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학 논쟁 스칼리게르의 '시간 수정론'과 연대학의 형성 보편사는 여기까지 서술해온 갖가지 요소에 의해 더욱더 위기를 키워온 셈이지만, 이 위 기는 보편사 자체에서는 필자가 '연대학 논쟁'이라고 부르는 논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보편사의 근본을 지탱해온 창세 기원에 바탕을 둔 연호의 체계가 새삼스런 문제가 되어, 연호의 재구축을 둘러싸고 다양한 연대학의 체계가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논쟁 이전 에 먼 저 연대학이라는 학문이 형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네덜란드 라이덴 출신의 요셉 스칼리게르(Joseph Justus Sca liger, 1540-1609)이다. 스칼리게르는 프랑스의 아장Agen에서 이탈리아의 군인이자 의사이며 훌륭 한 학자이기도 했던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직접 라틴어와 당시의 최신 지식을 배우고, 그 뒤 그리스어를 비롯한 모든 유럽의 언어와 히브리어는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 말에도 정통하여, 이십대 전반에 벌 써 사 람들의 주목을 끄는 문헌학자가 되어 있었다. 한편, 그는 스물 세 살 때에 칼뱅파로 개종하였고, 이후 평생을 칼뱅주의자(프로테 스탄트) 로서 싸워나간 신앙인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소란했다. 유명한 바르톨 로뮤Bartholomew의 대학살 때는 난을 면했지만, 1년 반 동안 칼뱅주의자들의 아성으 로 되 어 있던 제네바에 피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 칼뱅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프랑스로 다시 귀국한 다음에도 많은 친구들의 지원을 얻어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연대학을 하나 의 학 문으로 출발시켰다. 이에 대한 뒷바라지를 마지막으로 맡아준 것은 네덜란드였다. 그는 1593년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라이덴 대학 University of Leiden으로 초빙되었는데, 강의를 하지 않 아도 좋 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푸로 글로 티우스 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여 라이덴 대학을 키워낸 공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 다. 대표작 중 하나인 '시간 수정론'(1583)은 그가 프랑스에 살고 있던 시대에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놀라운 어학력으로 비로소 가능했던 획기적인 저술이었다. 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인이나 이집트인의 달력, 이슬람력과 인도력 등 당시에 알려져 있던 모든 달력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정확한 복원 작업이 수행 되고 있다. 여러 민족들이 근거해서 살아온 시간에 대해 이만큼 체계적이고 방대하게 연구한 서적은 그때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스칼리게르의 전기를 쓴 버네즈는 그를 '연대학의 발 견자이 자 창시자'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고대의 동양을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의 달력에 관해 유럽인들 이 제 공해준 연호를 편안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스칼리게르가 새로운 학문으로서 의 연 대학을 '발견'하고 '창조'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율리우스 주기 '시간 수정론'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율리우스 주기'의 창안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 한 바와 같이 온갖 종류의 달력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한 공통의 척도로서 고안되었 다. 그는 기초가 되는 세 가지 주기를 곱해서 매우 긴 하나의 주기를 설정한다. 태양장 28년x태음장19년x로만 인덱션 15년=율리우스 주기(Julian Period, 7980)가 되는 것 이다. 율리우스력에서는 28년을 주기로 해서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요일의 조합이 순환 되어 가 는데, 이것을 태양장이라고 한다. 다음 태음력에서는 1년이 354일이 되어 대개 태양력 과 11 일의 차이가 생긴다. 이 태양력과의 오차를 수정하기 위해 삼 년에 한 번식 윤달을 삽입하는 것이 여러 민족들 의 태음력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약간의 오차는 여전히 남게 된 다. 기원전 432년, 그리스의 천문학자 메톤이 태양력과의 엄밀한 대응을 구한 결과 19년 간 일 곱 번의 윤달을 두면, 태양력과의 관계가 다시 일치됨을 발견했었다. 이 사이클이 태음장인데,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메톤 주기'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의 로만 인덱션은 제2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스칼리게르는 태양장, 태음장, 그리고 로만 인덱션의 공배수인 7980이라는 장대한 주기를 설정했다. 그는 여기에서 다시 세 가지 주기를 동시에 출발시켜, 또 한 번 313년이 인 덱션 1 년째가 되는 등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시점을 수학적으로 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기 원으로 표현하면, 율리우스 주기 제1년은 기원전 4713년이라는 수치를 정했다. 기원전 4713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하루씩 눈금이 새겨진 7980년의 길이를 가진 자를 상상 해보면 된다. 그러나 스칼리게르가 역사는 기원전 4713년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 시 작점은 위에서 말한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단지 수학적으로 정해놓은 시점 에 불 과한 것이다. 천지창조 자체는 율리우스 주기 765년(기원전 3949년)에 놓여져 있다. 이 율리우스 주기는 내부에 태양력이나 태음력, 태음, 태양력 등의 기초가 되어 있 는 주기 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을 사용하는 민족의 달력이나 그에 따라 표시된 연호도 이 선분의 어딘가에 대응하는 위치가 주어진다. 이 대응 관계를 결정할 때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각 민족들이 남겨놓은 일식과 월 식, 만 월과 신월 등의 천문학적인 기록들이었다. 이러한 현상들의 천문학적인 계산에 의해 율리우스 주기 위에 정확하게 자리잡을 수 있으 므로, 스칼리게르는 위의 기록과 이러한 계산들을 결부하여 각 민족이 기록한 연호의 위치 를 정해갔던 것이다. 율리우스 주기를 공통의 척도로 하여, 그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고대 이후의 모든 민족들 이 사용해온 달력과 거기에서 사용된 연호를 결정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의 결 론으로 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점들이 수정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 있는 것들 도 있 다. 이 율리우스 주기의 통신 일수를 '율리우스일(Julian Day, JD)'이라고도 부른다. 이 율리 우스일은 멀리 떨어져 있는 기간의 일수 계산이나, 특정한 날의 요일이나 간지의 계 산 등 여러 가지 계산에 이용된다. 그 때문에, 오늘날에도 천문학자나 연대학자 같은 사람들은 율리우스 주기를 사용하 고 있 다. 스칼리게르의 연호 체계 그는 '시간 수정론' 제5권에서 역사상의 획기적인 대사건에 대해 연대 결정을 하는 작업 을 전개하고 있다. 전투적인 위그노였던 그답게 그의 시간 계산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은 히브리어 성서이다. 그리스도 기원 1년은 창세 기원으로 환산하면 3950년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 제1년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해와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2년(AM 394 8)이 되었다. 인류사 전체의 시간은 천지창조로부터 스칼리게르의 시대까지 5천백 년쯤의 폭밖에 없는 것이 된다. 그는 이 짧은 시간의 테두리 안에 인류 역사상 중요한 여러 사건들을 재 배치해 갔던 것이다. 그 결과를 개략적으로 표9에 정리해놓았다. 표는 '시간 수정론'과 그의 만년의 대작 인 '시 간론의 보고'의 기술을 그리스도 이전의 항목에 대해서만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표의 왼쪽 반만을 다루기로 한다. 고대 이집트에 대해서는 검토가 되어 있지 않지만, 그 시야의 넓음은 당시로서는 매 우 놀 랄 만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하나하나의 연호를 결정하는 데 있어 일찍부터 높이 평 가되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꼼꼼한 자료 검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 또한 획기적인 작업이었다. 스칼리게르에 대한 현대의 연구가인 그라프톤에 따르면, 이전에도 이와 같은 연표들 이 있 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초보적인 학생들이 성서나 고대의 역사가들의 저서들을 읽을 때 참조하기 위해 쓰인 것"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스칼리게르에 대해서는 "천지창조 이후 중세까지의 획기적인 사건들에 관해... 모든 사료의 비판적인 검토에 의해 그 각각을 확정하고, 그것들의 일시를 표시한 사람 은 오 직 스칼리게르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시 스칼리게르를 "연대학 자체를 창조 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시간'을 둘러싼 다툼 스칼리게르가 연구 대상을 문헌학에서 연대학으로 바꾼 것은 1570년대의 후반이다. 그리 고 그가 '시간 수정론 Study on the Improvement of Time'(1583)을 집필하고 있던 무 렵의 유럽에서는 '시간'의 문제가 커다란 논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율리우스력과 계절의 차이에 있었다. 춘분을 3월 21일로 정하 고, 부활 절을 이날 이후 최초의 만월 다음의 첫째 일요일로 정한 것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였 다. 이 회의가 열렸던 것은 AD 325년에는 그것으로 계절과 일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리우스력의 일 년과 태양년으로서의 일 년에는 해마다 0.9978일의 오차가 있어 서 180년마다 하루씩 달력 쪽이 앞서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1570년대에는 실제의 춘분은 3월 11일로서, 달력에서의 춘 분보다 열흘이나 빨라 큰 차이가 생겼던 것이다. 부활절은 달력에서의 춘분을 기초로 계산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뻔히 그런 줄을 알면서 도 원래 지내야 할 기간에서 동떨어져 있는 날에 부활절에 지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 다. 이와 같은 논쟁은 결국 당시의 로마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한 달력의 개정이 었다. 교황은 1582년의 10월 4일 바로 다음날을 15일로 하여, 한꺼번에 열흘을 단축시 킴으로 써 계절과 달력의 차이를 바로잡았다. 또한 율리우스력을 개량하여, 이후 유년에 대해서는 100으로 나누어지되 400으로 나뉘지 않는 해는 평년으로 하기로 정하여, 3천 년 동안 하루의 오차밖에 생기지 않는 '그 레고리 우스력'을 제정했다. 이 그레고리우스력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스칼리게르가 '시간 수정론'을 출판한 것은 그레고리우스력이 제정된 다음해에 해 당한다. 스칼리게르는 교황에 의한 달력의 개정을 반대했다. 그는 평생토록 이것을 두고 천문 학적으 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가 반대했던 배경에 있는 문제이다. 프랑스는 이것 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나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700년까지, 그리 고 역사 프로테스탄국인 영국은 1752년까지, 그레고리우스력의 채택을 계속해서 거부 했다. 여기서 스칼리게르가 위그노를 대표하는 이론가였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즉,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단순히 계절과 달력 을 일 치시킨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의 시점에서는 오히려 그 배후의 로 마 교 황권의 세계 지배 또는 그 세계지배의 일환으로서 '시간'의 지배를 수용하는가 하지 않는 가가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시간 수정론'이 출판된 시점은 종교 개혁 이후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의 투 쟁에 있어서 달력의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라는 형태로 '시간'을 지배하는 문제가 초점이 되었다. 이제 앞에서 소개한 그의 연호 체계를 상기해보자. 그의 연호 체계는 카톨릭 연대학이 베다 등을 예외로 하고 70인역 성서에 의해 시간 을 계 산해온 것에 반대하고 있다. 즉, 인류사에 있어서의 카톨릭적인 시간을 부정하고, 프 로테스 탄트적인 시간에 의한 인류사 바꿔쓰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칼리게르가 이 책을 통해 제시한 '수정'된 시간은 비록 그 자체가 학문적 연구 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의 시간'의 정확성을 주장하는 이데올 로기적 성격도 짊어지고 있는 셈이 된다. 스칼리게르가 왜 학문으로서의 연대학을 창시했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 그 자신의 훌륭한 자질과 독창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더라도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연결시켜 서 이 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대적 연대학의 발생에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회간 의 이 데올로기적 대립도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론의 보고'와 이집트의 문제 스칼리게르에게는 또 하나 '시간론의 보고 Thesarus temporum, compelectens Eu sebi Pamphili Chronicon. 영어로는 The Thesaurus of Time, Including the Chroni cle of Eusebius Pamphilus'(1609)라는 제목의 만년의 대저서가 있다. 이 저작에서는 '시간 수정론'에서 연구한 연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연 도 등을 수정하고, 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표에는'가정의 율리우스 주기'라고 하는 기묘한 틀이 첨부되어 있다. 거 기에서 이 문제, 즉 그 원인이 된 이집트사의 연원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했던 마네 토가 보여준 이집트사 연원의 문제점을 그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제기하였기 때문이 다. 그는 이미 1598년에 마네토의 '이집트지' 발췌를 출판하였다. 이것은 유럽에서 최 초로 마 네토를 소개한 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했기 때문에 그는 훌륭한 마네토의 사본을 찾고 있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마침내 마네토 사본의 발굴에 성공한 스칼리게르는 거기서 발견 한 유 세비우스와 아프리카누스에 의한 마네토의 발췌를 이 '시간론의 보고'에서 공표한 것 이다. 유세비우스와 이집트의 연원 문제는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스칼리게르도 그와 아 주 똑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더욱이 곤란한 일은 마네토가 기술하고 있는 이집트 31왕조 가운데, 그가 고안한 율리우스 주기의 범위에 들어가 있는 것은 제5왕조 시대 이후로서, 제1 왕조는 율리우스 주기의 시점보다 오히려 약 900년 정도 오래된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본래 그가 '시간 수정론'에서 천지창조 이전의 위치에 율리우스 주기의 기점을 둔 것은, 이것으로 모든 민족의 시간을 율리우스 주기 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 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그 기점마저 넘어버리는 예가 코앞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스칼리게르는 마네토의 기록에 진실성이 보인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제안한 해결책은 율리우스 주기 앞에 다른 하나의 '가정의 율리우스 주기'를 두고, 거기에 이집트사의 기점을 두는 것이었다. 기원전 4713년이라는 율리우스 주기의 기점 자체도 수학적인 기점에 불과했다. 따라 서 스 칼리게르는 이번의 조치도 일종의 수학적 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스칼리게르 에 따 라 말한다면, 이집트의 연원 문제는 '수학적 처리'에 의해 해결된 셈이 되었다. 표 9를 보면, 이 '가정의 율리우스 주기'에는 비잔틴 기원, 70인역 성서의 기원도 기입되 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기원은 사실 스칼리게르가 잘못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혹 여기에 표기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계산상의 일에 불과 한 것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집트 제1왕조의 항목은 어떠한가? 이 항목에 대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 인가 의 여부가 문제이며, 더욱이 스칼리게르 자신도 사실성을 부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된 시간의 시작인 천지창조(율리우스 주기 765년, 기원전 3947년) 이전에 이집트 사의 시 점을 둔다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수학적 처리'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상하 지 않 은가? 그러나 스칼리게르 같은 대학자 역시 이집트사의 연원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 연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몇 번이나 말해온 그대로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위에서 말한 중국의 문제, 과학 혁명이나 성서의 비판적 연구에 의해 보편사가 기초부터 흔들리게 되는 시대 직전에 해당한다. 이미 스칼리게르에게도 이 집트의 연원 문제가 그의 연대학을 위협하는 망령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갓 태어난 이 연대 학은 그 이후 점점 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연대학은 보편사의 위기 가운데에서 중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져나갈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 이다. 결국 스칼리게르는 연대학을 창조함과 동시에 '연대학 논쟁'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페타비우스 스칼리게르가 쌓아올린 연대학을 계승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어떤 논쟁이 전개되어 갔는가 를 네 명의 연대학자를 통해서 보기로 하자. 먼저 다루어야 할 사람은 스칼리게르의 엄격한 비판자로 등장하는 디오니시오스 페 타비우 스(1583-1652)이다. 그는 오를레앙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했으며, 약관 열 아홉 살에 부 르제Bourget에서 철학 교수가 되어 2년간 여기에서 지냈다. 그후 파리로 돌아갔으나, 거기서의 커다란 사건은 예수회에 입회했다는 일이다. 그 는 이를 계기로 하여 신학 연구를 하게 되었다. 1621년에는 파리대학의 신학 교수가 되었다가 1644 년에 물러나 예수회 콜레지오의 사서가 되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 있으면 서 정 력적으로 저술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많은 나라의 언어에 능통한 학자였다. 그는 신학자, 역사학자, 웅변가, 문헌학 자, 그리고 시인으로서 폭넓은 활동을 하여 스칼리게르에 못지 않았다. 그의 학식은 그가 추기경이 되기를 바랐던 교황 우르바누스 8세와 그를 프랑스에 머 물러 있게 하려 했던 루이 13세 사이에 일대 소동이 일어날 정도로 당시에 높이 평가되고 있었 다. 그러나 추기경 임명 건은 이 다툼으로 말미암아 페타비우스가 병으로 쓰러져버려 소동이 끝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병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수회의 진정한 명예'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온후한 인품으로 칭송 받았던 페타 비우스 는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전혀 참을 수가 없었다"고 소개될 만큼 심한 감정의 대립을 죽을 때까지 지속했다. 그리고 그에게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스칼리게르였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그의 '연대표'(1633)의 맨 끝에는 본문의 기술에 입각한 연표가 정리되어 있다. 이 표를 보면, 거기에는 율리우스 주기에 의한 연호가 모든 연호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 또한 다양한 민족들이 가졌던 시간에 대한 공통의 척도로 율리우스 주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스칼리게르의 맹렬한 비판자이기는 했지만 연대학을 창시한 존재로서의 스칼 리게르 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종교적 대립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 도, 학문으로서의 연대학은 종교적 대립을 넘어서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페타비우스가 보여준 각 사건의 연도는 노아의 홍수 연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스칼 리게르 의 수치와 다른 수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수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그는 스칼리게르 가 개 발한 방법에 의거하여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스칼리게르의 이론이 페타비 우스로 대변되는 카톨릭측을 압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후 중국에 대한 문제가 커질 때까지는 카톨릭측 연대학자도 히브리어 성서 에 의 한 연대학을 사용하게 된다. 물론 창세기 제5장은 라틴어 성서도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 점으로 말하자면 카톨릭측도 순교자나 전통적 연대학의 입장에서 의거 해야 했던 라틴어 성서로 되돌아왔다는 결론이 될지도 모른다. 연대학 논쟁에 있어서의 페타비우스에 관해서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마 이어의 백과사전을 보면, "기독교 기원의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시대에 대한 적용은 17 세기에 페타비우스가 창시하여, 18세기 일반에 사용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 이전 BC'이라는 연호는 페타비우스의 창시 에 의한 것이며, 실은 매우 새로운 연호인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기원 1년의 전 년을 0 년이 아닌 그리스도 탄생 전, 즉 기원전 1년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전'에 관 한 연호 산정과 표기 방법은 모두 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이론도 있을 수 있 다. 이미 베다나 슬레이다누스 같은 사람들이 개별적인 연호에 그리스도 이전을 사용 한 예 가 있다. 또 1474년 쾰른의 한 수도사가 사용하고 있었다는 실례도 알려져 있다. 그러 나 이 러한 예는 부분적이거나 고립된 예에 불과했었다. 그에 비하여 페타비우스의 경우는 체계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더욱이 그는 유럽 전체에 널리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연대학자였다. 따라서 그를 창시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고 생각된다. 단 그의 '그리스도 이전' 연호의 사용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 다. 그의 '연대표'에서는 창세 기원, 율리우스 주기에 의한 연호와 조합하여 '그리스도 이전' 의 연호 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기원은 결코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 종류의 연호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창세 기원에 의 한 세 계 연대 쪽이다. '그리스도 이전'의 연호는 그에 비하여 단순히 실용적 편의를 위하여 발명된 것이 며, 세계 연대에 대해 어디까지나 보조적 지위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정은 결코 페타 비우스 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미 뉴턴의 부분에서 뉴턴이 '그리스도 이전'만으로 연호를 쓴 것을 예외적으로 빠른 예로 삼았었다. 실제로 18세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리스도 기원은 창세 기원과 함께 병용 되면서 보조적 지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셔 다음으로는 영국의 청교도들을 대표하는 연대학자로 제임스 애셔(1581-1656)를 들고 자 한 다. 그는 아일랜드로 이주한 영국인 앵글로 아이리시의 자손으로 더블린에서 태어났 다. 아버 지는 아일랜드 재판소의 직원이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에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전쟁이다. 전쟁 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카톨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일랜드가 에스파냐와 결탁 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일랜드의 영국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1594년에 아일 랜드의 더블린에 프로테스탄트 상류 계급의 자제들을 교육할 대학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아일랜 드의 명문 대학인 트리니티 칼리지가 개교되었다. 당시 열세 살이었던 애셔는 이 학교의 개교와 동시에 입학하여, 스물 여섯 살인 1 607년 모교의 신학 교수 지위에 올라 1621년까지 근무했으며, 두 번에 걸쳐 부학장도 지냈 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 연구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615년에 아일랜 드 교 회 회의에서 '아일랜드 신앙개조'가 결의되는데, 거기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사람이 그였 다. 그 내용은 로마 교황을 '죄인'이라 부르고 미사를 전면 부정하는 등 강한 칼뱅주 의적 색 채와 강경한 반카톨릭주의로 일관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1603년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는 데, 그 는 왕으로부터 1621년 미스의 사교로, 다시 1625년에는 아머의 대사교, 아일랜드의 수 석 사 교로 임명되었다. 또한 1640년에는 영국으로 가서 찰스 1세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같은 해인 1640년 그는 장로파의 입장에서 장로제도와 국교회의 감독제도를 통합 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1642년에 청교도 혁명이 시작되 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왕당파였던 그는 왕당파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1643년에 의회파가 개 최한 '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초청되었던 그는 당당히 회의의 비합법성을 주장하여 즉석에서 축출 당하기도 했다. 그가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학식과 평소 반대파에 보여주었던 관용의 자세 로 얻 어진 그의 명성은 혁명 후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죽은 후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서 국 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이 조치를 명령한 것은 크롬웰이었다. 스칼리게르의 연대학적, 역사학적 저작이 가장 일찍 받아들여진 나라는 영국이었다. 위그 노와 청교도간의 종교적인 연계가 그 원인이 되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스칼리게르가 뿌린 씨앗이 차례로 싹을 틔워갔다. 그리고 스칼 리게르 의 계승자들 가운데에서 영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 애셔였다. 신학자로서의 애셔는 특히 소아시아의 초기 교부들과 교단의 연구로 유명하다. 뛰어 난 어 학력을 뒷받침으로 한 그의 연구와 간행 자료집 등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 다. 그의 연대학도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율리우스 주기 710 년 10 월 23일', 즉 기원전 4004년에 천지창조를 위치시키는 하나의 체계로 되어 있다. 애셔의 이 연대학에는 또 한 가지, 종말론적 역사관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도 지적 해두고 자 한다. 그는 뉴턴과 마찬가지로 '인류사 6천 년'이라는 고대 이후의 관념을 수용하 고 있었 다. 청교도 혁명과 천년왕국론의 결부는 오늘날 영국 혁명 연구에서 주목되고 있다. 당시는 종말론적 사고방식이 강했던 시대였다. 애셔도 그러한 가운데에서 연대학의 기호에 이 사고방식을 고착시켜놓고 있다. 그에 의하 면 우리는 대단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의 연대학에 따르면 1996년에는 종말이 찾아와 세상 이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대학은 칼뱅주의라는 채널을 통해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비롯하여, 미국에도 퍼져 나갔다. 네덜란드에 관해서는 이미 호른의 예에서 보았다. 미국에 관해서는 나중에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의 연대학에 의한 연표가 영국 흠정역 성서에 기록되어 발매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그의 연구 를 인정하여 그의 연대학을 받아들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애셔의 체계는 단순히 영국의 청교도 연대학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영국 국교회가 공인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보쉬에 프랑스의 카톨릭계를 대표하여 보쉬에(Jacques-Benigne Bossuer, 1627-1704)를 보기 로 하 자. 그는 프랑스 동부의 디종Dijon에서 태어났다. 그 시의 시장을 지내던 삼촌 댁에 서 자란 그는 열 살 때 이미 성직에 입문했다. 파리의 나바르 신학교College de Navarre에 들 어가서, 1652년에는 신학박사와 동시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그때 이미 파리에서는 지도적 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유명한 랑부이에 후작 부인의 살롱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로서 수도회나 교회뿐만 아니라 궁 정에서 도 설교를 하고 젊은 루이 14세에게 왕으로서의 의무를 가르치기도 했다. 더욱이 루이 14세 왕자의 교육관이 되는 등(1670-1681) 궁중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1681년에는 모어의 사교가 되어 '모어의 독수리'라고도 불렸으나, 이는 프랑스 문학 사에서 도 제일로 평가되는 그의 웅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정치면에서도 그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프랑스는 종교 개혁 시대 이후에도 카톨릭 진영에 머물렀다. 프로테스탄트 제국의 교회들이 그 나라의 군주들에게 복종했듯이, 프랑스 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는 복종하면서도 로마 교황으로부터는 독립성을 획득 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져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골리카니즘(Gaulicanism, 프랑스 국교회주의)이라고 부르는 데, 1682 년, 보쉬에가 중심이 되어 정리한 '프랑스 성직자 선언(4개조)'은 '골리카니즘의 마 그나카 르타'라고도 불리고 있다. 로마 교회에 대하여 프랑스 교회의 자립성과 프랑스 왕권 정치에 있어서의 절대적 독립 등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에 의해 완성되는 프랑스 절대왕정에 대해 그 는 이 것을 교회의 측면에서 떠받치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보쉬에게는 또한 종교 이론가로서의 무거운 임무도 부여되어 있었다. 프로테스탄 트와의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 과학 혁명의 세기가 진행되어 가는 가운데 '자유 사상가'라고 불리는 사상가들이 나타나 카톨릭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반카톨릭적 조류에 대한 이론 투쟁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카톨릭 교회내부의 동요를 진압하는 역할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세계사론'(1681)은 직접적으로는 당시 담당하고 있었던 왕자의 교 육관으 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한 교과서로 저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이런 목적만으로 쓴 것 은 아니었다. 이 저작에 착수하는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은 제3장에서 소개한 리샤르 시몽이 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시몽의 '구약성서의 비판적 역사'(1678)라는 책의 발매를 금지시킨 것은 보쉬 에였다. 시몽은 출판에 앞서 이미 국왕의 허락이나 검열관의 승인은 물론 자신이 속해 있었던 오라 토리오회 총회장의 허가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보쉬에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국왕에 게서조차 '헌정사'를 받았을지도 몰랐던 일이다. 보쉬에는 마침 사적인 서클의 회원을 통하여 시몽의 저서 목차를 구경했던 것이다. 한눈 에 그 책이 지니고 있는 뜻을 알아차린 보쉬에는 당장에 대법관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 를 강 제로 설득하여 이 책의 발매를 중지시켰다. 그날은 '성 목요일'로 교회의 의식과 회개에 충당된 엄숙한 날이었다. 그러한 날이 었음에 도 불구하고 그는 이 조치를 취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만큼 위기감이 강했다 는 의 미이다. 그는 당시의 사상적 상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 몇 차례나 '자유 사상가'들과 논쟁 을 벌 였었다. 이처럼 단련된 그의 시각이 시몽의 이론에 잠재되어 있는 위험성을 놓치지 않았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판금지 조치만으로 시몽의 논의를 누를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 다. 그래서 보쉬에는 카톨릭 정통파의 입장에 선 역사관을 보여줄 필요를 느껴, 스스 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연구를 통해 얻어진 그의 연대에 관해서는 기묘한 일이 있다. 세계 연대표를 자세히 관찰한 독자라면 알아챘을 것이다. 그것은 보쉬에와 애셔의 연호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보쉬에 또한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한 연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의 연호 이외에는 여러 대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것은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치를 도저히 우연이 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물론 시대의 전후 관계로 보아 이치를 시킨 것은 보쉬에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존슨이라는 학자는 이와 같은 사정을 '완전히 구약성서의 연호에 따랐다기보다는 다 른 여 러 가지 이유 때문에'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더 이상 깊이 있는 설명은 아니다. 당시 는 아직 도 낭트 칙령이 폐지되지 않았으며, 프랑스에는 광범위한 위그노들이 존재하고 있었 다. 그들을 중심으로 애셔의 연대학이 프랑스에서도 널리 수용되고 있었다는 상황이 배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정보를 아직 얻 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신, 구 교회 거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은 연대학 논쟁의 시대에 커다 란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천지창조를 기원전 4004년으로 하는 연대학을 프로 테스탄 트와 카톨릭 교회가 동시에 공인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연대학 논쟁은 종결된 것일까? 사실 보쉬에의 세계사에서는 중국의 연원 문제가 무시되었다. 그것은 보쉬에가 취한 방법으로는 당연한 결과였다. 성서에 따라 세계사 를 서술 했으므로 이와 같은 전통적인 보편사의 세계에는 중국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가 '세계사론'을 저술한 1681년에는 이미 마르티니의 '중국 고대사'(165 8)도, 포 시우스의 '세계의 진정한 나이에 관하여'(1659)도 출판되어 있었다. 중국의 연원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고 말해두었었다. 보 쉬에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 유형, 즉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무시하는 유형에 속한 다. 그러나 중국의 연원 문제가 점점 더 커지게 되면서 이와 같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으 리라 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페즈론 마지막으로 폴 페즈론(1639-1706)의 연대학을 보기로 하자. 그는 브르타뉴의 소도시 출신 프랑스인으로서, 스물 두 살 때 시토파 수도회에 입회한 뒤 파리의 베르나르 신학원에 서 공 부하였으며 뒷날 그 원장이 되기도 했다. 51세로 원장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수도원의 심사관고 수도원 관계의 직무들을 맡아 왔다. 이런 직무들을 맡는 한편, 그는 문헌학과 역사학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 을 계속 한 결과 시토파를 대표하는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연대학의 특징은 노아의 홍수의 연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70인역 성서를 기초 로 삼고 있는 데에 있다. 그는 히브리어 성서가 1세기경의 유대인들에 의하여 개찬된 것이 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연대학의 논리에 따라 족장들의 나이를 마음대 로 줄였다는 것이다. 즉, 그로 인해 아직 메시아가 출현하지 않았음을 표시하는 것이 목적이 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위조 행위를 감행한 유대인들은 개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고대 의 히 브리어 텍스트 전부를 조직적으로 파괴했다고 한다. 따라서 파괴되기 이전의 오래된 텍스트 에 가까운 성서가 지금까지 존재한다면, 그것은 70인역 성서밖에 없다는 것이 페즈론 의 주 장이었다. 페즈론이 이 논쟁에서, 원전으로 삼아야 하는 성서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 배경 쪽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저작인 '고대 복원' (1687) 이 보쉬에의 주장과는 달리, 마르티니나 포시우스의 주장을 의식해서 씌어져 있기 때 문이다. 예수회의 중국 습속에 대한 타협적인 방법과 이에 반대한 프란체스코회나 도미니크 회 등 의 논쟁(전례 문제)이 1643년에 로마 교황에 제소하는 데까지 발전한 이후로, 중국 문제는 유럽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예수회의 수사들은 스스로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의 소개에 나서고 있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차차 중국의 문제가 유럽인에게 있어서 진퇴 유곡의 문제로 의식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생각한다면 페즈론의 주장은 예수회 쪽을 지지한 내용 이며, 그 중점은 70인역 성서를 따르게 되면 중국(이집트를 포함하여) 역사의 연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필자만의 해석이 아니다. 이미 그 당시에 보수파들은 이집트인들이나 중국인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성서 의 텍 스트를 고른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페즈론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 로 비 판했기 때문이다. 보수파들의 비판으로 페즈론의 '모독 행위'가 사람들에게 신용을 잃었을까? 그렇게 되지 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 앞에서 말한 보쉬에이 다. 페즈 론의 '고대 복원'이 출판된 후인 1700년에 보쉬에는 '세계사론' 제3판을 출판했다. 여기에서 그는 "만일 독자들이 이집트의 역사나 중국의 역사 가운데 여러 사건을 수집함 에 있어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는 우르가타 성서에 의한 연대 기록법으로 불충분하다고 생각 한다면, 70인역 성서의 연대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의식적으로 추가하여 기록했 다. 이런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 아자르는 "페즈론 신부와 마찬가지로 보쉬에는... 순수 하게 연 대상의 이유로 성서의 두 가지 번역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만 큼 당혹스러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최고 지도자의 '당혹'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보쉬에가 애셔의 연 대학에 자신의 설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일단 수습된 것으로 보였던 연대학 논쟁은 당사자인 보쉬에 의 동요로 인해 한층 더 혼미한 상황이 된다. 그 동요를 가져다준 것이 이집트사와 중국사 의 연원 문제였다. 연대학의 창조자인 스칼리게르에서 시작하여 17세기 말까지의 연대학 논쟁을 살펴보 았다. 이 논쟁이 지향한 바는 -보편사가 각양각색의 압력을 받고 있는 가운데- 연호의 수정 을 통 해 보편사의 시간적 테두리를 지키고, 나아가 보편사 자체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사를 옹호하기 위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은 자연스레 연대학이 담당하 고 있 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연대학은 그 자체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일부 였다. 맨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입장에 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스칼리게르 이후 학자 라면 누구나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를 둔 연대학을 전개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사나 특히 중국사의 연원 문제에 도달하면, 또 다시 70인역 성서의 지위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이 진전되는 한편,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진행되어 보편사의 기초 가 되 어 있는 성서의 지위 자체가 동요를 더해가고 있었다. '과학 혁명'의 진행 속에서 이 신론이 등장하여 신에 대한 개념도 모습을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자유 사상가'들에 의 해 기독 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높아져갔다. 이와 같이 복잡한 상황이 진전되는 가운데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등장하 는 것 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의견들을, 여러 가지 예에서처럼 서로 관련되거나 대립 하면서 각자의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통해 대략 살펴본 셈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일치를 보아가기는커녕, 점점 더 혼란이 심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혼미는 18세기까지 지속되어간다. 표1 에 채록 한 최후의 예인 가테러가 18세기 후반의 독일 역사가라는 것으로도 이 혼란성은 쉽게 이해 될 것이다. 제4장 보편사에서 세계사로 계몽주의적 세계사의 형성 볼테르에 의한 역사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연대학 논쟁은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에 마지막 국면을 맞게 된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 는 계몽주의자들의 보편사 비판이다. 여기에서는 계몽주의자의 대표로, 역사학에 있어 서 '코 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초래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볼테르를 예로 들어 그들의 주장 을 살 펴보기로 하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루이 14세의 세기Le Ciecle de Louis 14'(1751)에 서 세계사 에 관한 기본 인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사상 특기할 만한 것으로서는 네 개의 세기를 세는 데 불과하다." 이 네 개의 세기에 대해서 그는 "먼저...'필립과 알렉산더의 시대(그리스', 다음은 '두 번째 는 시저(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로마)', '세 번째는 콘스탄티노플이 모하 메드 2 세의 손으로 들어간 직후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사람들이 부르기를 루이 14세의 세기'라고 한다. 이 마지막 시대는 아마도 네 시대 가운데에서 가장 원전에 가까울 것이다. 앞에 든 세 시대의 소산을 이어받았으며, 분야에 따라서는 이 세 시대를 합한 것 이 상의 진보까지 보여주었다... 대체로 이지 그 자체가 완벽에 다가선 것이다"라고 서 설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역사 서술은 우선 첫째로, 오늘날 말하는 '문화사' 또는 '정신사'에 해당한 다. 또한 그가 말하는 '네 개의 세기' 가운데 앞의 세 개는 오늘날의 그리스 고전문화, 로마 고전문 화, 르네상스이다. 이 네 개의 세기는 보편사에서처럼 기독교적 관점에 가려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의 바탕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 에서 말하는 이성이란, 르네상스를 통해 신앙에서 독립하여 '과학적 혁명'을 산출해 낸 이성 이다. 볼테르는 '이지' 또는 '문화'를 처음으로 역사의 주요 테마로 하고, 이에 의해 역사학 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준 것이다. 오늘날 융성한 문화사, 정신사는 계몽주의가, 직접으로는 볼테르가 그 출발점을 부 여한 것 이다. 둘째로, 이 네 개의 시대는 조악하나마 인류가 점차적인 완성으로 향하는 진보의 단계로 선정되어 있다. 볼테르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이성을 가진 인간을 역사의 기초에 두 고 그 위에서 이 진보관을 기둥으로 하는 세계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편사도 역시 일종의 진보사관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에 의 한 인 류 교육의 발전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평가하고, 그 진보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볼테르의 진보사관은 이성적 인간이 활동하는 세속적 세계에 주목하여, 그 정 신과 문화의 진보 과정을 서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자기 계몽의 발전 과정이 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테르의 진보사관은 기독교적 진보사관을 세속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리고 이 세속화를 대담하게 행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역사 서술을 위한 길을 열었던 것이다. 뉴턴의 물리학적인 시간 계몽주의자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이미 보편사에서와 같은 짧고 유한한 시간이 아니 다. 볼 테르에게서 이 점을 살펴보자. 그는 이신론자였다. 또한 뉴턴을 최초로 프랑스에 소개 한 사 람 가운데 하나였고, 열렬한 뉴턴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당연하게 뉴턴의 물 리학적 인 시간 위에서 역사를 포착해갔던 것이다. '역사 철학'(1765)에서 그는 역사의 기술에 대해 '지구상의 제반 변화'에서부터 개시하 고 있다. 물론 아담과 이브, 에덴 동산 같은 보편사에서 낯익은 기술은 전혀 없다. 초기의 인간은 오랫동안 '야생의 동물들과 같은 상태'로 지내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겨우 "몇 천 년, 몇만 년이 지난 뒤에 몇몇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고 있다. 문명이 발생하는 것은, 훨씬 다음의 일이다. 인간이 "우선 최초에 알아야 할 일은, 호구지 책을 강구하고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다... 둘째는 말을 만드는 일로서, 이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셋째는 몇 개의 움막을 세울 필요가 있다. 넷째로는 옷을 만들어 입을 재주가 필요하다. 이어서 쇠를 단련하기 위해, 혹은 그 대신이 될 수 있는 물건을 찾 아내기 위해 실로 많은... 노력과 세월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나 인류사의 시점에 관해서는 언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데아인이 인류 역사의 기간으로 전하고 있는 47만 년이라는 수치에 대해서는 "우주 전체로 본다면 대단한 것 도 아 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장구한 시간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 면, 인류사의 연원을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으로 재는 것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 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연호 표기의 문제 그러나 볼테르가 여기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와 같 은 새로운 시간을 어떤 수단에 의해 표기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역사 철학'에서 '세계 연대'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 이전 avant Jesus-Christ'도 쓰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가인 마에카와씨도 '역사를 생각한 다'(1988)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신하여 우리들의 '통속 기원전 avant notre ere vulgaire'으로 연호를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5경'이 우리들의 통속 기원전 2300년에 씌어졌다"고 하는 식이다. 또 기원 후의 연호에 관해서도 AD를 사용하는 대신 주(Dominus)라는 말을 뺀 상태에서 숫 자만을 표기했다. '통속 기원'이라는 말은, 제2장에서 얘기한 디오니시오스에 의한 기독교 기원의 별칭이 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 기원의 연호와 수치는 다를 것이 없다. 그는 왜 굳이 '그리스도'나 '주'라는 말을 빼고 이와 같은 연호를 사용한 것일까? 그것 은 기독교적인 시간은 부정했지만 새로운 시간에 대한 적절하고 새로운 표기 수단을 강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종교적인 의미를 박탈하고 난 다음 의 그 리스도 기원의 연호를 채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도 기원을 처음으로 '예수 이전'으로 연장시킨 페타비우스는 어디까지나 '창 세 기 원'을 연호의 기초로 하고 있었다. 한편,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기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아무런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형태의 볼테르의 '통속 기원' 사용은, 그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스도 기원과 페타비우스의 창세 기원의 가운데, 말하자면 징검 다리로 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볼테르는 창세 기원과 분리한 다음에 페타비우스의 '그리스도 이전'에까지 연장한 연호 체계를 채용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주'라는 단어를 제외함으로써 연호 표기의 '세속 화'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보편사적 세계의 부정 그는 '역사 철학'의 처음 몇 장에서 지구상의 여러 가지 변화, 즉 원시 시대의 사 람, 사회, 종교 등을 다루고, 그 다음으로는 아메리카인, 칼데아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인 도인, 중 국인 등의 문화에 대해 다루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이집트인,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볼테르가 묘사하고 있는 세계는 이와 같이 지구 크기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앞장 까지의 대항해 시대에서의 세계의 확대에 부응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전통적인 보편사 의 세 계를 결정적으로 타파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가 확대된 것만이 아니다. 중국, 인도, 이슬람 등 보편사에서는 이제까 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여러 종류의 문명을 들추어 그들 모두를 높게 평가하고, "칼 데아인, 인도인, 중국인은 가장 일찍부터 개화한 문화 민족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총괄했다. 그는 이리하여 문명의 일원적 발생을 주장하고 있는 성서에 반대하여 다원적 발생론 을 주 장하고 있다. 그리고 보편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히브리인(유대인)에 관해서는, "이 민족 은 가장 새로운 부류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 나님은 유대 민족 이외의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배타적인 민족신임이 분명 하다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가장 새로운 민족 가운데 하나인 유대인들의, 그것도 편협 한 민 족 종교의 교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 역시 구약성서를 기초로 하고 있는 보편사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라는 것은 재론 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중국 문제의 의미 변화 볼테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대기가 중국의 것이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중국의 연대기는 중단되는 일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 역사의 오 래됨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국의 연원에 대한 승인은 보편사 비판으로까지 연계되어간다. "이 오랜 민족은 지구상의 물리적 대변화, 즉 대홍수라든가 큰 화재와 같은 사건의 어느 한 가지도 역사에 기록된 바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풍토는 이와 같은 재해 로부터 지켜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노아의 홍수가 지구 전체를 뒤엎었다는 구약성서의 기록을 공격하는 근거로 중국 역사가 이용되고 있다. 이 비판은, 당연히 노아의 홍수의 연호 부정으로 연결되어 간다. 원래 보편사적인 짧고 유 한한 시간을 부정한 계몽주의는, 중국 역사의 오래되었음을 인정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의 연원 문제는, 오히려 노아 이후의 시간의 범위내에 중국 역사를 수용 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보편사의 입장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문명을 높이 평가하는 일과 그의 진보사관과의 관계에 주목한다면, 볼 테르에 게 있어서 중국에 대한 평가 문제가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도 관찰할 수가 있 다. 볼테르에게 있어서 중국 문제는 보편사의 경우와 같이 연원이 오래되었는가 오래되 지 않 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문제는,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 는 중 국을 어떻게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진보사관과의 관계로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 다. 이 문제에 대해 '루이 14세의 세기' 가운데에서 학문의 세계와 도덕이나 치안의 세계를 구별한 다음에, 중국인을 "도덕이나 치안의 점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또 한 가 장 뛰어난 국민"이라고 했다. 한편 학문의 면에서는 "선철들을 존경하는 나머지, 여 기에 주 어진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결국에는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실천면에서는, 중국이 오히려 정치, 도덕 등이 세계 최 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수준은 "2천 년 이상 전에 발전의 최종 단계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머물 러 있 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중국은 '학문에서는 뒤져' 있는 상 태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들었던 '네 개의 세기'론에서는, 진보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 를 들 고 있는 사건들이 모두 유럽에서의 사건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볼테르의 해답은 중국 문명의 특징을 '정체'라고 하고, 유럽의 그 것은 진 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은 계몽주의 시대 유럽에서 일반화되어 중국과 동양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로 정착되어 간다. 보편사의 붕괴 캘러리우스와 '고전적 3구분법' 보편사의 붕괴와의 관계에서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은, 17세기 말에 제안된 새로운 시대 구분법, 즉 오늘날 '고전적 3구분법'이라고 불리는 고대, 중세, 근대라고 하는 세 시 대로 구 분하는 법에 관해서이다. 이 3구분법을 맨 처음 역사 기술에 채용한 사람은 독일의 역사학자인 크리스토프 켈 러(켈 러리우스, 1638-1707)였다. 그는 대대로 많은 학자를 배출한 프로테스탄트의 명문 집 안 출신 으로 바이마르, 메르세부르크 등에서 김나지움의 교수, 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훌륭한 교육자라는 명성을 얻어 1693년 할레 대학의 창립과 동시에 이 대학 철 학부 의 역사 교수로 초빙된 사람이다. 그는 역사학뿐 아니라 지리학과 고전에도 능통했으며, 이 분야들에 관한 다수의 저작과 교과서를 집필하였다. 또한 독일 전역에 떨친 명성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을 할례로 끌어들 인 유명한 교수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활동중에 세 권으로 된 신서판 크기의 세계사 교과서를 썼다. '고대사 Historia aniqua', 1685년 '중세사 Historia meii aevi', 1688년 '근대사 Historia nova', 1696년 먼저 고대로부터 보아간다면, 켈러리우스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님롯이 건설한 칼 데아인 의 소왕국에서 시작한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점은 그의 식견을 나타내 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내용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어서 니누스로부터 사르다나팔루스에 이르 는 아시리아로, 다시 최후의 로마까지, 전통적인 보편사에서 낯익은 제국들을 서술했 기 때문 이다. 그는 좀처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데에서는 노아의 홍수를 1646년, 님롯을 1770년으로 하는 등 역시 창세 기원을 사용했다.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지표가 되어 있는 것도 이교 시대에서 기독교 시대로의 이동,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이어서 중세로 들어가는데, 여기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의 4세 기에서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세기마다 장을 따로 하여, 각 세기에 있어서 의 기독교인 세계의 움직임이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근대는 1453년 이후에 대해 역시 세기마다 장을 따로 하여, 정치사를 중심으 로 17세기까지 유럽 세계의 움직임이 서술되어 있다. 중국이나 아시아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켈러리우스의 서술은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 만 켈 러리우스의 이 저작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대, 중세, 근대라고 하 는 시대 명칭이 역사의 서술에 등장한 최초의 일이었다. 가테러와 괴팅겐학파 보편사는 마침내 붕괴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가테러이다. 요한 크리스토프 가테러(1727-1799)는 1759년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괴팅겐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지냈으며, 그 동안에 이 대학을 독일 역사학의 중심적 위치로 끌어 올렸다. 1737년에 갓 창설된 괴팅겐 대학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자유로운 대학이며, 여러 가 지 새 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 한 가지 예가 세계사의 강의를 신학자가 아닌 역사학 자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덕분에 그는 그때까지 연구하던 독일 중세에서 떠나 처음으로 세계사 연구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가테러의 강의는 그 참신성으로 인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 켜, 교 실만으로 부족하여 창 밖에서라도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로서 그의 활동은 역사학을 하나의 전문적인 학문으로 육성하기 위해 바쳐 졌다. 괴팅겐 대학은 1766년에 '역사학 연구실'을 설립하여, 역사학을 전문적인 학문으로 인지한 독인 최초의 대학이 되었다. 이 연구실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가테러였다. 그는 여기에서 세미나를 통해 제자들을 육성하고 사료의 수집과 저서의 편찬을 해나 갔다. 그리고 독일에서 최초로 역사학 전문 잡지를 발간하고 이 잡지를 무대로 역사학의 독 자적인 성격과 임무를 둘러싼 이론적 고찰과 비평 활동을 전개했다. 또 본업인 역사서의 출판 뿐 아 니라, 역사학 보조과학의 정비에 관한 일도 했다. 그는 문장학, 고문서학, 계보학, 지리학, 연대학의 교과서도 썼다. 그리고 이와 같 은 다방 면에 걸친 정력적인 활동에 의해 가테러는 '괴팅겐학파'의 창시자가 된다. 그는 거의 십 년마다 네 종류의 범주가 다른 세계사에 대한 저서들을 집필하고 있 다. '보 편사 교과서'(1761), '보편사 서설'(1771), '세계사'(1785), 마지막으로 '세계사 시 론'(1792)이 그것이다. 앞의 두 책에는 '보편사Universalhistory'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뒤의 두 책에 는 '세계 사Weltgeschichet'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명칭의 변경은 가테러의 입장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 변화의 내용 을 전 기의 '보편사 서설'에서부터 후기의 '세계사'로의 이행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보편사 서설 가테러의 출발점은 보편사였다. '보편사 서설'은 18세기라는 시대에 보편사를 대응 시키려 는 그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류사는 크게 4기로 구분되며, 제1기는 천지창조(아담과 이브)로부터 서술이 시작 되고 있 다(창세 기원). 1656년에 전세계를 뒤엎은 노아의 홍수를 거쳐, 여덟 명에서 새로이 인류사 가 재출발한다는 것 등 지금까지의 보편사와 다름없는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제2기의 시점도 펠레그의 시대와, 1809년의 바벨탑의 사건에 두어져 있으며 이를 여 러 민 족의 발생기로 삼고 있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구약성서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관해서 가테러는 '여러 민족 체계'가 계승하는 시대로 그려간 다. 그는 '세계제국'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특정의 지배적 민족, 그리고 그 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은 여러 민족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세계를 '여러 민족 체계'라고 불렀다. 처음의 세 가지, 즉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적 민족 체계까지는, 전세계사 가 단일 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와 파르티아(Parthian Empire, BC 247-AD 224)의 시대가 되면 아시아와 유 럽이 분리되어, 세계에 두 개의 민족 체계가 병존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 다. 제3기에 대해서는 먼저 이 시대가 전체로서 '중세 Mittlere Zeit'라고 불리는 점 에 주의 해야 한다. 이 기간에는, 아시아와 유럽 각각에 복수의 민족 체계가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 다. 이와 같이 많은 민족 체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시대로 표현하기 위해, 중세라는 시대명 을 사 용한 것이다. 그에 의한 중세의 기간은 민족 이동기인 5세기로부터 신대륙의 발견(1492)까지로서, 앞에 서 소개했던 켈러리우스의 구분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이 3분법의 사용에는 주의해두 고 싶 다. 그 이후 시대의 서술 내용에 관해서는, '민족 이동기' 가운데에서 그 계기를 부여 한 훈족 이 중국사에 등장하는 흉노족일 것이라는 추정을 실마리로 하여 중국사가 기술되어 있다는 것, 조선사나 일본사 등 몇몇 아시아 나라들의 역사가 제4기의 '비유럽 제국'의 항목 에서 서 술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와 같은 기술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유럽인이 처음 만났던 시점으로 그 나라들의 역사를 다시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 을 채 용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 한국 등을 하나의 '여러 민족 체계'로 평가할 것인가의 여부 에 대한 문제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전체의 구조를 보았다. 가테러가 지구 규모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 기술을 시도하였고, 그로 인해 전통적인 4세계제국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 던 것, 또한 그 대신 시대 구분에 새로운 3구분법을 도입해야만 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연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전체의 기초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 나 성 서였다. 이는 18세기라는 시대에 부응하여 지구 규모의 세계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 하고자 하는,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사가 되었다. 가테러의 강의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원인은 바로 이 새로움이었다. '세계사'에서의 변화 그의 세 번째 세계사 서술은 '세계사'라고 이름이 붙여져, '보편사'라는 명칭이 떨 어져나 가게 되었다. 이밖에도 '세계사'에서는 많은 점에서 가테러의 입장이 변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성서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 이전까지의 그는 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한 마디, 한 문장에 하나님의 영감이 깃들어 있다는 사고방식, 즉 축어적 영감 위에 서 있었다. 그러 나 여기에서는 성서를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편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변화는 당연히 그의 역사 서술에도 반영되었다. 이전의 시대 구분의 제1기는 지 금까지 도 성서에만 의존하여 기록해온,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의 시대로 충당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이것을 '가장 오래된 전통적 역사'라는 명칭으로 묶어놓고 있다. 즉, 이제 까지는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믿어왔던 창세기 등의 기술을 '전설'이라고 생각하 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그 '전설'에 대해서도 "히브리인의 전승은 노아 집안의 조상에 대한 것, 즉 셋을 시조로 하는 대민족 중의 한 줄기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고까지 한정을 해버렸 다. 따라서 성서는 '셋을 시조로 하는 대민족의 한 줄기'인 히브리인의 '전설'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아의 홍수까지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에 대해서도 홍수가 전세계를 뒤엎 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실은 인더스 강 상류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홍수였다고 한다. 방 주에 탔 던 것도 노아 일족과 그 지방의 동물에 불과했고, 성서에는 씌어 있지 않지만 다른 지방에 서는 홍수와 상관없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보편사에서 항상 이야기되어왔던,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여덟 명에 서부터 인류사가 재출발한다는 주장을 부정해버렸던 것이다. 그밖에도 변화는 더 있다. 표 2의 시대 구분으로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연호 체계를 바꾸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는 페타비우스의 연호 체계를 채용해왔었다. 그러나 이 세 번 째의 '세계사'에서는 노아의 홍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탄생까지의 기간을 198년간이 나 연 장했다. 그 원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이집트의 역사와 중국 역사의 연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까지는 그도 대홍 수로부 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를 1656년에서 3983년까지로 하는 페타비우스의 연호 체계에 어떻게 해서든지 양자를 밀어넣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끝내 이를 체념하고 연호 쪽을 바꾸었던 것이다. 당시의 독자들은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 기원에 의한 연호가 지녔 던 숙명이기도 하다. 중간의 어딘가에서 계산이 바뀌면 그 다음에 있는 연호들은 모두 변하 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연구자들마다 다른 연호 체계를 제출하는 처지가 된다는 것은 표1에서 보 는 바 와 같다. 물론 그도 가능하면 연호체계를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테러의 이러한 변화는 이집트와 중국의 연원 문제가 보편사 쪽을 궁지에 빠뜨렸던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 다. 가테러는 '세계사'의 구성 자체도 바꾸었다. '세계사'에서는 '보편사 서설'과는 전 혀 다른 원리에서 시대 구분을 6단계로 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책, 즉 '세계사'에서 시대를 구분한 원리는 정치사적인 관점에서였으 나, 이번 에는 문화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각 장에서는 각각의 문화적 단계에 서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이 어떠한 공헌을 했는가를 각 민족별로 서술해놓았다. 모세나 소크라테스와 나란히 공자나 조로아스터(Zoroaster, BC 10세기경, 고대 페 르시아 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교주)와 같은 사람들의 공헌을 설명해나갔다. 여기에서는 중국인의 문화 역사상의 영웅들에게 히브리인이나 그리스인, 그리고 로 마인들 과 동등한 지위가 부여된 채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적인 진보사관에 기초 하는 세계사 서술을 향한 가테러 나름대로의 접근이며 수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 책에서 가테러는 보편사의 입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 다. 그 렇지만 서술의 내용은 이미 전통적 보편사의 입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이 책에 '보편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세계사'라는 이름을 붙 인 원인 이라고 생각된다.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그는 계몽주의적 세계사로 향하여 크게 변화한 것이다. 보편사의 자기 부정의 발자취 이러한 변화는 그후로 한층 더 추진되었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세계사 시론'에서 는 일본 이나 중국, 아라비아와 인도 등 아시아 전체의 여러 나라들을 포함한 계몽주의적 문화 사, 혹 은 오늘날의 '사회사'적인 기술이 되어 있다. 더욱이 창세 기원을 사용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편사적인 요소들은 이미 거의 자취를 감춘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가테러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인류사의 제1기로 아담에 서부터 님롯Nimrod까지의 시대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관해서는 모두가 '전설적인 역사'로 치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861쪽 에 달하는이 책의 분량 가운데 여기에 관해서는 불과 2쪽밖에 없다. 결국 가테러는 연구자로서의 생애를 통하여 전통적인 보편사의 기본적 요소를 거의 다 부 정해버렸다. 처음에는 4세계제국론을 포기했고, 이어서 노아의 홍수를 국지적인 천재 지변으 로 파악했으며,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히브리인 가운데 노아의 자손들에 대한 역사밖에 기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성서 자체를 몇몇 인간 집단이 남긴 역사적 문서로 만들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창세 기원을 버리지 않았다. '전설'이라고 말했지만, 마지막 저 서에서 도 아담으로부터 세계사 서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보편사의 부정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진지한 프로 테스탄트였다. 원래부터 보편사적인 입장에서 출발했던 가테러가 보편사를 거의 부 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 데야말로 그의 역사적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 다. 18세기라는 계몽주의 시대 가운데에서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공격 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보편사는 내부로부터도 자기 부정을 향한 발걸음을 옮겨갔던 것이 다. 가테러는 이 보편사의 자기 부정의 발걸음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 다. 슐레처와 세계사 가테러를 괴팅겐학파의 시조라고 한다면, 제2세대의 대표자는 아우구스트 루드비히 폰 슐 레처(1735-1809)이다.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다음에 언급하게 될 미하엘리스에게 배 웠으며, 1769년 이후 1805년까지 모교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는 한편 다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했 던 사 람이다. 북유럽과 러시아의 역사를 비롯하여 상업사와 경제사, 나아가서 정치 평론에 이르 기까지 매우 폭넓은 활동을 했다. 그는 비판 정신이 왕성하여, 그 당시 가장 대표적인 계몽주 의자의 한 사람으로 다방면에 걸쳐 전투적인 논쟁을 펼쳤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 하면 마리 테레사(Marie-Louise-Therese, 1791-1847) 가 개 혁 사업을 입안할 때마다 슐레처가 어떻게 비판을 할까 하고 신경을 썼다고 전해질 정 도이 다. 역사가로서 그는, 초기에는'보편사의 관념'(1775)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고 있으며, 아직도 '보편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곧 이에서 탈피하여 명확하게 보편사를 부 정하기 에 이르렀다. 그의 보편사 비판의 논의를 '세계사Weltgeschichte'(1785)에서 보기로 하자. 그는 우선 서문 첫머리에서 "보편사는... 성서 문헌학과 세속적 문헌학의 보조 과 학에 불 과했다"고 말한다. 역사학을 독립된 학문이라고 보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종 속적인 지위에 안주하는 보편사를 긍정할 수 없었다. 그는 독립된 학문인 역사학은 보편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서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 그리고 '세계사'란 모든 사실의 계통적인 집대성인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대 지와 인 류의 현상을 근본부터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는 역사가 '모든 사실'에 기초하고, 성서에 입각한 역사 이해라는 보편사 의 입장 을 확실하게 포기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가테러와 마찬가지로 슐레처도 보편사에서 세계사로 전환한 셈이지만, 그는 이와 같 이 세 계사로의 전환을 소리 높여 선언했던 것이다. "중요한 변혁을 가져온 모든 사건들이 세계사에 있어서는 유익한 것들이다. 이를테 면, 천 연두나 집시gypsy, 그리고 담배의 유럽 전래 등도 자마의 싸움이나 예루살렘의 파괴 또는 베스트팔렌 조약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건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세계사의 내용은 가테러와 같이 계몽주의적 문화사라고 하 기보다 는 현대에 있어서의 '사회사'에 가깝다. 다음에 그 세계사의 구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인류사를 6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이 시대 구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그의 세계도 역시 지구 크기의 세계로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계의 문화적 발전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제4기, 제5기, 제6 기에다 가 각각 고대, 중세, 근대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는 키루스(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로부터라고 했으며, 그 이전의 아담으 로부터 사르다나팔루스(아시리아)까지의 시대와 구별하고 있다. 확실한 사료에만 입각한 역사 서술을 주장하던 그가, 이와 같은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것은 키루스 이후의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루스 이전의 세계는 시원세계, 무명세계, 전세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여기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보편사적 요소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 나 ' 전 설'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되고 있다. 창세 기원의 부정 시간에 관한 슐레처의 논의도 중요하다는 것은, 그가 연호 표기의 문제에 있어서도 전통 으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키루스 이후는 모든 연호를 '그리스도 이전' 으로 쓰기로 하고, '천지창조로부터 행하는 보기 안쓰럽고도 부정확한 산정'은 하지 않는다 고 천명한 것이다. 또한 키루스 이전에 대해서는 군데군데에서 창세 기원의 연호를 쓰는 일도 있으나, 그것 은 다른 책에도 나와 있어서 사용하고 있을 뿐 모두 불확실한 연호에 불과하다고 미리 말해 두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탄생한 것을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류사는 적어 도 6천 년간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이미 보편사의 그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그 는 엿새 동안의 천지창조를 명확히 부정하고, 지구의 역사 쪽은 '몇만 년이나 되는 길이'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지'(1749-1804)로 유명한 뷔퐁은 박물학의 세기이기도 했던 18세기에 커다란 영향력 을 지닌 과학자였다. 그는 <지구와 혹성의 냉각에 관한 연구>(1775)라는 논문 가운데에서 지구가 형성되 고 나 서 현재의 온도가 되기까지를 7만 4832년간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또 그는 인류의 탄생은 6천 년에서 8천 년 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슐레처는 뷔퐁의 설을 받아들인 것 이다. 그리스도 기원의 자립과 '고전적 3구분법' 이것은 그의 '시간'이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얼마든지 과거를 향하여 연장할 수 있 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 또 마찬가지로 창세 기원으로부터 단절된 그의 '그 리스도 이전'이라는 연호도 확실한 사실이 해명됨에 따라서 키루스 이전으로 연장될 수 있는 성격 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고대라고 하는 시대도 키루스 이전으로 확대되어 전세계 또는 무명세계, 심지 어는 시원세계까지도 구축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 그리스도 기원은 앞에서 소개한 볼테르를 계기로 슐레처에 의해 독립된 지위를 부 여받게 되었다. 창세 기원으로 표시되는 그리스도교적인 시간과는 상관없이 확실한 사실의 범위의 확대와 함께 '그리스도 이전'으로 얼마든지 거슬러올라가, 연장되어가는 시간의 눈금 으로 향 하는 변모를 이룩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이전'으로 향하여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는 시간과 결부하여 켈러 리우스의 3구분법이 사용되는 것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켈러리우스의 3구분법은 가 테러도 이미 채용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가테러가 4세계제국론을 표기한 일과의 관계로 켈러리우스의 3구분법의 의의 를 지적해두었다 .그러나 3구분법의 의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보편사적인 시간을 표기하는 것에 의해서도 그에 대신하는 새로운 시대 구분법 이 요구되었고, 이러한 요구와 결부되어 3구분법이 채용된 것이다. 고전적인 3구분법은 18세기를 통하여 일반화되었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는 일이다. 거기에 는 켈러리우스 자신이 당시의 독일에서 널리 알려진 역사가였다는 것도 한 원인이다. 그러 나 그 일반화에 커다란 구실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두 사람의 괴팅겐 대학의 역사가들 이라 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가죽부대를 만들어낸 것이 켈러리우스였다면 새로운 술을 빚어낸 것은 가 테러와 슐레쳐였다. 또한 새로운 술을 담을 그릇으로서 켈러리우스의 주장을 선택하고 이 가 죽부대 의 성능을 보여준 것도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창세기원의 무게 가테러와 슐레처의 발걸음을 앞에서 언급한 '연대학 논쟁'과의 관계로 고찰해보 자. 이미 이 논쟁을 통해서 혼미 상태가 점점 더 깊어갔다고 말했지만 혼미 상태라는 말만으로 는 상 황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표 13은 표 1에 나오는 같은 연호를 필자가 '그리스도 이전'으로 환산한 것이다. 양자를 비교해보면, 창세 기원에 의한 연대표에서는 숨어 있던 측면이 보인다. 즉 시대가 새로워질수록 오늘날 생각하고 있는 연호와 거의 다름없는 연호가 나타 난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나 대홍수는 별도로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소명과 출애굽 부근은 아직 도 세 자리 숫자의 차이가 있지는 하지만, 새로운 연호가 되면 한자리나 아니면 두 자리에서 도 고 작 10-20년 정도의 오차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연대학자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즉, 현실의 역사적 사건의 자 리매김 에 관해서는 존재의 과정에서 실제로 어느 연대학자의 의견도 크게 다른 데가 없는 데 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이 성과는 19세기로 승계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미의 참된 원인은 천지창조로부 터 연호 를 세웠던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천지창조에서부터 연호를 세는 한 혼미는 깊어갈 뿐이 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 이전'이 고안되었다는 것과 그 사용이 넓어져갔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천지창조에서 연호를 세우는 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을까? 근본적 이유는 창세기원(세계 연대)이 천지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기독 교적인 시간, 즉 보편사를 지탱하는 시간의 눈금이었기 때문이다. '연대학 논쟁'은 '연대'를 둘러싼 논쟁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시간'을 지키려는 논쟁이 었다. 그리고 논쟁이 이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한, 혼미한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것 은 불가 능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가테러가 끝까지 창세 기원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수 있 다. 진지 한 종교인이기도 했던 그는 그리스도적 시간마저 역사에서 추방하는 데에는 끝내 결단 을 내 릴 수 없었던 것이다. 창세 기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동시에 전통적인 기독교적 시간과 역사 적 시간을 분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전'을 포함하는 그리스도 기원만을 시간의 눈금으로 한다는 것은, 예 수 기원 이 지니는 종교적인 의미를 폐기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 발걸 음을 내디딘 사람은 독일의 볼테르라고 일컬어졌던 슐레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 기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적 의미를 포기하는 것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비판적 성서 연구의 새로운 전개 가테러가 차례로 보편사적인 요소를 폐기하고 슐레처가 창세기원을 폐기한 근본적인 동기 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두 사람에 의해서 보편사에서 세계사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이유 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의 발전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 엇보다 잔 아스트류크의 이름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모세 5경'을 연구했는데, 여기 에서 그 는 야훼나 엘로힘이라는 두 종류의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데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그는 5경을 서로 다른 호칭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서로 다른 그룹에 의한 기록을 통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1753년의 일이었다.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는 이렇게 하여 성서가 복수의 인간 집단이 계속하여 기 록해온 여러 가지 문서를 편집한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은 독일에서 '신교의파'라 불리는 새로운 신학의 조류를 낳게 되었 다. 카시 러가 '신교의파의 참된 교사들'(1970)이라고 불렀던 모하임, 미하엘리스, 에르네스티, 제믈러 등의 활동이 특히 1760년대에서 1770년대에 걸쳐 전개되었다. 신교의파 사람들에게는 성서가 서로 다른 시대에 그때 그때의 특정한 상황에 부응하 여 기 록된 여러 문서들을 어떤 시기에 편집한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공통된 인식이었다. 이 제 성 서는 비판적으로 연구되어야만 하는 '문헌'이 된 것이다. 더욱이 가테러의 활동 무대였던 괴팅겐 대학에서 이 신교의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 하고 있었다. 괴팅겐 대학 자체가 종교적 논쟁을 금지하거나 신학부가 다른 학부를 지배하 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강구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대학의 관용적인 조치 의 실 행은 '신교의파'인 모스하임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모스하임은 1747년에 스스로 괴팅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8년간 신학부장과 대학장 을 겸 직했다. 또한 철학부에서는 미하엘리스가 1745년 이후 그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괴팅겐 대학은 대학의 원칙 결정 그 자체에 있어서는 물론, 실제의 활동면 에 있 어서도 신교의파에게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미하엘리스 그 가운데에서도 커다란 구실을 해낸 것은, 요한 다비드 미하엘리스(1717-1791)였 다. 영국 유학을 마친 그는 스물여덟 살에 괴팅겐 대학으로 초빙되었다. 모스하임도 마찬가지 였지만, 당시 독일 사상가의 대다수는 영국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로크를 출발점으로 하고 뉴턴의 물리학과도 결 합되어 전개되고 있었던 이신론이 커다란 영향을 주어 많든 적든 간에 신교의파 사람들은 그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미하엘리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가 신학부에서 행한 교의학 강의는 이 대학에 서조차도 너무 튀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처음 10년 가까이는 개강하자마자 소송이 제 기되어, 정부에 의한 강의 금지 조치로 끝나는 일들이 되풀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교육자이기도 하여, 각지로부터 많은 학생들을 괴팅겐으로 끌 어들였 을 뿐 아니라 슐레처나 '근대 제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종교학자 아이히호른을 비롯한 수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여 이 대학의 지위를 높이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 다. 미하엘리스의 사상의 일단을 1770년에서 1775년에 걸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인 '모세 의 율 법'에서 찾아보자. 우선 이 책의 첫머리에서 그는 모세의 율법 연구를 '몽테스키외 가 행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행한다고 선언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 이 처 했던 풍토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관찰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이것을 '민족의 유년 시대의 오래된 법'이라고 관찰했다. 게다가 사막지 대라는 특수한 풍토 속에서 아브라함 이후 '유목민적인 유래'나 이집트에 있어서의 국가 생활을 경험한 뒤에 농사를 짓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 국가를 건설해간 역사 속에서 모세 의 율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중요한 결론은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환경 속에서는 옳 다. 그 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다른 환경에 있는 민족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었다. 이제까지 가장 중요한 예언이며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명령으로 전해내 려왔던 모세의 율법이, 유목민의 단계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또 그 사회에만 적합한 법으로 역사적 인 평가가 내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는 독일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가테러 는 미 하엘리스의 동료이자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슐레처는 그의 제자였다. 앞에서 말한 가테러의 성서에 대한 태도 변화나 슐레처의 보편사에 대한 태도는 미하엘리스의 이 혁명적 영향의 실제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볼테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는 가운데, 보편사를 비 판했다. 외부에서 보편사의 파괴에 진력한 셈이다. 이에 비해 가테러와 슐레처는 같은 계몽주의자이면서도 다 함께 프로테스탄트로 출 발했으 며, 처음에는 그것이 보편사의 입장에 서는 것과 결부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성서 의 비판 적인 연구가 진전되는 영향을 받아 두 사람은 결국 계몽주의적인 역사학의 입장으로 옮아가 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세계사'의 서술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앙까지 버렸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세계사'로 옮아간 것은 역 사 서술 과 신앙을 떼어놓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오랫동안 신앙을 직접적인 기반으로 삼고 그에 종속되어 발달되어온 역사학이 이 시점 에서 독립된 하나의 과학으로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보편사를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비판 이 얼 마나 날카로운 것이었든지 간에 그것만으로 1천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보편사 가 붕 괴될 이유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이미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대항해 시대, 과학 혁명 등의 시 대를 거 쳐 그 과정은 진행되어왔다. 역사학의 분야에서는, 이미 '연대학 논쟁'으로 그것이 나타나 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테러와 슐레처의 시대는 이 움직임의 마지막 단계였다. 슐레처에 의해 마침내 창 세 기 원 그 자체가 부정되었을 때, 보편사는 최후의 보루마저 잃고 만 결과가 되었다. 보 편사의 자기 붕괴의 과정이 완료되었고, 슐레처는 보편사에 대한 '죽음의 천사'가 되었던 것 이다. 제5장 보편사와 만국사 일본의 '사략'과 '만국사략' 메이지 유신 초기의 세계사 교육 끝으로 보편사와 일본의 세계사 교육의 관련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메이지 정부의 문부성(교육부에 해당)이 편집, 간행한 최초의 역사 교과서는 '사략' 이라는 소학교(초등학교) 교과서이다. 일본 정부는 1871년에 문부성을 설치하고, 다음해 8월에 '학제'를 발령 포고하였으 며, 다 시 9월에는 소학 교칙을 제정하여 4,4제 소학교를 발족시킨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에서 문부성이 그 역사 교육의 방침과 내용을 밝히기 위해 187 2년에 발행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에는 일본의 역사와 세계사가 함께 실려 있었으나, 1874년에 '만국사략', 다 음해인 1875년에는 '일본 약사'가 문부성에서 발행되어 세계사와 일본 역사가 분리되어 체제 가 정 비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1880년이 되자 '교육령', 다음해에는 '개정 교육령'을 발표하여 학제를 3,3,2제의 소학교로 변경하였다. 당시의 역사 교육에 있어서의 최초의 획을 그은 해 가 1881 년이다. 이해에 이루어진 교칙 개정으로 세계사는 소학교 역사 교육에서 벗어나 중 학교로 옮겨지게 되었고, 동시에 소학교에서는 수신 교육과 황국사관의 주입에 중점을 두는 시대 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략'과 '만국사략'(그리고 '일본 약사')은 역사 교육이 근본적인 변화를 이룩한 1 881년까 지 일본의 소학교에서 이루어진 역사 교육의 근본을 규정한 교과서였다. 또 이 두 교 과서는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후자 쪽이 양이 많아 상세하게 서술되 어 있 었을 뿐이다. 기원전 약 4천 년경에 있어서 '만국사략'에서는 지역별로 보면 아시아 주, 유럽 주, 아메리카 주로 크게 구분되 었고, 각 지역별로 역사 기술이 이루어져 있다. 아시아 주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및 아시아 터키(오 리엔트)로 나뉘어져 각 지역의 역사가 각 나라별 역사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한편 구라파(유럽) 쪽은 로마제국 멸망을 한 획으로 하여, '구라파 주 상'과 '구 라파 주 하'의 두 시기로 시대를 구분하였다(이하는 '일본 교과서 대계' 고단샤, 제20권). 먼저 오리엔트에 관한 기술을 살펴보자. 첫머리에 세계의 개벽과 인간의 생성에 대 해 ' 서양의 설'이라고 미리 말해놓은 뒤,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기원전 약 4천 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중앙, 유프라테스라는 커다란 강 근처에 서 남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태어났다. 남자를 아담이라 하고 여자를 이브라 했으며, 이들을 인간의 시조라 한다." 이어서 "기원전 '2340년경'에 있었던 노아의 대홍수 사건과 또 대홍수까지를 '대략 1650 년간의 세상을 전세계'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노아의 일족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 카로 확대되어갔음이 기술되어 있다. 이들의 연호는 이미 독자에게 낯익을 것이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노아의 자손 아수르가 '비로소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아시리아 가 건 국되었고 마침내 님롯이 바빌론을 건설했다는 것, 그리고 사르다나팔루스 때에 이 아 시리아 가 멸망한다는 것, 바빌로니아의 국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사 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페니키아, 유대인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살피고, 또 소아시아에 대해서는 마 호메트 의 등장에서부터 몽골인의 활동까지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 항목은 끝을 맺는다. '구라파 주 상'에서는 먼저 고대 그리스에 관해 기술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18 40년에 서 1890년경, 백성들이 차차 나라를 이루기' 시작하여 '아테네, 테베' 등이 성립되 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1200여 년' 테베를 칠방이 포위하는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 어서 트 로이전쟁이 일어났다'고 하고, 그 원인과 전쟁이 10년간에 걸쳤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수백 년 뒤 아테네, 스파르타가 일어났으며, 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극복 했지만 서로 전쟁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에게, 이어서 로마에게 복속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과 그 경과가 기술되어 있다. 로마에 대해서는, 기원전 1180년경 '명장 이니어스'가 함락된 트로이를 빠져나와서 이탈리 아로 왔는데 그 자손인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했다고 기록했다. 이 다음은 7대에 걸친 244년간의 왕정 이후에 공화정으로 이행하였으며, 그때 정복 사업이 진행되어 기원전 207년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일, 3차에 걸친 '카르타고'와 의 전 쟁, '폼페이 세자르 크라수스'와의 싸움, 그리고 세자르의 조카인 '옥타비우스토 안 토니와 빌레피듀스'의 싸움, 끝으로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한 제정의 개시 이 후 476 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간단히 더듬고 있다.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황제는 티베리우스, 네로, 타이투스, 안토니우스, 디오클레시 아누스, 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마지막 황제인 아우구스튜루스이다. '만국사략'의 제2권은 최초의 '인민의 이전'에서 민족 이동을 다룬 것을 빼면, 모 두 유럽 여러 나라의 역사에 대한 개별적인 서술에 충당되어 있다. 다루어지고 있는 나라들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 일, 에 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 이 탈리아, 터 키, 그리고 미합중국 등이다. 미합중국 이외에는 모두 다 간단한 왕조사를 다루고 있 다. '만국사략'의 대본 만국사를 가르쳤던 메이지 초기는 '번역 교과서 시대'라고도 불린다. 일본어 교육을 할 때 조차 교재의 '괘도'를 미국에서 들여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양 역사의 기술 에서는 그 내용이 거의 다 직수입의 형식을 취한 것도 부득이한 일이었다 하겠다. '만국사략'의 편찬을 맡았던 오쓰키 후미히코 씨는 '예언'에서 "한토(중국)의 역 사는 원 문을 가지고 바로 사용할 수 있지만, 서사(서양의 역사)는 번역을 거쳐서 문장을 만 든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직접적으로는 동양사와 서양사에 따라 문체가 다르게 되어 있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문체의 차이만이 아니라 양자의 내용상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 이기도 하다. 그러면 '만국사략'(그리고 '사략')은 어떤 서적에 의거하여 편집한 것일까? 두 권 의 교과 서는 모두 다 미국의 굿리치(Samuel Griswold Goodrich, 가명 Peter Parley, 1793-1 860)의 '팔리의 만국사'를 대본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팔리의 만국사'는 메이지 초기에 있어서는 매우 인기가 높은 책이었다. 사실 이 책 은 '사 략'과 '만국사략'의 '대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역사학자들의 저서들보다 상 세한 만 국사용 교과서의 대본으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그 책도 일어로 번역이 되어 문부성에 의해 간행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서문에 의하면, 원래 굿리치의 '팔리의 만국사'는 그 목적이 '어린이들에게 보편사 의 윤곽 을 제공하기 위해 씌어진 교과서'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쉬운 영어로 씌어져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진짜 필자는 문학가인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 1864) 이라는 설이 나올 정도의 명문으로 되어 있었다 .새뮤얼 굿리치는 미국의 저술가로서, 보스 턴에서 <토큰 The Token>이라는 잡지(1826-1842)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작가들을 원조 했 었다. 그 가운데에 호손도 있었기 때문에 그도 이 책의 집필을 어느 정도는 거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정으로 굿리치의 저작은 다른 영국사나 미국사의 저작을 포함하여, 메이 지 초 기에 가장 많이 채용된 영어 '텍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광범위한 독자를 확보함으로써, '팔리의 만국사'는 특히 메이지 초기에 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 인식에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한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리의 만국사'의 위치 '팔리의 만국사'의 내용에 대해 소개할 필요는 없다. '만국사략'과 내용이 거의 같 기 때문 이다. 다만, 그 책의 성격을 살펴보는 데 필요한 연대적인 테두리만을 살펴보자. 이 책에 서는 천 지창조가 그리스도 기원전 4004년으로 되어 있고, 창조 이후 1656년에 일어난 노아의 대홍 수를 거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 시간적 테두리는 앞에 서 언 급한 바 있는 성서 연대학자들 가운데 애셔의 연대학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애셔의 연대학이 미국으로 건너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의 만국사'를 쓴 굿리치가 보스 턴에서 활동한 사람이었다는 데 커다란 힌트가 있다. 보스턴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 방에는 원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정착해 있었는데, 이들은 본국(영국)의 퓰리턴 혁명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식민지에 정착할 당시, 영국에서는 애셔의 연 대학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신대륙에 영국의 식민지를 건설한 프로테스탄트들을 통해 애셔의 연대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이식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팔리의 만국사'가 성서에 바탕을 둔 세계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앞에서 다루어온 보편사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창세 기원 에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애셔의 연대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에 창세 기원이 부정되고 있는 것 은 아 니더라도, 구체적인 기술에서는 모두 '그리스도 이전'을 포함한 그리스도 기원만으로 표시되 어 있다. 또한 4세계제국론도 다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고대 로마 이후의 시대에 관해서는 각국의 역사라는 형식을 채용하고 있다. 그 각 국의 역사들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미국, 그리고 오세 아니아 의 여러 나라들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 19세기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나라들의 역사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문자 그대 로의 '만국사'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하여 아시리아, 페르시아, 그리스 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고대사 부분은 보편사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결국 '팔리의 만국사'는 크게는 보편사적인 토대와 그 위에 세워진 각국의 역사라 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전통적인 보편사는 18세기에 붕 괴되었 다고 말했으나, 미국에서는 아직도 보편사가 마지막 숨을 지탱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구조 전환을 한 다음 에 살아남았던 것이다. '팔리의 만국사'의 구조는 나름대로 19세기라는 세계를 전제로 하고, 이에 부응하는 보편사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전통적인 보편사 가운데의 '로마' 의 존 속이라고 하는 전제 자체가 무너져버렸다. 한편 19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민 국가로서의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이와 동시에 세계 시장으로서 세계의 일체화를 추진해가고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유럽 나라들 의 진출에 대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저항도 높아져가고 있었다. '팔리의 만국사'는 세계사의 구조에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전통적인 보 편사에 각국사를 접목했던 것이다. 아시아 역사의 특징을 정체로 보고 유럽 역사의 특징을 진보로 보는 사고방식도 19세기 유럽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다시 말해 구조 전환이라는 19세기의 세계 현실과 유럽적 의식에 적합하게 만든 국 민 국 가 집합체로서의 세계 역사, 즉 만국사로서의 전환이 분명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팔리의 만국사'는 '19세기적 보편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 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와 만국사 양학의 상황 메이지 정부는 왜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팔리의 만국사'를 교과서의 대본으로 삼았을 까? 당시의 일본 정부가 세계사 교과서의 모범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보다 일반적인 시 대 배 경으로서 당시 일본에서의 양학(서양의 학문)의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난학(네덜란드의 학문)의 시대가 끝나고 영어권 국가의 학 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자국어의 교육 방법까지 미국에서 직수입하는 방법이 채택되는 등, 역사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미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것이 '팔리의 만국사'였 다. 이 책이 '만국사략'(사략)의 대본으로서 채용된 하나의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일본에 '팔리의 만국사'를 가져온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양학의 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던 그가 막부 말기인 1867년, 세 번째 양행(서양 여행) 때에 보스턴에서 많은 서적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해왔던 것이다. 이때를 회상하여 그는 이것을 '고금을 통 해 여 지껏 보지 못했던 진기한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유는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용 자체에 도 있 었을 것이다. 필자는 두 번째 이유로 앞에서 말한 '만국사'로서의 이 책의 성격과 형 식 자체 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토베 이나조의 '귀안의 갈대'에는 "'팔리의 만국사'를 읽은 사람은 세계의 사정 에 정통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오랜 쇄국정책을 철회하고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에 '만국'들이 만들어낸 세계 를 눈앞에 두고 강대국의 지위를 구축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정부 당국자뿐만 아니라 민간 인들도 세계 각국에 대한 개별적인 인식을 포함하여 세계사를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팔리의 만국사'는 논리정연한 각국사의 서술로 인해 그 나름대로 충분히 이러한 요구에 부합되는 내용을 갖춘 책이었음이 분명하다. 19세기적인 보편사는 오직 한 군데 미국에서만 살아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도 덧붙 여야겠다. 네덜란드나 아일랜드에서도 가정용이나 초등교육용 서적으로서 19세기적 보편사 가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 초기에는 이들 서적 또한 '만국사'라는 이 름으로 번역되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소개되어 읽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만국사'의 유행은 메이지 초기 일본인들의 세계사 인식에 대한 욕구의 표현 이었다. 19세기적 보편사의 내용은 어느 것이나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내용을 갖추 고 있 었던 것이다. '팔리의 만국사'는 이처럼 서양의 19세기적 보편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서 받아 들여졌다. 정신 구조의 일치 '팔리의 만국사'는 보편사라는 뒷받침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것은 기독교적 세 계관에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로테스탄트적 세계관에- 기초하는 역사 서술임이 분명했 다. 무엇보다도 성서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이라는 점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신화가 사실 로 이 야기되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커다란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실제로 '팔리의 만국사'에서도 아담과 이브와 같은 성서의 신화는 물론, 그리스사 나 로마 사의 초기에 있어서도 신화가 모두 아무런 비판 없이 역사적인 사실로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보편사적인 요소는 당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 을까? 이 점에 대해 말한다면 '사략'이나 '만국사략'도 이것을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그대로 계승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만국사략'의 저자 가 아담 과 이브에 대하여 '남녀 두 사람이 비로소 태어나'라고 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에 게 가장 긴요한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창조라고 하는 기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 다. 기 독교적 세계관을 배제하면서 신화는 삽입한 것이다. '만국사략'에서는 서양사에 관해 "번역을 거쳐 문장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결코 단순한 번역은 아니었다. 다만 이처럼 기독교적인 부분을 골라내어 고치기만 하면 '팔리의 만국사'는 오히려 '일본 사략'과 공통된 구성을 가지는 것이 된다는 쪽이 여기에서는 중요할 것이다. 신들이 시대로부터 기술하기 시작하는 일본사의 기술과 '팔리의 만국사'는 신화를 역사에 섞어넣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양자는 공통의 정신 구조에 기 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공통적인 정신 구조 또한 '19세기적 보편사'가 일본에 받아들여진 세 번째 요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이와 같은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과학의 세기'이며 '역사학의 세기'였던 1 9세기 말에 오히려 교과서에서 보편사를 가르치게 되었던,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실례가 되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보편사라는 명칭은 영어로 말하면 유니버셜 히스토리Univ ersal History이다. 그러나 '보편사'라는 명칭은 오늘날 널리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말은 결코 아 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이 말을 접하게 되었다는 독자들이 더 많은 것 은 아 닐까? 필자가 이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십수 년 전, 이 책에도 등장하는 슐레처의 ' 세계사 Universale Historie'의 일본어 번역판에서였다. 당시에는 이것을 단순의 책의 제목으 로만 받 아들였다. 그러나 그후 유럽인의 세계사 서술의 역사를 나름대로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실제 로 슐레처나 가테러 같은 사람들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 결과 이 '보편사'라는 말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사 서술의 대명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전환점은 이 전통 적인 '보편사'로부터 오늘날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형태의 '과학'을 표방하고 있 는 '세 계사World History'로의 전환기이기도 하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이와 같은 필자 나름 의 발 견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원래 기독교의 성서는 인간뿐 아니라 일월성신에서 동식물까지를 포함하는 만유Univ erse 전체의 역사의 개시부터 종말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뜻에서 말한다면, '유니버 셜 히스 토리'라는 말은 '보편사'보다는 '만유사'라고 번역하는 쪽이 옳다고도 할 수 있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편사'라는 번역어를 채용한 것은, 이미 번역어로서 존재해 있 었을 뿐 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미 역사를 기술한 사람들의 의식에 전해 생각할 경우, '보편 사'라는 말도 결코 어긋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보편사'를 기술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실제로는, '만유' 전체를 기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목적으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류사의 서술이며, 전인류 가 기독교의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그들의 세계사 기술에는 '18세기까지의'와 '기독교적'이라는 두 개 의 한정사를 붙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에 준해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류 전체를 포함하는 '보편사적 역사'였던 것이다. 이 책과 같은 조그만 저작에도 완성이 되기까지 실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필자의 연구를 둘러싸고 많은 도움말을 주신 분들, 편집부와의 중개를 해주신 분, 이 책 내용 에 관 계되는 문제로 가르침을 주신 많은 분들, 또 평소에 필자의 초보적인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주신 분들, 이 책을 출판함에 있어서 소속되어 있는 학부의 동료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표현 할 수 있음을 학부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귀찮은 주문임에도 불구하 고 서 적 수집에 아낌없는 조언을 주신 선배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이 책의 최초의 독자가 되어 매서운 비판을 해준 아내와 두 딸들에게 감사하는 것도 양해 해주기 바란다. 끝으로 주석에 대해. 이 책에서는 독자 여러분이 이미 알아차린 바와 같이 직접적 인용 등에만 본문에 주를 삽입했다. 또 번역이 없는 영문 원서에서의 인용에는 주를 달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필자의 연속 논문인 <독일 계몽주의 역사 연구> 를 참조해주시면 좋겠다. 오카자키 가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