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심판한다 - 미키 스필레인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작가 소개 미키 스필레인(Mickey Spillane, 1918∼ )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 이민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잡지사의 필자가 되었고, 대학에 다닐 때는 학비의 대부분을 원고료로 충당했다. 공군 교관, '코믹 북' 출판, 서커스의 곡예사, 마약단속반등을 전전하다가 돈을 벌기 위해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비정파 탐정 마이크 해머 시리즈는 1950년대 미국사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처럼 인식되고 있다. 제 1 장 나는 모자의 빗방울을 털어낸 뒤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조용히 뒤로 물러섰으며,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 쏠려 있음을 느꼈다. 패트 첸버스는 침실문 옆에 서서 마너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 젊은 여자는 오열을 억제치 못하고 흐느끼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자, 진정해요." 내가 그녀한테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잠시 누워 쉬는 게 좋겠소." 나는 맞은편 벽에 붙여 놓은 침대 겸용의 소파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앉혔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 말이 아니었다. 정복 차림의 경관 한 사람이 베개를 침대 위에 놓아주자 그녀는 쓰러지듯 그 위에 누웠다. 패트가 그쪽으로 오라는 몸짓을 하며 침실을 가리켰다. "저기 있네, 마이크." 그가 말했다. 저기 있네 라는 이 말이 나에게는 몹시 충격을 주었다. 저기에는 내 친구가 죽은 채 바닥 위에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시체, 지금은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잭 윌리엄스로서, 전쟁이 있던 그 2년 동안 심한 악취를 풍기는 밀림지대의 그 진흙탕 속에서도 내내 나와 함께 진흙투성이의 침대를 나누어 쓰면서 생활한 전우였다. 전우들을 위해서라면 오른팔을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하긴 했었지만, 내 몸뚱이가 그 짐승 같은 일본군 손에 두 동강이 나려는 순간 그것을 막으려다 팔을 잃어버린 잭. 그는 결국 양팔이 총검에 찔려 병원에서 한쪽 팔을 잘라내야만 했었다. 패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가 시체의 시트를 벗기자 나는 그 차갑게 굳은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난생 처음 통곡 비슷한 것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디를 당한 건가, 패트?" "위장 쪽을 맞았네. 안 보는 편이 좋을 거야. 범인은 45구경으로 낮게 겨누고 쏘았어."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트를 들춰본 순간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다. 잭은 숏 팬츠 차림이었는데, 고통스러운 듯 한쪽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총알은 정확하게 명중했으며, 총알이 관통한 곳엔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시트를 도로 씌워놓고 일어섰다. 이 지역은 범죄가 일어날 만큼 골치아픈 곳이 아니다. 핏자국이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서부터 잭의 의수(義手)가 놓여 있는 장소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잭의 시체 밑에 깔린 양탄자는 구겨져 있었다. 그는 한쪽 팔로 기어가려고 애를 썼지만, 자기가 가려던 곳까지는 끝끝내 갈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폴리스 포지티브(스미스 앤드 웨슨제의 경찰용 리볼버 권총으로 경관 호신용 총)는 홀스터(총집)에 든 채로 흔들의자 등받이에 둥근 고리처럼 걸려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배에 총알을 맞았으면서도 끝까지 이걸 단념하지 못했던 거야. 나는 그 38구경의 무게로 인해 평형을 잃고 있는 흔들의자를 가리켰다. "저 의자를 옮겼나, 패트?" "아니. 왜 그러나?" "저건 원래 저기 있었던 게 아니야. 보면 모르겠나?" 패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단서라도 있다는 겐가?" "저 의자는 원래 저쪽 침대 옆에 있었던 것일세. 나는 가끔 이 방에 와봤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범인은 잭을 쏜 뒤에 저 의자 쪽으로 갔어. 그런데 범인은 잭을 쏜 뒤에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지. 그놈은 여기에 버티고 서서 잭이 괴로움을 못 이겨 바닥 위를 기며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단 말일세. 잭은 권총을 잡으려 했지만 손이 닿질 않았네. 만일 범인이 의자를 옮겨놓지만 않았어도 그는 권총을 잡을 수 있었을 걸세. 그런데 그 잔인한 살인자는 잭이 끝까지 권총을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즐기면서 문 옆에 서 있었던 거야. 잭이 단념할 때까지 1인치 1인치 의자를 뒤로 잡아당기면서. 마치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고 있는 남자를 악마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히고 있었던 걸세. 웃으면서 말이야. 이건 평범한 살인사건이 아니야, 패트.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부딪쳐 온 사건들과 똑같이 잔인하고 계획적인 살인사건이란 말일세. 이런 짓을 저지른 범인을 반드시 내 손으로 붙잡고 말겠어." "자네가 뛰어들겠다는 말인가, 마이크?" "물론이지. 어떻게 생각하나?" "깨끗이 해치우겠다는 심산이로군." "그래, 맞았어. 그것도 신속하게 말이야. 하지만, 패트, 지금부터는 경쟁일세. 나는 나를 위해서 범인을 잡으려는 거니까. 물론 언제나처럼 수사에는 협조하겠지만, 그것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때는 이 권총이 대신 말을 하게 될 걸세." "잠깐 기다리게, 마이크. 그런 짓을 하면 안돼. 물론 자네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일세." "좋아, 패트." 내가 그에게 말했다. "자네한테는 자네의 직무가 있을 테지. 하지만 나한테도 내 일이 있단 말일세. 잭은 이제까지 내 친구였고 좋은 녀석이었어. 같이 생활하고 같이 싸워 온 사이였네. 자네가 그런 내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고. 범인을 어떻게 그 미적지근한 법률적 처리에 맡겨둘 수 있겠나? 그런 것에 맡겨두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잖나? 개새끼들. 그 악당들은 일류 변호사를 끼고 있을 테니, 그 변호사란 놈이 사건 전체를 마구 휘저어놓고는 범인을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양 취급하겠지! 죽은 사람은 입이 없어.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증언할 수가 없단 말일세. 납으로 된 총알로 몸속이 갈갈이 찢겨지는 게 어떤 것이라는 걸 죽은 잭이 배심원들 앞에서 증언할 수 있겠나? 정말로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또 자기를 죽이려는 놈이 바로 코앞에서 자기를 비웃으며 서 있는 것을 봤을 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어찌 알겠나? 더구나 그는 팔이 한쪽밖에 없는 사람이었네. 자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그건 곧 잭이 상처를 입었다는 좋은 증거란 말일세. 몸에서는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하나뿐인 팔로 몸을 지탱해 가며 바닥을 기어 기어 권총이 있는 곳까지 가려고 한 그의 집념을 그런 인간들이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총에 맞고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범인이 있는 곳까지 가려고 하겠느냐는 말일세. 그런 자들은 절대 그런 일을 못해! 배심이란 건 고작해야 비열하고 야비한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피고인이 사건 당시에는 자기가 일시적인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다거나, 아니면 정당방위였다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진술하기만 하면 그걸 곧 냉정하고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고 마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어때, 대단하지 않나? 법률이란 건 그렇게 근사한 거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곧 법률이 될 걸세. 나는 아무거나 다 냉정하고 공정하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코트 앞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직 말할 게 더 남았어, 패트. 자네는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들어두기 바라네. 그리고 자네가 알고 있는 놈들 전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전해 주라고. 그 자식들한테 말해 줄 때는 확실하면서도 힘차게 말해 주기 바라네. 제발 그래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금 말하고 있으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이 뉴욕 시내에는 나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깡패들이 우글대고 있어. 지금까지 나한테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 놈은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나는 그놈의 골통에 바람구멍을 내주었고, 그리고 그 때문에 그놈들은 나를 더욱더 미워하고 있지.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걸세." 내 몸속에서는 격렬한 증오의 감정이 복받쳐올라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지만, 나는 뒤돌아서서 지난날의 잭에게 시선을 떨구었다. 그 순간 문득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기에 나는 너무 흥분해 있었다. "잭, 자네는 이미 죽어버렸어. 아마 지금쯤은 내 말소리도 들리지 않겠지. 그렇지만 실은 내 말을 듣고 있는지 또 누가 알겠나? 부탁하네. 부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게. 잭, 자네는 나와 아주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나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걸세. 이제까지 내가 한번 하겠다고 맹세한 것은 틀림없이 다 그렇게 되었지. 자넬 죽인 놈한테는 반드시 내 손으로 복수를 해주겠어. 그놈은 전기의자에 앉히지도 않겠네. 교수형도 필요없고. 자네처럼 뱃속 창자에 45구경 총알을 맞고 죽게 해줄 거야. 그놈이 어떤 놈이건, 잭, 나는 그놈에게 자네의 복수를 하고야 말 걸세. 잘 기억해 두게나. 그놈이 어떤 놈이든 상관없어. 자, 나는 자네와 약속을 했네." 시선을 다시 들어보니 패트가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마이크, 제발 그만해 두게. 이번에는 내 이렇게 부탁하겠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게나. 나 역시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 아마 자네는 이번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총을 쏘아대는 것으로 일을 시작해서, 나중에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스스로 빠져들고 말 걸세." "그런 수준은 이미 졸업했으니까, 패트, 너무 흥분하지 말게. 대신 지금부터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적하는 걸세. 범인 말일세. 어디까지나 자넨 경찰일세, 패트. 규칙이라든가 법률 같은 것에 묶인 몸이라고. 게다가 상사도 있지 않나. 하지만 나는 나 혼자뿐일세. 설사 내가 누구의 얼굴을 쳤다 해도 그는 내 목을 자를 수가 없어. 아무도 나를 내가 하는 일에서 쫓아낼 수 없단 말일세. 내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기만 하면, 아무도 함부로 내 앞에서 소동을 일으킬 생각을 못하네. 더구나 나는 권총에 언제나 총알을 장전해 두고 있어도 괜찮은 사립탐정 허가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자식들이 더더욱 나를 무서워하는 거지. 나는 지금 온통 증오심으로 들끓고 있네, 패트. 내가 이번 사건의 배후인물을 자루 속의 쥐로 만들어놓고 나면 비로소 그놈은 이번 일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게 될 걸세. 언젠가는 반드시 나는 권총을 들고 범인의 눈앞에 나설 거야. 그리고 그 살인자의 얼굴을 바라볼 걸세. 그놈의 뱃가죽에 한 방을 멋지게 먹여 준 다음, 그놈이 바닥에 쓰러져 죽어갈 때 놈의 앞이빨을 걷어차 줄 생각일세. 하지만 자네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어. 일일이 명령에 따라야 하는 신세니까. 살인과 형사잖나, 자네는? 범인을 전기의자에 앉혀 끝장내는 것으로 자네는 만족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못해. 그건 너무 싱거우니까. 그 살인자도 잭처럼 이렇게 쓰러져 죽어야 하네."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패트의 턱모양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그런 일로 더 이상 나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나를 떨쳐내어 이 장소 밖으로 내보내는 정도였다. 우리는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검시관이 막 도착하여 시체를 운반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너에게는 그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약혼자가 버드나무 들것에 실려 밖으로 운반되어 나가는 것은 그녀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끝났다. 그녀는 좋은 아가씨였다. 4년 전, 잭이 경찰에 몸담고 있을 당시, 그녀가 브루클린 다리 위에서 투신자살하려던 현장을 그가 붙잡았었다. 당시 그녀의 모습은 아주 형편이 없었다. 마약이 그녀의 신경 구석구석까지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그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그녀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그 비용도 대주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일은 그로부터 머지않아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연애로 발전했다. 전쟁만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벌써 옛날에 결혼을 했을 것이다. 잭이 한쪽 팔만 가지고 군에서 제대했을 때도 서로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이미 더 이상 경관이 될 수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경찰에 미련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에도 그를 사랑했었고, 그 당시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잭은 그녀에게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마너는 그를 설득하여 그가 다시 안정을 찾을 때까지만 계속 직장에 다니기로 했다. 왼팔 하나만을 가진 남자가 취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그는 어떤 보험회사 조사부의 직원이 되었다. 그것은 수사와 관계된 일이었다. 잭에게는 그밖에는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했다. 곧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패트가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줄 차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 일어나요. 이젠 당신이 할 일이 없으니까. 갑시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경관 한 사람이 그녀를 부축하여 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패트를 뒤돌아보았다. "자, 어디부터 시작할까?" 내가 그에게 물었다. "글쎄,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다 자네한테 말해 줄 테니까, 자네는 무슨 짚이는 것이라도 없는지 잘 생각해 보게나. 자네와 잭은 아주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잘하면 중요한 것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잭은 정말로 정직하고 착실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한테서 무슨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찰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직장을 잡은 뒤 보험회사에서 하는 일 역시 조사부원이라면 누구나 다 하기 마련인 그런 일들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런 곳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잭은 어젯밤 파티를 열었네." 패트가 말을 이었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었네만." "알고 있네."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한테도 전화를 해서 와달라고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나는 너무 취해 있어서 그대로 일찍 잠자리에 들고 말았지. 그 파티는 그가 입대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낯익은 사람들과의 모임이었네." "아 -- 그 사람들의 이름은 이미 마너한테서 들었지. 안 그래도 부하가 지금 한 사람 한 사람 조회해 보고 있는 중일세." "시체는 누가 발견했나?" "마너였어. 그녀와 잭은 오늘 별장의 부지를 고르기 위해 함께 시골로 드라이브를 할 예정이었다더군. 그녀는 아침 8시인가 그보다 좀 늦게 이곳에 왔네. 그녀는 잭이 안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저 요즘 그의 팔의 상태가 좋지 못하니까 그것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더군. 그래서 그녀는 관리인을 불렀네. 관리인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을 열어주었지.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그 즉시 관리인이 달려왔네. 그리고 곧바로 경찰에 연락을 했고. 내가 그 파티의 상황에 대해서 심문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네. 그리고 나서 나는 자네한테 전화를 걸었던 거야." "사건 발생시간은 몇 시쯤인 것 같나?" "검시관은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약 다섯 시간 전쯤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러면 새벽 3시 15분쯤 된다는 얘기지. 시체해부 보고서가 도착하면 그 시간은 좀더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을 걸세." "누구 총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소음장치가 된 권총을 사용한 모양이야." "아무리 소음장치가 되어 있다 해도 45구경이라면 상당히 큰소리가 날 텐데?" "그야 그렇지만 홀에서는 파티가 계속 진행중이었잖나? 물론 옆집에서 불평할 만큼 시끄러운 파티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해도 그 소동 때문에 들리지 않았을 걸세." "여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가?" 패트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더니 수첩을 끄집어냈다. 그러더니 그 중 한 장을 북 찢어서 나한테 건네주었다. "마너가 가르쳐 준 손님들 명단일세. 그녀가 제일 먼저 파티 장소에 도착했네. 어젯밤 8시 반에 도착했더군. 그녀는 여주인 역할을 맡아 문 앞에서 다른 손님들을 맞아들였네. 제일 늦게 온 사람이 11시에 왔지. 사람들은 이것저것 가벼운 음료수를 마시거나 춤을 추다가 새벽 1시경에 다같이 각기 집으로 돌아갔네." 나는 패트한테서 건네받은 명단을 대강 훑어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두세 사람은 잭한테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직접 만나본 적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파티가 끝난 뒤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패트?" "자동차는 두 대가 있었네. 마너가 탄 차는 헐 케인스의 것이었지. 마너는 도중에서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웨스트체스터까지 곧장 갔다더군. 물론 그 사람들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네만." 우리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패트가 물었다. "동기가 뭘까, 마이크?" 나는 고개를 저었다."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나는 기어코 알아내고야 말 걸세. 설마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죽였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 동기가 무엇이든 거기에는 아마 무슨 중대한 일이 얽혀 있을 걸세. 이 명단 속에는 갱 녀석들의 이름도 상당히 들어가 있으니까. 자네, 무슨 힌트 같은 거라도 떠오르는 게 없나?" "자네한테 알려준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네, 마이크. 안 그래도 나는 자네가 재미있는 답을 찾아내 주지 않을까 하고 바라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만에. 아직 멀었네. 하지만 머지않아 무슨 답이 나올 테지. 그렇게 되면 자네한테도 연락해 주겠지만, 그때엔 나는 이미 다음 행동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걸세." "경찰을 바지저고리로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답을 찾아낼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래도 나보다야 못할걸. 자네가 애초부터 나한테 다 털어놓고 의논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니까. 물론 자네 역시 나 못지않게 사건의 내막을 재빨리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순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말이네. 이렇게 일부러 이번 사건에 나를 끌어들인 것도 내 뒤에 바싹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수사가 저절로 착착 진행되어 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정작 범인을 체포할 단계에 이르면 자네는 나를 밀어제치고 그놈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 들 테지? 물론 그것도 자네가 나를 밀어제칠 수 있다는 가정하의 얘기가 되겠지만 말일세. 그런데 아무래도 그렇게는 되지 않을걸." "좋아, 마이크. 자네가 한 말이 다 옳다고 치세. 내가 자네 뒤를 따라다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하지만 나도 범인을 잡고 싶다네. 이것만은 잊지 말게. 언젠가는 자네도 범인한테 두손 두발 다 들게 될 때가 있다는 걸 말일세. 하지만 우리에겐 많은 과학적인 설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하들이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네. 우리 머리도 그렇게 돌은 아니니까." 그가 말했다. 그의 이 말이 아까 그가 한 말을 나에게 다시 떠올려 주었다. "거 참,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경찰을 얕보고 있지는 않네. 하지만 경찰은 상대방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상대방의 팔을 비틀어 부러뜨리는 곡예도 할 수 없고, 또 농담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45구경의 총구로 입술이 움푹 들어가도록 앞이빨을 부러뜨리지도 못하잖나? 그리고 나도 내 나름대로 탐문을 해볼 거고, 또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걸 얼마든지 가르쳐 줄 사람들이 주위에는 잔뜩 널려 있다네. 숨기는 날에는 내가 어떻게 나올 거라는 걸 그들이 먼저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지. 내 부하들은 겉과 속이 각기 다른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게 또한 아주 쓸모있는 것이기도 하다네." 이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우리는 홀로 걸어나왔다. 실내의 가재도구 일체를 그대로 보존해 두기 위해 패트가 순찰경관에게 문 앞을 지키게 했다. 우리는 자동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린 다음 로비로 나왔다. 패트가 몇 명인가의 신문기자들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내 자동차는 순찰차의 뒤쪽 보도 옆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패트에게 손을 흔든 다음 고물차에 올라타고 해커드 빌딩으로 향했다. 그 빌딩에서 나는 방 두 개를 사무실로 빌려쓰고 있었다. 제 2 장 내가 도착했을 때 사무실의 문은 잠겨 있었다. 발로 두서너 번 문을 걷어차자 벨더가 안쪽에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구라는 걸 알아차리고서 그녀가 말했다. "아, 소장님이셨군요!" "'아, 소장님이셨군요!' 라니, 무슨 뜻이지? 아직까지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 이 말인가? 마이크 해머라는 당신의 고용주를 말이야?" "흥,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모습을 감춘 적은 없으셨잖아요! 수금오는 사람들 때문에 도망을 쳤을 때도 말예요." 나는 문을 닫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백만 달러짜리 다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 앞에서나 드러내놓고 그걸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비서로서는 주의력이무척 산만한 편이었다. 숯검정 같은 까만 머리는 페이지 보이 커트형으로 잘라 놓았고, 복장은 늘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펜실베이니아 고속도로의 커브 길이 생각나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를 다루기가 아주 손쉬운 여자로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언젠가 나는 그녀가 두세 명의 불량배들을 상대로 그 녀석들을 때려눕히고서 무섭게 혼내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됐다 하면 그녀는 우선 덮어놓고 한쪽 구두를 벗어든 다음, 상대방이 자기 얼굴을 내리치기 전에 그의 정수리를 구두 뒷굽으로 찍어 버리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 역시 사립탐정 허가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발생해서 나와 함께 외출을 하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가느다란 32구경 자동권총을 휴대했으며 --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경우에도 무섭도록 배짱이 좋았다. 그녀가 나를 위해 일한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녀에게 절대 딴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것은 그렇게 하기 싫어서였다기보다는, 그렇게 할 경우 싫어도 가정을 가져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벨더는 메모지를 들고 의자에 앉았다. 나는 낡은 회전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다음 창 쪽으로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벨더가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 책상 위에 내던졌다. "이건 전부 어젯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내가 모은 자료예요." 나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잭에 대해서 어떻게 안 거지? 패트는 나한테만 전화를 했을 텐데?" 벨더는 그 아름다운 얼굴 하나 가득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몇몇 신문기자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사실을 잊고 계신 모양이군요. 크로니클지(紙)의 톰 듀런이 소장님과 잭이 친구 사이라는 걸 알아내서는 이곳으로 전화를 걸었더군요. 무슨 특종감이라도 얻어낼 심산이었겠지만, 소장님이 마침 안 계셨기 때문에 반대로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내게 흘려줄 수밖에 없었죠 -- 그렇다고 뭐 미인계를 쓴 건 아녜요." 그리고는 생각난 듯 이렇게 덧붙였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한 자료의 대부분은 소장님 서류철에 정리해 두었어요. 그렇지만 별로 눈에 띄는 것은 없어요. 톰한테서 약간 자료를 얻었죠. 그는 그 사람들 중 두셋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니까요. 자료라고 해도 대부분이 인물조회라든가 사교계 기사뿐이지만, 확실한 것은 어제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과거에 잭과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란 거예요. 소장님도 그 사람들 중 몇몇에 대해서는 자주 내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나는 서류 봉투를 찢어 연 다음 안에서 나온 사진 한 묶음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벨더는 내 어깨넘어로 사진을 넘겨다보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첫번째 사진의 주인공은 헐 케인스예요. 업스테이트 대학의 의과대학생이죠. 23살 정도 됐으며, 키가 크고 선원같이 생겼죠? 머리를 그렇게 깎아서 그런지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다음 사진으로 넘어갔다. "이 두 사람은 쌍동이인데 벨레미 자매예요. 나이는 29살, 미혼이고, 현재 결혼상대를 물색중이며,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남부 어딘가에 있는 몇 군데 직물공장의 권리를 반반씩 나눠갖고 있다는군요." "그래." 내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얼굴은 예쁘지만 그리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지. 예전에 한번은 잭의 집에서, 또 한번은 디너 파티에서 이 두 여자와 만난 적이 있어." 그녀는 다음 사진을 가리켰다. 찌그러진 코를 가진 중년 남자의 신문사진이었다. 조지 칼레키. 이 남자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금주법으로 세상이 뒤숭숭했던 20년대에 주정밀매업자였었다. 그런데 주식의 폭락에 힘입어 백만 달러 정도를 손에 거머쥐더니, 정정당당히 소득세를 치르고는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했지만, 그래도 나한테만큼은 제법 다정한 척했었다. 이 남자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불법사업에 그저 심심풀이로 손을 대왔다. 그러나 놈의 꼬리를 잡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놈은 일류 변호사를 늘 고용하고 있어서, 막상 일이 터져도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결백을 입증시키면서 계속 못된 일을 저질러 왔던 것이다. "이 남자는 어때?" "소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헐 케인스는 그의 식객(食客)이죠. 그의 집은 웨스트체스터의, 마너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한 1킬로 정도 더 가면 나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잭이 헐에 대해 해준 얘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잭은 헐을 통해 조지와 알게 되었다. 헐은 나이가 많은 조지와 알게 된 이후로 줄곧 그와 친분관계를 맺어온 사람이다. 조지는 그를 대학에 입학시켜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그 이유는 나도 자세히 모르고 있다. 그 다음 사진은 전에 잭이 나한테 가르쳐 준 적이 있는, 완전한 이력(履歷)이 첨부되어 있는 마너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잭이 그녀의 마약중독을 치료해 주기 위해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켰을 때 병원에서 보내온 증상기록서와, 완전한 금단요법을 받았다는 상습마약복용환자의 구술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일단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병원에서는 환자들한테서 완전히 마약을 끊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환자는 죽든지, 아니면 치유되든지 둘 중의 어느 한 상태가 된다. 마너 역시 그런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마약의 입수경로만은 묻지 말라고 잭에게 미리 부탁하며 양해를 얻었다. 잭은 그녀를 무척 동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 생각이었고, 그런 그가 마약의 입수경로를 눈감아주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증상기록서를 펼쳐 보았다. 이름, 마너 데블린. 헤로인 중독에 의한 일시적 정신이상으로 인한 자살미수. 잭 윌리엄스 형사에 의해 시립병원 중환자실에 수용. 40년 3월 15일에 입원, 40년 9월 21일 완전 치유. 환자의 아편 함유 약물의 입수경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단서 없음. 40년 9월 30일 잭 윌리엄스 형사의 보호 아래 퇴원.이런 기록사항에 뒤이어 나는 치료일지도 대강 눈으로 훑어보았다. "자, 봐요. 소장님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으니까." 벨더는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녀가 끄집어낸 것은 멋진 금발머리 여자의 전신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사진은 해변가에서 찍은 것이었는데, 날씬한 몸에는 눈부시게 하얀 수영복을 차려입고 약간은 수심어린 눈빛으로 그녀는 서 있었다. 늘씬하고 탄력 있어 보이는 두 다리, 영화관계 전문가들이 멋진 몸매라고 생각하기에는 약간 살이 찐 편이지만, 그래도 실제로 보면 구미가 당기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의 몸매. 수영복 밑으로는 복부의 근육이 보였다. 여자치고는 아주 어깨가 넓은 편이고, 착 달라붙은 수영복의 천을 뚫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이 힘차게 솟아오른 풍만한 유방하며, 사진에서는 비록 희끄무레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어날 때부터 금발이었을 머리카락. 아, 사랑스러운 금발. 하지만 무엇보다 내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그 얼굴이었다. 이제까지 나는 벨더를 꽤 미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 여자와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못했다. 그만큼 이 여자는 미인이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나는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 뻔했다. "이 여자는 누구지?" "아무래도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그 음흉한 눈빛을 보니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서 말예요.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름은 샬롯 매닝, 파크 애버뉴에 사무실을 갖고 있는 아주 인기 있는 정신과 의사지요. 특히 화려한 차림의 손님이면 더욱 환영한다더군요." 나는 전화번호를 슬쩍 쳐다보았다. 이보다 더 탐정이란 직업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게 해주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그러나 벨더에게는 그런 내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내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간혹 벨더가 나와 결혼할 심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말을 입밖에 낼 그녀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내가 와이셔츠 칼라에 루즈를 묻힌 채 사무실에 얼굴을 내민 날에는 어김없이 1주일 동안 그녀는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는 것이다. 나는 책상 위에 그 서류 뭉치를 쌓아둔 채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벨더가 노트를 잡으려다 말고 앞으로 몸을 숙였다. "뭐 더 덧붙일 말은 없나요, 마이크?"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은 없어. 생각해 봐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는 너무 많은걸. 확실한 거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으니 말이야." "그럼, 동기는 어때요? 잭은 다른 사람들한테 원한을 살 사람이었나요?" "아니,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런 친구는 아니었어. 공명정대한 친구였지. 한번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서라면 상대가 누구든 봐주는 법이 없는 친구였다고. 그렇다고 무슨 중대한 일에 휘말린 적도 없는 친구였고." "혹시 무슨 중요한 물건이라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아니, 아무것도 없었어. 현장에도 뭘 뒤진 흔적은 전혀 없었고. 지갑에 3백 달러 정도가 들어 있긴 했지만, 그 지갑은 고스란히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지. 살인은 흉악한 사디스트에 의해 저질러진 게 분명해. 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권총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범인은 권총이 걸려 있는 의자를 천천히 뒤로 끌어당겼지. 그렇게 함으로써 총에 하복부를 맞은 잭이 한쪽 손으로 내장이 빠져 나오지 않도록 배를 움켜쥐고 온 방안을 기어다니게 한 거야." "마이크, 그만해요!"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꼼짝도 않고 의자에 앉은 채로 벽만을 노려보았다. 잭을 죽인 놈한테는 내 손으로 반드시 방아쇠를 당겨 주고야 말 테다. 그런 일에는 이제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감상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다. 그런 센티멘탈한 감상 따위는 맨 처음 권총을 쏘았던 순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 나는 선량한 사람들을 뜯어먹고 사는 거리의 진드기들을 상대로 싸워 왔다.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어떤 때는 그들은 정말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바보가 되고 만다. 살인범에 대한 법적인 제재? 흥, 그것은 살인자를 제멋대로 날뛰게 만드는 말의 도피구일 뿐이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는 선량한 사람들 스스로 정의를 갖게 되기 마련이다. 때로는 나 같은 사람을 통해 그들은 정의라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놈들은 세상을 상대로 횡포를 일삼고 있지만, 나는 놈들을 상대로 철권을 휘둘러 왔다. 그런데도 내가 미친 개 같은 그 악한들을 쏘아죽이면 세상은 나를 법정에 세워 내가 왜 그들을 죽이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밝히게 하고 쓸데없는 선서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내 과거 경력을 조사하고, 지문을 찍고,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질문을 퍼부어대는 것이다. 신문이란 신문은 온통 나를 살인광 탐정이라고 매도하고 떠들어대지만, 패트 첸버스가 나를 감싸주기 때문에 사실 그리 심한 압력은 받지 않고 있다. 더구나 그 신문쟁이들 역시 내가 온 힘을 다해 경찰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해결한 사건은 언제나 각 신문의 톱기사가 되곤 했다. 벨더가 석간신문을 몇 장 가지고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그 살인사건은 첫 페이지 전면을 온통 장식하고 있었고, 이어서 그 사건에 대한 상세한 기사가 4단 톱으로 취급되어 있었다. 벨더는 내 어깨넘어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그녀의 흥분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소장님이 가셔서 온통 소란을 피우셨군요! 여길 보세요!" 그녀는 마지막 한 절을 가리켰다. 기사는 이번 사건과 나와의 관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았는데, 벨더가 가리킨 것은 그 중에서도 내가 잭에게 한 약속을 요약해 놓은 것이었다. 그를 죽인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번 사건의 범인을 쏘아죽이겠다고 죽은 친구 앞에서 맹세한 나의 말. 나는 신문을 둘둘 말아 힘껏 벽에 집어던졌다. "제기랄! 이런 기사를 쓴 더러운 놈의 모가지를 내 부러뜨려 놓고 말겠어! 나는 진심으로 그 약속을 한 거야. 그 약속은 나한테는 아주 신성한 것이었다고. 그런데 그걸 조롱하다니! 틀림없이 패트가 나불댔을 거야. 의리없는 놈! 그 전화 이리 줘!" 벨더가 내 팔을 잡았다. "진정하세요. 소장님 말대로 패트가 그랬겠죠. 하지만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경찰이잖아요. 그리고 어쩌면 그 말이 범인을 소장님 쪽으로 유인해 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요. 소장님이 뒤쫓고 있다는 걸 범인이 알게 된다면, 그는 가만히 숨어만 있지 않고 대신 소장님을 습격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라고요. 만일 그렇게 되면 소장님이 범인을 더 쉽게 잡을 수도 있잖겠어요?" "고맙군." 나는 그녀한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순진해. 처음에 당신이 한 말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중에 한 말은 아무래도 께름칙해. 패트는 내가 이번 사건을 그렇게 휘저어놓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이 사건은 금방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설사 그 친구가 내가 범인을 잡도록 나를 놔둔다 해도 막상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면 나를 미행하고 있던 형사가 어디선가 뛰쳐나와 범인을 빼앗아 가고 말걸. 이 말은 당신 할머니의 브래지어를 걸고 맹세해도 좋아." "글쎄요, 마이크, 패트는 소장님이 민감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미행자를 붙인다면 소장님이 금방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그분,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글쎄, 과연 그럴까? 그 친구는 절대 바보가 아니라고. 결혼 서약서나 샌드위치를 걸어도 좋아. 만일 망보는 형사가 없다면 내 당신과 결혼하지. 어때? 그 친군 말야, 이 건물의 출입구란 출입구에는 온통 민완형사들을 쫙 깔아놓고 있을 거라고. 내가 밖으로 나간다 해도 절대 나를 놓치지 않을 민완형사들을 말야. 물론 그렇다고 따돌리지 못할 나도 아니지만. 하지만 따돌렸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라고. 따돌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형사가 다시 나타나곤 하니까." 벨더의 눈동자가 마치 활활 타는 횃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말, 진심이에요? 그 결혼서약서 내기 말예요. 만일 형사가 없다면 정말 나와 결혼하시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심이야. 어때? 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볼까?"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자기 코트를 집어들었다. 나는 구깃구깃한 낡은 펠트 모자를 썼다. 우리는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나 나오기 전에 나는 샬롯 매닝의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보이인 피트는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나를 보고 이빨을 다 드러낼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헤머 씨?"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쿡 찌르며 말했다. "무슨 뉴스거리라도 있나?" "뭐 별로 대단한 건 없어요. 하지만 아무리 일 때문이라 해도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기만 한다는 건 따분한 일이죠."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웰더는 벌써 내기에 진 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피트와 나 사이에 오고간 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대화는 사실 우리가 몇 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암호였다. 그의 대답은, 즉 내가 이 건물을 나서게 되면 미행당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주당 5달러씩을 그 대가로 주고 있긴 했지만, 역시 그만큼의 성과는 있었다. 피트는 나보다 훨씬 더 빨리 형사를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옛날에 소매치기를 하다가 허드슨 강 상류에 있는 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징역살이를 마친 뒤 그 세계에서 겨우 손을 씻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방향을 바꾸는 데 현관을 이용하기로 나는 마음먹었다. 그전에 미행자가 있는지 둘러보았지만, 미행자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간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피트 놈, 암호를 혼동했던 모양이로구나,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벨더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인적이 없는 로비를 가로질러갈 때의 그녀의 미소는 가히 볼 만했다. 그녀는 내 한쪽 팔을 꼭 끼고,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가까운 치안판사가 있는 곳으로 결혼서약서에 사인하러 나를 끌고 가려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내가 회전문을 빠져 나왔을 때 그녀의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행자가 막 우리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더는 얌전한 아가씨라면 감히 쓰지 못할, 질 나쁜 불량배들이 시멘트 벽에나 낙서해 놓을 듯한 천박한 욕을 내뱉었다. 그 형사는 꽤 영리한 친구였다. 우리로서는 그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더 빨리 걷고 있었으며, 손에 든 신문을 그 발걸음에 맞추어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이 남자는 먼저 창가에서 종려나무 잎 사이로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가, 우리가 나가는 문을 확인한 다음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모퉁이를 돌아 우리와 마주치게 걸어온 것일 게다. 설사 우리가 다른 길로 갔다 해도 다른 형사가 우리 뒤를 미행했으리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권총을 허리에서 벗겨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불행히도 어깨 밑에 숨겨 두었다는 것은 잊고 있는 모양이었다. 권총이란 걸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한테는 그것이 호박만한 혹으로 보이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내가 차고에 도착했을 때 그 남자의 모습은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맘만 먹는다면 그늘에 몸을 숨길 만한 문은 얼마든지 있는 터였다. 나는 그 남자를 찾는 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후진시켜 차고에서 나오자 웰더가 기운빠진 모습으로 내 옆에 올라탔다. "지금부터는 어디로 가실 건데요?" 그녀가 물었다. "식당이지. 당신이 샌드위치를 사줄 식당 말이야." 제 3 장 식사를 하고 나서 벨더를 그녀의 단골 미장원까지 데려다 준 다음 나는 북쪽의 웨스트체스터로 향했다. 내일까지는 조지 칼레키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샬롯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보니 그녀가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칼레키를 먼저 찾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샬롯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뒤였고, 응접실에 있는 흑인 하녀는 절대 집주소를 가르쳐 주지 말라는 그녀의 엄명을 받은 터였다. 그래서 나는 그 하녀에게 조만간 다시 전화하겠으며, 급히 만나고 싶다는 말을 그녀에게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여자를 아무래도 마음속에서 쫓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다리를. 그로부터 20분 뒤, 나는 에누리없이 적어도 25만 달러는 나갈 성싶은 저택 앞에 서서 현관 벨을 누르고 있었다. 무섭도록 격식을 차린 집사가 문을 열고 나를 맞았다. "칼레키 씨를 좀 -- " 내가 말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마이크 해머라고 하오. 사립탐정이지요." 나는 배지를 꺼내 보여주었지만 상대방은 전혀 무반응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칼레키 씨는 지금 몸이 몹시 불편하셔서요." 그가 말했다. 손을 비비고 있는 그 남자의 태도가 몹시 쌀쌀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 정도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래층으로 잠시 내려와 보는 것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텐데? 만일 그게 싫으시다면 내가 직접 올라가 뵙겠다고 전해 주시오. 내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오." 집사는 잠시 동안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더니 만일 더 이상 거절한다면 정말 내가 말대로 행동할 거라고 판단했는지 목례를 하며 내 모자를 받아들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해머 씨." 나는 굉장히 큰 서재로 안내되었다. 그곳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나는 조지 칼레키를 기다렸다. 그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문이 쾅 하고 열리며 내가 본 사진에서보다는 훨씬 더 건장해 보이는 회색 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말은 하지도 않았다. "방해받기 싫다고 우리 집 집사가 분명히 전했을 텐데? 그런데 왜 굳이 나를 만나자고 했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훅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언제나 인사가 그런 식이오, 두목?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당신도 대강은 알고 있을 텐데?" "아, 물론이지. 신문에서 읽었으니까. 그러나 당신한테 도움을 줄 만한 것은 없어. 살인사건이 벌어진 그 시간에 나는 집에 돌아와 자고 있었으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훌륭하게 증명할 수도 있단 말이야." "헐 케인스도 같이 돌아왔소?" "그래." "하인이 당신을 맞았소?" "아니. 나는 내 열쇠를 사용했지." "헐 이외에 당신이 집으로 온 걸 증명해 줄 사람이 있소?" "아마 없을걸. 하지만 그 친구 말이면 충분히 증명되는 것 아닌가?"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쏘아주었다. "당신들 둘 다 살인용의자라고 한다면 그건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 될 텐데도 말이오?" 그렇게 쏘아붙이자 칼레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나를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겁도 없이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그는 나에게 난폭하게 퍼부어댔다. "경찰은 그 살인사건과 나를 연관시키지 않았어! 잭 윌리엄스는 내가 그의 아파트에서 돌아온 몇 시간 뒤에 살해당했단 말이야!" 나는 한 발 앞으로 걸어나가 힘껏 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잘 들어두라고, 이 꼴도 보기 싫은 난쟁이 녀석아!" 나는 그의 얼굴에 침을 퉤 뱉었다. "네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주지. 경찰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냐 ! 너한테 혐의를 걸고 있는 사람은 나니까! 나는 일 처리 하나만은 분명한 사람이야. 누구든 죄를 지었다는 게 인정되기만 하면 그 녀석은 이미 내 손에 죽은 거나 다름없어. 설사 아무 증거가 없다 해도 그 녀석의 숨통은 끊어지게 될 거란 말이야. 사실 나한테는 아주 뚜렷한 증거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야. 그저 두세 가지 증거만 있으면 네놈들이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으니까. 그런 증거가 나오기만 하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테다! 너희들이 나를 해치려고 해도 아마 그보다 먼저 내가 너희들 같은 천하고 야비한 놈들을 한데 묶어 쏴 죽여 버릴걸. 그리고 그 중의 한 놈은 지금 내가 찾고 있는 놈이 될 테지. 설사 그 와중에 살아남은 놈들이 있다 해도 그놈들은 정말 질기게도 악운(惡運)이 따르는 놈들일 뿐이야.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두들겨패도 먼지만 잔뜩 나는 그런 녀석들일 테니까." 지난 20여 년간 이 남자를 상대로 이런 말을 퍼부어 댈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 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만일 그 순간 그가 무슨 대꾸든 했다면 아마 그의 이빨을 부러뜨려 그 목구멍 속으로 처넣고 말았을 것이다. 그를 보고 있자니 다시 가슴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만일을 위해서 머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얼마쯤 피할 여유를 둔 다음, 나는 그를 작은 탁자 쪽으로 난폭하게 떼밀었다. 순간 도자기 꽃병이 내 어깨 쪽으로 날아오더니 이내 산산히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재빨리 몸을 낮추며 뒤로 휙 돌았다. 주먹 하나가 머리 위로 날아왔지만 왼손으로 그걸 막았다. 나는 우물거리지 않았다. 낮게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펀치를 허공으로 빗나가게 한 다음 상대방의 턱 끝에 압도적이고도 가공할 만한 일격을 먹였다. 다음 순간 헐 케인스가 바닥에 푹 쓰러지더니 옴쭉달싹도 하지 않았다. "약삭빠른 녀석, 뒤에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다니! 아주 위세가 당당하던걸 그래. 하지만, 조지, 자네는 이놈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했어. 나하고 싸워 이길 승산이라고는 자네들이 기관총이라도 갖고 있을 때뿐이란 말야. 그런데 고작 이 따위 대학생 나부랭이에게 덤비게 하다니. 이렇게 이 방에 잔뜩 거울이 있는데도 어리석게도 내 뒤에서 쥐새끼 같은 짓을 하려고 덤볐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를 발견하고는 쓰러질 듯이 주저앉더니 증오심으로 치켜올라간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그때 만일 그가 권총을 갖고 있었다면 나도 권총을 잡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이 세상을 하직한 몸이 되었을 테지. 45구경 권총을 겨드랑이 밑에서 재빨리 빼드는 연습을 내가 얼마나 했는지 그자는 모를 테니까. 그 애송이 같은 케인스 놈이 몸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몸을 일으킬 때까지 구두코 끝으로 놈의 갈비뼈 언저리를 툭툭 차주었다. 녀석은 상당히 큰 충격을 받긴 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욕설을 퍼붓지 못할 정도로 기가 죽지는 않았다. "이런 치사한 녀석." 그가 으르렁거렸다. "더러운 속임수를 쓰다니. 어디 정정당당히 대들어 보란 말야!"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겨드랑이를 낀 다음 그를 번쩍 안아일으켰다. 그의 양눈 언저리가 부어올라 있었다. 이 녀석, 자기 상대가 아주 얌전하고 온순한 사람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그래. "잘 들어둬, 여드름. 네놈의 그 솝털이 보송보송한 턱주가리를 이 방 구석구석에 처박아 줄 참이었어. 순전히 재미로 말이야.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몸이 워낙 바쁘시단 말야. 착한 애는 어른을 놀리는 법이 아니야. 너도 덩치가 꽤 큰 편이긴 하다만, 나는 너보다 세 배는 더 크고, 또 훨씬 건장해. 만일 또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면 이번엔 두 눈이 다 튀어나오도록 만들어 줄 테다. 그러니 거기에 얌전히 앉아나 있어." 케인스는 소파 위를 몇 번 가볍게 툭툭 친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았다. 조지는 다시 한 번 깊이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말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 해머. 이건 너무 지나친 짓 아니야? 나도 시청에서는 제법 얼굴이 통하는 사람인데......" "오, 그래? 아, 잠깐."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폭행상해죄로 고발해서 내 허가증을 박탈이라도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그렇게 할 경우 내가 너를 붙잡았을 때 네 면상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쯤은 충분히 각오하고 계시겠지? 과거에 누군가가 네 콧잔등을 손봐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내가 손을 보게 되면 아마 그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 큰 입은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먼저, 그 파티는 몇 시쯤 끝났나?" "1시나 그보다 좀 지나서였을 거야." 퉁명스럽게 조지가 대답했다. 그것은 마너의 진술과 일치하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나서 어디로 갔나?"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헐의 차를 타고 곧장 집으로 왔어." "우리라니? 누구누구를 말하는 건가?" "헐, 마너, 그리고 나. 마너는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내려주었고. 그리고는 집에 도착해서 자동차를 차고에 넣은 다음 집안으로 들어왔어. 헐한테 물어봐. 그럼,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될 테니." 헐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속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꿰뚫어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이런 사건에 이렇게 깊게 휘말려든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어쨌든 살인사건이라는 건 그 누구나 꺼림칙한 법이다. 나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을 했지?" "우리는 하이볼을 한 잔씩 마신 다음 잠을 잤단 말이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이러는 거요?" 헐이 말했다.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누가 알겠나? 혹시 같이 잤는지 말야." 그러자 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삽시간에 새빨개졌다. 나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세게 밀어붙여 그를 소파 위에 주저앉혔다. "안 그랬다면 물론 -- "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안 그랬겠지. 그 대신 이렇게 했을 테니까. 즉, 너희들 중 어느 한 놈이 다시 차를 몰고 시내로 되돌아가서 잭을 해치운 뒤 아무도 몰래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온 거야. 그 정도의 여유는 충분히 있었을 테니까. 같이 잤다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할 맘만 먹었다면 충분히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 어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겠지? 만일 너희 두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뜯어고치는 게 몸에 이로울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뭐 나 혼자만은 아니니까 말이야. 아마 지금쯤은 패트 첸버스도 추리 끝에 그런 결론에 도달해 있을걸? 얼마 안 있으면 그 친구의 모습이 보이게 될 테니까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런데 두 분 중에서 어느 분이든 전기의자 쪽을 택하고 싶으시다면 일찌감치 패트한테 잡혀가서 그 친구한테 혼나는 게 훨씬 좋아. 그래야 적어도 재판 기간 동안만이라도 살아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누구야? 내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이?" 그 소리는 문 쪽에서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문으로 다가갔다. 패트 첸버스가 경감 계급장을 단 채 그 특유의 싱긋이 웃는 웃음을 띄우며 우람하게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 여기에서는 마침 자네가 대화의 주제가 되고 있는 중이었지." 그러자 조지 칼레키가 푹신푹신한 쿠션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패트 쪽으로 다가갔다. 좀전의 몸에 밴 그 허세가 다시 나타나 있었다. "경감, 나는 지금 당장 이 남자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오." 그는 위세당당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 남자는 내 집에 불법으로 침입한 데다가, 나와 내 손님을 모욕하기까지 했소. 저 사람 턱에 난 상처를 보시오. 자, 자네가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 어서 말하게나, 헐." 헐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와 한 3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 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자세로 우뚝 서 있는 패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번개처럼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잭도 과거에 경찰이었으며, 그런 잭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자기가 경찰을 죽이지만 않았다면 이 자리는 어떻게 용케 모면해 볼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가 말했다. "이 자식! 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쟁이 놈아!" 칼레키가 그에게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자식아, 솔직히 말해! 이놈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협박했는지 다 털어놓으란 말야! 왜 벌벌 떨고 있기만 하는 거야! 이 야비한 엉터리 탐정 놈이 그렇게도 무서워?" "그게 아니야, 조지."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친구가 무서워하는 건 바로 이거라고." 90 킬로나 나가는 온 중량을 싣고 나는 조지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내 주먹이 상대의 뱃속으로 손목까지 푹 들어갔다. 그는 금방 허파라도 토해낼 듯 푹 쓰러지더니, 얼굴빛이 점점 보라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헐은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순간 나는 그의 부어오른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이 떠오르는 걸 확실히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패트의 팔을 잡았다. "안 가겠나?" 내가 그에게 물었다. "가야지. 이곳에는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것 같으니까." 밖에는 패트의 자동차가 베란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올라타자 패트는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저택을 한 바퀴 빙 돈 다음 간선도로로 나가는 자갈로 된 드라이브웨이(저택 정문에서 현관까지 이어지는 차도)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 다음 시내로 향했다. 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 그곳에 도청장치는 해놓고 왔나?" 그는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래. 자네가 한창 설교를 늘어놓고 있는 동안 내내 문 밖에 있었지. 자네도 나와 똑같은 걸 계획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말일세." 내가 덧붙였다. "부디 내가 일부러 소란을 피우고 다닌다고는 생각지 말게나. 알겠나? 나는 자네 명령을 받고 나를 죽 미행하는 친구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네. 그 형사는 어떻게 됐나? 내가 차를 세워두고 온 정문이나, 아니면 주유소에서 전화로 연락이라도 하던가?" "주유소에서 했더군." 그가 대답했다. "그 친구는 자네가 왜 차를 놔두고 걸어들어갔는지 이유를 몰랐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 지시를 받으려고 한 거지. 그런데 자네는 칼레키 저택까지 왜 2.5 킬로나 걸어갔나?" "그게 훨씬 편했으니까. 패트, 칼레키는 틀림없이 신문을 보고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다면 설사 내가 찾아간다 해도 정문에서 쫓겨날 게 뻔한 일 아닌가. 그래서 담을 뛰어넘어 들어간 거지. 자, 어느새 주유소에 닿았군. 세워주게." 패트는 도로를 벗어나 석탄재를 깔아놓은 드라이브웨이로 차를 몰아넣었다. 내 차는 아직도 모르타르를 칠한 집 옆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차 안에 앉아 졸고 있는 회색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를 가리켰다. "자, 보게. 자네 부하인 미행자일세. 아무래도 깨우는 게 좋을 것 같군." 패트는 차에서 내려 그 형사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그 남자는 눈을 번쩍 뜨더니 멋쩍은 듯 씩 웃었다. 패트는 몸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봐, 저 친구는 벌써 자네가 뒤쫓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아무래도 이번에는 방법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군." 그 형사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절 눈치챘다고요? 설마, 농담이시겠죠. 저쪽에서는 그런 눈치를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요." "이런 멍청한 친구야." 내가 말했다. "자네 권총이 허물이 벗겨진 엄지손가락처럼 자네 뒷호주머니에서 삐죽 나와 있단 말이야. 나도 옛날에 사람을 미행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지." 나는 내 차에 올라타고 방향을 바꿨다. 패트가 차창으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이렇게 물었다. "끝내 자네는 자네대로 수사를 해나갈 생각인가, 마이크?" 이런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게 가장 좋은 대답이다. "물론이지. 그 밖에 물어볼 말이 또 있나?" "그렇다면 일단 내 담당구역으로 함께 가는 게 어떻겠나? 자네가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이 있는데." 그는 순찰차에 올라타더니 석탄재로 된 드라이브웨이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해 들어갔다. 나를 미행했던 형사가 패트의 뒤를 따랐고, 그 뒤를 내가 따라갔다. 이제까지 패트와 나는 서로 무승부였던 셈이다. 그는 범인을 잡을 미끼로 나를 이용하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파리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송어를 미끼로 삼은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한테만 의존하고 있다가 범죄수사를 따분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만들지야 않겠지. 그러나 그의 의도가 내가 궁지에 몰리는 걸 막아주려는 데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혐의를 두고 있는 용의자를 손쉽게 나한테 넘겨주지 않으려는 데 있는 건지 아직은 불분명했다. 아직까지는 이번 사건의 수사가 그리 큰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신문기사도 그리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살인자를 그렇게 쉽사리 체포하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다. 이번 사건에서 방아쇠를 당긴 놈이 어떤 녀석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머리가 아주 좋은 놈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정말 무섭도록. 만일 그 녀석의 정신상태가 올바르다면 나에 대해 미리 생각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설사 이번 사건이 늘상 일어나다시피 하는 그런 흔해 빠진 사건이었다 해도 범인은 하다못해 경찰의 추궁쯤은 미리 고려해 두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과거 경관이었던 남자가 살해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사정이 훨씬 복잡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은 자신있게 확신할 수 있었다. 즉, 이번 사건에 어떤 식으로 관계된 사람이건 내가 그 사람들을 모두 조사하고 나면 범인은 틀림없이 내 이름을 살해되어야 할 사람들의 명단에 올릴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과는 달리 칼레키나 케인스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동기 역시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둘 다 잭을 해치울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었다. 조지 칼레키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지금도 암흑가의 조직을 조종하고 있는사람 중 한 명인 것이다. 거기에 뭔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헐이 등장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또 다른 가능성이 발견될 수도 있다. 어떤 의미로든 그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모르며,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가 그들과 어떤 관계든 맺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느낌을 뒷받침해 주는 그럴듯한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사연을 알아내기만 해도 좋을 텐데. 내 생각은 아무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그저 일반적 상황의 주변만을 맴돌고 있었다. 패트는 다른 경관들과는 달리 사이렌을 울리지 않은 채 시가지를 통과한 뒤, 그로부터 얼마 후 그가 근무하고 있는 지서(支署) 앞 도로에 차를 멈췄다. 2층에서 그는 자기 책상의 맨 밑서랍을 열더니 런치 박스에서 1파인트짜리 버번 위스키를 꺼냈다. 그러더니 나한테 위스키가 담긴 커다란 유리잔을 건네주고는 자기 잔에도 위스키를 따랐다. 나는 그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한 잔 더 하겠나?" "아니, 괜찮네. 그보다는 정보를 주게. 나한테 해줄 얘기라는 게 뭔가?" 그는 빙그르르 몸을 돌리더니 서류철들을 넣어두는 캐비닛 쪽으로 걸어가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는 그 서류철의 분류표를 보았다. 거기에는 '마너 데블린'이라고 적혀 있었다. 패트는 의자에 앉아서 그 서류철을 펼쳤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그녀의 경력조사서류는 내가 탄복할 만큼 완벽했다. 그 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물론이고, 미처 모르고 있는 것들까지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무슨 단서라도 있는 건가?" 나는 그가 무엇인가를 쥐고 있다는 걸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마너를 이번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건 전혀 번지수가 틀린 일인데?" "물론 그럴 수도 있을 테지. 그러나 말일세, 마이크, 잭이 브루클린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려는 마너를 검문하던 당시, 그 친구는 다른 마약사범을 다룰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다루었네. 그 즉시 그녀를 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시켰으니까." 패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지금 비록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그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아차렸다. "그 친구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 이후로도 계속 그녀와 만났기 때문이었어. 그 친구는 그 사랑에 대해 제삼자가 보기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했지. 그는 미처 그녀의 좋은 면을 보기도 전에 그녀의 나쁜 면을 싫도록 보았으니까, 잭이 그 당시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때가 아닌 다른 때 그녀를 만났더라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걸세." "찬성할 수 없는걸, 자네의 그 생각에는. 잭과 마찬가지로 나도 마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네. 만일 자네가 그녀에 대해 전기의자에 앉아야 할 제일 첫번째 후보자니 뭐니 하고 신문에 대고 떠들어댄다면 아무리 자네와 나 사이라 하더라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겠네." "옆길로 새지 말게, 마이크. 그 밖에 다른 것이 또 있으니까. 석방된 뒤 그녀는 잭에게 마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네. 잭도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 애긴 나도 알고 있는 일일세."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날 밤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니까." "비록 잭은 그 이후 그녀에 대해 완전히 조사를 중단해 버리긴 했지만, 그것이 전체적인 상황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네. 마약과 관련된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독립된 수사기관의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지. 결국 사건은 마약사범을 적발하는 사태로까지 확대되었네. 그러나 마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걸세.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말일세. 그래서 마약 기운이 떨어졌을 때 그 괴로움에 못 이겨 그녀는 다 털어놓고 말았네. 우리는 그녀가 털어놓은 말을 그대로 다 속기해 두었는데, 정말 엄청나게 많더군. 마약과(麻藥課)는 그녀의 말에 따라 시 주변에 숨어 있는 밀매업자들을 파헤쳐 검거할 수가 있었지. 그러나 경찰이 기습을 감행할 당시 총격전이 발생했었는데, 그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동안 경찰에 비밀을 팔아 넘겼다고 생각된 일당 중의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살해됐어. 그것으로 마약범 추적의 손길은 끊어져 버리고 말았지."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걸, 패트." "물론 그렇겠지. 그 당시 자네는 육군에 복무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밀매업자들을 찾아내는 일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네. 거의 1년이나 걸렸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추적 수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네. 밀매업자는 주(州)로 주(州)에서 연락을 취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직 경찰관까지도 매수해서 자기들 편으로 끌어넣었네. 그들은 마너의 경력을 조사한 뒤에 마너를 이용했던 걸세. 그녀는 쇼에 출연하고 싶은 욕망 하나로 뉴욕까지 올라온 시골 아가씨였네. 그런데 운이 없게도 좋지 못한 장사에 가담하게 되었고, 같은 하숙집에 살고 있었던 어떤 사람한테서 현품을 건네받기까지 되었던 거지. 그녀의 연락을 맡고 있는 연락책 남자는 겉으로는 경마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마약 거래에는 소포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네. 그 남자의 배후인물은 지금 허드슨 강 상류 아시닝의 조그만 별장(싱싱 형무소의 별명)에 틀어박혀 있는 정치 브로커였네. 그 밀매업자의 우두머리는 약삭빠르고 빈틈없는 솜씨를 지닌 자였어. 그자를 본 사람도, 알고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을 정도니까. 거래는 대부분 우편으로 이루어졌네. 마약은 아주 그럴듯하게 위장되어 우체국의 사서함으로 보내졌지. 그 사서함에는 각각 송금번호가 하나씩 달려 있더군. 그건 곧 다른 지역에도 그런 사서함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나는 그의 이야기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패트는 내 쪽으로 돌아서서는,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우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잠깐, 지금 자네 얘기엔 좀 석연치 못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패트. 얘기 전체가 말도 안된단 말일세. 우선 그런 물건을 거래하는 데 있어서는 현금 선불이 보통이네. 그 방면의 전문가들은 상당한 양의 마약을 교묘하게 처분해서, 어찌되었든 큰 돈을 한번 벌어 보려는 속셈을 갖고 있는 법이니까." 패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옳아. 우리가 지금 골머리를 썩고 있는 문제도 바로 그것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약이 가득 담겨진 상자가 포장된 채 어느 우체국 사서함 속에 고이 들어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보통 솜씨는 아닐세. 물건은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납품되어 오고 있으니까. 발송인의 주소는 제각기 다르게 말일세. 수취인이 버리지 않은 낡은 포장지를 몇 개인가 입수했는데, 같은 지역의 소인이 찍혀 있는 건 하나도 없더군." "대규모 밀매업자라면 그 정도의 손을 쓰는 것쯤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닐걸." "확실히 놈들한테는 그런 일이 조금도 어려운 게 아니야. 우리는 물건을 보내오는 모든 도시에 형사를 파견해서 그곳을 이잡듯이 조사해 보았다네. 그러나 떠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어쩔 수 없이 낡은 수법이긴 하지만, 화물 조사에 착수해 보았네. 버스 노선이나 철도가 시내를 통과하니까 여행자로 가장한 누군가가 도중에 그 소포를 부쳤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말일세. 그런데 이번에는 모든 장소가 다 한 번씩은 사용된 걸로 밝혀졌단 말이야. 이렇게 됐으니 이제는 그 소포를 보내오는 곳이 어디인지 그것조차 불분명해지고만 걸세." "그 얘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는군. 그럼, 마지막으로 물어보겠는데, 그 밀매업자를 검거하고 난 뒤에 무슨 또 다른 출처를 알아내지는 못했나?" "몇 군데 알아낸 곳이 있긴 했지. 그러나 그 밀매업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었네. 대부분 마약의 양이 소량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도 어떤 병원에서 사환으로 일하는 사람이 몰래 재고품에서 얼마간을 빼내 딴 사람들한테 판 것이니까." "그래서 자네는 마너가 이번 사건과 관계된 부분을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거군 그래. 아무튼 나한테 정보를 제공해 주어서 고맙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암중모색에 불과하네. 자네가 내게 알려준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자료에 있는 것들이니까 말이야." 패트는 꼼짝도 않고 다만 무엇인가를 살피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가늘어졌다. 나는 그런 그의 표정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겠나?"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혹시라도 잭의 직업이 경관이었기 때문에 마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나? 잭은 깡패나 불량배들도 싫어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가장 싫어한 사람들은 마너와 같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그런 인물들이었으니까 말일세."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즉,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단 말이지. 그 친구는 처음부터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네. 우리한테는 뭔가를 숨긴 채 말일세. 아니면 우리가 모르고 있는 뭔가를 마너한테서 알아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것을 그 친구가 적당치 못한 시기에 입에 올린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 친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겁이 난 누군가가 그 친구를 해치웠을 거야." 나는 하품을 했다. 정말 패트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추리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보게나, 지금 자네가 한 설명은 온통 뒤죽박죽일세. 내가 하나 가르쳐 주지. 우선 첫째로 살인행위를 분류해 보게나. 종류는 몇 가지밖에 없네. 전쟁, 치정, 자기방어, 정신이상, 물욕(物慾), 그리고 안락사 정도지. 그 밖에 다른 것도 있지만 대강은 그 정도라고.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잭이 살해된 유형은 강도의 짓이거나 아니면 자기방어, 이 둘 중의 어느 하나일 것 같네. 잭이 누군가의 꼬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걸세. 그 친구는 처음부터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리고 문득 그것의 중대성에 생각이 미쳤겠지. 아니면 최근에 이르러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던지. 불구자가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험회사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해도 그 친구가 사건을 수사하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일 아닌가. 그가 잡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 그것을 처리하려고 했던 게 분명하네. 그래서 자네한테 알리지도 않았을 거고 말일세. 범인은 잭이 갖고 있는 것을 손에 넣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몰렸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기 위해 그를 살해한 걸세. 그런데, 자네, 현장검증은 했을 테지?" 패트는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 손댄 흔적이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 "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가령 말일세, 이 얘기가 어떻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잭이 그 방 이외의 곳에는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번 사건은 결국 강도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네. 범인은 그것 때문에 자신의 비밀이 폭로되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급소를 잭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걸세. 그리고 자기가 살기 위해 잭을 해치웠지. 다시 말해 그의 범행은 자기방어였던 셈이네." 나는 책상에서 낡고 꾸깃꾸깃한 모자를 집어들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 지쳤네. 이곳에서 이러고 있다고 뭐 비용이 나올 것도 아니고 월급을 받을 것도 아닌데, 계속 이렇게 어정거리고 있을 수야 없지. 아무튼 도와줘서 고맙네. 무슨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자네한테 알려 주겠네." "그게 언제쯤이나 될까?" 미소를 지으며 패트가 말했다. "아마 자네가 조바심이 나서 안절부절못할 때쯤이 되겠지." 나는 그를 흘끗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어 담배 한 개비를 빼내어 문 뒤에, 패트에게 작별인사를 대신해서 손을 흔들어 주고 방을 나왔다. 나를 미행하도록 명령받은 형사는 대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다른 형사들 틈에 섞인 채 가능한 한 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순간 나는 벽돌담의 움푹 들어간 곳에 몸을 바싹 붙였다. 예상대로 그 형사는 밖으로 나와서는 걸음을 멈추고 핏발 선 눈으로 도로의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살그머니 그의 뒤로 가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쳤다. "혹시 성냥 있소?" 입에 문 담배를 손가락 끝으로 퉁기며 내가 물었다. 그는 라이터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 주었다. "순경과 도둑의 쫓고 쫓기는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소?" 내가 말했다. "대신 우리 같이 가기로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대답이 궁색했던지 그는 그저, "좋습니다." 라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내 귀에는 으르렁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우리는 내 차가 있는 곳으로 함께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가 옆자리에 타자 나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 녀석하고 타협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상대방은 전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큰 도로로 나서자 나는 작은 호텔이 보이는 보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호텔 앞에 차를 세워두고, 뒤에 미행자를 거느린 채 호텔의 회전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내가 들어간 회전문을 그대로 회전시켜 다시 밖으로 나온 다음, 회전문을 다시 한 번 더 회전시켰다. 그렇게 되자 그 형사는 그대로 회전문 저쪽에 갇히게 되었다. 나는 몸을 굽히고서 자동차 차창에서 벗겨내 온 고무쐐기를 회전문 밑에 쑤셔넣어 문의 회전을 멈추게 한 다음, 자동차로 되돌아왔다. 회전문 저쪽에서는 형사가 회전문의 유리창을 두들겨 대면서 갖은 욕을 다 퍼부어대고 있었다. 내 뒤를 다시 뒤쫓아오기 위해서는 뒷문을 통해 일단 밖으로 나온 뒤 도로를 한 바퀴 빙 돌아봐야만 할 것이다. 나는 프런트에 서 있는 남자가 빙긋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그런 우스꽝스런 짓을 위해 이 호텔을 이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내 중심가로 차를 몰고 갈 때 차창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렸기 때문에 다시 미행을 당할 때를 위해 앞으로는 아무래도 고무쐐기를 좀 여유 있게 갖고 다녀야겠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 4 장 대기실은 초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고, 실내장식도 아주 잘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모가 나 있는 의자가 실제로는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내를 장식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환자의 기분을 안정시킨다는 취지는 잘 고려해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방의 벽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올리브색으로 단장되어 있었는데, 그 빛깔이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한 쌍의 벽걸이와 그렇게 잘 조화될 수가 없었다. 창문이 햇빛을 차단하고 있는 대신, 벽에 직접 박아놓은 갓 달린 전구에서 부드러운 느낌의 백열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닥에 깔아놓은 푹신한 양탄자는 발걸음 소리가 전혀 나지 않게 해주었다. 어디에선가 현악4중주의 선율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내가 찾아왔다는 걸 전화로 알리던 비서가 책상 안쪽에서 이리 오라는 손짓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는 일찌감치 내가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아무튼 만 하루 동안 면도를 하지 않은데다가 양복까지 꾸깃꾸깃 구겨져 있었으므로 그녀의 눈에 내가 수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비치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서는 뒤에 있는 문 쪽을 머리로 가리키며 말했다. "매닝 선생님께서 만나시겠답니다. 저쪽으로 들어가세요." 내가 그녀의 옆을 지나칠 즈음 특히 '가세요'라는 말에 힘을 주며 그녀가 약간 몸을 도사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내뱉었다.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이것은 그냥 한번 해본 변장일 뿐이오." 나는 문을 힘껏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나았다. 그야말로 달게 무르익었다는 느낌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녀의 모든 부분이 도저히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했다. 샬롯 매닝은 책상 앞에 앉아서 마치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라도 한 듯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깍지를 끼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뭐라 하면 좋을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가 자기만의 독특한 기교를 다해 걸작을 그렸다고 했을 때, 그 그림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여자라고 해야 좋을까 ? 머리카락은 내가 상상했던 대로 거의 은빛이었다. 그것은 그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로 구불구불하고 부드럽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눈과 코는 어느 면으로 보나 아주 훌륭하게 균형이 잡혀 있었다. 매끄러운 이마는 생기있는 담갈색의 두 눈 사이로 녹아들었으며, 두 눈은 자연 그대로의 조화를 이룬 곡선으로 그려져 있는 갈색 눈썹에 감싸여 있었고, 그 밑으로 길고 촉촉한 속눈썹이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검은 드레스는 긴 소매가 달린 진찰복이었는데 그 옷은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는데,거기에서 보다 순결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유방은 수영복을 입고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겉에 입고 있는 드레스와 용감히 맞서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책상이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그녀 몸매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나 혼자의 상상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방을 가로질러가는 데 소요된 단 3초 동안에 내가 본 것들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표정에서 뭔가 변화를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하고 속으로 뜨끔했지만, 만일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어쩌면 나를 고소하겠다고 덤벼들지도 모를 일이다. "어서 오세요, 해머 씨.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그만치의 거리낌도 없었다. 그 목소리에 정열만 조금 담겨 있다면 이 세상에서 그녀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가 왜 정신과 의사로서 그렇게 인기를 끌고 있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그녀는 누구든지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할 만한 그런 여자였다. 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그녀는 앉아 있던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다정한 눈길로 재빨리 내 시선을 받았다. "경찰과 관계된 일로 오셨다고요?" "아니,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사립탐정이니까요." "아, 그러시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런 경우 흔히 있을 수 있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이나 호기심 따위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 쪽에서 그녀의 질문에 대해 적절한 말로 대답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윌리엄스 씨의 사망에 관한 일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어느 정도는요. 그는 내 친구였으니까. 이를 테면 내 나름대로 행하는 개인적인 조사라고나 할까요. 그 비슷한 것이지요." 처음에는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 맞아요. 신문에서 당신이 했다던 말을 읽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하게 된 근거를 분석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요. 나는 항상 그런 일에 아주 흥미를 갖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나요?" 샬롯의 말은 나를 꽤 놀라게 했다. "당신 입장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어요. 물론 나보다 고명하신 교수님들은,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아시게 된다면 틀림없이 나를 비난할 테지만 말예요." 그녀의 말뜻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즉,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그 살인 동기가 어디 있든간에 살인을 저지르는 그 순간만큼은 틀림없이 정신이상의 희생자였을 거라고 믿고 있는 심리학상의 학파(學派)가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나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우선, 그날 밤 파티에는 몇 시에 가셨습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11시경일 거예요. 환자를 왕진해야 했기 때문에 늦어진 거죠." "돌아온 시간은 몇 시였습니까?" "새벽 1시를 넘어서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돌아왔지요." "그런데 도중에 들른 곳은 어디어디였습니까?" "아래층에 차를 세워두었었지요. 에스터와 메어리, 벨레미 자매가 나와 함께 차에 탔었습니다. '치킨 바'에 들러 샌드위치를 먹고 1시 45분에 그곳을 나왔어요. 그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상점에는 그때 손님이 우리밖에 없어서 상점 주인은 2시에 문을 닫으려고 했기 때문이죠. 나는 그 쌍동이 자매를 호텔까지 태워다 준 다음 곧장 아파트로 차를 몰아 2시 15분에는 아파트에 도착했어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자명종 시계의 태엽을 감아 주어야만 했기 때문이었어요." "당신이 아파트에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까?" 샬롯은 얼굴에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런 미소를 살포시 지었다. "물론이죠, 지방검사님. 우리 집 하녀랍니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내 침실문을 열어 주었죠. 만일 내가 다시 내 침실 밖으로 나왔다면 틀림없이 그녀도 알았을 거예요. 내 방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다가 차임벨까지 달려 있어서 문을 열면 언제나 벨소리가 울리게 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캐시는 정말 귀가 밝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싱긋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패트 첸버스 경감이 벌써 당신을 만나러 왔었습니까?" "예, 오늘 아침, 그것도 아주 이른 시간에요." 그녀는 또 웃었다. 그녀가 그런 웃음소리를 낼 때마다 나는 온몸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그녀의 태도, 거동 하나하나가 모두 성적 매력을 담뿍 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분은, 이를테면 -- "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완전히 왔노라, 보았노라, 의심했노라(시저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흉내낸 것)예요. 아마 지금쯤은 틀림없이 내가 한 진술을 검토하고 있을걸요." '패트는 일단 조사를 시작했다 하면 끝까지 철저하게 파고 드는 성격이니까.' 나는 혼자 속으로 멍하니 생각했다. "나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아뇨, 아무 말도 않던걸요. 정말 무섭도록 철저한 유형의 사람이더군요. 마치 능률의 화신같이. 난 그런 사람이 좋아요."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이 잭 윌리엄스와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그것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겠는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너가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 거라면 그건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이렇게 찾아온 거니까요." 그녀는 그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잭이 마너와 관계된 지난날의 사건 전모에 대한 일은 가능한 한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되었던 거예요. 그는 전문의의 권유에 따라 내게 와서 마너를 좀 진찰해 줄 수 없겠느냐고 하더군요. 그 당시 마너는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에 있었어요. 마약상습자들에게 있어서 그 사람들의 용어로 이른바 콜드 터키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마 당신은 도저히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콜드 터키란 것은 마약환자들이 모르핀 물질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금단 상태에 놓여 있을 때의 환자의 정신적인 긴장이란 아주 무서운 것이죠. 환자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되고, 그의 육체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답니다. 그야말로 고문이죠. 극도로 쇠약해진 신경계통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며, 그 고통은 어느 누구도 진정시켜 줄 수 없습니다. 이건 실제로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한데, 마약환자들은 광기를 일으킬 때의 발작으로 인해 종종 폐인이 되기도 하지요. 마약의 해독치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일단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되면 환자는 외부와의 교섭을 일체 끊은 채 격리병동에 수용되게 되지요. 치료 초기에는 환자의 독물에 대한 욕구가 강해져 마약을 구걸하게 되지만, 후기가 되면 고통과 긴장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높아지기 때문에 환자가 이 시기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이성을 잃게 된답니다. 그 동안 환자의 육체는 마약의 영향과 계속 싸우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완전치유가 되든지, 아니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로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마너는 그것을 잘 견뎌냈죠. 잭은 그것이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걱정이 돼서 나를 찾아왔었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녀가 치료를 받고 있을 때도, 또 완전히 치유가 된 뒤에도 계속 그녀를 돌봐 왔죠. 그렇지만 그녀가 퇴원한 뒤에는 직업적인 일로 그녀와 마주앉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예, 좋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당신과 몇 가지 더 얘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만, 그러나 지금은 좀더 검토를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또다시 아까의 그 미소를 지었다. 만일 한 번만 더 그렇게 웃는다면 아마도 그녀는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과 키스를 한다는 게 어떤 거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의 말이 내가 한 증언의 시간적인 요소 -- 이를 테면 알리바이라고 해도 좋겠죠 -- 를 뜻하는 것이라면 하녀가 주말에 한 번씩 하는 쇼핑을 나가기 전에 재빨리 내 아파트로 달려가 그녀를 만나보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여자는 마치 두들기면 금방 소리가 울려 나오는 북처럼 척척 대답을 해대는 것이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그것은 상당히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그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모자를 집어들고 말았다. "어떤 의미로는 그렇습니다. 어쨌든 나는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지요." 샬롯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녀의 두 다리를 보여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그 우정이란 것에 훨씬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쪽 팔을 잃어버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내가 대답했다. 의심스러운 듯 그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러면 당신은 그의 친구였었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헐떡임에 가까웠다.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걸 알게 되어 다행이네요. 저, 잭한테서 당신 얘기는 상당히 많이 들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걸 3인칭으로만 얘기했어요. 그의 팔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해 준 적이 없답니다. 하지만 마너가 나중에 그가 한쪽 팔을 잃게 된 경위를 얘기해 주었죠." "잭은 내가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번 사건의 범인을 해치우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 중의 일부분은 내가 그 친구에게 갖고 있는 미안함이 차지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 친구는 팔 하나를 잃기 전부터 나와는 친구 사이였지요." "정말 당신이 범인을 체포하게 되면 좋겠어요." 진지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정말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겁니다." 내가 말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얼마 뒤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겠지요." 그때 그녀는 마치 방금 호흡이 멈춰진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럴 날이 있겠지요." 하고 말했다. 나는 아파트 입구에 달려 있는 관 뚜껑처럼 생긴 푸른색의 해가리개가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 수수한 제복을 차려입은 도어맨이 입도 삐죽이지 않고 별로 귀찮은 내색도 없이 내 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바깥쪽에 있는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초인종 위에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알루미늄으로 된 문패가 달려 있었다. 거기에는 '매닝 샬롯'이라고 새겨져 있을 뿐, 그 밑에 흔히 개업의사들이 달고 다니기 좋아하는 직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너절너절하게 직함을 적어서 늘어놓기 좋아하는 녀석들은 틀림없이 모두 문자 컴플렉스에 걸려 있을 거야.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 소리가 나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4층의 도로 쪽에 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방에 살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를 들은 흰 옷차림의 흑인 하녀가 손님을 맞으러 나왔다. "해머 씨인가요?"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그렇소만,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소?" "요 앞방에서 경관들이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어서 들어오세요." 창가의 의자에 누워 자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패트였다. "잘 지냈나, 마이크?" 그가 말했다. 나는 작은 탁자 위로 모자를 던진 다음 그 옆의 쿠션이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슨 단서라도 잡은 건가, 패트?" "그 여자의 진술을 검토해 보는 일은 다 끝났네. 마침 그 시간에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네. 하녀 역시 그녀의 말을 입증해 주었고." 그의 말을 듣고 이때만은 나도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네가 이곳에 올 줄 알았지. 그래서 자네가 나타날 때까지 순찰차를 세워둔 거야. 그런데 말일세, 나는 자네가 내 명령에 따라 자네를 미행하고 있는 형사들을 좀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네." "사랑해 주라고?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말게. 오히려 나는 자네가 그 친구들이 더 이상 나를 쫓아다니지 않도록 해주면 고맙겠네. 내 뒤를 쫓아다니지 말든지, 아니면 전문가답게 미행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라고." "그게 다 자네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란 말일세, 마이크." "어리석은 소리 말게, 패트. 자네는 나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나. 나는 내 자신의 신변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남의 손을 빌리기 싫어." 패트는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눈을 감았다. 나는 방을 대강 둘러보았다. 그녀의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집 역시 샬롯 매닝의 고상한 취미를 살려 정갈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 방안에는 뭔가가 스며들고 있는 듯한,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틀이 잡혀 있었다. 집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반드시 커야 될 이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녀 한 사람하고만 살고 있었으니까. 방이 세 개 정도면 알맞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벽에는 멋진 그림이 몇 장 걸려 있었고, 책들은 부문별 종류별로 책장 하나 가득 꽂혀 있었다. 책장 하나를 유심히 살펴보니 거기에는 완전히 심리학에 관한 책들만이 꽂혀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액자에 넣은 증명서가 그 방의 유일한 장식물이었다. 넓은 복도는 거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침실과 그 반대편의 욕실이 달린 주방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현관 옆에는 하녀의 방이 있었다. 이 방의 색조는 그녀의 사무실 색조와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색조가 아니라 단지 그 아름다운 이 집의 주인에게 더욱 화사함과 밝음을 더해 주기 위한 색조로만 꾸며져 있었다. 내가 점령하고 앉아 있는 소파의 맞은편에는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잠시 기분이 좀 묘해졌지만 이내 그런 기분은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늑대 같은 짓을 할 때가 아니지, 아직은. 나는 발끝으로 패트를 쿡 찔렀다. "그만 자, 이 친구야. 지금은 중요한 시기란 말야." 깜박 잠이 들었던 그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자네한테 이곳을 살펴볼 시간적 여유를 주려던 것뿐이었네. 그러면 이제 슬슬 이곳에서 나가 볼까?" 우리가 밖으로 나가려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하녀인 캐시가 허겁지겁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우리를 전송하기 위해 문을 열자 샬롯의 말대로 벨소리가 울렸다. "초인종을 눌러도 이 벨소리가 나오?" 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 문을 열 때도 나고요." "어째서 이런 장치를 해놓은 거요?" "그거야 제가 집에 없을 때면 샬롯 양이 손님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아가씨가 암실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이 벨소리가 울리게 되면 아가씨가 나와 현관문을 열어 주거든요. 그러나 손님이 오셔서 직접 이 방으로 들어오셔도 아가씨는 알게 되시지요. 만일 아가씨가 암실에서 작업을 하고 계신 중이라면 아무리 벨이 울려도 문 밖으로 나오실 수가 없으니까요." 패트와 나는 서로 쳐다보았다. "암실이라니, 그게 뭐하는 곳이오?" 나는 정말로 그게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자 캐시는 마치 총알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그것도 모르시나요? 그곳은 아가씨가 필름으로 사진을 만드는 곳이지요." 그녀가 대답했다. 패트와 나는 웬지 바보 취급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샬롯은 사진에 대해서도 취미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화제로 삼으려던 내용을 조금 바꿔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단 '그것'만은 예외지만. 제 5 장 아래층으로 내려와 패트와 나는 도로를 가로질러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맥주를 두 잔 주문한 다음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가 나에게 어느 정도 이번 사건의 윤곽이 잡혀 가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동기가 뭘까?" 나는 슬쩍 미끼를 던져 보았다. "지난번에 얘기한 그 각도에서 부딪쳐 봤지만, 이번 사건의 주된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 캄캄한 상태라네. 그래서 우선 이번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의 진술을 모은 다음, 그 뒤에 동기에 손을 대보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자네는 무슨 냄새라도 맡은 건가?" "아니, 나도 아직은." 패트가 대답했다. "탄도는 총알의 성능과 일치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 총알은 소유자 불명의 45구경 권총에서 발사된 거라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총신은 거의 신품이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총기 판매 쪽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았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네. 최근에 판매된 권총은 단 두 자루뿐이었는데, 그것도 얼마 전에 강도를 당한 상점 주인이 사간 것이었지. 총알의 견본과도 몇 종류 맞춰 보았네만, 그 총알과 일치하는 것은 없었어." "그렇다면 그 얘기는 곧 이번 사건에 사용된 권총이 훨씬 이전에 팔린 것이고, 또 최근까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거라는 얘기가 되는군." 내가 말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말야. 그리고 그 파티에 참석했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우리가 찾고 있는 권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었네."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는 말이지." 내가 덧붙였다. "그래. 물론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지. 권총을 지니고 파티에 참석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소음장치는 어떤가? 범인이 총기에 꽂아 사용한 솜씨를 보면 절대 초보자는 아니야. 소음기에 덤덤탄(끝을 편편하게 만든 총알로서, 맞으면 크게 상처를 입는다)을 썼으니까. 그놈은 잭이 죽는 걸 분명 확인하고 싶었던 걸세 -- 서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말이야." "그런데 그런 흔적조차도 없단 말일세.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사용된 총기가 라이플 같단 말이야. 45구경 총알에 꼭 맞는 제품이나 라이플용 소음기가 몇 종류 있거든." 서로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우리는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무슨 생각이 나서 그걸 말하기 위해 패트가 입을 열기까지는 꼬박 2분이나 걸렸다. "아 참, 그리고 잊어버릴 뻔했는데, 칼레키와 그 애송이 케인스가 오늘 아침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네." 이건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무슨 일로?" "어젯밤 늦게 누가 칼레키 집의 창문을 통해 그를 쏘려고 했었던 모양이야. 총알은 머리카락을 약간 스쳐 지나갔는데, 그 총알 역시 45구경이었지. 조사를 해보았더니 잭이 당한 총알과 똑같더군. 같은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었네." 하마터면 나는 맥주에 목이 막힐 뻔했다. "잊고 있었다고 잘도 시치미를 떼는군 그래." 나는 천천히 억지웃음을 지었다.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네." "뭐지?" "그는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자네라고 생각하고 있더군." 나는 패트가 깜짝 놀랄 정도로 탁자 위에 맥주 컵을 세차게 내려놓았다. "뭐라고? 그 자식, 정말 입을 함부로 놀리는군! 좋아, 잘도 지껄였어! 이번에는 정말 그 말대로 놈의 얼굴을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어 줄 테니까!" "이런, 또 시작이로군. 마이크, 자네는 그게 탈이라고. 무조건 핏대부터 올리는 그 성질 말이야. 자, 앉게나, 마이크. 그만 소리치고. 그놈 말처럼 놈은 정말로 시청에 줄이 닿아 있네. 솔직히 말해 시청에서 시경찰인 우리에게 지시가 내려와 어쩔 수 없이 자네를 감시했었던 거야. 그러나 이 사실 하나만은 기억해 주게. 자네는 예전에도 질이 나쁜 시민들을 몇 사람인가 해치운 경력을 갖고 있고, 그때 자네 총에서 발사된 총알들은 감식과에서 모두 사진을 찍어두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지문 역시 우리한테 보관되어 있고. 그 사건이 있은 뒤 어쩔 수 없이 조회해 보았네만, 물론 아닌 것으로 판명됐어. 게다가 그 당시 자네가 있었던 장소도 다 조사해 두었지. 자네가 돌아가고 나서 10분 뒤에 그 난잡한 번화가에 일제단속이 있었네." 나는 얼굴이 아주 새빨개진 채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패트. 자, 이제 농담은 그만두고 칼레키와 그 친구가 어디로 거처를 옮겼는지 가르쳐 주게." 패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를 쳐다보았다. "쌍동이 벨레미 자매가 살고 있는 같은 아파트식 호텔이네. 모퉁이에서 오른쪽에 있는 방으로 옮겼는데 2층에 있지. 장소는 미드워드 암스야." "자네 벌써 그곳엘 가봤나?" "쌍동이 자매를 만나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어. 조지와 헐을 만나기 위해서였네. 그날 밤 자네한테 잠자리를 습격당하고 구타당했던 걸 핑계로 자네를 고소하게 되면 그리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그 친구를 설득했지. 어쨌든, 뭐 그리 대단한 얘기를 한 건 아니지만 말일세. 확실히 자네가 한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소문을 듣고 있기는 한 모양이던데, 그래도 기죽기는 싫은지 그 녀석이 도리어 큰소리를 치더구먼." 우리는 맥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패트의 눈치를 살피며 계산서를 얼른 집어들었다. 아마 다음에는 그가 사겠지. 경찰이든 아니든 그건 암암리에 이루어진 규칙이니까. 우리는 문 밖에서 헤어졌고,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서둘러 미드워드 암스를 향해 출발했다. 실제로 범행을 저질렀든, 아니면 미수에 그쳤든 -- 누군가가 나를 살인죄로 고발하려 했다면 최소한 그 일에 대한 진상이나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패트가 내가 진범이 아니라고 단정지은 진짜 이유는, 범인들은 일을 저지른 뒤에 모습을 감추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도망을 치거나 사람의 눈을 피해 숨지 않았다. 나는 틀림없이 칼레키가 도어맨을 매수시켜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놈팽이는 내가 그 호텔로 들어가는 걸 방해하려 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시비를 걸어 와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월세로 방을 빌리러 온 사람인 척하는 대신 당당히 2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보이는 적어도 27~28살은 되어보이는 말라깽이 꼬마인데, 흐리멍텅한 눈을 가진 사팔뜨기였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은 나 혼자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나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색깔을 보여 주었다. "칼레키, 조지 칼레키야. 이 지붕 밑으로 새로 이사온 아저씨지. 그자의 아파트 번호를 내게 가르쳐 주면 이 녹색 지폐는 그대로 자네 것이 되는 거야." 내가 말했다. 그는 조심스레 나를 훑어보았다. 정말 생각했었던 대로 놈이 손을 써놓았군. 마침내 그가 볼따구니 안쪽으로 혓바닥을 굴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해머라는 사람인 모양인데, 난 이미 당신한테 그 장소를 가르쳐 주지 말라는 조건으로 10달러를 받아놔서요." 나는 코트 자락을 열고 홀스터에서 45구경 권총을 꺼내어 그의 코앞에 들이댔다. 그의 두 눈이 그것을 본 순간 크게 벌어졌다. "내가 바로 그 해머라는 형님이시다, 이 꼬마야." 내가 말했다. "그놈의 집 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겠다면 선물로 이걸 한 방 먹여 주지." 나는 총부리를 그의 이빨에 갖다댔다. "앞줄 206호실입니다." 그가 급히 말했다. 내가 내민 지폐는 5달러짜리였다. 나는 그걸 둘둘 말아 멍하니 벌리고 있는 그의 입안에 쑤셔넣은 뒤에 권총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자, 잘 기억해 둬. 내가 잠깐 볼일을 보고 있는 동안 조용하게 있지 않으면, 그때는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예, 예, 잘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 보이다운 태도를 되찾으며 문을 힘껏 닫았다. 206호실은 도로와 접해 있는 방의 홀 아래쪽에 있었다. 문을 노크해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귀를 문틈에 대고 문을 밀어 보았다. 그렇게 하면 문의 널빤지가 음향판과 같은 역할을 하여 실내에서 나는 소리를 100배나 크게 들리게 해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해 보기 위해 종이 한 장을 문 밑으로 밀어넣은 다음, 그곳을 떠나 1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계단의 중간쯤에서 구두를 벗어든 다음 다시 문앞으로 살며시 되돌아갔다. 종이는 내가 문 밑에 밀어넣어 둔 그대로 놓여 있었다. 쓸데없이 주위를 서성이는 대신 나는 마스터 키 세트를 꺼냈다. 그 중 세 번째 열쇠가 문에 맞았다. 안으로 들어서서 나는 우선 뒤쪽에 있는 방문을 열쇠로 열어보았다 -- 만일을 위해서였다. 그 방은 가구가 딸린 셋방이었다. 방안에 있는 물건 중 칼레키의 개인 소지품은 그가 젊었을 때 찍은 듯싶은 사진이 한 장 맨틀피스(벽난로 장식선반) 위에 놓여 있을 뿐, 그 이외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 방은 옷장 두 개와 탁자가 하나 있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그러나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한 침대에서 자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지난번 그들을 방문했을 때 혹시 함께 자지 않았느냐고 말한 것이 생각나 웃음이 피식 나왔다. 슈트케이스는 침대 밑에 놓여 있었다. 나는 우선 그걸 열어보았다. 와이셔츠가 여섯 장 들어 있었고, 그 위에 45구경 권총이 엎어져 있었으며, 그 옆에는 예비용 탄창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교활한 놈. 이 45구경 권총은 아무리 봐도 이걸로 밥을 먹고 사는 놈들의 것임이 분명해. 그런 자들은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나는 총신을 냄새맡아 보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지난 한 달 동안 이 총은 한 번도 발사된 적이 없는 총이었다. 나는 대강 지문을 닦고 권총을 원래대로 놓아두었다. 옷장 서랍에도 눈에 확 뜨일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헐 케인스는 앨범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앨범에는 대학에서 흔히 하는 스포츠를 하고 있는 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앨범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진은 여자들의 것으로, 키가 크고 마른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들어할 법한 아가씨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호리호리한 타입의 여자들보다는 풍만한 타입의 여자들을 더 좋아한다. 그 앨범의 마지막 장에는 칼레키와 헐이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장 있었다. 한 장은 두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었고, 다른 한 장은 캠핑갈 때의 가벼운 차림을 한 두 사람이 자동차 옆에 서서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내 흥미를 끈 것은 세 번째 사진이었다. 그것은 헐과 칼레키가 어느 상점 앞에 함께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 사진 속의 헐은 아무리 보아도 조금도 학생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사업가 차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또 아무것도 아니었다 -- 그의 등뒤로 도로와 접해 있는 상점의 창에는 새로 개봉된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으며, 그 밑에 제목이 찍혀 있는 큰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하나는 무슨 영화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으나, 다른 하나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모로 캐슬'의 광고였다. '모로 캐슬'은 지금부터 8년 전에 개봉된 영화다. 그런데도 사진 속의 헐 케인스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이들어 보이는 것이다. 그 이상은 방을 조사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프런트 룸으로 걸어갔다. 내가 막 그곳으로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밖에서 열쇠를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중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려는 순간 투덜대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들어오게, 조지." 내가 말했다. 그의 표정은 경악스러움보다는 오히려 공포에 가까웠다. 확실히 그는 자기를 쏜 것이 틀림없이 나였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헐은 그의 등뒤에서 내가 조금만 움직이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줄행랑을 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두 사람 중 그래도 조지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 아파트로 숨어들어온 거지? 이, 이번에야말로......" "아, 잠깐, 그런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우선 안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나? 이런 일쯤은 나한테 식은죽 먹기니까 말이야. 잠시 있으면 기분도 가라앉고 좋아질 거야." 두 사람은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나왔을 때 두 사람의 얼굴은 사탕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상대방이 비난을 퍼부을 틈을 주지 않았다. "그 권총은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물었다. "바로 네놈 같은 작자 때문에 갖고 있는 거야!" 그가 큰소리로 고함쳤다. "창문 밖에서 나를 죽이려고 노리고 있는 그런 놈 말야! 물론 난 총기류 소지허가증은 갖고 있다고!" "물론 허가증이야 갖고 있겠지. 나는 다만 네가 그걸 썼는지 안 썼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물어본 것뿐이니까." "그 따위 걱정은 필요없어! 그것을 사용할 때는 먼저 상대방에게 경고해 주는 걸 잊지 않으니까. 그런데 네놈은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듣고 싶다면 말해 주지, 이 애송이야. 나는 그 저격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은 거야. 내가 범인으로 고발당했다니까 말이야.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는 건지 그게 정말 궁금하다 이 말씀이지!" 조지는 코트에서 여송연 한 대를 꺼내어 물부리에 꽂았다. 얘기를 하기 전에 시간을 끌자는 수작이 분명했다. "자네는 아무래도 경찰에 무슨 끈이 있는 모양이로군."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걸 경찰한테 물어보지 않았지?" "고물 정보 같은 건 필요없으니까. 그리고 네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네 입으로 얘기해 줄 테니까. 너를 쏜 그 권총은 또한 이번 사건을 저지른 범인의 권총이기도 하지. 나는 그 사건의 범인을 찾고 있는 중이야. 너도 그것은 잘 알고 있을 테지?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냐. 범인은 일단 행동을 개시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어. 그렇다면 언젠가는 또 행동을 시작할 게 분명해." 칼레키는 입에서 여송연을 뗐다. 잔뜩 겁을 집어먹었는지 그의 얇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는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은 그것을 애써 숨기려 들고 있지만 그게 잘 안되고 있는 것이다. 신경질적인 경련이 그의 입 주위에 나타났다. "내가 증언으로 너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별로 없어. 그때 나는 창가에 있는 큰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누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창유리가 내 옆에서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지더니 총알이 의자 등에 명중했을 때였어.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권총을 쏘는 놈한테 보이지 않도록 벽을 향해 기어갔지." "왜 그랬지?" 내가 천천히 말했다. "왜 그랬느냐고? 목숨이 아까웠기 때문이지. 그래, 내가 그 자리에 태연히 앉아 나 죽었소 하고 총알이나 맞고 있을 사람 같나?" 내 말에 칼레키는 불끈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그걸 무시해 버렸다. "너의 그런 말이 통할 것 같나, 조지?" 내가 말했다. "그래, 아무 이유도 없이 너를 죽이려 들었단 말이야?" 작은 땀방울이 그의 이마에 솟아나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눈썹 가장자리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 딴 것을 내가 알 게 뭐야! 이제까지 나는 수많은 적을 만들며 살아왔는데!" "하지만 이번엔 특별한 적이야, 조지. 그자는 잭을 살해한 다음 네 뒤를 쫓았던 거야. 그자는 아마 다음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걸? 그런데 왜 네가 그 녀석의 블랙 리스트에 오른 거지?" 그 순간 그는 금방이라도 펄쩍 뛰어오를 기세였다. "난......나는 몰라, 정말 몰라!" 이제 그의 어조는 거의 변명조로 변해 있었다. "나도 그 점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지만,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아. 웨스트체스터에서 이곳 시내로 거처를 옮긴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내가 어디에 있든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있단 말이야.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있으니까 약간은 안심이 되는 거지." 나는 앞으로 몸을 굽혔다. "하지만 그리 잘한 짓이라고는 할 수 없어. 어쨌든 너와 잭은 뭔가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해. 도대체 그것이 뭐지? 잭이 한 일 중에서 무엇을 알고 있는 거야? 잭한테 걸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자와 너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거지? 네가 이 질문에만 대답해 준다면 너를 죽이려고 노리고 있는 범인의 단서도 잡을 수가 있어. 어때? 생각이 좀더 잘 나도록 네 머리를 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줄까? 아니면, 당신 스스로 입을 열 건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자신이 살인자의 살해 리스트에 올라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도 반쯤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행동처럼 그는 젊지 못했다. 이번 일이 그를 두 손 들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모르겠어. 그리고 설사 무언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일 거야. 나는 잭과 그리 오래 사귄 사이도 아니니까.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헐이었어. 헐은 매닝 양을 통해 그를 알게 된 것이고. 만일 이번 사건이 그런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건 무엇이든지 죄다 얘기해 주겠네. 내가 죽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야." 이것은 내가 잊고 있었던 단서였다. 헐 케인스는 아직도 맨틀피스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오랜 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스포츠를 하는 사람치고는 트레이닝의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은 축에 속했다. 나는 아무래도 사진 속의 헐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쫓아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8년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그저 평범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그 사진 속의 그는 마치 노인 같았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 상점은 그 영화광고를 그대로 붙인 채로 몇 년 동안이나 버려져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좋아, 헐. 자, 이번엔 자네가 알고 있는 얘기를 들어보기로 할까?" 청년은 그리스 조각을 닮은 그 멋진 옆모습을 내게로 돌렸다. "조지가 이미 다 얘기했잖소." "매닝 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언제 만났지? 그런 아가씨는 이를테면 자네 같은 사람이 아무리 입장료를 낸다 해도 절대 만날 수 없는 대(大)리거(메이저 리그에 속한 선수를 칭하는 말)인데 말야." "어떻게 그런 말을! 작년에 그녀는 대학에서 응용심리학 강의를 맡았었소. 내가 그 과목의 학점을 딴 것도 바로 그 강의에서였소. 그녀는 학생들 중 대여섯 명을 뽑아 자기 나름대로 견학을 시키기 위해 뉴욕에 있는 어느 진료소로 보냈었소.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 뒤 그녀는 나한테 관심을 갖고 계속 내 연구를 도와주게 된 것이오. 그뿐이오." 그녀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이해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자면 울화가 터질 노릇이었지만, 그렇더라도 이 남자의 얘기가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가진 관심이 직업적인 것 이상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여자들은 나를 포함하여 자기가 원하는 남자들한테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잭과는 어떻게 된 거지? 그와는 언제 만났나?" "그 뒤 좀 지나서였소. 어느 날 매닝 양이 잭과 마너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그의 아파트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도 함께 데려갔었소. 그런 뒤에 어느 날 나는 축구 구경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술주정뱅이들의 싸움에 휩쓸려 약간 곤궁에 처하게 되었었소. 그 경기는 그 시즌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정말 트레이닝 룰이란 게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합이었소. 모두들 그 경기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고, 그 덕분에 애꿎은 집 하나만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버렸소. 마침 그 집 주인을 잭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 고발하려던 집 주인한테 잭이 중간에 나서서 잘 말해 주어서 수리비만 변상해 주는 선에서 소동이 끝날 수 있도록 힘을 써주었소. 그리고 그 다음 주 내가 다시 그를 만났을 때 마침 나는 시립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살인편집광들의 사례를 한창 연구하던 중이었소. 우리는 서로 만나게 된 걸 반가워하며 함께 저녁식사를 했소. 비록 알게 된 기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웬지 그와는 그저 아는 사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절친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소. 나는 그를 알게 된 것이 정말 기뻤었소. 내게 참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까. 그 당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 우리가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가서 조사해 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도와준 이후로는 훨씬 수월하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소." 나는 난생 처음으로 머릿속이 텅 비어옴을 느꼈다. 살아 있을 때 잭은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형사상의 사건에 흥미를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권총의 사정거리, 탄도검사의 기록표, 지문 카드로 이어지며 우정이 발전되어 갔다. 군에 입대한 뒤에도 그런 우정은 우리들의 가슴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 이외의 생활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우연한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물론 그 대부분이 일반적인 것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마너에 대한 것은 그에게 들어서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칼레키에 대한 이야기도 그가 암흑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쌍동이인 벨레미 자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은 신문 보도에 의존한 것이었고, 그 나머지는 몇 번 되지는 않지만 그녀들을 만난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 꾸물거리고 있어 봤자 단서가 될 만한 것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모자 뒤를 가볍게 툭툭 턴 다음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조지나 헐이 전혀 작별 인사를 할 기색이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와서 나는 뒤로 문을 세차게 닫았다. 밖에 나와 생각해 보니 조지가 45구경 권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패트의 말로는 파티에 참석했었던 사람들 중에서 그 45구경 권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조지는 그 권총을 갖고 있었고, 더구나 허가증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자의 말로는 그랬다. 하긴 그렇다고 해도 별로 나쁠 것도 없다. 만일의 경우 그 45구경 권총으로 인해 어떤 사건이 돌발적으로 터진다면 제일 먼저 어디로 달려가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쌍동이인 벨레미 자매는 5층에 살고 있었다. 그녀들이 살고 있는 방은 칼레키의 방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초인종을 눌렀을 때 안에서 대답소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문은 안쪽에서 쇠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조금밖에 열리지 않았고, 그 열린 틈으로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워 보이는 깨끗한 느낌의 얼굴이 15센티 정도 나타나더니 내 시선과 마주쳤다. "무슨 일이죠?" 말을 걸어온 상대방이 쌍동이 중 언니인지 동생인지 잘 분간이 안 갔기 때문에 나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벨레미 양이십니까?"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해머라는 사람입니다. 사립탐정이지요. 지금은 월리엄스 사건을 조사중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아, 예. 어쨌든 들어오세요." 문이 닫히고 쇠사슬 고리가 벗겨졌다.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나는 온몸에서 마치 체조선수를 연상케 해주는 여자의 얼굴과 마주서 있었다. 피부는 눈꺼풀 주위의 주름살을 제외하고는 모두 햇볕에 그을은 다갈색이었는데, 팔에서 어깨까지 이르는 부분은 마치 흙으로 빚어놓은 상(像)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확실히 사진에는 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았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나는 이 두 자매가 결혼상대를 찾는 데 왜 그렇게 고심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본 바로는 이 특이한 쌍동이 자매에게는 그녀들의 돈으로도 도저히 보충될 수 없는 단점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남자라면 대부분 비록 그녀들한테 재산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들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예.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실내로 들어서서 대강 둘러보았다. 칼레키의 방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이 방에는 담배 냄새 대신 가벼운 향수 냄새가 풍기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랄까. 그녀는 앞에 차 테이블이 놓여 있는 소파가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더니, 그 중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자리를 잡자 그녀도 또 다른 긴의자에 몸을 내려놓았다. "오신 용건이 뭔가요?" "지금 나와 마주앉아 있는 분이 어떤 벨레미 양인지 먼저 말씀해 주신다면 내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 이런. 나는 메어리예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터는 쇼핑을 나갔죠. 그 말은 곧 밖에 나가 하루종일 놀다 온다는 뜻도 된답니다." "그럼, 당신이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모두 말해 줄 거라고 기대해도 괜찮겠지요? 그런데 첸버스 경감이 벌써 이곳을 다녀갔습니까?" "예. 그분이 조만간 당신이 찾아올 거라고 얘기하더군요." "그렇게 많은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잭과는 옛날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까?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 그 파티가 열리던 날 밤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된 점은 없었습니까?" 내가 질문을 계속했다. "아뇨,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가볍게 음식을 먹고 춤을 약간 추었을 뿐인걸요. 잭이 마너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몇 번인가 보았고, 케인스 씨와 함께 부엌에 가서 한 15분 정도 있긴 했는데 되돌아올 때는 농담을 했는지 어땠는지 두 사람 다 웃고 있었어요." "그밖에 잭이 다른 사람들 중 누군가와 같이 있는 걸 보지는 못했습니까?" "예. 아, 아니에요. 틀림없이 그렇다고는 할 수가 없겠군요. 그날 밤 마너와 샬롯이 잠시 무슨 이야긴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춤이 시작되자 남자들이 그 두 사람을 춤 속으로 끌어들였으니까요. 아마 그 두 사람은 틀림없이 마너의 결혼식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밖에서 식사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둘 다 열쇠를 챙기는 걸 깜박 잊었기 때문에 방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관리인을 깨워야만 했어요. 그리고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지요. 그날 밤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문기자들이 우리들과의 인터뷰 기사를 싣기 위해 전화를 걸어 오는 바람에 잠이 깨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마 이번 사건 때문에 경찰에서 탐문하러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첸버스 경감님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머리를 가볍게 갸웃거렸다. "어머나! 이를 어째!"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내가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는 그냥 나왔나 봐요." 그녀는 좁은 복도로 달려가더니 이내 욕실로 모습을 감추었다. 나도 이제는 늙다리가 다 된 모양이다. 내 귀에는 물 넘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긴의자 옆의 선반 위에는 잡지책이 두세 권 흐트러진 채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권을 집어들고 페이지를 뒤적거려 보았다. 그러나 그 잡지는 사진이 실리지 않는 패턴과 패션 전문지였기 때문에, 나는 이내 그걸 던져버렸다. 그 선반 위에 쌓여 있는 잡지들의 맨 밑에는 아직 새것인 '컨페션(手記)'이 두 권 있었다. 이 책은 다른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내용은 한결같이 틀에 박힌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그 중 한 이야기는 어떤 한 아가씨가 대도시에서 탐정과 만나게 되는 내용이었는데 꽤 괜찮았다. 그 남자한테 몸을 더럽힌 그녀는 지하철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어디선가 멋진 청년이 나타나 지하철로 뛰어들려는 그녀를 밖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그녀를 훌륭한 여자로 갱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메어리 벨레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청년이 그 아가씨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치안판사가 있는 곳으로 가는 대목을 읽고 있었다.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이때만은 내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입고 있었던 회색 슈트 대신, 그녀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된 얇고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실내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녀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을 등지며 그녀가 내 앞을 지나가는 순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모든 것이 그대로 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덧 그녀의 옷은 평범한 실내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나는 약간 옆으로 비켜앉았다. "죄송해요. 이야기 도중에 실례를 해서. 하지만 목욕물이 워낙 금방 식어버려서......" "아니, 나는 괜찮습니다. 대다수의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하루종일을 빈둥대며 지내니까요."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녜요. 오히려 지금 당신이 수사하고 있는 이번 사건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걸요." 그녀는 다리를 꼬며 탁자 밑에서 담배를 꺼내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게임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는 결국 연애로 휩쓸려 들어가야만 하고,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샬롯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담배 어때요?" 그녀가 담뱃갑을 내게 내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긴의자에다 뒤로 몸을 기대며 천장으로 담배 연기로 된 동그라미를 내뿜었다. "그 밖에 또 알고 싶으신 게 있나요? 그렇다면 내가 하든 언니가 하든 모두 다 얘기해 드리지요. 우리 두 사람은 내일 밤까지는 같이 있을 거니까요." 그녀의 몸매가 아른아른 드러나 보이는 그 흐트러진 매무새 때문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해 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언니는 나중에 만나면 되고 말예요." 그녀가 덧붙였다. "첸버스 경감님처럼 말예요, 안 그래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요. 세세한 사항들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으니까. 내가 지금 뒤쫓고 있는 것은 표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건 개인적인 문제인데, 지난 며칠 동안 잭에 대해 뭐 새롭게 안 사실 같은 것은 없습니까? 그냥 무심결에 지나친 것도 좋고, 어디에서 들은 얘기라도 좋습니다." "글쎄요. 그런 것에 대해서라면 별로 당신한테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남의 얘기를 엿듣는다는 게 결코 남한테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닐 뿐더러, 나는 사람들의 소문 같은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으니까요. 이 도시로 오기 전에 언니와 나는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그냥 집안에서만 살았어요. 우리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것도 역시 우리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웃에 가깝게 사는 사람들뿐이고요. 물론 어쩌다가 도시에서 온 사람을 손님으로 초대한 적은 있지만 말예요." 메어리는 다리를 긴의자 위로 끌어올리더니 옆구리를 나에게 과시하기라도 하듯 몸을 구부렸다. 그렇게 하는 바람에 실내복의 앞부분이 벌어졌지만 그것을 여미는 그녀의 손놀림은 아주 느렸다. 내 눈이 자신의 아름다운 젖가슴을 즐길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러는 것이리라. 그녀의 복부에서 내가 본 것은 거의 남성의 것이나 다름없는 가벼운 근육들이 매끄럽게 평행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이며 내가 말했다. "여기에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에스터가 쇼핑 때문에 완전히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요. 언니한테 있어서 이 세상을 사는 제일 큰 즐거움은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그저 예쁜 옷을 걸치는 거니까요." "그럼, 아가씨의 즐거움은 뭐요?" "저의 즐거움이라면 살아가는 일 그 자체예요." 아마 2주일 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몰랐겠지만, 지금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상대만 있다면 때와 장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여자였던 것이다. "엉뚱한 질문 같지만 -- " 내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와 언니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우리 둘 중 한 사람의 엉덩이에 작은 딸기만한 반점이 있죠." "그게 누굽니까?"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어때요?" 아니, 이 아가씨, 정말 심장 떨리는 소리를 하고 있잖아 !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은 좀 바빠서 말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겁쟁이처럼 굴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보랏빛 -- 거칠게 빛을 내뿜고 있는 보랏빛 눈동자였다. 부드럽고 축축히 젖어 있는 그녀의 입술도 공연히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녀는 그 실내복을 계속 입고 있을 생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그 실내복의 한쪽을 어깨에서 스르르 떨구어내리자 갈색 피부가 실내복의 핑크빛과 묘한 대조를 이루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햇볕에 그을릴 수 있었는지 희한한 일이다. 그녀의 피부에는 피부를 아무리 새까맣게 태운 사람이라 해도 있기 마련인, 흰 줄무늬 자국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때까지 꼬고 있던 다리를 일부러 풀더니 훤히 드러난 허벅지를 마치 파도처럼 굽이치는 근육에 햇빛을 받아 희롱하는 살찐 고양이처럼 비비꼬았다. 나 역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나는 그녀 위에 몸을 숙이며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나에게 더욱 바짝 달라붙으려고 두 팔로 내 몸을 힘껏 감싼 채 그녀는 긴의자 위에서 몸을 버티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뜨거운 불길 그것이었다. 그녀의 혀끝은 열심히 내 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내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그녀의 몸은 내 손바닥 밑에서 전율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이 여자가 왜 아직껏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한 남자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손이 실내복의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확 잡아당기자 그녀의 늘씬한 알몸이 내 눈앞에 훤히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그 다갈색 알몸을 내가 훑어보는 대로 그대로 놔두었다. 나는 모자를 집어들고 후딱 머리에 썼다. "반점은 언니한테 있는 모양이로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언제 다시 찾아오지요." 나는 그 방의 문을 빠져나오며 틀림없이 그녀가 내 뒤통수에 대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멋지게 빗나갔기 때문에 맥이 빠졌다. 뒤에서는 욕설 대신 나지막하게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나는 만일 패트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그는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궁금해졌다. 그 순간, 패트가 이번 사건을 자기가 지휘하고 있는 동안 내가 가는 길에 함정을 파놓을 작정으로 나를 그 여자의 봉으로 삼은 게 분명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아주 하찮은 속임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도 나는 그 친구의 덫에 걸려 버렸던 것이다. 흥, 하지만, 패트, 자네가 3번가에 갈 때는 미리 이런 속임수를 염두에 두고 가는 게 좋을 거야. 그곳에는 특히 경찰을 상대로 한바탕 골탕 먹이기를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으니까. 나중에는 아마...... 제 6 장 내가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벨더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사무실에 불이 켜 있는 걸 확인한 다음 나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거울같이 비치는 문 앞에 멈춰서서 어디 루즈 자국이라도 묻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았다. 입술 언저리는 깨끗이 닦여 있었지만, 와이셔츠의 흰 칼라 부근에 역시 뭔가가 묻어 있었다. 여자들의 향수 냄새는 어째서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한테 옮겨지고, 또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 다음에 다시 메어리 벨레미의 곁을 어정거려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미리 그녀에게 '클리넥스'를 사용하도록 주의를 주어야겠다.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벨더는 나를 한번 흘끗 쳐다보더니 입을 꼭 다물었다. "아니,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런 표정을 짓다니 뻔뻔스럽군요." 그녀가 말했다. 이것 보게. 이 아가씨, 맘만 먹는다면 살인이라도 서슴지 않겠는걸. 나는 더 이상 변명이나 거짓말을 늘어놓을 생각을 포기하고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 벨더는 나를 위해 깨끗한 와이셔츠와 다림질이 잘된 넥타이를 새로 내주었다. 간혹 가다 나는 그녀가 혹시 독심술의 달인(達人)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쪽에서도 긴급사태시에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편리하기 그지없는 수법을 갖고 있었고, 그녀도 대개 그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잘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방 구석에 있는 세면대에서 얼굴을 말끔히 씻고는 와이셔츠를 갈아입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넥타이였다. 보통 넥타이는 웰더가 매주었지만, 밖에서 문이 세차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오늘만은 내 손으로 넥타이를 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바에 들러 급히 몇 잔을 들이켰다. 그러나 벽시계를 쳐다보니 아직 시간이 일렀기 때문에, 대강 시간을 때울 심산으로 빈 좌석을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웨이터가 오자 15분 간격으로 위스키와 소다를 갖다 달라고 했다. 이런 것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웨이터도 대강은 눈치를 채는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리스트를 꺼내어 메어리 벨레미에 대한 것을 메모해 보았다. 이제까지 이 리스트는 주로 인물연구 쪽으로 쏠려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범죄에 대한 적절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이제까지 무슨 대단한 일을 해온 것은 아니다. 나는 직접 사건의 용의자들과 부딪쳐 보고, 그들의 입을 여는 데 필요한 무슨 그럴듯한 근거라도 없을까 하고 궁리해 왔을 뿐인 것이다. 확실히 경찰은 나름대로 특유의 방법적 수사를 해나가고 있었다. 상대는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탐문수사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시골뜨기 형사가 아닌 것이다.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만 살인사건은 또한 경쟁이기도 했다. 만일 내가 패트에게 협조하기만 했어도 그가 나를 눈앞의 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부딪쳐 본 곳을 그 친구도 부딪쳐 보았음이 분명했고, 또한 지금까지 밝혀낸 사실 이상으로 그가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역시 틀림없었다. 나나 패트나 현재 진행하고 있는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역시 동기였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 아주 뛰어나게 훌륭한 사실이. 그것은 살인이란 행위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살인사건은 계획적인 것이다. 간혹 돌발적인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도 역시 어떤 계획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시간상으로 따져 보면 조지 칼레키에게는 잭을 살해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헐 케인스도 마찬가지다. 이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샬롯 매닝 역시 같은 처지에 있다. 그리고 마너 역시. 그녀의 경우에도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무도 몰래 발길을 돌렸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벨레미 자매에게도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건 우연한 일이었겠지만, 그녀들은 집에 돌아온 다음 관리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귀가시간을 증명해 놓았다. 만일 그것이 사전에 미리 계획된 일이었다면 아주 그럴듯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녀들한테 집으로 돌아온 뒤에 다시 외출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대답은 '노'가 분명할 테니까. 쌍동이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웬일인지 세상 사람들은 쌍동이들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로 간주한다. 과거에 내가 경험한 다른 쌍동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벨레미 자매의 경우에도 사정이 같은 것은 뻔했다. 만일 자신들이 중대한 사건에 휩싸이게 되면, 그들은 서로를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도둑질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메어리 벨레미가 색정음란증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 자매의 신상조사서에 따르면, 그녀는 상냥하고 정숙한 여자에다 젊지는 않지만 결코 늙지도 않다고 되어 있으며, 몸가짐 역시 단정하다고 했다. 적어도 신상조사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긴 아무도 없는 방안에 남자와 단둘이만 있게 될 경우에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는 했다. 나는 에스터 벨레미를 생각해 보았다. 딸기처럼 생긴 그 반점이란 걸 확인해 보는 일도 꽤 군침이 도는 특종이었다. 그러자 칼레키의 방에서 있었던 거친 대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시내로 나가 그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쳐 보는 것이다. 나는 저쪽에 있는 웨이터에게 신호를 보내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자 웨이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그는 내가 겨우 네댓 잔만 마시고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차를 몰고 '하이 호 클럽'으로 향했다. 그곳은 금주법시대에는 밀조주(密造酒)의 거래가 성행했던 곳인데, 지금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위험한 놀이터로 바뀐 클럽이었다. 밤이 되면 그 클럽은 혼자 그곳을 찾는 손님들에게는 아주 불건전하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장소로 변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 나이트 클럽을 경영하고 있는 흑인과 잘 아는 사이였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이 흑인은 내가 술에 만취된 불량배를 상대로 사소한 다툼을 벌였을 때 내 방패가 돼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지 한 달쯤 지나서 나를 도와준 걸 트집잡아 깡패들이 협박을 하러 그를 찾아왔다. 그가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걸 거절하자, 이번에는 그를 해치려던 자들을 내가 상대해서 쫓아냄으로써 그에게 빚졌던 은혜를 갚은 적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내 이름이 알려지고 난 뒤에는 그 깡패들도 그의 나이트 클럽에는 손을 대지 않았고, 따라서 나이트 클럽은 그의 손에서 계속 운영될 수 있었다. 빅 샘은 바의 뒤쪽에 있었다. 그는 클럽으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빨을 다 드러내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입가로 젖은 냅킨을 가져가며 한쪽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눈 다음 맥주를 주문했다. 그때 옆에는 키가 큰 황인종 하나와 흑인이 앉아 있었는데 빅 샘이, "요즘 경기는 어떠십니까, 해머 씨? 이렇게 만나니 정말 기쁜데요. 이 근처에서 당신이 한바탕 몸을 푼 지도 꽤 오래 되었죠 ?"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아주 험악한 눈초리로 계속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듣더니 둘 다 음료수를 카운터에서 6피트(약 1.8-)나 옆으로 밀어놓는 것이었다. 샘은 내가 단지 맥주나 마시러 이곳을 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스탠드의 맨 끝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나도 그를 따라갔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해머 씨?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여기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대답을 하기 전에 샘은 우선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알고 있고말고요. 이 근처에서 말썽을 피우는 녀석들은 다른 곳에 가서도 일을 저지르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런 건 왜 묻습니까?" "조지 칼레키가 아직도 보스인가?" 그러자 그는 그 두터운 입술을 혀로 핥았다. 샘은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밀고자가 되기는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 역시 있었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이야, 샘." 내가 말했다. "경찰서까지 자네를 끌고 갈 형사한테 말하는 것보다야 나한테 말해 주는 게 훨씬 더 나을 텐데. 형사가 어떤 놈들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그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의 검은 이맛살에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해머 씨. 아무래도 당신한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아직까지 칼레키가 두목인 것은 틀림없지만, 절대 이 근처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일은 부하들이 대신 하고 있지요." "보보 호퍼는 아직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나? 언젠가 칼레키 밑에서도 일한 친구 있잖나? 그 친구 아직도 이 근처에서 어정거리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바로 여기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십시오. 요 몇 달 동안은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양봉도 치고 말입니다." 이것은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보보 호퍼는 반은 덜떨어진 사람인데, 환경이 사람한테 얼마만큼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정신연령은 겨우 12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키나 덩치도 대충 그 정도였다. 하긴 먹고 사는 데 곤란을 겪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자연히 체격도 왜소할 수밖에 없긴 하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황금으로 된 심장을 가진 마음씨 고운 조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를 거칠게 다룬다 해도 그는 늘 친구로서 변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무엇이든 다 친구가 되었다. 새나 동물, 곤충들까지도. 아주 오래 전에는 코흘리개 개구쟁이들이 흰개미집을 밟아 무너뜨리고 수십 마리나 되는 개미들을 밟아 죽였다고 해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그를 본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훌륭한 일거리를 얻어 양봉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 어디에 있나, 샘? 뒷방인가?" "그렇습니다. 장소는 어딘지 알고 계시지요? 아까 보니까 양봉책에 나와 있는 사진들을 보고 있던데요." 부디 먼저 이 컵으로 맥주를 마셨던 놈의 병이나 옮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단숨에 맥주를 마셔 버렸다. 예의 그 키큰 노랭이와 그 일행의 옆을 지나치면서 나는 그들의 시선이 곧장 뒷방 문에까지 나를 쫓아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보보 호퍼는 방 구석에 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과거에 이곳에는 주사위놀이 탁자와 룰렛이 두 대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도구들이 방 한쪽 구석에 쌓여져 있을 뿐이었다. 벽 위로 높게 외짝 틀로 된 창문이 천장에서 늘어져 있는 전깃줄에 갓도 없이 매달려 있는 알전구에 조명을 맡긴 채 환기 구멍 아래로 빛이 새나가는 것을 꽉 막고 있었다. 그리고 쓸모없는 잡다한 물건들이 한쪽에 높이 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얇은 맥주 광고 몇 장이 덮여져 있었다. 벽 위에는 압정으로 붙여 놓은 지저분한 사진이 몇 장 있었는데, 그 사진 속의 모습은 손자국과 먼지 때문에 거의 지워진 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벽 위에다 연필로 그 사진 속의 모습을 따라 그리려고 한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 솜씨는 아주 서툴러 보였다. 그 방의 유일한 출입문은 바로 통하는 문이었다. 빗장을 찾긴 했지만, 그 빗장에 걸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문은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보보는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책에 너무나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눈으로 읽은 글을 일일이 다시 입으로 발음해 보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잠시 동안 나도 보보의 어깨넘어로 그 책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나는 그의 등을 가볍게 쳤다. "이보게. 이젠 옛친구한테 인사도 하지 않는 건가?" 반쯤은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르기라도 할 듯 그는 몸을 일으켰지만,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고는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니, 마이크 해머! 정말 오래간만이로군!" 그가 여윈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이런 곳엔 무슨 일로 왔나, 마이크? 물론 나를 만나러 왔겠지, 그렇지! 참, 이 의자에 앉게나." 옛날에는 그래도 좀 나았을 것 같은 4분의 1파인트들이 빈 맥주통을 책상 있는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가 말했으므로, 나는 그 위에 앉았다. "요즘 양봉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보보, 그게 정말인가?" "응, 맞아. 이 책을 보면 양봉에 대해서는 뭐든 알 수 있다네. 이건 정말 재미있어. 정말이야. 벌들도 나를 잘 알아본다니까. 벌들은 내가 벌집에 손을 집어넣어도 절대 쏘지 않아. 그저 나한테 모여들기만 하지. 자네, 내 벌들 좀 구경하려나?" "그것도 괜찮겠지."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양봉을 치자면 돈이 꽤 들 텐데?" "뭐 그렇지도 않아. 벌집은 빈 계란상자로 만들고, 거기에 페인트칠을 했어. 벌들도 그 집을 정말 마음에 들어하지. 그 집들은 집주인 아주머니가 허락해 줘서 지붕 위에 갖다놓았네. 그 아주머니, 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꿀을 조금 갖다줬더니 꽤나 좋아하더군. 나도 벌들한테 잘 해주고 있지." 이 정도로 그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면 그 이야기에 온통 열중해서 사방에 침이 튀는 것도 모르고 계속한다. 뒷골목에서 사는 다른 놈들과는 전혀 질이 다르다. 그에게는 비록 가정도 없고 가족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가 양봉을 칠 수 있게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확실히 보보는 특이한 친구였다. 이 남자한테는 어떤 일에 대해 물어본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무리 물어봐도 변변한 대답 한 가지 제대로 못하지만, 또 멋대로 떠들게 내버려두면 하루 온종일이라도 한 말을 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았다고 하던데, 보보, 그 일은 어떻게 얻게 됐나?" "응, 정말 굉장한 거야, 마이크. 이번 일은 내 마음에도 꼭 드는 거거든. 모두들 나를 에런드 매니저(errand manager : 스포츠 팀의 매니저)라고 하지." 그 녀석들의 말뜻은 아마도 어링(erring : 본래는 몸을 망쳤다는 뜻이지만, 이 경우엔 보보가 온전한 동료가 아니라는 걸 뜻함)일 테지만 나는 그런 말을 그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래, 어려운가?" "글쎄, 내가 하는 일은 심부름을 한다거나, 여러 가지 물건을 배달한다거나 기타 등등 잡다한 일을 하는 거야. 도드슨 씨의 가게로 물건을 배달할 때는 그 사람이 자전거를 쓰라고 할 때도 있어. 정말 나는 요즘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네. 게다가 운만 좋으면 멋진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거든." "벌이는 괜찮나?" "물론이지. 일만 한다면 보통 25센트에서 50센트는 벌 수 있어. 파크 애버뉴의 높은 양반들은 듬뿍듬뿍 주니까. 지난주 같은 경우에는 무려 15달러나 벌었다네." 15달러. 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 금액은 정말 엄청난 액수였다. 그는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긴 나만 해도 그러니까. "굉장히 좋은 일거리인 모양이군. 그런데 말일세, 보보, 어떻게 그런 굉장한 일을 그냥 잠시 뛰어다니면서 다 해낼 수 있지?" "자네, 그 핸피 영감 기억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피라는 사람은 파크 애버뉴의 오피스 가(街)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나이가 거의 50살이나 된 곱사등이 남자다. 나도 몇 번인가 그에게 사람을 미행하는 일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는 돈벌이가 된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내는 인물이다. "그 핸피 영감이 폐병에 걸렸어." 보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산에 있는 휴양지로 가서 그곳에서 구두닦이를 하게 됐지. 내가 그 친구의 구역을 인계받았다네. 물론 나는 그 친구만큼 잘되지는 않았지. 그러자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쉬운 심부름이라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처음 일을 시작했던 거야. 지금은 매일 아침 일찍 그곳에 나가면 뛰어갔다 올 수 있는 일거리를 내게 준다네. 그런데 오늘은 여왕벌을 사기 위해 어떤 남자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하루 쉬겠다고 한 거야. 그 남자한테는 글쎄 여왕벌이 두 마리나 있다더군. 그런데 말이야, 여왕벌 한 마리에 5달러나 달라고 하는데, 혹시 너무 비싼 건 아닐까, 마이크?"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나는 킹코브라라든가 여왕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었지만, 원래 퀸(Queen)이라는 것은 다른 족속들보다는 항상 높은 자리에 있는 법이니까. "자네가 그 일을 맡게 되어 칼레키의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가 뭐라고 하던가?" 나는 그가 이 질문에 변변히 대답도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보보의 대답은 내 생각과는 반대였다. "역시 그는 멋진 사람이었어. 글쎄 나한테 10달러나 주지 뭐겠나? 하긴 참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한 사이이긴 했지.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할 마음만 있다면 다시 그 일을 맡겨 주겠다고 하더군." 그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보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주 정직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은 거래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부정한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그런 돈으로 자기 주머니를 불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보보의 머리는 그런 부정직한 짓을 흉내내기에는 너무 단순했다. "칼레키는 정말 좋은 사람이군 그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자네도 이제부터는 슬슬 자네의 일을 하는 게 좋을 거야." "맞아. 나도 언젠가는 양봉치는 일만 하게 될 거야. 양봉을 치면 꽤 많은 수입이 들어오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 양봉장도 하나 가질 수 있게 될지도 몰라." 보보는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자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내 그 미소는 당혹감이 뒤섞인 찌푸린 눈살로 바뀌었다. 그의 시선은 재빨리 내 등뒤로 향했다. 나는 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지만, 보보의 표정으로 지금 이 뒷방에 우리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이프 하나가 아주 슬며시 내 턱밑으로 들어왔다. 나이프를 쥐고 있는 늘씬한 손가락은 지금은 아주 살짝 그 나이프를 쥐고 있었지만, 만일 내 몸이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어느 때고 나이프를 꼭 쥘 태세를 단단히 갖추고 있었다. 그 나이프의 날에는 방금 숫돌에 간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나이프의 날을 간 지가 그리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특별한 손놀림을 위해서인지 집게손가락이 10cm쯤 되는 칼날 등에 놓여 있었다. 상대는 노련한 깡패였던 것이다. 보보의 눈이 공포에 질려 크게 떠졌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 입술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엾은 보보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으며, 작은 땀방울 한 줄기가 핏기 가신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갈색 소매의 팔이 내 한쪽 어깨넘어에서 뻗쳐 오더니 내 코트 깃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손은 이내 내 권총이 있는 곳까지 닿았다. 그 순간 나는 잽싸게 몸을 낮추며 발로 탁자를 걷어찼다. 탁자가 발길에 채여 미끄러져 나갔다. 나는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을 잡고서 힘껏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노랭이 녀석이 내 위로 겹쳐지면서 쓰러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발이 하나 날아왔지만 나는 사뿐히 머리를 피했다. 3센티 정도의 오차로 그 검둥이 녀석은 발길질에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을 놓는 순간에 발을 낚아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땀에 흠뻑 젖은 두 건달을 상대로 필사적인 격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격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나이프가 또다시 날아들기에 나는 이번에는 그 손목을 잡고 옆으로 홱 비틀었다. 힘줄이 팽팽해지며 가슴이 약간 답답해 오더니 이윽고 뼈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 키큰 노랭이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손에서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눈 깜짝할 새에 나는 일어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키큰 검둥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숙이고 나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상대방의 머리통에 받혀서 팔병신이 되기는 싫었기 때문에 발로 그 머리통을 걷어찼다. 구두코 끝이 정통으로 녀석의 얼굴 한가운데에 명중했다. 녀석은 옆으로 퍽 쓰러지면서, 글쎄 이것 보게, 힘이 넘쳐나서 그랬는지 벽에 정통으로 부딪치고 마는 것이었다. 아랫니가 그 녀석의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앞니 두 개가 코 밑에서 튀어나오더니, 이내 그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키다리 노랭이 녀석은 부러진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쥔 채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홱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쪽 주먹으로 녀석의 콧잔등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러자 뼈가 으스러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이 녀석은 할렘 가(街)에서 여자깨나 후렸겠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그에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픽 쓰러졌다. 나는 녀석이 쓰러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당연히 나는 녀석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그렇지만 별로 대단한 것은 없었다. 싸구려 지갑 속에는 여자들 -- 그 중 한 명은 백인이었다 -- 의 사진이 몇 장인가 있었고, 11달러와 부본(수표를 떼어내고 남은 기록란)만 남은 수표책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덩치 큰 흑인은 황소같이 큰 눈알을 꿈벅이며 엉망이 된 얼굴을 감쌌다. 그 녀석의 주머니에서는 성냥개비를 댄 안전면도날이 나왔다. 교묘한 수법이었다. 그 면도날을 두 손가락 사이에 낀 다음 손바닥 쪽으로 면도날만 나오게 해놓으면, 상대방도 알아채지 못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냥개비 때문에 면도날은 절대 손가락 사이에서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 칼날은 상대방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다. 그 검둥이 녀석이 나한테서 몸을 빼내려고 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패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먹으로 턱에 한 방 먹인 것이 녀석한테는 너무 충격적인 것이었는지, 녀석은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의자에 앉아 있던 보보가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야, 정말 굉장한걸, 마이크. 나도 좀 그래 봤으면 좋겠다." 나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대강 다섯 장 정도 꺼내어 그의 셔츠 주머니에 쑤셔넣어 주었다. "여왕벌을 위해 임금벌도 사주도록 하라고, 베이비." 내가 그에게 말했다. "언제 다시 만나세." 나는 그 두 건달 녀석들의 덜미를 움켜쥐고 그들을 방문 밖으로 끌어냈다. 빅 샘은 그들을 끌고 나오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열댓 명 정도 되는 패거리들의 시선 역시 내게로 쏠려 있었다. 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더 일어날 걸로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샘? 왜 이런 원숭이 같은 녀석들이 내 비위를 건드리도록 내버려둔 건가? 그럼, 어떻게 되리라는 것쯤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빅 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크게 히죽 웃었다. "여기서 우리가 한바탕 손을 본 지도 벌써 꽤 되었군요, 해머 씨." 그는 바에 모여 있는 남자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그 두터운 손을 내밀었다. "자, 내기에는 내가 이겼어. 빨리빨리 돈들을 내놓으시지." 그러면서 그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히죽 웃었다. 남자들이 샘한테 돈을 주고 있는 동안, 나는 그 꺽새 노랭이 녀석과 녀석의 친구를 바닥에 팽개친 뒤 포개놓았다. 아마 두 번 다시 그 두 녀석은 내게 손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샘한테 작별인사를 대신하여 손을 흔들어 주고 뒤돌아서려는데, 뒷방에서 보보가 지폐 다섯 장을 흔들어대면서 뛰쳐나왔다. "이봐, 마이크." 그가 외쳤다. "여왕벌한테는 왕 같은 건 필요없어. 임금벌을 파는 데는 아무데도 없어!" "필요할 거야, 보보."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말했다. "여왕한테는 늘 임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저기 있는 샘한테도 물어봐. 틀림없이 그렇게 대답할 테니까." 내가 돌아간 다음 틀림없이 그 친구는 샘한테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기를 쓸 것이 분명했다. 아마 일평생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그 이유를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렸다. 교통이 몹시 혼잡했기 때문에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차를 주차시킨 다음 나는 아파트로 올라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새로 갈아입었던 셔츠가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셔츠 앞에는 여기저기 핏자국이 튀어 있었고, 넥타이는 반쯤 목에서 풀려져 있었다. 윗도리의 주머니는 솔기가 다 터져 있었다. 이런 것들을 쳐다보니, 차라리 그 녀석들을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고 말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요즘 형편으로는 이만큼 말쑥한 양복을 손에 넣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온수와 냉수로 샤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상쾌해졌다. 깨끗이 면도를 하고 이를 닦은 다음, 나는 손질이 잘되어 있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자를 방문하는 데 권총을 갖고 가는 게 더 고상하게 보일까 아닐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습관상 갖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나는 셔츠 위로 권총의 총집을 살며시 벗겨내어 손때 묻은 45구경 권총에 기름을 몇 방울 떨군 다음, 총알을 조사했다. 그러나 별다른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권총을 닦은 다음 다시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었다. 혹시 또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권총이 겨드랑이 밑에 있지 않으면 웬지 내 눈에는 성이 차지 않았다. 특히 이번 사건은 권총을 한 방쯤 쏘아도 좋을 사건이니까 말이다. 나는 잊은 것은 없나 하고 거울 앞에 서서 살펴보았다. 평상시에는 어디를 가든 벨더가 미리 검사를 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이게 서커스를 구경하러 가는 사람의 차림인지, 아니면 나이트 클럽에 가는 차림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되곤 했다. 오늘밤에는 정말 그 생쥐 같은 벨레미에게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자고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 여자 때문에 잃기엔 벨더는 너무 훌륭한 여자다. 물론 나는 그녀가 앞으로 일주일 동안 침묵시위로 나오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형편만 된다면 벨더에게 좀더 나은 대우를 해주고 싶었다. 비록 그녀가 나의 도덕심을 절대로 인정해 주지 않으며, 또한 남자한테는 아주 까다롭기 그지없는 성격이라 해도 말이다. 고물 자동차에 휘발유를 채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주유소에 차를 댔다. 옛날부터 나와 안면이 있는 정비공인 헨리가 엔진 뚜껑을 열고서 휘발유를 조사했다. 그는 내 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차에 대형 엔진을 달고 차체를 개조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벌써 폐차시켰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덜너덜하고 온통 울퉁불퉁 찌그러졌지만, 타이어의 고무는 아주 품질이 좋은 것이었으며, 엔진은 다른 보통 차보다도 훨씬 더 성능이 좋았다. 엔진에 시동을 걸면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큰소리가 나지만, 이 차로 도로를 시속 150 킬로로 달려도 페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헨리는 뒷부분을 들이받아 찌그러진 리무진 한 대에서 모터를 떼내어 그걸 나한테 싼값으로 넘겨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차를 어떤 자동차 공장에 갖다넣더라도 정비공이 차 뚜껑을 열어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엔진의 성능에 놀라서 길고 나직한 휘파람을 불곤 했다. 정말 쓰기에 따라 이 차는 굉장한 걸작이었다. 주유소에서 나와 나는 일방통행로로 꺾어든 다음 샬롯의 아파트를 향해 라이트를 켜고 차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지난번 만났을 때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눈빛을 나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얼마나 굉장한 폭탄이었던가! 그녀의 집 앞에 있는 도로에는 자동차가 차례대로 빽빽이 주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 구역 전에서 방향을 돌려 검은 세단과 클럽(안락의자, 바 등이 갖춰져 있는 차)형 쿠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아파트까지 걸어가면서 부디 그녀가 다른 사람과 식사약속이 되어 있거나, 어딘가로 외출하고 없지 않기만을 빌었다. 나는 나만이 그 행운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신분석의였으므로 다른 여자들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훨씬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방면으로는 그녀가 전문가이므로 그녀가 이번 사건에 대해 생각해 봤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나는 아래층의 벨을 눌렀다. 잠시 뒤에 벨소리가 들렸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가에서 흑인 여자가 나한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모자를 쓴 코트 차림이었다. "어서 오세요, 해머 씨." 그녀가 말했다. "샬롯 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말은 정말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나는 문 옆에 있는 탁자 위로 모자를 벗어던진 다음 실내로 들어갔다. 침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하녀가 침실 문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시던 분이 오셨습니다, 샬롯 양." 그러자 안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고마워. 이젠 영화 구경을 가도 좋아요." 방을 나서는 흑인 하녀를 향해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긴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녀가 내민 따스한 손을 잡았다. "당신도 잘 지냈겠지요?" 이렇게 말하며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곳으로 찾아올 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저, 실은, 주제넘은 짓인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꼭 찾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답니다. 당신이 나를 상대해 줄 거라고 말예요. 그런데 어때요, 이 드레스? 마음에 드나요?" 내 눈앞에서 그녀는 사랑스럽게 몸을 약간 비틀더니 어깨넘어로 윙크를 보냈다. 이미 그 자리에 정신분석의사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샬롯 매닝이라는, 기쁨에 차 있는 싱싱하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마치 물에 젖은 듯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싸서 숨기고 있는 듯하면서도, 또한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드러내 주는 푸른 비단 저지로 된, 몸에 꽉 끼는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그 끝부분이 목 근처에서 구불거리며 마치 짧고 단단한 털인 양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욕정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내게 등을 보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드레스가 감싸고 있는 그녀의 육체는 처음 내가 상상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장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날씬한 편에 가슴도 얄팍했지만, 어깨만은 넓었다. 유방은 브래지어 끈 뒤로 숨겨져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다리는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나일론 스타킹에 감싸여 있었으며, 하이힐을 신은 탓인지 키가 거의 나만큼은 커 보였다. 아름다운 두 다리. 그것은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아주 강인한 느낌을 주는 다리였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름답군요. 물론 당신 자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오." 나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군요." "뭐죠?" "남자를 괴롭히는 방법이오." "어머, 그런 말씀이라면 그만두세요. 나는 그런 악녀가 아니니까요. 당신한테는 내가 그런 여자로 보이나요? 내가 지금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 물론 그렇지는 않지요. 그러나 만일 이 자리에 5년 동안이나 여자 구경을 못한 남자가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거요. 이건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지만, 만일 그를 벽에 쇠사슬로 꼼짝도 못하게 묶어놓고 방금 전에 당신이 내 앞에서 한 바로 그런 걸음걸이로 그의 옆을 지나가게 한다면 -- 그게 바로 고문이라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그녀의 웃음소리는 약간 쉰 듯하면서도 낮았다. 그녀가 고개를 약간 쳐드는 듯하자, 나는 그녀를 껴안고 그 아름다운 목에 키스를 퍼붓고 싶어졌다. 샬롯은 내 팔을 잡고 나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식탁은 2인용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닭튀김과, 그것에 버금갈 만한 양의 트렌치 프라이가 산처럼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한 성찬이에요. 자, 앉아서 맛있게 드세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다 지쳐서 어쩔 수 없이 한 시간 전에 가볍게 식사를 마쳤어요." 나는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혹시 이 여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어떤 것이며, 또 싫어하는 음식이 어떤 것인지 다 씌어 있는 요리대백과사전이라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든지. 아무튼 나는 닭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샬롯, 만일 여기에 딴 뜻이 있었다면 나는 혹시 이 음식 속에 독약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의심했을 거요. 하긴 설사 그렇다 해도 내가 이 음식을 다 먹어치우는 건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녀는 빨간 줄무늬로 된 앞치마를 걸치는 중이었다. 그 앞치마를 다 걸치고서 잔에 커피를 따랐다. "물론 딴 뜻이 있는 거죠."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그녀가 대꾸했다.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나는 한입 가득 닭고기를 뜯어먹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남자들을 만나봤지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난생 처음으로 내가 먼저 좋아할 만한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의자에 몸을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까지 나는 수백 명의 환자를 다뤄왔어요.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그 대부분이 남자였답니다. 하지만 아주 시시한 사람들뿐이었죠. 가난해도 한번 사귀어 볼 만한 사람은 없고, 오히려 이제 살 만큼 살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정신도 나약하고 생각하는 것도 아주 한정되어 있답니다. 또 그렇지 않다 싶은 사람들은 무엇엔가 억압당해 있거나, 아니면 오로지 집념에만 사로잡혀 있었고, 나한테도 눈물짜는 이야기 같은 거나 들고 오기 십상이었죠. 도무지 남자의 특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게다가 소위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와 엇비슷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연히 진정한 남자를 찾아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요." "고맙군요." 나는 약간 비꼬는 투로 말했다. "어머, 이건 진심이에요." 샬롯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사무실에 왔을 때 나름대로 난 당신을 분석해 보았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만들어놓은 법칙에 따라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남자를 발견한 거랍니다. 당신은 체격이 커요. 아마 당신의 마음도 그럴걸요. 억압당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할 거예요." 나는 입술을 닦았다. "하지만 집념은 있소." "당신에게 말예요? 그런 일은 전혀 상상 밖인걸요." "나는 살인범을 찾아내고 싶소. 그 범인을 쏘아죽이고 싶단 말이오." 즙이 많고 진한 닭다리를 1분에 1마일의 속도로 뜯어먹으면서 나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요. 하지만 그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집념이잖아요. 자, 빨리 다 드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나는 그 엄청난 양의 닭을 다 먹어치웠다. 접시에는 닭고기 대신 닭뼈만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샬롯이 준비한 음식이 맛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워낙 맛있게 먹기도 했다. 파이 한 조각, 커피 두 잔, 그리고 나서 나는 배부른 황소처럼 만족해서 의자 등에 벌렁 기댔다. "정말 요리사의 솜씨가 훌륭하군요." 내가 평가했다. "요리사라고요? 오, 천만에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거예요. 늘 호화판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고요." "오,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은 결혼할 때가 돼도 신랑을 찾기 위해 발벗고 나설 필요가 없겠는걸요." "물론이에요. 나도 나름대로 어떤 시스템을 마련해 놓았으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사실 당신은 지금 시험대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예요. 남자를 내 방으로 초청해서 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러면 그는 돌아갈 때 나한테 프로포즈를 한다, 뭐 대충 이런 계산이죠." "그건 전혀 기대 밖의 얘기로군요." 내가 그녀한테 말했다. "하긴 옛날에 나도 그런 수법에 걸린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오." "하지만 그땐 전문가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상대가 말예요." 그 말에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설거지를 거들어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내게 앞치마를 건네주었다. 나는 정중하게 그걸 의자 등에 걸쳐놓았다. 웬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던 것이다. 만일 이럴 때 아는 사람이라도 불쑥 들어와서 내가 그런 우스꽝스런 차림새로 설거지하는 모습을 들키게 된다면, 내 평생 그 오명을 어찌 다 씻어낼 것인가 ! 식기를 다 치운 뒤 우리는 거실로 돌아왔다. 샬롯은 아무 소파에나 털썩 주저앉았고, 나 역시 소파에 반쯤은 뻗어버렸다. 우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때서야 내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자, 됐어요. 이제는 당신이 날 만나러 온 이유를 듣고 싶군요. 또 심문인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백할 테니 그렇게 너무 다그치지 말아요. 사실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품고 이곳엘 왔소. 그 첫번째는 머리를 늘어뜨린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는 거였소. 그런데 와보니 생각보다 당신은 훨씬 더 아름다웠소." "그리고 또 한 가지는요?" "개업한 정신분석의로서 당신이라면 내 친구 잭 윌리엄스의 살인사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요." "그랬군요. 만일 지금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게 어떤 건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준다면 확실히 무슨 도움이든 줄 수가 있을 텐데요." "이것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나는 세부적인 사실이 필요하오. 나는 아직 이번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해결하고야 말겠소. 파티에 참석했었던 그 누군가가 잭을 죽였을 거라는 건 확실히 근거 있는 얘기요. 그게 외부에서 온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범행일 거라는 추측에도 근거가 있듯이 말이오. 나는 나 스스로 인물조사를 해보았소. 하지만 내가 발견한 사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소. 그렇다고 그게 살인을 저지를 만큼 중대한 동기가 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오. 그래서 나는 당신 의견을 듣고 싶었던 거요. 그것도 사실이라든가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닌, 순수하게 직업적인 전문가로서의 의견 말이오. 당신은 이번 사건에 틀림없이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당신이라면 이번 사건의 살인범으로 누구를 꼽을 것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 듣고 싶소." 샬롯은 천천히 담배를 깊이 한 모금 빤 다음, 그걸 재떨이에 비벼 껐다. 정신이 맹렬하게 활동을 개시했다는 것이 그녀의 표정에 역력히 나타났다. 그녀가 입을 열기까지는 1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어떤 한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라니, 무척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군요. 그런 건 보통 오랜 시간에 걸쳐 논의한 다음 12명의 배심원과 재판장에 의해 내려지게 되어 있는 거죠. 그렇잖아요, 마이크? 당신을 만난 뒤에 사실은 직업상 당신의 성격에 대해 연구해 보았답니다. 당신 같은 남자는 대체 어떤 모습을 갖고 있을까 궁금했던 거죠.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신문에는 당신이 한 일, 한 말, 그런 것들에 대해 잔뜩 실려 있었죠. 사설까지도 당신에 대해서 썼더군요. 그것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게 말예요. 하지만 나는 그래도 당신을 알아주고 또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잘 알아요.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거물급 인물에 이르기까지 말예요. 나도 당신이 좋아요. 하지만 솔직한 내 생각은 한 인간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판결을 쉽게 내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서운 일이라는 거예요. 아뇨, 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어요. 당신은 손이 너무 빠른 게 탈이지요. 내가 말하는 즉시 당신은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말 테니까요.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당신 마음이 그처럼 격렬한 증오로 가득차 있을 때만 빼면 당신이 멋있게 보일 때도 곧잘 있는데 말예요. 내가 당신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관찰해 온 것들을 당신한테 알려주는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당장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생각해 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기에, 오후 내내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았어요. 그러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확실하게 기억이 나더군요. 아마 당신이라면 그런 것에서 어떤 의미든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난 확신해요. 이제까지 나는 주로 개인의 갈등문제를 다뤄왔어요. 그것도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속되는 격투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예요. 하지만 두 사람,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문제는 그와 다르답니다. 아무튼 나는 이번 일을 기회로 여러 가지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되었어요. 우선 그런 것들을 본래의 장소에 다시 놓아보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정리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은 나도 할 수가 없어요. 가령 어떤 사람이 그 마음에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해봐요. 나는 그 사람이 그런 증오심을 품게 된 이유를 찾아내고, 그 이유에 확실한 논리적인 설명을 붙여 그 사람이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순 있지만, 만일 그 증오심이 동기가 되어 그가 살인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나는 단지 그 증오심을 사전에 고려해 두었어야 했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답니다. 살인자를 찾아낸다든지, 또는 어떤 범죄의 동기를 밝혀내는 것은 현재 내가 활용하고 있는 정신보다 더 기민한 정신에 속해 있는 거니까요."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차츰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이 무엇인지 분명해져 왔다. "그야말로 공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는 논리로군요." 내가 말했다. "그럼, 그 동안 당신이 관찰해 온 사실들에 대해서 일단 얘기해 주시오." "뭐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파티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잭은 정신적인 긴장상태에 놓여 있었어요. 그래서 그와 두 번이나 만나 얘기해 보았지만 조금도 효과가 없었죠. 내가 그 점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지만, 그는 그냥 웃으면서 아마도 아직까지 자기가 평범한 시민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만 하더군요. 그 당시에는 그의 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죠. 그는 전쟁터에서 한쪽 팔을 잃기까지 했으니까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보통 사람들처럼 생활하는 게 그에게는 고통스러울 게 분명하잖겠어요! 파티가 있었던 날 저녁에도 그런 긴장감은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어요. 마너 역시 그런 그의 영향을 받았는지 상당히 근심에 쌓여 있었고, 아무튼 내가 관찰한 바로는 잭과 마찬가지로 몹시 흥분해 있었어요.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죠. 다만 아주 사소한 일, 예를 들어 잔을 손에서 떨어뜨린다거나, 아니면 어디선가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났다 하면 공연히 발끈하는 정도였어요. 그날 잭이나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알아챈 건 아마 나 혼자뿐이었을 거예요. 칼레키 씨는 그날 무척 언짢은 표정으로 파티에 왔었어요. 사실 언짢다기보다는 화가 나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누구 때문에 화가 나 있었는지는 분명치가 않았어요. 아무튼 몇 번이나 해럴드 케인스를 나무라기도 하고, 또 메어리 벨레미한테는 장소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니까요." "어떤 식으로 말이오?" 내가 물었다. "두 사람이 춤을 추다가 그녀가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나 봐요.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내가 직접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말을 듣더니 그가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쓸데없는 흉내는 집어치워, 이 아가씨야.' 라고 쏘아붙이더군요. 그리고는 곧장 우리가 있는 쪽으로 그녀를 데려다 놓고는 나가 버리지 뭐예요." 그 말을 듣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내가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메어리 벨레미는 아마 조지에게 플로어 한가운데서 프로포즈를 했을 거요. 아무래도 그 녀석 이젠 정말 노인네가 다 된 모양이지? 아무튼 그녀가 대단한 색정광인 것만은 분명해요." "어머, 그래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아요?" 그녀의 말투는 아주 냉랭했다. "아아, 제발 이상하게는 생각지 말아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나한테도 그 수법을 써먹으려 했지만, 내가 그 수법에 넘어가지 않은 것뿐이니까 말이오." "그리고는요?" "그리고라니?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소. 나는 하고 싶은 일은 직접 발벗고 나서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이 그걸 접시에 담아 제발 먹어 주십시오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미요." "오, 나도 잘 기억해 둬야겠군요. 메어리가 그런 여자일 거라고는 진작부터 알아채고는 있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었어요. 어차피 우리는 우연히 알게 된 사이일 뿐이니까요. 아무튼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잭이 문 앞에서 나를 붙잡더니 이번 주 안으로 한번 자기를 만나러 와달라고 하더군요. 그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렀기 때문에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죠.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고 말았어요." "그랬군요." 나는 그녀의 증언을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아무튼 그녀의 말대로라면 잭은 무엇인가를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고, 마너 역시 그랬다는 얘기가 된다. 그 두 사람은 어쩌면 같은 걸 숨기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조지까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고. "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라도 있나요?" 샬롯이 물었다. "아니,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없소. 하지만 좀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소." 샬롯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문득 그녀의 손이 내 손 위로 겹쳐지며 우리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마이크, 부탁이 있어요. 물론 당신한테 지금 당장 이번 사건에서 손을 떼고 모든 걸 경찰에 다 맡겨 버리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디 조심하라는 거예요. 제발 다치지 않도록 몸을 조심하세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마치 오래 전부터 그녀를 알고 지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으며, 맥박이 가냘프게 뛰고 있었다. 나는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녀를 이제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조심하겠소." 나는 그녀한테 말했다. "하지만 왜 그런 걱정을 해주는 거요?" "이게 그 이유예요." 그녀는 입술을 벌리고 몸을 숙이더니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나는 그녀의 팔을 내 손이 아플 정도로 힘주어 잡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졌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 몸속 어디에선가 화산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낸 손자국을 보더니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사랑할 때면 무척 맹렬한 타입이로군요. 그렇죠, 마이크?" 이번에는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내 몸에 그녀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기 때문에 내 몸속에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그녀 역시 느끼게 되었다. 이번 키스는 길었다. 정말 내 생애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는 그런 키스였다. 나는 그녀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댄 뒤, 쾌감을 더욱 돋구어주기 위해 목덜미에 난 사마귀에 입술을 댔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나는 그녀의 몸을 돌려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함께 섰다. 그녀는 내 팔로 자기 허리를 단단히 감더니 머리를 내 머리에 기댔다. "나는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안 가면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서 말이오. 다음엔 천천히 놀다 가겠소. 나는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계속 나를 붙잡아두면 아무래도 그런 짓을 저지를 것만 같소."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위로 쳐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코에 살짝 입술을 댔다. "알았어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이렇게 있겠어요. 당신은 그냥 이곳에 와서 나를 당신 손에 넣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다시 한 번, 그러나 이번에는 신사답게 키스를 한 다음 문가로 갔다. 그녀가 모자를 건네주며 내 머리를 뒤로 쓰다듬어 주었다. "안녕, 마이크." 나는 윙크를 했다. "안녕, 샬롯. 정말 멋진 식사였소. 멋진 여자와 함께." 그리고 나서 내가 계단을 제대로 내려온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어떻게 해서 차에 올라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얼굴과 그 아름다운 몸매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해주던 그 키스와, 그녀의 눈동자에 어려 있었던 한결 같은 그 열정......나는 브로드웨이에서 차를 멈춘 다음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술집에 들렀다. 그러나 술도 별로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집으로 돌아와 평상시보다 일찍 침대로 들어가 버렸다. 제 7 장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나는 눈을 떴다. 이런 경우는 좀체 드문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샤워를 하고 면도를 마친 다음 계란 프라이를 몇 개 해서 먹어치웠다. 그리고 나서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으려니까 세탁소에서 심부름꾼이 깨끗이 세탁하여 다림질을 끝낸 양복을 들고 왔다. 솔기가 튿어졌던 주머니는 감쪽같이 꿰매져서 도무지 튿어졌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천천히 양복을 차려입은 다음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예, 해머 사립탐정사무실입니다." "오, 일찍 나왔군 그래. 벨더, 난 당신 소장이야." "어머!" "이봐, 제발 그쯤 해두라고, 허니." 내가 애원했다.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줘. 그 루즈 자국은 직업상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이렇게 당신한테 목이 짓눌려 있어서야 어떻게 제대로 일을 처리하겠어, 안 그래?" "그러니까 잘하고 계시잖아요. " 그녀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무슨 용건이시죠, 해머 씨?" "전화 온 거 있나?" "예." "편지 온 건 있어?" "예." "나와 결혼해 주겠어?" "예." "자, 그럼, 잘 있으라고." "결혼이라고요? 아니......저, 잠깐만요, 마이크! 마이크! 여보세요......여보세요......" 나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벨더는 이젠 잘 구워삶은 것이다. 아마 이번에 다시 그 말을 입에 올린다면 그녀는, "예." 라는 말 대신 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올 테지. 그런 수법은 적절하게만 쓰면 아주 효과가 만점인 법이다. 비록 그 말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해도. 그러나 벨더를 데리고 여행하는 것도 뭐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경찰에서는 잭의 아파트에 형사를 잠복근무시키는 것을 중지했다. 이미 가택수색은 다 마쳤기 때문에 문은 굳게 잠궈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는 죄목으로 지방검사의 사무실까지 연행되어 귀찮은 일을 겪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대신 그의 아파트 주위를 대강 둘러보았다. 문을 통해 그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나니, 언뜻 아파트 구조상 욕실 창문이 환기구멍과 바싹 접해 있고, 바로 그 뒤로는 다른 아파트의 창문이 있는 게 떠올랐다. 나는 홀을 돌아 잭의 방과 반대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파트 문을 노크했다. 이내 키가 작달막한 중년남자가 얼굴을 내밀었기에 나는 그 남자의 코앞에 배지를 슬쩍 보여 주었다. "경찰이오." 라는 말이 내가 말한 전부였다. 배지를 보고서도 그는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그는 법률이나 사회질서를 준수하고 있는 선량하고 존경할 만한 보통 시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낡은 스모킹 재킷의 옷자락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애써 악의 없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 남자는 바로 한 달 전까지 자기가 경영했던 풍속영업(風俗營業) 건 때문에 라인 업(용의자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의 시민이나 경찰관을 나란히 세워놓고 증인에게 범인을 지목하게 하는 것. 일종의 대질임)에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온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예......형사님...... 그런데 무슨 용건이라도......?" "나는 지금 윌리엄스 씨의 아파트로 숨어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입구가 있는지 조사하고 있는 중이오. 그런데 이 댁에 그 사람의 아파트와 바로 마주보는 창문이 있는 것 같아서요. 맞습니까?" 그의 입이 멍청하게 딱 벌어졌다. "그......그야 그렇긴 합니다만......하지만 우리 눈에 띄지 않고는 고양이 한 마리도 그 창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요." "그것은 문제가 아니오."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밧줄을 타고 지붕에서 내려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오. 내가 조사하고 싶은 것은 그 창문을 밖에서도 열 수 있나 없나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조사하기 위해 줄을 타고 곡예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그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 참, 그렇기도 하겠군요. 누구든 그러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자, 이쪽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때 잔소리깨나 할 듯싶은 여자가 침실문을 열더니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존, 무슨 일이에요?" "응, 경찰에서 왔어." 심각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한테 뭐 좀 도와달라는군." 그는 나를 욕실로 안내했다. 나는 욕실에 있는 창문을 들어올려 보았다. 그것은 굉장히 힘이 드는 일이었다. 아마도 사람들한테 들키는 걸 겁내는 고귀한 양반들은 단 한 번도 이 창문을 열어본 적이 없으리라. 창문이 올라가자 말라버린 페인트의 파편들이 우수수 욕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바로 맞은편에 잭의 욕실 창문이 나타났다. 됐어,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쪽 창문과 저쪽 창문 사이에는 약 1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바지의 혁대를 잡아달라고 그 작달막한 남자한테 부탁을 한 뒤 나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나서 앞쪽으로 몸을 굽혔다. 순간 그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그의 마누라가 침실에서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그러나 나는 앞가슴을 내밀고 저쪽 벽에 손을 댄 채 몸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틀림없이 이 남자는 나를 굉장히 무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잭의 욕실 창문은 손쉽게 올라갔다. 그 공간을 넘어 그 창문으로 몸을 밀어넣은 다음, 나는 그 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실내로 쑥 들어갔다. 실내에 있는 가구들은 별로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 다만 감식과의 지문검출반원들이 손댄 자국이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곳에 가루를 뿌려놓았고, 잭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던 장소에 그 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아웃라인이 분필로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잭의 의수는 그가 본래 놓아두었던 바로 그 자리인 침대 위에 얹혀 있었다. 없어진 것은 그의 권총뿐이었는데, 빈 권총집 안에는 웬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어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마이크'라고 적혀 있었다. '이 권총을 압수해 갔다고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게. 이건 수사본부로 가져가네.' 그리고는 밑에 '패트'라고 서명이 되어 있었다. '패트'라. 어떻게 이럴 수가? 패트 녀석,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아파트로 숨어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해. 나는 그 쪽지의 끝부분에 다시 몇 마디를 추가로 적어서 그걸 본래의 장소에 집어넣었다. 내가 쓴 내용은 이러했다. '고맙네, 친구. 내가 억울해 할 리가 있겠나?' 그리고 그 밑에 '마이크'라고 서명을 했다. 경찰이 이곳을 샅샅이 조사했다는 것은 한눈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교묘하면서도 완벽했다. 여러 가지 물건들이 범행 당시 때와 똑같은 자리에 다시 놓여져 있었으며,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주 조금밖에 없었기 때문에 얼핏 보아서는 도무지 수색을 당한 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실 바닥을 중심으로 의자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조사를 한 다음, 양탄자를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양탄자는 작은 얼룩이 약간 묻어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긴 소파를 조사할 때는 쿠션 밑에서 3센트를 찾아낸 것이 고작이었다. 라디오 내부는 쌓여 있는 먼지가 보여주듯 몇 달 동안이나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근처에 있는 책 속에도 아무것도 숨겨둔 게 없었으며, 책갈피에 한 장쯤 끼어 있을 법한 그 흔해 빠진 봉투나 장서인(藏書印), 기타 종이 나부랭이 한 장 눈에 띄지 않았다. 설사 그런 게 있었다 해도 벌써 경찰에서 압수해 갔을 테지만. 조사를 마치고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본래 있었던 자리에 되돌려놓은 다음 욕실로 가보았다. 그러나 죽 늘어선 병이며 면도기구 등이 캐비닛 속에 들어 있을 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실은 바로 그 옆이었다. 나는 침대의 매트리스를 들어올리고 안을 열어보게끔 되어 있는 부분이나, 혹은 새로 꿰맨 자국이 나 있는 부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별로 운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잠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긴 채 나는 바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잭은 늘 일기를 쓰고 있었고, 그 일기장을 언제나 옷장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또다시 경찰한테 선수를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그 속에 무슨 접어둔 메모지라도 있을지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아쉬워하면서 나는 창문의 차양까지 조사해 보았다. 순간 무엇인가가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잭이 군에 복무하고 있을 당시부터 수첩이나 주소록 같은 작은 메모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그래서 나는 옷장을 조사해 보았다. 서랍에서 셔츠와 양말, 팬티까지 몽땅 다 꺼내어 샅샅이 조사해 보았지만 시간만 허비했을 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서랍의 밑바닥까지 훑어보다가 그 밑에서 넥타이 하나를 찾아내어 그걸 어깨에 걸쳤다. 서랍을 다 조사하고 난 뒤 합판 밑을 뒤져보다가 그 넥타이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 외에 또 하나 찾아낸 것이 있었다. 바로 잭의 수첩이었다. 나는 그걸 지금 당장 조사해 볼 생각은 없었다. 이미 시간이 거의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순찰을 돌던 경찰관이 불쑥 나타나 나를 체포해 갈 수도 있었고, 또 그 작달막한 남자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 의심을 품고 경찰에 연락할 우려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서랍에서 끄집어낸 물건들을 도로 다 집어넣은 다음, 그 서랍을 옷장의 원래 있던 곳에 끼워넣었다. 그리고 잭의 수첩은 내 뒷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작달막한 남자는 자기 아파트의 욕실에서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잭의 욕실 창문으로 몸을 내민 다음 창틀 위쪽에 밧줄을 건 흔적이 있는지 조사해 보는 척했다. 그의 시선은 조심스럽게 내 동작 하나하나를 좇고 있었다. "뭐라도 발견했습니까, 형사님?" 그가 내게 물었다. "아쉽지만 틀렸소. 여기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어요. 다른 창문들도 다 조사해 보았지만 연 흔적이 있는 창문은 하나도 없었소." 나는 지붕 쪽을 쳐다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 남자 쪽으로 발을 내딛기 전까지는 충분히 몸을 젖힐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남자가 서 있는 욕실 쪽으로 천천히 들어간 다음 정말 뭔가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뒤로 고개를 젖혔다. "자, 이쪽은 이것으로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저쪽 방으로 가서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런 것쯤이야 괜찮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마치 장님한테 길을 인도해 주는 개처럼 나를 욕실 맞은편 방으로 안내하더니 그 방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늘 경찰에 협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지요." 이윽고 내가 돌아가려 하자 그가 내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꼭 좀 알려 주십시오. 정말 이렇게 도와 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나는 곧장 사무실로 차를 몬 다음, 뒷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벨더가 타이프를 치고 있었던 손가락을 멈췄다. "마이크." 나는 뒤돌아보았다. 이크, 벌써 시작이로군. "무슨 일이지?" "제발 그런 식으로 날 놀리지 말아요." 나는 한껏 빙그레 웃어 주었다. "난 놀린 적이 없는데." 내가 말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약혼할 수 있지. 그건 그렇고, 잠깐 내 방으로 들어와요." 그녀는 내 뒤를 따라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나는 경사진 책상에 두 다리를 얹어놓고 수첩의 페이지를 대강 넘겨 보았다. 그러자 벨더가 흥미를 나타냈다. "그게 뭐예요?" 좀더 자세히 보려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잭의 수첩이야. 경찰이 압수해 가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방에서 슬쩍해 온 거야." "혹시 무슨 단서라도?" "있을지도 모르지. 아직 보지 못했어." 제일 첫 장에 나온 것은 그 수첩의 인명 리스트였는데, 그것은 모두 X자로 그어져 있었다. 페이지에는 각각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날짜는 3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군데군데 용의자를 각 부문으로 분류해 놓고, 그 밑에 참고사항이나 해야할 행동들에 대해 적어놓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들에도 역시 X자가 그어져 있었다. 수첩의 중간 페이지쯤 이르자 X자가 그어지지 않은, 현재까지 계속 수사중에 있는 미결사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것들을 리스트로 뽑아 따로 기록해 두자, 웰더는 그것을 뉴스 스크랩과 대조해 보았다. 그 일을 끝내자 내가 뽑아놓은 리스트에는 '해결됨'이라는 글자가 모두 달려 있었다. 확실히 그 시기의 사건들은 잭이 육군에 복무하고 있을 때 다 해결된 것들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별로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어느 한 페이지에는 잭이 '술!'이라는 글자를 휘갈겨 써놓았는데, 날짜를 보니 그가 군에서 제대한 날짜였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송아지 고기와 고추절임에 대한 요리 비법이 적혀 있고, 그 밑에 보통 만드는 요리법보다 소금을 더 많이 넣을 것이라는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두 페이지 이상 계속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 숫자 중의 하나는 어느 은행에 예금되어 있는 잔고와 양복을 새로 맞추는 데 들어간 비용을 조목조목 계산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짧은 메모가 곁들여 있었다. '아일린 비커스. 가족은 현재도 포키푸시에 살고 있음.' 그 여자는 고향에서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잭은 포키푸시에서 태어나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보험회사에서 받은 지시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일린 비커스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V(Eileen Vickers의 약자)와 다시 만나다. 가족에게 전화해 줄 것.' 날짜는 잭이 살해되기 꼭 2주일 전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이름은 다섯 페이지 뒤에 다시 나타났다. 잭은 연필로 진하게 이렇게 적어놓았다. 'RH 비커스. 포 221.' '하퍼 씨 댁에는 6시 이후에 전화할 것.'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EV 가명 메어리 라이트. 주소-- 나중에 조사할 것.'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나는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애써 보았다. 나에게는 이것이 잭이 자기 고향에서 올라온 여자를 만나 나눈 얘기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이 포키푸시에 아직 살고 있다고 그에게 이야기했고, 그는 포키푸시에 전화를 걸었다가 그 가족이 하퍼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가족과 연락하기 위해서는 식사시간에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나서 다음 단계인 EV, 즉 아일린 비커스에 대한 조사를 순조롭게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는데, 그만 그녀가 메어리 라이트라는 가명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정확한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다시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자 또다시 그 여자의 이름이 나타났다. 'EV에 대한 건. 가족에게 전화할 것. 심각한 상태. 29일에 36904, 알아낼 것.' 그런데 오늘이 바로 29일이었다. 수첩에는 아직 페이지가 더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는 나중에 생각해 낸 듯한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CM 그녀와 상의할 것.' CM은 샬롯 매닝을 뜻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샬롯이 내게 얘기해 준 일과 잭이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그 일주일 사이에 진찰을 받아 보려 했으나 끝끝내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린 다음 교환수를 불렀다. 그리고 교환수가 나오자 포키푸시에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전화선이 연결됐는지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화기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내가 말했다. "비커스 씨입니까?" "아니오."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하퍼라는 사람입니다. 비커스 씨는 아직 직장에 계시지요. 무슨 전할 말씀이라도?" "아닙니다. 다만 그곳에 비커스 씨의 따님이 계신지 알고 싶어서요 -- 그녀가......그곳에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비커스 씨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시죠?" "나는 마이클 해머라는 사립탐정입니다. 어떤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과 함께 애쓰고 있는 사람이지요. 지금 그 사건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추적하고 있는 중인데, 죄송하지만 그쪽의 가정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하퍼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비커스 씨는 따님이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로는 따님과 계속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떤 젊은 남자와 방탕하고 타락된 생활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지요. 비커스 씨는 아주 엄한 분이라서, 자기 딸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따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 해도 그분은 그냥 모르는 척하고 말 겁니다." "그렇습니까. 아무튼 고맙소." 나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어놓고 벨더를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써놓은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36904. "마이크." "왜?" "이 숫자가 뭔지 알겠어요?" 나는 그 숫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렴풋이 경찰의 기록에 적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감은 잡았지만, 세 번이나 다시 쳐다보고서야 그 숫자가 무척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군. 확실히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그래,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나." 벨더는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들더니 수첩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자, 이렇게 써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서 그녀는 번호를 차례대로 써내려갔다. XX 3-6904. "맞았어.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군 그래. 전화번호였어." "그래요. 그럼 이번에는 X자 대신 다른 글자로 바꿔 보세요. 무슨 전화번호인지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서류철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전화번호를 어디서 봤었는지 생각이 난 것이다. 그것은 어떤 뚜쟁이한테서 빼앗은 명함 뒤에 적혀 있는 번호였다. 그 꼬마 녀석이 나한테 물건을 속여 팔려고 했기 때문에 까불지 말라고 손을 봐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트 종이나 명함, 메뉴판 뒷면에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전화번호 홀더를 가지고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 철에서 나는 한 장을 뽑아냈다. '댄스 교습'이라고 적혀 있고, 밑에 '미녀 20명'이라고 적혀 있는 종이였다. 그 뒷면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전화번호를 잭의 수첩에 적혀 있는 것과 대조해 보았다. 두 번호는 똑같았다. 다른 것은 롤렌(Loellen)을 표시하는 LO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틀림없는 전화번호였다. LO3-6904. 벨더는 내 손에서 그것을 낚아채더니 소리내어 읽었다. "마이크, 이게 어디 전화번호예요?" "콜 하우스의 전화번호야.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비커스라는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장소라고." 내가 수화기를 들어올리려 했는데, 벨더가 재빨리 내 손등을 눌렀다. "마이크, 설마 정말로 그런 곳에 가려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안될까?" "마이크!"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봐, 벨더,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나, 응? 나는 그곳에 가서 뭘 사려는 게 아니야. 군대에 있을 때 착한 남자애가 나쁜 여자애와 어울려 놀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 영화를 봐서 잘 알고 있어. 그 영화를 보고 나서는 정말 어머니한테 키스하기조차 께름칙할 정도였어." "그렇다면 좋아요. 가보세요. 하지만 발걸음이 휘청거리지 않도록 조심해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가는 새 비서를 고용해야 될 줄 아세요."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이번에 나온 목소리는 너무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마치, "여보세요." 라고 하는 그 목소리 뒤에 단정치 못하게 담배를 꼬나물고 야하기 이를 데 없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곰팡내가 물씬 풍기는 쉰 살 정도 먹은 여자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보세요." 내가 말했다. "그곳은 숙박 예약도 받소?"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피터 스털링. 다운타운에 있는 작달막한 남자한테서 그쪽 전화번호를 알게 됐소." "좋습니다. 밤 9시 전에 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즐거움의 시작을 보실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올 나이트를 희망하시나요?" "지금은 그럴 생각이지만,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하겠소. 아무튼 오늘밤 예약을 해두시오. 집에서 몰래 도망쳐 가는 것이니까 말이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벨더에게 살짝 윙크를 했지만, 그녀는 그 윙크를 받아주지 않았다. "적어두었어요. 요금은 현금으로 부탁합니다. 오셔서 세 번은 길게, 그리고 짧게 한 번 벨을 눌러 주세요." "알았소." 나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었다. 벨더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팔로 그녀를 감싸고 부드럽게 껴안아 주었다. "이봐, 웰더." 내가 속삭였다. "우린 현실적으로 이 사건과 부딪치지 않으면 안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그런 장소에 가겠어, 안 그래?"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는 코를 훌쩍거렸다. "하지만 아무 짓도 안하겠다고 내 약속했잖소. 장담해도 좋아. 난 그런 장소를 수시로 드나들 만큼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이제까지도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내 상대가 되어줄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어." 그녀는 내 가슴을 손으로 꼭 잡고 흔들어댔다. "어머, 난 그런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그녀는 정말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소장님 같은 사람,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는군요......하지만, 마이크, 미안해요. 어차피 나는 소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에 불과한걸요 뭐. 내가 한 쓸데없는 말들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나는 그녀의 코를 가볍게 톡톡 치며 빙그레 웃었다.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이지, 당신이? 하지만 당신이 없다면 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는데도 말이오? 자, 이제 그만 기분을 풀고 전화 옆에 꼭 있어 줘. 여기서는 물론이고, 당신 집에서도 말이야. 내가 내 자신을 위해 몇 가지 단서를 주워 오려면 당신 손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자 벨더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좋아요, 마이크. 나는 그 낚시대에서 눈을 떼지 않겠어요. 소장님이나 여자의 곡선미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요. 자, 빨리 빨리!" 내가 사무실을 나설 무렵 그녀는 책상 위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 제 8 장 먼저 전화연락을 해 온 사람은 패트였다. 그는 내 수사내용에 대해 무척 궁금해 했지만, 나는 그리 많이 털어놓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그도 비커스의 딸에 대해 알게 되기야 하겠지만, 나는 그전에 우선 12센트 은화 두 개로 그를 한 번 골탕먹여 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전화번호부에서 대충 몇 가지 번호를 골라낸 다음, 그 가운데 콜 하우스의 번호도 섞어놓았다. 패트가 그 전화번호들을 조사하고 나를 위해 그 번호들의 주소를 조회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에게 약간의 정보를 흘려 주었다. 그리고 그와 작별인사를 한 다음 패트가 가르쳐 준 사실이 정말 엉터리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전화번호부와 대조해 보았다. 전화번호부와 주소는 완전히 일치했다. 패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했던 것이다. 내 계산은 패트가 내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로 주소를 알아내어 행동을 개시하게 되기까지는 내가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차를 그 구역 중간쯤까지 몬 다음 앞쪽에 차를 주차시켰다. 내 행선지는 501번지였는데, 그곳은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낡은 아파트였다. 나는 잠시 동안 그 건물의 맞은편 도로에서 그 건물의 입구를 지켜보았는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보기에는 아무도 안 살고 있을 것 같은 3층의 어떤 방에서 불빛이 약간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약속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 건물은 마치 매춘부처럼 옆 건물에 찰싹 달라붙은 채 회색빛 유령의 도시처럼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은 채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평범한 사창가 구역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의 성질로 보아 어마어마한 소굴임이 분명했다. 고색창연하고 조용한 이 부근은 지하실까지 있는 아파트에 남자들이 몇 사람씩이나 드나드는데도 짐짓 그걸 못 본 체하는 경찰이 매일 밤 서너 번 순찰을 돌 뿐이었다 -- 아이들에게 이 일대는 별 볼일 없는 장소인 것이다. 문 입구에는 진을 치고 있는 그 흔한 주정뱅이들의 모습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피우던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끈 다음 도로를 건너갔다. 약속대로 세 번은 길게 한 번은 짧게 벨을 눌렀다. 아주 작게 벨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나온 사람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단정치 못한 금발 여자는 아니었다. 나이가 쉰살 가량 돼보이는 건 내 생각대로였지만, 입고 있는 드레스는 소박하면서도 단정했다. 화장은 그저 흉내만 낸 정도였고, 머리는 둘둘 말아 올려져 있었다. 그녀를 본 첫 느낌은 그냥 이웃집 아주머니 같다는 것이었다. "피터 스털링이오." 내가 말했다. "어머, 그러세요. 어서 오세요." 그녀는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등뒤에서 문을 닫은 다음 홀인 거실 구석 쪽을 향해 이리 오라는 몸짓을 했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변화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저 수수하게만 보였던 바깥과는 전혀 딴판으로, 그 방은 자극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가구는 현대적이면서도 쾌적했고, 벽은 방 구석에 나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계단과 조화를 이루는 풍부한 느낌을 주는 널빤지로 개조되어 있었다. 그 방으로 들어서서야 비로소 나는 창문으로 불빛이 새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창문은 검은 벨벳으로 된 커튼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모자는 맡아두죠." 나는 손을 뻗어 모자를 벗었다. 2층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올 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다시 방으로 되돌아온 여자는 나에게 앉으라는 몸짓을 하며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좋은 곳이오." 내가 내 생각을 말했다. "물론이죠. 여기는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니까요." 나는 이 여자가 내게 질문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아까 전화로는 우리 집의 어떤 대리인과 만나서 그가 당신한테 이곳을 소개했다고 하셨는데, 그 대리인은 어떤 사람이었죠?" "키가 작고 껄렁거리는 친구였는데, 이곳이 이렇게 훌륭한 곳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소. 내가 그 친구를 약간 손봐 주기는 했지만 말이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예, 그 일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해머 씨. 그 사람은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어요. 몸을 회복하기까지는 말예요." 이 여자, 나를 겁줄 생각이 아니라면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 "내가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알아냈소?"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선생님이 아무리 유명인사가 되기 싫어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신문에 선생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리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말인데요, 어째서 구태여 이곳까지 찾아오신 건가요?" "그건 당신 상상에 맡기겠소."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선생님 같은 분도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요. 어쨌든 좋습니다, 스털링 씨. 자, 2층으로." "좋소. 그런데 2층에는 어떤 애들이 있는 거요?" "꽤 쓸 만한 애들도 몇 명 있지요. 아무튼 일단 구경해 보세요. 하지만 그전에 25달러를 내셔야 합니다." 나는 선뜻 돈을 꺼내 주었다. 그녀는 계단까지 나를 안내했다. 계단 난간 기둥에는 버튼이 달려 있었는데, 그녀는 그 버튼을 눌렀다. 2층에서 벨소리가 울리자 문이 열리며 불빛이 계단에 쏟아져 내렸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긴 가운을 걸친 채 그 입구에 서 있었다. "올라오시지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한꺼번에 두 계단씩 뛰어올라갔다. 그녀는 예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다는 걸 알았지만 화장이 여자의 맛을 물씬 풍겨 주고 있었다. 그러나 몸매만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도 거실이었는데, 이번에는 여러 여자들이 있었다. 마담이 꽤 쓸 만한 애들도 몇 명 있다고 말한 의미는 이것이었다. 방안의 여자들은 제각기 책을 읽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앉아 있었다. 금발머리 여자들, 검은 머리의 여자들, 그리고 붉은 머리 여자도 둘. 그 여자들은 모두 다 몸에 거의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이런 광경을 본 남자라면 그 누구나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겠지만, 나에게만은 그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 웰더와 잭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곳에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걸 어떻게 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내 목적은 아일린 비커스였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가명은 메어리 라이트. 하긴 꼭 세금을 속여 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일부러 본명을 쓸 이유도 없을 테지. 아무도 나한테 눈짓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 내가 저 여자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모양이로구나, 하고 짐작했다. 나를 안내해 준 여자는 기다리고 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특별히 누구 찾는 사람이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메어리 라이트."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 그녀는 지금 자기 방에 있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데려다 드릴 테니까요." 그녀는 문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뒤에 다시 나타났다. "복도를 똑바로 따라가다가 맨 안쪽 끝에서 두 번째 문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느새 문을 지나 긴 복도로 나온 자신을 발견했다. 한쪽 벽은 새로 단장되어 있었으며, 그 벽에 나 있는 문은 모두 후추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문 하나하나마다 손잡이가 달려 있었는데, 열쇠구멍이 있는 문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맨 끝에서 두 번째 문도 다른 문과 마찬가지였다. 문에서 노크를 하자 안에서, "어서 오세요." 라는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잡이를 돌린 다음 앞으로 밀었다. 메어리 라이트는 머리를 빗으면서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거라고는 브래지어와 스타킹뿐이었으며, 발에는 실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거울 너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과거에는 예뻤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아름다움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그건 나이에서 오는 주름이 아니었다. 그녀의 볼이 약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걸 억제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20대도 반 이상 넘은 것처럼 보였다. 좀더 나이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대충 그 정도일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이 방안에 있는 여자는 온갖 인생, 아주 혹독하고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을 경험하며 살아온 여자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양 상태도 좋고 약간 말라 보이는 날씬한 몸매였지만, 감정적으로는 메말라 있는 것이다. 죽은 달팽이와 같은 공허감. 이런 직업과 자신의 과거가 그녀의 눈빛 속에 새겨져 있었다. 설사 거칠게 다룬다 해도 절대로 기를 쓰고 울 여자가 아니었다. 물론 표정이야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두들겨 팬다 해도 이 여자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 역시 타고난 창녀는 아니었다. 청초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별로 야하지도 않았다. 머리는 눈동자와 같은 갈색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요즘 일광욕을 했거나 전등불 밑에서 날을 보냈음이 분명했다. 피부에 온통 햇볕에 탄 자국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몸매는 놀랄 만한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평균 수준이었다. 가슴은 별로 풍만한 편이 아니었지만, 두 다리의 각선미는 멋있었다. 웬지 나는 이 여자가 가련하게 여겨졌다. "어서 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그녀는 마치 외출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처럼 앉아 있었고, 내 모습은 그 옆에서 커프스 버튼이라도 찾고 있는 남편 같은 꼴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약간은. 하지만 바에서 어물쩡거리는 게 싫증이 나서 말이야." 나는 방안을 대강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 구석에 놓인 탁자에 몸을 기대며 책꽂이의 책에 시선을 보냈다. 벽의 조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내 손가락은 탁자 밑을 구석구석 더듬어 보고 있었다. 녹음장치나 도청장치는 대개 이런 곳에 설치되어 있기 마련이었고, 나는 함정에 빠지는 실수는 저지르기 싫었다. 다음은 침대였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 밑을 훑어보았다. 전선은 없었다. 메어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도청장치를 찾고 계신 거라면 그런 건 이 방에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이 방의 벽들은 방음장치도 잘되어 있어요." 그녀는 내 앞에 섰다. "우선 한잔하시겠어요?" "아니." "그럼, 나중에 하기로 해요."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왜요?" "여기 온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아니, 그럼 무슨 목적으로 오신 거죠? 잠깐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서 오신 건가요?" "바로 맞았어, 아일린." 순간 그녀가 기절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입술이 굳게 닫혔다. 나는 그녀의 입을 열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 대체 누구시죠?" "본명은 마이크 해머요. 사립탐정이고." 내가 수상한 자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깨달은 듯했다. 내 이름을 듣자 그녀는 온몸을 굳혔다. 형태도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녀의 몸속으로 한발 한발 들어서고 있었다. "당신, 경찰의 앞잡이로군요. 날 어떡하려고 그러는 거죠? 혹시 우리 아버지가 당신을 보냈다면......" 나는 급히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보낸 사람은 당신 아버지가 아니오. 다른 누구에게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내 친구 하나가 살해당했지. 이름은 잭 윌리엄스." 그러자 그녀의 손이 입가로 갔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비명이라도 지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비명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침대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두 볼을 따라 화장한 얼굴에 자국을 남기며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아......나......난 -- 난 모르고 있었어요." "신문을 안 읽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소지품에서 당신 이름이 나왔지. 얼마 전에 그가 당신을 만나러 왔었지?" "예. 그런데 나는 체포되는 건가요?" "천만에. 나는 사람을 체포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체질이오. 다만 쏘아죽이고 싶을 뿐이지. 그 살인범 녀석을 말이야." 눈물은 이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 솟아오르고 있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내가 가까스로 찾아낸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잭이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잭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긴 그런 게 여자들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잭이 살해됐을 리가 없어요. 그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는데......나 -- 나는 여기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숨기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가 알아버린 거예요. 언젠가는 다른 확실한 일자리를 구해 주기도 했지만, 나는 그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어요." 메어리는 고개를 돌리더니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마구 흐느껴 울었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이제는 울어도 소용없는 일이오. 대신 당신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할 테니, 그 질문에 대답이나 해주시오. 자, 진정하고......똑바로 앉아서 잘 들어봐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원래 잭은 오늘밤 이곳을 손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게 경찰한테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소. 오늘밤 손을 쓰기도 전에 잭이 먼저 살해당하고 만 거요. 그런데 오늘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요?" 메어리는 몸을 굳혔다. 이제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잘 모르겠어요." 겨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잭이 무슨 일을 벌일 만한 이유가 없어요. 이런 곳은 이 도시에서 한창 번창해 가고 있고, 누가 보복할 만한 일도 없는걸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덧붙였다. "오늘밤 이곳에 누가 오기로 되어 있지?"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오늘밤엔 쇼가 벌어지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 쇼를 구경하러 올 거예요. 그 쇼가 어떤 건지는 잘 알고 계시죠? 그런 쇼는 이 거리에서는 늘상 구경할 수 있는 것으로, 돈 많은 사람들이 순간의 쾌락을 위해 조용히 모여들죠. 난 높은 양반들과는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건 세상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내 말은 말예요. 그 사람들은 그저 돈이나 잔뜩 갖고 있는 인간들이라고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어떻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교외에서 찾아오는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뚱보 녀석들. 온갖 곳에 줄을 대놓았다가 무슨 일만 벌어졌다 하면 돈부터 뿌려대는 무절제한 시민들. 그저 외설 사진과 돈만 손에 넣으면 입이 헤 벌어지고, 그것의 입수경로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남자나 여자로, 그저 돈밖에 없는 멍텅구리 녀석들. 이국적 취미의 사디스틱한 성애 (性愛)를 즐기는 변대성욕자들의 무리. 비열하고 천한 놈들. 그런가 하면 개중에는 이런 곳을 드나들기 위해 푼푼히 돈을 모은 다음, 그 모은 돈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이 거리로 찾아오는 시골 촌뜨기들도 있다. 나는 약간 질문의 각도를 바꾸었다. "그런데 왜 이런 직업을 갖게 되었소?" "바보같이 무슨 그런 질문을......이야기하면 길기만 할 뿐, 당신한테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에요." "아니, 나도 뭐 당신의 사생활을 캐보려고 그러는 게 아니오. 다만 당신한테 듣고 싶은 거지.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말이오. 당신이 얘기하는 게 당신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얘기가 이번 사건의 해결에 빛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오. 나는 당신과 관계된 그 어떤 일이 잭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소. 따라서 그것만 알게 된다면 다른 단서를 찾아낼 수도 있단 말이오. 나는 지금 당신을 두들겨 패서라도 당신이 다 털어놓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오. 그리고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건 문제도 아니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소. 그건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것 역시 당신 결심에 달려 있지." "그렇다면 좋아요, 정말 내 얘기가 도움이 된다면. 하지만 잭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난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이때까지 내가 만난 남자 중 정말 괜찮았던 두세 명 중 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나를 이 바닥에서 구해 주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지만, 난 항상 그를 실망시키기만 했죠. 아마 보통때였다면 이런 얘기를 하면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소란을 피우기에는 이미 때가 지나버렸고, 또 그렇게 소란을 피워 봤자 아무 소용도 없잖아요."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담배를 꺼내어 그녀에게도 한 개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았다. 우리는 불을 붙였다. 그런 다음,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그녀가 얘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애당초 일이 시작된 것은 대학에서부터였어요. 나는 교사가 될 작정으로 미드웨스트로 갔죠. 그 대학은 남녀공학이었는데, 학기 중에 한 남학생을 알게 되었어요. 이름이 존 핸슨이라는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어요. 우리는 결혼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밤, 축구경기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를 세우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마 상상이 가실 거예요. 그로부터 3개월 뒤에 나는 대학을 중퇴했죠. 내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존은 결혼할 생각은 않고 나를 의사한테 데려갔어요. 수술이 끝난 뒤 나는 벌벌 떨려서 노이로제 증세까지 일으켰지요. 그로부터 얼마 동안은 존과 나는 목사님의 축복도 받지 않은 채 어떤 아파트에서 부부처럼 살았어요. 고향에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여러 가지 트러블이 있은 뒤 어느 날 아버지한테서 부녀의 인연을 끊겠다는 편지가 날아들었죠. 그 편지가 온 날 밤, 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기다렸지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마지막으로 학교에 전화를 걸어 봤어요. 그는 커리큘럼에서 낙제를 했더군요. 그 이후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아파트 집세를 낼 때는 다가오는데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어요. 이제부터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얘기들뿐이에요. 그때부터 난 접객업(接客業)이란 걸 시작했어요. 남자 손님들을 받는 일 말예요. 그때 당시로서는 그들한테서 돈을 뜯어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죠. 아파트 주인 여자한테 발각되기 전 몇 주일 동안은 그런 짓을 계속했는데, 결국엔 들통이 나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곳을 나온 다음부터는 거리로 나가 남자를 유혹하지는 않았어요. 어디에선가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나 나를 방이 하나하나 독립되어 있는 집으로 데려갔으니까요. 그곳은 이런 집이 아니었어요. 더럽고 연기에 그을린 집이었어요. 게다가 마담이라는 여자가 신경질적이고 심술궂은 할머니였는데, 그녀는 걸핏하면 우리한테 물건을 집어던지곤 했죠. 처음에 내가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할머니는 자기한테는 그 동안 내가 한 짓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까 만일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나를 경찰에 넘겨 버리겠다고 협박하더군요. 그런 상황하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어느 날 밤 나는 우연히 같은 방에 있던 여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녀는 그 세계에서는 웬만큼 알려진 여자였죠. 폭탄처럼 정열적이면서도 자신을 비싸게 파는 요령을 터득한 여자였으니까요. 내가 내 사정 얘기를 하자 갑자기 그녀가 악마처럼 킬킬거리고 웃지 뭐예요. 그녀도 같은 일을 겪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모든 일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 똑같이 일치했어요. 나는 존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을 해주었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를 이런 곳에 떨어지게 만든 것도 바로 그였던 거예요. 내 얘기를 듣더니 그 여자는 벌컥 화를 내며 자제심이고 뭐고 다 잊고 한동안 길길이 날뛰더군요. 그 이후에 우리는 힘을 합해 존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했어요. 지금 나는 큰 조직의 일부예요. 우리를 필요로 하는 장소라면 그 어디고 가야만 해요. 얼마 전부터 나는 이곳에서 일해 왔어요. 보시다시피 말이죠. 또 물어보실 게 있나요?" 그것은 흔한 통속적인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가련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해도, 나는 그녀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대학에 다녔던 게 지금부터 몇 년 전쯤의 일이지요?" 내가 물었다. "12년이에요." "음." 더 이상 질문을 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지갑을 꺼내어 그 속에서 5달러짜리 지폐와 명함을 끄집어냈다. "그 밖에 또 다른 정보가 있으면 이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줘요. 그리고 이건 당신 몫이고.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에 좀 가봐야겠소."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그밖에는......아무것도......필요하지 않단......말인가요?" "그래요. 하지만 아무튼 고마웠소.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해 줘요." "예, 그렇게 할께요." 나는 다른 출구를 찾아내어 흔들리는 계단을 지나 아래층 홀로 내려왔다. 그 계단은 천으로 덮여 있는 꽃무늬 장식 세트 뒤쪽으로 반쯤 가리워져 있었다. 아까 그 마담이 책을 읽으면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책을 놓은 뒤에도 한참을 꾸물거린 다음 겨우 이렇게 말했다. "아니, 벌써 돌아가세요? 오늘밤엔 여기서 주무시는 걸로 알았는데." 나는 모자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럴 생각으로 왔지만, 아가씨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것만큼 젊지 않아서 말이오." 그녀는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배웅하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차로 돌아와서 올라탄 다음, 그 집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집에는 대체 어떤 녀석들이 드나드는지 봐두고 싶었던 것이다. 잭이 그곳을 가려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굳이 수첩에 적어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오늘밤 그곳에서는 쇼가 열리기로 되어 있다. 나중에 추잡한 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방까지 딸려 있는 에로 쇼가. 심지어 돌팔이 의사를 고용하여 성병에 걸린 피해자를 엉터리로 치료해 준 다음 돈까지 뜯어먹는 그런 장소인 것이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 성병예방을 위한 포스터나 영화를 보게 해준 미합중국 정부에 감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는 쿠션을 등뒤에 대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나 역시 알 까닭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한 편의 시정(詩情)도 없었을 뿐더러, 설사 있었다 해도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있다면 그저 짜증나는 일뿐이었다. 잭의 죽음, 그와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그의 수첩, 게다가 이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통점은 어떤 저음뿐이다. 그 깊은 가락은 증오와 폭력이라는, 내가 본 모든 장소에 으레껏 나타나는 공포의 흐름을 읊조리고 있었다. 아일린을 손아귀에 넣는다. 한 창녀를. 그것은 나 스스로 무덤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에게 임신을 시키고, 한동안은 희롱하며 데리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린 그 개 같은 녀석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은 그 뒤를 끝까지 쫓아가서 엄지손가락을 녀석의 목젖에 대고 질식사시켜 버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해주고 만다. 더구나 아일린은 자기와 함께 방을 쓰던 여자, 같은 식으로 타락해 가서 결국에는 같은 직업을 갖게 된 그 여자를 그렇게 만든 게 같은 남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정말 하잘것없는 거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존 핸슨.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그녀 역시 꽤 괜찮은 아가씨였을 텐데. 그런 놈은 머리통을 꽉 붙잡고는 장기형을 먹이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12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아일린을 저런 -- 아니, 잠깐만. 그녀가 18살에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면......아냐, 그 남자와 알게 된 것은 19살때인지도 모르지. 거기다 12를 더해 보면 31살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 나이들어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조금만 더 살아 있었다면 이런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녀가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심정일 때, 적어도 돌아오라는 상냥한 말 한마디만 해주었던들 그녀 역시 이런 함정에 빠지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한편, '미드웨스트'에 있는 대학에서 무려 1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뉴욕 주 포키푸시에 살고 있는 그 노인이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소문으로 듣고 알았다는 것도 좀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그런 뉴스가 제아무리 빨리 전해지는 법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마도 추악한 마음과 독을 품은 펜으로 일부러 그녀의 아버지한테 일러바친 질투심이 많은 어떤 여학생의 짓이었을 테지. '핸슨'의 다른 여자친구가. 그녀 말고도 애인은 많았을 테니까. 어쨌든 아일린의 처지는 나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곤란하게 되어가고 있다. 경제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다 -- 비록 단 1할에 불과한 수수료일지라도 현금으로 따지면 꽤 많으니까. 그녀가 일하고 있는 콜 하우스는 곳곳에 돈이 널려 있다. 그곳의 여자들은 엄청난 고액 지폐를 출자해서 신디케이트 조직으로 이루어진 여군단인 셈이니까. 예를 들어 오늘밤의 그 '쇼'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부정이익만 해도 몇천 달러에 달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느라고 하마터면 그 집의 입구 계단으로 택시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뻔했다. 더블 브레스테드(윗도리가 더블로 된 것)를 입은 젊은 동성연애자인 남자가 택시에서 내려 뚱뚱한 남자한테 막 손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비곗덩어리 바보 뚱보 자식 같으니. 두 녀석 다 그 쇼라는 걸 보러 왔거나, 아니면 다른 즐거움을 찾아온 거겠지. 나는 그 젊은 녀석이 업타운에 있는 경마의 마권 장사꾼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뚱뚱한 녀석은 전혀 모르는 놈이었다. 어렵지 않게 그 집의 문이 열렸기 때문에 나는 그 녀석들이 그 집의 단골이라는 걸 알았다. 5분 뒤에 다른 자동차가 한 대 멈추더니 바보 한 쌍이 그 차에서 내렸다. 그 남자 -- 만일 그를 남자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 는 낙타코트로 멋을 부리고 있었는데, 바싹 마른 목이 불타는 듯한 애스콧(스카프 모양의 넥타이) 위로 내밀어져 있었다. 머리는 물결치듯 구불거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방금 전에 손질을 한 모양이었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여자였다. 그걸 증명해 주는 유일한 것은 스커트뿐이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완전히 남자였던 것이다. 여자는 어깨에 힘을 주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반면에, 그 놈팽이는 한 손을 여자한테 잡힌 채 보도 위를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정말 꼴불견이군. 여자는 벨을 누른 다음 남자를 먼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굉장한 녀석들이다. 세상에 별난 일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저 두 남녀가 입장료를 내고 저 문 안으로 들어가서 모습을 감춘 것은 아무래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저 두 사람은 안에서 그 쇼라는 걸 즐긴 다음에 과연 어떤 흉내를 낼까 ?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그곳을 찾아드는 온갖 직업과 신분의 인간상의 축소판을 관찰했다. 만일 그때 내 손에 적외선 카메라 한 대만 있었다면 한 재산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일린은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이런 높은 양반들이 누군지 모를 테지.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 구(區)의 정치가만 해도 네 사람이나 왔다. 게다가 이런 저런 일로 신문에 그 사람들의 사진이 실리지 않을 때가 거의 없는 그런 거물급도 몇 사람인가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간 사람 중에서 다시 밖으로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곧 쇼가 막을 올렸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평소라면 놈들이 일을 처리하는 데는 반 시간이면 충분했을 테지. 그리고도 20분이 더 지났는데, 이제 더 이상 차는 오지 않았다. 잭이 저곳에 있는 누군가와 부딪치려 생각했었던 거라면 그는 잭의 파티에 참석한 사람이 아닐 뿐더러, 잭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가 된다는 얘기다. 나는 그게 누구일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깨달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그 보도 옆을 떠나 중앙선에서 차를 U턴했다. 나는 붉은 신호를 몇 개나 무시했으며, 다른 차들은 내 차를 피해서 급정거를 했다. 지름길로 간다 해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통행이 금지된 큰 도로에서 차를 돌려 곧장 잭의 아파트로 향했다. 이번에는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봉인을 찢고 권총 손잡이로 얇은 자물쇠를 튀어나오게 한 다음 예비열쇠로 문을 열었다. 전화선이 끊겨 있지 않기만을 바라며, 그곳으로 나는 달려갔던 것이다. 다행히도 전화선은 아직 끊겨 있지 않았다. 나는 다이얼을 돌리고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예. 경찰본부입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살인과의 첸버스 경감 좀 바꿔 주시오. 부탁합니다." 패트는 금방 나왔다. "첸버스 경감이오." "패트, 나야, 마이크 해머. 지금 잭의 아파트에 있어. 부탁 좀 하겠네. 경관을 두 사람 정도 이곳으로 보내 주게. 그리고 이곳에서 압수해 간 책이 있다면 그 책을 가지고 와주게. 그리고 또 한 가지, 비상소집령을 내려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도록 수배해 주게." 패트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마이크? 무슨 단서라도 잡은 거야?" "그래." 내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편에서 민첩하게 행동해 주지 않는다면 놓쳐 버릴 수도 있는 거라고." 그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거실의 불을 켠 다음 청동제품들 부스러기와 책꽂이 중간에 옆으로 눕혀진 채 쌓여 있는 책들을 끄집어냈다. 찾고 있는 것이 금방 눈에 띄었다. 그 세 권의 책은 대학의 연보(年報)였는데, 과거 15년 전부터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 책들은 지난번 아파트에 들어왔을 때에도 본 기억이 났다. 그때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책들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책들인 것이다. 패트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그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살펴보았다. 그 책들은 학생판이며, 모두 미드웨스트의 스쿨(미국에서는 대학이 각각 시니어 칼리지로 나누어져 단과대학과 똑같이 불리고 있지만, 특히 유니버시티라도 대학원, 의과, 법과 등은 칼리지라고 부르지 않고 스쿨이라고 부른다)의 출판물이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존 핸슨의 사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잭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아일린을 우연히 만나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전직이 경찰인 사람은그런 것을 일일이 조사하는 수고를 생략하는 법이다. 잭은 그녀가 무슨 일을 격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또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도 알게 되었다. 각각의 연보 표지의 뒷면에 저마다 타임스 스퀘어 부근에 있는 헌책방의 이름과 주소가 있고, 또 그 터브(서점에서 책의 표지 안쪽에 붙이는 우표 모양의 종이)가 깨끗한 걸로 미루어 잭은 이 책들을 최근에 구입한 것 같았다. 만일 잭이 그 남자의 뒤를 추적해서 차츰 그에게로 다가갔다면 당연히 상대방은 그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그 남자는 겉으로는 확실한 직업이나 가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잭은 악당들을 때려눕힐 수 있는 정보를 손에 넣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들을 쉽게 파멸시킬 수 있는 친구였다. 그 책들을 재빨리 훑어보고 다시 세세하게 조사했지만, 핸슨이란 이름으로 실린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침내 아파트로 패트가 들어섰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속으로 저주하고 있었다. 그도 그 책들과 같은 종류의 책들을 세 권 갖고 있었다. "여기 있네, 마이크." 내 옆 소파에 그 책들을 내던지며 그가 말했다. "자, 어디 자세하게 얘기해 보게." 나는 가능한 한 짤막하게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경로를 얘기해 주었다.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확실하게 마음속에 되새겨 두기라도 하려는 듯 몇 가지 질문을 다시 했다. "그래서 자네는 그 아일린 비커스라는 여자가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렇다는 것을 표시했다. "십중팔구는 그럴 거야. 그러니까 이 책들을 조사해서 그 남자를 찾아보자고. 그녀 말로는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라지만, 여자들은 자기가 반한 남자들을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법이니까. 그건 그렇고, 자네는 왜 그 책들을 압수해 간 건가?" "이 세 권이 거실에 펼쳐진 채로 놓여 있었기 때문일세. 아마도 살해되기 직전까지 읽고 있었겠지. 옛날 대학 연보를 일부러 읽다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사진을 찍어두려고 다른 증거물들과 함께 가지고 갔던 걸세." "그래서......?" "그래서 중혼죄를 범한 여자 두 사람, 나중에 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한 남자 한 사람, 그리고 다운타운에서 철물점을 하고 있는 내 친구 한 사람을 발견했지. 그 친구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친구라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우리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서 그 고약하고 신경질나게 하는 책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폈다. 그리고 그게 다 끝나자 우리는 책들을 서로 바꿔가며 혹시 빠뜨린 것은 없는가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존 핸슨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얘기 꾸미는 솜씨가 아주 좋군, 마이크." 산더미 같은 책들을 쳐다보며 패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잭이 찾고 있었던 게 그것이라는 걸 자네는 틀림없이 확신할 수 있나?" "물론이지. 왜? 더구나 이 사건의 날짜는 딱 일치하고 있어. 12년 전으로 말이야." 나는 뒷호주머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보라고." 내가 말했다. "그러니 내가 증거물을 숨기고 있었다는 공연한 트집은 부리지 말게." 패트는 흘끗 그 수첩을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알았네. 그날 나도 자네 뒤를 쫓아 이 방에 들어와 봤었지. 이건 옷장 서랍 밑에서 찾아낸 거겠지?" "아니, 어떻게 알았나?" "집에서 나도 서랍 뒤로 물건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지. 그것이 생각나자 나는 우리가 조사하지 않은 곳이 한 곳 있다는 걸 깨달았던 거야. 우연이지만 자네의 메모도 발견했고." 그는 그 수첩을 읽어보더니 자기 코트 속에 단단히 간직했다. 그건 이미 내게는 필요없는 물건이었다. "자네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네, 마이크. 그럼, 지금부터는 어디로 가지?" "책방. 잭이 다른 책을 샀을 수도 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일린에게 다녔던 학교 이름을 물어볼 걸 그랬군. 제기랄, 미처 그 생각을 못하다니." 패트는 전화번호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책방 이름을 찾을 때까지 손가락으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고 있었다. 그 책방은 벌써 문을 닫았지만, 주인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패트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우리가 갈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전등의 스위치를 끈 다음, 패트가 부하 한 사람에게 복도를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그 아파트를 나왔다. 우리는 차가 덜컹거리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순찰차는 사이렌을 울리면서 타임스 스퀘어를 향해 질주했다. 교통순경은 우리들이 지나가도록 한옆으로 비켜섰고, 우리는 타임스 스퀘어까지 신기록을 세울 뻔했다. 운전사는 6번가에서 방향을 돌려 책방의 맞은편 도로에 차를 세웠다. 책방의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지만, 가게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패트가 문을 두드리자 깡마르고 자그마한 몸집의 주인이 열쇠 소리를 잘그락거리며 우리를 맞았다. 그는 마치 12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처럼 초조한 표정으로 조끼자락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패트는 그에게 경찰 배지를 보여 준 다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 이 책방에서 대학 연보를 몇 권 사간 사람이 있었지요?" 그 자그마한 남자는 처음부터 고개를 저었다. "매상 기록은 다 있겠지요?"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물품세의 기록은 해두었지만, 저, 책을 판 기록은 해두지 않았으니까요. 책들이 다 재고품들이라." "그렇다면 좋습니다." 패트가 말했다. "그 남자가 무슨 책을 사갔는지는 기억납니까?" 남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오. 저......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긴 합니다만." 자그마한 그 남자는 우리를 책방 뒤쪽으로 안내한 다음, 제일 높은 서가에 사다리를 덜컥거리며 걸치더니 그 위로 올라갔다. "그런 책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요. 한 두 다스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긴 한데요. 아, 맞아요. 열 권쯤 사갔을 겁니다." 열 권. 세 권은 잭의 아파트에 있었고, 다른 세 권은 패트가 가져갔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네 권이 행방불명인 셈이다. "이보시오." 나는 그를 불렀다. "그 연보가 어느 대학에서 출판된 것인지 기억할 수 있소?" 그는 야윈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는데요. 그런 책들은 팔다 남은 것들이 하도 많아서 말예요. 그리고 평소에는 바빠서, 그때도 그 손님한테 책이 있는 장소를 가리켜 드리니까 그 손님이 직접 사다리 위로 올라가서 그 책들을 찾아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해도 결말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사다리를 마구 흔들어대자 그 남자는 몸을 지탱하려고 벽에 꼭 매달렸다. "책을 다 끄집어 내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던지란 말야, 빨리! 그렇게 밤새도록 걸려서야 어디 견뎌낼 수가 있겠소?" 그는 서가에서 책들을 뽑아 아래로 던졌다. 내가 몇 권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옆으로 흩어졌다. 나를 도와 패트가 그 책들을 책상으로 나르자 그 자그마한 남자도 사다리를 내려와 우리를 거들었다. "자 이번에는 -- " 내가 말했다. "송장(送狀)을 내오도록. 샀을 때 틀림없이 서명을 했을 테니까. 나는 그 영수증이 보고 싶단 말야." "하지만, 이것 보세요,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 우리는......" "제기랄. 가게 안을 발로 다 걷어차기 전에 고분고분 말을 들으라고! 옆에서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지 말고!" 그러자 상대방은 겁먹은 토끼처럼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패트는 내 팔을 잡았다. "제발 좀 부드럽게 다루게, 마이크. 나는 시(市)의 공복이고, 저 사람은 시민세를 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 달란 말게나." "세금이야 나도 내고 있지. 다만 우리가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일세. 그뿐이야." 남자는 먼지투성이의 장부를 하나 가득 껴안고 되돌아왔다. "여기 어딘가에 매상의 명세를 적어두었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그는 이걸로 우리의 골머리를 오랫동안 썩힐 작정이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밤샘을 시킬 속셈이 분명했다. 패트 역시 그걸 눈치채고는 재빨리 머리를 썼다. 수사본부에 전화를 해서 경찰관을 열댓 명 정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분 뒤 경찰들이 도착했다. 패트는 그들에게 무엇을 찾고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을 해준 다음, 그들에게 장부를 나누어 주었다. 이 책방 주인의 기장(記帳) 솜씨는 엉망이었다. 글씨는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고, 어떤 식으로 수지결산을 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추궁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반 시간 뒤에 나는 들고 있는 장부를 내던지고 다른 장부를 집어들었다. 순찰경관이 패트에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두번째 장부의 중간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경관은 매상의 명세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찾고 있는 게 이게 아닙니까?" 패트는 눈으로 그것을 읽어 보았다. "마이크, 이리로 좀 오게." 거기에는 경매인이 일괄적으로 매각한 장서 전체의 리스트가 있었는데, 그것은 서적수집가인 고(故) 로널드 머피의 유산을 매각한 것이었다. "맞아, 이거야." 내가 말했다. 우리는 그 리스트를 탁자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패트가 경관들을 해산시키고 있는 동안 나는 거기에 있는 책과 비교해 보았다. 빠진 것은 네 권이었다. 한 권은 미드웨스트에서 출판된 것이었고, 다른 세 권은 동부에 있는 대학에서 출판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디에선가 그 연보를 손에 넣는 것이다. 나는 패트에게 그 리스트를 건네 주었다. "이번에는 이것의 소재를 알아내야만 해.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걸." "대충 짚이는 데가 있긴 있네만." 패트가 말했다. "어딘데?" 희망을 가지고 내가 물었다. "공립도서관." "그래, 밤늦은 지금 이 시간에 말인가?" 그는 나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경찰한테는 특권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그는 다시 전화를 손에 들고서는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겨우 통화를 마치고서 책방 주인을 부르더니 포장대 위에 어질러져 있는 장부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리하는 걸 좀 도와 드릴까?" 남자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에 정리할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요. 어쨌든 경찰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이 밖에 또 무슨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뉴욕은 이처럼 자존심 강한 시민으로 가득한 도시다. 아마 언젠가는 이 남자, 뇌물을 쓰기 위해 패트를 찾아오겠지 -- 패트를 그런 사람으로 착각하고서 말이다. 패트의 전화는 효과만점이었다. 우리가 도서관에 도착하니 벌써 직원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신경질적이고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와 두 명의 남자비서였다. 회전식 출입문을 지나 우리는 수위가 열어준 문을 뒤로 하고 들어갔다. 그곳은 시체안치소보다도 훨씬 더 음침했다. 높다랗고 둥근 천장은 전구가 내뿜는 그 희미한 빛조차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텅 빈 복도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면서, 침울하게 저벅이는 소리로 되돌아왔다. 우리의 그림자가 빛을 차단하자 조각상들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이 보였다. 이런 때 겁을 먹고 무슨 얘기라도 한다면 한층 더 으스스해질 게 분명했다. 패트가 직원들에게 우리가 찾고 있는 책과,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었다. 상사인 듯한 직원이 두 사람을 어딘가로 보냈고, 그로부터 10여 분이 지나자 그 두 사람은 네 권의 연보를 가지고 되돌아왔다. 열람실의 탁자로 비치는 불빛 밑에 앉아서 우리는 두 권씩 책을 나눴다. 네 권. 잭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누군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그 네 권. 그는 전부 열 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난당한 그 한 권 이외에는 아무것도 쓸모가 없다. 그 도서관 직원은 우리의 어깨넘어로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2학년 부분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던 순간, 나는 손을 멈췄다. 존 핸슨을 찾아낸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청하게 그 사진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전신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패트가 옆에 와서 내 손을 가볍게 툭툭 치며 또 한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 역시 존 핸슨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패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또 다른 한 권에 달려들어 거기서도 존 핸슨의 사진을 찾아냈다. 나는 책을 탁자 위로 내던지고는 패트의 다리를 홱 잡아당겼다. "가세." 그는 나를 따라 나온 뒤에 메인 로비에서 경찰서에 전화를 걸기 위해 한참 서 있었다. 이윽고 놀라는 수위를 뒤로 하고 우리는 밖으로 뛰쳐나가 경찰차에 올라탔다. 패트는 사이렌을 최고로 울려대면서 자동차의 홍수 속을 빠져 나갔다. 우리는 앞쪽에 경찰 트럭의 꼬리등(尾燈)이 보이자 차를 세웠다. 옆 길에서 나온 다른 경찰차가 우리한테 가세했다. 그곳에도 같은 차가 서 있었다. 경관들이 도로 양쪽 끝을 봉쇄해 놓고 있었는데, 우리가 로프 밑을 지나가자 패트와 내 뒤에 정열해 섰다. 이번에는 벨을 세 번은 길게 한 번은 짧게 울릴 필요가 없었다. 소방관의 막대기가 잠겨진 문을 두들겨 부수자 부서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다른 사람이 그를 안아 일으켰다. 그곳에는 대혼란이 일어났지만 경관들이 곧 정돈을 시켰다. 패트와 나는 계단이 있는 곳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우리는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는 대기실을 통해 계단을 뛰어올라간 다음 홀을 지나 방으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각 방에서 홀로 나오는 작은 복도의 문을 열고 왼쪽의 맨 끝에서 두 번째 방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문을 밀자 문이 힘없이 열리며 무연화약이 폭발한 냄새가 코끝을 확 찔렀다. 아일린 비커스는 죽어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쓰러진 채 두 눈은 공허하게 벽을 바라보며 뜨여 있었고,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총알은 정확하게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고, 총은 45구경이었다. 우리는 존 핸슨도 발견했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는 침대가에서 머리를 자기 피와 내장 속에 파묻고, 두 눈 사이에 직각으로 총알 자국을 남긴 채 쓰러져 있었다. 벽에는 총알이 퉁겨져 나와 만든 회벽의 부스러기와 그의 점액들이 뒤섞여 있었다. 남자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존 핸슨이. 적어도 그 남자 자신은 그런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남자를 헐 케인스라고 불렀지만 말이다. 제 9 장 우리는 현장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두었다. 패트가 순찰경관 중 한 명을 휘파람으로 부르더니 문 안쪽을 지키게 했다. 집의 출입구란 출입구는 모두 차단되었으며, 손님들과 여자들은 큰 방에서 경관들한테 둘러싸인 채 불안한 듯 서성이고 있었다. 다른 경감 두 사람과 총경 한 사람이 우리 쪽으로 왔다. 나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한 뒤 재빨리 집의 뒤쪽으로 가보았다. 총알은 우리가 그 집을 급습하기 바로 직전에 발사됐다. 따라서 설사 손님들 속에 범인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틀림없이 이 부근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집의 뒤쪽을 조사했다. 그쪽은 2.5 미터 높이의 담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문 하나가 보통보다 작은 뜰과 연결되어 있었다. 잔디는 손질이 잘되어 있었으며, 뜰의 청소 역시 잘되어 있었다. 담에도 흰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나는 발자국의 흔적을 찾기 위해 뜰의 구석구석까지 다 조사해 보았지만, 요 일주일 동안 누가 잔디를 밟은 흔적은 아무데도 없었다. 설사 담을 뛰어넘었다 해도 뒤에 무슨 흔적이든 남아 있기 마련인데, 그런 흔적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열려 있었지만, 문은 밖에서 맹꽁이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그 문은 이 건물과 옆 건물 문의 중간을 연결해 주는 문이었다. 범인이 건물 뒤쪽을 통해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작은 부엌에 나 있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홀을 지난 다음, 쇼가 연출되고 있었던 방으로 들어갔다. 대단한 방이었다. 방의 칸막이들이 모두 치워지고 무대는 그 중 한구석에 만들어져 있었다. 경찰은 손님들을 영화관에나 있을 듯싶은 쿠션이 딸려 있는 자리로 한데 모아놓고 있었고, 에로 쇼에 출연했었던 여자들은 무대 위에 한 가득 세워놓았다. 패트가 방 저쪽에서 내게 다가왔다. "뒤쪽은 어때?"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무 흔적도 없어. 놈은 그쪽으로 도망친 게 아냐." "그럼 범인은 여기 어디에 있는 거로군.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도 없으니까. 도로는 이미 봉쇄됐고, 뒤쪽에는 부하 두세 명이 지키고 있다네." "지금 여기에 있는 작자들이나 한 번 훑어보세." 내가 거칠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좌석 사이로 내려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런 축복받은 패거리들 중에서 그래도 행복한 가정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내일 사태수습을 하기 위해 몹시 바빠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살펴 나갔다. 나는 조지 칼레키의 얼굴을 찾았지만, 그는 벌써 이 집을 빠져나가 버렸는지, 아니면 아예 오지도 않은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담 역시 보이지 않았다. 살인과의 담당자가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아일린의 방으로 갔다. 형사들은 우리가 꼭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래층에서 여자들이 슬픈 목소리로 뭐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이어 그들을 지키고 있던 경관이 큰소리로 엄격하고도 단호하게 조용히 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경우 공안위원장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러쿵저러쿵 할 바가 못 된다. 현장 사진이 찍혀 나오자 패트와 나는 헐 케인스의 남아 있는 얼굴 부분을 좀더 자세히 보려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연필로 그의 목에서부터 턱에 걸쳐 나 있는 몇 줄의 아주 희미한 선을 더듬어 내려가 보았다. "정말 교묘하군. 그렇게 생각지 않나?" 패트는 재빨리 나를 쳐다보았다."정말 그렇군.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말해 보게. 이 친구가 누구인지는 잘 알겠지만,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으니까 말이야."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낮추며 이렇게 말했다. "헐은 학생이 아니었네. 그 친구와 조지가 '모로 캐슬'이란 영화광고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금방 알아차렸지. 그러나 그것을 새삼스럽게 연구해 볼 생각은 전혀 못했네. 그 자식은 뚜쟁이였던 거야. 조지가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고 자네한테도 얘기해 준 적 있지? 나는 이 장사가 한때의 부업인 줄 알았는데, 웬걸 사실은 그 이상이었던 거야. 헐은 매음전문집을 몇 개씩 거느리고 있는 신디케이트의 일당이었어. 그는 갖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여자들을 낚은 다음 그 여자들을 조지의 손에 넘겨준 거야. 아마 헐은 그 일당 중에서도 거물급에 속한 녀석이었을 걸세." 패트는 헐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선을 주의깊게 관찰한 다음, 다시 머리가 나 있는 선을 가리켰다. 얼핏 보아서는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에 피가 묻어 엉킨 채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패트?" 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헐은 말일세, 늘 젊은 얼굴의 소유자였던 거야. 몇 번이나 플라스틱을 이식해 넣는 성형수술을 받은 거지. 우리가 찾아낸 연보를 보게나. 전부 다 다른 대학이었지. 바로 그곳이 그가 여자를 낚는 장소였던 거야. 고향을 떠나 다른 주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온 촌뜨기 여대생들을 말이야. 알겠나? 여자들을 유혹한 다음 함정을 파서 그녀들에게 협박을 하고, 그러다 보면 이런 꼴들이 되는 거지. 그 하나하나의 장소에서 그가 몇이나 되는 여자들을 낚았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걸세. 다만 그가 한 대학에서 1학기 이상 다니지 않았다는 것만은 인정해도 좋겠지. 대학의 입학허가는 아마 고등학교 학력을 거짓으로 꾸며내 받아냈을 테고. 그리고 일단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열심히 악랄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 여자들이란 일단 한번 그런 검은 손에 걸려들기만 하면 깡패들이 그런 세계에서 손을 씻기보다 훨씬 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법이니까." "아주 훌륭하군." 패트가 말했다. "아주 훌륭해." "별로 그렇지도 못해." 내가 그에게 말했다. "이번 사건으로 내 추리는 부서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나는 이놈을 내 손에 죽어야 할 제일 첫번째 용의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이놈의 짓이 아니었던 게 밝혀진 셈이야. 어쨌든 잭이 헐의 약점을 알아낸 것만은 틀림없어. 그리고 헐도 잭의 아파트에 있었던 연보를 보고는 잭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조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그가 선수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했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겠지. 오늘밤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잭이 굳이 이곳으로 오려 한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걸세. 그는 헐이 여기로 올 거라는 걸 알고 그를 만나 그의 가면을 벗겨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최소한 나한테만이라도 그 생각을 알려주었더라면 이렇게 아일린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패트는 벽으로 다가가서 나이프로 벽에 박혀 있는 총알을 빼냈다. 아일린을 죽게 한 것은 맹관총창(盲貫銃創 : 총알의 파편이 체내에 박혀 생긴 상처)이었다. 검시관은 그녀의 몸에서 총알을 제거하느라고 분주했다. 그는 마침내 총알을 빼내고서 그걸 패트한테 보냈다. 내가 뭐라고 미처 말도 꺼내기 전에 그는 총알을 주의깊게 조사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둘 다 45구경일세, 마이크. 게다가 덤덤탄이고." 그런 것은 들을 필요조차 없는 말이었다. "자식, 사람을 죽이기 위해 어지간히 정성을 들였군 그래."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고 마침내 내가 한마디했다. "역시 같은 놈이야. 범인은 한 사람이라고. 잭을 죽인 바로 그 추악한 놈의 짓이란 말이야. 이번 총알만 봐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들어맞고 있잖아. 제기랄!" 나는 퉤하고 침을 뱉었다. "그놈은 살인광이야! 아랫배, 머리, 심장 할 것 없이 아무데나 덤덤탄을 쏘아대고 있으니! 패트, 나는 그 무엇보다도 밥을 먹는 것이 즐겁지만, 설사 몇 끼니를 거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미친 놈한테 총알밥을 먹이고 싶네. 아니, 그보다 먼저 나이프로 문안인사부터 해줄까?" "함부로 그런 짓을 하면 안돼." 패트가 주의를 주었다. 검시관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던 경관들이 시체를 급히 밖으로 내갔다. 우리는 다시 계단 밑으로 되돌아와서 그곳에 있던 패거리들의 주소와 성명을 기입하고 있는 경관과 함께 그 주소와 성명을 조사해 보았다. 바깥에는 왜건이 세워져 있었고, 여자들은 모두 그 차에 태워지고 있었다. 형사 한 사람이 패트에게 다가오더니 인사를 했다. "이 봉쇄지역을 빠져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좋아. 부하를 몇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 인원은 옆골목과 인접한 빌딩들을 조사하도록. 신분증명서도 충분히 검토해 보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있으면 즉시 체포해.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알겠나?" "예." 형사는 경례를 한 다음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패트는 나를 뒤돌아보았다. "여기 마담 말인데, 자네, 나중에라도 그 여자를 보면 알아보겠나?" "그야 물론이지. 그런데 왜 그러나?" "경찰서에 가면 콜 하우스를 경영했었던 전과가 있거나, 그런 혐의가 있었던 사람들의 조사표가 있네. 그것을 좀 봐주었으면 해. 그 마담의 이름은 여자들한테서 들었지만, 공교롭게도 통칭뿐이었다네. 그녀는 존 양으로만 통하고 있었지. 여기 온 손님 중에서도 그녀의 본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때로는 창녀들 중의 한 명이 문으로 나와 손님을 맞기도 했지만, 정식 노크가 아닌 한 언제나 마담이 직접 문으로 나왔지." 그 순간 나는 패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조지 칼레키는 어떻게 되는 건가? 내가 찾고 있는 건 바로 그놈인데." 패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놈한테는 벌써 그물을 쳐놓았지. 아마 지금쯤은 천 명이나 되는 경찰들이 찾고 있을걸, 그 남자를 말일세.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나?"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 버렸다. 조지 칼레키를 찾기 전에 나는 우선 몇 가지 손을 써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범인이라 해도, 이 비합법적인 사업의 이면에는 반드시 체포해야 할 다른 흑막이 숨어 있다. 나는 직접 총을 쏜 하수인만이 아니라그 뒤에 숨어 있는 배후인물까지도 뿌리째 뽑아 처치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칠면조 요리가 올라 있는 호화스런 만찬과도 같은 것이다. 즉, 악인들 전부가 음식이라면 범인은 '디저트'쯤 된다고나 할까. 나는 어떻게 해서 잭의 추리가 헐에게까지 이르렀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이젠 모두 허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잭은 여러 가지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는 과거에도 헐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 줄기를 더듬어 가다가 칼레키를 발견하고서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다른 행동에도 의혹을 품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연히 아일린을 만나게 되어 각기 다른 두 개의 사건을 헐과 칼레키 이 두 사람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헐처럼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해온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기가 어려운 법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니까. 잭은 일단 무슨 일을 하겠다고 벌려놓으면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존 핸슨이란 남자가 나타나는 장소가 어딘지를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 시간이야 좀더 걸렸겠지만 우리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헐의 정체를 밝혀냈을 것이다 -- 각 지방의 대학에서 발행된 그 연보 속에서. 만일 헐이 잭을 살해한 범인이었다면, 어째서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살인자의 손에 그 권총을 넘겨준 걸까? 그 흉기는 범인과 똑같이 위험한 것이어서 함부로 손에 쥐고 놀 장난감이 아닌데. 아무래도 나는 헐이 잭을 죽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그 연보의 의미를 깨닫고 누군가 다른 사람한테 그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바로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범인인 것이다. 범인이 쫓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잠깐만. 정말 그랬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범인은 헐과 별 관계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일 그렇다면 잭은 다른 일로 살해당한 것이 된다. 범인은 헐과 그리 관계가 있지는 않았지만, 헐을 통해 자신의 신변에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헐이 수사선상에 떠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연보를 훔쳐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다시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잭이 다른 일로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런 기분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두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없었고, 또다시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추리를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소한 일 몇 가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살인의 동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걸 잡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지금 범인을 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쫓고 있는 것은 동기인 것이다. 패트에게 나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말하자, 그는 내게 비상선을 통과할 수 있는 증명서를 한 장 써주었다. 나는 거리를 걸어가서 불그레한 얼굴빛을 하고 있는 경찰에게 그 서류를 보여 준 다음 그곳을 빠져 나왔다. 마침 빈 택시가 다가왔으므로 그 택시를 타고 잭의 아파트로 향했다. 내 고물차는 아직도 밖에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나는 운전사에게 돈을 지불한 다음 내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할 일들이 산같이 쌓여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내게는 잠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0분 뒤, 잠을 자기 전에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침대 속에 누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봐도 더 이상 생각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담배꽁초를 꺼버린 뒤 눈을 감아 버렸다. 아침식사를 한 뒤 제일 먼저 차를 멈춘 곳은 칼레키의 아파트였다. 내 예상대로 패트는 나보다 한 발 앞서 그곳을 다녀갔다. 내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순경에게 그가 나한테 메모를 남겨두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가 봉함이 된 봉투 한 장을 건네 주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패트가 마구 휘갈겨쓴 글씨가 몇 자 적혀 있었다. '마이크......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네. 놈은 짐도 그대로 놔둔 채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는 대문자 P가 서명되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발기발기 찢은 다음 아파트 밖에 있는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버렸다. 멋진 날씨였다. 태양은 따뜻한 빛을 비추고 있었고, 도로는 온통 마치 다람쥐 떼같이 들떠서 돌아다니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나는 거리 모퉁이까지 차를 몬 다음 담배 가게 앞에서 세웠다. 그리고 샬롯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리에 없었지만, 비서는 그녀가 만일 나한테 전화가 오면 자기가 센트럴 파크에 있을 것이며, 그 정확한 장소는 5번가에 접해 있는 68번가와 가까운 곳이라는 걸 일러 주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나는 지름길로 해서 센트럴 파크 남쪽으로 차를 몰다가 5번가를 향해서 빙 돌아 그 근처로 계속 달렸다. 공원 입구에 다다르자 차를 67번가에 주차시킨 다음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어느 벤치에도 그녀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울타리를 뛰어넘은 다음 안쪽에 있는 보도로 가기 위해 잔디를 가로질러갔다. 그날 공원에는 백만 명, 정말 백만 명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산책하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아주 색다른 복장을 한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개인 간호원이 간신히 걸음마를 하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자 자연히 내 눈길도 그들을 따라갔다. 내가 땅콩 장수한테서 거스름돈을 받고 있을 때 문득 샬롯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 있는 쪽으로 유모차를 몰고 오면서 그녀는 내게 자신의 모습을 알리기 위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 샬롯 양." 내가 말했다. 그녀를 대하자 나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그녀는 밝은 녹색 수트 차림이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마치 폭포수가 흘러내리듯 목깃까지 내려와 파도치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태양보다 더 환했다. "안녕, 마이크.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으므로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녀가 어찌나 힘차게 손을 잡던지 조금도 여자와 악수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내가 그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팔짱을 끼며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니 그녀의 손은 어느새 유모차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우리 있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혼부부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가 웃었다. "그렇게 새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도 말이오?" 유모차에 약간 몸을 기대면서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머리를 내 머리에 비벼댔다. "왜 오늘은 일을 안하는 거요?" 내가 그녀한테 물었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말예요? 더구나 2시까지는 아무 약속도 없는데다가, 마침 친구 하나가 자기가 볼일을 볼 동안 이 아기를 좀 봐달라고 했거든요." "아기를 좋아하오?" "글쎄요. 아마 좋아한다기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이 더 맞을 거예요. 언젠간 나도 아이들을 여섯 명쯤 갖고 싶으니까요."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아니, 잠깐만. 나는 그렇게 능력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오? 먹는 입이 여섯 개나 더 늘어나게 되면 키우는 데만도 엄청나게 돈이 들어갈 거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나는 맞벌이를 할 건데. 어머! 그럼, 지금 당신이 한 말은 청혼인 셈인가요, 해머 씨?" "그런가 보오."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표본상자에 핀으로 꽂혀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을 만나고 보니 그렇게 되는 것도 별로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얘기를 진행시키다 보면 언제 끝이 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재빨리 나는 사건으로 이야기의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오늘 조간신문은 보았소?" "아뇨. 왜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헐 케인스가 죽었소." 순간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깜짝 놀란 듯 얼굴이 찌푸려졌다. "설마." 그녀는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꺼내어 그 큰 제목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 "오, 마이크. 정말 무서운 일이로군요. 대체 무슨 일이죠?" 나는 아무도 없는 벤치를 가리켰다. "잠시 앉을 시간은 있겠지요?" 샬롯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는데요." 그녀가 내게 말했다. "조금 있다가 베티를 만나야 하거든요. 대신 공원 입구까지 나를 바래다 주세요. 그리고 베티를 만나고 난 다음 자동차로 우리 함께 돌아가는 거예요. 우선은 내 사무실에서 술이라도 한잔하고 계세요. 이야기는 돌아가는 길에 듣기로 하고요." 나는 그녀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세부적인 사실 하나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다 이야기해 주었다. 샬롯은 질문 하나 하지 않고 잠자코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온통 이 사건의 심리적 상황을 파악하는 데 쏠려 있었던 것이다. 얘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나는 얘기를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베티 부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세상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가 베티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67번가에 이어져 있는 돌담길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채 3미터도 걷기 전에 자동차 한 대가 우리가 걷고 있는 방향으로 나란히 다가왔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할 틈이 없었다. 그 차의 차창에서 권총의 소름끼치는 총구가 불쑥 밖으로 나오는 걸 보는 순간 나는 샬롯을 그 자리에 밀어 쓰러뜨리고 나도 그녀 위에 바싹 넘어졌다. 총알이 허리쯤 되는 높이로 벽에 가 부딪치자 우리 얼굴 위로 돌 파편이 날아들었다. 조지 칼레키가 두 번째 총알을 쏠 여유는 없었다. 차는 기어를 넣고서 5번가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만일 이번 저격이 성공하기만 했다면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그 차를 추격하려 해도 그 근처에는 단 한 대의 자동차도 없었던 것이다. 정말 그럴 때 지나가는 택시 한 대조차 없기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나는 샬롯을 일으켜 세운 다음 그녀의 옷을 털어 주었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벌벌 떨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여전했다. 우리가 쓰러지는 걸 보고 산책하던 두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그들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다다르기 전에 나는 땅바닥에서 총알을 주워올렸다. 그것은 45구경 총알이었다. 나는 우리를 도와 주기 위해 달려온 두 사람에게 우리는 그저 돌부리에 채여서 넘어졌을 뿐이라고 대충 꾸며대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그녀를 데리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 지나자 마침내 샬롯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번 사건에 너무 깊이 개입했어요, 마이크. 누군가가 당신이 자기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당신을 처치하려 하고 있단 말예요." "나 역시 잘 알고 있소. 또 지금 이런 짓을 한 놈이 누군지도 잘 알고 있고 -- 우리의 친구 칼레키였소." 나는 짧게 웃었다. "놈은 떨고 있는 거요. 이제는 놈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테니까. 그 족제비 같은 놈이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벌건 대낮에 나한테 감히 그런 짓을 하려는 생각을 했겠소." "하지만, 마이크, 이건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녀가 아직도 떨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미안하오, 샬롯. 나는 한두 번 저격당했던 몸이 아니라서 말이오. 하긴 자칫 잘못했으면 당신이 맞을 뻔했지. 자, 내가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소. 옷을 갈아입어야 할 테니까 말이오. 그렇게 진흙투성이가 된 옷은 보기가 안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침내 내가 말했다. "왜 그러시오, 샬롯?" 그녀는 약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잭이 살해된 뒤에 당신이 잭에게 한 그 서약 때문에 칼레키는 당신을 파묻어 버리려고 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게 가장 그럴듯한 이유일 테니까 말이오. 그런데 왜 그러시오?" "이번 사건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일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많이 알고 있잖아요?"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아마 경찰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은 정보는 물론 동기며, 내가 조사한 개인적 견해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다 모아놓고 있을 테니까. 틀림없소."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서로가 입을 꼭 다문 채 차만 몰았다.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우리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곧장 계단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기에 샬롯은 열쇠를 찾아야 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하녀가 오지 않는 날이란 걸 깜박 잊었군요." 우리가 실내로 들어가서 문을 열자 또다시 벨이 울렸다. "내가 샤워를 할 동안 마실 것 좀 만들어 주시겠어요, 마이크?" 샬롯은 티 테이블 위에 버번 병을 내려놓고서 물과 진저 에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알았소. 그런데 먼저 전화 한 통 써도 되겠소?" "물론이죠. 마음대로 쓰세요." 그녀가 부엌에서 대답했다. 나는 패트의 전화번호를 불러내어 교환수가 패트의 책상 위에 있는 반 다스나 되는 중계전화로 연결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패트인가?" "오, 마이크. 무슨 일인가? 할 얘기라도 있는 건가?" "메모를 좀 해두겠나? 칼레키는 아직 도망치지 못했네. 아직도 계속 시내 어딘가에 숨어 있어." "어떻게 알았나?" "조금 전에 놈이 나한테 도전해 왔었지." 내가 그에게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주자, 그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 얘기가 대충 끝나자 그가 물었다. "차 번호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차 모양은 약간 구식의 캐디였네. 아마 41년형쯤 되는 것 같아. 색은 짙은 노란색이 섞인 짙은 파란색이었어. 내 옆을 지나 시내 쪽으로 갔지." "굉장하군, 마이크. 순찰차들에게는 라디오로 연락해 두지. 그런데 총알은 갖고 있나?" "가지고 있네. 45구경이야. 이것도 탄도검사를 해두는 게 좋겠군. 하지만 덤덤탄은 아닐세.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총알이지. 오후에 그쪽으로 가볼 생각이네." "그렇게 하게." 패트가 대답했다. "무슨 특별한 사건이라도 터지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그러더니 그가 덧붙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네, 마이크." "뭔데?" "케인스와 비커스를 살해하는 데 사용된 총알을 조사해 보았어." "같은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던가? 지난번 그......" "맞았어, 마이크. 역시 그 범인의 짓이었네." "제기랄."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수화기를 다시 제자리에 건 다음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살펴보았다. 같은 총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칼레키가 침대 밑에 있는 여행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그 권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불법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허가증을 갖고 있다고 했으니까. 내 코로 최근에 발사된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판가름하기보다는 차라리 탄도검사표를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그때 압수해 왔으면 좋았을걸. 나는 휴지로 그 금속덩어리를 싸서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하이볼을 두 잔 만들었다. 그리고 샬롯에게 큰소리로 마시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쪽으로 가지고 와주실래요?" 하고 대답했다. 나는 좀더 기다리든지, 아니면 문을 노크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쪽도 하지 않았다. 샬롯은 완전히 나체로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렇게 불쑥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눈앞에 대하자 순간 피가 몸속에서 끓어오르며 손에 든 잔이 부르르 떨렸다.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그녀의 육체는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한없이 매끄러웠다. 그녀도 나 못지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가운으로 앞을 가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나는 그녀의 온몸이 수치의 색으로 덮이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숨막힐 듯한 긴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이크." 그녀가 말했다.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온통 나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녀가 가운을 몸에 걸칠 동안 나는 뒤돌아서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다시 뒤돌아서서 그녀에게 마실 것을 건네 주었다. 우리는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그러나 술도 내 몸속에서 불타오르는 그 불꽃을 어쩌지는 못했다. 나는 그녀를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꽉 껴안아 주고 싶었다. 우리는 화장대 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서울 정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흔히 있는 순간의 하나였다. 그녀는 내 품속으로 쓰러지며 얼굴을 내 목에 파묻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리며 그 눈에 입술을 댔다. 그녀의 입술이 나를 향해 열렸고, 나는 힘껏 그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내게서 몸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키스에 입술로, 그리고 두 팔과 온몸으로 응해 왔다.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공간을 통해서 더욱더 나에게 접근하려고 절망적으로 시도하며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더욱더 힘차게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면서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꼭 쥐었다. 이런 격정적인 기분은 정말 난생 처음이었다. 또한, 지금 이 순간처럼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내 입술에서 입술을 떼고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으며 다시 내 팔에 안겼다. "마이크." 그녀가 속삭였다. "당신이 필요해요." "안돼."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안돼." "왜요, 마이크? 왜 그러는 거예요?" "안돼. 빼앗기에는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지금은 안돼. 언젠가는 우리가 결혼할 날이 올 거요. 그게 올바른 길이오." 나는 팔을 그녀의 몸 밑으로 내려 방에서 그녀를 안고 나갔다. 계속 그 침실에서 우물거리다가는 도저히 욕정을 억제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 양팔에 매달리자 나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를 한 다음 욕실문 앞에서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렸다. "샤워를 하고 와요." 내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졸린 듯한 눈길로 미소를 짓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나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부러운 눈길로 침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는 바보 중에서도 가장 바보가 분명한 것 같다. 나 자신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수화기를 들어올리기 전에 먼저 샤워 물소리가 들리는지를 확인했다. 이윽고 샬롯의 비서가 그 틀에 박힌 목소리로 재빨리, "여보세요."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이크 해머라는 사람이오." 내가 말했다.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친구한테 그쪽 사무실로 전화를 하라고 얘기를 해놓아서 말이오. 혹시 그 친구한테서 전화가 오면 내가 어디 있는지를 좀 알려주시겠소?" "어머,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 전화는 벌써 왔으니까요. 안 그래도 공원에 계실 거라고 알려 드렸는데, 만나지 못하셨어요?" "예, 알겠습니다. 곧 오겠지요, 뭐." 그래 맞았어. 늘 내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자가 있는 거야 하고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운 옛 친구 조지, 내 뒤를 쫓다가 놓쳐 버렸지만 샬롯과 만날 것이란 것은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두뇌회전이 굉장히 빠른 놈이다. 다시 하이볼을 한 잔 더 만들어 들고 나는 소파 위에 몸을 죽 펴고서 누웠다. 조지는 계속 내 뒤를 쫓아다니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도 나는 멍청하게 방심하고 지냈다. 하지만 얼굴에 적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샬롯과 만날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참아도 빛깔로 풍겨나오는 법이라서 그랬을까? 그러나 참으로 적당한 시간에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때와 장소를 너무도 교묘하게 잘 선택해서 말이다. 만일 내가 피하지 못했다면 칼레키는 과녁의 중심을 명중시켜 점수를 벌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표적에 대해 직사사격을 했다. 쥐새끼 같은 놈. 칼레키는 사수의 위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일 경찰이 긴급수배로 그를 체포하게 된다면, 그건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될 경우 몸을 숨길 곳을 얼마든지 갖고 있을 테니까. 조지는 머리가 영리한 놈이다. 더 이상 경찰이 그를 체포하는 일에 나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칼레키는 예약이 끝난 것이다 -- 내 몫으로. 이것을 알게 된다면 패트는 분명 기분나빠 할 테지. 샬롯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는 정말 기록적인 시간 안에 다시 옷을 갈아입은 뒤였다. 서로가 좀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 생각이 가득차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며 내 옆에 걸터앉았다. "내가 오늘 오리라는 건 어떻게 알았소?" 그러자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이크, 당신을 처음 만난 날 이후로 나는 당신이 나를 찾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잘못일까요?" "나에 관한 한 잘못이 아니오." "하지만 당신은 쫓아다니는 게 좋다고 했잖아요." "당신은 아니오. 시간은 중요한 거니까 말이오." 그녀가 내 팔에 몸을 기대자 나는 그녀의 사무실로 전화했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조심하려고 하지 않는군요, 마이크. 그게 정말 칼레키였다면 그는 머리가 아주 뛰어난 사람인 게 분명하다고요. 부탁이에요. 조심하세요. 만일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나는......" "당신이......어쩐다는 거요?" "오, 마이크!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세요?" 나는 그녀의 금발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알고 있소, 이 바보. 나 역시 목석은 아니오. 당신을 좋아한다는 표시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나타나 있잖소."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건 그래요."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마치 국민학교 학생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사무실로 서둘러 되돌아가기 전에 우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치기로 해요."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 주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용건이 있어서 오신 거죠? 그게 뭔가요?" 이번에 놀랄 차례는 나였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소?" 내가 되물었다. 샬롯은 내 손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내가 임상심리학 교수라는 걸 도대체 몇 번이나 더 깨우쳐 줘야 하는 거죠? 그건 말예요,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연구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 사람들의 행동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을 결정지을 수가 있다는 말도 된다고요. 특히 -- "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말예요." "두 손 들었소." 담배 연기로 동그라미를 두 개 만들어 뿜은 다음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헐 케인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듣고 싶었던 거요." 그녀는 그 이름을 듣자 갑자기 정색을 했다. "당신한테 그 사건에 대해 들은 뒤에 내가 생각해 본 것도 바로 그 점이었어요. 다 얘기해 드리죠. 그가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죠?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학부의 예과였어요. 당신의 얘기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그 추악한 직업인 신디케이트 때문에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 있었겠죠.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수법치고는 좀 특이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렇지는 않아요. 당신도 세상에 대해 알게 된다면 금방 이해가 가게 될 거요." 내가 말했다. "여자들을 낚기 위해서 그 패거리들은 우선 그녀들을 가정에서 떼어놓소. 그리고는 함정에 빠뜨리는 거지. 그런 다음 그녀들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녀들이 옴쭉달싹도 할 수 없는 증거를 손에 넣는 거요. 그렇게 되면 여자들이 어떡하겠소?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집에서는 쫓겨나고, 그렇다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고. 게다가 옛날부터 그런 방면으로는 문이 늘 열려 있잖소? 그런 곳으로 뛰어들면 적어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고, 또 지붕 밑에서 잠잘 수도 있소 -- 그리고 그런대로 현금도 손에 넣을 수 있고 말이오. 그러나 일단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아무리 자기가 발을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소. 또, 설사 그렇게 될 수 있다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게다가 그런 장사는 대부분 큰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보복을 당할 수도 있소. 어쨌든 그런 식으로 헐은 그렇게 큰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도 자기가 노린 여자들은 다 손아귀에 넣었던 거요." "그랬군요." 그녀는 내가 한 얘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나는 학술회의의 초청을 받아 대학에서 강연을 했어요. 그리고 정신병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성적과 학습태도를 검토한 다음, 내 임상방법을 연구할 학생들을 몇 명 선발했죠. 헐 케인스도 그 중 한 명이었어요. 그는 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는 우수한 연구생이었죠. 연구도 다른 학생들보다 진척이 훨씬 빨랐고요. 처음에는 그저 천성적으로 타고난 능력과 가정의 의학적인 배경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이유가 그 연구부문에서 몇 번이나 트레이닝을 거쳤기 때문이었군요. 한 방면으로 16년간이나 공부했다면 뭔가를 배워도 배웠을 테니까." "내 생각도 그렇소." 내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그 녀석의 교외에서의 여러 가지 생활은 어땠소?" "이곳 뉴욕에 있는 동안은 내가 있는 곳에서 3구역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식 호텔에서 생활했었어요. 대학에 있을 때는 아마 기숙사에서 살았을 거예요. 주말이면 진료소로 찾아와 칼레키 씨와 같이 지냈고요. 헐은 그렇게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어요. 아마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나 봐요. 언젠가 굉장히 곤란한 일에 휩싸이게 되어 잭 윌리엄스가 도와준 적도 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 경위는 헐한테서 들었으니까. 그의 개인적인 면은 어땠소? 당신한테 달려들어 입술을 빼앗는 정도였소?" "어머, 아니에요. 그런 눈치는 전혀 없었어요. 당신은 그가 나를......그......신디케이트 조직에 끌어들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런 비열하고 천박한 자식이라면 충분히......" 그녀가 나를 보며 소리없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말을 멈추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요. 당신은 그런 녀석들이 쳐놓은 함정에 걸려들기에는 너무 머리가 좋으니까. 그 녀석이 당신과 함께 있었던 것은 이 도시에 머무를 구실을 만들거나, 아니면 자기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정말로 정신병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던지 둘 중의 하나일 거요." "잭을 죽이기 위해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나에게는 그런 생각이 새삼스럽게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루 온종일 그런 가정하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안 그래도 몇 번이나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니까. 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이유도 잭이 벌써 뭔가를 눈치채고 그에게 이곳에 머무르라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소. 잭은 상냥한 마음씨를 가진 친구였지만, 그런 일에 관한 한 절대 상냥하지 않았으니까. 군대에서 제대하고 난 뒤에는 옛날처럼 경찰에서 일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공적으로는 그를 추적해서 검거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소. 하지만 그 친구의 머릿속에 뭔가가 있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헐을 놓치지 않았을 거요." "잭을 죽인 사람이......헐이란 말인가요?" "그걸 알 수만 있다면 -- " 내가 말했다. "나는 내 다리 두 개와 팔 하나를 주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소. 범인을 쏘아 죽이기 위해서는 팔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어쨌든 누가 잭을 죽였는지는 머지않아 곧 밝혀지게 될 거요." "그런데 헐과 그 아일린이란 여자는 어떻게 된 거죠?" "그 두 사람 다 범인이 죽인 거요. 내가 생각하기에 헐 케인스는 그 여자를 죽일 속셈으로 그곳으로 갔소. 그러나 그가 미처 그 여자를 죽이기도 전에 범인이 두 사람을 다 죽여버린 거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해도 헐이 아일린을 죽이러 갈 거라는 것을 잭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런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오, 샬롯. 하지만 잭은 무언가 다른 근거로 헐이 그곳에 가리라는 걸 알아냈는지도 모르오. 그렇게는 생각지 않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다른 근거가 있어서 살인자가 그곳에 나타날 것이라고 잭이 짐작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어쨌든 그 당시까지는 범인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을 테니까, 잭이 아일린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려던 데는 그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조금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 같기는 해도, 내 생각이 어때요?" "명석하군, 그래."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사건 전체의 구성이 뒤엉켜지면 뒤엉켜질수록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도 많은 법이오. 동기가 무엇이든간에 범인은 이미 여러 사람을 동원했소. 벌써 세 사람이나 죽었으니까. 한 놈은 이 도시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근접사격을 해대고, 범인은 어딘가에서 한가로이 누워 있으면서 우리 모두를 비웃고 있소. 제기랄, 웃고 싶으면 어디 맘껏 웃어보라지. 언제까지 그렇게 웃고 있을 수만은 없을 테니까. 이번 사건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수사를 하고 있으니, 그러다 보면 뭔가를 찾아도 찾아낼 테지. 살인을 끝내 감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패트는 나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한층 더 페이스를 빨리해서 수사에 임하고 있소. 그 친구 역시 나처럼 그 잔인한 살인범을 검거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지만, 그 친구에게 선수를 뺏기면 나는 설 땅을 잃고 말게 되오. 따라서 지금부터 나는 패트를 앞질러서 일을 추진해 나갈 작정이오. 그 친구가 내 뒤에 꼭 달라붙겠다면 그렇게 해주겠소. 그리고 마침내 범인의 배때기에 총알을 먹여줄 시기가 닥쳤을 때, 그때는 혼자서 처치해 버리는 거요. 나하고 그 쥐새끼 같은 녀석과, 그리고 총알 한 개만 있으면 되는 일이니까. 깨끗이 처리해 주겠소. 아랫배 부분의 가장 부드러운 곳에다 말이오. 강철로 만든 총알 한 발은 덤덤탄 열 발 정도의 효과가 있으니까." 샬롯은 눈을 크게 뜬 채 열심히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죄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의 정신상태를 분석하여 연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그만 생략하고 그녀의 옆구리를 슬쩍 쿡 찔렀다. "이럭저럭 내 바보 같은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소." "아녜요, 마이크.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로 당신 역시 그랬나요? 무슨 얘기냐 하면, 당신도 그렇게 비정했느냐고요." "나는 늘 이런 식이었소." 내가 말했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는 늘 말이오. 단지 재미삼아 다른 사람을 죽이는 쥐새끼 같은 녀석들은 정말 딱 질색이오. 전쟁은 그때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던 재주를 몇 가지 가르쳐 주었지. 아마도 그게 나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살아 있게 해준 은인인지도 모르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약속 시간에 맞게 나가려면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소."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까지 차로 데려다 주실 수 있어요?" "좋아요. 빨리 코트를 들고 와요." 가능한 한 많이 같이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시간을 봐가며 일부러 천천히 우리는 차로 되돌아왔다. 서로가 살인사건이나 좀전에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단지 쓸데없는 수다를 떨기만 했다. 파크 애버뉴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기 위해 방향을 돌리자 샬롯이 말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마이크?" "곧." 내가 대답했다. "만일 그 광대가 다시 또 권총을 휘두르려고 내 행선지를 묻는다면, 당신 비서한테 이렇게 얘기하라고 전해 줘요. 나는 이 거리 모퉁이에서 당신과 밀회를 즐기고 있다고 말이오. 놈은 나를 습격하려고 벼르고 있지만, 반대로 내가 먼저 숨어 있다가 놈을 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놈은 틀림없이 칼레키일 거요. 틀림없다고. 어쩌면 당신 비서는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기억이 날지도 몰라요." "알겠어요, 마이크. 그런데 만일 첸버스 씨한테서 전화가 오면 어떡하죠?" "아마도 조금 전에 저격당한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해야 할 테지만, 그런 전화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말아요. 칼레키를 함정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내가 주역이 되어 파티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니까."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몸을 숙이더니 다시 키스를 해주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져 갈 때 나는 그녀가 길 모퉁이로 사라지는 순간 슬쩍 보였던 그 다리의 매끄러운 색깔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멋진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온통 내 것이다. 문득 나는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면서 거리로 뛰쳐 나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자동차 한 대가 뒤에서 경적을 울려댔기 때문에, 나는 차에 기어를 넣고 그 커브길을 빠져 나왔다. 그로부터 두 구역 정도를 간 다음 빨간 신호 때문에 서 있는데, 도로 저쪽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옆에 서 있는 차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의 모습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지나가는 행인 속에서 내 고물차로 오려고 껑충껑충 뛰어오는 갈색 양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곧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문을 열자 그는 차에 올라탔다. "보보, 자네였군." 내가 말했다.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보보는 우연히 나를 만나서 그런지 무척 흥분하고 있었다. "오, 마이크, 자네를 만나 정말 반가워. 나는 이곳에서 일하고 있네. 무슨 꼭 특별한 장소가 아니야. 그저 다른 곳과 마찬가지야." 마치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그의 입에서 거품과 함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지금 어딜 가나?" "글쎄, 다운타운에 갈 생각인데, 자네가 갈 곳이 있다면 먼저 자네부터 데려다 주지. 그래, 어디로 갈 텐가?" 보보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잠깐만. 내가 가는 곳이 어디였더라? 처음에는 다운타운에 가려고 했는데. 맞아. 캐널 가(街)에 편지를 한 통 배달해야 해." "그렇다면 좋아. 거기에서 내려주지." 신호가 바뀌어 나는 브로드웨이를 돈 다음 차머리를 왼편으로 돌렸다. 보보는 거리를 걸어가는 젊은 아가씨들에게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는데, 지금 그가 어떤 기분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칼레키에 대해 뭐 들은 거 없나?" 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긴 했는데. 오늘 그 사람의 부하로 일하던 사람을 하나 만났는데, 그 사람, 이젠 더 이상 칼레키 밑에서 일하지 않는다더군." "빅 샘의 술집은 어때? 그곳에서도 무슨 뉴스거리를 듣지 못했나?" "아니. 그때 자네가 그 불량배들을 때려눕힌 이후로는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아. 혹시나 내가 자네한테 일러서 자네가 자기들을 쫓아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니까." 그때를 생각하자 즐거운 듯 보보는 웃었다. "나까지 터프 가이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우리 집 주인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더니, 나한테 절대로 자네 패거리에 끼어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더군. 우습지, 마이크?" 그런 식으로 입버릇은 나쁘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 내게는 많이 있었다. "우습군." 내가 말했다. "벌은 어떻게 됐나? 그 이후로 말일세." "아 -- 잘 있네. 잘 있고말고. 여왕벌도 손에 넣었고. 아 참, 자네가 한 얘기는 잘못된 것이었어. 여왕벌한테는 임금벌 같은 게 필요없어. 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더군." "그러면 벌들은 어떻게 번식시킬 작정인가?" 이 질문은 그를 아주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다. "알을 낳거나 어떻게 하겠지, 뭐." 그가 중얼거렸다. 캐널 가는 앞쪽으로 곧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빨간 신호 때 차를 세우고 보보를 내려주었다. 그는 활기차게, "잘 가게." 라고 인사를 한 다음 반은 거의 뛰다시피 도로 위를 달려갔다. 착한 친구야. 정말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 중의 하나야. 그리고 즐겁기도 하고. 제 10 장 패트는 사격장에 있었다. 제복 차림의 순찰경관이 나를 지하실로 안내해 주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모습을 가리켰다. 내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을 때 마침 그는 기록이 나쁘게 나온 것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왜, 시원찮은가, 친구?"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제기랄. 이 권총에는 아무래도 새 용수철이 필요한 모양이야." 그는 사람 모습을 본뜬 움직이는 표적에 권총을 겨누고 또다시 한 발을 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된 거야, 패트?" "빌어먹을. 표적을 넘어뜨리려고 했는데." 패트는 완벽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자기를 보고 싱글거리는 나를 보더니 대뜸 그 권총을 내게 내밀었다. "자, 자네가 한번 해보게." "그런 권총은 없는 게 더 나아." 나는 45구경을 꺼내어 슬라이드를 뒤로 젖혔다. 이윽고 표적이 나타나 사정거리를 가로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총이 내 손에 반동을 느끼게 했다. 3연발이었다. 패트는 표적을 세우고 그 표적의 머리에 뚫린 세 개의 총알 자국을 쳐다보았다. "그리 나쁘지는 않군." 아마도 내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내가 뛰어난 총잡이라는 건 인정하겠지?" 내가 말했다.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건 다 명중시킬 수 있거든." "정말 놀랄 노자로군. 어쨌든 지금 자네 솜씨는 잘 구경했네." 내가 코트 밑으로 권총을 쑤셔넣자, 패트도 자기 총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위층으로 올라가세. 아까 얘기한 그 총알을 검사해 보고 싶으니까. 물론 갖고 왔겠지?" 나는 그 45구경의 총알을 꺼내어 휴지를 벗겨낸 다음 그에게 건네 주었다. 패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걸 검사해 보았지만, 총알에 난 줄자국만으로는 그게 같은 권총에서 발사된 게 틀림없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돌벽에 명중한 총알은 인체를 관통한 총알에 비해 형상이 상당히 불완전했던 것이다. 감식을 하는 탄도검사실은 우리를 위해 비워져 있었다. 패트가 그 총알을 복잡한 슬라이드 장치에 끼우자 나는 불을 껐다. 우리 앞에 있는 스크린 위에 총알 두 개의 영상이 뚜렷이 비쳤다. 그 중 한 개는 범인의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었으며, 나머지 한 개는 칼레키가 나를 저격한 것이었다. 내 기념품이 스크린 위에 확대되어 선명하게 나타나고, 총구멍의 가는 선 모양의 흔적이 똑똑하게 눈에 들어왔다. 패트는 그 두 개의 총알이 일치하는 표식을 발견해 보려고 그 슬라이드 장치에 끼워 놓은 총알을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한번은 그 펴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영상을 다른쪽 총알의 머리 부분으로 옮겨 비교해 보니 전혀 달랐다. 몇 번인가 더 총알을 회전시켜 본 다음 기계를 벗겨내고 다시 불을 켰다. "틀렸어, 마이크. 같은 권총이 아니야. 그러니까 만일 칼레키가 지난번 사건의 범인이 틀림없다면, 그는 다른 권총을 사용했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 "거 참, 이상한 일이로군. 만일 첫번째 살인 때 그 총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면, 나중에도 우선 그 총을 사용했을 텐데 말이야." 패트 역시 내 생각과 같았다. 그는 벨을 눌러 부하를 한 사람 부른 다음, 그에게 총알을 건네주며 그 총알의 사진을 찍어 참고서류 속에 넣어두라고 시켰다. 나는 그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저격 당시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준 뒤, 케인스가 살해된 사건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 주었다. 그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다. 패트는 자기 머릿속에 사실을 넣어두는 타입의 형사였던 것이다. 그는 사실들을 단 한 가지도 빠뜨리는 법이 없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다가, 그것이 스스로 표면으로 떠오르기 전까지는 마음속에만 간직해 두는 성격이었다. 경찰에 그처럼 빈틈없고 열성적인 사람이 있다는 데 대해 나는 늘 놀라워해 왔다. 그러나 제복을 입은 경찰과 사귀고, 그 조직의 일에 머리를 들이밀고 보니 진정한 추리가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 세계에는 일에 필요한 설비란 설비는 다 갖추어져 있고, 세상의 이면과의 접촉도 많다. 가끔 신문들은 경찰들이 무능하다고 비판을 가하고는 하지만, 그들이 정말 궁지에 몰리게 되면 태도가 돌변한다. 다만 아쉬운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일에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결점이다. 그것은 어느 경찰이고 마찬가지지만, 그곳에는 어엿하게 패트같이 돈을 주고 살래야 살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만일 범죄자들을 두들겨 잡는 일에 법규라든가 법률 같은 골치 아픈 것들이 그렇게 많이 걸려 있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기지개를 켜며 패트가 말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겠는걸.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일세. 어쨌든 자네가 나한테는 아주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게, 마이크. 그런데 한 번 더 이야기를 해보게. 사건의 정황에 대해서는 그만하면 됐으니까, 이번에는 자네의 생각을 말해 달라고. 그래, 자네 생각에는 누구의 짓일 것 같은가?" "그런 건 불필요한 질문이 아닌가?" 내가 말했다. "만일 나한테 그런 확실한 직감이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자네는 내가 정당하다고 믿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게 되었을 테니까. 내 생각엔 말일세, 이번 사건들은 아무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짓일 것 같아. 그런 심증이 자꾸 들어. 자, 우리가 손댄 시체들을 생각해 보게.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서 권총을 들고 딴 짓을 하고 있을 칼레키를 생각해 보라고. 물론 그자의 소행일 수도 있겠지. 그럴 만한 근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니면 그 자식의 배후에 있는 녀석인지도 모르고. 매춘 전문집을 경영하는 그 신디케이트에 찰싹 달라붙어 사는 그런 놈 말이야.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조지가 움직이고 있는 일의 상대든지. 어쨌든 잭은 그것을 알아차렸으니까. 그리고 또 어쩌면 복수에 의한 살인극일지도 몰라. 살아 있을 때 헐은 여러 여자들을 농락했으니까. 가령 그런 여자들 중 하나가 놈의 수법을 알아채고 그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해보세. 그 여자는 잭이 그를 체포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우선 잭을 살해했네. 그런 다음 헐을 죽였지.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아일린의 입을 막기 위해 그녀 역시 죽였네. 그런 여자가 실제로 있을 수도 있어. 또, 그녀의 형제라든가 아버지의 짓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문제가 문제였던 만큼 그녀의 남자 친구의 소행일 수도 있고. 단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거야." "일단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네, 마이크. 그래서 말인데, 나는 내 급료에 어울리는 아주 그럴듯한 것을 생각해 냈다네." 패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로 같이 좀 가 주겠나? 자네가 만나면 좀 재미있어할 자네 친구가 이곳에 와 있으니까." 친구라고? 나는 그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안에는 형사 두 사람이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 두 형사는 번갈아가며 그 여자에게 질문공세를 퍼붓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도무지 입을 열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녀 앞으로 가기 전까지는 나는 그녀가 누군지 몰랐다. 친구는 무슨 친구야? 빌어먹을! 그 여자는 헐과 아일린이 살해되던 날 밤에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던 마담이 아닌가 ! "아니, 이 여자를 어디서 주워온 건가, 패트?" "이 근처에서였지. 새벽 4시에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걸 수상하게 여긴 순찰경관이 붙잡아 온 거라네." 나는 마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 시간 동안 질문공세를 받은 탓인지 그녀의 눈동자는 흐릿해져 있었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 위로 팔짱을 낀 채 아주 건방진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인내심이 거의 극에 달해 있다는 걸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기억하겠소, 나를?"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약간 졸리운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힘없이 말했다. "그럼요. 기억하고말고요." "단속이 있었던 날 밤 그 집을 어떻게 빠져나간 거지?" "정말 귀찮게 구네." 패트는 그녀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그 의자를 뒤로 돌린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금방 내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계속 증언을 거부하게 되면 -- " 패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결코 살인 혐의를 벗을 수 없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경찰은 그게 당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오." 이 말을 듣자 그녀는 힘없이 팔짱을 풀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는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 공포감은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에는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당신도 꽤나 끈질기네요. 나는 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어요." "물론 그랬겠지." 패트가 대답했다. "그러나 진범도 바로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그 집을 빠져나갔소. 당신은 그자에게 그 집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겠소? 당신은 최소한 살인방조범으로 간주되어 범행을 저지른 범인과 똑같이 취급될 거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미 그녀에게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뻔뻔스러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그녀의 야비한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 셈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불빛 아래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이 거칠거칠하게 보였다. 창백하고 땀구멍이 많은 피부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 나는 혼자였어요." "그것만으로는 혐의가 풀리지 않아요." 그러자 그녀의 두 손이 허리 밑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아니에요. 나는 혼자였어요. 정말이에요.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나는 문가에 서 있었어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방 알아차렸으니까요. 그래서 비상통로로 달려가서 도망을 친 거예요." "비상통로라니? 어디 말이지?" 내가 끼어들었다. "계단 밑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목조건물에 끼워둔 판벽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나는 급히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좋아. 당신은 경찰이 오는 걸 보고 있었던 거로군. 만일 당신이 계단을 뛰어내려왔다면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범인은 미리 그곳에 와 있었다는 계산이 되는데 -- 누구지, 그 녀석이?" "아무도 못 봤다니까요! 아아, 왜 날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거예요!" 신경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녀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밖으로 데려가." 패트가 그 두 형사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단서라도 있는 것 같나?" "근거는 충분히 있는 얘기였네."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 할망구는 우리가 들이닥치는 걸 보고는 급히 도망쳤던 거야. 그러나 범인은 운이 좋았어. 총을 쏜 지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그 집으로 뛰어들었지. 그런데 그 집에 있는 방들은 하나같이 다 방음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총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범인은 그 손님들 속에 휩쓸려든 다음, 만일 문에 아무도 없으면 쇼가 다 끝나고 난 뒤나 아니면 쇼가 끝나기 전에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생각했겠네. 그런데 그 남자는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우리가 들이닥치는 소리를 들은 거라네. 마담이 단속반이 들이닥쳤다는 걸 눈치채고 도망을 가려고 할 땐 이미 범인은 쇼를 보러 온 손님들 속에 뒤섞이겠다는 계획은 포기하고 있었네. 그 남자는 창녀들을 감독하는 그 할망구 눈에 들키지 않게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할망구의 뒤를 따라 그 비밀판벽을 통해 그 집을 빠져나간 거야. 아마 현장에 가서 검증을 해보면 그 비밀판벽의 문이 그렇게 금방 닫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장담해도 좋아. 어쨌든 우리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네. 자네도 기억하겠지? 나머지 사람들은 손님들만 지키고 있었고. 우리가 목표로 한 통로는 막혀 있었네. 범인은 경관들이 겅계 위치에 배치되기 전에 도망칠 시간이 있었던 걸세. 우리는 너무 서두르다 보니 미처 그것을 계산할 여지가 없었던 거야." 내 추리는 정확하게 입증되었다. 우리는 그 집에 가서 판벽을 조사해 보았다. 그 여자가 진술한 대로였다. 별로 정교하게 된 장치는 아니었다. 버튼은 조각된 꽃무늬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고, 비밀통로의 문은 절연장치와 슬라이드식의 장치가 접속되어 있는, 16분의 1마력짜리 모터로 여닫히는 것이었다. 패트와 나는 그 비밀통로로 들어가 보았다. 조명이라고는 벽의 틈새로 새어들어오는 약간의 불빛뿐이었다. 그 비밀통로는 이 집을 크게 다시 수리할 때 만든 것이 분명했다. 3미터 정도 뒤로 돌아가 보니 급하게 왼쪽으로 꺾인 곳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우리는 벽과 벽 사이에 있었다. 문 하나가 옆집 지하실로 통해 있을 뿐, 그것이 닫히면 그냥 벽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집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통로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머지 조사는 간단했다. 지하실 문을 빠져나가자 도로와 연결된 넓은 뒤뜰이 나타났다. 그 시간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손전등을 켠 채 단 1센티도 빼놓지 않고 그 통로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흔히 뭔가에 쫓기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흘리거나 무슨 흔적이라도 남겨놓는 법이어서 그런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렇게 생각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대기실로 되돌아와 담배를 피워물었다. "어떤가?" "뭐가 어떻다는 건가, 패트?" "아무래도 시간문제에 있어서만은 자네 말이 옳은 것 같아."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런데 자네들은 케인스의 경력에서 뭐 좀 알아냈나? 알아낸 게 있다면 어디 한번 얘기해 보라고." "27개교 이상 되는 학교에서 연락이 왔네. 그가 제일 최근에 다녔던 대학은 별도로 치더라도, 그가 1학기 이상 다닌 학교는 아무데도 없어. 겨우 1개월 정도 다녔다는 보고도 꽤 많았고. 그가 학교에서 사라지고 나면 반드시 그의 뒤를 따라 중도에서 자퇴하는 여학생이 몇 명 나타났지. 그 수가 점점 늘어나서 자네의 추측과 거의 들어맞았네. 나도 열 명이 넘는 부하들을 동원해서 계속 전화로 조사를 하도록 시켜 놓았네만, 아직 채 반도 조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야." 나는 그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본 다음,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속으로 헐을 저주했다. "자네 부하가 헐의 시체를 조사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서는 뭐가 나왔나?" "별로 대단한 것은 없었네. 지폐가 한 50달러 정도, 잔돈이 약간, 운전면허증, 그리고 차의 등록증, 기타 여러 클럽의 회원증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대학에 있는 클럽이었네. 몸가짐은 깨끗했고 차도 발견했지. 차는 글러브 컴파트먼트에 비단 팬티가 한 장 들어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네. 그건 그렇고, 이 집의 입구는 틀림없이 자네가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그는 어떻게 이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담배를 다시 꺼냈다. "그건 내 실수였네. 그가 혼자서 온 것은 아냐. 그건 틀림없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윗도리 밑에 베개 같은 것을 집어넣어 변장을 하거나, 아니면......" 나는 손가락 마디를 딱딱 소리내어 꺾었다. "생각이 났어. 여섯 명인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뒤에 있었던 두세 사람하고 한데 뒤섞였지. 그는 입구의 계단 밑에서 그 일행 속으로 뛰어든 다음 가능한 한 빨리 도로에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그 일행과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집으로 우르르 들어온 거야." "그는 혼자였나?" 패트는 진지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걸 모르겠어, 패트. 하지만 자기가 살해될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헐이 범인과 일부러 함께 왔다고 해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걸세." 오후의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우리는 오늘 일을 그만 마치기로 했다. 패트와 함께 경찰서를 나와서 나는 그와 작별을 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차를 몰고 집으로 달렸다. 이번 사건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험악한 불독이 지키고 있는, 닫혀진 문을 용케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단서를 찾아가 부딪쳐 보았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한 군데 가볼 곳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 쌍동이 중 누구한테 그 딸기 모양의 반점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길 모퉁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시켜 맥주 1쿼터와 함께 그 식사를 먹어치웠다. 벨레미의 아파트로 전화를 건 것은 이미 9시가 가까워져 올 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벨레미 양입니까?" "그런데요." "나는 마이크 해머라는 사람입니다." "어머나." 그녀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이렇게 물었다. "저, 무슨 --?" "지금 전화를 받는 분은 메어리입니까, 에스터입니까?" "에스터 벨레미예요. 무슨 일이시죠, 해머 씨?" "오늘밤에 좀 찾아가 뵐까 하는데요." 내가 말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전화로 하시면 안될까요?"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요.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죠."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다음, 코트를 입고 계단을 내려가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에스터는 동생과 똑같이 생겼다. 설사 틀린 곳이 있다 해도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나서 틀린 곳을 찾아내는 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아마도 서로 비슷한 점이나 틀린 점도 이 자매의 성격이나 개성에 있겠지. 메어리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음란증 환자였는데, 그녀의 언니는 어떤가 어디 한번 조사해 볼까. 그녀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그녀는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날씬한 몸매를 충분히 드러내 주는 디너 드레스 차림이었다. 메어리를 닮아서 그녀 역시 햇볕에 그을린, 스포츠로 다져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헤어 스타일은 달랐다. 에스터는 머리를 요즘 한창 유행하는 업스위프로 말아 올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점뿐이었다. 업스위프형의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는 여자는 웬지 부엌바닥을 청소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나는 물통과 긴 대걸레라도 갖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밖의 몸가짐에 대해서는 잔소리가 필요없을 정도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에스터는 장식장으로 가더니 술잔과 스카치 병을 꺼냈다. 그리고 얼음을 갖고 와서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물었다. "내게 물어보고 싶다는 게 뭔가요, 해머 씨?" "마이크라고 불러 주십시오." 정중하게 내가 말했다. "형식적인 것에는 그다지 익숙지 못해서요." "예, 그럼 좋아요, 마이크." 우리는 술잔을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그저 다니다가 알게 된 정도라고나 할까요? 소개받고 난 뒤에는 자주 만나서 어울리기는 했지만, 그리 친하다고는 할 수 없었죠." "그럼, 조지 칼레키와는 어느 정도의 사이입니까?"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좋을 거예요. 나는 그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동생분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가 당신을 달콤한 말로 유혹한 적은 없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는 그만하세요." 그녀는 말을 계속하기 전에 잠시 무슨 생각엔가 잠겼다. "그분은 파티가 있었던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몹시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즉, 사교적인 태도가 아니었다는 말이에요. 아무튼 점잖은 신사라고는 할 수 없었죠. 그분의 태도는 웬지 초조해 보였거든요." "그런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옛날에는 공갈범으로 이름깨나 날린 사람이었으니까요. 아마 지금도 몇 군데의 서클에서 활약하고 있을걸요." 그녀가 두 다리를 포개자 내 머릿속에는 더 이상 물어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 여자들은 남자들이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스커트를 밑으로 내리는 연습을 해두지 않는 것일까? 짧은 스커트를 입는 이유가 거기에 있구나. 젠장. 에스터는 자기 다리의 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아주 예로부터 써온 이른바 그 본능적 동작이란 것을 하는 척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감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질문을 계속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지장이 없다면 대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지요, 당신들은?" 나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뭔가를 물어봐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가 장난꾸러기처럼 반짝거렸다. "우리한테는 주식의 배당금에서 수입이 들어오고 있죠. 아버지가 서부에 있는 몇 군데의 공장 주식을 물려주셨거든요. 설마 지금, 부잣집 마나님을 물색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만일 그럴 생각이었다면 좀더 자주 이곳에 찾아왔을 거요. 집은 어떻습니까? 굉장한 유산을 물려받았을 텐데요?" "30에이커 정도의 초원과 1에이커 정도의 양육림이 있는 집이에요. 둘레에는 풀장과 테니스 코트가 서너 개 있지요. 방은 22개가 있고요. 그 집 주변에는 재산에 눈독을 들인 나머지 나한테 미인이라든가, 멋지다든가 하는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며 열심히 내 뒤를 쫓아다니는 시골뜨기들이 한 다스 정도는 어슬렁거리지요." 나는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하긴 당신들이 아담한 집을 갖고 있다고 말한 친구가 있긴 했지요." 그러자 에스터는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유방이 다 드러나도록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유방은 그녀처럼 싱싱했다. "언제 우리 집에 오시지 않을래요, 마이크?" 나는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바라지도 않던 행운인데요? 언제 말입니까?" "이번주 토요일이에요. 그날 밤 라이트를 켜고 하는 테니스 시합이 있는데, 몇몇 사람과 그 시합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거든요. 그때 마너 데블린도 가기로 했어요. 가엾은 사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자리에 그녀를 초청해 주는 정도죠. 잭이 죽고 난 뒤로는 그 사람 자체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말예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군요. 내가 차로 데리고 가지요. 그 밖에 또 나를 아는 사람이 옵니까?" "샬롯 매닝. 당신도 이미 그녀를 만났을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녀는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내 눈앞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그런 생각을 하면 못써요, 마이크." 나는 애써 미소를 참으며 이렇게 그녀를 골려 주었다. "그런 생각도 안하고 방이 22개나 있는 큰 집에서 무슨 재미로 삽니까?"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다른 표정이 나타났다. "왜 내가 당신을 초대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티 테이블 위에 술잔을 내려놓고는 그것을 손끝으로 빙그르르 돌린 다음 그녀 옆에 앉았다. "모르겠는데요? 이유가 뭐지요?" 그녀는 내 머리를 팔로 감으며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왜 그 이유를 직접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시죠?"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와닿자 그녀는 두 팔로 내 어깨를 힘차게 껴안았다. 나는 몸으로 그녀의 몸을 애무하면서 무겁게 눌렀다. 그녀는 내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자기의 얼굴을 내 얼굴에 비벼댔다. 내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가 한쪽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드레스의 단추를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녀의 두 어깨에 입술을 대자, 그 떨림은 그녀의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한번 그녀는 나를 깨물기까지 했다. 그녀의 이가 내 목을 물었던 것이다. 내가 더욱 힘차게 그녀를 껴안자 그녀의 숨소리는 헐떡임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마치 몸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것을 발산하기라도 하듯 몸을 심하게 비틀었다. 내 손이 소파 옆에 있는 스탠드의 줄을 찾아 잡아당기자 실내는 온통 캄캄해졌다.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아주 조그맣게 들리는 소리.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미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한두 번의 헐떡임 소리. 쿠션이 스치는 조그만 소리와 폭이 넓고 질이 좋은 검은 나사 천에 손톱이 긁히는 소리. 벨트와 버클이 서로 맞닿는 소리와 바닥에 벗어던진 구두의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 방안은 헐떡이는 숨소리와 키스의 젖은 느낌으로 온통 가득찼다. 그리고 침묵. 이윽고 나는 줄을 당겨 스탠드를 켰다. 그리고는 아래위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당신은 기막힌 거짓말쟁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그녀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엉덩이에 점이 없잖아, 메어리." 그녀는 쿡쿡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당신이 그것을 찾아내는 일에 흥미를 보일 줄 알았어요." "주먹으로 한 대 갈겨버릴까도 생각했어." "어디를 말예요?" "그만두지. 아무래도 당신은 얻어맞는 것도 좋아하는 모양이니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메어리가 드레스의 매무새를 고치는 동안 나는 술잔에 스카치를 따랐다. 그녀는 나한테서 마실 것을 받아들고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나는 그만 돌아가려고 모자를 걸어둔 곳으로 갔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토요일의 데이트는 유효한 거요?" 내가 물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늦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날 밤, 나는 맥주를 마시며 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우리는 지금 홈 스트레치로 향하는 마지막 턴 지점까지 와 있는 것이다. 나는 여분으로 사놓은 담배와 통조림, 그리고 맥주를 가지고 열어젖힌 창가에 있는 삐걱이는 흔들의자에 누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까지 세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나는 아직 이 사건에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을 리스트에 올려보았다. 그 첫번째로 잭은 무슨 이유로 살해당한 것일까? 그 연보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까? 왜 헐은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그가 그곳에 간 것은 살인이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협박을 하러 간 것일까? 그도 아니면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을까? 만일, 범인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떻게 내 눈을 피해 헐의 뒤를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할 것이 많다. 더구나 얼마든지 가능한 답이 나올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 게다가 조지 칼레키는 어떻게 경찰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가 이번 살인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굳이 도망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는 왜 나를 쏘았을까?-- 내가 범인을 뒤쫓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그 개연성도 크다. 그는 이번 사건의 진범을 알려주는 그 어떤 근거에도 모두 해당되기 때문이다. 파티에 참석했었던 사람들 중에서 잭을 죽일 기회가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동기 문제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가 잭을 죽일 만한 동기를 가진 걸까? 매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순전히 센티멘탈에서 비롯된 추측일 뿐이다. 샬롯? 천만의 말씀. 그건 더 센티멘탈한 추측이다. 더구나 그녀의 직업은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의학박사다. 마너의 병 때문에 잭과 친해졌을 뿐, 그를 죽여야 할 동기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쌍동이 자매, 그녀들은 어떨까? 한 사람은 음란증 환자, 나머지 한 사람은 아직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상태다. 재산은 썩어 없어질 정도로 많지만, 그렇다고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문제는 아직 없다. 그녀들은 어떤 점이 서로 닮았을까? 에스터에게는 그럴 만한 동기가 있을까? 아무래도 그녀에 대해 좀더 많은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그 딸기 모양의 반점만 해도 그렇다. 혹시 메어리는 잭을 유혹하려다가 망신만 당한 것은 아닐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성적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잭을 유혹하려다가 거절을 당하자 그 감정이 살인이라는 감정으로 뒤바뀐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 연보는 왜 가지고 간 걸까 ? 헐 케인스. 녀석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갔다. 아일린 비커스. 그녀도 죽었다.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게 때가 늦어버리고 만 것이다. 범인이 두 사람이란 것도 가능할까? 헐이 잭을 죽이고, 아일린도 죽이고,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바로 그 방안에서 자기 총으로 살해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엄청난 추측이다. 그 방안에 격투한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며, 더구나 아일린은 완전히 벌거벗은 시체였다. 직업적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옛날 애인이 들어오자 놀란 걸까? 왜? 왜 그랬을까? 왜 ? 이 사건 전체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누가 그걸 숨겼을까? 칼레키의 아파트에 숨겨진 비밀 같은 것은 없었다. 잭의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조사를 하면서 흘려버린 게 없다면 말이다. 제3자가 있는 걸까 ? 빌어먹을. 나는 다시 맥주 한 병을 비운 다음, 그 병을 발 밑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다만 조지 칼레키가 어디서 모습을 나타낼 것인지 그것만은 알고 싶었다. 그 남자에 대한 수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 되겠지. 웬지 나는 그를 찾아내는 일이 시간문제라는 기분이 들었다. 헐만 살아 있어 주었어도...... 나는 그런 생각을 멈추고 다리를 두드렸다. 제기랄. 제기랄. 도대체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단순하게 생겨먹었을까. 헐은 뉴욕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자기의 일에 대해 무슨 기록이라도 남겨두었다면 그것은 대학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게 내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다 ! 가능한 한 빨리 나는 옷을 차려입었다.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총알의 보조 클립을 넣은 다음 차고에 전화를 걸어 차를 좀 꺼내 달라고 부탁했다. 거의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잠이 덜 깬 듯한 수위가 차를 몰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1달러짜리 지폐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는 차에 올라 속력을 내어 마구 달렸다. 다행히도 이런 밤에는 신경을 쓰게 만드는 차들의 왕래가 별로 없었다. 나는 신호를 여러 번 무시해 가며 웨스트 사이드로 접어든 다음 북쪽을 향해 질주했다. 패트는 그 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마을에 대해 내게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평상시라면 아마 시내에서 그곳까지는 자동차로 세 시간은 충분히 걸리겠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의 시간 여유가 없었다. 두 번인가 고속도로 순찰경관이 나를 쫓아와 막으려고 했지만, 내가 전속력으로 마구 달리자 그리 오랫동안 쫓아오지는 못했다. 혹시 경관이 내 차를 잡기 위해 도로봉쇄라는 긴급수배를 취하고 미리 무선으로 연락해 놓았으면 어떡하나 하고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표지판이 울퉁불퉁한 길임을 표시하고 있는 곳에서 내 차는 바퀴자국이 많고 타이어가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것 같은 험한 길로 접어들었지만, 군(郡)이 바뀌자 도로 사정도 바뀌었다. 평탄한 매카덤 도로가 앞에 펼쳐졌기 때문에 나는 그 짧은 여행의 나머지는 전속력을 내어 달릴 수 있었다. 팩스테일은 8킬로미터 앞에 있었다. 상공회의소의 게시판에는 이 마을이 인구가 3천 명인 군청소재지라고 쓰여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대학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마을의 북쪽으로 1킬로미터쯤 더 간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건물 여기저기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아마도 복도의 불빛인 모양이다. 나는 차가 자갈로 된 도로로 접어들자 핸드 브레이크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장중하게 서 있는 2층 건물 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거기에 살고 있는 남자는 육군에 입대한 적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찻길을 따라 노란색과 검정색으로 된 표찰이 있었는데, 거기에 '미스터 러셀 힐버 사감(舍監)'이라고 씌어 있는 글씨를 볼 수 있었다. 건물에는 완전히 불이 꺼져 있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나는 벨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불이 켜질 때까지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문으로 급히 달려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자 입을 멍하니 벌린 사감이 서 있었다. 그는 잠옷 위에 작업복 윗도리를 걸친 차림이었다. 지금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다 만나봤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야릇한 차림을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허락을 받는다거나, 혹은 무슨 연락을 취하는 걸 기다릴 새도 없이 나는 집안으로 밀고 들어갔기 때문에 하마터면 이 새우 빛깔의 드레싱 로브를 입은, 키가 크고 남의 시선을 끄는 이 남자를 거꾸로 넘어뜨릴 뻔했다. "뭐요? 당신은 누구요?" 나는 배지를 슬쩍 보여주며 그를 옆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이크 해머. 뉴욕에서 온 사립탐정이오." "담당구역에서 나오셨소?"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이곳에 해럴드 케인스라는 학생이 있었지요? 그 학생의 방을 보고 싶소." "그건 말도 안돼요. 그 사건은 군(郡) 경찰이 처리하고 있소. 경찰에 맡겨둔 이상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 당신도 알았다면......" 나는 그가 건방진 말을 계속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당신." 나는 곧게 편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살인범이 지금 이 구내로 도망쳐 들어왔는데도 나와 의논할 수 없다는 거요? 설사 그놈이 정말 살인범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 가까운 놈이오. 그렇게 머리를 쓸 틈이 있으면, 그 방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시지. 만일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 " 내가 덧붙였다. "흠뻑 두들겨 패서 속에 있는 것까지 다 토하게 만들어주고 말겠어!" 러셀 힐버는 뒤로 한 발 물러서더니 몸을 지탱하려고 의자에 기댔다. 그의 표정은 풀처럼 희멀겋게 변해 금방이라도 기절할 사람 같았다. "나는 -- 나는 이런......꿈에도 생각 못......" 그는 입안에서 말을 우물거렸다. "......케인스의 방은 동쪽 계단 밑에 있소. 방 번호는 107호이고, 남동쪽의 모퉁이요. 하지만 군 경찰이 조사를 끝마칠 때까지는 문을 잠가놓았고, 그 열쇠는 내게 없소." "군 경찰 같은 건 똥이나 실컷 퍼먹으라고 해! 아무튼 나는 그곳에 좀 들어가 봐야겠어. 이곳의 불은 전부 다 꺼버려. 그리고 이 건물에서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말라고. 전화에 가까이 가지도 말고." "하지만 학생 -- 학생들은......" "내가 미리 주의를 주겠어." 문을 닫으며 내가 말했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동쪽 건물을 찾기 위해 방향을 정했다. 나는 기숙사로 보이는 낮은 장방형의 건물을 골랐는데,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잔디는 내가 내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 주었다. 나는 살짝 그 건물의 모퉁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능한 한 벽 쪽을 향해 우거진 풀숲 뒤로 걸어가며 그 그늘에 몸을 숨겼다. 창문은 어깨 높이로 죽 이어져 있었다. 나는 모자를 벗고 어떤 유리창에 귀를 대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되든 안되든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손끝을 창틀에 걸고 창문을 들어올렸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창문이 스르르 미끄러져 올라갔다. 나는 펄쩍 뛰어올라 창틀을 손으로 짚은 다음 고개를 숙이며 방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가 앞으로 고꾸라졌기 때문에 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서 두 발의 권총이 작열했던 것이다. 총알이 내 등뒤에 있는 창틀에 명중하자 내 얼굴로 파편이 날아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 방안은 권총이 내뿜는 처절한 붉은 불빛으로 환하게 비쳐졌다. 내 손이 코트 밑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총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우리 둘의 사격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이 재빠르게 연속으로 세 발을 쏘았다. 뭔가가 윗도리를 쫙 찢는 순간, 늑골이 타는 듯 아파왔다. 방안 저쪽에서 또 한 발 총이 발사됐지만 그것은 나를 향해 쏜 것이 아니었다. 그 총알은 방바닥을 관통하더니 이윽고 총을 쏜 남자가 뒤따라 쓰러졌다. 이번에는 운에만 맡길 수가 없었다. 나는 상대방이 쓰러진 곳으로 달려가 그의 몸 위로 몸을 덮치며 권총을 발로 찼다. 바닥 위로 권총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한 일은 스위치를 켜는 일뿐이었다. 조지 칼레키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내가 쏜 연속 세 발이 심장에 가까운 가슴 부위 위에 거의 명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방에 어떤 목적을 위해 찾아와서, 그 목적을 이룰 시간은 충분히 갖고 있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아직 따뜻한 녹색의 금속제 통에 타버린 재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제 11 장 다음 순간, 누군가가 문을 힘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문에서 떨어지고, 조용들 해!" 내가 고함쳤다. "안에 누구야?"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되물었다. "너희 찰리 아저씨다!" 내가 되받아 말했다. "그렇게 웅성거리며 섰지만 말고 어서 가서 학장을 빨리 이곳으로 모셔오고 경찰한테도 연락을 해!" "자, 모두 다 창문을 잘 감시해." 그 목소리가 외쳤다. "문은 아직 잠겨 있으니까 틀림없이 창문으로 들어갔을 거야. 참, 방에 있는 라이플을 갖고 오는 게 좋겠어. 지금 이 방안에 있는 놈이 어디서 굴러온 놈인지 모르는 일이니까." 미치광이 같은 대학의 건달 녀석들. 만일 라이플 총을 가지고 어리석은 짓을 하기만 해봐라.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네 사람이 전속력으로 모퉁이에서 뛰쳐나오는 순간 나는 창문으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나를 보는 순간 그들은 당황해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22구경 연발총을 손에 든 덩치 큰 우두머리 학생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네, 잠깐 이리로 와보게." 그는 총검을 들고 금방이라도 앞으로 돌격할 사람처럼 총을 앞으로 내민 채 창가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공포심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손바닥에 배지를 올려놓고, 그걸 녀석의 코앞에 바싹 내밀었다. "이 배지가 보이나?" 내가 말했다. "나는 탐정이야, 뉴욕에서 왔어. 자, 알겠으면 이제 여기에서 자네의 그 코를 치우게. 정말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면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구내에 감시원들이나 세워놓으라고. 아무도 밖으로 못 나가게 말이야. 알겠나?" 그 학생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모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것이다. 다음 순간 전 구내에 명령이 전달됐다. 정말 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예비장교들이었다. 학장은 병든 말처럼 헐떡이면서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거의 쉬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하면, 그저 어떤 남자를 한 사람 쏘아죽였을 뿐입니다. 경찰한테 연락해서 학생들이 여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해 주십시오." 그는 거북 떼처럼 모여든 학생들을 다 쫓아버렸다. 문 밖의 웅성대는 소리에서 간신히 해방되어 나는 방안에 혼자 남겨졌다. 지금부터는 시골뜨기 군 경찰이 들이닥쳐 현장검증을 하기 전에 먼저 해둬야 할 일들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총을 조사하는 데 약간 시간을 소모했을 뿐, 조지는 그가 쓰러진 장소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총은 45구경이었다.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총과 같은 크기로, 지난번 그의 방을 뒤졌을 때 거기서 본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 총 손잡이에 작은 흠이 있는 걸 봐두었던 기억이 난 것이다. 다음은 녹색 통을 조사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태워 버렸는지 정확하게 확인해 보려고 아주 주의깊게 재를 조사해 보았다. 통의 바닥에는 까맣게 탄 노트의 표지가 형태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손을 대자 금방 바스라져 버렸다. 재의 분량으로 미루어 보아 노트를 최소한 한 권 이상 태운 듯싶었다. 나는 노트에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백만 달러를 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노트는 완전히 타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 녹색 통이 놓여 있었던 바닥 위를 대강 휘둘러보았다. 거기에도 재가 약간 흩어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다른 재에 비해 형태가 약간 컸고, 어느 정도 타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종이 위에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가 어떻게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할 수 있었는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종이를 태웠다면 틀림없이 밖에서도 그 불빛이 보였을 텐데 말이다. 나는 금방 그 이유를 알아냈다.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양탄자를 들어올리자, 밑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올과 올 사이에는 한 반 페이지 정도 되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이 종이는 살인사건의 재판 때 내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 분명했다. 조지는 그 동안 살인사건의 하수인으로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고, 이제는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숨겨져 있는 곳도 알아낸 것이다 -- 업타운에 있는 은행의 귀중품 보관함 속에. 종이 위에는 그 보관함의 번호와 암호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열쇠는 은행의 관리인에게 맡겨져 있고. 결국 조지가 살인범이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놈이 옛날로 되돌아가 흉악한 수법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다행이었다. 그것을 증명해 줄 증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를 쏘아죽인 것이 정당방어였다는 걸 정당화하는 것 이상으로 도움이 된다. 그 누런 종이조각을 우송하기 위해 나는 작은 봉투에다 그것을 넣고 주소를 적은 다음 우표를 붙였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나는 어깨를 닫혀 있는 문에 힘껏 부딪쳤다. 문이 확 열리며, 하마터면 나는 문앞에 몰려 서 있던 열댓 명의 학생들 위로 넘어질 뻔했다. 나는 학생들을 쫓아보낸 뒤 우편함을 찾아보았다. 우편함은 복도 제일 안쪽에 있었다. 나는 우편함 속으로 봉투를 던져 넣은 뒤 경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비로소 대강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는 칼레키가 그 신디케이트 조직의 가장 중요한 배후인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아주 단역에 불과했다. 헐 케인스야말로 그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수법은 여자들을 손아귀에 넣을 때 사용하는 수법처럼 교활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을 테지만, 어쨌든 그렇게 할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우선 그는 수상쩍은 과거가 있는 남자들한테로 눈을 돌렸다. 그것도 그 증거물들을 확보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는 작자들만 골라낸 것이다. 이 조직을 만들 때 그는 그 남자의 죄상을 조사해 놓거나, 혹은 복사 카메라로 찍은 범죄자 카드의 사진을 그 남자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를 자기 부하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만일, 그 증거가 다 태워져 없어지기 전에 손에 들어오기만 했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오욕에 찬 범죄활동을 적발해 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단서는 잡았다. 금고 안에 그걸 복사해 놓은 게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십중팔구는 없기가 쉬웠다. 헐은 아마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증거물들을 각기 다른 금고에 넣어두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하면 설사 그가 어떤 부하한테 압력을 가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해도, 다른 부하한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면서 경찰한테 이러이러한 보관함을 한번 조사해 보라는 식의 편지를 보낼 수가 있을 테니까. 참으로 기막힌 생각이었다. 교묘한 장기포석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순간 칼레키를 체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그도 내가 찾고 있는 범인은 아니었다. 만일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마지막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않게 될 테지. 틀림없이 이번 사건에는 제3의 인물이 있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는 인물이 있다. 그게 누군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단, 이미 살해당한 사람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군 경찰은 위세도 당당하게, 마치 대학총장이 취임 연설을 하는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학교에 도착했다. 덩치가 크고 불그레한 얼굴을 한, 농부처럼 생긴 계장이 리볼버 총신에 손을 얹은 채 실내로 쿵쾅거리며 들어섰다. 그는 재빨리 나를 살인용의자로 체포해 버릴 심산인 듯했다. 나는 팔을 흔들어 우선 몸을 푼 다음, 2분 뒤에는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큰소리로 그를 꾸짖고 나무라자 그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며 언제 그랬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이미 그런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자진해서 사립탐정 허가증과 권총 사용허가증, 그리고 기타 신분증명을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꺼내어 그에게 살펴보도록 건네 주었다. 나는 패트와 전화로 하는 얘기를 일부러 그에게 들려 주었다. 대개 군 경찰들은 관할 구역 이외의 경찰의 권한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마련이지만, 그가 전화를 받자 패트는 만일 나한테 협력을 해주지 않으면 주지사한테 연락해 버리겠다고 위협조로 말했다. 나는 그 남자한테 여기서 협력해 줄 사항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 다음 뉴욕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내가 패트의 사무실 밖에 차를 세웠을 때는 윗 눈꺼풀과 아랫 눈꺼풀이 인정사정없이 맞붙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패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능한 한 간략하게 대학에서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얘기해 주었다. 패트는 현장 사진을 손에 넣고, 또 노트를 태운 찌꺼기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냈는지 알아보기 위해 경찰차를 업스테이트로 급히 출발시켰다. 새삼스레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없기에 나는 샬롯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외출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주겠소?" 내가 물었다. "물론이에요, 마이크. 빨리 오세요.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으니까요." "15분 이내로 가겠소." 이렇게 말하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시간은 30분 이상 걸리고 말았다. 교통이 아주 혼잡했던 것이다. 캐시가 집을 청소하고 있을 동안 샬롯은 문 앞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 코트와 모자를 받아들자, 나는 소파로 갔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나한테 키스를 했다. 나에게는 그녀의 키스를 간신히 되받아 해줄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내 옆에 앉게 하고는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해 주었다. 샬롯은 얘기를 들어주는 데는 그지없이 좋은 상대였다. 내 이야기가 다 끝나자, 그녀는 손으로 내 이마와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 참, 그 색광(色狂)의 소질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보시오." "그런 얘기를요? 또 그 여자를 만나셨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다. "일 때문이었소." 이런 변명을 도대체 언제쯤이나 그만두게 될는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스러웠다. 그러자 샬롯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좋아요. 내가 이해해 드리도록 하겠어요.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음란증은 환경에 따라 점차 그 증세가 심해지는 경우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성욕이 지나치게 왕성하다 못해 신경장애마저 일으키는 수도 있지요. 그런 타입이 아닌 경우에는, 유년기에 리비도(ribido : 성적충동)을 억압당하다 보니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는 더 이상 무감각한 구속의 희생자에서 벗어나서, 비정상적인 흥분을 추구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나는 일부러 그 '왜'를 회피하면서 도로 반문했다. "감정적인 장애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늘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법이오?" "다시 말해, 그런 변태성욕자가 감정적인 부담으로 인해 살인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느냐는 말이죠? 그런 생각에 나는 대체로 부정적인 편이에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 감정의 돌파구로 그것보다는 좀더 쉬운 방법을 택하는 법이니까요." "예를 들면?" 내가 중얼거렸다. "음란증적인 성적 도착 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대개 개개인을 상대로 일방적인 감정을 나타내다가, 그것이 상대방에 의해 거부될 경우 그 상대방을 죽이는 대신 좀더 간단하게 자신과 감정적으로 일치하는 다른 상대를 물색하죠. 그러는 편이 한층 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먼젓번 상대한테서 거절당함으로써 자기의 수완이 무디어졌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새롭게 등장한 나중 상대가 그녀를 새롭게 해주거든요. 무슨 애긴지 알겠죠?" 그녀의 이 말투가 나를 비꼬고 있는 것인 줄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쌍동이의 경우, 그 두 사람이 모두 색광이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샬롯은 몹시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으로 그 자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썩 잘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자매의 성격을 판단할 정도는 되죠. 그런 면에서 메어리는 회복불능이에요. 그녀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편이 나아요. 솔직히 그녀가 언니보다는 내 흥미를 끌어요. 에스터는 동생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여러 번 보아 왔고, 또 나름대로 그녀를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보려고 애를 써왔긴 하지만, 그녀의 연애사건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는 경향이 강하죠. 에스터는 인간적으로는 매력적인 여성이에요. 좋은 사람이죠. 그녀는 온통 동생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남자한테 열중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을 거예요. 따라서 만일 한 남성이 에스터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 수만 있다면 그녀는 거기에 순순히 응할 거예요."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졸린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 당신도 그 쌍동이 자매한테 갈 거요?" "예, 그래요. 메어리가 나를 초대했거든요. 거기에 도착하는 시간은 아무래도 좀 늦어지겠지만, 그래도 그 시합은 놓치기가 싫거든요. 하지만 금방 돌아올 생각이에요. 그런데 당신도 가세요?" "그렇소. 마너와 함께 갈 생각이오. 내가 전화로 얘기하면 마너도 승낙할 거요." "그게 좋겠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내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마침내 나는 망망대해와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잠이 깨자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거의 오후 4시가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캐시가 내가 일어난 기척을 알아차리고 베이컨과 계란, 커피가 놓여진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해머 씨. 샬롯 양이 나가시면서 돌아올 때까지 시중을 들어 드리라고 하셨어요." 캐시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더니 쟁반을 내려놓고 뒤뚱뒤뚱 걸어나갔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계란을 배부르도록 먹은 다음, 나는 연거푸 커피를 세 잔 마셨다. 그리고 마너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녀에게 토요일 오전 10시까지 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수화기를 다시 제자리에 건 다음, 샬롯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동안 무슨 책이라도 읽으려고 책장 앞을 기웃거렸다. 거기에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나도 이미 읽은 소설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샬롯의 전문서적이 꽂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상적인 제목의 책이 한 권 눈에 뜨였다. <정신장애의 최면요법>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나는 대강 그 책을 훑어보았다. 전문용어가 너무 많았다. 책의 주된 내용은 최면술을 이용하여 환자를 안정시키고 치료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환자는 나중에 자동적으로 치유된다고 책에 쓰여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걸 공부해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을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 이봐, 그런 걸 생각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라고. 더구나 나는 그런 병에 걸리지도 않았잖아. 이번에는 사진이 많이 있는 책을 한 권 골라 들었다. 책의 제목은 <결혼의 심리>였다. 어랍쇼! 이 책도 꽤 재미있을 것 같군. 만일 전문적인 용어로만 쓰여 있지 않았어도 나 역시 충분히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문외한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전문적인 용어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샬롯은 내가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을 무렵 돌아왔다. 그녀는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아 보더니, 이내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를 알아챘다. "무슨 특별한 생각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바보처럼 히죽 웃었다. "흥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가능한 한. 얼마나 오랫동안 에너지를 축척하고 있었는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요." 그녀는 나한테 키스를 하고 나서 스카치와 소다를 섞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마시고 난 다음, 캐시에게 모자와 코트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샬롯이 금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려고요? 적어도 저녁식사는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밤은 그만둡시다, 샬롯. 세탁소에 부탁할 일도 있고, 또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도 싶으니까. 설마 당신 집에 레저 핸디가 있지는 않을 것 아니오." 나는 코트에 난 총알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샬롯은 그것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당신......당신, 다치지는 않았어요, 마이크?" "천만에. 다행히 총알이 늑골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조금도 다치지 않았소." 그녀에게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나는 셔츠를 걷어올린 다음, 다시 옷을 고쳐 입었다. 마침 그때 전화가 울려서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녀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좋아요. 내가 만나보겠어요." 그녀가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자 나는 무슨 일이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단골 손님 얘기예요.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다시 본래의 증세로 되돌아왔대요. 안 그래도 진정제 처방을 써서 왕진을 갈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책상으로 갔다. "자, 그럼, 나는 이만 물러가겠소. 또 나중에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소. 지금 당장은 이발부터 하고 싶으니까." "그럼, 좋아요, 당신." 그녀는 되돌아와서 내 몸에 팔을 감았다. "모퉁이에 이발소가 있어요." "어느 이발소이건 단정해지는 건 마찬가지겠지." 나는 계속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면서 말했다. "빨리 오셔야 해요, 네, 마이크?" "물론이오, 샬롯." 다행히도 이발소는 한산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 마침 어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코트를 옷걸이에 건 다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깎아 주시오." 내가 말했다. 이발사는 내 권총을 흘끗 쳐다보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나에게 흰 천을 둘러 주었다. 이어서 전기 바리캉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15분 뒤, 그는 내 어깨를 털었다. 나는 마치 업타운의 불량배 같은 꼴로 이발소를 나왔다. 내 차는 덜커덩거리며 브로드웨이를 향해 시내를 가로질러갔다. 그 동안 사이렌 소리를 듣긴 했지만, 경찰차가 다가와 그 차의 차창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전까지는 그가 패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몹시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나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교통순경이 교통 통제를 하고 있는 동안 교차점을 지나갔다. 그 애버뉴로 다시 가보니 다른 사이렌 소리가 북쪽에서 들려왔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지난번 조지 칼레키에게 저격당할 당시의 예감과 엇비슷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때와 같은 사건이 되고 말았지만, 처음에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거리 모퉁이에 있던 교통순경이 교통정리는 뒤로 젖혀둔 채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쫓아 렉싱턴 애버뉴의 왼쪽 길로 달려갔다. 나는 그 훨씬 앞쪽에 있는 좁은 도로에 세워져 있는 차들 속에서 패트의 차 지붕을 발견했다. 잠시 뒤 차의 속력을 줄이며 나는 보도로 다가갔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1구획쯤 떨어진 곳에 주차해야만 했다. 도로 양쪽에 경찰차 두 대가 서 있으면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구획 모퉁이에 서 있는 순찰경관한테 배지와 허가증을 보여 주었다. 그가 나를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약국 바깥에 얼마간 모여 있는 사람들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패트는 마치 살인과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나는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패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어서 보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로 떨구어져 있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초라한 짙은 적갈색 윗도리를 더럽히면서 등뒤에 난 총상으로부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패트는 내게 조사해 보라고 했다. 나는 피살자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그의 얼굴을 들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보보 호퍼는 이제 더 이상 벌을 기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패트가 시체를 가리켰다. "이 남자를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알고 있어. 이 친구의 이름은 호퍼지. 보보 호퍼. 약간 바보스럽긴 해도, 태평하고 마음씨 착한 친구였는데. 나쁜 짓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예전에는 칼레키의 심부름꾼이긴 했지만." "45구경으로 맞았네, 마이크." "뭐라고!" 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것도 있어. 마약이지. 이리로 와보게." 패트는 약국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뚱뚱하고 작달막한 점원이 감색 사지 양복 차림의 덩치가 큰 총경이 인솔하고 있는 형사들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총경에 대해서는 아주 훤하게 잘 알고 있었다. 옛날에 어떤 사건에서 내가 솔개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한 이후로 그 총경은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감정적으로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마약 담당의 데일리 총경이었다. 데일리가 내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일로 왔소?" "당신이 여기에 온 바로 그 일 때문일 거요." "좋아.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는 게 좋을 거요.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무슨 냄새나 맡을까 하고 어슬렁거리는 사립탐정이 이번 사건에 코를 박게 할 순 없으니까. 자, 썩 꺼지시지."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총경님." 패트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가 이런 투로 말한다는 것은 곧 조심하라는 얘기와 마찬가지였다. 데일리는 패트를 아끼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타입의 경찰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데일리는 시간이 지나 승진을 한 케이스였지만, 패트는 범죄에 대한 과학적인 해결방법에 의해 지금의 지위까지 오른 케이스였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런 사이라 해도 두 사람은 서로의 방법을 눈엣가시처럼 여기지는 않았다. 패트는 데일리에게 신임을 받기에 충분한 남자였던 것이다. 그런 신임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의 의견은 데일리의 귀를 기울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이크는 이번 사건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수사를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마이크가 계속 정보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죠. 총경님만 좋다면 저는 마이크가 이번 사건에도 관여토록 해주고 싶습니다만." 데일리는 나를 노려보더니 이윽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하지만 증거물은 단 한 가지라도 갖고 가게 해서는 안돼." 그가 나에게 한 방 먹였다. 옛날에 나는 그가 수사를 맡고 있는 사건에 휩쓸려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서 그는 자기의 트럼프 솜씨를 숨긴 채 게임을 하는 식이었다. 나는 그가 숨기고 있던 증거를 근거로 그가 생각지도 못한 거물급 약품판매업자를 잡았다. 데일리는 아직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약과의 과장은 약제사에게 호통을 쳤다. 나는 그 한마디 한마디를 잊지 않고 다 기억해 두었다. "자, 다시 한 번 더 나한테 모든 것을 다 얘기하고, 또 그밖에 생각나는 일은 없는지 잘 생각해 보시오." 궁지에 몰린 그 약제사는 오동통한 손을 꼭 맞잡은 채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많은 얼굴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 중에서 패트의 얼굴이 가장 동정적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패트를 쳐다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아마 카운터 밑을 청소하고 있었을 때였을 거예요. 피살된 그 남자가 들어오더니 처방약으로 가득 채워달라고 말하더군요. 아주 걱정스런 표정으로 포장지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상자를 나한테 내밀면서 말입니다. 그 남자는 내게 자기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과, 내가 그 일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를 믿어 주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어떤 사람한테 전해 줘야 할 상자를 떨어뜨렸는데, 누가 그걸 밟는 바람에 처방약이 길에 쏟아지고 말았던 모양이에요. 이 가루는 부서진 상자의 양쪽에서 흘러나온 겁니다. 나는 그걸 안으로 가져가서 일단 핥아본 다음 분석을 해봤죠. 그 가루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긴 했지만 분석 결과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로인이었지요. 그래서 우선 큰일났다는 생각에서 -- 선량한 시민의 도리로서 -- 경찰에 전화를 걸어 그 남자가 나한테 무엇을 갖고 왔는지를 신고하니 경찰에 계신 분은 그 남자를 붙잡아 두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남자가 깡패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판국에 우물쭈물하다가는 그 남자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작달막한 남자는 여기서 얘기를 중단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래 봬도 내게는 가족이 있으니까요. 내가 시간을 끄니까 그 남자는 빨리 달라고 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지 뭐겠습니까? 권총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나는 다른 상자에 붕산을 채워 준 다음 그한테서 1달러를 받았고, 그는 약국을 나갔습니다. 나는 그가 어느쪽으로 가는가 보기 위해 카운터를 나갔는데, 내가 채 문가에 이르기도 전에 그는 보도에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거지요. 거의 즉사였습니다. 나는 다시 경찰에 전화를 걸었고, 그래서 이렇게 경찰들이 오신 거지요 -- " "누가 도망치는 것을 보진 못했소?" 패트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못 봤습니다. 워낙 정신도 없었고, 도로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총소리도 못 들었소?" "예. 하지만 났어도 못 들었을 겁니다. 아무튼 어찌나 놀랐던지 나는 총 맞은 곳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보고 안으로 그냥 뛰어들어와 버렸습니다." 패트는 자기 머리를 가볍게 톡톡 치고 있었다. "자동차는 어떻소? 그때 자동차가 지나가지는 않았소?" 작달막한 남자는 눈을 깜박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을 열려고 하다가는 멈칫한 다음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그런 말씀을 하시니 기억이 납니다. 그런 일이 있기 조금 전에 아마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갔을 거예요. 맞아요. 틀림없어요. 아주 천천히 와서 저기 길 모퉁이를 돌아갔지요." 그리고는 그는 급히 덧붙였다. "그 차는 아마도 길 옆에서 다가온 것 같았습니다.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그 차가 지나간 뒤였죠. 나는 감히 뒤쫓아가 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신이 없었거든요." 데일리는 부하 한 사람에게 그 얘기를 모두 속기시키고 있었다. 패트와 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총알의 발사 각도를 조사해 보았다. 시체가 넘어져 있는 위치로 보아 범인은 총을 쏠 당시 렉싱턴 쪽에 있었다. 붕산 꾸러미는 피로 붉게 물들여진 채 보보의 손 밑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의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지갑에는 8달러와 도서관의 열람권이 들어 있었으며, 코트 안쪽에는 양봉 사육에 관한 작은 책자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소음기를 달았군." 패트가 말했다. "9대 1로 걸어도 좋아. 이건 그 권총이야." "나는 그 내기 상대가 되기 싫네. 같을 게 뻔하니까." 나는 패트의 말에 동의했다. "뭘 좀 알아냈나, 마이크?" "아니. 만일 칼레키가 살아 있다면 그가 제일 의심스러운 인물이었겠지. 처음에는 매음이고, 이번에는 마약이니까. 이건 말이야, 보보가 아직도 칼레키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고. 하지만 이 친구는 그런 애길 나한테 하지 않았어. 나는 그 말을 믿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 친구는 너무 단순해서 사람을 속이는 짓은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물론 지금은 그게 확실치 않지만 말이야." 우리 두 사람은 잠시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길을 건너갔다. 그때 문득 어떤 일이 생각났다. "패트?" "응?" "칼레키가 자기 집에서 총에 맞아 죽을 뻔했다던 일 생각나나? 내가 한 짓이라고 떠들어대던 그 일 말야."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건가?" "그때도 같은 총이었어. 우리가 눈이 벌겋도록 찾고 있는 범인이 그 총으로 쏜 걸세. 이유가 뭘까? 뭐 생각나는 거 없나? 그 당시에도 칼레키는 무슨 일인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시내로 거처를 옮겼어. 그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그가 왜 저격당했을까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라고."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그 이유를 밝혀 줄 수 있는 사람이 죽어버렸다?" 나는 그에게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는 않아.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네. 범인 말이야. 그자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 자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나?"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야. 이 사건은 데일리한테 잠시 맡겨둬도 되고. 그런데 왜 그러나?" 나는 그의 팔을 잡고 내 차가 있는 곳까지 함께 걸어갔다. 그리고는 내 차를 타고 함께 내 아파트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우편배달부가 내 아파트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우편함을 열고 대학에서 내 앞으로 보낸 봉투를 꺼내어 겉봉을 찢었다. 내가 패트에게 짧은 시간 안에 그 시골 순경의 눈을 피해 타다 남은 그 증거물을 몰래 빼내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자, 그도 내가 한 행동이 당연한 것이었다고 인정해 주었다. 패트는 여러 곳으로 연락을 했다. 그는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은행에 도착하자 수위는 우리를 은행장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이때는 이미 재판소에서 통고가 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헐의 부하 이름이 적혀 있는 서류가 든 상자를 조사할 수 있도록 승낙을 받았다. 거기에는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조지 칼레키를 열두 번도 더 교수형을 처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그 녀석을 권총으로 쏘아죽인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 녀석은 정말 굉장한 악당이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 이상의 일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 새로운 죄상을 포함하여 조지 칼레키를 각각의 죄명으로 기소할 수 있는 증거물의 사진 복사, 편지,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기록, 기타 엄청난 자료들이 그 상자에는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조지가 간 곳은 이미 법정이 필요없는 곳이었다. 헐 케인스가 그를 한 패거리로 끌어들인 이상 설사 그가 케인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해도, 어차피 그가 갈 곳은 전기의자밖에 없었던 셈이다. 패트는 그 증거물들을 두 번씩 살펴본 다음, 그것들을 커다란 봉투에다 집어넣고 서명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물었다. "저 쓰레기들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 "다시 차근차근 조사해 봐야겠지. 설령 그 영수증이 현금으로 되어 있거나 뒤에 아무 서명이 돼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한번 조사해 볼 만한 가치는 있는 거니까.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여기에 오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는 게 낫겠지. 그런데 자네는 그 밖에 또 알아낸 거라도 있나?" 패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도 이제 곧 알게 될 걸세. 아무래도 자네한테 선수를 빼앗길 것 같아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네가 공명정대하게 나왔으니까 얘기를 해주기로 하겠네."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여기에는 몇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네. 이 사람들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면 얘기해 주게나." 패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헨리 스트라브하우스, 카멘 실비, 셀마 B 뒤발, 버지니아 R 레임스, 콘래드 스티븐스." 패트는 말을 마치자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스트라브하우스와 스티븐스는 주 형무소에서 1년간 징역살이를 한 놈들이야." 내가 말했다.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군. 뒤발이란 여자 이름은 신문의 사회면에서 한번 본 것 같기도 하네만." "아마 봤을 걸세. 아무튼 자네도 그리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내 얘기해 줌세. 이 사람들은 모두 시립진료소나 사립 새나토리움(요양소)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들이네. 마약중독으로 말이야." "거 참, 잘된 일이군."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건 어떻게 알아냈나?" "공중위생과에서 보고가 올라왔지." "음, 이들한테 그런 낌새가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런 게 신문에 안 났다는 게 좀 이상하군. 아, 알았네. 이제까지는 그 마약의 출처를 모르고 있었군 그래? 그게 어딘가?" 패트는 짓궂은 웃음을 띄웠다. "데일리가 알고 싶어하는 점이 바로 그거야.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까 말일세. 아무리 구속하겠다고 위협을 해도 소용이 없었지. 우리한테는 좀 고약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시의 상층부와 결탁하고 있어서 정보를 손에 넣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네. 그런데 이 편지가 손에 들어온 거야. 결국 물건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한테 알려지지도 않은, 머리가 좀 모자란 그 작은 남자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었던 거지." 나는 어렵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보 말이로군!" "맞았어. 틀림없이 그 친구였을 거야 -- 증명할 수도 있네. 만일 보보가 살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자들은 전보다 더 입을 열지 않으려 들 테지. 틀림없네." "빌어먹을!" 내가 중얼거렸다.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을 상대로 옥신각신할 수도 없고. 우리는 손이 묶여 있는 셈이구먼. 차렷 자세로 말야. 패트, 그게 틀림없어. 이자들이 모두 얼마나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 언뜻 보면 그 연결은 막연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네. 보보와 칼레키......헐과 칼레키......헐과 아일린......아일린과 잭. 그것은 용광로에 던져넣은 수많은 쇠조각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무슨 연쇄반응 같은 것이지. 잭이 행동을 개시하자 범인은 그를 쏘았네. 그러나 범인은 다른 무엇인가를 숨겨야만 했어. 그 이후로 계속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봐, 우리는 분명 어딘가에 다다른 거라고!" "농담하지 말게! 우리는 지금 우물 맨 밑바닥에 서 있을 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한테 맡겨두게, 패트. 지금 작은 빛이 보이고 있어. 몇 가지 일이 생각났네." "무슨 일이?" "아직은 아무 말도 않는 게 낫겠어. 뭐, 아주 사소한 거야. 그건 이번 사건 전체에 꼭 들어맞는 동기를 범인이 갖고 있다는 걸 나한테 가르쳐 주었을 뿐, 그밖에는 아직 아무 방향도 제시해 주지 않네. 그 정도로 사소한 것이야." "자네, 다시 나와 경쟁할 생각인가, 마이크?" "자네는 흰 연미복을 걸게나. 우리는 홈 스트레치에 거의 이르고 있는데, 불행히도 트럭이 진흙탕에 빠져 꼼짝도 못하고 있어. 차에다 채찍질을 해대는 대신 굳은 땅바닥 위를 고생스럽더라도 걸어가야 한다고."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네한테 질 것 같나, 패트?" "그럼, 자네는 뭘 걸겠나?" "비프스테이크가 나오는 저녁식사." "좋아. 걸지." 우리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는 택시를 타고 경찰서로 돌아갔고, 나는 내 아파트로 되돌아왔다. 바지를 벗으며 나는 지갑을 찾아보았지만 그것은 아무데도 없었다. 멋진 지갑이었는데. 게다가 지갑에는 200달러까지 들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잃어버린 것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바지를 입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갔다. 거기에도 지갑은 없었다. 나는 혹시 이발소에서 떨어뜨리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았지만, 이발 비용은 분명 주머니에 있었던 잔돈으로 지불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람. 나는 차로 되돌아와서 방향을 바꾼 다음 샬롯의 아파트가 있는 남쪽으로 차를 달렸다. 아파트 로비의 문이 그냥 열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곧장 샬롯의 집으로 올라갔다. 벨을 두 번이나 눌렀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누가 있기는 있었다. '스와니 강'을 부르는 노래소리가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문을 힘껏 두드리자 마침내 캐시가 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녀한테 물었다. "벨소리가 나지 않던가?" "안 났는데요, 해머 씨. 아마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어쨌든 안으로 들어오세요." 내가 들어가자 샬롯이 급히 방에서 나오며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얼룩진 가운에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어머나, 당신이었군요." 그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빨리 오셨군요. 마침 잘됐어요." 그녀는 내게 팔을 내밀며 키스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캐시가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입을 벌리고 있어서 그녀의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저리로 가, 캐시." 나는 빙긋이 웃었다. 마침내 캐시가 갔으므로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해주었다. 샬롯은 깊이 숨을 내쉬고는 내 품에 머리를 묻었다. "이번에는 오래 계실 수 있는 거죠?" "아니." "어머, 왜요? 지금 막 오셨잖아요?" "나는 지갑을 찾으러 온 거요." 나는 그녀와 소파 쪽으로 걸어가서 쿠션 위를 살펴보았다. 지갑이 눈에 띄었다. 고약한 놈의 지갑 같으니라고. 내가 잠자고 있는 동안 뒷주머니에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당신은 나한테 지갑을 훔쳤다고 야단을 치러 오신 거군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릴!" 나는 그녀의 금발머리에 입술을 댔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내가 얼룩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진을 현상하고 있었어요. 한번 보실래요?" 그녀는 나를 암실로 데려가더니 불을 껐다. 그러자 붉은 광선이 흘러나왔다. 샬롯은 현상액에 필름 몇 장을 집어넣었다. 몇 분이 지나자 의자에 앉아 팔을 금속으로 된 의자의 팔걸이에 얹고 있는, 긴장된 표정의 어떤 남자 얼굴이 인화되어 나왔다. 그녀는 사진을 한장 한장 머리 위로 들고 비춰 보았다. "누구요, 이 사람은?" "임상환자예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도록 하기 위해 헐 케인스가 시립병원의 자선병동에서 데려온 사람이죠." "그런데 이 남자의 얼굴이 좀 이상하군? 마치 죽을까 봐 겁이라도 잔뜩 집어먹은 사람 같잖소?" "이 환자는 일반적으로 기면상태(嗜眠狀態)라고 알고 있는 그런 상태에 있는 거예요. 사실 이런 환자에게는 휴식과 신뢰감을 주는 것 이외에는 다른 치료법이 없죠. 이 남자의 경우는 도벽에 의한 정신이상증세를 보이고 있었죠. 길거리에서 아사직전에 있었던 것을 시립병원에 수용시켰는데, 그때까지는 도벽에 의한 정신이상증세를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가 이 환자의 심층의식을 분석해 본 결과, 그는 노년에 이르러 자기가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려 필요한 것을 훔치지 않고서는 자기 소유를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나는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그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어요. 그에게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었고요. 그는 자기가 어떤 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극복해 냈어요. 지금은 건강하게 잘 지내죠." 나는 사진을 다시 선반에 얹어놓고 그곳을 대강 둘러보았다. 암실까지 갖추어 놓고 살다니, 정말 굉장한 생활인 게 분명하다.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아내를 데리고 살려면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만 할 테지. 샬롯은 내 생각을 읽은 게 분명했다. "우리가 결혼하면 이런 건 다 집어치우고, 사진은 모퉁이에 있는 약국에 맡기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우린 그런대로 잘 해나갈 테니까." 그녀는 내 등뒤로 손을 돌리며 매달렸다. 내가 워낙 힘껏 그녀에게 키스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 힘껏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팔짱을 낀 채 문까지 걸어나갔다. "오늘밤은 어때요, 마이크? 우리, 어디로 가지 않을래요?" "글쎄. 영화라도 보러 갈까?" "좋아요. 그렇게 해요."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나는 문 뒤에 있는 벨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제 이건 울리지 않는 거요?" "어머나,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발끝으로 양탄자를 가볍게 툭툭 찼다. "캐시가 또 여기서 진공청소기를 썼나 봐요. 언제나 이렇게 플러그를 뽑아놓는다니까." 나는 몸을 굽혀 그것을 다시 소켓에 꽂았다. "8시쯤 만납시다." 나오면서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내가 거의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다가 손으로 나에게 키스를 던지고는 문을 닫았다. 제 12 장 세탁소 주인은 내 코트에 난 총자국을 보더니 아연실색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어쩌면 가까운 시일 안에 단골 손님을 한 사람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 주인은 내게 제발 몸조심을 하라고 애원하다시피 말하며, 짜깁기는 다음 주까지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다른 옷 한 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전화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의자 등에 양복을 걸어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패트였다. "마이크, 보보 호퍼를 죽인 총알에 대한 보고가 지금 막 올라왔네." "그래?" 나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같은 것이네." "역시 그랬군, 패트. 그 밖에 다른 것은?" "그리고 칼레키의 권총도 여기에 보관하고 있네. 총알은 자네를 쏜 것 외에는 하나도 맞는 게 없었어. 권총 번호를 조사해 봤는데, 남부에서 팔린 권총이더군. 두 사람인가 세 사람인가의 손을 거쳐 전당포에 들어간 물건이지. 그리고는 조지 K 매스터스라는 이름의 남자 손으로 건너갔어." 그래서 조지가 그 권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진작 그 기록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칼레키라는 것은 중간 이름이거나 성쯤 되겠지. 나는 패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칼레키는 왜 하필 매스터스라는 이름을 사용한 걸까? 아마도 본명을 쓰면 아주 엣날에 범했던 범죄를 추궁당할 게 틀림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테지. 아무튼 우리가 은행의 귀중품 보관함에서 발견된 그 증거물에서 아무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문제는 미해결로 남게 되었을 터였다. 시체를 기소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식사를 끝내고 샤워를 한 다음 양복을 입고 있으려니까 전화벨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마너였다. 그녀는 만일 내 형편만 괜찮다면 내일 아침 일찍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았으므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아직도 상당히 쇠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외출을 도우는 일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꺼이 해주고 싶었다. 시골로 한번 드라이브를 가보는 것도 그녀한테는 좋겠지. 가엾게도 그녀에게는 무언가 기분전환이 될 만한 것이 필요했다. 단지 한 가지 걱정이라면 혹시나 그녀가 잭의 죽음을 잊기 위해 다시 마약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똑똑한 여자다. 아마 찾아보면 또 다른 길이 나타날 것이다. 언젠가 그녀가 훌륭한 남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게 되는 날, 잭은 단지 그녀의 기억 속에만 깊이 새겨진 사람으로 남게 될 테지. 그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길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인지도 모른다. 샬롯은 아파트 앞에서 나와 만났다. 내가 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마치 한 시간이나 기다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마이크." 그녀가 큰소리로 불렀다. "늦었어요, 당신. 벌써 5분이나 지났다고요. 무슨 일 때문에 늦었는지 빨리 다 털어놔요." "그렇게 너무 야단치지 말구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교통이 워낙 혼잡해서 그랬으니까." "그럴듯한 변명이로군요. 하지만 당신은 음란증이란 것이 어떤 거였더라, 하면서 그녀를 또 만나러 가려고 한 게 아니었나요? 맞죠?" 그녀는 사랑스러운 악마였다. "쓸데없는 소릴랑 말고 빨리 타기나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리를 못 잡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디로 갈 건데요?" "당신만 괜찮다면 좋은 추리영화나 보러 갈까 하는데. 수사를 하는 데 혹시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오." "좋아요. 그럼, 우리 맥더프로 가요." 우리는 밖에 1마일씩이나 자동차의 행렬이 줄지어 서 있지 않은 뒷골목의 작은 소극장 하나를 겨우 찾아내어 두 시간 반 가량이나 스위스 치즈 조각에 나 있는 구멍보다도 더 화려하게 사람 몸에 권총으로 구멍을 뚫어버리는 살인 얘기를 소재로 한 황당무계한 추리물과, 눈보라가 칠 때마다 연착되는 롱 아일랜드 철도보다도 더 꾸물대는 줄거리의 서부극을 보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마치 엉덩이 껍질이 다 벗겨진 느낌이었다. 샬롯이 샌드위치를 먹자고 해서 우리는 간이식당으로 들어가 토스트와 계란 반숙을 먹은 다음, 한잔하기 위해 술집으로 갔다. 나는 맥주를 주문했다. 그런데 샬롯까지 같은 것을 주문하기에 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괜찮으니까 좋아하는 걸로 주문해요. 돈은 있으니까."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정말 바보시군요. 나도 맥주를 잘 마시는 편이에요. 언제나 맥주만 마시는걸요." "그렇소? 거 참 다행이군. 하지만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소. 취미는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면서도 맥주 같은 걸 마시다니. 그러고 보면 당신이란 사람도 같이 살기에 그리 까다로운 편은 아닌 것 같소." "하지만 여차하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요." "그럴 필요는 없소. 나는 마누라한테까지 일을 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마누라는 집에 있어야만 해요. 어디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집에 말이오." 샬롯은 들고 있던 맥주를 내려놓더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 아직 나한테 프로포즈를 안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프로포즈도 안하고 내가 당신과 결혼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죠?"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입술로 가져갔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그녀는 웃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힘껏 얼굴을 파묻었다. "오, 마이크, 좋아요. 결혼하겠어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걸요." "나도 사랑하오, 아기 고양이님. 자, 마십시다. 그리고 내일 밤 그 쌍동이 집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우리 결혼을 발표하고 나중 계획을 세웁시다." "키스해 주세요." 불량배처럼 보이는 두 남자가 우리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람! 나는 시원스럽게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반지는 언제 주실래요?" 그녀는 궁금해 했다. "머지않아 곧 주겠소. 다음 주에 수표 몇 장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티파니에 있는 상점으로 가서 함께 고릅시다. 어떻소?" "멋져요, 마이크. 정말 멋져요. 나는 너무 행복해요." 우리는 그 맥주를 마시고 다시 한 잔 더 마신 다음 그곳을 나왔다. 그 두 불량배는 내가 지나가자, "어이." 하며 시비를 걸었다. 순간 나는 샬롯의 팔에서 손을 뗌과 동시에 두 녀석의 머리를 거머쥐고 호리병 두 개를 맞부딪치듯 서로 부딪쳐 주었다. 두 녀석 다 의자에서 껑충 뛰어올랐다.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할 때 바의 거울 속에 그들의 눈이 비쳤다. 마치 네 개의 유리구슬 같았다. 바텐더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으로 인사를 한 뒤 샬롯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등뒤에서 두 남자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젖은 걸레같이 뻗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경호원님." 그녀가 내 팔짱을 꼬옥 끼며 말했다. "제발 그만해 둬."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캐시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발끝으로 살그머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벨은 샬롯이 손으로 눌러 소리가 나지 않게 했지만, 우리가 움직일 때 나는 작은 소리에 문득 그녀의 코고는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이내 다시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녀가 잠시 몸을 뒤척였던 모양이다. 샬롯은 코트를 벗더니 불쑥 물었다. "뭘 좀 마시겠어요?" "아니." "그럼, 뭐 필요한 것이라도?" "당신이오." 다음 순간 그녀는 내 품안에서 나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방이 열정적으로 파도쳤다. 나는 가능한 한 꼬옥 그녀를 껴안았다. "말해 줘요, 마이크." "사랑하오." 그녀는 다시 나에게 키스를 했다. 나는 그녀를 떼어낸 다음 모자를 집어들었다. "이젠 그만 됐소, 달링." 내가 말했다. "나도 평범한 남자요. 그런 키스를 다시 한 번 더 하게 되면 결혼을 할 때까지 도저히 참아낼 자신이 없단 말이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나한테 다가왔지만, 나는 그녀를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있잖아요, 마이크?" "안돼." "우리 곧장 결혼해 버려요. 바로 내일이라도."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요염했던 것이다. "내일 당장은 곤란하더라도 곧 결혼할 수 있을 거요. 나 역시 그리 오래는 참을 수가 없으니까." 내가 문을 열 때 그녀는 다시 벨을 눌렀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를 해준 다음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날 밤 아무래도 나는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웰더가 이 얘기를 듣는다면 아마 당장 나한테 기왓장이라도 집어던지고 말 테지. 나는 그녀에게 이 모든 얘기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웬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명종이 6시를 알렸다. 나는 자명종의 버튼을 눌러 소리를 멈추게 한 뒤 일이나서 기지개를 켰다. 창문을 내다보니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 아름다운 날씨였다. 반쯤 남아 있는 맥주병이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걸 보고 나는 그걸 한 모금 마셨다. 아무 맛도 없이 그저 무미건조할 뿐이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나서 가운을 벗어 내팽개친 다음 뭐 먹을 거라도 없나 찬장을 뒤져 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트밀 상자에 쥐가 갉아먹은 자국이 나 있었기 때문에, 채소 상자에서 감자와 양파를 꺼내어 껍질을 벗긴 다음 기름을 친 프라이팬에 전부 넣고 볶았다. 그리고 그것이 익을 동안 커피를 끓였다. 감자를 기름에 볶긴 했지만, 그것은 늘상 먹던 음식과 마찬가지로 맛이 있었다. 아마 다음날 이맘때쯤이면 멋진 금발의 미인을 거느리고 식사를 할 수 있을 테지. 정말 그녀는 좋은 아내가 될 것이다. 마너에게 전화를 거니 그녀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8시까지 준비하고 있을 거니까 늦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나는 그녀에게 늦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뒤, 이번에는 샬롯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 게으름뱅이 아가씨." 나는 하품을 했다. "아침 이맘때쯤에는 늘 그렇게 기운이 없나 보군요, 당신은." "글쎄, 그런가 보오. 그런데 당신은 뭘 하고 있는 중이오?" "좀더 자려던 참이었어요. 어젯밤 당신이 나를 들뜨게 해놓고 가버렸기 때문에 채 세 시간도 못 잤다고요. 눈이 갈수록 말똥말똥해져서 그냥 누워만 있었죠."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런데, 당신, 벨레미 저택에는 언제 갈 거요?" "일이 빨리 끝나지 않는 한 역시 저녁때밖에 안될 것 같아요. 그래도 저녁 일찍, 적어도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갈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건 누가 하는 경기죠?" "잊어먹었어. 어쨌든 메어리와 에스터가 특별히 초청한 훌륭한 선수 두 사람이라더군. 경기가 시작되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되도록 빨리 오도록 해요." "알았어요, 달링." 그녀가 전화로 키스를 보내왔으므로 나도 전화를 끊기 전에 응답 키스를 보내 주었다. 벨더가 아직 사무실에 나와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베이컨을 치직거리며 굽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여보세요, 벨더? 마이크야." "어머나, 이렇게 일찍 웬일이세요?" "중요한 데이트가 있어서 말이야." "또 사건과 관계있는 건가요?" "으응......그렇지, 뭐.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만일 패트한테 연락이 오면 나는 벨레미 양 저택에 가 있다고 전해 줘. 전화번호는 그 친구도 알고 있어." 벨더는 처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행동에 조심해야 해요? 소장님이 안 계실 동안 무슨 주의할 일이라도?" "아니, 없어." "참고로 물어보겠는데요, 그곳에 며칠이나 계실 건가요?" "아마 월요일까지 있게 될 거야. 하지만 -- " "알았어요. 그럼, 다시 만나요, 마이크, 안녕." 나도 재빨리 안녕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 -- 벨더에게 샬롯 얘기를 해야만 하다니, 이 얼마나 께름칙한 일인가. 울지만 않아도 좋겠는데 말이야. 이게 무슨 꼴이람.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벨더는 아마 어딘가로 가버리고 말겠지. 만일 내 눈앞에 샬롯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녀와 가정을 꾸미게 되었을 텐데. 그 동안은 그녀와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에이, 뭐 잘되겠지. 내가 도착했을 때 마너는 옷을 입고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짐가방을 싸두었으므로 나는 그걸 차에 갖다 실었다. 그녀는 그다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 밑에는 아직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광대뼈가 홀쪽해져 있었다. 그녀는 이 하찮은 여행을 위해 예쁜 꽃무늬로 된 새 드레스를 장만했다. 밝은 푸른색의 울로 된 코트 밑으로 그 드레스는 그녀의 얼굴을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잭에 대해서는 얘기도 꺼내기 싫었기 때문에 우리는 날씨나 기타 쓸데없는 세상 이야기를 화제로 삼아 잡담을 했다. 내가 칼레키를 해치웠다는 사실이 신문을 통해 대문짝만하게 나갔을 텐데도 그녀는 굳이 그 얘기를 입에 담는 걸 피하고 있었다. 멋진 날씨였다. 교외의 도로에는 거의 인적이 드물었고, 우리는 평균 80 킬로미터 정도의 조심스런 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이날만은 간선도로를 순찰하고 있는 순찰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나와 야구를 하며 놀고 있는 빈터를 몇 군데나 지났다. 그러다가 어느 작은 오두막 옆을 지날 때 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윙크를 해주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괴롭게 했나 보다. 나는 슬그머니 화제를 오늘밤에 있을 테니스 경기 쪽으로 몰고 감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잊게 하려고 애썼다. 얼마 안 있어서 우리는 벨레미 저택의 소유지에 나 있는 드라이브웨이로 들어섰다. 나는 우리가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우리 앞에는 2다스는 될 듯싶은 다른 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쌍동이 자매 중 한 명이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겁쟁이 아저씨." 이렇게 얘기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녀가 언니인지 동생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오, 메어리." 미소를 띄우며 내가 말했다. 그녀는 끈이 없는 브래지어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그녀의 차림이 너무나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상상력에 의지해야 할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었다. 브래지어와 짧은 반바지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몸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택까지 이르는 도중 내내 그 다리를 나한테 비벼댔던 것이다. 이런 짓을 그만두게 해야겠군. 나는 마너의 짐을 메어리와 나 사이에 두었다. 그러자 그녀가 킥킥대며 웃었다. 저택 근처에서 그녀는 하녀에게 마너의 시중을 들도록 한 뒤 내 쪽으로 돌아섰다. "당신은 운동복을 갖고 오지 않으셨어요?" "아아, 그런데 말이오, 내가 열중할 수 있는 스포츠는 바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라서." "이런 딱한 분 같으니. 먼저 저쪽으로 가서 슬랙스(운동용 바지)를 입고 오세요. 집 뒤에서는 한창 골프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고, 또 여러 사람이 테니스 시합을 할 상대를 찾고 있다고요." "하지만 나는 스포츠맨이 아니라서 말이오." 메어리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나를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쫙 훑어보았다. "당신은 이제까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스포츠맨다운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이를 테면 어떤 종류의?"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침대 속의 스포츠맨으로서 말예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장난기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 옷을 가지러 자동차로 다시 되돌아갔다. 우리가 집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어떤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방의 한복판에는 네 기둥이 달린 대형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메어리는 내가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나에게 몸을 던지며 그녀는 입술을 벌렸다. 이거였군. 나는 이 여주인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자, 옷을 갈아입게 나가줘."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왜요?" "이것 봐." 내가 타이르듯 말했다. "숙녀 앞에서 벌거벗을 수는 없는 일이잖소?" "어머, 그래요? 언제부터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때는 어두웠잖소?" 내가 말했다. "더구나 그런 짓을 하기에 지금은 너무 일러." 나는 또다시 그 성적인 미소를 받았다. 그녀의 눈길은 자기 옷을 제발 벗겨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럼, 좋아요......바보 겁쟁이."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 목쉰 듯한 웃음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창문 밖에서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대기에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았다. 내 방 바로 밑에서 두 청년이 다른 네 사람의 응원을 받아가며 머리카락당기기 시합을 하고 있었다. 대체 이곳은 뭘하는 곳이람. 두 사람은 서로 치고 받고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자기 애인을 5월의 여왕으로 삼으려고 겨루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세면대에서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를 들고 와서 그들의 금발 위로 부어 버렸다. 그러자 그 시합은 그 즉시로 끝났다. 두 사람 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가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야유를 퍼부었다. 재미있는 개그였다. 메어리와는 아래층에서 만났다. 그녀는 가로대가 둘러쳐져 있는 포치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슬랙스와 운동 셔츠를 입고 나와 그녀를 불렀다. 마너도 우리와 합류하여 발끝에서 테니스 라켓을 흔들고 있었다. 메어리는 내 상대가 자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세 사람은 잔디밭을 지나 테니스 코트 쪽으로 갔다. 메어리는 줄곧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코트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녀의 복제(複製)가 경기를 하고 있던 그룹에서 나오더니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스터 벨레미였다. 그녀도 상당히 탐스런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를 금방 알아보고 굳게 악수를 나눴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냉담했고, 그리 다정스럽지는 않았다. 에스터는 메어리와 다르다고 샬롯이 말한 이유를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화가 난다거나 질투가 난다는 얘기는 아니다. 에스터에게도 따라다니는 놈팽이가 많았다. 나는 그들과도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돌아서자마자 잊고 말았다. 메어리는 싱글 경기의 상대로 나를 택해 빈 코트로 나를 데리고 갔다. 테니스가 내 특기가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금방 알아챘다. 10여 분이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내가 볼을 전부 담장 너머로 날려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볼들을 주워 상자에 담은 다음 라켓을 땅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벤치에서 땀을 닦고 있는 동안 메어리는 옆에 앉더니 거무스름하게 탄 다리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러길래 왜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해요, 마이크? 당신은 방에서가 훨씬 더 근사한데." 대단한 여자였다. "당신은 정말 앞뒤도 가리지 않는군. 메어리, 당신은 왜 언니처럼 얌전하지 못하지?" 그녀는 살짝 웃었다. "나한테도 언니와 비슷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죠." "어떤 면으로 말이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뻔뻔스럽기는 에스터도 마찬가지라고요. 처녀가 아니니까."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 메어리는 피식 웃으며 두 무릎을 껴안았다. "언니는 일기를 쓰고 있어요." "그럼, 당신 일기는 더 두껍겠군." 내가 말했다. "흐흥. 훨씬 더 두껍죠."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벤치에서 일으켰다. "자, 바로 안내해 줘." 우리는 포석이 깔려 있는 길을 지나 저택으로 되돌아온 다음, 한 쌍의 프랑스식 창문으로 들어갔다. 거울이 달린 떡갈나무 패널과, 골프 경기에서부터 스키의 점프 경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기에서 우승한 컵과 메달로 꽉 들어차 있는 기념실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바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확실히 활동적인 여자들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 알려지는 걸 싫어한다는 게 약간 이상할 뿐이었다. 그녀들이 결혼 상대자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하긴 맘에 차는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이제는 메어리도 당분간은 희망이 없다고 단념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흑인 바텐더에게 맡겨놓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던 것이다. 이 바텐더는 10미터나 되는 스탠드 끄트머리에 앉아서 산처럼 쌓여 있는 만화잡지를 읽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는 내가 잔을 비우면 마실 것을 따르기 위해 간신히 엉덩이나 일으킬 정도였다. 몇 번인가 손님이 바로 들어오긴 했지만 오래 있지는 않았다. 마너도 한번 오기는 했지만, 즐거운 듯 몇 마디를 떠들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 밖에도 몇몇 여자들이 이상한 얼굴로 왔다가는 바까지 쫓아온 남자친구들한테 이끌려 전부 다 도로 나가 버렸다. 내가 물을 퍼부었던 한 도련님이 와서 술을 조금 마셨지만, 친구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자 다른 친구들도 그에 가세해 그의 머리를 껴안으며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 이후로는 너무도 단조로운 분위기가 계속됐다. 샬롯만 여기에 있었어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메어리와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샬롯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메어리에게는 오로지 섹스뿐인 것이다. 물론 샬롯에게도 그렇지만 --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바텐더에게 들키지 않게 슬쩍 바를 빠져 나와 내 방을 찾아냈다. 그곳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늘 겨드랑이 밑에 차고 다니는 권총을 가볍게 두드려 본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제서야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술에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의식이 몽롱할 새도 없이 곧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 다음에 내가 안 것은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눈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내가 눈을 완전히 뜨기도 전에 샬롯은 키스를 하더니 내 머리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렸다. "고작 이게 당신 인사예요? 나는 당신이 두 팔을 벌리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려 줄 줄 알았는데." "오 -- 미인 아가씨." 내가 말했다. 나는 침대로 그녀를 끌어당겨 키스해 주었다. "몇 시요?" 그녀는 자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시 반이에요." "뭐라고! 이거 꼬박 하루를 자 버렸군." "그래, 잘 주무셨어요? 자, 옷을 똑바로 입고 우리 아래층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해요. 나는 마너를 만나고 싶어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세수를 한 다음 코트의 주름을 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메어리가 나를 보더니 신호를 보냈다. "오늘밤은 내 옆에 앉는 거예요." 그녀가 나한테 말했다.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나는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좌석표를 찾았다. 샬롯은 나와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만일 메어리가 식탁 밑으로 무릎을 비벼대지만 않았어도 이 쌍동이 자매에 대한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샬롯은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고, 마너가 그 옆자리에 있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가볍게 한잔하고 있는 동안 그녀들은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때로는 비밀스런 농담이라도 하고 있는 듯 킥킥 웃기도 했다. 나는 누구 아는 사람이 없을까 하고 식탁을 휘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하나 눈에 들어오기는 했다. 그 남자는 짙은 회색의 면양복을 입고 있는 키가 작고 바짝 마른 녀석이었다. 그는 마주앉은 건장한 체격의 여자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탁의 그쪽에서는 이야기가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나를 곁눈질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우연히 그가 잠시 동안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그는 그 단속이 있었던 날 밤 콜 하우스에 있었던 손님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내가 메어리를 쿡 찌르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던 그녀는 내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끝에 묘한 자세로 앉아 있는 저 사람은 누구요?" 포크로 그를 가리키면서 내가 물었다. 메어리는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 저 사람은 하몬 와일더라고, 우리 대리인이죠. 우리를 위해 우리 재산을 투자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왜요?" "아니, 그저 약간 마음에 걸려서.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만났던 적이 있을지도 몰라요. 주에서 손꼽는 형사사건 변호사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별로 떠들썩하지도 않은 일을 혼자서 맡게 된 이후로는 그 일을 그만두었지만요." 나는, "그래?" 하며 다시 식사로 되돌아왔다. 샬롯은 식탁 밑으로 내 발을 발끝으로 쿡쿡 찔렀다. 식탁 뒤로는 잔디가 달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 이제 완전히 밤이 된 것이다. 나는 저녁식사가 다 끝나기를 기다리는 게 지루했다. 메어리는 아주 은근하게 나를 유혹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샬롯이 불타는 듯한 시선을 메어리에게 던지고, 그녀에게 살짝 윙크를 하자 메어리가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걸 보았다. 그녀는 나와 샬롯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밤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어, 아저씨 --- 저 여자가 돌아간 다음에 말예요." 내가 그녀의 갈비뼈를 팔꿈치로 쿡 찌르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과일 한 개가 식탁 끝에 앉아 있는 남자의 의자로 굴러떨어지면서 식사가 끝났다. 이어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가운데 오늘밤 경기를 하기로 되어 있는 두 선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우유 컵으로 건배를 했다. 어떻게 겨우 샬롯 곁으로 갈 수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와 마너를 데리고 코트로 나왔다. 자동차가 점점 더 많이 밀려들고 있었다. 아마 이번 경기에 초대받은 이 근처 사람들일 것이다. 강한 조명이 낮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코트 바닥과, 내가 자고 있었던 오후 동안 만들어진 관람석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좌석을 잡느라 소란을 떠는 바람에 우리는 좌석을 잡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샬롯과 마너가 코트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잔디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으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 구경꾼들은 우리 뒤로 여섯 줄이나 늘어나 있었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짜 테니스 경기를 구경한 적이 없었지만, 웬지 나에게는 이 많은 사람들이 다 테니스 경기를 구경하는 게 좋아서 온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용 확성기에서 두 선수를 소개하고, 이어서 두 선수는 각기 자기 자리로 가 섰다. 마침내 경기가 시작됐다. 나는 경기 그 자체보다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원숭이들처럼 관람석에 앉아 있는 구경꾼들의 머리가 일제히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더 즐기고 있었다. 선수들은 정말 잘했다. 그들은 땀에 흠뻑 젖은 채 공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때때로 눈에 확 띄는 좋은 플레이라도 나올 성싶으면 구경꾼들은 박수를 보냈다. 높다란 의자에 앉은 주심이 스코어를 알려주고 있었다. 마너는 머리에 손을 대고 있었다. 마침내 세트 중간의 휴식시간이 되자 그녀는 나와 샬롯에게 클로크 룸(휴대품 보관소)으로 가서 아스피린 좀 먹고 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메어리가 마너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더니 다시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샬롯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랐으나, 그녀는 싫은 표정으로 살짝 웃었을 뿐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둔 채로 있었다. 메어리는 샬롯의 어깨를 살짝 쳤다. "잠시만 당신의 이분을 빌려도 될까요?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몇 있어서요." "물론 상관없어요." 명랑한 표정으로 샬롯은 살짝 윙크를 했다. 아마 속으로는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머지않아 샬롯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나 역시 메어리를 쫓아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저 샬롯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이다. 새로 자리를 잡아 세트 중간의 휴식시간 동안 쉬려고 오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우리는 그곳을 빠져 나왔다. 메어리는 내 옆구리를 팔로 끼더니 나무숲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어디 있소?" 내가 물었다. 그녀의 손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는 제발 그만둬요." 그녀가 대답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당신이 필요했단 말예요." "이봐, 메어리." 내가 설명했다. "이건 옳은 일이 아니오. 지난번 밤에 있었던 일은 잘못된 것이었어. 샬롯과 나는 약혼을 했소. 나는 당신과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는 몸이란 말이오. 이건 서로에게 나쁜 짓일 뿐이야." 그녀는 내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쑤셔넣었다. "누가 당신에게 결혼해 달라고 했나요? 내 말은 그게 아니에요. 그저 즐기자는 것뿐이라고요." 이런 여자는 어떻게 다뤄야 좋을까 ? "아니, 이봐." 내가 말했다. "당신은 좋은 여자야. 나도 당신을 아주 좋아하고 있고. 하지만 당신이란 여자는 내가 상대하기에 너무 복잡하다고." 순간 그녀는 내 팔을 놓았다. 우리들은 어느덧 나무 밑에 이르러 있었다. 주위는 온통 캄캄한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 윤곽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세상을 비추던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계속 그녀를 설득하여 나에게 매달리려는 생각을 포기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는 다만 그녀가 흥얼대는 노랫소리와 그녀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내가 워낙 지긋지긋해 하자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만일 당신을 놓아주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키스를 해주시겠어요?" 나는 약간 마음이 놓여서 후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하지만 단 한 번뿐이야." 나는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세상에, 이 귀여운 악녀는 어둠 속에서 어느새 옷을 전부 벗어버렸던 것이다. 그녀와의 키스는 용암과도 같았다. 나는 도저히 그녀를 밀쳐 떼낼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 순간부터는 그녀를 밀쳐내기가 싫었다. 그녀는 마치 그림자처럼 나한테 꼭 달라붙은 채 몸을 비틀며 나를 끌어당겼다. 10미터(약 90-)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관중의 환호성도 허무 속에 사라져 버리고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귓가에 울려퍼지는 신음소리뿐이었다. 우리가 되돌아왔을 때 경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묻은 루즈를 닦아내고, 양복의 먼지를 털었다. 언니를 발견한 메어리가 순순히 나를 해방시켜 주었으므로,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사람들의 틈을 빠져나와 샬롯을 찾았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남겨두고 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혼자 앉아 있는 게 심심했던지 그녀는 키가 큰 어떤 청년과 함께 코카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나를 벌컥 화나게 했다. 세상에. 조금 전에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나는 벌써 그녀를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큰소리로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디에 갔다 오신 거예요?" "싸우고 왔소."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 명예를 위해서 말이오."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싸우셨어요? 그런 건 물어보면 안되나요?" "어쨌든 해결은 잘하고 왔소. 약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오. 그런데 당신은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요?" "그럼요. 착하고 사랑스런 아내답게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외출하고 있는 동안에도 얌전히 집이나 지키고 있었죠."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테니스 경기가 끝나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저택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는 선수들에게 보내는 갈채소리를 지우기에 충분했다. 비명소리는 두세 번 더 어둔 밤에 울려퍼지더니 이윽고 그 소리는 작은 신음소리로 바뀌어졌다. 나는 샬롯의 손을 놓고 급히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흑인 바텐더가 시트처럼 창백한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그저 손으로 계단을 가리키기만 했으므로 나는 마구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첫번째 문이 클로크 룸 쪽으로 열려 있었고, 작은 홀 크기만한 방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하녀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마너가 있었다. 가슴에 뚜렷하게 총알자국이 난 채로. 그녀는 자기 몸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녀의 맥박을 짚어보았다. 이미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아래층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는 문을 닫으라고 흑인 남자한테 고함을 친 뒤 전화를 집어들고 수위를 불렀다. 나는 그에게 문을 닫고 아무도 내보내지 말라고 얘기한 다음, 수화기를 던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작업복 차림의 정원사같이 보이는 세 남자를 붙잡고 누구냐고 물었다. "정원사입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다. 또 한 사람은 벨레미 저택의 소유지에서 일하는 잡역부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의 조수였다. "여기에 총이 있소?"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에 산탄총이 여섯 자루 있고, 30-30(윈체스터)이 한 자루 있습니다." "그것들을 좀 가지고 와요." 내가 명령했다. "2층에서 살인이 벌어졌소. 범인은 이 저택의 정원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요. 총을 들고 이 근처 소유지를 감시하고 있다가 도망치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쏘아도 좋소. 알겠소?" 정원사가 뭐라고 투덜대려 하는 걸 보고 나는 그에게 배지를 보여 주었다. 그와 나머지 두 사람은 서재로 가서 곧 총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재빨리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람들이 저택 앞에 모여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손을 든 다음 조용히 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비명소리가 두세 번 일어나고 높은 목소리가 군데군데서 터져나왔다. 모두들 굉장히 당황해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손으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서도 여러분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주변은 도망치려는 사람은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총을 들고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현명하신 분이라면 경기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옆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알리바이는 성립하게 되지요.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자, 현관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정식으로 무슨 통고가 있을 테니까요." 그때 샬롯이 문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예요, 마이크?" "마너요. 이제 더 이상 그녀는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죽었으니까. 범인은 바로 코앞에서 나를 우롱하고 있소." "내가 도울 일은 없나요, 마이크?" "벨레미 자매를 좀 찾아줘요." 그녀가 그들을 찾으러 나가자 나는 다시 흑인 하인을 큰소리로 불렀다. 그는 덜덜 떨면서 내 곁으로 왔다. "여기에 누가 들어왔었소?" "아무도 못 봤습니다요, 나리. 여자분이 한 분 들어가는 건 보았습지요. 물론 그분이 나가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런데 그분이 2층에서 죽어 있었습지요." "계속 이곳에 있었나?" "그렇습니다요, 나리. 술을 마시러 오는 분이 없나 보고 있었습지요. 그리고는 바로 갔습니다." "뒷문은 어떤가?" "자물쇠로 채워두었습지요. 안으로 가는 길은 이곳뿐인데, 그 여자분 이외에는 아무도 오시지 않았습니다요. 그런데 그분은 죽어버리셨고요." "똑같은 얘기는 되풀이할 필요없어." 내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묻는 것에만 대답해. 단 1초 동안이라도 자리를 비운 적이 있나?" "아닙니다요. 거의 꼼짝않고 있었다니까요." "거의라고?" 그러자 그 검둥이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이번 살인과 무슨 관계라도 있다고 몰아세울까 봐 겁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 다 털어놓으라고." "딱 한 번 한잔했습지요. 맥주로요. 예. 그것뿐이었습니다요. 제발 벨레미 아가씨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제기랄." 내가 중얼거렸다. 비록 잠깐 동안이었다 해도 그 동안 살인범이 여기로 들어올 시간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얼마나 빨리 되돌아왔나? 아니, 잠깐. 다시 거기로 가서 맥주를 마셔 보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 수 있겠지." 내가 시간을 재고 있을 동안 그 검둥이는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15초 뒤에 그는 손에 병을 들고 되돌아왔다. "아까도 이렇게 빨리 돌아왔나? 잘 생각해 보라고. 맥주는 여기에서 마셨나, 아니면 저쪽에서 마셨나?" "여기에서 마셨습지요." 이렇게 명료하게 대답하며 그는 바닥 위에 놓여 있는 빈 병을 가리켰다. 나는 꼼짝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저택의 뒤쪽으로 달려나갔다. 그곳은 두 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쪽은 새로 증축된 부분이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프랑스식 창문을 거쳐 바와 뒷문으로 이어져 있는 길밖에 없었는데, 그렇지 않고는 다른 건물과 통하는 문밖에 없었다. 창문에는 전부 빗장이 내려져 있었다. 뒷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누어진 두 건물을 이어주는 유일한 문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었는데, 그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범인이 지나갔을 만한 문을 더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범인을 이 저택안 어딘가에서 생각보다 쉽게 붙잡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나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하녀는 이미 의식을 되찾았으므로, 나는 그녀를 부축하여 걸을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하고 숨쉬는 것도 힘들어 보여서 샬롯이 쌍동이 자매를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제일 윗계단에 잠시 그녀를 앉혀 주었다. 하녀는 심문에 대답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샬롯에게 가능한 한 빨리 패트 첸버스에게 연락을 해서, 그가 이쪽으로 오게 해달라고 큰소리로 부탁했다. 이곳의 경찰에게는 나중에 패트가 연락을 하겠지. 메어리와 에스터가 위로 올라와서 반쯤은 안아 나르듯이 하녀를 아래층에 있는 의자로 데리고 갔다. 나는 범행이 저질러진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아 버렸다. 지문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 상대는 결코 지문 같은 걸 남길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너는 청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늘밤은 코트를 입기에는 너무 따뜻한 날씨였던 것이다. 그녀는 전신을 비추는 거울 위로 넘어져서 몸이 반으로 꺾여 있었다. 사용된 총은 역시 45구경 권총. 그 범인의 권총이었다. 나는 몸을 숙이고 총알을 찾다가 양탄자 위에 뭔가가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얀 분말. 그 주위에는 누군가가 그 분말을 주워 담으려 했는지 양탄자의 털이 일어나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그 분말을 조금 주워 담았다. 그리고는 시체를 만져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이 정도 체온이라면 사후경직이 일어나려면 아직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테지. 마너의 손은 어찌나 꽉 쥐어져 있던지 내 손가락을 그 손 안으로 넣기조차 힘들었다. 그녀는 상처를 누르기 위해 코트를 꼭 쥐고 있었기 때문에 울로 된 천이 그녀의 손톱 안까지 파고 들어가 있었다. 몹시 괴로웠긴 해도 금방 숨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죽음은 자비로운 것이니까. 코트를 만져 보니 코트의 주름 사이에 45구경 총알이 있었다. 범인은 이곳에 있다. 나는 그 범인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가 마너를 죽인 이유는 아직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사건과는 아주 동떨어진 권외(圈外) 에 있지 않았던가. 동기. 동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야만 한 그 동기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일까? 범인이 뛰어들어 요절을 낸 피해자들은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고 있다. 제각기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잭. 그렇다. 그가 왜 살인사건에 말려들었는지 그 이유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너는 그렇지 않다. 보보를 보자. 그가 이 지옥 같은 그림 속의 한 등장인물이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가 죽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는 걸까? 마약. 그는 그것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는 그 소포를 어디에서 가져와서 누구에게 전해 주려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죽어 버렸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뜻에서 나는 방을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에스터 벨레미는 하녀를 안정시키기 위해 계단 바로 밑에 있는 의자에 그녀를 앉혀 두었다. 메어리는 자기가 마시기 위해 독한 위스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그녀에게 심한 타격을 준 모양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에스터가 훨씬 잘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았다. 샬롯은 차가운 물수건을 가지고 와서 하녀의 이마 위에 얹어 주었다. "이제는 이야기 좀 해도 되겠소?" 나는 샬롯에게 물었다. "예, 그럴 거예요. 하지만 아직도 흥분하고 있으니까 가능한 한 간단하게 물어보세요." 나는 하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기분은 괜찮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당신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렇소. 그런 다음에는 편히 누워 쉬도록 해요. 혹시 누가 들어오고 나갔는지 보지 못했소?" "아, 아뇨. 저, 저는 집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총소리는?" 역시 '아니오'였다. 나는 흑인 하인을 불렀다. "자넨 어떤가?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나?" "아뇨.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뎁쇼." 정말 두 사람 다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이번에도 역시 그 45구경 권총에 소음기가 달려 있었다는 게 된다. 그러나 만일 범인이 그걸 몸에 지니고 있었다면 내가 못 알아봤을 리가 없다. 그런 물건은 너무 커서 몸에 숨기기가 그리 쉽지 않은 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하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은 왜 2층으로 갔소?" "옷을 정리할 생각이었어요. 숙녀분들께서 함부로 침대 위에 옷을 벗어두셔서요. 그때였어요, 제가 시, 시체를 본 것은."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 또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그 방에 있는 물건에 손을 대지는 않았소?" "아뇨. 저는 그냥 기절해 버렸는걸요." "샬롯, 이제 이 아가씨를 침대로 데려가도 좋아요. 되도록이면 잠을 잘 수 있게 해주고.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 샬롯과 에스터가 하녀를 안고 반쯤은 끌다시피 침실로 데려갔다. 메어리 벨레미는 한 잔을 마시고 나서는 금방 다시 또 한 잔을 따랐다. 얼마 안 있으면 그녀는 제대로 몸도 못 가누게 될테지. 나는 옆에 서 있는 흑인에게 말했다. "나는 2층에 가 있겠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아무도 저택 안에 들여놓거나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돼. 알겠나? 그렇지 않으면 자네는 콩밥을 먹게 될 줄 알아." 그밖에 그와 할 얘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대답했지만, 나는 귓등으로 흘렸다. 그는 열쇠를 채우고 정면 현관문에 빗장을 걸었다. 범인은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한 출구는 정면 현관문밖에 없다. 다른 곳의 문은 전부 열쇠로 굳게 잠겨져 있다. 그러나 바텐더가 문에서 떨어져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은 예외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범인은 충분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다시 빠져나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따라서, 바텐더에게 들키지 않고는 집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저 검둥이가 누군가에게 뇌물을 받았다 해도 내가 그걸 못 알아챌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사실을 말했다고 인정해 줘도 좋겠지. 또, 범인은 그한테 들킴으로써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차라리 마너를 죽이듯 저 흑인도 깨끗이 처치해 버렸을 것이다. 계단 위에서 보니 현관 홀에는 한쪽이 열린 T자형 문이 교차되어 있었고, 그것은 각각 침실로 꾸며져 있었다. 나는 창문을 살펴보았다. 모두 열쇠로 잠겨 있었다. 나는 T자형의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서 저택 안의 방을 하나씩 조사해 가면서, 나는 권총을 쥐고 혹시 범인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 이곳 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범행이 저질러진 방은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살펴본 방이었다. 범인이 도망을 친 방은 바로 이 방이다. 창문이 너무도 손쉽게 열렸으므로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그 방에서 포석이 깔린 보도까지는 적어도 5미터는 충분히 될 성싶었다. 만일 그가 이 창문에서 뛰어내렸다면 아마 지금쯤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뛰어내리면 다리가 부러질 것은 뻔한 일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포석 위로 떨어지면 가장 먼저 다리가 부러져 나가는 법 아닌가. 건물 주변이나 창문 바로 밑에는 좁은 가로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대강 재어 보니 벽에서 약 20센티미터 가량이 튀어나와 있었고, 창문 양쪽으로는 먼지가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성냥불을 켜서 콘크리트 가로대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나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흔적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어쨌든 20 샌티밖에 안되는 콘크리트 위를 걷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한번 시험을 해보았다. 처음에는 벽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이어서 이번에는 벽 쪽으로 등을 댄 채 걸어 보았다. 그 어느 쪽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밑으로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이 위로 건너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뛰어난 운동선수뿐이다. 마치 고양이와 같은 습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 방안으로 되돌아와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홀로 건너왔다. 창문 양쪽 끝에서는 어느쪽에서나 땅바닥이 내려다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니 벽을 수리하는 데 사용됐던 비상 사다리가 창문에 걸쳐져 있는 게 보였다. 아, 이것을 이용했다면 멋지게 빠져나갈 수 있었겠지. 범인은 마너를 죽이고 창문에서 가로대로 나가 비상 사다리를 타고 도망을 친 것이다. 마침내 나는 곡예사를 상대하게 되었다. 아 -- 또다시 머리를 짜내야만 한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메어리한테서 술병을 빼앗은 다음, 난파선처럼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린 그녀를 부축하여 의자에 편하게 눕혔다. 그녀는 정말 엉망으로 취해 있었다. 그로부터 20분 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나는 흑인 하인에게 문을 열어 주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패트와 그의 부하가 군 경찰에 있는 두세 사람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마도 그는 자기의 관할구역 밖으로 수사를 넓히기 위해 어떻게 공안위원회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데 성공했겠지. 그런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서 내가 열심히 설명해 주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얘기가 끝나자 그는 시체 앞에 꿇어 앉았다. 군(郡) 의 검시관이 큰소리로 이 여자의 죽음을 선고하고 난 뒤 보고서를 썼다. "죽은 지 얼마나 됐나?" 패트가 물었다. 검시관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약 두 시간 정도 됐습니다. 하지만 날씨가 이렇게 따뜻하니 정확한 사망시간을 알아내기가 곤란합니다. 자세한 보고는 해부를 해본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두 시간이라면 대략 내 추측과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범행은 내가 메어리 벨레미와 함께 숲속에 있을 동안 저질러진 것이다. 패트가 나한테 물었다. "사람들은 여기에 모두 다 있나?" "그렇게 생각되네만, 만일을 위해 에스터한테서 손님 명단을 받아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걸세. 담이나 문에는 감시원을 세워 놓긴 했지만 말일세." "좋아. 그럼 아래층으로 내려가세." 패트는 저택 별관에 있는 큰 방으로 사람들을 전부 모았다. 정어리 통조림처럼 방안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에스터가 그에게 손님 명단을 건네 주자,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바닥에 앉았다. 형사들은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앉은 사람이 없는지 주의깊게 감시하고 있었다. 패트가, "하먼 와일더." 라고 부를 즈음에는 사람들의 약 반 정도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먼 와일더." 라고 불렀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내 친구는 벌써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패트는 전화 있는 데로 얼른 다가간 형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에 대한 지명수배가 내려지는 것이다. 여섯 명 정도 이름을 더 부르고 패트는, "찰스 셔먼." 하고 불렀다. 그는 이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나는 에스터 옆으로 다가갔다. "이 셔먼이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와일더 씨의 조수였어요. 경기가 계속될 동안에는 그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데 지금은 도망을 쳐버렸군." 내가 패트에게 이 얘기를 전해 주자 또 다른 형사가 순찰차와 분서에 연락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패트는 계속 명단을 읽어내려갔다. 그 명단을 다 읽었는데도 아직 30명 정도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온 구경꾼들이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저택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250명 이상이 된다는 얘기다. 패트는 형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명단을 나누어 준 다음 나한테도 몇 사람의 명단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하인 전부와 쌍동이 자매, 샬롯, 그리고 다른 사람들 중에서 열 명 정도가 할당되었다. 패트는 혼자서 나머지 구경꾼들을 맡았다. 그는 사람들의 명단을 할당하는 일을 마치고는 곧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고 헛기침을 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모두 일단은 살인혐의를 받게 됩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물론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담당형사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 여러분은 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개별심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사항은 알리바이로서, 경기가 펼쳐지는 동안 여러분은 누구와 같이 있었으며, 또 어디에 있었는가를 진술해 주시면 됩니다 -- 그는 자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15분 전에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자기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 아신다면 서슴지 말고 얘기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알리바이는 증명되는 겁니다. 오직 진실만을 말해 주십시오. 진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요. 만일 허위진술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체포할 것입니다. 내 얘기는 이것뿐입니다." 나는 내가 맡은 사람들을 모아 현관으로 데리고 갔다. 우선 가정부부터 처리해 나갔다. 하인들은 모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소재를 확인해 주었다. 열 사람 정도되는 모르는 얼굴들은 어떤 그룹과 함께 있었다는 게 확인되었으므로 그들의 진술도 믿을 수 있었다. 메어리는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제외됐다. 에스터는 그 시간에 거의 주심 곁에 있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나는 그들을 돌려보내고, 에스터는 아직도 취해 있는 메어리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마지막까지 샬롯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결국 현관에는 우리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자, 당신은 -- " 내가 물었다. "당신은 어디에 있었소?" "당신, 염두에 두고 계셨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버려둔 그곳에 있었어요." "제발 그렇게 화를 내지는 말아요. 나는 범인한테 한 방 먹었으니까." 내가 키스를 해주자 그녀가 말했다. "키스를 해주셨으니까 다 용서해 드리기로 하겠어요. 자, 내가 어디 있었는지 말씀드릴께요. 나는 어느 멋진 신사와 코카콜라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리고 또 어떤 나이가 지긋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이름은 모르겠어요. 명단에도 이름이 없었고요. 얼굴에 갈퀴 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죠." 나는 그가 기억이 났다. 나는 수첩에 '갈퀴 같은 수염'이라고 적어넣었다. 이름은 쓰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올 때 샬롯은 내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패트는 그의 부하가 일을 다 마치면 명단을 받아들고서, 모두 맞는지 표시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름 때문에 혼란을 빚었지만 곧 정리가 되었다. 우리는 실내로 들어가서 그것을 비교 검토했다.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일더와 셔먼이 도망쳐 버린 사실 역시 별 의미가 없었다 -- 그들은 알리바이가 있었던 것이다. 패트와 나는 어쩔 수 없이 재수없이 걸린 사람들을 하나하나 조사해 나갔다. 한숨을 돌리자 패트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의 이름과 주소록을 만들도록 부하에게 명령한 다음, 손님들한테는 조사를 할 경우 찾아가기 쉽게 가까운 곳에 머무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처사는 옳았다. 한꺼번에 이 많은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망없는 추적을 계속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모든 자동차가 일제히 떠나갔다. 패트는 범행장소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조처해 놓았으므로, 경관 한 사람을 시켜 손님들의 코트를 나누어 주도록 시켰다. 나는 샬롯과 2층으로 갔다. 경관이 그녀의 코트를 가져왔다. 그가 흰 여우털이 달린 그녀의 청색 코트를 건네 주었으므로, 나는 그걸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메어리는 아직 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작별인사도 못했다. 에스터는 아래층에 있는 현관문 앞에 서서 침착하게 나가는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상냥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녀와 악수를 하며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한 다음, 샬롯과 나는 그 저택을 떠났다. 그녀는 자동차 대신 기차로 에스터의 저택으로 왔으므로 나는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귀로에 올랐다. 우리는 서로 별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함정이다. 이번 사건은 잭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잭에서 끝난 것이다. 기어코 범인은 마너마저 해치우고 말았다. 미치광이 같은 짓거리다. 사건의 전체적인 형태가 다만 미치광이의 짓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기는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마너의 경우는 그 어느 쪽에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옆자리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걸 깨달았다. 샬롯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너를 좋아했으니까. 나는 팔을 돌려 그녀를 껴안았다. 이번 사건이 그녀에게는 마치 악몽처럼 여겨졌을 것은 뻔한 일이다. 내가 가는 길에는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와일더와 셔먼이 체포되면 무슨 해답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도망치는 법은 없으니까. 제3자. 문제에 대한 해답. 그 두 사람이 이번 사건에 숨어 있었던 제3자는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명수배. 이런 일은 경관들이 그 누구보다도 잘 해낸다.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만일 그 악당들이 도망을 치려고 한다면 그자들을 죽이기라도 해야 한다. 설령 내 손으로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해도 누구든 상관없다. 그렇게 하는 거다. 영광 같은 건 필요없다. 문제는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샬롯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을 때 나는 중간에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자정이 지나 있었다. 샬롯이 차 문을 열었다. "올라가실래요?" "오늘밤은 그만두겠소, 달링." 내가 말했다. "집에 가서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으니까." "알았어요. 그럼 작별 키스를 해주세요." 그녀가 얼굴을 내밀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아, 난 이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이번 사건을 끝내고 그녀와 결혼할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지겨워졌다. "내일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것 같소. 시간이 나는 대로 당신한테 전화를 하겠소." "오, 마이크." 그녀가 애원했다. "우리 만나요. 그렇지 않으면 화요일까지는 만날 수가 없게 된다고요." "왜, 월요일에는 무슨 일이 있소?" "에스터와 메어리가 시내로 되돌아온다고 하길래, 그들과 식사하기로 벌써 약속을 해버렸거든요. 에스터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어요. 메어리는 곧 회복될 거예요. 하지만 에스터는 그렇지 못해요. 당신은 여자가 그런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계시죠?" "알았소. 만일 내일 당신을 만날 수가 없으면 월요일에 전화를 하겠소. 화요일에 만납시다. 그때는 함께 반지를 사러 갈 수 있을 거요. 틀림없이." 이번에는 그녀에게 오랫동안 키스를 해주고, 그녀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이번 사건이 더 확대될까 봐 두려웠다. 지금 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포기해 버릴 것인가. 나는 차를 차고에 넣고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자버렸다. 제 13 장 일요일은 우울한 날이었다. 창문을 내리치는 빗줄기와 고막을 울리는 자명종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시계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도 시계를 맞춰두었던 나 자신의 얼빠진 행동에 욕설을 퍼부었다. 오늘은 샤워를 하거나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바지를 입으면서 먹을 것을 마구 먹어치웠다. 다 먹은 접시를 한쪽으로 쌓아놓으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수염이 거칠게 나 있는 얼굴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웬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행히 냉장고에 맥주가 들어 있었다. 나는 맥주 2쿼터를 꺼내고 식기 선반에서 컵을 꺼낸 다음, 만일을 위해 남겨두었던 담뱃갑을 의자 옆에 꺼내놓았다. 현관문을 열자 조간신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주 주의깊게 산더미 같은 신문기사 속에서 재미있을 만한 것만 골라낸 다음, 뉴스 같은 건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이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라디오를 틀었다. 그리고 나서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았다. 재떨이란 재떨이는 모두 넘쳐날 정도로 온통 담배꽁초투성이였다. 나를 도와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싶었다. 때로는 의자에 몸을 내던지고 손으로 머리를 감싼 다음 생각에 잠겨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하든 결론은 늘 같은 것이었다. 이를 테면 골프에서의 스타이미드(자기 공과 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상대방의 공)와 같다고나 할까. 빌어먹을. 뭔가가 자꾸만 도망을 가려 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불현듯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느낌이 와 닿았던 것이다. 마음속을 더듬어 내려가다 보면 사소한 일이 소리를 치며 심하게 저항을 하지만, 좀더 깊숙이 내려가면 갈수록 그것이 도망치려는 그 무엇인가를 막으려고 방벽을 점점 더 두껍게 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직감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그것도 아주 하찮기 이를 데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과연 해답이 될 수 있는 걸까? 아무튼 거기에는 나를 끝까지 괴롭혀 대는 뭔가가 있긴 있었다. 나는 계속 맥주를 마셨다. 틀려, 틀려, 틀려......틀려......틀려......틀려......틀려. 그 해답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람의 마음이란 건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지나치게 초조해 하다 보면 하나의 사소한 사실이 지식의 미로 속으로 사라져 가버리고 마니. 왜 그래야만 하는가? 지긋지긋하지만 언제나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그 '왜'라는 의문.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거기에도 늘 이유는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풀어야 하는 걸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통해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나는 그걸 잊어 보려고 애도 써보았지만,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패배의 느낌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나는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저 마시고 먹고 할 뿐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나는 불을 켜고 다시 술을 마셨다. 몇 시간, 몇 분, 몇 초가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싸울 뿐이고 결과는 또다시 패배였다. 그러나 또다시 나는 대들었다. 한 가지 사실. 그게 뭐였더라? 뭐였더라 ? 마침내 냉장고가 텅 비고 나는 피로에 지쳐 침대 위로 쓰러졌다. 나는 결국 그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날 밤 내내 나는 범인이 나에게 조소를 퍼붓는 꿈에 시달려야 했다. 범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잡기 위해 45구경 권총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가로막혀 있는 두꺼운 유리벽을 깨뜨리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으면, 범인은 그 건너편에서 조롱이라도 하듯 잭이나 마너 기타 여러 사람들을 쇠사슬로 엮어 맸다. 범인은 아무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아우성을 치면서 큰소리로 온갖 욕설을 다 퍼부어도 그는 그저 악마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유리벽은 깨뜨려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 벽을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바람에 나는 눈을 떴다. 이빨을 닦았지만 그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창문을 내다보았다. 월요일은 어제보다 더 끔찍했다. 빗물이 양동이에 하나 가득 고여 있었다. 더 이상 목적이라는 홀의 주변만을 배회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세수를 하고 옷을 입은 다음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때가 12시였다. 식사를 마친 것이 1시였고, 그리고 나서는 바로 들어가서 하이볼을 차례로 주문했다. 그리고 나서 시계를 보니 벌써 거의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였다. 내 손에 어떤 봉투 하나가 만져졌다. 제기랄.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나는 바텐더에게 이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약국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퉁이에 있다고 대답했다. 약국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웠지만 나는 그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약사에게 그 봉투를 건네 주며, 내가 모르는 이 물질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분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마지못해 그 봉투를 받았다. 그는 봉투 속의 물질을 하얀 종이 위에 쏟더니 그것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나왔다. 그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봉투를 다시 나한테 건네 주었다. 봉투 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헤로인. 나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보았다. 거기에서 내가 본 것은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만 같은 내 온몸의 혈맥이었다. 나는 내 눈이 크게 뜨여지는 것을 보았다. 거울. 그 한마디. 나는 봉투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다음 약사한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몸속에서 무엇인가가 불끈 솟아오르며 열기와 냉기가 일시에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 만일 내 목구멍이 이렇게 굳어버리지만 않았어도 나는 환호를 터뜨렸을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알았다. 더 이상 한시라도 낭비해서는 안된다.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 일이었다. 행복하다.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내가 비록 이번 사건의 '동기'를 밝혀내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옳지 않았다. 어쨌든 결국 나는 패트를 이기고야 말았다. 그는 아직 그 '동기'를 모르고 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인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워 버리자, 나는 그 꽁초를 도로의 하수구 속으로 던져 버린 다음 곧장 오른쪽으로 돌아 아파트로 향했다. 누군가가 로비의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쉽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도 없었다. 시간은 충분했던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이번 사건의 피날레가 어떻게 장식될 것인가를 상상해 보았다. 문은 열쇠로 잠겨져 있었지만, 그것은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다. 그 문은 두 번쯤 몸으로 밀면 쉽게 열 수 있었다. 방안에는 -- 아무도 없는 집 특유의 기묘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굳이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 집의 구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이 집의 가구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두 개의 벽 쪽으로 서로 마주보게 놓여 있는 튼튼해 보이는 접대용 소파로 다가가 그 위에 앉았다. 고무나무가 심어져 있는 화분이 소파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잎이 내 목에 닿았다. 나는 그 잎을 옆으로 치운 뒤 쿠션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그리고 가죽 케이스에서 45구경을 꺼내어 안정장치를 풀었다. 이제는 범인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네, 잭. 그랬어. 결국 그렇게 된 일이었다고. 여기까지 이르는 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겨우 도착했네. 이제까지의 범행들이 누구의 짓이었는지 나는 지금 알고 있다네.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조금 이상한 일이네만. 그렇지 않나? 모든 상황은 거꾸로 뒤바뀌어져 있었던 걸세. 이 실수를 알아차리기 전만 해도 나는 전혀 엉뚱한 사람의 뒤만 쫓아다녔던 거야. 그것 역시 모두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었네. 그 실수들은 모두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범인들과 관계가 있는 것들이지. 그들은 계획을 세우지.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우리가 몇십 명 몇백 명씩 달려들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동안 범인들은 모든 각도에서 이리 재고 저리 재며 머리를 쓰네. 우리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은 사실일세.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결국 누군가는 논리적인 해결방법과 만나는 법이지. 하지만 이번만은 논리적인 게 아니었어. 다만 요행이었을 뿐이지. 자네, 내가 한 약속을 기억하나? 나는 범인을 쏘아죽이고야 말 걸세, 잭. 자네가 맞았던 복부 바로 그곳을 겨누고 말일세. 누구든 그가 저녁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 금방 알 수 있는 그곳을 겨눌 걸세. 물론 범인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금방 죽지는 않을 걸세. 적어도 몇 분은 걸리겠지. 범인이 누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난 그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네, 잭. 전기의자도 교수형도 아닌, 복부를 향해 심장으로부터는 호흡을, 육체로부터는 생명을 빼앗는 단 한 발로. 피는 그리 많이 흐르지 않겠지만 나는 범인이 내 발 밑에서 죽어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고, 그리하여 자네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할 걸세. 범인은 그런 식으로 죽어 마땅하네. 추악한 모습으로 괴로워하면서 말일세. 작은 출구조차 없는 방안에서 소음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45구경 한 발 외에는 이번 사건의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그렇네, 잭.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나 ? 죽음은 늘 그렇게 찾아오는 법인데. 자네가 죽음을 받아들였듯이 범인 역시 그래야 하는 걸세. 나는 그게 누구의 짓인지 알고 있네. 얼마 안 있으면 그 범인은 여기로 걸어들어와서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걸세. 범인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또다시 범행을 저지르려 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걸세. 나는 상대의 모든 수법을 다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지금 나는 손에 권총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셈이지. 그를 죽이기 전에 나는 우선 그가 모든 걸 다 털어놓도록 할 생각이네 --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다 고백시키는 거지. 그건 내 추리가 정확했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절대 필요한 것이네. 어쩌면 그것은 범인이 나에게 대들 기회를 허락해 주는 꼴이 될지도 모르지.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말일세. 나는 워낙 악을 증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총을 쏘는 손도 빠르네. 세상 녀석들이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지. 그건 곧 범인이 나를 재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네. 그렇네, 잭. 차츰 끝이 가까워지고 있네. 나는 기다리고 있네. 지금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걸세. 문이 열렸다. 불이 켜졌다. 샬롯이 나를 볼 수 있도록 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거울 앞에서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는 불쑥 튀어나와 있는 내 발을 발견했다. 비록 화장으로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네, 잭. 샬롯이었네. 그 아름다운 샬롯이었어. 사랑스러운 샬롯, 개를 사랑하고 어린 아기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는 걸 좋아하던 샬롯이었네. 내가 끌어안고 젖은 그 입술에 그토록 입맞추고 싶어하던 바로 그 샬롯이었네.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명력으로 부드러운 비로드처럼 다가오는 그런 육체를 가진 샬롯이라네. 샬롯, 그녀가 바로 범인이었던 걸세.) 그녀는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 어색한 미소가 아니었는데도 웬지 나에게는 그 미소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내가 들고 있는 45구경은 그녀의 위(謂)를 똑바로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상냥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를 만난 것이 기뻐 못 견디겠다는 듯 환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의 그 태도는 차라리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 마이크, 달링, 나의 달링, 이렇게 당신을 만나다니 정말 기뻐요. 당신이 나와 약속을 해놓고도 전화 한 통 해주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 줄 아세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 들어와 계신 거예요? 오, 저런, 캐시가 또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갔군요. 그녀는 오늘밤 여기 없거든요." 샬롯은 내게로 다가왔다. "제발 부탁이에요, 마이크. 제발 여기에서만은 그런 끔찍한 총 같은 건 닦지 마세요. 무서우니까요." "그럴 거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녀가 약간 얼굴을 찡그리자 주름살이 약간 졌다. 그녀의 눈길조차 무슨 수수께끼처럼 여겨졌다. 만일 나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아, 정말 이 얼마나 멋진 연기인가? 이 세상에 그녀 같은 여자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녀는 혼자서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또 모든 등장인물의 역할을 다 해냈다. 호흡은 정확했으며, 모든 동작 하나하나, 표정, 언어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보여 준 힘과 성격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녀는 나로 하여금 자기를 믿도록 하고 내 마음속의 의심을 몰아내 버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소, 샬롯. 나는 이미 다 알아버렸소."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드디어 공포가 엄습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잭에게 약속한 말을 떠올렸을 게 분명했다. 하긴 잊을 수가 없었을 테지. 그건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니까. 이 마이크 해머가 그 약속을 저버릴 리가 없다. 그 약속은 내 손으로 범인을 죽이겠다는 것이었으며, 그녀는 바로 그 범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반드시 범인의 복부를 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탁자로 다가가서 상자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확실한 손놀림으로 불을 붙였다. 이것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쫓고 있을 때면 하는 동작이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권총은 단 한 순간도 그녀한테서 떨어지는 일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틀렸어." 내가 말했다. "샬롯, 나에게 말을 하게 해줘. 내가 이 사실을 알기까지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은 알아내고야 말았소. 지금이 어제라면 난 이렇게 하는 게 두려웠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오. 나는 너무 기쁘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오. 우리, 맨 나중에 있었던 살인사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때까지의 살인사건들은 공통점이 거의 없었소. 그 살인들이 너무나 냉혹하게 저질러졌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살인편집광이나 폭력배, 또는 제3자의 소행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당신에겐 행운이 따르고 있었지. 그 살인사건들은 당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였고, 그저 마구 뒤얽혀 있는 것처럼만 보였으니까. 그것은 한 사건에서 또 다른 사건으로 옮겨 갔소. 그러나 희생자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동기를 갖고 있었던 거요. 다만 우리가 그것을 놓쳤을 뿐이오. 잭은 경관이었지. 사람에 따라 이유 없이 경관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소. 그런데 그 경관이 자기에게 접근해 오는 경우에는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 아니겠소? 그러나 잭은 자기가 하고 있는 수사가 어느쪽으로 진전되어 가고 있는 건지 자신도 모르고 있었소. 적어도 당신이 그의 복부에 총알을 박기 전까지는 말이오. 그렇지 않소?" 그녀는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솟아나와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비통하면서도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 말을 가로막고 내 말이 틀렸다고 --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우쳐 주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애원하고 구걸하며, 또한 탄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 일을 시작한 사람은 헐과 당신이었소. 아니, 당신 혼자서였지. 당신의 직업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짓을 하도록 부추긴 셈이 됐소. 당신은 많은 돈을 벌고 싶었소. 그래서 단순히 사치스러운 삶이 아닌, 부와 권력을 휘두르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거요. 당신은 수없이 많이 남자들의 허약함을 통해 그들의 약점을 보아 왔소. 그것이 당신에게는 역효과를 낸 거요. 결국 당신은 여자의 사회적 본능 -- 다시 말해 남자한테 의지하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말았소. 당신은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소. 그래서 더욱더 많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사업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오. 당신이 그 사업으로 인해 체포될 염려는 없었지만, 그것은 야비하기 그지없는 사업이었소. 가장 비열하고 천박한 수법을 동원해서 -- 대부분이 그랬지." (그녀의 눈길 속에는 비애와 더불어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비로소 그게 나타났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마치 순교자처럼 아름다움과 믿음, 신뢰를 그 늘씬한 온몸으로 풍기며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녀가 머리를 약간 움직임으로써 터져나오려는 오열을 간신히 참고 있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병사와도 같았다. 그녀의 복부는 스커트를 졸라맨 벨트 때문에 평평해 보였다. 그녀는 팔을 양쪽으로 축 늘어뜨렸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나를 안고 싶어하며, 그녀의 입술은 키스로 나를 침묵시키고 싶어했다. 나타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만둘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랬다가는 나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진찰을 받는 사람들은 대체로 부자에다 거만한 사람들이었소. 당신은 재능과 미모,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런 사람들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었소. 그렇소. 당신은 그들을 진찰하고, 그들이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 주었소 -- 마약을 이용해서 말이오. 헤로인이었소. 당신이 처방해 준 그 처방약을 그들은 아무 의심 없이 사용했소 -- 그리고는 그들은 습관성 마약복용자가 되었고, 당신은 그 약의 유일한 공급자가 되었소.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당신에게 막대한 돈을 주어야만 했소. 아주 교묘한 수법이었지. 소름끼칠 정도로 교묘한 당신은 의사로서 진료소를 통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가 있었소. 당신의 마약배달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가면 그것도 차차 알 수 있게 될 거요. 그런데 당신은 헐 케인스를 만난 거요. 만남 자체가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비롯되었소. 내가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그것은 너무나도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었으니까 말이오. 당신은 그의 진짜 직업에 대해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았었소.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헐을 상대로 최면요법을 시험해 봤던 거요. 그렇지 않소? 그는 바보였기 때문에 거기에 응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서는 자기 선생의 제의를 싫다고 할 수도 없었을 거요. 어쨌든 그는 최면상태로 들어갔고, 당신은 별 뜻 없이 그의 인생의 모든 추악한 면을 밖으로 이끌어냈소. 그때 당신은 그 남자를 당신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그가 최면에서 깨어나자 당신은 그에게 당신이 알아낸 사실을 밝히면서 당신의 계획에 그가 동참해 줄 것을 요구했소. 그러나 그런 당신의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소. 헐은 단순한 대학생이 아니었던 거요. 그는 어엿한 성인이었소. 이미 성숙할 대로 성숙해서 스스로 계획을 꾸미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어른이었던 거요 -- 그는 단번에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당신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꿰뚫어본 것이오. 당신이 거기에서 얻은 거라고는 막다른 골목길뿐이었소. 당신 책꽂이에 꽂혀 있었던 그 책을 기억하시오?-- <정신 장애의 최면요법> 말이오. 그 책에는 당신이 그걸 얼마나 많이 읽었던지 새까맣게 손때가 묻었더군. 나는 물론 당신이 그 방면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오. (그녀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그녀가 무엇을 할 생각인지를 알아채자 나는 그만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옆구리로 손을 돌려 피부에 착 달라붙어 있는 옷을 손으로 누르며 그 손을 서서히 유방 밑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유방을 마치 술잔처럼 받쳐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 단추가 열리기 시작했다 -- 하나씩 하나씩.) 당신과 헐은 서로서로에게서 도망갈 방법을 궁리하면서도 굳게 맺어져 있었소. 하지만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소. 바로 그때 잭이 나타난 거요. 그는 똑똑할 뿐만 아니라 보는 눈이 빠르고 정확했지. 그는 분명 작은 문제에서 헐을 도와 주긴 했지만, 그러던 가운데 우연히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소. 그래서 그는 헐의 일을 도와 주는 척하면서 그 동안 계속 헐의 뒷조사를 해보았던 거요. 마침내 잭은 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냈소. 우연히 아일린을 만났는데, 그녀가 그것을 확인해 준 거요. 잭은 그녀의 입을 통해 그 쇼란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헐이 그런 추악한 일을 하고 있는 우두머리라는 것도 눈치챘소. 그래서 그는 그 콜 하우스에 가면 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요. 이야기를 조금 앞으로 돌려봅시다. 그 주(週)에 잭은 무슨 일인가로 당신과 만나고 싶어했소. 당신은 자신의 입으로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소. 물론 잭은 당신을 의심하고 있지 않았소. 오히려 그는 당신이 대학이나 임상강의를 통해 헐을 잘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헐을 좀 단속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을 거요. 그러나 그 파티가 열리던 날 밤, 당신은 잭이 갖고 있던 그 연보를 보고 그가 왜 그 연보를 갖고 있는지 눈치챘소. 당신은 만일 잭이 헐의 정체를 밝혀내게 되면 헐이 당신까지 끌어들여 당신의 정체마저 폭로할까 봐 겁이 났던 거요. 그래도 어쨌든 집으로는 돌아왔소. 그리고 하녀가 잠든 것을 틈타 문 뒤의 벨을 간단히 벗겨낸 다음 살그머니 다시 밖으로 나왔소. 그리고는 어떻게 했겠소? 아마 당신은 파티에서 돌아오기 전에 잭의 방 열쇠를 훔쳐두었을 테지? 틀림없이 그랬을 거요. 아무튼 당신은 그의 침실로 들어가 그와 만났소. 그리고는 그를 쏘고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소. 그가 자기 권총 쪽으로 다가가려고 애쓸 동안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남자의 심리에 대해 연구하며, 그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의자를 조금씩 뒤로 끌어당겼소. 그리고 당신은 집으로 돌아왔지. 그렇지 않소? 아니, 대답은 필요없소. 그밖에 다른 방법이란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오. (이제 단추는 전부 열려 있었다. 천천히, 더할 나위 없이 천천히 그녀는 스커트 속에서 블라우스를 끄집어냈다. 비단이 울에 닿아서 나는 아주 조그맣게 사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커프스의 단추가 열리고 -- 그녀는 어깨를 움츠려 블라우스를 벗은 다음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어깨, 숨겨진 근육의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선이 몸을 아름답게 감싸고 있었다. 흥분 때문인지 목의 아름다운 곡선이 잔잔하게 파도치고 있었다. 탄탄하면서도 하얀 두 유방은 부드러웠지만 도발적으로 아주 팽팽하게 솟아 있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젊은데다가 우아하며, 또한 자극적이기까지 했다. 금발머리가 반짝이며 흐르는 물처럼 등으로 굽이쳐 내릴 때까지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당신이 잭의 아파트에서 가져온 그 연보에는 아일린의 기록이 있었소. 그녀의 사진 한 장이 헐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던 거요. 앞의 살인만으로 다 끝난 게 아님을 깨달은 당신은 또다시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앞의 살인을 은폐하려고 했소. 당신은 헐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다 이야기해 주고 그를 겁주었소. 그리고는 그에게 가서 아일린을 협박하라고 시킨 다음, 그의 뒤를 밟았던 거요. 쇼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당신은 다시 그곳에서 살인을 저질러야만 했고, 그 시체들은 헐을 대신해 그 콜 하우스를 계속 경영해 나갈 심산인 신디케이트의 또 다른 조직원이 경찰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잘 처리해 버릴 거라고 생각했소. 당신의 판단은 거기까지는 옳았소. 만일 우리가 그렇게까지 빨리 현장에 들이닥치지만 않았어도 틀림없이 누군가가 그 시체들을 감쪽같이 처리해 버렸을 테니까. 당신은 우리가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마담의 뒤를 따라갔소. 물론 마담은 까맣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 그렇지 않소?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았소. 행운의 여신은 또다시 당신을 도와 주었던 거요. 패트도 나도 당신의 그날 밤 알리바이에 대해서는 물어볼 생각도 못했지. 물론 설사 물어봤다고 해도 당신은 그 달콤하고 사람의 간을 녹일 듯한 말로 우리를 속였겠지만 말이오. 조지 칼레키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오. 그렇지 않소? 그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소. 어느 날 헐이 술에 잔뜩 취해 그 얘기를 그에게 다 털어놓았겠지. 그가 파티가 열리던 그날 밤 화가 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요. 그는 걱정이 되다 못해 헐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지. 헐이 조지에게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놨다고 당신한테 얘기했기 때문에 당신은 가까이서 그를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말았소. 그건 당신의 유일한 실패였소. 그 사건 이후 그는 거처를 시내로 옮겨 경찰의 엄중한 보호를 받았지만, 경찰한테 그 이유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었소. 당신은 그 녀석이 그렇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소? 천만의 말씀이지. 그래서 당신은 계속 안전할 수가 있었소. 어쨌든 그는 나까지 덤으로 죽여 범인이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기 전에 먼저 자기가 범인을 궁지에 몰어넣으려 했던 거요. 헐이 죽은 뒤, 우리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조지는 권총으로 나를 쏘았소. 그러나 사실 그가 쏜 것은 내가 아니었소. 그가 노린 사람은 당신이었으니까. 그는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내 뒤를 미행했소. 그는 자기가 먼저 당신을 죽이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반대로 자기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걸 깨닫고 있었던 거요. 저격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지는 멀리 도망을 치기로 결심했소. 하지만 그전에 그는 헐이 모아놓은 그의 범죄에 대한 증거물들을 없애야만 했소. 그렇지 않고 만에 하나 그 증거물들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그가 전기의자로 보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소. 정말 못나고 겁많은 녀석이었지. 나는 처음부터 놈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있었소. 그 녀석이 나를 향해 총을 쏘지만 않았어도 나 역시 그를 죽이기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요. 그리고 그는 모든 걸 다 자백했을 테지. 차라리 그 녀석이 모든 걸 다 털어놓도록 살려둘 것을. 그때도 역시 행운의 여신은 당신 편이었던 거요. (그녀의 손가락은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지퍼와 단추. 그리고 나니 스커트가 다리 있는 곳까지 흘러내렸다. 스커트에서 발을 빼지도 않은 채 그녀는 이번에는 속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가 워낙 천천히 속옷을 벗었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분위기가 내게는 이국적인 풍으로 느껴졌다. 속옷이 발 밑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발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밀쳤다. 길고 우아하며 햇볕에 그을린 두 다리. 온갖 곡선과 힘을 지니고 있는 다리. 그녀는 내가 그 이상 보아서는 안될 한 폭의 그림을 내 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었다. 굳이 스타킹으로 꾸밀 필요가 없는 황금빛 다리. 평평한 복부로부터 시작되어 현실보다는 상상의 세계에 더 잘 어울릴 듯한, 허벅지에 둥글게 이어져 있는 우아하고 요염한 다리. 아름답고 미끈한 종아리.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도 훨씬 무게 있고 아름다우며 정열적인 다리. 이제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투명한 팬티 한 장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블론드였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보보 호퍼에 대해서요. 그의 죽음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었소. 순전히 우연이었지. 한때 그가 조지 칼레키 밑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그런 우연의 일치를 만들어낸 거나 다름없었소. 보보에게는 그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일이 있었소. 그는 근처에서 간단한 심부름이나 편지를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소. 그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위해 그런 일을 하는 단순하기 이를데없는 친구였지만, 그래도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친구였소.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고, 취미로 벌을 키우고 있었던 친구였단 말이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는 당신이 부탁한 물건을 갖고 가다가 그만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소 -- 당신은 그에게는 그게 처방약이라고 말했겠지.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무서워서 약국에 가서 그와 똑같은 처방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소. 그런데 사실은 그게 당신의 고객에게 보내는 헤로인이었던 거요. 환자는 당신한테 전화로 아직 심부름꾼이 오지 않았다고 연락을 했소. 그때는 나도 당신 방에 함께 있었지. 기억나오? 내가 이발소로 가자 당신은 급히 차로 보보의 뒤를 쫓아갔소. 그리고 보보가 약국에 들어가는 걸 숨어서 보고 있다가 그가 약국에서 나오자 그를 쏘았소. 그런데 당신의 알리바이는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었소. 캐시는 그때 집에 있었지만, 당신이 나간 사실은 전혀 몰랐지. 당신은 암실에 들어가 있는 척했소. 암실에 있을 때는 아무도 당신을 방해할 수 없으니까. 당신은 벨의 플러그를 뽑은 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캐시 몰래 집으로 돌아왔소. 하지만 너무 서두르다가 플러그를 제대로 꽂지를 못했소. 내가 그것을 꽂았지. 그것도 기억나오? 내가 지갑을 찾으러 당신 아파트에 다시 왔을 때 당신은 아파트에 있었소. 그야말로 완벽한 알리바이였지. 그때만 해도 나는 당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소. 그러나 나는 이번 사건의 요점만은 간추려 보았소. 그리고는 이 일련의 사건을 연결시켜 주는 어떤 동기가 있다는 걸 알아챘지. 패트는 마약상습자의 명단을 갖고 있소. 언젠가 그들이 다 치료되는 날, 우리는 그들로부터 당신이 저지른 일들을 다 알아낼 수 있게 되겠지. 그 다음 차례는 마너였소. 그녀의 죽음 역시 우발적인 것이었소. 이것 역시 전혀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거지만,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소. 내가 테니스 경기 도중 당신을 혼자 남겨두었던 게 그 기회를 준 셈이 되고 말았소. 당신은 그녀를 살려두었을 경우 나중에 벌어질 결과에 대해 언제 생각이 미친 거요? 아마 그 자리에서였겠지. 보보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오. 당신은 근본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소. 또한, 한번에 모든 것을 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소. 당신은 보보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소. 여자의 심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정신분석의로서 당신은 그 결과를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쉽게 예측해 낼 수 있었던 거요. 당신이 벨레미 저택에 도착할 당시 나는 잠을 자고 있었소. 당신의 코트는 마너의 것과 똑같은 청색이었지만, 당신의 코트에는 여우털이 달려 있었지. 여자들은 곧잘 옷을 빌려주거나 빌려입곤 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는 걸 당신은 잘 알고 있었소. 그러나 당신 코트 주머니 속에는 헤로인 봉지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다른 사람한테 당신 코트를 빌려 주기가 싫었소. 만일 그랬다가는 그 마약 때문에 꼬리가 밟힐 게 뻔했으니까. 당신은 그 마약을 하먼 와일더와 찰스 셔먼에게 건네 주기로 되어 있었소 -- 아마 그들이 도망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을 거고 말이오. 두 사람 다 그 마약을 몇 봉지씩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소. 당신은 조금 늦었던 거요. 마너는 당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말았소.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금방 알아봤을 거요. 당연한 일 아니오? 잭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그녀 역시 그걸로 살아왔으니까. 그녀가 손에 마약을 들고 있는 걸 보고 당신은 마너를 쏘았소.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코트를 침대 위에 다른 코트와 함께 갖다놓고, 바닥에 쓰러진 마너에겐 그녀의 코트로 덮었던 거요. 그리고 그 분말은 태워 버렸소.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소. 그녀의 바로 곁에서 당신은 마너가 총에 맞은 그 자리를 권총으로 정확하게 겨눈 다음 다시 한 번 더 쏘면 되었으니까. 몸을 관통한 총알이 당신 코트 주름에 박혔듯이 당신은 마너의 코트 주름에 그 총알이 박힌 것처럼 보이게 해놓고는 그 코트를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소. 당신은 벌써 그 코트는 없애버렸을 테지? 틀림없소 -- 그 코트에는 헤로인이 쏟아진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까 -- 그러나 마너의 손톱 사이에는 청색의 옷감 부스러기가 끼어 있었소. 당신의 코트 색과 같은 색깔의 옷감 부스러기가 말이오. 게다가 마지막으로 단서가 된 건 거울이었소. 그것과 헤로인을 당신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거요.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거울 앞에 서 있었던 것뿐이었소. 여러 가지 옷들이 잔뜩 널려져 있는 방안에서 이옷 저옷을 한 번씩 걸쳐 보면서 말이오. 샬롯, 당신은 정말 얼마나 운이 좋은 여잔지......바텐더가 한 잔 마시러 간 사이에 당신은 아무도 몰래 저택 안으로 들어갔소. 그러나 당신이 만일 다시 거기로 나왔다면 당신은 바텐더한테 들키고 말았을 거요. 더군다나 범행 직후가 아니었소? 그래서 당신은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가로대로 나와 재빨리 비상 사다리에 도착한 거요. 나는 뚱뚱해서 그렇게 못하지만 당신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아마 당신은 구두를 벗었겠지? 콘크리트에 긁힌 자국이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래서였을 거고. 사람들은 모두 테니스 경기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있든 없든 신경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일종의 군중심리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소...... ? 그러나 샬롯, 그런 것만으로 당신한테 유죄를 선고할 배심원은 아무도 없을 거요. 대부분 정황증거일 뿐, 결정적인 단서가 없으니까. 당신의 알리바이는 너무나 완벽하오. 순진한 사람이 굳게 믿고 있는 알리바이는 쉽사리 깨뜨릴 수 없는 법이오. 예를 들어 캐시 같은 사람들 말이오. 안 그렇소? 그러나 나는 당신한테 유죄를 선고할 것이오, 샬롯. 나중에 우리는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법정의 심리에 간섭받지 않고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 거요. 그때가 되면 우리가 주장하는 그 정황증거를 반박하여 배심원들을 우롱하려는 교활한 변호사들한테도 신경을 안 써도 될 테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하오. 그러나 법정의 심리는 우리에게 그럴 시간을 주지 않을 거요. 하지만, 샬롯, 지금은 내가 배심원이자 판사요. 게다가 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도 갖고 있소. 당신은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며, 나는 이때까지 내 전부를 걸고 당신을 사랑해 왔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해야만 하오.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얇은 비단 팬티의 훅을 벗겨낸 뒤 그것을 벗었다. 그리고는 방금 욕조에서 나온 사람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팬티에서 걸어나왔다. 이제 그녀의 몸은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그것이었다. 바야흐로 햇볕에 그을린 여신이 그 연인에게 몸을 바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팔을 벌리고 내게로 걸어왔다. 가볍게 그녀의 혀가 입술을 핥고 지나가자 젖은 그녀의 입술은 정열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체취는 나를 유혹하는 향기 그 자체였다. 천천히 가벼운 한숨을 그녀가 내쉬자, 둥그런 유방의 곡선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는 나한테 키스를 하려고 몸을 내게 기대며 내 머리를 안으려고 두 팔을 벌렸다.) 45구경의 굉음이 방안을 진동시켰다. 샬롯은 한 걸음 옆으로 비틀거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신의 교향곡이었으며, 끝까지 진실을 믿어 주지 않은 목격자였다. 그녀는 총알이 명중한 벌거벗은 복부에서 일어나는 추한 경련으로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핏줄기가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 앞을 가로막고 선 채 주머니에 권총을 쑤셔넣었다. 나는 뒤로 돌아 내 등뒤에 있는 고목나무를 쳐다보았다. 그 옆 탁자 위에는 아직도 소음장치가 달려 있는 권총이 안전장치가 풀린 채 놓여 있었다. 나를 포옹하려던 그 사랑스러운 팔은 내게 키스를 하면서 그 권총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의 키스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얼굴은 하마터면 그녀의 총에 산산조각이 나서 선혈이 낭자할 뻔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피. 나는 그녀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서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도 이제는 고통이, 죽음을 예고하는 그 고통의 빛이 스며들어가 있었다. 고통과 더불어 불신(不信)도 함께. "왜, 이, 이런 짓을, 달링?" 그녀가 헐떡이며 말했다. 잠시 뒤면 몸이 싸늘하게 식어 오겠지만,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면 편안함이 곧 뒤따라올 거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