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솔로몬의 노래 저자 : 토니 모리슨( 김성렬 옮김) 출판사 : 문학세계사 출판년도 :1993년 10월 23일 차 례 책머리에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세계) 1.숨어서 듣는 노래 2. 메마른 만남 3. 혼돈의 뿌리 4.알 수 없는 일 5.일요일의 남자 6.초록색 자루 7.아버지의 아들 8.동굴 속에서 9.낯선 곳 10.마지막 날개 작가와 작품 해설 (경이적인 상상력과 극적인 감동) 책 머리에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세계) 199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자, 미국의 문학계는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마침내 최초의 흑인 여성 수상자가 탄생한 것이다. 다름 아닌 토니 모리슨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에 일곱 번째가 되지만 흑인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가 되는 영예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이 처음부터 줄기차게 미국 사회 내에서의 흑인 문제와 여성 문제를 다루어왔다는 점에서 그녀의 수상은 모든 흑인들과 나아가 모든 여성들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그래왔듯이 토니 모리슨도 상을 수상하기 이전까지는 우리 나라의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 이미 1980년에 솔로몬의 노래 Song of Solomon'가 번역된 것을 시작으로 소중한 사람들 Beloved , 가장 푸른 눈 The bluest Eye' 그리고 가장 최신 작으로 1992년에 재즈 Jazz'(문학세계사)까지 번역되어, 비교적 일찍 많은 작품이 소개가 되었다. 다만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지금까지 잊혀져온 것뿐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토니 모리슨의 존재는 대단하다. 1978년 솔로몬의 노래 로 전미국 도서 비평상을 수상하고, 1988년 같은 경우에는 재즈 와 어둠 속의 유희 가 뉴욕타임즈베스트셀러집계에서 소설과 비소설 부문에 동시에 오르기까지 했다. 한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동시에 각각 다른 부문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란 미국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결국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노벨 문학상을 받기 이전부터 문학성뿐만 아니라, 이미 일반인에게까지 호소력이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흑인 여성이 흑인의 삶을 시적이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있는 현상은 미국 내에서도 의아스런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흑인 문학과 여성 문학에 대한 관심이 보편적인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여세를 몰아 토니 모리슨은 또다시 1992년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미국내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인 100인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100중에 하나라면 대단하지 않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나 마이클 잭슨과 같은 유명 가수와 유명 배우가 대다수 선정되는 미국 사회에서, 전통적이고 문학성 높은 소설을 쓰는 토니 모리슨과 같은 작가가 선정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일반적인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토니 모리슨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올해로 62세인 그녀는 1931년,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4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다. 그녀의 본명은 클로에 앤터니 워포드, 아버지는 평범한 흑인 노동자였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이었다. 로레인에서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책을 많이 읽는 성실한 학생으로 자라면서 주변의 흑인들이 겪는 고통스런 삶의 모습들을 눈여겨보고 가슴에 담았다. 그녀는 1953년, 흑인들의 하버드 로까지 불리는 명문 대학인 하워드 대학을 마치고 1955년, 뉴욕 주의 코넬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게 된다. 전공한 과목은 미국문학, 특히 버지니아 울프와 윌리엄 포크너를 전공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무너져가는 사회 질서 속에서의 흑백 간의 갈등을 그린 작가인데 토니 모리슨의 작품 속에는 두 사람의 영향이 다분히 엿보인다. 토니 모리슨은 자메이카 출신의 건축가 하워드 모리슨과 결혼한 후, 세 아이를 두었다.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경험은 그녀의 많은 작품 속에 반영이 되어 있다. 현재는 소설 작업 이외에도 프린스턴 대학의 고전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극작가이며, 랜덤 출판사의 선임 편집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그녀는 명실상부한 흑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토니 모리슨은 다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에 비하여 발표된 작품 수가 적다. 그리하여 애초에는 후보자로도 거론되지 못했다. 이렇듯 기대조차 없었기에 수상 소식을 전하는 한림원의 메시지조차도 직접 받지 못하고 토니 모리슨의 자동응답 전화기에 남겨 놓았었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은 모두 6편으로, 1970년에 가장 푸른 눈 The Bluest Eye 이 처음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세 명의 흑인 소녀와 소년의 눈에 비친 미국 사회를 그린 작품으로서, 특히 못생긴 흑인 소녀 피콜라는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아기까지 갖게 된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에 나오는 푸른 눈은 미국 사회에서 미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1974년에 두 번째로 발표된 슐라 Sula 는 굉장한 논란을 일으킨 작품으로 슐라와 넬이라는 두 여성의 우정과 사랑, 삶을 그리고 있다. 세 번째 작품은 솔로몬의 노래 (1977년)는 마콘 데드 3세라는 인물을 통해 과거 노예였던 조상들의 기억을 되찾고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내용이다. 그리고 중산층 흑인 부부를 주인공으로 남녀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타르 베이비 Tar Baby 가 1981년 발표되었고, 1988년에는 소중한 사람들 Beloved'로 퓰리처상을 받기에 이르른다. 흑인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노예로 키우자 않기 위해서 살해한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당초에 아무런 문학상도 받지 못하자, 미국내의 흑인 문인들이 항의 성명서를 내는 소동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토니 모리슨은 4년 만인 1992년 재즈 를 발표해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부상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흑인의 삶을 다루고는 있지만 단순한 저항문학의 차원을 넘어, 가장 심오하고 섬세한 삶의 문제를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노벨상 위원회에서도 작품에 따라 상이한 여러 가지 독특한 서술은 독자에게 기쁨을 준다. 그러나 가장 오래 감동을 주는 요소는 인간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며 이러한 점들이 깊이 있는 유머에 기반하고 있는 점이다. 라고 수상 이유를 밝히고 있다. 특히 그녀는 흑인 문제와 아울러서 여성의 삶과 고통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보이고 있다. 즉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이야말로, 흑인 남성들에 의해 또 다시 소외당하는 가장 밑바닥 계층이라고 파악하고 그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들을 작품에 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즈 를 살펴보면, 여주인공 바이올렛은 흑인으로서 평생을 번듯하게 살아보기 위해서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억척 여성이다. 뉴욕에서 겨우 보잘것없지만 안정된 삶을 이루었을 때는 이미 오십이 넘은 여자가 되었고, 그녀에게는 아이조차 없었다. 남은 것은 함께 나눌 대화조차 없는 남편과 사랑해요 라고 말할 줄 아는 앵무새뿐, 바이올렛은 이따금씩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편이 어린 소녀를 사랑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절망과 분노가 넘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꼭 흑인 여성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망감. 남편이나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느끼는 배신감.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단순히 여성의 고통을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여성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여성들간의 화해, 그리고 용서이다.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혹시 흑인 문학으로 평가되어 선입견을 가지게 될지 모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여성으로서, 한국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꼭 한번 읽어보아야 할 작품으로 권하고 싶다. 1993년 10월 최인자(문학평론가) 1. 숨어서 듣는 노래 노스캐롤라이나 생명보험회사에서 일하던 한 외무원이 자선병원으로부터 슈피리어 호수 건너편까지 날아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이 어이없는 일이 거행되기 이틀 전 그는 오두막집 노란 대문에 이런 쪽지를 붙였다. 오는 수요일, 1931년 2월 18일 오후 3시에 제가 직접 만든 날개로 자선병원에서부터 날아가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여러분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로버트 스미스.보험회사 외무원 스미스 씨는 4년 전 린드버그가 모았던 것처럼 엄청난 관중을 끌어모을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50명 정도나 됐을까. 날기로 선택한 날이 수요일인 데다, 오전 11시, 사람들이 그 쪽지를 읽기도 전이었기 때문이다. 한 주일의 중간인 그날 그 시간이라면 입에서 입으로 오고가는 소문은 허공에 뜨기 마련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남자들은 일터에, 그리고 대부분의 여인네들은 정육점으로 갔다. 이 시간이면 내장이나 꼬리 따위를 헐값에 팔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면 그들은 어디론가 외출하기 위해 치장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실업자들이나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 또는 학교에 가기 전의 꼬마들이나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연히 소문을 들었거나 그 시각에 바닷가에 접해 있는 낫 닥터 가를 거닐던 사람들이었다. 낫 닥터 가라면 우체국에서 확인할 수 없는 거리 이름이었다. 지방 지도에는 이 거리 이름이 메인스 에버뉴라고 나와 있었으나, 1986년 이 도시에선 유일한 흑인 의사가 이 거리로 이사해 온 이후부터 그렇게 불려졌다. 의사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먼 곳에서 오는 흑인들이었다. 그들은 이 거리를 닥터 가라고 불렀다. 이후 포스터란 이름의 그 의사를 따라 흑인들이 이 거리로 이사해 오기 시작하자 우체국 직원들은 골치를 앓았다. 이들에게 오고가는 우편물들에는 하나같이 닥터 가 X번지 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체국에서는 이런 우편물들을 되돌려 보내거나 수취인 불명 우편물 처리소로 보내 버렸다. 그러나 1918년 흑인 청년들도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이곳 출신 청년들이 신병 훈련소에 제출한 주소도 닥터 가 X번지 였다.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우체국 직원뿐만이 아니었다. 시의회 의원들도 이제는 무슨 조치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침 닥터 포스터도 죽었으므로 이 거리를 낫 닥터 가 (의사 없는 거리)라고 했다. 의회 의원들은 메인스 애버뉴에 낫 닥터 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그 거리 북쪽에 있는 자선병원을 흑인들이 비 자신병원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불명예스러운 이름도 스미스의 비행 이 있은 다음날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병원에서 처음으로 흑인 산모를 입구의 계단이 아닌 병동 분만실에 받아들여 출산을 하게 한 것이었다. 병원이 그 흑인 여인에게 특혜를 베푼 이유는 그녀가 메인스 에버뉴에서 살았던 유일한 흑인 의사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지붕 꼭대기에서 그들 머리 위로 뛰어내린 스미스의 비행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찌 됐건 스미스의 날아감은 그 흑인 여인의 분만 장소와 관계가 있건 없건 흑인 사회에 공헌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이야기되고 있었다. 보험회사 외무원 스미스 씨가 비행을 선언할 때처럼, 푸른 비단 날개를 펄럭이며 지붕 위로 불쑥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 순간, 죽은 의사의 딸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려 그 안에 가득 든 붉은 벨벳 장미 꽃잎을 쏟아 버렸다. 아직도 눈이 조금은 남아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붉은 장미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너울거렸다. 여인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하는 동안, 어린 딸들은 꽃잎을 주우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아이들이 벨벳 장미 꽃잎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그리고 게르하르트 백화점에서는 조금이라도 더럽혀진 물건은 사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동안 주위에는 들뜬 기운이 감돌았다. 어른들은 눈에 젖기 전에 꽃잎을 주우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바람은 놀리려는 듯이 그들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어린 아이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나이는 지붕 위에 나타난 푸른 새와 같은 스미스 씨를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눈 위에 붉게 흩어져 간 꽃잎을 쫓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어렵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갈등은 한 여자가 갑자기 봇물 터뜨리듯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하자 자연히 풀렸다. 그 여자는 모인 군중들 맨 뒤에 서 있었고, 의사의 딸이 옷을 잘 차려 입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거지같은 차림이었다. 의사의 딸은 말쑥한 회색 코트에 아주 편해 보이는 임신복, 그리고 검은 숙녀용 모자에 4개의 장식 단추가 달린 고무 덧신의 완벽한 차림인 데 비하여, 노래하는 여인은 깊숙이 눌러 쓴 해군용 모자에 코트 대산 낡은 담요를 둘러쓰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눈은 지붕 위의 스미스 씨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녀는 힘찬 콘트랄토(남성의 음성에 가까운 여인의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아, 슈거맨이 날아가네 멀리 멀리 날아가네 하늘을 가르고 날아 날아 슈거맨은 고향 찾아 날아가네 몇몇 사람들만이 팔꿈치로 서로를 쿡쿡 찔러 가며 키득거릴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성 영화의 효과를 내기 위해 울려 주는 피아노 소리라도 듣는 듯한 기분으로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아무도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는 그와 같은 상태는 병원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수롭지 안은 생각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병원 사람들은 흑인들이 병원 건물을 에워싸듯 모여들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인종 문제로 소요가 일어나면 대개 주위의 건물을 점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여든 흑인들이 확성기나 플래카드 따위를 들고 있지 많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가운을 입은 채로 병원을 나섰다. 푸른 날개를 펄럭이며 지붕에 올라서 있는 한 사나이, 낡아빠진 담요를 두른 여인의 힘찬 노래, 백설 위에 흩어진 붉은 꽃잎과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아이들, 이 모든 광경은 눈이 휘둥그래진 병원 사람들을 그 자리에 묶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처음 그들 중 몇 사람은 무슨 종교 행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필라델피아의 디바인 신부인가 누군가가 주창하는 신흥 종교의 행사가 이와 비슷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아이들이 의식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누런 금니를 한 사나이의 갑작스러운 웃음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낮꿈에서 깨어난 듯이 병원 의료진들이 서로에게 소리치는 바람에 주위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오지 않아도 될 자리에 온 것을 후회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간호원 하나가 연락을 취할 필요를 느끼고 주위를 돌아봤다. 심부름을 보낼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주위의 얼굴을 돌아보던 그녀의 눈길이 건장한 흑인 여인에게로 멈췄다. 땅덩이라도 밀어붙일 만한 당당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이것 봐요. 간호원이 다가가며 불렀다. 이 아이들이 당신아이들인가요? 건장한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치켜 뜬 눈을 깜박거린다. 그래요. 왜요? 아이 하나를 응급실에 보내 빨리 수위를 불러와야 해요. 저 아이라면 할 수 있겠군. 저 아이라면..... 그녀가 고양이 눈을 한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가리켰다. 건장한 여인의 눈길도 간호원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기타? 뭐라구? 이름이 기타란 말이죠.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간호원이 여인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다시, 고양이 눈의 아이에게 시선을 돌려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한다. 잘 들어. 병원 뒤로 돌아가면 수위실이 있어. 문에 응급 접수 라고 쓰인 곳이다. 그 안에 수위가 있으니 빨리 이곳으로 오라고 해. 얼른! 어서가, 어서. 간호원은 발을 동동 굴렀다. 갈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하얀 입김을 뿜어대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소방차가 오고 있으니 이제 안으로 들어가요. 이대로 있다간 얼어 버리겠소. 간호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할머니, 가야 해요? 아이가 가느다란 눈을 반짝이며 건장한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경어를 쓰지 않는 것들의 말은 들을 필요 없어. 저 사람 정말 뛰어내릴까요? 저런 괴짜는 무슨 짓이라도 하는 법이란다. 누군데요? 보험회사 외무사원이야. 괴짜지. 노래하는 여자는 누군가요? 썩은 콩 같은 존재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소 짓는 얼굴로 노래하는 여인을 보면서 열심히 노래를 듣고 있다. 그 노랫소리는 병원 지붕 위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서 있는 남자와 함께 아이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경찰이 달려올 것을 생각한 구경꾼들은 조금씩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거의 모두 스미스 씨를 알고 있었다. 그는 어김없이 한 달에 두 번씩 1달러 68센트의 보험료를 받고, 노란 카드에 날짜와 금액을 적어 넣게 위해 그들의 집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항상 보험료가 밀려 있었고, 따라서 언제나 그와는 입씨름을 해야 했다. 아니, 벌써 왔어요? 내가 뭐 떼어먹고 도망이라도 갈 줄 아세요? 정말 지긋지긋해요. 당신 얼굴은 보기조차 싫단 말이에요. 알고 있으니 여러 말 마세요. 다음에 오면 두 번 몫을 한 번에 해 드릴께요. 이런다고 해서 대통령이 당신 가슴에 훈장이라도 달아 줄 줄 아세요? 그들은 그를 놀리고, 욕을 퍼부어 대고, 아이들을 시켜 외출했다거나 아프다거나 피츠버그에 갔다고 따돌리게 했던 것이다. 그래도 스미스 씨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쓰며 그들의 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무중에는 말끔한 양복을 입었지만 그의 집은 그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이 알고 있는 한 그에게는 여자가 없었고, 교회에 와서도 입을 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따금 기도중에 아멘 하는 낮은 소리를 낼 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드물었다. 누구와 싸웠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밤거리에서 만난 적도 없어 이 거리 사람들은 그가 점잖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언제나 깊은 병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그이 얼굴을 보험회사의 노란 카드와 함께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가 한 일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이번의 병원 지붕으로부터의 비행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이 자리에 모여들면서 들면서 그들은 사람이란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고 수군댔다. 노래하던 여인은 이제 콧노래로 멜로디를 이어 가며 군중 사이를 헤치고 아직도 배를 움켜 안고 신음하고 있는 장미 꽃잎의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해요. 그녀는 신음하는 여인에게 속삭였다. 아침이 오면 자그마한 나비 한 마리가 태어날 거예요. 아니? 장미 꽃잎의 여인이 반문했다. 내일 아침이란 말예요? 밝아 오는 아침이면 나비가 날아와요. 그럴 수 없어. 의사의 딸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빨라요. 그렇지 않아요. 신의 뜻이에요. 두 여인은 군중 사이에서 함성이 일어날 때까지 서로의 눈동자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함성은 물결치듯 계속됐다. 지붕 위의 스미스 씨가 잠시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지붕에서 삐져나온 기둥을 잡았다. 순간 여인의 노래가 다시 터져나왔다. 아, 슈거맨이 날아가네 멀리 멀리 날아가네 소방수들은 허둥지둥 장비를 챙겼다. 그러나 그들이 병원 마당에 도착했을 때, 스미스 씨는 눈 위에 흩어진 붉은 꽃잎을 보며, 여인의 노래를 들으며 허공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튿날 자선 병원 안에서는 처음으로 흑인 아기가 태어났다. 스미스 씨의 푸른 비단 날개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태어난 아기는 나흘이 되자 예전에 스미스 씨가 깨달았던, 새들이나 비행기만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아이를 슬프게 했고, 상상력의 상실은 아이를 메마르게 하여 어머니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마저 바보처럼 행동하기가 일쑤였다. 어머니의 초대를 받아 의사의 집 에 와서 차를 마시며 방이 열두 개나 되는 거대한 저택과 초록색 기를 단 자동차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특색 있는 아이라고 불렀고, 거대한 저택이 감옥에 불과하다는 것과, 커다란 세단도 일요일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고인이 된 의사와 그의 딸의 불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이를 불길한 아이라고 불렀다. 모래집을 머리에 쓰고 나왔나요? 그걸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차에 타 마시게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유령을 만나게 된대요. 그런 말을 믿나요?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옛날부터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여간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데가 있는 아이예요, 저 눈을 좀 보세요. 그들은 햇빛에 구운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면 다시 한 번 아이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그들의 시선을 받아들이던 아이는 어머니에게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보낸다. 방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뜻이었다. 응접실을 빠져나가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인들의 따가운 눈총과 목소리를 등허리에 받아 가며 무거운 이중문을 밀고 나가 식당을 지나 계단을 올라 여러 개의 침실을 지나면 붉은 벨벳 장미 꽃잎이 수북히 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커다란 아기 인형처럼 앉아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레나와 코린시안스는 오후 내내 그 자리에 앉아서 벨벳 장미를 만들었다. 빛나는, 그러나 생명이 없는 장미들은 바구니 속에서 게르하르트 백화점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몇 달 동안은 기다려야 했다. 무료함과 짜증에 찌든 누나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쳐야만 자기 방에 안전하게 이를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면 그는 창가에 앉아 땅바닥에서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결국은 절망하고 만다. 이때쯤이면 거대한 저택은 이따금 어머니와 친구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적에 싸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마콘 데드가 나타나면 깨어지고 마는 불안한 정적일 뿐이었다. 마콘 데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 순간 돌발적으로,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마치 화산이 터지듯 가족들 앞에 나타난 모두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내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는 그녀에게 던지는 말속에서 칼날처럼 번뜩였다. 딸들에 대한 그의 실망은 분노로 화하여 재처럼 그들에게 뿌려졌다. 얼음처럼 차디찬 그의 눈길 앞에서 두 딸은 발도 제대로 못 떼었고, 테이블에선 삶은 달걀 위에 소금병을 떨어뜨리기가 일쑤였다. 아내 루스는 남편의 고함 소리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고, 욕지거리 속에서 하루를 끝냈다. 손님들을 전송하고 문을 닫고 난 다음, 그녀는 입가에 떠올린 미소를 지워 버리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남편에게 주기 위해 준비한다. 사실 음식을 맛없게 만들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가능하면 구역질이 나는 음식을 만들고 싶었으나 손에 익은 음식 솜씨는 그녀의 마음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쇠고기를 갈아 뭉친 미트볼과 돼지고기 구이를 만들고, 먹다 남은 케이크는 남편에 대한 오기 때문에 디저트로 내놓기로 작정한다. 음식 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서둘러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얗고 투명한 린네르 식탁보로 아름다운 마호가니 식탁을 덮어가던 그녀는 식탁에 새겨진 커다란 그릇 자국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식탁보를 펼 때나 식당을 지나가면서 그것을 보지 않고 지나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그녀였다. 등대지기가 무슨 일이나 없나 하고 순간순간 바다를 바라보듯, 운동을 하기 위해 운동장에 나오는 죄수들이 무심코 태양을 올려다보듯 루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자국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자국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변함없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바라보는 것이었다. 등대지기나 죄수들이 바다나 태양을 그렇게 생각하듯, 그녀는 그것을 아직도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순간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움직일 수 없는 표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잠의 늪에 빠져 그것을 꿈꾸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그녀는 그것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딸들이나 친구들에게 그와 같은 자국을 지우는 법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해 주는 그녀였지만, 이것만은 지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웬일인지 지워지지도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색빛의 그 둥근 자국은, 의사인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아름다운 꽃이 가득히 꽂힌 꽃병이 놓여 있던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단 하루라도 빈 병이 놓여 있던 적은 없었다. 꽃이 없을 때에는 아름다운 잎과 가지가 꽂혀 있었다. 푸르른 보릿대,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 가지, 스코틀랜드 소나무의 잔가지와 푸른 잎들, 어느 것이나 식탁을 우아하게 장식해 주는 것들이었다. 루스는 어린 시절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그와 같은 우아한 분위기를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마콘과 결혼하여 의사의 집 에 돌아와 살게 되자, 그녀가 예의 식탁 장식을 계속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겨울날 그녀가 거친 해변 가에서 레이스 장식이 달린 구두를 버려 가며,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며 이끼가 낀 유목을 건져온 일이 있었다. 신문에서 유목과 이끼를 이용한 장식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것을 그냥 지나쳐 버리죠. 보기는 하지만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사물을 단면만 보는 버릇이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편은 이끼 낀 유목의 가지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뱉았다. 저 따위 것을 바라보느니 차라리 썩은 감자를 씹는 게 낫겠군. 저런 걸 주우러 다닐 시간이 있으면 요리에나 신경을 쓰지 그래. 다음날 루스는 식탁 위의 꽃병을 치워 버렸다. 그러자 그 밑에 숨겨져 있던 자국이 튀어나왔다. 그 자국은 마치 생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꿋꿋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대개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남편이 없는 사이 그 자국을 보면서 지난날의 아름다움을 돌이켜보는 것은 그녀가 남몰래 누리고 있는 두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녀의 또 하나의 즐거움은 의사였던 아버지가 생전에 서재로 사용하던 자그마한 구석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창 밖으로 우거진 사철나무가 보이는 그 방은 구석에 자리한 재봉틀을 제외하면 흔들의자와 둥근 의자 뿐으로 휑하니 비어 있었다. 늦은 오후, 남편이 사무실 문을 닫고 돌아오기 전에 그녀는 아들을 그 방으로 불러들인다. 아이가 들어오면 그녀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이는 아직 어려 젖꼭지의 크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어머니 젖의 비릿한 맛에 싫증을 느낄 만큼 자랐기 때문에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빨아야 하는 일이 짜증스럽기만 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같은 행동으로써 아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저항, 복종, 그리고 보편성은 그녀로 하여금 환상의 세계에 빠질 수 있게 하고,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화점의 심부름꾼이며 그들 소유의 집에 세 들어 사는 프레디에게 그 광경을 들켰을 때 그녀의 눈에는 수치심보다는 분노가 타올랐던 것이다. 사철나무 숲 사이에서 능글맞게 웃고 잇는 프레디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릎 위의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선 그녀의 눈은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입빠른 프레디가 이 특종 뉴스를 혼자만 간직할 리가 없었다. 그 날로 의사의 집 부근은 물론 마콘 데드의 셋집이 있는 남쪽 거리에는 이 소문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아이에게는 우유배달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마콘 데드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왜 그와 같은 별명이 붙었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아이들이나 여인들이 별명을 불러대거나 키득거릴 때면 분노가 치미는 것이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다정하거나 깨끗한 느낌을 주는 별명은 아닌 듯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두 여인 중의 하나인 아내와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지방 흑인 중 그 누구도 거칠고 무뚝뚝하며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그에게 그 내용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이 두 딸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아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미워하는 또 하나의 여인은 누이 동생이었다. 같은 거리에 살면서도 그가 그녀의 집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한 번 들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는 그와 그녀가 남매 사이라는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눈치였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마콘 데드는 열쇠 꾸러미를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이 열쇠들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셋집들의 열쇠들이었으며,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네 채뿐이었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판잣집들이었다. 그는 사무실로 가기 위해 낫 닥터 가를 거니는 동안 그 열쇠 꾸러미를 호기롭게 흔들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 대해 그는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지금은 어엿하게 유리창 위에 금색 글자로 사무실 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은 그곳을 소니네 가게 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이 사무실을 얻던 30년 전까지는 그런 이름의 가게였던 것이다. 이제 30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름이라는 것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누이동생의 이름을 짓던 일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눈을 감을 때 성경에서 이름을 고르는 일을 도와야했다. 누이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난산 끝에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둔 아내로 하여 슬픔과 고통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아버지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했다. 아버지가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까닭에 아버지가 눈을 감고 성경책을 짚어서 고른 이름을 옮겨 적어야 했다. 이게 아기의 이름이라구요? 옆에 있던 산파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기의 이름을 이걸로 한단 말이에요? 그렇소. 그게 아기의 이름이오. 읽어 보시오. , 이름을 이렇게 징을 순 없어요. 읽어 보시오. 이건 사내 이름이에요. 읽어 봐요. 피레이트. 뭐라구요? 피레이트, 여기 피레이트라고 씌어 있어요.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 같은 거요? 아뇨, 파일럿 과는 달라요. 예수님을 죽인 피레이트예요. 그처럼 흉악한 이름을 아기에게 지어 줘서는 안돼요. 손가락이 그 이름을 골라냈소. 하지만 당신의 두뇌가 고른 건 아니에요. 어머니를 잃은 아기에게 예수님을 죽인 자의 이름을 지어 줄 수는 없어요. 예수는 내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소. 내 아내를 구해 주지 않았단 말이요. 말씀 삼가세요! 밤새도록 아내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었소. 주께서는 그 대신 당신에게 아기를 주셨지 않아요. 그렇소. 그러니 난 아이 이름을 피레이트로 하겠소. 맙소사, 억지 쓰지 마세요. 아니, 그 종이를 어디로 가져가는 거요? 이건 악마의 이름이에요. 태워 버려야 해요. 여기 놔두시오. 성경에서 골라낸 거요. 그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소. 결국 그 이름은 아기에게 붙여졌고 그 종이쪽지는 아기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성경 갈피 속에 꽂혀 있었다. 열두 살이 된 피레이트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비밀이 적힌 쪽지를 찾아내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피레이트가 바로 길 건너 판잣집에 사는 마콘의 누이동생이었다. 마콘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딸이 태어났을 때보다, 그 딸이 딸을 낳았을 때보다 더 큰 열의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끈도 묶지 않은 신발을 끌고 모자를 이마까지 내려오도록 눌러 쓴 채, 어울리지도 않는 귀걸이를 흔들어대고 역겨운 냄새마저 풍겨대며 부지런히 그의 집을 들락거렸다. 열 여섯 살 나던 해에 헤어진 이후 마콘이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아들이 태어나기 1년 전부터였다. 어느새 그녀는 태어난 아이의 고모답게 행동하고 있었다. 집안 일이나 여자가 해야 할 일에 아무런 지식도 흥미도 없으면서도 그녀는 루스나 딸아이들이 하는 일에 곧잘 덤벼들어 참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는 아기 옆에 앉아 노래를 불러 주는 일만이 자신에게 맞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 것 같았다. 노래는 과히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콘은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표정을 싫어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그때 그녀의 얼굴에 어린 표정은 놀라움과 열망 따위의 강렬한 것이어서 그를 무척이나 불안하게 했다. 아마도 그와 같은 표정은 그녀가 그를 배신하고 사라질 때부터 그녀의 얼굴에 자라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와 연결되어 있던 모든 것들을 잘라 버리고, 그에게 무서운 분노의 불길을 일으키게 하고, 머나먼 곳으로 그녀는 사라져 갔던 것이다. 한때는 마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던 그녀는 이제 가장 못나고 거북하고 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만약 그가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그를 당황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누이동생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기 전에는 그의 집에 나타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가 내건 조건 중에는 밀주장사와 같은 더러운 직업을 버리고 정상적인 직업을 구할 것도 들어 있었다.-----가 없었다. 그 백인 친구는 그의 부동산 일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점잖고 역량있는 친구들이, 번창하는 사업과 낫 닥터 가의 커다란 저택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밀주 장사에다 사생아인 딸, 그리고 그 딸이 낳은 사생아 손녀를 가진 누이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피레이트는 의혹에 찬 시선을 오빠의 얼굴에 못박은 채 꼼짝 않고 앉아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 오빠 걱정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에요. 내 걱정을 했다고? 화가 치민 마콘은 방문을 열어 젖혔다. 나가, 피레이트! 당장 나가! 네가 보기에 내가 사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난 이 세상을 깨뜨릴 생각은 없어! 몸을 일으킨 그녀는 담요를 몸에 두르고 마지막으로 아기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낸 후 문을 나섰다. 그 후 그녀는 다시는 그의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무실 앞에 이르른 마콘은 체격이 건장한 여인이 좀 떨어진 곳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을 연 그는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가 장부를 꺼내 넘기고 있을 때 건장한 여인이 혼자 들어섰다. 안녕하셨어요, 데드 시? 전 15번 가 3번지에 사는 베인스 부인이에요. 마콘 데드는, 이 여자는 모르겠으나 3번지 셋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해낸다. 이 여인은 아마 할머니나 아주머니쯤일 것이다. 그 집이라면 집세가 밀려 있었다. 알겠소, 베인스 부인. 나한테 줄 것이라도 가져오셨습니까? 사실은 그 문제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내 아들 센시란 녀석이 아이들만 나한테 맡겨 놓고 떠나 버렸지 뭡니까. 나한테 나오는 극빈자 구호금으로는 우리 세 식구가 생명을 부지하기도 힘들 지경이에요. 죽지 못해 사는 거랍니다. 집세는 한 달에 4달러요, 베인스 부인. 이미 두 달치나 밀려 있소. 알고 있어요, 데드 씨. 하지만 아이들이 끼니를 거르다시피 하고 있어요. 그들의 목소리는 다투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낮고 정중한 것이었다. 내 돈을 갚지 않는다면 거리로 나와야 할텐데, 그런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데드 씨, 아니 선생님. 거리로 내쫓진 마세요. 어떻게든 해 보겠어요. 그게 좋을 겁니다. 그럼... 마콘은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다본다. 이번 토요일까지 처리해 주십시오, 부인. 일요일도 월요일도 아닌 토요일입니다. 명심해 두십시오. 그녀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젊고 물기가 많았더라면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물기는 그녀의 볼을 듬뿍 적시고 흘러내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 나이가 되면 물기는 쉽사리 메마르는 법이다. 여인은 커다란 손을 마콘 데드의 책상에 올려놓고 메마른 눈길로 마콘을 노려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되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저와 아이들을 거리로 내쫓는다고 해서 선생께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토요일입니다,베인스 부인. 고개를 떨구고 잠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대던 여인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사무실에서 나갔다. 소니네 가게 의 문을 닫고 나서자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정신이 나간 듯 더 있었다. 뭐라고 해요, 할머니? 베인스 부인은 큰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정신이 나간 듯 서 있었다. 안 된다고 그래? 작은아이가 할머니 얼굴을 올려다본다. 이사해야 하나요? 큰 녀석은 할머니 손에서 고개를 빼고 안타까운 듯 할머니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고양이 눈이 누렇게 반짝인다. 베인스 부인의 손은 스르르 떨어져 내린다. 돈 있는 검둥이 놈들은 더 지독해. 보기만 해도 끔찍한 놈들이야.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다시 할머니를 올려다본다.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들은 듯이 그들의 입은 벌어져 있었다. 베인스 부인이 사무실에서 나가자 마콘은 다시 경리 장부를 펴고 손가락으로 숫자들을 짚어가며, 웬일인지 아내 루스 포스터의 아버지와 처음 만나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주머니 속에 두 개의 열쇠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도 방금 사무실을 나간 여인 같은 사람들의 사정을 일일이 봐주었다간 하나도 없었을 것들이었다. 만약 그것들이 없었다면 이 도시에서 가장 유력한 흑인을 만날 용기가 우러날 리가 없었다. 의사의 집 정문의 사자 대가리 초인종을 누르면서 한 개가 한 채의 집을 의미하는 두 개의 열쇠로 인해 그는 의사의 딸과 결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콘은 아마 주머니 속의 열쇠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뭐요? 라는 의사의 첫마디나 창백한 눈동자의 거센 열기에 밀려 그대로 물러섰을 것이다. 그는 의사에게 딸 루스 포스터와 잘 알고 있다고 자기 소개를 하는 대신 다짜고짜 딸과 계속 사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도가 영예스러운 것이며, 스물 다섯 살 때부터 루스와 점잖게 사귀어 왔고, 이미 상당한 재산을 모은 자신은 의사가 딸의 배우자로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존재라고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네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의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네의 그 듣기 싫은 이름 이외엔 말일세. 하지만 난 딸의 의사에 따를 작정이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사실 의사는 그를 잘 알고 있었고, 무뚝뚝하게 대하고는 있었지만 이 키 큰 청년에게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밖에 없어 애지중지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아내가 죽은 이후 그 딸은 집안 살림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의사는 근래에 들어서 딸의 존재에 어느 정도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욕구는 그칠 줄 몰랐고, 어릴 때는 귀엽게만 여겨지던 사랑의 행위 도 다 자란 지금까지 그만두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대하는 사랑의 행위 , 즉 굿나잇 키스는 이제 의사에겐 거북하기만 한 행위였다. 열 여섯이 넘어서도 딸 루스는 잠들기 전에 아버지가 그녀의 침실에 와 침대 가에서 다정한 말을 건네고 볼이나 이마가 아닌 입술에 키스를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딸의 이와 같은 행위를 단순히 애정의 결핍이나 또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라고 여기던 의사는 어느덧 그런 순간마다 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황홀한 표정에 일종의 죄책감과 함께 당황함을 갖추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의사는 이와 같은 내심을 젊은이에게 보였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마콘은 첫방문에서 의사의 승낙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주머니 속의 열쇠가 부린 마술의 결과라고 지금껏 믿고 있는 것이었다. 마콘의 아름다운 시절의 회상은 누군가 사무실 유리창을 급하게 두드리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고개를 쳐든 마콘은 유리창 밖의 프레디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들어와도 좋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누런 금니에 바짝 마른 프레디는 흑인 동네에선 유일한 소식통이었다. 유리창을 두드리던 방정맞은 손짓처럼 그는 채신머리없이 헤실 거리고 있었다. 마콘은 언젠가 스미스가 드디어 날아갔어요! 할 떼도 이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조금은 긴장했다. 포터 놈이 잔뜩 취해서 꼭지가 돌았어요. 총을 들고 휘두르고 난리가 났어요. 누구를 쏘겠다는 거야? 마콘은 장부를 덮고 서랍을 열었다. 포터라면 그의 셋집에 사는 자로 내일 집세를 내야 하는 인물이었다. 특별히 노리는 상대는 없는 것 같아요. 저희 집 창틀에 올라서서 총을 휘두르며 누군지는 몰라도 내일 아침이 밝기 전에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더군요. 오늘, 일은 했나? 그럼요. 십 달러나 벌었는데요. 그걸 다 마셔 버렸단 말야? 다 마실 수야 있나요? 겨우 한 병 마시고 그 야단인데요. 아직도 돈은 한 줌이나 남았다구요. 어떤 미친 것이 그 녀석한테 술을 팔았어? 프레디가 누런 금니를 드러내며 의미있는 미소만 지을 뿐 대꾸를 하지 않자 마콘은 술을 판 게 피레이트라는 걸 짐작했다. 그는 서랍을 모두 잠그고 단 하나 남은 맨 밑의 서랍에서 32구경 권총을 꺼냈다. 경찰이 밀주 장사는 모두 잡아 넣은 줄 알았는데 그놈은 잘도 구해서 퍼마신단 말야. 마콘은 포터나 아이들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돈만 주면 술을 퍼 주는 장본인이 누이동생 피레이트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실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피레이트가 잡히길 바라고 있는 그였다. 만약 그와의 관계를 떠들지만 않는다면, 그런 보장이 있으면 당장에라도 고발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어떻게 쏘는 지나 아세요, 나리? 알고 있어. 포터란 놈은 술만 취하면 미친놈이에요. 그놈이 어떻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놈을 어떻게 진정시킬 작정이죠? 난 그놈을 진정시키려는 게 아냐. 내 돈을 받아 내기만 하면 그 뿐이야. 그놈이 미쳐 버리건 뒈지건 내가 알 바 아냐. 하지만 내 집세는 받아 내야겠어. 그 다음엔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릴 테야. 프레디의 얼굴에 떠돌던 웃음기가 사라져 갔고 벌어졌던 잎이 다물어졌다. 이 허풍선이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입방아를 찧을 구실을 찾았을 때라는 걸 마콘은 알고 있었다. 그의 귀는 손살거리는 소리 하나 놓치는 법이 없었고, 그의 눈은 무엇 하나 은밀한 시선의 교환, 어둠 속에서의 싸움, 새로 맞춘 옷 등등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마콘은 프레디가 어리석으면서도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은 대부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이유가 있는 것이었으나 그 행동의 근원이 되는 동기는 언제나 잘못된 데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지금도 포터가 총을 휘두르며 악을 쓰고 있다는 건 사실이나 그가 내일 아침까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노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총이 노리는 상대는 자기 자신이었다. 포터는 창문에 올라서서 권총을 이마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나 올려 보내 줘! 내 말 들려? 누구 하나 올려 보내 달란 말야! 그렇지 않으면 내 머리를 쏴 버릴 거야! 마콘 프레디가 도착했을 때 벌써 모여든 구경꾼들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어떤 걸로 올려 보낼까? 여자가 아니면 안 되나?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구! 하얀 건 어떤가? 미친 짓 집어치우고 내 돈이나 내놔! 마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누르고 튀어 올랐다. 내 돈은 이리 던지고 머리통에다 총을 쏘든지 말든지 해! 포터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기려면! 마콘이 계속 소리쳤다. 똑똑히 보고 쏴야 돼. 만약 한 방에 날 못 죽이면 네놈 머리통은 내가 날려 줄 테니까! 마콘은 권총을 뽑아들었다. 자, 쏠 테면 쏴 봐! 그렇지 않으면 창문에서 당장 내려와! 포터는 잠시 주저하는 것 같더니 총구를 자기 이마에 도로 갖다 대려 했다. 그러나 너무 취해 손이 말을 안 듣는 듯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권총을 창틀에 내려놓고 갑자기 바지 지퍼를 내리곤 모여선 군중들 머리위로 오줌을 갈겨 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여자들인 군중들은 아우성을 치며 흩어졌다. 마콘도 오줌 세례를 맞고 배를 잡고 웃고 있는 프레디를 걷어차고는 옆집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로부터 30분 이상은 포터의 독무대였다. 권총을 들어 위협하기도 하고 낄낄거리며 희롱하는가 하면 욕지거리를 퍼붓고 비명도 지르다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난 너희들을 사랑해. 사랑한단 말야! 나한테 그러지 마. 이 나쁜 년들아! 그러면 안돼. 왜 날 놀리느냔 말야! 내가 네년들을 사랑한다는 걸 몰라? 난 너희들을 위해 죽는 거야. 사랑한단 말이다! 오, 하느님, 용서해 주소서.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이 똥걸레 같은 세상에서 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눈물이 그의 얼굴을 온통 적셔 놓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품에 안는다. 여태껏 찾던 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껏 호소하던 상대처럼. 차라리 미워하게 해 주소서, 주여. 그의 울음은 흐느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미워하게 해 주십시오.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스미스 씨처럼 더 이상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주여,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아시지 않습니까? 얼마나 무거운지.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독생자도 사랑을 하다 죽은 게 아닙니까? 사랑이 예수를 죽였다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창틀에 올라선 그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휘청거린다. 빨리 내려와, 이 검둥이 놈아! 마콘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으나 아까처럼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너, 흡혈귀 같은 놈! 포터는 다시 마콘을 겨누려 했다.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돼! 정말 죽어야 돼! 왠지 알아? 좋아, 내가 이야기해 주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리고는 방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권총은 아랫집 지붕 위로 떨어졌다가 다시 길바닥으로 떨어져 충격에 의해 커다란 총성을 발했다. 총알은 한 구경꾼의 구두를 스치고 지나 길에 세워 둔 차의 타이어를 뚫었다. 가서 내 돈을 가져와! 마콘이 프레디에게 소리쳤다. 내가요? 프레디의 얼굴이 질린다. 저놈이 만약... 가서 가져와! 포터는 코를 골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가도 어린아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마콘이 그곳을 떠날 무렵 해는 이미 빵 공장 건물 뒤로 숨어들고 있었다. 지치고 짜증스러운 심정으로 15번 가를 걸어가던 그는 자신의 소유인 다른 집 한 채를 바라본다. 희미한 실루엣이 저녁 햇살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셋집들은 두건을 뒤집어 쓴 유령처럼 시꺼먼 물체가 되어 그를 노려보는 듯했다. 이 시간에 그것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 끔찍한 일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그것들은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물체로만 여겨졌다. 이런 때면 그는 으레 집도 절도 없는 방랑자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이와 같은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난데없이 누이동생의 집을 지나쳐 볼 생각을 하게 했다. 이제 곧 어두워질 테니 그녀에게 눈치채이지 않고도 그 집을 바라보며 지나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피레이트가 살고 있는 다링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지상에 세워졌다기보다 땅바닥에 붙어 있다는 것이 어울릴 단층 짜리 판잣집이었다. 요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전기와 가스는 끊어진 지 오래였다. 밤이면 촛불이나 석유 등잔으로 불을 밝히고 석탄이나 나무를 주워 다가 불을 피워서 몸을 녹이고 음식을 만들며 물은 근처 우물에서 퍼다 먹었다. 문명이나 문화의 혜택은 이 집과는 거리가 먼 곳의 이야기였다. 그녀의 집은 큰길에서 40,50미터 들어간 곳에 있었고, 집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소나무 숲에 눈길이 가자 그는 문득 어린 시절의 피레이트의 입을 회상한다. 그녀는 항상 소나무 잎 씹기를 즐겨 해 그녀의 입에서는 언제나 소나무 냄새가 풍겨왔다. 피레이트는 어머니가 죽은 후 12년 동안 그의 자식처럼 자라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그녀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집 마당에 이르른 그는 어둠이 그의 몸을 숨겨 주리라는 생각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집 가까이 스쳐 지나면서도 바라보지 않았으나 노랫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피레이트, 딸 레바, 그리고 손녀 헤가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식탁에 앉아 손가락을 빨면서 포터의 난동과 마콘의 겁없는 행동 등에 대해 떠들고 있을 것이다. 이 부근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교교한 달빛만이 밤길을 밝혀 주는 것이었다. 마콘은 노랫소리에 등을 밀리기라도 하듯 발길을 돌려 서둘러 큰길로 나왔다. 큰길에 올라서자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동생 집을 돌아본 그는 어느 그림엽서에서 본 풍경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제부터 돌아가야 할 자신의 가정을 생각한다. 바짝 야위었지만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 빳빳한 아내, 언제나 울화를 치밀게 하는 망아지 같은 딸들, 그리고 칭얼대거나 투덜댈 줄밖에 모르는 아들... 그곳엔 음악이 없었다. 오늘밤 그는 그와 관계 있는 사람들이 약간의 음악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시 돌아선 마콘은 누이동생의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들은 피레이트의 선창에 따라 노래를 하고 있었다. 피레이트의 우렁찬 콘트랄토에 이어 레바의 날카로운 소프라노가 들렸고, 헤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음악에 싸인 채 다가가는 마콘은 누구의 마중도 대화도 필요치 않았다. 오직 음악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들소와 칠면조가 뛰노는 초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다가간 그는 창을 통해 희미한 촛불이 흔들리고 있는 방안을 들여다본다. 레바는 부엌칼 따위로 발톱을 깎고 있는 듯 긴 목이 무릎 가까이까지 숙여져 있었다. 헤가는 등을 창으로 향하고 냄비 속의 무엇인가를 젓고 있는 할머니 옆에서 머리를 땋고 있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방안의 정경을 엿보며 음악을 듣고 있는 사이에, 마콘은 이제껏 온몸에 찌들어 있던 피로와 짜증이 스러져가고 따뜻한 마음과 생기가 되살아오는 것을 느꼈다. 레바의 부드러운 옆모습, 머리를 땋고 있는 열 두어 살 가량의 헤가, 그리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 피레이트, 그들의 모습은 음악과 함께 아름답게만 보여지는 것이었다. 피레이트의 얼굴은 그가 자신의 얼굴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노래를 하고 있는 그 얼굴은 모든 감정과 정열을 노래 속에 뿜어 넣고 있었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노래를 하지 않거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면 쉬지 않고 우물대는 입으로 인해 찌그러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뭔가를 쉴새없이 씹는 것은 피레이트의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었다. 솔잎이 있으면 좋았지만, 없을 땐 지푸라기, 고무줄, 실 등 닥치는 대로 씹는 것이 어릴 때의 그녀의 습성이었다. 마콘이 추억과 음악의 무게에 눌려 아늑한 기분에 잠겨 있을 때 노래가 끝났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마콘은 아직은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방안을 마음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그곳에서 그는 쉽사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방안의 사람들은 노래를 할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했다. 레바는 아직 굽힌 목을 펴지 않았고, 헤가는 땋은 머리를 묶고 있었으면, 피레이트는 여전히 나뭇가지로 냄비 속의 음식을 젓고 있었다. 다만 음악만이 없을 뿐이었다. 2. 메마른 만남 데드 가의 대형 페카드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정으로 즐거운 기분이 된 것은 레나와 코린시안스뿐이었다. 그들은 호화스런 차를 타고 가 보지 못한 곳을 간다는 사실에 한껏 들뜰 만한 나이들이었다. 제각기 다른 쪽 차창에 붙어 앉은 그녀들은 나는 듯 뒤로 밀려가는 거리의 풍경에 열중하며 어쩌면 힘센 하인들이 노를 젓는 유람선에 탄 귀공녀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타킹을 발목까지 말아 내리고는 지나치는 사내녀석들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데드 가의 일요일 외출은 이제 거의 의식적인 것이었고, 마콘에게는 버릴 수 없는 즐거움이 되어 있었다. 그의 입장으로는 이 외출이 성공한 인물로서의 자신을 과시하는 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스에게는 야심적인 행사라기보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복한 가족들을 보여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부모들에게는 어쨌건 이유가 있는 외출이었지만 부모 사이에 끼여 앉아 차 엔진 뚜껑 가운데에 붙어 있는 마스코트 날개 달린 애인상 이나 겨우 바라다볼 수 있는 아이로서는 짜증스럽고 갑갑하기만 한 노릇이었다.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어머니의 무릎 위에 올라앉을 수 없어 키 작은 아이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차의 계기들이나 부모의 다리와 손, 그리고 목을 빼고 보아야 눈에 들어오는 마스코트 정도였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장님처럼 앉은 채로 날아가는 셈이었다. 지나치는 나무들도 집들도, 그리고 뛰노는 아이들도 아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마콘 데드의 페카드 차가 이 도시에서 가장 거칠고 볼품없는 거리 낫 닥터 가를 기세 좋게 달려 돈 많은 백인들이 사는 이웃 동네로 통하는 경계 지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의 차를 본 몇몇 흑인들은 악의 없는 부러움의 표시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1936년의 이 도시에서 마콘 데드만큼 부유한 흑인은 찾아보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마콘 데드의 페카드 차는 호화스러운 고급 차란 사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유명했다. 그의 차는 거리를 30마일 이상으로 달리는 걸 본 사람이 없었다. 달리다가 창을 열고 친구들에게 소리치는 걸 본 사람도 없었다. 일요일이 아닌 평일에 거리에서 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비 오는 날 본 사람도 없었다. 앞자리의 어린 아이가 일어서서 차창 밖을 내다보는 것도 본 사람이 없었다. 아이스크림 포장이나 맥주 깡통이 창 밖으로 던져지는 걸 본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마콘은 이따금 더러운 여자들 의 집에 드나들고 세 들어 사는 과부와의 사이에 묘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도 들렸지만 이 차의 뒷자리에 레나와 코린시안스 이외의 여자가 탄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이와 같은 모든 특징을 종합하여 이 거리의 흑인들은 마콘 데드의 초록색 페카드를 영구차 라 부르고 있었다. 코린시안스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길고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머리는 젖은 모래 같았다. 목적지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드라이브를 하는 걸까? 코린시안스는 지나치는 여인들과 남자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레나에게 속삭인다. 조심해요, 여보. 당신은 이곳에선 언제나 잘못 돌더군요. 루스가 부드러운 소리로 말을 건넨다. 운전하고 싶어? 마콘이 무뚝뚝한 소리를 내뱉는다. 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하는 대로 맡겨 둬. 좋아요. 하지만 잘못 돌았다고 나한테... 마콘은 매끄러운 솜씨로 차를 왼쪽으로 돌려 중심 가를 지나 주택가로 꺾어 든다. 아빠, 목적지가 있는 거예요? 그래. 마콘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래도 신이 나는 듯 레나가 스타킹을 훨씬 더 내리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이쪽으로 가면 호수 아녜요? 그곳에 가면 뭐가 있죠? 아무도, 아무것도 없을텐데요? 호숫가에 별장 지대가 있단다, 레나. 아버지는 그걸 보러 가시는 거야. 루스가 부녀 사이의 위태로운 대화에 끼여들었다. 그건 백인들 소유잖아요? 레나가 못내 의아스럽다는 듯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대담하게 묻는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마콘이 순순히 대답한다. 모두 다 백인들 것은 아냐. 건너편에 가면 팔려고 내놓은 게 많아. 누구든 돈만 있으면 사는 거야. 흑인들도 멋진 여름 휴가를 지낼 수 있단다. 내 말 알아들었니? 마콘은 백미러로 딸의 표정을 살핀다. 하지만 흑인 중에 누가 살 사람이 있겠어요? 콜스 목사나 싱글톤 박사는 살 수 있을 거야. 코린시안스가 마콘 대신 대답한다. 그 변호사 있지 않니? 이름이 뭐더라...? 루스가 코린시안스를 돌아보며 묻는다. 그러나 딸은 어머니의 말을 못 들은 척 넘겨 버린다. 그렇담 메리도 살 수 있겠지. 레나가 이 말을 하고는 깔깔거린다. 그러자 코린시안스가 그녀를 쏘아본다. 아빠는 그 따위 술집 계집과는 상종도 안 하셔. 그렇죠, 아빠? 우리를 술집 계집 옆에서 살게 하진 않으시겠죠? 그 여잔 돈이 많아. 어머니가 딸을 윽박지른다. 가진 게 많고 적고 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느냐가 문제죠. 아빠, 그렇죠? 코린시안스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지원을 기대한다. 너무 빨리 모는 것 같아요. 루스가 바닥을 딛고 있는 발가락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만약 한 번만 더 내 운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면 걸어서 가게 만들 테니 각오해! 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지자 레나가 얼른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루스는 즉시 조용해진다. 그러나 이번엔 앞자리의 사내아이가 속도계 아랫부분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만두지 못해! 마콘이 소리쳤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웅얼댔다. 코린시안스가 머리를 싸안는다. 하나님 맙소사.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엘 갔다왔잖니? 루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들을 내려다본다. 그래도 가야 한단 말이에요. 아들을 바라보던 루스가 고개를 돌렸다. 차를 세워야겠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차창밖에 펼쳐지기 시작하는 전원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리 별장을 사려는 거예요, 아니면 장사하시려는 거예요? 난 장사해 본 일 없어. 좋은 집을 사서 빌려 줄 생각만 해 왔을 뿐이야. 마콘이 아내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면 우리가... 오줌 마려워요! 아이가 소리쳤다. ...그곳에서 살게 되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우릴 빼놓고, 흑인 중에 누가 그런 곳에서 살 수 있겠어요? 코린시안스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당장은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머지 않아 오 년 내지 십 년 사이에 상당수의 흑인들이 그 정도는 지닐 수 있게 될 거다. 한두 명이 아닌 상당수다. 내 말이 틀림없을 것이니 두고 봐라. 레나가 초조한 듯 숨을 들이켰다. 저 언덕 위에 좀 세워 주세요. 안 그러면 아이가 시트를 더럽힐 거예요. 마콘이 백미러로 딸을 흘낏 바라본 다음에야 차의 속력을 늦춘다. 누가 데리고 갈래? 루스가 차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당신은 안돼. 마콘이 제지한다. 저도 안돼요. 코린시안스가 고개를 젓는다. 하이힐을 신었거든요. 루스는 남편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 다물어 버린다. 할 수 없군. 레나가 한숨을 쉬며 몸을 움직였다. 어린 사내아이는 커다란 누나의 손에 이끌려 숲 속으로 사라졌다. 정말 이 도시에 별장을 빌려 살 만한 흑인들이 생겨날까요? 코린시안스, 꼭 이 도시에 사는 흑인들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여름이면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단다. 백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많아. 마콘은 차의 진동 때문에 조금씩 덜덜거리는 핸들 위에 얹은 손가락을 북을 치듯 두들기고 있었다. 검둥이들은 물을 싫어해요. 코린시안스가 키득거린다. 자기 것이 되면 싫어하지 않을 거다. 마콘은 이렇게 말하고는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려 숲에서 나오는 레나를 바라본다. 레나는 색깔이 찬란한 꽃을 한 묶음 꺾어 들고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파란 드레스에는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다. 옷을 버렸어요. 레나는 눈물이 글썽해서 소리쳤다. 얘가 오줌을 갈겼단 말예요. 루스가 혀를 찼다. 코린시안스가 웃음을 터뜨린다. 검둥이들은 물을 싫어한다고 했잖아요. 아이가 일부러 한 짓은 아니었다. 오줌을 누고 있을 때 꽃을 꺾으러 갔던 누나가 돌아오는 발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누나의 드레스를 버려 놨던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는 등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집착하는 묘한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등뒤에서 일어나는 일에나 과거의 일에만 열중하는 그런 버릇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미래는 그에게 자연히 다가오는 것이었다. 페카드 차 속에서 지겹고 짜증스럽던 아이는 어느덧 학교에 가게 됐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만난 한 친구의 안내로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기타는 그녀를 안다고 했다. 그녀의 집에까지 들어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어떻게 생겼지/ 우유 배달 이 기타에게 묻는다. 빛이 났어. 기타가 대답했다. 빛이 나고 갈색이었지, 냄새도 났고. 나쁜 냄새였어? 몰라. 그 여자의 냄새야. 너도 맡게 될 거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러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아버지의 누이동생이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두 아이를 완전히 홀리듯 묶어 놓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이가 그 여인의 곁에 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일단 사실을 알고 난 아이들은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어쨌거나 기타는 이미 그녀의 집에 들어가 본 일이 있었고, 우유 배달 은 그녀의 조카가 아닌가. 아이들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긴소매에 긴치마로 된 검정색 롱드레스 차림으로 집 앞 계단에 주저앉아 오렌지를 씹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눈에는 그녀의 귀에 매달려 흔들리는 귀걸이가 보였다. 검은 드레스에 오렌지를 질겅질겅 씹으며 계단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 우유 배달 로서는 선뜻 다가가기 힘든 낯선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기타는 그의 어린 친구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 같은 걸 느낄 나이가 아니었다. 안녕. 여인이 머리를 쳐들어 처음엔 기타를, 그리고 우유 배달을 바라본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녀의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자갈이 부딪치는 것처럼 메마른 소리였다. 우유 배달은 불안한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타는 이를 드러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인사죠. 난 너와 가까운 사람이 아냐. 알았어요. 안녕하세요? 그래, 그게 훨씬 낫구나. 무슨 일로 왔지?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 지나가는 길이에요. 쓸데없는 소리 마라. 여기가 행길이냐? 우리가 온 게 귀찮으시다면 가겠습니다. 기타 녀석이 능글맞게 웃는다. 볼일이 없으면 썩 물러가거라. 좀 여쭤 볼 게 있습니다. 기타가 태도를 바꿔 정색한다. 이 여자가 지나치게 직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씨에도 신경을 쓴다. 물어 봐. 사람들이 그러는데 배꼽이 없으시다면서요? 그녀를 알고 있는 나이든 사람들은 그녀가 배꼽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머니가 그녀를 낳다가 죽자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낼 때 태를 잘못 잘라 배꼽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자국만이 그녀의 배에 남았던 것이다. 그걸 물어보러 온 거냐? 네. 딴 수작하지 말고 물어 볼 것이나 물어 봐. 정말 그래요? 뭐가? 배꼽이 없으신가요? 이 사실은 어린 우유 배달 도 누나들의 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여자가 정말 배꼽이 없다면 그의 고모가 분명한 것이다. 그래. 왜 그렇게 된 거죠? 기타가 짓궂게 묻자 대답은 하지 않고 잠시 그를 노려보던 피레이트가 화제를 돌린다. 이번에 내가 물어 보겠다. 네 꼬마 친구는 누구지? 이 아이는 우유 배달 데드예요. 이미 우유 배달 이라는 아이의 별명은 낫 닥터 가에 사는 흑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것이 되어 있었다. 벙어리는 아니겠지? 피레이트는 아이를 바라보며 오렌지를 질겅질겅 씹는다. 그럼요. 말 좀 해 봐. 기타가 아이의 팔꿈치를 잡아 흔든다. 우유 배달 데드는 잠시 호흡을 조절하다가 겨우 입을 연다. 안녕. 피레이트가 웃음을 터뜨린다. 아마 네놈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런 검둥이 녀석들일 게다. 도대체 학교에선 뭘 가르치더냐? 언젠가는 그 따위 소릴 지껄이다가 따귀를 얻어맞을 때가 있을 게다. 아이는 수치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학교에서 소문을 듣기로는 그녀는 가난에 찌들고 더럽고 못생겼으며 언제나 취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절대로 더럽거나 취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손톱은 상아처럼 새하얗고 술에 취하기는커녕 입에서는 향긋한 오렌지 냄새가 풍겨났고, 아이가 본 어느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 받았던 모한 인상과는 달리 볼수록 다정한 감마저 드는 여인으로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조금도 싫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인이 몸을 일으키자 아이는 다시 한 번 놀란다. 그녀는 아버지보다도 키가 커 보였던 것이다. 드레스도 안자 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길지 않아 치마 밑으로 끈을 묶지 않은 남자 구두와 갈색 피부의 종아리가 보였다. 그런 행동을 네 아버지가 봤더라면 화를 냈을 게다. 바보스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그녀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서 아이를 바라본다. 난 네 아버지를 잘 안다. 너도 잘 알고. 기타가 때를 놓치지 않고 참아 왔던 걸 묻는다. 그럼 당신이 이 아이 아버지의 동생인가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지. 데드 성을 가진 사람은 이제 단 두 사람밖에 없어. 바보처럼 안녕 이란 말을 해 핀잔을 듣고 난 후 입을 다물고 있던 어린 우유 배달 데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내 성도 데드예요!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누나들도 그래요. 아버지와 당신만이 데드 성을 가진 건 아니에요. 아이는 소리치면서도 자신이 왜 이처럼 흥분하고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사실 이제껏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싫어해 왔고, 기타와 친구가 되기 전까지도 자신에게 붙은 별명마저도 싫어했었다. 그러나 기타의 집에서 늘상 튀어나오는 그의 별명은 다정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는 낯선 여인 앞에서 자신의 이름에 대해 커다란 자존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심장이 뛰는 소리라도 들릴 듯한 침묵이 흐른 다음 피레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들 삶은 계란 먹지 않을래? 웃음이 가라앉자 여인이 아이들에게 불쑥 물었다.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삶은 계란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 여인 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더욱 없었던 것이다. 배꼽이 없다는, 그리고 이상한 귀걸이를 단, 검은 나무처럼 키가 큰 이 여인을 따라 밀주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사양하겠어요. 하지만 물을 좀 마시고 싶군요. 여인이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좋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여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뒤를 따라 밝고 낡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 한가운데 이끼 빛깔의 커다란 주머니가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었고, 곳곳에 초를 꽃은 병들이 털려 있었다. 그러나 넓은 방안에는 흔들의자 하나, 반듯한 의자 둘, 커다란 식탁 하나, 싱크대와 난로 외에는 이렇다 할 가구가 보이지 않았다. 먹어 보는 게 좋을 게다. 정말 맛있게 삶을 줄 알거든, 노른자가 완전히 익지도 않았지만 흐르지도 않게 삶아야 해. 그런 걸 먹어야 진짜 계란 맛을 알게 되지. 그녀는 들고 있던 오렌지 껍질을 항아리 속에 던져 넣는다. 이 집의 모든 물건들은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쓰이는 것 같았다. 싱크대로 다가간 그녀는 계란 삶을 준비를 한다. 어릴 때 내가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를 위해 요리를 할 때 난리를 피우던 생각이 나는구나. 너희 아버지는 할 줄도 모르면서 나서서는 망쳐 놓긴만 했지. 내가 버찌 파이를 만들어 주면 꼭 자기가 만들어 주겠다고 야단이었다. 그 당시의 마콘은 정말 착한 소년이었고, 나한테 너무나 잘해 줬었어. 너도 그 당시의 아버지를 보았더라면 착한 아이가 안 될 수 없을 게다. 너의 아버지에게 그 당시의 성격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너한테도 좋은 친구가 돼 줬을 것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자그맣고 동그란 자갈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자갈과 자갈이 부딪치는 바로 그 소리였다. 방안에 가득 찬,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술냄새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굴러다니듯이 들려 왔다. 커튼이나 블라인드가 없는 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은 방안의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자갈과 같은 목소리,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방안에 가득 찬 술 냄새... 이런 것들은 두 소년의 정신을 나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의자에 주저앉자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난 지금 이곳에 이렇게 있을 수 없었을 거야. 어머니 뱃속에서 한 번을 죽을 고비를 넘긴 나는 어두운 숲속에서 또 한 번 죽을 뻔했었지. 그런데 네 아버지가 나를 구해 지금 이렇게 계란을 삶고 있는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어. 아버지는 2미터나 되는 울타리 위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 뒤에서 쏴댄 총탄을 맞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떨어지셨어. 결국 마콘과 나는 살고 있던 커다란 집에서 떠나야 했어. 오고 갈 데가 없는 우리들은 숲으로 들어갔지. 어두운 숲이었어. 너희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어둠에도 여러 가지가 있단다. 폭풍과 폭우가 밀려오기 전의 초록빛이 나는 하늘색과도 같은 어둠이었지. 그 속에서 나는 두려움에 떨다 길을 잃은 거야. 그때 마콘이 날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난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었을 거야. 뒤에서 아버지에게 총을 쏜 건 누구였나요? 기타가 눈을 반짝이며 끼여들었다.. 누가 왜 아버지를 쐈는지는 몰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는 것뿐이야. 어디서 그랬었죠? 이야기했잖아. 울타리 위에서라고. 울타리는 어디에 있었죠? 기타는 끈질겼다. 우리 농장에. 묻던 아이가 웃고 만다. 그러나 그의 호기심은 웃음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농장은 어디 있었죠? 몬투어 읍에 있었어. 그 읍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지만 아이는 장소에 대해선 그만 묻기로 했다. 그때가 언제였죠? 아이는 능란한 형사처럼 집요하게 묻는다. 거리에서 아일랜드 인들을 쏴 죽이던 해였어. 무기 장수와 무덤 파는 사람들이 한몫 단단히 보던 해였지. 계란이 다 삶아진 듯 냄비를 난로에서 내려 탁자에 놓는다. 계란을 꺼내 찬물에 담가 식힌 다음 껍질을 까며 이야기를 계속하려던 그녀는 문득 창 밖을 내다보고는 기겁을 한다. 아, 왔구나! 우유 배달 데드와 기타는 누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피레이트는 어느새 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채 다가가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찬 듯 펄쩍 열렸고, 우유 배달 데드는 허리를 굽힌 소녀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소녀는 커다란 생철통을 끌고 있었고, 한 여인이 다른 쪽을 밀며 소리쳤다. 문지방을 조심해라. 열려 말아요. 끄는 소녀가 대답한다. 밀어요! 왜 이렇게 늦었니? 피레이트가 합세하며 묻는다. 토미의 자동차가 부서졌어요. 커다란 생철통을 방안에 완전히 끌어들인 다음에야 소녀는 허리를 펴고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기도 전에 벌써 호감이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헤가! 피레이트가 손녀를 부르며 아이들을 바라본다. 여기 이 꼬마가 네 형제 우유 배달 일난다. 저 아이는 이 애 친구고, 이름이 뭐랬지, 귀여운 친구? 기타요. 기타라니? 치고 노래 부르는 기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엄마, 얘네들은 남매 사이가 아니에요. 오촌간이지요? 나이 든 여인이 말한다. 마찬가지야. 그렇지 않아요. 내 말이 맞지, 헤가야? 그래요. 달라요. 보세요. 제 말이 맞죠.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나이 든 여인 레바가 적당한 말을 찾느라 천장을 바라본다. 남매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피레이트가 그녀의 말을 막는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친형제와 친척을 대할 때 다른 점이 있어야 하느냐는 거다. 그건 문제가 안돼요, 어머니. 닥쳐. 난 헤가에게 묻고 있는 거야. 맞아요, 할머니, 다르게 대할 필요는 없어요. 다를 게 없다면 무엇 때문에 다르게 불러야 하지? 똑같이 하나로 해 버리지. 레바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투덜거린다. 저 흔들의자를 이리 끌어와. 피레이트가 말했다. 너희 녀석들도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 있을 자격이 없어. 레바가 생철통에 든 것을 쏟아 놓는다. 가지에 달린 나무딸기였다. 우린 뭘해야 하는 거죠? 그 거지 같은 가지에서 딸기를 떼어 내는 거야. 뭉개지 말고. 항아리를 가져와. 이게 전부니, 헤가야? 아뇨. 밖에 두 통 있어요. 들여다 놓는 게 좋겠다. 파리들이 꾄다. 문으로 가던 헤가가 우유 배달에게 몸짓을 해 보인다. 같이 가자. 날 좀 도와 줘. 우유 배달이 의자에서 뛰쳐 일어나 헤가의 뒤를 따른다. 그녀는 이제까지 본 소녀들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 같았다. 나이는 훨씬 위일 것 같았다. 아마 기타 또래로 열 일곱쯤 된 것 같았다. 헤가의 뒤를 따르는 우유 배달은 한껏 들뜬 기분이 되어 갔다.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들뜬 기분으로 몸마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이와 헤가는 생철통 두 개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헤가는 기운도 무척 센 소녀였다. 기타라고 했지? 조심해. 터뜨리면 안돼. 그런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지? 기타를 잘 치나? 피레이트가 딸기를 따내고 있는 기타에게 말을 건넨다. 잘 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게 아니라 치고 싶어해서 붙은 거예요. 아주 어릴 때 그랬대요. 어린애가 기타는 어떻게 알았지? 우리가 플로리다에 살 적에 가게에 있는 걸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는 길에 봤대요. 그때부터 막 울며 그것을 달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아주 어린애였는데도. 이때부터 방안에는 각자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꽃피기 시작했다. 생철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딸기를 따는 그들은 다리가 저려 오는 것도 모르고 마음껏 웃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열두 살이라지만 키는 1백 70센티가 다 되도록 자란 우유 배달 데드는 이토록 완전히 즐거운 순간은 태어난 후 처음 맞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옆에는 그보다는 훨씬 나이 많아 믿음직스럽고 친절하고 집없는 친구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며 마음껏 큰 소리로 웃어대는 여인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싫어하는 것도 이 순간만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걸로 술을 담그면 언제 먹을 수 있는 거죠? 우유 배달이 딸기 한 움큼을 항아리에 넣으며 묻는다. 이 딸기 말이냐? 몇 주일 걸릴 거다.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도 좀 마시게 해 주실래요? 기타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그래, 문제없지. 지금 좀 마실래? 술은 지하실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건 마시기 싫어요. 내가 마시고 싶은 건 내가 만든 이 술이에요. 네가 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피레이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딸기 몇 개 딴 걸로 술을 담갔다고 생각해? 제기랄. 기타가 뒤통수를 긁는다. 맨발로 밟아야 된다면서요? 발로 밟는다구? 피레이트가 화를 벌컥 낸다. 술을 발로 담근다구요? 그런 술은 맛이 좋을 거예요. 헤가가 키득거린다. 우리 술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레바도 딸의 말에 동조한다. 이 집 술은 맛이 좋은가요? 기타가 입맛을 다신다. 말해 줄 수 없구나. 아니, 왜요? 맛을 본 일이 없으니까. 우유 배달이 웃음을 터뜨린다. 맛도 보지 않은 술을 파신단 말인가요? 맛을 보려고 사는 사람은 없어. 취하려고 마시는 거지. 예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레바가 고개를 젓는다. ...요샌 사가는 사람이 없어요. 이젠 집에서 담그는 밀주 따윈 사 마실 사람이 없을 거예요. 공황은 끝났어요. 헤가가 나선다. 실업자는 없어졌어요. 모두들 제대로 만든 술을 사 마실 수 있게 됐단 말예요. 아직도 살 사람은 많아. 술 담그는데 쓰는 설탕은 어디서 사죠? 기타가 그들의 대화에 끼여든다. 암시장. 레바가 대답했다. 살 사람이 많다구요? 왜 사실을 말씀하지 않는 거죠? 이러다간 올 겨울엔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우리를 먹여 살릴 사람이라도 있나요? 헤가가 얼굴이 상기되어 대든다. 진정해라. 우리 검둥이들은 도마뱀처럼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 도마뱀은 먹지 않고도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나요? 레바가 눈이 둥그래져 묻는다. 얘야, 널 굶어 죽게 놔두진 않아. 지금껏 배가 고팠던 날이 없었지 않니? 피레이트가 손녀에게 다정스레 말했다. 물론이에요. 배를 곯은 일은 없었을 거예요. 헤가가 들고 있던 딸기나무 가지를 방구석으로 내던지고 손가락을 꺾는다. 손톱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배가 고팠던 날이 많았어요. 깜짝 놀란 새처럼 피레이트와 레바의 머리가 번쩍 치켜들어진다. 그들은 헤가를 바라본 후에 서로 마주본다. 아가야. 레바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배가 고팠었다고? 그런데 왜 이야기를 안 했었지? 그녀의 표정은 딸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갖게 해 줬어, 뭐든지. 그걸 몰랐었니? 피레이트가 입 속에서 굴리고 있던 오렌지 씨앗을 손바닥에 뱉아낸다. 계속 우물거리던 입술이 멎은 그녀의 얼굴은 돌처럼 굳은 것이었다. 우유 배달은 그녀의 얼굴을 밝혀 주고 있던 전깃불이 꺼져 버린 듯한 착각에 빠진다. 레바의 얼굴엔 어느새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렸고, 헤가는 옆얼굴을 긴 머리에 가린 채 몸을 앞으로 숙여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손가락을 꺾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은 길고 길었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겁없는 기타마저도 그 침묵을 깨뜨리기 두려운 모양이었다. 결국 피레이트가 입을 열었다. 레바. 음식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레바의 표정이 천천히 풀려 갔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피레이트는 다시 딸기를 따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레바도 그녀를 따라 콧노래를 한다. 그들은 피레이트가 선창을 할 때마다 멋진 화음을 이루며 콧노래를 불렀다. 오, 슈거맨, 날 두고 가지 마오 여기 이 숨막히는 목화밭에 오, 슈거맨 날 두고 가지 마오 날 잡아 묶으려는 백인들의 손아귀에 두 여인이 목소리를 합쳐 노래를 시작하자 헤가 또한 고래를 쳐들고 노래를 한다. 아, 슈거맨이 날아가네 멀리 멀리 날아가네 하늘을 가르고 날아 날아 슈거맨은 고향 찾아 날아가네 우유 배달은 숨도 쉬지 못하고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가의 노랫소리는 그의 자그마한 폐부를 헤집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억눌린 감정에서 겨우 고래를 들어 친구의 얼굴을 돌아본 아이는 넘어가는 마지막 햇살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은 우유 배달 데드에겐 잊지 못할 날이 될 것만 같았다. 그 곳에서 받은 격한 감동도 이유가 되겠지만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서 아이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감정은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지속될 수 있었다. 입바른 소식통 프레디가 마콘 데드에게 그의 아들이 오후 내내 밀주 집에서 술을 퍼마셨다 고 일러바쳤던 것이다. 거짓말이에요! 우린 아무것도 안 마셨어요, 아무것도. 기타가 달라고 했던 물 한 잔마저도 안 마셨어요. 프레디는 거짓말은 안해. 허풍은 떨어도 거짓말은 절대로 안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거짓말을 했어요. 술 마셨다는 것 말이냐?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네가 그곳에 갔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겠지, 안 그래? 그건... 네, 거짓말이 아니에요. 아이는 목소리가 죽어 가는 걸 느낀다. 그러나 기를 써 떨지는 않는다. 평소에 내가 뭐라고 했었지? 그 집에 가도 좋다고 했나? 그 집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하셨고, 그 여자분들을 만나선 안된다고도 하셨어요. 그렇지. 하지만 그 이유는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은 나에겐 친적이고, 그 여자분은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에요. 그렇다면 넌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다. 설명을 해 주건 안 해주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하는 거야. 네 발이 이 집에 자국을 남기는 한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세 살이 되던 해부터 우유 배달 데드는, 그 당시 마흔두 살이었고 지금은 쉰 둘인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인물로 알았고, 이 거대한 저택보다도 크게만 생각해 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만큼 큰 여인을 보고 온 오늘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자신도 자랐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제가 가장 어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저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절 어린애 취급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설명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걸 들을 때 저는 어떻게 느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전 열 두 살난 젖먹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아버지.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하며 대드는 것은 어디서 배웠어? 할아버지도 아버지가 열두 살 때 그렇게 대하셨나요? 말 조심해! 드디어 마콘의 입에서 노호가 터졌다. 그는 주머니에 꽂았던 손을 뽑았으나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아들의 질문으로 인해 어린 시절의 자신과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가 높다란 담장 위에서 떨어지는 광경을 회상한다. 진흙땅 위에 떨어져 몸부림치던 아버지를 보던 순간 그의 체내에 흐르던 격렬한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권총을 뽑아들고 담장 위에서 닷새 밤을 지새운 아버지는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한테 가졌던 감정을 이 아이도 자기에게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치자 이제는 이야기를 해 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해 주세요. 할아버지도 그러셨나요? 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었다. 바로 곁에서 말이다. 둘이서 무슨 일이든 다 해치웠어. 어머니는 피레이트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셔서 어린 피레이트는 내가 돌봐야 했었다. 아침이면 아버지와 나는 피레이트를 안아다 다른 농장 집에 맡겨야 했지. 그리고는 우리 농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해야 했었다. 링컨 대통령과 함께-아버지는 말을 그렇게 부르셨지-쟁기질을 시작하는 거야.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밭에서 쟁기질을 하셨다더구나. 아버지는 우리 농장을 링컨 천국 이라고 부르셨지. 지금 생각해 보면 좁은 땅이었지만 그때는 굉장히 넓다고 생각했었어. 만여 평되는 땅이었으니까 넓은 땅은 아니었지. 게다가 숲이 들어차 있어 농지는 칠팔천 평 정도였으니까 농장 치곤 좁은 것이었어. 하지만 경치는 일품이었다. 술에는 오리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고 팔백 평 가량 되는 아름다운 연못과 물고기가 뛰노는 개울이 농장 주위를 흘렀어. 농장 오른쪽 계곡을 지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 분명한 몬투어릿지 산이 버티고 있었지. 우리가 살던 그곳은 몬투어 읍이었어. 서스퀘아나 바로 북쪽이다. 우린 돼지우리를 네채나 지어 돼지를 길렀고 어마어마하게 큰 창고를 지어 건초와 곡식을 저장했었다. 몬투어릿지 산 주위에는 사슴과 야생 칠면조가 얼마든지 있었어. 넌 아직 할아버지가 요리해 주셨던 것 같은 야생 칠면조 고기를 못 먹어 봤을 게다. 그뿐인 줄 아니? 주위에는 과일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사과, 버찌 따위는 지천이었어. 피레이트가 버찌 파이를 만들어 준 적도 있었다. 어느새 표정이 풀어진 마콘은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출 생각이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입에 담아 본 적이 없었고, 최근에는 자신의 추억마저 잊고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결혼 초만 해도 그는 아내 루스에게 링컨 천국 에 관해서 입버릇처럼 이야기해 주었었다. 현관 앞에 앉아 밀려오는 어둠을 바라보면서 한때는 자신의 땅이었던 그 농장을 다시 한 번 눈앞에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부동산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이발소 따위에 들러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농장 이야기를 수십 번 되뇌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년에 들어선 그런 시간을 가진 적도, 그럴 마음이 돼 본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찾아낸 것이었다. 그 아름다웠던 농장 구석구석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맑은 샘물, 사과나무 숲, 링컨 대통령(말), 메리 토즈와 율리시즈 그랜트(암소들), 리 장군(돼지) 등등. 그는 이런 식으로 역사를 배웠었다. 아버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 듣고 본 것만이 그의 지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역사적인 인물들의 상을 심어 줄 수는 있었다. 학교에 간 아이는 그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공부할 때엔 그들의 이름이 별명으로 붙은 농장의 짐승들이 자꾸만 떠올라 애를 먹어야 했다. 리 장군(남북 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이 자꾸만 좋게만 생각되는 거야. 우리 농장 돼지가 리 장군이었는데 내가 그놈을 좋아했거든. 그의 목소리는 평소에 들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딱딱하지도 않고 억양도 색달랐다. 남부 지방 사투리 냄새가 물씬 나 듣기에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우유 배달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로 했다. 고모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쐈다면서요? 등뒤에서 말예요. 농장을 완전히 건설하는 데는 십육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 그 전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땅이 아니었어. 누가 할아버지를 쐈죠? 마콘의 시선이 아들의 얼굴 위에 멎는다. 할아버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셨다. 서명조차도 못 하셨어. 다만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부호를 사용하셨지. 그런데 그놈들이 그분을 손인 거야.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시게 한 거야. 내용도 모르는 문서에. 그래 놓고는 우리의 재산이 그들의 것이라고 우겨댔던 거야. 모든 일은 아버지가 글을 못 읽는 데서 비롯됐지. 내가 쓰고 읽는 법을 가르쳐 드리려고 했지만 하룻밤만 자고 나도 까맣게 잊어버리신다는 거야. 나한테만 배우셨어도 아무 일이 없었을텐데, 읽지 못한 관계로 이름에 잘못이 생기고 만 거야. 이름요? 어떻게요? 노예들에게 자유의 날이 오자 모든 노예들은 자유민협회 에 등록을 해야 했단다. 할아버지도 노예셨나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물론 노예였지. 그렇지만 자유의 날 이전에 자유의 몸이 되셨었지. 하지만 자유인이건 노예건 모두가 다 등록해야 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등록을 하러 가셨지. 그런데 담당관이란 친구가 몹시 취해 있었다는 거야. 그 자가 할아버지에게 출생지가 어디냐고 물었지. 할아버지가 마콘 이라고 대답하셨대. 다음엔 그 자가 아버지의 이름을 묻더라는 거야. 할아버진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는구나. 그랬더니 술 취한 그 자가 서류에 받아 적었는데 쓰는 칸이 틀려 이름 쓰는 난에 마콘 데드 라고 썼대. 결국 할아버지의 이름은 마콘 데드가 되어 버렸고, 할아버지의 아버지 이름이 빠져 노예 출신이 돼 버린 거야. 할아버지가 글만 읽을 줄 아셨더라면 그 자리에서 고쳤을텐데 그러지 못하니까 그 증명서를 그대로 가져오셨던 거다. "그렇다면 할아버진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실 필요가 없었잖아요. 진짜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가 그 이름을 좋아하셨지. 이름이 새 이름이니까 과거를 싹 지워 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지. "진짜 이름은 무엇이었어요? 잊어버렸어. 그리고 네 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어. 내가 네 살 나던 해에 돌아가셨으니까. 하지만 연한 밤색 피부의 아름다운 분이어서 내 눈엔 백인 여자처럼 보였던 것은 기억해. 나와 피레이트는 어머니를 조금도 안 닮았어. 우리가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데 의심이 가거든 고모를 보면 돼. 고모는 할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는데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아프리카 흑인 바로 그대로야. 아프리카에서 바로 펜실베이니아로 실려 온 그런 흑인이지. 행동도 영락없이 그렇고. 저도 그분 얼굴을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 아이는 아버지에게 친근감을 가질 수 있어 마음 놓고 자신만이 간직했던 비밀스런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변한 건 아니다. 마콘(아이의 진짜 이름은 할아버지와 똑같은 마콘 데드였다), 그곳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 이유는 아직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잖아요. 내 말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돼. 그 여자는 좋은 여자가 아냐. 독사야, 독사. 독사처럼 널 홀렸겠지만 그래도 독사는 독사야! 아버지는 고모가 어렸을 때 품안에 안고 매일 아침 들판을 건너 다녔다면서요? 아버지는 고모를 귀여워하셨잖아요? 그건 오래 전 이야기다. 네가 봤다니까 하는 이야기다만 어떻게 보이더냐? 정상적이고 훌륭한 사람 같더냐? 저... 그분은...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이라도 자를 사람 같더냐? 그럴 것 같지는 않았어요. 사실은 그런 여자다. "예전엔 어땠는데요? 예전엔 그렇지 않았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자가 됐어. 지금은 어떤데요? 한 마디로 독사야. 독사에 대한 옛날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진흙탕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새끼 독사를 바구니에 넣어 집으로 데려갔더란다. 그리고는 잘 먹이고 잘 보살펴 크고 튼튼한 독사가 되도록 길러 주었지. 자기가 먹을 음식을 나누어주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독사가 갑자기 그 사람을 물어뜯었어. 무서운 독을 심장에 뿜어 넣은 거야.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어 가면서 독사에게 물어 보았다더구나. 나를 죽이는 거냐? 난 네 생명을 구해 주고 잘 돌봐 주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독사가 뭐랬는지 아니? 그래, 하지만 내가 독사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겠지? 난 어차피 사람을 죽이는 독사야. 그러니 어쩔 수 없어. 자, 이 정도 말하면 내가 왜 고모와 그 밀주 집을 멀리하라고 하는지 알아듣겠지? 우유 배달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얘야, 넌 그런 일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어. 이제부터 일을 배울 때도 된 것 같구나. 월요일부터는 학교가 끝나면 내 사무실에 와서 두 시간씩 정말 쓸모 있는 일을 배워라. 고모는 이 세상에서 쓸모 없는 일밖에 모르는 여자다. 저 세상에서는 쓸모 있는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 +이 세상에는 맞지 않는 여자란다. 이제 네가 정말 알아야 될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해 주겠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해. 그리고 그것으로 또 다른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니 보다 낫게 살 수 있는 거란다. 3. 혼돈의 뿌리 아버지를 따라 일을 하면서부터 우유 배달 데드는 갑자기 어른스러워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희망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이는 밀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것도 커다란 변화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남쪽 거리에 자주 갈 수 있는 아이는 친구 기타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도 많아져 갔다. 아직 어리고 남들과 친해지길 좋아하는 아이는 남쪽 거리의 빈민들과 곧잘 어울려 히히덕거리기도 하고 음식을 얻어먹기도 즐겨 해, 주민들은 그를 금세 귀여워하고 다정하게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요일을 제외하곤 친구 기타와 어울릴 시간이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따금 수업을 까먹고 도망 나와 비밀스런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날도 학교에서 도망나온 우유 배달은 기타의 뒤를 따라 피 흘리는 은행이 있는 거리10번가 있는 휘더 의 당구장에 들어섰다. 그 당구장은 술집을 겸하고 있었다. 그들이 당구장의 문을 밀고 들어선 시간은 오전 11시가 갓 넘어서였다. 기타가 기세 좋게 소리쳤다. 안녕하쇼, 휘더? 맥주 두 병만 주쇼. 작달막한 키에 배가 툭 튀어나온 대머리 휘더가 기타를 보고 우유 배달을 보더니 상을 찡그렸다. 저 아이 내보내. 문득 걸음을 멈춘 기타가 그의 시선을 따라 우유 배달의 얼굴을 보다가는 다시 그를 바라본다. 당구를 치고 있던 대여섯 사람들이 휘더의 목소리에 그들을 돌아본다. 그들 중 세 사람은 332전투기 부대 소속의 조종사들이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모자와 가죽상의는 단정하게 의자 위에 놓여 있었고, 눈처럼 흰 스카프는 뒷주머니에 꽂혀 있었으며, 팔소매도 단정하게 팔꿈치까지 접혀 올라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통이 보이도록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다. 당황한 기타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나하고 같이 왔잖소? 이것 봐요, 휘더. 얘는 내 친구요. 마콘 데드의 아들이지? 그렇지? 그래서요? 그러니까 내보내란 말이다. 얘는 자기 아버지와는 달라요. 다를 진 몰지만 그 자의 아들인 건 분명하지? 얘 아버지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소? 아직은 안 했지. 그래서 저 애를 내보내라는 거야. 내가 책임... 속썩이지 마. 데리고 나가! 한 잔하고 주정하기엔 아직 어려. 조종사들이 웃음 터뜨렸다. 회색 밀짚모자를 쓴 사내가 나섰다. 그럴 것 없잖아. 한 잔 주라구. 닥치쇼. 주인은 나요. 열두 살난 어린애가 주정이야 하겠어? 밀짚모자가 우유 배달을 바라보며 히죽 웃는다. 우유 배달은 아녜요, 난 이제 열세 살이에요. 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요. 휘더가 사나이에게 대든다. 난 저 애 아버지에게 집세를 내고 있소. 만약 저놈을 받아 줬다가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이 책임지겠소? 기타는 휘더에게 새로운 상대가 생긴 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듯 우유 배달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소리쳤다. 알겠소. 나중에 봅시다. 자,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우유 배달은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친구를 따라 어슬렁거리며 문으로 다가간다. 군인들의 조소의 눈길이 닿는 듯 뒷덜미가 근질거리는 걸 애써 참으며 의젓하게 문을 나선다. 그들은 하릴없이 휘적휘적 10번 가를 걷다가 모퉁이 근처에서 돌로 만든 벤치를 발견하곤 주저앉았다. 그들 뒤 이발소 앞에는 하얀 겉옷을 걸친 두 사나이가 있었다. 문간에 기대 서 있는 게 레일로드 토미였고, 진열장 앞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건 호스피탈 토미였다. 벤치에 앉은 아이들은 그들에게 아는 척도 않고, 지나가는 차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학교가 허물어지기라도 했느냐, 기타? 의자에 앉아 있는 호스피탈 토미가 말을 건네왔다. 그의 눈동자는 그와 같은 또래의 다른 노인들처럼 우윳빛으로 흐려 있었으나 몸의 다른 부분은 젊은이 못지 않게 팽팽하고 기운차 보였다. 목소리에도 노인다운 권위가 서려 있었다. 아녜요. 기타가 고개를 돌려 대답한다. 그런데 왜 이 시간에 거리에 나와 어슬렁거리는 거지? 기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쉬기로 했습니다. 네 옆의 꼬마 친구는? 역시 사보타주를 한 거냐? 기타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묻는 노인의 말에 대꾸할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우유 배달은 그곳을 지나치는 차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모처럼 쉬는 날인데도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노릇이지? 그럴 바엔 차라리 학교에서 악마 같은 선생이나 바라보고 있는 게 나을 뻔하지 않았느냐? 기타가 담배꽁초 두 개를 주워 하나는 우유 배달에게 내민다. 휘더가 우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휘더가? 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난 그 집에 한두 번 간 게 아니었고 예전엔 군소리 한 마디 안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쫓아내는 거예요. 내 친구가 너무 어리다는 거예요. 그 말을 믿으시겠어요? 휘더가 언제부터 나이를 봐서 손님을 받았죠? 휘더가 그런 걱정을 할 만할 두뇌 조직을 가졌다는 것은 미처 몰랐군. 아녜요. 괜히 한 번 으스대 보려고 했던 거예요. 맥주 한 병도 안 주더라니까요. 문 가에 선 레일로드 토미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 일 때문에 맥이 빠졌군. 맥주 한 병도 주지 않더란 말이지? 그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더니 기타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게나. 자네들이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을 이야기해 주겠네. 이리들 오라구. 아이들은 내키지 않는 듯 일어서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들 생각하니? 맥주 한 병 안 준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좋아,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 보겠다. 열나흘 동안 쉬지 않고 일하다 단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쉴 생각으로 집에 돌아오면서 따뜻하게 대해 줄 여자와 깨끗한 잠자리와 칠면조 고기 몇 조각을 기대하는 노동자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니? 우유 배달이 여자 이야기가 나오자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런 건 아예 지금부터 생각도 하지 말아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니까. 호스피탈 토미가 소나무 잎사귀 이쑤시개를 꺼내들며 동생을 나무란다. 아이들을 놀리지 마! 누가 놀려요! 난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일찍 가르쳐 주는 게 좋아요. 그리고 그는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것 뿐만은 아니다. 예쁜 가구나 깨끗한 화장실, 발레, 전속 조리사, 여행에 동행하고 시중을 들어 줄 비서, 이런 것도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주머니에 빳빳한 새돈 수천 달러를 넣고 은행에 가서 대접받기를 기대했다간 오산이다. 독일 전투기 수백 대를 떨어뜨리고 히틀러의 집 뒷마당에 내려앉아 그 콧수염의 따귀를 때리고 온다 해도 어깨 위에 별을 달 생각해서도 안 되고, 마스트에 올라가 소리칠 선장이 될 생각을 해서는 더욱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지나치던 몇 사람이 눈이 둥그래져 호스피탈 토미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요? 저 사람 무슨 연설 연습이라도 하는 거요? 휘더가 저 아이들에게 맥주를 안 팔더라는 거야. 사람들은 배를 쥐고 웃고는 지나쳐 갔다. 그뿐인가. 구운 알라스카 도 안돼! 레일로드 토미가 계속한다. 그럼, 너희들은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거야! 구운 알라스카 도 못 먹는다고요! 기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묻고는 가슴을 친다. 가슴 터지는 노릇이군! 그렇지. 너희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터지는 가슴뿐이다. 그게 싫으면 일찌감치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구운 알라스카 라는 게 뭐지? 토미의 이발소 앞을 떠난 그들은 10번가를 걷고 있었다. 달작지근한 음식이야. 기타가 대답한다. 디저트로 나오는 거지. 맛있어? 몰라. 난 단 음식을 못 먹어. 단 걸 못 먹는다고? 왜? 단 걸 먹으면 병이 나. 그럼 뭘 좋아해? 과일. 하지만 설탕을 묻힌 건 싫어. 과자나 케이크 따위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 우유 배달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박거린다. 단 음식이 싫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뇨병에 걸린 게 아냐? 설탕을 안 먹는데 어떻게 당뇨병에 걸려? 설탕을 많이 먹어야 걸리는 거야. 그럼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 난 그것들만 보면 죽은 사람들과 흰둥이놈들 생각이 나서 그래. 죽은 사람들? 시체 말야? 그래, 그리고 흰둥이놈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기타가 대답하지 않자 우유 배달이 다시 묻는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지? 어릴 때부터야. 아버지가 목재소에서 톱에 토막이 나 죽었을 때 그 목재소 사장이라는 흰둥이가 우리에게 과자를 줬었어. 커다란 과자였지. 그 흰둥이놈의 마누라가 우리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거야. 무지무지하게 달았어. 정말 달았는데... 꿀보다도 더...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가린다. 구역질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기타가 다른 손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낸다. 얼굴이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그리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생선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과 릴리의 미장원 사이의 골목길로 뛰어들어갔다. 우유 배알은 그 자리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이발소는 그렇지 않은데 미장원의 창에는 어디나 블라인드가 쳐져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머리 만지는 걸 바라보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아마 수줍어서 그럴 것이다. 다시 나타난 기타는 숨을 헐떡거렸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가자. 그는 우유 배달의 팔을 사납게 끌었다. 가서 밀주나 퍼 마시자. 우리가 마실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어. 열네 살이 된 우유 배달은 다리가 다른 쪽보다 짧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맨발로 반듯이 서면 왼쪽 발이 바닥에서 반 인치 가량 뜨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남이 보는 앞에선 항상 몸을 기대고 서거나 한쪽 엉덩이를 빼거나 다리를 꼬고 서는 버릇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걸음걸이도 자연히 이상해졌다. 그래도 아이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루는 누나 레나가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엄마, 저 애는 왜 저렇게 걷는 거지? 남이야 어떻게 걷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걷고 싶으면 네 못생긴 얼굴 위로라도 걸어갈 거야. 조용히들 하지 못하겠니? 너희들 떠드는 소리엔 더 못 참겠다! 어머니의 호령이 떨어져서야 레나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문제는 우유 배달에게 남아 있었다. 농구장에서 몇 시간 동안 뛰고 나면 외쪽 다리에 격심한 통증이 왔다. 그는 자신의 다리가 소아마비 증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이 사실로 하여 루스벨트 대통령과 자신을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친밀감을 생각한다면 우유 배달은 아버지보다 오히려 루스벨트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그 힘을 존경했지만, 다리의 이상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아버지와는 다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즉각 행동으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언제나 깨끗하게 수염을 밀고 있었으나 우유 배달은 몇 오라기 안 되나마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아버지가 단정하게 넥타이를 묶는 데 반해 그는 항상 허름한 셔츠 차림이었으며, 아버지와는 달리 머리를 잘라 넘겼고, 아버지가 지겹게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15분마다 한 대씩 담배를 태워 무는 것이었다. 돈이라면 살인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아버지였으나 아이는 닥치는대로 써 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새 구두와 얇은 양말을 사 신기 위해서는 어쩌는 도리 없이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 마콘 데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이제 아내보다는 자신의 소유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온 마을을 쏘다니며 거렁뱅이처럼 집세를 받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사업은 한층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세를 받으러 다니는 시간에 그는 새로운 사업을 생각할 수 있었고, 은행 사람들을 마나 사업을 늘릴 궁리를 할 수 있었고, 세금을 안 내고도 사업을 할 수 있는 묘책을 궁리할 수 있었고, 어리숙한 상속자의 재산을 갈취할 수 있었고, 학교나 슈퍼마켓, 그리고 새로운 길이 어디에 생기고 어디에 뚫리는지 알아 낼 수 있었고, 정부 사업에 투자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솜씨 빠른 도시 녀석들은 군수 사업으로 한몫 단단히 보던 때였다. 흑인인 그로서는 큰 덩어리는 먹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남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분야나 또는 모르고 있는 곳에 먹을 만한 건덕지는 남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전쟁이란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전쟁 중에는 모든 일이 잘돼 나가는 것 같았으나 아내와의 관계만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그 욕심 많은 배를 채워 줄 거리가 없어지고 나서야 그는 아내에게 큰 변화가 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아내는 이따금 밤을 새우는 모임에까지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걱정하는 기미가 없었다. 아내 나이는 이미 쉰 이니 그녀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길 리도 없었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프레디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내의 변화는 결코 중대한 일이 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오히려 자라나는 아들의 거친 변화가 더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루스 포스터가 페드루 신부를 만난 것은 드보르작 부인의 손녀 안나 드보르작의 결혼식장에서였다. 헝가리 이민인 드보르작 부인은 아버지 닥터 포스터와 오랜 친분이 있는 여인으로, 그녀는 닥터 포스터를 아들의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결핵에 걸린 아들을 요양소로 보내지 않고 치료를 맡아 결국은 완치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항생제가 발견되기 전인 1903년의 결핵 치료법이란 원시적인 것이어서 닥터 포스터가 드보르작 부인의 아들에게 행한 치료라는 것도 식이요법과 휴식, 그리고 하루에 두 차례씩 간유를 먹인 정도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 아이, 즉 안나 포스터의 아버지는 생명을 건졌고, 닥터 포스터는 생명의 은인이 되었던 것이다. 루스가 도착했을 때 이미 예식은 진행되고 있었다. 예식 도중이라 그녀는 다른 참석자들이 하는 대로 주례 앞으로 걸어나가 무릎을 끓고서야 자신이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례는 신부가 맡고 있었던 것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의 모자 위에 신부는 성수를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수를 다 뿌리고 나서도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자 신부는 그녀가 카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코르푸스 도미니 노스트리. 여기까지 외던 신부가 나직히 말했다. 고개를 들어요. 혼배 미사가 끝나고 피로연이 벌어지자 신부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카톨릭 신자 여부를 물었다. 아녜요. 전 감리교 신자예요.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크리스트교의 근본은... 신부가 그녀를 설득하려 할 때 드보르작 부인이 말을 막았다. 신부님, 저의 가장 귀중한 친구를 소개하겠어요. 바로 닥터 포스터의 따님이세요. 내 아들 릭키의 생명을 건져 주신 닥터 포스터, 아시겠지요? 이 자리에 그 아이가 있었다면... 그러자 페드루 신부도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이와 같은 상면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을 종교적인 커다란 감흥으로 받아들여 얼굴을 붉혀가며 이야기하고 있는 루스를 식구들은 냉랭한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아들 우유 배달만이 겨우 듣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도 카톨릭 신자인가요? 이렇게 물으시더구나. 순간 난 당황했어. 하지만 난 숨을 한 번 들이켜고는 아녜요, 전 감리교 신자예요 이렇게 대답했어. 그러니까 신부께선 준엄한 표정으로 카톨릭교만이 진정한 크리스트교의 참모습이라고 하시며, 그 자리에는 카톨릭 신자만 모이는 곳이라는 거야. 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지. 바로 그때 그 친절하신 드보르작 부인이 나선 거야. 신부님, 제 가장 귀중한 친구를 소개하겠어요. 바로 릭키의 생명의 은인 닥터 포스터의 따님이세요. 그러니까 신부님께서는 당장 미소를 지으시며 내 손을 잡고는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고 영광이라고 하시는 게 아니겠니? 난 갑자기 눈앞에 맑아지는 것 같더구나. 사실 난 어린양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거야. 성당에서 올리는 예식엔 카톨릭 신자만 가는 것을 몰랐단 말야? 마콘 데드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어조는 아내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물론이에요. 제가 알고 있었다면 왜 갔겠어요? 저희들 자식들만을 위해 학교를 따로 짓는 놈들이 아무나 받아들이겠어? 그놈들의 종교는 저희들만을 위한 거지 만민을 위한 게 아냐! 페드루 신부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아가리 닥쳐! 바보 같은 것아! 드보르작 부인도 그렇게 생각지 않을 거예요. 날 초대해 줬고 또 반가워했어요. 그년은 식을 무사히 마치려고 얼버무렸던 거야. 이 병신 같은 것아! 여보, 아이들 앞에서 그 따위 욕지거리는 하지 마세요. 무슨 상관이야. 얘들도 이젠 다 컸단 말야. 다툴 만한 일도 아니잖아요? 성당에서 망신을 당하고 피로연에서 웃음거리가 되고도 집에 와서 영광스러웠다느니 어쩌니 하는 게 제정신이 있는 거야? 여보... 뻔뻔스럽게도 거짓말을 늘어놓고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니 그게 말이 돼? 드보르작 부인은 얼마나 나를... 그년은 네년 이름조차도 모르고 있어! 네년을 닥터 포스터의 딸 로만 알고 있지 이름도 모른단 말야. 그년이 만약 지금이라도 네년의 이름을 기억해 낸다면 내 당장 일백 달러를 내겠어! 넌 아무런 존재도 없는 인간이야. 오직 닥터 포스터의 딸일 뿐이지. 그건 사실이에요. 루스는 가냘프나마 강경하게 대꾸한다. 전 분명히 우리 아버지 딸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마콘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을 사이가 없었다. 내던져 버리는 순간 주먹은 아내의 턱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우유 배달은 이와 같은 사태에 아무런 대비책도 없었다. 그것은 이번뿐만이 아니라 이제껏 그래 왔던 것이다. 입술의 피를 닦고 이가 부러지지나 않았나, 턱뼈가 부서지지나 않았나 하고 만져 보고 있는 어머니를 그저 물끄러미 보아 오기만 했던 것이다. 그런 오늘만은, 아니 이제는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주먹이 채 되돌아오기도 전에 벌떡 일어선 우유 배달은 마콘 데드의 셔츠 뒷덜미를 잡아 의자에서 끌어 일으켜 뒷벽에 처박았다. 그 서슬에 창문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가 떨어져 마콘 데드를 덮어 씌었다. 어머니한테 한 번만 손을 더 대며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잊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세상의 그 누구한테도 다해 보지 않던 그가 가장 믿고 있던 아들한테 당하고 있는 것이다. 수치와 분노와 당혹에 싸인 채 벽을 더듬어 가며 자리를 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우유 배달의 가슴속에는 그 오랜 기간의 욕망을 달성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깊은 슬픔이 자라고 있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걸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세요?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손톱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괜찮다. 그는 누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태어날 때 10대 소녀들이었던 그들은 이제 30대 중반에 든 중년 여인들이었으나 그는 웬일인지 동년배의 여인으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그들보다는 오히려 이따금 잠자리를 같이하는 헤가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맛을 느껴 왔던 그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그녀들의 시선은 분노와 증오로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당황하고 질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며 그들의 시선이 돌려지거나 부드러워지길 기다리던 그는 문득 방안의 싸늘한 분위기를 깨닫는다. 누구 하나 그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의 행동은 그 자체로서 끝나 버린 것이다. 그의 행동으로 해서 부모 사이가 변할 리는 없었다. 그의 행동으로 해서 가정의 분위기가 달라질 리도 없었다. 그가 아버지를 때려눕혔다고 해서 이 가정에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우유 배달은 서둘러 방에서 뛰쳐나갔다. 침실에 들어선 그는 옷장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는 그가 열 여섯이 되던 생일에 어머니가 준 은제 빗 한 벌이 들어 있었다. 그 빗 뒷면에는 그의 이름 머리글자 앞에 의사의 약자 MD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를 의사로 키우고 싫어하는 어머니의 소망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재미있는데요. 의사의 이름이 데드(Dead:죽음, 주검)라면 치료를 받으려 하는 환자가 있을까요? 아들의 말에 웃던 어머니는 그의 가운데 이름이 포스터라는 걸 상기시켰다. 닥터 마콘 포스터 제법 그럴듯하지 않니? 우유 배달도 이 말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마콘 데드는 반대였다. 그는 딸들이 대학에 가는 것은 찬성하지만-적당한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서-그래서 결국 코린시안스는 대학엘 갔었지만, 사내 녀석이 대학에 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대학은 사내 녀석들을 실생활에서 격리시켜 게으르게 만들고, 그로하여 이 세상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머리만 큰 바보가 된다는 거시었다. 더욱이 그는 그의 사업에서 아들의 존재를 뺄 도리가 없으며 대학에 가는 걸 찬성할 리가 없었다. 거울 앞에 선 우유 배달은 낮은 촉광의 불빛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 감정 없이 바라보았다. 모진 턱이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멋진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 얼굴은 아버지 마콘 데드와 너무도 흡사한 것이기도 했다. 거울을 바라보며 자꾸만 아버지의 모습을 지우려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이 순간에는 레나나 코린시안스와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었다. 더구나 어머니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선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직도 입술 언저리엔 핏자국이 보이는데도 그는 꿋꿋하게 서 있었고, 눈동자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 아까는... 우유 배달이 변명하려 하였으나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 의자에 앉았다. 앉아. 우유 배달은 침대가로 다가가면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아버지, 아까 일은 없었던 걸로 하시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신다면... 앉으라고 했다. 마콘의 어조는 나지막했으나 거역하기 힘든 힘이 들어 있었고, 표정은 피레이트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너도 이제 자랄 만큼 자랐다. 하지만 아직 충분치 않아. 넌 완전한 남자가 되어야 해. 그러자면 사실을 충분히 알아야만 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일을 알고 싶진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내가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이니 넌 사실을 알야야만 해. 아버지를 주먹으로 치는 게 직업이라면 다음 번에 주먹을 휘두르기 전에 알 건 알아두는 게 좋을 거다. 아니, 난 너로부터 용서를 빌거나 사과의 말을 들으려고 이러는 건 아니다. 다만 알려 주고 싶을 뿐이니까. 내가 너의 엄마와 결혼한 건 1917년이다. 그때 열 여섯 살이던 엄마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었지. 내가 꼭 사랑해서 결혼했다고는 할 수 없어. 지금처럼 사랑만이 결혼 조건이 되는 건 아닌 때였으니까. 누구나가 보다 문화적인 생활을 꿈꾸던 때였지. 또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마음만 일치하면 결혼은 가능했던 것이다. 네 외할아버지는 날 좋아하지 않았고, 나도 그분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분은 당시 이 도시의 흑인 중에선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였지. 부자라는 게 아니라 모든 흑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지. 사실은 그들에게 베풀어주는 것도 별로 없었는데 말이다. 솔직히 말해 그분은 어는 면에선 위선자겠지. 자신의 재산이 알려지는 걸 꺼려해서 네 개의 은행에다 돈을 나누어서 저금하는 그런 사람이었어. 네 누나 둘은 구분이 받아 냈단다. 딸에게도 의사 노릇을 하려는 게 못마땅했지만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어. 그때는 벌써 네 어머니는 그분의 딸이라기보다는 내 아내였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게 내 신경을 거슬렸지. 그런데도 네 어머니는 다른 병원엔 가지 않으려 했고, 자선 병원에선 흑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아버지 앞에서 두 딸을 낳을 수밖에 없었어. 아버지 앞에서 발가벗고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아이를 낳다니 얼마나 끔찍한 노릇이냐. 그분은 의사니까 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모르지만 의사도 인간이고 더구나 남자 아니냐? 그분과 네 어머니는 언제나 내가 그들 집에 살고 있다는 걸 강조하려 했어. 내 의견, 내 취향 등은 아예 무시해 버렸던 거야. 내가 원래 농부 출신이라는 점과 우리가 자랑으로 알던 농장 따위는 그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자신들도 흑인이면서도 그들은 흑인 사회에 대해선 조금도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거야. 네 할아버지는 나를 보면 요새 그 동네는 어떻게 돼 가나? 하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게 못마땅한 거지. 그러다 그분이 병에 걸렸어.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춘 마콘은 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입술언저리를 누른다. 손수건에는 약간의 핏자국이 묻어 나왔다. 한동안 그 핏자국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버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가 죽던 날 밤, 나는 집에 없었다. 프레디 씨의 집 현관을 고치고 있었어. 이십 년 동안 기울어 있던 현관이 드디어 넘어졌던 거지. 몇 사람 모아 가지고 달려가 그걸 고치고 누군가 달려와서 의사가 죽었소! 하고 내게 소리치는 거야. 루스 혼자만이 아버지의 주검을 지키고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난 그녀가 불안과 슬픔에 싸여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 급히 달려갔지. 작업복을 갈아입을 사이도 없이 말이다. 내가 이층 침실 문을 열었을 때 침대에는... 다시 말을 끊은 마콘이 너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 이제 그만 그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는 발가벗은 네 어미가 죽은 사람 옆에 누워 키스를 하고 있더란 말이다. 들개 새끼처럼 발가벗은 채. 그 모습을 본 이후 난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들 부녀의 사이는 보통 부녀의 사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은 나와는 피부 색깔이 너무도 다르고 의사를 그대로 닮은 레나와 코린시안스가 혹시 내 자식이 아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 것도 나로선 무리가 아니었지. 한때는 내 손으로 네 어미를 죽여 없앨까 하는 생각도 해 봤어. 하지만 바로 내 아내 때문에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긴 싫었던 거야.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눌러 참고 사는 도리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따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가 터져 나오는 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 저녁만 해도 네 어미가 난 아버지의 딸이에요 라는 말을 뻔뻔스럽게 하는 바람에... 마콘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입술이 경련했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내 책임을 잊어 본 일이 없고, 무리한 욕심을 부려 본 일도 없으며, 위선자도 아니다. 이 점만은 믿어 주기 바란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하지만 내가 한 말 모두를 잘 생각해 봐라.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우유 배달은 침대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만 같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가 어느 날 우연히 공원 벤치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이층 자기 방에 올라올 때만 해도 식구들로부터 격리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그래도 옳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은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인간의 악습에 제재를 가한 만족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은 감정마저 그로부터 남김없이 빠져나갔던 것이다. 웃옷을 걸친 우유 배달은 집을 나섰다. 일곱시 반인데도 아직 어둡지는 않았다. 그는 좀 걷고 싶었고 집과는 다른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는 남쪽 거리로 방향을 잡았다. 기타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 주에서 가장 적절한 일이 바로 기타와 같은 친구와 한 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만약 기타를 찾지 못한다면... 헤가를 만날까? 안돼. 우유 배달은 자신에게 대답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헤가건 누구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들만 해도 남인 것이다. 피레이트는 하루 종일 노래만 부르고 있을 것이고 레바는 그 따위 이야기엔 귀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헤가는, 그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녀도 그와 깊은 비밀을 나눌 처지는 아니었다. 기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약에 쓰려면 개똥도 없는 법이다. 꼭 필요할 때면 보이지 않았다. 우유 배달은 자신이 마음속의 생각을 입밖으로 중얼거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루 중 이 시간이면 거리에 사람이 가장 많을 때이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유 배달은 자신의 생각이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사실은 사실대로 알아야 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일일까? 주먹을 휘두르려면 그 전에 알아 두어야 할 일이 있다. 좋아, 알아야 될 일이라면 알아 두자. 그런데 그것이 어머니와 할아버지에 관한 일이라니! 그렇다면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그런 짓 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왜 딸을 시집보냈던 거지? 이웃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그 짓 을 계속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버지가 눈으로 직접 그런 사실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혹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재산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했기 때문에 악감정에서 그런 상상을 했던 게 아닐까? 온갖 상념이 우유 배달의 머릿속을 오고갔다. 그러나 한 가지 선명한 장면이 떠오르자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목덜미에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방이었다. 양탄자도 커튼도 그리고 창 밖의 나무도 모두가 초록색인 녹색의 방이었다. 어머니는 가슴을 드러낸 채 그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무릎에 올라간 그가 젖을 빨고 있을 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웃는 사람이 누군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웃음소리만은 분명히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어머니와 그를 향한 것이라는 걸 보지 않고도 아이는 알 수 있었다. 순간 그의 몸이 어머니의 무릎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애타게 불러 댔으나 어머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치와 분노에 타는 눈길로 창 밖의 웃음소리의 주인공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은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이미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커 있었다. 그렇다면... 견딜 수 없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는 길가의 진열장 앞으로 다가갔다. 깃이 젖혀진 웃옷 위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도대체 왜 어머니는 나에게 그런 짓을 시켰단 말인가? 그런 짓을 시킨 어머니가 할아버지와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우유 배달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리에는 조금 전보다도 더 많은 군중이 오가고 있었다. 모두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이 사람들은 이렇게들 바쁜 것일까? 우유 배달은 지나치는 한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 왜들 저렇게 급한 거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정신차려, 이 녀석아! 사내는 눈을 부라리고는 제 갈길로 가 버린다. 우유 배달은 냉정하고 명백하게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진 일들을 판단하려 기를 쓴다. 그러나 모든 일이 혼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럴 때 기타가 있다면... 결국 그는 친구가 갈 만한 곳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곳 한곳 다 뒤져 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쉽게 친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첫번째로 들러 본 토미의 이발소에서 그는 낯익은 친구의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기타 이외에는 남자들 몇 사람이 제각기 편한 자세를 취하고 무슨 소리인가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들 발견한 우유 배달은 자신도 모르게 구원받은 기쁨으로 소리쳤다. 기타! 쉿! 레일로드 토미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주의를 주고, 그를 돌아본 기타가 들어와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한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고 있었다. 미시시피의 선플라워 읍에서 살해당한 한 흑인 청년에 관한 뉴스를 아나운서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지껄여 대고 있었다. 흑인 청년은 백인 여자를 희롱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됐고, 범인은 정당방위라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살해당한 청년은 갓 스물이었고, 이름은 틸이라고 했다. 그 뉴스는 곧 끝났다. 아나운서가 열기띤 목소리로 주식 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동시에 물을 끼얹은 듯 잠잠하던 이발소 안은 갑자기 터지듯 흥분의 도가니로 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던 레일로드 토미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호스피탈 토미가 손님들, 기타, 포터, 프레디, 그리고 몇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려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동안 그는 말없이 면도칼만 갈고 있었다. 호스피탈 토미가 애를 쓰는 보람도 없이 손님들은 목에 핏대를 올리고 악을 써대고들 있었다. 말없는 것은 우유 배달을 제외한 레일로드 토미와 말주변이 전혀 없어 대화에 끼여들지 못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뿐이었다. 아침 신문에 나올 거야.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어. 포터가 반박했다. 라디오에서 방송했잖아. 신문에도 실려야 돼. 프레디가 열을 올린다. 흰둥이놈들 신문엔 그런 기사는 안 실려. 그 자가 휜둥이년을 겁탈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내기할래? 뭘 살까? 프레디가 바짝 달려든다. 잃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걸어. 포터도 물러서지 않는다. 5달러 걸어라. 잠깐만! 포터가 제지했다. 어디에 실릴 건지 말해 봐! 어디에 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침 신문에 실리나 안실리나에 5달러 걸었단 말야. 스포츠면에 말인가? 아냐, 제1면에 나올 거야. 틀림없어. 조용히 해! 젊은 애 하나가 죄없이 죽었는데 돈내기들을 할 건가? 호스피탈 토미가 소리칠 때 기타가 우유 배달의 팔을 끌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들어올 때 보니까 얼굴이 죽을 상이던데? 거리에 나서자 기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어디 가서 한 잔 할 곳 없을까? 미스 메리 라운지 는 어때? 지금이 몇 신데 그래. 아무리 일러도 아홉시는 넘어야 여느 데야. 그래도 그 집 여자들은 나와 있을 것 아냐? 무슨 여자들인지 몰라서 그러니? 지금쯤 어디선가 장사에 정신이 없을 거다. 술은 있을 것 아냐? 빌어먹을, 왜 그러니? 술에 걸신들린 놈 같으니. 그래, 가자. 기타의 말대로 술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준비도 덜 끝난 술집에 들어선 그들은 찡그리는 바텐더에게 스카치를 주문했다. 술이 오자마자 우유 배달은 단숨에 비워 버리고 또 한 잔을 주문한다. 도대체 왜 나를 우유 배달 이라고 하는 거지? 별 거지 같은 걸 다 묻는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게 네 이름이 아니냐? 내 이름은 마콘 데드야. 네 이름을 가르쳐 주려고 날 여기까지 끌고 왔나? 알아야만 될 일이 있어서 그래. 아, 술이나 마시지 그래? 넌 네 이름의 뜻을 알잖아. 그런데 난 나에게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단 말야. 똥 같은 소리 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버지를 받아 버렸어. 받아 버려? 그래, 주먹으로 치고 바닥에 처박아 버렸단 말야. 아버지가 너에게 어떻게 했었는데?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럼 넌 괜히 쳤단 말야? 그래. 아무 이유도 없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어. 아! 어머니를 쳤기 때문에 난 아버지를 친 거야. 거참 안된 일이군. 그래. 끔찍한 일이군. 알고 있어. 우유 배달이 한숨을 내쉰다. 정말 끔찍한 일이야. 그래, 나도 네 마음을 알 것만 같구나. 아냐. 넌 이해하지 못해. 너 자신에겐 그런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거야. 아냐. 난 알 수 있어. 내가 고향에서 살 때 사냥을 많이 했다는 걸 알고 있지? 빌어먹을, 지금 이런 때에 앨라배마 이야기를 또 들어야만 하나? 앨라배마가 아냐. 플로리다야. 어디건 상관없어. 듣기만 해. 우유 배달, 난 어릴 때부터 사냥을 많이 했어. 겨우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주 잘했어. 사람들은 나를 보고 선천적인 솜씨라고 했지. 난 어둠이나 이상한 소리나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짐승을 죽이는 것도 겁내지 않았어. 토끼, 새, 독사, 다람쥐, 사슴 등 닥치는 대로 쐈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멋도 모르고 쏴댄 거지.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웃더구나. 그리고는 나를 가리켜 타고난 사냥꾼이라고 했어. 그 뒤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 이곳으로 이사를 해 왔지. 내가 고향을 그리워한다면 바로 그 사냥 때문이야. 이곳으로 이사해 온 다음부터 할머니는 일 년에 한 번씩 여름이면 고향의 아저씨에게 우리를 보냈지. 난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바로 사냥을 시작했었어. 내가 열 살이든가 열한 살 때였지. 그때도 고향에 가자마자 난 총을 들고 숲으로 달려갔었어. 아저씨도 없이 혼자 간 거야. 재수가 좋았는지 얼마 안 돼 사슴길을 발견할 수 있었어. 여름은 사슴철이 아니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슴길이었지. 얼마 동안 기다리니까 정말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더구나. 웬일인지 전에 보던 사슴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주저없이 쏴댔지. 여지없이 쓰러지더군.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으로 달려가던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고 말았지. 새끼를 배서 배가 불룩한 암사슴이었어. 그것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더구나. 어릴 때 그런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걸 본 네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어머니는 새끼 밴 암사슴과 같은 존재야. 그런 존재에게 남자가 손을 대서는 안돼. 그걸 본 네가 참을 수 없었던 걸 이해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기타를 바라보던 우유 배달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타의 일은 자신의 일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새끼 밴 암사슴이 아닌 것이다. 기타가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올린다. 어머니의 반응은 어땠어? 그저 미소만 짓더군. 아버지는 어머니의 미소를 지독하게 싫어하거든. 자네 너무 흥분한 것 같군. 팔이 부러졌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 미안해. 술잔을 비우라는 뜻이야. 난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넌 똥 같은 수작만 하는 구나. 듣고 있잖아. 난 지껄이기만 하고. 그래. 이야기를 한 건 너였어. 그런데 뭐야?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려? 너도 아버지를 받아 버렸다? 이것 뿐이야?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이 그게 전부야? 뭐 또 말할 것이라도 있어? 그후에 내 방에 올라왔었어. 누가? 우리 집 가장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한다더군. 계속해 봐. 오래 전 아버지가 몫 좋은 부동산을 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해서 놓쳤다는 거야. 그렇다면 한 대 맞아야겠군. 웃기는 이야기였어. 그런데 안 웃었지? 속으로 웃었지. 이봐, 우유 배달. 말해 봐.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지? 그래, 그렇다니까. 그래서 넌 아버지를 받은 거지? 알고 있잖아. 그런데 아무도 너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단 말이지? 안 그래? 그래! 맞았어! 어머니도 누나들도 아무 말도 안 했겠지. 그런데 아버지가 네 방으로 올라와 널 쫓아냈나?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럼 조용히 이야기하던가? 그래, 그랬어! 왜 어머니를 때릴 수밖에 없었나를 설명했겠지? 바로 그거야. 그런데 그것은 모두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었겠지.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야. 하지만 넌 네 자신이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고, 또 너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아버지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겠지. 그 정도면 철학박사감이다! 하지만 괴롭다 이거지? 잠깐만, 나도 생각 좀 하자. 그는 눈을 감고 턱을 고이고 무엇인가 정리를 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다시 눈을 뜬 그는 서둘러 술잔을 비워 버렸다. 그래, 맞아. 그 사실은 아직도 날 괴롭히고 있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우유 배달의 표정은 일그러져 갔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만둬, 우유 배달.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아무것도 아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정말이야. 이것 봐. 사람들은 때때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특히 우리 흑인들은 더 그래. 인생이라는 어려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따금 그런 이상한 소리나 행동을 해야 하는 거야. 다만 그런 것에 다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이해하려고 해 봐. 만약 그게 잘 안 되거든 잊어버려. 자신을 강건한 인간으로 키워 가. 모르겠어, 기타. 난 그런 일에 다치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놔 둬선 안돼. 틸을 보라구. 그 친구도 쓸데없는 일에 다치고 만 거야. 생명을 잃었는데도 라디오의 짤막한 뉴스거리밖에 되지 않잖아. 강해져야 돼. 그 자는 미쳤어. 아냐. 미친 게 아니고 어리고 약했을 뿐이야. 그 자가 흰둥이년과 그 짓을 한 게 뭐가 잘못이지? 그 짓은 아무나 하는 건데. 흰둥이놈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렇다면 그 놈들은 더 미친 놈들이지. 물론 그래. 하지만 그 자들은 엄연하게 살아 있잖아. 하지만 틸은 죽었어. 죽었건 말건 나완 상관없어. 아직 문제가 남은 건 나 자신이야. 네 문제라는 게 뭐지? 넌 네 이름이 싫으냐? 그래, 싫어. 끔찍하게 싫어. 우유 배달은 고개를 떨군다. 내 말 좀 들어 봐. 우리 검둥이들은 이름도 자기 마음대로 붙일 수 없어. 남이 부르는 대로 지어지는 거야. 우유 배달이 고개를 번쩍 쳐든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금방이라도 타 버릴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왜 우린 이름마저 마음대로 지어 부를 수 없는 거지? 쉽게 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자, 일어나. 집에 데려다 줄게. 안돼. 난 집에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갈 수 없다고? 그럼 어디로 갈 거야? 너희 집에 가서 잘 수 없겠니? 너 내 사정을 잘 알면서도 그래. 우리 식구 중 하나는 바닥에서 자야 돼. 나도 바닥에서 자면 되잖아. 안돼. 안된다고? 거지같군. 그래, 가자. 집엔 안 간다고 했잖아. 그럼 헤가의 집에 데려다 줄까? 기타가 웨이트리스에게 계산을 부탁하며 그에게 물었다. 헤가? 좋지, 좋은 여자야. 이름은 모르지만. 지금 네 입으로 말하고 있잖아. 성을 모른단 말야. 아버지의 이름. 레바에게 물어 봐. 술값을 치른 기타가 비틀거리는 우유 배달을 부축해 술집을 나선다. 밖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바는 안돼. 우유 배달이 내뱉는다. 그 여자는 자신의 성도 모르고 있어. 그럼 고모에게 물어 보면 되잖아. 그래, 고모에게 물어 보면 되겠지. 귀에 달고 다니는 그 거지 같은 상자 속에 모두 들어 있을 거야. 그녀 자신의 이름도 그 속에 들어 있을 테지. 내 이름도 물어 보겠어. 이봐,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어떻게 해서 정해졌는지 알고 있나? 내가 알 리가 있나? 흰둥이놈이 서류에 잘못 써서 그렇게 지어진 거야. 웃기는 일이군. 그래.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 거야. 길거리의 개새끼처럼 말이야. 그런 검둥이는 누구든지 쏴 죽여야 했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걸, 그분 이름이 데드(죽음)였으니까. 4. 알 수 없는 일 우유 배달은 어쩔 수 없이 렉스를 드럭 스토어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야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밤에야 흥미 없이 거의 의례적으로 상점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는 집안의 분위기는 억지로 꾸밈 바로 그것이었다. 어머니는 매년 그랬듯이 엄청난 돈을 들여 크리스마스 트리와 버터를 만들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어릴 때부터 해 오던대로 그녀는 방 한구석에 커다란 나무를 갖다 놓고 트리를 꾸미고 있었다. 아버지도 언제나 그랬듯이 자녀들에게 돈이 든 봉투를 나눠 줘 백화점에서 값진 물건을 사도록 선심을 베풀었다. 우유 배달이 살 선물은 간단하여 드럭 스토어에서 쉽사리 고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레나에게 줄 향수와 분, 코린시안스에게는 콤팩트, 어머니에게는 초콜릿 몇 상자,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면도기 정도였다. 그들에게 줄 물건 사는 일은 단 15분만에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헤가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많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는 것 같아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헤가를 알고 있었으나 다만 그의 노리개감 정도로 여기고 있을 분 여자 친구나 결혼 상대자로는 생각해 주지 않았다. 오직 그와 심각하게 관계를 맺고 잇는 한두 여자만이 헤가가 그녀들의 라이벌 이상의 존재라는 걸 깨닫고 그에게 싸움을 걸어 왔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와 관계를 맺어 온 지 12년이 넘게 되자 그는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묻혀도 예전처럼 커다란 행운을 잡았다는 느낌 같은 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목줄기에나 가슴의 피가 뛰던 것은 이제 옛날 이야기였다. 별다른 자극도 받을 수 없이 열이 식은 상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를 정리하는 시기는 연말이 적당한 때일 것도 같았다. 그런 의미로서도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었다. 선물은 그를 기억하기에 좋은 의미를 담아야 했고 동시에 결혼 같은 걸 기대하게 할 만한 것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액세서리용 보석이 언뜻 눈에 띄었으나 시선을 돌렸다. 레바를 떠나간 남자도 보석을 주고 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목시계도 생각해 봤으나 시계를 볼 때마다 그를 생각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스러워졌다. 푸른색 비단 잠옷을 보자 그녀를 안던 첫날밤이 떠올랐다. 그를 침실로 불러들인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잠옷을 벗었던 것이다. 그때 입고 있던 것도 비단 잠옷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때 그는 열두 살, 헤가는 열일곱이었는데 그는 그녀에게 깊이 빠져 버렸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어린애 취급을 했고, 무시했고, 놀려 댔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해 오더라도 그녀를 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집세를 받으러 다니는 길에 밀주 집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헤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후 기타를 따라 그들 또래의 남녀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한 다음부터 우유 배달이 헤가를 보는 눈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그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자와의 첫 경험을 치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헤가와 첫 관계를 맺은 건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친구들의 부탁으로 술 두 병을 사기 위해 아버지의 2톤짜리 트럭을 몰고 고모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는 헤가 혼자만이 있었다. 술을 들고 나오려 할 때 헤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제 몇 살이 됐지? 눈썹을 치켜뜨고 이렇게 묻는 그녀의 표정은 어린애를 어르는 것 같은 것이었다. 열일곱 살. 장가가도 될 나이로구나. 난 너를 기다리고 있어. 헤가는 어이가 없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헛수고야. 왜? 헤가가 짜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기 때문이지. 사랑하려고 해 본 일도 없잖아. 넌 내 상대로는 너무 어려. 마음먹기 나름이야. 우유 배달은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그래, 내 마음이 문제지. 너도 다른 여자와 다를 게 없을 거야. 백마를 탄 왕자가 이 집 문 앞에 와서 네 앞에 무릎을 꿇기를 기다리겠지만 그런 건 MGM의 영화에서나 기대할 수 있을 뿐이야. 그건 네 말이 맞다. 헤가는 헤죽 웃어 보이고는 침실로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그녀가 사라진 침실 쪽을 아쉬운 듯 바라보고 있던 우유배달이 문 쪽으로 다가갈 때 다시 헤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침실로부터 그를 부르는 소리였다. 이리로 들어와, 우유 배달. 그가 침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잠옷을 벗고 있었다. 그것이 그와 헤가의 첫 관계였다. 그후 3년 동안 그녀의 태도는 들쑥날쑥이었다. 어느 땐 선선히 받아들이다가도 때로는 얼음처럼 차갑게 굴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그가 아버지를 때려 눕힐 무렵에 그녀는 그를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드럭 스토어의 점원에게 돈을 치르고 나서며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헤가에게 그들이 친척 관계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지 않았다. 대신 돈으로 줄 생각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선물이 될까 봐 돈으로 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줄 심산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가 원하던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인식시켜 줄 마음이었다. 난 너의 장래를 가로막고 있는 거야. 넌 너에게 어울리는 건실한 남자를 만나야 돼. 그렇게 되면 물론 난 상처를 입겠지. 하지만 난 그에게 감사할 거야. 사랑하는 여인을 행복하게 해 주는 남자에게 보내는 예의야. 그는 이렇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를 만나서 취해야 할 행동을 조심스럽게 생각하던 그는 그녀와 이와 같은 대화를 이미 나누었고 모든 일이 다 결정이 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버지의 사무실에 돌아온 그는 금고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고, 헤가에게 보내는 길고 멋진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이제까지 베풀어 준 그대의 친절과 사랑에 깊이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남자보다도 행복하다고 자부하고 있소. 사랑 이상의 감정이 있다면 이 편지를 끝맺는 내 감정이 바로 그것이오. 돈과 편지를 접어 봉투 속에 넣고 난 후 우유 배달은 한동안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장부의 숫자를 검사했다. 숫자는 조금씩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하는 게 많았다. 숫자를 검사해 나가면서도 그의심정은 극도로 착잡했다. 그것은 헤가로 인한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며칠 전 거리에서 기타와 나눈 대화들이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봐, 우유 배달. 우리는 오랫동안 아주 가깝게 지냈어.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야. 어떤 일에 대해 언제나 의견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지. 이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 생각이 깊은 사람이 있나 하면 경박한 사람도 많아. 발로 차는 사람이 있으면 채이는 사람도 있는 거야. 너의 아버지를 예로 들어 보자. 그분은 발로 차는 사람측에 속하지. 우리를 집에서 쫓아냈어. 그런 면에선 네 입장과 내 입장은 전혀 달랐지. 그래도 너와 나는 친구가 됐어. 우유 배달이 걷던 걸음을 멈추고 친구를 돌아본다. 설마 나한테 개똥 같은 강의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냐.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그렇다면 말해 봐. 그 개 콧구멍 같은 강의 따위를 늘어놓을 생각은 하지 말고. 자네 강의, 강의하는데 도대체 뭘 두고 하는 소리야? 기타가 상을 찡그렸다. 서른이 다 된 놈을 열 살짜리 어린애 취급을 하며 늘어놓는 말 따위를 강의라고 하지. 말을 할까, 하지 말까? 계속해 봐. 다만 날 코흘리개 학생 취급을 하는 선생 같은 억양은 쓰지 말고. 바로 그게 문제야. 넌 내가 말하는 내용보다 억양에 신경을 쓰고 있어. 난 너와 내가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이 같을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어. 너와 나는 결국은 다른 인간이니까. 나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 이건가? 내가 흥미를 느끼는 일을 넌 흥미를 못 느낄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단언하지? 널 알기 때문이지. 넌 뱃속 편한 놈들과 호수 건너편에 산책이라도 가고, 계집 궁둥이나 쫓는 데 정신의 반절은 쏟고 있어. 돈 있는 놈이니까 할 수 없겠지만. 듣기 거북하군. 우리 집의 부자라는 게 못마땅한가? 그게 문제가 아냐. 자네의 정신 상태야. 넌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한 일이 없었잖아. 호수 건너편에도 같이 갔었고... 호숫가 이야기는 집어치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다시는 그 검둥이들의 천국 에는 갈 생각이 없어! 좋아하는 걸로 알았는데.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어! 네가 끌고 가서 가기는 갔지만 정말 역겨웠어! 검둥이가 호숫가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뭐가 잘못인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넌 걸레질을 하거나 목화를 따는 인간들 이외의 검둥이들은 무조건 미워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 여긴 앨라배마가 아냐. 기타는 잠시 분노가 서린 시선으로 친구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이 맞다, 두유 배달. 네 생전에 그보다 더 솔직한 말을 해 본 일은 없을 거야. 그래, 여긴 앨라배마가 아냐. 하지만 만약 여기가 앨라배마라면 넌 어떻게 행동하겠니? 어떡하긴 뭘 어떡해. 비행기표를 사는 거지. 그렇겠지. 하지만 넌 네가 누구라는 걸, 어떤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해. 알고 있어. 한 마디로 앨라배마 같은 곳에서 살기 싫어하는 인간이지. 아냐, 살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살 수 없는 인간이야. 조건이 조금만 나쁘면 넌 쓰러지고 말 거야, 우유 배달. 진실하다는 말은 불쌍하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지. 아버지도 진실한 인간이라고 하더군. 누나들도 진실하고.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 어머니보다 진실해 보이지는 않겠지. 그런데도 불행하단 말야. 며칠전에 뒷마당을 파고 있는 우리 어머니를 본 일이 있지. 콧물도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씨인데도 십이월 십오일까지는 뿌리를 심어야 한다고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구덩이를 파고 있더라니까. 그런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그 추운 날에 땅바닥에 엎드려 구덩이를 파고 있더란 말야. 어머니는 꽃을 좋아해.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의 얼굴이야. 난 이제껏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왜 어머니를 도와 드리지 않았나? 어머니는 즐거움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누구도 방해해선 안 되는 일이었어. 그렇다고 확신하나? 확신해. 하지만 어머니는 추위에 떨고 있었겠지? 이봐, 왜 억지를 쓰는 거지? 모든 일을 자네 식으로 해석하고 자네 주장에 맞추려고 하지 마. 그건 우리 아버지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거야. 종이집게가 있던 장소에 없으면 내가 잘못 했다고 빌길 기대하는 식이지. 내가 그것을 만졌건 만지지 않았건 손댈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단정해 버리는 거야. 도대체 왜들 모두 그러는 거지? 너만 빼놓고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우유 배달은 언젠가 아버지를 때려눕힌 밤, 거리를 오고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겠지만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 우유 배달은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난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고 있어. 어느 곳인데? 파티가 열리는 곳이지. 기타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의 치아는 웃옷에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새하얗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에 복 많이 받게. 기타는 팔을 번쩍 들어 흔들어 보이고는 길을 건너 멀어져 갔다. 그는 우유 배달이 어디로 가는지 묻거나 기다려 달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내리는 눈발 속으로 묻혀 들어가 버렸다. 우유 배달은 들여다보던 장부를 덮어 버렸다. 기타와의 대화가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그날의 대화는 기타가 그를 생각하고 있는 것의 단면에 불과했다. 만약 그의 생각이 옳은 것이라면,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의 생활은 주제도 목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고, 모험도 불편도 없는 무미한 것이 되리라. 하지만 무슨 권리로 자기의 생활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기껏해야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나 만지고 토미의 이발소에서나 빈둥거리는 그가 무슨 권리로 남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한 여자와 몇 달 이상을 지속하는 법이 없었다. 여자가 영원한 삶에 대한 소리 를 하기 시작하면 그는 주저없이 그 여자를 버렸던 것이다. 그런 면에선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렇지만 자신도 결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누구와? 그의 주위에는 여자들이 널려 있었고, 호숫가 인간들에게 그는 매력적인 노총각으로 헌팅의 대상이었다. 하나쯤 골라잡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빨간 머리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멋진 집을 한 채 마련한다. 그 일은 아버지가 도와 줄 것이다. 다음엔 아버지와 동업 관계에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는 보다 나은 것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있을까? 돈은 그에겐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 여자? 아직 누구에게나 거절당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 정치? 토미의 이발소에서 하는 기타의 정치이야기는 그를 졸리게 만든다. 그는 한 마디로 모든 일이 시큰둥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지리하게 만들었다. 도시 전체가 지리한 상대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타가 늘어놓은 인종 문제는 그를 가장 지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흑백 문제가 없다면 그들은 무엇을 소화제로 떠들 것인가? 하지만 그들에겐 떠들 자료나 싸울 상대가 있다. 그러나 그에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지자 우유 배달은 사무실 뒷편에 마련된 목욕탕으로 들어선다. 그곳에는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커피를 만들고 있을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방정맞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창에 쓰인 글씨 너머로 프레디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우유 배달은 내키지 않았으나 문을 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프레디, 무슨 일이죠? 따뜻한 곳을 찾아온 거야. 또 크리스마스가 됐으나 밤새도록 추운 거리를 뛰어다니며 떨어야 될 판이거든. 백화점 수위인 프레디의 임무 중에는 상품 배달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직 트럭을 사 주지 않던가요? 미쳤어? 그놈들이 트럭을 사 주는 날엔 하늘이 놀라 무너질 거야. 커피물을 얹어 놓았는데 한 잔 들겠어요? 바로 그것 때문에 여길 온 거지. 이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봤을 때 이곳에 오면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으리란 걸 직감했거든. 조금만 기다려요. 멋진 젊은이야, 자네는. 목욕탕에 들어선 우유 배달은 변기 속에 숨겨 둔 술병을 꺼낸다.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술 마시는 걸 질색했던 것이다. 그는 술병을 사무실 책상 위에 갖다 놓고 커피를 타기 위해 다시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나왔을 때 이미 술을 한두 모금 마신 프레디가 시치미를 떼느라 애쓰고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찾고 있을 때 프레디가 입을 열었다. 살기 어려워. 우유 배달이 대꾸를 않자 다시 한 모금 들이켜고는 되뇌인다. 지겨워. 그런데 자네 단짝이 보이지 않는군. 기타 말인가요? 그래, 어딜 갔나? 며칠 동안 못 봤어요. 때때로 잘 없어지는 걸 알잖아요. 이야기하던 우유 배달은 문득 프레디의 머리가 많이 하얘졌다는 걸 느낀다. 지금 몇 살이죠, 프레디? 그걸 누가 알아? 나이 따위에 신경쓰다간 오래 못 살아. 하지만 그러고 보니까 나도 제법 오래 산 셈이군. 프레디가 키득거렸다. 여기서 태어났나요? 아냐, 남쪽에서 났지. 플로리다 젝슨빌이 고향이지. 더러운 곳이야. 정말 더러운 곳이지. 검둥이 고아는 고아원에 보내는 대신 감옥에 처넣는 곳이야. 감옥에서 자라난 내 신세를 이야기해도 이곳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더군. 고아로 자라셨다는 건 저도 몰랐군요.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돌봐 줄 사람이 없었던 거야. 어머니가 이상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날 맡으려 하지 않았어.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귀신에 홀렸지. 귀신요? 자넨 귀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나? 글쎄요. 우유 배달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있긴 있을 거예요. 믿는 게 좋을 거야. 여기에도 있으니까. 여기에도요? 우유 배달은 주위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창을 흔들고 있었고, 그의 앞에 앉아 있는 프레디는 금방이라도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들 귀신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 방에 있다는 건 아니지만 필요하면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야. 직접 본 일이 있어요? 물론이지. 한두 번 본 게 아냐.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귀신이 어머니를 죽였어. 그러니 믿지 않을 수 있겠나? 더구나 그후 내 눈으로 직접 본 일도 많아. 그 얘기를 좀 해 줘요. 싫어. 그만두겠어. 내가 본 귀신 이야기는 하면 안돼. 귀신들이 싫어하거든. 그럼 당신이 보지 않은 귀신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소? 당신 어머니를 죽였다는 귀신 이야기를 해 줘요. 아, 그 이야기라면 할 수 있지. 어머니가 친구 한 분과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더군. 그때 한 여자가 그들 쪽으로 걸어오더래. 그래서 그분들은 그 여자가 누군가 하고 기다렸대. 그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어머니의 친구가 말을 걸었대. 그 순간 그 여자는 순식간에 그분들 눈앞에서 하얀 들소로 변하더라는 거야. 그때 어머니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 직후에 내가 태어났다더군. 어머니는 나를 보는 순간 숨을 거두었대.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날 들소 귀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야. 우유 배달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백발이 성성한 프레디의 감정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지만 참으면 참으려 할수록 웃음은 걷잡을 수 없도록 터져 나왔다. 프레디는 감정을 상했다기보다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우유 배달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칠 수 없어 대답을 못 했다. 좋아. 프레디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좋아, 마음대로 웃으라고. 하지만 자네가 모르는 이상한 일이 많다는 걸 알아야 돼. 차차 알게 되겠지. 세상에는 이상한 일이 많은 법이야. 이 동네에서도 알 수 없는 일이 자주 터지고 있어. 이때에야 우유 배달의 웃음은 겨우 가라앉았다. 이 동네에서 일어났다는 알 수 없는 일이 뭐죠? 이 근처에선 흰 들소를 본 일이 없는데요. 눈을 똑바로 떠. 자네 단짝에게 물어 보면 알 거야. 단짝이라뇨? 기타 말일세. 그 친구에게 요새 이 동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물어 봐. 엠파이어 스테이트 사건을 물어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거야. 엠파이어 스테이트요? 그래, 바로 그 친구 이야기야. 무슨 소리예요? 그 친구는 벙어리예요. 벙어리가 아니라 말을 안 하는 거야. 오래 전 그의 아내가 어느 흰둥이놈과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 이후부터 아무도 그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 그 사람하고 기타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궁금하겠지. 경찰에 가서 물어 보면 그 대답을 해 줄 걸세. 경찰이라뇨?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소문도 못 들었나? 학교 운동장에서 흰둥이 하나를 죽인 게 검둥이였다는 거야. 그건 알고 있어요. 그 혐의를 받고 있는 게 엠파이어야. 그를 숨긴 게 기타야. 틀림없어. 그게 뭐가 이상해요? 기타는 원래 그런 친구예요. 그 친구는 쫓기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라도 숨겨 줄 거예요. 흰둥이들을 싫어하는데 특히 가장 미워하는 게 경찰이에요. 숨겨 주는 것만이라면 별게 아니지. 자기가 한 것처럼 나서니까 문제야. 취했군요, 프레디. 술병은 어느 새 거의 비어 있었다. 프레디는 병을 들어 마저 마셔버린다. 그래, 좀 취하긴 취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헛소리를 할 정도는 아냐. 미시시피에서 틸이라는 검둥이가 맞아 죽었던 일을 알지? 바로 그 다음날에 학교 운동장에서 흰둥이 하나가 죽었어. 엠파이어가 죽였다고 믿고 있나요? 그런 짓을 족히 할 놈이야. 기타는 알고 있겠지. 그뿐만이 아냐. 그것 말고도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어. 우유 배달은 이 자가 좀 흥분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 어머니를 죽였다는 들소 귀신 이야기에 자신이 웃은 게 화가 나 그 앙갚음을 하려고 일부러 심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야 돼. 프레디는 술병을 들어보며 비었다는 것을 알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들어 둬. 우리 주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어.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한테 들었다고는 하지 말게. 그 옛날 한 보험회사 외무원이 지붕에서 뛰어내린 일 같은 거야. 그 이야기들은 적이 있나? 그런 것 같아요. 바로 자네가 태어나던 무렵이었지. 1931년의 일이었지. 백화점 수위는 코트 단추를 채우고 방한모를 눌러 쓸 수 있는 한 깊이 눌러 쓴다. 커피 정말 고마웠어, 우유 배달. 자네는 나에게 정말 잘해 준단 말야. 천만에요. 그 사이 못 만날지 모르니까 먼저 인사해 두죠.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세요. 자네도 그러게. 그리고 자네 가족들에게도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길 비네. 그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문가에 이르러 장갑을 끼다가 다시 돌아서 우유 배달을 바라본다. 코린시안스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직접 물어 봐. 그는 누런 금니를 드러내 보이고는 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5. 일요일의 남자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속에 우유 배달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리두르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자 가슴 속이 텅 비어 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가고만 싶은 심정이 바로 지금 그의 심정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그의 뇌리를 어지럽힌다. 이 세상에서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말해 준 것들뿐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취한 행동이 과연 있었던가? 있었다면 단 한 가지 아버지를 후려친 것이고, 그 행동으로 인해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을 무슨 연관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알아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자신도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자 그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고통이 되어 그에게 떨어져 왔고, 그는 그것을 피할 힘이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생각하기도 싫은 일인데도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견디기 힘든 고통이 그로 하여금 일 주일 전의 어느 날 밤에 어머니의 뒤를 밟게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커다란 비크 차를 운전하며 파티에서 돌아오던 그는 낫 닥터 가를 걸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차의 불을 껐다. 새벽 한시 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조금도 서두르는 빛이나 망설임이 없이 평소처럼 태연하게 걷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평범하지만 존경받을 만한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의 행동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루스가 모퉁이를 돌아가자 우유 배달도 잠시 기다렸다가 차를 천천히 움직여 뒤를 따라 모퉁이를 돌았다. 그녀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녀가 버스에 탈 때까지 어둠 속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정부를 만나러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를 데리러 왔을 것이다. 이 시간에 버스를 타고 오도록 놔 둘 얼간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미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아닌가. 버스의 꽁무니를 좇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자주, 너무 오래 멈췄다. 느린 버스의 뒤를 들키지 않고 따르며 내리는 사람을 감시하기란 한 마디로 고역이었다. 라디오를 켰으나 음악은 오히려 그의 신경을 자극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저 금장이라도 차를 돌려 돌아가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결국은 버스가 종점인 기차역 앞에 멎을 때까지 그는 끈질기게 뒤를 따랐다. 그곳에서 이제 몇 남지 않은 승객들 틈에 끼여 역 대합실로 들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유 배달은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기차에 타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느 기차에 탔는지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했다. 밤을 깊을 대로 깊었고, 그는 피로와 허기에 지쳐 있었으며, 이 이상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우유 배달은 대합실로 향했다. 어쩌면 어머니는 아직도 대합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기 전에 그는 대합실 안을 조심스레 살폈다. 조그맣고 평범하지만 깨끗하게 다듬어진 대합실 안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대합실로 들어선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훼어필드 행 이란 팻말이 계단 상단에 붙어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계단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확성기에서 2시 15분 발 훼어필드 행 기타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순간 계단을 달려 올라간 그는 막 기차에 오르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출발 직전에 다른 칸에 뛰어 올라탔다. 기차는 10분 간격으로 열 곳이나 되는 정거장에서 정거했다. 기차가 정거할 때마다 그는 난간에 나와서 어머니가 내리는가를 살폈다. 여섯 번째 정거장을 지나쳤을 때 그는 지나치는 차장에게 시내로 돌아오는 차가 몇 시에 있는지를 물었다. 5시 45분에 있다는 대답이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어느새 3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분쯤 지난 후 차장이 종점에 도착했음을 소리치자 그는 기차에서 먼저 뛰어내려 바람막이용 목조 건축물 뒤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귀에 익은 고무창 소리가 그를 지나쳐 층계를 내려갔다. 정거장 옆으로는 상점 거리로 지금은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신문 판매대, 다방, 문방구점 등이 보였으나 일반 가옥은 눈에 뛰지 않았다. 이 한적한 교외에 집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여유있는 부자들로 그들의 집은 길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위치해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는 언제나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텅 빈 거리를 한동안 걷다가 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거친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훼어필드 묘지로 가는 길이었다. 묘지 입구를 알리는 철제 아치탑 밑에 이르러서야 그는 이곳에 흑인 공동 묘지이고 그의 외할아버지 닥터 포스터가 묻혀 있는 곳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우유 배달은 묘지 근처의 나무에 몸을 기대고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야 그는 아버지가 이야기해 주던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어머니는 이기적이고 변태적이며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걸 믿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또다시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왜 우리 가족은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없었을까? 어머니가 묘지 입구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이 지나서였다. 어머니! 그는 가능한 한 차갑게 말하려 했다. 동시에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나 경악하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놀란 루스는 한동안 호흡조차 가누기 힘든 것 같았다. 마콘? 네가 정말 마콘이냐? 오, 하느님! 네가 여기에 오다니... 경악의 순간이 지나자 그녀는 이 상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박거리면서 태연하고 여유있는 태도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우유 배달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 옆에 눕고 싶어서 온 거죠? 근래 몇 년 동안 걸핏하면 밤을 지새운 게 바로 이곳이었군요? 루스는 어깨가 경련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어조는 의외로 차분하고 강경한 것이었다. 정거장으로 가자. 시내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40여 분 동안 루스도 우유 배달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어느덧 어둠이 밀려가고 있었다. 플랫폼에는 그들 이외에는 단 몇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해서야 루스는 이제껏 해 왔던 이야기를 계속하듯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은 내가 작은 인간이기 때문에 생겼다. 어리다는 뜻이 아니라 작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내가 작은 인간이 된 것은 짓눌렸기 때문이야. 내가 자라난 커다란 집도 나를 짓누르는 구실밖에 하지 않았어. 친구도 없었어. 있다고 해야 내 드레스나 비단 스타킹 따위나 만지길 좋아하는 동급생 정도였다. 그러나 나에게 그분 이 계셨기 때문에 친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작았지만 그분은 큰 인물이었다. 그분이야말로 내 존재에 관심을 두는 유일한 분이었어. 그렇다고 그분이 훌륭한 인물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어느 면으로 보면 바보 같은 면도 있었고 거만하고 고집불통이었지. 하지만 나를 보살펴 주고 걱정해 주신 분은 이 세상에 그분 하나밖에 없었어. 그렇게 되니 그분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난 나 자신인 그분이 가장 아끼는 존재 중의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어. 그후 그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나에게는 중대한 일이었고, 그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분의 보살핌이 없이는 못 견디게 된 거야. 난 이상한 여자가 아냐. 다만 작은 인간일 뿐이지. 아버지가 너에게 내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을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자기로부터 내 관심을 끌어간다고 해서 내 아버지를 죽였고, 너를 죽이려 했다는 소리는 안 했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 자는 아버지의 약을 모두 내다 버렸어. 그래서 그분이 돌아가신 거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 만약 고모의 도움이 아니었다라면 난 네 목숨도 구하지 못했을 게다. 널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한 은인은 고모다. 피레이트 고모요? 우유 배달은 어느덧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 변명도 듣지 않겠다고 조개처럼 다물어 버린 그의 귀도 이제는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늙어빠지고 미치광이 같지만 인정 있고 용기 있는 고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네 아버지와 나는 부부 관계라고는 아예 없었다. 우리는 끔찍한 싸움을 했었지. 네 아비는 날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난 경찰에 가서 그 자가 우리 아버지에게 한 것을 고발하겠다고 대들었지.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어. 내 생각으론 날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만족보다는 아버지의 재산이 네 아비에게는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나도 어린 두 딸을 놔두고 죽기는 싫었지. 네 아비는 날 죽이는 대신 방을 옮겼어. 그때부터 부부 관계가 끊어진 거야.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무덤을 찾게 된 거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웃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상대가 필요했던 거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고 건드리지도 않는 감옥 같은 상태에선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았던 거야.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지. 네 아비가 나와 잠자리를 따로 하기 시작할 때 난 스물 살이 갓 넘어 있었지. 견디기 힘들었다. 마콘, 정말 힘들었다. 그러다 내가 서른이 되자 난 정말 말라죽는 게 아닌가 하고 겁이 나더구나. 바로 그 무렵에 고모가 이 도시에 나타났지. 딸 레바와 레바의 어린 딸을 데리고도 당당하게 말이다. 네 아비를 만나러 온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어떤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묻더구나. 남자가 필요한 것 같군요? 미칠 것 같아요. 아무라도 좋아요. 솔직한 심정이었지. 그랬더니 고모는 웃으면서 달랬지. 오빠는 어떤 사내보다도 훌륭해요. 남자 관계가 있으면 임신하게 될텐데 그 아기는 오빠의 자식이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이의 이나마의 관계도 끝나고 말아요. 그러면서 이상한 빛깔의 약을 주더구나. 네 아비가 먹을 음식 속에 넣으라는 것이었어. 루스는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끊고 웃음을 지었다. 난 중대한 실험을 하는 과학자라도 된 기분이었지. 효과는 금방 나타나더라. 네 아비는 나흘 동안이나 줄곧 내게 덤벼왔어. 어느 땐 대낮에도 일하다 말고 달려오더라.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런 일이 있은 지 두 달 후 난 임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 사실을 깨달은 네 아비는 즉시 고모를 의심하며 나에게 아이를 떼어버리라는 거야. 그러나 난 말을 듣지 않았고 고모가 나서서 네 아비를 닦아 세웠지. 그 때 고모가 없었다면 난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 고모는 내 생명을 구해 줬고 또 네 생명도 구해준 은인이야. 그런 일로 해서 고모는 널 친자식처럼 사랑했지. 그것도 네 아비에게 쫓겨나기 전까지만... 우유 배달은 앞좌석 등에 달린 차디찬 손잡이에 이마를 기댔다. 생각대로라면 그 쇠손잡이에 이마를 박아 깨뜨려 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발가벗고 할아버지 옆에 누워 계셨다면서요? 아니다. 난 그때 속옷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 그분의 아름다운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신체 중에서 그 부분만이... 어머니는 나에게 젖을 먹였죠? 그래, 그런데? 내가 젖을 먹기엔 너무...너무 컷을 때까지도... 루스는 고개를 돌려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젖을 먹인 것뿐만이 아니다. 매일 밤, 매일 낮,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널 위해 기도했다. 그런 내 행동이 너에게 해가 됐더란 말이냐? 내가 널 무릎 위에 올려놓고 네게 고통일도 줬단 말이냐? 그것은 시발에 불과했다. 이제는 모든 일이 종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어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철컥 또다시 돌리는 것 같았으나 열릴 리가 없었다. 그는 눈 위에 올려놓은 손을 치우지 않고도 창을 통해 그녀가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워져 살의가 번뜩이는 헤가는 그로부터 크리스마스의 감사 편지 를 받고 난 얼마 후 자신의 진실한 무기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 감사 편지 가 준 충격도 대단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 그녀가 무기를 찾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비단결처럼 반짝이는 머리결을 그의 어깨에다 얹고 있는 여인,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는 우유 배달의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사랑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적절한 무기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헤가가 그들을 발견한 것은 우유 배달이 자주 다니는 메리라운지 에서였다. 그의 상대역인 애인은 뒤에서 봤을 때 레나나 코린시안스 같았으나,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얼굴을 정면에서 봤을 때 헤가는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그 순간부터 헤가는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르는 자연의 법칙처럼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메우기 위한 무기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창문도 잠겨 있었다. 들어올리게 되어 있는 창문이 열리지 않아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우유 배달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어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 와도 그는 얼굴 위에 올려놓은 손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좁다란 난간 밑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홀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헤가는 깨진 유리창 안으로 손을 넣어 고리쇠를 풀고 창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나 그래도 아침 햇살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려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마실 수 있는 한 많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녀가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나를 죽일 수 없으면 차라리 죽어 없어져라! 둘 중의 하나가 죽어 없어져야 한다면 네가 죽어라. 죽어라, 헤가. 죽어 없어져라. 그러나 그녀는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 창을 타고 넘어온 그녀는 그가 누워 있는 자그마한 철제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든 정육점용 식칼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그의 목덜미 근처를 내리찍었다. 칼은 셔츠의 깃을 가르고 침대에 꽂혔다. 칼이 스쳐간 살갗에서 피가 번져 나왔다. 몸을 움찔한 우유 배달은 그래도 팔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전신을 헤가의 칼 밑에 맡겨 두는 것 같은 자세였다. 침대 매트리스에 꽂힌 칼을 다시 뽑아들어 머리 위에 치켜든 헤가가 움직이지 않는다. 좁다란 방 안에 창백한 여인과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남자의 숨소리만 정적을 흔들 뿐이었다. 그대로 1분 여가 지난 후에야 우유 배달은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얼굴 위에 얹었던 손을 내리고 눈을 떠 칼을 머리 위로 쳐들고 화석처럼 굳어 있는 헤가를 노려봤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헤가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일으킨 우유 배달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기왕 칼을 들었으면... 우유 배달의 목소리는 의외로 싸늘했다. 네 그 구멍이나 찢어 버리지 그래. 그럼 무슨 문제가 해결될 게 아냐. 잘 생각해 봐. 그는 헤가의 볼을 토닥거리고는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애걸하는 듯한 눈길을 피해 등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대로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 사이 주위 사람들은 그녀와 우유 배달의 신변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루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전쯤에 루스는 프레디로부터 그 동안 헤가가 여섯 차례나 우유 배달을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가가? 그녀는 짐작도 못 한 일에 얼이 빠진 듯 프레디의 드러난 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헤가를 본 것은 오래 전 단 한 번 가 본 피레이트의 집에서였다. 헤가라고 했나요? 헤가라니까요, 쇼어 헤가. 피레이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물론이죠. 그때마다 피레이트가 헤가를 호되게 때렸지만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루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그녀는 피레이트를 의심했던 것이다. 우유 배달이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해 준 장본인인 그녀가 이번엔 그를 죽이려 하는 것으로 짐작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심을 하는 그 순간 그녀는 아픔을 느꼈다. 아들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유 배달은 자신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은 어느덧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인간이 되어 온 셈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단 하나뿐인 정열의 대상이었다. 다시는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없게 되자 우유 배달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녀와 남편을 이어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도 그녀와 마콘에게 커다란 의미를 주던 존재였다. 피레이트의 영약 덕분으로 며칠 동안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난 후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마콘은 격노하여 아이를 떼어 버리려 했다. 파마자 기름을 마시게 했고 뜨겁게 달군 항아리 위에 앉게 하는가 하면 비눗물을 집어넣었고, 그것도 안 되자 뜨개질 바늘을 주고 자신이 직접 쑤셔 넣도록 강요했다. 문 밖에서 남편이 지키고 있는 동안 그녀는 바늘을 손에 든 채 목욕탕에서 통곡해야 했다. 이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어느 날 아침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배를 힘껏 후려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그녀는 남쪽 거리로 피레이트를 찾아나섰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그 주변 사람들은 피레이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안내로 포장되지 않은 길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녀의 집을 쉽사리 찾을 수 있었따. 피레이트는 의자에 앉자 있었고, 그 뒤에서 레바가 그녀의 머리를 잘라 주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헤가를 봤던 것이다. 네 살인가 다섯 살이던 그녀는 뿔처럼 머리를 묶어 올렸고 꼬리처럼 땋아내리고 있었다. 피레이트는 복숭아를 내주며 루스를 위로한 후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는 마콘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 후로 마콘은 태아를 없애려는 행위를 중단했던 것이다. 눈 덮인 언덕에서 흩어진 붉은 꽃잎 위로 떨어지는 푸른 비단 날개를 단 사나이를 본 다음날 태어난 아이는 그녀의 유일한 쾌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프레디에게 들킨 후 그녀로부터 떠나갔고 그때부터 아이는 영화에서 본 카우보이나 인디언처럼 자라갔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녀의 어항에서 빠져나간 금붕어요, 그녀의 정원을 떠난 꽃이었다. 한때는 그녀의 쾌락의 대상이었고 이제껏 그녀의 모든 정열의 표적이던 그가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다는 프레디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그 옛날 우유 배달이 그녀의 무릎 위에서 놀 때 느꼈던 강렬한 보호 의식이 되살아났다. 더구나 그의 생명을 노리는 인간은 바로 데드 가의 피를 이어받은 헤가가 아닌가! 끔찍한 일이군요. 루스는 프레디가 건네 준 집세를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소리쳤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프레디를 뒤로 하고 그녀는 현관 계단을 올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곳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는 싱크대 밑의 찬장문을 발로 걷어찼다. 문이 열리자 다시 발길로 차 닫았으나 힘이 넘쳐 다시 열렸다. 닫혀, 닫히란 말야! 그녀는 나직히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열린 문이 저절로 닫힐 리는 없었다. 내 말 안 들려? 닫혀! 닫히란 말야! 닫혀! 그녀는 어느덧 울부짖듯 악을 쓰고 있었다. 루스의 외침 소리를 들은 레나가 부엌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싱크대를 노려보고 서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레나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루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매섭도록 반짝이고 잇었다. 무슨 일이냐?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고함을 치신 것 같아서 온 거예요. 누굴 불러서 저 문이 꽉 닫히도록 고쳐라. 꽉 닫혀야 한다. 그리고 레나를 지나쳐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레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순 두 살의 노인이 그토록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레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루스는 다링 가를 가로지르는 지하도를 건너 피레이트의 집으로 향했다. 상당한 거리에서 그녀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집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서 풍기는 과일 냄새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 집에 왔을 때 먹던 복숭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집안의 분위기는, 물론 그녀의 내부에는 차가운 분노가 응어리져 있었지만, 따뜻한 휴식처나 안전한 항구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 집은 두 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큰방은 거실이었고 그 옆에 붙은 방은 침실인 모양이었다. 침실의 문을 여니 자그마한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옆의 흔들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내적 분노와 결심이 가슴 깊이 침전되기를 기다리며 침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대만으로 봐서는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깨끗한 시트가 깔리고 푹신한 베개가 있는 것이 바로 헤가의 것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그녀는 침전되던 분노가 되살아나 전신에 흐른 걸 걷잡을 도리가 없어 의자에서 일어서 침실을 나서고 말았다. 헤가의 침대 옆에서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안정되지 않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거실을 서성거리던 그녀는 문득 집 뒤쪽에서 콧노래가 들려 오는 것을 들었다. 피레이트일 것이다. 그녀는 항상 무엇인가를 씹으며 콧노래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루스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피레이트에게 프레디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묻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피레이트의 차분한 안목과 정직한 마음씨와 흔들리지 않는 감정이 필요했다. 그후에 그녀가 취할 행동은 자연히 결정될 것이었다. 루스는 이를 악물고 현관을 나서서 집 뒤로 돌아갔다. 한 여인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무릎을 감싸안고 있는 그녀는 피레이트가 아니었다. 다가가던 루스는 걸음을 멈추고 여인의 등을 바라본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걸음을 멈추고 여인의 등을 바라본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인간의 등이 아니었다. 다치기 쉽고 부드럽고 연약해만 보이는 여인 의 등이었다. 레바? 루스의 목소리도 조심스러웠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루스가 보아 오던 중 가장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어머니는 나가셨어요. 그녀의 말에는 긴 여운이 담겨 있었다. 도와 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내가 루스 포스터라네. 순간 헤가는 바늘에 찔린 듯한 충격과 함께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전율을 느껴야 했다. 우유 배달의 어머니가 아닌가! 언젠가 그녀의 사랑을 잡으려 , 그러다 모습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것도 안되면 사랑하는 남자와 관련이 있는 사물 가까이라도 있고 싶어서 우유 배달의 집 길 건너에 갔을 때 이층 커튼 사이로 옆모습만 보이던 여인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유 배달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거나 레바나 피레이트가 그녀를 어떻게 이야기했던가는 지금 헤간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그의 어머니 라는 점만이 헤가에겐 중요했던 것이다. 헤가의 얼굴에 떠오르는 처절한 미소는 그녀의 심정을 한 마디로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루스의 표정엔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미소 뒤에는 살기가 번뜩이고 있어. 루스는 숨을 들이켰다. 내 아들을 죽이려 했다면서? 그녀의 어조는 메말라 있었고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만약 내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친다면, 주여, 용서하소서, 난 네 목줄기를 끊어 놓지 않을 수 없어. 헤가는 놀란 듯이 보였다. 그녀는 이 여인의 아들 이외에는 세상의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그가 살아 있기를 원하는 것도 바로 그녀인 것이다. 그러나 그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녀의 사랑의 죽음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여인을 이토록 아프게 하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어요. 하지만 약속드릴 수는 없군요. 헤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옆모습만 바라보았던 여인의 모습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와 같은 지붕 밑에서 잠잘 수 있는 여인, 그가 필요할 땐 언제라도 불러들일 수 있고 그 부름을 그가 거역할 수 없는 여인, 그의 생애 전부를 기억하고 있는 여인, 그의 뒤를 닦아 줬고, 가장 은밀한 곳을 씻어 줬으며 그의 오물이 묻은 기저귀를 빨아 준 여인, 자신의 젖꼭지로 그에게 젖을 먹였으며, 안전하고 따뜻하게 가슴에 안아 주었을 여인, 그 여인이 바로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슬프디슬픈 질투의 아픔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헤가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마도 이 여인이야말로 죽여 없애야 할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녀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한다. 어쩌면 이 여자만 없어진다면 그는 다시 자신에게 올 것만 같다는 생각이 헤가를 괴롭힌다. 그 우유 배달만이 그녀의 안식처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가 입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안식처예요. 나한테도 필요해. 루스가 이렇게 잘라 말했을 때 또 하나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런데도 그놈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개똥 하나도 주지 않았어. 고개를 돌린 그들은 창틀에 기대 서 있는 피레이트를 발견했다. 그녀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 는지 그들로선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나무랄 생각은 없어. 나이가 훨씬 많은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놓고 안식처니 필요하다느니 하고 있는 게 한심한 노릇이지. 그 아이는 안식처도 뭣도 아냐. 그저 평범한 남자일 뿐야. 게다가 그 아이가 필요로 하는 걸 가지고 있지도 못하잖아. 참견하지 마세요, 할머니. 날 혼자 내버려 두세요. 넌 이미 혼자야. 더 외롭고 싶다면 지옥으로 보내 주마. 날 괴롭히지 말아요. 헤가는 악을 쓰며 손가락으로 머리털을 쥐어뜯는다. 이런 행동은 여인들이 신경질을 부릴 때 흔히 하는 행동이었으나, 루스는 그런 헤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의 아픔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그녀는 이곳 사람들의 걷잡을 수 없는 거친 정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은 빈곤이나 더러움이나 소음 때문에 비롯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규칙과 조직과 문화가 있는 곳에선 발견 할 수 없는 거친 정열이 이곳에는 숨쉬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 사람은 언제 어느 때든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해낼 사람들이라는 걸 그녀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런 점은 피레이트에겐 느끼지 못했던 점이었다. 물론 마콘 데드에게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인물로서는 루스가 알기로는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과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따뜻함은 거친 면을 숨겨 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헤가의 흐느끼는 소리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거기 앉아. 이 자리를 떠나선 안돼. 헤가는 비틀거리며 다시 벤치로 돌아와 주저앉는다. 피레이트가 루스에게 시선을 돌린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버스에 타기 전에 좀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요. 그들은 얼굴을 마주하고 식탁에 앉았다. 난 이럴 때 복숭아를 먹으면 진정이 되더군. 피레이트는 이렇게 말하며 복숭아가 담긴 바구니를 끌어당긴다. 마침 좋은 게 있어요. 좀 깎아 드릴까? 사양하겠어요. 루스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무섭게 타오르던 분노와 혀가 굳어가는 듯하던 긴장이 사라지고, 그리고 손녀에게 던지던 피레이트의 무서운 소리를 듣고 난 직후 그녀에게 주어진 일상적이고 편안한 상황은 그녀를 일시에 맥이 풀리게 했고, 그 결과 허탈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루스는 두 손으로 무릎을 눌러 떨리는 것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도 복숭아를 내왔었죠. 그때도 아들 때문에 왔었죠. 피레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복숭아 하나를 만지작거린다. 헤가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설령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안될거요. 하지만 내 입장으로는 용서는 못 하더라도 이해는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당신은 헤가가 그 애를 당신으로부터 빼앗아 가려 했기 때문에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거예요. 그건 헤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으로부터 그를, 즉 사랑을 뺏아 가려 한 상대는 그녀에겐 적인 거예요. 그 적이 바로 우유 배달이요. 그녀로부터 사랑을 빼앗아 가기 전에 헤가는 그 애를 죽이러 갔던 거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과 헤가는 같은 입장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요. 난 헤가가 그런 짓을 못 하도록 최선을 다해 왔어요. 그녀가 그런 짓을 하려고 했을 때마다 무서운 형벌을 가했지요. 하지만 분명히 알아 둘 것은 헤가가 하려고만 했지 실상은 하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우유 배달을 죽일 수는 없을 거요. 그 아이는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요. 뱃속에 그 아이의 친아버지가 갖은 짓을 다해 죽이려 했어도 용케 태어난 거예요.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그의 생명을 뺏을 수 없을 거요, 그 누구도 그런 그를 아버지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피레이트. 그럴까? 그럼요, 물론이죠. 그 누구도? 당연한 일이에요. 왜 그래야만 하는 거지? 죽음이란 태어나는 것처럼 가장 자연스런 일이에요. 죽음이 자연스런 일이라고? 천만에, 가장 부자연스런 일이에요. 인간은 영원히 살아야만 한다고 믿고 있나요? 어떤 사람의 경우에 그렇죠. 그걸 누가 결정하죠? 어떤 사람은 죽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그건 자신이 정해야 할 일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요. 자신이 죽고 싶은 때 죽는 법이죠. 원하지 않는 사람은 죽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집에 데려다 줬지. 방에 들어가니까 그녀가 방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더군. 그래서 데려다 준걸세. 안됐어. 정말 유감스런 일이야. 기타의 말에 우유 배달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헤가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으나 그렇게라도 해야 기타를 잡아 앉히고 다른 일들을 물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그래? 내가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건가? 그년이 백정들이나 쓰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내 이야기는 그 이전에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 됐느냐는 거야. 그 여자는 지각이 있는 거야. 자네가 여자들한테 하는 짓 이외엔 아무 짓도 안 했어. 여섯 달에 한 번씩 갈아치우는 자네니까 잘 알 테지. 믿을 수 없군. 사실이야. 아냐, 그런 일 만으론 그럴 리가 없어. 그 이상의 뭐가 있을 거야.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마음대로 해석하게. 여하튼 그 여자가 상처를 입은 게 사실이고 그 상처는 자네 때문에 비롯된 게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네는 그년이 몇 번이나 날 죽이려 한 걸 알고 있잖아. 그런데도 난 손 한 번 안 댔어. 그런데도 자네는 지금 그년 걱정만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갑자기 경찰이라도 된 건가? 하얀 옷이라도 입고 싶고 거야, 뭐야?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난 자네의 비판에 지쳤어. 모든 일에 의견이 일치할 수 없다고 한 건 자네야. 물론 자네 말에 의하면 난 진실한 놈이 못 되지만 우리가 친구 사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짓뭉개지는 못할 걸세. 내 생각과는 정반대군. 잠시 동안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우유 배달은 맥주 잔을 들었고 기타는 차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헤가가 그를 습격한 날부터 며칠이 지난 일요일 오후, 그들은 메리의 라운지에서 만났던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군. 한참만에야 우유 배달이 문득 입을 열었다. 끊었네. 끊고 나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 그리고 기타가 말을 이을 때까지 잠시 또 한 번의 침묵이 흘렀다. 자네도 끊어야 할걸세. 우유 배달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자네 옆에 머무른다면 그렇게 되겠지. 담배도 술도 계집도 모두 다 끊어야 되겠지. 그리고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꼴이 될 게고. 기타가 찡그린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 우유 배달은 한숨을 내쉬고 친구를 똑바로 바라본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엠파이어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군. 그 친구가 난처한 처지에 처했길래 도와 준 것뿐이야. 그게 전부야? 그럼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내가 알아서 안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말해도 좋지. 하지만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난 그걸 알고 싶어. 기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린 오랜 세월 동안 친구였고 자네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난 모든 걸, 우리의 상이점마저도 죄다 이야기할 수 있었어. 자네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 그러나 언제부턴가 내가 하는 행동이 일방통행이라는 걸 알게 됐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난 모든 걸 이야기하는데 자넨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야. 내가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생각해 본 일이 없어. 믿어 봐. 그러고 싶지만 곤란해. 다른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세. 그럼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게. 자네에 대한 이야기만 해 주게. 기타는 오랫동안 우유 배달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믿을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렇지 못할 것도 같았다. 그래도 모험을 해 보기로 작정한다. 좋아. 기타의 음성은 결단을 내린 사람의 것이었다.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둘 것은, 만약 자네가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자네가 내 목에다 밧줄을 옭는 셈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도 알고 싶나? 물론. 확신하나? 당연하지. 기타는 찻잔에 더운 물을 더 부어 넣는다. 그리고는 홍차 잎이 떴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잠시동안 들여다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흰둥이놈이 우리 검둥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죽이고 있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럴 때 우리들은 어떻게 했나? 고개나 흔들어대며 끔찍한 일이야 라고 씨부렁거리는 게 고작이었지. 우유 배달이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는 기타가 자신을 그가 행하고 있는 모종의 사건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타의 인종 문제로 가득 찬 자루 속으로 자신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기타는 한 마디 한 마디 확인이라도 하는 듯 천천히, 분명하게 말해 나갔다. 하지만 난 그렇게는 할 수 없어. 적어도 나만은 말일세.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니 해야 할 일이란 그놈들과 균형을 이루는 것밖에 없었어. 그 놈들이 다섯을 이룰 대 우리는 일곱을 이루어야 하는 거야. 인구의 증가도 그렇고 생산도 마찬가지야. 따라서 그놈들 일곱이 죽을 때면 우리 다섯 이상이 죽어선 안돼. 사회라는 것은 단 몇몇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인데 그 자리는 모두 흰둥이놈들이 차지하고 있어. 법도 재판도 모두가 그놈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흑인 여자를 강간하고 흑인 아이를 죽여 봤자 아무런 제재를 가할 리가 없어. 우리가 교수형을 당한다면 그놈들도 당해야 하고, 우리가 화형을 당하면 그것들도 당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그렇다고 그대로 놔둘 순 없어서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유 배달은 온몸이 굳어 가는 긴장감과 냉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사람을 죽이겠단 말인가? 사람이 아냐. 흰둥이놈들이지. 이유가 뭔가? 이야기했잖아. 그 방법밖에 없어. 그놈들에게 대항하고 응징하는 방법은 그것뿐이기 때문이야. 만약 세상 돌아가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렇게 되면 세상은 동물원이나 마찬가지가 될 걸세. 그런 세상에선 살 수 없어. 자네의 말에 의하면 죄를 지은 인간이 아니라 죽은 숫자만틈 아무나 죽이라는 것 같은데,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왜 죄없는 사람마저 죽여야 하는 거지? 죄를 진 놈이 누구건 상관없어. 그놈들은 누구나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들이니 아무나 그 대가를 받아야 해. 흰둥이 중에는 선량한 인간이 없어. 그것들은 누구나 검둥이를 죽일 수 있는 대가를 받아야 해. 흰둥이 중에는 선량한 인간이 없어. 그것들은 누구나 검둥이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걸 잊어선 안돼. 히틀러를 보면 알 수 있어. 그자야말로 대표적인 흰둥이야. 그놈이 유태인들과 집시들만을 학살한 것은 우리 검둥이들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백인들 중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잖아? 흑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도 있어. 극히 적은 수지만 그들이야말로 제대로 된 인간들이지. 그렇지만 그들도 다른 흰둥이놈들이 검둥이를 죽이는 건 막지 못했어. 분노하고 수치스럽게만 여길 뿐 그런 짓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는 다를 바가 없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걸세. 잘못 생각한 거야. 올바른 백인들이 적지 않아. 수많은 백인들이 올바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어. 내 말 들어 보게. 존F.케네디라도 미시시피의 한가한 술집에서 술에 취하고 지루해지면 검둥이 사냥 패거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 그와 같은 분위기에선 아무리 제대로 된 인간이라도 그 인간의 내부에 잠들어 있는 비자연스런, 변태적인 일면이 뛰쳐나오고 마는 거야. 그들은 그 짓을 단순히 지루하고 술에 취해 재미로 하는 짓이란 말일세. 하지만 우리들은 어떤가? 아무리 술에 취하고 몸이 꼬일 정도로 지루하고 심심해도 그런 짓을 생각이라도 했다는 소리를 못 들었어. 그러나 이런 사람의 경우엔... 우유 배달은 흑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인을 기억 속에서 더듬는다. 슈바이처 박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것 봐. 그 사람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해 봉사한 걸로 생각하면 오해야. 그 사람은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상대를 그들로 선택했을 뿐이야. 그렇다면 엘레노어 루스벨트는 어떤가? 난 여자들은 몰라. 백인 여자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란 태워 죽이는 검둥이를 잘 보게 하려고 자기 자식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고 있는 여자의 사진뿐일세. 그러니 엘레노어에 대해서도 의심을 안 가질 수 없지. 하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엔 의심이고 뭐고 없어. 그자도 앨랍머의 어느 더러운 촌락에 데려다 놓고 독한 위스키와 담배와 트럼프와 밧줄을 주면 다른 흰둥이놈들처럼 우리를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을 거야. 틀림없어.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그럴 만한 분위기기나 조건이 되면 흰둥이놈들은 하나같이 그런 짓을 할 놈들인 반면, 우리는 아무도 그런 짓을 생각도 않는다는 점일세. 듣고 본 바에 의하면 그들 자신들도 그걸 알고 있어.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은 일찍부터 그들이 부자연스럽고 변태적인 인간들이라는 걸 지적해왔고 그와 같은 사실을 비극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의 병적으로 그 상태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거야. 결국 그들의 피 속에는 그런 요소가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자넨 그걸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겠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런 끔찍한 행동을 하면서도 동기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나? 그놈들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과학적인 증명 따위를 하는 걸 본 일이 있나? 먼저 죽인 다음에 적당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놈들이라는 걸 몰라? 잠깐만, 기타. 만약 그들이 자네 말대로 그토록 나쁘고 변재적이라면 왜 그자들과 똑같이 행동하려 하는 거지? 그들보다 나은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나? 난 이미 그들보다 월등한 인간이야. 그렇다면 왜 그들 중에서도 가장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하는 짓을 하려는 거지? 그놈들과는 달라. 나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 정당한 행위란 말이지? 첫째, 재미로 하는 짓이 아니고 둘째, 돈이나 권력이나 공명심이나 땅을 노려서 하는 짓이 아니며 셋째, 아무에게도 분노를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일세. 화를 내고 있지 않다고? 억지 쓰지 말게. 사실일세. 정말 두렵고 하기 싫은 일이지. 분노도 느끼지 않고 술에 취한 상태도 아니며, 개인적인 원한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냐. 그런 짓의 결과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나? 이야기했지? 흑백의 균형을 이뤄야만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 수 있다고 믿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이 땅은 우리 검둥이의 피로 물들어 있어. 전에는 인디언들의 피가 땅을 적셨고, 따라서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될 권리가 있어.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단 말일세. 백인들도 수없이 죽었네. 서부에서만 그랬지. 하지만 그들은 그것의 대가 이외의 것마저 가지려 하고 있어. 자네들의 행동의 동기와 목적을 다른 흑인들에게 알릴 생각은 없나? 그들에게 희망을 줄 생각이 없느냐는 뜻일세. 안돼. 무슨 이유에서지? 배신자가 생겨날 가능성 때문이네. 그렇다면 백인들에게 알리는 건 어떤가? 마피아나 3K단 같은 상대들에게 자네들의 존재를 알려 그들의 행동에 제동을 걸 생각은 없나? 어리석은 짓이지. 우리는 그놈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해. 재물을 위해, 또는 재미로 우리 검둥이들을 죽이는 그놈들은 무서운 조직과 힘과 돈이 있어. 하지만 우리는 엄숙한 임무만 있을 뿐이지. 나약해. 겨우 일곱 사람뿐이야. 그래도 그걸로 충분해. 화요일에 사건이 생기면 화요일 담당이 처리하고, 수요일에는 수요일 담당이 맡으면 되니까. 조용히, 그리고 엄숙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 나갈 뿐이야. 우유 배달은 한동안 말없이 친구를 바라보다가 들이마셨던 숨을 길게 내뿜는다. 분명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어. 자네는 언젠가는 체포당하고 만다는 걸 알아야 돼. 아마 그렇겠지. 그렇지만 언제 잡혀서 죽더라도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이르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 이상의 감정은 없을 거야. 언제, 어떻게 죽든 별 흥미없어. 내가 맡은 요일 이외에도 일주일에는 엿새가 있어. 우리의 임무는 끊임없이 수행될 거야. 믿어 줘. 결혼도 못 하겠군. 생각없네. 아이들을 가지고 싶지 않나? 나완 관계없는 일이지. 인생이 그래서야 되겠나?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이지. 사랑이 없지 않나? 내 인생은 사랑으로 꽉 차 있어. 우유 배달은 다 타 버린 담배꽁초를 버리고 또 하나를 태워 문다. 자네가 맡은 요일은 무슨 요일인가? 말해 줄 수 없겠나? 일요일일세. 난 일요일의 사나이인 셈이지. 우유 배달은 짧은 쪽 다리의 장딴지를 비벼댔다. 자네 일이 걱정이군. 기타가 웃음을 터뜨린다. 자네가 날 걱정한다고? 거참 재미있는 일이군. 난 언제나 자네 일이 걱정이라네. 그들은 마주보며 씁쓸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6. 초록색 자루 내 재산이 모두 네 자치가 아니냐? 넌 그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어.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돈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 그래도 전 일단 떠나야만 해요. 이 지방을 떠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직업을 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겁니다. 아버지는 열여섯 살에 독립 하셨고 기타도 열 일곱 살 때부터 혼자 살기 시작했어요. 모두가 그래요. 그런데 전 뭡니까? 나이 서른이 됐는데도 내 일을 하느라 땀을 흘리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일을 위해 모든 정열을 다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 난 네 힘이 필요하다. 떠나려면 이미 5년 전에 떠났어야 했다. 이젠 난 너에게 의지하고 있단 말이다. 아들에게 사정하는 일이 마콘 데드에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일란 그 길밖에 없었다. 일 년입니다. 단 일 년만 저에게 여우를 주십시오. 돌아오면 일년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일을 해 갚겠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네가 여기 남아서 일을 보살펴야 해. 결국은 모두 네 재산이 될 테니 잘 보살피고 익혀야 할 게 아니냐? 제가 필요할 때 그 중 일부만이라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피레이트 고모처럼 초록색 자루에다 꽁꽁 싸서 천장에 매달아 놓고 아무도 손도 못 대게 하지 마시고 또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리게만 하지 마시구요. 지금 뭐라고 했지? 마콘 데드는 늙은 개가 고깃덩이를 발견하고는 물고 있던 신발짝을 내던지듯 새로운 흥밋거리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태도를 일변해 눈을 반짝였다. 아버지의 재산 중의 일부분만이라도 좀 이용을... 아니, 그게 아니고 고모의 자루에 대해 뭐라고 했지 않느냐? 야, 그거요? 아버지도 그 자루를 보셨겠죠? 유산으로 물려받은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천장에 매달려 있어 걸핏하면 이마를 부딪치게 되죠. 아버지도 그걸 기억하시죠? 마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동안 눈을 깜박이다가 마침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난 이제껏 피레이트의 집을 한 발자국도 들여다본 일이 없다. 언젠가 한 번 밖에서 들여다본 일은 있다만 그땐 어두워서 그랬는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물건을 본 기억도 없다. 마지막으로 그 자루를 본 게 언제냐? 아홉 달인가 열 달 전에 봤어요. 왜 뭐가 잘못됐나요? 아직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왜 있으면 안 되나요? 그 자루가 초록색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기억할 수 있느냐? 네, 그래요. 분명히 초록색이었어요. 그게 뭔데요! 왜 그러시죠? 그걸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하더라면서? 마콘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으나 우유 배달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뇨. 고모가 그런 게 아니고 헤가가 그러더군요. 언젠가 방안을 걷다가 그 자루에 이마를 부딪혀 혹이 생기자 헤가가 웃다가 할머니가 물려받은 유산이야 라고 했었어요. 이마에 혹이 생겼다고 했지? 네, 쇳덩어리 같던데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시죠?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아세요? 점심 먹었느냐? 이제 겨우 열시 반이에요, 아버지. 메리 라운지에 가서 바베큐 2인분을 사가지고 자선병원 앞 공원에서 만나자. 그곳에서 점심을 먹자꾸나. 아버지... 시키는 대로해라, 마콘. 아서 가. 그들은 자선병원 건너편의 자그마한 공원에서 만났다. 그곳은 비둘기들, 학생들, 술취한 사람들, 개들, 다람쥐들, 아이들, 나무들, 그리고 잠깐 쉬러 나온 사무원들 등 각양각색의 인간들과 동물들로 붐비고 있었다. 두 흑인은 복작거리는 부분에서 좀 떨어진 철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옷차림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서 공원에서 음식을 먹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화창한 9월의 하늘 아래에서는 모든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음식을 먹으면서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해라. 방해하지 말고. 하던 이야기를 잊을지도 모르니까. 오래 전에 내가 농장에서 살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을 거다. 당시의 피레이트와 내 이야기, 그리고 총에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 등을 했었다. 그때 못 다한 이야기가 있었어. 피레이트와 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때 난 너에게 그녀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는 독사 같은 여자라고 했을 것이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해 주겠다. 붉은 색 공 하나가 발밑으로 굴러오자 마콘 데드는 그 공을 아이에게 던져 주고 그 아이가 어머니에게 안전하게 돌아간 것을 보고서야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콘 데드 1세, 즉 우유 배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자식들, 열두 살난 피레이트와 열여섯 살 난 피레이트와 열여섯 살 된 마콘 데드 2세는 갑자기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황하고 슬픔에 싸인 그들은 가장 친했던 친지인 서스 를 찾아갔다. 그녀는 원래 산파로 두 아이를 다 받아 냈으며, 그들의 어머니의 임종과 피레이트의 이름을 지을 때 입회했을 정도로 데드 가와는 지극히 친밀한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덴빌 교외의 커다란 저택에서 신사 농부라고 불리는 점잖은 백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두 고아는 이른 아침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자마자 채소밭에서 서스를 불렀다. 그들을 발견한 서스는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두 팔로 감싸안으며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잃은 후의 아이들의 행방을 몰라 그녀는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마콘 데드는 아버지의 시체를 시냇가에 묻고 난 이후 숲 속을 헤매던 이야기 등으로 그녀를 눈물짓게 하였다. 서스는 아이들이 갈 만한 곳을 찾을 때까지 자신과 함께 머물러 있도록 했다. 집이 커서 두 아이를 숨기기에는 용이한 일이었다. 방이 많아 이 집 식구들이 거의 들어가 보지도 않은 방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창고로 쓰는 삼층의 방 두 개에 숨겨졌다. 서스는 음식과 씻을 물을 나르고 그들의 배설물통을 비워다 줬다. 마콘은 이 집에서 일을 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부엌일이나 밭일이나 무슨 일이든 시켜만 달라고 졸라댄 일이 있었다. 그때 서스는 혀를 차며 나무랐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네 아버지를 죽인 놈들을 너희가 봤다면 그놈들도 너희들을 봤을 게 아니냐?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 너희들이라고 살려 둘 것 같으냐? 정신 바짝 차려라. 우리는 어쨌든 이 고비를 넘겨야 해. 마콘과 피레이트는 그곳에서 꼭 2주일을 머물렀다. 대여섯 살 때부터 농장에 나가 일을 해온 마콘이나 날 때부터 거칠게 자란 피레이트는 답답한 방안에서 온종일을 아무것도 않고 지낸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기껏 한다는 일이 양탄자 깔린 방안을 거니는 것과 백인들이나 먹는 말랑말랑한 빵을 기다리는 일, 그리고 커튼 사이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그들의 즐거움(?)의 전부였다. 피레이트가 울기 시작한 것은 서스가 조반으로 하얀 토스트와 버찌 잼을 가져다 준 날부터였다. 그녀가 자신의 벚나무에 매달린 버찌가 생각났고, 그것으로 하여 농장에 널린 토마토, 율리시즈 그랜트(양)의 젖 등등 그녀가 매일 즐기던 음식을 먹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날밤 피레이트가 농장에 두고 온 그녀의 동물 친구들과 음식 생각에 실컷 울고 난 후 그들은 이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머물러 있는 것은 어지 됐건 서스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 주는 것이었으며, 만약 이 집주인 백인들이 그들을 발견하게 되면 서스를 쫓아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음식을 숨겨들고 삼층으로 올라간 서스는 아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칼 한 자루와 양철로 만든 컵 이외엔 손 하나 대지 않고 가버린 것이었다. 서스의 집을 빠져나온 첫날은 날아갈 듯이 즐거웠다. 그들은 야생딸기와 사과를 배가 터지도록 따먹고 신발을 벗어 던지고 촉촉한 잔디와 햇볕으로 따뜻해진 부드러운 땅 위에 맨발을 비벼댔다. 밤에는 건초더미 위에서 잠을 잤다. 시원하게 터진 밤하늘의 별들을 헤이며 잠이 들 땐 들쥐나 벌레들마저도 반갑기만 했다. 이튿날도 역시 즐거웠으나 흥분은 어제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시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난 그들은 남쪽을 향해 숲을 헤치고 들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버지니아로 가기로 작정했다. 마콘은 그곳에 가면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그들은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비슷한 한 사내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 사내의 무서운 눈초리만 보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달려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그들은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도망쳤다. 그날 하루종일 그들은 여러 번 그 사내와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들은 그가 가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으나 자꾸만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햇빛이 길게 늘어져 이제 곧 어두워지려 하자 숲에서 나온 그들은 어느 언덕 밑에서 그날 밤을 지새울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동물 입구에 서 있는 아버지를 닮은 그 사내를 다시 한 번 발견했다. 이번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따라오라는 듯한 몸짓을 하는 그 사내는 정말 그들의 아버지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 사내의 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 후였다. 그들은 이 동굴의 입구라면 지금까지 밤을 지새운 그 어느 곳보다도 아늑한 잠자리가 될 것이며, 만약 예의 그 사내가 헤치려 한다해도 쉽사리 도망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바위 위에 편한 대로 잠자리를 정해 누웠다. 이제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란 이따금 푸드득거리며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박쥐들뿐이었다. 새벽이 환히 밝아 올 무렵 마콘은 심한 복통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났다. 사흘 동안의 무절제한 음식, 특히 야생 과일 등의 과식으로 인한 배탈이었다. 동생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바위를 넘어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배설물을 내쏟기 시작했다. 볼일이 끝났을 때쯤 되자 동굴 안은 제법 환해져 물체를 분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문득 4,5 미터 앞에서 그 사내가 쭈그리고 새우잠을 자는 것을 발견했다. 마콘은 조심스레 일어서서 바지를 올린 뒤 그를 깨우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하였으나 발밑의 자갈이 구르는 바람에 사내의 잠을 깨우고 말았다. 사내는 고개를 번쩍 들어 마콘을 돌아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웬일인지 마콘에게는 무서웠다. 그 미소야말로 총을 맞은 아버지가 진흙탕 위에서 온몸을 비틀 때 지었던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콘은 한 팔을 뒤로 뻗어 굴 벽을 짚어나가다 돌멩이 하나가 손에 잡히자 그 사내의 미소 띤 얼굴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돌멩이는 그의 이마에 정통으로 들어맞아 순식간에 창백한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사내는 소매로 얼굴의 피를 닦으며 마콘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콘이 돌멩이 하나를 되던졌으나 이번엔 빗나갔다. 이제 사내와 마콘 사이는 2미터도 채 안 될 지경이었따. 순간 째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그들의 뒤켠에서 들렸다. 마콘은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피를 흘리는 사내가 비명소리에 언뜻 뒤를 돌아보는 사이에 잽싸게 품안의 칼을 꺼내 사내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고개를 돌린 사내의 표정은 경악에 차 있었고, 그의 입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라는 듯 움직였으나 이미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콘이 계속 찔러대자 경련을 일으킨 사내는 마침내 땅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사내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든 마콘은 사내가 누워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담요를 갖다 덮어 주기 위해서였다. 죽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게 덮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담요를 들어올린 마콘은 그 아래 자루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무심코 들어 보다가 그 무게에 놀랐다. 쇳덩어리처럼 무거웠던 것이다. 자루의 아가리는 철사로 옭아매어져 있었다. 피레이트!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피레이트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서 죽은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콘은 달려가 자루가 있는 곳으로 동생을 끌어와야 했다. 기를 써서 자루를 묶은 철사를 풀어낸 다음(이빨로 물어뜯어야 했다), 자루를 열어 속을 들여다본 마콘은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을 뿐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금이야! 한참 만에야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일단 말을 뱉아 내자 갑자기 눈앞에 환해지는 것만 같은 환각에 빠졌다. 행복하고 화려한 생활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마콘은 이미 황금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 알 만한 나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자, 피레이트. 이걸 가지고 이 자리를 떠나야 해. 그걸 가지고 가면 안돼. 뭐라고? 가져가면 안된다고? 너 정신나갔니? 그렇게 되면 우린 도둑질을 하는 거야. 우린 사람을 죽였으니까 우릴 잡으려 할텐데 금까지 가지고 달아나 봐. 사람들은 우리가 이 금 때문에 저 사람을 죽인 걸로 알게 될 거란 말야. 놓고 가야 돼, 오빠. 저것만 가지고 가지 않으면 우린 잡히지 않아. 저것만 있으면 우린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농장도 살 수 있고 또... 안돼! 놓고 가야 돼! 우린 도둑이 아냐. 잡혀 죽는단 말야. 오빤 도둑놈이야! 마콘은 자신도 모르게 동생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잠시 얼굴을 감싸고 있던 피레이트는 갑자기 사슴처럼 재빠르게 오빠에게 덤볐다. 남매는 죽은 사내의 부릅뜬 눈앞에서 싸워야 했다. 피레이트의 힘은 놀랄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만약 재빠르게 오빠에게서 칼을 빼앗아 그의 심장에 갖다 대지만 않았더라면 피레이트는 마콘의 주먹에 맞아 땅바닥에 쓰러졌을 것이었다. 마콘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칼에는 죽은 사내의 피가 아직 말라붙지 않은 채 묻어 있었다. 피레이트가 다가들자 그는 뒷걸음질쳐 굴 밖으로 밀려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콘은 하루종일 굴 밖에서 동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밤이 되고 어둠이 깔려도 마콘은 나무 밑둥치에 앉아 헝클어진 동생의 머리가 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예전 같으면 무서웠을 온갖 밤의 소리도 그이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동이 훤하게 뜰 무렵, 그는 조심스럽게 기어 굴 입구로 다가갔다. 굴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피레이트는 잠이 든 것 같았다. 그가 막 굴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사냥개들과 사냥꾼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그는 숲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개소리와 사냥꾼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던 것이다. 그날 오후와 그날 밤은 동굴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고 숲 속을 헤매는 것으로 허비했다. 아직도 사냥꾼들이 근처에 있을 것만 같아 그들을 피해 다니며 길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가 다시 동굴을 찾아낸 것은 이틀 밤과 사흘 낮이 지난 후였다. 굴 속에는 죽은 사내의 시체는 그대로 있었으나 금이 든 자루와 피레이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공원에 나왔던 사무원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공원에는 술 취한 사내들과 아이들과 부인들, 그리고 개들과 비둘기 떼만이 남아 있었다. 우유 배달은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땀방울과 추억으로 인한 감동이 서린 아버지의 얼굴만이 바라고 있었다. 고모가 가져간 거야. 그 금은 피레이트가 가져간 게 분명해. 어떻게 확신하시죠? 고모가 그걸 가져가는 걸 보신 것도 아니잖아요? 그 자루는 초록색이었어. 마콘 데드는 땀이 밴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피레이트가 이곳에 온 게 1930년이었다. 그때 난 그 동안 그녀가 그 금을 다 써 버린 것으로 알았었다. 거지꼴로 이곳에 와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네 말에 의하면 초록색 자루를 아직도 그녀가 가지고 있고 그 속에는 네 이마에 혹을 만들 정도로 단단한 물건이 들어 있다니 그것은 금이 분명해. 그 금은 아직도 피레이트에게 있는 거다. 틀림없어! 그는 갑자기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표정을 굳힌다. 마콘, 그걸 뺏아 와. 그럼 반절은 네 몫이다. 그걸 가지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네 몫을 줄 테니까 뺏아만 와라. 그것만 있으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다. 뺏아만 와. 기타는 매일 밤 일요일용 드레스의 스크랩을 보는 게 습관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흰색과 분홍색, 푸른색, 자주색과 흰색, 벨벳, 면, 공단 등 각양각색의 드레스 스크랩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로버트 스미스가 병원 옥상에서 떨어지던 날 눈 덮인 언덕 위에 흩어진 벨벳 꽃잎들과 그것들을 줍던 레나와 코린시안스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네 명의 흑인 여자아이들이 교회에서 나오는 길에 살해당하고 나자 일요일 담당인 기타는 비슷한 네 명의 백인 여자아이들을 죽여야 할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는 이번 임무는 철사나 칼로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폭탄이나 총 또는 수류탄이 필요했고, 이것을 구하자면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그들 그룹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갈수록 한 번에 많은 인명을 해치워야 했다. 백인들의 검둥이 사냥이 극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 즉 상당한 무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럴 때 우유 배달이 찾아와 금덩어리를 훔칠 것을 제의하자 기타의 귀가 번쩍 뜨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금덩어리?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금덩어리야. 금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쓸데없는 소리 말아. 피레이트 고모에게 금덩이가 있어. 그건 불법이야. 그렇기 때문에 가지고만 있을 뿐 사용하지도 못하고 훔친 것이기 때문에 신고도 못 하고 있는 걸세. 만약 그걸 훔쳐 낸다고 하더라도 자넨 어떻게 처분할 건가?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느냐 말이네. 그건 아버지한테 맡기면 돼. 아버진 은행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내니까 손쉽게 처분할 수 있어. 배분은 어떻게 할 건가? 셋으로 나눌 생각이네. 자네 부친도 그렇게 알고 계신가? 아직도 둘로 나눌 것으로 알고 계실 거야. 그 이야긴 언제 할 건가? 훔쳐 낸 다음에. 찬성하실까? 찬성하지 않을 수 없지. 언제 할 건가? 어느 때건. 우리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야. 기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좋아. 해 보자, 친구. 시원한 바람이 돼 주는 거야.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바람이 되어야 해. 기타의 표정은 어느덧 열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사이에 우유 배달은 자신의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거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린 금덩이만 끄집어 내면 그만이야. 여자들이 대들면 때려눕히면 그만이고. 하지만 그럴 때 내 감정은 어떤 것일까? 이렇게 말하는 우유 배달은 자신의 어조 속에 깃든 자조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힘들었다. 패배감이겠지. 일반적인 의식일 걸세. 곡괭이로 뒤통수를 맞지 않을 생각이나 하게. 가슴팍을 뚫겠지. 감상적인 이야기는 집어치우세. 장정들이 20킬로그램 정도 되는 물건 하나를 들고 나오는 데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곳에 있는 여자들 셋을 모두 합쳐야 150킬로그램도 되지 않아. 방아쇠를 당기는데 몸무게가 무슨 상관이 있겠나? 무슨 방아쇠? 그 집의 누가 초이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헤가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여자는 근 일 년 동안 자넬 죽이려 해 오고 있고 닥치는 대로 흉기를 들고 왔지만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네. 그랬었나? 총으로 죽이긴 싫었던 모양이지? 기타가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어린애 같은 미소였다. 우유 배달은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의 미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친구의 이런 점 때문에 이번 일에 끌어들인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그 정도의 일을 혼자 못할 리가 없었다. 우울하고 무거운 표정 대신 활짝 핀 미소를 짓는 친구의 얼굴을 보는 우유 배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들은 일요일 오전에 6번가의 폐차 처리장 근처에서 만났다. 이곳은 언제나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남이 들어서 거북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당한 장소였다. 문이나 창문을 잠그지 않을까?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 우유 배달이 우겼다. 세 사람 다 미친 여자들이야. 그래도 여자들이 아닌가? 미친 여자들이라니까. 여잔 여자야. 잊었군, 기타. 고모는 열두 살 때 시체 옆에서 혼자 밤을 새우고 금을 훔쳐 달아난 여자야. 그런 여자가 이제 칠십이 다 됐으니 어떻겠어? 그 여자들이 집에 있을 땐 안 될 것 같아. 밤에 잘 것 아닌가? 조그만 소리에도 깨어날 사람들이야. 깨어나면 때려눕혀야지. 사람을 다치긴 싫어. 그들이 없을 때 해야 해. 그럼 그 여자들이 집에서 나가도록 해야 할 게 아닌가? 어떻게 해야 그들을 몰아낼 수 있지? 우유 배달이 고개를 내젓는다. 지진이 있기 전에는 힘들어. 그럼 지진 같은 걸 만들면 될 게 아닌가? 어떻게? 집에 불을 지를 수도 있고, 곰을 몰아넣어도 좋겠지. 농담하지 말게. 농담이라니 무슨 소린가? 난 지금 머리를 짜내고 있는데. 그 여자들은 어딜 가는 일도 없나? 모두 같이 말인가? 그래, 모두 같이. 우유 배달이 어깨를 움찔한다. 장례식에나 같이 갈까? 아, 서커스가 들어왔을 때도 같이 가더군. 그렇다면 동네의 누가 죽거나 서커스단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지금으로선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네. 아직은 기회가 없어. 기회가 없으면 만들어야 할 게 아닌가? 이치에 맞게 행동해야 해. 이치에 맞게 행동하라고? 정당한 방법으로는 금덩어리를 훔쳐낼 수 없어. 부당한 짓을 할 때는 부당한 행동을 해야 해. 자네가 그걸 모르다니 말이 되나? 내 말 좀 들어 봐. 이제 더는 안 듣겠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건 바로 자네야. 잘 살고 싶겠지? 그래, 얼마든지 잘 살아 봐라, 영원히. 두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우유 배달은 더 이상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외에는 어떤 일도 판단되지가 않았다. 다만 입속으로 흘러들어온 땀이 짜다는 것과 기타의 목소리가 사냥꾼의 호른 소리처럼 웅웅거릴 뿐이었다. 내일 해치우자. 마침내 우유 배달이 내뱉고 말았다. 내일 밤에 하는 거야. 몇시에? 새벽 1시 반. 내가 데리러 가지. 좋아, 잘 생각했다. 먼 곳에서 공작 한 마리가 꼬리털을 펼치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 호수에서 불어와 바다로 빠지는 바람에는 생강 내음 같은 달착지근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다링 가 근처의 소나무 숲에 몸을 숨기듯 서 있는 두 남자는 그것이 생강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대기에 섞인 이 냄새야말로 자유와 정의, 그리고 복수의 냄새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곳에 오랫동안 있었던 듯한 한 남자는 무료하게 구두 끝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마침내 다른 남자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는 것을 신호로 그들은 술꾼들이 자주 찾는 갈색의 페인트가 칠해진 낡은 집의 열려진 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런 불편 없이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소나무 숲 속에서 어둠에 눈을 익혔는데도 집안의 칠흑 같은 어둠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치의 눈앞도 보이지 않았고 밖에 비하면 집안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순간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초록색 자루를 찾았다. 예상한 대로 예상했던 곳에 묵직히 드리워져 있었다. 기타가 재빨리 무릎을 끓자 우유 배달이 목말을 탔다. 기타가 일어서자 근 자루의 아가리가 있는 곳까지 손을 뻗쳤다. 자루는 철사로 묶여 있었다. 밧줄로 생각하고 칼만 준비해 온 그는 낭패스런 생각이 들었으나 칼로라도 시도를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칼이 철사를 긁어대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이 정도의 소리라면 잠든 사람도 충분히 깰 만한 것이었다. 드디어 몇 가닥의 철사가 끊어지고 한두 가닥이 남자, 무거운 물건을 받아 내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루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던 것이다. 우유 배달은 쉽사리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두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루를 잽싸게 들고 창문을 넘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그들은 안전하게 큰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넘어온 창문과 같은 쪽에 있는 다른 창문도 열려 있었다. 그 속에선 헤가가 머리를 땋고 있었고, 레바는 냄비 속의 음식을 젓고 있었다. 그 창문에 한 여인의 얼굴이 나타나 자루를 들고 서둘러 사라지는 두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들은 알 리가 없었다. 여인은 알 수 없다는 듯 의아스런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창틀에서 나무쪽 하나를 뜯어내 입안에 넣고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7. 아버지의 아들 우유 배달이 눈을 뜬 것은 점심때였다. 누군가 그의 방에 들어와 침대 발치 가까운 곳에 선풍기를 갖다 놓고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이 완전히 깨기 전부터 그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채웠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그는 땀을 쏟으며 그대로 눕는다. 너무 뜨겁고 피곤해 비누칠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더운 물을 얼굴에 끼얹어 이틀 동안 자란 수염을 적셨다. 얼굴을 베지 않고는 면도를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욕조는 몸을 펴기에는 불편했다. 그의 몸은 너무 커 버렸다. 그는 다리를 내려다 본다. 이제는 왼쪽 다리도 오른쪽 다리와 거의 똑같은 길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눈길은 천천히 윗몸으로 올라간다. 경찰의 손이 닿은 자국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골이 든 자루를 훔쳤단 말인가? 경찰서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대할 때의 그 수치감이 또다시 되살아온다. 아버지는 알 만하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부끄럽게 만든 것은 피레이트 고모와의 대화였다. 만약 그 순간 그녀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녀를 때려눕히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던가?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 이미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고, 태어난 후 노래를 불러 주었으며, 제대로 된 달걀 요리를 처음으로 먹게 해 주었고, 첫추위가 오는 날이면 따끈한 땅콩 수프를 끓여 주던 칠십이 돼 가는 여인을 때려눕히겠다고 생각했던 그가 아닌가. 경찰서에 뛰어들어온 그녀는 악을 쓰며 경찰들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끌어내지 않았던가. 우유 배달은 물 속의 다리를 문지르며 피레이트 고모를 노려보던 기타의 눈초리를 회상한다. 그것은 매서운 눈초리였다. 그는 무슨 이유로, 또 무슨 권리로 그런 눈초리로 노려봤을까? 갑자기 우유 배달은 기타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벌써 죽인 경험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가 속해 있는 데이스 (요일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붙였을 것이다) 그룹은 살인 집단이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고모를 그런 눈초리로 노려볼 이유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욕조에서 나온 그는 서둘러 온몸에 비누칠을 한다. 9월의 따가운 햇살은 거리에 나선 그를 목욕 후의 나른함에서 단숨에 깨어나게 했다. 데드 가의 대형차는 아버지가 타고 나간 후여서 기타의 집까지 걸어서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기타의 집에 이르는 모퉁이를 돌아서던 그는 뒷창의 금이 눈에 익은 올스모빌 차가 기타의 집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하고 발걸음을 늦춘다. 차 안엔 몇 사람이 타고 있었고, 차 밖에는 기타와 레일로드 토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레일로드 토미가 무슨 말인가 건네자 고개를 끄덕인 기타가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악수를 하는 것은 우유 배달로서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토미가 차에 오르자 기타는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기타가 보기에는 1953년이나 1954년형 같은 올스모빌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마당을 돌아 우유 배달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차가 그를 스쳐갈 때 우유 배달은 차 속의 얼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들 앞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운전은 포터가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엠파이어 스테이트와 레일로드 토미가 앉아 있었고, 뒷좌석에는 호스피탈 토미와 테로라는 이름의 사나이, 그리고 낯을 모르는 사람 하나가 타고 있었다. 저 자들이 바로 데이스 멤버들일 거야. 우유 배달은 심장의 고동이 거칠어졌다. 그 중에는 포터도 끼여 있지 않은가. 모두 여섯 명이다. 기타까지 합치면 요일 수와 마찬가지로 일곱인 것이다. 게다가 차, 올스모빌이 문제였다. 우유 배달은 누이 코린시안스가 집 근처에 와 멎은 그 차에서 내리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유력한 인물의 개인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는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한 그의 심정은 기쁘면서도 조금은 서글프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상대가 데이스 일당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그 많은 사람중에 하필이며... 미련한 것, 바보 같은 것, 빌어먹을! 그는 발길을 돌려 버린다. 지금의 심정으로는 기타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유 배달은 자신이 취했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평소보다 훨씬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알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데도 그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옆에선 사사로운 행동마저도 극히 조심하는 것 같았다. 결국은 부엌에다 오줌을 갈겨 파티에서 쫓겨났지만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나 그가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누워 있을 때 주머니를 털어 간 놈들까지도 사랑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틀 낮 이틀 밤을 이렇게 보냈다. 눈을 뜨면 술에 취했고, 취하면 길바닥이건 어디건 돌덩이처럼 쓰러져 굴렀다. 이러한 상태는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일이었으나 철이 든 다음 한자리에서 단 네마디도 주고받아 본 적이 없는 큰누이 레나와의 대화로 하여 끝을 내게 되었다. 어느날 이른 아침, 술에서 겨우 깬 그가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계단 꼭대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옷 바랑으로 안경을 쓰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어젯밤 그의 호주머니를 털어 간 놈의 모습처럼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보여 줄 게 있다. 내 방에 잠깐 들어올 수 있겠지? 그녀는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하면 안 될까? 그의 말씨도 부드러웠다. 자신이 지독하게 피곤하면서도 이처럼 점잖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유 배달은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안돼.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지금 당장 봐야 해. 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난 지금 죽을 지경이야. 어떻게 됐느냐 하면... 그는 적당한 구실을 찾으려 했다. 1,2 분밖에 안 걸려. 중요한 일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누나의 침실로 들어갔다. 레나는 곧바로 창가로 다가가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저걸 좀 봐라. 우유 배달은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마당의 잔디밖에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우유 배달은 자신이 못 보고 지나친 것으로 생각했다. 뭐지? 저기 있는 저 작은 단풍나무. 그녀는 1미터가 조금 넘을까말까 하는 단풍나무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9월이 다 가니 잎에 단풍이 들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해. 그대로 말라서 떨어지고 있어. 우유 배달은 돌아서서 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중요하다는 게 저거야? 그래, 중요한 일이야. 대단히 중요한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시선은 단풍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세히 이야기를 해 줘. 난 조금 있으면 일하러 가야 해. 알고 있어. 하지만 단 몇 분 정도는 틈을 내줄 수 있겠지? 저따위 죽은 나무나 보고 있으라면 더는 못 있겠는데. 아직 죽진 않았어. 그렇지만 곧 죽겠지. 올해엔 색깔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한잔 했어? 날 미친년으로 만들진 마라. 그녀의 어조는 날카로웠다. 한잔 한 것 같은데? 잘못 봤나? 언제는 네가 나 같은 것한테 관심을 둬 본 적이 있었니? 그래, 하긴. 그렇지만 지금은 여기 서서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잖아. 단풍나무가 죽어 가는데 뭐가 어쨌단 거야? 기억을 못 하는구나. 뭘 기억한단 말야? 저기에다 오줌을 눴잖아. 뭘 어쨌다고? 오줌을 눴다니까. 그런 이야기라면 나중에 한가할 때 하면... 저 나무뿐만이 아냐. 넌 나한테도 오줌을 갈겼어. 이러지 마. 이제껏 해선 안 될 짓도 많이 해 왔지만 하나님께 맹세하겠는데, 누나한테 오줌을 갈긴 일은 없어. 여름이었어. 그해엔 아버지가 페카드 차를 가지고 계셨지.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타고 드라이브 중이었는데 네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어. 이제 기억하겠니? 우유 배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억이 없는데. 내가 데리고 갔었지. 교외라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날더러 아무데나 데려 가서 뉘라더구나. 어머니가 데려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못 가게 했어. 코린시안스도 고개를 돌려 버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가 널 데리고 가야 했던 거야. 나 그때 사춘기였어. 낮은 등성이를 넘어갔지. 그곳은 정말 아름답더구나. 난 네 바지를 벗겨 주고 돌아서 오랑캐꽃과 나뭇가지 몇 가지를 꺾었지. 그것들을 너한테 보여 주려고 할 때 네가 나와 꽃에다가 오줌을 갈겼던 거야. 난 그 꽃들과 나뭇가지들을 집에 가져다 땅을 파고 심었어. 그런데 그 꽃들은 남김없이 죽어 버리고 나뭇가지만 살아남았는데 그게 바로 저 단풍나무야. 그것도 이제 죽어 가고 있단 말이다. 우유 배달은 손가락으로 눈 가장자리를 비비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정도로 졸렸다. 보고 있던 레나가 잠옷 주머니에 찌르고 있던 왼손을 뽑아 그의 입가를 문질러 댔다. 놀란 우유 배달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한테 오줌 벼락을 맞고 나 후 몇 번인가 널 죽이려 했었지.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음모는 아냐. 목욕탕 바닥에 비누칠을 해 놓은 것 정도지. 하지만 넌 미끄러져 목을 부러뜨리거나 하는 일은 없더구나. 모두 허사였지. 우유 배달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웃고 난 그는 다시 표정을 굳히고 누이를 노려본다. 바보 같은 짓이야. 그땐 그렇다 지더라도 그후에 내가 우리 가족들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고 생각해? 내가 가족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거나 명령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어? 난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해 본 일도, 방해해 본 적도 없어. 그건 누나도 인정해야 해. 아버지에게 코린시안스의 남자 관계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 그건 왜 그랬지? 어쩔 수 없었어. 코린시안스가 남자를 사귀는 일은 나도 바라던 일이야. 하지만 지금의 남자는 안돼. 그 자는 내가 잘 알고 있는데 절대로 안돼! 왜 하필 그런...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그는 입을 다물고 만다. 데이스 라는 집단과 그가 의심을 하는 인물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 그래? 레나의 어조는 비꼬는 것이었다. 그럼 그 애한테 맞는 적당한 남자라도 생각해 두었었니? 그런 건 아냐. 그런 건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 남자는 남쪽 거리에 사는 빈민이라 그 애한테 맞지 않는 거냐? 너와는 사귈 수 있어도 코린시안스에겐 안 된단 말이지? 누나... 한 사람에게 다른 한 사람이 맞을지 안 맞을지를 네가 무슨 근거로 판단할 수 있지? 네가 언제부터 코린시안스를 그렇게 생각했지? 넌 이제껏 나나 어머니, 코린시안스에 대해 조소를 해 왔어. 우리의 음식 솜씨를 혹평했고 살림을 잘못한다고 불평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해 코린시안스의 장래를 걱정해 주고 있다니 우습지 않니? 도대체 네가 무슨 권리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난 네가 태어나기 13년 전부터 이 세상의 공기를 마시고 살았고 코린시안스도 12년이나 너보다 더 살았어. 넌 우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기껏 안다고 해야 우리가 벨벳 장미를 만들었다는 것뿐일 게다. 그런데도 넌 우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어. 코흘리개 적부터 안아 기르다시피 한 우리의 생활을 네 마음대로 흔들려 하고 있단 말야. 우리의 소녀 시절은 너에게 빼앗겨 버린 셈이다. 네가 잘 때엔 우리는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고, 네가 배가 고플 것 같으면 다른 일 다 집어치우고 음식을 만들어야 했으며, 네가 심심해 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너와 놀아 주어야 했어. 이 집안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은 너만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어. 지금도 우린 네 속옷을 빨아야 하고 잠자리를 봐 줘야 하고 목욕탕을 치워야 하고 네가 더럽혀 놓은 양탄자를 닦아야 해. 그런데도 넌 우리에게 피로하냐고, 아니면 기분이 어떠냐고 단 한 번이라도 물어 봐 준 적이 있어? 커피 한 잔 권해 본 적이 있어? 물건 하나 들어 분 일도 없지? 우리의 문제에 단 한 번이라도 귀기울여 본적도 없잖아? 그런 네가 감히 어떻게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려 드는 거지? 진정해, 진정하라고.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 안돼. 더 들어야 해. 가랑이에 뭘 하나 달았다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 값을 해야 해. 아버지는 코린시안스에게 직장도 그만두고 집밖에 한 걸음도 못 나가게 했어. 그 남자를 못 만나게 하기 위해서지. 그게 모두 너 때문이야. 넌 아버지와 꼭 같은 인간이야. 한치도 틀리지 않아. 내가 왜 대학에 가지 않은 줄 아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집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야. 네가 아버지를 한 차례 두들겼다고 해서 네가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어림없는 이야기야. 그 순간부터 넌 아버지가 하던 짓을 물려받은 거야. 말을 멈춘 레나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는 목을 가다듬는다. 안경 속에서 두 배나 커 보이는 그녀의 눈은 창백하고 싸늘했다. 나도 이제는 장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 너도 우리에게 다시는 오줌을 갈기는 짓 따위는 해선 안돼. 그녀의 어조는 나지막했으나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우유 배달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자, 이제 가거라. 레나가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몸을 돌려 방을 가로질러 가며 우유 배달은 이것이야말로 좋은 충고라고 생각했다. 물론 받아들여야지. 우유 배달은 이렇게 작정하며 레나의 침실문을 나섰다. 8. 동굴 속에서 몸을 굽혀 뻗어나온 호도나무 가지 밑을 지나온 우유 배달은 허물어진 커다란 집을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이 집에는 한때 한 늙은 여인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1마일 가량 떨어진 자갈길에서 두어 대의 차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중 한 대는 열세 살난 조카가 운전하는 쿠퍼 목사의 차가 분명했다. 정오경에 데리러 와 달라고 보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도시 생활에 지친 한 청년이 숲 속에서 조용히 쉬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비치리라. 하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한가한 여행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어느 동굴을 찾는다면 사람들은 도와 주기 이전에 그의 목적지에 대해 의심을 가질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눕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피츠버그까지의 비행기 여행, 그리고 그곳에서 여기까지의 기나긴 버스 여행은 그를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피로가 아니라, 그의 옆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이었다. 이번만은 기타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내고 싶었다.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는 염원이 이 여행길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레나의 분노, 코리시안스의 빗질 안 한 헝클어진 머리와 굳게 다문 입술, 말없는 어머니의 차디찬 시선, 게다가 레나의 공허한 눈동자와 아버지의 끝없는 탐욕 등등 그를 질식시킬 것만 같은 이 모든 것들에게서 단 한순간이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결심을 아버지보다도 먼저 기타에게 털어놨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그 물건이 그 동굴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시더군. 그럴지도 모르지. 기타가 차를 훌쩍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어찌됐건 한 번 조사해 볼 가치는 있는 일이야. 마지막 희망이니까. 글쎄, 내키지 않는데. 그럴 꺼야. 그래서 혼자 가 보기로 했어. 혼자? 우유 배달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혼자라도 가야지. 어차피 난 이곳을 떠나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기타가 찻잔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깍지를 낀다. 둘이 하는 게 쉽지 않을까? 사고라도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둘이 하면 물론 쉽겠지. 하지만 이런 점도 생각해야 해. 만약 자네와 나 둘이서 숲 속을 헤매 보게. 아무래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겠나? 혼자 다닐 때 그럴 염려는 별로 없거든. 다행히 찾게 되면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분배를 할 테니까 그 걱정은 하지 말게. 어차피 난 돌아와야 할 몸이 아닌가? 언제 떠날 텐가? 내일 아침. 자네 혼자 가는 걸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던가? 아직 모르고 계셔. 아직까지는 이 일을 알고 있는 건 자네뿐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우유 배달이 창가로 다가가 창 밖을 바라보다가 내뱉는다. 똥 같은 일이야. 기타가 그를 조심스레 살핀다.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무지개를 찾으러 가는 사람답지않게. 우유 배달이 돌아서서 창틀에 걸터앉는다. 무지개처럼 황당한 게 아니라면 좋겠어. 그 누구도 그 금덩이에 손을 대지 않았어야 해. 난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일세.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물건이지. 나처럼 필요한 놈도 없을 거야. 기타가 미소를 짓는다. 몹시 급해진 모양이군. 그래, 모든 일이 나에겐 갈수록 나빠져. 아니, 예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르지. 모르겠어. 난 내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야. 이제 더 아버지 사무실의 사환 노릇은 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내가 이곳에 있는 한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 내 돈이 없으니 방법이 없는 거지. 집에서 나오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신세지기는 싶어. 그렇지만 이대로는 견딜 수 없어. 내 가족이 날 미치게 만드는 거야. 아버지는 나를 자기처럼 만들려 하고 어머니를 증오해. 어머니는 내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길 바라며 아버지를 미워해. 코린시안스는 나와는 말도 않고 레나는 대놓고 나보고 나가라는 거야. 게다가 헤가는 날 자신의 침대에다 묶어 놓지 못하면 죽이려 하고 있어.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어. 내 말 알아듣겠지?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내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나 봐.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기타가 다리를 길게 뻗는다. 그 사람들은 자네 목숨을 원하고 있는 걸세. 내 목숨을? 그 외엔 또 뭐가 있겠나? 아냐. 헤가는 그걸 원할지 모르지만 우리 가족은...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잘못 알아들었군. 내가 말한 건 그들이 자네의 죽은 목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을 원한다는 뜻일세. 날 혼돈 시킬 셈인가? 이것 봐. 그 사람들은 자네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있어. 하지만 만약 자네가 그들을 위해 모든 걸 바친다고 하세. 그럼 그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믿으려 들지 않을 걸세. 그렇다고 자네가 그들을 사랑해 주지 않으면 자네 자신만의 인생에 모든 걸 걸려 하는 자네의 의도를 방해할 걸세. 죽는 것마저도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이지. 결국 제대로 죽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내는 제대로 살지도 못한다는 이론이 성립되는 거야. 도대체 제대로 죽는다는 게 뭔가?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자넨 할 수 있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끝까지 시도해 봐야 해. 죽을 만한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거야. 그럼 자넨 무엇을 위해 죽을 건가?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의 이유를 물으면 언제나 사랑 어쩌고 하는데 정말 그것 때문에 죽을 작정인가? 검둥이에 대한 사랑, 바로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지. 사랑을 빼놓으면 또 뭐가 있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비판할 수 있겠나? 이렇게 말한다고 욕하진 말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피부 색깔로 인간들을 갈라서 생각하는 건가? 흑인 여자 하나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치자, 그게 백인 여자가 똑같은 일을 당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왜 하필 흑인 여자가 당했을 때만 자네들은 흥분하는 거나? 기타가 고개를 숙이고 옆눈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내뱉듯 대답한다. 검둥이들은 내 동포이기 때문이지. 물론 그렇겠지. 우유 배달은 조소적인 억양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검둥이들만 제외하고는 그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단 말이지? 그래, 맞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가, 물론 자네가 알다시피 나와 같은 검둥이인 아버지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려 했을까? 아마 자네를 계집애라고 생각했겠지. 아니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자네 아버지가 특이한 존재라는 건 자네도 부인하지 못할 걸세.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고 또 우리는 그런 점에 대해 할 말도 없어. 그 사람은 행동이나 사고가 흰둥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지. 어찌됐건 간에 자네 아버지 이야기는 잘 나왔네. 대답할 수 있으면 해 주게. 그 양반은 어떻게 해서 아버지가 쓰레기 같은 흰둥이놈들의 총에 맞아 돌아가시는 걸 보고 난 후에 흰둥이놈들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그놈들을 그토록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너의 고모 말인데, 그녀도 조금도 나을 게 없어. 뭣 때문에 흰둥이놈의 금을 그 자리에 다 놓고 갔으며, 왜 또 돌아가서 그놈의 뼈를 추려 싸들고 다니나? 우리가 훔쳤던 게 바로 그놈의 해골이라면서? 그녀는 죄책감에서 그랬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자발적인 노예 근성이 아니고 뭔가? 자넨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은 흰둥이놈들이 아니고 그놈들이 가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피레이트 고모는 좀 이상한 데가 있긴 하지만 우리들을 경찰에서 풀려나게 한 게 누군가? 바로 고모가 아닌가? 만약 그때 고모가 기를 써 우릴 풀어 주지 않았다면 자네나 나는 영창 속에서 엉덩이가 얼었을 걸세. 얼어붙은 건 내 엉덩이지 자네가 아냐. 그 여자는 자네를 끌어 낸 거지 날 끌어낸 게 아니라니까. 그렇게만 생각지 말게. 어찌됐건 우리가 자기 물건을 훔친 걸 알면서도 경찰놈들과 멱살잡이를 해 가면서 끌어내 주지 않았나? 그런 사람을 욕할 순 없어. 그래. 그럼 그 이야기는 접어 두기로 하세. 자네 아버지 추측이 맞기나 했으면 좋겠네. 그리고 자네 마음이 변하지 않길 바랄 뿐이고. 왜 그런 소릴 하는 거지?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릴세.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해. 만약 자네가 괴로운 정도라면 내가 어떻게 좀 도와 줄 수... 내가 아냐. 우리야! 우리에겐 할 일이 있어. 그런데 얼마 전에... 기타는 말을 끊고 의미 있는 시선으로 친구를 바라보다가 말을 잇는다. 바로 얼마전에 동료 하나가 길바닥으로 쫓겨났어. 누가 그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는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 집세가 두 달이나 밀렸다는 거야. 밀린 돈을 내기 전에는 그 게딱지만한 방이나마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어. 우린 당장 그 동료가 살 곳을 만들어 줘야 해. 그건 내 실수였어. 어떻게 됐냐 하면... 아냐, 말하지 말게. 자넨 집주인도 아니고 글 쫓아낸 것도 아냐. 자넨 그에게 총을 겨눴을 진 몰라도 방아쇠를 당기진 않았어. 난 지금 자넬 탓하고 있는 아냐. 그건 또 왜? 자넨 내 아버지를 욕하고 고모를 욕하고 누나들까지도 욕할 거야. 그러면서도 왜 나는 믿는 거지? 왜 자넬 믿어야 하는 건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게 되길 바라네. 이로써 그들의 우울한 대화는 그럴듯하게 끝을 맺었다. 화가 날 일도 취소할 말도 없었다. 우유 배달이 그 자리를 떠나려 할 때 기타는 언제나처럼 손바닥을 펴 내밀었고, 우유 배달은 그것을 마주쳤다. 아마 둘 다 피곤해서 그랬겠지만 이때의 손바닥 맞춤은 다른 때보다는 조금 약했다는 느낌을 똑같이 받아야 했다. 피츠버그 공항에 도착한 우유 배달은 그곳에서부터 덴빌까지는 2백 4십 마일이나 되는 거리며 교통편은 그레이하운드 버스뿐이라는 걸 알고는 그대로 돌아서고 싶기도 했으나, 택시를 타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도 하릴없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에 오를 무렵의 그는 이미 지쳐 있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두 시간 동안 잡지를 내리 읽거나 정류장 주위를 어정거렸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출발한 지 15분이 채 못돼 잠에 떨어진 그가 눈을 뜬것은 덴빌로부터 한 시간쯤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버지는 이 고장의 풍경을 아름다운 그림처럼 회상하고 있었으나 차창밖에 흘러가는 자연의 풍경은 도시인의 메마른 감정을 지닌 그에게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지루하게 느껴졌다. 산도 다 똑같고 나무도 다 그게 그것 같기만 했다. 그때부터 그는 도로변에 설치된 각종 표지판들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가방에는 속옷 몇 벌과 셔츠 두 장, 그리고 커티 사크 두 병뿐이어서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 커다란 가방이 정작 필요한 것은 돌아올 때라고 생각했다. 돌아올 때면 이 가방 그득히 들어 있어야 할 물건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제 20여 분 후엔 도착할 시각이 되어 있었다. 그는 머리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다시 눈을 감았다. 덴빌의 정류장은 11번 국도변에 위치한 황량한 가건물이었다. 주차장 직원은 단 한 사람뿐으로 차표를 팔 뿐만 아니라 햄버거, 치즈, 크래커, 담배, 캔디 등 간식용 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 외에는 대합실도 화물 보관소도 택시도, 그리고 화장실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난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기 서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어벙벙해 보이는 주차장 직원에게 58년 전 우리 아버지가 살던 집 근처의 동굴이 어디쯤 되느냐고 물어 봐야 할 것인가? 그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한 여인의 이름을 안다는 것뿐이었다. 성도 모르는 이름 하나 가지고 58년 전의 일을 더듬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주차장 직원에게 다가간 그는 가방을 맡겨 둘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가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수고료는 내겠소. 우유 배달이 재빨리 말했다. 그제서야 직원의 표정이 풀어졌다. 놔두고 가시오. 언제 찾아갈 거요? 오늘 저녁에 찾아가겠소. 좋아요. 염려 말고 맡겨요. 가방을 맡긴 우유 배달은 홀가분한 걸음걸이로 주차장을 나서 덴빌의 거리로 들어섰다. 이곳 펜실베이니아의 덴빌은 미시간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방 소읍과 별다른 점이 없는 곳이었다. 길가의 상점들은 다섯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문을 닫고 있었고, 거리에는 대여섯 사람이 떠들며 지날 뿐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이 많은 흑인이었다. 우유 배달은 글 지목하고 한동안 따라가다가 불러 세웠다. 실례합니다. 뭘 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그는 미소를 지어 가며 마을 걸었다. 노인은 돌아서긴 했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우유 배달은 갑자기 자기를 공격해 올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물어 보시오. 그는 노인답게 점잖은 말씨를 쓰고 있었다. 서스, 그래요, 서스라는 이름을 가진 부인을 찾고 있습니다. 실은 그분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았던 집만 찾으면 됩니다. 혹시 그분이 살았던 집을 모르시겠습니까? 전 외지에서 온 사람입니다. 지금 막 버스에서 내렸어요. 보험 일로 조사해 볼 게 있어서 그분이 살고 있던 집을 찾는 겁니다. 노인은 우유 배달이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차분히 듣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 아마 쿠퍼 목사라면 알 것 같구려. 그분은 어디 가면 뵐 수 있을까요? 우유 배달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스토운 가에 산다오. 이 길로 쭉 가면 우체국이 나오는데 그 옆길이 윈저 가고, 그 다음 길이 스토운 가요. 그곳에 교회가 있나요? 목사관은 대개 교회와 붙어 있다는 걸 생각해서였다. 아니, 그렇지 않소. 여기 교회에는 목사관이 없소. 그분은 스토운 가에 개인 집을 가지고 있소. 노란 페인트를 칠한 집일 거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잘 가시오. 그리고 노인은 멀어져 갔다. 돌아서서 가방을 가져올까 하다가 그는 그대로 노인이 알려 준 길로 접어든다. 쿠퍼 목사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노인의 말대로 노란 페인트칠을 한 집 앞에 이른 그는 옷매무새를 살피고 나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이 댁이 쿠퍼 목사 댁인가요?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부인인 듯했다. 네, 맞습니다. 좀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우유 배달이 좁은 응접실에 들어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키가 자그마하고 살이 투실투실 찐 노인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들어왔다. 그가 쿠퍼 목사인 모양이었다. 날 만나러 오셨다고요? 그의 시선은 재빨리 우유 배달의 옷차림을 살핀다. 네, 안녕하십니까? 아, 좋아요, 좋아. 당신은 어떠십니까? 대단히 좋습니다.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자신의 어색함이 상대방에게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는 이제껏 처음 보는 사람과 이런 식으로 인사를 나눠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 앞에선 편안한 마음이 없던 그였다.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제 이름은 마콘 데드라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바로 이 고장에서... 가만, 지금 뭐라고 하셨소? 데드, 마콘 데드라고 하셨지? 네. 우유 배달은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름이 멋쩍었던 것이다. 저의 아버지께서... 세상에 이런 일도... 여보, 에스터! 에스터! 그는 우유 배달의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이리 와 봐요, 어서! 그리고는 우유 배달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난 당신들을 알고 있단 말이오! 우유 배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이 자기 가족을 안다고 말할 때 기분 나쁜 사람이 있겠는가? 말로만 들었지 와 본 건 처음입니다. 앉아요, 앉아. 당신은 마콘 데드의 아들이지? 틀림없어. 당신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난 잘 기억하고 있소. 당신 아버지는 나보다 너댓 살 위였는데 이 거리에는 자주 나오지 않아 친분은 못 맺었지. 하지만 이곳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신의 할아버지 올드 마콘 데드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요. 더구나 대장장이였던 우리 아버지와 그분과는 아주 친한 사이였다오. 쿠퍼 목사는 그 옛날을 회상하는 듯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손으로 무릎을 비비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뜬다. 이런, 내 생각만 하다 손님 생각은 못 했군. 시장할 텐데. 여보, 뭐 좀 드실 것 좀 내오구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술이나 좀 주십시오. 혹시 금하시지만 않는다면 말씀입니다. 물론 괜찮아요. 염려할 것 없어요. 그녀는 벌써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잔 몇 개와 위스키 좀 가져와요. 이 청년이 바로 마콘 데드의 아들인데 피곤해서 한잔하고 싶다는구먼. 이봐요, 날 어떻게 찾았는지 말해 주지 않겠소? 설마 당신 아버지가 날 지금껏 기억하고 계셨던 것은 아니겠지? 아마 아버지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 댁을 가르쳐 준 사람은 길에서 만난 노인이었어요. 그 사람한테 날 물었던가? 그는 벌써 내일 친구들을 만나면 외지의 낯선 청년이 어떻게 자기를 찾아왔나 하는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을 하며 얼굴을 바짝 쳐들고 그를 바라본다. 부인 에스터가 쟁반에 유리잔 두 개와 물이 담긴 듯이 보이는 마요네즈 항아리를 들고 들어왔다.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물이 아니라 독한 호밀 위스키였다. 키는 목을 넘어갈 때 타는 듯한 통증을 주는 독한 것이었다. 아뇨, 목사님 이름을 대고 물은 것은 아니에요. 이제는 돌아가셨을 서스라는 여자분을 알 만한 사람을 찾았던 겁니다. 서스라고? 그래, 그 노인네 서스 말이군! 그 사람 이야기가, 목사님이라면 아실 거라고 하더군요. 목사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위스키를 또 한잔 따른다. 이곳 사람이라면 날 모른 사람이 없고 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분이 살던 곳에서 잠시 머문 일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사람들이 살던 농장은 정말 좋은 곳이었지. 지금은 어떤 백인들이 점령하고 있지만 너무 좋은 곳이라 백인들이 욕심을 냈던 거야. 그래서 그분 올드 마콘 데드를 쐈던 거고. 이곳 사람들은 다 흥분했지. 하지만 그들이 겁이 나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아버지한테는 피레이트라는 여동생이 있었을 텐데? 네, 맞습니다. 저의 고모죠. 아직 살아 계신가? 네, 물론이죠. 살아 계십니다. 그래? 예쁜 얼굴이었지. 정말 예뻤어. 아버지가 그녀의 귀걸이를 만들어 주셨지. 그 일로 해서 우리는 자네의 아버지와 고모가 살아 있는 걸 알 수 있었어. 올드 마콘 데드가 살해당한 이후 아이들도 역시 죽었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었던 거야. 그런지 2,3주일이 지난후 서스가 아버지의 대장간에 왔어. 대장간은 우체국 건너편에 있었지. 아이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넣은 자그마한 쇠상자를 귀걸이로 만들어 달라고 했던 거야. 그때 서스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안했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살아 있고 서스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우리들은 서스라면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돈이 많은 백인 버틀러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서스는 훌륭한 여인이었고 솜씨 좋은 산파였지. 그 당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그녀가 받아 냈지. 나까지도 말일세. 이제껏 여러 번 들어 온 이야기였고, 그때마다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던 이 이야기가 지금은 그를 자극하는 것이 위스키 때문이라고만 돌릴 수는 없었다. 그 일이 벌어진 바로 그 장소라는 현장감이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했을 것이었다. 할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잡지 못했나요? 쿠퍼 목사가 눈썹을 치켜든다. 잡다니? 그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미소를 짓는다. 잡을 필요가 없었지. 어디로 도망친 게 아니니까. 그럼 체포당하거나 재판도 받지 않았나요? 체포되다니, 무엇 때문에? 검둥이를 죽였다고 해서? 어림없는 소리야. 그럼 그놈을 그대로 놔 뒀단 말입니까? 할아버지를 죽인 놈이 누군지 몰랐단 말입니까? 이 고장 사람이라면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었지. 서스가 일하던 집이 주인 버틀러가 바로 범인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놈을 그대로 놔뒀단 말입니까? 우유 배달은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데 대해 의아스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도 이처럼 흥분했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백인들은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고 흑인들은 힘이 없었어. 지금처럼 경찰도 없었고 겨우 보안관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들도 백인이었으니까. 우리들은 아이들이 무사히 도망쳐 나온 것만 다행으로 여겼을 뿐이야. 서스란 분이 할아버지를 죽인 놈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죠? 그래, 그랬었지. 그런데도 아버지와 고모를 그 집에 숨겼다는 겁니까? 그랬어. 그 아이들을 숨기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었지. 누구든지 그 아이들이 그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도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아셨었나요? 그건 모르겠는데. 서스가 이야기를 하면 놀랐겠지. 어쨌건 우린 올드 마콘 데드가 살해당한 후 그 아이들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으니까. 그 자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버틀러 일당 말입니다.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벌써 죽었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어. 마지막으로 남았던 엘리자베스란 여자도 2년 전에 죽었지. 그렇게 못된 짓을 해서 재산을 모았지만 결국 죽고 말더군. 그래도 아무런 재해 없이 일평생을 편하게 살았잖아요? 그렇게 놔 둬선 안 되는 겁니다. 언제까지나 당하고만은 살 수 없잖습니까? 그 일 때문에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온 건 아니겠지? 쿠퍼 목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글 찬찬히 바라본다. 아닙니다. 그저 지나치는 길에 한 번 들러 보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하도 여러 번 말씀하셔서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젠 볼 것도 없을 거야. 서스가 관리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살아 계신가요? 나이가 아주 많으실 텐데요? 벌써 돌아가셨지. 돌아가셨을 때가 백 살이라고 하던가... 그 농장이 이곳에서 먼가요? 우유 배달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멀진 않아.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버틀러의 집 바로 뒤에 있었지. 여기서 15마일쯤 될까? 물론 안내해 줄 수 있어. 차의 부속품이 고장났는데 이제 다 고쳐 놨을걸세. 그러나 우유 배달은 차가 완전히 고쳐질 때까지 나흘이나 기다려야 했다. 목사의 집에서의 나흘간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고모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은 그 당시의 이야기를 자신이 알고 잇는 대로 갖가지로 늘어놓았으며, 하나같이 그분의 농장 링컨의 천국 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입에 침이 마르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우유 배달 자신도 할아버지의 모습이 점차로 그리워져 가는 걸 느껴야 했고, 아버지의 회고담이 되살아왔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존경했고 할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믿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생각하고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게 비어 있는 듯한 서글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난 아주 얼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나가 일을 했었어. 아버지의 이 말은 그들 부자의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닌가. 나흘을 기다리고도 그는 목사가 운전하는 차는 탈 수 없었다. 그날 따라 몇 푼 생기는 일이 있어 목사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열 세 살난 조카가 운전을 맡아야 했다. 이 아이는 면허를 가지고 있나요? 운전석에 앉으며 앞이나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스런 조카를 보고 우유 배달이 목사 부인에게 물었다. 아직 나이가 안돼요. 그녀는 우유 배달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고는 이곳 농촌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운전을 하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반을 들자마자 곧장 출발했다. 2차선밖에 안 되는 도로는 아침 시간을 제외하면 화물차로 혼잡했기 때문이다. 조카는 말이 적은 아이였다. 아이의 관심은 온통 우유 배달의 질 좋은 옷에만 집중되어 있는 둣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셔츠 한 장을 주기로 작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들러 맡겨 놓은 가방을 찾아가자고 말해야 했다. 말없이 한동안 차를 몰던 아이는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도로변에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냐? 내가 운전할까? 아녜요. 다 온 거예요. 무슨 소리냐? 어디냐? 바로 저 뒤예요. 아이는 잡목이 우거진 수풀을 가리켰다. 그곳에 버틀러의 집이 있고 농장은 그 바로 뒤에 있어요. 여기서부턴 걸으셔야 해요. 차는 못 들어가요. 우유 배달은 우선 위치만 살펴 두고 다음에 혼자 올 생각으로 아이에게 가리켜 달라고 했으나 아이는 심부름할 일이 있으니 시간만 알려 주면 다시 오겠다고 우겼다. 한 시간이면 돌아올 수 있다. 우유 배달이 짜증스레 말했으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그 사이에 심부름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엄마한테 맞아요. 이따가 올께요. 그는 더 우기면 자신이 혼자 떨어지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걸로 오해할까 봐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열두시에 와 달라고 했다. 그때가 아홉시였으니 세 시간이면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풀로 들어선 지 몇 발자국 걷지 않아 그의 모자는 호두나무 가지에 걸려 땅바닥에 떨어졌다. 거의 1마일이나 되는 길을 걷는 사이에 바지는 엉망으로 더럽혀졌다. 숲 속의 교교한 정적은 오히려 그를 몹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나 그의 뇌리에 오가는 황금 의 존재는 그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가 이제껏 보아 오던 중 가장 큰집으로 보이는 그 집 앞에 당도했을 때는 온몸에 땀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거대한 집을 바라보며 그는 이곳이 바로 아버지와 고모가 숨어 있던 집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어 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버찌 잼을 보고 피레이트 고모가 울음을 터뜨린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어린 그들의 눈으로 보면 이 곳은 대궐 같은 집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집을 칭찬하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 집의 주인이야말로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살인범의 집 을 싫어했던 것이다. 3층 어느 창에선가 두 어린아이들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집은 얼마 동안이나 비워 놓았는지 이제라도 곧 허물어져 내릴 듯이 낡아 있었다. 문을 밀어 보니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리긴 하였으나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막연한 호기심에 한 발 들여놓던 순간 그는 문득 물러서고 말았다. 지독한 냄새가 갑자기 그에게 밀려왔던 것이다. 동물의 배설물 냄새 같은 그 냄새는 단 한순간에 그의 내장을 뒤집어 놓아 아침에 먹은 음식을 토하게 했다. 뛰쳐나와 입안에 가득 든 오물을 내뱉고 나서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고 있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던 그는 흠칫 놀랐다. 어느 사이엔가 그는 여러 마리의 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 개들의 눈은 어린아이들의 눈처럼 악의 하나 없는 순하디순한 금색이었다. 지독하게 역한 냄새와 갑작스런 동물들의 출현, 그리고 순해 보이는 동물들의 눈동자를 보고 난 후의 안도감 등으로 인해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내릴 듯한 현기증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놀랄 일은 눈을 뜨고 나서 벌어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한 노파가 나타났던 것이다. 저리들 가라, 썩 물러가! 개들은 그녀의 말에 따라 물러갔다. 개들의 순하디순한 눈동자에 비해 광녀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눈과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얼마나 늙었는지 피부마저 퇴색했고 눈과 입만 구별이 될 뿐 얼굴 전체가 주름살로 덮인 그녀의 형상은 그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들어와, 어서 들어와.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늙은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끌고 앞장서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침실로 끌려가는 아이처럼 두 팔을 뻗은 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집안에서는 예의 역한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나마 열려진 문으로 모조리 쓸려나가 버린 듯했다. 방으로 들어선 그녀는 그를 회색 벨벳 소파에 앉혔다. 소파 옆 양탄자 위에는 밖에서 봤던 개 두 마리가 먼저 들어와 다리를 길게 뻗고 엎드려 있었다. 이 개들은 기억하지? 와이마르들이야. 우유 배달은 정신을 가누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아마 이 노파는 서스일 것이었다. 그러나 서스는 이미 죽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노파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언젠가는 네가 돌아올 줄 알았었다. 때로는 그런 믿음을 의심해 보기도 했고, 어떤 땐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었어. 하지만 봐라. 내 생각이 맞았지 않니? 여기 이렇게 네가 돌아왔지 않니? 무서운 일이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도록 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이십대 여인의 목소리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힘찬 것이었다. 우유 배달은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어 자신의 목소리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죄송합니다만 전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전 마콘 데드의 아들이에요. 할머님께서 알고 계신 마콘 데드가 아니에요. 노파의 주름진 얼굴에서 떠돌던 미소가 일순에 사라졌다. 제 이름도 역시 마콘 데드입니다만, 전 이제 서른두 살입니다. 당신께서는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알고 계시죠? 그의 귀는 아무 탈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서스 할머니죠? 그래, 서스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의 열기띤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이름은 서스란다. 우연히 들렀습니다. 그는 노파의 감정을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쿠퍼 목사 댁에서 며칠 지냈습니다. 그분이 이곳을 가르쳐 주더군요. 나는 네가 바로 네 아빈 줄 알았다. 그래서 날 만나러 돌아온 줄 알았던 거야. 지금 어디 있느냐? 내 마콘 말이다! 집에 계십니다. 살아 계시죠.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당신 이야기를... 피레이트는? 피레이트는 어디 있어? 같은 도시에 살고 계셔요. 잘 지내고 계십니다. 넌 네 아비를 닮았구나. 정말 꼭 닮았어. 아직도 그녀의 목소리는 별 흥미가 없다는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는 올해 일흔둘이십니다. 우유 배달은 이 말이면 그녀가 사태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열여섯 살 때 였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일흔 두 살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녀는 지금 몇 살이란 말인가! 배 고프지 않니? 아뇨, 조반을 먹고 나왔습니다. 그럼 그 조그만 쿠퍼 녀석 집에서 머물었단 말이냐? 네. 할머니. 못된 녀석이지.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도 피웠어. 하긴 어린애들이란 말을 안 듣는 법이니까. 저도 담배를 피우면 안 될까요? 우유 배달은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았으나 좀더 안정할 필요를 느껴 담배를 간절히 피우고 싶었다. 노파는 어깨를 움찔해 보인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지금 세상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세상이니까. 우유 배달이 담배를 붙여 물자 성냥불에 놀란 듯 엎드려 있던 개들이 귀를 세우고 으르렁거린다. 쉬! 노파가 주의를 주자 개들은 이내 머리를 다리 사이에 묻는다. 아름답군요. 뭐가? 개들 말입니다. 아름답진 않아도 색다른 놈들이지. 저놈들을 보살피느라고 내 뼛물이 다 빠진단다. 아까 이름이 뭐라 하셨죠? 종자 이름 말이군. 와이마르야. 독일산이지. 이것들을 어떻게 하시죠? 어떻게 하다니? 길러서 팔고 또 기르는 거지. 죽을 때까지 이놈들과 같이 살 거야. 이놈들은 실은 버틀러 양 소유였는데 그녀가 죽고 나니 돌봐 줄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맡게 된 거지. 저 개들 때문에 이 집에 남아 계시는 겁니까? 할아버지의 원수의 집을 아버지와 고모의 은인이 죽을 때까지 지키고 있는 게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노파는 이가 없어 푹 꺼진 입술을 더욱 빨아들인다. 내가 여기 머무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산이 탕진되자 난간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했단다. 내가 받아 낸 생명의 임종을 또 내가 치러야 했어. 그녀의 어머니도, 할머니도 내가 받아 냈지만 나한테 그런 끔찍한 꼴은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긴 이 고장 사람이라면 모두 내가 받아 냈지. 한 번도 실수가 없었어. 아니, 단 한 번 있었다. 단 한 번, 네 어머니, 아니지 네 할머니를 구해 내지 못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개들의 산파노릇을 하게 됐단다. 쿠퍼 목사의 친구분의 그러는데 할머니의 피부 색깔이 희었다고 하던데 정말 그랬나요? 백인은 아냐. 인디언의 피가 섞였었지. 참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젊은 여자치곤 고집이 너무 셌어. 그리고 자기 남편을 너무 광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였지. 내 말 알아듣겠나? 사랑을 지나치게 하는 여자들이 있는 법이다. 노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헤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증조할머니의 피를 물려받았단 말인가? 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좋은 여자였다. 그녀를 잃었을 때 난 어린애처럼 울었었어. 불쌍한 싱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름인가요? 싱 이라고 한 것 말이냐? 그래, 싱 데드 가 그녀의 이름이었지. 싱 데드 (Sing Dead,'죽은 사람을 노래부른다 )라구요?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갖게 됐죠? 넌 네 이름을 어떻게 얻었다고 생각하니? 백인들은 경마에게 이름을 붙이듯 검둥이들에겐 아무 이름이나 막 붙여 주었단다. 우유 배달은 할아버지의 이름이 결정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들려 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스 노파는 그 이야기를 몰랐던 듯 그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듣고 있었다. 네 조부모들은 어디서 왔다던? 조지아였나? 아녜요. 버지니아라고 했어요. 두 분 다 그곳에서 살았었고 가족들도 그곳에 있다고 했어요. 두 분 다 그곳에서 살았었고 가족들도 그곳에 있다고 했어요. 켈페퍼 아래 어디라고 했어요. 샤레마그라든가 그런 곳이었어요. 그곳이라면 피레이트가 몇 년 동안 살던 곳인 것 같군. 그렇다면 그곳에서 남자를 만났던 것 같군요. 그 남자와 결혼했었나요? 어떤 남자? 고모에게 아이를 갖게 한 남자요. 아니, 결혼은 안 했었대. 왜 그랬을까요? 그녀가 하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배꼽 때문이었겠지. 배꼽이라니요? 태어날 때 잘못돼서 배꼽이 떨어져 나갔어. 그때 내가 손을 썼어야 하는 건데 난 아이도 죽은 줄 알았거든. 불쌍하게 태어난 아이였지. 그래서 그런지 네 아비가 무척이나 사랑했었지. 그들이 헤어졌다더니 다시 만나 살게 돼서 다행이군. 두 분이 싸운 것을 아셨나요? 자세히는 몰라도 그랬다더군.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레이트가 나한테 왔었어. 그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고모 이야기에 의하면 이 집을 나간 뒤 동굴에서 며칠을 지냈다고 하던데요? 그랬었나? 그렇다면 사냥꾼의 동굴 일 거야. 사냥꾼들이 이따금 쉬는 곳이지. 그곳에서 밥도 해 먹고 자기도 하는 곳이지. 올드 마콘 데드의 시체를 버린 곳도 바로 그곳이다. 어떻게요? 아니 그럼...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묻어 드렸다던 데요. 고기를 잡던 강가에다 묻었다고 했어요. 그랬겠지. 하지만 물이 너무 가까워서 큰비가 한 번 오자 시체가 떠올랐던 거야. 그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게 누군지를 알아 내고는 그 동굴에 갖다 버린 거야.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모르시던데요. 그래, 네 아비에게는 말하지 마. 묻어 드린 걸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 그 시체가 그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필요가 없어. 그 동굴을 한 번 봤으면 좋겠군요. 할아버지의 시체가 있다는 곳 말입니다. 이젠 아무것도 없을 거다. 오래 저의 일이니까. 압니다. 하지만 남아 있으면 직접 묻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쓸데없는 짓은 아니겠지. 그 동굴은 지리만 알면 찾기 쉬워.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만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게다. 노파로부터 동굴에 이르는 길을 자세히 듣고 난 우유 배달은 이곳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쿠퍼 목사는 할머니께서 벌써 돌아가신 걸로 아시던데요? 난 그 검둥이놈들이 싫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개장사들뿐이야.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개먹이를 갖다 주지. 아마 그 사람들이 내 시체도 치워 줄 거야. 만약 아버지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문득 한 가지 잊었다는 생각에 떼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할아버지 이름은 처음부터 마콘 데드는 아니었다던데 그전 이름을 혹시 아시나요? 제이크라고 했었어. 성은요? 그 이름밖에 못 들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그는 필요 이상의 큰 소리로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어디선가 개들이 몰려와 그와 그를 따라오는 노파의 주위를 맴돈다. 개들에게 밥을 줄 시간이 됐구나.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아버지에게 할머니 소식을 꼭 전하겠습니다. 내 귀여운 피레이트에게도 전해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네, 그러죠. 이 집 문을 열었을 때 풍겼던 역한 냄새가 다시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도망치듯 그 집을 나서면서 저 노파가 아버지나 고모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왠지 불가능한 일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굴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동굴 입구에 다다른 우유 배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길을 찾지 못해 허리까지 잠기는 개울물을 한동안 거슬러 올라온 탓으로 옷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서투른 산길과 자갈길, 게다가 물에까지 젖어 구두는 이미 몇 군데가 찢어지고, 입마저 벌리고 있었다. 두 시간이 넘는 악전고투에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나 동굴 앞에 이르른 그는 갑자기 되살아오는 흥분에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동굴에 들어선 그는 칠흑 같은 어둠에 밀려나오고 말았다. 잠시 후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들어선 그는 입구에서 한동안 어둠을 익히고 나서야 동굴의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을 조금씩이나마 구별할 수 있었다.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그 옛날 아버지와 고모의 잠자리가 됐음직한 평평한 바위였다. 그것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그 옆에는 모닥불을 지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서스가 말했던 대로 사람의 시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동굴 입구로 나와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들고 장님의 지팡이처럼 앞을 더듬으며 7,8미터쯤 들어가자 동굴이 좁아졌다. 이곳은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손전등을 가져오지 않은 걸 크게 후회하며 성냥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쓸데없는 일이었다. 물에 빠졌을 때 몽땅 젖었을 것이다. 어둠에 눈이 익혀지기만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동굴은 갈수록 좁아지고 낮아졌다.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순간 그는 라이터를 생각해 냈다. 그이 조끼 주머니에 라이터가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동굴은 더 좁고 낮아져 배를 깔고 엎드려야 했다. 동굴 안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조그만 라이터 불이었지만 어둠 속에서의 위력은 대단했다. 바닥에는 돌덩이, 나뭇잎, 판자조각, 양철 컵까지 널려 있었으나 정작 그가 찾는 자루는 보이지 않았다. 금이 담긴 자루, 그것은 아무리 눈을 뜨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기며 손바닥으로 샅샅이 쓸다시피 더듬었으나 허사였다. 손가락으로 굴 바닥을 파헤쳐 봐도 소용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분노와 절망과 피로가 뒤범벅이 된 채 그는 한동안 그대로 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의 귀에 갑자기 섬뜩한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천장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찢는 듯한 파열음이 들려 왔다. 박쥐 떼였다. 라이터 불빛에 놀라 그의 주위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에 싸인 그는 몸을 돌려 정신없이 굴 바닥을 기었다. 이윽고 햇빛이 환히 들어오는 곳에서야 그는 몸을 일으키고 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다시 눈부신 햇빛 아래에 선 그의 눈에선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흙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그는 분노와 절망에 싸여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위가 뒤틀리는 듯한 허기와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지쳐 덴빌의 정류장에 도착한 그는 허겁지겁 햄버거를 입안에 틀어넣었다. 그러나 얼마 먹지 못한 채 그는 또다른 복통에 몸을 뒤틀어야 했다. 쿠퍼 목사의 집에선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대로 떠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쿠퍼 목사나 할아버지, 아버지의 친구들을 만나긴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직원에게 남쪽으로 가는 차시간을 물었다. 남쪽으로 가야 했다. 고모가 몇 년을 보냈다는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금은 그녀가 가져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몇 년을 보냈다는 그곳에 가면 문제는 해결될 것만 같았다. 해결되든 안 되든 그로서는 가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곳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두 가지 사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여하튼 그는 피레이트 고모가 걸어왔던 길을 밟아 보기로 작정하고 버지니아 행 그레이하운드에 몸을 실었다. 9. 낯선 곳 여인들의 손은 맨손이었다. 포켓북이나 지갑, 열쇠, 종이가방은 물론 빗이나, 손수건마저도 들고 있지 않았다. 우유 배달은 이제껏 손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을 본 적이 없어서 이 곳이 버지니아의 시골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로오크, 피츠버그, 컬페퍼를 지나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샤레마그라는 곳의 위치를 물었으나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이는 바닷가의 어느 촌락이라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산골짜기의 어디일 것이라는 등 믿을 수 없는 말들만 무책임하게 던지는 곳이었다. 그가 자신의 목적지가 샤레마그 가 아니라 샤리마 라는 것을 안 것은 컬페퍼의 우체국에 들러서였다. 알고 났어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으나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기차도 없고 버스는 하루에 두어 번 갈까말까 한데 조금전에 한 대가 떠났다니 75달러에 사들였다. 그러나 그 차는 첫 번째 주유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엔진이 꺼지더니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겨우 주유소까지 밀고 간 그는 엔지 부속을 거의 갈아 끼우다시피 하고 132달러라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출혈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완전히 뜯어고치고 차가 달리게 되자 그는 제법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남부 사람들은 친절해 보였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는 얼마든지 제공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는 홰 흑인들이 좋은 남부를 버리고 북부로 몰려드는 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는 곳마다 속 편한 표정의 흑인들이 얼마든지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샤리마라는 낯선 시골 마을을 찾기 위해선 거리의 표지나 표지판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가 지니고 있는 텍사코 지도에는 그런 지명이 나와 있지 않았고 컬페퍼 우체국 직원의 설명에만 의존해야 하니 그대로 지나쳐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만약 차의 팬벨트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그는 솔로몬의 가게 를 지나쳐 버렸을 것이었다. 솔로몬의 가게 는 식품점과 간이주점을 겸하고 있어 마침 목도 마르던 터라 우유 배달은 그곳으로 향했다. 가게 현관 앞에는 중늙은이 네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고는 가게 앞에서 모래를 쪼아대는 닭들을 비켜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세 사람이 더 있었고, 카운터 뒤에 뚱보가 한 사람 서 있었다. 우유 배달은 첫눈에 그가 이 집 주인 솔로몬 씨라는 걸 짐작하고 차가운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일요일엔 맥주를 안 팔아요. 붉은 머리의 뚱보 흑인 솔로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요일을 잊었군요. 우유 배달이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소다수를 주시오, 냉장했던 걸로. 버찌 사이다는 괜찮겠소? 아, 좋아요. 좋고말고요. 뚱보가 구석에 있는 구식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가게가 얼마나 됐는지 낡아빠졌으나 물건은 제법 많이 쌓여 있었다. 냉장고에서 붉은 액체가 든 병을 꺼내든 그는 앞치마로 병을 한 번 닦아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마시면 5센트고 가져가면 7센트요. 여기서 마시겠소. 금방 도착한 것 같구료. 예, 차가 부서져서... 근처에 정비하는 곳 없을까요? 없소. 한 5마일이나 가야 하나 있을 게요. 5마일요? 그렇소. 어디가 고장났는데 그러오? 어렵지 않은 건 여기 있는 사람들도 고칠 수 있을텐데, 어디로 가는 길이오? 샤리마요. 샤리마라니, 샤리마가 여기 말고 또 다른 곳에도 있나? 여기요? 여기가 샤리마란 말이오? 그는 대단한 선언이라도 하는 듯한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고장난 게 천만다행이군. 그냥 지나칠 뻔했군요. 우유 배달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 친구도 여길 지나칠 뻔했다더군. 내 친구라뇨? 누구 말입니까? 자넬 찾으러 다니는 사람 말이오. 오늘 아침 일찍 이곳에 와서 당신을 못 봤느냐고 묻더군. 내 이름을 대며 묻던가요? 아니, 당신 이름은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 사람이 날 찾고 있는 줄 어떻게 아시죠? 그 사람 이야기가 당신처럼 베이지색 양복을 입은 젊은이를 찾는다더군. 그는 우유 배달의 양복을 가리켰다. 어떻게 생겼던가요? 피부가 아주 새까맣고 키가 크고 바짝 여윈 사람이었소. 왜 길이 어긋나기라도 했소? 아, 아뇨,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말하지 않고 당신에 대한 것만 물었소. 먼 데서 온 사람이었소. 포드 차를 타고 있었는데 미시간의 번호판이 붙어 있는 걸 봤거든. 미시간? 틀림없이 미시간이던가요? 그렇소, 만약 당신이 여기 오면 여기서 당신은 좋은 날을 맞이할 거라고 전해 달라고 했었소. 우유 배달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를 찾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기타였다. 그는 그를 찾아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전해 달라는 말의 뜻은... 그건 데이스 그룹들이 즐겨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타가 나를...? 우유 배달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속이 좋지 않소? 솔로몬이 의아스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긴 나도 버찌 사이다 같은 건 좋아하지 않지만... 우유 배달은 서둘러 병을 비웠다. 아녜요. 속이 좀 울렁거려서요. 밖에 잠깐 나가 바람을 쐬고 있어야겠군요. 그는 문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나보고 차를 봐 달라는 이야기요? 솔로몬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깐이면 됩니다. 금방 돌아오죠. 우유 배달은 회전문을 밀치고 현관으로 나섰다.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웃도리를 벗어 어깨에 둘러메고 거리로 나섰다. 개 몇 마리와 병아리들과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역시 손에 아무것도 안 든 여인들이 면직 드레스로 감춘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스타킹도 안 신었을 것이었다. 우유 배달은 문득 그 중 하나를 끌어안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 거리에 나선 그는 교회나 클럽처럼 보이는 건물 옆의 나무들 밑으로 향했다. 나무 뒤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모여 뛰어놀고 있었다. 나무 밑에 이르른 그는 윗도리를 땅바닥에 깔고 주저앉았다. 기타가 이곳에 와 있다. 그리고 그를 찾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친구 사이가 아닌가. 그것도 형제처럼 다정해 데이스 그룹의 비밀까지도 그에게 털어 놓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그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할까? 그가 솔로몬에게 전해 달라던 그 말 때문인가? 기타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도 자신이 우유 배달을 찾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그런 특수한 용어를 썼던 게 아닐까? 고향 미시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타는 아마 경찰들로부터 쫓기는 몸이 됐을 것이다. 기타는 그의 친구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기타는 지금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 기타는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그는 정말 기타가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뒤에서는 아이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에 우유 배달이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덟이나 아홉 명의 아이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고,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아이가 양팔을 벌리고 비행기처럼 돌고 있었다. 그 아이가 선창을 하고 있었고 원을 그리는 아이들이 따라 불렀다. 제이는 솔로몬의 독생자 컴 부바 얄레, 컴 부바 탐비 하늘로 날아올라 태양을 만지네 컴 부바 알레, 컴 부바 탐비 아이들은 몇 구절을 더 계속하다가 스물하나의 아이 중 남은 건 제이! 라고 소리치고는 모두들 어지러운 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맑은 하늘 가득히 밝은 웃음소리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우유 배달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는 저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아 본 적이 없었다. 좋은 옷, 좋은 음식, 그리고 부유한 집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항상 아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아 던 것이다. 그러던 언젠가 그가 세 명의 아이들에게 달겨들다 두들겨 맞고 있을 때 나타나 그들을 상대로 하여 멋진 싸움을 벌여 쫓아 준 게 바로 기타였다. 우유 배달은 그때 처음으로 즐거운 듯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아이들을 때려 쫓고 난 다음 기타는 돌아서서 빙긋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어 그에게 주며 코피를 닦으라고 했었다. 그가 피를 닦고 돌려 주자 툭툭 쳐 다시 머리 위에 얹고는 다시 빙긋이 웃던 게 바로 기타였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그는 기타를 잠시나마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를 만나 기타가 모든 걸 털어놓으면 그는 서슴지 않고 도와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몸을 일으키고 웃저고리를 털었다. 그가 다가오자 개들과 닭들이 도망쳐 길을 열어 주었다.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소? 솔로몬이 잔을 닦으며 물었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공기가 좋아서겠죠. 그리고 그는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참 좋은 곳이군요. 조용하고 평화스럽고. 그리고 여자들도 예쁘고... 의자에 깊숙히 앉아 있던 한 젊은이가 모자를 치켜들며 발을 굴렀다. 다른 사람들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일부러 의자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솔로몬은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순간 우유 배달은 자신의 말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여자 이야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떤 곳이길래 여자 이야기도 못 한단 말인가? 우유 배달이 화제를 돌렸다. 아까 내 친구가 오늘 아침에 이곳에 왔었다고 하셨는데 만약 지금도 이곳에 있다면 어디 있을까요? 여기 여관 같은 것 있습니까? 솔로몬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이곳엔 없소. 그는 갑자기 이곳의 분위기에 짜증이 나서 그이 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 사람들 중에서 누구 내 차를 고쳐 줄 사람이 없을까요? 팬벨트만 갈아끼우면 되는데요. 솔로몬은 닦고 있는 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물어 봐 드리지. 그는 무엇 때문엔가 불안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그럴 사람이 없다면 바로 알려 주세요. 그렇다면 차를 사야 하니까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순간 우유 배달은 자신이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치는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분명히 적의가 흐르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언행은 그들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언뜻 보아도 막일을 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 앞에서 위스키 한 병을 사겠다는 듯한 말투로 새 차를 사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은 확실히 현명치 못한 짓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그들의 이름을 묻지도 않은 채 그들을 이 사람들 중에... 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조금 전에 모자를 젖혀 쓴 젊은이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 북부 사투리를 쓰고 미시간의 면허를 가지고 있는, 도시에서 온 검둥이놈을 그대로 놔 둘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북부에서 사는 놈들은 돈이 많은 모양이지? 안 그래? 입을 벌린 걸 보니 앞니 네 대가 부러져 나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도 있지. 우유 배달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라고? 내가 듣기엔 북부놈들은 모두 돈이 많다던데. 북부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 우유 배달은 애써 태연하게 받아넘기고 있었으나 일은 벌어져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 돈도 없는데 왜 거길 눌러 있겠어? 경치가 좋아서겠지. 듣고 있던 사람 하나가 끼여들었다. 경치도 좋고 계집도 좋은 모양이지? 시끄러워! 젊은 녀석이 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북부년들은 그게 남부년들과는 다르기라도 하단 말야? 그럴 리 없지. 그거야 다 똑같지. 퀴퀴한 냄새가 나고 찝찔한 맛이 나는 건 다 똑같아. 아냐, 달라야 돼. 또 하나가 끼여 들었다. 아마 사내놈의 것들이 다른지도 모르지. 예의 사나이가 다시 나섰다. 어떻게 다르단 말야? 아마 작을 거야. 웃기지 마! 그러니까 바짝 달라붙은 바지를 입고 다닌단 말야. 그렇지 않아, 북부친구? 말을 한 자가 동의를 구하듯 빙글거리며 우유 배달을 바라본다. 모르겠는데. 우유 배달도 억지로 웃으며 대꾸했다. 다른 놈들의 그것을 빨아 본 일이 없으니까. 모두들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호의적인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놈들의 뒷구멍은 어떻던가? 그것도 빨아 줘 본 일이 없나? 딱 한 번 있지. 어렸을 땐데 어떤 젊은 놈이 날 미치게 해 놓고는... 젊은 녀석의 손에서 예리한 칼날이 번뜩였다. 그것을 본 우유 배달은 태연하게 웃었다. 열네 살 이후로는 처음 보는 물건이군. 우리 고향에서는 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지. 그러면서 그는 재빨리 병 하나를 들어 깨어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 자도 빨랐다. 섬뜩한 기운이 얼굴을 스치는가 싶더니 피가 흘러내렸다. 다음 그 자의 칼은 우유 배달의 왼손을 짖고 베이지색 양복을 찢었다. 우유 배달의 솜씨도 뒤지지 않았다. 깨진 유리병 목의 예리한 날이 이미 그 자의 그 자의 눈두덩이를 긁어 그 자의 얼굴도 피범벅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만약 그 순간 가게 안으로 여인들이 뛰쳐들어오지 않았다면 둘 중 누구든 치명상을 입어야 했을 것이다. 소올! 솔! 두 여인이 악을 쓰며 달겨들자 다른 사내들이 여자들을 막아 밀어내려 했다. 가게 안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여인들은 악을 쓰고 사내들은 그녀들을 밀어내랴 싸움을 뜯어말리랴 어우러졌다. 됐어, 됐어. 이제 그만해 둬!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솔로몬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아가리 닥쳐, 솔로몬! 여자들을 내보내! 그 개새끼 죽여 버려! 그러나 이때 솔의 눈은 이미 퉁퉁 부어올라 앞을 구별 못 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싸움이 되지 않을 것을 짐작한 젊은 동료들이 눈을 못 뜨고 악을 쓰는 그놈을 떠메다시피 하고 가게를 나가자 주위는 조용해졌다. 카운터에 기대서 누구든 덤비라는 듯이 깨진 병목을 비껴 들고 서 있던 우유 배달은 모두들 밀려 나가자 소매로 얼굴의 피를 닦아내고는 들고 있던 병목을 냉장고 있는 쪽으로 내던졌다. 벽에 부딪친 병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그는휘청거리는 다리를 가누며 밖으로 나섰다. 가게 앞 의자에 앉아있는 네 명의 중늙은이들 은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얼굴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렀으나, 손의 상처의 피는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닭을 발로 차 던진 우유 배달은 계단 위에 서서 손수건으로 얼굴의 피를 닦아 냈다. 길 건너편에서 역시 손에 아무것도 안 든 여인 셋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으나 별다른 감정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개새끼처럼 그녀들 치마폭 주위에 원을 만들며 모여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마저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에게 다가와 담배나 물 한 잔을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우유 배달은 분노했다. 이 순간 그의 손에 총이 들려 있었다면 그는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다 쏴 죽여 버렸을 것이다. 병 놀리는 솜씨가 일품이던데 총 솜씨는 어떤가? 의자에 앉아 있는 중늙은이 하나가 미소를 지으면 말을 건네왔다. 젊은이들이 신통치 않자 늙은이들이 달겨들려나 하는 생각에 우유 배달은 다시 긴장했다. 총이라면 더 좋죠. 우유 배달은 말을 건네온 늙은이를 바라보며 빙글거렸다. 사실인가? 물론이죠. 그렇다면 잘됐군. 오늘밤 사냥갈 계획이 있는데 한몫 끼려나? 그 이빠진 개새끼도 옵니까? 솔 말인가? 총만 주신다면 아주 없애 버리려고 그럽니다. 늙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해 두게. 나머지는 경찰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걸세. 그래요? 다행이군요. 다행이라니? 실은 총 솜씨가 서툴거든요. 늙은이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늙은이들도 따라 웃었다. 난 오마라고 하네. 전 마콘 데드라고 합니다. 그가 이름을 대자 눈을 깜박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던 늙은이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고는 하나하나 이름을 대며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칼빈이라고 이름을 밝혔던 늙은이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섰다. 가세. 한바탕 했으니 시장하겠지. 좋은 집이 있으니 따라오게. 그가 앞장서자 나머지 늙은이들도 하났기 둘씩 일어서 뒤를 따른다. 중늙은이였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건장했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우유 배달은 그들이 농담이 아니고 정말 사냥으로 살아가고 있는 밀렵꾼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배가 고팠는데도 그들이 자랑하는 버넬의 음식 은 입에 받지 않았다. 그는 겨우 먹는 시늉만 내고 포크를 내려놓고는 커피를 석 잔 계속 들이켜고 이야기에만 열중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이곳 샤리마에 온 목적을 그들에게 털어 놓고 있었다.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곳 어디에선가 사시다가 이사를 하셨다는 겁니다. 이 근처에서 살았었다고? 할머니의 이름이 뭐였는데? 처녀 시절의 이름은 모릅니다만 이름 첫 자는 싱 이랍니다. 혹시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신 분 안 계십니까? 모두들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모도 여기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이 피레이트예요, 피레이트 데드, 혹시 못 들어 보셨습니까? 신문 머릿기사 같군. 파일럿 데드 (비행사 죽다의 뜻),비행기 조종사인가? 파일럿이 아니고 피레이트예요. 파이레이트라고? 피레이트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에요. 성경을 읽기나 하나? 읽을 줄도 모르면서 뭘 그래? 그들은 서로 놀려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소란은 음식점 주인 버넬 부인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도두들 닥쳐요. 조금 전에 싱이라고 하셨소? 그녀는 우유 배달에게 묻고 있었다. 예, 싱이 할머니 이름 첫 자였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할머니 친구의 이름이에요. 이름이 너무 예뻐서 잊지 않고 있는 거예요. 할머니는 항상 그분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그 집 사람들은 그 여자와 우리 할머니 같은 흑인이 어울려 노는 걸 싫어했어요. 그래서 그분과 우리 할머니는 멀리 나가 고기를 잡거나 딸기를 따러 다녔다더군요. 그러니까 그분과 할머니는 비밀스럽게 만났던 거예요. 버넬 부인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싱이란 소녀는 피부 색깔이 밝고 쪽쪽 뻗은 검은 머리였다더군요. 그래요! 바로 그분이에요! 우유 배달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분은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다고 했었어요. 버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인디언과의 혼혈이었대요. 헤디의 아이들 중의 하나였죠. 헤디는 좋은 여자였는데 자기 자식들이 검둥이들과 노는 것만은 싫어했대요 그녀는 버드 가의 사람이었어요. 뭐라고요? 버드 가요. 언덕 밑에 살고 있는 버드 가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었죠. 아, 그렇다면 수잔 버드의 가족이겠구만. 늙은이 중의 한 사람의 알 만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요. 그 가족이었죠. 그렇다고 해서 검둥이들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수잔도 그렇죠. 그 사람들 지금도 그곳에서 사나요? 우유 배달이 숨가쁘게 물었다. 수잔만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요. 그 사람 혼자 살고 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가요? 그렇게 멀진 않은데 차로는 곤란할 거야. 길이 좁고 꼬불꼬불하거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다. 일주일이 걸리더라도 찾아가겠어요. 찾아갈 땐 찾아가더라도 우선은 좀 쉬는 게 좋을 걸세. 오마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거리엔 멋진 여자가 있어. 아마 자네가 가면 무척이나 반겨할걸세. 얼굴도 나무랄 데 없이 예쁘지. 우유 배달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그 여자는 총을 겨누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미소에 걸맞게 --스위트라고 했다--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의 몰골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목욕물을 준비했다. 욕조는 최신식이었다. 그는 김이 오르는 더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편안히 누웠다. 스위트가 비누와 부드러운 솔을 가지고 와 그를 씻겨 주기 시작했다. 찢긴 손의 상처와 부르튼 발, 그리고 칼자국이 난 얼굴, 등, 목, 허벅지로 오가는 그녀의 손놀림은 마술사의 그것처럼 그를 아득한 황홀경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역경의 결과로 이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면 그는 또 다시 머나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길을 죽을 때까지라도 계속하겠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침대 위에서의 솜씨는 그를 결국은 무아지경 속을 헤매다가 죽음보다도 깊은 잠 속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침대 곁에는 그의 바지와 셔츠가 깨끗하게 빨아 다려져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50달러를 주었다. 그녀가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해 왔다. 그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다시 와 달라고 속삭였다. 그는 오늘밤 다시 오지. 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틀림없이 다시 오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10. 마지막 날개 수잔 버드가 살고 있다는 버드 가는 찾기 쉬웠다. 언덕을 넘어서는 전면이 벽돌로 되어 있는 집은 그 집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앞마당의 잔디는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었고 마당 구석의 히말라야 삼나무에는 그네가 매어져 있었다. 푸른 색으로 칠해진 네 개의 얄팍한 계단을 올라서서 현관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으며, 열려진 창문의 커튼 사이로 빵을 굽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초인종을 울리자 그의 어머니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미스 버드십니까? 우유 배다리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런데요?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마콘이라고 합니다만 좀 알아볼 일이 있어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전 지금 미시간에 살고 있습니다만 제 가족 중 몇 사람이 오래 전에 이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일에 관계된 일인데 미스 버드께서 도와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도와 달라뇨? 뭘요? 그녀의 어조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우유 배달은 이 여인이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분들에 관해 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당신이 그분들을 알 거라고 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누가 오셨어, 수잔? 그녀의 뒤에서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날 만나러 오셨대, 그레이스. 그럼 들어오시게 하지 그래? 문 밖에서 이야기를 하시게 할 작정이야? 미스 버드는 한숨을 쉬고는 역시 내키지 않는 어조로 권한다. 들어오세요, 마콘 씨. 우유 배달은 그녀를 따라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안락해 보이는 거실로 들어섰다. 결례했다면 용서하세요. 앉으세요. 그녀의 회색 벨벳 천으로 덮인 소파를 가리켰다. 요란한 무늬의 투피스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종이 냅킨을 들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뭔가를 씹고 있었다. 누가 오셨다고?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길은 이미 우유 배달의 아래위를 더듬고 있었다. 수잔 버드가 소개를 했다. 제 친구 미스 롱 그레이스예요. 그리고 이분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어요. 그레이스라고 소개된 여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마콘 씨죠? 네, 그렇습니다. 수잔, 뭘 좀 드시게 해야지. 그레이스는 집 주인에게 핀잔 섞인 웃음을 보내고는 우유 배달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금방 들어오셨잖아, 그레이스. 서두르지 마. 수잔 버드는 우유 배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커피나 좀 드시겠어요? 네, 고맙습니다. 어느 걸로 하시겠어요? 커피가 좋겠습니다. 버터 쿠키도 있잖아, 수잔. 그것도 좀 가져오지 그래? 수잔은 친구에게 짜증스러운 듯 찌푸려 보이고 일어섰다. 곧 돌아오겠어요. 그녀는 우유 배달에게 말하고 거실에서 나갔다. 볼일이 있으셔서 이곳에 잠시 들르셨다구요?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레이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녀도 수잔 버드처럼 검은 레이스 구두에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좀 편하게 하려는 듯 그녀는 치마 끝을 조금 치켜올렸다. 네, 잠깐 들른 길입니다. 이곳은 정말 볼 게 없는 고장이에요. 학교라고 해야 다른 데나 다를 바 없지만 한 번 꼭 들러 주세요. 아, 내 정신 좀 봐. 제가 교사라는 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그런데 어디서 오셨나요. 미시간에서 왔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수잔, 이분은 북부에서 오셨대. 그리고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선 어디서 묵고 계세요? 아, 그건 저 이곳에서 몇 사람 만났는데... 이때 마침 수잔 버드가 커피와 쿠키가 놓인 쟁반을 받쳐들고 거실로 들어와 난처한 처지에서 그를 구했다. 미시간에서 오셨대. 그레이스가 다시 수잔에게 말했다. 알고 있어. 커피는 어떻게? 블랙으로 주세요. 블랙으로요? 설탕도 크림도 아무것도 안 넣나요? 나도 그렇게 마셔 보고 싶지만 이젠 틀렸어요.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갈 수도 없구요. 그레이스는 한 손을 엉덩이에 짚고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저한테 알아보실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말씀하시죠. 수잔 버드가 부드럽지만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전 제 할머니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잇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싱이었습니다. 듣고 있던 그레이스가 갑자기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치뜬다. 아니, 그럼? 당신들은 친척이 되잖아? 세상에 이런 일이! 우유 배달도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찾아오긴 제대로 찾아오셨어요. 수잔은 침착했다. 하지만 제가 도와 드릴 게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그레이스! 모르는 소릴 함부로 하는 게 아냐!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 이름은 메리야, 메리! 그렇다면 실례했군. 수잔이 우유 배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아버지 크로웰 버드에게는 싱이라는 이름의 동생이 있었어요. 아마 그녀가 제 할머니일 겁니다! 그래요, 틀림없어요! 그분은 누구와 결혼하셨죠? 제가 알기론 그분은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그레이스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건 정말 기절할 만한 일이야. 한 낯선 손님이 갑자기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서로는 뭐지? 사촌간인가? 뭐든 좋다. 아! 세상은 너무 좁아! 마콘 씨, 우리 학교를 꼭 방문해 주세요, 네? 그러나 우유 배달도 수잔처럼 그레이스를 묵살하기로 작정했다. 당신 아버님의 동생이었다는 그분은 어디에 사셨나요? 아버지가 그분을 마지막으로 보신 건 그분이 매사추세츠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을 때라고 하더군요. 그분은 그곳의 학교에 부임하러 가시는 길이었대요. 퀘이커 교 계통의 학교였다더군요. 당신 가족이 퀘이커 교도였다고? 어머나, 세상이 이럴 수가 없어. 나한텐 그런 소리 한 마디도 안 했었잖아? 마콘 씨, 당신 친구분들과도 친구 사이에 숨기는 게 있나요? 이 여자는 당신에게도 다 털어놓지 않을 거예요. 그분은 끝까지 결혼을 안 하셨습니까? 우유 배달의 움켜쥔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우린 그분이 결혼했다는 소린 못 들었어요. 그분은 그 학교에 가신 후에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 지셨대요. 여러 사람이 그분을 찾으려고 애썼대요. 헤디 할머니의 성화가 극심해서 오랫동안 찾았대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말씀이 아마 그분이 일부러 몸을 숨기셨을 거라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사람이 그분을 못 찾을 리가 없었죠. 그분은 특히 피부가 검어서 눈에 잘 띄는 분이었다니까요. 우유 배달은 호흡이 가빠져 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떠들어 대는 그레이스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그분이 계시던 곳이 매사추세츠라고 하셨죠? 네. 보스턴이었어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를 끝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온몸이 꺼져 내려가는 듯한 절망감을 애써 뿌리치며 나머지 한 가닥의 줄을 잡아 본다. 그럼 피레이트란 이름을 들어 보셨거나 그런 여인을 알고 지내신 적이 없습니까? 피레이트? 아니, 없어요. 그런 이름 들어 본 적 있어, 그레이스? 수잔은 이때야 친구의 도움을 청한다. 역시 그레이스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는데.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야. 평생을 여기서 산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뿐만이 아니라 저희 부모께서도 여기서 나서 돌아가셨죠. 슬픈 일이에요, 마콘 씨. 가족들이 흩어져 서로 안타깝게 찾아다닌다는 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일까요? 전 결혼을 안 했어요. 하지만 가족들과는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그레이스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하고는 의미 있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다. 이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에 우유 배달은 시계를 들여다본다. 어머나, 멋진 시계군요. 좀 보여 주시겠어요? 우유 배달은 소파에서 일어서며 시계를 풀어 그레이스에게 건네 주었다. 이것 봐, 수잔. 숫자라고는 하나도 없고 점만 있어. 이런 걸 보고 어떻게 몇시인 줄 알지? 수잔도 일어섰다. 전에도 와 본 일이 있으세요, 마콘 씨? 아닙니다, 처음입니다.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 되지 않길 바라겠어요.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예정이죠? 오늘밤에나 늦어도 내일엔 돌아갈 생각입니다. 우유 배달은 창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하고 있었다.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렇게 빨리요? 그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 잊었다는 듯이 수선을 떤다. 수잔, 쿠키라도 좀 싸드리지 그러니? 마콘 씨, 어때요? 싸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도 나중엔 좋아하실 거예요. 그레이스란 여자는 좀 어처구니 없었지만 귀엽다는 생각도 들어 우유 배달은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시다면. 잠깐 기다리세요. 싸 드릴께요. 괜찮지, 수잔? 그레이스는 수잔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거실에서 서둘러 나갔다. 수잔도 의식적으로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좀더 머무시면서 저희 집에 다시 놀러 오셨으면 해요. 그러나 그에게는 이 말도 그녀의 미소처럼 의례적인 것으로 들렸다. 글쎄요, 한 번쯤은 더 오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좋아요. 도움이 못 돼 드려서 미안해요. 아뇨, 충분히 도와 주셨습니다. 제가요? 그럼요.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게 저한텐 큰 도움이 되는 겁니다. 이번에는 수잔도 격의없는 미소라고 생각되는 웃음을 지었다. 가족들의 자취를 찾는 게 당신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일인 모양이죠? 우유 배달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꼭 그렇진 않아요. 전 이곳을 그저 지나치는 길이었는데 문득 찾아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레이스가 하얀 종이 냅킨으로 싼 조그만 꾸러미를 들고 돌아왔다. 자, 받으세요. 나중에 고맙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두 분 모두 고맙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동감입니다. 버드 가를 나서는 그의 기분은 처참한 것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하룻밤만 더 지내고 떠날 생각이었다. 차는 지금쯤 다 고쳐져 있을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알아낼 것도 없었고, 더구나 금을 찾는다는 건 이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 되었던 것이다. 고모가 버지니아에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누구도 그녀의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곳에 살았었다는 싱이라는 여자는 펜실베이니아의 덴빌로 간 게 아니라 매사추세츠로 갔다고 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할머니처럼 피부색이 흰 게 아니고 특출나게 검었다고 수잔 버드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음식점의 버넬 부인은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그는 이곳 사람들, 특히 오마, 스위트, 버넬 들에게 수치스러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왜 나를 이곳에 머물게 했을까? 그래도 그는 그들에게서 다른 사람들, 더욱이 고향 사람들에게서 느껴 보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는 연대 의식이나 연관성 같은 걸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랐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도 언제나 이방인 같은 느낌을 지닌 채 살아왔었다. 그 감정은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 섞여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기타만이 예외였을 뿐이었다. 오래 전에는 고모와 헤가에게서 색다른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헤가를 정복하고 난 후, 그리고 고모의 유산 을 훔치고 난 후 그 감정도 메말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낯선 고장 이곳 샤리마에 와서 그는 그 옛날 고모의 집에서 느꼈던 감정, 자신이 그 속의 일부분이라는 느낌이 드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수잔 버드의 거실에서, 스위트의 침대에서, 그리고 이곳의 몇몇 사람들과 어울린 버넬 부인의 음식점에서 그는 이방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우유 배달은 손에 들고 있던 꾸러미를 풀고 쿠키 하나를 꺼냈다. 그 사이에 끼여 있었던 듯 종이쪽지 하나가 길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그레이스의 주소였다. <그레이스 롱 2번가 40번지, 학교 아래 세 번째 집>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쿠키 네 개를 싸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던 모양이었다. 쿠키를 한 입 물고 한동안 걷던 그는 귀찮고 짜증스러워 쿠키 꾸러미와 그레이스의 초대장을 한꺼번에 뭉쳐 길가에 버렸다. 아직도 가족들에 대한 의문점이 당구공처럼 그의 뇌리를 쾅쾅 부딪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의 할아버지 제이크 도 이곳 샤리마에서 태어났었다면 왜 그 술취한 흰둥이놈에게 마콘 에서 출생했다고 했을까? 그의 아버지나 피레이트 고모는 왜 항상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역마차에서 만났다 고 말하는 것일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뇌리를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마을 중심부에 이를 무렵에는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무심코 시계를 보려고 팔을 들어올린 그는 그레이스가 시계를 돌려 주지 않았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는 소리내어 투덜거리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잃어버렸군.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다시 돌아가 시계를 가져와야 할지 어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돌아간다면 한밤중에야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기타가 이곳에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기타가 남긴 말을 아직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생명을 노린다면? 어두운 거리를 혼자 걷는 일이 내키지 않아 시계에 대한 걱정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작정했다. 그는 턱수염에 묻힌 쿠키 찌꺼기를 닦아 내고 중심가로 이르는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저물어 가는 황혼을 배경으로 나무에 기댄 장승처럼 기타가 그곳에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자신이 의외로 침착하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공포 따위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타는 성냥개비로 손톱 밑의 때를 긁어 내고 있었다. 만약 무기가 있다면 윗도리 속에나 바지 주머니에 숨겨져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 마주보고만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이라도 하듯 상대를 찬찬히 뜯어보는 것도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기타였다. 오랜만이군. 우유 배달은 인사 따윈 나누고 싶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야, 기타? 이유가 뭐야? 자네가 금을 찾아 냈기 때문이지. 금이라니, 무슨 소리야? 금은 없었어! 딴 소리 마! 자넨 금을 찾았어! 동굴은 텅 비어 있었어. 굴바닥을 기며 바닥을 쓸다시피 찾았지만 아무것도... 자넨 미쳤군, 기타! 미칠 듯이 화가 나 있을 뿐이야! 미치진 않았어! 금은 없었다니까! 우유 배달은 악을 쓰지는 않았지만 강경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더러운 자식아, 내 눈으로 봤어. 보다니, 뭘 봤단 말인가? 금을 가지고 있는 걸 내 눈으로 봤어. 어디서? 시치미 떼지 마. 덴빌에서 봤어. 내가 금을 가지고 있는 걸 덴빌에서 봤단 말인가? 그래. 농담하지 마, 내가 그걸로 뭘 하던가? 어디론가 보내고 있더구나. 어디로 보냈다고? 그래, 날 놀릴 생각이냐? 더러운 놈, 너도 네 아비와 똑같은 돼지새끼야!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우유 배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이 어디 있다고 보냈겠어? 그런 일 없어. 자네가 봤다면 잘 알 것 아냐? 내 눈으로 봤단 말야, 이 애송이야. 나도 그 정류장에 있었어. 정류장이라니, 어느 개똥 같은 정류장이야? 덴빌의 버스 정류장! 순간 우유 배달의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남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어느 노인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끙끙거리고 있어 도와 주느라 들어올려 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기타가 봤다는 건 바로 그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유 배달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지 말게. 그건 내 물건이 아니었어. 그 영감이 도와 달라길래 들어 준 것뿐이야. 별 개똥 같은 생각을 다 했군. 그러나 기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우유 배달의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우유 배달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만약 금을 찾아 부쳤다면 왜 여기에 와 있겠나? 내가 금덩어리라도 앞세우고 온 나라 안을 유세하고 다니는 떠돌이라도 됐단 말야?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나? 개소리 마, 넌 그 금덩어리를 이곳으로 부쳤어! 이 원숭이 똥구멍 같은 놈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멍청아? 난 네가 떠난 다음 웬일인지 네 놈이 우릴 배신할 것만 같은 생각에 빠졌어. 그래서 널 따라 나선 거야.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네 놈을 도와 같이 찾아볼 생각이었지. 네놈은 영영 우리를 떠나 벌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거야. 결국 내 추축이 들어맞았어. 내가 네놈을 덴빌 정류장에서 발견했을 때 넌 금덩이가 든 짐을 부쳤어.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 금덩이는 미시간으로 가는 게 아니고 버지니아로 부쳐졌어. 그리고 네놈도 이곳으로 온 거야. 그래도 더 변명하겠나? 넌 우리를 배신하고 도망친 거야. 이 더러운 똥덩어리야! 우유 배달은 커다란 돌덩이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더 변명해도 소용없는 일일 것이었다. 돼 가는 대로 맡겨 놓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 죽이려고 했었나? 그렇다. 여기서 날 죽이고 금덩어리가 도착하는 대로 가져가려고 기다리는 건가? 바로 맞혔다. 헛수고야. 금은 없어. 개수작 마라. 한 가지 묻겠다. 날 죽이겠다면서 왜 솔로몬에게 그런 소릴 했나? 그건 나에게 경고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래도 넌 내 친구다. 친구한테 마지막으로 베푸는 최소한의 호의였다. 참 눈물나는 우정이군. 어찌됐건 고맙다. 천만에. 고마워할 것까지는 없다. 이 애송이야. 그날 밤은 스위트의 따뜻한 품안에서 잠들 수 있었다. 꿈 속에서 그는 먼 창공을 훨훨 날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 위를, 끝없는 평원 위를, 험준한 산맥 위를 날면서 그는 점점 불안해져 갔다. 지상에서 내려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텅빈 창공을 홀로 날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차가 고쳐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스위트의 집을 나서서도 꿈 속에서 느끼던 감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그러기도 싫은 감정이었다. 솔로몬의 가게에는 벌써 오마가 나와 있었다. 새건 아니지만 팬벨트를 구했다고 하더군. 잘됐군요. 고맙습니다. 떠나려고? 예,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수잔 버드는 만나 봤나? 예, 만났습니다. 뭘 좀 알아 냈나? 아뇨. 조금 있으면 킹 워커가 벨트를 가지고 올 걸세. 고친 다음에 시운전을 해 봐야 할걸. 그래야겠죠. 스위트가 아침을 주던가? 솔로몬이 빙글거리며 물었다. 그러려고 했지만 그냥 나왔습니다. 커피 한 잔 하지 않겠나? 아니 괜찮습니다. 좀 거닐다 오겠습니다. 이제 겨우 여섯시 반인데도 이곳은 한낮처럼 북적대고 있었다. 남부 지방은 생활이나 활동이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 중 가장 시원한 때니까 그대로 침대에서 보내기가 아까워 그럴 것이었다. 남자들은 이미 일터로 나갔고, 여인네들은 벌써 빨래를 끝내 내다 널고 있었고, 어린 학생들도 학교로 모여들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 소리에 끌리듯 그도 운동장으로 들어가 커다란 호도나무 밑으로 갔다. 그의 앞에선 어제 숲 속에서 놀던 아이들처럼 열댓 명의 아이들이 원으로 돌고 있었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남자아이가 빙글빙글 돌다가 노래가 끝나자 한 아이를 지적했다. 아이들이 또다시 노래를 시작했을 때 우유 배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피레이트 고모가 부르던 노래였던 것이다. 아, 슈거맨, 날 두고 가지 마오 대신 아이들은 아,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란 가사로 부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노래를 듣는 사이에 그는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피레이트 고모를 생각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생각하자 그는 갑자기 고향 미시간이 그리워졌다. 그의 집, 가족들, 그리고 헤가의 얼굴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순간적으로나마 아릿한 아픔과 함께 달콤한 기분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아이들의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다시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갑자기 피로를 느끼고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나무밑둥에 기대앉고 말았다. 제이는 솔로몬의 독생자 컴, 부바 얄레 컴...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솔로몬이란 이름이 유난히 많은 것 같았다. 솔로몬의 가게 , 솔로몬의 이발소 , 밀렵꾼 루더 솔로몬 .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이 지방 이름마저 솔로몬과 비슷하게 사례이몬이라고 발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의 뇌리에 갑자기 스치는 게 있었다. 제이는 솔로몬의 독생자 는 혹시 샤리마에 홀로 남은 제이크 가 아닐까? 제이는 제이크를 보통 부르는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제이가 제이크를 칭한다면? 이건 예사 노래가 아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아이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만약에, 만약에...! 제이는 솔로몬의 독생자 스물하나 중에 하나만 남은 제이 하늘로 올라 올라 태양을 만지네 컴 부바 얄레, 컴 부바 탐비 아기는 흰둥이의 집에 남겨 두고 헤디는 그를 데리고 붉은 사람들에게로 컴 부바 얄레, 컴 부바 탐비 검은 여인이 땅바닥에 쓰러졌네 그녀의 몸뚱이는 사방으로 던져졌네 컴 부바 얄레, 컴 부바 탐비 아,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아,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목화송이가 날 찌르고 흰둥이놈이 날 희롱한다오 솔로몬이 날아갔네, 솔로몬이 떠나갔네 먼 창공을 가르고 가르고 솔로몬은 고향 찾아 떠나갔다네 헤디는 그를 데리고 붉은 사람들에게로 라는 대목에서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헤디라면 수잔 버드의 할머니며, 따라서 싱 이라는 여인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리고 붉은 사람들 이라면 인디언을 칭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 싱은 인디언이었거나 아니면 인디언 혼혈일 것이다. 그녀는 이름을 싱 버드, 싱잉 버드(노래하는 새)일 것이다. 수잔 버드의 아버지, 그러니까 그녀의 오빠의 이름도 크로웰이라고 했는데 아마 크루우(까마귀)였을 것이다. 그것은 인디언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제이크와 싱은 서스 할머니의 말대로 이곳 샤리마에서 같이 살았던 것이다. 틀림없는 일이다. 저 아이들은 지금 그의 가족들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노래의 가사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제이크의 아버지는 솔로몬이다. 하늘로 날아올라 태양을 만진다. 그리고 아이를 흰둥이의 집에 남겨 두고 떠난 게 제이크였을까? 아니다. 아,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라는 구절이 틀리지 않는다면 떠나간 것은 솔로몬일 것이고 그 아이가 바로 제이크 자신이었을 것이다. 땅바닥에 쓰러진 여인은 누구였을까? 그녀야말로 솔로몬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울며 외치는 여인, 즉 그의 아내거나 연인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부분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밑에 높다랗게 쌓인 선물더미 앞에 선 아이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수잔 버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말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했건 시계를 찾아야 하니까 그 집에 가면 다시 한 번 물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솔로몬의 가게로 달려가 진열장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았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었고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난생 처음 행복과 알고 싶은 욕망에 들떠 있었다. 아마 비치는 햇빛의 방향이 달라서 그렇겠지만 수잔 버드의 집도 이전과는 달라 보이는 것 같았다. 마당의 호도나무는 전과는 달리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어 코끼리의 다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관으로 올라가는 낮은 계단도 푸른색이 아니라 퇴색한 회색으로 보였다. 초인종을 울리자 이번에도 수잔 버드가 직접 나왔다. 또 왔습니다. 말씀대로 오셨군요. 잘 오셨어요. 그녀의 태도도 어제보다는 부드러운 것 같았다. 말씀을 좀더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싱 이라는 어른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만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좋아요. 들어오세요. 그가 들어서도록 비켜서자 안에서 빵 굽는 냄새가 풍겨 왔다. 그들은 다시 거실에서 마주 앉았다. 이번엔 그녀가 그레이스 롱이 앉았던 소파에 앉았다. 그레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 누구와 결혼했는지 아니면 결혼 여부조차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만 제 생각은... 아녜요. 그 분이 누구와 결혼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분의 상대는 분명히 그분의 어머니, 즉 우리 할머니가 키우신 제이크였을 거예요. 우유 배달은 울컥 치미는 걸 겨우 억누른다. 왜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것일까? 하지만 어제는 그분이 없어지신 후의 소식은 전혀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사실이에요. 떠나신 이후의 소식은 몰라요. 그렇지만 그분이 떠나실 때 누구와 같이 떠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게 제이크였나요? 네, 검둥이 제이크였어요. 그는 석탄처럼 새까맣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았답니까? 그 사람들이 어디서 정착했는지는 몰라도 북부로 갔다고만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분이 보스턴의 학교에 가셨다고 했죠? 그러나 수잔은 손을 한 번 내젓는 것으로 어제의 모든 발언을 취소해 버린다. 그레이스 앞이라서 그렇게 말했던 거예요. 그 입이 싼 여자 앞에서 사실대로 말하면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온 마을에 다 퍼지고 말아요. 그분이 보스턴의 학교로 가려고 했던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랬는데 그 직전에 검둥이 제이크와 함께 노예들이 그득 탄 포장마차에 타고 사라져 버린 거예요. 마차를 몰던 마부가 바로 제이크였대요. 제이크라는 분의 성은 무엇이었나요? 그녀는 어깨를 움찔해 보였다. 그 사람에겐 그런 게 있었을까요? 그 사람은 그 유명한 날아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 중의 하나였어요. 그 사람들은 오래 전에 다 죽었을 거예요. 날아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 이라구요? 그래요. 솔로몬의 아이들이라고도 하고 샤리마의 아이들이라고도 했어요. 아버지와 할머니 헤디는 그 사람을 언제나 샤리마라고 불렀어요. 그럼 헤디라는 분은...? 제 할머니였고 아버지와 싱 의 어머니인 인디언이었죠. 그분이 누군가 버리고 간 제이크를 데려다 기른 거예요. 수잔이 몸을 앞으로 굽히고 속삭이듯 말했다. 헤디 할머니에게는 남편이 없었어요. 이런 사실을 그레이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그 여자가 이런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당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 그만이겠지만 제 입장은 그렇지 못해요.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제이크와 싱은 그렇게 같이 자라게 됐어요. 제 생각 같아서는 보스턴의 학교로 가는 게 싱에게 좋았을텐데 그분은 제이크와 하께 도망쳐 버린 거예요. 다 그렇진 않지만 인디언 중에선 흑인과 결합하는 걸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할머니도 그랬나 봐요. 제이크도 싱도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어요.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죠. 할머니가 끝내 말해주지 않았어요. 싱의 원래 이름은 싱잉 버드였대요. 아버지의 이름도 크로우였고요. 그걸 부르기 쉽게 바꾼 거죠. 인디언의 옷을 벗으면서 이름도 바꾸셨대요. 그녀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솔로몬 을 왜 날아가는 아프리카인 이라고 하시는 거죠? 아, 그건 이곳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예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이곳에 팔려온 검둥이들이 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날아갔다고 했어요. 이곳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솔로몬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샤리마라고도 했죠. 사실 저도 어떤 게 맞는 이름인지는 몰라요. 그런데 그 솔로몬이라는 인물은 자식을 스물하나나 두었다는 거예요. 그 아이들이 이곳 저곳에 퍼져, 당신도 아실지 모르지만 솔로몬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꽤나 많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솔로몬이란 사람은 정력이 무척 좋았던 모양이에요. 그녀는 잠시 웃고 난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모두를 남겨 두고 사라져 간 거예요. 아내와 자식 모두를 남겨 두고 말예요. 그가 날아가는 걸 그들 모두가 봤대요. 아내와 자식들이 목화밭에서 그가 날아가는 걸 봤다는 거예요. 날아갔다고 말씀하시는 건 도망쳤다는 뜻이죠? 아녜요. 말 그대로 날아갔대요. 바보 같은 소리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에 의하면 도망친 게 아니고 날아갔다는 거예요. 새처럼 말예요. 그후 그의 아내는 사랑을 잃은 탓으로 병이 들어 죽어서는 이곳 뒷산의 바위가 되어 바람이 불 때마다 운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유 배달은 어느덧 자신도 그 이야기 속의 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수잔의 이야기보다 때로는 앞서서, 때로는 멀리 떨어져서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그는 문득 수잔의 이야기가 끝난 것을 깨닫고 묻는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의 노래 중에는 제이크만이 솔로몬의 독생자 라고 했는데 무슨 뜻이죠? 글세, 아마 그것은 틀린 생각에서 나온 것일 거예요. 제이크만을 솔로몬이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니까 그런 노래가 생겼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 말고도 자식은 스무 명이나 있었대요. 는 제이크를 데리고 날아가다가 어느 커다란 집 현관 앞에 떨어뜨렸다는 거예요. 마침 헤디 할머니가 그 집에 갔다가 제이크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 거죠. 할머니는 노예는 아니었지만 비누 만드는 법과 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러 일 년에 몇 번씩 그 집에 가곤 했었죠. 어느날 그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나무 위에서 아이가 울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럼 그분의 형제들은 모두 다 어떻게 되셨나요? 스무 명이나 됐다면서요? 글세, 그후 이야기는 분명치 않아요. 모두 다 흩어져 같다고도 하고 그들의 어머니를 따라 대부분 죽었다고도 하는데, 그래도 이곳에 솔로몬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몇 사람은 살아남었던가 봐요. 그렇지만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저 흘러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문득 우유 배달은 그녀에게 갖고 사진 앨범을 보여 달라고 하고 싶어졌다. 할아버지는 몰라도 할머니의 사진이라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그에 관해 물을 것이고, 그녀에게 그녀가 싫어하는 제이크처럼 새까만 친척들이 있다는 걸 알리게 되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걸 도와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아니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막 일어서려던 그는 문득 시계를 생각해 냈다. 저, 그런데 제가 시계를 놓고 간 것 같습니다. 혹시 보관하고 계십니까? 시계요? 네, 당신 친구분께서 보고 싶다고 하셔서 드렸다가 그만 잊고... 그는 수잔 버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시계에는 작별을 고하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그레이스는 지금 자기에게 금시계를 준 젊은이 이야기를 퍼뜨리느라고 발바닥이 부르텄을 거예요. 뭐라구요? 하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니에요. 이곳은 조용한 곳이에요. 낯선 사람이 오는 일은 드물죠. 게다가 금시계를 차고 북부 사투리를 쓰는 젊은이를 만난다는 건 극히 드문일이거든요. 나중에 제가 찾아 드릴께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레이스를 용서해 주셔야 해요. 이곳은 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거지 같은 곳이에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아무것도, 무엇 하나도 변하지 않는 그런 어이없는 곳이니까요. 집엘 먼저 가야 할까, 아니면 고모를 만날까?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운 깊은 밤, 텅 빈 거리에 선 그는 어딜 먼저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아낸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의 고모의 표정을 생각해 본 그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다링 가로 향했다. 그는 운전사에게 웃돈을 주고 그녀의 집 앞에까지 바짝 대게 했다. 그가 문을 밀치고 들어섯을 때 고모는 싱크대 앞에서 밀주를 담아 파는 초록색 병을 닦고 있었다. 고모! 그는 외치고 있었다. 제가 왔어요! 드릴 말씀이 너무나 많아요! 그녀가 돌아서자 우유 배다른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녀를 품안에 꼭 안고 싶었던 것이다. 어서 오너라. 그녀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온 고모는 물에 젖은 초록색 병으로 그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가 정시능ㄹ 차렸을 때 그의 몸은 지하실에 눕혀져 있었다. 겨우 한쪽 눈만을 뜬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누워 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한동안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솟아올랐다. 또 하나의 사랑하는 여인이 다시 한번 그의 목을 자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그대로 누워 자신이 왜 그와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됐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왜 그녀는 그를 때려눕혔을까? 해골이 든 자루를 훔쳐갔다고 그랬을까? 아니다. 그때 그녀는 즉시 달려와 그를 구출해 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녀가 그에게 등을 돌렸단 말인가? 시간이 흐르니 생각 키우는 게 있었다. 그렇다. 헤가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헤가는? 헤가가 죽은 것이다. 그의 목줄기가 갑자기 뻣뻣해진다. 왜? 무엇 때문에?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그녀에게서 떠났던 것이다. 그래 놓고 지금 그녀가 죽었다고 해서 놀랄 게 무엇인가. 그가 스위트의 품에 안겨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을 때 헤가는 죽어간 것이다. 우유 배달은 무거워져 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본다. 그녀를 죽게 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실수였다. 그 사실을 피레이트가 알고 있는 것이다. 피레이트는 왜 이 지하실에 던져 넣었을까? 헤가의 곁으로 가라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그는 날 수 없는 인간이 아닌가? 난 날 수 없어! 솔로몬처럼 날 수 없단 말야! 난 할아버지의 뼈를 묻어 줘야 해! 갑자기 눈부신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지하실 문이 열리고 피레이트의 발이 돌계단 위에 나타났다. 제게 말할 기회를 주세요. 고모가 가지고 다니는 해골은 흰둥이놈의 것이 아니에요. 그자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그 자도 없어지고 금도 없어진 거예요. 아니면 누군가 그 자의 시체와 금을 가져갔을 거구요. 여하튼 그 해골은... 피레이트가 계단을 내려와 누워 있는 그의 앞에 섰다. 할아버지의 시체는 묻은 지 한 달 만에 떠올랐대요. 그래서 흰둥이놈들이 시체를 그 동굴 속에 내버렸다는 거예요. 고모가 가져온 해골은 할아버지의 것이에요. 그걸 묻어 드려야 해요. 아버지의 것이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요. 고모와 제가 묻어 드려야 해요. 그분은 그걸 원하실 겁니다. 그분이 살던 곳 솔로몬의 동산 에 묻어 드려야 해요. 아버지가? 그녀는 다시 한번 중얼 거렸다. 내가 아버지의 뼈를...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하실 구석으로 뛰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곳은 어두워 그의 눈길이 미치지 않던 곳이었다. 만약 내가 아버지를 묻을 수 있다면 이것도 어디엔가 묻어야만 해. 그것을 안고 돌아온 피레이트가 다시 그를 보았다. 안돼요. 그는 그것이 무엇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제게 주세요. 그날 저녁 낫 닥터 가의 집으로 가는 우유 배달의 손에는 헤가의 머리카락이 담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우유 배달은 기대했던 대로 개선장군처럼 귀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감정을 억누른 미소를 대하고는 불안을 떨치고 집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레나도 여전히 그를 용서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그래도 점잖게 그를 대했다. 그녀의 태도가 그렇게라도 누그러진 것은 코린시안스가 남부 거리에 조그만 집을 얻어 포터와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의 두서없는 대화는 길고 긴 시간 동안 끝날 줄 몰랐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덴빌 사람들 이야기, 할아버지의 도망친 할머니의 이야기,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의 이야기는 처음도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하늘을 나는 이야기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자신의 가족들의 이름이 지명이 된 곳의 이야기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서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그녀가 아직도 살아 계시며, 개들을 기르고 계시다고 간단하게만 설명해 드렸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그곳에 가야만 할 것 같다. 마침내 아버지가 결정을 내렸다. 버지니아로요? 덴빌에 말이다. 내 다리가 움직이는 동안에 직접 가서 그 사람들은 만나야만 할 것 같다. 집세는 프레디에게 받아 놓으라고 하면 될 거다. 피레이트 고모와 아버지와 함께 멀고먼 그들의 고향에 가는 길은 그로선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여전히 냉랭한 사이였지만 어머니도 동행하고 있어 더욱 흐뭇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어나갈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헤가가 죽었고, 기타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샤리마는, 그의 의외로 빠른 재방문에 또 한번 떠들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일행은 오마의 집에 머물렀다. 이틀째 되던 날 저녁 피레이트와 그는 솔로몬의 동산 에 오르고 있었다. 피레이트는 자루를 들고 있었다. 우유 배달의 손에는 자그마한 삽이 들려 있었다. 솔로몬의 아내가 죽어서 됐다는 두 개의 바위 밑까지 이르는 길은 몹시 험준하고 먼 거리였으나 두 사람 다 한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정상인 바위에까지 오른 그들은 바람을 맞으며 적당한 장소를 골랐다. 우유 배달이 조그만 구덩이를 파자 피레이트가 자루를 열고 유골을 꺼내 그 속에 조심스럽게 묻어 나갔다. 다 묻고 흙을 덮고 난 우유 배달은 삽으로 땅을 단단히 다지며 물었다. 비석을 세울까요, 십자가를 세울까요? 피에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무덤 옆에 손으로 조그만 구멍을 파고 귀걸이를 풀어 묻었다. 그 속에는 아버지가 지어 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우유 배달이 총소리를 들은 것은 막 일어서던 그녀가 쓰러질 때였다. 그는 재빨리 무릎을 꿇어 그녀의 머리를 안아 올리고 소리쳤다. 고모! 고모!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우유 배달이 그녀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보여 주던 바로 그 미소였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유 배달의 손은 총을 맞은 자리를 찾으려는 듯 그녀의 배와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고모! 괜찮죠? 괜찮은 거죠? 고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대신 레바를 돌봐 줘.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 그리고 그들 모두를 사랑하고 싶었어. 많은 사람을 알게 되면 사랑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지. 우유 배달은 그녀의 얼굴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목줄기에서 피가 솟구쳐 흐르고 있었다. 노래해. 피레이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위해 노래를 ... 우유 배달은 노래라곤 한 곡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는 남이 들어 줄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락도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아, 슈거걸, 날 두고 가지 마오 목화송이가 나를 찌른다오 오, 슈거걸, 날 두고 가지 마오 흰둥이놈의 손이 날 희롱한다오 이제 피는 더 이상 솟구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도 그녀의 눈은 그의 어깨 너머 먼 창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거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서도 그는 노래를 멈출 수 없었다. 점점 크게, 있는 목청을 다하여 품에 안고 있는 피레이트를 영원히 잠에서 깨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깨운 것은 일찍 잠자리에 든 새들뿐이었다. 새 두 마리가 그들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문득 그는 피레이트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지상을 떠나지 않고도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 같은 여인이 또 있어야 해요. 그는 피레이트에게 고개를 묻으며 속삭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또 하나 꼭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녀를 땅에 눕히며 그는 또 다른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일어서는 순간 기타의 총탄은 그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것이다. 그래도 그는 몸을 일으켰다. 기타! 그는 폐부가 울리도록 외쳤다. 타, 타, 타, 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나와라, 형제여! 내가 보이나? 그는 한 손은 입에 대고 한 팔은 머리 위로 흔들며 외쳐 댔다. 여기에 내가 있다! 또다시 마지막 말이 메아리친다. 내 목숨을 원하나? 내 목숨을 원하느냔 말이다! 7,8미터쯤 떨어진 바위 뒤에서 총을 든 기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친구! 그는 자신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내 형제! 그는 총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우유 배달이 흔들던 팔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기타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내 목숨을 원하나? 그는 이제 소리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목숨이 필요하나? 여기 있다. 가져가라.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지도 않으며, 무릎을 굽히지도 않은 채 그는 뛰어올랐다. 형제를 죽이려는 주먹 앞으로 그는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누구의 영혼이 날아 오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야 그도 샤리마의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머나먼 창공에 몸을 던지면 날 수 있다는 것을. -- 작가와 작품 해설 (경이적인 상상력과 극적인 감동) 어둠의 색깔처럼 짙은 피부, 슬픔이 가득 담겨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유달리 희게 빛나는 치아의 니그로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와는 거리감이 있는 인종이다. 작열하는 태양열처럼 격정적인 성격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도 또한 우리로 하여금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요소들일 것이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소위 아메리카 니그로 의 음악인 재즈 이외에는 거의 소개된 것이 없었고, 그로 하여 우리는 그것의 존재조차 의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몇몇 뜻있는 분들에 의해 제임스 볼드윈이나 리처드 라이트를 위시한 흑인 작가들의 작품들이 우리에게도 소개되어 그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 크게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메리카 역사 2백 년, 그리하여 그들 니그로들의 역사도 그만큼 길어졌고, 또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아졌을 것이다. 노예로부터 시작하여 자유 시민이 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평등한 인간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의 역사에서 그들이 감수해야 했던 처절한 고통은 이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가야 할 고향이 있고, 의지할 종교가 있다. 그러나 고향 아프리카는 너무 멀고 그들의 신 여호와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모멸에 찬 백인들의 눈초리와 살을 파고드는 굶주림뿐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견디기 위해 목화밭에서, 탄광에서 그리고 빌딩의 그늘에서 꿈을 꾸며 노래를 불렀다. 머나먼 아프리카의 따뜻한 햇살과 푸른 초원을. 오,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목화송이가 날 찌른다오 오,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흰둥이놈의 손길이 날 희롱한다오... 백인들의 편견과 박해, 게다가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극도의 불경기와 불안, 그 속에서 허덕이는 흑인들은 여러 형태로 변형된다. 밀주 장사, 고리대금업자, 백인 암살단원, 도박꾼, 알콜 중독자, 창녀... 이와 같은 무리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 이 작품은 그들의 고뇌와 염원과 사랑을 짙은 언어로 토로해 가고 있다. 자선병원의 흑인 진료 거부에 반발하여 병원 옥상에서 몸을 날려 죽어 간 어느 흑인은 죽는 게 아니라 멀리 멀리 날아가겠다고 말했었다. 고통스러운 현세에서 해방되는 길은 영혼만이라도 그들의 고향 아프리카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공통된 염원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평등을 그들의 힘만으로는, 아니 주 여호와의 힘을 빌어서도 이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영혼만이라도 자유를 얻기 위해 머나먼 창공을 향해 몸을 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했고, 그들로 인하여 자신들의 영혼도 구원받기를 기도했다. 오, 솔로몬, 날 두고 가지 마오 ...(중략)... 솔로몬은 날아가 버렸네 하늘 저 멀리 훨훨 날아가 버렸네 모두가 정상이 아니었다. 억압된 현상에서 자신을 구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돈 뿐이라고 믿는 아버지, 남편에 대한 혐오감과 과거의 인간다운 삶에 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밤을 지새우는 어머니, 온몸 가득히 비밀을 간직하고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며 밀주 장사를 하는 고모, 백인과의 인구 비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흑인 희생자만큼 백인도 없어져야 한다며 죄없는 백인을 암살하는 친구, 이들로 둘러싸여 자라난 마콘 데드(3세)가 정신적으로 방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젊은 그는 영혼의 고독과 육체적 욕구에만 의해 여인의 품과 알콜의 마력에 몸을 던져 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이로 하여 그의 끝없는 방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영호능ㄹ 구제할 수 있는 한 가닥 실마리를 잡은 것은 신비의 여인 고모 피레이트를 통해 그의 존재의 내력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 알아냄으로써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숙명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결국은 목숨마저 빼앗아야 되는 그들은 끝내 자신마저 버려야 했다. 젊은 마콘 데드는 그들의 이와 같은 운명이 어떻게 해서 비롯되었나를 규명하려 했고, 솔로몬의 노래 로 하여 해답을 더는 순간, 그 자신도 친구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깨닫는다. 그의 영혼은 이제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을. 풍부한 자원과 고도의 기계 문명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극치의 물질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다고 생각해 온 나라 미국, 자유와 풍요의 요람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역설적으로 가난과 굶주림과 불평등의 편견으로 인해 신음하는 아메리카 니그로의 어제와 오늘이 근년에 들어 문학 작품을 통해 갑작스레, 그리고 여실히 다가오고 있다. 소외되어 가는 인간 권리 -- 그것이 기계 문명의 소산이건 인간의 편견에 의해서건 -- 를 되찾기 위해 미국의 흑인들은 피나논 투쟁을 도외시하고 말초신경이나 자극하고 쾌락이나 추구하는 것을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하고 말초신경이나 자극하고 쾌락이나 추구하는 것을 본분으로 알고 잇는 듯한 현대 문화에 경종을 울려 주듯, 그들은 피를 토하듯이 절규하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흑인 사회에선 보기 드문 여류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1931-)의 세 번째 장편인 이 작품 (솔로몬의 노래 Song of Solomon)는 발표되자마자 각 매스컴과 문학평론가들의 유례가 드문 격찬을 받았고, 도서관협회 상 , 사친회 상 , 북 오브 더 먼스 클럽 최우수 작품상 , 뉴욕의 평론가들이 뽑는 비평가 상 등을 수상했고, 당연히 미국 국내외를 막론하고 1978년의 베스트셀러로 꼽혔다. 토니 모리슨은 오하이오 주 로레인에서 출생,성장했고 하워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 코넬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좋은 작품은 많이 읽힌다 라는 평범한 진리가 요사이 조금씩이나마 현시로 나타나는 것 같아 크게 다행으로 여기며, 여기에 흑인들의 피부 색깔처럼 애처로운 이야기를 소개해 드린다. 아직은 거리감이 있고, 그들의 문물에 익숙치 않아 혹시 미흡한 점이 있을지 모르나, 그들의 더운 가슴에 못지 않는 따뜻한 마음으로 옮겨 부끄러움 없이 내놓는다. -옮긴이 김 성 렬 (1946년 서울 출생, 고래대학교 영문과 졸업, 미국문화원 근무, 현재 번역문화 활동에 전념하고 있음. 주요 번역작품-- 솔 벨로우 단편선 , 벤지 , 두 갈래의 귀향 , 당직 간호원 , 마을 사람들 , 거울속의 나그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