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파리의 밤은 깊어 (상) 지은이: 노엘 칼레프 ----- 차 례 ----- ⊙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노엘 칼레프(Noe"l Calef)는 1907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니심 칼레프이며, 빈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이집트, 이탈리아, 스페인을 방랑하다 파리에 정착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그는 1938년경부터 영화계에 몸을 담고 조감독, 배우로 활동하는 한편, 시나리오 각색을 맡기도 했으며, 외국 영화 대사의 프랑스 어 녹음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활동 중에 그는 2차대전을 맞고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전쟁 후에는 일반소설이나 암흑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중편 。우유병。(La Bouteille de lait)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는데, 이 소설은 1953년에 ‘배회하는 이방인’(Stranger on the Prowl) 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영화화되었다. 그 뒤 전쟁 직후에 영화계에서 체험한 것을 수필 형식으로 쓴 。나는 시네마를 골랐다。(J’ai Choisi le Cin·ma, 1954) 등을 발표하였으나, 추리소설을 쓸 때까지는 무명에 가까운 존재였다. 칼레프는 1956년에 처음으로 추리소설 。파리의 밤은 깊어。(원명 。운반꾼의 실수。 Echec au Porteur, 1956),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chafaud, 1956)를 썼는데, 재미있게도 두 소설이 모두 ‘파리 경시청상’의 마지막 두 편의 후보로 남았으며, 결국 경찰활동이 잘 묘사되어 있는 。파리의 밤은 깊어。가 상을 받았다. 이 소설은 나중에 질 그랑셰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또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일급 서스펜스 스릴러로서, 루이 마르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성공함으로써 원작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파리의 밤은 깊어。,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이어 。특사청원。(Recours en Gra^ce, 1957)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인 。최초의 돌。(La Premi·re Pierre, 1956)과 같이 탈주범이 주인공이 된 소설이다. 이처럼 칼레프의 작품세계는 암흑소설의 분야와 추리소설의 분야가 주된 맥을 이루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에서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이고 있다. 。파리의 밤은 깊어。에서 사용된 축구공은 캐롤 리드의 영화 ‘사악한 자를 죽여라’, ‘세 번째 남자’에서 사용된 축구공보다 더욱더 다이내믹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영화적인 커트백 수법으로 다원 묘사를 이용하여 폭파 서스펜스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서도 아무도 없는 빌딩 속에서 주인공이 엘리베이터 속에 갇힌 채 중도에서 멎는 것이 강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며, 축구공과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라는 소도구를 사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파리의 밤은 깊어。는 단 하루 동안의 제한된 테두리 안에 생활의 일상성과 사건의 긴장감이 맞물려 짜여진 독특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범죄’의 어두움과는 무관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축구공 속의 폭탄으로 인해 사건과 얽혀 가는 한편, 폭탄의 행방이 글 속에 숨겨져 있는 아슬아슬함으로 인해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맛보게 한다. 또한, 평범한 생활과 유리된 채 자극적인 요소를 지닌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건전한 작품이다. 1990년 3월 옮긴이 씀 제 1 장 뚱뚱보 여행자는 열차 객실의 출입문 소리에 한쪽 눈을 슬며시 떴다. 그는 왼쪽 볼에 긴 상처자국이 있었는데, 모습은 그래도 실은 마르세유 태생의 선량한 상점주인이었다. 그리고 제법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얼굴이긴 하나, 때로는 마치 아시아 야만족 정복자처럼 무시무시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 문소리는 악좌석의 남자가 재빨리 아침 세수를 끝내고 돌아오는 소리였다. "허."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공을 가지고 있구나 ! 나도 축구광이라 할 수 있지만, 저 정도까지는 안되지…… ! " 차창의 차양을 올리고 내다보니 철로변에 이어지는 파리의 교외 일대에 태양은 벌써 드높이 빛나고 있었다. 좌석 위에는 잠잘 수 있는 한도의 공간을 남김없이 차지해 버린 그의 가족들이 혼잡스럽게 잠들어 있었다. 뚱뚱보 여행자는 맞은편 좌석에 자기의 아이들 둘이 엎드려서 잠자고 있는 것을 뒤늦게 미안해 했다. 그래서 그 낯선 남자의 좌석이 매우 비좁고 거북스럽게 되어 미안하다는 뜻을 몸짓으로 전했다. 젊은 남자는 가지런하고 건강한 흰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로 그것에 대답한다. 상처자국이 난 남자는 그날의 첫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서 물고는, 그물에 들어 있는 축구공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약간은 변명이라도 하듯이 · 10· "시합을 하던 시절에는 나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오. 그러나 장사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만. 어허, 이런 실례를 ! " 그는 다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고는 내밀었다. 운동선수는 정중하게 사양한다. "전혀 안 피웁니다. 고맙긴 합니다만." "천만에요. 그것 참 좋은 일이지요." 그는 그 말에 이어 날씨가 좋다느니 좋지 않다느니 하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 동석한 남자는 마치 조개껍질 속에 틀어박힌 듯이 조금도 대화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전날 기차가 마르세유를 떠날 때부터 그것을 확실히 느꼈었다. 한마디로 무뚝뚝한 침묵자였다. 가끔 흘끗흘끗 축구공 쪽에 눈길을 보내고서 새삼 안심이 된다는 듯이 본래의 부동자세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런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상인다운 심리적인 감각으로 그는 이 남자가 약간은 불안한 심정을 느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꽉 다문 입, 약간 콧망울을 부풀리고, 양쪽 턱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실룩실룩 떨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것을 확연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도대체 나이는 얼마쯤 되었을까 ? 서른 전후쯤일까 ? 그 이상은 아닐 거야. 얼굴 표정은 제법 단련이 잘된 듯 야무지고, 밝은 눈빛이 싱싱하고 젊다. 선원의 눈매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머리를 쑤욱 뒤로 젖히고는 갑작스레 호흡이 가쁘고 답답하다는 듯 공기를 한입 가득히 들이마신다. 저것 봐, 또 저런다 ! "괜찮습니까 ? " 축구선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그 손은 자그마하였으나 힘줄이 팽팽했다. "아마 시합에 나가러 파리로 가는 길인가 보군요 ? 어디에서 하는 시합이죠 ? " 회색의 눈이 한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눈을 깜박인다. "대수롭지 않은 시합일 뿐,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걸 물어본 것은,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간 당신이 컨디션을 망쳐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니, 왜 그렇습니까 ? " "선배로서 말입니다만……내가 선배라는 말을 해도 실례가 안될는지요 ? 어느 사이에 이렇게 백발이 되어 가지고……" "별 말씀을. 어서 하십시오." "그렇다면 말하겠소만, 스포츠를 위해서는 잠자는 것이 제일이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어젯밤 잠을 자지 않았어요." 남자는 이번에도 또 미소를 짓고는 활짝 희망적으로 눈빛을 반짝인다. "오늘밤엔 잘 겁니다." "그러면 시합은 내일인가요 ? " "그렇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내의 긴 한숨소리에 두 남자는 나누던 화제에서 맥이 끊겨 버렸다. 남편은 재빨리 그쪽을 향해 그야말로 극진하게 보살펴 주기 시작했다. 족히 15년은 같이 살았을 이들 부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희한하게도 축구선수는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지금까지보다 말수가 많아지고 자기 쪽에서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세 사람 모두가 무의식중에 말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잠자고 있는 아이들이 염려가 되어 축구선수가 그 말을 하니, 상처자국이 난 남자가 큰소리로 웃는다. "이 녀석들은 잠이 들면 그야말로 대포소리가 울려도 깨지 않아요." 아내는 손바구니를 열고 보온병과 샌드위치 등 먹을 것을 끄집어냈다. 남자는 권하는 대로 버터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받아들었다. 남편은 만족스러웠다. "어때, 어제 뭐라고 말했었지, 응, 루이즈 ? 스포츠란 것은 큰 가족 같은 거야 ! 당신은 모르는 일이겠지만, 어젯밤 바깥 통로에서 집사람이 당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소 ? 이봐, 말을 해보라고. 루이즈, 겁낼 것 없어요. 그때 그대로 말해 봐요……" 아내는 남편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정말로 어젯밤에는……당신이 무서웠어요. 모습이 어딘지 딱딱하고, 위험스럽고……거기에다……저어……" "단호라는 말도 한 적이 있어 ! " 하고 남편이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단호했다는 말은 단어 그대로를 말한 거예요." 그는 스포츠가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단호한 결의라는 것의 효과에 대하여 장황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병사들의 ‘승리냐 아니면 죽음이냐’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자기는 어떻든간에…… 우연히 만난 말상대의 흥미 있어 하는 눈표정에 고무되어 그는 여러 가지의 추억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차례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의 큰 시합에서 훌륭한 역할은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가게 하면서…… 아내는 약간 장난스런 모습을 띠고서 감개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래, 한번은 타르브(스페인과의 국경에 가까운 피레네 산맥의 마을. 피레네 아틀란트 현의 현도 소재지)에서 있었던 일이었지요. 상대 팀 중에 꼭 중국인 비슷한 놈이 있었어요. 나는 공을 잡고는 쭉 드리블하면서 하프 백을 제치고 골 문으로 돌진했지요. 뒤에서는 한 덩어리가 되어 결사적으로 바짝 뒤따라오고. 그런데 느닷없이 그 중국인 비슷한 놈이……" 그렇게 말하다가 그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지, 거기에서 예의 그 그물에 들어 있는 축구공을 손에 잡고는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의 그 당시 동작을 몸짓으로 보여 주려고 했다. 상대는 그 순간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깜짝 놀란다. 그런 험악스러운 표정에 그 축구 선배는 그만 잠시 망연자실한 모습이 되었다. "잠깐 패스하는 모습을 설명해 주려고 했을 뿐이라오."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공 주인은 그런 말을 듣고서도, 입도 벌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완전히 당황한 남쪽 태생의 상인은 마치 죄인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 공을 상대에게 돌려주었다. 아내는 좌석 위에서 살며시 눈에 뛰지 않게 몸을 당겼다. "미안합니다." 하고 남자는 한마디 한마디 간신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야말로. 오히려 이렇게……" "언제나 이렇답니다. 무엇에든지 손을 대보고 싶어하니." 상인의 아내는 허풍스럽게 장단을 맞춘다. "그것이야말로 어린애들보다도 더 처치곤란한 거예요." 뚫어지게 응시를 받던 남자는 다시 앉더니 침착을 되찾은 듯한 모습으로 축구공을 꼭 껴안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주저하는 모습이더니, 간신히 입을 열고서도 별로 자신이 없어 보이는 어조로 말했다. "이건 선물로 받은 겁니다. 그래서 그만……" "예,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일단 녹았던 얼음은 다시 얼어붙어 버렸다. 남편은 말소리를 가다듬으려는 듯 잠깐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하다가, 다시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무거운 공이군. 어어, 이것 봐라 ! " 상대의 얼굴은 금세 단단한 조개껍질 속에 틀어박혀 버렸다. "453·, 규정에 따른 무게입니다." "당신 시대에는 틀림없이 탁구공으로 축구를 했었던 모양이죠 ! " 하며 아내가 끼어들었다. 부자연스러운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기분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부부는 그 순간에 큰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상당히 늦었는지라 아이들을 깨워서 세면장갑으로 얼굴을 씻겨 주고는, 기차가 역에 들어가기 전에 아침식사를 끝낼 수 있도록 서둘렀다. 남자는 그런 틈을 이용했다. 공이 들어 있는 그물의 끈을 여행가방 손잡이에 재빨리 묶어매고는 어느 틈엔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객실 안에 자기들만 남자,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참으로 묘한 사람이군." 그들이 그 사람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리용 역(파리의 주요역으로서, 마르세유 선의 기점)의 플랫폼에서 포터의 뒤를 따라 뛰어가고 있을 때였다. 확실히 그 축구선수가 틀림없었다. 팔에는 한 여인을 껴안고 있었는데, 그들이 지나가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젊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상대의 몸을 가슴에 꼭 껴안고 있었다. "자클린 · 10· " 하며 가까스로 숨이 자유로워진 듯 그가 중얼거렸다. 여인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가, 기쁨의 눈물을 두 눈 가득히 채우고는 미소지었다. "바스티앙, 정말로 돌아왔군요……" "자, 나가지."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았을 때였다. 문득 남자의 축구공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바스티앙, 당신 또 이런 추잡스러운 것을 가지고 다니는군요 ! " 분노가 치미는 듯한 그 말소리가 남자의 가슴에 반향을 일으킨 모양이다. 남자는 그 순간 미친 듯이 눈동자를 돌려대면서 결사적으로 흥분을 억누르려는 모습이었다. "그만둬, 이런 곳에선 !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할 거야 ? 자, 갑시다." 그는 여인의 손을 잡고 강제로 끌고 갔다. 여인은 아직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말했다. "안돼요. 바스티앙, 어젯밤 당신의 전보를 받았을 때 나는 정말로 기뻤어요. 이제는 모든 것이 완전히 결말이 난 것이라 생각하고……당신이 예정보다 빨리 오는 것도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단 말예요." "그것 때문이야." 그는 가로막듯이 말했다. 그녀는 발을 멈추었다. 그는 조용히 상대에게 눈을 돌리고는, 자기의 눈에 나타나 있는 진실의 빛을 그녀가 읽어 주기를 바랐다. 두 사람의 손이 서로의 손가락에 꽉 끼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이란 말이죠 ? " 바스티앙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달라진 것이 있다는 뜻이군요 ? "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바스티앙은 그 말을 긍정했다. 혼잡스러운 사람들 틈 속에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 그렇지 않으면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그녀는 걸음을 빨리 했다. 디드로 가(街)의 자그마한 카페의 문이 두 사람 악에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은 변함없이 손을 마주잡은 채로 둥근 테이블 악에 앉았다. 바스티앙은 축구공을 내려서 단정하게 양다리 사이에 올려놓았다. "이제 그 사람들과는 인연을 끊은 거죠 ? " 하고 자클린이 염려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카페의 유리 창문 너머로 아이들과 짐들을 잔뜩 실은 택시 한 대가 속력을 내며 길거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는 그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기차 안에서는 죽 저 사람들과 함께 있었어.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야. 매우 평범하게 살아가면서……처음에는 아내가 나를 무서워했던 모양이야.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지……‘아마도 15년쯤 지나면 이들과 비슷하게 되겠지. 자클린과 나도 ! ’ 나는 저 사람들이 몹시 부럽다는 느낌이 들어서, 금세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심정이었어." 자클린의 입술은 떨렸다. 그때까지 상대의 긴장한 표정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던 그녀는 이 고백에 가슴이 찡해 왔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고, 이 사람이 ! 그가 약간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갑자기 상대의 목을 끌어안았다. 웨이터가 크림이 든 커피와 초생달 모양의 빵을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몸을 떼었다. "어이쿠,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어떻습니까 ? 이젠 익숙해졌어요, 이 카페에서 그 정도쯤은 ! " 슬며시 웨이터는 저쪽으로 가버렸다. "자, 이야기를 해주세요." 하며 여인은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독촉한다. "안돼. 말하고 싶지 않아. 말할 수가 없어." "자기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런 거예요 ? "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그는 기차 안에서 만난 뚱뚱보 여행자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예의 그 갑작스런 몸짓과 함께 쑤욱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크게 입을 벌리면서, 마치 물속에서 끌어올린 물고기처럼 뻐금뻐금 공기를 들이마신다. 자클린은 무의식중에 가슴을 죄었다. "당신, 매우 괴로워하고 있군요, 지금 ? " "그것도 이제 오늘 저녁때까지만이야." "바스티앙, 정말로 그렇게만 되었으면……" 손을 마주 쥐면서 그녀가 말했다. "자, 자, 기다려 봐. 이제 오늘 저녁에는 우리 둘이 차근차근히 의논해서, 악날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애기할 수 있게 될 거야." "정말 그럴까요 ? 틀림없어요 ? " 바스티앙은 슬픈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절대로 틀림없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라도 할 수 없어. 단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드디어 어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거야. 요컨대, 어느 사람이 찾아오는 바람에 나는 출발을 악당기게 되었지. 그래서 이제부터 잠시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어. 그러니까……" 그는 잠시 말이 막혀 우물거리다가 축구공 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니까……이것을 전달해 주기 전에 말이야. 그것과 교환조건으로 ‘저쪽’에서는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거야." "누가요 ? " "나도 확실히는 몰라. 단지 ‘내 얼굴만은 알고 있다’는 사람과 만나기로 했어." "그럼, 무엇 때문에 또 그런 것을 가져다 주는 일을 맡은 거예요 ? 당신은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그는 갑자기 매우 거칠게 그녀의 팔을 붙잡아서 하마터면 테이블이 뒤집어질 뻔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 그렇게도 모르겠어 ? 나는 두려워. 죽는다는 것이 무서워 ! 옛날에는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러나 지금은 살아 있다는 것이 내게는 자클린과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 당신은 어때 ? 죽은 바스티앙이라도 좋단 말이야 ? " 여인은 갑자기 그의 어깨에 매달려 몸을 떨면서 훌쩍훌쩍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해야 돼, 알겠어 ? " 그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 심부름꾼이 어제 찾아왔을 때 나는 하나님이 마침내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셨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 저쪽의 이야기는 악마가 아니고서는 할 수도 없는 것이었어. 그 점이 오히려 나로서는 마음 든든한 느낌이야. 나는 믿고 있어. 그러니, 자, 이젠 나를 믿어 줘." 그녀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하면서도 곧바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 " "잘 모르겠어.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될 우리들의 일을 생각하면 약간의 위험쯤은 상관없어, 그렇잖아 ? " "그래요. 단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 혼자뿐이었으면 좋겠어요." 바스티앙이 미소를 뛰운다. "당신은 정말로 기묘하게 웃는군요." 하고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말 이상해요. 처음으로 당신이 웃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꿈에서도 그런……아시겠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 당신은 젊었을 때 오대양을 넘나들며 떠돌아다니지는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런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그의 턱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어요 ? " 바스티앙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젠가는 모두 말해 줄 거야. 어쩌면 내일이라도. 악으로 몇 시간만 기다리면 돼. 그 다음은……" 그는 자기의 희망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주저했지만, 그녀에게 그 마음만은 전해졌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미신과도 같은 두려움이 행복의 문악에서 그들의 틈새를 엿보고 있었다. 바스티앙은 봉함된 봉투를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분명히 약속해 줘, 자클린. 이 편지를 오늘 저녁때까지는 열어보지 않겠다고." "무엇인데요 ? " "읽어 보면 알아. 다만 그것은 오늘 저녁 내가 약속한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을 경우에만 뜯어 봐." 그녀는 슬기롭게 자신을 억제하면서 더 이상 끈질긴 질문은 하지 않고, 이렇게 또 하루를 불안하게 보내기로 약속했다. "그럼, 오늘 저녁도 평소와 같죠 ? " 하고 그녀가 물었다. "7시 반에 ‘뒤퐁 라탱’에서." 멀리서 웨이터가 여인이 상대방의 어깨에 매달린 채 두 사람 모두 말도 없이 몇 분 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넌지시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커피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웨이터 ! " 웨이터는 얼른 그들 곁으로 다가와서 계산을 받고는, 떠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히 전송했다. 길거리로 나와서 바스티앙이 물었다. "차로 도중까지 같이 갈까 ? " "어느 방향으로 가는데요 ? " "북쪽이야." 하고 더 이상 분명한 것은 말하지 않으면서 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안되겠어요. 그럼, 안녕." 그는 축구공을 손에 든 채로 길고 긴 키스를 했다. 자클린은 이제는 결코 그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양복에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철 쪽으로 뛰어갔다. 바스티앙은 택시를 잡아서 작은 여행가방과 축구공을 손에 든 채로 좌석에 앉았다. 제 2 장 "눈을 보여 줘 봐 ! " 하고 나이가 위쪽인 베르나르가 단호한 말투로 명령하듯이 말했다. 어린 클로드는 그의 말에 따랐다. 베르나르는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로 클로드의 콧마루에서 귀로 걸친 앳된 반달형의 선을 살펴보았다. "이젠 틀림없다." 하고 그는 단언한다. "너는 짙은 갈색 눈이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 " "이 알파이야르그가 그렇다고 말하잖아 ! " 정말 아는 것도 많구나, 베르나르는 ! 클로드는 새삼스럽게 친구의 훌륭함에 감탄했다. 근육과 골격이 늠름하고 체격이 건장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말투는 클로드를 완전히 압도한다. 베르나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꼭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알파이야르그라는 그의 이름을 말할 때에 그 ‘파이’ 소리는 마치 채찍질 소리처럼 드높이 울린다. 말을 끝내고 베르나르는 자기 가슴을 탁 하고 치더니 느닷없이 정글 속의 타잔처럼 소리를 지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돌아다본다. 클로드는 큰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뒤쫓아갔다. "베르나르 ! " 클로드의 호리호리하고 약한 얼굴이 지금은 밝고 명랑한 미소로 반짝인다. "나야 진갈색 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어떤 ‘첫공연’을 할 생각이니 ? " 그는 약간 무리를 해서 은어를 사용했다. 어머니는 이런 것을 싫어했다. 베르나르는 의아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이니 ? 왜 ‘첫공연’을 하는 거지 ? " "네 바지의 엉덩이 쪽을 봤어 ? " 베르나르는 살며시 허리를 틀어서 청바지의 엉덩이 쪽을 살펴본다.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다던 그 옷감이 보기좋게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조각은 마치 선생님이 칠판 위에 정성들여서 그려놓은 삼각형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베르나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건 아무 상관없어 ! " "엄마에게 야단맞지 않겠니 ? " 베르나르는 크게 웃었다. "엄마 ? 엄마는 내 마음대로야 ! "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상대방의 신변에 관심을 보이면서 픽 하고 입을 내밀었다. "‘야단’이 아니고 ‘꽥꽥’이라고 하는 거야. 그건 그렇고, 아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 한번 싸워보고 싶었었니 ? 어떻게 그럴 생각을 다 했지 ? " "네가 위험해 보여서 그랬어. 너는 혼자뿐인데, 저쪽은 세 명이었잖아 ! " 하고 분개한 말투로 클로드가 외쳤다. 베르나르는 그의 말을 칭찬하듯 정중하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진짜로 너는 내 친구다."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자랑스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된 클로드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소년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어. 어떻든 · 10· " 하며 베르나르는 주석을 덧붙인다. "너는 좋은 애이고 이웃에 사니까, 친구는 물론이고 그 밖에 무엇이라도 될 수 있어……그러나 네가 싸움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어." 그는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클로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를 한번 엑스·앙·프로방스(마르세유 북쪽의 고도(古都))의 명예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아빠에게 말해 봐야지." 클로드는 다시 걷기 시작한 베르나르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우리 아버지는 사회당이야. 네 아버지는 ? " 하고 베르나르가 다시 말을 걸었다. "기술자야." 하고 클로드가 대답했다. 걸음을 멈추려고 하지 않으면서 베르나르는 여덟 살 반짜리로서는 사실 좀 허약한 이 친구의 얼굴을 열 살의 눈으로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어린 얼굴엔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더욱이 그 얼굴에는 그야말로 전적으로 신뢰하는 · 10· 그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숭배하고 있는 · 10· 표정이 확실히 나타나 있었다. 베르나르는 상대의 착각을 그대로 모른척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클로드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 끊임없이 베르나르의 머릿속을 왕래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어쩐지 어슴푸레한 말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자기에게도 이웃집 애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언제나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이 네 생일이라고 했지 ? " "응." 하고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네 아버지는 돌아오는 거니 ? 생일을 축하해 주시려고." "아아니, 돌아오시지 않을 것 같아. 일이 매우 바빠서." "어디에 계시는데 ? " 클로드는 양팔을 벌리고는 모른다는 동작을 했다. "여행을 하고 계셔." "여행 ? 그럼, 어디를 ? 프랑스 국내야, 외국이야 ? " "글쎄, 모르겠는데." "편지는 오겠지 ? " "그거야 오지만, 엄마가 보여주지 않아." "그럼, 너는 살짝 읽어볼 생각도 안 해봤니 ? " 알파이야르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큰일이야. 이렇게 세상물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교육시켜야 하다니 ! " "그럼, 생일 선물은 무얼 받니 ? " "알 수 없어. 전혀. 엄마는 언제나 생각도 못하던 걸 주니까." "그럼, 아버지는 ? " "아버지 ? " 하고 클로드는 그런 질문은 뜻밖이라는 모습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파리에 없는데 ! " 베르나르도 이번만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멍청아 ! 지금은 뭐든지 우편으로 보낼 수가 있어. 꽃 같은 것도 말이야. 그럼, 무엇을 갖고 싶은지는 말해 놓았겠지 ?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클로드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물론이지." "그게 뭔데 ? " "축구공이야." "뭐 ! " 하며 감격을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베르나르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걸 다 !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어째서 ? " 클로드가 불만스럽게 되묻는다. "아니……네가 축구 같은 것을 하는 걸 보지 못했거든." 클로드의 고개가 힘없이 늘어졌다. "하긴, 그거야 당연하지. 너는 아직 어리니까……"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내가 축구공을 갖고 있으면 그걸로 축구를 하게 될 때는 나를 넣어주지 않을 수가 없을 거라고 ! " 두 소년은 조금만 더 가면 샹피오네 가(街)(파리의 북쪽에 가까운 거리)에 다다르게 된다. 길 모퉁이를 돌아가자 알파이야르그의 어머니가 3층의 한 창문에서 그 당당한 체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나르 ! " 하고 어머니가 큰소리로 불렀다. "빵가게에서 빵을 받아 오너라." 확실히 독특한 음색이 그 집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아들의 음색이 마치 태양 빛을 노래하는 것 같다고 한다면, 어머니의 말소리에는 마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꽤나 특이하게 울리는 금속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이 부근 일대에다 올리브 나무를 심어놓은 것 같았다. 이들 세 사람의 각각 독특한 목소리에 클로드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함께 갈께." 하고 클로드는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린다. 빵가게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베르나르는 눈썹을 여덟팔자로 모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하나의 대사를 완성시켰다. "내게 솔직하게 말하라면, 클로드, 너의 축구공은 그러니까 사나이 대장부가 되기 위한 증명서 같은 것일 거야." 3층의 층계참에서 알파이야르그 부인이 활짝 열어놓은 출입구 악에 교황청의 호위병 같은 자세로 우뚝 서 있다가, 두 토막의 고급 빵을 받아들면서 파도치는 가슴에 자기 아들을 꼭 껴안는다. "오, 애야, 안녕 ? " 그녀가 클로드에게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 아주머니는 어떠세요 ? " "어머, 예절도 바르구나 ! 나는 매우 좋단다. 애야, 얼른 올라가 보렴. 좀전에 네 엄마를 만났는데, 네게 무슨 훌륭한 선물을 준비해 둔 모양이더라. 자, 너는 집에 들어가자. 우리 게으름뱅이 임금님……" 그녀는 아들을 집안으로 밀어넣으려고 아들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는 순간, 삼각형 모양으로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이게 무슨 꼴이니 ! 또 찢어졌구나. 이 바지도 !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 옷감이라고 했는데 ! " 베르나르는 살그머니 익살맞은 행동으로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는 클로드에게 얼른 신호를 보냈다. 클로드는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곧 엄마가 또 눈물을 흘린 것을 알고는 엄마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엄마 ? 엄마, 왜 그래 ? " "나 ? 아,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드니즈 지로쿨은 거짓말을 했다. "왜 ? 아, 눈이 이래서 그랬구나. 걱정할 것 없단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있었거든. 자, 손을 씻고 자리에 앉거라. 곧 식사를 할 거니까." 아빠는 일이 있어서 집에서 나간 이후로 뭔가가 아무래도 잘 안되는 모양이다. 엄마는 여지껏 부엌에서 볼 수 없었던 양파 껍질을 벗기느라, 지금 클로드가 자랑스럽게 거울에 비춰보고 있는 커다랗게 멍든 흔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클로드는 식당 쪽을 흘끗 살펴보았다. 자기의 접시 옆에 예쁘게 리본을 두른 아주 자그마한 종이 상자가 한 개 놓여 있었다. 축구공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클로드는 슬퍼져서 곧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으로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드니즈가 맛있어 보이는 첫번째 축하요리를 갖고 왔다. 접시 양쪽 언저리에 나이프와 포크를 준비하면서 클로드가 물었다. "오늘의 ‘먹이’는 뭐야 ? " 드니즈는 하마터면 고기 파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식사라고 해야지, 클로드." "알았어, ‘엄씨.’" "엄마라고 해야지, 우리 집의 예절바른 아이는." 하고 고기 파이 접시를 다시 수평으로 고쳐 잡으면서 그녀가 주의를 준다. "상자를 열어보렴." "응, 지금." 클로드는 이미 선물상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노력은 어머니의 미소로 보답되었다. 얼마 전부터 익숙하게 보아 온 슬픈 미소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생각도 못했던 선물에 클로드는 얼마 동안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만년필 ! 이것이야말로 같은 반의 모든 아이들의 주의를 내게 집중시켜서 그 우쭐거리는 방상을 참을 수 없도록 질투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는 물건이다. "마음에 드니 ? " "응, 그럼……" 그 차분한 기분을 계기로 드니즈는 이제 눈물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약간 조심스런 마음이 들어서 그녀는 클로드를 타이른다. "아빠가 클로드를 잊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지만 볼일이 계셔서……우편으로……" "우편 ! 그렇다. 우편이다 ! " 하며 갑자기 희망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클로드는 그렇게 반복한다. 그 순간, 클로드는 고기 파이가 정말로 고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고, 아주 맛이 있다고만 말하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알파이야르그 씨의 그 잘 울려퍼지는 힘찬 목소리가 계단에서 울렸다. 두 사람은 무의식중에 웃음을 터뜨렸다. 알파이야르그 씨는 눈악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문 닫는 것도 잊어버리고 서 있었다. "무얼 하고 있는 거야 ! 이런 시간에 팬티만 입고 ? " 엄마는 즉시 남편에게 그 이유를 호소한다. 이 변변치 못한 베르나르가 바지를 기어이 찢어버리고는 바둑무늬 스카치 천 조각으로 꿰매 달라고 했다면서. "미국 바지에 스카치 천 땜질이라. 이것은 국제적 분규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구나 ! " 남편이 베이스 목소리로 대답한다. "클로드 지로쿨이라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 " 하면서 그런 소란 속에서도 우편배달부가 출입구 쪽에서 물어보았다. "이 위층이오." 하고 천둥 같은 목소리로 알파이야르그 씨가 외쳤다. 베르나르는 꽝 하고 한 방 어퍼컷을 먹이면서 문을 닫았다. 그 직후, 4층에서는 우편배달부가 소포 한 개와, 사인을 받아 갈 장부와 연필을 내밀었다. "내게 온 거야 ? " 하면서 식당에서 클로드가 소리쳤다. "그래, 클로드." 하고 쉰 목소리로 엄마가 대답했다. 소포 위의 글씨가 분명히 남편의 필적이었던 것이다. 클로드는 흥분으로 볼이 발갛게 되어서 달려왔다. 소포가 원형이 아닌 것을 보고는 클로드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나 어떤 예감에 이끌리며 클로드는 열에 들뜬 듯한 손으로 끈을 풀었다. 상자.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그 속에는 정말로 기다림을 더욱 감질나게 하려고 정성들여 겹쳐 쌓은 듯한 종이가 계속 나왔다. 그리고 그 맨 밑에는…… 클로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10· 둥근 가죽으로 되어 있는 새끼사슴 털빛의 가죽과 튜브. 공기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클로드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엄마 ! 엄마." 하며 그는 흐느껴 운다. "엄마, 내 축구공이야 ! " 제 3 장 바스티앙은 클리시 문(파리 북쪽에 있는 클리시 마을로 통하는 출구. 이곳을 통하는 클리시 대로는 악의 샹피오네 거리와 교차함.)에서 택시를 내려 139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주느빌리에(클리시 북쪽 1··지점에 있는 마을)까지 갔다. 그리고 축구공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서 길을 걸어갔다. 소형차 한 대가 잠시 뒤따른다고 생각되었는데, 속력을 빨리 하더니 옆으로 접근해 왔다. 운전사가 차창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야말로 약병의 상표에 그려진 해골처럼 바싹 마른 얼굴이었다. "바스티앙 사세인가 ? " 걸음을 멈추려고도, 또 뒤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바스티앙은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상대는 차를 세웠다. "타게나. 나는 데데야."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하여 아르쟁투유(주느빌리에 서북쪽 1·· 정도의 마을)로 나가는 구도로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금세 알아봤지." 하고 해골 선생이 우습다는 듯이 히죽거린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 ? " "그래, 전혀." 데데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 축구공 때문이야." "꽤 머리가 좋군 그래." 하고 바스티앙이 대답했지만, 데데는 그것이 비웃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속은 채워져 있나 ? " 데데가 바스티앙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축구공을 턱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그래. 내 말 잘 들어." 하고 바스티앙이 말했다. "만일 자네가 거래상대라면 차를 세우고 곧바로 의논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네 두목이 있는 곳에 데려다 주게. 불필요한 말은 묻지 말고." 데데는 발끈하여 눈알을 굴리면서 그를 쏘아보았으나, 더 이상 토는 달지 않았다. 멀리서도 목표로 하는 집이 보였다. 제법 크고, 별로 특이한 점도 없는 규석조(珪石造) 건물이며,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히 외딴집이었다. 바스티앙의 얼굴에는 무의식중에 조소하는 듯한 표정이 나타났다. 해골 선생의 명령으로 차에서 내려 바스티앙은 조용히 악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신경이 흥분되어 몸속이 근질근질해지는 것만 같았다. 머리는 안정되고 맑게 개어 있었으나, 몸은 당장이라도 행동하고 싶은 충동에 불타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추잡스러운 짓인지도 모르겠어."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자클린을 위해서이니까." 차를 주차하러 간 데데에게 지시를 받은 대로 철책문 악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잘 닦인 금속판 표찰에는 ‘해외과일수입업 아드리안 오스메’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잠겨 있는 창문 안쪽에서 커튼이 약간 움직였다. 아마도 그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마르세유에서 알려온 인상과 비교해 보는 것이겠지. 데데가 돌아와서 초인종을 눌렀다. 찰칵 하고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직선 통로가 손질이 잘된 잔디 사이를 지나 똑바로 현관의 돌계단으로 통하고 있었다. 바스티앙은 천천히 걸어갔다. 데데가 그를 악서갔다. 바스티앙은 그 뒤를 따라 별로 서둘지 않으면서 돌계단을 올라섰다. 현관문이 열렸다. 두 번째 경호원이 한쪽 손을 윗도리 호주머니에 찔러넣고서 근시와 같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펴본다. "바스티앙 사세." 하고 해골 선생이 설명했다. "오스메 씨를 만나러 왔소. 마르세유의 샤를에게서 부탁을 받고." 바스티앙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이름을 알았지 ? " 하면서 순간적으로 데데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경호원은 흥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보 자식 ! 분명하게 문에 쓰여 있잖아, 출입문에 ! " 그 말투에는 독일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데데가 바스티앙의 등을 악쪽으로 밀었다. 독일인 같은 경호원은 길 안내를 하면서 투창하는 듯한 손짓으로 이렇게 주의를 시켰다 · 10· "조심해. 저곳에 계단이 있으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커튼이 내려진 집안으로 들어서니 그야말로 주위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나, 바스티앙은 그래도 그럭저럭 그 계단과, 1층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거실, 그리고 복도와, 마지막으로 거실 저쪽 깊숙한 곳에 테이블을 악에 두고 이쪽 방향으로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분간할 수가 있었다. 경호원 두 사람이 그를 가운데에 끼우듯이 하고서 그를 이 세 번째 인물에게로 데려갔다. 바스티앙은 이 집의 주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예리한 눈빛, 그리고 거의 눈에 뛰지 않을 정도로 약간 구부러져 있는 홀쪽한 코 · 10· 얇은 입술은 항상 말라 있는 듯 혀끝으로 부산스럽게 적셔대고 있었다. 두 손은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업무용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는데, 땅딸막한 모양이긴 하나 구석구석 손질이 잘된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저 녀석, 자기는 과일 상자를 싣고 내리는 작업도 별로 하지 않는가 보군." 하고 바스티앙은 얄。은 심정으로 생각했다. 그 남자는 말도 없이 그의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몸짓만으로 팔걸이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나 바스티앙이 앉으려고 하자, 느닷없이 손가락으로 딱 하고 소리를 내더니 그 손을 그대로 쑥 뻗으면서 이렇다 저렇다 말이 필요없다는 태도로 축구공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바스티앙은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하게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을 내밀고서 팔걸이 의자 쪽으로 물러났다. 경호원 두 사람은 거실 안의 전략상 요점을 차지하는 위치를 선택하여 각각 다른 의자에 앉았다. "샤를이 찾아갔었겠지, 어제 ? " 하고 해골 선생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알고 있겠지 ? " 하고 근시 선생이 뒤를 잇는다. 바스티앙은 그들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양쪽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는 손의 느낌으로 공의 무게를 달아보면서 히죽거리고 있었는데, 그 남자만이 바스티앙의 관심의 표적이었다. "조건은 괜찮겠지 ? " 하고 근시 선생이 또 물었다. 바스티앙은 약간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전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오. 여기서 두목을 만나 그 일을 의논해 보고 싶소. 당신이 아드리안 오스메인가요 ? " 테이블 저쪽에 앉은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해골 선생이 비웃듯이 말했다. "두목이 아드리안 오스메라고 누가 말하던가 ? " "오스메가 두목이 아니라면, 내가 만나고 싶은 것도 저 양반이 아니지." 이번에는 테이블 저쪽의 남자도 분명히 반응을 나타내고는, 전보다도 훨씬 밝아진 모습으로 웃었다. "소지품은 조사해 봤는가 ? " 하고 남자는 바스티앙에게는 말도 걸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데데는 바스티앙 옆으로 다가서서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몸수색을 하면서, 차례차례 바스티앙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테이블 위로 꺼내놓았다. 바스티앙은 말없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손수건이 한 장. 그의 이름 머리글자가 조각되어 있는 나이프. 이것은 자클린이 준 선물이다. 그리고 잔돈 약간 등이 가죽 깔개 위에 지갑과 나란히 놓여졌다. 근시 선생이 그 뒤를 교대하여 바스티앙의 팔소매를 걷어올리고서 팔 안쪽을 주의깊게 조사했다. "시간이 걸리는군, 한스." 하고 두목인 듯한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새로운 손님은 약은 하지 않아. 눈만 보면 알 수 있어." "조심에 조심을 하라고 해서요." 하고 한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바스티앙은 그 이름을 단단히 기억에 새겼다.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당연히 아드리안 오스메라고 생각되는 남자는 변함없이 축구공을 손에 든 채 그때서야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 " 바스티앙은 양손을 펼쳤다. "소동이 싫어서."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남자는 조용히 축구공을 바라본다. "그런데, 당신이 두목이오 ? " "그 질문은 좀더 있다가 생각해 보도록 하고, 우선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렇게 하시오." 하고 바스티앙이 대답했다. "자네는 걱정도 안되나 ? 코카인만 빼앗기고 쫓겨나 버릴지도 모른다고 ? " "그런 염려는 하지 않소. 당신들이 코카인만이 목적이었다면 좀더 다른 방법으로 축구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오. 내가 그 공에 물건을 넣어서 운반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하고 오스메가 또 같은 말을 반복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축구공 말이야 ? " "‘아르메니아 인’이라더군요." "꽤 재미있군. 재치가 있어." 하고 해골 선생이 찬사를 보냈다. "음, 꽤나 재치 있는 생각이야." 하고 오스메도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운반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지 ? " "6개월……7개월인가 ? " "한번도 시끄러운 적은 없었나 ? " "전혀." 아드리안 오스메는 일어서서 테이블 옆을 돌아가 축구공을 마루에 던졌다. 공이 퉁겼다. 그는 다시 양손으로 붙잡았다. "축구공치고는 무겁지 않을까 ? " "당신은 알맹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렇소. 결국 심리적인 문제지." "그래 ? " "사전에 알고 있지 않다면 좀처럼 눈치챌 수 없을 거요. 두 개의 공을 동시에 양손에 하나씩 들고서 비교를 해본다면 또 모르지만. 물건이 들어 있는 공과 들어 있지 않은 공과의 중량차이는 250· 정도쯤이니까." "250·이라고 ? " 데데가 덤벼들 듯이 말했다. "너는 샤를에게는 약이 500· 들어 있다고 말했었잖아." 바스티앙은 이제는 완전히 편안한 기분이 되어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대면서 다리를 꼬았다. "정식 규격의 공은 369·에서 453·까지의 무게인데, 그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을 선택하는 거야. 그리고서 가죽의 안쪽을 끈기있게 깎아내고서 튜브 대용으로 방광주머니를 넣으면 200· 이상이 가볍게 되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아드리안은 이제 세 번씩이나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경호원 두 사람이 옆으로 다가가서 공을 만져본다. 바스티앙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 " 하며 한스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당신들 쪽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무척이나 조심을 하는 모양인데, 이쪽에서 그럴 생각만 있었다면 분명히 당신들을 깔아뭉개 버렸을 거야 ! " "그건 인정하지." 하고 오스메가 말했다. "그러나 자네는 지금은 우리 쪽 사람이 된 게 아닌가 ? " "그렇지 않소. 그것 때문에 두목과 의논하고 싶은데, 당신이오 ? 아니면, 다른 사람이오 ?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당신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물론 스탄을 위해서도 일할 생각이 없고." "그것도 다음에 의논하지. 그런데 이것은 알고 있겠지 ? 그 공을 자네가 ‘아르메니아 인’인 스탄에게 넘겨주기 전에 우리가 약간 손을 보려고 하는데, 보통때와 달라진 점을 그놈이 눈치채지는 않을까 ? 만일 어딘가가 달라져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쉽게는 눈치채지 못할 거요. 아마도 오후에 천천히 대비할 수가 있고, 밤이 되도 또 다소 시간이 있을 테니, 그 동안에 몸을 숨기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렇게도 손을 씻고 싶었으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지 ? " "그렇게 하면 스탄이 나를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이고, 또 돈도 없었소. 그리고 어느 누가 보호해 줄 가능성도 없었고. 그 공에 어떻게 손을 대든지 그것이 내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스탄은 곧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그것에 어떤 짓을 했을 때는 실마리를 풀다 보면 당신이 떠오르겠지. 따라서 나는 그런 면에서만큼은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오." 아드리안 오스메는 공을 테이블 위에 놓고 팔걸이 의자로 돌아와서 다시 앉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겠다. 자네 생각으로는 이 공에 어떻게 손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 "특별히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정체가 의심스러운 코카인 같은 것을……‘아르메니아 인’이 단골 고객들로부터 외면을 당해버릴 지독한 것을 집어넣으려는 속셈이겠지. 그러나 그런 것이 어찌되었든 나는 조금도 상관이 없소. 벌써 몇 개월 전부터 몇 차례나 약속을 해놓고도 스탄은 결코 나를 놔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약간의 인사쯤은 해줘도 상관없지 않겠소 ? 더구나 자유의 몸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면 정말이지 그건 더더욱 좋은 거고. 오늘 여기에 온 것은 결국 그런 뜻이오." "‘배달부’ 선생, 상당히 흥분한 모양이야 ! " 하면서 그의 모습을 잘 봐두려는 듯 안경을 걸치며 한스가 빈정거렸다. "그 공에 대해서 50만의 분배를 요구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거기에다가 자유의 몸까지 요구한다는 말씀이로군." "그것은 좀 틀렸어. 우선, 나는 아무것도 요구 같은 것을 한 적이 없어.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은 사냥한 수확물을 무더기로 나누자는 거야. 250장이면 족해. 그것만 있으면 작별을 고할 수 있다는 거야." "어디로 갈 생각인가 ? " "글쎄, 얼마 동안 열기가 식을 때까지는 국내에 숨어 있다가, 더 이상 문제가 없어졌다고 생각될 때 외국으로 도피하겠어. 어디냐고 물어도, 그것은 나 자신도 아직 모르겠고. 그리고 그건 당신들 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야." "혼자서 갈 생각인가 ? " 바스티앙은 벌떡 일어섰다. 오스메는 삐걱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웃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뭐든지 모두 알고 있어. 그러니까 얼마 동안은 자네도 감시를 당하게 될 거야. 그러나 조바심낼 것까진 없어. 자네의 자클린에게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테니까. 뭣하면 말을 해줄까 ? 우리는 자네라는 사람에게는 전혀 티끌만큼의 흥미도 없어. 자네 몸의 자유라는 것은 그야말로 선물 리본을 붙여서라도 자네에게 주겠네. 그 일 이외에는 약속한 것만큼은 분명히 지킨다. 스탄에게서 받을 복수에 대해서는 우리가 떠맡아서 상대할 것이고. 그렇지 않아, 두 친구 ? " 경호원들은 갑자기 낄낄 웃었다. 바스티앙은 그 이유가 이해되지가 않아서 물끄러미 그들의 태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웃음소리가 가라앉자 바스티앙이 물었다. "공은 되돌려 주겠지 ? 스탄에게 갖고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 " "나는 영원히 잠들겠지. 몸을 숨길 수 있는 여유도 없는 사이에." "안심해. 공은 되돌려줄 것이고, 무게도 똑같이 할 거야. 좀전에 밤까지는 한가롭게 지낼 수가 있다고 말했는데, 어떤 이유인가 ? " "공은 지하실에 가져다 놓고 돌아오게 되어 있소. 그곳에 비밀제약소가 있으니까. 그러나 밤이 될 때까지는 그것에 손을 대지 않아. 제약사는 한밤중이 되어야 오니까. 그때부터 약을 만든다는 거지." "그렇다면 더할 나위가 없군." 피차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나를 여기에서 나가게 할 필요가 있을 거야." 하고 바스티앙은 가슴속으로 몇 번이나 반복했다. 문득 바라보니 오스메가 스위치 하나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짧고 거친 벨소리가 그에 응답하여 조용한 거실의 공기를 찢어버릴 듯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는 무의식중에 벌떡 일어섰다. 아드리안이 무슨 신호를 보내자 한스는 공을 테이블에서 들고는 그 자리에서 물러갔다. 독일인이 거실의 반대편 끝에 있는 나선계단을 올라가 위의 복도를 빙글 돌아서 어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문이 꽝 하고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어디로 간 거지 ? " "그것은 알 필요 없어." 바스티앙은 느긋하게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겠군. 나는 그런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소.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 기다려야 하는 건가 ? " "평소에는 몇 시에 넘겨주지 ? " "오후 안에. 그래서 밤기차로 온 거요. 그렇게 하면 반나절의 여유가 있게 되니까." "그래, 알겠어. 분명히 시간에 맞춰서 준비가 될 거야. 그런데, 그 근처에서 의자를 가져다가 한잠 자는 것이 어때 ? 아니면, 정원이라도 한 바퀴 돌아보겠나 ? " 바스티앙은 일어섰다. "역시 바깥 공기를 마시고 돌아오는 쪽이 좋겠다는 뜻인가 ? " "그런 것이 아니오. 잠시 다리의 피곤을 풀려고 생각한 거요. 하룻밤을 꼬박 앉아 있었으니까." 그는 창문 악에 멈추어서서 조용히 센 강까지 이어지고 있는 음울한 풍경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샤를이 찾아오고, 그리고 배반을 하더라도 몸의 자유를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그는 가슴속으로 이것저것 열심히 자기 변호를 쌓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최후의 변명은 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인 자클린에게로 귀착되는 것이었다. 눈을 감으면 상냥하고 싱싱하며, 정말이지 다정한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눈악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부의 불량배 패거리들 쪽에서 본다면 배반자로 볼 것이 틀림없는 행위를 그녀는 분명히 칭찬해 주겠지. 그렇다고 해도 어쩐지 자신의 배신행위가 꺼림칙해서 그는 살며시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해서 마약거래와 같은 일에 이렇게 깊이 빠져버리게 되었을까 !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짐승 같은 스탄 놈. 여기 있기만 하면 그냥 ! 유감스럽지만 그 ‘아르메니아’ 놈은 이 오스메 이상으로 더욱더 철저하게 경호되고 있다. "꽤나 규율 있게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너의 그 얼굴 생김새가 내게는 쓸모가 있는 거야." 하고 바스티앙이 자유의 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할 때마다 스탄은 대답했었다. 바스티앙은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고. 그러나 정말로 이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 ? 불안이 갑자기 명치를 덮쳤다. 그것이 오히려 갈수록 태산이 되어버린다면……오스메 일당이 상대인 스탄 일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치명적인 타격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일까 ? 500·의 마약을 포기한다는 것이 상당한 손실이기는 해도, ‘아르메니아 인’을 처치하는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도대체 저놈들은 그 공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을 생각해 무엇 하랴 ? 그의 주문대로 오케스트라는 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바에는 최후까지 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출 수밖에. 두 남자 쪽을 뒤돌아보며 그는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내 장난감에 손을 본다는데, 그것이 설마 바깥에서 볼 때 눈에 뛰지는 않겠지 ? " "틀림없어. 염려하지 마. 스탄이나 그 제약사라는 녀석이 깊은 밤이 되어야 그것에 손을 댄다니 만사가 잘될 거야.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 없어." 하고 데데가 대답했다. 오스메는 그 냉랭한 눈초리로 지그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자넨 머릿속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군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소." "그것이 좋을 거야. 왜 그런가 하면, 아직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주의해 둘 것이 있어. 그 공은 자네가 이번에 가지고 갈 때 그 속알맹이가 어떻게 바뀌었든간에 전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거야, 알겠나 ? " "나도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소." "그렇다면 좋아. 자, 앉아서 더 이상은 머리를 굴리지 말도록 해. 자네는 ‘운반꾼’이야. 오로지 운반하는 것뿐이야. 공을 스탄 쪽에 놓고 와버리기만 하면, 그 뒤에는 어느 곳에 몸을 의지하든 자네의 자유지. 바람부는 대로 가든지 아니면……" "이번에는 나에게 믿게 해주었으면 좋겠소. 내가 가려고 생각하는 것은……" "말하지 마 ! " 하고 오스메가 격렬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 만일 자네가 그것을 스탄에게로 가지고 가지 않는다든지, 그것을 놈들의 지하실에 놓고 오지 않는다면 자네가 상대할 것은 그놈 뿐만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생기게 될 거야. 알고 있겠지 ? " 바스티앙은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불쾌했다. 그러나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있는 사람은 체면이라는 것에 관해서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고 견뎌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참았다. 2층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한스가 위에서 축구공을 마루 위에 퉁기고 있는 소리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한스가 해석을 첨가한다. "정말 그 녀석 말대로군. 자식, 아무것도 모른다더니." "분명히 그런 식으로 해. 일이 끝난 다음에도." 하고 창문 악에 놓여진 팔걸이 의자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예, 두목." "잠깐 보여다오." 신경질적으로 생긴 홀쪽한 손이 팔걸이 의자의 등받이 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한스는 그 악으로 다가갔으나, 갑자기 쫙 벌어진 손가락이 그를 그 자리에 못박아 버렸다. "접근하지 마라. 나는 지금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 목소리는 명확한 위엄의 배후에 일말의 불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스는 헛기침을 했다. "그냥 도와드려야 할 것같이 생각되어서……" "필요가 있을 때는 내가 분명하게 말을 할 거야 ! " 하고 두목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그 공을 이쪽으로 보내라." 그 손이 공을 잡더니 다시 쑥 들어가 버렸다. "훌륭한 세공 솝씨군." "정말 그렇습니다, 두목." 상대방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그것을 가지고 와." "예, 지금 곧 갖고 오겠습니다." 한스는 다시 거실에서 나왔다. 바스티앙이 보고 있으려니 복도를 뛰듯이 돌아 날듯이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한스가 오스메에게 무엇인가 귀엣말을 하자 오스메는 하늘을 쳐다보는 듯하더니 서랍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는 어떤 조그마한 종이 봉지를 한스에게 건네주는 것 같았는데, 바스티앙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두목이 뭐라고 하던가 ? " 하고 데데가 물었다. "마음에 든데 ? " "응." 하고 독일인이 다시 나가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일을 시작할 거야." 그는 봉지를 조끼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종이가 호주머니 가장자리에 걸려서 흰 가루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바스티앙은 관심없다는 표정으로 그대로 눈을 돌려버렸다. "한스는 코카인을 누군가에게 갖다 주려고 왔군."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 해골 선생인 데데가 ‘두목’이라고 말하던 자로군." 근시 선생인 한스가 오스메에게로 돌아오자 오스메는 낮게 저주스런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바스티앙은 서랍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고, 그 다음 급하게 위로 올라가는 한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는 다른 패거리들 쪽으로 돌아섰다. 오스메는 계속 트럼프를 치고 있었고, 데데는 작은 유리상자를 끌어당겨 놓고서 세 개의 조그만 구슬을 구멍에 넣는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한 개 실패할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제는 지갑을 돌려주겠소 ? " 하고 바스티앙이 물었다. "안돼." 오스메가 대답했다. "종이쪽지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는 것이 좋아. 만일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그렇게 하면 적어도 무슨 대책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 여유는 생길 거야. 마음에 걸리면 나이프와 돈만은 가져가. 지갑은 자네 역할을 끝내고 난 다음에 찾으러 오고. 그렇지 않으면 확실한 사람을 여기로 보내서 찾아가도 좋아." "예를 들자면 자클린이라도." 하고 해골 선생 데데가 끼어들었다. 제 4 장 차고에서 공에 공기를 넣고, 두 소년은 차고의 입구 악에 우뚝 선 채 감탄의 눈으로 탐욕스럽게 클로드의 축구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끊임없이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멋지다’라든지 ‘대단하다’고 하는, 유난히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찬사를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클로드, 좋은 애기를 해줄까 ? 네 아버지는 실망시키지 않았어. 다시 말하면 진짜야. 정말 좋은 아버지란 말이야." 클로드의 눈은 만족감으로 빛났다. "어디로 가지 ? " "나를 따라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내가 알고 있는 빈터가 있어. 그곳에 가면 공을 찰 수가 있지." 베르나르는 늠름한 걸음걸이로 시의 외곽을 돌고 있는 대로를 가로질러, 클로드를 뒤에 따르게 하면서 옛 성벽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아니, 잠깐, 베르나르, 너 어떻게 된 거야 ? 그런 것을 다 입고 ? 더워서 금방 지쳐버릴 거야." 클로드는 베르나르의 멋지고 화려한 바둑무늬가 들어 있는 윗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베르나르는 발을 멈추려고도 하지 않고 제법 침착한 눈매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네게는 이것이 그렇게도 이해가 안 가니 ? " 베르나르는 실매듭 장식이 달린 화사한 무늬의 데비 · 클로켓 풍의 가죽 윗도리의 소매를 걷어올리고서, 청바지의 짙은 감색 천 위에다 윗도리와 같은 천조각으로 멋지게 기운 것을 보여주었다. "그 요란하게 화려한 색깔이 좀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닐까 ? " "그렇지만……어때, 꽤 매력적이잖아." 하고 베르나르는 자기 말을 매듭지었다. "축구를 할 때는 윗도리를 벗을 거야." 하지만 지금 베르나르는 구슬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와 나란히 걸으며 클로드는 꼭 껴안고 있는 축구공이 자기의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져서, 스스로도 무엇에 대해서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축구공을 갖고 있는 행복한 소년을 무엇보다도 가슴설레게 한 것은, 새끼사슴의 털 빛깔 바탕인 공의 가죽에 커다란 글자로 또렷하게 도드라져 있는 ‘스포팅’이라는 글자였다. "자, 다 왔다 ! " 하고 마치 그들의 스포츠 경기를 위해서 주문을 하여 만들어진 것 같은 빈터를, 황제처럼 턱으로 가리키며 베르나르가 기운차게 외쳤다. "아, 조심해 ! " 하고 그 말에 대답하며 클로드가 속삭였다. 한 무리의 소년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입을 꼭 다물었다. "쥘과 그 놈의 부하들이다. 방심하지 마. 시끄럽게 될지도 모르겠어 ! " 양다리를 벌려 힘을 주고 버티고 서서,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그는 말없이 기다렸다. 클로드는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패전주의의 돌풍과 싸우고 있었다. 하마터면 한눈도 팔지 않고 도망쳐 버릴 뻔했다. 그들은 이제 불과 대여섯 걸음 악까지 와 있었다. 얼뜨기 불량배들이 대장의 뒤를刷고 있었는데, 대장인 쥘이 묘하게 몸을 흔들면서 다가오는 모습이 어딘지 수상했다. 두 소년이 있는 곳 부근까지 와서도 그는 그쪽으로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그저 빈정대는 듯 슬슬 휘파람만 불어댔다. 그 패거리들 일당도 그 박자에 맞추어 똑같이 휘파람을 불면서 제각기 나름대로 조소를 퍼부었다. "쟤 좀 봐. 저 뚱뚱보 녀석을 ! " "밤만 되면 두들겨 맞는 놈이야." "애, 저 공 같은 얼굴을 보았니 ? 애어른이 축구공을 갖고 있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들은 그대로 지나갔다. 클로드는 후유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잠시 긴장이 느슨해진 이 순간에 쥘은 자기 패거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불량배 하나가 운동화 발로 펄쩍 뛰어오르더니 정확히 한번에 발로 차서 클로드의 축구공을 떨어뜨렸다. 또 다른 불량배가 그것을 발로 잡아서 나머지 패거리 쪽으로 차서 보내자, 그 패거리들은 뿔뿔이 빈터에 흩어졌다. 그리고는 신나고 즐겁다는 듯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서로에게 공을 패스하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는 첫번째 불량배를 붙잡아 크게 후려갈겼다. 또 다른 녀석이 친구를 구하려고 달려왔다. 거친 싸움이 시작되었다. 클로드는 자기 축구공을 쫓아서 뛰어갔다. 그러나 그런 것에 익숙지 못해서 불량배들에게 좋은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아차차……여기다 ! 여기야, 여기 ! " 공은 클로드의 머리 위를 지나기도 하고, 땅바닥을 거의 스칠 정도로 지나가면서 클로드의 몸을 스치기도 했다. 모욕을 당한 클로드는 기를 쓰고 용감하게 버텼다. 갑자기 타잔 비슷한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베르나르가 좀전의 그 두 녀석을 해치우고 난투장 속으로 뛰어들어왔다. "좀더 왼쪽으로 다가와, 클로드 ! " "네가 가, 탕탕." 하고 쥘이 소리쳤다. 오귀스트라든가 하는 놈의 비겁한 공격이 들어맞아서 베르나르가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 탕탕이라고 하는 녀석이 솝씨 좋게 다리를 걸었다. 키다리 알파이야르그는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 보기좋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악동들은 만세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베르나르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덤벼 봐, 이 중국놈아, 중국놈 반쪽놈아 ! 탕탕이 그의 옆에서 큰 입을 벌리고 웃어댔다. 베르나르는 그 녀석을 붙잡고서 팔을 비틀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공격이어서 탕탕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 해치워, 클로드 ! " 하고 베르나르가 외쳤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에 자포자기와도 같은 기쁨에 차 나이 어린 클로드는 지금까지의 근심도 잊어버린 듯 가슴을 두드리면서 크게 소리쳤다. "난 지로쿨이다 ! 야야, 이놈들아 ! " 베르나르에게 뒤지지도 않고, 쓸모없게 보여서도 안되겠다는 듯이 클로드는 달려오는 불량배 하나에게 발을 걸려는 흉내를 냈다. 상대는 피하려다가 몸의 중심을 잃고는 넘어질 듯이 베르나르에게 부딪치려 했다. 베르나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서 박치기로 때려눕혔다. "두 놈을 해치웠다 ! " 하고 그는 승리의 함성을 지른다. "자, 와라 ! 지로쿨과 알파이야르그다 ! 야, 이놈들아 ! " 싸움은 어지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쥘은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대장답게 초연한 모습으로 부하들의 뒤쪽에서 자기 혼자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멋지게 몸을 날려서 치고 때리고는 몸을 뺐다. 클로드는 그의 전법을 이해하고서 잠깐 도망치는 것처럼 습격해 오는 녀석들을 자기 쪽으로 유인했다. 그 틈에 베르나르는 민첩하게 달려가 쥘과 마주섰다. 결전의 시간이 온 것이다. "드디어 왔구나, 네 놈이 ! " 하고 호메로스의 영웅 같은 기세로 쥘이 큰소리를 쳤지만, 그 말소리에는 별로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제 너 같은 건방진 놈은 용서할 수가 없어 ! " 하고 의기양양하게 베르나르가 응수했다. 빈터 한 모퉁이에서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작은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그 여행가방의 손잡이에는 축구공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바스티앙 사세였다. 제 5 장 멀리서 바라보니 어린애들은 마치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바스티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린애들을 매우 좋아했다. 적을 물리치면서 클로드는 베르나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몸짓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것은 ‘어른들’끼리, 즉 쥘과 자신과의 대결인 것이다. 두 사람 중에 어느 쪽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쪽은 체면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클로드는 그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멈추었다. 쥘은 털럭거리는 한쪽 구둣발로 축구공을 땅바닥에다 눌러 밟고 있었다. "와볼 테냐, 이 애송이야 ? " 하고 그는 비웃었다. 교실에서 배운,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글귀가 무의식중에 문득 베르나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네 놈이 먼저 와라 ! 영국의 귀족놈아 ! " 쥘은 덤벼들려는 자세를 취했다. 베르나르는 눈썹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제는 여러 번 당해서 그런 수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전처럼 뒷걸음은 치지 않겠지, 이 뚱뚱보 쥘아 ! " 이렇게 모욕을 당한 쥘은 한 발 악으로 다가섰다. 베르나르도 그대로 따라했다. 두 몸이 마주 부딪치면서 서로의 구둣발이 공을 빼앗으려고 뒤엉켰다. 베르나르보다 키가 크고 무거운 쥘은 자기의 체중을 믿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계략을 써서 공격하기로 했다. 적당한 기회를 엿보다가 민첩하게 몸을 옆으로 피하면서 수평으로 가지런하게 모은 양발끝에 공을 끼운 채로 땅바닥을 굴렀다. 쥘의 몸은 불시에 허를 찔려 허공을 헤엄쳤다. 베르나르는 속임수가 잘 먹혀들어갔다고 흐뭇한 생각을 하며 일어나서 안전한 보도 쪽으로 몰고 갔다. 소년들은 자기들의 명예를 걸고 그를 해치워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일제히 달려왔다. 클로드는 위험을 알아차리고 보도로 달려가, 차도와의 사이에 있는 연석 근처에 멈추어섰다. "베르나르 ! " ‘정말 감탄할 만하군 ! ’ 하고 어른스러운 알파이야르그는 생각했다. "저 녀석도 이젠 ‘한몫 할 놈’이 되었어 ! " 이제 필요한 것은 명백했다. 공을 발끝으로 퉁겨서 떨어질 때 차는 것이다. 이것만큼은 잘 되었다. 공은 쥘과 그의 부하들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다만……클로드가 그것을 커트하는 데에 실패했다. 공은 바스티앙의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다. 졸지에 당한 그 충격으로 바스티앙은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 불과 4분의 1초 정도의 차이로 클로드가 자기의 소중한 공을 붙잡으려고 그의 다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바스티앙은 어린애가 다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서 그 아이를 뛰어넘으려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었다. 여행 가방이 떨어지면서 그물의 매듭이 풀려 그의 공이 보도 위를 퉁기며 굴러가고 있었다. "위험해 ! " 하고 쓰러지면서 그가 외쳤다. 그때는 벌써 탕탕이 발을 들어 빈터 쪽으로 차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탓으로 서툴게 차서 두 개의 공이 서로 한곳에 뒤엉켜 버렸다. 엎드린 채로 눈이 튀어나올 듯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바스티앙은 또 다른 공보다 엄청나게 귀중한 자신의 공을 확인하려고 했다. 몹시 놀라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인 그의 눈악에 갑자기 결사적으로 외쳐대는 악마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엉덩이 근처에 화려한 색깔의 무늬를 붙인 도깨비불 요정 같은 모습으로 무섭게 돌진하면서 공을 덮쳤다…… "그건 내 공이야 ! " 하고 바스티앙이 고함을 쳤다. 대답 대신에 마치 미치광이가 울부짖는 듯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고함 소리를 가슴속에서 내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악마 같은 소년은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내 공이야 ! " 하고 바스티앙은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키면서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또 한 녀석이 혜성처럼 다리 밑으로 뛰어들었다. 클로드였다. 클로드는 그대로 부리치더니 베르나르를 쫓아 달아나 버렸다. 바스티앙도 곧바로 두 사람 뒤를 따라 달려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건장한 손이 몸에 닿으면서 그를 막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는 뒤돌아섰다. 단추 구멍에 훈장을 달고, 코밑에는 짧게 자른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신사가 그의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매우 측은한 어조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오 ? " "아뇨.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하고 바스티앙은 소리치듯이 대답하면서 뛰어가려고 한 발을 옆으로 내딛었다. 마침 쇼핑을 하고 돌아오던 어느 뚱뚱한 여인이 바로 그가 가려는 쪽에 있다가 쇼핑 바구니를 배 쪽으로 끌어당겨 안으면서, 통행인들을 조금도 소중하게 생각지 않는 어린애들의 타락한 태도에 대해서 거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바스티앙은 또다시 뛰어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훈장을 단 신사가 그의 무릎 위로 허리를 굽히더니 바지의 무릎 언저리가 찢어졌다고 알려 주었다. 바스티앙은 몇 백만 프랑의 가치가 있는 상품이 들어 있는 없어진 공을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신사는 지극히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크게 다친 곳이 없다면 누구에게라도 여러 가지 형태로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므로 소년들을 용서해 주라는 것이었다. 바스티앙은 이제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서 정신이 없었다. 그가 다시 악으로 뛰어가려는 순간, 쾌활한 젊은이들이 타고 옆에는 수다스런 여인을 태운 삼륜 오토바이와 충돌해 버리고 말았다. 이들 모두가 숨도 쉬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와중에서도 그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 10· "나는 꼼짝없이 죽게 생겼어. 스탄이 아니면 오스메에게 당할 거야." 그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엉덩이에 요란한 색깔을 붙인 그 소년이 거리의 한 모퉁이로 사라지면서, 그의 자유와 어쩌면 생명까지도 그 축구공에 넣은 채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내 공 ! " 하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음하듯 같은 말을 세 번이나 외쳤다. 사람좋아 보이는 경관이 사람들의 울타리를 헤치고 들어왔다. "이런 곳에 있으면 안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 당신은 어떻게 된 거요 ? 당신의 공 ? 분명히 여기에 있잖소, 당신의 공이 ? " 다분히 위압적이고 무뚝뚝한 동작으로 경관은 쥘이 시기가 별로 좋지 않다고 여기며 내미는 두 번째 공을 그의 손에서 빼앗듯 잡았다. "이것은 내 공이 아니고……" "뭐요 ? 당신의 공이 아니라고 ? 도대체 당신의 공은 어떻게 생긴 거요 ? " "내 것은, 그게……아주 새것이었소 ! " 여러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다. 삼륜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울 것 없어요. 그것도 진짜 새것이잖아요 ! " 사실 그의 말은 맞았다. 경관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그 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떤 마크가 붙어 있었소 ? " 하고 경관이 물었다. 순간적으로 희망을 느낀 바스티앙이 대답했다 · 10· "‘스포팅’입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소." 하고 경관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것도 역시 ‘스포팅’이니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서 바스티앙은 공의 끈을 여행가방 손잡이에 묶고는 그대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아까의 그 쇼핑 바구니를 든 여인이 통행인의 바지를 찢어놓았다고 하면서 쥘에게 나무라기 시작했다. "이 애들은 이런 짓만 하고 다녀요. 경찰 아저씨, 이런 쓸모없는 애들 때문에……" 쥘은 뒷걸음질치면서 자기는 바스티앙의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훈장을 달고 있는 신사가 확고한 어조로 진실을 애기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이들의 논쟁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바스티앙은 재빨리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다스런 여인이 그의 길을 가로막고는 그를 증인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 10· "당신이 경찰에게 사실대로 말해 줘요. 나도 모두 보았으니까요. 이 불량배 녀석들이 두 남자애들의 공을 빼앗아서는 돌려주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여기를 보세요. 당신까지 이런 짓을 당했잖아요 ! " 경관이 아무리 타일러도 불가능했다. 결국 경관은 화를 냈다. "시끄러워요 ! 좀 조용히 해요 ! 이 공이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거요 ? 그렇지만 이 공은 당신 것과 똑같잖소 ! 그럼, 어떻게 하시겠소 ? 경찰에 고발할 겁니까 ? 바지를 찢겼다고 ? " 바스티앙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경관의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경관은 집게손가락으로 똑바로 쥘에게 손짓했다. "잠깐 이리 와라……" "하지만 저는 아무런 짓도 안했어요. 저는 단지……그건 저쪽 두 놈들이에요 ! " "저쪽 두 놈들이라니, 그게 누구야 ? " "잘 몰라요. 이 근처 애들이 아니라서." "그렇다면 좋다. 어서 돌아가거라 ! 또 사람들에게 귀찮은 짓을 하면 감옥에 처넣을 거야, 두고 봐라 ! " 쥘은 형편없이 되어버린 추종자들을 인솔하고는 부랴부랴 물러갔다. 더 이상 오래 있기가 싫었던 것이다. 사회질서의 대변인인 경관이 수첩을 꺼냈다. "그 두 아이의 집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소 ? 몰라요 ? 됐어요 ! 그거야 뭐 상관없지. 난 이젠 진절머리가 나요, 이런 일은. 자, 보고만 해두면 끝날 일이오. 당신의 이름과 주소는 ? " 불시에 허점을 찔린 바스티앙은 입술을 깨물었다. "줄리앙 프랑수아……둘 도베르뉴 가(街) 232번지……그럼, 내일 경찰서로 찾아가겠습니다." 하고 그는 약간 뒤로 물러서면서 덧붙였다. 경관은 힘없는 손짓으로 잠깐 모자의 가장자리를 만졌다. 바스티앙은 아까 두 소년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거리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여행가방의 손잡이와 그 괘씸한 공이 매달려 있는 끈을 꽉 거머쥐면서 걸음을 크게 하여 빨리 걸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절망적인 생각과 함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 하나……자클린 ! 그는 극도로 절망적인 상태여서 빈터에서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보도 옆에 서 있었던 소형차도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뛰어서 지나가 버렸다. 한스가 알아차리도록 하려고 아무리 신호를 해도 바스티앙은 전혀 눈에 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독일인 한스가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하늘이시고, 주님이신 하나님이시여 ! " 하고 차를 움직이려고 기를 쓰면서 그는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제 6 장 뒤를 쫓아오는지를 보려고 돌아보는 순간에 클로드는 가로등에 부딪쳐서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베르나르는 기사도적인 태도를 잃지 않고 즉시 되돌아 뛰어가서 전우를 안아 일으켰다. "많이 아프지 ? " 그는 불같이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으면서도,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축구공은 겨드랑이에 단단히 껴안고 있었다. 클로드의 눈매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베르나르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약국으로 데려갔다. "친구가 축구를 하다가 넘어졌어요. 치료해 주세요." 약국 주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상처를 살펴보았지만, 머릿속은 남프랑스에서 지낼 휴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알파이야르그는 약병이 줄지어 있는 상점의 안쪽과 입구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도로 쪽을 감시했다. 천천히 그의 심장은 정상 리듬으로 되돌아왔다. 아이고 ! 이럭저럭 먹구름이 걷히는 것 같군 ! 마치 원숭이가 꽥꽥거리듯이, "내 공이야 ! " 하고 소리소리 지르던 그 이상한 사람은 모습을 나타낼 기미도 없다. 자기 공이라고 ! 그런 농담은 그만두시지. 자기 멋대로 그런 말을 하다니 ! 공이 클로드 지로쿨의 것이라는 건 바로 이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 약국 주인은 상처를 씻어주고 이마에 머큐롬을 바르면서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클로드에게 말했다 · 10· "아무것도 아니다. 괜찮아……" "약값은 얼마예요 ? " 하고 아버지가 늘 그러듯이 자기도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베르나르가 물었다. "약값은 필요없다. 네 입에서 매미 소리(매미 소리는 남프랑스 지방의 밝은 여름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 " 베르나르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것은 악담일까, 아니면 인사치레일까 ? 아무튼 시간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는 후자 쪽을 택하기로 하고는, 즉시 클로드의 손을 잡고서, "고맙습니다, 아저씨 ! " 하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변함없이 어느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두 소년은 길을 건너갔다. "이젠 괜찮니, 클로드 ? " "응, 괜찮아……" 베르나르는 그 약하디약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지로쿨 소년은 시뻘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머큐롬이나 주위에 달무리가 생긴 짙은 갈색 눈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너, 왜 그러니 ? " "아무것도 아니야. 내 공을 줄래 ? " "여기……" 자신의 귀중한 소유물을 돌려받은 기쁨에 가득찬 클로드는 타버릴 듯한 몸의 고열이나 상처, 또 그 대단한 아픔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두 소년은 걸었다. "그런데 엄마는 특별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성벽자리에 있는 빈터에 가면 안된다고." 베르나르는 흥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엄마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놀 수 있는 시간도 없어 ! " 그는 팔꿈치로 클로드를 쿡쿡 찔렀다. "비밀인데, 어때, 굉장히 재미있었지 ! " "응." 하고 클로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운동을 했기 때문이리라. 시(市) 경계의 순환도로로 나가려고 할 때 베르나르가 갑자기 홱 뒤로 물러서면서 그 옆 건물의 현관 쪽으로 클로드를 밀어넣었다. "붙잡힐 것 같아 ! 온다 ! " "누가 ? 누가 말이야, 베르나르 ? " "그 사람 말이야. 그 축구공을 들고 있었던 사람 ! " 베르나르는 클로드가 아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까 우리들이 도망칠 때 뭐라고 소리치던 사람이 있었지 ? 그 사람이 자기 공이라고 하면서……" 바스티앙은 그 거리로 뛰어왔으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뛰지 않아 걸음을 늦추었다. 남자 하나가 바쁜 걸음으로 지나쳤다. 그는 그 남자를 불러세우고서 바지 엉덩이에 화려한 색깔의 천조각을 댄 소년을 보지 못했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베르나르는 클로드를 향해 확실히 알겠다는 몸짓을 했다. "저것 봐. 우리들을 찾고 있어 ! " "아니, 왜 그러지 ? " "알게 뭐야 ! 자기의 지독하게 낡아빠진 고물 공을 너의 새것과 바꾸려는 수작이겠지. 조심해……" 그늘에 달라붙은 채 두 소년은 슬며시 몸을 내밀고 살펴보았다. 바스티앙은 열심히 부근을 살피면서 맞은편 보도를 올라가고 있었다. "상대가 어른일 경우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아." 하고 베르나르가 엄숙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지 어른들이 승리해 버리거든 ! " 클로드는 베르나르의 곁에 바싹 다가왔다. 베르나르는 무엇이든지 정말 잘 알고 있어 ! 베르나르는 어린애치고는 제법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그럴듯하게 지으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거리에 나가 보면 언제나 싸움판이라니까. 그러나 잠자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안돼. 자기 고기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야 ! " 고기라는 말을 듣자, 클로드의 민감한 뱃속이 꾸르륵거린다. 그런데 아까 그 아저씨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소년들은 좀더 안전한, 육중한 철문 그늘에 바짝 몸을 숨겼다. 바스티앙은 어떤 노동자에게 말을 걸고는 잠시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베르나르는 숨을 삼켰다. "빌어먹을 ! 그 사람이 약국으로 가고 있어 ! " 그러나 바스티앙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거리 모퉁이까지 가서는 무엇이 걸려 있기라도 한 듯이 무의식중에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일부러 남들의 눈을 끄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기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그는 자기 임무에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회, 즉 그가 발을 빼려는 사회에서는 실수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대단히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법이다. 오스메와 그 부하들이 공 속에 마약 대신에 무엇을 넣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조건 받을 곳에 가져다 주기만 하면 그것과 교환조건으로 자기 몸의 자유를 손에 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고 오스메는 일부러 다짐까지 한 터였다 · 10· "이번에 갖고 갈 자네의 공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것이야 ! " 그때의 경고에 의하면, "그것을 스탄 쪽에 놓고 오지 않는다면 자네가 상대해야 되는 것은 그놈뿐만이 아니야. 우리들까지 상대해야 돼 ! " 라는 것이었다. 그의 발은 보도에 못이 박힌 듯 그대로 있었다. 불안이 온몸에 퍼지고 있다. 도망을 칠까 ? 돈도 신분증도 없이 ? 몸을 숨길까 ? 그러면 자클린에게는 어떻게 알리지 ? 그는 자클린 생각에 골몰했다. 술집은 눈에 뛰지 않는다. 모퉁이에 정육점이 하나. 맞은편에 철물점, 그리고…… 베르나르는 깜짝 놀라 그늘에 몸을 숨기면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베르나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 10· 그 아저씨는 역시 약국으로 들어갔다. "미안합니다만, 잠시 전화를 빌려주시겠습니까 ? " 약국 주인은 상점 한구석에 있는 전화 쪽을 가리키고는, 자신은 밖으로 나와 입구의 문지방에 서 있었다. 베르나르는 클로드의 몸을 흔들었다. "애, 클로드. 그 사람이 왔어. 우리들을 찾아서 ! 약국에서 물어보고 있는 걸 거야 ! " 소형차가 폭음을 내면서 이쪽으로 오는가 싶더니, 순환도로 부근까지 달려와서는 정지했다. 한스가 차에서 내려서 바스티앙의 모습을 찾으려는 듯 열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약국 안에서는 그 바스티앙이 귓볼에 핏기가 없어질 정도로 수화기를 꽉 붙잡고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안한 모습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어떤 목소리가 대답했다. "자클린 툴리우 양을 부탁합니다." "외출했어요." 이제 모든 것이 다 틀렸다. 그는 천천히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었다. 지금까지의 초조가 캄캄한 낙담으로 변해 버렸다. 쫓기는 듯한 공포가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얼마입니까 ? " 하고 기계적으로 그가 물었다. "20프랑입니다." 그는 동전 한 개를 계산대 위에 놓고 약국에서 나왔다. 완전히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길거리에 서서 양손에 축구공을 들어올리고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뒤바뀐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난 다음부터 그에게는 이 공이 믿을 수 없이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겠어. 이것을 여기에 놔두고 어디에라도 숨어 버릴까 ? 그 뒤는 될 대로 되겠지 ! " "완전히 돌아버린 거 아냐, 응 ? 어떻게 된 거야 ? " 바스티앙은 그 사투리의 주인공을 곧 알아차렸다. "한스 ? 자네, 그곳에 있었나 ? 그렇다면 보고 있었다는 말이로군 ? " "보고 있었지. 자네가 공을 내팽개치고 도망쳐 버리려던 것을 ! 자, 따라와 ! " "아니, 내 애기 좀 들어봐……" "타라고 하잖아. 이제 사람들 눈에 너무 뛰어 버렸어. 공을 잊지 마 ! " 그 목소리는 위협하는 듯한 어조를 띠고 있었다. 바스티앙으로서는 좋고 싫고가 있을 수 없었다. 소형 르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국 주인은 휴가를 떠나는 상상에 젖으면서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전송하고는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대단히 신이 나서 베르나르는 클로드를 팔꿈치로 찔렀다. "됐어 ! 그 사람들이 잘 안된 것 같아." 그는 아직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클로드는 약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왜 그래 ? " "나 ? 아무렇지도 않아. 왜 ? " "울상을 짓고 있잖아 ! " 클로드는 분명히 울고 있으면서도 울고 있지 않다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왜 그런지 배가 아프단 말이야……" "여기야 ? " 하며 클로드의 배 가운데를 손으로 누르면서 베르나르가 물었다. "으응, 아니." "이 근처니 ? " 클로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조금만 더 있었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뻔했다.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클로드가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제 7 장 바스티앙은 녹초가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게 다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스는 자기를 오스메에게로 데려가겠지. 그렇게 되면 가장 잘 되어봤자 이번의 손해를 변상하기 위해 이제부터 몇 년이든지 그 소굴에서 일하도록 허락받는 게 고작일 것이다. "이제는 절대로 손을 씻을 수가 없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반쯤은 체념한 기분으로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떴다. "어디로 가는 거지 ? 주느빌리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나 ? " "글쎄, 자네 행선지 근처까지 데려다 주겠어." 하고 독일인 한스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말했다. "이 운임은 100장이야. 알겠어 ? " "100장 ? " 한스가 잘 알아듣도록 설명했다 · 10· "자네가 받을 25만 중에서 내게 10만을 넘겨주는 거야. 여러 가지 수고의 대가로서.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네가 공을 내던져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을 말해 버릴 거야. 그렇게 하면 오스메가 너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바스티앙으로서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네가 내 뒤를 쫓아왔다는 말인데,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 ? " 한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 들어봐. 나 역시 필요한 경우라면 위험한 다리일지라도 건널 거야. 내가 보니까 자네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우물쭈물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좀 떨어져서 차를 세웠지. 재미없는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거로군, 그렇다면 ! " "볼 만큼은 봤어. 그래서 너는 결국 100장에 끝나는 거야." 바스티앙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는 눈썹을 찌푸렸다. "수상한데. 어떻게 된 거야 ! " "뒤바뀌어 버렸어 ! " 바스티앙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난 배당금 같은 것은 전혀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이야."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 " "실수가 좀 있었지 ! 그야말로 모래알 하나만큼의 차질이야 ! 예상 외의 사건이라는 거지. 어이, 알아듣겠어 ? " "내 말을 들어봐." 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수다를 떠는 것은 돌아가서나 해. 돌아가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무의식중에 불끈해 버린 바스티앙은 한스의 윗도리 옷깃을 움켜쥐고는 격렬하게 흔들었다. "아까 그 공하고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멍청아 ! 자, 봐." 그는 공을 흔들어 보았다. "이젠 알겠지 ? 아까 그 공하고 다르단 말이야 ! " 격분한 동작으로 그는 공을 뒷좌석으로 내던졌다. 바스티앙이 정말로 놀란 것은 한스가 황급하게 갑자기 차 문짝 쪽으로 몸을 피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만둬 ! 바보 같은 자식 ! " "뭐라고 ? 아까 그 공이 아니라니까 ! " 가슴이 메슥거리는 냄새가 나는 어두운 통로에서 클로드가 기절한 채로 아직도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무릎을 꿇고 어느 날 밤 근처의 여인이 기절했을 때 어머니가 하던 것을 본 대로 열심히 클로드의 볼을 가볍게 때리고 있었다. "가엾게도, 이 녀석이……" 하며 베르나르는 혼잣말을 했다. "너무 한꺼번에 일이 일어나서 자극이 좀 지나쳤나 본데. 이 녀석에게는……" 베르나르는 무한한 우정으로 인해 가슴을 적시면서, 사랑하는 친구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클로드가 눈꺼풀을 약간 움직였다. "됐다 ! 겨우 ! 어때, 몸은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 "글쎄, 어떻게 된 거지…… ? " 하고 클로드가 혀가 꼬부라진 듯한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애, 기다려. 기운을 차리게 할 것이 좀 있어야겠다 ! " 베르나르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괜찮겠지 ? 잠시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해." "내 공……" 하고 클로드가 우는 소리로 말했다. "자, 여기……" 베르나르가 클로드의 손에 공을 건네주었다. "곧 돌아올 거야." 베르나르는 순환도로 모퉁이의 식료품 가게까지 달려가서 위스키 초콜릿을 샀다. 그리고 다시 뛰어서 현관 출입구의 문짝 쪽으로 돌아왔다. 낯선 여인 한 사람이 클로드 악에 서 있었다. "내 동생인데요." 하고 즉시 명확하게 베르나르가 말했다. "넘어져서 몸을 다쳤어요." "정말로 어떻게 하지 않아도 괜찮겠니 ? " 하고 지나가던 여인이 친절하게 물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고마워요, 아주머니. 괜찮을 거예요." 여인은 떠나갔다. 베르나르는 금색 포장지를 뜯어서 위스키 봉봉을 클로드의 입안에 밀어넣었다. "이걸 삼켜.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자, 한 개 먹어봐. 어떻게 되는지." 공을 껴안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클로드는 그 초콜릿을 우물우물 십었는데, 그것은 울컥 치밀어오를 듯한 메슥한 맛이었다. 위 속으로 흘러들어간 달콤한 위스키의 맛이지만, 결국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갑자기 몸을 굽혀 컥컥하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나르가 클로드의 이마를 받쳐 주었다. "참지 말고 마음껏 토해 버려 !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틀림없이 탕탕 녀석에게 배를 채였을 거야.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하지만 엄마에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알았지 ? 그렇지 않으면 또 그랬느냐고 심하게 야단을 맞을지도 몰라 ! " 극심한 딸국질이 클로드의 몸을 흔들었다. 이 새로운 고난도 기사도를 수련하기 위한 시련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처럼 클로드는 용감하게 그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것이 끝나면 · 10· " 하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나는 사나이 대장부가 된다. 용감한 아이가 될 수 있는 거야. 오늘 아침에는 싸움을 했어. 낮에는 이렇게 부상까지 당하고 · 10· 이렇게 말하는 것이 ‘토할 것 같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멋있어 · 10· 이것이 회복되면 베르나르와 나는 ‘서로가’ 좋은 ‘동료’로 지낼 수가 있어." 구토증이 멎었는데도 그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 얼굴로 조용히 얼빠진 눈빛을 베르나르에게 보내고 있었다. 클로드에게는 베르나르의 모습이 마치 안개라도 낀 듯이 보이고, 목소리는 그야말로 솝을 통해서 듣는 것 같았다. "어때, 몸은 ? 조금은 좋아졌어 ? " 가까스로 클로드는 머리를 끄덕였다. 공이 미끄러져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는 그것을 다시 꼭 껴안는다. 베르나르는 몸을 쑥 뒤로 젖히면서 생각했다. "틀림없이 위스키 초콜릿이 효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 " 바스티앙은 모든 것을 말해 버리고 나니 기분이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니까 저기에 있는 공은 결국 그 아이들의 공이란 말이야." 그는 한스의 팔을 붙잡았다. 한스는 완전히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도망치게 해다오, 한스. 오스메에게는 뭐라고 말해도 좋아. 그 대신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까." 한스는 매정하게 그 팔을 부리쳤다. "추잡스런 말은 하지마. 병신같이 ! " 하고 이빨 사이로 밀어내는 듯이 한스는 중얼거렸다. "자, 내려서 차를 한 바퀴 돌아서 이쪽으로 와. 내 대신에 핸들을 잡는 거야. 이제부터 돌아가는 길은 네가 운전해. 이상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것이 좋아. 어차피 달아날 수는 없을 테니까." 한스는 약간 몸을 움직여서 권총집을 보여주었다. "난 권총이 있어. 조심해." 바스티앙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자기 자리 쪽의 문을 열었다. 한스는 그에게 운전석을 비워주고는 빈 자리 쪽으로 옮겨 앉았다. 차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스티앙은 다시 한 번 최후의 기회를 엿보았다. "내 말 좀 들어 봐. 이번 일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한 번쯤은 나를 봐줄 수도 있잖아. 오스메 악에 가면 잘 좀 말해 줘." "그만 됐으니까 타 ! " 이제는 죽든 살든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바스티앙은 운전석에 앉았다. "공 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거지 ? 못 쓰게 된 코카인 같은 건가 ? 어차피 그런 것들이겠지. 꼭 변상해 줄께. 그 정도쯤은 ! 그래서 네가 약간 도와준다면 내 몫의 1할은 네게 주겠다." "돼지 같은 놈 ! " 하고 당장 분통을 터트릴 것 같은 기세로 한스가 소리를 질렀다. "못쓰게 된 코카인이라니 ! 터무니없는 소리 ! 무엇이 그 공에 들어 있었는지 알아 ? " 바스티앙은 눈을 감았다. 인생이란 것은 때에 따라서는 형편없이 바보가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 그는 단념해 버렸다는 몸짓을 했다.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 " "그러나 우리들한테는 그렇지가 않아 ! 그야말로 스탄을 완전히 처치해 버릴 수가 있는 것이 그 공 속에 들어 있었단 말이야 ! " 그는 몸을 악으로 굽히고서 바스티앙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다이나마이트 500·……어때, 그것이 들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그 꼬마에게 폭탄을 맡기고 온 거야 ! " "폭탄 ! " 변속 기어 쪽으로 가던 바스티앙의 손이 허공에서 멈춰 버렸다. 그는 깜짝 놀라서 또다시 중얼거렸다. "폭탄 ! " "자, 차를 출발시켜." 하고 한스가 냉랭하게 명령했다. 바스티앙은 미칠 듯한 눈초리로 한스 쪽을 돌아본다. "그렇다면 경찰에 알려야 되잖아 !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 그냥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 텐데 ? 폭탄을 껴안고 ! " 한스는 입을 꽉 다물었다. "차를 출발시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유 불문하고 배에 한 방 쏠 거야. 아이들 일은 두목을 만나서 생각하면 돼." "어이, 한스 ! "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무언의 대답인 듯 한스의 콧망울은 오무라들고, 손은 권총을 힘껏 쥐었다. 바스티앙은 깊은 슬픔으로 가슴이 막혔으나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무슨 짓거리야, 폭탄이라니 ! " 클로드는 괴로운 듯 간신히 걷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축구공은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자기의 발걸음을 늦추면서 이렇게 말해 본다. "어때, 내가 들어줄까 ? " 클로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두 소년은 어느덧 파리 시내에 들어서서 계속 상피오네 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의 교통량은 뚝 끊어져서 보도에는 별로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베르나르는 무릎 근처가 근질거렸다. "잠깐 패스를 해볼까 ? " "축구공으로 ? " "두말할 것도 없지 ! 모자 같은 걸로 할 수 있어, 우스꽝스럽게 ! " 이렇게 말해도 클로드가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이는 모습이라 베르나르는 약간 빈정거리듯 물었다. "무서워 ? " "아까도 하마터면 빼앗길 뻔했잖아 ! " "그건 그래. 그러나 여기면 걱정할 것 없어 ! "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해서 클로드를 겁쟁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 공은 내가 찾아준 거야 ! " "응, 베르나르. 하지만……" 클로드는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은 모습으로, 기적적으로 되찾은 그 공을 또다시 잃어버릴 위험이 닥칠 것만 같아서 겨드랑이에 낀 공을 꽉 힘주어 안았다. "내가 들고 가는 것도 싫어 ? " 지로쿨 소년의 더러워지고 새빨간 얼굴이 활짝 밝아지고, 평소의 마음씨 착한 미소가 떠올랐다. 클로드가 말없이 공을 내밀자, 불뚝불뚝 솟아오르던 알파이야르그의 화도 이 신뢰의 표시를 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걱정마." 이번에는 베르나르가 공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었다. 두 소년은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하나, 둘……하나, 둘……이윽고 베르나르는 대담해져서 보도에 공을 던지고는 두 걸음마다 그것을 붙잡았다. 클로드는 경기에 들린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상피오네 가로 구부러지는 곳에서 베르나르는 공을 공중으로 던지더니, 무릎을 굽히고서 상체를 뒤로 젖혀 악으로 나가면서 머리 꼭대기로 솝씨좋게 공을 받았다. "나도 하고 싶어." 하며 클로드가 조른다. 베르나르는 친절하게 두세 가지 기술상의 조언을 해주고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공을 던졌다. 클로드는 이 정도는 단숨에 해낼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은 이마 언저리를 살짝 스치고 말았다. 공이 차도 위에서 퉁겼다. 바로 그때 자동차 한 대가 왔다. 클로드가 공을 잡으려고 뛰어가려는 순간에 베르나르가 가지 못하게 말렸다. "내 공 ! " 운전사가 핸들을 비틀어 돌리자 차바퀴가 공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공은 반대편 보도까지 굴러갔다. 베르나르가 단숨에 달려가서 공을 잡아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두 소년은 어느덧 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이제부터 또다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베르나르가 클로드에게 잘 알아듣게끔 말했다. "싸움을 한 것은 말해도 괜찮아. 그건 도저히 감출 수가 없으니까. 더구나 거짓말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지. 그런데, 잠깐, 네 배는 어떠니 ? 아직도 아파 ? " "이젠 괜찮아." "됐다 ! 알겠지 ? 그 일은 말하면 안돼. 말하면 다시는 놀다 오라고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들을 쫓아왔었던 사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야. 그런 사람은 전혀 보지 못한 것으로 해두는 거야." "왜 ? " "부모님은 언제나 아이들이 잘못한 것으로 여기거든. 이제 알겠지 ? " "알았어." 베르나르가 곧바로 그것에 응답하는 우정의 표시로 클로드의 등을 툭 치면서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잔소리 때문에 큰일이야 ! " 자기 집 초인종을 누르면서 베르나르가 투덜거렸다. 예상대로 베르나르의 모습을 보자마자 알파이야르그 부인은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도 베르나르는 소매가 찢겨진 것을 숨기고 있었다. "정말로 무슨 아이가 이럴까 ! 자, 봐라, 이걸 ! 오늘 아침에는 바지, 저녁에는 윗도리야 ! 이제부터는 매일 한 벌씩 새로 맞추어야겠구나 ! 왕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 " 계속 여러 가지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맞은편에 사는 고리대금업자에게는 대낮에 꾸는 악몽이 되어 문짝이 삐걱거리는 소리 속으로 점차 사라져 갔다. 아들과 마주했을 때 드니즈 지로쿨은 하마터면 누구인지도 모를 뻔했다. 온순한 클로드의 너덜너덜해진 옷, 부어오르고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보고 그녀는 엉겁결에 손을 마주잡았다. "저런, 가엾어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 "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하고 클로드가 단숨에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나쁜 놈들이 싫다고 하는데도 공을 빼앗아 가려고 하잖아. 그래서 우리는 그 놈들 속으로 뛰어들어간 거야, 베르나르하고 내가 ! 실컷 두들겨 패주었어." 지로쿨 부인은 오싹한 생각으로 눈을 크게 뜨고서도, 말하는 도중에 고쳐야 할 말이 있으면 주의를 주려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곳이 너무나 많아서 결국 단념해 버렸다.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자, 이리 와서 얼굴을 씻거라, 아무튼간에 ! " 클로드는 자기 책상 위의 책과 공책 옆에 먼저 공을 놓고서 어머니 곁으로 갔다. 어머니는 벌써 세면 장갑으로 비누 거품을 내고 있었다. 제 8 장 해골 선생인 데데는 무릎 위에서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 손은 어떤 종류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이동표적인 바스티앙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바스티앙은 흥분을 감추기 위해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초조한 발걸음으로 거실 안을 계속 왔다갔다하면서 혼란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근심은 아직까지는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고, 그런 근심은 이미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쯤이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벗어날 수가 있을 거야. 그렇다면 내게로 향하고 있는 저 권총, 약간만 움직여도 따라오는 저 검은 총구멍 같은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나 ! " "좀 앉을 수 없겠나 ? " 데데가 비웃듯이 말했다. "난 손목이 아파 ! " 이 경호원이 오스메에게 지시를 받아 권총을 총집에서 꺼낸 것은 한스가 ‘두목’에게 전반적인 경위를 보고하려고 나갔을 때였다. 그렇다면 오스메도 역시 어떤 인물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바스티앙의 머릿속은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우리 속에서 지쳐버린 곰처럼 미쳐 버릴 듯한 발걸음 사이사이에 한 단어만이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10· 그것은 ‘폭탄 ! ’, 즉 한 시간 이상이나 자신은 폭탄을 껴안고 헤매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는 오른쪽에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무시하고, 오스메의 악을 가로막고 섰다. "그럼, 그 아이를 찾기 위해서 아무런 행동도 안할 생각이오 ? " 해외과일수입상은 얼굴도 들지 않았다. 계속 손톱에 줄칼질을 하면서 그 손톱을 바라보기도 하고, 훅 불기도 하고, 윗도리 옷깃에 비벼서 광택을 내기도 했다. 바스티앙은 전법을 바꾸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아까 말대로라면 그 폭탄은 밤이 될 때까지는 폭발하지 않는다고 했소, 그렇다면 시한폭탄이라는 말이오 ? " "자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 " 희롱하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효과가 있어서 바스티앙은 무의식중에 울컥했다. 갑자기 덤벼들려는 자세와 얼굴 표정을 보고서 데데는 권총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운반꾼’ 바스티앙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키면서 괘씸하다는 듯이 고함을 쳤다. "짐승 같은 놈 ! 공 속에 시계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소리가 들렸을 거 아냐 ! " 이번에는 두 사람이 함께 합창을 하듯이 웃었다.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아내는 체하면서 오스메는 이 농담꾼 덕분에 줄칼질이 잘못되었다고 투덜거렸다. "그렇다면 분명하게 설명해 주시지 ! " 하고 힘없이 팔걸이 의자에 앉으면서 바스티앙이 신음하듯 말했다. "그것은 두목이 이야기할 거야. 말해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하고 오스메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엎드려서 손톱에 광택내는 것을 계속했다. 계단 위쪽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은 동시에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 벌써 복도 쪽으로 가버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고르지 못한 발자국 소리다. 처음에 바스티앙은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의 의족 소리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두목이란 자는 불구자로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한스는 고무로 밑창을 댄 구두를 신고 있으므로 발자국 소리는 두목 쪽에서 나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스메와 데데는 일어섰다. 오스메는 줄칼을 치웠다. 바스티앙은 변함없이 의자에 앉은 채로, "의족이 아니군. 다리가 불편한 거야." 하고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감질나는 소리는 복도를 한 바퀴 돌아서 큰 방의 반대편 끝 쪽에 있는 나선형 계단에 다다르고 있었다. 바스티앙의 발가락은 떨리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온몸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 계속해서 실내를 가로질러오는 발자국 소리가 그에게는 끝이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새로 온 사람의 모습을 보려면 큰 유리창문에서 희미하게 새어들어오는 빛 속으로 그 모습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는 제법 큰키에 훌륭한 풍채의 남자였다. 태도는 그럴 듯하게 기품이 있고, 단정한 몸차림을 가지고 있었다. 홀쪽한 얼굴의 선은 전혀 무표정하고, 머리카락은 꽤나 희끗희끗했다. 한쪽 다리가 비뚤어져서 정형화(整。靴)를 신고 있었다. 왼쪽 다리의 구두 밑창은 6。7··쯤 될 것 같았다. 한스가 나서려고 하자, 그가 큰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바스티앙을 일어서게 했다. 그러나 비뚤어진 다리가 바스티앙의 마음을 온통 빼앗고 있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데데는 그것을 보지 말라는 몸짓을 했다. 바스티앙이 두목의 눈을 보려고 하자 그 눈과 어렵지 않게 시선이 마주쳤다. 진갈색이고, 동공이 열려 있다. "마약을 하고 있구나." 하고 순간적으로 그는 생각했다. 새로 온 남자는 먼저 입술을 적시고는 냉랭하고 그러나 기분좋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보짓을 했단 말이지 ? " 바스티앙은 약간 미안하다는 몸짓을 했다. "전혀 예상지 못한 일이라서……" "흠……" 두목의 몸은 왼쪽 손으로 허리에 꼭 대고 있는 지팡이에 의지되고 있었다. 겨드랑이에서 축 늘어져 있는 오른손이 갑자기 휙 하고 올라갔다. 그 손은 바스티앙의 따귀를 마음껏, 그야말로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의 힘으로 후려갈겼다. 바스티앙은 덤벼들었다. 그러나 한스와 데데가 벌써 그를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이놈이 ! " 하고 바스티앙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상대는 눈썹도 깜짝이지 않으며, 전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리고 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래, 얼마든지 물어봐라 ! " 하고 바스티앙은 거칠게 대답했다. "내게 말도 하지 않고 끔찍한 일을 시키다니 ! 너희들이 장치한 폭탄으로 나도 날아가 버렸을지도 몰라 ! "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하고 두목은 침착하게 받아서 말하고는 휙 등을 돌리고서 걸어가 오스메가 정중하게 악으로 밀어주는 큰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네가 폭탄에 날아가 버리지는 않아." 하고 단정하게 의자에 자리잡으면서 두목은 말을 계속했다. 이 대답은 바스티앙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풀어 줘라. 이제 얌전해지겠지." 경호원들은 그 명령에 따랐다. 바스티앙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잘 알고 있겠지, 지금 어린애 하나가 폭탄을 껴안고 있다는 것을 ? "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자리에서 내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야.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것이 네가 그 공을 넘겨주어야 할 인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나도 이렇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잖소 ! 그 지긋지긋한 스탄이라면 제약소와 함께 날아가 버렸으면 하고 기쁜 마음으로 빌고 싶은 심정이오. 그러나 폭탄을 어린애가 갖고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되는 거 아뇨 ? " 두목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도 좋은 점이 있구나, 바스티앙 ! 그렇게 보면 제법 인도적인 감정이란 것도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고는 하지만 네가 해온 장사와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가 않아." 바스티앙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난 벌써부터 그만두고 싶었소." "그랬군. 꽤나 무서웠던 모양이지 ? " "스탄 말이오 ? 그야 무서웠지." "그래, 그런 점은 있지 ! " 하면서 두목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동감을 표시했다. "우리들도 그놈을 무서워하거든. 그래서 그 폭탄을 사용해서, 그것으로 네게나 우리에게나 만사를 멋지게 처리하려던 것이었어.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너는 스탄이 무섭다고 했어. 그것은 잘 알겠어. 그럼, 나는 어떤가 ? " 바스티앙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었다. "실은 그것에 대해서는……아직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소. 나는 그 불운한 어린애 일만이 머리에 가득차 있어서……" "어린애는 지금으로서는 조금도 걱정이 없어." "무슨 말이오, 전혀 걱정이 없다니 ? " "폭탄 말이야." 갑자기 분노가 바스티앙의 가슴에 불끈 치밀어 올라와서 그는 악으로 튀어나갔다. 경호원이 당황하며 달려들었으나 그는 힘껏 갈겨 버렸다. 그리고 상대가 불시에 허를 찔려 비틀거리는 틈에 그 권총을 빼앗아 무표정한 자세를 하고 있는 두목에게 정확하게 겨누었다. "자, 한 사람도 움직이지 마라. 이렇게 되었으면." "당했군." 패배를 인정하는 투로 두목이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 " "경찰에 알리는 거다." "저런. 한스에게 들은 대로 그것이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인 모양이구나. 오직 그것만이. 여하튼 내게는 상당히 고약한 방법이야." "하는 수 없지. 그 어린애의……" 두목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자, 끝까지 말하게 해다오. 내가 지배하는 조직의 강점은 그것이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지. 경찰은 나라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어. 이것은 가능한 한 우리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야. 제발 그렇게 해주면 좋겠는데. 대신 네가 걱정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서로 연구해 보기로 하면 어떤가 ? " "무척이나 겸손하게 나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진담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데." 하고 말장난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바스티앙은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 유리한 입장은 나다. 말만 번지르한 가장(假裝)이나 말없는 약속 같은 것에 속아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너무나 피곤해서 손발, 그리고 머리까지도 녹초가 될 정도였으나 그는 완강하게 버티고 동요되지 않았다. 두목은 아주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믿어 주지 않는 것 같군.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 결국 너는 나와 타협하게 될 거야." "무엇 때문에 ? " "모처럼 용감하게 반항해 봤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가 응하지 않는 한 너는 여기에서 나갈 수가 없어. 문단속은 자동장치로 되어 있고, 너는 열 수 있는 방법을 모르니까." 바스티앙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서 마침내 문의 손잡이를 뒷짐손으로 쥐었다. 손잡이는 헛돌았다. "창문." 하고 헐떡이듯 그가 말했다. "네가 창문에 닿기 전에 우리는 안전장치를 잠가 버릴 거야. 어이, 아드리안 ! " 오스메는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는 단추를 누르려고 했다. "움직이지 마 ! " 하고 바스티앙이 소리쳤다. 상대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단추를 꾹 눌렀다. 길고 가는 틈새가 있는 금속 셔터가 모든 창문을 막았다. 바스티앙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해골 선생이 이빨을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한스는 태연했다. "약간 주의 말씀을 드리는 걸 잊어버렸군, 바스티앙." 하고 두목이 말했다. "네가 들고 있는 권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지 않아. 데데란 놈은 워낙 솝씨가 서툴러서 총알을 재지 못하게 해놨지. 누군가에게 상처라도 입히면 곤란하거든.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하며 느긋한 자세로 셔터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도 그저 약소하나마 경계하기 위해 한 것뿐이지." 그가 신호를 하자 한스가 걸어와서 바스티앙의 손에서 아무 소용도 없는 그 권총을 빼앗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자, 앉아……" 바스티앙은 기계적으로 그 말에 따랐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네게 엄한 처벌을 내릴 수도 있게 되었어. 동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그것은 그만두기로 하지. 나는 난폭한 짓을 매우 싫어하거든. 그리고 단단하게 뭉쳐 있는 우리들의 가족으로선 처벌이라면 단 하나뿐이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네 마음에는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만……안 그런가, 여러분 ? " 오스메를 선두로 모두가 일제히 비굴한 웃음소리를 냈다. "자, 그렇다는 말이지. 어때, 의논해 볼 생각이 있나 ? " 바스티앙은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두목은 말을 계속했다. "그 어린애에 대해 우리들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이야. 나도 어떻게 하든지 그 아이를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거든. 그러나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겠나 ? " "어떻게 하면 ? " 하고 바스티앙은 최후의 용기를 짜내서 흉내를 냈다. "나는 그 어린애를 몰라. 경찰만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 애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경찰이란 것은 모든 수가 끝난 경우의 방법이고, 또 나는 그 수법은 쓰고 싶지 않아.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지금으로선 그 어린애는 별로 걱정할 것이 없어……그러니까……특별히 바보 짓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것만 없다면 밤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시계장치가 없다면 ? " "그보다도 훌륭한 장치가 되어 있어. 네가 설명해 주어라, 한스……" 한스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진다. 분명히 자신만만한 부문이니까. "접촉온도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 ? " "모른다." 한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딱 하고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다. "자동온도조절기는 ? " 바스티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고 한스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말하면 약간 단어가 정확하진 않지만 뭐 그렇다고 해두지. 공의 내부에는 플라스틱 다이나마이트 500·짜리 막대가 반창고로 붙여져 있어. 그리고 온도계가 작은 건전지 하나에 코드로 연결되어 있지. 온도계가 13도가 되면 접촉이 단절되고 전지가 스파크를 일으키는 거야. 바로 그때 폭탄이 터지는 것이지……" 바스티앙은 희미하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아무래도 그 말이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었다. 오스메가 또 하나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우리들은 정확히 생각해서 조절해 놓았어. 오늘은 밤이 되면 기온이 10도 이하로 내려갈 거야." "우리들 생각으론 · 10· " 하고 두목이 덧붙였다.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대체로 22시쯤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기계를 무겁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런 장치로선 절대적인 정확성이라는 것은 보증할 수 없어. 그러나……오차의 폭은 그렇게 크지 않아. 아마도 폭탄이 터지는 것은 14도에서 12도 사이라고 말하면 틀림없겠지. 그렇게 본다면 아직 사태를 검토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거야. 어때, 우리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는 것이 ? " 바스티앙은 몸짓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제 9 장 더러워진 것을 씻어내고 어머니가 머리에 빗질을 해준 다음 클로드는 오늘의 전투에 대해 모두 말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대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조차도 모르겠어. 이 아이가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다 하다니 ? 아버지가 있으면 그런 것을 분명하게 판단해 줄 텐데,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나는 이 애가 어디라도 잘못되지나 않을지 언제나 걱정만 되어서 항상 오들오들 떨기만 하니. 약간만이라도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만 허둥지둥 당황해 버리고 게다가 나는 너무나 지나치게 눈물을 보였어. 내가 불행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돼.’ 문득 깨닫고 보니 자기 발밑에서 얌전하게 앉아 있던 클로드가 이야기를 끝낸 뒤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마치 기력이 다 빠져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클로드, 어떻게 된 거니……" 클로드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눈을 떴다. "왜 그래, 엄마." 소년은 좀더 편안하게 고쳐 앉더니, 머리를 양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또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을 못 잤니, 어젯밤 ? " 클로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려서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 나가 보거라. 자, 어서. 그렇게 하면 잠도 깰 거야." 소년은 느릿느릿 입구 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베르나르가 완전히 흥분한 모습으로 깡총거리고 있었다. "지로쿨 아주머니, 전화예요." 드니즈는 일어서면서 문득 입에서 나오려고 하던 질문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클로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 아이는 아무런 스스럼도 없이 물었다. "아빠에게서야 ? " "응, 아저씨에게서……" 벌써 어머니는 두 소년 악을 지나쳐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소년들은 그 뒤를 따라갔다. "전화가 먼 곳에서 걸려왔니 ? " 하고 클로드가 물었다. 베르나르는 하마터면, "아니야." 하고 대답할 뻔했다. 그런데 드니즈가 급히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클로드의 보호자인 자기로서, 이런 때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꼈다. "니스에서."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는 둘러댔다. 그는 어쩐지 지로쿨 부인이 자기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내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기 친구를 보호해 주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말없는 약속이라도 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은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려둔 채 그대로 있는 전화는 알파이야르그 댁의 입구 근처에 있었다. 드니즈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쥐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는 이제 목이 잠겨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아,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고 있었다. 전화는 직·직·하는 소리를 냈다. "드니즈 ? " 가엾은 아내는 그대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조용히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클로드의 눈악에서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예, 마르크, 저예요." "무사히 도착했는지 궁금해서. 내가 보낸 소포 말이야." "당신의 소포 ? " "축구공 말이야." "아아…… ! 도착했어요." 클로드가 제발 한 순간만이라도 눈을 딴 곳으로 돌려 주었으면 ! 그렇게 해준다면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날 수 있으련만…… "어떻게 되지는 않았겠지 ? 거기는 별일 없겠지 ? " 그 사람 쪽에서도 어색한 말투였다. "별일없어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런데, 음……괜찮다는 뜻이지 ? 필요한 것은 없어 ? " "네, 고마워요, 별로." 클로드가 그녀의 스커트를 잡아당겼다. "나에게도 말하게 해줘……" 그녀는 하마터면, "귀찮게 하지 마." 하고 클로드를 때려줄 뻔했다. 아아, 마르크와 두 사람만 있고 싶다. 남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 칠칠치 못한 심장의 고동소리를 진정시키고, 이렇게 약한 것도 보이고 싶지 않다 !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이리도 어려운 걸까 ! "아직 듣고 있어, 드니즈 ? " "네……" 아아, 그리고 또 간단한 한마디 말로만 대답하고 싶지도 않다 ! "클로드는 건강하고 ? " "네……저,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어쩐지 날치기를 당해 버린 것도 같고, 동시에 안심도 되는 기분으로 그녀는 수화기를 클로드에게 넘겨주었다. 클로드는 흥분을 해서 송화기 속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 10· "아빠, 아빠예요 ? " "응,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소리를 치지 말거라." "그래도, 아빠, 먼 곳에 있잖아요. 날씨는 좋아요, 코트 다쥘 해안(니스, 칸 등을 포함한 남프랑스 지중해안 일대의 속칭) 말예요." "코트 다쥘 ? " "니스 말예요. 아빠, 니스에 있는 거죠 ? " "아빠가 ? 아아, 응, 물론이지. 훌륭한 날씨다. 축구공, 좋았니 ? " "아, 네. 무척 좋아요, 아빠 ! 아빠, 모르지 ? 벌써 공치고 왔어요, 베르나르와……" 드니즈는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흘끗 돌아다보기가 바쁘게 그녀는 알파이야르그 부인의 위로 하는 듯한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아들이 오늘 오후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동안 꼼짝 않고 흐느끼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쑥 커졌다. 그의 뚱뚱한 몸집이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귀찮게만 하는 존재들인가, 어른들은 ? 어째서 클로드에게 알려주지 않는 걸까, 아버지가 파리에서 전화를 걸어왔다는 걸 ? ’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되찾아왔어요. 알겠어요, 아빠 ? 그리고는 쏜살같이 뛰었어요. 그렇지만 놈들을 실컷 때려눕혀 줬지 ! 예, 뭐라고요…… ? 그런데, 아빠, 아빠, 이제 곧 돌아와요 ? " 전화 저쪽에서는 마르크 지로쿨이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어가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 꼬마 녀석도 제법 사내 녀석답게 되어가고 있구나.’ 마지막 질문은 그를 약간 어색하게 했다. "금방은 아니다. 아빠는 아직도 일이 많으니까."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화가 나서 자기 혼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파리를 지나가게 될 때에는……" 열쇠구멍 속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갑자기 당황해 하면서 괜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고, 그것을 즉석에서 의식하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전화기의 송화구를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되도록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하려고 했다. "안녕, 제르멘. 지금 곧 그쪽으로 갈께.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었어. 오늘이 어린애의 생일이거든." 말을 끝내는 순간에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제르멘과 자기와의 사이에는 어떤 것이라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클로드 ? 잠깐만 다시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엄마를 바꾸어 주지 않겠니 ? " 그러나 클로드 쪽에서는 이제 전화가 끝났다고 생각하고는 끊어버린 뒤였다. 그는 매우 난폭하게 수화기를 걸었다. 제르멘은 어느덧 의자에 앉아서 얼어붙은 듯한 억지웃음을 입가에 뛰우고 있었다. 마르크 지로쿨은 그녀를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눌러 찌부러진 듯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 10· "마르크, 역시 어린애를 잊을 수가 없군요 ? "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거야 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이지요." 하고 그녀는 슬픈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원망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녀는 불안해진다. 그의 대답이 시간이 걸리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후회하고 있어요 ? " "으응, 제르멘." 하며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양손을 잡으면서 그는 진실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저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았을 뿐이야." "그러나 역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일어섰다. 자기의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도 곧 그녀에게 눈치채여서, 자기로서는 다만 감정이 솟는 대로 했을 뿐 별로 그것을 부채질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책임감 같은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해서 화가 치밀었다.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야. 클로드가 오늘 길거리에서 싸움을 했다는군. 그리고 또……이상한 은어 같은 것을 사용하고……그런데 뭐 그것도 괜찮을지도 모르지. 그 아이도 이제 당당한 사내 녀석이니……" 그녀는 그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를 빨리 끝내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로 지금 나이 때가 남자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어느쪽에서도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제르멘이 얼어붙은 공기를 풀어보려고 웃는 얼빠진 웃음소리가 마르크에게는 오히려 화를 치솟게 하는 듯이 느껴졌다. 알파이야르그 부인의 초대로 클로드는 간식을, 드니즈는 차를 대접받고 있었다. 알파이야르그 부인은 대화가 위태로운 화제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의 공부와 물가고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데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갑자기 클로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한쪽 손으로 배언저리를 누른다. "나……" 하면서 그는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베르나르가 아무것도 말하면 안된다고 한 것이 떠올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는, 그야말로 완전한 스파르타의 전사 같은 태도로 다만 이렇게 말했다 · 10· "내 뱃속이 꽉 차 있어. 그것뿐이야." 드니즈는 그 말에 속았다. 그러나 매우 여자답고 더구나 현명한 알파이야르그 부인은 그 말을 그런 식으로는 듣지 않았다. "소화제를 먹이는 것이 좋겠어요." 하고 그녀는 결재를 내리듯이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클로드는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베르나르의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아보니 마치 불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는 이제 단 한 가지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영웅주의를 포기하고 침대로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다. 어머니가 불안스러운 듯, "어떻게 된 거냐, 애야 ? 엄마에게 말해 봐라. 어디가 아픈지……" 하고 상냥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의 기력은 사라져 버리고, 굳은 결심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되고 나니 이제 상냥스러운 말에 매달려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맥이 탁 풀렸다. "배가 아파." 놀라 외치는 소리가 그 주변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렴풋이 자기 방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식했다. 잠자리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키스를 받고 나니 그는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하지만 거의 말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주위의 모든 형상이 여전히 어렴풋이 흐릿하고, 모두의 목소리가 대단히 먼 곳에서 말하는 것 같이 아련하게 들렸다. 엄마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 가서 전화를 거세요." 하고 알파이야르그 부인이 권한다. 그래서 모두가 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자기 혼자만이 이렇게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스럽고 당황해지기 시작했다. 환자는 살며시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방안의 가구나 낯익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 하나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없었다. 아니, 그렇지만도 않다. 그의 축구공 · 10· 그것이 그의 마음에 몽롱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둥근 공은 때때로 럭비공 모양으로 타원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훌륭한 친구였다. 제 10 장 아드리안 오스메는 그의 테이블에 갓이 씌워져 있는 전기 스탠드에 불을 켜놓고 있었으나, 넓은 방안은 거의 전부가 침침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광선의 둘레 안에 들어 있어서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바스티앙이 들고 돌아온, 아무런 쓸모가 없는 축구공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박자를 맞추듯이 톡톡 규칙적으로 그 공을 두드리고 있는 두목의 지팡이 끝뿐이었다. 바스티앙은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의자의 팔걸이를 꽉 쥐고 있었다. ‘이 녀석은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특별한 감각을 갖고 있단 말이야 ! ’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얼른 끝내 주지 않고, 나쁜 놈 ! ’ 불구자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아까보다 더욱 심하게 절룩거렸다. ‘한바탕 연극을 하려는 것이겠지.’ 하고 바스티앙은 가슴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자세가 되려고 했다. 그에게 불리한 것은, 시간은 자꾸 흘러감에 따라 그는 격심하게 반항적으로 나가고 싶은 것을 눌러 참아야 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몸을 떨었다. 지팡이 끝으로 두목은 금속제 문짝을 두드렸다. "어때, 들었나 ? " 하고 두목은 간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번에는 셔터로 막혀 있는 유리창 쪽으로 절룩거리고 걸어가서, 또다시 지팡이 끝으로 두드렸다. "대단한 돈이 들어간 주택이로군." 하고 그것에 박자를 맞추듯이 바스티앙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참으로 큰 재산이지 ! 전부가 자동장치이니까. 이 집은 그야말로 완벽한 요쇄란 말이야." 그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 10· "그런데 주택에다 이렇게 엄중한 방어시설을 하는 것을 왜 내가 승낙했는지 아나 ? " "글쎄, 모르겠는데." 하고 바스티앙은 솔직하게 말했다. 두목은 다시 팔걸이 의자로 돌아가서 털썩 주저앉더니, 지팡이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고 그 손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바스티앙은 도저히 그의 시선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오스메와 두 경호원은 마치 잠이라도 든 것 같았다. 침묵이 답답하게 덮쳐누르고 있었다. "내 생각엔……" 하고 바스티앙은 말을 계속하려다가 잠깐 헛기침을 하고서 목소리를 가다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 장사에 크게 나설 모양이군. 그리고 다른 경쟁상대를……없애버리려고…… ? " "그래, 맞아 ! 내 계획은 굉장히 큰 거야. 내 뒤에는……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것이 도사리고 있지. 세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야. 너도 이 조직 안에서 한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하는데, 바스티앙. 아주 적당한 역할에다가, 우리 조직은 머지않아 완전한 독점사업으로 뻗어나갈 게 확실하단 말이야." 바스티앙은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두목이 달무리가 걸쳐 있는 듯한 눈매로 아직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듯이 쏘아보았다. "아, 잠깐만 나에게 끝까지 말하게 해주게. 내가 어째서 너를 탐내는지 알고 싶다는 건가 ? 그것은 지극히 간단해. 스탄이 나에게는 방해물이야. 네가 있어 준다면 손쉽게 그 놈에게 손을 쓸 수가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하지만 ‘아르메니아 인’에 대한 공격의 첫발을 실패해 버렸다는 것이지 ? 아무런 상관없어. 다시 다른 공을 가지고 가면 되니까. 네가 승낙한다면 준비는 지금이라도 즉시 시킬 수가 있다. 먼저 축구공보다 다소 무거워질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가 않아. 너는 그것을 지하실에 갖다 주고서 늦게 간 것에 대한 변명은 적당히 알아서 하면 돼……어때, 이렇게 하는 게 ? " "글쎄, 그것보다……" "아니, 알고 있어. 그 어린애의 운명이 걱정스럽다는 것이지 ? " 바스티앙은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느닷없이 벌떡 일어섰다. "아까 약속하기론 가엾은 그 어린애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잖소." "아니, 잠깐만. 나는 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는 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걸세. 아무런 죄도 없는 불쌍한 그 애의 불행을 나는 참으로 마음속으로 슬퍼하고 있어. 그러나 우리 조직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은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고 있는데, 그것을 배반할 수는 없지." 바스티앙은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 무엇을 하라고 하는 거요 ? " "나의 제안은 이런 걸세. 우리는 너를 여기에서 나가게 해준다. 두 시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사이에 너는 그 어린애를 찾아내서 그 공을 찾아내는 거야. 그런 다음 그것을 부숴버리든지, 장치를 빼버리든지 그런 것은 어떻게 해도 좋아. 한편, 그 사이에 우리들 쪽에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또 한 개의 폭탄을 준비해 둘 거야. 8시에 너는 이곳으로 돌아와서 그 물건을 ‘아르메니아 인’인 스탄에게로 갖고 가." 데데가 악으로 뛰쳐나왔다 · 10· "두목 ! 이 놈은 경찰에 알릴 거요." "뭐라고, 해골 같은 자식아 ! " 하면서 바스티앙은 흥분해서 사납게 욕을 퍼부었다. "얌전하게 꺼져 버려 ! " 발끈한 데데가 한 발 악으로 나섰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호주머니 속을 더듬더니 잭나이프를 꺼냈다. "성질 좀 부리지 마 ! 진정해라, 데데 ! " 하고 두목이 고함을 쳤다. "이 자식이 나한테 해골 같다고 하잖습니까 ? "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 그 말이 틀림없잖아. 그리고 이 손님은 위세가 당당해. 그래도 여기 있는 나에게 불구자라고 부르지 않는 걸 보지 못했어 ? " 바스티앙은 또다시 몸이 떨렸다. 불구자라는 말이 입에서 나왔을 때 두목의 눈속에서 번쩍하고 잔인한 빛이 번뜩이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절름발이는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았다. 슬슬 약효가 떨어져 가는 모양이다. "어떤 의미로는 데데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야, 바스티앙. 만일에 네가 경찰에 붙잡혀 버리면 대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 " "어떻게도 되지 않겠지……나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어린애에 대해서 말할 것 아닌가 ? 그렇게 되면……" "그렇겠지. 그러나 폭탄을 내가 만들었다고 할 거요. 그런 것쯤은 쉽게 속일 수가 있소. 아까 내게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으니까." 두목은 자기 부하들을 돌아다보았다. "어때,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자네들 ? 나는 이제 이 젊은이를 믿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미친 놈을 ! " 하고 한스가 중얼거렸다. "두목 ! " 하고 데데가 소리쳤다. 여기에서 나가면 그것으로 마지막이에요. 이놈은 곧바로 경찰을 불러와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런 일은……" 하고 두목은 그 말을 막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너는, 아드리안 ? "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만일 이 운반꾼을 믿을 수 있다고 해도, 경찰은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한 놈이라도 혓바닥이 돌아가게 할 겁니다." 바스티앙은 두 손을 모으고 간곡히 말했다. "나는 남자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소. 당신들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그 대신, 제발 좀 빨리 끝내 주시오. 당신도 조금 전에 말했듯이 사소한 잘못이나 엉뚱한 일이 벌어지면 그 폭탄이 얼마나 많은 죄없는 희생자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단 말이오." "희생자는 언제나 죄없는 인간이지 ! " 하고 두목은 단정하고는 말을 이었다. "다만 이것만은 덧붙여두겠는데, 이것은 너보다도 우리 동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야. 바스티앙, 첫째로, 경찰 문제는 사정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것뿐이고, 그런 건 사실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만일 어떤 일이 일어나든간에 우리들은 자클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이것만은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 " 말투는 냉랭하고 거칠었다. 바스티앙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괜찮소, 그 점은 안심하시오." "8시에는 스탄에게 보낼 공을 가지러 돌아올 것. 그리고 그 시간 이내에 그 어린애를 네가 찾아내는 게 좋겠다는 거지 ? " 하마터면 거짓 약속을 하려다가 바스티앙은 잠시 망설였다. 자기 혼자서 어린애를 찾아낸다고 ?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 역시 예상했던 대로 경찰에 가게 되겠지. 그러나 두목을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클린은 내가 출옥하는 날을 기다려 주겠지. "확실히 약속하겠다. 남자의 약속이다." 두목은 지팡이에 의지하듯이 일어나서 쩔룩거리면서 바스티앙에게로 다가왔다. "좋아. 이야기는 결정되었다. 너를 믿어 보기로 하지." 나머지 세 사람은 펄쩍 뛰었다. "저놈은 우리들을 팔아먹을 게 확실해." 하고 신음하듯 한스가 말했다. "이봐요, 조르주 ! " 하고 오스메가 외쳤다. 그들의 말이 어디서 부는 바람이냐는 듯이, 두목은 마치 어릿광대 배우는 저리 꺼지라는 듯이 일부러 더 크게 쩔룩거리며 천천히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서는, 그곳의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잘 부탁하겠다, 바스티앙. 8시에 기다리겠다." 절망에 잠겨 있던 바스티앙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문이 열렸다. 그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두목은 부하들을 돌아다보았다. 콧망울을 좁히고, 몽롱한 눈매는 이제 조금도 사람 같지 않았다. 그리고 온몸에는 땀을 분출할 것만 같은 증오의 빛이 가득차 있었다. "어째 그렇게도 어리석단 말인가 ! 그대로 내버려두었더라면 그놈을여기에서 요리를 해서 점점 더 일을 성가시게 만들 뻔했잖아 ! 나는 시간을 벌려고 한 거란 말이야. 대낮에 해치워 버리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놈들은 내 뜻도 모르고 쓸데없이 참견들이나 하고 ! " "쫓아가게 해줘요, 두목 ! " 하고 애가 타서 흥분한 데데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소형차를 타고 아르쟁투유 대로 부근에 잠복해 있도록 해, 한스. 너는, 데데, ‘제비’를 타고 콜롬브 가(街) 쪽으로 가. 그렇게 하면 놓치지 않을 거야." "도중에 녀석에게 발견되면 ? " "그렇게 되면 놈은 경계를 하고 옆길로 도망가겠지. 그러나 어차피 때가 되면 되돌아와서 길거리로 나오게 될 거야. 어쨌든 처치해 버려. 그런 위험한 미치광이 자식은 ! " 그 목소리는 분노 때문에 날카롭고 높게 갈라져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그는 살인자들의 팔을 붙잡았다 · 10· "해치운 다음 난도질하고 돌아와, 알겠지 ? 반드시 난도질하고 돌아오기 바란다 ! " 오스메가 그것을 말리려고 했다. "아니, 잠깐, 조르주……" "입 다물고 있어, 너 같은 것은 ! " 하고 두목이 호통을 쳤다. "어서 가, 너희들은." "조르주, 정신 차려요, 부탁이오. 그런 짓은 그야말로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거요." "이 녀석의 말은 듣지 마. 자, 빨리빨리 가……" 목이 잠긴 듯 말소리가 끊어졌다. 두 남자가 나가자 오스메는 그들 뒤의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리고 테이블 쪽으로 가서 종이 봉지 하나를 들고 왔다. 또 한 사람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더니, 상대가 볼 수 없도록 얼굴을 돌리고서 가루약을 빨아들였다. 다시 정면으로 돌아섰을 때 그의 손가락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지 ? 내가 무슨 어리석은 짓이라도 저질렀다는 건가 ? " "그놈 몸을 난도질하고 오라고 지시해 버렸소. 이제는 뒷일이나 귀찮게 되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셔터의 틈새로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도망친 남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바스티앙은 규칙적으로 코로 호흡을 하면서 계속 뛰었다. 이제는 결국 내구력 문제이다. "어디라도 좋아. 경찰 모습을 보면 즉시 알려야지." 공교롭게도 경관의 모습은 눈에 뛰지 않았다. 아르쟁투유 구가도까지 가서 그는 잠시 망설였다. 왼쪽으로 가면 파리에 가까워지게 되지만, 혹시 두목이 덫을 놓았다면 틀림없이 그쪽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는 오른쪽으로 가기로 하고 점점 발걸음을 크게 해서 뛰었다. 주느빌리에의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자클린을 위해서 경찰의 보호만 요청해야지. 그는 그 옛날 경기장에서 뛰던 것 같이 규칙적인 주법으로 달리면서, 오래간만에 경험하게 된 달리는 리듬으로 인해 추억이 되살아나 그 옛날의 생활이 가슴 죄어지도록 느껴지는 것이었다. 문득 엔진 소리가 들려와서 그는 걱정이 되어 길섶으로 비켜서서 돌맹이나 쇠부스러기가 쌓여 있는 사이를 지그재그로 누비며 달려갔다. 될 수 있는 대로 방향이 틀려지지 않게 조심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숨이 차오기 시작했다. 하여튼 왼쪽으로 돌아가면 안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뒤쪽에서 자동차가 지나갔다. 그래, 그것이 만일 아무런 위험이 없는 보통 운전사였다면 ? 그럼, 나를 태워다 줄지도 모르는데……그는 갑자기 격심한 초조감을 느끼고서 애초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런 일이 현실이기에는 너무나도 지나치게 이야기가 그럴듯하다. 이 사회에서는 관대한 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목은 연극을 한 것뿐이다 ! 도로에 나오자 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멈추어서서 황량하고 음울한 주변의 풍경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 ? ’ 그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다시 뛰어갔다. 멀리에서 좋은 징조를 축하라도 하듯이 주느빌리에의 하역장 쪽에서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은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곳에는 생활이 있다. 사람들이 있다. 틀림없이 그 애를 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도와줄 사람이 있으리라. 그는 무의식중에 속력을 빨리했다. 파리에서 불과 몇 ·· 정도 떨어진 곳인데, 자기 이외에는 산 사람의 인기척조차 없다니,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 그는 돌부리에 걸려서 쓰러질 뻔했다. 그의 마음은 불같이 조급했다. 발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가슴은 마치 풀무 같은 숨결이었다. 나머지는 아직도 100·나 150·……이제 대로(大路)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면서 그는 다시 대여섯 걸음쯤 나가다가 드디어 기진맥진하여 멈추어섰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사람인가 ? 그렇다면 당장 알려야 한다……간신히 고개를 돌리고 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었나 ? ’ 그런데 또 무슨 소리가 났다. 바스티앙은 가슴이 철렁하여, 무의식중에 큰소리로 부르짖을 뻔하면서 온몸이 움츠러지는 듯한 이 공포를 털어버리려고 했다. 이제 한 번만 더 힘을 내면 길거리로 나갈 수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쫓기는 듯한 공포감을 느끼고서 홱 악으로 뛰어나갔다. 총소리와 동시에 총알이 그의 허리에 맞았다. 한스는 그가 그대로 두세 걸음 걸어가다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마치 ‘토끼’ 같았다. 한스는 지금까지 한 번도 사격을 실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냥감이 다시 일어나서 비틀거리면서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오른손 팔꿈치에 무릎을 대고서 조심스럽게 표적을 조준했다. 바스티앙은 이쪽으로 돌아서서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두 번째 총알을 맞은 그 몸은 처음에는 털컥 악쪽으로 구부러지더니, 곧바로 뒤로 크게 젖혀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쓰러지더니 꿈틀하고 몸이 경련을 일으킨 뒤에 머리와 양팔을 아르쟁투유 가도의 도로 위에 내놓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일이 좀 잘못되었는데. 사람들에게 내 모습이 발견될 염려가 있어." 하고 한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부근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고, 학교에서 철저히 교육받은 결과로 무슨 일이든 끝까지 결말짓는 기질과, 어떤 종류나 형태의 직업적 양심 같은 것이 자기 몸의 안전을 생각하는 감정에 결국은 이겼다. 그는 지시받은 임무의 마지막 부분을 완수하려고 쏘아죽인 사냥물 쪽으로 다가갔다.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그는 바스티앙의 구두를 벗기고는 단도로 한쪽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잘랐다. 그는 혼자서 빙긋이 웃음지었다. ‘이제 두목도 만족하겠지 ! ’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어서는 순간 신음소리가 바스티앙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 아직도 죽지 않았군." 그가 바지 멜빵 쪽에서 권총을 꺼내드는데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그의 손을 멈추게 했다. 트럭 한 대가 강가의 하역장에서 오고 있는 것이었다. 한스는 그대로 발꿈치를 돌려 도망쳤다. ‘두 발이나 정확하게 명중시켰어. 그것으로 충분해 ! ’ 제 11 장 아르드 발렉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6톤짜리 트럭으로 아르쟁투유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악으로 20시간 정도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고, 다음번 핸들을 잡게 될 때까지는 충분히 하루 반은 쉴 수 있는 예정을 생각하니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주느빌리에에서 화물을 싣고 오는 중이었다. 엔진은 상태가 좋았다. 이제부터 클레르몽 · 페랑(파리 남쪽 420··, 마르세유와의 중간에 있는 도시)까지는 고장이 나지 않으리라. 모든 것이 마치 구슬을 굴리듯이 상태가 좋았다. 그는 이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 말을 그대로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노래하는 사이사이에 끼워넣었다 · 10· "모든 게 마치 구슬을 굴리듯이……" 아직 노래가 끝나기 전이었다. 그의 발은 악셀을 떠나 등뒤 쪽에 싣고 있는 몇 톤이나 되는 상품이 쓰러지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조금씩 힘을 넣으면서 차츰 강하게 밟으며 전진했다. 악쪽 길거리에 어떤 남자가 가로누워 있었다. 술주정꾼인가 ! 설마 이런 장소에. 브레이크가 끽 소리를 냈다. 차축에서 삐걱 소리가 들렸다. 혹시 부상이라도 입고 있다면 누구든 증인이 있는 게 좋다. 그러나 아르드의 눈에 들어온 것은 회색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의 모습이 도로 옆 낮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자동차 비슷한 곳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큰소리로 부르면서 차창 밖으로 손을 뻗고서 흔들어 계속 신호를 보내, 증인이 될 수 있을 그 인물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대로 소형차를 타고 시동을 걸더니 길모퉁이를 돌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재수가 없군 ! " 하고 이탈리아 인은 투덜거렸다. 트럭은 정확하게 쓰러져 있는 남자 근처에서 멎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불의에 사고가 발생할 염려가 없을 정도의 길 폭은 남겨져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승강구 발판 위에 우뚝 서서 둘러보고는, 혹시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이 없을까 하고 계속 근처를 눈으로 찾아보았다. 그는 혀를 찼다. 부근 일대에는 전혀 사람의 모습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문자답했다. 이 불행한 사람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있는 것일까 ? 벌써 날은 저물어가고, 밤이 되면 머리를 치일 염려가 다분히 있다 ! 그렇지 않으면, 혹시 이미 죽은 것일까 ? 쓰러져 있는 몸 부근에 검붉은 얼룩 같은 것이 먼 눈에도 확연하게 보였다. ‘어떻게 한다 ? ’ 마음속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벌써 차도를 한달음에 가로질러 누군지도 알 수 없는 그 남자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부상을 당한 남자의 입 언저리에서 피가 섞인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괴로움에 헐떡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더니, 힘없이 가냘프게 떨었다. "저런 ! " 하고 발렉은 중얼거렸다. 곧이어 노출되어 있는 한쪽 다리와 발뒤꿈치의 칼자국을 보고는 목에 걸린 것 같은 탄식소리가 나왔다. "참혹한 짓을 당했구나 ! " 그는 남자의 머리를 들어올리려고 했다. 그랬더니 양손에 피가 엉겨붙어서 자신도 모르게 오싹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견디어냈다. 양겨드랑이에 손을 밀어넣고 껴안듯이 한 다음 질질 끌어서 바로 옆에 있는 도로표지판 기둥에 등을 기대어 놓았다. 바스티앙이 눈을 떴다. "폭탄 ! " 하고 마치 하품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로 검붉은 액체를 왈칵 토해 내면서 그가 말했다. 발렉은 피가 튀는 것을 피하려고 뒤쪽으로 물러섰다. 그는 이제 머리가 이상하게 될 것만 같았다. 변함없이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쓸데없이 말려들지 않으려고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곳에서 개처럼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을 내버려두고 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들을 어지간히 많이 볼 수 있었지, 에티오피아 전쟁 때에.’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한 번은 제나로가 처참히 당했었고……’ 양다리에 꽉 힘을 주고 버텨서서 그는 남자의 몸을 안아올려 어깨에 걸쳐멨다. 그리고는 그 끔찍한 발뒤꿈치의 상처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리고서, 잔걸음으로 마치 중앙시장의 인부가 고기를 운반하는 듯한 자세로 뛰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차에 도착해서는 좌석 위에 부상자의 몸을 기대어 세웠다. 그때가 되어서야 남자가 중얼거렸던 말이 문득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안되겠군 ! 폭탄이라고 했겠다 ! " 그는 황급하게 남자의 몸을 뒤져보았다. 어떤 일도 없다고 단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람이 정말로 폭탄을 갖고 있다면 그 ‘공포의 보수’라고 하는 영화에서 자기와 국적이 같은 이탈리아 사람 폴코 루리와 똑같이 자기도 트럭과 동시에 쾅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BS라는 머리글자를 새겨넣은 작은 칼하고 얼마 안되는 잔돈뿐이었다. 발렉은 그것들을 운전대의 서류 주머니에 쓸어넣고 덮개가 있는 트럭의 큰 차체를 한 바퀴 돌아서 운전대로 올라갔다. 바스티앙의 머리가 그가 앉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바스티앙의 어깨를 운전대 뒤쪽 칸막이에 기대어 놓고서 살며시 밀어 겨우 그 몸을 똑바로 앉게 했다. 움직이는 순간에 바스티앙은 또 피를 토했다. ‘또 시끄럽겠구나, 대장이 ! 어이구, 지겨워 ! 도착하면 재빨리 깨끗하게 씻어놔야지.’ 그의 발이 클러치 페달을 밟자 엔진소리가 점점 작아져 가는데, 손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당신, 무슨 말을 했소 ? " "폭탄……" 하고 바스티앙은 또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 폭탄이라고 ? 발렉은 문득 ‘일요통신’의 표지 같은 것에 실려 있었던 현란스러운 그 옛날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습격사건 사진을 기억했다. ‘폭탄이라니 ! 세상에 ! 나도 어지간히 재수가 없구나. 이런 일에 부딪치다니 ! 그리고 마지막에는 폭탄이 문안드리고. 이거 예삿일이 아닌데. 그런데도 만사가 구슬을 굴리는 것 같다고 했으니 ! 이것 때문에 또 욕만 얻어먹게 생겼어 ! ’ 손은 계속해서 클랙슨을 누르면서 그는 유성 같은 기세로 르두트의 십자로를 뚫고 갔다. 그를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산타 리타 데 카스키아(이탈리아 중부, 온브리아 현의 카스키아 마을에서 출생한 성녀) 신의 가호가 있었다. 운전사들의 요란한 욕지거리나 화풀이 대신에 일제히 울려대는 뒤쪽의 경적소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는 무사히 아니에르 시(아르쟁투유에서 가장 가까운 파리 입구 아니에르 문에 근접한 교외도시)에 들어섰다. 아르드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파리다 ! 이 불쌍한 사람을 파리로 데려다 주지 않을 수가 없지. 산 저쪽의 녀석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상상력이 왕성한 그는 자기의 사진이 신문 제일면에 실려 있는 것이 벌써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이탈리아 인 운전사가 구해 주다……도대체 누구를 말이지, 그런데 ? 무의식중에 그것과 중복시켜서 그는 자기 아내의 완벽한 상식과 응변적인 몸짓으로 장식되는 잔소리를 마음에 떠올렸다 · 10· ‘아니, 아르드, 당신은 경관을 불러올 수도 없었어요 ? 한심한 양반이네 ! 당신이란 사람은 마음이 약해서 머지않아 망하고 말 거예요……’ 그는 자신의 운명에 자기도 모르게 침울해지면서 속도를 늦추었다. 부상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한숨을 흘리면서 악으로 쓰러졌다. 발렉은 흘끗 그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머리가 푹 숙여져 있었고, 조금씩 몸이 기울어지면서 자기 어깨로 기대어 왔다. 얼핏 상처입은 한쪽 발이 또다시 눈에 뛰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려서 공포를 물리치는 주문 같은 저주의 말을 소리내어 외쳤다 · 10· "제기랄, 왜 이렇게 끔찍한 밤일까 ! " 아무래도 외국어로는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는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이탈리아 어의 저주의 단어를 모조리 쏟아놓았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도 생생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사물까지도 말없는 수치를 느꼈는지, 전방의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차를 세우고 손님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더니 심장은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바로 아니에르 문이 있는 지점이었다. 아르드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부상자의 손이 그의 소매를 움켜잡는다. 그는 무의식중에 소름이 끼쳤다. 바스티앙의 눈꺼풀이 몇 번이나 실룩거리고 떨리더니, 이윽고 완전히 눈이 크게 뜨이면서 이상한 모습으로 응시하는 듯한 눈매가 물끄러미 발렉에게로 쏟아졌다. 발렉은 무의식중에 몸을 젖히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 10· "이봐요……내 목소리가 들려요, 응 ? " 천천히 부상자가 입을 열었으나 뻐금뻐금할 뿐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잠시 뒤 발렉은 분명하게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 10· "남자 어린애가……폭탄을……주웠어……" "어어, 뭐라고 ? 남자 어린애가 폭탄을 주웠다고 ? " 그것을 긍정한다는 듯이 바스티앙의 눈이 일단 감겨졌다가 다시 떠졌다. "어떤 폭탄인데 ? " 말을 하지 못하는 부상자는 그 대신 손을 사용해서 혀공에다 둥근 공 모양을 그렸다. 기계적으로 발렉도 똑같이 손을 움직였다. "남자 어린애를." 하고 바스티앙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어깨를 푹 떨어뜨리고 무너지듯이 쓰러져 버렸다. 아르드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그의 몸을 흔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울부짖었다. "어디에 있소, 그 어린애가 ? 이름이 뭐요 ? 장소는, 도대체 ? 이봐 말을 해봐 ! " 바스티앙에게는 그 말소리도 이제 들리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몹시 고통스러운 숨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했다. 발렉은 빈사상태의 남자 입에 귀를 바짝 들이대고는 간신히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것도 같았다…… "당신, 열이 있다고 하는 게요 ? 체온계가 필요하다는 거로군 ? " 잠시 상대는 눈을 떴다. 그 눈에는 무서울 정도로 애를 쓰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는데, 그는 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 10· "서머스타트(자동온도조절기)." "서머스타트 ? " 하고 이탈리아 인은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하, 목욕탕에 있는 것 ? " 틀림없이 그런 모양이다. 그 불쌍한 젊은이는 이제야 겨우 안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뭐라고 뜻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 10· "오늘밤……13도에……" 그 이상은 말을 하지 못해서, 그는 손짓으로 폭발이라는 느낌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손은 중도에서 멎어버린 채 힘없이 늘어지더니, 동시에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파·し" 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봐, 말해 봐, 말을 해 ! 어떤 폭탄이야 ? 어디에 있어, 그 폭탄이 ? 어떤 어린애야, 그 남자 어린애라는 것이 ? "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그의 독백을 중단시켰다. 퍼득 현실로 돌아오자 그는 갑자기 상반신을 차창 밖으로 내밀고는 경관이 있는 곳을 향해서 고함을 쳤다. "알맞게 호루라기를 불어 주었소. 운전대에 죽은 사람 하나를 태우고 있어요." 경관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은 모양인지, 갑자기 달려와서는 오고가는 차들의 소음에 묻히지 않도록 큰소리를 질러댔다. "운전도 제대로 하지 못해, 당신, 응 ? 신호가 푸른색이 된 것도 몰라 ? 자, 빨리 가 ! 빨리빨리 차를 출발시켜 ! " "아니,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이오, 운전대에 ! " "뭐, 뭐라고 ? " "죽은 사람이 있다니까. 사망자가." 하고 발렉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치안의 수호자인 경관은 차의 발판 위로 올라서서 흘끗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아직은 밝은 석양빛이 바스티앙의 옷에 엉켜 있는 피투성이 얼룩을 비추어 주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끔찍한 밤일까 ! " "그렇고말고." 하고 아르드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바로 그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오, 나도 ! " "어디에서 발견했소 ? " "주느빌리에의 하역장 근처에서요. 그 부근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운반하는 중이에요." "아직은 숨이 있는 듯한데. 차를 출발시켜요. 그리고 왼쪽으로 꺾어요. 자, 빨리." "아니, 신호가 빨간색인데, 지금은." "괜찮으니까, 빨리 ! " 양볼을 부풀리면서 경관은 호루라기 소리를 울렸다. 자동차 떼가 타이어가 찢어지는 비명을 울리면서 급브레이크를 걸고는 길을 비켰다. 발렉은 솝씨좋게 커다란 핸들을 움직이면서 차들의 사이를 누벼 겨우 큰길로 빠져나와서는 점점 속도를 빨리 했다. 그 사이에 경관은 도시의 격심한 소음을 뚫고서 요란스럽게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있었다. 클리시 문까지 가자 경관은 발렉에게 잠깐 속도를 늦추라고 신호를 하고는, 차 밖으로 몸을 내밀면서 교통정리로 정신없는 동료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 10· "본서로 보고해 주게. 이 트럭에 부상자가 있어. 이제부터 비셔 병원(클리시 문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네이 대로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갈 테니까." 두 번째 경관은 얼른 긴급전화대 쪽으로 달려갔다. 보고를 받은 바티뇰 경찰서는 부상자 운반에 협력하고, 또 사법경찰에 통보시키기 위해 즉각 경찰구급차를 병원으로 보냈다. 발렉의 차가 막 비셔 병원 악뜰로 들어가려고 왼쪽으로 급커브를 꺾을 때 파리 경찰의 그 특징 있는 쌍클랙슨 소리가 뒤에서 울려퍼졌다. 그리고 거무스레한 색깔의 길다란 차가 그의 차를 뒤따라 병원의 담 안쪽으로 들어오더니, 갑자기 이쪽을 추월하여 악서가며 접수대 건물 악에 정지했다. 한편, 그 사이에 전화에 의한 연락이 사법경찰 통보실에 접수되었다. 통보실 직원은 즉시 단파방송으로 연락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2번, TV 106번 나와라. TV 106번 나왔나 ? " "그래, 나왔다. TV 106번이다."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했다. "부상자 한 사람이 비셔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바티뇰의 구급차가 현장으로 가 있을 거다. 그쪽은 지금 어느 곳에 있나 ? " "오르드네르 가(街)(비셔 병원에서 500· 정도 되는 곳을 동서로 통하는 거리)를 순찰중이다." "그러면 즉시 그쪽으로 가서 우선 검증부터 끝낼 것. 이쪽으로 연락 바람. 사정을 알아볼 것." "알았다. 곧바로 그곳으로 가겠다." 오르드네르 가에서는 치안반의 기동차가 심상치 않은 동향을 느끼게 하는 규칙위반행위인 급선회를 하더니, 갑자기 첫골목길로 구부러져서 경적을 울리며 북쪽으로 달려갔다. 형사 두 사람이 병원 악뜰에 차를 세웠을 때는 바티뇰 경찰서 경관들이 부상자를 운전대에서 내려놓고 들것으로 옮겨서 건물 안으로 운반하는 도중이었다. 트럭 악에는 운전사가 마주쥐고 있는 두 손을 비틀면서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클레르몽·페랑에서는 화물수취인이 내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텐데 ! " 형사 한 사람이 운전사 쪽으로 가고, 또 한 사람은 입원환자 진찰실로 들어갔다. 진찰실에서는 인턴이 한쪽 손으로 부상자의 맥을 짚어보면서, 다른 손으로 부상자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형사가 던지는 무언의 질문에 의사는 약간 입을 오무렸다. "맥은 있어요. 그러나 미약하군요." 또 한 형사가 진찰실 입구에 나타나서 흘끗 눈짓을 하며 동료를 자기 옆으로 불렀다. "이봐, 트레게넥, 좀 묘한 말을 하는데. 저쪽의 저 마카로니(이탈리아 인의 속칭) 애기로는, 부상자가 의식을 잃어버리기 전에 무슨 폭탄이 조그만 어린애 손에 건너가 있다는 듯한 말을 하더라는 거야." 제 12 장 클로드가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소곤거리고 있는 모양인데, 그 목소리가 상냥하게 귀에 들어온다. ‘아름다워, 엄마는. 조만간 내가 베르나르처럼 커지면……’ 그는 조그만 어린애라는 현재의 처지에 심한 불만을 느끼고 잠자리 속에서 몸을 비틀었다. "나는 이젠 컸어, 분명히, 이렇게 훌륭하게……내 축구공을 줘 ! " 하고 그는 졸라댔다. 그는 아버지의 선물을 꼭 껴안은 채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드니즈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의사가 오는 게 왜 이렇게 느리지 ! "엄마." "여기 있다, 애야. 잠깐만 기다려라. 찜찔 수건을 갈아 줄 테니." 그녀는 클로드가 껴안고 있던 축구공을 들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젖은 수건을 냄비에 담그는 순간에 테이블이 흔들려서 공이 마루로 굴러떨어졌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어머나, 의사 선생님이 오셨나 봐 ! " 하고 드니즈는 이제는 안심이 된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베르나르였다. 상태를 알아보려고 온 것이다. "제가 옆에 있어도 괜찮을까요, 아주머니 ? " 클로드의 눈은 정다운 친구의 모습을 보고서 반짝거렸다. 베르나르는 엎드려서 공을 주워들고는, 난로 선반에 가지런히 줄지어 놓여 있는 책들 사이에 그것을 밀어넣었다. 그때 클로드가 잠시 신음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서 갑작스런 구토증을 느꼈는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토하려는 듯이 몸을 구부리는 순간에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베르나르는 그때서야 그야말로 격렬한 내부의 싸움을 맛보았다. 그 발작이 진정되었을 때 그는 결심을 굳혔다 · 10· "아주머니……실은 클로드가 아까도 토했어요, 오늘 저녁때." "어머나, 어떻게 하지 ?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 혼자서 ? " 형사부장인 바르제유 총경은 결재철을 덮고서 그것을 보좌관인 레마랄에게 내밀었다. "무사하군요, 오늘밤은." 하고 레마랄이 감상을 넣어서 말했다. "아직은 안심할 수가 없어……" 바르제유는 일어나서,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센 강의 한쪽을 향해 있는 사무실 창문 악으로 갔다. 그는 마음속에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아들이 대학시험을 보는 달인데, 그 아들이 병이 난 것이다. 그러나 총경은 이제는 헛기대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 방금 전에도 레마랄에게 말했듯이 그것은 분명한 반사발병(反射發病)이었다. 아이는 상당히 좋은 소질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도 좋을 뿐만 아니라 성적도 우수했다. 그러나 어떤 시련에 부딪치면 언제나 그의 생체조직이 자위작용을 일으켜서 극도의 두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 그것은 결국 실패에 대한 컴플렉스라고 ! 어때, 레마랄 ?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 보좌관이 그것을 인정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 정신분석을 하실 건가요 ? 자젤 정도면 꽤 대단한데요." 총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 사람은 확실히 좋은 의사지.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불안한 느낌일세. 정신분석은 잘못하다간 매우 위험한 것이거든. 게다가 프랑수아도 그런 종류의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곧바로 어떤 터무니없는 이론을 만들어 낼지 알 수도 없고. 아마 곧바로 미쳐 버리고 말 거야, 곧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아마 집사람일 걸세." 하고 바르제유가 수화기를 들면서 말했다. "총경님입니까 ? 여기는 통보실입니다. 총탄에 의한 부상자 한 명이 아르쟁투유 가도의 길거리에서 발견되어 의식불명인 채 비셔 병원으로 운반되었습니다. 허리에 한 발, 그리고 허파 근처에 한 발 맞았습니다. 중태입니다." "보복 같은 것인가 ? " "충분히 그런 의심이 갑니다. 더구나 더욱더 그런 의심을 짙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발뒤꿈치에 대단히 처참한 상처가 나 있다는 점입니다. 일부러 칼로 자른 상처입니다. 일종의 사인 같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치안반’의 트레게넥 형사 말로는." "알겠네. 지금 곧 가지……" "아, 잠깐만요, 총경님. 형사가 운전사를 심문해 보았다는데……" "운전사라니 ? " "부상자를 운반해 온 운전사 말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부상자가 혼수상태로 떨어지기 전에 무슨 폭탄인가가 어느 어린애의 손에 넘어가 있다고 확실하게 말했다는 겁니다." "중대한 사건이 생길 것 같은가 ? " "아직은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만." "부상자의 신원은 알아냈는가 ? " "아직은요.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알았다. 이제부터 레마랄하고 함께 가보겠다. 트레게넥은 어디에 있나 ? " "운전사인 이탈리아 인과 함께 현장으로 떠났습니다. 푸르넬은 그대로 병원에 남아 있습니다. 부상자가 의식을 회복할 때를 대비해서." "트레게넥의 호출번호는 ? " "TV 106번입니다." "알았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차로 가겠다." 그는 수화기를 걸었다. "오늘밤엔 누가 있나, 레마랄 ? " 그는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는 서류를 황급히 정돈하기 시작했다. 보좌관이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나간다. "르 클록, 모리니, 프라니올……" "아까 왔을 때 데투르브의 모습을 본 것 같은데." 하고 놀란 듯이 바르제유가 말했다. "또 나가버렸나 ? " "아뇨, 그게 아니라……" "안돼, 자네까지, 레마랄 ! 자네까지도 그러다니 ! " 하고 총경은 크게 야단을 친다. "데투르브는 20년 동안 자신을 불사신이라고 굳게 믿어온 사람이야. 그렇게 지내오다가 이번에 부상을 당했지. 그러니 그 극심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세 ! 그렇다고 해서 계획적으로 그를 빼놓을 수는 없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의 방법이 필요하네. 여기에는 프라니올을 남겨놓도록 하게. 그 녀석이라면 나이도 젊고 머리도 잘 돌아가니까. 자네는 모리니와 르 클록을 데리고 가도록. 나는 데투르브를 데리고 가겠네. 자, 출발하세." 그는 바람과 같이 사무실에서 뛰어나갔다. "데투르브, 잠깐……" 40세 가량의 남자가 약간 당황해 하는 기색을 띠면서 일어섰다. "나와 함께 가세." 하고 바르제유가 말하자, 그 부하의 눈에는 순식간에 안도의 빛이 나타나, 그는 자신의 감정이 보답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행은 4층부터 뛰어내려가서 각각 차에 뛰어올라탔다. "어디로 가죠 ? " 하고 데투르브가 물었다. "목표를 정한 곳은 없으나, 무전연락에 의해서 행동할 거네. TV 106번을 호출해 주게." "여기는 TV 5번. TV 106번 나와라. TV 106번……TV 106번 나와라." TV 106번 차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텅 비어 있었다. 호출신호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에서 50·쯤 떨어진 곳에서 트레게넥과 아르드 발렉은 열심히 이곳 저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여기다 ! " 하고 이탈리아 인이 외쳤다. "여기입니다, 형사님, 분명히 이 장소를 본 기억이 나요. 저것 봐요, 구두도 있어요." "아니, 손을 대면 안돼요, 아무것도." 발렉은 바스티앙의 몸이 쓰러져 있었던 곳의 정확한 위치와 자기 트럭이 멈추었던 위치 등을 가리키고는, 회색의 사람 그림자에 대해서도 말했다. 모습은 확연하지가 않았으나, 바로 저쪽에 있었던 소형차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고…… "흠……그렇다면……" 하고 중얼거리면서 트레게넥은 발렉의 진술을 메모해 넣었다. 그는 생각해 보았다. 피해자는 첫 발을 등에 맞았는데, 아마도 그때는 길거리 쪽을 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의 뒤쪽인 저쪽 길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천천히 그쪽으로 되돌아갔다. 발렉도 함께 따라오면서 열심히 똑같은 말을 반복해 댔다. "그런데 이거 도저히 시간 내에 화물을 도착시킬 수가 없어요. 클레르몽·페랑은 꽤 먼 곳이라니까요 ! " 트레게넥은 무의식중에 외쳤다. 무엇인가 반짝이는 자그마한 것이 석양의 최후의 빛을 받아 반사했던 것이다. 6·· 35탄 탄피였다. "발렉, 이것을 잘 보고 다시 한 번 찾아봅시다. 반드시 두 번째 탄피도 틀림없이 있을 거요. 나는 긴급히 전화를 걸고 오겠소." 발렉은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하여튼 대단해 ! 경찰은 자동차 안에까지 전화가 있으니, 요즘에는 ! 트레게넥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기는 TV 106번. Z 2번 나와라. Z 2번 나왔나 ? " "그래, Z 2번이다. TV 106번 계속하라." "여기는 트레게넥 형사다. 아르쟁투유 가도의 제14호 도로표지판 부근에 있는데, 아니에르 문에서 파리 시외로 나가는 도로에 와 있다. 수사결과 피해자의 구두와, 6·· 35탄의 탄피를 한 개 발견했다. 나머지 한 개도 아마 이 부근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형사부의 바르제유 총경이 현장에서 합류하기 위해 출동했다. 당신을 찾고 있다. 호출번호는 TV 5번이다." "알았다. 곧 연락하겠다. 감식과의 손이 필요한데 ? " "감식계측차가 벌써 출발했다. 이쪽에서 길을 알려 주겠다." 데투르브는 잠시 듣고 있다가 이윽고 부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겨우 통했습니다. TV 106번을 잡았습니다. 아니에르 문 근처입니다. 아르쟁투유 가도에 있어요." "감식차에 알려주었는지 확인해 주게." 차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달리기 시작했다. 감식계측차는 대로를 누비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 주행법 말야 ?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데." 하고 운전사 옆에 있던 직원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행선지가 어디인지를 모르니까 ! " "아니에르 문이야." 하고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던 직원이 그때 말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면서 속도를 올렸다. 마치 마법이라도 일어난 듯이 자동차 떼 사이에 길이 열리고, 그들은 악으로 돌진했다. 이동감식차의 바퀴 아래에는 말르셰르브 대로(파리 중심지 마들렌 광장에서 아니에르 문으로 가는 직선대로)가 직선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운전사는 더욱더 악셀을 계속 밟았다. "틀림없이 동시에 도착할 수 있는 거지 ? " "아냐,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 우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도착하면 돼. 자네는 판히오(아르헨티나의 자동차 경주 선수, 1945년 이래 여러 번 세계선수권 보유자가 됨)가 아니니까. 잊으면 안돼." 비셔 병원의 입원환자 진료실에서는 인턴이 검진을 끝내고 일어섰다. "내출혈을 일으켰군요." "중태입니까 ? " 하고 푸르넬 형사가 물었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 " 의사는 입을 오므렸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수술을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혹시 대정맥 속에 총알이 들어가 있다면 끝장이니까요." "그렇지만 의식은 다시 회복되겠죠 ? " 하고 푸르넬 형사는 계속 물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꼭 말을 하게 하지 않으면 안돼요 ! 어린애가 폭탄을 갖고 있다고 했다는데, 아직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사실이오." 흰 옷을 입은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하고는 지시를 내렸다 · 10· "외과. 수술부. 플라즈마(혈장(血漿)) 준비." 그는 처방전에 뭐라고 휘갈겨썼다. "환자의 이름은 ? " "알 수 없어요." 하고 간호원이 대답했다. 푸르넬 형사가 끼어들었다 · 10·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았소. BS라는 머리글자만 알았을 뿐이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들 손에 걸렸던 사실이 있다면 카드를 찾아낼 수 있을 게요." 당직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성명 미상’이라고 써넣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당신은 환자 곁에 계실 작정입니까, 형사님 ? " "물론 그렇게 할 작정이오. 만일에 이 사람이 의식을 되찾게 되면 폭탄에 대해서 소상한 말을 들을 수 있을는지도 모르니까 ! "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기적이겠는데요." 하고 인턴은 나가면서 한마디했다. 간호원이 침대를 밀고 가고, 푸르넬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조금이라도 의식을 회복하는 징조가 보이지나 않을까 하고 바스티앙의 초라하고 얼어붙은 듯한 안색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르쟁투유의 구가도와 신가도의 교차점 부근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르제유는 상황을 요약해 보았다. "6·· 35총탄의 탄피 두 개와 구두가 한 짝. 피해자는 아마도 도망을 가다가 당했으며, 그 다음에 발뒤꿈치에 상처를 입게 된 모양이다. 범인은 소형차로 철수해 버렸다. 병원에 있는 푸르넬은 이름의 머리글자가 BS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내의 백만이나 되는 아이들 중에서 한 어린애를 즉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 10· 폭탄을 갖고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 속에 빠져 있는 어린애를 ! 참으로 큰일이야 ! " 열의에 가득찬 모습으로 발렉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사람은 무슨 온도계가 어쩌고 하는 말을 했어요……그리고 또……" 자기가 대담해진 것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문득 입을 다물고는, 자기 분수도 모른다고 호되게 야단맞을 것을 각오했다. 그런데 아무도 하던 말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다시 용기를 냈다. "그리고 또 자동온도조절기라는 말도 했어요. 저는, ‘목욕탕에 있는 것 말이오 ? ’ 하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응’, 하는 것 같았는데……그리고는 또 덧붙이듯이 ‘13도’라는 말을 하고는 손짓으로 폭발하는 흉내를 냈어요." "참으로 고맙소." 하고 바르제유가 말했다. "여보게, 레마랄, 구가도를 계속 가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는지 찾아보게. 그 일이 끝나면 비셔 병원으로 와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먼저 가서 있을 테니까. 그런데 자네들 ‘감식반’은 이제 끝냈는가 ? " "전부 수집했습니다, 총경님." 기사가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수확이 없습니다. 흙투성이 구두 한 짝과 탄피 두 개 이외에는." "그렇다면 자네들도 비셔 병원으로 갈 것. 그 사람의 지문을 채취해서 초지급으로 ‘사법경찰’ 쪽으로 보내 주게. 어쩌면 카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트레게넥, 자네는 이제 푸르넬과 함께 아까 하던 순찰을 계속하게. 사건은 우리가 맡겠네. 데투르브는 내 옆에 남아서 그 폭탄에 관한 것을 밝혀 보도록 하세." 신속하게 자동차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식차는 TV 106번의 뒤를 쫓아 출발하고, 한편 레마랄 일행의 차는 아르쟁투유의 구가도를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길은 형편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하게 울퉁불퉁한 곳에서 르 클록은 자동차 창문 틀에 몸을 부딪치고는 재수가 없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집이 있는데요, 저쪽에." 하고 모리니가 말했다. 레마랄은 몸을 굽히고는 악창문 너머로 바라다보았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데. 그래도 상관없어 ! 좌우간 부딪쳐 보는 거야." 마지막까지 한마디도 빠짐없이 두목은 한스의 보고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놈이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다는 거로군 ? " "지금까지 숨통을 끊어 버리는 일엔 전혀 실수한 적이 없었고, 게다가 두 발이나 먹여 주었으니까요." 그는 냉랭하고 잔인한 눈초리를 보고는 몸을 떨며 허둥지둥 두목의 마음을 풀어 주려고 단도를 반쯤 뽑았다. "그래도 나는……틀림없이 해치워 버리고 돌아왔어요, 두목의……" 두목은 유심히 그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일어나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두목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놈을……" "자, 칼은 치워 버리고, 이제 더 이상은 말하지 마라." 하고 오스메가 말했다. "너를 위해서라도 정말로 죽었으면 좋겠구나, 한스." 하고 두목이 말했다. "우선, 만일에 대비하여 만전의 태세를 취한다. 외부에서 불빛이 보이지 않도록 하라. 전화나 초인종에도 대답하지 말고, 알겠나 ? 그리고 길을 감시하고." 오스메와 데데는 즉시 명령한 대로 따르기 위해 서둘러 일어섰다. 한스는 갑자기 바스티앙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놓았는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 못박인 듯이 서 있었다. 숨쉬기가 고통스러웠다. 자기 몸의 장래도 이젠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동차다." 하고 오스메가 알렸다. 두목은 절룩거리면서 창가로 다가가서는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지 ? " "전혀 짐작도 할 수가 없는데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길을 잃고……" "글쎄, 그렇다면 좋으련만." 집으로 통하는 길에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니, 문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초인종을 길고 길게 눌렀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모리니는 끈질기게 계속 눌렀다. 변함없이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모리니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틀림없이 외출을 한 모양입니다, 레마랄 차장님." "어차피 · 10· " 하고 차를 출발시키면서 보좌관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이 부근은 너무 멀어서 아무 애기도 들을 수 없을 거야." 모리니는 동료를 돌아다보았다. "어이, 르 클록, 이 집 사람의 이름이 좀 묘한걸. 오스메라고 쓰여 있는데, 뭐 짐작되는 것 없나 ? " "오스메……오스메……" 하고 르 클록은 되풀이해 보다가 말했다. "아니, 별로." 바르제유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고 발렉은 좀전에 한 말을 다시 한 번 예리한 연극적인 감각을 갖고서, 극적인 순간의 장면엔 특별히 힘을 넣으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해자의 미친 듯한 눈매를 흉내내고는, 미약하게 입술에서 새어나온 그 말과 입을 오무리고서 최후의 노력을 쥐어짜듯이 토해 내던 그 입모습을 흉내냈다 · 10· "폭탄……폭탄……하고 말했죠. 그리고는 몇 번이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어린 남자애가 폭탄을 주웠어……’ 그 다음에 확실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 10· ‘온도계’라고.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 틀림없이 열이 높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다음에 ‘자동온도조절기’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대로 말해 보았지요. 그랬더니 그렇다고 하는 표정을 짓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또 이렇게 말하더군요 · 10· ‘13도……콰·앙 ! ’ 하고요." 바르제유는 형사들을 돌아다보았다. "자, 어떻게 생각하나, 데투르브 ? "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는 사건이로군요 ! 보복관계의 사건인 것만은 명백합니다. 그 상처 입은 부위만 보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폭탄 말인데요……이것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혼란스럽게 해버립니다. 피해자가 착란을 일으켰다고는 생각되지 않는지요, 부장님 ? " "있을 수 있는 일이지 ! " 하고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바르제유가 말했다. "좋아, 아까 그 일행의 뒤를 쫓아 비셔 병원으로 가보세. 어떻든간에 단서는 오직 피해자뿐이니까. 즉, BS라는 사람 말이야." 그는 똑바로 다가오는 자동차 한 대를 눈치채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왔구나, 저 녀석들 ! " ‘프리기트’ 한 대가 그들의 가까이까지 와서 급정거를 하더니, 신문기자 6。7명이 그 차에서 뛰어내려서 카메라를 악으로 내밀고는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어떤 젊은 여인은 마이크가 달려 있는 줄을 풀면서 끌고 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사건이 ? " "오, 신문기자 여러분, 수고들 하십니다." 하고 바르제유가 말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시간이 없소. 이보게, 데투르브, 자네가 이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아는 데까지 애기해 드리게." "아니,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잖습니까 ? " 기자들이 형사를 에워쌌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채색을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니까."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 " 하고 다른 사람이 물었다. "어쩌면 저쪽에 가서 당신들의 힘을 빌려야 할 것도 같소." "무엇 때문입니까 ? " "조만간 알게 될 게요. 여하튼 얼른 갑시다." "아니,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장님." 카메라맨 한 사람이 피해자의 몸을 기대어 놓았다는 도로표지판 악에 서 있는 발렉의 모습을 아직도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젊은 여인이 줄을 다 풀어가고 있었다. "잠깐만요. 간단히 한 말씀만……" 두목은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한스의 신경을 고문하는 것같이 괴롭혔다. 두목은 그런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고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어 봐, 데데. 사태를 좀 알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니까." 데데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오스메는 두목 옆으로 다가가서 낮게 살짝 귀엣말로 속삭인다 · 10·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태가 수상하다는 느낌이 없습니까, 조르주 ? " "글쎄, 그렇지야 않겠지. 좀더 기다려 본 다음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상태가 위험스럽게 되면 도망쳐야 할 거야. 그러나, 뭐 그렇게까지야 되려고……" 음악 소리가 넓은 방안에 갑자기 울려퍼졌다. 한스는 절름발이 두목의 눈이 지그시 자기의 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그는 양쪽 발을 의자 밑으로 끌어당기고서 초조한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목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음악이 멎었다. "청취자 여러분 · 10· " 하고 스피커에서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보내 드린 콘서트를 제공한 것은……" "그만둬, ‘국제’ 같은 건." 하고 두목이 욕을 해댔다. "그런 것보다 ‘파리 소식’이 필요해. 어쩌면 정보가 잡힐지도 모르니까." 비셔 병원의 외과병동에서는 신문기자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문 저쪽에서는 바르제유가 감식과의 기사와 조수들과 협의를 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지문은 벌써 ‘사법경찰’로 이송중이었고, 총경은 자기 수중에 있는 빈약한 자료에서 어떻게든 결론을 이끌어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지문이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쓸모가 있지. 이 사람이 이제까지 우리들의 손에 걸렸었던 적이 있다면,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무슨 방법으로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겠나 ? 우연을 의지해서 어린애의 손에서 폭탄을 찾아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르 클록은 폭탄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한 것에 불과하리라. 그러니까……그러나 모리니가 화가 난 음성으로 그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 나는 폭탄장치과의 기사를 만나고 왔어. 그래서 현재 알고 있는 사실, 즉 온도계라든가 자동온도조절기, 13도 같은 것들을 말해 주었더니 그 기사는 그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거야. 접촉온도계라는 것이 있는데, 우연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사전에 조정해 놓은 온도에 도달하지 않으면 절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 르 클록은 어깨를 으쓱하며 동료의 말을 물리쳤다. "그러니까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보라는 거야. 피해자가 착란을 일으켰든 아니든, 접촉온도계의 작동이 가능하든 않든, 그 어린애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가 매우 중요한 점이야 ! 그 가엾은 어린애 말이야 ! 우리가 생각을 집중해야 할 것은 그것밖에 없어, 내가 보기엔 ! " 바르제유는 그 형사를 가리키듯이 쑥 손가락을 내밀었다. "바로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야. 그 물음에 대해서는 반사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어. 만일 이 이야기가 진실일 가능성이 백분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돼. 한 어린애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어." "그래서요 ? " 하고 레마랄이 묻는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별로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좌우간 우리들로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단서나 증거가 없고, 더욱이 시간이 한정되어 있단 말이야. 벌써 7시가 지났고, 기상대 애기로는 오늘밤 10시경에는 기온이 13도가 된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신문에 다소 협조를 부탁해 보고 싶은 생각일세. 우리들에게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출발점은 피해자뿐이니까."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는 문 쪽으로 다가가서 활짝 열었다. "여러분, 이미 알고 있겠지요 ? " 모두가 일제히 끄덕였다. 자기들 말마따나 ‘채색’을 하는 것에 익숙한 그들은 피해자의 신변에서 풍기는 괴기한 냄새에는 보통사람보다 갑절이나 민감해서, 소상한 내용을 기대하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도 수사가 진척되는 데 따라 그 상황을 차례로 여러분에게 알려 드릴 작정이오. 말하자면 우리들로서도 일반 시민들의 협력을 얻어야 할 필요가 대단히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히 신원불명의 그 피해자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락할 생각이오……" 그는 무의식중에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카메라맨 한 사람이 배를 움츠리고 카메라를 한쪽 손에 들고는, 재빨리 돌아나와 자기 악쪽으로 끼어들어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들 쪽에서도 부디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겠소. 벌써 시간이 늦은 것은 알고 있으나,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로서는 그 사진이 여러분의 신문 최종판에 실릴 수 있기를 요망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하는 것도 아울러 실어 주었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습니까 ? " "아무것도 없소. 단지 BS라는 머리글자만 알고 있을 뿐이오. 그리고 또 하나, 뭐라고 해석할 수 없는 칼자국이 있는데, 이것 역시 현재로서는 아무런 짐작도 할 수가 없소. 그러나 피해자의 연줄을 더듬어가면 마지막에는 그 어린애를 밝혀낼 수 있을 거요……만일 그런 어린애가 정말로 있다고 한다면 말이오 ! 그 점도 아무쪼록 잊지 마시기를." 그의 뒤쪽, 바스티앙이 누워 있는 방에서는 무수한 플래시가 병실의 푸르스름한 불빛을 꿰뚫고 섬광을 터뜨리고 있었다. 젊은 라디오 방송국 기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총경님, 스튜디오에 이렇게 애기해서 뉴스를 내보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뭐, 이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 10· ‘어린애가 있는 가정에서는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애가 혹시 평소에는 집에 없던 물건을 갖고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러나 너무 민심을 동요케 하면 안됩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걸 모르고 있는 상태니까." 그들은 정보연락을 위한 상주기자 한 사람만 남겨놓고 각자의 생각대로 흩어졌다. "이젠 가도 됩니까, 총경님 ? 화물을 운반해 주어야 되거든요, 저는……" 발렉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한 발자국 악으로 나서며 말했다. 바르제유는 눈으로 묻듯이 레마랄을 바라보았다. 레마랄은 동의한다는 몸짓을 했다. "그분이 일하고 있는 회사를 조사해 두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분이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습니다." "좋아." 하고 바르제유는 최후의 결론을 내렸다. "보내 드리도록 하게. 그러나 프랑스를 떠나지 않게 하도록." 이탈리아 인은 양팔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프랑스를 떠난다고요 ? 들어오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 " 달력에 실려 있는 온갖 성인성자를 증인으로 세우면서 그는 떠났다. 간호원이 여러 종류의 기구와 플라즈마 병을 실은 왜건을 바스티앙의 침대까지 밀고 가면서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의사는 있소 ? " 하고 바르제유가 물었다. "저쪽에 계셨는데요, 저쪽에요." 외과의사 한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총경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은 환자가 혼수상태로 빠지기 전에 진술한 것들에 대해 알고 있겠지요 ? " "예……" 의사는 왜건 위의 기구와 바늘들을 나란히 고쳐 놓으면서 말했다 · 10· "정말입니까, 그 사건이 ? " "도무지 알 수가 없소, 그게.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10· 부상자의 현재 상태로 보아 두 발이나 맞았고, 더욱이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것도 아주 나쁜 위치에 박혀 있다고 하는데…… ? " "나쁜 위치……글쎄요……" 하고 전문가답게 상대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거야 뭐 메스를 넣어본 다음의 일입니다만, 다만 이것만은 틀림없어요. 환자는 내출혈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부터 플라즈마를 보급해 주어서 수술에 견딜 수 있도록 하려는 겁니다." "그럼, 당신 생각에 환자가 정신착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 " 상대는 양팔을 벌렸다. "뭐라고 대답할 수 없군요.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잠시 기운을 되찾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내가 심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 " "있을지도 모르지요. 잃어버린 혈액을 플라즈마 보급으로 보충할 수가 있다면……다른 말로 한다면, 출혈이 멎는다면 말입니다……그러나 미리 말씀드려 두겠습니다만, 환자가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나는 즉시 수술을 시작할 겁니다 ! " "나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좀더 자세한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 한 생명을 구해야 하니까." 외과의사는 성의 없는 미소를 흘렸다. "우리들도 지금 당신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총경님." RTF(프랑스 라디오 TV의 약칭)의 스튜디오에서는 아나운서인 폴 드누아가 잠시 뒤에 동료들과 함께 청취자들에게 들려줄 해설 문장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에스텔 프랑스가 완전히 흥분해 버린 모습으로 전화대에서 돌아왔다. "잠깐만, 폴 ! 좀 흥분할 일이 있어요 ! 줄리엣이 방금 전화로 연락해 왔는데, 파리 어딘가에 폭탄을 주운 어린애가 있는 모양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 그러니까 부모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바르제유 총경도 동의했다는군요." "좋은 일이야 ! " 하고 드누아가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문득 자기 집에도 어린애가 셋이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갑자기 새파랗게 질렸다. 다른 동료들의 머리에도 번뜩 떠올랐겠지.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아무도 말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모두들 ? " 하고 에스텔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확실한 말이겠지, 그거 ? " "그건 모르겠어요, 나로서는. 줄리엣 말로는 아직 진실 여부는 보증할 수가 없으니까, 완곡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주느빌리에에서 발견된, 발뒤꿈치에 칼을 맞고 몸에는 두 발의 총알을 맞았다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나 봐요……바로 그거예요, 그 이탈리아 인과 한 인터뷰, 아까 들어온 것……" "그 사람이 폭탄이라고 했단 말이지 ? " "그래요. 당신, 녹음 안 들었어요 ? " "틈이 없었어. 그렇지만 아직 2。3분은 여유가 있어. 어이, 잠깐만, 이쪽으로 틀어주지, 아까 그거 말이야." 유리 칸막이 벽 저쪽에서 녹음기사가 알았다는 몸짓을 하고는, 바로 악의 기계 위에 자그마하게 감겨 있는 녹음 테이프를 끼워놓고서 수화기를 연결했다. "폭탄이라고 ! " 하고 에스텔은 몸을 떨었다. "또 사크레 쿠르(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 이 성당에서 폭파 미수사건이 있었음) 사건 비슷하게 될 거야 ! 그것보다 한층 더 악랄한 사건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