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보편사의 위기 시대 르네상스와 보편사의 위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마키아벨리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외교가이자 정치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 1469-1527)가 저술한 [군주론principe, 영역 The Prince]은 근대 사회과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역사Istorie fiorentine](1525)에 의해 근 대 역사학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꼽힌다. 먼저 [군주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희구하여 그 실현 방 법을 '새로운 군주'의 탄생에서 구하고, '새로운 군주'가 국가를 유지하는 데 주의해야 할 여러 가지 점들을 고찰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 유명한 것은 군주와 도덕의 관계를 논한 부분이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에서 군주는 덕이 있는 존재라야만 한다고 함으로써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한다. 또한 기존의 군 주에게 요구되던 '틀이 크고 호탕하기'를 바라는 미덕을 부정하고 "현명한 군주는 인색하 다는 평판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항상 자비로움을 보여주고 존경받는 군주가 되라는 전통적인 요구에 대해서도, "매정하다 는 비판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또는 "사랑받기보다는 무서움의 대상이 되는 쪽이 보다 안 전하다"고도 했다. "신의를 지키고, 간교한 지혜에 의지하지 말고 공정하게 처신한다"는 덕목에 관한 의논은 훨씬 과격하다. 그에 의하면, 처음부터 투쟁 수단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법'에 의 한 인간의 고유한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힘'에 의한 짐승들 특유의 방법이다. 그리고 "군주는 짐승과 사람을 잘 구분하여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우의 길'이란 '독살에 의한 암살과 같이 교활한 지혜를 쓰는 방법'이고, '사자의 길'이란 '눈에 띄는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의를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론은 분명하다. "현명한 군주는, 신 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고 약속할 당시의 근거가 없어졌을 경우에는, 신의를 지 킬 수가 없으며 지킬 필요 또한 없다"고 한다. 나아가서 군주가 기존에 주창되어오던 미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군주에게 해로운 일이 지만 "그것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라고도 적고 있다. 속으로는 '짐승의 길'을 따르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여러 가지 미덕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라는 말이다. "군주는 자비, 신의, 성실, 인간성, 경건함의 화신인 것처럼 보여주기에 충분한 배려를 해 야 한다. 그리고 특히 이와 같은 종류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일이 무엇보 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의 행동, 특히 군주의 그것처럼 호소할 재판소가 없는 경우에는 결 과를 주목하게 된다. 그 때문에 군주는 승리를 얻고, 권력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 면 그는 언제나 존경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 유지라는 결과 또 는 목적이 좋으면 거기에 이르는 수단이 인정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정치적 세계'의 발견 군주와 도덕과의 관계를 서술한 이 부분은 훗날 그가 비판을 받게 되는 중심 부분이 된 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가 가장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과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 지 않아야 한다는 권모술수로서의 '마키아벨리즘'이었을까?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린다면 [군주론]의 테마는 '통치arte, 군사dello, 외교stato'를 규명 하는 것이다. 외교를 의미하는 이 스타토stato가 '국가state'라는 말의 어원이 된 것을 보아 도 알 수 있듯이, [군주론]은 근대 국가의 원리를 해명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앞부분은 인간 일반의 행동 원리가 아니라 근대 국가의 '새로운 군주'와 기존의 도덕과의 관계를 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존재로서, 또는 그 한계 내 에서 군주가 규범으로 삼을 만한 새로운 원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의 논의를 다시 살펴보면, 이 논의의 중점은 결코 '마키아벨리즘'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것은 전통적, 종교적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적 세계가 성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정치적 세계는 종교적 원리와는 다른, 그가 분석한 것과 같은 독자적인 원리와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발견 정치적 세계의 성립 근거에 대해서는 [군주론]의 제25장에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전 통적인 견해, "이 세상의 일들은 운명과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고, 인간은 스스로의 사고와 행동을 통해 그 움직임을 변경할 수 없고, 이에 대해서는 손을 쓸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하 는 견해가 비판되고 있다. 만일 이 견해가 옳은 것이라면, 독자적 논리를 가진 정치적 세계 따위는 있을 수가 없으 며, 정치적 세계 모두가 종교적 논리에 포섭되어갈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논의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자유의사는 소멸하지 않으며, 운명은 우리 행위의 절반 정도는 정해놓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 또는 절반 가까운 부분은 우리들 자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운명은 여신이니, 그것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한다면, 쳐서 쓰러뜨리거 나 무찌를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자유의사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활동력을 마키아벨리는 '역량(virtu)'이라고 불렀다. 정치적 세계가 성립하는 것은 이처럼 '역량'을 지닌 인간들의 주체적 행동이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인 세계를 종교로부터 독립된 독자 적인 논리를 지닌 영역으로서 주장하는 그 근본에는 이와 같이 운명에 도전하고 운명을 지 배하려고 노력하는 의욕과 행동력을 가진 '인간의 발견'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 고 이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의 발견'을 실천하면서, 그것을 기초로 '국가학', '정치학, 넓게는 '사회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출 발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역사관 이와 같은 그의 기본적인 인간관은 그의 역사 서술의 기초로도 되어 있다. [피렌체의 역 사]에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서 시작하여 대로렌초(Lorenzo de Medici, 통칭 Lorenzo the Magnificent, 1449-1492)가 세상을 뜬 1492년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로마의 식민 도시로 출발한 피렌체는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 시대 를 거쳐 차츰 발전하여, 13세기 이후에는 이탈리아에서 제일 가는 유력한 도시 공화국의 하 나가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귀족과 일반 시민들과의 대립, 구엘프당(교황을 지지하는 당)과 기벨린 당(황제를 지지하는 당)의 대립, 유력한 시민들 사이에 대립과 항쟁을 계속하면서 오히려 이 것을 계기로 발전시켰다. 또한 황제와 교황, 이웃나라 등 국외로부터의 압력과 이에 호응하는 국내 반대 세력의 움 직임에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이것들에서도 지렛대를 삼아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 이후 메디치 가문의 주도하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른다고 서술되 어 있다. [피렌체의 역사]의 서술은 이것을 축으로 하여 생생한 이탈리아 역사의 서술까지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세계는 철두철미 정치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역량(virtu, 영어 virtue)'의 보유자로서의 인간들의 세계이며, 이러한 인간들의 대립과 항쟁 속에서 자유가 전개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군주론]에서 그가 주장한, 종교적 세계로부터 독립한 정치적 세계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 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근대 역사학의 시조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세계사의 서술은 하지 않았으므로 기존의 보편사를 그가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의 가운데에서 보편사가 전제로 삼고 있던 인간 관이 부정되고 종교적 세계로부터 자립한 정치적 세계의 논리와 역사를 밝히려는 태도가 생 겼다는 것은 보편사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게 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 다. 이집트사의 망령 중세의 보편사에서는 이집트사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았다. 오토 폰 프라이징의 경우, 아우 구스티누스를 기초로 하고 있었던 만큼 이집트사의 연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는 이집트가 이슬람 세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집트에 대한 관심도 엷어져 있었다. 그 결과 오토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이집트는 단순히 성서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장소에 불과했다. 헬레포드 그림에서처럼 피라미드마저 요셉이 세운 곡물 창고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세비우스처럼 보편사에 있어서 이집트사의 연원이 차지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의식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전의 '재생'운동의 하나로 15세기 말에 헤로도토스나 시칠리아의 디오도루스 등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16세기 초에는 그리스어 원전도 출판이 되어 연구 대상에 들어 갔다. 그후 종교 개혁이 일어나 성서 연구가 성행하면서, 그리스 역사나 오리엔트 역사의 연구 가 불가결한 요소로 생각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성서 속에 여러 차례 나오는 이집트의 역사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집트사의 연원 문제는 이러한 고전 연구나 성서 연구를 하는 가운데 일종의 부산물로 발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 문제는 르네상스 이후의 움직임 가운데 예상 밖인 곳에서 되살아나서 후세 사람들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묘사하는 이집트 역사 우선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430/420)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그의 이집트론이 기 술되어 있는 것은 [역사History](BC 430경) 제2권이다. 당시 가장 높이 평가되고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역사]에 기술된 내용 중 하나가 이 집트사였다. 헤로도토스의 이집트사는 성서가 그리는 것과, 오늘날의 역사 내용, 그리고 유 세비우스와 비교되는 마네토와도 크게 달랐다.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이집트사는 크게 '신들의 시대'와 '인간의 시대'로 나뉜다. 밑으로 의 시간의 한계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의 이집트 정복까지이다. 그는, 고대 이집트사를 이야기해주던 멤피스 프타 신전의 신관의 말에 의거해, 신들이 지 배하던 시대를 이집트사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신들의 지배의 마지막이 된 것은 "오시리스Osiris의 아들 호루스Horus인데, 이 호루스는 그리스에서 아폴로라고 부르는 신이다. 이 신이 튜폰을 쓰러뜨리고 이집트에 군림했던 마지 막 신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를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하였으며, "디오니소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신들의 이름이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 들어간 것이다"라고도 말하고 있 다. '인간의 시대'의 최초의 왕은 민(Min, 또는 메네스Menes)이었다. 신관은 헤로도토스 앞 에서 두루마리를 펴고 "메네스 이후의 330명의 왕들의 칭호를 차례대로 읽었다." 이 가운데 열여덟 명의 에티오피아인들과 여왕인 니토크리스를 빼면 모두가 이집트의 남 성들이었으나, 기록할 만한 사적을 옮겨놓은 왕은 모이리스 호수를 판 최후의 왕 모이리스 뿐이었다고 말했다. 이후에 이집트에는 세소스트리스Sesostris라는 대왕이 나타나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함대 를 이끌고 홍해 연안의 주민들을 정복하였으며 다시 "대군을 소집하여 대륙을 석권하고 진 로를 가로막는 민족들을 모두 평정했다."고 한다. 동쪽은 인도, 북쪽은 트라이키아, 남쪽은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유 럽에 걸치는 대제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동생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복사업에서 돌아온 다음, 그는 데리고 온 많은 포로들 을 사역하여 국토 전역에 운하를 건설하고 이집트인 모두에게 같은 넓이의 반듯한 땅을 준 뒤 세금을 부과하여 나라의 재원을 확보했다고도 한다. 그는 이집트 내정의 기초도 만든 셈 이다. 그러나 세소스트리스라는 왕은 실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 시대에 이집트인이 인도에까 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일도 오늘날에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마네토도 제12대 왕조 제3대 국왕을 세소스트리스로 하여 헤로도토스와 같은 활동 내용을 기록해놓았지만, 오늘날에는 사료적으로 확실한 제12왕조의 세네슬레트 3세가 모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혹은 이집트 고유의 땅에서 나서 대외를 지배했다는 데에서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를 모 델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논의일 뿐이다. 헤로도토스 가 이집트의 역사를 재생했던 당시에는 그의 기술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어서 그는 세소스트리스 이후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캄피세스 2세Cambyses2에 의해 이집트가 정복되기까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는 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들인 케옵스Cheops, 케프렌Chephren, 미케리누 스Micerinus를 트로이 전쟁보다 뒤에 두고 있으며, 매우 새로운 시대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26왕조 제2대의 네코Necho인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는 페니키아인에게 아프리 카 일주 항해를 시킨 파라오지만, 구약성서에서는 유대의 왕 요시야를 죽이고 여호야김을 이름뿐인 왕위에 오르게 한 파라오로 등장한다. 헤로도토스에 관해서는 최후에 이집트 역사의 연대적 틀짜기가 중요하다. '신들의 시대'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의 시대' 즉 메네스 왕에서 부터 세토스 왕까지는 합계341세대라고 하고, 그 기간을 다음과 같이 계산하고 있다. "3세대가 1백 년이므로 3백 세대면 1만 년이다. 더욱이... 나머지 41세대가 1340년이 된다. 이리하여 합계 1만 1340년이 된다." 사실은 헤로도토스가 잘못 계산하고 있는데, 정확히는 1만 1366년과 8개월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어쨌든 이것은 굉장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여기에는 '신들의 시대'에는 포 함되어 있지 않다. 헤로도토스 재평가의 시대 중에서 이 수치가 보여주는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가 보편사 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 분명하다. 디오도루스가 그리는 이집트 역사 기원전 1세기경에 살았던 시실리 태생의 디오도루스Diodorus Ciculus가 쓴 [역사 문고 Bibliotheca historica]도 당시의 헤로도토스와 나란히 이집트 역사 연구에 필요한 기본 문헌 의 하나로 다루어졌다. 이집트사는 [역사 문고] 제1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구조는 기본적으로 헤로도토스와 동 일하도고 해도 좋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들 자신에게 있었을 것이다. 글도 헤로도토스와 마 찬가지로 이집트의 신관에게서 역사를 구술해 받았기 때문이다. [역사 문고]에서 주의할 것은 두 가지 점이다. 첫째는 '신들의 시대' 가운데에서 오시리 스가 인도에서 아시아, 유럽의 모든 지역을 정복하고 각지에 기념비를 남겼다고 하는 점이 고, 이시스와 함께 전지역에 농업을 가르쳤다고 기록한 점이다. 그리고 세소스트리스의 부분에서도 또다시 헤로도토스와 같은 세계 정복이 서술되고 있 다. 말하자면 이집트인은 모두 두차례에 걸쳐서 대세계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디오도루스의 이집트사의 시간적 틀짜기에 대해서이다. 그는 '신들의 시대'에 관 해서는 1만 8천 년간으로, 메네스 이후 그의 시대까지를 5천 년 이하로 하고 있다. 첫째는 뒤에 소개하는 뉴턴의 기술과 관련되므로 특별히 다루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두 번째이다. 그가 이집트를 방문했던 때인 제180올림피아드는 기원전 60년에서 56년에 해당하 기 때문에, 이 수를 더하면 그는 메네스 이후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기간을 거의 5천년으로 보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수치로는 유세비우스가 마네토 연구로부터 이끌어낸 5천6백 년 간이라는 숫자에 가깝다. 헤로도토스보다는 대폭 단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편사가 부 여하고 있는 노아 이후의 기간을 크게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마네토의 재생 16세기 말에 이르면 마네토 역시 되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마네토의 부활로 인해 유세비 우스가 고민했던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도 완전히 부활하게 된다. 이 문제를 부활시킨 것은 네덜란드의 스칼리게르(Joseph Justus Scaliger, 1540-1609)라고 하는 연대학자인데, 그는 '연대학 논쟁'의 출발점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그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제2장에서도 말했듯이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는 이에 대해 고민했으면서도 해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유세비우스 시대부터 기독교적 세계사의 목구멍에 깊이 박혀 있는 가시처럼 존속해왔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으로 인한 새로운 조류가 뜻밖의 계기가 되어 다시 움직 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유세비우스에서 보았던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보편사의 생명을 위협할지 도 모르는 커다란 위험성을 가진 것이었다. 실제로 이 이집트사의 연원 문제는 18세기에 이 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유럽의 학자들을 괴롭힌다. 종교 개혁과 보편사의 위기 요하네스 슬레이다누스 종교개혁에 착수한 사람들이 당시의 전통적 세계사 기술이었던 보편사와 어떠한 관계를 가졌던가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검토에서 가장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바로 종 교 개혁기의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가인 요하네스 슬레이다누스(Johannes Sleidanus, 1506경 -1556)이다. 그는 칼뱅(Jean Calvin, 1509-1564)와도 가까운 사이로, 1541년에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 했다. 이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Schmalcaldic League, 1531-1547)의 대사가 되어 프랑스와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동맹 그 자체는 1547년에 붕괴되었으나, 동맹은 그에게 종교 개혁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서술을 위탁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가 완성한 것이 [황제 카를 5세 시대의 종교와 국 가](1555)인데, 이 책은 1786년까지 80판을 넘길 만큼 뛰어난 글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는 이 책으로 인해 독일의 근대적 역사학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제2의 주된 저서인 [4세계제국론](1556)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세계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역사 교육의 기초가 되었던 이 책 역시 1786년까지 70판을 헤아 리게 되었으며,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역할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대변자로서 [4세계제국론]은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노아의 홍수에서 '신아시리아(또는 유 대왕국의 멸망)'까지, 제2부는 최초의 세계적 제국인 '바빌로니아', 제3부는 페르시아, 제4 부는 그리스, 그리고 제5부가 로마제국으로 되어 있다. 구성과 내용으로 보아, 이제까지 몇 번씩이나 보아온 보편사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러나 보편사의 유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슬레이다누스 나름대로의 독자성이 존 재한다. 여기에서는 그 독자성 쪽에 주목하면서 보기로 하자. 제1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호이다.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하는 창세 기원이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는 1656년으로 되어 있으며, 바벨탑은 1787년에 칼데아를 출발하 는 기념으로 건설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의 히브리인 역사에 관해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모두 성서를 따른 형식으로 서 술되어 있다. 다만, 아시리아에 관한 서술만은 전통적인 서술과는 상당히 다른 데가 있다. 그는 '구아시 리아'와 '신아시리아' 두 개의 아시리아를 설정했다. 구아시리아는 유세비우스 이후 제1의 세계제국이 된 아시리아에 해당한다. 그 시조를 성 서에 나오는 님롯으로 하고, 여기에 베로소스 이후의 그리스인들이 전하는 아시리아의 여러 왕들, 즉 베르스, 니누스, 세미라미스 등에서부터 1천3백 년간 존속한 뒤의 왕 사르다나팔루 스Sardanapalus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신아시리아는 푸르(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때에 강성해진, 성서에 등장하는 아시리아로,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것도 이 아시리아이다. 앞에서 필자는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왕기 하>에 나오는 아수르(아시리아) 에 관해 이것을 메디아가 패권을 잡은 시대에 존재했던 종속국가 가운데 한 왕국으로 생각 하여 무심코 넘긴 것은 후세에 큰 문제를 남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슬레이다누스는 이에 대해 푸르 이후의 아시리아를 성서에서의 기술대로 '신아시리아' 로 부활시켰던 것이다. 슬레이다누스는 또 제1의 세계제국을 아시리아로 하는 히에로니무스 이후의 사고방식을 배척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에 나와 있는 대로 '바빌론의 제국'이며, 그 나라는 느부갓네 살 때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의 지배를 실현하여 최초의 세계제국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니엘서>의 기술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제2와 제3의 세계제국에 관해서는 다른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제국 및 그리스제국 으로 하고 있다. 전자는 세계적 제국으로서의 로마제국의 전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창세 기원 3212년의 로 마 건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왕정시대, 두 사람의 콘술 시대, 포에니 전쟁이나 카이사르의 정 복사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전사를 이어서 '제4의, 또한 최후의 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였다. 아우구스 투스 이후는 각 황제마다 황제 개인과 그 치세 기간 동안에 생긴 일들을 서술해간다. 그 서 술은 슬레이다누스가 살았던 시대의 황제인 카를5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여기에서는 슬레이다누스의 역사 서술의 특징을 생각할 경우에 필요한 것 두 가지만 지적 해두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는 그의 '로마제국'이 고대의 로마제국과 중세의 로마제국을 통 합한 것이라는 말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자리매김까지 포함하여, 이 점에 있어서는 오토 폰 프라이징의 로마제국론을 계승한 셈이다. 두 번째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그의 독특한 태도이다. 그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카톨릭 교회와 결탁하여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 개혁을 탄압하려고 했다. 이에 반해 슬레이다누스는 프로테스탄트측 제후들의 대변자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 교황과 카톨릭 교회들이 황제권의 약화를 초래했음을 이유로 부정하지 만, 로마 황제권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왜냐하면 제5의 제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독일만이 제국의 명칭과 지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제4의 제국이 멸망하는 때는 종말이 오는 때이므로, 종말까지 는 제4제국의 시대가 계속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역사 서술은 한편으로는 중세적, 카톨릭적 보편사를 계승하고 있다. 성서에 기초하는 역사 서술이라는 기본 성격도 변함이 없다. 로마제국의 평가에 대해서도,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로마제국을 하나의 제4세계제국으로 일괄하고 있으며, 이것을 최후의 제국으로 전망했 다는 점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로마 교황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프로테스 탄트의 근본적 교리인 성서 중심주의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아시리아론이나 제1의 세계제국이 느부갓네살의 칼데아라고 하는 점, 전통에 이의를 제기 하고 있는 점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그가 사용한 연호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테스탄트는 히브리어 성서를 원전으로 삼았다. 70인역 성서에 의지해온 전통적인 연대학에 비하여 슬레이다누스는 히브 리어 성서에 기초하는 연대를 채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적 연대학에 대한 명확한 비 판이며 하나의 혁신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적 보편사는 중세적, 카톨릭적 보편 사의 비판적 후계자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성서를 둘러싼 논쟁의 시대 [모세 5경]에는 분명히 모세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저자가 당사자인 모세라고 써 있는 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서는 물론 기독교에서도 모세가 5 경 전부를 쓴 것으로만 믿어왔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서 읽는다면, 모세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보기에는 이상하게 느껴지 는 데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창세기>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노아의 방주에 태울 짐승에 관하여 한편에서는 암수 "각기 둘씩"(6:20)을 넣도록 하나님이 명하셨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 씩"(7:2)을 태우도록 명하셨다고 되어 있다. 도대체 어느 명령이 옳으며, 노아는 어떤 명령을 따랐던 것인가? 또한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 가운데에 "아브라함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게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12:6)고 씌어 있는데, 모세는 가 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죽었었다. 그가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었을 까? 이것은 그가 선지자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그렇지만 왜 '그때에'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여기 말고도 성서에는 '그때 그곳에는'이라 는 식의 어구가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여, 이 어구는 후세의 누군가가 해설을 위해 삽입한 것이라는 편이 앞뒤가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신명기>에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보올 맞은편 모압 땅 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느니라"(34:5, 6)라고 씌어 있다. 그리고 "그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34:10)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모세가 자신이 죽은 뒤 자기 무덤의 위치에 관해 언급을 하며, 또 자신이 죽은 뒤 어느 시점에서 '오늘까지' 또는 '그후에는'이라고 쓸 수 있었단 말인가? 이와 같은 문제는 이미 고대에도 많이 지적되었고 논쟁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 쟁은 원천적으로 봉쇄를 당해버렸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이나 유대교의 율법학자인 랍비들도 가끔씩 논리가 통하지 않는 억지나 강변을 늘어놓으며 모세가 5경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물론 중세에 들어와서도 유대교, 기독교인들을 불문하고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것 들은 모두 교회 내부에서 억압당했으며, 공공연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은 성서를 둘러싼 논쟁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측의 성서 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왕성한 성서 연구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그 러나 이 성서 연구의 발전은 보편사에 이중의 의미로 커다란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연대학 논쟁과 성서의 비판적 연구 개시 첫째는 이 성서 연구가 '연대학 논쟁'에 불을 붙이는 촉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를 연구해가는 과정에서, 구약성서의 원전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히브리어 성서 하나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말한 70인역의 그리스어 성서와 사마리아인들이 전해온 사마리아판 성서가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세 가지 계통의 성서 어느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베껴지는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이본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기독교 교부들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라틴어로 된 우르가타에서는 노아의 홍수 같은 것들의 여수를 적는 부분은 히브리어 성서 를 번역해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의 중요 문서인 순교자록은 그리스어로 된 70 인역 성서에 근거하여 연대를 계산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쪽이 전통적 연대학으로 여겨 졌던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강력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와 같이 모순된 상황도 표면화 되는 일이 없었으나, 교회 자체가 분열된 종교 개혁 이후의 시대가 되어서는 더 이상 교회 내부에 감추어놓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성서들이 모두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사에서 가장 중요한 연호에 대해 이들 세 가지 성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하 고 있었다. 세 종류의 성서가 기록해놓은 연호가 서로 다른 가운데에서 보편사는 도대체 어느 연호를 채용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뒤에 말하는 '연대학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성서 연구의 발전은 그것이 차차 비판의 정도와 과학성을 높임으로써 역시 보 편사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프로테스탄트는 히브리어 성서를 원전으 로 하였고, 또한 이 원전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나갔다. 그러나 히브리어를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몇 종류나 되는 성서들을 연구하 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같은 작업은 지극히 방대한 비교, 교정의 작업을 수반하는 연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서 중심주의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상, 이와 같은 모든 작업을 통해 성 서에 씌어진 말씀을 비교, 검토하여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결정해 가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곧 사제라고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에 비 추어볼 때, 이 작업은 성서에 의거하여 생각하도록 요구되는 프로테스탄트들 한사람 한사람 에게 부과된 과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욱이 르네상스 이후는 사제들만이 이와 같은 작업을 하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라틴 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같은 언어들을 익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널리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제들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직업의 사람들이 연구를 담당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움직임이 서로 연결되어 성서 연구가 왕성해지고 또한 그 연구가 서로를 자극 하여 차츰 성서의 비판적 연구가 진행되어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됨에 따라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논쟁이 일반 대중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이루 어지게 되었다. 토머스 홉스 공공연한 논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그는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에서 "5경이 [모세 5경]이라 불린다고 해서 모세에 의해 서 씌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앞에서도 말한 <신명기>의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사 이외에도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라는 보기를 들어 주장하고, "따라서 [모세 5경]은 확실 하게 얼마나 뒤인지는 모르지만 모세 시대 이후에 씌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던 것 이다. 또 [모세 5경] 이외의 여러 성서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이 많이 있음을 언 급하면서 그 각각의 문서가 특정한 어느 시대에,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 고 주장했다. 스피노자 17세기 후반에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활동한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1632-1677)가 [모세 5경]의 비판적 연구를 한층 더 추진했다. 그는 [신학 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1670)에서 앞에서도 말한 '이후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나오지 않았다'와 같은 예를 들면서 "[모세 5경]은 모세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보다 몇 세기 이후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모세 5경] 이외의 다른 성서들에 대해서도 원저자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여 "나는 그가 에즈라Ezra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주장했다. 에즈라는 기원전 444년경 포로로 잡혀갔던 땅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방인과 혼인한 사람들을 이혼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유대인의 민족적, 종교적 순수성을 유지하 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던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였다. 성서에는, 그가 이때 모세의 율법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읽어주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이때의 문서가 오늘날의 [모세 5경]의 원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중세의 유대 교 성서학 등에서도 이루어져 당시 몇몇 선구자가 있었다. 그는 이 흐름을 계승하고 그것을 문헌 비판의 방법에 근거하면서 전개했던 것이다. 리샤르 시몽 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스피노자 이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오라토리오파 수도 회에 속해 있던 신부 리샤르 시몽(Richard Simon, 1637-1712)이었다. 그는 [구약성서의 비 판적 역사](1678)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문헌학적 비판을 바탕으로 철저한 연구를 추구 했다. 그는 선지자란 서기(기록하는 사람)였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기록, 보 관, 편집하는 임무를 띤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이라고 불리고 있는 부분 등 [모세 5경]의 일부는 모세에 의해 기록 된 것이지만 다른 역사적 서술을 한 부분은 이 선지자들, 즉 서기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 것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선지자가 서기라는 생각은 시몽의 독단적인 생각이었으며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었다. 그 러나 시몽의 논증의 매우 철저하여 그 이후로는 [모세 5경]의 전부가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어떤 형식이든 간에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손질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쪽이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되어갔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성서에 바탕을 두고 연대 계산을 하는 것 또한 잘못이 된다. 선지자 가 서기였다는 그의 설로 본다면, 이 서기는 당연히 유대인의 역사와 관계되는 것만 기록해 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구약성서에는 페르시아의 왕 이름이 세 사람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인을 ' 바빌론의 유수 생활'에서 해방시킨 키루스, 유대인의 제2신전 건설을 도와준 다리우스 1세Darius 1, 다니엘이 활동했을 때의 왕 페르샤자르(아르타크 세르세스?) 세 사람이다. 이 세 명의 페르시아 왕은 모두 다 유대인의 역사와 관계가 깊은 왕들이라 기록에 남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페르시아에는 세 명의 왕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13명의 왕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성서 이외의 여러 역사 서적에 나타나 있 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구를 왜 카톨릭의 사제인 시몽이 한 것일까? 그것은 심술궂게도 그가 열렬한 카톨릭교인이었다는 데에 기인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그의 이러한 주장에는 프로테스탄트 의 교리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성서 중심주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하여 그 성서가 인간에 의한 기술도 포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기본 전제 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시몽은 주관적으로는 카톨릭 진영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결국 카톨릭의 기 반까지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카톨릭측의 반응도 재빨랐다. 시몽의 저술은 발간과 동시에 발매 금지를 당하고 남은 것은 압수되었으며, 그는 소속되었던 오라토리오회에서 제 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카톨릭의 교리에 충성을 맹세한 그의 신념은 변 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프랑스에서의 출판이 불가능하게 되자 네덜란드에서 이 책을 출판 했고, 다시 신약성서 본문과 번역서, 주역서 등에 관해서도 차례대로 비판적 연구를 발표했 다. 시몽의 주장은 그때까지 1천 년 이상 동안 서술되어온 보편사에 대한 놀라운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까지 기독교 연대학이 성서의 기술 전체에 부여해왔던 절대적인 권위를 크게 흔들고, 그로 말미암아 성서 연대학을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몽이 행한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추진으로 말미암아, 보편사는 매우 중대한 국면에 서 게 되었다. 보편사의 위기가 문헌 비판의 등장에 의해 불러설 수 없는 사태까지 발달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에 의해 확립된 '비판'은 그후 더욱더 강화되어, 18세기와 19세기까 지 이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대항해 시대와 보편사의 위기 콜럼버스에 의한 '인간'의 발견 이탈리아의 항해가였던 콜럼버스(Columbus, 1446?-1506)가 1492년에 발견한 것은 단순한 '신대륙'만이 아니었다. 첫 번째 항해에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오늘날의 쿠바, 아이티 같은 섬들을 발견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괴물들을 이 섬에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나 다 모습도 좋고 피부 색깔 또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말 고는 기니아의 사람들처럼 검지도 않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콜럼버스는 거기에서 괴물이 아니라 '인간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과 함께 맨드빌의 책도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 괴물지' 속의 괴물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를 이어 '신대륙'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518년에 쿠바의 초대 총 독이었던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s de Cuellar, 1465-1524)가 코르테스(Hernando Cartez, 1485-1547)에게 준 명령서가 남아 있다. "크고 폭넓은 귀를 가진 사람들, 또 개의 머리를 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므로 그것을 찾아 낼 것과, 귀관과 동행하는 인디오들에 의하면 '그 근처에 산다'고 하는 아마존들이 어느 지 방에 살고 있는지를 조사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1년 뒤인 1519년에 코르테스는 이와 같은 괴물들이 아닌 아스텍Aztec 왕국과 수도인 테 노치티틀란(Tenocititlan, 지금의 멕시코시티)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이들의 후계자들은 아마존의 거주지 탐색을 계속했다. 16세기 중엽에 '아마존 강' 이나 '캘리포니아'가 발견된 것은 이와 같은 경위에서였다. '캘리포니아'는 당시 아마존의 여왕 칼리파가 살고 있는 것으로 믿어왔던 섬의 이름이었 다. 태평양을 북상하여 처음으로 이 반도와 맞닥뜨렸던 에스파냐 사람들이 '이곳이야말로 칼리파가 살고 있는 섬'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 반도의 이름이 캘리포니아가 된 이유였다. 콜롬버스의 편지에 나오는 말은, 유럽인들 스스로가 그 당시까지의 '세계 괴물지'를 타파 해가는 첫걸음이 되었지만 빠르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은 기존의 ' 세계 괴물지'와 공존해가면서도 아스텍 왕국의 정복(1519), 잉카제국의 정복(1521) 등 에스 파냐인들의 '신대륙'에 대한 진출이 확대되면서 착실하게 퍼져나갔다. 신대륙의 발견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지역을 인도 의 일부로만 생각했다. 그는 결코 그곳이 '신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상인이자 항해가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가 포 르투갈 왕의 요청에 따라 세 번째 항해에 나섰다. 이때 남미 대륙의 대서양 연안을 대략 남 위 50도 부근, 오늘날의 마젤란 해협 바로 가까이까지 탐험하여, 거기까지 육지가 이어져 있 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은 모두 남위 35도 이북에 있는데 만일 적도의 북쪽에서 남 위 50도 이남까지 이어져 있는 땅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 대륙 이외의 다른 대륙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항해 뒤 1503년경까지 쓴 편지들에서, 이것을 세계의 '제4의 부분'(네 번째 편 지)이라고 하기도 했고, 또 '신세계mundus novas'(다섯 번째 편지)라고도 일컫었던 것이다. 그의 편지는 그 즉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507년 [세계지리 입문]이라는 제목의 서적이 출판되었다. 그 책의 제9장에는 "바야흐로 세계가 다 알고 있는 부분은 광범위하게 탐험되어 있으나, 또 하나의 제4의 부분도 아메리쿠스 베스푸티우스(Americus Vesputius,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발견되었다. 유럽도 아시아도 여성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처 럼, 이것 역시 그 발견자이자 총명한 아메리쿠스와 관련해서 아메리카... 즉 아메리쿠스의 땅 이라 부르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세계지리 입문]에는 그밖에도 마르틴 발토제 뮐러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과 아메리 고 베스푸치의 항해에 의한 세계도'라는 제목이 붙은 세로 1.36미처, 가로 2.43미터의 거대 한 지도가 부록으로 딸려 있었다. 이 지도에는 남아메리카 부분이 섬 대륙으로 그려져 있고 거기에 '아메리카'라고 씌어 있다. 이에 비해 북아메리카는 훨씬 작은 섬으로 그려져 있다. 이 세계지도는 그 뒤 '신세계 의 세례 증명서'라고도 불리면서 옛 지도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아메리카라는 호칭은 현재의 남아메리카를 가리키는 말로 처음 등장했다. 그 뒤 이 것이 북아메리카에도 적용되는데, 이와 같이 북미 지역이 뒤늦게 아메리카라고 불려지게 된 것은 탐험이 늦게 이루어졌던 데에 그 이유가 있다. 북미 대륙의 대서양 연안이 영국인들에 의해 버핀만 부근까지 밝혀지게 된 것은 1576년에서 1586년 무렵이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의 경우 캘리포니아 이북은 오랫동안 탐험이 진전되지 못했다. 이 지 역이 최종적으로 밝혀질 때까지는 2백 년이나 흐른 뒤였다. 즉, 겨우 1728년에 이르러서야 베링이 아메리카와 아시아가 다른 대륙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당면하고 있는 16세기로 되돌아가보며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모습이 분명치 않은 채 그것 이 작은 섬이 아니라는 정도만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막연한 형태로 그 크기가 알려지자 오히려 콜럼버스가 상상했듯이 북아메리카는 아시아 대륙이라는 생각도 부활되었던 것 같다. 1590년 뮬리티우스의 세계도처럼 이와 같은 생각에서 그려진 세계지도에서는 -북아메리카와 아시아가 붙어 있게 되는 바람에- 지팡그 (일본)가 없어져버리기까지 한 것도 있다.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 북부 대륙까지 아메리카로 보는 사고방식은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지에 나온 것으로 보인 다. 영국에서는 1519년 존 라스틀이라는 사람의 '4대 원소의 성질'이라는 연극에서 이 말이 북부 대륙을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북미 지역을 아메리카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최초의 지도는 16세기에 가장 뛰어난 네 덜란드의 지도학자였던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 1512-1594)가 1538년에 출판한 세계지도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또 1569년에 출판한 유명한 세계지도 가운데에서 "신인도(아메리카)가 아시아와 같 은 대륙을 형성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메르카토르의 인식이 옳았다. 그후 세계지도의 역사는 세부적으로는 여 전히 수정이 필요했지만 큰 테두리는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가 승리를 차지해가는 과정이라 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은 유럽의 세계관이 전환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럽인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 이외에 또 하나의 대륙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 닫고 인정했다는 것은 보편사에 커다란 타격이 되는 사건이었다. 둥근 공 모양의 대지와 그 위에 있는 네 개의 대륙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은 보편사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은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친숙하게 대하고 있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지도는 세계사 서 술의 역사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해낸 것이었다. 인디언 역시 아담의 자손 1537년, 로마 교황 바오로 3세는 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선언을 했다. "인디언도 우리들과 똑같이 진정한 인간이다. 그들은 카톨릭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한 교서가 나오게 되었을까? 콜럼버스 이후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인들 사이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디언들이 기 독교를 이해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유럽인들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가 등의 문제였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괴물적 존재들에 관한 논쟁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그는 인간을 '이성적이며 죽어야만 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이 정의에 들어맞으면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고 단언했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한다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아담 과 이브의 자손, 즉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만일 인디언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한 이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디언이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윌무센이라는 학자는 "초기 에스파냐 이주자들이 제일 선호하던 견해는 인디언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의미에서 인디언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면, 인디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같은 논쟁이 벌 어지고 있는 와중에 발표된 것이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교서였다. 그 교서를 발표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디언들은 공식적으로 '진정한 인간', 즉 아담과 이브 의 자손이라고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바리아드리의 논쟁 이 교서로 논쟁은 그쳤을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것을 입증하는 흥미있는 사건이 1550년에 일어났다. 에스파냐의 바리아드리에서 공개적인 논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쪽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보호법 제정 활동과 [인디아의 역사](1559) 등으로 유명한 바르 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였고, 이에 맞서는 쪽은 당시 아 리스토텔레스학의 권위자였던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였다. 논쟁의 중심은 인디언이 유럽인들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둘 러싸고 이루어졌다. 이것을 긍정한 것은 당연히 라스 카사스이며, 부정한 쪽이 세풀베다였 다. 재미있는 것은 세풀베다의 논리이다. 그는 인디언을 '이성을 갖추지 못한 짐승과 다름없는 야만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아리 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전개한 '선천적 노예설'에 의거하면서, 인디언은 인간이라고는 하여도 오히려 선천적으로 모자라는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인디언은 인간적인 각종 권 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논쟁에서 이 '선천적 노예설'을 전개하고 있었다. 세풀베다의 이 주장도 에스파냐인들이 신대륙에서 추진한 엔코미엔다 제도를 옹호하고, 그 곳에서의 인디언들에 대한 노예 같은 혹사를 옹호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동시에 전통적 세계관을 고집했던 당시 유럽인 대부분의 심리도 배경이 됐다고 생 각한다. 보편사적인 관점에서는 유럽 이외의 땅은 요괴나 괴물 같은 인간, 즉 그들보다는 모자라 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일 뿐 유럽인들과 동등한 인간들이 사는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세계관에 대한 집착 역시 세풀베다에게 또 하나의 심리적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몽테뉴 이 문제는 16세기 말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였던 몽테뉴(Michel de Mantaigne, 1533-1592)에 의해 겨우 해결을 보게 되었다. 그는 [수상록Essais](1588)에서 "신대륙의 국민들에 대해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 에게는 야만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나 자신의 습관에 없는 것을 야만이라고 부른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저 신대륙에도 역시 완전한 종교와 정치가 있으며, 모든 것에 대해서 충분히 온전한 습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그를 통해서야 겨우 '신대륙'을 인간이 사는 지역으로 인정하고, '완전한 종 교와 완전한 정치'를 가진 세계로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중세적인 세계관을 스스로 파기하고 유럽을 세계 속의 한 지역으로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만을 절대시해 온 전통적인 보편사의 세계가 그 근본부터 부정된 것을 의미한다. 보편사는 이런 측면으 로도 위기를 더해간다. 다양한 인디언 기원론 마젤란의 세계일주가 신대륙의 인지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1522년, 바오로 3세의 교서 가 나온 것이 1537년, 메르카토르가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에서 분리해 그린 최초의 세계 지도를 출판한 것이 1538년이었다. 보편사적인 논쟁도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하고 있다. 1530년대부터 누가 신대륙 최 초의 주인이고, 그들이 누구의 자손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을 시작한 문헌상의 최초의 예는 카리브 해 지역을 널리 여행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에스파냐의 역사가 곤잘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Gonzlaos Fernandez de Oviedo)였 다. 그느 1535년에 출판된 [신대륙 자연일반사] 가운데에서 주민의 기원에 대하여 '고대 에 스파냐인설'과 '카르타고인설'을 짜맞추어 말했다. '고대 에스파냐인설'이란 기원전 1658년경에 고대 에스파냐인들이 대서양에서 저 멀리 서쪽에 있는 섬을 발견하고, 여기에 당시 왕의 이름을 따서 에스페리데스 제도라고 명명했 다는 전설에 의거한다. '카르타고인설'도 비슷한 전설에 의한 것으로, 이에 따르면 카르타고인들이 옛날 아틀란티 스Atlantis 저쪽에 있는 섬을 발견하고 정착했다고 전해져왔다. 오비에드는 최초로 고대 에스파냐인들이 섬에 정착하고 이어서 카르타고인들이 옮겨와서 그 지역의 인구 증대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리아드리의 논쟁이 벌어졌던 1550년이 지나면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빠른 속도로 확대 하여,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설 이외에도 다양한 인디언 기원설이 쏟아져나온다. 그중 라사 카사스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동인도 기원설'과 플라톤이 전한 아틀란티스 주 민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틀란티스 기원설'이 주목을 받 았는데, 이 설은 16세기에 가장 인기가 있는 설이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었던 호메 로스Homeros의 시로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Odyseus가 에스파냐 남단은 지브롤터Gibraltar 서쪽까지 흘러 떠내려갔을 때에 표착하여 남기고 온 사람들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그리 스인 기원설'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의해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인 기원설'과 '오빌 기 원설'이 그것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왕국이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했을 때 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열 개의 부족 이 아수르(아시리아)로 끌려갔다는 성서의 기록(열왕기 하 17:6)에 의거한 것이다. 이 10부족은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리는데, 현재 성서의 정전에서 제외된 '에즈라 제 2서'에는 그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이 10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율 법을 지키기 위해 동쪽 땅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일 년 반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아자레스'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인 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아자레스'야말로 신대륙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류의 종말이 매우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이유는 '에즈라 제2서'에는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 그들이 '아자레스'에서 모습을 나타내어 심판을 받는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 아자레스인들이 발견되었으니 예언이 성 취된 것이고 따라서 머지않아 종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오빌 기원설'이란 창세기(10:29)에 있는 함의 자손이며 욕탄의 손자인 오빌을 이들의 조 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페루인을 오빌의 자손들로, 그리고 유카탄 반도의 사람들을 욕탄의 후손으로 여기는(발음이 비슷해서일까?)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설들은 모두 16세기 후반 카톨릭의 나라인 에스파냐에서 주창되었 다. 그 설들은 한 가지 설을 단독으로 주창한 경우도 있고, 둘 이상을 짜맞추어서 주창한 경 우도 있다. 또한 둘 이상의 설을 짜맞출 경우에는 오비에도 같이 시대를 앞뒤로 움직여서 짜맞추기도 하고, 유카탄이나 뉴에스파냐 사람들은 그리스인의 자손이며 페루인은 아틀란티 스인들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장소를 바꿔 짜맞추기도 했다. 17세기 초까지는 위와 같은 에스파냐 학자들이 논쟁을 주도했다. 그들의 특징은 어느 것 이나 인디언들의 조상을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전하는 전설이나 성서상의 기록 등에서 구 하여 유럽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민족과 결부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이들 여러 가지 설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성서 기록의 진실성을 옹호하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들의 설에서 나오는 여러 민족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제1장에서 말했던 창 세기의 '민족표'에 연결하여 설명을 마친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각종의 시도 는 한결같이 전통적인 보편사에 신대륙을 짜넣으려는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아코스타의 아시아 기원설 에스파냐 학자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호세 데 아코스타(Jos de Acosta, 1539-1600) 의 과학적인 아시아 기원설이다. 그는 예수회의 선교사가 되어 남아메리카의 페루를 중심으로 활동했었다. 그리고 그 동안 의 경험을 바탕으로 1590년에 [신대륙 자연문화사Historia naturaly moral de las Indias]를 에스파냐어로 출판했다. 아코스타가 훌륭했던 점은, 이제까지의 여러 가지 설이 오직 인디언이라는 인간들에게만 국한해서 추론과 주장을 했던 경향에서 벗어난 점이다. 그는 동물들에게까지 시야를 넓혀 서식 동물들의 형태가 아시아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이들 인디언 의 아시아로부터의 도래를 추정했다. 그의 결론을 인용해보자. "인간의 계통은 조금씩 이동하여 신세계에 이르렀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은 신대륙의 땅이 세계의 다른 대륙과 이어져 있거나 또는 매우 근접해 있는 것이 신대륙에 사 람이 살게 된 주된, 그리고 진정한 이유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나는 신세계와 서인도에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은 그렇게 몇만 년이나 과거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제1권 24장). 물론 그가 이와 같이 생각하는 밑바탕에는 역시 성서가 있었다. 즉 인간과 동물의 양쪽을 생각하는 발상은 "모든 생물들의 번식은 방주의 바닥이 육지에 닿은 아라랏 산에서 방주로 부터 떠나간 자들에게 국한해야"(창세기 9:18-20) 한다는 신념에서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사고방식을 당시의 상황 속에서 생각한다면, 오히려 시대를 훨씬 초월한 과학적인 것이었다. 아코스타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옳았을 뿐만 아니라 지리학적, 역사학적 인 방법과 훌륭한 과학적 논리의 근거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 주장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인정을 받게 되었다. 위기를 극복한 보편사 이와 같은 움직임은 보편사의 위기와의 관계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일까? 보편사가 치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대지가 공 모양이며 그것도 세 개의 대륙이 아니라 네 개의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또한 이들 여러 대륙의 어디에도 괴물들은 없으며 모두 정상적인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 그리 고 지구상에는 여러 개의 독자적인 세계가 있어서 유럽은 이와 같은 여러 지역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등. 이러한 일들이 밝혀진 것은 어느 것이나 보편사의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다만 최후에 신대륙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은 동물들과 함께 아시아에서 건너간 것이 확실 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은 보편사에 있어서는 숨을 되돌릴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아시아인 은 이제까지 아담과 이브에 계보에 연결되어왔으므로, 인디언의 조상이 아시아인이라면 결 국은 인디언도 성서에 바탕을 둔 인류사에 위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신대륙'을 하나의 세계로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유럽인들은 여전히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이미 몽테뉴는 "우리들의 세계는 최근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 계에 못지 않게 크고 튼튼하며 손발도 건장하지만, 너무나도 새롭고 어리기 때문에 아직 도 ABC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세계 그 자체는 지금까지의 구조를 바꾸었으나, 신대륙을 '어린 세계'로 치부하고 유럽을 어른의 세계로 봄으로써 유럽은 새로운 세계에서 간신히 우월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보편사는, 비록 자기수정은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존망의 위기에까지 몰리는 일은 없었다. 중국사의 연원 문제와 보편사의 위기 포르투갈인과 중국 유럽과 중국의 직접적인 관계는 13세기에 성립되기는 하였으나, 14세기 전반에는 다시 관 계가 두절되었다. 마르코 폴로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소개된 중국에 대한 '부귀와 영화'의 이미지가 계속 유럽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중국의 문화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 이후는 앞에서 소개한 여행기들 가운데에서 맨드빌이 기술한 '호화스러운 궁중 생활을 영위하는 대한의 나라'는 환상적인 중국에 대한 인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그후 직접 중국에 발자취를 남기는 유럽인이 나타나는 것은 대항해 시대로 접어들고 나서 의 일이다. 1517년에는 광둥부근에 포르투갈인이 모습을 나타냈고, 1557년에는 그들이 아모 이(Amoy, 샤먼, 중국 남동부의 항구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을 찾아간 초기 사람들로는 밀무역에 가담하였다가 1549년에서 1552 년까지 중국 남부에서 구금되었던 여행가 갈레오 데 페레이라,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인 가스 파르 다 쿠르스 같은 포르투갈인, 1575년에 에스파냐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로서 기독 교 포교단장으로 푸젠을 찾아갔던 마르틴 데 라다 등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짧은 기간의 중국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여행기를 남겼다. 또한 1576년에는 아모이에 사교좌가 설치되었다. 포교에는 별로 공헌하지 못했지만, 교역 활동에는 성공하여 아모이는 포르투갈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해간다. 이와 같이 16세기 후반부터 몇몇 유럽인들이 중국을 찾아갔다고는 해도 그들의 중국 체험 은 여전히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예수회의 중국 포교 유럽과 중국의 교섭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은 예수Jesuit회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그 실마리가 된 것이 프란시스코 자비에르(St. Francisco Xavier, 1507-1552)였다. 그는 1541년에 리스본을 떠나 1549년에는 일본에서 전도를 했다. 일본에서의 활동중에 그 는 이 나라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국의 존재를 깨닫고,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회하는 듯한 감이 있어도 먼저 중국에 대한 전도가 지름길이라고 생각하 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스스로 중국으로 갔으나 광둥 부근의 상촨섬에서 열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중 국 본토 상륙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어 예수회의 수사들이 중국 포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1601년, 17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이탈리아인 예수회 수사이던 마테오 리치(Mateo Ricci, 1552-1610)는 북경으로 들어가 명나라의 만력 황제를 배알하기까지 했다. 이 일은 유럽과 중국과의 관계에 역사상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후 예수회 수사들이 차례로 중국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유럽의 과학 문명을 배경으로 그들이 지니고 있던 천문학, 수학, 과학 기술 등을 무기로 삼아 중국에서의 포교 활동에 힘 쓰게 된다. 멘도사의 [중국대왕국지] 1637년경에 예수회의 선교단이 자신들의 활동을 위해 중국에서 70인역 성서에 의거하는 연대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얻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장의 연대학 논쟁에서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당시에는 카톨리 교회도 연대학의 기초를 히브리어 성서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 왜 이런 논쟁이 일어났을까? 그 사정을 전해주는 것이 서양에서 가장 일찍 중국의 국정 전반에 관해 출판된 서적이라 일컬어지는 후안 곤잘레스 멘도사(Juan Gonzales Mendoza)의 [중국대왕국지]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선교사로 중국 포교의 명을 받고 1581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멕시코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마르틴 데 라다로부터 중국의 국내 사정을 듣고 명나라로 가는 것을 단념 했다. 하지만 그는 이때 라다에게 전해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처음에는 에 스파냐어로 출판하였으나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로도 번역되어 17세기 중엽까지 널리 읽혔다고 한다. 여기에서 멘도사는 '이 나라의 연원에 관하여'라는 장을 만들어 "이 나라의 영토와 백성 들은 제1대 황제인 비티 이래, 국왕의 권력에 귀속되어 현재 통치하고 있는 왕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역대 왕들에 관해서도 비티에서 시작하여 명조 제12대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연수 를 적고 있다. 그 숫자를 합하면 4269년 7개월이라는 숫자가 된다. 제12대 만력 황제가 황제의 지위에 오른 것이 1573년이다. 즉 멘도사는 비티가 즉위한 시 대를 그리스도 기원으로 기원전 2700년대에 자리잡은 것이 된다. 이 숫자가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노아의 홍수는 히브리어 성서(라틴어 성서도 동일)에 서는 기원전 2350년경의 일이며, 70인역 성서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일이다. 멘도사가 전한 중국 최초의 왕조 성립을 기원전 2700년대로 잡는 연호는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로 보면 노아의 홍수 이전의 연호가 되고, 70인역 성서를 기본으로 하는 연대를 이용하면 노아의 홍수 이후의 사건이 된다. 노아의 홍수로 인류는 8면으로 되돌아가서 새롭게 출발했다. 중국 왕조 성립의 연호는 70 인역 성서를 이용하면 성서의 역사기술과 서로 모순없이 설명이 가능하다. 중국의 예수회 수사단이 70인역 성서에 의한 연대학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는 것에는 이와 같은 사정이 얽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에서 포교를 진행시키려고 노력한 예수회 수사들이 불가피하게 중국인 들에게 이처럼 커다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입증해준다. 맨도사의 저작이 널리 읽혔다고는 하지만 간접적 정보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유럽 에서 이 문제는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또한 그 이후에 나타난 비슷한 책들 역시 근거가 애매하여 중국의 연원이 커다란 문제로까지 발전하는 일은 없었다. 마르티니의 [중국 고대사] 이 중국 역사의 연원 문제가 유럽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1658년의 일이었 다. 마르티노 마르티니(1614-1661)의 [중국고대사]가 출판된 것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티롤 태생인 예수회 수사로,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혁명 과정을 목격한 후 일시 귀국, [달탄전쟁기]를 저술하여 그 형편을 유럽인들에게 알렸다. 또한 도중에 기착한 네덜란드에서 저술한 [중국 신도](1655)는 유럽에서 최초로 나온 중국 의 지도와 지지를 기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청나라로 되돌아갈 때 열일곱 명의 예수회 수사들을 동반한 것으로도 중요한 일을 또 해냈다. 이들 열일곱 명 가운데에는 유명한 페르비스트 외에도 [대학], [중 용], [논어]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공자의 전기인 [중국의 철인 공자](1687) 등을 저술한 페르 디난도 크플레와, 유교 사상을 유럽에 소개한 프로스페로 인토르체터, 프랑수아 드 루즈몽 등이 있었다. 마르티니의 [중국 고대사]는 중국 최고의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한)의 시대까지를 다루 는 역사서지만, 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복희씨 이후의 시대를 의심 없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 것이었다. 복희씨란 '삼황 오제'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더욱이 마르티니는 이 복희씨의 통 치를 기원전 2952년으로 계산하였다. 그리고 복희씨, 신농씨의 삼황으로부터 기원전 2207년 에 건국하는 하, 은, 주의 오제 이후로도 면면히 이어져가는 중국의 여러 왕조들을 의심 없 는 사실로 인정했던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와 대조해본다면, 마르티니는 앞에서 언급한 멘도사보다 훨씬 오래 전인, 노아의 홍수를 거슬러올라가 약 600년경의 시점을 중국 왕조의 출발점으로 인정 한 것이 된다. 사실 그는 노아의 홍수를 오제 가운데에서 요 임금 시대의 사건으로 하고, 요 임금보다 앞선 여섯 명을 홍수 이전에 두고 있으며, 홍수 때의 연호도 기원전 2349년으로 했다. 이와 같은 기록은 노아의 홍수로 인류가 여덟 명으로 되돌아갔다는 성서의 기록과 정면으 로 대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마르티니는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한 가지 해결책으로 중국에도 기원전 3000년경에 요 임 금 시대와는 달리, 또 하나의 커다란 홍수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것이 만 일 노아의 홍수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히브리어 성서를 버리고 다시 70인역 성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르티니는 다시 생각을 계속한다. 그러면 복희씨 이전의 중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갑 자기 복희씨라는 군주만 출현할 리가 없다. 당연히 그 이전에 오랜 역사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르티니의 결론은 홍수 이전 가장 고대의 아시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중국에는 노아의 홍수가 미치지 못했다고 하 는 결론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고토 마츠오씨는 그의 명저인 [중국 사상의 프랑스 서점]에서 "마르티니는 오랫동안 중국 에서 산 결과, 중국 문명의 한 패거리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이교도 문명의 지지 자가 되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중국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생각된다. 물론 오랫동안 익숙해진 문명으로 기울어지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만, 기울어지게 만드는 중국 문명 쪽에 그만한 역량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소개했듯이 마르티니의 이 자세는 중국 현지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태도 이기도 했다. 이것은 공자나 조상에 대한 제사, 그밖의 중국 습관들과 타협하면서 포교를 진 전시켜나간다고 하는 예수회만이 취한 독특한 포교 방법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 다. 그러나 멘도사와 그에게 정보를 준 라다는 아우구스티누스파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예수 회 선교사가 아니면서도 중국사가 오래되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 회의 독특한 포교 방법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맞닥뜨린 중국 문명을 보고 중국 역사 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고토 씨에 의하면 마르티니의 중국사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가장 신뢰할 만한 중 국사였다." 그런 만큼 이 정보는 유럽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가 소개한 중국의 역사책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문제에서 볼 수 있는 공상적인 얘기를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 기록은 중단되는 일이 없어 당시까지 연 속되고 있으며, 또한 가끔씩 천문학상의 기록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럽인들은 여전히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모두 역사상의 사건으로 받 아들이고 있었다. 그러한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으로도 마르티니가 전한 중국 기록의 진실성 은 도저히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스칼과 중국 놀랄 만큼 오래된 중국의 역사에 대해, 유럽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까? 크게 구분하 여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잇다. 첫째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로 대표되는 유 형이다. 그의 대표작인 [팡세Pensee](1670) 가운데 '중국의 역사'라는 장에서 그는 "죽음을 돌아보 지 않을 정도의 증인을 가진 역사밖에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면서 죽어간 선지자들이나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는 것 은 기독교인들뿐이라고 생각했다. 즉, 첫째 유형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종교적 입장에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 정하거나 송두리째 무시하는 태도이다. 라이프니츠와 중국 그러나 기독교인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태도도 존재할 수 있 다. 이러한 두 번째 유형에 대해서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정치가였던 라이프니츠와 포시우스 두 사람을 살펴보기로 하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일찍부터 중국에 대해 뜨거운 관심 을 쏟고 있었다. 중국에 관한 그의 지식은 예수회 수사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전례 문제'가 일어나서 예수회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도 그는 일관성 있게 이것 을 지지했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방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당시 최신의 중국 정보를 수집한 서적인 [최신 중국정보](1699)이다. 그는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유럽과 중국의 문화적 교류의 필요성을 격조 있게 호소했다. "청나라 제국은 경지 면적에 있어서 유럽 전체에 필적하고, 인구에 있어서도 오히려 능가 하고 있다. 또한 기타 많은 분야에서 우리와 자웅을 겨룰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유럽이 우위에 있는 것은 형이상학, 신학, 수학, 천문학 등인 반면에, "실천 철학의 면에서 는 유럽이 청나라에 뒤지고 있다. 즉... 윤리학과 정치학 면에서는 우리가 그들만 못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학문, 특히 우리가 절실히 바라고 있는 실천 철학의 응용 부문과 지극히 이성적인 생활습관을 배웠으면 한다. 우리 유럽인들에게는 도덕적 황폐가 심 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우리가 중국인들에게 계시 신학을 가르칠 사람들을 파견했듯이 이번에는 자연 신학의 응용과 실천을 가르칠 수 있는 중국인 선교사들이 부디 유럽으로 파 견되어 와주기를 바란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국사의 연원 문제에 있어서는 마르티니를 지지한 듯하다. 그에게는 <0과 1만을 사 용하는 이진법 산술의 해설과 이 산술의 효용,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복희씨의 그림 해독에 대한 이 산술의 공헌에 관하여>(1703)라고 하는 긴 제목의 논문이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중국의 역의 64괘를 자신이 확립한 이진법으로 서명할 수 있다고 하면 서, 복희씨를 이진법의 창시자로 높이 평가했다. 여기에서 그는 복희씨를 '4천 년 이상 이전의 인물'이라고 했다. 이 수치는 미묘하여, 히 브리어 성서에서는 노아의 홍수가 라이프니츠의 시대로부터 약 4천 년 전이 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4천 년 '이상' 이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복희씨를 4천6백 년 전의 임금이라고 주장했던 마르티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포시우스의 문제 제기 파이프니츠와 마르티니의 설을 공공연하게 주장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역사가이자 '중국 미치광이'로 잘 알려져 있는 이삭포시우스이다. 그는 마르티니의 저서가 출판된 다음해에 [세계의 진실한 나이에 관하여](1659)라는 책을 내었다. 포시우스는 마르티니의 설을 따라서 중국의 역사가 당시 히브리어 성서에 의해서 생각되고 있던 대홍수의 연대보다 더 거슬러올라가고 그 이후에도 문명이 중단된 일이 없었 으며, 더욱이 대홍수의 기록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인류사는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대보다 1440년이나 더 오래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새 로운 연대는 70인역 성서를 따르면 바르게 설명될 수 있으므로 연대학은 70인역 성서를 바 탕으로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가 중국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이상, 대홍수는 전세계적인 것이 아 니라 국지적인, 즉 유대 역사의 내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고 논술했던 것이다. 포시우스의 이러한 주장은 라크에 의하면 "마르티니의 역사적 자료에서 서구적 사고에 대 해 품을 수 있는 전후의 사정을 검토한 최초의 시험적인 논의였다"고 한다. 즉 마르티니가 말한 중국사의 연원에는 보편사에 대한 파괴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을 유럽인들에게 구체적인 문제로 제기한 셈이다. 그 결과 중국사를 기준으로 성서가 판단되면서, 성서는 지역적인 사건을 기술한 한 권의 역사책에 불과한 위치로 전락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게오르그 호른의 해결책 이와 같은 '중국 미치광이'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첫째 유형이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1648년 이후로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를 지냈던 게오르 그 호른(Georg Horn)이었다. 호른은 [노아의 방주](1666)라는 책을 써서 포시우스가 제기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아일랜드의 장로파 연대학자였던 애셔(Jacob ben Asher, 1269-1340)의 연 대학을 채용하고 있다. 애셔는 천지창조를 그리스도 기원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호른은 이것을 인정한 데 덧붙여, 요 임금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상정하고 있던 대홍수도 승인한다. 이것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서에 바탕을 둔 연대이다. 그는 이러한 시간적 테두리 안에서 중국인의 연대기가 전하는 역사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 세 번째 입장은 앞에서 말한 고대 이후 선배들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즉 호른은 창세 기와 중국인의 전승이 동일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보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부장 들과 중국 초기의 여러 왕들이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복희씨는 아담이다. 왜냐하면 양자는 다 함께 흙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농씨는 카인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다 농업의 조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로 황제는 에녹이다. 이 두 사람은 다 함께 하나님에 의해 죽지 않는 존재로 되어 있으므로, 또 요 임금은 노아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둘 다 큰 홍수 때에 살고 있었으며 신을 경배하 는 사람들이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등등. 이와 같이 호른은 <창세기>와 중국의 연대기는 같은 역사를 다르게 기록한 두 종류의 기 록이며, 양자의 차이는 중국인이 히브리인으로부터 갈라진 다음의 시간의 길이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른의 후계자들 호른의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그 뒤 많은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영국의 존 햄 (John Webb)은 1669년 노아, 요 임금설을 수용한 다음, "노아와 그 아들들은 홍수 이전부터 중국에서 살았으며, 방주를 만든 것은 중국에서였다. 노아 또는 셈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 기 전에는 중국에서 살고 있었다."는 생각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가장 오래된 인간들이 사용했던 언어가 무엇이었는가가 문제였는데, 웹은 "노아 시대의 언어를 전하고 있는 것은 중국어이다"라고도 주장했다. 도미니크파의 중국 선교자였던 도밍고 나바레티는 1676년 복희씨를 중국 최초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 연대도 기원전 2957년이라는 마르티니의 연호를 인정하고 나서, 복희씨, 조로 아스터설을 주장했다. 그는 도미니크파로서, '전례 문제'에서는 예수회 비판의 논지를 펴 서 지도적 역할을 해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중국 연원의 오래됨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예수회의 수사들과 같은 입장을 취했으며, 연대학 역시 70인역 성서에 따를 것을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 킬리어는 '경교 유행의 기념비'를 연구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히에로글리 프(상형문자) 해독에 힘쓴 것으로도 저명한 예수회 소속의 학자였다. 그는 히에로글리프와 한자가 동일한 성질을 가진 것 같다는 것을 근거로, 중국인은 그곳 에 정착한 이집트인을 기원으로 한다는 설을 제창했다. 예수회 계통의 신중파는 '중국사에서 확실한 것은 셈의 자손인 요 임금부터'라고 하여 히브리어 성서와의 정확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 태도를 취했다. 이와 같은 공론 은 18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복희씨=아담, 신농씨=셋, 황제=노아라는 설(바이어), 도 반고=노아라는 설(풀먼), 초대 황 제인 요임금=욕탄이라는 설(랑베르), 복희씨=아담, 신농씨=노아, 황제=함=이집트의 세라피스 라고 하는 설(브라이언) 등 이와 같은 예들은 얼마든지 있다. 중국사의 연원 문제는 결국 보편사에 있어서 일종의 사활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대응에 고민한 것은 중국사가 아니라 보편사 쪽이었다. 중국인들이 전해오는 역사가 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중국사를 설명하기 위해 성서의 해석이 고쳐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더욱이 공론이 진전됨에 따라 본래 성서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중국사가 오히려 히브리어 성서와 70인역 성서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공론의 근거가 되기에까지 이른다. 중국사의 연원 문제는 이리하여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와 나란히 보편사에 있어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혼미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18세기로 들어가게 된다. 과학 혁명과 보편사의 위기 뉴턴의 세계사 서술 '과학 혁명의 세기'라고도 불리는 17세기에 유럽의 과학 문명은 장족의 발전을 한다. 여기 에서는 중심 인물이었던 뉴턴에게 초점을 맞추어 과학 혁명과 보편사의 위기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독자들 중에는 이미 뉴턴(Sir Issac Newton, 1642-1727)의 전기를 읽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은 책들을 통해 이야기되어온 뉴턴은 한결같이 [프린키피아Principia](1687, 영어판은 1729)나 [옵틱스Opticks](1704)의 저자 또는 미적분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즉 근대 합리주의의 확립자로서의 뉴턴이다. 물론 이것이 그의 중요한 측면이기는 하다. 그 러나 이와 같은 면만을 본다면 '과학의 세기'인 19세기적 입장에서 그를 과학자의 원형으 로만 판단하는 편파적인 견해가 된다. 실제로 뉴턴은 물리학, 수학뿐만 아니라 화학 연구에도 몰두하였으며, 이 방면에서는 연금 술과 오컬트 사상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그는 평생을 통해 기독교 연구를 계속했다. 고대 로마의 교부들에서 시작하여, 고래 의 기독교 이론가들의 서적을 총망라하여 연구하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비교, 연 구하는가 하면, 성서의 내용 중 예언 부분들에 관해서는 아주 상세한 연구도 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취미 정도가 아니었다. 자연에 관한 연구나 성서에 대한 연구 모두가 그에게는 똑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해명하는 것으로 동일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은 기독교 연구의 일환으로 그는 역사 연구도 했다. 뉴턴의 역사 연구의 결과는 다음 두 편의 저작을 통해 그 윤곽을 알 수가 있다. [개정 고 대왕국 연대학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1728)과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의 예언에 관한 연구Observations Upon the prophecies of Daniel and the Apocalypse of St. John](1723)가 그것이다. 전자는 그가 죽은 후 출판되었는데, 간행을 목표로 죽기 직전까지 가필을 하는 등 만년의 그가 가장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 책은 노아 시대로부터 페르시아까지의 고대 역사를 다루고 있다. 후자는 결국 그가 공표하지 못한 논고이지만, 고대 로마 이후 뉴턴의 시대까지를 대상으 로 하고 있다. 이들 두 편을 종합하면, 뉴턴의 세계사의 전체적 윤곽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두 편의 골격을 소개하면서 고찰한 것이다. 필자가 정리한 전체적인 모습과 뉴턴이 작성한 '소연 대기'의 요약을 참조하면서 읽기 바란다. 천문학에 의한 연대 결정 [개정 고대왕국 연대학]의 테마는 그리스, 이집트, 아시리아,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대 왕국 들의 연대를 확정하는 것이다. 특히 거기서 자세히 연구되고 있는 것은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 해결이다. 뉴턴이 연대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역할을 해낸 것은 천문학이었다. [프린키피아]의 저자답 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천문학이 동원되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의 연대 결정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흑해 연안의 골키스에 있는 보물인 금으로 만들어진 양가죽을 구해 이 아손을 중심으로 한 영웅들이 아르고선을 타고 갔다고 하는 원정담을 전해주고 있다. 이 이 야기에는 원정 때의 별자리가 전해져오고 있다. 뉴턴은 그 별자리를 바탕으로 원정이 이루 어진 연대를 결정하려고 했다. 뉴턴은 전설을 검토하고, 이 원정 때에 처음으로 천구의를 만들어 춘분점이 백양자리 중 심에 놓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춘분점은 황도 위를 72년에 한 번씩 이동한다. 이 운동을 '세차 운동'이라고 하는데 자전하고 있는 지구가 팽이처럼 머리를 흔드는 데 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 수학적인 증명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뉴턴이었다. 춘분점이 백양자리의 중심에서 얼마나 이동했는가는 천체 관측으로 실측하면 되므로, 그 수치로 춘분점에 중심이 놓여진 연대를 정밀하게 역산할 수 있는 셈이다. 결과는 "우리들은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은 솔로몬의 사후에 이루어졌다는 것과 가장 개연 성이 높은 것은 사후 43년이라고 안심하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하게 되었던 것이다. 솔로 몬의 사후 43년은 기원전 937년에 해당한다. 뉴턴의 시대에 확실한 연호를 전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에는 올림피아드 기원과 로마 건국 기원이 있었으나, 그 올림피아드 기원도 기원전 776년이 시점이다. 그에 비해 그가 구한 연호는 그보다 훨씬 오랜 연호이다. 게다가 이 연호는 다른 사건 등 과의 비교로 정해진 상대적 연호가 아니라 천문학이라는 자연 과학에 의해 엄밀하게 결정된 연호였다. 뉴턴은 이 기원전 937년이라는 연호를 정점으로 이집트 역사를 비롯하여 그리스사나 로마 사 같은 다양한 연호를 결정해간다. 그리스사에서 트로이 전쟁은 이아손 1세대 이후의 영웅들이 벌인 전쟁이므로 기원전 904 년으로 본다. '헤라크레다이의 귀환(도리아인의 펠로폰네소스 정복)'은 4세대 이후의 사건 이므로 기원전 825년으로 정하는 등이다. 그 결과, 그리스사는 전체적으로 크게 단축되었다. 유세비우스가 산정한 연대와 비교하면, 시큐온이나 아르고스, 아테네 등의 건국도 125년 단축되어 각각 기원전 1085년, 기원전 627 년이라는 연호가 부여되고 있다. 이리하여 그리스사, 로마사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새로운 시 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집트사의 단축 최대의 문제였던 이집트 역사에 관해서도 뉴턴은 마네토를 전혀 다루지 않은 채 헤로도토 스와 디오도루스, 그리고 성서의 이집트사 기록을 자료로 생각해나갔다. 이 뉴턴의 공론에서 초석이 된 것은 앞에서 소개한 세소스트리스, 오시리스 같은 사람들 이 했다고 하는 세계 정복 사업이었다. 그의 결론부터 먼저 소개한다면, 그것은 "오시리스, 바커스, 세소스트리스 세 사람이 실제로는 동일한 이집트 왕이며, 나아가 시샤크임이 분명하 다"는 것이다. 그는 오시리스, 바커스(디오니소스), 세소스트리스에 관한 전승이 정복 사업과 아우의 반 란에 의한 귀국, 또 귀국 후 내정의 정비, 기타 세부까지 같은 내용이라는 데에서 세 명의 이집트 왕은 결국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그 인물을 성서에 나오는 '시삭'과 동 일시한다. 시삭은 <열왕기 상>(11-14장)에 등장하는 왕으로서, 유대왕국 초대의 르호보암 때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 주의 신전과 왕국의 보물을 빼앗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 샤크를 성서에 나오는 시삭과 동일시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서가 이 왕 이전의 어떤 이집트 왕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한 일도 시인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집트 밖으로 나온 최초의 왕으로서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시삭이 바로 시샤크라는 것이 결정적 논거인 것이다. 더욱이 그에 따르면, 이 시샤크의 시대가 이집트사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 샤크는 죽은 뒤 오시리스로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아들인 호루스와 함께 신격화한 파라오들의 최후에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턴은 이집트인들이 말하는 '신들의 시대'란 사후에 신격화한 파라오들의 시대라고 생 각하고 있지만, 그의 이론대로 생각하다면 결국 '신들의 시대'는 끝나게 된다. 이집트인 자신이 그들의 역사를 '신들의 시대'나 '인간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그러나 뉴턴은 '신들의 시대'를 이와 같이 새로운 시대로 봄으로써, 안심 하고 성서에 기술된 내용과 이집트의 역사를 결부시킬 수 있었다. 뉴턴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역사는 성서에 있는 대로 바벨탑 사건 이후에 시작되었다. 따 라서 이집트인들의 역사는 히브리인들의 역사보다 새로운 것이 된다. 문자를 발명한 것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최초이며, 이집트인들은 다윗 시대 이후에 유대인들로부터 배운 것이라 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시샤크=오시리스가 르호보암 시대에 자리하고, 그것이 '신들의 시대'의 마지막 에 해당한다는 것은, 즉 메네스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시대'가 여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 된다. 앞에서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이 있었던 기원전 937년이 솔로몬의 사후 43년에 해당된 다고 결정해놓았기 때문에, 르호보암과 시샤크, 그리고 메네스의 연대는 이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결국 메네스가 왕조를 연 시대가 기원전 946년이라는 새로운 시점으로 끌어내려진 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의 파라오라면, 헤로도토스가 전한 메네스로부터 세토스까지 1만 1340 년간이라는 방대한 연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뉴턴은 "기록할 만한 사업을 이루지 못한 왕은 기록에서 삭제한다"고 말하여, 헤로도토스가 전한 기록할 만한 사적을 남 기지 못한 초기의 329명이나 되는 파라오들을 한꺼번에 말살해버렸다. 이와 같은 파라오에 대한 기록상의 대학살에 의해 메네스 이후의 이집트사도 큰 폭으로 단축되어 여기에서도 성서가 전하는 히브리인의 역사에 대비시킬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메네스(아메노피스)는 멤피스를 건설하고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시 켰다. 이때, 다나오스가 혼란을 피해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이주했는데, 그가 전한 조선 기술 로 그리스인들은 아르고선을 건조할 수가 있게 되었다. 더욱이 아르고나우타이의 원정은 시샤크=오시리스가 수립한 이집트인들의 대외적 지배권 에 타격을 주어, 이후 이집트인들이 고유의 땅에 칩거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의 이집트사에 관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뉴턴은 모이 리스와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는 케옵스, 케프렌, 미케리누스 등 헤로도토스가 실 제의 이름들과 사적을 전한 바 있는 여러 왕들만은 실재의 파라오로 승인한다. 이상이 뉴턴의 이집트사 개요이다. 당시 보편사가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뉴턴은 천문학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성서에 의거하여 이집트사의 시간적 길이를 대폭 단축시킨 것이다. 그 결과 이집트사는 문화적, 정치적으로 히브리인의 역사보다 짧은 것이 되었다. 뉴턴은 이집트사의 연원의 깊이를 부정하면서 이를 재편하여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 수용한 것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치도 않은 이집트사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집트의 히에로글 리프(상형문자)가 해독되지 않고 있었다. 현재의 지식을 일단 잊어버리고 책을 읽어보면, 그 나름대로 줄거리가 통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그럴 듯한 모방품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공론이기는 하다. 그러나 뉴 턴에게는 농담은커녕, 성서의 진리와 보편사를 옹호하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예언에 대한 연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에 관한 연구]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여기에서 그는 로마 시대를 대상으로 논의하고 있다. 뉴턴은 먼저도 소개한 <다니엘서> 제2장의 거대한 조각상의 환상에 관해 "이 네 가지 금 속으로 된 조각상의 환상에 다니엘의 예언의 기초가 있다. 그것은 꼬리를 물고 지배하게 될 4대 민족, 즉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로마제국은 <다니엘서> 제7장의 '제4의 나라'이자 열 개의 뿔을 가진 무섭고 놀라 운 '제4의 짐승'에 해당한다. 한편 <요한계시록>에는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세 번에 걸쳐 '제4의 짐승'과 흡사한 모습의 짐승이 환상으로 나타난다. 뉴턴은 이 짐승들을 <다니엘서>의 짐승과 동일한 것, 즉 로마제국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 로 해석한다. 단, <다니엘서>에서는 로마제국 전체가 짐승 한 마리로 나타나 있으나, <요한 계시록>의 '짐승', '붉은 짐승'의 세 가지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최초의 '붉은 용'은 통일 시대의 고대 로마제국을, '큰 음녀(매우 음탕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 열 개의 뿔은 머지않아 열 개의 지역으로 분열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어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하는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 바다와 육지에서 나타나는 두 마리의 짐승이라고 한다. 바다에서 올라온 열 개의 뿔을 가진 짐승은 라틴인의 제국(서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육지에서 나타난 짐승은 그리스인들의 교회이며, 그것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동로마제국으로 건너가서 그리스정교회가 되어 이 제국의 기둥이 된다고 한 다. 열 개의 뿔 가운데 하나는 라베나의 총독과 로마의 원로원이지만, 이에 의해 서로마제국 의 전통이 간신히 계승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역시 열 개의 뿔 가운데 하나였던 프랑크인 의 왕국과 연결되어 로마제국이 부흥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프랑크인들에 의한 로마제국을 세 번째 나타나는 '붉은 짐승' 의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그는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등에 타고 있는 음탕한 여 자를 로마 교황으로 본 것이다. 이 로마 교황은 피핀의 교황령 기증에 의해 세속적인 권력자로 타락했다고 말하고, 교황 과 카톨릭 교회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교황령이야말로 <다니엘서> 제7장에 서 술되어 있는 열 한번째의 뿔(제8장의 작은 뿔)이라고도 말한다. 뉴턴은 이와 같은 예언의 해석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보편사의 이론적 지주 중 하나인 '4 세계제국론'의 테두리가 그의 시대에 오히려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여기에서 도 그는 보편사의 옹호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적 보편사 스스로의 연대 결정에 크게 자신감을 가졌던 그는, "5년이나 10년 또는 20년 정도의 오차 는 있어도 그 이상의 오차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보면, 그의 주장은 대부분 잘 못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 시대의 공통 의식으로 살필 경우에는 반드시 잘못되었다 고만은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개정 고대왕국 연대학]을 둘러싸고, 당시 프랑스로부터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다. 거기서 는 예를 들면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의 연대가 지나치게 새롭다는 것, 그 전거가 되는 문헌 비판에 있어 뉴턴이 잘못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 원정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또 프랑스에서는 18세기의 위대한 저술가였던 볼테르(Voltaire, Francois-Marie Arouet의 가명, 1694-1778)가, 그리고 영국에서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뉴턴을 옹호했다. 그러나 옹호의 논리를 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그의 논의가 시대의 공통 인식으로 보았을 때 결코 엉뚱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뉴턴의 역사 서술은 당시로 볼 때 충분히 수용이 가능한 세계사 기술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확대해가는 면에서 본다면, 그의 서술에는 고대의 아시리아, 페르시아, 사라센 제국과 함께 현대의 터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나 신대륙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마르티니 이후로 이미 중국의 문제가 커져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중국을 무시하는 것이 가능 했던 시기이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뉴턴의 세계사 서술은 중국 문제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기 직전의 위태로 운 시점에서 서술된 프로테스탄트적 보편사였다고 할 수 있다. 뉴턴의 시간과 세계 뉴턴은 예언 연구 가운데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언된 제7의 봉함이 뜯어졌을 때 로마 제국이 분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첫 번째 나팔이 울렸을 때 고트족과 훈족의 침입이 일어났다고 해석하고, 다섯 번째 나팔이 울렸을 때 사라센의 칼리프가 나타났으며, 여섯 번 째 나팔이 울렸을 때 나타난 것이 터키제국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뉴턴은 일곱 번째 나팔에 의해 종말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리고 인류사의 종말도 기원 2015년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 교황이 세속적 지배권을 얻어 열한 번째의 뿔이 된 것이 755년, 그 다음으로 로마 교황이 "1260년간 살아 가게 된다"고 하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 수를 더한 숫자가 종말의 연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미처 발간하지 못한 원고 가운데에서 그는, "성서에 기초한 전통적 연대학은 하루를 천 년과 같은 것으로 하고 있어, 천년왕국과 최후의 심판을 날을 고찰하는 기초를 제공해주 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창조가 6천 년간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기술하 고 있다. 그가 재구성한 인류사 특유의 시간이 존재하는 셈이다. 한편 뉴턴은 그 자연철학의 기초에 '절대적 시간'을 놓고 있었다. [프린키피아]의 서두 부분과 정의에 뒤를 이은 주해에서 "절대적이고 참인 수학적 시간은 자체의 본성으로 말미 암아, 저절로 외계의 어떠한 것과도 관계없이 균일하게 흐르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시간'은 추론으로 산출된 하나의 중성적인 시간이다. 그 가운데에서 천지가 창 조되고, 이윽고 최후의 심판에 이른다는 등의 의미를 박탈당한 시간인 것이다. 공간 또한 뉴턴에 의해 의미를 박탈당했다. 그것은 '절대적 공간'이며 역학적인 여러 법칙 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적 존재라든가, 혹은 인간이 사 는 지역의 주위에 괴물적인 존재들이 살고 있다든가,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인간들이나 괴 물적 존재가 사는 대지를 중심으로 질서 있는 전체로서의 우주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전통적 으로 유럽인들이 부여해온 여러 가지 의미가 모두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턴이 행한 이 '시간, 공간의 무의미화'는 지금까지 말해온 보편사가 전제로 하는 시간이 나 공간의 관념과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우스파였던 뉴턴 뉴턴 자신은 보편사적인 시간, 공간이 '절대적'시간, 공간과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 것으 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덕계(인간계)와 자연계가 함께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프린키피아]의 일반 주석에서 "태양, 혹성, 혜성의 장엄하기 짝이 없는 체계는 전지전능 한 사고와 통제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 또한 만일 항성이 이 와 같은 또 다른 체계의 중심이라면 이것들도 같은 전지한 존재의 의도하에 형성된 것이며, 모두 유일한 존재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지고한 존재는 모든 사물을 통 치하는 것이다. 세계 정신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주인으로서 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란 과연 창세기 제1장에 나와 있는 것과 같 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일까? 뉴턴은 열여덟 살부터 쉰세 살까지의 기간을 케임브리지에서 보냈다. '경이의 해'라고 일 컬어지는 1666년,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에 '미적분'과 '만유인력의 법칙', '빛의 스펙트럼' 이라는 3대 발견을 하고, 1687년에 [프린키피아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영어로는 Natur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를 출판하기까지의 20년 가까운 세월을 연금술, 즉 화학에 대한 연구와 동시에 종교 연구에 몰두했다. 이 연구는 공표되지 않은 채, '포츠머스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원고로 남아 있었다. 이 미발표 유고의 일부를 20세기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입수한 것이 1936년이었다. 그후 비판적인 역사학적 수법으로 뉴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겨우 1960년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유고 속에서 뉴턴은 아타나시우스와 히에로니무스 등의 카톨릭 정통파 교부들을 맹렬 히 비판하고, 삼위일체설에 대해서도 그 근거가 되어 있는 성서의 어구는 히에로니무스가 행한 성서의 개찬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형식 을 취하면서 삼위일체설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뉴턴은 알렉산드리아의 카톨릭 신부였던 아리우스(Arius, 250-336)파의 이단설-정통 카톨 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인 아리아니즘Arianism을 옳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아리우스파 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하여 카톨릭의 삼위일 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파와 논쟁을 벌인 다음, 니케아 공의 회(AD 325)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었다. 이것은 케인스가 말했듯이 '무서운 비밀'이었다. 당시의 영국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배제하고 있었으며 이단설의 신봉자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가 매우 조심해서 읽어보면, 그는 공식적으로 출판한 서적의 내용에도 그의 생각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프린키피아]의 인용문에 있는 '유일한 존재'는 삼위일체설에서의 하나님으로 받 아들인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당시에 그렇게 받아들여졌으며, 뉴턴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뉴턴 스스로는 이와 같은 말 속엔 아리우스파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로마 교황을 <다니엘서>에 나타나 있는 '매우 음탕한 여자'로 해석하고 그 타락을 적극 비판하고 있었다. 이것도 영국의 국교도, 즉 성공회의 교인으로서 본다면 프로 테스탄트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타락을 '대대적인 이교' 로 보는 뉴턴 자신은 프로테스탄트마저 받아들이고 있던 삼위일체설 자체를 비판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의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이며, 자연세계의 법칙을 정하고 또한 인간 세계도 지배하는 신이지만, 삼위일체의 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볼테르를 비롯한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인격을 갖춘 신은 인 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다음 세계는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함 으로써 기적 같은 것을 부정했다. 이와 같은 입장을 '이신론'이라고 하는데, 뉴턴의 하나님은 오히려 이 이신론적인 신에 거 의 부합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에 속함과 동시에 이신론의 출 발점에 서 있었다. 역사학에 있어서의 위치 뉴턴의 역사 연구 방법이나 역사 서술에 나타난 새로움에 관해서도 언급해두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는 천문학을 연대 결정에 이용한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비록 최초는 아닐지 몰라도 과학 혁명의 세기를 대표하는 뉴턴다운 새로움 이다. 그렇지만 그 적용 대상을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으로 한 점에서, 시대적 제약을 극복하 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뉴턴이 자신의 [개정 고대왕국 연대학]에서 모든 연호에 '그리 스도 전, 즉 BC'만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스도 전'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뒤에 소개하는 예수회의 수사 페타 비우스이다. 그러나 그는 창세 기원에 의한 연호와 병행하여 기록하는 형태로 이것을 사용 했다. 뉴턴도 미공개 원고에서는 창세 기원을 사용했고, 또한 그가 기술한 역사가 보편사라는 것을 보더라도 결코 창세 기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출판된 서적에서 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전'만으로 연호를 기록한 것은 시간적으로 매우 이른 예이다. 이 점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연호 표기를 뉴턴이 먼저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세 기의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는 뒤에도 기술하듯이, 기독교적인 의미를 상실한 '무의 미한' 시간의 척도로 사용된다. 그의 신은 이신론적인 신이었으며, 이 신 아래에서 그의 '절대적 시간'은 정말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창세 기원에서 외따로 떨어진 그리스도 기원의 사용은, 뉴턴의 '절대적 시간'을 역사의 장에 적용했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뉴턴이 그리스도 기원만으로 연호를 표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 각한다. 케인스는 1946년에 행한 유명한 강의 '인간 뉴턴'에서 케임브리지 시대의 뉴턴을 '최후 의 마술사'라고 부르고, "한 발은 중세에 두고, 다른 한 발은 근대 과학으로의 길을 밟고 있었다"고 규정하였다. 이 케인스의 평가는 역사 연구가로서의 뉴턴에 관해서도 적절한 것 으로 생각된다. 그는 한편으로 보편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믿고 있으며, 그것을 옹호하는 논진을 폈다. 그 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배후를 지탱해야 할 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이미 형태 변화를 이 루고 있었다. 자연 철학이 전제로 하는 '절대적' 시간, 공간의 개념과 보편사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요소가 잉태되어 있기도 했다. 뉴턴 자신은 양자 사이의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자간의 균열은 이미 뉴턴 자 신에게 '그리스도 기원'만의 사용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이 균열은 18세기에 이르러 그의 '절대적' 시간, 공간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더욱 확대되어간다. 이와 같이 과학 혁명은 뉴턴이 제시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의해 근본적 차원에 서 보편사에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