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천지창조의 세계사 지은이: 오카자키 가츠요 출판사: 도서출판 창해 봉사자: 언론학과 4학년 96048618 윤 세 형 옮긴이의 말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서양 제국의 세계사는 그 출 발점이 기독교의 성서에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역사를 서술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대학 또한 성서에 근거를 둔 '성서 연대학'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다른 민족들의 역사까지도 자신들이 근거로 삼고 있던 성서 속의 연대에 맞추어 전개해나가 는 '보편사'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유럽인들이 성서를 근거로 한 계산에 따르면, 기독교의 하나님이 천지 창조 마지막날인 엿새째에 인간의 조상이 되는 아담과 이브를 만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6천 년 전이었다. 유럽인들이 서술하는 전세계 모든 민족들의 역사는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서 묘사하고 있는 천지창조 이후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연대학자나 보편사학자들의 계산으로는 그 어느 민족의 역사도-이집트 인의 연원은 지금으로부터 10만년도 넘는 옛날이라는 사실이 자신들의 전승에 나오고 있지 만-이 6천 년이라는 세월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외적으로는 인간들-주로 유럽인에 국한된 이야기이지만-의 세계 탐험과 인식의 발달로 인해서, 그리고 내적으로는 자체 붕괴의 과정을 통해, 17세기말에 시작하여 19세기에 들어서 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보편사'의 붕괴는 유럽 전역에 대한 기독교 영향의 축소와 그 축을 같이 하고 있다. 이에 대체되어 나타난 학문의 새로운 영역이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있는 '세계사'이다. 그 러나 이 세계사조차 아직 기독교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우리가 무의식적 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원전-BC', '기원후-AD'라는 연호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연호 사용의 변천 과정과 함께 유럽인들의 인식 발달 과정을 주도한 학자 들과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비전문가들인 일반 독자들이 보더라도 흥미롭게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믿고 있는 종교에 상관없이 여러 가지 생각이나 깨달음을 얻게 하고 있다. 또한 마 지막 장에서는 유럽이 아닌 동양을 대표한 일본의 상황을 통해 이러한 개념들이 교육에 반 영되는 과정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신대륙을 발견한 지 2백 년이나 지난 18세기조차, 유럽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아시아 대륙 등에는 약간의 미개한 인간들을 포함한 각종 괴물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신대륙에서 발견하게 된 인디언들을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할 것인가의 여부나 중국인들의 전통 예절을 인정 할 것인가의 여부 등이 나라나 종교계 논쟁의 쟁점이 될 정도의 사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UFO나 외계인들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어떤 사람은 신경질적으로 그런 것들에 대해 외면을 하고 있다.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계인들의 형상이나 행동을-영화나 각종 매스 미디어를 통해-형상화해놓은 것들을 보면, 18세기 이전 의 유럽인들이 아시아나 다른 대륙의 오지에는 온갖 괴물들이 살고 있으며 비록 인간이라고 해도 소수의 야만인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과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은 몇백, 몇천 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다고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20세기의 1백 년 사이에 과학 문명이 엄청난 진 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지성과 인식이 함께 발달하지 않는 한 이러한 발전에 대한 찬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자화자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인 류는 아직도 젊고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덧붙인다면 일본 사람이 쓴 책이라 일본에서 보편사를 어떻게 받아 들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만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일상생활 중에 서력 기원을 쓰며 세계 연호를 받아들인 것을 생각할 때, 이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본 다. 끝으로 두 가지 정도 밝혀둘 것이 있다. 하나는 일본어는 특성상 알파벳의 P와 F, R과 L, CH와 SS 등의 구분이 되지 않을 뿐 아 니라 저자 또한 서양인의 이름, 지명, 책제목 등에 원어를 부기해주는 수고를 별로 하지 않 았다. 그 때문에 역자가 한글로 옮기면서 내용과 발음의 정확을 기하는 한편, 원래의 정확한 명칭을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능력이 닿는 대로 원어들-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등-을 찾아 기재하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꼭 필요하고 간단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역주를 굳이 달지 않았다. 그것은 이 책이 전문 서적이 아닌 교양서적이므로 굳이 세세한 자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여러 독자들에게 좋은 교양서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옮긴이 김경진 프롤로그 미켈란젤로가 그린 뱀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되는 얘기는 기독교적인 역 사 서술에서 보면 인류사의 첫 출발점에 놓여지는 사건이다. 시스티나 성당에는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1475~1564)가 그린 '아담과 이브 의 원죄와 낙원 추방'이라는 천장화가 있다. 그 그림에는 뱀의 권유로 사과 열매를 따려 는 장면과 두 사람이 칼을 든 천사들에게 쫓겨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 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브에게 열매를 주려는 뱀을 위는 여성의 모습으로 아래는 뱀의 모습으로 그려놓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형상을 단순히 예술가에게 허용된 자유로운 공상의 산물이라고 볼 것인가? 구약성서 제3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원죄라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기초가 되는 사고방식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인 만큼, 여러 각도에서 주의 깊게 논의되어왔다. 그 문제의 하나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뱀의 모습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성서에는 두 사람이 죄를 범한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진노하여 나무 열매를 먹 도록 꾄 뱀에 대하여 "배로 기어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세기 3:14)고 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벌을 준 결과 뱀이 배로 기어다니는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므로, 이 선고가 있 기 전의 뱀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에 움직이는 방법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뱀의 모습은 한결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 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도 서서 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서 있 었을까?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이브에게 접근하려는 뱀을 "꼬리 부분을... 몇 겹으로 똬리를 틀고 그 둥근 아랫부분을 땅에 붙이고 선 채로 우뚝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머리는 높이 쳐들고 눈은 홍옥같이 빛나고 있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편, 이브는 아무런 겁도 없이 뱀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과연 오늘날의 우리라면 뱀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보다도 이 뱀은 '사람의 말'을 하고 있다. 뱀의 갈라진 혀를 가지고 '사람의 말'을 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이 뱀은 사람이, 특히 이브가 무서워하지 않는 처녀의 머리를 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이 책에도 등장하는 영국의 베다가 처음 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굳이 머리만 처녀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래서 어 디까지가 사람이었고 어디까지가 뱀의 모양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뱀은 이와 같은 여러 의견들 가운데에서 '가장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한 뱀'을 채용하고 있다. 그가 그린 뱀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 성서에 기초를 둔, 다만 르네 상스 시대의 논쟁을 의식한 표현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성서에 기초를 둔 세계사의 서술, 보편사 성서의 서술에 기초하여 씌여진 세계사는 '보편사'라고 불린다. 이 책의 테마는 이 보편사 의 변천을 살펴보는 데에 있다. 보편사는 그것이 기독교적 역사인 이상, 당연히 성서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결정적인 역 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변함없는 말씀을 근거로 한다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뱀의 모습을 둘러싼 논쟁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다양한 의견들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성서의 말씀들이 각 시대 사람들 의 문제의식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해석되는 데에 연유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포함한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 바티칸 궁궐에 있는 성당,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지오바니 데 돌치가 1473년에서 1481년에 걸쳐 건축)의 그림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까지를 그리고 있으며, 보편사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서의 보편사의 시각화라는 시대적 특징을 지니 고 있다. 보편사의 역사는 기독교가 성립된 고대 로마 시대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성립된 '고대 적 보편사'를 중세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고대적 보편사'의 기본구조는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다시 이론적으로 확장되어 '중세적 보편사'가 형성된다. 그 러나 중세적 보편사는 르네상스, 종교 개혁, 대항해 시대와 과학 혁명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차차 위기에 처해진다. 그리하여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에 마침내 역사적 생명을 잃게 된 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보편사의 역사를, 특히 각 시대마다의 '세계'의 내용, 시간 측정 법(연호), 성서의 해석과 그 위치의 변화 등에 주의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 보편사의 성립 성서가 묘사하는 인류사 성서의 구성 보편사는 기독교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그 시대 특유의 해석이 이루어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성서를 크게 고쳐 읽은 다음에 기술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 의 출발점으로서 성서에 묘사된 인류사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모세 5경', '역사서', '문학서',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구약성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모세 5경'이다. '모세 5경'은 구약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창세기Genesis>, <출애굽기Exodus>, <레위기 Leviticus>, <민수기Numbers>, <신명기Deuteronomy>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에서는 여호수아Joshua에서 에스겔Ezekiel까지의 12편 을 말하며, 카톨릭에서는 여기에 네 편이 더해진다. 이들 여러 성서가 그려내는 것은 모세 Moses 사후 히브리인의 역사이다. 보편사에서는 이 부분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세부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문학서'는 <시편Psalms> 제90편의 '모세의 기도' 이외에는 보편사와 그다지 깊은 관계 가 없다. 마지막 예언서 가운데에는 <다니엘서Daniel>가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신약성서는 네 편의 복음서와 역사서,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보편사에 깊은 영 향을 미친 것은 편지들 가운데 채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The Revelation of Saint John the Divine>이다. 이와 같은 여러 책을 통해볼 때 기독교의 성서에는 어떠한 인류사가 서술되어 있는가? 성 서는 인류사를 크게 3기로 나누어 서술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제1기는 아담에서부터 노아의 홍수까지이다. 제2기에서 인류는 여덟 명의 인간으로 재출발한다. "노아와 그의 아들인 셈Shem, 함Ham, 야벳Japheth, 노아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의 아내들도 방주로 들어갔다"(창세기 6:13)고 되 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제2기는 유대왕국의 멸망으로 끝이 난다. 제3기는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칼데아Chaldea인들의 제국인 제1왕국에서 최후의 '4세계제 국'까지이다. 4세계제국이 멸망할 때에는 인류사도 역시 종말을 맞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 이다. 인류사의 제1기 - 노아의 홍수까지 미켈란젤로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듯이 구약성서에는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당한 것을 지상에서의 인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창세기>에는 아담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다음 에 덴의 동쪽에 있는 놋Nod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카인의 자손들 가운데 라멕Lamech은 보편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다. 두 명의 아 내를 취한 그는(창세기 4:19) 일부다처제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또한 그의 두 아내가 낳은 자식들에 의하여 인류는 목축, 야금술, 예술, 수공업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예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라멕의 자손만이 문명의 출발점이라고 말 하는 셈이다. 결국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문명을 일원적 발생론으로 보고 있다. 한편 아담은 아벨이 죽음을 당한 후인 130세 때 다시 셋Seth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930 세에 죽는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Enos를 낳았고 912세에 죽었다. 창세기에는 그후에도 아 담의 계보가 똑같이 서술되어 아담의 제10대손으로 노아가 태어나게 된다(창세기 5:29). 그들은 지금의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만으로 나이를 세었는데, 모두 900세 전후의 장수 를 누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Methuselah로 969년을 살았 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에는 노아의 홍수가 천지창조 후 몇 년, 몇 월, 며칠에 일어났는지 자세하게 기록되 어 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의 2월, 즉 두 번째 달의 17일"(창세기 7:11)이다. 한편 아담이 130세 때 셋이 태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연히 천지창조로부터 세어 도 130년 후가 된다. 셋 이후의 자손에 대해서도 모두 출생 때 부모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노아 가 태어났을 때가지 계산하고, 여기에 앞서 말한 600이라는 숫자를 더하면 된다. 그 결과는 1656이라는 수가 나온다. 즉 성서에서는 천지창조 후 1656년에 노아의 홍수가 났다고 말하고 있다. 제2기 - 유대왕국의 멸망까지 제2기는 '모세5경' 이외에 여호수아 이후의 '역사서'에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 나오는 것은 여러 민족의 계보에 관한 설명이다. 창세기 제10장에는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의 자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또한 제11장에는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는 셈 의 직계 자손들이 자세한 탄생 연도와 함께 기록되어 있어서, 노아에서 아브라함에 이르기 까지의 연수 계산이 가능하다. '민족표'는 기원전 6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알아낸 세계 여러 민족을 설명한 것이다. '민족표'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에서 셈의 자손으로는 아시리아인의 조상인 아수르Asshur와 바벨탑 사건 당시의 직계 자손인 벨렉Peleg, 함의 자손으로는 이집트인들 의 조상이 된 미즈라임Mizraim, 군주가 된 사상 최초의 인물이자 바벨탑을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님롯Nimrod 등이 보편사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민족표에 관해 성서는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창세기 10:32)고 말 하고, 제11장에서 바벨탑 사건과 여러 언어의 성립, 여러 민족들이 세계로 흩어지게 된 이유 에 관한 서술을 계속하고 있다. 셈의 자손들은 아시아로,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로, 야벳 Japheth의 자손들은 유럽과 북아시아로 퍼져나가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창세기는 인류사의 초기에 대한 서술을 제11장에서 마치고, 제12장부터는 히브리인들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Abram, 이삭Isaac, 야곱Jacob 이 세 사람의 족장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야곱은 얍복Jabbok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김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창세기 23:22-23). 이어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요셉Joseph이 이집트로 팔려가서 마침내 국왕(파라오)의 총리가 되 는 이야기, 이집트로 이주하는 이스라엘(야곱) 일가와 요셉의 죽음에 이르기까지가 서술되어 있다. 모세에게 인도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다음, 이들은 40년 동안 아라비아의 사막을 방황한다. 그 동안에 이들에게 주어진 '십계명'을 비롯한 갖가지 율법들이 출애굽기 이후의 여러 구약성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모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눈앞 에 두고 네보산에서 120년의 생애를 마치는 데에서 '모세 5경'은 끝이 난다. 오늘날 '역사서'로 분류되고 있는 여러 성서에서 묘사한 것은 가나안 땅으로 침입해 들어 간 이스라엘 민족의 왕국 건설, 다윗과 솔로몬의 전성시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왕국과 유 대왕국으로의 분열, 아시리아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칼데아에 의한 유대왕국의 멸망 등 이다. 그 동안 히브리인(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대한 서술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을 통해 당시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 다. 단, 구약성서에서 아시리아는 아수르 이후 공백이 있으며, 그 이후 푸르(티글라트 필레 세르 3세, 기원전 8세기 중반) 시대부터 다시 등장한다. 이 공백을 포함하여 아시리아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을 괴롭히는 커다란 문제가 되므로 앞으로 자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제3기 - 4세계제국의 시대 인류사 제3기의 골격이 되는 것은 <다니엘서>에 근거를 둔 '4세계제국론'이다. 칼데아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꾼 꿈을 선지자 다니엘이 해몽했다는 이야기가 나오 는데, 이것이 '4세계제국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왕이 꾼 꿈에는 각기 다른 소재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물 조각이 나타난다. 머리는 순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무릎 아래는 철이고, 발은 일부는 철, 일부는 진흙이었 다(무릎 아래와 발은 제4의 부분). 그러고는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은 뜨인 돌이 나타나서 이 조각의 발을 친다. 그러자 이 조각 전체가 박살이 나서 땅에 흩어지는 한편, 돌은 커다란 산이 되어 온 땅으로 퍼져나갔 다고 하다. 왕이 숨기고 있던 이 꿈의 내용을 알아맞혔을 뿐만 아니라, 해몽까지 한 사람이 다니엘이 었다. 그는 머리는 느부갓네살의 칼데아왕국이고, 이어 각 부분에 해당하는 세 개의 나라가 일어나는데, 제4의 제국은 이 세상 최후의 제국이 된다고 했다. 돌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 의 나라이고 이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 꿈의 참된 뜻이라고 풀었다. 같은 성서의 제7장에서도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 곰, 머리와 날개를 각기 네 개씩 가 진 표범에 이어 제4의 짐승이 나타났는데 그 짐승에게 눈과 입이 달린 열한 번째 뿔이 돋아 났다고 한다. 이어지는 제8장에서는 뿔이 두 개인 숫양을 한 개의 돋보이는 뿔을 가진 숫염소가 쓰러뜨 리는 환상이 서술되어 있다. 숫염소의 뿔은 숫양을 쓰러뜨린 뒤에는 곧 부러지고, 네 개의 뿔이 새로 돋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네 개의 뿔 가운데 하나에서 '작은 뿔'이 돋아 자라 서 '하늘의 군대와 별 중의 몇'을 짓밟고 '그 성소를 헐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환상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개의 뿔을 가진 숫양은 곧 메데와 바사 왕들이요, 털이 많은 숫염소는 곧 헬라-그리스-왕이요(다니엘서 8:20-21)"라고 그 의미를 해설하고 있 다. 이 해설과 앞의 제2장을 합하면, 제1의 세계제국은 칼데아(신바빌로니아)이며, 이어서 메 데Mede와 바사Parthia(곧 페르시아)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처음 한 개의 뿔을 가진 숫염 소란 알렉산더인데, 앞에서 말한 거대한 조각에서는 종아리의 철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이어지는 네 개의 뿔은 철과 진흙 부분에 해당하며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 이 후 분열된 그리스인의 여러 나라를 가리킨다. 즉 '제4의 나라'란 그리스인의 제국이며, 이 예언은 '헬레니즘제국' 다음에 종말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오늘날 이 예언서, 즉 <다니엘서>는 기원전 166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기에서 열한 개째의 뿔-작은 뿔-로 표현되어 있는 셀레우코스 왕조Seleucus Kingdom의 안티옥스 4세Epiphanes Antiochus 4에 의해 예루살렘 신전이 더렵혀지고 심한 종교 탄압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다니엘서>는 이 와중에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고무 시키기 위해 씌어진 계시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구약성서는 결국 지상에서의 제4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이라고 하는 셈이지 만, 현실의 역사는 그리스인의 제국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후 로마제국이 성립되어 유대인 들도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기독교가 성립된다. 그 기독교인들이 제4제국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다음에 보기로 하자. '종말'과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후세 인류의 역사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는 일곱 개의 봉 함이 차례로 뜯기고, 일곱 번째 봉함이 뜯긴 뒤에는 천사들이 차례로 나팔을 분다. 그리고 그때마다 놀라운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세계가 한걸음 한걸음 종말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상징적인 '여자'와 <다니엘서>의 '제4의 짐승'을 닮은 짐승이 세 번 등장 한다.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밟고 있으며, 그 머리에 열두 개 별의 관을 쓰고 있는' 여자와 이것을 공격하는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진 붉은 용, 이어서 열 개의 뿔 과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과 두 개의 뿔을 가진 짐승(13, 14장). 마지막에는 '대음부 the great whore'를 태운 열 개의 뿔을 가진 붉은 짐승이다(17장). 그 리고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렸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다. 대음부와 붉은 짐승이 멸망하여 재림하신 그리스도의 나라인 '천년왕국'이 실현되고, 그 뒤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 책은 1세기 말에 도미티아누스 황제(Caesar Domitianus Augustus, 원명 Titus Flavius Domitianus, AD 51-96)의 탄압 하에서 씌어진 계시문학으로서, 로마의 멸망과 인류 의 종말을 겹치게 하면서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렬한 희구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나 '짐승'들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보편사와 관련된 해석에 관해서는 뉴턴을 다루는 데서 그 예를 찾아보기로 한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고 있는 인류의 종말에 이르는 과정은 보편사뿐만 아니라 유럽인 들의 예술이나 사상, 그리고 행동 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베아투스Beatus 사본의 삽화나 뒤러의 '묵시록' 판화 등이다. 또한 이것은 중세 말기 이후의 '천년왕국 운동Millennialism'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다. 카톨릭 정통파는 '천년왕국'은 카톨릭 교회가 성립된 이후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 석했다. 그러나 문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머지않아 재림 예수가 나타나면서 가까운 장래에 '천년왕국'이 실현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세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다양한 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이 운동은 오늘 날까지도 일부 프로테스탄트의 종파들, 예수 재림론자들이나 여호와의 증인 등에게 계승되 어 오고 있다.) 봉함이 뜯어지고 나팔이 울려 퍼질 때마다 일어난다고 하는 천재지변에 대한 언급도 이 세상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어, 유럽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755년에 있었던 에스파냐 리스본의 대지진, 핼리혜성의 출현, 1986년 러시아 체르노빌의 원자로 사고 등이 좋은 예이다. 체르노빌이 '아르셈(쑥, wormwood의 일종)'을 뜻하는 말 이라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인들 중에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 았다고 한다. 그것은 제3의 나팔이 울리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면서 물의 3분의 1을 쓰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별 이름은 쑥이라(요한계시록 8:11)"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종류 지금까지 보편사는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성서는 한 종류만이 아 니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일은 앞으로의 보편사의 전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문제로 사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인데, 그 중에서도 원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히브리어 성서, 그리스어 성서, 그리고 사마리탄판 성 서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히브리어 성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원전이다. 기원전 5-4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알 려져 있으며, 앞에서 노아의 홍수에 대한 연대 계산을 한 것도 사실 히브리어 원전에 의한 수치이다. 그리스어 성서는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y Philadelphus, BC 308-246, 재위 BC 286-246)의 부탁을 받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번역한 사람들의 수 가 70명이라 '70인역 성서'라고도 불린다. 신약성서의 원전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로마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뿐만 아니 라 구약성서도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서를 사용했다. 사마리탄판 성서(사미리아 5경)는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불렸던 유대교의 한 그룹이 전한 것이다. 참고로 라틴어로 번역된 성서(우르가타라고도 불림)인 카톨릭 교회의 정전은 AD 382년에 서 406년에 성립되었다. 나중에 이 책에서도 다루게 되는 유세비우스Dusebius와 히에로니무 스(Hieronymus, 성 제롬, 347-419/420)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의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 원전만 번역하자고 주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 게 되지 않았다. 70인역 성서의 일부와 오늘날에는 '외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번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서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여러 성경의 숫자가 다 른 것도 그 때문이다. '우르가타'가 완전히 보급된 것은 겨우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의 일이며, 그 뒤에도 '우르 가타'의 내용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이탈리아의 트 렌트Trent에서 있었던 종교회의(1545-1563)에서 1546년에 결정된 것이다. 보편사의 커다란 골격과 내용에 관해서 말한다면,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성서에는 다른 점 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큰 테두리와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만 한정된다. 세사한 자구나 특히 보편사에 있어서의 연호 계산에서는 커다란 차이점을 갖는다. 족장들의 나이 등에까지 시야를 넓힌다면, 이 성서들 가운데에서도 서로 다른 점들이 많 이 발견된다. 이와 같은 일은 이 책 전체의 테마에 관계되는 문제이기도 하여, 앞으로 여러 측면에서 소개도 하고 검토도 해보려고 한다. 기독교 연대학과 보편사의 성립 기독교의 성립 로마 제정을 개시한 아우구스투스 황제(Octavius Augustus, 재위 BC 27-AD 14)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고 제2대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aesar Augustus, 원명 Tiberius Claudius Nero, BC 42-AD 37, 재위 BC 14-AD 37) 시대에 기독교가 성립되었다. 이후 기독교는 점차 그 세력을 제국 전역으로 넓혀나간다. 그러나 그 확대의 시대는 64년의 네로 황제(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 37-68, 재위 54-68)에 의한 제1차 박해를 시작으로 303-304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316, 재위 284-305)에 의한 최후의 대박해까지 긴 박해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80?-337, 재위 306-337)의 기독 교 공인은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가 392년의 테오도시우스 황제(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379-395)에 의한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이다. 이 직후인 395년 로마제국은 분열되었고,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이 사이에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정비한 카톨릭 교회는 사회 속에 확고한 지 위를 축조함으로써, 중세에 있어서의 지배적인 지위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박해 시대에는 '교부'라고 불리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기독교의 교리 를 정비하고 박해자들이었던 로마인들에 대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호교 활동을 했다. 이같 은 교부들의 논쟁을 집대성한 사람은 교부 중 한 사람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relius Augustinus, 354-430)였다. 로마 시대에는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 역시 박해를 받아 두 차례의 대반란을 일 으켰다. 135년 오현제 가운데 하나인 하드리아누스 황제(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76-138, 재위 117-138)에 의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는 유대인들은 사형을 당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고국을 떠나 20세기까지 계속 되는 방황, 이른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대로 들어간다. 성서에 의해 인류사를 서술하려는 성서 연대학은 이처럼 박해를 당하고 있던 유대인들에 게서 비롯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세푸스(Flavius Josepus, 원명 Joseph Ben Matthias, 37-100)였다. 앞에서 보았듯 노아의 홍수나 아브라함의 탄생과 같은 천지창조 이 후의 연수는 구약성서를 토대로 계산이 된다. 그는 로마의 역사를 성서 연대학에 끼워넣어 로마인들의 역사도 구약성서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대교의 하나님 섭리에 로마제국도 들어가 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박해를 당하고 있던 기독교인들 또한 이들과 같은 전술을 채택했다. '기독교 연대학의 아 버지'로 불리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180-250)가 처음으로 시 도한 사람이다. 이미 요세푸스 같은 유대인들은 '세계의 해에Anno Mundi, AM'라는 말을 숫자에 붙여 서 연호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은 천지창조를 기원으로 하고 있어 '창세 기원' 또는 '세 계 연대'라고도 불린다. 아프리카누스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연대지Chronographiai'를 썼다. 그는 '아담으로부터ab Adam'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기독 교인으로서는 최초로 연대 연구를 했다. 이와 같은 일은 결국 그를 보편사 서술의 출발점에 서게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의 저작은 인용이라는 형식을 통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누스와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대학을 발전시킨 학자는 유세비우 스이다. 유세비우스를 통해 기독교 연대학과 보편사의 발자취를 알아보기로 한다.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 로마 시대의 기독교 연대학 가운데 서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교회사의 아버지 '인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rea 또는 Eusebius Pamphili, 263경-339)와 성 제롬으로 알 려진 히에로니무스(331경-420)의 연대학이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어로 '연대기, Chronicle'을 썼으나 원전은 망실되었다. 오늘날 전해지 는 것은 아르메니아어Armenian로 번역된 것과 라틴어 번역판이다. 히에로니무스는 당시 교 황의 요청으로 카톨릭 교회의 정전인 라틴어 성서를 집대성한 학자이기도 하다. 아르메니아어역에 의하면, 유세비우스의 '연대기'는 2부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 부는 '칼데아인', '히브리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의 항목에 각각의 역사와 성서의 역사 서술이 비교되어 있다. 제2부는 '캐논Canon'이란 제목으로, 창세 기원을 토대 로 한 '아브라함 기원ab Abraham'의 연호가 시간의 척도로 채용되고 있다. 그리고 제1부 에서 다루어진 각 민족과 여러 국가의 병존 관계를 1년씩 상세한 연표로 정리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 연표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가필하면서 번역했던 것이다. 서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히에로니무스의 연표가 퍼졌고 중세를 통하여 기독교적 연대학의 기초로 되어갔 다. 표3은 '캐논'을 요약한 것이다. 이 표에 나와 있는 연호 가운데 창세 기원, 아브라함 기원, 올림피아드Olympiad 기원의 세 종류는 유세비우스가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BC란 연호는 편의상 필자가 덧붙인 것이므로 이 점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이것을 보면 유세비우스가 묘 사하고 있는 인류의 역사는 오늘날의 그것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첫째, 시간적인 골격이 천지창조로부터 고려되고 있다. 노아의 홍수가 2242년, 예수 그리 스도의 탄생이 5199년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 세계사를 구성하는 요소가 오늘날의 것과 크게 다르다. 히브리인의 역사가 연호 산 정과 구체적인 서술의 기둥이 되는 것은, 그것이 구약성서에 기초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이 해가 간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역사나 그리스의 역사 등에서는 오늘날의 역사책에서는 전혀 볼 수 없 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이 옛 시대에 관해서는 큰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칼데아인의 연원 문제 먼저 '칼데아인'의 항목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유세비우스가 맨 처음에 부딪힌 문제는 칼 데아인(바빌로니아인)들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문제의 판단이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초에 바빌론의 신 말듀크의 신관이었던 베르소스 (Berosos 또는 Berosus)가 바빌로니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그리스어로 집필한 세 권의 책 들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215만 년 전에 하늘과 바다가 분리되었다고 했으며, 반인반어의 몸을 한 오아네스Oannes와 다른 신들이 그들의 문명을 연 이후, 인류 최초의 왕조는 아로루스로부 터 제10대인 시수트로스 왕(Xisuthros 또는 Ziusudra)에 이르기까지의 왕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시수트로스 왕의 시대에 커다란 홍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왕조의 존속 기간 이 120사르스(43만 2천 년) 동안이었다는 것 등을 기록해놓았던 것이다(1992년간 브리태니 커 백과사전 영문판 23권 p862-867에 의하면 베로소스가 18사르스, 즉 6만 4천8백년 또는 7 만 2천 년으로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자 주). 유세비우스는 이 방대한 연수에 대해서는 베로소스가 칼데아인들이 사용했던 단위인 '사 르스Sars'의 환산을 잘못한 것이라고 하여 상대를 하지 않았다. 한편, 베로소스가 전하는 큰 홍수 이야기는 시수트로스 왕에게 한 신의 예고, 배의 건조, 그의 가족과 동물들의 승선, 그리고 홍수가 멎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새를 날린 일 등 노 아의 홍수 이야기와 그 구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왕은 노아와 마찬가지로 제10대째였다. 유세비우스는 '시수트로스는 히브리인들이 노아라고 부른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리고 칼데아인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연원은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홍수에 이르는 시대를 칼데아인들이 나름대로 옳지 못하게 서술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 었다. 오늘날의 우리들이 본다면 오히려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홍수 설화 쪽이 훨 씬 더 오래된 것이며, 따라서 그 논의는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에게는 칼데아인들의 전설이 오히려 구약성서에 의한 역사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유력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아시리아의 문제 큰 홍수 이후 칼데아인의 역사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아시리아Assyria이다. 유세 비우스의 아시리아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시리아의 문제에 대해 설명해두기로 하자. 그것 은 간단히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믿고 있던 아시리아와 기독교의 구약성 서에 나오는 아시리아를 어떻게 종합적으로 자리매김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서에서는 그 조상으로서 아수르의 이름이 드러난 후 푸르Pur에 이르 기까지 공백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오늘날의 우리가 보더라도 정확한 아시리아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고대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성서가 전하는 아시리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테시아스(Ctesias, BC 405-359) 나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425),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역사가인 폼페이우스 Pompeius, 트록스 등이 전하는 아시리아에 대해서였다. 거기에는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를 지배하던 초대의 니누스Ninus에서 시작하여, 그의 아내 이면서 인도에까지 쳐들어갔고 또한 수도 바빌론을 건설한 제2대 여왕 세미라미스 Semiramis에 관한 이야기 등 갖가지 설화로 채색된 여러 왕들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이 전설은 부분적인 사실에 상상이 가미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도 하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는 들라크루아의 명화로도 유명한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 가 왕궁에 불을 지르게 함으로써 멸망할 때까지 약 1천3백 년간이나 존속한 것으로 전해지 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러면서도 인도에서 아프리카까지를 지배한 세계제국이었 다. 그리고 유세비우스가 칼데아인 역사의 첫머리에 올려놓고 있는 아시리아는 실제로는 로 마인들이 믿고 있었던 이 아시리아였던 것이다. '칼데아인의 역사'에서 유세비우스가 아시리아 다음에 두고 있는 것은 역시 고대 로마인 들과 마찬가지로 메디아(또는 메데)이다.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것은 알바케스이지만, "그는 이렇게도 장기간에 걸친 아시리아인의 지배권을 메디아로 옮겼다."라고 한다.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의 패권을 계승하고 다른 나라들은 이에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그 리고 그는 세계의 지배권이 298년간 메디아에 의해 유지된 이후, 키루스에 의해 페르시아로 계승되어,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될 때까지 세계를 지배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기원전 8세기 중엽,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 pileser 3 시대에 일어나 기 원전 612년에 멸망한 고대의 세계 제국 아시리아가 완전히 빠져 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말 했듯이 열왕기 하(제15장)에 나오는 푸르야말로 진정으로 이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분명 하다. 유세비우스는 이와 같은 아시리아를 무시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왜 성서에 나오는 아시리아를 무시한 것일까? 이에 대해 추리를 해본다면, 그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이후의 아시리아를 최초의 아시리아와는 다른, 메디아에 종속 된 소왕국으로 생각했던 것이라고 보는 수밖에 없다. 연대적으로 본다면, 이 새로운 아시리 아도 다시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느부갓네살의 칼데아(신바빌로니아)와 함께 메디아가 패권 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1의 세계제국을 칼데아로 명기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내용에 위배된다. 왜 이와 같은 일이 행해졌을까? 그에 관해서는 유세비우스의 아시리아론을 승계한 아우구스 티누스 장에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 '이집트인'의 항목에서 유세비우스가 봉착하고 있는 것도 이집트 역사의 '연원'을 기독 교 성서가 보여주는 시간적 테두리 안에 모순 없이 수용해야 한다는 문제였다. 그의 연대학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는 2957년이 걸린다. 칼데아인과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의 역사를 구약성서의 역사적 테두리 안에 잘 짜맞출 수만 있다면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시간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인류의 역사는 존재하 지 않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기독교의 성서야말로 모든 인류의 역사를 포괄하는 보편사를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마네토Manetho of Sebennytos였다. 마네토는 기원전 3세기 초엽에 히네로폴리스 신전의 고관을 지냈던 이집트 사람으로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 (혹은 1세)의 명령에 따라 그리이스어로 된 '이집트지Aegyptiaca'를 저술하였다. '이집트지'는 이집트 역사의 시작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정복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31왕조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오늘날 고대 왕국, 중기 왕국, 신왕국이라고 하는 이집트 역 사의 시대구분이 마네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마네토에 따르면, 이집트에는 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들과 반신들이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 다. 신들이 통치한 시대가 1만 3천9백 년간, 그리고 반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이 지배했던 시 대가 약 1만 1천 년간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인간들이 통치하는 시대가 메네스로부터 시작된다. 마네토는 메네스 이후 31개 왕조가 그 숫자가 표시하는 순서대로 이집트 전 영토를 통치 한 것으로 보았으며, 왕의 명칭, 수도의 위치, 왕조의 존속 연수를 갖추어서 서술하고 있다. 그 수치의 합계는 5268년 8개월이 된다. 이것이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페르시 아의 세계 지배권을 빼앗은 기원전 331년까지의 연수이다. 유세비우스의 계산대로 예수 탄생이 창세기로부터 5199년이 지난 뒤의 일이라면, 마네토 가 말하는 메네스는 이보다도 오래되었음을 의미하는 셈이다. 즉 그는 기독교 구약성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천지창조보다 4백 년 이상 앞선 시기에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집트인들은 메네스에 의한 인간의 통치 시대 이전에, 보다 장기간에 걸친 신들 과 반신, 그리고 영혼들에 의한 통치 시대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집트인의 달력이 과거 마네토 시대의 것과 다르다고 추정한다. 신들의 시대라고 칭하는 시대에는 '우리가 한 달이라고 부르는 기간 을 한 해로서 사용했었고' 반신 이후의 시대는 3개월을 일 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신들이 지배한 기간과 반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들이 지배하는 기간을 이 기 준에 의하여 태양년으로 환산을 하면, 합계 2206년이라는 수치를 얻게 되다. 이 수치는 창세 기원에 의한 대홍수가 있기까지의 기간인 2242년보다 적다. 따라서 그는 이 두 개의 시대는 바빌로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이 노아의 홍수 이전 시대를 변형하여 전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결국 유세비우스는 성서에 있는 대로 미 즈라임이야말로 이집트인들의 조상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들, 그리고 반신들에 의한 통치 기간이 유세비우스가 주장하는 대 로였다고 하자. 만약 이 '해결 방식'이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메 네스 이후의 기간 초과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앞에서 말했듯이 유세비우스가 주장하 는 노아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2957년간에 비해 마네토가 기술하고 있는 기간은 2천6 백여 년이 길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그는 "그래도 오히려 연수가 남아돌아간다면, 아마도 당시에는 몇몇 왕들 이 동시에 통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31개의 왕조 가운데 몇몇이 이집트의 세 지역 또는 두 지역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재편성함으로써 기간의 단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연표에서는 니누스,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집트에 는 갑자기 제16왕조가 들어선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후로는 모든 왕조를 마네토와 마찬가 지로 차례로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전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해 마네토의 기술에 따르면, 메네스로부터 제15왕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미 3732년이 경과하고 있는데, 이 기간 계산은 유세비우스에 의한 대홍수에서 아브라함까지의 기간인 942년과 동떨어진 연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집트인들은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미즈라임의 자손이라 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세비우스의 '연대기'에서는 그 논증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결국 그는 엉성한 형태로 해결책을 제시한 채,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에 대한 보편사적 해결을 후세에게 떠넘긴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후세 유럽의 연구가들은 이 문 제 때문에 매우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스인의 역사'에 관해서도 유세비우스의 관심은 고대로 향해져 있었다. 그의 '연대 기'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 최고의 왕국으로 치부되었던 시큐온 왕국 이후의 그리스 역사도 유대의 아브라함 이후의 연대 속에 자리매김되어 있다. '로마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 다. '연대기'에는 이집트의 역사처럼 문제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체로 본다면 그의 '연대기'는 공간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 민족이 전하는 태고의 전설적 역사까지를 수록한 포괄적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그는 기독교 성서가 전하는 역사만이 세계 모든 민족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목적은 이와 같은 서술을 통해 고대의 그리스인들이나 로 마인들에 대해 기독교적 세계관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기독교를 수용하도록 설득하 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다음 장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유세비우스의 '연대기'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판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중세 이후의 유럽에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것 은 유세비우스가 이처럼 포괄적인 보편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나라' 고대의 기독교 신학을 완성시킨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Saint Augusine of Hippo, AD 354-430)는 396년에서 430년 사망할 때까지 로마령 아프리카 히포의 주교를 지 냈을 뿐만 아니라 고대적 보편사를 완성한 사람이기도 하다. 대표작인 '하나님의 나라The City of God'는 로마 시대에 있어 가장 체계적인 보편사를 제시한 기술이기도 하다. 그는 우선 전체적인 인류의 역사가 지닌 의미를 묻고, 이에 대해 기독교적 해답을 제시하 였다. "하나님은... 시간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셨고...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이 일은... 불변하고도 영원한 당신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하나님의 나라' 제12권 15장)." 이 '당신의 의지'란 인간이 원죄를 범하고 죽어야만 하게 된 뒤에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한 가치를 갖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인도하 는 일이다. 역사는 인류의 구제를 향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에 의한 인류 교육의 과정에 불 과하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을 구제사관이라고 한다. 그는 구제사관의 기본 구조도 만들었다. 인류 구제를 향한 도정을 그는 '하나님의 나라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사이의 대립과 항쟁의 과정으로 다룬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는 데에 반하여, '지상의 나라'는 인간 자신을 향한 사랑을 기초로 하며 지배욕, 명예욕, 교만과 같은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고 본 것이 다. 이 두 개의 나라는 모두 하나님께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자손인 인간, 즉 태어날 때부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를 짊어진 존재인 인간의 본질에 기인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사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즉, '지상의 나라'는 아담의 맏아 들이며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서 비롯되었고, '천사의 나라'는 형에게 죽음을 당한 아벨 과 그의 사후에 태어난 셋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들 이후의 인류사는 두 개의 나라가 '뒤 섞여 존재하는' 상태로 진행한다. 현실의 역사는 부정적인 가치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지상의 나라' 가운데에서 이들과 대 립하면서 '이 세상에서 순례의 여행을 계속하는 천상의 나라'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어 받고 발전시켜가는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인류사를 구제라는 목적을 향해 가는 발전의 단계라고 자리매김하 였다. 시대 구분이란 원래 '발전'이라는 관념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지만, 그는 성서를 기 준으로 하여 인류사의 발전을 8개, 실질적으로는 6개의 시대로 구분했다. '하나님의 나라' 제22권 말미의 문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의 표현에 따라 여러 시 대를 하루로 계산하여 그에 따라 시대 구분을 한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일 첫 번째 시대를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홍수에 이르기까지로 보고 이것을 제1일이라 고 본다. 제2의 시대는 대홍수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이다. 이것들은... 세대별 길이에 관하여 말한다면 각각 10세대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가 구분했듯이 그 시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이르기까지는 3개의 시대가 있는데, 각각의 시대가 14 세대씩으로 설명된다. 제1시대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이고, 제2시대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 유수까지, 제3 시대는 거기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탄생하기까지이다. 이와 같이 우 리는 다섯 개의 시대를 가지는 것이 된다. 우리는 지금 제6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되지만 세대의 수에 의해 측량할 수는 없다... 이후 이른바 제7일에 이르러 하나님은 쉬시게 될 것 이다... 이 제7일은 우리들의 안식일이며, 그 끝은 저녁때가 아니라 말하자면 주님의 영원한 제8일이다." 제1기는 '유년기'라고도 불리며, 아직 인간들이 육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던 시대이다. 제2 기는 '소년기', 제3기부터 제5기까지는 '성년기'라고도 불린다. 노아에서부터 예수에 이르기 까지의 이 시대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율법'을 제시한다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원죄 와 구제에 관한 교육을 베푼 시대이다. 여기까지가 구약성서의 시대이다. 이 구약시대를 통하여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진 자는 이스라엘의 백성-유대인들뿐이었다. 예수의 탄생으로 인류사는 신약시대, 즉 노년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대는 그 이전의 5개의 시기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단계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도래에 의해 성취되었고, 인류의 교육 또한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최종 단계로 들어간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지는 자야말로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실적인 인류사는 이 제6기로 끝이 나고 다가올 '종말'과 '최후 의 심판'을 거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4의 나라 - 로마제국 그런데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적으로는 항상 온갖 '지상의 나라'에 둘러싸 인 채로 그것과 '혼재'하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위의 시대 구분에 근거하여 '지 상의 나라'의 발전도 서술한다. '지상의 나라'의 역사 전체에 테두리를 주고 있는 것은 역시 <다니엘서>의 '4세계제국 론'이다. 여기서 그는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사고방식을 수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들 네 개의 왕국을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를 지칭하는 것 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이 적절한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박식하고 그러면서도 자세하게 기록된 히에로니무스 사제가 저술한 '다니엘서 주해'를 읽을 것을 권 하는 바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시리아와 로마를 특별히 중시하는 점에서도 마찬가 지이다. "이 세상의 나라 가운데에서 두 개의 나라가 다른 모든 나라보다 뛰어나게 명성을 얻은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 가운데 먼저가 아시리아이며, 다음은 로마이다... 그리고 한 나라 가 시작된 것은 다른 나라의 종말에 바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다른 왕국이나 왕 들은 모두 이들 왕국의, 말하자면, 부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8장 2절). 결국 아시리아를 '최초의 로마인 바빌론'이라고 칭하며, 또는 '로마는 제2의 바빌론'이라 고 도 칭하고 있다. 또 양자의 중간에서 조정을 한 것이 페르시아(메디아를 포함)와 마케도니아 였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한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개의 나라의 역사'라는 관점에 잘 합치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브라함에 의해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지상의 나 라'도 첫 번째 제국 아시리아의 성립이라는 획기적인 단계를 맞이한다. 로마에 대해서도 마 찬가지이다. "로마인들의 믿음 가운데에는 나라의 체제에 변화가 일어나 황제의 통치로 인해 세계적인 평화가 확립되었을 때 미리 행해진 예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 났다는 것이다(제18장 46절)."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탄생이라는 결정적 단계를 맞이했 을 때, '지상의 나라'도 또한 최후의 제4제국의 단계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미리 정해놓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아시리아론은 아구스티누스도 유세비우스가 안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는 "모든 왕국 가운데에서 가장 컸던 아시리아는... 니누 스의 아버지인 베르스의 시대를 계산에 넣을 수 있다면 약 1305년 만에 메디아Media인들에 게 지배권을 넘겨주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유세비우스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와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느부갓네살 왕의 신바빌로니아(칼데아)에게도 성서 속에 있는 지위를 부여하지 않 았던 것이다. 고대적 보편사의 집대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대홍수 이전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홍수로 모두가 멸망한 결과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세비우스의 주장도 이어받고 있다. 그리스 역사의 자리매 김이나 이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인 시큐온의 국왕들로부터 시작하여 아르고스Argos나 아테 네의 역사도 끌어들이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나 헤라클레스와 같이 신화적인 인물들까지도 역사상의 인물로 전하고 있다. 로마사의 자리매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우위성을 보여주 려 하고 있다. 이상은 거의 대부분이 유세비우스 그대로이며, 따라서 고대의 보편사가 지닌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세비우스와 서로 다른 점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집트론이 다. 그는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각도에서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표5를 보면 아르고스의 왕 이나고스의 딸 이오Io가 이집트로 건너가서 이시스 여신이 되었다는 기 록이 채록되어 있다. 이것은 유세비우스도 이미 서술하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에는 이집트의 역사 가 오래되었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 전설을 이용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10만 년이 넘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신 자체가 이같이 새로운 시대의 인물을 신격화한 결과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또한 그도 비록 수치는 다르지만 유세비우스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창세 기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는 '70인역 성서'를 기초로 하여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연대학 에 의지하면서, 대홍수는 아담 이후 2262년의 사건으로, 아브라함의 탄생에는 홍수가 난 뒤 1072년 이후와 같이 연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보편사 서술에는 나중에 보게 되는 갖가지 문제점을 포함하여 고대적 보편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논의되고 집대성되어 있다. 기독교 호교활동으로서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출발,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는 기독교 연대학과 보편사의 발전은 원래 로마 세계에 대해서 행한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호교 활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인 버터필드에 의하면 당시의 교부들이 중시 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문제는 기독교가 당시 갓 시작되었을 뿐인 신흥 종교라고 하는 이교도들로부터의 비판 문제였다.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연속성을 보여줌으 로써 오래됨과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구약성서가 그리고 있는 인류사나 연대의 테두리 에 칼데아나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역사를 짜맞추어 넣으려는 논의는 이러한 방향 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의 세계제국을 성서의 내용에 없는 아시리아로 하고 성서에 나와 있는 아시리아 쪽은 무시하는 해석도 당시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가장 오래된 대제국으로 믿었던 아시 리아쪽을 보편사에 짜넣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서로 다른 점을 설명해야 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우선 제4의 세계제국을 로마제국으로 해석하고, 더구나 로마제국이 성립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지게 될 자가 유대인에서 그리스도 교회로 이행했다는 논리로 설명하려 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전체로서는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로마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 들의 역사를 꿰뚫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보편사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와의 싸움의 무기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지적한 바 있는 그들의 성서 바꿔읽기나 내용을 무시하는 등의 문제점도 이 목적 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 보편사는 기독교 성서의 천지창조로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으로 끝이 난다. 그 시 간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시간과는 매우 다른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관념은 보편사에 독특한 흔적을 남겨놓게 되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이 지금까지 여러 번 등장한 '창세 기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부분 에서 인용된 바와 마찬가지로 시간 자체가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 다. 창세 기원은 천지창조를 시작으로 종말까지의 유한한 기간을 새기는 눈금으로 시간을 사 용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편의상의 눈금이 아니라, 보편사의 본질을 구성하는 눈금이다. 물론 그것은 성서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계산되었다. 로마 시대의 교부들이 기본 성서로 삼고 있었던 것은 '70인역 성서'였다. 그들은 이 창세 기원을 근본으로 그리스의 올림피아드 기원, 로마의 건국 기원을 여기에 짜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낯익은 '그리스도 기원'의 연대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기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창세 기원이 있는 이상 그런 것은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종말관과 인류사 6천 년 사이의 관념 시간에 일정한 폭이 있다면, 그 길이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얻고자 하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더욱이 현실 세계의 종말과 교인들이 소망하는 지복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시간의 종점에 놓고 있는 기독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특히 박해를 받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한 바람이 매우 강했다. 그 러했던 시대, 즉 AD 70년에서 140년 사이에 씌어진 예수의 제자들이자 기독교의 교부들이 었던 사람들이 보낸 편지들의 사도교부문서 중에 '바르나바의 편지(Dpistle of Bamabas. Codes Sinaiticus에 포함되어 있음)'가 있다. 여기에는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6일동안 창조를 완성하셨음을 증 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엿새 동안에 완성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가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은 6천 년 동안에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하루는 인간 세상의 천 년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자신이 나에게 '보라, 주의 하루는 천년과 같도다(시편 90:4)'고 말씀하시며, 그 일을 증언 하 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들, 딸들이여. 엿새 동안에, 즉 6천년 동안에 모든 것이 완성될 것 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완성'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역사는 아담 이후 6천 년 만에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인용되어 있는 시편의 구절은 '하나님 의 사람인 모세의 기도' 중 한 구절이다. 아라이 겐 씨의 말에 따르면, 사도교부문서는 '전통적으로는 물론, 시대적으로나 사상적으 로도 신약성서에 다음가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문서들'이다(<사도행전>'성서의 세계 별 권 4, 신약' 일본 고단샤. 1974년 49쪽). 그중에서도 이 '바르니바의 편지'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신약성서 정전과 동등 하거나 거의 같은 지위에 놓여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류사 6천 년이라는 관념은 여 기에서 출발하여 로마시대의 기독교인들을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그뒤로도 계속 유럽인 들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아프리카누스는 예수의 탄생을 창세 기원으로는 5500년의 일로, 유세비우스와 히 에로니무스는 5199년의 일로 보고 있었다. 로마 시대 말기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코앞에 와 있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나오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제6기에 관해 '세대의 수로 측량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종말 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자신이 그 시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인류사의 최후 단계로 자리매김하 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세상의 종말이 매우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보편사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겼다. 보편사는 항상 종말을 의식하면서 서술되는 세계사인 것이다. 세계는 세 개의 편평한 대륙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독교적 세계관 보편사가 우주론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이에 관해서는 천동설에 기초한 우주관에 입각했 다는 정도만 이해하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고대 보편사가 전제로 하던 땅과 그 위에 거주하 던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보고자 한다. 사실 이 점에서 고대의 보편사들은 한결같이 고대적인 소박함을 보여준다. 세계를 아시아, 유럽, 리비아 셋으로 구분한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리고 리비아 대신 '아프리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다. 원래 '아프리카'라는 지명은 카르타고 근방을 가리키는 로마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카르타고를 정복한 이후, 로마는 이 땅을 아프리카 주로 삼아 총독을 보내어 지배하기도 했 다. 그 뒤 로마는 점차 영토를 확장하여 이집트에까지 이르는 북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로마의 지배 지역의 확대와 동시에 '아프리카'도 확대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아프리카'라는 이름은 이미 대륙전체를 지향하고 있었다. 세 계를 구성하고 있는 대륙들에 관하여 그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그 전부이다"라고 서 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의 동쪽 절반에는 아시아가 있으며, 서쪽에는 지중해를 사이 에 두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구 구체설'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후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만일 땅이 구형이라면, 우리의 아래쪽에는 우리에게 발바닥을 향하고 서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지구 구체설'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이 사람들을 대척인 (antipodas)이라고 불렀다. 대척인의 존재에 대한 개념은 피타고라스학파로까지 거슬러올라 가는 사고방식이었다. 이에 맞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믿을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대척인의 존재 를 전반적으로 부정하였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기독교의 교부들은 지구의 형태 를 세 개의 대륙이 전체적으로 편평하게 늘어서 있으며, 큰 바다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으로 보는 세계관을 중세에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 괴물지'의 계승 고대인들 거의 모두가 그랬듯이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괴물 같은 인간들의 존재를 믿고 있 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괴한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서술했다. 그는 사람들이 전하고 있는 외눈박이, 머리가 없는 사람, 남녀 양성을 함께 지닌 사람, 외 다리를 한 사람 등의 예를 들면서 이 모든 형태를 한 사람들의 존재를 믿어야 할 까닭은 없 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존재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이며 "인류 전체 가운데 어떠한 기괴 한 모습의 종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 역시 보편적 인간에 관한 '이성적이며 죽어야 할 동물'이라는 정의에 들어맞는다면, 그들 또한 아담의 자손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기괴하게 생긴 인간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그들의 존재를 믿었기에 그들을 아담 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도 고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고대 로마인들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고대의 기독교인들은 마스다 요시오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 중세시대의 공상 적인 세계관의 산물인 '세계 괴물지'('신세계의 유토피아', 일본 겐큐사 발행, 1971년) 탄생 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제2장 중세 보편사의 전개 그리스도 기원의 발생 여러 가지 연호 창세 기원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필요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실제 이것을 사용한 것은 소수의 저술가들뿐이었다. 로마인들의 실생활에는 카이사르가 도입한 율리우스력이 사용되 었고 연호를 세는 방법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무렵, 당시 역사가들이 널리 사용한 연호에는 기원전 776년에 시작된 올림피아드 기원과 기원전 753년에 시작된 로마 건국 기원(anno urbis conditae, AUC)에 따른 연호 등이 있었다. 이것은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 생활면에서는 콘술Consul이라는 공화정 시대 이래의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그밖에도 AD 284년을 원년으로 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 및 AD 313년을 원년으로 하는 로만 인 덱션Roman Indexion이 있었다. 앞의 것은 당연히 황제의 즉위 연도에서부터 연수를 세는 방법이고, 뒤의 것은 올림피아 드 기원의 연수 계산법과 마찬가지로 15년을 주기로 하여 연수를 세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15년마다 재산 평가를 개정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연호들은 모두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AD 525년에 그리스도 기원이 발생하게 된다. 6세기 초에 들어서 그리스도 기원이 생겨나게 된 원인은 카톨릭 교회의 행사 중 하나인 부활절Easter을 언제로 할 것인 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부활절은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이동 기념일로서- 3월 21일 이후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이다. 이 규정이 정해 진 것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최한 니케아의 종교회의(the Cousncil of Nicaea, AD 325)에서였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부활절의 특성상, 카톨릭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부활절의 날짜에 대 하여 계산이 이루어졌고 그것을 표로 정리해놓고 있었다. 6세기 초까지 사용되고 있었던 부활절 표는 알렉산드리아의 큐릴로스(444년 사망)가 산정 한 것이었으나, 525년에는 이 표도 6년을 남겨놓고 마지막이 되는 데까지 와 있었다. 새로운 부활절 표를 작성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디오니시오스 엑시구스 새로운 부활절표의 산정을 실행한 사람은 스키타이 태생인 로마의 수도사 디오니시오스 엑시구스(소디오니시오스, Dionysius Exiguus, 영어로 Denis the Little의 뜻, ?-540 또는 550년 사망)였다. 그리스도 기원의 발안자가 된 것이다. 디오니시오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긴 세월을 셀 때 우리는 이제까지 경건하게 믿는 마음을 가지 못한 박해자의 이름과 결부시켜온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 도가 육신으로 태어나신 때로부터 해를 세는 방법을 택했다(피네건 '성서 연대학')." 이 말에 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앞에 언급되어 있는 큐릴로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기 원으로 연호를 기록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최후의 대박해를 감행했던 황제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연호를 '순교자의 기원'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 릭 교회는 6세기가 되어서도 카톨릭 교회는 6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 기원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디오니시오스는 새로운 부활절 표를 만드는 데 이 연호를 부정하고, 이에 대치할 만한 것으로 '주께서 육신으로 태어난 때로부터ac incamatione Domini'의 연호 산정법을 만 들었다. 이것이 그리스도 기원이 발생한 경위이다. 디오니시오스의 산정 방법 디오니시오스가 그리스도 기원의 연호를 결정한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한 날이 3월 25일 일요 일이며, 예수가 만 나이로 30세 때의 일이라고 하는 당시의 통념을 출발점으로 했다. 참고로 말하면, 3월 25일은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이날은 예수의 수태고지일이 며, 더욱이 천지창조의 날로도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근거는, 당시에는 부활절이 532년이란 기간을 한주기로 하여 일순한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추정을 해보자면, 디오니시오스는 우선 자신의 시대에서 3월 25일의 일요일에 부활절에 해당하는 해를 찾아간다.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의 279년에 해당한다. 이 해는 부활 절의 이동이 꼭 한 바퀴를 돌아온 해에 해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 바퀴를 도는 데에 소요 되는 532년에 예수가 탄생한 해로부터 살아온 나이 31을 더하면 563년이 된다.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 279년은 그리스도 기원 563년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다음 은 이 등식을 출발점으로 해서 다른 연호를 결정해가면 된다. 그리고 디오니시오스는 그 당시 '주께서 육신으로 태어난 때로부터'라는 말로 연호를 표시했으나, 나중에는 '주의 해anno domini, AD'라는 말도 함께 사용하게 되어 현대에 와서 는 후자를 널리 쓰고 있다. 또한 예수가 탄생한 날 역시 통념에 따라 12월 25일로 정했지만, 기원의 시점은 그해의 1 월 1일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 것도 디오니시오스이다. 영국 교회의 역할 그리스도 기원이 단기간 내에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점과 그리스도 기원이 서유럽으로 퍼 져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의 교회였다는 점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 다. 영국은 게르만인들을 기독교인들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기원을 서유럽으로 확대하는 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의 카톨릭화는 교황 그레고리우 스 1세(재위 590-604)에서부터 시작되어 8세기 말에는 거의 완료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대륙에서 건너온 학승들에 의해 로마 문화가 이식되어 각지의 교회 부속학교나 수도원을 거 점으로 앵글로색슨인들 스스로 새로운 문화적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성 베다(Beda the Venerable, Bede 또는 Baeda 등으로도 표기, 672/3-735)이다. 베다로 대표되는 영국 카톨릭 교회의 '르네상스'는 대륙으로 파급되어 독일 의 기독교화나 '캐롤린지언 르네상스Carolingian Reneissance'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이에른 지방과 중부 독일을 비롯한 독일 전역에 기독교를 포교한 '독 일의 사도' 보니파키우스(Bonifatius, Banint, 675-754)이다. 그는 본명이 윈프리드였으며 영 국 웨섹스 지방 출신이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캐롤린지언 르네상스를 개시했을 때,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아르킨을 비롯한 인재들 역시 영국 교회가 배출한 사람들이었다.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은 먼저 이러한 영국 교회에 수용되어갔다. 그리고 664년 노섬브리아Northumbria에 위치한 위트비Witby에서 개최된 종교회의(Synod of Witby, 663-664)에서 디오니시오스가 계산한 부활절표를 사용하자고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영국 교회 전체를 구속하는 것이었으며, 이제까지의 개별적인 사용과는 달리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이 최초로 커다란 거점을 가지기에 이른 것이다. 베다를 비롯 한 권위자들이 그들의 저작에 그리스도 기원을 사용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미 말했듯이, 영국 교회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대륙에서도 커다란 구실을 했는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베다의 저작물이나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을 지니고 갔다. 결 국 유럽 대륙에서도 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그리스도 기원을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었 다. 그리스도 기원 사용의 일반화 그리스도 기원의 사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또는 Charles 1, 742-814,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황제)였다. 그는 랑고발트에 관한 한 칙령에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와 다른 세속적 문서의 전통적인 연호를 짜맞추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태어난 때로부터 801년, 인덱션 제9년, 우리들의 프랑 크 통치로부터 33년, 이탈리아 통치로부터 18년, 그리고 우리 콘술 재위 제1년." 이후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세속의 정치 쪽에서는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인 루이나 샤를 같은 왕들도 이 형식을 답습해갔다. 또한 10세기 후반부터는 이제까지 교황 재위년을 사용 해오던 교황청의 문서에 그리스도 기원도 함께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기원이 고안되었던 것이 525년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느린 걸음걸이였다. 그러 나 10세기 말까지는 대체로 서유럽에 그리스도 기원이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기원의 사용이 이와 같 이 확대되어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조 수단으로서의 위치밖에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기원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사건에 관하여 그것도 창세 기원과의 병용이라는 형식으로밖에 사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중세의 보편사에 '그리스도 탄생 이전BC'이라는 연호가 없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대적 보편사에 그리스도 기원이 필요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에서도 '그리스도 탄생 이전'이라는 연호는 필요가 없었다. 그 시대는 창세 기원으로 표시하면 충분했기 때 문이다. 중세의 보편사 서술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세계가 서술가 두 사람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 사람은 앞에 서도 소개한 베다(673-735)이며, 다른 사람은 오토 폰 프라이징(Otto von Freisingm, 1111경 -1158)이다. 이 두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카네이와 마사오씨가 자신의 저술인 '서양 중세의 역사가'속 에서 한 말을 인용한다면, 베다에 관해서는 "중세 초기의 세계 연대기는 베다에 의하여 완 성되었고 샤를마뉴 시대, 오토 시대의 세계 연대기는 모두 그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 다." 또한 오토 폰 프라이징에 관해서는 "중세의 세계 연대기의 완성기는 12세기이며, 가장 대 표적인 작품은 프라이징의 '연대기Chronica'이다."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베다의 연대기 베다는 놀라울만큼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9세기부터 '성자'라는 칭호로 불릴만큼 커 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그의 생애는 매우 단순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일곱 살에 웨어머스에 있는 베네딕트파의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열세 살에 재로Jarrow에 새로 생긴 성 바오르 수도원으로 옮긴 이후로는 몇 번에 걸친 두 도시로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도와 연구, 저술과 후진 양성 을 계속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는 요한복음서의 영어 번 역을 계속하다가 이 일을 마친 직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 그에게는 보편사에 관한 저작이 두 편 있다. 하나는 '시간론De Temporum Ratione, 영역 On the Reckoning of Time'(대연대기, 725년)이다. '시간론'에서는 시각과 일, 주, 월, 연, 하지, 동지, 춘분, 추분 등 천문학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시간을 논하는 한편, 고대 이후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간결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기독교적 시간으로 나아가는데, 거기에서는 앞에서도 말한 이동축제일인 부활절과, 마지막으로 '세계연대'라는 제목 하에 천지창조에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는 시간에 대 해서 고찰하고 있다. 우리들의 문제와 관계되는 것은 이 마지막의 '세계 연대'에 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사는 여섯 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유년기), 제2기는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소년기), 제3기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청년 기), 제4기는 다윗에서부터 바빌로니아로의 포로로 가는 시기, 즉 바빌론 유수에 이르기까 지, 제5기는 바빌론 유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태어나기까지(노년기), 제6기는 주 예수가 육신으로 태어난 이후이다. 그는 로마 황제의 재위년을 쓰면서 자신과 같은 시대 에 있던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다. 그의 인류사적 시대 구분은 앞에서 소개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 구분을 채용한 것이다. 이들 여섯 시기에 대한 각각의 내용은 거의가 유세비우스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소 개는 생략하겠다. 그런데 그가 유세비우스의 내용에 덧붙인 것이 있다. 예수의 탄생은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아담 후' 3952년, 70인역 성서에서는 519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두 가지 설, 즉 히 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를 추가하여 수록하는 양론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시간 계산론'은 서적의 쪽수가 많아진 만큼 상세하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 용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첫 번째의 '시간론'과 같다. 다만 두 가지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 변화란, 아브라함까지는 70인역 성서와 히브리어 성서가 사용하는 연호를 병기하고 있 으나, 그후로는 히브리어 성서의 연호만으로 기술한 점이다. 예를 들어 예수 탄생년을 '3952 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제42년... 제193 올림피아드 제3년'으로 한 것이다. 또한 예수 이후에 대해서도 동로마의 레오 3세까지, 모든 황제의 즉위년을 히브리어 성서 에 의한 창세 기원의 연호로 기록해간다. 두 번째 변화는 예수 이후의 서술 가운데에는 기본적으로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창세 기 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밖에도 '주의 수난' 또는 '주께서 육신으로 태어나 신 때로부터'라는 연호도 가끔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다의 역할 앞에서 유세비우스에 관해 살펴보면서,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에 의한 연대학이 서유 럽에 매우 큰 영향력을 주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 한 가지 예가 이 베다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연호의 사용과 로마 이후의 시대를 제외하면, 베다가 저술한 책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히에로니무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베다의 역할로 보아, 그의 작품을 통해 그들 두 사람의 영향력이 더욱더 커져 간 것으로 보여진다. 베다는 확실히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연대학과,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완성된 고 대적 보편사의 계승자이며, 또한 이것을 서유럽으로 보급시킨 중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거기에 머무른 것만이 아니다. 그것도 그가 사용한 연호에 나타나 있다. 최초의 '시간론'에서는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와 70인역 성서에서 유세비우스가 계산 한 연호를 병기하고 있었다. 베다는 이 가운데 어느 쪽도 옳다고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그 러나 제2의 '시간 계산론'에서 그는 결국 유세비우스의 연호가 아닌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를 채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오랫동안 그를 계승하는 사람은-종교 개혁의 시대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서 시작한-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에 관해서는 창세 기원의 연호에 덧붙여 그리스도 기원의 연호를 병기하는- 방법은 고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방법이었다., 뿐 만 아니라 그의 방법은 그 뒤 모든 사람들에게 계승되어가게 되었다. 오토 폰 프라이징과 중세 보편사의 완성 프라이징은 오늘날 뮌헨의 위성도시에 불과하지만, 한때 이곳에 설치되었던 사교좌는 남 부 독일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였다. 프라이징의 사교좌를 이같은 지위로 높인 사람은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조카이자 황제 프 리드리히 1세(발바로사)의 숙부인 오토 폰 프라이징이었다. 그는 1137년 이후 그곳의 사교를 지냈다. '연대기'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저작하던 당시에 이미 높이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종교 개혁 시대 이후에는 오히려 카톨 릭 정통파의 최고봉을 차지하는 역사서로서 계속 읽혀왔던 작품이다. 그의 '연대기'는 이미 제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마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제시한 보편 사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오토 자신도 "교회의 훌륭한 인도자 가운데 에서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오로시우스를 따랐다"(서문)고 언명하고 있다. 특히 고대 로마 까지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베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오토의 독자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독자성은 서유럽제국 멸망 이후의 역사를 보편사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에 도전한 데에 있다. 고대의 사람들이 생각한 '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고대 라틴인들의 로마제국이었다. 더욱 이 그 나라는 최후의 세계제국이며, 그 나라가 멸망할 때 인류사도 종말이 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서로마제국 멸망 후의 12세기에 살고 있었던 오토에게는 이 사고방식이 그대로는 통용되지 않았다. 오토의 배후에는 사를마뉴 대제에 의한 '서로마제국의 부흥'과 오토 대제 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게다가 오토가 살았던 12세기는 그의 일가인 황제들 스스로가 한쪽의 당사자였다. 당시는 그레고리우스 개혁이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중세적 로마제국을 어떻게 자리매김하 느냐가 첨예한 현실적 문제로 다루어지던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 직자이기도 했던 오토에게는 이와 같은 여러 문제에 대하여 논리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설명 을 할 의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제에 대한 해답에 전거를 부여한 것은 <다니엘서>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에 대 한 <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가 시작되고 나서 지금까지 4개의 발군의 대제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세상의 정함에 따라 이어가서 세계의 종말에 이른다는 것은 여러 가지 근거에서-특히 다니 엘이 본 환상으로부터- 도출할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들 여러 제국의 통치자들을 기록하여 연대순으로 나열하였다. 맨 처음은 아시리아인의 제국, 이어서 역사가들이 굳이 제국 가운데에 넣지 않았던 칼데아인의 제국을 제외하고는 메디아인과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인의 제국, 그리고 로마인의 제국이며, 그리고 오늘날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기록했다." 그는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아시리아, 페르시아(메디아도 포함), 그 리스(마케도니아), 로마를 4개의 세계제국으로 생각했다. 성서에 정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 다고 씌여 있는 '칼데아인의 제국을 제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제4의 제국인 '로마'가 '오늘날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주님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신 때로부터 801년, 로마 건설로부터 1552년, 그 통치의 제33년 카를 황제는 교황에 의해 파트로키우스란 칭호를 받고 아우구스투스 이후 제69대째의 황제가 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 대 제 이후 콘스탄티노플에 설치되어 있던 로마인의 통치권이 프랑크인에게로 옮겨졌던 것이 다." 즉 서로마는 멸망했으나, 황제권은 동로마제국(그리스인)을 거쳐 프랑크인인 샤를마뉴 대 제에게로 옮겨지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제4의 제국인 '로마제국' 자체는 멸망 하는 일이 없었으며, 지금은 신성로마제국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오토는 고대적 보편사를 확장하여 중세까지 포함하는 보편사, 즉 중세적 보편사로 변혁했던 것이다. 타원 유럽 그는 다시 확장된 의미로서의 로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로마의 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구분했다. 첫 번째 시대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콘스탄티누스까지이다. 이것은 지 상의 나라이며 이교를 신봉하는 로마제국과 하나님의 나라, 교회와의 대립 항쟁의 시대이다. 두 번째 시대는 콘스탄티누스로 시작하는 그리스도교 로마제국 이후이다. '주민들뿐만 아니라, 소수를 제외하고는 황제도 카톨릭교인이었으므로 두 나라의 역사가 아닌 한 나라 의 역사'가 된 시대이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에는 2개의 역할, 즉 승려적 역할과 군주적 역할이 있다"고 하며 "이 시대의 역사는 두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교회의-물론 혼합 상태의 교회의- 역사이다"라고 말했다.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그리스도교 로마제국의 시대를 황제와 교황이, 국가와 교회 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역할을 분담해서 '혼합 상태'를 이루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유럽 세계를 말하자면 양자를 초점으로 하나의 타원적 세계라고 규정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기독교 로마제국의 역사는 이 타원 유럽이 성립, 발전 하고 붕괴로 향하는 시대로 그려지게 된다. 제1단계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클로비스까지이다. 이 시기는 라틴인이 황제로 군림했던 로마제국 시대지만, 타원 유럽의 원형이 성립되는 시대이다. 제2단계는 클로비스로부터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 시대까지이다. 라틴인에 의 한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한동안 그리스인들에게 황제의 자리가 넘어갔으나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새롭게 프랑크인들에게 황제의 권좌가 옮겨갔다. 그리고 이 프랑크인들에 의한 로마제 국하에서 '혼합 상태의 교회' 즉 타원 유럽이 완성을 맞게 된다. 오토의 이상은 세계의 평화가 교회와 국가의 협조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었는데, 이와 같 은 정점의 시대를 쌓은 것은 하인리히 3세 시대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이자 오토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하인리히 4세 시대에 이미 그 조화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 서품의 임명권, 즉 서임권 투쟁이 지속되는 시대를 맞게 된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던 오토였지만, 그는 그 시대를 급속하게 종말로 향하는 시 대라고 생각했다. "제4의 제국의 시대 말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인류의 종말에 관해 예언된 것들을 경험 하고 있으며, 따라서 머지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 는 수록하고 있다. 그는 <다니엘서> 제2장에 나오는 '돌'이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서임권 투쟁 의 시기가 바로 그 돌이 거대한 조각(제국)의 발을 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리고 이 투쟁을 종결시킨 월무스의 협약에 관하여 "교황 칼릭스투스Calixtus 밑에서 교회는 거대한 산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종말에 관한 <다니엘서>의 예언은 이미 성취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보편사는 지극히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종말을 상정하고 있던 보편사였다. 오토가 사용한 연호 다음으로 오토가 서술한 보편사에서의 시간, 즉 연호에 대해 특징적인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여기에는 창세 기원이 기초가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해는 "아우구스투스 대제 통치 제42년, 로마 건국 기원 제752년, 올림피아드 기원 제193년, 아담으로부터 5500년 이후의 일이며, 다니엘에 의하면 안티파로스의 아들이며 이방인인 헤롯이 유대를 66주간 통치하고 있던 때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창세 기원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통치년, 올림피아드 기원, 로마 건국 기원 등과 같은 로마 시대 이후의 전통적인 연호들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토가 사용한 연호는 이것들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한 것은 첫째가 니누스 기원, 두 번째가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이다. 니누스는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제1의 세계제국인 아시리아를 건국 한 사람이다. 그는 창세 기원 3292년의 니누스 즉위를 기원으로 하는 이 연호를 창세 기원 5500년으로 하는 예수 기원이 개시될 때까지, 그 시간 전체를 새기는 눈금자로 사용했다. 그가 니누스 기원을 중시한 것은 4세계제국론에 기초하는 역사의 이해를 연호에도 반영하 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제1의 세계제국이었던 아시리아로부터 제3의 세계제국이 끝 나는 때까지만 니누스 기원으로 표시하고, 제4의 제국인 로마제국의 시작, 즉 예수 그리스도 의 탄생 이후는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를 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네 개의 세계제국들 가운데에서 신약시대에 대응하는 제국으로서의 '로마'의 위치가 연호 자체에 의해 확실하게 나타나게 되는 셈이다. 오토는 이와 같이 두 개의 기원과 창세 기원을 조합하여 기록함으로써 전체적인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와, 보편적 인류사의 내용인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와의 관계 등을 연호 자체를 통해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12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사 오토는 세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 등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세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인도는 동부가 대양에 면하고 있어 세계의 끝이 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점에 대해서도 고대의 관 점과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세계 괴물지'의 관점 역시 계승했다. 죽은 사람의 소생에 관해 말한 부분에서 는 "괴물이나 태아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것들이 이성적이며 필멸의 생물이라는 정의에 해 당되는 것은 모두 논의의 대상이 되며, 그것들이 죽는 것들인가 죽지 않는 것들인가를 결정 해야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토의 서술은 공간적으로 많은 괴물들이 살고 있는 인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러 한 서술이 시작되는 에덴 동산은 인도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고대의 아시리아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 등의 활동 무대가 인도에까지 넓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 토 자신은 세계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다 기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연대기'는 독자적인 내용을 더하여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나아가서 저자의 주관적 확신으로 미루어보더라도 12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사의 서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토는 마지막 저술인 '황제 프리드리히전'에서 자신의 소망대로 황제가 다시 교황과 나 란히 서는 존재로 그 지위를 회복하고 또한 양자의 협조에 의한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인류의 종말은 연기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프리드리히 1세(발바로사)에 의한 질 서회복을 확인하고 일종의 안도감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도 종말은 '연기'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권력이나 교황의 권력도 모두 유럽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의 역사 가운데에서 그의 타원 유럽이란 이념은 로마 교황과 로마 황제의 양 진영에 게 있어서 자신들의 지배권에 대한 사상적 지주로서 더욱더 그 가치를 높여가게 되었다. 중세의 세계 괴물관과 보편사 TO그림 12세기와 13세기를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에서 한창 유행했던 도식적인 지도로 'TO그림' 이 있다. 영문 알파벳의 T와 O를 짜맞추어 세계가 표현되어 있어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TO그림은 중세 유럽인들이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O는 세계가 대양, 즉 오케아노스oceanos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또한 O의 내 부에 있는 T는 세계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표시하 는 것이다. 세 대륙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타나이스(돈) 강과 나일강, 그리고 지중해이다.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TO그림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의 세계지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의 유럽인들은 여기에 그들다운 내용을 첨가하고 있다. 원의 중심에 해당하는 장소에 성지 예루살렘이 들어서고 원의 정점에 에덴 동산이 놓 여진 것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의 동산을 창설하시고"(2:8)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에스겔서>에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5:5)이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서의 말씀이 이 세계지도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헬레포드 그림'에 의한 보편사의 도식화 이같은 TO그림의 연장선상에 '마파 문디(Mappa Mundi, 세계지도)'가 있다. 이것도 엄밀 히 말하면 지형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그들의 세계관을 상세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현재 존재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헬레포드 그림'이다. 가로 1.65미터, 세로 1.34미터 의 송아지 가죽에 그려져 있으며 내용 또한 풍부하다. 영국 서부에 위치한 헬레포드 시에 있는 대성당의 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1,300년경에 그 려진 것이라고 한다. 세계지도 그 자체는 지름 1.32미터의 원형 안에 그려져 있으며, 기본적 으로는 TO그림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 2가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는 성서에 기초하는 인류사가 시각화되어 있다. 맨 윗부분에는 에덴 동산과 낙 원에서의 추방이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 부근에는 노아와 방주와 바벨탑이 그려져 있다. 울에는 아브라함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그리고 나일강 오른 편 기슭에는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가뭄에 대비해 세운 곡물 창고인 피라미드(당시에 는 피라미드를 곡물 창고라고 생각했다)의 그림, 모세에게 인도되어 이집트의 람세스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인들이 여리고Jericho에 도달할 때까지 더듬어온 길 등의 인류사가 시간의 축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고대 그리스 이후에 믿어온 공간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유럽에서부터 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런던, 로마, 파리,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프라하 등 192곳에 달하는 도시들이 그려져 있고, 산맥과 하천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들은 거의 정확하 게 그려져 있다. 노르웨이라고 씌어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물 위를 달린다"라는 설명으 로 스키를 신은 사람의 모습까지 있다. 헬레포드의 그림은 스키가 그려져 있는 사상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 아시아는 어떤가? 예전부터 알려져 있는 오리엔트의 지역들에 대해서는, 메소포타미아에 서부터 소아시아, 이집트에 걸쳐 여러 도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결국 '바이블랜드(성서 상의 지역들)'나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소아시아의 지역, 나아가서 북아프리카까지는 인 간이 사는 지역으로 그 나름대로 커다란 오류 없이 그려져 있다. 세계 괴물지 그러나 그밖의 아시아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미 그리스인들과 로마 인들 사이에는, 아시아에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이상한 인간들과 동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는 믿음이 있었다. 특히 인도는 그들에게 신비로 가득 찬 나라였다. 헬레포드 그림은 이러한 괴물들의 도감으로 되어 있다. 인도(에덴 동산의 아래쪽 부분)에는 어른의 키가 아이들의 키 정도 밖에 안 되는 소인족 과 개의 머리와 꼬리를 가지고 있는 거인인 아마존이 있다. 더욱 걸작인 것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으면서도 굉장히 빨리 달린다는 스키아포데스이다. 스키아포데스는 거대한 발을 마치 삿갓처럼 펼쳐 그 그늘에서 쉰다고 설명했다. 또한 인도는 공상적인 동물들로 가득 찬 곳이기도 하다. 드레곤(동양의 용과는 달리 부정 적인 개념을 가진 괴수)과 유니콘unicorn, 붉은 몸에 전갈의 꼬리를 가진 흉폭한 사람 얼굴 을 한 사자 만티코라, 그리고 몸은 말이고 꼬리는 코끼리에 염소의 턱을 가졌으며 몸의 앞 과 뒤에 거대한 뿔이 하나씩 달려 있어 싸울 때는 앞의 뿔 하나만으로 싸운다는 에아레 등 이 대표적인 동물이다. 중앙아시아에는 입이 없어 사과 냄새만 맡고 산다는 강기네스가 있다고 했는데, 그들은 사과 이외의 다른 냄새를 맡으면 당장 죽어버린다고도 했다. 인도의 북쪽에는 셀리카(Celica, 중국)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설명문에는 인도의 북쪽에 는 사막이 있으며, 그 "사막을 넘으면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셀레스(Celes, 중국인)들인데, 그들은 비단옷을 보내온다"고 적혀 있다. 그렇지만 그 셀리카가 사마르칸트의 바로 동쪽에 놓인 작은 지역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이 지리적 위치나 넓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은 위치로 보아 일본을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기 에는 말의 발을 가진 히포포데스, 엄청나게 커다란 귀를 가지고 추울 때에는 그것으로 몸을 싸서 따뜻하게 한다는 장이인(귀가 큰 민족) 등이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 서쪽으로 가면, 새의 머리와 다리를 가진 키코네스(황새인간)와 반은 사람이고 반은 황소인 미노타우루스가 그려져 있다. 그 북쪽에는 곡과 마곡이 유폐되어 있는 것을 그 려 놓았다. 성서에 "북쪽 끝에 살며 '종말' 때에 나타난 사탄의 앞잡이로 살육을 자행한다" 고 예언되어 있는 무서운 민족이다(<에스겔서> 38:16, 18, <요한계시록> 20:1,8). 알리마스 비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들은 그리핀과 싸워 그들이 지키고 있는 황금을 빼앗아온다 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아시아에는 괴물 같은 인간들과 공상적인 동물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에 해당하는 지역은 어떤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잘레산맥 이 그려져 있고 그 남쪽에는 나일강, 다시 나일강과 바다와의 사이에 갖가지 괴물들이 그려 져 있다. 동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보면, 귀가 없으면서 다리가 꼬여 있는 앙바리, 눈과 다리가 하나 씩밖에 없는 인간, 입이 너무 작아서 액체를 빨대로 빨아마실 수밖에 없는 인간(구세인), 남 녀 양성을 갖춘 허마프로디어, 네 발로 걷는다기보다는 미끄러져 나아가는 히만트포데스, 태 어난 아기를 뱀에게 주어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는 부슈리족, 머리가 없이 가슴에 눈과 입이 달려 있는 흉폭한 식인종인 브레미에, 네 눈이 달린 에티오피아인 등이 계속되고 있다. 나일강의 북쪽에는 "입술이 튀어나와 태양을 가린다"고 설명되어 있는 거대한 입술을 가 진 인간, "매우 열등하여 동굴 속에서 거주하며, 야수의 등에 매달려 뱀을 잡아먹는다"고 되 어 있는 트로그로듀테스(혈거인)등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덴 동산의 윗부분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즉, 이 그림에서는 현재를 거쳐 최후의 심판까지 그려져 있는 셈이다. '헬레포드 그림'은 이렇게 도상화된 보편 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갖가지 괴물들 역시 보편사의 한 요소로 받아들였음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시도루스 '어원론'의 세계 헬레포드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세계 괴물지'는 지도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사실 중세에서 이와 같은 '세계 괴물지'가 퍼지는 데 가장 커다란 구실을 한 사람 은 에스파냐 사람인 세빌리아의 이시도루스(Isidore of Seville, 라틴명 Isidorus Hispalensis, Saint, 560-630)였다. 그는 중세 초기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이론가로, 그의 저서 중 일종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어원론Etymologies'이 있다. '어원론' 제20권은 세계지지, 민족지로 되어 있으며, 당시 세계와 관련된 내용이 전개되어 있다. 여기에는 유럽이나 지중해에 관해서는 착실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보고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밖의 지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점이 없다. 아프리카의 남부에는 목이 없는 사람과 그밖의 괴물이 있으며, 또한 인도에는 개의 머리 를 한 견두인, 외눈박이 거인 등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셀레스 지방에는 식인종이 있고, 그 동쪽으로 가면 입술이 이상할 정도로 큰 대순인들과 스키아포데스, 구세인이 살고 있다는 등이다. '헬레포드 그림'과 그 위치가 조금 다른 점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요괴 인간들의 카탈로 그가 완성된다. 이시도루스 자신은 '어원론'을 크테시아스나 메가스테네스, 헤로도토스와 같은 그리스인들 과 플리니우스Plinius, 솔리누스와 같은 로마인들에 기초를 두고 기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스다 요시오 씨에 따르면 이시도루스의 이 저술, 특히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다 룬 제20권은 '7세기에 성립되고 나서 13세기경까지'는 '절대적인 전거로 다루어졌다'는 것 이다. 이시도루스가 활동했던 7세기는 서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의 문화적 전통이 끊어지고 교회 에만 그것들이 보존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그는 이처럼 교회가 지식을 독점하고 있던 시대에 가장 훌륭한 라틴어 저술가로서, 라틴 문화에 가장 정통한 권위자로서, 앞에서 언급한 베다와 나란히 당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 던 저술가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유럽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유라시아대륙의 북서쪽 한 구석에 봉쇄된 상태 라 유럽인들 스스로가 이슬람교도들의 지역을 넘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가는 일이 불가 능했다. 사실 인도, 셀리카(중국), 아프리카에 관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전 하는 간접적인 정보로밖에는 알 길이 없었다. 그와 같은 유럽인들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이시도루스의 저술이 오랫동안 절대적인 전거 로 되어 있던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서 교류의 재개 그렇지만 이시도루스의 영향력을 '13세기까지'로 한정시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13세기가 되면 유럽인들이 실제로 아시아를 찾아가 현지의 상황을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그 결과를 유럽에 보고 했기 때문이다. 13세기 이후 그들의 세계 인식에 대해 살펴보 기로 하자. 이제까지의 전통적 세계관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11세기 이후의 세계사적 동 향 때문이었다. 11세기 말에는 십자군의 원정이 있었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지중해 무역이 재건되었다. 그 결과 유럽과 아시아의 직접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더욱이 13세기에 들어서면 몽골안 에 의해 거대한 제국(원나라)이 형성되고 동서교류가 한층 대규모화한다. 이런 움직임 속에 서 직접 이슬람권에, 더 나아가 아시아 깊숙이까지 발자취를 남기는 유럽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교황 이노센티우스 4세Innocentius 4의 명으로 몽골에 파견되었던 프란체스코회 수사인 지오바니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i, 1180-1252)는 1245년 카라코룸 부근에서 구유크Guyuk 칸과 회견을 가졌다. 그는 유럽 침략을 중지해달라는 요청과 기독교 포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교황의 편지를 건네주고 답장을 받아왔다. 그는 귀국한 뒤 '우리가 달탄인이라 칭하는 몽골인의 역사 Historia Monglaorum quo nos Tartaros appellamus'와 '달탄기Lober Tatarorum'를 썼다. 또한 1253년에 교황 이노센티우스 4세와 프랑스 루이9세의 편지를 가지고 대한의 궁궐을 찾아갔던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의 기욤 드 류블류키도 '여행기'를 남겼다. 그후 많은 사절과 기독교인들이 몽골로 여행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상인들은 중동과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의 원나라까지 진출하여 그곳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마르코 폴로이다. 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베네치아를 출발한 것은 열 일곱 살 때였다. 그런 그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295년,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였 다. 그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에서 적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약 일 년에 걸친 이 옥중 생활중 그는 같은 방에 갇혀 있던 피사의 소설 작가인 루스티첼로에게 25년 동안의 동방여행 체험을 이야기해주었다. 이것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2 Milione, 영어명 The Traverls of Marco Polo'이다. '동방 견문록'에는 아르메니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간 것, 17년 동안 원나라의 황 제 쿠빌리아 칸을 섬긴 일, 그리고 남해 항로를 따라 귀국할 때까지의 체험이 생생하게 묘 사되어 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궁중 생활과 당시 유럽인들에게 있어서의 미지의 대국인 중국의 모 습뿐만 아니라 황금의 나라 지팡그(일본)를 비롯하여 각종 진귀한 동물과 풍물 등을 상인답 게 자세히 소개했다. 또한 마르코 폴로는 이와 같이 새로운 정보들과 함께 당시 유럽인들이 믿고 있던 공상적 인 동물들의 진실된 모습을 폭로하고 있다. 수마트라 섬에 대한 서술에서 "코끼리보다 약간 작은 뿔이 하나 달린 짐승이 많이 서식하 고 있다. 이 일각수는 털은 물소 비슷하고 다리는 코끼리를 닮았으며, 이마 한복판에 굉장히 크고 검은 뿔이 나 있다"고 했으며, "유럽 등지에서 공상으로 전해지듯 스스로 처녀의 무릎 에 몸을 던져 사로잡힌다는 식의 일각수 등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다"고 말했다. 또 불 속에서 서식한다는 불도마뱀(사라멘더)에 대해서도 사실 이것은 광물이라는 것, 그 리고 "불 속에 던져놓고 한참 지나야 눈처럼 희게 된다"는 사라멘더의 천에 대해서도 설명 하고 있다. 전자는 '코뿔소'를, 후자는 '석면'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동방 견문록'은 당시의 상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었을까? 이같은 관점에서 다시 읽 어보면, 다음과 같은 서술과 부딪히게 된다. 수마트라 섬의 랑블리 왕국에 관한 서술에서 "이 나라의 남성들은 대부분 길이 한 뼘 정 도의 꼬리를 정말로 달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남자들은 도시에는 살지 않으며 산간의 분지 에서 살고 있다. 그 꼬리는 거의 개의 꼬리만한데 털이 없다"라든가, 앤더먼 제도에 대한 기 록에서의 '이 책에서 특기할 만한 종족'으로 "섬 주민들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 도 이빨도 개를 닮은 데가 많다. 머리 부분은 특히 심하여 아주 사나운 개모습 그대로이다... 토인의 성질은 매우 잔인하여 사람을 사로잡으면 같은 종족이 아니면 통째로 먹어버린다." 이와 같은 서술은 마르코 폴로 자신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전해들은 부정확한 소문에 의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마르코 폴로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듣고 글로 옮긴 루스티첼로가 제멋대로 써놓은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요괴들도 이처럼 기록되어 당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동방 견문록' 자체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하여 들여왔든지 간에 전통적인 '세계 괴물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세계 괴물지'에 사로잡힌 새로운 정보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은 현존하는 사본만 해도 130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이것은 유럽에서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한자 한자를 손으로 베끼던 시대의 서적으로서는 매우 많 은 수량이다. 마르코 폴로로 대표되는 사람들의 아시아에 대한 보고는 그런 의미에서 분명 유럽인들의 폐쇄적이면서 독선적이기도 했던 전통적 세계관의 수정을 강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이시도루스적인 '세계 괴물지'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보고 역시 전통적인 '세계 괴물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 했다. 따라서 그 당시 유럽인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준 정보들 역시 전통적인 세계관을 뒤엎을 수는 없었다. 지오바니 카르피니의 '달탄기'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루이 9세를 섬기고 있던 도미니크 회 수사였던 보베의 뱅상Vincent of Beauvais의 '세계 고찰Speculum Mundi'에서도 역시 여러 군데에 걸쳐 '세계 괴물지'가 인용된 형태로 남아 있다.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뱅상의 이 백과사전적 저서는 그 대부분을 앞에서 말한 이시도루스 나 플리니우스, 솔리누스에게 의지한 저술이었다. 카르피니의 저작도 이와 마차가지로 '세계 괴물지'에 사로잡힌 형태로 남아 있었다. '동방 견문록'이 씌여졌던 1298년경의 역사를 여기에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때는 이미 십자군의 시대가 끝이 나고 있었다. 14세기로 들어서면, 유럽은 내부 문제의 해결에 바 빠서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1347년 이후에는 흑사병(페스트)이 유럽 전역을 엄 습하여 대외 진출은커녕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동서 교류의 한쪽 극이었던 원 왕조가 1368년에 멸망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 서 오스만터키제국이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하여, 1452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마 침내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들은 점차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 이 되어간다. 오스만터키제국은 동서 무역을 금지시킨 적은 없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강력한 벽으로서 가로막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열렸던 통로도 다시 막혀버렸다. 그런 가운데 한때는 마 르코 폴로도 거의 망각되고 류블류키의 '여행기'는 훨씬 더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저작은 영국의 철학자이며 교육개혁가였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20-1292)의 대저작 중에 일부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19세기까지는 잊혀져 있었다. 맨드빌의 '동방 여행기' 모처럼 동서의 세계 사이에 놓였던 다리도 유럽인들의 '세계 괴물지'를 뒤엎는 데까지 이르지도 못한 채 막혀버린 셈이다. 그 결과를 우선 맨드빌(Mandeville, 원명 Johan Maundeville, Chevalier)의 '동방 여행기 The Voyage and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Knight'에서 확인해보자. 작자에 대해서 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기록했던 것을 맨드빌 자신이 라틴어로 고쳐 썼다. 이 책은 15세기 이후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고 스위스 등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더욱이 마르코 폴로의 경우와는 달리 인쇄술에 의해 출판되어 유럽의 전지역으 로 퍼져갔다(그가 실제로 여행을 한 사실이 의심을 받게 세계적 거짓말쟁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대항해 시대 이후에도). 영어판의 경우에는 172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출판되면서 몇 번이나 판을 거듭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널리 또 오래도록 유럽인들에게 읽혀왔다는 것이 그의 '동방 여행기'를 검토하 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여행기는 동방 여행을 안내하는 형식으로 씌여져 있다. 영국을 출발하여 예루살렘, 이 집트 그리고 인도에서 중국(카타이)에 이르기까지를 그리면서, 모두 저자가 직접 했었던 세 계 여행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몇 번씩이나 실제의 체험임을 강조하며 로마 교황에게도 제출했는데 교황으로부터 "모두가 진실이다"라는 말씀을 받았다는 것 등도 써놓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아시아에 관해서 는 그의 말이 100퍼센트 거짓은 아니다. 그는 마프코 폴로나 보베의 뱅상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카르피니나 그밖의 아시아를 찾았던 사람들의 저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데에는 진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티오피아를 서술한 대목 중에 "이 나라에는... 다리가 하나뿐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 다리로 놀랄 만큼 빠르게 달린다. 더욱이 하나뿐인 발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몸 전체를 덮어 햇빛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제7장). 또 앤더먼 제도에 대한 기록에서는 "이 섬에는 여러 모습을 한 여러 형태의 인간들이 있 는데, 그 하나는 흡사 거인 같은, 보기만 해도 무섭고 못생긴 거대한 남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눈이 하나뿐인데, 더구나 그 눈은 이마 한가운데에 붙어 있다. 그리고 짐승의 날고기 와 물고기를 먹고 산다. 또 하나의 섬에는 머리가 없는, 기분 나쁜 인간들이 살고 있다. 눈은 양쪽 어깨에 붙어 있 고, 입은 말발굽같이 둥글며, 그것이 또 가슴 한복판에 붙어 있다... 또 다른 한 섬에는 윗입술이 굉장히 커서 보기 흉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양지 쪽에서 잠을 잘 때는 그 입술로 얼굴 전체를 가려버린다. 또 소인(난쟁이)와 같이 키가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도 있다. 진짜 난쟁이보다 약간 큰 정도이다. 입은 없으나 대신 작은 구멍이 붙어 있어서 무엇을 먹을 때에는 갈대 같은 것 으로 만든 대롱으로 빨아먹어야 한다"(제22장)고 되어 있다. 이것말고도 귀가 무릎까지 늘어져 있는 인간, 말다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 남녀 양성을 모 두 갖춘 인간 등에 대한 언급도 이어져 있다. 다른 곳에서도 개의 머리를 한 사람이나 동굴에 살면서 뱀을 잡아먹는 인간 등 비록 사는 장소는 다른 곳으로 바꾸어놓았지만, '헬레포드 그림'에서 언급된 전통적인 요괴 인간들을 그대로 채록해놓았다. '카탈로니아 그림'의 세계 다음으로는 '카탈로니아 그림'을 보기로 하자.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이후 1세기 정도 지나서 나타난 이 그림은 '세계지도에 '동방 견문록'을 최초로 적용한 것'으로 되어 있 어, 중세적 세계에서 대항해 시대Exploration Period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세계지도라고도 불린다. '헬레포드 그림'이 전통적인 세계관을 근거로 한 세계지도인 데 비해, 이 그림은 13세기 이후의 동향을 기초로 한 새로운 세계지도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카탈로니아 그림'은 1375년경에 마요르카 섬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대인인 아브라함 크레스케스에 의해 작성되었다. 아라곤의 왕 페드로 3세가 프랑스의 왕 샤를 5세에게 증정 한 것으로, 현재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세계지도는 그림3에서는 생략했으나 몇 개의 나침반에서 각 방향으로 방위선이 뻗어나 가 전체가 이것들이 만드는 그물눈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중세의 지도에는 없는 특징이며, 또한 위도와 경도에 의해 구분되는 대항해 시대 이후의 세계지도와도 다르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지도는 '포르틀라노형의 지도'라고 불린다. 방위선에 의해 목적으로 삼은 항구 를 향하는 방향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연구되어 있는 것으로서, 당연히 거기에는 나침반 의 사용이 전제되어 있으며 또한 북쪽이 위쪽에 놓이게 되어 있다. 지도에 기재된 내용은 여러 가지 의미로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중세적인 기독교적 세계지도에서 벗어나 있다. 예루살렘은 사원으로 표시되어 있 으나, 세계의 중심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며 에덴 동산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기 독교적 서술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아 바벨탑과 노아의 방주도 그려져 있다. 둘째로, 특히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지형 등은 매우 정확하다. 이 지역만을 본다면 오늘날 의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동해안은 어떤가? 단순한 원호를 이루는 해안선과 그 바깥쪽의 대양(오 케아노스)은 평평한 형태이 대지라는 관념상의 잔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셋째로,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술에는 새로운 지식이 담겨 있다. 북아프리카에 관해서 는 이븐 바투타의 정보가 채택되어 있으며, 아시아에 대해서는 마르코 폴로의 예가 많이 인 용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중국으로 가는 니콜로 형제도 그림에 나타나 있다. 또한 아프리카에는 ' 헬레포드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요괴 인간이 하나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중앙아 시아에는 소인족, 타블로바나 섬에는 거인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중국의 지명은 마르코 폴로가 알려준 정보에 따라 기입했으나, 항주나 복주가 두 군데 있 기도 하고, 면적도 이베리아 반도와 두 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가 담겨 있다고는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흑해 연안의 지형과 서술의 정확성에 비해서 아시아에 대한 부정확성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끝으로 대서양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아일랜드와 영국을 비롯하여 북부의 지형은 부정확 하고 또 가상의 브라질 섬이 두 군데나 그려져 있는 등, 대서양은 여전히 반쯤은 전설의 세 계에 묻혀 있다. 아프리카 서해안은 어떤가? 일반적으로는 1419년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마딜라 제 도, 1424년에 처음으로 통과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난곶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으며, 포자돌 곶, 카나리아 군도도 올바르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포르투칼이 '발견'하기 1세기나 앞서 이와 같은 탐험을 했다고 하는 마요르카 사 람인 페레엘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항해 시대의 여명기 시대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요괴와 변화로 가득 찬 세계 14세기에서 15세기의 양상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유럽에는 마르코 폴로 등에 의해 전해진 정보가 어느 정도는 퍼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직도 전통적인 '세계 괴물지'가 막강한 힘 을 유지하고 있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계를 맨드빌은 산문으로, 크레스케스는 당시의 최첨단 지식을 담은 세계지도로 보여주었다. 유럽인이 세상에서 괴물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세계 괴 물지'가 최종적으로 유럽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후반이 되어서 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체계'(초판 1735년, 10판 1758년)로 오늘날 동식물 분류학의 기초를 확립 한 린네(Carl von Linn, 1707-1778)조차 그 분류학에 사튜로스를 남겼으며, 또한 사람과 원 숭이의 중간종으로 '호모 트로그로듀테스(혈거인)'를 상정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덧붙인 다면, 이 혈거인은 오늘날에도 침팬지의 학명인 팬트로그로듀테스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아라마타 히로시씨는 "뷔퐁(1749-1804)의 '박물지'에 이르러서야 괴물은 현 실적 생물 분류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 괴물지'는 이렇게 고집 스럽게 살아남아왔던 것이다. 앞에서는 오토 폰 프라이징 같은 사람들이 서술한 '보편사'의 내용을 보았다. 말하자면 그 것은 방패의 앞면이고, 여기에서 보아온 것은 뒷면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적 보편사가 전제로 하고 있던 세계에서도 온전한 인간이 사는 곳은 고작 유럽에서부 터 북아프리카와 바이블랜드, 즉 성서상에 등장하는 지역 정도였다. 그 동쪽이나 남쪽은 괴 물이나 요괴들 또는 이상한 모습을 한 동물들로 가득 찬 장소들이다. 더욱이 '헬레포드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괴물 인간의 세계까지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각한 세계는 오늘날의 세계와 비교할 때 아프리카에서는 그 북부까지가, 아시아에 서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부근까지밖에 퍼져 있지 않았다. 또한 마르코 폴로 등에 의해 전해진 새로운 지식은 느리기는 해도 확실히 퍼져나갔지만, 보편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것이 결코 기존의 좁은 세계를 뒤엎은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