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느를 찾아서 지은이: 피터 메일 출판사: 문학사상사 1.앙드레와 카밀라 예쁜 여비서는 마치 실내 장식의 일부처럼 방과 잘 조화되어 있었다, 그녀는 잘 가꾸어진 세련미를 풍기는 주변 분위기와 짜 맞춘 듯 완벽하게 조화된 인간 장식물처럼 보였다. 베이 지 색과 검정색이 잘 어울리는 옷을 걸치고 잔뜩 멋을 부린 세련미까지 갖춘 그녀는 자기 앞에 서 있는 후줄근한 젊은이를 본체만체 하고 전화통화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젊은이가 그녀의 책상 위에 너덜너덜한 가죽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는 바람에 화장으로 만든 매끈한 가면이 구겨질 뻔했다 그 가죽 가방만 없다면 흠잡 을 데 없이 말끔했을 반들반들한 단풍나무 책상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금발 머리채의 한 쪽을 뒤로 젖히더니 통화하는 데 걸리적거려 빼두었던 금귀고리를 다시 달았다. 본래의 눈썹을 깡그리 뽑아 낸 자리에 그려 넣은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면서, 무슨 일로 왔는지 묻는 표정을 지었다. 젊은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카밀라 편집장과 약속이 있는데." 그녀는 눈썹을 그대로 치켜 뜬 채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앙드레 켈리라고 합니다. 아가씨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나 보지요?" 비서는 묻는 말에는 들은 체 만 체 딴전을 부리며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카밀라는 왜 허구한 날 이런 여자들을 데려다 앉혀 놓는지 앙드레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 았다. 여자들은 두 달을 채우는 경우가 드물었고 가고 나면 세련으로 포장된 복제품이 금방 그 자리를 메웠다. 온갖 장식으로 치장한, 사람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잔인할 정도로 무 신경한 여자들. 여길 그만두면 그녀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바니 백화점(최고급품만 취급하는 미국의 패 션 전문 백화점 체인-역주) 화장품 코너? 말쑥한 장의사 사무실? 그것도 아니라면, 유럽 귀 족 사회 하류층에 속하는 카밀라의 수많은 친구 중 하나를 붙잡아 쓸려 가버리는 걸까? "회의가 길어질 것 같대요."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접객실 맨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가방을 집어 들며 앙드레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아가씨는 늘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가요? 아니면 학교에서 그 비결을 배운 거요?"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비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윤기 있는 한 쪽 머리칼 밑으로 어 느새 수화기를 찌르고 다시 수다를 시작하고 있었다. 의자에 죽치고 앉은 앙드레는 하염없 는 기다림을 시작할 태세를 갖췄다. 카밀라는 일부러 시간을 지키지 않고 이중으로 약속을 해서 편집장으로서의 권위와 사교 상의 지위를 돋보이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오히려 그런 점에서 그 녀를 찬양하는 사람도 간혹 있긴 했다. 한 날 한 시에 로열튼 호텔 식당에 테이블 두 곳을 예약해 놓고, 양쪽 자리를 오가면 이 테이블에선 로켓(셀러드용 겨자와 식물-역주)을 홀짝거리면서 중요한 광고업자와 유망한 남 미 건축가를 동시에 접대하여, 파워 런치(중요한 사람들 간의 비즈니스를 겸한 점심식사-역 주) 세계에서 신분야를 개척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면서도 두 손님 중 누구도 불쾌 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의 명성을 드높였고, 마침내 이러한 두 테이블 런치는 카 밀라의 사교 레퍼토리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런 식의 자기 과시가 용인되는 것은 결국 그녀가 성공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성공만 하면 제 아무리 나쁜 매너도 용서되는 곳이 뉴욕이다. 그녀는 쓰러지기 직전의 오래된 잡지 사를 수렁에서 건져내어 현대화 시켰다. 잡지명을 바꾸고, 고리타분한 기고자들을 자르고, 사교계에 관한 톡톡 튀는 '편집자로부터의 편지' 코너를 새로 만들고, 표지, 식자, 사진은 물 론 비서와 접객실까지 최신 감각으로 끌어올렸다. 잡지 판매 실적은 세배로 껑충 뛰었고 광고 면이 꾸준히 늘어났다. 여전히 손해를 보고 있긴 해도 잡지 소유주들은 혜성같이 나타난 편집장의 재능에 흠뻑 취했다. 잡지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현재로선 카밀라 제임슨 포터의 앞길은 탄탄대로로 보였다 잡지가 그처럼 급격하게 부상하게 된 데는 물론 겉모습의 화려한 변신도 도움이 되었지 만, 사실 더 근본적이랄 수 있는 요인은 바로 카밀라의 편집 철학이었다. 이 철학이 발전된 과정이 또 기묘했다. 야심은 있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저널리스트 였던 그녀는 초창기에 사교계의 속물 근성에 영합하는 런던의 한 타블로이드 지의 R&L(소 문과 명예훼손)이라는 면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돈 많은 상 류층 남자를 붙잡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키가 헌칠하고 검은 머리에 엉뚱한 데가 있는 제레 미 제임슨 포터였다. 카밀라는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그의 이름은 그녀가 태어나면서 얻은 카밀라 부트란 이름 에 비해 너무나 멋지게 들렸다) 가문 좋은 그의 친구들까지 감싸 안았다. 그러나 불행하게 도 그중 한 사람을 너무나 열렬히 감싸 안는 현장이 포착되고 말았다. 곧 이혼이 뒤따랐지 만 아미 카밀라는 정차 뉴욕에서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교훈을 배우고도 남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부자들 틈에서 생활해 온 터였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철학이었다. 부자들은 소유욕이 많다. 그리고 몇몇 특이한 예외를 제 외하고 대다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결국 특권층 생활에서 오 는 만족이란 그 생활이 남들에게 일으키는 부러움이 절반을 차지한다. 제아무리 귀하고 값 비싼 것을 가지고 있다 한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독신녀로서 직업을 가직 살아가야 할 미래를 그려 볼 때면 바로 그 너무도 명백한 통찰이 카밀라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통찰을 직 업으로 바꾸어 놓을 계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평소 다니던 치과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는데, 표지 사진에 이끌려 밝은 색상의 가십 잡지 하나를 무심코 집어 들었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한 상류층 미술 수집 가가 최근에 구입한 거대한 저택 앞에서 역시 최근에 결혼한 아내와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런 부부가 왜 이런 잡지에 얼굴을 싣기로 동의한 것일까? 카밀라는 그 것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의 의문에 대한 답은 표지 기사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두 무릎을 꿇고 쓴 기사였다. 미술 수집가와 그의 터져 나갈 듯 탱탱한 젊은 신부, 코모 호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미술품으로 가득 한 쉰일곱개의 방이 있는 사랑의 보금자리에 대해, 기자는 낯뜨거울 정도로 아첨하며 묘사해 놓았다. 인공 명을 교묘하게 이 용하여 찍은 다수의 사진들에도 본문 못지않게 아첨 섞은 설명들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기 사라기보다는 차라리 7페이지 짜리 아부 특집이었다. 카말라는 그 잡지의 나머지 다른 부분들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잡지는 유럽사회에서 불 완전고용 부문을 차지하고 있는 팔자 좋은 유한계급에 속한 상류층 사람들의 동정을 사진을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었다. 자선무도회, 새 향수 품평회, 화랑 개관식, 기타 파리에 서 런던에서 제네바에서 로마에서 그 집단 사람들이 서로 끊임없이 마주치는-켈르 수르프 리즈(quelle surprise ; 어머, 여기서 만나 뵐 줄이야!)-구실 역할을 해주는 공허한 위락 거리 들. 한 면 한 면 넘길 때마다 미소 짓는 얼굴들, 장황한 사진 설명들, 거품 투성이의 이벤트 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에서 나오는 카밀라의 손에는 그 잡지가 들려 있었고, 카밀라는 커버 스토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날 저녁을 다 보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이디어 하나 가 조금씩 모양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성공이란 약간의 운이 따라 주지 않고는 달성하기 힘든 법. 카밀라의 경우 그 운은 뉴욕 에 사는 한 저널리스트 친구가 전화를 걸러 오는 형태로 다가와 주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개러비디언 형제의 출판업 진출을 두고 맨해튼의 전언론이 떠들어대고 있는 것 같 았다. 요양원 사업과 송증(보내는 물품의 내용을 받는 사람에게 적어 보내는 명세서-역주) 의 수금 대리업, 폐기물 처리업으로 적잖게 돈을 번 그들은 최근 작은 출판사. 롱아일랜드 신문, 기타 노후 혹은 붕괴의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전문 잡지 몇 개를 끼고 있는 한 그룹사를 인수했다. 개러비디언 형제가 그 그룹을 인수한 짓은 그룹의 주요 자산인 매디슨 가의 빌딩 때문이 었겠지만, '연료를 대겠다' 라는 동생 개러비디언의 발언과 관련해 어쩌면 잡지사 한두 개는 살아 남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재정 분석가들은 그의 발언을 상당 규모의 자본 을 투입하겠다는 뜻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룹 잡지사들 중에서 퇴출을 면할 수 있 는 잡지는 -데코레이팅 쿼털리(계간 장식)-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데코레이팅 쿼털리-는 근엄한 논조에 촌스런 모양의 잡지로서, 뉴포트 맨션의 응접실 같 은 데서 지면이 누렇게 변색되고 끝자락이 돌돌 말린 채 발견되기 십상인 그런 간행물이었 다. 드문드문 보이는 몇 면 안 되는 광고란은 커튼 천과 모조 호화 조명 시설 따위가 차지 했다. 기사들은 오르멀루(금 도금한 물건-역주)가 주는 기쁨이나 18세기 도자기의 올바른 손질법 따위나 논했다. 이 잡지의 편집진은 조금이라도 현대적이다 싶은 건 모조리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입이 점점 줄어드는 한계상황에서 절룩거리면서도 일 부 핵심 독자층은 용케 보유해 왔다. 잡지의 운영 실태를 검토한 형 개러비디언은 그 잡지를 폐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의 동생과 결혼한, 필립 스탁(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역주)에 관한 감동적인 얘기들을 즐겨 읽는다는 자칭 주부라는 젊은 여자가 그 잡지를 살려 보도록 남편을 설득했고, 그리하 여 -데코레이팅 쿼털리-는 퇴출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된 편집 공식만 찾아낸다면 이 잡지에도 서광이 비칠 수 있게 되었다. 그 소식이 유언비어 정보망을 타고 퍼져나가 술렁거렸다. 친구에게서 대충와 내용을 간략 하게 전해 들은 카밀라는 제일 짧은 치마를 입고, 동생 개러비디언에게 제시할 상세한 계획 서를 챙겨서 뉴욕으로 날아갔다. 설명 작업은 다소 시시덕거리는 분위기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두 시간 쉰 것을 빼고, 열 시부터 네 시까지 이어졌다. 결국 개러비디언은 그녀의 다리에 못지않게 그녀의 아이디어에 감명받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는 어쨌거나 카밀라를 채용했다. 편집상의 첫 조치로 그녀는 잡지명을 바꾼다고 선포했다. 이제 -데코레이팅 쿼털리-는 -DQ-로 알려지게 될 터였다. 뉴욕 전체가 주목하며 기다렸다. 새로 온 편집장들이 영향력을 과시할 때 대체로 그러하듯, 카밀라는 개러비디언이 낸 돈 의 상당 부분을 자기 홍보에 신속히 투자했다. 그녀는 적절하면서도 값비싼 의상을 입고 필 요한 모든 행사에 모습을 나타냈고,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으며, 자신의 개인 파파라초(사진을 찍어 언론에 파는 사람-역주)를 시켜 그 매력적인 순간들을 담게 했 다. -DQ-첫 판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의 명성을 굳혀 가고 있었다. 비록 확실한 능력이 아닌 왕성한 사교 활동에 기초한 명성이긴 했지만. 그러나 가서 만나고 모습을 드러내고 관계를 다지기 위해 애쓰며 보낸 그 무수한 저녁들, 그리고 후속 작업으로 같이한 수십 차례의 점심 식사는 분명 헛수고가 아니었다. 카밀라는 알아 두어야 할 모든 사람들, 즉 돈 많고 권태에 찌든 사람들, 사교계를 맴돌며 이런 저런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제일 중요한 인물일 그들와 실내 장식가들과 재빨리 관계를 텄다. 실내 장식가들은 고객에게 직물과 가구에 관해 조언해 주는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튼 카밀라는 특히 그들에게 공을 들였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이름이 선전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잡지사에 의해 선정된 사냥감들 가운데 사진사, 작가, 꽃꽃이 전문 가, 디자이너, 까만 옷에 휴대폰을 든 수많은 조수들 따위가 자기네 집에 침략해 들어오는 건 곤란하다며 드물긴 하지만 난색을 표해 오는 경우가 발생할 때면, 카밀라는 그 집의 실 내 장식을 맡았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 실내 장식가는 고객의 팔을 살며시 비틀 었고 그 집 문은 열리게 되었다. 카밀라는 이런 수법으로, 과거 이런 유의 잡지에서는 가보지 못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리 고 그녀가 맡고 나서 첫 번째로 내놓은 특종 기사는 그녀의 앞길을 훤히 열어 주었다. 월스트리트의 거물 클레멘트 집안의 리처드 클레멘트가 소유한 집들을 다뤘는데 파크 애 비뉴의 트리플렉스(3층 3세대 아파트-역주)에선 욕실마다 인상파 그림 하나씩, 무스티크의 별장에선 손님 한 명당 하인 세 명이 공개되었다. 평소 대중 앞에 드러나지 않는 생활을 해 온 그는 사실 은둔자에 가까운 독신이었지만, 자신의 젊은 이탈리아인 반려자(그 남자도 햇 병아리 실내 장식가였다)와 카밀라의 협공 작전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콤한 묘사와 보기 좋은 사진들로 가득 찬 퀘페이지의 완성된 기사는 큰 주목과 높은 평가를 받았다. -DQ-의 출발은 순조로웠던 셈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고 잡지는 애초의 신조 , '누구에 대해서든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험담을 쓰지 말라'를 굳게 지키면서 계속 번창해 왔다. 내년에는 카밀라에게 드는 비용까지 감안하더라도 상당액의 흑자를 낼 터였다. 의자 옆에 놓여 있던 -DQ-최신호를 집어 든 앙드레는 밀라노에 있는 부오나귀디의 아파 트에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이 나와 있는 난을 찾았다. 사진 찍는 현장에서 카밀라가 카날레토(이탈리아 화가-역주)의 그림을 사진이 더 잘 받는 장소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자 당황해 하던 그 자그만 사업가와 그의 경호원을 생각하며 앙드레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 그는 카밀라와 함께 일하는 게 그런 대로 즐거웠다. 그녀 는 안목도 있는데다 재미있는 여자였고 개러비디언와 돈으로 선심도 후하게 썼다. 이제 일 년만 더 그녀에게서 정기적으로 일거리를 받는다면 그도 독립해서 자신의 책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앙드레는 오늘은 그녀가 무슨 일로 불렀는지 궁금해 하면서 기왕이면 따뜻한 햇살이 있는 곳으로 파견될 작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뉴욕의 겨울은 정말이지 혹독해서, 지난번 시 위생과가 파업에 돌입했을 때도 파업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였다. 썩어 가는 쓰레기 냄새야말로 그들의 강력한 협상 무기였는데, 올 겨울엔 쓰레기가 얼어 버려 냄새가 진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조원들은 지금 봄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코를 찌르는 냄새가 되살아 나길 말이다. 매끄러운 석판 바닥에 부딪히는 하이힐 소리에 앙드레가 고개를 들자 또각대며 걸어가는 카밀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은 검정 텐트를 두른 것 같은 차림에 턱수염을 기른 한 젊은이의 팔꿈치 밑에 끼워져 있었다. 그들이 승강기 앞에 멈춰 섰을 때 앙드레는 그가 올리비에 투렝스란 걸 알았다. 그는 미니멀 아트(극단적인 간결함이 특징인 미술의 한 조류-역주) 가구로 유명한 파리의 최첨단 디자이너로, 지금은 소호(맨해튼 남쪽의 화랑가- 역주)에 있는 버려진 육류 통조림 공장을 부티크 호텔로 개조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승강기가 도착했다. 한 번은 서로의 뺨을 위해 또 한 번은 행운을 위해 얼굴 양쪽의 허공 에 대고 하는 에어키스가 한바탕 교환되었다, 승강기 문이 미끄러지듯 닫히자 카밀라가 앙드레에게 왔다. "어머, 자기! 잘 지냈어-기다리게 해서 어쩐다지?" 그녀는 그의 팔짱을 꽉 끼더니 쏜살같이 걷기 시작하여 비서의 책상 앞을 순식간에 지나 쳤다. "이 아가씨는 도미니크야. 벌써 인사는 했겠군." 비서가 고개를 들더니 립스틱 칠한 입술이 펴지는 등 마는 등 미소 짓는 시늉을 해보였 다. 앙드레가 말했다 "글쎄요, 인사를 나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복도를 따라 앙드레를 몰고 가던 카밀라가 한숨을 쉬며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말했다. "직원 관리는 정말 힘들어. 약간 밥맛 없는 인상이란 건 나도 알지만 재네 아버지가 좀 쓸모가 있거든." 카밀라는 까만 안경 너머로 앙드레를 쳐다보며 간략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소더비 씨(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업자-역주)라고 알지? 두 사람이 카밀라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계절에 맞지 않게 피부가 짙게 탄 호리호리한 중 년 남자가 수첩을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카밀라의 수석 비서인 그는 앙드레를 보고 씩 웃 었다. "여전히 기막힌 사진을 찍고 있는 거지?" "최선을 다하는 거죠, 뭐. 그런데 노엘, 어디 다녀왔어요?" "팜 기치(미국 플로리다 주 동남부의 해안 피한지-역주)에. 거기서 누구랑 있었는지 물어 봐 주지 않겠어?"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노엘이 약간 실망스런 표정을 짓더니 카밀라에게 말했다. "미스터 G가 당신과 얘기하고 싶대요. 다른 전화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카밀라는 수화기를 어깨 위에 올려 놓고 책상 뒤로 왔다 갔다 했다. 그녀의 음성이 고양 이처럼 낮고 은밀하게 가르랑거렸다. 그것이 그녀가 개러비디언과 통화할 때 내는 음성이라 는 걸 아는 앙드레는, 처음 드는 의문도 아니지만 그들의 관계가 정말 비즈니스에 국한되어 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사실 카밀라는 개러비디언와 취향에 비해 지나치게 드세고 저돌적 인 여성 간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온 갖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말라깽이 축에서 살짝 벗어난 적당히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직까지 살이 처지지 않은 매 끈한 목. 게다가 매일 아침 여섯 시에 하는 운동 적에 팔 윗부분과 허벅지와 엉덩이도 군살 없이 팽팽했다. 카밀라의 신체에서 다소나마 두껍다고 할 수 있는 부위는 머리칼뿐이었다. 단발로 자른 그녀의 짙은 밤색 머릿결은 부드러움과 깨끗함과 윤기와 믿어지지 않는 탄력으 로, 그녀가 일주일에 세 차례 머리를 손질받는 버그도프 미용실에선 전설로 통했다. 앙드레는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에 개러비디언에게 작별 인사를 속삭이느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바람에 뺨으로 흘러 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바라봤다. 앙드레를 쳐다본 그녀가 인상을 썼다. "어쩌지? 일이 생겼어. 그가 아르메니아식 파티를 열려고 한 대요. 상상이 돼?" "맘에 드실 거예요. 민족 의상을 입어 볼 기회가 되겠군요." "그게 어떤 건데?" "노엘에게 물어 보세요, 아마 자기 의상을 빌려 줄 겁니다," "됐어, 자기. 하나도 재미 없어," 메모 용지에 무엇인가 끄적거리고 나서 카밀라는 손목에 찬 대형금덩이 같은 롤렉스 시계 를 보았다, "어머, 눈썹을 휘날리며 날아가야겠네 " "카밀라, 제게 할 얘기가 있다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잊었어요? "점심 약속에 늦었어. 지안니하고의 약속인데. 그를 기다리게 할 순 없어. 이번에 또 그러 면 안 된다구. "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들어요, 자기, 성화야. 리비에라(프랑스의 세계적인 관광휴양지-역주)에 가서 성화를 찍는 거야. 어쩌면 파베르제(러시아의 금 세공사, 보석상-역주)의 소품들도 있을지 몰라. 자 기가 수소문해서 찾아가야 해. 소유주는 늙은 러시아 미망인이야. 자세한 건 노엘이 알고 있 어. " 카밀라는 책상에 놓여 있던 백을 집어 들었다. "노엘! 밑에 차 준비해 뒀어? 내 코트는 어디 있지? 로열튼에 전화해서 내가 지금 차 안 에갇혀 있다고 지안니에게 전해요. 굉장히 언짢은 장례식에 다녀오는 중이라고 둘러대라구. " 앙드레에게 키스를 날려 보낸 그녀는 놀라운 탄력의 머리칼을 날리며 승강기 쪽으로 또각 또각 사라졌고, 그 옆으로 비서가 그녀의 코트와 서류 한 뭉치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따라갔 다, 앙드레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며 노엘의 책상머리에 걸터앉았다. "나 참, '성화야, 자기. 리비에라에 있어,'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예요." "내가 알려 줄게." 노엘이 자신의 수첩을 뒤적였다. "어디 보자. 그 집은 니스(지중해에 면한 프랑스 남동부의 항루 도시-역주)에서 32킬로미 터 정도 떨어져 있어. 생폴드방스 바로 밑이지. 그 할머니의 이름은 오스팔로프인데 자기 말 로는 옛날에 공주였대." 노엘이 고개를 들며 윙크를 했다. "하기야 요즘엔 누구나 왕자, 공주잖아? 어쨌거나 콜롱브 도르(황금 비둘기) 호텔에 자네 이름으로 3박 4일간 방을 예약해 뒀어. 카밀라도 파리로 가는 길에 인터뷰하러 그리로 갈 거야, 그날 밤은 그녀도 거기서 묵게 될 테니 자네랑 둘이서 아늑한 저녁을 들 수 있겠구먼. 그저 내가 하지 않을 짓은 자네도 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점은 걱정 마세요, 노엘. 두통이 났다고 할 테니까 " 노엘은 책상 위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꼭 그래야 돼. 자, 비행기 표, 차편과 호텔 예약 확인서, 그리고 러시아 아줌마의 주소와 전화 번호야. 비행기를 놓치면 안 돼, 그 아줌마는 모레 자네를 만나는 걸로 알고 있으니 까," 봉투를 가방에 넣고 앙드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올 때 뭐 하나 사다 드릴까요? 에스파드릴(샌들의 일종-역주) 어떠세요? 아니면 셀 룰파이트(피하 지방이 뭉쳐서 밖으로 우툴두툴 드러난 것-역주) 제거 크림? 노엘이 천장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정 사다 주고 싶다면 난 자그만 라벤더 에센스 로션이 좋겠어 " 전화 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노엘은 방에서 나가는 앙드레에게 손가락 끝을 까닥거리 며 인사했다. 리비에라. 지저분하게 얼어붙은 매디슨 가로 나가기 전에, 앙드레는 담요를 두르듯 리비에 라 생각으로 몸을 감쌌다. 행인들은 살갗을 찢을 정도로 매서운 바람 때문에 목을 잔뜩 웅 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오가고 있었다. 담배 한 모금 빨아 보려고 맨해튼 오피스 건물들 출 입구 바깥에 죄인들처럼 서넛씩 웅크리고 선 니코틴 동호인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수 상스럽고 불편해 보였다(뉴욕은 공공 장소의 실내 흡연이 금지되어 있음-역주). 그들은 악의에 찬 냉랭한 공기 속에서 찡그린 얼굴로 담배를 빨아들이며 덜덜 떨고들 있 었다. 코카인을 애용하는 그들의 동료들이 따뜻하고 상대적으로 안락한 빌딩 화장실을 독차 지하는 반면, 흡연가들은 그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기회를 거부당한 채 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이 앙드레에겐 을 아이러니컬해 보였다. 그는 아래쪽으로 태워다 줄 택시를 기다리며 51번가와 5번가(맨해튼의 고급 쇼핑가-역주) 모퉁이에 서 있었다. 리비에라, 지금쯤 미모사가 꽃을 피웠을 테고 좀 대담한 사람들은 벌써 야외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다. 해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가격을 올려놓고, 올 여름엔 어 떻게 하면 플라지스트(유료 해수욕장 경영자-역주)에게 내는 세를 줄일 수 있을까 궁리할 것이다. 보트들은 지저분한 밑바닥을 긁어 내고 페인트도 다시 칠해져서 전세 안내 책자에 소개될 것이다 레스토랑, 의상실, 나이트클럽 주인들은 5월부터 9월까지만 땀을 흘리면 한 해의 나머지 기간을 풍족하게 놀며 보낼 수 있으므로, 금년의 지출을 전망해 보며 올해엔 어이에 돈을 쓸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앙드레는 언제나 리비에라가 좋았다. 힘들이지 않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주머니 에서 돈을 빼가면서도 오히려 이쪽에서 은혜를 입은 듯한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 곳이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는 해변, 이따금 겪게 되는 무례함, 자주 마주치는 터무니없는 물건 값, 악명 높은 여름철 교통 대란,,,,,, 그 모든 악조건들도 그는 프랑스 남부의 매력을 맛보는 대가 정도로 여기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 예술가, 작가, 억만장자를 비롯하여 행운을 찾아 나선 사람들, 들뜬 과부. 애인을 구하는 예쁜 여자들, 기회를 노리는 젊은 남자들을 끌어당기는 곳이 되어 왔다. 다소 퇴폐적인 면이 없잖아 있고, 비싼 물가에 사람이 너무 많이 붐비는 건 분명했지만,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침 택시 한 대가 도착하여 동상 직전의 그를 구해 주었을 때 앙드레는 생각했다. 그곳은 날씨가 따뜻하다. 택시는 그가 미처 차 문을 닫기도 전에 출발하더니 버스의 코앞을 가로지른 다음 적색 신 호등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뛰었다. 그제야 앙드레는 자신이 지금 스턴트맨 흉내를 내 는 운전사의 손아귀에 들어 있음을 알았다. 맨해튼 거리를 인간과 기계의 시험장쯤으로 생 각하고 아무데서나 가로지르고 돌진하는 스타일인 것이다. 택시가 속도를 높이며 마구잡이로 돌진하여 급사하기 딱 좋게 요리조리 비켜 가는 한편, 기사가 귀에 거슬리는 알아듣지 못할 말투로 교통 상황을 저주해 가며 5번가를 내달리기 시 작하자, 앙드레는 무릎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힘을 주고 항공사들이 추락 사 고시 권장하는 태아형 자세를 취할 준비를 갖췄다. 마침내 택시가 웨스트 브로드웨이로 접어들자 기사는 자기식으로 개조한 영어를 앙드레에 게 시도했다. "오케이, 어디 번호? 운이 끝까지 따라 주지는 않으리란 예감에 앙드레는 남은 두 블록은 걸어서 가기로 결심 했다. "이쯤이면 됐어요." "됐어요? "네, 바로 여깁니다." "오케이 , 그러시구려 ." 기사가 제맘껏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뒤따라오던 차들이 급정거에 미끄러지면서 택시 꽁 무니를 아주 살짝 들이받았다. 택시 기사는 제 목을 움켜잡고 쏜살같이 뛰어내리더니 자기 네 모국어로 긴 비난 연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의 말 가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딱 두 개였다. '삔 목'과 '이 개자식아' 앙드레는 요금을 지불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가 2분 정도 종종걸음을 쳐서 당도한 건물은 원래 의류 제조 공장으로 시작한 곳이었 다. 그러나 소호 거리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그렇듯이 지금은 몇 겹으로 새 단장이 되어 본 래의 초라한 내력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 높다란 천장에 빛 잘 드는 내부 공간들을 잘게 나 누어 칸막이를 치고, 페인트칠을 하고, 전선도 새로 깔고, 배관공사도 다시 하고, 구역 분할 도 새로 하고,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가격이 매겨졌다. 건물 입주자들은 대부분 예 술 및 정보 통신 분야의 자그만 업체들인데, 앙드레의 작업을 대행해 주는 에이전시 '이미 지 플러스'의 본부도 이곳에 있었다. '이미지 플러스' 는 지적이고 안목이 높으며 따뜻한 날씨를 좋아하는 스티븐 모스라는 젊 은이가 설립한 업체였다. 비패션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사진 작가들과 삽화가들이 그의 고 객이었다. 스티븐은 의류업계나 남잔지 여잔지 모를 모델들의 까다로운 비위를 맞춰 가며 그들과 얽혀서 작업하는 것을 꺼려 했다. 초창기 몇 년 동안 고생한 끝에 그는 이제 탄탄하고 수익 좋은 작은 업체를 꾸려 가고 있 었다. 이 에이전시에서는 전문 직업 상담을 비롯하여 세금에 관한 조언과 보수 협상에 이르 기까지 고객의 일과 관련된 일체 사항들을 대행해 주는 대가로 고객 수입의 15-20퍼센트를 받았다. 스티븐은 발이 넓고, 사랑에 빠진 여자 친구가 하나 있고, 정상적인 건강상태에 풍 성한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뉴욕의 겨울 을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루시 월콧을 하급 파트너로 데려 오게 된 배경에는 사업을 확장해 보려는 야망도 있 었지만 사실 추위에 대한 공포감도 무시 못할 이유였다. 그로부터 9개월 후 그는, 자살 충동 을 일으킬 만큼 사람을 못견디게 만드는 1월부터 3월까지의 기간에는 루시에게 사무실을 맡 기고 떠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대단히 현명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루시는 그런 책무 를 맡게 되어 좋았고, 스티븐은 키웨스트의 햇볕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앙드레는 예쁜 숙녀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루시를 알게 되면서 앙드레는 그녀와 좀더 깊은 관계를 만들어 볼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자 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출장이 지나치게 잦았고, 그녀는 매주 대단한 근육질의 새로운 젊은 남자를 유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사무실 밖에선 따로 만난 일 없이 지 금까지 지내 왔다. 벨이 울리며 철문이 열렸고 앙드레는 넓게 트인 공간으로 들어섰다. 한 쪽 구석에 놓인 긴 소파와 나직한 탁자 외에 커다랗고 네모난 4인용 업무 책상이 이 사무실의 유일한 가구 였다. 의자 세 개는 텅 비어 있었다. 루시는 네 번째 의자에 앉아 컴퓨터 키보드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룰루, 오늘은 당신의 날이에요,"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앙드레는 책상 쪽으로 갔다. "점심 초대예요, 룰루. 진짜 근사한 점심. 어느 식당이든 말만 해요. 방금 막 일거리를 받 아 가지고 오는 길인데 자축하지 않곤 못 배기겠어. 어때요?" 루시는 빙그레 웃으며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리호리하고 쭉 뻗은 몸매에,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칼을 한 가닥으로 묶은 탓에 168센티 미터의 공식 수치보다 더 커 보이는 그녀는 겨울철 뉴욕 사람으로 보기엔 너무도 건강해 보 였다. 초콜릿 색과 꿀색 중간쯤 되는 그녀의 살결은 고향인 바베이도스(서인도 제도의 영 연방 섬나라-역주)의 햇살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반짝이는 짙은 캐러멜 색이었다. 신상에 대해 물어 보면 자신은 순종 쿼드룬(흑인의 피를 4분의 1이어받은 혼혈-역주)이라고 설명하 곤 하는데, 상대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녀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앙드레가 시내에 좀 오래 머물기만 한다면 그와 가까 이 지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떠냐니까요?" 앙드레는 웃음기 어린 희망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도 없는 책상을 가리켰다. "오늘은 두 아가씨가 다 쉬어요. 메리는 감기에 걸렸고 다나는 배심원 임무를 수행하러 갔어요 내가 사무실을 지켜야 해요." 뉴욕에서 12년 넘게 살았다곤 하지만 루시의 목소리에는 서인도 제도의 감미로운 리듬이 깔려 있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다음 번엔 꼭 같이 갑시다?" "좋아요. " 루시는 소파 위에 잔뜩 쌓인 명세표 더미를 치우고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어떤 일인지 말해 봐요. 설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편집장이 낀 일은 아니겠죠?" 루시와 카밀라 사이엔 이상한 반감이 있었다. 카밀라가 루시를 가리켜 "구불거리는 머리 칼의 이상한 아가씨"라고 말한 게 발단이 되었는데, 그 얘기가 루시의 귀에 들어간 후로 두 여자의 악감정은 커져만 갔다. 카밀라는 루시가 공경심이 전혀 없으며 자기네 고객 편만 들 어 지나치게 요구해 온다고 생각했다. 한편 루시는 카밀라가 거만하며 허세가 심하다고 생 각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사업상 하는 수 없이 위태롭고 차가운 예의바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앙드레는 소파 쪽으로 가서 루시 옆에 앉았다. 그녀의 향기를 느낄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 데, 감귤향 짙은 따스한 냄새였다. "룰루, 거짓말은 못하겠군. 사실은 카밀라가 나더러 프랑스 남부에 가서 성화를 찍어 오라 고 했어요. 2-3일 걸릴 거야. 내일 출발해요, "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 얘긴 해보지도 않았죠?" 아주 커다란 갈색 눈 두 개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앙드레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내가? 당연히 안 했죠. 그 얘긴 하지 말라고 당신이 늘 주의시키잖아요." "그야, 당신이 그 방면엔 재주가 없으니까 한 소리죠." 그녀는 책상 위 메모지에 뭔가를 적고 나서 다시 와 앉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아요. 이제 당신도 몸값을 올릴 때가 됐어요. 그 사람들, 당신을 자기네 전속 사진사 정도의 보수밖에 주지 않으면서 잡지를 낼 때마다 부려먹고 있잖아요." 앙드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날 구제해 주고 있잖아요."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루시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자 말끔하고 얌전한 턱이 드 러났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미소 지어 보였다. "그 쪽과는 내가 담판을 지을 테니까 당신은 일에만 열중하세요. 참 그 여자도 거기에 간 대요?" 앙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콜롱브 도르에서 저녁을 먹을 거예요. 거긴 그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호텔 레스토랑의 하나죠." "당신과 카밀라, 그리고 그녀의 미용사 셋이서만. 멋지군요." 앙드레가 주춤했다. 그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루시가 수화기를 들었고 잠시 듣고 있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그 녀가 말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요." 그녀가 키스를 날려 보냈다. "몸 조심 하시고 잘 다녀 오세요." 차가 로열튼을 빠져 나올 무렵 수화기를 잡은 카밀라는 손톱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가 며 번호를 .눌렀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긴 했지만 성공적인 점심 식사였고 지안니는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그 호텔로 시가 한 상자를 보내야겠다고 그녀는 머릿속에 입력했다. "여보세요?" 전화 저쪽의 목소리는 뭔가에 몰두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자기, 나예요. 파리 행 건은 모두 완료됐어요. 지안니가 모든 걸 처리해 놨어요. 하인 한 명이 그 아파트를 안내해 줄 거예요. 원한다면 하루 종일 있어도 된대요." 상대는 좀더 관심 있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림들이 거기에 있다는 거야? 겨울이라고 창고에 처박아 둔 건 없고? 어디로 빌려 준 것도 없고?" "모조리 거기 있어요. 지안니가 파리에서 오기 전에 확인했대요.'' "좋았어. 정말 잘했어, 자기. 아주 좋아. 나중에 보자고."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드는 어둑어둑한 서재, 수화기를 내려놓은 루돌프 홀츠는 마이센(독 일의 자기 산지로 유명한 도시-역주) 산 컵에 든 녹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좀전에 읽고 있 던 기사로 다시 돌아갔다. -시카고 트리분-지에 난 런던 발 기사였는데 '스코틀랜드 야드 미술품 및 골동품 팀' 이 노르웨이의 가장 유명한 그림을 되찾은 내용을 다룬 것이었다. 그것은 시가 4500만 달러에 달하는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였다. 이 그림은 1991년에 도둑맞았는데 2년 만에 노르웨이 남부의 한 지하실에서 종이에 싸여진 채 발견되었다. 홀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기사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기자의 말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도둑맞거나 분실된 미술품은 '최소한' 30억 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수치가 홀츠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2년 전, 카밀라를 만났던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었 던가. 그들의 관계는 사교적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홀츠가 미술 거래상이라는 합법적인 자 격으로 정기적으로 드나들던 한 화랑 전시회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그림에 싫증이 나 있던 때였는데 카밀라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들 두 사람에겐 뭔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했고, 그 다음 주에 점심을 같이 하며 탐색해 보는 동안 그러한 직감은 더욱 굳어졌다. 예의를 차린 진부한 대화 밑으로 어 떤 암류가 흘렀고 그것은 두뇌와 야심이 만난 첫 징표였다. 저녁 식사 만남이 이어지면서 언어의 유희는 솔직함과 비슷한 권가로 바뀌었고, 이윽고 카밀라가 파크 애비뉴에 위치한 홀츠의 아파트에서 호화로운 물건들에 둘러싸여 네 개의 기 둥이 달린 그의 침대를 함께 쓰게 되었을 즈음엔, 두 사람은 탐욕적이라는 면에서 마음이 꼭 맞는 천생연분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분명해졌다. 사랑스런 카밀라. 찻잔을 마저 비운 홀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후 네 시를 넘긴 시각, 15층 아래 파크 애비뉴에 차가운 어둠이 깃들 면서 사람들이 택시를 잡느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렉싱턴 애비뉴에선 지금쯤 눈에 젖은 사 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홀츠는 부자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새삼 만끽하고 있었다. 2.취재 "가방을 직접 꾸리셨나요?" "그렇소. " "꾸려진 짐이 손님의 시야에서 벗어났던 적은 없었구요?" "없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선물이나 기타 품목을 소지하고 있나요?" "아니오." 델타 항공 비즈니스 클래스 담당 여직원이 여권을 훑어보았다. '성명 :앙드레 켈리. 출생지 :프랑스, 파리. 생년월일-1965년 6월 14일, '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려고, 처음으로 고개를 든 그녀는 짧게 깎은 검은 머리에 각진 턱의 호감 가는 얼굴을 돋보이게 만드는 초록색 눈과 마주쳤다. 진짜 초록색 눈을 본 것이 처음 인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앙드레가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가 아일랜드인이세요. 가문 대대로 초록색 눈이죠." 여자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가 그렇게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나요?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보군요." 그녀가 티켓과 수하물 꼬리표를 처리하느라 바쁜 사이에 앙드레는 니스 행 야간 여객기에 함께 타게 될 승객들을 둘러보았다. 대부춘 업무차 여행하는 프랑스인들이었는데 뉴욕의 날씨와 소음과 부산함에 대처하느라 고생한 뒤여서 다들 지친 표정들이었다. 게다가 뉴욕의 영어는, 그들이 벌리츠(세계적인 어 학 전문 학원-역주)에서 배운 박자가 딱딱 맞는 발음과는 완전히 다른 기관총 리듬이 아니 던가. 여직원이 그의 여권과 탑승권을 되돌려 주었다. "다 됐습니다, 켈리 씨. 그런데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손님은 아일랜드인이라고 하셨 는데 어떻게 파리에서 태어나셨나요?" "그때 우리 어머니가 거기 계셨거든요. 어머닌 프랑스인이죠. 난 혼혈이에요." 앙드레가 탑승권을 윗호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어머, 그래요? 멋진데요. 아무튼 좋은 여행 되세요." 여객기로 향하는 느릿느릿한 대열에 붙은 그는 옆 좌석이 비었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차선은 예쁜 여자가 앉아 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차 차선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입도 벙긋하지 않는 기업 간부라도 괜찮다. 막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옆에서 누군가가 서성이는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팽팽 하게 긴장된 여윈 얼굴의 젊은 여자가 통로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녀는 까만 정장에 소 형 서류가방을 든 전형적인 직업여성 차림새였고 불룩한 검정 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앙드레는 그녀가 창가 좌석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주었다. 여자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분명히 통로 쪽 좌석을 준다고 했는데. 전 언제나 통로 쪽에 앉거든요." 탑승권을 꺼내 좌석 번호를 확인한 앙드레는 자신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음을 알았다. 그 는 젊은 여자에게 탑승권을 보여 주었다. 여자가 말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전 창문 기피증이라서요." 그런 희한한 증상은 앙드레로선 금시초문이었지만 앞으로 일곱 시간동안이나 여자의 불평 을 들으며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평화로운 비행을 위해 그는 자신의 통로 쪽 좌 석을 그 여자에게 양보했고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창가 쪽에 앉은 그는 여자가 업무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서류며 노트북 컴퓨터 를 앞에 꺼내 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에도 이따금 해본 생각이지만 현재의 여행을 기분 전환의 기회라고 하는 건 너무도 과장된 얘기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람으로 붐비고, 지겹고, 안락하지 못하며, 거의 대부분 짜증스럽게 된다. "여행이란 정말 멋지죠? 그러니까, 프랑스 남부로 가게 되다니, 거긴 정말이지......" 원하던 자리를 차지하고 나니 기분이 완전히 풀린 듯 젊은 여자가 말을 걸어 왔다. "좋다구요?" 그의 무미건조한 대꾸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여자가 앙드레를 쳐다보 았다. 그는 여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노트 북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방해받지 않고 몇 시간 조용하게 있고 싶어하는 항공기 승객이 가장 피해 받기 쉬운 시간 은 바로 기내식이 나올 때다. 자는 척하는 것도 소용없고 책 뒤로 숨어 버리면 먹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린다. 하늘에서의 진수성찬을 실은 손수레가 다가오고 있을 때 앙드레는 옆자리 여자가 이따금 자신을 훔쳐본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노트북 화면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앙드레와의 대 화를 다시 한번 시도 해 볼 눈치였다. 마침내 피해 갈 수 없는 기내식 단골 메뉴인 치킨 한 조각이 그의 앞에 놓이자 그는 얼른 헤드폰을 끼고 접시 위로 머리를 숙여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으로 음식 물에서 주위를 돌려 보려 애썼다. 이제 허구한 날 여행하고 다니는 짓은 그만둘 때가 됐다. 사교 생활, 연애 사업, 심지어 소화 능력까지 모든 것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스튜 디오를 임시 숙소로 쓰고 있는 처지였다. 그곳에 갖다 놓은 책이며 옷가지 상자들은 여덟 달이 지나도록 아직 개봉도 안된 채 뒹굴고 있었다. 자동 응답기에 대고 말하다 지쳐 버린 뉴욕 친구들은 그에게 전화거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 파리에서 대학에 다닐 때부터 사귀어 온 프랑스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아이들을 낳 았고 어느 정도 정착한 듯 보였다. 친구의 아내들은 앙드레를 받아들이긴 하되 흉금을 트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못 믿을 사람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녀들은 앙드레를 여자들이나 쫓아다니는 사람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나 돌아다니기 일쑤였고 술을 좋아했다. 따라서 가장 생활의 즐거움과 제약에 아직 완전하게 길들여지지 않은 젊은 남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외로울 법도 했지만 그러나 외로울 시간조차 없었다. 그의 인생은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일을 사랑했다. 카밀라가 점점 더 괴팍해지고 사사건건 독재적으로 변해 가는 건 사실이었 다. 게다가 앙드레에게 클로즈업해서 그림들을 찍도록 고집하는 성가신 습관도 생겨 났다. 그런 걸 찍어 봤자 완성된 기사에 넣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보수가 괜찮았고 남들이 알아 주는 최고의 인테리어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책을 만들어 보자고 접근해 온 출판업자도 이미 둘이나 있었다. 내년에는 책을 한번 내리라고 그는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작업 속도도 자신이 조절하고, 주제 선정도 알 아서 하고, 스스로 사장이 되어 일할 것이다. 그는 치킨에 손을 댈까 하다가 그만두고 좌석 위 전등을 끈 다음 뒤로 기대어 누웠다 내 일이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입국장을 빠져 나와 니스 공항 대합실로 들어서자 코에 익은 프랑스 냄새가 그를 반겼다. 그가 구성 요소를 분석해 보려고 종종 시도해 봤던 냄새였다. 진한 블랙 커피향도 배어 있 고, 담배 냄새도 약간, 디젤 연료 비슷한 냄새와 오데콜롱 향 한 자락, 그리고 버터가 듬뿍 든 페이스트리의 기막힌 향 등이 어우러져 프랑스 냄새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란 나라의 국기만큼이나 특징적이어서 앙드레에게는 청춘의 많은 시간을 보 냈던 이 나라에 다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 주는 첫 번째 즐거움이었다. 다른 공항 들에서는 시시한 다국적 냄새가 난다. 그러나 니스에선 프랑스 냄새가 난다. 아까 옆자리에 앉았던 까만 정장의 여자가 수하물 찾는 구역에 서 있었다. 검정 고무벌레 같은 회전 벨트가 짐도 싣지 않은 채 느릿느릿 승객들 사이를 지나 벽 속 구멍으로 되돌아 가는 동안 여자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곤 했다. 그녀의 표정은 바로 뉴욕의 표 정이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초조해 하는, 뭔가에 쫓기는 듯한 표정 그 여자가 과연 느긋한 휴식을 가져본 적이 있을지 앙드레는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동정이 갔다. 그가 여자의 어깨를 톡톡 치자 그녀가 움찔했다. 그가 말했다. "시간이 늦은 모양이군요. 내가 좀 도와 드릴까요?" "이 사람들, 도대체 비행기에서 짐 꺼내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거죠?" 앙드레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프랑스 남부예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죠." 여자가 손목시계를 다시 보았다. "소피아 앙티폴리스에서 약속이 있는데. 혹시 거기 위치를 아세요? 택시를 타고 가면 시 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소피아 앙티폴리스 비즈니스 센터는 앙티브와 칸느 중간의 언덕지대 뒤편에 있었다 앙드 레가 말했다. "교통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얼추 45분 정도 걸릴 겁니다." 여자는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비행기 속에서 어땠는지 아세요? 당신이 혼자 잘난 척하는 사람 이라고 생각했어요." 앙드레가 한숨을 쉬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짐이 벨트 위에 얹혀 슬슬 나오고 있었다. "자 그럼, 볼일 잘 보시고, 일 끝나거든 거기서 되도록 빨리 벗어 나세요."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요? 위험한 곳인가요?" 앙드레는 짐을 집어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음식이 형편없는 곳이거든요," 그는 렌트한 르노를 타고 카녜쉬르메르 해안 도로를 벗어나 루 강 상류로 구불구불 이어 진 6번 지방 도로를 따라 생폴드방스로 향했다. 갑자기 차가워진 이른 아침의 쌀쌀한 기운 이 스며 왔지만 조금 지나면 풀릴 터였다. 앞 창에 내리쬐이는 햇볕이 벌써 따스했고, 멀리 산꼭대기 봉우리들에 쌓인 눈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맨해튼과 겨울은 멀리 다른 행성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차창을 내리자 부족한 산소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제시간에 생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에서 주차위반 딱지를 제일 신속하게 끊기로 명성 높은 마을 경찰 병력인 뚱뚱한 경관 하나가 카페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경관은 카페 문 간에 멈춰 서서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오늘의 첫 위반자를 잡아 볼까 하고 자그만 광장을 꼼꼼하게 훑었다. 그리고 앙드레가 정말 차량 몇 대밖에 허용되지 않는 광장 주차 구역에 차 꽁무니를 밀어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꽤 오래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규칙적인 장화발 소리와 함께, 자신의 권 위적 지위에 걸맞게 천천히 차 쪽으로 다가왔다. 앙드레가 차 문을 잠그며 그에게 목례했다. "봉주르(안녕하세요)" 경관도 되받아 끄덕였다. "한 시간이오. 한 시간이 지나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콩트라방시용(경범죄요) " 그는 한치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성 동작인 듯 자신의 선글라스를 고쳐 쓰더니 이 아침에 이루어 낸 자그만 첫 승리에 만족해 하며 멀어져 갔다. 그는 7--8윌을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 모른다. 가장 좋아하는 달이 바로 그 두 달이었다. 그땐 근엄한 얼굴로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을 되돌려 놓을 수도 있었다. 운 좋은 날엔 백 명에 달하는 운전자들을 격분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이야 말로 이 직업의 숨겨진 즐거움들 중에 하나였다. 카페에 들어간 앙드레는 크르와상과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광장 한가운데 쪽을 내다보았 다. 그곳은 날씨가 허용되는 한 일 년 내내 불르(프랑스의 공놀이-역주)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앙드레는 어릴 때 처음으로 생폴에 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 시절 어느 날. 웨이터같이 검 정과 흰색의 정장을 입은 이브 몽탕은 마을 노인들과 어울려 놀았고, 그 사이 시몬느 시노 레(몽탕의 아내로 배우이자 작가였음-역주)는 담배를 피우며 구경하고, 제임스 볼드윈(미국 의 흑인 작가-역주)은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이 유명한 사람들이 라고 앙드레에게 말해 주었고, 그는 빨대로 오랑지나(오렌지 소다-역주)를 마시며 몇 시간 씩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었다. 십 년 후 두 번째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한 스웨덴 여자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우 체국 뒤에서 나눈 열정적인 키스들,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맛보았던 가슴 저린 아픔, 그 리고 그럭저럭 진행되다 마침내 끊겨 버린 편지 왕래. 그후 그는 소르본느 대학에 진학하여 다른 여자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런던에서 한 사진작가의 조수 겸 견습생으로 보낸 몇 년. 그런 후엔 이국적인 풍경을 담고 싶어, 또한 미국식 보수 기준에 끌려, 뉴욕으로 날아갔다. 크르와상을 먹어 치운 그는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그 러시아 미망인은 여기서 제분 거기에 불과한 생자네 아래쪽에 살고 있었다. 그는 호텔에 짐을 풀기 전에 일단 가서 자신 을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주차장에서 빠져 나을 무렵 생폴은 슬슬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좀전의 그 경관은 사냥감을 찾아 배회하고 있었고, 콜롱브 도르 호텔에서 나온 웨이터가 호텔 입구에 서부터 안마당까지 호스로 물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돌바닥에 부딪혀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이 햇살 속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앙드레는 길 양편의 경치를 번갈아 감상하며 생자네 방향으로 슬슬 차를 몰았다. 오른쪽 으로는 콘크리트와 타일을 뒤섞어 경사진 대지를 덮어 버리고 줄지어 들어선 멋진 별장들이 눈길 닿는 데까지 늘어서 있었는데 그 경관은 지중해까지 쭉 이어졌다. 왼쪽은 표백한 듯 하얀 불모지로서 건축물이라곤 들어서지 않은 콜드방스 경사지가 나무들 꼭대기 위로 솟아 있었다. 그러한 대조적인 경관은 남부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발견되곤 한다 마치 어느 선 너 머로는 별장을 지을 수 없도록 금을 그어 놓은 듯, 치열한 개발 지역에서 느닷없이 텅 빈 자연 지역으로 바뀌곤 하는 것이다. 앙드레는 그 선이 유지되기를 바랐다. 다른 건 몰라도 프랑스의 현대 건축만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기에. 표지판을 따라 좁다란 도로에서 벗어나 계곡 자락으로 이어진 자그만 자갈밭 길로 들어선 앙드레는 자신이 개발업자들의 마수에서 용케 벗어난 한 고립 지대에 들어서 있음을 깨달았 다, 작은 시내 둑을 따라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일렬로 쭉 서 있었는데, 담장마다 제라늄 꽃 송이들이 늘어져 있고 어느 굴뚝에선 연기 한 자락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차를 마친 앙드레는 고르지 않은 층계로 된 야트막한 현관 계단으로 올라갔다. 담장 뒤 에 앉은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반쯤 감긴 거만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문득 그의 아버지가 즐겨 인용하시던 말씀 하나가 떠올랐다. '고양이란 놈들은 사람을 내려다본다 개들은 사람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돼지들은 똑바로 눈높이로 본다.' 문을 두드리면서 그는 빙그레 웃었다 딸가닥하고 빗장 내리는 소리가 났다. 곱슬곱슬한 회색 머리칼 밑으로 갈색 단추 같튼 두 눈을 가진 동그스름하고 혈색 좋은 얼굴 하나가 문을 빼곡이 열고 내다보았다. 앙드레는 좀 전의 그 고양이 놈들이 어느새 자신의 다리를 스치며 집안으로 들어간 것을 느꼈다. "마담, 봉주르. 저는 미국에서 온 사진작가입니다. 잡지사에서 나왔죠. 미리 연락을 받으셨 을 줄 압니다만 " 상대방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자라고 들었는데요." "그녀는 오늘 늦게나 여기로 올 겁니다. 불편하시다면 갔다가 나중에 다시 올 수도 있습 니다." 노부인은 관절염이 있을 것 같은 구부정한 손가락으로 코를 비볐다. "카메라는 어디 있수?" "차 안에요." "아. 봉(아, 그래요)." 앙드레는 카메라를 차에 두고 왔다는 자신의 대답이 노부인의 결정에 한몫 했음을 눈치챘 다. "내일이 좋겠네요. 오늘은 청소하는 여자가 오기로 되어 있어서." 노부인은 앙드레에게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면전에서 탕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는 차로 가서 카메라를 꺼내 왔다. 해가 동쪽에 있을 때 집의 외관을 좀 찍어 두어야겠 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메라 렌즈 속으로 창을 통해 그를 내다보고 있는 노부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이 부인은 과연 카밀라를 어떻게 견뎌낼까? 필름 한 통을 다 쓴 그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나머지 외관은 저녁에 와서 다시 찍기로 했다. 그는 호텔로 되돌아와 체크인을 했고 묵직한 키를 쩔렁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이어진 복도 를 따라갔다, 그는 이 호텔을 좋아했다, 소란하고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 호텔이라기보다 는 평범한 시골집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벽마다 걸린 그림들, 정원에 늘어선 조각품들 과 마주치기 전까지의 얘기다. 콜롱브 도르는 1차 대전이 종결된 후에 농부였던 폴 루란 사람이 세웠다. 그는 배고픈 화 가들에게 동정적인 사람이었다. 화가들은 그의 식당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예술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후원금 부족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루 씨는 친절하게도 화가들 이 자기 작품으로 음식 값을 내도록 허용했고 그러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샤갈, 브라 크, 피카소, 레제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 일이 사업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루는 그 다음부턴 아예 그림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40년이 지나자 프랑스에서 가장 훌륭한 20세기 미술 컬렉션을 가진 개인 소장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은행에는 겨우 몇백 달러의 돈을 남겼지만 벽에 큰 재산들을 걸어 놓은 채 사망했다. 앙드레가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덧문을 열어제칠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팩스가 와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는 나가는 길에 가지러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업무 여행을 하면서 한 두 번 당해 본 경우가 아니어서 어떤 내용의 팩스인지 알고도 남았다. 카밀라는 어느 곳에 가든 무계획하게 조용하게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의 평소 지 시들을 보완한 메모사항이나 주의사항들( 난 핑크빛 방은 절대 안 됨'으로 시작해서, 자신이 마시게 될 미네랄 워터의 거품 방을 크기부터 싱싱한 꽃다발의 색깔까지, 자신의 온갖 변덕 을 다 반영한 일장 연설문이다)이 언제나 그녀의 도착보다 미리, 일제 사격하듯 퍼부어지곤 했다. 밖으로 나온 앙드레가 햇살 좋은 마당에서 읽고 있는 것과 같은 추가 게시 항목들은 대체 로 카밀라의 그날그날 움직임과 선약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 식의 정보 전달에 대해 익히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궁정 회람장' 이라 불렀다. 영국 여왕과 왕가의 행사 계획표를 내보 내는 -런던 타임스-의 한 정기 기고란을 본뜬 말이었다. 수요일 : 오전에 콩코드를 타고 파리 공항으로. 거기서 에어프랑스로 갈아타고 니스로. 니스 공항에서 아주르사(처) 리무진을 타고 콜롱브 도르로 가서 앙드레와 저 녁. 목요일 : 오스팔로프 공녀와 하루. 코후 다섯 시 '에어 앵테르나시 오날' 로 다시 파리 로. 오를레망에서 에펠사(쳐) 리무진을 타고 리츠 호텔로. 거기서 앙뒤예트 자 작 부인과 저녁. 금요일 : 포쉬 가(좁) 보몽 씨네 집 방문. 랑브루와지에서 길르와 점심. 크리용 호텔에 서 ,,,,,, 이런 식으로, 여행 일정을 3분 1초 단위로 보고하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의 구체적인 품목 까지 세세하게 나열하는 거만스럽기 짝이 없는 카탈로그가 숨쉴 새 없이 이어졌다. 노엘의 말마따나, 보통 사람이라면 카밀라의 스케줄을 읽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고 남을 것이다. 앙드레는 팩스 용지를 쓱 훑어 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신분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름들이 었다, 카밀라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기가 왜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른 고개를 절레절 레 내저으며 팩스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관광 시간과 작업 시간을 나누어 즐거운 한나절을 보냈다. 퐁다시옹 마에트와 마티 스 예배당을 방문한 다음 방스의 야외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고, 이어 그미망인의 저택 외관 을몇 장 더 찍기 위해 다시 그리로 갔다 이번엔 서녘 햇살을 배경으로 찍었다. 호텔로 돌아 온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에 가 앉아 M. F. K. 피셔의 -프로방스의 두 마 을-을 읽었다, 그나 오래 전부터 갖고 다니며 틈틈이 읽어 온 책이었다. 그날 저녁 일진은 시원치 않았다. 바 한구석에서는 탁자 밑으로 손과 무릎을 맞댄 남녀 한 쌍이 부끄러울 것 없는 관계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샴 페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바에 앉은 손님 하나는 프랑스에서 우익 정치가 장 마리 르 팽의 세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바텐더를 상대로 근엄한 연설을 혼자 해대고 있었 다. 듣는 데는 이력이 난 그 청중은 말 중간중간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곤 했다. 레 스토랑 쪽에서 술병 코르크 마개 뽑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깥에는 어둠이 시나브로 내려앉 았고 호텔 마당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약한 엔진 소리가 들려 차 앙드레는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메르세데스 벤츠 한 대가 천천히 마당 입구를 가로질러 와 멈춰섰다. 운전 기사가 차 뒷문을 열자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샤넬 제품으로 치장한 카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마당 판석 위로 또각 또각 걸으며 지시하는 소리가 밤 공기를 타고 퍼졌다. "짐은 내 방으로 갖다 줘요. 장 루이. 의상 백은 꼭 벽에 걸어야 한다는 거 잊지 말구요. 내일 오후 네 시 정각에 이리로 와요. 콩프 레네(알았죠)?" 그녀는 바에서 나오는 앙드레를 보았다. "어머, 자기 여기 있었네. 장 루이한테 팁 좀 두둑이 줄래? 난 가서 연락 온 거 있나 확인 해 봐야 해." 운전 기사가 그녀의 가방을 내려 놓는 동안 앙드레가 요금을 계산했다. 그때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카밀라의 음성이 클 안에 메아리 쳤다. "말도 안 돼. 세 앵포시블(그럴 리가 없어). 아니, 정말 아무것도 오지 않았어요?" 다른 직원들도 불려 나와 심문을 받았다. 그녀 앞으로 온 메시지를 찾기 위해 호텔 전체 가 법석을 떨었다. 앙드레는 레스토랑에서 메뉴 두 장을 챙겨 다시 바에 가서 앉았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한 개인이 순식간에 한 업소 전체의 고요를 깨뜨리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삐르(버찌 술 -역주)를 또 한 잔 주문하고 난 그는 요즘 카밀라가 마시는 생수가 뭐였는지 생각해 보았 다. 바두와였던 것 같다. 그녀가 와서 긴 한숨과 함께 앙드레 앞자리에 앉더니 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재수 없는 날이야 내 꼴이 완전히 마귀할멈 같았을 거야." 그녀는 다궈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앙드레가 자신의 말을 부인해 주길 기다 리는 눈치였다. "저녁 식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죠." 앙드레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메뉴를 건넸다. "여긴 양고기가 좋아요 맛이 아주 최고죠." "오우, 그만해, 육류가 장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알기나 해요? 며칠은 간다구. 자, 이제 얘기나 해봐요. 그 공녀는 어땠어?" 앙드레가 아침나절의 그 짧은 만남을 고고하는 동안 카밀라는 물을 홀짝거리며 뻐끔 담배 를 피우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긴 여행을 하고 난 뒤인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는 활기 차고 집중력 있는 태도로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다음 날의 작업 계획을 세웠다. 그녀의 에너지는 니스 식 샐러드를 먹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저녁 식사 전 부였다. 반면에 앙드레는 구운 양고기와 적 포도주를 먹고도 몸이 축 가라앉아 점점 더 졸 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계산서가 식탁 위에 나왔을 때 그녀가 말했다. "피곤한가 봐, 자기. 가서 잘까?" 그 정도 속뜻은 알아차릴 만한 영어 실력이 되는지 웨이터가 눈썹을 치올리며 입술을 내 밀었다. 앙드레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가까지는 미치지 않는 엷은 미소를 띠고 눈길을 되받았다. 그는 유혹받은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카밀라는 돈 많은 애인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따금 개러비디언과도 은밀한 하오의 정 사를 즐기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니 사진작가쯤이야 대수겠는가? 원거리 출장중 에 잠시 편집장의 위안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제의는 꽤 오랜만에 받아 보네요." 이렇게 말하면서 앙드레는 웃음을 터뜨려 그 순간을 모면했다. "커퍼 더 안 드실래요, 카밀라?" 카밀라는 대답은 않고 냅킨을 식탁 위에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여덟 시에 봐요, 로비에서." 앙드레는 레스토랑에서 나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거절당한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그는 괜히 밥줄이 위태로워지는 짓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3.목격 앙드레는 정확하게 그 시간에 호텔 현관에 나와 아침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산등성이 위로 옅은 구름 몇 점이 높이 떠갈 뿐 하늘은 멀리 눈길 닿는 데까지 파랗고 맑았다. 그는 테라스를 가로질러 가서 수영장을 내려다보았다, 수영장 한 쪽엔 빽빽하게 군사 대 열로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경호하듯 죽 늘어서 있고, 한 쪽 가장자리엔 콜더(미국의 조각가, 모빌의 창시자-역주)의 으스스한 모빌 하나가 감시하듯 서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 속엔 어젯밤 바에서 보았던 그 남녀가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앙드 레는 이런 멋진 하루를 함께 해줄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근사할까 잠시 생각했다, 하긴,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 여기 있었네. 자기, 카메라에 필름은 넣어 뒀겠지? 차는 어디 있어?" 카밀라가 밀짚모자 테를 한 손으로 살짝 잡은 폼으로 서 있었다. 그 모자는 아마도 내년 여름이면 너나없이 쓰고 다니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칭 작업복이라고 부르는 중간 굽 구두에 다소 수수한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있 었는데, 날씨와 썩 잘 어울렸다. 지난밤엔 괜히 그녀의 신호를 잘못 받아들였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앙드레는 다소 마음을 놓았다. 생자네로 가는 길에 그녀는 자신이 러시아의 모든 것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성화를 얼마 나 열렬히 좋아하는지에 관해 떠들어댔다, 만일 그들이 바이에른(독일 남부의 주-역주)의 한 성이나 베네치아의 궁전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독일 것이나 이탈리아 것이면 뭐든 찬양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실험 재료를 구워삶아 흘리려 할 때의 방식이었다. 과연 그녀는 오전 내내 그 수법으로 밀고 나갔다. 우아하긴 하지만 다소 낡든 소박함을 지닌 그 고가의 모든 것들에 대해 탄성을 연발했고("때묻지 않은 매력이야, 자기. 기둥들이 대단하지? 이런 매력의 진수를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포착해야 해")몇 점 안 되긴 해도 대 단한 걸작인 바로 그 성화들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카밀라가 열광하며 인터뷰하는 사이 앙드레는 사진을 찍어 댔고 정오쯤 되가 작업이 대충 끝났다, 이제 오후에 작업할 땐 실험작도 몇 점 찍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부인은 점심 대접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부엌에서 카밀라의 지칠 줄 모르는 쾌활함과 아첨은 난처한 시험대에 놓이고 말았다. 그것은 앙드레 입장에선 매일매일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은 수수한 식단이었다. 통통하고 윤시 나는 까만 올리브 열매, 횐 버터를 바른 무 요리, 오래 씹어 먹어야 되는 시골 빵, 적포도주 한 주전자, 그리고 예와 성을 다해 가늘게 썬, 속이 꽉 차고 불그스름한 소시송(큰 소시지 -역주). 앙드레는 접시를 내밀고 노부인이 덜어 주는 음식을 즐겁게 받으며 말했다. "정말 근사한 대접입니다 미국에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겁니다. 아마 그 쪽에선 이런 건 위법이라고 할 거예요." 노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프랑스 산 치즈를 대접해도 그런 소리를 듣곤 한다우. 정말이지 미국은 이해하기 힘든 나라예요" 그녀가 카밀라 쪽을 보았다, "좀더 드시려우, 마담? 이 소시송은 아를 산이에요. 소고기에다 돼지고기와 당나귀 고기를 섞어 만든 거죠. 이게 특별한 맛이 나는 건 바로 당나귀 고기 때문이라고들 하죠." 이 말을 듣는 순간 카밀라의 미소가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잖아도 그녀는 시련에 가까운 점심을 견뎌 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두와도 없고(사실 식탁 위에는 부엌 수도꼭지에서 받아 온 지극히 수상쩍은 물밖에 없었다) ,샐러드도 없고, 게다가 고양이 한 놈이 상 위에 올라 가 포도주 주전자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당나귀 고기라니! 그녀는 창자 가 뒤집히기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의 상, 또 잡지사의 보다 큰 이익을 위해, 기꺼이 소시지 한 조각을 목구멍으로 삼키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당나귀라니 -그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앙드레는 표정이 완전히 굳어 버린 채 절박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흘끗 보고 그녀 가 할 말을 잃은 상태임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카밀라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만도 했다, 그는 노부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깜빡 했네요. 여기 있는 제 동료는 채식주의자랍니 다." 거기에다 하나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장이 극도로 민감하죠." "아, 봉?" "예, 그녀의 주치의는 어떤 종류든 붉은 육류를 금하고 있답니다. 특히 당나귀 고기는 섬 세한 근육 조직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치죠." 노부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카밀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매우 유감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놈의 장이 늘 골치라니까요.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요." 그러자 노부인은 재빨리 시원한 국수와 소금에 절인 대구를 권했는데, 카밀라도 재빨리 손을 채저으며 자신은 올리브와 무만으로도 더할 수 없이 만족스럽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거 절했고, 그리하여 점심 식사는 금방 끝나 버렸다. 고양이 놈만 남은 소시지나 주워 먹어 볼 까 기대하며 식탁에서 꾸무럭대고 있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 섰고 일을 다시 시작할 참이었다, 사실 더 할 일도 별로 없었지만. 앙드레는 성화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바위, 오래된 석고상, 목재 덧문같은 다양한 배경에 서 몇 장 더 찍었고, 고양이와 함제 나지막한 돌담에 앉아 있는 노부인의 인물 사진을 찍을 땐 그녀를 구슬려서 뜻밖의 젊은 미소를 얻어내기도 했다. 카밀라는 메모하기도 하고 자그 만 녹음기에 대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세 시쯤 되자 작업이 모두 끝났다, 저택에서 빠져 나온 차가 언덕 위로 접어들자 카밀라는 담배에 불을 붙여 긴 안도의 한숨 과 함께 차창 밖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맙소사, 당나귀라니, 아니, 그런 걸 어떻게 입에 댈 수 있지?" "맛있기만 하던데요, 뭐 ," 앙드레가 속력을 줄이며 말했다. 옆걸음으로 도로를 가로지르던 황토색 개 한 마리가 잡 초가 우거진 하수구로 뛰어들기 직전, 차를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다. "내장 요리도 한번 먹어 보세요,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죠." 카밀라는 치를 떨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좋아하는 개화된 파리 친구들이 아니라 프랑스 촌사람들은, 식습관이 아주 저속하다는 것을 그녀는 이따금 확인했 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들어간 끔찍한 재료에 대해 떠들어대면서 즐거워한다는 점이었다. 위, 창자, 토끼 머리와 양의 발, 젤리처럼 굳힌 이름도 모를 덩어리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잡다한 고기 찌꺼기 ......그녀는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그런데, 자기, 뉴욕엔 언제 돌아갈 거야?" 이번엔 앙드레가 치를 떨 차례였다. 그로선 이 좋은 초봄을 놔두고 끔찍한 맨해튼 겨울의 끄트머리로 돌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주말이나 지내고 갈까 해요. 내일은 니스로 들어가 '알지아리' 와 오에르의 사진이나 몇 점 찍을 거예요." "누구 이름들인지 모르겠네. 내가 알아야 되는 사람들이야?" "사람이 아니라 가게들이에요," 생폴로 들어선 차는 호텔 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경관이 아주 멋진 가게들이죠. 앞에 말한 데는 올리브와 올리브 기름을 파는 데고, 뒤의 것은 맛이 기막힌 잼을 파는 데예요." 카밀라가 흥미를 보일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올리브나 잼 따위에선 사회적 가치를 발견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광장 맨 끄트머리에 주차되어 있는 메르세데스를 향해 다급하게 손짓했다. "장 루이가 저기 와 있어. 안에 들어가서 내 짐들을 갖다 실으라고 얘기해 줄래? 난 메시 지 온 게 있는지 가봐야겠어." 그 다음 15분은 카밀라가 공항으로 출발하는 뻑적지근한 의식에 할애되었다. 경관의 주의 깊은 눈길 속에 짐들이 옮겨져 메르세데스에 실렸다, 객실 담당 종업원들은 사라진 카밀라 의 귀고리 한 짝을 찾기 위해 침대 밑까지 뒤지는 서비스를 덧보태야 했다. 카밀라가 뉴욕 으로 마지막 팩스를 보내고,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는지 공항에 확인 전화를 하고, 호텔 측에 팁과 찬사를 나눠 주고. 마침내 마당을 지나 차 뒷좌석에 들어가 앉는 순간, 호텔 직원들은 한결같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지켜보았다. 열려진 창으로 그녀가 앙드레를 올려다보았다. "화요일에 양화 필름 준비해 가지고 내 사무실로 와줄 거지? 다음 주엔 신간판을 짤거니 까" . 그리고는 앙드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차오(헤어질 때 쓰는 이탈리아 인사말-역주) 인사말과 동시에 창이 올려졌고 마침내 카밀라는 이번엔 파리의 넋을 빼놓으러 가버렸다. 앙드레는 메르세데스가 좁은 도로를 조심조심 올라가 마을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 았다. 리츠 호텔 수위가 조만간 닥칠 난리법석에 충분히 대비했으면 좋으련만. 이제부턴 아무 부담 없는 하루 저녁과 하루 낮이 통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샤워 를 하고 나서 지도를 들고 바에로 내려갔다, 지도라고 해봤자 사실은 그가 대학 시절부터 봐온 탓에 낡고 바랜 너덜너덜한 미씰링(안내 책자명-역주) 245페이지였는데 그는 그것을 식탁 위, 그가 준문한 키르 옆에 펼쳤다. 그가 가장 아끼는 지도인 이 245페이지는 감상에 끌려 여행하던 시절의 선물이어서 더더 욱 추억 어린 물건이었다. 과거 그는 서쪽으로 님므와 카마르쥐, 동쪽으로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기까지 이 지도에 나타난 지역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긴 여름방학을 보낸 적이 많았 다. 늘 돈이 궁했고 그래서 자주 난처한 처지가 되곤 했어도 그 땐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는 과거의 회상으로 빠져 들었다 태양이 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시절, 5프랑짜리 와 인을 마셔도 라투르(고급 와인-역주) 맛이 났고, 뒷골목 싸구려 여관엘 들어도 깔끔하게 단 장하고 반겨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시절 그의 곁엔 하얀 시트 위에 더욱 도드라지는 구릿빛으로 탄 여자들이 언제나 하나씩 붙어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가운데 이름 이 기억나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그가 키르 잔을 집어 들자 유리잔 아래쪽에 맺힌 물방울이 지도의 니스 바로 남쪽 지중해 위에 톡 떨어졌다. 물기가 코르시카로 가는 뱃길을 표시한 점선들을 적시고 캅페라 끄트머 리에까지 번지자 이번엔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다소 최근의 일이었다. 작년 여름이 끝나 갈 무렵 그는 곶에 위치한 한 절묘한 빌라(카밀라가 소곤대며 말하기론 '바다의 유산계급이야, 자기' )에서 작업하느라 이틀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드노이예 집안, 보나파르트 시대 이후 조용하게 부를 쌓아 온 바로 그 전통적인 부자 가문이 소유한 저택이었다. 처음에 나폴레옹 군대의 그 수많은 장병들에게 제복을 만들어 주기로 한 계약 이 세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성공적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직물을 제공 하는 거대한 기업으로 발전한 것아다. 현재 그 집안의 총수격인 베르나르 트노이예는 별로 시간을 바칠 필요도 없는 탄탄한 기 업과 마음껏 누려도 좋은 특권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앙드레는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기 억이 났다 물론 그의 딸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의 딸 마리 로르 드노이예의 사진은 프랑스에서 깔끔한 축에 드는 잡지들에 심심치 않 게 실리곤 했다. 계절에 따라 롱샹 경마장에서 아버지 휘하의 기수와 잡담하는 모습, 혹은 쿠르세벨 스키장에서, 혹은 몬테카를로의 적십자 주최 무도회에서 예쁘게 미소 짓는 아름다 운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는데, 가슴 설레는 젊은이들 패거리에 둘러싸여 있는 건 어디서나 변함없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우아한 금발 머리에, 태양에서 절대로 멀리 떨어져 살지 않는 사람만 이 지필 수 있는 살결(언제나 황금색이 도는 연한 구릿빛)을 지닌 그녀는 부잣집 딸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적당히 활발하고 상냥했으며 따로 남자가 있는 것 같 지도 않았다. 물론 카밀라는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앙드레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니스로 갈 것이 아니라 캅페라로 가서 드노 이예 집안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마리 로르가 시간을 내어 ,점심을 함께해 줄지도 모른다, 그는 키르를 마저 마시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내일 일에 대한 기대로 식 욕이 돋는 것 같았다. * * * 캅페라는 야자수와 소나무 숲이 우아하고 흠잡을 데 없이 보존되어 있으며, 물가가 엄청 나게 비싸긴 해도 예부터 코트다질르 지역에서 최첨단을 달려온 지역이다, 니스 동편 지중 해와 맞닿은 이곳에는 돈이라는 완충 장치에 의해 일반 대중과 격리된, 높다란 담장과 무성 한 나무 울타리로 가리고 철대문으로 막은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저택들이 많다. 과거 이곳에 살았던 인사들로는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 서머셋 모옴, 그리고 해외에 나갈 때면 가발 50개가 든 트렁크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머리 장식의 대가 베아 트리스 드 로췰그 남작 부인 등이 있다. 사회가 좀더 개인주의적으로 바뀌고 이유도 없이 봉변을 당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이곳 에 살고 있는 거주자들은 가급적 명부에 실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싶어하 기 때문에, 캅페라는 해안가 부락 중에서도 관광객들의 혼잡과 아우성에서 벗어나 있는 몇 안 되는 곳들 중 하나이다. 니스에서 들어온 방문객들이 맨 처음 느끼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여기엔 소음이 전혀 없다 는 점이다. 잔디 깎는 기계 소리까지도(물론 소리야 들리지만 담장과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보이진 않는다) 침묵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맞추려는 듯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다. 차들도 별 로 다니지 않지만, 쓰나마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차들도 근엄하다 싶을 정도로 여유만만 이다. 프랑스 운전자들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경쟁절인 다급함의 기미는 전혀 없다. 한마디로 여기는 정적감 같은 것이 뒤덮여 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돌진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느 끼는 것 같다. 등대를 지나 제네랄드골 거리를 따라가던 앙드레는 좁다잔 사유 도로로 접어들었다. 곶 언저리와 이어진 막다른 길이다. 그 도로 끄트머리에서부터 3미터 높이의 돌담과 드노이예 가문의 문장이 장식된 육중한 두 개의 철문이 눈에 확 띄는 드노이예의 사유지가 시작된다. 철문을 넘어가면 지대가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100미터는 됨직한 저택 내 신작로가 이어지 고 그 양편으로 계단식 잔디밭이 펼쳐진다. 야자수들이 줄지어 선 신작로 끄트머리에는 차를 돌리는 둥그런 순환로가 있고, 화려한 분수대와 호화로운 현관문이 나타난다. 지대가 경사지여서 꼭대기 길에서 보면 저택 지붕 너머로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지중해가 보인다, 앙드레는 정원에서 보트 창고와 사유지 해변으로 곧장 이어진 터널로 안내받았던 일을 떠 올렸다. 그때 드노이예는 침식 작용 때문에 걱정이라고 하면서,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매년 봄마다 모래를 실어 나르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고 했었다. 차에서 내린 앙드레는 철대문이 잠져 있음을 알았다. 쇠창살 사이로 멀리 저택이 보였다. 눈에 들어오는 창문들마다 덧문이 내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드노이예 일가는 집에 없음이 분명했다. 여기로 오기엔 철이 너무 이른 것이다 그들은 아직 깊은 산속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거나 어느 따뜻한 해변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 했다. 마리 로르는 살결에 선탠 을 보강하고 있을 테고. 실망감을 안고 돌아서려던 순간 그는 느닷없이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남자 하나가 뭔가 큼직한 것을 들고 나타났다. 네모난 물건, 색상이 선명한 사각판이었다. 남자는 그것이 몸에 닿지 않도록 아주 조심조심 들고 저택 측면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앙드레는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눈부신 햇살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어 눈을 찡그렸다. 그때 차 뒷좌석에 두고 온 카메라가 떠올랐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장면과 부딪 힐 때를 대비해 긴 망원 렌즈를 장착해 두었는데 그런 즉석 사진을 찍는 것은 그의 오래 된 습관이었다 차에 가서 카메라를 가져온 그는 현관 앞의 인물이 정확하고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앙드레가 알기로 그는 늙은 클로드였다(이 집 수석 정원사인 젊은 클로드와 구별하기 위 해 그렇게들 불렀다). 늙은 클로드는 이십여 년 간 드노이예 집안의 온갖 일을 처리하며 일 해 왔다 잡역부, 심부름꾼, 공항을 오가며 손님들을 모시는 운전기사, 집안 일꾼들의 감독관, 고속 모터보트 관리인 등으로서 이 집 고용인들의 핵심 인물이었다, 지난 해에 앙드레가 사 진을 찍으러 왔을 때도 가구를 옮기고 조명을 조절해 주고 친절하게 여러모로 도와 주어서 앙브레가 그를 조수로 쓰면 좋겠다고 농담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림을 가지고 도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그림 역시 앙드레가 잘 아는 것이었다 세잔느의 그림이었다. 세잔느 특유의 기법을 담 은 것으로 한때 르누아르가 소장하기도 했다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앙드레는 그 그림이 걸 려 있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본관 응접실의 화려하게 장식된 벽난로 위에 걸려 있었다. 당시 카밀라는 매혹적인 붓 터치를 포착해야 한다면서 클로즈업으로 여러 장 찍으라고 우겼지만 정작 기사에는 클로즈업 사진이 단 한 장도 실리지 않았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고, 또한 사진작가의 본능도 작용해서 앙드레는 현관 계단에 서 있 는 클로드의 모습을 몇 장 찍었다, 곧 클로드의 모습은 저택 측면을 돌아나와 그의 앞에 멈 춰 선 작은 밴에 의해 가려졌다. 프랑스 어느 도시에 가도 볼 수 있는 칙칙한 청색의 평범 한 르노 차였다. 측면에 자그맣게 새겨진 광고 문안은 이 차량이 '주카렐리 플롱브리 쇼파 질(주카렐리 난방 및 배관)소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앙드레가 렌즈를 통해 지여보는 가운데 밴에서 기사가 내리더니 차 뒷문을 열고 대형 판 지 상자와 거품 비닐 한 뭉치를 꺼냈다. 클로드도 작업을 도왔다, 두 사람은 그림을 조심조 심 포장하여 상자에 넣은 다음 다시 밴에 실었다. 이어서 차 문이 닫혔다. 남자들은 집안으 로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이 카메라 필름에 기록되었다. 앙드레는 카메라를 내렸다. 도배체 무슨 일일까? 끌로드가 버젓이 있는 백주 대낮에 이루 어진 일이니 도둑질이라고 보긴 힘들다. 그는 이십 년 동안 이 집에 충직하게 봉사해 왔고 주인으로부터 더할 수 없이 신뢰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림을 소제하려고 어디로 보 내는 것일까? 그림 틀을 바꾸려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배관사차 뒤에 실어 보내는 이 큐는 무엇일까? 이상하다, 아주 이상하다. 그러나 솔직히 앙드레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차 로 돌아갔고 정갈하고 근엄하고 나른한 캅페라를 천천히 벗어나와 니스로 들어가는 해안 토 로까지 왔다. 처음엔 일이 용두사미로 끝나 버린 것 같아서 실망감도 느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사 실 벅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었다. 설사 마리 로르를 만났다 한들 그녀는 그를 기억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를 알아봤다 하더라도 쓸데없이 접근하려 드는 정신나간 녀석쯤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앙드레든 어느새 휴일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 관광객들이 빠져 나가면 동면 으로 들어간 듯 보일 정도로 나른한 분위기로 빠져 드는 칸느와 달리 니스는 연중 내내 활 기를 유지한다 식당들도 늘 문을 열고, 시장도 계속 서며, 거리는 부산하고, '프롬나드 데 앙글레(영국인들의 산책로)는 바다 경치를 구경하며 운동을 즐기려는 조깅꾼들로 북적대고, 교통량도 많아 체증을 일으키기 일쑤다. 도시 전체가 활력에 넘치는 것이다. 뷔유니스의 좁은 골목들을 돌아다니다 생프랑수아 광장에 들른 앙드레는 얼마 전 근거지 를 옮겨 요즘은 어시장 널빤지들을 점거하고 사는 지중해 텃새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 쿠르 살레야(살레야 산책로)에 앉아 맥주를 마시셔 이번에도 망원 렌즈를 이용해 노점 상인 들과 손님들을 필름에 담았다. 이웃에서 장보러 나온 모범적인 주부들은 상추나 누에콩 감 식가일 뿐 아니라 흥정에도 전문가들이다. 홍합과 샐러드와 치즈로 점심을 때운 그는 '오에르' 와 '알지아리'로 가서 천연색 필름 서너 통을 찍었고 카밀라의 수석 비서 노엘에게 줄 라벤더 에센스 모션을 샀다 그리고 자신 의 에이전트 루시를 위해, 피레네 산간 지역에서 만든 방수 보증 베레모도 하나 샀다. 그녀 가 그걸 쓴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생폴로 되돌아오는 길에 비가 뿌리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꾸준하게 가느다란 이슬비가 내렸다. 그 비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급작스런 날씨 변화가 앙드레로선 찬가웠다. 프랑스 남부에서 떠나기란 언제나 고역이었는데 만일 해가 쨍쨍하고 뜨거웠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 이다. 비가 뚝뚝 떨어지는 잿빛 하늘을 보며 떠나는 게 가슴이 덜 쓰라릴 것이다. 공항으로 가는 도로에 늘어선 야자수들이 비를 피해 몸을 움츠린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야 자수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리와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종착지가 나타났다. 앙드레는 렌 터카를 되돌려 주고 나서, 체크인을 하려고 줄지어 선 비즈니스맨들(뉴욕에서 올 때 같이 타고 왔던 지친 집시들 같은 그 사람들일까?)과 햇볕에 타 뺨과 코가 발그스름해진 행락객 들 틈에 끼여들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 고개를 돌린 앙드레는 지난번 비행기에 함께 탔던 창문 과민증 여자가 환히 웃고 있는 것 을 보았다, 그도 되받아 웃어 주며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행은 어땠어요? 틀림없이 대단한 요리를 맛보셨을 것 같군요. 저는 칸느에 있는 정말 깔끔한 곳에 갔었어요. 선생님도 아시는 델 것 같은데 '르 루주' 뭐였던가? 잠깐만요, 그 집 소개장이 어딘가 있을 텐데," 그녀가 백을 뒤지더니 두툼한 다이어리를 꺼냈다. 대기 행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앙드레는 비행기가 만원이길. 그리고 어쩌다 아는 사이가 되어 버린 이 여자와 가능하면 먼 좌석이길 빌었다. 4. 의 혹 늦은 오후 케네디 공항에는 붉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공기는 칼날처럼 매서웠다. 오염된 눈으로 덮인 경사지가 니스의 찬란한 꽃밭들과 참담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택시 에 탄 앙드레는 좌석에 붙은 징그러운 녹색의 껌 덩어리를 떼어 내고 나서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비행기 여행은 순탄했고 다행히도 만원이었다. 한 가지 방해물이 있었다면, 스테로이드제 로 근육을 키운 할리우드 영웅들이 나머지 배역들을 몽땅 싹쓸이해 버리는 할리우드 영화였 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영화였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드노이예 저택에서 본 장면이 몇 차례나 그의 생각을 어지럽혔 다. 그가 알기로 그 그림은 엄청난 가격의 그림인데, 그것이 한 마을 일꾼의 밴에 실려 옮겨 진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맘 편하게 덮어두고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그가 돌 문기둥에 박힌 인터폰 버튼을 눌렀는데도 묵묵부답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 집이 텅 비었더라면, 그래서 응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면야 물론 이상할 게 없었 다. 그러나 분명히 클로드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저택과 외부 세계를 단절시 켜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찍은 그 사진들을 한시 바삐 보고 싶어졌다. 기억보다 훨씬 믿을 만한 기록이 사진인 것이다. 그래서 작업실로 곧장 가서 필름을 현상 해 보기로 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요란하게 쏟아져 나오는 인도 음악 소리 와중에서 의 사를 밝히려고 애쓰던 앙드레는, 결국 터번을 두른 택시 기사의 뒤통수에까지 고개를 내빼 고 고함치듯 소리지른 후에야 목적지가 어딘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일곱 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작업대로 가서 환등기를 켰다. 선명한 양화들을 유리판 위에 나란 히 펼쳐 놓는 동안 불빛이 깜박이더니 새하얀 빛 산으로 번졌다 자그만 상들이 드러나기 시 작했다 클로드, 세잔느 그림, 주카렐리 사 밴, 그리고 주카렐리 본인인 듯한 밴 운전수. 앙드레는 양화를 시간 순서대로 재배치하고 스토리를 짜보았다. 찍을 때 확대경을 최대로 사용한 덕에 세부 상들도 선명하고 초점도 완벽했다. 증거물로서 이보다 더 확정적인 건 있 을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의 증거란 말인가? 주인의 명에 따라 심부름한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앙드레는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그럴까? 그는 작업대 위 벽에 매달린 게시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폴라로이드(즉석 현상 카메라- 역주)로 찍은 사진들이 뒤죽박죽 매달려 있고, 영수증, 신문 스크랩, 전화 번호나 주소가 휘 갈겨진 메모지들, 라미 루이 식당 메뉴, 경비 청구서, 응답해 주지 못한 초대장들. IRS(미국 국세청 -역주)에서 보내 온 개봉도 하지 않은 봉투들 그리고 그 모든 우울한 잡동사니들 틈에서 한 가닥 햇살처럼 빛나는 사진 한 장, 앙드레가 사무실에 있는 루시를 찍은 것이었다. 루시가 카밀라와 통화하는 중에 찍은 사진이다. 수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고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승리의 미소로 반짝이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앙드레의 마지막 보수 인상안과 관련하여 와 협상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날 마침 카밀라가 소 란은 엄청나게 떨고 쥐꼬리만한 은전을 베푼 데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 안을 받아들였던 것 이다. 룰루. 그녀에게 이 사진들을 보여 주고 생각을 들어 보면 어떨까? 한 다리 건넌 견해를 말이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룰루? 앙드렙니다. 방금 막 돌아왔어요. 당신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 괜찮은 거예요?" "아무 일 없어요. 저녁 식사 어때요?" "오늘은 토요일이에요, 앙드레. 몰랐어요? 일하는 여자들이 데이트하고 놀러 나가는 날이 라구요." "가볍게 한잔하는 건 어때요? 중요한 일이어서 그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내가 저녁 식사 약속을 한 장소로 나을 수 있어요?" 20분 후 앙드레는 그곳에 도착하여 반쯤 들어찬 바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달 전 지나가다 보았던 이곳은 진열창에 먼지가 긴 자질구레한 용구와 죽은 파리들이 나뒹구는 다 쓰러져 가는 철물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첨단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또 하나의 소호 풍 레 스토랑으로 변모해 있었다. 최소한의 실내 장식, 빈틈없는 외관, 조금이라도 얼굴이 알려진 사람은 홀 반대편에서도 손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한껏 높여 놓은 조명. 무대 화장을 한 것으로 보아 연극 배우의 야심이 있는 것 같은 그 집 여주인은 스스럼없 는 매너에, 그 쪽 계통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요란하게 몸을 흔들며 걸었다. 메뉴엔 유행 에 걸맞는 야채 이름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띄었고 와인 목록에는 열두어 가지 브랜드의 광천 수가 섞여 있었다. 주인이 오만가지를 다 고려한 모양이니 이 식당이 적어도 3개월 동안이 나마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 말란 법도 없다. 모델 같은 여자를 에스코트한 사내족들이 쳐들어오기엔 아직 시간이 좀 일렀고, 일찌감치 저녁을 먹으러 온 사람들 몇 명만이 식사를 거의 끝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음식값과 식당 직원들의 눈초리에 겁을 먹어 완전히 기가 질린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카밀라가 터널 족 (맨해튼에 차로 들어올 때 통과하는 해저 터널을 말함-역주)이라고 부르는 뉴저지 주나 외 곽 지역에서 근사한 저녁을 기대하고 도심으로 들어왔음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뿐 아니라 팁을 주는 것도 아까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 어, 웨이터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냉대받고 경멸 어린 눈길을 받는다, 집으로 돌아갈 땐 아마 도 일종의 비뚤어진 만족감 속에서 서로 얘기할 것이다. 뉴욕이란 도시는 정말 몹쓸 데라고. 바 뒤쪽 거울 속으로 식당 입구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은 앙드레는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고 숱 많고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칼의 루시를 찾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가 도 착했을 때 그는 깜짝 놀라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늘 보아 오던 루시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 보였던 것이다. 윤기 나는 머리칼을 모조리 뒤로 넘겨 매끈하고 긴 목을 뽐내고 있었고, 화장으로 눈과 광대뼈 부위를 살짝 강조했으며, 양귓불엔 자그만 금단추 같은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그리 고 낮에 입는 수수한 옷차림과는 달리 값비싼 속옷처럼 보이는 짧은 검정색 실크 드레스 차 림이었다. 앙드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양볼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향기를 맡고 양손에 와닿 는 그녀의 어깨가 맨 살이라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보게 되어 기쁘긴 했지만 그 기쁨엔 질 투가 깃들여 있었다. "당신이 이렇게 차려 입고 나을 줄 알았더라면 나도 넥타이라도 매고 나오는 건데." 그가 양손을 내렸다. "별 말씀 다하시네요. 무엇을 드시고 싶어요?" 얼음은 빼고 럼주에 물만 타달라고 주문해 바텐더의 눈썹이 치켜올라가게 만든 루시는 앙 드레가 캅페라에서 본 일을 얘기하는 동안 천천히 술을 홀짝였다. 그녀에게 투명 양화를 넘 겨준 그는 그녀가 그것들을 뜯어보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조명의 유희를 지켜보았 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오늘 저녁 파트너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식당 안이 점차 부산해지더니 바에도 이제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자리를 잡고 술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듬성듬성 돋은 수염과 머리형을 비교하는 듯 슬쩍 슬쩍 곁눈질로 서로를 쳐다보곤 했다. 앙드레는 갑자기 자신의 차림새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말끔히 면도를 했나? "자, 어떻게 생각해요? 그 그림은 분명히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그림일 텐데," 루시는 주홍색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가락들을 움직여 투명 양화들을 바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앙드레는 그녀가 손톱을 칠한 모습도 처음 보았다. "글쎄요, 이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고 있는 거라면 밤에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왜 환 한 아침부터 그림을 들고 현관 앞을 왔다갔다 했겠어요?" 럼주를 한 모금 더 홀짝이고 난 그녀는 잔뜩 주름잡힌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 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 일이 그렇게 신경에 거슬리거든 드노이예 씨에게 전화해 봐요. 그가 있는 곳은 알고 있겠죠?" "그야 알아볼 순 있죠. 어쨌거나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드노이예 씨한테 전화해 봐야겠어요." 투명 양화들을 봉투에 넣은 후 그는 자신의 표정이 열정적으로 보이길 기대하며 루시를 쳐다보고 말했다. "토요일 밤 내내 혼자 보내야겠군. 내가 꿈꿔 오던 여자는 다른 녀석과 약속을 하고." 그는 땅이 꺼질 듯 길게 한숨을 뱉어 냈다. "피자나 먹고 텔레비전이나 보고 지저분한 접시들이나 늘어놓고 미친 척하고 머리를 감을 지도 모르겠네. 고양이나 길러 볼까?" 루시가 빙그레 웃었다. "정말 가슴 아픈 얘기군요." "도대체 당신과 만나는 그 행운아는 누구죠?" 그녀는 술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냥 남자죠, 뭐 ." "체육관에서 만났나요? 그렇군, 핵 잠수함 같은 사내들 틈에서 꽃핀 사랑. 헬스 기계 너머 로 눈길이 마주친다. 그의 근육질 가슴을 보는 순간 당신은 그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그가 또 한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한텐 왜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당신은 여기 붙어 있지를 않잖아요." 그녀는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앙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건 그렇고, 데이트 상대가 너무 늦어지네요. 그는 최고의 기회를 날려 버렸 군요. 우리 저쪽 구석 자리로 가서 근사한 식사나,,, ,,, ." 그때 짙은 애프터세이브 로션 냄새가 확 풍기는 바람에 옆을 돌아본 앙드레는, 검정 양복 에 위협적일 정도로 요란한 줄무늬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갑자기 루시와 자기 사이를 꽉 채우고 들어서 있음을 알았다, 그의 재킷 밑엔 분명히, 빨간 벨트 멜빵이 숨어 있으리라, 웬 기생오라비? 루시의 소개로 두 남자는 아무런 열의 없이 악수를 나누었고 마침내 앙드레가 바 좌석을 양보했다. "룰루, 드노이예 씨한테 전화해 보고 나서 내일 연락할게요. 그럼, 즐거운 만찬이 되길 빕 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미소 지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앙드레는 얼음이 덮여 베니어 합판처럼 미끌미끌해진 보도를 걸으 며 흔히 인용되는 통계치를 떠올렸다. '맨해튼에는 애인 없는 남자 한 명당 애인 없는 여자가 세 명씩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순간 그에겐 크게 위안이 되지 못하는 수치일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늘 다른 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계속하는 한 말이다. 루시 말이 맞다. 그는 루시와 줄무늬 셔츠가 저녁 식사하는 장면을 머리 에서 떨쳐 버리려고 애쓰면서 델리 점에 들러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잠시 후 앙드레의 집. 멘델스존을 연주하는 아이작 스턴(러시아 태생. 미국의 바이올리니 스트-역주)의 천상의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앙드레는 서랍 하나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오는 업무 관련 카드들을 집어던져 두곤 하는 서랍이었다. 드노이예의 카드는 크고 부티나는 프랑스 풍일 테니 다른 것들보다 큼직할 것이다. 과연 그랬다. 드노이예의 카 드를 뽑아 낸 그는 고전적 분위기의 까만 동판 인쇄 카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계절별로 두 개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에테(여름), 빌라 라 피네드, 06230생장 캅페라. 이 베르(겨울), 쿠퍼케이, 뉴프로비던스, 바하마 제도. 파리나 쿠르세벨이란 지명은 언급되지 않 은 걸로 보아 지금 스키를 즐기고 있는 중이 아니라면 드노이예은 아직 바하마에 있을 것이 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앙드레는 하품을 했다. 새벽 네 시였다. 그는 내일 전화해 보기로 했다 쿠퍼케이와 연결된 잡음 많은 전화선을 통해 들리는 드노이예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다정 스러웠다. 물론 그는 앙드레와 그가 찍은 멋진 사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많은 친구들 이 지난 번 그 기사를 보고 앙드레를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는 앙드레가 바하마에 와서 사 진 찍을 생각이 있는지 은근히 기대했다. 바하마 제도는 연중 이맘때, 특히 맨해튼의 날씨가 이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때쯤에 방문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드노이예는 터놓고 물어 보는 대신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렸 다. 앙드레가 말했다. "사실은, 프랑스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캅페라에 다녀왔거든요. 선생님 댁 에도 들렀구요." "안됐군요, 그때 우린 거기 없었어요. 겨울엔 그 집을 사용하지 않지요. 아, 물론 직접 확 인했겠지만 말입니다. 우린 4월이 될 때까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저, 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선생님네 집사를 봤습니다." "클로드 말인가요? 당연하죠. 우리가 없는 동안 집을 비우지 못하게 하거든요." 드노이예가 껄껄댔다. "제 얘긴. 그가 하는 행동이 어딘지 이상스러웠다는 뜻입니다만." "행동이 이상하다니요?" "선생님께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클로드와 또 한 남자가 선생님의 그림 하나 를, 세잔느 그림 말입니다. 그 그림을 밴에 옮겨 싣고 있었습니다. 배관사 소속의 차 였죠. 제가 대문 앞에서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전화에서 잠시 지직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드노이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랐다 기보다는 재미있다는 투의 음성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요, 선생. 배관사 밴? 당신은 대문 앞에 있었다는 거요? 거긴 집에서 꽤 먼 거린데. 뭘 잘못 본 것 같군요. 혹시 점심을 거하게 먹고 나 터라 뭘 잘못 본거 아 니요?" 그가 키득거렸다. "그땐 아침 나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진도 찍어 뒀구요. 사진들이 아주 선명해요. 하나도 빼먹지 않았죠." 앙드레가 길게 한숨지었다. 또 한번 침묵이 흘렀다. "그래요? 그렇다면 아마 클로드가 봄맞이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내가 전 화해 보리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가벼운 투로 덧붙였다. "그 보다도 그 사진들을 한 번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구려. 그걸 이리로 보내 주겠 소?" 즉석에서 가볍게 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았다. 지나가는 호기심 이상의 관심이 묻어 나는 음성이었다. 그러자 앙드레는 문득 사진을 보는 드노이예의 표정 이 어떨지 한번 보고 싶어졌다. 그가 말했다. "우편으로 보내는 것 보다 제가 직접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는 어느새 술술 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다음 주에 마이애미에 있는 한 주택을 둘러봐야 하거든요. 거긴 나소(바하마 제도의 주 도-역주)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죠." 드노이예가 그렇게 수고할 것까진 없다며 인사치레로 몇 마디 이의를 제기하고 난 후 곧 합의가 이루어졌다. 앙드레는 남은 오전 시간을 비행기 표 예약과 루시에게 연락해 보는 일 로 보냈다. 그녀는 외출하고 없었다. 줄무늬 셔츠가 그녀를 꼬드겨 북극같이 황량한 센트럴 공원에서 촌스럽게 일요일을 보내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어제 저녁식사 이후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 이 무슨 끔찍하고도 소모적인 상상인가. 정말이지 여행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 그는 여행 가방에 든 구겨진 내용물들을 세탁물 바구니에 탁탁 털어놓고 나서 바그너 음 악을 아주 크게 틀었다. 그러곤 바하마로 가져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5.드노이예 맨해튼의 날씨가 누그러지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온난전선이 도시로 기어들어 와 쌓인 눈을 잿빛 늪지로 바꿔 버렸고,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봉투 더미들이 햇살에 노출되면서 파 업을 일으킨 사람들의 가슴에 기쁨을 안겨 주었다. 이제 곧 쓰레기들이 지나가는 수 백만 행인들의 코에 대고 제 존재를 알리기 시작할 테고, 그렇게 되면 미화원 노조에선 악취라는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협상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스트 브로드웨이에 내린 앙드레는 눈이 녹으면서 엉망이 된 진창길을 가까스로 지나 간 신히 에이전시 사무실에 도착했다_ 루시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야무진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앙드레는 가방을 뒤져 지난번 에 찍은 성화 사진이 담긴 봉투를 꺼내 들고는 긴 의자에 가서 앉았다. "안 돼요." 루시의 표정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그건 안 돼요. 이번 주엔 바빠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어요. 이제 그만 끊어야 겠네요. 기 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네, 당신 전화번호는 갖고 있어요. 그래요, 당신두."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긴 숨을 불어 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드레가 씩 웃었다. "내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방해가 됐음이 분명하다고 느끼며 앙드레가 말했다. "그 줄무의 셔츠의 친구 아닌가요?" 그녀는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이려다 그만두었다. "어제 당신이 구석 자리로 가자고 할 때 따라갔어야 했는데. 정말이지 끔찍한 저녁이었어 요, 가능성이 있는 남잔 줄 알았지 뭐예요. 혹시 시가 바에 가봤어요?" 루시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앙드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대 가지 말아요." "연기가 너무 자욱했나요? "줄무의 셔츠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빨간 멜빵도?"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간색에, 줄무늬에, 꽃무늬, 모노그램(머리 글자를 짜맞추어 도안화한 것-역주), 증권 강 세 및 약세표, 칵테일 비법. 심지어 한 녀석은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프린트된 옷까지 입고 있지 뭐예요. 술을 마실 땐 모두들 겉옷을 벗어 두니까." 지난 밤 일을 생각하곤 그녀가 또 한 번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멜빵에 대해선 어떻게 알았죠?" "그게 없으면 월스트리트는 슬럼프에 빠질 테니까. 월스트리트의 거의 모든 바지가 흘러 내릴 거예요. 그 사람,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사람 맞죠?" "똑똑한 체하는 사진작가는 아니라고만 해두죠." 그녀는 작업대 쪽으로 가더니 사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게 프랑스에서 찍어 온 것들인가요?" "당신이 그걸 카밀라에게 전해 줄 수 있을지 물어 보려고 왔어요. 난 또 비행기 탈 일이 생겼거든요." "대단하시군요," 투명 양화들을 살펴보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멋져요. 정말 기품 있는 노부인이네 하얗지만 않으면 꼭 우리 월콧 할머니 같아요. 이게 그녀의 집인가요?" "낡은 방앗간이에요. 당신은 프랑스를 좋아할 것 같군요, 룰루. " "아름다워요." 투명 양화를 다시 봉투 속에 넣은 후 그녀는 쾌활하고 사무적인 업무 자세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또 어디로 간다는 거예요?" 앙드레는 바하마에 전화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얘기하는 도중에, 어쩌면 자신이 드노이예의 응답 태도에서 너무 큰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 다. 말을 잠간씩 끊고 머뭇거린 것이나 목소리의 톤만으로는 어떤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 더구나 액면 그대로 보자면 미심쩍은 얘긴 한마디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앙드레의 얘 기에 놀라거나 충격받거나 하는 기미도 없었다 사실 사진 얘기가 나오기 전까진 예의상 관 심을 보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앙드레는 뭔가가 삐걱대고 있다는 확신 이 들었다 아니,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루시를 납득시키기보다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싶었는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을 꾸미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앞으로 빼고 진 지한 표정이 되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긴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듣고 있던 루시는 그의 제스처가 점 차 활발해지자 이따금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얘기가 열기를 띠편서 그는 조금씩 프랑스인 본래의 모습을 내 비치고 있었다. 손으로 마침표를 찍어 보이기도 하고, 어구나 중요한 뉘앙 스를 강조할 때는 손가락으로 공중을 찌르거나 빙빙 돌리기도 했다. 마침내 얘기가 끝났을 때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프랑스인 그 자체였다. 어깨와 양눈썹을 동시에 치켜 올리고, 양팔꿈치는 허리께에 박혀 있었으며, 양손바닥은 팍 펴져 있고, 아랫입 술은 내밀고 ,자신의 결론은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발을 뺀 모 든 부위를 동원한 셈이었다. 소르본느 대학의 옛 스승이 계셨더라면 그를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이다. "난 그저 어디로 가나 물어 본 것뿐인데." 루시가 말했다. * * * 겨울철에 바하마 제도로 가는 사람들은 흔히 날씨를 기대하고 나선 사람들이어서 승객 대 부분이 공항 출구에서부터 이미 한여름 의상을 하고 있었다. 밀짚모자에 선글라스, 해변에서 볼 수 있는 화사한 복장, 심지어 유달리 성급하고 담대한 한두 쌍은 반바지 차림까지 하여 열대 지방 분위기를 잔뜩 내고 있었다, 입으로는 스킨 다 이빙, 열기 넘치는 나소의 나이트클럽들, 선정적인 이름의 해변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즐 거움 따위를 쉴새없이 교환하는 그들은, 즐기며 과음 과식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축제길 에 나선 군중들 같았다. 그러나 이제 껏시간 내로 그들 대부분은 풍토병과 같은 바카르디 (럼의 상품명-역주)와 햇볕에 탄 화상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라고 앙드레는 생각했다. 앙드레와 카리브해의 관계는 그다지 유쾌한 것이 못 됐다, 몇 년 전이던가, 뉴욕에서 첫 겨울을 맞은 그는 비행기로 잠깐 날아가면 하얀 백사장 해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근질긴 유 혹에 빠졌었다, 버진아일랜드의 섬 중 덜 유명한 곳에 가면 싼 비용으로 며칠 보내고 올 수 있다는 권유에 굴복한 그는 마침내 돈을 빌렸고 나흘 후 돌아 올 요량으로 떠났다. 그러나 알고 보니 물가는 터무니없이 비쌌고, 별 볼일 없는 음식은 너무 많이 튀겨 소화 도 안 되.됐으며, 그가 만난 몇 안 되는 토착민들은 진과 가십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후로도 업무차 카리브해의 진주라는 몇 군데 섬들에 다녀오긴 했지만 최초의 견해를 바꾸진 못했 다. 그는 작은 섬들파는 잘 맞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런 곳에 가기만 하면 밀실 공포증과 소 차 불량이 따라왔다. 조종사치 인사말이 끝나고 기내 방송에서 깡통 두드리는 듯한 칼립소 가락이 나오자 그는 유쾌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명감 속에서 좌석 벨트로 몸을 묶었다 조종사들은 어 쩌면 저렇게 한결같이 성량 좋고 자신만만하고 무한히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 직업을 가지려면 비행 기술과 완벽한 혈압 외에 그것도 필수조건인 것일까? 비행 교육 과정에 말씨와 연설에 관한 비결도 들어 있는 것일까? 비행기가 순항 고도로 접어들어 끝없이 푸르른 창공으로 들어서자 앙드레는 안전 벨트를 풀고 다리를 쭉 뻗어 보았다. 뉴욕의 흙탕물들을 휘젓고 다니느라 바지가 축축해져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 거기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울수 있을 터였다. * * * 나소 공항의 햇살이 눈을 시리게 했다. 물수건을 온몸에 두른 듯 느껴지는 오후의 열기 때문에 입고 있는 겨울 옷들이 가슴과 엉덩이에 착 달라붙어 끈적끈적하고 답답했다. 에어컨 시설이 된 택시를 잡는 데는 실패하고 낡은 시보레 한 대를 골라 잡은 그는 바람 을 쐬기 위해 열려진 창에 개처럼 얼굴을 매달고 쿠퍼케이까지 가야 했다. 드노이예는 그를 위해 클럽하우스에 방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어떤 손님이든 그 잘 꾸며지고 엄중하게 방비된 구역에 들어가려면 먼저 몇 가지 자잘한 절차들을 거쳐야 했 다. 입구를 카로막은 녹색과 횐색 줄무의의 장애물 때문에 차를 멈춰 세운 택시 기사는 경적 을 울려댔다. 군인 제복에 뾰족한 모자, 거울같이 반들반들한 장화 차림을 한 건장한 사내 하나가 내키지 않는 듯 어슬렁거리며 수위실에서 나와 택시 쪽으로 다가왔다. 그와 택시 기 사는 오랜 친구처럼 재잘거렸다. 이런 좋은 날, 시간은 많고 딱히 갈 네는 없는 친구들처럼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은 최근의 신변 잡사를 늘어놓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마침내 제복의 사내가 차 뒷좌석에 늘어져 있는 앙드레를 발견하고는 누굴 만나러 왔느냐고 물었다. 느릿느릿 수 위실로 되돌아간 그는 본부에 확인 전화를 넣었다 얘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장애물이 걷혀졌다, 택시가 또 한번 삑 경적을 울리며 안으로 들어섰고, 앙드레는 천만 달 러 이상의 재력과 베이 가의 잘 나가는 변호사들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생그릴라(히말라야에 있다는 지상 낙원-역주)로 입장했다. 처음엔 키가 15미터는 됨직한 코코넛 나무들이 늘어선 널따란 도로가 똑바로 이어지더니 흰색이나 분홍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저택들로 연결된 수많은 내부 차도로 접어들자 커브길 로 변했다. 선명한 색상의 표지판들이 부겐빌레아(분꽃과의 열대성 덩굴 식물-역주)사이사 이에 세워져 각 저택의 명칭을 신중하게 표시해 주고 있었는데, 장미, 산호, 모자반, 야자(당 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카수아비나 등 한결같이 작은 시골 별장 같은 소박함을 가장한 이름 들이었다. 저택마다 딸린 정원들은 단아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햇볕을 막기 위 해 덧문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앙드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과 캅페라에 있는 드노이예의 또 다른 은신처를 비교 하고 있었다. 심어져 있는 식물도 다르고 열기와 공기의 질, 건축물클도 달랐지만 한 가지 뚜렷한 유사성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바로 고요하고 나른한 부자 동네 분위기, 바깥 세상과 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금지 구역인 것 이다. 에메랄드 빛 골프 코스 끝자락으로 접어들자 도로가 다시 휘어졌다. 그곳은 아무도 걸어 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홀에서 볼로, 한 번씩 샷을 날린 후에 옮겨 갈 수 있도록 쿠퍼케이 전용색인 녹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전동 카트가 구비되어 있었다. 카트에 탄 골퍼들이 내려 한바탕 땅을 패고 나서 다시 타고 가는 것이다. 신체의 노고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장 치인 셈이다. 클럽하우스 입구 정면을 널따랗게 차지한 돌계단까지 온 택시 기사가 팁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그가 덮칠 듯이 앙드레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었지만 어 느새 등장한 클럽 보이가 이번엔 그의 손에서 가방을 낚아챘다. 녹색과 흰색의 줄무늬 조끼 를 입은 거인 같은 클럽 보이가 반짝이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였다. 앙드레는 손 벌리고 기다리는 기사에게 땀에 절어 축축해진 지폐를 쥐어준 뒤 시원하고 천장이 높은 로비로 들 어갔다. 보이의 안내로 풀장이 내려다보이는 방을 둘러보고 난 그는 이번에도 축축한 돈을 몇 푼 축내야 했다, 그는 짐을 풀기 전에 옷부터 벗어 내고 5분 정도 차가운 샤워기 밑에 서 있다 가 알몸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돌바닥을 가로질러 창가로 가서 바깥을 구경했다. 길다란 직사각형의 터키옥 빛 풀은 탕 비어 있었지만, 한 쪽 모서리에 동료 투숙객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붙잡으려고 오일을 바르고 세즈 롱느(길다란 의자-역주)에 꼼짝 않고 한 줄로 드러누워 있는 게 보였다 가죽 같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잘 먹어 피둥피둥한 중년 남자들, 풀장 장신구 외에는 거의 걸치지 않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젊고 날씬했다. 아이들 이나 소음 따위, 생활의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하이비스더스(열대산 아욱과 식물-역주) 그릇에 크림색 봉투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손의 물기를 닦고 봉투를 열어 보았다. 드노이예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자는 초대장이었는데 클럽하우스에서 그들이 머무는 저택까지, 멋지게 손질된 400야드에 이르는 정글 속을 무사히 지나도록 자그만 지도와 함께 안내의 말로 끝맺고 있었다. 그는 몸에 두른 타월을 벗어 내고 침대 위에 가방 속 내용물을 다 털어 냈다. 드노이예는 열대 지방에서 저녁 식사할 때도 하얀 턱시도를 입고 나타나는 사람일까? 자 신의 손님도 그런 복장으로 나오길 기대할까? 앙드레는 옷 뭉치 속에서 하얀 리넨 셔츠와 카키색 바지를 골라 욕실에 갖다 걸고 다시 샤워기를 틀었다. 여행이 남긴 처참한 자취를 깨끗이 씻어 낼 셈이었다. 클럽하우스 현관의 프런트 보이는 드노이예의 저택까지 연결되는 골프용 수레를 타고 가 라며 앙드레를 설득하려다가 거절당하자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쿠퍼케이에선 아무도 걸어가 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밤에는. 그러나 얼마나 멋진 밤인가. 따뜻한 검정 벨벳 같은 어둠, 낫 모양의 달, 윙크하듯 깜박이 는 별들,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도는 가벼운 미풍, 발 밑에는 빽빽하고 탄력 있는 촉감 의 거친 열대성 풀, 관목 숲에서 떠들썩하게 윙윙대는 보이지 않는 곤충들의 그 기분좋은 소리들 앙드레는 한 순간 특별난 행복감에 젖어 들었고, 겨울엔 카리브해 사람들이 목청을 높일 만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노이예가 '라 메종 블랑쉬(하얀 집)'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평범한 별장에서 저택으로 승 격된 그 집은 이웃집들과 마찬가지로 당당하고 나무랄 데 하나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 준 위 엄 있는 집사 역시도 그랬다. 앙드레는 널따란 중앙홀 복도를 지나 저댁 길이만큼 뻗은 야 외 테라스로 안내되었다. 테라스에서 보니 불 밝혀진 오솔길 하나가 수영장을 지나 야자 숲을 통과하여 부잔교(부 두에서 선박에 걸쳐 놓아 사람들이 오르내리게 한 다리-역주)까지 이어졌다. 그 너머 어둠 속에서는 물결 찰싹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므시유 켈리(켈리 씨)! 봉수와, 봉수와(안녕하세요). 쿠퍼게이에 온 걸 환영하오." 드노이예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산호 판석이 깔린 테라스를 가로질러 왔다. 그는 슬랙 스에 반팔 셔츠, 운동화를 신은 편안한 차림이어서 앙드레로선 반가웠다. 그가 유복한 사람 임을 보여 주는 건 햇볕에 타 가무잡잡한 손목에 채워진 큼지막한 큰 금시계(수심 150미터 에서도 완전 방수되는 매우 실용적인 종류였다)뿐이었다, 그의 살결은 건강미로 반짝였고 주름이 지긴 했어도 여전히 잘생긴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퍼져 있었다. 그는 앙드레를 나지막한 유리 탁자 주위로 등나무 의자들이 쭉 놓인 쪽으로 데려갔다. "내 아내, 카트린느, 기억하시오?" "물론입니다." 앙드레는 보석이 달린 가느다란 손을 잡고 흔들었다. 드노이예 부인은 나이가 들었을 뿐 딸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연푸른 실크로 된 수수한 시프트 드레스 차림에, 금발을 뒤로 넘겨 쪽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우아했고, 잘생긴 뼈대에 약간 오만하게 느껴지는 얼굴에서 몇 세대를 이어온 훌륭한 가정 교육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앉으세요, 켈리 씨. 뭘로 드시겠어요?" 집사가 와인을 가져왔다, 드노이예가 말했다. "우리 집사 페르낭 베르길리스요. 마음에 드셨으면 하오." 그렇게 말하고는 미안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캘리포니아 산 백포도주는 우리한텐 영 맞지가 않아서요. 오랜 입맛을 바꾸기란 쉽지 않 은 것 같소." 그가 자기 잔을 들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 반갑소."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눈길이 앙드레가 탁자 위에 얹어 놓은 봉투에 잠시 머물더니 이내 달아났다. 마치 담뱃갑 정도로 여길 뿐 그 이상의 관심은 전혀 없는 물건이란 듯한 태도였 다. 앙드레는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저도 이웃이 됐군요," 그러고 나서 드노이예 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님은 잘 계시겠죠? "마리 로르요?" 부인은 인상을 쓰는 것처럼 잠시 입이 뿌루퉁해졌다. "그 앤 여기 와 있으면 스키를 타고 싶어하고, 스키를 타러 가서는 해변에 가고 싶어하죠. 우리가 애를 버려 놓은 거예요. 아니, 이이가 애를 망친 거죠." 그녀는 애정과 가벼운 힐난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럼 또 어때? 난 재미있기만 한데." 드노이예가 앙드라를 돌아보았다. "사실 선생은 그 앨 아슬아슬하게 놓친 거요. 어제 파리로 돌아갔거든요. 아마 캅페라에서 주말을 보낼 겁니다." 그는 아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사실 그 앨 망치는 건 내가 아니라 클로드라구." 클로드 얘기가 나오자 드노이예는 앙드레가 온 동기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앞 으로 기울이고 양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고겟짓으로 탁자 위에 놓인 봉투를 가리켰다. "이게 선생이 찍었다는 사진들이오?" 너무도 무심해 보이는 고갯짓이었고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러 나 그 어느것도 완벽하진 못했다. 적어도 앙드레가 보기엔 그랬다. "아, 네. 바로 이겁니다. 보여 드릴 만한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앙드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드노이예는 양손을 들고 공손하게 부인하는 자세를 취했 다. "그래도 선생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잖소." 그가 손을 뻗어 봉투를 집었다. "봐도 되겠소?" 그때 집사가 터벅터벅 집에서 나오더니 드노이예 부인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보면 안 돼요, 세리(여보)? 수플레(달걀 흰자에 우유를 섞어 구운 요리-역주)가 다 식을 것 같은데." 비록 지리적으로는 다른 곳에 와 있어도 프랑스식 우선 순위를 따르는 전형적인 프랑스 집안이었다. 수플레가 볼품없이 쭈그러든 팬케이크 꼴로 망쳐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인 드노이예 부인은 허둥지둥 남자들을 식당으로 몰아갔다. 식탁에 앉은 앙드레는 자신 의 봉투를 드노이예가 들고 왔음을 알았다. 식당은 세 사람이 앉아서 먹기엔 너무나 크고 웅대했다. 그들은 열두 명의 인원이 넉넉하 게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 한 귀퉁이에 둘러앉았다. 앙드레의 머릿속에 드노이예 부부만 달랑 앉아 식사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식탁 양끝에 한 사람씩 앉아 있으면 소금, 후추, 심지어 대화까지 집사가 중간에서 전달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지내면 정말 즐거우실 것 같군요, 그렇죠?" 앙드레가 드노이예 부인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안면을 약간 찡그려 보였다. "재미 따윈 기대도 안 해요. 여기 사람들은 모두 골프 아니면 간통, 소득세 얘기나 늘어놓 죠. 우린 차라리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지내길 좋아한답니다." 집사가 품질 검사를 받기 위해 황금색의 둥그런 수플레를 내밀어 보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켈리 씨도 골프를 치시나요? 여기 코스는 최상이라고들 하던데," "아닙니다. 골프는 한 번도 쳐보지 않았어요. 만일 제가 여기서 살게 되면 이곳 사람들의 분위기를 망쳐 놓게 되겠군요." 앙드레는 자기 몫의 수플레 꼭대기를 무너뜨리고 허브 향을 한 모금 들이마신 다음 까만 타페나드(양각초 꽃봉오리와 까만 올리브, 멸치 가루를 넣고 올리브 기름을 뿌려서 먹는 요 리-역주)를 한 스푼 떠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간통 방면으로도 별로 능한 편이 못 되고요." 드노이예 부인은 빙그레 웃었다. 무언가를 사진으로 찍어 왔다는 이 젊은이는 남다른 시 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머 감각까지 있다고 부인은 생각했다. 마리 로르가 없어서 정말이 지 유감이었다. "보나페티(많이 드세요)." 향기로우면서도 담백하기 그지없는 수플레에 대한 성의 표시로 그것을 먹는 동안엔 대화 가 없었다 이어 와인이 한잔씩 더 나오자 드노이예가 술잔을 기울이며 프랑스 경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 전반적으로 암울한 전망을 피력하더니 이어 앙드레의 일에 관해, 뉴욕 생활과 파리 생활의 차이에 관해, 자주 찾는 식당들에 관해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몇 가지 물어 왔 다. 꼬치꼬치 캐묻거나 사생활을 지나치게 들추어내는 데까진 발전하지 않되, 만찬에 참석한 낯선 사람들을 응집시켜 주는 사교적 접착제쯤 되는 가볍고도 진부한 이야깃거리들이었다 그 사이에 드노이예의 눈길이 자기 접시 옆에 놓인 봉투 쪽으로 자주 가곤 했지만 사진에 관한 얘기는 일절 없었다. 주요리는 생선이었다. 그러나 카리브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죽재료에 질식당한 생선이 아니라 호밀빵 가루를 입혀 살짝 튀기고 신선한 라임 조각 몇 개를 얹어 장식한 것이었는 데, 입에서 살살 녹는 폼므 알리메트(감자 칩의 일종-역주)와 함께 나왔다. 두 가지 다 음식 평가서에서 별을 네 개 주고도 상위 목록에 올릴 만한 맛이라고 생각한 앙드레는 드노이예 부인의 요리사를 칭찬했다. "어쨌거나 바하마 요리계에도 희망은 있어 보이는군요." 드노이예 부인이 자신의 와인 잔 옆에 놓인 자그만 크리스털 종을 딸랑거려 집사를 불렀 다. "칭찬해 주시니 고맙군요," 그녀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는데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세월이 지워지 면서 자기 딸과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요리사는 마르티니크(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 섬-역주) 출신이랍니다." 앙드레는 디저트를 먹는 대신 와인 한잔을 마지막으로 마셨다, 거실에 가서 커피나 들자 고 드노이예가 제안했다. 거실 역시 군중 집회를 열어도 될 만한 크기였다. 그들은 천장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 밑, 대리석 바닥의 한가운데 섬처럼 달랑 놓인 안락 의자에 자리잡 고 앉았다. 드노이예가 말했다. "자, 우리 집 늙은 악당 클로드가 뭘 어쨌다는 건지 어디 한번 봅시다." 6.피습 루돌프 홀츠는 월요일 밤 스케줄을 벌써 몇 년째 엄격하게 지켜왔다. 사업 관련 약속은 오후 여섯 시 정각까지 모두 끝낸다. 사교적인 초청 자리는 만들지도 않고 응하지도 않는다. 월요일 저녁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고 매주 정확하게 똑같은 순서로 이어졌다. 머레이 식당에서 주문해 온 훈제 연어와 몽라세(프랑스 부르군디산 백포도주-역주) 반 병 으로(메뉴가 바뀌는 일도 없었다) 일찌감치 가벼운 저녁을 끝낸 홀츠는 최근 그림 판매 카 탈로그와 화랑 공시표, 현재 자신의 고객 및 유망 고객 목록 따위를 끌어 모아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침대에서 베개에 몸을 기대고 앞일을 구상하곤 했다. 이제 이러한 월요일 저녁은 그가 일가는 한 주의 대단히 귀중한 일부가 되어 버렸고, 이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그 동안 수익성 높은 성공작도 여러 건 고안해 냈다. 지극 히 합법적인 건수도 일부 있었지만 말이다. 옆에는 카밀라가 까만 새틴 안대로 빛을 가리고 이미 잠들어 있었다. 벅스 카운티에서 정 신나간 친구들 몇 명과 주말을 보내고 왔으니 뻗을 만도 했다. 그녀는 나직하고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코까지 골아 한때 홀츠가 사랑해 주었던 퍼그 견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는 가끔씩 건성으로 그녀를 쓰다듬으며 카탈로그들을 훑어 나가 다가 특별한 그림이 나오면 옆에 적당한 사람 이름을 메모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일 가운데서도 각 예술 작품이 어울릴 만한 집을 찾아주는 일을 대단히 즐겼 으며 자선 차원에서 봉사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아무리 크다 한들, 거래 가 끝나고 일곱 자리 수의 수표를 은행에 예치할 때 느끼는 그 깊은 만족감과는 당연히 비 교될 수 없었다. 전화 벨이 울린 것은, 그가 작지만 매혹적인 코로(프랑스의 화가 -역주)의 작품 하나를 들여다보며 오노즈카의 도쿄 컬렉션에 끼워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카밀라 가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더니 이불을 뒤집어 썼다. 홀츠는 침대 옆에 놓인 시계를 힐끔 보 았다. 열 한 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홀츠 씨? 나 베르나르 드노이예요." 홀츠는 또 한 번 시계를 확인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찍도 일어나셨군요, 드노이예 씨. 거긴 지금 이른 새벽일 텐데요. " "아니, 여긴 바하마요. 홀츠 씨, 나는 지금 아주 언짢은 사진을 보고 있는 참이오. 지난 주 에 캅페라의 내 집 바깥에서 찍은 사진들이오. 세잔느요, 홀츠 씨. 그 세잔느 그림이 배관공 의 밴에 실려 나가는 장면이오." 홀츠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키며 음성을 높였다. "뭐라구요?" 카밀라가 끙끙대며 베개로 머리를 덮었다. "누가 찍었습니까? 혹시 파리마치(프랑스의 일간지-역주)의 그 악당들 아닌가요?" "아니오, 사진은 지금 내 손에 있소. 사진작가가 내게 주고 갔습니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켈리란 사람이오. 작년에 우리 집에 관해 대형 기사를 실었던 그 잡지 말이오. 라든가 뭐든가?" "그런 사람 이름은 못 들어 봤는데." 카밀라의 신음이 계속됐다. 홀츠는 그녀의 머리 위에 베개를 하나 더 얹어 주었다. "켈.리라,,, ,,, 그가 돈을 원하던가요?" 잠시 머뭇거린 끝에 드노이예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진 않소. 복사판을 떠놨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는 내일 뉴욕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니까 또 볼 일은 없을 것 같소. 어쨌거나,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돼 가는 거 요? 나는 당신이 그 그림을 취리히로 옮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소. 우리가 합의한 게 그 거 아니오. 취리히로 가서 홍콩으로, 거기서 다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소." 홀츠는 지금까지 만만찮은 고객을 많이 상대해 왔다. 이번 건처럼 변칙적인 거래의 경우 대부분 때에 따라 몇 시간, 며칠, 혹은 몇 주 의 연옥 기간이 있곤 했다. 완전 합의를 이루 기 위해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기간인 것이다. 홀츠는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써 오는 부담이 실제 자신에게 닥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어떤 결정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수반되는 위험이 있어 자신의 운명이나 돈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베개에 몸을 묻고 제일 편한 자세를 취했다. 시중에 나도는 사진들이 더 없다면 걱정할 건 전혀 없다고 그는 드노이예에게 말했다 그 리고 옆에서 자고 있는 여인을 힐끔 쳐다보며 덧붙였다. 게다가 자신은 자세한 내막을 확인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므로 현재로선 뭐라고 얘기할 수 없다며, 질문하려 드는 드노이예의 말을 끊으며 계속 얘기했다. 클로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충복이니만큼 확실하게 입을 다물 것이다 그리고 그 밴은 단순한 위장물일 뿐이다. 밴 기사는 사실 배관공이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사람으로서 각종 귀한 품목을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수송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안 내인이다. 그런 평범한 기능공의 지저분하고 낡은 르노 차 안에 귀한 그림이 들어 있으리라 고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드노이예 당신은 세잔느의 그림이 지금 신중하고도 안전하게 유럽을 빠져 나가고 있는 걸로 믿어도 좋다. 흘츠의 말은 이런 것이었 다. 홀츠는 그림이 잠깐 파리를 경유하게 될 떠란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드노이예가 상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선생,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그 일은 사소한 불편거리에 불과합니다. 우연 의 일치죠. 좋은 햇살이나 즐기시고 나머진 나한테 맡겨 주시면 됩니다." 드노이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용한 바하마의 어둠을 내다보았다, 그가 이번에 홀츠 같 은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된 건 정직하고 질서 정연한 그의 삶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로서, 그다지 유쾌한 경험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뭔가 취약하고 위험스럽고 통제력이 부족한 듯하 고 초조한 느낌이 들었으며 어떤 땐 죄의식 같은 것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너무 깊이 연루되어 버렸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냑을 한잔 따랐다. 홀츠는 혹시 다른 사진들이 나도는 게 있는지 추적해 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진을 가져온 그 젊은이가 속이는 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완벽한 우연의 일치를 두고 드노이예 자신이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는 건지 도 몰랐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일이 일단락 되기 전 까진 마음을 놓을 수 없 을 터였다. 한편 홀츠는,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상태였다. 만일 드노이예 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에겐 내일까지밖에 시간이 없다, 그는 몸을 굽혀 카밀라의 머리에 얹힌 베개들을 치우고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카밀라가 안대를 위로 치켜 올렸다. 그녀가 흐릿한 한 쪽 눈을 뜨자 가늘게 쭉 찢어진 눈 매가 드러났다. 습관처럼 하고 다니던 화장을 지우고 난 맨 얼굴은 아주 낯설어 보였다. "지금은 안 돼, 자기 난 피곤하단 말이에요. 내일 아침이라면 몰라도, 체육관 가기 전에 말이야." 키 작은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홀츠는 왕성한 성욕으로 단신의 결점을 보상하려 들곤 했 는데 카밀라로선 그게 다소 성가실 때가 있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여자들한텐 이따금 그냥 자는 밤도 필요한 거예요, 자기. 정말이라니까." 홀츠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이 고용하고 있는 그 사진사의 주소를 알아야만 해. 켈리 말이l야." 카밀라가 이불을 끌어올려 가슴을 가리면서 어렵사리 일어나 앉았다. "뭐라구요7나중에 하면 안 돼요? 루디, 당신도 알잖아요. 난 지금 잠을 자지 않으면 몸이 완전히 간다구요. 게다가 내일은,,,,,-" "중요한 일이야 뭔가가 잘못됐어 ." 그의 굳은 입술을 본 그녀는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이따금 다소 잔혹한 야만인처럼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카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가지러 가다가 루이 15세 서랍장에 발가락이 채였다. 한 쪽 다리로 콩콩 뛰며 볼썽 사나운 꼴로 침대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주소록을 꺼내 K란을 펼쳤다. "발가락이 깨진 것 같아 틀림없어요. 저 빌어먹을 서랍장," 그녀는 주소록을 홀츠에게 건네 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도 알면 안 돼요?" "이봐, 당신은 아마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될 거야, 일단 전화나 하게 해줘." 이제 완전히 잠이 달아난 데다가 호기심까지 발동한 카밀라는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머리칼을 추스리며 홀츠와 베니란 자의 전화 통화 끝자락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 다가 문득 차라리 듣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_ 정말이지 오늘 밤만은 너절한 온갖 내 막을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안대를 착용하고 움푹 패인 베개들 속으로 뛰 어들어 자는 척해 버렸다. 그러나 잠들긴 어려웠다. 그녀는 대화가 다 끝나 간다는 것을 어렴풋한 잠결에 알아차렸 다. 갑자기 부드럽고도 끈덕지게 몸을 더듬는 홀츠의 손길이 느껴졌고 그가 그녀를 자기 쪽 으로 돌려 뉘었다. 그녀는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역시 좀 작았다, 누워 있을 때 도 말이다. 그의 손길은 끈덕졌다. 피해 갈 수 없는 욕구에 굴복한 카밀라는 한숨을 지으며 다친 발 가락이 홀츠의 허우적대는 발길과 부딪히지 않도록 그 쪽 발을 될 수 있는 한 멀리 떼어놓 았다. * * * 앙드레가 택시 백미러로 보니 쿠퍼케이를 평범한 무리의 침략으로부터 막아 주는 줄무늬 장애물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완벽하게 화창한 아침이었다 열대성 초록을 배경으 로 꽃들의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곳 거주자들이 떨어진 이파리나 시든 꽃송이 같은 참상을 보지 않도록 마당 관리인들이 쓸고 잘라 내고 있었다. 그는 좌석에 몸을 묻고 실망 감을 추스렸다. 24시간을 괜히 낭비한 기분이었다. 드노이예는 더할 수 없이 잘해 주었고 어제 저녁도 대체로 편안하게 보냈다. 그러나 나진 을 보고 난 그의 반응은 앙드레가 기대했던 만큼의 놀라움과 관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세잔느보다는 자기 네 집의 정원 상태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딱 한번 속내를 드러낸 순 간이 있긴 했었다. 사진 속의 밴을 본 그가 느닷없이 한차례 이맛살을 찌푸렸던 것이다. 그 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고 금세 원래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진 속 배관공은 클로드의 오래된 친구로서 종종 집안 심부름을 해주곤 한다고 그가 설 명해 주었다. 세잔느 그림은 이따금 칸느에서 화랑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빌려 주곤 하는데 아마 이번에도 그 경우인 것 같다고 드노이예는 말했다, 그러나 그림을 이처럼 부주의하게 수송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클로드와 꼭 한 번 재론해 봐야겠다고 덧붙였다. 앙드레가 관심 을 가져 준 데 대한 사례로 클럽하우스의 숙박비는 자기가 내겠노라고 우겼다. 그러나 어쨌 든 어제 저녁은 아니 이번 여행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 오후 뉴욕에 도착한 그는 작으나마 위안 거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아파트 단지 주변 보도가 빙판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파트로 이어진 계 단을 올라가던 그는 기운을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루시와의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문 을 열고 들어간 그는 곧장 전화기 쪽으로 향했다. 그가 주위가 온통 난장판으로 변해 있음 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뚝 멈춘 것은 거실로 반쯤 들어가서였다. 세상에, 상자란 상자는 모조리 꺼내져 열려 있었다. 거칠고 성난 손들이 집어 던진 듯 책, 사진, 옷가지, 여행 기념품들이 바닥이며 벽 쪽에 뒤죽박죽 쌓인 물건들 속에 흩어져 있었 다. 작업대 쪽으로 가보니 팍삭 깨진 유리판이 발에 밟혔다. 투명 양화를 연도별, 장소별로 구 분하여 보관해 두는 파일함들도 모조리 텅 빈 채 열려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장비 보관용 벽장도, 그가 고쳐 쓰려고 모아 둔 접는 삼각대와 낡든 플레이트 카메라를 제외한 모든 것 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나머지 카메라들과 렌즈, 필터, 조명 장치, 그리고 그런 것들을 넣고 다니는 맞춤 가방들, 모조리 사라졌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본 그는 거기 있던 필름들까지 한 통도 남지 않고 사라졌음 을 알았지만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탈탈 털린 집만이 뉴욕으로의 귀환을 반겨 준 셈이다. 침실에는 열린 서랍들이 축 늘어져 있고, 벽장은 텅 비고, 옷가지들은 아무데나 던져져 있 고, 매트리스는 침대에서 끌어내려져 있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분노 감이나 침해당했다는 인식은 나중에야 다가왔다. 잔해처럼 널린 물건들을 헤치고 작업대로 간 그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몇 눈데 전화들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경찰에 전화했다. 공손하게 받긴 했지만 지겨운 모양이었다. 이 도시에서 이런 일은 지난 주말부터 발생한 수백 건에 달하는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대개 범죄 목록의 첫 머리는 살인, 강간, 약물과용 사건들이 차지하고, 게다가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범죄들이 기 승을 부리는 시즌이 시작된 관계로 가벼운 절도 사건쯤은 맨 끄트머리를 차지하게 마련이 다. 만일 자세한 내막을 관할서에 신고한다면 절도 건으로 공식 기록될 것이다. 그래봤자 그 파일은, 아주 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게 될 컷이다. 앙드레는 잠금 장치를 바꿔 보라는 충고를 받았다. 보험회사에 전화했더니 그들은 즉각 방어태세로 나왔다. 전문가답게 미심쩍은 태도를 견 지하며 속사포를 쏘듯이 질문을 해댔다. 문과 창문들은 모두 잠가 두었는가? 경보 장치는 작동시켰는가? 필요한 모든 서류들 즉 영수증, 구매 날짜, 일련 번호, 장비 교환 견적서 등 은 보관하고 있는가? 그러한 결정적인 자료들이 없다면 어떤 조치도 취해 줄 수 없다는 얘 기였다, 이번에도 앙드레는 잠금 장치를 교환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수화기를 내려놓던 그는 문득 이 보험 회사의 광고 슬로건을 떠올렸다. 방송 광고 끝머리마다 달콤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가 전해 주던 말, '어려울 때 친구 같은 존재이고 싶습니다' . 루시에게 전화했을 때야 비로소 약간의 동정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무실 일이 끝 나는 대로 오겠다고 말했다. 놀라움과 분노로 굳어진 얼굴로 난장판 같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거실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니스에서 사다 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루 종일 본 것들 중에 최고의 장면이었고 그를 미소짓게끔 만들었다. "모자가 잘 어울려요, 룰루. 자전거하고 양파 한 줄도 사다 줘야겠는걸, 모자와 잘 맞을 것 같은데 " 그녀가 모자를 벗고 머리채를 흔들었다. "그렇게 용감한 척 허풍떨 거라면 저녁 외식에 데리고 나가지 않을 거예요. 맙소사, 엉망 진창이군요." 두 사람은 침실 치우기부터 시작했다. 루시는 재빠르고도 능숙하게 움직였다 옷가지들을 개고, 걸고,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앙드레가 스웨터 하나를 가지고 쩔쩔매는 것을 본 그녀 는 그를 거실로 내보냈다, 최소한 빗자루 사용법 정도는 포함된 가정 교육을 받았길 기대하 면서. 앙드레는 별 생각 없이 보브 말리의 CD를 찾아내서 틀었다. 그런데 스테레오에서 뒤돌아 서기 직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스테레오가 남아 있다. 왜 다른 것들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어서 부서진 유리 파편을 쓸어 담기 시작한 그는 가져 간 게 뭔지, 아니 가져 가지 않 은 게 뭔지 꼼꼼히 따져보았다. 스테레오, 텔레비전, 침대 머리맡에 둔 단파 라디오, 무선 전 화기, 모두 그대로 있다. 심지어 은으로 된 아르 누보 사진틀 여섯 개도 평소 있던 그 자리, 선반 밑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도둑들이 전문 사진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놈들이 아니라 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놈들이 원한 게 사진 장비였다면 투명 양화들은 왜 가져갔을까? 냉장고에 넣어 둔 필름 뭉치들은 왜? 집안을 모조리 뒤져 놓은 건 또 왜인가? 놈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 일까? 두 시간이 지나자 집안에도 질서 비슷한 것이 다시 갖춰지기 시작했지만 루시는 손길을 늦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장하거나 목마른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앙드레는 두 가 지 욕구가 다 들면서 집안 치우는 일에서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책 무더기를 턱까지 닿게 안고 위태위태하게 방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그가 막아섰다. "됐어요, 룰루. 이만하면-충분해요." 그는 그녀에게서 책을 받아 내려놓았다, "아까 저녁이 어쩌구 했잖아요. 혹시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멈추지 못하는 거 아니에요?" 루시가 양손을 허리께에 얹고 몸을 뒤로 쭉 폈다. "하지만 밤새도록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 파출부 쓰세요?" "네?" "아녜요, 그런 건 안 하실 것 같군요. 내가 내일 사람을 하나 보내 드릴게요. 물청소로 싹 씻어 내야 집안 꼴이 될 것 같아요. 창들도 그렇고요. 저 창문들 한 번이라도 닦아 본 적 있 어요? 그리고 앙드레, 아무리 냉장도 안이라지만 요구르트도 결국 상한다구요. 색이 변하면 싹 내다 버려야 하는 거예요, 알겠죠?" 앙드레는 갑자기 사생활의 일부가 새로운 감독관 밑에 들어간 것 같은 기이하면서도 유쾌 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루시가 코트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베레모를 집어 든 그녀가 실내를 쭉 둘러보았다. "여긴 거울도 없네요." 베레모를 머리에 쓴 그녀는 모자를 한 쪽 눈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이다가 그가 웃고 있 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에선 이렇게들 쓴다던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사람들 쪽이 쓰는 법을 바꿔야겠군요." 루시는 자신이 자주 찾는다는, 듀에인 가에 위치한 소위 시골풍에 자그맣고 따뜻하고 소 란스런 한 식당으로 그를 데려갔다. 마운스 게이 럼주에 레드 스트라이프 맥주가 나오는, 자 메이카인 주방장과 이탈리아인 아내가 하는 식당이었다. 짧은 메뉴에도 그 두 지역의 결합 이 반영되어 있었다. 루시는 럼주를 홀짝였다. "그런 일을 당하다니 안됐군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앙드레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자신의 유리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놈들은 5분이면 거리에 내다 팔 수 있을 물건들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오직 카메라 들만, 카메라와 내가 찍어 놓은 것들만 가져갔어요. 내 작업에 관심이 있다 이거죠. 그들이 원하는 건 그거였어요. 그리고 놈들은 프로였어요. 문을 부수지도 않았고, 경보 장치를 차단 하는 법도 알고 있었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프로들이라고요, 룰루. 그런데 왜 날 택했을까? 내겐 고작해야 집이며 가구, 그림, 사진들 밖에 없는데. <<인콰이어러>>지에 돈 받고 팔아 넘길 만한 것들도 아니잖아요. 알몸 사진 이라곤 그림 속 누드 들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주방장의 아내가 주문을 받으려고 탁자들 사이로 풍만한 몸집을 비집고 다가왔다. 그녀는 루시가 썰어 말린 닭고기를 주문하자 자기 손끝에다 입을 맞춰 보였고, 앙드레가 해물 리소 토(이태리식 쌀밥 요리-역주)를 선택하자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은 제가 골라 드릴까요? 맛이 기가 막힌 자메이카식 오르비에토(묘약)가 있는데." 그녀는 한바탕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난 뒤에 부여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가 버렸다. 루시가 빙그레 웃었다. "프랑스 사람 티 내듯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 짓지 말아요. 안젤리카도 많이 안다구요. 자, 조금 과거로 돌아가서 어제 여행은 어땠는지 얘기해 보세요." 앙드레는 사실 그대로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루시의 반응을 알고 싶어 그녀의 얼굴을 응시 하며 쭉 이야기했다. 그녀는 남의 얘기를 들을 때 진지하게 완전히 몰입해서 듣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앙드레는 안젤리카가 음식과 와인을 가지고 온 것도 모를 뻔했다. 두 사람은 그녀가 접시를 내려놓도록 공간을 주기 위해 각자의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안젤리카가 말했다. "그만들 해요, 분위기가 너무 좋으시네. 어서 드세요." 그로부터 몇 분 간은 두 사람 다 음식을 먹느라 말이 없었다, 루시가 와인을 마시기 위해 잠시 식사를 멈추고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누군가가 당신의 작품들을 망쳐 버리기로 마음먹고 한 짓이 아니라면 납득하기 힘든 일이네요, 당신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업상으로 말이에요." "딱히 누구라고 떠오르진 않지만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왜 예전에 찍어 둔 투명 양화들 까지 모조리 가져 갔을까요? 팔아 먹을 만한 것도 전혀 없는데, 그리고 놈들은 왜 온 집안 을 들쑤셔 놓았을까요?" "뭔가를 찾으려고 그랬겠죠. 당신이 뭔가 숨겨 놓은 게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안젤리카가 불쑥 나타나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음식이 어때요? 그녀는 와인 병을 들더니 두 사람의 잔에 채워 주었다. "손님은 여기 처음 오셨죠? 그녀가 앙드레에게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좋은데요," "잘됐네요. 여자 분께 좀 많이 드시라고 하세요. 너무 야위었잖아요." 안젤리카는 포동포동한 손으로 자기 배를 두드리며 식탁에서 멀어져 갔다.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절도 건에 대한 이러저러한 추측들은 그만 접고 일 과 관련된 잡다한 얘기들로 넘어갔다. 그러다보니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희망 사항과 야망 따위를 교환하는 단계를 지나, 서로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흔히 털어놓는 사소한 사항들까지 자연스럽게 거론하게 되었다. 그들이 커피를 마시고 났을 무렵엔 식당은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거리로 나서자 눅눅한 냉기가 몸을 파고들었다. 몸을 떨던 루시는 그와 나란히 듀에인 가 모퉁이를 돌아 웨스트 브로드웨이로 걸어 갈 때쯤엔 앙드레의 팔에 한 손을 끼고 있었다, 그가 택시를 한 대 불러 세웠고 그러자 잠시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그날 저녁 처음으로 두 사람을 감쌌다. 루시가 차 문을 열었다. "집에 가더라도 집안일은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럴게요.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룰루. 저녁 식사도 멋졌고 도둑맞은 게 다 보상된 기 분이에요." 그녀가 뒤꿈치를 세우며 그의 코끝에 살짝 입맞추었다. "자물쇠를 갈아요, 알았죠?"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그는 무수한 차량 불빛들 속으로 사라져 가는 택시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한참 서 있었다 난생처음 도둑맞은 사람치곤 놀라울 정도로 행복한 기분으로. 7. 거짓말 매디슨 가의 분주한 <>사무실은 신간 발행을 앞두고 평소보다 긴장감이 팽배해 있 었다. 카밀라의 계획이, 그녀 말대로 너무도 충격적으로 뒤집혀 버렸다. 청탁도 하지 않았는데 파리 태생의 유망한 칸 젊은 사진작가가 찍은 매혹적인 사진들까지 곁들여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한 비데(변기에 부착하는 국부 세척기-역주)에 관한 기사 하나 가 들어왔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호사스럽고 조각품에 가까운 그 위생 도자기는 현대의 잘 치장된 욕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물건처럼 보였다 게다가 겨울이 거의 다 간 후라 독자들 이 각자 가정의 위생 필수품들을 점검하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편집 회의가 열렸고, 이 기사야말로 선구자감이다, 심지어 잡지 사상 최초의 기록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쏟아져 나왔다 또한 카밀라가 재빨리 지적한 대로 그 비데 를 가진 저명한 사람들에게서 받아 온 품질 확인 서명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물론 용도가 그러니만큼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까진 사진에 담을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들은 관대하게도 이름을 빌려 주었다. 퇴짜 놓기엔 참으로 아까운 기사였다. 그러나 신간은 이미 꽉 짜여져 있었으므로 계획된 특집 기사 가운데 하나를 잘라내지 않 을 수 없었다, 견본판이 펼쳐진 회의실 길다란 탁자 옆에서 카밀라는 왔다갔다 하며 궁리했 다. 그녀 뒤엔 언제나 그랬듯이 메모 용지를 든 비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미술 부장, 직물 편집자, 가구 편집자, 액세서리 편집자, 그리고 젊은 보조 편집자 한 패거리가 줄지어 선 엄숙한 검은 옷의 요정들 같은 모양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밀라가 걸음을 멈추더니 아랫입술을 달짝거렸다. 움브리아 지방의 피뇰라타 스트루폴리 공작 부인의 중세에나 있을 법한 우행에 관한 기사나, 스위스의 한 억만장자가 도르도뉴 강 변의 수녀원을 사들여 공들여서 개조한 내막을 다룬 또 다른 특집기사는 그녀로선 도저히 미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사교계의 반발이 만만찮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미 초대장을 받아 둔 여름철 초청 건들도 위태롭게 되기 쉬웠다. 마침내 그녀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정이 요술 지팡이로 뿅 하고 사라지게 하듯 그녀는 몽 블랑 만년필로 견본판 가운데 세 면을 하나씩 두드렸다. 정말이이 이것들을 빼고 싶진 않아. 하지만 성화란 주제는 시류를 타지 않지만 비데는 지 금과 같은 이른봄이 한철이거든. 성화 기사는 여름에나 다루도록 합시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고 하는 가운데 회의는 끝났다, 물론 일부 부루퉁해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레이아웃을 모조리 다시 짜게 된 미술부 장은 컬 머리채를 획 쳐들었다. 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카밀라는 상당히 유감스런 표정으로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노엘을 보았다. "저런, 정말이지 안됐어. 자네에겐 보물과도 같은 걸 웬 짐승 같은 놈들에게 다 도둑맞다 니. 나까지 울고 싶은 심정이군. 참으로 안된 일이야. 아, 마침 편집장이 오셨네. 바꿔 줄게." 그가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앙드레가 도둑을 맞았대요. 위로해 줘야 할 것 같군요." 카밀라는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앙드레, 그의 이름을 들으니 모호하면서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았다. 죄의식 같은 건가? 아무튼 앙드레는 지금 그녀로선 전혀 얘기를 나누 고 싶지 않은 사람 이어서 그녀는 노엘의 책상과 자신의 사무실 사이에 그럴싸한 위기 상황 을 만들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전화기가 빨간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충격받고 동정해 줄 채비를 갖추고 수화기를 들 었다. "자기-어떻게 된 거야?" 앙드레가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카밀라는 콕콕 쑤시는 다친 발가락을 편하게 해주려 고 구두를 벗었다. 한숨 돌린 것도 잠시, 또다시 통증이 시작되자 상처난 발을 용감하게 샤 넬의 최고 구두에 쑤셔 넣고 다니느니 차라리 부상당한 편집장처럼 보이도록 입는 건 어떨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에, 편안한 벨벳 슬리퍼 차림 말이다, 손잡이가 상아로 된 지팡 이도 하나쯤 장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코코 샤넬이란 여자도 말년엔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았던가? 그래, 지팡이가 꼭 필요해. 그녀는 메모지에 적기 시작했다. "카밀라 듣고 있어요?" "물론이지, 자기. 너무도 충격적인 얘기라 넋이 빠졌던 것뿐이야. 정말이지 돌아버릴 일이 군." "그래도 또 살아가야죠. 다행히도 그 성화 필름은 가져 가지 않았어요. 그 사진들, 어때 요?" 카밀라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앙드레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탁월해, 자기. 완벽하다구 그런데 사실은, 계획에 작은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몇 페이지 를 날려 버렸어. 막판에 끼여든 광고들 때문에 말미야. 정말이지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을 정 도로 속상해. 그래서 우린 계획을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성화들은 이번 호에 나오 지 못하게 됐어. 내 기분이 지금 얼마나 처량한진 말로 다 못해 ." 실망한 앙드레가 말이 없자 카밀라는 누가 찾아온 것처럼 꾸며 대어 그 침묵을 깨뜨렸다. "거기서 그렇게 왔다갔다 하지 말아요. 금방 갈 테니까." 이어서 그녀는 앙드레에게 말했다. "가봐야겠어, 자기. 나중에 다시 얘기해. 그럼 차오."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 버렸고 곧바로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죄의식의 흔적 따윈 완전히 털어 버린 채 그녀의 생각은 이미 걸어 다니는 의상의 일부인 지팡이 쪽에 가 있었다. 재수 없게 시작된 앙드레의 한 주는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곤궁 할 때 즉각 찾아 주는 친구라던 보험회사 직원들은, 그가 전화할 때마다 보상비를 지급하는 데 장애가 되는 조항 을 새로 찾아냈다며 그를 허위 신고한 사기꾼 취급했다. 장비 교체를 하려면 수천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필요했다. 카밀라에게선 새 일감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었다. 루시가 새 일감 을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진 아무 성과가 얼었다. 도난 사건 이후 그는 여기저기 전화하는 틈틈이 물건 정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묵은 잡 지 더미 속에서 드노이예의 저택에 관한 특집 기사가 실린 <>판을 발견한 그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책장을 넘겨 보았다, 그 집 본관 응접실이 찍힌 사진을 보자 짙은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벽난로 위쪽에 걸린, 프로방스의 색채들로 번쩍이는 세잔느 그림이 그 방의 초 점으로 맞추어 찍혀 있었다. 지금 이 그림은 어디에 있을까? 드노이예의 말대로라면 칸느의 한 화랑에 걸려 있을 것이 다. 그는 사진 속 그림을 응시하면서 칸느에서 화랑을 본 적이 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 다. 아마 화랑이 많진 않을 것이다.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라도 확인을 해 야 적어도 마음이 흡족할 것 같았다. 만일 그 그림이 드노이예가 얘기한 곳에 있다면 그가 본 일이 그럭저럭 설명이 되므로 그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는 파리의 한 친구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프랑스의 전자 통신 전화 명부인 '미니텔' 을 2분 정도 뒤져 본 끝에 칸느에 소재한 몇 안 되는 화랑들의 이름과 전화 번호를 앙드레에게 알려 줄 수 있었다. 앙드레는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받는 곳마다 유감을 표하는 정도는 달랐지만, 자기네 화랑엔 세잔느가 없을 뿐 아니라 드노이예 씨란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대답만은 한결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다. "그가 거짓말을 한 저예요, 룰루. 켕기는 게 없다면 왜 그랬겠어요?" 루시의 책상 끝머리에 걸터앉은 앙드레는 사과를 먹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입 속의 것을 우물거리고 난 그녀는 눈이 둥그레지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앙드레, 그건 그 사람 그림이에요 자기가 맘대로 처분할 수 있다구요. " "그런데 거짓말은 왜 해요? 사실 그의 얘기가 거짓이란 게 나로선 다행이에요. 엉뚱하고 멍청한 녀석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으니까.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루시가 항복했다는 듯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 문제예요. 우리에 겐 우리 문제가 있구요." 그녀는 책상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그에게 주었다. "일거리가 있나 하고 연락해 본 잡지사들 명단이에요. 아직 회답이 온 덴 한 군데도 없어 요. 그런데 카밀라한텐 얘기해 봤어요? 맡길 일감이 있대요?" 앙드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신간을 준비하고 있을 땐 어떤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점심 시간도 모르고 일하 니까." 그는 루시가 준 목록을 건성으로 훌었다. "지난 번에 통화했을 때 성화 기사를 빼기로 했다고 그러더군요. 광고가 너무 많아서라 나? 결국 이런 일 저런 일로 이번 주는 끝내주는 한 주가 되어 버렸어요." 그는 우리에 갇힌 사냥개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앙드레, 비참한 날은 누구에게나 닥치게 마련이에요. 그러지 말고 나가서 당신의 새 장비 나 골라 보는 게 어때요? 내가 일을 마칠 무렵이면 그게 필요할 거예요. 그럼 우리, 좀 덜 우울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이전시 사무실에서 나와 웨스트 브로드웨이를 걸어 내려가던 그의 눈에 리졸리 서점 윈 도에 진열된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새로 나온 고갱의 전기였는데 박학다식한 설명을 곁들였 는지 두껍고 불룩했다. 가지런히 쌓인 책 무더기 뒤로 고갱의 작품 (꽃과 여인)을 담은 포스 터가 붙어 있었다. 여자의 포즈나 그녀를 그린 각도가 어딘가 낯익었다. 색채와 기법은 달랐 지만 그 그림에선 좀더 나이 들고 건강한 여자가 등장하는 드노이예의 세잔느 그림의 분위 기가 느껴졌다. 가게로 들어가 인상파 화가들에 관한 책을 모조리 훑어 가던 앙드레는 마침내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한 면 가득 채운 그 그림 밑에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멜론과 여인. 폴 세잔느, 1873년경, 한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소장, 현재는 개인 소장.' 그래, 지금도 개인 소장이지 하고 앙드레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쯤 배관공의 밴 뒤에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 칸느의 화랑에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책값을 지불하고 아파 트로 돌아왔다. 이제 오만가지 핑계를 내세우는 그 보험회사의 천벌을 받을 직원, 의심 많은 도마(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도-역주)와 또 한판 붙을 차례였다. 기울어 가는 마지막 창백한 햇살이 건물들 꼭대기 뒤로 넘어가자 맨해튼 시내는 저녁 빛 깔로 물들기 시작했다. 앙드레는 마지막 잡동사니 한 보따리를 쓰레기 더미에 보태고 나서 적포도주 한잔을 따랐다. 아파트 안을 쭉 둘러보니 이사 온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 고 질서정연한 것 같았다. 생활을 정리하려면 한바탕 거창하게 도둑맞는 것보다 나은 방법 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즈음 전화 벨이 울렸다. "다행이네요, 아직 자살해 버리진 않은 것 같으니." 루시가 웃음을 터뜨리자 앙드레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말한 그 수수께끼의 그림에 대해 쭉 생각해 봤어요. 아직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 요?" "글쎄 ,,,,,, 그래,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그건 왜 묻죠?" "내 친구 하나가 요기 모퉁이 근처에서 화랑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얘긴데, 혹시 그 쪽 분야에 대해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그 친구한테 들러도 될 것 같아서요." "룰루, 정말 고마운 얘기긴 한데 당신은 이미 다 들은 얘기잖아요. 지겹지 않아요?" "지겨운 일은 나중에 있어요. 바베이도스에 사는 내 사촌 부부가 지금 시내에 와 있는데 날 자기네 친구 하나와 소개팅 시켜 준대지 뭐예요. 바잔 정부를 상대로 컴퓨터 판매 대리 업을 하는 사람인데 뉴욕엔 처음이라나 봐요. 그런데 그 사람 너무너무 수줍음을 탄대요. 재 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당신은 몰라요, 룰루. 우리처럼 숙맥인 사람들이 오히려 깊이가 있다구요. 10분 후에 데 리러 갈게요." 앙드레는 가볍게 샤워하고 나서 새 셔츠로 갈아입고 애프터세이브로션을 듬뿍 발랐다. 그 리고 휘파람을 불며 아파트를 나섰다. * * * 화랑은 브룸 가, 낡았지만 멋진 한 건물의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금빛 목재 바닥에 주석 도금한 천장, 은은한 조명을 한 그곳의 주인은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었다. "그 친구 아버지가 부자래요. 그렇다고 기죽을 건 없어요. 데이비드는 사람도 좋고 자기 뜻대로 열심히 사는 스타일이에요." 계단을 올라갈 때 루시가 말했었다. 화랑 저 끄트머리에서 데이비드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호리호리하고 하얀 얼굴의 그는 검정 양복에 하얀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미니멀 아트 풍 책상 뒤에서 전화기를 어깨에 끼고 통화하는 중이었다 다른 청년 두 사람은 그림들을 텅 빈 벽들에 기대 세우고 있었다. 실내 어딘가에 숨겨 놓은 스피커에서 키스 자렛(재즈 피아니스트-역주)의 쾰른 공연 실황이 잔잔하게 흘렀다. 통화를 마친 데이비드는 두 사람 쪽으로 와서 루시의 볼에 살짝 입맞추고 앙드레와 가볍 게 악수를 나누며 반겼다. "난장판이라서 미안합니다. 새 전시회를 준비하는 중이어서요." 그는 큼직하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공간을 가리켰다, 그리고 뒤편 문으로 나가 아무렇 게나 너질러져 있어 좀 전보다는 사람 냄새가 나는 방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갔다. 방에는 사무용 의자 두 개 와 낡은 긴 가죽 의자가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그림 서적 무더기들 사 이로 컴퓨터와 팩스가 비좁은 듯 끼여 있었다. "세잔느를 찾고 계신다고 루시한테 들었습니다." 데이비드가 씩 웃었다. "사실은 저도 그래요." 앙드레가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젊은 미술 거래상은 이따금 한 손으로 은 귀고 리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하게 열심히 귀기울였고, 앙드레가 칸느에까지 일일이 전화한 대목 에선 양눈썹을 치켜 올리기도 했다. "그 일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그렇죠?" "그런 셈이죠. 물론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모른척하고 넘어가긴 힘들 것 같아서 말이죠." 앙드레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데이비드는 혀를 차며 생각에 잠겼다. "저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런 일은 제 분야가 아니라서요. 저는 그저 애숭이 거래 상일 뿐이죠." 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맛살을 찌푸렸고 이번에도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 겼다. "누군가 도와 줄 만한 사람이 있을 텐데,,, , 아, 잠깐 기다려 보세요. " 그는 앉았던 의자를 빙 돌려 컴퓨터와 마주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키보드를 두드려 파일을 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님 친구분이신데 잘나가는 아트 딜러 중 한 사람이죠. 이스트 사이드 육십 몇 번 가에 즐비한 포트 녹스(미연방 금괴 저장소-역주)처럼 경비가 삼엄한 고급 아파트에 사 시는 분이에요." 그가 화면에 나타난 주소 목록을 훑었다. "여기 있군요. 파인 아트, 그가 장난삼아 쓰는 이름이죠. 그분 성함은 파인, 사이러스 파인 이에요." 데이비드는 파인의 주소와 전화 번호를 메모지에 휘갈겼다. "저는 한 두어 번 뵌 적이 있어요. 그 분은 특별히 인상파 그림만 다루는데 모든 거물 수 집가들과 줄이 닿죠," 자리에서 일어선 데이비드는 메모지를 앙드레에게 넘겨주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런,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내일 새 전시회가 시작이거든요. 사이러스 씨 만나시거든 안부 좀 전해 주세요." 거리로 나논 앙드레는 루시의 팔을 잡아 웨스트 브로드웨이 쪽으로 방향을 틀고 힘차게 걸어갔다. "룰루, 당신은 정말 보석 같은 사람이에요. 인생에서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 샴페 인 한잔 할 시간 있어요?" 루시가 미소 지었다. 다시 쾌활해진 그를 보니 흐뭇했다. "없진 않죠." "좋아요. 펠릭스로 갑시다. 당신의 베레모를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도 싶어요." 두 사람은 프랑스어로 말하는 목소리들로 시끌시끌한 자그마한 바 한귀퉁이에 자리잡았다 참을성 있게 생긴, 세상에 넌더리가 난 듯 한 개 한 마리가 실내 한구석의 남자 화장실 앞 에 놓인 의자에 묶인 채 부엌에서 흘러 나오는 냄새에 코를 씰룩대고 있었다. 모두들 내 놓 고 담배를 피워 댔다, 이런 밤이면 마치 파리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앙드레가 이 곳을 자주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루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소음 속에서 아는 단어를 찾아보려고 애 썼다. "프랑스 사람들은 늘 저렇게 빨리 말하나요?" "언제나. 체호프의 편지 가운데 멋진 구절이 있어요. '프랑스인들은 심각하게 노망이 들지 않는 한 흥분해 있는 게 정상이다." "심각하게 노망이 들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 그야, 계속 여자들을 쫓아다니죠. 하지만 술을 엎지르진 않도록 천천히 하지요." 샴페인이 오자 앙드레가 잔을 치켜 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룰루. 괜한 시간 낭비일지도 모르지만 그 그림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난 정말이지 알고 싶어요." * * * 그들이 있는 바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루돌프 홀츠와 카밀라도 샴페인을 마시 고 있었다, 그들에겐 흡족한 며칠이었다. 당황한 드노이예의 전화도 더 이상 걸려 오지 않았 고, 세잔느의 그림도 파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앙드레의 작업실에서 훔쳐내 온 물건들을 철저히 뒤져 본 결과 놀라운 것을 찾아내긴 했지만 찝찝할 건 없었다, 그 투명 양화는 불태 워졌고 사진 장비는 퀸스에 사는 베니 아저씨라는, 미덥진 않아도 수완 하나는 좋은 자의 손을 거쳐 처분했다. 홀츠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아무 염려할 것 없어. 만일 켈리 녀석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처지라면 지금쯤 우리에게 정보가 들어왔을 거야. 드노이예와 다시 접촉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 카밀라는 벨벳 누에고치 같은 슬리퍼 속에 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통증은 가셨지만 이제 그녀는 지팡이 때문에 쏟아지는 이목을 즐기는 중이었고 좀더 매력적인 절름발이로 보 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선 난 모르지만, 그가 요 며칠 계속해서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왔어요." "전화 거는 게 당연하지. 그에겐 지금 일거리가 필요하니까." 홀츠는 입고 있던 턱시도 소맷자락에서 실 보푸라기 하나를 털어 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와 접촉하지 않는 게 현명할 거요. 다른 사진 작가를 찾도록 해요. 이 제 그만 가자구."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건물 입구에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네 블록 떨어진 민간 기금 마련 만찬장으 로 그들을 모셔 갈 차였다. 홀츠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 유의 자선의 밤 행사는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파산시킬 수도 있다 그는 수표장을 집에다 잘 두고 왔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호주머니를 쓰다듬어 보았다. 8. 사이러스 파인 맨해븐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부유층들의 주거지인 맨해튼 북동부 지구-역주) 거리는 전 쟁이 터지면 맨해튼이 전초대가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함을 재삼 확인시켜 주곤 한다. 요새 같은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제리, 팻, 후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리는 제복의 사내들이 시간마다 순찰을 돈다. 개인 주택들도 철저히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 3중 잠금장치 문에 강철 빗장, 경보 장치, 방탄용으로 적합할 정도로 두터운 커튼들------가정용 로켓 발사대나 대인 지뢰가 없을 뿐, 온갖 보안장치들이 전시되고 작동되고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은 도심에서도 안전한 지역이다. 아주 적절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 도 심지 벙커들은, 부와 특권의 중심지인 동시에 일곱 자리 수의 액수에 의해 주인이 바뀌는 부동산들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파크 애비뉴를 벗어나 ③번 가로 접어든 앙드레는 문득 영구히 포위당한 상태로 사는 기 분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당연하게 여기다가 결국엔 자신이 처한 상태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감옥 같은 집을 생각하니 그로선 소름이 끼쳤지만 그러나 그것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드노이예의 경우, 프랑스에 있든 바하마에 있든 바리케 이드 뒤에서 일생을 보낸다, 저택을 보아하니 사이러스 파인도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전형적인 4층짜리 고급 주택이었는데 다른 집들보다 약간 더 넓고 단속이 매우 철저했다. 나지막한 현관 계단은 말끔히 씻어 내 티끌 하나 없고, 현관문과 낮게 달린 창들을 보호하 기 위한 철제 방벽은 까만 페인트로 새로 칠해 반들거렸으며, 황동으로 된 벨이 늦은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장사하는 사업가의 집임을 알 수 있는 표시는 전혀 없었다 하긴 지나가는 손님이나 충동 구매 따위에 의존하는 그런 사업과는 종류가 다르니까. 앙드레는 벨을 누르고 인터폰을 통해 신원을 밝혔다. 몇초 후, 5번 가나 어슬렁대고 다닐 법한 한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차림새로 보아 오늘 하루 입을 의상을 위해 오전 시간의 대부분을 바쳐 쇼핑하느라 부모의 돈을 왜 축냈을 법한 호리호리한 젊은 여자였다. 캐시미 어 스웨터에 실크 스카프, 천을 아낀 듯 짤막한 길이의 고급 플란넬 스커트, 그리고 높은 굽 에 밑창이 종잇장 같은, 온스 단위로 값이 매겨지는 그런 류의 구두. 그녀는 마치 일평생 앙 드레만 기다려 온 여자처럼 정성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절 따라오세요." 그는 기꺼이 복종했고 그녀는 흑백 무의 타일이 깔린 복도를 지나 자그만 서재로 그를 안 내했다. "파인 씨는 금방 내려오실 겁니다. 에스프레소를 내올까요? 아니면 뭘로 드시겠습니까?" 앙드레는 백포도주를 주문했다. 너무 신경 써서 대접하는 것 같아 마음이 다소 불편해졌 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파인과 짤막하게 통화했을 뿐이었다. 소개시켜 준 그 젊은 미술 거 래상의 이름과 세잔느라는 단어만 언급했을 뿐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말하지 못했 다. 아마도 파인은 앙드레가 고객 입장으로 오는 줄 알 것이다. 그는 재킷의 주름을 매만지고 나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서재의 반들반들한 밤색 마룻바 닥에 비해 너무 뿌옇게 보여 한 쪽 다리로 서서 구두 코에 쌓인 먼지를 닦고 있을 때 그 여 자가 다시 들어왔다. "드세요 " 그녀가 또 한 번 미소 지으며 물방울이 응결되어 뽀얘진 크리스털 잔을 내밀었다. "파인 씨가 지금 막 통화를 끝냈습니다 여기 편안히 앉아 기다리세요." 그녀는 향수 냄새를 남긴 채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앙드레는 구두에 대해선 포기하고 실내를 훑어보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아늑한 신사 클 럽 회관의 조용한 한구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방 벽에 장식 판자가 대어져 있고, 혈맥 처럼 사방으로 금간 가죽 안락 의자, 낡았지만 훌륭한 동양풍의 양탄자, 특별한 경우를 위해 마련해 둔 18세기 풍의 멋진 탁자 두 개, 그리고 희미하게 맴도는 밀랍 향. 그림은 한 점도 없다는 사실에 앙드레는 약간 놀랐다. 아니, 파인의 직업을 시사할 만한 체 전혀 없었다. 거실에 있는 유일한 액자라곤 자그만 벽난로 위에 나란히 걸린 큼직한 흑 백 사진 두 장이었다. 그는 사진을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현저히 젊은 데 반해 사진들 자체는 오래되어 색이 바래져 있었다. 왼쪽 사진엔 성년기로 접어드는 일단의 청소년들이 보였는데, 모두들 검정 코트와 빳빳하게 풀먹인 옷깃으로 성장하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갖가지 화려한 조끼를 뽐내며 포즈를 취하 고 있었다. 반들반들하게 뒤로 넘긴 머리칼 밑으로 드러난 동그스름한 얼굴들은 오만하다 싶을 만큼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사진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먼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밑에는 '이튼 스쿨 1954년' 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옆의 사진도 젊은이들이 주인공이었는데 좀 덜 딱딱한 분위기였다. 모두들 테니스복 차림에 어깨엔 스웨터를 하나씩 걸치고 구식임이 확연히 드러나는 라켓을 군데군데 들고 있 었다. 청년들은 구릿빛 쾌활한 얼굴로 햇살 속에 환히 웃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 1958년' 서재 문이 열린 것은, 그 두 사진에 같은 얼굴이 있나 하고 앙드레가 양쪽 사진을 번갈아 뜯어보고 있을 때였다. "왼쪽 맨 끝, 코앞에 무슨 냄새라도 나는 양 건방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접니다, 안 녕하시오, 켈리 씨.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뒤돌아 선 앙드레는 사이러스 파인이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 았다. 그는 키가 크고 약간 구부정한 허리에 은발 머리칼을 넓은 이마 너머로 빗어 넘겼고, 날 카로운 갈색 눈매에 길게 휘날리는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유럽풍의 회색 트위드 정장에 연 푸른 셔츠와 버터색 실크 나비넥타이 차림이었다. 집도 그렇지만 주인 역시 언제나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앙드레는 그의 나이가 예순 주변 되겠다고 짐작했다. 힘있게 악 수하는 그의 손바닥엔 축축한 기가 없었다. 앙드레가 말했다. "만나 주셔서 고맙습니다. 괜한 시간을 뺏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소. 데이비드의 친구를 만나는 건 언제든 즐거우니까, 데이비드는 아주 똑 똑한 청년이오. 부친이 내 막역한 친구지. 우린 대학을 같이 다녔소." 앙드레가 고갯짓으로 사진들을 가리켰다. "선생님은 특이한 학벌을 가지셨군요. 고등학교는 영국에서 다니시고 대학은 미국에서 다 니셨으니까요." 파인이 껄껄댔다. "부모님이 헤매는 스타일이었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어느쪽에 살까 결정을 못하셨거 든." 그가 사진 쪽으로 가더니 테니스복 차림의 한 청년을 가리켰다. "하버드 시절의 내 모습이오. 보시다시피 이땐 코앞의 냄새를 맡지 않고 있소. 아마 그 버 릇을 이튼 스쿨에 두고 왔나 보오." 앙드레는 그의 악센트를 분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보스턴 말씨와 상류층 영국어의 중간쯤 될 것 같은 매력적이고 교양 있는 혼성어였다. "하지만 태어나긴 영국테서 태어나신 것 같은데요?" "아, 국적이야 아직 가지고 있지. 하지만 거기서 살아 본 게 벌써 40년이 넘었소." 그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자,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재촉하고 싶진 않지만 내 사업은 주로 나이프, 포크와 더불어 이루어지거든. 30분 후에 이른 점심 약속을 해둔 것 같소. 자리에 앉읍시다 " 의자에 앉은 앙드레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선생님께선 세잔느의 (멜론과 여인)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숙녀를 사적으로 알진 못하오, 그러고 싶은 맘은 굴뚝 같지만. 그 그림은 벌써 70여 년째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소." 그가 빙그레 웃자 갑자기 사진 속 젊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살려는 거요, 팔려는 거요?" 앙드레도 빙그레 되받았다. 어느새 그가 좋아지고 있었다. "두 가지 다 아닙니다, 그러고 싶은 맘은 굴뚝 같지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앙드레가 얘기하는 동안 파인은 한 번도 끼여들지 않고 깍지낀 양손으로 턱을 괴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파인은 전에도 그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일단 그림이 유통망에서 슬그머니 빠 져 나가면 스위스에 나타났다, 사우디아라비아, 캘리포니아, 일본 등지에서 봤다고 하는 미 확인 소문들이 이어지곤 했다, 파인 자신도 상속세를 줄이려는 계획하에 은밀하게 진행된 술책 한두 건을 도와 준 일이 있었다. 몇 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그림들은 지키는 비용만 해도 엄청난 경우가 많다. 요즘 시대엔 죽을 때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고심해 봐야 할 판이다. 앙드레가 얘기를 이어 가는 동안 파인은 슬슬 흥미가 돋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이 사 업을 가리켜 화사한 색채로 위장된 음흉한 놈들의 거래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사실 이 분 야에선 이런 색다른 작은 사건들을 진지하게 귀담아 둘 만했다. 얘기를 끝낸 앙드레는 술잔을 들었다. "파인 씨, 하나 여쭤 보겠는데요, 그 그림의 가치가 얼마라고 생각하세요? 추정가라도 좋 습니다." "글쎄요, 당신이 얘기하는 동안 나도 같은 의문을 가져 보긴 했소. 우선 아는 것에서 시작 해 봅시다." 파인은 한 쪽 턱을 비비며 머리를 굴렸다. "일 년 전쯤이던가, 게티 미술관이 3천만 달러 이상의 값에 (사과가 있는 정물)이란 세잔 느 그림을 하나 사들인 일이 있어요. 그게 신고가였소. 그러니 원화인가, 그림 상태가 양호 한가 따위 몇 가지 요건만 확실하다면 (멜론과 여인)은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의 값이 나갈 것으로 생각되오. 한때 르누아르가 소장했다든가, 시장에서 오랫동안 사라졌었다든가 하는 사실이 그림 값에 악영향을 주진 않소. 수집가들은 오히려 그런 내막들에 더 매력을 느끼는 수도 있으니 그거야말로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가치지." 그는 양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긴 해도 난 값을 매겨 보는 걸 즐긴다오. 아무리 신중하게 잡아도 최소한 3천만 달 러는 보장하오." "메르드(빌어먹을)." 앙드레가 말했다, 파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 전화번호나 남기고 가시오, 두루 수소문해 볼 테니. 미술품업계란 소문으로 먹고 사 는 국제 부락이라오. 뭔가 주워들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요." 그가 또 한 번 눈썹을 실룩거렸다_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하라면 말이오." 그때 가볍게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 5번 가 아가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파인 씨,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고마워, 코트니, 난 두 시 반에 돌아올 거야. 그때까진 당신을 쫓아다니는 친구들은 모조 리 몰아냈길 바래, 알았나?" 현관문을 열면서 코트니가 키득거렸다. 그녀의 뺨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집에서 나왔다. 현관 계단을 내려가던 앙드레는 코트니란 여자에 대해 무어라고 찬사의 말을 중얼거렸다. 파인은 재킷 단추를 채우고 소맷부리를 여몄다, "외모가 중시되는 사업에 몸담고 있다 보면 완벽하게 깨끗한 양심을 가진 예쁜 여자들을 고용할 수 있다는 게 한 가지 장점이지. 세금 공제도 받을 수 있구. 난 예쁜 여자들이 좋다 고, 당신은?" "기회만 있다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앙드레가 말했다. 두 사람은 63번 가와 매디슨 가 사이 모퉁이에서 헤어졌다. 주택 지구 쪽으로 가던 앙드 레는 <>사무실로 가서 카밀라를 만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지난번 마지막 통 화에서 퇴짜맞은 후로 계속해서 전화해 보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해서 침묵하자 앙드레는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처사였다. 그녀는 앙드레가 다른 데 일을 해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꼭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종 전화 연락을 해 오곤 했었다. '그냥, 정을 유지하자는 거지 뭐 .' 이렇게 자기 입으로 시인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날씨가 풀리면서 매디슨 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갖가지 다양한 거리 풍경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금방이라도 강도를 만나지 않을까 불안한 표정을 짓는 관광객들, 소음 속에서 자기 소리를 잘 들리게 하려고 무선 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비즈니스 맨들, 얼린 듯한 머리칼에 주름 제거 수술을 한 얼굴로 불룩한 쇼핑백을 들고 고급 부티크 를 휩쓰는 여자들, 거지들, 롤러 블레이드를 타는 젊은이들, 안마시술소 호객꾼, 프레첼(바싹 구운 군것질용 밀가루 빵-역주)에서부터 50달러짜리 가짜 롤렉스 시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가지를 다 파는 행상들, 그리고 대화 소리뿐 아니라 맑은 정신까지 집어삼킬 듯 끊임없이 밀려오는 야유와 불평, 경적과 사이렌의 불협화음, 버스 공기 타이어의 툴툴대는 소리, 고무 타이어의 비명과 들들대는 엔진소리, 언제 봐도 변함없이 허둥대는 도시의 기계적인 소동. 앙드레가 <>빌딩에 도착했을 즈음, 점심을 먹으려고 로비를 가로질러 물밀 듯 밖 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물결과 함께 정오의 대이동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사무실까지 올 라가는 승강기를 타지 않기로 했다. 카밀라가 내려올 경우 엇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몸 을 밀치고 경주하듯 입구로 빠져 나가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맞으며 그는 그 자리에 서 있 었다. 뉴욕에선 왜 아무도 한가롭게 걷지 않는 걸까? 모두가 다 늦을 린 없을 텐데 말이다. 또 다른 승강기 문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앙드레는 승강기에서 빠져 나오는 카밀라의 큼 직한 검은 안경과 윤기 있고 탄력 있는 머리칼을 보았다 그녀는 V자 형으로 늘어선 편집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바로 옆에는 비서라는 공식 직함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지금 카밀라의 소위 '이동식 회의'가 진행중인 상황임을 눈치챈 그는 그들 무리 쪽으로 다 가갔다. 이런 방식의 회의는 이 잡지사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생각할 때 긴 박하고 자극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는 법이라는 카밀라의 주장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있지 만, 사실 주요인은 그녀가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스타일이란 데 있었다. 이런 회의가 시작됐다 하면 카밀라가 버그도프 백화점까지 가든 점심 식사 장소로 가든 차 안에서도 계 속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결국 쇼의 일부였다.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잡지사 를 위해 일하는, 성공한 과로에 시달리는 편집장의 모습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유의 회의는 카밀라가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의 달갑잖은 접근을 막는 방패로도 아주 효과적이었는데 이번이 바로 그 경우였다. 그녀는 앙드레를 보았다, 분명히 보았을 것 이다. 그가 그녀에게 소리쳤을 때 두 사람은 불과 12미터 거리에 있었는데 한 순간 그를 정 면으로 보게 된 그녀는 이내 고개를 홱 돌려 외면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을 벽삼아 안 전하게 그를 지나쳐 갔다. 그가 황급히 뒤따라갔지만 그녀는 이미 입구에서 빠져나가 대기 하고 있던 차 뒷좌석에 올라 있었다. 그는 매디슨 가를 오가는 차들 사이로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도저히 믿 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덮쳐 왔다. 그는 카밀라와 이 년이 넘게 함께 일해 왔다, 둘은 가까운 친구도 아니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그녀에 대한 호감을 키워 왔고 그녀도 그 반대급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게 아니었음이 분명해졌다. 전화하는 족족 받지 않더니 이젠 이처럼 고의적으로 내놓고 타 박을 주다니. 하지만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단 말인가? * * * 그는 건물 입구에서 머뭇거리며 올파가서 노엘을 만나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노엘은 카밀라의 신호를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처난 자존심과 분노가 뒤범벅이 되어 밀려왔다 그녀가 그를 피하고 있는 거라면 쫓아다녀 봤자 결과는 뻔하다. 그녀와 끝이면 <>와도 끝장이다. 다른 잡 지사도 얼마든지 있다. 파크 애비뉴 쪽으로 향하던 그는 도중에 드레이크 바에 들렀다. 거기 처박혀서 당장 궁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결심한 작은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칵테일 냅킨 위에 새로 구입해야 할 장비의 가격을 쭉 적어 보고서는 곤궁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험회사 사람들이 일을 처리해 주지 않으 면, 지금 바고 있는 작태로 봐선 21세기하고도 한참 지나도록 처리를 미룰 텐데, 정말이지 얼마 못 가 쪼들리게 될 판이었다. 일을 해야 한다,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다음 번 일을 위해 말없이 잔을 들어 축배했 다, 조만간 루시가 일거리를 찾아 줄 것이다. * * * "좋아요, 이걸 믿고 독립하기엔 뭣하겠지만 제일 나은 일 같아요." 루시는 약간 방어적이고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메모를 훑었다. "시내엔 일이 전혀 없어요. (플러머스 가제트-배관업계 신문-역주) 빼고 모조리 다 연락 해 봤지만 카탈로그 일밖엔 따낼 수 없었어요." 그녀가 코를 찡그렸다. 그녀는 자신이 관리하는 사진작가들이 당장 생활비가 목을 옥죌 정도로 다급하지 않는 한 카탈로그 일은 연결해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 했다. "혹시 모르잖아요? 재미있을지도." 한 영국 잡지에서 따온 그 일은 보수도 영국식으로 받게 되어 있는데 앙드레가 미국식으 로 받아 온 보수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러나 루시 말이 옳았다. 수십 가지 룸 세팅을 설 치한 곳에서 뭐든 서치라이트를 밝힌 상태에서 찍고 싶어하는 미술부장의 감시하에 죽자사 자 일하느니 품격 있는 가정에 가서 태피스트리(색실로 짠 주단-역주)를 찍는 편이 훨씬 나 았다. 일을 시작한 후로 줄곧 그렇게 일해 온 앙드레는 다시 그 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가. "괜찮아요, 룰루, 지금 난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니까. 언제 작업에 들어갈 거래 요?" 루시가 메모지를 뒤졌다. "어제던가? 돌발 사고가 났대요. 벌써 일은 시작했어요. 그 잡지사 전속 사진작가가 작업 에 들어갔는데 말에서 떨어려 팔이 부러졌다나 봐요." 앙드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나더러 말을 타라고 하진 않겠죠? 아니, 도대체, 사진작가가 말을 타고 뭘 했다는 거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양무릎으로 말 잔등을 꼭 조이고 있으면 무사할 거예요." "룰루, 당신은 정말 강한 여자예요. 아까 낮에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주었다면 좋았을걸." 카밀라와의 접촉이 불발로 끝난 상황을 얘기해 주던 앙드레는 루시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 을 보았다. "그래서 난 건물 입구에 그대로 서 있었어요, 완전히 '코나르' (얼 간이)같이-." "뭐같이?" "얼간이같이 . 그때 그녀는 날 똑바로 봤어요, 분명히 봤다구요." 루시가 책상에서 일어나더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앙드레, 카밀라는 변덕이 심한 여자예요. 당신은 늘 그녀를 크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죠. 사는 방식이 약간 이상할 뿐 자기 일을 아는 여자로서 훌륭한 잡지를 내고 있지 않 느냐고,,,,,, , 그럴지도 모르죠." 루시가 경고하듯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아요. 그녀는 당신이 좋을 땐 열병 걸린 사람처럼 푹 빠지지만 싫어질 땐 사람 취급도 안 해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건대 지금 그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루시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밀라와 프랑스에 함께 ,있을 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앙드레는 롤롱브 도르에서의 저녁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혀 없었어요." 찌푸려져 있던 루시의 얼굴에 한 자락 미소가 스쳤다. 알 만하다는 미소였다. "그럼 그게 문제가 된 건지도 모르겠네요." * * * 고객을 대할 땐 언제나 싹싹하고 태평스런 사람인 척하는 사이러스 파인은 실상 경쟁심이 대단했다. 이기고 싶어하는 욕구는 이튼 스쿨 시절 이후로 그의 기질이 되어 버렸다. 사립학 교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의 시비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운동에서든 공부에서 든 '최고' 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의 재능을 위장하는 법을 배운 것도 이튼에서였다. 다른 사람 눈에 너무 맹렬하게 애 쓰는 걸로 보이는 것은 아주 초라한 모양새라고 생각되었다. 우연이나 행운의 결과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건 맘에 들었지만 확실하게 결심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건 만족 스 럽지 못했다. 그 같은 방식은 그가 하버드를 졸업할 즈음 확실하게 다져졌고 그는 인생의 운 좋은 아마 추어 정도로 행세했다. 이 위장술은 사업을 할 때도 톡톡히 한몫 했는데 그러나 실상 그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거래를 좋아했다. 미술 분야, 정확히 말하면, 파인이 취급하는 격조 높은 미술 분야의 거래는 다른 사람보다 정보를 먼저 손에 넣느냐 못 넣느냐가 중요했다. 그런데 이따금 그런 정보가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긴 세월 끈기 있게 가꿔 온 오랜 친분이 장기간의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통상 사업상의 정보란 밀담과 소문들을 추적하고 걸러 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수 가 많았다, 엄청난 액수의 돈들이 몇백 여점의 그림을 쫓아다니는 세계이다 보니 소문이 돌 고 도는 건 불가피 했다. 그러니 '이상적인 미술 거래상이란 꾸준히 일하면서 귀를 활짝 열 어 놓고 눈으론 큰 기회를 찾는 곡예사와 같다' 란 농담을 좋아하는 사이러스 파인에게 있 어, 추적해 보기에 너무 미약한 정보란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피사로와 시슬리 그림들이 지겹다며 공연히 한 번씩 툴툴대곤 하 는, 따라서 그때마다 마음이 바뀌곤 하는 한 늙은고객과 와인 무료 제공의 화려한 점심을 마치고 업무실로 돌아온 사이러스는 전화기 옆에 가 앉았다 그 젊은이의 이야기는 별스럽긴 하되 건질 만한 건 없는 사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알랴. 그는 광천수의 뒷맛을 없애려고 코냑을 한잔 마시며, 늘 하던 대로 롤로덱스(명함을 둥글 게 롤커에 꽃아 정리할 수 있게 만든 사무용품-역주)를 뒤적이며 추적해 보기 시작했다. 9. 계획 도둑들이 다시 왔다 간 것처럼 아파트가 난장판으로 변했다. 박스들, 부서진 플라스틱 조 각 무더기, 갖가지 다양한 스티로폼, 거푸집, 나무 블록, 쐐기, 숨을 내뱉을 때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무수한 파편들. 바닥은 그야말로 짐 싸기 좋아하는 미국이란 나라에 남기는 유서 와도 같았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실내 한 쪽에 놓인 긴 작업 테이블은 질서 정연한 모습이었다 카메라 몸체, 렌즈, 폴라로이드 뒤판, 필름, 필터들이 심을 덧대고 칸을 나눈 짙푸른 나일론 가방들 속에 채워 넣어 지길 기다리며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푹 놓이는 광경 이다. 이 생업 도구들이 없을 땐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었다, 마치 장비들과 함께 앙드레 자 신의 눈과 전문 능력까지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버튼과 오돌토돌한 손잡이테를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렌즈가 짤깍하며 제집에 쏙 들어가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기분이 붕 뜨면서 다시 자신감이 느껴졌다. 영국에서의 작업이 끝나면 어쩌면 파리로 들어가 한 이틀 머물며 프랑스 잡지사들 가운데서 일거리를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부로 가서 '코테쉬드' 나 찍으며 일주일 정도 쉬면 지난 며칠 동안 겪었던 좌절감이 깨끗이 해독될 것이다. 그는 니콘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손에 익어 푸근한 친구 같던 지난 번 것과는 종류가 다 르지만 묵직하고 카메라 몸체가 손에 쏙 들어와서 맘에 들었다. 카메라를 들고 창가로 간 그는 한 쪽 눈을 감고 어스름과 짙은 그림자, 깜박대기 시작하는 불빛들로 모자이크된 초저 녁 장면을 파인더를 통해 보았다. <>는 엿이나 먹어라, 카밀라도 엿이나 먹어라 너희 들 없이도 나든 얼마든지 해낼 것이다. 전화 벨이 두 번 울렸을 때 그 는 루시려니 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그가 여행을 떠날 때면 그녀는 늘 사전에 전화를 해서 비행기 표와 여권, 깨끗한 양말 따위를 잘 챙겨 넣었는 지 꼬치꼬치 확인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또박또박한 발음에 두드러지게 모음을 길게 늘이는 말투가 들려 오자 그는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시오, 젊은 친구. 나 사이러스요.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소. 바쁜 줄 알지만 혹시 술 한잔 같이할 수 있을까 하고 전화 해 본 거요. 난 지금 약간의 연구작업을 하고 있 는 중인데 당신도 관심이 있을 것 같아서." 앙드레는 어지럽게 널린 바닥을 힐끔 보았다. "정말 고마운 말씀이네요, 파인 선생님. 사실 잡동사니를 가득 늘어놓고 씨름하던 중이었 지만 그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디서 만날까요?" "하버드 클럽이란 데 아시오75번 가와 6번 가 사이 27번지에 있는데, 조용한 데다 내가 지금 누구와 얘기하고 있나 헷갈릴 염려가 없지, 난 이제 시야가 흐릿한 바에 들어가기엔 너무 늙어 버렸어. 내 나이가 예순셋이라고 말했던가요? 아 참, 넥타이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소. 거긴 타이 차림을 좋아하니까." "그리로 가겠습니다. " 앙드레는 한참을 뒤진 끝에 어느 재킷 옆 호주머니에 둘둘 말이 넣어진 유일한 의례용 타 이를 찾아냈다. 언젠가 한번 터무니없이 비싸고 터무니없이 허세부리는 댈러스의 한 호텔에 숙박했을 때를 제외하곤 타이를 매보지 않은 그로선, 타이를 매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다는 횡포는 이따금 너무도 불편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때 그는 텍사스의 한 궁전 같은 집에서 하루 종일 사진을 찍고 나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호텔 바로 들어갔는데, 깨끗하게 세탁해 눈처럼 하얀 셔츠에 타이가 매달려 있지 않다는 이 유로 입장을 거절당했다. 당시 그는 외출용 블레이저 차림에다 술도 먹지 않은 품위 있는 상태였다. 그곳 책임자들이 그에게 위스키로 얼룩진 과격한 무늬의 긴 실크 타이(바 전용 타이라나?)를 빌려 준 연후에야 술을 마셔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마치, 느닷없이 사회 적 인정을 받게된 부랑자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가 앉은 바에는 꼭 장화끈 같은 것을 목에 두르고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남자 둘과 여 자 하나도 같이 있었는데, 여자는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았을 뿐 허리 위로는 실상 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자 하나는 다수 문명 세계에서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법한 이상하게 재단된 큰 모자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경험 이후로 그는 여행할 땐 늘 호주머니에 타 이를 넣고 다녔다 검정색 편물 실크 타이로서 주름이 지지 않고 때가 잘 타지 않아 다용도 로 쓰곤 했는데 특히 장례식에 매고 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타이 매듭을 가다듬고 약간의 기대감 속에서 출발했다. 하버드 출신의 힘있고 돈 있 는 인물들이 미국이라는 법인 조직의 증권과 소송 일에 파묻혀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난 후 원기를 회복하러 들린다는 안식처로 가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코트를 맡기고 난 그는 로비 저쪽 끝 복도에 서 있는 사이러스 파인을 발견했다. 매끈한 양복 차림의 그는 휴대품 보관소와 등진 채 게시판에 나붙은 공고문들을 열심히 보고 있었 다. 앙드레가 그의 옆에 가서 섰다. "사진작가 출입 금지란 공문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파인이 고개를 돌리고 미소 지었다. "회원들 가운데 혹시 젊은 여자를 꼬여 한증막으로 데리고 들어가다가 걸린 자가 있나 하 고 살펴보던 중이오. 옛날이 좋았는데." 그는 빨간 펠트 천 게시판에 꽃힌 전단 하나를 가리켰다. "세월 참 많이 변했어. 이젠 일식 오찬까지 있잖소. 아, 반갑소 젊은이 ." 그가 앙드레의 팔을 잡았다. "바는 저쪽에 있소." 하버드 클럽의 바는 술집 특유의 부속 편의시설이 차나도 없었다. 원래 바란 곳은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담배 연기와 주크박스(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곡을 틀어주는 일종의 음악 자판기-역주)가 웅웅대는 소리, 조용한 대화를 깨는 스포츠 중계 소리부터 들리게 마련이 다. 그러나 거기엔 텔레비전이 두 대 있었지만(최근에 설치했다며 파인은 상당히 불쾌해 했 다) 오늘 저녁만큼은 특별히 화면이 꺼진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바 내부는 한가한 분위기였다, 자그만 탁자 네 개 가운데 한 군데에만 손님이 혼자 앉아 신문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회원은 바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화로이 알코올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될 만한 건 조금도 없었다. 두 사람은 바 한 쪽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월스트키트 저널>>을 보고 있는 회원 이 페이지를 넘길 때 나는 소음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파인은 주문한 스카치를 첫 모금 길게 들이켜더니 "크!" 하고 만족스런 소리를 낸 후 바 의자에 걸터앉았다. 앙드레는 실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텐더가 술병을 정리할 때 버 번 위스키 병이 보드카 병에 부딪혀 "쨍강!" 한 멋이 제일 큰소리였다. 앙드레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서로 쪽지를 주고받든지 귓속말로 얘기하든지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군요." "오우, 전혀 아니오. 내가 런던에 있을 때 가끔 들르곤 했던 곳에 비하면 여긴 떠들썩한 편이오. 정말 오래된 클럽 가운데 하나인데 디즈레일리도 그곳 회원이었지, 아마 아직도 회 원으로 남아 있겠지만 내가 짤막한 얘기 하나 해주리까? 실화라고들 하지." 그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곳 바의 독서실은 침묵 규칙이 아주 엄격했는데, 벽난로 양쪽 안락 의자들은 습관처럼 오후 명상을 즐기러 오는 가장 연로한 회원 두 사람이 차지하곤 했다우. 그러던 어느 날 캐 루터스 영감이 비트적거리고 들어와 보니 자기가 늘 앉던 자리에 역시 자기만큼 늙은 스미 스 영감이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 게 아니겠소? 언제나 그랬듯이 <<파이 낸셜 타임스>>로 얼굴을 가리고 말이오.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다 졸다 하던 캐루터스는 진(gin)타임이 되자 독서실에서 나갔소. 그때까지도 스미스는 제자리에 앉아 있었지.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말이오. 두 시간 후, 캐루터스가 돌아왔소. 그 이유에 대해선 설명이 없 지만 의치를 쿠션 밑에 넣어 두고 나갔던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간에 다시 온 그는 스미스 가 좀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앉아 있음을 알았소, 몸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 이 상하게 여긴 캐루터스는 스미스의 어깨를 톡톡 쳐보았소. 아무 반응이 없었지. 흔들어 봐도 반응이 없고. 마침내 신문을 걷어 낸 캐루터스는 멀건 눈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얼굴을 보곤 결론을 내렸소. '이럴 수가!' 그가 말했소. '회원 한 사람이 죽었소! 어서 의사를 불러 와요?' 그러자 실내 한구석에서 졸고 있던 회원 하나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엄한 목소리 로 이렇게 말했소. '조용하시오, 조용 침묵 규칙도 모르오? 수다쟁이 같으니다구!'" 파인은 어깨를 들썩이고 껄껄대고 웃으며 앙드레도 웃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수? 거기에 비하면 지금 여긴 그야말로 시장판이지 ." 그는 술을 한 모금 홀짝이고 나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자, 그럼 사업 얘길 해볼까. 하나 물어 봅시다. 지난번에 드노이예란 사람을 만났다고 했 는데 어떤 느낌을 받았소? 그가 세잔느 그림을 팔려고 하는 것 같았소? 그 사진들을 보는 그의 눈길은 어땠소? 무심하게 뱉은 말 같은 건 없었소? 어디 급히 전화하거나 하진 않던 가요?" 앙드레는 싱겁게 끝나 버린 쿠퍼케이의 저녁을 다시 떠올렸다. "그런 건 없었어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가 전혀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상하게 느껴졌을 뿐이에요. 만일 그가 속으로 놀라고도 그런 거라면 연극을 아주 잘한 셈이 죠." "그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진 않았소?" 무성한 눈썹이 한차례 오르내리더니 말이 이어졌다 "당신은 프랑스인의 피를 절반 이어받았다고 했는데, 무시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 당신 나라 사람들은 감정을 숨기는 편이라곤 할 수 없지 않소. 충동적이랄까? 가끔 연극적 인 데도 있고. 속을 헤아리기 힘든 경우는 드물지. 그것이 또 그들의 매력이기도 하고," "감정을 자제하는 편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제가 낯선 사람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늘 한 박자 뜸을 들이는 스타일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질문에 대답하거나 뭔가 에 반응하기 전에 1-2초 정도 사이를 두더군요. 먼저 생각하고 나서 말하는 사람이었어요." "맙소사, 그건 정말로 흔치 않은 경우군.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식이라면 세상이란 게 제대 로 돌아갈 수 있겠소? 다행히도 미술 분야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런 습관을 가진 이가 없어요." 파인은 바텐더를 쳐카보며 손가락으로 스카치를 한잔 더 달라는 신호를 해보였다. "오늘 오후에 몇 군데 전화 연락을 해봤소. 솔직히 정직한 전화였다곤 할 수 없지. 세잔느 를 살까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수집가를 대신해서, 내가 보수를 받으려면 당연히 그 사람 이름을 밝힐 수 없다고 하면서 시장을 알아보는 척하고 얘기했지. 세계 어디서나 지불 가능 한 막대한 가용 자금을 가진 유달리 정직한 고객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오. 아, 고맙 네, 톰." 파인은 말을 끊고 술을 홀짝였다. "자, 재미있는 대목은 지금부터인데 ,,,,,, 지금 어떤 물 속에 벌레를 하나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고 합시다. 고기가 미끼를 물려면 보통은 왜 시간이 걸리지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렇 지 않았소." 파인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한 채 듣고 있는 앙드레의 관심 어린 표정을 잠시 지켜 보았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당신에겐 상당 부분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오, 만일 이번 일이 거래가 개입된 거라면 난 그 거래에 끼여들고 싶소. 난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데 이런 건은 자주 찾아주는 게 아 니거든 게다가 당신은 이 릴을 내게 가져다 준 사람이니 당신도 한몫 챙기는 건 지극히 정 당하고 적절한 거요." 또 한 번 말이 중단된 사이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앙드레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자신의 와인 잔으로 눈길을 피한 채 생각을 모으려고 애썼다. 돈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정말 있다고 보세요? 거래란 말이죠?" "누가 알겠소? 그 그림을 입수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드노이예가 내게 일을 맡겨 준다면 바이어는 당장 내일이라도 셋은 찾아낼 수 있소." "그러니까 그 그림을 입수할 수 있다는 건가요?" 파인이 껄껄대자 반대쪽에 앉아 마티니 잔에 고개를 박고 있던 회원이 고개를 들고 인상 을 찌푸렸다. "쟁점을 피해 가고 있군, 젊은이. 그 점은 우리가 약간의 숙제를 마칠 때까진 뭐라고 장담 할 수 없을 거요," "우리라구요?" "안 될 게 뭐 있소? 난 미술품사업을 알고 당신은 드노이예를 알잖소. 내 보기에 당신은 괜찮은 젊은이인 것 같소. 그리고 난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정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오. 백짓장도 맞들면 나은 법이지, 이만하면 둘이 협력해야 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을까-와 인 좀 더 드시오." 파인은 앙드레의 얼굴에서 눈길을떼지 않은 채 한 번 더 바텐더에게 손가락으로 신호했 다. "어떻소? 해보겠소? 재미있을 거요." 앙드레는 파인이 뿌리치기 힘든 사람이란 걸 알았다. 게다가 굳이 뿌리쳐야 할 마땅한 이 유도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돈 때문에 개입하진 않을 겁니다. 돈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파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양 눈썹이 서로 닿을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요. 돈이란 건 항상 중요하오. 돈은 곧 자유요. " 그의 눈썹이 곧 제자리로 돌아왔고 얼굴도 미소 속에 풀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기분이 나아진다면, 그럼 좋은 명분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시오." "어떤 명분이지요? "늙은 노인네 한 사람 도와준다고 생각해요." 앙드레는 그 은발과 반짝이는 두 눈, 한 쪽으로 기운 멋들어진 나비넥타이를 응시했다. 재 미있을 거라고 파인은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보죠. 하지만전 제 일도 해야 합니다. 그 점을 알아주세 요." "잘 알겠소. 정말 기쁘구려. 당신 일과 맞출 수 있을 테니 염려 마시오, 자, 이번엔 오늘 오후에 들은 얘길 좀 하겠소." 파인은 바텐더가 앙드레의 잔을 바꾸고 자기 자리로 갈 동안 기다렸다. "이건 아직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에 불과한 얘기니까 너무 흥분할 언 못되오. 그 저 감으로 읽어 낸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듯이 반응이 매우 빨랐소. 내 입 에서 말이 떨어지고 두 시간도 채 안 됐는데 말이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일하는 괜찮 은 노부인이 하나 있소. 내가 1년에 두세 번 점심을 내곤 하지. 그녀는 시내에서도 귀가 밝 기로 유명하오. 우연히 어떤 대화를 엿듣게 됐거나 누군가의 책상 위에 있는 메모를 읽었거 나 했겠지만, 아무튼 그녀 얘기에 따르면 세잔느의 중요한 그림 하나가 앞으로 두세 달 내 에 시장에 뜨게 될 것 같은 아주 작은 낌새가 있다는 거요. 물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소, 구체적인 것도 모르고." 파인은 말을 강조하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다만 그 그림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고, 어느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으며, 오랜 세월 시장 에 나돌지 않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 우리가 찾고 있는 그림의 명세서와 딱 들어맞지 않 소?" 앙드레도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잔뜩 움츠렸다. "그렇지만 다른 그림들도 있지 않겠어요? 세잔느는 대단한 다작 화가잖아요." "물론이오. 일례로 생빅투와르 산만 해도 60점이나 그렸고 죽을 때도 손에 붓을 들고 죽 었다니까. 하지만 이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딱 들어맞아." 파인은 두 사람의 빈 잔을 보더니 손목시계를 보았다. "저녁 식사도 함께할 수 있겠소? 이곳은 와인도 마실 만하고 음식도 괜찮소. 오늘 밤 시 외곽으로 나갈 계획만 없다면 말이오," "파인 선생님, 제 사교 생활이란 건 들으시는 순간부터 졸릴 겁니다, 근래 들어 제가 얼마 라도 시간을 함께한 여자들이 있다면 비행기에서 '좌석 벨트를 채워 주세요'라고 말해 주는 여자들밖엔 없으니까요." "그래요? 그럼 코트니나 한번 꼬드겨 보시구려. 깜찍하고 귀여운데 젊은 남자들하곤 별로 운이 따르지 않아. 그 애가 사귀는 남자들을 한둘 만나 봤는데 형편없어요. 글쎄 스물다섯 살에 벌써 중년 티를 내더라니까 그렇게 따분한 애들은 처음 봤어요." 바 전표에 사인을 하고 난 파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멜빵에 줄무늬 셔츠 차림 아니던가요?" "맞아요. 속옷도 줄무늬 내의를 입을 게 분명하지. 자, 이제 식당으로 가볼까요?" 바에서 나온 그들은 하버드의 엘리트들을 300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만한 2층식 식 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주차장은 소대 병력 하나는 들어갈 만큼 널찍했다. 각종 사냥 전리품으로 꽉 찬 화려한 실내는 어느 귀족의 저택 홀과 사냥용 별장을 합쳐 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파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전리품의 대부분, 즉 코끼리 머리, 들소 머 리, 뿔과 어금니, 거대한 선반에 얹힌 엘크(큰 사슴-역주)의 가지 진 뿔은 시어도어 루스벨 트가 잡아온 것들이었다 인간 전리품들은 초상화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위엄 있는 표정의 실력가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클럽 회장이거나 미국 대통령들이지 ." 식당 중심부를 지나가며 파인이 말했다. 그들 머리 위의 널찍한 발코니에도 많은 식탁들 이 놓여 있었는데,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가 몇 명 있었다. 앙드레는 이처럼 남 성 본위의 분위기에 여자들이 출입하는 데 다소 놀랐다. "대학 클럽들 가운데 우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여자들의 출입을 허용했지, 그게 아마 1973 년이었을 거요. 잘된 일이지, 사방 벽에 걸린 야생동물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즐거운 변화 요." 파인은 근처 식탁에 앉은 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키가 크고 말쑥한 신사였는데 루리타니 아(유럽 중부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전설적이고 낭만적인 왕국-역주) 식으로 양끝을 꼬아 올린 특이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저이는 채프만이란 사람인데 뛰어난 법률가요. 클라리넷도 연주하지. 그 옆에 있는 머리 가 텁수룩한 사람은 할리우드에서 스튜디오를 경영하고 있소. 선글라스가 아니었으면 못 알 아볼 뻔했군. 여기에서는 선글라스 따윈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텐데 자, 뭘로 드시겠소?" 단촐하고 까다롭지 않은 요리 목록 가운데 대합과 연어를 고른 앙드레는 파인이 주문서에 자기가 고른 음식을 적는 것을 지켜보았다. 앙드레로서는 미국 대학 클럽에서 식사해 보긴 처음이었는데 그 같은 구식 주문 방법이 대단히 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대다수 뉴욕 식당에 서처럼 무슨 의무인 양 일하다 말고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그날의 특별 메뉴를 암송한 후 옆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이곳 빨간 재킷의 웨이터들은 말을 해도 중얼거리듯 나직했고 일 솜씨도 능숙했으며 주제 넘게 나서지도 않았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다. 앙드레는 자신도 하버드로 갈 걸 그랬나 싶었다. 맨해튼의 소란이 참기 힘들 정도가 될 때 언제든 이곳으로 피해 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1차 코스로 식욕을 달랜 후 파인이 바에서 하던 얘기를 이었다. "우선 1단계는, 그 그림이 있는 곳을 알아내는 거요. 내가 보기엔 그게 순서요. 어디 있을 것 같소?" "글쎄요, 일단 드노이예가 말한 곳에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칸느의 화랑 말입니다. 그림 청소를 하려고 어딘가로 보낸 게 아닐까 싶군요. " 파인이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소. 청소할 만큼 오래된 그림도 아니고, 당신이 작년에 <> 사 작업을 하며 찍은 사진으로 봐선 그림 속 숙녀와 멜론들도 아주 건강해 보였으니까. 달 리 추측한다면"? "그림 틀을 바꾸려는 건 아닐까요? 지난번 그 밴에 실을 때 보니 그림 틀이 없었거든요. 파리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보냈을 수도 있겠죠, 은행 보관실에 처박아 두었는지도 모르구 요. 아이고, 모르겠어요. 어쩌면 지금쯤 캅페라로 되돌아가 있을지도 모르죠." 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럴 수도 -겠지,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지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거요. 거기로 가봐야 해, 거긴 이맘때면 아주 좋은 시절인 걸로 알고 있소만." "지금 캅페라로 가신다구요? 진담이세요?" "그럼, 달리 어디겠소? 젊은이. 만일 그 그림이 있어야 할 곳에 없다면 우린 뭔가 제대로 짚은 셈이지. 만일 그것이 제자리에 있다면, 그렇다면야 뭐, 볼리외로 내려가 라레페르브 강 에다 눈물이나 떨구어야지. 거기 가본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군." 한마디 더 덧붙이는 파인의 표정은 꼭 방학을 앞둔 학생 같았다. "내가 말했잖소, 재미있을 거라고." 앙드레는 그 논리에 반박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붙임성 있는 노인네와 함께 떠나면 재미있을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유럽으로 가야 될 몸 아닌가. 결국 그들은 앙드레가 잡지사 일을 마치는 대로 니스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그날 저녁 나머지 시간은 아주 오래 묵은 기념비적인 코냑을 마시며, 어떻게 하면 프랑스 경찰을 건드리지 않고 캅페라의 그 저택에 침투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하는 데 바쳐졌다. 10. 램프리 경과 대프니 초봄 아침나절의 히스로우 공항. 낮게 드리운 잿빛 하늘에서 가느다란 이슬비가 끈덕지게 내리고 있었다. 잠을 못 잔 얼굴들이 컨베이어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구물구물 기어가는 다 른 사람들의 짐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내 방송은 공항 측에서 확성기 장치 안에 설치 해둔 변환 장치로 인해 횡설수설로 변해 있었다. 도착이 지연되고, 약속된 사람과 엇갈리고, 불안 이 엄습하고 ... 여행의 즐거움과 함께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 알코올을 피하고 여섯 시간 동안 잠만 잔 덕분에 앙드레는 아주 생생한 컨디션이었다, 교 통 사정만 나쁘지 않다면 점심 전에 윌셔에 도착해 오후를 보내고 내일 오전까진 사진 작업 을 끝내고 니스행 저녁 비행기 시간에 맞춰 히스로우 공항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유쾌한 일정에 때한 기대로 기분이 들뜬 그는 녹색 통로를 지나가면서 그만 세관원에게 미소를 짓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당연히 그는 저지당했다. "그것 좀 열어 봐 주시죠." 가방 속에 가지런히 놓인 장비들을 보조 난 세관원이 한 쪽 눈썹을 치올렸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신가 보죠, 선생?" "직업 사진작가요. 잡지 사진을 찍죠." "네에. 그 일을 오래 하셨나요?" 못 믿겠다는 듯 무심한 음성이었다. "네, 몇 년 했죠." "그런데 장비는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요." 앙드레는 왠지 자신이 무슨 죄라도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이 도둑맞아서 지난 주에 뉴욕에서 이걸 새로 장만했소." 세관원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그럼 그 영수증이 있겠군요." 10분 후, 영국 국경의 파수꾼으로선 대단히 실망스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필름 마지막 한 통까지 모든 물건에 대해 영수증이 제시되었으니까. 앙드레는 풀려났다. 이제 두 번 다신 세관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리라 결심하면서 그는 렌트한 포드를 타고, 미국의 괴물같이 큰 차들에 비하면 장난감같아 보이는 차들 틈에 끼여 서쪽으로 향했다. 도 대체 밀수꾼들이 몇 명이나 잡히는지, 그리고 뭘 들여오다 잡히는지가 갑자기 궁금해 졌다. 비밀스레 포장한 차이나 화이트(혜로인의 일종-역주)?대중의 안전에 위협이 될 만한 품목 들? 면세품 브랜디를 규정량보다 몇 병 더 가져오거나 밀매 노트북 컴퓨터를 들여오다 발각 되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부피가 좀 큰 물건은 어떻게 몰래 들여오는 걸까? 이를테면 그림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어서 일을 끝내고 사이러스 파인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에 속 력을 130킬로까지 올렸다. 도시 외곽을 빠져 나와 녹색 언덕배기들을 지나고 작고 정갈한 땅 윌셔로 접어들었을 무 렵 이슬비는 바람까지 동반한 폭우로 변했다. 하늘의 누군가가 물길만 좀 다른 데로 돌려 준다면 영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일 텐데. 앞유리 와이퍼의 단조로운 움직임 사이로 바깥 을 내다보던 앙드레는 간신히 마을로 가는 샛길을 발견했다. 그 마을에서 마지막 목적지까 지 가는 길을 물어 볼 참이었다. 하마터면 마을을 지나칠 뻔했다. 네더 트롤로프는 외길 촌락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작은 마을이었던 것이다, 들보식 시골집들이 비를 맞아 처량하게 물을 뚝뚝 흘리며 군데군데 흩 어져 있고 자그만 우체국 하나와 식료 잡화점, 그리고 선술집 하나가 있었다. 램프리(칠성장어란 뜻-역주) 가 문장을 행인들에게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풍파에 찌 든 표지판에는 칠이 다 벗겨져 읽을 수조차 없는 라틴어 표어가 씌어 있고, 그 위에 이빨을 드러내고 몸 뒤쪽을 치켜세운 벌레 비슷한 동물이 몸부림치는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표지 판 밑에 매달린 보충 표지판에 '그럽 주점' 이라고 씌어 있었다. 주차 구역으로 들어간 앙드 레는 비에 젖은 자갈밭을 가로질러 갔다, 딛는 발자국마다 작은 웅덩이로 변해 버렸다. 주점 문을 밀고 들어가자 그때까지 나누던 모든 대화들이 일순 중단되면서 대여섯 명의 손님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눅눅한 의복 냄새와 뒤섞인 짙은 맥주 냄새와 담배 연기가 말없이 그를 반겼다. 벽난로에선 석탄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앞에서 꿈 을 꾸는 듯 잿빛 주둥이를 씰룩대며 자고 있는 덩치 큰 검정색 래브라도 견이 난로 열기를 다 흡수하고 있었다. 바 뒤에는 화장품을 많이 바른 덕에 사람 같지 않게 환하게 빛나는 얼 굴의 몸집 좋은 검은 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 좋은 아침이네요. 뭘 드릴까요?" 앙드레는 맥주를 주문했다. 웅성거림도 다시 시작되었는데 정원 손질과 축구 얘기가 무슨 금지된 화제라도 되는 양 나직하고 비밀스런 음성들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그냥 지나가는 길이시죠?" 여자가 앙드레 앞에 맥주를 내놓으며 물어 보았다. 그를 뜯어 보는 그녀의 눈은 짙은 푸 른색 아이새도를 바른 눈두덩 때문에 더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뭣 좀 물어 볼까 하는데,,,,,, 난 지금 스로틀 홀을 찾아가는 길이거든요." 앙드레가 말했다. "그 어른을 만나러 가나 보죠?" 그녀가 담배 연기를 뿜어 냈다. 그것 역시도 필터에 생긴 립스틱 얼룩에 의해 좀더 멋스 런 효과를 내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5분만 올라가면 돼요. 큰 철대문 저택이죠. 거기 꼭대기에 아주 징그러운 것 들이 얹혀 있으니까 못 찾을 리 없어요." "징그러운 것들이라니요?" "칠성장어지 뭐겠어요? 표지판 그림에서 못 보셨어요? 이빨 가진 뱀장어 종류인데 보기만 해도 으스스해요. 나 같았으면 차라리 귀여운 개나 오리나 덩치 좋은 떡갈나무로 했을 텐데 왜 그런 걸로 했나 몰라. 하지만 보시다시피 여긴 램프리 경의 술집이니 참고 웃어야지 어 쩌겠어요." "그건 역사적인 동물이야, 리타.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지 " 손님 하나가 끼여들었다, "그런 거 난 몰라요. 보기만 해도 으스스해진다니까요. 그 이빨 말이에요." 리타는 방금 피우던 담배꽁초로 새 개비에 불을 붙였다. 앙드레는 반들반들한 바에 받치 고 있던 팔꿈치를 뗐다. "램프리 경이 종종 들러요?" 리타가 코웃음을 쳤다. "별로 안 와요. 대프니는 자주 오지만, 그 집 딸 말이에요." 그녀가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토요일 밤마다." 그리고는 눈꺼풀을 깔고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대프니는 재미나게 노는 걸 좋아하죠, 암, 그럼요." 앙드레는 대프니가 토요일 밤마다 정확하게 뭘 하는지 물어 봐주길 바라는 리타의 무언의 유혹을 무시해 버렸다. "그럼 램프리 부인은? 그녀는 자주 보나요?" 리타가 맥주 펌프 뒤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네 몸을 기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부인은 도망갔어요, 모르세요? 솔즈베리에서 온 변호사랑 눈이 맞아서요. 그녀보다 몇 살 이나 연하였대요. 그런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그녀의 필터에 립스틱 자국이 더 늘었다. 앙드레는 알지도 못했거니와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농부의 점심' 이라고 흑판에 광고된 것을 주문해서 더 심한 폭로로 나가려는 리타의 입을 막았다. 나온 것을 보니 자그만 빵 덩어리 하나와 호일에 싼 '신선한 목장' 버터 한 덩어리, 치즈 한 장, 그리고 너무 많이 절인 큼직한 앙파 두 개가 고작이었다. 종이 냅킨엔 주방장 모자를 쓴 뚱뚱한 사내가 '푸짐한 식사'라고 씌어진 기를 흔들고 있는 그림이 찍혀 있었다. 앙드레 는 그 냅킨으로 신 냄새 풍기는 양파를 덮어 버렸다 이게 농부의 점심이라니 갑자기 농부들 이 불쌍해졌다. 30분 후. 방금 먹은 점심이 그의 위 속에서 결코 용서하지 못할 기억을 남기는 동안, 앙드 레는 철대문을 밀려고 차에서 내렸다, 대문 안쪽엔 널따란 자갈 도로가, 장대하고 오래된 밤 나무와 떡갈나무들이 점점이 늘어선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차로 대문을 통과한 그는 문을 닫으려고 차에서 내려 되돌아갔다. 비에 흠뻑 젖은 양떼 한 무리가 그를 조사하려는 듯 다가왔다. 그중 한 놈이 가느다란 구슬픈 소리로 울어댔는데 자갈밭에 떨어지는 요란한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앙드레는 몸을 떨며 자갈길 을 따라 달렸다. 프링글의 (품격 있는 영국 가정집 안내서)에서는 스로틀 홀을 가리켜 '16세기 원형과 그 후 증축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인상적인 장원 가옥' 이라며 목록에 올려 놓았다. 400여 년에 걸친 건축물의 수난 과정을 그럴 듯하게 얼버무려 버린 관대한 설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지난날 돈 많던 시절의 수많은 램프리 경들은 넓히고, 첨가하고, 터무니없이 큰 건물을 짓 고, 지금 그 일부는 날아가고 없지만 어쨌든 버팀벽을 세우고, 박공식 고딕풍의 화려한 장식 을 하는 데 몰두했다. 원래 건물에 깃든 엘리자베스 시대의 균형미가 완전히 가려져 버릴 때까지 말이다.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오늘날, 스로틀 흘은 꼴사납게 늘어난 크고 엉성한 저택에 불과했 고 그 추함이 가히 장관일 정도였다. 앙드레는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맡은 일이 저 택 외관 쪽이 아닌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기둥으로 받쳐진 이중 문 옆에 매달린 초인종 당김줄을 한차례 잡아당겼지만 쇠가 돌에 긁히는 소리 외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좀더 세게 잡아당기자 이번엔 멀리서 개 짖는 소리 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금세 가까워지면서 더욱 흥분된 소리로 변해 갔다. 이어 문 저편을 발톱으로 북북 긁어대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났고 마침내 기름칠이 되지 않은 잠금쇠가 삐 걱거렸다. 그는 문이 열리도록 한 쪽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여위어 껑충한 적갈 색 개 한 무리가 구르듯 달려나왔다, 개들은 낑낑대면서 흥분하여 꼬리를 흔들어대더니 갑 자기 그를 향해 뛰어 오르며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오신다던 그 사진사 양반인가 보군요." 사타구니에 파고드는 개 한 놈을 밀어내고 난 앙드레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정 바지와 조끼 차림에 긴 앞치마를 두르고 앙상하고 반점으로 얼룩덜 룩한 팔뚝까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그의 양손엔 더럽혀진 흰 면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온 통 회반죽으로 얼룩진 머리칼 밑으로 드러난 갸름한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양뺨에 그물 처럼 퍼진 정맥 파열 자국이 유일한 색조 였다. 앙드레가 목례했다. "그렇습니다. 램프리 경은요?" "경마 구경하고 계시오. 따라오시구려 ." 집사가 코를 훌쩍대더니 고개를 돌렸다. 껑충대는 개들에 둘러싸여 앙드레는 어두컴컴한 실내로 안내되었다. 집사는 몸을 구부정 하게 굽히고 빙판을 걷듯 조심조심 짧은 걸음으로 앞서갔다. 금이 간 금박 액자들에 쭉 들 어 있는 역대 램프리 경들의 시선을 받으며 칙칙한 판석 홀을 통과한 그들은 패널이 장식된 복도를 따라갔다. 복도는 추웠다. 바깥보다 더 추웠다. 바닥에서 올라와 온몸으로 스며들어 동상과 류머티즘 과 기관지염을 일으키는 영국 특유의 눅눅한 냉기였다. 앙드레는 방열기가 있나 하고 둘러 보았지만 허사였다. 복도 맨 끝의 열려진 문간에 가까워지자 빠르게 재잘대는 텔레비전의 스포츠 해설을 가로 막는 한결 굵고 귀족적인 고함소리가 들렸다. "후려쳐, 저런 바보. 놈을 채찍으로 후려치라구!" 곧이어 실망스레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문간에 멈춰 섰다. 노인이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사진사가 왔습니다, 나으리 ." 말들이 경기장 구내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눈을 메지 않은 채 램프리 경이 말했다. "누구? 아, 사진사. 알았네. 가서 데리고 와, 스핑크. 들어오라고해." 스핑크가 천장을 한번 쳐다보았다. "여기 와 있어요." 램프리 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정말 와 계시는군." 바로 옆 탁자 위에 안경을 벗어 놓고 램프리 경이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야외 활동을 즐 기는 듯 불그레한 혈색에 초췌해지긴 했어도 한때 미남형이었을 법한 얼굴을 한, 키가 크고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닳은 수에이드 가죽 구두과 갈색 코슈로이 바지, 긴 트위드 코트 차림이었는데 몸에 파고드는 냉기 때문인지 코트 깃을 세우고 있었다. "램프리요. 반갑소." 앙드레에게 내민 그의 손이 차가운 가죽 같았다. "켈리라고 합니다." 앙드레는 고갯짓으로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혹시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 ." "다음 레이스까지 30분 여유가 있소. 차 한잔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스핑크, 차 좀 가져 오겠나?" 스핑크가 앙드레를 보며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낮게 투덜거렸다. "아까는 은그릇을 닦으라더니 이번엔 또 차를 가져오라는구먼. 내가 몸이 두 갠가?" 그러나 곧이어 말했다. "다르질링이요, 중국 차요? 나으리 ." "다르질링이 좋겠어. 우린 위층 발코니에 가 있을 거야. 켈리 씨한테 태피스트리를 구경시 켜야지." 복도를 따라 가구마다 먼지 쌓인 보를 덮어놓은 커다란 방들을 몇개 지나 램프리는 널따 란 떡갈나무 계단 밑으로 왔다. 그가 한 층계 올라가더니 걸음을 멈추고 조각된 난간을 쓰 다듬었다. "엘리자베스 시대 거요. 이 집은 보시다시피 창고가 다 됐소. 우리 선조들은 까치 같았지. 나갔다 들어올 땐 뭐든 물고 들어왔소. 조각상, 그림, 심지어 둘째 부인까지 말이오." 계단 꼭대기에 이르자 램프리는 팔을 펴서 태피스트리들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것들도 물론." 층계 양끝을 따라 20미터 정도 길이의 발코니엔 첫머리부터 끄트머리까지 태피스트리들이 쭉 걸려 있었다. 길다란 대에 매달린 것들도 있고 패널화처럼 틀에 넣어진 것들도 있었다. "대부분 고블랭(프랑스 파리의 고블랭 직물 공장 제품-역주) 제품들이오. 멋지지 않소?" 말없이 아름다운 색상들을 천천히 지나가며 앙드레는 동의의 뜻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 두컴컴하고 좁다란 이곳에서 작업하려면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많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 었다.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스로틀 홀의 다른 건 모두 변했어도 전기 시설만은 원형 그 대로였던 것이다. 20세기 초에 가설한 듯한 플러그 소켓들이 벽마다 하나씩만 자리잡고 있 었다. 아무래도 조명이 골치일 것 같았다. 차가 왔다, 오래 끓여 짙은 갈색이었다. 스핑크는 은그릇 닦으러 돌아갈 생각은 않고 팔짱 을 끼고 서서 이빨 사이로 쯧쯧거리고 있었다. 찻잔을 잡고 손을 데우던 앙드레는 램프리 경이 태피스트리에서 등을 돌리며 손목시계를 보는 것을 보았다. "대단한 물건들이군요. 이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된 것들인가 요?" 앙드레가 물었다. "18세기에 프랑스에서 들여왔소." 램프리는 태피스트리가 걸린 벽면을 지나가며 그 중 하나를 쓰다 듬었다. "지금은 물론 값도 매길 수 없는 물건이지 ." 스핑크가 옆걸음질로 슬슬 다가오더니 진 냄새를 확 풍기며 앙드레에게 속삭였다. "훔쳐온 것들이라오, 모조리 훔쳐왔다구,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우. 백주의 강도질이 따로 없다니까." 그는 손등으로 코끝에 걸린 콧물을 훔치며 훌쩍거셨다. 램프리가 말했다. "자, 여기서 어슬렁거리면서 자네 일을 방해할 순 없지. 난 내려 가겠소." "두 시 반에 시작되는 중계를 놓칠 수 없다는 말이겠지." 스핑크가 중얼거렸다. * * * 조명을 장치하고, 터진 퓨즈를 갈아 끼우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서로 엉켜 있는 오래 된 전선 뭉치를 손보기 위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사진 작업을 시작할 수 있 었다. 중간에 수시로 스핑크가 계단 밑에 나타나 입술을 내밀고 올려다보다가 다시 진으로 속을 달래러 하인들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램프리 경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 다. 일곱 시 무렵 스핑크가 저녁 먹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얘기하러 왔을 때야 앙드레는 일이 절반 넘게 진행된 덧 같아 만족스러웠다. 전기 쪽만 별탈이 없으면 내일 아침에 세 시간만 더 작업하면 끝이 보일 것 같았다. 그는 스핑크가 푸른 방이라고 부른 곳에서 그날 밤을 보내고 있었다. 커튼 색하고 들어맞 을 뿐 아니라 방의 실내 온도가 손님들의 살색에 미치는 영향과도 잘 들어맞는 이름이었다. 나오기 싫은 듯 쫄쫄 흐르는 온수가 욕조 바닥을 덮을 만큼 찰 동안 기다리면서 앙드레는 자신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닳았긴 해도 훌륭한 고가구들이 들어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틀림 없이 불편한 하룻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을 주는 방이었다. 커다란 침대는 스프링이 내려앉아 한가운데가 여물통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침대 옆 탁 자 위의 자그만 램프에선 빛이 나오는 둥 마는 둥했다. 나머지 탁자 위엔 잔 하나와 반쯤 남은 위스키 병이 놓여 있었는데, 신경을 무디게 해서 시원찮은 난방 상태를 보충하라는 뜻 으로 제공된 게 분명했다. 가스 히터가 있긴 했지만 살펴보니 가스라곤 전혀 들어 있지 않 았다. 앙드레는 욕조 바닥에 10센티미터도 안 되게 찬 미지근한 물로 부분부분 대충 씻고 나서 최대한 따뜻다게 옷을 껴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소 작은 편에 속하는 거실 가운데 하나에서 스로틀 홀의 칵테일 아워가 거행되었다, 어 두컴컴한 동굴 같은 분위기였지만 하버드 클럽풍 장식은 열성적인 박제사가 한 듯했다 램프 리 경은 거실 맨 안쪽의 통나무 태우는 불가에 등을 대고 서 있었는데, 따뜻한 기운이 귀족 의 궁둥이까지 발 전달되도록 재킷 자락을 추켜들고 있었다, 한 쪽 구석에서는 스핑크가 잔 들을 치켜 들고 불빛에 비춰 보기도 하고 소매로 훔치기도 하면서 술상을 차리느라 바쁜 척 하고 있었다 앙드레가 실내로 들어가자 개들이 반갑다는 듯 와르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램프리 경이 말했다. "놈들이 괴롭히거든 차버려요. 아일랜트 세터는 멋진 종이긴 한데 예절 감각이 없어, 피 츠! 피츠! 썩 내려와!" 개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 놈이 피츠죠?" 앙드레가 물었다. "이놈들 모두요. 내려와, 이놈들아! 한 놈 한 놈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모조리 한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지. 뭘로 마시겠소?" 스핑크는 이미 정해 둔 모양이었다. 그가 큰 컵을 은접시에 받쳐 앙드레의 코앞으로 쑥 내밀었다. "위스키요. " 그러곤 작게 소근거렸다. "세리주는 믿을 만한 게 못 되고, 진은 떨어졌다우." 술잔에 얼음이 안 든 게 다행스러웠다. 앙드레는 개들을 헤치고 불가에 있는 주인 쪽으로 갔다. 램프리가 말했다, "사진 작업이 잘됐으면 하오. 지난번 사진사에 대한 소문은 당신도 들었을 테지? 내가 보 기엔 내 딸 때문에 나쁜 길로 빠진 것 같은데 결국 말에서 떨어졌지." "그렇게 듣긴 했습니다," "문제는, 대프니가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말을 잘 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 앤 세 살 때부터 말을 탔거든. 남자처럼 타지. 엉덩이도 예쁘고." 두 사람 모두 잠시 말없이 불길을 응시했다. 앙드레는 여기 온 후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 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속되진 못할 터였다. 스핑크가 여러 일을 두고 어느 것부터 처리해 야 할지를 몰라 혼란에 빠진 사람같은 표정으로 다가오면서 손목시계를 톡톡 쳐보였다. "요리사가 일곱 시 반이라고 하면서, 시간 맞춰 오지 않으면 요리가 모두 엉망이 된다고 했어요." 램프리가 한숨을 지었다. "데프니는 어디 있나? 빌어먹을 여자들. 왜 허구한 날 늦는다지? 안 그래? 스핑크?" 스핑크가 곁눈질했다. "몸치장 때문인 것 같은뎁쇼, 나으리 ." "그 애는 빼고 우리끼리 먹어야지 뭐. 요리사를 화나게 만들 순 없잖아." 술을 마저 마시고 스핑크에게 잔을 건네 주고 난 뒤 램프리는 발치에 누워 있던 개를 쫓 아 버렸다, 앙드레를 데리고 문을 나가 복도를 지나가면서 그는 자기 딸의 무신경한 시간 관념에 대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제 말들에겐 기다리게 하는 법이 없으면서, 집을 호텔처 럼 이용하질 않나, 요새 젊은것들은 다 한통속이다,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는 건 이제 다 옛 얘기다 등등. 그는 자신이 늘상 즐겨 다루는 주제임이 분명한 그 얘기를 식당으로 들어 가면서도 늘어놓고 있었다. 식당에는 더 많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번엔 램프리 가문의 여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뽀족한 얼굴과 유리알 같은 눈을 한 여자 몇 명은. 으르렁대는 모습으로 박제되어 벽난로 위에 얹혀진 거대한 오소리 머리와 가족적으로 강한 연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육중한 샹 들리에 밑으로 길다란 떡갈나무 식탁에 세 사람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납 처리된 창틀 틈으로 들어오는 거친 바람결에 샹들리에에 달린 자그만 촛불 모양의 전구들에서 촛농이라 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식탁 맨 앞자리에 앉은 램프리 경이 자그만 은종을 맹렬하게 울리더니 와인 병을 들었다. 술병 레이블을 들여다본 그가 중얼거렸다. "운이 좋군. 69년 산 라투르요. 스핑크가 다 마셔 버린 줄 알았는데." 그는 술을 자기 잔에 조금 따르더니 킁킁대고 냄새를 맡았다. "훌륭해. 당신도 와인 맨이요? 켈리 씨?" "물론이죠." "그거 유감이군." 그가 앙드레의 잔을 반쯤 채웠다. "스핑크와 지내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30년 좀 넘을거요. 처음엔 아래층에서 주방 일을 거드는 걸로 시작했는데 계속 눌러앉았 지." 램프리는 입 속의 와인을 옹알거리며 음미했다 . "재미있는 노인네요. 이젠 서로 익숙해졌지. 집안 일도 아주 잘 해 나가구. 난 그를 진심 으로 좋아하오. 하인들과 사는 게 어떤 건지 당신은 모를 거요." 앙드레는 대꾸할 기회를 잃었다. 뚜껑 덮인 수프 그릇을 든 스핑크가 다른 문을 통해 어 기적거리며 들어왔던 것이다 이 집 딸도 군인 같은 장화발 걸음으로 들어왔다. 승마용 파지 와 목 부분이 돌돌 말린 롤넥 스웨터, 영국 시골 여자들이 좋아하는 솜을 덧댄 풍성한 조끼 차림의 크고 건장한 처녀였다 "늦어서 미안해요, 아빠, 퍼시가 산통중이라서요." 콧소리 섞인, 목이 약간 눌리며 나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실내를 쾅쾅 울렸다. 사람들 목소리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있다면 그녀는 단연 트럼펫 감이었다. 앙드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쳐다보았다. 수프를 검사하고 있던 램프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켈리 씨, 얘가 바로 내 딸 대프니요." 수프 그릇을 들고 앙드레 옆에 서 있던 스핑-가 속삭였다. "'고귀한' 대프니 아가씨지." 무릎 굽혀 절하라는 얘기인가 싶을 정도로 '고귀하다' 는 말을 강조해서 발음했다. 그녀가 그를 어찌나 열심히 겨다보는지 앙드레는 당황스러워졌다. 짙은 푸른색의 아주 큰 눈이 불그레한 혈색과 대조적이었다 갈색 머리는 뒤로 넘겨 검정 리본으로 묶었고 승마모를 갓 벗어 낸 듯 이마엔 모자 자국 선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한 15년 후엔 바깥 풍파를 너무 맞아 거칠어진 피부에 몸이 불어나 있을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나이인 현재로 선, 운동을 많이 한 최상의 컨디션을 가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건강미가 반짝였다. 램프리 경이 수프 접시를 숟가락으로 젓다가 표면에서 까딱거리는 자그만 고무 골무를 발 견했다. "스핑크, 도대체 이게 뭐야?" 스펑크가 허겁지겁 달려와 국자로 골무를 건져냈다. "아하, 그렇잖아도 요리사가 찾고 있었는데. 요리하다 손을 데었다더니 그때 손가락에서 빠져 나간 모양입니다. 요리사가 좋아하겠는데요. 이게 그녀의 마지막 골무였거든요." 스핑크는 골무를 자기 손수건에 쌌다. 앙드레는 짙은 수프 깊숙한 곳에 또 그런 물건이 빠져 있진 않나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자 신의 접시를 열심히 휘저었다. 먹어 보니 뜻밖에도 맛은 좋았다. 세리주를 듬뿍 넣은 수프가 따뜻하게 속을 달래 주었다, 문득 누군가가 쳐다보는 느낌에 고개를 든 그는 대프니가 자신 을 뚫어지게 보고 있음을 알았다. "말 타세요?" 그녀가 물었다. "못 탄다고 봐야죠. 한 번 타본 적은 있지만 옛날에 우리 부모님께서 보르도에서 멀지 않 은 아르카숑 바닷가로 날 데려가셨을 땐데. 모래사장에 당나귀들이 있었죠. 그때 아마 10분도 채 못 버티고 떨어졌던 것 같아요. 아주 순한 늙은 당나귀였는데 말이오." 앙드레는 그녀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프랑스 얘기가 나오자, 열심히 수프만 먹고 있던 램프리 경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프랑스 인들의 사악한 기질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 지독한 이기주의, 오만하고 자기 만 족적인 성향, 속물 근성, 음식에 대한 열성. 개구리라니, 맙소사. 게다가 달팽이까지. 게다가 요즘엔 빌어먹을 프랑 화 가치까지 너무 올라 가 볼래야 가볼 수도 없다는 얘기였 다. 그의 얘긴 앙드레가 영국인 지인들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어온 견해였다 그들은 마치 운명 이 프랑스인에게만 편파적으로 대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영국인들은 지금도 매년 수백 명씩 영극 해협을 건너간 다. 돌아올 땐 커피 한잔 값이 5파운드라는 등 파리 웨이터들의 무례함이 전설적일 정도라 는 등 온갖 끔찍한 얘기들만 한 보따리씩 안고 오면서 말이다. 앙드레는 램프리 경의 심술궂은 기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재미있는 건, 프랑스인들도 영국인에 대해 똑같이 말한다는 겁니다. 물론 음식에 관한 한 예외지만요. 여기서 음식에 대한 그들의 촌평까지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만하 다, 속물이다 하는 건, 특히 속물이란 얘기는 영국 해협을 건너가 보시면 한치도 틀리지 않 게 똑같은 소릴 듣게 될 겁니다. 제가 볼 때 양국민은 서로를 약올리며 즐거워하는 것 같아 요." 그는 대프니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사실 전 프랑스인의 피를 절반쯤 받았어요. 그러니 우린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대프니가 코웃음을 쳤다. "프랑스 사람들은 말들한테 아주 잘해요. 아빠 얘긴 너무 심각하게 받아늘이지 마세요 아 빤 모든 사람을 싫어하죠. 독일인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해요. 아니, 영국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아빠에게 정치인 욕을 하게 만들려면 블레어(1998년 현재 영국의 수상-역주) 라고 한마디만 입에 올리면 돼요. 하지만 잘못하편 우린 밤새도록 여기에 앉아 있어야 된다 구요," "프랑스 사람들한테 한 가지 꼭 말해 줄 게 있어." 램프리가 자기 잔을 가득 채우더니 눈에 띄게 내키지 않는 태도로 두 사람의 잔에도 술병 을 돌렸는데, 인색하기 그지없게 따라주면서 말했다. "그 사람들, 와인 하나는 정말 잘 만들어. " 그는 앙드레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영광된 당신의 조국을 위하여." 이어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우리나라였으면 좋았을걸."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식탁을 치우고 난 스핑크가 까맣게 태운 동물 시체를 구운 감자 와 싹양배추의 바다 한가운데 띄워 놓은 것 같은 주 요리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는 엄지 손가락 위에 대고 날을 시험해 본 다음 손잡이가 뼈로 된 대형 나이프와 포크 세트를 램프 리에게 건네 주었다. "풀어 키운 닭만한 요리가 없지." 램프리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대형 포크로 힘 차게 찌르고 들어갔지만 까만 피부로 무장한 적이 갈퀴 공격에 저항하는 바람에 접시에 놓 였던 닭고기가 식탁으로 반쯤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싹양배추와 감자를 사방으로 흩어 놓았 다, 램프리가 놀라서 소리치며 적을 쫓아갔다. "이런, 이 빌어먹을 것이 안 죽었잖아. 스핑크!" "첫 패스(펜싱에서의 찌르기 -역주) 때 우리가 다소 서둘렀던 것 같네요, 나으리 ." 스핑크가 냅킨으로 닭을 집어 다시 접시에 올려놓았다. "포크로 불시에 공격하듯 해야 한다고 제가 그랬잖습니까. 그런 다음 나이프로 뿔 위쪽을 파고들어야죠." 스핑크는 램프리를 곁눈질하며 흩어진 야채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뿔? 뿔이 어딨어? 지금 이건 닭이잖아." "오래된 투우 용어가 그만 튀어나왔네요, 나으리." 투덜대고 난 램프리는 마침내 닭을 꿰뚫는 데 성공했고 나이프로 썰기 시작했다. 스핑크 가 능글맞게 웃었다. "올레(스페인어로 훌릉하다는 뜻의 감탄사-역주)나으리 " 앙드레는 싹양배추와 닭 중에 어느쪽이 더 질긴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거나 가리지 않는 촌사람 식성으로 잘도 먹어댔다. 한 번씩 더 덜어 가는 것으로 보아 맛도 좋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앙상한 뼈대만 접시에 달랑 남게 되었을 때 램프리가 휴전을 선포 했다, 뼈대가 치워지고 적포도주 병과 스틸튼 치즈(영국산 치즈의 일종-역주) 조각이 남았 다.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갔다. 말들에 대해 최근의 시시콜콜한 만남들, 내년의 링 사냥 전망에 대해 주로 대프니와 그녀의 아버지가 얘기했다. 두 사람은 앙드레나 그의 일에 대해선 전혀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자기들 관심사에만 온전히 몰두했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난 그로선 오히려 그것이 아주 편안했다. 거실에서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고 난 후, 램프리 경은 갓 들 어온 재난 소식(그는 열 시 뉴스를 그렇게 불렀다)을 시청할 뜻을 밝혔고 앙드레는 그것을 핑계삼아 빠져 나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위스키 잔을 들고 침대 가에 앉아, 촉감이 꼭 얼어붙은 유리같은 면 시트 속으로 옷 을 벗고 기어들어 가야 할 순간을 자꾸만 미루고 있었다. 알코올 기운은 실내 온도와의 싸 움에서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어 옷을 입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건강의 소중함을 운에 맡 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급한 노크 소리가 난 것은, 그가 인간답게 옷을 입고 잘 것인가 벗고 잘 것인가를 두고 한참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혹시 스핑크가 데운 벽돌이나 온수병을 들고 온 건가 기대하며 그는 문을 열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나 거기엔 '고귀한' 대프니가 서 있었다. "한바탕 달려볼래요?" "응? 이 야밤에?" 앙드레가 물었다. "원한다면 불을 켜둘 수도 있어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억센 손이 그의 가슴에 올라왔고 그를 뒤로 밀어붙이며 들어온 그녀 는 장화발로 문을 차 쾅 닫아 버렸다. 11. 위조된 세잔느 비가 그쳤다, 미풍엔 봄의 따스한 숨결이 실려 있었고 스로틀 홀의 끔찍한 정면 풍경마저 도 반짝이는 오후 햇살 속에선 다소 덜 불쾌해 보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작별 인사까지 마 친 앙드레는 마지막 가방을 챙겨 넣고 나서 차 트렁크를 닫았다. 스핑크는 방해가 되지 않 도록 현관 계단 한 쪽에 웅크리고 서서 언제 달려들어 팁을 요구할까 틈만 보고 있었다. 앙드레가 차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쪼르르 달려온 스핑크가 머리로 앙드레를 받으 며 달려들어 은근한 곁눈질과 함께 운전석 문을 열어 주었다. 앙드레가 20파운드 지폐를 주 자 그는 액면 금액 확인을 하기 위해 한차례 눈길을 내리깔고 감사의 정도를 계산하고 난 후에야 슬그머니 받아들었다. "아이구 고맙기도 하지. 정말 고맙수 " 돈을 안전하게 호주머니에 넣고 나자 이제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 다. "간밤엔 편안했소, 선생? 잠자린 따뜻했구? 각종 설비들도 잘 이용하셨겠지?" 딴엔 살짝 윙크할 생각이었던지 그의 안면이 그 비슷하게 일그러졌다. 앙드레는 그 늙은 돌이무기 같은 얼굴에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안전 벨트를 착용한 후 그는 시동을 걸 었다. "결코 잘 자진 못했어요, 스핑크. 고마웠소." '난 다 알지, 저녁 먹을 때 대프니가 그를 바라보는 태도를 보고 알았지. 어린 게 뻔뻔스 럽기 그지없어. 제 에밀 닳아 가고 있단 말야. ' 멀어지는 차를 지켜보며 스핑크가 생각했다. 램프리 경은 경마 중계가 없는 날엔 오후 낮잠을 즐기는 습관이 있었다. 그가 깨기 전에 마을로 내려가 리타에게서 진 한 병 사올 시간이 있을까 하고 스핑크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히스로우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앙드레는 '고귀한' 대프니와 더불어 초강럭 에어로빅을 하고 난 것 같은 지난밤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처음 한마디 인사를 하고 난 후로, 테크닉의 종류에 관해 설교하고 공중 점프를 할 땐 좀더 힘차게 뛰어 오를 것을 주문 하는 쪽으로 얘기를 몰고 갔다. 한바탕씩 난리를 치고 나서 체력을 회복시키는 중간중간 그 녀는 줄곧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위스키를 마셔 댔고, 꾸벅꾸벅 졸기도 해서 대화해 보려는 그의 시도를 사실상 무시해 버렸다. 그가 거기 있는 이유는 잡담이 아닌 서비스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라는 게 분명해지자 그 는 그렇게 해주었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새벽녁이 되자 그녀는 완전히 녹초 가 되어 얼굴을 처박고 있는 그를 남겨 두고 방에서 나갔다. 작별 인사로 그의 궁둥이를 철 썩 때리며 자기가 졌다는 촌평을 남기고. 히스로우 공항에서 그 영국 잡지사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 태피스트리를 찍은 필름들을 넘 겨주고 난 그는 출발 대기 라운지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 들이 욱신욱신 쑤셔댔다. 또 한번 그런 밤을 보냈다간 목발 신세로 물리 요법을 받아야 할 것이다. 루시에게 전화 하려고 팔을 뻗을 땐 에서 경련까지 일었다. "앙드레! 어디에요?" "히스로우 공항이레요. 니스 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잡지사에서 사람이 나왔길래 필름을 건네 줬으니까 언제든 당신 편할 때 청구서를 작성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말하다 말고 하품을 했다. "미안, 지난 이틀 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거든." "어땠어요?" "춥고 축축하고 괴상했지, 요리사에, 집사에, 선조들 초상화, 바닥 가득 깔린 개들, 구불구 불 수백 에이에 달하는 영지, 그런데 난방이라곤 안 되고. 램프리 경은 이젠 지붕에 올려 보 내 굴뚝 청소시킬 젊은애들이 없다고 투덜거리고. 요즘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지 정 말 몰랐어요." 루시의 킥킥대는 소리가 3천 마일의 거리를 달려왔다. "영국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네요. 말 타볼 시간은 있었어요?" "룰루, 정말이지 맹세코 말하는데 자신을 위한 시간은 1분도 갖지 못했어요." 이건 완벽하게 진실한 얘기라고 앙드레는 생각했다. "룰루, 거기 일은 어때요?"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긴 하지만 잘 돌아가고 있어요. 스티븐이 플로리다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난 사무실에서 나가 점심을 먹을 수도 있게 됐죠." "나하고 같이 먹게 한 번쯤 비워 둘 거죠? 오늘 밤에 사이러드 파인을 만날 건데 이틀 후 에나 돌아갈 것 같아요. 그땐 내가 로열튼에 데려가 줄 테니 우리 거기서 카밀라한테 손을 흔들어 줍시다." "좋죠. 난 총이라도 갖고 나가야 할까 봐요." 앙드레가 탈 비행기의 탑승 시간이 됐음을 알리는 소리가 지직대며 요란하게 울려 퍼졌 다. "룰루, 니스에 가서 전화할게요," "거기야말로 점심 먹기엔 딱 좋은 곳이군요. 몸조심 하세요." 비행기 뒷좌석에 앉은 앙드레는 이륙하기도 전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 로 그려본 것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야외 식당에서 루시와 마주앉아 있는 장면이었다. 착륙 직전 그를 깨우러 온 여객기 승무원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 * * 사이러스 파인의 제안에 따라 보 리바주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프롬나드 데 앙글레 뒤쪽 에 있는 작고 쾌적한 호텔인데 오페라 극장 에서도 멀지 않은 위치였다. 오페라 주역 여가 수들이 오면 그 호텔에 머물곤 한다고 사이러스가 말했었다. 그리고 자기는 당당한 젖가슴 을 특히 좋아하기 때문에 여가수들에게 약하단 소리도 덧붙였다. 밤 비행기로 파리까지 와 서 다시 니스로 들어온 사이러스는 앙드레보다 몇 시간 먼저 호텔에 투숙하고 프런트에 쪽 지를 남겨 두었다. "피시 앤 칩스(생선 프라이에 감자 칩을 곁들인 것-역주)를 먹으러 나가네. 열 시에 바에 서 만나세." 앙드레가 손목시계를 프랑스 시간으로 맞춘 다음 보니 3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는 짐 을 풀고 나서 몸에 손톱 자국이나 타박상이 남지 않았나 꼼꼼히 살펴가면서 샤워를 했다. 펑펑 쏟아지는 온수 밑에 서니 쑤시던 게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제 다시는 프랑스 배관 시설을 욕하지 않으리라 스스로에게 맹세하고 나서 그날 처음으로 인간이 된 기분으로 바에로 내려갔다. 10분도 채 못 되어 파인이 들어왔다, 깔끔한 모습이긴 했지만 송곳니 체크 무늬 양복과 건포도색 나비넥타이가 약간 연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방금 먹고 온 음식 때문에 말 그대로 배가 터질 지경이라고 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대식가들인지 내가 깜박했지 뭔가, 나한테서 분명히 마늘 냄새 가 날 걸세. 왕새우 라비올리(만두와 흡사한 이탈리아 요리 -역주)를 먹어 본 적 있나?" 앙드레는 스로틀 홀 부엌에서 이것저것 남은 걸로 차린 점심을 먹은 게 자신의 마지막 끼 니였슴을 문득 깨달았다. "피시 앤 칩스를 드신 줄 알았는데요," "물론 그럴 생각이었지 그런데 프런트 데스크에 앉은 그 예쁜 아가씨가 항구 밑에 있는 ' 레스키나드' 란 곳에 가보라고 권하길래 그만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지. 여자 꾐에 넘어가는 거, 그게 내 오랜 습관 아닌가." 파인은 바텐더에게 코냑을 주문하느라 잠시 얘기를 중단했다. "어쨌거나 장애물이 없다는 걸 알면 자네도 기분이 좋을걸세. 우리가 합의한 대로 전화를 해봤는데 드노이예는 아직 바하마에 있어. 그와 직접 통화했지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더군." "뭐라고 하셨어요?" "저는 AT&T(유명한 통신 회사-역주)의 국제 고객 서비스부 부사장인데 손님에게 플래 티늄 카드(골드 카드보다 한 단계 위의 최고 추대 카드-역주)를 하나 보내 드리고자 합니 다, 했지 모든 장거리 전화의 비용을 75퍼센트씩 할인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카드라구 말이 야. " 파인은 자신의 코냑을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좋아하더구먼. 하긴 부자가 돈 아끼는 것보다 좋아하는 건 없으니까. 그가 나더러 캅페라 로 카드를 보내라고 했어 . 자기는 다음 주에나 거기로 간다더군. 그러니 내일은 우리둘과 그 집사뿐이라는 얘기지." 앙드레는 빙그레 웃고 나서 모자를 치켜 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직물 견본은 가져오셨겠죠?" "열 몇 개는 가져왔네, 젊은이. 준비는 다 끝난 거야." * * * 다음 날 아홉 시, 그들은 차를 타고 캅페라로 가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파인 은 경우에 맞게 옷차림을 바꿨다. 양복 대신 블레이저와 분홍색 슬랙스를 입고, 늘상 매고 다니던 나비넥타이 대신 실크 페이즐리 무의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어떤가? 인테리어 장식가로 보이나? 바지가 너무 튀는 건 아닌가 몰라. 지난번 파이어 섬에서 주말을 보내고 온 유물인데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만난 적이 있는 유일한 실내 장식가는 여자였어요. 엄청나게 뚱뚱 한 데다가 스스로에게 아주 만족하는 스타일이었죠. 쿠션 장식 일을 했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쿠션을 몸에 입고 다니는 것 같더라구요." 앙드레는 N98번 도로에서 벗어나 곶으로 이어진 자그만 도로로 접어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의상은 멋지니까. 지금 여기서 아르마니 정장 차림이라면 큰 실 수죠. 모두들 선생님이 자가용 기사인 줄 알 테니까." "비행기 안에서 숙제를 좀 했지. 리비에라에 관한 책을 읽었네.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이 캅페라에 별장을 한 대 두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수영할 때면 턱수염을 고무 봉지 안에 넣 고 했다는구먼, 재미있지 뭔가. 이제 다 와 가나? 사이러스가 말했다. "2분만 가면 돼요." 앙드레가 대답했다. 그는 초조하고 흥분될 걸로 예상했었다. 어쨌거나 거짓 핑계를 대고 남의 집에 들어가려는 참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의 쾌활한 동반자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 보였다. 그의 자신있는 태도에 고무되어 앙드레의 기분도 기대감과 낙관주의 쪽 으로 기울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 집에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잔느 그림을 거기서, 늘 있던 그 자리에서 발견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훌륭한 점심 식사 후에 그 무슨 김빠지는 일인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속력을 줄이며 사이러스를 보았다. "이 굽이만 돌아가면 바로예요. 여기서 차를 세우고 리허설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됐네. 우린 기본 줄거리를 알고 있지 않은가.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생명의 숨결이네, 젊은 이. 일단 들어가는 거야, 나머진 내게 맡기라구." 파인이 말했다. "클로드가 영어를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걸 잊지 마세요." "신중하기로는 나만한 사람도 없네. 걱정 말게." 앙드레가 씩 웃었다. "그 바지를 보면 아닌 것 같은데요." 앙드레는 철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벨을 눌렀다. 인터폰을 통해 깡통 소리 같은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 왔다. "누구신가요?" "봉주르, 클로드 아저씨. 앙드레 켈리예요. 기억하세요? 지난번 그 사진 작가. 드노이예 씨 가 자기 친구 한 명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내게 부탁했어요. 응접실에서 몇 가지 작업 을 할 게 있답니다. " "아탕(기다리세요)." 찰칵 소리에 이어 철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어 앙드레가 사이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의 본명을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좋은 뱅각이야, 젊은이 ." 그가 목에 맨 스카프를 가다듬었다. "페이즐리가 어떤가? 프레드릭 페이즐리 3세. 올드 팜 비치 가문에 조상은 스코틀랜드인." "너무 그렇게 들뜨지는 마세요." 앙드레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며 천천히 저택 안의 신작로로 들어갔다. 드노이예가 돌아을 때가 되어 정원사들이 바빠진 모양이었다. 잔디는 면도날처럼 깎여 있 고, 사이프러스와 야자수들도 가지치기로 모양을 냈으며, 꽃밭에도 새 꽃들이 심어져 있었 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설치된 살수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가 햇빛을 받아 무지 개 빛을 발하는 가운데 저택 저 너머로 멀리 지중해가 아른거렸다. "드노이예는 꽤 사치스럽게 사는구먼. 여기에서 여름을 지내는 것도 괜찮겠는걸, 저기 현 관 계단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충직하다 는 가신인가?" 사이러스가 말했다. "맞아요. " 앙드레가 차를 세웠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동안에 클로드가 그들을 맞기 위해 앞으 로 나왔다, 면 바지에 낡은 폴로 셔츠 차림의 땅딸막한 인물로서, 벌써 햇볕에 타 미소를 짓 자 얼굴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앙드레와 악수하고 난 그가 목례했다. "잘 지내시죠? 켈리 씨?" 너무 바빠요, 클로드 아저씨, 여행도 너무 많고. 이곳에서 좀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아저씨는요?" "우프(에이그)나이만 더 먹었죠. 뭐." 클로드의 눈이 한 쪽에 서 있는 사이러스에게로 향했다. 사이러스는 직물 견본 책들과 색 상 샘플 묶음, 클립보드를 한아름 들고 있었다. "클로드 아저씨 , 이분은 뉴욕에서 오신 페이즐리 씨예요." 두 사람은 고개 숙여 인사를 교환했다. "이분이 응접실의 장식 바꾸는 작업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드노이예 씨에게 안을 내기 전에 먼저 색상을 선택하고 측정해 볼 게 있답니다." "아 봉(그래요)?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 연락도 못 받았는데요." 상냥하던 클로드의 얼굴에 당황스런 빛이 떠올랐다. "그래요? 거참 이상한 일이네." 앙드레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바하마에 전화해 보면 되잖아요?" 이어서 그는 사이러스 쪽으로 돌아서서 방금 자신의 말을 반복했다. 이번엔 영어로. 사인 을 알아챈 사이러스가 능청을 떨며 말했다. "전화를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러고 나서는 손목시계를 보기 위해 손에 든 짐을 추스렸다. "지금 거긴 새벽 세 시오, 베르나르가 얼마나 잠꾸러긴지 모른단 말이오?" 앙드레가 클로드에게 애로사항을 설명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페이즐리 씨는 오늘 오후에 파리에서 약속이 있어요. 지금 못하면 기 회가 없답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앙드레는 숨을 죽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생각에 잠겨 있던 클로드는 스스로를 격려하듯 자신의 시계를 확인하고 나서 마침내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아니겠죠, 뭐." 이렇게 말하곤 전화 거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중에 제가 드노이예 씨와 통화해 보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타일이 깔린 현관 홀로 그들을 데리고 간 클로드는 응접실로 들어가는 이중 문을 열었다. 길다랗고 천장이 높은 응접실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그들은 클로드가 무거운 커튼을 걷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덧문을 열 때 일부러 천천히 하는 것 같아서 앙드레는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물밀듯 들어오자 화려한 촛대와 옅은 복숭아색 벽지, 정확하게 제 자리에 정렬된 가구들, 오부송 카펫, 낮은 탁자 위에 놓인 책들과 골동품들의 모습이 드러났 다. 실내는 작년에 그가 사진 촬영 했을 때와 똑같았다. 정말이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오우, 놀랍군." 사이러스는 안으로 들어가 견본과 색상 묶음을 긴 의자 위에 내려놓고 나서 양팔을 확 벌 려 보였다. "공간 배분도 최상이고, 조명도 뛰어나고, 가구도 일부는 정말이지 특이해." 그는 양손을 엉덩이에 대고 한 발로 대리석 바닥을 톡톡 차며 서 있었다. "하지만 저 촛대는 전혀 맘에 안 들어. 그리고 커튼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는 편이 낫겠 군. 하지만 가능성이 보여. 대단한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러나 앙드레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운이 쭉 빠지면서 모든 낙관적인 생 각들이 싹 사라졌다, 그는 벽난로 위의 그림을 응시했다. 세잔느의 (멜론과 여인)의 여인도 정확하게 제자리에 앉아 자기와 마주 보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도 그림틀까지 지난번과 똑 같았다. 아, 완전히 시간만 낭비한 셈이다. 클로드는 문가에 자리를 잡은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기로 작정한 게 분명했다. 앙드레는 실망 어린 말투가 되지 않도록 애쓰려 말했다. "제가 도와 드릴 거라도 있나요?" 사이러스가 그에게 클립보드와 펜을 건네 주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둘러보는 동안 메모 좀 받아 적어 주시겠소?" 그의 음성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만일 실망하고도 그런 거라면 정말 그럴듯하게 감정 을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 방의 초점은 저 세잔느 그림이오. 뛰어난 수작이군. 따라서 우린 저 그림 에 방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되오, 안 그렇소? 색상, 마무리 재료. 직물,,,,,, 모두 저 그림과 조화되어야 하오. 누구보다도 세잔느가 제일 잘 알 테니 우리의 출발점도 바로 저 그림이오. 따라오시오." 그는 직물 견본 한 무더기를 벽난로 쪽으로 가져가 그림을 유심히 쳐다보며 이따금 천 조 각을 그 옆에 대보기도 하면서 관련 견본의 번호를 불러 댔다, 앙드레는 그가 부르는 대로 열심히 클립보드에 적어 나갔다. 그 과정은 색상 샘플을 가지고도 되풀이되었고 재고 삼고 하는 사이러스의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는 마치 그림에 최면이 걸 린 사람 같았다. 그런 작업이 두 시간 동안 계속됐는데 그 동안 클로드는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고, 앙드레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을 클립보드에 적을 때마다 점점 기분이 침체되고 있었 다. 때는 벌써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 가지 재보고 난 사이러스가 마지막으로 그림을 오래 쳐다본 후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군. 틀림없이 받아 적었겠죠?" 그는 앙드레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클로드에게로 가더니 그의 손을 힘차게 흔들어 댔 다. "이렇게 주래 기다리게 해서 데졸레(대단히 미안하오),친애하는 선생, 정말이지 고마웠소. 메르시, 메르시(고맙습니다). 비브 라 프랑스(프랑스 만세) 클로드가 앙드레 쪽으로 곤혹스런 눈길을 던졌다. 차를 타러 나가면서 앙드레도 감사를 표했다, 두 사람은 대문을 빠져 나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택이 시야에서 사라 지자 앙드레가 차를 도로 한 쪽에 정차시켰다. "선생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쩜 그렇게 시종일관 너스레를 떠실 수 있어 요?" 그는 차창을 내다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죄송해요. 선생님은 정말 잘 하셨어요. 그걸 생각하면 속이 더 상하지만 말예요" "자넨 몰랐을걸, 젊은이 . 그 그림은 말야, 모조품이었어." "뭐 , 뭐라구요? "아주아주 정교한 위작. 그래, 틀림없네 " 입이 찢어질 듯한 미소가 떠오르며 앙드레의 얼굴이 펴지자 사이러스는 재미있다는 듯 지 켜보았다. "자, 그렇게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하나? 차를 몰게나." "어디로요? "점심 먹으러 가야지, 이 사람. 점심." 햇살 아래서 점심 먹는 장소로는 생장 캅페라 항이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제라늄 꽃 들로 넘쳐나는 브왈 도르 식당 테라스만한 곳도 드물다. 늙은 올리브 나무 그늘 아래 식탁에 자리잡고 앉자 사이러스는 만족스러운 듯 흥흥거렸 다. 앙드레는 그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로제 와인을 한 병 주문한 후 두사 람은 메뉴를 살폈다. 마침내 궁금증을 참다 못한 앙드레가 물었다. "모조품이란 걸 어떻게 아셨어요?" "으응? 구운 크레베트(작은 새우)라, 근사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지 말고요, 선생님 . 어떻게 아셨냐고요?" "글쎄, 수십 년에 걸쳐 아주 가까이에서 원화를 봐온 게 주효했다고나 할까? 게다가 난 이 업을 시작한 후로 세잔느 그림을 꽤 많이 취급해 왔거든 작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 잔느 전에 가봤는가? 난 거기서 이틀을 묵으며 보고 또 봤지. 정말 멋지더군. 아, 반가운 사 람이 오셨구먼." 웨이터가 와서 술병의 코르코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냄새 좋은 연분홍 와인을 그들의 잔 에 따라 주면서 젊은 처녀의 혈색 운운했다. 주문을 받고 난 웨이터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 를 끄덕이더니 터벅터벅 부엌 쪽으로 되돌아갔다. 사이러스는 와인을 맛보기 전에 햇살 속에 자신의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정말이지 프랑스만한 데가 없어, 그렇지? 참 내가 어디 얘길 했더라?" "필라델피아요." "그렇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 자네의 눈이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걸세, 그러니까 색채와 빛과 원근 사용법, 구도를 다루는 비결, 붓 터 치, 즉 빠르게 혹은 천천히 칠하는 따위 말일세. 그런 것들은 가만히 보면 마치 사인처럼 뚜 렷이 구분되지 자네와 같은 사진 작가들도 마찬가지일걸세. 자넨 진짜 아베동 사진과 모방 작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 거야." "하지만 그림 쪽하곤 많이 달라요, 선생님 ." "어쨌든 내 말뜻은 이해가 갈걸세. 가짜를 구별하는 덴 공식이란 게 없네, 바로 자네의 눈, 경험, 그리고 직관, 좀 거칠게 말한다면 본능적 반응에 달려 있지, 캔버스, 물감, 캔버스 틀, 거기 박힌 못 따위의 연대를 알아내기 위한 테스트도 있긴 하지만 완벽하게 믿을 만한 건 못 되네, 예를 들어 캔버스나 거기 쓰인 목재를 생각해 보게. 수천 점에 달하는 평범한 옛 그림들이 시중에 나돌고 있지. 그 중 하나를 솜씨 좋은 날조자가 몇 달러를 주고 사들이 네. 물론 필요한 연대와 일치하는 걸로 말일세. 그러곤 그걸 이용하여 위작을 만들어 내지. 시기적으로 현대와 가까운 그림일수록 재료를 찾아내기가 더 쉬운 법인데 세잔느는 죽은 지 불과 90년밖에 안 됐지." 사이러스가 와인을 조금 마셨다. "날조자는 세잔느가 원작을 팔 때보다 훨씬 더 높은 대가를 받고 위작을 판다는 것을 생 각해 보게. 정말이지 한심한 세상이야." 웨이터가 오더니 연습이라도 한 듯 기계적으로 웅얼거렸다. "작은 새우와 가스파초(스페인식 찬 수프-역주) 소스를 곁들인 생퍼에르입니다. 맛있게들 드십시오." 앙드레는 더 묻고 싶은 것을 잠시 참아야 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음식에 정신이 빠졌 던 것이다. 그들이 앉은 테라스에는 다른 커플들도 몇 쌍 있었는데 식탁을 선택한 기준으로 어디 출신들인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그늘 쪽에, 그리고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긴 잿빛 겨울을 보상받으려는 듯 쨍쨍한 햇볕 속에 앉아 있게 마련이다. 테라스 밑으로 보이는 항구엔 요트와 작은 보트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을 뿐 고즈넉한 분 위기였다. 그 주인들은 정박 이용을 벌기 위해 지금쯤 멀리 어딘가 사무실들에서 열심히 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7--8월이 되면 내려와 2주짜리 뱃사람이 되어 비슷한 처지의 수천 명 속에 끼여 선체를 부딪혀 가며 휴가를 보낼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갈매기들이 보트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걸신들린 듯 남은 소스까지 다 먹어 치운 앙드레는 사이러스가 치즈 테이블을 감정하듯 훑어보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미국에서 너무 오래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구먼, 치즈는 몸에 나 쁘다, 햇볕도 나쁘다, 알코올이나 담배는 생각도 하지 마라, 이따위 선전들에 제약받고 살아 왔지. 프랑스인들이 수명이 다하도록 사는 게 놀랍지 않은가? 역시 프랑스 사랑들이 옳은 데가 있어." 사이러스가 말했다. "여기 와서 살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살고 싶지, 이 사람아. 하지만 돈이 문제지. 뉴욕의 집은 저당 잡혀 있는 데다 이혼한 아 내의 위자료도 아직 다 못 갚았거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큰 거래 한 건이 모든 걸 바꿔 놓을지," "이번 건이 그렇다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우선 그 그림을 손에 넣는 게 급선무야." "그 집에 있는 그림은 단순한 위작이 아니라 놀랍도록 정교한 위작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게 어떤 단서가 되지 않을까요?" "아, 날조자가 누군진 짐작이 가네. 인상파에 일가견이 있는 위작화가가 딱 한 명 있거든 아까 내가그렇게 오래 캔버스에 코가닿을 정도로 열심히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위작인 줄 모르고 넘어갈 뻔했네 대단히 훌륭한 위작이야. 하지만 그린 사람만 알면 뭐 하 나? 문제는 그 악당을 찾아내는 건데," 사이러스는 웨이터를 불러 치즈 식탁을 가리켰다. "직업별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을 녀석도 아니고." "그를 찾아내 봤자 뭐 하겠어요? 하나도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 게 뻔하잖아요? 사기꾼일 것 같아요." "잘 봤네. 그리고 사기꾼들은 늘 뇌물을 먹는 법이지. 아마 교묘한 작전이 필요할 거야. 하지만 우리 둘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걸로 믿네. 잘 궁리해 보게나. 그 녀석 빼고, 이 일에 연루된 또 다른 사람은 우리가 아는 한 드노이예뿐인데, 그가 깨끗하게 나올 가능성은 없네. 이미 한 번 거짓말을 했잖은가. 세상에 저 치즈들 좀 보게나, 내가 감히 카망베르(카망베르 산 고급 치즈-역주)를 택할 수 있을까? 언제든 공격해 올 것 같아 보이는군." 그가 그 치즈를 가리키자 웨이너가 한 쪽을 썰어 주었다. 완벽하게 숙성되어 기름기가 자 르르 흘렀다. "아베크 사, 므시유(그밖에 또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손님)?" 그는 캉탈 치즈와 베이비 세브르(염소젖 치즈-역주)를 고르고 나서 적포도주 한잔도 주문 했다. 그러곤 앙드레가 치즈를 고르는 것을 흥미로운 듯 지켜보았다. "자넨 어떤가? 자넨 여길 좋아하는 것 같은데. 불어도 할 줄 알고. 파리에서 자그만 스튜 디오나 열면 좋겠군그려 아니면 니스에서 하든지 매일같이 사무실에 나가야 하는 업도 아니 잖은가." 앙드레가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최근엔 부쩍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뉴욕엔 좋은 일거리들이 있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 적어도 2주 전까진 그랬죠." 이어서 그는 자신이 카밀라와' <에게 냉대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사이러스에게 모 두 털어놓았다. "하룻밤 사이에 태도가 변했어요. 제가 바하마에서 돌아온 직후죠. 카밀라는 전화 한 통도 해주지 않고요." 사이러스는 카망베르를 먹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거 흥미롭군. 그녀도 드노이예를 아나?" "글쎄요, 모르진 않지만 작년에 저와 함께 그의 집에 가서 사진 작업을 한 후로는 그에 대해 얘기하는 건 한 번도 못 들었어요." "이상하지 않은가? 타이밍이 말이야. 자네가 뜻밖에도 어떤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곤 곧이 어 ,,,, ." 사이러스가 손가락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글쎄요,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죠." 사이러스가 혼자말에 가깝게 말했다. "난 나이를 먹어 갈수록 우연의 일치 따윈 믿지 않게 되는걸." * * * 쿠퍼케이의 수영장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해온 50번 왕복을 하고 있는 베르나르 드노이예 의 마음은 무거웠다. 아침 여섯 시에 캅페라에서 온 클로드의 전화에 잠이 깼는데 그의 전 화가 하루의 시작을 망쳐 놓았다. 처음엔 아내인 카트린느가 모두를 놀라게 해주려고 은밀히 실내장식 작업을 진행시키나 보다 했다, 아니 그랬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물어 보니 전혀 아는 바가 없었을 뿐 아니 라 페이즐리란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수영장 끝까지 온 그는 벽을 박차 방향을 돌리고 시원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 채 수영장 바닥에 어른대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홀츠의 이번 계획이 만일 성공하지 못한다면 드 노이예로선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다. 처음에 그의 얘길 들었을 땐 아주 간단한 일인 것 같았다. 세잔느를 원화와 다름없는 위 작과 바꿔 치기만 하면 된다, 원화는 신중하게 팔 수 있다, 그 과정은 스위스에서 은밀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했었다. 엄청난 세금을 물 필요도 없고 막대한 현금을 곧바로 손에 넣을 수 있어 리용 은행의 파산으로 발생한 저 억울한 손실늘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뭐란 말인가. 그 젊은 사진작가는 도대체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 이며 이번에 등장한 페이즐리란 자는 또 누구인가? 50번 왕복을 마친 그는 타월 가운을 두 르고 서재로 곧장 가서 문을 닫고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엔 루돌프 홀츠도 어떤 장담도 해줄 수 없었다. 드노이예와 통화하고 침실데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맘 역시 편치 않았다. 그 사진작가가 성가신 존재로 되어 가고 있었 다. 아니, 그보다 더한 존재였다 점점 위험한 인물로 되고 있었다. 홀츠는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한 다음 커피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짜낸 사 기 수법은 실패를 모르는 것 같았고 실제로 지난 2년 간 아무 장애 없이 기능해 왔다. 최고 의 사기가 모두 그러하듯 그의 수법도 비교적 단순했다. 카밀라는 <>를 통해 부잣집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집주인과 하인들에게 알 랑거리며 예술품으로 장식된 방들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메모도 하며 몇 시간씩, 심지어 몇 날씩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런 작업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아첨 섞인 기사를 쓰는 데 필요 한 자요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에 불과했다. 그녀가 하는 작업의 숨은 목적은, 물론 그러한 목적들은 결코 인쇄되어 나가지 않았지만, 두 가지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첫째, 집주인이 집을 비우는 양태, 다시 말해서 카리브 해안 이나 스키 경사지의 즐거움을 찾아 정기적으로 주 거주지에서 떠나 있는 날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집의 보안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보안 장치의 범위와 성능을 알아 보는 것인데 그 결과는 흔히 구식이거나 놀랄 만큼 무력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홀츠가 전문가들. 다시 말해서 그와 연결된 날조자 및 운반책들 에게 지시를 내린다. 우선 선정된 그림을 똑같이 위작한다(그 네덜란드인은 그 일에 관한 한 당연히 천재다-그런 다음 집주인이 안전하다 싶을 만큼 먼 곳 산봉우리로 가고 없을 때 운반책들이 몰래 들어가 위작을 걸고 원화를 빼내 온다. 운반책들 역시 몰래 훔쳐 내는 방 면에선 예술가 수준들이다. 고도의 전문가나 의심 많은 안목가의 눈이 아닌 한 아무것도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원화 는 새 집을 찾아가게 되고, 남몰래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새 주인의 금고실이나 도쿄 어느 일본식 가옥에 처박히게 된다. 홀츠와 카밀라가 스위스에 터놓은 안전하기 그지없는 구좌는 자꾸 자꾸 불어날 터였다. 어느 누구도 이보다 더 영리할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처럼 특별한 경우엔 주인인 드 노이예가 자진해서 공범으로 연루되어 있으니 위험 따윈 전혀 있을 수 없다. 이론상으론 말 이다. 체육관에 갔던 카밀라가 돌아오는 바람에 홀츠의 회상은 거기서 끝났다, 그녀는 선글라스 에 운동용 타이츠, 장딴지까지 올라간 친칠라 코트 차림이었다. 친칠라 모피 코트는 지난번 큰 건을 올린 기념으로 그녀가 받은 보너스였다. 그녀는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 다. "왜 그렇게 잔뜩 찌푸리고 있어, 자기? 하녀가 르누아르 그림을 들고 튀기라도 한 것 같 은 표정이네." 그녀는 냉장고에서 에비앙을 한 병 꺼내더니 그것 한잔에 레몬 한 조각을 곁들인 자신의 아침을 준비했다. 그리고 외투를 벗고 자리로 와서 앉았다. 타이츠 차림의 카밀라는 아주 자극적인 데가 있어서 평소 같으면 종종 운동하고 오는 그 녀에게 덤벼들어 2차 운동을 시키곤 했지만, 그러나 오늘 홀츠의 심경은 그런 것들과 거리 가 멀었고 그녀의 밝은 기분이 오히려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당신네 회사의 그 빌어먹을 사진사 말이야, 그 녀석이 또 끼여들고 있어." 관심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면 늘 그러듯 카밀라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하곤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야, 자기. 지난번에 말했듯이 벌써 몇 주째 그와는 말 한마 디 나누지 않았는걸요. 이번엔 그가 뭘 어쨌게요?" "페이즐리란 장식가 놈하고 드노이예의 집에 들어갔었대. 그런 장식가 알아?" 카밀라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요. 일류 장식가 40명 축엔 들지 않는 사람인가 보네. 그 사 람들은 내가 다 알거든요." 홀츠가 손을 내저으며 일류 장식가들을 묵살해 버렸다. "직물 장사 나부랭이들." 카밀라가 턱을 당기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주 쓸모 있는 사람들이에요 루디, 잘 알잖아요. 게다가 그 중 몇 명은 내 절친한 친구들이기도 하구요. 이를테면 지안니 같은 이, 그리고 이름이 어려워서 생각도 안 나지만 아무튼 그 멋진 남자도 그렇구요." "그 여자나 밝히는 놈팽이 ." 홀츠가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땅딸막한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쳤다. "그 사진사 녀석이 더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당신이 어떻게 좀 해줘야겠어 ." 언젠가 한번 지안니와 유난히 편안한 점심 식사 자리를 가진 후 실제로 그와 잔 적이 있 는(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카밀라는 오늘 아침엔 가볍게 넘어갈 분위기가 아님을 눈치챘다. 그녀는 팔뚝에 찬 운동용 시계를 힐끔 보았다. 땀이 흘러도 전혀 손상되지 .않는 다고 카르티에 보석점 점원이 장담했던 그 시계였다. "자기, 나 늦겠어요. 내가 뭘 해주길 원해요?" "그 멍청이가 돌아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 뭐든 방법을 생각해 보라구. 당신이 못하면 내가 할 거야. 난 정말이지 더이상 깜짝 깜짝 놀라고 싶지 않아." * * * 카밀라는 <>사무실로 차를 몰고 있는 기사의 뒤통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자기 '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천사 같은 초록 눈을 가졌든 말든 앙드레는 처리되어야 한다. 12. 세잔느 위조 전문가 이제 프랑스에선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한 사이러스는 일정을 바꾸어 앙드레와 함께 니스에 서 곧장 뉴욕으로 가기로 했다. 두 사람 다 떠나긴 싫었지만 속히 돌아가야 했다. 하늘에서 기내식을 먹는 고통을 피해 갈 방법이 있다는 사이러스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 은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니스의 한 시장을 돌아다니며 소풍 준비하듯 먹거리들을 고르느 라 30분 정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적당히 안락한 비즈니스 클래스에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사이러스가 승무원을 부르더니 훈제 연어, 각종 치즈, 갓 구운 바게트 빵, 부르고뉴 산 백포도주 한 병이 든 쇼핑 백을 건네 주며 말했다. "식사 시간이 되거든 이걸로 좀 차려다 주면 고맙겠소. 우리 점심이오." 쇼핑 백을 받아드는 승무원의 미소가 움찔했지만 사이러스는 그녀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 지 않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운 아가씨군 우린 위장이 약간 예민해서 말이오. 아, 기왕이면 와인을 너무 차 지 않게 해서 줄 수 없겠소? 그 술은 시원할 정도로 해서 마셔야지 깜짝 놀랄 정도는 안 되 거든." "놀라지 않을 정도로." 승무원이 진지하게 되뇌었다. "알겠습니다." 쇼핑 백을 들고 멀어져 가는 승무원을 바라보며 앙드레는 왜 진작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항공사 측 요리사들이 제 나름대로 열심히 주물럭거려 내놓는 음식들은 메뉴에는 번쩍번 쩍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제 맛이 나는 법이 없었다, 양고기, 쇠고기, 해산물, 송아지 고기 등 그 어떤 요리든 기내에서 나왔다 하면 맛과 외양이 영락없이 기내식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맛에, 얼렸다 녹인 것처럼 산뜻하지 못한 외양. 와인도 마찬가지다. '저희 항공사의 와인 담 당 웨이터가 엄선한' 것이라고 떠들어도 상표에 걸맞는 맛이 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런 일을 종종 하세요, 선생님?" "늘 하지 내가 볼땐 더 많은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네. 내가 비행 기에서 받아 먹는 것이 있다면 브랜디와 샴페인 정도일세. 항공사 측 요리사도 그런 품목엔 크게 손대기 어렵거든. 마실 게 나오려나 보군. 한잔 해볼까?" 활주로를 떠난 707기는 우선 예비 단계로 한차례 울렁대며 굉음을 낸 후 마침내 떠올랐 다. 두 사람은 샴페인이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공항 테라스에 무리 지어 선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동행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앙드레로 선 대단히 기분 좋은 변화였고, 최근 몇 년 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 왔음을 새 삼 일깨워 주었다. 누구 탓이랄 것도 없이 바로 내 잘못이다. 그는 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시, 사랑스런 독신녀 루시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에게 해준 게 무엇이던가? 기껏해야 공항에서 전 화나 하고, 빨간 멜빵의 사내들 손에 맡겨 버리고. 루시에게 좀더 확실하게 해봐야겠다고, 아니 도착하는 대로 곧바로 시작해 봐야겠다고 그가 마음을 다지고 있을 때, 사이러스가 그 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결혼 경험이 있나, 앙드레?" "아뇨. 한 번 할 뻔하긴 했었죠." 앙드레는 그때 그 여자의 얼굴이 흐릿한 기억드로만 남아 있다는 데 놀랐다. "5년 전 쯤에요. 제가 원거리 작업을 막 시작했을 땐데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질려 버렸나 봐요. 그녀는 치과의사와 결혼해서 스카즈 데일(뉴욕 주 동남부의 소도시 -역주)로 이사해 버렸죠. 아마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제 생활을 얘기하자면 너무도 잦은 여행 외엔 말 할 것도 없으니까요." 사이러스가 한숨을 지었다. "난 여행을 별로 못했어.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면 거리를 두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고들 하는데 말일세. 두 번 시도했다가 두 번 다 찢어졌다네." 회한이 드는 듯 그의 양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직도 여자를 좋아하세요?" "물론이지. 문제는 아작 한 번도 진짜 여자를 가려내지 못했다는 거지만," 늘 사람 좋은 표정만 짓던 사이러스에게서 보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앙드레는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서 결혼 생활의 위험을 주제로 얘길 나눠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날조자에 대해 얘기 좀 해주세요. 그가 누군지 안다고 하셨잖아요. 만나 본 적 있으세 요?" "천만에, 본 적은 없어, 그는 언제나 숨어 다니지. 그런 계통의 일을 하니 당연하지 않겠 나. 화랑 주최 칵테일 파티 같은 데서 마주쳐 명함을 건넬 수도 없는 일이고. 지금 어느 나 라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네 ." 기내 비디오의 음량이 최고로 높아지자 사이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나 추락해서 죽 음에 직면했을 때를 대비하여 쾌활한 목소리가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들을 소개하고 있었 다. 사이러스는 자기 말이 잘 들리게 하려고 앙드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이름은 프란젠일세, 니코 프란젠. 암스테르담 출신이지. 그 네덜란드인은 이런 일에 아주 능하다네. 혹시 베르메르(네덜란드 화가-역주) 전문가에 대해 들어봤는가?" 앙드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도 네덜란드인인데 이름은 반 미게렌일세. 베르메르 작품위조를 전문으로 하지. d 옛날 캔버스를 구해다가 직접 밑칠을 한 후 온갖 기술을 발휘한다네. 그 일로 큰 돈을 벌었 다고들 하더군 한동안은 모두들 속아넘어갔지. 어떤 면에선 최고의 위작 화가들에게도 존경 을 표해야 할걸세. 악당들일지는 몰라도 재능 하나는 정말 뛰어 나거든 어쨌거나 우리가 찾 는 프란젠이란 자는 인상파 화가들만 고집하고 있다네. 참으로 눈부시게 그려 낸다는 건 직 접 확인했잖은가. 실제로 그의 작품 몇 점이 원화를 가장하고 지금도 미술관과 개인 소장품 간에 걸려 있다고 하는 소문도 들었네. 그걸 보노라면 그 사람, 대단히 짜릿한 스릴을 느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림이란 건 전문가들에 의해 검증되는 거 아닌가요?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유명한 그림들에는 족보, 역사, 일련의 박식한 견해들과 확인서 따위가 늘 붙어 다니지. 법률 용어로 말하자면 판례쯤 된다고나 할까. 어떤 그림이 오랜 세 월 원화로 인정되어 왔다면 그 자체가 아주 강력한 추천장이 되는 것이네. 전문가들은 인간 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전문가란 걸 믿지. 위작을 보게 될 거라고 미리 알고 가지 않는 한, 게다가 그 가짜가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면 가짜임을 밝혀 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네. 솔직히 나도 평범한 상황에서 드노이예의 세잔느를 봤다면 원화라고 말했을 걸세. 아주 훌륭했거든. 하지만 자네한테 미리 들은 게 있었던 덕분에, 혹시 위작일 가능성을 배 제하지 않고 볼 수 있었지." 사이러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본 건 분명 위작이네." 앙드레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 참, 꼭 (벌거벗은 임금님) 얘길 듣는 것 같네요." 사이러스는 빙그레 웃더니 승무원을 향해 자신의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그 얘기와 비슷한 거지. 사람들은 차기가 보게 될 거라고 예상한대로 보게 되어 있으니 까. 우리가 조금 알아낸 바로는 지금 그림 주인이 사기극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드노이예는 원화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어. 그러나 자기가 직접 할 순 없지, 프란젠이란 친구와 캅페라를 관리하는 그 늙은 친구 외에도 분명히 또 다른 사 람들이 관계되어 있을 거야. 그들 가족뿐 아니라 외부인들도 말이야." 승무원이 샴페인을 한잔 더 따르자 사이러스는 얘기를 중단하고 홀린 듯 그녀를 쳐다보았 다. 앙드레는 문득 사이러스가 우연의 일치에 대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얘기까지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는데요, 제가 바하마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까 아파 트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고 사진 관련 물품들이 모두 사라졌더군요. 카메라 몇 대, 필름 들, 옛날에 찍어 둔 양화들이 모조리 사라졌어요. 그러나 다른 건 모두 그대로 있었어요." 파인의 눈썹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아하, 그런 일이 있었구먼, 그러고 나서 그 편집장은 자네 전화를 안 받으려 들었고." "지금 카밀라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카메라들로 가득 채운 자루를 메고 비상계단 으로 빠져 나가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안 돼요." 앙드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자 짓이란 얘기는 아닐세."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러스는 플라스틱 거품 막대기로 샴페인을 저었다. "다만 타이밍이 그렇다 이 얘기지," * * * 그들은 케네디 공항에서 헤어졌다. 사이러스는 미술계 인사들 가운데 몇 사람에게 연락해 서 그 날조자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지 수소문해 볼 계획이었다. 앙드페는 카밀라와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사이러스와 합의했으나 택시가 시내로 접어들자 생각이 바뀌었 다. 그녀의 사무실로 가봤자 별효과도 없을 테고 집으로 전화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자기 집 전화 번호를 국가 기밀인 양하니까, 사무실 건물 로비에 잠복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결국 아침 일찍 그녀의 사무실로 정면공격을 감행하여 깜짝 놀라게 만든 뒤, 일자리가 절실 히 필요하다고 공손하게 요청하는 게 유일한 해답인 것 같았다. 사이러스와 함께한 이번 여행은 그의 예감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 운 여행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시차 때문에 다소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며 더 많은 것을 밝혀 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일단 아파트로 간 그는 가방들을 내려놓은 후 자동 응답기에 남겨진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자기, 어디 가 있는 거야? 정말이지 걱정돼 죽겠어," 한껏 유혹적인 카밀라의 음성이었다. 이처럼 위선기가 뚝뚝 흐르는 저음의 쉰 소리는 그 녀가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내는 목소리 였다. "자기네 사무실의 그 꼬마 아가씨한테 전화해 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것 같더라구 난 자 기를 꼭 봐야해, 못 본지 정말 너무 오래 됐잖아. 자기한테 전해 줄 멋진 소식도 있는데. 두 더지같이 숨어 있지 말고 나한테 전화해 줘요. 안녕," 그 다음 메시지 "저 루시예요, 돌아온 걸 환영해요, 방랑자 아저씨. 무슨 일인지 알아요? 드디어 전쟁이 끝났어요. 카밀라가 두 번이나 전화했더라구요. 그것도 공손하다 싶을 정도의 목소리로. 완 전히 손들었나 봐요. 어쨌거나 당신한테 대단한 프로젝트를 맡길 거래요, 아, 그리고 당신의 행방에 대해선 알려 주지 않았어요. 전화해 줘요, 알았죠?" 손목시계를 본 앙드레는 여섯 시간을 벌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 시간으론 다섯 시가 막 지난 땀이었다. 그는 에이전시에 전화를 걸었다. 먼저 간단한 인사말이 오간 뒤 앙드레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룰루, 쭉 생각해 봤는데 그 동안 내가 너무 오래 멀리서만 당신을 생각해 온 것 같아요. 이제 그런 짓은 그만두기로 했어요. 아니, 잠깐만, 내 얘긴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이제 멀리 나가는 짓은 그만두겠다는 얘기요. 정말이야. 만일 당신이 ,,,,,, 이런, 젠장. 이봐요, 정 말이지 전화론 설명하기 힘들군 여섯 시에 내가 데리러 갈 테니 저녁 같이 하겠어요?" 루시의 숨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다른 전화벨 소리가 배경음으로 들려 왔다. "앙드레, 난 오늘 약속이 있어요." "취소해요." "그 정도로 급한 일이에요?" "응. 급해요." 앙드레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 이 흘렀다. "앙드레?" "응?" "그럼 늦지 말고 공항에 가봐야 한단 얘기 따윈 하지 말아요." 30분 후 샤워하고 면도까지 한 앙드레는 줄기가 긴 백장미 한 송이를 들고 휘파람을 불며 웨스트 브로드웨이를 따라 걷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행인들만 물색하고 있던 웨스트 브로드웨이 단골 부랑자 하나가 다리를 질질 끌며 그에게로 다가왔는데, 뜻밖에도 함박 웃 음과 더불어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받게 되자 깜짝 놀랐다. 앙드레가 장미 줄기를 입에 물고 사무실 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 시각은 여섯 시 몇 분전이었다. 루시의 파트너인 스티븐이 책상에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 앙드레! 웬 꽃인가? 이거 깜짝 놀랐는걸. 자네가 나에게 그런 감정을 갖고 있었다니." 앙드레는 입에 문 장미꽃을 얼른 빼며 얼굴이 붉어졌다. "루시는 어디 있어요? 스티븐이 씩 웃었다. "가짜 눈썹이라도 붙이러 갔나 보네, 곧 올 거야. 어떻게 지내?"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본 앙드레는 청바지에 헐렁한 흰 스웨터 차림의 루시를 보았다 횐색 셔츠 때문에 초콜릿 색 살결이 더욱 돋보였다. 그녀가 앙드레의 손에 들린 장 미를 보았다. "받아요, 당신 스웨터와 잘 어울릴 것 같군." 앙드레는 그녀에게 장미를 내밀었다. 스티븐의 고개가 진지하고 열의에 깐 앙드레의 얼굴 과 루시의 얼굴 사이를 잠시 왔다갔다하더니 말했다. "안됐군, 루시. 앙드레의 입장식을 못 보다니," 이번엔 앙드레를 보며 말했다. "요즘 프랑스에선 그런 식으로 하나 보지? 장미 씹는 거 말일세." 앙드레는 소파에 놓여 있던 루시의 코트를 집어 그녀가 입는 것을 도와 주었다. 코트 깃 밑으로 들어간 머리채를 꺼내 주다가 그녀 목 뒷덜미에 손길이 스치자 그는 숨을 크게 들이 켰다. 스티븐이 말했다. "자네의 매력적인 파트너에게 큼직한 옻나무 덩굴 부케를 보낼 거니까 내가 잊지 않도록 꼭 말해 주게나." 스티븐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사무실에서 나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결국 결실을 맺는 것을 보니 흐뭇했다. 그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하려 고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 저녁엔 어디 근사한 데 데리고 가서 식사나 해야겠다. 꽃을 바치 는 것도 괜찮겠지? 사랑의 낭만은 전염되게 마련이다. * * * 사이러스 파인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는 사람들 명부를 샅샅이 뒤지는 작업에 들어갔 다. 그가 볼 땐 상당히 그럴듯한 스토리를 꾸몄는데도 그와 안면이 있는 거래상들은 상당수 가 똑같은 답변을 해 왔다. '우린 원화만 취급한다.' 잘난 체하며 한껏 치켜 올린 그들의 코가 눈에 선했다. 그들 대부분이 적어도 한 번씩은 위작에 우롱당한 경험이 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일을 캐물 어 봤자 흔쾌하게 협조해 주려 들진 않을 터였다. 그는 그 쪽으로 알아보는 방법을 포기하고, 자신의 명함철을 뒤져 좀더 실체에 가까운 인 물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V항목에 다다랐을 때쯤 그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문득 빌리 에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인물을 둘러싼 소문들과 그후 이어졌던 공공연한 망신 건에 대해서는 사이러스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빌리에르다. 돈이 마치 끝없는 홍수처럼 뉴욕 미술계로 흘러 들던 1980년대 당시, 빌리에르는 그 시절 의 총아였다. 바짝 여윈 체격에 가느다란 세로줄 무늬의 옷을 입고 다니던 그는 한 귀족 명 문과 먼 친척뻘(이 관계는 그가 미국에서 한 해 한 해 보내는 동안 놀라을 정도로 가까운 친척인 것처럼 되어갔다)로 알려진 영국인으로서, 대단한 심미안을 가진 행운아였다. 경매장들마다 그를 자문으로 모셔 가려 했고 미술관들도 그의 의견에 경의를 표했다. 수 집가들은 그를 자택으로 초대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가 명망을 떨치게 될 거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재단이나 미술관 이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게 될 것이고, 결국엔 미술계의 핵 심 거물로 성장할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빌리에르는 나중에 잘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당장 손에 들어오는 현금 에 눈이 어두워진 빌리에르는 출처가 다소 의심스러운 그림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 풀기 시작했다. 그림 주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감정 확인은 은행에 박아 둔 돈이나 마 찬가지였으므로 그들은 가장 빠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에 바빴다 빌 리에르는 부자가 되었고 점점 탐욕스러워져 갔다. 그것 자체야 미술계에선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가 점점 자만에 빠지 면서 경솔해져 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허세까지 부리게 되었다. 그는 2층식 아파트, 클래식 모델의 벤틀리(영국의 고급 승용차-역주) 햄프턴의 부동산을 장만했고, 금발 미녀들이 득실대는 그의 침실과 그들의 화려한 파티 행사는 가십 기사에 연일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그를 미술계의 총아라고 불렀고 그는 그런 아첨들에 열심히 귀기울였다. 그의 몰락은 신속하고도 요란스럽게 찾아들었다, 저널리스트들이 자기들보다 운 좋은 사 람이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싶을 때 재빨리 선보이곤 하는 언론 특별 메뉴감이 되면서부터 였다. 사건의 발단은 빌리에르가 원화라고 선언한 17세기의 한 그림이 몇 백만 달러에 팔 려 나간 데서 비롯되었다. 그 그림의 새 주인은 보험 브로커의 요청에 못 이겨 그림 감정을 한번 받아 보기로 했다. 약간 의심스런 결과가 나왔고 그러자 몇 군데서 더 감정을 받았다. 캔버스를 틀에 고정시켜 주고 있는 못들은 18세기 것이고, 캔버스 그 자체는 그보다 더 현대에 가까운 물건인 것으 로 드러나면서 결국 그 그림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위작인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얘기가 세상에 퍼지면서 과거에 빌리에르의 확인을 받고 그림을 사들였던 나머지 사람 들까지 과학적 검증을 받아 보기 위해 연구소로 몰려들게 되었다, 더 많은 위작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불과 몇 주만에 미술계의 총아는 지극히 의심스러운 사기꾼으로 전락해 버렸다. 소송이 이어지고 그에 맞서 역소송을 제기하고 하는 가운데 빌리에르는 하나 둘씩 자산을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으레 그러하듯 금발 미녀들도 그의 주변에서 사라 졌다 미술 협회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는 산산조각 난 명성보다도 자신의 안목에 더 관 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끔씩 자문해 주는 것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 가는 신세가 되고 말 았다. 요즘같이 특히 돈이 가문 시절엔 고객의 전화도 아쉬운 판일 테니 그로선 사이러스 파인의 전화가 반갑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지 30분도 되지 않아 빌리에르는 파인의 서재에 앉아 있었다. 보드카 를 준비하며 파인이 말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소, 빌리에르 씨. 전화에서도 말했듯이 난 이 일을 은밀하게, 시간 낭 비하는 일없이 진행하고 싶소. 고객이란 사람들이 어떤진 당신도 잘 알잖소. 번갯불에 콩 볶 아 먹듯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가 미안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빌리에르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외모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 다소 초라한 몰골이었다. 입고 있는 초크 스트라이프(짙은 색 바탕 천에 흰색 줄무늬가 있는 옷감-역주) 정장은 고급 옷이긴 했지만 다림질이 필요해 보였다, 셔츠 목 깃은 닳아서 해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목 께까지 내려온 두발은 이발소에 가야 할 시기를 한참 넘기고 있었다. 그는 거무브레한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술잔을 휘휘 돌리며 말을 이 었다. "사실 요즘엔 별로 바쁘지 않아요. 뭐든 제때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잘됐소, 정말 잘됐어. 이건 당연히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야 하오." 사이러스는 술잔을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빌리에르가 고개 를 끄덕였다. "내 고객 중에 아주 품격 높은 컬렉션을 소장한 사람이 있는데 호크니 같은 현대 화가 한 둘 외엔 대부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오. 그는 소장품들을 제네바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 일부 보관하고 있고 나머지는 토스카나(이탈리아 중서부의 주-역주)에 있는 본가에 보관해 두었소. 그 본가 역시도 아주 훌륭한 저택이지만 말이오. 그런데 지금 그는 약간 신경 과민 증을 보이고 있어요, 당신은 소문을 못 들었겠지만 근자에 그 저택 부근에서 밤도둑 건이 잇따라 터졌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곳 당국에선 관광 경기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투자 심리 를 위축시킨다 따위의 허구한 날 써먹는 핑계들을 내세우며 쉬쉬 덮어 버렸소. 어쨌거나 내 고객은 귀한 그림들을 경보 방치와 늙수그레한 관리인 손에 달랑 맡겨 놓고 멀리 떠나 와 있다는 게 몹시도 불안스러운 모양이오. 무슨 얘긴지 알겠소? 사실 빌리에르는 그의 얘기를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다. 이런 유의 얘기는 예전에도 많이 들어 보았다. 일단은 그럴듯한 커버 스토리가 나온 후에야 핵심으로 접어드는 법이고 그 핵 심은 보나마나 뒤가 구린 내용일 터이다. 돈이 손에 들어올 전망이 보였다 "거참 대단히 걱정스럽겠네요. 보드카 한잔 더 해도 될까요?" "이봐요, 선생." 빌리에르에게 줄 보드카를 준비하면서 사이러스가 말을 이었다. "내 고객이 특히 염려하는 그림이 두 점 있어서 난 그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소." 빌리에르에게 잔을 건네 주고 난 사이러스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원작은 은행에 맡겨 두고 위작들을 걸어 두라고 말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제 슬슬 본론이 나오는군, 빌리에르가 생각했다. 사이러스가 원하는 건 위조 전문가인 것이다. "아주 현명한 방책이죠." "그도 그렇게 생각합디다. 그런데 그는 최고급 위작이어야 된다고 우기고 있소." "물론 그렇겠죠. 당신의 그 고객이 누군지 밝힐 수 있나요?" "그는 이름이 알려지는 걸 꺼리고 있소. 본래 그런 거 아니겠소? 하지만 그가 상당한 재 력가란 건 분명하오." 사이러스는 잠시 빌리에르의 표정을 살피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인색한 사람도 아니지 수수료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군, 빌리에르가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서 한몫 잡게 생겼다. "어떤 화가들 그림이죠? "피사로 것 하나, 세잔느 것 하나요." "흠" 빌리에르는 처음 예상했던 액수에 곱하기 2를 했다. 그 쪽 일이라 면야 프란젠이 적격이 고 그 사람밖에 없다. 하지만 우선 그가 일을 할 수 있을지부터 확실하게 알아봐야 한다. "어쩌면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파인 씨. 24시간만 시간을 주시겠소?" 택시를 타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 소개비 가운데 자신의 몫으로 떨어질 액수가 어느 정도일지 궁리해 보던 빌리에르는 좀 위험스럽긴 하지만 누구 거칠 것 없이 프란젠에 게 직접 연락을 취하고 소개비를 혼자 챙겨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모험 은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아쉬운 심정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괜히 그런짓을 해봤자 조만간 들통날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두번 다시 그에겐 일거리를 주지 않으려는 사람만 하나 더 늘어난다. 악착 같은 집념과 탐욕으로 똘똘 뭉친 늙은 돼지 같은 놈. 그깟 몇 천 달러쯤 챙기나 못 챙기나 그 엄청난 재산에 무슨 티가 난다고? 택시가 멈춰 서라 빌리에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중충한 건물을 혐오스런 눈길로 쳐다보 았다. 운전사에게 쥐꼬리만한 팁을 던져 준 후 그는 늘상 욕을 먹고 살아온 탓에 습관적으 로 어깨를 움츠린 채 서둘러 보도를 건넜다. 빌리에르는 행운을 기원할 겸 보드카를 한잔 더 마신 후에 전화를 걸었다. "홀츠 씨 댁입니다." "홀츠 씨 계신가요? 저는 빌리에르란 사람인데요." "지금 식사중이신데요, 선생님 ." "중요한 일이니 바꿔 주시오," 젠장, 집사란 그 얼마나 성가신 존재들인지, 내 집 집사라면 또 모를까. 1분 정도 지난 다음 '찰칵' 하고 전화 연결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여보세요?" 빌리에르는 다정한 척 애쓰며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루디. 당신이 들으면 흥미있어 할 것 같은 일이 생겨서요. 프란젠에 게 일거리가 들어왔어요. 그의 일은 당신이 직접 챙기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연락드리는 거 예요." "누구 부탁인데?" "사이러스 파인. 어떤 유럽인 고객 대신 나서는 거래요. 고객이 이름은 밟히지 않더군요. 피사로와 세잔느가 필요하대요," 홀츠가 열려진 서재 문틈에 눈길을 박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식당에서 깔깔대는 카 밀라의 소리가 홀을 건너 서재까지 들려 왔다. 파인은 그도 아는 사람이었다. 화랑가 행사에 서 종종보곤 했다. 평판이 좋게 나 있는 사람이니 장차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홀츠 자신은 멀찍이 물러나 있더라도 빌리에르가 혹시 켕기는 구석을 포착해 낼지도 모른 다. "좋아, 내일 프란젠에게 전화해 보지. 내가 자네한테 연락할 때까진 파인에게 프란젠의 전 화번호를 넘겨주지 마." 홀츠는 너털웃음에 가까운 소리로 덧붙였다. "넘겨준다는 게 딱히 적합한 용어인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빌리에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늙은 여우는 술책을 쓰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 "글쎄, 나야 뭐 수수료나 약간 받게 되겠죠." "당연하지. 하지만 내가 그깟 수수료나 나눠 먹자고 이러는 건 아닐세. 내 밑에서 일했던 크루그의 전례를 잊지 말란 뜻이지, 알겠나? 내일 연락함세." 식당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홀츠는 아주 넉넉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프란젠이 받는 대가 가운데 50퍼센트를 받기로 되어 있는데 통상 여섯 자리 액수는 너끈하다. 약간의 도움을 줄 때마다 그런 돈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손님들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플로리다에 계신 우리 어머니는 늘 일찌감치 저녁을 드시는데 여기 사람들도 다 당신 같 은 줄 아셔서 말이오." 이어서 그는 새끼 양고기 살을 한 입 씹으며 생각했다 끔찍하게 인상된 국제 전화 요금을 반영해 수수료 지분율을 60퍼센트로 올려야 하는 것 아닐까? 냉장고를 뒤져 본 빌리에르는 보드카 반 병과 오래되어 돌돌 말린 간소시지 다발만 남아 있음을 알고, 수수료도 받게 될 테니 나가서 거하게 저녁 식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 생기면 저 인색한 녀석에게 샴페인을 사주고도 돈이 왜 남을 것이다. 최고의 샴페인을 사줄 생각은 없으니까. 13. 카밀라의 미끼 앙드레의 귀에서 40센티미터 거리에 놓인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며 그를 화닥닥 잠에서 깨 어나게 만들었다. 베개로 머리를 가렸지만 비명에 가까운 집요한 전화벨 소리는 계속 귀로 파고들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 같더니 맨 살의 따뜻한 감촉과 가슴께를 누르는 무게 감이 함께 느껴졌다. 루시가 전화를 받으려고 그의 가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던 것이다. 앙드레는 그녀가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는데 느닷없이 얼굴을 가렸던 베개가 달아나 버렸다. 루시가 그의 귓불에 입맞추며 속삭였다. "카밀라래요." 그에게 수화기를 넘겨주고 난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편한 자세로 누웠다. 앙드 레는 하품이 나오는 걸 막으려고 애썼다. "거기 있었네. 연락이 닿아서 정말 기뻐." 밝고 우렁찬 카밀라의 목소리에 괜히 움찔해진 그는 수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고 말했 다. "안녕하세요, 카밀라?" "안녕하고말고, 자기. 대체 어디 가 있던 거야? 난 보고 싶어 죽을 뻔했는데. 할 얘기가 많아. 잘 들어, 나, 지금 막 약속 하나 취소해 버렸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작가랑 점심 이나 하려고. 자기하고 나, 단둘이서만." 루시가 그의 목께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작가라고? 기가 막혀서." "앙드레?" "네, 잘 알았어요. 그게 좋겠네요," "잘됐어. 로열튼에서 오후 한 시, 어때?" "로열튼에서 한 시." 호기심을 떨치지 못한 카밀라가 덧붙였다. "그런데 앙드레, 방금 전화 받은 사람은 누구야?" "아, 청소해 주러 온 아줌마예요." 루시가 고개를 들더니 씩 웃고 나서 앙드레의 목을 깨물어 버렸다. 앙드레는 본의 아니게 한차례 신음을 뱉었다. "목요일마다 아침 일찍 오는 아줌마죠." "오늘은 수요일이야, 자기 한 시에 만나요." 전화를 끊고 난 앙드레는 루시에게 아침 인사를 하느라 30분을 보냈다. 이윽고 루시가 그 의 손길을 떨치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그만 가야겠어, 나머진 나중을 위해 아껴 두자구요, 응?" 그녀는 베개로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자기 처지를 잊으면 안 돼." 멀리서 그녀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사이, 그는 다시 반쯤 잠으로 빠져 들었다. 참 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만족감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시트에 남은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우리 둘이 여기까지 오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깨에 와닿는 그녀의 손길과 커피 향이 그의 잠을 완전히 깨웠다. "앙드레, 이제 떠돌이처럼 사는 생활은 그만둘 때가 됐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그는 양손으로 머그잔을 싸들고 뜨거운 김을 들이켰다. "알았어, 룰루 " "냉장고가 꼭 과학 실험실 같아요.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게 없나, 알을 간 게 없나." "알았어 , 룰루." 그녀가 몸을 굽혀 그에게 키스했다. "골치 아픈 일엔 끼여들지 말기, 알았지?" 현관문 소리가 나기도 전에 그는 그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네 시간 후 로열튼, 앙드레는 여전히 기분 좋고 맑은 머리로 카밀라가 예약해 둔 좌석으 로 안내받고 있었다 실내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창백한 카메라 렌즈 같은 얼굴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곤 했다. 더 오래 쳐다볼 만큼 유명한 얼굴인지 확인하려는 듯 짧지만 면밀한 시선들이었다. 흥미가 있음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았지만 막상 고개를 홱 돌려 버릴 땐 관심이 없어졌음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그것은 뉴욕의 최고급 인사들을 대상으로 점심을 파는 식당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 의 사람 감별 절차였다. 이런 업소들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요리(흔히 음식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대체로 최상급이다)보다도 고객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냐 하는 평점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곳을 드나드는 전설적인 인사들, 당대의 모델, 배우, 작가, 일류 언론사의 최 고위급 인사 같은, 상대방의 뉘앙스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배우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좋은 좌석을 잡느냐 하는 것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식탁으로 추방될 경우 음식을 먹어 봤자 재를 씹는 기분이 될 때가 많아서, 요즘 시대 이런 식당들에선 브리야사바랭(프 랑스의 법률가로서 식품 및 요리 전문가로도 유명함-역주)의 법칙이 폐물로 변해 버린 듯했 다. 그 위대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먹는 음식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얘기가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 요즘엔 "어떤 자리에 앉는지를 보면 그가 어 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그러니 음식이 아닌 지명도가 '오늘의 특별 메뉴'로 되는 것도 시간 문제인 것 같다. 메뉴를 전할 때 지금 우리 식당에 와 있는 '오늘의 명사' 를 신중하게 발표하겠지. 그런 저런 생각들이 스쳐 가는 사이에 안내해 주는 대로 눈에 잘 띄는 한 식탁에 앉게 된 앙드레는, 이 식당에서 가장 헌신적인 고정 고객 축에 드는 사람의 고귀한 손님이라는 이유 로 분에 넘치게 격식을 차려 대접해 주는 바람에 잠시 안절부절못했다 그 단골은 당연히 오 늘도 늦었다. 이윽고 식당에 도착한 그녀가 (큼직한 검은 안경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상태 이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해) 식탁들을 헤집고 자기 좌석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 나자 식당 여기저기가 웅성거렸고 멀리서 가벼운 키스를 날리는 사람도 있었다. "앙드레!" 앙드레가 자기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이 전혀 뜻밖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따분한 날 한 가닥 즐거움을 갖고 온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가 그를 불렀다. "어떻게 지냈어? 어디 얼굴 좀 봐요." 그녀는 코끝에 걸린 검은 안경 너머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그를 살폈다. "눈이 겅말 반짝거리네, 자기. 그런데 목에 그 상처는 뭐야?" 앙드레는 몸을 움츠려 목을 숨기며 빙그레 웃었다. "좋아 보이네요, 카밀라, 못 본 지 꽤 됐죠? 바빴어요?" "정신없었지 뭐. 밤낮으로 뛴 결과 자기가 깜짝 놀랄 작은 소식을하나 건졌지. 일단 자기 얘기부터 좀 해봐. 유럽 어딘가에 다녀왔단 소문이 있던데?" "영국에 며칠 다녀왔어요." 앙드레는 램프리 경과 스로틀 홀 태피스트리에 관한 묘사를 위주로 적당히 편집해 여행담 을 들려주었다 달아난 닭고기 사건으로 마무리 지으려 할 즈음 카밀라의 핸드백 속에서 전 화 벨이 울리는 바람에 얘기가 중단되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는 동안에 그는 주문을 했다 웨이터는 카밀라가 전화기를 다시 백에 넣 을 때까지 기다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푸성귀 콤비네이쳔을 주문받아 갔다. 카밀라가 일 에 지친,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중역 티를 내며 힘겨운 듯 한숨을 지었다.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지, 자기?" "대단히 바쁘게 일한 끝에 따낸 프로젝트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얘기가 나올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앙드레는 등받이에 의자를 기대고 30분 정도 카밀라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녀는 더할 수 없이 설득력 있는 어조로 말했다. 검 은 안경은 벗어 내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시선을 그의 눈에 맞춘 채, 손을 앞뒤로 흔 들어 대는 틈틈이 강조 부분에선 그의 팔을 지그시 누르기도 했다. 그녀 앞에 나온 푸성귀 요리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다른 사람 눈엔 그녀가 만사를 잊 은 채 옆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만 푹 빠져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태도는 그녀가 수년에 걸쳐 완성시켜 온 일종의 연기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드레는 어느새 그녀의 열연에 끌려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팔기 위해 너무도 열심히 애쓰고 있는 아이디어에 점차 흥미를 느끼게 되 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그녀가 미끼를 선정하는 데 아주 공을 들였던 것이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책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특이한 주거지들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서가 될 터였다, 모든 비용은 잡지사에서 대고 앙드레가 사진 작업을 전담한다는 조건이었다. 출간과 홍보는 개러비디언 형제가 소유 한 협력회사들 가운데 한 군데에서 책임지게 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저택들이야, 자기" 하고 카밀라가 말했다. 정치인이 선거 공약하듯 힘 차고 진지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강조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이 대목에서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공중에다 그의 이름을 크게 그려 보였다) '책 제목 위에' 넣어질 것이다. 홍 보 여행도 하게 될 것이고 외국에서도 출판될 것이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전세계에서. 사 진만 모아 전시회도 열 것이며, CD-ROM으로도 제작할 예정이다. 그 책이 출간되면 그는 그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진 작가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물론 돈도 많이 벌게 될 것이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저작권료, 연재물 판권료, 로열티. 돈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카밀라는 자기 얘기에 흥분하여 머리칼을 찰랑대며 앙드레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잠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벙벙할 따름이었다. 카밀라의 말마따나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그의 야망과도 꼭 들어맞는 꿈 같은 일거리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카밀라를 덥석 껴안았을 것이다. 그녀의 그 침착한 태도뿐 아니라 화장까지 망쳐 놓을 정도로 열렬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적당한 대답을 모색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선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제안은 지 나치게 적절하고 지나치게 완벽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나로선 어리둥절할 따름이네요. 충분히 납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 겠어요. 출간 시기를 언제쯤으로 잡고 있는지나 알려 주세요.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잖아 요." 그런 사소한 걱정 따윈 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카밀라가 손을 내젓자 웨이터가 자기를 부 른 줄 알고 쪼르르 달려왔다. "시간은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써도 돼, 자기." 당곡스런 시선으로 눈치를 보던 웨이터가 그녀의 샐러드 접시에 손을 뻗치려 하자 그녀가 또 한 번의 손짓으로 쫓아 버렸다. "이건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책이 될 거야. 눈에 선해. 생빼쩨르부르크, 자이푸르(인도 북 부의 옛 토후국-역주)스코틀랜드의 옛 성들, 마라케시(모로코 남부의 도시 -역주-발리, 베네 치아,,,,,,오우 베네치아." 그녀의 머키칼이 또 한 번 찰랑거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약간 은밀하게 변했 다. "1년이든, 1년 반이든 시간은 관계없어. 다만 그 첫 작업을 기획한 게 바로 나인 만큼 시 작은 서둘러 주는 게 좋아. 홍콩의 고가인데 환상적이야. 하지만 홍콩이란 델 믿을 수가 있 어야지." "무슨 얘기죠?" "중국인들 말이야. 홍콩을 반환받은 그들이 언제 어느 때 홍콩의 거대한 저택들을 모조리 여성 혁명군 숙소로 바꿔 놓을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초이 선생이라는 그 쬐끄만 친구가 지 레 겁을 먹고 돈을 몽땅 싸들고 비벌리힐스로 냉큼 달아나 버리기 전에 자기가 그 사람 집 에 가서 작업해 줘야해." 그녀는 자기 접시를 밀쳐 내고 식탁에 양팔꿈치를 괴더니 말했다 . "최대한 빨리 , 정말이야." 앙드레는 의심이 더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커피 마실 시간도 안 주는 건 아니겠죠?" 카밀라는 환하게 웃으며 앙드레의 손을 토닥였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정말 기뻐, 자기. 역시 자기다워." 그녀는 그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비자를 받아 두라고, 그리고 비행기 표나 비용에 대해선 노엘과 상의하라고 지시한 뒤 그를 호텔 입구에 남겨 놓고 떠났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자축하고 있었다. 앙드레는 완전히 혹한 것 같았다. 그러니 어찌됐거나 일주일 내로 홍콩 가는 길에 오르게 쐴 것이다 루디가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호텔 로비로 돌아온 앙드레는 사이러스 파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이러스는 그에겐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들어댔다. "좋은 뉴스야, 젊은이, 좋은 뉴스라구. 프란젠이 있는 곳을 알아 냈는데 다행히도 문명 세 계 어디에 있다지 뭔가, 파리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설마 싫다곤 않겠지?" "사이러스 전생님, 방금 카밀라와 점심을 했는데요, 음모의 색채가 점점 짙어 가는 것 같 아요. 언제 시간 있으세요?" "글쎄, 지금 아래층에서 늙은 고객 하나가 썩 괜찮은 수채화 두 점을 사려고 기다리고 있 다네. 수표장을 꺼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 한 것 같아.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군. 오늘 저녁이 어떨까?" "시내로 내려오실래요? 소개해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사이러스가 키득거렸다. "예쁜 여잔가?"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니예요." 그들은 펠릭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루시에게 전화하고 난(그녀는 물어 볼 게 많은 모양이 었지만 너무 바빠서 전화를 길게 받을 수 없었다) 앙드레는 오후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소호 화랑가 쪽으로 걸어가 보기로 결정했다. 상쾌한 봄날 토후에 5번 가를 따라 슬슬 걸어 보는 건 맨해튼에 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 다 뉴욕 하늘이 푸를 때면 여긴 더한층 짙푸르고, 뉴요커들이 겨울이 끝났다고 느낄 때면 여기 사람들은 움츠렸던 어깨를 확 펴고 고개를 들어 해를 보며 이따금 낯선 사람들에게 웃 어 주기도 한다. 앙드레의 기분과 딱 들어맞는 날씨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카밀라의 제안 뒤에 숨겨진 꿍 꿍이를 밝혀 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퍼즐 풀기는 제쳐 둔 채 루시의 얼굴과 파리 생각으로 빠져 들었다. 루시와 파리, 참으로 멋진 조합이다. 42번 가의 들끓는 소음을 지나 뉴욕 시립도서관 입구를 지키는 사자상 밑을 지났다, 햇살 아래 육중한 자태를 드러낸 사자들은 머리 위에 비둘기들이 화관처럼 떼지어 앉아 있는데도 마음 좋게 제나름의 위엄을 지키는 표정들이었다. 5번 가 아래쪽으로 접어들자 수수한 노동 자풍 상점과 사무실들이 바로 옆 주택 지구의 돋보이는 외관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한 블록씩 지날 때마다 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고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워싱턴 광장 을 가로질러 간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누군가와 함에 있고 싶어 안 달하는 자신의 색다른 모습을 함께 음미했다. 사람에게 자석처럼 끌리는 느낌을 다시 맛보 게 되기까진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 남은 루시와 마주치게 되길 바라며 다섯 시 직전에 웨스트 브로드웨이에 도착하여 나머지 100미터를 뛰다시피 해서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 다. 사무실 문간에서 스티븐이 그를 맞았다. "일찍도 오시네. 막 나가려던 참이야. 루시는 옷 갈아입으러 벌써 집으로 갔다네. 그리고 자네, 내일 또 그녀를 지각하게 만들면 고소해 버릴 거야. 좋은 저녁 시간 되길 비네." "스티븐, 마침 만났으니 얘긴데 ,,,,, ." 앙드레는 그를 사무실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요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 혹시 하루 이틀쯤 루시 없이 당신 혼자 처리할 순 없 을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긴 주말 여행 일주일쯤 주면 더 좋고." 스티븐이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게 선택권이 있는 건가?" "그녀에겐 아직 물어 보지도 않았어요." "어디로 갈 건데?" "파리 ." 스티븐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앙드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서 그녀에게 물어 보라구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 만약 그녀가 거절하면 내가 갈 거야." 두 사람은 나란히 사무실에서 나왔다 앙드레는 사무실 건물 바깥에 서서 속력을 줄이며 다가오는 택시가 보일 때마다 고개를 빼고 일일이 확인하며 기다렸다. 이제 저녁 시간이 길 어지면서 점점 포근해지고 있었다, 신비스러운 위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땅거미가 웨스트 브 로드웨이의 불완전한 것들과 모난 것들을 덮어 주고 있었다. 전깃불들이 반짝이며 저녁을 맞이할 무렵 택시 하나가 서는 것을 본 앙드레는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차 문이 열리고 날씬한 갈색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뉴욕 택시들이 어떠니 저떠니 하지만 누군진 몰라도 차 설계자는 분명히 발로 뛰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두 번째 다리가 등장하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그는 루시가 내리는 것을 도와 주려고 보도 를 가로질러 갔다. 그녀는 짧고 단순한 스타일의 짙은 회백 드레스 차림에 검정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 다. 머리를 뒤로 넘긴 루시의 눈이 거리 불빛에 반짝였다. 그녀가 그의 셔츠 깃을 세워 주었 다. "일찍도 왔네." 그녀가 말했다. "그냥 지나는 길이었어, 내 운이 바뀌길 바라는 심정으로."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그랜드 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룰루. 놀라게 해줄 일이 있어 "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귀에 박힌 은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알아맞혀 볼까? 냉장고 청소했어? "그보다 더 좋은 일이야 " "점심 때 카밀라에게 프렌치 프라이를 먹게 만들었다?" 앙드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파리에 가본 적 있어? 가보고 싶지 않아?" "파리 ?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바람에 지나가던 행인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그 뒷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 ! 정말이에요?" "준비 완료야. 스티븐에게도 말했어. 당신은 그 동안 일 잘해 준 대가로 일주일의 휴가를 얻게 된 거야. 조금 있다 사이러스 씨를 만나 날짜를 정하기만 하면 돼, 그리고,,,,,, ." 그녀가 폴짝폴짝 뛰더니 진하게 키스했고 모두들 그 장면을 보느라 한 순간 브로드웨이의 사람 왕래가 잠시 뒤엉켰다. 행인 하나가 옆사람을 쿡 찌르며 말했다. "둘이 결혼하기로 했나 봐," 그의 친구가 한슴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서?" * * * 식당에 도착했을 즈음 루시는 흥분을 완전히 가라앉힌 상태였다. 바에 자리를 잡자 럼주와 물을 주문하고 나서 질문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일 때문에 가는 거냐? 파리의 날씨는 어떠냐? 어디에 숙박할거냐? 내가 베레모를 쓰고 가면 촌스러워 보이지 않겠느냐? 사이러스가 오기로 했느냐? 그가 날 맘에 들어 하겠느냐? 앙드레가 대답 할 틈도 주지 않고 쉴새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난 그녀는 이윽고 자기 잔을 들었다. 그가 말했다. "건배하자구, 그러다 목 버리겠어. 당신의 첫 번째 프랑스 여행을 위하여 ." 두 사람은 잔을 부딪히고 나서 상대가 마시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았다, 앙드레가 몸을 앞 으로 기울였을 때(키스를 할까 속삭여 줄까,미처 결정하기도 전에)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 려 왔다. 뒤돌아보니 사이러스가 루시를 뜯어보며 서 있었다. 즐기는 표정이 역력했는데, 그 녀의 짧은 드레스와 바 걸상에 앉은 자세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굴곡 있는 몸매에 그의 양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앙드레가 잔을 내려놓았다 "룰루, 이분이 사이러스 씨야." 그녀가 손을 내밀자 사이러스가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만나서 기쁘오, 아가씨. 소호엔 몇 년 동안 와보지 않았는데 여자들이 모두 당신만큼 예 쁘다면 좀더 자주 와봐야겠는걸." "사이러스 씨, 루시의 손을 놓아 줘야 이걸 드실 수 있잖아요." 앙드레가 그에게 스카치 잔을 건네 주며 빨강과 흰색 범이 찍힌 그의 나비넥타이를 칭찬 했다. 곧 그들은 앙드레의 안내로 바에서 내려와 바로 옆 탁자로 자리를 옳겼다. 남자들이 루시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앙드레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할까요? 선생님이 먼저 하시겠어요? 지금까지 얘기는 룰루도 다 알고 있 어요.: 사이러스는 대충대충 얘기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불운한 빌리에르의 영광과 좌절에 서부터 설명하기 시작하여 첫 대면 상황과 간단한 협약이 이루어진 내력, 그리고 파크 애비 뉴의 한 은행 로비에서 두 번째로 만나 프란젠의 전화번호와 5천 달러를 교환한 내용을 널 어놓았다. 루시가 낮게 속삭였다. "전화번호 대가치곤 너무 많은 돈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선 누구에게나 제 몫을 줘야 하오. 그리고 그 그림에 가까워질수록 할당액은 더 커지지. 프란젠이 요구할 액수를 생각하면 살이 떨린다오. 어쨌거나 나는 약속 장소로 나 가 현금이 가득 든 봉투를 들고 문 옆에 숨어 있었지. 빌리에르가 도착했는데 CIA요원이라 도 뒤따라오는 것처럼 두리번대며 다가오더군. 그때 상황은 정말이지 범죄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네, 잠복해 있던 누군가가 뛰어나와 총을 겨눌 것만 같더라구. 아무튼 우린 그렇게 해 서 서로의 봉투를 교환했는데 그 녀석이 뻔뻔스럽게도 돈을 다 세볼 때까지 날 못 가게 하 지 뭔가. 돈을 다 세어 보곤 그는 가버렸네 " 자신의 잔이 빈 것을 본 사이러스는 약간 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잔 더 갖다 드릴게요." 앙드레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이러스가 루시를 보며 말했다. "내 나이가 되어 누릴 수 있는 특권 가운데 하나는 다소 무례한 질문을 해도 된다는 거 요." 그의 눈썹이 재빨리 움찔거렸다. "아가씨와 앙드레는, 뭐랄까, 가까운 사이요?" 루시가 빙그레 웃었다. "가까워지려고 하는 중이죠. 그에게 물어 보세요 " "물어 볼 것도 없소. 그의 상태는 눈에 빤히 보이는데 뭐. 저 친구, 내가 여기 들어오고 나서도 날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어서 섭섭하기 그지없다오. 난 그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소. 좋은 사람이오." 루시가 술잔을 밀어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이러스 선생님, 앙드레가 오기 전에 여쭤 보겠는데, 제가 파 리까지 동행해도 괜찮겠어요? 여기 오는 길에 그가 제안해 오긴 했지만 어쩐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 ." 사이러스가 손을 치켜 들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 "두말할 것 없소. 아가씨가 가지 않으면 난 더할 수 없이 실망할 테니까." 그녀가 탁자를 가로질러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사이러스의 뺨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스 카치 잔을 들고 온 앙드레가 보았다. 자리에 앉은 앙드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두 분을 위해 제가 자리를 피해 드려요?" 루시가 앙드레에게 살짝 윙크를 했고, 사이러스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난 자네가 돌아오면 얘길 마무리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의 여행 친구가 갑자 기 날 공격했다네. " 그가 술을 한 모금 삼키고 얘기를 이었다. "그런 다음 나는 빌리에르가 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프란젠과 얘기를 나뒀네. 전화상으로 자세한 얘기까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꽤 관심이 있는 눈치였어. 다음 주에 그가 중립지대 라고 지칭하는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네. 그 사람, 유머 감각이 왜 고급이더군 루카스 카르통 에서 만나자는 거야. 예술적 분위기라 좋대나? 그의 말에 의하면 툴루즈 로트레크(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역주)가 즐겨 찾던 곳의 하나라더군." 앙드레가 갑자기 손가락에 불이 붙은 듯 흔들어 대자 루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설명했다. "거긴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야, 플라스 드 라 마들렌에 있지, 생일날 한 번 가본 적이 있어," "싼 데는 아닌가 봐요." 루시가 말했다. "싸다고 할 순 없지 ." 사이러스가 한차례 고개를 내저어 돈 걱정을 떨쳐 버렸다. "여보게들, 이번 여행은 투자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이 건의 가능성은 막대하다구. 게다 가 " 그는 잠시 멈추고 앙드레 쪽을 보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 아주 좋은 일이 있었어. 아까 말한 그 노부인이 손자에게 준다며 수채화 두 점을 모두 사갔네. 난 신바람이 난다구. 우리 여행에 돈이 부족하진 않을 걸세." 앙드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많은 돈을 투자하셨잖아요." 사이러스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자넨 돈 불리는 법을 좀 생각해 봐야겠구먼, 앙드레. 지난번에 내가 그 그림의 가치가 얼 마라고 했는가? 줄잡아 3천만 달러 이상이라구." 사이러스가 손가락을 내리더니 논쟁에서 이긴 사람처럼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 이번엔 자네의 편집장 얘길 해보게." 앙드레는 카밀라의 제안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루시가 이따금 투덜대는 소리를 냈고 사이러스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책 출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즈음 앙드레는 자신의 동료들이 점점 의심스러워하는 쪽 으로 기울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이윽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현재로선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는 자평과 함께 얘기를 끝냈다. 그러나 앙드레 자신이 생각해도 어리석은 의견인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는데 루시가 먼저 그것을 깼다. "카밀라의 농간이야. 겨우 며칠 여유를 주곤 당신이 18개월이 될지 더 될지도 모를 길에 오를 거라고 그녀가 진심으로 기대하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녀가 사이러스를 보며 말했다. "눈치채셨겠지만 전 카밀라를 좋게 안 봐요." "룰루,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계획이야." 앙드레가 손가락으로 조목조목 짚어 가며 말했다. "그녀에겐 접촉선이 있어. 배후에 개러비디언의 돈이 있다고. 아이디어 자체도 충분히 설 득력이 있고. 게다가 지금 내게 일거리가 많지 않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어 선생님은 어떻 게 생각하세요? 사이러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순진한 사람. 룰루 얘기가 맞아, 타이밍을 생각해 보라구. 까다로운 노인네라고 할지 모 르지만 할 말은 해야겠네 전시회니 해외 출판이니 떠들어대도 모두 연막 작전일세. 집요하 게 늘어놓는 그 모든 얘긴, 물론 교묘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자넬 비행기에 태우려고 계획된 걸세, 그녀는 자네가 되도록 빨리, 아주 멀리 사라져 주길 바라는 거야." "좋아요, 그렇다 쳐요. 하지만 대체 이유가 뭐죠?" "아, 그 부분에선 나도 할 말이 없네 하지만 일단 자네 건강에 나빠. 그리고 그 때문에 우 리의 계획이 방해받아서도 안 되지. 내 말에 동의하는가?"' 루시가 함박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좌중의 모두에게 미소가 번졌다. "파리는 정말 멋질 거예요," "꼭 데려가 달라고 압력을 넣는 것 같군." 앙드레가 말했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메뉴를 가져오게 했다. "우선 배부터 채우고 가죠." 14. 본격적인 준비 가방 바퀴들이 바닥 위로 구르는 소리와 묵직한 지퍼 열리는 소리에 앙드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낯선 침대에 앉아 있다는 것만 느껴졌을 뿐 몸이 흔들흔들한 게 영 방향감 각이 작동하지 않았다. 박스 스프링 위에 매트리스를 얹어 놓은 그의 침대에 비하면 어느 모로 보나 한결 아늑한 자그만 여성용 침대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옷가지들이 침대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희미하고 부드러운 전등이 밝혀진 방 한구석에서 루시가 옷가지들에 둘러싸인 채 여행 가 방을 열어 놓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하얀 티셔츠를 입은 그녀가 그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더니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룰루, 뭐하고 있는 거야?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일어섰다. 그녀의 티셔츠는 재수가 없을 경우 경범죄에 걸려들 수도 있을 만큼 짧았다. "미안, 앙드레. 잠을 깨우고 싶진 않았는데. 다시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길래 차라리 짐이나 꾸릴까 하고," 그녀가 여행 가방을 툭 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앙드레는 손목시계를 찾으려고 침대 옆 탁 자를 더듬거렸다. "지금 몇 시지?" 루시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게 그러니까, 조금 이른 시각이겠지." 이어서 그녀의 하얀 치아가 반짝였다. "뭐, 특별히 파리에 가는 게 아니라면," 시계를 찾아랜 그가 눈을 찌푸리고 들여다보았다. "룰루, 이제 겨우 새벽 네 시잖아. 비행기는 오늘 밤 여덟 시까진 뜨지 않아 시간은 충분 하다구," 루시가 침대 가로 와서 앉더니 이마의 머리칼을 걷어 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챙겨 넣을 게 많다구. 난 시골 촌닭 같은 꼴로 파리의 그 멋 쟁이들 옆에 서고 싶진 않아."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며 빙프레 웃었다. 뒤에서 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머리칼이 헝클어 진 먹구름처럼 하얀 삼각형 얼굴 주위로 퍼져 있었다. 앙드레는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따라 올라가며 길다란 근육을 느꼈다. 잠 생각이 싹 달 아났다. "당신 말이 맞아, 그리고 파리의 여자들은 침대에서도 대단하지." 그녀가 그의 어깨를 눌러 침대로 밀어뜨리고 몸을 굽혀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만큼은 못할걸. * * * 그들은 에어 프랑스 사 출국 라운지에서 사이러스와 만났다. 짐을 싸고 거듭 확인하고, 친 구들에게 작별 전화를 하고, 급한 용무를 대충 처리하고, 마치 4월 초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은 것처럼 즐거우면서도 기묘한 하루를 보낸 후였다. 도중에 잠시 파스타와 샴페인 한 병 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JFK. 공항에 도착했을 무렵엔 두 사람 다 피로와 흥분에서 오는 기분좋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뉴욕 타임스>>를 펼쳐들고 있던 사이러스가 신문 위로 빼꼼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옷 맞추러 양복점에나 들렀을까, 아웅다웅 준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하루를 보내고 온 것처 럼 보였다. "안녕하신가, 젊은이들. 십자 말풀이 게임이나 할까? '빛의 도시'란 뜻에 알파벳 다섯 개 로 된 단어가 필요한데 말씀이야, 혹시 파리 (Paris)가 아닐까? 그가 빙그레 웃으며 신문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 베레모, 정말 매력적이야. 생제르맹 가의 화젯거리가 되겠는걸. 앙드레, 자넨 정말 복 이 많군 " 친구들과 함께 모험에 나서는 길은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현대의 여행에선 더더욱 쉽게 맛보기 힘든 즐거움이기도 하다. 생활의 허례들에 지친 심신엔 기대 로 한껏 부푼 마음 맞는 일행이야말로 확실한 치료약이다. 비행기는 걸핏하면 지연되고, 항 공사 지상 근무원들은 다루기 힘들고, 보안 검사는 까다롭기 그지없고, 그러다 보면 늘 불편 하고 골치 아픈 인간 짐의 하나가 되어 버린 느낌이 되지만, 결국엔 이것저것 다 용서하고 이런 것들도 여행의 일부려니 하게 된다.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자신들이 즐겨 찾는 파리의 명소들, 리츠 바, 벼룩 시장 오르세 미술 관, 퐁네프 다리, 음식과 꽃으로 유명한 뤼드뷔시 거리에 대해 번갈아 가며 루시에게 얘기해 주는 동안, 느릿느릿 전진하던 출국자 행렬이 그들만 의자에 남겨 놓은 채 어느새 다 빠져 나가 버렸다. 루시는 짙푸른 제복으로 멋지게 차려 입은 기내 승무원들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남자들은 미국 항공사 승무원들보다 체격이 좀 작았고, 여자들뜬 단정한 머리에 공손하면서도 오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야말로 프랑스 공식 얼굴의 남다른 특징이랄 수 있었다, 그녀 가 앙드레를 쿡 찔렀다. "프랑스 아가씨들에 대해선 내 예상이 옳았어, 모두들 크리스찬 디오르(고급 의류 브랜드 -역주)에서 확 뽑은 것 같은 차림이잖아." 앙드레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당신이 보는 건 단면일 뿐이야, 프랑스 여자들은 유럽 어느 나라 여자들보다 속옷에 돈 을 많이 쓴다구. 이건 (월스트리트 저널)의 란제리(속옷류) 담당 기자한테 들은 얘기야," 루시는 몸을 굽혀 딱 붙는 코르셋으로 무장한 엉덩이를 흔들며 중앙 통로를 지나가는 한 승무원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객기가 활주로를 빠져 나가자 그녀가 팔을 뻗어 앙드레의 손을 잡고 지그시 눌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자기. 앞날은 정해져 있는 거야."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가 싶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지친 아이가 금세 잠들 어 버리듯이. 사이러스는 옆자리에 앉은 손님 때문에 다소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워싱턴에서 왔다 는 수다스러운 중년 여인네였는데 얘기를 나누며 안내받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프랑스 여행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 몸으로 -말이다. 그녀는 꼬드기는 듯한 미소를 지 으며 혼자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신상 얘기들을 늘어놓는 간간이 좀더 개 인적인 부분들까지 암시하곤 했지만, 30분쯤 지나자 사이러스는 두통이 있는 척하기로 했다 그는 좌석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승산에 대해 다시 한 번 따져 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만나려고 3천만 달러짜리 거래가 걸린 모험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승산이 높아졌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프란젠에게 달려 있었 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드노이예는 어떤 관계인지, 그는 어느 정도 신중한 스타일인지(신 중한 스타일이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우리를 만났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가 관건인 셈이다.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날조자들이란 원래 민감하게 마련이어서 의심할 땐 빠르고 신뢰할 땐 느리다, 언제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 직업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프란젠 같은 사람은 자기가 윌 해서 먹고 산다고 얘기하고 다닐까? 빌리에르 같은 조무래 기 축에 드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가도 믿어 줄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그에게 일거리를 제 공해 주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만일 있다 해도 분명히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큐레이터는 아닐 것이다. 세잔느의 그림을 파는 부분에 있어선 사이러스가 볼 때 큰 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비공 식 미술 시장이 광대하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대중이 보지 못하도록 그림을 지하실 에 숨겨 놓고 은밀하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보여 주며 즐기는 자기 만족적인 수집가들 이 있는가 하면, 그림이 발각되지 않도록 은근히 도와 주는 일본 사유 재산 보호법에 기대 어 이익을 보는 일본 고객들도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보물들이 손쉽게 사라지는 땅, 홍 콩도 있다. 그는 은밀하고 현명한 거래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돈 많고 소유욕 강 한 사람들이 부족한 경우란 결코 없으니까. 기내 통로 건너편을 힐끔 보니 루시와 앙드레가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식사 시간 이 되면 워싱턴에서 온 열정적인 부인의 사생활 폭로가 추가로 이어질 게 뻔했다. 사이러스 는 식욕을 눌렀다가 파리에 가서 제대로 식사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파리는 역시 고생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비행기는 혼잡으로 인해 로와 시 공항의 연푸른 아침 상공에서 맴돌다가 연착했다. 입국장에선 더 많은 시간이 지연되었 다. 해마다 여름만 되면 파업에 돌입하는 검사원들이 미리 몸을 푸는 차원에서 태업중 이었 던 것이다. 공항에서 도심까지 가는 길엔 차량들이 엉겨 붙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줄 몰랐다. 고속 도로에서도 택시가 지그재그로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서는 짓을 반복하기 시작하면서 카페 에서 아침을 먹기로 한 계획은 자연히 무산되었고, 세 명의 여행객이 마침내 세느 강을 건 너 리브고슈(세느 강 좌안 지구-역주)의 좁다란 거리들을 기어다니는 차량 행렬에 합류했을 즈음엔 이미 열한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그들은 뤼뒤박을 벗어나서 좁은 길에 위치한 몽탈랑베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외관은 구식이지만 내부는 현대식으로서 서늘했다. 검정 제복의 패션계 인사들이 애용하는 호텔이 다. 앙드레가 이곳을 택한 것은 외관이나 위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호텔 직원들이 전통적인 파리지엥들과 달리 매력적이고 젊고 진심으로 상냥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텔 의 바도 한몫 했다. 몽탈랑베르 호텔 로비 바로 왼쪽에 위치한 바는 누구든지 들어가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 내기 좋은 곳이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가 제공되고 늦은 오후부터 계속 술이 나오기 때 문이다. 이곳에선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오가고, 거래가 이루어지고, 연애가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선지 연애가 끝나는 장면은 보기 드물다. 아마도 눈물 짜고 후회하고 하기엔 조명이 너무 밝은 분위기여서인 것 같다). 텔레비전도 없다. 인간적인 여흥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호텔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루시가 바에 앉은 두 여자에게 찬탄의 눈길을 던졌다. 엄청나게 겉치장한 깡마른 여자 둘이 샴페인 잔을 앞에 푸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한 번씩 내뿜을 때마다 길고 우아한 목을 돌려 연기를 피하면서. "정말 멋쟁이들이에요. 저 사람들 좀 봐요. 너무 고상한 것 같아요. " 사이러스가 루시의 어깨를 톡톡 쳤다. "교외 지역에서 온 가정 주부들이야, 아가씨, 아마 남편 저녁상을 뭘로 차릴까 의논하고 있을걸." 저 여자들이 부엌 아니라 부엌 근처에라도 갈 수 있을까, 루시는 입술을 내밀고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돌아서는 앙드레의 손에는 열쇠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룰루, 멋진 아줌마들 구경은 그만해요." 열쇠 하나를 사이러스에게 넘겨주면서 앙드레는 일행을 승강기 안으로 몰아넣었다. 서로 밀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진 프랑스인 사이즈의 승강기였다. 처음 승강기에 탈 땐 낯선 사람들이지만 내릴 땐 결코 낯선 사람들이기 어렵다. 루시는 마치 경주가 시작되기 전 타이어를 점검하는 기사처럼 방을 샅샅이 점검하고 돌아 다녔다. 자단(열대산 향목-역주)재 가구들을 더듬어 보기도 하고, 짙은 감색에 흰 줄무늬 보 가 덮인 침대에 앉아 보기도 하고, 욕실을 장식한 스테인리스와 석판에 감탄하기도 하더니, 길다란 여닫이 창들을 열어제치고 뒤죽박죽 솟아오른, 세계 어느 곳의 지붕들과도 다른 파 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앙드레는 미소를 지으며 하나씩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쫓아 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 았다. "어때? 맘에 들어?"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그녀는 그를 잡아 끌고 창가로 갔다. "봐요, 파리야!" "그래. 맨 먼저 뭘 보고 싶어?" "모든 걸 다." * * * 그녀처럼 야심 찬 계획하에 파리로 온 사람들이 가볼 만한 데는 수천 군데가 되지만, 첫 방문객을 즐겁게 매료시키는 곳으로 생제르맹 가에 위치한 카페의 진수 '뒤 마고'만한 곳도 별로 없다, 그 카페엔 관광객이 아주 많이 드나들고, 세상이 귀찮은 듯 평발 걸음으로 오가 는 웨이터들이 성마르고 인색한 서비스의 극치를 보여 주는 데다가, 음식 값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비싸다고 비판론자들은 흔히 얘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대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파리인들이 너무도 잘하는 짓' , 즉 폼잡고 어슬렁어슬렁 활보하며 서로의 봄 의 상 뜯어보기, 어깨 으쓱하기, 입 삐죽거리기, 무수한 키스 교환 속에 다른 사람을 구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고 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 파리인들을 구경하려면 그곳 테라스의 식탁들에 견줄 만한 자리가 없다. 정오가 되자 기온이 올라가며 해가 쨍쨍 났고 세느 강을 따라 가벼운 미풍까지 불어 거리 로 나가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새로 돋아나 아직 가솔린 연기에 찌들지 않은 나뭇잎들이 깨 끗하고 인한 초록색 물감으로 갓 그린 듯 햇살에 반짝였다. 파리의 4월을 칭송하는 찬미가 가 나을 법한 날이었다. 두 남자 사이에 앉은 루시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마치 테니스 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이쪽 저쪽 번갈아 고개를 돌려 댔다. 어느 모로 보나 뉴욕과 는 딴 판이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도 너무 많고, 개도 너무 많고,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 물도 많아, 고층 건물 숲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유 같은게 느껴졌다. 커피는 약간 더 진하고, 공기에서도 다른 맛이 나며, 앙드레까지도 달라 보였다. 그녀는 웨이터와 얘기하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불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그의 몸은 마치 기어를 바꾼 듯 한결 유연해지면서 손과 어깨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턱과 아랫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그는 지금, 거친 억양의 앵글로색슨계 말에 익숙한 귀에겐 너무도 이국적 으로 들리는 바로 저 단어들을 발음하고 있었다. 말의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모두들 너무도 빠르게 지껄여댔다. 저녁엔 오래오래 훌륭한 만찬을 들게 될 것 같으니 그때를 위해 가볍게 먹자고 사이러스 가 제안했다. 그들은 커피를 마신 다음 보졸레 와인 한잔페 햄샌드위치 하나씩을 주문했다. 샌드위치에 쓰인 빵은 가공품이 아닌 갓 구운 바게트였는데 루시로선 진짜 프랑스 빵과 노 르망디 버터를 처음으로 맛보는 셈이었다. 처음 한 입을 베어물고 음미하던 그녀가 씹기를 멈추고 앙드레를 쳐다보았다. "가만, 파리 사람들은 왜 뚱뚱하지 않은 거지?" 주위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녀가 물었다. "저들이 먹어 치우는 저 음식과 와인들을 봐요. 지금 저렇게 먹고 저녁이 되면 또 저만큼 은 먹을 텐데, 어떻게 살이 안 찔 수가 있지? 무슨 특별한 식이요법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건 전혀 없어. 그저 점심 땐 세 가지 코스 이상 먹지 않고 저녁 땐 다섯 가지 코스 이상 먹지 않으며, 아침 식사 전엔 절대 음주하지 않는 정도지. 그렇죠, 선생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거기다 매일 와인 한 병, 잠자기 전 약간의 코냑도 곁들인다는 걸 빼먹으면 안 되지, 아, 그리고 요리할 때 버터를 듬뿍 쓴다는 것과 운동은 거의 안 한다는 것, 하루에 담배 한 갑씩은 피운다는 것도 중요하지 ." 루시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요,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나 봐. 어쨌거나 여기 와서 지금까지 살찐 사람을 못 봤어 요, 단 한 명도." 앙드레가 말했다. "그게 바로 소위 프랑스식 패러독스라고 하는 거야. 기억 안 나세요-몇 년 전인가 그 문 제를 두고 야단법석을 떨었던 적이 있잖아요. 20개국을 선정해 각 나라별 식사 습관을 연구 하면서 시작됐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때 연구원들은 각 나라의 식단과 심장질환 발생률과의 관계에 주목했죠." 사이러스가 와인 잔을 신중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나로선 안 듣는 게 좋을 얘긴 것 같은데." 앙드레가 씩 웃었다. "이 나라에 계시는 한 무사하실 거예요. 그 실험 결과, 건강에 가장 좋은 식습관을 가진 나라는 일본이래요. 그 나라에선 어류와 쌀이 주식이니 전혀 놀랄 만한 결과도 아니죠. 그런 데 진짜 놀라운 건 2위국이었어요. 20개국 가운데 2위를 차지한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거든 요. 빵, 치즈, 푸와그라(특별히 살찌운 훈제 거위 간-역주)소스, 세 시간에 걸친 점심, 꾸준 한 알코을 섭취에도 불구하코 말이죠, 모두들 뭔가 비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먹고 싶은 대로 먹 어도 그걸 처리해 주는 식단상의 어떤 특징이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마침내 그들 이 찾아낸 설명은 바로 적포도주였어요." 사이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는군. 텔레비전에서 떠들어대던 그 얘기지? 그 방송이 나간 지 48 시간 만에 미국의 주류 판매점에 있던 카베르네 소비뇽(적포도주의 일종-역주)이 바닥났지," "맞아요. 그리고 얼마 후 프랑스의 간경변 발생률이 미국보다 높다는 얘기가 일부에서 흘 러 나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다시 햄버거와 콜라 쪽으로 몰려가 버렸죠." "미국은 그 20개국 중에 몇 위였는데?" 루시가 물었다. "그야, 하위였지. 14윈가 15위였던 것 같아. 하지만 적포도주를 마신다 해도 미국의 순위 를 바꿔 놓진 못할 거야. 사실 내가 볼 땐 적포도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는 것 같아. 분명한 건,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고 마시느냐 하 는 것도 중요하다는 거야. 먹는 방법도 나라마다 큰 차이가 있거든.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음식은 연료와도 같은 거지. 그러니 차에서도 먹고, 길에서도 먹고, 저녁 식사를 15분 만에 마쳐 버리기도 하잖아. 그러나 프랑스인들에게 음식이란 하나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식사하 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그리고 집중해서 먹고. 그들은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 며 끼니 중간에 군것질을 하지 않아. 프랑스 대통령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감자 칩을 바삭 바삭 먹어대는 장면은 결코 상상할 수 없지. 이 나라에선 요리가 존경받아. 일종의 예술로 인정되지. 최고 요리사들은 영화계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다구." 앙드레가 잠시 말을 끊더니 와인 잔을 마저 비웠다. "미안해요. 무슨 강의같이 돼버렸네요. 하지만 사실이 그런걸요." 그리고 루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 저녁 식탁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라구 " 사이러스가 말했다. "말하려다 깜박했는데, 아까 호텔 방에서 프란젠한테 전화했네 " "얘긴 잘됐어요? 사이러스의 눈이 빛났다. "열광적인 식도락가였어 메뉴에 대해 쉴새없이 얘기하더라구. 상드랑이란 자가 위대한 요 리사 축에 드는 건 틀림없나 봐. 프란젠은 벌써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든 사람처럼 떠들어 댔어. 오늘 여덟 시에 거기서 만나기로 했네. 프란젠은 아주 호의적인 친구 같았네. 자기를 니코라고 불러 달라더군.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즈음 루시는 검정 가죽 차림의 키 큰 금발 여자가 보르조이(러시아 원산의 개 -역주) 를 데리고 대로를 건너려고 하는 장면을 지켜 보고 있었다. 여자와 개 둘 다 도도하게 고개 를 치켜 들고 폼을 잡으며 차량을 무시한 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개가 도로 한 쪽에 세워진 오토바이 뒷바퀴에 한 쪽 다리를 걸치고 오줌을 누었다. 막 출발하려던 오토바이 주인 역시 오토바이 안장에 한 쪽 다리를 걸친 채 개를 타일렀다. 개 주인은 아는 체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개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루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뉴욕이었다면 지금쯤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을 텐데. 개는 고발됐을 테고."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 저은 후 그녀가 사이러스를 보며 물었다. "그를 만나면 사업 얘길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 그럼, 오늘 저녁엔 검정 옷을 입어야겠네요? 아니, 농담이에요. 프란젠에게서 뭘 얻어낼 수 있을까요?" "글쎄 , 두고 봐야지 ." 사이러스는 나비넥타이를 바로잡으며 도로 건너편의 브라스리 립 (간단한 식사와 술을 파 는 식당-역주)을 쳐다보았다. "일단 그가 우리를 편하게, 느끼게,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지. 그런 다음 그가 어떻게 해서 드노이예의 일을 맡게 되었는지, 그리고 원작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는지, 지 금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어디로 옮겨지고 있는 중인지 캐내 봐야지." 그가 루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사항들을 모조리 털어놓게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루시가 이마를 찡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사이러스가 말했다. "물론이지. 그를 취하게 만든 다음 최선의 것을 기대해 보는 거요." * * * 카밀라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한 쪽 팔꿈치를 구부려 담배를 어깨까지 치켜 든 채 팎고 초조한 걸음으로 노엘의 책상 앞을 왔다갔다 했다. 일이 크게 어긋나고 있 었다. 앙드레에게 사진작가라면 깜박 넘어갈 일생일대의 기회를 제안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는 사라져 버렸다. 종적을 감춘 것이다. 지난 이틀 동안 그의 아파트에 전화한 것만 해도 수십 통은 될 것이다. 그를 위해 홍콩 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고 복잡한 제반 준비도 다 끝냈다 그녀의 입장에선 최대한으로 비굴 함을 발휘해 애걸한 끝에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증발해 버렸다. 프 랑스인이 창조적인 국민이라고? 오만한 것들! 책임감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 그녀는 자 신의 수첩에서 그를 영원히 지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사무실로 다시 한 번 연락해 봐, 노엘. 월콧인가 하는 그 여자한테 물어 보라구. 앙 드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 노엘이 전화를 거는 동안 카밀라는 서성대기를 멈추고 지켜보며 서 있었다. 노엘이 고개 를 가로 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여자도 없는데요. 다음주까지 휴가래요." "휴가라구?" 카밀라가 코웃음을 쳤다, "존스 비치로 패키지 여행이라도 떠났나 보군, 할 수 없지. 앙드레 집으로나 계속 연락을 취해 봐요." 분노로 몸이 굳은 채 쿵쿵대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지켜보며 노엘이 한숨을 내 쉬었다 한동안 또 괴로운 날들이 이어질 조짐이었다. 15. 프란젠 그들은 여덟 시 직전에 로비에서 만났다. 루시는 가져온 옷 중에서 제일 멋진 검정색 옷 으로 차려 입었고, 앙드레는 넥타이를 착용할 때면 늘 경험하는 금방 질식할 듯한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사이러스는 불바르디에(파리의 큰 거리를 배회하는 플레이보이 족-역 주) 분위기의 체크 무늬 정장 차림이었다. 그가 기사처럼 큰절을 하며 루시의 손을 잡더니 입을 맞췄다. "아가씨, 아주 매흑적이오, 파리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아가씨 같아요." 루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사이러스 뒤에 서 있던 젊은 호텔 웨이터 하 나가 눈을 맞추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에게 미소 지어 준 그녀는 홍수 같은 불어 공격에 직면하고 말았다. '방금 호텔까지 손님을 태워다 준 택시가 한 대 있다. 지금 비어있어서 타실 수 있다 원하 신다면 마드모아젤(아가씨)을 위해 기꺼이 그 택시를 붙잡아 줄 수 있다.' 홀린 듯한 그의 표정으로 보건대 사실은 택시가 아니라 마드모아젤을 붙잡고 싶은 속셈 같았다. 당황한 루시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한 쪽에 서 있던 앙드레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 지금 뭐라고 그래요?" "자기가 수많은 여자들을 보았지만 당신한테 견줄 만한 여자는 없다고 하는군. 당신을 집 에 데리고 가서 자기 엄마한테 소개시키고 싶대 ." 어쨌거나 그 택시를 잡아 탄 그들은 생제르맹 가를 지나 콩코드 다리를 건너갔다 화려한 교각들 밑으로 거대한 검정 리본처럼 펼쳐진 세느 강 풍경에 루시가 숨을 죽였다. 그녀를 지켜보던 앙드레가 말했다. "내가 룰루 당신을 위해 교각들에 불을 밝히라고 했어 저기 오른쪽으로 보이는 게 튈르리 공원이고 바로 정면이 콩코드 광장이야. 비 오는 월요일 아침의 웨스트 브로드웨키와 맞먹 는 풍경이지?" 특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주변 풍경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루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투광 조명으로 칠해진 것 같은 건물들, 도로변에 자로 잰듯 정확하게 줄지어 선 나무들, 육중한 돌담들에 조각같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들. 파리의 밤 풍경을 처음 대한 그녀는 넋이 나간 듯 말이 없었다. 택시 기사는 한가하게 경치를 즐길 기분이 전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는 가속 페달을 힘 차게 밟아 르와얄 가를 빠져 나와 마들렌 광장으로 돌진하더니 오토바이 한 대 앞으로 갑자 기 끼여들었다. 곧 욕이 쏟아졌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기분 좋은 듯 한마디 불퉁 스럽게 내뱉으며 보도 쪽으로 차를 붙였다, 팁 액수가 적절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보나 페티(많이 드세요-라고 중얼거린 다음 세 사람을 식당 입구 정면 보도에 남겨 놓은 채 다시 차량들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입구 위에 붙은 간판을 보니 식당 이름 바로 밑에 스타급 주 방장, 알랭 상드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약간 연극적인 기질이 느껴졌다. 루카스 카르통 식당의 기원은 18세기, 과감한 영국인 로버트 루카스가 먹는 즐거움을 박 탈당하고 사는 파리 토박이들에게 냉육과 찐 푸딩을 제공하려고 개업한 타베른 앵글레(영국 식 주막)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이 두 요리의 조합은 그러나 지역 식도락 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루카스의 이름과 명성은 그의 사후 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130여년 후 식당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서 새 주인은 식당 이름을 타테른 루카스로 바꾸었다. 호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20세기 초, 이 점포는 아르 누보 양식으로 개조되었고, 1925년에 프랑시스 카르통으로 또 한번 주인이 바뀌었다. 실내 분위기는 아마도 9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바 없을 것이다. 청동 장식제들이 놀랍 도록 유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거울과 장식용 조각 패널들, 화사함을 자랑하는 신선한 꽃들, 크림색의 큼직한 메뉴들 뒤에서 들려 오는 웅얼대는 목소리들,,, ,,, 전반적으로 호사스 럽고 향락적인 분위기다. 사이러스가 양손을 비비며 마치 특별하게 효험 있는 산소라도 한 줄기 들이켜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프록 코트(남자의 의례용 긴 상의 -역주)에 실크햇으로 차려 입고 왔어야 할 것 같은 분 위긴데," 그가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의 손님이 와 계시는 것 같은가?" 식탁의 대부분이 말쑥하고 점잖게 차려 입은 비즈니스맨들에게 점령당해 있었는데 매력은 없지만 이들이야말로 값비싼 식당의 핵심 기둥들이다. 검정 양복 패거리들 사이로 여자들 몇 명이 두드러져 보였다. 일부는 화장 분위기와 맞추어 돋보이는 보석들을 달고 있었고, 나 머지 여자들은 다국적 군대와도 같은 기업을 확연히 보여 주는 맞춤 제복 차림들이었다. 그 리고 실내 맨 끝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 메뉴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는 데, 그의 뒤에 달린 벽면 거울 속에 단정치 못한 그의 뒤통수가 비쳐져 있었다. 식당의 지배인이 그들 일행을 그 쪽으로 안내해 가자 프란젠이 돋보기 안경 너머로 올려 다보았다. 앙드레와 사이러스를 훑고 난 그의 동그랗고 파란 눈이 루시를 보더니 휘둥그레 졌다. 그는 다소 힘들게 일어나 살찐 손을 내밀고 탁자 위로 몸을 구부려 그들 세 사람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곰처럼 덩치가 컸는데 총알도 막아 낼 것 같은 두꺼운 갈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있어서 부피가 더 커 보였다. 맨 윗 단추를 열어 놓은 체크 무의 셔 츠에 다소 구김이 가 있었지만 노란 모직 넥타이를 곁들여 겨우 격식을 차린 시늉을 냈다. 그는 두상이 컸다, 길게 쭉 뻗은 코, 잘 다듬은 콧수염, 넓은 앞이마 위로 희끗희끗한 머 리칼이 텁수룩하니 후광처럼 사방으로 삐쳐 나가 있었다 그가 말을 하자 거의 완벽에 가까 운 영어가 튀어나와, 네덜란드에선 보육원 시절부터 영어를 가르치나 싶을 정도였다. "좀 의외입니다. 파인 씨 한 분만 오실 줄 알았는데." 그는 일행에게 다정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메뉴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사교적인 자리 같군요, 아닌가요?" "일도 약간 처리할 수 있겠죠. 미스 월콧과 미스터 켈리는 내 동료들이오. 대단히 신중한 친구들이란 건 내가 장담할 수 있소." 사이러스가 말했다. 식탁 옆에 서서 얼음통 놓을 자리를 만들고 있던 웨이터가 얼음통에서 물기가 뚝뚝 흐르 뜬 술병을 상표가 보일 때까지 끌어올렸다. 술병을 힐끔 본 프란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이러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가정 집에서 만든 샴페인이죠.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아주 맛이 좋아요." 잠시 대화가 끊기고 병 코르크 마개를 뽑는, 급작스런 한숨보다 크지 않은 소리가 났고 술잔들에서 거품이 보글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이러스가 식탁 위로 몸을 굽히더니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오늘 저녁 계산은 내가 책임지려 하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꼭 내고 싶소." 그 네덜란드인은 자기 잔 밑동을 만지작거리며 사이러스의 말을 잠시 되씹는 듯했다, 그 는 출발이 창 좋다고 생각했다 1상팀(100분의 1프랑-역주)까지도 물고 늘어져 협상하려 드 는 저 인색한 홀츠 녀석과 전혀 다르다. 그가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며 말했다. "정말 후하시군요. 선생과 함께 일하면 마음이 서로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사이러스가 좌중을 둘러보며 잔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예술을 위해 ." "사업을 위해 ." 프란젠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덧붙였다. "하지만 빈 속으론 안 되죠." 식탁 밑으로 무릎을 맞대고 앉은 루시와 앙드레는 메뉴를 두고 예의를 차려 가며 티격태 격하는 두 노신사를 내버려둔 채 둘이서 무엇을 주문할기 의논했다. 앙드레는 요리명을 번 역해 주고 루시는 넋을 잃고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누가 봤다면 둘이서 결혼 문제를 상의하 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앙드레가 비고르노(경단 고둥요리 -역주)에 대해 설명 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고둥의 일종이야, 룰루 알지? 식용 고둥. 바다에서 나는 거." "생선 종류? 게 같은 거?"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구. 달팽이에 더 가깝지." 루시가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리 드 보(송아지나 양 새끼의 흉선-역주)는 어떨까?" "맛있지, 하지만 그게 뭔지 알고 나면 입맛이 싹 가실 텐데." "그렇게나 끔찍한 거야?" "그럼 . " "좋아, 먹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군. 그럼 퀴스 드 그러뉴(개구리 넓적다리 요리 -역주)로 할까?" "좋은 요리지 연한 닭고기하고 맛이 아주 비슷해." "닭고기는 아닌가 봐?" "응 개구리 허벅지 살이야." "오우 " 그러자 프란젠이 자신의 메뉴를 루시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내가 좀 도와 드릴까요?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 가도 맛볼 수 없는 이곳만의 요리 가 하나 있어요. 바로 카나르 아피시우스죠. 이 요리의 비법은 2천 년 전 로마인들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그는 말을 끊고 샴페인을 조금 마셨다. "오리 요리이긴 하지만 어떤 오리 요리와도 다르죠. 꿀과 향신료에 절였다 구운 오리로서 맛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에요. 이 오리 맛이야말로 평생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겁니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요란하게 입맞추어 찬사의 뜻을 표했다. "당신 손자들에게 이 오리 얘길 들려줄 수 있을 겁니다." 루시는 자신에게 향해진 세 남자의 얼굴을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하지? 그래요, 그 오리 요리로 하겠어요 "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프란젠은 자신이 일행 모두의 식사를 지휘하는 사람인 듯 엄청난 열정과 해박한 지식으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자 지배인과 소말리에(와인 감정 가)가 서로 경쟁하듯 와인을 추천하여 그들의 식탁이 그 식당에서 제일 활기를 띠게 되었 다. 주문이 끝난 후 앙드레가 프란젠에게 그 점을 지적했더니 네덜란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야 아주 간단하오. 이런 식당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릇된 동기를 갖고 옵니다. 다 시 말해서 저녁 한끼에 몇천 프랑을 쓸 능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러 온다 이겁니다. 그들에 겐 돈이 성스러운 것이니까 마치 교회에 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마련이죠." 그는 양손을 모으고 천장에 그려진 먼 옛날의 천사를 한번 올려다 보았다. "웃지도 않고 와인도 많이 먹지 않고, '구스토(맛을 즐기는 태도)'도 없고. 그러니 웨이터 들이나 소말리에들로선 별로 재미가 없죠. 안 그렇겠어요? 맛보다 가격에 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와인을 제공해 보았자 무슨 만족을 느낄 수 있겠소? 카!" 그는 잔을 마저 비우고 너더니 더 얘기하겠다는 뜻으로 지배인에게 눈을 징긋해 보였다. "그러나 우린, 우리는 다릅니다. 우린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 여기에 와 있어요. 진정한 식도락가라 이겁니다. 우린 주아 드 망제(먹는 즐거움)을 믿습니다. 주방장의 청중이 되어주 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평가하고 있소. 그들은 우리가 통하는 사람들이 란 걸 이미 알아챘어요. 식사가 끝날 무렵이면 아마 우리한테 술을 살 겁니다." 프란젠의 태도엔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고, 게다가 파리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들에 곁들여 부르고뉴와 보르도 산 와인을 쉴새없이 따라 마시다 보니 네 사람은 금세 편안한 동 료들 같은 분위기로 빠져 들었다. 사이러스는 프란젠을 적절히 요리하고 있는 와인과 두 젊 은이를 주시해 가며 때를 기다렸다. 이 자리의 목적을 털어놓을 적절한 순간을 포착할 셈이 었다. 주요리를 먹어 치우고 잠시 휴식의 시간으로 접어들었을 때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러나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오히려 프란젠 쪽이었다. "오리 요리를 먹고 나니 매일 저녁 여기 와서 식사하고 싶어지는 군요. " 냅킨으로 조심조심 콧수염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그러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 분 위기로 말을 이었다. "고정 예약 손님이 되어, 매일 밤 같은 식탁에 앉아 미리 얼음통에 담가 둔 와인을 마시 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식당 측에서 환히 알고 있고, 이따금 주방장이 내 식탁에 놀 러 오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냅킨을 셔츠 깃 속으로 다시 꽂고 난 그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 같은 투로 냅킨을 가만히 쓸어 내리더니 사이러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같은 야망이 있으니만큼 내겐 일거리가 필요하오. 선생이 원하는 게 뭡니까? 뉴욕의 그 친구와 통화하긴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거든요. 자, 말씀해 보시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여린 감성과 자의식 강한 분방한 성향을 다년간 경험해 온 사이러 스는, 우선 화가로서의 지위를 존경하고 있음을 이 네덜란트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키면서 조심스레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프란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선생, 지금 피카소하고 얘기하는 거요? 난 그저 붓으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인이라오."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니 오히려 다행이오. 그럼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난 세잔느가 필 요하오." 프란젠의 양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거참 희한하군. 세잔느 작품은 1992년에 한 번 해보고 손을 놓았는데 금년엔 두 번째 작 을 마치자마자 또 세잔느 작품이 들어오다니 그 늙은이, 인기가 좋은 모양이구먼 일이란 건 때때로 이런 식으로 풀린다니까요. 사이러스가 무어라고 덧붙이기 직전, 디저트 주문을 받으려고 지배인이 다가왔고 그러자 프란젠의 관심은 금세 그리로 쏠렸다. "자, 모두들 메뉴를 다시 펼쳐 보시죠. 꼭 맛보셔야 할 게 있어요." 좌중의 일행이 그의 지시에 따르자 프란젠이 말을 이었다. "치즈엔 적포도주를 마시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죠. 하지만 여길 좀 보세요. 카망베르와 칼 바도스(사과주-역주)에푸아세와 마르드 부르고뉴(포도 찌꺼기로 만든 프랜디 -역주)뷔유 브 레비스와 만자닐라(스페인 산 포도주-역주) . 모두 기가 막힌 조합들이죠. 아, 이 대단한 상 상력! 대단한 탐구력!" 프란젠은 고개를 내저어가며 30여 가지에 달하는, 치즈별로 엄선해 놓은 술 목록을 계속 훑어 나갔다, 그가 메뉴를 내려놓고 다시 세잔느 얘기로 돌아오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 다. "난 세잔느를 아주 존경합니다만 꼭 그의 작품 때문만은 아니죠. 미안하지만 그 병 좀 건 네 주시겠소? 내가 즐겨 얘기하곤 하는 세잔느의 일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리다." 남은 보르도를 마저 따른 프란젠은 술잔을 들어 불빛에 비추더니 한숨을 내쉬고 나서 쭉 들이켰다 "화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세잔느 역시 살아생전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편이였는 데, 그의 화풍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경우도 허다했지요. 그가 엑상 프로방스에 있을 때 얘깁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 지방은 그림에 관한 한 결코 세계적 중심지라곤 할 수 없는 곳이죠. 어쨌거나 거기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고, 늘 그렇듯 지 역 비평가들도 다수 참석했죠. 세잔느는 우연히 그들 가운데 한 사람 뒤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 비평가는 그림 한 점을 두고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얘기가 점점 불쾌한 쪽으로 발전되더니 드디어 아주 모욕적인 소리까지 한 마디 곁들인 모양입니다. 세잔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지요. 그가 비평가의 어깨를 톡톡 치자 그 사람이 뒤돌아보았습니다. '선 생.' 세잔느가 말했습니다. '엿이나 먹으시지.' 그 말에 뭐라고 응수할 수 있었겠어요? 그때 그 비평가의 얼굴을 한 번 봤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아, 저기 치즈가 오는군요." 치즈를 다 먹고 나자 사이러스는 다량의 코냑의 힘을 빌린 수완을 발휘해 점점 흥이 나는 이 네덜란드인을 사업 얘기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내일 아침 모두들 맑은 정신으로 프란젠 의 화실에서 만나 세부 사항을 해결하기로 얘기가 됐다 합의가 되자 프란젠은 내일 혹시 가 벼운 점심이라도 하면서 모두의 새로운 관계를 자축하고 싶어지거든 자신이 잘 아는 곳으로 안내하겠노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루 데 생페레에 위치한 자신의 주소들 휘갈겨 적고 나서 아파트 현관문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비밀번호까지 적어 주었다. 사이러스 편에선 몽탈랑베 르 호텔 방 번호를 적어 주었다. 세 명의 웨이터와 소말리에, 지배인이 정중하게 안내하는 가운데 좋은 밤이 되라는 인사 를 받으며 그들은 식당에서 맨 마지막으로 나왔다. 대단히 훌륭한 만찬이었다. 마침내 그 네 덜란드인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자 사이러스는 흡족한 기분이 되었다. 오늘 밤엔 그를 친 구를 만들었다. 내일은 운만 따라준다면 그를 공범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호텔로 돌아오고 있었다, 와인 기운이 따뜻하게 올라오면서 시차로 인한 졸음이 쏟아졌다. 졸린 눈으로 생제르맹 가의 흐릿한 불빛들을 바라보던 루시는 어느새 끄덕끄덕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앙드레? 우리 오늘 밤에 저 다리를 걸어 보기로 했죠? 그거 내일로 미루면 안 될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앙드레?"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사이러스 선생님?" 그녀는 백미러 속 택시 기사의 눈과 마주쳤다. "도도(잠드셨네요). 두 분 다 잠에 빠져 있어요." 그가 말했다. * * * 프란젠은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코에 익은 유화 물감과 테레빈유 냄새가 머리에 밴 알코올 냄새를 뚫고 밀려왔다. 화실로 쓰고 있는 거실을 지나 자그만 부엌으로 곧장 간 그 는 커피를 달이기 시작했다. 사이러스 파인은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루돌프 홀츠와는 아주 다르다. 퍼컬레이터(여과기가 달린 커피 끓이개 -역주)를 쳐다보며 앉아 있자니 해묵은 반감들이 되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홀츠는 탐욕스럽다. 약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야비한인데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프란젠의 밥벌이를 제공해 주는 인물이고 두 사람 모두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점잖은 새 고객과 만나게 될 이 일을 기화로 다른 일거리들이 쭉 이어지기만 한다면 얼마 나 좋을까 내일 파인이 오면 포장을 끝내고 이송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저 두 점의 그림도 보여줘 버릴까? 두 그림을 나란히 보여 주면 그 거래상도 내 솜씨를 한결 높이 평가할 텐 데. 커피를 준비하고, 오늘은 진짜 마지막이라고 결심하며 코냑을 한잔 더 따른 프잔젠은 닳 아 빠진 가죽 의자에 몸을 묻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대를 찾아냈다. 그때 전화 벨이 울 렸다. 그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 언젠가는, 아니 내일 당장이라도 자동 응답기를 사고 말겠다고 작정하면서 그는 어기적어기적 거실을 가로질러 가 수화기를 들었다. "프란젠? 홀츠요. 파인 씨와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겠군 " 프란젠은 하품을 했다. 홀츠는 항상 이런 식이다. 고객을 소개해 주면 그 첫 만남에서부터 그림이 완성되고 물감이 마르는 순간까지 언제나 꼬치꼬치 참견한다. 점검하고, 귀찮게 볶아 치고, 제 몫을 잘 챙겨줄지 반드시 확인한다. "네 , 아주 잘 통하는 사람이던데요." "그가 원하는 게 뭐지?" "세잔느요." "젠장, 세잔느를 원한다는 건 나도 알아. 그 얘긴 자네한테 전화하기 전에 빌리에르한테서 들었다구. 세잔느의 어느 그림이냔 말이야?" "아직은 몰라요." 홀츠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림이 뭔지 알아야 위작의 가격을 어림잡아 볼 수 있다. 아니 도대체, 저녁 내내 같이 있었으면서 일 얘기를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는 짜증 난 음성이 되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언제 알게 될 것 같은가?" "내일쯤. 오전 열 시에 그들이 내 화실로 올 거예요, 그때 ,,,,,, "그들? 그들이라니? 파인 혼자인 줄 알았는데." "아, 아니에요. 두 사람 더 따라왔던데요. 젊은 남자하고 여자." 홀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이름이 뭐야? 그들의 이름 말일세." "남자는 켈리, 앙드레 켈리예요. 여자는 루시라고 했어요. 성은 생각이 안 나고." 홀츠는 말을 잊은 채,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파크 애비뉴의 초저녁 차량 물결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했다. "홀츠? 듣고 있어요?" "자네, 거기서 나와야겠어. 그 그림들을 챙겨서 나오라구. 오늘 밤, 지금 당장," "왜요? 난 통 영문을 모르겠네, " 홀츠는 한차례 숨을 들이켜더니, 고집 센 아이를 타이르는 사람처럼 급한 마음을 겨우겨 우 눌러 가며 말했다. "그림들을 챙겨서 호텔로 들어가게. 방을 잡거든 내게 전화해서 자네의 위치를 알려 줘, 꼼짝 않고 전화기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내 말 똑똑히 들었나?" 프란젠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금여기 시간이 몇 신 줄 알기나 해요?" "이런, 답답한 사람 같으니. 심각한 문제란 말이야, 아무 소리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당장." 프란젠은 이미 끊긴 수화기를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못 들은 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음 순간 직업적인 경계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면으로 야 어떤 인간이든 홀츠는 결코 쉽게 겁먹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심각한 일이라고 했 다. 프란젠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숨겨 놓은 그림 두 점을 가지러 갔다. 홀츠는 서재에 앉아서 초조한 마음에 검정 스웨이드 가죽 실내화를 신은 발로 오부송 카 펫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사진사 녀석. 도대체 파리로 가서 무슨 짓을 하 고 있단 말인가? 지금쯤 홍콩에 가 있어야 할 녀석이. "자기?" 카밀라가 문간에 나타났다. 은빛 옥구슬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공들여 야회용 화장을 한 그녀는 자선의 밤 행사에 나갈 준비를 완전히 끝낸 상태였다. "자기? 이러다 늦겠어 ." "들어와 문이나 닫아, 우린 오늘 아무데도 안 가." 16 . 파라두 치밀어 오르는 울화로 갑자기 술이 다 깨버린 프란젠은 적막한 한밤의 거리를 재빨리 걸 어 내려가 자신의 임대 차고가 위치한 골목길로 향했다. 그의 한 손엔 가방이, 다른 한 순엔 대형 알루미늄 아트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기포 고무와 거품 비닐로 겹겹이 싼 그림 두 점이 들어 있었다. 폴 세잔느가 그린 <멜론과 여인>, 그리고 니코 프란젠이 그 린 <멜론과 여인>. 두 그림의 합산가는 3천만 달러와 거스름돈. 한밤중에 그처럼 짐을 들고 파리의 뒷골목을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보통 때 같았으면 생각만 해도 오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접어들 무렵엔 그러한 초조감도 점점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밀려났고, 그 울화의 일부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홀츠 같은 인간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며 한 번도 그를 믿은 적이 없었다. 이쪽 계통 에선 루돌프와 홀츠와 악수하고 난 후엔 반드시 손가락 수를 세어 봐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홀츠가 시키는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신세다. 악성 편집증을 앓 고 있는 자그만 인간에게 목줄이 매여 잡아 끄는 대로 껑충대는 강아지처럼, 따뜻한 잠자리 와 수익 높은 일거리 전망까지 떨치고 나와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체 뭐가 그리 심각하다는 건가? 파인에 대해선 이미 조회가 끝난 상태 아닌가? 미술계 에서 유명한 성실한 거래상으로서 정직성 면에서도 인정받는 축에 드는 인물이라고 빌리에 르가 힘주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경찰에 밀고하는 짓거리를 하겠는가? 결코 그 렇지 않을 것이다. 차고 문 앞에 멈춰 선 프란젠은 귀가 너덜너덜한 고양이 한 마리가 호기심어린 눈을 동그 랗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맹꽁이 열쇠를 찾아 더듬거렸다. 지난번에 이웃집 고양이 놈이 화실로 기어들어 와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쇠라(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역주)의 거의 완벽한 위작에 날카로운 발톱 자국을 남겨 버린 일을 생각하고, 그는 고양이를 향해 '쉬쉭' 소리를 냈다. 그는 고양이란 놈들을 증오했다. 도무지 예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놈들이다. 차고 문을 연 그는 전깃불을 켰다. 고양이를 한 대 차버리려고 하자 녀석은 먼지로 얼룩 진 시트로엥 DS의 보닛으로 훌쩍 뛰어올라가 웅크렸다. 차고 벽들에는 연대별로 대충 추려 놓은 낡은 캔버스와 캔버스 틀이 수십 점 쌓아 올려져 있었다. 벼룩 시장이나 가재 도구 정 리 세일 장에 부지런히 다니며 모아 온 수집품들로서 부지런한 날조자에겐 모두 훌륭한 재 료였다. 프란젠은 커다란 덩치를 차 측면과 벽 사이로 밀어 넣고 그림 두 점을 차에 실은 다음 시 동을 걸고 차고에서 빠져 나왔다. 차에서 내려 차고 불을 끄고 자물쇠를 잠그는 동안 게으 르게 덜덜대는 디젤 엔진 소리가 골목길 담에 부딪혀 메아리 쳤다. 멀리 안전한 곳으로 달 아난 좀전의 그 고양이가 원망스런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프란젠은 잠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미 새벽 한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지금 시각에 호텔 문을 두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크리용 호텔의 더블 룸 생각이 굴뚝같은 가운데 그는 리옹 역 뒤편의 음산한 골목 길을 슬슬 돌아다녔다. 역전 부근 호텔들은 이런 유별난 시각에 찾아드는 손님들에게 익숙 할 것 같았다. 호텔 레옹 투 콩포르란 전등 간판이 깜박이는 것을 마침내 발견했을 무렵에 그는 얼마나 지쳤던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호텔 앞 주차장엔 빈 공간도 하나 있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모서리가 접힌 《뤼》잡지를 까고 졸리운 듯 앉아 있던 알제리인 안 내원은 일단 현금을 치르고 나서야 방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러곤 털 빠진 오렌지색 카펫이 깔린, 희미하게 불 밝혀진 콘크리트 계단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프란젠은 퀴퀴한 냄새 가 진동하는 좁다란 복도를 지나 마침내 하룻밤 묵게 될 방의 문을 열었다. 방에는 여기저기 얼룩이 진 침대와 커버와 쭈그러든 얇은 베개 두 개가 놓인 철제 침대가 있었다. 화장실을 욕실로 개조하느라 꽤나 고생한 모양이지만 완벽한 성공작은 아니었다. 서 랍장과 침대 옆 탁자의 표면은 오래된 담뱃불 자국투성이고, 침대 머리맡에 걸린 흐릿한 에 펠 탑 포스터엔 먼저 묵고 간 손님이 힘주어 휘갈긴 험악한 대문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MERDE(메르드, 빌어먹을)'. 루카스 카르통에서의 우아한 안락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잠자 리였다. 프란젠은 아트 케이스를 침대 밑에 밀어넣고 나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기록해 두는 메모장 을 찾느라 잠시 여행가방을 뒤졌다. 무심결에 침대 옆 탁자 쪽으로 손을 뻗던 그는 이 호텔 의 설비 수준이 객실 전화에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침대가 조금이라도 몸을 눕히고 싶어지는 구석이 있었다면, 아니 위생적으로 보이기 만 했어도, 전화 거는 일은 아침으로 미뤘을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메모장을 들고 계단 을 내려가 안내원 앞으로 갔다. 마지못해 센터포드(잡지 속에 누드 사진 따위를 접어 넣은 페이지-역주)에서 눈을 뗀 안내원은 프란젠 쪽으로 전화기를 밀어주곤 스위치를 착칵 눌러 통화 시간과 요금을 기록하는 자그만 기계를 작동시켰다. 첫 번째 전화 벨이 울리자마자 홀츠가 응답했다. "어디 있어? 전화번호를 대줘." "됐어요, 이 싸구려 호텔엔 오늘 하룻밤만 묵을 거니까.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이에 요?" "켈리란 녀석 때문이야. 자네가 파인과 함께 만난 녀석 말이야. 드노이예의 집에서 그림을 빼내는 걸 그 녀석이 목격했어." "그래서요?" "그 녀석이 수상쩍어. 그가 왜 파인과 함께 있을 것 같은가? 뭣땜에 파리에까지 가 있겠 냐구? 녀석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될 수도 있어." 안내원은 사진 속에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터질 것 같은 젊은 여자의 몸매를 다 른 각도에서 즐기려고 잡지를 돌려 세우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 때문에 프 란젠이 눈을 찡그렸다. "이해가 안 돼요. 파인은 인터폴(국제 경찰-역주)이 아니고 거래상이라구요. 내가 그의 일 을 해주면 그도 공범으로 연루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뭣 땜에 밀고를……." "이해가 안 되면 할 필요없어. 자네한텐 그림을 그리라고 한 거지 생각하라고 돈을 준 건 아니니까. 잘 듣게. 내 얘긴 자네 화실 근방에서 어정대고 있으란 게 아니야. 깨끗이 행방을 감춰. 그런 다음 자네의 소재를 내게 알려 줘. 그리고 파인의 일을 맡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프란젠은 윗입술을 깨물며 성질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짭짤한 수입을 포기하라 이 얘기요?" "그래, 만일 파인의 일을 해주면 자넨 끝이야." "협박하지 말아요, 홀츠. 그게 협박이 아니라면 약속이오?" 잠시 지직대는 잡음을 들으며 홀츠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썼다. "니코, 니코, 우리가 지금 뭣 땜에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거지?" 그림들이 현재 이 네덜란드인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는지, 홀츠는 갑자기 싹싹해진 태도로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우리가 함께 해온 일들을 생각해 보라구. 앞으로도 우린 함께 일할 거야.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겠어? 내가 내일 파리고 날아갈 걸세. 우리 둘이서 모든 걸 처리하자구. 리 츠 호텔에 자네 연락처를 남겨 두게나." 프란젠은 자그맣고 지저분한 접수처를 잠시 훑었다. 기름 때 낀 플라스틱 나무 화분이 놓 인 책상 너머에서 안내원이 잡지를 넘기려고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있었다. "리츠 호텔이란 말이죠." 그가 반복했다. "내일 밤 만나세, 친구. 그림들을 가져오는 걸 잊으면 안 돼." 전화 요금을 지불한 프란젠은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호주머니에 든 것들을 모두 꺼 내 탁자에 올려 놓던 그는 사이러스 파인의 명함이 눈에 띄자 잠시 동작을 멈췄다. 명함 뒤 편엔 그이 호텔 방 전화번호가 휘갈겨져 있었다. 이제 결코 성사되지 못할 일이 되어 버렸 다. 프란젠은 불쾌한 눈길로 침대를 쳐다보았다. 비듬 있는 사람들이 머물고 간 듯 지저분해 보였다. 감히 시트 속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으므로 옷 입은 그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채 천장을 응시하며 홀츠를 생각했다. 빌어먹을 노랭이 영감. "멍청한 네덜란드 녀석." 홀츠는 중얼거리며 양무릎을 싸안고 안락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여 태껏 혼쭐이 난 카밀라는 자신에게 퍼부어진 그 더러운 욕설의 상처에서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턱시도 차림의 그가 성난 늙은 난쟁이처럼 머리를 어깨에 묻고 잘 다듬어진 손가락들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말하는 그녀의 음성에는 망설임이 깃들여 있었다. "내가 할 일이라도 있어요?" 홀츠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마치 회의를 선언하는 사람처럼 책상 위에 양손을 쫙 펴고 말했다. "내일 콩코드 편으로 파리로 갈 수 있게 해. 리츠 호텔에 전화해서 방도 하나 예약하고." "나도 가야 해요?" "당신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같이 가. 기분 전환도 될 테고." 그의 표정을 본 카밀라는 지금 무슨 얘길 해봤자 좋은 소릴 듣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밝은 면을 보자. 4월의 파리, 멋지잖아? 그녀 는 전화도 걸고 짐도 꾸리려고 나왔다. 봄은 참으로 나해한 계절이다. 봄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시 자리에 앉은 홀츠는 프란젠과의 통화 내용을 곰곰이 되씹었다. 저 멍청이는 상황의 심각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것이 바로 그림쟁이들의 맹점이다. 자기들 분야 엔선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몰라도 도무지 생각할 줄을 모른다. 아니, 하찮은 자신들의 관심 사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전체 구도나 미래에 대해선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비전이 없다. 만일 이번 실수가 계속 발전되도록 방치했더라면, 위작을 한 점 더 그렸다는 사실을 만에 하나 드노이예가 알게 됐더라면, 파인과 그 사진사가 경찰에 불었더라면, 참으로 끔찍한 결 과가 나왔을 것이다. 홀츠는 두 개의 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매년 들어오는 수백만 달러에 의존하여 지금과 같이 호화롭고 특권적인 생활을 계속 영위하는 길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상황이 복잡해지는 경우다. 드노이예와 사이가 틀어질 뿐 아니라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루돌프 홀츠 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 놓은 것들이 하루 아침에 날아간다. 미술계란 데가 자기 기반을 잃은 회원에게 얼마나 냉정한지는 빌리에르의 경우만 봐도 자 명하다. 죄를 범하는 것 자체는 결코 죄악이 아니다. 발각되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파멸시키 는 것이다. 뭐라고 제안할까? 7만 5천? 10만?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사업에 드는, 정 말 겁날 정도로 큰 액수의 비용을 생각하며 홀츠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제 가능성도 없는 지출이다. 예상치 못한 시각에 걸려 오는 전화들은 브루노 파라두에겐 일종의 직업적 재난이었다. 이 직업에선(그의 명함에 적힌 대로라면 '보안 이사') 불안과 당황은 다반사다. 고객들은 늘 초조해 하며 때로는 필사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워낙 그런 직업이라고 해도 새벽 세 시라 는 시각에 기분 좋게 전화받기란 그로서도 힘든 노릇이었다. 그는 아주 결연한 의지로 전화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포기하기 딱 좋게 으르렁대는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파라두? 나 홀츠네. 자네한테 줄 일거리가 있어." "아탕(기다리세요)." 파라두는 거실에 가서 전화를 받으려고 나직이 코를 골고 있는 아내를 내버려둔 채 침대 에서 빠져 나왔다. 시간을 확인하고 난 그는 담배와 메모지를 전화기 옆에 갖다 놓고 거래 상의 회의를 할 준비를 갖췄는데, 홀츠를 대할 땐 늘 이런 식으로 해야 했다. "즈부 제쿠트(말씀해 보시죠)." 홀츠는 각별히 급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일에 대해 설명했다. 파라두는 그의 지시를 조 목조목 되짚으면서 머리 속으로 값을 올려 갔다. 보수를 깎으려 들 게 뻔하기 때문에 마음 을 단단히 다잡았다. "3만 정도는 될 거야." 홀츠가 말했다. "두당?" "미쳤어? 그들 모두에 대해서지." "말도 안 돼요. 겨우 몇 시간 주고 그 사이에 모든 일을 처리하라니. 우선 잠입해야죠, 둘 러봐야죠, 물건 정리도 해야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엄청나게 서둘러 해야 하는 일이니 보수도 최고라야 돼요. 그래야 말이 되죠." 홀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최고의 보수는 얼마 정도를 말하는 건가?" "10만." 홀츠는 고통 받는 동물의 소리에 가까운 신음을 한차례 내뱉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5만." "7만 5천." "이 악당. 내일 밤엔 내가 파리의 리츠 호텔에 가 있을 거야. 그리로 전화하게." 파라두는 옷을 갖춰 입고 나서 필요한 장비를 추려 보기 시작했다. 그는 빵빵하고 땅딸막 한 체격에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외인 부대에 있을 때부터 쭉 유 지해 온 두발형이었다. 그가 홀츠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몇 년 전, 민간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유명인들의 보디가드로 일하던 때였다. 그림 경매가 끝나고 파티가 벌어졌는데 그날 저녁 파라두의 고 객이었던 무수한 이혼 경력의 한 여배우는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가십 잡지 기자를 한사코 만나려 하지 않았다. 파라두는 그 기자의 코뼈를 부러뜨려 결국 구급차에 실려 나가게 만들어버렸는데, 그의 신중하고도 효율적인 활약에 홀츠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후로 홀츠는 사업상 파라두의 남 다른 기술이 필요할 때면 몇 차례 그에게 일을 시키곤 했다. 그러나 오늘 밤의 일은 격이 좀 달랐다. 상대를 위협하거나 뼈 몇 대를 부러뜨리는 따위 의 늘 해오던 일들에 비해 다소 패기를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가방 지퍼를 잠그는 파라두 는 어느새 즐거이 콧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단순한 폭력도 물론 즐겁지만 그러나 이제 그 정도론 충분치 않았다. 그에겐 군대가 자상 하게 가르쳐 준 그 모든 것들을 써먹을 수 있는 일종의 도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번이 바 로 그 기회였다. 보수를 높일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획과 전문 능력을 제대 로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보수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선 택한 전문직에서 한 차원 높아지려 하고 있었다. 몽파르나스에 위치한 그의 아파트에서 생페레까지 가는 길은 인적이 끊겨 고요했고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혹시 경관이 길가에 잠복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신호들을 지켜 가며 조심조심 운전해 간 파라두는, 프란젠의 아파트 건물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주 차 공간을 발견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였다. 시간이 좀더 주어졌으면 좋았을걸. 그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가방에 든 것들을 점검한 다음 차 문을 잠갔다. 그러곤 고무로 밑창을 댄 신을 신고 소리나 지 않게 움직였다. 아파트 건물은 이웃한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유형으로서 삼면이 마당과 면해 있고 마당은 높은 담과 육중한 이중문에 의해 도로와 차단된 형태였다. 벽에는 전자식 키 패드가 설치되 어 있었는데 거주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흔히 출입 비밀번호를 매달 바꾸도록 되어 있었다. 파라두는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 불쌍한 풋내기들, 그래 봤자 말짱 헛거라는 걸 아시 는지 모르겠네. 파리의 집주인들은 너나할것없이 한결같다. 현대의 기술을 따라잡기엔 동작 이 너무 느리고 투자에 인색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는 가방에서 가느다란 상자를 꺼내 키 패드 위에 붙인 다음 상자의 스위치를 켰다. 자 그만 화면에 불빛이 들어오면서 아라비아 숫자 여섯 개가 나타났다. 그는 숫자를 읽은 다음 상자를 다시 가방에 넣고 비밀번호를 두드렸다. 무거운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파라두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 같은 쾌감 속에서 잠시 어둠 속에 서서 마당을 둘러 보았다. 현관문 위에 달린 등 외엔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꽃들이 심어진 작달막한 함지 통들이 하얀 자갈밭과 대비되어 한결 더 까맣게 형체를 드러냈고 위층 창들은 덧문이 내려 진 채 깜깜했다. 지금까진 아주 잘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까지 가는 덴 2초밖에 걸리지 않았고 구식 자물쇠느 꼬챙이 로 후비는 데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문 위쪽 유리 창살로 새어 들어온 불빛이 희미하게 현관 복도를 밝히고 있었는데 멀리 안쪽 벽에 기대 세워진 자전거와 돌계단의 우아한 곡선 이 눈에 들어왔다. 두 개 층을 올라가 꼭대기 층에 다다른 그는 오른쪽 방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여덟 살짜 리도 딸 수 있을 것 같은 초보적인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파라두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처 럼 빈약한 폐물을 믿고 살다니 그 믿음이 가상할 정도였다. 문을 닫고 들어선 그는 조심스레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까진 장난삼아 드라이브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흥미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파라두는 회중전등을 켰다. 12미터는 됨직한 길이에 넓이도 거의 그 정도 되어 보이는 널찍한 실내가 불빛에 드러났 다. 비스듬한 지붕에 설치된 채광창 밑으로 이젤과 커다란 작업대가 놓여 있었는데 작업대 위에는 붓통, 팔레트 나이프, 튜브형 물감과 병 물감, 말아 놓은 캔버스, 다양한 크기의 못과 압정들을 담아 놓은 낡은 주철통, 가장자리에 담배꽁초가 쪽 늘어선 놋쇠 재떨이 따위가 어 지러이 널려 있었다. 작업 구역 너머로는 책과 신문 더미, 손대지 않은 거피 잔과 동그란 브랜디 잔이 놓인 나 지막한 탁자 주위로 긴 의자 하나와 안락 의자들이 모여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간 파라두 는 자그만 식탁을 지나 좁다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이라고 해봐야 고작 대리석 표면의 조리대로 실내 한 쪽을 막아 구분해 놓은 공간이었다. 그는 바로 이거란 듯이 고개를 끄덕 이며 스토브를 살펴보았다. 그는 가스를 좋아했다. 가스엔 가능성들이 있다. 짧은 통로 맨 끝에 위치한 침실과 욕실에선 아무런 흥미도, 감흥도 느끼지 못한 채 파라 두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브랜디 잔을 들고 냄새를 맡은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화끈한 맛은 없었지만 아주 오래된 질 좋은 코냑의 온기가 슬슬 펴졌다. 그는 덧문 틈새로 2층 아래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사람 셋을 손잡고 다이빙하게 만 들 계획이라고 있다면 여기가 아주 멋진 장소였다. 부어진 목들이 사방에 나뒹굴 것이다. 살 아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는 코냑 한 모금을 더 들이켜고 나서 부엌에서 거실 한중간 의 거리를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서게 될 지점은 어디쯤일까? 작업대 다리에 기대 세워진 작고 금간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들어 텅 빈 이젤 위에 놓고 늘어진 작업복으로 캔버스 한 귀퉁이만 살짝 보이게 가렸다. 이제 누구든 작업복을 들추어보고 싶은 유혹에 빠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라두는 시간이 빠듯한 데 대해 욕설을 내뱉었다. 필요한 장치를 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 렸다. 24시간만 더 여유가 있어 폭파 장치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온 집안에 위장 폭탄을 가설하고 불꽃이 타들어 가기 시작할 때쯤엔 침대로 되돌아가 있을 텐데. 그러나 동틀 시각 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잠시 후면 아파트 주민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할 터였다. 이쯤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절반은 이젤에 장착하고 나머지 절반은 스토 브에 장착한 다음 전선으로 잇고, 전선은 바닥에 놓인 주조물에 테이프로 붙이거나 갈라진 바닥 판자 틈샐 쑤셔 넣었다. 부엌으로 가서 가스를 약하게 틀어 둔 다음 현관문으로 간 그 는 손잡이만 살짝 틀어도 열리도록 빗장을 열어 두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실내를 둘러보고 나서 문을 살짝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열 시에 도착할 거라고 홀츠는 말했었다. 그렇다면 아직 네 시간 넘게 시간이 있 었다. 이 건물에서 제일 가까운 주차 공간을 차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었다. 그러나 커피부터 한잔해야 했다. 회색빛 첫 여명이 밤하늘을 밀어내고 있을 즈음 그는 생제르맹 가를 따라 걸어 오고 있었 다. 프란젠은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불편하고 피곤한 하룻밤이었다. 리츠 호텔에 앉아 있는 홀츠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바람에 한 번씩 발작적으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돈이 가득 든 가방 위에 이무기처럼 웅크리고 앉아 유혹의 손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땅딸막한 악당은 프란젠이 해주고 있는 일에는 어울리지 않은 인간이었다. 하품을 하면 기지개를 켜던 프란젠은 등에 뻐근한 마디들이 맺힌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는 꺼칠꺼칠한 턱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갑자기 최상의 기분이 되었다. 이 불결하 고 비참한 아침을 깨끗이 보상해 줄 완벽한 위안물이 침대 밑에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에겐 그림들이 있었다. 열쇠를 반납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갈 즈음 그는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안내원은 잡지 보는 재미에 지쳐 버렸는지 권태롭고 흐릿한 눈길로 바깥 거리를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결코 잊지 못할 하룻밤이었소. 손님 맞느 태도, 객실 상태, 서비스 수준, 한결같이 최고 수준이었소." 프란젠이 말했다. 안내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찬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동받지 않는 듯했다. "샤워하셨수?" "타월이 한 장도 없던데." "타월은 내가 갖고 있죠. 20프랑입니다." "그걸 미처 몰랐군." 프란젠은 여행 가방과 3천만 달러짜리 케이스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리옹 역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아침을 먹으면서 눈앞에 닥친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참이었다. 17 . 구사일생 리옹 역 대합실 카페, 프란젠은 식탁에 나온 크르와상을 감상하며 앉아 있었다. 그가 좋아 하는 대로 중간 부분은 황금색이고 양쪽 끄트머리는 짙은 갈색으로 구워져 있었다. 그는 빵 한 모서리를 커피에 적셔 한 입 베어물고 음미하며 씹었다. 이른 아침에 구운 신선함이 느 껴지는 게 역전에서 파는 크르와상치곤 대단히 훌륭했다. 거키도 뜨겁고 진해서 정신이 번 쩍 들게 했다. 프란젠은 속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겉모습은 약간 손봐 줄 필요가 있었다. 구겨진 셔츠와 그레이비(육즙 소스) 얼룩이 남은 넥타이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면도하고 샤워한 다음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자, 그 러고 나서 오늘 하루르 공격할 채비를 갖추자. 식사가 끝나는 대로 괜찮은 호텔부터 찾아봐 야겠다. 호텔 생각을 하니 리츠 호텔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루돌프 홀츠와 만나기로 한 약속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프란젠으로선 도저히 즐거울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아파트에서까지 퇴거당했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이에서 끓어 오르는 적개심을 누를 길이 없 었다. 어젯밤 전화로 얘기할 때 홀츠는 그를 마치 제 종복 대하듯 했다. 사실 지난날의 관계 를 돌이켜봐도 그런 구도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홀츠는 일거리와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어 놓고 즐거움을 느낀다. 수염에 붙은 부스러기를 털어 내는 동안 프란젠은 어느새 빙그레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 했다. 이번엔 좀 다를 것이다. 그는 식탁 밑에 놓인 케이스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나에겐 이 그림들이 있다. 이것들을 손에 쥐고 있는 한 내가 유리하다. 비록 그늘진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에겐 약간의 정직성이 있어서 결코 합의된 보수 이상으로 우려내려 들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 관계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홀츠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정직하게 벌어먹고 살 자유, 기회가 오면 다른 사 람들을 위해서도 위작을 그려 줄 자유가 그에게도 있어야 온당하다. 그리고 지금 그 같은 기회가 바로 문 앞에 와 있다. 아니 몇 시간 상관의 문제로 다가왔다. 파인과 그의 친구들이 아파트에 오기로 한 시간을 따지자면 말이다. 프란젠은 호주머니를 뒤진 끝에 파인의 명함을 찾아냈다. 시계를 보니 문명인이 기상하기 엔 아직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호텔을 하나 골라 들어가 거기서 전화해도 시간이 충분할 터였다. 스스로의 결정에 용기가 생긴 그는 짐들을 들고 옅은 햇살 속으로 빠져 나왔다. 새 롭고 더 나은 하루가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브루노 파라두는 차 안에 죽치고 앉아서 슬슬 활기를 띠어 가는 생페레 가를 지켜보고 있 었다. 문이 하나 열리더니 안경 낀 중년 남자가 하나 나타났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쾌청 한 아침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비옷 차림에 우산을 들고 나온 걸로 봐서 비관주의자임에 분 명했다. 사내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는 거리 쪽으로 열심히 걸어가 기 시작했다. 지하철 이용객이다. 파라두에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다. 30분 정도 더 지나자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 하나가 좁은 도 로를 건너오더니 프란젠의 아파트 건물 맞은편에 주차된 차 문을 따기 시작했다. 파라두는 차를 끌고 그 쪽으로 내려갔다. 여자는 운전석에 앉더니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 화장선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고 가방에서 브러시를 꺼내 이미 잘 다듬어진 머리를 또 손질했 다. 파라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전자가 경적을 울려 댔다. 파라두는 차창 밖으로 팔을 내 밀고 '엿이나 먹어라'는 의미의 손가락 모양을 해보인 다음 자신도 경적을 울려 댔다. 여자 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비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일부러 더 느린 동작으로 까만 안경을 꺼내 쓴 다음 마침내 주차 구역에서 빠져 나갔다. '좋아.' 파라두는 그 자리에 차를 넣은 다음 시동을 끄고 유식한 용병들의 잡지 《솔저 오브 포 춘》을 핸들 위에 펼쳤다. 그의 영어 실력은 바에서 주워들은 몇 마디에 불과했으므로 잡지 의 세부적인 내용은 사실 이해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보와 광고들을 좋아했다. 부지 런한 투자자가 《월스트리트 저널》을 탐독하듯 그는 보다 개량된 새로운 파괴 도구를 다룬 광고들(무슨 소린지 약간만 이해하면 참으로 매력적인 데가 있다)을 탐독했다. 오늘은 건장한 사내의 손바닥에 올려 놓고 찍은, 새로 나온 글록 26이 그의 첫 눈길을 끌 었다. 9밀리 구경에 10발짜리 탄창, 더블 니트나 스위스 군용 양말 속에 차고 다니기 딱 좋 은 560그램의 가벼운 총. 전투 능력도 검증받은 제품. 페이지를 넘겨 가던 그는 또 다른 광고들에서 손길을 멈추었다. 3인치 깊이로 절단할 수 있는 나이프, 자유자재로 매달 수 있는 마닐라 로프, 《머신 건 뉴스》의 구독 예약 유혹, 손마디 부분을 납 처리한 사슴 가죽 장갑, 온갖 사이즈의 야간 투시 장비, 저격병 훈련 교육 과정, 방탄 조끼. 미국이란 데는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 탄약 벨트와 자동 소총 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매를 자랑하는 금발 미녀 사진을 뜯어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따금 그는 고개를 들고 거리 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까진 돈을 받으면 어디에 쓸지나 궁리하면 될 뿐 달리 신경 쓸게 없는 시간대였다. 7만 5천 달러라. 우지(단기관총 상품명-역주)가 제아무리 고가라 해도 그 돈이면 떡을 치고도 남을 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차는 웬만한 자명종보다 사람을 깨우는 데 효과가 크다. 거기에다 파 리 구경을 더 하고 싶은 루시의 흥분감까지 보태져 그녀와 앙드레는 아침 일곱 시가 막 지 난 이른 시각에 몽탈 랑베르 호텔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사이러스는 이미 내려와 있 었다. 그는 혈색 좋은 뺨에 베이럼(베이베리 나무를 원료로 한 향유-역주) 냄새를 살짝 풍 기면서 《헤럴드 트리뷴》지를 훑고 있었다. "잘들 잤는가, 젊은이들. 이렇게 일찌기 내려올 줄은 몰랐는걸. 침대에서 아침을 먹으니 어떻던가?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낭만적으로 삶은 계란을 먹고, 오렌지 주스에 샴페 인을 흩뿌리고……." 루시가 허리를 굽혀 그의 뺨에 입맞추며 말했다. "선생님께도 여자 친구를 하나 구해 드릴 때가 됐나 봐요." "그래 주면 좋지." 사이러스는 돋보기를 벗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 안에 내게 어울릴 만한 여자가 보이는가? 천사 같은 성품에 돈 많은 과부, 단단하고 풍만한 가슴, 그리고 일생루이에 아파트 한 채를 가진 여자. 요리를 할 줄 알면 더 좋겠지만 필수 사항은 아니고, 유머 감각은 꼭 있어야 하겠는데." "룸서비스는 어때요?" 앙드레가 물었다. 커피가 나왔을 즈음 실내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리에서의 멋진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두고 의논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고민일 것이었 다. 물론 이미 열 시 약속이 있고 일이 잘 풀리면 프란젠과 점심 식사를 함께하게 될 가능 성도 있지만 그러나 오후는 온전히 그들의 시간이었다. 루시는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꼭 가봐야 할 파리의 명물이라고 제안하는 것을 듣느라 정신 이 없었다. 오르세 미술관엔 꼭 가봐야 한다,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해 봐야 한다, 사크레 쾨르(몽마르트 언덕의 성당-역주), 세느 강의 바토 무쉬(통통배), 앙드레가 대 학 시절에 자주 드나들었던 라팔레트 카페,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오스카 와일드의 마 지막 안식처, 윌리의 와인 바도 빼놓지 말고 가봐야 한다고 계속 늘어놓았다. 이윽고 루시에 게 말할 기회가 돌아왔다. 그녀는 특별한 곳보다는 남들이 다 간다는 샹젤리제 거리, 에펠탑, 세느 강이나 구경하면 그냥 평범한 관광객들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월콧 할머니 께 보내드릴 사진이나 많이 찍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20년 전 당신의 조카가 트리니다 드 처녀와 결혼할 때 포터브스페인에 나가 보신 것 외엔 바베이도스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으신 분이니까. 그녀는 걱정스레 두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하면 너무 별볼일없는 관광이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나도 에펠 탑을 다시 보게 되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자네도 그렇지? 젊은 이." 사이러스가 말했다. 앙드레는 말없이 루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이러스 얘기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몰라 하 고 있는 그녀의 표정엔 사랑스런 진지함이 깃들여 있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왜 아침부터 농담을 하겠어? 자, 그럼 프란젠을 만나기 전에 먼저 어딜 구경해 볼 까? 강으로 갈까? 탑으로 갈까?" 강으로 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은 여덟 시 직후에 호텔을 떠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분 후, 불행하게도 사이러스 앞으로 오전 약속 시간을 약간 변경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갈을 전할 수 있을까 하고 호텔 웨이터가 황급히 거리로 뛰어나가 봤 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서둘러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사이러스의 흔적은 찾 을 수 없었다. 그 시각, 그들은 앙드레가 파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한군데로 가보기 위해 뒷길을 택해 가 고 있었다. 뷔시 가 주변 지역으로서 거의 매일 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한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부산한 시골읍 분위기에 가까웠다. 거리를 따라 노점들 이 펼쳐져 있고 부스러기를 차지하려는 시장 개들이 가판대 밑에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인사말과 욕설도 오가지만, 상인들과 단골 손님들 간에는 건강을 염려해주는, 특히 간의 상 태를 걱정하는 말들이 오간다. 치즈, 빵, 소시지들이 넘쳐 나고, 생쥐라 불리는 작달막한 감 자를 비롯하여 성냥개비 두께보다 얇은 강낭콩 꼬투리에 이르기까지 형형색색의 신선한 야 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왕성한 식욕을 불러일으킨다. 노점들 뒤로 들어선 상설 점포들 대부분은 갈란틴(닭, 송아지의 뼈를 추려 내고 고기를 채워 삶거나 쩌서 양념한 요리-역주), 테린(단지에 담은 스튜 요리의 일종-역주), 타트(과일 파이-역주) 따위를 취급하는 저렴한 음식점들인데, 진열창 속엔 흔히 자그맣고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예술 작품처럼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제철일 경우, 시장 한구석엔 굴 통들이 쌓 여 있고 가죽장갑 낀 사내가 껍질 깐 굴들을 잘게 부순 얼음 무더기 위로 집어 던진다. 꽃들은 항상 볼 수 있다. 프리지아의 자극적인 향기, 이슬 머금은 꽃잎들, 어린 양치식물 의 싱그런 냄새…… 유난히 풍성한 꽃들의 향기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갖가지 즐거움을 제 공한다. 한 노점 앞에 멈춰 선 루시는 파리에서의 첫 상품 구매를 했다. 자그만 암적색 장미 두 송이였는데 그것들을 남자들의 재킷 깃 단추 구멍에 한 송이씩 끼워 주며 그녀가 말했다. "자, 이제 사진 찍을 준비가 다 된 것 같군요." 세느 강을 보기 위해 그들은 도핀 가를 따라 내려갔다. 물론 파리에서 제일 오래됐지만 이름은 퐁네프(새 다리란 뜻-역주)인 다리도 구경할 예정이었다. 그럭저럭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루시의 월콧 할머니께 보내 드릴 사진을 남기 기 위해 루시가 선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느라 약간 우스꽝스런 한때도 보냈다. 사 이러스와 앙드레가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잡고 있지 않은 남자는 엑스트라 역을 맡거나 인간 받침대 역을 맡았다. 앙드레는 루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를 취했 고 사이러스는 가로등 뒤에서 곁눈질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앙드레가 사진을 좀 찍어 달라고 경관 하나를 설득해 냈다 세 사람은 서로 팔을 끼고 일드라시테를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어서 루시가 경관에게 자기와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부탁해서 성사되었는데, 루시는 그 사진이야 말로 바베이도스의 화젯거리가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들이 생페레 가의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파리 사람들은 오만불손하단 얘길 수도 없이 들었잖아요? 까다롭 고 무례하고 건방지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뉴욕이었다면 감히 경관에게 사진 한 장 같이 찍 자고 할 수 있었겠어요?" 앙드레가 말했다, "프랑스 경관이라고 해도 프랑스 사람이란 게 먼저고 경관이 나중이란 걸 잊지 말라구, 경관 아니라도 웬만한 프랑스 사람이면 예쁜 숙녀의 얼굴을 위해 그만한 수고는 해주게 되 어 있어." "그것도 맞는 얘기군." 사이러스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걸음을 빨리 했다. "아직 멀었나? 늦고 싶진 않은데 " 그들이 선창을 벗어나 생페레 가로 올라오고 있을 무렵 파라두는 줄담배의 마지막 꽁초를 차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 잡지도 치워 버리고(장차 참고할 만한 몇 페이지는 귀퉁이를 접 어 놓았다) 홀츠가 설명해 준 모습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나 하고 거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키가 크고 은발 머리에 옷을 잘 입은 남자,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이 남자는 카메라를 메 고 있을 수도 있다),그리고 호리호리한 미인형의 흑인 여자. 그런 세 사람이 함께라면 그다 지 어렵잖게 눈에 띌 터였다. 파라두는 옆자리 조수석에 놓인 가방에서 폭파장치를 꺼냈다. 5분에서 10분 정도의 여유 를 줄 것이다. 이제 어느 순간에든 나타나기만 해라. 이윽고 생제르맹 가 쪽에서 서둘러 내려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깔깔대고 있었는데 남자는 남자들과 보폭을 맞추려고 뛰다시피 걷로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타이밍 맞추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그에겐 그 들이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7만 5천 달러의 돈더미로 보였다. 건물 입구를 지나 마당을 통 과하려면 5분 정도 걸릴 것이다. 노인네가 하나 끼였으니 계단을 올라가는 데 시간이 약간 더 걸릴 수도 있다. 그 다음엔 펑! 그들이 건물 입구에 멈춰 펐다. 사이러스가 호주머니에서 종이 조각을 꺼내 프란젠이 일 러 준 비밀번호를 확인한 다음 키 패드를 눌렀다. 젊은이들이 먼저 들어가도록 한 쪽으로 물러나 있던 그는 반쯤 미소 띤 얼굴로 나비넥타이를 가다듬었다. 그들이 들어가고 문이 닫 히는 것을 본 파라두는 시간을 확인했다. 7분 여유를 줄 작정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탄 그들이 벨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귀에 핸드폰을 박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나왔다, 그는 그들 일행에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고 나가 버렸고 그들은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사이러스가 다시 한 번 쪽지를 확인 했다. 맨 위층 오른편 문. 그들은 돌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깥 도로에선 파라두가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치고 앉아 있었다. 일행이 계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사이러스가 숨을 약간 몰아 쉬며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 높은 데 살면 다리 운동도 되고 건강엔 좋겠구먼," 앙드레가 두 차례 노크했다. 놋치로 된 낡은 노커 (현관문에 붙은,부딪혀 소리내는 쇠붙이 -역주)의 굵고 낮은 소리가 벽들에 부딪혀 울렸다. 앙드레가 손잡이를 건드리자 문이 살짝 열렸다. 그들은 잠시 망설이며 기다려 보았다. 앙드레가 말했다. "우리가 올 줄 알고 문을 열어 두었나 봐요. 들어가시죠." 그가 문을 열며 말했다. "니코! 안녕하세요. 우리가 왔어요." 그들은 문지방에서 걸음을 멈췄다, 코를 찡그리게 만들 정도로 짙은 가스 냄새가 난 데다 그냥 들어가려니 어쩐지 무단침입 같은 기분도 들어서였다. 바로 그때 뒤편 복도 쪽에서 슬 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일 레 파르티(그는 떠났어요)" 옆집에서 나온 늙수그레한 여인의 미심쩍은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그녀는 닳은 앞치 마로 양손을 닦으며 맑은 노안으로 사이러스와 루시와 앙드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요." 앙드레가 말했다. 노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화가들이란 늘 불규칙하게 움직이므 로 신뢰하기 힘든 법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어젯밤 분명히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가 났다, 나 는 얕은 잠을 자는 편이어서 잘 안다, 물론 속된 호기심에서 엿듣는 게 아니라 이웃에 대안 일종의 의무로 늘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코를 킁킁대며, 누군가 가스를 틀어 두고 나간 게 분명하다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부주의 할 수 있느냐는 듯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예술가들이란 원래 그렇잖아요. 괴짜들이죠." 손목시계의 초침이 정확하게 7분 후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파라두는 폭파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두 개의 폭약이 천등 같은 소리와 함께 연속적으로 터지면서 부엌과 화실 한구석을 파괴 했고 채광창과 창문들, 지붕도 상당 부분 망가뜨렸다. 가스 때문에 증폭된 폭발력이 현관문 을 날려 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우르르 층계참으로 달아났으나 그들 네 사람은 모두 몸이 붕 뜨면서 벽에 부딪혔다. 이어서 돌 조각 떨어지는 소리와 항께 파편이 비 오듯 떨어졌고, 잠 시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노부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한차례 터져나왔다. 노부인은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가슴 쪽으로 찰싹 달라붙은 사이러스를 떠밀어 내고 있는 중이었다. 고막이 찢어진 것처럼 귀가 멍해진 앙드레는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그때 어깨에 와 닿은 루시의 손길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당신, 괜찮아?"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놓았다. "사이러스 선생님? 무사해요?" "응, 괜찮은 것 같아." 그가머뭇대며 한쪽 팔을 움직이자 노부인에게서 또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안합니다, 부인, 용서하세요. 앙드레, 고의가 아니라고 어서 말씀드리게 ." 그들은 느릿느릿 서로 얽혔던 몸을 풀었다. 앙드레는 노부인을 부축해 주었다. "소방서에 연락해야겠는데 전화 좀 써도 되겠어요?" 앙드레가 노부인에게 말했다.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앞치마 를 쓸어 내리고 있었다. "발,을 털고 들어가세요." 거리가 멀고 벽들 때문에 소리가 죽긴 했어도 폭발음은 충분히 요란했다고 파라두는 판단 했다 이제 곧 경찰과 소방서에서 출동할 터였다. 그리고 구급차도. 그로선 시신을 확인할 필 요가 있었다. 어느새 지나가던 행인 서넛이 건물 앞에 오여들어 있었다. 그들은 마당으로 통하는 닫혀 진 이중 문을 쳐다보며 틀림없이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도로가 봉쇄되면 빠져 나가기 어려을 것이다. 파라두는 주차위반 딱지를 떼일 각오를 하고 생제르맹 가로 빠져 나가 차를 세워 둔 다음 걸어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이웃의 재 난에 이글려 나온 구경꾼인 척 군중 속에 섞였다. 째지는 클랙슨 소리를 앞세우고 소방차 한 대가 도로로 접어들더니 아파트 건물 앞에 멈 췄고 그 뒤로 경찰차 여러 대가 줄지어 들어 왔다. 얼마 안 되어 현장 일대는 제복 입은 사 람들로 뒤덮였다 그들은 이중 문을 열어제치고, 점점 불어나는 구경꾼 무리를 한 쪽으로 밀 어붙이고, 차량을 우회시키고, 무전기에 대고 꽥꽥대며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는 등 부산을 떨었다. 파라두는 검은 안경을 꺼내 쓰고 건물 맞은편 보도에 모여 선 사람들 무리에 달라 붙었다. 제복 입은 사람들은 계단 꼭대기에서 나뉘어 소방관 한 무리는 폐허가 된 프란젠의 아파 트 안으로 조심조심 진입하고 경관 두 명은 네 명의 생존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옆집으로 들 어갔다. 노부인은 이제 충격에서 충분히 회복되었는지 상급 경관(교대 시간이 왔는지 푸르 스름한 턱에 지쳐 보이는 사람이었다)을 붙들고 분통을 터뜨리며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괘 씸한 이웃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도 가스 냄새가 나지 않느냐, 하마터면 모두 가루가 되어 죽을 뻔했다고 하소연했으며 , 그리고 자기는 자기 집 고양이 다음으로 예민한 기질의 여자라고 덧붙였다. 경관이 한숨을 지으며 최대한 동정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소방관 한 명이 문간으로 고개를 내밀고 잔해 속에 묻힌 시체는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이름과 주소, 증언들 을 기록하는 지루한 절차가 시작되었다. 파라두는 구급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구급차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의 폭발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피 흘리는 부쌍자나 시체를 보게 될 기미도 보이지 않자 구경꾼들이 하나 둘씩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파라두 의 노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몸 가릴 곳을 찾아 거리 아래위를 오가던 그는 마침내 한 고서점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그는 라신(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역주)의 가죽 장정본 한 권을 집어 들고 책 구경하는 사람인 척했다. 메모장을 뒤적여 본 경관이 눈을 비비고 나서 앙드레에게 말했다. "이젠 가셔도 됩니다. 우리 신임 경관이 호텔까지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파리에 와서 그 런 불행한 일을 당하시다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 그리고 노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그녀는 긴 한숨을 지으며 의무에 충실한 시민인 듯이 말했다. "'나중에 또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경찰서로 갈테니 " "아닙니다, 부인, 그럴 필은 없을 겁니다." "아, 네." 그녀는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문간에 서서 앙드레 일행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라두는 세 사람의 목표물이 아파트 건물에서 빠져 나와 경찰차 뒷좌석에 타는 것을 보 았다. 목표물들은 먼지만 좀 뒤집어 썼을 뿐 전혀 다친 데가 없었다, 그때 길을 막고 있던 소방차를 빼기 위해 소방관 한 명이 달려 나왔다. "메르드(빌어먹을)" 책을 탁자 위에 집어 던진 그는 서점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와 자기 차 쪽으로 향했다. 나 가는 그를 서점 주인이 눈썹을 치올리고 쳐다 보았다, 라신의 작품 세계가 모든 이들의 취 향에 다 맞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 저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아주 드문 경우였다. 경찰차는 경광등을 울리며 생제르맹 가를 달려갔다. 파라두는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내뱉 으며 어렵사리 따라붙었다 쥐탱 폴리스(망할 놈의 경찰 녀석-정신병자같이 차를 몰잖아. 그 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듬더듬 담배를 찾았다 대관절 놈들은 어떻게 해서 폭파 지점 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제 경찰차 뒷좌석에 앉은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 든 남자가 옆에 앉은 여 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7만 5천 달러가 바로 저기에,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불운으론 충분치 않다는 듯 이번엔 소 변이 마려 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놈들은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가? 커브길을 돌 때의 타이어의 마찰음과 함께 대로를 벗어나 뤼뒤박으로 접어든 경찰차는 몽 탈랑베르 호텔 진입로로 들어서더니 멈춰 섰다. 점점 참기 어려워지고 있는 배설의 욕구 때 문에 파라두는 어디든 아무데나 차 세울 곳을 찾아야 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자네들 두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난 한잔 해야 될 것 같아." 그들이 바에 들어가려고 할 때 프런트 데스크의 아가씨가 로비를 가로질러 달려왔다. "파인 선생님이시죠? 아까 나가신 직후에 이 전갈이 왔어요. 저희가 뒤따라 나가 봤지만, 벌서 어디론가 사라지셨더라구요." 사이러스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후 메모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계획이 바뀌어 미안하오. 를레 크리스틴 호텔, 43. 26. 71. 80 으로 내게 전화해 주 시오. 프란젠." 앙드레가 말했다.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떡해. 폭파 건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을까요?" "그건 이제 곧 밝혀지겠지. 전화하고 곧 돌아올 테니 이 바에서 제일 큰 걸로 보드카 한 잔 주문해 주겠나?" 앙드레와 루시는 바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 바로 앞쪽에 검은 안경의 건장한 사내가 있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 건장한 사내는 약간 다급한 태도로 리카르드(파스티스 술 상표명 -역주)를 주문하고 나서 남자 화장실의 위치를 급히 물었다. 자리에 앉자 앙드 레가 루시의 뺨에 묻은 얼룩을 떨어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해, 룰루. 정말 괜찮은 거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운이 좋았어, 그렇지? 그때 그 노부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앙드레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운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럼주로 할 거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응, 더블로. 얼음 빼고." 용변을 마치고 바에 돌아온 파라두는 앙드레와 루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를 잡았다. 그러곤 신문을 펴들고 얼굴을 가린 채 좌절감을 달랬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오 늘 아침 작업에서 그래도 한 가지 건진 게 있다면 그들의 숙소를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머물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들이 호텔 안에 머무는 한 파 라두가 일을 꾸밀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을 터였다. 오늘 저녁이면 홀츠는 파리에 와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어쩌면 그에게서 새로운 안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까진 저들 옆에 착 달 라붙어 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손짓으로 리카르드를 한잔 더 주문한 그는 나 이 든 남자가 두 젊은이와 합류하는 것을 신문 너머로 지켜보았다. 보드카를 한 모금 쭉 들이켠 후 사이러스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낮게 말 했다. "폭발 건으로 우리 일이 크게 잘못되진 않을 것 같네, 그 얘길 했더니 프란젠은 깜짝 놀 라더군 크게 충격 받은 모양이야. 자네들은 무사한지 묻더군. 그리고 자기는 아직도 우릴 만 날 마음이 있다고 했어. 하지만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자는 거야," "그건 왜요?" "너무 위험하기는 거지. 뭔가를, 아니 누군가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 같았어 하지만 무슨 문젠지, 누구인지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네. 파리는 우리 모두에게 안전하지 못한 곳이라 고만 하더군 " 앙드레는 루시의 손이 자신의 손을 죄여 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아직까진 그도 무사한가 보네요. 어디서 만나자고 하던가요?" 자신의 잔을 응시하고 있던 사이러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곧 알려 주겠다고만 했어. 지금은 파리를 떠나고 있는 중이래. 자기가 전화하거나 어떤 연락을 취할 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 우리가 미행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 앙드레와 루시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수상한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 다, 둘, 혹은 여럿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웃으며 얘기하거나 점심을 주 문하는 중이었다. 한 테이블엔 몹시 마르고 창백한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로비 쪽을 내다보는 틈틈이 손목시계를 쳐다보곤 했다. 맨 구석 자리에 앉은 사내 하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처럼 쾌적한 실내에, 느긋하고 평범한 사람들 속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 하긴 어려웠다. 앙드레가 말했다. "선생님, 그의 얘길 바 믿으시는 거예요?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우릴 미행하겠어요?" "내 생각은 이렇네." 사이러스가 보드카 잔을 비웠다, "첫째, 아까도 말했듯이 그는 정말 진심인 것 같았어. 그리고 진짜로 겁먹고 있었고. 둘째, 오늘 아침 일이 그 그림과 관계가 있다는 건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셋째 로,,,,,," 그는 루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루시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앙드레도 마찬가지고. 지금 거래를 해 보려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자네들까지 얽혀들 필요가 없지.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웅얼웅얼 들려 오던 대화 소리들이 갑자 기 커지면서 또렷해졌다. 미국인 목소리였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말했지, 만일 내달까지 이혼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내가 떠나겠 다고. 약속했든 말든 사랑의 보금자리를 끝장내 버리겠다고. 빌어먹을 프랑스 남자들. 네 생 각은 어때? 오우, 연어가 먹음직해 보이네." 루시가 키득거렸다. "됐어요, 선생님, 이제 그만 긴장을 푸세요. 그건 사고에 지나지 않아요. 선생님도 가스 냄 새를 맡았잖아요. 어쩌면 프란젠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의 소행인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돌아 가지 않을래요." 그녀가 앙드레를 쳐다보았다. "우리 함께 남을 거죠?" 야무지게 턱을 치켜 올리며 호전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나 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앙드레가 빙그레 웃었다, "룰루 얘기가 옳은 것 같아요. 별수없이 저희를 달고 다니셔야겠네요, 선생님."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더 좋지 ." 사이러스가 말했다. 이어 결심한 듯 심호흡을 하는 그의 표정에선 진심으로 기쁜 빛이 느 껴졌고 두 눈도 반짝였다. "이 근방에 체르세 미디라고 아주 작고 멋진 식당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폭발 사고를 겪은 후엔 식욕이 더 당기는 법이지 . 그리로 가볼까? 파라두는 그들이 로비를 지나 출구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따라 나갔다. 리카르드를 마셔서인지 시장기가 돌았는데 10분 후 그들이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니 배 가 더 고파졌다. 그는 잠시 바깥에 서서 그들이 식당에 자리잡는 것을 확인한 다음 샌드위 치 가게를 찾아 나섰다. 18. 감시 프란젠은 파리 교외로 향하는 차량 행렬에 끼여 있었다. 파리와 홀츠에게서, 그리고 폭탄 으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 정신 병자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 다, 폭발 사건의 배후엔 홀츠가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결과적으로 는 그에게 그림들을 더 잘 지키도록 경고해 준 셈이 되고 달았다. 그 얼마나 귀한 그림들인가. 휴대용 생명보험 증권이나 다름없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 은 안전한 피난처와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이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홀츠냐 파인이냐, 둘 중에 하나다. 그러나 우선은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내 는 것이 급하다. 무심코 달려가던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군디를 거쳐 리옹으로 이어지는 A6도로 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에겐 남부 지방과 관련된 좋은 기억들이 왜 있었는데 특히 그 중 하나는 지금 눈앞에 닥친 그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적절히 사과하고 아부하고 지어내고, 다급한 상황임을 분명히 인식시키고, 매력을 발휘 하여 끌어당기고 하는 과정들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마음은 어느새 엑상 프로방스와 산악 지역 중간 어느 전원 속에 묻혀 있는 자그만 마을 레크로탱과, 생빅투와르 산이 내다보이는 허름한 오두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거기에 는 아누크가 살고 있었다. 그와 아누크는 6년 동안 함께 지냈는데, 아누크의 매우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함께 있 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대단히 당당 한 여자였다, 목소리도 그렇고, 길고 숱 많은 갈기형 머리칼과 푸짐한 외형이 모두 그랬다, 속을 너무 채운 쿠션 같은 여자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루벤스(플랑드르의 화가-역 주)라면 그런 소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젠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들이 함께한 그 시절은 대체로 좋은 시간들이었지만 시간의 흐름이 장밋빛으로 채색해 주면 서 더더욱 좋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둘의 관계가 끝장난 것은 18개월 전이었다. 프란젠이 생각할 땐 정말 사소한 예술상의 오 해에 불과한 일이 발단이었다. 어느 날 오후, 예기치 못한 시각에 집으로 돌아온 아누크는 프란젠이 그림 모델이 되어 준 마을 처녀의 가느다란 팔다리를 만지며 자세를 고쳐 주고 있 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 처녀가 머리에 화환 하나만 달랑 얹고 있을 게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도 하나 걸 치고 있었더라면(그때 프란젠은 낭만파 양식의 그림을 그리고 있던 중이었다-또 그 처녀가 몸을 굽히고 있더라도 좀더 품행이 방정하게 보였더라면, 그리고 또 그때 프란젠이 바지라 도 입고 있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러했으니만큼 아누크는 즉각 결론에 도달했고 두 남녀를 집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오해를 청산하기 위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프란젠은 기죽은 채 파리로 물러나을 수밖에 없었다. 불규칙하게 뻗어 나간 파리의 교외 지역에서 빠져나와 탁 트민 전원이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 그는 생각했다, 역시 세월이 약이 되는지, 비록 그녀의 변덕스러운 성질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은 따뜻한 여자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녀는 비록 성질이 변덕스럽긴 싸지만 마음이 따뜻한 여자다. 어쩌면 오늘 밤에 그녀를 찾아가 쫓기고 있는 몸이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고 몸을 맡겨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으론 벌써 화해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다소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이 미쳤다. 이른 아침에 약간 먹은 이후로 아무것 도 먹지 않았으니 위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지저분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 고 점심까지 거른 비극을 겪고 난 프란젠은 이제 근사한 저녁 식사와 깨끗한 잠자리로 위안 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콩과 리옹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나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서쪽으로 그 두 지 역 중간쯤 어딘가에 로안느란 읍이 있다. 아누크와 함께한 초창기 시절 어느 날 둘이서 트 루와그로에 들러 점심을 먹었었다. 차가운 백랍 주전자에 담긴, 집에서 빛은 플뢰리를 몇 주 전자나 마셨고 일품 요리 일곱 개 코스의 점심 식사를 했었다. 두 사람 모두 얼마나 먹어댔 던지 그 식당 맞은편에 위치한 자그만 호텔까지 건너가는 데도 어지간히 애를 먹었던 그 점 심. 도망자 주제에 그 이상의 것을 어찌 싸랄 수 있겠는가? 프란젠은 현명한 결정임을 스스로 에게 확인시키기라도 하듯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파라두로서는 기분을 풀기 위해 애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오후였다. 잠시 기회 를 잡아 차를 가지고 온 그는 차 안에 앉은 채 체르계 미디 식당 밖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앙드레와 일행이 식당에서 나와 택시를 탔고 그들 뒤를 밟아 에펠 탑까지 간 그는 거기서 또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그들이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 있을 즈음엔 담배까지 떨어졌다. 연락 온 게 없는지 물어 보려고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했다. 저녁 식사 땐 집에 들어 오느냐고 아내가 물었다. 젠장, 지금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더 나쁜 것은 이런 공공장소에 선 그들을 어떻게 해볼 기회조차 없다는 점이다. 다만 한 가지, 나중에 홀츠에게 그들의 소 재를 알려 줄 수는 있을 터였다. 벌써 오후 다섯 시 가까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저 빌어먹을 샹젤리제를 도대체 언제까지 내려다보고 있을 참인가? "루시가 오늘 꼭 봐야 할 곳이 한군데 더 있어 " 개선문에서 내려오면서 사이러스가 루시에게 말했다. "파리에 처음 온 아가씨라면 반드시 리츠 호텔에서 술 한잔은 해야 하거든. 생카세트(다 섯 시에서 일곱 시, 오후의 밀회 -역주)가 어떤 건지 내가 구경시켜 주지," 앙드레가 빙그레 웃었다. "나쁜 아저씨네요, 선생님." "난 리츠에 가서 나쁜 짓을 볼 준비가 되어 있긴 한데...도대체 어떤 건데요?" 루시가 물었다. 사이러스가 나비넥타이를 비틀더니 말했다. "오랜 전통이지,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의 두 시간은 파리의 신사들이 아내가 있는 집 에 들어가기 전에 애인을 즐겁게 해주는 시간이야. 대단히 사려 깊고 낭만적인 전통이지 ." "낭만적이라구요?" 루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사이러스를 좋아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끔찍하군요. 그런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 우월주의-역주)적 전통은 난생처음 들어봐 요." 사이러스가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쇼비니즘적인 전통이란 말은 맞는 말이야. 그러나 명심할 것은,그 쇼뱅(쇼비니즘이란 용 어가 나오게 한 장본인-역주)이란 자가 바로 프랑스 남자였다는 사실이야, 비록 섹스보다는 애국주의도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말이야." 루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선생님은 정말 걸작이세요. 프랑스 식 해피 아워(술집의 할인 시간대 -역주)군요, 그렇 죠? 뭐 특별한 거 없을까요?" "있고말고. 아름답게 차려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 샴페인을 마시는 거지." 루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요." 앙드레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난 볼일이 좀 있어, 룰루. 게다가 리츠 호텔에 어울리는 복장도 아니고. 당신이 스커트를 2인치 정도 끌어 올리고 있으면 호텔 측에서 아마 땅콩을 더 갖다 줄 거야." 그녀는 그에게 혀를 날름해 보이곤 사이러스의 팔에 매달렸다. "어디에 볼일이 있는지 물어 볼 생각도 없다구." "놀랄 일이로군. 나중에 호텔에서 다시 봐요." 앙드레가 그들 일행이 두 패로 갈라지는 것을 본 파라두는 우거지상이 되었다. 나이 든 남자와 여자는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젊은 남자는 지하철 역 쪽으로 걷고 있었다. 별수없었다. 그로선 차를 두고 갈 수도 없고 차를 둘로 쪼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내 그는 일행 중 두 사람 쪽을 계속 감시하기로 결정했다. * * * 루시와 사이러스가 아직도 샹젤리제의 러시 아워 인파 한가운데 서 있는 시각에 생제르맹 지하철 역에서 올라온 앙드레는 자코브 가의 골동품 가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가게는 이웃한 여러 비슷한 점포들과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유혹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계산하에 물건을 전시해 두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실상은 기교를 부 려 진열된 물건들 대부분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가격 표시가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자기 주발, 끈으로 몇 자루씩 묶어 놓은 포크와 나이프들, 황동 모자걸이, 세월에 깃든 성숙미를 자랑하는 거울, 머스태시 컵(코밑 수염이 젖지 않도록 컵 안쪽에 수염 받치는 장 치가 된 컵-역주) 상아와 은으로 된 단추걸이(단추를 끼우거나 빼낼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기구-역주) 손잡이에 솔이 달린 포도주 코르크 마개뽑이, 굽이 달린 술잔과 코디얼 주술잔., 발 올려 놓는 자그만 대, 코담배 갑, 환약 상자, 크리스털 잉크병 ,,,,,, 이 모든 물건들이 무 성의해 보일 정도로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흥정이라고 하는, 현대 사회에서 보기 드문 영역을 최후까지 고수하고 있는 주인들의 술 수에 걸려 넘어진 경험을 고려하면 구경만 하고 지나가는 손님들을 욕할 수도 없다. 학생 시절부터 이 가게 주인과 알고 지내 온 앙드레는 사실 이쪽 거래의 진상을 잘 알고 있었 다. 주인들이 부르는 값은 턱없이 높게 마련이고 최상품은 언제나 뒷구석에 있다는 것을 말 이다. 출입문을 밀고 들어간 드는 언제나 나태한 자세로 드러누워 순진한 손님을 속여 먹는 박 제 고양이를 성큼 뛰어넘었다. "위베르! 그만 자고 일어나요-오늘의 첫 손님이 왔다구요." 옻칠 된 칸막이 뒤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프랑스 사람 치곤 유난히 큰 키에 곱슬기 있는 갈색 머리칼의 그는 입술에 문 시가 연기 때문에 눈을 반 쯤 감고 있었다. 깃 없는 횐 셔츠에 가느다란 세로줄 무늬의 낡은 바지를 입고, 마리르 본 크리켓 클럽 회원임을 나타내는 색상의 실크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타이 역시 낡아 있었 다. 시가를 뱉고 난 그가 어두침침한 뒷구석에서 가게 전면으로 걸어 나오며 고개를 앞으로 쑥 뽑았다. "이게 누구야? 현대판 라르티그(1920 -- 1930년대의 파리 사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진 작가-역주)인가? 미래의 카르티에 브레송(프랑스의 세계적인 사진작가-역주)인가? 아니면 그 고약한 앙드레인가?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길 다 왔어? 아바나 여송연 냄새를 풍기며 앙드레를 끌어안고 난 덩치 큰 주인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너무 말랐군. 하긴 자네가 뉴욕에 산다는 걸 내가 깜박 했네. 거긴 문명인이 먹을 만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곳이니 말이야.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요, 아저씬요?' "아, 나야 그저 땅이나 파먹고 살지. 늘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신세지 뭐." "요즘도 경주마를 갖고 계세요?" 위베르가 눈을 찡긋했다. "세 마리 있어, 카린한텐 비밀이야."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새 편안한 옛 친구 사이로 되어 진부한 농담 과 애정 어린 욕설, 함께했던 지인들 소식, 그리고 그 지인들의 아내에 대한 평가 따위를 주 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앙드레가 방문 목적을 꺼내기까지 30분이나 시간이 걸렸다. 앙드레가 찾고 있는 것을 설명하자 열심히 듣고 있던 위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찾아오긴 했네 그려 ." 그는 앙드레를 옛 파트너의 책상 쪽으로 데리고 갔다. "이리로 와서 이것들을 좀 보게." 그가 널찍한 중간 서랍을 열더니 좀 벌레 먹은 벨벳 천에 싸여진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하얀 토끼를 튀퍼나오게 만드는 마술사와도 같이, 그는 유연하게 팔을 휘저어 단번에 덮개 천을 벗겨 내렸다. "자,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파리 최고의 상품들이지. " 흐릿한 시가 연기를 뚫고 내려다본 앙드레는 휘파람 소리를 냈다. "이런 걸 모두 어디서 훔쳐오셨어요?" 위베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맘에 드는 게 있나?" 앙드레는 가지런히 정렬된 자그만 은 사진틀들을 유심히 살폈다. 모두 매끈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아르 누보 스타일로서 반짝이는 은빛에 질감도 부드러웠다. 위베르는 마를렌 디트리히, 그레타 가르보, 에디트 피아프, 잔 모로, 브리지트 바르도 등의 암갈색 인화지 사진을 사진틀 속에 하나씩 끼워 넣었다. 그렇게 놓고 보니 중앙의 것이 눈에 쏙 들어왔다. 다른 것들보다 크기가 약간 더 컸는데 꼭 지하철 역 위에 걸린 철제 표지판을 찍어 낸 것 같았다. 디자인도 단순해서 대문자로 'PARIS'라고 새겨 넣은 게 고작이었다 지금 그 사진틀 속에서 까만 머리칼을 초승달 모양 의 빳빳한 컬로 만들어 이마에 붙이고 미소 짓고 있는 인물은 조세핀 베이커(20년대 프랑스 에서 인기 있던 미국의 흑인 엔터테이너-역주)였다. 은의 묵직함과 뒷면에 덧댄 보드라운 천의 감촉을 느끼며 앙드레가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게 맘에 들어요." 그 순간 '친구' 위베르는 '전문 골동품상' 위베르로 바뀌었다. "그래? 자넨 역시 안목이 있어, 앙드레. 그건 몇 개밖에 제작되지 않은 귀한 물건이지. 나 도 지난 5년 동안 겨우 두 개밖에 못 봤다네 게다가 이처럼 완벽한 상태의 물건은 구경하기 도 힘들지. 완전 오리지널이야, 유리까지 말일세," 덩치 큰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앙드레의 어깨를 붙잡고 지그시 눌렀다. "특히 자네에겐 그 안에 든 사진까지 그냥 덤으로 주겠네." 그 가격은(그는 마치 고위 기관이 지정한 가격이어서 자기로선 어쩔 수 없다는 듯, 안됐 다는 투로 값을 말했다) 앙드레가 예상했던 대로였고, 결국 그는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꺼내 주었다.. 당일자 <<르 몽드>>지를 찢어 사진틀을 포장하는 것으로 거래는 끝났 다. 앙드레는 와인이나 한잔하며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은 것을 자축할 겸 이 옛 친구에게 서 오히려 100프랑을 빌려 플로르 카페로 들어갔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 든 사진틀의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초저녁 대로를 오가는 행렬을 구 경하고 앉아 있었다. 이 선물을 받은 룰루의 표정이 얼른 보고 싶어졌다. 그 생각을 하니 빙 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녀가 파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 * * "여기 교통은 늘 이런 식인가요?" 생오노레 가로 느릿느릿 기어 내려가는 택시 안에서 루시가 사이러스에게 말했다. 다른 운전자들의 어리석음 교통 혼잡을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고 있는 경관들, 이런 악조건하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의 불가능함에 대해 투덜대는 운전기사의 짜증스런 독백이 계속 이어졌 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이해는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세계 어느 대도시에 가더라도 들을 수 있는 택시 기사들의 국제적인 신세 타령이다. 사이러스는 르와얄 가 모퉁이에서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남은 거리는 걸어서 갈 참 이었다 택시 기사는 병 속에 긴 코르크 마개 꼴로 뒤에 남았다. 100미터쯤 떨어져서 따라가 던 파라두는 차에서 내려 그들이 왼쪽으로 돌아 방돔 광장으로 접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따 라갈 수도 안 따라갈 수도 없어 낭패감에 싸인 그는 다시 차에 올라 경적만 요란하게 울려 댔다. 나폴레옹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원기등 쪽으로 걸어가며 사이러스가 말했다. "난 말이야, 루시를 아르마니의 부티크 근처엔 절대 데려자지 않을거야. 그게 루시한테도 좋을 테고. 저기 그의 가게가 보이지? 무수한 사람들의 신용을 파탄시켜 버린 장본인이지. 난 늘 놀라곤 해------." "선생님 , 잠깐만요." 루시가 어느 출구 쪽으로 그의 팔을 잡아 끌더니 검정 메르세데스 한 대가 멈춰 서 있는 리츠 호텔 입구 쪽을 가리켰다. 까만 선글라스를 착용한 남자와 여자가 차 트렁크 옆에 거서 짐들이 내려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키였다. "저 여잘 알아요, 바로 앙드레가 일하는 그 잡지를 맡고 있는 여자죠, 카밀라라구요." 사이러스가 주의 깊게 남녀를 살피더니 말했다. "나 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여자와 함께 있는 저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야. 루 돌프 홀츠란 사람이지." 그들이 계단을 올라가 호텔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사이러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턱을 비 비며 잠시 지켜보았다. "리츠 호텔에 들르는 계획을 포기한다면 루시로선 대단히 실망스럽겠지? 하지만 지금 우 린 호텔로 돌아가 앙드레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어서 갑시다, 홀츠에 대해선 가면서 얘기해 줄 테니." 파라두는 방돔 광장 주변을 두 바퀴나 돈 끝에 차를 주차시키고 광장을 돌아보았지만 곧 그들을 놓쳐 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츠 호텔 앞에 멈춰 선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연착하지 않았다면 홀츠가 지금쯤 호텔에 투숙해 있을 터였다 홀츠와 그의 7만 5천 달러가 말이다. 메르드(빌어먹을) 재수에 옴 붙은 날이다, 그는 어깨를 쭉 펴고 자신의 방광을 저주했다. 그러곤 호텔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 * * 카밀라는 호텔에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룸 서비스 부에 전화해 샴페인을 부탁하고, 호텔 관리실에 전화해 그녀의 중요한 의상들을 걷 어 가 재빨리 세탁해 다림질까지 마쳐 줄 성실한 세탁부를 보내 달라고 하는 일이다. 그녀는 이제 한결 본모습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홀츠의 기분도 상당히 좋아졌다. 하긴 그의 방식은 늘 그렇지만. 그리고 자세한 얘긴 없었지만 뭔가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처럼 호텔 직원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지 않고 팁을 주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샴페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그 엄청나게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통화하고 있는 중이 었다, 카밀라는 그의 앞에 놓인 탁자에 샴페인을 한잔 갖다 놓고 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이 보였다. 이곳 파리의 아르마니 부티크는 쇼핑의 즐거움을 제 대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내일 아침 루디가 마사지받는 사이 얼른 건너갔다 와야겠다고 카밀라는 마음먹었다. 통화를 끝낸 홀츠가 안경을 집으려 할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올려 보내시오." 카닐라가 말했다. "그런데 자기 , 오늘 밤엔 어디서 식사할까요?" 홀츠는 안경을 집어 코에 걸었다. "아, 어디 수수한 데로 가지 뭐. 타이예방이나 그랑 베푸르가 어떨까? 당신이 정해. 호텔 안내인한테 물어 보면 될 거야." 더블 룸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샴페인 첫 모금을 맛본 홀츠의 혀가 짜릿한 뒷맛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패였다. 카밀라가 문을 열자 파라두가 비척비척 겁먹은 게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인사를 하는 등 마 는 등 고개를 까딱이곤 욕실을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카밀라는 욕실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도대체 누구예요? 저 사람, 원래 저런 걸음으로 걸어 다녀요?" "내 일을 좀 거들고 있는 사람이야." 홀츠로서는 카밀라에에까지 내막을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이니까. 그는 미안한 듯 카밀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사람은 영어를 잘 못하니까 우리 얘길 듣고 있어 봤자 당신은 지겹기만 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난 내려가서 안내인한테 식당이나 알아볼게요." 바지 지퍼를 올리며 나오는 파라두를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고 난 그녀는 이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재빨리 방에서 나가 버렸다. "어서 오게, 파라두 " 홀츠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거나 한잔하면서 좋은 소식을 들려주게나," 입을 열기 전, 파라두는 우선 샴페인 한잔을 통째로 들이켰다. 감정을 전혀 섞지 않고 딱 딱 끊어서 얘기하는 그의 스타일은 군대식 언어 습관으로서, 승리 아니면 패배를 보고할 때 나 어울리는 말투였다. 시간, 상황, 모든 것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견해는 섞지 않고 주로 사 실들만 얘기했다. 얘기를 하면서 지켜보노라니 기분 좋은 기대감에 젖어 있던 홀츠의 표정이 불쾌감으로 딱 딱하게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의 얘기가 끝나자 길고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홀츠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숙소는 알고 있다 이거군 거기서도 뭔가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았나?" 파라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불가능했습니다." 홀츠가 한숨을 지었다. "불가능이라,,,,,, 10만 달러를 준다 해도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일까?" "홀츠 씨,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맘만 먹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습 니다. 광적인 놈들은 그러잖아요. 그래요, 그들이 호텔에서 나을 때 바로 쏴버릴 수도 있었 소. 살인이란 게 별 건 아니니까. 하지만 잡히지 않고 달아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요. 말썽 많은 알제리인들 때문에 파리 시내에 경찰이 확 깔려 있소." 파라두는 아랫배에 양손을 대고 깍지꼈다 그로선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홀츠가 일어나더니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후퇴, 심각한 후퇴다. 그러나 만회 불가능 한 것이란 없다. 폭발 건은 파리에서 매일같이 수백 건씩 발생하는 단순 사고의 하나로 처 리될 것이다. 루돌프 홀츠와는 아무 연관도 없다. 프란젠과 연락이 닿으면 그럴싸한 스토리 로 납득시켜야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파인과 그의 친구들의 문제는 또 다 르다 그들은 너무 가까이에 있다, 어떤 수를 써서든 그들이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까진 잘 감시해야 한다. 창가로 간 홀츠는 팔짱을 끼고 방돔 광장의 불빛들을 잠시 내려다 보았., "그들을 계속해서 감시해 주기 바라네. 조만간 기회가 생길 거야. 하지만 그들 모두를 처 리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한 명이라도 살아 남아 여기저기 사방에 말을 퍼뜨리고 다니 는 일이 발생해선 절대 안 돼." 그가 몸을 돌려 파라두를 쳐다보았다. "내 말 알겠지?" "주야로 감시하라고요?" 등줄기가 쑤시는 것를 느끼며 파라두가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러자면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비용은 물론 선생이 대주셔야죠." 홀츠는 뺨 맞은 사람처럼 잠시 빠르게 눈을 깜박이더니 아주 내키지 않는 태도로 어렵사 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모조리 처치해야 돼 " 그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파라두가 씩 웃었다. "10만 달러로 합의된 거죠?" 그는 완전히 공친 날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연락하겠습니다." * * * 몽탈랑베르 호텔의 로비에 들어선 앙드레는 휘파람을 불며 바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루시와 사이러스가 벌써 와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자리에 앉기 전, 그는 루시에게 입맞췄다. "리츠에서 샴페인이 떨어졌대요?" "여보게, 일에 진전이 생겼네, 대단히 기묘한 진전이야 " 사이러스는 앙드레가 주문하는 동안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 친구 카밀라께서 방금 막 리츠에 투숙했네, 그리고 홀츠라는 아주 불쾌한 작은 친 구도 그녀와 함께 있었어, 거래상이지,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데, 그걸로도 충분하더군." 앙드레가 식탁 위로 몸을 숙였다. "그들도 두 분을 알아봤나요?" 사이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루시가 그들을 먼저 봤지. 잘 듣게, 홀츠란 사람은 대단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미술계에 평판이 나 있네. 몇 건의 경우는 최고 수준의 거래였지. 이를테면 4천만 달러에 달 하는 피카소의 작품을 취급하기도 했지, 하지만 또 하나, 물론 전혀 검증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그가 뒤에서 장물을 취급한다는 얘기가 있어." 웨이터가 앙드레의 와인을 가지고 보자 사이러스는 잠시 얘기를 중단했다. "좀전에도 말했지만 확실한 얘기는 아닐세 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단히 신빙성 있는 얘기 같네. 그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알려져 있어. 그에게 당한 미술계 인사들도 왜 많지 " "그가 카밀라와 함께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걸까요?" 함께 일해 온 편집장의 사생활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앙드fp가 물었다. 그녀의 사생활을 모르기는 <>의 직원들도, 심지어 노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부 분은 늘 잡지사 직원들의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었고 개중에는 입에 담기 힘든 추측도 나돌았다. 버그도프 미용실의 그녀 담당 미용사, 그녀의 개인 코치 동생 개러비디언, 그리고 여러 다양한 인테리어 장식가들이 그녀의 파트너로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홀츠란 이름은 그 누구도 거론한 바 없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파리에 와서 뭘 하고 있느냐 하는 걸세. 나이를 먹어 가다 보니 의심이 많아진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일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우연의 일 치일 리는 없어," 앙드레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긴장해서 양눈썹을 실룩대며 손가락으로 식탁 을 톡톡 두드려 대고 있는 사이러스의 꼴이 가까운 개구멍을 찾고 있는 테리어 견 같아 보 였던 것이다. 앙드레 가 말했다. "선생님의 추측이 옳다고 쳐요. 하지만 모든 내막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 줄 수 있는 인물은 프란젠뿐이에요. 그에게서 연락이 왔나요?" 사이러스의 손가락들시 멈췄다. "아니, 아직 없었네, 하지만 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어. 그가 홀츠와 연루되었든 아니든 날조자들이 일거리를 거절하는 법은 극히 드무니까, 지금 그는 우리가 일거리를 주려 한다 고 생각하고 있어. 전화가 올 거야." 사이러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올 거라구 " 그리고 자신의 잔이 빈 것을 본 그는 언제나처럼 놀라는 시늉을 해보이곤 손목시계를 봤 다.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자, 우리 샤워하고 나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나 하는 게 어때?" * * * 자기 치수보다 큰 헐렁헐렁한 횐 가운을 걸친 루시가 머리에 타월을 감고 욕실에서 나왔 다.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볼 땐 선생님은 이 일에서 짜릿한 스릴을 느끼는 것 같아. 분명 히 흥분해 있어." 앙드레는 재킷을 벗고 호주머니에서 사진틀을 꺼냈다. "당신은 안 그래?" 루시가 고개를 가로 젓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물어 볼 것도 없는 얘기 아냐?" 타월을 풀어 목에 걸친 루시는 앙드레가 내민 물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선물이야, 룰루. 당신의 경관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넣어 두라고 샀어 ." 그것을 양손으로 감싸 들고 종이 밑의 형체를 더듬어 보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 졌다. "포장지가 그래서 미안해, 뭐해? 어서 뜯어보지 않고." 종이를 뜯어본 그녀는 사진틀을 만져 보며 잠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 앙드레 고마워요 " 고개를 든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거기에다 꼭 프랑스 경관 사진을 넣을 필요는 없겠지? 월콧 할머니 사진도 좋고, 가로등 뒤에서 손 흔드는 사이러스...... ." 그의 말은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향기로운 여자의 입술이 그의 입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잠시 후, 샤워기 밑에서 목줄기를 때리는 물살을 받고 서 있던 그는 루시가 소리치는 것 을 들었다. "오늘 밤엔 우리 어디로 갈 거지? 입을 옷을 골라야 하는데." "약간 죄는 옷이면 좋겠어, 룰루." 그녀는 혹시 기회가 오면 입으려고 몇 달 전에 사둔 공기처럼 가벼운 토카 드레스를 들고 침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또 한 번 소리쳤다, "너무 야해 보이는 거 아냐?" * * * 셔츠 깃에 냅킨을 끼운 프란젠은 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세상은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 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전화하자 예상했던 대로 아누크는 놀라는 것 같았다 그 러나 전혀 동정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낙관주의자라면 그녀를 따뜻한 여자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젠 자신이야말로 기질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분명히 낙관주의적 성향이 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긴 했지만 우호적이었다, 아니, 적어도 쌀쌀맞진 않았다. 그녀와 트루와그로에 가서 근사한 물고기 젤리 요리를 먹으며 꽃을 바칠 것이다.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막 시작된 긴 프로방스의 여름을 고려해 볼 때도 췄다. 핑 크빛 와인, 아을리 (남프랑스의 마요네즈의 일종-역주) 즙 많은 신선한 복숭아, 그리고 남부 의 햇빛으로 가득한 그 몇 달.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는 지극히 만족스런 미소로 반기며 음 식을 주문했다. 내일 아침엔 사업을 진행시킬 것이다, 사이러스 파인에게 전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홀츠 쪽을 포기하는 게 된다.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하더라도 산산조 각 난 아파트 문제가 남는다, 홀츠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그림들을 돌려주기 전에 먼저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번에 새로 뚫은 이 거래 관계에서 얼마나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을진 아직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수십만 프랑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다, 내일 아침 제일 먼저 할 일은 파인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프란젠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19. 미행 아침 일곱 시를 조금 넘긴 시각, 파라두는 샤르니에와 교대하기 위해 몽탈랑베르 호텔 부 근에 도착했다 자동차 옆 보도에 서 있던 샤르니에는 반가운 듯 기지개를 펴고 나서 간간이 하품을 해가며 경과를 보고했다. 보고할 것도 별로 없었다. 자정 무렵 샤르니에는 그들이 호텔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고 그 후론 아무 일도 없었다. 아침 여섯 시 직전에 갓 구운 빵과 파티스리(과자)가 배달되기 전까 진 생쥐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분 후엔 이른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는 손님 한 쌍이 호텔에서 나갔다. 그것말곤 아무 일도 없었다. 격식 차릴 것도 없고 부정한 돈이 오갈 여지도 없는 조용한 임무교대였다. 쌀쌀한 아침 바람을 피해 코트 깃을 세운 샤르니에가 떠나면서 말했다. "이제 대장 차례군요. 오후에 전화할게요." 차 안으로 들어간 파라두는 창을 열고 담배 연기와 마늘 냄새로 후텁지근한 공기를 빼냈 다. 샤르니에는 착실하고 고분고분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 빌어먹을 프랑스 소시지를 차 안 에 들고 와서 먹고는, 고약한 냄새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포장지를 늘 좌석 밑에 쑤셔 넣 어 두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파라두는 쓰레기를 길가 하수구에 던져 버리고 나서 자기 물건들을 주위에 늘어놓았다. 담배와 핸드폰은 계기판 위에, 각종 무기가 든 나일론 가방은 조수석에, 그리고 뚜껑 달린 5리터들이 플라스틱 병은 차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황스런 경험을 어제 이미 두 차례나 한 그로서는 또카시 뒤통수를 맞고 싶진 않았다. 거리에서 장시간 잠복하는 일은 그의 직업상의 어려움 중에서도 최악에 속했다 게다가 그 지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푹 자고 나온데다, 일이 끝난 후 여 섯 자리 수의 보수를 손에 쥐게 될 생각을 하니 이까짓 지루함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리는 청소 차들이 뿌리고 간 물기로 아직 축축했고 공기는 신선했으며 햇살은 엷은 잿 빛 구름을 뚫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호텔 웨이터 한 명이 입구를 쓸고 있고 다 른 한 명은 테라스 가장자리에 심어져 있는 상록수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파라두는 바로 옆 건물로 눈길을 옮겼다. 지저분한 창에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현관문에 무 거운 쇠고리가 감겨 있는 걸로 보아 빈 건물임이 분명했는데, 바로 옆의 말쑥한 호텔과 대 비되어 한결 더 꾀죄죄해 보였다. 저 빈 건물로 들어가서 벽을 뚫고 호텔로 침투하면 어떨까? 그런 다음,,, ,,, 그러나 너무나 소란스럽고 복잡한 작업이다. 그들이 모두 거리로 나오면, 그리고 군중들oi에게서 떨어져 볼 로뉴 숲 같은 호젓한 곳으로 가준다면 좋을 텐데. 아니, 놈들은 조깅하러도 안 가나? 미국인들은 너나없이 조깅을 즐긴다던데. . * * * 사이러스는 면도를 하고 있었다 전화 벨이 울린 것은 그가 코 바로 밑 인중과 까다로운 부위를 상대로 한창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시오, 친구. 나 니코 프란젠이오. 무사하시겠죠?" 프란젠은 지난번 마지막 통화 때의 근심에 찬 음성과는 크게 다르게 쾌활하고 자신만만한 분취기였다. "연락해 줘서 정말 고맙소, 니코. 지금 어디에 있소?" "다행히도 생제르맹 가에서 멀리 벗어나 있어요. 잘 들으세요. 나는 지금 엑상 프로방스 부근의 친구네 집에 가고 있는 중이오. 거기서 만날 수 있겠어요? 파리에서 오기도 편해요. 테제베(고속 철도-역주)를 타고 네 시간이면 곧장 아비뇽 역에 떨어지니까 거기서 차를 렌 트해서 오면 돼요." 사이러스는 전화기에 떨어진 면도 크림을 닦아 내고 나서 메모지와 연 필을 집었다. "우리가 그리로 가겠소, 어디서 만나지요?" "내가 머물게 될 곳의 전화번호를 알려 줄게요. 엑상 프로방스에 도착하거든 전화하시오. 피차 할 얘기가 많을 겁니다." 잠깐 조용하더니 다시 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참, 사이러스 씨 어제 별다른 일은 없었소? 미행당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사이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홀츠를 봤다고 하면 이 네덜란드인이 겁을 집어먹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얘긴 만나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아무 일도 없었소." "잘됐군, 좋아요. 연필 준비 됐어요?" 프란젠이 아누크의 전화번호를 부르자 사이러스가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적었다. "그런데 하나 물어 봅시다." 프란젠의 음성에서 근심의 낌새를 느긴 사이러스는 순간 긴장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저녀엔 어디서 식사했소?" "브라스리 립 (립 식당) "슈쿠르트(양배추 절임 요리)?" "물론이오. " "잘했어요. 자, 그럼 아 비엥토(또 봅시다)" 앙드레와 루시에게 전화하고 면도를 끝내고 짐을 챙긴 사이러스는 30분 후엔 밑으로 내려 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몇 분 후 앙드레와 루시가 들어왔다. 빨리 소식을 듣고 싶었던지 급하게 갖춘 듯한 차림새에 상기된 얼굴들이었다. "그가 연락해 올 거라고 내가 그랬지?" 다소 흥분되는 듯 사이러스의 아침 안색도 여느 때보다 발그스름했다. "이제 우린 어디로 좀 가봐야 하네. 루시가 아직 파리 구경을 다 못했을 텐데 다른 데로 끌고 가게 돼서 미안하구먼." 그가 눈썹을 치켜 올려 미안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프로방스도 그다지 흉한 곳은 아니라고 들었네. 난 엑상 프로방스 쪽으론 한 번 도 못 가봤어 앙드레, 자넨 가봤겠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이 있는 곳이죠. 여대생들도 있고. 돈 많은 과부도 한둘 있을 지 모르죠. 당신도 맘에 들 거야, 룰루. 정말 아름다운 고장이거든." 루시가 파리 여자들을 유심히 관찰한 끝에 체득한 제스처를 흉내냈다. 아랫입술을 쑥 내 밀고 입을 삐죽대면서 어깨 으쓱하기가 그것이었다. "예쁜 여자들? 무슨 끔찍한 소리야? 다른 데서 만날 순 없어? 프랑스에는 호보켄(뉴욕 시 와 마주보고 있는 뉴저지의 베드타운-역주)같은 곳은 없나? 그런 데가 편할 것 같은데." 식사를 마친 그들이 숙박비를 계산하고 있을 즈음 다섯 번째 담배를 입에 문 파라두는 잡 지를 사오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윽고 앙드레 일행과 그들의 짐이 나오는 것을 본 그는 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공항으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10만 달러는 날아갔다. 메르드. 택시 한 대 가 호텔 앞에 멈추자 그는 시동을 켜고 본능적으로 연료 계기판을 확인했다. 강을 건넌 택시는 로와시 공항이 있는 동남쪽으로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우회전했다. 마 음이 푹 놓인 파라두는 계기판을 철썩 때렸다. 오스테를리츠 역이나 리옹 역으로 가려는 모 양이다. 5분 후, 그들이 리옹 역으로 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그로선 견인 구역에 차를 두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메르드. 하지만 10만 달러에 비하면 그깟 벌금이 대수인가, 그는 핸들을 잡지 않은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다음 택시를 뒤따라 테제베 전용 대합실 앞에 차를 세웠다. 그들이 표를 미리 사두었을 경우 따라잡으려면 서둘 러야 할 터였다. 그는 보도 연석에 바퀴 두 개를 처박아 주차시킨 다음 가방을 들고 황급히 대합실로 달려들어갔다. 달려가던 그는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때마침 신문 가판대에 놓인 잡지들을 구경하고 있 던 그 여자와 하마터면 충돌할 뻔했다. 곧 남자 둘도 발견했다. 그들은 표를 사려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긴 행렬에 합류했는데 파라두에겐 줄이 긴 게 무 한히 반가웠다. 그는 신문을 사서 머리를 숨긴 채 그들 바로 옆줄에 섰다. 그들이 자기네 줄 창구에 도달하기 전에 그의 차례가 먼저 왔다, 표 판매원이 짜증스러운 듯 쳐다보더니 말했다. "손님은요?" 메스인가? 스트라스부르? 마르세유?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행렬에서 빠져 나온 파 라두는 가방에서 무엇을 찾는 척하며 옆줄에 등을 돌린 채 서서 귀를 종긋 세웠다. 미국식 발음을 듣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그는 앙드레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아비뇽 행 좌석 세 개를 주문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다른 사람들 얘기로 착각하고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이어서 영어가 들렸다. "선생님 , 다음 기차는 10분 후에 떠난대요," 아비뇽으로 간다는 얘기다. 뒤에 선 여자의 불평과 그녀의 개가 낑낑대는 소리를 무시하 고 다시 표 사는 줄로 밀고 들어간 파라두는 창구로 돈을 밀어 넣었다. 기차가 출발하려면 아직 몇 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홀츠에게 전화 할 시점은 아니었다. 파 라두는 그들 세 사람이 기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할 때까진 기다릴 참이었다. 카밀라는 밝고 명랑한 척 해보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대단히 고전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렇게도 좋았던 루디의 기분이 싹 바뀌어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변기의 받침대를 올려 놓고 나와 카밀라에게 엄청난 짜증을 불러일으켰던 그 끔찍하고 불쾌한 사내 때문임이 분명했다. 저녁에 타이예방에 가서 훌륭한 음식을 먹긴 했지만 생기 넘치는 자리가 되진 못했다. 그 리고 오늘 아침도 내내 루디는 딱딱거리기만 했다. 식사엔 거의 손도 안 대고, 마사지도 안 받으려 들고, 장 폴, 필립과 함께 점심 먹자는 그녀의 제안을 매우 상스런 소리와 함께 거절 했다. 그들처럼 재미있는 사람도 없는데. 이런 저런 상황을 종합해 본 그녀는 따라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슬슬 들기 시작했다. 지 금도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전화기 옆에만 붙어 있다. 그러나 노력해 볼 필요는 있다. 그 더러운 내막을 혹시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얘기해 봐요, 자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홀츠는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 했다. "도움은 무슨 도움." 카밀라는 담배에 불을 붙여 그의 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루디, 당신의 소년과 같은 매력이 참으로 뿌리치기 힘들게 느껴지는 때가 가끔 있어요. 난 그저 도와 주려는 것뿐이에요. 무슨 일이죠? 그 네덜란드인 때문인가요?" 물론 그 녀석 때문이다. 3천만 달러짜리 세잔느를 들고 파리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그 녀석.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겠노라고 했던 바로 그 녀석. 그가 전화를 걸어 올 때까진, 그 리고 파라두가 연락해 올 때까진 홀츠는 꼼짝 않고 전화기 옆에 앉아 있어야 할 입장 이었 다, 리츠 호텔에 감금된 것이나 마찬가지다_ 그는 카밀라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알고 싶은 건 아니겠지?" 카밀라가 고개를 움츠렸다. 자신이 신고 있는 샤넬 구두의 두 가지 색조가 소리나지 않는 오부송 카펫의 분홍색 초록색과 대비되는 그 놀라운 색상 효과를 보고 감탄사를 내지 않으 려니 무척 힘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전혀 알고 싶지 않아요. 난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 봐." 홀츠가 불퉁거렸다. 마지막으로 올라탄 승객들이 자기 좌석을 찾아 객실을 이동하는 동안 기차는 서서히 역에 서 빠져 나갔다. 바지런한 중역들은 어느새 윗도리를 벗어부치고 앞에다 노트북 컴퓨터를 펼쳤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탄 어머니들은 장난감과 심심풀이 먹거리를 찾느라 짐보따리를 뒤지고 있었으며, 행락객들은 잡지책이나 안내서를 보느라 모두들 기차의 속력이 빨라지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매끄럽게 속도를 높여 가고 있는 기차는 이제 시 속 1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그들을 남쪽으로 옮껴 갈 터였다. 이등석 표를 산 파라두는 기차 후미에서 일등석 객실 쪽으로 천천히 지나가며 까만 선글 라스 밑으로 이쪽 저쪽을 훑고 있었다. 곱슬머리를 한 타래로 묶은 여자부터 찾는 게 손쉽 다. 역에서 느꼈던 불안감은 이미 사라졌다, 그는 그들이 타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고 그들이 내릴 곳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기차 안에서 혹시 누군가와 접촉하는지 여부만 점검하 고 나면 홀츠에게 보고할 참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 몇 시간은 좀 편하게 보낼 수 있 을 것이다. 앞쪽 객실 중간쯤에 그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탁자를 긴 네 자리 좌석에 앉아 있었는 데 네 번째 좌석은 비어 있었다 그는 핸드폰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객실 끄트 머리로 가서 WC라고 표시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곤 그 안의 좌석이 허용하는 대로 최 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한 다음 리츠 호텔 전화번호를 눌렀다. 홀츠가 오전 내내 신경에 거슬렸던 문제를 두고 궁리해 가며 전화를 받는 바람에 그들의 통화는 꽤 길어졌다. 혹시 프란젠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쯤은 분 명히 리츠로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돈을 더 짜내기 위해서일 것 이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남은 한 가지 이유는 뻔하다. 홀츠의 경고를 무시하고 엉뚱한 짓 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홀츠에게 지고 있는 막대한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사이러스 파인과 일하기로 한 것이다. 홀츠는 그 네덜란드인에 대해 파라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파라두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야 당연히 탐욕스럽고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겠죠. 하지만 그렇게 설명해 가지곤 도움 이 안 돼요. 정확히 어떻게 생겼어요? 그리고 그를 찾아냈을 경우 어떻게 해주길 파라는 거 예요?" 홀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프란젠의 신체적 특징을 집중적으로 얘기했다. 그리고 파 라두에게 다시 한 번 반복시켰다. 그러나 프란젠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 다음 지시는 정확 하게 내리기 어려웠다. 보수가 높아질 것을 예상한 파라두가 대뜸 내놓은 안은 그를 제거하 자는 것이었아.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그 그림들을 되돌려 받을 때까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를 보는 대로 내게 알려 주기만 하면 돼. 그 다음에는 내가 결정할 테니까. 그리고 자 네의 핸드폰 번호나 알려 주게." 바 칸으로 갔던 루시가 커피 세 잔을 들고 당황스런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참 별일도 다 있네. 여기선 남자 둘이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프랑스 사람 들은 원래 그런가?" 앙드레가 웃으며 쳐다보았다 "내가 알기론 절대 그랬던 적은 없는데, 룰루, 그런데, 왜?" "방금 화장실 앞을 지나오는데 안에서 누군가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어. "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화장실 쪽을 가리켰다. "진짜 대화 소리가 났다구. "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프랑스는 정말 요상스런 나라야." 규칙적이고 부드럽고 졸리운 흔들림과 함께 기차는 남쪽으로 계속 달렸다. 리옹을 지나자, 부르군디의 녹색 만곡들에서 남부의 들쭉날쭉한 경관으로 전원 풍경이 바뀌었다. 포도밭들 이 가파른 언덕배기를 수놓고, 하늘의 푸르름도 눈에 띄게 짙어켰다. 사이러스가 가볍게 코 를 고는 동안 앙드레는 루시에게 자신이 아는 프로방스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프로방스는 특이한 고장이다. 고유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프랑스어를 구 사한다. 사람들의 성격은 화끈하고 급한 지중해 기질이다. 시계가 아니라 계절로 구분되는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어 시간을 정확나게 지키는 것을 북부의 요상한 강박관념쯤으로 생각 한다. 프로방스 배후의 산야는 넉넉한 아름다움을 지녔고 사람으로 붐비는 시장들에선 인간 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학과 목동들로 유명한 카마르그(남부 론 강 어귀의 섬-역주)그 리고 먹거리들, 타페나드, 에투페(찜 요리 - 역주) 송로, 무화과, 염소젖 치즈, 올리브 기름, 허브 향내 나는 시스테롱 산 양고기, 엑상 프로방스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칼리송(아몬드 과 자-역주)이 유명하다. 루시의 손가락이 앙드레의 입술을 막았다. "꼭 관광 사무소 직원 같아. 당신 얘길 듣고 있으니까 배가 더 고파지잖아." 다음 정거장이 아비뇽이니 내리실 승객은 정확히 2분 내로 움직여 달라는 안내 방송이 불 어와 영어로 나왔다. 사이러스가 눈을 뜨고 머리를 흔들더니 말했다. "하마터면 잠들 뻔했네. 이제 다 온 건가?" 아비뇽 역은 사실 프로방스의 관문으로 택할 만한 곳이 못 된다. 볼 때마다 언제나 깨끗 이 청소하고 제대로 정리해 주길 기다리는 상태로 남아 있다. 무거운 짐을 옳기는 데 더할 수 없이 불편한 변덕스런 에스컬레이터와 높은 계단, 자동차 를 증오한 나머지 특별히 악의를 가지고 설계한 듯한 역 앞 광장. 질서라고는 전혀 없고 사 람들 언성이 높아진다, 진입이 차단되어 낭패감에 빠진 운전자들은 흔히 품위 유지를 포기 하고 손이나 팔을 휘두르며 소리 높여 인사해야 한다 . 그들 세 사람이 렌터카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파라두는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탔다, 기사가 한 쪽 눈썹을 구부정하니 치켜 올리고 뒤돌아보았다. 파라두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 차 한 대를 뒤쫓아가야 하니까," 기사가 손짓으로 주차 구역을 가리켰다. "차라면 얼마든지 골라잡을 수 있습니다, 손님. 특별히 좋아하는 색이라도 있으십니까?" 파라두는 렌터카 사무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 했다. "잠자코 있으시오. 그 차가 보이면 내가 알려 주겠소." 기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슈. 돈이야 당신이 내는 거니까." 기사는 미터기를 작동시킨 다음 신문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10분 후, 앙드레가 운전하는 청색 르노가 조심조심 렌터카 주차장 에서 빠져 나왔다. "바로 저 차요. 어서 가요, 놓치면 안 되니까." 파라두가 말했다. 두 대의 차는 철교 밑을 지나 A7도로로 향하는 차량 행렬에 합류했다. 앙드레는 이 지역 운전 기법에 익숙해질 때까지 조심해서 리노를 몰았다. 한동안 프랑스에서 떠나 있다가 돌아와 운전할 때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차량들의 속도와 급작스런 차로 변경, 배기관에 달라붙을 듯 착 불어 따라오며 호시탐탐 추월할 기회만 노리 는 뒤차들 때문에 마음 편하게 운전할 수가 없다. 그 상태가 계속되다가 아비뇽 공항을 지 나 널찍하게 펼쳐진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앙드레는 비로소 어깨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 다. 루시와 사이러스는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가는 차들과 성난 듯 빵빵대는 경적 소리에 이 따금 눈살을 찌푸리며 말없이 앉다 있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야 왜 저렇게 서두르지? 남부가 멋지고 조용하고 나른한 곳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루시가 말했다, 소형 시트로엥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앞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앙드레가 급브레이크를 밟았 다. "유전자 때문이야, 룰루. 프랑스 사람들은 가속 페달에 올려 놓는 오른발이 무겁게 태어 났거든. 차는 보지 말고 경치나 즐기라구." 그들은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파라두가 탄 택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 뒤를 쫓 고 있었다. 지중해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잠겨 드는 오후 해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짙은 푸른색 하늘을 배경으로 솟은 석회암 언덕들을 구워 버릴 듯한 바깥 열기가 차 안에서도 느 껴졌다, 잠시 후 엑상 프로방스에 가까워지자 들쭉날쭉한 거대한 산 생빅투와르 산이 펼쳐 졌다 세잔느를 그토록 매료시켰던 바로 그 산이다. 엑상 프로방스로 들어서자 앙드레는 차창을 내리고 대기에 깃든 신선함을 맛보았다. 산들 바람이 미라보 산책로 아래쪽에 공들여 마련해 놓은 거대한 분수에서 나오는 물보라를 흩날 리고 있었다. 앙드레가 말했다. "저기에 신사 숙녀들이 보이죠? 프랑스에서 제일 아름다운 거리예요." 그들은 산책로 양편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 가지들로 이루어진 긴 터널로 접어들었다. 그 늘진 녹색 터널에서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디 보자, 와본 지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걸. 여기 어디에 호텔 하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바로 저거야. 네그르 코스트 호텔. 저기가 어때요?" 파라두는 그들이 차 키를 호텔 도어맨에게 넘겨주고 짐을 안으로 들이는 것을 지켜보았 다. 그들이 방을 잡아 들어갈 때까지 한 5분 정도 시간을 둔 후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 하고 내렸다, 그러곤 호텔 맞은편 벤치에 가서 앉았다. 어디에 가면 차를 렌트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파라두? 지금 어디에 있나?" 홀츠의 음성이 희미하고 가느다랗게 들려 왔다. "엑상 프로방스에요. 그들이 5분 전에 호텔에 투숙했어요." "누굴 만나거나 한 적은 없 고?" 파라두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어 댔다. "내가 돌벽까지 꿰뚫어 볼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잠깐, 그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어요, 그들 셋만 있어요." 파라두가 거리를 따라 올라가는 그들을 지켜보는 사이 잠시 대화가 끊겼다 "됐어요. 카페로 들어가는군요.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요." 카페를 들여다보니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서비스도 느릴 게 분명하다. 시원한 황금색 맥주를 들고 가는 웨이터를 본 그는 입술을 한번 핥고 나서 다시 거리를 따라 내려왔다. 렌 트하는 데를 찾을 셈이었다. 사이러스가 프란젠에게 전화하러 간 사이 루시와 앙드레는 뒤 가르송 싸페 테라스에 앉은 다른 손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관광객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 역 비즈니스맨들,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일과를 마치고 쉬고 있는 대학생들 루시는 학생들 에게 매료되었다. 앙드레의 말대로 눈에 띠게 잘생긴 학생들이 몇 명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검은 잔과 담배를 쉬지 않고 만지락대며 희희덕거리고 웃어대다가 요란하게 포옹을 하기 위 해 자리에서 자주 일어서곤 했다. "재네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직업적인 키스꾼 같아. 저기 저 사람들 좀 봐" 루시가 말했다. "그것도 커리클럼의 일부야, 룰루. 입맞춤 전공 학생들이지 . 뭘로 마실래?" 마실 것을 주문한 그들은 끊임없이 바뀌며 느릿느릿 보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행인들의 시선과 카페 탁자에서 내다보는 시선들이 마주치면서 아무 근거 없는 호기심들이 느긋하게 끝없이 교환되고 있었다. 앙드레는 루시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걸리는 건 모조리 빨아들이는 레이더 스캐너처럼 열심히 이쪽 저쪽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앙드레는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녀 쪽으로 자기 얼굴을 갖다 댔다. "당신과 함께 온 나라는 사람은 잊어버린 거야?" 웨이터가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났을 때 사이러스가 다가와 말했다. "맙소사, 키스하는 것도 전염성이 있나 보군. 내가 들어간 전화 부스 바로 옆에도 완전히 딱 붙어 버린 한 쌍이 보이더니 그 커플은 아직도 저러고 있다네. 아, 청춘이란 좋은 거 야." 그가 자리에 앉아 잔을 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준비가 다 됐네. 르 피아크르란 식당으로 가서 니코를 만나는 거야. 여기서 30분 가량 떨어진 전원 지역이래. 그는 프티트 아미 (귀여운 여자 친구)를 데리고 나 오겠다는군." 맥주를 한 모금 쭉 들이켠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닦았다. "재미있는 저녁 한때가 될 것 같아." 루시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또 하나 오네 . 여긴 선남선녀들이 득실대는군요." "아무래도 운에 맡겨야 될 것 같아. 그렇지 않은가? 난 왠지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 어져. 이제 그래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들은 가능성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과연 프란젠이 그 위작을 그렸을까?(그럴 가능 성이 높다. ) 그와 홀츠는 굳건한 동업자 관계일까?(사이러스는 그게 다소 의심스럽다고 보 았다.) 프란젠은 드노이예를 알고 있을까? 원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까? 의문은 계속 이어졌지만 해답은 하나도 얻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이제 내막을 밝혀 볼 때가 됐다는 사이러스의 말에 동의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옅은 자줏빛 황혼이 미라보 산책로를 번쩍이는 동굴 같은 풍경으로 바꿔 가고 있었다. 학 생들은 슬슬 카페에서 나가 저녁 시간대 교육 기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쌍쌍이 팔짱을 끼고 어슬렁대던 커플들이 걸음을 멈추고 식당 바깥에 전시된 메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쑤시는 엉덩이를 비비며 벤치에서 일어난 파라두는 호텔로 돌아가고 있는 그들 세 사람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세잔느라는 화가가 왜 저 산을 그렇게 자주 그렸는지 해답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사이러스가 말했다. "저길 한번 보게, 참으로 걸작이야." 그들은 왼쪽으로 생빅투와르 산을 끼고 D17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꼭대 기엔 마지막 노을빛이 걸려 있고 아래쪽 등성이들엔 이미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러다가 듬방 사방이 깜깜해졌다. 엑상 프로방스에서 불과 몇 마일 외곽 지역을 지나고 있을 뿐인데 먼 농가들의 가느다란 불빛들만 이따금 보일 뿐 사람 사는 흔적이 별로 느껴지 지 않았다 차량들도 뜸했다. 이따금 불도 켜지 않은 트랙터들이 헉헉대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과, 반대편 차선에서 충돌할 듯 달려오는 차량들만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차 한 대가 꾸준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뒤차는 프랑스 운전자치곤 보기 드물게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백미러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좌석에 등을 기댄 파라두는 핸들을 붙잡고 앉아 있었다. 상황이 점점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시골 구석으로 들어가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터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들 을 덮치고픈 유혹에 시달렸다. 도로에서 끌어내린 다음 파리에서부터 끼고 온 총으로 단숨 에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전문가로서의 신중함이 요구되었다. 참자, 브루노, 기다리자, 짐을 싣지 않은 걸 보면 그리 멀리까지 가진 않을 모양이다. 그들 이 차에서 내릴 때, 그때가 기회다. "정말 여기가 맞아요, 선생님? 훌륭한 식당이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니코 같은 식도락가 가 올 만한 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앙드레가 속도를 낮추고 급커브틀 돌았다. "D17도로변에서 간판이 보일 거라고 했는데, 아, 저기 보이는 게 뭐지? 그것은 나무 기둥이었는데 빨간색, 흰색, 파란색으로 '피아크르, 르 파트롱 망쥐 이시(피아 크르, 품격 높은 사람들의 식당)'라고 씌어진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화살표 하나가 이 륜 트럭 폭보다 넓어 보이지 않는 샛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이러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 다. 1킬로미터 가량 꼬불꼬불한 길을 달린 끝에 마침내 프랑스인에겐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외 지인들에게는 즐거운 충격을 안겨 주는 인적 드문 곳에 세워진, 자그맣고 품위 있으며, 주차 장의 상태로 보건대 인기 있는 레스토랑에 당도했다. 건축학적으로 보자면, 흔히 원 건물에 박힌 암석 자재를 숨기거나 결합시칠 때 쓰는 수법인 분홍색 애벌 칠로 겉만 바꿔 놓은 수 수하고 소박한 2층 건물이었다. 소박하긴 해도 손질이 잘되어 있었다. 건물 정면으로 포도덩굴이 무성하게 기어올라 있고, 식탁과 의자들이 갖추어진 널따란 테라스 에서 보면 사이프러스 나무들, 협죽도 덤불, 늙어 쭈글쭈글한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 정원엔 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미안해요, 선생님. 아까 얘긴 취소할게요. 괜찮아 보이는 곳이네요." 앙드레가 몇 군데 빈자리 중 한 곳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그들이 테라스를 가로질러 지나가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프란젠도 거 기 있었다. 그는 당당한 몸집의 여자와 얘기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여자는 희끗희끗 한 머리칼 색을 돋보이게 하는 회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마침내 만났군 행운을 빌자구." 사이러스가 말했다. D17도로변에 차를 세운 파라두는 가방을 들고 깜깜한 도로에 내려섰다. 식당 정원 언저리 의 어둠 속에서 사이프러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살펴본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불빛도 너무 밝았다. 그러나 그들의 차가 있다. 살금살금 자갈 마당 주차장을 돌아간 그는 그들의 청색 르노를 찾아냈다. 20. 추격전 테라스 한 쪽에서 청바지에 횐 셔츠 차림의 포동포동하고 키 작은 여인이 미소 짓는 얼굴 로 그들을 맞았다. 식당의 테리어 견이 다리에 용수철이라도 단 듯 거칠게 뛰어오르자 그녀 가 둥글게 만 메뉴판으로 개를 위협하며 그들을 보호했다. "므시유, 담, 봉수와, 봉수와(신사 숙녀분들, 어서 오세요). 아누크의 친구분들이시죠?" 그녀가 공중으로 뛰어오른 개를 철썩 때렸다. "에르클! 사 쉬피 (그만하라니까) 자, 절 따아오시죠." 그녀는 몸을 흔들며 마치 항해하듯 식탁들을 헤집고 그들을 인도했다. 테리어도 그녀 옆 으로 껑충껑충 따라왔다. 그들을 본 프란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음 띤 얼굴로 연신 고 개를 끄덕이며 친구 에게 그들을 소개시켰다. 아누크는 전통적인 미인형은 아니지만 분명히 잘생긴 스타일이었다. 무성한 머리칼 밑으 고 드러난 그녀의 옆모습은 동전에서 익히 보아 온 얼굴과 흡사했는데, 지중해 햇살을 그대 로 간직한 듯한 올리브색 살결을 가지고 있었다. 까만색 눈에, 튼튼하고 수완 있어 보이는 손을 가진 그녀는 함부로 대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본 사이러스는 눈을 빛내며 본능적 으로 나비넥타이를 바로잡았다. 프란젠이 로제 와인 병을 바삐 기울이며 사람들의 잔을 채워 주면서 말했다. "여기 음식은 뭐든 괜찮은 편이지만 피살라디예르(니스 풍의 파이-역주)가 특히 뛰어나죠. 그리고 햄도 프로방스에서 여기만한 곳이 없어요. 그렇지 , 아누크?" 아직 약간 불안한 입지에서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 남자의 간절한 어조로 그가 아누크에게 말했다. "안 그럴 때도 많지만 이번엔 그럴지도 모르죠." 아누크는 억양이 다소 강하긴 해도 자신감이 느껴지는 영어를 구사했다. 그녀는 자기 말 에 깃든 조소의 분위기를 해소하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루기 힘든 고집 센 아이를 감시하는 어머니처럼 신중하면서도 따뜻한 눈길로 프란젠을 쳐다보았다. 느긋한 식전 절차, 메뉴를 연구하고 요리에 대해 토론하면서 우유 부단할과 흥분감을 즐 기는 가운데 더할 수 없이 식욕을 돋우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사이러스가 이제 점잖게 실무 적인 주제를 거론해 볼 때가 됐다고 느낀 것은 첫 번째 술병이 비워지고 추가 주문을 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가 말했다. "니코, 당신에게 설명해 줄게 좀 있소." 앙드레가 먼저 얘기를 시작했다, 아누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열심히 듣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얘기가 전개 될 때마다 눈에 띄게 반응하는 프란젠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특히 앙드레가 드노이예를 만난 일과 장비를 도둑맞은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프란젠의 눈썹이 한참 높이 치켜 올라갔다. 사이러스가 앙드레 뒤를 이어서 얘기하려는 순간 일차 코스 요리가 나왔다. 속에 든 올리 브, 양파, 앤초비(지중해산 멸치류-역주)가 그대로 드러난 타트, 야채 그룻, 콩 그룻, 나륵풀 (향미료로 쓰이는 차조기과의 일년초-역주)과 마늘로 맛을 낸 파스타 수프 그릇, 타페나드 단지, 소금으로 간을 맞춘 브랑다드(대구 요리 -역주-미끈미끈한 잼 같은 라타튜이 (잡탕 스튜-역주).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맛있른 장애물의 하나라고 알려진 프로방스 식단이었다. 사이러스는 음식을 먹는 틈틈이 프란젠을 힐끔힐끔 관찰했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네덜란드인은 마치 평범하고 흥겨 운 친구들 모임에와 있는 사람처럼 아누크의 브랑다드를 맛보기도 하고 자신의 수프를 맛보 여 주기도 하면서 음식과 아누크에게만 열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 다음 얘기를 듣고 난 후 에도 그 기분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기를 사이러스는 빌었다 한편 식탁 맞은편에 앉은 루시는 앙드레로부터 연신 훈계를 들으면서도 모른 척하며 식사 에 열중해 있었다. 앙드레는 아직도 네 가지 요리 코스가 남아 있음을 명심하고 초반엔 좀 자제해서 먹으라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게 그녀로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식욕 좋은 건강한 처녀인 데다 점심까지 거른 터여서 흙내 물씬하고 톡 쏘는 풍미의 이 일차 코스는 그녀가 일찍이 경험해 본 그 어느 식단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루종 일 몸을 움직인 일꾼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고, 사실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거웠 다. 깨끗이 비운 접시와 사발들이 치워지자 사이러스가 심호흡을 하고 나서 앙드레가 했던 다 음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홀츠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뚜렷한 반응이 감지됐 다. 그러나 반응한 사람은 프란젠이 아니라(그는 벌써 예상했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아누크였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경멸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그러곤 불쾌해진 입맛을 와인으로 씻어 내고 싶은 듯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그것을 본 사이러스가 용기를 내어 슬그머니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멜론과 여인)의 거래 를 자신이 취급하고 싶다고 말했다. 원화 말이다. 얇게 썰어 구운 납작납작하고 바삭바삭한 감자와 함께 불그레한 분홍빛에 향 좋은 양고기 가 나오자 프란젠이 한눈을 팔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누크의 중지가 가차없이 그의 허 리를 찔렀다. "알로르(그렇다면) 니코, 지금까지 얘길 들었으니 이젠 당신이 얘기할 차례잖아요." 프란젠의 얘기는 중간중간 양고기를 뜯어 가며 진행되었으므로 끝이 나려면 왜 시간이 걸 릴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그 위작을 그렸지만 드노이예와는 만난 일이 없다고 했다, 홀츠 가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홀츠란 이름이 언급되자 이번에도 아누 크가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 그걸 본 사이러스는 그녀도 동맹군이 될 수 있 겠다고 판단했다. 프란젠의 얘기가 계속됐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홀츠가 똑같은 그림을 한 점 더 날조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악당들과 손잡고 일해 온 그로서도 그런 경 우는 처음인 모양이었다. 내막을 알 수 없는 사이러스로선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수 없 었다. "거참 희한하군 두 번째 위작은 누구 부탁으로 청탁한 걸까?" 프란젠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업종에선 그런 건 물어 보지 않는 게 관례요. 아주 급하다고 하는 얘 기만 들었소." "홀츠가 원화를 팔아 주려 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위작이 나돈다는 것을 알면 드노이예도 기분이 좋지 않겠군." 사이러스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대단히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홀츠가 원화와 위작 둘 다를 원화인 것처럼 해서 팔아 보 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는 두 명의 고객을 찾고 있을 거요. 자기 그림을 대중 앞에 드러내 놓고 싶어 하지 않는 아주 신중한 고객들 말이오. 사실 그런 고객은 찾아보면 많이 있거든.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몇 사람 되니까." "그러니까, 그 두 고객 모두 자기가 진품을 산 걸로 생각할 거란 얘긴가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선생님." 앙드레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게 장담할 게 못 돼, 젊은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테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위대한 그림을 소유하는 걸로 만족하 는 사람들도 있다네. 허구한 날 지하실에 처박아 두는 한이 있더라도 말일세. 내가 듣기론 실제로 그 쪽이 더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하더군 " 사이러스는 와인을 홀짝이고 나서 프란젠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진품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니코? 프란젠이 아누크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교시를 바라고 그런 거라면 아무 소득도 없는 짓 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으니까. 그 네덜란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사이러스는 이미 그의 답변을 감지 했다. 프란젠이 말했다. "내가 갖고 있소. 진품과 위작 둘 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그제야 아누크가 미소 비슷한 것을 얼핏 흘렸다. 사이러스는 말없이 몸을 뒤로 기댔다. 샐러드와 푸짐한 플라토 드 프로마질(치즈 쟁반-역 주) 추가 주문한 와인이 식탁에 나왔던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인을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프란젠은 지금 프랑스 치즈들에 대해 루시에게 한창 강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 염소, 젖 소, 양의 젖으로 만든 수많은 치즈들, 그리고 브랜디와 마늘이 들어가 톡 쏘는 향을 가진 카 샤. 사이러스 자신이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프란젠의 심사가 편안해 보 였던 때문일까? 아무튼 프란젠은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이러스는 생각을 모으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어요. 우리가 힘을 합해 캅페라로 가서 드노이예를 만나는 겁니다. 그에게 또 하나의 위작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진품을 돌려준 다음 우리의 희망 사항을 털어놓는 거요, 우리에게 일을 맡겨 주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말이오. 앙드레의 얘기로 볼 때 그는 점잖은 사람인 것 같소. 그는 지금 그림을 팔려고 하는데 그거 야말로 내 전공이니. 판매 수수료가 엄청날 거요. 우린 그 돈을 나누어 가지면 되오." 사이러스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지금까지 얘긴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고 가정할 때의 경웁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같소." 프란젠이 입술을 닦고 나서 와인을 조금 마셨다. "그럼 두 번째 가능성은 뭐요?" "아, 그건, 첫 번 경우만큼 재미있진 않을 것 같소.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해 준 데 대 해 당신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우린 뉴욕으로 돌아가는 거요. 당신과 홀츠는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도록 남겨 두고 말이오." 심사숙고 하는 동안 잠시침묵이 이어졌다. 바로 그 순간 테라스 건너편 깜깜한 정원 한구 석에서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귀가 아주 예민한 사람이라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프러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테라스 쪽을 계속 감시하고 있던 파라두는 전화를 받 아도 될 만큼 충분히 먼 거리까지 황급히 후퇴했다. "그들은 지금 엑상 프로방스 외곽의 한 식당에 있어요. 그 네덜란드인과 함께 ." 홀츠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파라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언뜻 듣기에도 뭔가 안 좋은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내려가겠어, 거기서 제일 가까운 공항이 어디지?" "마르세유 공항이죠. 당신이 도착할 때쯤이면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소. 그들 의 차에 약간의 작업을 해두었으니까." "그 네덜란드인이 다치는 건 바라지 않아. 마르세유에 가서 다시 연락하겠네 " 전화가 끊어졌다. 파라두는 부러운 눈길로 식당 불빛 쪽을 힐끔 보고 나서(그는 지금 며 칠 굶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자신의 차에서 기다릴 셈이었다. 자리가 의논하는 분위기에서 자축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아누크가 몇 차례 끄덕여 주고 쿡쿡 찔러 준 데서 다소 기운을 얻은 프란젠이 마침내 사이러스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내일 아침 아누크의 집에서 만나 모두 함께 캅페라로 가기로 했다. 이쪽에서 솔직 하게 나가면 드노비예도 감명을 받아, 도와줘서 고맙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호감을 느끼 는 한편 홀츠의 음흉한 작태에 치를 떨면서 사이러스에게 거래를 맡기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분이 좋아졌고 낙관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판단과 조리 있는 분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프란젠이 주방장이 은밀히 보관하고 있는 마르 술(포도찌꺼기로 만든 브랜디-역주)을 몇 잔, 아니 인 심 좋은 식당이니 아예 큰 컵으로 달라고 했던 것이다. 포도 껍질 즙을 짜서 만든 그 독한 증류주는 소화에도 도움을 주지만, 프랑스 의료계의 박식한 사람들도 인정한 바 있다고 알 려진 특정한 효험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시간 와인을 마시고 한껏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마신 마르 술은 사람들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헤어졌다. 아누크와 프란젠은 1.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자기네 마을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충 엑상 프로방스 쪽일 것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자신의 반사 신경계가 완전히 술에 절었다는 정도는 알 만큼 적당히 취한 사람이 운전할 패 그렇데 하듯이, 앙드레는 과장됐다 싶을 정도로 조심조심 속력을 줄여서 달리고 있었다, 이따금 대화를 해보려고 노력하던 루시와 사이러스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앙드레는 차창을 내리고 가능한 한 바람을 많이 받으려고 얼굴을 창 쪽으로 빼고 운전하 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참 거리를 두고 뒤에서 따라오는 희미한 전조등이 보이긴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갈래 길과 모퉁이로 뒤덮인 낯설고 표지판도 없는 깜깜한 길을 갑작스레 달리게 된 앙드 레는 머릿속이 흐리멍덩한 가운데서도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얼마를 달리다 가 마침내 A7도로로 나가는 방향이 표시된 청색 ,흰색의 표지판을 발견했다. 다시 고속 도 로로 올라섰을 몇 분 후면 엑상 프로방스에 도착할 것 같았다. 고속도로의 우회로로 접어든 앙드레는 창을 올리고 드문드문 달려가는 차량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 차량들은 대부분 남부의 따뜻한 흙에서 캐낸 작물들을 싣고 파 리로 달려가는 야간 화물 트럭들이었다. 한시 바삐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진 앙드레는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싸우며 눈 초점을 유지 하기 위해 몇 차례 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차 길이가 자기 차의 두 배쯤 되는 스페인 국적의 냉동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속력을 줄였다. 늦은 시각이어서인지 냉동차 운전사는 난폭운전을 해대고 있었다. 차로를 바꾸기 전에 백 미러를 잘 봤어야 했다. 흔히 사고 직전엔 의식이 아주 명료해지는 법이다. 그 트럭의 꽁무 늬에 씌어진 글씨며 엉켜진 불빛들, 늘어진 흙투성이 플랩(바퀴 진흙받이 -역주) '레알 마드 리드(스페인의 프로 축구팀 -역주) 만세' 라고 쓰인 스티커 , 타이어에 새겨진 무늬 따위가 앙드레의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다. 앙드레가 그것들을 보고 나서 브레이크를 밟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1초도 되지 않았다. 트 럭 꽁무니가 바로 코앞에 온 것을 본 순간 밟고 있는 브레이크 페달에서 갑자기 아무 저항 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핸들을 왼쪽으로 트는 순간 차가 도로 중앙 풀밭을 덮쳤고 중앙선 구실을 하는 나무 울타 리를 부수고 반대편 차선들을 가로질러 도로 가장자리에 세워진 장벽을 치고 나갔다. 덤불 과 나뭇가지들과 바위들을 가르며 언덕배기로 미끄러져 내려간 차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 와 유리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를 끝으로 어느 소나무에 가 처박혔다. 엔진은 아직도 부르릉거리고 있었다. 앙드레는 핸들 위에서 떨고 있던 손을 뻗어 어렵사 리 시동을 껐다. 보기 좋군, 파라두가 생각했다. 아주 보기 좋았다.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트럭과 충돌했더 라면 더더욱 완벽했을 테지만 그만 해도 충분했다. 이제 가서 부러진 목의 수나 세보면 된 다. 그는 파괴된 차량이 있는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U턴할 지점을 모색했다. 알코올에 절은 머리를 맑아지게 하려면 죽음의 문턱에 가보는 것보다 나은 방법도 없다. 엄청난 강도로 흔들리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정신이 맑아진 세 사람은 언덕배기를 기어올라 가 도로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저쪽 편으로 건너갈 수 있겠어요? 엑상 프로방스로 들어가는 차를 얻어 타야겠어요." 앙드레가 말했다. 그들은 몸 속 아드레날린이 급격히 분비되는 것을 느끼며 통행이 끊긴 틈을 타서 전속력 으로 뛰었다. 도로를 건너오자 비로소 구역질과 몸 떨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앙드레 는 갓길에 서서 달려오는 트럭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쭉 펴보였다. 손가락이 아직도 떨고 있 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고. 트럭은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곧장 지나쳐 버렸다. 다음 번 트럭도 마찬가지였고 그 뒤로 마주친 대여섯 대도 마찬가지였다. "그걸로는 안 되겠어. 두 사람은 눈에 띄지 않도록 저기 밑으로 가 계시다가 내가 휘파람 을 불거든 올라와요." 루시가 말했다. 두 남자가 깜깜한 도로변 언덕배기로 살짝 내려가 기다리는 동안 루시는 블라우스의 맨 윗단추를 열고 안 그래도 짧은 치마단을 좀더 올린 다음 미소 띤 얼굴로 한 손을 들고 다가 오는 전조등을 맞이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수압 브레이크의 거친 마찰음을 내며 용맹한 프 랑스인 하나가 구조 현장에 멈춰섰다. 조수석 문쓸 연 트럭 운전사는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번득이며 루시를 내려다보았다. 그 녀는 브래지어 끈을 추스르며 그에게 살짝 윙크했다. "엑상 프로방스?" "파리 시 부 불레, 세리(파리로 가는데, 아가씨가 괜찮다면)" "좋아요. " 그녀가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나타났고 그것을 본 운전사 는 재빨리 차문을 닫아 버렸다. 그가 실망스런 기분을 극복하는 데는 그의 손에 쥐어 준 100프랑 짜리 지폐 몇 장이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앙드레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사고가 났다고 설명하자 약간의 동정심까 지 얻어낼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고속도로에서 벗어난 그들은 시내 중심부 근 처에 와서 트럭에서 내렸다. 한 손에 총을 든 파라두가 그들의 부서진 차 주변 덤불을 뒤지 고 있을 시각, 그들은 이미 호텔로 되돌아가 있었다. 홀츠와 카밀라는 적의 어린 침묵 속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리츠에서부터 시작된 언쟁은 차 안에서도 이어졌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마르세유 행 마지막 여객기의 뒷좌석에 앉아 있는 지금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파리에서 끌고 온 데 대해 격분해 있었다. 그것도 필요할 때 운전이 나 시키고 하인처럼 이것저것 부려먹기나 하려고 말이다. 그녀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 었고 그도 굳이 부인 하려 들진 않았다. 그녀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편의 시설도 갖추지 않은, 공항 주변의 형편없는 작은 호텔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게 될 게 뻔한 데다 루디의 기분도 엉망이고, 서둘러 출발하는 바람에 당장 내일 입을 의상도 전혀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앞으로도 더 악화되면 됐지 좋아질 게 없 었다. 호텔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매우 황량했다. 그들이 아무 짐도 없이 투숙하려 하자 안내 원의 얼굴에 알 만하다는 듯 교활한 표정이 스쳤고 그것을 보니 더 기분이 나빠졌다. 호텔 의 안내원은 제정신이 박힌 남녀라면 낭만적인 밀회 장소로 마르세유 공항을 택할 리가 없 다고 조소라도 하듯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호텔 방에 들어선 홀츠는 곧장 전화기 앞으로 갔고 눈에 띄게 불만스런 대화가 오래 이어 졌다. 그의 찌푸린 얼굴을 본 카밀라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물을 받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가 잠들어 있기를 빌며 오래오래 씻을 생각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의 분위기도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라두를 만나기 위해 일찌감 치 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엑상 프로방스로 들어온 그들은 미라보 산책로, 네그르 코스 트 호텔 입구와 비스듬히 마주보는 지점에 세워진 그의 차에 들어앉아 있었다. "놈들이 아직 저 호텔에 있는 건 확실해?" 카밀라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는 홀츠를 파라두가 흐릿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젯밤에 데스크에서 확인했어요. 무슨 수로 빠져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돌아왔 대요, 그후론 내가 여기서 쭉 지켜봤어요." 차 안이 다시 침묵에 싸였다. 아침 햇살을 받은 짙은 녹색 거리의 아름다움, 햇살 무늬 얼 룩덜룩한 카페 차양들, 유쾌한 광경과 소리들 속에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는 아름다 운 읍내 ,,, .,, 그러나 그 어느것도 그들에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카밀라의 기분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홀츠는 초조함과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 며, 파라두는 지독한 좌절감으로 슬슬 빠져들고 있었다. 단 몇 분 안에 그의 임무를 끝내 줄 노골적이고 결정적인 폭력의 순간을 그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는 팔 밑에 끼고 있는 총의 개머리판을 쓰다듬었다. 행운의 삼세판이다.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해치울 것이다. 놈들이 거꾸러지는 꼴을 보고 말 것이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편 거기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호텔 안에선 세 사람이 평소와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에 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충격과 알코올 기운 덕분에 마치 약 먹은 사람처럼 정신없 이 자고 일어나긴 했지만, 그 기운이 싹 가신 지금 그들은 어젯밤 일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사이러스가 자기 혼자서 계속하겠다고 또 한 번 제안했고 이번에도 앙드레와 루시는 그의 안을 일축해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들이 할 일은 캅페라로 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새 차를 렌트하진 않 기로 했다. 택시로 레크로탱에 있는 아누크의 집으로 가서 프란젠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들이 엑상 프로방스를 뒤로했을 무렵엔 벌써 해가 왜 높이 올라와 있었다, 생빅투와르 산과 나란히 달리는 뒷길로 접어들면서 위협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평온하고 일상적인 분위기가 이어지자 그들의 기분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동편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산은 신비스럽기도 하고 불길하기도 한 어젯밤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포도밭 중간중간에 난 흙 길도 윙윙대며 오가는 밴과 트랙터들, 도로 변에서 종종거리며 서로 다투는 까치들, 넓고 푸 른 아침 하늘의 먼 창공 위에서 오락가락 하는 몇 점의 구름, 평범하고 아름다운 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택시가 도로 한 쪽으로 난 갈래 길로 접어들자 레크로탱으로 올라가는 짧고 가파른 언덕 이 시작되었다 오전 경비를 서던 마을 개 두 마리가 돌진해 와서 택시 타이어를 향해 덤벼 들자 운전사가 욕을 퍼부어 댔다. "파란 덧문 집이오. 저기 길 끄트머리, 입구에 시트로엥이 서 있는 집." 앙드레가 말했다. 프란젠의 시트로엥 때문에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진 운전사의 입에서 또 한번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이 지역 마을길들은 당나귀 통행에나 적합했다 팁을 받고 다소 기분이 풀어진 운전사는 그들 일행에게 고개를 까딱 바며 인사까지 하고 난 다음 차를 후진시켰다. 노크도 하기 전에 프란젠이 현관문을 열었다. "살뤼, 메 자미(안녕하시오, 친구들). 자, 어서 들어와요." 남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거친 수염을 들이대며 루시의 양뺨에 입맞추고 난 그는 천장이 낮은 실내로 그들을 안내했다. 아누크는 워낙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어서 '봉 봐야주(좋은 여행)를 기원하며 조만간 또 보자고 하더라고 그가 해명했다. "출발하기 전에 먼저 저것들을 보여 드리면 재미있어 할 것 같아서 ,,,,,, ." 그가 돌로 만들어진 벽난로 쪽을 가리켰다 "실내가 좀 어둡긴 하지만, 저렇게 나란히 두고 봐도 웬만한 안목이 아니고서는 가려내기 힘들걸요? 그렇지 않소, 사이러스 씨?" 벽난로 돌 선반 위엔 세잔느의 (멜론과 여인)똬 그것의 쌍둥이 그림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와 아름다움까지 두 그림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 같았다. 사이러스가 다가가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으로 축하하오, 니코. 정말이지 완벽한 걸작이오. 직업상의 기밀 하나 물어 봅시다. 저렇게 똑같이 그려내는 데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 ,,, ." "사이러스 선생님?" 자동차 엔진 소리에 힐끔 창을 내다본 앙드레가 소리쳤다. 검은 안경을 쓴 짧게 깎은 머 리의 남자가 백색 르노에서 내리더니 재킷 속에 손을 넣으며 길을 가로질러 집 쪽으로 오고 있었다. "누가 오고 있어요. .., ,,, 맙소사, 총을 가지고 있어 ." 잠시 동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네 사람은 끈덕지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금 정신을 추스렸다, 프란젠이 말했다. "부엌으로 가면 뒷문이 있소." 그가 벽난로 선반 위에 있던 그림들을 들고 앞장섰다 집안을 빠져 나오자 높은 담으로 둘 러싸인 자그만 마당이 나왔다. 마당에는 골목으로 통하는 창살 달린 문이 달려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내 차가 있어요," 사이러스가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총을 든 저 친구의 차도 거기에 있는데.," "잠깐만요." 앙드레가 프란젠이 끼고 있는 그림들을 가리켰다. "그가 쫓고 있는 것은 십중팔구 바로 저것들이에요. 니코, 그림하나를 내게 주세요. 나머 지 하나는 사이러스 씨에게 주고요. 당신은 차 키를 준비해요. 룰루, 당신은 내 뒤에 바짝 붙어요. 니코는 사이러스 선생님 뒤에 붙어요. 바짝 붙어야 안전해요. 저들은 세잔느 그림에 총알 구멍이 생기는 건 결코 원하지 않을 거예요." 파라두는 현관문에서 물러나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차 뒷좌석에 탄 홀츠 의 고함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린 파라두는 그림 두 개가 마당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 것 을 보았다. 그림 하나에 발이 네 개씩 달린 채 완전히 코미디언들이군. 세상은 코미디언들로 가득하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총을 치켜 들었다. 그때 홀츠에게서 고뇌에 찬 외마디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는 지금 차창으로 어깨까지 내 밀고 있었다. "안 돼-안 된다구! 빌어먹을, 쏘면 안 돼! 프란젠, 아니 니코, 우리 다시 협상해 보자구 내 말 잘들어 그건 모두 오해였을 뿐이야, 내가 설명해 줄,,,,,,." 사이러스가 들고 있는 그림을 방패삼아 시트로엥 문을 열고 들어 간 프란젠이 시동을 걸 었다. 루시와 앙드레도 뒷좌석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사이러스가 프란젠 옆에 타자 시트 로엥이 골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백색 르노를 가깝게 지나치는 순간 앙드레는 그 차에 앉 은 홀츠의 입가에 묻은 침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하얗게 질린 카밀라의 얼굴 도 얼핏 보였다. 프란젠이 말했다. "저 차는 뒤로 빼서 돌아 나와야 하니까 한 2분 정도 우리가 출발이 빠 른 셈이오." 앙드레가 뒤쪽을 보니 파라두가 르노에 막 타고 있었다. "고속도로로 갑시다. 거긴 교통량이 많을 테니까. 어디에서 고속도로를 탈 수 있죠?" 앙드레가 말했다. "생막시맹까진 가야 하오. 놈들이 우릴 쫓아올까요?" 커다란 덩치의 시트로엥이 모퉁이를 돌았다. 사이러스는 무릎 위에 놓인 그림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우리가 아니라 3천만 달러를 쫓아고겠지." N7도로에 오른 프란젠이 가속을 붙이며 쭉 뻗은 평평한 도로를 따라 달릴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길이 너무 곧고 평탄해서 커브 길도, 숨을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프란젠 은 운에 맡긴 채 경적을 울리며 계속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루시와 앙드레는 계속 차 뒤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30분이 지났다, 하긴, 프랑스에서 제일 지독한 도로를 30분 간 고속으로 달 린다 해도 아무 일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차가 N7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오르자 차 안의 긴장감이 다소 씻어졌다. 통행 요금 징수소 앞에 온 프란젠은 통과를 기다리며 줄지어 선 차량들 뒤에 붙었다. 온 몸의 공기가 다 빠져 나갈 듯 요란하게 안도의 숨을 내뱉은 그가 씩 웃으며 옆에 앉은 사이 러스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턴 꼼짝 않고 위조 작업이나 할 겁니다, 정말이지 이런 짓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모두들 괜찮소? 심장 발작을 일으킨 사람은 없나요?" 앙드레가 물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자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군지 ,,,,,," "앙드레? 저기에 그가 있어요." 루시가 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시가 가리키는 쪽으로 모두의 눈이 따라갔다. 그들 바로 옆줄에서 백색 르노가 요금 징 수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파라두가 그들의 눈길을 되받았다. 그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루디, 이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방금 전 30분 동안 눈을 꼭 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밀라는 온몸이 산산조각 난 기분 이었다."미친 듯 질주하고, 게다가 총까지 ,,,,,, " "입다물어, 이 여자야. 파라두, 자네 생각은 어떤가?" "고속도로를 타면 우리에게 불리하죠. 하지만 놈들이 언제까지나 고속도로를 타진 못할 테니 계속 따라붙으며 기다려야죠." 카밀라가 또 한번 애써 보았다. "만일 저들이 경찰에게 간다면?" "저 차엔 도난당한 원화와 위작이 실려 있어. 난 내 물건을 되찾으려는 것 뿐이야 경찰로 가든 말든 상관없지만 아마 그렇겐 못할걸. 자네 말이 맞아, 파라두. 계속 따라붙어." 홀츠가 말했다. 브리뇰과 프레쥐를 지나고, 칸느와 앙티브를 지날 때까지 그들은 차 두세 대 간격 이상으 로 멀어지는 일 없이 잘 따라붙고 있었다. 카밀라는 부디 뉴욕까지 무사 귀환할 수 있기를 빌며 차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홀츠는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저들 입장이라면 이탈리아 쪽으로 향하 는 척하다가 스위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취리히의 그 사람에게 그림을 들고 갈 것이다. 파 인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러자면 길이 멀다. 놈들은 도중에 기름도 보충 해야 할 테고 어차피 어두워질 때까지 달려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파라두가 기회를 잡 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비뚤어진 업에 종사해 온 홀츠는 인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조 급하거나 너무 늦었다간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다. 인간의 신체가 견며 낼 수 있는 초조와 근심의 양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놀란 가슴이 진정되면서 논리적 사고에 가까운 것을 다시 회복하게 되어 있 다. 두 시간 정도 지나자 프란젠의 시트로엥에 탄 사람들도 그 같은 회복 상태로 접어 들고 있었다. 그러나 캅페라는 가까워지고 있는데 백색 르노는 여전히 그들을 따라붙고 있었다, 같은 차로를 타기도 하고 다른 차로를 달리기도 하면서 변함없이 백미러 속에 잡히고 있었다. 니스 공항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 것은 앙드레였다. "우선 공항엔 차들이 많으니까 그들을 따돌릴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리고 방향을 틀 면 놈들은 우리가 비행기를 타려는 것으로 짐작할 거예요. 일단 공항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가 곧장 다른 출구로 빠져 나가는 게 좋겠어요." 프란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다잡았 다. "빌어먹을, 놈들이 비행기를 타려 하고 있어." 홀츠가 말했다. 공항 건물들이 밀집한 구역 주변에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인 도로들을 뚫고 나가려고 아우 성치는 차량들 속으로 시트로엥이 합류해 버리자 파라두는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관광버스 한 대가 가로막는 바람에 귀중한 2분을 허비했고 앞길 이 다시 뚫렸을 땐 시트로엥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터미널로 곧장 가." 홀츠가 말했다._ 그러나 니스 공항엔 터미널이 두 군데 있었고, 그것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 중 한 터미널 앞으로 간 파라두는 카밀라와 홀츠를 차 안에 두고 다른 터미널까지 달려 갔다. 애쓴 보람이 있어서 주차장을 빙 돌아 '투트 디렉시용(모든 방향 가능)'이라고 표시된 출구로 막 나가고 있는 프란젠의 시트로엥 꽁무니를 목격 할 수 있었다. 머리 끝까지 울화가 치민 파라두가 땀에 절어 헉헉대며 돌아와 보니 이번엔 그의 르노가 한 무리의 택시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달변에다 몸짓 손짓까지 섞어 가며,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여긴 정차 금지 구역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터 미널 바깥 주차 공간은 신이 부여한 택시 기사들의 권리인데 감히 그런 자리를 무단 침입했 다는 얘기였다. 결코 부드럽지 않은 태도로 기사들 틈을 뚫고 들어간 파라두가 차에 올라타 며 말했다. "놈들이 우릴 속였소. 나가는 걸 봤어요." 앙드레는 뒤따라오는 차량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흰색 차는 모두 그 르노인 것만 같 았다. "장담할 순 없지만 공항에서 빠져 나을 때부터 놈들이 쫓아오지 않아요. 작전 성공인 것 같군요." 프란젠이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사이러스는 말없이 앉아 드노이예에게 할 얘기를 생 각해 보고 있었다. 앙드레와 루시는 빌프랑슈와 생장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만날 때까 지 뒤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의 시트로엥은 바다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노이예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내와 클로드를 니스로 보내고 혼 자만의 오후를 즐기게 되어 좋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는 캅페라로 돌아오면 처음 며칠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여름철 손님 들이 닥치기 전이라 평화로운 분위기에, 바하마의 무절제한 식물들을 실컷 보고 온 후 만나 는 조각처럼 질서 정연한 정원의 소나무와 사이프러스들, 달라진 공기 맛을 다시 느끼는 것 도 즐거웠고, 와인 저장실과 서재의 편안함도 좋았다. 즐거울 수 있는 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여느 해 같진 않았다. 지난번 통화할 때 들은 루돌프 홀츠의 말을 믿어 보 려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잔느 건이 도무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요 며칠 사이엔 아무 소식조차 없는 것도 신경 쓰였다. 내일 다시 홀츠에게 전화해 봐야겠다. 아니, 지금 당장 해보자. 분명히 무슨 소식이 있을 것이다 드노이예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 었다. 벨 소리가 난 것은 그가 거실 중간쯤 다다랐을 때였다. "드노이예 씨? 리브래종(배달 왔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흘러 왔다. 카느린느가 또 뭘 주문한 모양이었다. 캅페라로 돌아온 처음 며칠간은 언제나 배달 사례 가 쏟아지곤 하니까, 드노이예는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 준 다음 현관문으로 나가 섰다. 한편 백색 르노는 햇빛을 받으며 니스 공항 주차장에 서 있었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열 받을 대로 받은 성질을 가라앉히는 데 전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카밀라는 뾰로퉁해 있었다. 루디, 파라두, 불결한 소형차들, 프랑스, 미친 듯한 추격전, 모 조리 신물이 났다.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해 보기도 했지만 홀츠로부터 가시 돋힌 응수 만 받았을 뿐이다. 이제 그녀는 입을 굳게 봉한 채 파라두의 굵은 목 뒷줄기로 흘러내리는 땀방울만 불쾌한 눈길로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궁리하던 홀츠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마 침내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몰라, 놈들은 독자적으로 그림을 판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시 말 해서 거래를 해볼 심산인 게지. 이제 우리로선 다른 수가 없어. 파라두, 최대 속력으로 캅페 라로 가세," 홀츠가 갑자기 쳐다보는 바람에 카밀라가 움찔했다. "드노이예의 집을 찾아낼 수 있겠지? 가본 적이 있잖아." "그에게 뭐라고 얘기하려구요?" 그러나 홀츠는 이미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스토리를 짜내느라 상상력을 있는 대로 발휘 하는 중이었다. 프란젠이 날 배신하고 원화를 훔쳐 가 위작을 또 하나 그렸다고 말해 준다, 그리고 나는 최후의 순간에 나타나 구해 주는 영웅 역할만 하면 된다. 드노이예로선 충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30분이었다.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번갈 아 가며 얘기하는 동안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_ 그들이 얘기하는 동안 드노이예는 의자에 기대 세워 놓은 그림들을 자주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든 어쨌거나 세잔느를 다시 그에게 가지고 왔다는 건 분명했다. 그것은 결국 어느 정도 정직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 사람들을 믿어도 될까? 신뢰해도 좋 을까? 그림이 다시 수중에 들어왔는데 믿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사이러스가 아쉬운 눈길로 말했다. "선생 입장에선 물론 우리와 더 할 얘기도 없으시겠지만, 이왕 그림을 매각하기로 하신 거라면 내가 책임지고 최대한 신중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께 필요한 사항들을 조언 해 줄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나로선 기쁜 일이고 말입니다." 자신을 빙 둘러싸고 앉은 네 사람의 열의 어린 얼굴을 훑어본 드노이예는 그림들을 한 번 더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저 날조자의 작품은 정말이지 감쪽같다. "지금 당장 결정해 주리라곤 바라지 않겠지요?" 당연히 바라지, 사이러스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야 물론이죠." 거실 바깥에서 벨 소리가 들리자 드노이예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돌아왔다. "웬 사람이 루돌프 홀츠와 함께 왔다고 하는군요. 문은 열어 주지 않았소." 그때 연이은 두 발의 총 소리가 열려 있는 창을 통해 들려 왔고 이어서 세 번째 총 소리 가 났다. "총으로 문을 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나갈 다른 길은 없나요?" 앙드레가 말했다. 드노이예가 창으로 내다보았다. 신작로 맨 끝에서 한 남자가 대문 쇠창 살을 발로 차고 있었다. "따라오시오." 그림을 집어 든 드노이예가 그들을 안내해 집 뒤쪽으로 빠져 나갔다. 테라스를 지나자 선 착장으로 이어진 터널이 나타났다. "경찰을 불러야겠소. 이건 용납할 수 없는 폭력 행위요." 드노이예가 말했다. 카밀라는 다 쓴 탄창을 비워 내는 파라두를 보며 몸서리를 쳤다. 금방이라도 지독한 편두 통이 덮칠 것 같은 위기감이 그녀로 하여금 입을 열게 만들었다. "루디! 루디! 저 사람 좀 말려요! 맙소사, 여긴 캅페라라구요." 홀츠는 들은 척도 않고 파라두가 대문 자물쇠에 또 한 번 발길질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프랑스인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차라리 차로 밀어 버리면 안 될까요?" 홀츠는 입술을 깨물며 쇠창살 틈으로 저택 내부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는 이미 때가 늦었 다는 사실을 수긍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지금쯤 드노이예는 경찰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 갈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떠나야 할 때였다, 그는 감히 올가미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림을 손에 넣긴 틀렸다는 것도 깨달 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의 얘기일 뿐이다. 파인이 뉴욕으로 돌아오면 거기서 다시 한 번,,,,,, . 멀리 나무들 너머로 움직이는 물체를 본 홀츠는 시야에서 햇살을 막으려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택 아래편으로 쭉 뻗은 수평선 위에 하얀 물거품을 길게 남기며 자그만 보트 하나가 검은 거울 같은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대문에서 물러서며 말했다. "할 수 없군 날 공항으로 데려다 주게." 다섯 명의 승객을 싣고 물 속에 얕게 잠긴 수상 스키 보트가 해안에서 200미터쯤 멀어질 때까진 아무도 안도의 숨을 쉴 수 없었다. 앙드레를 잡고 있던 루시의 손길이 다소 느슨해 지더니 그녀가 말했다. "이런 말 하긴 싫지만, 다른 데로 정신을 돌리지 않으면 멀미가 날 것 같아요." 앙드레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결코 멀미할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던 것이다. "파리에서 한 일주일쯤 더 지낼 생각을 하면 멀미가 달아나겠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발끝을 세워 그의 얼굴에 튄 물기를 닦아 주었다. "2주라면 효과가 더 확실할 텐데." 보트의 속력을 늦누기 위해 레버를 조금 뒤로 늦춘 드노이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집을 쳐다보았다. "나쁜 놈들, 감히 총을 쏘아 대다니 ! 캅페라에 갱들이 나타났다고 하면 대단한 스캔들이 되겠군. 파인 씨, 한 가지 말할 게 있소. 상황이 마무리되거든 우리 곧장 생장의 경찰서로 갑시다. 홀츠와는 더 이상의 거래는 없을 것이오." 그러고는 재킷으로 그림 두 점을 가리고 있는 사이러스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나머지 위작 하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나로선 더 기쁘겠 소." 사이러스가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니코, 당신이 할 일이 뭔지 알 만하죠?" 네덜란드인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사이러스 쪽으로 몸을 굽혀 캔버스 하나를 골라잡았다. 그것을 얼굴에 바짝 대고 한차례 입을 맞추고 난 다음 팔을 크게 뒤로 휘둘렀다가(그 바람 에 보트가 뒤집힐 듯 요동했다) 어깨너머로 그림을 내던졌다. 그림은 수면에 평평하게 뜬 채 부드럽게 까딱거렸다.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 여인 의 얼굴을 물결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니코가 제대로 골라잡았길 하늘에 빌어야지 ." 사이러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작품 해설- '프로방스의 작가'가 보여주는 '세잔느를 찾는 이야기' 이태동(문학평론가, 서강대교수) 대가의 예술작품이 처한 비극적 운명 시간을 초월해서 세계의 유명한 미술관에 걸려 있는 위대한 미술 작품을 보고 즐기며 감 상하는 것은 항상 기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과 인간의 신비스러운 존재 에 대해 깊은 사색을 가져다 주는 위대한 미술작품들은 예술가들의 끝없는 정신적 방황은 물론 인간 조건과의 처절한 투쟁과정에서 잉태되고 만들어진다. 예술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예술가들은 수없이 많다, 가령,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의 그림을 그렸던 미켈란젤로는 우리에게 예술가의 창조 적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무리 그림 속이지만, 한 사람의 인간인 미켈란젤로가 천지를 창조하는 작업은 얼마나 힘겨웠을까, 미켈란젤로는 여러 해 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 에, 그의 목은 반쯤이나 굳어져서 그는 여생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이러한 육체적 고통은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 미술가인 반 고흐의 신 경병적인 고통에 비하면 그래도 가벼운 것이라고 하겠다. 고흐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귀까 지 잘라 버린 것으르 유명하다. 그의 이러한 비극적 발작은 선천적인 유전병 때문일까, 아니 면 잡힐 듯 잡힐 듯했지만 끝내 잡을 수가 없었던 화상을 좇다가 지쳐버린 정신의 파산 때 문일까. 그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마저 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니, 필 자 역시 그에 대해 여기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가가 되기 전, 고흐가 칼이나 피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이 많은 인품을 가졌던 선교사였던 사실 때문에 전자보 다는 후자에 무게를 둘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인이자 일급 한국화가 였던 고 우향 박내현 화백이 "그림은 아픔이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처절한 그림 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러나 이것보다 더욱 더 큰 아픔은 그들이 창조한 작품들이 처하게 된 비극적인 운명이 다, 불행한 천재화가들이 불굴의 인간의지로 창조한 이른바 그들의 '자녀' 인 이들 예술작품 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인다. 가령, 이들 작품들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나 미국 국립미술관과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전시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필은 인상을 주 어 높은 찬사를 받기도 하고, 고관대작이나 대부호들의 저택에 걸려 있기도 하다. 경우에 따 라, 이 작품들은 무위도식하는 벼락부자들의 창고에 갇혀 있기도 하지만, 이곳은 습도조절이 잘 된 창고이기 때문에, 민초들의 찌든 삶의 냄새로 고생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만일 고흐가 오늘날 뉴욕의 소더비 경매장 같은 데서 자신의 작품이 엄청난 거금 에 팔리는 광경을 지하에서 지켜본다면 그의 기분은 어떠할까. 생전에 그의 그림을 이발소 그림 취급도 하지 않던 파리의 화상들이 뒤늦게 그를 천재로 떠받드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예술혼의 사후 역전승' 이라고 쾌재를 부를 법도 하지만, 그런 속된 말들을 듣기 싫어 생전 에 한쪽 귀를 잘라버린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고흐의 '자녀' 들을 '입양' 시키고 있는 사람들은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했던 친구 고갱이나 동생 테오와는 전혀 핏줄이 닿지 않는 이방인들이다. 물론, 이를 아프리카의 쿤타 킨테가 노예선에 실려 '문명사회'의 노예 경매시장에 서는 것으로까지 비유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 명화들을 둘러싼 소란스러운 법석이 작품의 예술성보다는 그 작품을 소유 한 데에서 오는 명예나 투자가치에서 비롯된다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정도에만 그쳐도 지하에 잠든 화가들의 꿈자리가 얼마나 편할까. 많은 명화들이 범죄 적인 암거래 조직들의 손을 거쳐 외국으로 밀반출되기도 하고 원작과 똑같은 모조품이 성행 하기도 하니, 모양새만 다를 뿐 대가들의 고통스런 예술혼은 필로폰이나 위조지폐 취급마저 받고 있다. 프랑스씬보다 더 프로방스를 사랑하는 작가 피터 메일 피터 메일의 -세잔느를 찾아서-는 바로 후기 인상파의 거장인 프랑스 화가 폴 세잔느 (1839 - 1906)의 작품을 위조해 거금을 챙기려는 미술품 거래업자와 이를 추적하는 한 사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태생인 세잔느는 고흐처럼 생전에 그림 한 장 팔지 못할 정도로 인 기가 없진 않았으나, 대체로 화상들의 주목을 끌 지 못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는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기에 말년에는 고향에 칩거하다시피 하며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잔느가 사후에 큐비즘(입체파)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게 되자 그가 남긴 작품들 도 피카소의 인기에 실려 끝간 데 없이 치솟았다. 생전에 그의 작품을 쉰 떡 보듯 밥 맛 없 다는 표정을 짓던 화상들이 새삼 입맛을 다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미술품의 위작 거래에 얽힌 흑막을 파헤치려는 본격적인 범죄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프랑스인보다도 더 프랑스를 사랑하는 한 영국 출신 작가의 프랑스 에 대한 애정을 담은 성격이 짙다. 피터 메일은 1939년 영국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서 대학을 졸 업하는 등 다국적적인 삶을 살다 마침내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프랑스를 사랑했고, 특히 프로방스 지방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가 프로방스에서 제대로 짐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이 지방의 풍경과 인정을 소재로 쓰기 시작한 -프로방스에서의 1년-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메일은 그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지, 그 후에도 -언제나 프로방스-라는 속편 을 내놓았고, -세잔느를 찾아서-도 그것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세잔느를 찾아서-는 소설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프로방스에서의 1년-과는 다르지만, 이 작품 역시 메일이 가장 프로방스적인 작가로서 그곳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메일의 프로방 스 사랑이 단순한 풍경과 인정의 차원을 넘어 프로방스 예술인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한 것 이자, 글쓰는 세잔느가 활자라는 물감으로 '세잔느가 있는 풍경' 이라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그림이나 범죄 이야기 못지않게 프랑스의 풍경과 음식 이야기가 많이 차와서 프랑스의 풍물기 같은 느낌마저 준다. 얼핏보아 그는 프랑스의 미술보다 그들의 입 맛의 예술이라고 할 미술을 더 사랑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영국계 작가의 프랑스 사랑 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국 사치에 대한 염증으로 이어진다 그가 가지고 있는 미국문명 에 대한 혐오는 이미 -프로방스에서의 1년-에도 잘 나타난 바 있다. "유럽공동체가 이루어지면 프로방스는 유럽의 캘리포니아가 될 것 이라고들 말한다. 나로 선 그들의 예측이 틀리길 바란다. 식이요법에 미친 사람들이 더블니트 조깅복을 차려입고 생수를 마시려고 몰려 올 것이고, 수영장 옆엔 무선 전화가 설치되고, 테니스 코트 옆에는 거품목욕기가 들어설 게 눈에 선하기에 ... ..." 그는 -세잔느를 찾아서-에서 이런 인정에 유난히 추운 겨울날씨까지 곁들여 뉴욕을 범죄 만이 무성할 뿐 메마르고 검고 추운 도시로 그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 영국계 작가는 18세기 에 있었던 미국 독립전쟁을 되새기듯 미국을 미워할 뿐 19세기에 있었던 나폴레옹전쟁은 모 른다는 어투다. 그러나 메일에게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비롯해 영국과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어 온 반면, 미국은 한때 집안 싸움은 했지만 앵글로 색슨계의 한 식구라는 등의 족보 설명은 무의미하 다. 이 코스모폴리탄적인 작가에게는 영국 그 자체도 여권의 한 칸에 써 넣는 단어의 의미 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그가 스치듯 보여 주는 영국 풍경이 이를 말해 준다. 주인공이 찾아다는 램 프리 경의 집안 모습은 고풍스러운 저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집안사람들 마음씨는 아일랜드 영화의 빈촌 풍경처럼 메마르기만 하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램프리 경부터 하인까지 모두 비정상이다. 그것은 얼핏 에밀리 브 론테의 -폭풍의 언덕-같은 작품의 등장인물들과도 다른 이방인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것 들은 모국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보낸 글처럼 먼 곳의 풍경을 담은 것이다. -남부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경쾌한 모험 이야기 사실, 그는 세잔느처럼 프로방스 출신의 작가다. 세잔느는 타향을 떠돌다 고향인 프로방스 에 정착한 반면, 메일은 세계를 떠돌다 이역인 프로방스에 정착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 과할 뿐이다. 세잔느는 프로방스의 풍경이 좋아서 프로방스에 정착했고, 메일은 프로방스의 풍경과 인정을 좇아 그곳에 정착한 것이다. 메일은 프로방스의 작가일 뿐 아리라, '인상파적인 소설가' 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국 제적인 범죄 조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전율적인 플롯과는 달리, 살상이 한 건도 없다. 살상은커녕 상처도 입지 않는다. 대부분의 범죄 소설이 악당들의 처절한 최후라는 피비린내나는 요리를 후식으로 삼는 것 과 달리, 이 소설에서는 그들이 그저 낭패당한 표정만 짓는다. 아니 그보다도 이 소설에는 원래 '악당' 이없고, 그저 '욕심많은 사람' 정도가 등장한 셈이다. 따라서 살인 청부업자 파라두도 어딘지 어리숙하고 순박할 뿐이어서 그 모습은 세잔느의 (성 안트완의 유혹)을 연상케 한다 숲속에서 나녀들이 노닐고 있는 이 그림의 한 구석에는 이를 훔쳐보는 듯 한 사나이가 서 있다. 그림의 주제와 상관없이 부랑아 같은 파라두 역시 그런 정도의 부류로만 보인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 이 소설은 위대한 미술가들의 고통스러운 창조적인 삶의 소산인 미술품들이 처한 운명을,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한 경쾌한 모험을 밑그림 삼아 희비극적인 터치로 그린 이야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