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움직이는 표적 (하) 지은이: R.맥도널드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제17장. 협박장 제18장. 그물을 치다 제19장. 강도냐 배신이냐 제20장. 여자와 남자 제21장. 구름 속의 사원 제22장. 혈 투 제23장. 새로운 혐의자 제24장. 가난한 미남자의 최후 제25장. 살인의 보수 제26장. 검시심문 제27장. 범인의 정부 제28장. 목숨값 제29장. 사라진 꿈 제30장. 필사의 도주 제31장. 제3의 사나이 ⊙ 작가소개 ▶ 작가/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 - 루 아처(Lew Archer) 시리즈가 성공하면서 명성을 얻음 - 필명을 존 로스 맥도널드로 바꾸어 '루 아처 시리즈'의 첫권인'움직이는 표적'을 출판했다. - 이어서 제12작 '금력의 피안'(The Far Side of the Dollar, 1965) 을 출간 - 미국 추리작가협회 MWA의 회장에 피선 - 주요작품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길(The Way Some People Die)>,<피해자를찾아라(FindaVictim)>,<운명(TheDoomsters)>, <지하인간(The Underground Man) 등이 있다. ▶ 옮긴이/이기형 - 문학박사 - 전 국민대학교 대학원장 - 한국 추리작가협회 회장 - 저서 - '미국문학사', '세계추리문학사' - 번역서 - 말르로의 '희망' (한국번역문학상 수상)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일강의 죽음'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예고살인' '커튼' 외 다수. 제17장. 협박장 우리가 골짜기를 지나기 전에 붉은 태양은 이미 해안선 위에 걸린 구름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땅거미가 진 들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농장의 합숙소로 돌아가는 일꾼들을 실은 트럭을 여러 대 스쳐 보냈다. 덜컹거리는 트럭 위에 가축 떼처럼 처박힌 남녀노소가 음식과 잠과 다음날의 해돋이를 기다리며 말없이 서 있었다. 낮이 어언 저물고 밤은 아직 속력을 올리지 않은 그 황혼녘에 잠겨, 나는 약간 우울한 기분으로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바야흐로 익어가는 밤과 점차 짙어가는 냉기를 한데 머금은 구름 떼가 한 줄기 우유빛 급류처럼 길 위에 흘러내려 산 저편으로 사라져 내려갔다. 한두 번 커브를 틀 때 미란다가 내게로 몸을 기대어왔다. 그 몸은 떨고 있었다. 나는 춥거나 무섭냐고 묻지 않았다. 그 어느 쪽인가의 대답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01번 국도로 통하는 산길 도중에서 구름은 시종 산을 타고 굴러 내려갔다. 국도에 이르려면 아직도 요원한 산길에서, 나는 저 아래 고속도로상을 질주하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보았다. 그것들은 안개로 인해 몽롱하고 거대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정지신호에 막혀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데, 산타 테레사 방면에서 두 개의 휘황한 불빛이 쏜살같이 다가왔다. 그 빛줄기가 불현듯 방향을 돌리더니 맹수의 두 눈처럼 우리를 향했다. 질주해 온 그 차는 우리가 지나온 산길로 접어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브레이크가 비명을 울리고, 고무바퀴가 지면을 스쳐 날며 으르렁거렸다. 여차하면 정면충돌을 면치 못할 기세였다. "고개를 숙여."하고 미란다에게 이르고는 있는 힘을 다해 핸들을 틀었다. 상대편 운전사는 태세를 가다듬더니, 시속 70- 80 킬로미터의 속도에서 폭음을 울리며 2단 기어를 넣고 우리 차의 범퍼 바로 앞에서 빙그르르 차를 돌려 신호등과 우리 차 사이의 2m 간격을 빠져 내 오른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에 나는 운전사의 얼굴을 포착했다. 안개 서린 우리 차의 불빛 때문에 누르스름했으나, 우뚝한 가죽모자 밑의 얼굴은 깡마르고 창백했다. 차는 검은색 고급 승용차였다. 나는 차를 뒤로 물려 방향을 바꾸고는 그 차 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도로가 이슬에 젖어 미끄러웠고, 게다가 다른 차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느라고 시간을 잡아먹었다. 상대편의 붉은 후미등(後尾燈)은 꼬리를 끌며 산길 높이 올라가서 어느덧 안개에 삼켜지고 말았다. 어느 모로 봐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고속도로와 병행하는 샛길 중의 어느 하나에서 차를 돌릴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차를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샘프슨을 위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될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갑자기 차를 세우는 바람에 미란다는 양손으로 차내의 계기반을 짚어 겨우 몸을 지탱해야 했다. 내 몸의 반사성이 점차 격렬해져 가고 있었다. "대체 웬일이죠? 그 차가 우릴 들이받은 건 아니잖아요." "차라리 들이받았더라면 좋았을걸." "그 사람, 조심성은 부족해도 운전 솜씨는 기막힌데요." "흠, 녀석이야말로 움직이는 표적이지. 언젠가는 쏘아맞추고 싶군." 그녀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계기반의 불빛을 아래에서부터 받아 그늘이 진 어두운 얼굴 속에서 커다란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울해 보이는군요. 내가 또 아처 씨를 화나게 했나 보죠?" "미란다 때문이 아니오."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는 무언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니까 그래. 나는 직접 행동으로 뛰어드는 것을 좋아하거든." "알겠어요." 그녀는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 춥고 배가 고프군요." 나는 길가 얕은 도랑에서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카브릴로 협곡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안개 때문에 켜놓은 가로등의 노란 불빛을 받아, 길 양편의 나무와 덤불들이 태양을 잃어버린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흐릿한 잿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풍경은 몽롱한 내 머릿속과 잘 어울렸다. 그 몽롱함 속에서 내 생각은 랠프 샘프슨이 숨겨진 곳에 대한 단서를 찾아 느릿하게 헤매고 있었다. 그 단서는 샘프슨 저택으로 들어가는 차도 입구의 우편함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데는 특별한 지혜가 필요없었다. 미란다가 먼저 그것을 알아보았다. "차를 세워요." 그녀가 차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우편함에 하얀 봉투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기다려요. 내가 꺼낼 테니." 나는 한 발을 땅에 내디딘 채 손을 뻗어 막 편지를 집어내려는 그녀의 동작을 막았다. 나는 한쪽 귀퉁이를 잡고 편지를 꺼내어 깨끗한 손수건으로 쌌다. "지문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게 아버지한테서 온 것인 줄 어떻게 알죠?" "그거야 모르지. 집까지는 미란다가 운전하지." 주방에 들어가서 편지를 싼 손수건을 풀었다. 천정의 형광등이 에나멜을 칠한 흰 식탁에 죽음처럼 차디찬 백광(白光)을 던지고 있었다. 겉봉에는 발신인의 이름도 주소도 없었다. 나는 한쪽 모서리를 뜯고는 접힌 편지지를 손끝으로 집어냈다. 편지지에 인쇄된 글자들을 모아붙인 것을 보자 내 가슴은 철렁했다. 글자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오려내어 말이 되도록 늘어놓은 그 수법은 전형적인 납치범의 짓이었던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샘프슨 씨는 잘 있으니 10만 달러를 흔한 포장지에 싸서 끈으로 묶은 다음, 산타 테레사 경계 남쪽 1.6 킬로미터 지점 프라이어스 도로 반대편 고속도로 분기점의 남쪽 끝 길 복판의 풀밭에 놓아두시오. 이 일은 오늘밤 9시에 할 것이며, 돈 꾸러미를 놓으면 즉시 차를 몰고 떠날 것. 산타 테레사의 북쪽으로 떠나는지 확인할 것이오. 샘프슨의 목숨을 귀중히 여긴다면 경찰을 매복시키지 마시오. 매복이나 추적이 없고 돈에 표시가 안되었다면 샘프슨은 내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 각별히 조심하시오. 만일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샘프슨에겐 유감천만일 것이오. "당신이 옳았군요."하고 미란다가 반쯤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무언가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샘프슨에겐 유감천만일 것이오'라는 말로 차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혹시 있나 찾아봐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즉각 자리를 떴다. 나는 편지지에는 손을 대지 않고 몸을 바짝 기울여 오려낸 글자들을 조사했다. 그것들은 크기와 모양이 저마다 달랐으며, 질이 좋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다. 십중팔구 유명잡지의 광고란에서 오려냈으리라. 철자법으로 보아 중등교육 정도를 받은 사람 같았지만,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도 철자법이 틀리는 사람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러 틀리게 쓸 가능성도 있었다. 태거트와 미란다를 이끌고 그레이브스가 주방에 들어왔을 즈음에는 나는 이미 편지를 암기하고 있었다. 그는 강철처럼 차가운 눈을 빛내며 피스톤처럼 힘차고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식탁 쪽을 가리켰다. "저게 우편함에 있었는데...." "미란다한테 들었네." "아마 몇 분 전 고속도로상에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차 중 하나가 집어넣고 갔을지도 몰라." 그레이브스는 편지 위로 몸을 숙이고 나직하게 소리내어 읽었다. 태거트는 문간의 미란다 곁에 그대로 서 있었는데, 자기가 끼어야 될 일인지 어쩐지 몰라 얼떨떨한 듯했지만, 지극히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같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지만, 적어도 그때만은 미란다가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 밑에는 푸르뎅뎅한 기미가 끼어 있었으며, 커다란 두 입술은 그 가지런한 고운 이를 덮고 샐쭉하니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취한 듯 울적한 자세로 문설주에 기대어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젠 확실해졌군. 보안관 서리를 데려와야겠어." "지금 여기 와 있소?" "그래. 서재에서 돈을 검사하고 있지. 보안관에게도 연락하겠네." "그에게는 지문감식원이 딸려 있겠죠?" "그건 검사실 쪽이 나아." "그럼, 검사도 부르시죠. 녀석들은 교묘하니까 이렇다 할 지문을 남기지는 않았을 거요. 그렇지만 혹시 잠복성 지문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장갑을 끼고 글자들을 오려내기란 어려우니까." "옳은 말이야. 그런데 자네를 스쳐 지나갔다는 차는 무슨 얘기지?" "그건 당분간 덮어두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테지." "적어도 어떻게 해서는 안되는가는 알고 있죠. 되도록 샘프슨 씨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 셈이오." "내가 염려하는 게 바로 그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너무도 빠른 속도로 문으로 나갔으므로 태거트는 펄쩍 물러나 길을 비켜줘야 했다. 나는 미란다를 쳐다보았다.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태거트, 아가씨에게 뭣 좀 먹이시지." "할 수만 있다면야." 그는 부엌을 가로질러 냉장고로 갔다. 그녀의 시선이 그 뒤를 따랐다. 순간이나마 나는 그녀가 싫어졌다. 그녀는 마치 개와 같았다. 발정기의 암캐 같았던 것이다. "아마 먹을 게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소. 하지만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로 아는데." "이 편지를 보고 나니 훨씬 실감이 나는군요. 전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문자 그대로 현실이오! 이제 들어가요. 가서 누우시지." 그녀는 건들건들 방을 나갔다. 보안관 서리가 들어왔다. 체구가 크고 얼굴이 검게 탄 30대의 사내로, 어깨가 꼭 맞지 않는 다갈색 기성복을 입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일그러진 표정 또한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권한을 갖고 있음을 자기 자신에게 상기라도 시키려는 듯이 오른손으로 옆구리에 찬 권총을 잡고 있었다. 그는 시험삼아 도전적인 말투로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별거 아니오. 납치 및 공갈에 의한 지불청구서일 뿐이오." "이건 뭐요?" 그의 손이 식탁 위의 편지로 뻗었다. 나는 그가 그것을 만지지 않도록 그 손목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멍청하니 내 얼굴을 쏘아보았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이러지?" "내 이름은 아처요. 고정하시오, 서리 양반. 증거물 함을 갖고 있겠지요?" "그렇소. 차 안에 있소." "가져오시죠. 이걸 감식담당원에 넘길 때까지 보관해야 하니까." 그는 방을 나가더니 검은 금속제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내가 그 안에 편지를 떨어뜨리자 그가 상자를 잠갔다. 그것으로 그는 매우 만족한 듯했다. "잘 보관하시오." 그가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방을 나갈 때 내가 말했다. "절대로 손에서 놓아서는 안돼요." "이제 우린 뭘 하지요?" 열린 냉장고 옆에 서서 반쯤 남은 칠면조 다리를 손에 쥐고 뜯어먹던 태거트가 물었다. "당신은 대기하고 있으시오. 조금 뒤 신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총은 가지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그는 윗도리 호주머니를 두드렸다. "일이 어떻게 벌어졌다고 생각하시나요?샘프슨 씨가 버뱅크 공항을 떠날 때 놈들이 그 양반을 잡았다고 생각하나요?" "난들 알겠소? 전화는 어디 있지?" "집사 전용의 식료품실에 한 대 있지요. 바로 여깁니다." 그는 주방 끝에 붙은 문을 열고는, 내가 들어가자 도로 닫았다. 그곳은 찬장이 일렬로 늘어선 작은 방으로, 창은 구리로 만든 싱크대 위에 단 하나 뿐이었고 문 옆 벽에 전화기가 붙어 있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장거리 전화를 신청했다. 피터 콜튼은 아마 퇴근했겠지만, 메시지를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교환수가 그의 사무실을 부르자 콜튼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루입니다. 납치요. 몇 분 전에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일전에 샘프슨이 보낸 편지는 일을 쉽게 하려는 연막이었습니다. 검사에게 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사건이 그 지역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요. 샘프슨이 그저께 버뱅크 공항을 뜰 때 말입니다." "검찰 쪽은 납치 사건에는 반응이 느린데...." "시간 여유는 있습니다. 작전계획은 다 세워졌으니까요. 검은 승용차에 관해서는 뭣 좀 들어온 게 없습니까?" "너무 많아. 그날 전세낸 차가 무려 12대나 되네. 하기야 대부분은 합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2대를 빼놓고는 그날로 대리점에 반납되었네. 그 2대는 선불을 주고 1주일 기한으로 빌렸다더군." "세부 사항은요?" "첫 번째는 루스 딕슨 부인, 금발, 40대 전후, 비벌리 힐스 호텔에 거주하지. 거기를 조사했는데, 방은 빌렸지만 아직 들어오지는 않았다더군. 두 번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사나이인데, 아직 그쪽 대리점에 차를 돌려주지 않았다는군. 하긴, 1주일 기한으로 빌린 것인데 이제 겨우 이틀 됐으니까. 이름은 로렌스 베커, 약간 마른 친구로 옷은 그다지 잘 입지 않았고...." "그 친구 같은데요. 차 번호는 아십니까?" "잠깐 기다리게. 여기 있군--- 62S895 야. 1940 년형 링컨일세." "대리점은?" "패사디나의 딜럭스야. 내가 직접 가보겠네." "가능한 한 자세히 알아봐 주십시오. 수소문도 좀 하시고." "말해서 뭣 하나! 그런데 자네 어째서 갑자기 열을 내지?" "이곳 고속도로상에서 말하신 인상에 부합되는 사내를 보았거든요. 그자는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가 날아든 무렵에 길다란 승용차를 타고 나와 엇갈렸습니다. 게다가, 그 친구인지 한 패인지 모를 녀석이 오늘 아침 태평양 연안도로에서 푸른색 트럭으로 나를 깔아뭉개려고 했고요. 놈은 뾰족한 가죽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왜 한 방 쏘아붙이지 그랬나?" "대령님이라도 그렇게는 안할걸요.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샘프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힘자랑이나 하고 다니다가는 영영 못 찾게요. 부하들에게도 그저 미행만 하라고 이르십시오." "내게 일을 가르치는 겐가?" "바로 그렇습니다." "좋아. 달리 할 말은 없나?" "<미치광이 피아노> 가 문을 여는 대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만일의 경우를 위한 거지만...." "벌써 보냈네. 그 뿐인가?" "산타 테레사 지검(地檢)과 연락을 갖도록 하시지요. 지문감식차 협박장을 그리로 보낼 작정이니까요. 감사합니다. 편히 들어가십시오." "어, 그래." 그가 수화기를 놓자 교환수가 연결을 끊었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감감한 전화선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 도중 찰칵 하는 소리와 전화선이 탁탁 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결시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잡음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또 다른 내선(內線)에 연결된 수화기를 드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꼭 1분이 흐른 뒤에 집안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수화기를 내려놓는 희미한 금속성이 들려왔다. 제18장. 그물을 치다 크롬버그 부인이 요리사와 함께 주방에 있었다. 헝클어진 백발과 모성적인 엉덩이를 가진 여자. 내가 식료품실의 문을 열자 그들은 다같이 펄쩍 뛰었다. "전화를 쓰고 있었지요."하고 나는 말했다. 크롬버그 부인은 일그러진 미소를 애써 지었다. "선생님이 거기 계신다는 말을 못 들어서요." "이 집에는 전화가 몇 대나 있습니까?" "네 댄가 다섯 댄가--- 다섯 대로군요. 두 대는 2층에, 세 대는 아래에 있지요." 나는 전화를 체크하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모두들 어디 있죠?" "그레이브스 씨가 고용인 모두를 거실로 불러모으셨는데요. 누구든 편지를 두고 간 차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 본 사람이 있었나요?" "아뇨. 얼마 전에 나도 차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사람들이 언제나 여기까지 와서는 입구에서 차를 돌리거든요. 여기가 막다른 길인 줄 모르니까요." 그녀는 내게로 바짝 다가와서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선생님, 그 편지엔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돈을 달라더군요." 나는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세 사람의 다른 하인들이 복도에서 나와 엇갈렸다. 고개를 숙이고 한 줄로 서서 왔는데, 원예용 작업복을 입은 두 멕시코인과 그 꽁무니를 따르고 있는 것은 펠릭스였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를 보냈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 눈에선 흐릿하니 석탄 덩어리 같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거실의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부지깽이로 까맣게 탄 장작을 뒤집고 있었다. "고용인들이 왜들 저 모양이죠?"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끙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흘끗 문쪽을 쳐다보았다. "자기들이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은 안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런 생각을 심을 만한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아챈 거야. 나는 그저 문제의 차를 본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을 뿐이야. 그야 사실은 그들이 내색을 감추기 전에 그 표정들을 보고 싶었던 거지만." "당신은 이것이 집안 사람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군요?" "전적으로 집안 사람의 소행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 편지를 누가 만들었건 배달만큼은 너무 때를 잘 맞췄어. 예를 들어, 9시라는 마감 시간 내에 돈이 준비될 줄을 그자가 어떻게 알겠나?" 그는 흘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한 시간 10분밖에 안 남았는데." "오로지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지." "논쟁은 그만두지요. 일부는 집안 사람의 소행이라는 당신 의견은 십중팔구 옳을 겁니다. 차를 본 사람이 있던가요?" "크롬버그 부인이 소리는 들었다더군. 다른 사람들은 벙어리 행세를 했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별 다른 내색이 없었단 말이지요?" "응, 멕시코 인들과 필리핀 인들은 속셈을 읽기가 어려워." 그러면서도 그는 신중하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뭐 내게 정원사들을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건 아니지만. 펠릭스도 마찬가지고." "샘프슨 씨 자신은 어떤가요?" 그는 빈정거리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여보게, 루, 기발한 체는 하지 말게. 자네 직감은 그다지 잘 맞는다고 할 수 없잖나." "한번 가정해 봤을 뿐입니다. 만일에 샘프슨 씨가 수입의 8할을 소득세로 내고 있다면, 이런 일을 꾸밈으로써 손쉽게 8만 달러를 벌 수 있단 말입니다." "딴은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는걸." "실제로도 있었다더군요." "그렇더라도 샘프슨 씨의 경우는 너무 지나치잖나?" "설마 그분이 정직한 인물이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죠?" 그는 부지깽이를 집어들어 불타는 장작을 탁 때렸다. 불꽃이 벌떼처럼 튀어올랐다. "일반인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종류의 일을 꾸밀 만한 머리가 없다네. 그 방면에는 어두워. 더구나, 일이 너무 위험하단 말이야. 그리고 그에게는 돈이 필요없어. 갖고 있는 유전만 해도 500만 달러는 나가거든. 그것도 실수입을 따지면 훨씬 더 나가서 2,500만 정도야. 10만 달러쯤은 샘프슨에겐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번 납치는 진짜네. 루, 다른 생각일랑 말게." "그래도 그러고 싶은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수많은 납치가 편의상 살인으로 끝나니까." "이번 일은 그럴 리가 없어." 그는 깊은 분노를 담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절대로 그렇게는 안돼!! 놈들이 요구한 돈을 주면 될 게 아닌가. 돈을 받고도 샘프슨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놈들을 찾아서 작살을 내면 돼." "동감이오." 그러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돈은 누가 갖다주죠?" "아니, 자네가 가는 게 아닌가?" "놈들은 나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나는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세요, 버트. 그리고 태거트를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겁니다." "난 그 친구가 싫은데."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요. 또, 총을 겁내지도 않고. 만의 하나라도 일이 잘못 풀릴 경우,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아무것도 잘못될 일은 없어.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를 데리고 가지." "그렇게 하십시오." 크롬버그 부인이 문 어귀에 나타났다. 작업복의 앞섶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레이브스 씨?" "예?" "그레이브스 씨, 미란다 아가씨에게 말씀 좀 해주셔야겠어요. 좀 드시게 하려고 잠을 깨우려고 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으세요. 대답조차 없어요." "염려없을 거요. 내가 나중에 일러보지요. 당분간은 그냥 놔두시죠." "아가씨가 이렇게 나오시면 걱정이에요. 원체 감수성이 예민하시니...." "잊어버려요. 태거트에게 내가 서재에서 좀 보잔다고 알려 주겠소? 아, 그리고 권총을 가지고 오라고 이르시오. 총알을 재서." "알겠습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이 글썽글썽했지만, 두터운 입술을 꾹 다물고 방을 나갔다. 그레이브스가 문 쪽을 향했던 몸을 돌렸을 때, 나는 미란다가 자신이 품은 불안감의 일부를 그에게 전해주었음을 보았다. 그의 한쪽 뺨이 가볍게 씰룩이고 있었다. 그 눈은 방 저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죄의식을 느꼈던 게지." 그는 반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엇에 대한 죄의식이죠?" "확실치는 않아. 내 생각으론 근본적으로 오빠를 대신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녀는 아버지가 타락해 가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봤어. 그래서 만일에 자기가 보다 가깝게 지냈더라면 아버지가 그토록 빠른 시간에 그렇게까지 깊이 타락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여기는 모양이야." "그녀는 그분의 마누라가 아니잖소?" 라고 내가 말했다. "부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부인을 만나봤나요?" "몇 분 전에 만났지. 기막히게 멋지게 받아들이더군. 실은 소설을 읽고 있는 거야. 어때, 마음에 드나?" "안 드는데요. 죄의식을 느껴야 할 사람은 바로 부인일 텐데." "그렇다고 해도 미란다에게는 아무 도움도 안돼. 미란다는 묘한 아가씨라네. 무척 민감하면서도 자신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언제나 목을 길게 내밀고 자기 감정의 근원 저편에서 살려고 한다니까." "버트, 당신은 그녀와 결혼할 작정인가요?" "할 수만 있다면 하겠네." 그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두 번 청혼한 게 아니야.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더군." "당신이라면 그녀를 잘 돌볼 수 있을 겁니다. 그녀도 결혼하기에 충분한 나이이고."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참견 말라는 신호가 번득였다. "오늘 오후 드라이브 때 자네가 많은 얘기를 했다고 그러더군." "아버지 노릇 삼아 충고를 좀 했죠."하고 나는 말했다. "과속운전에 관해서 말이오." "아무쪼록 아버지 선(線)을 유지해 주기 바라겠네." 갑자기 그는 화제를 바꿨다. "그 클로드란 친구는 어때? 그자가 납치에 관계될 가능성은 있나?" "그 친구라면 어떤 일에도 낄 수 있을 겁니다. 그 녀석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몇 달 동안 샘프슨을 못 봤다고 잡아떼더군요." 자동차의 누르스름한 안개등이 집 주위를 쓸더니, 잠시 뒤 쾅 하고 차 문이 울렸다. "보안관이 틀림없네."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지독히 오래 걸리는구먼." 보안관은 단거리 경주선수가 결승점에 들어오듯 무척이나 서두르는 기세로 들어왔다. 양복을 입은 커다란 몸집에 차양이 넓은 카우보이 모자를 들고 있었다. 입은 옷처럼 그 얼굴도 잡종이어서, 경찰관과 정치인 티가 반반이었다. 완강한 턱과는 대조적으로 입 모습은 부드러웠는데, 느슨하게 포개진 두 입술 사이엔 여자와 술과 떠벌이기를 좋아하는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그레이브스에게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좀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당신이 험프리스를 데려오라고 해서." 그를 따라 조용히 방에 들어선 인물은 야회복을 입고 있었다. "파티에 가 있었다네."하고 그는 말했다. "잘 있었나, 버트?" 그레이브스가 나를 소개했다. 보안관의 이름은 스패너였다. 지방검사는 험프리스였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가 벗겨졌으며, 야윈 얼굴과 머리좋은 명투수의 눈과 같은 신들린 눈의 소유자였다. 그와 그레이브스는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워낙 친해서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레이브스가 지방검사를 지낸 시절, 험프리스는 예심판사였다고 했다. 나는 그레이브스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도록 물러서 있었다. 그는 그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야기하고, 알 필요없는 것은 젖혀놓았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자 보안관이 말했다. "편지에는 돈을 놓은 뒤 북쪽으로 가라고 쓰여 있더군요. 즉, 놈은 반대방향으로 도망치겠다는 얘긴데-- 로스앤젤레스 쪽이 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러니 저편 고속도로상에 잠시 경계망을 치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내가 한마디로 잘라말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샘프슨 씨에게 이별의 키스를 보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지만 납치범을 잡기만 하면 놈을 족쳐서...." "잠깐, 조." 험프리스가 끼어들었다. "놈들은 하나가 아니라고 가정해야 되네. 우리가 일당 중 한 놈을 때려눕히면 다른 놈, 혹은 그놈들이 샘프슨 씨를 해칠 거야. 그건 자네 얼굴에 코가 달려 있는 것처럼 명백해."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편지를 보셨습니까?" "앤드루스가 갖고 있소."하고 험프리스가 말했다. "내 직속지문감식 담당이죠." "무언가 발견된다면 FBI의 기록과 대조해 봐야 할 겁니다." 나는 내 자신이 점차 인기를 잃어가고 있음을, 그것도 자초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고 사교성을 발휘하기에는 시간이 급했다. 더욱이, 나로서는 풋내기 수사관들이 자기들이 할 일을 알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보안관을 향해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시 당국과는 연락을 취했습니까?" "아직은. 먼저 상황판단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좋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편지의 지시 그대로 따른다고 할지라도 샘프슨 씨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은 5할이 넘습니다. 그는 적어도 일당 중의 하나는 틀림없이 기억할 테니까요. 버뱅크에서 그를 붙든 자 말입니다. 이건 그에게 불리합니다. 또한, 만일 여러분이 놈들이 돈을 못 가져가게 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됩니다. 납치범 하나를 감옥에 넣을 수는 있겠지만, 샘프슨 씨 또한 목을 잘린 채 어딘가에 드러눕는 신세가 될 테니까요. 최선책은 그 물을 치는 것인데, 그 방면은 그레이브스에게 맡기십시오." 스패너의 얼굴이 분노로 얼룩졌다. 그 입이 할 말을 찾아 반쯤 열렸다. 험프리스가 그를 막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조. 법을 집행하는 방법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샘프슨 씨의 목숨을 구하는 거니까. 이제 그만 시내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그는 일어났다. 보안관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스패너가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믿어도 될까요?" "괜찮을 거야." 그레이브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험프리스가 그 친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테니까." "험프리스란 친구, 말하는 걸 보니 꽤 머리가 좋은데요." "1급이지. 7년쯤 함께 일했는데, 이렇다 할 실수를 저지르는 걸 못 봤어. 그래서 나오면서 내 자리를 물려줬지." 그의 음성에는 약간 후회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그 일을 계속할 걸 그랬죠?"하고 나는 말했다. "별로 만족을 못했나 보죠?" "급료가 더럽게 적은 일이지? 10년을 매달렸는데도 끝났을 적엔 빚만 남았거든." 그는 내게 익살스런 눈길을 던졌다. "자넨 왜 롱 비치 경찰을 그만두었나, 루?" "돈이 주요인은 아니었지요. 숨막히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거죠. 게다가, 더러운 정치도 싫었고. 좌우간 내가 그만둔 게 아니오. 쫓겨난 거지." "좋아 좋아, 자네가 이겼네." 그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8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군." 앨런 태거트는 황갈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서재에 있었다. 벨트를 맨 탓으로, 위쪽이 부풀어 어깨가 굉장히 크게 보였다. 그가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양손을 뽑자 두 자루의 권총이 나타났다. 그레이브스가 하나를 갖고, 또 하나는 태거트가 간직했다. 연습용 32구경 권총으로, 푸르스름한 강철의 총신 끝에 가늠쇠가 불쑥 솟아 있었다. "명심하시오."하고 나는 태거트에게 일렀다.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 "저쪽에서 먼저 쏘기 전에는 절대 방아쇠를 당겨서는 안돼요." "함께 안 갑니까?" "그렇소." 이어서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말했다. "프라이어스 도로의 모퉁이를 알고 있습니까?" "응." "주위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없을까요?" "전혀 없어. 한쪽은 탁 트인 해변이고, 다른쪽은 밋밋한 둑이야." "그럴 테지. 당신은 차로 먼저 가세요. 나는 뒤따라가서 고속 도로 저편 1 킬로미터 지점에서 대기할 테니." "설마 즉각 끝장낼 생각은 아니겠지?" "적어도 나는 그런 짓은 안해요. 그저 녀석이 지나가는 걸 보고 싶을 뿐입니다. 나중에 시(市) 경계에 있는 주유소에서 만나요. 이게 마지막 기횝니다." "알았네." 그레이브스는 벽금고의 다이얼을 돌렸다. 시 경계선에서 프라이어스 도로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벼랑을 깎아 파서 만든, 1.5 킬로미터 정도의 4차선이었다. 그 복판에 콘크리트로 가장자리를 두른 잔디밭이 한 줄 있었는데, 이것이 길을 양분하고 있었다. 프라이어스 도로에 인접하는 지점에서 잔디는 끝나고, 길은 폭이 좁아져 3차선이 되어 있었다. 그레이브스의 차는 그 교차점에서 빠른 속도로 U턴을 한 뒤 불을 켠 채 정지했다. 헤드라이트의 타는 듯한 빛이 고속도로의 등판 위에서 작렬했다. 그곳은 그런 목적에 이용하기에는 아주 좋은 곳으로, 외진 모퉁이의 오른편 가장자리에는 하얀 전신주가 일렬로 서 있었다. 부근에는 집은커녕 나무 한 그루 없었다. 도로를 오가는 차도 뜸했고, 그나마 한참이 지나서야 한 대씩 나타나고는 했다. 계기반에 붙은 시계가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태거트와 그레이브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들 곁을 지나 달려갔다. 거리계로 재어보니 다음 샛길까지의 거리는 1.1 킬로미터였다. 이 샛길 저편 200 미터 지점에 고속도로 오른편으로 펼쳐진 해안을 굽어볼 수 있도록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이 있었다. 나는 차를 돌려 남쪽을 향해 세우고는 라이트를 껐다. 8시 53분이었다. 매사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놈들의 차가 10분 안에 내 곁을 통과할 터였다. 차를 세워놓자,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잿빛 밀물처럼 해안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차를 온통 둘러쌌다. 마치 심해어(深海魚)의 눈과도 같은 두세 쌍의 헤드라이트가 그 안개 속을 뚫고 북쪽으로 사라져 갔다. 도로 가장자리의 난간 아래 어둠 속에서 바다가 숨을 내쉬며 꾸르륵거렸다. 8시 58분이 되자 프라이어스 도로 방면에서 두 줄기 헤드라이트가 커브를 돌아 질주해 왔다. 돌진해 온 차는 내 차 바로 앞에서 급회전을 하더니 왼쪽으로 빠지는 샛길로 들어갔다. 차의 색깔이나 형태는 볼 수 없었지만, 차바퀴가 어지간히 닳았음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운전솜씨 또한 낯익은 것이었다. 나는 불을 끈 채 고속도로를 건너질러 가장자리를 따라 그 샛길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러나 미처 거기 이르기도 전에 안개 속으로 잦아들어 멀리서 울려오는 듯한 세 가지 소리를 들었다. 통곡을 하는 듯한 브레이크의 울부짖음, 한 방의 총성, 스피드를 내기 위해 열을 올리는 모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샛길의 어귀에 커다랗게 확산된 흰 빛이 쏟아졌다. 나는 교차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또 한 대의 차가 샛길에서 나타나더니 내 앞에서 좌회전을 하여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앞쪽이 길쭉한 우유빛 컨버터블이었다. 차창에 김이 서려 운전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본 것 같았다. 나로서는 그 뒤를 추적할 처지가 못 되었다. 어찌됐든 추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안개등을 켜고 노상으로 나갔다. 고속도로에서 수백 야드 떨어진 곳에 두 바퀴를 길가 도랑에서 처박고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는 그 뒷전에 차를 세운 뒤 권총을 쥐고 밖으로 나갔다. 차는 검은 승용차로, 전쟁 전 링컨 사(社)에서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었다. 엔진은 헛돌고 불은 켜진 채였다. 번호는 62 S 895. 나는 오른손에 권총을 틀어쥔 채 왼손으로 앞문을 열었다. 작은 사내가 내게로 몸을 기울여 왔다. 부릅뜬 죽은 눈이 안개 속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쓰러지려는 그 몸을 붙잡았다. 하루 24시간을 뼛골에 사무치게 죽음을 의시하며 살아온 내가 아니었던가. 제19장. 강도냐 배신이냐 그의 왼쪽 머리에는 바로 그 가죽모자가 여전히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왼쪽 관자놀이를 가린 부분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얼굴 왼쪽은 화약 때문에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총알이 준 충격으로 목뼈가 부러졌는지, 내가 일으켜 세우자 머리가 어깨 위에서 디룽거렸다. 때가 시커멓게 낀 손톱이 달린 양손은 핸들에서 미끄러져 내려 옆구리에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를 일으켜 세워 운전석에 앉히고, 다른 손으로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스포츠 재킷의 양쪽 옆주머니에는 휘발유 냄새가 나는 싸구려 라이터와 질 나쁜 갈색 종이로 만 담배가 반쯤 든 값싼 목제(木製) 담배 케이스, 그리고 칼날 길이 10 센티미터의 재크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작업용 청바지의 뒷주머니에서는 닳아빠진 상어가죽 지갑이 나왔는데, 18~20 달러 상당의 소액권과 캘리포니아 주 당국이 최근 로렌스베커 앞으로 발행한 운전면허증이 들어 있었다. 주소는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굴 언저리에서 떠도는 싸구려 호텔로 되어 있었다. 그게 그의 주소일 턱도 없었고, 로렌스 베커가 그의 이름일 리도 없었다. 바지 왼쪽 주머니에는 인조 가죽 케이스에 든 더러운 빗이 하나 있었다. 다른 주머니에서는 사슬에 꿴 자동차 열쇠 뭉치 - 시보레에서 캐딜락에 이르는 어떤 차라도 열 수 있는 열쇠와 반쯤 사용한 성냥갑이 들어 있었는데, 성냥갑에는 '코너 하우스, 칵테일 및 스테이크, 부에나비스타 남쪽 101번 고속도로'라고 찍혀 있었다. 재킷 안에 걸친 옷은 T셔츠 뿐이었다. 계기반에 붙은 재떨이에는 짤막한 마리화나 꽁초가 몇 개 있었지만, 차 안의 다른 부분은 목구멍처럼 깨끗했다. 시트 주머니 속에 등록증조차 없었으니, 50달러와 100달러짜리 지폐로 열심히 꾸려놓은 10만 달러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물건들을 주머니에 도로 넣은 뒤 그를 일으켜 운전석에 똑바로 앉히고는 문을 탁 닫아 받침대 구실을 하게끔 했다. 차에 오르기 전에 다시 한 번 돌아보니, 헤드라이트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으나 헛돌아가는 모터는 이제 지쳤는지 드문드문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죽은 사내가 핸들 위로 몸을 숙인 모양이 마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고도 빠른 여행길에 나설 준비가 끝난 듯했다. 그레이브스의 차는 주유소의 펌프 곁에 서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그 곁에 서 있던 그레이브스와 태거트가 달려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핼쓱했으나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검은 승용차였네."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아 떠나면서 그자가 모퉁이에서 멈추는 걸 봤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캡을 쓰고 가죽 점퍼를 입고 있더군." "지금도 입고 있습니다." "놈이 지나가는 걸 봤습니까?" 태거트의 음성은 긴장이 지나쳐서 속삭이는 소리를 냈다. "내 앞에서 차를 돌렸소. 다음번 샛길에 차를 세우고 앉아 있지.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말이오." "아니 뭐라고!" 그레이브스가 소리쳤다. "설마 자네가 쏜 건 아니겠지, 루?" "딴 작자가 그랬소. 총성이 울리고 1분쯤 지나자 그 샛길에서 크림빛 컨버터블이 나오더군요. 여자가 운전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로스앤젤레스로 갔어요. 그런데 놈은 확실히 돈을 집었나요?" "녀석이 집는 걸 봤어." "지금은 갖고 있지 않아요. 결국 두 가지 일 중 하나가 일어난 거야. 강도였거나, 동료의 배신이지. 만일 놈이 노상강도에게 당한 거라면 그 패거리들은 그 10만 달러를 손에 넣지 못한 게 돼. 한편, 놈들이 자기 편을 배신한 거라면 당연히 우리도 배신할 테지. 어느 쪽이든 샘프슨에게는 불리하게 됐는걸." "이제 어떻게 하죠?"하고 태거트가 물었다. 그레이브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공개적으로 나서야지. 경찰에게 나설 기회를 주는 거야. 현상금을 걸고. 그 문제로 샘프슨 부인을 만나야겠군."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시오, 버트."하고 나는 말했다. "이 싸움은 조용히 벌이지 않으면 안돼요. 신문에 나는 일만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만일 노상강도의 소행이라면 놈의 패거리는 우리를 탓할 거요. 그렇게 되면 샘프슨은 끝장이지." "더러운 새끼들!" 그레이브스의 음성은 침울했다. "우리는 약속을 지켰어. 이 자식들을 잡기만 하면 그냥 -" "아직 일의 전말은 모르죠. 확실한 건 어떤 사내가 렌트가 속에서 죽어 있다는 것 뿐이죠. 보안관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겁니다. 별로 쓸모는 없겠지만 그럴 듯한 시위는 되거든. 그 다음에 고속도로 순찰대와 FBI를 불러요.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동원하시오." 나는 비상 브레이크를 풀고 차를 약간 움직였다. 그레이브스는 창에서 떨어져 뒤로 물러섰다. "자네 또 어디로 갈 셈인가?" "목표도 모르는 사냥길에 나서려는 거요. 사태가 샘프슨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게 아니오?" 부에나비스타까지는 고속도로로 80km 길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모텔과 술집, 그리고 극장 간판이 중심가를 밝히고 있었다. 세 개의 극장 중 둘은 멕시코 영화광고를 내걸고 있었다. 통조림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 멕시코 인들은 땅을 파먹고 산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멕시코 인들과 고기잡이 배를 우려먹고 살고. 나는 마을 복판에 멋없이 서 있는 커다란 잡화점 앞에서 차를 세웠다. 거기서는 총기류 및 잡지, 낚시 도구, 생맥주, 문방구, 야구 글러브, 피임약, 그리고 담배를 팔고 있었다. 오리꽁지처럼 쳐낸 머리카락에 반들반들 기름칠을 한, 20명도 넘는 멕시코 소년들이 쉴새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게 뒷전에 놓인 회전 당구기와 거리의 소녀들에게 끌려 두 패로 나뉘어 있었다. 소녀들은 리본과 화장품으로 치장하고 젖가슴으로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소년들은 휘파람을 불며 폼을 잡거나, 혹은 관심이 없는 체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보도 쪽으로 불러 '코너 하우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동료와 말을 나누더니 둘이 동시에 남쪽을 가리켰다. "곧장 가세요, 8km 쯤요. 화이트 비치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어요." "커다랗고 붉은 간판이 있어요." 나중에 온 소년이 팔을 벌리며 열심히 말했다. "<코너 하우스> 라면 당연히 눈에 띄죠."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들은 마치 내가 자기들에게 친절을 베풀기라도 한 듯 절을 하고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네온의 '코너 하우스'라는 간판은 고속도로 오른쪽에 있는 길쭉하고 낮은 건물 지붕 위에 걸려 있었다. 그 저편 교차로에 있는 하얀 이정표에는 검은 글씨로 '화이트 비치'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건물 곁의 아스팔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거기에는 8~9대 가량의 다른 차들이 있었으며, 트레일러가 달린 트럭 한 대가 고속도로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반쯤 커튼이 쳐진 창을 통해 보니, 몇 쌍은 테이블에 자리잡고 두어 쌍은 춤을 추고 있었다. 문을 들어서니 왼쪽에 기다란 바가 보였는데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입구에 선 채 마치 누군가를 찾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춤추는 사람은 그 큰 홀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만큼 많지 않았다. 음악은 주크박스 (요금을 넣어 원하는 곡을 들을 수 있는 자동전축) 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홀 안쪽의 연주대는 비어 있었다.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힌 바닥과 미처 정돈되지 않은 채 휘청거리는 테이블의 행렬, 주정꾼들이 벽에 남기는 기념물의 냄새, 취한의 잠꼬대처럼 너저분한 장식 등이 이날 저녁 큰 바람이 한번 쓸고 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손님들도 홀 안의 침울한 분위기를 느끼는 듯, 애써 웃음과 쾌락을 얻으려 하면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어느 얼굴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나 뿐인 웨이트리스가 내게 다가왔다. 검은 눈동자에 부드러운 입매, 스무 살을 맞아 막 피어나려는 멋진 몸매였다. 그 얼굴과 몸만 봐도 그녀의 과거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발에 티눈이라도 난 것처럼 조심스레 걸어왔다. "자리를 마련해 드릴까요, 손님?" "고맙지만 바에 앉겠소. 그런데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야구장에서 만난 친구를 찾고 있는데, 보이지를 않는군." "이름이 뭔데요?" "그게 골칫거린데... 이름을 몰라요. 그 친구에게 내기빚이 있는데, 여기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하더군. 키가 작고 서른다섯쯤 된 친구야. 가죽 점퍼를 입고 가죽 캡을 썼지. 눈이 푸르고 코가 날카롭게 생겼어." 그리고 마음속으로, '머리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아가씨, 머리통에 구멍이 뚫려 있어' 하고 말했다.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이름이 에디 뭐라든가, 아무튼 그래요. 가끔씩 한잔하러 오거든요. 하지만 오늘밤엔 안 왔는걸요." "여기 오면 만날 거라고 하던데. 그 친구 보통 몇 시경에 오나?" "이보다 더 늦게 와요. 자정 때쯤. 그분, 트럭을 몰지요?" "응, 푸른색이오." "바로 그거예요. 주차장에서 본 적이 있어요. 이틀 전에 와서 여기 전화로 장거리전화를 걸었어요. 아니, 사흘 전이군요. 주인은 싫어했지만.... 왜 아시잖아요, 3분만 지나면 요금이 엄청나게 붙으니까요. 하지만 그분이 요금이 나오면 계산하겠다니까 주인도 가만 있더군요. 그런데 그분에게 줄 돈이 얼마나 되죠?" "많아. 그 친구 어디로 전화했는지 혹시 모르나?" "아뇨, 그야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요. 아저씨에겐 상관이 있나 보죠?" "연락을 하고 싶어서. 그럼, 돈을 보낼 수 있거든." "괜찮으시다면 주인에게 맡겨도 돼요." "그 양반은 어디 있소?" "이름을 치코예요. 바 뒤에 있어요." 한 테이블에 자리잡은 사내가 유리잔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나는 바로 들어갔다. 바텐더의 얼굴은 벗겨져 가는 이마 끝에서 느슨하게 늘어진 턱에 이르기까지 지독하게 길쭉하고 앙상했다. 이 밤에 텅 빈 바를 지키고 있는 그 몰골은 더욱 길어 보였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맥주." 그의 턱이 한 단계 더 처졌다. "동부식, 아니면? 서부식으로?" "동부식으로." "음악까지 35센트 되겠는데요." 그의 턱이 원상복귀를 했다. "우리집에선 음악을 곁들이지요." "샌드위치, 되겠죠?" "물론이죠." 그는 아주 신이 나서 말했다. "어떤 걸로?" "베이컨과 달걀을 넣어 주쇼." "오케이." 그는 열린 문을 통해 웨이트리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난 에디라는 친구를 찾고 있소."하고 내가 말했다. "며칠 전 밤에 내게 장거리전화를 건 친구 말이오." "라스베이가스에서 오셨소?" "지금 거기서 오는 길이오." "그곳 경기는 어떤가요?" "형편없소." "거 안됐구먼." 그는 기쁜 듯이 말했다. "뭣 땜에 그자를 찾는 거요?" "빚이 좀 있어서. 그 친구, 이 근처에서 사나요?" "그렇소.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요. 금발머리 여자를 데리고 한두 번 여기 왔었지요. 마누라일 테지. 내 생각엔 오늘밤에도 올 것 같은데 기다려 보시구려." "고맙소, 그렇게 하죠." 나는 맥주잔을 창가의 테이블로 가져갔다. 거기서는 주차장과 입구를 지켜볼 수 있었다. 잠시 뒤 웨이트리스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그녀는 내가 요금을 치르고 팁을 준 뒤에도 그냥 남아 머뭇거렸다. "돈을 주인에게 맡기실 건가요?" "그건 생각중이야. 틀림없이 그 친구 손에 들어가야 하니까." "아저씨는 양심껏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분인가 보죠?" "도박꾼이 낼 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잖아?" "도박꾼이 아닐까 생각은 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열을 내며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들어보세요, 아저씨. 내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스포츠맨하고 데이트를 하걸랑요. 그런데 그 애 말이, 그 사람이 그러는데 내일 3회전에선 징크스 호가 꼭 이길 거라나요. 아저씨 같으면 그 말(馬)에 거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말에?" "돈을 아껴요." 나는 말했다. "경마장 친구들을 이길 수는 없어." "난 팁으로 받는 돈만 거는걸요. 그 사람, 내 친구의 남자친구 말이에요, 징크스 호가 틀림없이 이긴대요." "돈을 아끼라니까." 그녀의 입이 샐쭉하니 오므라들었다. "도박꾼치곤 이상한 분이시네." "할 수 없군." 나는 1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주었다. "징크스 호더러 뭔가 보여달라고 하지." 그녀는 놀라움에 찬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아저씨--- 난 결코 돈을 달라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 "아가씨 돈을 잃는 것보다는 낫잖아." 근 12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그런지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내가 그것을 먹고 있는 동안 몇 대의 차가 도착했다. 젊은이들이 한 무더기 웃고 떠들며 들어오자 식당은 단번에 활기를 띠었다. 뒤를 이어 검은 세단 한 대가 주차장으로 굴러 들어왔다. 전면 유리 옆에 경찰용 붉은 서치라이트가 티눈이 박힌 엄지손가락처럼 비쭉 튀어나온 검은 포드였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평복을 입고 있었으나, 정복을 입은 야구심판 못지 않게 뚜렷이 표가 났다. 게다가,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는 권총 여기 있소, 하는 모양이었다. 입구에 달린 전등의 불빛 속으로 그가 들어섰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산타테레사에서 온 보안관 서리였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바 끝의 붙은 문을 통해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었다. 변기 뚜껑을 내려덮고는 그 위에 걸터앉아 선견지명이 없었음을 한탄했다. 에디 뭐라는 녀석의 주머니에 성냥갑을 남겨놓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그대로 앉아 회칠을 한 벽에 끄적거린 낙서들을 보며 8~10분을 보냈다. '넝마주이 존 라티노, 장애물 경기에서 120회 우승, 1946년 미시건 주 디어본 시 디어본 고등학교 졸업. 프랭클린 P 슈나이더, 오클라호마 주 오시지 군, 고맙다, 이 병신아.' 나머지는 유치한 그림을 곁들인 흔해빠진 변소 낙서였다. 천정에 붙은 벌거벗은 전구가 눈부셨다. 머릿속이 띵 하더니 나는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방은 땅 밑 저편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하나의 통로 - 좌우의 벽이 하얗게 칠해진 통로였다. 나는 그 통로를 따라 도시 밑을 흐르는 더러운 지하수에 이르렀다.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오물로 가득찬 그 강을 건너야만 했다. 다행히도 내게는 죽마(竹馬)가 있었다. 덕택에 나는 셀로판 지에 싸인 것과 마찬가지로 몸에 오물을 묻히지 않고 저쪽 기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나는 죽마를 던져버리고 - 그것들은 또한 목발이기도 했다 - 죽음의 아가리처럼 번쩍이는 크롬을 입힌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그것은 순조롭고 확실하게 나를 끌어올려, 나는 온갖 험난한 지대를 통과하여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대문 앞에 이르렀다. 줄무늬진 면포(綿布)를 두른 한 처녀가 문을 열어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노래하면서. 내가 포석(鋪石)이 깔린 광장으로 들어서자 등뒤에서 문이 철컥 닫혔다. 그것은 그 도시의 중앙광장이었지만,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 뿐이었다.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전차 한 대 눈에 띄지 않았다. 노란 가로등 불빛 하나가 사람들의 발길로 매끄러워진 보도 위를 쓸쓸히 비추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자 내 발소리는 쓸쓸히 메아리쳤고, 사방에 웅크리고 앉은 크고 작은 집들이 폭풍을 앞둔 나무숲처럼 웅성거렸다. 문이 또다시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혀서 나는 눈을 떴다. 무언가 쇠붙이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 열어."하고 보안관 서리가 말했다. "그 안에 있는 걸 알고 있어." 나는 걸쇠를 뽑고 문을 활짝 열었다. "바쁘시군요, 서리님?" "바로 당신이었군. 당신일 거라고 짐작했지." 그의 검은 눈동자와 두터운 입술은 만족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손에는 총을 들고 있었다. "나 역시 당신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소."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사람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비밀로 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겠지, 응?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 이리로 숨어든 이유가 있었겠지? 보안관은 이번 일을 내 부인의 소행으로 보고 있어. 당신이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할 거야."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 어깨 너머에서 바텐더가 말했다. "라스베이가스에 있는데 에디가 전화했다고 말하더군요." "어때, 뭐 할 말 있나?" 서리가 따지고 들었다. 그는 내 얼굴에 대고 권총을 휘둘렀다. "들어와서 문을 닫으시지." "뭐 어째? 머리에 두 손을 올리기나 해."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손을 머리에 올리라니까." 권총이 명치를 파고들었다. "총 갖고 있나?" 그는 다른 손으로 내 몸을 더듬으려 했다. 나는 뒤로 물러서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총은 갖고 있지만, 빼앗길 수는 없소."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 등뒤에서 문이 빙그르 닫혔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응? 공무집행방해죄야. 체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은걸." "생각이 굴뚝 같은 건 좋지만 그쯤에서 끝내시지." "농담은 집어치워, 이 하룻강아지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는 것 뿐이야." "그저 즐기고 있었을 따름이오." "그래, 입 다물지 못하겠나?" 그는 만화에 나오는 경찰처럼 말했다. 그는 빈손을 쳐들어 내 뺨을 때리려 했다. "잠깐."하고 나는 말했다. "내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안돼." "어째 안된다는 거지?" "아직 경찰을 죽인 적은 없었어. 이력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거든." 둘의 시선이 맞부딪쳐 얼어붙었다. 쳐들었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뻣뻣이 굳는가 싶더니 슬금슬금 내려갔다. "이제 총은 치우시지."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강요받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도 당신 취미를 물어보지는 않았어." 말은 이랬어도 그의 분노는 어느덧 가라앉아 있었다. 거무튀튀한 그 얼굴이 분노와 의혹, 의심과 당황이라는 모순된 갈등 사이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이유로 여기 온 거요. 서리님." 마지막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으나, 나는 애써 입밖에 냈다. "에디의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발견했었죠." "녀석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는 빈틈없이 물었다. "웨이트리스가 말해 주었소." "허어? 바텐더는 녀석이 라스베이가스로 전화해서 당신을 찾았다던데?" "바텐더에게서 뭣 좀 짜낼까 하고 내가 꾸민 거요. 알겠소? 내가 꾸며낸 이야기란 말이오. 꾀를 좀 썼지." "그래, 무얼 알아냈지?" "죽은 사내의 이름은 에디, 트럭을 몰았고, 가끔 한잔하러 여기 왔다는 것. 사흘 전에 여기에서 라스베이가스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오. 사흘 전 샘프슨은 라스베이가스에 있었소." "농담은 아니겠지?" "서리님, 설령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당신에게 농담을 걸어 뭣 하겠소?" "제기랄."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일이 앞뒤가 딱 맞아 떨어지는군, 안 그렇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걸."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사실을 지적해 줘서 정말 고맙소." 그는 이상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총은 거두었다. 제20장. 여자와 남자 나는 고속도로를 1 킬로미터쯤 내려갔다가 차를 돌려 되돌아와서는, '코너 하우스'와 대각선상에서 마주보는 건너편 교차로에 차를 세웠다. 보안관 서리의 차는 여전히 주차장에 있었다. 안개는 걷히고 있었다. 물에 풀려가는 우유처럼 하늘 속으로 녹아들며 바다로 흩어져 날아갔다. 멀리 펼쳐진 수평선은 단지 내게 랠프 샘프슨이 그보다 더 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상기시켰을 따름이다. 산속 오두막에서 굶어 죽어가거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거나, 아니면 에디처럼 머리에 구멍이 뚫려서--- 그는 어느 곳에든 있을 수 있었다. 양쪽 방향에서 달려온 차들이 그 식당 앞을 지나 제가끔 집으로, 혹은 보다 밝은 곳을 향하여 달려갔다. 백미러를 통해 보니 내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다. 에디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옮겨받기나 한 듯이 눈 밑에는 깊은 주름이 패이고,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트럭 한 대가 남쪽에서 올라오더니 천천히 내 곁을 지나 '코너 하우스'의 주차장으로 굴러 들어갔다. 푸른색 유개 트럭이었다. 한 사내가 차에서 뛰어내려 급한 걸음으로 아스팔트를 건넜다. 땅을 스치듯 하는 그 걸음걸이는 내 귀에 익은 것이었고, 입구의 불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도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성미 고약한 조각가가 돌을 깎아만든 뒤, 그것을 또 다른 돌로 뭉개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검은 경찰차를 보자 그는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푸른 트럭으로 뛰어 돌아갔다. 트럭은 기어 소리를 울리며 뒷걸음질치더니 방향을 바꾸어 화이트 비치로 통하는 길을 내려갔다. 그 후미등이 점점 작아져 한 점의 붉은 섬광처럼 보였을 때 나는 그 뒤를 쫓았다. 길은 포장도로에서 자갈길로 변하더니 끝내는 모래사장이 되었다. 나는 3 킬로미터 가량을 트럭이 날리는 먼지를 마셨다. 양측이 절벽으로 막힌 해변으로 접어들자 길은 또 하나의 길과 교차했다. 트럭의 불빛은 좌회전을 하더니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불빛이 언덕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그 뒤를 쫓았다. 길은 언덕 측면을 깎아 만든 일방 통행로였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니 오른쪽 저 아래로 태평양의 파도가 보였다. 달은 바다로 흘러나가는 구름 떼 속에서 여행하고 있었다. 그 빛이 검은 물결 위에서 한 조각 납처럼 투박하게 빛났다. 언덕을 넘어서자 길은 평탄해져서 곧장 앞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불을 끄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트럭을 스쳐지났다. 트럭은 불을 끈 채 길에서 50 미터 떨어진 지점에 서 있었다. 나는 그대로 진행했다. 2분의 1 킬로미터쯤 더 간 언덕 기슭에서 길이 갑작스럽게 끝났다. 오른쪽 바다 쪽으로 한줄기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나 있었지만, 그 입구는 통나무 문으로 막혀 있었다. 나는 막다른 그 길에서 차를 돌려세우고 걸어서 언덕을 되올라갔다. 하늘을 향해 들쭉날쭉 뻗어오른 유칼리나무 숲이 트럭이 서 있는 오솔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길을 벗어나 나무숲 뒤로 몸을 숨기며 계속 나아갔다. 군데군데 솟아난 잡초 덤불로 땅은 고르지 않았다. 발이 걸려 넘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득 눈앞이 확 트이며, 나는 하마터면 낭떠러지 밖까지 걸어나갈 뻔했다. 발 밑 아득한 곳에서 하얀 파도가 해변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바닷물은 다이빙을 해도 괜찮으리만큼 깊숙히 밀려 들어와 있었지만, 금속판처럼 단단해 보였다. 발 밑 오른쪽에 사각형의 흰 불빛이 보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도록 풀잎을 붙잡아가며 엉금엉금 기고 미끄러지며 언덕 허리를 내려갔다. 불빛에 둘러싸인 작은 건물 한 채가 윤곽을 드러냈다. 두 절벽이 만나는 곳에 하얗게 칠한 오두막집 하나가 있었다. 창에는 차일이 쳐 있지 않아서 단칸방 구석구석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총집에 권총이 제대로 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포복하여 창가로 접근했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샘프슨은 아니었다. 퍼들러는 뭉개진 옆얼굴을 내게로 향한 채 한 손에 맥주병을 움켜쥐고 술통 모양의 안락의자에 엉덩이를 박고 있었다. 그는 벽에 붙여진 부서진 침대 겸용의 소파에 앉은 여자와 마주보고 있었다. 회칠을 하지 않은 천정의 서까래에서 늘어진 휘발유 램프가 그녀의 얼굴과 가닥가닥 늘어진 금발에 투박하도록 흰 빛을 던지고 있었다. 넓고 벌름거리는 콧구멍과 바싹 마른 입이 달린, 앙상하고 생활고에 지친 얼굴이었다. 오직 두 개의 차가운 갈색 눈만이 그 속에서 생기를 띠고, 움푹 꺼진 눈자위 속에서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방은 크지 않았는데도 지독히 황량해 보였다. 소나무를 깔아 만든 바닥은 양탄자도 없이 우둘두툴하고 더러웠다. 램프 바로 아래에 지저분한 접시들이 쌓인 나무탁자가 서 있었다. 그 저편 안쪽 벽에는 두 개의 버너가 달린 석유 난로와 축 늘어진 냉장고, 얼룩덜룩 녹이 슨 싱크대가 붙어 있었다. 싱크대 밑에는 양동이 하나가 놓여 있어서, 그것으로 찔끔찔끔 새는 물을 받고 있었다. 방안이 워낙 조용하고, 판자벽 또한 원체 얇아서 램프의 끊임없는 탄식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윽고 퍼들러가 입을 열자 그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난 여기서 밤새 기다릴 순 없단 말이야, 안 그래? 설마 날 여기서 밤새 기다리게 할 셈은 아니겠지? 난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한다고. 게다가, '코너 하우스' 앞에 죽치고 있는 그놈의 경찰차가 영 맘에 안 들어." "그 얘긴 아까도 하지 않았수. 그 찬 별거 아니라고요."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다시 말하는 거야. 난? 벌써 '피아노' 술집으로 돌아가 있어야 했다고. 당신도 알잖아. 에디가 안 보인다고 트로이 씨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니까." "내버려둬요. 졸기라도 한들 그게 대순가." 여자의 음성은 그 얼굴처럼 날카롭고 메말랐다. "에디가 일하는 방식이 맘에 안 들면 쫓아내면 될 것 아뇨?" "당신은 어느 모로 보나 그런 말을 할 입장이 못돼." 퍼들러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에디가 감옥에서 나와 일자리를 얻으려고 돌아다녔을 땐 당신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그 친구가 감옥에서 나와 일자리를 찾아헤맬 때 마침 트로이 씨가 일자리를--- " "기가 막혀서! 한 말은 제발 안할 수 없수? 얼간이같이." 흉터진 그의 얼굴이 감정을 다친 놀라움에 일그러졌다. 목을 움츠리자 두터운 목덜미에 거북 목처럼 주름이 패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야, 마시." "입 닥치고 에디나 감옥 얘길랑은 주절거리지 말아요." 그녀의 음성이 가느다란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당신 대체 진짜 감옥맛을 몇 번이나 봤길래 그러는 거야, 얼간이 같으니." 그의 대답은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이었다. "이봐, 날 끌어들이진 말라고." "좋아요, 그렇담 에디도 끌어들이지 말아야지." "그런데 도대체 에디는 어디 있는 거야?" "어디 있는진 나도 몰라요. 이유도 모르고. 하지만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을 거야." "나중에 트로이 씨에게 말씀드릴 때 그 이유가 그럴 듯했으면 좋겠구먼." "트로이 씨, 트로이 씨라니. 그 작자가 당신을 홀린 모양이구려? 에디는 아마 그놈의 트로이 씨에겐 얘기조차 안 꺼낼걸." 그의 작은 눈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에서 그 말의 뜻을 읽으려고 애썼으나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들어봐, 마시."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가 말했다. "당신이 트럭을 몰 수도 있어." "말하는 것 좀 봐! 그 따위 일은 난 조금도 하고 싶지 않다고요." "그렇게 되면 내겐 참 좋아. 에디에게도 좋고. 당신은 에디가 사창가에서 빼낸 뒤론 점점 멋쟁이가 돼가고--- " "입 닥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어!"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가 겁쟁이라서 골치야. 순찰차만 보고도 오줌을 싸는 판이니, 야단맞는 게 겁나서 여자를 앞세우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지. 쌔고쌘 뚜쟁이놈들하고 뭐가 달라."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술병을 휘둘렀다. "보라고, 날 끌어들이지 말라니까. 난 누구도 앞세우지 않는다고. 이봐, 사내새끼였다면 낯짝을 뭉개버렸을 거야." 맥주거품이 넘쳐흘러 그의 무릎과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지극히 쌀쌀맞게 대꾸했다. "에디 앞에선 그런 말 하지 않는 게 좋을걸. 당신을 열 토막은 낼 테니까. 잘 아실 테지." "그 원숭이새끼 같은 놈!" "그래, 원숭이새끼다! 앉아, 퍼들러. 당신이 기찬 싸움꾼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니까. 맥주 한 병 더 줄께."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가로질러 갔다. 굶주린 고양이처럼 가볍고도 사나운 기세로. 그녀는 싱크대 옆에 박힌 못에 걸린 타월을 끌어내려, 맥주 얼룩이 진 가운을 가볍게 문질렀다. "트럭은 오는 거지?" 퍼들러가 기대에 차서 말했다. "나도 당신처럼 뭣이든 두 번씩 말해야 돼? 트럭 같은 건 몰지 않아. 그렇게도 겁나면 딴치들을 시키면 되잖아." "아니, 그건 안돼. 길을 모르는데. 뒤집어엎기 십상이지." "그렇담 시간낭비만 하고 있군, 안 그래?" "응, 그런 것 같군." 그는 방바닥과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던지며 머뭇머뭇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가기 전에 한번 놀면 어떨까? 잠깐 즐기자고. 에디 녀석도 보나마나 누군가와 이불 속에 있을걸. 난 돈깨나 있는 몸이라고." 그녀는 식탁에서 반달처럼 날이 휜 식칼을 집어들었다. "그거 갖고 꺼지시지, 퍼들러. 아니면, 이걸로 사랑해 줄 테니까." "이러지 마, 마시. 좀 친해 보자고." 그는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발작을 억누르려고 침을 꿀꺽 삼켰지만, 튀어나온 음성은 비명에 가까웠다. "꺼져!" 눈부신 불빛 속에서 식칼이 춤을 추며 그의 목을 향해 움직여 갔다. "알았어, 마시.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실연당한 사내가 으레 그렇듯 상처받아 맥빠진 얼굴을 하고 몸을 돌렸다. 나는 창가를 떠나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처 꼭대기에 이르기 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언덕길에 사각형의 빛이 뿌려졌다. 나는 기어가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코앞 마른 풀 위에 내 머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윽고 문이 닫히며 어둠이 내 몸을 덮었다. 집 뒤, 어둠의 바닷속에서 퍼들러의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그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언덕을 올라, 유칼리나무 숲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그와 마시라는 금발 여자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나는 퍼들러를 택했다. 마시는 기다릴 터였다. 그녀는 에디 뭐라는 작자가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다. 제21장. 구름 속의 사원 부에나비스타 북쪽 몇 킬로미터 지점에서 푸른 트럭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돌았다. 나는 차를 세우고 트럭이 충분히 앞설 때까지 기다렸다. 교차로의 표지판에는 '앞길이 험하니 경계하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다시 추적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안개등으로 불을 바꿨다. 안개는 어언 바다로 날아가고 없었지만, 퍼들러로 하여금 가는 길 내내 똑같은 불빛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행로는 100 킬로미터가 훨씬 넘었다. 산속을 누비는 난폭한 운전의 두 시간이었다. 귀가 울릴 정도로 높은 산등성이를 따라 8 킬로미터 정도 직선 코스를 달리기도 했는데, 낮에 올랐던 그 어느 길 못지 않게 험했다. 시커먼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달린 적도 두 번이나 있었는데, 매 커브마다 아래 저멀리 영원한 암흑이 도사리고 있었다. 트럭은 마치 안전한 노선을 달리기라도 하듯 최대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트럭을 시야에서 내보낸 뒤에 헤드라이트를 다시 켜고, 다른 차를 운전하는 새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려고 애썼다. 어느덧 우리는 미란다와 내가 오후에 건넜던 협곡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협곡 안의 똑바른 길에 이르자 나는 차의 불을 모조리 끄고 달빛과 기억에만 의지하며 차를 몰았다. 트럭이 가는 곳을 알 것도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거기라야 했다. 협곡을 지나자 트럭은 '구름 속의 사원'으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타고 산속으로 기어 올라갔다. 나는 그 뒤를 쫓기 위해서 다시 헤드라이트를 켜야 했다. 클로드의 우편함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그 옆의 나무문은 닫혀 있었다. 트럭은 훨씬 위를 달리고 있었다. 산을 기어오르는 반딧불 같았다. 그보다 더 높은 곳엔 톱니 모양의 검은 지평선 위에 별이 뿌려진 맑게 갠 하늘이 있었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달이 별들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밤의 장막에 뚫린 동그랗고 하얀 구멍 같았다. 나는 어느덧 기다리는 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길을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사람을 뒤쫓는 일에 진력이 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곳에는 퍼들러와 클로드 단 두 사람밖엔 없었다. 내게는 총이 있었고, 또 불의의 습격이라는 이점이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차를 몰아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산꼭대기에 있는 암층 대지의 가장자리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리막길에 들어 그 사원으로 향했다. 사원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하얀 건물의 상공에서 희미하게나마 빛나고 있었다. 철사로 엮은 정문은 열려 있었다. 트럭은 그 안에 서 있었다. 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정문 옆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트럭 안에는 웅크리고 있는 어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양쪽에는 누런 삼베를 낀 나무 벤치가 하나씩 있었다. 땀을 흘리고서 옷을 입은 채 땀을 말리는 사내들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 가장자리에 쇠로 테두리를 한 사원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달빛이 그려놓은 로마 시대 원로원 의원 같은 모습을 한 클로드가 나왔다. 그의 샌들이 자갈길을 울렸다. "누구요?"하고 그가 물었다. "아처요. 기억하시겠소?" 나는 트럭 뒤에서 나와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그 불빛이 내 손에 쥐어진 권총 위에서 빛났다. "여기서 무얼 하는 거요?" 수염은 떨리고 있었으나 그의 음성은 차분했다. "여전히 샘프슨을 찾고 있소."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문 쪽으로 물러났다. "여기 없다는 걸 알잖소? 한번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거요?" "헛소리 작작해요, 클로드. 그런 말에 넘어갈 사람이 하나라도 있겠소?" "꼭 그렇다면 들어오구려."하고 그는 말했다. "보아 하니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구먼." 그는 문을 열어 나를 들여보내고, 내가 들어가자 문을 닫았다. 내원(內院) 복판에 퍼들러가 서 있었다. "저리 가서 퍼들러와 서 있으시지."하고 나는 클로드에게 말했다. 그러나 퍼들러가 발을 질질 끌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의 발치에 한 발 쏘았다. 총알은 그의 발 앞 돌바닥에 흰 상처를 내고는 내원 저편의 벽돌담에 부딪치며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퍼들러는 우뚝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클로드가 시원치 않게 내 손에서 총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나는 팔꿈치로 그의 배를 찔렀다. 그는 허리를 꺾으며 돌바닥에 나자빠졌다. "이리 오시지."하고 나는 퍼들러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 그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클로드가 배를 끌어안고 일어나 앉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 사투리로 목청껏 부르짖었다. 그 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내원 저편의 한쪽 문이 열리며, 열댓 명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체구가 작고 갈색 피부를 가진 그들은 잽싸게 내게 달려들었다. 허연 이빨들이 달빛 속에서 번쩍였다. 그들은 말없이 다가왔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총을 쏠 수가 없었다. 갈색 피부의 사내들은 뻔히 총을 보면서도 개의치 않고 다가왔다. 나는 권총을 거꾸로 쥐고 기다렸다. 먼저 달려든 두 사내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벌떼처럼 나를 덮쳐 내 팔에 매달리고, 밑에서 내 다리를 찼다. 드디어 나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은 마치 이승의 어둑한 산기슭 아래로 사라져 가는 자동차의 후미등처럼 내게서 빠져나갔다. 나는 대항을 했다. 양팔은 비틀어 올려졌고 입은 돌바닥과 키스를 했다. 얼마 뒤에 나는 내가 엉망이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두 팔은 뒤로 돌려 묶여졌고, 두 발 역시 구부려 돌려져 허리에 묶여 있었다. 몸을 약간 흔들어 한쪽 머리로 돌바닥을 짓찧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이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고함을 치려고 했다. 내 머리가 북에 씌운 생가죽처럼 진동했다. 그 윙윙거림 때문에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함치는 것도 포기했다. 머리는 계속 윙윙거림이 점점 심해져서 급기야는 소리 없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진짜 고통이 시작되어, 마치 부두 노동자들이 돌아가며 말뚝을 박듯이 단속적인 리듬으로 관자놀이를 치고 있었다. 차라리 누군가가 집적거리는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가 비록 클로드일지라도. "신의 진노하심은 준엄하도다." 등뒤 머리 위에서 그가 말했다. "신전을 모독한 자 어찌 벌을 면할 수 있으리오." "수다는 그만 떨지."하고 나는 돌바닥에 대고 말했다. "이젠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 납치죄의 벌을 받게 될 거야." "죄를 덮어씌우지 마시오, 아처 씨." 그는 혀를 입천정에 대고 '꼬꼬댁' 하고 우는 암탉과 같은 소리를 냈다. 억지로 목을 틀어 바라보니까 샌들에 얹힌 옹이투성이의 발이 내 머리 가까이에 있었다. "당신은 상황을 오해하고 있소." 옷치레를 하듯 어휘치레를 하면서 그는 말했다. "그대는 무장을 하고 우리들의 은신처에 침입, 본인을 공격하고, 본인의 친구 및 제자들을 공격했으며...." 나는 침울하게 애써 코웃음칠 수 있었다. "퍼들러도 제잔가? 기차게 종교적인 타입이지." "귀담아 들으시오, 아처 씨. 우리는 정당방위차, 완전한 정당성에 입각하여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소. 당신 목숨은 여전히 우리가 장악하고 있소." "굴뚝으로 기어 올라가서 연기를 타고 꺼져 버리는 게 어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구먼...." "당신이 냄새나는 늙은 사기꾼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지." 보다 그럴 듯한 욕을 생각하려 했지만, 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그는 발꿈치로 콩팥 바로 위의 옆구리를 짓밟았다. 내 입이 벌어지고 이빨이 돌바닥을 갈았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신중히 생각하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불빛이 사라지며 문이 쾅 닫혔다. 머리와 몸의 통증이 별빛처럼 고동쳤다. 별빛이 아득히 작은가 싶으면, 다음 순간 크고 가까워졌다가 또다시 점점 작아져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천공기(穿孔機)의 핑핑 도는 첨단(尖端)과도 같았다. 의식의 문턱에 선 내 마음에 문지방 저편의 갖가지 영상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어느 거리에서 본 것보다도 더욱 험상궂은 얼굴들, 어떤 도시에서 마주친 것보다도 훨씬 더 사악한 거리들이었다. 나는 시내 중심부의 텅 빈 광장에 와 있었다. 덜컹거리는 유리창 저편, 화장한 얼굴 밑에 병색이 짙은 늙은 창녀와 같은 죽음이 슬그머니 도사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것은 다른 얼굴로 변하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란다의 햇볕에 그을린 젊은 얼굴에서 잿빛 머리카락이 솟아나오고, 클로드의 입에서 사라진 미소가 페이의 미소로 변하고, 페이의 얼굴은 커다란 눈만 남기고 오므라들어 죽은 필리핀 인의 머리가 되고, 그것이 순식간에 시들더니 트로이의 흰 머리로 바뀌었다. 에디의 부릅뜬 검은 눈과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일그러진 미소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갖고 있어서,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멕시코 인의 얼굴들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두 손은 뒤로 돌려져 밧줄로 묶이고 두 발뒤꿈치는 엉덩이에 바짝 붙여진 채, 나는 몸을 굴려 문지방을 넘어 불편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꺼풀에 비치는 불빛이 나를 다시 밀폐된 붉은 세계로 데려왔다.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는 트로이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당신은 위험한 실수를 범했어, 클로드. 내가 이 친구를 알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그런데 이 친구가 먼젓번에도 찾아왔었다는 걸 어째서 내게는 알리지 않았느냔 말이야?" "난 그게 그렇게 중대한 일인 줄 몰랐소. 녀석은 샘프슨만 찾았거든요. 샘프슨의 딸도 함께 왔었고요."하고 클로드가 처음으로 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낭랑하고 유창한 음향은 간데없이, 한껏 옥타브를 올린 음성이었다.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 "중대한 일인 줄 몰랐다고, 응? 그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내 가르쳐 주지. 바로 네 녀석의 이용가치는 끝났다는 뜻이야! 정부인지 뭔지 그 까무잡잡한 계집앨 데리고 꺼지라고." "여긴 내 집이오! 여기서 살아도 좋다고 샘프슨이 말했소. 당신이 날더러 나가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이미 말했잖아, 클로드. 당신은 자신이 맡은 노선을 망쳐놨어. 즉, 당신 역할은 끝났다는 얘기야. 아니, 만사가 끝장난 건지도 모르지. 우리는 이 사원에서 철수해야 될 테고, 당신을 그냥 남겨놓았다간 경찰에 밀고하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난 어디로 갑니까?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엉터리 교회를 또 하나 차리면 되잖아. 가워 협곡으로 돌아가! 네 녀석이 무얼 하든 내 상관할 바 아니니까." "이러시면 페이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난 페이와 의논할 생각은 없어. 자, 이젠 그만 떠들라고. 아니면 퍼들러에게 넘겨서 넋두리를 들어주라고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아직 당신에게 시킬 일이 있으니까." "뭔데요, 그게?" 클로드는 성의를 보이려고 애쓰며 물었다. "트럭에 실려 있는 짐을 끝까지 탈없이 운반하는 거야. 그거조차 잘 해낼지 의문이지만, 모험하는 수밖에 없지. 어떻든 모험은 당신이 하는 거니까. 남동문(南東門)에 가면 농장의 십장이 나와서 짐을 받아 안전하게 처리할 거야. 남동문이 어디 있는지는 아나?" "예, 고속도로 벗어나서 바로죠." "좋았어. 짐을 내리고 나면 트럭을 베이커스필드로 도로 몰고 가서 내버리는 거야. 그걸 팔려고 해서는 안돼. 아무 주차장에나 내동댕이쳐놓고 꺼지라고. 어때, 믿어도 되겠지?" "그럼요, 트로이 씨. 하지만 내겐 돈이 한푼도 없는데요." "자, 100달러 주지." "겨우 100달러?" "그거나마 얻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당장 출발해. 퍼들러에겐 식사가 끝나는 대로 내가 보잔다고 전해." "트로이 씨, 설마 그자를 시켜 날 때리려는 건 아니겠죠?" "병신 같은 소리 작작해. 그 녀석이 당신의 더러운 대갈통의 머리카락 한 오라기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까." 클로드의 샌들이 땅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이번에는 불빛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가 내 손목을 죄고 있는 밧줄을 끌어당겼다. 양손과 팔뚝은 거의 마비 상태였지만, 그 힘을 어깨로 느낄 수 있었다. "놔둬!" 모처럼 입을 열자 턱이 제멋대로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멈추기 위해선 이를 악물어야 했다. "금방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꼭 시장에 내갈 암탉처럼 동여놨구먼, 안 그런가?" 나이프로 밧줄을 슬근슬근 끊는 소리가 들렸다. 팔다리의 긴장이 풀렸다. 풀려진 팔다리는 장작개비처럼 바닥으로 탁 하고 떨어졌다. 목덜미에 소름이 쫙 끼치며 전신을 뒤흔들었다. "일어나시지, 친구." "이대로가 편한걸." 천천히 번져오르는 불길처럼 팔다리 신경에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을 해서는 안돼, 아처. 경고삼아 부하들 얘기를 했었잖아. 그 애들이 당신을 다소 거칠게 대접했다 하더라도, 다 당신이 자초한 게 아닌가, 응? 그리고 이런 말은 어떨지 모르지만, 당신은 보험가입 권유를 꽤나 유난스러운 방식으로 하는구먼. 꼭두새벽, 산꼭대기에서 권총을 들고 말씀이야.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오래 살 사람들한테 말이지."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팔을 움직여 보고 발을 모아서 차보았다. 한 가닥 뜨겁고 거친 피가 밧줄처럼 팔다리에 돌았다. 트로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빨리 두 걸음 물러섰다. "내 손에 든 권총이 당신 뒤통수를 겨누고 있어, 아처. 그렇지만 몸이 풀렸으면 천천히 일어나도 괜찮아." 나는 팔다리를 아래로 끌어모아 돌바닥에서 힘껏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이 빙빙 돌고 비틀거리더니 이윽고 멈춰섰다. 내원 안쪽에 있는 썰렁한 작은 방 중의 하나였다. 한쪽 벽에 붙여진 벤치 위에 전기 스탠드가 서 있었다. 그 곁에 여전히 산뜻한 몸차림으로 니켈을 입힌 그 권총을 든 트로이가 있었다. "엊저녁 난 당신을 선의로 해석했는데."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이 오히려 날 실망시키는구먼." "나는 맡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오." "내 일에 저촉이 되는 것 같구먼." 그는 자기 말에 종지부를 찍기라도 하듯이 손 안에서 권총을 한 바퀴 돌렸다. "당신 일은 정확히 어떤 것이지, 형씨?" "샘프슨을 찾고 있소." "샘프슨이 없어졌나?" 나는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이봐, 트로이, 알면서도 묻는 건 질색이오. 이미 저지른 납치행위에 하나 더 덧붙여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걸 모르오? 날 내보내는 게 이로울 거요." "이봐, 친구, 나와 거래를 하자는 건가?당신, 거래 솜씨가 좀 서툴구먼, 안 그래?" "난 혼자 뛰고 있는 게 아니오." 나는 말했다. "오늘밤엔 '피아노'에 경찰이 가 있어. 페이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지. 미란다 샘프슨이 오늘 그들을 이리로 데려올 거요.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하든 당신 장사는 끝장이야. 쏘라고, 그 즉시 당신은 끝장이니까." "아마도 당신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는 조심스레 미소지었다. "오늘밤 수입의 배당은 고려해 보지 않았을 테지?" "그럴까?" 나는 상대의 손아귀에 든 권총에 대처할 수단을 짜내려고 애썼다. 정신이 다소 희미했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내 입장이 돼봐."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어쩌다가 풋내기 사립탐정이 사업에 뛰어들었단 말씀이야.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두 번씩이나 말이지. 내가 빙긋 웃고 참아주지. 달가울 건 없지만, 참는 거야. 난 당신을 죽이는 대신, 오늘밤 수입의 3분의 1을 양보하지. 700달러야, 아처." "오늘밤 수입의 3분의 1이라면 3만 3천 달러지." "뭐라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더러 대신 말하라는 거요?" 그는 이내 냉정을 회복했다. "당신은 3만 3천달러라고 말했어. 과장을 해도 유분수지...." "10만 달러의 3분의 1은 33,333달러 33센트야." "대관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그의 음성은 초조하고 거칠었다. 나는 그 모든 긴장이 권총으로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잊어버리쇼."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 돈엔 손대지 않을 테니." "그래도 나는 이해가 안 가."하고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네,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곤란해. 내가 펄쩍 뛰게 되거든. 손도 떨리게 되고." 해설이라도 하듯 권총이 움직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오, 트로이?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라고, 그리고...." "신문을 보면 알아." "빨리 말하라고 했어." 그는 총을 들어올려 총구멍을 정통으로 내 눈앞에 갖다댔다. "말해, 샘프슨과 10만 달러 얘기." "뭣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당신 사업 얘기를 해야 되지?당신은 이틀 전에 샘프슨을 납치했잖소?" "계속해." "어젯밤 당신이 보낸 운전사가 10만 달러를 거둬갔어. 이만하면 충분하오?" "퍼들러가 했나?" 그의 무표정은 이제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새로운 표정이 그의 얼굴을 지배했다. 냉혹하고 진지한 살인마의 표정이었다. 그는 내게서 총을 떼지 않고 문께로 가서 문을 열었다. "퍼들러!" 높고 갈라진 음성이었다. "다른 운전사야."하고 나는 말했다. "에디지." "아처, 자네, 거짓말을 하고 있지?" "좋도록. 경찰이 와서 직접 얘기할 때를 기다리시지. 지금쯤은 에디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지 알았을 테니까." "에디에겐 그만한 머리가 없어." "희생타로서는 우수한 머리지." "무슨 뜻이야?" "에디는 시체안치소에 있어." "누가 그를 죽였지? 경찰인가?" "당신일지도 모르지." 나는 천천히 말했다. "풋내기에겐 10만 달러면 큰 돈이니까." 그는 흘려넘겼다. "돈은 어찌 됐나?" "누군가가 에디를 쏘고 가져갔어. 크림색 컨버터블을 탄 자야." 나중 말이 정통을 찔렀는지, 순간 그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나는 오른쪽으로 뛰며 왼손바닥으로 그의 총을 후려쳤다. 총은 발사되지 않은 채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열려진 문께로 미끄러져 갔다. 한 발 앞서 퍼들러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총을 집었다. 나는 물러섰다.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줄까요, 트로이 씨?" 트로이는 얻어맞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그 손이 스탠드의 둥그런 불빛 속에서 하얀 나방처럼 파닥거렸다. "지금은 아냐."하고 그는 말했다. "우선 여기부터 정리해야 돼. 또 골칫거리를 남기고 떠나고 싶진 않으니까. 녀석을 링컨의 선창으로 끌고 가도록. 녀석의 차를 써.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녀석을 거기 잡아둬. 내 말 알겠나?" "알겠습니다, 트로이 씨. 어디로 가실 건데요?" "확실히 모르겠어. 베티는 오늘밤 '피아노'에 있었나?" "내가 떠나올 땐 없었는데요." "어디 사는지 아나?" "아뇨. 2주일 전에 이사했거든요. 누군가가 어딘가의 오두막을 빌려주었다더군요. 나도 어딘지는 모릅니다만-- " "아직도 그 차를 몰고 있나?" "컨버터블요? 예, 어젯밤엔 그걸 몰랐어요." "알았어."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난 아직도 멍텅구리와 건달들에게 둘러싸여 있군 그래. 녀석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는 못 사는 모양이지, 안 그래? 이젠 우리가 녀석들에게 말썽을 부려줄 차례야, 퍼들러." "알겠습니다." "나가."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제22장. 혈 투 그들은 나를 끌어내어 내 차로 데려갔다. 트로이의 뷔크가 그 곁에 서 있었다. 트럭은 가고 없었다. 클로드와 갈색의 사내들이 떠난 것이다. 달은 이제 거의 지려 하고 있었지만 밤은 아직도 캄캄했다. 벽돌집 옆의 창고에서 퍼들러가 밧줄 한 다발을 꺼내왔다. "손을 뒤로 돌려."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나는 그대로 팔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있었다. "손을 뒤로 돌리라니까." "지금까지는 내 일만 해왔지만...."하고 내가 말했다. "이 이상 나를 더 건드렸다간 큰코 다칠 줄 알아." "주둥아리로는 잘 싸우는군."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퍼들러, 이 친구 주둥아릴 막아." 나는 퍼들러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주먹이 내 목덜미에 떨어졌다. 박살난 유리창처럼 고통이 전신을 꿰뚫고, 또다시 어둠이 묵직하게 나를 덮쳤다. 이윽고 나는 길거리에 나와 있었다. 길은 폭주하는 차량으로 혼잡했다. 나는 모든 차의 소유자들을 조사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각 사람의 연령, 직업, 취미, 종교, 은행예금고, 성적(性的) 경향, 정치관, 범죄사실 여부, 즐겨 가는 식당 등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들은 마치 의자 빼앗기놀이라도 하듯 수시로 차를 바꿨다. 차들의 번호와 색깔이 자꾸 변했다. 내 펜은 잉크가 떨어졌다. 푸른 트럭이 나를 태우더니 검은 장의차로 변했다. 에디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가 차를 몰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는 한 사내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계획이 반쯤 세워졌을 때 나는 정신이 들었다. 나는 내 차의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쑤셔박혀 있었다. 바닥이 끊임없이 진동했고, 그에 따라 머리의 윙윙거림도 계속되었다. 양손은 다시 뒤로 묶여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퍼들러의 널찍한 등판이 헤드라이트에 반사되어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일어날 수가 없었으니, 그를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밧줄에서 손을 빼내려고 손목의 피부가 벗겨지고 옷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뒤틀고 당겼다. 밧줄이 나보다 잘 견뎌냈다. 나는 이 계획을 단념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나는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길을 지난 뒤에 우리는 산에서 빠져나와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그는 장대 끝에 쳐놓은 방수포(防水布) 아래에 차를 세웠다. 엔진이 꺼지자 이내 저 아래에서 백사장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 윗도리 칼라를 잡고 나를 끌어내어 일으켜 세웠다. 그가 내 차의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는 것이 눈에 뛰었다. "다시는 떠들지 마."하고 그가 말했다. "한 번 더 주먹 맛을 보지 않으려거든 말이야." "배짱이 대단하군 그래." 라고 나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한 편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 뒤에서 상대를 치려면 보통 배짱으로 안되지." "입 닥쳐." 그는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고는 훑어내렸다. 망아지 냄새 같은 역한 땀내가 풍겼다. "보통 배짱이 아니야."하고 나는 말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사람을 닦아세우다니." "닥치지 못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말문을 닫게 만들겠어." "그러면 트로이 님께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 "닥치라니까. 자, 걸어." 그는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더니 방수포 아래에서 밀어냈다. 나는 물속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세운 기다란 선창의 해변 쪽 끄트머리께에 있었다. 등뒤 수평선에 유정탑(油井塔)들이 있었으나 불빛은 없었다. 바다와 선창끝에 있는 기름 펌프의 작동 외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앞서고 퍼들러가 뒤따르며 우리는 한 줄로 서서 그곳을 향해 걸었다. 선창 바닥에 댄 널빤지들은 하나같이 뒤틀리고 금이 가 있었다. 검은 물결이 그 틈바귀에서 번쩍였다. 해변에서 100 미터쯤 걸어나오자 선창 끝에 설치된 펌프가 기계로 작동되는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 곁에 연장을 넣어두는 창고가 하나 있을 뿐, 저 너머 태평양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퍼들러는 창고의 자물쇠를 열고 못에 걸린 램프를 벗겨내려서 불을 붙였다. "앉아, 등신아." 그는 램프를 들어 벽에 붙어선 육중한 벤치를 비췄다. 벤치한 끝에 바이스가 붙어 있었고, 그 주위에 펜치와 각종 렌치, 녹슨 줄칼 등 몇 가지 연장이 널려 있었다. 나는 빈 자리에 걸터앉았다. 퍼들러는 문을 닫고 램프를 드럼통 위에 놓았다. 너울거리는 노란 불빛을 아래에서 받은 그의 얼굴은 거의 인간의 얼굴 같지 않았다. 눈썹이 낮고 턱이 튀어나와 마치 네안데르탈 인처럼 생긴 그 얼굴은 둔중하고 쓸쓸해 보였으며,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한 일로 그를 탓하는 것은 부당한 듯싶었다. 그는 어쩌다가 강철과 콘크리트의 정글에 떨어진 원시인이었으며, 짐을 지우기 위해 훈련된 짐승이요, 싸우는 기계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탓했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행패를 감수하든가, 반격의 수단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넨 지금 좀 별난 입장에 놓여 있군 그래."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못 들었거나, 아니면 대답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문에 몸을 기댔다. 아름드리 나무의 그루터기 같은 사내가 내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펌프의 쿵쿵거리며 삐걱거리는 소리와 그 아래에서 말뚝을 치면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퍼들러에 관해 내가 아는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네는 좀 별난 입장에 놓여 있군 그래."하고 나는 다시 말했다. "입 닥쳐." "내 말은, 간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야. 보통은 정반대 입장에 있잖아, 안 그래? 자넨 감방에 들어앉아 있고 다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지." "입 닥치라고 했어." "이봐, 얼간이, 감옥 구경은 몇 번이나 했지?" "이 새끼가 정말!" 그는 악을 썼다. "그만큼 주의를 줬는데도." 그는 나를 향해 몸을 숙여왔다. "배짱 한번 좋구먼. 양손이 뒤로 묶인 사람을 을러대고." 그의 손바닥이 번쩍이자 얼굴이 얼얼했다. "자넨 겁쟁이라서 골치야."하고 나는 말했다. "마시 말대로야. 자넨 마시에게까지도 겁을 먹고 있어? 안 그래, 퍼들러?" 그는 그 자리에 나를 덮쳐누르듯 서서 눈을 깜빡였다. "이 새끼, 널 죽일 거야. 내게 그따위 소릴 지껄였지. 이 새끼, 널 죽일 거야." 서투른 말주변으로 너무 빨리 지껄이느라 말이 분명치 않게 토막이 되어 튀어나왔다. 그의 입가에 침방울이 일었다. "하지만 트로이 씨가 좋아하지 않을걸. 잊었나? 나를 무사히 지키라고 했잖아? 자넨 날 어쩌지 못해, 퍼들러." "귀싸대기를 날려버릴 테다."하고 그는 말했다. "귀싸대기를 날려버리겠어." "내 손이 자유롭다면 어림도 없지. 불쌍하고 시시한 자식아." "누구더러 시시하다는 거야?" 그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자네지 누구야. 놈팽이 중에서도 하치라고."하고 나는 말했다. "원래부터 그랬지. 아주 저질이야. 상대가 묶여 있을 때를 노려 치기나 하고-- 기껏 할 수 있다는 게 그 정도지." 그는 나를 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칼을 꺼내더니 날을 폈다. 두 개의 작은 눈이 붉게 충혈되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어나." 그는 말했다. "누가 놈팽인지 보여줄 테다." 나는 그에게로 등을 돌렸다. 그는 내 손목을 묶은 줄을 끊고는 칼날을 접어넣었다. 다음 순간 내 몸을 빙그르 돌려 자기를 향하게 하더니 오른손으로 재빠르게 일격을 퍼부었다. 얼굴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나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배를 걷어차자 그는 방안 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그가 되돌아오는 사이에 나는 벤치에서 줄칼을 집어들었다. 끝이 무디었지만 그런대로 쓸 만했다. 나는 그와 맞붙었다. 오른손으로 줄칼의 끝부분을 잡고, 관자놀이에서 관자놀이까지 이마를 일자로 그었다. 그는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날 베다니."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자넨 곧 앞을 못 보게 될 거야, 퍼들러." 산 페드로 부두에 내린 어느 핀란드 선원이 발트 해 일대의 칼잡이들이 상대의 눈을 멀게 하는 수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죽이고 말겠어." 그는 황소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그의 아래에 두고, 줄칼로 여기저기 급소를 골라 쑤셔댔다. 그는 허리를 꺾으며 엎어졌다. 나는 문 쪽으로 뛰었다. 그가 뒤에서 쫓아와 문간에서 나를 잡았다. 우리는 선창 언저리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허공으로 떨어졌다. 나는 물에 빠지기 직전에 재빨리 숨을 들이켰다. 우리는 함께 가라앉았다. 퍼들러는 맹렬히 나를 공격했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나는 그의 허리띠를 움켜잡고 매달렸다. 그는 겁에 질린 동물처럼 후려갈기고 발길질을 했다. 그의 몸속의 공기가 은빛 물거품이 되어 검은 물살을 헤치고 수면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를 잡고 놓지 않았다. 허파가 공기를 갈구하며 오그라들고,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골이 뻐근했다. 퍼들러는 이제 몸부림을 멈추고 말았다. 늦기 전에 수면에 떠오르려면 그를 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 밖에서 한번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를 찾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옷이 걸리적거렸고 구두 때문에 발이 무거웠다. 나는 수압 때문에 귀가 멍해질 때까지 점점 차가워지는 수층(水層)을 뚫고 내려갔다. 퍼들러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 닿지도 않았다. 여섯 번을 그러고 나서 나는 포기했다. 내 자동차 열쇠가 그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 해변으로 헤엄쳐 나왔을 때는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파도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기어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힘을 많이 뺀 탓도 있었지만, 한편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등뒤 차가운 물속에 있을 그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의 고동이 수그러들 때까지 모랫바닥에 누워 있었다. 내가 일어섰을 때는 수평선상의 유정탑들이 밝아오는 하늘 아래에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둑을 기어올라 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헤드라이트를 켰다. 방수포를 떠받치고 있는 장대 중의 하나에 한 가닥 구리 철사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풀어 흙받이 아래에 있는 점화단자(點火端子)의 양극을 붙들어맸다. 단번에 발동이 걸렸다. 제23장. 새로운 혐의자 산타 테레사에 이르렀을 때 태양은 산 위에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 돌과 칼날 같은 풀잎과 나뭇잎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부각시켰다. 협곡 사이의 길에서 보니, 샘프슨 저택은 각설탕으로 만든 장난감 별장 같았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저택을 싸고 있는 크고 묵직한 침묵이 느껴졌다. 그 침묵의 지배권 속에 나는 차를 세웠다. 발동을 끄기 위해서는 점화장치에 비끌어매둔 철사를 풀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펠릭스가 나왔다. "아처 씨 아닙니까?" "뭐 의심스러운 점이라도 있소?" "사고를 당하셨군요?" "보다시피 그렇소. 내 가방 아직 광에 있나요?" 그 속에는 새 옷과 자동차의 예비 열쇠가 들어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얼굴에 타박상이 있는데요, 아처 씨. 의사를 부를까요?" "신경쓰지 마시오. 하지만 샤워를 했으면 좋겠는데 마땅한 곳이 있겠소?" "예, 차고 위에 제 전용 샤워장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샤워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가방을 갖다주었다. 나는 그의 아늑한 욕실에서 샤워와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아담한 독방, 채 자리를 치우지 않은 침대 위에 사지를 뻗고 누워 일이야 될 대로 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주방으로 돌아가니 그는 쟁반 위에 은식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무얼 좀 드시겠습니까?" "베이컨과 달걀을 먹고 싶지만 될 수 있을는지--- " 그는 둥그스름한 머리를 끄덕였다. "이 일만 끝내면 즉시 해드리지요." "그건 누구 식사요?" "예, 샘프슨 양 겁니다." "이렇게 일찍?" "방에서 드시겠답니다." "어디 불편한가?" "예, 모르겠습니다. 거의 주무시지 않으셨으니까요. 자정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오셨답니다." "어디 갔었는데?" "저는 모릅니다. 선생님이 그레이브스 씨와 함께 나가시자 바로 나가셨지요." "직접 운전하고?" "예, 그렇습니다." "차는?" "패커드 컨버터블입니다." "가만 있자, 그거 크림빛이던가?" "아, 아닙니다, 빨갛지요. 진홍색입니다. 나가 계시는 동안 300 킬로미터를 달리셨더군요." "펠릭스, 당신은 가족의 일거일동을 매우 세심하게 지켜보는군?"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가스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나 차를 점검하는 것도 제가 맡은 일 중의 하나랍니다. 이 댁에는 정식 운전사가 없어서요." "그런데 당신은 샘프슨 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지?" "아닙니다, 저는 그분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의 불투명한 검은 눈은 그 자체가 가면이었다. "펠릭스, 일이 고되지는 않소?" "예, 아니올시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사마르에서는 이름이 있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공예과에 들어가려고 미국에 왔다가 이 일을 하게 되었지요. 피부색 때문에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그레이브스 씨의 지론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정원사들 역시 자신들의 문제이니까 반감들을 품고 있지요." "어젯밤 일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닐 거요." 펠릭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브스 씨 지금 여기 있소?" "예, 아니올시다. 보안관 사무실에 계실 겁니다. 예, 전 이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쟁반을 어깨에 얹었다. "전화번호를 아시오? 아, 그리고 말끝마다 꼭 '예'를 붙여야만 하나?" "예, 아닙니다."하고 그는 부드럽게 비꼬는 듯이 말했다. "23665번입니다." 나는 집사의 식료품실에서 그 번호를 돌려 그레이브스를 찾았다. 서리 중의 하나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레이브스요." 그의 목소리는 피곤으로 쉬어 있었다. "아처요." "대관절 어디 있었나?"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샘프슨 소식은?" "아직 없네. 하지만 조금 진전을 보였어. 나는 지금 FBI가 보낸 중대사건 수사반과 함께 뛰고 있네. 죽은 사내의 신원을 워싱턴에 조회했지. 한 시간 전에 회답이 왔는데, FBI 기록에도 전력이 창창하다는군. 이름은 에디 래시터야." "식사가 끝나는 대로 그리 가지요. 지금 샘프슨 댁에 있어요." "안 오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음성을 낮췄다. "간밤에 그냥 내뺐다고 보안관이 벼르고 있어. 내가 그리 가지." 그는 수화기를 걸었다. 나는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프라이팬 속에서 베이컨이 기분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것을 접시에 옮긴 뒤, 스토브 곁에 있는 토스터에 식빵을 찔러넣고 뜨겁게 데워진 기름 위에 달걀을 깨뜨려 놓은 다음, 김이 나는 사이렉스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한 잔 따라 내게 주었다. 나는 주방 식탁에 앉아 그 끓는 커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집안의 모든 전화가 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소?" "아닙니다. 주인용의 전화는 고용인용 전화와는 선이 다르지요. 아처 씨, 달걀을 뒤집어 드릴까요?" "아니, 그대로 먹겠소. 식료품실에 있는 전화와 같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어느 거요?" "세탁물실과 집 위쪽의 손님용 별채에 있는 것이지요. 태거트 씨가 쓰고 계십니다만." 입속에 가득히 음식을 문 채 나는 물었다. "태거트가 지금 거기 있나요?" "예, 모르겠습니다. 간밤에 차를 몰고 나가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가서 확인해 주겠소?" "예, 알겠습니다." 그는 뒷문으로 주방을 나갔다. 1분쯤 지나자 차 한 대가 올라오고, 그레이브스가 들어왔다. 기세가 조금 줄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날쌔게 움직였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지옥에라도 다녀온 것 같은 얼굴이군, 루." "바로 거기서 오는 길이오. 래시터의 기록을 가져왔나요?" "응." 그는 안주머니에서 텔레타이프 통신용지 한 장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나는 빽빽하게 인쇄된 종이를 훑어보았다. 1923년 5월 29일 뉴욕의 소년재판소에 회부, 기소자는 아버지로 내용은 무위도식. 동년 4월 4일 뉴욕의 가톨릭 소년원에 입소. 1925년 8월 5일 출소. 1928년 1월 9일 브루클린 특별재판소, 자전거 절도혐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보호관찰을 받음. 1929년 11월 12일 풀려남. 1923년 5월 17일 도난당한 우편환 소지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검찰에 의해 기각됨. 1936년 10월 5일 자동차 절도혐의로 체포되어 싱싱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 1943년 4월 23일 마약국에 의해 누이동생인 베티 래시터와 함께 체포됨. 코카인 1온스 판매혐의. 동년 5월 2일 선고를 받고 레븐워스 형무소에서 1년 하루 복역. 1944년 8월 3일 제너럴 일렉트릭 사(社)의 봉급수송차 강탈 공범혐의로 체포. 유죄가 인정되어 5∼10년 형을 받고 싱싱에서 복역. 1947년 9월 18일 가출옥 허가를 받고 출감. 동년 12월 약정을 어기고 실종. 이상이 에디의 이력 중 특히 눈에 띄는 것들이었다. 비행소년 시절부터 비명횡사하기까지의 그의 경력이었다. 이제 그는 전혀 존재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펠릭스가 어깨 어림에서 말했다. "태거트 씨는 별채에 계십니다." "일어났소?" "예, 옷을 입고 있습니다." "아침 좀 주지 않겠나?" 라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레이브스는 나를 향했다. "그 안에 뭐 쓸 만한 게 있나?" "딱 한 가지. 하지만 확실치는 않아요. 래시터에게는 마약 소지혐의로 함께 체포된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스앤젤레스에 마약사용 경력이 있는 베티라는 여자가 있죠. 트로이의 바가지 술집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베티 프레일리로 행세하고 있어요." "베티 프레일리라고요!" 펠릭스가 스토브 앞에서 말했다.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하고 그레이브스가 불쾌한 듯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하고 내가 말했다. "베티 프레일리가 어떻다고? 펠릭스, 당신 그 여자를 아시오?" "알지는 못합니다. 몰라요. 하지만 태거트 씨 방에 있는 레코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청소할 때 눈에 띄길래 이름을 봤었지요." "사실인가?"하고 그레이브스가 물었다. "제가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태거트가 뭐라고 하나 좀 들어봐야겠군."하고 그레이브스가 일어섰다. "잠깐 기다려요, 버트." 나는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의 팔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억지로 밀어서는 아무것도 안돼요. 설사 태거트가 그 여자의 레코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여자가 래시터의 누이동생이라는 것조차 확실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친구, 레코드를 모으는 건지도 몰라요." "그분은 레코드를 꽤 많이 모으셨더군요."하고 펠릭스가 말했다. 그레이브스는 완고했다. "그래도 봐야겠어." "지금은 안돼요. 태거트가 정말로 죄가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우둔하게 굴었다가는 샘프슨을 찾을 수 없어요. 태거트가 방을 비울 때를 기다립시다. 그때 내가 레코드를 조사하지요." 내가 팔을 당기자 그레이브스는 순순히 도로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는 손끝으로 눈꺼풀을 슬슬 쓸며 말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사건은 듣도 보도 못했어." "그건 그래요." 그러나 그레이브즈는 사건의 절반밖에 모르고 있었다. "샘프슨 수색망은 수배되었나요?" 그는 눈을 떴다. "어젯밤 10시 이후부터 발동했어. 고속도로 순찰대와 FBI, 그리고 여기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의 전 경찰국과 지역담당 보안관에게 경보를 발했지." "전화를 한 번 더 하는 게 좋겠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이 주(州) 전역에 걸쳐 또 하나의 수색망을 펴는 겁니다. 이번에는 베티 프레일리입니다. 남서부지역 담당을 모조리 끌어들여요." 그는 듬직한 턱을 내밀며 비양거리듯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하는 게 우둔한 짓이라고 생각지 않을까?" "이 경우에는 필요할 거요. 만일 우리가 얼른 베티를 잡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선수를 칠걸. 드와이트 트로이가 그녀를 노리고 있단 말이오." 그는 묘하다는 시선을 내게 던졌다. "루, 자넨 어디서 정보를 얻나?" "몸으로 얻은 거요. 간밤에 트로이 본인과 이야기를 했지요." "그렇다면 녀석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겠군?" "지금은 그렇지. 아마 그 10만 달러를 자기가 차지하려 들거요. 그걸 누가 갖고 있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 "베티 프레일리인가?"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그래요. 검은 머리, 초록빛 눈, 체격은 보통, 160cm 정도,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 십중팔구 마약중독, 말랐지만 탄탄하고, 파충류와 놀아도 좋다는 사람에게는 예쁜 얼굴이지. 에디 래시터 살해혐의로 수배함." 그는 받아쓰다가 후딱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자네 추측 중 하나인가?" "좋도록 생각하세요. 전화를 걸겠어요?" "당장 걸지."하고 그는 방을 질러 식료품실로 가려고 했다. "그 전화는 안돼요, 태거트의 방에 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 얼굴에 한 가닥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네는 우리가 찾는 인물이 태거트라고 확신하는 모양이군." "만일에 그렇다면 당신 마음이 아프실까?" "나는 그렇지 않아." 하며 그는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서재에 있는 전화를 쓰겠네." 제24장. 가난한 미남자의 최후 현관 안쪽 홀에서 기다리고 있자니까 펠릭스가 와서 태거트가 주방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고 알렸다. 펠릭스는 나를 데리고 차고 뒷전을 돌아 드문드문 이어지는 돌계단 길을 올라 언덕으로 갔다. 객사(客舍)가 보이는 곳에 이르자 그는 내 곁을 떠났다. 그것은 하얀 단층집으로, 언덕을 등지고 나무숲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아서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벽과 바닥을 황송목(黃松木)으로 댄 응접실엔 안락의자와 전축, 잡지와 레코드 더미로 뒤덮인 탁자가 놓여 있었다. 서쪽 벽의 커다란 창으로 주택지 전체와 수평선까지 이르는 바다가 보였다. 탁자 위의 잡지들은 '재즈 레코드'와 '다운 비트'였다. 나는 레코드와 악보집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데카, 블루버드, 애슈, 12인치 코모도어, 그리고 블루노트. 귀에 익은 이름도 많았다 - 패츠 월러, 레드 니콜즈, 럭스 루이스, 메어리 루 윌리엄스. 전혀 들어보지 못한 곡목도 있었다 - '무작정 찾아서', '독사의 움직임', '밤의 인생', '데나파스 퍼레이드' 그러나 베티 프레일리는 없었다. 그 전날 바다에 내던져진 검은 원반들이 생각난 것은, 돌아가서 펠릭스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려고 문간에 섰을 때였다. 내가 그것을 본 몇 분 뒤에 태거트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저택으로 되돌아가다가 나는 바닷가로 향했다. 벼랑 끝에 세워진 유리로 덮인 정자에서 한 줄기 기다란 콘크리트 계단이 비스듬히 벼랑을 타고 내려 해변에 이르고 있었다. 맨 아래 층 계참에는 바람막이를 두른 베란다가 딸린 휴게소가 있었다. 나는 그리로 들어갔다. 간막이를 친 탈의실들 중 하나에 고무에 유리판을 끼운 잠수용 마스크가 있었다. 나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고는 마스크를 썼다.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파도를 몰아치며, 물결이 부서지기 전에 그 물마루를 불어 날려 물보라를 뿌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등에 따갑게 비추고 바싹 마른 모래가 발바닥에 따뜻하게 닿았다. 나는 잠시 파도가 미치지 않는 갈색의 젖은 모래 바닥에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푸르게 반짝이고 여인들의 몸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나는 두려웠다. 바다는 차갑고 위험했다. 그 품에는 죽은 자들이 안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헤쳐 들어가며 올렸던 마스크를 내려 덮어쓰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해변에서 50 미터 쯤 떨어진 파도 저편에서 몸을 돌려 누워서는 숨을 깊숙히 들이마셨다. 파도의 오르내림과 한껏 들이킨 산소 때문에 정신이 약간 몽롱했다. 김이 서린 안경을 통해 본 푸른 하늘은 머리 위에서 맴을 도는 것 같았다. 나는 물속에 머리를 박고 물안경을 씻고는, 수면 밑으로 잠수하여 가슴으로 물살을 헤치며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다 밑바닥은 길고 갈색인 갈비뼈 모양의 돌들이 흩어져 있는 새하얀 모래밭이었다. 파도가 약간 모래밭을 휘저어놓기는 했지만 흐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바닥을 따라 40~50 미터 가량 지그재그로 헤치고 나아갔지만, 바위에 붙어 있는 유난히 작은 전복 한 쌍밖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숨을 쉬기 위해 발길로 물을 차고 수면으로 올라갔다. 물안경을 머리 위로 밀어올렸을 때, 벼랑 위에서 한 남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정자 옆 들벚나무 방풍림 뒤로 몸을 숨겼지만, 그전에 이미 나는 그가 태거트임을 알아보았다. 나는 서너 번 심호흡을 하고는 도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올라왔을 때 태거트는 사라지고 없었다. 세 번째의 잠수에서 나는 드디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깨어지지 않은 검은 레코드 판 하나가 바다 밑바닥 모래에 반쯤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레코드 판을 끌어안고 몸을 돌려 누워서 물을 차며 수면으로 올라갔다. 그것을 샤워장으로 가지고 가서 어린애를 다루는 어머니처럼 조심스레 말렸다. 탈의실에서 나오자 태거트가 베란다에 있었다. 그는 철망 문을 등지고 굵은 삼베로 짠 의자에 앉아 있었다. 플란넬 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의 그는 매우 젊고 더욱 까무잡잡해 보였다. 작은 머리통에 붙은 검은 머리는 정성스레 빗겨져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천연덕스럽게 웃었으나,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안녕하시오, 아처 씨. 수영은 즐거웠습니까?" "나쁘지는 않았소. 물이 좀 차긴 했지만." "풀 장을 사용하실 걸 그랬습니다. 언제나 따뜻하니까." "바다가 더 좋소, 무엇을 찾아낼지 모르니까. 나는 이런 걸 얻었소." 그는 생전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레코드를 쳐다보았다. "그게 뭡니까?" "레코드 판. 누군가가 라벨을 떼어내고 바다에 던져버린 모양인데. 왜 그랬는지 몹시 궁금한데." 그는 내게로 성큼 다가섰다. 동작은 컸지만 바닥이 풀밭이라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좀 봅시다." "손대지는 마시오. 깨뜨릴지도 모르니까." "나는 깨뜨리지 않을 거요." 그는 팔을 뻗어 레코드 판을 잡으려 했다. 나는 레코드를 잡아채어 그의 손을 피했다. 그의 손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물러서."하고 나는 말했다. "그걸 내게 주시오, 아처 씨." "그럴 생각은 없어." "강제로라도 빼앗겠소." "그만두시지. 나는 당신을 두 토막낼 수도 있으니까." 그는 멈춰서서 10초쯤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소년 같은 매력이 매우 느릿하게 되살아났다. "한번 농담을 해봤을 뿐인데 뭘. 하지만, 그놈의 레코드 판에 대체 무슨 곡이 실려 있는지 알고 싶군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렇다면 틀어봅시다. 여기 야외전축이 있으니까." 그는 나를 돌아 베란다 중앙에 있는 탁자로 가더니, 천으로 짠 네모꼴 상자를 열었다. "내가 틀겠소."하고 나는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그걸 깨먹을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니." 그는 의자로 돌아가서 다리를 죽 뻗고 앉았다. 나는 전축에 스위치를 넣고 레코드를 회전반 위에 올려놓았다. 태거트는 기대가 크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가 무언가 조짐을 보일 것에, 무언가 서투른 행동으로 나올 것에 대비하며 선 채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 잘생긴 청년은 내가 품은 공포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내가 아는 어떤 유형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레코드는 흠집투성이의 낡은 것이었다. 표면의 직직거리는 소리에 반쯤 잠겨 피아노 독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너 개의 케케묵은 부기우기 곡의 화음들이 되풀이되었다. 이윽고 노련한 솜씨가 그것들을 엮어짜고 틀어누비며 생동감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의 화음들이 중첩되어 방안 가득 선율이 맴돌았다. 그 메아리 속에서 방은 반은 정글이요, 반은 기계였다. 선율은 쫓는 듯이 그곳을 오락가락했다. 거인의 그림자에 쫓겨 인공의 정글 속을 헤매는 듯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 정도는. 만일에 피아노 대신 타악기였더라면 일품이었을 거요." "아니, 바로 그겁니다. 피아노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훌륭한 타악기지요." 연주가 끝났다. 나는 전축을 껐다. "당신은 부기우기 곡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구려. 연주자가 누군지 모르겠소?" "모릅니다. 연주 스타일은 럭스 루이스 같은데." "과연 그럴까? 내게는 여자의 연주처럼 들리는데." 그는 애써 생각을 집중하는 듯이 이마를 크게 찌푸렸다. 자그마한 얼굴 속에 뚫린 눈이 더욱 작았다. "나로서는 저만큼 연주할 수 있는 여자는 알고 있지 못한데요." "나는 한 사람 알고 있지. 그저께 밤 '미치광이 피아노' 술집에서 그녀의 연주를 들었소. 베티 프레일리."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하고 그가 말했다. "그쯤 하시지, 태거트. 이건 그녀가 연주한 거요." "그래요?" "잘 알면서 그래. 당신이 바다에 던졌잖아. 자, 왜 그런 짓을 했지?" "질문은 필요없습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근사한 레코드를 내버리다니.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오." "태거트, 보건대 당신은 꿈을 너무 많이 꾸는 모양이군. 내 생각에 당신은 내내 10만 달러에 관한 꿈을 꾼 것 같아." 그는 의자에서 약간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쭉 뻗은 자세가 뻣뻣하게 굳어 느긋함을 잃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목덜미를 잡아 그를 들어올렸다면, 그의 두 다리는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뻗은 채 공중에 떴으리라. "내가 샘프슨을 납치했다는 말인가요?" "직접 그랬다는 건 아니야. 당신이 그 일을 꾀했다는 것이지.... 베티 프레일리와 그녀의 오빠인 에디 래시터와 함께 말이야." "그런 사람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소. 양쪽 다 말이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앞으로 듣게 될 거야. 하나는 법정에서 만날 테고, 또 한 사람에 관해서도 듣게 될 거야." "아니, 잠깐만."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 말은 비약이 너무 심해 못 알아듣겠군요. 이게 다 내가 그 레코드를 내버렸기 때문인가요?" "그러니까 이것은 당신 레코드로군?" "틀림없소." 그의 목소리는 다소 떨렸으나 솔직함이 엿보였다. "내게 베티 프레일리의 레코드가 몇 장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어젯밤 당신이 경찰에게 '미치광이 피아노'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서는 버렸지요." "당신은 또 다른 사람들의 전화에도 귀를 기울이더군?"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마침 전화를 걸려다 당신 전화를 엿듣게 된 거지요." "베티 프레일리한테 걸 생각이었나?" "그 여자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는 어젯밤에 당신이 그녀에게 전화해서 살인허가를 내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살인이라니?" "에디 래시터 살해 말이야. 그처럼 놀란 체할 필요는 없을 텐데, 태거트." "하지만 난 그 사람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 만큼 알고 있었기에 베티의 레코드를 버린 게 아닌가?" "이름은 들었지만, 그 뿐입니다. 그녀가 '미치광이 피아노'에서 연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경찰이 그 집에 관심을 돌렸다는 말을 듣고는 레코드를 버린 거지요. 그 작자들이 소위 상황증거라는 것에 관해서 얼마나 터무니없게 구는지 당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속였듯이 나를 얼렁뚱땅 속이려 들지 마시지."하고 나는 말했다. "결백한 사람이라면 그 레코드들을 버린다는 건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이 나라 전역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레코드를 가지고 있잖나?" "내 말이 바로 그겁니다. 그 레코드에는 특별히 죄가 될 만한 것이 없지요." "그런데 당신은 있다고 생각한 거야, 태거트. 당신이 정말로 베티 프레일리나 이 사건과 관계가 없었다면, 그것들을 불리한 증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당신은 내 전화를 엿듣기 훨씬 전에 그것들을 바다에 던졌단 말이야--- 즉, 베티라는 이름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언급되기 이전의 일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레코드를 빌미로 삼아 뭔가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럴 생각은 없어.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지목하게 했으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지. 그러니 이제 레코드 얘기는 집어치우고 다른 중요한 일을 논하자고." 나는 베란다를 가로질러 그 맞은편에 있는 버드나무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요?" 그는 여전히 자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듯 지은 미소는 자연스러웠으며, 음성도 맺힌 데가 없었다. 오직 그 몸의 근육만이 말을 듣지 않아,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와 떨리는 다리가 속마음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납치."하고 나는 말했다. "살인 건은 나중으로 미루지. 이주에서는 납치도 살인에 못지 않게 중죄이니까. 이번 납치에 관한 내 견해를 이야기할까? 그런 다음 당신 말을 듣기로 하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당신 말을 들으려고 안달을 하고 있으니까." "유감천만이로군요. 내게는 아무런 의견도 없으니." "나는 있어.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았던들 보다 일찍 알아차렸을 텐데. 당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많은 기회가 있었고, 동기 역시 마찬가지야. 당신은 자신에 대한 샘프슨의 대우에 불만을 품었어. 그가 가진 엄청난 돈에도 반감을 갖고 있었지. 자신은 별로 돈이 없었으니까--- " "여전히 없지요."하고 그는 말했다. "당분간은 여유가 충분할 테지. 10만 달러의 절반은 5만 달러이니까. 일시적인 선물이긴 하지만." 그는 익살맞게 두 손을 벌려 보였다. "내가 지금 그걸 갖고 있나요?" "그토록 어리석지는 않겠지."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역시 어리석어, 태거트. 당신은 마치 세상 모르는 시골뜨기처럼 행동했어. 도시의 협잡꾼들이 당신을 이용하고 빨아먹은 거야. 십중팔구 당신 몫의 5만 달러는 구경도 못하게 될걸." "당신은 뭔가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 걸로 아는데요?"하고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점점 깨뜨리기 어려운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당신이 샘프슨을 태우고 라스 베이가스를 떠나기 전날 밤, 에디 래시터가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 "설마 독심술사는 아닐 텐데요. 아처 씨, 그 사내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태거트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새로운 주름이 잡혔다. "아니, 한술 더 떠 당신이 에디에게 한 말도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있어. 당신은 그자에게 당신 일행이 다음날 3시경에 버뱅크로 뜰 예정이라고 말했지. 또한, 검은색 승용차를 빌려 버뱅크 공항에서 당신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어. 샘프슨이 발레리오 호텔에 전화를 걸어 승용차를 부탁하자, 당신은 그 전화를 취소하고 대신 에디를 보냈지. 발레리오의 교환수는 샘프슨이 다시 전화한 줄 알았고. 당신은 그 양반 흉내를 곧잘 내더군, 안 그런가?" "계속하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언제나 헛소리를 좋아했으니까." "에디가 빌린 차를 타고 공항입구에 나타나자, 샘프슨은 당연지사로 차에 올랐어. 그로서는 조금치도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당신은 그를 고주망태로 만들었기에 그는 운전사가 바뀐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하도 취해서 조용한 곳에 이르렀을 때 에디 같은 꼬마 친구라도 능히 다룰 수 있었을 만큼 인사불성이었겠지. 에디가 그에게 무슨 약물을 사용했지? 클로로포름인가?" "이 이야기의 작가는 당신일 텐데?"하고 그는 말했다.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모양이군요?" "이 이야기의 작가는 우리 두 사람 모두야. 그 취소 전화는 중대한 실수였어, 태거트. 그 때문에 당신을 우선적으로 사건에 연관시켰으니까. 샘프슨이 발레리오에 전화를 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신밖엔 아무도 없었어. 샘프슨이 네바다에서 날아 들어올 예정이라는 것도 당신만이 알고 있었고. 그 전날밤 에디에게 귀띔을 해줄 수 있었던 사람도 당신 말고는 없었어. 당신밖에는 그 누구도 그 모든 일을 계획하고, 또한 스케줄에 따라 이행할 수가 없었던 거야." "나는 샘프슨 씨와 함께 공항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 시각 그곳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요. 당신은 여느 경관이나 마찬가지로 상황증거에 빠져 있는 거요. 게다가, 이 레코드 건은 상황증거조차 못 됩니다. 순환논법에 불과해요. 당신은 베티 프레일리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쥐고 있지 않고, 우리 둘 사이의 관계도 전혀 입증하지 못하고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레코드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음성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고 분명했으며 밝은 솔직성을 띠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몸은 마치 내가 강제로 좁은 구석에 처박기라도 한 듯이 위축되고 긴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은 흉하게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둘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기란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들이 함께 있는 게 한두 번은 남의 눈에 띄었을 테니까. 그리고 요전날 밤 내가 페이 이스터브룩과 함께 발레리오에 있는 걸 보고 베티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당신이 아니었던가? 사실 당신은 샘프슨을 찾으려고 '미치광이 피아노'에 갔던 게 아니야, 안 그런가? 베티 프레일리를 만날 셈이었던 거지. 그리고는 퍼들러에게서 나를 구해줌으로써 당신은 내 의심을 떨쳐버렸어. 나는 당신이 내 편이라고 생각했지. 워낙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당신이 푸른색 트럭에 대고 총을 쏘았을 때도 우둔한 탓으로밖엔 돌리지 않았어. 당신이 에디에게 경고하여 그를 달아나게 할 셈이었는데도 말이야. 안 그런가, 태거트? 납치와 살인으로 손을 더럽히지만 않았던들 나는 당신을 똑똑한 청년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처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면, 똑똑하고 뭐고 말짱 헛거지." "이제 내 욕이 끝났다면...."하고 그는 말했다. "진지한 일을 논해 보실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권총을 들고 옆구리에서 나타났다. 전에도 본 바로 그 연습용 32구경이었다. 경화기(輕火器)였지만 내 위장을 오그라들게 할 만한 위력은 충분히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으시지."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이처럼 쉽사리 포기할 줄은 몰랐는데." "포기한 게 아니야. 단지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것 뿐이지." "나를 쏜다고 그 자유가 확보되지는 않아. 다른 것이 확보될 뿐. 가스에 의한 사형이지. 총을 치우게. 그리고 이야기를 하세." "이야기할 것도 없어." "여전히 잘못 알고 있군. 내가 이번 사건에서 무슨 일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총이 손에 쥐어져 언제라도 폭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자,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렸다. 인간의 생명에 이렇다 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겁이라고는 없이 착 가라앉은 그 얼굴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얼굴이었다. 거의 깨닫지도 못하는 채로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차라리 천진난만한 소년다움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미처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전쟁터에 서게 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샘프슨을 찾으려는 거네."하고 나는 말했다. "그를 다시 데려올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문제 밖이야." "당신은 그 일을 하는 데 길을 잘못 들었어, 아처. 자신이 어젯밤에 한 말을 잊었군 그래. 만일 샘프슨을 납치한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샘프슨도 끝장이라며?" "당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나? " "샘프슨도 아무 일 없어." "그는 어디 있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내가 원하기 전에는 말이야." "돈을 쥐었잖나. 그를 놓아주게."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아처. 오늘은 풀어 주려고 했지. 하지만 연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어.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몰라. 만일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으로 샘프슨도 안녕이야."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텐데." "천만에."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우리는 자유로운 몸으로 빠져나가야만 돼. 당신이 그걸 망쳤다는 걸 모르겠나? 당신에게는 일을 망치는 힘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는 능력은 없어. 내가 당신과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 뿐이야." 그는 내 몸 한복판을 겨누고 있는 권총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무심한 얼굴을 다시 내게로 돌렸다. 언제 어느 때라도 그는 쏠 수 있었다. 구태여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것이다. "기다려." 나는 말했다. 목구멍이 죄어왔다. 살갗이 바짝 타들며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내 두 손은 무릎을 움켜쥐고 있었다. "오래 끌 필요는 없겠지."하고 그는 일어나서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들어올렸다.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한발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첫 발과 둘째 발 사이에 달려들면 되는 것이다. 발을 뒤로 물리며 나는 급히 말했다. "샘프슨만 돌려준다면 자네를 붙들거나 이 일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겠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네 운을 시험해 봐야 할 테지만 말이야. 납치도 다른 사업과 같아. 운에 걸지 않으면 안되지." "걸고 있어."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야." 그의 뻣뻣한 팔이 총과 함께 올라왔다. 총 끝은 마치 속이 빈 푸른 손가락 같았다. 나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몸둘 곳을 찾아야 했다. 반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권총이 불을 뿜었다. 내가 달려들었을 때 태거트는 어느덧 맥이 풀려 있었다. 총은 그의 손을 벗어나 미끄러져 날았다. 또 다른 총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한 쌍으로 된 태거트의 권총 중 다른 한 자루를 들고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칸막이에 뚫린 동그란 구멍 속으로 새끼손가락을 찔러넣었다. "유감천만이야."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 얼굴에선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제25장. 살인의 보수 나는 쓰러지는 태거트의 축 늘어진 몸을 붙잡아 바닥의 풀밭 위에 눕혔다. 검은 눈은 뜬 채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내 손가락이 닿아도 반응할 줄을 몰랐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뚫린 동그란 구멍에서는 피도 흐르지 않았다. 마치 작고 붉은 모반(母斑)과도 같은 죽음의 표시였다. 이제 태거트는 인간의 형상을 한 30달러짜리 유기화합물이었다. 그레이브스가 몸을 굽혀 내려다보았다. "죽었나?" "발작을 일으켜 넘어진 게 아니잖아요? 당신 정말 잽싸고 깨끗하게 해치웠군." "자네냐 태거트냐였다고." "알고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신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의 손에서 총만 날려 보내든가, 총 든 팔꿈치만 부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난 그런 사격을 할 자신이 없었네. 군대에 있을 때 손을 놓았거든." 그의 입이 심술궂게 비뚤어지며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자넨 형편없이 입만 산 놈팽이로군, 루. 생명을 구해줬는데 방법이 덜 됐느니 어쩌고저쩌고 하다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나요?" "충분히. 녀석이 샘프슨을 납치했더군."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어요. 패거리들은 이 일을 달갑지 않게 여길 거야. 샘프슨에게 보복을 하려 들 테지." "그럼, 샘프슨은 살아 있나?" "태거트 말에 의하면 그런 셈이죠." "그 패거리들이란 누군데?" "하나는 에디 래시터. 또 하나는 베티 프레일리. 더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 일로 경찰을 부르겠소?" "당연하지." "그 친구들더러 입을 다물라고 하시오." "난 이번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네, 루."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기야 자넨 내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네. 그리고 이런 경우의 법적 해석은 자네도 나만큼은 알고 있지 않나." "베티 프레일리의 관점에서 사태를 보죠. 법률적인 것하고는 상관 없이 그 여자는 곧장 샘프슨에게로 달려가서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들 거요. 구태여 샘프슨을 살려둘 필요가 없거든. 돈은 쥐었겠다--- " "자네 말이 옳아."하고 그는 말했다. "신문과 방송에는 알리지 말아야겠군." "그리고 샘프슨에게 가기 전에 그 여자를 찾아내야 해요. 당신도 조심하시오,버트. 그 여자는 위험해. 게다가, 태거트에게 홀딱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 여자도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말을 끊었으나,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미란다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충격이 클 거요. 이 친구를 좋아했으니까, 안 그런가요?" "홀딱 반해 있었지. 알다시피 그 여자는 로맨틱한데다 너무 어리거든. 태거트에게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어. 젊음과 잘생긴 외모, 그리고 굉장한 전투경력이지. 이 일로 미란다는 큰 충격을 받을 거야." "나는 쉽사리 놀라지는 않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에는 좀 놀랐소. 매우 건실한 젊은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약간 자기중심적인 데는 있어도 건전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 "자네는 그런 타입을 나만큼 몰라."하고 그레이브스는 말했다. "나는 똑같은 일이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일어나는 것을 보아 왔네. 물론 이처럼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찬가지야.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육군이나 공군에 들어가서는 큼직하게 출세했지. 높은 보수를 받는 장교이자 신사로서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고, 또한 그 자부심을 한껏 부풀리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성공도 했어. 전쟁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지.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그들도 끝장이 난 걸세. 다시금 애들이나 할 일로 돌아가서 나이 지긋한 선배 어른들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지. 조종간과 기관총 대신 펜이나 계산기를 다루게 된 거야. 그들 중 몇몇은 그걸 참지 못하고 나쁜 길로 들어섰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요리되는 것으로 알았던 만큼 왜 그것이 멋대로 자기 손을 벗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거야. 그들은 그걸 다시 빼앗으려 했지. 자유라든가 행복, 혹은 성공에 필요한 기반을 닦는 노력은 전혀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살려고 든 걸세. 그 결과 당연히 부작용이 일어나게 된 거지." 그는 바닥에 뻗어 있는 새로운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은 아직도 열린 채 지붕을 통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 눈을 감겼다. "꽤나 기분이 슬퍼지는군."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서 나갑시다." "잠깐만." 그는 슬며시 내 팔을 잡았다. "청이 하나 있는데, 루." "뭔데요?" 그는 머뭇머뭇 말했다. "나는 이 일을 미란다에게 알리기가 두렵네. 그녀는 사실을 그대로 보려 하지 않을 거야. 자네, 내 말을 알겠지? 나를 탓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네." "날더러 알려달라는 건가요?" "자네 애인이 아니라는 건 아네. 그래도 그래 주면 고맙겠어." "그러지요, 뭐."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크롬버그 부인이 현관 바로 안쪽의 널따란 홀에서 진공소제기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녀는 흘끗 올려다보고는 그것을 껐다. "그레이브스 씨가 제대로 찾아가셨던가요?" "제대로 찾아왔소." 그녀의 얼굴이 긴장했다. "뭐 잘못된 일이라도?" "이젠 다 끝났소. 미란다 양이 어디 있는지 아시오?" "몇 분 전에 거실에 계셨더랬어요." 그녀는 집안으로 나를 안내하여 햇살이 가득한 방의 문간에 나를 남기고 가버렸다. 미란다는 스페인풍의 안뜰을 굽어보는 창가에 있었다. 두 손에 수선화 다발을 들고 하나씩 화병에 꽂고 있었다. 샛노란 꽃송이가 그녀의 검은 옷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 중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색깔은 검은 모직 수트의 목 언저리에 매달린 진홍빛 나비 리본이었다. 자그맣고 뾰족한 젖가슴이 성난 기세로 옷을 뚫고 나올 듯했다. "안녕하세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냥 인사말이 아니라, 기도를 하는 거예요." "알 만하군." 그녀의 눈두덩이는 부어올라 있었고, 희미하나마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보였다. "그런데 아가씨에게 썩 나쁘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 "썩 나쁘지 않다니?" 그녀는 동그스름한 턱을 치켜들었지만 입 언저리에는 여전히 수심이 감돌았다. "아버님이 살아 있다고 여겨도 좋을 만한 근거가 있어요." "어디 계신데요?" "그건 몰라." "그렇담, 어떻게 살아 계시다는 걸 알죠?" "분명히 살아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납치범 중의 하나와 이야기를 했소." 그녀는 황급히 내게로 다가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요?" "아버님이 살아 있다고 하더군." 그녀는 내 팔을 놓고 두 손을 맞쥐었다. 깍지를 낀 다갈색 열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수선화 다발은 가지가 꺾인 채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 말을 믿을 순 없잖아요? 당연히 살아 있다고 주장할 텐데 뭐. 그 사람들 뭘 원한대요? 아처 씨한테 전화를 걸어왔나요?" "그 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했을 뿐이오. 얼굴을 맞대고 말이지." "직접 보고서도 놔줬단 말인가요?" "놔준 게 아니야. 그는 죽었소. 이름은 앨런 태거트라고 하지."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난--- " 그녀의 아랫입술이 벌어지며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어째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하고 나는 물었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상냥했고 언제나 내게--- 우리들에게 정직했어요." "큼직한 기회가 올 때까지는 말이지. 그런데 드디어 그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던 거요.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마다 하지 않게 된 거고." 그녀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말했단 말이죠?" "태거트는 아가씨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소. 나를 죽이려고 했지." "아녜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가 그를 망친 거예요. 그대로 관계를 계속하면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태거트가 미란다에게 그 여자 얘길 했구먼?" "물론 얘기했어요. 내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는걸요." "그런데도 변함없이 그를 사랑했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그녀의 입은 다시 꼭 닫혀 자존심 때문에 커브를 그었다. "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 멍청이를요? 잠시 이용했을 뿐이에요. 내 목적엔 딱 맞았거든요." "그만두시지."하고 나는 거칠게 말했다. "나를 속일 순 없어. 또, 자기 자신을 속일 수도 없고. 그러다간 심신이 조각나 자기를 잃고 말 거야." 그래도 그녀의 깍지낀 두 손은 움직일 줄 몰랐다. 늘씬한 몸도 그대로 정지상태를 유지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휘어진 채 꿋꿋이 버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 바람이 그녀를 내게로 밀어붙였다. 그녀의 발이 수선화를 밟아 뭉갰다. 그 입이 내 입 위에 겹쳤다. 가슴부터 무릎까지 그녀는 나를 꼭 부둥켜안았다. 너무 오래 끈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오랜 시간도 아니었다. "그를 죽여줘서 고마워요, 아처 씨." 그녀의 음성은 고뇌에 차 있었으나 부드러웠다. 상처가 입을 열 수 있다면 그것이 낼 만한 그런 소리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그 몸을 내게서 떼어냈다."잘못 알았어. 내가 죽인 게 아냐." "아처 씨를 죽이려다 자기가 죽었다면서요?"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그를 쏘았지." "앨버트가?" 폭소와 히스테리의 중간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섬광처럼 오락가락했다. "앨버트가 했다고요?" "그는 명사수야. 우리는 함께 사격연습을 많이 했었지."하고 나는 말했다. "만일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미란다와 함께 여기 있지도 못했을 거야." "지금 나와 함께 여기 있는 게 좋은가요?" "조금 현기증이 나는군 그래. 미란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데, 그래 가지고 소화시킬 수 있을까?" 그녀의 시선이 내 전신을 훑었다. 이윽고 어여쁜 처녀치고는 꽤 그럴 듯하게 원숭이처럼 히쭉 웃었다. "내가 키스했을 때도 현기증이 났나요?" "그렇지 않았다는 건 보면 알잖소. 하지만 대여섯이나 되는 개성들이 다투고 있는 방에 있으려니 어리둥절하군."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겠죠." 그녀는 히쭉 웃으며 말했다.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미란다가 현기증을 일으킬 거야. 이번 일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찾아요. 그런 다음 한바탕 속시원히 울라고. 안 그러면 끝내는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고 말겠어." "난 늘상 정신분열증 타입이었는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울어야 하죠, 의사 선생님?" "제대로 보기 위해서지. 그게 된다면 말이지만." "아처 씨,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군요,그렇죠?" "나는 갈라진 나무 틈새에 손을 집어넣을 만한 배짱은 없어." "맙소사."하고 그녀는 말했다.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에, 갈라진 나무라니. 정말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나도 몰라. 어젯밤 어디 갔었는지 말해 준다면 좀더 나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는데." "어젯밤에요? 아무데도 안 갔어요." "미란다가 간밤에 빨간 패커드 컨버터블을 몰고 한참 드라이브를 즐겼다는 건 익히 알고 있어." "드라이브야 했죠. 그렇지만 아무데도 안 갔어요. 그저 돌아다녔을 뿐이에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혼자 있고 싶었던 거죠." "무엇에 대해서?"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죠. 아처 씨는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어요?" "아니. 미란다는 아오?" "앨버트가 보고 싶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분, 어디 있죠?" "탈의실에. 일이 벌어진 곳이지. 태거트도 거기 있소." "날 앨버트에게로 데려다 줘요." 우리는 칸막이를 친 베란다에 앉아 죽은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찾았다. 보안관과 지방검사가 아직 커버를 씌우지 않은 태거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레이브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미란다가 들어서자 셋은 다같이 일어났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에게로 가려면 태거트의 몸뚱이를 타고 넘어야 했다. 그녀는 드러난 시체의 얼굴을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일을 해냈다. 그녀는 그레이브스의 한 손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가 입맞춘 손은 그의 오른손, 바로 총을 쏜 손이었다. "이제 당신과 결혼하겠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그레이브스로서는 앨런 태거트의 머리통을 쏠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제26장. 검시심문 30초 가량 아무도 말이 없었다. 연인들은 함께 시체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선 채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군, 미란다."하고 마침내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는 지방검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실례해도 괜찮겠지? 샘프슨 부인도 이 사실을 들어야 할 테니까." "어서 가게, 버트." 라고 험프리스가 말했다. 검사실에서 온 한 사내가 기록을 하고 다른 사내가 바닥 위의 시체 사진을 찍는 동안 험프리스는 나를 심문했다. 그의 질문은 재치 있고 철저했으며, 상황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태거트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고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설명했다. 보안관인 스패너는 안절부절 못하며 시거를 질근질근 짓십으며 귀를 기울였다. "검시심문이 있을 거요."하고 험프리스가 말했다. "물론 당신이나 버트는 무죕니다. 태거트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고, 또한 명백히 그걸 사용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 총격 사건은 우리들을 전보다 더욱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었군요. 사실상 전혀 단서가 없으니까." "베티 프레일리를 잊고 계시는군요." "그 여자를 잊은 건 아니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여자를 잡지 못했고, 또 설령 잡은들 샘프슨이 있는 곳을 그녀가 안다는 보장도 없거든. 문제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고,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해결에 조금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소. 문제는 샘프슨을 찾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10만 달러도."하고 스패너가 말했다. 험프리스는 짜증이 나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돈은 2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2차적이라, 그렇긴 하지. 그러나 현찰로 10만 달러란 언제나 중요하지." 그는 탄력 있는 아랫입술을 힘껏 빨아들였다. 그리고 잿빛 눈을 치켜올려 나를 향했다. "심문을 끝냈다면 나도 이 친구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 "좋도록 하게나."하고 험프리스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시내로 돌아가야겠네." 그는 시체와 함께 떠났다. 단둘이 되자 보안관이 육중한 몸을 일으켜 나를 굽어보았다. "그런데--- "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지요, 보안관?" "할 말이 있으실 텐데." 그는 두툼한 두 팔을 올려 가슴 앞에서 팔짱을 꼈다. "내가 아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당신은 간밤의 일에 관해서 응당 말해야 할 것을 죄다 털어놓지는 않았소. 오늘 아침 당신 친구인 콜튼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그 래시터란 친구가 몰던 승용차에 관해서 말해 주더군. 패사디나의 자동차 대여업소에서 빌린 거라던데 당신도 알고 있겠지?" 그는 느닷없이 언성을 높였다. 내가 놀라서 자백하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전에는 그런 걸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길 안 했어. 왜 그 협박장이 날아들었을 때 말이야." "비슷한 것을 보기는 했죠. 그러나 같은 차인 줄은 몰랐소." "하지만 당신은 그렇다고 추측했어. 콜튼에게도 그렇게 말했고. 이 지역에서는 실권이 없기 때문에 정보를 얻어봤자 그걸 살릴 수도 없는 관리에게 정보를 제공했단 말이야. 그런데 내게는 말하지 않았어 안 그런가? 말해 줬다면 그 자식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저격도 미연에 방지하고 돈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샘프슨은 못 찾았겠죠."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냐." 그의 얼굴이 분노의 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신은 사실을 손아귀에 틀어쥔 채 내 직무에 참견했어. 정보를 감췄단 말이야. 래시터가 총에 맞은 직후 당신은 잠적했어. 유일한 목격자가 사라진 거야. 그와 동시에 10만 달러도 사라졌어." "그 말, 마음에 안 드는데요." 나는 일어섰다. 그는 거구였지만, 우리의 눈높이는 같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마음엔 들 것 같나? 당신이 그 돈을 가져갔단 얘긴 아냐. 그것도 두고봐야 알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지. 총을 이리 내고 내 조수가 남쪽에서 당신과 맞닥뜨렸을 때 대관절 무얼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시지. 또한, 그뒤에 한 일도 알고 싶군." "나는 샘프슨을 찾아다녔소." "샘프슨을 찾아다녔다고?" 그는 대놓고 빈정거렸다. "날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구태여 내 말을 믿을 필요는 없겠지. 당신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니까." 그는 두 손으로 허리 뒤를 받치고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치사하단 소릴 들을지언정, 당신을 당장 집어넣을 수도 있어." 내 참을성도 한계를 넘었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하고 나는 대꾸했다. "사실 당신은 치사해." "지금 누구를 상대로 말하는지 알고 있나?" "보안관이지. 어려운 사건을 부둥켜안고 오리무중을 헤매는 보안관. 그래서 대타(代打)를 찾는 거고."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창백한 얼굴에 분노만 남았다. "시 당국에 보고할 테다." 그는 떠듬떠듬 말했다. "사립탐정 허가가 취소되면--- " "그 소린 전에도 들었소. 그래도 나는 이렇게 건재하단 말이오. 이유를 말해 드릴까? 기록이 깨끗하거든. 그리고 나는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니지 않으니까." "이젠 공갈까지 치는군!" 그의 오른손이 옆구리에 찬 권총을 찾아더듬거렸다. "자넬 체포한다, 아처." 나는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진정하시지, 보안관. 앉아서 긴장을 풀어요. 의논할 게 있으니까." "얘기는 법정에서 할 수 있어." "안돼. 여기서 하는 거요. 당신이 나를 이민조사관에게 데려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이민조사관?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는 예리하게 보이려고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눈을 껌벅였지만, 결과적으로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을 따름이었다. "당신, 설마 외국 태생은 아니겠지?" "이곳 순종이오."하고 나는 말했다. "시내에 이민조사관이 있소?" "산타 테레사에는 없어. 가장 가까운 데는 벤투라에 있는 연방사무국이야. 그건 왜 묻지?"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소?" "꽤 있지. 외국인 범법자를 잡으면 그 친구들에게 넘기니까. 그런데, 당신, 날 놀릴 셈은 아니겠지?" "좀 앉아요."하고 나는 다시 말했다. "어젯밤 나는 찾고 있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신 다른 것을 찾아냈소. 당신과 그 조사관들이 대단히 기뻐할 일이지. 그걸 당신에게 거저 제공하려는 거요. 조건은 없소." 그는 엉덩이를 낮춰 캔버스 의자에 앉았다. 어느덧 분노는 자취를 감추고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뭐지? 근사한 건수였으면 좋겠군." 나는 그에게 푸른 유개 트럭과 사원에 있는 갈색의 사내들, 트로이와 에디. 그리고 클로드 이야기를 했다. "트로이가 그 패거리들의 두목인 게 틀림없어요. 다른 자들은 부하고. 그들은 멕시코 국경과 베이커스필드 지역간에 정기적인 지하운송망을 펴놓고 있소. 남쪽 끝은 십중팔구 칼렉시코일 거요." "음." 스패너가 말했다. "국경을 넘기엔 딱 좋은 곳이지. 나도 두어 달 전에 국경수비대와 함께 한번 내려가 봤지만, 이쪽 길에서 저쪽 길까지 그저 철망 밑으로 기기만 하면 되더군." "트로이의 트럭이 대기하고 있다가 주워 싣는 거죠. 놈들은 '구름 속의 사원'을 불법이민자들의 임시거류소로 사용하고 있소. 과연 몇 명이나 그곳을 거쳐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젯밤만 해도 12명이 넘었소." "놈들은 아직 거기 있나?" "지금은 베이커스필드에 있을 거요. 일망타진하려면 어려울 것도 없지. 클로드를 잡아족치면 틀림없이 불 거요." "기가 막히는군!" "하룻밤에 열둘을 데려온다면, 한 달이면 360명이오. 놈들이 숨어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내는지 아오?" "아니." "두당 100달러요. 트로이란 자식, 돈을 무진장 벌었겠는데." "더러운 돈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가난한 황인종들을 트럭으로 실어 들여와서 그들의 저축을 빼앗고는, 그냥 내팽개쳐 이주민 노동자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는 약간 묘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친구들도 법을 어긴다는 걸 잊으면 안되지. 하기야 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우린 내버려두지만. 우린 그저 그 친구들을 차에 실어서 국경까지 데리고 가 풀어놓을 뿐이거든. 하지만 트로이 패거리라면 문제가 다른데. 녀석들이 한 짓은 깨끗이 30년감이야." "그거 근사하군."하고 나는 말했다. "혹시 녀석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쏘다니는 곳을 모르나?" "'미치광이 피아노'란 술집을 하고는 있지만, 아마 거긴 안 나타날 거요. 이제 내가 아는 건 깡그리 얘기했소." 나는 두 가지를 빼놓았다. 내가 죽인 사나이와 아직도 에디를 기다리고 있을 그 금발 여자 말이다. "당신은 구린 데가 없는 것 같군." 보안관이 느릿하게 말했다. "아까 말한 체포 건은 잊어주게. 하지만 만일에 지금 말한 것이 핑계삼아 꾸민 이야기라면 나도 다시 생각하겠어." 감사의 말 같은 건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실망할 것도 없었다. 제27장. 범인의 정부 나는 유칼리나무 아래의 오솔길에 차를 세웠다. 마른 흙 위에는 트럭의 타이어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솔길 저 아래편에 군데군데 녹이 난 초록색 A 모델 세단 한 대가 말뚝 울타리를 등지고 세워져 있었다. 운전대에 붙은 등록증을 보니 소유주는 마르셀라 핀치 부인으로 되어 있었다. 엊저녁은 달빛이 그 하얀 오두막에 친절을 베풀어 보기 좋았지만, 오늘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는 이 오두막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초라해서 보기 흉했다. 그 모양은 뒷전의 망망한 푸른 바다에 찍힌 한 점의 지저분한 얼룩 같았다. 바다 그 자체와 언덕 기슭에 돋아난 잡초 사이를 희미하게 웅얼거리며 지나가는 몇 줄기 바람 외에는 살아 있거나 시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권총의 손잡이를 더듬어 그것이 틀림없이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했다. 마른 흙이 내 발소리를 덮어주었다. 노크를 하니 문이 삐걱거리며 조금 열렸다. 여인의 음성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누구세요?" 나는 그녀가 권총을 가졌을 경우에 대비해서 한켠에 물러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거기 누가 있나요?" "에디야."하고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에디는 더 이상 자기 이름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으나, 그 이름을 사용할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에디라고?" 놀라움에 반쯤 의혹이 어린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녀의 스적거리는 다리가 방을 가로질러 건너왔다. 방안의 어둠 속에서 그 얼굴이 미처 보이기도 전에 그녀의 오른손은 문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군데군데 벗겨진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은 꽤나 더러웠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에디!" 문간을 둘러보는 그 얼굴은 햇빛과 필사적인 기대감 때문에 눈이 멀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깜박인 뒤에야 내가 에디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지난 12시간 동안 그녀는 급속히 늙어버렸다. 눈 언저리는 부풀고 입가는 쳐졌으며, 턱은 늘어져 있었다. 에디를 기다리느라고 생기를 몽땅 소모해 버린 것이다. 일종의 발작적인 분노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그녀의 손톱이 앵무새 발톱처럼 내 손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앵무새처럼 꽥꽥거렸다. "더러운 거짓말쟁이 같으니!" 그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그래도 총알이 박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강제로 그녀를 집안으로 되밀어넣고서는 발꿈치로 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무릎으로 나를 차려고 애쓰다가는 이번에는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나는 그녀를 침대 위로 밀쳐냈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요, 마시." 동그랗게 벌어진 입으로 그녀는 내 얼굴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은 도중에 꺾여 연속적인 딸꾹질로 변했다. 그녀는 나가떨어지듯 모로 쓰러지며 이불 밑으로 파고들었다. 발작적으로 분통을 터뜨리며 그녀는 꿈틀거렸다. 나는 선 채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메마른 딸꾹질에 귀를 기울였다. 더러운 유리창을 통과한 뒤 빗물로 얼룩진 벽과 초라한 가구에 반사된 방안의 햇빛은 잿빛으로 보였다. 침대 곁에 놓인 구식 건전지 라디오 위에는 한 줌의 성냥개비와 담배 한 갑이 놓여 있었다. 잠시 지나자 그녀는 일어나 앉아 싸구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깊숙히 빨아들였다. 가운 앞섶이 빠끔히 열려 늘어진 젖가슴이 이제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기와 더불어 뿜어져 나온 목소리는 단조롭고 경멸에 차 있었다. "안됐군요. 울고불며 한바탕 소동을 피워야 경찰 나리께서 만족하실 텐데." "난 경찰이 아니야." "내 이름까지 알면서 뭐. 하긴, 아침 내내 당신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니까." 그녀는 싸늘한 관심을 나타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네 악당들은 어디까지 저질일 수가 있지?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을 쏴죽여 놓고는, 이번엔 내게로 와서 자기가 에디라고 하질 않나. 한 순간 난 또 혹시 방송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당신네 악당들이 또 공갈을 친 줄로 알았지. 더 저질로 놀 수는 없수?" "그 이상이야 못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난 당신이 대답 대신 총을 쏠 줄로 알았거든." "총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갖고 다닌 적도 없어. 에디도 마찬가지고. 만일에 에디가 어젯밤 도망쳤다면 이렇게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진 못할 텐데.... 그이의 무덤 위에서 기뻐 날뛰다니." 그 음성의 단조로움이 다시 깨졌다. "나도 당신 무덤 위에서 왈츠를 추게 될 거야, 경찰 양반." "잠깐만 입을 다물고 내 말을 들어요." "좋지. 암, 좋고말고." 목소리에 다시 쇳소리가 감돌았다. "이제부턴 당신 혼자 떠들라고. 문을 걸어서 날 가두고 열쇠를 던져버려요. 내게서는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할 테니까." "담배를 꺼요, 마시. 좀더 그럴 듯한 얘기를 듣고 싶소." 그녀는 깔깔 웃으며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나는 그 손가락에서 반쯤 탄 담배를 빼앗아 발뒤꿈치로 뭉개버렸다. 새빨간 손톱이 내 얼굴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그녀는 침대 위에 엎어졌다. "당신도 틀림없이 관계했겠지, 마시? 에디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겠지?" "죄다 부인하겠어요. 그이는 트럭 운전사였고 임페리얼 계곡에서 콩을 실어날랐을 뿐이니까." 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가운을 벗어버렸다. "날 경찰서로 끌고가서 심문해 보시지. 공식적인 질문은 뭐든 부인할 테니까." "나는 경찰이 아니야." 그녀가 머리부터 옷을 입으려고 팔을 쳐들자 몸도 따라 올라갔다. 젖꼭지가 똑바로 섰고, 배는 희고 팽팽했다. 겨드랑이에 난 털은 검었다. "내 몸매가 맘에 들었수?"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는 거칠게 옷을 당겨 내리고서는 더듬거리며 목언저리의 단추를 채웠다. 실낱 같은 금발이 흩어져 내려와 얼굴을 덮어버렸다. "앉아요."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데도 안 갈 거니까. 난 당신에게 알려줄게 있어서 여기 온 거요." "당신, 경찰이 아닌가요?" "꼭 퍼들러처럼 한 말을 되풀이하는군. 잘 들어요. 내가 원하는 건 샘프슨이오. 나는 그를 찾기 위해 고용된 사립탐정이오.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 뿐이란 말이오. 알아듣겠소? 그를 내게 넘겨주면 당신이 경찰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겠소." "치사한 거짓말쟁이 같으니."하고 그녀는 말했다. "사립탐정이든 뭐든 난 경찰 나부랭이는 믿지 않아. 게다가, 샘프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엷은 갈색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천박했으며 아무런 뜻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설령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도 그 눈을 보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당신은 샘프슨이 있는 곳을 모르신다--- " "모른다고 했잖수." "그렇지만 누가 알고 있는지는 알겠지."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난 쥐뿔도 몰라요. 아까도 말했을 텐데." "에디는 혼자서 그 일을 해치우지 않았어. 틀림없이 동료가 있었을 텐데." "그는 혼자 했어요.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날더러 고자질쟁이가 되란 말요? 에디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경찰에 협조하란 말이우?" 나는 술통 모양의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소. 에디가 총에 맞았을 때 나는 거기 있었소. 주위 3 킬로미터 내에는 경찰이라곤 그림자도 없었지, 나를 경찰로 여기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를 죽였나요?"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니오. 그는 돈을 다른 차에 건네주려고 샛길에서 차를 세웠소. 크림빛 컨버터블이었지. 여자가 타고 있더군. 그 여자가 그를 쏘았소. 그 여잔 지금 어디 있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물에 젖은 갈색 조약돌처럼 반짝였다. 빨간 혀 끝이 윗입술을 맴돌더니 아랫입술로 옮아갔다. "그년이 마약중독자가 된 뒤로는 우릴 독사처럼 싫어했단 말이야."하고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 마시? 그 여잔 어디 있지?"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군." "베티 프레일리."하고 나는 말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를 그대로 두고 차를 몰아 '코너 하우스'로 되돌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창 위에 달린 해가리개를 내렸다. 마시는 내 얼굴은 알아도 내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반 시간 동안 화이트 비치로 뻗은 길에는 아무 왕래가 없었다. 이윽고 멀리서 흙먼지가 일며 초록빛 A 모델 세단이 나타났다. 그 차가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순간, 나는 짙게 화장한 얼굴과 소용돌이 모양의 잿빛 모피와, 새파란 깃털이 달린 대담하게 치켜 올라간 모자를 보았다. 옷과 화장품, 그리고 혼자만의 반 시간이 마시를 일변시켰던 것이다. 두어 대의 차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A 모델의 최고 속력은 80 킬로미터 이하였으므로 그 뒤를 따르기는 쉬웠다. 무더운 날 천천히 차를 몰아 너무도 익숙한 길을 가는 데 유일한 난점은 졸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가 가까워지면서 통행차량이 늘어나자 나는 둘 사이의 간격을 좁혔다. A 모델은 선세트 대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쉴새없이 태평양 연안도로를 통과했다. 차는 암청색 기름 연기의 꼬리를 끌며 산타 모니카 산맥 아래의 언덕을 기를 쓰고 달렸다. 그러다가 비벌리 힐스 부근에서 갑자기 대로를 벗어나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 뒤를 쫓아 양편에 생울타리가 쳐진 구불구불한 길로 접어들었다. A 모델은 자갈길 입구에 늘어선 월계수 울타리 뒤에 서 있었다. 그 곁을 지나치며 나는 마시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유도화로 둘러싸인 깊숙한 벽돌 포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막강한 힘에 의해 억지로 앞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제28장. 목숨값 나는 다음번 차도에서 차를 돌려 길가에 세워두고 교외의 평화를 깨뜨릴 신호를 기다렸다. 포커판의 불안한 분초(分秒)가 쌓여갔다. 차 문을 열고 한 발을 땅에 내디뎠을 때 포드 자동차의 엔진이 쿨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리는 끌어들이고 운전석에 웅크리고 엎드렸다. 으르렁거리는 포드 엔진 소리는 기어를 넣는 소리로 바뀌더니 이윽고 멀어져 갔다. 그 대신 더욱 우렁찬 소리가 들리며 검은색 뷔크가 차도 밖으로 후진해 왔다. 처음 보는 사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살이 퉁퉁한 얼굴의 두 눈은 아직 굽지 않은 밀가루 반죽 속에 박힌 건포도와 같았다. 마시는 운전사 옆에 앉아 있었다. 뒤창에는 영구차의 휘장 같은 회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로에 들어서자 뷔크는 한 바퀴 돌아 바다 쪽을 향했다. 나는 가능한 한 좁은 간격을 유지하며 그 뒤를 따랐다. 브렌트우드와 태평양 연안도로 사이에서 그 차는 우회전하여 협곡으로 들어가는 길을 올라갔다. 나는 샘프슨 사건의 여정(旅程)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우리는 종착역에 이르는 좁은 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길은 계곡의 서쪽 절벽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난간을 두르지 않은 길 가장자리 저 아래로 무수한 덤불이 엉겨붙어 있었다. 길 왼편 위쪽 산마루의 마구 밀어붙인 빈터에 몇 채의 집이 드문드문 널려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되어 보였다. 맞은편 벼랑은 작은 너도밤나무류(類)가 우거진 황무지였다. 언덕 꼭대기에서 다음 언덕 허리를 기어오르는 뷔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속력을 올려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 물이 말라붙은 협곡 위에 결쳐진 비좁은 돌다리를 건너 그 뒤를 쫓아 언덕을 올라갔다. 그 차는 낯선 지역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는 한 마리의 커다랗고 검은 풍뎅이처럼 반대편 내리막길을 느릿느릿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바퀴자국이 난 한 가닥 샛길이 갈라져서 길 오른쪽으로 나 있었다. 풍뎅이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나는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도록 어느 나무 뒤에 차를 세우고 뷔크가 오솔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진짜 풍뎅이보다 별로 크지 않게끔 되었을 때 차는 성냥갑처럼 생긴 노란 집 앞에 멈춰섰다. 성냥개비처럼 생긴 검은 머리의 여자가 집에서 나왔다. 두 쌍의 남녀가 차에서 나와 그 여자를 둘러쌌다. 다섯 사람은 발이 많이 달린 한 마리의 곤충처럼 한데 몰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차를 떠나 덤불을 헤치고 언덕을 내려가서 계곡 맨 아래의 말라붙은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마른 강줄기는 둥그런 표석(漂石)들 사이를 구불구불 돌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돌틈에 있던 도마뱀 새끼들이 질겁을 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둑을 따라 휘어지고 뒤틀린 나무들이 무성하게 솟아 있어서 나는 들키지 않고 바로 집 뒤까지 갈 수 있었다. 그 집은 페인트 칠을 하지 않은 통나무집으로, 집 뒤 끝머리는 야석(野石)으로 만든 짤막한 돌기둥 위에 얹혀 있었다. 집안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매우 드높은 비명이 되풀이되었다. 비명이 내 신경을 긁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덕분에 내가 둑을 타고 내려가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지워졌던 것이다. 비명은 점차 사라지더니 한동안 잠잠했다. 나는 납작하게 엎드린 채 머리 위 마룻바닥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마루 밑에 감도는 정적은 또 다른 비명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듯싶었다. 송진 냄새와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나 자신의 식은땀 냄새가 풍겨 왔다.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사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군 그래. 우리가 순전히 새디즘이나 단순한 보복으로 이러는 줄 아는 모양이야. 하기야, 설사 우리가 복수심을 품게 될지라도, 우리는 당연히 네 소행이 우리의 복수심을 정당화시킨다는 건 느낄 수도 있겠지." "제발 입닥쳐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괜찮다면 내 관점을 밝히겠어, 베티. 내 관점은, 네가 매우 그릇된 행동을 했다는 거야. 내게는 단 한 번의 상의도 없이 혼자서 멋대로 사업을 벌였어. 내 부하가 그런 짓을 하는 게 난 딱 질색이란 말이야. 설상가상으로 넌 일의 선택에서도 부주의했고 또한 실패했어. 경찰은 지금 너는 물론, 나와 페이나 루이스까지도 찾고 있단 말이야. 더욱이 너는 그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음모의 제물로 내 귀중한 조수를 택했어. 그리고 사건이 극에 이르자 너는 단체적 협동정신은 고사하고 형제애조차 없는 사람임을 보여줬어. 친오래비인 에디 래시터를 쏘아죽였단 말이야." "당신이 사전을 통째로 외고 있는 건 다들 알고 있어요."하고 페이 이스터브룩이 참견했다. "심문이나 계속해요, 트로이." "난 오빠를 죽이지 않았어요." 상처입은 고양이의 흐느낌과 같은 목소리였다. "거짓말 마."하고 마시가 딱딱거렸다. 트로이가 언성을 높였다. 모두들 조용히 해. 이봐, 베티, 우린 기왕에 지난 일은 덮어둘 생각이야." "당신이 안한다면 내가 이 계집앨 죽일 테야."하고 마시가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마, 마시. 넌 정확히 내 말대로만 하는 거야. 아직 손해를 벌충할 기회는 있으니까. 우리 몸속의 보다 원시적인 충동들 때문에 일을 망쳐서는 안돼. 그래서 이처럼 유쾌한 작은 모임을 갖게 된 게 아닌가 말이야. 안 그래, 베티? 나는 돈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물론 알아낼 작정이야.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 말하자면 넌 사면(赦免)을 받는 셈이 되는 거지." "이 계집앤 살 가치도 없어요."하고 마시가 말했다. "당신이 안 죽인다면 맹세코 내가 죽이겠어." 페이가 깔깔거리며 비웃었다. "헤이, 애송이, 그만한 배짱도 없으면서 뭘 그래. 혼자서 이 계집앨 다룰 만한 배짱이 있었더라면 우릴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거야." "이봐, 둘 다 입 다물지 못해." 그래 놓고 트로이는 다시 부드럽고 단조로운 독특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때, 베티? 마시쯤 내가 다룰 수 있다는 건 알지? 안 그래? 지금쯤은 너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깨끗이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다소 뜨거운 맛을 보게 될 테니까. 사실 말이지, 두 번 다시 걸어다닐 수 없게 될 거야. 어때? 결코 걸어다닐 수 없다고 보장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겠어."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만일에 네가 이기적인 이익에 앞서 조직의 복지를 우선적으로 보고 협조하려 든다면 말이야...." 트로이는 부드럽게 계속했다. "그 보답으로 조직도 기꺼이 널 도와주리라고 내가 보장하지. 즉, 오늘밤 널 이 나라에서 빼내주겠단 말씀이야. 루이스와 나라면 널 위해 그만한 일쯤 할 수 있다는 건 너도 알겠지?" "당신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있나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난 당신을 잘 알아요, 트로이." "그렇다면, 아가씨, 당장 보다 친밀히 나를 알게 해줄까? 루이스, 이 계집애 구두를 마저 벗겨." 마룻바닥 위에서 그녀의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내 귀에는 그 몸의 숨쉬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짝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마루판자를 울렸다. 나는 이쯤에서 내가 나서서 사태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넷이었다. 권총 한 자루로는 너무 벅찼다. 그런데 베티 프레일리는 살아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트로이가 말했다. "발바닥 반응검사부터 할까. 그렇게들 부르지, 아마." "이런 짓은 싫은데."하고 페이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 역시 질색이라고. 그렇지만 베티 고집이 이만저만 세야지." 찢어지기 직전의 엷은 막처럼 한 순간 침묵이 흐르더니 비명이 다시 터졌다. 그 소리가 멎었을 때 나는 자신이 흙바닥을 물어뜯고 있음을 알았다. "네 발바닥은 반응이 대단히 좋군 그래." 라고 트로이가 말했다. "혓바닥이 그만큼 잘 돌아가지 않는 게 유감인데." "그걸 넘겨주면 나를 놔줄 건가요?" "내 보장하지." "당신이 보장한다고!"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내 말을 믿길 바란다, 베티. 좋아서 널 괴롭히는 게 아니라고. 너도 설마 고통받는 걸 좋아하진 않겠지?" "그렇다면 날 일으켜 줘요. 날 앉게 해줘요." "암, 그러고말고, 착한 아가씨." "부에나비스타 고속버스 터미널의 사설 화물보관함에 있어요. 열쇠는 내 핸드백에 있고." 집에서 보이는 곳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뛰기 시작했다. 차에 이르렀을 때 뷔크는 여전히 저 아래 오솔길 끝에 서 있었다. 나는 돌다리가 있는 곳까지 언덕을 도로 내려가서 반대편 비탈을 반쯤 올라갔다. 그리고 한 발은 클러치를, 또 한 발은 브레이크를 밟은 채 뷔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차의 모터가 씩씩거리며 맞은편 언덕길을 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어를 넣고 저속으로 전진했다. 언덕 꼭대기에서 앞차의 동체가 햇빛 아래 번쩍였다. 나는 길 복판을 달려 다리 위에서 그 차와 마주쳤다. 브레이크의 비명이 경적의 울부짖음을 묵살하고 메아리쳤다. 그 대형차는 내차 범퍼에서 2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가까스로 정지했다. 차 바퀴가 미처 구르는 것을 멈추기도 전에 나는 운전석을 빠져나갔다. 루이스라고 하는 사내가 운전대에 앉아 나를 노려보았다. 살집 좋은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운전석의 문을 열고 그에게 권총을 보여주었다. 그 곁에서 페이 이스터브룩이 분노의 비명을 질렀다. "나와!"하고 나는 말했다. 루이스는 한 발을 내디디며 내게로 몸을 기울여 왔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조심해, 손을 머리 위에 얹어." 그는 손을 올린 채 길에 내려섰다. 한 손가락에서 에메랄드 반지가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크림빛 개버딘 양복 속에서 커다란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당신도, 페이. 이쪽으로." 그녀는 하이힐 신은 발을 휘청거리며 나왔다. "자, 돌아서시지." 그들은 어깨 너머로 나를 주시하며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나는 권총을 거꾸로 잡아 루이스의 뒤통수 아래쪽을 후려쳤다. 그는 무릎을 꺾으며 소리 없이 엎어졌다. 페이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잔뜩 몸을 움츠리고 물러섰다. 모자가 꼴 사납게 흘러내려 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기다랗게 땅에 누운 그림자가 그녀의 동작을 흉내냈다. "녀석을 뒷좌석에 쳐넣어."하고 나는 말했다. "이 더럽고 비열한 자식!"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 밖에도 말이 많았다.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서!" "난 이 사람을 못 든단 말이야." "들지 않으면 안돼."하고 나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쓰러진 사내 위로 어정쩡하게 몸을 굽혔다. 활기를 잃은 그의 몸은 무거웠다. 그녀는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 넣어 그의 상체를 일으켜서 차로 끌고 갔다. 내가 문을 열고, 우리는 힘을 합쳐 그를 뒷좌석에 처박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햇살이 가득한 협곡의 한가로운 정적은, 우리가 하는 일과는 기묘한 대조를 이루는 배경이었다. 나는 마치 아득한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듯,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피묻은 손에 돈을 움켜쥐고, 태양 아래 외로이 선 까마득한 사람들을 말이다. "이제 열쇠를 주시지." "열쇠?" 그녀는 못 알아듣겠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으나 그것이 지나쳐서 만화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무슨 열쇠?" "화물보관함 열쇠 말이야, 페이. 어서!" "열쇠 같은 건 없어요." 그러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뷔크 차의 앞좌석으로 향했다. 앞자리에 검은 가죽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열쇠는 그 안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 지갑으로 옮겼다. "타시지."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운전석으로. 당신이 차를 몰아야겠어."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다. 나도 차에 올라 바로 뒤에 앉았다. 루이스는 뒷자리의 한편 구석에 곤두박혀 있었다. 눈꺼풀이 조금 열려 있었지만, 치켜 올라간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 얼굴은 어느때보다도 더욱 밀가루 반죽 같았다. "당신 차를 비켜갈 수 없어요." 페이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후진해서 언덕을 되올라가면 돼." 그녀는 야단스럽게 후진 기어를 넣었다. "너무 빨라."하고 나는 말했다. "사고가 났다 하면 당신은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 그녀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속력은 줄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차를 후진시켜 언덕을 올라 반대편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오솔길 어귀에서 나는 그녀에게 차를 돌려 오두막으로 몰고 가도록 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는 거야, 페이. 클랙슨에 몸을 기대거나 해서는 안돼. 척추가 부러지면 별 볼일 없을 테니까. 쌍동이자리 출생은 인정사정이 없단 말씀이야." 나는 총 끝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슬쩍 건드렸다. 그녀는 질겁을 했고, 차는 껑충 뛰어나갔다. 나는 루이스의 몸뚱이에 기댄 채 오른쪽 뒤창을 내렸다. 오솔길은 오두막 앞의 작고 평평한 빈터 안으로 열려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 나는 말했다. "그리고 문 앞에 차를 세워. 그런 다음 비상 브레이크를 걸라고." 오두막의 문이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트로이가 문간에 서 있었다. 오른손으로 문틀 가장자리를 잡고 있어서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드러나 있었다. 나는 겨냥을 하고 쏘았다. 6 미터 거리였지만 총알이 새겨진 자국이 똑똑히 보였다. 구멍은 그의 오른손 엄지와 둘째손가락 사이에 마치 한 마리 살아 있는 통통하고 붉은 곤충처럼 패어져 있었다. 왼손이 총을 찾아 배를 가로지르기 전에 그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찰나였지만 내가 달려가서 다시 한 번 총의 손잡이를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은발 머리를 두 무릎 사이로 늘어뜨리며 문간에 주저앉았다. 뒷전에서 뷔크의 모터가 부르릉 소리를 냈다. 나는 페이 뒤를 쫓아가, 그녀가 미처 방향을 틀기 전에 차를 잡아세우고는 어깨를 잡아 그녀를 끌어냈다. 그녀는 내게 침을 뱉으려다 자기 턱만 적시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가."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부터!" 그녀는 하이힐 위에서 비틀거리며 거의 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들어갔다. 트로이는 문지방 밖으로 굴러나와 비좁은 현관에 웅크리고 뻗어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타고 넘었다. 방안에는 아직도 살갗이 타는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베티 프레일리의 목 언저리에 마시가 앉아 삽살개처럼 집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시를 잡아 떼어놓았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하이힐로 바닥을 굴렀지만 일어나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총든 손을 흔들어 페이에게 그녀 곁의 방구석에 서 있도록 했다. 베티 프레일리는 일어나 앉았다. 목구멍에서 가냘픈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한쪽 뺨 관자놀이에서 턱뼈에 이르는 곳에서 손톱에 할퀸 네 개의 나란한 상처에서 뚝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의 다른쪽은 노르스름한 하얀빛이었다. "가관이군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의 목소리는 활기 없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같았다. 시선은 멍하니 고정되어 있었다. "누군들 상관 있겠소. 이자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여기서 나갑시다." "그거 기분좋은 일이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손발과 두 무릎을 짚으며 엎어지고 말았다. "나, 걸을 수 없어요." 나는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마른 장작처럼 가볍고 뻣뻣했다. 그 머리는 내 팔뚝 위에서 건들거렸다. 난 꼬마 악마를 안아든 기분이었다. 마시와 페이는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악이란 질적으로 여성적인 것이며, 여자들이 비장하고 있다가 전염병처럼 남자들에게 옮겨주는 독약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베티를 안고 밖으로 나와 차로 데리고 가서 앞자리에 앉혔다. 뒷문을 열고는 루이스를 땅바닥으로 몰아냈다. 얕은 숨결에 따라 두텁고 푸르딩딩한 입술 사이로 게거품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내가 차에 올라 운전대 앞에 앉자, 가냘픈 까마귀소리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내 목숨을 구해줬군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별로 대단한 가치는 없겠지. 하지만 대가는 치러줘야겠어. 값은 10만 달러와, 랠프 샘프슨이야." 제29장. 사라진 꿈 나는 다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차를 세우고 점화 열쇠를 거두었다. 베티 프레일리를 안아올려 밖으로 데리고 나올 때, 그녀의 오른팔이 미끄러져 내려 내 두 어깨에 걸쳤다. 목덜미께에 그녀의 작은 손가락이 느껴졌다. "당신은 힘이 퍽 세군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처, 그렇죠?" 그녀는 엉큼하고 교활한 속셈을 감추고 겉으로는 새침을 떠는 고양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생각이 난 모양이군. 손은 치우시지, 아니면 내동댕이 칠 테니까."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 차로 옮겨타서 차가 후진을 시작하자 그녀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요?" "그 친구들까지 실을 자리는 없어." "저 사람들을 놔줄 건가요?" "무슨 이유로 그들을 붙잡아두라는 거야? 폭행죄로 고발하라는 건가?" 나는 도로의 폭넓은 곳을 찾아내어 선세트 대로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팔을 꼬집었다. "우린 돌아가야 해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 역시 당신이 에디에게 한 짓이 그들 못지 않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내 물건을 갖고 있단 말예요!" "아니-- "하고 나는 대꾸했다. "내가 갖고 있지. 이제 그건 당신 게 아니야." "열쇠 말예요?" "그래." 그녀는 척추가 녹아버리기라도 한 듯 축 늘어져 좌석에 파묻혔다. "그 사람들 놔주면 안돼요."하고 그녀는 토라진 듯이 말했다. "내게 한 짓을 봤잖아요. 트로이를 달아나게 내버려둬 봐요, 오늘 당장 당신에게 보복할걸요."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 친구들은 잊고 자기 걱정이나 시작하시지." "나는 걱정할 장래도 없어요, 안 그런가요?" "우선 샘프슨부터 봐야겠어. 그리고 나서 결정하지." "그 사람에게 데려다 줄께요." "그는 어디 있나?" "집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에요. 산타 테레사에서 60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해변 어딘가에 있어요." "진담이겠지?" "진짜 진담이에요, 아처. 하지만 당신은 날 놔주진 않겠죠. 돈도 주지 않을 테고. 그렇죠?" "당신 돈이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녀는 앙칼지게 말했다. "내 10만 달러를 빼앗고선." "나는 샘프슨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어. 그들이 돈을 되찾게 되는 거지." "그 사람들은 돈이 필요없어요. 어째서 똑똑하게 굴지 못하죠? 이번 일에는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끼어 있어요. 그 사람은 에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돈을 가져다 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게 어때요?" "그 남자가 누군데?" "그 사람이 남자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시의 손가락에 의한 압박에서 회복되어 있었고, 그녀는 목소리를 소녀의 음성처럼 꾸며내고 있었다. "여자와 함께 일할 수는 없겠지. 그 남자는 누구지?" 그녀는 태거트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알려줄 때는 아니었다. "그 얘긴 잊어요. 잠시 당신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 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은 아직 샘프슨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어.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당신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텐데." "그는 부에나비스타 북쪽 20 킬로미터쯤 되는 해변 어느 집에 있어요. 수영 클럽이 탈의실 겸 휴게소로 쓰던 집인데, 전쟁중 문을 닫았죠." "그는 살아 있는 건가?" "어제까지는 그랬어요. 첫날엔 클로로포름 때문에 뻗었지만 이젠 멀쩡해요." "어제는 살아 있었다 이거지. 묶여 있나?" "난 본 적도 없는걸요. 에디가 맡았더랬으니까." "굶어죽도록 그대로 내버려둔 모양이군." "난 거기 갈 수가 없었어요. 내 얼굴을 아니까. 그가 모르는 사람은 에디 뿐이었어요." "그리고 에디는 천벌을 받아 죽었단 말씀이지." "아니, 내가 죽였어요." 그녀는 거의 점잔을 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걸요. 난 에디를 쏠 때 샘프슨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돈 생각만 했겠지, 안 그런가? 셋으로 나누느니 둘이서 나눠갖는 편이 낫다고 말이야." "물론 그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고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조금이었어요. 에디는 날 어릴 적부터 못살게 굴었어요. 내가 다 자라서 내 갈 길을 가려고 하자 그는 날 꼼짝 못하게 옭아넣었단 말예요. 난 마약중독자였었는데, 그는 그걸 팔았거든요. 그리고는 당국에 고자질해서 내게 죄다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가벼운 처벌만 받고 빠져나갔어요. 내가 그걸 안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난 언젠가는 그 값을 치러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난 그가 한창 신이 나 있을 때 해치웠지요. 아마 그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을 거예요. 뭐든 일이 잘못될 경우에 대비해서 마시에게 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으레 그리 되기 마련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납치란 곱게 끝나지 않는 거야. 특히, 납치범들끼리 서로 죽이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지." 나는 대로로 접어들자 첫번째 주유소에서 차를 세웠다. 그녀는 내가 점화 열쇠를 거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뭘 할 셈이죠?" "전화로 샘프슨 구조요청을 하려는 거야. 그는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거기 가려면 한 시간 반은 걸릴 테니까. 그 집, 이름이 붙어 있나?" "전에는 선랜드 수영 클럽이라고 했어요. 기다란 녹색 건물이죠. 고속도로에서도 보여요. 작은 갈림길 끄트머리께에 있으니까." 처음으로 나는 그녀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주유소 직원이 차에 기름을 채우는 동안, 나는 그곳의 공중전화로 산타 테레사를 불렀다. 창을 통해 베티 프레일리를 지켜볼 수 있었다. 펠릭스가 전화를 받았다. "샘프슨 저택입니다." "난 아처요. 그레이브스 씨 거기 계시오?" "예, 계십니다. 불러 드리지요." 그레이브스가 전화에 나왔다. "도대체 자넨 지금 어디 있는 건가?" "로스앤젤레스요. 샘프슨이 살아 있어요. 적어도 어제까지는 말이오. 선랜드라는 수영 클럽의 탈의실에 갇혀 있다는데, 거길 아십니까?" "전에 좀 다녔지. 요 몇 해 동안 문을 닫은 걸로 아는데, 어디 있는지는 알지. 부에나비스타 북쪽 고속도로상이지." "구급약품과 음식을 갖고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가시지요. 의사와 보안관을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양반, 상태가 나쁜가?" "모르죠. 어제부터 죽 혼자 있었다니까. 나도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가겠소." 나는 그레이브스와 대화를 끝내고 피터 콜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 근무하고 있었다. "대령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일부는 대령님을 위한 거고, 일부는 법원을 위한 거죠." "보나마나 또 두통거릴 테지." 그는 내 전화가 별로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이 놈의 샘프슨 사건은 금세기의 골칫거리라니까." "전에는 그랬지요. 오늘 내가 매듭을 지을 겁니다." 그의 음성은 완전히 한 옥타브가 떨어졌다. "다시 말해 보게." "샘프슨이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또, 납치범 중 마지막 인물을 지금 데리고 있고요." "이봐, 제발 어려워하지 말게나, 빨리 말해. 그는 지금 어디 있나?" "대령님 담당구역 밖인데요. 산타 테레사 군입니다. 지금 산타 테레사의 보안관이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랑을 하려고 전화를 했단 말이지. 이런, 자기 도취에 빠진 악당 같으니. 난 자네가 나나 법원에 뭔가 줄 게 있다고 들었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납치는 아닙니다. 샘프슨은 주 경계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FBI가 상관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이 사건에는 부산물이 있습니다. 브렌트우드와 태평양 연안도로 사이에 선세트 대로로 통하는 협곡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으로 통하는 길은 홉킨스 로(路)라고 합니다. 그 길을 따라 8 킬로미터쯤 들어가면 노상에 검은 뷔크 세단이 있는데, 그 곁을 지나 계속 내려가면 페인트 칠을 하지 않은 소나무 오두막이 있습니다. 집안에 네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트로이지요. 알건 모르건 법원은 그들을 필요로 할 겁니다." "무슨 이유로?" "불법 이민 반입이지요. 난 바쁩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요?" "당장은 그렇군."하고 그는 말했다. "홉킨스 로라고 했지?" 차로 돌아가 보니 베티 프레일리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구멍에서 나오는 구렁이처럼 그녀의 눈은 다시 음흉해졌다. "귀여운 양반, 이젠 뭐죠?"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을 위해 좋은 일을 하나 했지. 경찰을 불러 트로이와 그 일당을 주워담으라고 했어." "나도?" "당신은 빼놓았어." 나는 101번 국도를 향해 선세트 대로를 내려갔다. "그자에게 불리한 증거를 주 당국에 제출할 거예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밀입국 말인가요?" "그래. 트로이는 나를 실망시켰어. 트럭으로 멕시코 인들을 들여오다니, 신사 악당이 하는 일치고는 극히 저질이야. 그만한 인물이면 할리우드의 스타디움을 관할 소방서원들에게 팔아 먹든가 해야지." "수입이 좋잖아요. 그는 이중으로 수입을 올렸거든요. 그 불쌍한 쫌씨들한테서 차비를 뜯어낸 다음, 다시 그들을 두당 같은 값으로 농장에 팔아 넘겼지요. 멕시코 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파업선동자로 이용된 거예요. 트로이는 그런 식으로 몇몇 지방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었죠. 한편에서는 루이스가 멕시코 정부에 기름칠을 하고." "샘프슨은 트로이에게서 파업선동자를 사들이고 있었나?"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걸 입증할 수 없을걸요. 샘프슨은 자신이 깨끗하게 보이도록 무척 조심했으니까." "충분히 조심하지는 못했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 말 뒤에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고속도로상에서 북쪽으로 차를 틀며, 나는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을 보았다. "시트 주머니에 위스키 병이 있소. 그걸로 덴 곳과 얼굴의 상처를 닦아요. 마셔도 좋고." 그녀는 두 가지 충고를 다 받아들이고는 내게도 병을 내밀었다. "나는 괜찮아." "내가 먼저 마셔서 그런가요? 내가 걸린 병은 모두 정신적인 거예요." "집어치워." "당신은 내가 싫은 모양이죠, 그렇죠?" "나는 독약을 마시지는 않아. 나를 독살할 속셈이 없는 건 아니겠지? 당신도 머리는 있는 것 같군,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고맙다고 할 것도 없군요, 머리 좋은 양반." "그리고 당신은 온갖 경험을 다 겪었거든." "난 숫처녀는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면 얘기지만. 11살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지요. 에디는 틈만 있으면 나를 팔아 돈을 벌려 했지만, 난 한 번도 허리띠 아래로 밥벌이를 한 적은 없어요. 음악이 날 지켜줬지요." "이번 일에서도 지켜줬어야 했는데, 유감천만이로군." "한번 걸어본 거죠, 결국 운은 없었지만. 어째서 내가 이런 저런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당신은 아까 말한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소. 자신이야 어찌되든 그자가 돈을 쥐길 바라는 거야." "그 얘긴 잊으라고 했을 텐데요." 잠시 침묵했다가 그녀는 말했다. "날 놔주고 그 돈을 갖는 게 어때요? 10만 달러를 쥘 기회는 앞으로도 다신 없을 테니까." "당신도 마찬가지야, 베티. 앨런 태거트도 그렇고." 그녀는 경악과 충격이 섞인 신음소리를 질렀다. 원래의 목소리를 되찾자 그녀는 적개심에 불타는 어조로 말했다. "날 놀리고 있었군요. 태거트에 관해서는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죠?" "그가 내게 이야기한 만큼."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죽음이 덮쳤소. 에디처럼 머리에 구멍이 생겼지." 그녀는 뭔가 말하려 했으나, 그 말은 복받치는 울음 속에 삼켜졌다. 높고 길게 끄는 흐느낌이 점차 메마른 훌쩍거림으로 변해 갔다. 한참 지난 뒤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왜 그가 죽었다는 말을 안했죠?" "묻지도 않았잖아. 그에게 반했었군?" "그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린 서로 반했었죠." "그토록 반했다면서 왜 그를 이런 일에 끌어들였지?" "내가 끌어들인 게 아녜요. 그가 원한 일이에요. 우린 함께 달아날 작정이었어요." "그리곤 내내 행복하게 살 셈이었겠군." "되지도 않는 농담 짓거리는 혼자서나 해요." "나 같으면 당신한테서 사랑의 젊은 꿈을 사지는 않겠어. 경험으로 말하면 그는 소년이었고, 당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야. 당신이 그를 꾀었을 테지. 턱 끝으로 부릴 사내가 필요한 참에 그 같으면 손쉬워 보였겠지."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녀의 음성은 놀랍도록 온화했다. "우린 반 년 동안 함께 지냈어요. 그는 내가 문을 연 지 1주일 뒤에 샘프슨과 함께 '피아노'에 왔었어요. 난 당장 정신을 빼앗겼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우린 둘 다 가진 게 없었어요. 깨끗이 손을 씻고 새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고요." "그런데 샘프슨은 확실한 돈줄이었단 말이지? 납치가 확실한 방법이었고?" "샘프슨 같은 사람에게 동정심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처음에는 우리에게도 다른 계획이 있었어요. 앨런이 그 계집애--- 샘프슨의 딸 말이에요, 그 계집애와 결혼하려는 체하는 거예요. 그러면 샘프슨은 그걸 말리느라고 돈을 주어 쫓아낼 게 아니에요? 그런데 샘프슨이 그걸 망쳐버렸어요. 그는 어느 날 밤 앨런에게 발레리오에 있는 자기 방갈로를 빌려줬어요. 한밤중에 우리는 샘프슨이 침실 커튼 뒤에 숨어서 우릴 엿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요. 그 뒤로 샘프슨은 그 계집애에게 만일 앨런과 결혼하면 의절을 하고 일체 돈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앨런 또한 내보낼 작정이었지요. 다만, 우리가 그자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게 탈이었지만." "왜 그를 협박하지 않았지? 그 편이 더 손쉬웠을 텐데." "그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는 우리가 다루기에는 너무 거물이었고, 주 내의 최고 변호사들을 쓰고 있었거든요. 우린 비록 그에 관해 많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꼼짝 못하게 옭아넣기란 어려운 일이었죠. 예를 들어, '구름 속의 사원'만 해도 그렇죠. 트로이와 클로드나 페이가 그걸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지 샘프슨이 알고 있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어요?" "당신이 샘프슨에 관해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다니 묻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어떻게 아직까지도 활동할 기력이 있었을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나도 한때는 그가 강철로 된 심장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도 이젠 나이가 들었고, 아마 자신도 한물 간 것을 느꼈나 봐요. 젊음을 다시 느끼게 해줄 만한 것이면 뭣이든 찾았으니까요. 점성술이든 변태적인 섹스 행위든, 뭐든지 가리지 않았지요. 그가 걱정하는 건 단 하나, 자기 딸 뿐이에요. 그 애가 앨런에게 달라붙은 걸 알았다면, 아마 절대로 앨런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태거트도 그녀에게 달라붙었어야 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음성은 풀이 죽어 있었고 자그마했다. "하긴, 나야 그에게 잘해 준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 말 안해도 나도 그쯤은 알고 있다고요. 하지만 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지요. 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는 어떻게 죽었지요, 아처?" "그는 궁지에 몰리자 총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어. 그런데 다른 사람이 먼저 쏘았지. 그레이브스라는 사나이." "그 남자를 만나보고 싶군요. 죽기 전에 앨런은 무슨 말인 가를 했다고 했죠? 설마---?" "당신 얘기는 없었어."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죠?" "산타 테레사의 시체공시소." "그를 볼 수 있다면 좋겠군요. 한 번만 더." 그 말은 어두컴컴한 꿈 속에서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뒤를 이은 침묵 속에서 그 꿈은 그녀의 마음 저편으로 번져, 저무는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들처럼 기다란 그림자를 던졌다. 제30장. 필사의 도주 부에나비스타를 향해 천천히 차를 몰고 갈 때, 황혼은 빌딩가의 추악함을 부드럽게 감싸주었으며, 번화가에는 하나둘 불빛이 늘어가고 있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의 불빛을 보았지만 나는 차를 멈추지 않았다. 시가지를 벗어나 몇 킬로미터 더 달리자 고속도로는 다시 해안선과 마주치고, 텅빈 해변가에 솟은 벼랑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다. 저무는 태양의 마지막 잿빛 광선이 해면에 들러붙어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여기예요." 베티 프레일리가 말했다. 그 동안 너무 조용히 있었기에 나는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었다. 나는 교차로 바로 앞에서 도로의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바다 쪽 길은 경사져 내려가 해변으로 통하고 있었다. 모퉁이에 세워진 표지판이 비바람에 씻긴 글자로 이 해변의 바람직한 발전을 선전하고 있었지만, 집 한 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고속도로 아래쪽 200 미터 지점에서 바로 그 낡은 수영 클럽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몇 개의 별채로 이루어진 길고 납작한 건물로, 그 흐릿하니 선명치 않은 빛깔은 하얗게 번쩍이는 거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차로 내려갈 순 없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길 아래쪽은 바닷물에 씻겨 나갔거든요." "당신은 거기 내려간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지난 주 이후에는 없어요. 에디가 처음 찾아냈을 때 함께 둘러보았거든요. 샘프슨은 남자용 탈의실의 작은 방에 있어요." "그랬으면 좋겠군." 나는 점화 열쇠를 빼내고 그녀를 차에 남겨놓았다. 내려감에 따라 길은 좁아져서, 양쪽에 깊은 도랑이 패인 불룩한 진흙 길이 되었다. 첫번째 건물 앞에 놓인 나무 발판은 휘어 있었고, 금이 간 틈바구니를 뚫고 자라나온 풀이 발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처마 밑의 높직한 창들은 어두컴컴했다. 나는 손전등을 켜 건물 복판에 달린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문을 비추었다. 한쪽에는 '신사', 또 한쪽에는 '숙녀'라는 표시가 박혀 있었다. '신사'라는 글이 박힌 오른쪽 문은 조금 열린 채 건들거리고 있었다. 별 기대는 갖지 않고 나는 그것을 활짝 열었다. 실내는 텅 비고 죽은 듯이 고요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 외에는 집안에도 그 주위에도 생명의 자취라고는 없었다. 샘프슨도 없었고, 그레이브스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6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레이브스에게 전화한 지 한 시간이 훨씬 지났다. 카브릴로 협곡으로부터의 8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차로 달려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와 보안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다. 나는 손전등의 불빛으로 실내를 죽 훑었다.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날아온 모래와 흙먼지로 덮여 있었다. 맞은편 합판 간막이에 몇 개의 닫힌 문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일렬로 늘어선 그 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뒷전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도마뱀처럼 너무도 빨라 나는 돌아볼 틈도 없었다. '복병이다!'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의식을 꿰뚫었으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멀어져 갔다.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 맨 처음 떠오른 말은 '병신같이!'였다. 거인의 외눈 같은 손전등의 불빛이 소름끼치는 양심의 눈처럼 뚫어져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나는 일어나 달려들려고 했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그 충동을 제지했다. "이게 웬일인가?" "전등을 치우쇼." 불빛이 칼날처럼 내 눈을 꿰뚫고 뒤통수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전등을 내려놓고 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루?" "일어날 수 있어." 그러면서도 나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늦었군요." "어둠 속에서 집을 찾느라고 애먹었다네." "보안관은 어디 있나요? 그 사람도 못 찾았단 말입니까?" "사건 때문에 나가고 없더군. 군(郡) 병원으로 편집광(編執狂)을 호송중인 모양이야. 의사를 데리고 내 뒤를 따라오라고 전해 달라고 했지. 시간을 허비하기 싫어서 말이야." "내가 보기엔 시간을 꽤나 허비한 것 같은데 그래요." "위치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지나쳐 갔었던 모양이야. 부에나비스타에 다 가서야 그 생각이 났다네. 되돌아오자니 찾을 수가 있어야지." "내 차를 못 보셨나요?" "어디 있었는데?" 나는 일어나 앉았다. 머릿속에서 구토증이 일며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했다. "바로 이 위쪽의 모퉁이에 세워놨는데." "거기라면 바로 내가 주차한 곳이야. 자네 차는 안 보이던데." 나는 더듬더듬 차 열쇠를 찾았다. 열쇠는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확실해요? 녀석들은 내 차 열쇠를 가져가지 않았는데." "자네 차는 거기 없었어, 루. 그런데 녀석들이라니 누군가?" "베티 프레일리와 누군진 모르지만 나를 때려눕힌 녀석이오. 패거리 중 네 번째 멤버가 있어서 샘프슨을 감시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나는 그에게 이곳에 이르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여자를 차에 남겨둔 게 잘못이야."하고 그는 말했다. "이틀에 세 번씩이나 얻어터져서야, 사람 병신되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일어서기는 했지만 다리에 맥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기대라고 어깨를 내밀었지만 나는 벽에 기대었다. 그는 전등을 치켜들었다. "자네 머리 좀 보세." 흔들리는 불빛 속에 떠오른 그의 넓적한 얼굴에는 불안 때문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는 지치고 늙어 보였다. "나중에."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손전등을 집어들고 방을 가로질러 늘어선 문 쪽으로 갔다. 샘프슨은 두 번째 문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칸방 뒷벽에 붙여진 벤치 위에 쓰러져 있는 뚱뚱한 늙은이--- 머리는 똑바로 들고 있었는데, 모퉁이에 처박혀 있었다. 그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뒤를 따라 비집고 들어온 그레이브스가 외쳤다. "이런!" 나는 그에게 손전등을 건네주고 샘프슨 위로 몸을 숙였다. 두 손과 발목은 5 밀리 두께의 밧줄로 한데 묶여 있었다. 밧줄 한 끝은 벽에 박힌 스테이플에 잡아매어져 있었다. 다른 한 끝은 샘프슨의 목을 파고들어 왼쪽 귀밑에서 힘껏 잡아매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몸 뒤를 더듬어 묶여진 손목 한쪽을 잡았다. 차갑지는 않았으나 맥은 이미 없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동자는 제가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두툼한 발목을 감싼 삼원색의 바둑판 무늬 양말에 어쩐지 가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숨가쁘게 물었다. "죽었나?" "흠." 나는 온몸에서 맥이 빠지며 허탈감이 찾아왔다. "내가 여기 왔을 때는 틀림없이 살아 있었을 거요. 내가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죠?" "지금은 7시 15분이야." "나는 6시 45분쯤에 여기 왔어요. 녀석들에게는 일을 벌일 시간이 30분이나 있었군. 우리도 어서 움직여야지." "샘프슨을 이대로 여기 놔두고?" "경찰은 이 상태 그대로의 그를 원할 테니까요." 우리는 그를 어둠 속에 남겨놓고 떠났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내어 언덕을 올랐다. 내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레이브스의 스튜드베이커는 교차로 건너편에 세워져 있었다. "어디로 가지?" 운전석에 오르자 그가 물었다. "부에나비스타. 고속도로 순찰대로 갑시다." 나는 지갑을 조사했다. 화물함 열쇠가 없어졌을 것을 예상하며. 그러나 그것은 명함꽂이에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 나를 때려눕힌 자가 누구였든 그에게는 베티 프레일리와 정보를 교환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돈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놓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있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마을의 경계선을 지날 때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말했다. "나를 버스 터미널에 내려주시오." "아니, 왜?" 나는 그에게 까닭을 말하고는 덧붙였다. "만일 돈이 그대로 있다면 놈들은 그걸 찾으러 돌아올지도 몰라요. 그리고 돈이 없다면 놈들이 십중팔구 이 길을 따라와서 화물함을 부숴 열었다는 이야기가 되지. 당신은 이 길로 고속도로 순찰대에 갔다가 나중에 날 태워주시오." 그는 버스 터미널 앞,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표시하는 붉은 포석 위에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유리문 밖에 서서 장방형의 커다란 대합실을 들여다보았다. 작업복을 걸친 서너 명의 사내가 흠집투성이의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원시인처럼 보이는 몇몇 노인이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은 벽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편 구석에는 멕시코 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부모와 네댓 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그들은 마치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축구 팀으로 굳건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대합실 뒤쪽 시계 아래에 있는 매표소에는 꽃무늬의 하와이 셔츠를 입은 여드름투성이의 젊은이가 들어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도너츠 판매대가 있었고, 유니폼을 입은 뚱뚱한 금발 여자가 그 뒤에 앉아 있었다. 실내의 어느 누구도 내가 찾는 긴장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저녁과 버스, 토요일 밤이나 봉급 봉투, 혹은 수명을 다한 뒤의 안락한 죽음 같은,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유리문을 밀어젖히고 담배 꽁초가 흩어져 있는 플로어를 건너 화물보관함으로 갔다. 목표인 화물함의 번호는 열쇠 위에 찍혀 있었다--- 28번. 구멍에 열쇠를 밀어넣으며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너츠를 파는 여자의 몽롱한 푸른 눈이 무심히 나를 향하고 있을 뿐,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함 안에는 천으로 만든 붉은 비치백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끌어내자 안에서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까이에 있는 빈 벤치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안에 든 갈색 종이꾸러미는 한쪽 끝이 찢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더듬으니 빳빳한 새 지폐의 모서리가 느껴졌다. 나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도너츠 판매대로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와이셔츠에 피가 묻었는데, 모르시나요?"하고 금발 여자가 물었다. "알고 있소. 늘 이런 식으로 입지요." 그녀는 마치 내 지불 능력이 의심스럽다는 양 나를 훑어보았다. 나는 100달러 지폐를 내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카운터 위에 10센트 은전 한 닢을 탁 올려놓았다. 그녀는 두텁고 흰 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을 내주었다. 왼손에 컵을 들고, 언제라도 총을 뽑을 수 있도록 오른손은 비워둔 채 나는 커피를 마시며 문 쪽을 지켜보았다. 매표소 위의 전기 시계가 조금씩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버스가 한 대 도착했다가 떠나자 대합실의 구성원이 바뀌었다. 시계는 매분 60번씩 착실히 시간을 십어 소화시키며 무척이나 느릿하게 똑딱걸음을 했다. 7시 50분쯤 되니, 시간이 너무 늦어 그들이 나타날 가망은 없는 듯싶었다. 그들은 돈을 포기했거나,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그레이브스가 문간에 나타나더니 열심히 손짓을 해댔다. 나는 컵을 놓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의 차는 길 건너편에 다른 차들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녀석들이 방금 자네 차를 작살냈다네." 보도 위에서 그가 말했다. "여기서 북방 25 킬로미터 쯤 되는 곳이야." "놈들은 도망갔습니까?" "분명히 하나는 내뺏어. 프레일리란 여자는 죽었고." "다른 놈은 어찌됐나요?" "순찰대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네. 무전연락을 한번 받았을 뿐이니까." 25 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줄지어 늘어선 차량과 헤드라이트의 불빛 속에서 검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일단의 사람들로 그 장소는 이내 눈에 띄었다. 그레이브스는 신호용 붉은 손전등을 열심히 흔들며 우리더러 그대로 직진하라고 지시하는 경찰 바로 옆에 급정거를 했다. 스튜드베이커에서 뛰어나가 보니, 차량의 행렬 저 너머 서치 라이트가 훑고 간 길 끄트머리에 내 차가 있었다--- 둑에 코를 처박고. 나는 부서진 차체를 에워싼 군중을 팔꿈치로 밀쳐내며 앞으로 내달았다. 갈색으로 그을린 주름진 얼굴의 고속도로 순찰경관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그손을 밀쳐냈다. "이건 내 차요."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갈색 주름살이 귀밑까지 부채살처럼 퍼졌다. "확실하오? 당신 이름이 뭐요?" "아처." "정말 당신 거군. 등록된 이름과 같으니까." 그는 순찰 오토바이 곁에 불안한 듯이 서 있는 젊은 순경을 불렀다. "이리와, 올리! 이 사람 차야." 군중은 내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망가진 차 주위에 빈틈없이 쳤던 원진(圓陣)을 풀자, 그 곁 땅바닥에 놓인 담요로 덮인 물체가 보였다. 나는 두 눈으로 열심히 그 광경을 빨아들이고 있는 두 여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담요의 한 끝을 들추었다. 그 밑의 물체는 보기엔 도저히 사람 같지 않았지만, 걸친 옷으로 보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 시간에 둘씩이나 죽는다는 것은 내게는 벅찼다. 속이 뒤집혔다. 얼마 전에 마신 커피만 남겨놓고 모조리 토해 내자 메스꺼움이 조금 가셨다. 두 명의 순찰경관은 내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 여자가 당신 차를 훔쳤소?" 그 중 나이든 쪽이 물었다. "그래요. 이름은 베티 프레일리." "본서에서는 수배중인 여자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놈은 어찌됐소?" "다른 놈이라니?" "사내 하나가 함께 있었을 텐데?" "사고 당시에는 없었습니다."하고 젊은 순경이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니잖습니까?" "아니, 확실합니다. 현장을 보았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내게도 책임이 있지요." "원, 천만에, 올리." 나이든 경관이 올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넨 분명히 옳은 일을 한 거야. 아무도 자넬 탓할 순 없어." "어떻든 수배중인 차였다니 다행이군요." 올리가 불쑥 말했다. 이 말에 나는 화가 났다. 보험에 들기는 했지만, 차를 원상태로 수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나는 그 차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기수가 자기 말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하고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서너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북쪽을 향해 80 킬로미터 속도로 순찰을 돌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차에 탄 여자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더란 말입니다. 마치 내가 정지상태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 뒤쫓았지요. 거의 150 밀로미터나 속도를 내서야 가까스로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내가 나란히 달리는데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총알처럼 내리막길을 치닫더군요. 멈추라고 신호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할 수 없이 앞을 막았지요. 그러자 차를 틀어 내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다 중심을 잃은 겁니다. 차는 60 미터 가량 미끄러져 나가더니 둑에 꼬나박혔지요. 내가 끌어냈을 땐 여잔 이미 죽어 있더군요." 말을 마친 그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이든 사내가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여보게, 신경쓰지 말어. 법대로 집행했을 뿐 아닌가." "차 안에는 그밖에 아무도 없었다고 확신하는 거요?"하고 나는 물었다. "연기처럼 사라졌다면 몰라도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 그는 언성을높여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불은 나지 않았는데, 그 여자의 발바닥은 온통 물집투성이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찾아도 구두가 보이질 않아요. 그 여잔 맨발이었거든요." "그거 묘하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어느 틈엔지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군중을 뚫고 들어와 있었다. "놈들은 따로 차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그녀는 왜 구태여 내 차를 몰았을까?" 나는 망가진 차 안으로 손을 넣어, 휘어지고 피가 묻은 계기반 아래의 점화장치를 더듬어 보았다. 양극이 아침에 내가 남겨둔 구리철사로 다시 이어져 있었다. "점화장치를 철사로 이어 발동을 걸었군." "아무래도 남자 솜씨 같군. 안 그런가?" "꼭 그렇지도 않아요. 오빠한테서 얻어들었는지도 모르지. 차도둑이라면 다 아는 수법이니까." "놈들은 갈라져서 도망치기로 한 건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알 수 없는걸. 그녀는 내 차를 쓰면 당장 발각되리라는 것쯤은 알 만한데--- " "난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되네--- " 나이든 경관이 말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소?" 내가 마지막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스패너 보안관이 무전기가 달린 차로 도착했다. 운전은 서리가 하고 있었다. 둘은 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스패너가 뛸 듯이 내닫자 그의 살집 좋은 가슴은 여자의 젖가슴처럼 출렁거렸다. "무슨 일이오?" 그는 축축하고 의심에 잠긴 눈으로 나와 그레이브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설명을 맡겼다. 샘프슨과 베티 프레일리에게 일어난 일을 죄다 듣고 나자 그는 내게로 돌아섰다. "잘 보셨겠지, 아처? 당신이 쑤시고 돌아다닌 결과를 말이야. 내 지시 없이는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소?" 나는 그런 소리를 순순히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지시라니, 웃기는군! 당신이 좀더 일찍 샘프슨한테 갔더라면 지금쯤 그 사람도 살아 있었을 게 아뇨?" "당신은 그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내겐 알리지 않았어."하고 그는 툴툴거렸다.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아처." "물론 그럴 테지. 내 면허증을 갱신할 때 말이지. 전에도 들은 소리요. 그런데 자신의 무능력은 시 당국에 뭐라고 말할 셈이오? 사건이 큼직하게 터지고 있는데도 당신은 자리를 비우고 미친놈이나 병원에 나르고 있었단 말이야." "어제 이후로는 병원에 간 적이 없는데."하고 그가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샘프슨에 대한 내 전갈을 못 받았단 말이오? 두 시간 전인데?" "전갈 같은 건 없었어. 그런 수로 빠져나갈 생각은 말라고." 나는 그레이브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산타 테레사 방면에서 구급차 한 대가 요란스레 사이렌을 울리며 고속도로를 달려 내려왔다. "더럽게 늦는구먼."하고 나는 순찰경관에게 말했다. "여자가 이미 죽은 걸 알고 있으니 서두를 게 없지." "여잘 어디로 데려갈 거요?" "연고자가 나서지 않는 한 산타 테레사의 시체공시소일 거요." "연고자는 없을 거요. 거기라면 그 여자에게는 아주 좋은 곳이지." 앨런 태거트와 에디, 즉 그녀의 애인과 오빠가 벌써부터 거기에 가 있지 않은가. 제31장. 제3의 사나이 그레이브스는 아주 천천히 차를 몰았다. 마치 그 사고현장을 본 것이 그에게 충격을 준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산타 테레사로 돌아가는 데는 근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 동안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와 미란다에 관한 생각으로. 그러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서자 그는 기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겠네, 루. 경찰은 아직도 얼마든지 녀석을 붙잡을 기회가 있어." "녀석이라니, 누구 말인가요?" "물론 살인자지. 제3의 사나이 말이야." "그런 사내가 또 있는지 모르겠군." 그의 손이 운전대를 힘껏 움켜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샘프슨을 죽였네." "그렇지."하고 나는 말했다. "누군가가 죽였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나는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나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조심해서 운전해요, 그레이브스. 매사에 조심해야죠." 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은 다시 길로 향했지만 그 직전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치욕감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고속도로와 산타 테레사의 주요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는 붉은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웠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어디든 나는 상관없네." "샘프슨 저택으로 가지요."하고 나는 말했다. "샘프슨 부인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까." "지금 꼭 해야 되나?" "나는 그분에게 고용되어 있잖소. 결과를 보고해야 돼요." 신호가 바뀌었다. 샘프슨 저택으로 통하는 길을 오를 때까진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저택의 거무스레한 형체 속에서 몇 줄기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되도록 미란다는 만나고 싶지 않군."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오늘 오후 결혼했다네." "조금 성급했던 게 아닌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몇 달 동안이나 혼인신고서를 갖고 다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잖소? 아니면, 점잖게 묻어줄 때까지만이라도." "그녀가 오늘 하자고 우겼다네."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법원에서 식을 올렸지." "아마도 당신은 첫날밤도 거기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유치장도 한 건물 안에 있지요, 아마?"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차고 옆에 차를 세우자,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치욕감은 이미 그의 얼굴에서 가시고 없었다. 오직 도박사의 체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공교로운 일이군."하고 그는 말했다. "이 밤은 우리들의 신혼 초야야. 몇 년 동안 기다려 온 밤이지. 그런데 그녀를 보고 싶지 않으니." "당신은 혼자 있기를 바라시오?" "왜, 안되나?"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소. 당신만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 나는 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몰랐다. "자넨 나를 믿어도 되네, 루." "이제부터는 아처 씨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아처 씨, 지금 내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네. 그렇지만 난 그걸 쓰지 않을 참이야. 그만하면 폭력은 충분했으니까. 이해하겠나? 역겨울 정도로 싫증이 나버렸어." "역겨울 게 당연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두 번이나 살인을 저질렀으니 뱃속이 편할 리가 있나. 한동안 폭력을 만끽했군 그래." "어째서 두 번이라는 거지, 루?" "아처 씨라고 하라니까." "너무 그렇게 도학군자인 양할 필요는 없잖나? 계획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네." "대개들 그렇지. 당신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태거트를 쐈어. 그리고 그 이후 즉석에서 내키는 대로 행동한 거야. 막판에 이르자 당신은 점점 조심성이 없어졌어. 오늘 저녁 보안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리라는 것쯤은 알 만했는데 말이야." "자네는 그걸 입증할 수 없네." "그럴 필요도 없어. 하지만 당신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었다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지. 당신은 잠시 탈의실에서 샘프슨과 단둘이서만 있고 싶었던 거야. 태거트의 패거리들이 당신을 위해 했어야 할 일을 못하게 되자, 그 마무리를 스스로 짓지 않을 수 없었지." "자네, 정말 내가 납치에 관계했다고 생각하나?" "관계하지 않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 그러나 그 납치사건은 당신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어.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태거트를 죽일 타당한 이유를 갖게 함으로써 당신을 살인자로 만들었던 거야." "나는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태거트를 쏘았네."하고 그는 말했다. "그를 저 세상에 보낸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지. 미란다가 그를 너무 좋아했거든. 그렇지만 내가 그를 쏜 것은 자넬 구하기 위해서였다네." "믿어지지 않는군."하고 나는 싸늘한 분노에 휩싸여 거기 앉아 있었다. 검은 하늘에 눈송이처럼 박힌 별들이 머리 위로 냉기를 퍼붓고 있었다. "계획적인 게 아니었네."하고 그는 말했다. "계획을 짤 시간도 없었어. 태거트가 자넬 쏘려 하기에 대신 내가 쏘았던 거야. 단순히 그거 뿐이라고." "살인은 결코 단순하지 않소. 적어도 당신만한 두뇌의 소유자가 저지를 때는. 당신은 사격의 명수요, 그레이브스. 그를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어." 그는 냉혹하게 대꾸했다. "태거트는 죽어도 마땅해. 당연한 응보를 받은 거란 말이야." "그러나 때가 맞지 않았소. 난 그가 내게 한 말을 당신이 얼마만큼이나 들었는지 내내 그게 궁금했지. 당신은 그가 납치범 일당 중의 하나라는 걸 알 만큼은 들은 게 틀림없어. 만일에 태거트가 죽는다면 그 패거리들이 샘프슨을 죽이리라는 걸 충분히 확신할 만큼은 들었겠지." "나는 거의 들은 게 없었네. 그가 자넬 쏘려는 걸 보는 순간 대신 쏘았을 뿐이라니까." 그 음성에 쇳소리가 돌아왔다. "명백히 나는 실수를 저질렀던 거야." "실수를 한두 번 저지른 게 아니지. 첫 번째는 태거트를 죽인 것이었소.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단 말이야, 안 그래요? 당신이 정말로 죽기를 바랐던 건 태거트가 아니라 실은 샘프슨이었어. 샘프슨이 살아서 돌아오는 걸 바라지 않았던 만큼, 당신은 태거트를 죽임으로써 그 기틀을 마련할 생각이었지. 그러나 태거트에게는 살아남은 동료라고는 하나 뿐이었고, 게다가 그녀는 멀찌감치 숨어 있었단 말이야. 그녀는 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태거트가 죽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더더욱 샘프슨을 죽일 기회가 없었지. 물론, 기회만 있었다면 반드시 그리 했을 테지만 말이야. 그래서 결국 당신이 직접 샘프슨을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지." 치욕감과 불안감이 다시 그의 얼굴을 내리눌렀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그것들을 떨쳐버렸다. "나는 현실주의자라네, 아처.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샘프슨이 죽었다고 섭섭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의 어조는 바뀌어 갑자기 나직하고 단조로워졌다. 그 사람 전체가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지탱시킬 그 어떤 자세를 찾아 몸부림치고 있었다. "당신은 어느 때보다도 살인을 가볍게 취급하는군."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살인혐의로 많은 사람을 가스실로 보냈소. 그곳이 바로 당신이 가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입 언저리와 이마 사이에 깊고 보기 흉한 주름살이 잡혔을 뿐이었다. "자넨 내게 불리한 증거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네. 한 조각도 없단 말이야." "내게는 심증이 있소. 당신이 은연중에 고백한 것도 있고." "그러나 녹음이 안됐어. 그나마 나를 법정에 끌어넘기기에는 충분치 못해."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오.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나보다 잘 알 테지. 왜 당신은 샘프슨을 살해해야만 했는지 모르겠군." 한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 그의 어조는 또 변해 있었다. 솔직하고 젊어진 데가 있는 그 음성은 몇 년 전 수사관 시절에 내가 들었던 사나이의 음성이었다. "내가 해야만 했었다고 자네가 말하다니--- 루. 바로 그대로일세.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그곳 탈의실에 혼자 있는 샘프슨을 발견할 때까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네. 난 그에게 말도 걸지 않았어. 그를 본 순간 해치워야 한다는생각이 번뜩인 거야. 일단 그렇게 되니까 싫든 좋든 그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기꺼이 그 짓을 한 것 같은데." "그래."하고 그는 말했다. "그를 죽이는 건 즐거웠어. 이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지만." "당신, 좀 손쉽게 넘기려는 게 아니오? 나는 정신분석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또 다른 동기들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소. 보다 뚜렷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은 것들 말이오. 당신은 오늘 오후,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재산이 많은 아가씨와 결혼했지. 아버지가 죽으면 그녀는 실제로 대단한 부자가 되는 거요. 설마 지난 두 시간 동안에 당신 부부가 500만 달러의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500만은 아니야. 절반은 샘프슨 부인에게 돌아가거든." "그녀를 잊고 있었군. 왜 그녀도 마저 죽이지 그랬소?" "자네, 너무 심하군." "당신은 샘프슨에겐 더 심하게 굴지 않았소, 별것도 아닌 125만 달러 때문에 말이오. 그가 남긴 돈의 반의 반이지. 그레이브스, 당신은 송사리 도박꾼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소? 아니면, 앞으로 샘프슨 부인과 미란다도 살해할 계획이었던가?" "그렇지 않다는 건 자네도 알잖나."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넨 날 뭘로 보는 거야?"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소. 당신은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 날 여자의 아버지를 죽이고 여자로 하여금 상속자가 되도록 한 사람이오. 어떻게 된 일이오, 그레이브스? 백만장자가 아니면 필요없다는 거였소? 난 그래도 당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만해 두게." 고통스러운 음성이었다. "미란다를 끌어들이지는 말게." "그럴 수는 없지. 미란다만 아니었다면 할 말이 더 많았을지도 몰라." "아니...."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 더이상 말할 게 없어." 나는 도박꾼의 차디찬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자갈길을 건널 때 내 등은 그를 향해 있었고 그의 주머니에는 권총이 있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폭력에 싫증이 났다는 그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주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내 노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냥 집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위층 홀에 내리니 크롬버그 부인이 있었다. "어딜 가시지요?" "샘프슨 부인을 만나야겠소." "안되겠네요. 부인께서는 오늘 무척 신경이 날카로우시답니다. 한 시간쯤 전에 넴부탈 세 알을 잡수셨는걸요." "이건 중요한 일이오." "얼마만큼이나 중요한데요?" "그분이 기다리는 소식입니다." 알겠다는 기색이 그녀의 눈에 번뜩였다. 그러나 더 이상 캐묻기에는 그녀는 너무도 훌륭한 하인이었다. "잠이 드셨나 보고 오지요." 그녀는 샘프슨 부인의 닫혀진 방문으로 가서 조용히 문을 열었다. 겁에 질린 속삭임이 방안에서 울려왔다. "누구지?" "크롬버그예요. 아처 씨가 뵙고 싶답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네요." "좋아요." 속삭이는 듯한 말이었다. 전등이 하나 켜졌다. 크롬버그 부인은 뒤로 물러서서 내게 길을 비켜주었다. 샘프슨 부인은 불빛 아래 눈을 깜박이며 팔꿈치로 몸을 괴고 있었다. 갈색으로 그을은 얼굴은 약기운 때문인지 잠에서 깬 탓인지 푸석푸석했다. 아니, 그것은 어떻게든 잠을 자보려고 애쓰는 얼굴인지도 몰랐다. 젖가슴 끝의 둥그스름하고 검은 꼭지가 실크 파자마 속에서 몽롱한 눈처럼 내다보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서 나는 문을 닫았다. "남편께선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 " 그녀는 나를 따라 되풀이했다. "놀라지 않으신 것 같군요." "꼭 놀라야 하나요?내가 방금 무슨 꿈을 꾸었는지 당신은 모르실 테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건 참 끔찍해요. 있지도 않은 얼굴들이 보일 정도로 정신이 몽롱하면서도 제대로 잠이 들지 않으니 기가 막힌 일이죠. 오늘밤에 나타난 얼굴은 너무도 생생했어요. 바닷물에 부풀 대로 부푼 그 사람 얼굴을 보았는데, 날 집어삼키려고 을러대지 않겠어요." "내 말을 들으십니까, 부인? 남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시간 전에 살해당했지요." "말씀은 들었어요. 내가 그 사람보다 오래 살 줄은 알고 있었지요." "그 일이 부인에게 뜻하는 바가 그것 뿐이란 말입니까?" "더 이상 무슨 뜻이 있어야 하죠?" 그녀의 음성은 희미하니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것은 수면과 각성 사이의 깊숙한 동굴 속을 떠도는 속삭임이었다. "전에도 남편이 죽은 적이 있고, 슬픔은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밥이 죽었을 때 난 며칠이고 울었죠. 그의 아버지를 위해 슬퍼할 생각은 없어요. 난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랐으니까." "그렇다면 소원을 성취하신 셈이군요." "다 성취한 건 아니죠. 그 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든가, 아니면 너무 늦게 죽었으니까요. 만일에 미란다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이는 유언을 바꾸었을 테고, 결국 나 혼자서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녀는 교활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아처. 내가 악독한 여자라는 거죠. 하지만 난 실은 악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난 워낙 가진 게 없잖아요. 그나마 갖고 있는 얼마 안되는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잖겠어요." "500만 달러의 절반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돈이 아녜요. 그게 갖다주는 힘이지요. 난 무척이나 그걸 원했어요. 이제 미란다도 떠나버리면 난 완전히 홀몸이 되는 거예요. 이리 와서 잠깐이라도 내 곁에 앉으세요. 잠이 들기까지가 끔찍히 두려워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내가 꼭 그 사람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알 수 없군요, 부인." 나는 그녀에게 동정을 느꼈지만, 다른 감정들이 더욱 강했다. 나는 방을 나와 문을 닫음으로써 그녀를 떨쳐버렸다. 크롬버그 부인은 여전히 복도에 있었다. "주인 어른께서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렇소. 부인께서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말씀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는 어디 계신지 아시오?" "아래층 어딘가에 계실 거예요." 나는 거실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는 벽난로 옆의 방석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전등이 꺼져 있어서 벽 중앙의 커다란 창문을 통해 어둑어둑한 바다와 은필(銀筆)로 그린 듯한 수평선이 바라보였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일어나서 맞아주지는 않았다. "아처 씬가요?" "그렇소. 할 이야기가 있소." "아버지를 찾았나요?" 벽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그녀의 머리와 목 언저리를 형형색색의 장미꽃으로 밝혀 주었다. 커다랗고 검은 눈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음, 돌아가셨소." "그럴 줄 알았어요. 애초부터 살아 있질 않았던 거예요, 그렇죠?" "차라리 그랬노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군." "무슨 뜻이죠?" 나는 그 설명은 뒤로 미루었다. "돈은 되찾았소." "돈이라뇨?" "이거요." 나는 가방을 그녀의 발치에 던졌다. "일전의 그 10만 달러." "이런 건 관심 없어요. 아버지를 어디서 발견했죠?" "잘 들어요, 미란다. 미란다는 이제 독립된 사람이야."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오늘 오후에 그레이브스와 결혼했으니까." "알고 있어. 그가 말하더군. 그래도 미란다는 이 집에서 나가서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안돼요. 우선 해야 할 일은 그 돈을 간수하는 거요. 난 그걸 되찾으려고 무척 애를 먹었고, 또 미란다는 그 일부를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몰라." "미안해요, 이걸 어디다 두죠?" "서재에 있는 금고가 좋겠지. 나중에 은행에 넣도록 하고." "알았어요." 그녀는 불현듯 확고한 태도를 보이며 발딱 일어서더니 앞장서서 서재로 갔다. 마치 위에서 내리누르는 그 어떤 힘에 대항이라도 하는 듯, 두 팔은 죽 뻗고 양어깨는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금고의 문을 여는 동안 차가 차도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자세가 우아한 맵시보다 매력적이었다. "누구죠?" "앨버트 그레이브스. 날 여기까지 태워다 줬지." "그런데 왜 들어오질 않았죠?" 나는 남아 있는 용기의 조각들을 주워모아 가까스로 말했다. "그는 오늘밤 미란다의 아버지를 죽였소." 그녀의 입이 숨가쁘게 움직이더니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농담이죠, 그렇죠? 그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가 했어." 나는 사실 속에서 도피구를 찾았다. "오늘 오후 나는 아버지가 갇혀 있는 곳을 알아냈지.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레이브스에게 전화하여 보안관을 데리고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가라고 했소. 그레이브스는 나보다 한 발 앞서 그리로 갔지. 보안관을 대동하지 않고서 말이오. 내가 도착했을 때, 그의 자취는 없었어. 차는 어딘가에 숨겨놓고 이미 집안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거야. 내가 들어가자 그는 뒤에서 나를 내리쳐서 기절시켰지. 내가 정신이 들자, 그는 방금 도착한 체했어. 아버지는 죽어 있었고, 시체는 아직도 따뜻했소." "앨버트가 그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하지만 믿어야 돼." "증거가 있나요?" "내게는 심증 뿐이오. 물증을 찾을 시간이 없었어. 그걸 찾는 건 경찰에게 달렸지." 그녀는 가죽을 씌운 안락의자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군요. 아버지, 그리고 앨런도...... " "그레이브스가 두 사람 다 죽인 거요." "하지만 앨런을 죽인 건 아처 씨를 구하기 위해서였잖아요. 아처 씨가 그렇게 말하고선---" "그건 좀 복잡한 살인이었소."하고 나는 말했다. "정당방위로 볼 수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지. 그는 태거트를 죽일 필요가 없었어. 사격의 명수거든. 상처만 입힐 수도 있었단 말이오. 그러나 그는 태거트가 죽기를 바랐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지."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 중 한 가지는 미란다도 알 텐데." 그녀는 불빛 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내게는 그녀가 여러 가지 다른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해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그래요. 알고말고요. 난 앨런을 사랑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레이브스와 결혼할 작정이었지." "어젯밤까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그럴 듯해 보였던 거죠. 사랑 때문에 고통받느니 결혼하는 게 낫잖아요?" "그는 미란다를 걸고 도박을 했고, 그리고 이긴 거야. 하지만 그가 걸었던 또 하나의 도박은 실패했지. 태거트의 동료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한 거야. 그래서 그레이브스는 직접 아버지를 교살한 거요."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감쌌다. 관자놀이에 솟은 푸른 정맥이 애띠고 섬세했다. "추잡해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녀는 말했다. "왜 그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군요." "돈 때문에 그런 거지." "하지만 그는 돈에는 관심조차 없었는데요. 그 점이 내가 그를 존경한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그녀는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 얼굴에는 쓰라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존경심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군요." "그레이브스에게도 돈을 우습게 안 시절이 있었을 거야. 그 마음가짐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곳도 있었겠지. 그러나 산타 테레사는 그런 곳이 못 돼. 이곳에서는 돈이 활력소이지. 그게 없으면 반송장이야. 백만장자들을 위해 그 많은 돈을 다루면서도 자기는 한푼도 없으니 그레이브스도 조바심이 났던 거요. 그러던 차에 문득 자기도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걸 알아차린 거지. 그는 자신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돈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거야."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는지 아세요?" 그녀가 말했다. "돈이고 섹스고 내겐 없었으면 좋겠어요. 둘 다 이롭다기보다는 골칫거리거든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돈을 탓할 수는 없소. 악이란 사람들 개개인의 내부에 숨어 있는 거야. 돈은 그 핑계에 불과하지. 사람들은 원래 지녔던 다른 가치들을 잃었을 때 맹목적으로 돈에 매달리는 거야." "앨버트 그레이브스는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요?" "아무도 몰라. 그 자신도 모르겠지. 지금 중요한 일은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하는 거지." "아처 씨는 꼭 경찰에 알릴 건가요?" "그럴 생각이야. 미란다가 동의해 준다면 나로서는 한결 마음이 편하겠어. 결국에 가서는 미란다에게도 마음 편한 일이 되겠지만." "나와 함께 책임을 나누자는 거군요. 하지만 사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잖겠어요? 어쨌든 그들에게 알릴 테니까.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인정하신다면서." 그녀는 의자 속에서 쉴새없이 몸을 꼼지락거렸다. "기소를 당하면 그는 부정하지 않을 거요. 나보다는 미란다가 더 잘 알 텐데." "잘 안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모든 게 다." "그러니 내게 맡겨두라는 거요. 미란다는 풀어야 할 의문점을 많이 갖고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풀 수는 없소. 또한, 불확실한 상태에서 삶을 계속해 나갈 수도 없는 것이고." "삶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낭만적인 기분으로 대하지 말아 줘."하고 나는 거칠게 말했다. "자기연민을 해봤자 빠져나갈 수는 없어. 미란다는 두 남자와 아주 불행한 인연을 맺었었지. 하지만 미란다는 내가 보건대 그걸 감당할 만큼 충분히 강한 아가씨요. 일전에 내가 말했지. 미란다 앞에는 스스로 이끌어나가야 할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이제 그때가 된 거요." 그녀는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 몸에서 비스듬히 튀어나온 젖가슴은 연약하고 부드러웠다. 부드러운 입술이 말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좋죠?" "나와 함께 가는 거야." "아처 씨하고? 나와 함께 살길 바라세요?" "내게 기댈 생각일랑 말아요, 미란다. 당신은 사랑스런 아가씨야. 물론 나도 무척 좋아하지. 그렇지만 내게 맞는 사람은 아니야. 날 따라와요. 함께 검사한테 가서 말합시다. 결정은 그에게 맡깁시다." "좋아요. 험프리스한테 가도록 하죠. 늘상 앨버트와 친했으니까." 그녀는 나를 태우고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 절벽으로 둘러싸인 채 시내를 굽어보는 대지 위로 차를 몰았다. 붉은 삼나무로 지은 험프리스의 방갈로 앞에서 차를 세우고 보니 또 한 대의 차가 차도에 서 있었다. "앨버트의 차예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제발 혼자 들어가세요.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녀를 차에 남기고 테라스로 이르는 돌계단을 올라갔다. 미처 노크를 하기도 전에 험프리즈가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해골처럼 창백했다. 그는 테라스로 나와서는 문을 닫았다. "그레이브스가 와 있소." 그가 말했다. "2~3분 됐지. 자기가 샘프슨을 살해했노라고 하더군." "어떻게 할 생각이오?" "보안관을 불렀소. 지금 오는 중이오." 그는 숱이 적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의 몸짓도 그 음성처럼 맥없고 희미했다. 마치 현실이 그의 손 닿는 곳을 벗어나 멀찌감치 물러선 것 같았다. "이건 비극이오. 앨버트 그레이브스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었었는데." "범죄란 종종 그런 식으로 번지기 마련이지요." 라고 나는 말했다. "전염병이나 같습니다. 전에도 그런 현상을 보셨을 텐데요." "내 친구들에게 일어난 적은 없었소."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버트는 방금 전에 키에르케고르 이야기를 하더군. 양심에 관해 그 사람의 말을 인용했는데, 인간이란 깊이를 모를 심연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거나 같답니다. 양심을 잃지 않고는 그 심연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거지요. 일단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순간 죄인이 된다나요. 그 친구 말로는 자기는 심연을 들여다보았으니 샘프슨을 살해하기 전에 이미 죄를 지은 거랍니다." "아직도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있군."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내려다본 게 아니라 올려다보았던 겁니다. 큰 돈이 서식하고 있는 언덕 위의 집들을 말이지요. 자신도 표변하여 크게 되려고 했던 겁니다. 샘프슨이 남길 백만금의 4분의 1로 말입니다." 험프리스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알 수 없구먼. 그는 돈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겼었는데....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무언가가 그에게 일어난 겁니다. 샘프슨을 미워한 건 사실이지만, 그를 미워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요. 샘프슨이란 사람은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머슴처럼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레이브스의 경우에는 뭔가 보다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평생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불현듯 모든 일에 싫증이 난 거지요.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잃었던 겁니다. 그로서는 자신에게나 이 세상에 있어서 더 이상 미덕이라든가 정의가 없어졌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게 바로 그가 검사직을 그만둔 이유입니다." "그건 몰랐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상을 향해 맹목적으로 복수의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게까지 되었던 거지요."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영리했습니다." "매우 맹목적이었지요." 험프리스는 우겼다. "지금의 버트 그레이브스처럼 비참한 인간을 나는 평생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미란다에게로 돌아갔다. "그레이브스가 와 있소. 미란다가 전적으로 그를 잘못 판단했던 건 아닌 셈이군. 그는 올바른 일을 하기로 결심했으니 말이오." "자수했나요?" "계속 배짱으로 밀고 나가기엔 그는 너무도 정직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사람의 정직성이란 조건에 따라 달라지니까. 그런데 그는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험프리스에게로 가서 털어놓은 거요." "그가 자수했다니 기뻐요." 그러나 그녀는 다음 순간 다른 소리를 냄으로써 그 말을 부정했다. 운전대에 엎드려 하염없이 흐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안아 일으켜 옆자리에 앉히고 직접 차를 몰았다.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데 시내의 모든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그다지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그 모든 불빛과 별들의 반짝임은 한갖 반딧불의 미광(尾光), 어두운 공간 속에 퍼져 있는 차가운 불꽃이었다. 내 세계에 있어서 현실이란 곁에 있는 소녀, 따스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길잃은 소녀였다. 그 몸에 팔을 둘러 끌어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토록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으며, 그처럼 연약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렇게 했더라면 그녀는 1주일도 못 되어 나를 미워할 터였다. 그리고 반 년이 가기 전에 나 역시 미란다를 미워하게 되었으리라.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그녀가 스스로 자기 상처를 달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계속 울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그랬으리라. 그녀의 울음소리는 차츰 일정한 리듬으로 낮아지더니, 이윽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덕 기슭에서 무전기를 단 보안관의 차가 우리 곁을 스쳐 그레이브스가 기다리고 있는 집을 향하여 기어 올라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