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첫번째 책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다. (임어당은 1895년에 중국에서 태어 난 학자) 임어당은 중국인이다. 그의 책은 내 책 죽음의 예술을 떠오르게 한다. (죽음의예술은 유태교 신비주의 하시디즘 강의이다) 임어당은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인이면서도 그는 오 염된 중국인, 즉 기독교인이었다. 오염이란 그런 것이다. 오염된 나머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된다. 임어당은 이 책 생활의 발견에서 많은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묘 사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곧 삶이 제외되어 있음을 의미 한다. 죽음을 내쫓지 않고 받아들일 때 만이 삶이 찾아온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 쪽면이다. 어느 한면만 인정하고 다른 면을 거부 할 순 없다. 그러나 그는 매우 아 름답게, 예술적으로 쓰고 있다. 그는 분명 현대의 뛰어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쓰든지 그것은 상상, 순전한 상상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것들 에 대한 꿈일 뿐이다. 때로 꿈은 아름다운 것일 수가 있다. 꿈마다 악몽인 것은 아 니다. 생활의 발견은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발견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긴 하나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어 나가노라면 그 속에 몰입할 수 있다는 뜻 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마치 깊은 숲에서 길을 잃듯이 하늘에도 별들이 빛나고 사바에 나무들이 있으며 길마저 없고 가야 할 곳도 없다. 이 책은 독자를 어느 곳 으로도 인도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좋은 책임을 발견한다. 왜인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잊고 현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어당이 명상에 대해 무엇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불행히도 그는 기독교이었 기 때문에 도교의 사원이나 불교의 절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대신 그는 세상에서 가장 3류급인 성경 만을 열심히 읽었다. 구약의 솔로몬의 노래과 신약의 산상수훈을 제외하면 성경은 잡지책에 불과하다. 아아, 만일 임어당이 붓다와 장자를 알았다면 나가르주나와 까비르와 알 힐라즈 만수르를 알았다면, 이 모든 미치광이들을 접했다면 그의 책은 예술적이긴 하나 진실되진 않다. 솔직하진 않다. 제2권은 임어당의 또다른 책 중국의 지헤이다. 그는 뛰어난 글솜씨를 갖고 있었기 에 중국의 지혜뿐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대표하는 노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함에 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혜와 같은 내용의 글까지도 쓸 수 있었다. 물론 임어당은 노 자의 가르침 몇 줄을 인용하긴 했으나 자신의 기독교적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들만 뽑아서 썼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전혀 노자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는 장자에서 도 몇 줄 인용했지만 자연히 합리적인 내용들뿐이었다. 장자는 합리적인 인물이 바 로 장자였다. 장자야말로 나의 연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 기하노라면 자연히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나에게는 어떤 것도 과장이 될 수 없 다. 장자의 우화 한 편 한 편은 나라와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그러한 우화 들을 수백 편 썼다. 우화마다 솔로몬의 노래이고 바가바드 기타이다. 각각의 우화가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따지기도 불가능하다. 임어당은 장자을 인용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한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입장에 서 인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으며 그의 책 중국의 지혜는 버트란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또는 무어헤드와 라드크리슈난 공저 인도의 마음등과 같이 한 나라 전체를 대표한 몇 안 되는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 다는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이 책은 신비서가 아니라 역사서지만 아름 답게 기록되었고, 그리고 문법이나 그밖의 모든 면에 있어서도 정확하다. 임어당은 기독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도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는 것만큼 큰 불행이 어디있겠는가? 따라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임어당 은 모든 점에서 옳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나 같은 미치광이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모든 점에서 틀리다. 그렇긴 해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재능이 있 다. 나는 그가 천재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그에게는 재능이, 뛰어난 재느이 있다. 그 이상은 묻지 말라. 천재는 아니다. 나는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제3권은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을 같지 않은 책이다. 그 책이 자꾸만 코를 들 이민다. 물론 유태인들의 책이다. 그렇지않다면 그렇게 긴 코를 어떻게 갖겠는가? 제목은 탈무드이다. 왜 나는 그것을 피하고 싶어했는가? 날마다 나는 유태인들을 비난하는 발언을 해왔다. 그래서 단 하루만이라도 유태인을 잊고서 휴일을 즐기고 싶다. 이 책을 피하고 싶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책에 읽을 만한 문장은 이 귀절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따라서 그 문장을 여기에 인용하겠다. 탈무드는 말한다. "신은 잔인하다. 그는 그대의 삼촌이 아니다. 신은 전혀 다정하 지 않다." 탈무드 전체에서 오직 이 문장만을 나는 사랑한다. 나머지 부분은 전부 헛소리다. 무두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저절로 집어던지게 된다. 집어던질 때는 이 문장만을 건져라. 그것을 욕실에 적어 놓으라. 그대가 아내에게 또는 아이들에게 어리석은 직을 행할 때마다 이 귀절을 생각하라.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것이다. 제4권 나는 아주 작은 자이나교 종파를 따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종파는 어떤 미치광이가 그 창시자였는데, 그는 나보다 약간 덜 미친 자였다. 나보다는 더 미쳤 다곤 할 수 없다. 이제 그의 두 권의 책을 소개하겠다. 이 책들은 아직 영어로 번역 되지 않았으며, 힌두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이 불가능한 것이다. 정확히 미치 광이의 방식으로 그는 언어를 사용한다. 제4권은 그의 책 "수냐 스바브하반" 이다. 그뜻은 '공의 본질.' 이 책은 몇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장마다 경전귀절이다. 그러나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내가 어떻게 그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우선 마틴 부버가 하시디즘의 가정에서 태어났 듯이 나는 이 미치광이의 전통 속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타란 타란이다. 이것 은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누구도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다. '타란 타란'은 단순히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된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그의 노래를을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겐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노래들이 아름다웠고, 그 춤이 아름다웠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른이 되어서 그 노래들을 들었다면 그것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어렸을 적부터 그 노래를에 둘러 싸여 자란 사람은 굳이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존재 깊은 곳에서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타란 타란을 이해한다. 머리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나아가 나는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안다. 내가 설령 그를 추종하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나는 그를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수많은 전통을 이해 하며, 내가 그 모든 전통들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수많은 미치광이를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수많은 전통을 이해하며, 내가 그 모든 전통들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수많은 미치광이를 이해한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 많은 미치광이를 이해하려다가 자신이 먼저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라! 그들 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초월해 있다. 어쨌거나 나는 타란을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존재를 못랐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를 추종하는 집단은 그 규모가 아주 작았으며, 그것도 인도 중부지방에서나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세력이 약한 것을 두려워하여 남에게 자신들이 타란의 추종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그냥 자신들이 자이나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이나교가 숭배하는 마하비라가 아니라 자기네 종파의 창시자인 타란을 몰래 믿는다. 자이나교 자체도 규모가 작은 종교이다. 신자수는 3백만 명에 불과하 다. 자이나교에는 두 개의 대표적인 종파가 있는데 디감바라와 스베탐바라가 그것이 다. 디감바라파는 마하비라가 나체의 성자였다는 사실을 믿는다. '디감바라'라는 말 자체가 '하늘의 옷'이라는 뜻으로 '나체'를 상징한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종파이다. '스베탐바라'의 뜻은 '흰옷'으로, 이 종파는 마하비라가 나체로 살긴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흰옷의 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힌두교와의 타협 과정에서 생겨안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타란의 추종자들은 디감바라파에 속했으며 이들이 자이나교 전체에서 가장 혁명적이다. 그들은 심지어 마하비라의 상까지도 숭배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원은 인간 내면의 공성을 상징하기 위해 텅 비어 있다. 우연히도 타란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그 가정에서 태어나기 위해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모든 고생은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잊혀질 수 있다. 그 가정은 나에게 인도 최고의 신 비가를 소개해 준 것이다. 그의 책 '수냐 스바브하바'는 미치광이의 중얼거림처럼 한 가지 사실만을 반복해서 말한다. 그대들은 알다시피 나 역시 지난 25년 동안 똑같은 것만을 말해 왔다. 즉, 나는 언제나 "깨어있으라!" 라고 말해 왔다. 타란이 '수냐 스바브하바'에서 말한는 것도 그것이다. 제5권은 타란의 두번째 책 '싯디 스바브하바'이다.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란 뜻이다. 아름다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도 타란은 똑같은 말만을 반복 한다. "비어 있으라!"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누구도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다. "깨어 있으라! 비어 있으라!" 영어의 '조심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깨어 있으라' 합쳐져서 생긴 말이다. 깨어 있는 것, 그것이 곧 조심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순간 그대는 '집'에 돌아온다. 이밖에도 타란의 저서가 많으나 이 두 권의 책이 그의 메시지 전체를 담고 있다. 한 권은 그대가 누구인가를, 그대가 순수한 공의 상태임 을 보여주고, 다른 한 권은 어떻게 그 상태에 도달하는가를 보여 준다. 깨어 있음으 로써 가능한 것이다. 두 권 모두 몇 페이지에 불과한 소책자들이다. 제6권... 늘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모자라서 빼먹을까 두려웠다. 원래 나는 늘 그렇듯이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처음엔 50권의 책만 말하려고 했으나 어느새 제2부가 시작되고, 또다시 50권의 책이 지나갔으나 아직도 많은 아름다운 책들이 남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제3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도스토엡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기록'이다. 이 책은 저자 와 마찬가지로 매우 이상한 책이다. 겉으로 봐선 각각의 단락들이 아무런 연결성이 없으나 실제론 하나의 큰 맥락이 밑에 흐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깊은 명상하면 서 읽어야 한다. 그 이상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문학사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걸작 중의 하나다.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메모에 불과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 문에 아무도 이 작품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명상적이지 않은 눈으로 보면 각각의 메모들이 아무런 의미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도자들에겐 이 책이 깊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구도자라면 그 소게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제7권. 어디선가 갑자기 이 책에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이 책을 말할 생각이 없 었으나 그것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렇다고 두려워하진 말라. 책의 저자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으로 역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메모삼아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은 저 자 사후에 '철학적 탐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인간의 모든 뿌리깊은 문제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물론 여성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이 없다면 남성의 뿌리깊은 문제가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남성의 진정한 문제는 여성 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인이면서 착한 여성은 정말로 드물다. 그런 여성과 결혼한다면 하늘이 준 행운인 줄 알라."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명확성, 투명성, 그리고 그 빈틈없는 합리성을 나는 사랑한다. 그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한다. 진리의 길을 탐구하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의 책장을 하나하나 통과하기를 나는 바란다. 제8권은 아싸지울리의 '정신통합'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을 창안함으로 써 위대한 업적을 나기긴 했으나 그것은 반쪽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아싸지올 리가 행한 '정신통합'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반쪽의 작업에 불과하다. 나의 작업은 '정신정립'이다. 정신분석과 정신통합, 이 두 과학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정신통합은 아싸지올리가 프로이드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거의 읽혀지 지 않고 있다. 그는 프로이드에 미친진 못했으나 모든 구도자들이 읽어야 할 책을 썼다. 사실 프로이드와 아싸지올리를 함께 읽었을 때만이 두 사람의 작업이 가치가 있다. 제9권. 언제나 나는 칼릴 지브란을 찬양해 왔다. 이제 그를 비난하기 전에 한번 더 그를 찬양하고자 한다. 걱정하지 말라. 나는 단순한 의미로 '비난'이란 단어를 쓴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9권은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이다. 실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현대에 와선 라빈드라나드 타로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러한 산문시를 쓰지 못했다. 지브란과 타고르 둘다 영어권 밖의 작가라는 점이 신기하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아름다운 시어들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국어는 원래 영어가 아니었다. 칼릴지브란은 아랍어가 모국어였 는데 아랍어는 대단히 시적으로 순수시 그 자체다. 그리고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벵갈어가 모국어였다. 벵갈어는 아랍어보다 더 시적이다. 실제로 벵갈인들이 벵갈 어로 싸우는 광경을 보면 마치 사랑의 말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싸울 때조차도 벵갈어는 시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벵갈 지역에 갔다가 한번은 사람들이 싸우 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시를 읊는 것과 같았다. 얼마나 놀랐던가! 그러다가 이곳 마하라슈트라 지방에와서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잡담하는 것까지 마치 싸우는 것 같아서 놀라고 했다. 마라티어 자체가 원래 그렇기 때문에 달콤하고 부 드러운 말을 속삭일 수 없다. 매우 거칠다. 싸움하는 언어인 것이다. 영국인들이 칼릴 지브란과 라빈드나드 타로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그들의 성공 비결을 배우지 못 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들의 '시적인 감수성'이었다. 제10권. 이것은 내가 그를 더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싶지 않았 던 칼릴 지브란의 작품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의 말이 진리에서 어긋난다면 나는 그를 비난해야 한다. 그 책은 '사색과 명상'이다. 나는 이 제목에 동의 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책으로 인해 칼릴 지브란이 명상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이 책에서의 '명상'은 명상이 아니라 '사색'알 뿐이다. 나는 사색에 반대한다. 따라서 이 열번째 책에 반대하는 바이다. 또한 칼릴 지브란이 서양적인 의미에서 '명상'이란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대한다. 서양에서는 명상이 아니다. 동양에 선 명상이 사색이나 생각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명상은 '무엇에 대한'것이 아니 다. 명상은 대상이 없다. 명상에는 객체가 없으며 순수한 주체뿐이다. 쇠렌 키에르케골은 말했다. "인간 존재의 핵심은 순수 주체 그 자체다." 명상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첫번째 권으로 선정하고자 하는 책은, 내가 설마 그런 사람의 책을 좋아하 리라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의 저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하드라 간디의 저서전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이다. 그의 진리에 대한 실험을 논하는 것은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이 적절한 시간인 것 같다. 기트 바르티여, 그 대가 나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다시 마하트마 간디를 비난하 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이 불쌍한 사람을 부드럽게 대할 수 있도록 나를 일깨워 달라. 지금까지 나는 한번도 간디에 대해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아마도 그대의 도 움을 받는다면 마하드마 간디와 같은 사람에도 나는 약간 부드럽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러나 나는 몇가지 아름다운 사실에 대해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누구도 간디처럼 진실하고 솔직하게 자서전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은 모든 자서전들 가운데 가장 솔직한 글이다. 자서전이란 무척 이상하다. 자기가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따라서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겸손을 부린다. 후자 역시 광장이긴 마찬가지다. 그것에 대해선 제2권에서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마하트마 간디는 어느 쪽도 아니다. 그는 단순하다. 그냥 사실 그대로를 기록해 나 가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의 과학자인양.... 그것이 자신의 자서전이란 사실을 전 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흔히들 남에게 감추고 싶어하는 모든 사실들을 있는 그대 로 다 말한다. 잘못된 것은 책의 제목이다. 진리를 갖고선 실험할 수 없다. 진리를 알든지 모르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 그것을 갖고 실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험이란 단어 자체가 객관적인 과학세계에 속한 것이다.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성을 갖고 실험할 수은 없다. 이것을 적어 넣으라. "주관성은 어떤 실험 과 관찰 대상으로 전락될 수 없다." 주관성은 존재계의 가장 신비한 현상이며, 그것 의 신비는 그것이 언제나 뒤켠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관찰하든지 그 관찰되어지는 대상은 관찰하는 자와 다르다. 그 관찰하는 자와 다르다. 그 관찰하는 자, 그 주시자를 의식하는것,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진리를 갖고 실험할 순 없다. 실험이란 의식이 아니라 물건, 물체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심 으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명상가는 아니었다. 명상가가 못 된다면 좋은 사람이라도 가치가 없다. 그는 평생에 걸쳐 실험했지만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더없 이 무지한 상태에서 생을 마쳤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토록 진실하고 정직한, 그리고 진리를 알려는 부타는 욕망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기란 결 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욕망이 장애물이 되었다. 진리는 진리 따위 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그러한 것에 관심조차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 내다. 신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 해도 나는 문을 열러 나가지 않을 것이다. 신 스스로 문 여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그러한 게으른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깨달음으로 인도 하는 게으른 자의 안내서'라고(이것은 원래 타데우스 골라스가 쓴 책의 제목으로, 인쇄소 견습공 출신의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명상서다)불러왔다. 이제 나는 그것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 완전하게 하고 싶다. 나는 깨달음 아닌 것으로 인도하는 게으른 자의 안내서이기도 한다. 나는 깨달음을 초월해 있다. 나는 항상 간디를 비난해 왔다. 정치관, 그의 사회상, 시대의 바퀴를 거꾸로 돌리 려는 그의 어리석은 노력.... 세상에선 그것을 '실잣는 물레'라고 부르겠지만.... 그는 인간이 원시사회로 되돌아가길 원했다. 그리하여 모든 기술 문명, 심지어 철 도건설과 전신전화, 우편제도 따위의 기본적인 것들조차도 그는 반대했다. 과학이 없다면 인간은 침팬지에 불과하다. 매우 힘세긴 하지만 침팬지는 침팬지일 뿐이다.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책 제목일 뿐 아니라 그의 전생애를 요약해 준다. 그는 자신이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완벽한 인도, 영국인이랑고 생각했다. 완전한 빅토리아인이라고. 지옥에 떨어질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이 빅토리아인들이다! 그는 모든 에티켓과 매너 온갖 종류의 영국식 어리석음들을 잔뜩 갖고 있었다. 체타나(오쇼 라즈니쉬의 제자) 는 이 말에 상처받을 것이다. 체타나는 나를 용서하라. 그ㅡ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그리고 그대는 나를 알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후려칠 소재 를 발견하는데에 있어서 천재적이다. 그러나 체타나는 운이 좋다. 그녀는 영국 숙녀 가 아니라 소위 라즈니쉬 광이다. 그녀는 가난한 영국 가정 출신이다. 아주 좋은 일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부였고 단순했다. 그녀는 다른 영국 숙녀들처럼 속물이 아니다. 영국 숙녀들은 남성들보다 코를 높게 하고 다닌다. 마치 하늘의 별이라도 보려는 것처럼. 그들에게선 속물근성의 썩은 냄새가 난다. 간디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것이 그를 망가뜨린 것 같다. 만일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훨씬 나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진리에 대해 실험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진리를 체험했을 것이다. 진리를 실험한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우습기 짝이 없다!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직접 체험해야 한다. 제2권은 성 어거스틴(초대 기독교회의 가장 유명한 교부신학자)의 '고백록'이다. 어거스틴은 두려움 없이 자서전을 쓴 최초의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다른쪽 극단으로 달려갔다. 내가 간디를 찬양하는 까 닭이 여기에 있다. 고백록에서 어기스틴은 너무 많은 것들을 고백한다. 심지어 자신 이 저지른 적이 없는 죄까지도 고백한다. 단순히 고백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서다 세상을 향해 "내가 짖지 않은 죄는 하나도 없다. 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죄 를 저질렀다"라고 자랑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어떤 인간 이라도 모든 죄를 저지를 순없다. 인간은 물론 신조차도 그럴 능력이 없다. 신은 말 할 것도 없고 악마초차도 어떻게 하면 어거스틴이 고백하는 그 많은 죄들을 즐길 수 있는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과장이 대단했던 것이다. 과장은 성인이 라고 하는 자들의 공통된 병이다. 그들응 모든 것을, 심지어 그들이 지은 죄까지도 과장한다. 그리하여 자연히 그들의 선한 행위까지 과장하면 자연히 그것을 배경으로 작은 선이라도 아주 크게, 아주 빛나 보인다. 먹구름 속의 번개와 같아지는 것이다. 그 먹구름들 때문에 번갯불이 더 돋보인다. 따라서 죄를 짖지 않고선 성인도 될 수 없다. 죄가 클수록 더욱 위대한 성인이 된다. 단순한 산수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를 내가 사랑하는 책들의 목록속에 포함시킨다. 아름답게 쓰여 진 책임엔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사람이다. 이것을 꼭 기록해 두라. 어떤 자가 비록 거짓말을 할지라도 그 거짓말이 아름다우면 나는 그것을 찬양 할 것이다.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것이 거짓말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 인가? 아름다우면 그만이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즐기고 감상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고백록은 거짓말의 걸작품이다. 온통 거짓말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업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수행한 것이다. 내가 완벽에 가깝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누군가 또다시 그 일을 더 완벽하게 수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이다. 어쨌든 어거스틴은 그 일을 99퍼센트 완벽하게 해냈으며, 다른 사람이 따라잡 을 여지를 별로 남겨놓지 않았다. 그렇다, 그 이후 많은 이들이 시도했다. 심지어 레오 톨스토이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시도했다. 그의 책 부활과 전쟁과 평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평생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고백록을 썼지만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톨스토이 같은 사람조차도 어거스틴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여, 낙담 하지 말라. 이제 당신의 책을 또다시 이도서목록에 포함시켜 주겠다. 제3권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이다. 짧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소설이다. 왜 내가 이 책을 포함시키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미친 자이기 때문 이다. 나는 온갖 종류의 것들을 좋아한다. 안나 카레리나는 내가 자장 사랑한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 책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내용을 생생히 기억하 며, 원하다면 소설 전체의 내용을 들려줄 수도 있다. 보라! 기트 바르티가 금방 한 숨을 쉬었다. 그녀는 걱정이 된 것이다. 이제 이 미친 사람이 안나 카레리나의 전 내용을 들려 주려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다. 다른 많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만일 내가 바다에 빠 져 세상의 수만 권 소설 중에서 단 하나의 소설을 선택하게 한다면 나는 안나 카레 리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 아름다운 책과 함께 있는 일은 더없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이 책은 읽고 또 읽고 해야 할 책이며, 그래야만 최소한 그 작품의 진가를 느끼고, 냄새맡고, 맛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책들과는 다르다. 간디가 결국 각자가 되지 못 했듯이 톨스톨이 역시 각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톨스토이은 위 대한 소설가였다. 간디는 그 솔직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앞으로도 그 럴 것이다. 금세기에 그만큼 솔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끝에다 '진저으로 당신의 것' 이라고 쓸 때 그것은 말 그대로 진심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당신의 것 이라고 쓸 때는 그대도 알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알듯이 그것은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진정으로 당신의 것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솔직성, 그것은 인간을 종교적으로 인도하는 초석이다. 톨스토이는 종교적 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는 아주 열심히 노력했다. 나는 그의 노력에 무한한 동정을 느끼는 바이다. 하지만 그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 는 최소한 몇 생을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의미에선 그가 묵타난다와 같 은 종교인이 되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나, 그리고 그밖의 여러 편의 위대한 작품들을 만나지 못했 을 것이다. 그때 그는 또 하나의 '스와미 바보난다'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제4권. 아지트 무케르지(탄트라 연구에 있어서 세계 최고봉인 인도 학자) 의 책이다. 그는 탄트라에 대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내 도서목록에 그이 두 권의 저서를 포함시키고자 한다. 제4권은 아지트 무케르지의 탄트아 예술. 제5권은 그의 또다른 저서 '탄트라 미술'이다. 이 저자는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나는 늘 이 두권의 책을 사랑했다. 이 두 권의 책은 실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이 책들에 수록된 그림들, 예술품들, 그리고 그가 그 예술품들에 단 주석들 하나하 나가 훌륭하다. 그의 서문은 그 가치가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저자 자신은 한 사람의 보잘 것 없는 벵갈인이었던 것같다. 바로 며칠 전 그가 델리에서 내 제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자리서 그가 고백하기를, 사실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탄트라 수집품들을 나에게 기증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탄트라 그림들과 미술품들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내 제자에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스승에게 바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두렵웠다." 그는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스승과 관계를 갖게 되면 나는 많은 두설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내 펴생에 걸친 수집품들을 인도정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늘 그의 두 저서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 사람, 아지트 무케르지, 아지트 새앙쥐인지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 겁쟁이를! 그런 두려움을 갖고서 어떻게 탄트라를 이해하겠는가? 불가능하다! 그가 책에 쓴 것은 지식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것은 가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가슴이 없었던 것이다. 생리학의 관점으로 말하자 면 생쥐에게도 가슴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가슴이 아니라 허파일 뿐이다. 허파 이상의 것, 즉 가슴을 가진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그리고 가슴은 오직 용기와 사랑과 모험 속에서만 커나간다. 얼마나 가련한 사람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책을 높이 평가한다. 생쥐가 실로 위대한 작업을 한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언제까지나 탄트라에 있어서, 그리고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아지트 생쥐, 아니 아지트 무케 르지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아지트 무케르지여, 내가 그대에게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세상 누구의 적도 아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들의 적 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나는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지트 무케르지여, 그대가 탄트라에 대해 훌륭한 일을 했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 다. 탄트라는 많은 학자, 철학자, 화가, 작가, 시인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고대의 지혜가 현대에 되살아날 수 있으며, 그대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역할을 한 것이다. 제6권. 이 책에 대해 나는 늘 강의하고 싶었다. 아침에 영어로 강의하기로 시간까 지 짜놓았었다. 나는 힌두어로 그것에 대해 강의한 바 있으며, 그것을 영어로 번역 하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아디 상카라차리아의 책이다. 지금의 그 바보 상카라차 리아가 아니라 진짜 상카리차리아를 말한다. 이 책은 1천 년이나 되었으며, 사실 작은 노래에 불과하다. 브하지 고빈담 무드 마테. "오, 바보천치여!" 기트 바르티, 주의깊게 들으라. 나는 그대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이 그런 뜻이다. "브하지 고빈담, 주의 노래를 부르라. 무드 마테, 오, 바보천치여, 바보천치여, 주의 노래를 부르라!" 그러나 바보천치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귀머거리들이다.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저능아들이다. 이해한다 해도 따르지 않는다. 따르지 않고선 무의미하다. 실천할 때만이 그 이해는 값진 것이다. 상카라차리아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이 노래 브하지 고빈담 무드마테 만큼 아름다운 책이 없다. 나는 이 제목의 네 개 단에 대해 거의 3백 페이지 분량의 강의를 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노래부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영원히 이 책에 대한 강의를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선 이 책의 제목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자. 제7권.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또다른 책이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내가 사랑한 사람중의 하나다. 책의 제목은 '철학산책' 이다. 그것은 한 권의 저서라기보다는 여러차례에 걸쳐 자신이 발표했던 글들의 모음집이다. 각각의 글들이 아름답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논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또한 산문을 쓰면서도 시를 표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 적이 없지만 그는 내가 보건대 일류 시인이다. 그는 칼리다스(인 도의 시인), 세익스피어, 밀톤, 괴테와 동등한 위치의 시인이다. 제8권. 폴 렙스(미국 태생의 시인이자 화가)의 '선육선골'이 여기있다. 이 책은 폴 렙스의 창작품은 아니자만 대단히 가치있는 책이다. 그의 원작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번역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 선의 일화들과 경전의 번역이다. 지금까지 나는 선에 대해 쓰여진 거의 모든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폴 렙스의 책에 버금갈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 자신이 선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임제선사나 바쇼와 같은 진가를 갖고 있다. 저자 폴 렙스는 캘리포니아의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이 작은 책에 선의 일화뿐 아니라 시바 신이 연인 파르바티에게 불러준 11개의 경인 비그야나 브하이라바 탄 트라를 번역 수록했다. 이 경에서 시바 신은 모든 가능한 명상비법에 대해 이야기하 고 있다. 명상에 대해 비그야나 브하이라바 탄트라보다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112개의 열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에 한 가지가 덧보태어져서 113개가 되어도 그것은 별 쓸모가 없다. 112, 이 숫자는 진실로 신비하고 아름답다. 이 책은 아주 얇다.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닐 수도 있다. 문고판 정도의 책이다. 하지만 그대는 주머니 속에 코히누르를 넣고 다니는 것이다. 물론 코히누르는 영국 왕실의 왕관에 부착되어 있어서 그댜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순 없다고 하겠 지만 폴 렙스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이 책을 엮고 번역하명서 자신의 말을 한 단어 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번역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번역했을 뿐아니라 선의 꽂을 영어에 옮겨 심었다. 그 꽃은 선에 대해 글을 쓴 다른 영어권 저자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 스즈키 아이세츠조차도 일본이었기 때문 에 그렇게 할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긴 했지만 스즈키는 자신의 깨달음의 향기를 영어 속에 옮기지 못했다. 스즈키의 영어도 물론 아름답지만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전가가 흐르긴 하지만 대광명은 아니다. 폴 렙스는 거의 불가능한 작업을 해냈다. 미국인이었지만 거듭 말하건대 선의 모든 진가를 터득했으며,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위해 그것을 선육선골에 옮겨적었다. 세상은 영원토록 그에게 감사해 야 한다. 비록 그 자신 도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9권. 나는 그대가 좀더 높이 비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나는 최고의 경지 에 해당하는 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좋은 것... 그러나 그 상태에 머물지 말라. 좋다는 거은 중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고, 또 나아가라. 즉 체라베디, 체라베디를 의미한다. 내가 아홉번째로 꼽고자 하는 책은 크리스마스 험프리의 선불교이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체라베디, 체라베디' 의 벅역인 '나아가라, 나아가라' 또는 '전진하라, 전진하라'였다. 하지만 영국인 어디까지나 영국인이다. 저자는 결국 애초의 생각을 버리고 그 책에 선불교라는 제목을 붙였다. 책 자체는 훌륭하지만 제목은 형편없다. 선은 어떤 '교' 어떤 '이즘'과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니다. 그냥 선만으 로 충분했을 것이다.험프리는 일기에 자신이 원래 '체라베디, 체라베디'를 제목으로 생각했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 제목이 너무 낯설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제목을 추하게도 선불교라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훌륭하다. 이 책 은 수많은 서양인들에게 선의 세계를 소개했으며, 그 점에서 대단히 공헌을 했다. 이 사람 험프리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제자였으며, 특히 서양에선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스승을 잘 모셨다. 그는 평생에 걸쳐 스즈키에게 헌신적이었다. 험프리는 진정한 제자였다. 그는 스즈키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리고 자신의 생이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에게 충실했고 복종했다.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책 속에서 흔들림 없는 그 충실한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제10권. 오늘의 마지막 권은 아주 작은 책이며 몇몇 사람에게만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에게 널리 알려질 필여가있다. 그것은 '찬디다스의 노래'이다. 찬디다스는 벵갈의 한 미치광이, 한 사람의 바울이었다. 바울은 광인을 의미한다. 찬디다스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춤추며 노래불렀다. 누가 그의 노래를 수집 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찬디다스의 노래 나는 경이로움을 감출 길 없다. 찬디다스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는 얼마나 위대한가! 수많은 시인들이 있어 왔지만 찬디다스는 솔로몬과 같은 위치다. 솔로몬에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찬디다스이다. 찬디다 스는 오묘한 것들, 존재하지 않는 신에 대한 것들을 노래부른다. 찬디다스 역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신을 노래불렀다. 그의 신은 곧 존 재계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곧 존재계 그 자체가 신이다. 찬디다스는 또 명상에 대해 노래부른다. 명상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무시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는 말한다. "명상은 곧 무심이다." 얼마나 중요한 공식인가! 공식을 좋아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조차도 찬디다스에 질투를 느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은 찬디다스에 대해, 그리고 명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인 그가 명상에 대해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해 깨달았다. 찬디다스의 노래는 사랑의 노래, 깨달음의 노래, 아름다움과 자연의 노래이다. 그리고 거기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순수한 기쁨, 노래 그 자체의 즐거움에 관련된 노래들도 몇 편 실려 있다. 이것이 오늘의 열번째 책이자 마지막 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