를 퉁기고, 혹은 피리 되어 그분의 숨결이 나를 통하여 흐르게 할 것인 가? 나는 침묵을 찾는 자, 그 침묵 속에서 내 무슨 보배를 찾은 것 있어 저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베풀 수 있을까? 오늘이 만일 나의 거두는 날이라면, 나는 씨를 어떤 밭에 뿌렸으 며, 또 어느 기억 못하는시절에 뿌렸던 것일까? 지금이 정말로 내가 등불을 켜들 시간이라 해도,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내 불꽃일 수 없다. 나는 다만 텅 빈 깜깜한 등잔을 들어올릴 뿐, 그러면 저 밤의 파수꾼이 거기 기름을 채우 고 불을 켜리라. 이렇게 말했으나, 그의 가슴속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았다. 그 스스로도 깊고 깊은 자신의 비밀은 말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마침내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낯선 땅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며 오랜 생 동안 방황한 끝에 한 사람이 마침내 본래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순간, 단지 그 사람 혼자만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진실은 당장에 수천 수만 의 가슴에서 멀리까지 느껴진다. 그대는 진실의 불꽃을 감추지 못한다. 눈을 가진 이들은 반드시 보게 되어 있다. 그대가 꽃피어날 때 그대는 그 향기가 아직 죽지 않은, 아직 살아있는, 아직 예민한, 아직 받아들일 문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알무스타파가 자신의 배가 항구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 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이 배가 전혀 모르는 생소한 배가 아니라 자신이 잊고 있던 고향 의 배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 배를 알아보았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을 알아보았으 며, 그 순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그는 결심하게 된 다. "이제 나는 가야만 한다. 이 어둡고 쓸쓸한 세계를 떠나 영원한 본질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는 그가 걸어 내려갈 때 저 멀리 남자와 여자들이 들녘과 포도밭 을 떠나 서둘러 성문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놀랐다. 아직 아무 것도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아직 돌멩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 아직 느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뭔가가 전달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배 가 도착했으며 자신이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 다. 지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대들과 함께 살아왔다. 숱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내게 남아 있지만, 나는 그대들을 뒤에 두 고 떠나야 한다. 나는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12년 동안이나 기다렸던 나의 고향 사 람들, 내 탄생지, 내 근원지의 사람들이 드디어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사방에서 많은 남녀들이 일손을 놓고 '들녘과 포도밭을 떠나 서둘러 성문 쪽으로 오고'있었다. 뜻을 전달하는 데에 늘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치있는 것일수록 말은 더 필요없게 된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가장 본질적인 자리에 대한 것이라면 침묵만으로도 충분하다. 왜 이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갑자기 그를 향해 '서둘러' 달려오기 시작했을까? 전에 는 그들은 그에게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그는 그들과 12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지만, 아무 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가 떠나려고 할 때 남자와 여자들이 그 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인간 역사를 통틀어 진실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빛과같은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감출 수가 있는가? 그것은 멀리 떨어진 별이어서 그대가 그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 누구도 그대가 그 별 을 알아보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라. 그 별을 알아본다는 것은 결코 작 은 일이 아니다. 알아보는 순간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대의 온 존재가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대들 중의 한 사람이, 적어도 어느 한 사람이 피어나면 그 향기가 그대에게 전해진 다. 꽃잎이 지고 꽃이 사라지기 전에 그대는 서둘러 그에게 가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작별 인사만이라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이라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꽃피어났다는 것은 그 대 역시 똑같은 씨앗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대는 그 씨앗을 찾지 않고, 무시하고, 세상의 많은 것들로 파묻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본래의 자신을 기억해 낸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일깨워 준다.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 고 있는가? 그대는 지금과 같은 하찮은 일들을 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이 지 구가 하나의 수련 장소, 학교, 배우고 터득하는 장소라는 것을 그대는 잊고 있다. 또 그들의 목소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며, 밭에서 밭으로 서로 외치면서 그들은 그의 배가 오고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전에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다시 또다시 이렇게 말해 왔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나의 봄이 올 것이다. 조만간 나의 배가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비웃고 놀렸 다. 그들은 그가 꿈을 먹고 사는 시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어쩌면 그의 배가 실제로 오고 있 는 중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밭에서 밭으로 서로 외치고' 있다. "우리가 틀렸고 그가 옳았다. 우 리는 다수였지만 그는 혼자였다. 그는 증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그 미지의 세 계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내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증거가 필요없다. 이제 배가 도착 한 것이다." 거기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여러 하늘이 있다. 오직 기다릴 수 있는 강한 마 음이 필요할 뿐이다. 그때 그는 혼자서 생각했다. 헤어지는 날이 곧 모이는 날이어야 하는 것인가? 그는 지금 까지 그들과 함께 사는 동안 이 사람들을 모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기울 이지 않았다. 그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이상하고 신비한 것들만 이야기 하는 이방인이고 낯선 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가 떠나려 하니까 그들은 모여들고 있 다. '헤어지는 날이 곧 모이는 날이어야 하는가?' 그들은 달려오면서 '밭에서 밭으로'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다. "비록 그가 혼자이긴 했지만 그가 옳았다. 우리는 숫자가 많았 지만 우리가 틀렸다." 진실은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와는 상관이 없다. 진실은 언제가 혼자의 것이지 군중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군중은 헤어질때가 되어서야 그것을 알아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또 내 마지막 저녁이 정말로는 내 새벽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12년 동안이나 그는 각자 의 문을 두드리고, 설득하고, 강조하면서 노력해 왔다. "걱정하지 말라. 나의 배가 오고 있 다. 나의 배가 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배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배가 어디 서 오는지, 저쪽 해안이 과연 있기나 한지 알지 못했다. 얼마나 간절하게 그는 사람들을 일 깨웠던가? "여기서 그대들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내 마지막 저녁이 '참으로 나의 새벽'이라 불릴 것인가? 나의 마지막 말, 나의 떠남이 곧 내 진실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인가?" 이는 알무스타파의 경우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신비가들이 그렇다. 떠나려는 날, 그들 의 저녁에서야... 그들이 떠나려고 할 때만이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본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무지, 세상의 어리석음이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느 이 한가지만을 진지하게 생 각하고 있다. 밭을 갈다 말고 쟁기를 밭고랑에 내던지고 오는 사람, 포도주 짜는 틀을 밟다 말고 바퀴를 내려놓고 오는 사람에게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깨달은 사람은 불평하거 나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러한 사람들을 적어도 겉으로라도인간적으로 대해 준 적이 없다. 세상을 언제나 이들을 비인간적으로, 야만적으로 다루었다.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데 이제 세상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다. 아무도 고타마 붓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 나라 인도에서 불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나라는 계속해서 세상에 대고 "우리나라는 고타마 붓다 가 탄생한 나라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단 한 명도 불교신자가 없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절에서조차 불교신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 모두 그러하듯이 성직자들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 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을 물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 반대하였다. 과거는 어디 까지나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현재에 살아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짐이 너무 무거울 때 그대는 이 순간을 놓치게 된다. 이 순간은 매우 짧다. 그대는 늘 새롭고, 짐이 없고,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한다. 고타마 붓다 이전에 인도는 바라문들의 가짜 종교왕국에 불과하였다. 그는 바라문들, 성직 자들에게 절대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베다(Veda)를 반대했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98퍼센트가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는 계속해서 그것을 숭배해 오고 있다. 고타마 붓다 앞에서는 아무도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 그의 눈, 그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말하든 영원한 진리가 되었다. 그의 존재는 권 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일단 그가 가버리자, 그의 깨달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절 까지도 어떤 바라문 승려가 관리해야만 했다. 한 명의 불교신자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25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어떤 바라문 승려가 그 절을 소유하고 있다. 25세기 동안 그의 조상들이 그 절을 소유해 온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인간은 그토록 무지 하다. 언제나 늦고, 언제나 기차를 놓친다. 그들이 정거장에 도착하면 열차는 이미 떠난 뒤 다. 그래도 거기 불평이 없고 자비만이 있다. '밭을 갈다 말고 쟁기를 밭고랑에 내던지고 오 는 사람, 포도주 짜는 틀을 밟다 말고 바퀴를 내려놓고 오는 사람에게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깨달은 사람은 오로지 그대에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줄 수 있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어 떻게 하면 그대를 깨어나게 하고, 어떻게 하면 그대의 눈이 볼 수 있고, 귀가 들을 수 있고, 가슴이 느낄 수 있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대가 더 많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 는가... 내 가슴이 열매 달려 휘늘어진 나무 되어 그 열매를 따 그들에게 줄 것인가? 시간 이 많지 않다. 뭔가 주어야 한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다.어떤 일 을 하든 그들이 잠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행동하리라는 것을 그는 이해한다. 의식이 깬 사람은 거지가 아니다. 그는 왕이다. 그는 언제나 그대가 받아 담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주려는 생각만 하고 있다. 그 는 계속해서 주고 있다. 심지어 그대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해도 그는 이해한다. 그대는 그런 짓밖에 할 수 없으니까.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에게 한 가지만을 기도한다. 그것 은 그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다. "아 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나이다." 내 가슴이 열매 달려 휘늘어진 나무 되어 그 열매를 따 그들에게 줄 것인가? 또 내 소원이 샘물처럼 넘쳐 흘러 그들의 잔을 채울 것인가? 내가 거문고 되어 전능하신 이의 손길이 나를 퉁기고... 시간이 너무나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고민하고 있다. 그에게는 줄 것이 없는 것이 다. '내가 거문고 되어 전능하신 이의 손길이 나를 퉁기고...' 그리하여 나는 나의 음악을 뒤 에 남겨 두고 떠날 수 있으리라.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나의 음악이 그들 을 일깨워 줄지도 모른다. 혹은 피리 되어 그분의 숨결이 나를 통하여 흐르게 할 것인가? 알무스타파로서는 '나'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그 러나 그는 하나의 피리, 텅 빈 대나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숨결이 '나를 통하여흐 르게' 하여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하나의 노래가 되게 할 수 있다. 나는 침묵을 찾는 자... "평생 동안 나는 침묵을 찾아왔다. 나는 돈을 모은 것도 아니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없다. 나는 '침묵'을 모아왔다. 그대들이 그 침묵을 가질 수는 있으나, 내가 그대들에게 줄 수는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이다. 가장 소중한 보물은 스스로 가질 수는 있으나 남이 줄 수는 없다. 게오르그 구르지예프(George Gurdjieff)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금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 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훔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아 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스승의 문은 열려 있다. 그는 주기를 원 한다. 수천 가지 방법으로 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 보 물의 문이 그대에게로 열린다. 스승은 그대를 부르고 있다. "그대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최 대로 가져가라." 어쩌면 그는 그대가 당황하지 않도록 일부러 조는 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르지예프는 인간의 오랜 역사에서 누구도 말한 적이 없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서 훔쳐서라도 가져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그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스승은 그것을 강요할 수 없으니까. 그대 자신이 용기를 모아 그것을 가져 가야 한다. 나는 침묵을 찾는 자, 그 침묵 속에서 내 무슨 보배를 찾은 것 있어 저들에게 확 신을 가지고 베풀 수 있을까? 그는 그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세상이 '하느님'이라고 알고 있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 보물은 너무나 크고 넓으며... 거기에 그것을 찾는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열심히 찾던 사람이 드디어 근원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대가 근원을 발견 하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근원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궁극의 근원은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없 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그 궁극의 근원은 그대가 다가감에 따라 강력한 힘과 중력으로 그대를 잡아당기기 때문에 그대는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라고 소리칠 여유조차 없다. "유 레카(Eureka)!" 하고 소리칠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말하기도 전에 그대는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찾고 있던 것이 발견되긴 했지만, 찾는 주체였던 그 사람은 사라진다. 그대와 신은 나란히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타마 붓다를 '브하그완'이라고 부 르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비라를 '브하그완'이라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을 시작한 그 사람이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발견했으며, 바로 그 발견 속에서 그 것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저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베풀 수가 있을까?' 그는 주고자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보물이 과연 줄 수 있기나 한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것은 주어진 적이 없으며, 언제나 스스로 발견했을 뿐이다. 그것은 남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었다. 각자가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아무도 그것을 그대에게 줄 수 없으며, 그것은 선물이 될 수가 없다. 그대는 그것을 빌릴 수가 없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대가 죽어야 한다. 신이 나타날 수 있도 록 그대가 사라져야 한다. 그대가 사라지는 것이 동전의 한쪽 면이라 한다면, 다른쪽 면이 바로 신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어 떤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 스스로 찾기 시작하지 않으면 준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오늘이 만일 나의 거두는 날이라면, 나는 씨를 어떤 밭에 뿌렸으며, 또 어느 기억 못 하는 시절에 뿌렸던 것일까?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난다. 평생 동안 나는 세상의 모든 밭에 '또 어느 기억 못하는 시절에' 씨앗을 뿌려왔다. 나는 씨앗을 뿌릴 적절한 시기가 되기 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 다음 순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나는 여기에 있 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이 순간에 그대가 가능성이 있다면 계절에 대해 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일단 씨앗이 뿌려지면 그 씨앗이 그대 안에서 기다리게 하라. 봄 이 오면 그 씨앗은 싹이 틀 것이다. '오늘이 만일 나의 거두는 날이라면...' 알무스타파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 곡 수천 수만의 들녘에 추수의 계절이 다가올 것이다. 나는 완전히 잊을지도 모른다... 어느 기억 못하는 시절에 그 씨를 뿌렸던가?" 매우 중요한 여자가 한 명 생각난다. 중요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성은 세상에 많지 않았 다. 하지만 이 여자는 정말로 중요한 인물이다. 바로 블라바츠키(Blavatsky) 여사다. 그녀는 신지학이라는 매우 중요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녀는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전세계를 여행하 곤 했다. 러시아는 바로 그녀의 조국이었다.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마치 하나의 법칙처럼 되어 버린 일이다. 블라바츠키는 지 구 곳곳을 여행했지만 자신이 태어난 조국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지 그녀는 언제나 양쪽 어깨에 가방 두 개를 짊어지고 다녔다. 그 가방에는 아름다운 꽃씨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달리는 열차에 앉아서 그녀는 창문을 열고 철도 주변에 씨앗을 뿌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이 길로 두 번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르지 않소?" 그녀는 대답했다. "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봄은 올 것입니다. 나는 오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알무스타파가 옳다. '오늘이 만일 나의 거두는 날이라면 나는 씨를 어떤 밭에 뿌렸으며, 어 느 기억 못하는 시절에 뿌렸던 것일까?' 하지만 알무스타파라는 가상의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칼릴 지브란 같은 사람들은 계산을 하지 않는다. 이들 자신이 "어느 밭에 씨앗 을 뿌렸으며 어느 계절에 씨앗을 뿌렸는가."를 적어 놓은 계산 장부를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사랑을 베푸 는 이들이다. 그것이 누구의 밭인가는 상관이 없다.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었다면... 바람이 그 향기를 실어다 준다면 누가 지나가든 장미꽃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대가 그것을 받을 자 격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는다. 이들은 이렇게 묻지 않는다. "네가 그 씨앗을 받을 자격 이 있느냐?" 아니다. 어떤 씨앗인지, 어떤 밭인지, 어떤 계절인지 기억해 두지도 않고 그들 은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그들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한 가지만을 안다. 머지않아 모든 이에게 봄이 올 것이다. 모든 인류가 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계속 씨앗을 뿌려라. 어느 시대이냐는 중요하지 않 다. 시간의 영원성에게 보면 그대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순간에 불과하다. 지금이 정말로 내가 등불을 켜들 시간이라 해도,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내 불꽃일 수 없다. 등잔은 내 것이지만 그 불꽃은 신의 것이어야 한다. 나는 다만 텅 빈 깜깜한 등잔을 들어올릴 뿐, 그러면 저 밤의 파수꾼이 거기 기름을 채우 고 불을 켜리라. 깨달은 이가 말하는 순간... 그는 텅 빈 허공이다. 그의 등잔은 불꽃이 없다. 하지만 그는 신성이 자신을 소유하도록 자기 등잔, 자기 말, 자기 몸짓, 자기 존재를 제공한 다. 깨달은 사람은 전체성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이다. 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전체의 것이다. '지금이 정말로 내가 등불을 켜들 시간이라 해도,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내 불꽃일 수 없다.' 알무스타파는 이렇게 말하 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지 말라. 나는 단지 텅 빈 등 잔일 뿐, 그 등잔 속의 불꽃을 바라보라. 그 불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불꽃은 그대의 것 도 아니다. 그 불꽃은 전체의 것이다." 그 등잔이 알 힐라즈 만수르(AI-Hillaj Mansoor)의 것이든, 모세(Moses)의 것이든, 까비 르(Kabir)의 것이든, 나나크(Nanak)의 것이든 모둔 같은 불꽃이다. 누구의 것인가는 중요하 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불꽃, 배가 도착한 사람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이다. 이렇게 말했으나... 그의 말은 순수한 벌꿀이다. 그의 말은 또한 순수한 침묵이다. 그의 말은 책이나 사전에서 보는 언어와는 다르다. 그의 말은 어떤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그의 텅 빈 침묵에서 나온다. 그것들은 저 너머에서 온다. 이렇게 말했으나, 그의 가슴속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았다. 모든 깨달은 영혼들은 깊은 슬픔을 안고 죽었다. 우리의 언어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 다. 우리의 언어는 시장의 언어이지 사원의 언어가 아니다. 물건들에 관해서 말할 때는 그 언어는 아주 쓸모가 있지만, 그대 존재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무력해진다. 그대 영혼의 침 묵들속에서는 무엇을 발견하든지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의 가슴속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았다.' 그의 가슴속뿐만 아니라, 신성 의 축복을 받은 모든 꽃 피어난 위대한 가슴들 속에 많은 것들이 미처 말해지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들이 말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들으려면 그대는 침묵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것을 들으려면 어떤 것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말없이 기다리 면서 스승의 발 아래 앉아 있어야 한다. 어쩌면 마음에서 마음으로 일치가 되고 조화가 되 어 스승의 가슴속 춤이 그대의 가슴속 춤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중요한 것들은 오로지 그렇게밖에 전달되지 않는다. 서양은 매우 빈곤하다.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가 아니라 영적인 면에 있어서 가난하다. 왜 냐하면 그들은 진리와 아름다움과 축복으로 넘쳐나는 사람과 침묵 속에, 그것들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고 마주 앉아 있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말하지 않고 그것 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어떤 이의 발 아래 앉아 있는 것조차 미개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또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 전달되고 있는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가라앉고 침묵을 느낀다면 다른 어떤 논리도 필요가 없다. 그 대가 만일 사랑을 느낀다면...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질서, 가장 높은 차원의 법칙에 속한 것 이다. 이러게 말했으나, 그의 가슴속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았다. 그 스스로 도 깊고 깊은 자신의 비밀은 말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비가들이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비 밀은 너무 깊은데 우리의 언어는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에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하 지만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비밀을 그대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깨달음이 다. 그대는 그대 내면에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든 그대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남에게서 들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책에서, 사회에서, 선생에게서, 교육을 통해서 온 것이다. 모두 빌려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피상적인 것들이다. 그대 안에 있는 것은 단 한가지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오직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만이 언어를 초월하게 된다. 그는 아무도 여행한 적이 없는 처녀림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은 정말 때묻지 않은 처녀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수십억의 인구가 사용해 온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 언어들은 사실 세상에 서 가장 더러운 것이다! 그대는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신다.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잔으로 커피를 마셔왔다. 머지않아 그들은 커피가 아니라 침을 마시게 될 것이 다! 언어는 때가 묻었는데, 그대의 침묵들은 때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도 깊고 깊은 자신의 비밀은 말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날, 첫 번째 의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떠올랐다. "내가 그것 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말하지 않는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또한 비인 간적인 일이다. 수십억의 구도자들이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그대는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니 적어도 그들에게 힌트라도, 몇 가지 안내라도, 작은 지도라도 주어 야 한다. 그것을 그대 자신만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것은 몹시 몰인정한 것이다." 이레 동안 그의 계속해서 고민해야 했다. 이 고민은 정에는 느껴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는 원래 수천 가지 많은 고민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거기 단 한 가 지 고민, 한 가지 문제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깨울 것 인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 귀에 대고 소리쳐 뭔가가 그들의 침묵에 가 닿을 수 있게 할 까? 아름다운 이야기다. 여기까지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다음부터가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없으면 그대는 붓다가 직면하고 고민했던 진실 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붓다의 실제 체험이라는 데에 나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체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하늘에 있는 신들은 무척 당황했다. 수천년에 한 번씩 어떤 이 가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아직 어둠 속에, 무의식 속에 있는 나머지 수십억의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만일 깨 어난 사람이 그들을 도울 수 없다면 누가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들에게 저쪽 해안, 저 멀리 있는 해안을 보여 줄 것인가? 이레 동안 기다리면서 하늘의 신들은 고타마 붓다가 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래서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신과 함께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고타마 붓다의 발에 손을 얹고 그에게 침묵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붓다와 같은 완성은 대단히 드 물기 때문에 다른 이를 인도할 발자국이라도 남겨 놓지 않고 그냥 사라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이 모든 대화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도 그렇고 붓다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대화가 가능했다. 고타마 붓다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레 동안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말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사람들은 귀머거리이고 장님이다. 그들은 들을 수 있긴 하지만 진정으 로 듣지 못한다. 그들은 늘 보지만 쓸데없는 것만 볼 뿐이다. 그러니 왜 불필요한 고생을 하 겠는가?"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매일처럼 불필요한 고생을 하고 있다. 나는 조용 히 앉아서 나의 행복을 누릴 수도 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정치인이나 종교 지도자들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다. 사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옮기기 힘든 것을 옮기려고 노력한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감옥에도, 그들의 괴롭힘과 야만적인 행동에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그들은 왜 나를 괴롭히는지 나에게 말해 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이 천치들에게 말해 줄 것인가? 그대는 논란의 여지가 없 는 어떤 위대한 사람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크리슈나(Krishna)는 논란의 여지가 없 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가, 또는 소크라테스(Socrates)가, 또는 피타고라스(Pythagoras)가 논란의 여지가 없었는가? 사실 모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을 없애 보라. 그러면 온 인류가 없어질 것이다. 오직 하마와 원숭이와 경찰들만 남게 될 것이다. 만일 나에게 논란의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실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 이 편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가장 단순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논 쟁을 일삼는다는 뜻이다. 그대의 마음에 혼란이 오고, 편견들이 흔들리니까 차라리 소크라테 스를 독살하고 편안히 쉬는 게 낫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편안히 쉬는 게 낫다. 하지만 기억하라. 의식의 진화는 복종이나 전통이나 타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라, 바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오직 반역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반역아는 자신이 떠나는 날에야 사람들로부터 이해를 받는다. 그의 저녁이 아침으로 바뀌지만, 때는 너무 늦다. 고타마 붓다는 말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나는 그것에 대하여 이레 동안 계속 생각 해 왔다. 내 말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내게로 올 것이 고, 들을 능력이 없는 사람은 내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소리친다 해도 고작해야 경찰에게 어떤 사람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알리기나 할 것이다. '어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람 이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사람들의 정적과 평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떤 평화 속 에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가? 과연 어떤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가?" 붓다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그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고 모두가 그대를 오해할 텐데 무엇 때문에 고생할 것인가? 차라리 말 없이 있는 편이 낫다. 목마른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대 일이 아니다. 그대는 이제 목적지 에 도달했고 찾는 일이 끝났다. 하지만 하늘의 신들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이야 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 큰일이다. 붓다가 된 사람이 가르침을 베풀 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면 이는 인류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다. 미래에 대한, 다가오는 세대 에 대한 큰 손해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우리만이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는 것은 우리 책임이다." 그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붓다가 거절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들의 논리는 매우 간단했다. 그들 은 말했다. "그대는 99.9 퍼센트 옳다. 하지만 거기에 더 없이 목말라하고 있는 영혼들이 있 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경계선에 서 있기 때문에 누군가 한 번만 밀어주기만 하면 되는 그러한 영혼들이 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그대는 그러한 영혼들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해로울 것 없지 않은가? 손해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일 두세 사람만 당신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도 세상은 영원히 그대에게 감사해할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세상에는 이제 막 그 경계선에 도달한 몇몇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대도 인정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밀어 주지 않고 있으며, 그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 그 미지의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대의 확실성, 그 대의 권위가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한 걸음'을 때어 놓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면 그들은 그대와 똑같은 의식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몇 명이나마 깨달은 영 혼이 나올 기회를 저버리지 말아 달라. 인류는 대단히 빈곤하다. 약간이라도 더 풍부해지도 록, 약간만이라도 더 아름다워지도록 해달라." 침묵 속에서 붓다는 눈을 감고 말했다. "그 몇 사람을 위해 나는 말을 하겠다. 비록 내가 진리 전체를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가장 깊은 비밀은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저 멀리 있는 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손가락으로 그 별을 손짓해 보일 수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 별도의 경우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마나 원숭이로 남아 있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 몇 안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알무 스타파는 말하고 있고, 나도 말하고 있다. 뭔가 탈바꿈을 원하고, 도대체 이 삶이 무엇인가 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알무스타파는 말을 하고 있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