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프롤로그 프롤로그 “메스.” 의사의 목소리는 마치 기계가 내는 신호음 같았다. “가제.” 이구찌는 수술실 안을 신기한 듯이 둘러보았다. TV나 영화에서 자주 본 수술 장면과 하나도 다를 것 없었다. 심장 고동을 보여 주는 오실로스코프는 삑- 삑- 삑, 하고 규칙적 으로 울리고 있다. 만약 이 소리가 ’삐’ 하고 울리게 되면, 그 것은 한 목숨의 끝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리는 거의 없겠지만. “땀 좀 닦아 줘.” 마스크 너머로 들려 오는 의사의 목소리는 다소 분명치 않았으나 간호사는 익숙한 솜씨로 의사의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닦아 냈 다. ‘늘 저렇게 땀을 흘리나. 아 참,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 하고 이구찌는 생각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수술대 위의 여자를 뚜렷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구찌에게 보이는 것은 투명하도록 하얀 다리뿐이었다. 그 다리 는 정말 늘씬하고, 도기처럼 매끈했다. ‘오늘 여자가 가장 괜찮군. 이구찌는 잠시 히쭉거렸다. “바늘.” 의사가 구슬땀과 함께 살짝 한숨을 내뿜었다. “잘 해, 엉.” 이구찌가 말했다. “그 여잔 형님 여자라구.” “조용히 해 주십시요.” 의사는 애써 냉담하게 말했다. 이구찌는 조금 불끈해져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네 녀석의 목숨줄을 잡고 있단 말이야. 그래, 여기선 네가 멋 대로 굴 수 있다. 나중에 꼭 보답해 주지. “맥박은?” “정상입니다.” 오히려 간호사 쪽이 목소리는 안정되어 있었다. “혈압을 잘 봐 줘.” “예.” 간호사가 움직이자, 반사적으로 이구찌는 가지고 있던 경기관총 을 다시 고쳐 쥐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이상 없습니다.” “좋아.” 의사는 크게 숨을 쉬었다. “가위 좀 가져다 주지 않겠나?” “예.” 간호사는 의사의 등 뒤를 돌았다. 그 때 노크도 없이 병실문이 열렸다. “형님.” “아직 안 끝났어?” 가죽 점퍼를 걸친 30세 가량의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몸집은 작지만,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체구는 다소 위압감을 풍긴다. 두 터운 눈썹 아래 빛나는 두 눈이 매섭다. 이구찌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간호사 손에 쥐어져 있던 메스가 의사 손으로 넘어갔다. 메스는 소리 없이 수술복 소매 안 으로 밀려들어갔다. “밖으로 나가 주십시요. 여긴 살균되어 있는 곳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사내는 잠시 입술을 씰룩거리듯 웃더니 다시 문을 열고 나가며 이구찌에게 말했다. “잘 지켜.” “…아직, 멀었나?” 이구찌가 물었다. “30분 정도 걸릴 듯합니다.” 이구찌는 의자를 끌어당겨 문 앞에 놓고 앉았다. 묵직한 기관총 을 무릎 위에 내려 놓는다. 이것들이 섣불리 딴 짓을 할 리는 없다. 마누라와 아이를 인질로 잡아 두었으니 얌전히 굴 수밖에. “자 이제 봉합을 할 차례야.” “예.” 이구찌는 간호사의 짧지만 자신의 업무에 익숙한 말투에 목덜미 의 근육을 팽팽히 당겨 놓았던 긴장의 끈이 다소 느슨해짐을 느 꼈다. 앞서 한두 사람의 경우도 의사가 그렇게 말하자 곧, 수술이 끝났던 것이다. 이구찌는 오랫동안 참았던 하품을 쏟아냈다. 누군가를 감시한다 는 것은 여간 중노동이 아니다. 음악이라도 흐르면 그나마 나으 련만…. 삑- 삑- 삑…. ‘심장의 고동이 눈에 보인다니 묘하군.’ 컴퓨터라든가, 홀로그래프라든가, 그는 그런 것들을 아주 좋아했 다. 그게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지만 막연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 다. “제기랄 ….” 의미도 없이 이구찌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일어서서 힘껏 기지개 를 켠다. 기관총이 점점 무거워지는 듯하다. 2킬로 500그램, 기관 총으로서 그리 무거운 축은 아니지만 현재는 더 가볍고 빠르게 발사되는 타입이 유행이다. 이것은 중고품이니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단도 하나면 충분하 다. 식칼에 찔려 죽든, 중성자 폭탄을 맞아 죽든, 죽으면 다 똑같 다. 이 기관총은 말하자면 위협용이다. 솔직히 그는 아직 이걸로 사 람을 쏜 적이 없다. 물론 탄환은 들어 있지만, 유사시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의사는 능숙하게 손을 놀린다. 이전처럼 실과 바늘로 꿰매는 일 은 이미 없어졌다. 요즘은 고성능 접착제가 사용되고 있으나, 여 전히 ’봉합’이라는 말이 습관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구찌는 문득 여자의 알몸을 엿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비닐 포로 거의 덮혀 있지만, 수술 부위는 하복부이다. 혹시라도 보일 지 모른다. 그는 총구를 아래로 향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의사가 얼굴을 들 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아아, 수고했소.” 이구찌는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이 의사는 매우 솔직했다. 아 니 솔직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처자를 인질로 잡혔고, 눈앞에 기관총 총구가 있다면 솔직해지지 않을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뒤를 부탁해.” 의사는 짧게 숨을 내쉬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예.” 간호사가 떨리는 손길로 비닐을 젖혔다. 이구찌는 엉겁결에 침을 삼켰다. 의사가 등 뒤로 돌아섰는데도 이구찌는 깨닫지 못했다. 다만 눈 앞에 펼쳐진 여인의 몸이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했다. 무심코 수 술대 쪽으로 한발이 나아갔다. 바로 그 순간이다. 돌연, 차가운 물체가 이구찌의 목에 닿았다. “움직이면 메스가 네 목을 갈라 버린다!” 이구찌는 일순, 하얗게 질렸다. 마치 온몸이 얼어 붙은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명한 공포감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지 알아챌 수가 없었다. “뭐야?”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이후에야 뒤를 돌아보려 한다. “움직이지 맛!” 의사의 손이 엉겹결에 미끄러졌다. 그 순간 이구찌의 단단한 목 에 한 줄기 붉은 선이 달린다. “새꺄!” 이구찌가 기관총을 들어올렸다. 메스가 목줄기를 깊숙하게 찔러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이구찌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 고 있었다. 짧은 발사음과 함께 기구선반의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다. 이구찌 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이구찌가 두세 발짝 뒷걸음질쳤다. 쓰러지 면서 손가락은 또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간호사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간호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넘어진다. 수술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아까 들어왔던 가 죽 점퍼의 사내가 권총을 쥔 손을 똑바로 뻗고 냉정하게 걸음을 멈췄다. 의사가 돌아보았다. “이 짜식 ….” 사내는 민첩하게 실내 상황을 파악했다. 의사는 재빨리 수술대 위의 여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손에 쥐고 있던 메스를 번쩍 쳐 들었다. 수술대 위에 달린 조명에 비쳐 메스는 시퍼런 불빛을 내 품었다. 그때 총성이 거푸 세 번 울렸다. 의사는 메스를 꼭 그러쥔 채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사내는 몇 초밖에 안 되는 잠시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 다. 자신이 쏜 것이 과연 사람인지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서둘러 이구찌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이미 숨은 싸늘하게 끊어져 있었다. 사내는 권총을 벨트에 끼우고, 기관총을 거두어 겨드랑이에 껴안는다. … 수술실 안은 조용했다. 심장의 고동을 그리는 오실로스코프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삑삑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관총을 고쳐잡고, 빠른 걸음으로 수술실을 나갔다. 잠시 후, 멀리서부터 기관총 발사음이 들려왔다. … 그 후, 고요함만이 병실 주위를 적막하게 흘렀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1> <계엄령 1>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깨어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이제 동경역이 가까워졌옴을 알지만 졸음에 겨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열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는 모양이다. “니노미야씨. 니노미야 구니꼬씨.” 문득 차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온 것이 자신의 이름임을 깨닫자 잠은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무슨 일이지? “전화가 와 있으니 가까운 전화 코너로 가십시오.” 니노미야 구니꼬는 눕힌 의자를 바로하고 일어섰다. 통로를 지나 플라스틱 문이 붙은 전화 코너로 들어갔다. “니노미야입니다.”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마치 기계음처럼 단조로운 교환수의 목소리다. 구니꼬는 차창 밖 으로 다가오는 마루노우치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탄 열차와 같은 리니아모터 초특급이 은빛 차체를 빛내면서 반대 편으로 스쳐 지나갔다. “구니꼬.” “아버지! 어떻게 이 열차인지 알았어요?” “그 정도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웃음끼가 섞여 있었다. “컴퓨터로 국철 탑승자 명단을 조회해 보았다.” “위법이잖아요.” “연줄이 있어. 그런데 혼자냐?” “물론이에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누구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모르는 남자라도 데리고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유감이네요.” “역에 미나까미가 마중 나갔다.” “휴우! 살았다. 짐이 무거워요.” “오는 길에 회사에 들려다오.” “좋아요.”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마침 점심때로군요.” “기다리마.” 구니꼬는 수화기를 놓고 전화 코너에서 빠져 나왔다. 자리로 돌 아오자 다시 한 번 소파에 푹 파묻힌다. “잠시 후 동경입니다.” 역시 기계음처럼 무뚝뚝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정차할 곳은 지하 4번 홈입니다.” 차체가 조금 기울어지고 창 밖으로 지면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열 차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하 터널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일등객실 은 텅 비어 있었다. 이 객실에는 그녀 외에 단지 세 사람밖에 타 고 있지 않았다. 열차는 홈에 미끌어져 들어갔다. 슈웃- 공기를 뽑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열차는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자기의 반발력으로 부상하는 리니아모터의 차체가 조용히 유도레 일에 들어가고 고무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홈에 선 사람들의 모습이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파노라마 를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손님들은 짐을 들고 출구 쪽으로 걸어갔지만 구니꼬는 앉은 그대로였다. 차체가 조용히 정지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운전 기사 미나까미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나와 줘서 고마워요. 짐은 위에.” “알겠습니다.” 양복에 넥타이 차림의 미나까미는 40세 정도지만 상당히 침착해 보인다. 탄탄한 체격을 지닌 그는 그녀가 학교를 오갈 때는 호위 를 맡기도 했다. 미나까미는 선반문을 열고, 보스톤 백을 내렸다. 시속 오백 킬로가 되는 리니아모터 초특급은 차체의 강도라든가 설비가 비행기에 가까운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먼저 열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미나까미가 뒤따라 걸어오며 물었다. “어디에 가셨던 겁니까. 아가씨.” “비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모처럼의 혼자 여행이었거든 요.” “그랬군요.”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인 어른께서 걱정하셔서 ….” “과잉보호예요. 이젠 나도 다 컸다구요.” 구니꼬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아버지 회사에 들리는 거죠?” “예. 그렇게 분부받았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어차피 저녁이면 만날텐데.” “요즘 주인 어른께선 귀가가 늦으시거든요.” “그렇게 바빠요?” “공안위원회 모임이 하루 걸러 있으셔서.” “그 정도예요…?” 그들은 상점이 빼곡히 들어선 지하도를 걸어갔다. 상점가는 쇼핑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구획마다 경찰 모습이 보인다. “무슨 일이죠? 경찰들의 경비가 삼엄한데요?” “지난 주 여기에서 폭탄 소동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요? 대형 사고였나요?” “아뇨. 그저 장난이었던 모양입니다.” “뭐야. 시시하게 ….” “함부로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상점가가 끝나고 둥근 의자가 늘어선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 한 쪽에 지하 주차장이 있었다. “잠깐만!” 누군가의 외침에 두 사람이 멈추어 서니, 경찰이 걸어온다. 이제 겨우 스무 살쯤 됐을까? 앳된 얼굴이다. “그 가방 좀 봅시다.” 퉁명스럽게 말을 건넨다. “뭐예요? 도대체.” 구니꼬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묻어있다. “어서 열어 보시오.” “자, 보세요.” 미나까미가 구니꼬를 막아서서 가방을 열어 보였다. 경찰이 안을 뒤적거렸다. 구니꼬는 경찰을 째려보면서 서 있었다. “이건 ….” 경찰이 비닐 봉지를 꺼냈다. “속옷이에요. 꺼내 볼까요?” 구니꼬는 뺨을 붉히면서 말했다. “아, 그래요? 신분증 좀 봅시다.” 미나까미가 급히 윗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이분은 국가공안위원이신 니노미야 다께야씨의 따님입니다. 나 는 운전수이고….” “아, 그렇습니까?” 급히 경찰은 허리를 바로 폈다. “실례했습니다. 미리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면 ….” “가도 됩니까?” “예. 요전에 여기서 폭탄 테러 사건이 있어서 ….” “아저씨. 가요.” 구니꼬는 주차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불쾌해.” 벤츠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차장 지하도를 빠져나오자 지 상 고속도로로 미끄러지듯 진입한다. 그녀는 뒷좌석에서 숨을 돌 렸다. “회사까지 15분 정도면 갑니다.” 그녀는 마루노우치 초고층 빌딩가를 바라보았다. 니노미야 구니꼬는 열아홉 살이다. 사립 여자 대학교 1학년이다. 작은 몸집이지만 날씬하고 다리가 길었다. 하얀 정장 차림에 어 깨 아래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열린 차창으로 스 며드는 초가을 바람에 흩날린다. 고생 없이 자란 소녀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지닌 단정한 얼굴이 다. 자세히 보면 눈이 조금 짝눈이지만 검은 보석처럼 생기 있게 빛나고 있다. 그녀는 앞좌석 등에 붙어 있는 수화기를 들어 단추를 눌렀다. “M 통신 공업입니다.” “개발부 시게마쯔씨 좀 부탁합니다.” 잠시 후 상대가 나왔다. “여보세요.” 조금 초조한 목소리다. “회사로 자꾸 전화하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어머니.” 구니꼬는 쿡쿡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이봐. 그렇게 불친절하면 어떡해!” “아, 너구나! 어머니와 방금 전화를 한 끝이라 … ,그건 그렇고 넌 언제 돌아왔어?”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지금 막 돌아왔어.” “여행은 어땠어?” “그냥 그래. 2주간 혼자 산에 틀어박혀 있었어. 덕분에 남자에 굶주려 있어. 나 오늘 밤 만날 수 있어?” “오늘 밤은 안 돼. 밤늦도록 실험이야.” “늘 바쁘시군.” “미안. 내일이라면 ….” “내일은 누군가와 결혼해 있을지도 몰라.” 구니꼬는 장난스레 협박조로 말하며 웃었다. “그럼 또 걸게.” “그런데 말 ….”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시게마쯔 다꾸야는 말을 끊었다. “뭔데?”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내일 만나서 얘기하지.” “응. 알았어.” “그럼 끊을게.” “그대 애인, 첨단 현미경께도 안부전해줘.” 끊어지기 전에 시게마쯔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그녀 에게는 무엇보다도 멋진 음악으로 들린다. 그러나 뭔가 의논할 일이 있다는 말과 평소와 달리 신중해진 듯한 그의 어조에 그녀 는 자꾸 신경이 쓰였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2> <계엄령 2> 벤츠가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벌써 아버지의 회사 빌딩이 눈에 들 어온다. 벤츠가 빌딩 정문 계단에 닿자 구니꼬는 미나까미가 문 을 열어 줄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빌딩 앞은 광장으로 되어 있다. 광장이라 해도 사람 모습은 없었 다. 단 몇십 명일지라도 집회가 엄격히 규제되어 있어서 광장은 어디나 한산하다. 신고하지 않은 집회는 즉시 해산되고, 집회에 가담한 사람은 체포된다. 신고제가 허가제로 바뀌고 나서 집회는 완전히 관변 단체들만이 독점하고 있었다.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 고까지 집회를 갖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구니꼬는 광장을 가로질러 빌딩으로 들어갔다. 빌딩은 1층은 홀 을 중심으로 상점이 늘어서 있고, 지하에서 2층까지는 온통 레스 토랑과 상점이 들어서 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이전에는 결코 대기업이라고 할 수 없었던, 이 니노미야 상사가 급격하게 성장하여 순식간에 업 계의 선두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무기 수출이 인정되고 나서 이다. 처음엔 ’죽음의 상인’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 만 지금은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벽에 걸린 두 개의 거대한 초상화를 쳐다 보았다. 하나는 아버지 니노미야 다께야의 것이고, 또 하나는 다 끼 유이찌로 수상이었다. 현재 일본을 움직이고 있는 남자다. 구니꼬는 실제로 다끼 수상을 만난 적은 없지만, 이렇게 그림으 로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아버지와는 스케일이 다른 인 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화가는 애써 아버지를 위엄 있게 그려 놓았지만, 아무래도 억지 를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 초상화를 보면 소 흉내를 내며 배 를 부풀리다 죽어 버린 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난다. 다끼 수상은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묵직한 위엄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왔다. 구니꼬는 30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가벼운 소리를 내며 금방 30층에 그들을 내려 놓았다. 번쩍번쩍 윤이나는 바닥, 이 공간 안에 사장실과 개인실이 있다. 자택은 물 론 다른 곳에 있지만, 일 형편에 따라 여기에 묵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버지가 여기에 묵을 때는 늘 여자와 함께라는 사실을 그 녀는 알고 있다. 비서실 문을 노크하자, 붕 소리가 나더니 감시카메라가 구니꼬 쪽을 향한다. “안녕하세요.” 구니꼬는 미소를 지었다. 찰칵, 자물쇠가 풀리자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나뭇결을 살린 아름다운 문이지만 사이에 철판이 끼워져 있다. 무기 수출을 주된 업무로 하고 있으므로 과격파 테러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엘리베이터 앞의 넓다란 로비도 별실 경비원이 항상 대형 멀티 비디오로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들어가니 아버지의 여비서 나가모또 교오꼬가 일어섰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40세 정도인 베테랑 비서로, 한때는 구니꼬도 교오꼬와 같은 전 문 비서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은 적도 있었다.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상냥한 성격으로, 흔히 전문직 여성에게 있기 쉬운 딱 딱함이 없었다. “아버지는?” 구니꼬가 물었다. “지금 손님과 말씀중 입니다. 곧 끝나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구니꼬는 소파에 앉았다. “아가씨가 안 계시니까 사장님께서 몹시 쓸쓸한 모습이었어요.” “저도 이제 제 생활이 있어요.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에요?” “저도 잘 모릅니다.” “나가모또씨도 모르는 게 있어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비서실은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언제나 그녀의 책상 위에는 서류하나 놓여있지 않았다. 이미 사무실에서 종이가 사라진 지는 오래 됐 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깨끗했다. 교오꼬의 와인빛 매니큐 어의 가느다란 손끝이 책상 모서리를 약간 신경질 적으로 두드리 고 있었다. 교오꼬를 대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그녀의 손은 여자인 자기 가 보기에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갑자기 이 완벽해 보이는 여비서를 한번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잔 적 있어요?” 구니꼬가 짖궂게 웃으며 말했다. “예? 뭐라구요?” “전부터 한번 물어 보고 싶었어요.” “유감이지만, 전 사장님에게는 걸어다니는 메모 용지에 불과할 뿐이에요.” 교오꼬가 가볍게 받아 넘긴다. “아버지는 걸어다니는 수표뭉치이구요?” “어휴….” 나가모또 교오꼬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웃었다. 구석 문이 열렸다. 니노미야 다께야가 얼굴을 내밀고 구니꼬를 맞았다. “언제 왔느냐?” “지금 왔어요.” 니노미야의 얼굴이 사업가에서 부드러운 아버지로 돌아왔다. 그 때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사장실에서 여자 세 명 이 나왔다. “저희들은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구니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앞에서 걸어오는 여자는 구니꼬 또래이든지 기껏해야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늘씬한 키에 차가 움이 느껴지는 미인이었다. 구니꼬의 시선을 뺏은 것은 얼굴보다도 세 사람의 복장이었다. 완전히 똑같은 제복이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듯한 빨간 상의 에, 검은 스커트와 부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폭이 넓은 가죽 벨트와 어깨부터 비스듬하게 걸친 홀스타에 넣은 소형 권총이었 다. 가슴에는 활과 화살촉을 디자인한 배지가 빛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가모또 교오꼬에게 가볍게 인사하더니 활기찬 걸음 으로 문 쪽으로 걸어간다. 나가모또 교오꼬가 문을 열어 주고 엘 리베이터 앞까지 뒤따라 나갔다. “점심 먹어야지? 잠깐 여기서 기다리거라.” “예.” 니노미야가 사장실로 사라지자 나가모또 교오꼬가 금방 돌아왔 다. “나가모또씨. 방금 그 사람들….” “예. ’프로메테우스의 딸’들이죠. 앞에 있던 여자가 대장이랍 니다.” “그 여자가 대장이라고?” 그녀는 세 사람이 사라진 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봤어요. 소문은 들었지만…. 웬지 무서워요. 여자가 총을 갖고.” 구니꼬는 소파에 몸을 맡겼다. ’프로메테우스’. 정식으로는 ’ 프로메테우스의 딸’이라고 들었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묘연한 17,8세에서 20세까지의 소녀집단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소녀들의 자주적인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그 제 복과 특별히 휴대를 허락받은 권총만 보더라도 뒤가 있는 조직인 것이 확실했다. 국회에서도 문제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여당측 질문이었다. 거기 에 대해 다끼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의 조직이다. 다소 행동이 지나치더라도 눈감아 주고 싶다.” 이제 야당이란 것은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게 현실이었다. 몇몇 의석을 주고, 의회제도의 형태를 갖추는 구색용에 지나지 않았다. “나가모또씨. 저 여자들 뭐하러 왔어요?” 구니꼬가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요. 저에게도 아무 말씀 없으셔서….” 사장실에서 니노미야가 나왔다. “기다리게 했구나. 자, 나갈까?” “사장님. 어디로 가십니까?” 나가모또 교오꼬가 물었다. “음… 이 애가 가는 곳.” 그렇게 말하고 니노미야는 웃었다. “전화 오면 낮잠중이라고 말해 줘.”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엘리베이터를 타자 니노미야는 20층 버튼을 눌렀다. “20층에 식당이 있었어요?”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무슨 일?” “괜찮으니까 어서 와.” 20층은 구니꼬도 와 본 적이 없는 곳이다. 특별히 중요한 회의나 극비를 요하는 모임에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무기 수출이란 군사 기밀에 저촉되는 점도 있으니 이런 외진 층에 있는 거겠지. 하고 구니꼬는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건장한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이 분은?” 한 명이 구니꼬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 딸이야.” “실례했습니다. 가시죠.” 복도를 걸어가니 감시카메라가 끊임없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쫓 고 있었다. “마치 CIA 같군요.” “절대 도청당하지 않게 해야 하니까. 이 층은 모든 게 특별해.” “난 이런 데보다 레스토랑이 좋은데.” 구니꼬가 불평했다. “라면이라도 괜찮아요.” “여기서 식사를 하는 거야. 손님과 함께.” “싫어요. 설마 선보일 마음은 아니겠죠.” “이런 곳에서 선을 본다면 상대방이 도망가지 않겠어?” 니노미야가 뾰루퉁해진 딸이 귀여운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여기야.” 문 앞에 또 사복 차림의 보디 가드 같은 남자가 서 있다. 니노미 야를 보자 인사를 하더니 문을 열었다. 구니꼬는 좁고 긴 방으로 들어갔다. 왕실풍으로 장식한 우아한 식당 구조다. 흰 천으로 덮인 테이블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늦었습니다.” 니노미야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배어있었다. “딸 구니꼬입니다.” “아!” 그 남자는 반갑다는 듯이 얼굴을 펴면서 미소지었다. “나는 수상 다끼다. 점심이나 같이 하려고.”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3> <계엄령 3> “비가 오는군.” 가죽 점퍼 차림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국도변에 위치한 교외 레스토랑 중 하나, 한때는 몇 종류나 난립 했지만 지금은 두 개의 체인점이 거의 독점한 상태이다. 밖은 옅 은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기다리셨습니다.” 웨이트레스가 식사를 가져왔다. 그리고 콜라와 컵 세 개를 늘어 놓았다. “자, 마실까.” 사내가 말했다. “콜라보다는 술이 생각나는 곳인데….” 마주한 좌석에 두 명의 여자가 앉아 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한 싱싱한 젊음을 풍기는 여자가 쯔브라 야 교오꼬다. 그 옆의 27,8세쯤으로 보이는 가와이 노부꼬는 의지 가 강해 보이는 눈매를 하고 있다. “우리 건배해요.” 쯔브라야 교오꼬가 컵에 콜라를 따르기 시작했다. “요다씨가 선창하세요.” “좋지.” 요다는 조금 곤란한 듯이 웃으며 컵을 잡았다. “근데. 뭐라 하면 좋을까?” “’성공을 빌면서’가 좋지 않겠어요?” 가와이 노부꼬가 한껏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제안했다. “그래. 세 사람의 행운과 우리들 계획의 성공을 빌면서!” “자, 들지.” 요다는 그렇게 말하고, 두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 시 묘한 긴장감과 침묵이 흘렀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요다씨….” 가와이 노부꼬가 요다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당신이 괴로워 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도 다 알고 하는 일이니 까.” “그래요.” 쯔브라야 교오꼬가 잽싸게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면서 맞장구쳤 다. “요다씨 답지 않아요.” 요다는 조금 씁쓸한 듯이 웃었다. “내 얼굴이 알려지지만 않았더라도….” “남자는 의심 받아요….” “여자가 유리해요.” “어쨌든, 부디 초조해 하지 말아줘.” 요다는 그렇게 말하며 가게 안을 둘러본다. 어중간한 시간탓인지 한산하다. 누군가 엿들을 염려는 없지만 요다는 조금 소리를 낮 췄다. “폭탄은 최후 수단이야.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와 줘. 몸 속에 감 춘 폭탄은 다시 꺼낼 수도 있어.” “잘 알고 있어요.” 가와이 노부꼬가 식사를 하면서 끄떡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렵지 않겠어요? 비록 다른 방법으로 다끼 수상을 죽인다 하더라도 즉시 발견되겠죠.” “실패하면 안 돼. 다른 방법은 생각하지 말아. 모처럼의 폭탄이 쓸모 없게 돼.” 연장자답게 가와이 노부꼬의 말투는 담담했다. “너희들 몸 속에 묻어 놓은 폭탄은 심장 고동이 계속되는 한 폭 발하지 않아. 만약 심장이 정지하면 5초 후에 폭발한다.” “그 때는 죽는 거야.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고….” 쯔브라야 교오꼬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5초야.” 가와이 노부꼬는 잠시 생각하더니, 요다를 보면서 의미심장한 질 문을 던졌다. “만약 근처까지 가서 사살당한다면 즉시 보디가드가 수상을 어 딘가로 피신시키겠죠. 5초 동안 얼마만큼 멀어질 수 있을까?” “폭탄은 강력해.” 요다가 말했다. “50미터 이내에 수상이 있으면 성공할 거야.” “그 다음은 운에 맡겨야겠군요.” 쯔브라야 교오꼬가 말했다. 식사가 묵묵히 계속되었다. 15분 정도로 식사가 끝나자 가와이 노부꼬가 일어섰다. “그럼 난 가보겠습니다.” 요다도, 쯔브라야 교오꼬도 갑자기 말을 잃은 듯했다. 가와이 노 부꼬가 내민 손을 요다와 쯔브라야 교오꼬가 잡았다. “그럼.” 가와이 노부꼬는 잠시 웃어 보이고 먼저 음식점을 나갔다. 빗속 을 내달아 자신의 차로 향한다. 빨간 소형차 안으로 그녀의 모습 이 사라지자 곧, 차도 빗속으로 사라져갔다. “좋은 사람이군요.” 쯔브라야 교오꼬가 말했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몰라.” “너희들을 자꾸만 죽음으로 몰아 넣는구나, 나는….” “이제 그만해요.” 그녀의 손이 요다의 손을 잡았다. “몸은 괜찮아?” “좀 가려운 것 같긴 해요.” “거부 반응이 걱정이야.” “괜찮아요. 당신은 거부 반응이 없었나요?” “나야 무….” “여자에 대한 거부 반응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쯔브라야 교오꼬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멋졌어.” 요다는 쯔브라야 교오꼬의 가슴에 입맞추며 말했다. 침대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약간 어 슴프레한 모텔 방이었다. “이제 갈까요?” 교오꼬는 벌거벗은 채로 침대를 빠져 나와 불을 켰다. “아직 저녁도 아닌데 어둡네요.” “샤워할까.” “그래요. 상쾌한 기분으로 헤어지고 싶어요.” “시계가 거기 있지?” “예? 아, 이거요.” 그녀는 테이블 위의 시계로 손을 뻗쳤다. “아, 어떡하지. 휴지통에 떨어져 버렸네.” “이봐, 아무리 싼 물건이지만 심하네.” 요다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구나.” 시계를 주우려다 교오꼬의 시선이 휴지통 속의 종이뭉치에 멈췄 다. “이것 좀 봐요!” 교오꼬가 종이뭉치를 펴서 요다 눈앞에 내밀었다. <전국지명수배범>이란 10명의 얼굴 사진 가운데 요다의 얼굴이 있었다. 구겨진 전단 속의 요다 얼굴은 한층 험상굿어 보였다. “아까 이 방으로 안내한 모텔 종업원이 치운 거 아냐? 어서 옷 을 입어!” 교오꼬는 당황해서 옷을 입었다. 요다는 바지만 꿰차고 창쪽으로 다가가 커텐을 들추고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부연 빗속에 검은 그림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5, 6명. “경찰?” 교오꼬가 물었다. “그래.” “어떡하지?” 요다는 셔츠를 머리부터 뒤집어 쓰며 말했다. “넌, 욕실 창문으로 나갈 수 있겠지?” “당신은?” 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빨리 나가.” 교오꼬를 밀어 보냈다. 욕실에 들어가자 교오꼬는 변기에 올라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 다. 곧바로 들판이다. “나갈 수 있어?” “글쎄….” “윗 창문틀을 잡고, 다리부터 빠져나가. 서둘러!” “요다씨….” “한가하게 이별할 틈이 없어.” 그래도 요다는 한번 더 교오꼬의 입술에 키스했다. 창에서 교오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문에 노크 소리가 난 것 은 동시였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4> <계엄령 4> 욕실의 물을 틀고, 요다는 방으로 돌아왔다. “뭐야?” 요다는 가방을 뒤적이며 물었다. “음료수 서비스입니다.” 모텔 주인 목소리가 났다. “잠깐 기다려요. 알몸으로 나갈 순 없잖소.” 요다는 기관총을 꺼내 들고 살짝 문으로 다가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걸쇠를 열었다. 그러고 나서 문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열렸으니 들어오쇼.” 그 말과 동시에 문이 세차게 열리고 경찰이 뛰어들어 왔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들판을 달리고 있었던 교오꼬는 총소리에 발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기관총이다! 총소리가 흩날렸다. 그리고 끊어졌다. 교오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뺨을 적시는 것이 비인지, 눈물 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구니꼬는 놀라 아버지와 다끼 수상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내가… ’프로메테우스’에?”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되어 있었다. 고급 요리가 겨우 목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맛을 느낄 수 없었 다. “프로메테우스는 수상께서 개인적으로 뒷받침하고 계신 조직이 야.” 니노미야가 말했다. “그래요?” 수상이 만들었다면 저 정도 힘을 가진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 다. “너에게 그 일원이 되어달라고 말씀하신다. 명예스러운 일이야.” 니노미야의 강요하는 듯한 어투에 구니꼬는 잠시 표정이 굳어졌 다. “하지만, 저는 아직 학생이고….” “대학에 다니는 것보다 더 나라를 위한 일이야.”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그렇군. 구니꼬는 비웃듯이 아버지를 곁 눈으로 쏘아 봤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은 어떤 거야? 라는 얼굴 이다. “그 조직은 어쨌든 멤버를 엄선해야만 해.” 수상은 아버지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그러나 대단한 남자다. 체 격도 크지만, 어딘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을 느끼게 한다. “왜, 그런 조직을 만들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수상이 말했다. “알 것 같아요.” “오, 그래….” “정치적인 목표는 회의를 통해 실현할 수 있어도 정신적 이념은 정책으로 밀어붙일 수 없어요. 그것을 그 사람들에게 대행시키고 있는 거라 생각해요.” 수상이 두세 번 눈을 깜박거리며 구니꼬를 보았다. 니노미야가 불안한 듯이 두 사람 얼굴을 재빠르게 바라보았다. “야, 머리 좋은 아가씬데.” 수상은 조금 웃으며 말했다. 니노미야가 안심한 듯이 표정을 풀었다. “그래, 아가씨 말대로야. 단지 이념이라기보다는 도덕이지. 지금 이 세상은 도덕을 이미 잃어버렸어. 지금은 아예 흔적도 없어졌 지. 나는 그것을 되찾고 싶은 거야.” “그렇지만 저는 별로 그 역에 적당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구니꼬, 무슨 말을….” “아니, 괜찮아.” 수상이 가로막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해. 프로메테우스는 내가 뒷받침하고 있는 조직이긴 하지만, 독립성은 보장되어 있지. 이해할 수 있을 까? 결코 내가 말하는 대로만 움직이지는 않아. 행동 결정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이루어지고 있어. 그 점에 대해 나는 결코 불 만이 없다.” 구니꼬는 먹다만 디저트를 물끄러미 내려보면서 잠자코 있었다. “구니꼬.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겠니?” 니노미야가 서둘러 강조했다. “프로메테우스의 간부가 되면 수상의 신변 경호를 맡는 일도 있 어. 그만큼 사회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신용받는 일이야.” 구니꼬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수상을 보았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래.” 수상은 미소지었다. “거절당하지 않은 것만도 기쁘군. 즉석에서 승낙해 주었다면 오 히려 걱정했을 거야. 좋은 답변을 기대하고 있겠어. 어서 디저트 나 마저 먹자구. 재미 없는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구만.” 디저트를 먹으면서 구니꼬가 말했다. “프로메테우스에 들어갔을 경우, 사생활면에서 속박받는 일은 없을까요?” “그런 일은 없어. 그 때문에 충분히 조사해서 조직에 넣으니까. 충분히 사생활을 보장하지. 다소 바빠지고 시간을 뺏긴다고는 생 각하겠지만, 지금 멤버들 역시 거의가 학생이니까.” 구니꼬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빌딩 지하 2층, 특별히 설계된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타는 다끼 수상에게 니노미야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수상은 구니꼬에 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즐거웠다.” 달리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구니꼬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 면서 수상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럼. 니노미야씨. 다음 주 위원회에서 만나지. 그 때까지 아가 씨도 대답을 준비해 주지 않겠어?” 뒷말은 구니꼬에게 한 것이었다. “예.” 검은 괴물같은 차가 수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롤스로이스의 특별 주문품이다. 중장갑, 방탄 유리, 강력 타이어, 그리고 소문으로는 기관총도 어 딘가 장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꼭 옛날에 유행한 007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동차를 방불케 한다. 경호원차가 앞서 출발하자 수상전용차가 유유히 움직이기 시작한 다. 양옆으로 오토바이가 호위하고, 뒤에서 또 한 대의 경호원차 가 따라 움직였다. 주차장 통로는 지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지하 깊숙이 잠기고 있다. “이 도로, 어디로 통하고 있어요?” 차를 보내고 구니꼬가 물었다. “극비야.” 니노미야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짐작은 가겠지.” “아마 수상 관저겠죠.” 니노미야는 대답하지 않고 딸을 재촉하여 엘리베이터로 걸어갔 다. “프로메테우스에 들면, 자연히 그런 것도 알게 돼.” “아버지 희망이겠죠. 저를 이용해서 또 크게 돈을 벌고 싶은 욕 심?” “삐뚤게 생각하지 마.” 니노미야가 웃으며 말했다. “단지 수상의 신임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해. 그것뿐이야….” “제가 인질이군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다. 프로메테우스에 들면 너도 알게 돼. 여러 가지 얻는 게 있을 거다.” 니노미야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에 한 번 더 들를까?” “집에 돌아가겠어요. 짐 정리도 해야 하니까.” “그래. 엘리베이터를 타자.” 니노미야는 지하 1층과 30층을 눌렀다. “설마 거절하지 않겠지?” 지하 1층 일반 주차장으로 걸어나가는 구니꼬에게 니노미야가 다 시 한 번 다짐을 받으려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뒤돌아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생각해 보겠어요.” 문이 닫혔다. 수상 전용차 안에서 전화가 울렸다. 비서가 재빨리 수화기를 든 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수상 각하, 미네까와씨입니다.” 수상은 잠자코 수화기를 받았다. “다끼다.” “미네까와입니다.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좋은 소식인가.” “둘 다입니다.” “말해 봐.” 미네까와는, 정부 관계자라면 수상측 사람 밖에 접촉한 적이 없 는 인물이었다. 수상 직속 비밀 경찰장관인 것이다. 비밀 경찰의 존재는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부정되고 있지만 그 실체를 아는 사람들이 적 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 사실을 폭로하려고 하지 않 는다. 다끼 수상 이외 사람은 거의 모르는 일이지만 미네까와는 그의 소꿉친구이자 여동생의 남편이었다. “요다를 찾아 냈습니다.” “요다. 요다라면, 그 테러리스트….” “그렇습니다.” “그거 축하할 일이군.” “별로 축하할 게 못 됩니다.” 미네까와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 쪽에 정보가 들어오기 전에 지방 경찰이 습격했습니다. 요다가 반격하자 사살해 버린 겁니다.” “그거 유감이군.” “그렇습니다. 모텔에 있었는데, 함께 있던 여자는 놓쳐 버렸습니 다.” “누구인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습니다.” 잠시 이야기가 끊기고, 미네까와가 계속했다. “요전에 요다의 동생뻘인 이구찌가 어느 병원 수술실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나.” “의사와 간호사. 가족도 전원 사살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모릅니다만 요다는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겁니다.” “요다가 확실히 죽었는가?” “그렇습니다.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캐 내겠습니다만 유 감입니다.” “정보를 얻는 대로 또 전화를 주게. 나는 자네를 신뢰하고 있다 네.” “알겠습니다.” 수상은 수화기를 비서에게 건넸다. “오후 예정은?” “방위청 장관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퍼레이드 건이구만. 그 녀석은 너무 들떠 있어. 가라앉혀 줄 필 요가 있어.” “그렇습니까?” “매스컴도 아직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너무 눈에 띄게 움직이면 외국의 의심을 받을 거야.” 수상은 천천히 숨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수상 각하. 5분 후에 도착합니다만….” “알고 있어. 자는 게 아냐. 생각하고 있는 거야.” “예.” “이봐. 자네는 뭐가 좋을 거라 생각해?” “뭘 말입니까?” “내일이 아내 생일이야. 무얼 선물할까 생각하고 있어.” 수상은 그렇게 말하고 미소지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5> <계엄령 5> 신쥬꾸 중심부, 작년에 완성된 초고층 쇼핑 건물 ’샤트르’. 60층짜리 은색 원통형 건물은 멀리서 보면 창공을 찌를 듯한 나 이프 같았다. 저녁 6시가 되었지만 아직 하늘은 파랗고, 해 저물 때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나 남 아 있었기 때문에 구니꼬는 ’샤트르’ 의류 코너에 들러 옷들을 둘러 보았다. 마음에 든 원피스를 발견하자 선뜻 사기로 마음먹 는다. 입어보니 사이즈도 적당하다. “집으로 부쳐 주세요.” 구니꼬는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다. 은색 카드로, 표면은 본인 부 기록되어 있다. “알겠습니다.” 여점원의 태도가 조금 변했다. 대학생은 대개 그린 카드다. 은색은 고액 소득자가 사용하는 카 드다. 물론 구니꼬 자신이 소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재 력 때문이다. “구니꼬.”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본 그녀는 반가운 옛 친구의 얼굴을 보고 펄쩍 뛰었다. “마찌꼬! 야아- 보고 싶었어! 잘 지냈니?” “그럭저럭, 대학생활은 어때? 공부는 잘하고 있어?” “응.” 구니꼬는 여점원으로부터 카드를 받자, 마찌꼬의 팔을 절대로 놓 지 않겠다는 듯이 꽉 쥐었다. “자, 시간 있지? 차 한잔 해.” 이또 마찌꼬는 구니꼬와 어려서부터 중학교까지 쭈욱 한 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마찌꼬의 아버지가 전근하자 학교 를 옮긴 이후, 점차 사이가 멀어졌던 것이다. “마찌꼬, 지금 동경에 있어?” 엘리베이터로 찻집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면서 구니꼬가 물었다. “응.” “어째서 전화 한 통화 없었어?” “바빠서 말이야….” 마찌꼬는 약간 쓸쓸하게 웃었다. 구니꼬는 깜짝 놀랐다. 마찌꼬의 복장이나 핸드백 등 어디를 봐도 낡아빠진 것들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바깥 풍경을 환히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투명 엘리베이터가 정지했다. “어쨌든, 어딘가 들어가서 얘기하자.” 구니꼬가 재촉했다. “전부다 만원이잖아.” 마찌꼬는 오랫동안 걸어다녔는지 숨을 돌렸다. “참, 사람이 많네.” 구니꼬도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 수 없잖니. 자, 위로 가자.” “위라니?” “같이 가자.” 둘은 엘리베이터로 맨 위층까지 올라갔다. “레스토랑이야.” 마찌꼬가 말했다. “괜찮아.” 구니꼬는 근사하게 꾸며진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입구에 서 있는 지배인에게 미소지었다. “아, 니노미야씨….” “미안하지만 잠깐 차만 마실게요. 아래층이 꽉 차서.” “괜찮습니다. 자, 창가 자리로 가시죠.” 두 사람은 신쥬꾸 서문의 초고층 빌딩가가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마찌꼬, 뭐 좀 먹지 않을래? 나는 이따 약속이 있어서.” “괜찮아. 배고프지 않아.” “그럼 케이크 정도는 괜찮겠지? 케이크하고 커피요.” 주문하고 나서 구니꼬는 옛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기보다 대여섯 살은 더 먹은 것처럼 보인다. “지금 뭐하고 있어?” 구니꼬가 물었다. “일 하고 있어. 낮에는 점원, 저녁에는 이것저것. 웨이트리스나 애를 봐 주기도 해.” “밤낮으로? 아버지는?” 마찌꼬는 약간 얼굴을 숙이다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바깥 풍 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형무소에 계셔.” 구니꼬는 해 줄 말이 없었다. 마찌꼬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삼 킨 탓인지 불안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하고 이야기하기 거북하면 그만 일어나도 좋아.”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구니꼬가 말했다. “이야기 해 줘.” 마찌꼬는 피곤한 듯이 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오늘 네가 집을 나설 때부터 쭉 따라왔어.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바보….” 구니꼬는 마찌꼬의 손을 잡았다. “힘이 될 거야. 말해 봐.” “네 아버진 실력자이시잖아. 경찰 쪽 사람이나 훨씬 더 높은 사 람도 알고 계시겠지?” “응. 아마….” 구니꼬는 애매하게 수긍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아버진 어떻게 해서 잡히셨어?” 마찌꼬는 휴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기밀 누설이야. 스파이 용의로 몰렸어.” 구니꼬는 어렵겠구나고 생각했다. 살인이나, 상해죄면 모르겠는 데, 당국이 가장 민감한 것이 스파이 사건이다. “하지만 아버진 아무 것도 모르셨어.” 마찌꼬는 말했다. “단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복사를 했을 뿐이야. 그런데도….” “알았어.” 구니꼬가 대답했다. “쉽지 않은 일 같지만 알아볼게. 희망을 잃지 말고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고마워.” 케이크가 왔다. 두 사람은 잠시 옛날의 학생 시절로 되돌아갔다. “구니꼬, 그 때 그 사람하고는 아직 사귀고 있니?” “그 사람?” “언젠가 편지에 써 보냈잖아. 전기 기술자라 했던가?” 구니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전기 기술자라…. 그렇게 부르면 그 사람이 섭섭해할걸. 꼭 전 자공학 기술자로 불러 달라고 했지. 오늘 이따가 여기에서 만날 거야.” “그래? 그럼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냐?” “괜찮아. 아직 시간 있으니까.” 실제로는 벌써 15분이나 지나 버렸지만 구니꼬는 여자의 ’기다 리게 하는 권리’를 활용하기로 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약속한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시게마쯔 다꾸야는 책을 펴 놓고 있 었다. “야아. 안 오는가 했어.” “정말?” “아니야.” 구니꼬는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책이야? 전공 서적인가?” “그래. 넌 재미없을 거야.” 시게마쯔 다꾸야는 웃으며 책을 덮었다. 어제 전화로는 어딘가 불안한 거 같아 구니꼬는 좀 걱정했는데, 만나보니 그런 것 같지 는 않았다. “식사할까?” 조금전 마찌꼬와 들어갔던 곳처럼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다. 시 게마쯔가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평범한 레스토랑이다. 그 부분은 구니꼬도 신경쓰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어서인지 상당히 붐볐지만 안쪽 테이블을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시끄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어머닌 건강하시지?” 구니꼬가 물었다. “아아, 널 보고 싶다고 하셔.” “어머, 정말! 기뻐라.” “한번 네가 구운 쿠키를 드시더니 굉장히 좋아하셨어. 그걸 아 직도 기억하고 계셔.” “그럼 쿠키를 한 트럭 분 갖고 갈게. 아예 결혼하면 쿠키 파는 가게라도 할까?” “가게는 내가 볼게.” 시게마쯔가 맞장구쳤다. “공학도의 쿠키 가게라? 1밀리 그램마다 얼마라는 식으로 장사 하면 손님은 오지 않을 거야.” 구니꼬가 시게마쯔를 놀렸다. 식사가 끝나자 시게마쯔는 예전과 달리 말이 없었다. 역시 조금 은 이상하다. 그는 원래가 연구가이기 때문에 말이 적고 묵묵히 일하는 타입이다. 구니꼬와 만날 때도 결코 잘 떠드는 사람은 아 니다. 그러나 오늘은 약간 느낌이 다르다. 무언가가 무겁게 짓눌 러, 말을 억제하고 있는 듯했다. “의논할 게 있다고 했는데… 뭐야?” 구니꼬는 될 수 있는 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네게 의논해도 방법이 없을 거야.” “어머, 냉정하네.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으니까, 중매라도 서 달라고 말 할 생각이야?” 시게마쯔는 잠시 웃었다. “일에 관한 거야.” “전근?” “아니, 연구소는 옮기지 않아.” “그럼. 뭔데?” 시게마쯔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게 말할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네 아버님과 관련이 있어.” “우리 아버지와 관계 있다고?” “실은 병기 부문에 배치되었어.” 구니꼬는 뜻밖의 말에 일순간 눈을 내리깔았다. 시게마쯔가 병기, 무기 같은 것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알게 될 무렵, 아직 니노미야 상사는 무기 수출에 거 의 손을 대고 있지 않았다. 법률상으로도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 에 다른 품목만을 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기 수출이 합법화 됨과 동시에 니노미야는 본격적으로 무기를 팔기 시작했다. 병기 산업은 곧 니노미야뿐만 아니라 일본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쳐 몇십 년만에 누리는 호황의 길잡이가 되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6> <계엄령 6> 구니꼬의 아버지, 니노미야가 '죽음의 상인’이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그늘을 드리우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이 헤치기 어려운 장애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시게마쯔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든지 회사의 성장을 선도하는 주서 쪽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한 영광이라 말할 거야. 연구비도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마음껏 호사를 부릴 수가 있지. 그래서 모두들 나를 부러워 하고 있어.” “당사자 마음도 모르고 말하는구나.” “그렇지.” 시게마쯔는 고개를 흔들었다. “원폭이니, 수폭이니, 중성자 폭탄이니 하는 것들을 만든 것은 과학자야. 아니, 과학자가 고안하고, 기술자가 실용화시킨 거야. 아무리 정치가가 핵무기를 원해도 만드는 사람이 없으면 도리가 없을 거야. 그런데도…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설계하고 만드는 놈들이 너무 많아!” “모두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아. 넌 과학자들을 잘 몰라. 특히, 말하고 싶진 않지 만 연구자는 자기 연구가 재미있는지 어떤지 그것 밖에 흥미가 없어. 목적 따위는 그 다음이야. 많은 연구비를 받고, 흥미로운 테마가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당신같은 사람도 약간은 있겠지?” “글쎄, 어떨지.” 시게마쯔는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부서 옮기는 것을 거부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 받겠지?” “다른 사람과 바꿀 순 없어?” “넌 직장에 다녀 본 적이 없어 잘 모를 거야. 그런 일을 하면 해고야. 해고는 당하지 않더라도 시말서 정도는 써야 할 거야.” 시게마쯔는 깊이 한숨을 쉬더니, 물끄러미 천정을 바라보았다. “난 비겁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냐, 정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광통신 기술이라는 것은 병기에도 응용할 수 있는 거야. 그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무 기를 만들고 있지 않다’고 내 자신에게 말 해왔어. 받는 월급의 삼분의 일은 병기 대금이야. 그것만으로도….” “그만해.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구니꼬가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해. 네게 말해도 방법이 없는데 말야.” “뭔가 다른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나는 연구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야. 달리 뭘 하라는 거야.” 시게마쯔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구니꼬로서도 어찌 할 수 없었다. 구니꼬는 아직 학생인 것이다. “뭔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구니꼬가 물었다. “글쎄….” 시게마쯔는 잠시 미소를 띄었다. “평소처럼 즐겁게 해 줘. 그렇게 해 주면 나도 기운이 날 거야.” 구니꼬는 시게마쯔의 손을 잡았다. “기운을 내, 어떻게든 될 거야, 꼭!” 그때 갑자기 레스토랑이 조용해졌다. 구니꼬는 레스토랑 입구 쪽 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저건?” 시게마쯔가 말했다. “쉿!” 구니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프로메테우스야.” “저들이….” 붉은 제복이 가게 입구를 막고 있었다. 5명 아니 7명이 들어온다. 구니꼬는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 어제 아버지 사무실에서 본 대 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레스토랑 안은 조용해졌다. 전부 제복의 소녀들을 보고 있다. 대장인 여자가 걷기 시작했다. 뒤로 손을 깍지끼고, 등을 곧게 펴 고 마치 사열중인 장군처럼 테이블 사이를 걸어온다. 한 테이블 앞에서 그녀는 발을 멈췄다. 부하들이 그 뒤로 흩어진 다. 머리를 물들이고 담배를 물고 있던 소녀가 대장인 여자를 올 려다봤다. “무슨 용건이라도?” “몇 살?” 대장이 물었다. “그런 것 관계 없잖아요.” 대장인 여자가 손등으로 그 소녀를 때렸다. 담배가 휙 날아가고, 의자가 쓰러질 정도의 힘이었다. 레스토랑 안의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기껏해야 16, 7세 정도의 소녀는 완 전히 기세를 잃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너 같은 인간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거야. 법을 모르나?” “잠깐 피운 것뿐이잖아요.” 갑자기 대장인 여자는 그 소녀의 빨갛게 물들인 머리를 잡아당겼 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부하들이 재빨리 소 녀를 에워쌌다. 시게마쯔가 엉겹결에 일어났다. “그만둬!” 구니꼬는 시게마쯔의 손을 잡았다. “말려야 돼.” “부탁이야. 제발 그만둬.” 구니꼬는 시게마쯔를 앉혔다. “나를 놔 줘요.” 소녀의 울음소리가 높아지다가 잦아들었다. 대장인 소녀는 천천 히 레스토랑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대장인 여자는 다시 가게 안 을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진 소녀가 보였다. 물들인 머리가 온 바닥에 흩어져 있다. 머리카락을 잘린것이다. “어쩔 작정이지?” 시게마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조용히 해. 부탁이야!” 구니꼬가 한 말이 들린 모양이다. 대장인 소녀가 구니꼬들의 테 이블로 왔다. 구니꼬가 뒤돌아보자 상대는 기억하고 있는 듯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니노미야 구니꼬씨군요. 안녕하세요.” 구니꼬는 가볍게 인사했다. “소란을 피웠어요. 저런 해충을 제거하는 일이 임무라서…. 나는 아즈마 마사꼬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휙 돌아서서 재빨리 가게를 나갔다. 부하 들이 보조를 맞추어 그 뒤를 따랐다. 레스토랑의 공기가 갑자기 온화해졌다. 모두가 작은 소리지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바닥 에 쓰러진 소녀는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지만 아무도 일으키려 하 지 않았다. “놀랐어.” 시게마쯔는 휴 하고 숨을 토했다.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저런 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리고 구니꼬를 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그 여잘 알고 있었지?” “그런 무서운 얼굴하고 묻지 마.” “미안해. 너무 놀랐을 뿐이야.” “아버지 사무실에서 만난 적이 있어.” “아버님의?” “응,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소개만 받았어. 그래 서 아는 거야.” “그래…. 여러 가지 소문은 있지만, 저건 폭력단과 다를 게 없잖 아?” “상관 없는 일이야.” “상관 없다고?” 시게마쯔는 일어서더니 쓰러져 있던 소녀 쪽으로 가 안아 일으켰 다. “괜찮아요.” 소녀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시게마쯔는 손수건을 꺼냈다. “이걸로 머리를 싸매고 가요.” 소녀는 그의 말대로 손수건으로 머릴 싸매더니 도망치듯 레스토 랑을 나갔다. 시게마쯔는 자리에 되돌아 와서 말했다. “아무리 불량소녀라 해도 그렇지, 아무런 권한도 없는 것들이 너무 심하게 굴잖아?” 구니꼬는 불안한 눈길로 가만히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이야. 너무 화내지 말아.” 시게마쯔는 가볍게 눈을 감고 끄떡였다. “하지만, 저런 걸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아.” “물론이야.” “봐, 가게 안의 사람들을.” 하며 시게마쯔는 천천히 실내를 둘러 보았다.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떠들고 있잖아.” 그대로였다. 구니꼬도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분노한다든지 불 쌍히 여기는 감정을 잃어버린 듯했다. 어쨌든 남의 일에는 관여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돼.” 시게마쯔는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가볍게 자 기를 비웃듯이 말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 괴롭군. 나는 별수 없이 또 내일 아침 9시면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할 거야.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삶이야.” 구니꼬는 말했다. “빵 살 돈을 벌기 위해 하루 대부분을 소비하고, 그 나머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간은 차이가 나는 거야.” 너무 틀에 박힌 생각인가 하고 구니꼬는 자신을 약간 조소했다. “널 만나니까 조금 안정되었어.” 시게마쯔가 말했다. 밤길은 낮동안의 더위로부터 겨우 해방되어 숨을 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역에서 약 20분 가량 걸리는 구니 꼬의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불문율처럼 만 날 때마다 되풀이되곤 했다. “내가 마치 신경안정제라도 된다는 말인가?” “다른 의미로는 흥분제야.” “뭐라고?” 구니꼬는 웃었다. 시게마쯔는 구니꼬를 끌어안았다. 입술이 뒤엉 켰다. 구니꼬는 가슴에 압박감을 느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꼭 이 주일만이야.” 숨을 가만히 내뱉으며 구니꼬가 말했다. “외로웠어.”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듣는군. 대체 이 주일 동안이나 어디 갔었어?” “신경쓰여?” “응, 그래.” “애를 떼고 왔지!” 시게마쯔가 놀랐다. 구니꼬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요 녀석.” 구니꼬는 시게마쯔의 팔에서 빠져나와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밤늦은 고급 주택가의 고요함 속에 울려 퍼졌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7> <계엄령 7> 가와이 노부꼬는 중학교 주차장에 차를 멈추자 가방을 안고 밖으 로 나왔다. “야, 가와이 선생님.” 누군가 반갑게 부른다. “아, 홈마 선생님, 안녕하세요.” 홈마는 노부꼬와 같은 국어 교사로 40대 중반의 마음씨 좋은 남 자였다. 붉은 얼굴을 한 그는 여름철이면 버릇처럼 늘 벗겨진 머 리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곤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땀을 닦는다 기보다 부지런히 머리를 문질러 윤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 다. 홈마가 자신의 벗겨진 머리를 두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정도 볼 만한 대머리라면 학생들이 금방 별명을 붙일만도 한데 요즘 아이들은….” 그의 말처럼 학생들은 교사에게 별명을 붙이는 것마저 귀찮게 여 길 정도이다. 두 사람은 함께 새로 지은지 얼마 안 된 교사로 들 어갔다. 홈마가 말했다. “우편으로 온 비디오 디스크는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모두들 말하던데요. 가와이 선생님은 아직 신혼이라 서 포르노 비디오를 산 거 아니냐구.”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노부꼬는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그건 TV <명작 세계>예요. 수업 시간중 소설 해설에 사용하 려는 거예요. 심해요. 정말!” “아-아. 농담입니다.” 노부꼬도 그만 웃어 버렸다. 교직원실로 들어가자 노부꼬는 우선 교감 책상 앞으로 갔다. “며칠 동안 수업에 차질을 빚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사는 무사히 끝냈습니까?” “덕분입니다.”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노부꼬는 자신의 책상으로 왔다. 노부꼬의 책상은 창가에서 두 번째였으며, 창쪽으로는 홈마의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 진절머 리가 날 정도의 우편물이 쌓여 있다. 우선 발신인을 보고 급해 보이는 것부터 골라 냈다. 비디오 디스크는 오늘 수업부터 사용 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봉투를 뜯었다. 그러고 나서 전언을 본다. 책상 위 디스플레이 장치의 키를 누르자 소형 브라운관에 <메시 지>이라는 문자가 나왔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자리를 비운 10일 사이에 입력된 메시 지가 순서대로 문자로 나타난다. 날짜, 시간, 메시지를 남긴 사람 것은 <프린트> 키를 누르면 인쇄되어 나온다. 그럴 정도의 중요 한 용건은 없었던 것같다. 사무 보는 여자아이가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고마워.” 노부꼬는 눈앞의 디지탈 시계를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수업 시간은 5분이 남았다. 가와이 노부꼬는 28살이다. 처녀때 성은 미따였다. 가와이 성이 된 것은 홈마도 말했듯이, 바로 3개월 전의 일이다. 남편은 극히 평범한 샐러리 맨이다. 중매결혼이었다. 노부꼬가 선을 보고 결혼 한 것을 알고 친구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식장에 나오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어.” 이렇게 말한 친구도 있었다. 노부꼬가 소위 말하는 커리어 우먼 이고, 교직에 정열적인 것을 친구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와이 선생님.” 홈마가 말을 걸어왔다. “예.” “이번 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험을 치르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생각중입니다만.”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겠죠? 그 녀석들은.” 홈마는 한숨을 쉬었다. “시험 자체는 싫어하지만….” 홈마는 교사로서는 약간 파격적인 면이 있었다. 노부꼬는 홈마 선생에게는 아직 교사로서의 정열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어 친 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여튼, 요즘의 젊은 교사들은 빨리 수업 시간이 끊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전에는 학생들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학생이 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노부꼬는 생각했다. 교내의 설비 나 기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대화되고 편리해졌다. 그러나 그 곳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교과서대로의 수업, 노트를 베끼는 것만이 공부인가? 교사와 학생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지 금은 전설뿐인 것이다. 모든 게 컴퓨터나 전기를 사용한 설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수업방식이 싫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이전의 수업방식은 현 공립중학교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열을 갖고 온 교사들도 점점 무기력해져가고 있었다. 종이 울렸다. 수업 시작이다. 노부꼬는 출석부와 교과서, 비디오 디스크를 안고 일어섰다. 처음 15분은 아침 H.R(홈 룸), 그 후 10 분의 휴식이 있고, 첫 시간이 시작된다. 교사 중에는 아침 H.R은 자율 학습 시간이라고 해서 교실에 가지 않는 사람도 반수 가까 이 있다. 굳이 가지 않더라도 출결사항은 정확히 알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2층의 담당반인 2학년 C반에 들어간다. 교실 안은 조용했다. “안녕.” 그녀가 웃으며 인사했다. 언제나 반응은 없다. “휴가를 내서 미안해요. 제사가 있어 시골에 다녀왔어요. 오늘부 터는 제대로 할게요. 자, 출석 부릅니다.” 대부분의 교사는 반장에게 누가 결석했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 한다. 그러나 그녀는 반드시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하는 것이다. “오니시, 가세, 다리 삔 건 나았니? 다행이구나. 가또, 기하라, 곤도, 여동생이 생겼다면서? 축하한다. 좀 조용히 해! 사꾸라, 어머니 좋아지셨니? 퇴원하셨어? 안심이구나!” “좋아, 다음을 읽어 보렴.” 그녀는 책상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창밖은 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과연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일 까? 교사가 테러활동에 가담한다는 것은 그러나 이미 현실적으 로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수술받는 것을 승낙한 그 순 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젠 되돌릴 수 없다. 시대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대 탓인 것이다. 지금 이 시기에 교 사가 된 것이 내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요 수년, 아니 실제로 는 벌써 십 년 전부터 시작된 것임엔 틀림없지만 무력한 교육계 에 대한 정부의 압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국정교과서, 국방교육, 국기, 국가의 법정화, 교장에게는 교사임명 권이 부여되어 조금이라도 지시에 반대하는 교사는 차례차례로 교사직을 물러나야 했다. 교사들은 해고될 것을 두려워하며, 단지 묵묵히 교과서를 읽게 하고 암기시켰다. 거기에 대해 교사측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일처럼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교원노조연맹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의 힘으로 해산 되었다고 한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무의미한 내부 대립과 분열 로 인해 자연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가 교사가 된 것은 그 런 때였다. “자, 그럼. 이 소설의 개요를 모두들 200자로 정리하세요.” ‘에… 싫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앞으로 30분이나 남았어요. 충분해요.” 그녀가 말했다. “자, 시작해요!” 투덜투덜 불평하면서 노트를 펴는 소리. 이렇게 30분 걸려서 200 자로 제대로 요약하는 학생은 3분의 1도 안 된다. 대개는 도중에 단념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햐얗게 햇빛을 반사하는 교정으로 살짝 눈을 돌렸다. 다끼 수상 한 사람을 암살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녀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정국이 다끼라는 한 사람 의 카리스마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당 안에 서도 그에 대한 불만은 대단한 듯하다. 그러나 다끼가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반대파를 침묵시키고 있다. 만약 다끼가 죽으면, 정 국은 움직인다. 다끼의 독주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쪽이 발 언권을 가지려 할 것이다. 무언가가 변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부꼬가 기대하는 것은 그 혼란 속에서 지금 은 압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다끼를 죽여도 영 웅은 되지 않는다. 다끼는 그 강력한 이미지로 국민에게도 인기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 역시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지 않았던가? 하여튼, 다끼 수상이 노리는 것에 ’징병제’가 있다는 것은 분 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궤도에 오르는 것은 결코 멀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것만은…, 그것만은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죽음으로써 그것을 저지하리라 생각했다. “선생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여학생 하나가 일어나 있다. “왜 그러니?” 이 교실은 그녀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은 아니지만, 그 여학생은 학년에서도 일등을 다투는 수재였으므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부찌와 다니가 컨닝을 하고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 거기 두 사람 일어나.” 남학생들이 쭈뼛쭈뼛 일어난다. “각자 노트를 들고 일어나! 그리고 의자를 들고 교실 뒤쪽으로 가서 쓰도록.” 그녀는 교단으로 올라가 의자에 앉았다. 드문 일이다. 그녀는 좀 처럼 앉지 않았다. 잠깐 힘이 빠진 기분이었다. 학생끼리 노트를 교환했다. 그것은 물론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것을 동급생이 고발한 것이다. 그녀가 학생이었을 때는, 그 정도 일이라면 모두 재미있어 하며 넘겼을 것이다. 물론 교사에게 들키면 틀림없이 혼났겠지만, 그것을 같은 반 아이가 고자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교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잠시 약간의 한기를 느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계엄령 > <계엄령 8> “수상 각하. 공안위원회 시간입니다.” 비서가 이야기하자, 다끼는 보고 있던 잡지에서 얼굴을 들었다. “알았어.” 커다란 의자에서 일어서자 전화벨이 울린다. 비서가 재빨리 받았 다. “네, 지금 회의에 넒다. 잠시 기다리시면….” “누구야?” “꼭 이야기하고 싶다고…, 니노미야라는 여자입니다.” “오오, 그래. 전화 이리 주고 자네는 먼저 가 있게.” “알겠습니다.” 다끼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니노미야 구니꼬입니다.” 활달하고 똑똑한 목소리가 전해져 온다. “요전에는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아냐, 당치도 않아. 아가씨도 눙 “네. 조금.” “그런데 어떻게 됐나. 결정했는가.” “네. 들어가겠어요.” “그거 고마운데. 아니 필시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예.” “그럼, 프로메테우스 쪽에서 연락이 갈 테니까 기다리도록 해. 괜찮겠지?” “알겠어요. 그리고….” “뭔가 용건이 있나?” “실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말해 봐.”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제 친구의 아버지가 기밀 누 설 혐의로 지금 구치소에 있어요.” “그래.” “만약 가능하다면, 가석방 때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해서 요.” “스파이 혐의라고?” “네.” “그건 쉽지 않겠는데?” “잘 알고 있어요.” “이름을 말해 봐…. 흠, 이또 마사또라고? 별로 힘은 되지 않겠 지만, 할 수 있는 한 해 보지.” “고맙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 입단하면, 또 만나러 오너라. 시간 있으면 식사 라도 함께 하자.” “네. 그럼 이만 끊겠어요.” 다끼가 수화기를 놓자, 이번에는 책상 서랍 하나에서 램프가 깜 박거렸다. 그는 서랍을 열고 노란색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수상 각하십니까?” “미네까와인가?” “준비는 되었습니다.” “좋아, 예정대로 해 주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야.” “예?” “지금 스파이 혐의로 복역중인 남자, 이또 마사또라는 사람… 그래, 이또 마사또야.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인물인지, 조사해 주게.” “알겠습니다.” 그는 비밀 경찰과의 직통 전화인 노란색 전화를 집어 넣고 서랍 을 닫았다. “… 그러면,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지요.” 다끼는 공안위원회 멤버들의 얼굴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수상이 일어나자 전원이 일어섰다. “수고했어요. 다음 회의까지 각자 숙제는 해 두도록 하시오.” 수상은 그렇게 말하고 미소지었다. “안 해 왔다고 해서 벌세우진 않겠지만.” 가벼운 웃음이 일고, 한 사람씩 회의실을 나간다. 수상은 니노미 야를 손짓해 불렀다. “지금 따님에게서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전화가 왔었 소.” “예? 구니꼬에게서 말입니까?” “듣지 못했나?” “아버지한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녀석이라서.” 겸연쩍은 듯이 니노미야가 웃었다. “좋은 딸이야. 외동딸인가?” “예, 아내와 일찍 사별했기 때문에.” “반듯한 아가씨로 기른 것은 자네 공이구만. 애인은 있나?” “딸아이 말입니까?” “자네 애인에 대해서 말해도 상관 없네. 하하.” “예에, 아니….” 니노미야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딸애도 사귀고 있는 사람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스스로 결혼 상대도 찾지 못한다면야 안 되지.” “그렇습니다.” “자, 어떤가. 내 방에서 한 잔하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니노미야는 미소지었다. 니노미야 상사에 있어 중요한 일은 이 '수상 방에서의 한 잔’으로 결정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공안 위원회 멤버중 한 사람, 최고령인 나까도는 이제 걸음걸이 도 불안할 정도로 쇠약한 듯했다. 회의에 출석해도 대개는 꾸벅 꾸벅 조는 일이 많았다. 발언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없어도 좋을 듯한 인물이었지만, 다끼 수상의 대학 시절 은사였다는 사 실 하나 때문에 본인이 사임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두기로 한 것 이다. 본인도 의식이 흐려져 있는 탓인지 사임하고자 하는 마음 도 없는 듯 이렇게 위원회 때마다 졸면서도 참석하는 것이다. “차는 이 쪽입니다.” 양쪽에서 관저의 직원이 땀을 흘리며 나까도를 차 있는 쪽으로 부축해 간다. “아아… 그래… 고마워.” 중얼중얼거리며 나까도는 대기하고 있던 차로 왔다. 겨우 나까도 를 태운 차가 출발하자, 관저 직원들은 휴우하고 숨을 쉬었다. 차 는 수상 관저를 조용히 빠져나갔다. 나까도는 곧 뒷좌석에서 꾸 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한 대의 승용차가 나까도의 차 앞을 가로막았다. 요란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나더니 한 사나이가 튀어나왔다. 들고 있던 기관총이 불을 뿜고, 나까도가 탄 유리창이 날아갔다. 나까도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운전사가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엎드렸다. 사나이가 차로 달려간다. 총성을 들은 관저의 호위 경관이 달려 온다. 사나이의 기관총이 다시 한 번 울리고, 경관 하나가 쓰러졌 다. 사나이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동시에 차는 급커브를 틀어 맹렬한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경관이 권총 두 발을 쐈지만 아무 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선생님은 고매한 인격을 지닌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목숨을 앗아간 증오할 테러리스트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슬픔과 함께 폭력에 대한 증오심을 새로이 하지 않으면 안 됩니 다.” 구니꼬는 옆에 놓여 있던 스위치로 TV를 껐다. “… 어리석기는.” 넓직한 거실. 구니꼬는 쿠션처럼 푹신푹신한 양탄자 위에 엎드려 있었다. “얘, 구니꼬.” “어머, 아버지. 일찍 오시네요.” “오늘은 떠들썩했으니까.” “사건 당시 근처에 계셨어요?” “수상 방에 있었다. 마침 중요한 이야길 하고 있었지.” 사업 이야기를 방해 받아서 몹시 화가난 모양이었다. “누가 그랬을까요?” “뻔한 거지 뭐. 좌익 테러분자들이야.” “그럴까요?” “그럴까요라니?” “저런 늙은일 죽여서 뭐하겠어요?” “일종의 경고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하고 구니꼬는 고개를 저었다. “저였다면 아버지를 노렸을 거예요.” “뭐라고? 그게 딸이 할 소리냐?” 니노미야는 웃으며 구니꼬 옆에 앉았다. “너, 프로메테우스에 들어가겠다고 대답했느냐?” “예. 재미있을 것같아요.” “가서 확실하게 하거라. 수상이 꽤 맘에 들어하는 것같더라.” “그래요?” 구니꼬는 리모콘으로 다시 TV를 켰다. 시네마스코프 형의 고성 능 TV이다. 실용화된지 몇 년 안 된다. 지금은 대부분의 프로가 이 크기의 화면에 맞추어 방송되고 있다. “영화같은 거 하지 않나?” 채널을 돌리며 구니꼬는 어깨를 움츠렸다. “테이프나 디스크로 보지 그러니?” “재미없어요. 질렸거든요. 음악이나 들어야지.” 구니꼬는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가려 했다. “얘야, 구니꼬.” “예?” “너, 누구라고 했지? 그 남자 친구, 아직도 사귀고 있니?” “시게마쯔요? 그래요.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물어 보는 거야.” 구니꼬는 어깨를 움츠리고 거실을 나갔다. 자기 방에 들어오니, 에어컨을 꺼 놓았기 때문에 후덥지근했다. 할 수 없이 창문을 열 어본다. 밤바람이 기분 좋게 들어왔다. 날벌레들이 몰려들자 구니 꼬는 불을 끄고 소파에 엎드렸다. 정원의 수은등 불빛이 스며들어 마치 흰 페인트를 곱게 칠하듯이 천정에 번져들고 있다. 이 일대는 고급 주택지 중에서도 제일가 는 곳이다. 높은 담들이 연이어 집주인들의 부를 다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니노야마 저택은 새로 지은 것인 만큼 호화스러움이 두드러진다. 구니꼬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이다. 이 집에는 가족이라고 해 봤자 아버지와 자기 두 사람 밖에 없지 않은가? 일하는 사람은 다섯 명이다. 그 외 운전수가 한 사람, 그러나 가족과 달리 남이 므로 마음이 편안한 상대는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라….” 구니꼬는 물끄러미 천정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먼 곳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가까워진다. 무슨 일일까? 구니꼬는 3층 일광욕실로 올라갔다. 이 베란다에 서는 꽤 먼 길까지도 볼 수 있다. 잠시 바라보니 트럭 행렬이 시 야에 들어왔다. 단순한 트럭이 아니다. 장갑차까지 실은 카키색 군용 트럭이다. 트럭 대열은 이 주택가의 땅을 울리면서 빠져나갔다. “웬 트럭 소리냐?” 인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니 니노미야도 올라와 있었다. “군용 트럭이에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관청 쪽일 거야. 경비 때문이지.” 구니꼬는 니노미야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큰일이라도?” “지금 수상관저로부터 전화가 왔다. 계엄령을 발동했다는구나.” “계엄령?” 구니꼬는 트럭 대열 맨 끝의 두 대가 정지하고, 총을 든 군인들 이 차례차례로 내리는 것을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뭘 하고 있는 거죠?” “걱정 마라, 이 일대 경비를 위해 온 것이야.” 군인들이 길 쪽으로 흩어진다. 예전에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불렸 던 국방군이다. “자, 들어가자.” 니노미야가 구니꼬를 재촉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1> <영웅 1> 6대의 지프는 길 가는 사람들이 전부 뒤돌아 볼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질주해 갔다. 한 대의 지프에 5명씩, 30명의 <프로 메테우스 딸> 군단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리는 이전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크고 작은 출판사들이 올망졸망 인접해 있던 간다 주변은 이제 동경역 부근의 초고층 빌딩들에 둘러싸여 한층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지금 구니코를 포함한 프로메테우스의 딸들을 태운 지프가 그 거리를 달리고 있 었다. 구니코로서는 이것이 소위 첫 임무였다. 오늘 제복과 권총 을 받은 것이다. 입단 의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시로 가네의 고급 맨션으로 찾아갔다. 그곳이 <프로메테우스>의 숨은 본부였다. 거기에서 구니코는 마사코와 재회했다. “잘 왔어요.” 마사코는 구니코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환영해요.” “잘 부탁합니다.” 구니코는 얌전히 머리를 숙였다. “자, 딱딱하게 굳어 있을 필요는 없어요. 우리들도 철의 규율로 만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마사코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친한 동지죠. 나는 일단 대장이라 불리고 있지만, 특별난 독재자는 아니에요. 모두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소수 의견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 조금 엄격한 말투로 바뀌었다. “행동시에는 일사 불란하게 행동할 것. 알겠지요?” “네.” “자, 제복을 받아요. 저 조그만 방에서 갈아 입어요. 준비가 끝 나면 출동할 거예요.” 구니코는 빨간 상의, 검은 스커트, 검은 부츠, 그리고 벨트를 받 아 들고 탈의실인 듯한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 다. 구니코는 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구니코는 마 치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복의 마력이라고나 할까? 어느새 가슴과 등을 똑바로 펴고 있는 자신 을 발견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마사코가 가슴에 활과 화살을 도 안한 배지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권총 케이스가 달린 벨트를 어 깨에서 사선으로 걸쳐 단단히 채워주었다. “권총을 주겠어요.” 마사코가 은색의 소형 권총을 구니코 손 위에 놓았다. 차갑고 무 거운 독특한 감촉이 구니코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전날 구니코는 경찰 사격장에 아버지와 함께 가서 권총 사용법과 사격 연습을 하고 왔다. 22구경의 경우, 반동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제대로 조준하면 구니코라도 10미터 앞 지름 5센티의 표적을 명중시키는 데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권총을 받게 되자 구니코는 전율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구니코는 권총을 케이스에 넣었다. “자, 나갑시다.” 마사코가 말했다. 이렇게 해서 구니코는 지프 조수석에 앉아 뒤쪽으로 지나가는 풍 경을 보고 있게 되었다. 지프의 디자인은 옛날과 비교해서 조금 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기보다는 오히려 오토바이를 탄 것 같았다. 승용차 창문으로 밖을 보면 밖 의 세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지프 좌석에 앉아 있으니 자신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계엄령은 하루 만에 해제되었다. 반발도 거셌고, 해외로부터의 비 판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루지만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사건이었다. 오늘도 곳곳에서 군용차가 눈에 띄었다. 다행히 전차까진 출동하 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시켜 놓았다는 보도 가 흘러 나왔다. 구니코는 길 모퉁이마다 총을 든 병사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동남아시아의 도시 같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항쟁을 되풀이하고 있는 나라들. 일본도 지금 유럽 쪽 나라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걸까? ‘군(軍)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구니코의 고등학교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언젠가 그렇게 말한 적 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얼마 안 있어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이렇게 지프와 트럭, 그리고 병사들의 모습을 매일 보게 되니 얼 마 지나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구니코는 운전하고 있는 대원에게 물었다. “출판사예요.” “출판사?” “이제 다 왔어요.” 꽤 오래된, 약간 낡은 건물이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출판사 간판 이 걸려 있었다. 차가 멈추자 30여 명의 대원들이 일제히 차에서 내렸다. 마사코를 선두로 반 정도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인원은 밖에 남아 있었다. 구니코는 마사코의 바로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 다. <쓰레기 더미>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사무실이었다. 어떤 출 판사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누드 포스터. 쌓여 있는 것은 대부분 컬러 사진집이었다. 소위 포르노 잡지 전문 출판사인 것이다. 남자 3, 4명에 여자 2명이 마치 책과 종이 더미 속에 파묻히다시피 해서 일을 하다가 마사코를 선두로 열 몇 명의 소녀들이 들이닥치자 놀라서 일을 멈췄다. “뭐야, 너희들은?” 책임자인 듯한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즉시 이곳을 나가시오.” 마사코가 말했다. “뭐라고?” “전원 나가 주시오.” “이봐, 우리는 지금 일하는 중이야. 놀 생각이라면 ….” 덤벼 들려고 하는 사내의 팔을 여사원 하나가 붙잡았다. “편집장님, 프로메테우스예요.” “응? 아 그래, 당신들인가?” 남자는 좀처럼 기가 꺾이는 기색이 없었다. “아직 어린애인 주제에 무슨 짓들이야? 우리는 이것이 사업이 야. 나한테 이러쿵저러쿵 말할 근거는 없잖아?” “당신 같은 인간은 사회의 해충입니다.” “뭐라구?” “부끄러운 줄 아세요.” 갑자기 마사코가 권총을 빼 천장을 향해 발사했다. 사원들이 새 파랗게 질려 몸을 움츠렸다. “나가시오.” 기세 등등했던 편집장 사내도 질려 있었다. 사원들이 펜을 놓고 차례차례 밖으로 나갔다. 편집장만 남았다. “대체 어쩔 셈이지?” “이 사무실을 깨끗이 청소해드리겠습니다.” “그만둬. 모두 이걸로 먹고 산단 말이야.” 마사코의 권총이 편집장을 향했다. 구니코는 가슴이 조여드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편집장은 문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마사코는 권총을 도로 집어 넣었다. “시작하시오.” 대원들이 차례차례로 그곳에 쌓여 있는 사진집과 원고 서류들을 운반해 나가기 시작했다. 구니코도 몇십 권씩 끈으로 묶여 있는 책 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도로에 책과 서류더미가 쌓였다. “더 가지고 나와.” 마사코의 소리가 들렸다. 다섯 명 정도를 남겨 놓고 전원이 좁은 사무실을 철저하게 빈 공간으로 만들어 나갔다. 사진, 네가 필름, 수정 전의 사진, 파일, 마지막에는 낡아빠진 의자까지 내던져졌 다. “구니코.” 칠판을 떼어 내고 있는데 마사코가 들어왔다. “이 기회에 사격연습이나 해요.” 마사코가 권총을 빼 들었다. “자아, 어서 총을 빼요.” “네.” 구니코는 권총집에서 권총을 뺐다. “안전 장치를 풀고, 뭐든지 괜찮으니까 쏴봐요.” 마사코가 방아쇠를 당겼다. 전기 스탠드가 쓰러졌다. 구니코는 똑 바로 팔을 뻗어 사무실 구석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전기 포트와 찻 잔을 조준해서 쐈다. 컵의 파편들이 부숴져 흩어졌다. 계속해서 구식 전화기와 카세트 레코더를 쏘았다. TV의 브라운 관도순식간에 박살났다. 총알이 없어지자, 구니코는 온몸으로 숨 을 쉬었다. “어때요. 기분 좋죠?” 마사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에.” 목이 마르고 권총을 쥔 손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도로를 가로막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과 서류더미에 대 원들이 석유를 뿌리고 있었다. 마사코는 유유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닥불 치고는 좀 더울지도 모르겠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멀리 빙 둘러서서 이 광경을 쳐다보고 있 었다. “이제 됐어.” 마사코가 말했다. “불을 붙여.”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2> <영웅 2> 대원 중 한 명이 종이에 불을 붙여 책더미 위로 던졌다. 불꽃이 순식간에 퍼져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구니코는 그 열기 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거의 종이뿐이어서 다 타 는데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았다. 마사코는 그러는 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불꽃이 내는 열기를 마치 기분 좋은 바닷바람이라도 쐬듯이 서 있었다. 이마 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지만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구니코는 마사코의 얼굴에서 일종의 황홀감에 도취된 듯한 표정 을 읽을 수 있었다. 이윽고 불꽃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 리가 들렸다. 소방차가 온 것이다. “대장, 소방차가 왔어요.” 구니코가 말했다. “알아요. 내가 연락하라고 했어요.” 마사코는 미소지었다. “큰 불을 내는 것이 우리의 일은 아니니까.” 마사코는 천천히 멀리 빙 둘러서서 불구경하는 이들을 둘러보았 다. “자, 갈까요?” 마사코가 차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 다. “가자.” 전원이 차에 오르자 선두차에 탄 마사코가 외쳤다. 운전하는 대 원이 시동을 걸었다. 지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구경꾼들이 일 제히 길을 터 주었다. 구니코는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했다. 바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 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구경만 했을 뿐이야. 그 얼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분노도, 고통도 없는 듯했다. 아무런 감동 없이 지쳐버린 듯한 무관심만이 느껴졌다. 문득, 구니코는 조금 떨어진 길가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 는 여자를 발견했다. 약간 낡은, 렌즈가 하나인 리플렉스 카메라 를 갖고 있었다. 구니코는 마사코 옆에 앉아 있었다. 다른 대원도 본 모양이다. “대장,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내버려 둬요.” 마사코는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선전해 주면 우리도 행동하기 쉬워지니까.” 쯔브라야 교오코는 지프 행렬이 멀어져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 았다. 도착한 소방차가 타다 남은 불씨에 물을 뿌렸다. 흰 연기가 재와 함께 피어올랐다.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남아 있는 사람 은 출판사 직원인 듯한 남녀 몇 명뿐이었다. 그들은 망연자실 한 채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방대원들은 불을 끄자, 화재 원인도 묻지 않고 재빨리 사라졌 다. 쯔브라야 교오코는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두 번 정도 말하자 그제서야 남자는 뒤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당신 회사의 출판물인가요?” “아아, 그렇소. 뭐 자랑할 것도 못 되는 도색 잡지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 “저는 신문사 기자입니다.” 쯔브라야 교오코는 말했다.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신문 기자시라.” “네, 마침 현장에 있어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들려 주세요.” “얘기할 거리도 못 됩니다. 갑자기 저 여자들이 들이닥쳐 권총 을 빼들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진 거요. 그것뿐이오.” “일은 이제 ….” “할 수 없어요. 다시 시작하면 또 당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프로메테우스 무리지요.” “아 …,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나한테 닥칠 줄이야 …, 누드집의 어디가 나쁘단 말이야. 빌어먹을 ….” 내뱉듯이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분노보다는 체념한 듯한 느낌만이 있었다. 쯔브라야 교오코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걷다 뒤 돌아보았으나 아직 아무도 잿더미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가택 침입, 기물 파손, 총기 불법 소지, 방화 …. 저 정도의 무법 이 통용되는 데도 법치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프로메테우스의 딸. 정부나 군이 후원하는 조직일 거라고들 하는 데, 교오코는 이것을 기사화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사진도 있 다. 프로메테우스의 횡포를 고발할 수 있다면? 그러나 교오코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신문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교오코는 A신문사 기자였다. 일본에서도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 는 큰 신문사였다. 비교적 지식인들이 선호하는 편이었다. 큰 신문사치고는 종종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도 싣고 있었고, 정 부도 그것을 저지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전문 학교를 나와 A신문 사에 입사했을 때 교오코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낱낱이 파헤치 겠다고 마음 먹었다. 권력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정열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교오코의 이상은 3개월도 못 되어 깨져 버리고 말았다. 기사가 자질구레한 사실 보도일 경우에는 편집장도 기꺼 이 그것을 기사화하도록 했다. 상당히 적극적으로 취재해 오는 그녀의 기사는 재미가 있어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제가 일단 정치비판에 이르게 되면 그녀의 원고는 묵살당했다. 항의해도 결코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교오코도 깨닫기 시작했다. 지금의 신문은 외적으로 는 검열 당하고 있지 않지만 그대신 사내에서 검열받고 있는 것 이었다. 논설위원 중에 정부요인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 몇 명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유주의자인 척 사설을 쓰는 인 간이 실은 가장 보수적이고, 자기 몸만 사리는 것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다른 신문사라 할지라도 사정은 똑같 을 거라고 교오코는 생각했다. 교오코는 기사화되지 않는 것을 알고도 잃어가고 있는 자유에 대해 계속 썼다. 그러다가 반정부 운동가 프포시 요다를 알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다는 테러 활동조차 마다하지 않았지만, 본성은 상냥하고 부드 러운 남자였다. 교오코는 그에게 끌렸다. 연인 사이가 되어 교오 코가 요다의 일을 돕고 싶다고 했을 때 비로소 요다는 수상 암살 계획을 털어 놓았던 것이다. 그 요다도 죽었다. 교오코는 그가 죽었을 때, 자신도 죽은 것이라 고 생각했다. 목숨은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요다의 죽음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경찰이 극비리 에 처리했던 것이다.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기자로서 숨겨진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예전에 상실 되었다. 대개 정치부 기자들은 모두 뚱뚱한 몸을 이끌고 다녔다. 정부기관 홍보실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전송받아 기사화하기 때문 에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회부의 경우에도 발로 뛰며, 취 재하고 다니는 사람은 몇몇 젊은 기자들 뿐이었다. 교오코는 찻집에 들어가 지금 목격했던 사건을 단숨에 기사로 썼 다. 찻집에서 나오자마자 근처 현상소에 맡겨 놓았던 필름을 찾 았다. 교오코는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쯔브라야 씨.” 생각대로 5분도 채 안 되어 교오코는 편집장에게 불려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건 뭐야?” 편집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교오코 앞에 기사 원고를 집어 던졌 다. “기사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편집장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자네, 해고되고 싶나?” “예?” “그러려면 혼자서나 해고당하도록 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라 구!” 교오코는 아무 말도 못했다. 절망스럽다. “자아, 알겠나?” 편집장은 조금 목소리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려서 말했다. “난 조금 전 부장한테 한소리 듣고 왔단 말이야. 최근의 기사는 너무 한쪽으로 쏠린다고, 정부 쪽에서 불만의 소리가 있다고.”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알 리가 있나? 나도 재미없어. 그러나 여기에서 무리를 해봐 바로 이때라는 듯이 저쪽에서 물고 늘어질 거야. 그런 구실을 제 공한다면 역효과야.” 그러나 편집장의 말은 소극적인 보신주의자의 말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교오코는 그에게 <보신주의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 나 그런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교오코는 자리로 돌아왔다. 사진부로부터 필름을 인화한 사진이 와 있었다. 안 보고 버릴까도 했지만, 생각을 고쳐 봉투에서 꺼내 보았다. 확대한 사진을 보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프 로메테우스 대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별 생각 없이 쳐다보던 교오코는, 문득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설마 ….”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나왔다. 교오코는 다른 사진도 차례차례 훑 어보았다. 같은 얼굴이 눈에 띄면 확대경으로 자세히 보았다. “틀림없어.” 교오코는 사진을 천천히 책상 위에 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3> <영웅 3> 구라다 기누코는 쇼핑용 전기 자동차를 차고에 넣고, 쇼핑백을 안고 현관으로 돌아왔다. “어머, 열쇠가 ….”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분명히 잠그고 나갔을 텐데 …. 현관에 들 어서자, 구두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머나, 웬일이지.” 한 켤레는 남편, 구라다 소이찌로의 것이었다. 이렇게 일찍 돌아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다른 한 켤레는 누구 것일까? 현관을 들어서자, 거실 쪽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에 쇼핑백을 일 단 부엌에 두고, 거실에 가기로 했다. “부인 생각도 하게나!” 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누코는 엉겁결에 발걸음을 멈췄다. 남편 의 목소리가 나즈막하게 들렸다. 하지만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 었다. 기누코는 일부러 슬리퍼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어머, 사사끼 씨, 어쩐 일이세요?” “아, 형수님. 오랜만입니다.” 구라다의 오랜 친구로, 음악 평론가인 사사끼가 인사를 했다. 구 라다와 마찬가지로 마흔 살이지만 더 늙어 보였다. 구라다는 장식장 앞에 서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북스 런 공기가 찌든 담배 냄새처럼 감돌고 있었다. “저녁을 함께 하는 게 어떻겠어요?” 기누코가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가 봐야지요. 아참, 약속이 있어요.” 사사끼는 약간 허둥거리며, 차라도 하고 가라고 붙잡는 기누코에 게 거듭 양해를 구하며 돌아갔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당신?” 거실로 돌아온 기누코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구라다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뭔가 다툰 것 같던데요?” “음악에 관한 견해 차이일 뿐이야.” 구라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서, 깊은 한숨을 지었다. “배고프다구. 점심을 리허설 때문에 건너뛰었거든.” “알았어요. 밥이야 금방 하면 되지만 …. 정말 괜찮아요?” “별일 아니래두. 걱정하지 말라구.” 구라다는 소파에 앉자마자 테이블에 놓여 있던 두꺼운 악보를 집 어 들었다. 구라다 소이찌로는 젊은 지휘자로서는 최고의 실력자 로 인정받고 있었다. 지휘자의 세계에서 40대는 <젊은> 편이었 다. 세상은 변했지만, 베토벤이나 브람스가 연주되고 있는 것에는 변 함이 없었다. 구라다는 고전파에서부터 후기 낭만파, 현대 음악에 이르는 폭 넓은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다. 30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까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자도 많았지만, 구라다의 재능만큼은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기누코는 저녁 준비를 하면서도 아까 우연히 들었던 사사끼의 말 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부인도 생각하게나!” 음악상의 논쟁이라고 남편은 말했지만, 그랬다면 그런 말이 나왔 을 리가 없었다. 무엇인가 다른 일이 생겼을 것이다. 기누코는 남편이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 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구라다의 아내라고 할 수 없었다. 기누코는 이제 막 스물아홉 살이 된 젊은 여인이었지만, 구라다 와 결혼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아이는 아직 없었다. 남편은 해 외 여행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으나, 특별한 불만은 없었다. 예술가가 통상 그렇듯이 구라다는 감정의 기복이 크고, 금방 벌 컥 화를 내는 대신에 한 5분만 지나면 태연스러워졌다. 싫고 좋 음이 분명하고 그것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에 상당히 불쾌하게 생 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구라다로서는 불가능했다. 거짓말 을 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것이 음악에 관한 것이면 더욱 극단 적이었고 절대로 타협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성격에서 오는 작은 마찰은 연중 행사처럼 쉬지 않았기 때문에 기누코도 ‘특별히 걱정할 일이야 없을 테지’ 하고 자신 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설령 옛 친구 사사끼라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고함을 쳐서 내쫓아 버리는 구라다인데 오늘은 그것을 억 누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는 점이 기누코에게는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저녁 식사중에도 구라다는 여느 때와는 달리 말이 없었고, 기누 코의 이야기도 거의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식사가 끝나자, 구라 다는 집을 나섰다. “산책하고 올게.” 저녁 식사를 빨리 끝냈기 때문인지, 바깥은 아직 저녁 노을이 남 아 있었다. 기누코가 식탁을 치우고 식기 세척기에 접시를 넣고 있을 때 전 화가 울렸다. “예, 구라다입니다.” “사사끼입니다. 아까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계십니까?” “지금, 잠깐 산책하고 오겠다며 나갔습니다만.” “그렇습니까? 그럼 나중에 다시 ….” “사사끼 씨!” 기누코가 급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가르쳐 주세요. 남편은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사사끼는 잠시 주저하였지만, 기누코가 계속 부탁하자 입을 열었 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들었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약속드리겠어요.” “작년, 대통령의 콘서트 사건 이후로 상당한 압력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압력이요?” “네, 구라다에게 N필의 음악 감독을 그만두게 하려는 것이지요. ” 대통령의 콘서트 사건이란 작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환영 연주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지휘를 구라다가 의뢰받 고는 일축해 버렸던 사건을 말했다. 이탈리아 악단의 아니, 세계 악단의 거장인 아바도나 피아니스트 포리니와도 절친하며, 진보파를 자인해 왔던 구라다로서는 미국 대통령을 위해서 군대 행진곡을 지휘하는 짓 따위에는 절대로 승 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스콤에서도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다 루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어쨌든, N필도 문화청의 원조를 다소나마 받고 있기 때문에 관 리들은 머리 끝에서부터 화를 내며 발끈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 럭저럭 그 사건은 잠잠해졌습니다.” “그 일이 다시 ….” “나까도 신고라는 노인 알고 계시지요?” “요전에 암살당한 분이죠?” “네,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조만간 관 속에 들어갔을 그런 노 인이었지요. 학자라 해도 그리 대단치는 않았습니다. 신문은 어마 어마한 대선생 취급을 합니다만, 그것은 수상의 은사라고 해서 그렇게 떠들어 대고 있는 것입니다. 뭐, 그거야 어찌되었든 상관 없지만, 그 노인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치르게 된 모양입니다. “국장으로요? 하지만 그것은 수상이라든가, 그런 높은 사람이 ….” “테러로 죽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겠지요. 이번 주 토요일에 하기로 결정했답니다.” “그게 우리 남편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그 장례식에서 구라다에게 필을 지휘하란 것입니다.” 기누코는 일순 말을 잃었다. 사사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확실히 의도적인 일이지요. 국가 행사이니, 만약 필요하다면 N 향(響)을 사용하면 됩니다. 그것을 일부러 N필로, 게다가 구라다 에게 지휘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물론 거절했겠지요?” “그야 물론이죠. 그래서 언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형수님도 작년 그 사건 후 짓궂은 일을 꽤나 당하셨죠? 이번에 거절하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틀림없이, 구라다는 N필에서 쫓겨납니다. 아마도 일본 음악계에서 따돌림을 당하겠지요.” 기누코는 수화기를 고쳐잡았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일단, 어떻게든 설득시키고자 합니다만 시대가 나쁘지요. 형님 이 자기 주장 하는 것은 좋지만 형수님에게도 무슨 재난이 닥칠 지 모르기 때문에 ….” “그렇지만 남편은 분명히 하지 않을 거예요.” “형수님께서 말씀해 보지 않으시겠어요? 아주 잠시 동안만 바보 가 되어 주면 된다고. 뭣하면 N필 단원에게 잘 말해서 지휘봉을 보지 않고 수석 연주자를 보고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형님은 봉을 휘두르는 시늉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만족한다면.” “그런 속임수는 남편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알고 계시죠?” “네, 하지만 … 잘못하면, 형님은 평생 지휘대에 설 수 없게 될 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면 잘 얘기해 볼 게요.” 기누코는 수화기를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구라다가 돌아왔다. “다녀왔소.” “다녀오셨어요? … 어머나, 어쩐 일이에요?” 구라다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사 왔소. 오랜만이군. 둘이서 먹읍시다.” “참 별일이에요. 당신이 케이크를 사 오다니. 홍차라도 끓일까 요?” “좋지.” 부엌에 서 있던 기누코의 귀에 구라다가 전화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야. … 그래, 하기로 했어. … 너를 위해서야. 끝나면 한 잔 사라구.” 기누코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 것을 느끼고, 얼른 손가락으로 닦았다. “전화했어요?” 케이크와 홍차를 담은 쟁반을 손에 들고 갔다. “응, 사사끼한테.” “무슨 일로요?” “아니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야.” 구라다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4> <영웅 4> 구니코는 손을 뻗어, 디지탈 오디오 디스크 한 장을 플레이어에 올려 놓았다. 직경 2센티의 은색 레코더였다. 구니코는 적어도 다 다미 방이라면 40조 가까이 될 넓은 자신의 방 가득히 넘칠 듯한 음으로 클래식을 듣는 게 좋았다. 정면에 놓여 있는 스피커에서 꿰뚫고 나올 듯한 금관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가만히 눈을 감고 현의 감미로움을 실은 음과 시원 스레 부상하는 타악기의 화려함에 도취되었다. 요즈음 차이코프스키를 듣는 일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어쩌다 한 번씩밖에 듣지 않았는데 편안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지쳐 있는 것일까? 시게마쯔로부터 그 뒤로 통 연락이 없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 찌된 일일까? 그 고지식한 사람은 도무지 요령 있게 사는 방법 따위는 전혀 모르니. “병기 부문에 가서 미사일 유도 장치를 만들게 되더라도 일은 일로 구분지어 놓을 거야. 가능한 한 성능이 나쁜 것을 만들 거 야.” 시게마쯔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발사한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그런 것을 만들면 어때?” 구니코도 맞장구쳤지만 그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시게마쯔라면야 그녀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갑자기 음악이 피아니시모로 바뀌고, 전화 벨이 울리고 있음을 깨닫자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레코드를 정지시키고 수화기를 들 었다. 시게마쯔였다. “뭐하고 있었어?” “네 생각 하고 있었어.” “허, 장단도 잘 맞추네.” “농담하지 마. 그 이후부터 전화도 오지 않아서 걱정했단 말야. ” “나도 부서 이전으로 인수다 뭐다 해서 바빴어. 계속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으니까. 오늘은 모처럼 집에 일찍 왔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 “할 수 없잖아.” 시게마쯔는 한숨을 쉬었다. “병기 부문으로 배치된 거야?” “응, 아직 뭘 담당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참으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속도계 미터라도 만들라고 하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건 그렇 구 조만간 둘이서 드라이브라도 하지 않겠어?” “응, 좋아.” 구니코가 말했다. “자기 어머님과 셋이서 함께 가는 건 어때?” “어머니도 모시고 가자구?” “아이참, 너가 없으면 외톨이가 되시잖아. 쓸쓸하실 거야.” “가끔은 괜찮아. 자고 오지만 않으면 아무 말씀도 안하셔.” “알았어. 하지만 아직 일정이 어찌될지 모르지?” “일요일은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나도 비워 둘게. 스케줄을 조정해야 되겠네.” “왜 그리 바뻐?” “학교 공부 때문이야.” 구니코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들킨 것 같아 가 슴이 뜨끔했다. 우선은 안심이다. 구니코는 차이코프스키를 계속 들으면서 훨씬 기분이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군. 말러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 슬슬 목욕을 하 지 않으면 …. 곡이 끝나자 구니코는 욕실로 갔다.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전용 욕실이었다. 욕조에 온수를 받고 있자니, 또 전화가 울렸다. 욕실 에서도 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좀 번거롭게 느껴졌다. 시게마쯔, 뭔가 잊은 말이 있는 것일까? “예. 구니코입니다.” “구니코, 나야. 마찌코.” “어머, 난 또 누군가 했네. 요즘엔 좀 어때?” 구니코는 갑자기 마찌코가 목소리를 울먹거리자 깜짝 놀랐다. “왜 그래?” “구니코 … 고마워.”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무슨 일? 참, 아버지 일은 ….” “가석방될 거라는 통지가 왔어!” “그랬구나.” 구니코는 자신의 일처럼 가슴이 뛰었다. “네가 마음 써 준 거지, 고마워!” “쬐끔. 하지만 그렇게 고마워할 정도의 일은 하지 않았어.” “잊지 않을게. 이 은혜는.” “그만해, 마찌코. 싫다 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어쨌든, 다행 이다. 좀 안정되거든 다시 전화해. 지금 상태론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겠다.” “그래 … 그렇지? 어쨌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정말 고마워. ” 마찌코는 울다 웃다 하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고맙다고 되풀이하 고서 겨우 전화를 끊었다.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구니코는 휘파람을 불며 욕실로 갔다. 온수가 거의 반쯤 찼다. 거 울 앞에서 구니코는 옷을 벗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상하 다고 하면 이상했다. 스파이 용의가 있는 죄수에게 그리 간단하 게 가석방이 내려질 수 있는 걸까? 하나님의 말씀이군. 필시 다 끼 수상이 직접 지시한 것이겠지. 그것만으로도 프로메테우스에 입단한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구니코는 욕조에 몸을 담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남편이 말을 건네자 가와이 노부코는 곧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고 있었어?” “아뇨.” 노부코는 남편 얼굴에 손을 댔다. “생각할 게 있어서요.” “다른 남자?” “아니에요.” 노부코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내일 있을 시험에 대해.” “잘한다 잘해.” 가와이 야스히꼬는 웃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란 직업은 침대 속에서까지 시험 문제를 만들어야 하 나.” 둘은 알몸으로 바싹 붙어 있었다. 오늘 밤, 오랜만에 잠자리를 같 이 한 직후였다. “침대에서 만드는 것은 아기뿐이라고 생각했었다구.” 가와이는 농담처럼 말했다. “미안해요. 매력이 없나 봐요. 나라는 사람.” “그렇지 않아. 충분해. 당신처럼 딱딱한 느낌의 여자를 안은 것 이 오히려 매력적인걸.” “그럴까?” “오래간만이었지.” 가와이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제 위험한 시기는 지난 거야?” “네, 아마도.” 노부코는 애매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노부코.” 가와이는 손을 뻗어, 노부코의 어깨를 둘렀다. “아이를 갖는 게 좋지 않을까?” “네 ….” 노부코는 눈길을 피했다. “싫어?” “아직, 지금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요. 그 일이 끝나 면….” ‘그 일이 끝나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는 없다. 산산조각이 되 어, 날아가 버릴 테지 ….’ “내 맘대로 말해서 미안해요.” “사과할 건 없어. 그런 조건으로 결혼했으니까.” 가와이는 상냥하게 말하고서 노부코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이런 곳에 흉터가 있었어?” 하복부를 더듬던 손이 멈췄다. “네, 그래요. …맹장 수술 자국 … 여태 몰랐어요?” 노부코는 덜컥 내려앉은 마음을 간신히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처음 알았어. 여태까지 더 아래 쪽에만 정신을 너무 빼앗기고 있었나?” “아휴, 미워라!” 노부코는 양 볼을 붉힌 채, 남편의 코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가와이는 매우 평범한 샐러리 맨이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서서 밤엔 대개 일곱 시쯤 귀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부코가 아침엔 나중에 집을 나가고 귀가는 남편보다 이를 때가 많았다. 교사는 교사끼리 결혼하는 예가 많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 지지만, 노부코는 굳이 이 평범한, 어디라고 꼭 집어 낼 장점이라 고는 없는 남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부코는 후회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는 게 좋았 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가와이가 싫기 때문이 아니 라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노부코가 사랑할 수밖에 없 는 사람이었다. 가와이는 노부코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자상한 남자였던 것이다. 노부코가 결혼할 결심을 한 것은 죽음으로써 수상 암살을 결의한 후의 일이다. 마침 어머니의 끈질긴 권유로 결혼할 생각도 없이 맞선을 보았는데, 요다로부터 결혼하는 편이 낫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당국의 의혹을 피하는 데 결혼은 절호의 수단이란 것이 이유였다. 그렇다면 … 하고 노부코는 생각했다. 어차피 몇 달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형편없는 남편이라도 그 정도 기간이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겠지. 그런 기분으로 가와이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러 나 곤란하게 된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가와이는 너무나도 좋은 남편이었다. 노부코는 이제 몇 개월 후에 남편을 남겨 두고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수상을 암살한 범인의 남편으로서, 가와이마저도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새삼스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샤워하고 올 게요.” 노부코는 침대에서 나와 욕실로 갔다. 샤워를 하기 전에 노부코 는 거울 앞에 섰다. 손으로 살며시 하복부의 수술 상처를 만져 보았다. 바로 이곳에 <죽음>이 있었다. 남편의 사랑에 안온하게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잠자리를 지금까지 거부해 왔다. 그러나 전혀 고통이나 이질감은 없었다. 요다가 염려했던 거부반 응은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요다는 무사한 것일까? 요다와 함께 있었던 쯔브라야 교우코도, 그리고 ….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노부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5> <영웅 5> 다끼 수상의 차는 완전히 통제된 도로를 따라 국장이 치러질 회 장인 국립 회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가는 경관과 기동대 병사 가 엄중히 경계하고 있었다. “장례식 쪽은 괜찮겠지?” 수상이 말했다.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나란히 앉아 있는 이는 수상보다 훨씬 젊은, 40대 안팎으로 보이 는 호리호리하고 눈에 띄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수상 직속 비밀 경찰의 장관 미네까와였다. 언뜻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직무에 어울리는 생김새였다. “일전에 죽은 테러리스트 … 요다라고 했던가?” “예.”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 알아냈나?” “유감스럽게도 아직입니다.” “당사자가 죽어 버렸으니 위험은 없을 테지?”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미네까와는 고개를 흔들었다. “경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경계를 하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지.” 수상은 즐기는 듯이 말했다. “아내가 나를 원망하여 죽이려 한다면 아무리 비밀 경찰이라 해 도 막을 방도가 없지. 죽는 건 그리 무섭지 않아. 다만, 그로 인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좌절되는 것이 두려운 거야.” “문제없습니다. 반드시 해내실 겁니다.” 차안의 전화가 울렸다. 미네까와가 즉시 받았다. “… 아, 나다. … 그래? … 그쪽을 쫓아 봐!” “뭔가 알아냈나?” “요다는 모텔에서 사살되었습니다만, 바로 그 전에 가까운 레스 토랑에서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으음, 그래서?” “여자가 두 명이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자 둘?” “한 사람은 모텔에 함께 있던 여자일 것이고, 또 한 사람은 먼 저 차에서 나갔다고 합니다. 지금, 웨이트리스를 데려와 요다와 가까웠던 여자의 사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을까?” 미네까와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 하지만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차는 고속도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국립 회관의 은색 지붕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저 집은 ….” 미네까와는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국립 회관 곁의 붉은 집에 눈을 고정시켰다. “프로메테우스의 딸 본부 말입니까?” “그래.” 미네까와는 잠시 틈을 두고 입을 열였다. “저 그룹을 만드신 것이 어떤 생각에서였는가는 알고 있습니다 만, 지나치게 앞에 내세우시는 것은 어떤 까닭에서입니까?” “자네가 내게 의견을 묻다니 신기하군.” “아닙니다. 결코 그런 ….” 미네까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수상은 여유 있게 웃었다.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래. 걱정하지 말게나.” “네.” 롤스로이스는 경호원 사이를 조용히 미끄러지듯 벗어나기 시작했 다. 구니코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오늘 경비에 프로메테 우스도 끼게 되었다고 수상으로부터 연락이 있었던 것은 어젯밤 이었다. 물론 수상으로부터 구니코에게 직접 연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즈마 마사코가 한밤중에 구니코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 다. 아침 여섯 시 본부로 집합. 아침 잠이 많은 구니코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럭저럭 졸린 눈을 비비며 본부로 갔다. “프로메테우스가 공식적인 장소에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다. 모두 충분히 자각하고 행동하도록.” 아즈마 마사코는 최대한 억제하고는 있었지만, 상당히 기분이 들 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구니코로서는 수상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디까지나 자주적으로 결성된 조직 임을 강조해 왔다. 그것을 공식 행사의 경비에 넣는다는 것은 무 슨 연유에서일까? 실제로 프로메테우스의 대원들은 차가 들어가는 회관의 문 바로 앞. 이곳은 요인(要人)들의 출입이 많기 때문에 차가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앞 열에 배 치되었다. 검정이나 회색, 그리고 감색의 경비진 가운데에서 새빨 간 상의를 입은 프로메테우스는 더욱 더 눈에 띄었다. TV 뉴스, 신문사의 카메라맨들도 몇 시간 전부터 찾아와서 별달 리 찍을 것이 없는지 프로메테우스 대원들을 다투어 카메라에 담 아 간다. 구니코는 될 수 있는 대로 얼굴을 숙이고 있었지만, 아즈마 마사 코가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 다. TV 뉴스에라도 나오면, 시게마쯔가 어찌 생각할는지 …. “수상의 차입니다.” 대원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아버지 회사의 지하에서 본 롤스로이스란 괴물이 유유히 땅을 기 어 들어왔다. 그 차는 총탄은 물론이고 작은 폭탄으로는 파괴되 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차를 타면서도 이 난리이다. 차는 회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갔다. “구니코.” 아즈마 마사코가 말을 걸어와서 구니코는 깜짝 놀라 허리를 쭉 폈다. “네.” “나와 함께 가자.” 구니코는 아즈마 마사코의 뒤를 따라 경비 열을 벗어났다. 무슨 일을 하든 가만히 서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둘은 기동 경비대의 장갑차가 늘어선 사이를 지나 걸어갔다. 대 학에 데모가 있던 때는 기껏 물을 뿌리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모 든 게 중장비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요?” 둘은 회관의 통용 출입구로 다가갔다. 물론 이곳도 엄중하게 경 계 태세가 취해져 있었다. “이곳으로 누군가 몰래 들어오면 어떡하죠?” 구니코는 아즈마 마사코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걱정 없어. 여기부터는 무대 뒤로 나가도록 되어 있으니까.” “무대 뒤?” “그래. 여기로 올라가는 거야.” 아즈마 마사코는 앞에 서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꽤 긴 계단 으로 조금 숨이 찼다. 다 올라가자 폭이 넓은 통로가 쭉 뻗어 있 었다. 한쪽 편은 벽, 다른 한쪽 편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곳에 올라서니 넓은 장례식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정면에 는 나까도 신고의 엄청나게 큰 사진, 그것도 상당히 젊은 ― 그 렇다고는 해도 육십 정도 된 ― 사진이 있었다. 그 앞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오케스트라용 의자와 악보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약 이천 명을 수용할 좌석의 삼분의 이 정도가 채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겨냥하면 끝장나겠네.” 아즈마 마사코가 말했다. “폭탄이라도 떨어뜨리는 편이 빠를까?” “글쎄요.” “그렇지만, 이 유리는 특수 유리라구.” 아즈마 마사코는 그렇게 말을 하며 창유리를 두드려 보았다. “총탄은 도저히 안 되고, 폭탄에도 거의 꿈쩍도 않는다는 거야. ” “굉장하네요. 두께가 2센티 정도는 되겠네.” “여기서 말이지, 아래 상황을 보고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 “아래 상황?”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장송 행진곡 영웅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어. 지휘는 구라다 소이찌로야.” “어머, 그래요?” “알고 있어?” “네. 클래식을 좋아해서 구라다 소이찌로의 이름은 일찌감치 들 은 적이 있어요.” “그럼, 얼굴 알아?” “네.” “잘 됐다. 사실은 말야. 구라다 소이찌로를 보고 있어 줘야겠어. ” “왜죠?” “반정부 분자 중 하나야.” 아즈마 마사코가 말했다. “혹시, 무대에 나가 이상한 짓을 하거든 곧장 이곳에서 내려가 지금 지나왔던 통로를 감시해 줘.” “어떻게 하면 되나요?” “저 무대에서 나가면 이 아래 출입구로 나오게 돼 있어. 도망가 지 못하도록 감시해 줘. 필요하면 출입구 밖에 있는 경비원을 부 르고.” “알겠어요.” 설마 구라다 소이찌로가 도망치려 하는 일이야 없겠지. 아즈마 마사코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구니코는 다시 마사코를 불렀다. “대장!” “왜?” “만약 … 구라다가 도망치려 하면?” “물론, 쏴 버려도 상관없어.” 아즈마 마사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6> <영웅 6> “오케스트라가 나왔습니다.” 회관의 직원이 알리러 왔다. “알았어요.” 악실 의자에 앉아서 구라다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사사끼가 어딘지 불안한 얼굴로 구라다를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 워서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자네가 무대에 나가는 것 같군.” 구라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검은 연미복 차림으로 손가락에 지휘봉을 가볍게 끼워 들고 있었다. “고작해야 2분 정도야. 참고 견디게나.” “끈질기군 자네도. 근심이 많으면 머리가 벗겨져.” 구라다는 가볍게 웃었다. “지금 나가야 하지 않나?” “음을 맞추고 있네.” 무대 쪽에서 오보에 A 음에 맞추어 전 악기가 울리는 것이 들렸 다. 보통 콘서트와는 달리 튜닝도 금방 끝났다. “이제, 나가 볼까?” 구라다는 일어서서 기지개를 폈다. “그럼 ….” 이야기를 꺼내고서 사사끼는 말을 끊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힘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하여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이기에 당연히 박수 따위는 없었다. 구라다는 지휘봉을 손에 들고 무대로 나아갔다. 이천 명 가량되 는 청중 가운데 베토벤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어느 정도 있을 까? 시대가 변해도 정치가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결코 변 하지 않는 철칙과도 같은 것일까? 여전히 오페라 극장 건설을 미 루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지휘대를 향해 걸어 나가는 구라다의 눈이 언뜻 객석 쪽으로 향 했다. 수상은 조금 뒷줄에 앉아 있었다. 테러가 겁나는 것일까? 정말이지 칠칠치 못한 이야기였다. 구라다는 지휘대로 올라갔다. 오케스트라가 잠잠해져 일순 긴장 감이 흘렀다. 음악에서조차 음악가는 목숨을 걸고 있었다. 고작해 야 오선지에 그려진 도레미파를 위해서. 구라다는 오케스트라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그의 손에 있는 지휘 봉이 올라가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잘 해낼 수 있 을까? 구라다는 그러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태연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휘대 위에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 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조금 불안스런 눈빛으로 바뀌었다. 구라 다는 언제나 그다지 사이를 두지 않고 빨리 음악을 시작하기 때 문이다.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긴장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실 력을 발휘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은 좀 지나치게 사이를 두는 것 같았다. 한 번 숨을 크게 쉬고 구라다는 지휘봉을 앞으로 쑥 내밀고 움직 이지 않았다. 현악 멤버들이 활을 준비했다. 이것을 내리면 음악 은 시작된다. 베토벤! 에로이카 장송 행진곡. 사사끼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무대를 지켜보고 있을 테지. 용서해 라. 사사끼, 그리고 기누코. 구라다는 지휘봉을 천천히 가로로 눕혀서 양손으로 잡았다. 오케 스트라 단원들의 얼굴에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구라다 는 지휘봉 양끝을 꽉 쥔 채로 2천 명의 청중 쪽으로 몸을 돌렸 다. 그리고 힘을 주어 지휘봉을 두 동강으로 부러뜨렸다. 관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 구라다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이런 인간을 위해서 장송 행진곡을 작곡한 것이 아닙니다.” 구라다는 부러진 지휘봉을 발 밑에 내팽개치고, 지휘대에서 내려 와 당연하다는 듯한 걸음걸이로 단상에서 내려갔다.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구라다! 무슨 짓이야!” 사사끼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고서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지 않아.” “어쩔 작정이야! 부인 생각을 좀 해봐!” “아내는 어제 유럽으로 떠났네.” “뭐라구?” “나중에 뒤따라가겠다고 얘기해 뒀네. 그렇지만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구라다 ….” 사사끼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자네도 빨리 오케스트라 악실로 가게. 나와 함께 있다간 체포 되어 크게 고생할 거야.” 사사끼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빨리 가! 가족을 생각하게!” 구라다의 말에 사사끼는 고개를 끄떡였다. 구라다의 손을 굳게 잡아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구라다는 좁은 계단을 내려와 독실로 마련되어 있는 대기실로 돌 아왔다. 모든 게 끝났다.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기묘하리만큼 마음이 편 안하고 들뜨지도 않았다. 특별하게 힘든 일을 해냈구나 하는 느 낌은 들지 않았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진실로 양심이 있는 음악 가라면. 구라다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아직 체포하러 오지 않았다. 사태를 수습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최고의 연주를 하고 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내 생애 최고의 명연주였을지도 모른다. 문이 열렸다. 드디어 왔는가. 사살 당하더라도 전혀 상관은 없지 만. “당신.” 구라다의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기누코! 어떻게 여기에 ….” “비행기는 타지 않았어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할지, 내가 모를 거 라 생각했어요? 나만 보내려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구요.” “왜 안 갔어!” “난 당신의 아내예요. 나는 …?” 기누코는 서 있는 구라다에게 곧바로 다가왔다. “죽을 작정이죠?” “당신마저 죽을 필요는 없어!” 구라다는 기누코의 팔을 꽉 잡았다. “나 하나로 충분해!” “당신이 음악을 빼앗기고 살아갈 수 없듯이, 나도 당신을 잃고 서는 살아갈 수가 없단 말이에요. 당신 흉내를 낸다고 해서 나를 꾸짖을 권리는 없잖아요.” 구라다는 기누코를 껴안았다. “… 당신. 서두르지 않으면 체포하러 올 거예요.” “나는 혼자서 독약을 마실 작정이었어.” 구라다는 주머니에서 작은 캅셀을 꺼냈다. “한 사람 몫밖에 없어요? 정말 냉정한 사람이군요!” 기누코는 웃으며 말했다. 핸드백을 열고 소형 권총을 꺼냈다. “어, 어디서 그런 걸 ….” “고생해서 손에 넣은 거예요. 비쌌어요.” 기누코는 그것을 그의 손에 놓았다. “탄환은 세 발밖에 들어 있지 않지만, 충분하겠지요?” “당신을 … 쏘라는 건가?” “비밀 경찰에게 체포당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세요. 이렇게 하 는 편이 훨씬 편해요. 설령 살해되지 않더라도 평생 정숯 있어야 할 거예요.” “알았어 ….” 구라다는 작은 권총을 꽉 쥐었다. 문이 열렸다. 둘은 긴장하여 돌아보았다. 구니코는 지휘봉을 부러뜨린 구라다가 무대 밖으로 사라짐과 동 시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자살할 사람이야! 통로 씨?구라다를 찾았다. 처음이기 때문에 어디에 구라다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필시 비밀경찰이 움직이기 시작 했을 텐데, 오늘은 어쨌든 매스컴의 눈이 많다. 이것은 전국에 생 중계되고 있기 때문에 보도를 규제하는 것도 불가능 할 것이다. 아무리 공포정치라곤 하지만 이곳에서 다짜고짜 구라다를 체포하 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두번 다시 구라다를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든 다음 온갖 술수로 협박하여 자살로 몰아넣을 궁 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방을 찾고 있을 때, 구니코는 발소리를 듣고서 그늘에 몸을 숨겼 다. 젊다고 해도 이십 칠팔 세 가량되는 부인이었다.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구니코는 그 여자 뒤를 몰 래 따라갔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부 듣고 말았던 것이다. “빨리 도망가세요!” 문을 연 구니코가 말했다. “너는 누구야?” 구라다가 의아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 기누코가 먼저 알아차렸다. “<프로메테우스의 딸>이지요?” “프로메테우스? 그렇다면 나와는 반대 입장의 사람일 텐데.”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구니코는 서둘러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살아 남아 주세요. 뭔 가 방법은 있어요. 지금이라면 아직 나갈 수 있어요.” “싫소.” 구라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을 나가 어디로 가지? 가령 지금 체포되지 않더라도 마찬 가지야, 이 나라에서 나갈 수 없다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 해.” 구니코는 답변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한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다섯, 여섯 명의 발소리였다. “찾아온 듯하군.” 구라다가 말했다. “자네 마음은 고맙지만, 이곳에 우리 둘만 있게 해주게나.” 구니코는 서둘러 복도로 나와 문을 닫았다. 통로를 찾아 온 이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뭐 하고 있나?” 맨 앞의 남자가 예리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딸>입니다. 대장의 명령으로 도주하지 못하 도록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구라다가 있군.” “그렇습니다.” “좋다. 뒤는 우리에게 맡겨라.” “저 … 그렇지만, 대장의 명령이라서.” “나는 수상의 직속 호위관이다.” 남자가 말했다. 물론 비밀 경찰이란 것은 구니코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공공연히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뒤는 보증한다. 저쪽으로 가라.” “이곳에 있으면 안 될까요?” “왜지?” “대장에게 명령을 해제 받지 못하면 ….” 그때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남자가 당황하여 구니코를 밀어젖히고 문을 열려고 했다. “자물쇠가 걸려 있다.” 권총으로 자물쇠를 쏘아 부숴뜨리자마자 문을 박찼다. 구니코는 소파에 앉아서 아내의 시체를 무릎에 뉘어 놓은 구라다를 떨리는 눈길로 보았다. “여어 제군들.” 구다라는 그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자신의 관자놀이에 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7> <영웅 7> “조용하군.” 시게마쯔가 말했다. “그래.” 구니코는 풀 위에 드러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보고 있는 사이에 어쩐지 평형 감각이 사라지고 자신이 하늘로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라이브를 하던 도중에 갑자기 차를 세우고서 완만한 바다가 내 려다보이는 경사면에 둘이 누워 있었다. 상쾌하고 아주 맑은 날이었다. 드라이브 약속은 일 주일 지연되 었지만 그 때문인지 푸른 하늘은 벌써 가을 분위기가 났고, 바람 도 선선했다. 시게마쯔가 말했다. “모두 다 잊고, 전부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어.” “나도 잊고?” “바보. 둘이서 말이야.” 시게마쯔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 인간은 좋건 싫건 간에 현재 살고 있는 공간에 얽매여 있다.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생각하는 게 있어.” 시게마쯔는 바다를 보면서 말했다. “뭘?” “차에 혼자 타고 말이지, 벼랑으로 차를 마구 몰아 단숨에 곤두 박질치는 거야. … 그것으로 다 해결할 수 있지.” “그런 건 비겁한 거야!” 구니코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시게마쯔는 깜짝 놀라서 말을 덧 붙였다. “생각이라고 말했잖아. 하지는 않는다구.” “생각할 게 아냐, 그런 거.” 구니코는 조금 불쾌한 듯이 뾰로통해져 말했다. “그렇게 화내지 마.” “네게는 어머니가 계셔. 홀로 남겨 두고 죽을 작정이야?” “너도 있고.” “나? 그래.” 구니코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부터 어떡해?” “이제부터라니.” “이제부터 말이야. 오늘의 일정.” “오늘의 일정 말이지.”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이 마치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것처럼 들려. ” “그건 알 수 없잖아. 그렇지?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래 ….” 시게마쯔는 하늘을 보면서 마치 삶의 어두운 구멍을 엿본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이런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만 걸까?” “갑자기 된 건 아니잖아. 조금씩, 조금씩 이 정도면, 아직 이 정 도라면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어쩔 수 없는 데까지 와 버린 거 야.” “그래. 그렇지만 말야. 어찌해야 좋을까?” 구니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게마쯔는 계속해서 말했다. “요전 토요일, 그 지휘자 말야 … 기억하고 있지?” “응.” 구니코는 조금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지휘봉을 부러뜨리는 걸 말야. 나는 TV로 보고 있었어. 대단한 용기였어.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글쎄 ….” 구니코는 고개를 돌렸다. 구라다 부부의 자살은 공표되지 않았다. 총성을 들었던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함부로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모두 관련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자신을 굽히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인간은 차라리 낫지 않은가? 아니, 그 사건 때문에 오케스트라 멤버나 책임자들은 틀림없이 큰 곤경에 처하게 될 터인데, 그것을 고려 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 것도 역시 예술가이기 때문일까? “그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드라이브 나온 의미가 없잖아?” 구니코가 말했다. “그것도 그렇군.” 시게마쯔는 엷게 웃었다. “여하튼 오늘 스케줄을 정해.” “정처 없이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시간은? 빨리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애가 아니라구.” “어린애면서?” “뭐야, 요 녀석.” 시게마쯔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구니코의 코를 가볍게 찔렀다. “아휴, 낮아지잖아.” “어디에 가고 싶어?” “글쎄. … 어딘가의 호텔.” 시게마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담하지 마.” “농담이라 생각되면 시험해 보는 게 어때?” 구니코가 말했다. 구니코는 시게마쯔의 묵직한 상체를 밀어 내며 살짝 몸을 뺐다. 얼마큼 시간이 경과한 것일까? 벌써 밤이 된 것일까? 어슴푸레한 방 안에 디지탈 시계의 문자가 녹색으로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 다. 겨우 4신가. 아침이 밝으려면 얼마쯤 시간이 있었다. 시게마 쯔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구니코가 시게마쯔와 처음으로 잠을 잔 것은 약 1년 전의 일이 다. 그러나, 임신이 두려워서 그 후 계속 잠자리를 거부해 왔다. 시게마쯔의 입장에서 보면 구니코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불평 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구니코에게도 그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구니코가 침대에서 빠져나오자 시게마쯔는 몸을 조금 뒤척이다 다시 잠들고 말았다. 구니코는 알몸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지금은 여러 가지 약도 개발되어 있어서 임신 걱정은 없었다. 하 지만 역시 체질적으로 약이 잘 받지 않는 여자도 있으니까, 중절 이나 낙태도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요즘 같은 세상을 생 각하면 구니코는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악조건에서도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예로 니노미야 다께야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구니코는 뜨거운 물을 틀었다. 구니코도 시게마쯔 이외의 남자와 는 잔 적이 없기 때문에 모처럼의 잠자리에서 땀을 많이 흘렸다. “프로메테우스의 딸이라 ….” 샤워로 땀을 씻어 내면서 구니코는 피식 웃었다. 하긴 아즈마 마 사코도 그렇고,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로 그 이름에 어울리는 처녀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다음에 다시 시게마쯔에 게 안길 날이 올까? 구니코는 흔들리는 마음을 도저히 억제할 수 가 없었다. 모든 것을 알고 결심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시게마쯔에 대한 생 각도, 부모 자식 간의 정도, 친구도, 모든 인연을 잘라 버릴 결심 을 했던 것이다. 구니코는 지금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된 하복부의 상흔을 손가 락으로 살며시 문질렀다. “장관님.” 미네까와는 얼굴을 들었다. 심복 부하 중 하나인 겐모찌가 서 있 었다. 35세. 예리하고 준수한 외모의 남자였다. “뭔가?” “지금 경시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모텔에서 요다와 함께 있었 던 여자의 지문을 알아 냈다고 합니다.” “이제서야 …. 고맙군, 정말.” 미네까와는 냉소를 섞어 말했다. “우리를 성가신 존재로 취급하는 거야, 뭐야?” “확실한 지문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퍼진 지문을 복원하 는 데에 시간이 걸린 듯합니다. 그 다음은 아주 쉽습니다. 컴퓨터 가 찾아 주는 셈이니까요.” 겐모찌는 항상 냉정했고, 절대로 거칠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오히 려 그 점이 미네까와를 때때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래, 누구야. 여자는?” “쯔브라야 교오코. A 신문의 기자입니다.” “기자? 음, 상당히 수상하군.”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능률적일까?” 미네까와는 의자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일본은 18세가 되면 국민 전부가 지문을 등록하는 것이 제도화되 어 있었다. 일부에서 끈질기게 반대도 했지만, 지문등록제도는 관 철되었다. 무엇이든 일단 시작되어 버리면 쉽게 체념하는 것이 일본인이었다. 벌써 실시된 지 8년. 지금은 이 제도를 문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범죄 검거율이 높아졌다고 호평하는 사설 이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또 다른 여자가 있었습니다.” 겐모찌가 말했다. “그 여자와 접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롭게 놓아 두고 감시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끌고 와서 캐 보든가 하게.” “자백약 말입니까?” “그래. 고문보다 손쉽고 빠르지.” 강력한 자백약은 후에 정신 장해를 남기는 경우가 있어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비밀경찰에게 금지는 무의미했다. 비밀경찰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문제가 될 것도 없는 셈이 다. “그럼, 연행해 올까요?” “으음 ….” “혹시, 자살이라도 하면 도리어 ….” “그 점이 어려운 부분이지.” “잘 해보겠습니다.” “다만, 신문 기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행방불명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할까? 겐모찌, 자네 생각은?” “빨리 처리해야만 합니다. 잡아와서 알아낸 후 사고로 위장하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도중에 시간이 뜨지 않도록 주의하면 됩 니다.” 겐모찌의 말은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A 신문이라 하더라도 기자 한 사람의 사고사 따윈 문제삼지 않겠지요?” “아니, 그렇게 간단히 봐선 안 돼.” 겐모찌의 자신감 있는 말투가 도리어 미네까와의 신중함을 일깨 웠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잊지 말도록.” “네.” “또, 그 여자 이외에도 접촉하고 있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 얼마 간 감시하면서 추이를 지켜 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겐모찌의 표정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 다. “절대 경찰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라구.” “알겠습니다.” 겐모찌가 방을 나갔다. 미네까와는 담배에 불을 붙혔다. 이곳은 광대한 도서실이 있는 수상 관저의 지하. 여기가 바로 비 밀 경찰의 본부인 것이다. 미네까와도 직함은 수상 비서 겸 도서 실장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부하는 기껏해야 5, 6 명으로 다른 부하들은 시내의 몇몇 장소로 분산되어 있었다. 경 찰청에서는 물론 비밀 경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수상의 경호 나 공안관계의 조사 등에서는 세력권에 대한 강한 경쟁의식으로 양쪽이 대립하는 일도 있었다. 미네까와의 불만은 비밀경찰에 독자적인 조사국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 때문에 쯔브라야 교오코의 지문을 조사하는 데도 일부 러 경시청까지 가서 조회를 해야만 했다. “이제 2, 3년만 기다리게. 틀림없이 예산을 할당해 줄 테니.” 수상은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잘 먹었습니다.” 쯔브라야 교오코는 라면집 계산대에 카드를 내밀었다. 정말이지, 이젠 옛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교오코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에 는 어수선한 작은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라면집도 그 중에 한 집이었는데, 지금은 20층짜리 빌딩 안에 들어가 있었다.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라면이란 본디 깨끗한 가게에서 먹는 음식 은 아니었다. “매번 감사합니다.” 단골가게 주인의 목소리도 예전 같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교오코는 한가롭게 걷기 시작했다. 편집장이 그녀에게 기사를 맡 기지 않기 때문에 요즈음은 여유가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이 렇게 근무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수상에게 접근하는 데 기자란 입장은 큰 이점이 있었다.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성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번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다시 시 도할 수는 없다. 교오코가 노리고 있는 것은 수상이 외국의 원수(元首) 그 누군가 를 맞이하는 때다. 그 외에는 수상이 조심성이 많아서 결코 무방 비 상태로 사람들 앞에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외국 원수가 되면, 결국 많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맞이하게 된다. 그것 이 아마도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물론 경계는 더할 나위 없이 엄중할 테지만 ….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영웅 8> <영웅 8> 교오코는 혼자 살고 있었다. 저녁 식사도 자기 아파트 근처에 있 는 이 식당가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 정말 충격이었다. 그 <프로메테우스의 딸>들 중에서, 그때 함께 수술을 받았던 여자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는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신문사에 흘러 들어오는 정보 로는 프로메테우스에 들어가는 사람은 유력자의 자녀로 한정되어 있다고 했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혹시 내가 실패를 하더라도 그 여자가 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 지 억측이 분분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어쨌 든, 나까도 신고의 장례식 경비에 가담했던 것을 보면 필시 수상 이나 정부에 직결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 교오코는 이름도 몰랐다 ― 그 멤버 중 하나였다. 필시 수상에게 접근할 기회도 교오코보다 훨씬 많을 테고 의심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교오코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교오코는 아직 행인이 끊기지 않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기 섯!” 돌연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교오코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고 말 았다. 뒤를 돌아보니 달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그 뒤를 쫓아 경관 이 달렸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교오코는 일 단 안심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남자와 아슬아슬하게 부딪힐 뻔해 서 허둥지둥 옆으로 피했다. “서라! 쏜다!” 경관이 총 쏠 자세를 취했다. 교오코는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심하다! 이렇게 북적대는 곳에서!’ 한 발의 총성이 산책로에 울려 퍼졌다. “꺄 … 악.” 잇달아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걷고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찰라의 정적이 흐른 후 교오코는 머리를 들었다. 그 남 자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경관은 양손으로 권총을 잡고 겨누었 다. … 탕 탕! 두 발째 총성과 함께 남자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교오코는 숨을 죽이고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 다. 잠시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경관이 발 소리를 내며 옆을 지나가자마자 교오코가 부자연스런 몸짓으로 일어섰다. 교오코에 게 이끌리듯 다른 통행인들도 일어서기 시작했다. 교오코는 이미 한 명의 기자로 되돌아와 있었다. 백에서 소형 마그네틱 카메라 를 꺼냈다. 필름이 아니라 자기판에 기록하는 카메라였다. 매트 한 장에 백 컷트를 담을 수 있다. 보도용으로써 아주 요긴했으므 로 항상 가지고 다녔다. 남자는 한 발에 즉사했다. 첫발은 다른 통행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하늘을 향해 쏜 것이었다. 경관이 남자의 죽음을 확인하 고 있는 동안에 교오코는 민첩하게 셔터를 5번 눌렀다. 셔터 소 리가 거의 나지 않으므로 편리했다. 최근에는 현장 사진을 찍는 데도 경관들이 까다롭게 굴었다. 이것도 찍겠다고 말하면 십중팔 구 허가하지 않을 게 뻔했다. 교오코는 카메라를 백에 넣었다. 경관이 일어서서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저어 ….” 교오코가 말을 거니 경관이 돌아보았다. “뭔가?” “무슨 짓을 했지요. 이 사람?” “날치기를 했소. 핸드백을 말이오.” 교오코는 놀랐다. “그래서 사살했단 말이에요? 날치기를 했다고?” “달아났기 때문이오. 발을 겨냥했지만 말이오.” 거짓말이라고 교오코는 생각했다. 탄환은 남자의 심장을 관통했 다. 분명히 죽이려는 마음으로 쏜 것이었다. “구경거리가 아니오. 저리들 가시오!” 경관이 멀찍이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던 통행인들에게 외쳤다. 모 두가 허둥지둥 흩어지기 시작한다. 경관의 제복도 지금은 감색의 스마트한 복장으로 바뀌었는데, 권총은 훨씬 강력한 것이 사용되 고 있었다. 경관이 범인을 사살하는 사례는 요즈음 눈에 띄게 많 아졌다. 교오코도 너무 오랫동안 옆에 붙어 있다가 의심을 받으면 곤란했 으므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으나 조금 가다 걸음을 딱 멈추었 다. 남자가 총에 맞았던 자리 맞은편 산책로는 완만한 커브길로 그 사이에 전화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플라스틱 캡슐 모양을 한 현 대식 전화 부스였다. 그 플라스틱 판에 둥글게 뚫린 구멍이 교오 코의 눈에 들어 왔다. 총알 자국이다! 그 남자를 관통한 탄환이 정면에 있던 전화 부스 를 명중시킨 것이다. 가까이 간 교오코는 놀라서 숨을 죽였다. 수화기가 축 늘어져 있 고,. 부스 바닥에 젊은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달려가서 문을 열 고 교오코는 그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손에 찐득찐득하게 붙는 것이 있었다. 피다! 옆구리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교오코는 급히 손의 피를 손수건 으로 닦아 내고, 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비상 전화가 있을 것이 “이건 실어도 괜찮겠는걸.” 편집장은 교오코의 기사에 흥미를 나타냈다. “현장사진도 생생하고. 그리고 사건에 말려들어 부상당한 여자 이야기도 써야 하겠지. 경찰에게도 조금은 자중할 필요가 있으니 까 말이야.” 교오코는 기쁨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오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 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발포를 하다니, 말도 안 돼요. 그 여자는 전치 3개월이래요.” “인터뷰는 할 수 있대?” “어젯밤 쭉 붙어 있었지만, 의식 불명이었어요.” “가봐. 말할 수 있게 되면 면회사절이라도 상관 말고 한마디라 도 좋으니 인터뷰를 해 와.” “가족두요?” “남편이 있어?” “예. 어제 함께 있었어요. 굉장히 좋은 사람이에요.” “좋아. 그 남편의 말도 넣지. 아이는? … 없어? 유감스럽군. 지 금부터 만들 수는 없을까?” 교오코는 편집장다운 말을 오랫만에 듣는 것 같아 저절로 신이 났다. 병원에 가자마자 교오코는 직접 그 여자의 병실로 달려갔다. 다 까하시 노리꼬란 이름을 가진 28세의 여자였다. 그러나 병실에 도착한 교오코는 의외의 사실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름표가 바뀌 어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교오코는 간호사 한 명을 붙잡고, “어젯밤 이 병실로 들어온 다까하시 노리코 씨란 분은 ….”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교오코는 그 간호사를 따라갔다. 환자들은 각 층마다 접수처에 가서, 컴퓨터에 이름을 입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 분은 입원하지 않으셨는데요.” “뭐라고요?” 교오코는 어이가 없었다. “어젯밤 구급차에 실려 왔어요. 총에 맞았어요. 틀림없다구요.” “그렇지만 기록이 없는데요.” 교오코는 뭔가 집히는 것이 있었다. 착오 따위가 아니다. 경찰에 서 쉬쉬 하며 재빨리 수습해버린 것이다. 환자를 어디론가 옮기 고 기록을 말소시켰음에 틀림없었다. 교오코는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카드를 넣고 그녀는 남편의 근무 처로 전화를 했다. “판매1과의 다까하시 씨를 부탁합니다.” 잠시 후,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외근중이므로 지금 바깥에 나가 있습니다.” “아주 급해요. 연락을 하고 싶어요.”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그 여자가 말했다. “카폰이 고장났는지 연락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 여자는 사무적인 대답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 다. 교오코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잠깐 동안 병원 안을 서성거리며 조사를 해 보았지만, 아무런 단 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신문사로 전화를 했다. “편집장님이세요? 쯔브라야입니다. 실은 ….” 교오코는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 편집장은 그다지 의외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봐, 지금 방금 들어온 뉴스인데, 차 한 대가 고속도로에서 전 복했어. 운전하고 있던 남자는 즉사했다구.”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까하시란 남자야. 자네가 기사에 쓴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군.” 교오코는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손수건으로 이를 악물었다. 살해 당한 것이다! 필시 그녀도 …. “이제 됐어. 돌아와.” 편집장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상냥했다. “네.” 교오코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편집장님.” “뭐야?” “기사는 빠지겠군요.” “현장기사는 실을 거야. 거기에, <만일 다치는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장은 넣어 둘게.” 그것이 최선책일 것이다. “고맙습니다.” 교오코는 수화기를 놓고, 병원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병원 을 나오자마자, 교오코는 갑자기 두 남자 사이에 끼여 팔을 붙잡 혔다. “무슨 짓이에요!” 뿌리치려고 했지만,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다. “경찰이다. 따라와야 되겠어.” 교오코는 약간 떨어져 있는 차 쪽으로 끌려갔다. 체포되는 것인 가. 혐의는? 필시 그 일은 아닐 거야.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 을 보면 어젯밤 사건에 대해 조사받게 되는 것일까? 입을 막을 작정이라면 …. 지금은 안 된다! 그런 짓을 당해선 안 된다. 큰 목표가 있으니. “가짜 형사죠! 당신들!” 교오코는 큰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햇!” “사람 살려! 강도다!” 주위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찰 한 사람이 황급히 차 문 을 열려고 교오코에게서 떨어졌다. 교오코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한 사람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그가 주춤하는 사이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들이받았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행운이었다. 구급차 출입구에서 마침 구급차가 나오고 있는 중이 었다. 교오코는 젓먹던 힘을 다해 그 바로 앞을 가로질렀다. 급브 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끽 하고 울렸다. 쫓아오던 형사들은 가속 이 붙어서 발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구급차 차체에 정면으 로 부딪혔다. 교오코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택시를 잡자마자 뛰어 올라 타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행선지를 댔다. 교오코는 숨을 헐떡이 면서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교오코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경황중에도 ‘형사들은 이제 쫓아오지 않는다 ’는 생각만 들었다. “무슨 일이야?” 미네까와는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에 호출을 받고 못 마땅한 얼 굴로 찾아왔다. “일이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겐모찌가 말했다. “쯔브라야 교오코를 놓쳤습니다.” “뭐라고! 도대체 뭘 한 거야!” “미행했던 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미행은 완벽했습니다. 경시청 의 형사가 손을 댔던 것입니다.” “무슨 용의로!” 겐모찌가 어젯밤부터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녀를 연행하여 협박할 생각이었을까요? 바보같은 녀석들 때 문에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미네까와는 책상을 힘껏 두들겼다. “그래서 빨리 끌고와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제와서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찾아. 여자가 갈 만한 곳을 뒤져봐. 경시청 쪽은 아무런 죄명도 붙일 수 없을 거야. 수배할 처지도 아니고, 상대는 아직 기자니까 말야.” “어떻게든 이쪽에서 붙잡겠습니다.” “그렇게 해줘.” “알겠습니다.” 겐모찌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미네까와의 책상에 놓인 전화 가 울렸다. “다끼 수상이다.” “수상님, 어쩐 일이십니까? “실은 그 예산건 말인데, 어떻게든 될 것 같다.” “정말 감사합니다.” 미네까와의 목소리에 생기가 넘쳤다. “단, 비밀경찰로서는 역시 어렵겠어. 그래서 새로이 호위관이란 부서를 만들까 하네.” “인원을 늘리는 것입니까?” “아니, 몇 명만 명목상 있으면 된다. 비용을 넉넉히 책정하여 그 쪽으로 돌리겠다.” “고맙습니다.” “일단, 자네 부하 중 몇 명. 그래, 세 명만 있으면 되겠군. 후보 명단을 보내 주게나. 그게 없으면 모양새가 갖추어지지 않을 테 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너무 말단이나 신출내기는 곤란해. 거액의 예산을 잡아 먹어도 어쩔 수 없는 자들이 아니면 말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세 명 정도로 괜찮겠습니까?” “다른 곳에서도 보낸다. 경호원, 경찰청,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에 서도 보낸다.” “그런 애송이들을 말입니까?” “예산을 위해서는 다소 요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 아 이들을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 매스컴도 그쪽으로만 주목할 테구. 자네 부하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나쁘게는 하지 않아. 나를 믿게.” 수상의 전화가 끊어지자, 미네까와는 잠깐 수화기를 든 채로 마 치 그것이 수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외경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1> 순교자들 1 “조심하거라.” 자식을 학교에 보내는 어머니의 말은 어느 집이나 다 비숫비슷하 다. 그러나, 후루이찌네 집에서는 아주 절실한 말이었다. 매일 아 침 중학교 2학년인 딸 찌까를 배웅할 때 미끼코는 같이 따라가고 싶은 마음으로 달려나가게 된다. 하지만 야무진 찌까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괜찮아. 내 나이에 엄마랑 같이 다니면 흉본단 말야.” 미끼코의 불안은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본래 미끼코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괜한 일에 근심 걱정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런 미끼코였기 때문에 남편인 후루이찌 히로야와도 잘 지내왔 던 것이다. 후루이찌는 10년 전, 아니 20년 전의 작가처럼 까다롭 고 신경질적인 타입이었다. 고전적인 작품을 고집하며 최근에 보기 드문 <작가다운 작가>라 고도 불리는 후루이찌는 과연 그 말에 어울릴 법하게 행동했다. 아내 이외에 애인을 사귀기도 했고, 홀연히 어느 날 종적을 감추 기도 하는가 하면 느닷없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끼코는 찌까와 함께 고집스럽게 집을 지키곤 했다. ‘남편은 조만간 돌아오고 말 거야’ 하며 태평스럽게 지내왔다. 그리고, 그것은 늘 옳았다. 6년 전, 병으로 한 번 쓰러지고 난 후부터 후루이찌는 몰라보게 절제하면서 저작에 몰두하게 되었다. 잊혀져 가던 작가의 부활이 라고 세간의 주목도 집중시켰다. 게다가 천 장이 넘는 대작으로 두 개의 상을 받고 나자 문단내 그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5년 전에 별세계처럼 보였던 이 고급주택지에 호화저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정원이 딸린 집을 샀고 생활도 안정되었다. 찌까도 명문사립중학교에 넣었다. 미끼코도 명사 부인으로서 괜찮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온한 날들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찌까를 배웅하고 돌아온 미끼코는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냈다. 전에는 된장국과 밥이 아니면 먹은 것 같지가 않았는데, 이 현대 식 부엌에서 식사하게 된 후로는 빵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스 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워질 정도였지만, 인간이란 환경에 많이 좌 우되는 동물인 듯했다. 토스트를 굽고, 딸 찌까처럼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피를 타서 마 셨다. 익숙해지면 이것도 산뜻하고 위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슬리퍼 소리에 미끼코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 … 왜 그래요?” 후루이찌 히로야가 텁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핼쑥한 얼굴로 돌아 왔다. 미끼코가 골라 준 영국제 얇은 카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미 끼코가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후루이찌 자신은 옷차림에는 통 관심이 없어 아내가 골 라준 옷이라면 여자옷이라도 입어 버릴 정도였다. 이를 보고 종 종 찌까가 아빠를 놀려 대곤 했다. “커피 있어?” 억지로 짜 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안 주무셨어요?” “응.” 후루이찌는 의자를 당겨 털썩 주저앉았다. 미끼코는 불안한 표정 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몸 상해요, 자지 않으면. 그렇게 일이 밀렸어요?” “신문 연재는 펑크낼 수 없으니까.” 미끼코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잠시 연재를 쉬게해달라고 하면 어때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 오세요.” “이런 때에? 안 돼.” 후루이찌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쉬면 더 쓰기 어렵다구.” 미끼코는 잠자코 후루이찌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후루이찌는 문 득 시계를 쳐다보며 물었다. “찌까는 벌써 갔나?” “네.” “요즈음 … 아무 일도 없지?” “괜찮아요. 친구와 함께 다니게 했으니.” “그래?” 후루이찌는 머리를 흔들었다. “좀 주무셔야겠네요. 원고는 다 됐어요?” “응” “그럼, 빨리 보내야 되지 않아요? 제가 할까요?” 후루이찌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냐, 내가 할게. 담당자와 할 얘기도 있고.” 오토바이가 원고지를 가지러 오던 것은 오랜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전화 회선을 이용한 팩시모뎀을 사용했다. 후루이찌처럼 나이 든 작가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원고를 확실하게 건네 주었구나’ 하는 느낌이 안 드는 것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미끼코가 일어섰다. “누구지?” 후루이찌네 집에는 두 대의 전화가 있었다. 한 대는 후루이찌의 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울린 것은 거실 전화였다. “네, 후루이찌입니다.” 미끼코는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로 걸어오는 이는 편안한 상대들뿐이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젊고, 우렁찬 남자 목소리였다. 누굴까? 미끼코는 짐작가는 이가 없었다. “누구시죠?” “난 당신 남편을 죽일 것이오.” “뭐라구요?” “당신 남편은 일본인으로서 애국심이 결여되어 있으며 공산권을 위해 일하는 비국민이오.” “당신은?” “나는 일본인이오.” 마치 연설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강한 긍지가 깃들인 말투였다. “후루이찌 히로야를 죽이는 것이 나의 의무요.” 전화가 끊겼다. “무슨 일이야?” 후루이찌가 다가왔다. “협박했어요. 당신을 죽이겠다고 ….” “항상 있는 일 아냐?” 후루이찌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버려 두라구. 상대하지 마.” “그렇지만 당신, 이쪽 전화로 걸려 왔다구요. 아무도 모를 텐데. ” 후루이찌가 2층의 서재를 향해 계단 쪽으로 가자, 미끼코가 쫓아 오며 말했다. “그런가?” 후루이찌도 비로소 그 점을 깨달은 듯했다. “그렇지만 … 불가능이란 없겠지. 뭐, 찾을 작정만 하면 간단하 잖아. 놈들에겐 뒤를 봐 주는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 말야.” “그런 말 해도 괜찮아요? 찌까는 어쩌구요.” 후루이찌는 아내의 눈을 피하듯이 눈길을 떨구었다. “그 앤 똑똑해. 괜찮을 거야.” 거의 자신에게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미끼코는 부엌으로 돌아와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지만 도무지 진 정이 되지 않았다. 후루이찌는 정치적인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비도덕하 다고 비난받은 적도 있고, 외설적이라 하여 경찰에게 감시를 당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1년 사이에 부쩍 협박이나 짓궂은 편지와 전화 가 많았던 사실이 상기되어 미끼코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은 위협에 그쳤지만, 돌에 맞아 유리가 깨졌던 적도 있었 고 죽은 개가 현관 앞에 던져졌던 적도 있었다. 후루이찌는 대범하게 생각했고 지금까지는 그다지 겁낼 만한 일 도 없었지만, 아내나 딸의 신변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끼코도 남편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 만 24시간 내내 안전하게 경계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일 단 가까운 경찰에 알려두긴 했다. 보통 때라면 세척기를 사용했을 테지만, 오늘은 손으로 설거지를 했다. 뭔가 하고 있으면 불안이 다소 가셔지는 것같았다.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은 그쪽이 후루이찌 주변사정에 상당히 정 통해 있음을 나타냈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군대식 말투가 지금까 지 걸려 온 협박 전화와는 어딘가 달랐다. 그것은 미끼코의 직감 에 지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달랐다. 다시 한번 남편에게 주의를 잘 시켜두자고 미끼코는 생각했다. 지금은 벌써 잠들었을 것이다. 일어나면 말해 줘야지. “아 ….” 미끼코는 무심결에 소리를 질렀다. 커피 잔 하나가, 세제 묻은 손에서 미끄러져 개수대에 떨어졌다. 그다지 세게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 멋지게라고 말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 깨지고 말았다. 미끼코는 잠시 그 파편을 주으려 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발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후루이찌가 얇은 코트를 걸쳐 입고 내려 와 있었다. “당신, 어디 외출하는 거예요?” “응, 약속을 깜빡 잊고 있었지 뭐야.” 후루이찌는 허둥대며 현관으로 갔다. “원고는 보내지 않았어요?” 그녀는 남편 뒤를 따라서 현관으로 쫓아갔다. “그거랑은 다른 이야기야.” 후루이찌는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구두에 억 지로 발을 밀어넣었다. “갔다 올게.” 말이 끝났을 때, 후루이찌는 이미 밖에 나가 있었다. 미끼코는 잠 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2> 순교자들 2 일 때문에 편집장 같은 이를 만나는 경우라면, 저렇게 허겁지겁 나가지 않았다. 가령 약속에 한 시간쯤 늦어도 태평스럽게 나간 다. 그리고 대개는 편집장이 이쪽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후루이찌 가 나가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일까? 미끼코 가 현관 앞에 붙박혀 있을 때, 2층 남편 서재에서 전화 벨 소리 가 들려왔다. 아랫층 복도에 있는 전화로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미끼코는 자신도 모르게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찌까 어머니신가요? 담임 선생인 야기입니다.” 전화선을 타고 온화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찌까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뭐라구요? 제 시간에 나갔는데 ….” 미끼코는 일순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같이 다니는 우에쿠사에게 물어 봤습니다만, 겁에 질려 서 …. 아무래도 상태가 좀 이상한 거예요.” “무슨 일이 … 있었나요?” “우에쿠사를 상담실로 데려가 안정을 시킨 다음 물어 봤어요. 실은….” 교사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그날 아침도 찌까는 보통 때처럼 우에쿠사 도모미 집에 들렀다. 도모미와는 국민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각 별하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중학교에 진학해서 다시 만났고 집도 가까와서 곧 친한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기다렸지?” 우에쿠사 도모미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왔다. 둘은 지하철 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립 학교의 교복은 한때 거의 폐지될 뻔했지만, 최근 수 년 동 안 부활한 곳이 많아졌다. 찌까가 다니는 중학교에서는 구태의연 한 제복을 감색으로 바꿨으며, 스커트와 구두는 자율에 맡겼다. 물론 가방은 들고 다니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패션 백 으로 안에는 전자식 탁상 계산기와 마이크로 카세트 레코더가 들 어 있었다. “걱정되는 일 있어?” 도모미가 걸어가면서 물었다. “아빠가 말이지.” 찌까가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 “요즘 우리 집엔 부쩍 협박 전화가 많이 걸려오고 있어. 아빠는 만일의 경우도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애.” “설마! 괜찮을 거야.” “그랬으면 좋으련만.” 찌까는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 테러까지는 막을 수 없을 걸. 수상하고 다르잖아. 경 호원이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위험해?” 도모미가 지그시 찌까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빠는 어떤 각오가 되신 것 같애. 그렇지만 말야, 문제는 엄마 랑 나야.” “찌까 네가?” “엄마는 나한테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좀처 럼 주무시지도 못하는 것 같애.” 도모미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떡였다. 찌 까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서두르자. 늦겠어.” 둘은 좀 걸음을 재촉했다. 고급주택지여서 그런지 이렇게 이른 시각에 나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들 외에 사람 그림자는 그다 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자동차 엔진소리가 났다. 최근에 나온 차 치고는 요란스럽다. 찌까가 돌아보았다. “도모미 ….” “어?” 돌아 본 도모미는 눈을 크게 떴다. “프로메테우스 아냐?” 붉은 제복이 타오를 듯 선명했다. 지프 두 대에 세 명씩 타고 있 었다. 찌까와 도모미는 길 옆으로 비켜섰다. 앞에 달리고 있던 지 프 한 대가 속도를 내며 둘을 앞지르는가 싶더니 끽 하는 브레이 크 소리를 내며 그들 옆에 정지했다. 등 뒤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찌까와 도모미는 앞뒤를 지프에 차단당하게 되었다. “찌까 ….” 도모미는 하얗게 질려 찌까의 손을 꼭 쥐었다. 프로메테우스 대원들이 지프에서 내려 둘 쪽으로 다가왔다. 가장 연장자인 듯한, 머리가 긴 대원이 찌까를 꿰뚫을 듯한 눈으로 똑 바로 응시했다. “후루이찌 찌까 맞지?” 의외로 상냥한 목소리였다. “맞아요.” 찌까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 줘야겠다.” “학교에 가야 해요.” 찌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원의 손이 날아왔다. 찌까는 내동댕이쳐지듯 길바닥에 쓰러졌다. “찌까!” 도모미가 몸을 굽히기도 전에 다른 대원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반쯤 정신을 잃은 찌까를 일으켜 세워 지프 쪽으로 끌고 갔다. 쫓아가려 하는 도모미의 발을 머리 긴 대원이 부츠 끝으로 걸었 다. 도모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모미는 얼굴을 들었다. 지그 시 내려다 보고 있는 대원의 차가운 눈을 보자 몸이 떨렸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 대원은 그렇게 말하고서 부츠 끝으로 도모미의 얼굴을 툭툭 쳤다. “알겠지?” 도모미는 울먹거리며 끄덕였다. “착한 아이구나.” 어울리지 않게 그 대원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모미는 그대로 얼굴을 숙이고 흐느껴 울었다. 점차 지프 소리 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구니코는 아즈마 마사코 앞에 나가 똑바로 섰다. 프로메테우스에 경례는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아즈마 마사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SS와는 다르기 때문이지.” SS. 히틀러의 나찌 독일에 조직되어 있었던 친위대를 뜻했다. 신 문이나 잡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프로메테우스를 SS와 관련시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즈마 마사코도 알고 있었던 것이 다. “안녕.” 아즈마 마사코는 책상에 앉은 채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상황이 있었나요?” “넌 괜찮아.” “그래요? 난 잊어버렸는 줄 알고 ….” 구니코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나중에 일이 있어. 기다리고 있도록.” “네.” 구니코는 대장실에서 나와, 이 맨션의 거실에 해당하는 방으로 갔다. 이 거실은 대원들의 휴게실로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편히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구니코는 언제나 일찍 본부에 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자신 보다 먼저 7, 8명의 대원이 출동했다 돌아온 것을 게시판을 보고 알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가장 신참 대원인 오사다 가나코가 카운터 맞은편에서 머리를 숙 였다. “안녕.” 구니코는 휴식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네. 먼저 온 마쯔이는?” “제가 오기 전에 외출한 것 같아요.” 가나코가 말했다. “커피 마시겠어요?” “응, 부탁해.” 구니코는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프로메테우스 대원이 된 지 2개월이 지났다. 대원의 수도 약간 늘었다. 가나코는 17살이다. 물론 대기업 사장의 딸이며, 역 시 수상에 대한 충성의 증표이다. 인질로서 대원이 되었다는 점 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고마워.” 구니코는 커피잔을 받아들며 물었다. “마쯔이하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 알아?” “아뇨. 전혀 몰라요.” “그래?” 구니코가 입단한 후, 특히 나까도 신고의 국장 경비에 참가한 후 로 프로메테우스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이 다끼가 노린 바였는지 모르지만, 매스컴이 프로메테우스를 화제성 보도 로 다루는 한도 내에서는 전혀 규제받지 않았다. 물론 비판적인 말이 활자화된 적은 없었다. 대원들의 활동은 거의 TV나 신문사 카메라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것은 구니코에게는 괴로운 일이었 다. 당연히 그 사진이나 뉴스는 시게마쯔의 눈에 띌 것이 틀림없 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드라이브 갔을 때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고 난 후, 구니코 는 한 번도 시게마쯔를 만나지 못했다. 전화를 걸어보아도 회사 에서는 병기부서의 사람에게는 전화를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집에 걸면, 어머니가 미안한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바쁜지 아직 안 왔는데?” 이미 시게마쯔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구니코는 생각했다. 그 래서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집요하 게 전화도 걸 수 없었다. 다끼의 이야기로는 어디까지나 대학생이란 입장에서 프로메테우 스에 참여해 주면 된다고 했지만, 이미 구니코는 대학에도 다니 지 않았다. 구니코가 프로메테우스의 대원이란 사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널리 퍼져 학교에 가도 누구 한 사람도 구니코에게 다가 오려 하지 않았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친구들에게 다 가가면 그들은 이내 입을 다물고 어딘가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구니코로서는 괴로웠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반응이 기도 했다. 누구라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상 대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이렇게 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구니코는 대학을 휴학하게 되었고, 매일 이 본부로 나오게 되었다. 다른 부원들도 모두 비슷한 것 같았다. 제복 차림으로 거리를 걸으면, 누구나 당황하여 피했다. 눈이 마 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묘 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단지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타인에게 두려운 존재라는 인식은 기묘하게도 자학적인 쾌감을 주었다. 구니코조 차 그것을 느꼈다. 다른 대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때때로, 구 니코는 문득 문득 두려워지기도 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마쯔이 미즈요가 들어왔다. 구니코는 컵을 놓고 일어섰다.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마쯔이 미즈요는 아 즈마 마사코에 버금가는 부대장의 지위에 있었다. 필시 태어날 때부터 오만한 성격이었을 테지만, 그 오만함이 <힘>을 장악하 고 있으니 그 결과는 당연히 상상이 가는 것이었다. 가혹함에 있 어서는 대장인 아즈마 마사코에게조차 주의를 받은 적이 있을 정 도였다. “걔는 너무 지나쳐 ….” 구니코는 아즈마 마사코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 었다. “니노미야, 잠깐 대장실로 와.” 마쯔이 미즈요가 말했다. “네.” 구니코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쯔이 미즈요의 뒤를 따라서 대장실에 들어간 구니코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열네댓 살쯤 된 소녀 한 명이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알몸이었 다. 전라가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3> <순교자들 3> 쯔브라야 교오코는 누군가의 손이 몸을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 다. 시야가 아직 흐릿하다. “이봐요 아가씨,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습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침한 두 눈에 초점이 잡히자 경관 제복이 덮쳐들 듯이 서 있었다. 교오코는 튕겨오르듯 일어섰다. “취했었나요?” 경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일순, 교오코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냈다. 그렇다. 여기는 공원 안의 휴게소였다. 어젯밤, 너무 지쳐 이곳에 누웠고 잠시 두세 시간쯤 눈을 붙일 작정이었는데 곯아 떨어지고만 모양이다. “미안합니다.” 재빠르게 교오코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기 드물게 마음씨 좋 은 경관 같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잠자기 좋은 계절이니까요.” 경관은 웃음을 띠고 말했다. “겨울 같으면 얼어 죽어요.” “잠깐 쉬어 간다는 게 그만 잠이 들어서.” 교오코는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를 자기 손으로 짧게 잘라 버렸 는데, 잘된 것 같았다. 여자는 머리 모양에 따라 인상이 많이 변 한다. 경관은 지금 자신이 흔들어 깨운 사람이 전국에 지명 수배 된 테러리스트 일당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는 모양이었 다. “아니, 벌써 지각이잖아?” 교오코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었다. “빨리 가야겠네요?” “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교오코는 머리를 꾸벅 숙이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 들후들 떨렸지만, 미심쩍게 여기지는 않았다. 조금 걸어가다가 뒤 를 돌아보았다. 이미 경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오코는 이 마의 땀을 살짝 닦아냈다. “휴우, 십년 감수했네 ….” 그 경관이 멍청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양손엔 차가운 금속제 수갑이 채워져 있을 뻔 했다. 교오코는 공원을 나와, 어디로 갈까 궁리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주위의 시선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걱정해도 소용 없 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명수배된 후 시작된 도주생활은 벌써 2주일이나 됐다. 예상했 어야 했다. 그 호텔 방에서 당연히 자신의 지문이 나왔을 것이다. 오히려 그때를 생각하면 수배가 늦은 셈이다. 물론, 수배가 늦어 진 것을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신문사에서는 즉시 해고되었을 테고, 숨겨줄 친구도 떠오르지 않 았다. 아니, 부탁하면 숨겨줄지도 모르지만 상대에게 폐가 되는 일이었다. 관계 없는 친구들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교오코는 무작정 도망을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미국에서 부통령 해리슨이 찾아올 예정이다. 수상은 당연히 공항으로 마중나갈 것이다. 그것이 유일 한 기회였다. 물론 교오코의 얼굴은 잘 알려져 있었다. 경계가 삼엄한 공항에 잠입하는 것조차 하늘에 별따기일 테지만, 어쨌든 해보아야 했다. 이대로 헛되이 잡히면 끝장이다. 그뿐이 아니다. 함께 수술을 받았던 두 사람에 대해서도 불어버 리게 될 것이다. 아무리 묵비권을 행사할 작정이어도, 지금은 자 백약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경찰이 특 히 공안관계로 체포된 사람에게 한가롭게 인권 운운 하지는 않을 게 뻔했다. 만약 잡히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죽어버려야 한다. 그 방법이 교 오코의 고민이었다. 옛날 스파이처럼 입 안에 청산가리를 넣어둘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일단 교오코는 핸드백 안에 나이프를 넣고 다녔다. 그러나 형사 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으면 그런 것을 꺼낼 틈이 있을지 의문이 었다. 무언가 다른 수단을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교오코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장소를 걷고 있었다. 어딜까? “교오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돌아보니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오까야 ….”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비지니스 맨 이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 맞았군. 아까부터 네가 아닐까 했어.” “너 …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일하는 회사라구, 여긴.” 오까야 시게오가 눈 앞의 빌딩을 가리켰다. “그래…? 나도 모르게 그만 여기로 걸어오고 말았네.” 교오코는 힘없이 웃었다. “잘 지내고 있어?” “응, 너는 … 큰일났더군.” 오까야 시게오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내 자리는 3층 창간데 무심코 아래를 봤다가 깜짝 놀랐다구.” “나랑 길게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아. 괜히 말려들면 큰코다친 다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개의치 않다는 듯이 환하게 오까야는 웃었다. 웃는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교오코는 생각했다. 오까야 와는 전문학교를 다닐 때부터 알고 지냈다. 순정파 젊은이로 만 나면 기분 좋은 상대였지만, 오까야가 교오코에게 지나치게 집착 하였고 그것이 부담스러웠던 교오코가 결국 그를 차버리고 말았 다. 그 이후로 첫 재회였다. “너, 갈 곳은 있어?” 오까야가 물었다. “있지. 그게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잘 모르지만.” 교오코는 농담조로 말했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줘.” 오까야의 말은 고마웠다. 하지만, 그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를 자기와 같은 수렁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 ….” 교오코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혹시 현금 좀 있으면 주지 않을래? 카드를 사용하면 금방 알아 버릴 테니까. 요 2, 3일은 별로 먹지도 못했어.” 오까야는 조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 내들며 물었다. “내 아파트 기억해?” “응.” “아직도 거기에 혼자 살아. 이게 열쇠야. 들어가 좀 쉬었다 가. ” “안 돼! 그럴 수 없어.” “괜찮아.” 오까야는 교오코의 손에 열쇠를 쥐어 주었다. “냉장고에 먹을 것도 좀 있어. 편히 좀 쉬어. 알았지?” 불러세울 틈도 없이 그는 빌딩으로 달려들어갔다. 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더니 웃음을 지어보였다. 교오코는 열쇠를 꼭 쥐고 눈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꾹 참았다. “가와이 선생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 홈마가 옆자리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 아뇨.” 가와이 노부코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잠시 현기증이 나서….” “저런. 너무 피곤하신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노부코는 시험 답안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노부코를 지 켜 보던 홈마가 말했다. “어쩌면 …. 축하할 만한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홈마 선생님! 금세 소문이 퍼질 텐데, 그만하세요.” “아니 실례! 실례!” 홈마가 유쾌하게 웃었다. 노부코도 웃었다. 그러나 진짜 웃음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인데 교정은 조용했다. 이미 흙투성이가 되어 뛰어다니 던 학생들의 모습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노부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정말 임신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제 검사를 받았다. 오늘 낮에는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노 부코는 동요하고 있었다. 설마 하고 생각했다. 피임약도 먹고 있 었는데. 물론 그것이 100퍼센트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99퍼센트라면 누구든 괜찮으리라 생각하기 마 련이다. 혹시, 임신이라면 …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인가? 결의는 변치 않 았다. 그렇다. 변하면 안 된다 ….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4> <순교자들 4> 교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전화가 울렸다. “네, 가와이입니다.” “아, 가와이 노부코 씨이신가요?” “그렇습니다.” “K대학 병원 산부인과입니다.” “검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임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그 뒤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부코는 기계적으로 대답 을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임신. 홈마가 마침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노부코는 손으로 하복부를 쓰다듬어 보았다. 이 안에 생명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생명과 죽음, 양쪽이 모두 태내에 머물고 있는 것 이다!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 노부코는 아이러니한 자신 의 운명을 저주하고 싶었다. 이런 몸으로 암살 따윌 할 수 있을까? 언제 현기증이 나서 쓰러 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안 되겠다. 아이를 지우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태어날 수 없는 아이니까. 노부코가 직원실로 돌아오니, 홈마가 TV를 보고 있었다. 디스플 레이용 브라운관의 입력을 바꾸면 TV를 수신할 수 있었다. “뭐예요?” 노부코가 물었다. “뉴스예요.” “무슨 일 있어요?” “별다른 건 없고, 미국 부통령이 다음달 온다고 하네요.” “부통령 … 해리슨이요?” “이름은 잘 모르겠어요.” “내달 10일에 방문할 해리슨 부통령은 최근 일본의 무기 수출이 대폭 늘어난 데 대해….” “평화헌법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홈마가 한숨을 짓는다. 그러나 노부코는 듣지 못했다. “나리따 공항에 도착할까요?” “글쎄요. 어차피 우리 쪽에서는 수상인지 뭣인지 높은 사람들이 총출동하여 마중을 나가겠지요.” “그렇겠죠 ….” 노부코는 지그시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다끼는 마 중을 나갈 것이다. 그날 공항은 어떻게 될까? 패쇄? 아니, 그런 일은 있을 리 없다. 국민들에게 그만한 불편을 강요하지는 못할 것이다. 친구를 마중하러 간다고 하면 공항에 나가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검문이 아무리 엄중하여도 수하물을 조사하는 정도 는 할지도 모르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속탐 지기까지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수상에게 접근할 수 없 다고 해도, 그 정도의 거리라면 …. 폭발은 상당히 강력하다고 했 다. 다음달 10일.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때가 기회 였다. ‘빨리 병원에 가야 해’라고 노부코는 생각했다. 그날은 조금 집에 돌아가는 것이 늦어졌다. 쇼핑을 하고 서둘러 귀가하 니 집은 아직 깜깜했다. “아직 안 돌아왔나 ….” 반쯤은 안심을 하며, 올라가 불을 켰다. 그때였다. “어서 와.” 노부코는 ‘꺅’ 소리를 내며 놀랐다. “계셨어요? 아이,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 미안.” 가와이는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어요? 불도 켜지 않고.” “아니, 잠깐 잠이 들었었거든.” “몸이 안 좋아요?” “그런 건 아냐.” 가와이는 고개를 저었다. “좀, 이상해요.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가와이는 기운이 없었다. 이미 몇 개월이나 같이 살았다. 그 정도 는 알 수 있었다. “음, 이리 좀 와 줘.” 시키는 대로 옆에 앉자, 가와이는 노부코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냐 … 하고 말하고 싶지만 말야.”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일 말야, 실패하고 말았어.” “괜찮아요. 누구라도 실패를 한번쯤은 해요.” “그렇지만 너무 큰 실패야.” 가와이는 천정을 올려보고 한숨을 쉬었다. “직장을 그만두게 될 것 같아요?”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말야.” “그럼, 괜찮지 않나요?” “그렇지가 않아. 아마 회사측은 내가 사표내기를 기대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 내려구요?” “내고 실직할까? 당신이 날 먹여 살려야만 하는데.” “그럼, 아무렇지도 않게 버티면 되잖아요? 그래서 도저히 안 되 겠다 싶으면, 그때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노부코도 알고 있었다. 특히 가와이처럼 고지식한 남자는 외곬으 로만 생각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다지 요령 좋게 행동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노부코도 그 점은 같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있 었다. “우선 저녁부터 드시고 내일 하루 쉬면서 생각해 봐요.” “산책 좀 하고 올게.” 이렇게 기운 없는 남편의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노부코는 가슴이 미어져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보 …” 노부코는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부르고 있었다. “왜?” 현관으로 가던 가와이가 뒤돌아 보았다. 안 돼! 말해선 안 된다!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낫다. “저 …, 나 아이가 생겼어요.” 속생각과는 달리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자신의 말에 노부 코는 흠칫 놀랐다. 가와이는 일순 멍하게 노부코를 바라보았다. “뭐라구? 그 동안 약 먹지 않았어?” “때마침 효과가 없었나 봐요.” 그렇게 말하고 노부코는 웃었다. 말해 버리니 갑자기 몸이 가벼 워지는 듯했다. “정말이야? 여보!” 가와이는 얼굴이 환해지며 노부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짓말이라 우긴다 해도 사실은 사실이에요.” “잠깐만 기다려. 나 장 좀 보고 와야겠어. 당신은 얌전히 쉬고 있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학교도 다닐 거라구요.” 노부코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일, 쉬면 어때? 아이 낳을 때까지.” “몸이 무거워지면요. 지금은 걱정 없어요.” “하지만 무거운 물건은 들지 마.” “학교에 들고 다니는 것은 교과서와 마카펜 정도인 걸요.” “그것도 위험하다구.” “호호 … 지나친 걱정이에요. 당신 회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 는데, 학교를 그만둘 순 없잖아요.” “회사? 누가 그만둔대? 목이 잘려도 책상에 몸을 동여 매고 월 급을 받아 올게.” 둘이 웃기 시작하자 좀처럼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겨우 웃음이 멎자 둘은 소파에 앉아서 크게 숨을 쉬었다. “이봐.” “응?” “너무 웃은 거 아닌가? 괜찮아?” “그만 해요.” 노부코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밤에 침대에 들자 가와이가 말했다. “이름을 생각해 둬야겠군.” “너무 일러요.” “그래? 그렇군. 하지만 빨리 정해 둬야 나쁜 일도 없을 거야.” 노부코는 조금 웃었다. “덕분에 생각할 게 생겼어. 잘 자.” 가와이는 노부코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남편의 자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노부코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만 걸까. 모르는 채 있으 면 슬픈 일도 없을 텐데. 잔혹한 짓을 하고 말았다. 창틈으로 스며든 달빛에 남편의 옆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 었다. 노부코는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단지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만, 형식뿐인 결혼 생활을 할 작정이었는데. 노부코는 천장으로 눈길을 되돌렸 다. 빛이 그림자와 장난치면서 무언가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노부코의 뇌리에 가와이와, 자신과, 그리고 유모차 안의 아기, 그 렇게 셋이서 밝은 햇살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안 돼.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안 돼.” 노부코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태내에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노부코를 압박했다.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 러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노부코는 손으로 살짝 하복부를 더듬었다. 수술 자국이 만져졌다. 노부코는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한 눈길을 어둠 속으로 돌렸 다. 체내에 장치된 폭탄이 아이와 이웃해 있다니. 아니, 그것은 아직 아이라고 할 단계는 아니고, 아주 작은 원형질에 지나지 않 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생명임에는 틀림 없다. 어찌하면 좋 을 것인가? 답은 나오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노부코는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빨간 유모차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5> <순교자들 5> “어떻게 했다고?” 아버지의 목소리에 구니코는 갑자기 자신으로 돌아갔다. 평면의 장방형 브라운관은 이미 아무런 영상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구니코는 긴 의자에 가로 누운 채 말했다. “저녁도 먹지 않은 것 아니야.” “걱정 마세요.” 니노미야는 천천히 긴 의자 앞으로 돌아왔다. “프로메테우스에 무슨 일이 있었니?” 구니코는 부친을 말없이 뒤돌아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프로메테우스는 정확히 임무를 다하 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수상에게도 그렇게 말해 주세 요.” “요즘에는 너와 충분히 대화할 틈도 없었구나.” 니노미야는 의자를 끌어당겨 구니코의 곁에 앉으면서 말했다. “말씀 드릴 것도 별로 없어요. 프로메테우스가 오늘 올린 전과 는 발가벗은 소녀 한 명이었어요. 근사하지요? 우리 프로메테우 스의 심원한 이념에 꼭 맞아요.” 구니코는 입술을 삐쭉이며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니노미야가 당황한 듯이 말했다. “작가의 딸이에요. 후루이찌 히로야. 부도덕한 작가, 일본인을 타락시키는 퇴폐 작가.” “아아, 알고 있다.” “그 애를 유괴해 왔어요. 프로메테우스의 임무 중에 유괴까지 있다는 것은 몰랐어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후루이찌 히로야의 연재소설을 중지시키려고요.” “아아, A 신문에 연재하는 거 … 그 소설에 대해서 수상이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끼 수상한테서요?” “일본의 전통을 파괴하는 소설이라고 말했지.” 그러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 탄압이 되기 때문에. 구니코는 웃고 싶었다. “알았어요.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대신 행동을 개시한거로군요. ” “여자 애를 유괴했다고?” “그리고 부친을 불러내어, 그 길로 신문사에 전화를 하게 했던 거예요. 건강상 당분간 연재를 못하게 됐다고. 그뿐 아니라 앞으 로는 두번 다시 펜을 드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런가? 허나, 방법은 약간 다를지 모르지만 그것도 나라를 위 해서지.” 니노미야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삐 하는 전자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로군.” 니노미야가 일어섰다. “내가 사용해도 되냐?” “안 돼요. 아버지 방에서 받으세요.” 구니코는 지지직거리는 브라운관 쪽으로 눈을 돌린 채 말했다. “내가 써야 돼요.” “알았다.” 니노미야는 별로 화난 기색도 없이 구니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 려 주고, 방에서 나갔다. 구니코는 온몸으로 숨을 쉬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조명이 부드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마저 눈부신 느낌이 들었다. 대장실 안에서 아즈마 마사코와 마쯔이 미즈요의 날카로운 시선 에 떨고 있던 후루이찌 딸의 흰 피부가 그 조명에 겹쳐졌다. 구 니코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달려들어 마쯔이 미즈요를 목졸라 죽이고 싶었다. 원래 성질이 잔인한 미즈요였다. 저항할 만한 힘 도 없는 소녀를 때리고, 걷어차고, 결국에는 의자에 앉혀서 부하 가 붙잡고 눌러 옴짝달싹도 못하는 소녀의 나신에 손장난을 치며 협박했다. 미즈요의 번들거리는 두 눈은 이미 제 정신을 가진 인 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구니코는 참을 수 없어 아즈마 마사코 쪽을 보았다. 그러나 아즈 마 마사코는 마치 환자를 진찰하는 여의사와 같은 냉정한 눈으로 구니코를 제지했다. 대장실에는 후루이찌의 딸이 훌쩍훌쩍 우는 소리와 미즈요가 장난치는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 보고 있는 대원들의 웃음소리가 잠시 뒤섞여 마치 독가스처럼 구니코를 에 워쌌다. 이대로 계속되면 소녀는 도대체 어떻게 돼 버릴까. 돌연 아즈마 마사코가 일어서서 말했다. “미즈요, 이젠 됐어. 부친이 올 시간이야. 어서 옷을 입혀.” 미즈요는 마지 못해 명령에 따랐다. 그냥 두었더라면 아마도 미 즈요는 소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휴게실로 돌아온 구니코는 힘없이 소파에 덜썩 주저앉았다. 전신 에 땀이 스며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까다 가나코가 물을 들 고 급히 뛰어왔다. 구니코는 물을 받아들고 벌컥 벌컥 마셔 버렸 다. 구니코는 머리를 흔들었다. 모두 잊어버리고 싶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있다. 이곳은 자신의 방이다. 일어서서 구니코는 방 안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전화벨이 울렸다. “네. 구니코입니다.” “아즈마 마사코예요.” 나즈막한 소리가 들렸다. 구니코는 반사적으로 등을 펴고 섰다. “무슨 일이에요?” “오늘 매우 괴로웠죠?” 구니코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네.” “미즈요의 행동이 못마땅했던가요?” “그건 ….” 구니코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대장도 말씀하셨다시피 폭력집단도, SS도 아닙 니다. 그런 일은 누구라도 반감을 살 수밖에 없는 거 아니에요? ” 단숨에 말해 버리고 살짝 숨을 내쉬었다. 아즈마 마사코는 말없 이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데 잘 말해 줬어요. 미즈요는 프로메테우스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 각해요.” 구니코는 잠자코 있었다. “그럼 쉬세요.” 구니코는 아즈마 마사코가 먼저 끊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수화 기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몸이 굳어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오늘밤은 아무 생각 없이 자버려야지 하고 생각했다. 욕실 쪽으로 걸어가자, 전화벨이 또 울려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니노미야 구니코입니다.” “니노미야 씨입니까!” “가나코 씨? 어쩐 일이지?” “큰일났습니다!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가나코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진정해! 무슨 일이 있었어?” “미즈요 씨가 … 칼에 찔려서 ….” “칼에 찔렸다고?” 구니코는 어안이 벙벙했다. “거기가 어디야?” 구니코는 전화기에 설치된 녹음 테이프의 버튼을 눌렀다. 허둥대 는 가나코를 호되게 꾸짖고 나서 겨우 장소가 긴자거리의 지하도 라는 것을 알았다. “경찰은? 아직? 그럼 좋아. 내가 전부 연락을 취할 테니까, 너는 그 곳에 있어.” 구니코는 전화를 끊고 경찰에 연락한 후, 아즈마 마사코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야기를 듣자 마사코가 말했다. “바로 갈게요. 당신도 오세요.” “예.” “제복을 입고, 권총을 갖고 와요.” 마사코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에는 제복도, 총도, 본부에 놓아 두었으나 지금은 각자 보관하 고 있었다. 구니코는 운전사인 미나까미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말 하고 재빠르게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가씨. 준비됐습니다.” 미나까미가 벌써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구니코는 부츠를 신었다. “무슨 일이 있니?” 니노미야가 뒤따라 나오며 물었다. “부대장이 칼에 찔렸어요.” 구니코는 권총집을 손으로 누르면서 말했다. “나도 그런 신세가 될지 몰라요. 각오하고 있어요.” 구니코는 재빨리 현관을 나섰다. 현장은 지하도의 한 모퉁이, 술집이 늘어선 비교적 복잡한 장소 였다. 전에는 지하도라고 하면 기껏해야 여자들이 들리는 커피숍 정도였지만, 요즘은 지하도가 무척 번화가로 바뀌고 있었다. 구니코가 현장으로 다가가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이 당황해서 길 을 열어주었다. 놀랍게도 아즈마 마사코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지극히 흔해빠진 건물의 술집 입구에 오사다 가나코가 긴장된 얼 굴로 입술을 꼭 깨물고 서 있었다. “대장님, 늦어서 죄송 ….” 구니코가 입을 열자 마사코가 가로막았다. “아냐, 나는 가까우니까.” “이 술집입니까?” “그래요.” “미즈요 씨는 무얼 하고 있었나요.”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가나코가 말했다. “대단한 기세였어요. 내가 말렸지만 ….” “그래서?” “취한 손님 한 명이 부대장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어요. ‘ 너희들 같은 조막만한 계집애들이 낯짝 쳐들고 다니지 못하게 할 거야’ 이러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부대장님이 권총을 빼어 그 남자를 쏘았습니다.” “쏘았다구?” “팔목에 맞았을 뿐이에요. 그러자 상대가 위스키 병을 깨들고 뾰족한 끝으로 부대장을 ….” 가나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옆에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네가 나쁜 건 아냐.” 아즈마 마사코가 말했다. “그런데, 미즈요는 어디 있나?” “조금전 구급반이 와서 데리고 갔는데, 출혈이 심해서 살아나기 힘들 거예요.”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6> <순교자들 6> 구니코는 엉겁결에 심호흡을 했다. 마쯔이 미즈요가 죽음을 당했 다. 그 자체는 별로 슬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프로메 테우스의 대원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역시 쇼크였다. 물론 내 심으로는 구니코 자신도 프로메테우스를 혐오하고 있지만, 매일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동안 구니코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동지의 식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관은 오지 않았어?” 구니코가 물었다. “돌아갔어요.” 아즈마 마사코가 말했다. “돌아갔다구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죠.” 아즈마 마사코가 먼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구니코도 뒤를 따 랐다. 구니코도 술집 정도는 들어가 본 적이 있지만, 이곳은 생각보다 훨씬 넓은 건물이었다. 카운터 외에, 테이블이 네 개. 바닥에는 액체와 함께 유리 파편이 널려져 조명에 반사되고 있었다. 깨진 병 속에 담겨 있던 것은 위스키일까, 아니면 마쯔이 미즈요의 피 일까? 어둠침침한 조명과 바닥 색이 혼동되어 구별할 수 없었다. 안쪽 테이블에 코트를 걸친 오십 세 가량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얼빠진 눈으로 바닥을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그래요. 미즈요를 찌른 남자야.” 아즈마 마사코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에 인계하지 않습니까?” “내가 결정하지.” 아즈마 마사코는 천천히 나갔다. 그러다가 구니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에게 일임한다면 ….” “뭘 말입니까?” 아즈마 마사코는 권총을 빼들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 금속음에 남자가 몸을 움츠렸다. “자, 받아.” 구니코는 아즈마 마사코가 내민 권총을 망설이면서 집어들었다. “어떻게 할 셈이에요.” “이 남자를 처형해 버려.” 구니코는 숨을 삼켰다. “우리가 어떻게 ….” “괜찮아. 경찰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이 남자가 덤벼들어서 쐈다고 말하면 정당방위로 통해. 내 총이야, 걱정하지 마.” 구니코는 천천히 남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생활에 찌들어 보이는 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지금은 술이 깨어 핼쓱한 얼굴로 부들부 들 떨고 있었다. “어서!” 아즈마 마사코는 재촉하고 나서 옆으로 물러섰다. 남자가 구니코 쪽을 쳐다보았다. “살려주십쇼!” 별안간 남자는 바닥에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었다. “부탁합니다.! 경찰로 데려가 주세요!” 구니코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권총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 고 있다. “아내도, 자식도 있어요. 부탁해요! 쏘지 말아줘요!” 남자는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있었다. “눈을 보지 않는 편이 쏘는 데 좋아요.” 아즈마 마사코는 말했다. “허나 … 대장님, 꼭 이렇게 해야만 ….” 구니코는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명령을 거부하면 프로메테우스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 면, 다끼를 암살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점을 구니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웅크리 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남자를 사살해도 되는 걸까? 구니코는 이렇게까지 비정한 짓은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다면 내가 하지요.” 아즈마 마사코가 구니코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 직접 그 남자를 겨누었다. 구니코는 얼굴을 돌렸다. 권총이 두 번 울렸다. 허나, 그 음은 입구 쪽으로부터 들려왔다. 남자는 퉁겨나오듯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마루바닥 위에 굴렀다. 구니코는 입구에 서서 초연한 자세로 남은 권총을 꼭 쥐고 서 있 는 오사다 가나코를 보았다. 아즈마 마사코도 오사다 가나코 쪽 을 돌아보다가 곧바로 자신의 총은 홀스타에 집어넣고, 남자쪽으 로 걸어 나갔다. 이미 남자는 죽어 있다고 구니코는 직감했다. 아즈마 마사코가 잠시 확인하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 로 말했다. “니노미야 씨, 경찰을 불러.” “네.” 구니코는 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억눌렀다. “오사다 씨, 잘했어.” 아즈마 마사코가 말했다. 그러나, 가나코는 아직 권총을 움켜쥔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조각상처럼 크게 뜬 눈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같았 다. “오사다 씨!” 구니코가 어개를 붙들고 흔들어대자 비로소 가나코는 숨을 내뱉 었다. 아직도 멍한 상태로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 는 것같았다. 구니코는 가나코의 손에서 권총을 빼들고 홀스타에 다시 집어넣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입구 근처에 몰려 있던 사람 들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도망치듯 가버렸다. 구니코는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두 번의 총성이 프로메테우 스를 변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은,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으로 인간살육이 행해졌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던 구경꾼 중에서 그것을 항의할 용기를 가 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겠지만, 아마도 이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아즈마 마사코가 일시적으로 격한 감정에 휘말려 행동하는 성격 이 아니라는 것은 구니코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정당방위로 서 불문에 붙여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끼 수상으 로부터 양해를 받아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니코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비실>이라는 표시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눈을 떠 보니, 부드러운 저녁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쯔브라야 교오코는 어깨까지 덮어 주는 모포의 감촉에 잠이 깼 다. 머리를 돌려 보니 책상다리를 한 채 내려다보고 있는 오까야 시 게오의 따뜻한 시선이 있었다. “잠이 깼어?” 오까야는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깜박 잠이 들었네.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가려고 했는데.” 교오코는 일어서서 머리를 흔들었다. “벌써 저녁인가?” “그래.” 오까야는 일어서서 부엌으로 갔다. “내가 간단히 장을 봐 왔으니 어서 저녁 준비를 하자.” “난 나가야 하는데?” 교오코가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해?” 오까야는 냉장고에서 냉동식품을 꺼내며 윙크를 했다. “전자 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니까 썩 맛있지는 않을 거야.” “커튼을 닫을까?” 교오코가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오까야가 급히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내렸다. “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아. 누가 보면 안 되잖아?” 오까야는 실내등을 켠 다음 식기를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잠 깨게 샤워라도 해. 피곤하지?” “이러다가 너에게 어떤 폐를 끼칠지 …?” “괜찮아. 내가 옛날에 너에게 반했다는 걸, 아무도 몰라.” 오까야가 웃었다. “교오코, 저기 쇼핑백 있지? 옷 한 벌 사 왔어. 갈아 입어. 사이 즈는 중간이야. 맞겠지?” “그런 것까지 ….” “속옷은 좀 사기 어려웠어. 여점원에게 부탁해서 골랐어.” “고마워요. 염치 없지만 고맙게 받을 게요.” “지나치게 예의 차리면 곤란해. 샤워부터 하고 와. 그 동안 식사 준비를 해놓을 테니까.” 오까야는 휘파람을 불면서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목욕은 삼십 분 이상 걸렸다. 며칠 동안 샤워는커녕 머리조차 제대로 감지 못했다. 말끔히 씻 고 새 옷을 갈아 입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까야가 사온 옷은 활동하기 편한 바지와 스웨터였다. 색상과 무늬도 세련된 것으로 오까야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야아! 잘 어울리는데? 혈색도 좋아 보이구.” 오까야가 기쁜 듯이 웃었다. “밥이 좀 식었군. 한 번 더 데울까?” “괜찮아요. 이 정도면 따뜻해요.” “그래? 그럼, 많이 먹어. 그다지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이렇듯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하는 게 도대체 며칠 만인가? 교오코 는 다소 식긴 했지만, 이 인스턴트 식품이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고급요리보다도 맛있게 생각되었다. “… 친절, 잊지 않을게.”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오까야가 커피를 내놓을 때, 교오코는 말했 다. “됐어.” 오까야는 교오코의 컵에 커피를 따랐다. “모두가 세상이 이대로면 안 된다고는 생각하고 있어. 아냐, 모 두는 아냐.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허나 … 그날 그날 생활에 쫓겨서 아무 일도 못하지. 당신 같은 용기 있 는 사람과 한때 사랑을 나눈 사이였다는 것만도 나의 영광이야! ” “그만해요, 나는 … 여기저기 도망다니는 처지이고 영웅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교오코는 커피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다면 이곳에 있는 게 어때? 낮에만 밖에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렇게 하면 당신도 공범이에요.” “괜찮아.” 오까야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에게는 다행히 처자도 없다구.” “고마워요.” 교오코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물론 억지로는 안해도 돼.” 교오코는 커피를 모두 마셔 버리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불을 껐 다. “어쩔려구?” 오까야도 들어갔다. 교오코는 뒤를 돌아보고 나서 그 자리에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괜찮아.” 오까야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그럴 속셈이 아니니까 말야. 괜찮다니 까.” “안아 줘요.” 교오코는 봉긋한 가슴에 오까야의 손을 갖다 댔다. “나를 위해 ….” 이윽고 주방의 전등도 꺼지고, 커튼 사이로 스며든 가로등 불빛 만이 두 사람의 살갗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계속> 천리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7> <순교자들 7> ‘마쯔이 미즈요 씨의 죽음은 이 사회에 새로운 도덕성을 확립하 기 위해 용기 있는 싸움을 계속하는 프로메테우스읒? 불한 고귀한 희생이 되었다’ 다끼 수상은 TV 카메라를 향해서 쉴 틈도 없이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는 다행히 그 장소에서 사살되었다. 그러나 마 쯔이 미즈요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진심으로 추도의 뜻 을 표한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프로메테우스에서 탈퇴하려는 소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애국심이며 보상을 원치 않는 정열이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딸 들을 마음으로부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등의 내용이었다. TV 화면은 프로메테우스의 대원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비 추었다. 아즈마 마사코는 다끼 수상의 말이 끝나자 스위치를 껐다. 구니 코는 아즈마 마사코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즈마 마사코는 그저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대원들은 각자 오늘 임무에 착수하도록.” 구니코는 한 조의 리더로서 어느 중학교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곳에는 반정부적인 언동을 하는 교사가 판치고 있고, 축제일 에도 일장기를 게양하지 않는다는 밀고가 있었던 것이다. “니노미야 씨.” 아즈마 마사코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당신은 됐어.” “무슨 말씀입니까?” “그 조에는 쿠사마 씨를 가게 할 테니까, 당신은 내 방으로 와 줘.” “네.” 역시 … 제명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는 다 끼 수상과 면회할 기회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구니코는 생 각했다. 단지 한 번 만나면 되는 거야. 한 번만 …. “문을 닫고.” 대장실에 들어가자 아즈마 마사코가 말했다. “앉아요.” 구니코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아즈마 마사코와 마주 앉았다. 아 즈마 마사코는 서랍을 열더니 담배갑을 꺼내어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 구니코는 놀랐다. 아즈마 마사코가 담배 피는 것을 처음 본 것이다. “당신은?” “아뇨. 괜찮습니다.” 구니코는 아즈마 마사코가 능숙하게 연기를 내뿜는 것을 물끄러 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즈마 마사코는 피어오르는 흰 실 같은 연기를 보면서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 3개월이 지나면, 스물한 살이 돼요.” “이제 … 프로메테우스의 대장직을 내놓을 생각이야.” “예? 그렇지만 ….” “너무 오래하는 것도 좋지 않아. 대체로 스무 살까지 한다는 규 칙은 지켜야 하니까.” “유감입니다.”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아즈마 마사코에게는 늘 무엇이 있었다. 그저 미친 듯 행동하는 마쯔이 미즈요 같은 타입이 대장이 되어 있었다면 지금쯤 프로메 테우스는 틀림없이 살인집단으로 변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젯밤 그 남자를 사살하도록 명한 아즈마 마사코의 말 은 구니코에 있어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 아즈마 마사코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책상 위의 인터폰이 울 렸다. “겐모찌 씨가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구니코는 벌떡 일어섰다. “전, 그만 가 보는 게 ….” “아니야, 당신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 아즈마 마사코가 만류했다. 문이 열리고, 몸집이 작고 탄탄한 체격을 지닌 남자가 들어왔다. “겐모찌 씨. 앉으세요.” 구니코는 약간 떨어진 옆자리에 앉았다. 눈이 날카롭고 윤곽이 뚜렷한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 었다. 냉철한 인상과 함께 오만함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 었다. “비밀경찰인 겐모찌 씨요.” 아즈마 마사코가 그 남자를 소개했다. “니노미야 구니코라고 합니다.” 구니코는 절도 있게 머리를 숙였다. “아아, 그러면 바로 니노미야 씨의 따님?” 겐모찌라는 남자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비밀경찰 … 과연 직책에 어울리는 듯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러 나 비밀경찰이 무슨 용무로 왔을까. “인선은 끝났습니까?” 겐모찌가 아즈마 마사코에게 물었다. “네. 바로 니노미야 씨입니다.” 겐모찌는 끄떡였다. “더할 나위 없습니다. 수상 각하도 기뻐하실 겁니다.” 구니코는 당황해 하면서 아즈마 마사코를 쳐다보았다. “아직, 니노미아 씨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 당신에게 외부의 임무를 맡기고 싶어요.” “… 무슨 임무입니까?” “수상 관저의 경비야. 명예스런 일이지.” 구니코는 턱이 떨리는 것을 필사적인 노력으로 억제했다. “새롭게 특무대가 신설되었소.” 겐모찌가 말했다. “비밀경찰에는 나와 몇 명, 경찰청으로부터도 경호원과는 별도 로 뽑은 사람들이 추가되지요. 본래의 경비는 그대로 계속되고 야간에는 수상도 거의 관저에 계시지 않으므로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거의 부재중이라고 하는 것은 때로는 거처할 때도 있다는 의미도 된다. 구니코는 바라던 순간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사실에 가 슴이 뛰었다. “니노미야 씨의 따님이라면, 안성마춤입니다.” 겐모찌가 미소를 지었다. 웃을 것같지 않은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의외였다. “니노미야 씨를 선택한 것은 꼭 부친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즈마 마사코가 말했다. “그녀가 가장 우수한 대원이기 때문입니다.” 구니코는 약간 당황해서 아즈마 마사코를 보았다. 의외의 말이었 다. 아즈마 마사코는 미소를 띠면서 계속했다. “그래서, 니노미야 씨를 차기 대장으로 수상에게 추천했던 것입 니다.” “누가 와도 나가면 안 돼.” 오까야가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회사를 쉬어도 괜찮아요?” 쯔브라야 교오코는 아침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면서 말했다. “하루 정도 쉰다고 목이 달아나지 않아.” 오까야는 웃으며 신용카드를 찾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자, 어쨌든 수퍼에 갔다올게. 전화 와도 받으면 안 돼?” “네에. 알았어요.” 오까야가 밖으로 나가서 열쇠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교오코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는 것은 며칠 … 아니, 몇 개월만인가, 오까야의 친절함이 새삼 가슴에 젖어들 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교오코는 조심스럽게 창가에 기대어 커튼의 끝을 들추고, 살며시 밖을 내다보았다. 오까야의 방은 2층에 있었다. 길가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 다. 형사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까야가 신바람이 나는 듯 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교오코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옛날 학생 시절과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오까야는 아파트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수퍼마켓에서 쇼핑 을 끝냈다.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카드를 주고 계산을 끝내고 나 서 큰 비닐 봉지를 껴안고 슈퍼마켓을 나섰다. 누군가가 곁에 다가왔다. “오까야 시게오 씨죠?” 뒤를 돌아보니, 신사복 차림의 무뚝뚝한 남자가 두 명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 “경찰입니다만, 좀 물어 볼 일이 있어서.” “나에게요? 무슨 일인데요?” 오까야는 겨우 동요를 감추었다. “쯔브라야 교오코라는 여자를 아시지요?” “쯔브라야 … 혹시 전에 전문학교에 다녔던 쯔브라야 씨인가?” “그렇습니다. 연인 사이였지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더듬어 찾아온 것일까? “연인 사이였다고요?” 오까야는 가볍게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짝사랑이었지요. 나는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어 요. 그녀가 무슨?” “알고 있지 않습니까? 테러리스트로 지명수배되고 있는 사실을. ” “그녀가요? …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좀처럼 TV를 보지 않으 니까요.” “오늘 아침 당신을 만나러 회사에 갔었습니다. 휴가중이라고요. 댁을 방문하려고 했는데 마침 여기서 만났군요. 쯔브라야 교오코 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댁까지 동행해도 좋겠습니까? ” 오까야는 형사가 하는 말에 대해 가타부타 묻지 않고 듣기만 했 다. 집히는 데가 있었다. 아마, 어제 오까야가 길가에서 교오코를 불러 세워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회사의 누군가가 보았을 것이 다. 교오코의 얼굴까지는 몰랐겠지만, 쓸데없이 참견하기 좋아하 는 놈이 형사들에게 지껄였겠지. 형사들은 오까야가 어떤 대답을 해도 아파트까지 쫓아올 눈치였 다. “상관 없어요.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그런 것은 괜찮습니다.” 형사는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정중하게 말했다. “가실까요?” 오까야는 걸어나갔다. 두 명의 형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오까야를 좌우에서 에워싸 듯이 걸었다. 어떻게 하면 교오코에게 알릴 수 있을까? 오까야는 봉지를 껴안은 손에 배어나오는 땀을 짜내기라 도 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5분 거리인 길이 마치 몇 미터처럼 금방 집에 닿았다. “저 이층이지요?” 형사가 말했다. ‘아마 전에도 와서 알고 있는 거겠지. 어느 방에 살고 있는지도. ’ “커튼을 친 채로 살고 있습니까?” 한 명의 형사가 물었다. “걷는 것을 잊어버린 거겠죠.” 다른 한 명이 말했다. 협박 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오까야는 잠깐 한 사람 쪽을 노려보았다. ‘교오코, … 저 창가에서 보고 있었으면, 그리고 급히 도망가 준 다면 ….’ 오까야가 앞서서 아파트의 계단을 올라갔다. 두 명의 형사가 그 뒤를 따라갔다. 계단 위에서 이웃집에 사는 여자가 내려왔다. 좁 은 계단이었다. 더구나 뚱뚱한 그 여자와 부딪히지 않으려면 난 간에 몸을 바짝 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녕하세요.” 그 여자가 큰 비닐 봉지를 껴안은 채 말했다. 쓰레기 봉지였다. 일층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러 가는 모양이었 다. 여자는 샌들 소리를 따박따박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형사들도 어쩔 도리 없이 비켜서서 난간에 몸을 바짝 붙였다. 오 까야는 껴안고 있던 쇼핑 백을 바로 뒤쪽의 형사 얼굴에 집어던 졌다. 형사가 몸의 균형을 잃는다. 오까야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여자의 등을 냅다 떠밀었다. “아얏!” 밀쳐진 여자가 한 형사의 몸에 묵직한 체중을 실었다. “교오코! 경찰이다! 도망가!” 오까야는 힘껏 소리질렀다. ‘틀림없이 들었겠지.’ 오까야는 난간을 뛰어넘어 아래층으로 몸을 날려 내려갔다. “기다려!” 겨우 주부의 중량을 밀쳐낸 형사가 소리쳤다. 오까야는 아파트에 서 뛰어와 정신없이 달렸다. 쇼핑하고 돌아오는 주부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돌아보았다. “멈춰!” 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까야는 막무가내로 달렸다. 그러나 두 발의 총탄이 오까야의 가슴을 관통시키고 앞질러 갔다. 교오코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들린 소리는? 무언가 총성같은 소리였는데. 교오코는 백을 어깨에 고쳐 메었다. 버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 탓인가? 설마, 이런 장소에서 잡히진 않겠지? 교오코는 다시 한번 오까야의 아 파트 일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왔는지 더듬어 보았다. 벗어 놓은 옷은 전부 밖에 버렸다. 사용했 던 식기는 깨끗이 씻고, 자신이 손으로 만졌던 곳의 지문은 닦아 버렸다. 욕실 배수구에 걸려 있던 머리카락도 흘려보냈다. 우선 다행이라 고, 교오코는 고개를 끄떡였다. 오까야는 한가롭게 편안한 마음가 짐을 하고 있지만, 경찰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그만 실마리를 더듬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찾게 되겠지. 오까야도 언제 조 사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오까야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만은 피 하고 싶었다. 그와 하룻밤을 보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아 마도 살아서 다시 만날 수는 없을거라고 교오코는 생각했다. 버스가 왔다. 교오코는 잔돈을 요금통에 넣고 비어 있는 좌석에 앉았다. 아주 쾌청하고 기분이 좋은 날씨였다. 오까야와 살아서 다시 만날 수가 없으리라는 상상이 이미 냉엄한 사실로 되어 있는 것을 교오코는 전혀 알지 못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8> <순교자들 8> “당신, 이제 가지 않으면 ….” 후루이찌 미끼코는 남편을 재촉했다. 후루이찌는 깨끗하게 정리 된 작업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책이랑 쓰다만 원고, 편지, 신문 등이 아무렇게나,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을 부드럽게 안정 시켜 주곤 했는데 이제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되어 버렸다. “여보.” “알았어.” 후루이찌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은 닫았어?” “커튼을 쳐 놓았어요.” 후루이찌는 여자들이 모든 슬픔이나 고통을 자질구레해 보이는 일상에 몰두함으로써 털어내 버리는 지혜에 감탄하고 있었다. 남 자처럼 언제까지나 슬픔이나 고통을 싸안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말은 똑같으므로 괴로움을 오래 끌고 가는 것이 손해라고는 알고 있지만, 남자들은 쉽사리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찌까는?” “친구 집에요. 우에쿠사 도모미네.” “그 애도 꽤 충격을 받았을 거야.” “우리가 이사가면 낫겠지요. 동네 사람들도 한결 안심할 거예요. ” 미끼코의 어조도 조금은 쓸쓸한 듯했다. “시골이 좋아요. 한가롭기도 하고, 이상한 사람들도 없고.” 과연 그럴까 하고 후루이찌는 생각했다. 그곳에는 프로메테우스 의 빨간 제복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 전역에 권력의 손 이 미치지 않는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꼼꼼히 문단속을 마치자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차가 와 있나?” “예. 집 밖에.” “그러면 찌까를 불러와야겠군.” “그렇군요. 헤어지기 아쉬운 친구와 작별하느라고 시간도 잊었 을 거예요. 나도 부인에게 인사하고 와야겠어요.” “내 인사도 전해 줘.” 미끼코가 현관 열쇠를 걸고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후루이찌는 밖 에 정차해 있는 택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수는 잠에 빠져 있 었다. 후루이찌는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서서히 저녁이 되기 시 작하고 하늘이 자주색으로 계속 변해 가고 있었다. 조용한 하늘 을 쳐다보며 후루이찌는 크게 숨을 쉬었다. 심호흡을 해도 동경 의 공기는 납을 녹인 듯이 그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찌까, 이제 그만 가자.” 미끼코는 소파에 앉아 도모미와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찌 까를 재촉했다. “그럼 편지 쓸 테니까.” 찌까는 눈물을 머금고 도모미의 손을 잡았다. “전화도 자주 해.” 도모미는 찌까보다 눈물을 더 잘 흘린다. 이미 30분쯤은 울었다. “자, 가자.” “그만 그치거라. 앞으로 또 만나게 될 텐데, 뭘 ….” 도모미의 어머니가 웃으면서 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에쿠사네 집을 나와서도 찌까가 연신 손을 흔드는 도모미를 돌 아보는 바람에 지척의 거리를 5, 6분이나 걸려서 겨우 집 앞에 도착했다. 택시가 서 있었으나 후루이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상하네. 대체 어디로 가셨을까?” “택시 안에 있는 것 같아.” “아버지!” 차 뒷문을 열던 찌까가 신음 소리처럼 부르짖었다. 후루이찌는 좌석에 기대어서 눈을 감고 있었다. 가슴에 칼이 꽂 혀진 채, 흘러나오는 피가 배 언저리까지 물들이고 있었다. “누가 아버지를 ….” 찌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끼코는 멍하니 말을 잊은 채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아, 아!” 돌연 인기척이 나서 찌까와 미끼코는 몸을 움츠렸다. 운전사가 하품을 하면서 눈을 떴다. “잘 잤다. 이제 됐습니까? 부인? … 부인.” 운전사는 이상하다는 듯이 미끼코와 찌까의 얼굴을 교대로 쳐다 보았다. 어깨에 와 닿는 손이 있었다. 구니코는 눈을 떴다. 몸을 바짝 구 부린 남자의 얼굴이 아주 가까운 데 있어 움찔했다. “시간이 됐어요. 아가씨.” “겐모찌 씨 ….” 구니코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랐어요.” “깨울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해.” “잠자는 동안 죽음을 당하면 편안해서 좋아요.” 구니코가 대꾸했다. “밖에서 기다려.” 겐모찌는 가볍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구니코는 야간 당번에 걸렸을 때에는 이곳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 도 했다. 구니코는 하품을 하면서 빨간 웃옷을 걸치고 벨트를 매 었다. 홀스타를 어깨로부터 걸친 벨트를 통해서 허리에 고정시켰 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나서 구니코는 밖으로 나갔다. “벌써 시간이 됐어요?” 복도에 서 있는 겐모찌에게 말했다. “아직 15분 있어. 잠이 달아나도록 커피라도 마실까?” “네.” 구니코는 겐모찌와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오래 된 석조건물이었 던 관저도 다끼 수상이 집권하고 나서는 아주 현대적인 건물로 변했다. 다끼 수상이 제일 관심을 가진 것은 방범 문제였다. 낡은 관저는 테러나 습격을 막기에 미흡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새 관저는 외관상으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으나 여러 가지 방범 장치가 설치되었고, 작은 폭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견고 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겐모찌와 구니코는 중앙감시실로 들어갔 다. 브라운관과 가지 각색의 램프가 관저의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감시원이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커피를 마실게요.” “자, 여기.” 겐모찌가 포트의 커피를 종이 컵에 따라 구니코에게 건네 주었 다. “감사합니다.” 구니코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브라운관을 쳐다보았다. 곳곳 에 비치된 고감도의 카메라가 침입자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니코가 다른 두 명의 프로메테우스 대원과 함께 관저 경비에 참가한 지 벌써 일 주일이 되었다. 그러나, 수상에게 접근하기는 커녕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관저 경비는 어찌나 삼엄한지 구니 코 일행이 순찰하는 것은 형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형식적이군.” 구니코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겐모찌도 동감인 모양이었다. “인간은 위대할수록 형식을 좋아하게 되는 거야.” 이상한 남자였다. 어딘가 고독한 그림자를 지닌 심중을 알 수 없 는 사람이다. “어머나, 차가 ….” 뒷문을 비춘 브라운관에 검은색 벤츠가 보였다. 경비원이 내부를 들여다보고 카메라 쪽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감시원이 버튼 을 누르자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문이 열리고 차는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일까, 이런 시간에.” 구니코가 말했다. “수상은 틀림없이 안 계시죠?” “저 사람은.” 감시원이 말했다. “우에다 미나꼬다.” “우에다 미나꼬라고요? 여류 평론가말인가요?” 본래는 배우였지만, 지금은 연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미묘 한 분위기가 풍기는 삼십오륙 세의 좀처럼 보기 힘든 미인이었 다. “맞아요. 그 여자예요.” “무엇 때문에 이런 밤중에?” “수상의 연인이야.” “네에? 정말요?” “비밀이야.” 감시원이 윙크를 했다. “재미있군.” 구니코는 지하 주차장의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운전사가 문을 열자 화려한 코트를 걸쳐입은 여자가 내려왔다. “화면을 좀 올려 줄까?” 감시원이 카메라의 조작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 영상이 갑자기 확대되면서 여자의 얼굴을 비췄다. “정말이네! 우에다 미나꼬예요.” 지하 주차장에서 카메라가 우에다 미나꼬를 클로즈업 하고 있을 때, 차의 트렁크가 조용히 열리고 한 남자가 천으로 싼 무언가를 껴안고 미끄러지듯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재빨리 벤츠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카메라는 우에다 미나꼬의 움직임을 쫓아서 천천히 방향을 돌렸 다. 차에 기대어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운전사는 별안간 어떤 소리에 놀라 뒤돌아 보았다. 순간 무언가에 얻어맞고 운전사는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남자는 운전수를 차 안으로 밀어 넣고 카메라를 보았다. 천천히 카메라가 돌아오고 있었다. 남자는 카메라 바로 밑을 향해서 힘차게 달렸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순교자들 9> <순교자들 9> 화면은 다시 주차장의 전경을 광각 렌즈로 비쳐 주고 있었다. “그럼 수상은 사저에 안 계신 거예요?” “대개 주에 한 번은 그래. 상대 여성은 때때로 바뀌지. 저 여자 는 반 년 정도 됐지, 아마.” “예?” 구니코도 여자다. 그런 류의 화제가 싫었다. “수상방에 모니터 카메라가 있으면 좋은데.” “자네, 지독한 말을 하는군.” 감시원이 웃었다. 구니코는 삼층 복도에서 그 여자가 걷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수상의 밀실이 있는 곳이었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녀의 모습은 안으로 사라졌다. 오늘 밤은 수상이 이곳에 있을 모양이다. “자, 순찰 시간이다.” 겐모찌가 말했다. 두 사람은 관저의 일층으로 나갔다. 다음은 결 정된 코스로 구내를 도는 것이었다. “우리가 바보같지 않아?” 겐모찌가 걸으면서 말했다. “예?” “정말 싫군. 쓸데없이 이렇게 걸어다녀야 하다니.” “임무인 걸요.” “수상이 여자를 데리고 땀이나 흘리는 걸 경호하는 게 좋아? 정 말 어처구니 없어서.” 구니코는 무의식중에 웃어 버렸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까?” “상관 없어. 카메라에 마이크가 붙어 있지 않으니까.” 두 사람은 넓은 관저 안을 걸었다. “겐모찌 씨도 변했군요.” “그런가?” “비밀경찰이잖아요?” “누구에게서 들었어?” “소문이에요. 여자는 소문에 민감하죠.” “자네도 변했어.” “내가요?” “프로메테우스의 다른 어리석은 여자애들과는 좀 달라.” “어리석다니요?” “눈을 보면 알아.” “내가요?” “자네는 어딘가 달라. 아름답지만 냉정한 눈을 하고 있어. 어째 서 프로메테우스에 들어왔는지 궁금해.”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죠.” “그 때문만이 아니겠지.” “그럼,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세요?” “모르겠는데?” 겐모찌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네는 프로메테우스의 일을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 여.”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구니코는 어물어물 넘겼다. 어떻게 할 작정인가. 이 남자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걸까? 허나 정말로 의심하고 있다면 이처럼 상대 를 경계시킬 말을 할 수 있을까? 구니코는 어떻게 해서든 혼자 있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3층에 올라가서 수상을 사살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겐모찌와 같이 있어서 는 불가능했다. 겐모찌를 죽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할 수만 있다면 좋지만, 겐모찌의 태도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구니코 따 위로는 아무래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 찬스임엔 틀림이 없지만, 장애물은 겐모찌와 그리고 저 TV 카메라였다. 두 사람이 복도를 더듬어 가보니 카메라가 늘 하던 대로 머리를 움직여 쫓고 있었다. 혹시 요행스럽게 혼자서 삼층에 갈 수 있다 해도 카메라에 잡히면 곧 의심받게 되었다. 누군가가 급히 달려 오기 전에 수상의 방에 가서 문을 부수고 수상을 죽일 수 있을 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해도 수상이 있는 근처까지 가서 죽는다 면, 그것도 좋다. 죽으면 그만이다. 만약 살아서 체포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여하튼 오늘밤은 분명 찬스 였다. 이 찬스를 놓치면 두번 다시 이런 좋은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헛되이 죽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사실은 아버지 회사에서 다끼와 식사를 했던 때가 절호의 기회였 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아무것도 되지 않은 상태 였다. 아버지를 같이 죽이는 것도 망설여졌다. 기회는 또 있겠지 하고 단념해 버렸던 것이다. 겐모찌에게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호출이야.” 겐모찌는 양복 주머니에서 초소형 발신기를 꺼내어 버튼을 눌렀 다. “지하에 좀 갔다올게. 자네, 혼자 좀 하고 있지.” “네.” “일찍 끝나면 뒤따라 붙을 테니까.” 겐모찌는 그렇게 말하고 복도를 되돌아갔다. 구니코는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양 볼에 피가 올 라와서 뜨겁게 느껴졌다. 절호의 기회다. 가능하면 카메라마저 어 떻게 …. 포기해서는 안 돼! 구니코는 걷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경비견처럼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서 머리를 움직였다. 감시원은 구니코가 혼자 걸어가는 것을 멍청히 쳐다보고 있었다. 귀여운 여자로군. 몸집이 좀 작긴 하지만, 벗겨놓으면 몸매가 아 주 눈부실 거야. 프로메테우스의 처녀라, 저 여자는 정말로 처녀일까? 아냐, 설마 요즈음 여자애로서 저 나이까지 처녀일 리가 없겠지. 한 번쯤 점 심이라도 같이 하자고 해볼까? 여하튼 돈 많은 여자애겠지. 잘만 사귀어 놓으면 큰 돈벌이가 될지도 몰라. 감시원은 바로 옆의 스위치를 눌러 구니코의 얼굴을 당겨 보았 다. 정말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감시원이 싱긋 웃고 고개를 흔들 었다. 그때 TV의 화면도 판넬의 조명도 전부 꺼졌다. 이상한데, 구니코는 카메라를 쳐다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카메라 가 이곳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방금 지나온 방향으로 향했을 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저 카메라는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하면 그것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판별해서 정확하게 포착하게 되어 있 었다. 그런데 그것이 움직이지 않았다. 구니코는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다음 카메라가 이곳을 향하고 있다. 구니코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카메라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구니코는 종종걸음 으로 다음 카메라를 향했다. 그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장인가? 어쨌든, 지금이다! 구니코는 계단으로 달렸다. 이층, 삼 층을 단숨에 뛰어올라가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일층만 고장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니코는 살짝 삼층의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카메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도 급히 달려오지 않았다. 구니코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느 방일까? 수상의 밀실 은 구니코도 본 일이 없다. 이 삼층은 순찰의 루트로부터 벗어나 있는 곳이었다. 어디지? 구니코는 복도를 향해 걸어 갔다. 빨리 찾지 않으면 고장이 복구될지도 모를 일이며, 경비원이 만일을 위해 올지도 몰랐다. 복도를 차츰차츰 나아갔다. 이미 카메라 방 향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감행할 따름이다! 구니코는 돌연, 좀전의 TV화면을 통해서 본 장소로 나가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카메라는 아직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저 문이 다. 확실히 그렇다. 구니코는 문 밖에 서서 살며시 귀를 갖다 댔 다.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나즈막하게 전해졌다. 구니코의 볼에 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이 안에 다끼 수상이 있을 테지! 구니코는 권 총을 빼었다. 손이 땀에 흠뻑 젖어 들었다.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댔다. 슬며시 돌려서 당겼다. 열려 있구나! 믿을 수 없는 느낌이 었다. 일순간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관저는 완벽하게 경비되어 있는 것이다. 열쇠가 채워져 있지 않아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여자의 숨가쁜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구니코는 권총을 꽉 쥐었 다. … 안전장치! 급히 안전장치를 풀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땀 이 관자놀이와 볼에서 미끄러진다. 빨리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 다. 빨리!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돌연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 다. 돌아보니 한 남자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소총을 손에 들고 잠바 차림에 청바지 스타일이었다. 일순간 구니코와 그 남자는 멈춰섰다. 남자가 소총을 겨누었다. 구니코는 뒷걸음질 을 치다가 비틀거리면서 넘어졌다. 소총이 불을 뿜었다. 문의 판 자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구니코의 볼을 베었다. “아, 그만 해!” 구니코는 미친 듯 부르짖었다. 소총이 잇따라 불을 뿜었다. 그만, 그만 해. 나는 ….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구니코를 사로잡았다. 지금 죽으면 … 지금은 … 지금은 안 돼! 구니코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소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은 부르짖음과 같은 총성이 세 번 울렸다. 남자가 뜻밖에 비틀 거렸다. 소총의 총구가 바닥을 향했다. 한번 더 소총이 불을 뿜어 내고 총신이 튀어올랐다. 동시에 구니코는 볼에 타들어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눈 앞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붉음이 어둡고 검게 녹아 들었다. 이게 바로 죽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죽어도 좋다. 그냥 이것으로 족한다. “구니코 ….”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가 들렸다. “구니코, 나다.” 아버지 …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초점이 또렷이 잡혔다.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알아 보겠니, 구니코?” “아버지 ….”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천천히 얼굴을 돌려 보려고 하니까 왼쪽 볼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총탄에 상처를 입었단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아.” 병실이었다. 그러나, 넓은 독실로 호텔 방이라고 생각될 정도였 다. “내가 … 분명 살아 있는 거죠?” “그렇고말고.” 니노미야가 웃으며 말했다. “금방 퇴원할 수 있어. 상처 자국은 성형 수술을 하면 거의 모 를 거야.” “수상은?” “무사해. 네가 도와주었어. 봐, 이걸.” 니노미야가 신문의 일면을 구니코의 눈 앞에 내밀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딸, 수상을 구하다. - 테러리스트를 사살, 자신 도 부상> 구니코의 컬러 사진이 일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 의 제복 차림으로, 아마 국립 회관 경비 시절에 찍어 둔 것 같았 다. “수상이 너에게 감사하고 있다. 꼭, 한번 문병하러 오겠다고 말 했다. 잘했구나. 덕분에 니노미야 상사의 주식이 뛰어올랐어.” 니노미야가 활짝 웃었다. “네 용돈도 올려줄까?” “그 사람은?” “누구 말이냐?” “소총을 들었 ….” “테러리스트 말인가? 죽었어.” 그런가, 신문의 표제에 <사살>이라고 되어 있었다. “내가 … 죽였어요?” “당연한 일이다. 걱정이 되니?” 구니코는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봐, 상처는 대단치 않아. 무엇 이든지 먹을 수 있어.” “그래요 ….” “이 병실은 마음에 드니? 근사하지? 이곳은 VIP용의 최고급 방 이다. 수상이 특별히 이 방을 사용하도록 해주셨다. 배는 고프지 않니?” “예 ….” “어때, 최고급 요리로 시켜 올까?” 구니코는 웃어댔다. “얘야, 상처 자리가 터지겠다.” 구니코는 계속 웃었다. … 상처가 아팠다. 그러나 상관않고 웃음 을 그치지 않았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불꽃의 종결 1> <불꽃의 종결 1> 차가운 비가 추적추적 히비야의 영화가를 적시고 있었다. 저녁 6 시 30분. “이상 없나?” 극장 <히비야 시네마 포토>의 지배인인 가와구찌는 영화관 입구 에 와서 신사복 차림을 한 수위에게 물어 보았다. “이상 없습니다.” “그래?” 가와구찌는 안심하면서도 가슴 한 켠으로 움터오는 불안감을 느 끼고 있었다. 으스스하게 추운 날이었으나, 가와구찌는 벗겨진 이 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가와구찌 씨.” 이층 계단으로부터 영화 평론가인 호리 요시야가 내려왔다. “아, 호리 선생. 언제 나오셨습니까?” 가와구찌가 급히 다가갔다. “바로, 조금 전에 왔습니다.” “몰라 뵈서 실례했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오십 세 가량의 영화 평론가로서 꽤 이름도 있고, TV에도 자주 나오는 호리와 가와구찌는 오랜 기간 사귄 사이였다. “다행이네요. 관객들이 많이 몰려서.” 호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 덕분에 ….” “천만에요. 나는 별로 힘이 되지 못했는데.” 호리는 그다지 격에 맞지 않을 정도로 겸손하게 말했다. “최종회에는 거의 만원이 될 거예요. 이 정도라면 충분히 적자 는 면할 것 같아요.” 가와구찌는 그 <검은 불꽃>의 출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첫 날에 이 정도의 관객이 동원되었으면 앞으로의 흥행에 큰 걱정은 없을 듯했다. 적어도 적자는 면할 것 같았다. 영화산업은 TV와 비디오에 밀려 쇠퇴일로를 걸었으나 최근 들어 예전의 필름을 사 용한 진짜 <영상>의 매력이 재평가되어 겨우 힘을 회복하고 있 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TV 드라마로 생활비를 벌어왔던 옛날의 영화감독들도 다시 영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대한 돈을 들인 미국 의 오락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유럽의 순수영화는 좀처럼 수입되 지 않았으나 애호가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 다. 포르노의 규제가 엄해져서 군소 프로덕션은 잇따라 망했다. 몰래 활동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늘날 당국의 눈을 피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스스로 영화에서 손을 뗐다. “방해는 없었습니까?” 호리가 물었다. “예, 아직까지는 전혀.” “그거 다행이군.” “오히려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와구찌는 희뿌옇게 비가 계속 내리는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생각이 지나쳐요.” 호리가 웃었다. 가와구찌는 호리가 이런 시간에 온 것은 방해나 습격으로 인한 곤욕을 피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소위 인텔리라고 하 는 자들은 안전한 장소에서만 용기 있는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 었다. <검은 불꽃>은 온통 파시즘이 휩쓴 태평양 전쟁과 중일 전쟁 때 의 일본에서 박해당하고, 죽음을 당한 작가나 사상가들을 묘사한 드라마였다. 당연히 우익이나 정부로부터의 위협과 압력이 있었 다. 그 중에서 가와구찌가 제일 걱정하고 있는 것은 프로메테우 스였다. 위협도 경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파괴했다. 첫날 아 침, 1회 상영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히 경 비원을 고용해 두었다. 물론, 경비원도 프로메테우스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관객을 대피시키거나, 필름을 안전한 곳 으로 운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 늘 하루, 아무런 불상사도 없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걱정됩니까?” 호리가 말했다. “예,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아주 … 묘한 세상이 됐군요.” “오늘 찾아올 것 같아서 ….” “그 친구들도 바쁘지 않습니까? 여기저기 참견 안하는 데가 없 잖습니까?” “요즈음 부쩍 더한 것 같아요. 거의 보도되지 않으니까 자세히 는 모르지만.” “내 친구 중에 정치부 기자가 있어서.” 호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친구가 말해준 건데, 프로메테우스의 멤버가 요즈음 대부분 교체되고 있는 것 같던데요.” “대장이 교체되었다고 신문에서 봤어요. 얼마 전 수상의 목숨을 구해 준 여자애가 대장으로 취임했다던가 ….” “니노미야 상사의 니노미야 다께야의 딸입니다. 내 친구의 말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일류기업 간부의 딸이 랍니다. 어느 기업이라고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이번에 대원이 교체되는 것을 보니 거의가 특정기업과 연관되어 있다더군요.” “프로메테우스는 재계의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셈이군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다끼 정권에 충성을 나타내 는 일종의 서약 같은 거죠.” “에도 시대에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식별하기 위해 그리스도나 마리아 상을 새긴 널족을 밟게 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젊은 여자애들을 그런 목적으로 이용하다니 ….” 가와구찌는 몹시 불쾌한 듯이 머리를 저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예요. 재력과 권력을 등에 업고 있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사회악을 처단하기 위해 떨쳐나선 순결한 처녀들이 아닙니까? 만약 프로메테우스의 구성 원이 남자들이었다면 금방 폭력단체로 여겨졌을 겁니다.” 호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그저 모르는 체하는 게 상책이지요. 그런데, 나가다 씨 가 안 보이는군요?” <검은 불꽃>의 감독 나가다 시게가즈를 말하는 것이었다. “저녁에 전화해서 흥행에는 성공했다고 전해 두었습니다. 최종 회에 시간이 되면 오겠다고 말하더군요.” “나가다 씨가 다시 메카폰을 잡은 게 10년만이로군. 기쁘겠군요. 이제 이러한 대작을 만들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연세가 벌써 일흔다섯입니다. 이런 대작을 만든 것만 해도 놀 라운 일이지요.” 가와구찌는 비가 그칠 줄 모르는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빗길을 가르며 달려온 차 한 대가 극장 앞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레인 코트를 입은 백발의 남자가 잔뜩 목을 움츠리면서 내렸다. “나가다 씨가 오셨군요!” 가와구찌는 뛰어나갔다. “야아! 고마워 ….” 나가다는 약간 발걸음이 불안한 모습이었다. 75세의 노감독은 숨 을 헐떡거리며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축하합니다.” 호리가 나가다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그런데 음향은 어때?” “아주 좋습니다.” “그런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삼일 전까지 고쳐 놓았어. 관객들 반응은 어때?” “꽤 좋은 편입니다.” “어떤 작품을 완성하든 간에 미진한 감을 떨쳐버릴 수 없어. 평 생 백 프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모양이 야.” 나가다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러나 볼은 기쁜 듯이 붉게 물들 어 있었다. “어때요? 30분 정도 남았는데, 보시겠습니까?” “아니, 관객들에게 신경쓰게 하고 싶지는 않아. 다음에 보겠소. 다른 문제는 없었나?” “아직까지는 조용합니다.” 가와구찌가 말했다. 그때 호리가 가와구찌의 손목을 잡았다. 마치 마술처럼 영화관 입구에 빨간 제복의 대열이 펼쳐지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다 ….” 호리는 뒷걸음질쳤다. 나가다는 입구를 가로막듯이 양팔을 벌리 고 섰다. “감독님, 여기는 내게 맡기세요. 위험합니다!” 가와구찌가 속삭였다. 그러나 나가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프로메 테우스 대열의 맨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가다 시게가즈 감독이시죠?” “그렇다.” “프로메테우스의 대장입니다. 저리 비켜 서세요. 부상을 입어요. ” “자네들이 어떻게 할 셈인가 모르지만 ….” 가와구찌는 노감독을 감싸며 만류했다. “감독님, 어쨌든 일단 물러나 주시는 게 상책입니다.” “거절한다.” 나가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필름은 나의 목숨과 똑같다. 필름을 빼앗는 것은 나를 죽이 는 것과 같은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대장은 한 걸음 물러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빨간 제복의 대열이 일순간에 영화관 안으로 밀어닥쳤다. “감독님!” 가와구찌가 소리질렀다. “나가!” 나가다는 비틀거리면서 노기를 띤 음성으로 외쳤다. “도대체 무얼 어쩌자는 거냐? 이 미친 것들아!” 뒷문으로 다른 대원들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니노미야 구니코는 밖에 서 있었다. 양손을 뒤로 잡은 채 가슴을 펴고 완강한 자세로 서 있었다. 터져나오는 비명, 유리 깨지는 소 리, 그리고 총성이 이어졌다. 관객들이 우왕좌왕 극장 밖으로 튀 어나왔다. 그러다가 구니코와 마주치자 놀라며 좌우로 나뉘어 흩 어졌다. 혼란은 잠시 계속되었다. 이제는 아주 이골이 났구나 하 고 구니코는 생각했다. 아즈마 마사코로부터 대장직을 승계한 이래 얼마나 많은 임무를 처리했는지, 일일히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잔인한 파괴와 도망 치려고 허둥대는 많은 사람들. 차츰 그런 일에는 아무런 흥분도 없게 되었다. 테러리스트를 사살하고 다끼의 목숨을 구하여 영웅 이 된 이래 구니코는 모조리 흥미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그 후 다끼와 만날 기회도 있었다. 병원에 있을 때 다끼가 문병하러 오 긴 했다. 카메라 맨들에 둘러싸여 다끼가 구니코와 악수하고 있 는 사진이 모든 신문 잡지에 실리고 TV의 전파를 탔다. 그리고 또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제2대 대장에 임명되었을 때 다끼가 직 접 대장의 배지를 달아 주었던 것이다. 그때라도 다끼를 없애려 는 마음만 먹었더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구니코에게 는 암살도 저항도, 덧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끼 한 사람을 죽 이면 어떻게 된다는 건가. 일본이 갑자기 변하는가? 아마도 제2 의 다끼가 그 자리에 앉게 되고,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더욱 더 반정부 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될 뿐이겠 지. 그런 일 때문에 왜 죽는가?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불꽃의 종결 2> <불꽃의 종결 2> “대장.” 영화관 안에서 오사다 가나코가 뛰어나왔다. “대강 정리했습니다.” 구니코는 안으로 들어갔다. 매점, 로비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 다. 벽의 그림이나 사진 판넬도 떨어져 있었다. “필름은 몰수했습니다.” 가나코가 말했다. “내일은 다른 곳에 복사물이 없는지 조사해 와.” “네.” 구니코는 객석 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이었지만 아직도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부상당한 관객은 없나?” “두세 사람이 밀려 넘어져 다친 것 같습니다.” “그래?” 구니코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막이 열린 채 드리워진 흰 스크 린이 거대한 창문처럼 보였다. “가나코.” “네.” “스크린에 불을 붙여.” 구니코가 그렇게 말하고 객석 밖으로 나갔다. 로비로 나간 구니코는 출구 쪽으로 걷다가 계단 밑에서 지배인 가와구찌의 모습을 발견하고 발을 멈췄다. 다가가 보니 나가다가 쓰러져 있었다. “상태가 나쁘면 병원으로 이송하시오.” 구니코가 말했다. 가와구찌가 얼굴을 들었다. 눈물로 볼이 빛나고 있다. 구니코는 나가다의 얼굴에서 생기가 다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 고동이 … 약해졌어.” 가와구찌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분은 언제 죽어도 좋다는 기분으로 … 이번 영화를 찍어 놓 았던 거야. 그것을 … 너희들은!” 구니코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죽어버린 인간에게 무엇을 말해도 쓸데없는 일이다. “대장, 가지 않겠어요?” 가나코가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그래, 가자.” 구니코는 계속 뒤돌아보면서 그 장소를 떠났다. 도중에 문을 열 고 객석을 살펴보았다. 빨간 불꽃이 스크린을 핥으면서 천천히 위로 뻗어 갔다. 안쪽의 스피커가 노출되어 보이고 있었다. 온도 를 감지하고 스프링 쿨러가 일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흰 물줄기가 객실 곳곳에서 솟구쳤다. 구니코의 얼굴에도 가는 물방울이 튀겨왔다. 영화관을 나와 보니 대장 전용차가 문을 열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지 프였으나 지금은 특별히 제작된 차로 모양은 보통차에 가깝지만, 새빨갛게 도색되어 있는 방탄 장갑차였다. “자택으로 모실까요?” 운전사가 물었다. “일단 본부로 돌아가지.” 대장 전용차가 질주하자 대원들을 태운 소형 버스가 뒤이어 달려 나갔다. “대장.” 같이 타고 있는 가나코가 말했다. “저 늙은이는 누구죠? 입구에 쓰러져 있던 사람 말예요.” “감독인 나가다 시게가즈야. 알겠어?” “모르겠어요.” “그래 … 이미 이곳에서 10년 정도 영화를 찍지 않았기 때문이 지. 나는 그 사람이 만든 <수저의 태양>이나 <창백해진 내일> 같은 작품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어.”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런 작품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 데.” “그렇군.” 구니코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별안간 눈물이 났다. 무슨 눈물 인지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나가다의 죽음이 슬픈 것은 아니 다.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구니코의 마 음 속에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늦었구나.” 집에 돌아와 보니 부친이 브랜디를 마시면서 서류를 보고 있었 다. “일 이외엔 무언가 생각할 수가 없으세요?” 구니코는 놀리듯이 말하고 부친의 손에서 브랜디 잔을 빼앗아 단 숨에 마셔버렸다. “저런, 저런!” “저도 무척 강해졌어요.” 구니코는 제복을 입은 채로 소파에 누웠다. “수상이 프로메테우스의 일을 칭찬하고 있어.” “고마운 말이군요.” “네가 대장이 되고 나서 점점 마음에 들고 있는 모양이야.” 구니코는 대답도 하지 않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조금 틈을 두고 니노미야가 말했다. “아참, 시게마쯔 군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는데.” “시게마쯔로부터?” 구니코는 일어섰다. “그래. 한 시간쯤 됐지, 아마?” “뭐라고 하던가요?” “전화 달라고 했어.” “어째서 빨리 말하지 않았어요!” 구니코는 이층 자기 방으로 급히 올라갔다. 이미 시게마쯔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 그로부터 전화가 온 것 이다. 제복을 벗어 던지고 까운만 입은 상태에서 전화기를 들었다. 번 호는 물론 잊지 않았다. “시게마쯔입니다.” 그의 모친이 받았다. “저 … 니노미야 구니코입니다.” “아, 구니코 양. 오랜만이군요.” 모친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에 구니코는 안도했다. “다꾸야 씨는 ….” “있어요. 잠깐 기다려요.” 잠시 후 그의 목소리로 들렸다. “야, 오래간만이군.” “음. … 이미 딱지맞았다고 생각했어.” “무슨 말 하는 거야?” 시게마쯔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그동안 멀어진 것은 사실이잖아?” “그래 … 아마도 네가 위대해졌기 때문일 거야.” “그만해요. 별로 … 좋아서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렇고 건강은 어때?” “음, 건강해.” “무언가 용건이 있어서 전화했어?” “네 목소리가 듣고 싶기도 하고, 알리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설마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든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겠지?” “그만둬. 바빠서, 그럴 새도 없었어.” “그럼 알리고 싶다는 게 뭐야?” “음, 이번에 주임이 됐어, 최연소야.” “대단한데?” “요즈음 내가 연구한 게 특허가 났는데 말야. 우수하다고 인정 되어 높은 가격에 팔렸어.” “재주꾼이야. 축하해.” “전에 나는 네 아버지의 일을 아주 나쁘게 말하기도 했지만, 병 기부서로 옮겨보니까 잘 알겠어.” “무얼?” “이러한 연구도 필요한 거라고 말야. 현실 속에는 늘 전쟁이 있 으니까. 병기를 제조하는 것도 파는 것도, 자신이 하지 않으면 다 른 누군가가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같은 일이지.” 구니코는 아무 말도 없이 듣고 있었다. 시게마쯔는 계속해서 말 했다. “게다가, 연구실의 공기가 전혀 틀려. 지금과 비교하면, 이전에 해온 일은 아이들 소꿉장난이었어. 팽팽한 긴장감이 있어서 좋고 시시한 일로 번거롭지도 않아. 연구원은 한 사람당 한 대의 컴퓨 터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어. 전처럼 차례를 기다리느라 헛되 이 시간을 낭비할 일도 없어. 그래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겠어? 나이가 들어 잘 모르는 상사에게 일일이 설명을 늘 어놓을 필요도 없어. 일도 스케일이 크고 정말 재미있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 ….” 시게마쯔는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놓았다. “재료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 실패해도 태연히 마구 버리지. 예전 생각하면 분에 넘치는 일이야. 그리고 주임이 되었다구. 월 급도 자그마치 두 배야! 이 참에 차를 바꿀 생각이야. 새 차를 사 면 드라이브 가지 않을래? 어때? … 여보세요 … 여보세요?” “듣고 있어.” “왜 그래? 말도 하지 않고. 너무 혼자서만 말했나? 어때, 이번 일요일, 시간 낼 수 있어?” “모르겠어. 아직, 좀 ….” “그래. 대장님이니까. 상사에서 가끔 네 얘길 들어. 내가 프로메 테우스용 비밀 병기라도 만들어 줄까?” “글쎄.” “또 전화해.” “음 ….” “조금 전, 아버지와 잠깐 이야기했어. 식사라도 한번 같이 하려 고. 자, 그러면 또.” “잘 있어.” 구니코는 수화기를 끊고 침대로 달려갔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목소리를 높여 몸을 비틀며, 계속 울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불꽃의 종결 3> <불꽃의 종결 3> “네. 누구세요?” 벨이 울리고 나서 조금 후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쯔브라야 교오코는 인터폰에 말을 하려다 주저했다. “누구세요?” 반복해서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하며 돌아서는 교오코의 등 뒤에서 도어가 열렸다. “교오코! 어떻게 된 거야?” 뒤돌아보니 옛친구 사나다 유우코다. 지금은 결혼해서 가따오까 유우코가 돼 있었다. 샌들을 끌며 나왔다. “오랜만이야!” “그래 ….” 교오코는 주저하며 말했다. “들어가도 괜찮아?” “당연하지,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유우코는 교오코의 손을 끌어당겼다. 극히 평범한 맨션이었다. 교 오코는 소파에 앉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잘 왔어.” 유우코는 서둘러 홍차를 내오며 말했다. “걱정했어.” “알고 있겠지? 내가 ….” “수배중이란 것? 물론이야.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 어 디 있었어?” “여기저기. 친구 집에서 하룻밤 묵기도 하고, 공원에서 자기도 하고 ….” “교오코, 얼굴이 엉망이네.” 유우코가 안쓰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거 아냐?” “응, 그렇지 뭐 ….” “기다려, 저녁 식사로 냉동식품이 있으니까. 곧 녹여 줄게.” “미안해. 곧 나갈 테니까….” “무슨 말 하는 거니? 우린 친구잖아?” “폐가 되잖아.” “요즘 경찰이란, 열받는 일밖에 안 하잖아. 조금은 골탕을 먹이 자구.” 전자 레인지의 벨이 울렸다. 유우코가 저녁을 차려놓자, 교오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 다. “더 먹을래?” “아니, 됐어. 차 한 잔 줄래?” “알았어. 너,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한 거 아니니?” “삼일 동안 거의 굶다시피 했어.” “너무 했다. 빨리 왔으면 좋았을 텐데.” “쇼핑을 하고 싶어도, 카드를 사용하면 금방 발각되잖아? 하는 수 없이 물건 사는 척하며, 조금씩 훔칠 수밖에. 요령이 좀 생기 긴 했어.” “여기 있는 동안은 괜찮을 거야. 안심해.” 유우코는 학생 시절 그대로인 둥근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 다. “그렇게 할 순 없어.” 교오코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지었다. “너랑 남편이 곤란하게 될 거야.” “괜찮아. 남편은 내 말대로 할걸. 내게 저항할 만한 박력은 없다 구.” “심하구나, 얘.” 교오코는 웃었다. “와, 드디어 웃었네. 이제야 교오코 같아졌다. 피곤하지? 잘래? ” “그래. 그것보다,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아, 그래. 그럼 옷도 갈아 입어. 내 걸 줄게.” “그럴 것까지 ….” “뭐, 어때? 괜찮아.” 유우코는 욕실로 가서, 욕조에 더운 물을 틀어 놓고 돌아왔다. “욕조가 작아서 금새 가득찰 거야. 마음 놓고 천천히 해.” “고마워. 잊지 않을게.” “바보같이.” 유우코는 교오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교오코가 욕실로 들어가 옷 을 다 벗자, 밖에서 유우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아 입을 옷을 갖다 놓았어.” “고마워!” 교오코는 우선 샤워를 하고 스폰지로 전신을 한 번 닦아 냈다. 그리고 나서 더운 물로 가득찬 욕조에 천천히 몸을 담궜다. 기분 이 무척 좋아졌다. 요며칠 안심하고 잔 적도, 쉬었던 적도 없다. 오까야의 아파트에 서 하룻밤을 지낸 이후, 처음이었다. 몇 번이나 오까야의 아파트 로 발걸음을 돌렸다가는 고쳐 생각을 했다. 단 한 번의 방심이 목숨을 재촉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유우코의 집으로 찾아오고 말았다. 물론 머물 생각은 없었지만, 위험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내주, 해리슨 부통령이 내 방한다. 그때까지 참아야 한다. 별안간 졸음이 밀려왔다. ‘목욕탕에서 잠들면 익사할지도 몰라.’ 교오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언제까지나 물에 잠겨 있고 싶었다. “가와이 선생님, 축하할 일이 있다구요?” “예.” 홈마의 말을 듣자, 가와이 노부코는 좀 수줍어하면서 고개를 끄 덕였다. 두 사람은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거, 축하합니다. 내 직감도 그다지 나쁘진 않지요?” “정말 그래요.” “그 보따린 뭐예요?” “예? 아, 이거요? 노트예요. 학생들.” “들어드릴 게요.” “네, 그렇지만 ….” “아뇨, 지금이 중요한 시기예요.” “고맙습니다.” 노부코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보따리를 홈마에게 넘겨주었다. “드디어 점심 시간인가, 가와이 선생님은 도시락 싸 오셨어요? ” “아뇨, 게을러서요.” “그러면 식당으로 갑시다.” “그래요.” 교직원 식당은 학생식당 안쪽으로 따로 있었다. TV가 켜져 있고, 때마침 뉴스 시간이었다. “이제 곧 닥치겠군요.” 홈마가 말했다. “뭐가요?” “시험말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않는 편이 … 뭣하면 거들어드릴 게요.” “감사합니다.” 홈마는 별안간 TV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 준가 … 다음 준가 미국의 부통령이 온다던데.” 노부코도 TV 화면을 응시하였다. 미사일이 불꼬리를 날리며 푸 른 하늘을 가른다. 이번의 일·미 회담이 일본의 핵무장 문제에 관한 것임을 구태여 다끼 수상도 숨기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 나 매스컴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노부코는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태내의 생명은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고 있을 것이다. 노부코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남편이 기뻐하는 탓만은 아니었 다. 자기 자신의 안으로부터 살고 싶다는 욕망이 격렬하게 치밀 어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이런 세상에서도. 아니, 바로 이런 세상이기 때문이다. 노부코는 지금껏 결정을 내 리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결행해야 할 때는 내주로 닥쳐와 있었 다. 식사를 끝내고, 두 사람은 교무실로 돌아왔다. “자, 시험지 채점을 해볼까?” 홈마는 빨간 싸인펜을 손에 들었다. 노부코는 <전화 있었음> 하는 램프를 보고, 디스플레이 장치의 스위치를 켰다. <남편으로부터 : 무거운 물건은 들지 마. 오늘은 내가 장을 봐서 집에 갈게> 이런 문자가 나와서 노부코는 웃었다. 그때, 돌연 교무실 내부가 아주 조용해졌다. 물론 부재중인 교사 가 많아서 본래부터 조용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부자? 런 침묵이었다. 입구 쪽을 보고 있는 노부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언뜻 보니 형사로 보이는 남자들이 5, 6명 서 있었다. 형사들이 노부코 쪽을 보고 고개를 서로 끄덕이더니 느린 발걸음으로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부코는 자신을 저주했다. 여러 가지로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 버린다. 죽어 주지. 그러나 혼자 죽지는 않는다. 비록 이 남자들 중 한 사 람이라 할지라도 나의 죽음에 동반시키겠다. 노부코는 꼼짝 않고 앞을 바라보며 형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형사들은 노부코의 뒤에서 서지 않고, 홈마의 좌석까지 가서 발 걸음을 멈췄다. “같이 가야겠어.” 형사가 말했다. 홈마는 전혀 유념하지 않고 시험 채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 고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 “무슨 용의입니까?” “알고 있을 텐데? 수상 암살 미수 주모자다!” 노부코는 아연 실색했다. 설마 홈마가? 그러나 홈마는 얼굴색 하 나 변하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뭐라고?” “보다시피 시험지를 채점하는 중입니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 십시오.” “수작부리지 맛!” 형사 중 한 사람이 홈마의 손에서 싸인펜을 쳐서 떨어뜨렸다. 홈 마는 한숨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홈마는 답안 용지를 둘둘 말아서 노부코에게 내밀며 말했다. “가와이 선생님, 미안하지만 나머지를 부탁합니다.” 노부코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자, 갈까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일어서던 홈마는 별안간 형사 한 사람을 들이받았다. 그리고 열려 있던 창을 통해 교정으로 몸을 날렸다. “기다려! 쏜다!” 형사가 권총을 뽑아들고 홈마를 겨눴다. “그만둬요!” 노부코가 부르짖었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불꽃의 종결 4> <불꽃의 종결 4> 총성이 울려퍼졌다. 교정 한가운데를 달리던 홈마의 몸이 흔들렸 다. 다리가 엉키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노부코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사들이 뛰어나갔다. 교정으로 나온 학생들이 멀리서 홈마를 둘 러싼 상태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홈마는 총에 맞을 작정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도망치려 했다면 일부러 아무것도 없는, 절호의 표적이 될 교정으로 달아날 리가 없었다. 홈마는 학생들이 지켜 보고 있는 앞에서 총을 맞고 싶었던 것이 다. 모두가 하나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 노부코는 홈마가 두고 간 답안용지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아직 홈마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머지 부탁해요.” 홈마는 그렇게 말했다 …. 노부코는 답안용지 묶음 위에 가만히 손을 얹은 채, 움직이지 않 았다. 교오코는 정성들여 목욕을 하고 나니 마치 다시 살아난 듯한 기 분이 되었다. 정말이지, 친구만큼 고마운 존재는 없다. 그러나 그 런 만큼, 너무 오래 머물러 폐를 끼치는 일만큼은 피해야만 한다. 확실히 몸은 지쳐 있었다. 만약 유우코가 허락해 준다면 하룻밤 만 묵고 내일 떠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주 나리따 공항은 분명히 물샐틈없는 경비태세를 갖출 것이 다. 어떻게든 잠입할 수만 있다면 …. 기자증은 아직 가지고 있다. 운만 좋으면 수상에게 접근하는 것 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접근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수상의 곁으로 뛰어나가면 거의 틀림없이 사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이 바로 승리의 순간이 된다. 그때까지 잡히지 않아야 한다. 결 코, 잡혀서는 안 된다. “어때? 괜찮아?” 문 너머로 유우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기분 좋아.” “그렇다면 다행이야. 너무 오래 있어서, 익사한 줄 알았어.” “머리도 감고 싶은데.” “어서 감아. 더운 물 정도야,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아.” 교오코는 앞으로 몸을 숙여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샴프와 린스 로 머리를 헹구어 내니, 정신이 번쩍들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샤 워기로 온수를 머리서부터 끼얹으며 교오코는 심호흡을 했다.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왜?” 교오코는 흘러 내리는 물 때문에,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돌연 손목을 잡혔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팔이 등 뒤로 비틀어올려 졌다. 마룻바닥에 엎어지자, 등 뒤에서 양손에 수갑을 채우는 소 리가 들렸다. “일어섯!”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교오코는 머리카락을 잡혀 질질 끌려갔 다. 방 안으로 내동댕이 쳐지자, 교오코는 몸을 비틀었다. 형사가 두 사람 서 있었다. 눈을 돌려 보니 유우코가 화장실 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유우코!” 교오코가 소리쳐 부르자 유우코는 당황하며 숨어 버리고 말았다. 교오코는 눈을 감고 숨을 토해냈다. 후회도, 노여움도 없었다. 허 탈하고 쓸쓸했다. “자, 가자.” 형사가 교오코를 일으켜 세웠다. “발가벗긴 채로 끌고 갈 심산이야?” 교오코는 형사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 어이, 아무거나 입혀 줘.” 한 사람이 말했다. “이봐.” 다른 한 사람이 유우코에게 말을 건넸다. “레인 코트 같은 것 없소?” “네.” 유우코는 마지못해 걸어나와 교오코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급 히 옷장을 열고 얇은 레인 코트 하나를 꺼냈다. “입혀.” 유우코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형사에게 재촉당하자 어쩔 도 리 없이 코트를 발가벗은 교오코에게 걸쳐 주었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 유우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오코는 있는 힘껏 몸을 유우코에게 부딪쳤다. 유우코가 쓰러졌 다. 코트가 떨어지고 교오코는 발가벗은 채로 창가를 향해 달렸 다. “쏘지 마! 이봐!” 한 사람이 소리질렀을 때, 이미 다른 한 사람이 방아쇠를 당긴 뒤였다. 가슴을 관통당한 교오코는 창 안쪽에 무릎을 꿇었다. 급속히 힘 이 빠져 나가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이제 됐다. 총을 맞으려고 교오코는 도망쳤던 것이다. 붙잡혀서 자백약 주사를 맞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유우코, 너를 원망 은 하지 않지만 같이 죽어 줘야겠어. “바보 녀석! 쏘지 말라고 했잖아!” 한 형사는 그렇게 화를 내며 급히 교오코의 옆에 무릎을 꿇고 동 맥에 손을 댔다. 유우코가 양손으로 머리를 싸안고 울기 시작했다. “할 수 없다. 죽었어.” 형사는 일어섰다. “여하튼 본부로 ….” 그렇게 말을 했을 때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산산조각났다. “쯔브라야 교오코는 폭탄을 감춰두고 있다가 체포를 피할 수 없 게 되자, 스스로 자폭하여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와이 노부코는 눈물어린 눈으로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쯔브 라야 교오코가 죽었다. 아마 요다도 죽었을 것이다. 노부코는 TV를 껐다. 이제 곧 가와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저녁식 사 준비를 해야 한다. 눈물을 닦고 노부코는 부엌으로 갔다. “다녀왔어.” 잠시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가와이가 부엌으로 얼굴을 내밀었 다. “어이, 좋은 이름을 생각해냈지. 오늘 말이야, 책을 읽고 있는데 … 어이, 무슨 일이야?” 가와이는 노부코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울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이야?” 노부코는 고개를 저었다. “양파 때문이에요. 어서 옷을 갈아 입고 와요.” “아아, 뭐야. 그랬어? 무슨 일인가 하고 깜짝 놀랐잖아.” 가와이는 그렇게 말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노부코의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 자꾸자꾸 흘러내렸다. “폭탄인가?” 미네까와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안 들어.” 전화가 울리자 미네까와는 덤벼들 듯이 전화기를 들었다. “수상 각하이십니까?” “뭐야, 급한 일이란.” “테러리스트 여자건 ….” “알고 있어.” “폭탄을 소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 같더군. 형사들이 몹쓸 짓을 했어.” “다음 주 해리슨 부통령이 오십니다만 ….” “그것이 왜?” “영접은 그만두는 편이 ….” “왜?” “폭탄입니다. 상당히 강력하고, 같은 것이 혹시 다른 테러범에게 도 ….”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네.” “그렇지만 ….” “미국측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나?” 미네까와는 한숨지었다. “알겠습니다.” “만일을 대비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막는 것이 자네들의 역 할이네.” “네.” “관저의 경비도 의외로 취약했지 않았는가. 그 아가씨가 없었더 라면 나는 이미 죽었네.” 그 말을 꺼내자 미네까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절대로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게.” 전화는 끊겼다. 미네까와는 화가 치미는 듯이 수화기를 세게 내 팽개쳤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불꽃의 종결 5> <불꽃의 종결 5> “무슨 일이야?” 겐모찌가 물었다. “뭐가?” “자네, 많이 변했군.” “어떻게?” “좋지 않게 변한 것은 확실해.” 구니코는 얼굴을 들었다. 침대 안에 알몸으로 누운 채였다.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서 네게 불평을 듣게 되다니, 이상해.” “불평이 아냐.” “그럼, 뭐야?” “너를 걱정하고 있단 말야.” 구니코는 소리 높여 웃었다. “친절하셔라. 고마워.” “믿지 않는 거야?” “전혀 …. 넌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야. 뭘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잖아?” “나는 그저, 비밀경찰 간부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구.” “내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어쨌든 국민들의 영웅이니까.” “국가적이지.” “어디가 다른데?” “크게 다르지. 국민 중엔 다끼 수상이 죽으면 기뻐할 사람들이 많이 있지.” “너야말로, 그 수상을 지키고 있는 거잖아?” 구니코는 겐모찌의 입에 키스를 했다. “애인은 없어?” 겐모찌가 물었다. “뭐야, 갑자기.” “없군.” “지금은 있어, 너야.” “나는 일시적 기분 전환용이겠지.” 구니코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있었어. 서로 사랑했고, 좋은 사람이었어.” “무슨 일 있었어?” “그냥 헤어졌을 뿐이야.” “그래서, 자포자기한 거야?” “자포자기 따윈 안해, 너도 참 집요하네.” 구니코는 그렇게 말하고 겐모찌 위로 몸을 덮쳤다. “한 번 더 껴안아줘 ….” 삐익 하는 소리가 났다. “호출이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 겐모찌가 일어섰다. “촌뜨기군, 당신의 상사는.”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겐모찌는 씩 웃었다. 전화로 미네까와와 연락을 취했다. “겐모찌입니다. … 지금 말입니까? 호텔 안에 있습니다. … 여자 와 둘이서요. … 알겠습니다.” 구니코는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구니코, 자 이제 철수하자.” “싫어.” “회의가 있어.” 겐모찌는 욕실로 들어갔다. 구니코도 뒤따라 들어가서 함께 샤워 를 했다. “무슨 회의?” “내주 해리슨이 일본을 방문하는데 나리따 공항에 수상이 영접 을 나갈 것 같아. 그 경비 건이야.” “우리도 나갈까?” “글쎄, 죽을 각오가 아니라면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겐모찌는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로 머리를 들이대며 말했다. “죽을 각오라고?” “폭탄이 나오면 모두 끝장이야.” “폭탄이라고?” “몰랐어? 어제, 여자 테러리스트 한 명이 자폭해서 죽었어.” “여자?” “쯔브라야 교오코라고 하든가, 지명 수배돼 있던 여자야.” 구니코는 잠시 묵묵히 샤워를 했다. “죽었어?” “산산조각 났어. 형사 두 명과 또 한 여자가 같이 죽었지.” “죽었다면 이젠 괜찮잖아.” “테러리스트 일당 중에 여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 든.” “또 한 명?” “그래서 경계하고 있는 거야.” 구니코는 먼저 욕실에서 나와 목욕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또 한 사람이 죽었는가. 구니코는 침대에 앉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겐모찌가 뒤따라 나오자, 구니코가 말했다. “먼저 가. 좀 있다 갈게.” 혼자 있고 싶었다. “왜 그래?” “자고 싶어, 이런 곳에서 혼자 자는 것도 괜찮을 거야.” “그건 뭐 상관없지만. 나갈 때 제복은 입지 말고 손에 들도록 해. 호텔에 있는 사람들이 덜덜 떨 거야.” 겐모찌가 가 버리자, 구니코는 다시 한번 샤워를 했다. 하복부의 상처 자국은 이제 거의 없어졌다. 호텔에서 나와 보니, 밖은 아직 환했다. 시계를 보고 겨우 세 시 인 것을 알고 놀랐다. 겐모찌의 차로 왔으므로 택시를 잡아야만 했다. 물론 승차거부를 하는 운전사는 없었다. 본부인 맨션 앞에 서 내리자 때마침 임무를 끝낸 대원들 몇 명이 차에서 나오고 있 는 중이었다. “수고했어.” 구니코는 가나코에게 말을 걸었다. “일은 순조롭게 집행됐어.” “그래, 안에 들어가서 들을게.” 구니코는 맨션의 입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달려 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구니코는 뒤를 돌아 보았다. “대장, 위험해!” 나이프를 손에 쥔 여자가 구니코를 향하여 돌진해 오고 있었다. 피할 여유가 없었다. 순간 가나코의 몸이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이프는 가나코의 가슴을 깊숙히 꿰뚫었다. “가나코!” 구니코는 가나코를 부축했다. 동시에 다른 대원들이 그 여자에게 달려들어 땅바닥에 밀어 넘어뜨렸다. “구급차! 빨리!” 그러나 구니코는 가나코의 목숨이 이미 끊어졌음을 알았다. “가나코 ….” 구니코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장, 이 여자는 ….” 구니코는 곧 정신을 차렸다. “물론, 경찰로 넘길 거야.” “죽여 버리지 않고?” 목소리를 떠는 대원도 있었다. 구니코는 대원들에게 매를 맞고, 걷어차여 녹초가 된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수갑을 채워서 대장실로 데려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맨션 안으로 들어갔다. 손 에 묻은 피를 씻어낸 다음, 대장실에 들어갔다. 여자는 의자에 앉 아 있었고, 뒤쪽으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양쪽에 붙어 있는 대 원에게 나가라고 손을 흔든 구니코는 자리에 앉았다. “마찌코.” 구니코가 소리를 질렀다. 이도 마찌코였다. 부친을 다끼에게 부탁해서 석방시켜 주었던 옛 친구였다. 마찌코의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어째서 그랬어? 왜 나를 죽이려 했어?” “그 이유를 몰라?” 마찌코는 차갑게 구니코를 노려 보았다. “네 아버지는 석방되었잖아?” “그래.” “그렇다면 ….” “아버지는 분명 돌아왔어. 폐인이 되어서.” 구니코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약, 약 말이야. 자백약, 마약, 최면약. 매일 그것들을 주사 맞고, 복용을 강요당했어. 때때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무의식중에 그 렇게 말하지만, 곧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지.” “몰랐어.” 구니코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심각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어. 우리 아버지 한 사람쯤으 로 ….” “그만해!” 구니코는 일어서서 울부짖었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참기 어 려운 침묵이 감돌았다. 마찌코가 말했다. “너를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 생각했어. 네가 미운 것은 아니야. 그저,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대장을 죽이려고 왔을 뿐이야.” “마찌코, 너 어떤 조직에 소속돼 있지?” 마찌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니코, 나를 죽여!” 구니코는 눈을 크게 떴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경찰서로 넘겨지면, 틀림 없이 비밀경찰행이야. 그렇게 되면 자 백약을 주사맞게 되고 죄다 털어놓게 되겠지. 구니코, 부탁이야. 제발 나를 죽여줘.” “그만둬,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구니코는 마찌코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차피 아버지와 똑같이 될 텐데, 뭐. 일생을 감옥에서 나오지 도 못하고. 구니코, 부탁해. 네가 나를 죽이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런 ….” 구니코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문이 열렸다. “대장.” “무슨 일이야?” “경찰이 ….” “바로 갈게, 기다리라고 해.” “네.” 문이 닫혔다. “구니코, 부탁해!” 구니코는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마찌코. … 일어설 수 있어?” “응.” “문을 향해 뛰어. 내가 쏠게.” 마찌코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고마워 ….” 구니코는 마찌코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 힘껏 부등켜안았다. “자, 구니코, 의심받을 거야. 이제 됐어?” 구니코는 권총을 꺼내어 안전장치를 풀었다. 마찌코는 미소를 띠 고 있었다.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구니코는 권총을 잡은 오른손을 힘껏 뻗쳐 들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쌌다. “안녕, 구니코.” 마찌코가 문을 향해 달렸다. 구니코는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불꽃의 종결 6> <불꽃의 종결 6> “선생님.” 학생 한 명이 말했다. “왜, 간다?” 노부코는 얼굴을 들었다. “창문 닫아도 돼요? 먼지가 들어와요.” “그래. 잠깐 기다려.” “선생님, 제가 닫을까요?” “괜찮아, 내가 닫을게.” 한참 시험중이었다. 학생을 걷게 할 수는 없었다. 노부코는 결석한 학생의 의자를 가져와서 구두를 벗고 그 위에 올라섰다. “선생님, 괜찮겠어요?” 여자애 한 명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 노부코는 웃으며 손을 뻗었다. 윗쪽의 창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창틀에 모래가 쌓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네. 이것 ….” 노부코는 힘껏 창문을 밀었다. 갑자기, 창이 미끄러졌다. 노부코 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위험해요!” 여학생들이 소리를 질렀다. 노부코는 마룻바닥에 넘어져 신음소리를 냈다. 움직이려고 하니 하복부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선생님!” “일으켜줘 ….” 다리 사이로 차디찬 것이 퍼져가고 있었다. 노부코는 손을 뻗어 보았다. “피가 ….” 여학생 한 명이 파랗게 질려 비틀거렸다. “구급차를 불러!” 노부코가 말했다. “빨리!” 눈 앞이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심한 출혈이다.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일까? “지금, 유미다가 교무실로 갔어요.” “나를 좀 일으켜줘.” “선생님, 움직이지 않는 편이 ….” “괜찮아, 손 좀 빌려줘 ….” 양쪽으로 부축을 받고 노부코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출혈은 계속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마룻바닥에 퍼지는 피를 보고 벽쪽에 모여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여학생 둘이 노부코를 의자 있는 데로 데리고 갔다. “고마워 ….” 현기증이 났다. 오한이 온몸을 엄습했다. 이 상태로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쇼크로 나팔관이 파열 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 어쨌든, 이 출혈이 계속되면 목숨이 위 험할 것이다. 노부코는 이쯤에 생각이 미치자 눈을 크게 뜨고 학 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 폭탄이, 아이들을 죽여버리고 만다. 안 된다! 어딘가 다른 장소로 가지 않으면. 노부코는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선생님 ….” “오지 마!” 노부코는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누구도 이 교실 밖으로 나와선 안 돼! 알았지?” 의외의 기세에 눌린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코는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너무 멀다. 한 걸음이, 마치 개미 걸음 같았다. 무릎에서 힘이 빠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죽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 이상하게도 노부코의 머리 속에는 다끼 수상의 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학생들, 홈마, 그리고 남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간신히 문에 다다르자 노부코는 가까스로 문고리를 돌려서 열었 다. 복도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어쩌지, 이제 설 수가 없어 …. “선생님.” 여학생이 쫓아왔다. “안으로 들어 가!” 노부코는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 짜내어 외쳤다. “어서 교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가능한 멀리 떨어져!” 벽에 손을 대고 겨우 노부코는 일어섰다. 피로 얼룩진 손도장이 선명하게 흔적을 남겼다. 엘리베이터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 노부코는 비틀거리면서 나아갔다. 출혈은 계속되었다. 이젠 끝이다. 걸을 수 없다. 불과 일 미터 앞에 엘리 베이터를 남겨놓은 채 노부코는 쓰러져 버렸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통보를 받고 누군가가 온 것이다. 안 돼! 엄청난 일이 일 어나고 말 것이다. 상반신을 일으켜 노부코는 엘리베이터로 기어 갔다.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가락 끝이 버튼에 닿았 다. 스르르 문이 열렸다. 노부코는 그 안으로 기어갔다. 힘이 계 속 빠져 나갔다. 겨우,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철제문이었 다. 조금은 방패막이 될 것 같다고 노부코는 생각했다. 노부코는 안도감과 함께 급속히 의식이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느 꼈다. 더 이상 감각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최후의 한 순간에, 암 흑은 흰빛으로 바뀌어 사라졌다. 폭탄은, 교사(校舍) 전체를 흔들어댔다. 엘리베이터를 관통한 불 기둥이 옥상의 기계를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불꽃과 검은 연기가 하늘로 거대한 뱀처럼 넘실거리며 치솟았다. “휴가라구요?” 구니코는 반문했다. “그래.” 니노미야는 책상 위의 파일철을 덮었다. 아버지의 사무실이었다. 구니코는 전화로 호출을 받고 찾아온 것이었다. “왜 휴가를 준대요?” “왜라니, 그저 휴가야.” 니노미야가 말했다. “수상이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 너는 그 동안 고생이 많았잖니? 좀 쉬는 편이 낫겠다는 배려야.” “그래도 ….” 구니코는 당황했다. “이제부터 큰 일이 많은데. 모레는 해리슨 부통령이 방문하잖아 요?” “수상에게 들으니 그런 때에는 잡다한 일만 많다고 하더구나. 프로메테우스에겐 특별한 용무가 없다는 얘기지.” “그렇지만, 전원이 휴가라면 몰라도 나만 휴가라니 이상해요.” “좋지 않니? 휴가를 준다고 말씀하셨다. 받아 들여라.” 무언가 있다. 구니코는 아버지 말투에 미묘한 초조함이 배어 있 음을 알아차렸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그래.” 니노미야는 웬지 안도한 모습이었다. “이러면 어떻겠니? 규슈에라도 갔다 오면?” “좋아요.” “그럼, 내일 비행기를 예약해 두마.” 아버지는 비서인 나가모또 교오코에게 빨리 준비하도록 일렀다. 구니코는 아버지의 말투로 이미 그 표가 준비되었음을 알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왜 급히 해리슨의 경비에서 프로메테우스를 제외시킨 것일까? 혹시 내가 의심받고 있는 것일까? 구니코는 그 러나 그 이상 아버지에게 묻지는 않았다. 의혹을 사면 오히려 손 해다. “얘, 구니코야.” “네?” “그 시게마쯔라는 남자 말야.” “시게마쯔가 왜요?” “어떠니? 결혼할 마음은 있는 거니?” 구니코는 머리를 숙였다. “몰라요. 왜요?” “꽤 괜찮은 젊은이 아니냐?” “조사해 봤어요? 아버지답군요.” 구니코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할 일이 있어서, 그만.” “얘야, 좀 놀다 천천히 가거라.”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괴로운 법이에요.” 구니코는 웃으면서 말하고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어머, 아가씨. 벌써 돌아가세요?” 나가모또 교오코가 얼굴을 들었다. “예, 이래저래 바빠서요.” 구니코는 별안간 아버지 사무실 쪽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처음 프로메테우스 대원을 보았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녜요. 그럼, 안녕히 계셔요.” 구니코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방을 나왔다. 건물 지하 상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TV에서 뉴스를 방송하 고 있었다. 구니코는 비로소 가와이 노부코의 죽음을 알았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메테우스의 딸] <불꽃의 종결 7> <불꽃의 종결 7> 그날, 공항으로 향하는 도로는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다. “날씨가 좋군.” 다끼가 말했다. “예.” 옆에서 미네까와가 초조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뭘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있나? 자네가 해리슨과 악수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다끼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맑고, 따스한 날이었다. 다끼의 차는 관례에 따라 엄중한 경 계 속에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그 여교사 사건은 역시 폭탄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걸로 두 번짼가? 그런데 하필이면 왜 학교에서 폭발시킨 것 일까?”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임신중이었는데, 그 전에 심한 출혈을 했습니다. 아마 과다출혈로 죽었는지도 모르겠다고 ….” “안 됐군.” “오늘이 걱정입니다.” 미네까와는 머리를 저었다. “만전을 기하기는 했습니다만 ….”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끼는 태연하게 말했다.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는 게 인생이지.” 오후 1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수상도 도착하겠네.” 구니코가 손목시계를 보고 말했다. “이상하군, 너도.” 겐모찌가 미소지었다. “어째서?” “휴가를 받았으면서도 일부러 공항까지 찾아오고.” “그럼 안 돼?” 구니코는 공항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난, 공항을 좋아해.” “아버지는 너가 규슈에 갔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그렇겠지?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명예로운 대장으로서 미국 부통령을 환영하는 자리에 참석해야 하지 않겠어?” “널 몰래 데려와서 들키면 호되게 당할 거야.” “너가? 설마.” 구니코는 웃었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구니코는 전혀 공포도 그 무 엇도 느끼지 못했다. “각료들이 도착했다.” 겐모찌가 말했다. “자, 밑으로 내려갈까?” “어째서 수상이 뒤쪽이야?” “만약을 위해서야. 테러리스트가 있다면 우선 선두의 차를 겨낭 할 테니까.” “철저히 신경을 썼군.” 구니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슨 일일까, 도대체?” “몰라, 그런 거.” 부대장인, 가미무라 미유끼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 부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별안간 대장이 휴가를 얻자마자 이렇게 갑자기 소집한 것이다. 소집이 수상의 직접 명 령이란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디까지나 독 립적인 조직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시를 받았으니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대장을 제외한 전원이 본부에 모여 있 었지만, 도대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관저에 전화해 보는 게 어때?” “벌써 한 시간 정도 기다렸어.” 저마다 불평을 토로한다. 그때, 밖에서 자동차 멈추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 드디어 온 것 같다.” 미유끼는 안도하며, 입구로 걸어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 다. “네, 어서 ….” 문을 열자 미유끼의 얼굴은 얼어붙고 말았다. 눈앞에 총부리가 있었다. 군인들이 차례차례 들이닥쳤다. 모두들 손에는 기관총과 소총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무슨 짓들 ….” 미유끼는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소총 소리가 울리자, 미유끼는 가슴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프로메테우스 처녀들의 비명이 들리고 그것을 덮어 씌우듯 기관 총 발사음이 울려 퍼졌다. 공항 로비에는 각료 전원이 모여서 따분해 하고 있었다. 뭔가 이 상하다고 구니코는 생각했다. 다끼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너무 늦었다. 아무리 신중을 기했더라도 이제 곧 해리슨의 비행기가 도착할 텐데? 게다가 부통령을 맞이하니까 외무대신은 이해가 되 지만 왜 각료 전원이 모인 것일까? 푸념을 늘어 놓고 있는 각료 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겐모찌는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구니코에게 각료들과 떨어져 있도록 하라는 말만 남겼다. 그 말도 걸렸다. 돌연, 로비에 군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구니코는 깜짝 놀랐다.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한순간에 각료들은 총구에 둘러싸였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이봐, 집어쳐! 나는 ….” 아수라장이 되었다. 먼저 총성이 한 발 울리고, 각료 중 한 사람 이 쓰러졌다. 로비는 다시 평온을 찾았다. 구니코도 겨우 깨달았다. … 쿠테타다! 그렇다면, 다끼는? “여러분, 조용히 들어 주십시오.” 다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려다보니 다끼와 방위대신이 계 단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여기서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끼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군이 전면적으로 나를 지지해 주고 있다. 여러분 가운데 반대 할 자가 있다면 이곳에서 사의를 표명해주기 바란다.” 구니코가 망연자실해 있을 때, 겐모찌가 어느 새인가 옆에 서 있 었다. “너도 이 사실을 ….” “비밀경찰 업무의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규슈에 가라고…. 그럼, 아버지도 알고 계셨 어?” “자금 쪽은 네 아버지의 힘이야.” 군사정권. 병기산업에 있어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좋 은 세상이었다. “지금쯤 방송국도 점거되었을 거야. 시내 일원에 전차가 출동하 고 있을 테니. 그뿐만이 아니야.” “뭐?” “프로메테우스 대원들은 인질로 잡혀 있어.” “무슨 말이야?” “업계의 재편성을 위해서야. 그 때문에 대원을 골랐던 거구.”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계산을 한 사람이 아버지였던 것이다. 각료들이 군인들에게 내몰리 듯이 로비에서 모습을 감췄다. 구니 코는 다끼가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야아, 자넨가?” 다끼가 다가왔다. 지금이다. 구니코는 시게마쯔 사건, 마찌코 사건, 그리고 죽어간 두 동료를 생각했다. 다끼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구니코의 권총은 안전장치 가 풀어져 있었다. 발사해서 맞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사살되면 그것으로 족했다. 구니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와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네.” 다끼가 말했다. “나와 자네 아버지는 새로운 일본을 만들 거네. 자네도 힘이 돼 주겠지?” 다끼가 손을 내밀었다. 구니코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천천히 권총을 빼들었다. 몇 초 후 로비에는 불꽃이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폭풍으로 유리 가 산산조각 나서 흩날렸다. 멀리 일반용 게이트에서 승객들은 은빛 연기가 하늘로 춤추듯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유리 파편이 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천리안 - 출력일 ::96/12/08 --------------------------------------- 제목 : [프로테리우스의 딸] 에필로그 에필로그 한 소녀가 빗속을 걷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숲속 오솔길에 회색빛 안개로 피어 오르고 있었 다. 소녀는 레인 코트 깃을 세운 채 보퉁이를 안고 바삐 걷고 있 었다. 군용트럭이 길가에 서 있고, 병사들이 무료한 듯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차 안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오늘 니노미야 수상은 의회 연설에서 계엄령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 트럭 앞까지 와서 소녀는 미끄러졌다. “엄마얏!” 소녀가 소리를 지른 것은, 보퉁이가 터져 사과가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웃었다. “얘야, 괜찮니?” “예.” “주워 줄까?” “됐어요. 더러워졌는 걸요.” 소녀는 잠시 웃고 어깨를 움츠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약간 오르막이었다가 다시 내리막으로 되어 있었다. 소녀는 오르막길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트럭에서 7, 8미터는 더 와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 다소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트 럭이 폭발했다. 붉은 불꽃이 솟아올랐고 병사들이 불길에 싸여 굴러나왔다. 소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지프가 왔다. 소녀는 멈춰섰다. 길에서 벗어나 덤불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기다려!” 고함 소리가 빗속을 뚫고 소녀의 귓전에 들려 왔지만 소녀는 계 속 달렸다. 지프가 덤불 안으로 돌진해 왔다. “서랏!” 소녀는 숲속으로 달려갔다. “쏜다!”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달렸다. 총성이 울렸다. 총탄이 나무 줄기를 파고 가지를 부러뜨렸다. 잠 시 동안, 총성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프는 덤불 속에서 U턴을 하여 길 쪽으로 되돌아갔다. 소녀는 숲속에 쓰러져 있었다. 총탄 중 한 발이 소녀의 배를 관 통했다. 소녀는 이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빗줄기가 볼을 때리며 입으로 흘러 들어 왔다. 소녀는 빗물의 차 가움도 느낄 수 없었다. 숲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적막한 숲 속에서 고요히 이름 모를 소녀는 생을 마감했다. 빗줄기가 더욱 강해져 회색의 막으로 온세상을 덮어씌우고 있었 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