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움직이는 표적 (상) 지은이: R.맥도널드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제1장. 루 아처의 데뷔 제2장. 주정뱅이 석유왕의 실종 제3장. 삼각관계 제4장. 12각형의 방 제5장. 3호 촬영소 제6장. 추 적 제7장. 스위프트의 주정뱅이들 제8장. 한물 간 여배우 제9장. 암흑가의 보스 제10장. 미치광이 피아노 제11장. 군용 수송 트럭 제12장. FBI의 수석검사관 제13장. 최악의 상태 제14장. 말괄량이 아가씨 제15장. 움직이는 표적 제16장 성자 클로드 ⊙ 작가소개 ▶ 작가/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 - 루 아처(Lew Archer) 시리즈가 성공하면서 명성을 얻음 - 필명을 존 로스 맥도널드로 바꾸어 '루 아처 시리즈'의 첫권인'움직이는 표적'을 출판했다. - 이어서 제12작 '금력의 피안'(The Far Side of the Dollar, 1965) 을 출간 - 미국 추리작가협회 MWA의 회장에 피선 - 주요작품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길(The Way Some People Die)>,<피해자를찾아라(FindaVictim)>,<운명(TheDoomsters)>, <지하인간(The Underground Man) 등이 있다. ▶ 옮긴이/이기형 - 문학박사 - 전 국민대학교 대학원장 - 한국 추리작가협회 회장 - 저서 - '미국문학사', '세계추리문학사' - 번역서 - 말르로의 '희망' (한국번역문학상 수상)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일강의 죽음'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예고살인' '커튼' 외 다수. 제1장. 루 아처의 데뷔 택시는 101번 국도(國道) 에서 벗어나 바다 쪽을 향했다. 길은 갈색 언덕 밑을 빙 돌아 떡갈나무 숲이 줄지어 서 있는 협곡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카브릴로 협곡입니다."라고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집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동굴 속에 숨어서 살고 있소?" "무슨 말씀을. 저택들은 저 아래 바닷가에 있습니다." 잠시 뒤에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커브를 하나 더 돌아 시원한 지대로 들어섰다. 길가의 광고판에는 '사유지 - 통행 허가가 어느 때든지 취소될 수 있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떡갈나무 숲 다음에는 정돈된 종려나무와 몬티레이 실삼나무의 생울타리가 나타났다. 나는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잔디밭 깊숙히 들어간 하얀 현관들, 붉은 타일과 녹색의 구리 지붕들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여자가 운전하는 롤스로이스 한 대가 일진선풍처럼 우리 곁을 지나갔다. 그 장면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좀 낮은 협곡의 연한 푸른 빛깔의 아지랑이는 마치 천천히 불에 타는 지폐에서 나는 가느다란 연기와도 같았다. 바다까지도 아지랑이를 통해서 아늑하게 보였다. 바다는 마치 협곡의 입구에 박힌 반짝이는 푸른 빛깔의 보석처럼 윤이 나는 견고한 쐐기와 같았다. 바다는 사유지와도 같았다. 빛깔은 영원히 퇴색할 것 같지 않았다. 바다는 인간의 자존심을 위축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태평양이 이렇게 작게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보초처럼 서 있는 주목나무 사이의 사설 차도 위쪽에서 회전하여 자가용 고속도로망 속을 한동안 빙 돌다가 하와이 쪽으로 깊고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다 위로 나왔다. 그 집은 협곡에 등을 진 언덕배기의 아래쪽에 다소 외떨어져 있었다. 건물은 길고 낮았다. 양 날개 부분이 예각으로 마주쳐서 거대한 하얀 화살촉처럼 바다를 겨누고 있었다. 관목 숲 '스크린' 사이로 하얗게 번쩍거리는 테니스 코트와 녹청색으로 가물거리는 수영장이 눈에 띄었다. 택시 운전사는 부채꼴 사설차도로 나와서 차고 옆에 차를 세웠다. "이곳이 아까 말씀드린 동굴인이 사는 곳입니다. 뒷문 입구에 댈까요?" "난 으스대는 사람이 아니오." "그럼, 그 동안 대기할까요?" "그러시오." 푸른 린네르 스모그를 입은 육중한 여자가 뒷문 현관에 나와서 내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처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샘프슨 부인이신가요?" "저, 크롬버그 부인인데요, 가정부죠." 미소가 마치 햇빛이 쟁기질을 한 밭을 지나가듯이 주름살투성이 얼굴 위를 스쳐갔다. "택시는 보내도 좋아요. 펠릭스가 언제든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냈다. 나는 가방을 손에 들면서 약간 난처해짐을 느꼈다. 일이 한 시간으로 끝날지, 아니면 한 달이 걸릴지 도무지 몰랐기 때문이다. "가방은 헛간에 넣어두겠어요."하고 가정부가 말했다. "아마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나를 이끌고 크롬과 자기(瓷器)로 꾸며진 부엌을 지나 수도원처럼 싸늘한 둥근 천정의 복도를 건너서 2층까지 올라가는 승강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버튼을 눌렀다. "모두가 문명의 이기로군요."하고 나는 그녀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이 승강기는 샘프슨 부인이 다리를 다쳤을 때 설치한 거예요. 7,500 달러나 들었는 걸요." 이 말이 나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효과는 충분했다. 그녀는 승강기 건너쪽에 있는 문을 노크했다. 대꾸가 없었다. 가정부는 다시 노크하고서 문을 열었다. 천정이 높고 하얀 그 방은 여자의 방치고는 너무나 크고 장식이 없었다. 육중한 침대 위엔 그림이 한 폭 걸려 있었다. 시계와 지도와 여자용 모자를 화장대 위에 늘어놓은 그림이었다. 시간과 공간과 섹스가 그려진 셈인데, 일본의 화가 쿠니요시의 그림 같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샘프슨 부인!"하고 가정부가 외쳤다.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광욕 발코니에 있어요. 무슨 일이예요?" "아처 씨가 오셨어요.... 전보로 부르신 분 말예요.""이리로 나오시라고 해요. 그리고 커피를 더 가져와요." "프렌치 도어로 나가세요." 라며 가정부는 돌아섰다. 내가 발을 내딛자 샘프슨 부인이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잔뜩 올라온 아침 햇살을 등지고 몸에 타월을 두른 채 긴 의자에 절반쯤 누워 있었다. 그녀 옆에 휠체어가 있었으나 불구의 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비쩍 말라 있었고 살결은 갈색이었다. 햇볕에 너무 그을려서 단단하게 보일 정도였다. 햇빛을 받고 있는 고수머리는 좁은 이마에 마치 크림 거품처럼 바짝 붙어 있었다. 나이는 마호가니 조상(彫像)처럼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책을 가슴 위에서 내려놓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 평판은 들었어요. 밀리센트 드루와 클라이드가 헤어졌을 때 당신이 퍽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말예요." "꽤 긴 이야기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추잡한 이야기들이죠." "당신은 밀리센트와 클라이드가 너무 추잡하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소위 탐미주의자들 말예요! 난 클라이드의 정부가 인간이 아닌 무슨 동물일 거라고 늘 의심해 왔어요." "나는 고객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말과 함께 나는 그녀에게 소년과 같은 미소를 보냈다. 하도 써먹어서 비록 닳아빠진 미소이긴 했지만. "이야기도 하지 않나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객들에게도 말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신선했지만 병적인 소음(騷音)이 전음(顚音) 밑에 깔려 있었다. 나는 어쩐지 겁을 먹고 있는 듯하고, 또 아름다운 갈색 육체 속에 질병을 감추고 있는 듯한 샘프슨 부인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앉으세요, 아처 씨.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하실 거예요. 아니, 궁금하시지 않은가요?" 나는 긴 의자 옆의 '덱 체어' 에 앉았다. "물론 궁금하지요. 억측까지도 한답니다. 내가 맡는 일은 대부분 이혼문제니까요. 그래서 보시다시피 이렇게 남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고 있습니다." "아처 씨, 자신을 비방하시는군요. 그리고 당신은 탐정처럼 이야기하진 않는군요. 당신이 이혼 얘기를 꺼내주어 반가워요. 그런데 이혼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처음부터 분명히 해두고 싶군요. 결혼생활이 지속되길 원해요. 난 남편보다 더 오래 살 작정이거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의 갈색 피부는 조금 거칠고 시들어 있었다. 햇볕은 그녀의 구릿빛 다리와 나의 머리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의 발가락과 손톱은 다같이 핏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건 적자생존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아마 내가 다리를 못 쓰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그러나 난 남편보다 스무살이나 젊어요. 난 남편보다 더 오래 살 생각이에요." 괴로움이 그녀의 목소리 속에 들어가서 마치 말벌처럼 왱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뇌에 찬 목소리를 듣자 그 소리를 꼴깍 삼켰다. "이곳은 용광로 같죠? 남자분들이 윗도리를 입어야 하는 건 공평치 못해요. 윗도리를 벗으세요." "괜찮습니다." "당신은 대단한 신사로군요." "어깨에 권총을 메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직도 궁금합니다. 부인께선 전보에 '앨버트 그레이브스'에 대해 쓰셨던데..." "그분이 당신을 소개했어요. 랠프의 고문변호사 중 한 사람이지요. 점심 뒤에 그분과 보수문제를 결정하세요." "그분은 지방검사를 그만두었나요?" "예, 전쟁이 끝난 뒤에요." "전쟁이 끝나기 전인 40년과 41년에 그분 밑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 뒤론 못 뵈었습니다만." "그분은 나에게 당신이 사람을 잘 찾아낸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검은 얼굴에 흰 이빨을 드러내며 식인종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처 씨, 당신은 정말 사람을 잘 찾아내시나요?" "실종자를 잘 찾지요. 바깥 주인께서는 실종되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실종은 아니에요. 그인 혼자,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집을 나가버렸답니다. 내가 실종자 조사국에 간다면 그이는 펄펄 뛸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분을 찾아내어 그분과 함께 간 사람의 신원을 아시고 싶다는 거군요. 그리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이가 있는 곳과, 그이와 함께 있는 사람을 나에게 알려주세요.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어요." 그녀는, '나는 병자이고 비록 다리는 못 쓰지만.'하고 작아서 들리지 않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은 언제 집을 나갔나요?" "어제 오후예요." "어디서요?" "로스앤젤레스에서요. 그이는 라스베이가스에 가 있었어요. 근처 사막에 우린 땅이 있거든요. 그러다가, 그이가 어제 오후에 앨런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비행기로 떠났지요. 앨런은 조종사예요. 랠프는 공항에서 앨런을 떨쳐 버리고 혼자 자취를 감추었대요." "왜 그랬나요?" "술에 취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녀의 붉은 입술은 멸시하는 듯이 일그러졌다. "앨런은 그이가 술을 마셨다고 했어요." "부인은 그분이 법석을 떠느라고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분은 종종 그랬나요?" "종종이 아니라 늘 그랬어요. 그이는 취하면 걷잡을 수 없어요." "여자관계는?" "남자들은 다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아요. 그이는 돈에 대해서는 허깨비예요. 몇달 전에도 산을 하나 남에게 주어버렸거든요." "산을?" "사냥 막사까지 끼워서 완전한 산을 하나 말예요." "여자에게 주었나요?" "차라리 여자에게 주었으면 좋았게요. 남자에게 주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에요. 회색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로스앤젤레스의 성자'라는 남자에게 주었어요." "그분은 잘 속아 넘어가는 분인 모양이군요?" "랠프가요?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그인 노발대발할 거예요. 그이는 난폭한 석유 투기꾼으로 시작했어요. 당신은 그런 종류의 인간을 아시죠? 절반은 인간, 절반은 악어, 절반은 곰덫이에요. 그이에겐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돼지 저금통이 있어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말예요. 그러다가 지난 2~3년 전부터 술에 약해졌어요. 두세 잔만 들어가면 어린애가 되고 싶어한답니다. 그이는 모성형의 여자나 부성형의 남자를 찾아가서 코를 풀어달라고 하고 눈물을 훔쳐 달라고도 하고, 일을 저지르면 엉덩이를 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내가 잔인한 사람인가요? 난 단지 객관적으로 얘기하고 있을 뿐이에요." "알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그분이 산을 또 주어버리기 전에 남편을 찾아달라는 거죠?" 생사는 불문이렸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정신분석 의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이가 여자와 함께 있다면 당연히 나는 흥미를 느낄 거예요. 그녀에 관해서 죄다 알고 싶답니다. 그런 신나는 일을 놓쳐버릴 순 없기 때문이죠." 나는 그녀의 정신분석 의사가 누군지 정말 궁금했다. "어떤 여자인지 짐작도 안 갑니까?" "랠프는 나에게 얘기하지 않아요. 그이는 나보다도 미란다하고 더 가깝죠. 그리고 나에겐 그이를 감시할 수단도 없고요. 그래서 당신을 고용하는 겁니다." "탁 터놓고 말해서요."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언제나 탁 터놓고 말하죠." 제2장. 주정뱅이 석유왕의 실종 하얀 윗도리를 입은 필리핀 인 하인이 활짝 열린 프렌치 도어에 나타났다.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샘프슨 부인." 그는 긴 의자 옆의 낮은 테이블 위에 은제 커피 세트를 내려놓았다. 그는 체구가 작고 민첩했다. 조그맣고 동그란 두상(頭狀)의 머리카락은 기름을 칠한 것처럼 반들반들하고 새까맸다. "고마워요, 펠릭스." 그녀는 하인에게 인자했다. 아니면, 나에게 그런 인상을 주고 싶었겠지. "좀 드시겠어요, 아처씨?"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은 술은 좋아하시겠네요?" "점심 전엔 술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좀 색다른 탐정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일어나서 일광욕 발코니의 바다 쪽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일광욕 발코니 아래는 테라스들이 긴 녹색의 계단을 이루며 언덕배기의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언덕배기 바로 밑은 해변이었다. 집 모퉁이 쪽에서 물방울이 튀는 소리가 들려서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풀 장이 위쪽 테라스에 있었는데, 푸른 타일 속에 타원형의 녹색 액체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사내애와 계집애가 숨바꼭질을 하면서 물개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계집애가 사내애를 쫓아갔다. 사내애는 계집애에게 붙잡혀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다 큰 총각 처녀이었고, 지금까지 움직이던 장면이 태양 속에서 얼어붙은 듯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 뒤에 서서 남자의 허리를 껴안고 있었다.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하프를 타듯이 그의 갈빗대를 살그머니 만지다가 오목한 가슴에 난 털을 꼭 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의 등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마치 청동의 장님상처럼 긍지와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 비켜섰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 모습이 드러났다. 몹시 연약해 보였다. 그녀의 두 팔은 목적을 잃은 듯이 처졌다. 그녀는 풀 장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물속에서 디룽거렸다. 얼굴빛이 검은 청년은 다이빙대에서 한 바퀴 반을 돌고 떨어졌다. 그녀는 못 본 체했다. 물방울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서 마치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가슴속으로 흘러들었다. 샘프슨 부인이 내 이름을 불렀다. "점심 안 드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펠릭스, 파티오 (스페인식 집의 안뜰) 에 3인분 점심을 차려놓으세요." 펠릭스는 살짝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그녀는 그를 다시 불렀다. "내 화장대에서 남편 사진을 가져오세요. 당신은 그이 얼굴을 알아두셔야 하죠, 아처 씨?" 가죽 사진첩 속에 있는 얼굴은 살이 찌고 머리카락은 엷은 회색이며, 입은 차분하지 못했다. 두터운 코가 대담해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고집불통으로 보였다.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주름이 지고, 축 처진 볼때기에 군살이 잡힌 미소는 판에 박은 듯이 억지로 지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미소는 시체안치실에서 주검의 가면 같은 얼굴 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미소는 내가 늙어가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볼품은 없지만 내가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에요." 라고 샘프슨 부인이 말했다. 펠릭스는 킬킬거리는 건지 투덜거리는 건지, 아니면 한숨을 내쉬고 있는 건지 모를 조그마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뭐라고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펠릭스는 파티오에 점심을 차렸다. 파티오는 집과 산 중턱 사이에 있는 붉은 타일을 깐 삼각형의 뜰이었다. 석조 옹벽 위에는 경사면에 지의류(地衣類)와 아제라툼과 로벨리아가 부서지지 않는 청록색 파도 모양으로 심어져 있었다. 내가 펠릭스의 안내로 안뜰에 들어가자 아까 그 얼굴빛이 검은 청년이 파티오에 있었다. 그는 긍지와 분노는 걷어치운 채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편안한 자세로 있었다. 그는 키가 아주 커서 함께 서 있으니 내 키가 보통보다 좀 작게 느껴졌다. 190cm 정도는 되었다. 그는 내 손을 단단히 쥐었다. "앨런 태거트라고 합니다. 샘프슨 씨의 비행기를 조종하지요." "루 아처요." 그는 왼손으로 조그마한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무얼 마십니까?" "우유." "농담이시겠지? 당신은 탐정인 줄 알았는데요." "발효시킨 암말의 젖이오." 그는 유쾌한 듯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를 지었다. "내 술은 '진 비터즈'입니다. 포트 모레스비에서 이걸 마시는 버릇을 배웠지요." "비행을 많이 했겠군요." "출격 55회, 그리고 2,000 시간 비행." "어디서?" "대부분 캐롤라인 군도에서요. 난 P_38 을 탔었소." 그는 탑승기의 이름을 아가씨의 이름처럼 사랑스러운 향수를 느끼는 듯 말했다. 아까 그 아가씨가 검은 줄무늬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 옷은 좁혀야 할 곳만 좁히고 다른 데는 넉넉하니 풍성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은 말리고 빗질을 했는데도 머리 주위에 물거품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갈색 얼굴에서 커다란 녹색 눈이 마치 인디언의 밝은 눈동자처럼 유난히 밝고 기묘한 느낌을 던져주었다. 태거트는 그녀를 소개했다. 그녀는 샘프슨의 딸 미란다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금속 테이블에 앉으라고 권했다. 테이블 가운데에 비치 파라솔이 달린 쇠막대기가 꽂혀 있었다. 나는 마요네즈가 쳐진 연어 너머에 앉아 있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키가 큰 이 아가씨의 동작에서 차츰 세련된 매력이 풍겨나오고 있어서 가만히 지켜볼 만했다. 만 15살에 사춘기에 들어서서 20살이나 21살에 결혼이나 첫 정사를 경험하게 된다. 연애의 꿈에서 벗어나 처녀에서 여자가 되기까지 고단한 몇 해를 보내고, 이어서 28살이나 30살에 완전히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그녀는 21살 가량 되었고, 샘프슨 부인의 딸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우리 새엄마는.... "하고 그녀는 마치 내 생각을 알고나 있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새엄마는 언제나 극단적이에요." "샘프슨 양, 나를 두고 한 말입니까? 난 매우 평범한 탐정인데요?" "꼭 당신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에요. 새엄마가 하는 일은 매사가 다 극단적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망아지에서 떨어져도 허리 아래가 마비되진 않아요. 그러나 엘레인은 그렇게 되었어요. 그건 심리적 이유에서라고 생각돼요. 엘레인은 예전처럼 그런 미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경쟁에서 뒤지게 되었지요. 낙마한 것이 그런 계기가 되었어요. 새엄마는 아마 일부러 낙마했을걸요." 태거트가 짤막하게 웃었다. "미란다, 그만해 두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지?" 그녀는 오만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나를 욕하진 마세요." "내가 여기 온 것에도 심리적 이유가 있습니까?"하고 내가 물었다. "난 왜 당신이 여기 계시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버지의 뒤를 밟는다든가 하는 그런 일인가요?" "비슷한 일이오." "새엄마는 아버지에게서 무언가를 알고 싶어해요. 남자가 하룻밤 집을 비운다고 해서 탐정을 불러들인다는 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게 걱정된다면 신중히 생각해 보겠소." "걱정될 건 없어요."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난 단지 심리적 관찰을 했을 뿐이에요." 필리핀 인 하인이 기척도 없이 파티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펠릭스의 변함 없는 미소는 일종의 가면이었다. 그의 개성은 그 가면 뒤에 외롭게 자리잡고서 멍이 든 것 같은 눈 안쪽 구석에서 은밀히 밖을 엿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쫑긋한 귀가 내가 한 말을 죄다 듣고 나의 숨소리를 세며, 맑은 날씨에 내 심장의 고동소리까지 듣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거트가 느닷없이 화제를 바꾸었다. "진짜 탐정을 만난 건 생전 처음인 것 같은데요." "사인이라도 해드릴까요? 난 X라고만 쓰지만." "솔직히 말해서, 탐정이라는 것에 관심이 쏠리는군요. 한때는 나도 탐정이 되고 싶었지요. 비행기를 타기 전이지만. 아이들은 대개가 탐정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꿈에 집착하지는 않지요." "왜요? 탐정이 싫어선가요?" "이 직업은 장난이 아니오. 그런데 샘프슨 씨가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당신은 동행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복장은?" "스포츠복 차림이었지요. 해리스 트위드의 윗도리에 갈색 모직 셔츠, 엷은 갈색 바지에 브로그 구두, 모자는 쓰지 않았고요." "정확히 언제 일이오?" "약 3시 30분경, 우리들이 어제 오후 버뱅크에 착륙했을 때였습니다. 다른 비행기들이 이동하고 나서야 내 비행기를 격납할 수 있었죠. 나는 늘 그 일을 직접 했습니다. 도둑맞지 않도록 특별장치를 해놓는답니다. 샘프슨 씨는 호텔에다 리무진을 보내달라고 전화하러 갔었고요." "어느 호텔?" "발레리오 호텔." "윌셔 근처 원주민 부락인가요?" "아버지는 그곳에 방갈로를 가지고 있어요."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조용한 곳이어서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했어요." "내가 정문 입구 쪽으로 나가 보니--" 하고 태거트가 말을 이었다. "샘프슨 씨는 이미 사라지고 없더군요. 하지만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몹시 취하셨지만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약간 약이 올랐습니다. 버뱅크에서 꼼짝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되었으니까요. 단 5분간을 기다려 주시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발레리오까지는 택시로 3달러 거리인데, 그런 돈조차 내겐 없었다니까요." 그는 자기가 너무 말을 많이 했나 하고 미란다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재미있어 하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하고 그는 말했다. "호텔까지 버스를 탔지요. 30분씩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탔다고요. 그런데 호텔엔 계시지 않더군요. 그래서 어둑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았지요. 그리고 나서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샘프슨 씨는 발레리오에 가시긴 가셨나요?" "아닙니다. 아예 가시지도 않았더군요." "짐은 어떻게 되었소?" "없었습니다." "그럼, 외박할 생각은 없었겠군?" "그렇다고도 하지 못할 거예요." 하고 미란다가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발레리오의 방갈로에 필요한 건 뭐든지 두셨으니까요." "지금쯤은 거기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니에요. 엘레인이 한 시간마다 전화를 걸고 있는걸요." 나는 태거트에게 물었다. "그 분은 예정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없었소?" "어제는 발레리오에서 묵을 예정이었지요." "당신이 비행기를 격납고에 넣고 있는 동안 그분이 혼자 있었던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15분 정도-- 20분 이상은 아닙니다." "그럼, 발레리오에서 리무진 차가 꽤 빨리 도착한 게로군. 샘프슨 씨는 호텔에 전화를 걸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공항에서 누굴 만나셨을지도 몰라요."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엔 친구분이 많으셨나요?" "대부분이 사업상의 친구예요. 아버진 아무하고도 별로 어울리지 않으셨어요." "그분들 이름을 알려줄 수 있습니까?" 그녀는 그 이름들이 벌레나 되는 것처럼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에게 물어보면 될 거예요. 그분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찾아갈 거라고 말해 두겠어요. 펠릭스가 차로 안내할 거예요. 그러고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어요?"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앨런이 그곳까지 비행기로 모실 거예요." 그녀는 일어서서 거만한 눈초리를 번득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앨런, 오늘 오후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죠?" "기꺼이 모시죠." 하고 그는 말했다. "심심찮게 됐습니다." 그녀는 집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분노치곤 귀엽게 봐줄 만했다. "저 아가씨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일어서서 내 앞에 우뚝 섰다. "무슨 뜻이오?" 그에게는 오만한 고교생의 독선적인 면이 한 가닥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콕 찔렀다. "그녀에겐 키가 큰 사나이가 필요한가 봅니다. 당신이면 멋진 한 쌍이 되겠는데." "물론이지, 물론이오." 그는 고개를 부정적으로 양쪽으로 흔들었다. "그런데 나와 미란다 사이에 대해서 성급하게 속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란다도 포함해서?" "난 우연히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건 당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지. 저 검둥이도 물론이고." 검둥이란 부엌으로 통하는 입구에 서 있는 펠릭스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갑자기 그림자를 감추었다. "저 녀석이 내 신경을 건드린단 말이오." 라고 태거트가 말했다. "언제나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엿듣고 있거든요." "아마 단순한 관심 뿐일 거요."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에서 내 마음에 걸리는 녀석이 있다면 바로 저 자요. 난 가족들과 식사는 함께 하고 있지만, 막상 다급할 땐 하인이 아니라곤 말 못해요. 조종사에 불과하니까." 미란다에겐 그게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진 않았다. "쉬운 일 아니오? 샘프슨 씨도 내내 비행기만 타고 있을 순 없잖겠소." "비행기를 타는 건 내겐 아무렇지도 않아요. 난 그게 좋아요. 내가 싫은 건 늙은이의 감시인 노릇을 하는 거지." "그에겐 감시인이 필요한가요?" "그분이야 언제든지 소란을 피워도 되죠. 미란다 앞이라 당신에게 말을 못했지만, 샘프슨 씨가 지난 주에는 사막에서 죽을 작정을 하고 술을 마시는 것 같았어요. 하루에 1쿼트 반이나 마셔대는걸요. 그렇게 술을 마시다간 과대망상증에 걸려요. 난 술주정꾼 뒤치다꺼리는 아주 질색입니다. 그런 뒤엔 그는 마음이 헤퍼지는 거지요. 나를 양자로 삼아서 항공노선을 사주겠다는 둥." 그는 목소리를 거칠게 해서 주정뱅이 늙은이의 흉내를 냈다. "앨런, 내가 자넬 돌봄세. 항공노선을 사줄께." "아니면 산을?" "난 항공노선 얘기는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분이면 그런 일 정도는 저지를 수 있을 거요. 그러나 술이 깨면 아무것도 줄 생각을 하지 않아요. 한푼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철저한 정신분열증 환자로군." 하고 나는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된 거죠?" "확실히는 모르겠소. 2층에 있는 그 계집년에게 걸리면 누구나 돌아버리게 되는 모양이오. 그리고 그분은 전쟁 때 외아들을 잃었지요. 아마 그럴 즈음에 내가 나타났을 거요. 그분에게 전속 조종사가 꼭 필요하진 않소. 아들인 밥 샘프슨도 조종사였어요. 일본의 시카시마 상공에서 격추당했다는군요. 그 때문에 노인은 충격을 받았다고 미란다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란다는 아버지와 사이가 어떤가요?" "꽤 좋지요. 그런데 최근에 부녀간에 틈이 생기고 있어요. 샘프슨 씨는 미란다를 시집보내려고 애쓰고 있거든요." "누구, 정해진 사람에게?" "앨버트 그레이브스." 그는 이 말을 찬성도 반대도 아닌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3장. 삼각관계 고속도로는 바닷가 마을의 저지대에 있는 산타 테레사로 이어졌다. 우리는 2 킬로미터나 늘어선 빈민가를 통과했다. 무너져 가는 오두막집들, 가게 앞의 노점들, 옛날에는 보도였던 질척한 오솔길들, 그리고 먼지 속에서 뛰노는 흑인, 또는 유색인종의 어린애들. 중심가 쪽으로 가까운 곳에 판지 케이크 겉에 바른 크림처럼 빛나는 네온사인 간판의 여행자용 호텔 몇 채와 붉은 빛으로 칠한 싸구려 식당, 주당들이 모여드는 초라한 술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의 절반 가량은 땅딸막한 인디언 체구에 모로코 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카브릴로 협곡을 지난 뒤부터는 마치 다른 행성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캐딜락은 마치 지상을 미끄러져 가는 우주선과도 같았다. 펠릭스는 중심가에서 왼쪽으로 꺾어져서 바다 반대쪽으로 향했다. 길거리는 높이 올라갈수록 변해갔다. 남자들은 여러 색깔의 셔츠와 린네르 양복을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헐거운 바지나 복부가 노출되는 옷차림으로 캘리포니아 스페인계 상점들과 사무실 빌딩 등을 드나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마을 위에 솟아 있는 산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산은 의연히 존재함으로써 그들 모두를 어리석게 보이게 했다. 태거트는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내 마음에 들 필요까진 없소. 당신은?" "돈을 벌기에는 아주 경기가 없는 곳이죠. 사람들은 마치 코끼리처럼 죽기 위해 이곳에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죽지 않고 살아가지요. 그것도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오." "당신은 이곳엘 전쟁 전에 와보았어야 할 걸 그랬군. 과거에 비하면 현재 이곳은 와글와글 들끓는 벌집이나 다름없소. 옛날에는 기껏해야 돈많은 늙은 부인네들이 상품권이나 뜯어내고 지독한 구두쇠 노릇이나 하면서, 정원사들의 품삯마저도 깎으려 들던 곳에 불과했소." "당신이 이 마을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몰랐는데요."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이 지역 담당검사였을 때 두세 사건을 맡아 함께 일을 했었지." 펠릭스는 사무실 빌딩의 안뜰로 이어지는 노란 벽토를 바른 아치 길 앞에 멈춰섰다. 그는 차창을 열고 말했다. "그레이브스 씨 사무실은 2층에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지요." "나는 여기서 기다리지요." 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그레이브스의 사무실은 그가 사건을 처리할 때 사용하는 법정의 지저분하고 좁은 방과는 대조적이었다. 대기실은 시원한 초록색 천과 흰색으로 칠해진 목재로 꾸며져 있었다. 게다가, 시원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금발의 아가씨가 접수대에 앉아 있어서 실내의 색채 조화는 더욱 완벽했다. 그녀가 물었다. "약속을 미리 하셨습니까?" "그레이브스 씨에게 루 아처가 찾아왔다는 말만 전해 주시오." "그레이브스 씨는 지금 매우 바쁘십니다." "그렇다면 기다리겠소."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샘프슨에 대한 일을 생각했다. 금발 아가씨의 흰 손가락이 타이프라이터 키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괜스레 초조해지면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찾기 위해서 고용되었다는 점이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성직자들과 교제하던 석유재벌이 결국은 과음으로 죽었다는 것 아닌가. 그의 사진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사진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쪽 문이 열리고 한 노부인이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인사하고는 만족한 듯이 웃음소리를 내며 뒷걸음쳐 나왔다. 그 여자의 모자는 해변에 떠내려온 걸 건져낸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자줏빛 비단 드레스에 매달린 회중시계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그녀의 뒤를 따라나갔다. 그녀는 그가 아주 예리해서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감사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고맙다는 듯이 듣는 체했다. 나는 일어섰다. 그는 나를 보고서는 그 여자의 모자 너머로 눈짓을 보냈다. 그 모자가 사라지자 그는 문 쪽에서 돌아왔다. "루, 만나서 반갑네." 그는 내 등을 두드리지는 않았으나, 손아귀 힘만은 여전히 억셌다. 그러나 세월이 그를 변하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머리는 관자놀이까지 벗겨져 있었고, 작은 회색 눈동자가 잔주름 사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푸른빛이 감도는 턱은 양옆으로 처져 있었다. 그가 나보다 다섯 살도 채 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별로 편치 못했다. 그레이브스는 험난한 길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바로 노쇠를 재촉했다. 나도 그를 만나 반갑다고 말했다. 정말로 반가웠다. "아마도 6~7년은 될 걸세."하고 그가 말했다. "정말 그쯤 되겠군요. 당신은 이젠 검찰직에 계시지 않는 모양이군요." "버텨나갈 수가 없었어." "결혼하셨습니까?" "아직 못했다네. 인플레 때문에 말이야." 그는 싱긋 웃었다. "수는 잘 있나?" "수의 변호사에게 물어보시죠. 그 여잔 나와 사는 것이 싫어졌다는군요." "그것 참 안됐군, 루."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재판 일은 많습니까?" "종전 후론 그렇지 않다네. 이런 마을에서는 통 수지가 안 맞아."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하고 나는 실내를 돌아보았다. 냉정한 금발 아가씨가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나의 일선이라네. 나는 아직도 투쟁하는 검사지. 그러나 한편으론 늙은 부인네들과 대화하는 법도 배우고 있다네." 그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루, 이리로 들어오게나." 안쪽 사무실은 훨씬 넓었고 시원했으며, 꽤 많은 장식물로 꾸며져 있었다. 장식물이 없는 두 벽에는 사냥 그림의 복사판들이 걸려 있었고, 다른쪽 벽은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커다란 책상 뒤에 선 그가 오히려 왜소해 보였다. "정치는 어떤가요?" 하고 내가 물었다. "당신은 주지사가 되려고 하셨잖습니까, 생각나시나요?" "캘리포니아에선 당(黨)이 산산이 깨졌네. 하지만 어떻든 내 자신의 정치욕은 충족시켰지. 바바리아 지방의 어느 마을을 2년간 다스렸거든. 군정(軍政)이긴 했지만." "뜨내기 정치꾼이었나요? 나는 정보부에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랠프 샘프슨 씨 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샘프슨 부인과 이야기해 보았나?" "해보았지요.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사건의 요점을 모르겠더군요. 당신은 아십니까?" "물론 난 알고 있어야지. 내가 그 방법을 알려준 셈이니까." "왜요?" "샘프슨 씨는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500만 달러를 가진 사나이는 그와 같은 모험을 해서는 안되지. 루, 그는 주정뱅이라네. 아들이 전사한 뒤부터는 더욱 심해졌어. 나는 그가 정신 이상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늘 걱정이 되었다네. 샘프슨 부인이 자네에게 클로드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던가? 샘프슨 씨가 사냥 막사를 주었다는 인물 말일세." "오라, 그 성자 말이군요." "클로드는 해를 끼치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아. 그러나 그 다음 인물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네. 자네에게 로스앤젤레스에 대해서는 말해 줄 필요도 없겠군. 이곳은 늙은 주정뱅이가 혼자 살기에는 안전한 곳이 못 된다네." "그렇겠죠."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 말은 내게 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샘프슨 부인은 남편이 은밀히 즐기려고 여행을 떠난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내가 그 부인에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도록 부채질했네. 그 여자가 남편을 보호하는 데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해서 말이야." "당신이 돈을 쓰시겠군요." "그 여자의 돈을 쓰지. 나는 그 사람의 변호사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그 노인네를 좋아한단 말일세." 그리고 그의 사위가 되길 바라고 있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돈을 얼마나 내겠답니까?" "자네가 원하는 대로 일단 50달러에다가 경비는 별도일세, 어떤가?" "75달러 주시죠? 이 사건의 헤아리기 어려운 점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65달러일세." 하고 그는 활짝 웃었다. "나도 내 고객을 보호해야지." "그런 문제로 다투고 싶진 않습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일지도 모르니까요. 샘프슨 씨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을 수도 있잖겠습니까?" "그런 점도 이미 고려해 보았네. 그 사람은 이 근처엔 친구가 별로 없어. 자네에게 그 사람이 교제하던 사람들의 명단을 주겠네. 그러나 최후의 방편으로라면 모르지만,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아. 그의 진짜 친구들은 텍사스에 살고 있지. 그 사람은 바로 거기서 돈을 벌었다네." "당신은 이 사건을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한 발자국 더 나가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자넨 일자리를 잃을 말만 하는군." "그렇습니까?" "루, 그럴 수는 없다네. 만일 경찰이 내 대신 그를 찾아낸다면 그는 당장 나하고는 관계를 끊을 걸세. 게다가, 나로서는 그가 여자와 함께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네. 작년에는 그를 샌프란시스코의 50달러짜리 매음굴에서 찾아낸 적이 있었거든." "당신은 그곳에 왜 갔었습니까?" "그를 찾으러." "이 사건은 이혼의 요인도 될 듯싶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샘프슨 부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난 아직도 이 사건을 종잡을 수 없고, 그 여자의 말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도 그 여잘 알게 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네. 그러나 적어도 그녀를 어느 선까지는 다룰 수 있지. 무엇이든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내게 가져오게나. 그 여자에겐 탐욕과 허영과 같은 두서너 가지 뚜렷한 동기가 있어. 자네가 그녀와 거래를 할 때는 그러한 점들을 고려하게나. 그리고 그녀는 이혼은 원치 않는다네. 차라리 좀더 기다렸다가 그의 재산을 몽땅, 아니면 그 절반이라도 상속받으려 하겠지. 미란다 양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할 거고." "그게 그녀의 주된 동기인가요?" "적어도 내가 그 여자를 알게 된 뒤로는, 아니 아마도 그녀가 샘프슨과 결혼한 이래로는 그랬을 거야. 그녀는 과거에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었지. 댄서, 화가, 디자이너 등등. 하지만 재능이 없었어. 그녀는 한동안은 샘프슨의 정부였다네. 그러다가 그에게 전적으로 비비적거리다가는 마침내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지. 그게 6년 전 일이야." "그 여자의 다리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녀는 자기가 훈련시키던 말에서 떨어져 돌에 머리를 부딪쳤다네. 그 뒤론 아주 걷지 못해." "미란다 양은 그 부인이 걷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요?" "미란다와도 대화를 나누었나?" 그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어때, 굉장한 여자가 아니던가?" "그렇더군요." 라고 말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축하합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그레이브스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자동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도중에 그가 내게 물었다. "그녀가 내 얘길 하던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로 짐작했지요." "그녀는 굉장한 여잘세." 라고 그는 되풀이했다. 나이 사십에 그는 사랑에 도취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차에 이르렀을 때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란다가 뒷자리에 앨런 태거트와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뒤쫓아왔어요. 나도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겠어요. 버트, 안녕하세요?" "안녕, 미란다." 그는 그녀에게 불쾌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태거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거트는 그저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일종의 삼각관계였지만 결코 정삼각형은 아니었다. 제4장. 12각형의 방 우리는 공항을 휩쓸고 해안 앞바다로 불어가는 바람 속으로 날아올라 산 남쪽 분기점으로 항했다. 산기슭에 자리잡은 산타 테레사는 한 장의 천연색 항공지도였고, 항구에 정박한 범선들은 하이타이를 풀어넣은 물통 속에 떠 있는 하얀 비누 조각이었다. 공기는 무척 맑았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은 마치 판지로 만들어 세운 세트처럼 윤곽이 너무도 뚜렷해서 손가락으로 찌르면 뻥 뚫릴 것만 같았다. 이윽고 우리는 그것들을 타넘어가다 싸늘한 대기 속으로 올라갔다. 80 킬로미터의 지평선을 이루며 길게 뻗어 있는 황량한 산맥들이 눈 아래 펼쳐졌다. 비행기는 점차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바다 저편을 향해 날았다. 야간비행 장비를 갖추고 있는 4인승의 소형 비행기였다.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미란다는 앞좌석 태거트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조종간을 잡고 있는 태거트의 오른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기체를 조용하고 안정되게 유지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였다. 기체는 하강기류에 부딪쳐 고도를 30 미터쯤 낮추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그의 무릎을 움켜잡았다. 그는 그 손을 물리치지 않았다. 내 눈에도 명백한 일이었으니, 앨버트 그레이브스에게도 명백했으리라. 태거트가 원하기만 한다면 미란다는 그의 것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레이브스는 결국 비참한 좌절로 끝날 일에 쓸데없이 기대를 안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레이브스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란다는 그레이브스가 꿈꾸어 온 모든 것-- 돈과 젊음과 꽃봉오리처럼 탄탄한 젖가슴과 한창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원했고, 따라서 그녀를 소유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고, 그것들을 하나씩 손에 넣어왔다. 그는 오하이오 주 출신으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가 13살인가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농장을 잃고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났다. 버트는 6년 동안 고무공장에서 타이어를 만들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대학에 들어가 우등생이 되었다. 서른도 되기 전에 그는 미시건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년 동안 디트로이트에서 회사법을 연구한 다음 서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까지는 산맥을 본 적도 없었고 바다에서 수영을 해본 적도 없었으므로 그는 산타 테레사에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여행을 캘리포니아 주에서 보내고 싶어했었는데, 버트는 그런 중서부에 대한 꿈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물론 그 꿈에는 석유로 부자가 된 텍사스 백만장자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너무 바빠서 여자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시(市)검사보, 시검사, 지방검사를 거치면서 그는 마치 사회의 주춧돌을 닦는 듯한 태도로 많은 사건을 다루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당시 나도 그를 도와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어느 주의 대법원 판사는 법정에서의 그의 변론을 가리켜 법률학의 모범이라고까지 논평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마흔이 된 지금 그레이브스는 담벼락에 대고 박치기를 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그는 그 벽을 뛰어넘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벽 스스로가 무너질 수도 있다. 파리를 쫓는 망아지처럼 태거트가 다리를 흔들었다. 비행기는 방향을 잡아 다시 제 항로로 찾아들었다. 미란다는 그의 무릎을 잡고 있던 손을 치웠다. 약간 화가 나서 귀 밑까지 붉어진 태거트는 조종간을 잡아당기고서 날아올랐다. 마치 그녀를 뒤에 남기고 창공의 품 속에 홀로 안길 수 있다는 듯이 날아올랐다. 천정의 온도계가 섭씨 4도 이하로 내려갔다. 24 킬로미터 상공에서 저 멀리 오른편 아래쪽에 펼쳐진 산타 카탈리나 섬이 보였다. 몇 분 뒤, 우리는 왼쪽으로 돌아 하얗게 얼룩진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나는 엔진 소리를 덮어누를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버뱅크 공항에 착륙할 수 있겠소? 뭣 좀 물어보고 싶은데." "그럴 생각입니다." 기체가 선회하며 계곡으로 접어들자 한여름의 열기가 기체에까지 올라왔다. 열기는 결이 고운 잿가루처럼 쓰레기 하치장과 들판과 반쯤 개발된 교외를 덮고 대기를 메우며, 국도와 대로를 달리는 조그마한 차량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미세한 흰 먼지가 콧구멍으로 스며 들어와 목이 깔깔했다. 그 깔깔함은 내가 언제나 품고 있었던 느낌과 한데 어울려, 반나절이 지나 시내로 돌아온 뒤까지도 지속되었다. 공항 택시 정류장의 안내원은 붉은 줄무늬 셔츠를 입고 양소매에 강철테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노란 모자가 잿빛 뒤통수에 거의 수직으로 매달려 있었다. 오랜 세월의 햇볕과 욕설이 그에게 분노로 붉어진 얼굴과 지극히 침착한 태도로 만들어주었다. 사진을 꺼내 보이니 그는 샘프슨을 기억해 냈다. "예, 그 양반 어제 여기 왔었습니다. 몸이 좀 불편한 듯이 보이기에 눈여겨 보았죠. 하지만 뭐 인사불성이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경비원을 불렀게요. 좀 지나치게 마셨던 게지요." "그렇고말고요." 하고 나는 얼른 말했다. "누구와 함께 왔던가요?" "글쎄, 난 모르겠는데요." 마치 더위에 지쳐 늘어진 듯한 여우 목도리를 둘이나 두른 여자가 옆에서 빠져나와 차도로 뛰어들었다. "지금 빨리 시내로 들어가야 돼요." "안됐습니다만, 부인, 차례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급한 일이라니까요." "차례를 기다리시라니까요." 하고 그는 지겨운 듯이 말했다. "보시다시피 차가 딸리지 않습니까?"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내게로 돌아섰다. "이보쇼, 뭐 또 물어볼 게 있소? 그 양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도 모릅니다. 그는 무얼 타고 떠났소?" "자동차지. 검은색 리무진. 아무 표시도 없길래 눈여겨 봐두었지요. 아마 어느 호텔에서 보내준 거겠지만." "차에 누가 타고 있던가요?" "운전사 뿐이던데." "아는 사람입디까?" "아뇨. 호텔 운전사를 몇 알기는 하지만 늘상 바뀌니까. 몸집이 작은 친구 같던데. 얼굴은 좀 창백하고." "차의 제조번호나 허가번호는 기억지 못하겠죠?" "형씨, 난 항상 눈을 크게 뜨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천재는 아니잖소?" "고맙소." 나는 그에게 1달러를 주었다. "나 역시 천재는 아닙니다." 나는 2층 칵테일 바로 올라갔다. 미란다와 태거트는 어쩌다가 어울리게 된 낯선 사람들처럼 앉아 있었다. "발레리오 호텔에 전화했습니다." 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리무진 한 대가 곧 이리로 올 겁니다." 잠시 뒤 나타난 리무진은 야구심판의 유니폼처럼 번쩍이는 푸른빛 사지 양복을 입고 헝겊 모자를 쓰고 있는, 체구가 작고 얼굴이 창백한 운전사가 몰고 있었다. 그러나 안내원은 어제 샘프슨 씨를 태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앞좌석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잽싸게 나를 돌아보았다. 잿빛 얼굴, 움푹 들어간 가슴, 눈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첨하듯 부드럽게 꼬리를 끄는 목소리였다. "발레리오로 갑시다. 어제 오후에 근무했었소?" "그렇습니다." 그는 기어를 넣었다. "누구 또 다른 분은 근무하지 않았소?" "아뇨, 야간에 근무하는 친구가 하나 있긴 합니다만 6시 전에는 오지 않지요." "어제 오후 혹시 버뱅크 공항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나요?" "아니오." 그의 눈에 슬며시 근심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의 눈에는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잖소?" "아니오, 확실합니다. 이쪽으로 나온 일이 없었으니까요." "랠프 샘프슨을 아시오?" "발레리오에 묵으셨던 분 말씀입니까? 예, 그럼요. 알고말고요." "최근에 그를 본 일이 있소?" "아니오, 몇 주 동안 뵙지 못했는데요." "알겠소. 그런데 출장 전화는 누가 받습니까?" "교환수지요. 제발 일이 잘못된 게 아니길 바랍니다. 샘프슨 사장님은 선생님 친구분이신가요?" "아니오."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 양반 고용인 중 하나요." 경어를 남발한 것이 후회되는지 그는 남은 길을 가는 동안 입을 꼭 다물고 차를 몰았다. 차에서 내릴 때 내가 팁을 1달러나 주자 그는 꽤나 당황해 했다. 요금은 미란다가 치렀다. "방갈로를 보고 싶소." 하고 나는 로비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먼저 교환양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는걸." "방갈로 열쇠를 찾아놓고 기다리죠." 교환양은 밤이면 사내들 꿈만 꾸다가도 낮에는 그들을 증오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처녀였다. "무슨 일이죠?" "어제 오후 버뱅크 공항에서 리무진을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텐데요?" "그런 종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아니오. 사실을 확인하자는 거요." "지금 무척 바쁩니다." 하고 그녀가 말했다. 동전처럼 짤그랑거리는 어조였다. 작고 딱딱한 두 눈이 은화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1달러짜리 지폐를 책상 위 그녀 팔꿈치 옆에 내놓았다. 그녀는 마치 더러운 물건을 보듯이 지폐를 쳐다보았다. "지배인을 불러야겠군요." "좋습니다. 나는 샘프슨 씨 일을 보고 있는 사람이오." "랠프 샘프슨 씨 말씀인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쾌활하게 바뀌었다. 혀를 굴리는 음성이었다. "그렇소." "예, 그분이 전화를 하셨어요!" "알고 있소. 그래서 어떻게 했소?" "그분은 제가 미처 운전사에게 알리기도 전에 곧바로 그 말씀을 취소하셨는걸요. 예정이 바뀌었던가 보죠?" "그래요. 두 번 다 그 양반인 건 틀림없소?" "그럼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저는 샘프슨 씨를 잘 알고 있거든요. 몇 년째 이곳에 오셨으니까요." 그녀는 그 깨끗하지 못한 1달러짜리 지폐가 행여 자기 책상을 더럽힐세라 냉큼 집어들어 싸구려 플라스틱 핸드백에 쑤셔넣었다. 그리고서 그녀는 붉은 신호등이 셋이나 켜진 스위치보드로 돌아섰다. 로비로 돌아가자 미란다가 일어났다. 그곳은 찍소리도 못낼 만큼 조용하고 호사스러운 곳이었다. 푹신한 양탄자와 푹신푹신한 소파, 그리고 연자줏빛 코트를 입은 보이들이 차려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박물관 안의 살아 있는 젊은 요정처럼 움직였다. "아버지는 근 한 달째 여기 오시지 않았대요. 지배인 대리에게 물어봤어요." "그가 열쇠를 내주던가요?" "물론이죠. 앨런이 방갈로를 열러 갔어요." 나는 그녀를 따라 복도를 내려가 끄트머리께의 튼튼한 철문에 이르렀다. 본관 뒤뜰은 잔디밭과 화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길이 있고, 양쪽엔 방갈로들이 늘어서 있었다. 높다란 돌담이 감옥처럼 둘러쳐져 바깥 세계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돌담 안에 갇힌 사람들은 매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테니스 코트와 풀 장, 식당과 바와 나이트 클럽이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돈이 가득 든 지갑이나 사용되지 않은 수표책 뿐이었다. 샘프슨의 방갈로는 다른 방갈로들보다 컸으며 상당히 큰 테라스가 붙어 있었다. 옆으로 나 있는 문은 열려 있었다. 우리는 불편해 보이는 스페인식 의자들이 제멋대로 놓여 있는 홀을 지나 높직한 천정을 참나무 대들보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진 화덕 앞의 기다란 의자에 태거트가 앉아서 몸을 숙인 채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고 있었다. "친구를 불러낼까 하고." 그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미란다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좀 돌아다녀 봐야겠어." "나하고 함께 지낼 줄 알았는데요." 그녀의 음성은 불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대개의 호텔 객실처럼 늘어놓은 것만 많을 뿐 개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버님은 일용품들을 어디다 두지요?" "아마 침실일 거예요. 여기에는 별로 물건을 두지 않아요. 갈아입을 옷 몇 벌 정도겠죠." 그녀는 홀 저편의 침실로 나를 안내하고는 불을 켰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에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방은 12각형으로, 벽이 12개나 되었지만 창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간접 조명의 붉은빛이 감돌았다. 주름잡힌 두텁고 붉은 커튼이 천정에서 바닥까지 드리워져 벽을 덮고 있었다. 방 중앙에 놓인 묵직한 안락의자와 침대도 역시 검붉은색이었다. 금상첨화격으로 천정에 원형 거울이 박혀 있어서 방 전체를 거꾸로 비추고 있었다. 그 붉은 그늘 속에서 나의 기억력은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이 방과 비슷한 방을 찾아냈다. 어떤 사건 때문에 찾아갔었던 멕시코 시티의 어느 나폴리식 유곽이었다. "여기서 지내려면 그 양반이 술을 마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군." "전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가 다시 꾸민 게 틀림없어요." 나는 방을 한 바퀴 돌았다. 12개의 벽에는 점성술의 12궁도가 각각 금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사수자리, 황소자리, 쌍동이 자리, 그리고 나머지 9개의 별자리들. "아버님은 점성술에 관심이 있었나요?" "예, 그래요." 하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말려보기도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오빠가 죽자 자제력을 잃었던 거죠.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빠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뭐 특별히 찾아가시는 점성술사라도 있었나요? 세상은 그런 사람들 투성이이니까." "모르겠는데요." 나는 한 커튼 뒤에서 벽장을 찾아냈다. 문 대신 커튼을 여닫게 되어 있었다. 안에는 셔츠와 구두, 그리고 골프복에서 야회복에 이르기까지 각종 양복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차례차례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어떤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지갑이 나왔다. 그 안에는 20달러 짜리 지폐 뭉치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을 꺼내어 벽장에 붙은 전구에 가까이 대고 보았다. 무당처럼 생긴 여자의 우수에 잠긴 검은 눈과 두툼하게 늘어진 입 모양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 양쪽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내려와 검은 드레스의 하이 네크라인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사진 아래쪽에는 일부러 그림자를 지게 했기 때문에 검은 옷과 그림자가 한데 어울려 검은빛 일색이었다. 그 그림자 위에 흰 잉크로 '페이로부터 랠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기를'이라는 말이 여자의 필적으로 쓰여 있었다. 분명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우수에 잠긴 눈만이 낯익을 뿐 그밖의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샘프슨의 윗도리에 지갑은 도로 넣고, 그 사진은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사진 수집의 제1호 증거물로 보관했다. "이것 보세요." 하고 내가 다시 방으로 들어섰을 때 미란다가 말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스커트가 무릎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실내의 장미빛 조명 속에서 그녀의 몸은 불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런 미치광이 방에 있으면 무슨 생각이 나죠?" 그녀의 머리카락은 온통 불타오르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반듯이 위를 향한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 늘씬한 몸뚱이는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방을 질러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불그스레한 빛이 내 손을 비쳐 내게도 뼈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눈을 떠요." 그녀는 눈을 뜨고 생긋 웃었다. "알아보셨군요, 그렇죠? 이 교도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 '살람보'처럼 말이죠." "책을 너무 많이 읽는군." 하고 내가 말했다. 내 손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진 채 달아오른 육체를 감지했다. 그녀는 내게로 몸을 돌려 내 몸을 잡아끌었다. 내 뺨 위에 그녀의 입술이 뜨겁게 짓눌렸다. "이거 어떻게 된 거요?" 하고 문간에서 태거트가 물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성이 난 듯이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그 어정쩡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뜻밖의 사건을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옷을 바로 매만졌다. 나로서는 조금도 재미가 없었다. 미란다 만큼이나 신선한 육체를 접해 본 것도 퍽 오랜만이었다. 온몸의 피가 마치 경마장을 달리는 망아지처럼 내 몸속을 치달렸다. "윗도리 주머니에 든 게 뭐길래 그처럼 딱딱하죠?" 미란다가 또렷한 어조로 물었다. "권총을 차고 있소." 나는 그 검은 머리 여자의 사진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혹시 이 여자를 본 적이 있소?'페이'라고 서명했는데."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나도."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그녀는 마치 한 점을 따내기라도 한 듯이 옆눈으로 태거트를 보며 남몰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휘젓기 위한 도구로 나를 사용했는데, 그게 나를 화나게 했다. 바깥을 내다볼 창 하나 없고 보이는 것이라곤 거꾸로 비친 영상 뿐인, 꼭 정신병자의 두뇌 속과도 같은 방.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제5장. 3호 촬영소 초인종을 누르자 통화관(通話管) 속에서 여자의 풍성한 음성이 가르랑거렸다. "누구시죠?" "루 아처입니다. 모리스는 집에 있습니까?" "그럼요, 어서 오세요." 버저가 울리며 아파트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층계를 올라가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엷은 금발의 뚱뚱한 여자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오랫동안 뵙지 못했군요." 나는 흠칫 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이는 새벽에야 눈을 붙였어요. 지금 아침 식사중이랍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3시 반이었다. 모리스 크램은 컬럼니스트를 위해 일하는 야간 취재기자여서,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까지 일했다. 나는 부인의 안내로 거실 겸 침실로 쓰는 방을 지나 부엌으로 갔다. 그 방에는 신문지와 책, 아직 잠자리를 치우지 않은 소파 겸용 침대가 들어차 있었다. 모리스는 가운을 입고 식탁에 앉아서 자기를 올려다보는 두 개의 계란 프라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검고 체구가 작으며, 두툼한 안경 뒤에서 검은 눈이 예리하게 빛나는 남자였다. 그 눈 뒤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중요 정보는 모조리 분류하여 간직한 조직적인 두뇌가 있었다. "밤새 안녕하셨나, 루?" 하며 그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후도 한참 됐어." "내겐 아침이야.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잖나. 여름날 자리에 들 때 샛노란 태양이 머리 위에 빛나도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이지. 오늘 아침엔 나의 어떤 뇌엽(腦葉)이 필요한가? 앞인가 뒨가?" 그는 '아침'을 강조했고, 부인 또한 내게 커피 한 잔을 따라줌으로써 남편의 말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까지도 샘프슨 가(家)의 꿈을 꾸다가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샘프슨 가에 관한 그 모든 일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말했더라도 아마 나는 곧이 들었으리라. 나는 그에게 '페이'라고 서명된 그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얼굴을 아나? 나도 본 듯한 얼굴인데, 아마 영화에서 봤을지도 몰라. 배우 타입이거든." 그는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물 간 흡혈귀로군. 마흔은 넘었겠고. 하긴, 이 사진도 10년은 됐겠구먼. 페이 이스터브룩이야." "이 여잘 아나?" 그는 포크로 계란 프라이를 찔러 터뜨려진 노른자가 접시를 노랗게 물들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번 본 적이 있지. 펄화이트 시대의 스타였어." "지금은 뭘 하고 먹고 사나?" "이렇다 할 만한 건 없어. 그냥 조용히 살고 있지. 한두 번 결혼한 적이 있고."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달걀을 먹기 시작했다. "지금도 결혼생활을 하고 있나?" "모르겠는걸. 지난번에 한 결혼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런 대로 수입을 올리고 있어. 심 쿤츠가 자기 영화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지. 왕년에는 그녀의 전속 감독이었거든." "부업으로 점성술도 겸하고 있지는 않나?"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두 번째의 달걀을 난폭하게 찔렀다. 무슨 질문이든 자기가 그 대답을 모른다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내게는 그 여자에 관한 기록이 없네, 루. 이젠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못 되거든. 하지만 그 여자에게 모종의 수입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제법 돈을 뿌리고 다니니까. 체이슨에서 본 일이 있다네." "물론 혼자였을 테지?" 그는 낙타처럼 음식을 좌우로 십으며 작고 진지한 얼굴을 찌푸렸다. "이 친구야, 자네가 내 뇌엽 앞뒤 양쪽을 다 파헤치자는 거로군. 내 뇌엽을 혹사하는 데 대한 대가는 있는 건가?" "5달러 내지." 하고 내가 말했다. "경비는 나오기로 되어 있어." 크램 부인은 젖가슴을 내 머리 위에서 출렁거리며 커피를 또 한 잔 따랐다. "영국인 건달 같은 사내와 함께 있는 걸 몇 번 봤어." "인상은?" "백발에 겉늙었고 눈은 푸르거나 잿빛, 체격은 보통이고 깡말랐어. 옷은 잘 입었고, 자네가 나이든 합창단 소년을 좋아한다면 미남으로 보이겠지." "내가 그런 타입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잖나. 또 다른 친구는 없나?" 나는 그에게 샘프슨의 사진을 보여주거나 그의 이름을 댈 수는 없었다. 그는 이름들을 모으는 대가로 양쪽에서 보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보수이긴 했지만. "적어도 한 번은 본적이 있네. 그녀가 10달러짜리로 옷을 해 입은 것 같은 관광객 비슷한 뚱뚱한 남자와 밤늦게 저녁을 먹는 걸 보았네. 그 친구, 곤드레가 되어서 문간까지 가는 데도 부축을 받아야 했지. 그것도 서너 달 전이었어. 그 뒤로는 그 여잘 본 적이 없네." "그래, 그 여자가 어디 사는지는 모르나?" "교외 어딘가에 살 테지. 그건 내 전공 밖이야. 어쨌든 5달러 상당의 정보는 제공했다고 보는데." "그건 부정하지 않네만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 시메온 쿤츠는 아직 일하고 있나?" "독립해서 TV 용 영화를 만들고 있지. 그 여자가 거기 나가 있는지도 모르겠군. 지금 촬영중이라고 하니까." 나는 그에게 5달러 지폐를 주었다. 그는 지폐에 입을 맞추고는 그것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체했다. 그의 손에서 마누라가 지폐를 잡아챘다. 내가 떠날 때도 그들은 귀여운 미치광이들처럼 깔깔거리면서 쫓고 쫓기며 부엌을 맴돌고 있었다. 타고 온 택시는 아파트의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시 집어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로스앤젤레스 일대의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이 이스터브룩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유니버셜 시티의 TV 영화제작소에 전화하여 페이 이스터브룩을 찾았다. 교환수는 그녀가 스튜디오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며 찾아보겠노라고 했다. 자그마한 촬영소에서도 그 모양이니 적어도 영화에 관한 한 페이는 분명히 한물 간 배우가 틀림없었다. 교환수가 다시 전화에 나왔다. "이스터브룩 양은 여기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촬영중입니다. 뭐 전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그리로 가지요. 몇 호 촬영소지요?" "3호입니다." "시메온 쿤츠가 감독합니까?" "예. 아시겠지만 출입증이 있어야 됩니다." "갖고 있소." 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떠나기 전에 나는 권총을 풀어 거실의 벽장 속에 걸어놓는 실수를 저질렀다. 무더운 날이라 거추장스럽기도 했거니와, 그것을 쓸 일도 없을 듯했기 때문이다. 벽장 안에는 낡아빠진 골프채들이 든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것들을 차고로 가지고 가서 차 뒤칸에 던져넣었다. '유니버셜 시티'의 건물 벽은 때에 찌든 칼라처럼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TV 영화제작소 건물들은 다른 것들보다는 새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길가에 늘어선 볼품없는 술집이나 지저분한 식당들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었다. 애당초 오랫동안 사용할 생각도 없었던 듯 석회를 이겨바른 벽돌은 한눈에도 날림 공사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주택가의 모퉁이를 돌아 차를 세우고 촬영소의 정문으로 골프 가방을 메고 갔다. 배역(配役) 사무실 밖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서 배역을 맡아 흐뭇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질을 너무 해서 해어질 정도가 된 검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고 있었다. 인정머리 없게 생긴 여자가 그 또한 인정머리 없게 생긴 꼬마 계집애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있었다. 분홍색 비단 옷을 입은 그 계집애는 깩깩 울어대고 있었다. 뚱뚱하거나 마르고, 수염이 더부룩하거나 깨끗했고, 정장을 하고 솝브렐로 (멕시코 모자) 를 쓰고, 병들고 알코올에 중독되고 노쇠한 -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한물 간 - 배우들이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다. 결국은 일어나지 않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나는 쫙 깔려 있는 글래머들을 눈 딱 감고 외면하며 어둠침침한 홀을 지나 회전문으로 갔다. 먹다 남은 햄조각처럼 생긴 턱주가리를 한 중년의 사내가 푸른 경비원 제복을 입고 문가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골프 가방을 매우 소중한 듯이 껴안고는 문앞에 멈춰섰다. 경비원이 눈을 반쯤 뜨며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그가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어떤 질문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쿤츠 씨가 이게 당장 필요하시다던데요." 일류 스튜디오의 경비원들은 여권이나 비자를 요구했고, 숨겨진 사제폭탄을 찾느라고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뒤졌다. 하지만 독립된 스튜디오에서는 조사가 다소 느슨했기 때문에 나는 그걸 노렸던 것이다. 그는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미궁(迷宮)으로 통하는 길과도 같은 새하얗고 비좁은 콘크리트 길을 빠져 나와 분간할 수 없는 빌딩들의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발길을 돌려 '웨스트 메인 스트리트'라는 표지판이 걸린 길을 따라 내려갔다. 거기서는 두 명의 페인트공이 비바람에 휘어진 술집의 앞면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이 세트는 회전문은 있었지만 내부는 전혀 없었다. "3호 촬영소가 어딥니까?"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오른쪽으로 돌아 첫번째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요. '뉴욕 아파트' 건너편 길에 표지판이 보일 거요." 나는 오른편으로 돌아 '런던 스트리트'와 '컨티넨탈 호텔' 앞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멀리서 볼 때는 꼭 진짜 같았던 호텔의 현관이 다가가서 보니 너무나 보기 흉하고 얄팍한 세트라서 나 자신이 과연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골프 가방을 던져버리고 '컨티넨탈 호텔'에 들어가 다른 허깨비들과 함께 가짜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허깨비들에게는 분비선이라는 게 없지만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좀더 가벼운 것을 들고 왔어야 했다. 예를 들어 배드민턴 라켓 같은 것들 말이다. 3호 촬영소에 다다르니 붉은 등이 타오르고 있었고, 방음장치가 된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골프 가방을 내려 벽에 세워 놓고 기다렸다. 잠시 뒤 붉은 등이 꺼졌다. 문이 열리자 토끼 모양으로 차려입은 코러스 걸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흥청거리며 거리를 올라갔다. 나는 그녀들이 다 지나가도록 문을 잡고 있다가 마지막 한 쌍까지 다 나간 다음에 안으로 들어섰다. 음향실 내부는 그대로 공연장이 재현된 듯이 붉은 플래시 커버를 씌운 연주석(演奏席)과 관람석, 그리고 로코코 풍의 금빛 장식들이 있었다. 오케스트라석은 텅 비어 있고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관람석 앞줄에는 한 무더기의 청중이 떼지어 앉아 있었다. 한 젊은이가 셔츠 차림으로 머리 위의 꼬마 조명등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가, "라이트!"하고 소리치자 꼬마등이 밝아지며 맨 앞줄 중앙에 앉아 카메라를 마주보고 있는 여자의 머리를 비추었다. 나는 관람석 사이의 통로를 내려가서 불이 꺼지기 전에 그 여자가 페이임을 확인했다. 라이트가 다시 들어오고 버저가 울리자 실내에는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은 그 여자의 나직하고 폭넓은 음성으로 인해 깨어졌다. "저 애 참 멋있죠!" 그녀는 몸을 돌려 옆에 앉은 잿빛 콧수염의 사내를 향하고는 가만히 그 팔뚝을 잡아 흔들었다. "컷!" 머리가 벗겨지고 연푸른빛 개버딘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피곤에 지친 듯한 작은 사내가 카메라 뒤에서 일어서더니 페이 이스터브룩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것 봐, 페이. 당신은 저 친구 어머니란 말이야. 그는 지금 저 무대 위에서 정성을 다해 당신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고 있어. 이건 저 친구로서는 처음으로 맞는 큰 기회야. 몇 년 동안 당신이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렸던 결과란 말이야." 중앙 유럽 사람들의 음성처럼 감정이 어린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무대 쪽을 쳐다보았다. 무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 여자가 열을 내며 말했다. "좋았어, 한결 낫군. 하지만 정말로 묻는 건 아니야.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형을 취했을 뿐이니까. '멋'을 강하게 발음해요."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액센트를 더 강하게, 좀더 감정을 넣어요. 무대에서 각광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노래부르는 당신 아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껏 쏟아내는 거야. 자, 다시 한 번 해봐요."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 여자가 악을 썼다. "안돼! 세련미를 담아서는 못 써요. 교양은 쑥 빼놓으라고. 소박한 감정을 나타내는 거야. 따사롭고 애정어린 소박한 감정을. 알겠소, 페이?" 그녀는 울화가 치밀어 마음이 산란한 듯이 보였다. 조감독에서 소도구 담당에 이르기까지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기대를 갖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녀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 훨씬 좋아." 하고 작은 사내가 말했다. 그는 조명담당과 촬영기사에게 촬영 개시 신호를 보냈다. "저 애 참 멋있죠!" 하고 그녀는 다시 말했다. 잿빛 콧수염의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여자의 손을 감싸쥐었고, 그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컷!" 미소가 슬며시 사라지며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불이 꺼졌다. 몸집이 자그마한 감독이, "77번" 하고 외쳤다. "가도 좋아, 페이. 내일은 8시야. 편히 쉬도록 해요, 페이."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조는 매우 언짢은 듯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이 무대 양옆으로 모여들고 카메라가 그들을 향해 회전을 하는 동안 그녀는 일어나서 중앙 통로를 걸어 올라갔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우중충한 창고 같은 건물을 빠져나와 양지로 나갔다. 그리고는 문 어귀에 선 채 그녀가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빨리 걷지 않았다. 어딘지 목적 없는 듯한 걸음걸이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수수한 검은 옷에 베일이 달린 모자'라는-- 미망인용의 초라한 의상 때문에 그 큼직하고 멋진 몸매가 어설프고 볼품없어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이는 건 햇빛에 눈이 부셔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감상적인 기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냄새 없는 가스처럼 스튜디오 안에 퍼져 있던 음산한 기운이 텅 빈 세트의 거리를 건들건들 걸어가는 그 커다란 검은 형체에 몰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컨티넨탈 호텔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골프 가방을 집어들고 그녀 뒤를 밟았다.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하며, 나는 평생 프로는 될 수 없는 늙은 캐디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나이가 죄다 다른 여섯 여자와 만나서는 떼를 지어 정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정문에 이르기 전에 발길을 돌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녀들은 '갱의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아치 문 아래로 사라졌다. 나는 경비원 옆에 있는 회전문을 밀어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경비원은 나와 골프채를 기억하고 있었다. "필요없다고 하시던가요?" "골프 대신에 배드민턴을 치시겠다는군요." 제6장. 추 적 그녀가 나올 때까지 나는 입구 근처의 황색 보도 가장자리에 차를 대놓고 엔진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쪽 보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맵시 있게 디자인된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었다. 마음가짐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속옷 탓인지 그녀의 몸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뒤에서 보니 10년은 젊어 보였다. 그녀는 내게서 반 구역쯤 떨어진 곳의 검은 세단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차량의 물결 속으로 끼어들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세단은 새것으로 '뷔크'였다.그녀가 내 차에 주의를 기울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는 청색 컨버터블 (접는 지붕이 달린 차) 천지였으며, 그 길의 교통상태는 마치 흔들리고 있는 요지경 속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의 개성까지 곁들여 차선을 들락날락하며 맹렬하게 차를 몰았다. 하지만 훌륭한 솜씨였다. 고가도로에서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도 속력을 110 킬로미터나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내 존재를 눈치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재미로 그러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80 킬로미터를 유지하며 선세트 거리를 내려가서는 바다로 향했다. 비벌리 힐즈의 커브 길에서는 90 킬로미터를 냈다. 그녀의 육중한 차는 타이어를 태워먹을 듯이 달렸다. 다소 가벼운 차를 탄 나는 원심력에 맞서서 팽팽한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내 차의 타이어는 날카로운 비명을 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태평양 연안 도로로 통하는 기다란 환상도로의 마지막 내리막길에서 나는 방심한 나머지 하마터면 그녀를 놓칠 뻔했다. 그러나 직선도로에 접어들자 그녀가 대로를 벗어나 우회전을 하기 직전에 다시 그 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우들론 레인' 이라고 표시된 길을 올라갔다. 산기슭을 따라 달리는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내가 커브를 돌아나갔을 때 수백 야드 앞을 달리던 그녀의 차가 크게 회전하며 좁다란 현관 차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 지점에서 추격을 멈추고 유칼리 나무 아래에 차를 세웠다. 도로 연변에 늘어선 동백나무 생울타리 사이로 하얀 집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2층이었고, 한길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 있었으며, 한켠에는 언덕 기슭을 파서 만든 차고가 붙어 있었다. 한물 간 여배우가 사는 집치고는 꽤나 멋들어진 집이었다. 얼마 지나니 열리지 않는 문을 지켜보기가 지겨워졌다. 나는 윗도리와 넥타이를 벗어 둘둘 말아서는 차 뒷좌석에 던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리곤 트렁크 안에 있던 길쭉한 꼭지가 달린 기름치는 통을 꺼내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차도를 올라가 뷔크 곁을 지나 차고의 열려진 문으로 들어갔다. 차고는 엄청나게 커서 뷔크 외에도 2톤짜리 트럭 한 대는 더 들어갈 만했다. 기묘한 것은, 중량급 트럭이 최근 거기를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널찍한 타이어 자국이 나 있었고, 군데군데 상당량의 기름이 흘러나와 있었다. 차고 뒷벽에 달린 작은 창은 평지보다 조금 높은 뒤뜰로 면해 있었다. 새빨간 실크 스포츠 셔츠를 입고 어깨가 듬직한 사내가 내게 등을 돌린 채 휴대용 캔버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짤막하고 숱이 많은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보아 랠프 샘프슨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는 발돋움을 하고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창문은 비록 흐렸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림처럼 선명했다. 빨간 셔츠를 입은 사내의 널찍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듯한 등판. 그 옆 풀밭에 땅콩 그릇이 놓여 있었다. 머리 위의 오렌지 나무는 설익어 암록색 골프공 같은 오렌지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커다란 손에 달린 갈퀴 같은 손가락이 땅콩 그릇을 더듬었다. 손은 땅콩 그릇을 못 찾고서 오그라든 왕새우처럼 풀밭 속을 기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옆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랠프 샘프슨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또한 붉은 셔츠의 그 사내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얼굴도 아니었다. 그것은 원시시대의 조각가가 돌을 깎아 만든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너무나 흔해빠진 20세기의 이야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격투를, 극심한 동물적 기질을, 그리고 모자라는 두뇌를. 나는 바닥의 타이어 자국으로 되돌아가서 무릎을 꿇고 그것을 조사했다. 바로 그때 현관 차도를 달려오는 질질 끄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행동을 취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붉은 셔츠의 사내가 문간에서 말했다. "무슨 일로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거지? 여기서 어슬렁거릴 일이 없을 텐데." 나는 기름통을 거꾸로 들고 벽에다 기름을 한 줄 뿌렸다. "불빛을 가리지 말아요." "뭘 하는 거야?" 하고 그는 성가신 듯이 물었다. 윗입술이 마치 입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는 키가 나보다 더 크지도 않았고 어깨가 문짝만큼 넓지도 않았지만, 그런데도 우람하게 느껴졌다. 나는 낯선 집을 찾아가서 처음 보는 불독에게 말을 걸 때와 같은 초조감을 느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틀림없이... "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집에 있소." 그가 나를 향해 육박해 오는 그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왼편 어깨를 내밀고 턱을 당긴 그 모양은 마치 매일같이 매시간을 3분짜리 20회전으로 나누어 사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소리야, 우리 집에 있다니? 우린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무얼 팔 생각으로 어슬렁거리는 거라면 잘 안될 거야." "흰개미요." 하고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소금을 뿌린 콩과 맥주와 충치냄새가 풍겨왔다. "골드 스미드 부인에게 말씀드리시오. 분명히 흰개미가 있다고." "흰개미?"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이 우뚝 섰다. 나는 그를 때려눕힐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대로 넘어져 누워만 있을 상대가 아니었다. "나무를 갉아먹는 조그만 동물이오." 나는 벽에 기름을 좀더 뿌렸다. "치사한 벌레 새끼들이지." "거기 그 깡통에 든 게 뭐지? 거기 그 깡통 말이야." "여기 이 깡통?" "그래." 우리는 조금 친해졌다. "흰개미 죽이는 약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놈들이 이걸 먹고 죽는 거요. 골드 스미드 부인에게 확실히 흰개미가 있다고 말해요." "난 골드 스미드 부인을 도대체 모르는데." "이 집 안주인 말이오. 조사해 달라고 본부로 전화했었는데." "본부?" 그는 의아스러운 듯이 되물었다. 그의 반흔 조직에 돋아난 눈썹들이 그의 작고 멍청한 눈 위로 셔터처럼 내려왔다. "흰개미 박멸협회 본부 말이오. '킬러버그' 가 흰개미 박멸협회 남캘리포니아 지부지요." "아!" 그는 이 말에 어리둥절해 했다. "그래? 하지만 우리 집에는 골드 스미드 부인은 없는데." "여기가 유칼립터스 레인이 아닌가요?" "아냐, 여긴 우들론 레인이야. 당신은 집을 잘못 찾았군."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군요." 라고 나는 말했다. "난 또 여기가 유칼립터스 레인인 줄 알았지." "아냐, 우들론이야." 그는 내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고서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빨리 가봐야겠군. 골드 스미드 부인이 나를 찾겠는걸." "그럴 거야. 그런데 잠깐 기다려." 그의 왼손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는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이젠 다시는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지 말게. 여기서 어슬렁거릴 일은 없을 테니까."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눈은 거친 빛을 띠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금이 가고 주름이 진 입 가장 자리에 투명한 침이 한 줄 흘러나와 있었다. 주먹으로 살아가는 싸움꾼들은 불독보다도 예상하기가 어려웠고, 위험하기는 그 갑절이었다. "이것 봐." 나는 기름 깡통을 치켜들었다. 이 물건이 자네 눈을 멀게 할지도 몰라." 나는 그의 눈에 기름을 뿌렸다. 그는 지레 겁을 먹고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나는 잽싸게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오른 주먹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귓대기가 불에 덴 듯 얼얼했다. 내 와이셔츠의 칼라가 찢겨나가 그의 손아귀에서 디룽거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기름에 흠뻑 젖은 두 눈을 싸쥐고 어린애처럼 끙끙거렸다. 그는 장님이 될까봐 겁내고 있었다. 차도를 반쯤 내려갔을 때 뒷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생울타리 가장자리를 돌아 내 차가 있는 곳과는 반대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는 걸어서 그 구역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컨버터블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뷔크는 여전히 현관 차도에 서 있었다. 초저녁의 놀 속에서 나무숲 속의 그 하얀 집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늑해 보였다. 그 집 안주인이 점박이 무늬의 모피 코트를 입고 집에서 나온 것은 주위가 어둑어둑할 무렵이었다. 나는 바퀴가 뒷걸음질쳐나오기 전에 차도 입구를 지나 선세트 대로상에서 뷔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앞서보다도 훨씬 맹렬히 그러나 보다 어설픈 솜씨로 차를 몰며, 온 길을 거슬러 할리우드로 향했다. 웨스트우드, 벨 에어, 그리고 비벌리 힐스를 통과했다. 나는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모든 것의 종착점이자 또한 수많은 사연의 시발점이기도 한 할리우드와 바인의 모퉁이 근처에서 그녀는 방향을 돌려 어느 사설주차장으로 들어가서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거리에 주차한 다른 차들 곁에 차를 세우고서 그녀가 스위프트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의기양양한 숙녀처럼 화려한 모습이었다. 나는 집으로 가서 와이셔츠를 갈아입었다. 벽장 속의 권총이 나를 유혹했지만 나는 권총을 휴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생각 끝에 총집에서 총만 뽑아내어 차 안의 장갑함 속에 집어넣었다. 제7장. 스위프트의 주정뱅이들 스위프트의 뒷방은 번질번질한 놋쇠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어슴푸레하게 이글거리는 검은 떡갈나무 목재로 장식되어 있었다. 양옆에는 가죽 쿠션 좌석이 있는 칸막이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테이블로 차 있었다. 칸막이 방과 대부분의 테이블에는 고급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기다리면서 붐비고 있었다. 여자 손님들은 대부분이 탄탄한 피부에, 다이어트로 지나치게 여위어 있었다. 반면에 남자들은 남성적인 할리우드풍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무어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의 떠들썩한 말소리와 화려한 몸짓 속에는,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백만 달러짜리 계약 상대자로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고집스런 자만심이 들어 있었다. 페이 이스터브룩이 안쪽 칸막이 방에서 마주보고 있는 상대자는 청색 플란넬 옷의 팔꿈치만 보였다. 나머지는 칸막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세번째 벽에 붙어 있는 스탠드로 가서 맥주를 주문했다. "바스 에일, 블랙 호스, 카르타 블랑카, 아니면 기니스 스타우트로 드릴까요? 여기서는 6시 이후는 국산 맥주는 팔지 않습니다." 나는 바스를 주문하고 바텐더에게 1달러를 주며 거스름돈은 그냥 가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잔돈이 남지 않을 금액이었다. 그는 사라졌다. 나는 바 뒷벽의 거울을 바라보려고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거울 속에서 페이 이스터브룩의 얼굴이 4분의 3 가량 보였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진지하고 열의에 차 있었다. 입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상대방 남자가 일어섰다. 그는 늘 젊은 여자를 거느리는 부류의 사나이였다. 해마다 무슨 짓으로 돈을 벌어들이는지 아무도 모르는 말쑥하고 늙을 줄 모르는 사나이. 그는 바로 모리스 크램이 설명한 대로 나이가 들어가는 소년합창단원이었다. 그의 감색 윗도리는 너무도 잘 어울렸다. 더구나 그의 목에 두룬 하얀 실크 스카프는 은발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는 칸막이방 곁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사나이와 악수를 했다. 그 붉은 머리 사나이가 돌아서서 방 한가운데 있는 자기 테이블로 돌아갈 때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러셀 헌트라는 메트로 영화사의 계약 대리인이었다. 은발의 사나이는 페이 이스터브룩에게 팔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고 문 쪽으로 나갔다. 나는 거울을 통해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마치 이곳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똑바로 앞을 바라보면서 요령 있게 빠져나갔다. 그에게 있어서 이곳은 텅빈 곳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손을 흔들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나가자 몇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한 사나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페이 이스터브룩은 마치 그에게서 받은 병균을 주위에 퍼뜨려야겠다는 듯이 자신의 칸막이 방에 혼자 남아 있었다. 나는 술잔을 들고 러셀 헌트의 테이블로 갔다. 그는 끝이 비뚤어진 못생긴 주먹코에 스파이처럼 번득이는 작은 눈을 가지고 있는 비만한 사나이와 마주앉아 있었다. "러셀, 사업은 어떠시오?" "여어, 루!" 그는 나를 만난 게 달갑지 않은 듯했다. 나는 기껏 일을 해야 고작 주당 300 달러를 벌어들일 뿐이니, 소작인 계급에 속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1,500 달러를 번다. 그는 시카고에서 온 전직 기자였다. 그는 첫번째 소설을 메트로에게 팔아 넘긴 이후로 다시는 새로운 소설을 쓴 적이 없었고, 촉망받던 젊은이로부터 편두통을 앓는 고약한 늙은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는 공수병(恐水病) 때문에 수영장에도 가지 못했다. 그가 둘째 부인과 이혼하고 셋째 부인의 일을 도와주었지만, 셋째 부인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전혀 없었다. "앉게, 앉아." 하고 그는 내가 서 있자 입을 열었다. "한잔하게. 술은 편두통을 없애준다네. 나는 내 자신을 망치기 위해서 술잔을 들지는 않네. 오로지 편두통을 없얘기 위해서야." "잠깐만." 하고 스파이와 같은 눈을 가진 사나이가 말했다. "만일 당신이 창조적인 예술가라면 앉아도 좋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당신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소이다." "내 대리인인 티모시일세." 하고 러셀이 말했다. "나는 이 친구에게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위이고 말이야. 스테이크 나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신경질적인 손가락을 좀 보게. 그의 두 눈이 탐나는 듯이 나의 둥근 모가지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난 불길한 예감이 든다네." "또 그놈의 예감 타령인가?" 라고 티모시가 말했다. "당신도 창작하시오?" 나는 슬그머니 의자에 걸터앉아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행동가입니다. 말하자면 사냥개이지요." "루는 탐정일세." 하고 러셀이 말해 주었다. "이 친구는 사람들의 떳떳하지 못한 비밀을 캐내어 분개한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게 일이지." "그럼,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야비하게 굴 수 있소?" 티모시가 유쾌한 듯이 물었다. 나는 그 농담이 싫었다. 하지만 나는 정보를 얻으러 왔을 뿐이지 실력을 행사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는 나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 의자 곁에 서 있는 웨이터에게 돌아섰다. "당신이 악수한 사람은 누굽니까?" 하고 나는 러셀에게 물었다. "스카프를 맨 멋진 사나이 말인가? 페이는 그의 이름이 트로이라고 하더군. 그들은 한때 부부였지. 그러니까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은 무얼 하고 있나요?" "확실히는 모르겠어. 그 사람 여기저기 얼씬거리던데. 팜스 프링스, 라스베이가스, 타이후아나 등지에서 말이야." "라스베이가스?" "아마 그럴 거야. 페이 말로는 수입상이라더군. 하지만 진짜로 그 사람이 수입상이라면 나는 원숭이 삼촌이겠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상기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원숭이 삼촌인 모양이야. 하긴 실토하네만, 유방이 셋이나 있는 내 누이동생이 지난 성신강림절에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꼬마 침팬지를 출산했을 때 세상에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을라고. 그녀가 첫번 결혼으로 인해 그레이스토크 경 부인이 된 걸 알고 있지?" 느닷없이 그의 재잘거리던 말소리가 그쳤다. 그의 안색은 다시 암울하고 참담했다. "한 잔 더." 하고 그는 웨이터에게 말했다. "스카치를 더블로 주게. 지금 것과 똑같은 걸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웨이터는 검정 압핀과 같은 눈동자를 가진 쭈글쭈글한 노인이었다. "이 신사 어른의 주문을 받고 있으니까요." "웨이터도 내 주문은 받지 않는다네." 러셀은 절망에 빠진 듯한 익살스런 제스처로 팔을 내흔들었다. "난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인가 봐." 웨이터는 티모시가 하는 말에 정신이 팔린 체했다. "그러나 난 기름에 튀긴 프렌치포테이토는 싫어. 오그라탱 포테이토로 주시오." "죄송하지만, 여기는 '오 그라탱 포테이토'는 없습니다." "만들지 못하나?" 티모시는 들창코의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물었다. "35~40 분 가량 걸립니다." "제기랄!" 티모시가 내뱉었다. "무슨 놈의 싸구려 음식점이 이 모양이야. 러셀, 체이슨으로 가세. 난 꼭 '오 그라탱 포테이토'를 먹어야만 하겠네." 웨이터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먼 거리에서 보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페이 이스터브룩이 자신의 테이블에서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난 체이슨엔 들어가지 못한다네." 라고 러셀이 말했다. "왜냐하면 난 코민포름 (소련 공산당 정보국. 1947~1956) 의 스파이이기 때문이야. 나는 나치당원을 악당으로 하는 시나리오를 썼지. 그래서 코민포름의 스파이가 되었다네. 여보게들, 거기서 내 돈이 나오고 있단 말이야. 모스크바 냄새가 나는 금화 말일세." "그만두시죠." 하고 내가 말했다. "페이 이스터브룩을 압니까?" "조금 알지. 몇 해 전에 그녀를 출세시켜 주었거든. 또 앞으로 몇 해 지나면 그녀를 몰락시켜 줄 거야." "나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겠소?" "왜?" "나는 항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했죠." "믿지 못하겠군, 루. 하긴 그녀는 자네 짝이 될 만한 나이이긴 하겠군." 나는 그가 알아들을 만한 말로 이야기했다. "나는 기억할 수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녀를 사모해 왔죠." "저 사람이 원한다면 소개해 주지 그래." 하고 티모시가 말했다. "사냥개들은 나를 신경질나게 하거든. 그래야만 내가 '오 그라탱 포테이토'를 조용히 즐길 수 있잖겠나." 러셀은 마치 자기의 붉은 머리가 천정이라도 받치고 있는 듯이 힘들게 일어섰다. "안녕히 계시오." 하고 나는 티모시에게 말했다. "저자들이 당신 덜미를 잡고 밀어내기 전에 종업원들과 적당히 재미나 보시오." 나는 내 술잔을 들고 러셀을 끌고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에게 내 직업은 이야기하지 마십시오."하고 나는 그의 귓속에다 대고 말했다. "아무려면 자네의 치부를 공적으로 밝힐 난가? 사적으로 밝히는 건 별문제이지만. 난 자네의 치부를 사적으로 밝히는 건 좋아하네. 난 자네의 치부가 무척 좋단 말이야." "그러나 그건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닙니다. 장래의 나를 위해 제발 남겨두시지요. 나중에 그래프트 에빙 정신병 진료소를 통해 내게 보내주십시오." 이스터브룩 부인은 마치 검은 탐조등과 같은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페이, 이분은 루 아처요. 스파이야. 국제공산당의 스파이. 이 사람이 당신을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사모해 왔다는구려." "멋진데요!"하고 그녀는 아까 어머니 역에 쏟았던 어조로 말했다. "앉으시지 않겠어요?" "고맙습니다." 하며 나는 그녀 맞은편의 가죽 의자에 앉았다. "미안하네만..."하고 러셀이 말했다. "난 티모시를 보살피러 가야겠네. 그는 지금 웨이터에게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야. 내일 밤에는 그 친구가 나를 돌볼 차례라네. 제기랄!" 그는 자기 자신의 말의 미로(迷路) 속을 헤매면서 칸막이 방에서 나가버렸다. "이따금 기억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에요."하고 그 여자는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떠나가 버렸죠. 그들 모두가 잊혀져 버렸고요. 헬렌, 플로렌스, 그리고 메이... 그들은 모두가 떠나가 버렸고, 또 잊혀져 버렸어요." 절반은 거짓이요 절반은 진짜인 포도주에 취한 그녀의 감상적인 말은 러셀의 절망적이고 터무니없는 말과는 상쾌할 정도로 딴판이었다. 나도 내 역할을 해야 했다. "그와 같이 지상의 영광은 사라지도다... 헬렌 채드윅은 당시에 위대한 연기자였죠.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쟁쟁하잖습니까?" "아처 씨, 나는 아직도 손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할리우드는 생명력이 다한 것 같아요. 우린 늘 영화 제작에 애를 썼지요. 정말로 애를 많이 썼어요. 나도 한창 때는 주당 3,000 달러 정도를 벌었죠. 하지만 우린 돈을 위해서 일하진 않았어요." "연기가 문제이지요." 남의 말을 인용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럼요. 연기가 문제였어요. 하지만 이젠 그렇지가 않아요. 할리우드는 성실성을 잃어버렸어요. 할리우드엔 아무런 생명력도 남아 있지 않아요. 할리우드에도 내게도 전연 생명력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녀는 절반 남은 셰리주 병에서 마지막 잔을 따르더니 천천히, 그리고 서글픈 표정으로 죽 들이켰다. 나도 천천히 술잔을 들이켰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하고 나는 활짝 벌어진 털코트가 드러내고 있는 그녀의 풍만한 육체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육체는 그녀의 나이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꽉 조인 허리, 불룩한 유방, 암포라 항아리 같은 궁둥이, 그리고 미묘할 정도로 끈질기게 풍기는 여성적인 매력. 다시 말하면 고양이가 풍기는 것과 같은 동물적인 자부심으로 생기를 띠고 있었다. "아처 씨, 난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매우 동정적이로군요. 당신, 언제 태어났는지 말해 보세요." "생년 말인가요?" "생일 말이에요." "유월 초이틀이오." "정말인가요? 나는 당신이 쌍동이자리일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어요. 쌍동이자리 사람들은 인정이 없어요. 그들은 쌍동이들과 똑같이 이중 성격의 소유자들이지요. 그리고 생활도 이중적이에요. 아처, 당신은 인정사정 없는 사람인가요?" 그녀는 초점을 잃은 눈을 크게 뜨고서는 내게 가까이 기대어왔다. 나는 그녀가 나를 놀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난 만인의 친구랍니다."하고 나는 그녀의 마력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말문을 열었다. "어린애들과 강아지들이 나를 좋아하죠. 나는 꽃도 키우고 정원도 가꾼답니다." "당신은 비웃고 있군요."하고 그녀는 토라진 듯이 대꾸했다. "난 당신이 동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당신은 공삼궁좌 (空三宮座)에 있고 나는 해중 (海中)에 있어요." "그렇다면 우린 기막히게 멋진 해공 합동구조대를 조직할 수 있겠군요."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점성술을 믿지 않으세요?" "당신은?" "물론 나는 믿어요. 과학적인 방법으로 말예요. 당신도 증거를 보시면 결코 부정하지 못해요. 예를 들면, 나는 게자리예요.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내가 게자리 타입이라는 걸 알아보지요. 난 감정이 섬세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요.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새끼손가락 끝에서 나를 비틀어버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난 필요하다 생각되면 고집을 부릴 수도 있답니다. 다른 게자리 사람들처럼 나도 결혼생활이 불행했어요. 아처 씨, 당신은 결혼하셨나요?" "지금은 아닙니다." "결혼한 적은 있었다는 뜻이군요. 당신은 재혼할 거예요. 쌍동이자리 사람들은 언제나 재혼하지요. 그리고 연상의 여인과 재혼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몰랐소." 그녀의 억지스러운 음성이 내 균형을 조금 잃게 하고 있었고, 대화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지배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당신 이야기는 무척 자신만만하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건 진실이에요." "그렇다면 직업적으로 나서야겠습니다. 설득력이 있는 장광설을 청산유수로 구사한다면 돈을 벌 수 있지요." 그녀의 솔직한 눈동자가 좁아지더니 마치 성채의 총안(銃眼)과 같은 두 개의 검은 동전 구멍처럼 되어버렸다. 그런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전략적인 판단을 내리고서는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순진성이 괴어 있는 검은 웅덩이였다. 마치 독약을 뿌린 우물과 같았다. "오, 천만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이 짓을 직업적으로 하진 않아요. 그건 내게 주어진 재주, 말하자면 천부적인 재능이지요. 게자리는 심령적이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 재능을 사용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결코 돈을 벌기 위한 건 아니에요. 오로지 나의 친구들을 위한 거예요." "하여튼 당신은 다른 수입처를 가지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다리가 가는 유리잔이 그녀의 손가락에서 굴러떨어져 테이블 위에서 두 동강이 났다. "그래서 당신은 쌍동이자리라는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항상 사실만을 찾고 있으니까." 나는 한가닥 의혹을 느꼈으나 이내 훌훌 털어버렸다. 그녀는 무작정 총을 쏘다가 우연히 과녁을 맞춘 셈이리라. "무얼 캐물어 보려고 한 건 아닙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오, 알고 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일어났다. 나는 그녀의 몸이 나를 짓누르는 걸 느꼈다. "아처 씨, 여기서 나가요. 또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요. 서로 대화를 나눌 만한 다른 곳으로 가시죠." "그럽시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빳빳한 지폐를 놓고 묵직한 위엄을 보이며 걸어서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는 놀랄 만한 성과에 기분이 흐뭇하긴 했지만 마치 암커미에게 먹히는 운명에 처한 수커미 같은 기분이 들었다. 러셀은 머리를 두 팔에 묻고 앉아 있었다. 티모시는 마치 아무런 방어력도 없는 조그만 동물을 구석에 몰아넣고 사납게 짖어대는 테리어 종 개처럼 웨이터장(長)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 웨이터장은 그에게 '오그라탱 포테이토' 는 15분 뒤에 준비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제8장. 한물 간 여배우 헐리우드의 루즈벨트 술집에서 페이 이스터브룩은 공기가 나쁘다고 투덜거리며, 비참한 생각이 들어 기분이 젊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말라고 내가 말했지만 결국 우리는 '지브라 룸'으로 술집을 옮겼다. 그녀는 술을 아일랜드 위스키로 바꾸고, 더군다나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지부라 룸'에서는 옆좌석 사나이가 비웃는 눈초리를 보냈다고 그녀는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나는 그녀에게 바깥 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돌입하려는 듯이 윌셔까지 차를 몰았다. 나는 앰배서더에서 그녀의 뷔크를 세워달라고했다. 나는 스위프트에 차를 두고왔던 것이다. 앰배서더에서는 바텐더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면서 자기를 비웃었다고 하며 그녀는 그와 다투었다. 나는 그녀를 '한툰 파크'의 지하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그렇게 붐비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는 곳마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일어서서 인사하거나 우리 자리로 합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웨이터까지도 그녀를 떠들썩하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낙오자였던 것이다. '한툰 파크'엔 건너편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아베크 족 이외에는 손님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텅 비어 있었다. 두툼한 융단, 부드러운 조명. 이 지하실은 우리가 지샌 밤을 장사지내는 장례실이었다. 이스터브룩 부인은 마치 시체처럼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정신을 잃진 않아서 눈도 멀쩡했고, 떠들고 마시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에도 무리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발레리오 술집 쪽으로 그녀를 유도하여, 그녀 쪽에서 그 술집 이름을 말해 주기를 바랬다. 그러다가 몇 잔을 더 마신 뒤에 내쪽에서 먼저 술집 이름을 꺼내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도 함께 마셔댔지만 아직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쪽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취해서 무슨 말이라도 지껄여주기를 기다렸다. 쌍동이자리의 아처는 망각을 일깨워주는 조산원이었다. 나는 술집의 안쪽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 쌍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갈수록 야위어, 마치 식인종과 같은 얼굴이었다. 코는 가늘고 귀는 지나치게 찌부러져 있었다. 눈꺼풀은 바깥 모서리에서 축 처져 있어서 내 눈은 내가 좋아하는 삼각형으로 보였다. 오늘밤 내 눈은 눈꺼풀 속에 박힌 얇은 돌쐐기와도 같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스탠드 위로 몸을 내밀고서 절반 빈 리큐르 잔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과 얼굴을 반듯이 지니게 했던 자존심은 이미 흘러나와 버렸다. 그녀는 자기 인생의 밑바닥의 괴로움을 되십으며 인생의 비가(悲歌)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이는 자기 몸도 가누지 못했어요. 레슬링 선수와 같은 몸에다 인디언 추장과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이에겐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었어요. 그러나 그이에겐 남다른 점은 없었어요. 상냥한 분이었지요. 조용하고, 침착하고, 별로 말이 없었고, 정열적이었어요. 그분처럼 정절을 지킨 남자도 없을 거예요. 그분은 폐결핵에 걸려 어느 여름에 죽어버렸지요. 그걸로 난 만신창이가 되어 벗어나지 못했지요. 내가 정말로 사랑한 건 그분 뿐이었어요." "이름은 뭐라고 했죠?" "빌이에요." 그녀는 교활한 듯한 눈초리를 내게 보냈다.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그분은 우리 회사의 지배인이었어요. '협곡 1' 이라는 커다란 땅 하나가 우리 것이었어요. 우리는 1년쯤 함께 살다가 그이가 죽었지요. 25년 전 이야기예요. 나 자신도 그때 죽은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녀는 눈물이 없는 커다란 눈을 들어 거울 속의 내 눈을 마주보았다. 나는 그녀의 우울한 얼굴에 응해 주고 싶었지만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웃으며 내 자신을 격려했다. 결국 나는 착한 놈이었다. 깡패들과 매음부들, 나쁜 놈들과 어수룩한 놈들... 나는 그들과의 공모자였고, 부정한 침실의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립탐정이었고, 의처가의 밀고자였으며, 간막이 벽 뒤에 스며드는 비열한 놈이었고, 일당 50달러면 아무에게도 총잡이로 고용되는 그런 놈이었다. 그러나 나는 착한 놈이었다. 그런 결과로, 눈꼬리와 볼때기에 주름이 잡히고 입술은 까져 이빨이 드러났다. 미소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얻은 것은 늑대의 웃음과 같은 바싹 마른 굶주린 표정 뿐이었다. 그 얼굴은 술집이나 형편없는 호텔, 싸구려 사랑의 보금자리, 법정과 감옥, 검시와 경찰들, 그리고 고문당한 벌레처럼 드러난 말단신경을 너무나 많이 본 얼굴이었다. 만일 내가 남에게서 이런 얼굴을 본다면 나는 그 얼굴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얼굴이 미란다 샘프슨에겐 어떻게 보이는지 무척 궁금했다. "사흘 동안의 파티는 지겨워."하고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승마도 에메랄드도 보트도 지겨워. 좋은 친구 하나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나아요. 내겐 좋은 친구가 없어. 심 쿤츠는 자기가 내 친구라고 하고, 내 마지막 영화를 찍고 있다고 말해요. 나는 25년 전에 인생을 몽땅 살아버렸어요. 나는 이젠 지쳐버렸다고요. 아처, 당신은 나와 어울리고 싶은가 보죠?" 그녀 말이 옳았다. 나는 내 직업을 떠나서도 그녀에게 흥미가 있었다. 그녀는 영화(榮華)의 절정에서 오랫동안 굴러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통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촬영소의 감독에게서 그녀가 배운 엉터리 정확성과 같은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저속하고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거칠었다. 그 목소리는 금세기 초엽에 디트로이트나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의 뒷골목에 살면서 그녀가 배운 것이었다. 그녀는 술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아처, 집까지 바래다 줘요." 나는 기둥서방처럼 민첩하게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집에 갈 순 없소. 기분나게 한잔 더 합시다." "당신은 친절한 분이셔." 나는 그녀의 비웃음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었다. "이곳은 참기 어려워요. 시체실 같아. 제기랄!"하고 그녀는 바텐더에게 소리를 질렀다. "광대들은 모두들 어디 있나요?" "부인, 당신은 광대가 아닌가요?" 또 싸움을 벌이려 하기에 나는 그녀를 끌고 계단을 올라 바깥으로 나갔다. 안개가 조금 끼어 있어서 네온이 약간 희미하게 보였다. 즐비한 빌딩 위로 별 하나 없는 하늘이 우중충하고 낮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그녀의 팔에서 전율을 느꼈다. "다음 거리에 좋은 술집이 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발레리오 말예요?" "아마 그럴 거요." "좋아요. 한잔 더 하고 나서 집에 가야지." 나는 그녀의 차 문을 열고 부축해서 태워주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내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나는 물러섰다. 나는 깃털을 채운 베개가 좋지, 추억이나 좌절감으로 가득찬 복잡한 베개는 싫었다. 발레리오 술집의 웨이트레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맞이해서는, 박스로 안내하곤 재떨이를 비워주었다. 미끈한 얼굴의 희랍인 청년 바텐더가 박스까지 일부러 나와서 그녀에게 인사하고 샘프슨 씨의 안부를 물었다. "그분은 아직 네바다에 계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내 얼굴의 표정을 알아차렸다. "랠프는 나와 아주 친한 친구예요. 여기 오면 내게 들르지요." 두 구역을 차를 몰고 왔기 때문인지, 환영이 깍듯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물론 나의 오해였는지도 모르지만. "훌륭한 어른이시죠."하고 바텐더가 말했다. "요즘은 못 뵈었습니다만." "랠프는 참으로 멋진 분이에요."하고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상냥하고요." 바텐더는 우리의 주문을 받고서 돌아갔다. "그분의 점도 쳐봤습니까?"하고 나는 물었다. "아주 친하다는 친구분 말입니다." "오, 어떻게 알았죠? 그이는 염소자리예요. 상냥한 분이지만 대단히 지배적인 형이에요. 하지만 그이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답니다. 외아들이 전사했어요. 랠프의 태양은 천왕성의 앙갚음을 받아요. 염소자리의 사람에겐 그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모르죠.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물론이죠. 랠프는 신앙심이 점점 깊어가고 있답니다. 천왕성이 랠프의 적이지만, 다른 행성들은 그의 편이에요. 그걸 알고서 랠프는 용기를 얻었지요." 그녀는 밀담을 하는 양 내게 몸을 기댔다. "내가 그분을 위해서 꾸민 방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 방은 이곳 방갈로에 있는데, 우릴 들여보내진 않을 거예요." "그분은 지금 이곳에 계신가요?" "아니에요. 네바다에 계세요. 그분은 사막에 아주 멋진 집을 가지고 있죠." "그 집에 가보셨나요?" "당신은 질문이 많아요." 그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애교를 떨면서 눈을 흘기며 미소를 지었다. "질투하는 건 아니죠?" "당신은 친구가 없다고 내게 말했잖소?" "그랬나요? 랠프를 잊고 있었나 봐요." 바텐더가 술을 가져왔다. 나는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나의 눈은 방의 뒷면을 향하고 있었다. 울리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 옆 벽면의 문이 발레리오 호텔의 로비 쪽으로 열렸다. 앨런 태거트와 미란다가 함께 들어왔다. "실례합니다."하고 나는 이스터브룩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일어서자 미란다가 나를 보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한 손가락을 입에 대고 다른 손을 저어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그녀는 입을 딱 벌리고 당황한 눈빛을 하고서 물러갔다. 앨런은 보다 민첩했다. 그는 미란다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문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바텐더는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고, 웨이트리스는 단골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이스터브룩 부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문 밖으로 나갔다. 미란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은 아버지를 찾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난 계약대로 움직이고 있어요. 제발 들어가지 마시오." "하지만 난 당신에게 연락하려고 애를 썼는데요." 그녀는 긴장하여 울상이 되었다. 나는 태거트에게 말했다. "내 야간작업을 망치지 않도록 미란다를 데려가시오. 가능하면 시외로." 페이를 세 시간이나 상대하고 있노라니까 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샘프슨 부인이 전화로 당신을 찾던데요?"하고 그는 말했다. 필리핀 인 벨보이가 벽에 기대어서서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모퉁이를 돌아 불빛이 희미한 로비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데?"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대요." 미란다의 눈동자가 사슴의 눈처럼 호박색으로 이글거렸다. "등기속달로 왔어요. 어머니더러 돈을 보내라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보내지는 말고 준비하라는 거예요." "얼마를?" "10만 달러." "다시 이야기해 봐요." "10만 달러 어치의 증권을 현금으로 바꾸라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만큼 갖고 계신가요?"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만들 수는 있어요. 버트 그레이브스가 위임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그 돈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요?" "아버지 말로는 다시 연락하거나 심부름꾼을 보내시겠대요." "편지는 틀림없이 아버지가 보내신 거요?" "엘레인이 아버지의 필적이라고 해요." "어디 계신다고 했소?" "그런 건 없고, 편지의 소인은 산타 마리아예요. 아버진 오늘 그곳에 계셨을 거예요." "꼭 그렇지는 않지. 그런데 샘프슨 부인은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말씀은 없었어요. 의견을 듣고 싶은 거겠죠." "알았소. 이렇게 합시다. 어머니에게 돈을 준비하라고 해요. 하지만 아버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증거 없이는 아무에게도 돈을 건네주지 말아요."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한 손이 드레스의 깃을 잡아당겼다. "난 짐작할 겨를이 없소." 나는 태거트에게 돌아섰다. "오늘밤 미란다를 비행기로 보낼 수 있겠소?" "방금 산타 테레사에 전화를 했더니 공항이 안개에 싸여 있답니다. 내일 아침에 첫편으로 보내죠." "그럼 샘프슨 부인에게 전화로 전해요. 나는 가망 있는 단서를 잡고서 추적하고 있다고. 그레이브스에게는 경찰에 조용히 연락해 두는 게 좋겠다고 하시오. 그리고 지방경찰과 로스앤젤레스 경찰, FBI에게도." "FBI 에게?"하고 미란다가 소곤거렸다. "그렇소." 하고 나는 말했다. "납치는 FBI 소관이오." 제9장. 암흑가의 보스 바에 돌아오니까 턱시도(연비복) 를 입은 젊은 멕시코 인이 기타를 들고 피아노에 기대어서 있었다. 그는 애조를 띤 희미한 테너로 스페인 투우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손가락은 천둥치듯 기타줄을 타고 있었다. 이스터브룩은 그 사나이를 쳐다보느라고 내가 옆에 앉아도 거의 모르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큰소리로 박수를 치고 그 사나이를 우리 자리로 불렀다. "바발루를 부탁해요." 하며 그녀는 그에게 1달러를 주었다. 사나이는 고개를 숙이고 싱긋이 웃고서 돌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랠프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도밍고는 저 노래를 아주 잘 불러요. 그분에겐 순수한 스페인 피가 흐르고 있어요." "당신 친구라는 랠프 말인데... " "랠프가 어떻게 됐나요?" "나와 함께 이런 데 온 걸 화내지 않나요?" "어리석은 소리 마세요. 언젠간 그이를 소개해 주고 싶어요. 당신도 그분을 좋아할 거예요." "지금 무얼 하시나요?" "은퇴한 셈이죠. 돈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왜 그분과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큰소리를 내어 웃었다. "내게 남편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하지만 그분 걱정할 건 없어요. 순수한 사업상의 친구이니까." "당신이 사업을 한다는 건 몰랐는데요." "내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나요?" 그녀는 또 소리를 내어 웃었지만,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기운찬 웃음이었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날더러 왜 랠프와 결혼하지 않았느냐고요? 재미있군요. 두 사람은 각자 결혼했는데... 하여튼 우리들의 우정은 차원이 달라요. 보다 더 정신적인 거예요." 그녀는 나의 취기까지 깨놓았다. 나는 술잔을 들었다. "우정을 위하여, 차원이 다른 우정을 위하여." 그녀가 술잔에서 입을 떼기 전에 나는 웨이트리스에게 손가락을 둘 올려보였다. 두 잔째가 그녀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 자체의 무게 때문인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둔탁해진 눈은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입은 하품을 연발하며 떡 벌리고 있었고, 빨간 입술에 핑크와 백색의 입안이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입을 마비된 듯이 다물며 소곤거렸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것 같은데." "집까지 바래다 드리죠." "친절도 하셔라." 나는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웨이트리스가 이스터브룩에게 동정의 눈초리를 보내며 나를 흘겨보고는 열린 문을 붙들어주었다. 이스터브룩은 지팡이를 잃은 노파처럼 길에서 비틀거렸다. 나는 술 때문에 다리 힘이 온통 빠진 그녀를 부축하며 주차장까지 갔다. 그녀를 차에 태우는 건 석탄 부대를 싣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가 문과 좌석 등 사이의 구석으로 굴러 들어갔다. 나는 차를 몰고 태평양 연안도로로 향했다. 차의 동요 때문에 잠시 뒤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집에 데려다 줘요." 그녀는 멍청하게 말했다. "어딘 줄 아세요?" "들어서 압니다." "내일 아침엔 지겨운 일을 해야 돼요. 제기랄! 그가 나를 영화계에서 쫓아내면 난 틀림없이 울어야 할 거야. 생활이야 할 수 있겠지만." "당신은 여류사업가로 보이는데요." 나는 용기를 북돋아주듯이 말했다. "아처, 당신은 친절한 분이시네요." 이 대사에 나는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노파를 돌보아주시다니. 내가 어디서 돈을 벌고 있는지 듣게 되면, 틀림없이 당신도 나를 싫어할 거예요." "어디 한번 들려주시오." "하지만 당신에겐 말 못해." 그녀의 웃음소리는 추악하고 흐트러진 음성이었다.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조소를 품고 있는 듯이 들렸는데, 내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이에게는 보기 드문 상냥한 분이시네요." 그렇고말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확실히 나는 미국형 남자다. 숙녀가 도랑에 넘어질 것 같으면 언제나 기꺼이 손을 빌려주는 사나이. 숙녀는 술에 곯아떨어져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쯤 의식을 잃은 그녀와 한밤중의 대로를 차를 몰고 간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얼룩무늬 코트를 입은 그녀의 육체는 나이를 먹어 무거워진 산고양이나 표범이 옆좌석에서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나이를 먹지는 않았다. 기껏 50살 정도였지만, 나이값만큼 완전히 늙어 불쾌한 과거의 추억이 철저히 발효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또 그 이상 알아내기엔 나도 지쳐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녀는 샘프슨이나 그 밖의 누구이든 간에 경솔한 인간에게는 나쁜 친구라는 점이다. 그녀의 패거리들은 위험했다. 거칠고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만일 샘프슨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녀는 그걸 알고 있거나 탐지하고 있거나 할 것이다. 그녀의 집 앞에서 차를 멈추자 그녀는 눈을 떴다. "차를 차고에 들여놓으세요. 부탁합니다." 나는 노상에서 차를 후진시켜 차고에 집어넣었다. 현관 계단을 오르는 데도 손을 빌려주어야 했다. 그녀는 문을 열어달라고 내게 열쇠를 주었다. "들어오세요. 마시고 싶은 걸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괜찮습니다. 바깥주인은?" 그녀는 콧구멍에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요 몇 해 동안 함께 살고 있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두 가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향 냄새와 술 냄새. 다시 말하면 동물 냄새와 인간 냄새였다. 빤질빤질하게 초를 먹인 바닥에 발을 내려놓으며 나는 그녀가 미끄러져 넘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제 집에 들어선 그녀는 눈을 감은 몽유병자와 같은 정확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나는 발끝으로 더듬으면서 뒤를 따라 왼쪽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녀는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어둠 속에서 부상된 그 방은 그녀가 랠프 샘프슨을 위해 설계한 붉은 방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다. 밤이어서 베니스식 차일이 온통 내려져 있었지만 그런대로 커다랗고 쾌적한 방이었다. 벽에 후기인상파 그림의 복제품이 서너 장 걸려 있고, 만들어 붙인 책장에는 책이 꽂혀 있었으며, 전축과 레코드 케이스, 광택이 나는 벽돌로 된 벽난로 앞에는 묵직한 지방색이 깃든 긴의자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 견실한 중류계급의 방이었다. 한가지 이상한 건 긴의자와 전등 밑 안락의자에 씌워놓은 의자 커버의 무늬였다. 하얀 사막의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녹색의 열대수가 솟아 있었는데, 그 잎 사이로 눈알이 하나씩 내다보는 무늬였다. 그것은 보고 있는 사이에 무늬가 변했다. 눈알이 사라졌다가 또 나타났다. 나는 그 눈알의 덩어리 위에 엉덩이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난로 곁의 구석에 꾸며놓은 스낵 바에 서 있었다. "무얼 마시겠어요?" "위스키와 물." 그녀가 유리잔을 들고 왔다. 도중에 유리잔 속의 술이 절반은 쏟아져 연한 녹색의 융단에 거무튀튀한 오점으로 점점이 묻었다. 그녀는 소파의 쿠션을 깊숙히 가라앉히면서 내 곁에 걸터앉았다. 검은 머리가 내 어깨 쪽으로 기울어져 와서는 그대로 멈췄다. 머리카락을 염색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미용사가 일부러 염색하지 않고 남겨둔, 약간의 잿빛 머리카락까지 잘 보였다. "난 뭘 마시고 싶은지 생각이 안 나요."하고 그녀는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세요." 나는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녀의 어깨 폭은 내 어깨만했다. 그녀는 내게 기대왔다. 그녀의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가 느껴졌지만 그것도 점점 가라앉았다. "이봐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난 오늘밤엔 송장이에요. 다른 날 밤에나..."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어쩐지 계집애 목소리 같았지만 흐리멍덩했다. 그녀의 눈 속의 젊음도 해저의 안광과 같이 희미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시들어가는 눈꺼풀에 떠오른 혈관에서 그녀의 심장의 고동소리의 아련한 전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구부려 놓은 짙은 속눈썹이 눈꺼풀의 가장자리를 수놓고 있었는데, 그것은 젊음과 아름다움의 잔재이며 그녀의 늙어빠진 모습을 결정적으로 처참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잠들었을 때가 오히려 쉽게 동정이 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자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가만히 그녀의 눈꺼풀 하나를 들어올려 보았다. 대리석과 같은 하얀 안구가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내 팔을 풀고 그녀의 몸에 쿠션을 받쳐주었다. 드레스의 가슴 부분이 엇갈려 있고 양말도 비틀려 있었다. 그녀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옆방에 가서 문을 잠그고 전등을 켰다. 전등은 천장부터 조화를 가운데에 꾸며놓은, 탈색 마호가니 재(材)로 만든 번득번득한 테이블이며, 한쪽 면에 있는 자기(瓷器)로 된 옷장이며, 반대켠의 만들어 붙인 식기선반이며, 아랫벽에 바짝 붙여놓은 다리가 여섯 개인 육중한 의자 등을 비추었다. 나는 전등을 끄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조촐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한 순간 나는 이 여자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직한 점성술사나 죄없는 주정뱅이는 얼마든지 있다. 그녀의 집은 로스앤젤레스 주에 있는 몇 십만이나 되는 다른 집들과 다를 것이 없었고, 사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전형적이었다. 단지 커다란 차고와, 차고를 지키는 불독처럼 생긴 사내만이 특이할 뿐이다. 욕실 벽은 파스텔 블루타일로 되어 있었고, 네모진 남색 욕조가 들어차 있었다. 세면대 위의 선반에는 강장제 특허약, 크림과 물감, 그리고 파우더, 루미놀, 넴부탈, 베로날 등이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우울증 약병과 약상자가 세면대, 빨래 바구니, 양변기 뚜껑 뒤까지 넘쳐 있었다. 빨래 바구니 속의 옷가지는 여자 것이었다. 칫솔도 케이스에 든 것 하나 뿐이었다. 면도기는 있었지만 면도용 크림은 없었고, 도대체 남자용품이란 전혀 없었다. 욕실 옆 침실은 전쟁 전의 감상적인 희망처럼 분홍 일색으로 아름답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침대 곁 테이블에는 우주에 관한 책이 한 권 얹혀져 있었다. 옷장에는 여자옷 뿐이었고, 대부분이 '삭스'나 '마그닌'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장농 속의 내복이나 잠옷은 복숭아색과 연한 남색, 또는 검은색 레이스였다. 두 번째 서랍 속에 있는 꼬깃꼬깃한 양말 뭉치 밑을 들여다보다가 이 집의 이상한 핵심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고무줄로 묶어놓은 좁다란 꾸러미가 늘어서 있었다. 그 꾸러미는 1달러와 5달러, 10달러짜리 지폐 다발이었다. 지폐는 대부분이 낡고 더러웠다. 만일 이 꾸러미가 전부 내가 조사한 것과 똑같다면, 서랍 밑바닥에는 8천 내지 1만 달러의 돈이 들어 있는 셈이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서 돈을 바라보았다. 침실의 서랍은 돈을 감추는 데 좋은 장소는 못 된다. 그러나 자기의 수입원을 밝힐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은행에 맡기는 것보다 안전하다. 전화의 벨소리가 불이 붙은 듯 울려 마치 치과의사가 이를가는 소리처럼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깜짝 놀라 뛰어 일어났다. 전화기가 있는 현관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서랍문부터 닫았다. 거실에 있는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넥타이로 목소리를 위장했다. "여보세요." "트로이 씨예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예, 그렇소." "페이 있어요?" 그녀는 말씨도 빠르고 발음도 생략되어 있었다. "난 베티예요." "페이는 없는데." "저 말예요, 트로이 씨, 약 한 시간 전에 페이가 발레리오에 뛰어들었어요. 함께 들어간 남자는 형사 같아요. 그 남자가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했어요. 트럭이 지날 때 그런 남자가 있으면 곤란해요. 게다가 당신은 술에 취했을 때의 페이를 아시잖아요." "알고말고."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 거요?" "물론 '피아노'에 있죠." "랠프 샘프슨이 거기에 있나?" 그녀는 대답 대신에 깜짝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화선 저쪽 끝에서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며, 접시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마 레스토랑인 모양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내게 묻죠? 난 최근에 그분을 못 봤는데." "어디 있나?" "난 몰라요. 그런데 누구시죠? 트로이 씨예요?" "물론이야. 내가 페이를 혼내 줄 거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 현관문 손잡이가 내 뒤에서 가볍게 찰칵 소리를 냈다. 전화기에 손을 건 채 나는 공포에 얼어붙어, 커트글라스 (세공유리) 손잡이가 천천히 돌며 거실에 전등이 갑자기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이 갑자기 홱 하고 열리고 가벼운 톱코트를 입은 사나이가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은발 머리에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그는 마치 무대에 나타나는 배우처럼 안으로 들어와 왼손으로 문을 깍듯이 닫았다. 그의 오른손은 톱코트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 호주머니가 나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그와 마주섰다. "당신 누구요?" "질문에 대해서 되질문하는 게 실례라는 걸 알아." 그의 목소리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남부 영국인의 억양이 남아 있기 때문에 부드럽게 들렸다. "당신은 누구지?" "강도라면-- ?"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무거운 것이 내 쪽을 향하여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가 더욱 불손해졌다. "여보게, 난 간단한 질문을 했을 뿐이야. 간단히 대답하게." "이름은 아처."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머리를 감을 때 푸른 물감을 사용하시오? 내겐 그게 잘 듣는다고 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는데."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노여움을 보다 명확하게 표시했다. "난 경솔한 폭력은 싫어. 제발 이걸 휘두르지 않게 해주게." 나는 그의 머리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정성들여 가른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골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은 무섭군."하고 나는 말했다. "이탈리아계 영국인은 악마의 화신이지." 그의 호주머니의 권총은 작지만, 현관을 냉각시키는 고성능 냉동장치 같았다. 그의 두 눈은 벌써 얼음장 같았다. "직업이 무언가, 아처?" "보험회사 직원이오. 내 취미는 총잡이를 위해서 허리를 굽히는 거요." 나는 그에게 보험관계의 모든 설명이 적힌 회사 명함을 보여주려고 지갑을 더듬었다. "아니, 손은 내가 보이는 곳에 내놓게. 그리고 주둥아리 놀리는 걸 조심해, 알겠어?" "그야 알고말고요. 당신에게 보험을 권하진 않겠소. 총을 가지고 로스앤젤레스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우리에겐 좋은 고객이 아니라서." 이 말의 뜻을 알면서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이 집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페이를 데리고 왔소." "그녀를 알고 있나?" "그렇소. 당신은?" "내가 묻고 있는 거야. 그래,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소."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걸." 나는 수화기를 들어 택시를 불렀다. 그는 경쾌하게 내게 다가왔다. 왼손이 나의 가슴과 겨드랑이 밑을 뒤지고 옆구리부터 허리까지 더듬어 내려갔다. 권총을 차에 두고 오길 잘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녀석에게 수색당하는 건 불쾌했다. 이 녀석은 사내인지 계집앤지 모르는 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발자국 물러나서 권총을 내게 보였다. 니켈을 씌운 리볼버로 32구경이 아니면 38구경이었다. 나는 그를 쓰러뜨리고 권총을 빼앗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몸이 살짝 굳어져 총구멍이 마치 동공처럼 초점을 맞추었다. "안돼..."하고 그가 말했다. "난 권총이 빨라, 아처. 자네에겐 찬스가 없어. 자, 돌아서게." 나는 돌아섰다. 그는 권총으로 내 콩팥 위쪽의 등을 쑤셔댔다. "침실로 들어가게." 그는 나를 전등이 켜진 침실로 들어가도록 문을 마주보게 했다. 나는 그가 재빠르게 방을 가로질러 서랍을 여닫는 소리를 들었다. 권총이 나의 콩팥으로 되돌아왔다. "이 방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난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소. 페이가 전등불을 켰었지." "페이는 지금 어디 있나?" "현관 방에." 그는 나에게 이스터브룩 부인이 긴의자 등에 누워 있는 방으로 가라고 했다. 그녀는 죽은 듯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코는 골지 않았다. 한 팔이 마치 과식한 흰 뱀처럼 마룻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비웃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술에 찌든 육체에 대한 비난이 담겨져 있었다. "페이는 술을 삼갈 수가 없군." "우린 함께 마시고 다녔소."하고 나는 말했다. "멋지게 술판을 벌렸지." 그는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런가? 그런데 왜 당신은 이런 벌레주머니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갖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그렇게 말합니까?" "내 아낼세." 그의 콧구멍이 살짝 비뚤어지는 것을 보니 그의 얼굴도 변할 것 같았다. "정말이오?" "아처, 난 질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아내에게서 손을 떼라고 당신에게 경고해야겠네. 내 아내에겐 많지는 않지만 패거리들이 있는데, 당신은 그들과 어울리진 못할걸. 페이는 물론 아주 붙임성이 있지. 나는 페이보다 못하지만, 페이의 패거리 중에는 붙임성이 조금도 없는 놈이 있어." "그들도 당신처럼 수다스럽소?" 그는 조그마한 이빨이 고르게 돋은 잇몸을 드러내 보이고 재빠르게 자세를 바꾸었다. 그의 상반신이 기울자, 동시에 그의 고개도 젖혀져서 전등 불빛이 번뜩였다. 그의 모습은 불쾌했다. 그는 노인의 가면 뒤에서 빈틈없이 기를 쓰고 움직이는 불량소년 같았다. 권총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은바퀴처럼 빙빙 돌다가 나의 심장을 겨누고 멎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표현방식이 다르지. 나도 내 정체를 뚜렷이 밝혀줄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소." 식은땀이 내 등에 흘렀다. 택시의 경적이 거리에서 울렸다. 그는 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내가 나갈 때까지 붙들어 주었다. 바깥은 집안보다 따뜻했다. 제10장. 미치광이 피아노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덕분에 빈 차로 돌아가지 않게 됐습니다. 말리부까지 끌고 갔거든요. 거지 네 명이 해변 파티에 불려나갔죠. 그들은 바다엔 아예 가지도 않을 겁니다." 택시의 뒷좌석은 아직도 온실과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들 하는 얘길 들려주고 싶은데요." 그는 선세트 대로의 빨간 신호에 걸려 속도를 떨어뜨렸다. "시내로 돌아가십니까?" "잠깐만." 그는 차를 멈추었다. "<피아노> 라는 술집을 알고 있소?" "<미치광이 피아노> 말인가요?"하고 그가 말했다. "서(西) 할리우드에 있죠. 술집 같은 뎁니다." "누가 하는 가게요?" "그 사람들이 내게 장부를 보여준 적이 없어서요."하고 그는 기어를 넣으면서 경쾌하게 말했다. "거기 가십니까?" "왜 어때서?"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초저녁인데."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밤은 깊었고 싸늘했다. 밤의 맥박이 느리게 뛰고 있었다. 네 개의 타이어는 밤안개에 깊이 젖은 아스팔트 길을 굶주린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선세트 대로의 네온이 불면증이라도 걸린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옆골목에, 쓰레기투성이인 뒷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어깨를 내밀고 있는 2세대 주택들 속에 그 술집이 있었다. 가게에는 네온도, 플라스틱과 플레이트 유리의 현관도 없었다. 비바람을 맞아 갈색이 된 데다가, 딱지처럼 벗겨져 나간 아치 문이 입구 위에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치 문 위에는 장식 쇠난간이 붙은 발코니가 두텁게 커튼을 내린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흑인 도어맨이 아치 문 밑에서 나타나 택시의 문을 열었다. 나는 운전사에게 요금을 치르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문 위의 희미한 전등 불빛으로, 나는 그의 푸른 옷의 보풀이 닳아서 실밥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갈색 가죽을 입힌 문은 땀이 밴 손으로 문질러댔는지 손잡이의 언저리에 검게 때가 묻어 있었다. 문을 열자 터널과 같이 길쭉한 방이 나타났다. 내프킨을 팔에 걸친 웨이터 복을 입은 다른 흑인이 문까지 나와서 나를 맞아들였다. 그의 미소를 띤 입술은 벽에서 나오는 푸른 전등 불빛 속에서 짙은 감색으로 보였다. 벽 장식은 여러 가지 자태의 푸른색 나체 사진들이었다. 좌우 벽에 통로를 사이에 두고 하얀 커버를 씌운 테이블이 늘어서 있었다. 한 여자가 방의 맨 끝에 있는 낮은 연단 위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그녀의 손가락은 교묘하게 움직였지만 등은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기계인형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나는 내 모자를 비좁은 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아가씨에게 맡기고 피아노에 가까운 테이블을 잡아달라고 청했다. 웨이터는 내프킨을 창 끝에 다는 삼각형 깃발처럼 팔락거리면서 앞장서서 통로를 미끄러지듯이 걸어갔다. 그는 경기가 좋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은 경기가 좋지 않았다. 테이블의 3분의 2가 비어 있었다. 나머지 테이블은 커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고급 바의 대표적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뚱뚱이도 홀쭉이도 죄다 푸른 수족관 같은 불빛 속에서 얼굴이 물고기 같았다. 물고기와 같은 얼굴에다가 굴과 같은 눈들이었다. 그들의 짝들은 대부분이 돈을 미리 받았거나, 돈을 당장이라도 받고 싶어하는 표정들이었다. 3분의 2가 내가 코러스 계통에서 본 적이 있는 금발 여자들인데, 그녀들은 마치 시간의 경과를 멈출 수 있는 것처럼 순진한 미소를 얼굴에 고착시키고 있었다. 몇몇 여자는 나이가 들어보였지만, 그녀들의 둥실둥실한 육체는 한두 해 더 떠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들은 손과 혀와 눈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들이 '미치광이 피아노' 수준에서 밀려나간다면 보다 나쁜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루한 노란 얼굴의 멕시코 아가씨가 내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초리는 나를 더듬다가 외면했다. "스카치와 버본,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하고 웨이터가 물었다. "버본과 물, 내가 타겠어." "예, 알겠습니다. 샌드위치도 있습니다." 나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생각했다. "치즈 샌드위치." "감사합니다." 나는 내가 너무나 융통성이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쳐다보았다. 자기 이름을 베티라고 한 그 여자는 피아노를 친다고 말했었다. 피아노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테이블에서 이따금 일어나는 웃음소리와 대조적인 선율을 이루었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투명한 건반 위에서 마치 피아노가 혼자 연주하기 때문에 그녀는 피아노를 따라가야 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급속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긴장된 벌거벗은 어깨는 야위었으나 맵시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마치 타르처럼 쏟아져 내려와서 어깨를 새하얗게 보이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남 아저씨. 술 한잔 사주세요." 멕시코 아가씨는 내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그녀는 걸터앉았다. 어깨가 둥글고 허리가 없는 그녀의 육체는 마치 채찍처럼 움직였다. 깃을 낮게 판 가운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야만인에게 옷을 입힌 것 같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목석 같은 얼굴은 웃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가씨에게 안경을 사주어야겠군." 그녀는 그 말이 익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익살꾼이에요. 난 익살꾼이 좋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억지로 내는 소리였다. 목석 같은 얼굴에서 나옴직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나를 싫어할 거야. 하지만 술은 한잔 사지." 그녀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눈알은 송진 덩어리처럼 딱딱하고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 팔에까지 뻗어 쓰다듬기 시작했다. "난 당신이 좋아요, 익살 아저씨. 익살맞은 얘길 해주세요." 그녀는 내가 싫었고, 나도 그녀가 싫었다. 그녀는 상체를 내밀어 자기의 드레스 속을 보게 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작고 단단했고 젖꼭지는 연필 끝처럼 뾰족했다. 그녀의 팔과 윗입술엔 부드러운 검은 털이 돋아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고 아가씨에게 호르몬제를 사주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거 먹는 거예요? 난 무척 배가 고파요." 그녀는 설명삼아 자기의 배고픈 하얀 이를 내게 보였다. "왜 나를 뜯어먹지 않나?" "당신은 나를 놀리시는군요?"하고 그녀는 토라져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내 팔을 주물렀다. 웨이터가 나타나 내게 빠져나갈 기회를 주었다. 그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비웠다. 접시에 올려놓은 조그마한 샌드위치, 물 한 잔, 바닥에 1 센티미터 가량의 위스키를 넣은 술잔, 빈 주전자, 웨이터가 이심전심으로 알고서 그녀의 몫으로 가져온 음료수 한 잔. "6달러가 되겠습니다." "뭐라고?" "음료수가 각각 2달러, 샌드위치가 2달러입니다." 나는 샌드위치의 윗조각을 들추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엷은 치즈 한 토막을 보았다. 그건 금박지처럼 얇고 값도 꽤나 비쌌다. 나는 10달러 지폐를 내려놓고 거스름돈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내 원시인 동반자는 그녀 몫의 과일 주스를 마시고 나서 네 장의 1달러 짜리를 흘끗 보고는 다시 내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당신 손은 아주 정열적인데."하고 나는 말했다. "난 오직 베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베티?" 그녀는 피아니스트의 등에 대고 멸시의 검은 눈초리를 던졌다. "그러나 베티는 예술가예요. 그녀는 안..." 말 끝은 제스처로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서 빨간 혀 끝을 마치 침이라도 뱉는 듯이 밀어냈다. 나는 웨이터에게 신호를 보내어 피아니스트에게 술을 보내도록 했다. 내가 멕시코 아가씨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웨이터가 피아노 위에 술을 내려놓고 나를 가리키자 피아니스트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타원형이었고 마치 축소된 듯이 보일 정도로 작고 섬세한 생김새였다. 그녀의 눈은 빛깔도 표정도 또렷한 데가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초대할 셈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고서 다시 건반 위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녀의 하얀 손이 인공적인 '부기우기'의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치 거인의 발길이 금속의 덤불을 스칠 때 내는 소리처럼 하얀 손에서 음악이 나왔다. 거인의 그림자를 볼 수 있고, 거인의 스프링 해머와 같은 심장의 맥박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곡을 바꾸었다. 그녀의 왼손은 여전히 둥둥 소리를 내며 베이스를 굴리고 있는 한편, 오른손은 블루스를 정교하게 치고 있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단단한 치찰음을 내는 목소리는 모서리는 무뎠지만 어쩐지 가슴을 치는 데가 있었다. ...... 내 발은 남쪽을 향하고 있소. 난 우울증 환자예요. 박사님, 박사님, 박사님 내 두뇌를 분석해 주세요. 박사님, 나를 안정시켜 주세요. 박사님, 나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난 우울증 환자예요. 그녀의 노래 가사에서는 퇴폐적인 지성이 풍겼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 노래는 내 뒤에서 지껄이고 있는 패거리들보다 훨씬 고급인 청중들에겐 어울렸다. 노래가 끝나자 나는 손뼉을 치며 그녀에게 한 잔을 더 시켜주었다. 그녀는 술잔을 들고 내 테이블에 왔다. 그녀의 육체는 조그맣고 완벽한 타나그라의 작은 입상(立像)과 같았다. 나이는 20-30살 사이의 어떤 곳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내 음악을 좋아하시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이마를 숙이고 나를 치켜보았다. 그건 자기 눈에 자신을 가진 여자의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갈색 반점이 박힌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당신은 52번가에 있어야 했는데."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다고는 생각 마세요. 그러나 당신은 잠시라도 거기 있지 않았죠? 거리는 엉망이 되었어요." "이 가게는 수지가 안 맞겠군. 망하고 있어. 누구나 그 조짐을 볼 수 있지. 주인은 누구요?" "내가 아는 분이에요. 담배 가지셨나요?" 내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자 그녀는 깊이 빨아들였다. 그녀의 얼굴은 무의식적으로 치켜올려 주기를 기다리다가 내가 그러지 않자 약간 수그러졌다. 그녀는 쓴 술병을 빨아먹고 성장한, 늙지 않은 얼굴을 가진 아기와 같았다. 그녀의 콧구멍 가장자리는 핏기라고는 없었고 눈처럼 하어다. 프로이트의 학설에는 과오가 없었다. "내 이름은 루."하고 나는 말했다. "난 틀림없이 당신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난 베티 프레일리예요." 그 말에는 명함의 엷고 검은 가장자리 장식처럼 유감의 여지가 있었다. 그 이름은 내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소." 나는 더욱 대담하게 거짓말을 했다. "베티, 당신은 심한 상처를 받았소." 모든 마약중독자에게는 불행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런 말은 두 번 이상 해서는 안돼요. 하얀 감방에서 2년, 피아노도 없는 방. 모의죄는 불법체포였어요. 그들이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마약이 필요하다는 것 뿐이었지요. 그들은 나를 위해서 나를 체포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란 말예요! 그들은 선전효과가 필요했어요. 내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지금은 아니에요. 만일 내가 그 습관을 끊는다면 그건 마약 단속관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닐 거예요." 그녀의 붉은 입은 담배의 붉은 끄트머리 위쪽에서 비뚤어졌다. "피아노 없는 2년간의 감금생활!" "당신은 오랫동안 쉬었던 솜씨치고는 잘 치는데."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성시대 때 시카고에서의 내 음악을 들었어야 했는데. 당신은 내 레코드를 들으셨겠죠?" "안 들은 사람이 없었지." "내 말대로 괜찮던가요?" "굉장했어! 나는 당신 레코드에 미쳤었지." 그러나 나는 재즈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잘 못했거나 지나치게 칭찬을 했던 모양이다. 입에서 풍기던 씁쓸함이 눈과 목소리까지 번졌다. "난 당신 말을 곧이듣지 않아요. 레코드 하나 대보세요." "오래 전 일인데." "<진 밀 블루스> 를 좋아하셨나요?" "좋아했지." 나는 안심하고 말했다. "당신은 설리번보다 잘했지." "루, 거짓말 마세요. 난 그런 곡을 취입한 적이 없어요. 왜 당신은 나를 지나치게 떠벌이게 하는 거예요?" "그야 당신의 연주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물론이겠죠. 당신은 십중팔구 음치일 거예요." 그녀는 나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변덕스러운 그 눈이 단단하고 밝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초점을 맞추었다. "당신은 경찰 같은데? 꼭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파고드는 방식이 좀 수상해요. 당신은 경찰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경찰의 눈은 남이 다치는 것을 보고 싶어해요." "베티, 진정해요. 당신은 신경이 너무 날카롭군. 물론 난 경찰이나 다름없지만, 남이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소." "마약단속반인가요?" 그녀의 얼굴을 새하얀 공포가 휩쓸었다. "그런 게 아냐. 사립탐정이오. 난 당신에게서 바라는 게 없어. 그저 우연히 당신의 음악이 좋아졌을 뿐이지." "거짓말!" 증오와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마른 소음이었다. "당신이 페이의 전화를 받고 트로이라고 대답했죠? 도대체 무엇을 쫓고 있는 거죠?" "샘프슨이라는 사람. 그의 소식을 못 들었다고는 말하지 마. 당신은 그의 소식을 들었을 거야." "그분의 소식은 들은 적이 없어요." "전화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럼, 좋아요, 나는 그분을 다른 사람들처럼 여기서 보았을 뿐이에요. 그걸로 내가 그의 간호원이 되나요? 왜 내게 온 거예요? 그는 내 고객 중 한 분에 불과할 뿐이에요." "당신이 내게 왔지. 기억 안 나?" 그녀는 내게 몸을 기울이고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증오감을 쏟아냈다. "여기서 나가서 들어오지 말아요." "난 여기 있을 거야." "그렇게 해보세요." 그녀는 팽팽한 하얀 손을 웨이터에게 홱 돌렸다. "퍼들러를 불러요. 이 사람은 FBI의 끄나불이에요." 웨이터는 검푸른 얼굴을 당기며 불안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서둘지 마." 나는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피아노 뒤에 있는 문으로 갔다. "퍼들러!" 실내의 모든 손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주홍색 셔츠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조그만 눈이 두리번거리면서 말썽꾼을 찾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를 지적했다. "저 사람을 끌어내서 혼을 내줘요. 저치는 탐정이에요. 나를 염탐하러 왔어요." 나는 뛸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뛰는 것도 하루에 세 번은 너무 많다. 나는 그에 맞서 젖먹은 힘을 다해 펀치를 먹였다. 칼자국이 있는 머리가 쉽사리 물러갔다. 나는 오른손으로 치려고 했지만 그는 팔로 받으며 뛰어들었다. 그의 흐릿한 눈빛이 바뀌었다. 나는 그 눈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주먹 하나가 나의 배를 갈겼다. 나의 방어자세가 무너졌다. 다른 주먹이 목덜미로 날아왔다. 나의 두 다리가 연단 모서리에 걸렸다. 나는 쓰러지면서 피아노에 부딪쳤다. 의식이 요란한 불협화음을 내면서 사라져 거대한 그림자 속에 가라앉았다. 제11장. 군용 수송 트럭 검은 상자의 밑바닥에 보잘것없는 작은 사내 하나가 딱딱한 것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딱딱한 무언가가 그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먼저 한쪽 턱을, 이어 다른 쪽을. 그때마다 그의 머리는 뒷전의 딱딱한 벽면에 부딪쳐 한 번씩 퉁겨져 나왔다. 다시 얻어맞고 다시 퉁겨져 나오고...... 이 괴로운 고문은 상당한 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단조롭게 지속되었다. 주먹이 다가올 때마다 그 보잘것없는 사내는 쑤시는 이빨로 그것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렇지만 그의 두 팔은 양옆에 얌전히 늘어져 있었다. 양다리는 극도로 활력을 잃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통로 어귀에 나타나서 잠시 동안 황새처럼 한발로 서 있더니, 이윽고 괴상하게 절룩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퍼들러는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는 그의 등뒤에서 허리를 죽 펴더니 한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팔이 내려오며 팔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물체를 휘둘렀다. 그것은 퍼들러의 뒤통수에서 호두를 깔 때처럼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흰자위만 보였기 때문에 눈 속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뒤로 밀쳤다. 앨런 태거트가 구두를 도로 신고는 내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다지 세게 때리지는 않았으니까요." "다음번에 또 녀석을 마구 때려줄 일이 생기면 내게도 알려주시오. 구경하고 싶으니까." 입술이 부풀어오른 것 같았다. 다리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와도 같았다. 나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그래도 한쪽 다리만으로 설 수는 없었다.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길로 찬다면 나중에 후회했으리라. 설사 몇 해 뒤일지라도. 태거트가 내 팔을 붙들고 입구 쪽으로 끌고 갔다. 도로변에 택시 한 대가 한쪽 문을 연 채 서 있었다. 길 건너편 '미치광이 피아노'의 입구는 한산했다. 그는 나를 택시에 밀어넣고 뒤따라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잠시 나는 머릿속이 멍했다. 이윽고 그 진공 속으로 분노가 밀물처럼 몰려 들어왔다. "집에 가서 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할리우드 대로의 스위프트로 갑시다." "거긴 문을 닫았는데요."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내 차가 그 집 주차장에 있어요." 그리고 차 안에는 총이 있었다. 그 길을 반쯤 가서야 비로소 머리와 혀가 보조를 맞추었다. "당신은 대체 어디서 여기에 온 거요?"하고 나는 태거트에게 물었다. "이리로 통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있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딱딱거렸다. "말을 돌려서 하지 말아요. 난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미안합니다."하고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샘프슨 씨를 찾고 있었지요. 아까 거기는 '미치광이 피아노'라는 집이었어요. 샘프슨 씨가 나를 거기 데려간 적이 한 번 있기에, 그 사람들한테 그 양반 소식을 물어볼까 하고요." "바로 내가 하려 했던 일이로구먼. 그 친구들 대답은 당신이 직접 본 그대로요." "어쩌다가 거기 가시게 됐지요?" 나는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저 비실비실 들어갔다가 비실비실 나온 것 뿐이오." "나오시는 걸 나도 봤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내가 걸어서 나왔소?" "어느 정도는. 도움을 좀 받기는 했지요. 누군가가 당신을 부축해 주더군요. 난 택시에서 기다렸지요. 그 깡패 녀석이 당신을 골목으로 몰아붙이는 걸 보고 뛰어나간 겁니다."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군."하고 나는 말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는 내게로 몸을 기울이며 진지한 어조로 속삭였다. "정말로 샘프슨 씨가 납치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장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군. 납치란 그래도 뭣 좀 생각할 수 있었을 때 떠올랐던 생각이오." "누가 그 양반을 납치했을까요?" "이스터브룩이라는 여자가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트로이라는 사내도 있고. 그자를 만난 적이 있소?" "아뇨. 하지만 이스터브룩이라는 여자에 관해서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어 달 전에 샘프슨 씨와 함께 네바다에 갔었지요." "어떤 자격으로?" 멍든 내 얼굴이 짓궂은 곁눈질로 그를 노려보고 싶어했다. 나는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확실히는 모릅니다. 여자는 차를 타고 그곳에 갔거든요. 비행기가 고장나서,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러 수리했죠. 그 여자를 본 적은 없지만, 샘프슨 씨가 얘길 하더군요. 두 사람이 햇볕 아래 앉아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나요. 내 생각으론 그 여잔 그 '클로드'라는 성자의 패거리 같습니다. 샘프슨 씨가 산을 기증한 그 사람 말입니다." "이전에 말해 주지 그랬소. 내가 당신에게 그 여자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땐 미처 몰랐습니다." "이젠 상관없는 일이오. 난 오늘 저녁을 그녀와 함께 보냈으니까. 발레리오에 나와 함께 있었던 게 바로 그 여자였소." "그랬었군요." 그는 깜짝 놀란 듯했다. "그 여자가 샘프슨 씨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까요?" "그럼직도 한데, 아무 말도 않더군. 난 지금 다시 한 번 그녀를 찾아가려는 중이오. 그런데 응원군이 있었으면 좋겠는걸. 그 친구, 좀 거칠어서." "좋지요!"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감각이 아직 마비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운전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커브를 돌 때 차를 비스듬히 기울여 모는 경향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 탈없이 이스터브룩의 집에 도착했다. 주위는 어두웠다. 뷔크는 차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차고는 비어 있었다. 나는 총 끝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뚫고 들어갑시다." 그러나 문에는 빗장이 걸려 있어서 둘이 함께 어깨로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로 돌아갔다. 뒤뜰에서 나는 뭔가 매끄럽고 둥그스름한 물체를 밟고는 휘청거렸다. 맥주병이었다. "조심해요, 형씨." 태거트가 불량소년과 같은 투로 말했다. 그는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젊은 혈기로 부엌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리가 함께 밀어붙이자 자물쇠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우리는 부엌을 통과해서 컴컴한 홀로 들어갔다. "권총은 가졌소?"하고 나는 물었다. "아니오." "하지만 사용법은 알 테지?" "당연하죠. 기관총이 더 좋긴 합니다만."하고 그는 허풍을 떨었다. 나는 그에게 내 총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만족하시오." 나는 현관문으로 가서 빗장을 뽑고는 문을 조금 열었다. "누구든지 오면 내게 알려요. 당신은 모습을 비치지 말고." 그는 버킹검 궁전에 새로 들어간 보초병처럼 지극히 엄숙한 자세로 자기 위치에 섰다. 나는 불을 켰다 껐다 하며 거실과 식당, 부엌과 욕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방들은 내가 아까 본 그대로였다. 침실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두번째 서랍에는 스타킹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그리고 스타킹 뭉치 뒷전 한구석에 찢겨지고 속이 빈 편지봉투 한 장이 꾸겨져 처박혀 있었다. 겉봉의 수신인은 이스터브룩 부인이었고, 주소는 내가 찾아온 집의 주소였다. 누군가가 그 뒷면에 연필로 몇 마디 말과 숫자를 휘갈겨 써놓았다. 40,000 > 2 > 20,000 그것은 매우 수익성이 좋은 사업의 계획서 초안 같아 보였다. 내가 아는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미치광이 피아노'는 그만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봉투를 다시 뒤집었다. 발송 날짜는 1주일 전인 4월30일이었고, 산타 마리아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봉투의 내역을 기억에 새기고 있는데, 길에서 육중한 모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줄기 불빛이 집 앞을 쓸더니 열려진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곳에 서 있던 태거트가, "아처 씨!"하고 쉰목소리로 불렀다. 다음 순간 그는 대담하고도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현관 앞, 작렬하는 백광(白光) 속으로 뛰쳐나가며 들고 있던 총을 쏘았던 것이다. "멈춰!"하고 내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총알은 금속판을 때리고는 억울한 듯 윙 하는 여운을 끌며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응답하는 총성은 없었다. 나는 팔꿈치로 그를 밀치고 내달아 현관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유개(有蓋) 화물 트럭 한 대가 부랴부랴 차도를 벗어나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트럭이 미처 속도를 올리기 전에 찻길에서 따라잡았다. 운전대의 오른쪽 창이 열려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팔을 넣어 걸고는 한쪽 발을 펜더 위에 걸쳤다. 시체처럼 야위고 창백한 얼굴이 핸들 위에서 나를 쳐다보았다. 겁을 먹은 작은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트럭이 바람벽이라도 들이받은 듯 급정거를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손을 놓치고 길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내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트럭은 뒷걸음질쳐 이를 가는 소리를 내며 기어를 바꾸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휘황한 불빛이 한 순간 내 눈을 현혹시켰다. 으르렁거리는 네 바퀴가 나를 덮쳤다. 난 의도하는 바를 깨닫고는, 옆으로 몸을 날려 보도 쪽으로 굴렀다. 트럭은 내가 있던 지점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통과하더니, 그대로 대로를 따라 올라갔다. 엔진의 으르렁거림이 점차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번호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불이 켜 있지 않아서 보이지 않았다. 뒷문에는 창이 없었다. 내 차로 갔더니 태거트가 벌써 엔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를 운전석에서 밀어내고 트럭을 뒤쫓았다. 선세트 대로에 이르렀을 때 트럭의 뒷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 산을 향했는지, 바다 쪽으로 돌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태거트를 향했다. 그는 총을 무릎 위에 놓고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쏘지 말라고 했으면 말을 들어야지." "당신이 말했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운전사 머리 위쪽을 겨냥했던 거니까요. 놈을 놀라게 해서 차 밖으로 몰아낼 생각이었습니다." "놈은 나를 깔아 뭉개려고 했어. 당신이 총을 갖고 침착했더라면 놈이 달아나지는 않았을 텐데." "미안합니다."하고 그는 깊이 뉘우치는 태도로 사과했다. "모처럼 총을 잡고 보니 들떴던 모양입니다." 그는 손잡이 쪽을 내밀며 내게 총을 건네주었다. "잊어버려요."하고 말하고 나는 좌회전을 해서 시내로 향했다. "트럭을 눈여겨 봤소?" "군용 수송차 같던데요, 병력을 수송할 때 쓰는 종류 말입니다. 검은색이었지요, 아마?" "푸른색이었어. 운전사는?" "놈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캡을 쓰고 있더군요. 본 거라곤 그것 뿐입니다." "앞쪽 유리창을 못 봤단 말이오?"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유감천만이로군."하고 나는 말했다. "희박하기는 해도 샘프슨이 그 트럭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혹시, 탄 흔적이 있던가." "그게 정말입니까? 우린 경찰에 가야 하나요?" "그래야 할 것 같소. 그러나 먼저 샘프슨 부인에게 알려야겠지. 부인에게 전화했소?" "연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했을 땐 부인이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었지요. 그게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답니다." "그렇다면 아침에 찾아뵈야겠군." "우리와 함께 비행기로 가실 겁니까?" "아니, 차로 가겠소.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뭡니까, 그 일이란?" "별것 아니오." 하고 나는 무뚝뚝하게 잘라말했다. 그 뒤 그는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가지 위에 걸린 시뻘건 구름층의 가장자리가 엷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밤늦도록 쏘다니던 택시와 자가용의 행렬은 어느덧 꼬리를 감추고, 새벽일을 나가는 트럭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유개 군용 수송 트럭을 찾아보았지만 한 대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태거트를 발레리오에 내려주고는 집으로 갔다. 문간에서 우유 한 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놈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에 걸린 전자시계가 4시 20분을 알리고 있었다.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얼린 굴 한 상자를 꺼내어 굴 스튜를 만들었다. 아내는 굴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이제 나는 낮이든 밤이든 어느 때라도 부엌 식탁에 앉아서 마음껏 굴을 포식하며 정력을 증강할 수 있다. 옷을 벗고는, 방 저편에 놓인 또 하나의 빈 침대는 보지도 않고 자리에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온종일 자기가 하고 지낸 일들을 구태여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위안이었다. 제12장. FBI의 수석검사관 중심가에 이르렀을 때에는 아침 10시가 지나 있었다. 피터 콜튼은 사무실의 납작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육군정보국 시절 내 직속 상관이었다. 내가 우유빛 유리문을 열자 그는 한 무더기의 수사기록부에서 냉큼 고개를 들어 흘끗 시선을 던지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아, 내가 환영받고 있지 않음을 표시했다. 그는 검사실(檢事室)의 수석수사관으로, 짧게 친 금발과, 뒤집혀진 쾌속정의 뱃머리처럼 날카로운 코를 가진 비대한 중년 사나이였다. 그의 사무실은 강철 틀에 끼운 유리창이 단 하나 뿐인, 석고로 된 작은 방이었다. 나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벽에 붙여놓은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얼마 있다가 그는 코끝을 내게로 돌렸다.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으니 그냥 얼굴이라고 해두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얼굴이 그 모양인가?" "싸움질에 말려들었지요." "그래, 나더러 이웃집 어깨를 체포해 달라는 건가?" 미소가 입가에서 느릿하게 꼬리를 끌었다. "자네, 자신의 싸움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네. 내게 관계되는 일이 있다면야 물론 문제가 다르지만." "아이스캔디 하나와-- "하고 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풍선껌 세 개." "법의 힘을 풍선껌 세 개로 매수할 작정인가? 이 친구, 자넨 지금이 원자력시대라는 것도 모르나? 풍선껌 세 개면 우리 모두를 풍지박산으로 날려보낼 만큼 막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단 말이야!" "그만두시죠. 사고는 '미치광이 피아노' 와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넨 내가 미쳐 날뛰는 피아노에 총을 들이대는 것밖에는 따로 시간보낼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일개 한물 간 이혼전문 사립탐정과 일장 희극을 연출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튼 좋아, 털어놔 보게. 또 공짜로 뭔가 해달라는 거겠지." "일거리를 드리려는 겁니다. 대령님 생애 최고의 일거리가 될지도 모르죠." "물론 대가를 바라시겠지." "자그마한 겁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이야긴지 들어나 봄세. 단 다섯 마디로 끝내야 돼." "시간은 그렇게 걸리지 않을 겁니다." "벌써 다섯 마디야."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내 의뢰인의 남편되는 사람이 그저께 소유주 불명의 검은색 고급 승용차를 타고 버뱅크 공항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그 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스물다섯 마디야." "잠자코 들어주시죠. 어제 그 부인은 남편이 직접 쓴 편지를 받았는데, 10만 달러를 현찰로 보내라고 했답니다." "그런 목돈이 있을 리가 있나. 더구나 현찰로."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갖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봅니까?" 그는 어느 틈에 책상 왼쪽 윗서랍에서 인쇄된 서류다발을 꺼내어놓고는 재빨리 훑어넘기고 있었다. "납치인가?" 그는 무심코 물었다. "그런 냄새가 납니다. 콧구멍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최신 보고서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지난 72시간 동안 검은색 리무진이라곤 없구먼. 리무진을 가진 사람들은 차를 찾거든. 그저께라고 했지? 몇 시였나?"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네 의뢰인은 머리회전이 좀 늦는 모양이군." "신중 제일주의랍니다." "남편 제일주의는 아닌 모양이군. 그 여자 이름을 말해 주면 도움이 될 텐데." "기다리십시오. 조건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이 일은 공개되어서는 곤란해요. 내 의뢰인은 내가 여기 온 줄도 모릅니다. 또 하나, 나는 그 친구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죽으면 곤란해요." "손대기엔 너무 거창한걸, 루." 그는 일어나서 우리에 갇힌 곰처럼 유리창과 문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공식 루트를 통하면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되면 내 손이 비게 되지요. 또, 그 동안 대령님은 한편에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실 수도 있을 테고요." "자넬 위해서 말인가?" "대령님 자신을 위해섭니다. 자동차 대여소 조사부터 시작하십시오. 그게 둘째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미치광이 피아노'라는 술집인데요." "됐어, 그만하게."하고 그는 자기 얼굴 앞에서 손뼉을 쳤다. "공식보고서를 기다리기로 하지,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야." "내가 언제 엉터리 일거리를 갖고 왔던가요?" "한두 번이 아니지. 하지만 그 얘긴 그만두세. 자네도 어느 정도 과장할 수도 있지 않나, 안 그래?" "내가 무엇 때문에 말을 둘러대야 합니까?" "그러는 편이 직접 뛰어다니는 것보다 비용도 덜 먹히고 손쉽거든." 그의 푸른 눈이 가늘어지며 반짝거렸다. "우리 군(郡)에는 자동차 대여소가 무지무지하게 많단 말이야." "내가 직접 해도 좋지만 여길 떠나야 해서요. 그 사람들, 산타 테레사에 살거든요." "그자들 이름은?" "대령님을 믿어도 될까요?" "어느 정도는. 보기보단 나을 거야." "샘프슨."하고 나는 말했다. "랠프 샘프슨." "그자 얘긴 들었지. 자네가 말한 10만 달러 건의 뜻도 알 만하구먼." "문제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다릴 수밖에요." "그거야 이미 한 말 아닌가." 그는 발꿈치로 몸을 돌려 창을 향하고는 등을 진 채 말했다. "뭐랬더라, '미치광이 피아노'인지 뭔지에 관해서도 말했었지?" "날더러 돈 안 들이고 되는 일거리를 찾고 있다고 말하기 전이었죠." "설마 자네에게 상할 만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 "그저 실망했을 따름이죠. 나로서는 10만 달러의 현찰과 500만 달러의 고정자산이 걸린 일거리를 갖다드렸는데, 대령님은 하루의 귀중한 시간 어쩌고 하면서 입씨름만 하시니 말입니다." "여보게, 나도 독자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잖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향했다. "드와이트 트로이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나?" "드와이트 트로이라니--- "하고 나는 물었다. "어떤 작잔데요?" "자그마한 봉지에 든 독물이지. '미치광이 피아노'를 운영하고 있다네." "그런 집을 규제할 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요. 또 그런 작자도 말입니다. 소생의 견문이 좁았던가 보죠?" "그럼, 자넨 그 친구를 알고 있군?" "그자가 백발의 영국인이라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콜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만났습니다. 모종의 사연으로 내게 권총을 휘둘렀지요. 비켜줬습니다. 그 친구 총을 빼앗는 건 내 담당이 아니라서요." 콜튼은 언짢은 듯이 두툼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녀석을 잡아넣으려고 몇 년 동안이나 애먹었지. 녀석이 원체 매끄러워서. 위험하다 싶어질 때까지 한탕하다가는 슬며시 옆길로 샌단 말이야. 30대 초반에는 한창 날렸었지.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술을 팔았더랬어, 결국 문을 닫았지만. 그 뒤론 오르락 내리락했지. 한동안 네바다에서 도박판을 벌이기도 했는데, 마피아가 쫓아냈어. 듣자 하니 최근에는 녀석의 국물도 줄어들었다더군. 그래도 우리는 놈을 족칠 날을 기다리고 있지."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미치광이 피아노'를 폐쇄하면 될텐데요?" 나는 잔뜩 비꼬아서 말했다. "6개월마다 폐쇄한다네." 그는 툭 쏘았다. "지난번 소탕이 있기 전에 자네도 그 꼬락서니를 볼 걸 그랬지? 그땐 라인스톤이라는 술집이었어. 변태성욕자들을 위해 2층엔 한편에서만 볼 수 있는 창까지 달아놨더군. 여자가 남자를 매질하는 따위의 틀에 박힌 짓거리를 보여주는 거지. 우리가 끝장을 내줬지만." "거긴 누가 운영했었나요?" "이스터브룩이라는 여자야. 그 여잔 어찌됐느냐고? 기소조차 안됐다네." 그는 분한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형편이 그래 놓으니 손댈 도리가 있어야지. 나는 정치가가 아니잖나." "트로이도 아니죠."하고 나는 말했다. "녀석이 어디 사는지 아십니까?" "몰라. 놈에 관해서 물은 쪽은 내가 아니었나, 루?" "그렇군요. 대답은 나도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녀석과 샘프슨은 얼마간 같은 행동반경 속에서 움직여 왔습니다. '미치광이 피아노'에 사람을 하나 달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손이 비는 친구가 생기면 그렇게 하지." 뜻밖에도 그는 내게로 다가와 두툼한 손을 내 어깨에 얹었다. "자네, 트로이와 다시 맞닥뜨리더라도 놈의 총을 빼앗을 생각일랑은 말게. 전에도 그걸 시도한 친구가 있었지." "나야 그런 짓 안하지요." "그래야지."하고 그는 말했다. "그걸 시도한 친구는 죽었다네." 제13장. 최악의 상태 로스앤젤레스에서 산타 테레사까지는 시속 100 킬로미터의 속도로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샘프슨 저택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해는 어언 중천을 지나, 테라스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동하는 흩어진 구름 사이를 뚫고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펠릭스가 나를 집안으로 맞아들여 거실로 안내했다. 방이 워낙 커서 육중한 가구들조차 빈약해 보였다. 바다를 마주보는 벽은 단 한 장의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양끝에 드리워진 유리섬유 커튼은 마치 빛살을 모아 만든 것 같았다. 샘프슨 부인은 그 커다란 창가에 놓여 있는 푹신푹신한 의자에 버티고 앉은 실물 크기의 인형과 같았다. 그녀는 노란색 실크 저지 드레스로 정장을 하고 있었다. 두 발은 금빛 구두를 신고 발받침용 작은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염색한 머리카락에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금속제 휠체어는 문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꼼짝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극적인 한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초침이 시간을 새김에 따라 바야흐로 일장 희극이 될 판이었다. 침묵의 순간이 15초쯤 흘러 팔뚝이 근질근질하게 되자, "이젠 됐소."하고 내가 말했다. "나를 만나자고 하셨다고요?" "오시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잡으셨더군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서 토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과드릴 일은 없습니다. 부인께서 맡기신 일로 줄곧 뛰어다녔으니까요. 게다가, 지시 사항도 전해 드렸고... 부인께서도 그대로 하셨습니까?" "일부는요. 좀더 가까이 오세요, 아처 씨. 그리고 앉으세요. 나는 전혀 남을 해치지 않는 존재이니까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자기의 의자와 마주 놓인 안락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방을 가로질러 가서 의자에 앉았다. "일부라니, 어느 부분인가요?" "내 몸 전체예요." 그녀는 식충식물과 같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독침은 빼어버렸답니다. 하지만, 물론 당신은 지시사항을 물었겠지요? 버트 그레이브스가 지금 돈을 만들고 있어요." "경찰에 알렸답니까?" "아직은요. 그 문제를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데요. 하지만 먼저 편지를 읽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곁에 놓인 커피 테이블에서 봉투를 집어들어 내게로 던졌다. 나는 이스터브룩 부인의 서랍에서 발견한 빈 봉투를 꺼내어 둘을 대조했다. 그것들은 크기와 질은 물론 주소를 쓴 필적까지도 달랐다. 유일하게 닮은 점은 산타 마리아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있다는 것 뿐이었다. 샘프슨의 편지에는 부인 앞으로 주소가 적혀 있었고, 전날 오후 4시 반에 접수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이걸 몇 시에 받았습니까?" "어젯밤 9시경이에요. 보시다시피 속달로. 읽어보세요." 편지는 보통 쓰는 흰 타이프 용지 한 장인데, 푸른 잉크로 휘갈겨쓴 사연이 한 면을 채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엘레인 뜻하지 않은 사업에 관계하게 되어 현금이 급히 필요하오. 미국 은행에 있는 우리 공동명의의 안전금고에 증권이 꽤 있소. 앨버트 그레이브스라면 그것들 중 어느 것을 팔아야 현찰이 되는지 알고 있을 거요. 10만 달러 상당의 증권을 현찰로 바꿔 주기 바라오. 액면이 50달러나 100달러보다 큰 지폐는 곤란하오. 이번 거래는 신빙성 있고, 또한 몹시 중요하니 은행에서 지폐에 표시를 한다든가 일련번호를 기록하지 않도록 해주구려. 돈이 되거든 내 연락을 받거나 증거서류를 갖춘 대리인이 갈 때까지 집의 금고에 보관해 두도록 하시오. 곧 소식 전하겠소. 물론 앨버트 그레이브스를 신임하지 않으면 안되오. 그러나 이번 일은 극히 중대하니 그 밖의 누구에게도 이 일에 관해 말해서는 안되오.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나는 막대한 이익을 놓치게 됨은 물론, 자칫하면 법망에 걸릴지도 모르오. 누구에게든 엄중히 비밀에 붙여두지 않으면 안되오. 그래서 내가 직접 은행에 가는 대신 당신에게 돈을 부탁하는 것이오. 일은 이번 주 안으로 끝날 것이니, 근간 당신을 보게 될 거요. 당신을 사랑하오. 걱정마시오. 랠프 샘프슨 "신중하게 작성되기는 했지만..."하고 나는 말했다. "신빙성이 없군요. 그가 직접 은행에 갈 수 없는 이유라는 게 극히 빈약합니다. 그레이브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 역시 그 점을 지적하더군요. 그의 생각으로는 모두 조작이래요. 하지만 결정은 내게 달렸습니다." "부인은 이것이 남편의 필적임을 절대로 확신합니까?" "그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극히' 란 말의 스펠링을 보셨지요? 그건 그 이가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인데, 그러면서도 늘 틀리게 쓴답니다. 아예 발음까지도 틀리게 해요. 그이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거든요." "문제는 이겁니다--- 그는 살아 있을까요?" 그녀의 맵시 있는 푸른 눈이 언짢은 기색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처 씨, 당신은 정말 사태가 그토록 심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분은 보통 이런 식으로 거래하지는 않을텐데요?" "그이의 사업방식에 대해서라면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우리가 결혼한 이래 사실상 그이는 사업에서 손을 뗐으니까요. 전쟁 중 목장을 몇 개 사고팔긴 했지만, 거래의 제반사항을 내게 알려주지는 않았거든요." "거래 중 비합법적인 것은 없었습니까?" "난 하나도 몰라요. 그이는 사업처리 능력이 완벽하답니다. 그것도 나를 꼼짝못하게 묶어놓은 수단 중의 하나죠." "다른 건 또 뭡니까?" "난 그이를 믿지 않아요."하고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난 그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 많은 돈을 가졌으니 세계일주라도 계획하고 있는지 모르지요. 어쩌면 내 곁을 떠날 생각인지도 모르고요. 알 수 없어요." "나 역시 모르지만 추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주인께서는 몸값 때문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는 머리에 권총이 겨누어진 처지에서 부르는 대로 받아쓴 겁니다. 정말로 사업상의 거래였다면 부인에게 편지를 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레이브스는 변호사로서 그 나름의 역량이 있겠지요. 하지만 납치범들이란 희생자의 부인과 거래하기를 좋아한답니다. 그 편이 손쉽거든요." "난 어쩌면 좋지요?" 그녀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물었다. "편지에 적힌 지시대로 따르십시오. 그렇지만 반드시 경찰을 불러야 합니다. 공공연하게 존재를 알리라는 것이 아니라, 한 편에 대기시켜 두라는 겁니다. 부인도 잘 아시다시피 납치범들이 돈을 챙긴 다음에 남편의 머리통을 날려보내고 줄행랑을 놓는 건 누워 떡먹기가 아닙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남편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혼자서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이가 납치되었다고 확신하는 것 같군요. 아직 내게 말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신 모양이죠?" "제법 많지요. 그것들을 종합해 보면 남편께선 질이 나쁜 친구분들과 어울리고 계셨다는 괘가 나오더군요." "그건 알고 있었어요." 한순간 그녀의 표정은 자제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그것 보라는 듯이 일그러졌다. "그이는 가정적인 남자와 모범적인 아버지의 포즈를 취하곤 했죠. 하지만 결코 나를 속일 수는 없었어요." "아주 고약한 패거리들입니다."하고 나는 엄숙하게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패거리들 못지 않아요. 현존하는 최고의 악질들이지요." "그이는 늘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좋아했어요." 그녀는 문득 말을 끊고는 내 뒤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란다가 거기 서 있었다. 늘씬한 키를 강조하는 회색 개버딘 투피스를 입고 구릿빛 머리채를 머리 위로 말아올린 그녀는 어제 내가 만난 처녀의 언니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분노로 크게 열려 있었고,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아버질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자칫하면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고작 한다는 게 그분 험담이라니." "내가 고작 그런 것밖에 안했던가, 애야?" 다갈색 얼굴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오직 푸른 눈동자와 조심스레 루즈를 칠한 입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미란다는 우리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화가 나 있을 때조차도 그녀의 몸은 어린 고양이의 유연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을 드러내 보였다. "새엄마의 진짜 관심사는 자기 자신 뿐이에요. 자기도취자라는 것이 있다면 새엄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잔뜩 허영에 들떠서 옷치장이나 머리 손질, 특급 미용사, 다이어트...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죠. 안그래요? 그러니 계속 자기만 사랑하세요. 물론 다른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생각일랑은 말아야겠지요." "분명히 네 사랑은 기대하지 않을 거다." 나이가 위인 여인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런 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니까. 그럼, 네 관심사는 뭐지, 애야? 앨런 태거트겠지, 아마. 보나마나 간밤엔 그와 함께 지냈을 테고." "거짓말! 난 안 그랬어요."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고 선 채 계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장이 난처했지만,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입 끝으로 하는 고양이 싸움이 종종 폭력사태로 끝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앨런이 또 연기를 한 모양이지? 언제 너와 결혼하겠다던?" "천만에! 난 그 사람과 결혼 안해요." 미란다의 음성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식의 말다툼을 오랫동안 이끌어가기에는 너무 어렸고, 따라서 상처받기 쉬운 일이었다. "날 놀리는 것쯤 간단하겠죠. 다른 사람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테니까. 무정한--- 그래요, 새엄마는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새엄마가 조금이라도 아버질 사랑해 드렸다면 아버진 행방불명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버질 이곳 캘리포니아까지 꾀어내어 모든 친구로부터 떼어놓고는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질 몰아내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샘프슨 부인 또한 초조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란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넌 처음부터 날 싫어해서 옳건 그르건 내게 반대해 왔지. 네 오빤 좀더 내게 잘 해줬는데..." "오빠를 끌어들이진 마세요. 오빠를 손 안에 쥐고 놀았다고 해서 새엄마 신용이 늘어날 것도 아니니까. 댄스 파티에 의붓자식을 파트너로 데려갔으니, 그 허영심도 꽤나 만족했겠죠?" "그만하면 됐어." 샘프슨 부인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썩 나가, 못된 계집애 같으니." 미란다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입은 다물었다. 나는 앉은 채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단(壇)을 쌓아 만든 잔디밭 아래로 돌을 깐 오솔길이 있어서 바다를 굽어보는 벼랑 끄트머리에 세워진 정자로 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붕이 원추형이고 사면 벽이 유리로 완전히 둘러진 팔각형의 작은 집이었다. 팔각정 유리벽을 통해서 그 너머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바다의 물빛이 보였다. 파도가 이는 곳은 초록빛과 흰빛이었으며, 저 멀리 해초가 있는 지역은 황록색으로 빛났고, 그 맨 끝에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내 시선은 파도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하얀 물거품의 선(線) 저편에서 일어난 뜻밖의 움직임에 사로잡혔다. 조그마한 검은 원반이 해면을 따라 미끄러져 나와, 파도에서 파도로 뛰어다니더니, 이윽고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뒤 또 하나가 뒤를 이었다. 미끄러져 나오는 그 물건들의 출처는 너무 해안에 가까워서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예닐곱 개가 파도를 타고 뛰놀다가 사라지고 나자, 원반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몸을 돌려 침묵에 싸인 방을 향했다. 미란다는 여전히 앉아 있는 상대를 굽어보며 서 있었지만, 자세는 변해 있었다. 그녀의 몸은 긴장을 풀고 있었다. 내려뜨려져 있던 한 손이 올라가더니 계모를 향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미안해요, 엘레인." 내게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샘프슨 부인의 얼굴은 보였다. 딱딱했지만 영리한 표정이었다. "넌 내 가슴에 못을 박았어."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도 용서를 바라는 건 설마 아니겠지?" "새엄마도 내 감정을 건드렸잖아요." 미란다가 흐느끼는 어조로 말했다. "내 앞에서 앨런을 비난해서는 안되잖아요." "그렇다면 앨런에게 추파를 던지지 마. 아니, 참, 이렇게 말할 셈이 아니었는데... 내가 진정으로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겠지? 난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너도 그러고 싶지?" "그래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새엄마도 알잖아요? 앨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시니...." "넌 앨런 걱정만 하면 돼." 샘프슨 부인은 거의 쾌활하다 싶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정말 그래 주실래요?" "내 장담하지. 그러니 이젠 그만 가보렴, 미란다. 무척 피곤하구나." 그녀는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 소동 덕분에 아처 씨는 배우신 게 많았을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하고 나는 말했다. "부인의 견해에는 감탄할 따름입니다." "하긴 그럴 듯하죠, 안 그래요?" 그녀는 막 방을 나가려는 미란다를 불렀다. "미란다, 마음이 내키면 여기 머물어도 좋아. 난 위층에 올라갈 거니까." 그녀는 곁의 탁자 위에 놓인 은제 종을 집어들었다. 별안간 울려퍼지는 방울소리가 마치 한 그라운드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와 같았다. 미란다가 방 저편 구석에 외면을 하고 앉음으로써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당신은 우리들의 최악의 상태를 보셨어요."하고 샘프슨 부인이 내게 말했다. "이번 일로 우리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말씀하신 대로 하기로 작정했으니까요." "내가 경찰을 부를까요?" "그건 버트 그레이브스가 할 거예요. 산타 테레사의 모든 권위자들과 친하니까. 그가 곧 이리 올 거예요." 가정부 크롬버그 부인이 방에 들어와서 고무 바퀴가 달린 휠체어를 양탄자 위로 끌고 왔다. 그녀는 힘을 거의 안 들이고 샘프슨 부인을 안아올려서 휠체어에 앉혔다. 그들은 말없이 방을 나갔다. 샘프슨 부인이 위층으로 오르는 동안 집안 어디선가 전기 모터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14장. 말괄량이 아가씨 나는 방 구석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미란다와 함께 앉았다. 그녀는 애써 나를 외면하며 말했다. "남이 보는 앞에서 그런 싸움을 하다니-- 우릴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죠?" "뭔가 다툴 일이 있었던 게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새엄마는 어떤 때는 상냥하지만, 그래도 늘 날 미워하는 것 같아요. 밥은 새엄마의 귀염둥이였지요. 오빠 말예요, 아시겠지만." "전사했다고?" "그래요. 오빤 내게 없는 모든 걸 갖추고 있었어요. 힘세고 자제력이 강했고, 하는 일 모두가 뛰어났었죠. 죽은 뒤엔 해군 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요. 새엄마에게는 오빠가 걸어다니는 땅까지도 소중했어요. 때로는 오빠를 사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긴, 우린 모두가 오빠를 사랑하긴 했지만 말예요. 오빠가 죽고 나서 이곳으로 옮겨온 뒤 우리집은 너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종잡을 수 없게 되고, 새엄마는 엉터리 하반신 불수에 걸리는가 하면, 나도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거든요. 어머나, 내가 너무 입이 싼 것 같아요. 그렇죠?" 고개를 반쯤 돌리는 그 제스처가 내게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게 떨렸고, 커다란 두 눈은 생각에 잠겨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고마워요." 그녀는 생긋 웃었다. "보시다시피 내겐 이야기 상대가 없어요. 전에는 아버지의 그 많은 돈을 등에 지고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죠. 거만한 꼬마 계집애였거든요. 지금도 그럴는진 모르지만. 난 깨달았어요. 돈은 사람을 다른 이로부터 갈라놓는다는 것을. 우리는 소위 산타 테레사의 사교생활이라는 것도, 국제 할리우드의 집단이라는 것도 갖지 못했고, 여기서 사귄 친구도 없어요. 하긴 그 일로 새엄마를 탓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전쟁중에는 여기 와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건 새엄마였거든요. 내 잘못은 학교를 떠난 거예요." "어느 학교를 다녔는데?" "래드클리프예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보스턴에는 친구들이 있었는걸요. 규칙을 어겼다고 작년에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돌아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받아줬을 거예요. 하지만 용서를 빌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죠. 난 지나치게 자만했어요. 난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내게 잘 해주려고 애쓰셨고요.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아버지는 새엄마와 벌써 여러 해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집안에는 언제나 긴장이 감돌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급기야는 이렇게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만 거예요." "아버지는 도로 모셔올 수 있소."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발뺌할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이 있잖소. 앨런이나 버트와 같은 사람들 말이오." "앨런은 정말로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녜요. 한때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그 사람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그리고 버트 그레이브스는 내 친구가 아녜요. 하기야 그 사람은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달라요. 자기와 결혼하려는 사람하고는 마음 편히 어울릴 수가 없잖아요." "어느 모로 보나 그는 미란다를 사랑하고 있던데." "그건 알고 있어요." 그녀는 동그스름한 턱을 의기양양하게 치켜들었다. "그게 바로 마음 편히 그와 어울릴 수 없는 이유인걸요. 또한 그 사람이 싫증나는 이유이기도 하고." "미란다는 요구가 너무 많군." 그런데 나 또한 너무 많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치 <마일즈 스탠디시> 에 나오는 인물처럼.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일이란 결코 완전히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오. 미란다는 생각하는 게 좀 허황돼. 그리고 이기주의자야. 언젠가는 땅바닥에 떨어질 날이 올걸. 충격이 너무 커서 아마 목이 부러질지도 모르지. 아니면 난 그놈의 자만심이 박살나길 바라겠소." "난 거만한 계집애라고 말했잖아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극히 가볍게 말했다. "그 진단엔 요금이 붙지 않나요?" "더 이상 내게 거만을 떨지 말아요. 이미 한 번 그랬으면 됐잖아." 그녀는 얌전을 뺀답시고 서투르나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제 당신에게 키스한 것 말인가요?" "기분이 안 좋았던 체는 안하겠어. 기분은 좋았으니까.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났단 말이오. 다른 사람의 도구로 이용되는 건 딱 질색이거든." "그렇다면, 내게 무슨 악의가 있어 당신을 이용했다는 건가요?" "뭐, 악의가 있었다는 건 아니오. 유치하고 건방진 수작이었을 뿐이지. 태거트를 녹일 생각이라면 좀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야 할 거요." "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말아요." 날카로운 어조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그만큼 화가 났었나요?" "이만큼 화가 났었지."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잡고 그녀의 입에 내 입을 포개었다. 반쯤 열린 그녀의 입술은 타는 듯 뜨거웠다. 가슴부터 무릎까지 그녀의 육체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응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뭐 조금이라도 만족했나요?" 어깨를 풀어주자 그녀가 말했다. 나는 커다랗게 뜬 그녀의 초록빛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솔직하고 침착한 눈이었지만, 끝 모를 심연을 안고 있었다. 그 바다처럼 깊숙한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나는 궁금했다. "내 자존심이 위로받았지." 그녀는 깔깔 웃었다. "적어도 입술은 위로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루즈가 묻었군요."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아가씨는 몇 살이오?" "스물이에요. 당신의 엉큼한 속셈에 이용되기에는 충분한 나이죠. 내가 어린애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세요?" "미란다는 다 큰 여자야." 나는 일부러 그녀의 육체를 - 볼록한 젖가슴과 날씬한 허리, 둥그스름한 엉덩이와 쪽 곧은 통통한 다리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어색해서 꼼지락거릴 때까지. "즉, 모종의 책임감이 있다는 뜻이지." "알아요." 그녀의 음성은 자책감 때문에 거칠었다. "자신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되겠죠. 당신은 많은 인생을 겪었어요, 안 그래요?" 그것은 어린 소녀의 입에서나 나옴직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결국 그게 그거지만,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일을 겪었소. 나는 수많은 인생을 보는 것으로써 먹고 사니까." "난 아직 충분히 인생을 겪지 못했나 봐요.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는 불현듯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내 뺨에 지극히 가벼운 키스를 했다. 나는 굴욕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카딸이 아저씨에게나 할 그런 종류의 키스였기 때문이다. 하기야 나는 그녀보다 열 다섯이나 위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내 굴욕감도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버트 그레이브스는 20년이나 연상이 아니던가. 차도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이 집안으로 다가들었다. "버트가 틀림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충분히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짧기는 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힐난하는 듯 초조한 눈짓을 내게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제력을 발휘하여 표정을 풀었다. 그럼에도 그 미간에는 초조감을 나타내는 깊은 주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체구가 큰 사람치고는 신속하고 절도 있는 고양이걸음으로 움직였다. 적어도 그의 몸만큼은 행동을 취하는 것을 반기는 듯했다. 그는 미란다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나를 향했다. "무슨 일인가, 루?" "돈은 마련됐습니까?" 그는 옆구리에 끼고 온 송아지 가죽의 서류 가방을 내리더니, 자물쇠를 열고는 커피 테이블 위에다 그 속에 든 것을 쏟아놓았다. 은행에서 사용하는 갈색 포장지로 싸고 붉은 테이프로 한데 묶은, 한 다스가 넘는 직사각형의 꾸러미들이었다. "10만 달러야."하고 그가 말했다. "50 달러 짜리 1천 장. 그리고 100 달러 짜리 50장이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군." "당분간 금고 속에 넣어두시지요. 이 집안에 하나쯤은 있겠죠?" "있어요."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 서재에요. 번호는 책상서랍 속에 있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돈과 이 집 사람들의 보호조치를 강구해야 해요." 그레이브스는 갈색 꾸러미들을 손에 든 채 나를 향했다. "자네는 무얼 하지?" "나는 여기 머물지 않습니다. 보안관 서리들더러 좀 나오라고 하시죠. 그들은 이런 일을 위해 있는 존재이니까." "샘프슨 부인은 그들을 부르지 못하게 할걸." "이젠 할 거요. 부인은 당신이 모든 일을 경찰에 맡기도록 바라고 있어요." "됐어! 이제 좀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이것들을 치우고는 전화를 걸겠네." "직접 만나보시죠." "어째서 그래야 하나?" "이번 일은 집안 사람의 소행이라는 낌새가 보이기 때문이오. 집안의 누군가가 당신들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거든." "자네는 나보다 한술 더 뜨는구먼. 아무튼 뜻은 잘 알겠네. 샘프슨 씨에게서 받아내긴 했어도, 그 편지를 보면 그자들이 내부사정에 밝은 모양이야. 하기야, 상대가 여럿이고 샘프슨 씨가 납치되었다는 가정하에서의 얘기이지만." "우리는 다른 가설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 가정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발 경찰이 너무 열을 내지 않도록 해주시죠. 그자들이 겁을 먹으면 곤란하니까. 뭐, 샘프슨 씨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다면야 이야기가 다르지만." "잘 알겠네. 그런데 자네는 어디로 갈 작정이지?" "이 봉투에는 산타 마리아의 소인이 찍혀 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 든 또 하나의 편지봉투에 관해서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합법적인 업무 때문에 그곳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요. 하기야, 이번 경우에는 비합법적인 일일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려는 겁니다." "그 양반이 거기서 무슨 사업에든 관계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래도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지." "농장 쪽은 알아보셨나요?" 미란다가 그레이브스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관리인에게 전화했소. 소식을 못 들었다더군." "어떤 농장이오, 그거?"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베이커스필드 건너편에 농장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채소밭이죠. 하긴, 이런 일이 생긴 지금 거기 가신 것 같지는 않군요." "일꾼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나갔다던데."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나간 지 두 달이나 된다는군. 폭력사태까지 있었다고 하고. 형편이 말씀도 아니지." "그 일이 이번 일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글쎄." "아시잖아요."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는 사원(寺院)에 계실지도 몰라요. 전에도 거기 계실 때 편지가 산타 마리아를 경유해서 왔거든요." "사원이라고?" 나는 전에도 한두 번 사건의 언저리에서 벗어나 동화 같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지킨 적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일을 하려면 그것도 직업에 따르는 위험들 중의 하나였지만, 나로서는 그런 건 달갑지 않았다. "구름 속의 사원, 아버지가 클로드에게 준 것 말예요. 아버지는 초봄이면 그곳에서 2-3일 지내시곤 했죠. 산타 마리아 부근의 산속에 있어요." "클로드란 또 누구요?"하고 내가 물었다. "내가 일전에 이야기했잖나."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샘프슨 씨가 산을 기증한 그 성자 말이야. 그자가 산의 작은 집을 개조해서 일종의 사원 같은 것을 만들었다네." "클로드는 사기꾼이에요." 미란다가 끼어들었다. "그 사람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깎는 적이 없어요. 게다가, 일류 시인 흉내를 낸답시고 떠벌이는 꼴이라니...." "거기 가본 적이 있나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버지를 태워다 준 적이 있어요. 하지만 클로드가 입을 열자마자 내려왔어요.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 사람은 굵직하고 쉰목소리를 내는 지저분한 늙은 염소예요. 게다가, 그처럼 소름끼치는 눈은 본 적이 없어요." "나를 지금 그곳으로 데려다 주지 않겠소?" "좋아요. 스웨터를 입고 올께요." 마치 항의라도 하려는 듯 그레이브스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는 방을 나가는 처녀를 걱정스러운 듯이 지켜보았다. "염려 마십시오. 아무 탈없이 데려올 테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잠자코 있었을 걸. 그는 황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내게 다가왔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건장한 사나이였다. 옆구리에 늘어뜨린 두팔은 뻣뻣했고, 그 끝에 달린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잘 들어, 아처." 그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뺨에 묻은 루즈를 지우게. 아니면, 내가 닦아줄까?" 나는 당황한 마음을 미소로써 얼버무리려 했다. "내가 참죠, 버트. 사나이의 질투를 다룬 경험은 많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미란다에게서 손을 떼. 아니면, 그 잘난 얼굴을 망가뜨려 놓을 테니까." 나는 미란다가 루즈 자국을 남긴 왼뺨을 문질렀다. "그녀를 오해해선 안돼요...." "자네의 키스놀이 상대는 샘프슨 부인이라는 말인가?"하고 그는 비통한 듯이 나직이 웃었다. "젠장!" "미란다가 한 거요. 장난이 아니었어. 우울해 하길래 말상대를 해줬더니 딱 한 번 키스해 줬을 뿐이오. 아무 뜻도 없었다고요. 순전히 부녀지간의 키스와 같은 거였지." "자네 말을 믿고 싶구먼."하고 그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내가 미란다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자네도 알잖나." "그녀가 말하더군요." "뭐라고 했는데?" "당신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알고 있으니 기쁘군. 우울할 때는 내게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루?" "사랑 문제로 내게 의논하지는 마시오. 결과가 뻔하니까. 하지만 한마디 충고는 할 수 있지." "해보게." "참으시라는 거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저 꾹 참고 기다리세요. 당장에 큰일을 떠맡았으니 우린 힘을 합쳐야 해요. 나는 당신 연애사업에 위협적인 존재도 못 되거니와, 설령 된다 하더라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비단 나만 무관심한 게 아니라 태거트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그는 한마디로 미란다에게 관심이 없어요." "고맙네." 그는 쉰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처량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나보다 너무도 어려. 태거트는 젊음과 매력을 다 갖추었고." 문밖 홀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마치 신호라도 받은 듯 태거트가 문 어귀에 나타났다. "누가 함부로 남의 이름을 불렀지요?" 그는 물에 젖은 수영복만 걸친 알몸이었다. 널찍한 어깨, 잘록한 허리, 그리고 늘씬한 다리--- 자그마한 머리통에 붙은 물에 젖은 검은 고수머리와, 만면에 띤 나른한 미소--- 희랍인들에게는 젊음의 신으로 여겨질 만했다. 버트 그레이브스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훑어보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아처에게 자네가 얼마나 미남인가 말하던 참이었지." 미소는 약간 엷어졌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칭찬치고는 애매하게 들리는군요. 하지만 대관절 무슨 얘기죠? 안녕하시오, 아처 씨.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당신은 미란다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던 참이었소." "바로 보셨습니다." 그는 경쾌하게 대꾸했다. "좋은 아가씨지만 내게는 안 맞아요. 자, 괜찮으시다면 나는 뭣 좀 걸쳐야겠습니다." "물론이지."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권총을 가지고 있소?" "연습용 한 쌍이 있지요. 32구경으로." "한 자루에 장탄을 해서 몸에 지니고 있으시오. 알겠소? 집 주위에 꼭 붙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하오. 기분 내키는 대로 쏘다니지 말고." "나도 배울 건 다 배운 사람입니다."하고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뭐가 터질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하지만 뭐가 터질 일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두라는 거지. 내 말대로 하겠소?" "기꺼이 하지요." "나쁜 친구는 아니야." 그가 나가자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런데도 나는 녀석의 꼴을 보면 견딜 수가 없으니.... 우스운 일이야, 전에는 질투 같은 걸 품은 적이 없었는데." "전에도 사랑에 빠진 적이 있으신가요?" "이제까지는 없었지." 그는 불운(不運)과 고조된 감정, 그리고 실망의 짐에 겨워 구부정하니 서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데다가, 그것을 영원히 지키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말해 주게."하고 그가 말했다. "미란다는 뭣 때문에 우울해 하고 있었나? 이번 일--- 아버지 때문인가?" "그것도 한 가지 이유였죠. 가정이 풍지박산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언가 안정된 뒷받침을 원하더군요." "그럴 거야. 나도 알지. 그게 바로 내가 그녀와 결혼하려는 이유 중 하나야.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런 것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 "물론이죠."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노골적인 질문을 시도해 보았다. "돈도 그 이유 중 하나인가요?" 그는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미란다에게는 자기 재산이 한푼도 없어." "그렇지만 앞으로 생기게 될 테지요." "아버지가 죽으면 자연히 생기겠지. 그 양반의 유서를 작성해 주었는데, 그녀가 절반을 상속받게 되더군. 물론 나도 돈이 싫다는 것은 아니야---" 그는 쓰디쓰게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몫 잡으려는 사람은 아니네. 자네가 그런 뜻으로 물었다면 말이지만." "그런 사람은 아니죠. 그래도 그녀는 당신 생각보다는 빨리 그 돈을 쥐게 될걸요. 영감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다급하고 기묘한 일에 말려든 모양이니까. 혹시 그가 이스터브룩이라는 이름을 입밖에 낸 적은 없나요? 페이 이스터브룩. 아니면, 트로이라고 하는 남자에 대해서라도?" "트로이를 알고 있나? 도대체 그 친구 어떤 인물인가?" "총잡이지요."하고 내가 말했다. "살인도 몇 번인가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놀랄 일도 아니군. 샘프슨 씨더러 트로이를 멀리 하라고 달래느라 무척 애먹었지. 그래도 그 양반은 녀석을 좋게만 생각했으니...." "트로이를 만나보셨나요?" "두 달쯤 전에 라스베이가스에서 샘프슨 씨가 소개해 주었다네. 셋이서 한 바퀴 돌았는데, 많은 사람이 그자를 아는 것 같더군. 노름판의 카운터가 그자를 알고 있던데.... 그것도 인기의 척도라고 할까." "그럴 리는 없죠. 그렇지만 놈은 한때 라스베이가스에서 영업을 한 적이 있어요. 많은 일을 벌였었죠. 그러니까 납치라고 한들 놈의 체면이 깎일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트로이는 어쩌다 샘프슨 씨와 어울리게 됐나요?" "한때 샘프슨 씨 밑에서 일하지 않았나 생각되네만, 확실치는 않아. 괴짜더군. 나와 샘프슨 씨가 노름하는 걸 보기만 할 뿐, 자기는 하지 않는 거야. 나는 그날 밤 1천 달러를 고스란히 날렸지. 샘프슨 씨는 4천 가량 따고. 부익부 빈익빈이야." 그는 서글프게 웃었다. "트로이 녀석,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게지요."하고 내가 말했다. "그랬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녀석, 내게는 소름끼치는 악당으로 비치던데. 놈이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나?" "그걸 알아내려는 게요."하고 내가 말했다. "샘프슨 씨는 혹시 돈에 쪼들리는 건 아닙니까, 버트?" "원 천만에! 그는 백만장잘세." "그런데 어째서 트로이와 같은 하찮은 녀석과 일을 벌일 생각이 들었을까요?"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니까 그렇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에서 토지임대료조로 돈이 쏟아져 들어오니까 싫증이 난 거야. 돈을 못 버는 것이 내 타고난 재능이라면, 그 양반은 돈을 버는 천재라네. 자신이 직접 돈을 벌지 않으면 기분이 안 나는 거야. 내가 돈을 잃지 않으면 기분이 안 나듯이 말이지." 미란다가 방에 들어오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준비됐나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버트 씨, 내 걱정은 마세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지그시 눌렀다. 연갈색 코트의 앞자락이 열려 스웨터에 감싸인 작은 젖가슴이 드러났다. 마치 무슨 무기처럼 튀어나온 그 가슴은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기가 짜증난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점차로 증대해 가는 위협을 시위하는 듯도 싶었다. 말아올렸던 머리채는 풀어내려 귀 뒤로 넘겨 빗겨져 있었다. 그 활짝 핀 얼굴이 도전이나 하듯이 그에게 기울어져 갔다. 그는 그녀의 빰에 가볍게, 그리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건장하고 지성도 갖춘 사람이었지만, 가느다란 세로줄 무늬의 푸른 신사복을 입고 그녀 곁에 선 모습은 약간 후줄근해 보였다. 미란다와 같은 말괄량이를 길들이기에는 좀 늙고 지친 모습이었다. 제15장. 움직이는 표적 산으로 난 도로는 연갈색 작은 떡갈나무와 가지를 쳐서 붉은 속줄기가 드러난 나무들의 경사진 숲을 뚫고 위로 뻗어오르고 있었다.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고 나는 우리가 탄 차의 속도를 시속 80 km로 유지했다. 올라감에 따라 길은 좁아지고 굴곡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표석(漂石)으로 뒤덮인 산비탈과 떡갈나무와 전신주가 죽 늘어선 폭 넓은 계곡을 후딱후딱 훑어보았다. 구릉 사이의 틈새기를 빠져나갈 때는 낮게 뜬 푸른 구름처럼 보이는 바다가 뒤로 스쳐 달아났다. 이윽고 길은 한 바퀴 돌아 고갯마루에 걸린 구름 때문에 별안간 잿빛으로 물들고, 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으스스해진, 산의 황무지 속으로 굽어들었다. 밖에서는 구름이 묵직하고 빽빽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구름은 스르르 엷어져, 가닥가닥 하얀 실오라기가 되어 길가로 흩어져 날아갔다. 구름에 가리어 흐릿하니 을씨년스러운 산허리가 우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시대의 첨단을 걷는 아가씨를 곁에 앉히고 46년형 신형 자동차를 몰고 있었지만, 나는 우리가 콜튼이 말했던 원자력시대와, 인간이 뒷발로 서서 태양을 기준삼아 시간을 헤아리기 시작했던 저 석기시대와의 분기점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 전방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U자형의 커브를 쏜살같이 돌아나오자 길은 앞으로 곧장 뻗어 있었다. 순간, 열이 오른 모터가 저절로 피치를 올리는가 싶더니 우리는 구름 밖으로 빠져나왔다. 산길 꼭대기에서 보니, 햇살 가득한 골짜기는 샛노란 버터가 넘쳐흐르는 주발 같았고, 건너편 산맥들은 뚜렷한 시야 속에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정말 찬란하죠?" 미란다가 말했다. "산타 테레사 쪽에 아무리 구름이 끼더라도 이 골짜기에는 거의 언제나 햇살이 넘치거든요. 장마철이면 난 종종 혼자서 차를 몰아 저기에 가곤 했지요. 그저 태양이 그리워서요." "나도 태양이 좋아요." "정말이예요? 태양을 좋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네온사인을 좋아할 타입이니까, 안 그래요?" "좋도록 생각해요." 그녀는 펄쩍 뛰어드는 길과 뒷전으로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길은 초록색과 황색이 바둑판 무늬를 이룬 계곡을 뚫고 곧장 앞으로 탄탄하게 뻗어 있었다. 들에서 일하는 멕시코 인부들밖에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기에 나는 차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속력계의 바늘이 85와 90의 중간을 떠나지 않았다. "아처, 뭐가 무서워서 이렇게 달아나는 거죠?" 그녀가 놀리는 투로 물었다. "겁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시오?" "기분전환삼아 좋잖아요." "나는 좀 위험한 것을 좋아하지. 내가 조종하고 길들인 위험말이오. 자기 목숨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서, 또한 그것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뭔가 권력을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 "이 차가 펑크만 안 난다면 말이죠." "펑크난 적은 한 번도 없소." "말해 주세요. 그게 바로 탐정 일을 택한 이유인가요? 위험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도 그럴 듯한 이유이겠지.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을?" "다른 사람한테서 물려받았지." "아버지?" "보다 젊었을 적의 내 자신에게서. 그때 나는 세상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했소. 모든 나쁜 짓은 어떤 특정한 무리의 책임이며, 따라서 그들을 벌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지. 아직도 그 시늉을 계속하고 있지만 말이오. 게다가, 난 말이 너무 많아." "제발 계속하세요." "난 버린 놈이야. 미란다까지 버리게 할 필요가 있을까?" "나도 이미 버렸어요. 그런데 아까 그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1935년 경찰에 투신했을 때만 해도 나는 악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었더랬어. 언청이처럼 말이오. 경찰의 일은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어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악한 마음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더군. 누구나 그것을 가슴속에 품고 있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느냐는 여러 가지 요인에 달려 있지. 환경, 기회, 경제적 압박, 한때의 불운, 나쁜 친구 따위 말이오. 문제는 경찰관이 경험에 의한 주먹구구식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서 그 판단에 의해 행동해야 한다는 거요." "아처 씨도 사람을 판단하세요?"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지. 경찰학교 출신들은 소리 높여 과학수사를 부르짖지. 하기는 그도 옳은 소리야. 그렇지만 내 일의 대부분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판단하는 거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한테서 악을 발견하나요?" "대강 그래. 내 눈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든가, 아니면 사람들이 점점 나빠져 가고 있는 거겠지.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전쟁과 인플레는 으레 수많은 골칫거리를 만들어내기 마련이고, 그들 중 많은 무리가 캘리포니아에 발판을 굳혔으니까." "우리집 얘기는 아니겠죠?"하고 그녀가 따졌다. "특별히 그런 건 아니오." "아무튼 아버지가 잘못된 것을 전쟁 탓으로만 돌릴 순 없어요. 전적으로는요. 원래 조금쯤은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래요." "미란다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소?" "그랬어요." "아버지에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걸." "나도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젊었을 적엔 아버지도 주관이 있었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평생 자기 땅을 가져보지 못한 소작인이었거든요. 아버지가 어째서 평생토록 땅을 사들이는지 이해가 가요. 하지만 자신이 가난했으니만큼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더 동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잖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 농장에서 파업을 일으킨 사람들을 봐요. 생활조건은 형편없고 임금도 넉넉하지 못한데, 아버지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거든요. 온갖 짓을 마다 않고 그 사람들을 아사지경으로 몰아넣어서 결국은 파업을 일으키게 했잖아요. 멕시코 인 농부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거야 흔해빠진 착각이지. 또한 쓸 만한 착각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을 착취하기가 한결 쉽거든-- 이거, 내가 중년에 들어서면서 대단한 도학자가 되어가는 모양인걸." 잠시 말이 없다가 그녀가 물었다. "물론 내게도 판단을 내렸겠죠?" "임시적 판단이라면야. 아직 확증이 없으니까. 미란다는 거의 모든 소질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거의 어떤 사람으로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거의'죠? 그토록 내게 부족한 게 뭐죠?" "갖고 있는 연에 달 꼬리지. 시간을 재촉해서 빨리 가게 할 수는 없어. 보다 나은 걸 찾아내어 자신을 뒷받침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은 이상한 분이세요."하고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자기 자신도 판단하시나요?" "안해도 좋을 때는 하지 않지. 그런데 어젯밤엔 했어. 주정뱅이에게 술을 먹이고 있을 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으니까." "어떤 판정이 나왔죠?" "판사께서는 선고를 보류했지만, 그 대신 호된 질책을 내리셨소." "그래서 이처럼 빨리 달리는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난 다른 이유로 스피드를 내요. 그렇지만 제 생각엔 일종의 도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죽음을 향한 소망 때문이죠." "제발 심리학 전문용어는 삼가주시오. 미란다도 차를 빨리 모나?" "캐딜락으로 이 길에서 170 킬로 까진 내봤죠."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경기는 규칙이 아직 뚜렷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수 당한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지루해지면 그래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달래는 거죠. 난 무언가, 무언가 전혀 새로운 것을 맞고 싶다. 무언가 적나라하고 눈부신 것, 노상(路上)에서 움직이는 표적 같은 것을." 나의 애매모호한 분노는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것 같은 충고가 되어 튀어나왔다. "그런 짓을 자주 하다가는 정말로 무언가 새로운 일에 부딪치게 될걸. 골통이 박살나서 영원한 망각 속으로 꺼지는 거지." "원 망칙해라!"하고 그녀는 부르짖었다. "당신도 위험을 좋아한다고 해놓고선, 케케묵은 버트 그레이브스와 다를 게 없잖아요." "미란다에게 겁을 주었다면 미안하게 됐소." "나에게 겁을 줬다고요?" 그녀의 짤막한 웃음은 소리는 작았지만 갈매기의 울음처럼 날카로웠다. "당신네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아직도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숙취(宿醉) 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아처 씨도 역시 여자란 가정에 들어앉아 있어야 제격이라고 생각하나 보죠?" 길은 걷잡을 수 없이 굴곡이 심해지며 하늘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경사가 제동역할을 하게끔 차를 몰았다. 시속 80 킬로미터로 달리는 차 속에서 우리는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제16장 성자 클로드 자신이 호흡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만한 높이에 이르자, 우리는 안쪽으로 갈수록 높은 길로 접어들었다. 새로 깐 자갈길은 닫혀 있는 나무문으로 앞이 막혀 있었다. 문설주에 붙어 있는 금속제 편지함에 '클로드'라는 이름이 흰 글자로 찍혀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미란다가 차를 안으로 몰았다. "아직 2 킬로미터는 더 가야 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 말을 믿나요?" "아니. 하지만 경치를 좀 보고 싶소. 여기 온 적이 없으니까." 그 일대는 길을 제외하면 마치 아무도 산 적이 없는 곳 같았다.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감에 따라, 표석으로 점점이 수놓인 계곡과 사철 푸른 산이 눈 아래 펼쳐졌다. 저 멀리 나무숲 사이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연갈색 사슴의 움직임이 짜릿한 전율을 전해 왔다. 또 한 마리의 사슴이 회전목마와 같은 껑충걸음으로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공기가 원체 맑았기 때문에 설령 그들의 발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모터의 크르렁거리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다만 빛을 담뿍 머금은 대기와 맞은편 산의 벌거벗은 암면(岩面) 뿐. 차는 산꼭대기의 받침접시 모양으로 움푹 팬 지대의 가장자리를 기어 넘었다. 눈 아래, 사면이 절벽으로 에워싸인 대지(臺地) 중앙에 독수리 떼와 비행사밖에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구름 속의 사원'이 서 있었다. 그것은 직사각형의 단층 석조건물로, 하얗게 칠한 벽돌담이 중앙의 빈터를 빙 둘러싸듯 세워져 있었다. 철사로 엮은 울타리 안에는 몇 개의 별채가 있어서, 그것이 사원을 둘러싼 채 일종의 말뚝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별채들 중 하나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드문드문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본채의 평평한 지붕 위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워낙 꼼짝도 않고 있어서 내 눈조차도 지나쳐 버린 그 무엇인가가--- 한 늙은이가 책상다리를 한 채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황제처럼 의젓하고 느릿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가죽 빛깔의 큼직한 체구였다. 이발을 하지 않아 제멋대로 헝클어진 잿빛 머리카락과 삐쭉 솟아나온 수염으로 싸인 모습은 마치 햇빛에 바랜 낡은 지도 같았다. 그는 유유히 몸을 굽혀 천 한 조각을 집어들어서 벌거벗은 허리에 둘렀다. 그는 우리더러 참고 기다리라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뒤뜰로 내려갔다. 뒤뜰의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그가 나타나 비척비척 정문으로 가더니 자물쇠를 풀었다. 나는 비로소 그의 눈을 보았다. 하늘빛의 상냥한 눈이었으나 동물의 눈처럼 도덕관념 같은 건 없어 보였다. 햇볕에 검게 탄 멋들어진 양어깨와 부채 모양으로 가슴을 내리덮은 무성한 수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자와 같은 데가 있었다. 성량이 풍부하고 자신만만한 음성은 바리톤과 콘트랄토의 미묘한 혼합음이었다.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친구들이여. 이 몸의 외딴집 문전에 들리는 여행자는 누구라도 기꺼이 맞아 내 모든 것을 대접하리다. 환대는 미덕 중에서도 상덕(上德)이니, 최상의 미덕인 건강에 가까운 것이오." "고맙소. 차를 탄 채 들어가도 됩니까?" "친구여, 차는 부디 울타리 밖에 두고 오시오. 울타리 바깥 조차도 기계문명의 부산물로 더럽혀져서는 안되거늘." "그는 당신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 차에서 내리며 나는 미란다에게 말했다. "시력이 별로 좋지 않은가 봐요." 우리가 다가가자 그의 하늘빛 두 눈이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가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이자, 헝클어진 잿빛 머리카락이 앞으로 휘돌며 어깨를 쓸었다. "안녕하세요, 클로드." 하고 그녀가 활발하게 인사했다. "아니, 샘프슨 양이 아닌가? 요즘 같아서는 젊은 미인의 방문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이처럼 발랄하고 아름다울 수가!" 그는 입술 사이로 숨을 들이켰다. 매우 거칠고 핏발이 선 숨소리였다. 나는 그의 나이를 알아내려고 그의 발을 보았다. 새끼줄로 밑창을 대고 가죽끈을 맨 샌들에 얹힌 두 발은 마디마디 옹이가 지고 부풀어 있었다. 60년 묵은 발이다. "고마워요." 그녀는 탐탁지 않게 말했다. "아버지를 보러 왔어요. 여기 계실지 모르지만." "아니, 안 계신데, 샘프슨 양. 여긴 나 혼자 뿐이오. 지금은 제자들도 멀리 보냈소이다." 그는 입을 다문 채 빙긋이 웃었다. "나는 태양과 산을 상대로 교제하는 늙은 독수리라오." "늙은 콘도르겠죠!"하고 미란다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최근에 아버지가 여기 오신 일이 있나요?" "몇 달 동안 오시지 않았소이다. 오시겠다고 약속은 하셨는데 아직 안 오시는구려. 아버님은 영적인 잠재능력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도 물질생활이라는 우리에 갇혀 얽매여 있소이다. 그분을 하늘나라로 끌어올리기는 어렵지요. 타고난 천성을 태양 앞에 열어 보이기가 그분으로서는 괴로운 거요." 그는 이 말을 영탄조의 리듬으로, 거의 예배를 드리는 투로 읊조렸다. "한번 둘러봐도 상관없겠죠?" 라고 내가 말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싶군요." "나 혼자 뿐이라고 말했잖소." 그는 몸을 돌려 미란다를 향했다. "이 젊은이는 누구지?" "아처 씨예요. 아버지를 찾는 일을 돕고 계시죠." "그랬었군. 미안하오만, 아처 씨, 그분이 여기 안 계신다는 내 말을 믿어주셔야겠소. 당신은 아직 청정식(淸淨式)을 치르지 않았으니 사원 안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소이다." "어쨌든 한번 둘러봐야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소."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갈색의 그 손은 두툼하고 물큰한 것이 꼭 생선튀김 같았다. "당신은 사원에 들어가서는 안돼요. 미드라스 (옛 페르시아의 빛의 신) 께서 노하실 게요." 들쩍지근한 그의 숨결이 구역질이 나도록 내 코를 찔렀다. 나는 어깨에 얹힌 그의 손을 잡아뗐다. "선생은 청정식을 치른 몸인가요?" 그는 그 순진무구한 눈을 들어 태양을 향했다. "이런 일을 농담 삼아서는 아니되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죄많은 사람이었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마음의 눈이 멀어 죄에 물든 몸이었지요. 마침내 태양의 화염검이 육신의 검은 소를 저며내자, 나는 청정한 몸이 된 것이오." "그렇다면 나는 초원의 들소겠군."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미란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무슨 헛소리예요. 우리는 들어가 볼래요. 당신 말은 뭐든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클로드." 그는 텁수룩한 머리를 숙이며 입을 오므린 채 사이비 부처님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메스꺼움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뜻대로 하구려, 샘프슨 양. 신성을 모독하면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미드라스의 진노가 너무 무겁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소이다." 그녀는 오만하게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아치 문 입구를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서편으로 기운 붉은 해가 산마루에 무심히 걸려 있었다. 한마디 말은 물론 한번 쳐다보는 일도 없이, 클로드는 문 안의 돌계단을 올라 지붕 위로 사라졌다. 돌로 포장된 내원(內院)은 텅 비어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닫혀진 나무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의 빗장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참나무로 서까래를 댄 방이 나타났다. 방안에는 더러운 담요가 덮인 붙박이 침대, 흠집투성이의 철제 트렁크, 판지로 만든 싸구려 옷장, 그리고 클로드의 들쩍지근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신성한 향기로군요."하고 나의 어깨 어림에서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가 정말로 여기서 클로드와 함께 지냈을까?" "유감이지만, 그런 것 같군요." 그녀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아버지는 그 태양숭밴지 뭔지 하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거든요. 점성술과 함께 꽉 믿어버린 거예요." "그 양반, 정말로 이곳을 클로드에게 주었나?" "등기까지 옮겨주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수도장으로 쓰라고 클로드에게 넘겨주었어요. 잘만 되면 언젠가는 도로 빼앗아올 거예요. 광신병에서 깨어난다면 말이지만, 과연 그렇게 될는지...." "사냥할 때 쓰는 집치고는 묘한걸." "실은 사냥용으로 지은 게 아니에요. 일종의 은신처로 지은 거죠." "은신처라니? 뭐가 두려워서?" "전쟁이죠. 이건 아버지가 종교에 미치기 전인데, 아버지는 조만간 전쟁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 전적으로 믿었어요. 적이 쳐들어오면 이곳을 피난처로 삼겠다는 거죠. 하지만 그 공포감은 작년에 사라졌어요. 일꾼들이 방공호 설립작업을 시작하기 직전이죠. 설립계획서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어요. 그 대신 아버지는 점성술 쪽으로 피신했지만." "나는 '광신'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소. 미란다가 했지."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시오?"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녜요." 그녀는 약간 처량하게 웃었다. "알고 보면 아버지도 그렇게 정신이 나간 것 같지는 않아요. 내 생각엔 지난번 전쟁 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낀 게 아닌가 해요. 게다가 오빠가 죽었거든요. 죄의식은 온갖 종류의 터무니없는 공포감을 야기시키기 마련이니까요." "당신은 또 책을 읽은 모양이구먼."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 것은 심리학 교과서였군." 그녀의 반응은 놀라웠다. "아처 씨, 골치아픈 사람이군요. 바보 같은 탐정 노릇을 하기가 싫증나지도 않나요?" "정말 싫증이 나는걸. 내게도 뭔가 적나라하고 화끈한 게 필요한가 봐요. 노상(路上)의 움직이는 표적과 같은 것이." "원 세상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고는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우리는 문을 여닫으며 각 방을 돌았다. 대부분의 방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지만, 그 밖의 다른 세간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맨 안쪽의 거실에는 짚으로 엮은 돗자리가 대여섯 장 바닥에 깔려 있었다. 거실은 창문이 좁고 벽이 두터워 마치 요새와도 같았으며, 방안 공기도 형무소의 물 탱크 냄새를 풍겼다. "누가 되었든 제자들은 잘사는구먼. 전에 여기 왔을 때 그 사람들 중 누구라도 보았소?" "아뇨. 하긴 이 안에 들어와 보지는 않았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클로드와 같은 떠버리에게 좋은 봉이 되지. 가진 것을 몽땅 갖다바치고는 그 대가로 굶어죽기 십상인 단식요법과 신경쇠약의 보증을 얻는 게 고작이야. 그렇지만 태양숭배자들의 사원은 들어본 적이 없는걸. 그 바보들이 오늘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사원 수색을 마쳤다. 나는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는 벌거벗은 등을 돌리고 태양을 향해 앉아 있었다. 옆구리와 엉덩이께에 주름투성이의 살집이 늘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언쟁이라도 하는 양 고개를 앞뒤로 젓고 있었는데,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 양쪽의 세계를 다 아는 수염난 여자처럼 햇빛 아래 부각된 커다란 내시와 같은 허약한 등과 머리는 기묘하고 우스꽝스럽고 징그러웠다. 미란다가 내 팔을 건드렸다. "저 미치광이 말인데요...." "녀석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하고 나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적어도 당신 아버지에 관해서는 사실을 말했나본데. 당신 아버지가 딴 채에 없다면 말이지만." 우리는 자갈을 깐 뜰을 건너 굴뚝에서 연기를 뿜고 있는 벽돌집으로 갔다. 나는 열려진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머리에 숄을 두른 젊은 여자 하나가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펄펄 끓는 남비 속을 휘젓고 있었다. 5갤런 들이의 남비였는데, 콩 같아 보이는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제자들이 저녁 먹으러 올 때가 된 모양이군 그래." 어깨는 그대로 둔 채 여자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진흙빛 인디언 얼굴에 박힌 두 눈의 흰자위가 백자(白瓷)처럼 반짝였다. "어떤 노인을 못 봤소?" 나는 스페인 어로 물었다. 그녀는 사라사를 두른 한쪽 어깨를 움찔하며 사원의 본채 쪽을 가리켰다. "저 노인 말고, 수염이 없는 노인 말이오. 수염이 없고, 뚱뚱하고, 돈이 많은 노인. 샘프슨 씨라고 하는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김이 무럭무럭 나는 남비 쪽으로 다시 돌아앉았다. 우리 뒷전에서 클로드의 샌들이 자갈을 울렸다. "보시다시피 나는 문자 그대로 혼자 있지는 않소. 시중드는 처녀가 있지요. 그렇지만 저 처녀는 동물이나 별로 다를 바 없소이다. 자, 두 분이 용무를 마치셨다면 나는 이만 실례하고 명상으로 돌아가야겠소. 해가 저물어가니 이별을 고하시는 신께 인사를 올려야 하오." 벽돌집 옆에 양철로 지은 창고가 붙어 있었는데, 문에는 맹꽁이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가시기 전에 저 문 좀 열어주시지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몸에 두른 천 틈바구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창고에는 한 무더기의 자루와 마분지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콩이 담긴 포대 몇 자루, 분유 한 상자, 그리고 작업용 바지와 장화가 든 상자 몇 개가 모두였다. 클로드는 문간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때때로 제자들이 골짜기로 내려가 일수 노동을 한다오. 채소밭에서 하는 그런 일도 의식(儀式) 중의 하나이지요." 그는 내가 나가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그가 서 있던 자갈길 가장자리의 진흙에 자동차 타이어 자국이 나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대형 트럭의 바퀴자국이었다.이런 형의 오늬 무늬 자국은 전에도 본 일이 있었다. "울타리 안으로는 기계문명의 부산물을 들여놓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는 땅을 살펴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필요할 때만은 예외지요. 일전에 식량을 배달하기 위해 트럭 한 대가 다녀갔다오." "필시 청정식을 치른 트럭이었겠구먼요?" "운전사가 청정식을 치른 사람이니 그렇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렇군요. 이제 우리가 이곳을 더럽혔으니 집안 대청소를 한번 해야겠구먼요." "그거야 신과 당신네들간의 문제요." 그는 고개를 돌려 저무는 해를 한번 흘끗 쳐다보고는 지붕 위의 횃대로 되돌아갔다. 국도로 돌아가는 귀로에서 나는 필요할 때는 밤중에 눈을 감고도 차를 몰 수 있도록 그 길을 기억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