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린] 상견환 ■ 상견환 서문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정말 구구절절(句句節節)한 사랑의 노래를 오래된 중국서적에서 찾을 수 있 었습니다. 상견환(相見歡)! 물론, 서로를 만나보면 환희가 넘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마는 시를 해석해보니 전혀 다른 뜻이었습니다. 이미 떠나버린 여인을 그리워하는 사나이의 정이 구구절절 녹아있는 시였습 니다. 더구나 시를 지은 사람이 일국(一國)의 황제였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하늘이 막는 사랑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시를 지은 사람은 천하의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정 작 자신의 곁에 두지 못했었나 봅니다. 시를 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쓰면 쓸 수록 어려웠습니다. 아직도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우정(友情)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사나이들의 우정이 여인의 사랑과 어떤 것이 다른지 비교도 해보고 싶었습 니다. 부족하지만 노력을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신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모두 독자제현(讀者諸賢)들의 판단에 맡겨야겠지요 아마 오래 동안 상견환이라는 시는 제 머리 속에서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 각을 합니다. 늘 강호의 무객(武客)들에 지도(指導)와 편달(鞭撻)을 부탁드리며 상견환을 떠나 보냅니다. 종린 배상 ■ 상견환 서시(序詩) 상견환(相見歡) 무언독상서루(無言獨上西樓) 월여구(月如鉤) 적막오동심원쇄청추(寂寞梧桐深院鎖淸秋) 전불단, 이환란(剪不斷, 理還亂) 시이추(是離秋) 별시일반자미재심두(別是一般滋味在心頭) 말없이 홀로 서루에 오르니 달은 고리같이 빛나고 오동나무숲은 적막한데 가을 하늘은 맑기만 하다 끊어도 안 끊기고, 거두어도 엉키는 이별의 쓰라림이여 가슴 끝 저리는 이별이어라. 남당(南唐) 후주(後主) 이욱(李煜)의 가사로 애끓는 이별의 노래이다. 사랑 하는 님과 헤어졌으나 오죽 마음이 아팠으랴! 일국의 황제임에도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내니 그 애달픔이 가슴을 비수로 도려내는 것 같았을 것 같다. 그러나 상견환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서 몰락 한 제후가 되었을 때 지은 사(詞)이다. 이욱은 십 오 년 동안 제위에 머물렀으나 송에 의해 남당이 멸망하고 송에 의해 제후(諸侯)로 봉해졌다. 그의 사는 애통한 마음이 구구절절 녹아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눈에서 흐르 는 눈물을 그치지 못하게 한다. ■ 상견환 서장-그녀가 내 곁을 떠났다 그녀가 나를 떠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했던 그녀였다.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 다는 말인가? 난 믿을 수가 없다. 그녀가 나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아니 그녀는 떠난 것이 아니 라 납치(拉致)된 듯하다. 만약 떠나려 했다면 한 통의 서찰이라도 남길 여 자였다. 그녀는 나보다 똑똑했고 또 배움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사 랑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나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이다. 나는 짐을 꾸렸다. 그녀를 찾아 떠날 생각이다. 중원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나는 안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 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한다. 그녀와 내가 달콤한 보금자리를 꾸민 지 벌써 십 년이 흘렀다. 내가 한때 머물렀던 곳, 그곳은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그녀가 있을 것이다. 그곳은 강호(江湖)라는 삭막한 이름을 가졌다. 나는 이제 오랫동안 깊숙이 넣어두었던 반검(半劍)을 꺼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을 죽이고 피를 묻히게 될지라도 난 갈 것이다. 그리고 반지도 끼어야겠지. 내가 발견된 곳에서 같이 발견되었다는 반지를 가지고 갈 것이 다. 확인(確認)해야 한다. 그녀가 나를 떠난 것인지 이제 확인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나에게 희망일 뿐이다. ■ 상견환 제1장-그가 떠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그 날! 작얼산(雀 山)은 비가 온 이후였는지라 사람을 쪄 죽일 정도로 날씨가 무더 웠다. 그러나 삼 개월에 걸친 긴 우기(雨期)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북천(北天)에서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몰려왔던 비 보다도 더욱 많은 습기(濕氣)를 머금은 검은 구름이 북천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 * * 열흘이나 내리던 지루한 비가 멈추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안개에 싸여있 던 작얼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겁 없이 나이만 먹은 노파의 볼이 개구리의 울음처럼 씰룩거리며 뿜어낸 연 초(煙草)의 연기처럼 영봉(靈峰)에 한 무더기의 구름이 걸려있었다. "비가 그치려는 모양이군!" 초풍비(楚風飛)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영봉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그것이 구름이 아니고 안개라는 것을 아는 그였지만 습관처럼 구름 이라 말했다. 구름과 안개라는 말은 그에게 주는 어감(語感)이 달랐기 때문 이었다. 벌써 반 시진이 족히 되었으련만 그의 눈을 산 정상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 었다. "이제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겠지." 초풍비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한곳이 빈 것 같은 허망함을 담고 있었 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좋든 싫든 간에 작얼산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진 하게 묻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자신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던 작얼산이었다. 언제까지나 속세(俗世)를 버리고 묻혀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작얼산이지만 지금은 둘 중 누구 하나는 배반을 해야 했다. 산이든지 초풍비든지! 초풍비는 몸을 돌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따듯하게 품었던 초막(草 幕)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를 따듯하게 품어주었던 초막은 변함이 없었지만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따듯한 온기(溫氣)도 느껴지지 않았고 항상 그를 따듯하게 맞아주었던 초란 (草蘭)의 명랑한 목소리도 없었다. 그것을 느끼면서부터 비 애감이 몰려들었다. "이제 이곳에 나를 반기는 사람은 없다." 초풍비는 걸음을 옮겨 초목으로 다가가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찬바람이 거 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가슴이 쓰라려 울컥거릴 뻔했다. "빌어먹을!" 십 년 동안 몸을 담았던 집이었다. 추위가 몰려올 때는 그의 몸을 따듯하게 감싸주었고 초란이 늘 그를 따듯하게 대하던 곳. 아니, 그의 터전이었다. 이제는 그가 떠날 차례였다. "이제 간다." 초풍비는 초막의 마루에 놓였던 등짐을 지었다. 등짐이라고 해 보아야 특별 한 것도 없었다. 누더기처럼 기운 두 벌의 옷을 싸고 그 동안 짐승을 사냥해 마련한 은자(銀 子) 조금, 그리고 노숙(露宿)할 경우를 대비해 길고 넓은 천을 준비했다. 넓은 천은 올이 성긴 삼베와 짐승의 가죽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꿰매진 것으 로 한기가 몰아와도 거뜬하게 막아줄 물건이었다. 그가 사냥을 다닐 때 늘 가지고 다니던 물건으로 눈이 무릎까지 싸여도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해주 었던 귀한 물건이었다. 옷가지를 천에 넣고 둘둘 말아 등에 지자 완벽한 등짐이 되었다. 은자와 몇 개의 금원보(金元寶)를 챙겨 허리에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묶었다. 그리 많 지 않은 양이었지만 초란을 찾을 때까지는 아껴 써야 했다. 허리 앞쪽에 조그만 주머니에는 동전(銅錢)을 넣었다. 동전은 오십 문(五十 紋) 정도 되었는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에 앞쪽에 주머니를 만 들었다. 굳이 동전을 앞에 넣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꺼내기가 편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욱 강할 수도 있었다. 사용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정말로 동전이 사용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었다. 허리에는 십 년만에 나무 밑에서 파낸 반검이 걸려있었다. 십 년 전 다시는 강호에 나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땅에 묻었던 반검이었다. 십 년만에 반검을 다시 보니 감회(感悔)가 새롭기도 했지만 다시 손에 피를 묻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기도 했다. 손에는 반지를 끼었다. 그 동안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숙이 넣어두고 끼지 않았던 반지였다. 둥근 보석이 달리고 보석의 중앙에는 호랑이가 실같은 금으로 정교(精巧)하게 새 겨진 반지였다. "간다. 다시 오기는 힘들겠지." 초풍비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자신을 십 년 동안 감싸주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인사 같았다. 그는 예감(豫感)하고 있었다. 다시는 작얼산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비를 맞으며 번(番)을 선다는 것은 뼈 속에 한기가 스미는 일이었다. 혹자는 비라는 것이 세파(世波)에 찌든 마음을 순화(純化)시키고 어쩌고 하 며 주절대지만 정말로 두 시진이나 되는 시간을 맞아보면 순화고 뭐고 없다 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비록 비를 막을 수 있도록 갈대와 짚으로 엮은 도롱이를 입고는 있지만 두 시진 동안이나 화살처럼 내리붓는 빗줄기를 맞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 다. 도롱이 속으로 파고든 빗방울은 속옷을 적시고 후끈한 열기를 만들어 내었 다. 몸을 타고 흐르는 비는 어깨를 적시고 등을 타고 흘러 사타구니를 끈적거리 게 만들었고 기분을 울적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라질...... 이건 아예 쏟아 붓는군 그래." "그래, 하늘에 구멍이 나지 않는 한 이토록 거친 비가 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 장노(張老)의 말에 좌명(左明)이 거들었다. 비가 오는 날, 그것도 황량한 벌판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행인을 기다리 며 번을 선다는 것은 더없이 처량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 일이기도 했다. 분명 사람이 지나다니는 관도(官道)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산천초목(山川草 木)이 떠내려 갈 것 같은 빗줄기 속에 누가 온단 말인가? "미치겠군." 장노는 신경질적으로 창을 바닥에 꽂았다. 장창은 질퍽거리기 시작하는 황토 흙에 깊숙하게 박혀들었다. 초혜(草鞋)로 물이 스며들고 마치 거머리가 달라붙은 듯 종아리가 가려웠다. 허리를 숙이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허리를 숙이면 허리에 비가 고스란히 맞을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장노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에 다른 발로 비비기로 했다. 먼저 오른발을 들어 왼발의 종아리를 뻑뻑 소리가 나도록 비볐다. 처음에는 까칠한 느낌이 들었으나 연속해서 비벼대자 가려움이 가라앉았다. 풀과 싸리나무의 껍질을 섞어 만든 초혜는 제법 까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왼발이 시원해지자 이번에는 왼발을 들어 오른다리의 종아리를 긁기 시작했 다. 몸서리가 처지는 희열이 느껴졌다. 산채에 있는 열 계집도 그에게 그런 희 열을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등이 다시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자 장노는 다시 심통이 올랐다. 아무리 생 각해도 기가 찰 노릇인지라 원인 모를 욕설이 입안을 맴돌았다. '제기랄! 이런 날은 산채(山寨)에서 따듯하게 데운 탁주나 마시던지 가슴이 풍만한 앵앵(鶯鶯)이나 껴안고 있어야 제격인데.' 장노는 불현듯 술 생각이 났다. 술이 없다면 앵앵의 속살도 그만일 것 같았다. 앵앵은 산채에 머무르는 이 십여 명의 계집 중 가장 풍만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앵앵의 주인은 없었다. 지아비가 없으니 당연히 먼저 눈을 맞추는 놈이 임자였다. 앵앵은 산채에 머무르는 오십여 명의 배설을 받아주는 그렇고 그런 계집 중 하나였다. 그 러나 장노가 생각하기에는 천하제일의 명기(名器)가 바로 앵앵이었다. "이거 그 개놈의 새끼가 앵앵을 품고 있는 것 아닌지 몰라. 우리는 초번(哨 番)이나 세워놓고 말이야." 좌명도 앵앵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좌명은 자신들에게 비를 맞으며 번을 서도록 한 막주(幕主)를 욕 하고 있었다. 그도 앵앵을 좋아하기에 앵앵에게 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듣는 자가 없으니 막주를 욕해도 하등의 문제는 없었다. 설사 누가 듣는다 해도 동감을 표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재미란 계집을 품거나 술을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막주를 욕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번을 서는 곳에서 오십여 장을 이동하면 조그만 초막이 있었고 산채 의 식구들은 그곳을 초막(哨幕)이라 불렀다. 번을 서는 자들이 몸을 녹이거나 잠을 자게 만들어진 곳이지만 늘 막주가 기거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이 멋대로 깔아뭉개고 성토의 대상으로 삼는 막주는 산채의 세 두령 중 막내였다. 산채의 식구들은 모두 그를 가리켜 낭리보(狼里步)라 했는데 그건 그가 지 닌 보법이 특이하게 늑대의 발걸음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맞아, 바로 내 말이 그 말이지. 이런 날 번을 서라고 한 그 새끼는....... " 장노는 갑자기 벨이 꼴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앵앵이 반 시진 전 초막으로 내려온 것을 보았던 것이 생 각났다. 보나마나 두 년 놈은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으이그......." 좌명도 앵앵의 보드라운 속살이 생각나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몸에 스며 드는 빗줄기가 참을 수 없으리 만치 으슬으슬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평소에도 인적이 뜸한 작얼산 기슭에 번을 선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 도 했다. 그나마 비라도 온다면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인적이 뜸하기는 하지만 사천에서 청해(淸海)로 연결되는 유일한 관도인 청 해관도(淸海官道)에는 그럭저럭 재미가 괜찮은 편이었다. 간혹 관군이 이동을 하기는 하지만 그들만 피한다면 벌어들이는 재미가 쏠 쏠했다. 간혹 대상(隊商)들도 이동을 했고 청해와 사천의 소금장수들이 지나다녔는 데 그들은 제법 많은 금화(金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아예 산채의 식 구들에게 적지 않은 상납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상납하는 황금과 곡물은 산채에 머무는 오십 명의 호걸들에게 충분 한 생활을 주었고 이십 명의 계집들도 그럭저럭 만족시켜 줄 수도 있었다. "우후후후! 뼈 속까지 시리군." 장노는 정말로 뼈가 녹아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기를 오래도록 비를 맞으면 뼈가 시리다고 했었다. 나중에야 어머니가 그랬던 것은 집안이 너무도 가난해 신발이 빨리 떨어질 까 봐 했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정말 뼈가 시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또다시 뼈가 시리고 몽둥이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무릎 이 저렸다. "교대자(交代者) 올 시간은 멀었어?" "이미 반 식 경은 지났을 거야. 놈들이 우리보다 높으니 어쩌면 후임자(後 任者) 몫까지 서야 될지도 몰라." 좌명이 입술을 내밀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머리 위에 갈대를 촘촘히 엮어 만든 파립(破笠)을 쓰고는 있었지만 비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변에 큰 나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잡목과 관목뿐이니 몸을 피할 수도 없 었다. 몇 달 전부터 막주에게 그토록 작은 우막(雨幕)이라도 지어달라 했지만 모 든 것을 말아먹었는지 들어 처먹었는지 아직도 아무런 확답이 없었다. "뭐야...... 이곳을 뜨던지 해야지. 정말...... 어라!" 중얼거리던 장노의 눈이 불거졌다. 너구리의 가죽으로 만든 토시로 눈을 비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었 다. 뿌연 물안개 사이로 바위처럼 보이지만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 다. 우중(雨中)에 작얼산 기슭을 지나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분명 사람 의 그림자가 분명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아도 사람이었다. 장노는 땅에 박아두었던 장창을 뽑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오랜만에 나타 난 먹이가 분명했다. "뭔데 그래?" 좌명은 다가오는 사람을 보지 못한 듯 싶었다. 자욱한 물안개와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술 것 같은 빗줄기 속이니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장노의 행동이 이상했는지 좌명이 몸을 흔들며 허리에 찬 박도(朴刀)를 움 켜잡았다. "저거...... 사람이지?" "어디?" "저기 말이야. 눈깔 좀 똑바로 떠봐!" 장노는 좌명이 가리키는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좌명은 장창(長창)으로 자욱한 물안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과연 장창의 끝에 하나의 움직이는 물체가 나타났다. 장노의 말대로 사람이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이 서로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들이 번을 서고 있는 곳에서 보았을 때, 인가는 적게 잡아도 오십 리 길 이었다. 오십 리의 먼길을 비를 맞으며 가겠다는 미친놈이 나타났던 것이 다. 둘의 얼굴은 뜨악한 표정으로 변했다. 미친놈이거나 급한 물건을 나르는 놈이 분명했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들은 비오는 날 번을 섰다는 칭송(稱訟)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한 이틀 동안 번이 없을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적어도 앵앵의 속 살을 마음대로 더듬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틀 중 하루는 앵앵과 미친 듯 뒹굴 수도 있을 것이었다. 막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거친 수염을 흔들며 그는 만족한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생전 하지 않 던 칭찬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수가 좋으면 술을 상으로 받을지 도 모른다. 막주는 신이 나서 놈을 족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은자가 생길 것이라는 것 을 생각하나 장노와 좌명은 하체가 벌떡 일어서는 흥분을 맛보았다. "어서 놈을 막아야지." "물론. 술과 계집이 눈앞에 있는데 마다할 수는 없지." 둘은 몸을 움직여 관도에 나란히 섰다. 누가 보아도 자신들이 위압감이 있 다는 생각을 하며 둘은 다리를 벌렸다. 그럭저럭 관도를 가로막은 꼴이 되 었다. 그림자는 점점 다가와 이제는 한눈에 들어왔다. 다가오는 자가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하는 놈인지 완벽 하게 파악은 되지 않았다. 얼굴이 드러날 정도로 다가온 사내는 사십대로 보이는 사내였다. 온몸에 비를 맞아 생쥐처럼 젖은 모습은 장노나 좌명과 같았다. 사내의 온 몸도 젖어 있어 '이거 미친놈 아냐?'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장노와 좌명이 도롱이를 입고 있는 반면 사내는 도 롱이는커녕 비를 막아줄 수 있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몸에는 올이 성긴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다. 등에 진 봇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특히 마구 솟구친 수염과 구레나 룻, 허리까지 마구 자란 긴 머리카락은 지저분해 보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산적(山賊)들보다 더욱 산적 같은 모습이었다. 특이한 것은 사내 의 허리에 검갑(劍匣)도 없이 엇비슷하게 찔러있는 반검이었다. 사내는 장노와 좌명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작 정 앞으로 걸어왔다. 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간혹 비바람에 흔들렸다. '병신 같은 새끼가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장노는 중년사내가 자신들을 몰라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작얼산 의 산 두령들을 몰라 볼 리가 없었다. 거창하게도 흑룡채(黑龍寨)라 이름 붙여진 산채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사천 (四川)에서는 공포의 집단이라 알고 있었다. 막주가 그랬고 채주가 그랬으 니 그건 틀림없을 것이었다. "크흐흐흐흐!" "이거 오늘 재미있는데...... 이 털보 정신이 없구먼!" 장노와 좌명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반은 미친놈 같았 다. 장노는 개구리처럼 튀어나갔다. 좌명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도 먹이를 발견 한 똥개처럼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가 장노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들은 마음이 급했는지 기다려도 될 것을 굳이 삼 장을 달려가 중년인과의 거리를 십여 장으로 맞추어 섰다. 다가오는 사내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것으로 그들의 임무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산채의 규율대로 고지(告知) 를 해야 했다. "멈추어라!" 장노는 제법 위엄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드는 목소리로 다가오는 중년인을 향해 목소리를 뿌렸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목소리는 위엄과 일말의 살기까 지 내포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살벌한 기운이 느껴져 담이 약한 놈이라면 아래로 배설(排泄)을 할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장노는 자신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있었다. 허나, 중년인은 귀가 먹은 것 같았다. 아니라면 긴 머리카락이 귀를 덮어 잘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내는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장노의 음성이라면 몸이 와들와들 덜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야 하는데 중 년인은 묵묵히 걸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장노와 좌명은 한동안 어찌 할 바를 몰랐 다. "이런 뼈를 발라 버릴 놈 같으니라고...... 멈추라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느 냐?" 장노는 약이 올랐다. 자신의 말을 어느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계속 걸음 을 옮기는 중년인을 향해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었다. 가뜩이나 날씨가 시원치 않은 판에 웬 똥파리 같은 놈이 말을 듣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들자 울화가 치밀었다. "뼈를 추릴 놈 같으니......." 장노는 놈을 잡아 자근자근 밟아 뼈를 추려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우라질 놈 같으니...... 네놈은 이 장장군(張將軍)의 목소리가 들리 지도 않는단 말야." 장노는 장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잠깐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중년인은 삼 장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구름이 흐르듯 느린 발걸음 같았으나 계곡의 물처럼 빠른 걸음을 가진 자였다. 사내가 전개하는 발걸음이 일반의 초부(樵夫)들 발걸음이 아니고 내공을 바 탕으로 한 축지성촌(縮地星寸)의 한가지 경공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장노 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중년인은 장창이 가슴 앞으로 다가오자 걸음을 멈추었다. '옳지, 이제야 조금 겁을 먹은 모양이군.' 장노는 머리가 산발한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야, 이놈의 자식아. 어르신이 서라면 서야 될 것 아냐. 내 말이 우습게 들 려? 뭐야!" 장노는 삼 장 앞에 선 중년인을 향해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달려가 창모 (槍矛)로 찌를 듯 위협하며 악다구니를 썼다. 제법 해먹는 놈의 모습이었 다. 좌명도 지지 않고 박도를 뽑아들며 중년인의 주위에 맴을 돌았다. 그래도 중년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노와 좌명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중년인이 조금은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위세에 질렸다고 생각했다. "자식, 건방지게 까불었구먼!" "하여튼 간에 겁 대가리를 상실하고 설치는 놈들은 몽둥이 찜질을 해 줘야 한다니까!" 중년인이 눈을 내리깔며 장노와 좌명을 훑어보았다. 장노와 좌명은 개의치 않았다. 사내는 마의(麻衣)를 입고 있지만 모든 것이 부조화(不調和)를 이 루고 있었다. 중년인은 한눈에 보아도 오래 동안 산에서 짐승이나 잡던 사냥꾼이라는 것 을 알 것 같았다. 거친 마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손과 다리에는 귀한 곰의 가죽으로 토시를 만 들어 찼고 신발마저도 습지에 산다는 습지 도롱뇽의 가죽을 꿰매어 만든 것 이었다. 중년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지만 장노와 좌명은 미쳐 알아보지 못 했다. "어서 내놔!" 장노는 다짜고짜 창을 중년인의 턱으로 밀었다. "반항할 수 있으며 입을 닫을 권리가 있다. 죽은 후에는 염라대왕(閻羅大 王)에게 항의할 권리가 있으며 물건을 내놓고 도주할 권리도 있다. 단 우리 에게 반항하거나 애원을 할 권리는 없다. 알아들었어." 좌명이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기라도 하듯 자신들이 정한 고지사항을 알려주 었다. "재미있군. 아주 감동적이야."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비꼬는 듯한 목소리였다. 중년인의 말투를 장노와 좌명이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비록 산채에서 산적질을 하고 있지만 좌명은 한때 성도부(成都府)에서 한가락한다고 생각 했던 성문지기였다. 죄명은 중년인의 비꼬는 말에 참을 수가 없었다. 손을 부르르 떨며 창을 움 켜쥐었다. "반항하면 죽을 것이고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하면 이 장군들이 목숨을 살려 주겠다." 장노는 아무리 생각해도 좌명은 머리가 좋았다. 어쩌면 그렇게 고지사항을 정확하게 외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세하 게 들어보면 좌명의 고지는 단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피식! 중년인의 입가에서 바람이 새어나왔다. "비웃어. 이 빌어먹다 거꾸러져 뒈질 놈이." 장노는 격한 음성을 토하며 중년인을 창극으로 찔러갔다. 그렇다고 죽일 생 각은 없었다. 창극은 중년인의 옷깃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몸으로 파고들지 는 않았다. 그들의 규칙이었다. 사람을 죽이면 점차 관도를 이용하는 자가 없어질 것은 분명했다. 어찌되었건 죽이지만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관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을 것 이고 그것으로 그들은 영원히 수입원(收入源)이 유지가 될 수 있었다. 산채의 대두령은 자신이 생각해낸 묘안(妙案)이 천하제일이라고 떠벌렸다. 비교적 쓸모 없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다는 생각은 옳은 것 같았다. 그들이 산채를 짓고 약탈에 들어간 지 십 오 년이 넘었지만 관도를 이용하 는 이용객(?)이 줄지 않은 것만 보아도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네놈이 날 무시해?" 장노는 정말 이마에 열이 올랐다. 중년인은 장노의 격한 행동에도 한 오라 기의 동요 없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장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물러서거라. 애들은 다칠라!" 처음으로 중년인의 목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낮은 저음이었다. 어딘지 모르 게 힘이 실려있는 목소리였는지라 장노는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비가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다. "이런 싹수머리 없는 새끼. 뭐라고?" 파슷! 장창이 중년인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밀려갔다. 제법 힘이 실린 일지창(一 支槍)의 수법이었다. 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중년인의 가슴으로 다가들었 다. "장난이 심하군." 중년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중년인은 다가오는 창극을 바라보다 몸 을 가볍게 두어 번 정도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창은 중년인을 찌르지 못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창은 중년인 몸을 미끄러지 듯 흘러 어깨위로 지나갔다. 창을 급히 회수하며 장노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실 패한 적이 기억에 없는 장노였다. 아니, 그 동안 자신이 창을 찌르도록 한 자가 없었다. 대개의 상단들은 알아서 통행료(通行料)를 상납했고 혹시 지나가는 길손은 짐을 내팽개치고 달아났기에 자신이 자랑하는 창을 쓸 기회가 없다는 것이 옳았다. "이 자식이...... 이게 장난으로 보여." 장노는 허공에 창으로 원을 그렸다. 산채에서도 장노는 창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창을 돌려 만천화우(滿天花 雨)의 수법으로 한줄기 둥근 막을 형성하자 중년인의 인상이 구겨졌다. 장노는 용기백배했다. 만천화우의 수법은 창을 신체의 각각 다른 주변으로 옮겨가며 돌리는 것으 로 엄밀한 방어막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적의 기선을 제압하는데도 사용되었 다. 장노가 최근에 몇 달이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익힌 창법이었다. "죽여버릴 거다." 장노가 빠르게 다가들었다. "어어...... 어라! 장노, 그만 둬!" 좌명이 무엇을 느꼈는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지만 장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없이 창을 돌리고 있었던 장노는 자신의 창에 온 정신 이 쏠려있었다. 필시 자신이 앞으로 산채에 돌아가 떠벌릴 무용담(武勇談) 에 미리부터 도취해 있을 것이었다. 폭포 같은 소리를 뿌려 내며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좌명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사실, 장노는 좌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또한 중년인의 모습이 조금만 빠르고 정교하게 찌르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좌명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어른을 몰라보는 어린아이는 매를 맞아야 한다." 퍽― 장노는 얼굴이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으로 가까워지던 중년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삼 장으로 멀어졌다. 갑자 기 몸이 출렁하는 느낌이 들며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퍽―털썩! 갑자기 엉덩이뼈가 부러졌는지 충격을 호소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는 알 수 없었다. 하늘이 노래지고 백열(白熱)을 뿜어내는 별이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 했다. 눈가에 별이 술래잡기를 돌았다. 엉덩이가 차가워졌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일어서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빗물이 실개천 되어 땅에 손이 닿은 것으로 보아 자신이 넘어졌다는 것은 알지만 사지(四肢)에 힘이 빠져나간 후라 버둥거리기도 힘이 들었다. 앵앵 과 하루종일 방사(房事)를 치른 것보다 더 힘이 없었다. 입이 찝찔한 느낌이 들고 끈적거렸다. 알 수 없는 냄새가 입안에 가득 고였 다. '뭐지?' 냄새의 실체가 피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 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코를 통해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장...... 장노!" 좌명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소리를 질렀다. 장노는 피가 목안으로 넘어가려 하자 침을 뱉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침이 뱉어지지 않았다. 손을 들어 입을 만져 보았다. 턱이 축 늘어져 있었고 침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을 눈에 가져오고서야 흘러내리는 것이 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으으으!" 장노는 비명을 토했다. 턱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입이 다물어지니 않는 것은 턱뼈가 조각조각 부서져 축 늘어졌기 때문이었 다. 손으로 다시 만져보니 부러진 이가 입 속에 가득 들어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상대가 무엇으로 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건 꿈이야.' 평생 입을 다물지 못하는 신세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앞으 로 음식을 씹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평생을 죽으로 연명(延命)하며 구더기처럼 꿈틀거려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 욱 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앵앵의 입술을 빨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도 생각 하지 못했다. "으으으으!"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장노는 물기가 흥건한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 다. 중년인은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으며 장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한 표정도, 그렇다고 가소롭다는 표정도 지니고 있지 않은 털북숭이 얼 굴이었다. 단 한가지 장노가 알 수 있는 것은 잠깐동안, 아주 잠깐동안 중년인이 애처 로운 표정을 지었다가 흩트렸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웃음이 진노가 평생동 안 살아갈 애처로움이라는 것을 알리 없었다. "으어어어어!" 장노의 말(言)은 사람의 말이 될 수 없었다. 장노는 멍청한 표정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움직이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달라진 것이 있기는 했다. 횡으로 서 있던 다리 중 오른다리가 반 족장(半足仗) 앞으로 나와 있었다. "너, 꼼짝 마라." 삐이이이익― 좌명의 황급한 목소리가 울리고 날카로운 호적(胡笛)소리가 울렸다. 조릿대 라 불리는 산에 자란 대나무를 잘라 만든 호적은 그들이 신호용으로 사용하 는 것이었다. 소리가 날카로워 천여 보는 능히 전달되는 소리였다. 좌명이 불어 젖힌 날카로운 호적소리를 듣지도 못한 듯 장노의 눈을 중년인 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빗줄기를 뚫고 열 개의 신형이 나타났 다. 본시 흑룡채는 다섯 개의 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섯 개의 조가 일률적으 로 돌아가며 관도를 지키고 있었다. 나타난 자들은 장노와 같은 추풍조(醜風組)였다. 그들은 초막 밑에서 비를 피하며 마작(麻雀)을 즐기고 있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호적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것이었다. 한결같이 손에는 산적이 아니랄까봐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병기들을 들고 있었다. "에워싸라." 장노의 처참하게 뭉개진 얼굴을 바라보던 산전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여 중 년인을 에워쌌다. 중년인의 눈가에 언뜻 안타까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길을 열어라. 이 몸은 너희들과 푸닥거리를 할만큼 한가하지 않다." 중년인은 낮은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비록 작은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 기이한 것은 좌명 을 제외한 누구도 중년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좌명만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뒤로 뺐다. 중년인의 눈에 잠시 애잔한 감정이 스쳤다. 그러나 나타난 산적들은 오해를 했다. 오해할 만도 했다. 중년인의 눈에 비추어진 빛이 후회를 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장노를 묵사발로 만든 후회라 생각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곧 자신들을 두려 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 버렸다. "모두 놈을 포위하라." 손에 대부(大斧)를 든 놈이 소리를 지르자 제법 빠르게 몸을 움직인 산적들 이 중년인을 에워쌌다. 중년인은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자들을 바라 보았다. "길을 열어라. 초풍비가 네놈들에게 괄시를 당할 만치 녹슬지는 않았다." 초풍비! 그는 작얼산에서 길을 떠난 지 불과 두 시진만에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번에 산적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과거 산적생활을 했던 아우들을 생각해서 함부로 죽일 마음이 일지 않았다. 초풍비는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분명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비록 세월이 오래되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가 단 한 놈이라도 있다면 길을 열 것이 분명했다. 도주(逃走)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산적 천명이 달려와도 자신을 막지 못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꽁무니를 말고 싶은 생각은 꿈에라도 없었다. 자신이 과거 십 년 전에 가졌던 쩌렁한 명성을 생각하면 조무래기들과 푸닥 거리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도주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 다. '따끔한 훈계(訓戒)를 내리리라.' 초풍비는 눈을 들었다. "죽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식하게 생긴 파풍도(破風刀)가 머리를 쪼개며 떨어 져 내렸다. 초풍비의 얼굴에 언뜻 어이가 없다는 듯한 희미한 웃음이 걸렸 다. 휙! 초풍비의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한발자국 움직인 것 같았는데 그의 몸이 파풍도를 든 자의 앞에 있었다. "크아아악!" 파풍도를 휘둘러 들어가던 산적이 이마를 감싸며 나뒹굴었다. 피풍도는 허 공에서 빙글빙글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엇이 어찌 되었는지는 초풍비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초풍비의 동작은 너무도 간단한 것이었다. 파풍도를 휘두른 산적은 힘을 모으기 위해 등뒤에서부터 큰 곡선을 그리며 그어왔고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산적의 용기는 가상했지만 초풍비처럼 강한 내공을 익힌 내가고수(內家高 手)에게 등에서 앞으로 쏘아져 오는 시간은 수십 명을 죽일 수도 있는 시간 이었다. 초풍비는 번개처럼 쏘아갔고 손바닥을 펼쳐 파풍도를 잡은 손을 허공으로 후려쳐 올렸다. 동시에 몸을 돌리며 팔 굽으로 산적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 었다. 너무도 빨라 산적들은 다만 한 발 다가간 것으로만 느꼈을 뿐이었다. 쿵!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산적의 몸이 물기 흥건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죽여버리겠어." 파풍도를 들었던 사내는 급히 몸을 움직여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 도 잠시,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변해버렸다. 퍼퍽!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산적은 다시 허공으로 날아갔다. 날아간 거리는 삼 장이었다. 온몸에 이는 충격으로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우웩!" 낙상(落傷)의 충격만으로도 가슴에서 피가 솟아오르는지 그는 입을 벌리고 헛구역질을 토했고 누런 위액(胃液)과 불그스름한 피를 게웠다. 과도한 충격으로 몸에 흐르는 기가 깨어졌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자세히 보면 그의 얼굴에 가는 선이 수십 줄기나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것은 전사경(纏絲勁)의 일종으로 팔로 상대를 칠 때 강한 회전력 (回轉力)을 일으켜 돌려 찍기 때문에 나선형의 상처가 남기 마련이었다. "우우! 놈을 죽여라." 누구인지 불분명한 고함소리가 들리고 일곱 개의 병기가 일제히 초풍비를 산산조각으로 만들 것 같은 강한 기파(氣波)를 뿌리며 밀려들었다. '귀찮은 파리 떼로군.' 초풍비는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그들 을 격퇴시키기로 했다면 질질 끌어서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초풍비는 양손을 벌려 머리위로 삼각형이 되게 모았다. 일곱 개의 병기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초풍비는 급히 몸을 돌려 다가드는 병기를 피했다. 병기를 피한 그의 몸이 풍차(風車)처럼 회전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그의 모 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내공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내공을 사용했다면 그가 회전하는 속도는 열 배 이상 빨라졌을 것이었다. "중앙을 찔러라." "머리도 공격해라." 산적들이 당황했는지 제각각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들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산적 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떠나지 않았다. 초풍비가 한곳에 고정된 모습으로 회전을 일으켰을 뿐 그들을 공격하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젠 틀림없이 죽였다'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후회는 빨라도 늦는다." 산적들이 드리운 병기의 그물 속에서 한소리 호통이 울려 나왔다. 정신없이 병장기를 휘둘러가던 산적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렸다. 퍼퍼퍼퍽! 갑자기 울려나온 소리는 살을 가르고 뼈를 자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가죽으로 만든 북을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 "쿠악!" 제일먼저 퉁겨 나온 자는 이십 근이 나가는 철부(鐵斧)를 든 자였다. 그는 다리를 움켜쥐며 이 장을 날아갔는데 한번 나뒹군 후에는 일어서지 못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제비새끼처럼 끙끙거리고 있었다. 철퍼덕! 털썩! 뒤이어 나뒹구는 두개의 신형은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들었 던 대감도(大坎刀)와 철퇴(鐵槌)는 이미 허공으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 았다. 그들도 눈초리가 흐트러진 상태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 눈 깜 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그들 모두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둔탁한 소리가 연속으로 들리더니 네 개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마치 날 개 달린 날짐승처럼 날아간 산적들은 한결같이 신체의 일부가 상처로 물들 어 있었다.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고 치명적이지 않아 죽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한 달 은 요양(療養)해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상처가 그들의 몸에 남았 다. "이...... 이건......."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던 좌명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니 반대였다. 입을 하마처럼 벌리고 입 속으로 들어가는 빗물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턱 뼈가 빠졌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작얼산에서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던 자신들이 단 일합에 무너졌다는 것 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일곱 명의 합공(合攻)이 아니었던가? 좌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들려온 소리. 마치 탁한 술에 목구멍이 젖은 듯 들리는 소리가 들리고 언덕에서 철퍼덕거 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오는군.' 좌명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언덕 위에는 초막이 있었고 막주라 불리는 산채의 셋째 두령이 기거하고 있 었다. 그토록 탁하고 거친 음성은 오로지 그자의 목소리뿐이었다. 시간만 있으면 부하들을 모아놓고 한때 자신이 무림에서 칠절검예(七絶劍 藝)라 불렸다고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리는 등하명(鄧河皿)이 바로 그였다. 등하명은 비에 젖어 철퍼덕거리는 땅을 밟으며 마구 달려왔다. 어림잡아도 이 백 근은 나갈 것 같은 몸집이 구르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어떤 개망나니 아들놈이냐." 등하명은 미친 듯 달려 초풍비의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섰다. 그의 인상이 묘하게 비틀어지는 것을 초풍비는 멍한 시선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 소리를 지를 때와는 달리 등하명의 인상은 차갑게 식어 있있다. 차갑 게 식었다고 하기보다는 새파랗게 얼굴이 얼어 있었다. "혹시?" "나를 아는가?" 초풍비는 나직하게 물었다. 등하명의 눈이 도르르 굴렀다. 그의 눈이 구르는 곳이 만약 쟁반 위였다면 정말로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한참동안 눈알을 굴리던 등하명의 얼굴이 비굴하게 물들었다. "혹시...... 오지회(五指會)의 대형(大兄)이 아니십니까?" "눈알이 제대로 박혔구나." 초풍비는 처음으로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말이 떨어지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등하명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무릎 을 꿇었다. 주위에서 신음을 흘리던 모든 수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등하명은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가관이라 웃을 만도 한데 부하들은 얼굴이 굳어 버렸는지 웃을 수가 없었다. 단 한번도 남에게 머리를 숙인 적이 없었던 등하명이었던 것이다. 설사 산 채의 대두령에게도 그는 머리를 숙이는 따위를 하지 않는 안하무인격(眼下 無人格)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애처롭기보 다는 차라리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초풍비가 멀어진 뒤에도 등하명은 한참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산적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바단 옷을 차려입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와 땅에 서 튀어 오른 흙으로 그는 무논에서 한참동안이나 뒹군 똥개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삼 채주(三寨主)! 그는 갔습니다." 멀뚱하게 서 있던 좌명이 초풍비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등하명에게 다가 가 입을 열었다. "휴!" 등하명은 긴 한숨을 불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 었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육중한 몸을 숙이고 있었기에 얼굴에 피가 몰려 붉게 변하는 것이 당연하지 만 창백하다 못해 노랗게 변한 까닭을 좌명은 알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킨 등하명은 초풍비가 멀어져간 방향으로 한참동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좌명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었다. "그는 강호에서 가장 강한 자다. 그가 마음을 먹으면 아마도 중원을 평정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좌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황당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등하명은 누구도 추켜세우는 법이 없는 자였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었다. 좌명은 초풍비가 사라진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물론, 초풍비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자욱한 물안개가 사람의 모습을 가려버렸고 설사 비가 오지 않는다 하더라 도 그가 얼마나 빠른 걸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리도 센 사람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자가 자신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다니...... "그가 왜 나타난 걸까? 소문에는 십 년 전에 은거(隱居)를 했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좌명의 귀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등하명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의 목 소리는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1 페이지: 1/32 자료번호: 254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1 ─────────────────────────────────────── ■ 상견환 제2장-그가 나타난 것을 본 사람도 있다1 대도하(大渡河)는 사천에서 장강(長江)으로 이르는 가장 큰 지류중의 하나 였다. 강이 얼마나 크기에 오죽하면 대자(大字)를 붙였을까마는 대도하가 사천에 서 유명한 것은 물살이 거칠고 주변 경관이 수려한 때문이기도 했다. 대도하는 청해에서 발원하여 대설산(大雪山) 기슭을 거쳐 아미산(峨嵋山)을 바라보며 장강으로 들어가는 긴 강으로 길이만도 근 삼천여 리에 이르는 강 이었다. 특히 대설산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이 대도하에 섞여 물이 차갑고 맑아 늘 은어(銀魚)와 빙어(氷魚)가 살며 하루도 쉬지 않고 유람객을 불러들였 다. "사천제일수(四川第一水)는 대도하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많은 시인들과 묵객들이 대도하를 가리켜 그와 같이 말했다. 대도하는 사 천의 명물이었다. 오죽하면 아미파가 사천에 있는 이유가 대도하 때문이라는 소리가 강호에 흘렀다. 아미파가 자리를 잡음으로써 그들이 자리한 산이 아미산이 되었다는 이야기 도 있었고 아미산에 무파가 자라잡아 아미파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튼 아미파가 경치가 수려하기 때문에 대도하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를 잡은 것 은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대도하(大渡河)라고 불리는 긴 강은 그렇게 사천을 감으며 휘돌아 장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긴 우기가 끝나고 가을로 접어든 길목에서 산의 경치는 서로 뽐내기에 날이 저무는 줄 몰랐고 하늘거리는 갈대는 구름을 유혹하고 있었다. 차가운 물이 안개가 되어 피어오르는 태양하구(太陽河口)는 대도하에서 유 람선이 다다르는 마지막 나루터였다. 수십 개의 나루터가 있지만 태양하구는 늘 붐볐다. 사천을 유람하는 사람들 의 마지막 기착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장강에 이르는 길목이었기 때문 이었다. 태양하구에서 배를 타려면 반드시 거처야 하는 주루(酒樓)가 있으니 사천의 명물로 이름이 높은 태양루(太陽樓)였다. 태양루는 태양하구에 있는 하나뿐인 주루였다. 주루라고는 하지만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는 말하자면 빈관(賓館)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하하하! 어서 한 잔 들게나." "그렇게 하자고. 그나저나 이제 장강으로 들어가 한 번 장사를 시작해야지. " 오후의 태양루는 시끌벅적하기가 시장 같았다. 물론 이층까지만 시끄러웠지 삼층부터는 조용했고 품위가 있는 자들이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곳이었다. 바위가 휘어질듯, 무너질 듯 자리한 강안(江岸)에 서 있은 태양루는 바위를 벽 삼아 지어진 오층 건물로서 강에서 보아야만 건물이 보이는 구조를 지니 고 있었다. 태양루에 이르는 길은 두 개로 강으로 이어진 길은 나루터였고 오층은 관도 로 이어지는 길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마치 하나의 긴 상자가 벼랑에 달라 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이층의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루 내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 모두가 쌍쌍이었고 흔치않게 장사치들이 왁자하니 소란을 피우기는 했지만 사방 십여 장은 넘을 것 같은 주청(酒廳) 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자는 그 혼자 뿐이었다. "오늘도 허탕인 모양이군. 그가 장강을 따라 호북(湖北)으로 가자하면 오로 지 이곳에서 배를 타야 하는데......." 사내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리에 이르는 긴 머리카락은 창(窓)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하늘거렸고 몇 날, 몇 칠을 깍지 않았는지 마구 뻗친 수염은 마치 산적을 연상하게 했다. 사내는 초풍비였다. 그는 사라진 초란의 발자취를 따라 작얼산에서 동쪽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 었다. 그가 작얼산을 떠난 지 벌써 두 달의 세월이 흘렀다. 이미 사라진 여인의 뒤를 쫓는다는 것은 누구나 초조하게 만들고 쓸쓸함을 풍기게 마련이다. 이미 흩어져 버린 흔적을 찾는 것은 장강에 빠져 파도에 실려간 어린이이의 초혜(草鞋)를 찾는 것이나 같았다. "이곳에서부터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초풍비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태양하구에서 초란의 발자취는 끝나 있었다. 배를 탄 것인지 육로(陸路)를 선택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장강으로 흘러드는 삼십 칠 개의 지류를 건넜고 배를 타야하는 큰 강만 해도 다섯 개를 건넜다. 물을 건널 때마다 그의 발걸음은 수일씩 지체 되고는 했었다. "이곳하고는 인연이 깊군. 내가 아우들에게 마지막 서찰을 보낸 곳도 이곳 이었지." 초풍비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대나무를 잘라 만든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맑 은 옥향미주(玉香美酒)가 잔을 채우며 불그스름한 빛을 띠었다. 오랜만에 형제들의 생각이 났다. 초란을 만나 은거를 하기 위해 작얼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를 내린 곳이 태양하구였다. 그는 초란이 원하는 대로 은거를 선택했고 아우들을 버려야 한다는 죄책감 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태양루에서 한 통의 서찰을 써서 인편 (人便)으로 오지회에 남아있던 아우들에게 보냈던 것이었다. 당시 아우들은 사천의 남부에 치우쳐져 있는 금불산(金佛山)에 머물고 있었 다. 의욕이 넘쳤던 아우들은 금불산에 오지회의 장원을 짓느라 분주했고 칠월 보름을 기준으로 하여 모두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다. 금불산은 귀주성(貴州省)과 인접하고 있었고 호남(湖南), 호북(湖北)과 모 두 가까운 지역이었기에 아우들이 선택한 곳이었다. 더구나 금불산은 장강 과도 가까워 장강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 아우들의 생각 이었다. "벌써 십 년 전의 이야기로군." 초풍비는 잠깐 생각에 젖어 있었다. 벌서 두 시진째였다. 그는 오늘 하루만 도 반나절동안이나 태양루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흘이 지났다. 태양루에서 한사람을 기다린 지는 이미 사흘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반드 시 만나야 했다. 초란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그 뿐이었다. 초풍비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대도하의 푸른 물결이 태양을 받아 은파(銀波)를 번뜩 이고 있었다. 어제저녁에 보았던 붉은 빛의 낙조(落照)와는 다른 운치가 느껴졌다. 아니, 하루하루 대도하를 바라보며 느낌이 바뀌고 있었다. 하루에 네 척이 들어오고 나가는 태양하구에서 오늘 떠날 배는 이제 마지막 한 척이 남았다. 그 배가 떠나버린다면 또다시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아우들을 불러내면 일이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또다시 짐을 지워주고 싶지는 않다." 초풍비가 자신의 아우들을 불러낸다면 초란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이미 십 년 전에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훌쩍 떠난 자신이 아닌가? 아마도 아우들은 진한 아픔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 니라면 분노로 심장이 타들어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도 많이 변했겠지." 막내의 곰 같은 모습이 술잔에 어렸다. 유난히 그를 따르던 막내아우는 아 마도 그를 찾다 지쳐 들판에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 앞에 나설 자격도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초풍비는 그들을 배신(背信)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겠지. 그나저나 결혼들은 다 했는지 모르겠군." 초풍비는 불현듯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강호에 이름 을 날릴 때만 하더라도 이십대였다. 무림을 누비는 후지기수들 중에서 첫째로 치는 무명(武名)뿐만이 아니라 그 가 강호를 횡협(橫俠)한 지 삼 년만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그가 나이 삼십이 되던 해에 그는 초란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무림을 떠났다.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니 나이가 사십을 넘어 버렸다. 아우들도 이제는 삼십 대 후반이었다. "자 한 잔 마시자고?"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들어보니 키가 장대같이 큰 사내와 옆으로 퍼져 키보다 살찐 것처럼 보이는 두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생긴 모양만큼이나 독특한 복장에 독특한 병기를 지니고 있었다. 키가 장대처럼 커 한눈에 보아도 구 척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내는 사십대 의 나이로 보였는데 피처럼 붉은 홍포(紅布)를 걸치고 있었다.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큰 대도(大刀)를 들고 있었다. 대도의 도신(刀身)은 이 척이 넘어 보이는데 구 척의 키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 옆의 난쟁이는 더욱 가관이었다. 등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것으로 보아 그는 원래부터 난쟁이가 아니라 등을 다쳐 성장이 멈춘 것으로 보였다. 난쟁이는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유랑가극단(流浪歌劇團) 의 원숭이 같은 모습이었는데 허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장도(長刀)가 걸려있 었다. 오 척이 되지 않는 그의 몸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 않은 장도였다. 장도가 도신(刀身)을 숨긴 도갑(刀匣)의 맨 밑바닥에는 철제로 만들어진 조 그만 바퀴가 달려있어 그가 걸을 때마다 도갑이 바닥에 잘 굴리도록 했다. '흠! 저들은 소문에 듣던 장단이괴(長短二怪)가 분명하군. 그런데 저들도 그가 필요하지는 않겠지.' 초풍비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들에 대한 소문은 작얼산에서 먼 거리를 돌아 태양하구에 이르는 동안 나 불거리기 좋아하는 상인들과 많은 무인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본시 중원의 무림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변방(邊方), 서장(西藏)의 무 인들이었다. 서장 홍교(紅敎)의 이단자(異端子)로 낙인찍힌 자들인데 오래도록 홍교에서 무공을 익혀 서장에서는 그 적수가 없으리 만치 가히 놀랄만한 무공을 지니 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들이 왜 홀연히 서장을 떠나 사천으로 들어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막연하 게 중원을 가로지르고 있다고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초풍비는 한동안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주시했다. 초풍비가 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비어있 는 자리를 찾아 앉아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의외로 무인들이 많군." 장단이괴 중의 난장이, 따로 부르기는 단구도괴(短軀刀怪)라 불린다는 요달 각(療達覺)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소리를 내었다. 초풍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주루에 앉은 사라들 중 반수가 무인이었다. 장사치로 혹은 농부로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동작들 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 단구도괴의 말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모두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군." 장단이괴중 키가 큰 사나이, 장구철도(長驅鐵刀) 저유평(猪柳萍)이 거들었 다. 그들이 입을 놀리자 그들에게 눈을 모았던 십 수명의 사람들이 듣지 못 한 척 음식을 먹었다. '그라고? 혹시!' 초풍비는 그들이 말하는 그가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는 서장에서 도주를 시작하여 청해를 건 넜다고 했다. 초풍비가 기다리는 자는 청해에서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더 이상 도주할 곳 이 마땅치가 않자 청해와 감숙(甘肅)을 나누는 적석산(蹟石山) 줄기를 따라 사천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천으로 진입했다면 십중팔구 태양하구로 들어올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추론이었다. 그렇다면 서장의 무인들인 그들이라고 사천에 들어오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도 충분히 그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적지 않은 무림인들이 한사람을 놓고 쟁탈전(爭奪戰)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그건 달갑지 않은 불유쾌한 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초풍비가 생각하기에 그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초풍비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여기저기 무림인들로 측정되는 자들은 많았지만 초풍비가 얼굴을 아는 자는 없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무림을 떠나있었기에 세상이 너무도 변한 것 같았 다. "나타났다." 갑자기 주청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의 눈의 빛났다. 그것은 한눈에 파악 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갑자기 술렁이던 주청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치 바늘 하나만 떨어지 더라도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릴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계단으로 향했다. 시선이 모아지는 곳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열기를 담고 있어 나무계단이 타버리지 나 않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나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처음에 보인 것은 챙이 넓은 죽립(竹笠)이었다. 죽립은 그늘을 만들어 나타난 자의 코 위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 신에는 날아갈 것 같은 몸에 달라붙는 흑의경장(黑衣輕裝)을 입었지만 오랜 여행을 했는지 어깨 위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있었다. 나타난 사내는 발걸음도 지쳐 보였다. '소문과 똑같은 모습이로군.' 초풍비는 침을 삼켰다. 그가 기다리던 사나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가 사흘동안 고생하며 기다리던 사내, 만리당혜(萬里唐鞋) 풍무영(風無 影)이 태양루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풍무영은 피곤해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서장의 오지마을 파청(巴靑)을 출발해 근 십일만에 청해의 적석산에 다다랐 던 그는 오일이 걸리지 않아 태양하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적석산과 태양하구는 근 천리길이나 되는 먼길이었다. 범인이라면 십일은 걸릴 길이었다. 그것도 적석산과 민산(珉山)으로 이루어진 산락군을 주파하는 무서운 길이 었다. 거리 상으로는 범인이 열흘이 걸릴 거리지만 실제로는 보름이 걸릴지도 모 르는 험한 길이었다. 그가 그리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앞에 붙은 무림명호(武林 名號)가 대신 말해주듯 뛰어난 경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풍무영은 무공에서 일가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경신법은 놀라운 성취를 이루 고 있었다. "휴!" 너무도 지쳐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풍무영은 앞뒤 재지 않고 비어있는 자 리에 엉덩이를 디밀었다. 모든 자리가 꽉 차있었는데 오로지 한가한 자리는 그가 앉은 자리 뿐이었 다. 더구나 창가였기 때문에 장강의 경치가 한눈에 보였다. "한 잔 드실 텐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풍무영은 눈을 들었다. "응?"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잔이 놓여지고 분홍빛이 나는 술이 딸려졌다. '에라 모르겠다.' 풍무영은 술잔을 들이켰다. 가슴이 시원해지며 피로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누구요?" 풍무영은 눈을 들었다. 처음에는 빈 자리인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인지 그의 앞, 탁자건너에는 한 괴인(怪人)이 앉아 있었다. 그랬다. 괴인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사람이었다. 우선 긴 머리가 눈을 끌었다. 엉덩이까지 자랐을 것 같은 긴 머리칼은 언뜻언뜻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지저분하기로 하면 머리만으로 만족을 못했는지 얼굴은 수염이 뒤덮여 있었 다.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얼굴의 수염을 밀면 제법 준수(俊秀)할 것 같은 사내였다. 풍무영이 유난히 그를 가슴에 심은 것은 눈이었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사 내의 눈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이 깊고도 착 가라 앉 은 눈이었다. 인간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다. 눈을 보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심지어 무인의 눈은 공격방향을 나타내 주기도 했다. 눈을 보면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일 이 다반사(茶飯事)였다. 어찌된 일인지 사내의 깊게 가라앉은 눈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 다. "한 잔 더 할 텐가?" "주십시오." 풍무영은 왠지 가슴이 포근해졌다.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사내가 마음이 악독하지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그가 그같이 생각하는 것은 풍무영은 오로지 뛰어난 경공 하나로 강호를 돌 아다니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그를 원했다. 그를 위해주는 사람을 만나본 적 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 후대했다. 그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의 빠른 다리를 이용해 자신들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려 해 서였다. 그를 진정한 무인으로 여겨주고 대우해주는 무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벌써 삼 년이 흘렀다.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가문이 몰락(沒落)하고 어둠 속으로 도주해 목숨 을 구한 뒤부터 강호를 싸돌아 다녔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발이 빠르다고 만 리당혜라는 이름뿐이었다. '어, 저자까지 나타나다니.......' 풍무영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경악이었다. 술을 들이키던 풍무영의 몸이 굳었다. 한 사나이의 모습이 풍무영의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삼십이 채 되지 않아 보였고 전신에는 하늘처럼 푸른 남색의 넓은 장의(長衣)를 입고 있었다. 잘록해 보이는 허리에는 대나무가 그려진 넓은 요대(腰帶)를 차고 있었고 특이하게도 양쪽 팔에 가죽으로 만든 토시를 감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고 마시게." 풍무영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풍무 영과 마주앉은 괴인이었다. 풍무영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풍무영이 본 자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이손(二孫)인 당천엽(唐天燁)이었 다. 당천엽은 지루할 정도로 서장에서부터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풍무영은 괴인이 따라주는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연거푸 마 신 술이 그를 불안에서 해방시켰다. 서서히 풍무영의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아갔다. 기이한 것은 괴인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쫓기는 그로서는 자신 주위에 몰려든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궁금하고 경계 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기이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괴인이었다. 그가 만약 강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있었고 괴인이 초풍비였다는 것을 알 았다면 아마도 그는 혼이 유체이탈(遺體離脫)을 해 십리는 달아날 것이었 다. 한동안 술을 마시던 풍무영은 갑자기 눈을 크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에 하나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저 자가 벌써 쫓아오다니." 풍무영의 얼굴이 탈색되었다.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했지만 너무도 놀라 입술을 비집고 말이 되어 튀어나 오는 것은 경악이었고 두려움이었다. 풍무영이 얼마나 두려움에 젖어있는가 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풍무영이 바라보는 곳에는 한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층으 로 오르는 계단이었는데 아마도 그는 오층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것 같은 모 습으로 서 있었다. 마치 강시(疆屍)처럼 깡마른 노인이었다. 얼굴은 핏기가 말라 창백해 보였고 얼굴 전면에 그물처럼 얽힌 주름살은 적 어도 그가 백살은 넘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도록 했다. 턱이 매의 부리처럼 뾰족하여 찢어진 눈과 함께 인상을 결정하고 있었다. 특히 휘적거리며 걸을 때마다 드러나는 손이 심상치가 않았다. 손톱은 보이 지 않고 번쩍거리는 빛이 반사(反射)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풍무영은 목을 움츠렸다. 심지어는 그가 몸을 돌릴까 두려워 목을 숙이기도 했다. "그가 누구기에 그리도 두려워하나?" 괴인, 초풍비는 술을 마시며 담담하게 물었다. 풍무영은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앉은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초풍비의 허리에 부러진 반검이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초풍비가 빙그레 웃었다. 아무런 사심(邪心)이 없는 웃음이었다. 풍무영도 엉겁결에 웃고 말았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지요. 그는 나를 서장에서부터 추적하고 있답니다. 혈 응마조(血鷹魔爪) 봉조환(奉照奐)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풍무영은 말을 마치자 다시 몸을 움츠렸다.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는 그가 행동하는 모습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모습은 결국 그는 서장에서부터 봉조환을 피해 도주를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봉조환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시선을 한곳에 던져두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눈을 고정시킨 곳은 풍무영이 고개를 수그린 탁자였다. 봉조환이 풍무 영을 바라보든지 말든지 초풍비는 느긋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 다. 봉조환은 얼굴에 키득거리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풍무영을 향해 다가왔다. "제길!" 눈을 들던 풍무영은 봉조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터져 나오는 욕설을 뿌렸다. 이제 더 이상 도주할 곳도 없다는 체념이었다. 봉조환이 다가오자 풍무영은 얼굴을 탁자에 처박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죄를 지은 아들이 어머니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과도 같았다. 봉조환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비켜, 빌어먹을 놈들아." 콰지지직― 봉조환은 다가서다 발에 걸리는 물체가 있자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그것은 주탁(酒卓)이었고, 날아간 주탁은 벽에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갑자기 주청이 얼어붙었다. "어서 가자!" "우리도 그만 갑시다." 갑자기 얼어붙은 냉기에 질린 수많은 주객들이 서둘러 계산대에 은자를 던 지고 계단으로 물러갔다. 주객들뿐만이 아니었다. 턱이 가슴까지 늘어져 욕심 많게 생겨 보이는 주청의 주인도 계산대에서 허 겁지겁 일어나 걸음아 날 살려라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도주를 해 버렸다. 황금을 밝히는 자도 목숨이 아깝다는 것은 아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들이 너무도 오랜만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초풍비는 피식하고 웃었다. 주객들이 아우성을 지고 미친 듯 도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십여 명에 이 르는 주객은 남아 술을 마셨다. '흠! 저들의 목적은 모두 한가지로군.' 초풍비의 얼굴에 웃음이 옅게 흩어졌다. 초풍비의 생각대로 남은 자들은 모두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은 태연함을 가 장하며 술을 마시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쉴 사이 없이 눈알이 돌아가고 있 었다. 뿐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는 크든 작든 간에 병장기(兵仗器)를 소유하고 있 었다. 드러나는 병기도 있었지만 드러나지도 않는 병기를 지닌 자도 있었 다. 이미 초풍비는 그들이 지닌 병기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병기를 보면 사 용하는 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가문과 문파(門派) 까지도 드러나는 법이었다. 초풍비가 냉정하게 파악해본 결과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제자는 보이지 않 았다. 중원을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左之右之) 한다는 육대세가(六大世 家)에서도 단지 사천당가의 후손만이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날 따라가자." 봉조환은 다가서자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풍무영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풍무영은 초풍비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 괴인이 한 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초풍비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리석군. 만리당혜를 끌고 저자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아닐텐 데." 초풍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모두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소리였다. 어찌 들 으면 봉조환이 풍무영을 데리고 가니 막으라는 소리 같기도 했다. 봉조환이 갑자기 몸을 돌려 주청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파란 광망 (光芒)이 줄기줄기 쏟아졌다. 한참동안 주위를 훑어보던 봉조환의 입 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그도 한눈에 주청에 모여 앉은 모두가 풍무영을 노리고 몰려들었다는 것을 안 것 같았 다. "어떤 놈이 감히 내일을 방해하느냐?" 기선(機先)을 잡으려 했음인가? 봉조환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강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반월창(半月窓)들이 마구 흔들렸다. 주청이 웅웅 소리를 매며 흔들리는 것 같은 고함소리였다. 늙은이치고는 무서운 고함소리였다. "늙은이가 너무 설치는군."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봉조환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봉조환의 눈이 멈춘 곳에 사인(四人)이 음충맞은 눈웃음을 뿌리며 서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들이 결코 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들게 했다. 한 결같이 등에 둥근 방패를 매고 있었는데 햇빛에 말린 조개껍질처럼 흰색이 었다. 허리에 덜렁거리는 삼척길이의 병기는 한결같이 유엽도(柳葉刀)였다. 방패 와 합쳐지면 무서운 위력을 나타내리라는 것은 충분히 인식이 가능했다. 그들은 쌍둥이 같았다. 한결같이 하관(下官)이 처지고 눈초리가 말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독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아무리 보아도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가 분명했다. "오호! 건방지기가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다는 대산파(大山派)의 쌍둥이들 인가?" "저들이 팽가(彭家) 형제(兄弟)였구나." "저들은 사천무인이 아닌데 이곳까지 오다니......." 봉조환의 입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자 여기저기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 어났다. 그러나 그들의 신경전에 끼어 들기는 싫었는지 일어서는 자는 없었 다. 나타난 사인 중 가장 앞에 섰던 사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한결같이 사순(四 旬)은 되어 보이는 중년인들이었다. 그는 허리에 붉은 요대를 하고 있었다. 그들 쌍둥이들은 하나같이 검은 무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가 걸친 붉은 색 요대가 가장 강렬했다. 그들 쌍둥이는 각각 다른 요대를 매고 있었는데 요 대의 색이 그들의 이름과 형제 서열을 나타내고 있었다. 붉은 요대를 맨 자가 그들 중 맏형으로 단월도(斷月刀) 팽무강(彭武剛)이라 불렸고 녹색의 요대를 맨 자는 둘째로 파월도(破月刀) 팽자강(彭滋剛)이라 불렀다. 조금 야윈 듯 보이는 자로 허리에 청색의 요대를 맨 자가 쌍둥이들 중의 셋 째로 파수도(破水刀) 팽현강(彭鉉剛)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허리에 흰색의 요대를 맨 자가 막내로 파천도(破天刀) 팽염강(彭炎剛)이라 불리는데 그가 가장 무서운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우후후후! 늙은이 우리 대산파를 그렇게 가볍게 보다가는 큰 코 다칠텐데. " 팽무강이 나직하게 음소를 뿌렸다. 봉조환의 얼굴이 수치로 물들었다. 그럴 이유가 그들 사이에는 충분했다. "빌어먹을 놈들!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다니...... 네 놈들은 나서지 말아 야 했다." 봉조환이 이를 갈았다. 대산파는 설립된 지 십 년이 되지 않은 문파로 청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 지만 누구나 함부로 대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문파였다. 십 년만에 청해의 힘을 모은 그들은 무려 삼 백 명에 이르는 문인들을 가지 고 있었다. 더구나 대산파의 총수는 한때 청해무림의 우상이었던 청해노조 (淸海老祖) 장무백(張武伯)이었다. 봉조환이 수치스러워하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와 원인을 찾아보면 바로 대산파에 대한 은원(恩怨)이었고 그들로 인해 봉조환이 강호를 유랑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진 것이었다. 봉조환이 몸을 담았던 청해탈방(淸海奪幇)은 대산파에 겨루어 끝까지 항전 했던 문파였다. 결국은 무너지게 되었지만 청해탈방의 장로였던 봉조환은 대산파에 대한 불같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크! 잘 만났다. 이제야 이곳에서 네놈들의 살가죽을 벗길 수 있게 되었구 나." 봉조환은 이를 갈아붙였다. 그에게 풍무영은 뒷전이 되었다. 봉조환은 주루의 중앙으로 나가 그들 쌍둥 이들과 마주섰다. 쌍둥이들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비록 눈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쌍둥이 팽가 형제들은 봉조환을 바라보며 은근한 경멸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언젠가는 네놈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회가 나쁘지는 않군. 얘들아!" "대형,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팽무강의 명이 떨어지자 나머지 형제들이 일제히 유엽도를 뽑았다. 유엽도 를 뽑은 그들은 등에서 조개껍질 같은 방패를 끌러 왼팔에 끼웠다. 방패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방패는 둥근 원형이었는데 사방 일 척의 넓이로 팔뚝에 고정되게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강한 재질로 만들어져 웬만한 병기로는 격파할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방패의 면은 날카로워 보였다. 때로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놈의 패합진(牌合陣)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이지." 봉조환의 날카로운 빈정거림에 역시 쌍둥이들이 빈정거림으로 대답했다. "그럼 어디 막아보아라." 분노의 음성을 뿌린 봉조환의 몸이 마치 제비가 날개를 치듯 수평으로 달려 들었다. 두 손이 허공으로 뻗어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그의 손에 끼워진 철골조(鐵 骨爪)가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철골조는 빳빳하게 세워진 모습으로 쌍둥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독수리의 발톱처럼 구부러진 철골조가 허공에 무수한 빛의 편린을 뿌렸다. 철골조는 순식간에 쌍둥이들의 면전에 이르렀다. 봉조환의 응조권(鷹鳥拳)은 무림에서도 높이 칭송 받는 절기였다. 그가 손 가락을 뻗으면 두 자 두께의 흑오석(黑烏石)도 부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소문의 진위야 어찌되었던 봉조환의 응조권이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합!" 단월도 팽무강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봉조환의 철골조가 팽무강의 가슴에서 세 자 거리로 다가섰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쌍둥이들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팽무강은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자세를 낮추고 조개껍데기 같은 방패를 이용 해 안면을 가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방패처럼 날이 있는 살상용 방패는 흔 히 비패(飛牌)라 불렸다. 결국 그들의 방패는 이름 그대로 방패로 사용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때인가 는 병기로 사용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패는 넓이가 사방으로 자로 재서 한 자밖에 되지 않는 면적이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몸이 가려졌다. 그보다 팽무강이 몸을 잘 웅크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째인 팽자강도 빨랐다. 팽자강은 급히 몸을 숙이며 팽무강의 오른쪽에 팽무강과 같은 모양과 자세 를 만들었다. 그도 급히 몸을 말듯 웅크려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말았다. 셋째인 팽현강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그가 팽무강 의 왼쪽을 막았다는 것 뿐. 마지막 팽염강은 팽무강의 머리 위를 방어했다. 날아드는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방패의 진이었다. "허헛!"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몸을 날린 봉조환은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놀란 음성을 부린 봉조환은 급히 몸을 뒤집으며 두발로는 각각 팽자강과 팽 현강이 가린 좌우측의 방패를 차며 손가락을 뻗어 팽염강의 방패를 훑어갔 다. 빠드드드드― 손톱이 갈리는 것과 같은 거친 소리가 들리며 봉조환의 철골조와 방패가 부 딪친 곳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방패가 뚫릴 것 같지는 않았다. 쌍둥이 팽가 형제들이 사용하는 방패는 금강석(金剛石)의 가루와 백금철(白 金鐵)을 섞어 장공(匠工)으로 유명한 청해의 파공공(杷工工)이 만든 것으로 단단하기가 만년오석(萬年烏石)에 버금갔다. 비록 봉보환의 철골조가 강호의 일절(一節)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강하다고 는 하나 방패를 뚫을 수는 없었다. 비록 강한 방패라고는 하나 파고드는 봉조환의 철골조가 만만치 않았든지 쌍둥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무려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우지끈! 강한 회오리가 일어나며 주청의 창이 부서져 날아가고 주탁과 술잔들이 허 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순식간에 주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객으로 모습을 감춘 무인들도 강한 여력에 움찔하며 몸을 움직이기도 했 고 회심의 눈초리로 웃고 있는 자들도 보였다. 순식간에 쌍둥이들과 봉조환 은 주청을 살벌한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었다. "살격(殺擊)!" 갑자기 몸을 가린 방패 속에서 팽무강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네 자루의 유엽 도가 허공을 향해 솟구치고 앞으로 뻗어 나와 공격을 시작했다. 방패가 맞닿는 부분에는 미세한 간격이 있었고 그 사이로 유엽도가 솟구친 것이었다. "어라! 빌어먹을 놈들." 급격한 반전에 놀라움을 토한 봉조환은 급히 몸을 뒤집으며 발로 방패를 박 차고 공중제비를 돌아 몸으로 날아드는 유엽도를 피하며 물러섰다. 사각! 빠르게 물러섰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봉조환의 가슴앞섶이 쩍 벌어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옷만 베어졌을 뿐이라 는 사실이었다. 몸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한치의 오차라도 있었다면 봉조환 의 가슴은 늑골이 베어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우하하하하! 어리석은 놈! 죽을 각오가 되었느냐?" 몸을 일으킨 팽무강이 호기가 철철 넘치는 거친 호령을 터트렸다. 한번의 충돌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기고만장(氣高萬丈)한 모습이었다. 개개인으로는 봉조환에게 감히 상대할 염두도 낼 수 없었으나 쌍둥이들이 힘을 합치자 한때는 청해에서도 열 손가락에 들었던 봉조환을 가볍게 격퇴 시킬 수가 있었다. "으드득!" 봉조환이 이를 갈았다. 적어도 쌍둥이들은 봉조환을 상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합격이 오차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봉조 환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진이었다. 봉조환이 추춤거리자 쌍둥이들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간격을 흐트러뜨 리지 않으며 한발씩 다가들었다. "빌어먹을 애송이들!" 봉조환은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았지만 어절 수 없었는지 뒤로 물러서기 시 작했다. 한 개의 손으로 열 개의 손을 막지 못한다는 강호의 고사가 여실히 증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산개(散開) 대형(隊形)으로!" 다시 한 번 팽무강이 외침을 터트리자 쌍둥이들은 일제히 앞으로 달려들었 다. 봉조환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그는 급히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발과 손으로 쉬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그 가 자랑하는 응조십이수(膺爪十二手)를 모두 사용했으나 우위를 점하기가 어려웠다. 허공에 수없이 많은 불꽃들이 피어올랐으나 모두가 방패에 긁힌 그의 손톱에서 일어난 불꽃이었다. 한때 천하가 부럽지 않던 그의 철골조는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 상견환 제2장-그가 나타난 것을 본 사람도 있다2 "누구를 살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나?" 초풍비의 물음에 풍무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들 모두가 죽 어야 했다. 그것만이 그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모두 죽어야만 오랜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풍무영은 초풍비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가 보고 있는 관점에서 초풍비는 희미하게 웃는 것을 제외하고는 안색이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죽여야......." "멍청하군. 다른 놈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야. 그들도 생각해야지." 쿵! 풍무영은 머리 속에서 울리는 둔한 철고(鐵鼓)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초 풍비가 말하지 않았다면 풍무영은 오로지 봉조환과 쌍둥이들만 생각했을 것 이었다. 풍무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과연, 이십여 명의 무인들 이 제각기 병장기에 손을 대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 눈을 파고들었다. 만약 그들이 초풍비가 누구인가를 파악했다면, 그래서 이름도 없는 무명소 졸(無名小卒)인 것을 알았다면 풍무영은 이미 그들의 손에 넘어 갔을 것이 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초풍비도 무명의 삼류 무인이 아니었다. 혹시 개중에 풍무영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풍무영을 포기하고 물러섰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풍무영이 그들에게 끌려간다고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기에 풍무영은 태양루로 들어왔다. 도주를 포기한 심정이었던 것 이었다. 풍무영이 잡혀가거나 그들에게 끌려가도 죽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들 모두는 죽은 풍무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풍무영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결국 최후로 살아남는 자는 풍무영을 얻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초풍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계산 하에서의 결론이 될 수 있었다. 무인들은 기회를 보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기를 바라 고 있었다. "우선 숫자를 줄여야겠지?" "그거야 물론이죠." 초풍비는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로 주탁 위에 놓여있던 술잔을 들어 벌컥거 리는 소리가 나게 들이켰다. 마치 한바탕 싸움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 처럼 보였다. 풍무영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초풍비를 바라보았 다. 카카캉! 마침 접전은 종국(終局)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얼마간 버틸지는 몰라도 봉조환이 수세(守勢)에 몰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허공에 울린 병장기의 충돌소리는 팽무강이 단월도라 이름 붙인 유엽도와 봉조환의 철골조가 허공에서 부딧치며 울리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애송이들. 모두 죽여주마." 봉조환은 연신 뒷걸음질로 물러나면서도 노한 음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의 비기(秘技) 응조공도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방패와 네 자루의 유엽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여주는군.' 초풍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리는가싶더니 몸이 크게 뒤로 제쳐졌다. 한참동안 입가와 코를 씰룩거리더니 그의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에취!" 핏-피피핏! 갑자기 초풍비의 입에서 재채기가 터지고 술 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쌍둥이 팽가 형제들이 초풍비와 풍무영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순간이었다. 누가 보아도 사래가 들린 것처럼 보이는 토해진 술이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 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었다. 초풍비가 뿌려낸 술은 주우비성(酒雨飛星)이라는 절기였다. 술에 내공을 실 어 뿌려내는 것으로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몸을 보호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무공이었다. 접전시(接戰時)에는 내공을 모아 화살처럼 외줄기로 뿜을 수도 있고 안개처 럼 분사시켜 상대의 눈을 흐리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뭐냐?" "암습을 하다니...... 더러운 놈들!" 갑자기 경기가 실린 기파(氣波)가 밀려들자 합세의 진을 구성하고 있던 쌍 둥이들 중 팽현강이 급히 몸을 돌려 방패로 막으며 유엽도를 허공으로 휘둘 렀다. 그것이 실수였다. 첨예(尖銳)한 대립이 일어나는 고수들의 접전에서 약간의 충격은 진을 흐트 러뜨리는 위력을 가져왔고 쌍둥이들의 진은 한순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진의 좌측이 비어버리자 봉조환의 눈이 불을 뿜었다. "죽어라. 응조살벽기(鷹爪殺劈氣)!" 봉조환은 노련한 살쾡이였다. 근 팔십 년 동안 강호 밥을 먹었으니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금의 빈틈도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봉조환은 급히 몸을 낮추어 응조보(鷹鳥步)로 보법을 바꾸며 당랑(螳螂)이 먹이를 공격하듯 두 개의 손을 구부려 좌측으로부터 긁어갔다. 마치 갈퀴가 낙엽을 긁어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좌측이 열렸다." 상단부(上段部)를 막고있던 팽염강이 화급하게 소리치며 몸을 낮추어 좌측 을 막았으나 이미 늦었다. 봉조환의 쌍수에 달린 열 개의 철골조가 중앙을 막고있던 팽무강의 옆구리를 갈랐다. 찌이이익― 옷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허공에 번졌다. 봉조환은 기회를 잡자 동작을 늦 추지 않았다. 그의 철골조는 무형의 강기를 동반하며 팽무강의 옆구리로 파 고들었다. "크어어어억!" 팽무강이 비명을 토했다. 사람의 살가죽은 질겼다. 철골조가 아무리 강하고 날카롭다고 한들 쉽게 사람의 복부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퍼퍼퍽! 봉조환은 몸을 돌려 좌측을 막아오는 팽염강의 방패를 선풍각(旋風脚)의 기 법으로 연속으로 돌려 차며 손은 팽무강의 복부로 밀어 넣었다. 몸이 회전하며 손에도 나선형(螺旋形)의 강기가 형성되었다. 찌이이이―푹! 비단천을 찢는 소리와 함께 봉조환의 우수가 팽무강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만약 몸이 돌지 않고 손에 회전력이 생기지 않았다면 설사 철골조가 달렸다 해도 복부는 뚫지 못했을 것이었다. "핫! 철응조파쇄(鐵鷹爪破碎)!" 봉조환의 손이 비스듬한 사각으로 기울어지며 팽무강의 복부로부터 빠져 나 왔다. 봉조환의 손에는 피에 젖은 창자가 줄줄이 달려나왔다. 창자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크어어억!" 팽무강의 비명이 주루를 울렸다. 봉조환은 자신의 손에 딸려 나오는 창자를 마구 잡아당겨 삼 장 여를 뽑아 내었다. 진한 혈향이 주루에 뿜어지고 찢어진 팽무강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오랏, 네놈 형의 창자다." 봉조환은 매우 잔인한 성격을 가진 듯했다. 그는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앞으로 나가며 맹무강의 창자를 그 들 형제에게 집어던졌다. 동시에 기울어지는 팽무강의 목을 발로 밟았다. 팽무강의 몸이 심하게 들썩거리고 온몸의 신경이 살았는지 손가락과 하체가 들썩거렸다. "엇 형님의 창자가 날아온다." "피해!" 아무리 죽음이 눈앞에 있다고는 하나 형님의 창자를 유엽도로 끊을 수는 없 었다. 그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전열을 가다듬으려 했다. 그들에 물러선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미쳐 진형을 가다듬기도 전에 봉조환 의 손이 구수(拘手)로 변하며 팽자강의 가슴을 후벼팠다. "커흑! 이렇게 허망하다니." 팽자강의 가슴이 길게 찢어지며 늑골이 드러났다. 봉조환은 좌수를 뻗어 팽 염강의 허리를 감아가며 왼손은 팽자강의 가슴으로 우겨 넣었다. 우지지직―가각! 가슴을 가리는 흉부의 늑골(肋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봉조환의 좌수 (左手)가 팔목까지 파고들었다. "크하하하하! 이것이 네놈의 심장이다." 봉조환은 손을 뺏다. 그의 손에는 펄떡거리는 심장이 들려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팽자강 의 심장이었다. 팽자강은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있었으나 달리 어찌해볼 방 법이 없었다. 팽자강은 자신의 심장이 봉조환의 손에서 터져 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무너졌다. 쌍등이 형제는 순식간에 네 명에서 두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매우 허 둥거리고 있었다. 허둥거리는 것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봉조환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급히 허공으로 선회하며 손을 부챗 살처럼 펼쳤다. 바바바바박! 다시 방패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이 늙은 놈! 목을 늘여라." 봉조환이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팽염강의 유엽도가 봉조환의 무릎을 베며 낮게 깔려 날아왔다. "기다렸다." 봉조환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팽염강의 등을 부인각(婦人脚)으로 걷 어찼다. 팽염강의 몸이 앞으로 퉁겨져 나가며 한 사발의 피가 쏟아졌다. 사람의 심장은 배보다 등에 가까웠다. 사람의 복부에 담긴 창자를 제외하고 는 대다수의 모든 장기가 같았다. 등을 정통으로 맞았다는 것은 치명적이었 다. 울컥! 충격으로 달려나가던 팽염강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팽염강은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차라리 누워있는 것만 못했다. 봉조환의 몸이 바람처럼 돌아서며 팽염강의 등으로부터 엉덩이에 이르는 깊 은 상처를 만들었다. 푸욱―시스슥! 우드둑! 봉조환은 분노가 극에 도달해 있었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목 표를 놓치는 법은 없었다. 봉조환은 자신의 철골조에 힘을 주며 다가설 뿐 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팽염강의 목 울대에 오른손의 철골조를 감았 다. 철골조는 좌로 움직였고 울대가 한 무더기나 뜯겨져 날아갔다. 목에서 피가 폭포처럼 흘렀다. "으으으으! 이렇게 허무할 때가." 팽염강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목이 뜯겨져 나가 말이 바람 새 는 소리에 섞여 들렸다. 쌍둥이 네 형제 중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팽현강 뿐이었다. 너무도 갑자기 반전(反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팽현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미 피 맛을 본 봉조환의 눈이 살쾡이를 닮아 있었다. 물러서게 놔둘 봉조 환이 아니었다. 봉조환은 급히 다가가며 전소퇴(前掃腿)의 수법으로 몸을 낯추어 팽현강의 발을 걸어 눕혔다. 봉조환은 허공으로 오 척을 치솟았다 손을 합장한 체 떨 어지듯 내리 꽂히며 팽현강의 가슴을 찍었다. "어림없다. 늙은이." 팟! 정신을 차린 팽현강의 방패가 날아오르며 봉조환의 어깨를 스쳤다. 허공에 피가 번졌다. 봉조환의 오른쪽 어깨에 백설처럼 빛나는 뼈가 드러났다. 푹! 이어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는 봉조환의 쌍수가 팽현강의 뼈를 부수고 들어 가는 소리였다. 뼈가 부서지며 솟구친 피가 허공을 붉게 수놓았다. "으으으! 대산파가 네놈을 죽여줄 것이다." 무엇이 그리도 원통했는지 팽현강은 애끓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목을 떨구었 다. "으으!" 봉조환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왼손이 감싼 어깨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 러나왔다. "재미있군요." "물론 내가 싸울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하고 어렵지만 남이 싸우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는 일이지." 풍무영의 말에 초풍비가 맞장구를 쳤다. 초풍비는 맞장구를 치며 싸움구경 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연속 들이키는 술이 목에서 천둥 같은 소리 를 냈다. "어찌 될까요?" "뭘?" "저들은 싸움이 끝난 건가요?" 풍무영의 물음에 초풍비는 희미하게 웃었다. 풍무영은 움찔했다. 초풍비가 얼굴에 다른 변화를 보이는 것은 오로지 희미한 웃음뿐이었다. 초풍비는 싸움에 정신을 빼앗긴 듯 풍무영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듣 기는 문제가 없었는지 풍무영의 물음에 또박또박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 "봉조환은 죽어." "예?" 풍무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풍무영은 고개를 개웃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누구도 함부로 봉조환을 건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봉조환이 비록 어깨를 다치기는 했지만 고수인 그로서는 급히 지혈(止血)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설사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도주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봉조환이 죽는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 나 반박할 수는 없었다. "저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아마 저들도 숫자를 줄이려 할거라는 거지. 그도 아니라면 저들은 짧은 시간에 은연중 동맹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풍무영은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놈을 죽여라." 누구의 음성인지는 불분명했다. 봉조환은 눈을 크게 떴다. 이십 개의 신형이 그를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우당탕! 주탁과 의자가 날아가고 이십 자루의 병기가 봉조환의 신체 곳곳을 향해 날 아들었다. "비열한 놈들!" 봉조환은 비통하게 부르짖으며 쌍장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그러나 역부족이 었다. 순식간에 봉조환의 몸은 이십 개의 그림자에 휩싸이고 말았다. 퍼퍼퍽― 차창!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병장기의 거친 마찰음이 일어났다. 무엇이 어찌되는 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싸우고 있는 당사자들은 알지도 모를 일이 었다. "크아아악!" 얼굴이 뭉개져 버린 하나의 인형이 퉁겨져 날아갔다. 아마도 얼굴을 철골조 에 긁혔는지 허연 뼈가 드러나 있었다. 얼굴뼈는 곧 붉게 물들어갔다. 퍽! 부르르르르!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날아간 인형은 주청의 기둥에 부딪혀 허연 뇌수를 뿌 리며 스르르 미끄러졌다. 몇 번인가 목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를 토했으나 그가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아무 것도 없었다. 꿈틀거리던 손이 축 늘어졌다. 얼음처럼 빛을 반사시킬 정도로 새하얗게 드러난 뼈가 점차 잿빛으로 변해 갔다. 아니, 붉어졌다. 잿빛으로 물드는 것은 뼈가 상하는 것이었고 붉은 색은 흘러나온 피가 뼈를 덮는 것이었다. 창! "크헉! 더러운 놈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끝으로 분노에 젖은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끝나있었다. 죽 늘어선 발 사이로 봉조환의 모습이 보였다. 봉조환은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비썩 마른 몸이었지만 온몸에 적어도 십여 개 이상의 병기를 박은 체 버러 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주청 바닥에 피가 자욱하게 깔렸다. 역한 냄새에 풍무영은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그래도 가슴이 가라앉지 않자 한 잔의 술을 들이키고서야 가슴이 안정되었다. 열 개의 병기가 봉조환의 몸에서 뽑아졌다. 츄아아아― 몸에서 탈출을 노리던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초풍비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때, 내 말이 틀림없지?" 풍무영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열 여덟 개의 그림자가 초풍비와 풍무영을 향해 다가왔다. 풍무영은 얼굴에 사색을 띠우고 어쩔 줄 몰랐다. 초풍비는 감정의 기복이 없는 표정으로 다 가서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리오라." 제법 나이가 든, 오십 줄은 넘어선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표정에는 초풍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풍무영이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안돼!" 초풍비의 음성이 주청의 바닥에 깔렸다. 조용했지만 단호(斷乎)한 음성이었 다. 덜도 아니고 넘치지도 않는 음성이 울리자 다가서던 자들이 모두 멈추 어 섰다. 오십 줄의 사내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볼을 씰룩거렸다. 풍무영은 일어서지도, 그렇다고 앉지도 못한 상태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초풍비의 눈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애원을 하는 듯한 표 정이었다. "앉아라." 초풍비의 한마디에 풍무영은 '에라 모르겠다'하는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 다. 어차피 자신을 죽이지는 못하리라는 계산이 서 있는 표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풍비의 말에 주눅이 든 것 같았으나 사실 풍무영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심정도 깔려 있었다. 어차피 그는 초풍비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알 지 못했다. "이런 괘씸한 놈! 감히 사천의 이리, 사천혈랑(四川血狼) 감운량(甘雲量) 을 장기판의 졸로 보다니." "흠, 그래! 한가지 경고하지. 시답지 않은 이름으로 나를 억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나도 저 친구가 필요해." "뭐라고?" 감운량은 자신의 잘난 이름을 밝히면 초풍비가 물러가리라 생각했던 것 같 았다. 그러나 오히려 비꼼을 당하자 참을 수가 없었는지 손에 들고 있던 대 도를 내리그었다. 쉭! 파공성이 울리고 한줄기 백색 선이 초풍비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 사칵! 초풍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마치 얼음을 베는 듯한 소리가 허공으로 울 렸다. 미약한 소리이기는 했지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텅! 대도가 주탁에 박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초풍비는 멀쩡했다. 대도에 목이 잘리기는커녕 한치의 움직임도 없었던 것 같았다. 감운량이 휘 두른 대도는 초풍비의 오른쪽 어깨를 약 이 촌 정도 벗어나 주탁을 반이나 쪼개고 박혀있었다. 신기한 것은 탁자에 올려져있던 술잔과 몇 점의 시답지 않은 안주가 한 점 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초풍비의 앞에 한 자루의 검이 놓여져 있었다. 검이라고 보기 에는 너무 짧은 병기였다. 모양으로 보아 장검(長劍)이 잘린 것 같았다. 검 신의 대부분이 잘려 나가고 일 척도 남지 않은 반검이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어찌되었는지 몰라 한결같이 눈 을 멀뚱하게 뜨고 꼿꼿이 서 있는 감운량과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휭!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만 누워라!" 초풍비는 가볍게 탁자를 쳤다. 탁자는 가볍게 이 촌을 밀려 감운량의 복부 를 건드렸다. 스르르르르― 쿵! 감운량은 마치 연체동물(軟體動物)처럼 물러앉았다. 마치 고목이 무너지듯 뒤로 자빠지던 감운량의 머리가 심하게 소리를 내며 주청의 바닥으로 나뒹 굴었다. 곧 감운량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바람이 새는 소리를 내며 밀려나오기 시작 했다. 모두들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초풍비가 검을 휘둘렀다는 것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몰려들었던 무인들이 본 것은 오로지 초풍비의 앞에 한 자루의 반검이 놓여 있었다는 것과 감운량이 아무런 이유 없이 쓰러졌다는 것 정도였다. 파하하하하― 감운량의 가슴이 갈라지며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주 작은 부위만 베어 졌는지 피는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뿜어지는 간헐천(間歇泉) 같았다. "우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잔인한 놈이다. 단칼에 심장을 도려버리다니." 몰려들던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신음을 뱉었다. 그들은 초풍비를 잔인하다 말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모두 달려들어 봉조환 을 죽인 일이 정말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만리당혜는 내가 필요하다. 그만 물러가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초풍비는 단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경고를 발했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 는 그가 단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으로 그가 괴인의 모습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는지 십 칠 명은 한참동안 초풍비와 풍무영을 바라보 았다. 풍무영은 내심 적잖이 놀라고 있었지만 물어볼 상황도 아니었기에 묵 묵히 초풍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초풍비! 나를 아는 자가 있는가?" 초풍비가 주탁에 놓여있던 반검을 들어 손에 잡으며 물었다. 반검의 검환 (劍環)에는 가는 마삭(麻索)으로 이어진 끈이 있었는데 초풍비는 반검을 잡 고 마삭을 검과 손에 칭칭 감았다. 죽기 전에는 검을 놓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준비였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초풍비는 몸을 일으켰다. 일전을 결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혹시...... 오지회?" "그렇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 죽음이 두려운 자는 신속하게 이곳을 떠나 라." 초풍비의 음성이 울리자 서너 명의 얼굴이 흑빛이 되었다. 그들이라고 십 년 전 천하를 경악에 몰아넣었던 오지회의 대형인 사나이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참동안 술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아예 겁을 집어먹었는지 네 명 의 무인들이 뒤로 물러나 창가로 물러섰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었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덤비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그는 은퇴했는데." "미친놈 아냐? 초풍비이란 이름이 십 년 전 사라졌는데...... 놈은 사기꾼 이다." "잘되었다. 놈을 주살하자." 갑자기 열기가 번졌다. 그들은 모두 초풍비를 죽여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다가들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함성이 울리고 열세개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그들 모두는 누구도 초풍비가 재출도(再出道) 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초풍비의 위명(威名)이 한때는 천하를 울렸다고는 하나 이제는 잊혀진 이름 이었다. 그들 모두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믿을 수 없다는 의구심, 그리고 혹시나 하는 요행심이 깊이 어려있었다. '이상하다. 이들은 나를 죽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초풍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파하하하하― 열세 자루의 병기가 미친 듯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 으니 초풍비의 반검이 살아있는 미꾸라지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믿지 않으면 죽는 수밖에. 너는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라." 초풍비는 풍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탁자를 뛰어넘었다. 초풍비의 몸이 탁자를 넘어 다가서는 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초풍비가 다가 가자 열세 개의 그림자는 일제히 협공을 시작했다. 장병기와 단병기가 어우 러진 공격은 난마(亂麻)처럼 얽혀 초풍비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으로 초풍비의 몸에 다다른 자는 사천에서 백인의 무인 중에 든다는 철 혈척(鐵血尺) 탁명수(卓明洙)였다. 그는 빠르게 손을 휘두르며 다가섰다. 그가 든 삼 척 길이의 철척(鐵尺)은 한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는 병기였 다. "건방진 놈! 뒈져라." 쾅! 거친 폭음이 일고 그의 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삼 장을 퉁겨져 날아갔다. 이미 얼굴이 뭉개져 있었다. 무엇으로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날아가며 그가 본 것은 두 개의 무릎이 연속으로 뛰어올라 자신의 몸에 충 격을 준 것 같았다. 두번째의 죽음은 한번에 네 명이 퉁겨지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목에 가는 실금이 그어져 있었는데 병장기로 당한 흔적이었다. "우우우! 정말로 초풍비이다." 정신없이 병장기를 휘두르던 자들 사이에서도 경악이 뿜어져 올랐다. 손을 쓰기도 전에 퉁기듯 날아가는 무인들은 죽기 전에 눈이 굳어있었다. "하하하! 난 두 번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초풍비의 몸에서 은은한 홍색의 안개가 뿜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내공을 끌어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몸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마치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마시 고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드러나는 피부는 모두 붉었다. 초풍비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주청의 천장에 손을 짚은 초풍비의 몸이 허공에서 급격히 회전을 하며 반검을 흩뿌리듯 휘둘렀다. "막아. 천장이다." "뭐야. 머리를 조심해!" 사각! 파드드득! 아우성이 엉켜들었지만 초풍비의 반검을 막을 자는 흔치 않았다. 순식간에 두 개의 머리가 반검에 의해 수박이 쪼개지듯 벌어졌다. 살이 베어지는 소리와 반검이 뼈에 부딪치는 소리와 어우러지며 살에 소름 이 돋게 했다. 순식간에 무인들의 숫자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모두들 경악을 토했지만 발이 굳었는지 도주할 수도 없었다. 등을 돌리면 사신(死神)이 등을 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누구도 건들이지 않는다. 오지회의 철칙을 모른 단 말인가?" 초풍비는 연신 몸을 날리며 외쳤다. 그랬다. 과거 그가 이끌었던 오지회는 몇 가지 철칙이 있었는데 건드리지 않으면 절 대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지회는 자신들을 배척(排 斥)하고 이유 없이 적대하는 자들만을 상대로 손을 썼다. 간혹 무공대련(武功對鍊)을 위해 구파를 찾거나 명문세가를 찾았지만 결코 살수를 쓰는 법은 없었다. 그들의 규칙을 지키던 오지회도 악인을 만났을 때는 달랐다. 그들은 악인을 만나면 악인보다 더욱 악한 모습으로 변해 살겁(殺劫)을 일으켰다. 십 년 전 무인들이 오지회를 두려워한 것은 그들의 손이 잔인하기 때문이었 다. 오지회는 결정을 내리면 지옥의 유황불까지라도 쫓아가 결국은 끝장을 보아야 모든 것을 끝냈다. "흥! 나는 오지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파파파팟! 어디선가 분노한 소리가 들리고 허공으로 수십 개의 빛 무리가 쏘아갔다. 초풍비는 급히 공중제비를 돌아 허공에서 주청의 중앙으로 떨어졌다. 열세 명 중 살아남은 자는 이제 여섯뿐이었다. 그중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 이십대 후반의 청삼 사내가 손을 마구 휘젓고 있었다. 그는 당가의 후손인 당천엽이었다. 천수(千手)라는 외호가 어울리게 암기술 이 뛰어난 사천당문의 후지기수로 사천에서 근래 서서히 떠오르는 자였다. 당천엽의 손에서 뿌려진 것은 암기였다. 가는 우모침(牛毛針)에서부터 시작하여 손가락 굵기에 이르는 투오정(投蜈 丁), 심지어는 나한전(羅漢錢)에서 비황석(飛蝗石)까지 다양한 종류의 암기 들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졌다. "흥! 당가도 이일에 개입되어 있는가?" 초풍비는 분노가 석인 음성을 외치며 쌍수를 풍차 돌리 듯 휘둘렀다. 맨손 과 반검이 어우러져 마치 불가를 표시하는 만자(卍字)처럼 회전했다. 날아들던 암기들이 허공에서 주춤했다. 초풍비가 일으키는 거력이 방어막을 형성한 탓이었다. 팅팅팅! 몇개의 암기가 검에 부딪혀 튕겼다. "크아아악!" 울려나오는 비명은 초풍비를 공격하던 자의 목소리였다. 당천엽의 등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던 무인 하나가 이마를 감싸며 나뒹굴 었다. 무인의 이마에는 굵은 투오정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날아들던 투오정이 초풍비의 반검에 부딪혀 퉁겨졌고, 날아드는 투오정을 미쳐 피하지 못한 무사는 황천행 마차를 타고 말았던 것이었다. 몇 번인가 버둥거리던 무인은 축 늘어졌다. 이미 허공에 자욱하던 암기들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몇 개의 암기가 초풍비의 팔목에 박혀 있 었다. 초풍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팔목을 감싼 것으로 보이는 짐승의 가죽토시는 안에 도롱뇽의 가죽으 로 촘촘하게 덧대어진 가죽토시로 이중의 보호막을 구성하고 있었다. 더구나 도롱뇽의 가죽에는 묵철(墨鐵)로 만든 단추가 빽빽하게 박혀있어 최 악의 경우에는 날아드는 대도를 막을 수도 있었다. "이제 그 잘난 사천당가의 만천화우(滿天花雨)도 끝난 것인가?" 초풍비의 말에 당천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것은 가문에 대한 모독 이었다. 당문은 사천의 패자로서 독과 암기에 관한 한 최고의 가문이라 자부하는 일 파였다. 오죽하면 그들은 가문의 비전절학(秘傳絶學)을 밖으로 유출시키지 않기 위 해 딸을 밖으로 출가시키지도 않았다. 혼기에 찬 딸이 있을 때에는 오히려 데릴사위를 통해 가문의 비전을 숨기는 일가였다. 그들이 자랑하는 암기수법 중 가장 위력이 있고 뛰어나다는 절기가 만천화 우였다. 몸에 지니고 있는 모든 암기, 심지어는 옷에 달린 단추까지 모두 뿌려 상대 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리는 수법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투오정이나 척전(擲箭)에는 내공을 주입시킴으로써 암기에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는 상대를 일거(一擧)에 쓰러뜨리기도 했다. 그토록 놀라운 만천화우의 절기를 시전한 당천엽이었지만 초풍비에게는 어 린아이의 장난 같은 몸짓이었다. 만천화우를 전개하고도 초풍비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잇! 받아라. 탄비척전(彈泌擲箭)!" 피이이이― 당천엽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자 팔목에 두르고 있던 두 개의 토시에서 번 뜩이는 빛이 초풍비를 향해 퉁겨나갔다. 퉁겨진 빛은 모두 열 개였다. 각각의 토시에서 다섯 개의 빛이 반사되었는 데 그것은 무서운 암기였다. 근래 당문에서 개발한 탄비척전이라는 암기였 다. 척전과 같이 던져지는 원리를 이용했지만 발사방식(發射方式)이 사람의 힘 이나 내공이 아니라 기계식이었다. 강한 강철을 둥글게 말아 조그만 원통에 넣고 그 안에 궁노(弓弩)처럼 화살 을 장전하는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장전이 되지 않아 기계로 장전해야 하 는 것이었다. 내공의 힘으로 만든 호신강기와 내공의 방어벽을 뚫어 상대를 척살하기 위 해 만든 병기였다. "죽어라, 이 망할 놈아." 당천엽은 분기탱천(憤氣 天)하여 소리쳤다. 가문의 비전 만천화우가 깨어졌 다는 사실이 그를 못내 분노하게 만들고 만 것 같았다. "온당치 못한 수법이군." 초풍비는 날아드는 열 개의 그림자가 감히 무시당할 수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 막으려면 막을 수 있겠지만 몸에 가벼운 상처라도 입게 된다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찻!" 초풍비는 낮게 기합을 터트리며 자리에 주저앉음과 동시 하나의 물체를 집 어들었다. 대도회의 네 쌍둥이 팽씨 형제가 사용하던 방패였다. 초풍비는 방패를 이용하여 앞을 가리며 몸을 뒤집어 회전을 일으켰다. 마치 버섯이 옆으로 누운 것 같았다. 마침 방패는 우산처럼 둥글고 볼록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뒤를 받친 초풍 비가 회전을 일으키자 정말로 버섯이 따로 없었다. 핑― 파파파팟! 열 개의 탄비척전이 방패에 부딧치며 사방으로 방향을 바꾸어 퉁겨져 나갔 다. 과연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방패였다. 무쇠도 뚫는다는 틴비척전은 방 패에 흠집을 주지도 못했다. "좋군! 이제부터 너를 패갑둔(覇甲遁)이라 부르겠다." 짧은 순간 초풍비는 방패를 자신의 병기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웠고 강한데다 자세히 보면 파립과 같은 용도로 머리에 쓰고 다녀도 나 쁠 것 같지는 않았다. 초풍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초풍비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방패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지를 ...... 어찌 어찌해서 팽씨 쌍둥이들에게 들어가게 되었지만 황금을 수레로 주고도 구하기 힘든 병기였던 것이다. "가랏!" 파아아아― 초풍비의 손에서 갑작스럽게 패갑둔이 날아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던 패갑둔 이 당천엽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천엽의 얼굴이 짧은 순간에 백지처럼 탈색되었다. 손을 내저었지만 날아 드는 패갑둔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각― 뎅겅! 패갑둔의 날은 면도(面刀)보다 날카로웠다. 당천엽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목이 베어졌음에도 당천엽은 눈을 뜨 고 있었다. 머리의 신경이 살아 있었는지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파아아아아―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한참이 지나서야 당천엽의 몸이 기울었다. 허 공으로 솟구쳤던 당천엽의 머리와 몸뚱어리가 동시에 바닥으로 굴렀다. 패갑둔은 포물선을 그리며 초풍비의 품으로 날아 들어가 왼쪽 팔목에 착용 되었다. 사실 초풍비가 패갑둔이라 방패의 이름을 정하고 날린 것은 짧은 시간이었 고 내공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원심력(遠心力)과 회전(回轉)을 이 용했음에도 고수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었다. 초풍비는 회(回)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작얼산에서 사냥을 하며 초란과 은거생활을 할 때도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그와 같은 원리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고는 했다. 이제 그에 상응하는 병기가 생겼으므로 그가 만든 한 초식의 무공은 무림에 알려질 것이 틀림없었다. "우우우우! 저자는 초풍비가 틀림없다." "모두 도망가자." 살아남은 네 명의 무인들이 몸을 뒤집었다. 방향을 틀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흥! 네놈들을 살려주면 다시 욕심을 내게 될 것이다." 초풍비는 손에 들어온 패갑둔은 다시 날렸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패갑둔 은 다시 두 명의 목을 베었다. 목이 잘려서인지 비명도 울리지 않았다. 초풍비는 발로 바닥을 연속으로 걷어찼다. 피―핑!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세 개의 방패 중 두 개가 날아가 다른 두 명의 무인을 쓰러뜨렸다. 하나의 방패는 도주하는 무인의 목을 잘라버렸고 다른 하나는 허리를 베어버렸다. 방패는 위력이 놀라웠다. 목도 아니고 허리를 벨 정도라면 그 위력은 놀라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웬 만한 병기로는 내력을 주입시켜도 사람의 허리를 뎅겅 자른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핫!" 날아드는 패갑둔을 받아든 초풍비는 다시 날아오는 두 개의 방패에 부딪쳐 갔다. 내력이 실린 패갑둔이 흰색에서 붉은 빛으로 변했다. 팍― 방패끼리 연속으로 충돌하자 허공에 불꽃이 일어났다. 허공에서 날아들던 두 개의 방패가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리 강해도 내력이 실린 같은 방패로 치는 데야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금강석을 부수기 위해 금강석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주청은 조용했다. 누구하나 얼굴을 내밀고 들여다보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는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도 사라지고 없었다. 초풍비는 다가가 땅에 굴러다니는 나머지 하나의 방패를 주웠다. 주위를 휘 휘 둘러보다 팽염강의 시체에 눈이 머물렀다. 팽염강은 검은 색이 도는 장 갑을 양손에 끼고 있었다. "이것이었군." 초풍비는 시체에서 두 개의 장갑을 빼내었다. 장갑은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부드러웠으나 기이하게도 껄끄러웠다. 반짝이는 무수한 모래 같은 것이 달 려있었다. 그것이 금강석의 가루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초풍비였다. 초풍비는 장갑과 방패를 들고 경악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풍무영에게 걸어 갔다. 팍! 방패가 주탁에 내리 꼽혔다. 장갑도 주탁에 떨어졌다.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하나?" "그게......." 풍무영은 할말이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는 욕지기를 겨우 참고 있는 중이었던 때문이었 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초풍비가 잔인하거나 악마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잔인하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은 주청의 주방 쪽에서 들려온 말이었다. 언제부터인 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키가 유난히 큰 사내와 눈에 뜨이게 작은 사나이. 장단이괴가 서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병기를 뽑은 상태였다. "그대들도 관심이 있나?" 초풍비는 이미 그들이 도망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 었다. 초비풍은 전혀 놀라지 않았고 그들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풍무영을 잡을 생각이었는데 초풍비를 만나니 감개가 무량 하군." "나에게 감정이 있는 모양이군." "물론이야. 네놈 때문에 내 명예가 실추(失墜)되었으니 이제 그 은혜를 갚 아야겠지." 키가 오 척에도 이르지 못하는 요달각이 어깨를 흔들며 음소를 뿌리고 천연 덕스럽게 말했다. 요달각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구 척의 키를 가진 저유평 도 키득거렸다. 초풍비는 그들이 자신에게 원한이 있다는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 과는 만난 적도 없었거니와 서장에서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다. "놀랍군, 나에게 원한이 있었다니......." "아, 별것 아니지. 석년 을목세가가 우리에게 네놈 목을 청부했지. 십 년 전 네놈이 사라져 버려 아직까지 을목세가의 빛을 갚지 못했었는데." "그렇군." 초풍비는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이곳에서 을목세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초풍비였 다. 을목세가라면 그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찾고 자 하는 여인, 그의 여자 초란이 을목세가와 혼약을 했었던 관계이기 때문 이었다. "이제 한판 벌여보지. 네 목을 가지고 을목세가로 가야겠다." "그것도 좋지." 초풍비가 앞으로 나섰다. 장단이괴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초풍비를 에워쌌다. 에워 쌌다 하기보다는 키가 큰 저유평이 대도를 들고 초풍비의 앞을 막아섰고 키 가 작은 요달각이 장도를 들고 뒤를 막았다. 초풍비가 가볍게 웃었다. 그들이 어떤 공격을 가해오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는 표정이었다. "찻! 쌍검이합(雙劍離合)!" 기다리기가 지루하다는 듯 장단이괴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저유평은 긴 대도를 돌리며 목을 노렸고 요달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초풍 비의 하체를 쓸어왔다. 초풍비는 병기도 뽑지 않은 상태였다 '단 일수로 끝낸다.' 초풍비는 상대가 대도를 사용할 때, 섣불리 단병기를 사용하면 오히려 위험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주청은 천장이 낮고 좁은 지역이었다. 대도를 무한정 사용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초풍비는 박투술(搏鬪術)에 자신이 있었다. 그가 익힌 무공의 근원 은 백타(白打)에서 시작되었고 소림의 요결(要訣)을 얻은 뒤부터는 그의 백 타는 입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사실 그의 박투술은 병기를 사용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만 그가 병기를 사용하는 것은 단시간에 결정을 보아야 하는 경우나 강한 기파를 흘 리기 위해 내공을 끌어 올려야 할 때였다. 사사사사― 대도가 허공에서 묘한 바람을 일으키며 물이 굽이치듯 휘둘러졌다. 처음에 는 목을 노리는 것 같았는데 도신이 향하는 방향이 불규칙했다.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풍비는 그들 장단이괴가 내공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공이 강했다면 기파가 느껴져야 했다. "핫! 과호세(戈虎勢)!" 초풍비는 몸을 퉁기듯 앞으로 뻗어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오 척을 달려나간 초풍비는 저유평이 휘둘러오는 대도의 장봉(長棒) 중간을 손바닥으로 퉁겨 방향을 바꾸었다. 놀라는 저유평의 눈이 가득 들어왔다. "죽어라. 이 놈아!" 등으로부터 장도가 밀려드는지 고함과 파공성이 느껴졌다. 초풍비는 방향이 틀어지는 대도의 장봉을 손으로 잡으며 몸을 횡으로 움직 였다. 발로 바닥을 찍어 반탄력을 얻어 몸을 회전시키며 두발을 연속으로 걷어찼다. 퍼퍼퍼퍽! 대도의 봉을 잡고 엉겁결에 놀란 표정을 짓던 저유평의 몸에 초풍비의 발이 연속으로 날아가 박혔다. 무섭도록 빠른 족기(足技)였다. "커흑! 이리도 빠르다니." 저유평의 입에서 비명이 울리더니 손에서 대도를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 초 비풍이 바라던 것이었다. 초비풍은 몸을 지면으로 떨구며 빠르게 대도를 잡아끌어 횡으로 그었다. 마 치 대도의 뒤에 저유평을 세우고 대도의 장봉 중앙을 잡아 휘두르는 모양이 되어 버렸다. 깡! 날아들던 요달각의 장도가 저유평의 대도에 부딧쳤다. 순수한 사람의 힘으 로는 장도가 대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저유평이 휘두른 힘과 초비 풍의 힘이 합해졌기 때문에 대도의 힘은 놀라웠다. 대도와 부딪친 요달각의 장도가 방향을 트는 사이 대도는 방향을 변화시키 지 않으며 횡으로 쓸어갔다. "이...... 이게 뭐...... 크악!" 요달각의 경악에 젖은 소리가 들리고 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은 짧 았다. 대도의 날이 요달각의 목에 반이나 박혀 있었다. 대도의 도신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어억! 내가?" 놀란 저유평의 목소리는 신음이었다. 자신이 휘두른 대도에 요달각의 목이 베어지니 나니 잠시 어안이 벙벙한 것 같았다.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초풍비의 몸이 횡으로 회전을 일으키며 저유평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쾅! "크아악!" 철고를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비명이 울렸다. 저유평의 몸이 이 장을 날아 가 주청의 기둥에 부딧치며 나동그라졌다. 겉으로 보아서는 입과 코로 넘어오는 피가 전부였다. 그러나 저유평은 움직 이지 않았다. 이미 숨이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저유평의 가슴이 부서지고 내장이 파열되었지만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 었다. 초풍비가 저유평을 죽인 방법은 두공술(頭攻術)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소림 의 비전에 속하는 것으로 사람의 머리를 단련해 상대의 머리나 뼈를 전문적 으로 파괴하는 무서운 백타의 백미였다. 머리라는 점에 익힌 사람이 극히 드문 절기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공격 이었다. 특히 강한 회전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사경의 힘이 실려진다면 그 위력은 놀 라웠다. "어쩔 수 없이 피를 보게 하는군!" 초풍비가 손을 털며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요달각의 몸은 목에 대도를 박 은 채 서 있었다. 콰당! 초풍비가 몸을 돌려 풍무영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을 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요달각의 몸이 모로 비틀리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그만 가도록 하자고. 이곳은 피 냄새가 진동해 영 신경이 쓰이는군." 초풍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풍무영은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초풍비는 방패를 초립처럼 쓰고 있었다. 초 풍비가 방패를 초립 삼아 쓰자 너무도 잘 어울렸다. 조개껍질 같은 패립 밑으로 덥수룩한 수염이 보였고 등으로는 긴 머리카락 이 등까지 이르렀다. 한눈에 보아도 천하에 둘도 없는 고인(高人)의 모습이 었다. "자네도 병기가 필요해. 그 방패는 강하고 날카롭지. 평소에는 이처럼 패립 으로 쓰고 필요할 때는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어. 그 장갑을 끼어." 초풍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장갑을 끼어야 하는 것인 지는 알 수 없었다. 풍무영은 장갑을 들기는 했으나 멀뚱한 눈으로 초풍비 를 바라보았다. 초풍비가 빙그레 웃었다. 어찌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웃음이었지만 풍무영은 가슴이 덜컥했다. 이미 오래 전에 오지회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던 그는 자신과 같이 있는 이 괴인의 정체를 알고 보자 수족(手足)이 떨려 온전치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장갑을 끼어야 자네는 손을 베이는 일이 없을 거야. 어서 끼고 따라와. " 초풍비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초풍비는 성큼 성큼 걸음 을 옮겨 삼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초풍비는 입구에 있는 계산대에 한 덩이의 금원보를 놓 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풍무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는지라 그는 너무도 놀라 혼이 달아난 지경이었다. "어서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풍무영은 방패를 들었다. 마음이 바쁘고 경황이 없는 지경임에 도 그는 초풍비가 자신에게 방패를 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 다. 그의 강호경험으로 보아 초풍비와 같이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들 은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건성으로, 혹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 디를 해도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풍무영은 알고 있었다. "크흑!" 무심한 심정으로 방패를 들던 풍무영은 밭은 신음을 뿜었다. 방패를 잡자 갑자기 손이 저릿했던 것이다. 급히 얼굴을 숙이고 손을 들어보니 방패를 잡았던 왼손의 엄지손가락과 식 지가 붉은 피를 뿌리고 있었다. 방패는 떨어지며 탁자에 박혀 있었다. 풍무영은 놀라웠다. 과연 초풍비의 말대로 방패는 놀랍도록 예리하고 두려운 물건이었다. "어서 와!" 초풍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말소리만 들려왔다. 풍무영은 급히 장갑으로 방패를 감싸 들었다. 장갑은 끄덕 없었다. 풍무영 은 허겁지겁 초풍비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진 주청에는 진한 피비린내와 부서진 기물만이 나뒹굴고 있었 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은 파리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 제 목:[종 린] 상견환 3 페이지: 1/44 자료번호: 256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1 ─────────────────────────────────────── ■ 상견환 제3장-오래 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석양에 물드는 대도하를 바라보며 두 사람은 앉아 있었 다. 마치 의자처럼 생긴 바위는 그들의 등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강에서 몰아쳐 올라오는 바람은 귓가의 머리카락을 날리게 만들었다. 바위는 매우 컸다. 수면에서부터 불쑥 솟아오른 바위는 무려 오십 장은 넘을 것 같았다. 바위 밑에서 부딪치는 물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것이 마치 칠현금(七絃琴)을 울리는 것 같았다. 고즈넉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한 시진 동안이나 앉아있었다. 풍무영은 불안했다. 한 시진이 지나도록 초풍비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마치 굳은 석상 (石像)처럼 몸이 굳어 있었다. 그가 숨을 쉬지 않는 다면 죽었다고 생각해 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대인(大人)!" "난 대인이 아냐." "뭐라고 불러야 되죠?" "그냥 편한 대로 불러. 누구도 허물을 잡을 사람은 없어." 풍무영으로서는 그를 어찌 불러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소문에 듣기에 는 오지회의 다섯 사람은 근래 십 년 동안 강호활동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허지만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강호에서 불가사의(不可思議) 할 정도로 인구 (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혹자는 오지회를 정인군자(正人君子)라 했으며 혹자는 정사중간(正邪中間) 의 인물들이라고 했다. 개중에는 오지회를 헐뜯어 말하기를 악인중의 악인 이라 했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음으로 양으로 오지회에 피치 못할 원한을 가진 자들 로 일족이 멸망당했거나 오지회에 의해 사문이 초토화 된 무인들이었다. 강호에 알려진 철칙은 오지회와 적대를 한 문파나 가문은 언젠가 초토화를 당한다는 것이었다. 오지회에 멸문을 당한 문파나 가문은 늘 뒤가 구린 구 석이 있었다. 오래도록 그러한 철칙은 지켜졌었다. 단, 오지회가 사라져버린 십 년 전까 지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다. "대형(大兄)이라 부르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어찌 들으면 퉁명스럽게도 들릴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풍무영은 이미 면역 이 되어가고 있었다. 풍무영이 우연히 초풍비의 앞에 앉았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존대어를 붙 이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된 습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초풍비는 이십대의 나이에도 누구에게 존대를 한 적이 없다 고 알려져 있었다. 소림의 고승이라는 백지대사(白指大師)에게도 그는 반말 을 썼다고 했다. 백지대사는 초풍비과는 무려 백살이나 차이가 나는 고인이었지만 허허하고 웃고 말았다고 했다. 그리고 초풍비에게 소림의 비전구결을 한 초식 전수했 다고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말 괴인이야. 소문이 모자란다.' 풍무영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많은 소문을 들으며 강호를 뛰어다녔지만 그가 들은 소문은 눈으로 보는 것 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소림의 무공도 익히셨다고 들었습니다." 할말이 없어서였는지 풍무영은 은근 슬쩍 과거의 이야기를 열었다. 답답하 고 막막한 기분을 깨고 싶었다. 마냥 앉아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 때가 있었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초풍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저녁놀이 지는 서천(西天)은 피처럼 붉었고 주변은 황토가 넘치는 황하처럼 자욱한 빛을 수놓고 있었다. 풍무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대략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풍비가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백지대사가 소림 의 비전을 전수할 리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가문과 문파를 비롯한 무파에는 무파 나름대로의 비전이 있기 마련이었 다. 그것은 비결밀결(秘訣密訣)이라 불리며, 모두 극비로 전해지는 법이었 다. 비결밀결이라 하는 것은 그 문파의 비전절기로 겉으로 드러나는 무공과는 격이 달랐다. 한결같이 문서로는 남겨져 있지 않고 입에서 귀로 전해지는 것이므로 구결(口訣)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소림의 경우는 더욱 많은 구결을 가지고 있었다. 무공이 강할 수록 구결은 많았고 한결같이 비밀리에 전수되었다. "소림의 무공은 드러난 것보다 네 배는 많은 무공을 지니고 있다." 침체했던 소림을 한때 중원최고의 문파로 끌어올렸던 각원상인(覺元想人)은 처음으로 소림에 구결이 있음을 시사한 바가 있었다. 소림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구결의 요체는 초식(招式)에 있는 것이 아니었 다. 바로 수련의 방식에 있는 것으로 타격력(打擊力)을 양성하는 연공법(練 功法)과 흔히 백타라 부르는 격투술(格鬪術)이 포함되었다. 백타는 흔히 기법(技法)이라 부르는 것으로 병기를 사용하는 것과는 달랐 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내공 이상의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기법이 수 두룩했다. 구결 중에 내공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강한 타격력과 살상력을 낼 수 있는 것 이 발경(發勁)이었다. 발경과 더불어 급소만을 공격하는 타법은 구결의 백 미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래되었지. 백지대사를 스승으로 모신 지가...... 이미 오래 전 일이라 살아 계신지도 모르겠군." 초풍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십 년이란 세월은 그에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그 의 무공은 놀라울지 모르지만 강호지식을 백지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살아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군." 풍무영의 대답에 초풍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먼 하늘로 다시 눈을 던 졌다. 아마도 그는 백지대사에게 사부의 연을 맺었던 것을 생각하는 것 같 았다. 사실 들리는 소문에는 그가 소림이 가장 자랑하는 백타의 구결을 전수 받았 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격투술은 놀라운 바가 있었다. 특히 소림의 백타에서 주장하는 요결에서 연공술이란 비전하는 관념이 주어 지는 것으로 비결을 받은 사람과 비결을 받지 못한 사람과는 같은 시간, 같 은 양의 단련을 해도 그 성취도는 몇 갑절이 나기 마련이었다. 격타의 기법에서 극히 사소한 요결이나 비인부(秘認符)만 전수 받아도 타격 부위의 강도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방어에 있어서도 가장 작은 힘으로 봉쇄 하거나 피하는 요령이 터득되는 것이었다. 특히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피탈(避脫)은 공격이상의 효과가 있어 누구나 얻기를 원하는 구결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구결은 아니었다. 설사 소림의 제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발경은 몸의 기를 뿜어내는 기법으로 내가진기를 뿜어내는 것과는 달랐다. 발경의 위력은 몸에 지닌 순수한 체력으로 뿜어내는 것이며 설사 내공이 강 한 자라해도 발경에 의해서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 다.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발경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다년간 무공을 익히 더라도 일정한 위력 이상의 타격력은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자질이 부족하여 발경의 구결을 얻었더라도 초급인 장경(長勁)으로부터 중급인 단경(短勁), 다시 고급인 암경(暗勁), 냉경(冷勁). 침투경(浸透勁)을 모른다면 완벽한 발경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었다. 소림의 무공은 구결로 전해지는 완벽한 백타를 지니고 있으며 요결에는 발 경의 완성이 이르는 법이 있었다. 특히 발경과 더불어 상대를 상하게 하는 타법은 작은 힘으로 극대의 효과를 얻는 법이 있었다. 흔히 타법은 타인법(打人法)을 말하는 것으로 타기(打氣), 타혈(打穴), 타 음양양부접(打陰陽兩不接)이 있고 어느 것이나 상대를 단 일수에 살상하는 무서운 비기였다. 아무튼 비전이란 바람과도 같아 눈앞에 있더라도 깨달을 수 없으며 비전의 전수는 문파의 전인이나 수제자가 아니라면 꿈도 구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은혜를 입은 분이지." 백지대사가 생각났었기 때문인지 초풍비는 긴 한숨을 뿜어냈다. 아마 짧은 시간에 그는 백지대사의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초풍비의 얼굴이 숙연해 보인다는 것이 풍무영에게는 그렇게 짐작되었다. "대형, 오지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까?" "아니!" 초풍비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빠른 반응이었다. 풍무영은 그런 초풍비에게도 사연이 있구나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초풍비는 언제부터인지 본래의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 다. 언제 그가 생각에 잠겼었는가 하는 표정이 느껴졌다. 초풍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을 감았다. "내가 강호에 재출도한 것은 아우들도 모른다." "저......." 갑작스러운 초풍비의 말을 미쳐 예상하지 못했었는지라 풍무영은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말문을 열 수가 없었 다. 한참동안 생각하던 풍무영이 불현듯 생각이 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대형이 저를 구한 것은 이유가 있었을 테지요?" "그랬지. 자네를 잡아 다그쳐 일을 시키고자 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달 아나 버리는군." 풍무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이 그에게 무언가 도울 일이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강호의 이인(異人)이라는 초풍비를 만났고 더구나 대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설사 몸이 부서지고 가루가 되더라도 초풍비의 부탁은 들어주고 싶었다. 그 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다면 몸이 부서져도 행복할 것 같았다. 안심도 되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핍박한다면 초풍비의 아우라는 사실만으로도 피해갈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면 초풍비가 반드시 복수를 해줄 것 같았다. 강호에서 의형(義兄), 의제(義弟)는 그토록 놀라운 전통을 가지게 되는 것 으로 사형(師兄)이나 사제(師弟)보다 더욱 그 의가 깊었다. 그런 점에서 풍무영이 대형으로 모신다고 했을 때 초풍비가 그렇게 하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뭡니까? 아우는 대형을 도울 수 있다면 섶을 지고 불 속이라도 뛰어들 준 비가 되어 있습니다." 초풍비가 눈을 뜨고 풍무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잔 떨림이 일고 있 었다. '아우들...... 오지회의 아우들을 제외하고는 나에게 이런 감동을 주는 사 람은 처음이다.' 초풍비는 손을 뻗어 가볍게 풍무영의 손을 잡았다. 초란을 찾는 일이 막막 했었지만 이제 새로운 돌파구(突破口)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초란의 행방정도라면 강호제일의 추적술(追跡術)을 지녔다는 풍무영이 찾아 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고맙다. 아우!" "아닙니다. 아우는 죽을 때까지라도 대형을 따를 것입니다." 두 사람의 눈에 열기가 번졌다. 그것은 믿음이었고 신뢰였다. 초풍비는 마 음속으로 다시 다짐했다. '이제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겠다.' 초풍비의 얼굴에 아련한 추억이 흘렀다. 이제는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오지 회의 아우들이 그리워졌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심장을 날카로운 비 수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스라이 쓰라렸다. "아우의 경공은 무림의 비기로 알려져 있는데 어디 출신인가?" 무림에서 자신의 출신은 족보(族譜)와 같았다. 설사 무공이 약하다고 하더 라도 문파가 강하다면 감히 대적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구파일방의 제자들이었다. 설사 소림의 소사미라 하더 라도 그 배경이 소림인지라 강호의 고수들도 함부로 괄시를 하지 못했다. 육대세가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힘은 당금 천하에 제일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두번째는 되었기에 그들의 제자들은 강호를 활보하며 잦은 사건에 개입하고 있으며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두 시진 전 초풍비의 손에 죽음을 당한 사천당문의 이손 당천엽의 경우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그는 풍무영을 잡으려다 자신의 목을 초풍비에게 내민 경우였다. "저는 비류문(飛流門)의 후예입니다. 이미 망한 무가(武家)이지요." 풍무영은 비통한 음성을 흘렸다. 그의 말에 따르지 않더라도 비류문이 이 년 전에 멸망했다는 소문은 초풍비 도 들은 바가 있었다. 십 년만에 강호로 나온 초풍비는 강호의 소문에 귀를 기울였고 적잖게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초풍비가 강호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사실 강호에서 떠도는 문파 간의 대립이나 혜성같이 출몰한 고수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함이 아니었다. 초란! 그녀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 녀가 어디선가는 흔적을 남길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강호의 흘러 다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비류문이라. 안타깝군. 영화롭던 무가였는데......." 초풍비는 비류문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비류문은 감숙성의 하 단, 하서회랑(河西回廊)이 끝나는 감숙성의 최남단 무도현(武都縣)에 자리 한 문파였다. 일가족으로 이루어진 비류문은 어느 문파와도 적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유 명한 신선도(神仙道)를 추구하는 문파였다. 비류문의 식솔은 겨우 오십 명을 넘지 못했지만 무림의 이권에 개입하지 않 고 자신들만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이어가고 있었다. 밤이 어두우면 반딧불은 더욱 빛나는 법이고 은자(隱者)는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그 이름을 날리는 법이라고 했던가! 비류문은 암암리에 무림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무공은 뛰어나지 않은 문파 였으나 그들이 지닌 경공은 타의 주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비류문은 강호의 이권에 개입하지 않는 문파가 아니던가? 누가 비류문을 건드렸는가?" "모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언젠가는 내가 비류문의 원한을 갚아주겠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 나?"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그래?" 초풍비는 진심이었다. 사심 없이 살아가는 비류문을 초토화시킨 자들이라면 그들은 목적이 있었을 것이었다. 설혹 그것이 비류문의 놀라운 경공일 수도 있었다. 암중의 흉수를 찾아낼 수 있다는 풍무영의 말에 초풍비는 가슴이 끓어올랐 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협의지도(俠義志道)였다. "은미(恩美)를 찾을 수 있다면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은미? 혹시 남궁은미(南宮恩美)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대형이 어찌 은미를 아신다는 말입니까?" 놀라는 쪽은 풍무영이었다. 그는 안개 같은 눈을 치뜨며 초풍비를 바라보았 다. 이미 날은 저물어 해가 지고 동쪽에서 불게 달아오른 달이 머리를 풀며 허 우적거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연한 일이었지." 어찌되었든 풍무영과 남궁은미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풍무영이 의아심을 가지기 전에 남궁은미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 았다. 풍무영의 눈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게 아마...... " 풍무영은 초풍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초풍비가 작얼산을 내려와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초풍비는 겨우 백 리밖에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초란의 행방은 군데군데 끊어져 있었고 바다에서 동전을 찾는 심정으로 수소문을 해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벌판을 가로질렀을 때 날은 저물었고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내공을 운기(運氣)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없겠지만 너무나 지쳐있었고 밤에 초란을 추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과 입, 귀에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에게 묻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가 초란을 추적하는 방법이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 밤새도록 날개를 접고 내일을 기약하는 해시경(亥時頃) 이었다. 그는 무너져 가는 관제묘(關帝廟)를 찾아 하루 밤을 쉬기로 했다. 촉장 관 운장을 주신으로 모시는 관제묘는 마을 어디에나 있었고 길손에게는 더없이 좋은 쉼터가 돼주었다. "완전히 무너졌군." 주변에 마을은 없었다. 오래 전에 마을이 폐허가 된 듯 보이는 것이라고는 풀에 쌓인채 무너진 열 두어 채의 집뿐이었는데 관제묘가 그중 가장 실했다. 한쪽 벽이 무너져 바람이 들어치기는 했으나 비가 오면 능히 피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타타타탁! 부서진 가옥에서 주워온 마른나무는 소금이 튀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관 제묘의 한구석에 등을 기댄 초풍비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닥불에서는 반 시진 전 그가 잡은 산토끼가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어서 추적해야 할텐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초란의 행방이 지워지 고 말 것이다." 바람난 계집이 옷고름을 풀듯 어른거리고 무당이 널을 뛰듯 솟구쳐 오르는 붉은 화염(火焰)을 보며 초풍비는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자괴감(自愧感)에 젖어있었다. 쾅! 콰르르르르르― 하루종일 참았던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다. 우기가 끝나지 않았던지 비가 오는 날이 부잣집 떡 먹 듯했다. 어찌된 일인지 연 사흘동안 날씨가 맑아 그나마 빠른 추적이 이루어지던 중이었다. "빌어먹을 비가 오려는 모양이군." 초풍비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비가 오면 추적은 그만큼 느려지고 발길이 더뎌졌다. 무엇보다 초란의 발자취가 흐려지고 사라질 수 있었다. 그녀의 가문이 사라진 지금 그녀를 찾는다는 것은 심해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그나마 날씨라도 좋아야 발끝을 따라갈 수 있었다. 쏴아아아아― 갑자기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청록색 번개가 번뜩일 때마다 굵은 비가 마치 주렴처럼 내리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던 오늘은 여기에서 쉰다. 아침이면 비가 그칠 수도 있겠지." 초풍비는 노릇노릇하게 익은 토끼를 집어들었다. 하루종일 굶었기 때문에 배가 등에 붙은 것 같았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만약 내가진기에 의한 운기토납(運氣吐納)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지쳐 쓰러 졌거나 허기져 쓰러졌거나 둘 중 하나로 결과가 드러났을 것이지만 다행히 그는 잘 버티고 있었다. 휙! 갑작스러운 파공성이 울리며 하나의 인형이 관제묘로 날아든 것은 그가 토 끼를 반정도 뜯어먹었을 때였다. 초풍비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초풍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관제묘로 다가서는 발걸음을 느끼고 있었다. 초풍비는 날아든 물체가 사람이건 짐승이건 상관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과 은원이 없다면 참견하고 피를 뿌리는 일은 무의미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죽여 버릴 테야." 날카로운 음성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아직 치기가 남아있는 소녀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돌아앉기는 했지만 이미 나타난 자가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초풍비에 게 그녀의 음성은 무의미했다. 초풍비는 눈을 들었다.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거친 숨소리로 나타난 여인이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늘게 귓가로 스며드는 숨소리뿐만이 아니라 코로 밀려드는 혈향(血香)으 로도 그녀가 피를 흘리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 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초풍비의 눈에 비친 사람은 소녀였다. 이제 열여덟이나 열아홉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는 분명 이십을 넘지 않아 보였다. 소녀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보름달을 닮은 큰 눈이 아름다웠고 마늘쪽처럼 오뚝 솟은 코가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소녀는 균형 잡힌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이 잘못 생겼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녀는 십전십미(十全十 美)를 지니고 있었지만 유난히 굴곡이 뛰어난 몸이 사람의 시선을 묶었다. '강호에서 살기란 어려운 일이지. 특히 저 소녀 같은 경우는 더욱 그래.' 짧은 생각이지만 초풍비는 그녀가 강호의 색마들에게 쫓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만큼 소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초풍비는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소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고 핏기가 없었다. 손에 한 자루의 장검을 들고 있기는 했으나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날렵하게 차려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옥색의 무복은 이미 군데군데 찢겨 여 인으로서 감추어야 할 곳곳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나마 속에 잠자리에 들 때 여인들이 입는 옷 같아 보이는 짧은 단삼(單 衫)을 걸치지 않았다면 눈요기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뭘 봐. 이 색마 같은 놈아. 눈 돌려." 소녀는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귀여운 아가씨로군.' 초풍비는 초란을 보는 느낌이었다. 초란을 만나게 된 것도 비슷한 상황에서 였다. 당시 초란도 쫓기는 몸이었고 그녀를 구해주다 보니 서로 사랑을 싹틔웠던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오래 전 추억이었다. 초풍비는 얼굴을 돌렸다. "난 신경 쓰지 마라. 다만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괴롭히지만 않으면 된 다." 초풍비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어찌되든, 어떤 마음을 먹었던 그것은 그 녀의 일이지 초풍비의 마음은 아니었다. "미친놈!" 소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밀렸다. 초풍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극한 상황에 밀리면 성인군자(聖人君 子)가 따로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소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초풍비는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들린 토기고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많이 굶은 것 같았다. 쫓기는 와중에도 음식에 탐을 낸다면 사흘 이상을 굶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난 다 먹었으니 아가씨나 먹어!" 초풍비는 보란 듯이 자신이 먼저 토끼의 옆구리 살을 찢어 질겅질겅 씹으며 나타난 소녀에게 집어던졌다. 만약 그냥 던져주면 소녀는 절대 먹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쫓기고 굶은 사람으로서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 심정이겠지만 아무거나 먹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초풍비는 잘 알았다. 그 정도의 긴박한 모습이라면 소녀는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도처에 적이 있다면 초풍비와 같은 모습으로 미혼약(迷魂藥)을 뿌렸거나 독 이든 음식을 먹이려 할 수도 있었다. 소녀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소녀는 토끼를 받아들고 한참동안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초풍비의 모습이 심상치는 않았지만 입은 옷이나 몰골로 보아 자 신을 추적하는 무리는 아니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잘먹겠어요." 소녀는 허겁지겁 토끼구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반 마리의 토끼는 반식경 (半食頃)이 지나지 않아 수북한 뼈로 바뀌어버렸다. 토끼구이를 먹고 나자 소녀는 추웠는지 불가에 다가와 불을 쪼였다. 몸에는 물기가 흠뻑 했다. 비록 몸이 떨리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손에 들린 검은 절대로 놓지 않고 있 었다. 그녀가 검을 들고 있는 것은 습관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초풍비에 대한 의심과 알 수 없는 적개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불쌍한 소녀로군.' 초풍비는 돌아누운 상태에서 품을 뒤져 몇 개의 풀잎을 꺼냈다. 오랫동안 산에서 사냥을 하며 산 그는 몸에 약이 되는 풀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꺼낸 풀은 꺾으면 우유 같은 액이 나오는 풀이었다. 오랜 경험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데는 그가 내민 풀보다 좋은 약은 없었다. "이건 외상(外傷) 약이다. 꺾으면 우유 같은 즙이 나올 거다. 그것을 바르 면 서너 시진이 지나지 않아 상처가 아물 거야." 초풍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초를 던져 주었다. 바르고 안 바르고는 그 녀의 마음이었다. 쫓기는 급한 상황이라면 너무 친절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오해라는 허울을 쓰고...... 그가 아무런 사심 없이 약초를 준 것은 과거의 초란이 생각났기 때문이었 다. 초란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그녀를 돕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참견하기도 싫었고 그녀가 받아 줄 리도 없었다. 초풍비는 드러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소녀는 그를 믿었는지 옷을 벗고 상처에 약초의 즙을 바르기 시작했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소녀는 초풍비를 믿었는지 옷을 몽땅 벗고 몸에 약초를 바르고 있었다. 모닥불이 만든 그림자가 눈을 파고들었다. 그림자는 경장뿐만이 아니라 나삼(羅衫)도 벗었고 젖무덤을 가리는 조그만 천과 하체를 가리는 작은 천도 모두 떼어내고 있었다. 비록 몸을 돌리고 있었지만 초풍비는 그림자를 통해 모두 보고 있었다. "어서 바르고 옷을 입어. 누군가 오고 있는데 아마도 아가씨를 추적하는 자 들 같군." 초풍비는 낮게 호통쳤다. 누워있는 그의 귀에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때문이었다. 물이 고인 지면을 달리느라 철퍼덕거리는 소리는 요란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어마, 그들이 벌써?" 소녀는 급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불에 비쳐진 그림자가 한바탕 몸을 틀었 다. 마치 무희(舞姬)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발자국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남궁은미! 네년이 그곳에 있는 줄 안다. 겨우 이곳에서 널브러져 있느냐?" 일부러 쉰 소리를 내었는지는 모르지만 음침한 목소리가 관제묘를 파고들었 다. 철퍼덕거리던 발소리도 멈추었다. 그러나 초풍비는 발자국의 주인이 관 제묘를 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관제묘를 도는 자들은 한둘이 아니고 일곱 명이나 되었다. 한참동안 관제묘 를 돌던 자들이 멈추어 섰다., "흥! 네놈들을 두려워할 남궁은미가 아니다." 소녀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기력이 쇠진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는 이득일 것 같았다. 초풍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남궁이라는 성씨를 가졌으며 이름이 은미라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후후후후! 네년이 우리 형제를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리석은 계집. " "흥! 육지도마(六指刀魔)! 개수작하지 말아라." 초풍비는 자신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은거하기 전에도 육지 도마라는 외호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니 그가 한때는 죽이려 마음먹었던 자였다. 육지도마는 오래 전부터 무림에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가 이름을 얻은 것 은 뛰어난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별호에 마(魔)라는 글자가 들 어있겠는가 마는 그는 오래 전부터 황금 사냥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살수(殺手)인가 하면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다만 뒤 가 구린 무파에서 황금을 받고 대신 사람을 죽여주는 자였다. 그가 무림인의 질시를 받으면서도 오래도록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외호가 말해주듯 한 자루의 귀두도(鬼頭刀)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고 그를 따르는 여섯 명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리리릭―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며 하나의 인형이 관제묘 안으로 들어 섰다. 안색이 음침한 육십대의 노인이었다. 몸에는 비를 맞아 빗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손에 들린 삼척칠촌 의 귀두도가 모닥불에 빛을 반사시켜 귀화(鬼火)를 토했다. "아니, 벌써!" 나타난 자를 본 남궁은미가 자지러질 것 같은 비명을 뿌렸다. 손에 들린 장 검이 미친 듯 흔들렸다. 초풍비는 두러 누워 있었지만 돌아가는 사태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던 육지도마가 노리는 소녀라면 무조건 소녀를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나 초풍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더 사태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흐흐흐! 계집 도망가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다. 날고 기어봐야 손오공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흥, 더러운 놈!" 남궁은미는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육지도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만 순순히 따라오면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겠다." "흥, 차라리 혀를 물고 죽겠다." "그럼 죽여주지. 네년이 죽인 내 부하가 벌서 이십 명이 넘어. 네년을 죽이 고 배를 갈라 네년이 그리도 아끼던 것을 찾아가겠다." 파아아아― 파공성이 일어나며 모닥불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것으로 보아 육지도마가 남궁은미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그림자에 의하면 남궁은미도 지지 않고 검을 들어 맞서는 것 같았다. 창창창!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다. 육지도마의 눈에는 드러누운 괴인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등을 돌리고 누워있으니 그가 초풍비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 다. 초풍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육지도마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만약 초풍비 가 무림을 떠나지 않았다면 육지도마는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손에 죽었을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디 놀아나는 꼴 좀 볼까?' 초풍비는 우선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기로 했다. 육지도마는 도를 잡는 오른손에 여섯 개의 손가락이 있어 그 외호가 육지도 마라 불렀는데 도법은 제법 위력이 있었다. 칠순에 다가드는 나이를 먹은 육지도마는 초풍비가 무림에 출도하기 이전부 터 악명을 떨치고 있었고 무립십대악인(武林十代惡人)중 한 명이었다. 창창창! "커흑!" 연속으로 들리는 병장기 소리가 무너져 가는 관제묘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 었다. 뒤이어 터진 비명은 남궁은미가 어떤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지 여실 히 보여주고 있었다. 창그랑! 남궁은미가 장검을 떨어뜨리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초풍비가 준 약초의 즙 으로 인해 멈추었던 피가 과도한 진기의 운용으로 다시 터지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군." 초풍비는 일부러 큰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은근슬쩍 불타고 있는 나무를 발로 걷어찼다. 마침 육지도마는 귀두도를 들어 남궁은미의 허 리를 베어가고 있었다. 파아아아―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간 불덩어리가 육비도마의 눈앞에서 작은 불덩어리로 쪼개어졌다. 그러나 불이 타서 앞이 뾰족해진 나무는 계속해서 육지도마의 안면으로 날아갔다. "어떤 놈이냐?" 육지도마는 급히 몸을 뒤집었다. 무시하고 계속해 도를 그어 내린다면 남궁 은미를 제압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안전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초풍비는 몸을 일으켰다. 육지도마는 눈을 부릅뜨고 초풍비를 바라보았지만 너무도 달라진 모습으로 인해 알아보지 못했다. "나를 몰라보다니...... 육지도마! 오늘 이곳에서 죽어야 할 것 같군." 초풍비가 빙그레 웃었다. 육지도마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잊을 리가 없 었다. 초풍비가 은거하기 전 그는 초풍비에게 쫓기던 중이었다. 육지도마는 초풍비의 형제 중 한 명에게 암수를 써 상처를 입혔던 것이었 다. 평상시의 실력으로 겨루었다면 감히 아우에게 겨룰 수도 없는 육지도마였지 만 자신을 따르는 아우들과 힘을 합쳐 아우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 마침 초풍비가 그를 추적하기 위해 청해로 넘어갔다 찾지 못하고 아우들이 몰려있는 금불산을 향해 출발했다. 초란을 만나게 되어 은거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초란을 만나게 되는 연의 끈을 연결했을 수도 있는 육지도마였다. "설마! 초풍비?" "왜 초풍비가 아니겠나. 이곳에서 만나다니 육지도마의 운명도 다했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지도마가 몸을 날렸다. 그러나 관제묘를 완전히 벗어 나기도 전에 앞을 막고 서 있은 초풍비를 보아야 했다. 초풍비는 폭포처럼 쏟아 붓는 비를 맞으며 관제묘의 밖에 서 있었다. 언제 밖으로 나섰는지도 모를 빠른 보법이었다. 초풍비가 관제묘 안에서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관제묘에서 겨루게 되면 가뜩이나 위태한 관제묘가 무너질 수도 있 기 때문이었다. 관제묘가 무너지는 것은 별일이 아니었으나 상처를 입은 남궁은미는 치명적 이랄 수 있는 위기가 올 수도 있었다. 그녀에 대한 배려(配慮)였다. "아우들!" "예, 형님!" 육지도마가 외치자 여섯 개의 신형이 빗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마도 그들 은 이미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초풍비는 그들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초풍비가 누구인지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육지도마를 비롯한 일곱 개의 신형이 초풍비를 둥글게 에워쌌다. 무림에서 는 지나가는 개도 펼칠 줄 안다는 흔하고 흔한 원진(圓陣)이었다. "놈이 계집을 죽이는 걸 방해했다. 죽이자." 일곱 개의 신형이 초풍비를 중앙에 두고 빙글빙글 맴을 돌았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초풍비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쳐라!" 일곱 개의 그림자가 강한 비를 튀겨내며 밀려들었다. 초풍비는 반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번―쩍! 번개가 쳤다. 그가 강호출도 후에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은형만리파(隱形萬里派)가 그들 형제의 몸으로 날아간 것은 하늘을 쪼개는 번개가 울리고 나서였다. 풍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 뒤는 어찌 되었습니까?" "별일은 없었네. 난 날이 새도록 남궁은미, 그 아이를 치료했고 아침이 되 자 헤어졌지." "그때가 언제쯤이었습니까?" "한 달 정도 되었지." 초풍비는 말을 하면서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의문이었 다. 풍무영이 비류문의 후손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왜 그리도 남궁은미 의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비류문과 남궁가문이 연관이 있다는 소문은 들은 바가 없었다. 더구나 남궁 은미가 몸을 치료할 때 해준 이야기는 남궁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 했다는 사실이었다. "자네는 왜 그녀에게 그토록 관심을 가지나. 혹시 그녀가 자네의 정인(情 人)인가?" 풍무영은 뜨악한 눈으로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틀린 추측은 아닐 수도 있었 다. 스물이 되지 않은 남궁은미와 이십 오륙 세 정도의 풍무영이라면 나이 차이도 많지 않아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풍비가 그와 같이 물어본 것은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녀를 찾아 풍무영과 맺어주고자 함이었다. "원, 대형도 농담이 진하십니다." 풍무영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초풍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무언가 잘못 짚었다는 생각을 했다. 만 약 풍무영과 남궁은미가 연인 사이라면 풍무영이 초풍비에게 그토록 어이없 다는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녀의 가문 남궁세가와 우리 비류문이 한날 한시에 무너졌다면 그것을 믿 겠습니까?" "사실이 그렇다면 그것은 음모(陰謀)가 깔려 있겠군." "물론입니다. 음모였죠. 남궁세가(南宮世家)에 한 장의 장보도가 나타났다 는 소문이 났지요. 그것도 사실입니다. 남궁세가는 한 장의 장보도(藏寶圖) 를 얻었지요." "그것이야말로 음모가 깔려있군." 초풍비는 너무도 눈에 보이는 음모를 듣고 있었다. 설사 장보도가 사실이더 라도 너무도 쉽게 드러났다는 것은 오래도록 준비된 음모일 가능성이 있었 다. 초풍비는 이미 은거를 하기 전 자신을 조여오던 음모를 알고 있었다. 아마 도 초란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십 년 전의 음모와 연장선상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를 보시지 못하셨나요?" 풍무영의 물음에 초풍비는 불현듯 그녀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어두운 관제 묘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하루를 지새웠었다. 초풍비가 남궁은미의 몸을 치료하고 다시 나타날 추적자를 지켜주는 것이었 지만 남궁은미는 초풍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많은 이야기 를 했었다. 그녀가 그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는 오직 자신이 장보도를 가지고 있다는 이 야기뿐이었다. 그녀가 한 말 중에는 자신의 오빠가 육지도마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다는 말 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오빠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터트렸었 다. "그녀의 오빠가 죽었다고 하더군. 오빠는 육지도마에게 죽었다고 하던데." "그랬을 겁니다. 소문에는 그녀와 그녀의 오빠인 옥룡선랑(玉龍仙郞) 남궁 도하(南宮桃夏)가 같이 도주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아우는 아직도 대답하지 않는군. 그녀와 아우가 어떤 관계인지?" 풍무영의 눈이 한참동안 초풍비를 주시했다. 초풍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서는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했나요'하는 듯한 빛이 흘러나왔다. 초풍비는 두 손을 들어올려 어깨를 들썩이며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조금 쑥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얼굴에 난 짙은 수염으로 인해 겉으로 드러 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동생입니다. 제 모친께서 남궁은미의 고모라면 믿겠습니까?"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초풍비는 두 개 가문이 얽힌 비사(秘事)를 듣고 있었다. 결국은 드러나지 않은 흉수가 두 개의 가문을 피로 물들여 버린 것이었다. "아우가 쫓기는 이유도?" "물론입니다. 이미 강호에는 은미가 장보도를 가졌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들 모두는 은미를 잡아 장보도를 빼앗고 싶은 거죠." "아우는 왜?"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들은 저를 잡으면 은미의 행방을 알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저를 잡아 은미를 추적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뿌드드득! 초풍비의 손에서 바위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진한 분노의 표정이 었다. 풍무영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분 노는 볼 수가 있었다. 풍무영은 오래 전에 들은 소문을 떠올렸다. ― 오지회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남지 않는다. 어둠이 잠든 침실(寢室)은 칠흑처럼 어두웠으나 침상이 놓여진 곳은 제법 밝았다. 침상머리가 밝은 것은 한 자루의 향촉(香燭)이 타고 있기 때문이었 다. 향촉은 매우 가늘어 참상만을 비추고 있었다. 주변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 았다. 한 명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별 특징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은 막 잠에서 깬 듯 조금은 표정이 무료해 보이기도 했고 표정이 없는 듯도 보였 다. "원주(院主)!"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너무나 조용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노인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아마도 지난밤에 과음(過飮)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흔들어도 여전히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누군가?" "무영(無影)입니다." "들어 오라. 자네는 한 번도 시간을 어기지 않는구먼!" 노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자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물음을 던져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서야 출입(出入)을 허가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향촉이 꺼질듯 가늘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침실을 흐르고 있는 것 같았 다. 하나의 인형이 노인 앞에 나타났다. 나타난 자는 중년인이었다. 나타난 중년인은 노인과 닮아 무표정해 보였다. 한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노인이 피부가 창백(蒼白)하여 무표정한 것이라면 중년인은 지닌 인상이 무 표정한 것이었다. 중년인은 무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과 무영은 단 한번의 어김 이 없이 노인의 일곱 개 침실 중에서 한곳을 택해 하루에 한번씩 만나는 사 이이기도 했다. 무영은 등에 한 자루의 가는 도를 메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안정되고 몸이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오랜 기간동안 수련을 쌓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했다. 드르르르― 무영은 어디선가 작은 의자를 끌어다 마주 앉았다. 어두움에 보이지는 않았 지만 어디에 의자가 있다는 것을 무영은 알고 있었다. 비록 노인이 반말을 하고 있고 무영이 존대어를 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하는 행동으로 보아 무영은 노인의 명령을 받는 자는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은 무슨 일인가?" "그가 나타났습니다." "그라니?" 노인은 눈을 들었지만 무영의 말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 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랄 만도 한데 노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면의 신경이 모두 죽은 것 같았다. 무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초풍비가 나타났다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뭐야?" 노인은 침상에서 퉁기듯 몸을 일으켰다. 놀라움이 심장에 달했는지 눈이 바 쁘게 굴렀다. 그럼에도 표정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침상에 주저앉았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놈이 태양하구에 나타나 풍무영을 노리던 제자 이십 명을 모 두 주살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군. 그가 나타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旣定事實)이었 지만 태양하구에 나타나다니......." 노인은 머리를 홰홰 내둘렀다. 행동으로 보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원주라는 노인이 초풍비의 출현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었 다. 노인의 말투로 보아서는 초풍비가 강호로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 투였다. "어르신께서 걱정이 태산이십니다." "그러시겠지." 노인은 얼굴을 들었다. 창백하기만 한 얼굴에 향촉의 불빛이 비추어지며 희 미한 음영(陰影)이 만들어졌다. 노인은 한참동안 무영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몇 번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에 잠긴 것인지 습관인지는 분명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동쪽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데...... 그렇다면 한 달 전 육지도마의 죽음도 초풍비를 의심해 보아야 하겠군." "그렇습니다. 어르신도 다시 조사를 하시라는 말씀을 보내오셨습니다." 무영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인의 물음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의 표정 은 노인이 물어볼 어떤 말에라도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는 표정이었다. 노인이 몸을 비틀었다. 좀이 쑤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초란의 행방을 찾은 것인가?" "아닌 것 같소이다. 그는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소. 다만 만리당혜를 수중에 넣었으니 이대로 두면 곧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요." "그렇군. 초란은?" "어르신이 데리고 가셨소이다. 어르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를 없애라는 분부를 내리셨소." "그야 물론이지." 노인은 갑자기 주먹을 쥐었다. 그것이 노인이나 무영이 말하는 어르신이라 는 존재의 말을 따르겠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부르르르르― 자세히 보면 노인의 몸이 가볍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몸에 걸친 바단 잠옷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발 밑이 흔들림을 알 수 있었 다. 실처럼 가는 향촉도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대도하를 내려오고 있소." "놈! 제대로 내려오고 있구나.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내려오니 마다할 내가 아니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죽일 수 있다는 확 신이었다. 무영은 감정의 기복이 심해 보이는 노인을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인 의 무표정은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무영은 면역이 된 것 같았 다. "어르신은 두 가지 명을 더 내리셨소." "그게 무엇인가?" "검문산(劍門山)의 일을 마무리 지으시라는 명령이셨소. 만약 그들 오지회 가 다시 힘을 뭉치게 된다면 어르신으로서는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 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소." "그것은 이미 준비가 되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사천당문의 멍청한 당협(唐協)이 움직일 것이다. 그분에게 그리 전해 주면 되겠다." "알겠소." 고개를 돌리는 무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나갔다. 그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무영이 다시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는 원래의 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노인은 무영의 얼굴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노인이 다시 무영을 바라보았다. 눈가에 피곤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다른 분부는 무엇인가?" "서둘러서 천지검문(天地劍門)을 움직이라는 말씀이 계셨소. 천지검문이 너 무 움직이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질책이 있으셨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천지검문의 멍청한 놈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사천의 패권(覇權)을 잡으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언제든지 그들을 움직 일 수가 있다." "그리 전해 드리겠소." 말을 마친 무영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할 말은 다했으니 돌아가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영은 한참동안 서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도 어정쩡한 모습으로 무영 을 바라보았다. 노인을 바라보는 무영의 표정에는 작은 갈등이 있었다. "나에게 할 말이 또 있는가?" "이건 어르신이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초풍비의 뒤에는 어르신의 수족(手 足)이 따르고 있소. 어물쩍하게 몸을 사리면 어르신의 귀에 들어갈 것이오. " 무영의 말에 노인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것은 분노라고 하기보다는 전 율 같았다. "협박(脅迫)인가?"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소? 내 스스로 당신이 실수하지 말라고 알 려주는 것이요. 원주!" "고맙군!" 무영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걸음을 옮겨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은 향촉 아래에서 사라졌다. 삐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향촉이 춤을 추는 무희처럼 흔들렸다. 실 처럼 가는 향촉이 어찌 그렇게 흔들리고도 꺼지지 않을 수 있는지 의심스러 운 모습이었다. 털썩! 노인이 다시 침상에 엉덩이를 떨구었을 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작인가! 초란을 그 먼 작얼산에서 납치해 올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나저나 놈이 장강으로 내려온다니 일이 수월할 수도 있겠군." 노인은 무엇이 좋은지 키득거렸다. 그러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마치 고 무로 만든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후후후! 초풍비, 네놈은 죽는다. 아예 장강에 고기밥으로 만들어주마. 설 혹 네가 살아난다 해도 네 동생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훅! 말을 마친 노인은 의식적으로 입김을 불어 향촉을 껐다. 길게 몸을 늘이던 향촉이 서너 번 좌우로 흔들리더니 몸을 비틀며 어둠으로 묻혔다. 잠시 침상의 금침(衾枕)이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후후후! 초풍비, 네놈이 나에게 아픔을 준 만큼 네놈에게도 아품을 주겠 다." 노인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자신을 원주라 부른 노인은 잠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4 페이지: 1/37 자료번호: 259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2 ─────────────────────────────────────── ■ 상견환 제4장-날 좀 내버려 둬 대도하의 물결은 푸르고도 아름다운 은파(銀波)에 흔들리고 있었다. 대도하 는 넘실거리는 물결을 일으키며 하루도 쉬지 않고 장강을 향해 바쁜 발걸음 을 재촉하고 있었다. * * * 여객선 사천삼호(四川三號)는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세 폭의 돛은 바람을 받아 임신 칠 개월의 아낙처럼 부풀었고 선부(船夫)들은 신이 나 뱃전을 오갔다. 사천삼호는 이백 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배였지만 태양하구에서 탄 삼십 칠 명의 승객이 전부였다. 열흘은 걸려야 금천(金天)에 다다를 수가 있을 것이고, 금천에 다다라야 승객을 태울 수 있었다. 승객들 중 절반은 여자들이었다. 배를 탄 지 수일이 지나고 있었다. 아직도 하루는 더 가야 두번째 기착지인 금천의 나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도하를 거슬러 올라오고 내려가는 유람선 중 두번째로 큰 사천삼호는 산 들바람을 맞아가며 돛을 넓게 펴고 유유히 흘러가는 대도하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태양하구를 떠난 지 구일이 지났다. 사천삼호는 그 규모가 놀라운 배였다. 수십 개의 선실이 있다는 것을 제외 하고라도 두 개의 식당이 있었고 이십 칠 명의 선부들이 배를 움직이고 있 었다. 심지어는 그 규모를 자랑하고자 한 것인지 삼층갑판에 주루까지 있었다. 주 루에서는 술뿐만이 아니라 사천을 위시한 중원 십삼 개 성의 모든 요리를 맛볼 수가 있었다. 우기가 지난 초가을의 태양은 뜨거웠다. 갑판 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손대면 터질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손 을 펴면 새가 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너무도 맑은 날이었다. "하하하! 미매, 이제 우리는 장강을 거슬러 울지화(鬱枝花)로 아버님을 뵈 러 가자고......." "아버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선남선녀들이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너무도 호쾌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 다. 한눈에 보아도 있을 법한 가문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루는 삼층갑판에 있었다. 강변의 경치를 조망(眺望)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기에 배의 가장 높은 곳 이었다. 주루의 위로는 돛대가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 몇 마리의 물새가 앉 아 끼룩끼룩 울었다. 탁! 주루의 한곳에 앉아 술을 마시던 초풍비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방으로 보이는 강변으로는 갈대가 키를 넘기도록 자라 있었다. "그는 아무 일 없이 잘 가고 있는지 모르겠군." 초풍비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풍무영에 대한 것이 었다. 풍무영은 육로로 이동을 하며 초란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있었다. 풍무영이 먼저 떠난 뒤 배를 타고 대도하를 따라 내려가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풍무영을 끌어들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방패를 파립(破笠)으로 개조하여 풍무영에게 주었다. 당연히 날카롭기 그지 없는 방패를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쳐 주었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초풍비는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뒤, 입안에 싸하는 느낌이 들도록 술잔을 털었다. 입안은 싸하지 않았지만 목구멍은 짜릿했다. 휘이이이― 바람이 불었다. "남쪽으로 부는 바람이군. 곧 다음 기착지가 나타날 것 같은데." 초풍비는 이처럼 바람이 불어준다면 적어도 다음 기착지에는 예정보다 두 시진 이상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배! 배가 나타났어요" "어디?" 누군가의 말에 초풍비도 고개를 돌렸다. 멀리 수평선(水平線)에 조그만 점 이 흔들렸다. 그것이 배라는 것을 인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배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배다. 배가 나타났다." 누군가 큰소리로 외치자 조용하던 배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강이 있다면 배 가 있을 수 있었다. 배가 보인다고 그리 놀랄 것은 없었다. 초풍비는 무심하게 멀리 보이는 배를 바라보았다. 우당탕! 배를 발견한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닌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명의 선수 부(船首夫)가 이층갑판으로 올라왔다. 그는 손에 천리경(千里鏡)을 들고 있 었다. 천리경은 긴 대나무 통에 왕옥산(王玉山)에서 나는 옥돌을 볼록하게 갈아 양옆에 끼운 것으로 먼 거리에 있는 물체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귀한 물 건이었다. 선수부가 올라온 것은 아무래도 근래 장강에 수적(水賊)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초풍비도 장강뿐만이 아니라 유람선이 다니는 장강지류에 근래 적지 않은 수적들이 출몰한다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배가 이상하다." 선수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다시 천리경을 들고 한참동안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았다. 배는 빠른 속도로 사천삼호를 향해 다가왔다. 점차 배의 거리는 좁혀졌고 사람들은 배 의 접근을 아는 듯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이층갑판에까지 전해졌다. "수적선(水賊船)이다.!" 천리경으로 배를 쳐다보고 있던 선수부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목소리에 는 경악과 다급함이 서려있어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짐작 이 가능했다. 선수부는 바삐 계단을 타고 구를 듯 내려갔다. "수적선이래. 어서 피하자." "어디로? 도망가자." 갑자기 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갑판에 사람들이 뛰어다 니고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울려 나왔다. 초풍비는 다가오는 배를 쳐다보았다. 초풍비는 선수부의 말을 믿을 수가 없 었다. 벌건 대낮에 어찌 수적들이 유람선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배는 순식간에 그들의 육안에서 확대되었다. 배의 규모는 제법 육중했다. 크기로만 보아서는 초풍비가 타고있는 유람선보다 두 배나 컸다. "정말 큰배로구나." 초풍비는 감탄을 토했다. 그는 아직 그처럼 큰배는 본적이 없었다. 촤! 촤! 촤! 수적들이 탄 배는 이십 개의 노가 일사불란하게 물살을 갈랐다. 수적선은 순식간에 눈에 확대되고 불과 이십여 장의 거리로 다가왔다. 검붉은 색으로 보이는 돛은 바람의 방향이 반대인 때문인지 내려져 있었고 돛을 연결하는 굵고 긴 밧줄에는 원숭이들처럼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돛 대 꼭대기에 깃발은 펄럭이고 있는데 피가 뚝뚝 흘릴 것 같은 붉은 색이었 다. 기이한 깃발이었다. 한 면에는 날카로워 보이는 한 자루의 도가 그려져 있어 곳 피를 뿌릴 것 같았다. 깃발이 붉어 보이는 이유는 바로 붉은 색으로 수놓아진 세도(細刀) 때문인 것 같았다. 세도는 두 자루가 엇갈려 그려진 모습이었다. 다른 한 면에는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은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얼마나 세밀하고 정교했는지 깃발에 그려진 나무에서는 향기가 날 것 같았다. 촤촤촤! 쿵! 물살 가르는 소리에 이어 유람선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심하게 흔들렸다. 수적선은 그대로 달려들며 유람선의 옆구리를 박았다. 수적들이 탄 배의 사 방은 눈에 보아도 자못 그 위력이 느껴지는 두터운 철로 싸여져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유람선과는 강도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어 보였다. 수적선을 감싼 거무튀튀한 철판은 그 두께가 무려 반 자나 되어 어떤 배와 부딪쳐도 상대의 배를 부수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람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단 한 번의 충돌에 왼쪽 갑판이 깨져나갔다. 아무리 단단한 해송(海松)과 십자목(十子木)으로 만든 유람선도 수적선의 철갑판에는 풍랑에 밀리는 판옥선(板屋船)과 다름없었다. '대단하군.' 초풍비는 수적선이 자신의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해지기만 했다. 단 한 번의 충돌에 유람선은 무려 십여 장이나 밀리며 출렁거렸고 부딪친 왼쪽 갑판은 깨어져 물이 배 안으로 스며들었다. 단 한 번의 충돌에 유람선 은 철저하게 깨어지고 바람에 밀려난 듯 배에 받힌 반대쪽으로 심하게 기울 었다. 휙! 휙! 휙! 요란한 파공성이 울리고 화살이 날았다. 당연하게도 수적들이 날린 화살이 었다. "크허허헉!" "화살이 날아든다. 피하라!" 화살을 맞은 유람객들이 나뒹굴었다. 좋은 세월 보내자고 유람선을 탔던 유 람객들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올라가라."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싶더니 수적선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초풍비는 갑판의 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적들의 하는 모습을 당분간 지켜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수적들은 모두 일 층갑판을 노린 듯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은 일정했다. 팅―팅―! 간간이 강맹한 힘이 실린 철궁시(鐵弓矢)가 초풍비의 앞으로 날아들었으나 대게는 갑판에 막혔고 설사 그의 몸으로 쏘아졌어도 모두 퉁겨져 날아갔다. 츄리리리―! 수적선에서 시커먼 물체가 쏘아져 날아왔다. 그것은 굵은 밧줄에 갈고리가 달린 것이었다. 갈고리는 갑판의 모서리에 걸 리고 수적들은 곧 밧줄을 잡아 당겼다. 가는 철사를 섞어 만든 마승(麻繩) 이 당겨지자 오래지 않아 수적선과 유람선이 평행으로 맞닿았다. 휙! 휘―익! 수적들이 몸을 솟구쳐 유람선으로 날아들었다. * * * '잘못하다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수장되고 말겠다.' 초풍비는 겉모습과는 달리 사태가 매우 긴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수적들은 강했고 일 사불란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저들의 목적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수적들의 목적은 따로 있을 것 같았지만 몸을 움직여 수적들을 상대해야겠 다는 생각은 없었다. 과거 은거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초풍비는 굳은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돌려 수적선에서 유람 선으로 넘어오는 수적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오십 명이 넘는 수적들이 유람선으로 넘어 들어온 후였다. 그들의 동 작은 제비처럼 날카로웠고 가파른 계곡을 오르는 잉어처럼 쾌속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동작이 다년간의 연습과 훈련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느껴 졌다. 오십 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수적들의 동작은 수십 년 동안 군무 (群舞)를 익힌 무희들보다 질서정연했다. 한결같이 등에 갈대 잎처럼 가는 세도(細刀)를 메고 있었고 도갑이 없이 겉 으로 드러나 태양의 밝은 빛을 받아 번뜩이며 은파를 뿌렸다. '단순하지! 찌르는 동작도 없고 그렇다고 후리는 방법도 없다. 다만 예리하 게 베어버리는 일살필도(一殺必刀)의 무서운 도법만이 그들의 방법이야.' 세도를 사용하는 자들이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는 이미 짐작이 가능한 것 으로, 이미 초풍비도 세도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는 가볍게 눈썹을 말아 올렸다. * * * 차차창! 요란한 병장기의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며 그의 생각은 끊어졌다. 삼십여명 의 수적들이 이층갑판으로 솟구쳐 오르며 세도를 흔들었다. 초풍비는 갑판에 이어진 철삭(鐵索)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느긋한 표정에 웃는 듯한 그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자신의 앞에서 죽을둥살둥 모르고 몸을 피하는 유람객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컥!" "크아아악!" 순식간에 수적들의 손에 여섯 명의 유람객이 피를 뿌리고 널브러졌다. 수적들의 발 아래는 유람객들이 흘린 피로 붉게 변해 있었고 수적들의 옷에 도 점점이 선혈이 뿌려져 있었다. 파드드드― 수적들이 뿜어내는 강한 기파가 초풍비의 얼굴에까지 밀려들었다. 무려 삼 십여 명이 쏟아내는 도풍(刀風)은 그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써걱! "크아악!" 다시 한 번의 고기 썰리는 소리가 들리고 삼층갑판 모서리에 서서 두려움에 떨던 유람객의 목이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죽은 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연인과 달콤한 꿈을 꾸 던 귀공자풍의 사내였다. 그의 발 밑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소녀가 다리를 벌리고 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유람객 사내의 목 없는 시체는 그가 사랑하던 여인의 시체 위로 넘어졌다. 죽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포옹할 수 있다니 참으로 행복한 연인이 었다. 후두두두― 핏방울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후후후. 초풍비! 오래도록 너를 기다렸다. 감히 겁을 상실하고 강호에 다 시 나타나다니......." 초풍비를 둘러싸고 다가들던 삼십명의 수적들 중 두목인 듯한 자가 앞으로 나서며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거들먹거렸다. 그들은 초풍비를 알고 있었다. 초풍비는 나타난 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십 년 전 자신에게 초란을 뺏긴 자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초풍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초풍비는 머리에 쓰고 있던 패갑둔을 등 으로 밀었다. "결국 나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군." "물론이다. 대인께서 너를 장강에 수장(水葬)시키시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어리석군, 장강어은(長江魚隱)! 네놈의 무공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하리라 는 것을 알텐데." 초풍비는 그가 누구인지 확연하게 생각이 났다. 장강어은의 눈가에 악독한 살기가 스쳤다. 그것은 분노였고 살기였다. 수치심(羞恥心)이었고 참을 수 없는 자격지심(自激之心)이었다. 나이 육십이 넘도록 장강어은에게 그토록 수치를 준 자는 없었다. 장강어은은 장강에서만 삼십 년 동안 무명을 날려온 육십대의 무웅이었다. 그가 거느린 장강수풍대(長江水風隊)는 이미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도 함 부로 대하지 않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근 십 년 내로 장강어은은 사천십걸(四川十桀)에 드는 무위를 자랑하 고 있었다. "찢어 죽일 놈" 한참동안 눈가를 씰룩거리던 장강어은이 물러났다. 뒤에 서 있던 부하들 중 에서 초풍비가 누구인지 몰라 겁을 상실한 십여 명의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 다. "놈을 죽여라." 세 명의 무인이 세도를 횡으로 그으며 앞으로 달려왔다. 그들의 기세는 일 도양단(一刀兩斷)의 기세였다. 초풍비는 서두르지 않았다.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한바퀴 회전시켰다. 동시에 초풍비는 자신의 허리 아래 앞으로 달려있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둥그런 것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손에 잡힌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의 손이 앞으로 뻗었다고 느낀 순간 하나의 흰 선이 그어지며 날아갔고 비명이 울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컥!" 미친 듯 달려오던 무인이 짧은 비명을 토하며 무너졌다. 그의 미간에는 하 나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검붉은 피가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 나왔다. 초풍비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다시 빗살처럼 펼쳐지며 열 개의 선이 허공을 그으며 날아갔다. 슛―슈―슈―슈―슛―! 캉! "커어억!" "큭!"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하나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들리는 것은 사람의 폐부(肺腑)를 가를 듯 선명한 비명 이었다. 털썩! 쿵! 두 개의 신형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들은 밑동이 잘린 고목처 럼 스르르 기울어져 갑판 바닥으로 굴렀다. 한결같이 그들의 목에는 구리돈 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동전이 박힌곳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사혈(死穴) 이었다. 초풍비가 전개한 것은 나한전이라는 것으로 강호의 무인들이라면 흔히 사용 하는 암기수법이었다. 초풍비가 날린 나한전이 다른 무인들과 다른 것은 무인들이 나한전을 날리 는 것은 살상하기보다는 상대의 혈도를 맞추어 행동의 제약을 주거나 때로 는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풍비의 나한전은 살상을 위한 것이었다. 목에는 염천혈(廉泉穴)이라 부르는 혈도가 있었다. 염천혈은 인간에게 치명 적인 급소였다. 염천혈에 박힌 구리돈은 박히는 순간 수적들의 호흡을 끊었다. 숨이 끊어져 뒹구는 시체는 서로 엉키어 수적들의 행동을 무력화 시켰다. 콸―콸! 수적들의 목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솟구쳐 배의 갑판을 붉게 물들였다. 이미 죽여있는 자들의 시체 위에 그들의 주검이 포개어졌다. "어, 어!" 장강어은의 입이 벌어졌다. 입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신음이 흘렀다. 조금 전 이미 그는 승리를 장담했 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미 승리가 눈앞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십 년 전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초풍비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부하 들이 그리도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갑작스럽게 날아든 암기가 자신의 부하들을 한순간 무너뜨린 것이다. 자신도 가까스로 목으로 날아드는 암기를 퉁겨냈으나 아 직도 손목이 얼얼했다. "이런 우라질...... 호랑 말코 같은 놈이 감히......" 장강어은의 눈가에 진한 살기가 흘러 넘쳤다. 초풍비는 빙그레 웃고 있었 다. 그것만으로도 장강어은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끓어 넘치는 살기와 분노 가 그의 손을 흔들리게 했다. 무인으로서의 부동심(不動心)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놈. 감히 내 부하들을 죽이다니.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 "그럴까?" 초풍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린 하룻강아지. 단 일수에 핏물로 만들어 주겠다." 장강어은은 분노의 일갈을 뿌리며 자신의 세도를 머리 위에 세우고 전신에 내가진기를 전신에 유포시켰다. 장강어은이 취한 자세는 부상(扶桑)에서도 그 위력이 자자하다는 일도류(一 刀流)의 진전을 이은 것으로 무공으로만 보자면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수도 있는 무공이었다. 초풍비는 반검을 들어 허리 어름에 세웠다. '무슨 기수식(起手式)이 저 모양이지.' 공격하려던 그는 초풍비의 기수식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비록 부러진 반검을 가슴에 세웠다고는 하나 엉덩이가 뒤로 빠지고 두 다리 가 불안정해 보였다. 엉덩이를 잡아들이고 두 다리를 꽃꽂이 세웠다면 빈틈 없는 자세가 될 것 같은데 상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친놈! 만용(蠻勇)을 부리다니." 장강어은은 초풍비가 일부러 자신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초풍비를 죽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잡혀 있는 자신의 식솔들은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과연, 소문은 빠르군. 이곳에서 나를 저지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 허나 모 두 죽어." 초풍비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장강어은은 바람 앞의 갈대처럼 몸이 떨리고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낄 수 있었다. '소문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장강어은은 미칠 것 같았다. 십 년 전 이미 소문으로 만도 그가 얼마나 무서운 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 다. 비록 부딪친 적은 없었지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었다. 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달라진 것은 그가 한번의 실수 를 했고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올가미가 목에 걸렸다는 사실뿐이었다. 한번의 실수가 장강어은의 인생을 바꾸었다. 우연히 만난 소녀, 그녀를 겁탈(劫奪)한 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어찌되었거나 일은 벌어졌고 목격자는 그를 압박했다. 사실 그 소녀는 자신 을 억압하기 위한 제물로 보내진 것이었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당시에 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자신이 철저한 함정(陷穽)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쌀이 익어 밥이 된 후였다. 그를 옭아맨 자는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놈이 의외로 약할 수도 있다. 강호의 소문은 왕왕 과장되기 때문이다.' 장강어은은 이미 벌어진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초풍비만 죽인다면 모든 것은 해결이 될 것이었다. 목격자(目擊者), 그를 압박하는 하는 자는 오로지 초풍비의 목만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후후, 이놈아. 무공이 높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아느냐? 네놈이 조금 전 일수(一手)에 죽은 제자들을 보니 네놈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겠 다마는 이제 재롱은 끝내고 어르신의 도에 제물이 되어야겠다." 말을 마친 장강어은이 몸을 뒤트는가 싶더니 한순간 그의 입에서 일 성의 호통이 터져 나오고 가는 도신을 가진 세도가 허공을 갈랐다. "일월도(日月刀)!" 쉬이잉! 장강어은의 손에서는 부상에서 창시되고 천하를 노렸다는 도법이 전개되었 다. 부상을 주름잡은 막부의 도법이 이도류(二刀流)였다면 그와 버금갈 수 있는 도법은 오직 일도류 밖에 없었다. 장강어은이 시전한 도법은 일도류 중의 하나로 한 번도 실패가 없었다는 도 법이었다. 부상의 도법이 어떻게 그에게 전해졌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적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장강어은에게는 중요했다. 부상을 주름잡았다는 일월도는 위력이 있다고 하기보다는 날카로웠다. 손가락을 두 개 겹친 것처럼 가늘고 얇은 도신이 연속해서 일곱 번을 쓸어 갔고 순식간에 초풍비의 옷에는 도가 스치고 지나간 흔적이 새겨졌다. 놀라 만치 빠를 쾌도(快刀)였다. 초풍비는 황급히 물러섰다. 펄렁! 초풍비의 몸에서 조그만 천 조각이 떨어졌다. 오른쪽 소매에서 잘린 옷 조각이 하늘하늘 날려 떨어졌다. 살벌한 분위기와 는 어울리지 않게 가을날의 낙엽처럼 부드러운 모습으로. "헛!" 초풍비의 입에서 바람이 밀려나왔다. 주르르르― 그의 가슴에 길게 베어진 옷 사이로 방울방울 핏방울이 맺혔다. 미처 피하 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공할 도법이었어. 만약 한치만 깊었다면 심장을 다칠 뻔했다.'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만약 살갗을 뚫고 두 치만 들어갔다면 그의 심장은 밖으로 드러나 강바람을 느끼고 말았으리 라. 비록 선공(先攻)을 내주기는 했지만 초풍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 동안 실전은 없었다 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공을 연마했고 사냥으 로 몸을 단련했기에 실전에 버금가는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초풍비가 짧은 생각을 하며 몸을 뒤트는 사이에도 장강어은의 세도는 수십 개의 그림자를 뿌리며 그의 전신요혈(全身要穴)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죽여주마. 네놈만 죽이면 나는 새로운 영화(榮華)를 창조할 수가 있다." 초풍비의 가슴을 파고드는 장강어은의 세도가 번개처럼 느껴졌다. 세도는 초풍비의 가슴을 쪼갤 듯이 한 자나 늘어나는 듯 보였다. 그대로 서 있기에는 절대절명(絶大絶命)의 순간이었다. 초풍비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예리한 도를 보며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 반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핫!" 힘찬 고함과 함께 그의 검이 앞으로 두 자나 늘어났다. 아니, 늘어난 듯 보 였다. 단순한 동작으로 보이지만 무서운 내공이 담긴 것이었다. 그가 십이성의 내공을 반검에 심는다면 막을 수 있는 자를 찾지 못할 것이 었다. 십 년 전에도 초풍비는 검에 내공을 심어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 은 그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익힌 검법만으로도 능히 모든 적을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풍비가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 다. 더구나 가슴에 상처를 입고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의 반검은 오랬만에 내공을 받아들여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반검이 파르르 떨렸다. 앞으로 뻗어나가던 반검이 사각(斜角)으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의 반검은 완전히 정도(正道)에서 어긋나 있었다. 검이 사각으로 방향을 꺾으며 빠르 고 악랄하게 변했다. 초풍비가 펼치고 있는 검법은 오래 전 해남(海南)에서 배운 검법으로 반드 시 피를 보고 나서야 그 끝을 볼 수 있다는 무서운 검법이었다. 캉! 창그랑! "커흑!"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비명이 울렸다. 두 개의 신형이 오보의 간격을 벌리며 떨어졌다. "우우욱, 내 눈. 내 눈." 장강어은의 입에서 절규가 터졌다. 그의 손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눈물처럼 흘러 내리고 있었다. 초풍비의 검이 스치고 지나간 오른쪽 눈은 붉은 피로 물들 어 있었다. "비열한 놈, 눈을 베다니." "흥, 네놈이 나이를 먹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눈을 벤 다." 초풍비는 빈정거리는 말투를 흘리며 한 발을 옮겨 장강어은의 앞으로 다가 섰다. 그도 온전하지는 못해 어깨 언저리가 붉게 물들었다. 초풍비가 입은 상처는 아주 미미했다. 설사 그런 상처가 백개는 더 만들어 져도 초풍비의 행동에 제약(制約)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흥, 아주 죽여주마. 네놈을 너무 얕보았다만 이제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 이다." 장강어은이 발악을 떨었다. 눈에서 흐른 피가 입술을 적시고 턱에서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손은 중풍(中風)에 걸린 것처럼 떨렸다. '두렵다.' 장강어은의 턱이 덜덜 덜렸다. 겉으로야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고 냉정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가슴 밑에서 부터 솟구쳐 오르는 두려움을 완전하게 지워버리기는 역부족이었다. "마음대로. 이제 그만 놀고 네놈을 죽여주마." 초풍비가 한 발 한 발 거리를 좁혔다. '만만한 놈이 아니다. 놈에게 당한 것은 실수가 아냐. 놈은 강하다. 소문만 큼 무서운 놈이야. 검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놈이다.' 장강어은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삼십 년의 긴 세월동안 강호를 헤매었다. 많은 무인들과 겨루었고 많은 적 을 죽였다. 작금(昨今)에 이르러는 세도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자부하 고 있었다. 그가 거느린 장강수풍단도 성세(成勢)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이 뛰었다. 그토록 가슴이 뛴 적은 한 번도 없던 일이었기에 그의 얼굴이 상기 되었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어쨌든 강해야 싸울 맛이 나는 것 아니겠어." 장강어은은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중얼거리며 자신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피가 주르르 흘렀다. 그의 오른쪽 눈은 반검에 상처를 입어 보이지도 않았 고 그나마도 피가 흘러 진한 피비린내가 코로 스며들었다. "크으으으으!" 장강어은은 자신의 손으로 눈알을 후빈 후 잡아 뽑았다. 이미 초풍비의 검 에 상처를 입어 눈의 기능이 상실(喪失)되어 있으나마나한 상태였다. 그의 손은 입으로 다가갔고 망설임도 없이 눈알은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눈알이 빠진, 퀭한 눈두덩이 을씨년스럽게 사방을 훑었다. 우지지직― 장강어은은 자신의 눈알을 씹어 삼켰다. '징그러운 늙은이로군.' 주위를 둘러쌓고 있던 장강어은의 부하들도 몸서리를 치며 추춤추춤 물러났 다. 수십 년 동안 장강어은을 따랐지만, 또한 잔인한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도(領導)했던 자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있었다. "흐흐흐흐, 오랜만에 맘에 드는 놈을 만났군, 각오해라, 너를 죽여 버릴 테 다." "후후후. 누구 마음대로. 오늘 이곳에서 죽는 자는 내가 아니라 네놈이다." 초풍비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번쩍! 검이 태양을 받아 빛을 반사시켰다. "받아라. 일월도." 장강어은이 몸을 날렸다. 눈앞에 도를 세우고 제비가 날 듯 바람같이 달려들었다. 오로지 공격. 죽음 을 도외시 한, 상대를 죽이기 위한 일도필살(一刀必殺)의 도법이 펼쳐졌다. "흥. 이제 네놈의 수법은 다 알았다." 초풍비의 몸이 섬전(閃電)처럼 다가갔다. 몸을 숙이며 장강어은의 팔꿈치 아래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검을 내리그었 다. 그의 엉덩이는 바닥에 닿을 듯 내려져 있었고 한 발은 장강어은의 가랑 이 사이로 뻗어나갔다. 깡! 허공에 불꽃이 퉁겨 올랐다. "아!" 장강어은의 부하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접전을 바라보다 비명을 토했다. 그 들은 눈을 부릅뜨고 접전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들던 장강어은의 세도가 초풍비의 검에 부딪치며 부러졌 다는 것을. 두 개의 병기는 가슴높이에서 부딪쳤다. 병기가 부딪친 순간 장강어은이 휘 두른 도는 부러지며 검에 퉁겨져 주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장강어은의 비명이 울렸다. 그 뒤로 초풍비의 검은 다시 장강어은의 몸을 그었다. 촤촤촤! 장강어은의 몸에서 흐른 피가 폭포가 되어 흘렀다. 복부가 갈라지고 희끄무레한 기름기가 벌어지고 피에 섞여 창자가 밀려나와 갑판 위에 늘어지기 시작했다. 갑판이 붉은 선혈로 물들었다. 장강어은의 몸은 서 있었으나 사지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분수 처럼 솟구치는 피와 복부에서 피를 따라 빠져 나오기 시작한 창자뿐이었다. "빌어먹을!" 초풍비는 낮게 부르짖으며 반검을 허공에 휘둘러 반검에 묻은 피를 흩뿌려 내었다. 이어 서둘지 않고 반검을 허리에 맨 요대에 밀어 넣었다. 초풍비의 반검이 요대를 찾아 들어갔을 때 장강어은의 몸이 두 개로 갈라졌다. 정수리에서 갈라지기 시작한 몸은 몸의 군데군데 빗방울을 맺혔고 급기야는 사타구니까지 수박이 쪼개지듯 두 쪽으로 갈라졌다. 파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쿵! 피가 솟구친 후 장강어은의 나뉘어진 몸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몸에서 내 장(內臟)이 콸콸거리는 소리를 내며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이층 갑판으로 오르던 몇몇의 수적들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들은 수적이 아니었다. 수적으로 위장한 장강수풍단의 무인들이었다. 아니, 장강어은이 심혈을 키운 부하들이었고 제자들이었다. 우루루루― "살객(殺客)이다. 도망가자!" "단주가 일 검에 당했다. 철수해라." 미친 듯 달려가는 그들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초풍비의 몸이 물찬 제비처럼 허공을 날아 수적으로 위장한 장강수풍단의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빼 들었는지 손에서는 반검이 눈이 달린 듯 수적들의 몸을 베어갔다. 방어도 없었다. 오로지 미친 듯 흔들어대는 검기(劍氣)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초풍비는 주 위를 감싸고 있던 장강수풍단 무인들과의 사이를 급격하게 좁혀갔다. 초풍비의 검은 허공에 무수한 빛의 조각을 만들었고 날카로운 손톱의 그림 자는 무차별 휘둘러져 허공의 공기를 산산이 찢어 발겼다. "크아아아! " "피해라. 어서 도주하라!" 먹이를 노리는 듯한 독수리의 모습이 저러할까? 먹이를 노리고 거센 물결을 차는 흑악(黑鰐)의 포악함이 그리도 비슷할까? 장강수풍단 무인들의 눈에 보이는 초풍비의 모습은 바로 악마, 그 자체였 다. 단주가 목적을 달성하리라 생각했던 장강수풍단의 무인들은 급작스러운 변 괴에 정신을 수습할 여유도 없었다. 자신들의 목으로 다가오는 검기와 손톱 의 그림자를 막아내기에도 정신이 없는 듯 그들은 서로 얽히고 뒹굴었다. 초풍비는 자신의 앞에 엉거주춤 물러서는 무인들을 향해 순간적으로 손가락 을 접었다 폈고, 검에서는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따―다―당! 초풍비의 손톱은 정확하게 수적들의 얼굴을 긁었다. 수적들은 미쳐 피하지도 못하고 얼굴이 찢겨지며 허연 뼈가 드러났다. 그것도 일순, 그들의 얼굴은 붉게 물들고 서서히 동체를 바닥에 눕혔다. 분수공(分水功)의 무서운 위력이었다. 소림의 백지대사가 십이 년 전에 그에게 전수해준 비결로 소림에서조차 익 힌 자가 별로 없다는 박투의 비결이었다. 손을 벌려 가슴을 가르는 악력(握力)이 드러났다. 익히기도 힘들지만 그 위력은 자못 놀라웠다. 후두두두두― 피가 튀었다. "커으윽, 잘못 만났다." "어서 도주해라." 마지막 남은 무인이 신음을 뱉었다. 말을 미쳐 끝내기도 전에 그의 몸은 정수리에서 사타구니에 이르는 피로 그 어지는 선을 그렸다. 휘―익― 초풍비의 몸이 그를 타넘었다, 쿵! 그제야 무인의 몸은 두 쪽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막도막 끊어 진 창자가 뿌우연 김을 뿜으며 밀려나왔다. 초풍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삼층갑판에서 이층갑판으로 이어진 계단을 타고 일층갑판으로 사라졌다. 눈 깜작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휘이익― 풍덩! 살아남은 장강수풍단 고수들이 황급히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뒤에 서 누가 쫓아오는지 황급한 모습으로 허우적거리며 자신들의 배로 황급히 헤엄쳐 갔다 멀어지는 배가 보였다. 수적으로 위장한 장강수풍단의 배가 황급히 노를 저어 유람선에서 멀어졌 다. 장강수풍단의 배는 빠른 속도로 유람선과의 간격을 벌렸다 잠시 후 장강수풍단의 배는 그의 시야에서 희미해져 갔다. 아직도 대도하에 는 물에 빠진 장강수풍단의 무인들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초풍비는 빠르게 이층갑판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의 뒤를 따라 사람들이 이 층갑판으로 몰려들었다. "만세!" "수적선이 물러갔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 * * 어둠은 노인의 입김을 얼려버릴 듯 차갑게 느껴졌다. 노인의 앞에는 무영이 서 있었다. "장강어은이 실패했다는 것을 들었소." "나도 그가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미련한 놈이 화공(火攻)을 전개해 초풍비! 그놈을 물 속에 처넣어라 했더니 만용(蠻勇)을 부렸다." "어르신이 매우 화가 나셨오이다. 원주를 문책할까 두렵소이다. 어떻게 하 면 좋겠소?" 무영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노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무영의 말은 겉으 로 생각하기에는 의견을 묻는 것 같으나 자세하게 되새겨 보면 협박이나 다 름이 없었다. 노인은 지은 죄가 있는지 머리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에 서는 차가운 기운이 안개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준비를 하고 있다. 산장(山莊)이라면 그를 능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어 차피 산장도 손을 떼려 했으니 둘 중 누가 죽어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손해 는 없다,"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의 말로 미루어 보아 초풍비를 상대할 수 있는 준비는 다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초풍비의 행보(行步)를 완벽하게 예측하고 있었 다. 노인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마도 장강어은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다른 방책 이 서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산장이 눈치를 챈 것 같은데 당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겠소?" "어쩔 수 없을 것이야. 그곳에는 초풍비가 찾아야 할 인물이 있지. 다행히 초풍비가 배에서 내렸다 하니 그는 산장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장에 대해서는 그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비추어졌다. 노인은 자신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모를 힘이 무영으로 보내지고 있 었다. '비록 몸을 숨기고는 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자다. 어르신에게 원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만 일개의 범부(凡夫)로 보기에는 눈이 아리다.' 무영은 노인을 볼 때마다 점점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며 사람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노인에게서의 변화는 세월의 변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노인은 점점 치밀(緻密)해 지고 있었다. 실패는 어르신에게 문책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가 벌리고 있는 일은 점차 정교해지고 빈틈이 사라지고 있었다. "좋소! 어르신에게 그렇게 말씀을 올리겠소. 그러나 산장까지도 실패한다면 어찌 하시겠소?"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 어차피 산장은 우리의 손을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조치를 해 놓았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어 차피 확률은 반반이라 생각하는 것이 좋아." 노인은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그렇다는 뜻은 아니었다. 노인의 말은 자신이 개입하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개입할 수가 없 어 모든 것을 장담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무영이 다가섰다. 그가 모시는 어른은 항상 완벽(完璧)을 추구했다. 수십 년 동안 곁에서 지 켜본 어르신이지만 엉거주춤 넘어가는 것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무영이 었다. "만약 산장의 놈이 잘못되어 불기라도 한다면 일이 어찌되겠소?" 무영은 만약의 경우에도 대비하는 심기의 소유자였다. 물론 어른이라는 암 중인(暗中人)이 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무영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 할 사람이었다.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무영을 바라보았다. 눈가에 가는 경멸이 흘렀다. 무영은 분명 노인의 눈에 흐르는 경멸을 보았을 테지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에게 맡겨 두면 되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세가(世家)의 제자 를 준비해 놓았으니...... 그가 초풍비를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입을 다물게 해줄 수 있다." "믿겠소." 무영이 몸을 돌렸다. 어둠이 그의 몸을 가렸다. 무영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는지 온기(溫氣)도 느껴지지 않았고 가늘게 뿜어내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침상에 앉았다. "초풍비! 그는 강호제일의 강자다. 그러나 나는 너를 죽일 수 있다. 우선은 하루도 쉬지 않고 너를 괴롭힐 것이다. 언젠가는 네가 스스로 지쳐 쓰러지 게 만들고 말 것이다." 출렁! 노인이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침상이 무너지듯 비명을 뿌리며 심하게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떨림은 멈추고 노인의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5 페이지: 1/27 자료번호: 260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2 ─────────────────────────────────────── ■ 상견환 제5장-아우를 만나다니 말(馬)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 * * 말은 성시(成市)로 들어서자 고삐를 잡아당기지 않아도 스스로 속도를 줄였 다. 말을 판 노인의 말대로 명마는 아니어도 잘 훈련된 말임에는 틀림없었 다. "멈추어라."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려오며 눈앞으로 덩치가 산만한 자가 퉁겨져 나왔다. 관도가 가득 차는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사내의 손에는 박도가 들려있었 다. 사내는 여간 무겁지 않은 체중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달려오자 지 축이 울렸다. 사내는 큰 덩치가 무색하게 빠른 속도로 마주 달려오고 있었 다. 초풍비는 말고삐를 바싹 죄어 달려오는 자의 몸과 부딧치지 않도록 했 다. "비켜!" 박도를 든 사내가 외쳤다. 그의 뒤에는 전신을 묵의(墨衣)로 감싼 다른 인형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 었다. 한눈에 보아도 덩치가 큰 사내가 묵의를 입은 자에게 쫓기는 것 같았 다. "억!" 초풍비는 달려오는 덩치 큰 사내의 얼굴을 보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황급 히 얼굴을 돌렸지만 사내도 초풍비를 본 것 같았다. 패갑둔 아래로 잘 보이 지 도 않았을 테지만 그가 자신을 몰라보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초풍비는 마음이 급해졌다. "하아!" 말의 배를 걷어찼으나 늙은 말은 빠르지 않았다. 초풍비는 마음이 팥죽이 끓듯 급해졌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았 다. 말이 투레질을 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돈 초풍비는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담붕비는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보같이…… 십 년을 찾아 헤맨 대형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 보다니……' 담붕비의 눈에 번뜩이는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대형―" 담붕비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며 고함을 터트렸다. 뒤따르는 자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분명, 형님이 분명했다. 아니, 십 오 리를 도주했고 갑작스러운 곳에서 형님을 만나리라 생각지 못 했던 까닭에 처음에는 몰라본 것이 당연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을 스쳐 지나간 사람이 분명 대형이라는 사실이었다. '역시 대형이다. 눈 한번 깜짝한 것 같은데 벌써 삼 백여 장을 달려나가다 니…… ' 담붕비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십 오 리를 전력질주(全力疾走)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보지 못할 것 을 본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찾던 사람을 본 탓이었다. "멈추어라!" 담붕비는 감탄하며 그림자가 사라진 쪽으로 신법을 전개하려는 찰라, 고함 소리와 함께 유기성(柳起星)이 앞을 막아왔다. 그는 전신에 칠흑처럼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유기성은 비하산장(肥荷山莊)에서부터 자신을 추적해온 놈들의 우두머리였 다. "이놈! 어딜 도망가느냐?" 유기성의 운두대도(雲頭大刀)가 명멸하는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비켜! 나중에 다시 올 테니까." "미친놈. 이곳이 아무 때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말로는 안되겠군." 담붕비의 우수(右手)가 칠흑처럼 검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유기성의 얼굴이 백지처럼 탈색되었다. 눈이 경악으로 퉁방울 같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입은 마음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탈명수(奪命手)?" "흐흐. 눈깔이 썩은 놈은 아니네." 담붕비는 차갑게 웃으며 우수를 밀어냈다. 번쩍! 검은 묵기류(墨氣流)가 순식간에 유기성의 면전으로 덮쳐왔다.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기는 했으나 유기성은 피하지 않고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파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유기성은 차라리 몸에 흐르는 내가진기 를 끌어올려 호신벽(護身壁)을 이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꽝! 폭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유기성의 신형이 휘청하며 한순간에 오보나 물 러났다. 그의 발 앞에 깊은 족인(足印)이 파여 있었고 마지막 족인에는 붉으스레한 기운이 돌았다. 어두워서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피의 흔적이었다. "크윽!" 유기성은 답답한 신음을 토해내며 신형을 세웠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그냥 간다만, 다음에 만나면 염라국(閻羅國)에서 최고 로 좋은 방을 알아봐 주마. 흐흐" 담붕비는 유기성을 훌쩍 뛰어넘어 바람처럼 사라진 그림자 뒤를 따라 달려 갔다. 일장을 맞고 비틀거리던 유기성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담붕비가 멀어 져 가는 것을 보았다. * * * 와자작! 주루의 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번개처럼 황영(黃影)이 날아 들어왔다. 술을 마시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한결같이 눈을 돌려 나타난 자를 바 라보았다. 주객들의 눈에 놀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구 척의 키에 이 백 근 이상 나갈 것 같은 몸을 지닌 털북숭이 괴인이었다. "뭘 봐." 담붕비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손에 아직도 박도가 들려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모두의 시선 이 박도에 머물렀다. 챙그랑! 담붕비는 박도를 집어던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박도가 청명하게 울었다. 그제야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담붕비를 쳐다보던 주객들이 눈을 돌렸다. 담붕비는 사방을 둘러보다 박도를 다시 들어올려 자신의 허리춤에 질러 넣 고는 초풍비를 발견했는지 망설임 없이 직선으로 다가왔다. "흐흐! 설마 못 찾으리라 생각하셨소?" 담붕비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초비풍은 잠시 난처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 불행하게도 나를 찾았구나." "불행! 그래 말 잘했소. 불행이지." 담붕비의 목소리는 격노(激怒)에 젖어있었다. 그는 초풍비를 형제로 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해가 깊어 골수에 박힌 것이 분명했다. 초풍비는 한참동안 머뭇거려야 했다.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를 이해시킬 아 무런 방책이 없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句句節節)변명을 늘어놓기도 싫었 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담붕비는 무작정 다가와 초비풍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몸을 이기는 의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너무도 감정이 격했는지 담붕비 는 바닥을 발로 쿵쿵 굴렀다. 이층의 주루가 무너질 듯 출렁거렸다. "아우, 조금만 참아라.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우! 내가 왜 당신 아우야! 말 한마디 없이 우리를 버려 두고 계집을 껴 안고 잠적한 당신에게 형제가 있었나?" "미안하다. 할 말이 없구나!" "시끄러워! 당신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어. 당신을 믿고 따르던 형제 들에게 일언반구(一言半句)없이 떠난 당신이 형제를 운운해. 그럴 수 있는 거야?" 담붕비의 괄괄한 목소리가 나중에는 고함으로 변해갔다. 주청에 앉아 술을 홀짝거리던 주객들이 분위기가 험악했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취객 중에는 담붕비의 고함과 씩씩대는 모습에 기가 질렸는지 황급히 술값 을 치르고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계산대의 주인은 인상을 쓸 뿐.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자의 상판으로 보아 괜히 참견하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풍비는 인상을 구긴 채, 묵묵부답(默默不答)으로 일관하며 담붕비의 고함 소리를 듣고 있었다. "왜! 말이 없소, 그 잘난 입으로 변명이라도 해보지?" 초풍비는 대꾸 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짧은 상념이 스쳤다. 모든 것이 눈발이 날리는 것처럼 조각조각 끊어진 채로 머리를 스쳤다. 초풍비는 입을 엷지 않았다. 담붕비가 다그치고 주탁을 주먹으로 내리쳐도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초풍비로는 어찌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변 명으로 들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낳았다. "말 좀 해보라니까?" 담붕비의 고함 소리에 점소이가 달려와 뭐라 말하려다 담붕비의 얼굴을 보 고는 사색이 되어 달아났다. 누가 보아도 담붕비의 모습은 야차(夜叉)였다. 그렇다고 초비풍의 모습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초풍비의 모습도 산적과 다름없었다. 올이 성긴 마의는 입는 자가 드물었고 팔목과 발목에 찬 토시는 시진에서 보기가 힘든 복장이었다. 더구나 허리에는 소를 잡을 때 사용되어 정수리를 내리치는데 어울릴 것 같은 육도(肉刀)처럼 잘린 반검까지 꽂혀 있으니.. .... 점소이의 놀라 달아나는 모습에 초풍비가 불쑥 물었다. "그래! 형제들은 잘 있느냐?" "술이나 퍼 드쇼." 초풍비의 질문에 담붕비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했다. "후후. 녀석. 말하는 것도 여전하구나." "웃지 마시오. 아직 화가 안 풀렸으니까?" "미안하다. 나중에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설명할 테니 그만 화를 풀어라. 붕비!" "흐흐흐흐!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우선은 형제들을 모아놓고 당신을 대형 으로 인정할 건지 논해야 할거요." 담붕비가 초풍비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눈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 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술 더 가져와." 담붕비의 턱짓에 눈치를 보던 점소이가 비쭉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러나 단붕비의 험악한 모습을 보고는 이 보(二步) 앞에서는 다가서지 못 하고 있었다. 초풍비가 보아도 담붕비의 몰골은 사람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곰처럼 둔 한 몸에 황소 같은 눈, 더구나 구 척에 이르는 키에 허리에 걸린 삼척 길이 의 박도는 그야말로 도살장(屠殺場)의 살도부(殺屠夫)와 다를 것이 없었다. "쯧쯧! 멍청하게 생긴 놈아! 돌아보긴 뭘 돌아봐? 너 말이야, 너." 담붕비의 혀차는 소리에 점소이는 더욱 죽겠다는 표정으로 초풍비를 바라보 았다. 눈에는 애원이 가득했다. 이러 지도 저렇게 하지도 못하는 모습이었 다. 초풍비는 점소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웃어주는 수밖에. 객잔의 후원에 있는 객방(客房)으로 들어섰을 때, 담붕비의 분은 여전히 풀 리지 않은 것 같았다. 방안에는 술상이 놓여져 있었다. 초풍비가 미리 시켜 놓았던 것이었다. "그 장원에는 왜 들어갔느냐?" "그 장원에 둘째 형님과 비슷한 사람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서요." "둘째가? 아직도 형제들에 대한 정이 식지 않았구나."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다 저물었어." 담붕비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었고 상스러웠다. 초풍비는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그것으로 담붕비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초풍비는 지난 십 년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갔다. 십 년이란 세월이면 잊을 만도 하건만 담붕비는 전혀 잊지 못하고 초풍비를 찾아 헤맨 것 같았 다. 겉으로야 씩씩거리고 있지만 눈가에 닭똥처럼 그렁한 눈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형제들은 잘 있느냐?" "둘째형을 만나면 조심하시오. 항상, 죽이고 말 거라고 떠들고 다녔으니까. " "술이나 마시자." 담붕비는 알았다는 소리도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벌컥거 리는 소리가 들리고 담붕비의 목으로 술이 넘어갔다. 생긴 것만큼이나 거친 모습이었다. 초풍비는 오랜만에 아우를 보니 스스로 목에 겨워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만 있었다. "천천히 마시거라." "참견하지 않아도 내 알아서 마실 거요." 담붕비는 괜히 심통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형님! 헝! 헝! 헝!" 담붕비의 울음소리는 객방의 벽을 울리고 모자라 아예 난장판으로 만들었 다. 갑작스러운 울음소리는 벼락이 치는 듯했다. 덩치만큼이나 큰 울음소리 였다. 그는 술이 몇 꼭지 돌자마자 갑자기 몸을 돌려 초풍비를 껴안고 목놓아 통 곡을 터트린 것이다.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소리에 초풍비도 어쩔 수 없이 허둥거려야 했다. "아우, 왜 이러나?" "형 같으면 여기에서 그치겠어. 날 그냥 나둬! 그냥 울게. 어어엉!" 담붕비는 할말을 다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소리 에 객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장사치며 유람객들이 문을 열었다. 그들은 한밤중에 들리는 돼지 잡는 듯한 울음소리에 잠이 깬 것이 부당하다 는 듯 거친 음성을 토했다. "거, 잠 좀 잡시다." "누가 말렸나. 쓰러져 코나 처박던지 계집 엉덩이나 두드려! 참견하지 말 고." 담붕비는 욕설을 터트리면서도 할말을 아끼지는 않았다. 오래된 습관은 십 년 전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역시 담붕비로군. 아우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초풍비는 다가가 울고있는 담붕비의 몸을 껴안았다. 담붕비의 덩치가 초풍 비의 두 배는 되어 보였지만 그런대로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대나무 잎에 앉은 잠자리와 같이 키 차이가 나기는 했어도 그들의 모 습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십 년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자! 그만하고 이야기나 듣자." "힝! 그럽시다. 형님." 한바탕 울고 난 담붕비는 조금 풀린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담붕비는 십 년 동안 이를 갈며 살아왔다. 언제고 대형을 만나게 된다 면 자신을 버리고 홀연히 떠난 대형을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대형을 만났을 때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혼잡(混雜)한 인간 세상에 혼 자 처박아 두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형은 홀연히 사라졌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원망이 많았겠구나?" 팍! 담붕비는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렇소. 난 하루도 대형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소. 처음에는 그리움으 로. 나중에는 당신을 죽일 목적으로 말이요." "그리도 한이 깊었더냐?" "한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죽여버리고 싶었소." 말을 받으며 초풍비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담붕비의 잔에 부지런히 술 을 따랐다. 술을 따르는데 그치지 않고 초풍비도 기다리지 않고 술을 마셨 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잔이 아니라 술병이었다. 한식경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둘은 거나해지고 얼굴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그래,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려줄 테냐?" "휴!" 담붕비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 언뜻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형님의 갑작스러운 실종(失踪)으로 한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었소." 담붕비는 말문이 열리자 안색을 바꾸고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말을 이어갔 다. 오지회라 이름 붙여진 방파(邦派)는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방파였다. 비 록 오인으로 이루어진 무파이기는 했으나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고 하고 자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오지회는 강했다. 그들에게 무례를 범하면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었다. 특히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남지 않는다 하여 강호인들은 극히 두려 워했었다. 그런 오지회의 형제들에게 느닷없이 날아든 대형의 서찰은 그야말로 마른하 늘에 날벼락이었다. 하늘같이 믿었던 대형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찾지 말라 는 한 통의 서찰뿐이니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그들은 대형을 찾기 위해 중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들은 약속된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누구도 대형의 소식을 알 수 없었 다. 중원은 너무나 넓은 땅이었다. 그들이 이년동안이나 중원을 뒤졌으나 그들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더욱 많 았다. "형님, 대형은 우리를 버린 것 같소. 우리도 대형을 포기합시다." 가장 분노를 터트렸던 사람은 막내인 담붕비였다. 챙그랑―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혈부(血斧)를 집어던졌다. 더 이상 강호에서 병기를 쓰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대형이 늘 칭송해마지 않았던 혈부였지만 대형이 사라진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우, 너무 분노하지 말아라. 대형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넷째인 귀검수(鬼劍手) 혁천련(赫天憐)이 그를 말렸다. 그의 얼굴에도 암울한 빛이 흐르고 있었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대형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모두 대형을 믿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혁천련은 대형의 입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흥! 형님은 분하지도 않소." 담붕비가 쏘아붙였다. 머쓱해진 혁천련이 그의 손을 놓고 물러났다. "오제(五弟)의 말이 맞다. 설사 대형이라 해도 이것은 용서 못한다. 이건 그 동안 우리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다." 무심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혼혈마장(混血魔掌) 도우선(都遇璇)이 음울한 목소리를 뿌렸다. 대형이 사라진 지금 그의 역할은 막중한 것이었 다. 도우선은 그 동안 오지회의 둘째형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해왔었다. 대형 을 보필하고 아우들을 추스르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대형이 사라져버리자 그의 입장은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약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오지회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또는 대형이 없었다면 그가 대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난, 대형을 만나게 된다면 배신의 허울을 벗겨 버릴 거다. 그를 죽이겠어. " 이빨 시린 분노였다. 도우선의 목소리는 가늘고 낮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말이라는 것 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대형을 존경해마지 않았던 도우선이었다는 것을 아는 형제들은 감히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불거지기를 좋아하는 담붕비도 입을 열 수가 없 었다. "우리 오지회는 당분간 활동을 중지한다. 나는 그 동안 대형을 찾겠다." 도우선은 차갑게 말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꽁꽁 얼어있는 느낌이었 다.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십 년을 이어온 우정과 형제간의 사랑에 금이 가 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 난 오지회에 남을 거야." 혁천련이 거부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형을 좋아했기에 오지회를 떠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 형이 나타날 때까지 오지회에 남아있겠다고 그는 자신을 추슬렀다. 모두들 그의 생각을 모르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는 남아라. 대형을 죽여 목을 가져다 보여주마." 도우선이 으르렁거렸다. 그들 형제들은 각자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담붕비는 어정쩡한 상태로 형제들 과 헤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물어보나 마나 대형을 만나기 전의 상태로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하한 일이었으므로...... * * * "그나저나...... 형제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왜 찾으려 하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형제들은 형님을 죽이려 할거요. 특 히 둘째 형님은 결코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을 거요." "그래도 만나야 해." 초풍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칼로 무를 자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칼날 같았기 때문에 담붕비는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담붕비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입을 열었다. "셋째 형님은 산채(山寨)로 들어갔소." "산채로?" "그렇소. 그곳에서 애송이들을 데리고 병정놀이를 하는 중이요. 석 달 전에 만났는데 비린내 나는 계집 하나를 얻어서 잘 삽디다. 어린애 장난감 같은 애송이들이 셋째 형님을 신으로 알고 있습디다." "그럴 만도 하겠지." 초풍비가 심난하게 웃었다. 셋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셋째는 검문산(劍門山) 아래의 우풍령(牛風嶺)을 넘던 초풍비를 털기 위해 덤볐다가 그의 동생이 된 자였다. 만약 그가 초풍비를 만나는 일이 없었다 면 녹림(綠林)에서도 제법 하는 도둑이 되었을 것이다. 초풍비는 가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셋째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셋째에게는 녹림이 어울리는지도 몰랐다. 그는 녹 림에서 자라고 녹림의 밥을 먹던 산중인(山中人)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거부한다 해도 필요했다. "둘째는?" "내가 둘째 형님을 만나본 지 이미 오 년이 넘었다고 말한다면 믿겠소?" "오 년씩이나? 설마, 그는 형제들에게 섭하게 대할 사람이 아닌데......." "사실이오." 담붕비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더 이상의 부언설명도 없이 그는 입을 다 물었다. 초풍비는 담붕비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형제의 의가 두터운 담붕비가 그렇게 말했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담 붕비의 말은 둘째가 오 년 동안 실종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갈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느냐?" "물론이오. 형제들이 둘째 형님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소. 그러나 근래 조그마한 단서를 잡기는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아서." "무슨 단서?" "얼마 전에 비하산장에서 둘째형의 표식이 발견되었소. 그러나 나는 그곳에 서 죽을 뻔하고 겨우 목숨을 구했소. 제길! 예전 같으면 발에 밟히지도 않 았던 놈들인데...... 형님이 없으니 무림방파들이 우리 오지회를 아주 호구 로 보고 있소."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비하산장에 들어가 보아야겠군." "비하산장의 경비망은 놀랍소. 형님이 비하산장의 경비를 뚫을 수 있겠소." "막으면 모조리 죽인다." 초풍비의 말에 담붕비가 움찔했다. 한 번도 거짓을 말하지 않은 대형이었다. 그가 한다면 하는 것을 그는 수차 에 걸쳐 보아왔기에 코로 스미는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초풍비는 습관적으로 가볍게 어깨를 추슬렀다. "비하산장은 만만히 볼게 아니오." "나는 목적이 서면 무엇이든 한다. 죽이고자 한다면 못 죽일 자가 없고 부 수자 한다면 천하에 부수지 못할 게 아무 것도 없어. 설사 황제(皇帝)가 있 는 황궁(皇宮)이라도 말이야." 초풍비가 의외로 조용한 음성을 토했다. 조금 전에 열기가 넘치던 목소리와 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날이 밝기 전에 내가 비하산장에 가보도록 하겠어. 그건 그렇고 넷째는?" "넷째 형님은 지금 셋째 형님하고 있을 거외다. 두 달 전에 그리로 간다고 했으니 다른 곳으로 새지는 않았을 거고." 담붕비는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지 코를 벌름거렸다. 그의 눈에도 알게 모르 게 자랑스러움이 넘쳐 났다. * * * 노인은 침상에 앉아 무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무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과 어르신의 이야기를 전달 (傳達)하는 데는 전연 문제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산장 부근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물론이오?" "그렇다면 일이 수월하겠군." 노인의 표정없는 얼굴에 눈만 반짝였다. 아마도 노인은 죽게 된다면 변하는 것은 눈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설사 죽어도 표정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얼 굴이었다. 노인은 무영을 바라보았다. 마치 '나에게 알려주어야지' 하는 듯한 표정이 었다. 무영이 몸을 돌렸다. 그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무영은 몸을 돌렸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참동안 노인을 바라보던 무영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노인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인간의 감정은 완전히 배제(排除)하고 오로지 어 르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제길, 얼음 같기는!' 노인은 무영을 볼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무표정하고 창백하여 무영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 다. "좋지 않은 소식이 있소." "나도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노인은 무영을 바라보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치 기선(機先)을 제압하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영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어, 먼저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는지 손을 펼쳐 무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무영은 노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노인치고는 깨끗한 손이었다. 손등의 주름 살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노인의 손답지 않게 팽팽했다. 그것으로 보아 노인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 무영의 눈에 들어 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무영은 일찍부터 노인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인의 진정한 정체도 무영은 알고 있었다. "먼저 말씀을 하십시오." "좋아. 초풍비의 무공이 십 년 전에 비해 가일층(加一層) 강해진 것 같다. 동정어은을 따라갔다 살아 나온 자들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과거의 초풍비 같지 않게 잔인(殘忍)한 손속을 보이고 있다. "그건 소식이 될 수도 없소, 그런 것은 원주께서 알아서 할 일이요." "그것은 맞는 말이요." 노인은 시큰둥한 무영의 말에 작은 분노가 이는 지 손이 떨렸다. 너무도 미 세하여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떨림이었다. "오지회의 막내라는 놈이 산장 근처에 나타났소." "막내라...... 담붕비?" "그렇소." 무영은 입을 열며 노인의 눈에서 자신의 눈을 떼지 않았다. 노인의 눈이 가 볍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영은 무시했다. 노인의 사정을 모두 들어주다가는 어르신의 일에 차질(蹉跌)이 올 것은 뻔 한 일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혹은 초풍비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소. 분 명한 것은 단붕비의 출현은 변수(變數)라는 것이요. 우리의 계산에 그는 들 어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물론, 그를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십 년만에 나타나다니.... ..." 노인은 짐작하지 못했다는 말을 흘렸다. 갑자기 나타난 담붕비에 대해 그들 은 아무런 대책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사실 오지회는 근 십 년간 활동(活動)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담붕비가 나타 났다는 사실은 그들 모두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누군가 나타나리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어둠 속으로 몸을 묻었던 담붕비가 불쑥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결과였 다. 그들 모두의 안전(案前)에 담붕비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초풍 비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담붕비는 그들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면밀하게 조사를 하고는 있지만 담붕비가 나타났다 는 것이 썩 좋은 일은 아니지." 노인은 어둠 속에서 눈을 끔뻑거렸다. 담붕비의 출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 던 일이었다. 설사 산장이 희생양(犧牲羊)이라 해도 담붕비의 출현은 놀라 운 것이었다. 무영은 노인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무영 역시 표정의 변화는 일어 나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노인은 침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을 뿐 달리 어 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책은 있소?" "없소. 다만 그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이 행운(幸運) 일 뿐이요." 무영은 어떤 해결방안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할 말을 다하고 있다 는 생각뿐이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6 페이지: 1/42 자료번호: 261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2 ─────────────────────────────────────── ■ 상견환 제6장-다시 찾은 형제들 유기성은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한심스러웠다. '빌어먹을......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만나기만 하면 그냥.......' 유기성은 심한 굴욕감에 젖어있었다. 한때는 강호에서 묵의천사(墨衣天邪)라 불린 적도 있었던 유기성이었다. 작금에 이르러 그가 몸을 담았던 문파가 무너지고 계집을 강간(强姦)한 죄 가 있어 숨어 지내고 있지만 한때는 무림에서도 한다하는 무인이었다. 지금 도 유기성이라 하면 두려움을 느끼는 강호인도 제법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손속이 잔인했던 탓이었다. 그의 이름에 따르는 외호가 말해 주듯 그가 지닌 사기술(詐欺術)과 사람을 암습하는 기술은 천하에서 손가락 을 꼽아 주었었다. 그는 화강암을 깎아 만든 석로(石路)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체 머리를 조 아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혹이 나고 붉어진 것으로 보아 머리로 땅을 수 차래나 박은 것 같았다. 그의 앞에는 열두 개의 층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중앙으로는 붉은 비단이 펼쳐져 단위의 전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전각의 앞, 정확하게 말하면 붉은 비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자단목(紫檀木) 으로 정성 들여 만든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는 황금색이 빛나는 천이 치장되어 있어 희미한 횃불을 반사시켰다. 의자에는 한 중년인이 거만스러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 상체를 숙인 모습으 로 앉아 있었다. "정말입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미친놈, 네놈에게 총관(總管)의 자리를 준건 네놈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장 원을 지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었기에 이나마 막을 수 있었습니다." 유기성은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토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범 벅이 되어 보는 이의 눈에 안쓰러움을 넘치게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안쓰럽다 거나 불쌍하다는 표정을 짖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들린 횃불만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불티를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유기성의 명을 받던 비하산장의 무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한 표정으로 유기성을 바라보았다.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이었다. "머저리 같은 놈!" 팍! 중년인은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팔걸이의 한 모서리가 뭉개졌다. 유기성은 더욱 머리를 숙였다. 그는 자신에게 호령을 내지르는 자가 지닌 능력(能力)을 알고 있었다. 자신 이 날고기는 재주가 있다손 치더라도 함부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자였다. 그의 눈길이 멈추는 단위의 높은 곳에서 분노를 뿌리는 자는 비하산장의 주 인이었다. 천수마검(千手魔劍) 도홍진(都鴻盡)! 천 개의 손을 가졌다고 알려진 도홍진은 별호만큼이나 암기에 능했고 한 자 루의 날렵한 면검으로 휘두르는 십 팔 검을 막을 수 있는 자는 흔하지 않았 다. 따자고 보면 유기성이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 있기는 했지만 자신도 그의 십 팔 검에 감복해 비하산장에 몸을 담게 되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하여 장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 다." 그는 납작 엎드렸다. 유기성은 처세술에 일가견이 있는 자였다. 무공도 남다르지는 않지만 그나 마 비하산장의 총관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무공보다 처세술 덕분이었다. 한 자루의 운두대도를 펼치는 도법도 쓸만하지만 그의 처세술은 그의 도보 다 몇 배는 강했다. "그래, 몇 놈이나 거꾸러졌느냐?" "미리 말씀 드린 데로 놈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곰처럼 무식한 놈이었습 니다. 그러나 놈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도홍진의 성난 일갈에 유기성은 다시 허리를 접었다. 얼굴조차 마주치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도홍진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발아래 엎드린 유기성을 가소롭다는 눈 초리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흐르는 것은 경멸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 나는 몇 놈이나 거꾸러져 돼졌느냐고 물었다?" "도합 열 둘입니다. 모두 현장에서 직사했습니다." 우두두둑― 도홍진의 손 마디마디마다 관절(關節)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섬뜩하게 만드는 소리여서 곁에 서 있던 무인들의 횃불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의 몸에서는 은연중 사람을 질식(窒息)하게 만들고도 남는 살기가 풀풀 날렸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살기는 모두 유기성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빌어먹을 놈! 그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모두 몰살(沒殺)을 시킨단 말이냐?" 도홍진의 분노는 입김이 서리도록 신랄한 것이었다. '내가 언제 그들을 몰살시켰어. 백 명이나 되는 하급무사들 중 겨우 열두 명이 죽은 걸 가지고 트집을 잡다니.......' 유기성은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오려 했지만 감히 얼굴에 나타낼 수는 없었 다. 도홍진의 심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화가 머리까지 치밀면 설사 자신의 마누라라도 목을 비틀 만큼 잔악(殘惡) 한 성격을 지닌 도홍진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고 총관이랍시고 주저앉아 개 처럼 밥을 얻어먹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때가 많은 유기성이었다. "더구나 수년 동안 만든 진을 한순간에 망가뜨려. 그리고 뭐 탈명수를 펼치 고 달아났다고...... 세상에 누가 네놈 말을 믿을 수 있겠어. 탈명수는 이 미 십 년 전에 담붕비가 사라지며 없어진 무공이야." 마지막 말은 숫제 빈정거림이었다. 그러나 유기성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 다. 자신도 눈으로 보고 나서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으니 보지 않은 다음에야 누구라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담붕비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래 전에 오지회는 붕괴되었고 그들 모두는 강호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누구인지는 파악이 되었느냐?" 유기성은 이번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그가 누구인 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인지는 기억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막연하게 주저앉아 욕만 먹기에는 가슴에서 불만이 치솟아 올랐다. 참을 수 없었는지 유기성은 제법 긴장을 가라앉힌 목소리를 토했다. "생김새는 기억을 합니다만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놈이냐?" 도홍진의 물음은 아예 빈정거림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 의문이 들어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 유기성인지라 말을 그치지 않았 다. 시간이 지나며 머리를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마처럼 둔하게 생겨먹은 놈입니다. 박도를 휘둘렀는데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누구를 구하러 온 것 같았습니다. "사람을 구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놈은 우리에게서 냄새를 맡거나 무언가를 구하려 숨 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도홍진은 잠시간 머리를 숙였다. 간혹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감이 잡히기도 하는 모양 이었다. 얼굴에서는 희미한 웃음이 안개처럼 번졌다. 웃음은 이내 마른 짚이 바람에 번진 불에 타고남은 불씨처럼 수그러들었다. 모여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그가 잔혹하리 만치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는 것 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신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도홍진의 입가에 의문이 걸리며 눈이 도르르 굴렀다. 말을 하려다 끊은 것 이 이상했는지 유기성이 얼굴을 들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혹시 그들이 지하 뇌옥(牢獄)에는 접근하지 않았느냐?"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자는 무식하게 무작정 전각(殿閣)으로 진 입했습니다." 비록 비위가 상했지만 유기성은 명확하게 말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 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물러나다가는 결국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쓸 수도 있었다. 도홍진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자신에게 말을 하며 한 번도 고개를 세운 적이 없었던 유기성이었다. 그런 데 고개를 세우고 주절대는 유기성의 모습이 도홍진이 느끼기에는 반항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는 슬며시 기분이 나빠졌다. 유기성은 자신이 고용한 총관일 뿐이었다. 자신은 주인이라는 사실에 갑자 기 아랫배에서부터 노기가 뻗쳤다. '이놈이 어디다 대고!' 쾅! 그는 팔걸이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손에서 일파의 진력을 뿜어 대가리를 쳐드는 유기성의 뇌를 바수 어 버리고 싶었다. 쾅! "장주님, 큰일났습니다."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무인 하나가 달려와 무너지듯 엎드렸다. 비 하산장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그렇고 그런 무인 중 하나였다. 그는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머리가 엉클어지고 발에는 아무 것도 걸려있 지 않아 맨발이었다. 더구나 몸에는 여기저기 그을린 자국이 있었고 핏방울 이 묻어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그놈이라니?" "어제 나타났던 그놈 말입니다. 박도를 쓰던 무식하게 생긴 놈이 나타났습 니다." "뭐야?" 도홍진은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놈인지 상판이라도 보고싶던 참이었다. 그의 눈이 화염 (火焰)으로 타올랐다. 이미 그의 안중에 유기성은 보이지도 않았다. 도홍진은 몸을 일으켜 계단을 달리듯이 내려가 무인 앞에 다다랐다. 너무도 급하게 달려 내려온 장주를 보자 무인은 멈칫하는 표정이었다. "놈은 어디에 있느냐?" "지금 막 비봉전(飛鳳殿)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휙!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홍진의 신형이 솟구쳤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무인이 말한 전각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곧 담을 타넘어 사라졌다 "어서 따라와!" 사라진 그의 등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유기성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에 게 들으라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굴한 놈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패대기쳐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유기성은 때때로 잘 참아내는 자신이 대견스러울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때였다. "어서 가보자." 유기성도 몸을 일으키기가 바쁘게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갑자기 어안 이 벙벙해진 무인들도 허둥대며 문을 향해 몰려나갔다. 그들의 손에 들려있던 횃불이 갑자기 뽑아든 병장기에 반사되며 사방에 빛 의 무리를 만들었다. 스슷! 장원을 달리는 그림자는 분명 사람이었지만 마치 날개 달린 야조(夜鳥)같이 빠르고 들고양이처럼 민첩했다.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모든 걸 마무리해야 한다." 초풍비는 비조처럼 몸을 전진시켰다. 그는 군데군데 자라 있는 나무가 만들 어 내는 어둠과 담을 타며 신속하게 비하산장의 내부로 전진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경비를 서는 무인들과 보표(步標)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발걸 음을 감지(感知)하지는 못했다. 너무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인지 무공이 약한 보표들은 그가 옆 으로 스치듯 지나가도 전혀 깨닫지 못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던 초풍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빌어먹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표인 듯 손에는 타경 (打鏡)을 들었고 허리에는 긴 몽둥이를 차고 있었다. 보표의 눈이 놀란 소의 눈깔 만하게 변했다. 마음속으로 바람을 불어내던 초풍비는 벼락같이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 는 부러진 검이 들려있었다. 슈가가각― 툭!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 그의 발아래 보표의 목이 떨어져 굴렀다. 비명도 토 하지 못한 보표의 눈이 어둠 속에서 경악으로 굳어있었다. "누구냐?" 파공성을 감지한 무인 두 명이 어둠 속에서 달려왔다. 손에는 각기 날이 선 박도가 들려있었다. 그들도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초풍비를 보았다. 멈칫하며 몸을 세우는 사 이에 초풍비의 검은 이미 그들의 목을 그어가고 있었다. 파―승― "컥!" "빠르다. 헉!" 그들이 비명을 토하며 몸을 무너뜨릴 때 여기저기서 화염이 솟구치며 비명 이 터져 나왔다. 멀리서 들리기는 했지만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비명은 바로 곁에서 듣는 것과 같이 선명(鮮明)했다. 귀로만 판단해도 일은 혼자 저지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초풍비의 일을 돕기 위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낡은 계교를 펼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무식한 놈들이 성동격서에 넘어가 준다는 사실이었다. 초풍비가 달리는 곳에 강한 무인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성동격서 는 틀림없이 성공한 듯 보였다. '아우가 벌써 일을 시작했군. 서둘러야겠다.' 츄리리릿― 그는 검을 휘둘러 검신에 점점이 묻은 피를 뿌려낸 뒤 다시 어둠 속으로 스 며들었다. 오십여 장을 전진했을 때 그는 한 채의 전각을 볼 수 있었다. 전각은 아담 하게 지어진 이층이었다. 주변에는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사면을 둘러쳤고 주변에는 온갖 꽃들이 어 둠 속에서도 만발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향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전각의 기둥에는 궁등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궁등의 불빛은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물 속의 황금잉어의 등이 보일 정도로 물은 맑았다. 무심관(無心館). 전각의 입구에는 나무의 뿌리를 다듬어 만든 것으로 보이는 편액이 달려 있 었고 전각의 이름이 음각(陰刻)으로 깊이 패어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얻어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현판으로 사용된 나무만 해도 구하기 힘든 것이지만 글씨는 분명하지는 않 지만 왕희지체를 닮았다. 제법 정성 들여 만든 것으로 보였다 "이곳이 분명하군. 이렇게 아담한 전각에 경치가 좋게 만들었으니...... 누 구라도 지하에 뇌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초풍비는 자세를 낮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둘러본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각 안 에 무인들이 있다면 모를까 화원(花園)과 연이어 이어진 인공호수에서는 숨 은 자의 체온은커녕 숨소리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각과 뇌옥에는 적지 않은 놈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선풍보(旋風步)의 신법이었다. 십이성 완성을 이루면 바람처럼 빠르고 신형 을 안개처럼 뿌옇게 만들 수 있는 상승(上昇)의 경공이었다. 그도 겨우 구성의 경지에 올랐으나 그것만으로도 모든 적을 교란하고 혼란 에 빠뜨릴 수가 있었다. 척! 그는 매미처럼 기둥에 달라붙었다. 그의 손톱이 무쇠처럼 뻗쳐 기둥 속에 깊숙하게 박히며 마치 조각처럼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청각에 내력을 주입시키며 전각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 를 썼다. '총 네놈이 있다. 전각 앞에 두 놈, 후면에 두 놈이 나란히 서 있은 것으로 보아 그곳이 지하 뇌옥으로 통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의 청각은 전각 안에서 움직이는 자들의 미세한 소리에까지 정확하게 잡 아내고 있는 상태였다. 휙! 그의 몸이 바람처럼 날아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에는 반월창이 있었고 마침 두 개는 열려 있었다. 제비가 물을 차고 오르듯 날렵한 동작이었다. 수평으로 만들어진 그의 손에서 두 줄기 뇌전(雷電)이 일어났다. 픽― "커흐흑!" 파공성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명은 제법 컸고 마치 한사람의 목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같았다. 쓰러지며 손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는 두 명의 무인은 전신에 흑 색의 무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허리에는 역시 한 자루의 박도가 매어져 몸이 기울 때마다 덜렁거렸다. 그들의 눈이 불신(不信)으로 물들었다. 전각 안에는 궁등이 빽빽하리 만치 다닥다닥 붙어 불이 밝혀져 있어 사람의 미세한 표정까지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초풍비는 그들의 표정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목에는 가는 돌이 박혀있었다. 돌은 그가 화원을 지나며 주어 넣은 것으로 적엽비화(摘葉飛花)의 수법을 응용하여 날린 것이었다. 번개처럼 빨랐기에 무인들이 미처 인식하기도 전 에 결과는 끝나 있었다. 흔히 무림에서는 비황석이라 해서 돌팔매질도 암기수법으로 인식되고 있었 다. 그러나 초풍비가 사용한 것은 진기로써 돌을 날려 혈도를 제압하는 절 정의 상승절기였다. 퍽―퍽― 두 개의 시체가 통나무 넘어지듯 무너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슈슈슈― 두 개의 박도가 초풍비의 허리를 노리며 횡으로 그어졌다. 각기 목과 허리 를 겨냥한 것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면 두 군데 중에 한곳은 분리(分離) 될 판이었다. 초풍비는 이미 전각으로 들어오기 전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어딜―!" 초풍비는 낮게 부르짖으며 신형을 빠르게 앞으로 퉁겼다. 순식간에 그의 몸 이 박도를 휘두르는 자들의 가슴으로 쏘아져 들었다. 퍽― 동시, 초풍비의 한 손과 검을 잡은 주먹이 무인들의 가슴을 가죽 북 두들기 는 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백타중의 진수 출룡수(出龍手)라는 초식이었다. 본시는 달려가는 힘으로 두 주먹을 펴서 상대의 가슴을 빠개는 초식이지만 반검을 들고 있는 그로서는 적절하게 변형하여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위력에서는 충분했다. "커흑!" 두 개의 신형이 퉁겨져 주르르 물러났다. 그들의 손에 들린 박도는 미처 다 시 거두어들이지도 못하고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수아―아―아―아― 초풍비의 반검이 허공에 반원을 그렸다. 창! "커흑!" 한 자루의 박도가 반검에 부딪치며 허공에 밝은 불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한 무인은 가슴이 쪼개져 붉은 피를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가슴이 갈라진 무인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초풍비의 검을 막았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초풍비의 반검은 그의 생각보다는 빨랐 다. 반검은 이미 무인의 가슴을 지나 두번째 박도를 휘두르는 자와 대치(對峙) 한 상태였다. 가까운 쪽에 있던 자는 급히 박도를 들어 막았다고 생각했지 만 이미 검이 가슴을 스친 뒤였던 것이다. 콸콸콸― 비가 쏟아지며 사방에 선혈이 튀었다. 초풍비의 옷에도 점점이 피가 튀었으나 돌아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초 풍비는 검을 사각으로 미끄러뜨리며 재차 그어 올렸다. "큭!" 초풍비의 검을 막았던 흑의인의 턱이 두 조각으로 쪼개지며 무너졌다. "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그는 검을 든 손으로 널브러진 흑의인의 시체를 뒤집었다. 아무래도 숨이 붙어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의인은 절명한 상태였다. 머리가 두 쪽으로 잘려진 시체는 뇌수가 흐르고 있었으며 점차 선홍색의 피 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흐른 피로 인해 이미 목불인견(目 不忍見)의 참상으로 변해 있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풍기자 초풍비는 얼굴을 찡그렸다. 역한 기운에 위장이 역 겨워졌다. 후끈한 피 냄새와 썩는 듯한 내장의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이미 악귀가 되기로 작정한 이상 망설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응!" 휘리릭! 초풍비는 급히 몸을 날려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전각의 이층계단에서 미 약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울리는 소리는 마 치 전족(纏足)을 한 여인의 발자국 소리 같았다. 담운량은 발소리가 여인의 발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미 오랜 경험에서 발자국의 주인이 지니고 있는 무공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몸이 가벼운 자다.' 초풍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건물에 들어서자 조금 전 자신을 막았던 무인들과는 격이 다른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은연중 퍼져 나오는 기운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휙! 하나의 인형이 대전에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홍의(紅衣)를 단정히 걸친 중년사내였다. 그의 허리에는 한 자루의 가는 세도가 걸려있었다. "나서라." 사내는 대전의 중앙에 내려서자마자 한소리 외침을 토했다. 결코 서두르거 나 재촉하는 듯한 인상이 풍기지 않았다. 어찌 보면 유유자적(悠悠自適)한 모습이기도 했다. '강자다.' 초풍비는 상대의 역량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타난 자가 보여주는 기도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초풍비는 신형을 이동시켜 중년인 앞으로 나섰다. "후후후, 올챙이가 물을 어지럽히는가 했더니 제법 큰 메기 새끼였군." 중년인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마치 만사(萬事)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달리 보면 말과 다르게 초풍비를 업신여겨 보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초풍비가 가슴을 폈다. 나타난 자는 뿌리는 기도로 보아 암습을 가하거나 느닷없이 살수를 가하지 는 않을 것 같았다. 초풍비가 아는 바로는 그와 같이 호언(豪言)을 터트리 는 자들은 자신의 역량보다 간이 큰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비하산장에 당신 같은 무인이 있었다니 놀랍군.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것 같은데...... 외호나 들읍시다." 초풍비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에 중년인은 배시시 웃었다. 여인들이나 지을 법한 그의 표정에서 초풍비는 더욱 강한 경각심을 느꼈다. 나타난 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길 줄 아는 자였다. 표정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중년인은 습관적인 동작으로 자신의 허리에 매어져 있는 검을 가볍게 쳤다. 검에서 가벼운 울음이 일어났다. 그것으로 보아 검은 제법 쓸만한 병기인 것 같았다. "후후, 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나 물었으니 알려주는 것이 예의겠지. 남들이 나보고 세심마혈(細心魔血)이라 부르더군." '헛!' 초풍비는 폐를 열고 목구멍을 타듯 넘어오는 바람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미 알고있는 외호일 뿐만이 아니라. 한때는 천하를 떨게 만들었던 사람들 중에 어깨를 당당히 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그가 불현듯 강호에서 사 라졌다는 사실도 초풍비는 알고 있었다. 그가 무림에서 사라진 것은 초풍비가 무림을 떠나기 삼 년 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무를 좋아해 이름있는 명사들을 찾아다니며 늘 도전을 했 던 초풍비도 그와는 겨루어보지 못했었다. 그런 점으로 보아서는 서로간에 잘 만난 만남이라 해도 나쁠 것은 없었다. "강한 자의 이름이로군."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심마혈이란 명호는 궁자천(宮資天)이라는 검수(劍手)의 외호였다. 분명하 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소문이 따라 다니고 있었다. 강호의 소문이 그다지 믿을 것이 아니지만 그에게 따라붙는 소문은 제법 신 빙성이 있었다. 삼십 년 전 만욕방(萬欲邦)이라 불리어지는 방파가 있었다. 그들은 장강을 주름잡는 장강수로체와 함께 장강 주변을 휩쓸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잔악했다. 그들은 사시를 경계로 남쪽은 장강수로체가, 북쪽은 만욕방이 점령하기로 하고 이년에 걸친 무인 살육을 시작했다. 그들의 방법은 적중해 그후 이십 년 간 만욕방은 강북을 통치할 수 있었다. 이십 년 전 만욕방은 구파일방 중 장강을 끼고 있는 무당(武當)과 아미파를 위시해 사천당문의 연합공격에 무너졌지만 장강수로체는 여전히 성가를 올 리고 있기도 했다. 첨예한 강호의 살얼음판에서 만욕방을 이끌던 오적(五賊)이 있었다. 그들은 의형제를 맺고 각기 역할을 분담해 중원의 일각을 공략했었다. 만욕 방주 만화검마(滿花劍魔)가 총괄하고 네 명의 형제는 각기 공격첨병에 서 있었던 상태였다. 그중, 세심마혈 궁자천은 수궁단(水弓團)이라고 불리는 선단(船團)을 이끌 고 있었다. 그의 수궁단은 장강을 오르내리는 어선(漁船)과 상선(商船)을 습격하여 뇌 물을 빼앗거나 재물을 빼앗았다. 그러나 누구도 수궁단에 도전을 하지 못했 다. 바로, 세심마혈 궁자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세심도(細心刀)로 펼치 는 세풍삼십식(細風三十二式)은 장강의 절정 절기로서 당시 어깨를 나란히 하던 백인의 최강 무인 중 하나였다. 초풍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저자가 세심마혈이라면 칠십이 넘었을 텐데...... 사 십 정도밖에 보 이지 않다니...... 더구나 비하산장의 장주 밑에서 식객(食客)으로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초풍비는 눈을 들어 궁자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자신에게 거짓을 이야기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있다. 비하산장은 시시한 장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도 이곳 어 디에는.......' 그의 생각을 끊어내기라도 하듯 궁자천이 입을 열었다. "후후후, 보아하니 자네도 무명소졸(無名小卒)은 아닌 듯한데 명호나 밝혀 보시지." "난, 초풍비라 하오." "초풍비!" 궁자천도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눈빛을 부드럽게 고치더니 초풍비의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초풍비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소문에 세심마혈의 검술이 천하에 가장 빠르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들렸었기 때문이다. 검을 사용하는 자들에게서 거리는 매우 중요했다. 궁자천이 빙그레 웃었다. 초풍비가 물러서는 의도를 파악했다는 눈빛이었 다. "나를 아시오." "들은 적이 있었지. 오지회라는 패거리를 조직해서 한때 중원을 누볐었다고 하던가? 오지회의 대형이 초풍비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바로 본인이요." 초풍비가 가슴을 가볍게 내밀었다. 어차피 고수끼리의 대결은 한순간에 결정 나는 법이고 기(氣)의 싸움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진기의 저하를 최소화하여 무공을 펼치지만 한 번 주눅이 들면 회복하기가 어렵다. 초풍비로서는 기의 저하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십 년만의 재출도였다. 그 동안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사냥에 몰입해 있었기에 동물적 감각은 몰라 도 병기를 빠르게 뽑거나 완벽하게 초식을 시전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 을 수도 있었다. 올바른 방법이라면 여러 고수들과 수차례 겨루어 단전의 진기를 풀고 운기 토납을 하여 몸을 가다듬는 것이 올바르겠지만 여유가 있을 리 만무(萬無) 였다. "그래,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스르르릉― 궁자천은 허리에 달린 세심도를 뽑아 비스듬히 잡았다. 손잡이가 허리가 닿 았고 도극(刀極)이 땅을 향하는 자세였다. 오른발이 반 족장 앞으로 나와 있었다. 초풍비의 얼굴에 흘깃 웃음이 밀렸다. "좋은 발검세(拔劍勢)로군." 초풍비도 반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웠다. 언제든지 발검을 할 수 있었고 방어를 겸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였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이기도 했다. 다만 하체를 공격하려면 발을 앞으로 내밀어야 하고 병기가 기울어지는 각도를 신중이 할 필요가 있었다. 초풍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 궁자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것은 놀라움 이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낸 경악을 지워버리고 입술을 악다물었다. "당신은 비하산장주의 식솔이요?" "아니다. 나는 산장의 장주가 근래 딴마음을 먹고 있지 않나 해서 주군(主 君)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람이다." "주군?" "알 것 없다. 어차피 나를 죽일 수 있다면 그를 만나게 될 테니까." 의외로 궁자천의 말은 담담했다. 언뜻 들으면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 다. 그러나 목소리에 담긴 살기는 추측이 불가한 것이었다. 더구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일부러 흘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상이 가능했다. 더구나 그가 입 밖으로 거짓을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주군을 모신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치욕(恥辱)일 수도 있는 일이 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뇌옥으로 통하는 문이오?" "그렇다. 나를 죽일 수 있다면 너에게 열리겠지. 그러나 나를 이기지 못하 면 뇌옥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물론......." 사사삿― 초풍비가 좌측으로 몸을 이동시키자 궁자천도 뒤질세라 몸을 가볍게 움직였 다. 그들은 서서히 좌측으로 맴을 돌기 시작했다. 마치 중앙에 기둥에 박혀 있고 끈에 연결된 인형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그들은 한참동안 맴을 돌 았다. "파하하핫!" 한소리 기합성이 울리고 궁자천의 몸이 뱀이 땅위를 스치듯, 굴곡을 그리고 제비가 벌레를 잡듯 날쌔게 초풍비의 몸으로 쏘아왔다. 땅을 가리키고 있던 도극이 하늘로 향했고 바람소리 하나 흘리지 않으며 그 의 가슴과 목, 팔다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세심도의 형상은 자세하게 보이 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도(細刀)라 불리기도 하는 세심도는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보다도 가늘어 언뜻 보면 마치 굵은 쇠막대를 정신없이 휘두르는 것 같아 보였다. 파파파파― 징―지지지―지징! 세심도에서 일어나는 기파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너무도 빨리 휘둘러지는 세심도를 따라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핫! 만파천호벽(萬波天護壁)! 카드드드드― 초풍비의 입에서 한소리 외침이 일고 반검이 허공에 무수한 그림자를 그렸 다. 창―차―차―창― 허공 이곳저곳에서 요란한 금철소리가 들리며 불똥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궁등(宮燈)에서 타오르던 불들이 기파를 이기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거나 꺼 져 버렸다. 궁자천의 세심도가 허공에 호선(弧線)을 그리고 밀려들었을 때, 초풍비는 번개같이 솟구쳐 반검을 지면으로 향하게 하고 다리를 허공으로 가위처럼 벌렸다. 세심도는 헛되이 반도에 부딧치며 퉁겨져 방향을 바꾸었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던 초풍비의 몸이 연속으로 세 번의 회전을 일으켰다. 비립(飛立)의 자세였다. "커흐흐―흑!" 가래 끓는 소리가 들리더니 궁자천이 세심도를 놓치는 모습이 궁등의 그림 자에 비쳐졌다. 뒤이어 초풍비의 검이 궁자천의 가슴에 바람구멍을 만들었 다. 퍽! 궁자천의 무릎이 땅에 꿇려졌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반검이 깊숙하게 목울대를 뚫고 박혀있 었다. 그의 목에서 듣기 거북한 쉰 소리가 올라왔다. 천하를 경악에 떨었던 인물의 최후(最後)치고는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십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검이었지만 초풍비의 검법은 무리가 없었다. 단 한순간도 진기가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었다. "좋은...... 검법이군. " 몸이 무너지는 상황하에서도 궁자천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하거나 숨을 쉴 때마다 그의 목울대에서는 붉은 피가 불쑥불쑥 솟아 나오고 있었 다. "주군에게 덤볐다가는 뼈도 추리기 어려울 걸세. 설사 천하를 울고웃게 만 들었던 자네라 하더라도...... " 궁자천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말을 할 때마다 공기와 피가 섞인 거품 이 올라와 입에 피칠을 했다. 초풍비는 궁자천의 말을 무시했다. 초풍비가 물은 것은 궁자천이 이야기하 는 그의 주군이 아니었다. "뇌옥은 어디요?" "벽 뒤에 문이 있네. 자네가 찾는 자도 있을지 몰라." 궁자천은 의외로 순순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내 목이 뒤로 젖혀졌고 다시 는 숨을 쉬지 않았다. 천하를 경악에 떨게 하던 백대고수 중 한 명이 쓰러 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형님은 뭐 하는 거야!" 박도를 거칠게 흔들어 대며 담붕비는 목을 타고 오르는 숨에 섞어 혼자 말 을 중얼거렸다. 적어도 이십 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흑의인들이 박도를 뽑아들고 둥근 원 형대열(圓形隊列)로 그를 둘러쌓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피빛 살기가 너 울거려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담붕비의 주위로는 십여 명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 가 조그만 내를 이룬 상태였다. 담붕비는 붉은 피가 흐른 바닥을 딛고 서서 자신을 둘러싼 흑의인들을 노려 보았다. 벌써 겁을 먹고 새파랗게 질린 흑의인들도 간혹 눈에 보였다. "오랏! 모두 죽여주겠다." 휘이잉― 그는 의식적으로 박도를 한바퀴 회전시켰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며 힘 이 솟았다. 박도는 손에 밀착된 듯 달라붙었다.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기분 이었다. 담붕비는 진력을 끌어올려 전신에 유포시키며 장심(掌心)에 밀려드는 뜨거 운 기운을 맛보았다. "미친놈, 네놈이 잘도 설쳤다마는 이젠 끝났다. 궁수대(弓手隊)! 준비하라. " 어디선가 날카로운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군 데군데 박혀졌던 횃불보다 열 배는 밝은 불빛이었다. "이건, 뭐야?" 담붕비는 주위를 돌아보며 노화를 터트렸다. 눈에 정경이 세밀하게 들어오 자 담붕비는 침이 꿀꺽 소리를 내며 목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서 있은 곳은 사방이 삼십여 장이나 되는 넓은 광장이었다. 사방으로 는 전각과 담이 가려져 있었고 군데군데 수십 년은 먹었음직한 소나무가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담과 누각의 지붕에 고정되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지붕에는 횃 불을 든 자들 외에도 궁노(弓弩)의 시위를 당기는 자들이 보였다. 이십여 명쯤으로 보이는 궁사들은 강궁(强弓)을 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 고 명령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미 일부의 그림자들은 강전(强箭)을 시위 에 걸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아! 이 혈부대형(血斧大兄) 담붕비를 호락호락하게 보 았다가는 삼대를 고자로 만들어 버릴 거다." 담붕비의 음성은 거칠다못해 상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단박에 효과가 나 타났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얼굴을 탈색시켰 다. 그들 모두는 오래 전에 천하를 경동(驚動)시켰던 많은 고수들 중에 혈부대 형이라는 외호를 지녔던 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담붕비라는 사실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담붕비의 이름은 거칠 고 포악한 면으로만 보자면 초풍비를 능가하고 있었다. 잠시 술렁이는 사람들의 호흡이 느껴졌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저자가 오지회의 인간백정(人間白丁)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혈부대형 담 붕비란 말야." "설마, 그들이 사라진 지가 벌써 십 년이 지났는데......." "아닐지도 몰라, 소문에 듣던 혈부대형의 생김새가 너무 닮은 것 같아. 우 리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데! 괜히 잘못하다 모두 죽을지도 몰라." 담붕비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있었다. 만족한 그는 거칠게 웃었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싹텄다면 우선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內在)된 두려움이 얼마나 행동을 제어하게 되는지 담웅비는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십 년 전에도 그의 이름만으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듯 달려들던 그들의 얼굴에 진한 두려움 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인생사에는 왕왕 예기치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는 법이라는 것 을 담붕비는 생각지 못했다.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담붕비의 앞에서 발생하 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간에 원하지 않았던 경 우가 발생했다. "쏘아라. 놈이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고슴도치가 되면 할 말이 없을 거다." 핑! 최초의 시위소리가 들린 순간 석자에 이르는 강궁이 그의 목 줄기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대낮같이 밝아진 후라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선명하게 들어왔 다. 두려워할 담붕비가 아니었다. 병기만 손에 쥐어져 있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담붕비였다. 비록 자 신이 사용하던 혈부는 아니었지만 박도라 해서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창! 그는 박도를 들어 날아오는 강전을 퉁겼다. 한 뼘이 무색하게 넓은 도면은 날아오는 강궁의 살촉을 퉁겨 방향을 바꾸었다. 박도에 맞아 퉁겨진 화살은 비스듬히 방향을 바꾸어 담벼락에 기댄 체 두려 운 얼굴로 담붕비를 쳐다보는 흑의인 쪽으로 날아갔다. "크아악!" 흑의인 하나가 날아드는 강궁을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토했다. 그의 어깨에 강전이 깊숙하게 박혀들자 얼굴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파! 파! 파! 수십 개의 강전이 담붕비를 향해 쏟아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냐. 아주 죽여주마." 담붕비는 미친 듯 박도를 흔들며 담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흑의인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곳이 었다. 파파― 핑― 후두두두― 담붕비의 몸으로 접근했던 강전들은 단 한 자루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수십 발의 강전이 쏘아졌지만 담붕비의 옷을 건드리거나 상처를 준 강전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박도에 맞은 화살들이 사방으로 퉁겨져 날아가며 담벼락에 기 댄 자신들의 동료들을 향해 날아갔다. "오...... 온다. 피해라." "화살이 우리에게 날아온다. 크악!" 담에 기댄 흑의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 아닐 수 없었다. 담붕비는 거칠게 박도를 흔들며 달려들었고, 화살은 빗발처럼 날아들었다. 담붕비를 향해 쏘아지는 강전은 그가 달려감에 따라 자연히 벽에 기댄 자신 들의 동료들에게도 날아들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박도에 맞고 사방으로 퉁 겨지는 강전의 방향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죽어라. 이놈들아." 담붕비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미친 듯 박도를 휘둘렀다. 강 전과 시체가 한 무더기가 되어 그의 주변에 떨어져 내렸다. 뼈가 드러나고 붉은 피가 작은 내를 이루었다. 복부가 갈라져 흘러나온 내 장이 담붕비의 다리에 동아줄처럼 감겼다. 그것이 담붕비의 행동을 제약(制 約)했다. 퍽! "윽!"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담붕비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울려나왔다. 그의 왼 쪽 어깨에 강전이 파르르 떨고 있었고 옷 위로 붉은 피가 젖어 들었다. 발이 시체들과 창자에 감겨 불편한 사이에 날아든 강전이 담붕비의 등을 꿰 뚫어 버린 것이었다. "제길!" 그는 강전을 손으로 잡아 뽑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쉽사리 뽑힐 강전이 아 니었다. 화살촉이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살 속에 깊이 박히고 뼈까지 파고든 것 같았다. 더구나 날아오는 강전이 많기 때문에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도 만만치 않았 다. 자신의 어깨에 박힌 강전을 뽑으려다 가는 자신이 먼저 고슴도치가 될 판이었다. '우선 피하고 보자.' 사방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조그만 전각이 들어왔다. 그는 몸을 날려 전각 으로 뛰어들었다. "이곳이라면 쉽게 화살을 맞지는 않겠지." 담붕비는 전각의 기둥 뒤에 몸을 사리며 어깨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피가 많이 흘러 쓰러질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휘이익! "컥!" 담붕비가 화살을 맞은 것을 본 흑의인 하나가 용기를 내어 쫓아왔다. "어서 오너라. 이 애송이 놈아." 담붕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도를 횡으로 그었다. 날아드는 흑의인이 그 의 박도에 피떡처럼 저며져 날아갔다. 담붕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담붕비의 눈이 예리하게 사방을 훑었다. '한쪽만 남겨두고 패쇄(閉鎖)시키자.' 그는 몸을 일으켜 전신에 도는 진기를 어깨에서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혈 도의 일부를 폐쇄(閉鎖)시킨 후 다시 진기를 유포시켰다. 불편해 어깨위로 올라가지도 않는 왼손에 박도를 옮겨 잡은 그는 오른손을 뻗어 벽을 두드렸 다. 잠시 두드리던 담붕비는 벽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주먹을 쥐 고 전신의 진력을 모아 뿜어냈다. 쾅! 전각이 부르르 몸을 더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먼지가 날리며 찬장이 내려 왔다. 와르르르― 벽이 무너지며 무너진 벽돌과 흙이 창을 막아버렸다. 그는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옮겨 다시 벽을 내질렀다. 벽은 다시 무너지고 전각이 무너져 내렸다. 중앙에 돌로 만든 기둥이 있어 전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저것도 부셔야 하나. 아니, 만약을 대비해 퇴로(退路)는 나두어야 하겠지. ' 그는 들었던 손을 내렸다. 뒷문까지 모두 부셨다가는 만약의 경우 자신이 도주할 길이 없어진다는 것 을 인식한 것이다. 그는 다시 돌아와 전각의 문 앞에 섰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 기침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애써 참았다. "놈이 진무전(振武殿) 안으로 숨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왔다. 담붕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진 벽에서 깨진 벽들이 수없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벽돌을 손에 감아 쥐고 힘을 주었다.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그의 손아귀에서 나오는 악력(握力)을 이길 수는 없었다. 파스스스― 벽돌이 부서지며 일부는 먼지가 되고 일부는 사방이 뾰족한 돌 부스러기가 되었다. 몇 개를 연속해서 부슨 그는 벽돌 조각을 모았다. 제법 많은 부스러기가 모였다. 담붕비는 벽돌 쪼가리를 한줌 가득히 쥐고 몸을 숨긴 채 전각이 비틀린 틈 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전각 가까이 다가와 있는 한 무리의 무인들이 보였 다. 손에 박도를 든 것으로 보아 그들이 누구라는 것은 뻔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곳에 숨어있다 진천뢰(震天雷)나 협공을 받으면 꼼 짝없이 당하겠는걸......." 그는 결심을 굳히자 번개같은 신법으로 앞으로 내달았다. 피피핑! 퍽! 담붕비의 등뒤로 땅에 박히는 강전 소리가 들렸다. 담붕비는 앞으로 몸을 퉁기며 손에 들린 한줌의 벽돌 부스러기를 사방으로 퉁겨냈다. 피피피― "으아악!" 그가 날린 벽돌 부스러기에는 그의 내공이 실려있었다. 벽돌 부스러기를 피 하지 못한 몇 놈의 흑의인이 나동그라졌다. 담붕비는 다시 오른손으로 박도 를 잡았다. 담붕비는 박도를 휘두르며 뛰어나갔다. 부우우우― 그의 박도가 허공을 가르자 다시 몇 개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퉁겨져 오르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달려가는 담붕비의 눈앞에 붉은 막이 펼쳐졌다. '형님이 가신 곳으로 가자. 이곳에 있다가는 결국 죽게 될거다. 뼈도 추리 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그는 다가서는 흑의인들의 머리를 빠개며 빠르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7 페이지: 1/52 자료번호: 262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2 ─────────────────────────────────────── ■ 상견환 제7장-고생이 심했겠구나 "컥!" 초풍비의 검은 자신을 덮쳐들던 흑의인의 가슴에서 멈추었다. 이미 한쪽은 잘려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고 곧 도막도막 끊어진 창자가 바닥으로 흘 렀다. 여기저기에는 이미 복부에서 빠져 나온 지 오래된 듯 잿빛으로 변해 가는 창자들도 보였다. 몸에서 바로 빠져 나온 창자에는 누리끼리한 기름덩어리 가 붙어있는 것도 있었다. 퍽! 초풍비는 신경질적으로 흑의인을 걷어찼다. 흑의인은 시체가 되어있었지만 날아가 벽에 부딪쳐 머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두 번 죽는 시체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검에 죽은 뇌옥의 위사(衛士)는 가장 처참했다. 뇌옥에 들 어 온 지 벌써 열두 명째였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신경질적으로 휘둘러 마구 떨구어냈다. 손에도 피가 흘러내려 끈적거렸다. "피도 진한 놈들이로군." 그는 주의를 기울였으나 별다른 흔적이나 미세한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게 되자 곧 상체를 세우고 검을 시체가 입고 있던 옷에 문질러 닦았다. 뇌옥 속에는 더 이상의 무인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물론 미약한 숨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철창으로 만들어진 뇌옥 속에서 들 려오는 것이라 그들이 비하산장의 무인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뇌옥은 길었다. 사방이 돌로 된 벽이 보였다. 원래는 바위였던 것을 동굴로 만들어 뇌옥을 만든 것 같았다. 뇌옥은 중앙에 긴 복도를 설치하고 양옆으로 팔뚝보다 굵은 창살로 설치되 어 있었다. 오장 넓이로 칸이 막혀져 있어 적어도 이십여 개의 뇌옥이 보였 다. 그는 비록 검을 집어넣었으나 경각심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두 손바닥에 언 제든지 뿜어낼 수 있는 내가강기를 운집(雲集)시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접 근했다. 초풍비는 뇌옥을 샅샅이 훑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뒤지는 그의 눈에서는 푸르스름한 인광(燐光)이 뿜어져 나 왔다. 모든 진기가 눈으로 몰렸기에 밤 짐승 같은 빛을 낼 수가 있는 것이 었다. 만약 누군가 정면으로 보았다면 귀화를 보았다고 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살려 주시오." "우리를 꺼내 주시오." 뇌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갇혀 있는 듯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울려왔 다. 코를 마비시킬 것 같은 퀴퀴한 냄새도 스며 나왔으므로 초풍비는 얼굴 을 찡그렸다. 초풍비는 뇌옥으로 다가가 일일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찾는 도 우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력을 돋구어 어둠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뇌옥에 갇혀 있다면 보 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설사 몰골이 변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에 감금된 것이 확실한지 모르겠군." 초풍비는 주변을 훑어보다 비통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움직이 기 시작했다. 그는 인내심(忍耐心)을 가지고 부지런히 뇌옥을 들여다보았 다. 한참동안 전진하던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입구에서 일곱 번째 좌측에 만 들어진 뇌옥이었다. 다른 뇌옥과는 다르게 이중의 철창이 되어 있었기 때문 이다. "누구 없소?" 누군가 있기는 했으나 대답하지는 않았다. 길게 누운 사람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중년인이었다. 젊었을 때는 곱살하게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얼굴이었다. 비록 입고 있는 옷이 남루해지고 두 손은 철삭으로 묶여 있기는 했으나 눈 에는 총기(聰氣)가 어려있었다. "아우!" 초풍비의 입에서 놀람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뇌옥에 누워있는 중년인 은 초풍비가 찾던 사내였다. 얼굴이 파리해지고 눈이 퀭하니 들어가기는 했 지만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초풍비가 아니었다. "혀...... 형님!" 한때 오지회의 이제로서 혼혈마장이라 불렸던 도우선이 그를 알아보았다. '빌어먹을...... 모든 것이 사실이었어. 아우가 이런 곳에 갇혀있다니... ....' 초풍비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라왔다. 비하산장이 수상하 다고 담붕비가 입에 침을 튀기며 말했을 때도 믿지 않던 초풍비였다. 비하산장의 실력으로 도우선을 윽박지를 수 없다는 것이 초풍비의 생각이었 다. 그런데 모든 것이 현실이 되자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았다. 그것은 죄책감(罪責感)이기도 했다. 담붕비가 오지회의 표식이 비하산장에서 나타났다고 했을 때 초풍비는 반신 반의(半信半疑)했었다. 믿을 수도 없었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초풍비는 믿지 않았다. 도우선은 자신 다음으로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고수였다. 설사 소림사의 장문인이 온다해도 쉽사리 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십 년 전 담붕비가 소림사에 들어가 난동(亂動)을 부리고도 살아남았던 것 은 이미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된 지 오래였다. 당시 담붕비는 소림의 장문인 까지 황급히 달려 나왔어도 도주할 수 있었다. 도우선은 그런 담붕비보다 한 단계 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그 는 치밀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우선은 오지회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두터운 무림의 신망(信望)을 받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형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비록 힘이 없기는 했으나 또렷한 말소리였다. 감정이 없는 것이 흠이기는 했다. '제길, 놈은 이 상황에서도 나를 원망하는 듯하군.' 속이 쓰리고 괜히 울화(鬱火)가 밀려 오르기는 했지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비켜라. 옥을 열겠다." 몸이 제압 당한 듯 허리를 펴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던 도우선이 물러나자 초풍비는 반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내력을 검에 운집시키고 심호흡을 한 뒤 반원(半圓)을 그리며 휘둘렀다. 창―와르릉! 팔뚝처럼 굵은 쇠창살이 잘리며 흩어져 바닥에 굴렀다. 초풍비는 달려들어 갔다. 그때까지 몰랐던 역한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으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가자." "어떻게 오셨소?" "밖에 막내가 있다. 너를 구하게 된 것도 다 막내 덕분이다. 밖에서 한창 혈전(血戰)이 벌어지고 있을 테니 어서 나가보도록 하자꾸나. "어떻게 오셨소? 아니 언제 다시 강호에 나왔소?" 도우선은 줄기차게 질문을 토했다. 자신이 구출(救出)되는 것보다 초풍비가 비하산장의 뇌옥에 나타난 것이 더욱 궁금한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무엇보다도 그가 강호에 나온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으로 보이기 도 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여전히 말투는 차가웠다.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어서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자. 막내가 곤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초풍비는 대답을 회피했다. 담붕비의 말이 있었기도 했으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 다. 휙! 차르르릉! 그의 검이 허공에 무지개를 그리자 앞을 가로막던 뇌옥의 철창살이 수수깡 처럼 부러지고 잘려져 바닥으로 흩어졌다. 도우선을 발견한 이상 더는 얌전 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 나타나 앞을 막는다면 오로지 베어버리면 그뿐이었다. 한참을 걸어도 나타나는 자는 없었다. 괴괴한 정적만이 뇌옥에 가득 차 있었다. "살려 주시오." "우리도 꺼내 주시오." 여기저기서 간곡한 음성이 발걸음을 잡았지만 초풍비는 귀에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이 누구이던 전연 관심(觀心)이 없다는 행동이었다. 초풍비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도우선이 부축되어 있었 다. 한참동안 걸음을 그렇게 걷던 도우선이 입을 열었다. "대형, 붕비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무슨 이야기를......." "당신을 만나면 내가 죽인다고 했다는 이야기 말이외다. 정말 내 손에 죽으 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닐텐데......." 초풍비는 빙그레 웃었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의 웃음을 접한 도우선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과거(過去)에도 초풍비의 웃음을 보며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우선은 초풍비의 웃음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 았다. 도우선으로서는 가벼운 전율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군.' 도우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이더라도 우선 네가 살아나야 죽일 것 아니겠냐. 우선 이곳을 벗어나고 보자." 초풍비는 걸음을 재촉했다. 만약 담붕비에게 일이 생기거나 눈치를 챈 무인 들이 달려온다면 모두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궁금한 것은 초풍비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참을성이 있게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이 다물어졌는지라 도우선은 묵묵하게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을 때 도우선이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 는 그리 힘든 것 같지 않았는데도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초풍비는 기다려 주기로 했는지 묵묵히 서서 올라가는 계단을 노려볼 뿐이 었다. "같이 나가다가는 모두 죽을지 몰라요. 나야 괜찮지만 형님 몸에도 피해가 올텐데...... 어떻게든 이곳을 알아서 빠져나가 보도록 할 테니 신경 끄시 고 그만 나가보시오." 도우선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회포를 풀 겨를도 없이 그들은 약간의 앙금과 적당 한 반가움으로 서로를 외면(外面)하는 형상이었다. 허나 도우선의 퉁명스러운 말속에는 정이 녹아 있었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 의 투정 같게도 느껴졌다. 도우선이 그토록 자신을 학대(虐待)하는 것은 자신 때문에 대형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그것을 모를 초풍비는 아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네가 나를 원망하려해도 우선 살아야 하는 것이고 나를 죽이려고 해도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더냐? "흥, 막내에게 이야기는 들은 모양이구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우선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뇌옥에 갖혀 있었던 사람치고는 의외로 몸의 상태가 좋았다. 걸음을 옮길 수 있다는 것 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도우선의 몸은 제법 빨랐다. 도우선의 걸음은 빨랐으나 초풍비는 안심할 수 없었다. 온몸으로 들썩거리 는 도우선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온몸의 힘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걸을 수 있겠느냐?" "이래도 한때는 오지회의 이제(二弟)였소. 내가 삼 년 동안 뇌옥에 갇혀 있 었다고는 하나 망가진 것은 아니오." 말을 내뱉기는 했으나 걷기가 만만치 않은 듯 도우선은 얼굴을 찡그리고 석 상처럼 몸이 굳어 있었다. 큰소리를 치기는 했으나 막상 걸으려하니 현기증(眩氣症)이 나고 전신에 통 증이 어려 걷기가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도우선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었 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참아보려 했으나 결국은 참을 수 없는 듯 거친 숨 도 내쉬었다. "어서 가자.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나중에 이곳을 벗어나고 해도 늦지 않는 다." 초풍비는 자신의 어깨에 도우선을 다시 부축했다. 원래 호리호리한 몸을 지 닌 도우선은 과거 초풍비가 느끼고 있던 몸보다 더욱 야위어 있었고 가벼웠 다. '이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초풍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발에 걸렸다. 도우선은 이미 누구의 작품(作品)이라는 것을 알고 있 다는 듯 눈 하나 끔뻑이지 않았다. 초풍비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올라섰다. 계단을 오르는데 약간의 시간이 요구되었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 마지막 계단이 나타나자 초풍비는 도우선을 내려놓고 밖을 둘 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 돌아와 도우선을 업고 계단을 벗어났다. 부서진 비밀 문을 벗어나 전각을 벗어났다. 어둠 속에 희미한 구름다리를 건너 인공 호수를 지나쳤다. 그들은 곧 인공 호수를 지나 서둘러 걸음을 옮 겼다. "억! 대형!" 갑작스러운 담붕비의 부름에 초풍비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침 초풍비는 전각 을 벗어나 사방을 둘러보며 막 달리려던 참이었다. 담붕비의 몸에서는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꼴은 담 붕비의 어깨에 깊이 박혀있는 강전이었다. 초풍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견딜 만 하느냐?" "물론입니다. 놈들이 내게 모두 덤볐지만 난 건재(健在)하잖소. 재수 없게 한 발 맞기는 했지만 놈들이 날 어쩌겠소." 담붕비는 코방귀를 뀌었으나 뒤를 돌아보는 눈에는 적잖은 걱정이 깃들여 있었다. 그의 등뒤가 점점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담붕비였다. "친구들이 많이 몰려오는군." 초풍비는 다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밝아오는 빛이 아니라 횃불을 든 사람들이었다. 무 려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박도를 들고 몰려오고 있었고 손에 든 횃불로 인 해 그들의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창! 초풍비는 반검을 뽑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도우선과 담붕비는 가볍게 어깨를 떨 었다. 오지회 시절 초풍비가 어떤 결심을 할 때 짓는 표정이 있었다. 그 중에서 무표정이 가장 두려운 표정이었다. 초풍비가 가질 수 있는 수만 가지 표정 중에서 무표정(無表情)은 바로 살심 (殺心)이었다. 상대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때 짓는 표정이 바로 무표정이 었다. "막내, 아우를 지켜라." 파아아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몸이 쏜살같이 퉁겨나갔다. 담붕비가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초풍비는 이미 반검을 들고 달려오는 비하산장의 무인들 앞에 다다라 있었다. 최초의 비명은 곧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악!" 비명을 토한 자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허리가 두 동강으로 잘려 상 하체가 나뉘어진 무인의 사이로 초풍비의 반검이 빛을 반사시켰다. 피가 솟구쳐 이 장이나 날아갔다. 사방으로 역한 피비린내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엇! 막아라." "물러서지 마라." 느닷없는 살격(殺擊)에 당황한 비하산장의 무인들이 걸음을 멈추며 박도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들의 틈바구니로 파고든 초풍비를 정확하게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찾아냈다 하더라도 박도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박도를 휘 두르기 위해 초풍비를 찾았을 때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피를 뿌려 붉은 안개를 일으키며 비하산장의 무인들 사이를 헤집는 초풍비 의 몸은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다. 창―차창― 간혹 병장기가 마구 부딧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병장기의 충돌(衝 突)이 일어난 곳에서는 여지없이 비명이 울려나왔다. "크아아악!" "컥!" 허공에 머리가 퉁겨져 올라가고 땅바닥에 내장이 깔렸다. 진한 혈향이 풍겨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비위가 약한 무인들은 헛구역질을 토했다. 파드드드등― 콰지직! 허공에서 검광이 일고 붉은 손 그림자가 횃불 사이를 헤집었다. 검에 목이 잘린 자는 다시 손 그림자에 격타 당해 허공을 날아갔다. "꾸에엑!" 머리가 손 그림자에 부서지고 허연 뇌수를 뿌렸다. 땅에 뿌려진 뇌수는 곧 붉은 색으로 변했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검은 색으로 변화를 서둘렀 다. "피하라." "으으으, 살신을 만났다. 어서 흩어져라." 누군가 외침을 토했으나 무의미(無意味)한 경고성에 지나지 않았다. 외침을 토한 자는 자신이 미쳐 피하기도 전에 두개골이 빠개지고 목이 잘려 퉁겨졌 다. 후두두두― 하늘에서 피 비가 내렸다. 스스슷― 허공이 뿌려졌던 피 비가 엷어지며 초풍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전신이 붉게 물들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전신에서는 진한 혈향이 풍겨 나와 옆에 서 있은 것조차 역겨울 지경 이었다. "푸후후후, 날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그는 검을 허공에 휘둘러 검신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버린 다음 담에 등을 기대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서너 명의 무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묻겠다. 누가 너희들의 우두머리냐?" 대답은 없었다. 모두들 입이 얼어붙어 대답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후들거 리는 다리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 들의 우두머리가 비하산장의 장주라는 사실인데 그것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 지 않을 것이었다. 무인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탈색되었다. 너무도 질식할 것 같은 공포(恐 怖)에 하체를 축축하게 적시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배설의 만족을 느끼는 자는 없었다. "멈추어라!" 허공에서 한소리 호통이 들려오며 강맹하고 예리한 강기가 초풍비를 향해 날아왔다. 뒤이어 파공성이 울리며 두 개의 인형이 날아왔다. 파파파파― 예리하고 강맹한 강기가 날아오자 초풍비는 뒤로 두 발을 물러나며 검을 휘 둘러 부딪쳐갔다. 미처 상황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임기응변(臨機應 變)의 방어였다. 캉! 허공에서 불똥이 튀며 날카로운 강기가 퉁겨졌다. 한 자루의 단검이 땅속에 박히고서야 초풍비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 강기가 단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냐?" 초풍비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두 개의 인형이 떨어져 내렸다. 비하산장의 장주인 도홍진과 유기성이었다. 그들의 뒤로도 열 명의 그림자가 더 떨어져 내렸다. "흐흐흐,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겁 없이 날뛰다 니......." 도홍진은 비릿한 살소를 흘렸다. 유기성은 그의 등뒤에서 약간 겁을 먹은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홍진은 미처 주변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자세히 훑어볼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오로지 자신의 장원이 피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에 격분(激憤)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네놈들 중 누가 내 아우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느냐?" "아우?" 도홍진은 의문을 토했다. 도홍진의 의아심도 잠시, 곧 초풍비가 말하는 아우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아차리고 얼굴색을 변화시켰다. 그제야 자신의 앞에 서 있은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도홍진이었다. 도홍진은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위축된 감정을 애써 지우려는지 가슴을 폈다. 의도적인 냄새가 풍겼지만 그는 태연했다. "혹시, 당신은?" "말하는 순간 네놈은 죽는다." 초풍비의 목소리는 늦가을에 내리는 찬 서리처럼 냉기가 풀풀 날렸다. 여전 히 표정의 변화가 없어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도홍진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초풍비가 한발 다가섰다. 도홍진은 초풍비가 자신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원래는 자신이 초풍비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만 모든 것이 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도홍진이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좋다. 네놈은 죽는다. 그러나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 하면 편안하게 죽 여주겠다." "이런 괘씸한 놈." 파아아아― 도홍진의 등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기성이 손을 뻗어내며 앞으로 퉁겨 나 왔다. 그의 손에는 횃불을 반사시키는 날렵한 검이 쥐어져 있었다. 유기성은 아직 초풍비가 누구인지 몰랐다. 다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 근접 (近接)해 있었으므로 단 한 번의 암습이라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합, 건방진 놈!" 카드드등― 초풍비의 손이 적색으로 물들며 빠르게 허공을 찔러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반검이 들려있었다. 캉! 허공에서 한줄기 빛이 번뜩인 순간 마치 유리조각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 렸다. 그러나 초풍비가 언제 검을 휘둘렀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흑!" 털썩― 허공에서 하나의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사람의 팔이었다. 팔에는 검이 들 려있었는데 유기성이 찔러가던 검이라는 것을 도홍진은 알 수 있었다. 부들부들― 신경이 살았는지 검을 잡은 손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검이 바닥에 부딪치 며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마치 쇠로 만들어진 주걱으로 솥을 긁는 듯한 거친 소리였다. 퍽― 유기성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그 후였다. 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 멍이 뚫려 있었고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분수처럼 흩어졌다. 잘린 창자가 복부로부터 밀려나오며 땅으로 파고드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렸 다. "으으으, 잔인한 놈." 도홍진은 치를 떨었다. 그가 들었던 것보다 더욱 처참한 모습이 눈에 들어 오자 발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부하들이 그에게 보고했던 것은 눈에 보이 는 것에 만분지일(萬分之一)도 되지 않는 참상이었다. 한참동안 푸들거리던 유기성의 몸이 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졌다.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자신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 될까 두려운 표 정이었다. "다시 묻겠다. 내 아우를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냐?" "묻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 네놈이 그것을 알게 되는 날에는 결국 죽음 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언뜻 도홍진의 눈가에 두려움이 스쳤다. 눈도 흰자위가 많아지는 것이 그는 마음속에 부담을 느끼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겠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초풍비는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 같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흑백(黑白)이 가려질 것 이다." "흥, 어차피 네놈도 죽게 되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감히 비하산 장을 건드리다니." "그래, 네놈 말이 너무도 괘씸해서 결과를 보아야 하겠군." 슈슈슈슈― 초풍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홍진의 몸이 회전을 일으켰다. 도홍진의 몸 이 회전을 일으키자 수십 줄기의 은빛이 횃불에 편광(片光)을 반사시키며 사방으로 비산(飛散)했다. 빛의 정체는 명확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도홍진의 외호에 천수(千手)라는 이름이 들어있다는 사실이었 다. 천수니 만수(萬手)니 하는 따위의 외호는 주로 암기를 사용하는 자들의 이름에 붙기 마련이었다. "흥!" 날카롭게 콧소리를 외친 초풍비는 반검을 휘둘러 몸 주위에 엄밀한 검막(劍 幕)을 형성했다. 진기가 반검에 스며들며 붉은 색을 띄웠다. 이미 사라진 사문이었고 초풍비 의 은혜로운 사부가 원하기는 했지만 그의 사문(師門)에서 전해지는 내가진 기가 밖으로 표출될 때는 마치 피처럼 진한 선홍색을 뿌리게 되어 있었다. 한때, 그가 정사중간의 인물로 치부를 받은 것은 그의 진기가 붉은 홍운을 일으켰던 이유도 있었다. 창창창 ― 차창! 후드드드― 허공에서 병기의 충돌음과 비슷한 쇠붙이 소리가 들리고 적지 않은 숫자의 암기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잡다한 암기가 보였다. 혈도를 공격하는 혈리표(穴理標)며 살상을 극대화한다는 탈수표(脫手標)도 보였다. 비황석 대용으로 사용하는 바둑돌도 있었고 나한전도 있었다. 씨익! 초풍비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찌 보면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만약 오지회의 동생들이 보았다면 그것이 잔악한 살소(殺笑)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건방짐 놈! 내가 네놈의 장난감이라 생각했다면 목을 늘여야 할 것이다." 갑자기 초풍비의 손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며 도홍진의 가슴을 찍어갔다. 너 무 빠른 공격이 사람의 눈에 손이 늘어나는 듯 보이게 만들었다. 너무도 창 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도홍진은 감히 마주치지 못하고 황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재빠른 출수(出手)였지만 초풍비는 허공에 손 그림자를 그리는데 그쳤다. 도홍진이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암기를 뿌리고 세 걸음이나 물러나 있 었다. 차―앙― 도홍진은 물러나는데 그치지 않고 허리에 감고 있던 요대를 풀어 허공에 한 줄기 선을 그었다. 요대에서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일었다 요대는 연검(軟劍)이었다. 허리에 둘러진 매화무늬는 검을 싸고있는 검집이었고 그 속에는 백색투명 (白色透明)한 연검이 들어있었다. 연검은 독사의 혀처럼 휘어지며 초풍비의 목을 감아왔다. 연검은 강호에서 흔히 사용되는 냉병기와 달리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 었으나 막아내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탄성(彈性)을 지닌 철로 만들어 채찍처럼 휘어지므로 설사 검을 막았다 하 더라도 어느 방향으로 휘어지며 공격이 이어질지는 예측이 불가능했다. 내공이 강한 자는 휘어지는 도중에 검에 내력을 주입시켜 직도처럼 뻣뻣하 게 만들 수도 있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검을 휘두르는 자도 연검이 어느 방향으로 휘어도 제어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보통 연검을 사용하는 무인들은 다른 병기와 마찬가지로 오랜 숙련을 통해 자신의 병기를 제어하지만 다른 병기보다 다루기가 어려운 것은 확실한 사 실이었다. "돼져라. 이놈아!" 파스스―스아앙― 눈 깜작할 사이에 연속 두 번의 흔들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연검은 마치 살아있는 버드나무처럼 그의 목과 얼굴, 심지어는 폐를 찢어발길 듯 밀려들 었다. '이크, 잘못하다가는 명년 오늘에 제사를 치르겠다.'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검의 그림자를 보며 초풍비는 급히 상체를 둥글게 말 아 미친 듯 날뛰는 검의 그림자를 흘렸다. 검은 그의 귀밑이며 얼굴 사이로 마구 지나갔다. 그러나 단 일 검도 그의 몸에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초풍비는 몸을 비스듬히 세웠다. 몸을 팽그르르 돌리며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혀졌는지 반검이 들려있었고 진력이 녹아들어 새빨갛게 달구어져 있었다. 챙―채챙―창― 연속 일곱 번의 병기가 충돌했다. 허공에서 반딧불 같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건방진 놈, 각오하라." "얼마든지 오라, 네놈의 제삿날을 만들어 주마." 검을 휘두르는 중간에도 도홍진은 연신 중얼거리듯 입을 놀렸다. 초풍비는 입이 없는 듯 묵묵히 검을 휘둘러 미친 듯 달려드는 그를 상대했다. 겉으로 보기에 결과는 명백(明白)한 것 같았다. 연검이 허공에 그리는 검의 그림자가 너무 많아 보는 이들 모두는 한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 날 듯 보였 기 때문이다. "아우, 그를 어디서 만났느냐?" "모르겠소. 어제 이곳에서 형님의 신물(神物)이 나타났기에 들렸다 놈들에 게 들켜 미친 듯 싸우다 도주하는데 바람처럼 경공을 전개하는 사내를 만났 소." "대형이었겠군." "무슨 일인지 모르나 대형은 바쁜 표정이었고 얼굴이 침울했소." 담붕비는 사촌 남 말하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현재 그들의 모습은 철저한 방관자(傍觀者)의 모습이었다. 담붕비의 어깨에 의지한 도우선도 그랬고, 담붕비라 해서 다를 것도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뇌옥에 갇혀있었던 도우선이라지만 그의 얼굴에 어리는 것은 걱정과 호기심, 안도감 등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기력(無氣力)한 모습마저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난 거냐?" "대형이라 불러요." "좋다. 대형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뭐란 말이냐?" "모르겠소. 자세히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십중팔구(十中八九) 신변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같소...... 아무튼 대형은 왜 강호에 나오게 되었 는지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도우선이 뜨악한 얼굴로 담붕비를 바라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 무 많았다. 만약 도우선이었다면 무엇보다 왜 강호로 나왔는지 알아보았을 것이었다. "언제 그를 만났느냐?" "한 네 시진 정도 되었소." 도우선은 눈을 크게 떴다. 담붕비가 대형을 만난 지 하루가 지났다는 이야 기가 아닌가? 더욱 황당한 것은 네 시진이나 지났다면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가 왜 강호에 나왔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단 말인 가? "물어보지도 않았어." "뭘?" "대형이 왜 강호에 나오게 되었는지 말이야. 십 년 만에 강호에 나온 것은 필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니냐." 이제의 말에 담붕비가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차 하는 마음 이 들기도 했다. 자신도 대형이 왜 강호로 다시 나왔는지 묻지 않았던 것이 다. 원망과 섭섭함 때문에 묻는 것을 잃어버렸던 것인지, 속으로 너무나 반가워 흥분한 탓인지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르겠어. 잠시 후에 물어보도록 하지 뭐." 담붕비는 대답하며 눈을 돌려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슈슈슈슈― 초풍비의 검이 연속해 삼 검을 찌르자. 도홍진은 피할 곳이 없었다. 모두가 허초(虛招)라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검이 스치는 바람소리에 비 해 밀려드는 강기는 너무 약했다. 그러나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어느 것이 정말 검인지 그도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파파파파― 파파파파― 도홍진도 뒤지지 않았다. 연속해서 삼 초를 휘둘러 달려드는 초풍비의 검초를 받으며 몸을 움츠렸다. 몸이 노출되는 부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한 것이다. "이런, 난 놀림 당하지 않는다." 도홍진이 호령을 터트렸다. 어느새 그들의 사이에서 백합(百合) 정도의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졌다. 겉 으로 보기에는 누구도 승리를 점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점점 공방 (攻防)이 깊어갈수록 도홍진이 수세(守勢)에 밀리기 시작했다. '기이한 일이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검법이란 말야. 어디서 보았지!'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도홍진의 공격을 막고 검을 피하면서도 초풍비는 너 무도 눈에 익은 검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법에서 실마리는 잡히지 않 았다. 그가 도홍진과의 싸움을 질질 끄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 초풍비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력으로 부딪친다면 불과 오 합을 넘기지 않고 도홍진을 제압할 수도 있었다. 한순간, 그의 미간사이가 좁혀졌다. "이만 줄여야겠군. 챙― 파파파팟― 초풍비의 검이 허공을 가린다고 느껴진 순간, 다섯 손가락의 그림자가 환영 (幻影)처럼 피어올랐다. 손가락은 번개같이 퉁겨지며 도홍진의 몸으로 쏘아 갔다. "헛! 뭐냐?" 도홍진이 놀람의 음성을 토해내며 뒤로 몸을 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초풍비의 손가락은 목표를 찾은 후였다. 그의 손가락은 살아있는 활어(活 魚)처럼 움직이며 요혈(要穴)을 찔러갔다. 핏핏핏! 연속 세 번의 파공성이 울리고 심하게 비틀거리는 도홍진의 몸이 보였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손에 쥐어져 있던 연검은 보이지도 않았다 "어떤가? 이제 현실이 믿어지나?" 초풍비는 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도홍진의 얼 굴이 파랗게 탈색되었다. 그는 상체가 굳어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 다. 도홍진은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으나 곧 발걸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 물러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등에는 전각의 일부가 닿았고 손가락에 요혈을 제압한 후라 마음대로 움직 일 수도 없었다. 주루루루― 도홍진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털썩! 그의 무릎이 접혔다. 더 이상 반항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했던 것이다. 상체 는 제압 당했고 하체는 무력감에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공포가 여울처럼 밀려오자 도홍진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반항할 힘조차 남 아있지 않았다. 의미가 없다는 것도 인식이 되었다. "아우를 이곳에 잡아 가둔 자가 네놈이 아니란 말이냐?" "그렇다." "그러면 왜 아우가 이곳에 잡혀와 구금(拘禁)되어 있었단 말이냐? 그것마저 모른단 말이냐?" "비록 내가 지금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쓰레기는 아니다. 나에게 수치심을 주지 마라." 도홍진의 말에 담붕비가 앞으로 나섰다. "뭐라고...... 이런 개만도 못한 자식, 내가 너와 농담하자는 거야." 분기탱천(憤氣 天)한 담붕비의 주먹이 허공에 궤적(軌跡)을 그렸다. 퍽! 출렁! 담붕비의 주먹에 가슴을 강타 당한 도홍진의 몸이 삼 장이나 밀려가며 바닥 에 여덟 개의 발자국을 남겼다. 마지막 발은 안간힘을 쓴 듯 복숭아뼈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어 있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도홍진의 하체는 바람맞은 갈대처럼 심하게 후들거렸 다. "으으윽......! 울컥!" 도홍진의 칠공(七孔)에서는 선홍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핏속에는 조각난 창자 쪼가리가 섞여있어 담붕비의 주먹에 실 린 힘을 알 수 있게 했다. "아우, 참아라." 초풍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담붕비를 말렸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으나 자신이 제압한 자에게 굳이 위협을 가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더구나 그에게서는 얻을 것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도우선이 그에게 당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하뇌옥에 갇혀 있었던 만큼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툇!" 담붕비가 가래침을 뱉으며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초풍비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초풍비는 도홍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표정은 다시 무심(無心)해졌다. 도홍진의 얼굴이 암울하게 변했다. 이미 자신의 생사(生死)가 어디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어떤 용기도 생겨나지 않았다. "나에게도 부탁이 있소. 들어주시겠소?" "말해 봐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 주겠소. 대신 나에게도 무인답게 죽을 권리를 주 시오." 초풍비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심하기만 하던 얼굴에 측은하다는 표정이 어 렸다. 그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무인의 권리라...... 중요할지도 모르지.' 초풍비는 뒷짐을 지었다. 그는 왼쪽으로 두 걸음 옮기며 도홍진을 바라보았 다. 이미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는지 그의 얼굴은 본래의 색을 보이고 있었 다. "좋아. 당신의 죽음을 당신이 선택하게 해 주겠다.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알려주어야 한다." "물론이오." "좋소. 첫번째로 아우를 잡아온 것이 당신인가?" "아니오." 도홍진은 강한 거부의 반응을 보였다. 그의 눈빛은 진실(眞實)이라는 듯이 활활 타올랐다. 생명의 불꽂 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기는 했지만 그의 모습으로 보아 거짓을 이야기할 자는 아닌 것 같았다. 초풍비는 묵묵히 도홍진의 표정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누가 아우를 잡아왔느냐? 그리고 누가 그를 가두었느냐?" 초풍비는 그의 정면에 서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가 도홍진의 정면에 선 것 은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거짓말을 하고자 해도 눈이 마주치면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초풍비였다. '헛!' 도홍진을 노려보던 초풍비가 한줌의 숨을 몰아쉬며 몸을 비틀었다. 경악이 목구멍까지 밀려 올라왔다. 슈슈슈슈― 날카로운 강기가 그의 등에 있는 명문혈(命門穴)을 노리며 밀려들었다. 너 무나 가까운 곳에서 발출(拔出)된 것이었기에 피해야 된다는 것 외에는 아 무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휘리리리―리릭! 초풍비는 번개처럼 몸을 뒤집으며 허공으로 이 장을 솟구쳤다. 동시 손가락 을 부채처럼 펼쳐 자신에게 덮쳐오는 경력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에서 빨래줄 같은 강기가 손톱을 벗어나 밀려나갔다. 십 수 년 전에 익힌 절기로 마황지(魔皇指)라는 지공으로 절대 실수하지 않는 기공이었다. 한때 초풍비는 마황지 한 가지 초식을 연달아 사용해 녹림십팔채의 한곳인 회룡채(回龍寨)의 무인 중 오십 인을 박살내버린 적이 있었다. 결국 회룡채가 오지회의 빈틈없는 공격에 무너지고 한때 무림의 피의 바람 이 일어났었다. 당시 무림맹주였던, 소림의 속가제자이며 초풍비의 친구인 일월랑(一月郞) 문준현(文俊賢)이 초풍비를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비 참했을 것이다. 강기는 그의 머리 밑을 스쳐 그대로 날아갔다. 초풍비의 앞에는 비하산장주 가 몸에 심한 부상을 입고 서 있었다. 강기는 그대로 비하산장주의 목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오늘의 내가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다. 근래 들어 그는 나를 배신했 다. 그는...... 컥!" 말을 이어가던 도홍진이 갑자기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소리를 토하며 목을 떨구었다. 그의 목에서 한 방울 두 방울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무언가 나올 것이 있으리라 믿었던 초풍비는 허탈(虛脫)했다. 그는 언뜻 실 눈으로 도홍진을 쳐다보았다. 피는 곱게 다듬어진 매듭의 끝에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매듭 은 조그만 단검의 손잡이 고리에 만들어진 것으로 붉은 색과 청색으로 만들 어져 있었다. 수실이 매달린 고리에도 이미 붉은 피가 묻었다. 원래는 백색이었을 것 같은 고리의 색도 붉게 변해버렸다. 고리는 단검의 손잡이에 이어져 있었다. 단검의 손잡이에도 붉은 피가 엉겨 흐르고 있는 것이 흉측하고 역겹게 보였다. 목에 박힌 단검은 길지 않았다. 손잡이 부분까지 목을 파고 들었으나 목뒤 로 빠져 나오는 검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휙! 미세한 파공성이 울리자 굳은 듯 움직임이 없던 초풍비의 몸이 허공으로 솟 구쳤다. 솟구치는 그의 눈에 수십 장 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 가 보였다. "형님!" 담붕비가 외쳤을 때 초풍비의 몸은 허공을 도약하며 연신 자신의 발등을 찍 었다. 초풍비는 불과 두 번의 도약으로 지붕 위로 올라섰다. "너는 아우를 맡아라. 곧 다녀오마." 그는 사방을 둘러본 뒤 담붕비를 향해 외쳤다. 새벽이 되어가며 거세어진 바람이 불기는 했으나 그를 막을 수 있는 바람은 아니었다. 휘이이익― * * * 망한구(亡恨丘)! 비하산장에서 오리 정도 덜어진 조그만 언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쩐 이유로 망한구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나 사방 만여 장에 이르는 망한구는 범상한 곳이 아니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망한구는 명나라 초기 연왕(燕王)의 명을 받들어 남경 을 공략하던 몽고족의 원혼들을 모아 장사 지낸 곳으로 지금도 땅을 파면 사람의 해골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했다. 스우이이잉― 차가운 바람은 뼈를 베일 듯 칼바람이 되어 불었다. 군데군데 자란 활엽수 (闊葉樹)의 잎이 바람에 떨어지자 더욱 스산해진 풍경이 되어 오싹하는 기 분이 들 정도였다. "헛! 무서운 놈이다. 벌써 추적해 오다니." 휘리릭! 전신에 검은 무복을 걸친 무인이 무섭게 질주하다 걸음을 멈추었다. 전신에 걸친 무복 외에도 발끝에서 머리끝에 이르도록 검은 천으로 감싸 얼굴도 보 이지 않았다. 손에도 검은 천이 돌돌 말려있어 보이는 것이라고는 빠끔히 뚫어진 복면 사 이로 보이는 눈뿐이었다. "어차피 놈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틀렸다. 오라!" 스―창― 복면인은 두 다리를 땅에 붙이고 오연(傲然)하게 서서 검을 뽑아 중극(中 極)을 겨누었다. 그가 숨 한 번 고르는 시간이 지났을 때 허공에서 하나의 인형이 떨어져 내렸다. 초풍비였다. "하하하, 더 도주해 보시지 왜 걸음을 멈추었나?" 초풍비가 호탕하게 웃으며 한 발 한 발 거리를 좁혔다. 그때마다 복면인은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가 물러설 때마다 땅에 발자국이 새겨졌다. "망할 놈, 죽여버리겠어." 복면인이 물러서기를 멈추었다고 느껴진 순간 검을 휘두르며 물러설 때보다 수십 배는 빠르게 앞으로 퉁겨져 나왔다.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헛!" 너무도 예상 밖의 공격이었기에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한 초풍비는 목이 갈라 지는 듯한 다급한 신음을 뿌리며 좌측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찌이―이―익― 그러나 완전히 공격을 벗어나지는 못한 듯 가슴부위가 찢어지며 선혈이 튀 었다. "넌 죽었다. 이놈아!" 한 번의 공격이 성공으로 돌아가자 기가 산 복면인의 검이 더욱 날카로워졌 다. 복면인의 가는 세도는 연환세(連環勢)의 검법으로 변화되어 한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복면인의 검은 가늘고 길었다. 흔히 부상의 무인들이 사용하는 검과 닮아 있었다. 그토록 가는 검을 쓰는 자들은 한결같이 쾌검식(快劍式)이라 부르는 검법을 익히고 있었다. 빠르고 잔악한 쾌검식은 한 번 뿜어지게 되면 그 끝을 보아야만 거두어지는 무서운 검법이었다. 그래서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음지(陰地)에서 적을 죽이는 살수들의 검 이 대게 그런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이토록 빠른 검이 존재하다니.......' 초풍비는 어지럽게 다가오는 검을 피하며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상대의 검 이 얼마나 빠른지 미처 검을 뽑을 사이도 없었던 것이다. 복면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수십 초의 공격이 가해졌지만 초풍비를 어쩌 지 못했던 것이다. 살수들의 쾌검은 내력이 많이 소모되는 검법이었다. 따라서 검을 뽑으면 빠 른 시간에 상대를 요절내야 했다. 심지어는 온 내력을 모아 일 검으로 모든 것을 결해야 하는 것이 살수였다. 그런데 복면인은 초풍비를 어쩌지 못했 다. '큰일이다.' 복면인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자신의 손에서 무섭게 춤을 추는 검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어지러워지 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등으로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후후후, 어리석은 놈아. 이제 칼춤은 다 추었느냐?" 창! 초풍비의 허리에서 백색광선(白色光線)이 번뜩였다고 느낀 순간 복면인은 손목이 부러지는 충격을 느끼고 비명과 함께 주르륵 물러났다 어느새 초풍비의 손에는 반검이 들려져 있었다. 조금 전 비하산장에서 무수 히 많이 죽인 무인들의 피가 엉겨붙어 군데군데 검붉게 변한 검이었다. "감히 내일을 방해하다니...... 네놈이 대신 입을 열어주어야겠다." 츄리리리릿― 초풍비의 검이 허리에서부터 뻗어나가 횡으로 그어 올라가자 복면인은 엉겁 결에 검을 들어 막았다. 찡― "커흑!" 둔탁하게 들리는 신음은 당연하게도 복면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입에서 튀어나온 것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복면인의 눈이 말하는 것 이었다. 부르르르― 복면인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의 가슴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 다. 검에 잘려 희게 빛나는 갈비뼈는 점차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네놈에게 비하산장주를 죽이라 사주한 놈이 누구냐?" "흥, 네놈 같으면 말할 것 같으냐."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나는 잔인하거든...... 뿐만 아니라 죽은 자라도 나는 뼈를 갈아 버리는 사람이지." 초풍비가 음충스러운 음성을 토했다. 이미 기력을 상실했는지 복면인은 미 동(微動)도 없이 초풍비를 노려보았다. 초풍비는 그의 주위를 어슬렁거렸 다. "나는 많은 정보(情報)를 원한다. 그러나 네놈은 나에게 한가지만 알려주면 된다. 누구냐?" "미친놈, 내가 알려줄 것 같으냐?" 팟― 빈정거림의 말투를 토한 복면인이 날카로운 음성을 토하며 검을 수평으로 겨눈 채 달려들었다. 검은 정확하게 가슴의 높이였다. 검 끝은 과도한 진력의 끌어올림을 보여주는 듯 심하게 요동쳤고 오로지 죽 이기 위한 공격의 방법이었다. 검을 제외한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었다. "흥, 동귀어진(同歸御眞)의 수법인가." 초풍비는 빠르게 뒤로 두 발을 물러서며 검을 휘둘러 둥근 원을 그렸다. 동 시에 왼손에 내력을 집중하여 힘차게 뻗어냈다. 차차창― 콰직- 날카로운 병장기의 충돌음이 연속으로 울리는가 싶었는데 수박이 깨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악!" 후두두두―두두―두둑― 허공에서 부서진 뼈 조각과 살점이 짓이겨진 채로 떨어져 내렸다. 언제 찢어졌는지 복면과 흑의도 조각조각 흩어진 채로 뿌려졌다. 챙그렁! 복면인이 들었던 검이 떨어져 날카로운 금붙이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놈들...... 언젠가는 네놈들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거다. 그때는 아예 끝을 내주마." 초풍비는 몸을 돌렸다. 그의 등뒤로 망한구의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실린 진한 혈향이 번 져나가고 있었다. * * * 초풍비가 다시 비하산장으로 돌아왔을 때 담붕비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십 여 명의 무인들을 도륙(屠戮)을 낸 후였다. 그의 몸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뿌려진 선혈이 그를 악귀나찰(惡鬼羅刹)로 보이게 했 다. "형님은 더하신다고......." 담붕비는 그렇게 말하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초풍비가 야차(夜叉) 같다는 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대꾸한 말이었다. "그만 돌아가자."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담붕비가 갑자기 달려갔다. 횃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그의 몸은 곳 사라졌다. 둔해 보이는 몸이었지만 담붕비의 경공은 놀라운 바가 있었 다. 과거 십 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그였다. "이제, 막내가 왜 저러냐?" "신경 쓰지 마세요. 언제나 저런 놈이지 않아요." 이제는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처음 뇌옥에서 만났을 때 냉기를 풀풀 날리 던 말투부터 달라져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도 많이 온화해졌다. 무엇보다 반말 비슷하게 쓰던 말투가 정상적인 존댓말로 바뀐 것이었다. 그 렇다고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담붕비의 말대로라면 그 는 정말로 초풍비를 죽이고 싶은지도 몰랐다. 화르르르― 갑자기 사방이 다시 밝아졌다. "저...... 저게 뭐냐?" "불 아닙니까?" "누가 불을 질렀지? 혹시 막내가 한 짓인가?" 초풍비는 한탄을 흘렸다. 과거 오지회를 조직했을 때만해도 그들에게 생명의 존엄(尊嚴)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앞길을 막는 자는 죽였고 의견을 내는 자는 입을 찢었다. 앞을 막는 자들의 집은 불태웠고 심지어는 일년이 걸리는 추적을 벌여 일가 족을 몰살시킨 적도 있었다. 그것이 불과 십 년 전의 자신이었다. 그런데 왠지 담붕비가 불을 질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언짢았다. 담붕비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반 식 경이 지난 후였다.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는 그는 비대해 보이기조차 한 몸을 날려 다가왔다. "형님, 갑시다." "네가 불을 질렀느냐?" "예." "왜지, 사람을 죽였는데 불까지 지르는 것은 너무하지 않았을까?" "무슨 말씀이세요. 악의 소굴은 아예 뿌리부터 잘라버려야 해요. 놔두면 다 시 악의 소굴로 변할 겁니다." 초풍비는 입을 다물었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담붕비가 앵무새처럼 중얼 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우들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자신이었다. 동녘이 밝아졌다. 그들이 서 있은 곳을 기준으로 하여 서쪽에서는 산장이 불에 타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서서히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불과 한 시진이 지나지 않아 사방이 밝아질 것 같았다. "그만 가자꾸나. 여기서 어물거리다가는 방화범(放火犯)으로 관부(官府)에 끌려가기 십상이다." 초풍비는 도우선를 들쳐업었다. 오랜 세월 동안 뇌옥에 갇혀있었기 때문인 지 짚단처럼 가벼웠다. "아우?" "예, 대형."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객점으로 돌아가자. 어서 가거라." "알겠어요." 휙― 담붕비의 몸이 비조(飛鳥)처럼 솟구치며 불길이 치솟는 반대방향으로 달려 갔다. 그 뒤를 따라 초풍비의 신형도 안개처럼 흐릿하게 변하며 날아갔다. 그들은 한 번의 도약에 이 장을 솟구치더니 곧 비하산장에서 사라져 버렸 다. 그들이 사라져 버린 후에도 불길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거세게 타올 랐다. * * * 노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제 놈은 다시 힘을 얻고 있소. 오지회가 뭉치게 된다면 그 힘이 어떠하 리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물론!" 무영의 말에 노인은 알고 있다는 강한 표현을 했다. 그가 모를 리가 없었 다. 그가 아는 대로라면 초풍비 하나를 상대하기도 벅찼다. 그런데 두 명의 형 제가 초풍비에게 힘을 보태게 되는 날에는 노인으로서도 감히 막을 수가 없 었다. 설사 어르신의 분노가 있다해도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르신이 매우 노하셨소이다. 어쩌면 원주를 불러들이려 할지도 모르겠소. " "나에게도 기회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르신 말씀이 기회는 충분하게 주고 계시다는 말씀이 계셨소이다." 무영은 노인을 사정없이 압박(壓迫)하고 있었다. 노인의 눈이 허공으로 돌 려지며 흰자위만 드러났다. 강한 반발(反撥)이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반 박하지는 못했다. 노인에게 있어 무영이 어른이라 부르는 자는 그에게도 신과 같았다. 노인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어르신에게 불경(不敬)은 금물이었다. "그러나 어르신도 이해를 하리라 생각이 되네. 이제 곧 초풍비의 형제들이 피를 토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일의 진척은?" "물론 완벽하지. 멍청한 놈의 손을 빌어 내 코를 푸니 어디 쉬운 일이겠나. " 무영의 이야기가 무거웠던지,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조여오는 무영의 말을 피하려 한 것인지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로 돌리고 있었다. '당신이 살길은 그것 뿐이요.' 무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노인이 말을 다른 이야기로 끌어가도 상관하지 않 는 것은 이미 일이 이렇게 돌아가리라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초풍비! 놈도 똥끝이 타게 될 거다." "이유가 무엇이요?" "그의 형제들이 위기에 처한다면 그가 움직일 것이다. 나는 그들 위해 준비 를 하고 있다." "준비라고 했습니까?" 무영의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 이야기를 하는 노인의 안색은 창백하게 굳어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무영의 얼굴은 변하고 있었 다. "물론, 이번에야말로 놈을 잡을 수 있다. 놈이 형제들의 위기를 듣고 몸을 움직인다면 나는 놈을 죽일 수가 있다." "자신이 있어 보이시는군 요." 무영은 어느 때 보다도 노인이 자신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 다. 지금까지 마지못해 어르신의 말에 따르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제는 달 랐다. 노인의 몸에서는 진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죽하면 문이 열리거나 닫히지도 않았고 바람이 새어드는 흔적도 없었는데 향촉이 몸부림을 일으켰 다. "비책(秘策)이 있습니까?" "물론이다. 나는 우리 가문에 남아있는 최후의 병기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 동안 아껴왔지만 더 이상 아낄 필요가 없다. 무영, 당신은 그를 따라 행동 해 주어야 한다." "내가?" 무영은 노인이 이야기하는 최후의 병기가 누구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무영은 노인의 가문(家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 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었다. '아마 당신은 그를 찢어 죽이고 싶을 것이다.' 무영은 노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작 초풍비를 죽이 고 싶은 사람은 어르신이 아니라 노인이라는 것을 무영은 너무도 확연하게 알고 있었다. "원주! 그는 아껴야 하는 것이 아니오?" "아니! 이번이 그를 쓸 차례다." 노인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 비책이 노인에게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언제 그를 사용할 것이오?" "초풍비! 놈이 움직이면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온 힘을 쏟아 부어 놈을 잠 재울 것이다." 무영이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노인의 몸에서 뿜어지는 힘이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진한 살기에 쌓여 있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8 페이지: 1/22 자료번호: 263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2 ─────────────────────────────────────── ■ 상견환 제8장-형제의 우애는 가를 수 없다 "너도 모른다는 이야기냐?" 초풍비는 허탈해졌다. 이미 그들 사이에 가로 막혀있던 앙금은 풀렸다. 도우선은 처음에 말도 안 하리라는 듯 입술을 악물고 있었으나 의형제의 정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 었다. 담붕비의 재촉에 그는 서서히 얼어있던 마음을 풀었다. 더욱이 그는 대형을 원망하고는 있었지만 살기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대형을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한 것은 진의(眞意)가 아니라 그리움이 었다.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 되어 비하산장의 지하 뇌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정확 한 경위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당한 일이 라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당했는데 그래?" 담붕비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쳤다. 답답하기는 초풍비도 마찬가지였으나 세상의 순리(順理)를 아는 그로서는 다그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도우선이 자신을 속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속여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십 년 동안 아우들을 팽개친 자신의 업보(業報)라고 생각할 판이었다. 담붕비는 달랐다. "모르겠다. 그날은 내가 무공을 익힌 이래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연 환이십팔식(連環二十八式)을 사용한 날이기도 했었지." 말은 열리기가 어렵지 한 번 입이 열리면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 닌 모양이다. 이제는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그날 난 북안탕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북안탕산에 비급(秘 )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난 믿지도 않았 고 관심도 없었다. 내가 북안탕산에 간 것은 그곳 어디인가에 대형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 문이었다. 난 형님이 보고싶어 한 달음에 달려갔다. 그들을 만나 것은 형님이 있다는 운무곡(雲霧谷)을 찾아 들어갈 때였다. 오 륙십 명의 검은 무복을 걸친 자들이 나를 막았다. 그들은 다짜고짜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 하는 놈들 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대형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형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도 아 마 대형을 목적으로 하는 자들이기 십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 오지회를 아는 것은 분명했다. 그중 첫번째가 나를 목표로 했겠지. 나는 무려 네 시진의 싸움에서 삼십 명을 죽였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 는 상태에서 말이다. 결국 난 쓰러졌다. 그들의 병기에 쓰러졌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내가 쓰러진 것은 그들이 뿌린 독 때문이었다. 독이라고 보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사고(思考)를 정지시 키는 미혼약(迷魂藥)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는 힘없이 무너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뇌옥이었다. 삼 년 동안 그들은 의외로 나에게 잘해 주 었다. 내 주위에 있던 많은 죄수들이 시체로 변했지만 난 건재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형이 있는 곳을 물었다. 당연히 난 모른다고 했지. 사실 알지도 못했으니까. 그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내 말을 믿었다. 나를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육 개월 전에 나는 이곳 비하산장으로 옮겨졌다. 그들이 왜 나를 이곳으로 옮겼는지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비하산장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내 품에 있던 내 신물을 빼앗아간 것이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로군." 묵묵히 도우선의 말을 듣고 있던 초풍비가 입을 열었다. 비록 두서가 명확 하지 않은 도우선의 말이라고는 하나 초풍비는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이건 나를 노리는 것이 틀림없어. 재수 옴 붙어 아우가 당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노린 것은 나였다.'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윤곽(輪郭)은 보이지 않으나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느껴졌다. 결 국 그들의 목적은 초풍비를 강호로 불러내려는 것이었다. "차도살인지계라니?" 도우선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부지런히 이야기하는 중에 부지불식간 튀 어나온 담붕비의 말은 도우선의 말을 끊었다. "그건 여러 가지가 있다. 나를 비하산장주의 손에 죽게 하려고 했는지, 비 하산장주를 내 손에 죽게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한 가지는 성공했 겠지." "성공이라 했습니까?" "물론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들이 너를 비하산장 뇌옥으로 보낸 것은 이유가 있는 듯싶다." "그게 뭐죠. 나도 관련되어 있는 겁니까?" "암중의 세력은 나를 세상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너를 억압(抑壓)한 것 같다. 오 년 동안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 하다." 초풍비의 말이 너무도 단정적(斷定的)이었기 때문인지 도우선과 담붕비는 고개를 쳐들었다. 과거 대형은 결단성(決斷性) 부분에서는 특히 높은 점수 를 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일을 처리해도 모든 동생들의 의견을 듣고 진행시켰다. 그랬기 때 문인지 초풍비의 말은 늘 권고형이거나 의견을 묻는 형태였다. 과거에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힘을 모아 모든 것을 해결했었다. 허나 현재 의 그가 보여주는 행동과 말은 결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대형, 무슨 일이 있습니까?" 눈치 빠른 도우선이 다가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담붕비도 느끼는 것이 있는 지 초풍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초풍비는 그들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이들에게도 알려주는 것이 좋으리라.' 그는 마음을 굳혔다. "초란이 실종되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의 상식으로 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형이 오지회를 떠난 것이 누구 때문인지 짐작 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한때는 원망도 했었다. 그들이 아는 범위(範圍) 내에서 생각한다면 대형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여인을 위해 강호를 떠났다. 그들이 분노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여인에 대한 분노였다. 여인으로 인해 자신들의 우애(友愛)가 깨졌고 결과적으로 오지회의 공중분 해(空中分解)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그 여인의 이름이 초란이 라는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초풍비는 초란을 만난 지 석 달만에 오지회를 내팽개치고 사라져 버렸던 것 이다. "형수가 사라졌다고요?" "실종(失踪)입니까? 아니면 집을 나간 겁니까?" 서로 다르게 입을 열었으나 같은 뜻이었다. 초풍비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 다. "실종이다. 갑작스러운 실종이라 해야겠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이라면 차라리 아우들에게 자세히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아우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유일(唯一)한 길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제가 납치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 같이 들리는데요." 도우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좀더 자세히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 오지회 시절 오 형제는 모두 간을 빼줄 듯 친했고 서로를 믿었지만 이제는 대형을 위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그랬기에 더욱 분노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래, 초란을 찾기 위해 그들은 아우를 제압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아무 것도 얻어낼 수는 없었겠지만."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다면 도우선이 북안탕산에서 흑의인의 공격을 받은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초란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다른 경로(經路)를 통해 알아냈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다. "형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요?" 도우선의 목소리는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과거 초풍비를 따를 때의 정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초란을 찾아야지.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그냥 내가 싫어졌는지 알아보아야겠지." 초풍비의 목소리는 시들했다. 담붕비는 다시 무릎걸음으로 다가들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살 았다. 그러나 그들은 형님을 돕고 싶었다. 과거 그들과 헤어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전적으로 초풍비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죠?" "모른다. 그러나 짐작이 가는 것은 있다. 그녀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는 있 으니까!" 초풍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말소리까지 숨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비통함을 숨기기에는 쓰린 가슴이 허락하지 않았 다. 도우선과 담붕비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형님." "알고 있다." 담붕비의 말에 도우선이 대답했다. "서둘러서 형수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만약 형수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중원을 다 뒤져서라도 해결하고 말 테다." "동감(同感)이다." 도우선과 담붕비는 초풍비를 무시하고 자신들끼리 결정을 내려 버렸다. 초 풍비의 말을 들어주다가는 자신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결국은 초풍비 가 거부할 것은 뻔했다. 대형은 자신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담붕비와 도 우선은 먼저 결정을 내려버린 것이었다. "안 된다. 더 이상 너희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다. 더구나 아우는 몸 도 불편한 상태이니 요양(療養)을 하는 것이 낫겠다." "흥, 또다시 우리를 떼어놓으려 한다면 정말로 그냥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 오. 설사 대형이라도." 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만약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형이 거부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도우선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초풍비는 얼굴을 돌렸다. 더 이상 자신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그들과 오랜 생 활 같이 생활했던 경험으로 미루어 어떤 이유가 있어도 그들을 설득(說得) 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임은 뻔했다. 그들을 형제로 인정한다면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필요했다. "형님, 그럼 실마리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모르기는 해도 아마 지금 중원을 주름잡고 있는 가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강한데...... 방법은 있습니까?" "없다." 그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 다. 초란이라는 여자를 본 적도 없는 도우선과 답붕비는 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파아아아― 검이 스치고 지나갔을 때 초풍비는 원래의 모습대로 마상(馬上)에 움직이지 않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한 자루의 반검이 쥐어져 있었 다. 그들의 뒤에 쓰러진 복면인은 모두 열 명이 넘었다. "죽여버릴 놈들...... 감히 어따 대고 부엌칼을 휘두르고 지랄이야. 지랄 이......." 담붕비는 말에서 내려 혈부를 땅바닥에 질질 끌며 중얼거렸다. 그의 혈부에 서 피가 흘러내려 땅의 색을 더욱 칙칙하게 만들었다. 그는 조금 전 여섯 명의 복면인들을 빠개벼렸다. 시체들 중 몸이 마치 톱으로 썰 듯 짓이겨지고 산짐승에게 물어뜯긴 듯 참 혹한 시체는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그의 혈부는 마치 상어의 이빨같이 거 친 톱니가 달린 거치도(鋸齒刀)의 형태를 지니고 있기에 시체를 온전하게 보존하기 어려웠다. "큭!" 짤막한 신음이 들리더니 초풍비를 공격했던 복면인 하나가 목이 분리되며 날아갔다. 복면인을 공격한 검은 자신의 손에 둘려있던 청강검(靑剛劍)이었 다. 초풍비는 찔러오는 청강검을 맨손으로 빼앗아 원래 검의 주인이었던 복면인 의 목을 도려버린 것이었다. 파아아아― 허공에서 피 비가 쏟아졌으나 초풍비의 몸으로 쏟아진 피는 많지 않았다. 말이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물러났고 복면인의 목이 분리된 것은 오 장여를 퉁겨나간 후였다. "형님, 녹슬지 않았군요?" "아우는 더욱 출중해진 것 같군." 담붕비의 말에 초풍비가 맞받아 쳤다. 과거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모 습이었다. 서서히 원기(元氣)를 회복해가고 있는 도우선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들의 앞에 남은 복면인은 불과 세 명에 불과했다. "자, 이제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초풍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근래 하루도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는 날이 없었다. 비록 초란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아우들을 만났다는 것이 그렇 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으으......." 기세 좋게 공격하던 복면인들은 잠깐 사이에 모두 죽고 자신들 삼 인만 남 자 전신을 부르르 떨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복면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몸이 부정확(不正確)하게 흔들리 는 것과 발걸음이 어지러운 것으로 보아 그들의 모습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누구냐?" "우리는 모른다." "우리를 공격했던 것으로 보아...... 준비는 철저했던 것 같군. 비하산장과 같은 놈들이지?" "아니다." 삼 인 중의 하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초풍비가 빙그레 웃었다. "네놈들은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무공으로 보니 비하산장주보다도 훨씬 아래 수준이지. 비하산장주도 잘 모르는 것을 너희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겠 지." 철저한 무시에 복면인들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것 은 잔인한 살기였다. "죽여버리겠다." "너무나 흔한 이야기로군. 옛날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이제는 귀 에 못이 박힌 소리야. 돌아가라. 이곳에서 죽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 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부르르르르― 복면인들은 분노와 치욕으로 몸을 떨었다. 무인의 세계에서 그보다 더한 모 욕은 없었다. 아무리 무공이 약한 자들이라 해도 정도에서는 예의를 갖추어 무시하지 않 는 것이 관례(冠禮)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지회는 예로부터 관례라는 것 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감하게 무시하는 편이었다. 과거 오지회가 정사중간으로 인식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행동들 이었다. 그들은 적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무시하는 발언을 했고 때에 따라서 는 암습도 했다. 정당한 결투(決鬪)를 신청해 중원의 대파들에게 모욕(侮辱)을 듬뿍 안겨 주 기도 했고 심한 경우에는 야습을 통해 불을 지르며 시비를 걸어 하나의 문 파를 초토화시킨 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돌아가라." "무슨 소리......!" "산이나 들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며 살아라. 그렇다면 네놈들을 죽이려는 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무공도 시원치 않은 네놈들을 내가 죽였다고 하면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초풍비의 말은 완벽한 모욕이었다. 복면인들도 나름대로 일류고수의 수준에 이르러 있는 자들이었다. 혈부대형 담붕비의 앞에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거꾸러졌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무인의 자부심은 상처에 특히 약했다. "죽여 버리자." 한 명의 복면인이 말하자 살아남은 삼 인의 복면인들 모두 활처럼 간격을 벌리며 검을 세웠다. 담붕비가 초풍비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이 달싹거리자 개미 기어가는 듯한 가는 소리가 초풍비의 귀를 파고 들었다. '형님, 놈들을 제압하여 누가 우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는지 족쳐봅시다.' 초풍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명예롭게 죽여주어라." 초풍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을 제압해도 얻어낼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살려 보 내주어도 배신의 낙인이 찍혀 추적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인이 원하는 영광(榮光)에 맞게 죽여주는 것이 나았 다. 설사 그들을 살려도 이빨 사이에 독단(毒丹)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사로잡히는 경우나 혈도가 제압 당할 위기에 처하면 그들은 가차없이 독단을 깨물 것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붕붕― 담붕비가 혈부를 허공에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대장간에 들러 거대한 혈부를 마련했다. 무려 팔십 근이나 나가는 한 쌍의 혈부였다. 과거에 그가 사용하던 혈부는 오래 전에 버린 뒤였다. 다시는 병기를 잡지 않겠다고 하던 담붕비가 새로운 혈부로써 강호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것이 었다. "쳐라!" 쇳소리처럼 날카롭게 들리는 한소리 외침이 터지고 복면을 한 세 개의 그림 자가 담붕비의 상중하를 노리고 밀려들었다. 제법 빠른 칼질이었다. "오라." 짧은 외침을 토한 담붕비는 혈부를 휘두르며 초풍비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드드드드― 바닥에 끌리는 혈부에서 땅을 긁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서로의 간격이 일 장여에 다다르자 담붕비는 몸을 지면에 닿을 정도로 굽힘과 동시 혈부를 횡으로 그어 올렸다. 바로 소림사의 장문인과 일전을 벌일 때 사용했던 초식으로 초풍비가 무공 을 익힌 적궁의 부법에서는 천하일수(天下一手)라 불렀다. 콰드드드― 파지지지―지지― 제일 재수가 없는 자는 그의 하체를 향해 검을 뿌렸던 복면인이었다. 무릎 아래에서 물통이 폭죽처럼 터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음향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그의 비명은 길었다. 담붕비의 혈부가 복면인의 두 다리를 무릎 위에서 잘라버린 것이었다. 풀썩! 복면인의 몸이 땅으로 쓰러졌다. 하체가 잘린 복면인은 버티고 설 수가 없 었다. 쓰러지는 복면인의 가슴을 두 뼘이 넘는 넓은 혈부가 훑었다. 파하하하―하ㅎ― 핏방울이 퍼지며 관도가 불게 물들었다. 담붕비는 자신의 도에 쓰러진 복면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미 그의 혈부는 달려든 두 자루의 검을 퉁겨낸 후였다. 저물어 가는 노을 속으로 쇠붙이소 리와 불꽃이 허공으로 퉁겨졌다. 순간적으로 허공이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캉! "커흐흐흑!" 가슴 답답한 비명이 들리며 두 개의 신형이 퉁겨졌다. 그들은 무려 삼 장이 나 뒷걸음질을 쳤다. 한 복면인은 무릎을 꿇고 누런 물을 게웠다. "모두 목을 내밀어!" 담붕비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드드드―드듣― 그의 혈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그들을 향해 구 르는 바위처럼 달려갔다. "막아!" 복면인 중 바닥에서 누런 위액(胃液)을 토하던 사내가 몸을 추켜세우며 외 쳤지만 이미 늦었다. 엉겁결에 검을 세우며 퉁겨 나오던 복면인의 몸에는 이미 혈부가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복면인은 사타구니에서부터 단전(丹田) 위까지 쪼개져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혈부가 파고든 모습이었다. 혈부에 붉은 피가 흘렀다. "파(破)―!" 담붕비가 한소리 외침을 토하며 혈부를 뽑았다. 혈부의 날카로운 양날에 걸 린 창자가 줄줄이 뽑아져 나왔다. 역한 비린내가 풍겼다. 그것도 잠시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복면인이 통나무 넘어지듯 무너졌고 그 의 하체로 검붉게 변한 피가 설사하듯 쏟아져 내려 흘렀다. 휙! 몸을 솟구친 담붕비의 혈부가 다시 지면을 향해 찍어갔다. 누런 위액을 토 하던 복면인의 머리였다. "헛!" 놀람의 외침을 토한 복면인이 급히 검을 들어 머리 위를 보호하며 신속하게 신형을 뒤집었다. 캉! 카드드드드― 그러나 이내 병기의 충돌음이 들렸고 몸을 뒤집던 복면인은 미처 몸을 추스 르기도 전에 눈이 경악으로 놀란 소의 눈망울을 뒤집는 소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볼 수 있었다. 혈부가 검을 밀어내며 자신의 머리를 빠갤 듯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꿈속 에서 보는 것처럼 느리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현실이었다. '이럴 수가? 내 검이 부서지고.....' 복면인은 비명을 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한마디의 비명도, 사소한 신음도 나오지 못했다. 생각이 끝났을 때 이미 그의 혼은 육신(肉身)을 떠난 후였다. 쿵! 흑의인이 머리가 부서진 채 무너졌다. "빌어먹을 애송이들...... 병기도 다룰 줄 모르는 것들이 검을 들고 설치고 있어." 담붕비는 나직하게 내뱉고는 쓰러진 복면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의 혈 부에 묻은 피를 복면인들의 옷에 문질러 깨끗이 닥은 그는 등에 다시 걸머 졌다. 혈부는 부갑(斧匣)이 없어 누가 보아도 거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담붕 비는 그런 것을 알지만 한 번도 혈부를 감싸는 부갑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 을 한 적이 없었다. "형님, 가시지요?" "그러자꾸나." "막내의 혈부가 상상을 초월하는걸......." 도우선이 감탄했다는 음성을 토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십 년 전, 오 년 전 의 막내와는 무공이 천양지차였다. 자신이 오 년 동안 알 수 없는 자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어 허송세월을 보내 고 있는 동안 막내는 무공이 수배나 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도우선이 었다. "형님, 갑시다. 가까운 객점에서 술이나 한 잔합시다." "그러자꾸나." 퍽! 히히히히힝― 초풍비가 말의 배를 걷어차자 말은 앞으로 쏜살같이 퉁겨나갔다. 두두두두― 그의 뒤를 따라 두 필의 말이 뽀얀 먼지를 뿌리며 달려갔다. < 1편 끝 2편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9 페이지: 1/46 자료번호: 271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9장-그것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우리들보고 떠나라고요?" 담붕비와 도우선은 눈을 치뜨며 대들 듯 다가갔다. 이미 무공을 완전히 회 복한 도우선은 더욱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형님이 우리를 버릴 것 같아서라도 헤어질 수가 없 소." 도우선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따라갈 태세였다. 그는 초풍비보다도 먼저 말 등에 올라 고삐를 움켜진 채였다. 완전한 채비 를 차린 그의 말에는 야영(野營)을 할 수 있는 준비까지 갖추어져 있어 어 떤 경우라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그의 위세(威勢)에 눌린 듯 담붕비도 엉거주춤하기는 했으나 역시 눈초리를 세우고 초풍비를 쳐다보고 머뭇거렸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들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이면 족 하다." 초풍비는 말 등에 몸을 실으며 그들에게 말했으나 아우들은 막무가내(莫無 可奈)였다. 초풍비는 말의 등에 올라타려던 몸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초 풍비를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서로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우선은 다른 형제에게 가라. 내가 짐작이 가는 곳에 다녀올 동안 아우들을 보살펴 주도록 해라. 그리고 셋째와 넷째에게도 도움을 청하도록 해라." "설마?" "그렇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것 같다. 초란이 납치 된 자리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혼자서는 흉수(兇手)를 찾기 힘드니 너 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초풍비는 오랜만에 마음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벌써부터 그들에게 도 와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있던 그였다. 자신의 마음속에는 이미 흉수의 그림자가 짐작이 가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 고 애간장만 태우는 중이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우들의 도움 을 받는 것이 일을 해결하는데는 차라리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약속하마. 우선 아우들에게 가서 대책을 세우고 옛 친구들을 모아라. 친구 들이 모이면 오지회를 부활(復活)시킬 것이다." "좋소이다." 먼저 대답을 한 사람은 도우선이었다. 그는 이미 초풍비가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確信)을 가지고 있 었다. 만약 다시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좋소. 우리가 아우들에게 가리다. 형제들도 모두 모아놓고 있을 테니 형님 은 가급적 빨리 오시구려." "알았다. 일을 마치는 대로 빨리 가마." 도우선의 말에 초풍비는 호쾌(豪快)하게 대답했다. 담붕비도 고개를 끄덕였 다. * * * 사천성(四川省) 사천성은 변방(邊方)을 제외하고 중원의 어느 지방보다 넓은 지역이었다. 동서로 삼천 리가 넘고 남북으로 보아도 넓은 곳은 이천 오백여 리에 이르 니 사천을 노리는 자들은 많았다. 더구나 사천은 크고 작은 강줄기가 그물 처럼 엮여 있었기에 땅이 척박(瘠薄)하기는 해도 가뭄이 들지 않았다. 사천성에는 무수히 많은 산이 있고 산에는 많은 문파가 있었다. 특히 구파 일방의 하나라 자처하는 아미파(峨嵋派)와 점창파(點倉派)가 사천에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더구나 북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잡은 청성파(靑成派)는 근래 사천을 송 두리째 집어삼키겠다는 듯 세력을 키우며 세(勢) 불리기를 하고 있는 실정 이었다. 종남파는 섬서 지방에서 사천을 아우르기 위해 힘을 쏟고 있었고 청해에 위 치한 곤륜파(崑崙派)마저 사천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변방에 맞서기 위해서만 무인들의 활동이 격해지던 사천지방은 당연하게도 구파일방의 각축장(角逐場)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더구나 독과 암기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천당가마저 당가타에서 문을 박 차고 나와 장강을 따라 남하하며 서서히 세력을 넓혀 인근 천여 리를 점령 했다. "사천은 우리에게 맡겨라." 여섯 개의 문파는 그렇게 외쳤다. 그들은 삼 년에 걸친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를 벌였다. 결국 사천을 여섯 등분으로 나누어 황금의 분할에 따른 경영의 권리를 차지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이 그토록 각축장이 되고 서로 영역을 넓힌 것은 근래 들며 인재가 많이 났고 장강을 끼고 있어 문물교역(文物交易)이 왕성 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변방에 위치하는 길목이라 기이한 물품과 새로운 병기를 입수하기가 편했고 넓은 평야가 많아 어떤 가뭄에도 걱정이 없었다. 당가타에는 중원무림에서 그 세력과 무공을 인정받는 육대세가 중의 한 문 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장강을 끼고 오천여 평에 달하는 넓은 장원을 가지고 오백여 명의 제자들을 가지고 있는 문파가 그들이었다. 식솔들을 모두 합치면 근 천여 명에 이르 렀고 방계가족을 합치면 이천 명이 넘을 거대한 씨족(氏族)이었다. 오죽하면 장원과 장원을 둘러싼 큰 마을이 모두 하나의 성씨를 가지고 있다 해서 당가타라 불렸다. 당씨의 땅이라는 뜻이었다. 당가타에 사는 사람들의 칠 할은 당씨(唐氏)였다. 그러나 삼 할은 당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문에 비전으로 전해오는 독의 제련법(製鍊法)과 해독법 (解毒法)을 포함하여 암기술(暗器術)이 외부로 흘러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당가타를 떠나지 않았으며 부득이한 경우라도 오랜 전통을 지켜왔다. 심지어 여인이 혼인을 해야 한다면 데릴사위로 끌어들여 당가타에 안주시켰 다. 그래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당가타에 새로운 문파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들도 당문의 일족으로 강호의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당가문의 여인이 다른 대문 파(大門派)에 혼인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에 속했다. 한 문파가 한가족으로 이루어진 문파는 중원에서도 감히 경시하지 못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사천당문이라 불렸다. 중원의 구대문파와 무림의 역사를 함께 이룩해 온 그들은 사천의 북두(北 斗)로서 한 번도 그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근래 다른 문파들과 사천을 나누 어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으나 사천은 너무나 넓은 땅이었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오후, 수많은 사람들이 사천당문의 태사청(太 師廳)이라 할 수 있는 화의각(譁議閣)에 몰려들었다. 무려 삼백 명을 수용 할 수 있는 대전이었다. 적어도 백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당문의 제자들이 모여들자 화의각은 시 끌벅적하게 변해버렸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회의를 시작하겠소."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킨 칠순의 노인이 우렁찬 함성을 토하자 웅성거리던 중인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한결같이 병기를 지닌 무인들이었다. 화의각은 빈틈없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군데군데 둥근 원탁이 놓여 있고 원탁주위로 앉은 남녀노소는 태사의를 바라보며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오늘 회의를 본인, 사천당문의 가주인 본인 당협이 직접 주도하겠다." 노인은 자신이 당문의 주인이기에 회의를 주도하겠노라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의 말은 모여든 당문의 식솔들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사천당문은 일가족(一家族)으로 이루어졌다. 당대의 사천당문을 이끌어 가는 당협이 가주(家主)이기는 했으나 칠순이 넘 은 노구(老軀)였고 사소한 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그였다. 그가 직 접 회의를 주도하겠다고 하니 가솔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설사 그가 직접 회의를 주도하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가문을 이끌어 가는 우두머리들의 모임에 한해서였다. 입이 무겁기로 하면 당문에서 제일인 그가 앞에 나서서 회의를 주도하는 경 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대회의(大會議)에서 주도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회의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음을 짓거나 틀린 점이 있다면 지적을 해주는 경우가 전부였다. "아니, 무슨 일이 있기에 가주께서 직접 회의를 주재하신다는 것인지 모르 겠군." "회의 주재자는 따로 선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당주 중에 한 명이 하거 나 원로(元老)들도 있잖아." "큰일이 있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가주가 직접 해야지." 당협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반대하는 식솔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찬성하는 편이었다. 한참동안 시끄럽던 화의각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노인, 당협은 능력이 있는 자였다. 칠백 년 전통의 당문의 당대 가주라는 자리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도 그가 구파일방에서도 장문인들과 뒤지지 않는 연배(年輩)를 지니고 있다 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는 활동이 왕성하여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회의에 얼굴을 보임으 로써 중원무림에서도 지고(至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당문의 가주이며 곤륜과 무당에서 각각 사사를 받았다. 엄격한 의미에 서는 무당과 곤륜의 제자가 되기도 하는 셈인 것이었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오늘 회의는 매우 중요하니 가주께서 직접 하시는 것 이 좋을 것 같소." 오른쪽 벽 아래서 중후해 보이는 노인이 일어나 찬동을 표했다. 그는 장로 인 천기노인(天氣老人) 당일수(唐壹樹)였다. 그는 당협과 함께 당문을 이끌 어 가는 원로원(元老院)의 원주이기도 했고 당협과는 한 아버지와 한 어머 니를 공유한 형제간이기도 했다. 그의 말로 미루어 사안(事案)은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 알고 있는 표정이었고 가주가 곧 발표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좋아요, 좋소. 어서 회의를 진행합시다." 왼쪽에서 몸을 일으킨 자는 여인이었다. 오뚝한 코가 유난히 눈에 드러나는 여인은 사순 정도에 이르는 나이를 지니 고 있었다. 당문에서는 누구나 그녀를 알고 있었고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 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녀는 당문의 수재(秀才)들을 가르치는 문인각(文人閣)의 각주였다. 여인이 각주를 하는 것이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당문은 무림에서도 여 인들의 문파를 제외하고는 남녀차별(男女差別)이 거의 없는 문파였다. 그것 은 그들이 하나의 가문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무림에서 흑린접(黑燐蝶)이라 불리는 당가령(唐佳玲)은 당금 가주인 당협보다 나이는 어려도 고모가 되는 여걸(女傑)이기도 했다. 특히 그녀의 사려 깊은 언행은 당문 제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었고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모두들 만약의 경우 반대가 있다면 당연히 그녀가 반론(反論)할 것이라 생 각했다. 그녀는 늘 당문의 안위를 생각했고 당협에게 가문의 가주이기는 하 지만 일파의 문주로서 품위를 요구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깨어졌고 당가령까지 두둔하고 나서자 다른 제자나 각주 들은 설사 반대하고자 해도 반대할 입지가 서지 않았다. "좋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어쨌든 간에 당문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당협이 몸을 일으키고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자 주위가 쥐죽은 듯이 조용 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 화의각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에 무엇인가를 달고 있는 사 람들이었다. 그들은 각주니, 전주니, 혹은 당주(堂主)라도 되는 사람들이었고 나이가 젊 은 사람은 대주(隊主)니 하다못해 령주(領主)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들이었다. "그 동안 우리는 만족했소. 약간의 욕심이 나기는 했으나 효율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관리했고 우리는 사천을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했소." "맞아." "그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니오리까?" 대전에 앉아있던 중인들 중에 한 중년인이 외쳤다. 그의 말에 모두들 고개 를 끄덕였다. 모인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 가벼운 비소가 흘러 지나갔다. 사실 그들은 밀려오는 다른 다섯 개 문파와 영토쟁탈전(領土爭奪戰)을 모두 끝낸 상태였다. 은연중에 당문을 포함한 여섯 개 문파는 사천을 분할(分割)했고 그 후로는 비록 안색을 붉히기는 하지만 살얼음같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영토를 쟁탈했다고 해서 자신들의 땅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중원의 영토가 명나라의 황제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영토의 개념은 생활권(生活圈)을 말하는 것으로 무림으로의 영토였다. "알고 있소. 지금부터 육 개월 전부터 우리 당문은 평화를 되찾았소. 그러 나 우리가 아직 평화를 찾지 못한 곳이 있소." 웅성웅성― 갑자기 대전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당문의 식솔(食率)들이 고개를 내 두르며 의구심을 토했다. 당협은 열기가 달아오도록 지켜보기만 했다. 당협은 빙그레 웃음을 뿌렸다. 자신의 생각대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것 같았다. 그가 직접 나선 것도 이와 같이 분위기를 숙성(熟成)시켜 의도대로 끌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검문산(劍門山) 때문이오." 순식간에 장내는 북풍(北風)이 불어온 듯 얼어붙었다. 누구라도 검문산을 모르지 않았다. 과거에는 천검산(天劍山)이라 불렸으나 근래 검문산으로 이름이 바뀐 산에 는 그들의 마음속에 썩은 이처럼 박힌 하나의 골치 덩어리가 있었다. 모두의 얼굴 색이 변했다. "그래, 놈들이 있는 한 완전한 평화는 없지." "우리가 놈들을 쳐부숩시다." 여기저기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당협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빙그레 웃음 띤 얼굴로 중인들을 향해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식솔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협은 그들의 어른이었고 일문의 문주였다. 그들 모두는 당협을 향해 얼굴 을 돌리고 눈을 빛내었다. 당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손을 들어올리자 죽 끓듯이 소란스럽던 중인들 이 조용해졌다. "오늘 회의는 그들을 치자는 것이오. 그들이 우리 당문의 코밑에 진을 치고 있는 한 당문은 영원히 가시방석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오 ." 중인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제야 왜 당협이 갑자기 가문의 요소요처(要所要處)에 흩어져 일을 하고 있는 자신들을 불러모았는지 알 것 같았다. 화의각에 모인 당문의 식솔들은 느닷없는 당협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자들 이었다. 이미 당협은 가문을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사람들, 장로들과 원로 원의 전대 어른들과는 합의를 끝낸 상태였다. 그랬기에 처음부터 당일수와 당가령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의견을 제 시하지 않은 채 찬동(贊同)을 했던 것이었다. 그들이 장로라는 신분이 있기 도 했지만 원로원의 어른들로부터 당협을 도와주라는 언질을 받았다는 사실 이 더욱 컸다. 비록 가문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각주와 령주들은 엉겁결에 듣 게 되는 이야기인 셈이지만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검문산은 우리 당문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중앙에 위치한 산으로 사천에서 이어지는 모든 진로(進路)가 모이는 곳입니다. 그 러나 지금은 모두 검문산을 피해 다니고 있는 실정입니다."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사천에 살고있는 모든 무인들은 검문산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 다. 설사 무인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근래(近來)에는 검문산을 두려워했다. 십여 년 동안 검문산을 마음놓고 활보(闊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문산은 검문산이라 불리기도 하는 곳으로 사천성의 중앙인 성도부(成都 府) 동남쪽으로 치우쳐진 곳으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었다. 산은 낮았으나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울창한 수림(樹林)이 사람의 시야를 가로막고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더구나 검문산 아래로는 사천의 중앙을 꿰는 관도가 열려있어 황경(皇京)으 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만약 사천을 지나 황경으로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기도 했 다. 만약 검문산을 피해 돌아서 간다면 열흘은 더 소요되는 지리적(地理的) 요충지(要衝地)가 바로 검문산이었다. "여러 가족들도 기억할 것이요. 일전 검문산의 도적들이 우리의 제자들이 후송하던 굉천뢰(轟天雷)와 독단을 빼앗고 이십여 명의 제자를 죽였던 사실 말이요." "우우!" "건방진 놈들이 우리를 건드린 이상 우리도 참아서는 안되는 일이요." 동조는 점차 거세어졌다. 당협의 말대로 사천당문과 검문산의 산적들은 이미 오래 전에 적지 않은 충 돌(衝突)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일년 전에 일어 난 일이었다.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당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험을 마친 굉천뢰와 독단을 싣고 들어오는 한 개의 돌격대를 부수어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굉천뢰를 실은 마차와 호송하는 돌격대를 공격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굉천뢰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분분했 었다. 당문은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눈으로 본 자가 없고 살아난 제자가 없어 불확실(不確實)했으므로 무작정 검문산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검문산의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검문산의 도적들이 일 을 저질렀다는 아무런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무기를 꼬나 잡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주위에는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남긴 시체와 병기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흔한 병기의 부러진 쪼가리나 암기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누가 사천당문의 제자들을 공격했는지 찾아낸다는 것은 신이 아니고서는 불 가능(不可能)한 것이었다. "아마 검문산의 산적 놈들이 그랬을 거야." 누군가 의미 없이 중얼거린 말이 발단(發端)이 되어 검문산의 도적들이 일 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心證)으로 굳어버렸다. 단서(端緖)는 마차 바퀴였다. 마차는 무거운 짐을 싣고 있었다. 어찌되었던 마차를 공격한 것이 굉천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마차 바퀴가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마차 바퀴는 생각과는 달리 산채 방향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마차 바퀴는 제자들이 죽어있는 곳에서부터 백여 리까지 흔적을 남겼는데 성도로 향하는 관도에 닿아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더 이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당협은 검문산의 도적들이 저지른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드러나는 증거(證據)는 없지만 정황으로 보아 검문산의 소행이 틀림없으리라 확신하 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에 검문산에 제자들을 보내어 접전을 치를 수가 없었다는 사실 이었다. 다른 오 개 대파가 사천의 생활권을 압박하고 있었기에 검문산의 산적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다섯 개의 무림대파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피를 갚겠다." 당협은 언제든지 검문산을 쓸어버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업에 손을 댄 자를 보면서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그것은 참패(慘敗)나 같았다. 그러던 중 하나의 서찰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곳에는 일년 전의 일이 검 문산의 산적들이 저지른 일이라 적혀 있었다. 앞뒤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검문산을 쓸어버릴 때가 된 것이었다. 당협은 더 이상 주저하지도 않았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검문산에 산채를 지은 도적의 무리들 때문에 우리 당 문의 식솔들은 매우 많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이오." "물론이오이다." "놈들을 죽여버리고 관도를 확보(確保)합시다." 또다시 장내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울렸다. 당협이 어떤 의견을 제시 하기도 전에 장내에서는 검문산의 산적들을 죽여 버리자는 분위기가 성숙 (成熟)되었다. 사실 그와 같은 것은 당협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당협은 빙그레 웃었다. 바로 자신이 바라던 대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고 식솔들은 그의 의도대로 행동해 주고 있었다. 씨익― 당협은 웃으며 여러 곳을 쳐다보았다. 장로들이 은근히 눈웃음을 보냈다. 눈을 돌리던 당협의 눈이 간혹 멈추었다. 그의 눈이 멈추는 곳은 장로들이 앉은 자리였고 그때마다 장로들은 당협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노부는 결정했소. 검문산에 머물고 있는 도적들을 잡아죽이고 사천 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만들겠소이다." "와―와―!" "가주를 따르겠소." 당협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단아한 내실은 사천당문의 깊숙한 후원(後園)에 자리한 곳이었다. 사방은 물샐틈없는 경계가 세워져 있었고 좁아 보이는 내실에는 여섯 명의 그림자 가 궁등의 불빛에 일렁였다. 멀리서 보표들이 움직이고 있는지 손으로 치는 편경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떤 방식으로 놈들을 공격하면 되겠소?" "하하하. 아우는 너무 보채지 말아라. 이제 가문의 모든 분위기를 이끌어 냈으니 검문산을 쓸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당협은 한 당일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주, 혹시 무림에서 우리를 욕하지 않을까요?" 걱정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흘리며 머리를 주억거리는 사람은 오십대 초반의 무인으로 눈이 유난히 붉어 적안탈명(赤眼奪命)이라 불리워지는 당윤성(唐 潤星)이었다. 그는 사천당문의 모든 독을 취급하는 독령각(毒靈閣)의 각주였다. 그의 눈 이 붉은 것은 어려서부터 독을 만져 온몸이 독의 기운에 쌓여있기 때문이었 다. "무슨 욕을 먹는다는 말이냐?"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당문이 한갓 산적들 때문에 제자들 을 동원했다면 무림에서 배꼽을 쥐고 비웃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당윤성의 말에 당협은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이미 결정 된 일에 반론을 제기하는 당윤성이 의아스럽다는 눈초리였다. 당협은 당윤성을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눈초리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의혹이 깃든 눈으로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당윤성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찌르자 당윤성은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무얼 잘못했나 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명색이 무림대파이고 구대문파에도 뒤지지 않는 무명을 지 닌 우리 사천당문이 그깟 도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제자들을 풀었다는 오명 (汚名)을 쓰게 될지도 모를까 걱정입니다." 당윤성은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중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윤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당윤성이 이야기한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는 중이었다. 당문의 깊숙한 정실에 모인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것 때문이었 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곳에 모인 것이 아 니겠소." 당협이 수염을 꼬며 호탕하게 말했다. 그의 표정대로라면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들어있는 듯 보였다. '강호에서 세뇌갈(世腦葛)이라는 명호까지 듣는 가주이시니 문제의 해결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당일수는 느긋한 표정으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오랫동안 당협을 보아온 그로서는 누구보다도 당협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형제로서 당협은 믿음이 가고도 남음 이 있었다. 부친을 사부(師父)로 모시고 같이 무공을 익힐 때만 해도 당일수는 단 한번 도 당협을 이겨보지 못했다. 무공이 문제가 아니라 지혜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은 당협은 당문의 문주가 되고 그는 원로원의 원주가 되어 있지만 단 한번도 형제의 의가 상하거나 서로를 배척(背脊)한 적이 없 었다. 오죽하면 사천무림은 그들 형제를 가리켜 당문쌍작(唐門雙雀)이라 불러 칭 송을 아끼지 않았었다. "간단하다. 먼저 우리의 휘하에 있는 군소방파(群小方派)와 당문의 인척들 로 이루어진 세가들을 앞에 세워 먼저 검문산을 치게 한 후 우리가 나서면 될 것이다." "옳은 이야기요." "그런 묘안이 있었구려." 모두들 맞장구를 쳤다. 모두들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며 당협을 추켜세웠지만 당윤성은 찬동하기 가 어려웠다. 결국 당문은 대파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휘하에 모여든 힘없는 군소방 파와 일족들을 이용해 피를 흘리지 않고 검문산을 얻겠다는 뜻으로 들렸던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검문산은 여섯 개의 문파가 부딪치는 첨예(尖銳)한 대립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 문파는 모두 한 번씩 검문산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더구나 근래 사천을 삼키겠다고 욕심을 내고 있는 여섯 개 문파 모두는 검 문산을 노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검문산은 그들의 대립이 모여드는 곳에서 풍전등하(風前燈下)와 같은 신세였지만 꿋꿋하게 버텨오고 있었다. 검문산을 얻을 수 있다면 사천에서 가장 많은 영역을 확보한다는 생각은 각 파 중 하지 않은 문파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검문산에서 얻은 것이 없었 다. "그러다가 만약 군소방파(群小方派)들이 검문산을 함락하게 된다면 모든 공 이 그들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우리 당문은 창피 를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것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시구려. 만약 군소방파들이 검문산을 정벌하 게 된다면 무림에는 전혀 다른 소문이 나게 될 거요." "어떤 소문이죠?"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지던 당가령이 당협의 말에 의혹이 남는다는 듯 앞가 슴을 기울여 당협을 바라보았다. 궁금증의 발로(發露)였다. 그녀의 말에 동감하는 듯 나머지 장로들도 상체를 숙였다. 얼굴에는 궁금증과 함께 솔깃한 표정이 넘쳤다. 그들도 당가령의 의견에는 동조하는 듯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이 기 때문이다. 목적 없는 도발(挑發)이 있을 수 없었다. 당문에게 이익(利益)이 없다면 움직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막연하게 그들 이 밉다는 이유만으로 제자들을 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하하, 그리된다면 강호에는 이런 소문이 날 거외다. 우리 당문이 산적을 무찌르기에 너무 자존심이 상해 군소방파에 방법을 제시하고 진로를 알려 주었다고......" "그런 방법이 있었구려." "하하하, 과연 절묘(絶妙)한 방책이오" 그들은 무릎을 두드리며 기쁨의 탄성을 토했다. 누가 보아도 적절한 방책이 라 아니할 수 없었다.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니 어찌 마다하겠는 가? 어떤 상황이 되던지 간에 그들 당문은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며 잃는 것도 없을 비책이었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바였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고 찜찜해, 사천의 패자라고 자처하는 우리가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당가령은 가슴 언저리 한구석을 콕콕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비록 당문의 장로로서 가문의 회의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원하지 않는 일이었기에 도망치 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뭔가 잘못되었어. 당문은 정당치가 못해! 썩어가고 있어. 어서 이 어두운 밤을 벗어나야 해.' 당가령은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암울한 기분만이 그녀의 정신을 산란(散亂)하게 만들었다. * * * 휘이익― 하나의 그림자가 처마 밑에서 지붕으로 몸을 비틀어 솟구치듯 지붕으로 올 랐다. 전신에는 칠흑처럼 검은 야행복(夜行服)을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손가락보다도 가는 세심도가 엇비슷하게 걸려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복면 때문에 유난히 검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 다. 바스락― "헛!" 그가 밟은 기왓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자 몸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할 정 도로 빠르게 숙여졌다. 그의 두 손가락과 발끝은 기왓장을 집었고 입은 벌렸다. 만약에 어디서 튀 어 날아올지 모르는 장공(掌功)에 대비한 것으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은신술(隱身術)이었다.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있다 진공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위장이나 내장이 파 열(破裂)되어 즉사를 면치 못한다. 허나 복부를 맞지 않으면 충격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였다. 그는 한참동안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 다. 반각이 지나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지붕까 지 자란 나무로 건너뛰었다. 바스락― "누구냐?" 온전하지는 못했다. 그가 건너뛴 충격에 나뭇가지는 가볍게 흔들거렸고, 잎 이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뿌렸다. 경비를 서는 보표(步標)들이 다 가온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흑의인은 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었 다. 스르르르― 그의 허리에서 쇄심도가 차가운 달빛을 받으며 뽑혀졌다. 그러나 얼마나 은 밀하게 도를 뽑았는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놈들이 오면 먼저 죽인다.' 그는 매미처럼 달라붙은 상태에서 배에 도를 숨겼다. 달빛에 노출될까 두려 워서였다.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무 일도 없잖아." "거 봐라. 아무 것도 아니데 호들갑 떨기는......" 보표들은 다시 멀어져 갔다. 그들의 어깨에 걸친 창에서 달빛이 부서졌지만 흑의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멀어져 가는 보표들을 바라보았다. 풍무영은 객잔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름한 곳이로군.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을 보니 대형은 행적이 노출 될까 신경을 쓰시는 것 같은데......" 몇 걸음 옮기지 않아 그는 술 냄새가 풍겨 나오는 한 채의 모옥(茅屋) 앞에 이르렀다. 좁아 보이는 집이었는데 막상 다가가 보니 제법 큰 객잔이었다. 좁은 마루에는 이십여 개의 탁자가 놓여있었고, 주위로는 의자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탁자들은 산에서 베어낸 나무들로 다듬지도 않은 채 만들어져 있었으며 일견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풍무영은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빈 탁자를 찾아 엉덩 이를 디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헤헤헤." 점소이가 다가와 목에 건 수건을 끌러 부지런히 탁자를 닦아내며 아양을 떨 었다. 다시 보아도 평생 점소이를 할 놈 같은 인상이었다. 풍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뭘 드시겠습니까?" "이봐." "정하셨습니까. 손님." "그래, 구운 오리하고 사천만두를 좀 주게, 아참! 그리고 나는 차를 많이 마시니까 오룡차를 아예 잔뜩 갖다놓도록 하고." "예!" 점소이는 엉덩이를 흔들며 물러갔다. * * * "오래 기다렸나?" 약속시간에서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초풍비가 나타났다. 풍무영은 급히 일어 나 목을 숙여 대형에 대한 예의를 보였다. "앉게나." 풍무영의 행동을 제지하며 초풍비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풍무영은 이미 식 사를 마치고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오룡차(烏龍茶)를 마시는 중이었다. 식탁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찻잔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점소이가 다가왔다. 초풍비는 머리에 눌러썼던 패갑둔을 벗어 탁자에 놓았 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이미 음식은 먹었으니 나에게도 오룡차를 주게."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곧 물러갔다. 아마도 점소이는 초풍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놀랐을 것이다. 긴 머리, 덥수 룩한 수염, 그야말로 천년 동안 산중에서 산 사람의 모습을 지닌 초풍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점소이가 화급히 물러간 것은 바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초풍비의 모 습이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초풍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 수상한 것은 없군.'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서너 개의 주탁에서 술을 마시는 자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평안해 보이고 자 신들의 일에 열중(熱中)하는 그들이 초풍비나 풍무영을 노리는 자들이라고 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인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고 병기를 지녔다고 모두 무인이라 할 수도 없었다. 검을 지닌 자들도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 모두 자신들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근래 들어 관에서는 병기 중 검을 개인이 소장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 관부에서 지위를 누렸거나 무관(武官)의 후예(後裔)들이 조상이 사용 했던 병기를 가문의 가보(家寶)로 여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된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검은 누구나 소장할 수 있는 병기가 되어버렸다. 흔히 대문파 의 제자들과 후예들이 검을 병기로 사용하는 것이 그런 이유였다. 검은 어디에서도 구애를 받지 않게 되었고 적지 않은 무인들이 어디나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검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 외에도 몇 가지의 병기가 개인 소유가 될 수 있었다. 농사를 지을 때 사 용되는 철파(鐵 )는 농기구이지만 병기로 사용될 수도 있고 곡식을 터는데 사용하는 목곤(木棍)이나 칠절편(七絶鞭)도 같았다. 그와 같이 농사와 관계 있는 도구는 병기였지만 농사도구라는 이유를 달아 누구나 소유를 할 수도 있었다. 단, 도는 개인의 소유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다만 무공을 익히는 무 관(武館)이나 황제로부터 윤허를 받은 무파는 당당히 소지를 할 수 있기도 했다. 무인들은 관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창과 대도, 기타 의 도를 지니고 있다면 무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했다. 석면현(石面縣)의 외곽에 자리한 허름한 객잔은 그저 그렇게 조용하고 자유 로웠다. "대형, 대형을 미행하는 자는 없었습니까?" "웬걸, 늘 바늘방석이지. 어제도 나를 추적하는 자들이 있어 피를 보았지." 초풍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비하산장을 초토화시킨 이후로는 늘 살격 이 따라다녔다. 초풍비는 단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산길을 걸어 금면현으로 향하던 중에 일곱 명의 살수가 그 를 막았지만 그는 단 일 검으로 그들을 황천으로 보내고 달려온 것이었다. "차가 나왔습니다." 점소이가 다반(茶盤)에 다기(茶器)와 차가 우러나 향기를 풍기는 다호(茶 壺)를 들고 왔다. 점소이가 다가왔으므로 초풍비와 풍무영은 잠시 말을 끊 었다. 점소이는 다기에 다호를 기울여 차를 따라준 후 부리나케 물러났다. 아무래 도 거칠어 보이는 초풍비의 모습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초풍비가 이 허름한 산중의 객잔을 만날 장소로 택한 것은 사람들의 이목 (耳目)을 피하고자 한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초풍비나 풍무영, 모두가 사 천을 바람 속으로 몰고 가는 입장이었기에 몸과 마음이 자유스럽지 않았다. 또 한가지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만약 추적자가 있거나 살수들 이 접근한다면 대로상이나 시진의 객잔에서 마구 살수를 휘두를 수가 없었 다. 근래 사천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살겁으로 인해 관부가 신경이 날카로 워지고 있었다. 만약 살수가 있다면 산중이라 몸을 피하기에도 유리했고 마 음껏 살수들과 검을 나눌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초풍비가 아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행이 이 허름한 객잔은 십 년 전이나 다름없이 산기슭에 서 있었다. "대형! 그 동안 추적한 결과로 보아 형수님은 당가타로 간 것 같습니다. 그 전에 발길이 성도로 이어졌기에 성도를 파헤칠 생각입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지." 풍무영의 말에 초풍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초풍비도 당가타를 주시(注 視)하고 있었다. 한때 초란과 혼약의 이야기가 나돌았던 을목세가가 당가타에 있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을목세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을목세가가 망해 초토화(焦土化)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던 적이 있 었다. 아무튼 근래 들어서며 을목세가는 사천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당가타에는 사천의 명문 당문까지 있어 사천의 무림총단(武林總團)같은 곳 이었다. 다만 당문이 장강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 을목세가는 당가타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 장강을 건너 명목산(名木山)에 위치하고 있었던 적 이 있었다. 당문과 을목세가는 서로를 바라보고 선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엄격하게 말 하자면 장강 건너는 귀주성(貴州省)이었는데 을목세가는 귀주성에 위치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어이, 점소이!"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풍무영이 말을 멈추며 눈을 들었다. 객잔이 시끄러워 지며 다섯 명의 주객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결같이 중년을 넘은 나이를 지 녔는데 행실이 거칠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한결같이 병기를 지닌 그들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어 마치 산적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대형!" "신경 쓰지 마라. 차나 마시도록 해라." 초풍비가 나직한 목소리로 풍무영을 제지했다. 초풍비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시끄러운 일을 벌여봐야 그들을 쫓으려는 자들에게 기회를 줄 뿐이었다. 다섯 명의 주객들이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풍무영과 눈이 마 주쳤다. 주객들은 초풍비와 풍무영이 곁에 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왔 다. 그들은 초풍비와 풍무영의 곁으로 다가와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의심이 가는 구석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대형,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검문산을 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답니다. 그들은 검문 산의 쌍룡채(雙龍寨)를 없애기 위해 몰려갔다고 하는데 혹시 하는 생각에 급히 달려왔습니다. 소문으로 듣기에 쌍룡채에 있는 분들 중에 대형의 동생 들과 닮은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앞에는 구하기 힘들다는 일창일기차(一蒼一技茶)가 모락모락 김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차를 들지 않았다. 초풍비보다도 풍무영의 표정이 더 엄숙해 보였다. 이미 초풍비를 대형으로 모신 풍무영에게 있어 오지회를 만들었던 초풍비의 동생들에 관한 일이 남 같지 않았던 것이고 보면 그의 표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말을 들은 초풍비의 얼굴이 노래졌다. "생각보다는 빨리 왔군." "그렇습니다. 아직 형수님의 소식은 추적 중이지만 너무도 급한 소식이 있 어 우선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초풍비는 태울 듯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대가 약한 자라면 고개가 절로 숙여질 판이었으나 풍무영은 대형의 아픔을 알기에 더 욱 숙연해졌다. "아우." "예, 말씀하시지요." "내 급히 검문산에 다녀오겠다. 당문이 아우들을 노린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다른 아우들이 갔다고는 하지만 왠지 불안하군." "그렇게 하시지요.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풍무영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 * * "아무래도 불안하다." 풍무영은 가슴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에 못내 가슴이 쓰렸다. 아무리 생각해 도 절묘(絶妙)한 조화였다. '대형이 나타나고 검문산이 공격을 받는다. 아무래도 이상해! 마치 기다리 고 있었던 듯하다.' 초풍비는 말을 타고 이미 떠났다. 풍무영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검문산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지 역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가 우연한 기회에 들은 소식이 아무래도 함정(陷穽)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검문산을 찾아가려면 가장 빠른 길은?" 풍무영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석면에서 가장 빠른 길은 대도하를 따라가 는 길이었다. "앗차! 뇌룡탄(雷龍灘)!" 풍무영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대도하에서 가장 험난하고 벼랑이 높다는 뇌 룡탄이 초풍비가 달려가고 있는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함정을 파고 초풍비를 끌어들인 것이라면 초풍비는 뇌룡탄을 벗어날 수 없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풍무영이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렇다. 어쩐지 그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나에게 들으라고 이야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풍무영은 자신이 검문산의 소문을 들었던 곳을 생각해 냈다. 그곳은 온갖 파락호들과 떨거지들이 모이는 음침(陰沈)한 곳이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기거하는 것이 아닌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풍무영은 미칠 것 같았다. 풍무영은 초란의 발자국이 이른 곳을 찾아 들어갔고 그곳은 인간시장(人間 市場)이었다. 사람을 팔고 사는 노예시장(奴隸市場)에서 그는 검문산의 이 야기를 들었던 것이었다. "이건 함정이 분명해!" 풍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스스로 놀 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풍무영은 눈을 들었다. "어서 뒤쫓아가서 대형께 함정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해!" 풍무영은 빠르게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곧 사라졌다. 석면 에서 검문산으로 향하는 산길로 그의 몸이 사라진 것이었다. "후후후!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어둠이 물드는 나무그늘 밑에서 농부(農夫)가 걸어오며 웃음을 뿌렸다. 그 는 풍무영이 객잔에 나타날 때부터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었 다. 농부는 풍무영이 사라져 간 방향을 빙그레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농부는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산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사십대로 보이는 여인은 청초하거나 깜찍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 으나 삼십대의 완숙(完熟)한 미를 지니고 있었다. "별무리가 아름답구나!" 여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과연, 그녀의 머리 위에는 별이 부서질 듯한 빛을 뿌리며 제각기 자태(姿 態)를 뽐내고 있었다. 여인이 서 있은 곳은 깊은 산중이었다. 그녀가 서 있은 곳은 넓은 벌판이었 지만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멀지 않은 곳이 수림으로 빽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등 쪽으로는 삼층의 누각이 보였다. 어스름하기는 하지만 누각은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고 운치(韻致)가 있었다. 여인의 팔 소매처럼 휘어진 처마가 아 름다운 건물이었다. "정랑(情郞)!" 여인은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는 불분명(不分明)했다. 다만 그녀의 눈가에 아스라한 그리움이 물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눈망울에 어리는 그리움은 완숙한 여인이 그릴 수 있는 그리움이었고 그것 은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 단 한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쉬이이이이―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여인은 탄식을 토했다. 그녀의 눈에 백색(白色)의 선을 그으며 땅으로 맹렬히 떨어져 내리는 유성 (流星)이 보였다. 그것은 슬픔처럼 여인의 몸으로 밀려들었다 으슬으슬한 추위가 여인의 몸을 감아왔다. "정랑! 난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내 곁에 없어도 나는 당신 을 잊지 않아요." 여인은 손을 모아 가슴을 감쌌다. 달을 가렸던 구름이 밀려나며 주변은 갑자기 밝아졌다. 어둠이 급히 물러나 며 여인의 얼굴을 밝혔다. 짙은 눈썹이 유난히 돋보이는 얼굴에 수정처럼 맑은 눈이 반짝이는 얼굴이 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척(瘦瘠)한 모습을 지닌 여인이었다. 초란! 세상에 그런 눈을 가지 여인은 단 하나였다. 운명이 초란이라 이름지어준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난 당신이 나를 찾아오리라 믿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나를 찾아오면 안돼 요." 여인의 음성은 간곡했다. 만약 곁에 누가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능 히 슬픔에 잠길 것 같은 음성이었다. 여인은 풀 위에 둔부(臀部)를 깔고 앉았다. 이슬이 맺혀있던 풀이 자지러지 며 낮은 비명을 토했다. 여인은 풀이 울어대는 비명을 듣지 못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슬픔이 너무 큰 탓이었다. "당신은 이렇게 맑은 날이면 언제나 별이 내 눈에 들어온다고 이야기했었지 요. 꿈만 같아요."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비통(悲痛)하게 변했다. 곁에서 듣는다면 그녀를 위 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더욱 슬퍼졌다. 그녀가 살 던 곳에서도 늘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사는 의미 였고 행복이라고 생각이 들게 했던 소리였다. 풀벌레 소리가 슬픔으로 바뀐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일이었다. 불과 두 달 전부터 풀벌레 소리는 그녀에게 슬픔을 주었고 복받치는 설움을 주었다. "정랑! 오면 안 되요." 초란은 다시 중얼거렸다. "아니, 그는 올 것이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등뒤에서 들렸다. 초란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놀 라거나 하는 어리석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이끌고 온 자의 목소리였다. 아니, 자신의 행복을 깬 사람이었다. 기구한 운명(運命)이지만 그는 초란에게 아버지라 부리는 자이기도 했다.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다가와 초란의 곁에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노인의 몸에서는 한줌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그가 온다는 말씀이에요?" "그는 온다." 초란의 물음에 노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것은 확신이었고 자신에게 다짐을 주는 것 같은 말투였다. 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은 표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뜻은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반드시 온다. 그것이 너와 그의 영원(永遠)한 이별(離別)이 되고 말 겠지." 노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초란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점차로 핏기를 잃어갔고 무표정해 져 갔으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린 것이 부친의 말에 긍정을 뜻하는 것임에 는 분명했다. "그가 오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군요?" "물론이다. 을목세가가 기를 쓰고 그를 저지하고는 있지만 나는 그가 오리 라고 믿는다." 노인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신앙(信仰)과도 같은 확신이 었다. 초란도 부친의 확신을 믿었다. 부친은 단 한번도 자신의 확신에 대해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을 초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싸울 건가요?" "물론." "아버지가 죽을 수도 있어요." "어찌되었건 그와는 한번 부딪쳐야 한다. 이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가 아니라 아버지예요. 그에게 사죄(謝罪)를 하면 모 든 일이 마무리되는 것 아닌가요?" 초란의 목소리가 어느덧 애원으로 변했다. 그녀는 초풍비와 부친의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은 하고 있었으 나 어떤 이유 때문에 장인과 사위가 적대(敵對)를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 었다. 분명한 것은 부친이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초풍비에게 씻지 못할 짓을 했다 는 사실이었다. 부친이 초란과 초풍비의 사랑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 다. 그것은 이차의 문제인 것 같았다. 부친이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초란과 초풍비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부 친이 초란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부친은 분명 초란의 문제 이전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 것 때문에 초란의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강경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무림에서 은원(恩怨)은 흐르고 늘 피가 흐르기 마련이다. 무인에게 누구의 잘못은 없다." 부친은 딸에게 궤변(詭辯)을 늘어놓고 있었다. 초란은 그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는 착한 사람이에요. 그가 잘못한 것은 없어요. 저를 이대로 놓아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된다. 이제는 너를 그에게 보내준다고 해도 운명을 거역할 수 없게 되 었다. 어차피 그와 나는 한번 만나야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초란은 눈을 감았다. 완고한 부친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미 쏘아진 살이요. 엎질러진 물이 되고 보니 자신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가슴만 타서 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이야." 초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늙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무언가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늘에 그려지는 사내의 얼굴을 보노라면 모든 것이 꿈같이 흘러가 버렸다. 쉬이이이이― 다시 하나의 유성이 긴 사선을 그으며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오한(惡寒)이었다. '정랑! 제발 오지 마세요.' 초란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단 한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과거 부 친이 보낸 무인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하늘에서 한 사내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0 페이지: 1/45 자료번호: 272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0장-빌어먹을 놈들이군 검문산은 짙은 안개에 쌓여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검문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장강이 멀지 않았고 지난 밤 뿌린 비로 인해 사방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안개를 뚫고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까?" "글쎄요, 알려온 대로라면 두 시진이 지나지 않아 네 개의 진로를 열려고 하겠지요." "그 뒤에 소식은 있었나?" "글쎄요, 아무래도 밀정을 나간 현구(玄駒)가 발각되어 죽었거나 감금(監 禁)된 것 같아요. 한참이 지났는데 그 뒤로는 소식이 전혀 오지 않고 있어 요." 안개 속에 두 명의 사십대 중년인이 산 아래를 바라보고 서서 이야기를 나 누고 있었다. 산허리를 감아 도는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건만 그들의 시선은 산 아 래를 샅샅이 훑고도 남는 예리함이 철철 넘쳐나고 있었다. 두 사내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눈을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허리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전신에 화의장삼(華衣長衫)을 걸친 사내와 흑색무복을 단정히 걸친 중년인 은 검문산에 산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였다. 사람들이 검문산의 산채를 쌍룡채라 부르는 것은 이 두 명의 중년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묶어 검문산의 쌍룡(雙龍)이라 불렀는 데 그것은 그들이 신룡(神龍)처럼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던 무영환검(無影幻劍) 사무기(査武基)가 치사하 게 산정(山頂)에서 머리나 굴리고 있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형님! 이건 우리의 안위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지회의 자존심에 관한 거라고요." 허리에 가는 고리로 만들어진 절편을 둘둘 말은 중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을 무영환검이라 지칭한 사내는 육 척의 평범한 키였으나 허리에 절편 을 두른 사내는 오 척이 되어 보이지 않는 왜소한 몸집이었다. 절편 사이로는 가늘고 길어 마치 회초리처럼 보이는 기형장검(奇形長劍)이 꽂혀 있었다. 그가 오지회의 넷째인 귀검수(鬼劍手) 혁천련(赫天憐)이었다. 혹자는 그를 가르쳐 철편사랑(鐵鞭邪郞)이라고도 불렀다. 허리에 걸린 검만 큼이나 철편을 잘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제길...... 그때 놈들에게 속지만 안 했어도 우리가 이런 고초를 겪지 않 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무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친 음성을 뱉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민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서도 한망(罕罔)이 쏘아져 나와 그가 얼마나 격앙(激昻)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사무기 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에 역시 한 꺼풀의 살기를 띄운 혁천련이 그 를 올려다보았다. "형님, 우리 오지회 시절을 생각해요. 비록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 는 단 한번도 누구에게나 부끄럽게 물러서지 않았어요" "맞아. 우리는 늘 최강이었지." "어서 준비해요. 이제 곧 두 시진만 지나면 놈들이 쳐들어올 거고...... 우 리는 살아야 해요." "그래. 곧 둘째형과 막내가 올 거다. 대형도 찾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여기 에서 뼈를 묻을 수는 없어. 우선 둘째형과 막내가 올 때까지만 이라도 버텨 야 해." 사무기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머리를 풀며 하늘로 말려 올라가고 는 있었지만 푸른 하늘이 보였다. 허리를 감아도는 운무는 산정에 자리한 쌍룡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났구나." 흘러간 기억이 아련하게 수놓아졌다. 벌써 십 년이 지나간 이야기였고 이미 지나간 이야기지만 늘 오지회 시절이 그리운 사무기였다. 곁에 아우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사무기는 나이 이십이 되던 해, 필사(必死)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는 개봉현(開封縣)의 제형안찰사(提刑按察使) 밑에서 포두로서 이름을 날 리고 있었고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꾸려갈 정도는 되었다. 금승탈삭(金蠅奪索) 혁천련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포교 중의 한 명으로 둘 은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그들을 이끌던 총포두는 귀면초자(鬼面硝子)라 불리는 가영환(價英煥)이었 다. 그가 지방의 흔하게 늘어서 있는 객점과 전장(錢場), 주점에서 뇌물을 받고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황금을 받고 풀어 준다는 소문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 었다. 문제는 사무기와 혁천련이 너무 청렴하다는데 있었다. 언젠가 혁천련이 잡 은 살인범을 가영환이 황금 열두 냥을 받고 풀어주자 사무기는 분노를 금치 못했고 백 팔십 리나 추적한 끝에 다시 잡아들였다. 가영환은 다시 살인범을 풀어주었고 혁천련이 오십 리를 추적해 다시 잡아 들였다. 분노한 혁천련은 살인범을 잡는 중에 그가 가영환의 이종매(姨從妹)라는 것 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 분노를 참지 못해 한 다리를 베어버렸다. 분노한 귀면초자 가영환은 그들에게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죄를 만들어 뒤집 어 씌웠다. 강변(强辯)도 변명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을 상세히 써서 제형안찰사에게 보내고 가영환을 죽였다. "아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형님,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 더러운 세상! 난 이곳을 떠날 것이다." "저도 가겠습니다. 형님이 없는 이곳에서 개처럼 끌려 다니다 죽느니 형님 을 따라 가겠습니다." 제형안찰사는 가영환에게 매수가 되어 있었던 터라 모든 군사를 풀어 그들 을 죽이려 했다. 그들은 달이 어두운 그믐밤을 택해 야반(夜半)의 탈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그들은 사천의 검문산까지 도주하게 되었다. 더 이상 갈곳이 없었던 그들은 검문산에서 몸을 감추고 이 년이라는 세월을 숨어 살았다. 당시 검문산에는 이십여 명의 산적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산적들을 부 하로 제압한 후 산적의 길로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다시 오 년이 지났을 때 는 그들 밑에 모여든 부하가 백여 명에 육박했다. 그들은 포교시절 배운 각종 무공과 포박술(捕縛術)을 산적들에게 전수했고 뛰어난 두령들을 육성하여 완벽한 체계를 잡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산적들은 군대의 체계처럼 정비가 되었다. 사무기가 대두령이 되고 혁천련이 소두령을 총괄하는 부두령이 되었다. 열 명의 소두령을 나누어 열 명씩 패를 갈라 지휘하도록 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 검문산은 당문이 있는 당가타에서 사천의 중심시진 성도에 이르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주변에서는 가장 잘 닦여진 관도가 산 아래를 지나가 늘 상인들과 관군이 지나다녔다. "우리는 철칙이 있다." 그들은 세 가지의 철칙을 만들어 철저하게 지켰다. 그것이 쌍룡채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었고, 그들이 초풍비를 만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절대 관병(官兵)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였다. 만약 관병을 건드렸 다가는 언젠가 산 전체가 피로 덮일 수도 있었기에 첫번째 철칙이었다. 둘째는 여인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설사 재물을 빼앗고 말을 빼앗 기는 해도 여인의 몸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살인(殺人)을 금지했다. 중원 천하에는 어디에서나 산적을 만날 수가 있었다. 또한 살인이 일어났 다. 그러나 살인을 하지 않음으로서 결정적인 적을 만들지 않았다. 초풍비를 만난 것은 그들이 산적이 된 지 오 년이 넘던 시점이었다. 초풍비는 당시 처음으로 강호에 출도하기 위해 하산(下山)하여 사천을 지나 중원으로 진입하려하는 중이었다. 길을 막은 삼십 명이 달려들어 그에게 달 려들어 등에 맨 재물을 뺏으려 했으나 옷깃도 건드리지 못했다. "후후후, 재미있는 놈들이로군.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산적질을 하다니." 초풍비는 그렇게 웃었다. 그것이 사무기와 혁천련이 초풍비를 만난 첫날이었다. 초풍비는 산적들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 제압하여 산채로 안내할 것을 요구했다. 초풍비는 산채로 들어와 사무기를 만났다. 초풍비가 산채로 올라왔을 때, 한 번도 실패가 없었던 산채의 부하들이 혈도를 제압당해 줄줄이 끌려오고 있었다. 분노한 사무기는 미친 듯 달려들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단 일수(一手)만에 사무기는 허리를 접으며 나동그라졌다. 어떻게 된 일인 지 파악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 사무기는 쓰러진 채로 눈알만 돌렸다. 뒤이어 날아든 혁천련도 허무하게 나동그라졌다. 그가 자랑하던 금승탈삭은 초풍비의 옷자락도 건들이지 못했다. "너희들을 아우로 거두겠다. 그후에 나에게 무공을 익혀 나를 꺾으면 너희 들을 놓아주겠다. 산적질이 아니라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는 무인으로 만들 어 주마." 너무도 강렬했던 말투와 신념(信念)에 그들은 초풍비를 따라 나섰다. 그것 이 오지회의 처음이었다. 오지회가 대형의 편지 한 장으로 해산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분노했다. 이 미 강호에서는 무영환검으로, 귀검수로 불리는 그들이지만 대형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머지 두 명의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오지회는 대형을 포함하여 다섯 명으로 만들어진 문파였다. 대형은 오지회 를 해산한다는 서찰만을 보내온 뒤 행방이 묘연했다. "난 대형을 찾아 떠나겠다. 만약 우리를 배반한 것이 확인된다면 대형을 죽 이고 나도 자결(自決)하고 말겠다." 둘째형은 그렇게 떠났다. 막내도 떠났다. 둘째형을 찾으러 간다는 구실(口實)이었지만 그도 사실은 대형을 찾기 위해 천하를 뒤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우린 어디로 가지?" 혁천련이 그렇게 물었을 때, 사무기는 막막했다. 자신도 어디로 가야할지 계획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다 한곳을 떠올렸다. "검문산으로 돌아가자." "검문산?" "그래, 그곳에는 아직 부하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우리를 기쁘게 맞이할지도 몰라. 그곳에서 형님들과 막내를 기다리자." "좋은 생각입니다. 만약을 위해 우리도 힘을 키워야 해요. 더구나 우리는 기댈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검문산으로 돌아갔다. 과연 산채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식구(食口)가 불어 백 이십 명이 넘었다. 그들은 사무기와 혁천련이 없는 동안에도 세 가지의 철칙을 지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돌아온 옛날의 두령을 환영했다. 사무기와 혁천련은 처음 산채를 떠났을 때와는 많이 변해있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이 무공이었다. 처음 산채에서 두령생활을 할 때만 해도 그가 지닌 무공은 관병들이 배우는 선인지로(仙人指路)가 전부였다.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초풍비를 따라 천하를 주유하던 사무기와 혁천 련은 초풍비에게 배운 무공으로 강호 일류고수가 되어 있었다. 초풍비가 전한 무공은 천하에서 두려운 것이 없는 절정의 무공인 탓이었다. 산채로 돌아온 그날부터 사무기와 혁천련은 부하들을 조련(調練)하기 시작 했다. 초풍비에게 배운 무공을 전수하고 그들을 다그쳐 일당백(一當百)을 만들었다. 와중에도 담붕비는 가끔 그들을 찾아왔다. 늘 사용하던 혈부는 보이지 않았 으나 그가 아는 세상의 이야기와 둘째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오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담붕비가 찾아왔다. "둘째형마저 실종되었소." "그럴 리가? 형마저 은거한 거 아니냐?" "아니. 형님은 대형이 사라진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소. 웬 여인이 중간에 개입(介入)되어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을 알려온 후에 실종되었소," 담붕비의 말에 사무기와 혁천련은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담붕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둘째형을 구하러 가야했다. 이미 대형의 소식은 오리무 중이었다. 그러나 혁천련의 생각은 달랐다. "형님. 설사 형님이 둘째형을 찾으러 간다해도 난 남겠소. 만약 형님들에게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난 이곳에 남아 대형을 기다릴 거요." "왜요? 큰 형님은 나타나지 않을 거요." "아니. 난 기다릴 거다." "그래. 넷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나도 남아서 기다리겠다. 둘째형은 무 사할 거다." 사무기까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막내 담붕비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그가 쌍룡채를 찾아온 것은 둘째형을 구하기 위해 힘을 모으러 온 것이었 다. 그런데 셋째형과 넷째형이 미지근한 반응(反應)을 보이자 화가 치민 것이었 다. 담붕비는 혼자라도 둘째형을 찾겠다고 떠났다. 삼 년이 지났을 때 담붕비가 돌아왔다. 그는 둘째형을 찾지 못했으나 형제 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담붕비는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둘째형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초풍비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형님, 그때 말이에요." "그때...... 언제?"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혁천련의 말에 사무기는 의문을 던졌다. 말투로 보아 혁천련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억지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사무기는 혁천련의 말속에 진한 궁금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놈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도 이번 일과 같은 일이 생겼을까?" "물론이다. 다만 놈들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구실(口實)을 만들었을 뿐이 야. 만약 당시에 놈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사무기는 혁천련이 무엇을 물으려고 하는지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었다. 적어도 십오 년이 넘도록 같이 생활해 온 그들이었다.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사이었다. "어서 가요. 놈들이 행동을 개시(開始)하기 전에 먼저 준비를 하자고요." "그러자." 사무기는 다시 몸을 돌려 안개를 바라보았다. 일년 전의 일이 주마등(走馬 燈)처럼 떠올랐다. 모든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한편으로 보면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나 따지고 보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산채를 공격할 것임을 짐작하는 그였다. 문제는 그 시점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 * * "여러 산중의 호걸(豪傑)을 만나기 위해 나흘을 헤맸습니다." 얼굴을 면사로 가린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로 노인이라는 것을 판단 할 뿐이지 진정 그가 노인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이 얼굴을 가린 일반 면사와는 많이 달랐다. 강호인들은 간혹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을 때, 면사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게 남자들은 챙이 넓은 방립(方笠)을 사용했고 면사는 주로 여자들의 전 유물 같은 것이었는데 노인은 두터운 면사를 이용해 안면을 가리고 있었다. 노인은 검문산 아래를 지나다 부하들에게 잡혀 왔었다. 포박은 당하지 않았 지만 어찌되었든 포로로 잡혀온 노인치고는 기도가 당당했고 조금도 굴함이 없었다. 노인이라는 것도 분명치 않았다. 목소리만으로 노인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산채의 사람들 모두는 그를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노인이 무슨 일이 있어 나를 보자고 했소." "당신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요. 내가 쌍룡채의 두령을 만나지 않으 려 했다면 이 먼 검문산까지 오느라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사무기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며 대답했다. 조금도 비굴함이 없었다. 사무기는 노인을 바라보며 신중하게 생각했다. 사무기는 조금은 자신이 노인에게 끌려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노인의 언행은 힘이 있었고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기백(氣魄)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을 산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허허로움을 지니 고 있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소?" "사천당문의 부탁을 전하려 하오." "사천당문?" 놀란 사람은 비단 사무기 뿐만이 아니었다. 혁천련도 놀란 표정으로 사무기 를 바라보았다. 사무기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사천당문이 우리에게 얻을 것이 무엇이기에 부탁을 한다. 무엇보다 이자가 사천당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누구요? 누구기에 나에게 사천당문의 일을 부탁한단 말이요. 도적 질이나 해먹고 사는 내게 볼일이 있다는 말 자체가 우습구려." "하하하, 난 만도화원(萬賭花院)의 원주요. 짐작이 가오?" '헛!' 사무기는 심장에서 시원한 바람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목으로 넘기며 그제 야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정말 만도화원의 원주라면 이야기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사천무림은 중원과 달리 오래도록 새외무림(塞外武林)과 충돌하며 무림을 형성했고 항시 서로간에 힘을 합치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당문이라는 가문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 밀려들어올지 모를 새외의 힘에 대비한 것이었 다. 그들은 은연중 고리처럼 묶여져 있었다. 사천무림이라 부르는 그들의 공동체(共同體)에는 사천지방에서 무림인이라 자처하는 모든 문파가 개입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무공으로 이름을 날리는 문파가 있는가 하면 자금을 대주는 경우도 있었다. 만도화원의 경우가 그랬다. 만도화원은 술과 미희의 춤을 팔고 몸을 파는 만화각(萬花閣)과 도박(賭博) 을 하는 도루(賭樓)가 있었다. 도루는 만도각(萬賭閣)이라 부르는 곳이었고 이 두 개의 누각을 합쳐 만도화원이라 불렀다. 만도화원은 사천무림에 자금을 대주는 대신 사천무림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곳이었다. 만도각주가 사천을 장악하고 있는 여섯 개의 문파에 자금을 대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그래, 사천당문이 우리 같은 산적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이요?" 사무기는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검문산이 사천에 위치하고 있는 이상, 그것도 당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명을 거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만약 사천무인들이 사천당문의 명을 받아 공격이라도 해오는 날에는 결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사무기는 알고 있었다. 만약 의지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거역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검문산의 산채가 언제 쑥밭으로 변하는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천무림이 사천을 지키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변방에서 들어오는 무인들 과 싸우기는 하지만 언제나 정당(正當)한 것은 아니었다. 오지회 시절 사천무림의 폐쇄성(閉鎖性)과 아집(我執)을 이미 경험한 바가 있어 사무기는 바싹 긴장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만도화원의 원주라는 늙은이가 사무기와 혁천련을 모른다 는 사실이었다. 사무기와 혁천련이 오지회의 셋째와 넷째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만도화원 의 원주는 달리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 두 명이 오지회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부탁은 하지 않았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천에서 심심치 않게 문제를 일으켰던 오지회이고 보면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사천당문의 부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사천당문의 내부에 간세(間世)가 있다는 것이었소. 당문은 신병기를 구입 했는데 놈들이 마수를 뻗치려 하고 있소. 그래서 당문은 비밀리에 놈들이 알아챈 병기를 빼돌리려 하오." "설마 우리더러?" 만도화원주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 기 때문에 오히려 사무기가 정신이 산란할 지경이었다.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의 사무기를 만도화원주는 한참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약 산채의 두령들 이 수긍을 하지 않을 때에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천당문의 무자비한 침공 (侵攻)이 있을 것이었다. 대파라 부르는 허울좋은 자들이 항상 그랬던 것처 럼...... "사천당문의 내부에 좀을 먹는 간세라니......?" "깊게 알려고 하지 마시오. 아무튼 사천당문이 지닌 병기는 매우 귀한 것이 오. 간세들이 알아챘으니 우리는 그것을 빼돌려 비밀리에 다시 사천당문으 로 가지고 들어오려고 하오이다." "다시 들어간다고?" "그렇소, 그래서 병기를 나르던 중 모두 빼앗겼다고 소문을 내려고 하니 당 신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사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천당문의 밀명(密命)을 받은 만도화원주가 비밀리에 찾아온 것이 며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을 자신들에게 맡기려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사무기는 바로 수긍하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이 있지 않고서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없었다. 사천당문이 오리발을 내민다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피해갈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 다. "증거가 있소?" "물론이오. 이미 검문산 산채의 소문이 자자하니 누구라고 해서 듣지 못하 였겠소. 사천당문의 당가주께서 친히 보내신 서찰이요." 만도화원주는 품에서 서찰을 꺼내 사무기에게 건네주었다. ― 쌍룡에게 본인은 사천당문의 가주로서 무림의 일원인 쌍룡채의 호걸 두 분에게 위급 지경(危急之境)에 달한 두 가지 일을 부탁하고자 하오. 먼저 내막은 원주에게 들었을 터이니 간세들이 탈취(奪取)하려고 하는 병기 를 보호해 주시오. 그들이 검문산 아래로 지나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다 들 었으니 분명 당신들의 영역(領域)일 것이오. 그들은 허울좋게 당가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소. 그들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들이 지닌 것을 빼앗아 주시오. 모 든 것은 비밀스럽게 진행될 것이오. 다만 당문이 원하는 병기만 다시 찾아 돌려준다면 쌍룡채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드리도록 하겠소. 당협 배상 서찰의 하단부에는 한 송이 국화(菊花)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서찰을 보낸 주인은 사천의 실질적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사천당문의 당대가주 당협 이었다. "조건은?" "고맙소. 천하의 안위를 위하는 길이니 산채라 하더라도 도와주시리라 말씀 하셨소." 만도화원의 원주가 고개를 숙였다. "조건 없이는 움직이지 않겠소." "물론이오. 산채아래 관도에 늘어진 다섯 마리의 마차에 황금과 숱한 병기 가 실려있습니다. 그것이 선불(先拂)이고 만약 일을 끝내면 마저 채워 드리 겠소." "총액은?" "금원보 이천 근입니다. 범인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큰돈일 것이오." 그렇기는 했다. 지나다니는 행인이나 장사치를 털어 봐야 백 이십 명이나 되는 산채의 식구 들에게는 어림도 없어 근래에는 풀칠이 어려웠던 참이었다. 다행스럽게 검문산 아래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통행하는 장사치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쌍룡채는 재원을 충당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근래 급격하게 수입원(收入源)이 줄어들어 산채를 유지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탐이 나는 거래라 아니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천 근이라?" "그렇습니다. 선불은 마차에 실려있고 후불(後拂)은 일이 끝난 뒤 만도각의 불패신수(不敗神手)를 통해 받아가도록 하시오." "불패신수라고?" "그렇소." 그리하여 계약은 성립되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늦은 봄이었다. 오십여 명의 산채 호걸들은 관도를 중심으로 두고 양옆으로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총 다섯 개의 무리로 만들어진 산채의 부하들은 각각 다섯 명의 소두령들이 인솔하고 사무기의 명을 기다렸다. 사무기는 높은 바위 위에 몸을 눕힌 채 마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곁에는 혁천련이 명을 받아 산채의 부하들에게 전달하기로 되어 있어 역시 바위에 배를 붙이고 누워 있었다. "아우, 오늘이 틀림없지?" "그 놈이 말한 대로라면 오늘이 틀림없어요. 지난밤에 도착한 전서구에도 오늘 도착하리라고 적혀 있었잖아요." "그랬지." 목소리를 건성으로 흘리며 사무기는 먼 관도를 바라보았다. 두두두두― 거친 말발굽소리가 관도를 울린 것은 태양이 머리 위에 있을 때였다. 새벽 부터 진을 친 산채의 부하들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형님, 저기!" "나도 보고있으니 호들갑 떨지 마라." 다급한 혁천련의 말소리가 들리자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던 사무기가 자신의 애병(愛兵)을 허리에 단단히 매며 대답했다. 그의 애병은 구불구불한 기형장검으로 길이가 무려 사 척이 넘었다. 오지회 시절에는 무려 이 백 명이나 되는 목을 벤 피에 젖은 마물(魔物)이었다. "어서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대기하라." "알았어요." 혁천련은 품에서 조그만 삼각소기(三角小旗)를 들었다. 깃발은 붉은 색을 띈 것이었는데 혁천련의 품에는 그것 말고도 네 개나 되는 깃발이 있었다. 스스스슷― 관도를 가운데 두고 스산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각기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무리는 사방으로 압박하고 돌풍을 일으 키는 사상귀마진(四象鬼魔陣)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오래 전 대형이 가 르쳐 준 진법이었다. 사무기와 혁천련은 검문산으로 돌아오자 부하들에게 무공을 익히며 틈틈이 대형이 가리켜 준 진법을 가리켰었다. 언젠가는 쓰임새가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두― 마차가 관도에 뽀얀 황진을 일으키며 다가오자 모두의 눈에 일목요연(一目 瞭然)하게 드러났다. 말 네 마리가 끄는 두 대의 마차를 주위로 말을 탄 스무 명의 무인들이 질 서도 정연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무리의 맨 앞에는 다른 말과 십여 장 떨어져 한 필의 적색 털을 가진 말이 달려오고 있었는데 바람을 받아 한껏 펄럭이는 깃발이 보였다. 깃발에는 검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는데 은은한 남색의 깃발에 너무나 잘 어 울리는 글씨였다. ― 당(唐) 깃발로 보아 사천당문의 행렬이 분명했다. 더구나 마차의 지붕에 박혀있는 깃발은 작았으나 사천무림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두 대의 마차 지붕에는 조그만 삼각의 깃발이 걸려있었는데 반달이 그려져 있었다. "형님 사천당가의 반월대(半月隊)인 것 같은데요." "그럴리가? 반월대가 사천당가를 배반했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는데...... 정말 반월대냐?" "맞아요." 혁천련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가 사천무림의 반월대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무기는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반월대는 사천당문에서도 제법 이름을 얻은 전위무사대(前衛武士隊)였다. 그들은 돌격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십 개로 나누어져 있는 사천 당문의 전위무사대 중 중간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철혈무인(鐵 血武人)들의 집단이었다. "형님, 틀림없습니다." "너무나 정확한 것이 오히려 불안하다. 그러나 지체할 수는 없다." 마차와 사천무림의 무사들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혁천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등에서 제법 큰 강궁을 끌렀다. 허리에는 단 한 자루의 화살이 매어져 있었는데 길이가 넉 자가 넘을 것으로 보이는 철궁이 었다. 철궁에는 붉은 색의 깃털이 달려있어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쏴라."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사무기의 음성이었다. 피――핑―― 퍽! 앞서 달리던 말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허공에서 거꾸러졌다. 말에 타 고 있던 무사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관도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멈추어라." "습격이다. 방어막을 구축하라." 마차에 실린 병기가 귀한 것인 듯 반월대의 무인들은 신속하게 마차 주위로 몰려들어 원진을 만들었다. 마차가 멈추고 말의 걸음이 멈추었다. 만약에 도주할 것에 대비해 설치했던 하마삭(下馬索)은 쓸모가 없게 되었 다. 당문에 숨어있던 자들이 도주할 것에 대비해 관도 이십 장밖에는 발의 다리 를 거는 하마삭이 준비되어 있던 상태였으나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원진을 구성했기에 굳이 사용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핫! 쌍룡채다." 누군가 화살을 알아보고 외침을 토했다. 쌍룡채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털 때 반드시 붉은 수실이 달린 화살을 날려 사람들을 위축시켰다. 상인들이나 쌍룡채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적전(赤箭)이라 부르는 화살이 날 아들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도주하는 것이 일반화된 일이었다. 상인들과 달리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차를 보호 하며 일제히 병기를 뽑아들고 적전의 주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었다. "형님." "아무래도 겁을 주어야겠지." 혁천련은 사무기의 말을 듣자 관도로 달려나갔다. "멈추어라!" 혁천련은 관도에 내려서자마자 한소리 호통을 내질렀다. 그의 머리에는 깊 은 방갓이 씌어져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가뜩이나 작은 키라 우스꽝 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이곳은 쌍룡채의 어른이 머무는 곳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물러가면 죽 이지는 않겠다." "건방진 난쟁이 놈. 죽여주겠어," 어디선가 살기가 깃든 음성이 혁천련의 귀를 때렸다. 혁천련은 눈을 들었 다. 그의 눈에 마부석에 앉은 제법 기도가 넘치는 사내가 보였다. 전신에는 매화문양(梅畵紋樣)이 아로새겨진 문사복(文士服)을 걸치고 있었 으며 손에는 철골이 든 부채를 유려한 모습으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반월대주라는 당청유(唐淸遊)라는 놈이로군.' 혁천련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놈이 무공으로 하자면 십 합도 되지 않을지 몰랐으나 놈의 배경은 쉽게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옥선미랑(玉扇美郞)이라는 미명으로 지닌 바 실력 이상으로 칭송을 받고 있 는 당청유는 이미 사천의 후지기수 중에서는 제법 이름을 얻고 있기도 했 다. 그의 명호가 말해주듯 그는 대단한 미남이었다. 삼십을 넘지 않았지만 당금 당문의 일곱째 손자인 그의 무공은 사천무림 내 에서도 결코 하수가 아니었다. 반월대를 지휘하는 만큼 그의 통솔력도 쉽게 볼 수는 없었다. 그의 손에 쥐 어진 옥선으로 펼치는 혈풍십이선(血風十二扇)의 절기는 사천당문의 절기가 아니었다. 그가 어디에서 선법(扇法)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후지기수의 무 공치고는 무서운 살인기예(殺人技藝)였다. "하하하, 이곳을 지나면 네놈들이 나타난다 하기에 기대를 했었지. 후후후, 모두 죽여주마." 당청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호기롭게 말했다. "하하하, 애송이 놈, 쓴맛을 보아야 하겠느냐? 다시 말해 주겠다. 무기와 재물을 버리고 물러난다면 목숨만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혁천련은 호통을 내질렀다, 음성에 내공이 실려있었기에 그의 말이 떨어지 자 관도 주위에 서 있던 나무의 잎이 심하게 흔들렸다. 말을 하며 혁천련은 품속에서 다섯 개의 깃발을 양손에 나누어들었다. "하하하. 모두 모여라. 놈들을 주살하고 반월대의 이름을 높이자." "와!" "와―와아―!" 당청유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반월대의 무인들이 병기를 하늘로 치켜들며 함성을 터트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주인 당청유를 믿었다. '할 수 없군.' 착! 혁천련의 수중에 들려있던 깃발 중 눈처럼 흰 깃발이 들려졌다. 그는 머리 높이보다 높게 깃발을 뽑아 흔들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관도의 양편에서 쌍룡채의 산적들이 번뜩이는 병기 를 들고 관도로 밀려나왔다. 동서남북을 차지한 사상(四象)의 방위였다. 각기 손에는 병기를 들었다. 검도 아니고 도도 아닌 기이한 중간형태의 병 기는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 중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병기였다. 쌍룡채의 부하들이 철심도(鐵心刀)라 부르는 병기였다. 검처럼 양날로 되어 있으나 한 면은 박도처럼 배가 약간 불렀고 검극은 뾰족했다. "놈들의 퇴로를 차단해라." 사사삿― 쓰스스스― 혁천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쌍룡채의 산적들은 반월대가 구성한 원진 앞으로 다가섰다 불과 일장의 간격을 든 그들은 일제히 철심도를 뽑아 세웠 다. 네 개의 큰 무리를 만들고 각각의 무리는 열두 명의 몸과 열두 자루의 병기 로 둥글게 말려있는 모습이었다. 서로의 몸이 닿아있어 물샐 틈이 없어 보 였고 고슴도치처럼 철심도의 검인이 밖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쳐라." 먼저 명령을 내린 것은 당청유였다. 그는 마차의 지붕 위에 올라가 부채를 좌우로 흔들며 연신 호통을 내질렀다. 파파파파― 원진이 바람든 풍선처럼 불어나며 반월대는 순식간에 일장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마치 퉁기듯 탄력 있는 공격이었다. "선회(旋回)하라." 사무기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휘리리리―리리―리릭― 수아아아― 네 개의 거대한 무리가 갑자기 회전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삐죽하게 튀어나 온 검극이 그물처럼 얽히며 다가오는 병장기를 퉁겨내었다. 차창― 찬― "커흐흐흑!" 병장기가 부딪치며 청명(淸明)한 쇠붙이 소리가 일어나자 반월대가 만든 원 진이 심하게 출렁거리며 공격하기 위해 튀어나올 때와 반대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나중에는 처음에 구축(構築)했던 원진보다도 더욱 좁아진 원진이 되었다. 충격에 자신의 병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자도 있었고 손아귀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자도 있었다. "다가서라." 말소리가 떨어지지 바쁘게 쌍룡채의 사상귀마진은 더욱 단단하게 서로를 조 이며 반월대를 향해 다가들었다. 다시 일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물건을 내놓고 사라진다면 살려는 주겠다." "무슨 개소리냐! 산개하라." "각자 공격하라." 원진이 어지럽게 얽히는가 싶더니 병기가 하늘을 덮으며 사상귀마진을 양해 무섭게 돌진했다. 차창― 챙― 병기가 부딪치고 불꽃이 피어올랐으나 사상귀마진을 구축한 쌍룡채의 산적 들은 방어만 할 뿐으로 공격을 받아 내기만 했다. "큭!" 산채의 부하들 중 남쪽을 막고있던 부하 하나가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땅바 닥에 주저앉았다. 혁천련은 눈에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봐주다가는 우리가 당한다. 이 기회에 그 동안 연습했던 사상귀마진을 실 전에 사용해서 놈들을 쓸어버리겠다.' 척! 혁천련은 손에 들린 깃발 중 청색을 띄우는 소기를 들어 허공에 흔들며 한 소리 외침을 토했다. "양행(兩行)으로 진입하라." 우두두두두― 부하들의 몸이 분분히 움직이며 진을 변화시켰다. 중앙에 마차를 두고 네 개의 줄이 각각 늘어선 형태였다. 네 개의 긴 줄은 모두 병기를 좌우로 뽑 아 세워, 마치 쓰러진 나무에 가지가 잘린 것 같았다. "발진(發陣), 백상붕암(白象崩岩)!" 혁천련은 붉은 색 기와 청색 기를 번갈아 교차시켰다. 우두두두두두―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마치 말이 달리는 듯 들리더니 일자로 늘어선 네 개의 줄이 바람개비처럼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열두 명의 부하들 중 중앙에선 두 명이 축이 되고 나머지 열 명이 바람처럼 뛰며 닥치는 대로 반월대의 무인들을 베어버리는 것이었다. 파파파― "크아아악!" 비명이 울리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창자가 갈라져 땅바닥에 질질 끌리고 머리가 퉁겨져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진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반월대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반월대 는 반으로 줄었다. '후후후, 네놈들을 죽이려면 내 손 하나면 되지만 내 부하들도 그 동안 억 제된 것이 있으니 이해해라.' 사무기는 속으로 웃었다. 그의 생각은 맞는 생각이었다. 명색이 오지회의 셋째인 무영환검이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도 무섭지 않 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반월대 정도는 아침 운동거리로도 모자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 무인들이라고 하는 것은 간혹 피를 보기를 원했고 너무나 억제시키면 탈이 날 수도 있었다.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오히려 유약(柔弱)한 모습으로 변하고 성격도 변하나 무공이 경지에 완벽히 올라서기까지는 적절한 살생이 요구되기도 했 다. 쌍룡채의 부하들이 그랬다. 무작정 칼을 휘두르며 산적질을 하던 그들이 무정환검과 철편사랑의 무공을 이어받은 지금, 내공이 생기고 태양혈(太陽穴)이 깊숙하게 들어간 그들에게 는 적절한 피가 있어야 했다. 실전감각(實戰感覺)도 필요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반월대는 쌍룡채의 무술 연습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쌍룡채의 부하들은 말이 산적이지 어디에 내어놓아도 꿀리지 않는 무인이 되어 있었다. 다만 산적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무림으로 쏟아져 나간다면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를 일으킬 수도 있 었다. 파파파파― 여기저기에서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나동그라졌다. 하늘에서 피 비가 쏟아 졌으며 부하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무섭게 검을 휘둘렀다. 사상귀마진은 그들이 익힌 수십 개의 진법 중 하나였다. 부하들은 너무나 훌륭하게 진법을 수행하고 있었다. 까닥까닥― 사무기는 혁천련을 보며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두 개의 손가락 이 연신 붙었다 떨어지자 혁천련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고 녹색의 기를 뽑 아 머리 위에서 흔들었다. 한소리 외침을 터트리는 것도 습관적으로 잊지 않았다. "각개 격파하라." "와―와―" "죽어라." 쌍룡채의 부하들은 각기 다른 무공을 지니고 있다. 혹자는 암격술(暗擊術) 을 지니고 있기도 했고 도에 능한 자, 검을 잘 쓰는 자, 천차만별(千差萬 別)이었다. 특히 살인술(殺人術)만 전문적으로 익힌 자도 있어 어느 문파에도 뒤지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저 놈은 내가 죽여줘야겠지." 스스슷― 바위 위에 냉큼 올라앉아 싸움구경을 하던 사무기는 바람처럼 허공에 몸을 도약시켰다. 한 번에 무려 이 장을 날아간 그는 허리에서 구불구불한 장검 을 뽑았다. 사 척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기형장검은 하나의 인형을 향해 빗살처럼 스며 들었다. '헛! 뭐야." 놀라 부르짖는 목소리의 주인은 당청유였다. 믿었던 부하들이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무너지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청유는 어지간히 놀라 분별력(分別力)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을 만났을 때만해도 그는 쌍룡채의 산적들을 같잖은 놈들이라 생각했었 다. 대다수의 산적들이 그렇듯이 겁을 주고 재물을 빼앗는 정도라고 생각했었 다. 누누이 들었던 검문산 쌍룡채였건만 그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었다. "산적 놈들이 날고 기어보았자 산적이지." 상황은 생각과 많이 달랐다. 오 척도 안 되는 난쟁이 놈이 나오는 순간까지만 해도 그는 배꼽이 빠질 정 도로 우스웠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산적들은 이미 산적이 아니었다. 반월대는 늘 함께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틈틈이 모여 수없이 많은 합격술 (合格術)을 익혔고 당청유는 사천의 명가 당문의 자제로서 무공을 익혔으나 지금과 같이 손도 써보지 못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창― 갑자기 눈앞으로 강한 기파가 밀려들었다. 당청유는 급히 날아드는 상대를 향해 부채를 뻗었다. 그의 부채는 겉은 옥 으로 싸여져 있으나 속은 강한 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더구나 부채 속에는 암기까지 숨겨져 있어 누구라 하더라도 그의 부채를 피 하기는 어려웠다. 혈선십이법이라는 그의 부채술이 듣기 좋게 피혈(血)자가 들어간 것이 아니 었다. 피피핏― 부채의 속에서 소털보다도 가는 암기가 날아갔다. 강호에서 흔히 사용하는 우모침과는 격이 다른 암기였다. "헛!" 당청유는 덮쳐 들던 상대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불과 서너 자의 거리에서 암기를 뿌렸으니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 해도 피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푹! "커흐흐흑!" 기고만장한 웃음을 터트리려던 당청유는 불신의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내려 다보았다. 한 자루의 구불구불한 검이 심장 깊숙하게 박혀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자는 조금 전 자신이 죽으라고 암기를 뿌린 상대방이었다. "어찌......?" "이것 말인가?" 당청유는 하늘이 노래졌다. 자신의 앞에 다가선 자의 이빨 사이에는 자신이 날린 암기 세 개가 물려있 었다. 날아드는 암기를 이빨로 문 뒤 검은 당청유의 가슴을 벤 것 같았다. "크흐흐흐―" 당청유는 비통한 신음을 뿌렸다. "잘 가게...... 네놈들이 추종하는 사천당문의 그 잘난 명예를 중시하는 원 로들이...... 아니지, 자네의 할아버지가 원한 것이니 섭섭하게 생각지는 말고......" 슈카칵― 사무기의 장검이 허공으로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잘리며 피가 뭉턱 솟구쳤 고 어깨를 스친 검이 턱에서 머리에 이르는 일부를 베어냈다. 털썩! 당청유의 몸은 마차의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툇!" 사무기는 입에 물고 있던 암기를 신경질적으로 뱉어냈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살아남은 자는 쌍룡채의 부하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죽인 당청유가 마지막으로 죽은 자였다. 이미 바닥은 피가 흘러 내가 되었고 여기저기 쓰러진 반월대의 시체에는 어 디서 날아왔는지 파리가 엉겨붙어 있었다. 마차에 실린 것은 굉천뢰였다. 두 대의 마차에는 사람을 묻을 때 사용하는 관이 각각 열 개가 실려 있었고, 도합 스무 개의 관에는 굉천뢰가 가득 실 려 있어 그들을 놀라게 했다. "형님, 이 굉천뢰는 어디서 가져오는 걸까요?"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다." 사무기는 짤막하게 말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그의 머리를 무겁 게 짓눌렀다. 나머지 잔금(殘金)은 만도화원의 불패신수와의 도박을 통해 모두 받을 수 있었다. 불패신수는 그에게 수십 번의 도박을 져주었고 사무기는 어렵지 않 게 나머지 잔금을 회수했다. 그가 마지막 도박을 하고 나올 때 불패신수라는 놈이 물었다. "귀하의 존대성명(尊大姓名)을 알고 싶소." 사무기는 철저한 포석(布石)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거짓으로 이름을 댈 수도 있었 다. 그렇다면 자신이 오지회의 삼제(三弟)라는 사실은 영원히 감추어질 것 이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이 무영환검이라고 부르더군." 불패신수의 얼굴이 참혹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그는 만도화원을 나섰다. 만도화원의 원주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일설에는 그를 상대하는 사천무림의 많은 원로들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만도화원의 식솔들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 았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무기가 불패신수의 손을 거쳐 자신의 몫을 가져간 뒤 그는 조그만 내실에 앉아 있었다. 만도화원의 후원에 자리한 삼층누각의 조그만 내실이었다. 내실은 사방이 막혀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고 바람 한 점 새어 들지 않았 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은밀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은은한 어둠아래 그는 서성거렸다. 벽에 걸린 두 개의 궁등이 그나마 실내를 적적한 고요에서 운치를 만들어내 고 있었다. 실내는 매우 좁았다. 두 명이 누우면 한 명은 굴러 떨어질 듯 보이는 좁은 침상이 하나 벽에 붙 어있었고 그 앞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가 펼쳐진 탁자가 놓여 그나마 을씨 년스러운 방안 풍경을 바꾸었다. 털썩! 여전히 면사로 얼굴을 가린 그는 탁자에 주저앉아 붓을 들어 미리 갈려있던 먹물을 찍어 모란무늬가 들어 있는 당지(唐紙)에 바삐 써 내려가기 시작했 다. "크크크, 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감히 사천당문을 건드리다니...... 이 기회에 건방진 사천당문과 오지회의 잔당들을 쓸어버리는 거다." 그는 음침한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이 쓴 서찰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 사천의 맹주이신 당협 대협께 일전 귀공은 귀가의 칠손(七孫)이신 당청유대협에게 명해 병기를 후송하라 한 적이 있었소. 나도 우연히 사천을 지나다 귀공의 칠손을 만났기에 들은 것이오. 그런데 귀공의 칠손 당청유대협은 검문산에서 쌍룡채의 산적들의 습격을 받 아 죽게 되었소. 난 무림인은 아니지만 당신이 인의가 있고 무림의 어른이라 알고 있기에 알 려드리는 것이오. 사천이 여섯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졌다는 소식은 들었소. 만약 검문산을 사 천당문이 주도해 없애버린다면 아마 사천은 여전히 당신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오. 만도화원주 "크크크크, 오지회! 내 씨를 말려 줄 것이다." 만도화원주는 붓을 내던지고 서찰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었다. 먹물에서 배 어 나온 물로 젖어있던 서찰은 곧 말랐다. 그는 서찰을 곧게 접은 뒤 팔 소 매에 갈무리했다. "초풍비, 네놈의 피를 보고 말 것이다. 네놈 뿐만이 아니라 네놈을 지지했 던 모든 놈들을 죽여 버릴 것이다." 털썩! 그는 침상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침상머리에 있는 노란 줄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부르셨습니까? 원주." 숨 한 번 몰아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나의 인형이 나타나 부복했다. 나타 난 자는 항시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 무영이라는 자였다. 무영은 어르신이 그에게 보낸 호위무사이기도 했지만 어르신의 말씀을 중간 에서 전하는 자이기도 했고 때때로 두뇌를 빌려주는 군사(軍師)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전신에 탁한 색을 띄우는 회색의 무복을 걸친 그는 허리에 황금색의 손잡이 가 달린 단검(短劍)을 차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 "예." 회의무복(灰衣武服)을 걸친 무영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항상 그러했는 지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이것을 사천으로 보내라." "알겠습니다." 무영은 만도화원주가 내미는 서찰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어르신에게 전하게. 이제 오지회를 잠재우기 위한 일보를 내디뎠다고 말이 야." "알겠습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벌써 육 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1 페이지: 1/29 자료번호: 273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1장-검문산에 부는 바람 "정말, 사천당문의 무인들이 검문산을 습격한다는 것이 사실이냐?" "그렇다니까요." 점소이 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전 주객을 잡고 대단한 소식이라도 들은 듯 떠들던 놈이 담붕비의 물 음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담붕비는 주먹을 쥐었다 다시 풀었다. 도우선과 담붕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당혹감이 스쳤다. 그들의 앞에는 진수성찬(珍羞盛饌)이 차려져 있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으나 순식간에 시장기가 사라졌다. 하루를 굶은 그들이었으나 코로 스 며드는 음식냄새가 폐부(肺腑)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봐, 점소이." "예. 손님. 무엇이든 주문하십시오." "이곳에서 검문산이 얼마나 되나?" "글쎄요. 잘 모르기는 하지만 걸어서는 잘 모르겠고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 면 갈 수 있을 겁니다." 점소이는 주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점소이의 모습은 곧 주방으로 사라졌고 담붕비는 벌떡하고 몸을 일으켰다. 도우선도 몸을 일으켜 밖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휙! "형님 같아 갑시다." 일어서기는 담붕비가 먼저 일어섰으나 동작은 도우선이 빨랐다. 또로로로―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은자 두 냥이 뒹굴고 있었다. 초풍비가 초란을 처음 만난 것은 둘이 은거하기 두 달 전이었다. 두 달만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할만큼 절실하기도 했다. 초란을 만나던 날은 비가 모질게도 왔었다. 초풍비는 태양하구에서 장강을 거쳐 금불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금불산에서는 그의 형제들이 오지회를 부흥(復興)시킨다 는 계획아래 거대한 공사를 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초란을 만났을 때는 한창 봄꽃이 만발하던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청해의 적석산에서 부지런히 말을 달린 그는 늦지 않게 태양루에 도착할 수 있었 다. 그가 중원을 떠나 청해에 있었던 이유는 육지도마 때문이었다. 당시 육지도 마와 도우선과는 사소한 마찰이 있었는데 육지도마가 암습으로 도우선에게 상처를 입히고 오지회를 피해 청해로 몸을 숨긴 상태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인다." 육지도마는 어디로 잠적(潛跡)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후일을 기약하고 동생들과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초풍비는 장강으로 나가기 위해 서둘러 선착장으로 나갔다.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유람선은 막 떠나려하고 있었다. 배를 오르는 발판 도 이미 치워진 뒤였고 배는 약 삼사 장을 육지에서 벗어난 후였다. 유람선은 세 개의 돛을 단 배였는데 이미 바람을 받아 팽팽하게 당겨져 있 어 잠깐 사이에도 장강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안됩니다. 배는 이미 떠났습니다." 선착장(船着場)을 지키는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노인은 배를 돌아오게 한 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니 다음 배를 타라고 극구 만류했다. '왠지 꼭 타야할 것 같다.'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자 두 닢을 던진 그는 갈대 입을 밟으며 도약(跳躍)했다. 겨우 배에 올라 탄 그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도약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도(安堵)했으 나 한 여인은 그가 나타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녀가 초란이었다. 장강은 너무도 넓어 마치 바다처럼 보였다. 그날 장강은 짙은 물안개에 쌓여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언뜻 보아서는 강 양안의 갈대밭과 나무가 우거진 산들이 육지라기보다는 바다의 섬으로 보였 다. 그가 경치를 구경하며 한 잔의 죽엽청(竹葉淸)을 마실 때 그녀와 눈이 마주 쳤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누구나 함부로 걸칠 수 없는 궁장을 걸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바람 한 점 맞지 않은 듯 보이는 해사한 얼굴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이마는 넓었고 궁형(弓形)으로 튼 머리는 인세(人世)에 보기 드문 아름다움 을 풍겼다. 산수화(山水畵)나 신선도(神仙圖)에서나 본 듯한 얼굴이 그녀가 지닌 얼굴이었다. 코는 오뚝해 태산준령(泰山峻嶺)을 닮았고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은 무저갱 (無低坑)처럼 가라앉아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시원하게 했다. 그것은 환상과도 같은 전율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야.' 초풍비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의 모든 여인이 몰려와도 그녀에게는 견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탄 배에는 도합 이십여 명의 유람객이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며 희희낙 락하고 있었다. 초란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 다. 당시 그녀는 전신에 평민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궁장을 걸치고 있었고 아리따운 용모로 인해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사람들의 눈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당황하는 눈치가 보여 초풍 비는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와! 강남일미(江南一美)가 어쩐 일로 사천의 태양하구에 다 나타난 거지?" "글쎄 소문에 의하면 그녀의 부친이 을목세가에 정략결혼(政略結婚)시킨다 는 소문이 있던데." "무슨 소리야. 을목세가의 단가주(段家主)는 벌써 두 명의 여인이 있다던데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강남일미가 첩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이 사람아.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강남일미는 모든 남자가 원하는 미 인 아닌가? 더구나 그녀의 집안은 예로부터 정략 결혼으로 중원의 상권을 잡았다는 가문이잖아." "그러면 중원상단(中原商團)이 그녀의 집이라는 사실이 틀림없나 보지." "내가 거짓말하는 것 보았어." 초풍비는 유람객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옆으로 돌려 초란을 바 라보았다. 그제야 초풍비는 초란이 지닌 진정한 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강남제일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녀는 십만 명을 모아도 눈에 뜨일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초풍비가 보았던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특히 서늘한 봉목(鳳目)이 초풍비의 눈을 끌었다. 천하를 돌며 무수한 여인 들을 보았고 추파를 보내는 여인도 보았지만 그토록 맑은 눈은 본적이 없는 초풍비였다. 덜컥― 초풍비는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었다. 혹시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심정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위축시켰다. '혹시 누가 내 추태를 본 건 아닐까!' 그는 자신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는 사실을 눈치 챌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눈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간혹 눈이 돌아가는 것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눈을 돌리다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은 운명(運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초풍비에게 다가온 것도 운명이라 해야 옳았다. 그녀는 느닷없이 다 가와 그렇게 말했다. "저를 보호해 주세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를 찾는 무인들이 나타났다. 두 대의 유엽선에 나누어 탄 무인들은 유람선에 배를 밀착시키고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멈추어라. 배를 세우지 않는다면 모두 죽인다." 나타난 자들은 무작정 배 위로 뛰어올라 초란을 끌고 가려고 했다. 초란은 그의 엉덩이 뒤에 몸을 숨기며 비 맞은 참새처럼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저들은 을목세가의 무인들이에요. 저를 데려다 을목세가 가주의 노리개로 만들려 하고 있어요." 그들은 다짜고짜 초풍비를 향해 검을 전개시켰다. 부득이 초풍비는 그들을 향해 자신의 무공을 시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는 곧 드러났다. 그녀를 찾아 배에 오른 을목세가의 무인들은 모두 그의 검 앞에 무너졌다. 무려 이십 명이나 되었던 을목세가의 무인들 중 살아남은 세 명의 무인은 언젠가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사라져 갔다. "당신은 누구죠?" 그제야 초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보호해준 초풍비에게 물었다. "난, 초풍비라 하오." "설마...... 그 유명한 오지회의 초풍비라는 말씀인가요? 그럴 리가?" "사실이오. 난 초풍비가 분명하오." "난 초풍비라는 사람이 늙은 자였는 줄 알았는데...... 이토록 젊다는 것을 누구도 믿지 못할 거예요." 초란의 눈이 반짝였다. 당시 천하를 울리는 오지회의 초풍비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자세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무림의 여인들에게는 선망(先望)의 대상이기 도 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초풍비는 수차에 걸친 무림행보(武林行步)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다. 때 로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었고 암중에 일을 처리하기도 했기에 그의 진면목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진면목(眞面目)을 아는 자는 그의 의형제들뿐이었다. "내 친구들은 모두 중원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세가의 며느리가 되었어요. 나도 별 수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난 이제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 을 것 같아요." 담백한(淡白)한 고백(告白)이었다. 그녀는 단 한순간에 그를 자신의 낭군으로 선택했다. 초풍비도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 동안 여인에게 무 신경했던 그였으나 그녀를 본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눈으로 들어오는 착각 을 느꼈다. '그래, 어쩌면 이 여인과 평생을 사는 것이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초풍비의 은거 결정은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조치였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녀가 은거를 원했다.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살아요." 초란은 매우 지친 듯했다. 그럴 것이 그녀는 을목세가의 추적을 피해 무려 두 달 동안 시비도 없이 혼 자 천하를 도는 중이었다. 심신(心身)이 지쳤던 그녀는 마음의 안식이 필요 했다. 더구나 초풍비는 자신이 꿈에 그리던 낭군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들은 중원상단으로 갔다. 당시의 상단주, 초란의 부친에게 둘의 결정을 알려주고 허락을 받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중원상단주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문전박대(門前薄待)가 그들 이 받은 전부였다. "차라리 잘되었어요." 초란은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냉정 하게 거부한 아버지에게 기댈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 그녀는 더욱 초풍비를 재촉했다. "어서 우리의 길을 가도록 해요. 이젠 사람이 보기도 싫어요. 당신과 단둘 이 살고 싶어요" 초풍비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한평생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아우들에게 오지회를 해산한다는 서찰을 보내고 은거를 하기 위해 작얼산으로 향했다. 아우들을 만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하는 것이 순리였으나 초란은 너무나 지쳐있었다. 아우들이 자신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한 초풍비였다. 어차피 강호의 소문은 빠르다. 자신들의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고 아우들은 가까운 시 일 내에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어쩐 일인지 그와 초란의 이야기는 강호 어디에서도 거 론되지 않았다. 그것은 을목세가와 중원상단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은거할 곳을 찾아 천하를 떠돌던 중 대량산(大凉山) 아래에서 복면 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다짜고짜 살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초풍비 뿐만이 아니라 초란까지도 죽이려는 기세였다. 여차하면 황천행 마차를 탈 순간이 었다. "정랑, 그들을 죽여버리세요. 살려두면 지긋지긋하게 쫓아 올 거예요."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적을 만나도 가능한 죽여야 하는 악인을 제외하고는 살인을 하지 않았던 초풍비도 부득이하게 살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초풍비의 이름이 강호에 퍼진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상대를 이기면 서도 가능한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에 더욱 유명했던 것이었다. 초풍비는 그녀의 말을 듣자 살기가 솟구쳐 단 십이 초식만에 그들을 모두 황천으로 보내고 말았다. 진정한 살인기예는 처음으로 시전한 것이었다. 그들이 모두 쓰러졌을 때, 갑자기 초란이 목을 놓아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터트렸다. 초풍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 다. "어쩌면 좋아요...... 이들은 아버지의 수족들과 막내 동생이어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리였다. 그들을 습격한 자들은 중원상단의 무인들이었고 초풍비가 죽인 자들 중에는 초란의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초풍비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해졌다. 처음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살인을 했건만 그것이 사랑하는 여인의 동생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세상은 너무도 가혹한 올가미를 그들 앞에 던 져놓고 있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을 굳 힌 초란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동생이 초풍비의 손에 죽었음에도 불구 하고 초란은 단호하게 말했다. "잘 되었군요. 동생은 어차피 배가 다른 형제였고, 그래서인지 나를 을목세 가에 보내려고 가장 주장하는 아이였어요. 혈육이 죽었다는 것에 죄책감이 가기는 하지만 슬프지는 않아요." 그녀의 내력은 복잡했다. 천하의 상권을 쥐고 흔드는 중원상단에도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은거지로 작얼산을 선택했다. 작얼산은 깊었다. 또한 너무나 외진 곳이라 찾아오는 자는 없었다. 중원상단의 무리들과 을목세가의 무인들이 그를 찾으려 한다는 소문은 들을 수 있었으나 그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초란이 사라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초풍비의 눈이 허공으로 향했다. 허공에는 새털구름 두서너 덩어리가 마치 봄나들이를 나가는 병아리들처럼 한가로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고 했다. 초풍비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던 것이, 그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는 어린 시절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일곱 살이 넘어서부터였다. 그 이전은 어찌된 일인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일곱 살은 천산(天山)이었다. "아이야. 이제 눈을 뜨려무나. 이제 네 상처가 모두 치유되었단다."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수염이 신선(神仙)처럼 자란 노인이 그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얼굴이 대추빛처럼 붉었으며 수염과 머리가 반백(半白)이었으나 피 부는 여인의 피부처럼 고운, 조금은 특이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깨어난 곳은 천산이었다. 노인은 첩첩이 쌓인 천산의 바위 틈에서 살고 있었다. 지상에서 수천 장을 올라 하늘과 맞닿은 천산의 봉우리 아래 바위로 쌓아진 틈바구니 아래에는 동굴이 있었다. 동굴은 깊어 수백 장의 깊이를 지니고 있었고 비스듬히 내려가 지하로 뻗은 동굴의 막다른 곳에는 뜨거운 물이 송송 솟아나고 있어 훈기(薰氣)가 넘쳤 다. "아이야, 나는 천산괴노(天山怪老)라 부른단다. 젊었을 때는 천산미랑(天山 美郞)이라 불렸지." 노인은 그렇게 자신을 알려주었다. 초풍비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자신이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 다. 만약 말을 하지 못했다면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는 냉철(冷徹)한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할아버지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천산괴노라고 자신을 밝힌 노인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지는 것을 그는 놓 치지 않았다. "잘 들어라. 네가 누구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는 네가 누구의 자손인지 네가 찾아야 할 것이다." 노인의 말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그는 겨우 일곱 살이었으며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 태였다. 노인의 이야기로는 기억상실(記憶喪失)이라 했다. 노인은 무엇이 어찌된 일인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곱 살의 나이로는 이해 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나는 청해호(靑海湖)를 건너 중원으로 들어오던 중이었다. 사부가 내게 해 결하라 하신 두 개의 일을 마치고 십이 년만에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던 중 이었지.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사방이 모래로 뒤덮인 사구(砂丘)에 너는 쓰러져 있었단다. 주위를 둘러보 았지만 너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 아마 너는 돌풍에 휘말려 날아온 것 같았다. 당시 너의 몸에는 귀하기 이를 데 없는 금라(金 )로 만든 옷이 걸쳐져 있었 고 목에는 하나의 반지가 걸려있었다. 반지는 너의 손에 들어가기가 너무 커서 목에 걸어준 듯 싶었다. 네가 입고 있는 옷의 여기저기에는 피가 묻어 있어 목에 걸린 반지와 생각 해 볼 때 아마 너의 부모는 너를 피신시키려 했던 듯 보였다. 너는 아마 어떤 충격에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듯 싶다. 너는 내가 청해를 건너 천산에 이를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곳에 이르러서야 너를 깨울 수 있었다. 너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부님이 물려주신 요상대법(療傷大法) 때 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이곳은 어디죠?" "이곳은 천산이다. 중원과는 제법 먼 곳이지 너의 말투로 보아 너는 중원의 사천지방 태생(胎生)일 것이다." 노인은 그에게 매우 자애로웠다. 초풍비는 노인이 설명해도 알 수 있는 것 은 많지 않았다. 말은 알아듣고 이해는 했지만 중원이 무엇인지 노인이 말하는 사천지방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는 어린 마음에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노인은 측은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무엇을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난 무인이란다." "무인이 뭐예요?" "신선 같은 것이지. 하늘을 날고 바람처럼 달릴 수 있으며 수십 명과 싸워 도 지지 않는 사람을 무인이라 한단다." 초풍비는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세상물정(世上物情)을 모르는 어린아이라 해도 노인의 말은 그의 상상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꿈같은 일이었다. "나도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노인은 친절하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노인이 가르쳐 주는 무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접어보지 않은 그였다. 강호에 출도를 하고 많은 겨룸이 있었던 결과 노인이 전수해준 무공이 정말 놀라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네 성(姓)이 무엇이더냐?" 노인이 물었을 때 초풍비는 막막했다. 천산에 정착한 지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렀고 그가 노인을 통해 얼마 정도 의 글을 깨우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좋다. 내 이름은 초비천(楚飛天)이라 한다. 내 성에 맞추어 이름을 짓는 것도 괜찮겠지?" "좋아요!" "그러면 너는 이제부터 초풍비다. 세상을 바람처럼 날아다니며 네 꿈을 펼 치라는 뜻으로 바람풍자(風)에 날 비자(飛)를 썼다. 맘에 드느냐?" 초풍비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초풍비는 자신의 이 름이 생기게 되었다. 초풍비가 노인과 살기 시작한 지 칠 년이 되던 해 노인은 노환(老患)으로 숨을 거두었다. 초풍비가 사막에서 구출되었던 당시 노인은 이미 백 살이 넘은 고령(高齡) 의 나이였기에 천산으로 돌아온 이후는 거의 거동을 하지 않았다. 일년에 한번 산을 내려가면 육 개월만에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그 것도 딱 두 번 뿐이었다. 노인은 모든 것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자신의 후계자(後繼者)로 천년간 구결로만 무공을 이어 익힌다는 무공을 물 려주었고 자신이 사용하던 부러진 검도 물려주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 의 목에 걸려 있었다고 하던 반지도 볼 수가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노인의 사문은 적궁(赤宮)이라 했다. 적궁은 소림과도 관계가 있다고는 했지만 노인은 어찌된 일인지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얽 매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적궁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풍비야." "예, 할아버지." "나는 너의 가문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었단다. 그런데 아무리 해 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반지가 네 가문의 내력이 분명한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구나. 네가 산을 내려가면 찾아보도록 하거라." 그렇게 반지는 초풍비의 손으로 넘어왔다. 노인은 그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기 전에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풍비야!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동굴에서 남아있는 무공을 대성(大成) 하기 전에는 이 동굴을 떠나서는 안 된다. 천하에 다시없는 절학(絶學)이니 반드시 모두 익혀야 한다." "예." 노인은 자신이 백 십 년간 살며 익혔던 무공을 모두 동굴에 남겼다. 자신이 깨달은 요결마저도 동굴의 벽에 남겨 초풍비가 익힐 수 있도록 했다. 노인이 죽고 난 뒤에도 초풍비는 노인의 유시를 따라 무공을 익히는데 전념 했다. 동굴 벽에 새겨진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단련함에 조금도 소홀히 하 지 않았다. 동굴이 지니고 있는 영험함도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동굴의 막다른 곳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물은 유황온천(硫黃溫泉)이었다. 온천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진기의 흐름을 빠르게 했으며 단전을 단련시키는데 있어 더없이 좋은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솟구치는 막다른 곳 주변에 자라는 이끼는 그의 식욕을 달래 주었고 그때마다 내공이 가일층 강해졌다. 그가 모르고 있었으나 영약이거나 내공을 증진시키는 약초가 분명했다. 만약 무인들이 안다면 살육이 벌어질 만큼 진기하고 영험한 것일 테지만 그 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다. 할아버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게요. 후계자를 데리고 말이에요." 초풍비는 천산을 떠났다. 천산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던 바로 그날, 사천을 지나기 위해 검문산을 지나 던 날에 초풍비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일단의 무리를 만났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사무기와 혁천련이었다. 그후 둘은 초풍비의 아 우가 되었다. 수십 번의 사천지방에 대한 면밀한 탐사(探査)가 이루어졌지만 그가 지니고 있었다는 반지의 내력을 알아 낼 수는 없었다.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은 문제 가 아니었으나 아무나 붙잡고 반지의 내력을 물어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 다. 그토록 찾아 헤맸건만 가문과 태생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노인은 긴 회랑(回廊)이 끝나는 방에 앉아 있었다. 침실과 집무실(執務室) 을 겸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정실은 어두컴컴했다. 밤인지 낮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정실에는 군데군데 향촉이 몸을 태우고 있어서인지 어두컴컴한 가운데 에서도 그리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출렁! 노인이 몸을 일으키자 침상이 심하게 몸을 비틀었다. "이제 종국(終局)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오래도록 이끌어오던 은원이 종결되는 건가?"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단정히 다듬고 소요건(逍遙巾) 을 쓴 모습이 보기 드문 유현(儒賢)한 모습을 보여주는 노인이었다. 어림잡 아 칠순(七旬)은 넘어 보였으나 팔순(八旬)에는 이르지 않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전신에 날아갈 것 같은 학창의(鶴 衣)를 입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 라 허리에는 매화가 정성스레 수놓아진 요대를 매고 있어 마치 황궁의 학사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좋은 일이지." 노인이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노인의 수염은 길게 자라 배꼽에 이르고 있었다. 짙은 흑염(黑髥)과 빛을 발하는 백염(白髥)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존경이 우러러 나올 것 같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걸음을 옮겨 침상에서 벗어났다. 침상과 잇닿은 넓은 정실의 귀퉁이에는 원탁이 두 개나 놓여있었고 야트막 한 서가(書架)가 벽을 가리고 있었다. "이제 습(濕)한 기운은 싫군." 노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과연 노인의 말대로 정실에는 음습한 습기가 맴돌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가 머무는 곳이 지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벽에 단 하나의 창도 없다 는 것이 지하라는 것을 더욱 여실하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노인이 있는 곳이 바위를 깎아 만든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털썩! 노인은 몸을 움직여 정실의 모퉁이 원탁과 서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주저 앉았다. 그곳에는 곰의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털이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놓 여있었다. 흔히 태사의라 불리는 귀한 의자였다. "후! 긴 세월이었다. 초란이 현문세가(顯門世家)의 살아있는 후손을 찾아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잊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노인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바위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울퉁불퉁한 바위 면이 그대로 드 러났고 바위틈에 섞인 작은 유리질(琉璃質)이 향촉을 받아 반짝였다. 천장에는 야명주(夜明珠)라 불리는 구슬이 달려있었다. 야명주는 흔히 묘안 석(猫眼石)이라고도 불렸는데 밤에 빛을 내는 고양이의 눈과 같다는 뜻이었 다. 야명주는 스스로 빛을 내기도 했지만 향촉의 불빛을 반사시켜 더욱 밝은 빛 을 내고 있었다. 어두컴컴하면서도 어둡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야명주에서 뿜어 지는 빛 때문인 것 같았다. 노인은 한참동안 야명주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운명(運命)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얼굴에 인상이 찌푸려지자 마치 천하가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노인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얼 굴이었다. 노인은 손가락을 한시도 그냥 두지 않았다. 그것이 노인이 불안하다는 심정 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노인은 다시 얼굴을 숙였다. 노인의 얼굴이 닿은 곳에는 무수한 종이들이 널려있었다. 종이는 지질이 거 친 당지(唐紙)도 있었고 비교적 보드라운 원지(元紙)도 있었다. 한결같은 공통점이라면 종이는 손바닥 넓이에 불과하다는 것과 구겨져 있다 는 사실이었다. 다른 특징을 보자면 종이의 하단(下端)에 그려진 문양이었다. 문양은 간단 했다. 말이 앞발을 들고 투레질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눈에 보 아도 한번 찍은 먹물로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한곳 끊어진 곳 이 없었다. ― 무영 서찰에는 한결같이 '무영'이라는 글씨가 눈을 파고들 듯 굵은 필체로 쓰여 져 있었다. 종이에 쓰여진 글씨들이 문인필(文人筆)로 쓴 가는 글씨인데 비 해 '무영'이라는 글씨는 너무 컸다. 종이의 모습으로 보아 구겨져 있고 서명(書名)이 남겨졌다는 것은 그것이 서찰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더구나 심하게 구겨진 것으로 보아서 는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져 날아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노인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토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노인은 누구인가를 기 다리는 것 같았다. 드르르르르― 마치 돌이 가볍게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하나의 인형이 들어선 것은 노인의 눈에 무료함이 스미는 시간과 겹치고 있었다. "단주!" 나타난 자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전신에 짙은 옥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 고 등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비스듬히 미끄러매고 있었다. 노인은 눈을 들었다. 그러나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눈을 들 어 나타난 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타난 자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환(幻), 다녀왔느냐?" 사내는 환이라 불리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름인지 그의 명호(名號)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타난 자가 중년인이라는 사실과 그의 태도로 보아 노인을 매우 존경한다는 사실뿐이었 다. 환은 다가서자 노인의 앞에 공손한 자세로 시립했다. 노인이 묻지 않는다면 어떤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물어진 입이 대변하는 듯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그가 있는 곳은 석면입니다. 석면의 허름한 객잔 부근에서 오행천사(五行 天賜)의 습격을 받았으나 그는 건재합니다." "그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검문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만리당혜에게 은근히 소문이 들어가도록 했으니 그가 검문산으로 가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잘했다." 노인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환은 노인의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몸을 움직여 노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환은 빠르게 원탁에 놓인 서찰들을 훑어보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원탁에 놓인 모든 서찰들을 읽은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단주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을목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오지회를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환은 자신의 의견(意見)을 말하지 않았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 로 보아 환이라는 중년인은 단 한번도 자신의 의견을 말한 적이 없는 것 같 았다. 노인은 가늘게 웃었다. 자세히 보아야 입가에 감도는 웃음기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흠칫! 환은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노인이 그러한 표정을 지을 때가 가장 무섭다는 것을 환은 오래 전부터 알 고 있었다. 노인이 그러한 표정을 지었을 때는 반드시 일이 터졌고 그 결과 는 늘 세인(世人)들의 이목(耳目)을 끌었다. 노인은 단 한번도 자신의 실체를 중원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가 지닌 힘 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그가 지닌 힘을 알고 있는 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모품이야." 노인은 냉정하게 말했다. 환은 전혀 놀라지 않고 무감각한 모습으로 노인을 주시했다. 노인의 말투에도 이미 숙달이 되어 있는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노인이 가슴을 폈다. 환은 긴장한 모습으로 손을 공손(恭遜)하게 모았다. 노인의 동작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환은 오랫동안 노인의 주변 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초풍비의 주변을 비우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이미 다른 세 명의 환이 초풍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초풍비는 환이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습니다." 세명의 환?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세 명이나 더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환 이라는 말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 아마도 어떤 단체를 지칭(指稱)하거 나 어떤 목적을 가진 자들을 통칭(通稱)하는 이름 같았다. "그대들을 믿는다." 노인은 낮은 음성으로 환에게 치하(致賀)를 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모 든 것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환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인 은 그가 움직이든 앉아있든 전연 상관하지 않으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 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2 페이지: 1/29 자료번호: 274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2장-검문산에도 달은 뜬다1 검문산의 남쪽은 관도와 인접한 곳으로 그 동안 쌍룡채의 산적들이 자주 출 몰하던 곳이었다. 당가타에서 성도를 연결하는 관도는 제법 넓기는 했으나 구절양장(九折羊 腸)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이 무려 오십 리나 펼쳐져 있고 검문산의 허리를 돌아야 하기 때문에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했고 산에 오르면 울울창창(鬱 鬱蒼蒼)한 나무들로 한 치 앞을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사사사사― 슥! 정확하게 삼십이 명의 그림자가 절벽 위로 솟아올랐다. 절벽에는 쇠로 만든 사다리가 걸려있었고 아직까지도 사다리를 오르는 무인들이 보였다. 사다리를 오르는 무인들까지 모두 합하면 오십 명이 조금 넘을 것 같은 숫 자였다. "자, 빨리 서두르자." 맨 앞에선 노인은 얼굴이 차분해 보였으나 말은 바쁘게 울려나왔다. 얼굴이 대추빛처럼 붉고 수염이 촉장(蜀將) 관우(關羽)처럼 길게 자란 노인이었다. 머리에는 문사건을 질끈 동여매었으며 손에는 배가 부른 한 자루의곡도(曲 刀)가 들려있었다. 흔히 유엽도라 부르는 것으로 곡도는 제법 무거워 보였 는데 노인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들고 있는 듯 보였다. 적어도 이십 근은 넘어 보였고 손잡이의 고리에는 붉은 천이 달려있었다. "방 어르신! 너무 서두르다가는 매복(埋伏)에 걸릴 수도 있으니 사방을 살 핀 후에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을 건 자는 삼십대 후반의 대한이었다. 단정하게 보이는 중년인은 무인이라기보다는 문인으로 보였고 수중에는 무 기도 보이지 않았다. 걸친 옷도 단아한 문사복이었다. "하하하, 천리통문(千里通文) 당하군(唐河君)!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 천리 도(擅離刀) 방수민(方需閔)이 언제 실수하는 것을 보았는가?" 노인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는 소리로 호통에 가까운 장담을 토했다. 사실 노인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천리도 방수민이라 불렸다. 사천당문의 방계가족(傍系家族) 중에는 당씨(唐氏)와 성이 다른 일곱 개의 문파가 있었다. 그들은 당문과 보조를 맞추며 살아가는 문파들로 사천당문의 외척들이거나 협조세력들이었다. 그들의 힘만 모아도 일파를 이루고 남을 힘이었다. 천리도 방수민이 이끌고 있는 문파만 해도 사천당문의 외척으로 알려진 방 가장(方家莊)이었다. 방가장은 당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바, 당수민 이 당문가주 당협의 처조카뻘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사용하는 이십 근 짜리 곡도는 당문의 십팔도법(十八刀法)과 합 해져서 사천제일이라 부르기도 했다. 방수민은 검문산을 공격하는 네 개의 지로 중 남쪽을 택했다. 당문의 회의가 끝난 뒤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검문산을 네 곳에서 공격하기 로 했다. 동서남북의 네 곳으로 일제히 공격해 검문산의 산적들을 교란(攪亂)시키며 동시에 일제히 쓸어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중원에 산재한 많은 산들은 북쪽이 비탈이 심했다. 유독 몇 개의 산들이 자 연의 법칙 같은 현상을 무시하고 있었다. 검문산도 그 중의 하나였다. 검문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마치 지붕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산이었 다. 남쪽은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경사가 심했다. 북쪽은 완만했으나 돌로 이 루어져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남쪽을 맡겠소." 네 명의 적임자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을 때, 방수민은 스스로 남쪽을 책임 지겠노라고 말했다. 그의 뒤로는 사천당문의 후원을 받고있는 군소문파와 사천당문의 일부 군웅 들이 모여 오십 명이 넘었다. 네 개의 지로(支路)는 각각 오십여 명으로 하 나의 돌격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당하군은 사천당문의 문인각 소속으로 그의 군사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엄 격히 따지면 그의 곁에 있는 당하군은 방수민의 형제 뻘이 되는 항렬이었 다. "이곳은 나무들이 우거져있어 사주를 파악하기가 힘이 드는 곳입니다. 더구 나 경사가 심해 열 발자국 앞을 파악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상관없어. 이곳은 함부로 암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네." 당하군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수민은 찬동(贊同)할 수 없 었다. 먼저 진격해 놈들을 산산이 쓸어버리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나머지 세 개의 진로를 선택한 무인들에게 공을 빼앗기기는 싫었다. "길이 아예 없군요?" "글쎄! 쌍룡채 놈들이 가끔 출몰(出沒)하는 지역인 것으로 보아서는 길이 있을 만도 한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 시작된 그들이 행동은 생각보다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지난 밤 흠뻑 내린 가을비로 인해 돌은 미끄러웠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 깃에 물기가 젖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도 걸음을 더디게 했다. 더구나 물기 젖은 땅바닥과 나뭇잎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는 불과 열 발 자국을 식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부득이하게 그들은 일렬(一列)로 늘어서 서 서로의 발뒤꿈치를 바라보며 몸을 전진 시켜야 했다. '제길...... 생각보다 쉽지는 않군.' 방수민은 자신의 생각이 조금은 빗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 같아서는 불 과 한 시진이면 산의 정상에 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검문산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깊었다. 심한 곳은 무릎까지 빠지는 낙엽으로 걸음이 불편했고 빼곡한 나무가 경신 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를 따르는 오십여 명의 무인들도 지닌 바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고 헉헉거 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 시진이 조금 넘은 시간이 되자 어슴푸레한 안개 사이로 햇빛이 보였다. 완벽하게 햇빛이 보이려면 또 다시 두 시진은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였다. 바람에 따라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밀리는 안개 사이에서 붉게 보이는 빛이 태양인가 싶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산의 중턱은 넘어선 것 같은데......" "그럴 겁니다." "얼마나 가야 정상일까?" "한 시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놈들이 곧 나타나겠지요." 방수민의 말에 당하군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는 자 신이 없었다. 비록 검문산이 가까이 있어도 올라 본 자는 많지 않았다. 과거에는 검문산이 요충지(要衝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으나 관도가 열리고 요충지가 된 지금에는 쌍룡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소외된 지역이었다. 십 년 전부터, 정확하게 말하면 십 수년 전부터 검문산은 사천에서도 기피 되는 지역 중 한곳이었다. 무영환검이 초풍비를 따라나서기 전에도 검문산에는 도적들이 자주 출몰했 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래 관도가 정비되고 관병들의 이동로가 된 뒤로부터 검문산은 중요한 요 충지가 되었다. 사천을 분할한 여섯 문파의 이해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검문 산은 여전히 세인들의 눈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었다. "잠깐 쉬었다 가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금 쉬었다 힘을 비축(備蓄)해서 일시에 올려치도록 하시지요." 지친 것은 아니지만 방수민은 검은 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그는 손을 들어올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두 반각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쉬는 동안 무기를 정렬하고 힘을 비축하라." 그의 손이 안개 때문에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 그는 정확하게 명령 을 하달했다. 슥! 사사삿― 방수민의 주위로 빠르게 달려온 무인들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지친 모습들이 역력했다. 산길이 상상했던 것 보다 가파른데다 사람의 키를 수배나 넘기는 나무들이 가로막고 있어 산을 오르는데도 적잖은 내력이 소모되었다. "휴!" "멀리서 보는 것 보다 몇 배는 힘이 드는걸......" 주변에 주저앉은 무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놈들...... 이까짓 산을 올라가는데 뭐가 힘들다고 그토록 헉헉대 는지 모르겠군.' 방수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반각 동안만 휴식을 취한다. 반각 후 출발한다." 딱!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좌측 나무 숲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 다.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 사람!" 당하군의 음성이 조심스럽게 울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쉬이이이― 그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의 그림자가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휘―이이―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방수민이 빠르게 덮쳐가며 자신의 곡 도를 무지막지하게 흔드는 것 같았다. 콰드드드드― 안개 속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한아름이나 되는 나무들이 빽빽한 산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요란한 소리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무가 잘리어져 무너지는 소리였다. "으―아아악―" 비명은 나무가 쓰러지기도 전에 들렸다. 비명소리는 무인들이 모여 앉은 곳에서 들렸고 비명이 터졌을 때에는 허공 에서 하나의 목이 떨어져 굴렀다. 조금 전까지 무인들 틈에 섞여있던 사천 당문의 제자였다. "피하라. 암습이다." 파파파팟! 경악성이 들리고 모여 앉아있던 무인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누가 당문의 제 자를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챙! 차차창! 일단의 무인들이 일제히 병기를 뽑았다. 그들은 안개 속에서 서로를 노려보 았다.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하며 갑자기 공기가 냉랭(冷冷)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오십 명의 무인들은 각기 다른 문파에서 모아 급조(急造)된 추살대(追殺隊) 였다. 서로간에 믿음이 있을 수 없었다. 남다른 것이 있다면 사천에 산재한 각파에서 무공이 높다는 자들일 뿐이었다. 다만 사천당문의 깃발 아래 모였다는 것 외에는 유대감(紐帶感)이 약할 수 도 있는 무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스스슷― 진한 혈향을 뿌리며 안개가 흘렀다. 오십 명이 흩어졌으나, 눈에 보이는 자 는 많지 않았다.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마라." "조심해라. 우리들 중에 간첩(間諜)이 있다." 갑자기 무인들의 행동이 위축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목이 잘린 사 천당문의 제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번뜩! "크아아아―" 허공에서 빛의 무리가 쪼개졌다고 느껴진 순간 병기를 세우고 사방을 둘러 보던 사천당문의 제자가 가슴을 부여안으며 무너졌다. 가슴이 벌어져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의 눈은 불신(不信)으로 가득 차 있 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눈동자에 실려있었으나 눈은 곧 회색으로 퇴색해 버렸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제자는 흉수가 누구인지 알려주지도 못했다. "저쪽이다." "놈은 중앙에 있다. 누구냐?" 서로 소리를 내질렀으나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움직이게 된다면 동료들의 병기에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누구도 섣불 리 움직이기가 만만치 않았다. 쉬―이―이―익― 허공으로 하나의 조그만 물체가 솟구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팟! 허공으로 솟구친 물체는 허공에서 수십 개의 조각으로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어져 쏘아갔다. 수십 개의 철편(鐵片)은 머리 위에 거친 살기를 뿌렸다. "잔인한 놈이다." "방어막을 구축하라." 그제야 자신이 조호이산지계(調虎移山之計)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방수 민이 신속하게 몸을 되돌려 돌아왔으나 이미 모든 것이 꼬여있었다. 만약 그가 남아있었다면 이토록 우왕좌왕하며 허둥거리지는 않았을 것이지 만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마냥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호통이 떨어졌어도 무인들은 간격을 좁히거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 았다. 움직이면 누군가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은 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 다. "어떤 놈이냐? 나서라." 방수민이 호통을 내질렀으나 움직임은 없었다. '아차, 놈들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우리들 중 간세가 끼어있다면 나도 언제 누구에게 당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주르르르― 방수민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최악의 순간이 다가와 있었 다. '어떡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서서히 시간이 흘렀다. 무인들은 그를 바 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대책이 없다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우게 될 겁니다." 당하군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방수민은 움찔하며 몸을 경직시켰다. 지금 상황에서는 설사 당하군이라 해 도 믿을 구석이 없었다. 친구를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끄덕끄덕! 방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으로서는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작정 돌격을 감행하다가 는 간세에 의해 죽을 것이고 그렇다고 마냥 간세를 잡을 수도 없었다. 간세를 잡으려 해도 지금으로서는 동정호에 빠진 바늘 찾기 식이어서 막막 하기만 했다. "모두 서로의 간격을 넓혀라. 그 후에 철수한다."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스스스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인들은 서로 간격을 넓혔다. 안개 속이라 모든 것 이 불분명하지만 다른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제기랄...... 이게 내 꼴이라니.......' "철수한다." 한소리 거친 호통을 내지른 방수민이 먼저 몸을 날려 산비탈을 내려갔다. 그의 뒤를 이어 당하군이 신속하게 몸을 날렸다. 그도 의심이 가득한 눈으 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도 방수민의 삼 장 뒤에서 뒤따랐다. 더 이상 접근하면 설사 그라고 해도 방수민의 곡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무심결에 간격을 넓히는 것이 다. "크아아악―" 다시 한 번의 비명이 터졌다. 모두들 몸을 움찔거리며 떨었으나 감히 흉수를 찾아 죽일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검이라도 잘못 휘두르는 날에는 자신이 흉수로 몰릴 수 있다 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슈슈슛― 점차 간격을 벌리며 무인들은 산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 * * 딱― 딱딱― 두 번의 마찰음이 일었다. 첫 번 마찰음은 한 번의 소리였고 두번째는 두 번의 소리였다. 어디서 들리 는지 파악하기는 힘이 들었다. 휘스스스스― 바람이 불었으나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보였다. 부스럭― 낙엽이 들추어지며 하나의 인형이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손에는 예리한 장 검이 들려있었는데 전신에는 습기 찬 낙엽이 붙어있었다. 짐승의 가죽을 잇대어 만든 옷에도 축축한 낙엽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낙엽을 뒤집어쓰고 있는지 알만 했다. "어이, 노삼(盧三)! 그만 나오게." "모두 갔나." "그럼, 놈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해서 사라졌네." 부스스스―부스럭― 낙엽이 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나의 인형이 낙엽더미를 손으로 밀며 나 타났다. 그도 전신에 낙엽을 붙이고 있었다. 손에는 날카로운 직배도(直拜 刀)가 들려있었다. 전신에는 역시 똑같은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옷과 머리 에도 낙엽이 묻어있었다. "후후후, 놈들이 혼비백산했으니 우리 임무는 완수한 거지." "물론이지. 당분간 놈들은 간세를 찾기 위해 한참동안 우리를 찾지 못할 거 야."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다가가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조금 전 방수민 이 주저앉았던 바위였다. "후후, 부두령의 예측이 정확한데...... 놈들은 결국 있지도 않은 내부의 적을 찾으려고 심력(心力)을 낭비하겠지." "그럴 거야. 그나저나 반대쪽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는 걸!" "그래, 어서 그리로 가보자고." 두 사내는 곧 엉덩이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스스스스―슷― 휘이―이―이잉! 일단의 무리가 검문산의 북벽(北壁)을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집채만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는 했으나 고수들로 구성된 듯 그들에 게는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삼 장씩을 솟구치는 그들의 발 아래 바위들은 조약돌처럼 뒤로 밀 려갔다. 무리들의 몸에서는 힘이 넘치는 듯 은은하면서도 강한 강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희미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박살낼 듯한 살기가 빗살처럼 뻗쳐올랐 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자욱한 사람의 그림자만 남았다. 사사삿―- 휘―휘익! 가지각색의 복장을 갖춘 그들은 사천당문의 지휘아래 명을 따르는 무리들이 었다. 사천의 군소방파 중 힘을 지닌 하나의 문파로 이루어진 일단의 무리는 이미 훤히 알고 있는 검문산의 지형을 따라 은밀하게 몸을 솟구치고 있었다. 빠르게 몸을 날리는 일단의 무리들 앞에는 머리가 훌떡 벗겨진 독두노인(禿 頭老人)이 다른 누구보다 가볍게 신형을 움직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까마득히 몸을 날리는 무인들이 보였다. 어림잡아 오십 명은 넘 어 보이는 무인들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눈에 흡족한 웃음을 띄었다. 표정과는 달리 그가 뱉어내는 소리는 이빨 시린 소리였다. "제길...... 칠십 년 동안 살아온 사천에서 미꾸라지를 잡아야 하다니..... 망할 놈들! 아주 잘근잘근 씹어 뼈만 확 뱉어주고 말 테다." 말을 하는 노인의 몸에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강기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 왔다. 강기는 살기였고 곁에 누가 살기에 다가오기라도 한다면 핏물로 녹아 내릴 것 같았다. "후후후, 우리 사천만도가(四川彎刀家)가 나선 이상 네놈들은 개밥이 될 거 다. 그 동안 소문파라고 경시(輕視)당했지만 이번에 놈들을 피작살 내고 사 천무림에 우뚝 서게 될 거다." 그는 일갈을 뿌리며 신속하게 몸을 허공으로 상승시켰다. 사천만도가! 수백 개로 나뉘어진 사천의 무를 숭상하는 무리들 중에 일개 가문으로 이루 어진 문파로는 사천당문 다음으로 거대한 문파의 이름이었다. 그 동안 사천의 가문으로 이름을 크게 얻지 못한 것은 사천만도가가 사천당 문에서 갈라진 문파인 이유도 있으나 그 동안은 숨겨진 문파였던 이유였다. 그들은 백 삼십 년 전 사천당문에서 분가(分家)를 이루었으나 강호 활동을 하지는 않았었다. 사천당문이 자랑하는 암기 중 일부는 사천만도가가 만든 것이기도 했다. 사삿! 휘―이―익! 사천만도가의 오십 문인은 더없이 신속한 신법으로 노인의 뒤를 따라 몸을 솟구쳤다. "후후후...... 산적 놈들! 나, 만도패신(彎刀覇神)이 도착하면 모두 죽었 다고 복창하고 있어라." 만도패신 당사복(唐嗣 )! 오늘의 사천만도가를 일구어낸 인물이었다. 사천만도가가 만들어진 지 어언 육 대째, 그의 선대 조상들도 끊임없이 노 력을 했지만 지금의 성세(成勢)는 분명 그가 만든 것이었다. 그가 가주가 된 이래 사천만도가는 열 배 이상 강해졌고 가문의 무인들도 이 백 명으로 늘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오십 인은 그가 자랑하는 만도대 (彎刀隊)였다. 사천당문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기는 하나 그들은 암기나 독을 중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과 도를 숭상했고 당사복만 하더라도 등에는 한 자루의 만도를 걸치고 다녔다. "멈추어라." 사사사―팟! 휘리리릭―처척! 그의 오른손이 올라가자 뒤를 따르던 오십여 인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며 그 의 뒤에 도열했다. 그들의 경신법은 너무도 유연해 바닥에 착지하는 소리도 신경을 써야 겨우 들릴 것 같았다. 당사복은 눈을 들어 앞을 쳐다보았다. 북벽에서 가장 험난한 곳을 지난 그들의 앞에는 깎아지른 암벽 사이로 난 조그만 통로가 보였다. 두 개의 바위가 쩍 갈라진 사이로 난 길은 두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양쪽에 보이는 절벽은 사람이 감히 솟구칠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제길...... 호구관(虎口關)이로군" 그가 가장 우려하는 곳이 나타났다. 사천의 지형은 거의 모두 그의 머리 속에 그려져 있는 셈이었다. 검문산의 지형도 그의 이목을 떠나지 못했다. 더구나 당가타는 검문산에서 멀지 않았 고 그의 가문이 있는 사천만도가도 가까웠다. 그가 아는 검문산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바로 호구관이었다. 호랑이의 입처 럼 생겼다해서 지어진 호구관이라는 지명은 옛날부터 검문산의 북벽에서는 가장 험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기도 했다. 호구관의 양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약 사오백 장이나 길게 이어졌다. 더구나 사시사철 칙칙하게 끼어있는 안개가 보는 이로 하여 질리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더구나 절벽 위에는 떡시루를 포갠 듯 차곡차곡 쌓여있는 바위는 그야말로 아차 하는 느낌이 들었다. "놈들이 우리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좋으련만......" "물론입니다. 놈들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겁니다." 뒤를 따르던 총관(總管) 황보삼(黃寶三)이 거들었다. 눈이 뱀 눈처럼 찢어진 그는 유난히도 날카로운 눈썰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목귀뇌(蛇目鬼腦)라 불리기도 하는 황보삼은 사천만보가의 모든 계략을 집행하는 지략가이기도 해서 이번 검문산에 동행하게 되었다. "기분 나쁜 곳이니 서둘러 돌파하자." "아닙니다. 조금만 더 동태(動態)를 살피도록 하시지요." "우리가 다른 쪽으로 해서 올라가는 세 개 지로보다 늦으면 안돼! 빨리 판 단하도록 하게." "예." 대답을 한 황보삼은 빠른 걸음으로 호구관으로 다가갔다. 칙칙한 안개가 그 의 몸을 휘감았지만 한참을 서성거려도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황보삼은 신형을 전진시켜 호구관을 지나 맞은편으로 나갔다. 보이는 것은 여전히 안개뿐, 안개를 벗어나도 역시 눈에 띄는 것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 다. "멍청한 놈들이로구나. 나 같으면 이곳에 열 명만 배치시켜도 모든 것이 달 라질텐데......"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안개를 지나 호구관을 거슬렀다. 처음 들어갔던 곳이 나타나자 황보관은 빙그레 웃었다. 모두는 그의 웃음을 볼 수 있었다. 황보삼은 안개를 벗어나 협곡의 입구에서 손을 들었다. "기분 나쁜 곳이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자." "예." 화르르르르― 당사복의 몸이 빗살같이 쏘아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십여 명의 무인 들도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서두른다 해도 한계는 있었다. 협곡이 너무도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천만도가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만도대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협 곡의 중앙에 이르렀다. 불과 숨 몇 번 들이킬 시간이면 협곡을 빠져나갈 수가 있는 위치에 이르렀 다. 멀지 않은 곳에 희미하지만 안개 속에서도 확연한 입구가 보였다. "서둘러라. 입구가 보인다." "예." "달려라. 거의 다 온 모양이다." 다시 힘을 낸 무인들의 발걸음은 단숨에 십 장을 건너뛸 듯 용기가 넘쳤다. 그때였다. 쾅―콰드드드...... 호구관을 일시에 쪼갤 것 같은 폭발음이 들리며 자욱하고 메케한 냄새가 그 들의 코로 스며들었다. 우르르르르―- 협곡의 양면이 심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바닥이 토악질을 하듯 울렁거렸 다. 급히 달려가던 무인들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렸다. "엇! 뭐냐?" "하늘...... 하늘이다." 비명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무인들은 얼굴을 하얗게 탈색시켰다. 집채 만한 바위들이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 속에 쌓여있다 떨어져 내리는 바위를 보았으니...... 그들이 바위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그들의 머리 삼 장 위에 바위가 다가와 있었다. 피하기도 전에 바위는 이미 코앞에 다가들었다. 몸을 솟구치기도 어려웠다. 콰―드드드― 콰―쾅! 전후좌우(前後左右)에서 들리는 바위의 굉음은 그들 모두의 혼을 앗아가 버 리기에 충분했다. 들려오는 굉음이 이미 그들의 말문을 닫게 만들었는지라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없었다. "헉! 굉천뢰...... 놈들이!" 당사복은 가래가 끓는 듯한 신음을 불어내었다. 그는 너무도 놀라 분노조차 도 터트리지 못했다. 이미 황보삼이 점검했기에 철저하게 믿었던 당사복이 었다. 닥쳐온 현실은 그가 생각하기 싫었던 괴변이었다. 너무나 흔한 공격법이었다. 협곡(峽谷)에 폭약을 매설해 폭파하거나 돌을 떨어뜨리는 공격법은 이미 흔 한 공격법이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간과(看過)한 점도 있었다. "크아아악―!" "큭!" 너무도 졸지에 당한 이변이었기에 미처 피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늘을 쪼개고 남을 용기와 살기를 지닌 그들이건만 피할 도리가 없었다. 마른하늘에 떨어지는 불벼락 같은 변고(變故)에 그들은 우왕좌왕 허둥대다 그대로 바위에 깔리는 형국이었다. 만도대는 너나 할 것 없이 바위에 깔려 사지가 피떡이 되어 사방으로 퉁겨 졌다. "으으으......!" "피...... 피해야 돼. 으악!" 각양각색의 비명....... 비명들....... 그리고 피어오르는 피 분수와 자욱 한 흙먼지들. 웬만한 집채의 수배나 되는 암반의 공세는 인간의 피를 마시는 흉물스러운 악귀처럼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그들을 덮쳐들었다. 죽어 넘어진 시체 위에 바위가 쌓였다. 요행히도 바위를 피한 자들은 바위 위로 몸을 날려 올라섰지만 뒤따라 내려온 바위에 마구 짓이겨졌다. 좁은 계곡은 순식간에 인간도살장(人間屠殺場)으로 변해 버렸다. 절벽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데에는 아무리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위에서만 떨어지는 바위라면 어찌해볼 도리는 있었다. 협곡이 좁아 큰 바위가 떨어지면 걸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벽 이 통째로 무너지는 바에는 어찌 대비할 방법이 없었다. "괘씸한 놈들...... 기다리고 있었구나." 당사복은 손으로 장력을 뿜어내며 덮쳐 드는 바위를 피했다. 그러나 그도 무한정으로 피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설사 한두 개의 바위를 경력으로 부수었다고 하더라도 뒤이어 떨어지는 암 반을 부수기는 어려웠고 피할 곳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뛰어라. 앞과 뒤로 뛰어 협곡을 벗어나라." 분노의 함성을 토한 당사복은 번개같은 신법으로 전면으로 튀어나갔다. 바 위가 앞을 가로막았고 부하들의 시신이 깔려있었지만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 다. 수―이이익― 쾅! 그가 지나간 자리위로 바위가 덮치며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불꽃을 만들어 내었다. "크아악!" 당사복은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뒤돌아 볼 시간적 여유가 없 었다. 돌아보다가는 자신이 짓이겨 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사복의 몸이 앞으로 전진하자 일정한 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바위가 떨 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제외한 누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펑! 퍼퍼퍼―펑! 바위의 세례가 멈추는 곳까지 왔나 싶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가죽 북 두드 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은 오색의 가루였다. "억! 도......독이다." 당사복을 따르던 황보삼이 눈치를 채고 일갈을 터트렸으나 곧 스르르 무너 지며 석벽에 몸을 기대었다. 당사복은 급히 숨을 멈추었으나 완벽하지는 않 았다. 팅― 머리 속에서 칠현금의 줄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이 느껴지더니 몸이 심히 불 안정해졌다. 그는 급히 품을 뒤져 은으로 싸여진 둥근 환을 삼켰다.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피독단(避毒丹)이었다. "으...... 괘씸한 놈들...... 감히 나에게 감히 독공을 펼치다니...... " 몸을 일으키고 몸을 점검한 당사복은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달려가 황보삼의 옷깃을 잡았다. "총관! 총관! 정신을 차려라." 당사복은 한참을 외치던 끝에 황보삼의 옷깃을 놓았다. 이미 싸늘하게 시체 가 되어버린 황보삼의 몸이 무너졌다. 얼굴은 이미 검은 색으로 변했으며 입술과 코는 녹아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한번만 더 숨을 쉬었다면 나도 이미 총관처럼 시체가 되어 버렸을 거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피독단을 먹기는 했으나 몸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가 마신 약간 의 독기도 그의 정신을 혼미(昏迷)하게 만들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무슨 독이기에...... 이리도 강한가?" 화르르르르― 당사복의 의복중 일부가 녹아 사라졌다. 신체에만 닿으면 바로 녹아버리는 독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했군. 이곳에 독의 대가들이 있는 것을 보니 녹록치 않겠어. 감히 사천의 하늘에서 독을 쓰다니...... 놈들을 죽이겠다. 슈―수욱! 당사복은 완전히 낭패가 된 몰골을 이끌고 허물어진 바위의 사리를 이용해 정상으로 몸을 솟구쳤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2-2 페이지: 1/34 자료번호: 275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2장-검문산에도 달은 뜬다2 당사복의 몰골은 이미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몰골이 아니었다. 그의 명성을 말해주던 오른쪽 팔은 이미 돌에 짓이겨져 어깨서부터 인육(人 肉)이 되어 버렸고 안면도 깨어져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흐흐흐, 이게 나란 말이냐?" 당사복은 외눈이 된 눈알을 돌리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시력을 떨어지게 해 사물이 가물가물했지만 웅덩이 에 고인 물에 비치는 자신의 몸은 제대로 바라보였다. 당사복은 호구관을 지나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호구관은 완벽하게 허물어져 막혀버린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오십여 명의 목숨을 가져간 협곡이지만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면 그곳이 협곡이었는지 구 분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으으으...... 가주!" 피떡이 되어버린 하나의 인형이 바닥을 벌레처럼 기어 당사복에게 다가왔 다.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머리가 깨어진 채 기어오는 자는 만도대의 대주 당가명(唐 )이었다. 한때 사천 제일의 미남이라던 얼굴은 뭉그러졌고 기고 있으니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를 악물고 지켜보던 당사복은 몸을 돌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분명 놈들이 사용한 것은 사천당문의 비기로 만들어진 굉천뢰가 분명했다. 더구나 오색의 가루,오무형살지독(五霧刑殺之毒)은 당 문에서조차 아는 자가 많지 않은데......!' 당사복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굉천뢰는 사천당문이 만든 것으로 보였다. 세상 에서 사용하는 굉천뢰는 당문을 제외하고 두서너 군데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문이 만든 굉천뢰라고 믿는 것은 당문의 굉천뢰가 폭 발을 하고 나면 매캐한 냄새 속에 희미한 난향(蘭香)이 나기 때문이다.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그로서는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어떤 놈이 감히 나를 막았단 말이냐?"" 의문은 의문이고 분노는 분노였다. 당사복은 분노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허공을 향해 소성을 토했다. 그의 얼굴에 근육이 밀리며 지렁이처럼 꿈틀거림이 일어났다. "하하하, 당사복! 그대가 분노해도 어쩔 수가 없다. 사천무인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머리를 모아도 우리를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중년의 목소리로 들리는 음성이 울려나와 당사복의 귀로 파고들었 다. "아......아니! 누...... 누구...... 누구냐?" 당사복이 놀람을 토할 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부르지 않아도 나갈 것이니 보채지 말아라." 차가운 목소리였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파악을 못한 당사복은 미친 듯이 몸을 돌려 사 방을 둘러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이 정신없이 굴렀다. 스슷! 하나의 인형이 허공에서 떨어져 나타났다. 뒤이어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그의 뒤에 도열했다.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등에 장도를 메고 있어 인상이 험악해 보였다. 의도적인 험악함이었다. "너는 누구냐?" "나, 나는 쌍룡채의 사채주(四寨主) 이랑도(二郞刀) 마등(馬 )이라 한다.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 자신을 마등이라 부른 자는 팔짱을 끼었다. 그의 등에 걸린 이랑도가 안개 가 걷히며 쏘아지는 햇빛을 받아 잠시 반짝거렸다. 이랑도는 무인들이 별로 사용하지 않는 병기였다. 너무 길었고 무거웠으며 우선 익히기가 어려웠다. 이랑도를 사용한 전대기 인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랑도에 대한 비급도 없었다. 이랑도는 석 자에 달하는 거대한 칼날을 긴 장봉에 부착한 것으로 창과 비 슷해 보였다. 더구나 갈라진 검극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졌 다. 흔히 쌍첨양인도(雙尖兩刃刀)나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라 불리는 병기로 창과 도의 기능을 모두 가진 예리하고도 무서운 병기였다. "감히...... 산적 우두머리 주제에 감히...... 감히!" 당사복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분노는 앞서지만 지금 자신의 몰골로 마등을 이길 수 있다는 장담을 하기는 어려웠다. 지금 서 있기조차도 어려운 것이 자신의 모습이었다. 말을 마친 당사복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동시에 몸에 오한이 이는 듯 부들부들 떨렸다. '빌어먹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산 채의 도적놈들이 이리 건방지게 나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당사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은밀하게 진행해 온 모든 것이 이리도 허무하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그였다. 자신이 그토록 당했다면 나머지 세 곳의 상황도 만만하지는 않으리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산채의 소두령이 나와 나를 죽이려 하다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분노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설사 분노가 치밀어도 상대를 죽일 수 없음에야 더 이상 무엇으로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좋아. 누가 너희들에게 내통(內通)했느냐?" 당사복은 정말로 자신을 죽인 자는 암중으로 쌍룡채에 모든 것을 알려준 자 라 생각했다. 암중의 그림자에게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후후후, 죽을 놈이니 알려 준다마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그가 사 천당문을 이루는 중요한 누각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자라는 것은 분명하 다." "흐흐, 그렇게 된 것이군. 나라는 계집 때문에 기울고 성은 간세 때문에 기 울어진다더니...... 결국 내부의 적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는군." 당사복은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에 왼손으로 등에 걸린 한 자루의 만도를 뽑았다. 중원인 치고는 조금 특이한 나만(南蠻)의 만도를 사용하는 그였다. 그러나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뽑은 그의 만도가 어떤 위력을 만들어내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후후후, 소두령! 무인답게 싸우다 죽을 영광은 줄 수 있겠는가?" "물론이다." 창! 이랑도를 빼어든 마등이 당사복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에서 서서히 기도 가 흘러나왔다. 산적들에게서 보여지는 비겁하고 음습한 기운이 아니었다. "어쩐지...... 쌍룡채를 산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군." "무엇이오?" "그건 쌍룡채가 산적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지. 산적으로 위장한 무림대파라 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다. 사천무인들은 영원히 모르게 될 수도 있겠지." 말을 마친 당사복은 만도를 허공에 한바퀴 휘둘러 본 다음 마등을 향해 겨 누었다. 만도에서 어떤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그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만도의 끝이 바람을 맞은 갈대처럼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무인으로 받아주게. 차핫! 천의무봉(天衣無縫)!" 다다다다― 당사복의 몸이 허공에서 한 번 뒤집히는가 싶더니 만도가 수십 개의 그림자 를 만들어 내며 마등을 향해 밀려갔다. 수십 개의 빛 쪼가리가 허공으로 뿌 려졌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외다." 한소리 외침을 토한 마등은 이랑도를 서두르지 않는 모습으로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발을 뒤로 받치고 왼발은 넓게 벌려 안정된 기마지세(騎馬姿勢)의 변형 이었다. 이랑도의 장봉 끝은 오른손에 잡혀 허리춤에 고정되었고 왼손은 자 유로운 상태였다. "화락천세(和樂天勢)!" 마등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며 손에 들린 이랑도가 회전을 일으켰다. 오른손 에 잡힌 봉의 손잡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나 이랑도의 검극은 크게 원을 그리는 형국이었다. 파파파파― 허공에서 강기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가죽북이 터지는 듯 한 소리였다.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일장 이내로 다가들었다. 팟! 단 한번의 파공성이 울렸다. "잘 가시오." 이랑도를 둘러맨 마등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 열 명의 그림자가 따랐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산정을 향해 걸어갔 다. 퍽! 당사복의 시체가 땅으로 구른 것은 그때였다. 이미 이랑도에 가슴이 찍혀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그는 눈을 까뒤집은 체 서 있었다. 정신력 하나로 식어 가는 몸을 버티었겠지만 혼이 빠져나가자 그의 몸은 무 너져버렸다. * * * 푸드드드― 하나의 인형이 몸을 일으킨 것은 마등이 사라지고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바위 위에 깔린 것은 의복뿐이었지 그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온전했다. 찌이이익― 그가 몸을 일으키자 바위에 깔려있던 옷이 찢어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 했다. "우! 내가 살았단 말인가?" 사방에 깔려있던 안개는 밀려가 보이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방 에 깔린 돌과 처참하게 변해버린 동료들의 시체뿐. "이......이런 일이. 이건 악몽(惡夢)이야."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내 몸을 일으켜 주 변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고 바위 위를 타넘으며 둘러 보기도 했다. 바위가 엉겨있는 곳에 머리를 밀어 넣어 보기도 했고 손을 밀어 넣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반 시진이 속절없이 흘러도 그가 찾아낸 것은 아무 것도 없었 다. 찢어진 몇 자락의 옷과 짐승의 이빨에 찢긴 것처럼 난자 당하고 흉측하게 변해버린 시체의 팔다리가 고작이었다. "퓨유! 사천만도가가 이렇게 무너진단 말인가?" 그는 엉덩이를 돌에 붙이며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가 만도대의 일원이 었던 때가 바로 한 시진 전이었는데 이제 만도대는 붕괴되고 없었다. "응!"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신음소리는 매우 가늘었 다. 정신을 집중해야 겨우 들릴 둥 말 둥이었으나 그는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시키며 신음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었다. 바위들이 마구 엉켜진 곳에서부터 붉은 피가 한 줄로 선을 긁고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눈 에 들어왔다. "누구?" 그의 눈에 두 구의 시체가 들어왔다. 그는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 쉽게 이해 했다. "가주...... 대주." 후다닥! 그는 미친 듯 다가가 당사복을 끌어안았다. 가슴에 귀를 대어보고 완맥(脘 脈)을 잡아보았으나 사람이 살아있다는 기척을 느낄 수는 없었다. 차갑게 식은 감촉이 그의 몸을 섬뜩하게 했으므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내 가주의 시체를 안아들었다. "엉!" 하나의 시체를 깜박했던 그는 다른 시체로 다가가 가주 당사복의 시신을 바 닥에 내려놓고 얼굴이 땅을 향한 채 엎드려 있는 다른 시체를 뒤집었다. "만도대주!" 과연 그는 만도대의 대주였다. 비록 얼굴이 깨지고 바위에 눌려 팔다리가 잘려졌다고는 하나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옥이 박힌 요대며 목에 두른 붉은 목도리는 평시 대주가 사용하 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대주! 크흐흐흐......" 그는 생사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만도대의 대주는 부하들 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던 절대적인 무인이기도 했었다. 그랬기에 살아남은 부하가 가주의 죽음보다 대주의 시체를 접하고 더욱 슬 프게 우는 것인지도 몰랐다. "으으으...... 조명(遭命)!"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드는 듯 머리를 든 그는 바로 대주가 부 르는 대로 조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만도대 서열 십 위의 무 인이었다. 부르르르르― '이게 꿈인가?' 조명의 몸이 바람맞은 갈대처럼 떨었다.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오." "나...... 나다....... 조명!" 그제야 조명은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사내의 입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급히 가슴을 열어 만도대주의 몸을 내려놓은 조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뜨지도 못한 대주가 입술을 미약하게 달싹이느라 온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번쩍― 갑자기 만도대주가 눈을 떴다. 눈을 뜨기는 했으나 눈동자에 보이는 것은 없는 모양으로 눈동자가 마구 굴 렀다. "대주! 조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팔다리가 잘린 상태였기 때문에 조명은 만도대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질 식할 듯한 피비린내가 코로 스며들었지만 조명은 느끼지 못했다. "조명!" "대주, 어서 돌아가야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명은 조금만 서두르면 대주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주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키자 대주는 전신에서 다시 멈추었던 피가 솟구쳤 다. "컥!" 입으로도 피와 산산이 부서진 창자 쪼가리가 넘어왔다. 피와 혼합이 된 누 런 위액이었다. "대주!" "나를 내려놓아라." "대주, 어서 가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아라. 너는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대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은 없었 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조명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대주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시체일 뿐이었다. 회광반조는 죽어 가는 자에게 유언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주는 것이지 살아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대주!" "잘 들어라. 우리들 중에 누군가 밀정(密偵)이 있다. 놈을 찾아야 한다." "밀정이라니요?" "분명히 놈들이 말했다...... 사천당문안에 있다고...... 적어도 장로급 이 상은 되는 놈이다...... 놈을 찾지 못한다면 사천당가는 지리멸렬(支離滅 裂)...... 망할 것이다." 툭! 바삐 말하던 대주의 목이 꺾어 졌다. 그러나 그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정 보를 부하에게 남기고 간 것이었다. 그가 죽었다고 믿었던 자들의 실수였 다. "대주!" 조명은 대주의 시체와 당사복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조명이 평생동안 가장 존경했던 자들이었다. 조명은 당사복의 시체를 등에 메었다. "대주, 다시 오겠습니다." 휙! 그는 무너진 협곡의 바위들을 밟으며 사라졌다. * * * "후후후, 이거 뜻밖의 수확인걸." "글쎄 말이야. 저 대주란 놈을 살려두길 잘했는 걸....... 놈이 죽으면 어 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말이야." "그만 우리도 가지. 놈이 목적대로 사천당문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겠지." "물론이지." 휙! 휘리리릭― 두 개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쌍룡채의 내부 깊숙하게 자리잡은 목조 건물은 어둠침침했다. 만약 유등(油燈)이 없었다면 한 치 앞의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 웠으나 군데군데 밝혀진 유등으로 인해 서로의 얼굴이 확연하게 구별이 되 었다. 십 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둥근 원탁에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은 쌍룡채를 이끌어 가는 자들로서 사무기와 혁천련을 둘러싼 소두령들 이었다. 그들은 나무를 잘라 만든 탁자 가운데 양피(羊皮) 가죽 위에 그린 지도를 놓고 머리를 맞댄 체 숙의(熟議)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들 중에는 불과 두 시진 전 사천만도대의 공격을 방어한 마등의 모습도 보였다. "놈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럴테지." 마등의 말에 사무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무심함이 떠올라 있었으나 불끈 쥔 두 손이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철필(鐵筆)이 들려있었는데 철필에는 붉은 색의 물감이 새어나와 그가 철필을 그을 때마다 지도에 표식이 새겨졌다. 지도에는 크게 네 개의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동서남북 네 개의 표식은 모 두 원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각각 사람의 이름과 숫자, 그리고 산의 지점이 새겨진 모습이었다. "삼 소두령, 몇 놈이나 살아서 돌아갔느냐?" "예, 도합 일곱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만약 강전만 제때에 도착했으면 단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는 제가 준비에 차질이 생겨 강전이 도착하지 않아 미처 추적을 하지 못했습니다." "잘했다. 산을 벗어나면 우리가 불리하다. 당분간은 산 속에서 벗어나지 않 으며 놈들을 막아야 할 것이다." 사무기는 손으로 지도의 한곳을 가리켰다. 붉은 원이 칠해진 지도의 위에는 역시 붉은 색으로 구십 구 라는 숫자와 은표신절(銀標神絶) 하맹유(河猛 ) 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검문산의 동쪽으로 난 산길은 기이하도록 갈대가 많은 길이었다. 삼소두령 은 갈대밭에 은신해 있던 이십여 명의 부하들로 백 명이나 되는 사천의 무 인들을 상대했다. 동쪽을 택했던 사천무인들의 인솔자는 은표전장(銀標錢場)이라 불리는 전장 과 표국(標局)을 경영하는 은표신절 하맹유라는 자로 곤륜의 제자라 소문이 있는 오십대의 무인이었다. 하맹유는 갈대밭을 지형적으로 이용해 넓게 벌려 공격을 했으나 불과 이십 명의 쌍룡채 무인들에게 혼쭐나고 도주했다. 그러나 길목에서 역으로 기다리던 혁천련은 단 일초의 철편으로 하맹유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동쪽이 너무 트여있다는 것에 대비해 혁천련이 지 키고 있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서쪽은 어땠는가?" 사무기의 오른손 식지가 다시 검문산이 그려진 지도의 서쪽 능선을 가리켰 다. 말이 끝나기 바쁘게 얼굴에 구레나룻이 지저분하게 나있는 털북숭이 삼 십대 대한이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박도가 걸려 철렁거리고 있어 그가 가볍지 않은 거력 (巨力)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허리에 달린 박도는 유난 히 컸기 때문이었다. 박도만 큰 것이 아니라 몸은 더욱 컸다. 구 척에 다다르는 큰 키에 손바닥 하나가 솥뚜껑을 연상하도록 했다. 더구나 전신에 난 털은 진화가 덜된 원 숭이 같았다. 그가 바로 쌍룡채의 역사라 알려진 육두령 웅철신(熊鐵神) 박장형(朴 )이 었다. 과거 노예시장(奴隸市場)에서 거부(巨富)에게 팔리는 것을 사무기가 도와주어 지금은 소두령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 "표시된 대로입니다. 오십 삼 명의 침습이 있었으나 모두 죽였습니다." "잘했군. 놈들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이었나?" "놈들은 밑에서부터 불어 올라오는 바람을 이용해 연을 띄워 우리의 키를 넘으려 했습니다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투석기(投石機)가 있어 모두 추락 시킬 수 있었습니다." "놈들이 대형 연을 띄어 공격을 했다 이건가? 그렇다면 연표선랑(鳶驃仙郞) 이라는 계집의 도움을 받았겠군." 톡톡! 사무기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두들겼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거나 검의 면을 가볍게 어루만지듯 쓰다듬는 버릇은 그가 긴장하고 있거나 마음속 깊 이 무언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의 손가락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던 박장형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연을 탔던 계집들 중 아마 연표선랑이 있었다면 그 계 집도 죽었을 겁니다. 연을 타고 있던 놈들 중 살아남은 놈은 하나도 없었으 니까요." "잘했다." 사무기는 다시 탁자를 두드렸다. 소두령들은 모두 그의 손을 따라 지도 위를 바라보았다. 지도 위에는 검문산의 요소요소가 그려져 있었고 그들이 모인 것도 다음에 밀려들 사천의 무인들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잘 들어라. 우리는 백 이십 명밖에 되지 않는다. 놈들은 천 명이 되는지, 만 명이 되는지 알 수 없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도전할 거다." "그렇겠지요." 혁천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와는 다르게 나머지 여덟 명의 소두령은 얼굴의 안색을 붉혔다. 사무기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매우 중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처음에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문제였고 이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대패했으니 그들은 아마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라 도 우리를 모두 죽이려 할겁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인 체 사무기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던 마등이 나섰다. 그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어렸을 때 부모가 도살장의 살도부였기 때문에 늘 서러움을 받던 사내가 바 로 그였다. 세상을 증오(憎惡)하다 만난 자가 바로 사무기였고, 사무기가 포교생활을 그만두고 검문산으로 옮겼을 때 무작정 따랐던 그였다. 그랬기 때문인지 그의 충성심은 다른 누구보다도 강했다. 만약 지금 당장 죽어달라고 한다면 그는 사무기를 위해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자였다. "그렇다고 기다릴 수야 없지 않은가?" "방법은 많이 있을 겁니다. 저희들은 대두령 형님이 하라는 대로 따르겠습 니다." "그렇습니다." 나머지 소두령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바로 자신들이 하고자했던 말이 었기 때문이다. * * * "아우!" 둘만 남게 되자 사무기는 혁천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두령들과의 회 의 때 그들은 서로의 말을 아꼈었다. 소두령들의 의견을 더 많이 듣기 위해 서였다. "아우, 놈들을 막을 좋은 방법이 없겠나?"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언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는 사무기이기는 했으나 먼저 아우의 의견을 들 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항시 같았다. 혁천련의 이야기를 토대(土臺)로 하여 모든 일의 하나하나를 유추(類推)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늘 결론을 맺을 수 있었다. 포교생활을 할 때와 다른 것이 없었다. 모두의 의견을 들은 뒤 아우의 보충(補充)되는 설명이나 반대 이유를 듣고 결정을 내리는 그였기에 실패는 거의 없었다. 오늘의 쌍룡채가 있는 이유가 그의 탁월(卓越)한 능력도 있으나 늘 들어주는 귀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 다. "지금은 가을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겨울을 날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결 정해야 합니다. 겨울을 난다고 하면 먼저 야습 등을 통해 겨울날 준비를 하 고 놈들을 맞이해야 하고......." "그리고 다른 방법은?" "이곳에서 열흘이나 보름 정도를 견딘 뒤에 놈들이 양식(糧食)이 떨어지고 무기가 떨어졌으려니 하고 방심할 때 퇴로를 열고 이동하는 겁니다." "좋은 생각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사무기는 상황을 인식할 줄 아는 아우가 있어 늘 즐거웠다. 아우는 포용력 (包容力)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상황을 폭넓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 쌍룡 채에는 늘 도움이 되었다. 포교생활을 청산하고 도주 끝에 검문산에 둥지를 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아우의 생각이 주효(奏效)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모았던 황금과 재 물을 가지고 오히려 성도(省都)로 들어가는 방법이 하나 있고 반대로 서장 이나 청해로 도주해서 힘을 기르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어차피 서장이나 청해로 도주한다 해도 중원에 진입하는 방법은 상인으로 위장해 사천을 지 나 들어가게 되겠지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떤 방법이 상책이냐?" "상책(上策)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중책(中策)은?" "우리에게는 일 년 전 만도화원의 부탁을 들어주며 슬쩍한 독과 굉천뢰가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쓰자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우선 산 주변에 독을 뿌려 적의 습격에 대비하며 동시에 빠른 공격을 저지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혁천련이 하는 말은 사천무림과의 싸움이 시작된 이래 사무기가 늘 생각했 던 부분이었다. 아우의 생각은 너무도 그의 생각과 일치했다. 같이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인지 그들의 의견은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근본적인 기준은 늘 같았기에 설사 이견(異見)이 있다해도 의견을 모으는데 걸리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단 한곳의 통로는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곳이 설사 적의 코앞이든 뒤였든 상관없이." "어디가 좋겠느냐?" "적이 순수한 사람의 힘으로만 공격할 수 있는 곳이겠지요. 우리가 놈들을 공격하듯 만약의 경우 반대의 입장이 되었을 때 가장 피해가 적을 곳을 택 해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일까?" "과거 대형이 말했던 방식입니다." "대형이 말했던 방법이라고......?" 사무기는 초풍비가 말했던 많은 이야기 중 어떤 것이 지금의 상황에 해당될 까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초풍비는 평상시 그들에게 무공만 전수했던 것이 아니었다. 초풍비는 그들에게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쳤다. 학문도 가르쳤고 인간이 살 아야 할 처세술도 가르쳤다. "상대가 가장 공격하기 좋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가야겠지?"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동쪽의 갈대밭이 되겠군." "저도 동감(同感)입니다." 사천무인들이 일차로 공격했던 네 곳의 진로 중 동쪽의 능선(稜線)에 가장 많은 적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가장 공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셈 이었다. 그들도 역시 퇴로를 연다면 가장 좋은 곳이 갈대밭이라는 사실에 의견을 모 았다. "사천의 무인들이 첫번째 공격에서 피해를 입었고 반간계(反間計)를 펼쳤으 니 그토록 가까운 시일 내에 쳐들어오지는 않을텐데......열흘은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놈들의 이차 공격이 있고 나서 열흘 후로 하지 요. 물론 사천당문의 이차 공격에서 우리가 당한다면 방법도 없겠지만...." "그렇게 하자꾸나. 우선 놈들의 이차 공격을 막는 것이 중요하겠지." 사무기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혁천련도 몸을 일으켜 뒤를 따랐다. 그들의 앞에는 오직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만이 남은 셈이었다. * * * 만도화원주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무영이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는데 그도 눈에 떠오르는 빛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어르신이 나보고 당가타로 오라고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만도화원주의 모습으로 본신(本身)을 감춘 단화연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 고 있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를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단화연을 마음대로 부르거나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어르신의 말씀만 전달할 뿐입니다.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아니, 이제 오지회의 그 못된 놈들을 징계(徵戒)하는 중인데 나를 오라 하 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어르신의 말씀만 전달할 뿐입니다. 저를 곤란하게 하 지 마십시오." 무영은 몸을 틀었다. 단화연의 몸이 비틀렸다. 무영이 말은 하지 않아도 이유를 알 고 있다고 믿 는 그였다. 알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무영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에게 핍박을 받은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무영은 어르신의 말이 라는 핑계로 은근히 단화연을 압박하고 때로는 욕보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누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먹고사는 데 나를 이토록 핍박하는 거 야.' 때때로 열이 오르기도 하는 단화연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어르신이라 부 르는 자는 단화연이 벌어들이는 은자로 자신의 식솔들을 먹이고 자신의 가 문을 영위(營爲)하고 있었다. 만약 단화연이 만도화원을 운영하지 않았다면 어르신이라는 자는 오래 전부 터 거지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화연은 잘 알고 있었다. 만도화원은 그에게 남은 하나뿐인 가업(家業)이었다. 어르신이라는 자는 천 하를 아우를 수도 있는 재화(財貨)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이제는 단화연의 피를 빨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르신의 그늘을 벗어나려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천지검문을 키우고 있던 것도 사실은 어르신의 그림자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천지검문을 키우고 있다는 것도 모두 어르신의 눈에 들키고 말았으 니 천지검문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힘이 든 상황이었다. "어르신은 열흘 이내로 오시라는 전갈(傳喝)을 보내셨습니다. 이곳의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으셔야 합니다." '열흘!' 단화연은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한때는 명예로는 세가의 후손(後孫)이었다. 부친의 명을 어기고 욕심을 낸 것이 평생의 짐이 되고 있었다. 가문의 모든 제자가 이제는 어르신의 부하들로 바뀌어 있었다. 세가의 충신 (忠臣)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는 자는 아 무도 없었다. "사흘이라......?" "사흘이요." 단화연의 비틀린 말에 무영은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 * * 초란은 어제와 다름없이 달을 보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별이 보이지 않 는 밤이었다. 그것은 은은하게 깔린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는 하늘의 별을 숨겨버렸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눈물처럼 물기에 젖은 달이었다. "그날도 이렇게 물기가 흥건하던 날이었어요." 초란은 자신이 작얼산을 떠나오던 밤을 생각했다. 그날은 유난히 밤이 길었다. 초풍비가 오랜만에 깊은 산으로 사냥을 나가 이틀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방문을 열어놓고 달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이불에서는 사내의 냄새가 났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냄새였다. 참을 수 없는 격정(激情)으로 자신을 안아주던 남자의 냄새에 가슴이 탈 지경이 었다. "당신은 오늘도 오지 않는군요." 초란은 간혹 짜증이 나기도 했다. 초풍비는 한번 사냥을 나가면 사흘이 걸 릴 때도 있었고 멀게는 삼칠일(三七日)이 걸리는 수도 있었다. 초풍비의 행동이 자신과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초란은 때때로 불만이었다. 그녀는 초풍비가 늘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대개의 경우 그녀의 소망은 지켜졌다. 초풍비는 그녀의 소망대로 가능한 그녀의 곁에 머물러 주었다. 그것이 사랑 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내였다. 스스슷! 물기 먹은 달을 쳐다보던 초란은 바람이 스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 했다. 집 주변으로는 풀밭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나무들이 무성(茂盛)했 으니 바람만 불어도 나뭇잎이 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두번째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서야 초란은 그것이 사람으로 인해 일어 나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 일어나는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초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섰다. "우노(右老)인가?" 우노는 간혹 짐승의 가죽을 사러오거나 초풍비가 부탁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노인이었다. 초풍비가 가능한 인가(人家)가 몰려있는 곳으로 내려가지 않으 려 했지만 다행히 우노가 있어 그것은 가능했다. 우노는 간혹 늦은 시간에 산에 오르면 초막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가기도 했다. 그녀로서는 우노가 왔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노인가요?" 대답이 없었다. 초란은 겁이 나기는 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초풍비는 주변에 적잖은 진과 올가미를 설치해 놓았고 짐승에 대비(對備)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 놓고 산 을 떠나고는 했었다. 다가오는 짐승도 없으려니와 설사 다가온다 해도 초풍비가 설치한 덧과 올 가미, 진을 돌파해서 모옥(茅屋)까지 다가올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도 초란이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초란은 몸을 돌렸다. 그저 바람 소리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왜 이리 거센 거지."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한 심정으로 초란이 나직하게 입을 열고 몸을 틀었다. "초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초란은 몸을 굳혔다. 언제인가 들었는지 기억이 막 막한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 목소리이기도 했 다. 간혹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십 년 동안 잊고 살았던 목소리이기도 했다. "아버지?" 초란이 몸을 돌렸을 때, 언제 다가왔는지 십여 명의 얼굴이 보였다. 초란은 눈을 크게 떴다. 나타난 자들 중의 중앙(中央)에 선 노인은 그녀가 잊을 수 가 없는 얼굴이었다. 몇 명의 가솔들도 눈에 띄었다. 중앙의 노인은 부친이었다. 나타난 자들은 부친과 십여 명의 가솔들이었는데 그들이 나타나리라고는 생 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한동안 초란은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 다. "그만 가자." 부친은 마치 유람을 나온 딸에게 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마치 모든 것 을 훌훌 털고 가자는 이야기인 듯해서 초란은 잠시 어이가 없었다. 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버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버티면 한두 시진은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추한 모습으로 산을 내려가야 할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훌훌 털고 앞서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버틴다 고 초풍비가 서둘러 달려올 것도 아니었다. 그가 서둘러 달려온다면 버틸 만하겠지만 초풍비는 전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부친이 어떻게 자신을 찾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현실(現實)이 문제였 다. 초란은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어서 가자." 부친의 재촉에 초란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몸만 따라 나섰다. 마치 산책을 나가는 듯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초풍비가 사냥에서 돌아와 놀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초풍비에게 어떤 기대감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초풍비가 자신을 찾아 하산(下山)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흔 적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만 모든 것을 잊도록 해라." 부친은 너무 쉽게 이야기를 했다. 마치 손에 들었던 과일을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란, 자신의 마음이었다. 반항(反抗)할 마음도 일지 않았고 거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저 묵묵히 부친을 따라 산을 내려가게 되었다. 그것으로 초풍비와의 인연 (因緣)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는 산을 내려오게 될 거예요." 초란이 부친에게 한 말은 경고(警告)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초 풍비가 산을 내려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찾아서, 혹은 다른 것을 찾 아서...... "어서 가자." 부친이 초란을 재촉했다. 초란은 뒤를 돌아본 뒤 걸음을 옮겼다. 하루만 지나면 초풍비가 돌아올 것이었다. 그는 돌아오면 초란을 찾으리라 는 것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초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초풍비가 자신을 찾을 것이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3 페이지: 1/32 자료번호: 276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3장-형제들이 모이면 힘이 배가 된다 "그래, 무식한 사천당문 놈들이 쌍룡채를 공격했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원주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당협이 사천의 군소방파에 공격을 맡겼으나 쌍룡채는 피해를 하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강한가?" 만도화원의 원주는 놀라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사천무림인들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의 타격(打擊)은 입었어 야 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소식이었다. 그런데 검문산이 건재하다 하는 말이 들리니 어찌 속이 타지 않겠는가? 그리된다면 그의 목적은 완전히 틀어지게 되는 것이며 십여 년의 적공(積功)은 수포(水泡)가 되는 것이었다. "전서구는 언제 도착했느냐?" "오늘 아침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갑자기 거칠어진 원주의 말투에 엽산(葉山)은 고개를 떨구었다. 만도화원의 만도각을 관장하는 그로서는 원주의 말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고 있는 자였다. 원주가 사무기의 손을 빌어 사천당문의 굉천뢰를 빼앗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계획한 자였다. 당문과 사무기를 적대시하게 만드는데는 성공했 지만 사무기의 실체를 파악하는데는 실패했었다. 불패신수까지 동원해 사무기의 내력을 알아내고자 했고 두 번의 살수를 보 냈으나 얻어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황금만 낭비한 꼴이 되었다. 그후로 엽산은 늘 기가 죽어지내야 했다. 원주와 이십 년의 인연이 있다고 는 하나 안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원주는 올라볼 수 없는 산이기 때문 이었다. "다른 전언(傳言)은 없었느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엽산은 고개를 다시 떨구며 목소리를 흐렸다. 그의 수염이 바람을 맞은 듯 가벼운 파랑을 일으켰다. 얼굴도 참혹하게 변했으나 숙이고 있는 탓에 보이 지는 않았다. 엽산은 말을 하기가 두려운 듯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가만히 무릎을 꿇고 기다릴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한 시진 전 두번째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두번째 전서구라고......?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느냐?" "그게......" "말하라. 설사 이번 일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용서해 주겠다. 어차피 검문 산의 놈들과 싸우는 것은 네가 아니라 사천무림인들이니까." "감사합니다. 사천당문은 반간계에 당한 듯 보입니다." "반간계라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만도화원의 원주가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입에 서는 놀람의 음성이 터져 나오고 눈은 소의 눈처럼 튀어나와 두터운 눈 꺼 풀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사천무림은 흉수를 찾는다고 난리입니다. 서로가 반목 (反目)을 하고 뒷조사를 하는 것이 아무래도 놈들이 이간질을 한 것으로 보 입니다." "과연 초풍비의 동생들답구나." 삐이익― 침상에서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원주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 다. 몸을 일으킨 만도화원주는 서둘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의(寢衣)를 벗은 그는 용의 그림이 수놓아진 장포를 걸치고 발에 당혜(唐鞋)를 신었다. 허리에 봉황이 그려진 요대를 찬 원주는 서서히 침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엽산은 뒤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원주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긴 회랑(回廊)이 이어졌다. 사방으로 궁등이 환한 불을 밝히는 회랑의 양옆으로는 급히 몸을 돌린 계집 들이 허리를 접었다. 한결같이 만화각에서 몸을 파는 계집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계집들은 몸이 들여다보이는 나삼을 걸치고 있었고 가슴과 사타 구니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듯 거뭇거뭇한 음모가 보였고 붉은 젖꼭지도 보였다. 모두가 원주의 생각이었다. 원주는 결코 미색(美色)을 밝히지는 않았다. 대신 벗은 계집들의 몸매를 감 상하는 요상한 취미를 지니고 있어 밤새 그의 침상 머리에는 벗은 계집들로 붐볐다. 간혹 벗은 몸으로 춤을 추게 하고는 술을 마시는 모습도 볼 수가 있어 엽산 은 이제 만성이 된 느낌이었다. 원주는 얼마나 벗은 계집들을 좋아했는지 자신의 처소(處所)도 계집들이 희 희낙락거리는 만화각의 삼층에 만들었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계집들을 불러다 춤을 추게 할 수 있었고 원한다면 사타구니를 벌리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원주는 수시로 침실을 옮겼다. 막상 밤이 되면 엽산은 계집들이 머무르는 전 침실을 뒤져야 원주가 잠을 자는 침실을 찾을 수가 있었다. 원주가 왜 방을 옮겨가며 잠자리를 바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침실을 옮겨 다니기는 해도 계집들의 몸을 탐하지는 않는 것이 분명했다. "너는 계집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느냐?" "계집 말입니까?" 엽산은 대답이 궁해졌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가 아는 한도에서 볼 때 다시 묻는다고 대답할 원주가 아니었다. 원주는 간혹 그와 같이 뜻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 무어라고 대 답을 하느냐로 원주는 자신대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상황에 따라 기억을 회 상(回想)하는 자였다. "계집들은 여러 가지 쓸모가 있습니다. 입이 무거운 자의 입을 열게 하는데 도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성욕(性慾)의 배출구로도 사용되지요." "많이 늘었구나. 엽산." "모두가 원주께서 돌보아 주신 덕입니다. 원주의 후덕함이 없으셨다면 이 엽산이 마부질이나 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엽산은 마부였다. 벌서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우연히 자신의 마차를 탄 원주를 편안하게 모 셨다는 것으로 그는 졸지에 만도화각의 마부가 될 수 있었다. 원주는 늘 그가 모는 마차를 탔고 그때마다 엽산의 지위는 하늘 높은 줄 모 르고 치솟았다. 결국 그는 만도각의 각주로 발탁되었고 만도화원의 이인자 (二人者)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 엽산 자네도 그리되었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엽산이 원주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십 년 동안 그를 따라 다녔지만 모든 것은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원주가 수 개의 침실을 가지고 있어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알기 어렵다는 사실과 몸을 파는 여인들을 통해 막대한 재화(財貨)와 강호 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 재화를 사천당문에 대주고 있으며, 그리하여 사천당문에서 그를 매우 귀히 여기며 사천당문에서 나온 무인들이 그를 지켜준다는 것 정도였다. "엽산!" "예, 원주." "놈들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너는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다만 나와 놈들 사이에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놈들이 살면 내가 죽어야 하고 내가 살려면 놈들 을 죽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번 사천에서의 작은 파랑(波浪)은 결국 무림 전체로 파급(波及) 될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중원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겠지. 놈들이 살아남 는다면." 엽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잘못 대답했다가는 자신의 위치가 어찌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엽산이었 다. 원주는 더 이상 그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원주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은 것은 굳이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빌어먹을! 당문이 직접 우리를 목조를 줄은 몰랐는데, 놈들이 직접 우리를 공격하다니......" 사무기는 이빨 시린 소성을 뱉어내었다.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천당문을 위시한 군소방파는 자신들의 부하들이 죽은 것을 트집잡아 모든 제자를 풀어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는 공격이었다.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순수한 의도인지 당문의 압력(壓力) 때문인 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아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동쪽 갈대밭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투명(不透明)합니다." 혁련천도 방법이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혁련천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리 심한 편 은 아니었다. 그가 자랑하고 아끼지 않는 철편이 반이나 잘려 있었다. 조금 전 순식간에 몰려드는 적을 향해 일곱 개의 굉천뢰가 소모되었고 이십 여 명의 부하들이 죽었다. 산채는 불에 타 이제는 눈이 오거나 비가와도 몸 을 녹일 공간조차도 없었다. 주변에 뿌린 독은 매우 효과적으로 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 다. 사천당문은 사흘만에 해독제를 만들어 냈고 순식간에 오 백 명의 무인들이 쳐들어 와 세 개의 방어벽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와중에 이십 명의 부하들이 황천으로의 고혼(孤魂)이 되었다. 오 백 명의 공격을 받고 이십 명이 죽었다면 그리 많이 죽었다고는 생각되 지 않았지만 사무기로서는 애간장이 타고 가슴이 막히는 일이었다. "무기는 얼마나 남았느냐?" 전초에 나가있는 이십여 명의 부하들을 제외하고 팔십여 명의 부하들은 비 장(悲壯)한 각오를 얼굴에 띄운 채 사무기 앞에 도열해 있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팔십 명 중 앞에 서 있던 팔척 장신의 소두령이 앞으로 나섰다. 귀견휴(鬼見休)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소명(疎明)이었다. 한때는 마적(馬 賊)으로 사막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내였지만 지금은 쌍룡채에서 무기조달을 담당하고 있는 소두령이었다. 비록 무기를 담당하고 있지만 무공도 그리 약하지 않아 사무기가 믿는 부하 중 한 명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양은 얼마나 남았느냐?" "강전이 약 이백여 발, 굉천뢰가 두 발입니다. 그 외로 잡다한 병기들이 있 기는 하지만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흐흠!" 사무기는 마음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불어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이 강했다. 숫자도 상상 이상으로 많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열흘 전 최초의 공격을 막아냈을 때, 반간계가 성공한 듯 보였다. 사천의 무인들은 간세를 찾아낸다고 법석을 떨었고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사천당문에서 소식을 알려주던 흑룡일비(黑龍一泌)가 발각되어 죽었 다는 데서부터 발생되기 시작했다. 흑룡일비가 사천당문의 추적 끝에 죽어버리자 사천당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추이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십일 동안 사천당문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쌍룡채는 고립(孤立)되어 버렸다. 열흘이 지났을 때, 사천의 무림은 무려 오백 명의 인원을 동원해 압박해 들 었다. 결과는 비관적이어서 부하들도 동요를 일으켰다. "방법은 하나." "무엇이오." 혁련천이 사무기를 돌아다보았다. "탈출(脫出)이다." "탈출?" "그래,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오늘밤 야음(夜陰)을 틈타 도주한다. 최초의 계획대로 사천을 지나 섬서지방(陝西地方)에 들어간 후 장사꾼으로 위장하 여 황경 방향으로 가자. 그곳에서 잠시 몸을 숨기고 후일을 기약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명이 동의(同議)를 했다. "동쪽 진로를 뚫을 수 있겠느냐?" "가능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도와야 합니다." "하늘?" 혁련천의 말에 사무기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동안 하늘을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십 번의 위기에서도 그는 하늘을 믿어본 적이 없었다. 오지회의 형제로서 수십 번의 겨룸이 있었고 그 중에는 위험한 순간도 적지 않았었다. 그래도 하늘에게 기원한 적은 없는 그였다. "하늘이 도와야 한다니 무슨 뜻이냐?"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는 독은 그리 많지 않아요. 더구나 갈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화공(火攻)을 사용해야 하는데 바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혁천련의 말에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기도 혁천련의 말뜻을 알아듣 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부하들에게 전달해라. 오늘밤에 우리는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방향 은 동쪽 갈대밭이다." "알겠습니다." 소명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열해 있던 팔십여 명의 부하들도 사무기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 "예." "소두령들을 모두 모아라. 오늘밤의 탈출에 대비해 총체적인 회의를 하겠 다." "알겠습니다." 사무기가 몸을 돌렸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눈에서는 횃불 같은 섬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놈들이 이제 여력(餘力)이 다했겠지?" "그럴 것이오." 당협의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로 당일수가 대답했다. 실질적인 명령 권자는 당협이었지만 공격을 주도하는 자는 당일수였다. "놈들의 반응이 어떠하리라 보나?"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놈들은 모든 여력을 써 버렸다고 생각이 됩니 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도주하는 것 뿐이오." 당일수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협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래도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당일수를 쳐다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측의 피해는 어떻게 되는가?" "보신 바와 같이 백 명이나 됩니다. 죽은 자가 도합 팔 십 이 명, 나머지는 중상(中傷)이라 무기를 들 수가 없소." "그들은 모두 어떻게 했나?" "모두 당문으로 후송했습니다." 당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큰 피해다. 놈들이 그토록 면밀하게 대응할 줄은 몰랐다. 비록 손 자 놈이 그들의 손에 죽었다지만 무림의 화살은 피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 다.' 당협은 나직하게 한숨을 몰아 쉬었다.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나 쌍룡채의 저항은 거셌다.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결과가 펼쳐지자 나머지 군소방파의 눈초 리가 따가워졌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에는 분노와 위기감이 고조되어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 려웠다. "좋아, 아우의 말대로 그들이 탈출을 하고자 한다면 어디로 선택하겠나." "아마도 그들이 탈출하리라 본다면 동쪽의 갈대밭이 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갈대밭은 지리적으로 공격하기에 유리하고 산을 타는 놈들이라 빠른 걸음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도주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지요." "그럴 만도 하군." 당협은 수긍하면서도 불안했다. 검문산은 너무나 넓었다. 만약 도주하기로 한다면 자신들이 일 장의 간격으 로 늘어서서 버틴다 해도 공간은 충분히 나올 판이었다. 검문산에 오르는 네 곳의 방향 중 적어도 두 곳은 포기해야 완벽(完璧)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모든 곳을 막기에는 제자들의 숫자가 모자랐다. 그렇다고 사천의 모든 무인 들을 불러올 수도 없었다. 당문만 해도 삼 백 명의 가솔이 투입된 상태였 다. '어디를 포기한다.' 그는 당일수를 돌아보았다. "어디를 포기하는 것이 좋겠나? 다른 곳은 정말로 선택하지 않을까? 설혹 우리의 생각을 역으로 집어 도주한다면 우리는 닭 쫓던 개꼴이 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쪽을 제외한 다른 세 방향은 너무 무리요. 우선 남 쪽은 관도이기 때문에 발각되기 쉽고 북쪽은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굉천뢰를 두려워 할 겁니다. 선택하기 어렵지요." "서쪽은?" "그곳이 조금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서쪽은 능선이 짧고 곧 평원(平 原)이 나옵니다. 당분간은 피할 수 있지만 오래 견디기는 어렵지요."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잖소." "아닙니다. 산이 울창(鬱蒼)해 빨리 전개할 수 없다는 것도 하나의 장애요 인(障碍要因)입니다. 밤에 탈출을 시도한다면 날이 새기 전에 검문산을 벗 어나야 하는데 불가능하지요." 끄덕끄덕― 당협은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제기랄, 산채의 산적 놈들을 살려두었다가는 언젠가 사천을 먹자고 덤비겠 군. 놈들이 이 정도의 심계(心計)가 있다면 무공이나 지략으로 우리에게 뒤 지지 않을 것이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다.' 꿀―걱― 당협은 침을 삼켰다. 설사 쌍룡채를 박살낸다 해도 후일이 걱정되었다. 만약 그들 중에 우두머리 하나만이라도 살아 도주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후일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검문산을 부수고 볼일이었다. 검문산은 포기할 수 없는 땅이므로...... "좋아, 그러면 인원배치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제 생각으로는 전체를 십 할로 보고 동쪽 갈대밭에 오 할, 서쪽에 삼 할을 배치하십시오. 나머지 일 할씩을 각각 만약에 대비한 측면으로 남쪽과 북쪽 으로 배치하십시오." "좋아. 공격은 해야 하니 남쪽과 북쪽에서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쾅! 당협은 탁자를 두드렸다. 모든 결정은 내려졌다. 이제는 야밤을 틈타 습격을 가하고 도주하는 놈들을 주살 하는 일만 남았 다. 당협은 가볍게 어깨를 폈다. * * * 만도화원주는 한 장의 서찰을 받아들고 킬킬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 었다. "킬킬킬, 그러니까 쌍룡채의 건방진 산적 놈들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렸 다 말이지!" 부르르르― 격동(激動)이 넘쳤음인지 만도화원주의 손은 부르르 떨렸다. 뿐만 아니라 몸에도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후후후, 우리 을목세가가 네놈들에게 당하고 낮잠만 자고 있을 줄 알았더 냐? 초풍비! 네놈은 피를 말리는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다." 만도화원주의 입술이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그는 을목세가라 했다. "크흐흐, 초풍비! 네놈이 내 여인을 가로채는 순간부터 난 너를 죽일 생각 만 했다. 비록 계집이 천하의 모든 것은 아니나 네놈도 쓰라린 맛을 보아야 한다." 만도화원주는 연신 키득거리는 웃음을 뿌렸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사래까 지 들리도록 웃는 모습이 마치 미치기 일보직전의 위기감까지 주었다. 파스스스스― 만도화원주의 몸에서 안개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니, 안개는 아니 었지만 누가 보았다면 그렇게 느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피워 올린 알 수 없는 힘은 짙은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거역하기 어려운 기운까지 물신 풍기고 있어 만약 누가 보았다면 아수라(阿修羅)를 보았다고 할 지경이었다. "후후후, 초풍비 조금만 기다려라. 나, 단화연(段華淵)이 너를 갈기갈기 찢 어 죽일 것이다." 단화연이라 했다. 당대 을목세가의 가주. 한때 천하의 상권을 지배하던 중원상단의 여인과 혼인하기 직전까지 갔던 사내. 기이한 일이었다. 강호에 알려진 소문에 의하면 단화연은 초풍비와 비슷한 연배(年輩)를 지니 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늙은이의 모습이 아닌가? 그가 정말 단화연이라는 것인가? 초풍비에게 자신의 여인을 빼앗기고 십년간 이를 갈았던 사내의 진면목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단화연은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멍청한 중원상단의 늙은이 네놈의 역할은 당분간만 지속시켜 주겠 어. 초풍비만 죽이면 네놈도 끝이다. 초란! 네년도 더 이상 가치가 없겠 지." 단화연은 몸을 돌렸다. 눈에 침상이 보이자 다가가 엉덩이를 디밀었다. 침상이 심하게 출렁였다. 어제 뒹굴었던 계집의 체취가 남아 코에 훅하고 다가왔다. 진한 반향과 사타구니에서 뿜어지던 냄새였다. 단화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후후후, 이제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인피면구(人皮面具)도 벗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군. 늙은이의 행세를 하기 힘들었는데 곧 사천을 먹어버리리라. 당문의 못된 짓을 핑계 삼아 그 동안 을목세가를 업신여겼던 놈들을 피로 물들여 주겠다." 단화연은 침상 머리에 있는 적색의 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숨 두 모금 몰 아쉴 시간이나 지났을까? "대령했습니다. 가주!" 소리없이 방문이 열리며 나타난 인형이 그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전신에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무복을 입고 얼굴에는 턱까지 내려오는 방갓을 쓴 사 내였다. 방갓 밑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마구 엉클어져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목소리마저도 분간이 쉽지 않았다. 밤마다 단화연을 찾아오는 사내, 얼음 덩어리 같이 무표정한 사내의 이름은 무영이었다. "그에게 가라." "예." "그는 아직 나에게 한 번의 약속이 남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에게 두 년 놈을 죽이고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라고 말해라. 마지막으로 이번 일만 해 결해 준다면 모든 거래(去來)는 끝이 난다고 말해 주어라." "알겠습니다." "그만 가 보아라. 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일을 마무리한 후 세가 (世家)로 오라." "알겠습니다." 사내는 몸을 일으켜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 의 몸은 곧 문을 열고 사라졌다. 너무나 조심스러워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출렁― 침상이 심하게 요동치며 단화연의 몸이 일어났다. 단화연은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점차 전신에 서려있던 살기가 사라져 갔다. "후후후, 이제부터 시작이다." 목소리는 더할 수 없이 냉정했다. 누가 옆에서 들어도 알아듣기 어려운 작 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였다. "이곳은 엽산에게 맡기고 오랜만에 세가로 들어가 보아야겠다." 단화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봐라, 엽산을 불러와라." "예." 어디선가 계집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바람이 부는 곳, 바로 만도화원주가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대두령님! 누군가 대두령님을 찾고 계십니다." 구불구불 휘어진 검을 닦는 그에게 소리를 치며 다가온 사내는 소명이었다. 소명은 이미 전투준비를 완전히 갖춘 듯한 모습이었다. 허리에는 두 자루의 도끼를 달고 있었고 등에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활과 전통을 맨 모습이었 다. 전통에는 삼십여 발의 강전이 꽂혀 깃털이 바람을 타고 흐느적거렸다. 머리 에 질끈 동여맨 머리띠가 소명의 결의(決意)를 나타내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인데...... 나를 찾는다고?" "그렇습니다. 일전(日前)에 왔던...... 그....... 형님의 아우, 혈부대형! 담붕비대협께서 오셨습니다. 담대협께서 둘째 형님이라는 분하고 같이 오셨 습니다." "뭐? 아우가?" '설마!' 사무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같이 몸을 일으켰다. 휙! 소명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쏜살같이 퉁겨나간 후였고 소명은 눈을 멀뚱거렸다. "허―참!" 소명은 나직하게 헛기침을 토한 뒤 빠르게 사무기의 뒤를 따랐다. * * * "하하하, 형님, 이게 무슨 꼴이요." 담붕비는 무너진 산채의 목책(木柵)에 걸터앉아 있다가 사무기가 나타나자 반가운 웃음을 뿌리며 몸을 일으켰다. 도우선 또한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 다. "네가 왔구나?" "하하, 형님도 왔소." 사무기는 그제야 도우선을 바라보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형님!" "일어나라. 이제 보았으니 되었잖아. 오다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던데 먼저 대책을 생각해야 할 것 같구나." 도우선은 사무기에게 다가가 몸을 잡아 일으켰다. 사무기는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도우선의 팔을 잡았다. 오 년이 넘도록 행방이 묘연했던 형님이었 다. 담붕비도 도우선이 죽었거나 사라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사 무기는 사실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가닥 희망만이 남아있어 쌍룡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셈인데 도우선이 나 타났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 표현(表現)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말로 하자면 한이 없다. 대형께서 산을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난 이미 죽었 을지도 모르겠다." "대형이요?" "그래, 대형께서 내려오셨다. 아마 지금 이곳으로 오시는 중인지도 모르겠 고...... 우선 중요한 것부터 해결하도록 하자. 놈들이 산아래 구름처럼 모 여 있더구나." "무엇 하러 오셨소. 죽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위급함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도와 달려왔다. 그 동안 잘 견디어 냈구나." 사무기는 대답대신 도우선의 손을 움켜잡았다. 둘 사이에서는 따듯한 정감 이 전달되고 있었다. * * * "자, 시작합시다." 당협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수십 명의 군웅(群雄)들이 대답도 없이 흩어져 갔다. 그들은 사천당문의 각주들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당협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피―이―융―! 한자루의 향전(香箭)이 쏘아 올려졌다. 무려 백여 장이나 솟구친 향전은 하늘에 번쩍이는 불꽃을 만들었고, 반짝거 리는 불꽃을 탐지(探知)한 검문산 일대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팟! 팟!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향전이 쏘아 올라갔다. 처음에 쏘아진 향전보다 나중에 쏘아진 향전의 불꽃이 작기는 했으나 수십 발의 향전이 쏘아지자 검문산 주변은 그야말로 불꽃놀이를 하는 듯 환해졌 다. 검문산의 정상을 향해 피어오른 향전은 각기 숫자가 달랐다. 동쪽방향에서는 십여 발의 향전이 솟구쳐 올랐고 서쪽 방향은 삼십여 발이 었다. 남쪽은 사십여 발이 올랐고 북쪽은 이십여 발이었다. 동쪽에서 피어오른 향전은 넓게 분포(分布)되어 사방에서 쏘아 올라갔고 다 른 방향에서 쏘아 올라간 향전은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쏘아져 올라갔다 슈슈슈슈― 간혹 다른 색의 향전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많은 수의 향전은 밝은 빛이었으나 간혹 붉은 색의 향전이 피어오르기도 했 고 황색의 향전도 있었다. 동쪽에서 피어오른 향전 중에는 청색의 향전도 있었다. "허허허! 이거야말로 대보름인 것 같군." 당협은 일부러 어색한 듯 웃었다. 마음속에 있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괜히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 것 같았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너희들은 소모품(消耗品)이다. 이 기회에 사천당문의 힘을 보여주고 사천 을 다시 지배하겠다.' 당협의 본심은 그것이었다. 사천을 나누어 먹자고 덤벼드는 나머지 다섯 개의 문파에 사천당문의 위력 을 보여줄 생각 때문에 그는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었다. "우리는 맡은 구역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당일수가 자신을 따르는 이십여 명의 사천당문 제자들을 데리고 빠르게 사 라졌다. 그는 서쪽의 산등성이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휙!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신형을 솟구쳤으나 한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파공성 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우리도 가겠습니다." "모두 서둘러라. 이 기회에 악한 무리들을 없애 사천에 평화를 만들어야 한 다." "그러시지요. 가주도 몸조심하십시오." 휙!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흩어져 갔다. 그들은 사천당문을 이루고 있는 대소 전(大小殿)의 전주들로 검문산의 동로(東路)를 맡기로 되어있는 제자들이었 다. 그들이 맡은 갈대밭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각 전각 의 많은 제자들이 필요했다. 당문의 제자 백여 명이 동쪽 갈대밭에 배치된 상태였다. 더욱 많은 무인들을 배치 할 수도 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사천의 군소방 파들이 사천당문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을 아는 당협 은 분노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방계가문이라 할 수 있는 사천만도대와 같은 문 파들이 당문을 등지고 물러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혹시 나중에라도 무림 의 질타(叱咤)로 가문을 이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당협은 분노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우현(雨絃)은 어디 있느냐?" "대령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바삐 뛰어왔다. 전신에 날렵해 보이는 경 장을 착용하고 있었고 허리와 등을 이은 가죽띠에는 손가락을 두 개 합한 정도의 가는 비도(飛刀)가 수십 자루나 꽂혀 있었다. 몸은 갈대가 연상되도록 가늘어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쓰러질 듯 보였다. 몸 에 착 달라붙은 경장과는 다르게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고 있어 가볍게 부는 바람에 살랑거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 눌러쓴 방갓이 너무 넓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이었다. 비 록 희미한 달빛이 사위를 비추고 있기는 했으나 우현의 얼굴까지 비추지는 못했다. 우현은 당문에서 추적술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제자였다. "추적하라. 놈들이 만에 하나라도 살아난다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칼날을 들 이댈 것이다. 뿌리부터 없애야 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가라!" "예!" 휘리리릭―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현의 몸은 나무숲 사이로 스며들었다. 한 마리 비조같은 신법을 펼친 우현은 곧 당협의 시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모두 사라지자 당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아직도 남아 그를 주시하며 눈을 빛냈다. 한결같이 말을 타고 있는 당문의 제자들이었다. 당협을 따라 검문산에 이른 삼 백 명 의 제자들 중 오십여 명이 도열한 모습으로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 었다. "당문의 제자는 지금부터 네 개의 대(隊)로 나눈다." "예!" "각각 이대제자(二代弟子) 중의 각주(閣主)가 지휘를 하고 동서남북에 흩어 져 살아남아 도주하는 자들을 도륙하라. 단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가라." "가주의 명을 받듭니다." 스스스스― 파파팟! 오십여 명의 제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흩어져 갔다. 각기 네 줄기로 나뉜 당문의 제자들은 도주해 내려오는 쌍룡채의 산적들을 추적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유독 그들만이 말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추적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했다. "후후후, 모든 것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당협은 입가에 흐르는 침도 의식하지 못한 채 뿌듯한 가슴으로 웃었다. * * * "드디어 시작인 모양이오." "그렇군. 철저하게 부셔주자. 그 대신 우리에게 피해가 있어선 안되니 최대 한 은신하다 일제히 빠져나가야 한다." 검문산의 정상에 선 네 명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한때 오지회의 형 제들이었던 그들은 죽음의 고비에 모여있는 상태였으나 그리 걱정하지는 않 는 표정이었다. 개개인이 지닌 일신상(一身上)의 무예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치밀한 준 비가 되어 있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더구나 대형이 빠지기는 했으나 그들은 오지회의 찬란한 명성을 지니고 있던 한때의 영웅들이었다. "미친 듯 쏘아 올리는군." "우리를 현혹시키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데." 담붕비는 뽑아든 혈부를 흔들며 피어오르는 향전을 가리켰다. 그들의 눈에 도 쉴 사이 없이 피어오르는 향전이 환하게 보였던 것이다. "후후후, 이제 몸 좀 풀어보자고......." 으드득! 도우선이 목을 돌리자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수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관절이 근육과 맞부딪치며 아우성을 터트렸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4 페이지: 1/41 자료번호: 277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4장-죽음을 건 탈출 당일수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무림의 고수인 그가 숨이 턱에 찰 일이 없었으나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크르르르르― 그의 등뒤로 굴러 내려오는 바위는 그가 일찍이 느끼지 못했던 공포를 느끼 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으으...... 이러다가는 죽고 말 것 같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피할 곳이 한곳도 보이지 않다니......' 당일수는 애간장이 탈 지경이었다. 불과 일 각 전만 하더라도 자신을 따르던 부하의 수는 삼십 명에 가까웠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빽빽하게 자란 나무로 발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기고만장해서 미친 듯 산정으로 쏘아갔었다. 그들을 막는 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무의 숲을 벗어나자 오백여 장에 이르는 벌판 같은 지형이 나타났다. 벌 판은 아니었으나 일부러 나무를 깎은 듯 보이는 능선은 능선이라 하기보다 는 협곡처럼 오목한 지형으로 변했다. "억!" 앞서 길을 열던 제자가 쓰러지며 주저앉았다. 낚엽이 깔린 능선에서 삼각형 (三角形)으로 생긴 암기가 퉁겨나와 제자의 발등을 뚫어버린 것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자신의 앞에서 쓰러진 제자 외에도 적지 않은 자들이 발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핑!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고 느낀 순간 한무더기의 돌들이 머리위로 날아왔다. "투석기다. 피하라." 적게는 주먹만한 돌에서부터 크게는 사람 몸집 만한 돌이 허공에서 쏟아져 내렸다. 돌이 빠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투석기를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투석기는 살아있는 나무를 휘어 가지를 치고 둥근 철판(鐵板)으로 만든 기 구를 단 것으로 나무의 탄력을 이용해 돌을 날리는 기구였다. 간혹 철로 만든 투석기가 있기는 했으나 검문산에 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철로 만든 투석기는 너무나 무거웠고 제조(製造)도 어려웠기에 나무를 휘어 만든 투석기가 맞을 것 같았다. "몸을 숙이고 사면(斜面)으로 접근하라." 콰드등! 당일수는 장력을 뿜어 날아오는 바위를 한 손으로 쳐내며 외쳤다. 그의 손 에 충격이 오고 부서진 바위가 뽀얀 먼지를 날렸다. "큭!" 그의 등뒤를 따르던 제자가 나뒹굴었다. 어둠 속이기는 했으나 제자가 발을 끌어 안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바닥에 깔린 암기를 밟은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는 돌이 날아들고 발 밑에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는 암기 가 그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물러서지 말고 신속하게 진격하라." "와와와!" 당일수의 외침에 용기를 얻은 제자들이 함성을 뿌리며 빠른 속도로 몸을 솟 구쳤다. "커으윽!" "켁!" 돌에 맞아 다시 수명의 제자가 땅으로 추락하며 나뒹굴었다. 바닥으로 나뒹 군 제자들은 다시 몸을 비틀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암기가 그들의 몸을 사 정없이 찔렀다. "앞으로!" 당일수는 몸을 숙여 동글게 말며 탄력 있는 공처럼 앞으로 쏘아갔으나 곧 걸음을 멈추었다. 비스듬한 언덕 위에 나무를 깎아 만든 목책이 세워져 있 었던 것이다. 목책은 높아야 일 장을 넘지 않았다. 문제는 목책 뒤에 숨어있을 쌍룡채의 산적들이었다. 그들이 어느 정도의 무 공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는 그로서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놈들의 계략이 아닐까?' 당일수는 한 발 물러서며 외침을 토했다. "목책을 타넘어라." 휘리릭! 휙! 당일수의 명을 받은 십여 명이 몸을 솟구치며 목책을 넘어갔다. 핑! 피피핑!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으며 강전이 쏘아져 들어왔다. 길이가 세 자가 넘을 듯 긴 강전은 정확하게 다섯 명의 몸을 파고들었다. 허공에서 피가 뿌려졌 다. 털썩―툭― 시체가 된 제자들의 몸이 나동그라지며 진한 피비린내가 코로 스며들었다. "이익!" 당일수는 전신의 내공을 손에 모아 벼락같이 장력을 뿜어내었다. 그가 후려 진 장력은 일신의 내공이 모두 모인 것이라 설사 바위라도 빠갤 수 있는 위 력을 지니고 있어 자못 위세(威勢)가 등등했다. 휘리리리리― 쾅! 당일수가 뿌려낸 장력은 목책의 일부를 부수며 날아가 땅거죽을 두드렸다. 어둠 속에서도 말라 비틀어진 낙엽이 날고 나뭇가지가 으스러지는 것이 보 였다. 파파팟― 그러나 목책이 부서지며 목책 뒤에 숨겨져 있던 암기가 날았다. 나무를 뾰 족하게 깎은 것으로 죽창(竹槍)과도 같았다. 더구나 무엇에 탄력을 받았음 인지 빗살처럼 빨랐다. "어어어, 창이다." "피해라. 크아아악!" 우왕좌왕하던 제자들의 입에서 비명이 울리며 두 명이 가슴과 배를 부여 안 고 무너지듯 나동그라졌다. 그들의 전신에는 각기 서너 개씩의 나무를 깎은 창이 깊숙하게 박혀 이미 절명(絶命)한 상태였다. 부르르― 잠시 살아있던 제자들도 곧 목을 떨구었다. '악독한 놈들이다. 그러나 치밀하도록 무서운 놈들이야.' 등골이 시원해지며 땀이 흘렀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흐른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옆에서 제자들이 쓰러지고 뒹굴었으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모두 죽여버리겠어.' 당일수가 전신에 진기를 유포시키며 무작정 앞으로 다가갔으나 더 이상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암기도 쏘아지지 않았고 사람의 그림자는 더욱 묘 연했다. '혹시 놈들이 도주한 것이 아닐까?'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가다 전황(戰況)을 파악했다. 어디에고 사람의 그림 자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물러섰거나 도주한 것이 분명했다. "놈들이 도주했다. 총공격하라." "와! 와! 와!" "앞으로......" 그의 명이 떨어지자 수명의 무인들이 미친 듯 목책을 넘어 날아올랐다. 강 전이 날지도 않았고 투석도 없었다 검문산의 정상방향에는 고요만이 감돌았 다. 크르르르― '이게 무슨 소리지?' 정신없이 몸을 날리던 당일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갈리는 듯한 소리 가 들려온 것이었다. 당일수는 고개를 들어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돌! 집체 만한 돌이 그들을 향해 굴러오고 있었다. '아차, 지형(地形)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깜박했다.' 지형이 우묵하게 바뀌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 실수였다. 산 능선이라 돌을 굴리거나 하는 공격은 없을 거라 지레짐작했던 그였기에 무심코 넘긴 지형 이었다. 드드드드― 바위는 우레와 같은 굉음(轟音)을 뿌리며 굴러 내려왔다. 바위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바위끼리 부딪치는 소리만으로도 양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도주하라." 미친 듯 소리를 지른 그는 제자들을 도외시한 채 번개같이 산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다르던 제자들이 미처 상황을 인식(認識)하기도 전이 었다. "피하란 말이다. 어서!" 그제야 눈치를 챈 제자들과 대소문파의 무인들이 허둥거렸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바위는 이미 수없이 많은 무인들을 짓이기며 굴러 내리고 있었다. 퍽! "크아아아―! 비명소리가 당일수의 발걸음을 잡았지만 그는 무시(無視)하고 미친 듯 뛰었 다.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의 전부였다. 그의 곁에 있던 무인들이 점점 뒤로 멀어져 갔다. 그의 경공(輕功)을 따를 제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를 따라 뛸 수는 없었다. 퍽! 어디선가 몸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 각 전부터 뒤를 따라 굴러오는 바위는 결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오십여 장 앞에는 나무들이 울창한 수림(樹林)이었다. 만약 수림까지 갈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적이었다. 아무리 큰 바위라 하더라도 수백년이나 자란 나무의 숲을 무작정 돌파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듯 싶었다. 휘리릭― 그는 발로 바닥을 찍으며 앞으로 쏘아갔다. 눈 앞으로 나무숲이 다가왔다. '조그만 더' "크으윽!" 마음속으로 외치던 그는 무릎을 굽히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발바닥에 서 시작해 머리 속을 하얗게 만드는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이게 뭐지?" 당일수는 자신의 발에 박혀든 물체를 뽑았다. 발바닥에 찢어지는 소리가 들 리며 손에 잡힌 물체가 발바닥과 분리되었다. 신발도 같이 벗겨졌다. 당일수는 손에 들린 거무튀튀한 물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삼구정(三鉤釘)이다."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변했다. 삼구정이 박혔던 다리에 힘이 빠지며 후들후 들 떨렸다. 무릎이 안정을 잃고 자꾸 안으로 미어져 들었다. 삼구정은 바닥에 수북하게 깔려있는 상태였다. 조금 전 제자들이 나뒹굴었던 이유는 삼구정 때문이었다. 자욱하게 깔린 삼 구정을 피한 제자들과 무인들은 그야말로 복이라 할 수 있었다. 삼구정은 당문에서 처음 만든 병기로 삼각뿔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낙엽 속 에 묻어두거나 풀숲에 숨겨 말의 발을 상처 내거나 적의 공격을 늦추는데 사용하는 작은 암기였다. 비황석이나 혈리표처럼 적을 살상하는데도 매우 유용한 암기로 흔히 사용하 는 것이었다. 특히 삼구정은 아무렇게나 집어던져도 삼각뿔 중 하나가 뾰족하게 서기 때 문에 암기를 설치하지 못하는 자라해도 뿌리기만 하면 되었다 삼구정의 면에는 가는 홈까지 파여 있어 때로는 독이나 삼구정보다 가는 암 기가 숨겨지기도 했다. 드드드― 한참을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당일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뒤에서 밀려 드는 소리를 다시 인식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휙! "아흑! 몸을 일으켜 신형을 전개시키려던 당일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하체가 떨 려 쉽게 신형을 전개시키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제길, 이곳까지 삼구정이 깔려있다니......' 당일수는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크아아아―"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미 집채보다 서너 배는 커 보이는 바 위가 그의 몸을 덮치고 있었다. '어서!' 등으로 덮치는 바위를 바라보던 그는 눈에 희망이 물들었다. 눈앞에 가는 바위틈이 보였다.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능히 숨길 수 있는 바위틈이었다. 당일수는 바람처럼 몸을 날려 바위 틈으로 숨어들었다. 쿠르르르르― 등을 타고 바위가 굴렀다. 등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당일수는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눈앞에 별이 춤을 추었다. "형님, 출발합시다." "좋아, 가자!"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네 개의 무리로 만든 쌍룡채의 무인들은 서서히 행 동을 개시했다. 각각 두 명의 소두령이 앞뒤에 서고 오지회의 네 명은 무리 의 중앙에 섰다. "형님이 앞에 서서 길을 안내하시구려." "그렇게 하지." 사무기가 소속되어 있는 이십여 명이 앞에 섰다. 그의 옆에는 소명이 커다 란 보따리를 둘러멘 채 뒤를 따랐다. 소명이 둘러멘 자루는 너무도 커 이기 기도 힘이 들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소명은 힘들이지 않고 자루를 둘러메었 다. "무겁지 않느냐?"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가자!" 스슥― 이십 명은 신속하게 앞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무너진 산채의 목책을 넘은 그들은 각 무리 사이에 이십여 장의 간격(間隔) 을 두었다. 그들의 행동은 너무도 은밀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곁으로 지나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우리도 떠납시다." 두번째의 무리에는 도우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단창(短槍)이 달빛을 받자 그는 땅에 푹 찍어 흙을 발랐다. 최대한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단창이 그의 병기는 아니었으나 병기를 잃어버린 지금 그가 선택할 여유는 없었다. 마구 널려있는 적들의 시체 속에서 찾아낸 병기일 뿐이었다. 더구 나 그는 병기보다 육장(肉掌)으로 전개하는 일월장(日月掌)을 사용하는 무 인이었다. "산채에 굉천뢰는 모두 설치했지?" "물론이야. 걱정하지 말고 앞서 가라니까?" 혁천련의 물음에 담붕비가 말의 이빨처럼 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담붕비는 짧은 시간에 산채의 부하들을 독려해 모든 돌들을 모으고 나무들 을 모아 커다란 돌무더기를 쌓았다. 돌무더기는 동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 을 보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떠나면 자동적으로 터져서 사방으로 굴러가게 만들어야 해." "알아, 어서 가라니까!" 세번째의 무리가 출발했다. 혁천련이 이끄는 삼십여 명의 무리는 서서히 어 둠 속으로 사라졌다. "박장형! "예, 대협!" 육소두령 박장형이 앞으로 나섰다. 키나 사용하는 무기까지 담붕비와 너무 나 닮은 사내였다. 허리에 걸린 박도가 그러하거니와 팔 척에 이르는 키도 닮았다. 박장형은 담붕비의 앞에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붙여라." "예!" 박장형이 몸을 돌렸다. 그는 전 무리의 가장 마지막에 따를 소두령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검문산의 지리를 환하게 알기 때문에 마지막 대열에 남게 된 것이었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라." 휙! 손가락으로 도열해 있던 부하 둘을 지명한 그는 훌쩍 몸을 날려 어둠 속으 로 스며들었다. 지명을 받은 부하들도 박장형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어떻게 빠져나간다. 놈들도 눈치가 있으니 갈대밭에 가장 많이 포진(布陣) 해 있을 텐데......' 담붕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스위이이잉―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형님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이 끝날 때, 박장형이 돌아왔다. 그의 등뒤에도 두 명의 부하가 담 붕비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예." 이십 명이 되지 않는 그림자들은 은밀하게 이동을 시작했다. 병기가 적에게 노출되거나 달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기름먹인 숱에 발랐고 얼굴에는 숯검정 을 발랐다. "신속하게 서둘러라. 우리의 앞에 간 대열에 너무 쳐져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소리가 너무 크다. 죽여라." 수스스슷― 사삭! 바람에 미끄러지는 갈대 잎처럼 은밀하게 이동이 시작되었다. 앞에선 부하 들은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어디에도 나타나는 자는 보이지 않 았다. 쿠쿵! 우루루루루루― 그들의 등뒤에서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명의 부하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 하늘로 치솟은 번쩍이는 섬광(閃光)이 보였다. 땅 거죽도 가볍게 흔들렸다. 박장형이 불붙인 굉천뢰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불꽃은 곧 멎었으나 흔들리 는 땅거죽의 요동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반대쪽으로 구르는 돌의 소리였 다. * * * 슥! 사무기는 손을 들어올렸다. 미약하지만 인간이 뿜어내는 땀 냄새를 맡았던 것이었다. "놈들이 숨어있는 것 같아." 도우선이 앞으로 다가왔다. 사무기가 이끄는 무리와 도우선이 이끄는 두번 째 무리는 거의 맞닿아 있었다. "잠깐 기다려." 도우선은 청력(聽力)에 내공을 모았다. '흠, 제법 많군. 오른쪽에 둘, 왼쪽에 셋, 정면에는 도합 열 명 정도 되는 군.' "내가 정리하마. 뒤를 맡아라." 끄덕끄덕! 사무기가 알았다는 표식을 하며 손을 들었다. 뒤따르던 부하들이 자세를 낮 추며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을 뿜었다. "조용히 병기를 뽑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 스스슷― 차―아―앙― 병기는 아무리 조용히 뽑아도 소리가 나는 법이었다. 쌍룡채의 산적들이 아 무리 조심스럽게 병기를 뽑았다고는 하나 소리까지 완전히 죽이기는 어려웠 다. 다행스러운 것은 적이 아직은 멀리 있다는 것. 당거정(唐巨霆)은 자신의 가문이 있는 사천을 떠나 중원에서 오래 동안 무 인생활을 한 자였다. 친구들은 그를 가리켜 인의도신(仁義刀身)이라 부르며 추켜세워 주었으나 기실 그는 사천당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하찮은 무인일 뿐이 었다. 아무튼 그는 사천당문의 후광(後光)이 자신을 비추어주는지 생각지 못하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뛰어나 중원에서 인의도신이라 부른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당거정은 보름 전 사천당문에 도착했고 나흘 전 당가타를 떠나 이틀 전에 검문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갈대밭에 잠복한 것은 불과 두 시진 전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열두 명의 제자들이 갈대밭으로 투입되어 오천 장에 이르는 면적(面積)을 맡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넓은 지역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있 었다. 그가 아는 사천당문은 강했다. '흐흐흐, 오너라. 인의도신의 이름을 알려주마.' 당거정은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흥분을 느꼈다. 한 가지 걱정은 있었다. 갈대뿌리 밑에 숨은 지 벌써 두 시진이 지나고 있 었다. 한 시진 전부터 생리적인(生理的)인 욕구가 밀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당거정은 생리적인 욕구를 참기가 어려웠다. '빌어먹을!' 생각 같아서야 쉽게 해결하고 싶지만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아랫배가 더부룩해지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지금은 몸을 일으킬 때가 아 니었다. '제길...... 아무 곳에서나 속썩이는군.' 당거정은 일부러 아랫배에서 힘을 뺐다. 힘을 주다가는 만사(萬事)가 그르 쳐질 것 같았고 더 이상 힘을 주다가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 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차차창― 어디선가 미약한 소리가 들리자 그의 귀가 날카로우리 만치 예민해졌다. '놈들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는 갈대뿌리 밑에 누운 채로 검을 움켜잡았다. 만약 누구라도 다가오면 일도에 양단을 낼 태세였다. 그러나 더 이상 병장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들리지 않다니......' 당거정은 더욱 귀를 크게 열었다. 듣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몸을 비틀어 귀를 갈대 뿌리 밖으 로 내밀었다. 그제야 아련히 들리던 병장기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가 귀를 최대한 열며 청력을 배가 시킬 때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몸 을 돌렸다. 창! 날카로운 금붙이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드는가 싶더니 아무 것도 들리지 않 게 되었다. 귀가 멍해지고 바람이 마구 부는 느낌이 들 뿐 사람의 말소리나 미세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웬 조화(造化)냐?' 부스스스― 당거정은 갈대뿌리를 밀며 몸을 일으켰다. 한 자루의 단창이 그의 목을 찌 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큭!" 당거정은 트림을 하듯 미약한 신음을 토하며 자신의 목을 찌른 암중인(暗中 人)을 바라보았다. 깨끗한 피부를 지닌 중년인이었다. 손에는 핏방울에 물들어가고 있는 단창 을 쥐고 있었다. 자신을 찌른 자가 오지회의 도우선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 다. '재수 더럽게 없군. 이럴 줄 알았으면 생리적인 욕구나 배설(排泄)하는 건 데......' 툭! 당거정의 목이 꺾여졌다. "무슨 일이야?" 불과 다섯 걸음 밖에서 한 사내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역시 몸에는 검을 안 듯이 가슴에 품고 땅속에 숨어있었던 사천당문의 제자였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기이한 소리가 들리자 몸을 일으킨 사 내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무성한 갈대만 보였다. 그러나 이 내 누군가 자신의 얼굴 위에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 누구?" "알 것 없다. 편안하게 죽었다는 것만 기억해라." 푸―욱! 한 자루의 단창이 천돌혈(天突穴)을 뚫고 목뒤로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사 내는 얼굴에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도우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몸을 움직 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퓨―슛! 단창이 빠지며 부서진 천돌혈을 통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내는 진한 피비린내를 느낄 수가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게 내 피야.' 허우적! 한참을 허우적대던 사내의 손이 무너져 내렸다. 목은 꺾여진 지 이미 오래 였다. 아무런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우연히 본 중년인의 모습만이 망막 (網膜)에 맺힐 뿐이었다. "큭!" "컥!" 계속해서 비명이 울렸다. 도우선은 번개처럼 몸을 움직이며 암중에 몸을 숨긴 자들의 목 줄기를 찔렀 다. 천돌혈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나는 적이 없는 창술이었다. 땅속에 몸을 숨켰던 자들은 정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하나둘 땅바닥에 피 칠을 하며 무너졌다. 스슷! 도우선이 손을 들었다. 매복했던 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신호였다. 그의 손이 올라가자 몸을 엎드리 고 있던 오십여 명의 쌍룡채 산적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형님!" "알았다. 우리는 직선으로 간다. 직선으로 가서 갈대밭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강으로 간다. 어부들의 배를 뺐어 타고 우선 장강으로 간다." "알았습니다." 사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선이 이야기한 것 외에 사무기로서는 달리 방법이 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도우선의 말을 듣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았다. "쳐라!" "막아라." 오랫동안 강호활동을 삼가고 있었던 천양필사(天壤必死) 당염보(唐廉保)는 힘찬 함성을 터트렸다. 그의 명호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강호 활동을 삼가고 있었지만 하늘을 우러러 죽이지 못하 는 자가 없다는 그의 명호는 당문에서조차 명예로 여기고 있었다. 이미 팔십을 넘긴 그는 당협의 막내삼촌으로 그 동안 원로원에서 바둑이나 두며 소일(消日)했었지만 부득이 당협의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어 검문산에 나타난 자였다. 그의 앞에 포진(布陣)하고 있던 당문의 제자 삼십 명이 단 한사람에 의해 마치 도살장의 가축처럼 도륙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부들부들 떨 었다. 희미한 안개가 쌓여 형태를 구분할 수 없는 검을 든 사십대의 중년인이 무 지막지하게 흔들어대는 검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제자들을 보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치치치칫―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번개같은 붉은 섬광이 허공에 번뜩일 때마다 쓰러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제자들 뿐이었다. 미쳐 손도 쓰지 못하는 제자들이었다. "빌어먹을! 놈들은 뭐 한 거야. 이곳까지 오도록 향전도 하나 올리지 못했 다는 거야." 당염보는 불만스러운 음성을 뿌렸다. 제자들이 지키는 곳은 동쪽 갈대밭에 서도 제법 뒤쪽이었다. 앞에는 적어도 칠십 여명의 제자들이 깔려있었다. 그런데도 쌍룡채의 산적들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휘두르는 검에는 힘이 들어있었고 보기에도 섬뜩한 검광만이 난무(亂舞)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어. 모두 불러야 해.' 당염보는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품속에 들린 향 전을 끄집어내었다. 그의 뒤에는 불과 삼십 명이 지키는 마지막 저지선이 있을 따름이었다. 만약 자신들이 지키는 저지선이 뚫린다면 마지막에 배치된 추살대도 안전하 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허허허, 노인네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누구?" 팟! "허헉!" 돌아보던 당염보는 팔뚝에 찌르르한 충격을 느끼고 쏘아 올리려던 향전을 떨어뜨렸다. 팔뚝에서 느껴지던 통증은 서서히 어깨를 타고 전신으로 흘렀 다. 당염보는 자신의 팔뚝을 쳐다보았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나무 창이 박혀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나무 창은 맥 문을 뚫고 들어가 팔목 뒤에까지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붉은 피가 스며 나왔다. "누...... 누구냐?" "이봐, 노인네! 만약 당신이 향전을 올리면 우리의 생명은 누가 보장해 주 겠어. 그 뿐이야? 이곳으로 모두 몰려올 것은 뻔하잖아." 담붕비는 나직하게 웃으며 키득거렸다. 동시에 손에 들린 혈부를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스이이익― 추춤! 목에 스며드는 칼날 같은 살기를 느낀 당염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크아아악!" 제자들의 비명이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이마에서 흐 르는 땀도 닦을 여유가 없는 그로서는 제자들의 죽음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 가 없었다. "누......누구요?" "이런 빌어먹을! 그럼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겁 없이 설쳤단 말야. 말해 주지.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오지회라면 말이지, 나는 담붕비라고 불러." "으으...... 혈부!" 당염보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두려움에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하필...... 이들이 오지회였다니...... 우리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당염보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미 십 년 전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오지회의 젊은 무인들이 천하를 휩쓸었 다는 이야기를 그도 들었던 것이다. 직접 본적은 없었다. "설마?" "뭐가 설마? 내가 오지회의 담붕비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단 말이야. 뭐 야." 답붕비는 입에 침을 튀겨가며 분노를 터트렸다. 나름대로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던 담붕비는 자신을 의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당염보를 부릅 뜨고 노려보았다. "아......아니! 듣기로는 혈부는 소림의 장문인과도 일전을 벌여서 꿀린 적 이 없다고 들었소이다. 그런데 이들 산적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러시는 지......" 당염보의 목소리가 비굴하게 변했다. 비굴하기보다는 두려움에 깃든 목소리 였으나 담붕비가 듣기에는 충분히 비굴하게도 들릴 목소리였다. 추춤추춤― 당염보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멍청한 사천당문 놈들 같으니...... 이건 만도화원주가 당문을 이간질 시 킨 거란 말이다." "이간질?" "궁금하면 나중에 당협에게 물어봐! 놈이 만도화원주에게 이용당한 거니까. 알았어." "믿을 수 없소." "그렇겠지. 네놈들은 사천을 나눌 계획만 세우다보니 그렇게 되었으니까." 휙! 한줄기의 암경(暗輕)이 밀려든 순간 당염보는 몸을 움찔 떨며 몸을 좌측으 로 기울였다. 그의 눈에 날아드는 한줄기의 빗살이 보였기 때문이다. 당염보는 몸을 기울임과 동시에 소매를 휘둘러 벼락같은 경력과 함께 암기 를 뿌렸다. 파파파파― 옷자락에서 삼십여 줄기의 경력이 일어나 갈대에 부딪쳐갔다. 사천당문이 자랑하는 절정의 암기수법이었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자부하는 절기이기도 했다. 휘류류류류― 경력이 밀려들자 담붕비를 향해 날아가던 암기와 경력에 잘린 갈대가 갑자 기 방향을 바꾸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헛, 나선강기(螺線剛氣)!" "눈은 있군, 그래!" 담붕비는 언제 잘라 들었는지 손에 들고있던 갈대를 흩뿌리며 황소처럼 거 칠게 숨을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담붕비가 집어던진 갈대는 나선강기라 불리는 무공의 정화(精華)였다. 나선 강기는 상대의 경력 흐름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천하없어도 피할 도 리가 없었다. 나선강기를 피하는 방법은 날아드는 경력이나 암기를 몸으로 받는 것이었 다. 따라서 몸이 금강불괴(金剛不壞)이거나 철포삼(鐵布衫)같은 외가기공을 익힌 자만이 가능했다. "오래 다툴 수 없으니...... 이거나 받아라." 파파파― 담붕비의 손에 들려있던 십여 줄기의 갈대가 허공을 뒤덮었다. "으으으......" 너무도 급한 나머지 당염보는 땅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날아들던 갈대가 땅 바닥에 박혀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의 생각이 적중해서 두 개의 갈대는 땅바닥에 박혀들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개의 갈대를 완벽하게 피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차앗!" 당염보는 급히 암기를 다시 뿌려내고 검을 뽑았다. 날아드는 갈대들을 향해 엄밀초밀(嚴密礎密)의 수법을 전개했다. 한순간 그의 몸은 검막(劍幕)에 쌓 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파파팍! 갈대가 검에 부딪치며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허공에 날리던 갈대가 주 춤하는 듯하더니 더욱 거세져 당염보를 향해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아홉 조각이었으나 수십 조각으로 변한 갈대조각은 모두 암기가 되어 당염보를 핍박(逼迫)해 들었다. 퍽! "커흑!" 파파파파파― 최초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신음이 터졌다. 당염보의 비명이 채 가시기 도 전에 수십 개로 나뉘어진 갈대조각이 그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당염보의 왼팔이 어깨부터 잘려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피가 폭포처 럼 솟구쳐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담붕비가 혈부를 돌리며 징그럽 게 웃고 있었다. "으으으......" 비명이 애처롭게 울렸다. "당염보, 잘 생각해라.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설사 수치를 당했다 하더라 도 살아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만화도원주의 농간에 속지 말아라." "헉!" 고통을 참으며 식은땀을 흘리던 당염보의 몸이 무너졌다. 그의 몸에 박힌 갈대조각이 붉게 물들어갔다. 담붕비는 몸을 돌렸다. 이미 모든 싸움은 끝나 있었다.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갈대 사이에 쓰러져 갈대 줄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 다. 진한 혈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그를 왜 살려 주느냐?" 도우선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모두들 그를 주시했 다. 산채의 부하들도 그를 쳐다보았다. 담붕비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형님들은 언제까지 막연한 적대감정(敵對感情)을 취할 거요. 당염보가 조 금이나마 도움을 줄 거요." "그럴까?" "물론이죠. 내가 대형에게 늘 어리석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이번만큼 은 확실해요." "그래, 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도우선의 말에 모두 동의를 했다. "모두 가자." 도우선의 말에 쌍룡채의 무인들이 다시 움직이기를 시작했다. 다시 네 개의 무리를 만든 그들은 이십 장의 거리를 유지하며 은밀하게 전진하기 시작했 다. "우리도 가세." "예, 대협." 마지막으로 담붕비가 이끄는 무리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들이 사라진 자 리에 흥건한 핏자국과 진한 혈향만이 사방을 감돌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으으으,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음모야." 부스스스― 당염보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 박힌 갈대조각들은 아직도 핏방울을 흘려내고 있는 상태였다. 비틀비틀― 당염보의 몸은 심하게 비틀거렸다. "으으으......그건 사실일 수도 있어. 근래 사천당문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고 느꼈었지......"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당염보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비척비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쾅! 당협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태사의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파스스스― 손잡이가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의 옆에 앉은 장로들도 불안감 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움찔 떨었다. 그만큼 당협의 분노는 파괴적이었다. "가주, 고정하시오." 장로 천검선협(天劍善俠) 당무웅(唐武雄)이 그를 말렸다. 당협은 당무웅을 노려보았다. 움찔! 당무웅은 당협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 무리 장로라 한들 미친개는 누구나 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길...... 완전히 미친개로군.' "아우!"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는지는 잘 아니 그만 합시다." 사실 당무웅은 속으로 부글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힘이 들었다. 더구나 당무웅의 당문 내 서열을 보면 비록 나이는 당협에게 어리나 같은 항렬(行列)이기에 설사 화가 나는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당협이 함부로 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당무웅은 참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쌍룡채의 산적들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 었고 자신과 당일수가 지휘한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모두 몰살(沒殺)당했다 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장로! 아우가 장로 맞소?"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사실이 그렇지 않소. 놈들이 장로에게 다가갔을 때, 장로는 길을 열어주었 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소. 입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당무웅은 입을 다물었다. 쌍룡채의 산적들이 다가왔을 때, 이미 제자들은 반으로 줄어 있었다. 더구 나 그는 한 사내를 알고 있었다. 꿈에라도 보기가 두려운 사내. 혈부대형 담붕비! '오지회였다니......' 그는 무조건 제자들을 후퇴시켰다. 당무웅은 누구보다도 담붕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점창(點蒼)에서 장문인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 던 담붕비였다. 당시 당무웅은 점창에 빈객(賓客)으로 잠시 머무르고 있던 때였다. 비록 장문인이 출타(出他)중이어서 담붕비와 일전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만 약 비무(比武)를 했다면 장문인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 다. 담붕비는 점창이 자랑하는 점창십이수(點蒼十二秀)의 공격을 적수공권(赤手 空拳)으로 막은 최초의 사내이기도 했다. "그는 혈부대형 담붕비였소." "뭐라고?" 당무웅의 말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에서 아우성과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이 들 렸다. 무림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지회의 담붕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초풍비보다 더 이름을 얻은 자가 담붕비였다. 천하의 말썽꾸러기 담붕비가 말썽을 피워 놓으면 초풍비는 수습을 하는 편 이었다. 무공은 초풍비가 당연히 높았으나 사람들은 담붕비를 더욱 무서워 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그가 확실했소. 본인이 보기에는 혈부대형 뿐만이 아니라 초풍비를 제외한 모든 오지회의 형제들이 있는 듯 보였소. 가주는 그래도 그들과 싸우고 싶 소?" "흠!" 갑자기 궁지(窮地)에 몰리는 당협이었다. 그는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 다. 싸우겠다고 할 수도 없고 싸우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입장에 몰린 것이다. "듣기로는 담붕비 비슷하게 생긴 자가 비하산장에 나타났었다고 하던데.... 그가 벌써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이요? 아니, 정말로 오지회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오?" 무언가 돌파구(突破口)가 필요했다. 당협의 목소리는 단호했으나 힘은 없었다. 조금 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호 기롭던 당협은 이미 날개 잃은 독수리 꼴이었다. "가주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이 일은 당신이 벌렸소. 오지회를 탓하기 전에 당신이 주도한 이번 쌍룡채 의 일에 적어도 이 백 명 이상의 제자들이 죽었소이다." "그...... 그런데?" "본인은 철저하게 조사를 할 것이요. 당신이 이 일을 저지른 데는 아마도 다른 뜻이 있을 거외다. 나 말고 다른 장로들이 있으니 내 말뜻이 무엇인지 는 알 거요." "그렇소." "조사를 벌입시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당문의 제자들은 이제 상황(狀況)이 바뀌어 당협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당 문에서는 단 한번도 가주의 권위에 도전한 적이 없었다. 상황이 긴박했다. 오지회가 다시 나타났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오지회를 상대해야 될지도 몰랐다. 당문의 제자들은 두려웠다. 생존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들은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서서히 공포(恐怖)로 변했다. 무엇보다 사천당문이 오지회를 공격한 꼴이 된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설사 그들이 오지회라 하더라도 그들은 사람을 죽 이지 않소. 더구나 우리 사천당문이 호락호락할 것 같소. 나를 믿으시오." 당협은 일부러 거들먹거렸다. 자신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 도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당협은 강호의 늙은 생강이었다. 당협이 용기를 내어 호쾌하게 이야기를 해 말문을 막으려 했지만 그를 상대 하고 있는 당무웅 또한 강호의 말라비틀어진 생강이었다. 결코 주도권(主導權)을 놓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조금 전에는 당협에게 무 안도 당했지 않은가? 무엇보다 당무웅은 당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실 당무웅의 부친과 당협 의 부친이 형제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무웅으로서는 가주가 될 수도 있 었다. 당무웅의 부친이 전대가주(前代家主)의 큰아들이었던 것이다. 전례대로라면 의당 장무웅의 부친이 가주가 되어야 했고 결국은 그가 가주가 되었어야 옳 았다. 한가족이라 해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주, 그들이 무인들을 죽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이번에는 상 황이 달랐소. 그들은 이백여 명에 이르는 사천의 무인들을 죽였소." "그들을 공적(公敵)으로 만들면 되잖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우리가 욕심을 부렸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소. 오지회의 입을 통해 이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천하인의 입에 오 르내리게 될 거요." "끙!" 당무웅의 말에 대답을 찾지 못한 당협은 귀찮다는 듯 앓는 소리를 했다. 더 이상의 어떤 비책도 모인 제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협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 작한 것 같았다. 수염이 부르르 떨리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길...... 재수 없게.' 당협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전서구를 믿은 것이 잘못이다.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당협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몇 개월 전 갑자기 날아든 전서구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는 믿을 만 도 했다. 전서구에 적혀있는 데로 손자가 검문산 아래에서 죽었고 굉천뢰도 모두 없어졌었다. 조사를 했던 결과 범인들은 쌍룡채의 산적들이었다. 오로지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인 것이 불찰(不察)이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어떻게 할거요?" "나도 모르겠소. 내 차차 대안(代案)을 찾아내도록 하겠소." 느닷없는 당무웅의 성토에 당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것은 벌어진 일, 그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도 해결할 능력이 없었 다. '후! 어쩐다.'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주위로 분노한 제자들은 달려들었고 무성한 고함이 대전을 부수어 버릴 것 같았다. 당협을 감싸고 싶은 제자들도 있었지만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움직이게 된다면 모든 비밀이 드러나 사천을 차지하기 위해 벌 인 음모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사천당문이 영원히 무림에서 치졸한 문 파로 낙인이 찍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선은 자체적으로 해결을 보아야 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5 페이지: 1/42 자료번호: 278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5장-밤이 깊으면 음모도 깊다 휘이이―이익―! 초풍비의 몸은 바람처럼 숲을 스치듯 허공을 도약하고 있었다. 그의 발 아 래 갈대가 몸을 눕히며 그의 발끝을 퉁겼다. 그때마다 초풍비의 몸은 수 장 씩 솟구쳐 올랐다. '급하다. 만약 아우들이 무슨 일을 당한다면 나는 다시 하늘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은 달리는 속도보다 빠르게 아우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마음에 갈증(渴症)처럼 밀려드는 조급증도 그의 발을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데 일조 (一助)하고 있었다. 사스스스슷― 그는 갈대의 머리를 밟으며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만약 사람들이 그를 보았다면 신을 보았다 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두 시진 동안 경공을 전개했지만 그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만 약 누가 보았다면 전설의 초상비(草上飛)를 시전하고 있으리라 생각할 것 같은 신법이었다. 초상비의 신법.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초상비의 신법은 몸을 한줌의 공기처럼 가볍게 해야 가능하다는 경공법으로 무림에서 초상비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미 경공으로 는 천하제일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초풍비의 신법은 초상비가 아니었 다. 무공이 극에 달한 내공의 대가라 해도 초상비를 시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語不成說)이었다. 초상비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지고정순(至高貞純)한 내력을 뿜어낼 수 있어 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백 년 동안 강호에 초상비를 전 개한다는 사람은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뇌룡탄(雷龍灘)이다. 그곳에서부터는 관도를 타고 가야겠 다." 초풍비는 마음이 급했다. 전신의 진기를 사용해 솟구치고는 있으나 그도 한계는 있는 법, 마음처럼 몸이 빨리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마음으로만 하자면 이미 쌍룡채에 도착해 있어야 할 그였다. "엉!" 바삐 몸을 움직이던 초풍비의 몸이 허공에서 한바퀴 회전을 하며 멈추었다. 허공에 뜬 그의 몸은 한참동안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초풍비는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청력(聽力)과 안력(眼力)을 돋구었다. "체온이 느껴진다. 숨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은 고수라는 이야기인데...... 구식대법(龜飾大法)을 전개하고 있다." 초풍비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편안한 상태라면 전혀 입밖에는 나오지 않을 말이었다. 극도의 내력을 뿜어내며 긴장으로 달려왔기에 생각이 입 밖으로 새어나온 것이었다. 스스슷― 초풍비는 땅으로 내려섰다. 키를 넘어서는 갈대가 그의 눈앞을 가렸다. '만만치 않은 놈들이다. 오래 전부터 나를 죽이기 위해 준비한 것 같군. 누 군가 내가 이곳으로 간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지.' 초풍비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듯한 모습으로 앉았다. 이어 땅에 귀 를 붙였다. 땅은 정직했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가볍게 뛰는 맥박(脈搏) 들이 감지되었다. 맥박은 도처에서 뛰고 있어 마치 바람이 불 때 비벼지는 나뭇잎의 소리 같 았다. '돌아가기는 틀렸다. 뒤에도 나타났다. 오로지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일진 이 좋지 않은 것 같군. 그나저나 나를 죽이려고 철저하게 매복했군. 역시 을목세가의 그림자들인가?' 을목세가는 하루도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제법 적지 않은 황금을 뿌렸는지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불나방들이 초풍 비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오죽하면 초풍비는 만성이 되어있었다. 스―창! "그냥 갈 수 없겠군." 초풍비는 반검을 뽑아들었다. 검에서는 붉은 섬광이 뻗어나갔다. 전신에 진기를 모아 검에 주입시켰기 때 문이었다. 진기를 몸에 유통시키자 그의 전신에서도 붉은 홍운이 일어나는 듯 피부가 붉게 변했다. "모습을 보여라.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던 초풍비다." "하하하, 초풍비, 너를 기다렸다. 어서 오너라." 초풍비의 목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알 필요 없다. 네놈이 이곳까지 올 수 있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다." "정당하게 얼굴을 보여라." "잔소리 말고 어서 오너라. 내 새끼들이 너를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초풍비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늠했다.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어리 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흐르는 기운이 강해져 얼굴과 손이 불덩이처럼 붉어졌다. 사사사삿― 어디선가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성질이 급하군.' 초풍비는 자신을 향해 빠르게 접근(接近)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초풍비는 몸을 숙인 채 빠르게 앞으로 전진했다. 갈대에 가려 아무 것도 보 이지 않았으나 곤두선 신경은 숨소리까지 감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앞에 세 놈이 먼저다.' 초풍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갈대가 거칠게 흔들리고 다가오던 숨소리가 수면(水面)에 돌을 던지듯 크고 빨라졌다. 초풍비는 다가가던 몸을 뒤로 퉁 기며 반검을 정중(正中)으로 찔렀다. 파아아아― 갈대가 쓰러지고 번뜩이는 빛의 편린들이 초풍비의 눈을 어지럽혔다. 검은 무복으로 몸을 감싼 신형이 퉁기듯 솟구친 것이었다. 그림자처럼 보이는 신형은 셋이나 되었다. "죽어라! 이놈." 스―사―삿― 세 자루의 날카로운 경기가 그의 목과 가슴, 단전을 노리고 쏘아 들어왔다. 언뜻 세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검은 그림자들이 유 성(流星)처럼 따라 솟구쳤다. 그림자들은 마치 잠자리가 날 듯 비스듬히 상체를 숙이고 검을 찔러 들었 다. '남해의 검법이다.' 초풍비는 상대의 검법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해남도(海南島)의 패주(覇主)라는 남해검문(南海劍門)의 검법이 분명했다. 중원정토(中原正土)의 검과는 달라 상대하기 극히 까다롭다는 검법이 펼쳐 지고 있었다. 오래 전에 남해검법을 견식(見識)한 적이 있는 초풍비는 엇비스듬하게 검을 잡은 모습만 보고도 남해검법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남해검법은 중원의 검법과는 상이했다. 우선 검을 잡는 법부터 달랐다. 검을 비스듬히 잡고 마치 풀을 베듯 흔드는 남해검법은 방어하기도 어렵거니와 익히기도 만만치가 않은 검법이었다. 암습을 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남해의 검법을 익혔는지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초풍비는 오른쪽 무릎을 지면에 대고 상체를 세우며 빠르고 강하게 갈대밭으로 반검을 전개시켰다. 반검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그었다. 적궁이 자랑하는 추풍만리파(秋風萬 里波)라는 초식으로 위력은 강하지 않으나 예리하고 빠른 검법이었다. 파사사사! 갈대들이 허리가 잘려 무너져 내리고 날카로운 면이 생겼다. 죽창처럼 삐죽 하게 변한 갈대의 줄기는 사방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빠른 것은 초풍비의 검으로서 먼저 공격한 암중인들의 검이 몸에 부딪치기도 전에 그의 검이 허공을 격하고 경기를 뿜어내었다. 창! 한 번의 맑은 소리는 검기 부딪치는 소리였다. 이어서 들리는 소리는 폐부 를 가르고 숨이 넘어가는 비명이었다. "크아아악!" "컥!" 초풍비의 몸은 비명이 울리는 순간 이미 이십여 장이나 퉁겨져 앞으로 나가 고 있었다. 구부렸던 무릎을 펴며 얻어지는 탄력이 그의 몸을 쏘아가게 했 다. "기다렸다." 창호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갈대밭을 울리며 두 개의 검은 그림 자가 초풍비의 다리와 목을 향해 날카로운 경기를 날렸다. 전신에 검은 복면을 한 그림자는 검도 아니고 창도 아닌 기이한 병기를 지 니고 있었다. 창이라 하기에는 도신이 너무 길었고 도라고 하기에는 구불구 불한 창극(槍極)이 눈에 거슬리고 짧았다. 사모(蛇矛)라고 불리는 병기였다. 사모는 모(矛)의 일종으로 날 부분이 꿈틀거리는 뱀의 모양을 가진 것으로 관군이 사용하는 이모(夷矛)에서 발전한 것으로 명대에 들어와 사용이 많아 졌다. 모는 창의 원조(元祖) 격인 병기로 이미 전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는 병기 였으나 명대에 들어 다른 병기에 밀려 모습을 감추었다. 다만 사모만이 몇몇 무가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사모는 그 끝이 뱀이 기는 것처럼 구불구불하고 예리하기 때문에 상대의 몸 에 빠르게 들어가며 상처를 크게 내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창과 같은 병기는 적의 몸에 찔렸을 때 잘 빠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으니 사모는 상대의 몸에 들어갈 때 넓은 상처를 만듦으로서 빠지기 쉽게 만들어져 있었다. '을목세가?' 초풍비의 눈이 황소의 놀란 눈알 만하게 떠졌다. 비록 을목세가와 겨루어 본 것은 한 번에 불과하지만 병기를 보는 순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 다. 초란을 처음 만났을 때, 을목세가는 그를 공격했었다. 당시 그들이 사용한 병기가 검이기는 했지만 을목세가의 병기는 사모라 불러야 옳았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사모라 부르기도 어긋나는 이야기지만 분명히 사모였다. 대신 사모의 손잡이는 짧고 창의 날은 길었다. 온통 창날로 보이기도 했다. 사모의 한 쪽에는 무려 한자에 이르는 반월인(半月刃)이 붙어 있는 병기였 다. 사모를 개량한 것으로 그와 같은 병기를 사용하는 무파는 오직 하나 뿐 이었던 것이다. 이미 천하에 을목세가가 사용하는 병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원의 무인 들은 을목세가의 기이하게 생긴 병기를 가리켜 을목신창(乙木神槍)이라 불 렀다. "드디어 을목세가의 본신(本身)이 드러났구나." 초풍비는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그 동안 그를 공격했던 자들이 강호의 황금(黃金)을 노린 인간 사냥꾼이나 살수들이었다면 지금 그를 공격하는 자들은 을목세가의 무인들이었다. 파파파파― 두 개의 을목신창은 땅에서 솟아올라 초풍비의 가랑이 밑 사타구니를 갈라 왔다. 초풍비는 지체하지 않고 가랑이를 벌린 뒤 몸을 뒤로 누이며 번개같 이 검을 흔들어 날아드는 두 개의 반월인을 막았다. 차창! 맑은 쇳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스사사삿― 초풍비의 반검이 갈대를 베며 허공에 원을 그렸다. 두 개의 신형이 놀라 몸 을 비트는 것이 환영처럼 초풍비의 눈으로 들어왔다. 초풍비의 반검이 허공 을 갈랐다. 갈대 잎이 쓰러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피가 튀었다. "큭!" "크헉!" 단말마가 울리며 네 개로 분리된 몸뚱어리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몸뚱어리는 잘려진 갈대에 박혀 또다시 핏물을 뿜어내었다. 퍼퍼퍼퍼― 핏물이 허공과 갈대밭으로 번지며 진한 피비린내가 다시 안개처럼 퍼져 올 랐다. 초풍비는 자욱하게 퍼지는 피 냄새를 느끼며 허공에서 한줄기 빛으로 변해 신형을 뒤집었다. 그의 몸이 제비가 허공을 날듯 빠르게 이동했다. 초풍비는 거친 동작으로 몸을 뒤집으며 반검을 휘둘러 기파를 쏟아냈다. 날 카로운 경기 십여 줄기가 그의 전신으로 날아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사삿! 피―잉― 십여 개의 암기가 그의 몸을 스치며 날아갔다. 투오정(投蜈丁)이라고 불리 는 날카로운 병기는 호신강기를 뚫는 암기였다. 창에 낚시바늘처럼 생긴 고 리가 달린 암기로 한 번 몸에 박히면 빠지지 않았다. 휘리릭― 몸을 뒤집은 초풍비는 번개처럼 몸을 쏘아감과 동시에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펼치며 암기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연속 열 줄기의 희미한 선을 뿌렸다. 퍽! 퍼퍼퍽! 초풍비의 손에서 뿌려진 희미한 기파는 허공을 날아 갈대밭의 한곳에 스며 들었다. 품속에 있던 은자가 쏘아진 것이었다. 무인에게 있어 은자는 때로 암기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크허허헉!" "크악!" "피하라. 으아아악!" 정확하게 열 개의 비명이 터지며 땅속에서 열 개의 신형이 솟구쳐 올랐다. 초풍비의 육 장 앞이었다. "늦었다. 놈들아." 한마디 호통을 내지른 초풍비는 몸을 이동하며 연속으로 열 번의 검을 휘둘 렀다. 허공에 붉은 반원이 만들어지고 붉은 빛으로 빛나는 검기가 열 개의 몸에 닿았다. 써걱― 초풍비는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기를 써는 듯한 음 향이 귀에 들어왔고 이어 가슴에서부터 멈추어지는 갑갑한 숨을 느꼈다. 작은 느낌이지만 그의 반검이 상대의 몸을 베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으으으!" 투투툭― 털썩! 열 개의 몸이 바닥에 흩어지듯 살점을 뿌려내며 떨어져 내릴 때 초풍비는 허공에서 다시 한 번 몸을 선회하며 지면을 검으로 찍었다. "큭!" 구식대법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을목세가의 무인은 땅속에 숨은 체로 정수 리가 쪼개지며 즉사를 면치 못했다. 땅에 쪼그리고 앉은 초풍비는 자신의 주위에 적이 없음을 간파했다. 숨소리 도 들리지 않았고 운 신경을 집중해 보아도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에 몸을 떠는 갈대소리만 들릴 뿐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 았다. "체력을 보충해 두지 않으면 천라지망(天羅之網)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이 것은 단기전(短期戰)이 아니고 장기전(長期戰)이다." 초풍비는 다시 한 번 주변의 미세한 소리에 귀 기울여 정황을 파악한 후 자 리에 앉아 간단한 운기조식(運氣藻飾)을 취했다. 그가 움직이기 전에는 움 직일 을목세가의 무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스스스스― 운기조식을 취하고 토납(吐納)이 이루어지자 그의 몸에서 다시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분홍색으로 흐릿하던 빛이 시간이 지남에 점차 진해져 어느 순 간부터인가 그의 몸은 피처럼 붉은 선홍색으로 변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을목세가만 나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기 분이 좋지 않아.' 초풍비는 이를 악물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앞을 막아서는 놈들을 죽이는 길뿐이었다. 달리 방 법이 있으면 선택해 볼만도 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방법은 오직 죽이는 방법뿐이 없었다. 휙! 초풍비는 허공에 반검을 휘둘렀다. 다시 단전에서 힘이 솟구치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초풍비는 진기의 흐름을 점검했다. 단전에서 갈라진 진기는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따라 무리 없이 흘렀다. 그 를 막아섰던 이십 여명의 을목세가 무인들을 죽이면서 단 한 차례의 부상도 없었다. 그가 운기조식을 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운기조식도 없이 무작정 적에게 둘러싸여 진기를 소모하다가는 진기를 고갈 당해 쓰러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가자!" 사사삿― 초풍비의 몸이 다시 앞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초풍비는 몸을 낮추어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갈대 사이를 스치듯 앞으로 나 아갔다. 마치 허리가 굽은 노인과도 같은 모습으로 신형을 전개시켰으나 물 이 흐르듯 빨랐다. "컥!" 초풍비가 지나가는 도중 무엇을 느꼈는지 몸을 비틀며 검을 흔들자 비명과 함께 하나의 신형이 갈대 사이에서 쓰러지며 붉은 핏물을 뿌렸다. "은자술(隱者術)을 익힌 놈들이 있었다니...... 이들은 을목세가의 무인들 이 아닌 것 같다.' 을목세가에는 은자술을 익힌 자들이 없는 것으로 초풍비는 알고 있었다. 그 를 막는 자들 중에 은자술을 익힌 자들이 있다는 것은 을목세가 외에도 다 른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파르르르― 한 무더기의 갈대가 심하게 흔들렸다. "탓!" 초풍비의 검이 사오 장이나 길게 늘어나는 듯 보이더니 신형과 검이 합일 (合一)되어 갈대를 쓸었다. 갈대는 산산이 잘리며 허공에 뿌려졌다. "으으으으! 이럴수가......" 갈대는 사람으로 변했다. 팔다리가 끊어지고 목이 분리된 자는 갈대의 형상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변 하며 전신이 갈가리 분리되어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변해 흩어졌다. 챙! 바닥에 무엇인가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금속성으로 보이는 소리에 바삐 신형을 날리던 초풍비는 걸음을 멈추었고 이어 바닥에 떨어진 패를 볼 수 있었다. 패는 태양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중원상단(中原商團)도 참여했단 말인가?" 초풍비의 짙은 검미(劍眉)가 흉악하게 이지러졌다. 초풍비는 바닥에 떨어진 패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초란도 늘 품 속에 간직하던 패였다. 한 면에는 코끼리의 그림이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었고 다른 일면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꽃의 그림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진 황금색의 패였 다. 중원상단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신물이라는 것을 초풍비는 이미 오래 전 초란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중원상단은 크게 두 개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상반무(半商半武)의 단 체였다. 반은 중원의 상권(商圈)을 유린했고 상업행위에서 벌어들인 황금으로 중원 천하에서 뒤지지 않는 무인들을 지니고 강호를 질타했다. 그들, 중원상단의 무인들이 지니고 있는 패가 바로 바닥에 떨어진 패였다. '중원상단까지 개입했다 이거지...... 제길, 장인이 주인인 문파가 사위를 죽이려고 부하들을 보내다니......' 초풍비는 몸을 일으켰다. 마냥 하염없이 적이 다가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다릴 필요 도 없었다. 기다려야 할 사람들은 초풍비가 아니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많 은 무인들이었다. "가자!" 휘리릭― 초풍비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의 앞에는 수없이 많은 자들이 기다리 고 있을 테지만 초풍비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팍! 그의 등뒤에서 붉은 빛을 부리는 향전이 솟아올랐다. 그가 죽인 자들의 시 체가 발견된 모양이었다. 갈대밭이 끝나는 지점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천년의 풍파를 견딘 모습으로 묵묵히 세월을 이겨내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오래 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 이는 고색창연한 정자가 세워져 있었고 뒤는 천 길의 낭떠러지였다. "후후후! 이곳이 뇌룡탄이라 이거지. 이제 연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사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전신이 오물덩어리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전신에 변변한 것이 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두 팔은 없어지고 대신 두 개의 칼날이 팔을 대신하고 있었다. 흉측하게도 다리마저 무릎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라 보기에는 인생이 불쌍한 사 람이었다. 눈도 한쪽만이 온전했고 한쪽 눈은 은빛 나는 구슬을 박아 넣어 보기조차 흉측스러웠다. 머리는 마구 엉클어져 그가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믿 기 어려웠다. 주름진 얼굴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창백한 얼굴은 빙굴(氷窟)에서 막 튀어나온 시체같이 푸르스름한 귀기(鬼氣)를 뿌렸으며 그나마도 몸을 가린 곳은 하체뿐이었다. 전신에는 무수한 상처가 있어 생선에 회를 뜨기 전 칼자국을 낸 것 같이 어 지러웠다. "후후후, 이게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던가...... 그러면 나는 이제 자유의 몸이다.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백년에 이어온 저주를 풀어 버리겠다." 괴인은 누각 뒤를 바라보았다. 멀리 햇빛을 받아 편린이 부서지는 대도하의 푸른 물줄기가 괴인의 눈에 들 어왔다. 대도하 너머에는 희미한 산봉(山峰)이 긴 선으로 연결되어 보였는데 사천에 자리잡은 구대문파의 하나인 아미파가 자리한 아미산의 영봉(靈峰)들이었 다. 천 길의 벼랑 밑으로는 대도하가 거친 물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언 뜻 보이는 흰 포말(泡沫)은 굽이치는 강물에 떠올라 마치 파충류(爬蟲類)의 비늘 같았다. 노한 용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보이기도 했다. 뇌룡탄이라는 이름과 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지세를 지닌 곳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이 우러나게 했다. "후후후, 노인네! 이제 놈이 다가오고 있어.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군." 목소리의 주인은 중년을 갓 넘겨 보이는 사내였다. 등에는 너무나 평범한 검을 메었고 얼굴 어디에도 특징이 없어 보아도 곧 잊어버릴 사내였다. 그는 만도화원주에게서 명령을 받던 사내였다. 만도화원주는 그에게 뇌룡탄 의 일을 마무리짓고 세가로 오라는 말을 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던 마지막 이라는 말은 아마도 괴인(怪人)에게 해당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는 무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크크크, 나를 실험하고 싶으냐?" 파스스스스― 분노한 듯 괴인의 몸에서 무엇이든 부수어 버릴 것 같은 강기가 자욱한 운 무처럼 피어올랐다. 그의 주변에 자라고 있던 풀들이 몸을 떠는 듯 흔들렸 고 누렇게 탈색(脫色)되는 느낌이 들었다. 무서운 살기요, 기절하리 만치 가공한 무위를 지닌 노인임이 틀림없었다. 주춤주춤! 중년인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연거푸 일곱 걸음을 물러났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데 그치지 않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으며 이마에서부 터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것으로 보아 중년인은 노인에게 말로 설명 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아...... 아니오! 난, 다만......" "날 시험하려 들다가는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것이다. 나에게 딸의 안위만 걱정이 없다면 네놈들은 이미 내 손에 백 번은 죽었다." "그...... 그게." "시끄럽다. 을목세가의 어리석은 애송이 놈들아. 그렇다고 네놈들의 헛된 꿈이 피워지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크크크!" 노인은 모습에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괴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몰골을 지 니고 있었다. 괴인은 간장이 뒤틀릴 정도의 거친 괴소(怪笑)를 뿌렸다. 물 러섰던 중년인이 얼굴을 탈색시키며 괴인에게 다가섰다. 비록 공포와 두려움이 얼굴에 퍼져 있기는 했으나 괴인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중년인은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놈을 죽이는데 착오는 없겠지?" "물론이다. 놈들만 이곳으로 몰아오면 깨끗하게 처리해 주지. 내 그것만은 약속하지. 그러니 더 이상 참견하지 마라. 애송이 놈아!"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을 걸다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말을 조심해 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도(限度)에 서 괴노인은 이미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팔을 씹어먹었다고 했지.' 부르르르― 중연인의 몸이 학질에라도 걸린 듯 떨렸다. 삼 년 전에 가주는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이 괴인을 불렀다. 괴인을 따라 다니던 을목세가의 한 사내가 계속해서 괴인을 다그치자 분노 한 나머지 괴인은 을목세가의 사내를 잡아 팔을 잘라 뜯어먹어 버렸다. 사내는 영원히 불구가 되었다. 중년 사내는 이미 삼 년 전의 일이지만 확연 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가주도 그에게 신신당부(申申當付)한 내용 중의 하나 였다. "아가야. 놈들은 어디쯤 있느냐?" "향전이 올라간 것으로 보아 이미 십여 리 안에 들어온 것 같소. 아마 당신 도 만만치 않을 거요. 그는 한 때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불렸던 사내 요." "뭐라고! 천하제일인!" 화르르르르― 괴인의 몸에서 검은 안개와도 같아 보이는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질식할 듯한 살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자 중년사내는 엉거 주춤한 자세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중년인은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괴인에게 천하제일인 따 위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괴인이 분노하면 중년인이라 해서 온전 할 리가 없었다. "아...... 아니오. 그가 한 때 그렇게 불렸다는 이야기요." "감히 내가 있는데 천하를 들먹여." 팟팟팟! 괴인이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팔을 대신한 검이 휘둘러지며 바닥을 그었다. 검이 땅바닥을 긁으며 휘둘러 지자 마찰(摩擦)이 일어났는지 맑고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검이 지면을 스치고 허공으로 올라가자 검신에 붙은 불꽃이 허공에 딸려 올 라가 화려하게 흩어졌다.. 마치 불꽃놀이할 때 피어오르는 불꽃같은 모습이었다. 불꽃은 환상(幻想)처 럼 이내 허공으로 날아가고 소리 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헤헤헤, 노선배 노여움을 푸시지요. 세상물정 모르는 놈들이 하는 말을 신 경 쓸 일 없지 않습니까?" "다시는 내 앞에서 천하제일인을 논하지 마라." 스스스슷 괴인의 몸에 피어올랐던 질식할 것 같았던 기운이 바람에 밀리듯 흩어졌다. 불과 눈 몇 번 깜박일 순간이 지나자 괴인의 몸은 평정을 찾았다. "알겠습니다. 노선배." 중년사내는 대답하며 무의식적으로 목을 더듬었다. 괴인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 정도의 무인은 수천 명이 달려들어도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익히 들은 바가 있는 그였다. 목 위의 물건이 달려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할 지경이었다. 입은 다물 어졌고 눈은 순한 양처럼 풀어졌다. 어찌 보면 비굴해 보일 정도였다. 지금의 무영은 만도화원주로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숨기고 있는 을목세 가의 단화연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무게를 잡던 얼굴이 아니었다. "계집도 있다더니......?" "계집도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계집이 얼마나 영악한지 교묘하게 추적 을 따돌리고는 있지만 결국 이곳으로 오고 있답니다." "크크크, 결국 비린내 나는 계집과 건방을 떠는 사내놈이라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중년사내는 괴인이 눈꼴이 시었지만 정중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 몸에서 뿜 어져 나오던 살기는 그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막강한 것이었기에 오금이 저리고 손에 땀이 배었다. 팍― 멀지 않은 곳에서 한줄기 향전이 피어올랐다. "흐흐흐, 노선배 놈이 가까이 온 모양이오." "애송이! 너는 멀리 물러가 있거라. 얼쩡거리다가는 제명에 죽지 말고. 크 크크크!" 말을 할 때마다 괴인의 몸에서 칙칙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자욱 한 안개처럼 느껴지는 기운은 피를 부르는 사기(邪氣)였으며 질식할 것 같 은 살기였다. 괴인은 하늘에 피어오르는 향전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팟! 남궁은미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품속을 더듬었다. 이제는 던질 수 있는 암기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무서운 을목세가 놈들...... 반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추적하다니...." 남궁은미는 바위 뒤에 몸을 쪼그리며 품속에 남은 일곱 개의 죽편(竹片)을 뽑아들었다. 갈대 숲에 들어설 때 백 개가 넘던 대나무 조각은 이제 일곱 개밖에 남지 않았다. 남궁은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나무조각들이 그녀의 손에서 아우성을 쳤다. 핏! 하나의 그림자가 바위 앞에서 솟구쳤다. 미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암습을 받자 남궁은미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남궁은미의 무공은 특별하게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 육지 도마에게 처절하게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반년에 이르는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이 그녀를 강한 무인으로 만들어버렸 다. 이제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흥! 어림없다." 팟! 그녀의 손을 떠난 한줄기의 푸른 선은 덮쳐 들던 그림자의 가슴으로 파고들 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림자로 다가든 암습자나 남궁은미, 모두 무의식(無意識)에 가까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 되어 버렸다. 푹! "크으으으―" 털썩! 그녀의 머리 뒤로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가슴을 부여안은 검은 옷의 사 내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남궁은미가 던진 대나무 조각은 흑영(黑影)의 심장에 정확하게 박혀 있었 다. 그러나 대나무 조각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남궁은미는 빠르게 검을 휘 둘러 벌레처럼 버둥거리는 흑의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파하하하하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그녀의 몸을 붉은 악귀나찰(惡鬼羅刹)로 만들 었다. 아니, 이미 혈인(血人)의 모습으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 무인의 목이 잘려지며 그녀의 몸에 다시 핏물을 뒤집어 씌웠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위에 있던 갈대가 물감을 바른 듯 붉게 변했다. 남궁은미는 잠시 진저리를 쳤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한이 섞인 음성을 토 해냈다. "흥! 나를 악독하게 만든 놈들은 너희들이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말아라." 남궁은미는 코방귀를 뀌며 몸을 일으켜 다시 바위 뒤로 다가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자 함인지 양손에 나누어 쥔 검과 대나무 조각에 힘이 들어 갔다. 남궁은미는 바위 뒤에 몸을 은신하며 주변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온기(溫氣)가 있다.' "흥! 네년의 목을 도려주겠다." 바위가 호박이 갈라지듯 쩍 갈라지며 전신에 붉은 기운이 솟구치는 그림자 가 덮쳐든 것은 남궁은미가 바위에 다시 다가서는 순간에 일어났다. "호호호, 멍청한 놈! 이미 알고 있었다." 팟! 남궁은미의 손에서 다시 두 개의 대나무 조각이 날았다. 동시에 오른손에 들려있던 청강검을 휘둘러 한줄기 사선을 그었다. 그녀는 바위에 달라붙어 몸을 숨기는 순간 바위가 갑자기 가볍게 움직였다 고 생각했다. 더구나 손에 느껴지는 온기는 바위에서 느껴지는 기운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의심을 느낀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암습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남궁은미가 다가들자 가볍게 몸을 떨었던 것 이다. 은자술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완벽하게 체온을 숨길 수는 없었고 남궁 은미가 다가오자 자신이 그녀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던 탓에 모든 것이 발각되었다. 팟― '베었다.' 남궁은미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야말로 자신이 상 대를 베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감촉이었다. 마치 고기를 써는 듯한 이질감(異質感)이 느껴졌다. "크으으으―" 남궁은미는 자신을 덮쳐들던 흑영의 입에서 흘리는 신음을 들었다 동시에 얼굴로 떨어지는 따뜻한 피도 느껴졌다. 상대가 흘린 피였다. "큭!" 그녀도 짧은 비명을 토했다. 어느새 그녀의 어깨에도 날카로운 검이 박혀있 었다. 상대의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투투툭! 손에 들려있던 대나무 조각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 다. 다행스러운 것은 검을 사용하는 오른쪽 어깨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추축! "끄으으―" 남궁은미는 이를 악물고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았다. 연골(軟骨)이 부서졌는 지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크흐흑!" 팔을 움직여보던 남궁은미는 이빨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했음 에도 이빨 사이로 밀려나오는 신음을 완전히 감추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깨가 부서지는 충격은 여인의 몸으로 참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었 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얼마나 거세게 물었는지 이 사이에 물린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남궁은미는 사방을 둘러본 뒤 다가오는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자 상체를 가리고 있던 장의(長衣)를 벗었다. 장의에도 붉은 피가 범벅이 되어 검붉게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빌어먹을 놈! 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퇘! 남궁은미는 갈대밭으로 침을 뱉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흑의인들이 쓰러져 나뒹구는 방향이었다. 그 렇다고 어깨의 상처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마음이 후련해졌다. 찌이이이익― 남궁은미는 상처를 가리고 있는 경장의 어깨를 찢었다. 뽀얀 어깨의 일부가 드러났다. 언뜻 가슴을 가린 붉은 헝겊 쪼가리도 보였다. 남궁은미는 다시 사위를 둘러본 뒤 고개를 돌려 상처를 돌아보았다. 상처는 의외로 깊었다. 피가 말라붙어 점차 멈추고는 있지만 아직도 선홍색 의 피가 밀려나오고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수반되었다. '그대로 나두다가는 피가 고갈(枯渴) 되어 죽을 거야.' 팟! 팟! 팟! 남궁은미의 손이 움직이며 어깨를 지나는 여러 개의 혈맥을 집었다. 피가 점차 약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완벽한 것은 아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비록 혈도를 제압해 지혈을 했다고는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피를 완전히 막을 수도 없었다. "제혈(啼血)을 해야겠어." 그녀는 서둘러 제혈을 했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 쉽게 제혈이 되지 않았다. 지혈과 제혈법은 차이가 있었다. 지혈이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혈도를 제 압하거나 혈맥을 치료하는 것이라면 제혈은 피 자체를 흐르지 않게 하는 용 도가 있었다. 당분간은 피를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팔이 썩을 수도 있었다. 남궁은미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제혈을 포기하고 지혈을 하기로 했다. 남궁은미는 품속에서 조그만 옥병(玉甁)을 꺼냈다. 옥병을 열자 기이한 냄 새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눈에 보아도 옥병에 든 것은 귀 한 요상약(療傷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면 좋겠는데......' 남궁은미는 옥병에 들어있는 가루를 어깨에 뿌렸다. 백색의 가루는 피가 닿 자 곧 색이 붉게 변하며 응고(凝固)되기 시작했다. 피도 멈추었다. "무슨 소리지." 부지런히 어깨를 치료하던 남궁은미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목 을 움츠렸다. "누가 온다고 지키라는 거야. 아무리 둘러보아도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데......" "기다리면 오겠지!" "그래도 그렇지! 오지도 않는 자를 어떻게 기다리라는 거야. 혹시 놈들이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겠어. 단주(團主)의 이야기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을목세가를 도우라고 했잖아." '을목세가라고?' 목을 움츠리고 있던 남궁은미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귀를 곤두세웠다. 을 목세가라면 그녀가 수십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을목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더구나 지금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무인들도 을목세가의 무인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다. 조금 전에도 을목세가라고 거들먹거리던 두 명의 털보 장한은 모두 그녀의 손에 목이 뎅겅 잘려 즉사했다. '저들은 을목세가의 무인들이 아닌가?' 그들의 이야기로 판단해보면 을목세가가 아닌 무인들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단주는 뭐고, 도와준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궁은미에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 글쎄!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을목세가를 돕는다는 거지. 알다가도 모 르겠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일이나 하자고...... 상단과 을목세가는 오래 전부터 한 몸이라고 하잖아. 그러니까 단주도 우리를 보냈겠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이처럼 빈둥거리며 놀아야 하나." '상단....... 무슨 상단! 혹시?'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말투에서 일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을목세가와 손을 잡은 상단이라면 어차피 한곳밖에 없었다. 남궁은미는 그들의 말투에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비교적 안전(安全)한 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험한 길이라면 그들처럼 조심성 없는 자 들이 지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서는 조심하는 기색도 없었고 누구를 기다리거나 죽이겠다는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오로지 지키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것 같았 다. '기다려...... 죽여줄 테니까.' 남궁은미는 부스럭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경장을 올렸다. 어깨가 찢어지기는 했으나 가리는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장포를 걸치자 그녀의 모습은 다시 원상태가 되었다. 어깨가 불편하기는 했 으나 마냥 드러내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빨리 자리를 이탈(離 脫)해야 했다. '앞에 세 놈, 저놈들을 죽여야 돌파가 가능해!' 넘궁은미는 고개를 살며시 내밀었다. 앞에 검은 피풍을 두른 사나이 셋이 사방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의 무공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들이 무공이 높았다면 그녀가 하는 행동을 모를 리 없었다. '다행이다. 무공이 약한 놈들 같아.' 팟! 남궁은미는 바닥에 떨어진 대나무 조각을 들어 허공으로 날린 뒤 날카로운 매의 부리처럼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뭐냐?" "어, 암기다. 피해." 스삿! 날아오는 경력을 느낀 삼 인의 흑의인은 급히 몸을 숙였다. 갑자기 날아든 암기를 보고 사내들의 몸이 굳었다. 날아간 대나무 조각은 한 사내의 단전 에 박혀들었다. 고개를 숙였으나 대나무 조각은 곡선(曲線)을 그리며 단전으로 스며든 것이 었다. 매우 정교한 암기수법이었다. "커흐윽―흑!" 콰당! 대나무 조각에 단전을 맞은 사내가 인상을 쓰는 듯하더니 뒤로 벌렁 넘어갔 다. 뒤이어 달려드는 남궁은미의 검날이 다가오는 줄은 생각지 못했다. 흑의인들이 놀라 허리를 폈을 때 이미 사내의 허리는 싹둑 베어지고 있었 다. "헛!" 한 사내는 멍한 눈으로 남궁은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는 표정이었다. "크흐흑!" 뒤이어 터진 것은 또 다른 사내의 신음이었다. 가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왼팔은 싹둑 잘린 뒤였다. 남궁은미의 검 이 가슴에 깊숙하게 박혀 검신에서 피가 타고 흘렀다. 추리릿! 남궁은미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뽑았다. 심장(心腸)에 바람구멍이 뚫린 사내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내 려다보았다. 사내의 눈에 진한 죽음이 밀려왔다. "이...... 이럴 수가...... 허무하게......." "가라!" 촤아아―아아―! 분노한 남궁은미의 발길질이 사내의 아랫배를 걷어차자 사내는 무기력(無氣 力)하게 무너졌다. 넘어지는 사내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순식간에 세 명의 목숨을 황천으로 보낸 그녀도 어지러움을 느꼈다. 수일간 자지 못한 잠과 피를 흘려 약해진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우선, 쉬어야 해. 운기조식이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뼈를 묻고 말 거야." 남궁은미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자신이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는 것 이었다. 이미 사흘간에 걸친 도주와 그에 따르는 긴장으로 심신이 노곤한 상태였다. '저기다.' 휙! 남궁은미는 갈대가 마구 엉클어져 새둥우리같이 보이는 숲으로 몸을 날렸 다. 갈대가 마구 엉겨붙어 운신하기가 힘이 들기는 했으나 그리 어렵지 않 게 파고들 수 있었다. "휴!" 자세를 잡은 남궁은미는 내력을 귀로 몰아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나 한 참동안 주의를 기울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한순간에 결정 난다는 것을 아는 남궁은미였 다. 단 한순간도 방심(放心)이란 용납되지 않았다. 단 한번의 실수는 곧 죽 음이었다. 오랜 추적과 도주로 이루어진 그녀의 생활은 완벽과 조심의 연속이었다. 아 무리 주위가 안전해도 주위를 살피는 것은 이미 오래된 습관이었다. '반각이면 돼.'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안 남궁은미는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하고 운 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일어난 진기가 단전을 시작으로 전 신의 혈맥을 돌았다. 스스스스슷― 미약하기는 했지만 남궁은미의 몸에서도 강기가 피어올랐다. 오랜 도주는 그녀에게 어떤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야 했기에 시간이 나는 데로 운기조식을 통해 피로를 덜고 내공 을 강화했다. 결국 시도 때도 없는 도주는 그녀에게 틈을 쪼개어 쉬지 않고 운기조식할 시간을 주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는 운기조식을 통해 내공을 강화시켰 다. "퓨―우―!" 반각 여를 운기조식한 남궁은미는 거친 숨을 불어냈다. 피곤하던 몸이 조금 은 활기가 느껴졌고 피곤해 보이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부스럭― 남궁은미는 품을 뒤져 양피지(羊皮紙)로 만들어진 조그만 물건을 끄집어냈 다. 양피지는 그녀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온 물건이기도 했다. 그녀가 지닌 양피지는 그녀의 가문인 남궁세가 뿐만이 아니라 비류문까지 몰락의 길을 가도록 한 마물(魔物)과도 같은 것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중 해지는 물건이었다. 남궁은미는 양피지를 폈다. 빽빽한 선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기호로 이 루어진 양피지는 장보도였다. 지도의 한곳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표시한 장 보도에는 그녀의 피가 절어있어 검붉게 변해 있었다. "그 사내는 누구였을까?" 갑자기 생각나는 사내의 얼굴이 남궁은미의 머리 속을 지배했다. 오래 전 그녀를 구해준 사내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그녀를 내팽개치고 자신 의 길을 떠났다. 혼미한 정신이었지만 사내는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던 옷을 모두 벗기고 치 료를 했다. 심지어는 가슴의 상처까지도 치료를 해 놓았다. 당시에 그녀는 정신이 없었지만 언뜻언뜻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무서운 사내였어. 나를 쫓던 그 무서운 육지도마와 그 형제들을 단 일 검 으로 죽였다니...... 더구나 의식은 없었어도 그가 나를 치료해 준 것을 알 수 있어. 그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있지도 않았을 거야.' 그녀는 갈대가 어우러져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수염이 마구 엉클어지고 머리가 길었던 무심하기만 하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찾아야해. 그래야 오빠의 원수, 그놈들을 죽이고 원한을 갚을 수가 있어." 남궁은미는 장보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육 개월을 도 주한 이유도 바로 장보도 때문이었다. 장보도는 이제 누구에게도 줄 수 없 는 물건이 되었다. 설사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모르겠어. 장보도는 두 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분명 뇌룡탄까지 가야하는 것은 맞는데...... 장보도가 잘못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다음은 알 수가 없으니....." 남궁은미는 벌써 육 개월간 끊임없이 도주를 하며 자신의 품에 감추어진 장 보도가 가리켜주는 지점을 찾아다녔다. 장보도가 뇌룡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불과 한 달 전이 었다. 그전에는 장보도를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모든 것을 깨닫고 보니 장보도는 반쪽이었다. 그러나 장보도가 가 리키는 곳을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도주를 한없이 하다보니 장보도가 가리키는 지형(地形)을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서 가자. 혹시라도 놈들이 뇌룡탄을 지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부스럭! 남궁은미는 수풀을 기어 나왔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이었 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2편 16 페이지: 1/38 자료번호: 279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3 ─────────────────────────────────────── ■ 상견환 제16장-우리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 파스스스― 하나의 인형이 초풍비의 앞을 막아섰다. 갈대가 듬성듬성 했고 군데군데 소 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진 들판은 조금 전 초풍비가 지나온 갈대 숲과는 많이 달랐다. 군데군데 깔린 자갈도 초풍비가 지났던 갈대 숲과는 달랐다. 그 동안 초풍 비가 지나온 길은 습기를 머금은 진토(塵土)였고 그 길도 일부는 물이 질척 거렸다. "헛!" 너무도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에 초풍비는 가슴이 덜컥하는 경악을 불어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강한 자다. 지금까지 내 앞길을 막은 자는 이 백 명이 넘지만 아직 내가 감지하지 못했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 초풍비는 등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느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고 검을 부딪치며 격전을 벌였다고는 하나 그의 귀를 피 했다는 것은 결코 내공이 약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대는?"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목제(木帝)라고 부른다네" 단아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전신에는 오행(五行)의 기운이 넘쳤고 손에는 한 자루의 목검(木劒)을 들고 있었다. 빡빡 밀어버린 머리가 승인을 방불케 했으나 분명 그는 승려가 아 니었다. "목제?" "듣지 못한 모양이로군. 우리 을목세가에는 오행신군(五行神君)이 있는데, 강호동도(江湖同道)들은 우리 다섯 명을 가리켜 각기 오행에 따라 부르고 있다네." "오행이라고? 그러면 수목금토화(水木金土火)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네. 한 가지 알려줌세. 비록 내가 중년인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팔십을 넘었으니 존댓말을 사용하게. 아랫사람에게 반말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그럽시다." 초풍비는 가볍게 내뱉었다. 을목세가의 인물치고는 제법 기도가 있는 인물이었다. 초풍비가 죽이며 돌 파한 이백여 명의 무인들은 한결같이 기도라는 것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행이라면 나머지 넷은 어디 있소?" "여기 있다." 스스스― 초풍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에선가 아스라이 일갈이 들리며 네 개의 신형이 땅에서 솟아올랐다. 그들은 빠르게 움직여 초풍비의 주위를 둘러쌓 다.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중년인으로 보였다. 초풍비는 그들의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대단한 자들이다.' 오행신군은 각기 전신에서 천하를 오시(傲視)하는 기운을 뿌려내었다. 각기 우주(宇宙)를 나타내는 오행의 강기였다. 오래도록 오행의 기운을 습득했다 는 것을 알 것 같았다. "후후후, 나는 금을 맡고 있지! 친구들은 나를 가리켜 부르기를 금제(金帝) 라 부른다네." 자신을 금제라 말한 사내는 마치 친구처럼 친근감 있게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칼집도 보이지 않는 두터운 도를 지니고 있었다. 도는 직도였는데 석 자가 넘지 않아 보였고 기이하게 칼날이 없었다. 투박 한 철판을 오린 것 같은 모양이었으나 그의 손에 들려있으니 무서운 병기로 변해 보였다. "후후후, 들어보았으리라 믿소. 난 한때 오지회를 거느린 적이 있었소." "헛! 초풍비!" "그럴 리가, 가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행신군의 다섯 명은 갈대 숲을 지나 자신들을 향해 오는 자가 초풍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도 오래 전에 초풍비의 놀라운 무위 (武威)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설사 그들이 초풍비가 온다는 것을 들었다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 다. 아무리 그보다 강한 자가 온다해도 오행신군은 가주의 명을 거역할 수 는 없을 것이므로...... "믿어야 되오. 난 분명 초풍비요." "킬킬킬, 애송이 너무 무게 잡지 마라." 초풍비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등에 긴 장봉을 걸친 사십대 후반 의 중년인이 초풍비를 바라보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겉으로 사십대의 중년 인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도 팔십의 노객(老客)일 터였다. 등에 둘러멘 장봉의 끝에는 짧은 봉이 달려있어 마치 쇠도리깨처럼 사용하 는 병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석면의 초라한 객잔에서 풍무영을 만 나며 경험한 적이 있었던 대초자곤 이라는 병기였다. "후후후, 당신이 토제(土帝)겠구려." "그렇다. 눈은 제대로 달렸구나." 까칠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토제가 거들먹거렸다. 워낙 키가 작았음인지 등 에 멘 병기가 더욱 크게 보였다. 그가 병기 대초자곤은 오래 전부터 농사꾼 들이 사용하던 쇠도리깨를 발전시킨 병기였다. 날카롭지는 못했으나 그 파괴력이 놀라워 함부로 부딪치기가 어려운 병기라 는 사실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고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병 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후후후, 네가 그토록 무섭다는 초풍비냐? 나는 수제(水帝)라고 부르는 어 른이시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냘픈 몸매를 지닌 중년인은 이미 초로 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는데 끝이 갈라진 기이한 검이었다. 검의 끝에는 긴 철삭이 달려 그의 손목에 감겨져 있었다. 검의 길이는 두 자를 조금 넘었다. '기이하게 생겨먹은 이랑도로군.' 이랑도는 매우 긴 것이 특징이었다. 이랑도라면 십 척에 이르는 긴 장봉에 두 자 정도의 끝이 갈라진 검인(劍刃)을 붙이는 것이 보통의 이랑도였다. 수제가 지닌 이랑도는 순수하게 검인만을 지닌 것이어서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분간도 하기조차 어려웠다. "나도 있다. 남들은 나를 화제(火帝)라 부르지." 키가 오 척을 넘지 않는 노인이었다 얼굴이 저녁 노을처럼 붉었으며 손에는 단권(段圈)을 두르고 있었다. '흠, 열량진기(熱量眞氣)를 사용하는 자로군.' 화제는 이미 늙어 팔십 나이가 보였다. 다섯 명의 오행신군중 그만이 제 나 이를 먹은 것 같았다. 그러나 키가 너무나 작았기 때문에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다. 긴 수염과 흰 머리칼도 어린아이가 머리가 센 것처럼 보여 어찌 보면 가관 (可觀)으로 보였다. "하하하, 노선배들도 나를 막으러 오셨소?" "물론이다. 자네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면 이곳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 다." "후후후, 그러면 한 가지만 물읍시다. 을목세가는 왜 나를 막고자 하오. 십 년 전의 일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초란이 원한 일임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인데......" "그건 네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도 할 말이 없다. 다만 가주의 명 에 따라 너를 막으러 왔으니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말아라." 목제가 비통하게 말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개인의 원한으로 자신들이 초풍비를 막으러 왔다는 사 실에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상하던 그들이었다. 초풍비의 말은 정곡(正 鵠)을 찌른 말이었다. 초풍비는 씨익 웃었다. "하하하, 어차피 무인은 싸움에서 죽고 검 때문에 명예를 지키는 법. 나 또 한 노인네들과 싸우는 것을 원치 않으나 목을 드릴 수는 없으니 나를 죽여 보시오." "기개(氣槪)가 있구나. 조심하라." 스스스스― 다섯 개의 그림자가 초풍비를 둥굴게 에워쌌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각기 다 른 강기가 퍼져 나왔다. 각기 다른 강기는 조화를 이루며 초풍비를 그물처 럼 옭아매었다. '과연, 오행이 뭉치면 어찌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다.' 초풍비는 전신을 압박하는 강기의 그물을 느끼며 반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 웠다. 동시에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려 전신에 유포시키며 호신강기를 운용 했다. "하하하, 조심하라. 오행진(五行陣)." 금제의 목소리가 울리며 제각기 다른 다섯 줄기의 강맹한 경기가 파공성을 울리며 초풍비의 전신으로 날아왔다. 초풍비도 마주쳐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파― 허공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강맹한 강기가 부딪쳐 회오리를 일으켰다. "모두들 죽고 싶다면 후배의 예로서 고이 보내드리리다." 초풍비는 외침을 터트리며 두 다리를 땅에 박고 검을 사선으로 그어 올리며 목제의 앞으로 쇄도했다. 마치 강궁에 퉁겨진 화살과 같은 빠름이었다. 초풍비의 몸에서는 눈을 아리게 만드는 짙은 살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 다. "놈, 내가 현혹(眩惑)될 줄 알았느냐?" 목제는 목검을 연신 뿌리며 몸을 비틀었다. 자연적으로 원이 회전하며 초풍 비가 뿌려낸 검기는 허공으로 흘러버렸다. 퍽! 목제가 뿌려낸 검기는 초풍비의 몸에 강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초풍비의 몸 은 가볍게 출렁거렸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의 중앙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앗 이놈이." 오행신군은 놀라 부르짖었으나 초풍비의 얼굴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양이 태연(泰然)하다고 해서 마음속까지 태연한 것 은 아니었다. 초풍비는 마음속으로 심하게 놀라고 있었다. 아니,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큰일날 뻔했다. 다행히도 내 주먹에 맞지 않았으면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 지도 모르겠다.' 목제가 뿌린 검기가 초풍비가 시전한 권풍(拳風)에 맞은 것은 우연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공중에서 검기를 해소하는 역할을 했기에 초풍비는 안전했다. "무서운 놈이다. 오행으로 상대하자." "뿌려라." 오행신군은 모두가 하나같이 공력을 끌어올려 공격을 시작했다. 목제의 검 은 초풍비의 단전을 노렸고 수제의 이랑도는 목에 나 있는 천돌혈을 노렸 다. 토제의 대초자곤은 머리를 빠갤 듯 바람을 일으키며 떨어져 내렸고 금제의 도는 허리를 양단할 듯 밀려들었다. 화제의 손에서는 번개 불같은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감아왔다. 차차창! 허공에서 무수한 병장기의 충돌이 일어났으나 초풍비는 여전히 멀쩡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모두의 병기는 모두 자신들이 목적했던 곳 에 닿아있었다. 그러나 피부를 관통(貫通)한 병기 또한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 하는지 그들이 먼저 알았다. "잘못되었다. 피해라." "어딜 탄강기(彈剛氣)!" 초풍비는 한소리 기합을 터트리며 검을 열 십자로 그었다. 콰드드드드― 초풍비의 검에서 번갯불이 일어났다. 퍼억! "크아아아!" 제일 재수 없는 자는 토제였다. 장병기를 사용하였기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봉을 따라 스쳐 올라오는 검의 기를 이기기에는 너무나 촉박했다. 창그랑! 토제의 손에서 대초자곤이 땅으로 떨어지고 이어 손이 핏물로 변했다. 이어 진 현상은 전신이 쩍쩍 갈라지는 파천황(破天荒)의 모습이었다. "아우!" "형님...... 피해요!" 미처 정신을 추스르지 못했던 나머지 오행신군이 비명에 가까운 경호성(警 護聲)을 뿌렸으나 이미 늦었다. 산산이 부서진 토제의 몸은 다져진 어육(魚 肉)이 되어 흩어졌다. "악독하구나." "네놈을 갈아 마시겠다." 오행신군은 이미 죽어버린 토제의 모습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들은 토제가 어떤 검법에 당해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강기를 사용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토제가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평상시의 초풍비가 지니고 있는 무공이 놀랍도록 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진기운용을 하면 반검에 진기를 심어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오행신군이 모를 뿐이었다. 흔히 무림에서 검강(劍 )이니 하는 말로 칭송되는 경지가 바로 초풍비가 뿌 려내는 탄강기와 같은 것이었다.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 수 없었다.' 초풍비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불어내었다. 그로서도 사실 그들 모두의 힘 과 부딪치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결과가 이리 나올 줄은 예측을 하지 못했었다. 처음으로 사용한 탄강기였다. 모든 내공을 사용하면 탄강기에 맞은 자가 시체도 보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초풍비였다. "으으으, 악독한 놈이로구나. 시체도 남기지 않다니......" "후후후, 오행신군. 묏자리나 보아 두시오" 초풍비는 착잡한 마음과 달리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이놈, 죽어라." 목제가 참지 못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목검의 강기가 파공성을 울리며 배심 (背心)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미약했다. 다섯이 덤벼도 끄덕 없던 초풍비가 아닌가? 초풍비는 느긋한 마음으로 탄강 기를 뿌려내었다. "가라, 출!" 탄강기공은 몇 가지의 기이한 효력(效力)이 있었는데 그것은 상대의 여력을 흡수해 시전자의 내공과 합쳐져 두 배의 위력을 낸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상대가 시전자의 두 배 이상 높지 않은 기력을 사용하는 한 얼마든 지 받아서 탄강으로 돌려줄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상대의 힘으로 상대를 죽이는 일이었다. 급히 탄강의 구결을 암송한 초풍비는 받아들인 목제의 경력과 자신의 경력 을 합해 뿜어내었다. "큭!" 추춤! 초풍비의 몸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목제의 경력을 받아들였다 뿜어내는 순간 초풍비의 등은 노출되었고 그것을 놓칠세라 화제의 주먹이 열량지기를 뿜어낸 것이었다. "크아악!" 목제가 목이 부러지며 무너졌다. 두어 번 들썩이던 목재의 몸이 잠잠해진 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쿨럭쿨럭!" 초풍비도 밭은기침을 토했다. 등에 맞은 화제의 일장이 그의 창자를 심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그리 큰 고통이 아닐 수 있었지만 반탄결(反彈訣)을 사용하는 동안 그의 등 은 호신강기가 풀려있는 상태여서 맨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초풍비가 기침을 토하자 한 모금의 피가 솟구쳤다.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 았으나 상처를 입은 것을 살아남은 세 명은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흐흐흐,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감히 아우를 죽이다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 화제의 얼굴에 살기가 짙어졌다. 그의 전신에서 용광로(鎔鑛爐)같은 열기가 활활 타올랐다. '머뭇거리다가는 결코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속전속결(速戰速決) 로 모든 것을 정리하자.' 생각을 굳힌 초풍비는 반검에 모든 내력을 주입했다. 동시에 몸을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검을 가슴 앞에 고정시켰다. 바바바바― 파리가 거칠게 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초풍비의 검에서 붉은 광채가 두 자나 밀려 나왔다. "헛, 검망(劍 )이다." "피해라. 검망이다." 오행신군의 살아남은 세 명은 급히 허공으로 몸을 퉁겨 올렸다. 그들도 검 망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검에서 뿌려진 광망(光芒)이 너무 도 거세었기 때문에 검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검망은 아니었다. 검망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수백 년의 운기조식이 필요했다. 아무리 내공이 출중한 초풍비라 한들 쉽사리 검망을 뿜어내기는 불가능했다. 다만 초풍비가 익힌 검공(劍功)이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오행신군의 삼 인은 결정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졸지에 등을 보이고 만 것은 상대에게 공격할 기회를 준 셈이 되었으므로...... "합일!" 슈우우우― 검과 몸이 합일된 초풍비는 허공으로 따라 오르며 연속으로 세 명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크아아악!" "피해라. 크흑!" 투투툭! 분리된 동체(動體)들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뎅겅 잘린 목이 한참 만 에야 허공에서 떨어져 초풍비의 발아래 굴렀다. 후두두두―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초풍비의 의복을 붉게 물들였다. 검을 늘어뜨린 초풍비는 한참동안을 굳은 듯 서 있었다. 과도한 진기를 사용했으므로 전신에 힘이 빠졌다. 만약 누가 그를 공격한다 해도 반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쉬운 듯 보이는 격전이었으나 수십 명의 무인들을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 전이었다. 사용해보지도 않았던 십이 성의 진기를 사용해서야 그들을 겨우 제압할 수 있었던 초풍비였다. 강호에 나온 이래 십이성의 내공을 모두 사용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욱, 겨우 칠성밖에 익히지 못한 필살기(必殺技)를 십이 성의 내력으로 펼쳤더니 오장이 뒤틀렸다. 이들이 나를 기다리지는 않을텐데...... 이대로 라면 정말 큰일이다.' 초풍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을목세가의 무인들이 달려든다면 아무 것도 기약하기 어렵기 때문 이다. "어디서건 운기조식을 해야 한다." 초풍비는 주변을 둘러보다 키보다 좀더 큰돌들이 쌓여있는 곳을 발견하고 조심조심 다가갔다. 주위를 둘러보고 바위 틈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위 틈으로 사라졌다. 오십 명이 넘어 보이는 무인들이 초풍비를 둥글게 에워쌌다. 멀지 않은 곳 에 누각(樓閣)이 보였고 누각 위에는 괴이독날(怪異毒捺)하게 생긴 괴인이 초풍비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초풍비도 괴인의 눈을 의식할 수 있었다. '이들을 먼저 죽여야 한다.' 초풍비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하하하, 죽여라." 어디서 들리는지는 구분할 수 없었으나 땅을 쩌렁하게 울리는 호통이 들리 자 초풍비를 막아섰던 무인들이 무섭게 병기를 휘두르며 몸을 날렸다. '이들은 을목세가의 인물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초풍비는 눈을 빛냈다. 처음에 그를 막은 자들은 을목세가의 가솔들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타나는 자들은 점차 불어났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중원의 모든 무공 들이었다. '많은 자들을 모았군.' 막연(漠然)한 추측이었다. 구파일방의 무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중원의 무학이 그의 앞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조종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배후(背後)의 조정자(調停者)가 있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으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슈슈슈― 갑자기 오른쪽 어깨를 향해 두 개의 검이 쏘아들었다. 각기 차갑고 뜨거운 검기는 대성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막강한 경기를 지니고 있었다. "하앗, 어리석은 놈들......" 초풍비는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며 왼쪽 식지를 펼쳐 연속으로 두 번 퉁겼 다. 쉭! 퍼퍽! "크아아악!" 덮쳐들던 두 개의 신형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하나의 신형 이마에는 바 람구멍이 뻥 뚫려있었고 다른 한 명의 무인은 목에 돌출된 천돌혈이 부수어 져 있었다. 죽은 자의 머리 속에서 반짝하고 빛을 뿌리는 것은 은자였다. "흐흐흐, 감히 어디라고......내 손맛을 보아라." 칠순의 강마른 노인이 싸늘한 안광을 뿌리며 날아드는데 짙푸른 장포에 호 랑이가 그려져 있어 곧 아가리를 벌리고 초풍비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헛, 을목세가의 호법단(護法團) 표식이다.' 초풍비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호룡장(虎龍掌)을 받아라." "흥! 너나 정신을 차리고 내 손을 받아라." 펑! 둔탁한 소리는 마치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 같았다. 날아들던 노인의 몸이 허공에서 날아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초풍비는 뿜어내었던 장력(掌力)을 거두며 뒤돌아 섰다. 쿵! 노인은 땅바닥을 뒹굴었다. 아랫배가 터져 검붉은 피가 흰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기름기가 보이는 창자도 밀려나왔다. 훈훈하고 거북한 피비린내가 훅하니 풍겨졌다. "이놈, 네가 초풍비라는 놈이냐?" 안색이 시커먼 노인이 바람처럼 날아 내렸다. 양손에 나누어 든 한 쌍의 묵 부(墨斧)가 검은빛을 뿌렸다. "알면서 왜 묻는 거냐? 너는 누구냐?" "철궁대주(鐵弓大主) 여반삼(呂班 )이다." '과연 모두 끼여들었군.' 초풍비는 자세히는 몰라도 을목세가가 어떤 무인들의 구조로 이루어졌는지 는 알고 있었다. 구조에 대해서는 초란이 이야기를 해준 것이었다. "너나 죽어라." 쉬이이익― 묵부가 바람을 가르며 밀려들었다. 초풍비는 몸을 뒤집으며 손을 뻗어 묵부의 면을 후려쳤다. 동시에 몸을 퉁 겨 달려가며 어이없어하는 표정의 여반삼 가슴에 어깨를 연속으로 후려쳤 다. 소림의 비결이 전개되자 야반삼은 묵부를 놓치며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고 입가에 피가 흘렀다. 입으로 흘러나오는 피는 그가 가슴에 얼마만큼의 충격을 받았는지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으으으! 이런 가...... 가공할 무위가!" 여반삼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허공으로 도약한 초풍비의 신형이 바람개비처럼 회전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 도로 다가갔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초풍비의 주먹이 회전력과 함께 긴 반원을 그렸다. 퍽! 초풍비의 주먹은 정확하게 여반삼의 머리를 빠개버렸다. 허공 가득 뇌수가 퍼졌다. 휙! 쉴 사이를 주지 않고 파공성과 함께 하나의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현의 무복(玄衣武服)을 차려입은 이십대 초반의 아리따운 여인 이었다. 손에는 긴 요대가 들려 독사(毒蛇)의 혀처럼 초풍비를 향해 날름거렸다. "앗!" "현녀대주(玄女隊主)다." 그녀를 알아본 을목세가의 무인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 현녀대는 을목세 가에 소속된 열 개의 추살대 중 하나로 여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열 개 중 단 하나뿐인 여인들의 추살대였기 때문에 대주인 그녀를 모르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을목세가의 그늘에 발을 담그지 않은 무인들도 그 녀를 알아보았다. 일설에는 강호의 남아들이 꿈에도 그리는 여걸(女傑)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 도였으나 콧대가 세고 웬만한 사내들의 무공보다 높아 사내들을 발가락의 때보다도 가볍게 여긴다는 소문이 있는 여인이었다. "계집은 집에서 밥이나 하고 아기나 낳는 것이 본분(本分). 내 조공(爪功) 을 막을 수 있을까?" 초풍비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폈다. 슉! 슈슈슈슈― 허공을 찍듯이 휘둘러 가는 초풍비의 다섯 손가락에서 바람을 가르는 파공 성이 울렸다. 파공성이 울린 직후의 소리는 더욱 컸다. 현녀대주의 뒤를 따라 초풍비의 몸이 빠르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퍼퍼퍽! "크윽! 허공을 날던 현녀대주의 몸이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수십 줄기의 핏방울이 허공으로 퍼졌다. 피는 안개처럼 퍼지며 허공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털썩! 현녀대주의 몸은 허공 삼 장의 높이에서 떨어지더니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 며 널브러졌다. 두 팔과 두 다리가 탈골(奪骨)되었는지 온몸이 물먹은 솜처 럼 흐느적거렸다. "앗!" "저럴 수가!" "과연 초풍비다." 여기저기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고 비명과 비통함이 어우러진 소리가 들 렸다. 초풍비가 땅바닥에 뒹구는 현녀대주를 바라보니 몸 전신에 마치 갈고리로 마구 긁어놓은 듯한 상처가 옷을 찢은 사이로 드러났고 아리땁던 얼굴에도 다섯줄기의 상처가 길게 이어져 흉측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뼈가 드러난 얼굴은 세상에 둘도 없는 추녀(醜女)로 변해 있었다. 살벌하게 변해 뼈가 드러난 얼굴과 몸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고 신경이 살았는지 가끔 몸의 일부가 꿈틀거렸다. "이놈, 은률(隱律)의 검도 받아 보아라."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두 자루의 검이 연속으로 초풍비의 몸을 그어 왔다. 허공에 나타난 자는 전신에 태극문양(太極紋樣)이 그려진 도복을 입 고 있었는데 양수검(兩手劍)을 익힌 듯 쌍수에 각각 한 자루씩의 검을 들고 있었다. "은률도장(隱律道長)이시다." '은율도장...... 말코도사들까지 나타났단 말이렸다.' 초풍비는 지체없이 검을 겨누었다. 은율도장은 한때 화산파(華山派)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 알려졌었지만 작금 에 이르러 그가 을목세가에 몸을 담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하하, 이제 보니 비겁한 을목세가의 원흉들이 모두 기어 나왔구나." 번쩍! 검에서 붉은 줄기가 화살같이 늘어나더니 검을 떠나 은률도장의 몸을 감았 다. 은율도장은 미처 검을 뽑을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순식간에 은률도장의 몸을 스친 붉은 검기는 허공으로 사라졌으나 모두들 붉은 검기를 볼 수 있었고 검기의 정체를 감지한 몇몇 늙은 검수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으...... 검강이다." "인세에 검강이 나타나다니......" 하늘에서는 뿌연 연기가 뿌려지고 있었다. 은률의 몸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강에 부딪힌 모든 물체는 재가되어 버린다는 말이 사실로 드 러나는 순간이었다. 은률도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검강에 부딪친 순간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검강이 아니다. 멍청한.' 초풍비는 반검을 움켜쥐었다. 기실 조금 전 그가 뿌려낸 검기는 검강이 아니었다. 그가 익힌 검결의 특징 이었다. 그가 익힌 검결은 마지막 초식에 이르면 검강과도 같이 붉은 열량지기가 홍 운(紅雲)을 일으키며 쏘아져 나가 상대를 격살시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강과는 차이가 있었다. 검강은 진기를 검으로 유형화(有形化)시켜 쏘아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익힌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천하에 그 누구도 아직 검강을 사용할 만큼 내공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 러나 많은 무인들은 그가 뿜어낸 검기가 검강이라 믿고 있었다. "이놈!" 허공에서 벽결같은 호통소리가 들리고 잿빛 가사를 걸친 승려가 날아 내렸 다. 이마에 계인(契印)도 찍지 않아 중인지 불확실하기는 하나 분명 승복(僧服) 을 걸친 것으로 보아 중인 것은 확실했다. 키가 작고 뚱뚱한 것이 위아래를 구분하기 힘들게 만들기는 하나 중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네놈은?" "마도천불(魔刀天佛)이라고 들어보았느냐?" "마도천불? 처음 들어보는군. 무림에 너 같은 가짜중도 있느냐?" "이런 찢어 죽일 놈!" 마도천불은 분을 참을 수 없었는지 쌍장을 휘두르며 신형을 전개시켰다. 어느새 오른손에는 박도가 들려있었다. 벼락같은 섬광이 일어나며 두 개의 귀면상(鬼面像)이 초풍비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초풍비는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초풍비는 적궁의 비학(秘學) 은파만리형(銀波萬里 )을 뿌리며 빠르게 몸을 이동시켰다. 반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머리위로 치켜들어 갈라가며 몸은 일직선에 되도록 했다.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는지라 마도천불이라 자신을 소개한 승 려는 일순 당황했다. 급히 몸을 피하려 강기를 회수했으나 초풍비의 몸이 빨랐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간발의 차이는 승부(勝負)를 결정 짓는 요건이었다. 초 풍비가 지닌 바 이상의 무위를 보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초풍비는 절대 피하는 법이 없었다. 설사 상대가 더욱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해도 강기슭으로 파고들어 상대를 가르고야 말았다. 대개의 고수들도 자신의 강기를 파고들면 겁을 내게 마련이었고 그 찰나의 순간을 이용하여 초풍비는 상대를 격살하거나 도륙해 버렸다 "이...... 이런 어이없는 일이." 귀면상이 쪼개지며 마도천불의 몸이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휙! 초풍비의 몸이 갑자기 군중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순식간에 장내는 피보라 가 몰아쳤다. 난무(亂舞)하는 손의 그림자가 둘러섰던 자들의 목덜미를 감아갔고 머리에 눌러쓰고 있던 패갑둔이 허공을 날았다.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패갑둔 의 위력은 놀라웠다. 패갑둔은 날카로운 상어의 이빨처럼 달려들었고 스친 모든 것들을 잘라버렸 다. 그것이 사람이든 나무이든 가리지 않았다. 패갑둔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로지 시체만이 남아 뒹굴었다. 불기둥을 토하는 검의 그림자 또한 잔인(殘忍)한 살인기예를 보여주고 있었 다. 마치 이지(理智)를 상실한 자의 모습처럼 초풍비의 신형이 허공에서 번 뜩였다. 지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초풍비의 모습이 번뜩거렸다.. 허공을 부수는 듯한 파공성을 동반하는 발의 그림자. 돌풍이 모든 것을 허공으로 말아 올렸다. 하늘이 어두워지는 착각에 미친 듯 달려들었던 을목세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은 피를 뿌리며 무너졌 다. "모두 죽인다." 초풍비의 목소리가 격노한 음성으로 허공을 울릴 때마다 쓰러지는 것은 사 람이었고 허공으로 퉁겨지는 것은 죽은 자의 팔다리와 묽은 핏물이었다. "무섭다. 도주하라." "크아아악! 상대할 수 없는 자다." 누구도 초풍비의 미친 듯한 행위를 막을 수가 없었다. 막기 이전에 도주하 기에도 여의치 않아 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초풍비에게 내맡기고 있 었다. 검은 팔다리를 잘랐다. 허공을 격해 휘둘러지는 장공(掌功)은 내장을 파열시켰다. 소림의 고승 백 지대사로부터 전수된 구결에 따라 물 흐르듯 움직이는 초풍비의 손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헉!" 남궁은미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 도 좋았다. 남궁은미를 추적하던 사내들이 모두 황천으로 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이는 자는 그녀가 어렴풋하게 기억을 하는 사람이었다. 달라진 것 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는 똑같이 쫓기는 몸이라는 것 뿐, 초풍비의 등 으로 젖혀진 방갓이 과거보다 늘었다는 것만이 달랐다. '저자는......? 그래, 그 사람이야.' 미친 듯 허공을 넘나드는 초풍비의 그림자를 보며 남궁은미는 얼굴을 활짝 폈다. "크아아악!" "케엑!" 초풍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는 비명이 터졌고 그때마다 수명 씩 무너져 내렸다. 몸이 잘린 자는 잘린 자대로, 몸이 부서진 자는 부서진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는 이미 피로 만들어진 도랑이 있어 붉은 피가 응고도 되지 못하고 거친 땅을 흘렀고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피가 신발에 엉겨 끈적거렸다. "사람도 아냐." 남궁은미는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다물지 못한 것이 아니고 다물어지 지 않았다. 너무 놀라 벌어진 턱이 빠질 듯 아팠으나 입을 다물어야겠다는 생각을 못하는 남궁은미였다. "으응!"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남궁은미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초풍비를 볼 수가 있 었다. 초풍비의 전신은 피로 범벅이 되어 눈과 이를 빼놓고는 모두 붉은 색 이었다. "캬악!" 반검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남궁은미는 너무도 놀라 한마디 비명을 토하며 뒤로 넘어졌다. "저여요. 남궁은미!" 스스슷― 가슴을 찔러오던 검이 급히 방향을 바꾸어 남궁은미가 쓰러진 땅바닥을 후 려쳤다. 퍽―프스스스― 남궁은미의 몸을 가까스로 피한 검기가 무려 두 자나 되는 구덩이를 팠다. 뿌연 먼지가 사위에 흩어지며 그녀를 먼지의 장막(帳幕)속에 가두었다. "누구?" "절 모르시겠어요. 남궁은미요. 저를 추적하는 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었잖 아요." "구해주었다고?" "그래요. 벌써 두 달이 지난 이야기지만...... 당신이 그때 저를 구해주었 어요." "그렇군. 여기는 웬일이지?" 초풍비는 그녀의 얼굴에서 먼지가 걷히자 얼굴을 기억해 냈다. 이미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희미했다. 초란을 찾아 작얼산을 내려와 태양하구로 향할 때 처음으로 만났던 그녀였다. '그래, 작얼산을 내려온 한 달 뒤에 계집아이를 구한 적이 있었지. 이곳에 서 만나다니.' 짧은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초풍비는 검을 거두며 돌아섰다. 주위를 돌아보는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벌판에 가득 쌓인 시체들은 어림잡아도 이 백 명은 넘어 보였다. '모두 내가 죽인 자들이로군.' 초풍비는 나직한 탄식(歎息)을 불어내었다. 과거 오지회의 시절에도 그는 가능한 살인을 삼갔었다. 천하인이 모르는 서 너 차례의 살인이 있기는 했으나 부득이한 경우였고 살려두어서는 안될 자 들의 경우였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랬기 때문에 천하인들은 아직도 오지회를 이끄는 초풍비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오지회를 정사중간으로 보면서도 칭송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기도 했다. "당신은 여기 어쩐 일인가?" "당신은요?"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는가?" 초풍비의 말에 남궁은미는 자신이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초풍비의 말대로 질문(質問)을 먼저 던진 것은 초풍비였고 자신은 분명 나 중에 질문을 던졌으니까. 남궁은미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나에게는 한 장의 양피지가 있어요. 당시 쫓기던 것도 양피지 때문이죠. 양피지 때문에 오빠가 죽었어요. 모두 놈들의 마수에 걸려서요" 초풍비는 풍무영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녀가 뇌룡탄에 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지?" "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에요. 장보도가 가르치는 곳이 뇌룡탄이었어요. 비록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이들에게 쫓기기는 했지만요." "그렇다면 이들이 당시 그대를 쫓던 자들과 한 패겠군. 결국 따지고 보면 사천무림이 한패라는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장보도가 이곳으 로 불러들였다는 것이!" "그럴 리가?" 반문(反問)을 하기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남궁은미는 말끝을 흐렸다. 초풍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자신의 오빠가 죽은 것은 무림의 사냥꾼이라 불렸던 육지도마의 짓이었고 그녀가 장보도를 지녔다는 것을 아는 자는 육지도마뿐이었다. 육지도마는 이미 오래 전에 초풍비의 손에 죽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을목세 가가 자신을 추적했다. 을목세가의 추적을 피하다보니 사천무림의 그림자들까지 그들과 합세했다. 이제는 아예 사천무림 전체가 을목세가라는 생각까지 드니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장보도는 가짜로군." "예?" "내 말을 믿어 그 장보도는 가짜가 분명해. 아마 을목세가가 노린 것은 남 궁가문에 있던 무엇일거다." 남궁은미의 얼굴이 탈색을 일으키며 눈에서 충혈된 눈이 떠졌다. 짧은 시간 생각해 보니 초풍비의 말은 그 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의문과 너무도 일치했 다. 슬며시 분노가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살기가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으드드득!" 남궁은미가 이를 갈았으나 이미 지나간 배요, 돌아간 철새였다. 달리 방법 이 있을 수 없었다. 남궁은미는 지난 일년이 악몽(惡夢)같이 다가왔다. 누가 곁에 있다면 난도 (亂刀)라도 쳐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초풍비는 그런 그녀를 무심(無心)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그녀 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남궁은미는 자신을 추스를 수가 있었다. 눈가에 묻은 눈물을 훔치며 초풍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까지 초풍비는 측은한 눈으로 남궁은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나는 오래 전부터 이들의 추격을 받고 있는 셈이지. 이들은 내가 사천으로 아우들을 구하러 가는 것을 막아 천라지망을 펼쳤지. 벌써 이틀째야." "그렇지만 모두 죽였잖아요." "천만에." 초풍비의 말에 남궁은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초풍비를 올려다보았 다. 주위를 둘러보면 살아있는 생물체는 오직 초풍비와 자신뿐이었다. 그런데도 초풍비는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궁 은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살아있는 자는 보이지 않 았다. "무슨 소리예요.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당신과 나뿐이 에요." "아니. 정말 무서운 자는 저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초풍비가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언덕 위에 있는 조그만 정자였다. 정 자는 제법 멀리 있었으나 초풍비와 남궁은미,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정자 안에 있는 하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비록 불투명 하기는 하지만 분명 사람의 형상을 갖춘 모습의 그림자였다. "누구죠?" "나를 기다리는 사람." "당신을 기다린다고요?"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같이 기다릴지도 몰라. 그는 아마도 우리를 기다리 느라고 매우 지루했을 거야." "그가 누구죠?" "나도 몰라." 초풍비의 말에 남궁은미는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초풍비가 모르는 자가 초풍비와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가 강자(强者)라는 이야기라는 뜻이 되 기도 했다. "그냥 가면 안되나요?" "안돼." "왜죠?" "그를 실망시켜서는 안되지. 그는 적어도 사흘동안 우리를 기다렸을 거야. 더구나 우리가 이곳을 피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아." 찌이익― 초풍비는 시체에서 비교적 깨끗한 천을 찢어내어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닦 았다. 이미 말라붙어 습기가 느껴지지 않는 피는 닦여지지도 않았지만 초풍 비는 애써 정성을 들여 몸에 묻은 피를 닦았다. < 2권 끝 마지막 3권 계속> 추신] 이제 마지막 한권이 남았네요... 파일 정리가 끝난 후에 계속 올리겠습 니다. 현재 작업중...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17 페이지: 1/32 자료번호: 284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4 ─────────────────────────────────────── ■ 상견환 제17장-역시 기다리는 사람이 있군 "흐흐흐. 놈을 뇌룡탄으로 몰아 넣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남궁 계집도 뇌룡탄으로 밀어 넣는데 성공했습니다." 사내는 무릎을 바닥에 댄 모습으로 부지런히 보고를 했다. 사천에서 일어나 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사내를 통해 단화연의 귀에 보고되고 있는 중이었다. 만도화원주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는 누가 보아도 칠순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인피면구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사십대의 뜨거운 분노를 지니고 있 었다. "그래, 그렇다면 사천의 일은 어찌 되었다고?" "그게......" "말하라." 단화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망설이는 부하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무언가 약간의 잘못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 못 챌 그가 아니었다. 설사 모든 계략이 실패(失敗)를 했다고 하 더라도 자세한 것은 들어야 했다. "사천의 계략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쾅! 그가 내려치는 무지막지한 힘을 이기지 못한 의자의 팔걸이가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단하(段下)에 엎드린 자세로 보고를 하던 사내의 몸이 사시 나무처럼 떨렸다. 오랫동안 단화연을 지켜보아 온 사내는 자신의 목이 붙어있으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다. 오로지 살 궁리를 해야하는 그로서는 등줄기에 흐르는 땀도 미 처 의식을 할 수 없었다. "과연, 초란이 선택한 남편답군." "남편이라뇨?" "그대는 몰라도 된다." 갑작스럽게 냉정해지는 단화연의 말투에 사내는 목을 움츠렸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 동안 단화연은 늘 부드러웠다. 설사 자신을 죽이겠노라고 달 려드는 자가 있어도 겉으로 웃는 자가 바로 단화연이었다. 사내는 단화연의 웃음 속에 얼마만큼의 살기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평소의 마음을 가슴속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던 단화연이었다. 그러나 지 금은 아니었다. 늘 온화(溫和)하던 단화연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으 며 손은 팔에서부터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움켜쥔 상태였다. 사내는 전과 달리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설사 계략이 실수를 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했 다. '일이 매우 잘못되었다.' 사내는 얼굴을 탈색시켰으나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십 년 이 넘도록 한 번도 단화연의 명을 거역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이번의 경우도 그랬다. 단화연은 초풍비라는 사내가 나타났다고 하며 을목세가가 그를 척살하는 선 봉(先鋒)에 서리라고 했다. 단화연은 비밀리에 사천당가를 움직여 오지회의 잔당들을 몰살시키려 했고 무림의 적지 않은 문파들을 부추겨 무사들을 보내 을목세가를 도우라고 했 었다. 단화연의 주위에서 늘 서성거리는 사내는 의아했었다. 명확한 명분(名分)없이 사천무림의 무인들을 움직인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 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어찌되었던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검문산을 공격했고 그렇고 그런 사천의 무 인들은 단화연에게 받은 금전적(金錢的) 지원을 무시하지 못했는지라 초풍 비를 뇌룡탄으로 끌어들이는데는 한몫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불안합니다. 명분이 없다는 것은 재고하심이......" 사내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단화연은 단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놈들은 악독하다고 소문이 나 있다. 물론 내가 조장(助長)하기는 했지. 소 문대로만 한다면 그들은 비록 사람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 한 달 사이에 수백 명의 목숨을 죽였고 사천당가의 권위(權威)에 도전하고 있다." 사내는 급히 을목세가의 가솔들을 내보내 초풍비와 검문산의 산적들 뒤를 추적시켰다. 결과는 놀라웠다. 사천당가의 온 힘이 투입되어 있었지만 검문산의 산적들은 유유히 사라졌고 초풍비는 뇌룡탄에 이르는 길목에서 도살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진행된 일로만 보자면 초풍비의 죄는 죽어 마땅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사내도 움직이지 않았고 단화연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잠겨가고 있었다. "하하하하, 어서 오시게." 괴인은 마치 십 년만에 만난 친구를 맞이하듯 반가운 얼굴로 초풍비를 맞이 했다. 그가 앉아있는 팔각정에는 다리 없는 조그만 주탁이 있었고 한 가지의 안주 에 곁들인 죽엽청이 담긴 옥으로 만든 병이 놓여있었다. 잔은 도합 세 개뿐 이었다. "하하하, 잔을 정확하게 준비했지 세 개뿐이니." 무엇이 좋은지 괴인은 호들갑스러운 웃음을 뿜었다. 마구 엉클어진 머리가 그의 웃음을 따라 요동을 쳤다. "어마!" 괴인의 모습이 너무나 상상을 초월했는지 남궁은미는 한소리 비명을 지르며 초풍비의 허리 뒤로 몸을 숨겼다. 가쁜 숨이 초풍비의 등으로 느껴졌다. 초풍비는 묵묵히 괴인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그가 보아왔던 어떤 모습보다도 괴인의 모습은 처참했다. 두 다리 는 무릎 아래부터 잘려 있었고 두 팔은 어깨에서부터 잘려 두 자루의 검을 박아 넣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길게 자란 머리는 얼굴을 덮었고 몸에 입혀진 옷은 상거지라하더라도 입지 않을 누더기였다. 개방( 幇)의 거지들도 그가 입고 있는 옷을 입지 않을 것 같았다. "앉읍시다." 초풍비는 무심한 얼굴로 다가가 누각의 계단을 오른 뒤 술상이 차려진 주탁 의 맞은편에 앉았다. 괴인과는 정면에 앉은 꼴이었다. 아직도 무서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남궁은미는 초풍비의 곁에서 몸을 오돌오 돌 떨고 있었다. 비 맞은 참새 꼴이라고 할까? "난, 자네가 이곳까지 올 것으로 믿고 있었네." "그랬습니까?" "을목(乙木)의 어린놈이 만약 자네를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다면 계약이 무 효(無效)라고 하더군. 그래서 자네가 이곳까지 오기를 신께 빌었지." "잘하셨습니다." 초풍비는 정중하게 말했다. 가볍게 대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던 터였기에 그는 정중하고 후배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 잔 들게나. 난 오늘 자네하고 석 잔의 술을 들겠네...... 그 후에 싸워 도 늦지 않지." 초풍비와 괴인은 잔을 들었다. 남궁은미는 아직도 무서움에 질려 잔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두려움은 마음속에서부터 기인(起因)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잔을 들든 말든 초풍비와 괴인은 개의치 않고 잔을 비웠다. 탁― 잔을 내려놓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들어보게, 내가 왜 자네를 막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려 주겠네." "그러시지요." 초풍비의 얼굴을 쳐다보던 괴인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백 삼십 년 전,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구시(九市)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 다. 마을에는 이십여 호가 살았고 모두들 짐승을 잡는 도살업을 하고 살았 다. 그들이 잡는 소와 돼지는 질이 좋아 주변에 널리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이 잡은 고기를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인(自由 人)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문에 매어진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억압한 가문은 을목세가라 불렸다. 구시를 장악한 주인은 중원의 수많은 가문 중에서도 일이 위를 다투는 을목 세가였다. 그들이 도살한 육류는 을목세가의 철저한 관리하에 모처(某處)로 흘러갔고 그들에게는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재화만 주어졌다. 노궁탄(盧窮 )이라는 소년은 구시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도 짐 승을 죽이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도 또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가업을 이었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구시는 을목세가의 숨겨진 힘이었다. 구시에 사는 사람 들은 겉으로 소를 잡고 돼지를 죽이는 일을 하지만 을목세가의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을목세가의 위기가 닥쳤을 때나 힘이 필요했을 때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을목세가를 지켰다. 비극은 노궁탄에게 너무 빨리 왔다. 그의 나이가 이십이 되던 해에 을목세가의 가족이 그들을 보러왔다. 차후 을목세가를 이끌어갈 후지기수들이 가문의 힘이 모여진 곳을 보기 위 해 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단숙혜(段肅慧). 노궁탄의 인생을 바꾼 소녀의 이름이었다. 단숙혜는 당시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였고 천하의 명가에서 탐을 내는 요조 숙녀(窈窕淑女)였다. 그야말로 명가의 후손으로 손색이 없는 여인이었다. 노궁탄과의 만남은 그녀에게도 일대의 전환이었다. 비바람이 몹시 불던 날 쏴아아아― 천지가 함몰되는 그날의 비는 눈앞에 뻗은 팔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이 짙은 소나기였다. 십 년만에 처음 보는 괴변이라고들 이야기를 했다. "아씨가 없어졌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구시의 모든 남자들은 단숙혜를 찾기 위해 산지사 방으로 흩어졌다. 노궁탄도 예외는 아니어서 절벽이 깎아지른 듯한 산으로 올라갔다. "언젠가는 절벽에 매달린 옥녀상(玉女像)을 가져오겠어." 그녀의 말이 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시의 마을 뒤에는 무려 오십 장에 이르는 바위절벽이 있었는데 바위절벽 중앙에는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동굴이 있었다. 언제부터 만들어진 동굴인 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은 무성했다. 동굴 안에는 하나의 옥녀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옥녀상을 차지하는 자는 천 하제일이 되리라는 거였다. 을목세가는 의식적으로 동굴을 피했다. 구시의 마을 사람들도 어찌된 일인지 동굴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옥녀상을 찾으러 굴에 올랐던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콰르르― 번개가 쪼개지고 벼락이 하늘을 울릴 때 그는 미친 듯 바위를 기어올랐다. 바위를 올라 동굴에 올랐을 때, 그는 보았다. 단숙혜가 옥불상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절벽을 올랐느냐는 불문(不問)의 일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비록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남궁은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는 상대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인물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 은 듯했다. "비극(悲劇)이었다." "비극이요?" "사람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자네들은 모를 것 이야. 자! 한 잔 더하게, 그 후에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지." 괴인, 노궁탄이라는 사내는 어깨에 박힌 두 자루의 칼을 기이하게 비틀어 술을 마셨다. 양팔이 없는 대신 검 날이 박혀있기 때문에 부득이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초풍비도 망설이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안색을 변화시키던 남궁은미도 술 잔을 기울이는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남궁은미는 술을 따라 세 개의 잔에 가득 채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그건 운명이었다. 결국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요?" 초풍비는 듣기만 했다. 주로 대답하는 쪽은 노궁탄이었고 질문은 남궁은미가 했다. 그들은 죽이 잘 맞는 할아버지와 손녀(孫女)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초풍비는 듣기만 했다. "계속 이야기를 해주마." 괴인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맙소사." 노궁탄은 어찌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단숙혜의 다리에는 한줄기의 가는 끈이 묶여져 있었다. 알록달록 보이는 끈 은 천숙헤의 다리를 칭칭 감았는데 발목에서 둔부에 이르도록 긴 뱀이었다. 그것은 여인의 음기(淫氣)를 자극시킨다는 뱀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기절해 있었고 전신에 푸른 멍이 들어있었다. 그녀를 안고 절벽을 내려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궁탄은 단숙혜를 안았다. 을목세가의 아씨를 한낱 노복(奴僕)의 몸이나 다름없는 노궁탄이 안았다는 것은 을목세가의 주인이 아는 순간에 이미 결과는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 었다. 그들은 연 사흘을 동굴 속에서 정사(情事)로 보냈다. 사흘이 지나고 비가 그쳤을 때, 그들의 정사는 끝이 났다. "미안하오." "흑흑흑!" 사내의 미안하다는 말과 여인의 눈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과는 몸을 더럽힌 소녀와 상전의 몸을 탐한 더러운 하인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었 다. 그들은 마을로 내려왔다. 모든 것은 끝난 듯 보였다. 단숙혜도 더 이상 구시를 찾지 않았고 노궁탄도 여인을 잊지는 못했으나 그럭저럭 참으며 살아나갔다. 그는 가끔 바위절벽을 쳐다보는 일 외에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단 한 가지, 그는 누가 종용해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무공을 익히고 자신 의 일만 할 뿐이었다. 일년이 지난 어느 날. 을목세가의 인물들이 다시 나타났다. 단숙혜도 나타났다. 노궁탄은 뛸 듯이 기뻤으나 다가갈 수는 없었다. 엄연히 상전과 하인의 관계였던 것이다. "노궁탄은 따라 오라." 아기를 안고있던 을목세가의 가주는 그렇게 말했다. 노궁탄은 따라갔다. 은 밀한 곳에서 을목세가의 가주는 그에게 아기를 안아보도록 명했다. 아기는 겨우 백일이 지나있었고 딸아이였다. 아기는 다시 을목세가의 가주 에게 넘어갔다. "이 아이가 누구의 아기인 줄 아느냐?" 노궁탄은 멍청한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숙혜의 아기다." 쾅! 노궁탄은 머리 속에서 굉천뢰가 터지는 충격을 느꼈다. 일년 전의 일이 주 마등처럼 흘렀다. 사흘간에 걸친 정사가 여인을 임신(姙娠)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숙혜가 외면했구나.' 단숙혜의 외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아기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다가갔으나 가주는 다시 아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툭! 대신 그의 앞에 양피지 책자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익혀라." "무엇입니까?" "악마의 무공이다. 그것을 익혀 을목세가의 세 가지 명령을 수행하면 네 자 식을 주겠다." 을목세가의 가주는 떠났다. 눈시울을 적신 단숙혜도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에 아기의 낭랑한 울음소리만이 남았다. 모든 것은 운명이었다. 그들이 남겨준 무공은 악마의 무공이었다. 무공을 익히기 위해 그 동안 익히고 있던 내공을 버려야 했다. 두 팔을 어 깨에서 자르고 두 개의 칼날을 박아 넣었다. 다리도 잘랐다. 그 대신 무릎 아래에서는 경공을 펴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했다. 사람이 달 릴 수 있는 두 배의 바른 경공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의 부탁을 시원하게 마무리지었다. 한 번은 사천에서 을목세가의 활동에 제재를 걸었던 제형안찰사를 주살하는 일이었고 아기의 얼굴을 본 뒤 무려 십이 년만에 행한 일이었다. 육 년 동 안을 도주하며 살았다. 육 년이 지났을 때 그를 찾는 방(榜)이 모두 사라지 고 그를 쫓는 포교의 무리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번째 부탁은 을목세가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된 동방세가(東方世家)를 괴 멸시키는 일이었다. 아기의 얼굴을 본 뒤 무려 이십 년만의 일이었다. 동방세가는 철저하게 괴멸(壞滅)되었다. 노궁탄이 석 달을 걸려 행한 일이었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을목세 가가 동방세가가 지니고 있는 섬서 지방(陝西地方)의 상권을 얻기 위해 저 지른 일이었다. 그 뒤, 이십 년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딸아이는 이제 사십이 넘었을 것이었다. "크흐흐흐, 자네를 죽이면 내 딸을 만나게 해 준다고 했지. 원하지 않아도 자네의 숙명이야." "선배의 숙명이기도 하지요." 남궁은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노궁탄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구인지 생각이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궁은미의 얼굴에 혹시 하는 생각이 스쳤다. "혹시, 선배는 화후천존(華厚天尊)이 아니십니까?"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린 이야기다." "허!" 남궁은미는 놀라 거친 숨을 뱉어내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심장이 덜덜 떨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너무도 오래 전 이야기지만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초풍비를 돌아다보았으나 이미 그는 아는 듯 너무도 평온(平溫)한 얼굴이었 다. 사실, 초풍비는 노궁탄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강호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화후천존에 대한 이야기가 들끓 고 있었다.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후천존은 한때, 불과 이십 년 전이지만 천하최강(天下最强)으로 불리던 자였다. 어깨에 검을 박은 그의 무공은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화후천존에 대해서 알려진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왜 그토록 그가 잔인하게 살생을 저질렀는지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가 하늘을 오시(傲視)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탁! 그들은 마지막 잔을 내려놓았다. 팟스스스― 잔이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누구도 잔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누가 죽느냐에 대한 문제였으므로...... "자네를 만난 것은 참으로 행운이네." "저도 그렇습니다." "자네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지. 나를 이길 수 있다면 자네의 여인도 찾 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겠죠." 스스스슷― 그들의 사이로 거친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앉은 상태였지만 옷깃이 펄렁이 며 적지 않은 파공성을 일으켰다. "난 자네를 죽이고 내 딸을 만나러 가겠네." "저는 선배를 죽이고 내 여자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우후후, 우리는 똑같군. 모두 상대를 죽여야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말일세." "그렇군요." 초풍비와 노궁탄은 가볍게 웃었다. 그들은 일어나 누각을 내려갔다. 그들의 뒤를 따라 남궁은미가 조용히 누각을 내려갔다. 그녀는 땅만 쳐다보고 있었 다. "아가야. 저놈이 살면 너도 살게 될 거고......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만 말이다. 저놈이 죽으면 너도 죽을 것이다." 움찔! 남궁은미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휘이이잉― 거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땅바닥에 널려있던 갈대 잎이 회오리에 말려 하늘로 솟구 쳤다. 하늘로 솟구친 바람은 곧 하늘을 까맣게 뒤덮였고 갈대가 떨어져 내 렸다. "후배, 준비해라." "선배도 준비하십시오." 초풍비는 전신의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에 유포(流布)시켰다. 그의 몸이 불 에 달군 쇳덩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적궁이 자랑하던 내가 진기가 그의 전신에서 회오리를 일으켰다. 츠츠츠츳― 그의 발 밑에 아직은 푸른빛을 버리지 못하고 막 고개를 내밀던 작은 풀들 이 이지러졌다. "좋은 신공(神功)이다." "선배도 좋은 신공을 지녔군요." 초풍비와 노궁탄은 대조적이었다. 노궁탄의 전신에서는 먹장구름 같은 안개가 사방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츠츠츠츠― 노궁탄의 몸에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음향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주변 에 널려있던 풀들이 그의 발에 밟혀 마구 이지러졌다. 노궁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까지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그가 극 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서운 내공이었다. '두렵다.' 초풍비는 무림에 나온 이래 처음으로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하고 있었다. 그의 발은 불안정하게 변했고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멈추지 않 았다. 스스스슷― '주저앉을 수는 없다.' 초풍비는 마음을 다잡으며 전신의 진기를 일주천(一周天)시켰다. 임독양맥 이 열리고 십이 경락(十二經絡)이 떨렸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혈기는 더 욱 짙어졌다. '한번의 기회밖에는 없다. 오로지 한 번뿐이다.' 초풍비는 진기를 십이 성 끌어올렸다. 그의 몸을 감싸는 것처럼 은은하던 혈기가 더욱 짙어 몸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공기와 마찰을 일으킨 무형의 호신강기가 곳곳에서 불꽃이 번개처럼 피어올 랐다. "후후후, 후배, 한 가지만 묻자. 자네를 길러낸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군. 사부는 누구신가?" "나도 무어라고 대답하기는 어렵소. 다만 내가 몸담은 곳이 적궁이라고는 말씀드릴 수는 있소만, 선사께서는 당신이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으셨소. 다 만 천산괴노라고만 하시더군요." "은자(隱者)시구먼." 차르르르르― 말을 마쳤다는 듯 노궁탄의 몸에서도 묵기가 피어올라 그의 전신을 나찰의 모습으로 바꾸어 버렸다. 남궁은미가 보기에 그렇게 느껴졌다. 그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풍비는 좌측으로 이동했고 자연스럽게 노궁탄의 몸도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마치 중앙에 말뚝이 박혀있고 묶 여있는 송아지처럼 일정한 축으로 맴을 돌았다. 그들은 누구도 섣불리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단 한번의 기회뿐이 없는 그 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공격의 기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발!" 남궁은미는 애가 탔다. 가슴이 답답해져오고 팔다리가 저렸다. 자신의 목숨이 초풍비에게 달려있다 는 사실이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어쩔도리가 없는 상태였다. '도주할까.' 남궁은미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만약 도주한다해도 자신을 추적하는 자 들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준다는 보장(保障)도 없었다. 자신이 무사히 뇌룡탄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을목세가와 사천 무림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만약 자신을 죽이고자 했다면 서너 번은 죽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었다. "어떡해. 초대협, 제발...... 이겨야 해요."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만약 도주한다면 그 순간부터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냥개들이 달려 들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곳에서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몰 랐다. 남궁은미는 눈이 아리도록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한 시진이나 지났지만 누구도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모르지는 않았지만 남궁은미로서는 뼈가 말라 가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핫!" 초풍비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무려 삼 장이나 솟구친 그의 몸은 허공 에서 붉은 빛의 무리를 줄기줄기 쏟아내며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슈아아아아― 검기나 강기가 아닌 몸 자체였다. 공기가 산산이 부서지는 마찰음(摩擦音)이 일며 그의 몸이 떨어지자 기다리 고 있었다는 듯 한 무더기의 묵기(墨氣)가 땅을 박차고 허공을 향해 솟구쳤 다. 노궁탄이었다. 그도 병기나 강기를 사용하지 않고 몸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노궁탄도 초풍 비와 다르지 않게 몸 자체가 칼날 같은 강기로 변해 있었다. 우루르르르르― 쾅아아아― 두 개의 강기 덩어리가 근접함에 따라 허공에서는 천둥이 치고 눈사태가 나 는 듯한 거칠고 거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간격이 좁혀지며 허공 에서 기류(氣流)가 마구 흐트러졌다. 그들의 몸이 닿기도 전이었다. "하하하하, 좋은 수법이네!" "선배의 강기는 도저히 인간의 것이 아니듯 합니다." 허공에서 서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쾅! 서로의 몸이 부딪치기 전, 두 사람의 몸이 반탄을 일으키며 퉁겨졌다. 휘류류류류― 나선형의 바람이 불며 다시 땅거죽이 천지번복의 변화를 일으켰다. 팟! 땅에 부딪친 노궁탄의 몸이 탄력을 받아 처음보다 두 배는 빠르게 솟구쳤 다. 하늘로 퉁겨졌던 초풍비의 몸도 방향을 틀어 빠르게 내리 꽂혔다. "아아, 인간들이 아닌 것 같아." 남궁은미는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하며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허공을 쳐다보느라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심코 걸 음을 옮기며 강기의 그물을 피할 뿐이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초풍비는 검을 앞으로 내밀며 자신이 익힌 최강의 검결(劍訣)을 외었다. 바바바바― 검 끝에서 밝은 기운이 한 자나 늘어났다. 검의 모양을 한 검기였다. 두 시 진 전 오행신군에게 날려보냈던 열기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당시에는 붉은 진기의 모습이었다면 이번에는 백색투명(白色透明)하고 눈을 아리게 만드는 강기의 덩어리였다. '검강이다.' 위급한 순간이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희열(喜悅)이 폭포처럼 솟구 쳐 올랐다. 누구도 익힌 적이 없다고 알려진 검강이 자신의 손에서 뿜어지 는 것이었다. 슈카카카칵― 갑자기 그의 몸을 향해 호랑이의 이빨과 용의 비늘을 지닌 두 줄기의 검기 가 밀려들었다. 노궁탄이 날려보낸 검기에 이어 두 개의 어깨가 보였다. "탓! 검강!" 그는 혼신의 진력을 검에 실어 날려보냈다. 퓨화아아아― 검강은 투명한 빛 무리로 변해 두 개의 검기를 헤치며 날아갔다. 콰드드드드― 쾅! 귓가를 멍멍하게 만드는 폭음이 일며 가슴에 둔중한 충격이 밀려왔다. 머릿 속이 아득해졌다. 가슴이 울컥거렸고 현기증이 밀려 몸이 빙빙 도는 것 같 았다. "커흑!" 비명을 뿌리는 그의 눈에 별이 총총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을 한 모금 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아아, 끝이다.' 아득한 정신에도 비애(悲哀)가 밀려왔다. '가슴!' 노궁탄의 가슴이 보였다.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서도 노궁탄의 가슴이 보인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 지만 초풍비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끝에는 언제 등에서 끌러들었는 지 패갑둔이 들려있었다. '사부가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는 했지만......가랏! 나의 혼이여......' 푸슛― 초풍비는 적궁이 자랑하던 마지막 초식을 전개했다. 만리회풍영(萬里回風 影)이라 이름 붙여진 절기는 천산괴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비기였다. 초풍비의 손에서 실처럼 가는 빛줄기가 긴 사선을 그으며 노궁탄의 가슴으 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이미 초풍비는 정신을 잃은 뒤였고 몸은 천장단애(天仗斷崖) 쪽으로 날아가 고 있었다. 전신에서는 피 화살이 솟구치고 그가 죽였던 많은 사람들처럼 날아갔다. "어머, 이리로 날아오네......" 남궁은미는 엉겁결에 몸을 솟구치며 날아드는 초풍비의 몸을 안아갔다. 남 궁은미가 몸을 피하고 있는 곳으로 날아든 순간은 너무나 절묘했다. 퍽! 엉겁결에 남궁은미가 초풍비의 몸을 안았다. 그러나 너무나 빨랐고 반탄력 에 퉁겨진 몸이라 남궁은미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스스스스― 검은 묵연이 풀리며 노궁탄의 신형이 드러났다. 그의 전신도 인간이라고 보 기 어려웠다. 어깨에 박혀있던 두 자루의 검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얼굴 과 가슴은 검강의 여파로 익은 고기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걸레처럼 걸쳐져있던 의복도 이미 검강의 열기에 타버려 재가 되어 있었다. 머리털도 날아가 버렸고 하체의 음모마저도 모두 타버려 재가 되어 남아있 지 않았다. "강한 아이였다. 검강을 시전하다니...... 무림의 아까운 인재를 죽이다니. 결국 나도 살지 못하면서......" 스스슷― 바람이 불어오자 그의 몸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숨 한 번 쉬기 전에도 입을 열었던 그였으나 타버린 몸을 남아있던 한줌의 진기로 보호하 고 있었던 중이었다. 바람이 불자 그가 지니고 있던 진기가 흩어졌고 검강에 타버린 몸이 형체를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스위이잉― 강한 바람이 불었다. 노궁탄의 몸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 날아갔다. 바람이 다시 멈추었을 때 그 의 몸이 남긴 흔적은 부러진 도와 재를 빼놓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휘익!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날아든 것은 노궁탄의 몸이 재로 부서지는 순간이 었다. 날아든 인형은 제비처럼 빨랐고 날다람쥐처럼 날렵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다." 가늘게 소리친 인형은 허공에서 선회(旋回)하는 패갑둔을 낚아챘다. 누구나 함부로 만질 수 있는 패갑둔이 아니었지만 인형은 가볍게 낚아챘다. "그대로 두면 주인에게 돌아간다." 인형의 말은 사실이었다. 패갑둔은 날린 자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만약 나타난 인형이 패 갑둔을 잡지 않았다면 다시 초풍비에게 날아갈 것이었다. 인형은 바람처럼 땅에 떨어져 있는 반검도 집어들었다. "대형의 병기를 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 나타난 인형은 풍무영이었다. 그는 대형을 보내놓고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 아 빠른 경공으로 뇌룡탄까지 추적을 해 온 것이었다. 그의 경공이 너무도 놀라워 갈대밭을 지키던 을목세가의 무인들이 찾지 못 한 점도 있지만 이미 대부분의 무인들이 초풍비에게 주살 당해 막는 자가 없었다. 그것이 그가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나타난 시점과 초풍비와 그를 끌어안은 남궁은미가 천 길의 낭떠러지 로 추락하려던 시점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은미!" 남궁은미는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 발은 낭떠러지에 걸려있던 상황이었고 다른 한 발은 허공으로 밀려나가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엉겁결에 날아든 초풍비를 안기는 했지만 밀리는 힘이 워낙 커서 그녀로서 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오빠!" 경황 중에도 남궁은미는 풍무영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고종사촌오빠를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얼굴을 잊을 리가 없었다. 턱!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풍무영의 손이 초풍비와 그녀를 낚아챘다. 너무도 급한 나머지 달리는 힘으로 잡아채자 초풍비와 남궁은미가 허공으로 날아올 라 나뒹굴었다. 천장의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 다. "어서 대형의 검을 들어라." 풍무영은 다급하게 외쳤다. 말을 하면서 풍무영은 바람처럼 달려가 초풍비의 몸을 안아들었다. 나동그라졌던 남궁은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경황을 차리기도 전 에 그녀는 급히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초풍비의 반검을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행방이 묘연하던 풍무영이 나타났다는 것이 그녀에게 하등의 궁금증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어서 가자." 풍무영은 자신의 등에 패갑둔을 걸고 초풍비를 안았다. 왼손으로는 엉거주 춤한 상태로 혼백(魂魄)이 나가있는 남궁은미를 잡았다. 남궁은미도 경황이 없는 중에도 손을 내밀어 풍무영의 손을 잡았다. 풍무영은 온몸의 힘을 모두 발끝에 모아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 의 모습은 관목 숲을 벗어나 갈대 숲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샅샅이 살펴라." 목소리가 들린 것은 풍무영의 모습이 사라지고 채 반식경(半食頃)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세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노궁탄의 곁에 서 있던 무영과 두 명의 청년무인이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격전의 흔적을 샅샅이 뒤졌다. 여기저기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고 한 움큼의 재도 그들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두 자루의 검 쪼가리도 발견되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한 청년이 소리치자 무영은 빠르게 다가갔다. 과연, 청년은 벼랑의 끝에 서 있었는데 그가 가리키는 곳은 풀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깊게 패인 발자국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이 가까스로 벼랑 끝에 파여져 있었다. 중년인은 벼랑을 내려다보았다. "벼랑으로 떨어진 것 같군." "그렇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청년이 대답했다. 그들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어 렸다. "계집도 같이 떨어졌군. 아무래도 저기 뿌려진 재는 그들 중 누군가 타버린 것 같은데...... 화후천존도 죽었어." 무영은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어찌되었던 을목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삼 인은 모두 제거되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중년인과 청년들은 한참동안 주변을 살피다 몸을 이동해 사라졌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18-1 페이지: 1/28 자료번호: 285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4 ─────────────────────────────────────── ■ 상견환 제18장-만도화원에 부는 바람1 만도화원은 성도현(成都縣)에 자리한 삼층의 누각으로 지어진 건물로 이루 어져 있으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했다. 수백 년 동안 무림의 꿈을 키워온 을목세가의 모습이 위장한 만도화원이 그토록 허술할 리가 없 었다. 실상(實像)은 후원의 넓은 뜰과 지하에 수십간의 숨겨진 비밀의 암실(暗室) 이 있었고 삼층누각 주변에 수십 채의 단실(單室)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만 만도화원으로만 알고 있으나 사실은 만도화원에는 다른 하나 의 문파가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파를 천지검문이라 불렀는데 강호인들은 만도화원의 그 늘에 천지검문이라는 문파가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호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도화 원의 후문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은밀한 곳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검술을 연마하는 자가 있었고 언젠가는 중원에서 이름을 날리리라고 생각하는 무인 들이 가득했다. * * * 시월 열 이틀 정오. 우두두두두두―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만도화원의 후문을 향해 달려들 었다. 마차는 둔탁하게 생겼으며 두 마리의 말도 지친 듯 보였다. 콰당― 문과 부딪칠 듯 무섭게 질주해 오던 마차는 만도화원의 후문을 들어서지 못 하고 부서졌다. "누구냐?" 휘리리릭! 손에 자모이환권(子母二環圈)을 든 수문장 혈랑독권(血狼獨拳) 팽수만(彭秀 )은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며 문루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뒤를 따라 두 명의 위사가 신법을 펼치며 떨어져 그의 뒤에 시립했다. "주위를 살펴라." 팽수만은 날카롭게 외치며 자신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쥐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생긴 그의 얼굴이 독기를 뿜었다. 염소의 수염보다 도 적은 턱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의 모습이 역력했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하가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거린 팽수만은 부서진 마차로 다가갔다. 그러 나 오랜 경험으로 똘똘 뭉쳐진 그답게 함부로 접근하지 않고 주위를 빙빙 돌았다. 한참동안 주위를 돌았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제야 팽수만은 마 차로 다가갔다. 그를 따르는 위사들도 그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팽수만은 만도화원이 만들어진 이래 수문장을 한 번도 다른 자에게 넘겨주 지 않았다. 원래 중원세가의 하나인 하북팽가(河北彭家)의 후인이라고 알려 진 그는 한때 방랑의 길을 떠나 낭인무사(浪人武士)로 살아가던 때가 있었 다. 팽수만이 어떤 연유로 만도화원에 몸을 담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가 원주의 신임을 받고 있으며 귀계에 능해 수문장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의 마차입니다." 참지 못한 위사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사흘 전 당문으로 출발했던 다섯 대의 마차 중 하나다. 무슨 일로 이런 지경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팽수만은 쓰러진 기를 바라보았다. 검은 바탕에 두 자루의 피리와 그 겹쳐진 부분에 한 송이의 꽃이 그려져 걸 려있는 깃발은 만도화원의 고유표식이었다. 만도화원의 마차는 모두 그와 같은 기를 걸었다. 깃발이 상단에 붙어있어야 할 창모도 잘려져 보이지 않았다. "마차를 조사해라." "알겠습니다." 두 명의 위사는 부서져버린 마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말을 끌러놓은 뒤 마차의 덮개를 열었다. 마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의 덮개는 산산이 부서져 치우는데 시간이 걸렸다. "으으으―" 덮개를 치우자 미약하게 들리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피에 절은 손가락 도 모습을 보였다. "어서 치워라." 팽수만은 거칠고 날카로운 소리로 위사들에게 명했다. 두 명이 위사들은 급 히 마차의 덮개 부스러기와 모든 집기(什器)들을 치워낸 뒤 하나의 신형을 끄집어내었다. 삑! 시체가 되어버린 식솔의 모습을 확인한 팽수만은 입에 조그만 호각을 넣고 빠르고 날카롭게 불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만도화원 안으로 보내는 신호였 다. "으으으......" 시체가 다된 듯 얼굴이 난자 당하고 팔다리가 부러진 만도화원의 마부(馬 夫)는 이미 얼굴이 재색으로 변해 있었다. 더구나 하체에는 심한 상처를 입 어 기사회생(起死回生)이 불가능해 보였다. 팽수만은 노련한 무인이었다. 한참동안 예리하게 사태를 주시하던 그가 움직였다. 망설이지 않고 다가간 그는 죽어 가는 부하의 등을 강하게 쳤다. 한 모금의 죽은피를 토한 제자가 눈을 떴다. 사색으로 물들었던 마부의 얼 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에서도 희미하지만 빛이 났다. '회광반조...... 반각의 기회도 남지 않았다.' "누구냐?" 팽수만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으으으......" "원수는 갚아준다. 누구냐?" "사천당문......사천 ......!" 팽수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한 사천당문은 만도화원을 건드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마차는 사천당문에 예물(禮物)을 싣고 가는 중이었다. 팽수만은 더욱 강하게 마부의 손에 있는 합곡혈(合谷穴)을 압박했다. 마부 의 몸에서 잔 떨림이 일고 눈가에 주름이 졌다. 팽수만의 신속한 조치 덕으 로 마차에 실려있던 마부의 눈에서는 다시 빛이 났다. 혼을 불러오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천당문......확신하느냐?" "사천당문......철기대(鐵騎隊)...... 먼저 공격...... 우리의 예물을 강탈 했습니다." 툭! 전신의 진기를 모아 입을 열던 부하의 목이 좌로 숙여졌다. 팽수만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야 하는 일과 느긋해야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아는 팽수만이었다. 이 일은 누구보다도 먼저 원주에게 보고가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원주는 만도화원에 없었다. 원주는 하루 전부터 장원을 비우고 있었다. "치우고 문을 지켜라. 부원주님에게 다녀오겠다. 문도(門徒)들 외에는 누구 도 출입시키지 말라." "알겠습니다." 휙! 팽수만의 몸이 빠르게 달려갔다. 몸을 솟구쳐 망루로 올라선 팽수만은 허공 에서 몸을 뒤집으며 발등을 박차고 후원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 * * "그럴 리가 있소?" 쾅! 가목염(價木 )은 발바닥으로 바닥을 거세게 구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 다. 그의 앞에는 일곱 명의 노인들이 장방형의 탁자에 앉아 있었고 팽수만 이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 칠순노인인 가목염은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입니다." 팽수만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직언(直言)을 올렸다. "여러분들! 믿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오?" 가목염은 장방형의 탁자에 앉은 노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동시에 가목염 은 자신의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 호피(虎皮)로 덮은 의자에서 가는 먼지가 피어올랐다. 누구도 가목염의 의자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 치 않았다. 문제는 자신들의 눈앞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가능하리라 봅니다." 등에 황색수실이 걸린 손잡이가 보이는 검을 메고 있는 칠순 가량의 노인이 일어섰다. 노인이 일어서자 갑자기 대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가목염보 다도 더욱 강한 기도였다. "아우의 생각은 무엇인가?" 노인은 가목염의 친동생으로 가목천(價木泉)이라는 올해 칠순의 노인이었 다. 부원주인 가목염이 검신(劍神)이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 가목 천은 검제(劍帝)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쌍둥이로 똑같이 화산파의 속가 제자였고 만도화원의 부원주였다. 일설에는 가목염보다 가목천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소문도 있었다. 혹자는 가목염이 무공이 뛰어나고 가목천은 지략이 뛰어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두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두 가지라니?"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아졌다. "하나는 보이는 그대로 사천당문의 소행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근래 사 천당문이 오지회의 형제들을 공격하는 등 쓸데없이 일을 벌이고 있다는 소 문을 무시할 수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도화원의 식솔들이면서도 단화연이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단화연은 만도화원을 운영하며 을목세가와는 다른 무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단화연이 늙은이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때 문이었다. 누구도 단화연이 을목세가의 가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단화연 은 자신이 문주의 자리에 앉아있는 천지검문에도 을목세가의 가주라는 사실 을 숨기고 있었다. 만도화원의 앞면이 도박장과 기루였다면 뒷면은 그들끼리는 천지검문이라 부르는 무파였다. 그들,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순순하게 천지검문 의 무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단화연이 사천당문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것이 오로 지 을목세가와 엽산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지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원주가 만도화원의 영위를 위해 사천무림에 금은보화(金 銀寶貨)를 뿌리고 있다는 정도였다. "사천당문이 오지회의 형제를 공격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확인하지 않았 소?" "그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요." 모두들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사천성도(四川省都)라 할 수 있는 성도에 본 거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더구나 사천당문 은 불과 말로 달려 나흘의 거리에 이웃하고 있었다. 가목천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다른 한 가지는 우리와 사천당문을 반목(反目)시키려는 세력일 겁니다. 정 말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찾아야 하겠지요." "그럴 리가?" "우리 천지검문이 원수진 문파가 없었는데......감히 분란(紛亂)을 일으 켜...... 피를 부른단 말이요."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단편적인 사고하나만 가지고는 정확하 게 알아내기란 어려움이 많았다. 더구나 살아있는 제자는 없었다. 공격을 당한 제자가 가장 정확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나 제자는 죽었다. 죽은 자를 본 것은 팽수만 뿐이었다. 그의 눈과 입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 는 상태였다. 모두의 눈이 팽수만에게 향했다. 팽수만은 어깨를 추켜 올렸 다. 장로들만이 모인 자리였기 때문에 특별한 지시가 내려지지 않은 한 입을 열 기는 어려웠다. 비록 수문장의 직위를 가지고는 있지만 당주의 대접을 받고 있는 팽수만이 었다. 그러하더라도 함부로 입을 열기는 어려웠다. 분명한 것은 그가 아는 대로 모든 것을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세하게 이야기하라. 당주." "알겠습니다." 팽수만이 몸의 방향을 돌렸다. 그는 장로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말을 하기 전 뜸들이기도 되지만 그의 속셈은 치밀해 다른 뜻이 내포된 것이었다. '만약, 내부에 적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팽수만이 한참을 둘러보았으나 장로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로지 그 의 입에서 어떤 내용이든 말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적은 없는 것 같다.' "저는 마차의 부서진 형태와 죽은 부하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그 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 오." "어서 해라." 가목염이 명했다. 팽수만은 예리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장로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이러한 버 릇을 장로들은 싫어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주는 그를 신임했다. 잡초(雜草)처럼 무림을 살아온 그의 경험과 비상한 머리는 비록 무공을 차 지하고서도 가목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이었다. "우선, 마차에 파손상태와 파손 흔적으로 보았을 때, 두 가지를 알 수 있었 습니다." "두 가지라고." "먼저, 마차의 벽에는 암기가 박혀 있었습니다. 독감람(毒橄欖)이라는 물건 으로 당문의 독문 암기입니다. 그것도 직계자손만 사용하는 것으로 극독이 발려져 있었습니다." "당문이라는 말인가?" 장로중의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등에 일곱 자루의 검을 부챗살처럼 맨 초로의 노인으로 백발을 단정하게 묶 고 있어 유려한 모습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성질이 급해 보였다. 그는 칠선왕(七扇王)이라 불리는 자로 일곱 개의 검을 마치 표창처럼 날려 적을 살상시키고 돌아오는 검을 거두는 무공을 시전하는 자로 그의 무공은 이미 검증된 바가 있었다. "아닙니다.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계속 들어보십시오. 마차에 남겨진 두번째 증거는 마차의 바퀴에 묻은 누 런 가루입니다." "누런 가루라고?" 물음을 던진 것은 가목염이었다. 가목염은 자신이 질문을 던지며 손을 내저 어 아직 일어서 있는 칠선왕을 자리에 앉게 했다. "그게 무언가?" "폭약의 가루입니다." "굉천뢰?"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굉천뢰일 수도 있고 열화탄(熱火彈)일 수도 있습니 다. 분명한 것은 모두 폭약의 종류라는 것입니다. 폭약에 치명타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당문의 짓이 분명하군." 칠선왕이 내뱉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전적으로 칠선왕의 말에 동감(同感)하는 자는 적 었다. 만약 당문이 아니고 다른 문파에 대해서 그가 그리 말했다면 모두들 찬동했 을 것이나 칠선왕이 당문을 걸고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찬동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그는 사천당문의 문주 당협과 일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칠백 초만에 검 한 자루를 부러뜨림으로서 패배를 자인했다. 그의 마음속에 당문에 대한 증오(憎惡)가 녹아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일고 있었다. "폭약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당문이라 단정을 내릴 수 없는 것이 중원에서 폭약을 만드는 곳은 당문을 제외하고도 네 곳이 더 있습니다. 특히 벽력궁 (霹靂宮)은 당문보다 폭약제조 능력이 열 배는 앞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팽수만의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비록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그가 힘주어 말하니 더욱 확연하게 인식 이 되었다. 팽수만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동의를 얻고 자하는 것 같았다. 장로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누구라는 거지?" 가목염이 나섰다. "기다리십시오. 부문주. 하나하나 밝히다 보면 결과는 드러날 겁니다." "끙!" 가목염은 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태사의에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그도 팽수만의 말에 기울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탓이다. "이미 죽었지만 마차에 실려왔던 부하는 사천당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차를 습격하고 보물을 빼앗아 갔다고 이야기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잘못 보지 않았을까?" 장로 중 누군가 반대의견을 냈다. 말은 했지만 일어서거나 손을 드는 등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은근히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역력했다. 팽수만은 과감하게 무시했다. 때로는 무시하는 것이 자신의 의견을 끌어가는데 이롭다는 것을 그는 잘 알 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철기대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쾅! 모든 중인의 귀가 멍멍해졌다. 가목염이 일어나며 바닥을 발로 굴렀기 때문 이었다. * * * "하하하, 천지검문이 미친 듯 중원으로 달려가겠지." "물론이지." 두 복면인은 미친 듯 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뒤에는 말을 타고 복면을 쓴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각기 다른 병기 를 등에 지거나 허리에 매단 채 따르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눈에서 빛이 났 다. 앞서 말을 몰며 이야기를 나누는 복면인도 그들과 다름없이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모두 말이 없으나 그들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한 복면인의 허리에는 뱀이 허리를 비틀어 지면을 기는 듯한 기형장검이 비 스듬히 끼워져 있었고 키가 구 척이나 되어 보이는 복면인의 허리에는 두 자루의 혈부가 등에 매어져 있었다. "형님! 정말로 이곳이 놈이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까?" "물론이다. 내가 이곳이라면 이곳이 틀림없어." 구 척의 복면인이 물음을 던지자 기형장검을 허리에 꽂은 복면인이 강조했 다. 그것으로 보아 그들은 형제인 것 같았다. 더구나 벌건 대낮에 복면을 뒤집 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재물(財物)들은 어떻게 되었지?" "걱정하지 말아. 은밀하게 사천당문에 전달 될 테고 소문은 더욱 사천당문 을 난처하게 만들 테니까!" "그럴까?" "물론이지, 어서 가자고. 어서 가서 이 단계를 시작해야지 않겠어" 키가 구 척인 복면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혹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고 산을 돌아보기도 했다. 언뜻 보면 그는 초조함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보였 다. 곁에 있던 기형장검의 복면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거구의 복면인을 바라보았 다. "너무 밝은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라. 이제 한 시진만 지나면 어두워질 거야." "그나저나 대형을 찾으러간 둘째 형님은 어떻게 된 거지. 아직도 안 돌아오 게." "그것도 걱정하지 마라. 형님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곧 우리를 찾아오 실 거다." 퍽! 앞서 있던 기형장검의 사내가 말의 배를 걷어찼다. 푸르르르― "히히힝!" 두두두두두― 발에 배를 걷어차인 말이 한소리 투레질을 토한 뒤 기세 좋게 앞으로 달려 가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이십 여기가 미친 듯 달려나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황진(黃塵)속으로 사라졌고 그들이 떠난 뒤에는 뿌연 먼지 와 깊게 찍힌 말발굽뿐이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하나의 물체가 떨어져 있었다. 금색이 나는 정교한 패 로 한 마리의 잉어가 그려져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 * * 휙! 스스슷! 두 개의 그림자가 땅을 스치듯 날아왔다. 두 명은 노인이었고 그들의 뒤로도 이십여 명의 중년인들이 따라왔다. 가슴 에는 한결같이 두 자루의 검이 엇갈린 표식이 달린 옷을 걸치고 있었다. 천지검문의 표식이었다. "멈춰!" 휘릭― 몸을 날리던 노인이 몸을 뒤집으며 땅바닥에 착지(着地)했다. 그의 뒤를 따 라 오륙 명의 중년인도 내려섰다. 노인의 등에는 일곱 개의 검이 부챗살처 럼 꽂혀 있었다. 천지검문의 장로 칠선왕이었다. "흥, 놈들이 이곳에서 재물과 사람을 나누었군." "찾으셨습니까? 장로님." 중년인 중 한 명이 다가왔다. "물론이다. 이것을 보아라." 칠선왕이 내보이는 것은 조그만 패였다. 금색으로 빛나는 패는 손바닥보다 조금 작았는데 양면(兩面)에 각각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 면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그림이 양각으로 돌출 되어 있었고 다른 한 면에는 물결을 타 는 잉어가 평각(平角)으로 그려져 있었다. 매우 정교한 솜씨였다. "사천당문의 표식이라도 남아있습니까?"" "이곳에서 찾았다." 칠선왕은 바닥을 가리켰다. 칠선왕이 가리킨 곳에는 수십 개의 말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어느 놈들입니까?" 칠선왕은 패를 뒤집었다. 달리는 말이 너무도 정교해 자신의 눈으로 달려드 는 충격에 칠선왕은 얼른 패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중년인은 모두 본 것 같았다. 중년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사천당문의 철기대 아닙니까? 멍청한 놈들 자신들의 표식(表式)을 남겨 놓 는 우를 범하다니......" 휙! 중년인의 말을 듣던 칠선왕은 훌쩍 몸을 날려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땅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땅을 눌러보기도 하고 돌 틈 사이를 벌려 보기도 했다. 모래를 들어 바람에 날려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콕콕 찔러보기도 했다. "장로님, 무얼 발견하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하하하, 놈들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 무던히도 머리를 굴렸다만 나는 속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놈들은 사천당문의 철기대가 분명하다." 휙! 말을 하는 와중에도 칠선왕은 몸을 날려 자신의 말 위로 떨어져 내렸다. 깜 짝 놀란 말이 가볍게 몇 번 앞뒤로 발을 움직였으나 원래의 자리를 벗어나 지는 못했다. "무엇을 발견 하셨습니까?" "그렇다. 놈들은 두 개의 무리로 나누고 이동했다. 몇 놈이 자신들을 따라 오라고 일부러 깊은 말발자국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 패가 떨어진 듯하다. 놈들도 몰랐을 것이다." 칠선왕은 다시 바닥을 가리켰다. "봐라. 저쪽 숲으로 사라지는 길에는 빗자루로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느냐? 놈들은 마차가 지나간 길을 일부러 숨기고 우리를 유인(誘引)하기 위해 이 쪽 길에 무수히 많은 말발굽을 찍었다." "그렇군요." "우리는 당연히 저쪽 숲길로 간다. 나를 따르도록 해라." 퍽! 히히히히― 우두두두― 다시 뽀얀 황진이 일어났다. 조금 전 복면인들이 사라진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스슷―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두 개의 그림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신에 는 검은 색의 경장을 입고 얼굴에는 검은 복면을 깊숙하게 눌러쓰고 있었 다. 그들은 천지검문의 칠선왕이 나타나기 조금 전 모습을 드러냈던 이십여 명 의 무인 중 두 명이었다. 그들은 말을 몰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 사태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제대로 된 것 같군." "그러기는 한데...... 어찌 미안하군." "신경 쓰지 말자고." 그들은 조용히 칠선왕과 천지검문의 무인들이 달려간 방향을 주시한 뒤 몸 을 돌렸다. 칠선왕이 달려간 방향에서는 아직도 보얀 황진이 일어나고 있었 다. 그들은 한참동안을 칠선왕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결국, 사천당문까지 이르겠지." "물론이지. 이미 철저하게 준비를 했으니까. 곳곳에서 그들을 유인하게 될 거야. 결국 그들이 발을 멈추게 되는 곳은 사천당문의 정문이 되겠지." "우리도 가자" "물론." 휘리릭― 두 개의 그림자는 곧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서 준비하라고 신호를 보내라." 낮은 목소리가 울리자 사내는 일어서서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삐익― 참새소리보다도 작은 소리가 울려나가자 여기저기에서 신호를 받았다는 뜻 으로 돌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왔다. 사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 알렸습니다." "알았다, 반각 후에 일제히 공격을 감행한다. 우리가 맡은 곳에서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만약 그랬다가는 살아남는 식솔은 아무도 없을 것이 다." '알겠습니다." 사내는 다시 일어서서 휘파람을 불었고 다시 휘파람이 되돌아왔다. "두령! 놈들은 아직 모르니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더구나 천지검문에서 적 지 않은 숫자가 빠져나갔으니 설사 놈들의 저항(抵抗)이 완강하다 해도 우 리를 막지는 못할 겁니다." "휴!" 삼두령이며 제일 소두령이었던 소명의 자신만만한 소리에 사무기는 가벼운 한숨을 뿌렸다. 비록 어두운 밤이기는 했으나 어스름한 달빛이 있어 두 눈 만큼은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나 왠지 사무기의 눈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제길 형님의 소식은 찾지도 못하다니......' 사무기는 초풍비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내내 불안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지만 사무기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눈앞을 쏘아보았다. "빌어먹을......" "옛!" 혼자 중얼거린 말이 밖으로 새어나왔던 모양인지 곁에 웅크리고 있던 소명 이 말을 받았다. "다른 쪽에서 신호가 떨어졌느냐?" "아직 무소식입니다." "잘 경계해라. 한 치의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곳은 시진이다. 관병 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면 오차(誤差)가 생겨서는 안 된다. 우리도 일제히 공격해 들어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소명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도화원은 오지회의 형제들과 검문산의 산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검문 산을 탈출한 그들은 은밀하게 이동해 성도로 스며들어 만도화원을 감시(監 視)했다. 사흘의 감시 끝에 만도화원이 천지검문이라는 문파를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고 사천당문과 어쩔 수 없이 접전을 벌이게 만들어 놓았다. 천지검문의 제자와 장로 중 반이 사천당문으로 추적해 가는 것을 보고 그들 은 만도화원과 천지검문의 남은 잔당을 도륙하고 자신들에게 당문의 마차를 습격하도록 흉계를 꾸민 만도원주를 죽일 생각이었다. 사무기는 만도화원이 바라보이는 높은 누각에 엎드려 눈 아래 멀리 보이는 장원을 바라보았다. 장원은 어둠 속에서도 활활 타오르는 불빛처럼 사방으 로 밝은 불빛을 번지게 하고 있었다. 성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둘러친 담을 모두 직선으로 이으면 오 리(五里)나 되는 넓은 장원이었다. 담 안으로 만들어진 장원 안에는 울울창창한 산 속처럼 꾸며져 있었고, 식 재(植栽)한 나무 사이로 자리한 장원은 적어도 평면이 오 천 평은 족히 넘 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삼층 누각 하나에 작은 누각이 보였을 뿐이지만 다른 두 개의 담 너머로는 수십 개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보였고 수백 개의 부속 건물도 작지 않았다. '을목세가! 오늘로 끝이다.' 사무기는 스산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움츠렸다. 오늘 그들 오지회는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도화원을 피로 물들일 계획이었다. 모든 형제들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들 중 성격이 포악 하다고도 할 수 있는 담붕비와 혁천련이 도우선의 도움을 받아 천지검문이 있는 만도화원의 후문으로 진입을 할 것이고 그것으로 접전은 시작될 것이 었다. 산채에서 살아남은 칠십 명의 부하들과 여덟 명의 소두령 중 육십 명의 부 하와 일곱 명의 소두령이 그들 쪽을 지원하고 있었다. 만도하원의 정문방향 은 사무기가 열 명의 부하와 소명만을 데리고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 무기 쪽에 인원이 적은 것은 화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18-2 페이지: 1/34 자료번호: 286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4 ─────────────────────────────────────── ■ 상견환 제18장-만도화원에 부는 바람2 "신호가 왔습니다." 소명의 말소리가 귓가에 들렸을 때, 사무기는 상념(想念)에서 깨어났다. 피이이유― 펑! 허공에 한줄기의 향전이 긴 꼬리를 끌며 올라가다 허공에서 폭발하며 잘게 부서지는 빛무리를 토했다. 만도화원의 내부에 자리한 전각 어디에선가 올 라온 향전이었다. 사무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어디선가 진한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 에 사무기는 어깨를 움찔했다. 스산한 바람이 어깨를 스쳐 뼈 속까지 파고 드는 느낌이었다. 슈슈슈슈― 수십 발의 화전(火箭)이 허공을 날았다. 화전은 소명의 뒤에 도열하고 있던 부하들이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십여 개의 화살을 가지고 있었는데 각기 지향하는 방향이 달랐다. 열 명이 각각 열 개의 화살을 쏜다면 만도화원이 아무리 커도 불바다가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백 발의 화전이라면 개봉성도 불바다로 만들 수가 있 는 양이었다. 번화한 시진에서 화공을 한다는 것이 누가 보아도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 들은 상식(常識)을 깨는 공격을 하고 있었다. 장원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지금은 깊은 밤이지만 성도성의 평민(平民)들은 곧 불 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관군이 몰려올 것이었다. 관군이 몰려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어서 가시죠." 소명이 재촉했다. "가자!" 휙! 사무기의 몸이 대붕전기(大鵬展示)의 경공을 시전하며 삼층 누각을 벗어나 장원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슈슈슈슈― 그의 등뒤를 따라 쌍룡채의 부하들이 복면을 뒤집어쓰고 떨어져 내렸다. 누 구인지 모르게 복면을 쓰기는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사무기는 느 끼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사무기는 품에서 검은빛이 나는 천으로 만 들어진 복면을 꺼내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펑! 화르르르르― 지은 지 오십 년이 넘은 장원의 전각은 모두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 기 때문에 화전이 날아와 박히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습격에 미처 대비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천지검문은 강했다. 담을 지키는 무인들이라고 해봐야 천지검문의 내부에서는 하류에 속하는 무사들 이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삼사 장의 거리에 우뚝 선 그들의 모습에서는 결사항전(決死抗戰)의 모습이 드러났다. "누구냐? 멈추어라." "죽여주마. 물러서는 놈들은 살려주겠다." 담붕비는 이 장은 족히 될 것 같은 천지검문의 담을 뛰어오르며 외쳤다. 쌍 룡채의 부하들은 마승이 달린 갈고리를 집어던져 담과 누각에 걸고 부지런 히 담을 타넘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길이가 이 장이나 되는 사다리도 담에 받쳐져 산채의 부하 들이 담을 타넘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슈아아악! 담을 타넘어 뛰어내리는 담붕비의 몸을 향해 두 자루의 단창이 날아들었다. 담 위에서 지키고 있던 천지검문의 위사들이 던진 창이었다 "흥! 감히 창으로 나를 상대해." 분노한 호령을 터트린 등에서 혈부를 뽑아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날아드는 창을 향해 벼락같이 휘둘렀다. 우루루루루― 쾅! "카아아악!" 그가 뿜어낸 기파는 날아드는 두 자루의 단창(短槍)을 퉁겨내며 창을 던진 자의 가슴을 빠개버렸다. 바람에 진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담붕비는 바닥에 착지했다. "죽어!" 슈칵― 바람소리와 한소리 기합성이 울리며 경기가 그의 허리로 밀려들었다. "또 창인가?" 담붕비는 몸을 돌리며 한 손으로 날아드는 창을 잡고 당기며 다른 손으로 끌려오는 자의 가슴에 혈부를 쪼개갔다. 파스슷― 늑골을 부수며 담붕비의 혈부가 달려든 자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에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붉은 피가 검은빛으로 변해 혈부의 뒤로 뿜어져 나왔다. "컥!" 비명은 짧았다. 이미 심장에 빠개진 이상 비명을 지를 수 있는 힘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죽어라!" 등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리고 가는 파공성이 울렸다. 파공성이 예리하다는 것으로 보아 검이나 도(刀)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혈부를 뽑아 돌려 찍으려 했으나 혈부가 박혀 빠지지를 않았다. 아마도 혈 부에 가슴이 찍힌 놈은 나무처럼 단단한 뼈를 가진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담붕비는 한 손에 혈부를 잡은 그대로 다른 손을 수도(手刀)로 세워 몸을 비틀며 찔러갔다. 아슬아슬하게 장도가 머리를 스쳤다. 미세한 소음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보아 장도에 몇 올의 머리카락이 잘린 것 같았다. 우지지지직― 마른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담붕비의 손이 나타난 자의 가슴을 파 고들었다. 내공을 운용해 펼치는 탈명수의 절기 중 하나로 비연수(飛燕手) 라 불리는 절기였다. 담붕비의 탈명수는 놀라운 바가 있었다. 과거 비하산장의 총관이었던 유기 성이 그가 뿌린 탈명수에 몸이 얼어붙었던 것과 같이 그의 탈명수는 강호의 일절이었다. 손이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따듯해졌다. 사람의 몸이 지니고 있는 체온(體 溫)이 어느 정도였는지 처음으로 느끼는 담붕비는 손이 뜨겁다는 생각을 했 다. "으으으! 으으으으!" 가슴을 가리는 늑골이 부서지고 손의 감촉이 몸 안에서 느껴졌는지 장도를 휘두르고 달려들었던 사내는 입에서 연속으로 바람 새는 신음을 흘렸다. 펄쩍펄쩍 뛰는 심장이 그의 손에 잡혔다. "나도 살기 위해서다. 원망하지 마라." 퍽! 담붕비의 손이 가슴에서 빠져 나왔다. 손에는 아직도 살아 펄쩍펄쩍 뛰는 심장이 들려있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고 공기(空氣)가 들어가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흑의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담붕비는 손에 들린 심장을 보며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 다. 기이하도록 표정이 없는 사내였다. 아니 벌써 기절했는지 혹은 죽었는 지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담풍비는 사래가 들렸는지 밭은기침을 토하 며 웃음을 뿌렸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내 심장이 차갑게 식었는데...... 남의 심장은 펄펄 뛰고 있다니......" 꿈틀꿈틀― 심장이 미끄러지려고 꿈틀거렸다. 휙! 담붕비는 심장을 집어던지고 담 아래로 뛰어내렸다. 검은 색 복면이 거추장 스럽기는 했지만 무공을 펼치기에는 장애(障碍)가 되지 않았다. 퍽! 담붕비의 신형이 미끄러지자 그때까지도 서 있던 심장을 빼앗긴 사내가 널 브러졌다. "문을 지켜라." "막아."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리고 무수한 인형이 벌 떼처럼 담붕비를 향해 날 아들었다. "좋아. 재미있게 즐겨 보자고......." 담붕비는 혈부를 높게 치켜들었다. 불과 두 자가 넘지 않는 손잡이에 두 자 가량의 넓은 날을 가진 혈부는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것 같았 다. 휘이이잉! 그가 혈부를 휘두르자 봉은 속에 숨겨져 있던 단봉(短棒)을 차례차례 밀어 내며 장봉(長棒)이 되었다. 그가 처음에 꺼낸 단봉은 혈부를 지탱하는 손잡이의 마지막 부분으로 혈부 를 흔들면 원통으로 만들어진 철봉이 밀려나며 앞으로 나와 연결되는 방식 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봉이 완전히 밀려나오자 칠 척의 길이가 되었다. "헛! 네놈은 누구냐?" 그를 알아본 성문의 수문장이 물러서며 외쳤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자 모이환권이 들려있었는데 이미 몇 명의 침입자를 벤 듯 피가 묻어있었다. 천지검문의 수문장이라한들 담붕비의 명성에 비할 수 없었다. 혈부대형이 나타난 이상 누구도 마음놓고 병기를 휘두를 수 없을 것이었다. 팽수만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낭인무사로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그로서 는 담붕비를 보기는 했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구인지는 알아 볼 수가 없 었다. "누, 누구냐?" "네 형이다!" 담풍비는 웃음을 뿌리며 빠르게 수문장의 가슴으로 도끼를 찍어갔다. 수십 개로 갈라져 보이는 혈부가 마치 풀잎이 바람에 나부끼듯 수십 개의 그림자와 수십 번의 흐느적거림을 남기며 수문장의 머리와 목, 가슴과 단전 을 향해 찔러갔다. "헉! 혈부대형!." 푹! 팽수만은 단말마를 남기고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혈부는 뱃가죽 을 찢어 놓고 있었다. 너무도 빨랐는지 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푸샤샷― 박혀있던 혈부가 빠져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뜬 팽수만이 그대로 무너졌다. "수문장 님이 죽었다." "문을 지켜라." 슈슈슈슈― 휙! 휙! 휙! 외침이 일며 수 개의 신형이 원을 그리며 담붕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오냐 죽여주마." 담붕비는 주먹에 진기를 모아 허공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루가 길 어진 도끼가 횡으로 마구 휘둘러지며 달려오는 자들의 허리를 베어갔다. 탈명수라 불리는 그이 손바닥이 허공을 헤집자 무수한 경기가 수십 조각으 로 갈라져 뿌려졌다. "탈명수가 나타났다. 피하라." 그들 중 안목이 있는 자가 있어 담붕비의 손에서 뿌려지는 무공이 탈명수인 것을 알아보았다. 적성의 수많은 장법 중 하나인 탈명수가 담붕비를 만나 제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케에에엑!" 퍼퍼퍼퍽― 허공에서 피떡이 된 시체가 떨어져 내렸다. 머리가 깨진 자, 배에 권풍(拳 風)을 맞아 복부가 가죽 북처럼 터져 버린 자도 부지기수였다. 핏방울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천지검문 고수들이 황천으로 직행했다. 담붕비의 전신 에 떡이 된 살점과 뼈 쪼가리가 떨어져 내렸다. 핏방울은 그의 옷을 붉은 혈색으로 바꾸어버렸다. 담붕비는 문으로 다가갔다. 문에는 팔뚝 굵기만한 자물쇠가 잠겨있었다. 쉬이이이―콰등― 그의 혈부가 부딪치자 자물쇠는 마치 구부러진 철사조각처럼 휘어지며 끊어 졌다 담붕비는 다시 한 번 혈부를 들어 문짝을 내리 찍었다. 쾅―콰드드드― 문짝을 가로질렀던 버팀목이 부서져 날아갔다. 담붕비는 문을 향해 벼락같 이 몸으로 부딪쳤다. 쾅― 끼이이이이― 그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게만도 무려 오 백 근이 넘어 보이는 쇠로 만들어진 문이었지만 혈부에서 쏟아지는 무지막지한 기파를 견딘다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와아아아아―" "문이 열렸다." 산채의 부하들이 물밀 듯이 장원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순식간에 문은 산채 의 부하에게 점령되었고 물밀 듯 밀려드는 산채의 부하들은 천지검문 안으 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다." "막아라!" 반항도 만만치 않았으나 담붕비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직까지도 천지검문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고수들은 보이지도 않았 던 것이다. 우루루루루― 성의 내부는 곧 점령될 것 같았다. 뎅뎅 뎅뎅― 급박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적이 침입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나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오지회의 세력은 이미 성의 안쪽으로 진입한 후였다. * * * 후다다닥― 곤한 잠에 빠져있던 가목염은 불현듯 들려오는 종소리에 상체를 일으켰다. 뎅뎅뎅―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종소리는 그의 귀를 날카롭게 자극했다. 가목염은 뒤 를 돌아보았다. 애첩(愛妾) 가희(佳姬)는 저녁 내내 애교를 부리더니 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만도화원의 일급 명기이기도 한 가희는 원주가 먼 여행을 떠난 뒤로는 늘 그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는 했었다. 질탕한 방사 끝에 잠이 들은 것 같았 는데 귓가에 아우성소리가 들려 잠이 깬 그는 침상에 앉아 있었다. 가희는 질탕한 방사에 몸과 정신이 모두 녹았는지 난리가 몰아와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변고가 있기에 저리도 급한 타종(打鐘)이란 말인고?" 가목염은 급히 벽으로 다가갔다. 지난 저녁 가희가 벗어 던진 궁장이며 자신의 문사복이 떨어진 채로 뒹굴고 있었다. 그는 잠옷을 벗고 급히 문사복을 걸쳤다. 뎅뎅뎅뎅― 종소리는 더욱 급박해졌다. "별일이로다. 근래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적의 내습이라도 있단 말인가? " 그는 문사복 위에 무늬가 화려한 장포를 걸쳤다. 조금 안심이 되기는 했다. 만약 장내에 일이 생겼다면 누군가는 득달같이 달려와 자신에게 보고를 했을 테지만 아직 보고하는 자는 없었다. 무엇보다 수문장 팽수만이 달려오지 않는 것이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 고 여기게 만들었다. 일이 급박하다면 철저한 팽수만이 벌써 달려왔을 것이 었다. "급박한 일은 아닌 것 같군.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그러나 일이 있기 는 한 듯하니 나가보아야겠다." 가목염은 허리에 요대를 두르고 자신의 애병 홍매(紅梅)를 매었다. 홍매는 그의 부친이 물려준 검의 이름이었다. 가늘고 긴 검의 모습이 마치 겨울철 에 피어나는 매화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검의 이름이었다. 이미 칠십의 나이가 넘었다. 그 동안 이름 없는 소문파의 주인으로 무림에서 괄시를 당했으나 자금력이 뛰어난 만도화원과 힘을 합쳐 만든 천지검문의 힘을 극대화시켜 어느 문파 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키운 그로서는 더 이상의 영화를 바랄 처지도 아니었 다. 더구나 화산의 속가제자인 그로서는 화산의 배경을 등에 업고 개파를 하면 사천에서는 어느 문파에게도 뒤지지 않는 힘을 발휘하리라 믿고 있었다. 다다다다― 갑자기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털썩! 침실 밖에서 황급히 달려온 발자국 소리가 멈추어지며 부복하는 소리가 들 려왔다. "무슨 일이냐?" "부문주!" 목소리가 비통하기는 하나 늘 자신의 처소에서 지키고 있는 철검파립(鐵劍 破笠) 강명우(姜明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수족이었던 강명우는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왠지 비통하다는 생각이 들자 가목염은 마음이 바빠졌다. 마음이 굳건하기 로 한다면 천지검문에서 강명우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외호가 철검파립인 것은 그가 검을 잘 쓰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그의 마음이 철처럼 한결같다는 뜻이다. 와드드드― 가목염은 문을 밀었다. 강명우가 바닥에 두 무릎과 두 팔을 짚고 꿇어 엎드려 있었다. 늘 그렇듯이 등에는 한 자루의 철검이 매어져 있었다. 몸에는 그가 걸칠 수 있는 최대한 의 무장이 갖추어져 있기도 했다. "무슨 일이기에 호들갑이냐?" "적이 내습했습니다." "물리치면 되지 않느냐? 제자가 백 명이 넘는데 그깟 적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적이 너무 많습니다." 가목염의 물음에 평상시의 강명우답지 않게 대답했다. 평상시 아무리 다급 한 일이라 해도 목소리를 떠는 법이 없는 강명우였다. 더구나 강명우는 적이 아무리 강해도 물러서지 않는 강심장을 지닌 무인이 었다. '일이 크게 벌어진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장내에는 적어도 백 명이나 되는 무웅(武雄)들이 있다. 더구나 호법(護法)들과 장로들이 모두 있지 않은가?' "호법들은 뭐 하는 것이냐?" "적의 숫자와 무공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더구나 적들은 굉천뢰와 화전까지 까지 사용한 급습이라 외장(外莊)이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뭐라고?" 가목염은 그제야 사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외 장이 붕괴되었다면 이미 적은 만도화원의 중심부에 다다라 있다는 이야기였 다. "적은 누구냐?"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부터 물어보아야 했는지도 몰랐다. 그가 적이 누 구인지를 묻지 않았던 것은 부하들을 믿었던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상황이 그토록 임박했다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만만한 적 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지회 같습니다." "오지회라고?...... 그들이 아직도 존재한단 말이냐? 그들이 무엇 때문에 천지검문의 코털을 건드린단 말이냐?" "모두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마는 그들인 것 같습니다. 복면을 뒤집어 썼습 니다마는 무공으로 보아 오지회의 막내라는 철부대형 담붕비가 분명합니다. " "가자!" 더 이상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가목염은 복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의 발은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솟구치고 몸은 유영하듯 바쁘게 뛰어 갔다. 강명우는 급히 가목염의 뒤를 따랐다. 별미천좌(別味天座) 여상각(呂 ). 천지검문의 서열 십위 안에 드는 무웅으로 설사 천지검문의 무인이 아니라 해도 그를 모르는 무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록 무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별난 식성(食性) 때문이었다. 소문대로라면 여상각은 절대 익은 음식을 먹는 경우가 없었다. 그는 생식주 의자(生食主義者)이며 육식주의자(肉食主義者)였다. 그는 익히지 않은 살아 있는 동물을 먹는다고 강호에 소문이 난 자였다. 소문에 불과할지는 모르나 여상각은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그가 어떤 연유로 천지검문의 호법이라는 지위에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나 아마도 을목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다. 한때 그는 서장에서 활동을 했던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원에서 악 명을 뿌리던 여상각은 무림인의 검에 쫓겨 서장으로 도주했었다. 무림정파의 무인들이 그를 척살하려 했던 이유는 그가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당의 제자를 잡아먹었다는 소문은 무림에 공분(公憤)을 일으켰고 급기야 구대문파가 추살대를 조직하여 추격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쉽게 어쩌지는 못했다. 그의 무공이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이었 다. "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食人鬼)가 아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다. 두고봐라." 여상각은 그렇게 울분을 뿌리고 서장으로 돌아갔다. 이십 칠 년 전의 일이 었다. 그는 팔 년 전 중원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장을 여행하던 단화연의 눈에 들 어 천지검문의 원로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지금 이 인의 합격을 받고 있었다. "모두 덤벼라. 나에게 당한다면 네놈들의 살점이 내 입에서 씹히게 되면 시 체조차 보존 할 수 없게 될 테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나를 죽 여야 할거다." 부르르르― 여상각의 살소에 그를 둘러싼 이 인은 몸을 거칠게 떨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명예가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제길. 저 미친놈 때문에 도우선이 두려움을 느껴야 하다니.' 도우선은 손에 두 자루의 짧은 검을 나누어 쥐었다. 쌍비단검(雙飛短劍)이 라 부르는 병기는 불과 반 각 전 죽은 천지검문의 부하 시체에서 뽑아든 것 이었다. 두 자루의 검은 손목에 채워진 고리에 철삭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언제든지 발출하고 회수하기가 간편했다. 한 자루의 장검을 든 사내는 귀검수 혁천련이었지만 복면을 쓰고있어 그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다. "후후, 네놈이 무지막지한 살인마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우리 시원하 게 칼춤이나 추어 보자고......" 입이 거친 혁천련이 앞으로 나섰다. 어찌된 일인지 도우선은 둘러싼 형태를 하고 있지만 눈은 딴 짖을 하고 있었다. 그저 서 있기는 하지만 도우선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산채의 부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우선의 모습은 여상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했다. 다만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후후후, 과연 한 대가리씩은 하는 놈이었구나." 이미 그는 한차례의 격전에서 적지 않은 피를 흘린 듯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복부와 어깨를 가렸던 장포는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뜨거운 열기가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바람이 불어오자 불길이 미인이 긴 머리를 풀듯 화염의 꼬투리를 만들며 솟구쳐 올랐고 병장기들이 빛을 반사 시켰다. 여상각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자신의 애병을 들어올렸다. 두 자루의 철골조 (鐵骨爪)였다. 독수리의 다리를 본떠 만들어진 철골조는 육십 년간 그의 명 성을 만들어준 무기이기도 했다. "철골조로군." "아직도 내가 사용하는 철골조를 기억해 주는 자가 있다니 정말 고맙구먼. 난 중원이 이미 오래 전에 나와 내 철골조를 잊은 것으로 알았는데......" 스위잉― 여상각은 철골조를 허공에 힘차게 휘둘러 보았다. 철골조의 쇠 발톱 사이에 서 바람이 스치며 날카로운 소성(簫聲)이 울렸다. 철골조는 두 자루가 한 쌍이었다. 청강석(靑剛石)에서 추출한 쇠에 만년한 철(萬年寒鐵)로 만들어진 세 개의 발톱을 달은 것으로 날카롭기 그지없는 병기였다. 더구나 익히기가 어려운 응조공을 익혀야 한다는 단점도 있어 아무리 무공 광(武功狂)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익히기가 쉽지 않았다. "덤벼라." 여상각이 자세를 잡았다. 혁천련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서서히 좌로 돌기 시작했다. 비록 대형을 만나 적성의 무공을 전수 받고 천하에 이름을 날리기는 했지만 여상각은 강 했다. 오지회가 이름을 날렸다고는 하나 초풍비가 반이었다. 오지회에서 초풍비를 제외하고는 무공이 천하제일이라 할 수는 없었다. "클클클, 애송이 놈이 연구(硏究)를 많이 했구나." 쉬이익!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기이한 목소리가 울리고 여상각의 철골조가 허공을 날아 혁천련의 가슴을 후벼갔다. "헛, 이런 무례한 경우가." 찌이익! 혁천련의 입에서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바람이 터져 나온 순간 이미 그의 어깨가 노출되어 옷깃이 찢어지며 살이 드러났다. 붉은 핏방울이 허공으로 퉁겨 올랐다. 드러난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허연 뼈가 드러나고 행동이 둔화되었다. 철골조는 무서웠다. 너무도 빠른 공격이었기에 천하의 혁천련도 기겁을 토하며 물러섰다. "비겁한 놈!" "비겁해...... 오밤중에 잠도 못 자게 습격한 놈들은 비겁하지 않고...... 내가 비겁한가? 미친놈들! 복면이나 벗어라." 슈아아악! 다시 철골조가 휘둘러지며 어두운 허공에 무수한 바람소리를 만들었다. 이 를 갈며 분노를 터트리던 혁천련은 황급히 장검을 들어 날아드는 철골조를 막아갔다. 차차창! 철그렁! 혁천련의 장검에 부딪친 철골조에서는 파란 불꽃이 별무리처럼 피어올랐다. 혁천련의 얼굴에 가려졌던 복면이 벗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런 죽일 놈!" 휘이이이― 분노를 토한 혁천련의 손에서 장검이 반원을 그리며 튀어나와 교활한 영사 처럼 여상각의 몸으로 쏘아져 들었다. 마냥 어정쩡한 모습으로 있다가는 계 속되는 급습에 온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파리리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여간 스산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후리릭― 여상각의 고함이 터지며 몸이 허공으로 솟구침과 동시 연속 세 번의 재주를 넘었다. 쏜살같이 지상(地上)으로 방향을 틀며 철골조를 휘둘렀다. 부르르르― 혁천련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혁천련의 왼손은 철골조를 움켜쥐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고 빠르게 휘둘러 지던 철골조는 어이없게 혁천련의 손에 잡혀있었다. 혁천련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와 철골조의 손잡이까지 흘러 내렸다. "잘 가라. 한심한 놈." 날카로운 음성을 토한 혁천련이 힘껏 철골조를 잡아당기자 여상각의 몸이 딸려왔다. 여상각은 철골조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손에는 가죽으로 된 띠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가죽의 띠는 철골조를 충격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 단 것 이었지만 오히려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가 되고 말았다. 쉬리리리리― 혁천련의 손에서 흰빛이 번뜩였다. 빛은 수평으로 그어졌고 여상각의 목으 로 파고들었다. 써걱! 마치 얼음 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혁천련의 손에 들린 검신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달빛에 번뜩이던 검신이 붉게 물들어 갔다. 여상각의 숨이 거칠어 질 때마다 목을 파고든 검신에 흐르는 피는 많아졌 다. "그만 가라!" 혁천련이 거칠게 검을 잡아 당겼다. "허억!" 성대가 잘려나가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숨이 그대로 토해지며 여상각의 몸은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퍽! 여상각의 몸에 잠시의 진동(振動)이 스치고 지나간 뒤 축 늘어져 버리자 혁 천련은 다른 상대를 찾아 몸을 돌렷다. 피를 본 혁천련 눈이 붉게 달아올랐 다. 콰등! 어디선가 진천뢰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때 까지 희미한 어둠이던 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모든 것이 서로의 눈에 일 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장원은 쑥밭이 되어 있었다. "으으으! 이럴 수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다니......" 장내에 도착한 가목염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실성(失性)할 지경이었다. 모 든 것이 불에 타고 앙상한 서까래와 쓰러 넘어진 돌기둥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급히 신형을 날려 도착한 곳은 연무장(鍊武場)이었는데 살아있는 부하 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시체와 도랑을 이른 피뿐이었다. 곳곳에 떨어져 구르는 팔다리의 주인을 굳이 찾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로 쳐도 반은 천지검문의 부하들이 뿌리고 죽은 것이었다. "으으으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들...... 어서 오너라! 모두 잘 근잘근 씹어 뱉어 줄 테니......" 가목염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파공성을 들으며 외쳤다. 사사삿― 불타는 지붕을 타넘어 날아온 복면인은 그의 면전에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나타난 자는 우선 키부터 상대에게 위압을 주기 충분했다. 더구나 등에 걸 쳐 맨 두 자루의 혈부는 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겁을 주기에 충 분했다. "네놈은 누구냐?" "네놈? 허기는 그렇게 불러보는 것도 마지막일 테니 마음대로 불러라."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은 담붕비였다. 담붕비는 가목염이 무어라고 욕을 하 든 개의치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대신에 등에서 한 자루의 혈부를 뽑아들었 다. '강한 놈이다. 어떤 방법에도 넘어가지 않을 놈이라는 것을 알겠다.' 가목염은 불안해졌다. 모든 부하들이 죽었는지 움직이는 기색도 보이지 않 았고 병장기의 충돌소리가 들릴 만도 한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부하들을 모두 어찌했느냐?" "모두 죽였어. 반항하는 놈들은 죽이는 것이 우리들 방식이거든...... 모두 무공이 형편없는 약골(弱骨)들이어서 특별한 재미는 없었어," 어린애처럼 말을 하고는 있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위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거구의 사내가 말하는 내용에는 상상도 하 지 못할 내용이 들어있기도 했다. 가목염은 너무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미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명색이 천지검문의 부문주인데 내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놈들이 모두 죽였느냐?" "아니. 나는 강한 놈만 상대하기로 했지. 그들을 죽인 자들은 굳이 말하면 산적들이지." "산적?" 복면을 쓰고 있는 담붕비의 눈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밤이라 하지만 전각 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눈가에 짓는 미소도 모두 볼 수 있었다. 가목염은 어이가 없었다. 상대는 자신을 두고 장난을 하고 있었다. 천하에 가목염을 두고 장난을 하 는 자는 오지회 밖에는 없을 것이지만 가목염은 그것으로 부동심을 잃어버 렸다. "그대들은 누군가?" "오지회라고 들어보았는지 모르겠어. 너무 오랫동안 활동을 안 했더니... ..." "헉!" 가목염은 가슴 아래부터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라고 오지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오지회는 무림인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 상이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를 왜?" 그것이 궁금했다. 가목염의 생각으로는 천지검문이 오지회와 적대관계(敵對關係)를 맺은 적이 없었다. 만약 오지회와 적대를 맺었다면 그토록 편하게 계집을 껴안고 뒹굴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담붕비가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시치미를 뗄 건가? 이곳이 을목세가라는 것을 알고 왔는데!" 가목염은 어이가 없었다. 을목세가는 고사하고 그들과 손을 잡아본 적도 없 고 을목세가의 무인들을 본 적도 없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장원이 불타고 부하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오해 치고 그 대가가 너무나 참혹했다. "우리는 을목세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흥! 끝까지 시치미를 뗄 생각일랑 집어쳐라. 만도화원의 주인이라는 놈이 단화연이라는 것을 알고 왔다. 놈이 우리와 당문을 이간질했다는 것을 모르 는 줄 아느냐?" 퉁! 가목염은 머리 속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들었다.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만도화원의 주인이며 자신들의 문주 인 자가 을목세가의 주인과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니..... 이미 오래 전부터 을목세가의 가주와 혼인(婚姻)하기로 되어 있던 여인이 오지회의 대형과 잠적(潛跡)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을목세가 가 힘을 얻게 되면 오지회와 일전을 겨루게 되리라는 소문이 공공연했었다. "설마?" "사실이야. 놈이 있는 곳을 대라." 가목염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단화연에게 속았다는 분노였 는지 담붕비에 대핸 분노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가목염은 자신의 애검 홍매를 치켜들고 내력을 주입했다. "모른다. 그보다 네놈이 천지검문을 피로 물들인 것에 대한 피 값을 물으리 라." 가목염의 분노는 당장 눈앞에 있는 담붕비에게 뿌려졌다. 가목염은 자신의 애병 홍매를 바라보았다. 내력이 주입된 홍매가 몸을 새빨갛게 달구고 있었 다. "이놈, 감히 화산파의 속가제자에게 건방을 떨다니......" "호, 화산파의 속가제자라 그토록 거드름을 피웠나." 담붕비는 여전히 거들먹거리는 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감히 경시(輕視)하지 못하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있었다. 혈부를 든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담붕비는 등에 걸머지고 있던 나머지 혈부도 끌러 손에 잡았다. 두 자루의 혈부가 손에 쥐어지고 나서야 담붕비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담붕비도 마음속으로 내공심법의 구결을 암송했다. 단전에서 한줄기 거센 힘이 끓어올라 소주천을 맴돌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갈라진 두 줄기의 힘은 각각 임독양맥으로 나뉘어 흘렀다. 곧 두 손에 충만(充滿)한 기운이 넘실거 렸다. "오라!" 담붕비가 호기롭게 외쳤다. "간다." 기다렸다는 듯 가목염의 신형이 지면을 훑어내 듯 수평이 되어 날아왔다. 그가 달리는 뒤로 모래가 튀어 올랐다. 홍매에서 붉은 기운이 허공으로 줄 기줄기 뻗어나갔다. 화산파의 속가제자인 가목염의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홍매는 날카롭 고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가목염이 시전한 초식은 화산의 검법에서도 구결에 속하는 일지선결(一指仙 訣) 이라는 초식으로 직선으로 찔러 가는 검초였다. 빠르고 간결하지만 방어가 용이하지 않은 검초로서 상대의 허점을 유도하는 검초였다. 담붕비는 두 개의 혈부를 마치 풍차처럼 돌리며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혈 부가 발라지며 점점 힘이 배가되자 왼손에 든 혈부를 질러오는 검에 마주쳐 가며 오른손에든 혈부를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십이참마부결중(十二斬魔斧訣)의 삼 초. 풍뢰선부(風雷旋斧)였다. 초풍비가 전수한 적성의 무공이었고, 적성의 무공 중에는 유일한 부법이기 도 한 십이참마부결은 오로지 담붕비를 위해 만들어진 무공인 듯 너무나 어 울렸다. 콰아아아아― 두 개의 파공성이 기이하도록 같은 파공성을 울렸다. 병기가 다르고 초식이 달라 전연 다른 바람소리가 들려야 했지만 같은 파공성이 들린다는 것은 오 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빠름(快)! 빠르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의 파공성이 들렸던 것이고, 빠른 만큼 그들의 병기는 한곳을 향해 부딪쳐 갔다. 파징! 허공에서 불꽃이 명멸했다. 가목염이 찔러낸 홍매와 혈부가 허공에서 부딪 치며 피워 올린 불덩어리는 긴 사선을 그으며 방향을 틀었다. 이어 남은 한 자루의 혈부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그만 가라!" 퍽! 가목염은 마음속의 부동심을 잃어버렸는지라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혈 부의 존재를 잠시 간과했던 것 같았다. 그의 무공 정도라면 담붕비와 겨루 어 볼만한 적수였으나 너무도 쉽게 무너진 것은 너무도 허망했다. 주르르르르― 잘린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잘려 땅위로 뒹구는 머리에서는 피가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비명도 없었다. 오로지 죽은 시체만 있을 뿐이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19 페이지: 1/45 자료번호: 287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4 ─────────────────────────────────────── ■ 상견환 제19장-족치면 입을 열게 되지 가목천은 바쁘게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우선은 살고 보아야 한다.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뼈를 묻게 될 것이 다." 가목천은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며 바람에 날리는 재를 밟으며 몸을 퉁겼다. 바닥에는 전각이 타고 날리는 재로 인해 전장(戰場)이 따로 없었다. 이미 그의 손에 죽은 자는 오인이나 되었다. 겁 없이 달려들던 복면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일초를 받아내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멈추어라!" 캉! 허공으로 도약하던 가목천은 눈으로 날아드는 물체를 장검으로 쳐내며 떨어 져 내렸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고 생각한 것은 그 후의 일 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열두 개의 신형이 나타나며 가목천을 에워쌌다. 휘리리리리― 거친 바람이 불어오자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마주선 모든 사람들의 옷자락을 나부끼게 만들었다. 가목천은 파랑검(波浪劍)이라 이름 붙여진 장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웠다. 한 번도 자신을 배반한 적이 없는 파랑검이었지만 어쩌면 자신을 배반할지 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별무리를 보면 소나기가 오는 것을 안다고 했어. 최대의 난국(難局)이야.' 가목천은 자신의 주변에 다가드는 십이 인을 바라보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단 한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그였으나 밤바람에도 솜털이 날리는 기 분이었다. 스슷― 열두 개의 그림자가 그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쌌다. "오늘은 왠지 한바탕 웃고 싶어지는군."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 쓴 자들이 키득거렸다. 가목천이 모르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복면인들은 산채의 부하들로 그들을 이끄는 자는 삼소두령 마등이었 다. "애들아, 놈을 죽이자." "예, 두령님!" 마등이 소리를 지르자 열 한 명의 산적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며 서서히 몸 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한결같이 복면을 하고 있었다. 열두 복면인은 다짜고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 한번 몰아쉴 시간이 지나자 몸이 점점 빨라졌다. 복면인들은 일제히 회전을 함과 동시 손을 내밀어 일제히 경력을 뿜어냈다. 각기 다른 병장기가 허공에 무지개를 만들며 가목천을 향해 다가들었다. "흥!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가목천의 말은 옳았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그는 화산파의 속가제자였고 검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니 설사 두려움 이 있다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충격을 느끼지는 않았다. 휘리리리― 열두 자루의 병기가 가목천의 이십 사 개 요혈을 파고들었다. 경력이 이르 기도 전에 피부를 파고 도는 충격에 가목천은 검을 거칠게 흔들었다. "어림없다. 애송이들!" 휘류류류― 파랑검에서 뿜어진 검기는 열두 갈래로 갈라지며 달려드는 십이 인의 배심 으로 파고들었다. 화산이 자랑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중 매화노방(梅花怒 放)의 초식이었다. 가목천은 평생을 한 가지 검법에 매달렸는데 바로 화산 에서 익히기가 가장 힘들다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이었다. 스물 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매화검법은 흔히 강호에서 알고있는 것과 는 그 격이 달랐다. 매화검법을 익혔다는 화산의 제자들은 단순히 초식을 숙달하고 투로(鬪路)를 익혔을 뿐이었지 요결을 익히지는 못했다. 가목천이 검제라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가 매화검법의 비결로 전해지는 구결 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투로에 따라 움직이는 초식과는 달랐다. "헛! 어리석은 놈!" 차차창! 콰징! 한차례의 둔탁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가목천의 몸이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가목천이 원한 것이 아니라 십이 인이 뿜어낸 반탄력에 의한 결과였다. 휘리릭! 몸을 뒤집으며 착지하는 가목천의 주변에 다시 몰려드는 십이 인의 눈에는 더욱 강한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커흑!" 가목천의 입에서 가슴 답답한 비명이 터졌다. 입에서는 한줄기 실낱같은 핏 줄기가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고 어깨에서는 옷이 뜻긴 채 붉게 물들었다. 비록 피가 흐르고 옷이 뜯어졌다고는 하지만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다만 엉겁결에 시전을 한 내공이 엉켜 몸에 충격을 주었던 것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놈들이로군" 가목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강해 보이지는 않는 자들이었 지만 제법 짜임새가 있는 진이었다. 다만 진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 었다. "아우들 놈을 죽이자!" 복면인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고 열두 개의 병기는 다시 몸을 파고들었 다. 네 자루의 장병이 다리를 후려왔고 두 자루의 장병기는 복부와 가슴을 지향했다. 여섯 개의 병기가 등과 머리를 위협하고 떨어져 내리자 가목천은 정신이 산 란해 정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막막했다. "차핫!" 가목천은 급히 몸을 움직였다. 화산제일의 신법이라는 청운신법(靑雲身法) 을 펼쳐 몸을 제비처럼 뒤집으며 매화검법의 이 초식 매화토염(梅花吐艶)을 전개했다. 파하하하― 차차차창!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고 수 개의 병장기가 허공에서 어우러졌다. 주변에서 타오르는 불꽃보다 수배는 밝은 백열(白熱)이 피어올랐다 사그라 졌다. "어흑!" 비명이 울리고 두 개의 그림자가 이 장이나 퉁겨져 날아가 나뒹굴었다. 복 면인 중 두 명이 허리가 쩍 벌어져 피와 창자를 쏟으며 널브러졌다. 주변에 적지 않은 시체들이 흩어져 있었고, 시체들에서 흐른 피가 작은 내 를 만들었지만 새로이 흐른 피가 더욱 진한 혈향을 뿌렸다. "흥! 애송이 놈들!" 두 명의 복면인을 죽이자 가목천은 상대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화토염의 한 초식으로 열두 자루의 병기를 퉁겨내고 두 명을 죽 였으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를 공격했던 복면인들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목천의 무위가 강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그들은 둘러싼 범위를 넓혔다. "죽일 놈!" 쉬이익― 두 개의 그림자가 목을 감아갔다. 두 자루의 장창은 각각 복부와 목을 노리 고 있었다. 목을 노리는 장창은 등뒤에서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불빛에 번뜩이는 장창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장창이었다. "당하지 않는다. 매개이도(梅開二度)!" 가목염은 몸을 엇비슷하게 뒤집으며 번개가 무색한 빠르기로 파랑검을 그어 갔다. 파랑검은 정확하게 다가드는 복면인의 손을 스치며 목으로 파고들었 다. 치칫! 불에 달구어진 쇳덩이가 물에 젖으며 내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검은 정확하 게 목표를 찔러갔다. 촤아아아― 손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것도 잠시뿐, 검은 손을 가르고 비껴나가 복면 인의 목에 깊숙하게 박혀버렸다. "커흐―흑!" 툭! 목에서 한 방울의 핏방울이 떨어졌다. 미약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누구라 도 천둥처럼 들리는 묘한 소리였다. 도르르르...... 핏방울이 파랑검의 날렵한 몸을 타고 흘렀다. 파랑검을 붉게 물들이던 핏방 울은 검신의 중앙에서 머물렀으나 곧 다시 흘러내렸다. 뒤이어 흘러나온 붉은 피가 앞서 흘러내리던 피를 더욱 세찬 힘으로 밀어내 어 검신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앞에서 다가들던 복면인을 찌른 검이 다시 뽑아지며 가목천의 몸이 주저앉 듯 낮아졌다. 뒤에서 목을 노리고 찔러온 창이 바람을 가르며 가목천의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가목천은 몸을 퉁겨 올리며 파랑검을 횡으로 그었다. "커흑!" 나직한 비명이 울리며 하나의 신형이 스르르 미끄러지듯 넘어갔다. 가목천 의 검이 복면인의 가슴에 박혀있었다. 복면 속의 눈이 불거져 나와 눈꺼풀 이 닫히지 않고 있었다. 팟! 가목천은 검을 뽑으며 다시 발검(拔劍)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파랑검을 가 슴에 세운 가목천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복면인들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퍽! 가슴이 검에 찔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와중에도 손을 허우적거리던 복 면인이 땅바닥으로 널브러졌다. 목에서는 숨이 남았는지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을 몰아 쉴 때마다 갈라진 심장에서 핏줄기가 어린아이 오줌을 싸듯 밀려나왔다. "아우!" 비통한 목소리가 터진 것은 그후의 일이었다. "끄으으으! 감히 아우들을 죽이다니...... 아우의 원수를 갚겠다." 다시 두 개의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쉬이이이― 카카카카― 두 개의 손톱그림자가 각기 목덜미와 단전을 노리고 밀려들었다. 두 개의 병기도 허공에서 빛 무리를 쪼갰다. 박도와 대감도였다. "어림없다. 파랑검은 풀 베는 초부의 검이 아니다." 휘리리리리― 한소리 호통을 내지른 가목천은 번개같이 파랑검를 그어갔다. 마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듯 비틀어진 검세는 땅을 기듯 흐르다 용이 승천하듯 솟구쳐 올랐다. 땅!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가목천은 연거푸 세 걸음을 물러섰다. 그의 발아래 깊이 패인 발자국은 그가 내공에 얼마만큼의 상처를 입었는지 말을 해주고 있었다. "우욱!" 푹! 두 명의 복면인은 땅바닥에 병기를 꼽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아랫배에 서는 붉은 피가 흘러 땅바닥에 조그만 피의 구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선홍 색 피가 떨어질 때마다 모래알갱이가 튀어 올랐다. "크으으! 놈을 죽이지 못하다니!" 비명의 주인은 마등이었다. 분노의 일갈을 뿌리고 달려들었지만 가목천의 검은 그의 단전을 갈라버렸고 복부를 감싼 마등의 손으로 피가 새어나왔다. 마등은 쓰러질 수 없다는 듯 박도를 땅에 짚으며 버텼으나 부질없는 짓이었 다. 곧 그의 몸은 좌로 흐느적거리는 연체동물처럼 무너졌다. "형님의 원수를 갑자."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분간하기 어려우나 살기에 찌든 목소리가 울리고 남았 던 여섯 개의 신형이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놈들!" 가목천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반수를 죽였으니 이제 어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가목천은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매화검법을 시전 했다. 쉬이이이이― 허공에 반월이 그려지며 무수한 검의 그림자가 흩어졌다. 차차차창! "크아아악!" 여섯 개의 병기가 부딪쳐 울리고 허공에 피의 분수가 번져 올랐다. 아무리 무공을 열심히 익혔다고 해도 산채의 산적들에게 가목천은 무리였다. 푹! 날카로운 소리는 살을 파고드는 병기의 소리였고 가목천의 허벅지에서 들렸 다. "에잉! 끝까지 속을 썩이는구나." 가목천은 신경질적으로 파랑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지나가는 곳에서 다 시 혈화(血花)가 피어올랐다. 검에 잘린 목이 일장을 날아가 데구루루 굴렀 다. 마지막 남은 복면인의 머리였다. 순식간에 다섯 개의 목을 베었지만 마지막 하나, 동작이 느렸던 복면인의 목은 베지 못했다. 복면인은 목숨을 걸고 가목천의 몸에 창을 꽂은 것이 분명했다. 창은 허벅 지를 뚫고 반대편으로 창극(槍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가목천은 창을 움켜잡았다. 창을 뽑으려던 가목천은 파랑검을 휘둘러 창극 에 연결된 봉을 잘라버렸다. 사람이 죽는 것은 병기에 상해 죽는 경우도 있지만 몸에 박힌 병기를 뽑음 으로써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몸에 박힌 병기를 뽑으면 그 상처로 피가 빠져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치를 아는 가목천은 병기를 뽑기보다는 차라리 놔두기를 택했다. "으!" 창이 잘리며 가슴을 도릴 듯한 아픔이 밀려오자 가목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휭! 바람소리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치 지면에 흩어져 뒹구는 재를 날 리려는 듯 거친 바람이 불었다. 몸을 숙이고 있던 가목천은 바람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키려다 깜짝 놀랐다. 바람소리를 타고 흰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둥근 물체였다. "누구냐?" 가목천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허벅지의 통증이 그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결정적인 패인(敗因)이었 다. 사각! 무를 자르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어깨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목천 은 무심코 머리를 돌려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크아아악!" 그의 입에서 비명이 울렸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은 고통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는 잘려 보이지 않았다. 바닥을 뒹구는 팔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쥐어진 검이 파랑검인 것으로 보아 분명 자신의 것이 분명했다. 가목 천은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눈을 들어보니 다시 흰 물체가 날아들고 있 었다. 빠른 물체는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도주해야 해.' 가목천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후 빠르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절뚝거리 는 다리가 걸음을 더디게 했지만 가목천은 고수였다. 그는 곧 장원의 외곽 을 둘러싼 담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죽기는 너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용기를 내어 싸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그의 몸은 평소의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힘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계속해서 뿜어지는 피는 곧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 분명했다.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 암중의 고수와 상대하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어찌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의 몸이었다. 팔을 잃어버렸고 다리에 창이 박혀든 상태에서는 아무리 날고 기는 자신이 고 검제라는 외호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가목천은 급히 담 옆으로 몸을 붙였다. 그때까지도 팔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지혈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는 가목천이었다. 가가가가각! 담에 날아들던 물체가 불똥을 일으키고 날아갔다. 그 순간 가목천은 자신의 팔을 자른 둥근 물체가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방패였다. 조개껍질처럼 밝은 빛을 뿌리는 둥근 방패가 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만도화원을 화염으로 이글거리게 만든 사무기는 빠르게 전진했다. 계집을 잡아 족친 결과 만도화원의 원주가 평소에 머무는 일곱 개의 방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었고 이미 여섯 개는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어디에도 원주는 없었다. "급하다. 놈이 도주라도 하는 날에는 언제 다시 놈을 찾게 될지 모른다." 사무기는 뒤에 떨어져 달려오는 소명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놈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할 뿐이었다. 콰당! 마지막 방의 문이 열렸다. 열렸다고 하기보다는 문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 옳았다. 사무기는 달려가는 힘으로 문짝을 걷어차고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 었다. 방안은 화려했다. 침상은 금침이었고 정실 안에 놓여진 원탁도 중원에서 구하기 힘들어 보이 는 붉은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빌어먹을...... 여기도 없군." 사무기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방이었다. 더 이상 찾아볼 곳도 없 었다. * * * "모두 입이 얼어붙었느냐? 문주는 어디로 갔느냐?" 혼혈마장이라는 외호에 걸맞게 붉게 달아오른 쌍수를 휘두르며 호령을 터트 리던 도우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했던 천지검문의 무인들이 언제부터인가 턱없이 형편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천지검문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자들이 살아있는 전부였다. "모르오. 우리는 모르오." 몇 명의 무인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모두 동의를 하거나 대꾸를 하 기에는 입이 얼어붙어 버렸다. "죽일 놈! 어디서 감히 거지같은 허명(虛名)으로 우리를 겁주려하다니... ... 죽여버리겠다." 하나의 손가락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무사들의 뒤에 몸을 숨기듯 움츠리고 있던 호랑이의 탈을 뒤집어쓴 자였다. 그는 천지검문의 장로 중 한 명으로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무림에서 호제(虎帝)라 불리는 만도신유(萬刀神儒) 이탁극(李卓 )이었 다. 도우선의 앞에 무릎 꿀려진 부하들 틈바구니에서 우물쭈물하며 도우선의 목 덜미가 노출되기를 끊기 있게 기다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회는 너무나 빨 리다가왔다. 온몸의 모든 강기를 풀어버린 듯한 도우선의 몸은 너무도 빈틈이 많았고 모 두 제압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긴장이 풀어져 보였다. 이탁극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번의 기회는 있을 것 같았다. 빛도 무색하리 만치 빠른 자신의 열 손가락은 도우선을 죽일 수 있다고 믿었다. 당금 천하에 기인이사가 많다고는 하나 그의 손가락을 피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팍! 갑자기 허공으로 도약하듯 몸을 날린 이탁극이 빠르고 정교한 도법으로 도 우선을 향해 내리 꽂았다. 도가 허공을 가르는 사이 갈고리처럼 굽어진 손가락이 부챗살처럼 도우선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죽어라. 이놈!" 이탁극은 득의양양(得意揚揚)해서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이탁극의 손톱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손톱에는 내력이 실려있 었다. 사람의 피부 정도는 수십 번이라도 갈가리 찢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흐흐흐! 죽였다.' "네놈이 먼저 죽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이탁극의 생각을 백지로 만들었다. 머리 속이 텅 비 는 느낌에 그는 눈을 부릅떴다. '이게 아닌데......' 이탁극의 손은 허공에 떠 있었다. 도우선의 목덜미를 감아쥐었다고 생각했던 손에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픔이었다. 손목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인가 손은 손목에서 싹둑 잘려있었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목을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거리가 멀었다. 목에서 한자는 족히 떨어진 거리였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도우선의 손에는 작은 비수(匕首)가 들려 있었다. 평소 병기를 사용하지 않는 도우선이었지만 품에 한 자루의 작은 비수는 지 니고 다녔다. 그 비수가 이탁극의 손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주르르르― 손목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은 도우선의 얼굴 한 자 앞에서 쏟아졌지만 한 방울도 도우선의 얼굴이나 몸에 묻히지 못했다. 도우선의 몸에는 무형의 강기막(剛氣幕)이 펼쳐져 있는 듯 핏방울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방으 로 퉁겨졌다. "으아아아아!" 이탁극은 두려움과 참을 수 없는 경악으로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위허위 휘 둘렀다. 붉은 피가 마구 튀며 이탁극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후후, 또 한 가지 있는데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나는 나를 건드리는 자 를 하나도 살려주지 않을 결심을 했지. 너처럼 암습을 하는 놈들도 예외는 아니야." 도우선은 번개처럼 손을 내밀어 이탁극의 손을 잡았다. "카아악!" 이탁극은 가슴이 화끈해지고 창자가 타 들어가는 느낌에 비명을 토하며 펄 쩍 뛰어올랐다. 도우선의 손가락이 잘려진 팔뚝을 통해 이탁극의 몸으로 스 며들자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이탁극은 몸을 비비꼬았다. 털썩! 서너 번의 눈 깜작거릴 시간이 지나자 이탁극은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무너 져 내렸다. 잘려진 팔뚝으로 흘러나오던 피는 어느새 굳어버렸고 피부는 쪼 글쪼글 말라 비틀어졌다. "으으으......" "사람이 아니다." 살아남은 부하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헤치고 몸을 뺄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었다. "몇 가지만 충실하게 대답해주면 살려는 주겠다. 그러나 허튼 수작을 부리 면 죽지도 못하는 고통이 네놈들을 기쁘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 휘리리릭― 도우선의 손이 허공을 한 번 휘저었다고 느낀 순간 천지검문의 제자들은 몸 이 굳어지며 땅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착각을 느꼈다. 이탁극이라 해서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으으...... 이건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다.' 이탁극은 하늘이 노래지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도우선이 왜 혼혈마장이라 불려지는지 증명(證明)되는 순간이었다. 도우선의 장법은 이미 천하를 울리 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대답해라. 만약 대답이 늦게 나오거나 속임이 있을 때 에는 죽지도 못하는 고통을 맛보게 해주겠다." 퍼퍼퍽! 도우선이 이탁극의 혈도를 찍었다. "크아아아!" 이탁극의 입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졌다. "얼굴에 뒤집어 쓴 것은 벗어버리고......" 도우선은 생각난 듯이 호제의 얼굴에 씌어져 있는 호랑이의 탈을 벗겨버렸 다. 참혹하게 이겨지기는 했으나 오관(五觀)이 단정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 났다. 가시처럼 돋친 수염이 거칠게 보이기는 했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번듯해 보 이는 노인은 전신을 비틀고 밭은 신음을 흩뿌려 내었다. 노인은 얼굴이 험악하게 비틀어지고 혈맥이 마구 튀어 올랐다. 사람이 참을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한 듯 진한 땀이 흘러나왔고 이마에 굵은 심줄이 솟아 올랐다. "묻겠다." "으으으......" "을목세가가 어디에 있으며 그곳에 모여있는 무인들의 숫자는 몇이나 되느 냐?" "으으으......" 고통이 심했는지 이탁극은 말을 잇지도 목하고 연신 밭은 신음만을 부려내 며 이를 악물었다.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 내렸고 이는 부딪쳐 쥐가 기둥을 갈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혈맥(血脈)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얼굴에도 혈맥이 터질 듯 불거져 파란 심줄이 돋아 올랐다. 도우선은 이탁극의 혈도를 제압하여 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방해(妨害)한 것이었다. 사람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방향을 바꾸면 그야말로 죽지 못하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도우선은 알고 있었다. "으으으......" 이를 악문 이탁극의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도우선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대 형을 찾고 산채에서 죽은 아우들이 사랑했던 부하들 피의 값을 받기로 한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렵거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당분간은 철저한 악인이 되기로 작정한 터이고 보니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 기로 했다. 사실, 오지회의 형제들은 검문산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후, 악마가 되 기로 생각했다. 어물거리다가는 오지회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기도 했고 과거의 명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은 만도화원과 천지검문으로 난입하기 전 당분간은 자신들이 사람이 라는 사실을 잊자는 결의(決意)를 했었다. "크아아아! 멈춰! 멈춰!" 온몸에 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탁극은 마구 비명을 토하며 뒹굴기 시작 했다. 이탁극은 땅바닥에 마구 어지럽혀 있던 재와 피가 엉겨 붙여 흉측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혈관의 일부를 폐쇄(閉鎖)시키는데 따르는 고통은 마치 개미가 혈관을 따라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팽창하는 피부를 따라 늘어졌고 심줄이 뼈를 감아 당기는 고 통이 같이 수반되는 고문이었다. 이탁극은 버러지처럼 몸을 비틀었다. 그것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무서운 고통이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묻겠다. 을목세가가 어디냐? 그곳에 모여든 무인의 숫자는?" "으으으, 몰라" 당연한 대답이었다. 이탁극이 천지검문의 장로라고는 하나 문주가 을목세가의 후인이라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비극이었다. "좋아, 네놈은 단화연, 그놈에게서 어떤 명령을 받았느냐" "몰라!...... 으...... 몰라." "그렇다면 다리 하나를 잘라주랴?" "모, 몰라. 사천당문...... 그곳 어디인가에 있다는 것...... 헉! 그거!" 이탁극은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으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으로 입을 여는 것이지 제정신은 아니 었다. 혼백마저도 이미 육신을 떠난 충격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크아아악!" 갑자기 이탁극의 몸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즉사였다. 도우선은 일어나 이탁극의 완맥을 잡아보았다. 그의 혈맥들이 모두 터져 있었다. 혈도를 제압해 피의 흐름을 방해한 상태 에서 두려움과 충격으로 혈맥이 터져 버린 것 같았다. 이탁극의 코와 입을 통해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위이잉! 바람이 불었다. 전각이 타서 재가 된 상태라 자욱하게 날리는 것은 모두 불티였고 재였다. 사무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걸음으로 오인을 향해 다가갔다. 사무기의 앞에는 네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사내가 패대기 처진 모습으로 엎드려 있었 다. 그들의 뒤에는 소명과 사무기를 따라 만도화원으로 난입했던 열 명의 쌍룡 채 산적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누구 하나 다친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 다. 실제로 만도화원으로 날아든 그들은 접전이 있을 수 없었다. 담 하나를 사 이에 두고 천지검문과 치열한 접전을 치르고 있는 산채의 부하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네 명의 계집은 평소 원주라는 놈과 뒹굴었던 계집들이고 사내놈은 원주에 게 명을 받고 만도화원을 관리하는 부원주라는 놈이랍니다." "어찌 알았나?" "죽기 싫어하는 계집들이 말해주었습니다." 소명은 마치 사무기가 물을 것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한 것 같은 표정이었 다. 서동(書童)이 글 선생이 질문하면 대답하듯 그는 사무기가 물으면 바로 대답을 했다. 사무기는 단하에 널브러져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계집과 사내를 바라보았다. 계집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얼굴과 쪽 빠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색향 (色鄕)으로 항주(杭州)니 소주(蘇州)니 하는 말이 있지만 만도화원에서도 진회하(進會河)와 버금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사무기는 무엇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오래 전에 포교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죄인들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안다는 뜻이 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다루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두 번 묻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성격인 것을 미리 이야기하지 않아 미 안하군. 미리 말해 두지만 난 네놈이 모시던 상관 때문에 삼십명의 부하를 잃었다. 그 대가를 혼자 지불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 참으로 정중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속에 깔려 있는 진한 살기는 안개와도 같았다. "이름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무기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가늘게 꿈틀거리는 가 싶더니 역 팔자로 휘어졌다. 눈가에 가는 잔주름이 잡혔다. 입가가 가늘게 떨렸는데 주변에 전각이 타는 불빛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 의 미세한 떨림이었다. 사무기가 웃는 낮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난 오지회의 형제였다. 물론 지금도 오지회의 형제이기는 하지. 왜 오지회 가 정사중간이라는 말로 악명을 떨쳤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소명이 다가왔다. 사무기가 자신을 바라본 것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소명은 오 래 전부터 사무기를 따랐기 때문에 사무기의 마음을 읽는 힘을 지니고 있었 다. "잘라라." "예." 소명이 품에서 손잡이까지 합쳐야 한 자가 되지 않는 소도를 꺼냈다. 쌍룡 채의 부하들이라면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소도는 상대에게 체포되었을 때 자결(自決)하기 위한 것이었다. 산적이라는 것이 관부에서는 토비(土匪)라 불렀는데 잡히는 날이면 열이면 열! 모두 효수(梟首)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열어 형제들이 다 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했다. 소명은 작은 소도를 들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망설이지 않는 얼굴로 소도를 흔들자 바닥이 붉게 변했다. 잘린 새끼손가락이 구른 것은 그 후의 일이었 다. "크아아아! 내 손!" 비명은 가장 마지막에 울렸다. "저런, 쯧쯧쯧! 아프겠구나." 사무기의 음성은 처절하도록 부드러웠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하는 말처럼 부드러웠는데 사내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사내의 입에서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무릎이 꿀려 주저앉은 계집들도 하나같이 침을 삼키며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바닥이 흥건하게 젖 었다. 두려움을 참지 못한 계집들이 배설을 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사무 기는 무심했다. "이름?" 사무기의 질문은 점점 짧은 명령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내의 눈이 암울(暗 鬱)하게 변했다. 사내의 두려움은 극도에 달했는지 입술이 자주색으로 변했 다. 입술과는 달리 얼굴은 창백해 마치 얼음을 보는 것 같았다. 사무기의 얼굴 에 자애로운 미소가 아렸다. "여...... 여......엽산, 엽산이오." "진작 그랬어야지. 그가 간 곳은?" "모르오." 엽산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영화가 끝났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에게 형극(荊棘)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 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소명이 다시 다가섰다. 언제든지 벨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지 소도를 손바닥에 넣고 소 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엽산은 더욱 마음을 졸이느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팟! "크헉!" 허공에 가는 빛줄기가 흐르고 엽산의 목에서는 다시 비명이 터져 올랐다. 그의 손가락 중 다른 하나가 잘려 뒹굴고 있었고 피도 다시 흘렀다. 갑자기 엽산이 얼굴을 쳐들었다. 눈에서는 원독(怨毒)에 쌓인 진한 살기를 뿌렸다. '입을 다무는 것이 그 동안 원주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은혜에 보답하는 길 이다.' 엽산의 눈이 고요해졌다. "나는 네놈들과는 원한을 진 일이 없는데...... 이토록 잔악하게 사람을 핍 박하다니. 보복이 두렵지도 않느냐?" 엽산으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항거(抗拒)였다. 조금만 더 견뎌 준다면 천지검문에서 무인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원주는 길을 떠나며 만약의 경우 문제가 생기면 담 너머에 있는 천지검문의 무인들이 도와줄 것이라 이야기했었다. 갑자기 그들의 생각이 나자 용기가 백배했다. '어차피 저자는 나를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엽산의 생각은 천지검문의 무인들이 자신이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 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검문에서 보아도 만도화원이 불에 타는 것이 보일 것이고 결국 그들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것을 엽산은 알고 있었다. 엽산으로서는 천지검문마저 오지회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지 않았다. "보복? 그게 뭔지 모르겠군." 사무기는 느물거렸다. 그의 얼굴을 본 오인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사무기의 몸에서 풍기는 애잔하 고도 허허로운 기운은 이미 자신들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듯 느껴졌기 때문 이었다. 수천 명의 주객(酒客)과 도박꾼을 상대하며 그가 배운 것은 사람에게서 느 끼는 감정이었다. 사무기에게서 풍겨 나오는 스산하고도 가라앉는 듯한 느낌은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기도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원주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엽산은 용기를 내어 외쳤다. 자신이 아니라면 이미 얼어붙은 계집들의 입은 열리지 않을 것을 잘 알기에 자신이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목을 넘어선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떨렸고 절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과였다. "난 말많은 놈들을 제일 싫어한다." 콰지지지― 사무기가 손을 가볍게 내젓자 기다렸다는 듯 소명이 다가와 계집 중의 하나 를 잡아 일으켰다. 계집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으나 소명은 망설이지 않 고 소도를 허공으로 그었다. "크아아악!" 비명이 울리고 계집의 머리통이 피범벅으로 잘려져 날아갔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피는 남은 계집들의 얼굴에도 묻었으나 모두들 얼굴조차 도 돌리지 않았다. 한결같이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얼마든지 독해질 수 있어. 그것이 나를 따르던 부하들을 죽게 만든 벌이다." 평소의 사무기가 아니었다. 산채에서도 사려(思慮)깊은 사무기였지만 십 년 전 오지회 시절에도 사무기는 잔인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변해 있었다. 쌍룡채에서 사천당문의 공격을 받고 부하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그는 내 가 죽지 않으려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강호의 진리를 새삼 깨달은 것 같 았다. '으으...... 쌍룡채에서 이 백 명에 가까운 무인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있더 니...... 이건 누가 보아도 장난이 아니다. 소문은 형편없이 축소(縮小)되 어 전달되었어.' 엽산은 입을 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버티다가는 그 끝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동안 버틴 것만으로 도 그 동안 원주가 그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한 보답은 했을 것 같다는 생 각도 들었다. 계집들은 사지가 떨려 앉아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천하의 남자들을 치마폭 에 쌀 수 있다고 자부(自負)하는 계집들이었지만 무감한 사무기에게는 화려 함도 통하지 않았고 미태가 넘치는 계집들의 애처로움도 통하지 않았다. "이곳이 을목세가인가?" "아니오." 사무기의 질문에 엽산은 고분고분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로서도 더 이상 버 틸 아무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엽산은 언젠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산의 얼굴이 들려졌다. 얼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할 사무기가 아니었다. "을목세가는 어디 있는가?" "다...... 당문!" "당문?" "아니, 당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만 알 뿐이요. 그것밖에 모르오." 엽산은 발악하듯 외쳤다. 더 이상은 기대할 것도, 그렇다고 누가 구해 주리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우선은 살고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사무기가 희미하게 웃었다. 엽산으로서는 사무기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럴수록 불안해지기만 했다. "나를 속이려 하는가?" "아...... 아니, 절대 아닙니다." 엽산은 마구 손을 내저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한없이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고 비굴하게 만들었다. 만약 오지회라는 이름만 아니었다면, 죽음의 공포가 사신처럼 다가와 목덜 미만 낚아채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토록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 이었다. '제기랄...... 사천당문으로서도 이놈들을 어쩌지 못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입을 막는단 말인가? 더구나 강호활동을 하지 않는다던 이들이 갑자기 타나 다니......' 엽산은 처음부터 등에 흐르는 땀방울이 차갑게 식었다는 것을 의식했다. 처 음에는 뜨겁게 흐르던 땀이었다. 언제부터 식은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 다. "묻는 말에 대답하면 살려준다. 단 도주하려하면 핏물로 녹여줄 수도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앞에서 거짓을 하려는 놈이 있다면 가차없이 죽여 서 들판의 이리 밥을 만들어 버리겠다." 사무기의 말은 엄포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네 명의 계집들도 사무기가 엄포 를 놓거나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목숨과 직결된 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언제 떠났느냐?" "오일은 족히 되었습니다." 엽산의 대답에 계집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엽산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으으으! 네놈은 누구냐?" 천지검문의 부서진 문을 기어 나와 담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 쉴 때 하나의 인형이 나타났다. 머리에 방립을 쓴 사내는 표표히 마치 바람을 타듯 부드러운 보법을 전개하 여 가목천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쓰고 있는 방립이 조금 전 자신의 어깨 를 자른 병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목천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나타난 자는 풍무영이었다. 풍무영은 한 시 진 전에 천지검문에 나타나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만도화원에 이르게 된 것은 초란을 추적하면서였다. 풍무영의 추적에 의하면 초란은 만도화원의 주인인 원주에 의해 만도화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풍무영은 만도화원에 스며들어 원주를 잡아 초란의 행방을 물을 생각이었 다. 만도화원의 원주가 초란을 기녀(妓女)로 만들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 았다. 초란의 이미 사십대의 여인이었다. 대개의 기녀들이 적게는 십 오륙 세에서 시작해 십 팔 세에서 이십 이 세의 나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초란을 기녀로 만들었을 리는 없다는 것이 풍무영의 생각이었다. 풍무영이 만도화원으로 난입하려 할 때 나타난 자들이 오지회가 이끄는 산 적들이었다. 한 시진 동안 사태의 추이(推移)를 주시하던 풍무영은 산적들을 베는 가목 천을 볼 수 있었고 그가 만도화원에서 초란의 행방을 알 수 있으리라 여겼 다. 마침 가목천은 부상을 당했고 기회를 보아 날린 그의 방립은 가목천을 제압 할 수가 있었다. "나는 풍무영! 초란이라는 여인의 행방을 쫓고 있다. 네놈은 그녀를 알 테 지?" 풍무영의 말에 가목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목천으로서는 초 란이 누구인지 전연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의 방립에 당했다는 사실이 한심스러워졌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나는 모른다." 가목천은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풍무영의 모습으로 보아 그가 지닌 방립을 날리는 절기는 뛰어나 보였으나 내공이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가목천은 풍무영의 모습에서 고수의 흔적을 찾 을 수가 없었다. 비록 몸은 가벼워 보이는 사내였지만 태양혈이 밋밋했고 안색도 붉어 보이지 않았다. 외형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고수가 지니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가목천이 판단하기에 자신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자는 그의 추측대로 고 수가 아니거나 판단할 수 없는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후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다. '놈을 죽이고 이곳을 탈출해야겠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귀했다. 천지검문을 초토화시키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누구를 찾는 것이냐?" "초란이라는 여인이다." "누구?" "초란!" 풍무영은 한 발 한 발 다가들었다. 가목염은 빙그레 웃었다. 과도하게 흘린 피로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기는 했 지만 그가 보일 수 있는 여유는 그저 웃어주는 것이었다. 웃음을 본 풍무영의 얼굴이 야차(夜叉)로 변했다. 그제야 가목천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아차!' 풍무영은 급히 몸을 뒤집으며 빠르게 물러났다. 자신이 그의 앞에 너무 가 까이 접근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슈아아아아― 가목천의 왼손이 허공에 수십 개의 장영(掌影)을 그렸다. 몸 구석구석에 모 여있던 모든 내공이 그의 손으로 뿜어져 나왔다. 퍼퍼퍽! "커흐흑!" 풍무영은 비명을 뿌리며 나동그라졌다. 가슴과 복부를 강하게 격타 당한 그 로서는 몸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 비록 팔이 잘리고 허벅지를 다쳐 과도 한 피를 흘렸다고는 하나 가목천이 지니고 있는 내공은 놀라웠다. 울컥! 풍무영은 입으로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 가목천의 장공은 풍무영의 창자에 무시 못할 타격을 주었다. 풍무영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창자 가 꼬이는 충격에 몸을 부들부들 떨 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병신 같은 놈이 감히 검제 앞에서 설치다니...... 너를 잔인하게 죽여주겠 다." 츄리리릿! 가목천은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자신의 허벅지에 박혀있던 창극을 뽑았다. 창극을 뽑으면 더 많은 피가 흐르리라는 것을 모르는 가목천이 아니지만 풍 무영을 빠른 시간 내에 죽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였다. 가목천은 하나 남은 왼손에 창극을 꼬나들고 버둥거리는 풍무영에게 절뚝거 리며 다가섰다. "형님, 왜 저자를 도와주지 않는 거죠?" "하하, 그는 아직 견딜만하다. 저자는 지금 도와준다면 고맙기보다는 수치 심을 느낄 것이다. 완벽한 기회에 한 번 손을 들어주는 것이 그를 위한 길 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나 참!" 도우선의 말에 담붕비가 투덜거렸다. 그들의 십여 장 뒤에는 모든 산채의 식구들이 모여있었다. 칠십여 명이 천 지검문과 만도화원을 공격했지만 살아남은 자는 모두를 합해 채 사십 명이 되지 않았다. 도우선과 담붕비의 좌우로는 사무기와 혁천련이 서 있었고 그들은 풍무영과 가목천이 있는 곳에서 불과 십여 장의 거리에 서 있었다. 그들은 반각 전부터 가목천과 풍무영의 혈투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들이 올라앉은 거대한 나무는 삼층전각 높이였으며 마구 타오르는 화염으로 가목천과 풍무영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구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천지검문의 사람과 싸우는 것으로 보아 아 군은 아니더라도 적군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혁천련이 거들었다. 아우들이 일각 전부터 도우선에게 풍무영을 구해주라고 종용(慫慂)했으나 도우선은 아우들을 제지하고 일부러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혹시 놈들의 계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갑자기 나타난 풍무영 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군이 아니라면 그에게서 어떤 단서 (端緖)를 얻을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도우선이었다. 도우선은 화염이 이글거리는 사이로 보이는 가목천과 풍무영을 쳐다보며 그 들이 사용하는 무공의 내력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었다. "저자가 사용하는 장법은 을목세가가 지니고 있다는 권법이 아니군. 마치 화산파의 복호권(伏虎拳) 같은데?" "글세,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랄까......?" "틀림없다. 저자가 펼치는 장법에 은은하게 손톱의 그림자가 푸르게 물들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화산의 절기 중 백미에 꼽힌다는 죽엽수(竹葉手)가 틀림없는 것 같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선이 말을 하지는 않지만 제법 명망이 있는 가문의 후손인 것을 짐작하 고 있었다. 그가 한번도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강 호의 모든 상황에 밝다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어엇! 형님, 저기 봐요." 혁천련의 급박한 목소리에 도우선은 황급히 눈을 들었다. 날카로운 혁천련 의 목소리가 풍무영의 아련한 마음을 깨웠던 것이다. 그는 잠시 가목천이 사용하는 장법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느라 눈을 돌리고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 도우선의 마음이 졸여졌다. 일곱 개의 손 그림자가 허공을 덮으며 풍무영의 신형을 가려가고 있었다. 하늘에 가득한 손의 그림자들은 풍무영을 집어삼키는 해일(海溢)같았다. "핫!" 도우선의 입에서 기합이 울리고 급히 손가락이 펼쳐졌다. 슛슛―슈슈슈슛―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선이 어둠에 묻힌 채 날아갔다. 빗살처럼 빠른 검은 선은 순식간에 장내에 도달했다. 불빛에 반짝이지 않도록 광택이 없는 검은 선은 미친 듯 손을 흔드는 가목천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웬놈이냐?" 파파팟! 손 그림자를 뿌리며 풍무영의 몸으로 덮쳐들던 가목천이 몸을 부들부들 떨 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아악!" 한 개의 가느다란 철사(鐵絲), 가목천의 목에는 가느다란 척전(擲箭)이 천 돌혈을 뚫고 목뒤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상태였다. 척전을 타고 피가 스며 나왔다. "누구냐?" 풍무영은 몸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누군가 자신을 돕기 위해 암기를 사용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적인지 아군인지는 불투명했다. 자신도 쫓기는 몸이었는지라 만약 자신을 생포하기 위한 자들이라면 재미가 적었다. 풍무영은 사위를 둘러보며 다급한 음성을 터트렸다. 네 개의 신형이 달려왔다. 비록 달려오기는 했으나 서두르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늦지도 않았다. 눈 으로 쳐다보기 딱 좋을 만큼의 속도로 달려오는 자들은 오지회의 형제들이 었다. 풍무영은 다가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한결같이 복면을 쓰고 있었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설사 그들이 복면을 벗었다고 하 더라도 풍무영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 뻔한 일이기는 했다. 풍무영의 눈은 불안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보다는 도주해야 한다 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멈추는 것 같았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들이 복면을 쓰고 있지만...... 네 명이다. 혹시?' 풍무영의 얼굴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희망이 물들었다. 어쩌면 하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물음을 던졌다. "당신들은 누구요?" "나는 도우선! 오지회의 둘째다. 그대는 누군가?" 풍무영의 눈가에 짙은 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나, 풍무영!" 도우선의 입에서 되돌아온 물음에 풍무영은 똑똑 끊어지는 말투를 뱉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20 페이지: 1/45 자료번호: 292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5 ─────────────────────────────────────── ■ 상견환 제20장-다시 뭉치는 오지회 넓은 언덕은 소의 등같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에는 가을을 시샘하듯 말라 들어가는 잔 풀이 자라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뿌리가 잘린 풀이 허공으로 날려 올랐다. 태양은 따사로웠다. 언뜻 보아도 사방 천여 장은 넘어 보이는 넓은 언덕에는 풀로 지붕을 엮은 초막이 하나 있을 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성도의 동서 쪽 이십여 리에 떨어져 있는 넓은 언덕을 가리켜 사람들은 와 우평(臥牛坪)이라 불렀다. 이름 그대로 누워있는 소의 모습과 닮았다는 뜻 이었고 멀리서보면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랑! 풍가가(風可可)께서 언제나 올까요?" "글쎄 곧 오지 않을까? 떠나면서 성도에 다녀온다고 했으니 곧 오겠지. 이 곳에서 가까운 거리니 곧 올게다." 초풍비는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상처는 모두 아물었다. 제자리를 이탈했던 단전도 제자리를 찾았고 내공도 구할 이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다. 환우천존 노궁탄이 뿜어낸 파쇄강기(破碎剛氣)는 무서웠다. 파쇄강기는 초 풍비의 가슴과 단전에 무서운 충격을 주었다. 어깨를 탈골시켰고 가슴의 기 혈을 흔들었으며 단전에 입은 충격은 그를 사흘간의 혼수상태(昏睡狀態)로 몰아갔다. 사흘이 지나도록 초풍비는 깨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풍무영이 천하를 떠돌 다 보아둔 와우평은 그들에게 숨어 지내며 몸을 추스를 시간을 제공했다. 풍무영은 끊임없이 약초를 구해왔고 남궁은미는 단 한시도 초풍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초풍비는 사흘만에 깨어나 운기조식을 시작했고 열흘이 지난 지금은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초랑(楚郞)! 옷이 마음에 들어요?" 언제부터인지 남궁은미는 초풍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단 한번의 입맞춤 도 없이, 단 한번도 품에 안겨보지 않고 그녀는 초풍비의 여인이 되기로 작 정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초풍비가 그녀를 유혹한 것도 아니었고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초풍비가 뛰어난 풍류남아(風流男兒)도 아니었다. 그녀가 초풍비를 영원한 사랑으로 선택한 것은 오로지 한가지 이유였다. 그 것은 세상의 여인들이 사내를 모두 배반 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남궁은미는 장담하지 못했다. "음! 마음에 드는군." 언제나 그렇듯이 초풍비의 말은 무뚝뚝했다. 말로는 아무런 정감도 느껴지 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은미는 실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초풍비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초풍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모두 바뀌었다. 투박한 마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팔과 다리에 차여져 있던 짐승 털이 더부룩했던 가죽 토 시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은편(銀片)이 붙은 토시가 차여져 있었다. 토시는 역시 가죽이었지만 그녀가 풍무영을 시켜 성도에서 구한 것으로 은 자 닷 냥이 든 물건이었다. 초풍비는 머리를 숙여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짙은 청색의 장포는 그녀가 정성을 들여 만든 것으로 어디에 내어놓아도 뒤지지 않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었다. "어때요? 수염을 깎으니 기분이 상쾌하지 않아요?" "그렇군." 초풍비는 얼굴을 더듬었다. 남궁은미가 반 시진이나 걸려 다듬은 얼굴이었 다. 그녀는 얼굴을 다듬고 한참동안이나 초풍비의 얼굴을 바라보았었다. 너무나 달라진 얼굴이었기에 잊지 않으려는 듯한 표정이 너무나 가관이었던 지 초풍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좋아요. 새로운 기분이 들잖아요." "그래!" 초풍비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허리에 이르는 긴 머리카락도 다듬어져 묶여 있었다. 정말 초풍비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초풍비는 옆에서 재잘거리는 남궁은미의 말을 듣는지 듣지 못하는 것인지 눈을 허공으로 던졌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던 남궁은미가 말을 멈추었다. "또 초란이라는 여인을 생각하는 건가요?" 남궁은미는 안타깝다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초 란을 원망(怨望)하거나 질투(嫉妬)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타 깝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응!" 초풍비는 남궁은미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의도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테지만 초풍비 는 생각이 나는 대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남궁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는 아스라한 슬픔의 흔적 같은 눈빛이 흘렀다. "그녀는 예쁘나요?" 모든 여인의 궁금증을 그녀라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궁은미 로서는 오랫동안 참았을 뿐, 초풍비가 그토록 생각하는 초란이라는 여인이 늘 궁금했다. 생각 같아서는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의 상처를 제가 보듬어 줄 거예요.' 남궁은미는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울적한 것은 여인 으로서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자 일부러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외상은 다 나았어요. 내상은 어떤가요?" "아마 나는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한번 헤어진 연인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법이거든!" 남궁은미의 물음에는 전연 답이 될 수 없는 대답을 하는 초풍비의 음성이 쓸쓸하게 들렸다. 남궁은미의 눈가에 가는 이슬이 맺혔다. 눈물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남궁은미는 눈을 하늘로 돌렸다. 남궁세가가 불에 탈 때도 그토록 슬프지는 않았었다. 오빠가 육지도마에게 죽을 때도 슬프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속에서 독기가 피어올랐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의 문턱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슬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초풍비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녀를 위해 형제도 버렸지. 무림에 심은 나의 꿈도 모두 버렸어." 초풍비가 타인(他人)에게 초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풍 무영에게 이야기를 했었던 것은 그가 초란을 추적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 다. 곁에 앉은 남궁은미는 자신을 평생 사랑하겠노라는 여인이었다. 가슴에 영 원히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 는다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동안 가슴에 쌓인 한은 깊었다. 여인으로 인해 모든 것을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행복 했었나요?" 남궁은미는 물음을 던지면서도 잘못된 물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렇게 묻고 싶었다. "사랑했지. 내 명성(名聲)과 모든 꿈을 접을 만큼 사랑했었다. 십 년 동안 은 너무도 행복했었다. 모든 것을 버렸지만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다." 초풍비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이 격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분노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궁은미는 그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으로 위로가 될지 참으로 막막했다. 아니,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오래지 않아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남궁은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못난 계집. 그녀를 대신해 사랑을 달라는 소리를 왜 못해. 내가 곁에 있다 는 소리를 왜 못해.' 남궁은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열 수가 없었다. 말을 하면 할 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슬픔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 다. "어마!" 눈을 돌리던 남궁은미가 놀라움을 터트렸다. 일단의 무리가 비탈진 길을 올 라 와우평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적어도 사십 여 명은 되는 숫자였다. 와우평은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멀리 관도가 보이기는 하지만 관도에서 와우평까지는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꼬여진 길을 올라와야 했 다. 남궁은미의 행동이 빨라졌다. 급히 초막으로 달려가 병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자신의 병기뿐 만이 아니라 초풍비의 병기인 반검과 패둔갑도 들려 있었다. 패둔갑의 날카로움이 두려웠는지 그녀는 겨우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있 었다. "적들이 와요." 남궁은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는 자들은 놀라우리 만치 빠른 속도로 산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초풍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려라. 저들이 적이라면 모두 죽일 것이고, 풍아우가 당했다는 이야기 가 된다." 초풍비는 여전히 무감각한 음성이었다. 항시 그렇듯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 는 모습을 보며 남궁은미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남궁은미는 초풍비의 뒤에 가서 섰다. 손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들고 있었 는데 눈에서는 강한 빛줄기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들이 와요." 남궁은미는 이를 악물었다. 적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한바탕의 혈전은 불 가피했다. 초풍비가 있으니 안심이 되지만 절로 화가 났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검을 꼬나 잡고 앞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반면에 초풍비는 처음에 주저앉았던 풀에서 한발자국도 움직 이지 않고 있었다. 벌떡! 초풍비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적이로구나!' 남궁은미는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초풍비는 곧 패갑둔을 들 것이고 반검을 가슴으로 잡아당길 것이 분명했다. 그리 된다면 와우평은 혈수에 잠길 것이었다. "응!" 갑자기 들려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잠시 머리가 멍했지만 남궁은미는 초풍비가 분명 무어라고 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남궁은미는 초풍비가 무어라고 외쳤는지 곧 짐작이 되었 다. "아우들!" 칠선왕을 비롯한 이십여 명의 천지검문 제자들은 열 하루가 지났을 때, 마 차를 추적해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마차는 분명 만도화원의 정문을 출발한 마차가 틀림없었다. 다섯 대 중에 한대는 천지검문으로 돌아갔지만 네 대는 계속해서 당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문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패인교(貝燐橋)는 다리가 워낙 낡은 목교(木橋) 였다. 다리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듯 삐거덕 소리를 뿜어내었고 마차 는 흔들렸다. "한 대씩 건너도록 한다." 마차는 서두르지 않았다. 만약 급한 마음에 서둘렀다가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철삭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마차는 천길 낭떠러지의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마차 를 모는 당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알고 있었다. 이십여 리를 돌아가면 관군이 놓은 다리가 있지만 당문에 이르기란 하루의 차이가 걸리는 길이었다. 비록 위험 부담이 있기는 했으나 당문의 제자들이 패인교를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휘이이이이― 바람이 불자 다리가 심하게 출렁거렸다. 다리 위에 있는 제자들이나 다리밖 에 서 있은 제자들 모두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슈아아아아― 바람을 가르며 한 자루의 검이 날아든 것은 두번째 마차가 다리를 통과하기 위해 말을 움직였을 때였다. 이미 한 대의 마차는 다리를 건너 다른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아아악!" 비명이 짐승의 우는 소리처럼 울려 퍼지며 하나의 인형이 목이 뎅겅 잘린 채 어자석(御字席)에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진 머리가 마차 바퀴에 깔 려 피떡이 되어 버렸다. 히히히히힝! "으아아아악!" 마차가 기우뚱하더니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한참이 지나도 마차 가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계곡이 너무 깊었던 때문이었다. 마차의 뒤에 타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던 제자의 비명이 계곡에서 울려왔 다. 마차에서 탈출하지 못한 그는 계곡에 떨어져 피떡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일이냐?" 평온하기만 하던 사천당문의 대열(隊列)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말이 뛰고 한 대의 마차가 방향을 틀어 오던 길로 달려갔다. 검은 실이라도 달린 듯 교묘하게 허공을 선회한 뒤 달리는 말의 다리를 자 르고 되돌아갔다. "뭐냐?" 뒤에서 말을 타고 따르던 당호곤(唐虎 )은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당문이 자랑하는 철기대의 대주인 그는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변고에 놀라기는 했 지만 그다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겨우 철기대의 대주가 되었지만 그의 무위는 지닌 바 작은 명성보다 두 배는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사실, 당문에서 이십여 리의 거리라는 것은 완벽한 당문의 권역(權域)이라 는 것을 의미했다. 당문이 위치한 당가타의 오십 리 거리의 안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내 집 안마당에서 적으로부터 습격을 받는 꼴이라니.....' 갑자기 나타난 적이지만 당호곤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아직 적이 누구인지 도 몰랐고 적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막연하게 마차에 실린 금 은보화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만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는 적의 습격에 우왕좌왕하다가는 그 끝이 별로 달갑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옥수신타(玉手神打)라고 알려진 당호곤은 외호에 나타난 그대로 박투에 놀 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마상에서 겨루는 무공은 누구도 그를 제 어할 수는 없었다. 오죽하면 철기대의 대주인가 하겠는가 마는 아무튼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박도와 높이 들린 대도의 위력은 놀라운 바가 있었다. "놈들을 죽여라!" 고함소리가 들리고 다리 앞의 낮은 언덕에서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튀어나 왔다. 그들이 천지검문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당호곤을 알 수 없었다. 당호곤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이끄는 철기대는 이십 명으로 이루 어져 있었다. 이미 한 대의 마차가 다리를 넘어갔으므로 다리를 건너지 못한 쪽에는 십오 명의 부하들이 있었다. 다리를 건너지 못한 십오 명 중에 두 명은 마차와 추락을 했으니 남은 숫자는 불과 열세 명이었다. '저들이 우리가 철기대인 것을 알면서도 달려든다는 것은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호곤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리를 건너간 마차와 마차를 호위 하고 있는 당문의 제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어서 가라. 가문에 놈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당호곤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른 후 자신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는 부하들 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허공을 나는 검을 보았기 때문인지 부하들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두두두두두― 다리 건너에 있던 마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당문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반 시진은 걸릴 것이었다. 그 동안 견뎌내야만 했다. 당호곤은 자신의 지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차로 방패를 삼고 장기전을 펼칠 준비를 하라. 우리가 견디는 동안 지원 군이 도착할 것이다." 사천당문의 제자들은 빠르게 몸을 움직여 작은 방어막을 구축했다. 마차를 끌어다 붙이고 어디에서 날아들지 모르는 사병(射兵)에 대비했다. "에워싸라." 등에 일곱 자루의 검을 부채처럼 둘러메고 나타난 칠선왕은 벽력같은 호통 을 내질렀다. 이십 개의 신형이 당문 제자들의 외곽(外廓)을 둘렀다. 천지검문의 제자들은 몸이 일사불란했고 민첩했다. "흐흐흐! 이놈들아, 은혜를 갚아도 분수가 있지. 황금을 주었더니 제자들을 죽여!" 칠선왕의 살소에 당문의 제자들은 몸을 거칠게 떨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명예가 걸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음모다.' 당호곤은 현실을 직시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우리를 불러다 이 물건을 인계(引繼)한 당신들이 다시 물건을 빼앗으러 오다니 세상에 이런 법도 있소?" 당호곤은 분기탱천(憤氣 天)하여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물건을 주고 다시 뺏는 자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겉으로는 물건을 주었다고 할 것이 아닌 가?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만을 찾으려 할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내는 황금과 패물은 만도화원이 사천에서 장사를 잘 할 수 있도록 사천당문이 지켜주는 대가로 받는 물건이었다. 어떤 문제도 없었다. 철기대는 가주의 명을 받았을 뿐이었다. 만도화원의 식솔들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유가 있어 사천당문의 제자들 이 중간에서 만나 마차를 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만도화원주의 말을 받아들 인 당문주 당협의 명을 수행(修行)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놈들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부우우우우우― 다시 검이 날았다. 칠선왕의 등에 매어져 있던 일곱 개의 장검 중 두 자루가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왔다. 칠선왕의 등에 매어진 검은 누가 보아도 진기를 이용하여 날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가는 철선을 매달아 기계적(機械的)으로 날리는 것이었 다. 그래서 직선의 공격은 있지만 선회와 같은 공격은 할 수가 없었다. 전설에 나 들을 수 있는 신선들의 무공 이기어검공(利氣御劍功) 같은 것은 아니었 다. "피하라!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라." 부하들의 안위를 위해 외치기는 했지만 정작 몸을 날려 마차의 차륜(車輪) 밑으로 기어든 것은 자신이었다. '제길. 명색이 사천제일의 무가라는 사천당가의 철기대주인 당호곤이 겁을 먹다니......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파아아아아― 검이 스치고 지나가며 철기대의 깃발을 잘랐다. "이런 괘씸한 놈!" 깃발이 잘린 것을 보고 몸을 솟구치던 제자 하나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비명을 토하며 나뒹굴었다. 날아든 두번째의 검이 당문 제자의 이마에 박혀 있었다. 검은 곧 이마에서 빠져나갔다. 붉은 피가 솟구칠 때, 당문의 제자는 지면으 로 나뒹굴고 있었다. 당호곤은 허리춤에서 도를 끌렀다. 평소에는 곡도(曲刀)처럼 보이지만 미첨 도(眉尖刀)라 불리는 대도(大刀)의 도신은 삼척이나 되고 손잡이가 달려있 어 평소 곡도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등에는 두 개의 중봉(中棒)이 달려 있었고 당호곤은 엎드린 상태에서 중봉 을 끌러 내었다. 두 개의 중봉을 조립하자 칠 척에 이르는 장봉이 되었다. 장봉을 곡도에 조립하자 십 척에 이르는 대도가 되었다. 부르르르르― 대도를 손에 쥐자 당호곤은 가슴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흥분을 느꼈다. 바 로 그것 때문에 그는 가문의 비전 암기술을 포기하고 천하를 유랑한 적이 있었다. "후후, 네놈이 무지막지한 살인마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우리 시원하 게 칼춤이나 추어 보자고......" 어느새 칠선왕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신위는 한눈에 보아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호곤은 비록 약간의 겁이 나기는 했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사천제일의 명성을 얻고 있는 가문의 자존심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후후후, 과연 한 대가리씩은 하는 놈이었구나. 네놈은 보나마나 당가의 자 식이겠지?" 투박해 보이는 대도를 지닌 당호곤을 가리키며 칠선왕은 살소를 베어 물었 다. 당호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놈들을 씨도 남기지 말고 주살하라!" 칠선왕의 목소리가 무너져 가는 패인교를 울렸고 그것으로 사천당문과 천지 검문의 피를 토하는 살육전이 시작이 되었다. 그것이 천지검문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칠선왕은 알지 못했다. 이미 천지검문과 만도화원이 초토화 된지 모르는 그로서는 용기백배(勇氣百 倍)해 미친 듯 일곱 개의 검을 쏘아내며 달려들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칠선왕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등에 매어져 있는 자신의 애병을 뽑았다. 일곱 자루의 장검 중 하나 남은 마지막 병기였다. 여섯 자루의 병기는 여섯 명의 사천당문 무인들을 베었으나 그의 수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장검까지 날릴 수는 없었다. "과연 사천당문의 철기대로군. 소문이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칠선왕은 나직한 신음을 뿌렸다. 주변에 무수히 스러진 시체는 천지검문과 사천당문의 제자들로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대치하고 있는 자는 오로지 칠선왕과 당호곤 뿐이었다. 단 반 시진이 걸리지 않은 접전으로 두 개의 세력은 종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당신은 강하군." "역시. 과연 철기대주의 명성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그들은 서로를 칭찬했다. 그들 서로의 모습을 보며 서로간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칠선왕은 오른쪽 옆구리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당호곤은 왼쪽어깨가 불편해 보였다. 그들은 각각 한군데씩의 상처를 입고 있었고 병기를 사용하 기에 불편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자! 마지막이자. 덤벼라." 칠선왕이 장검을 정중으로 향하며 자세를 잡았다. "이제 죽여주겠다." 내공이 남아있었는지 당호곤의 몸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뒤덮였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대도의 끝이 파르르 떨렸다. 병기에 내공이 흘러들었다는 것을 반증(反證)하는 것이었다. 칠선왕의 검도 변화를 일으켰다. 마치 엿가락이 늘어나듯 길어지는 환영을 일으켰다. 자세히 보면 장검이 늘 어난 것이 아니고 칠선왕의 몸이 빠르게 다가서고 있었다. "오라!" 당호곤은 대도를 치켜들었다. 오른발에 체중을 실어 몸을 지탱하고 왼발을 들어올렸다. 거칠어 보이는 도 신이 지면을 향했고 도에 이어진 장봉이 허공으로 향했다. "한번으로 족하다." 당호곤은 더 이상 질질 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몸이 피에 젖어가고 있 었고 시간이 지나면 원하지 않아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늑골이 열 개 이상이나 부서진 그는 단 한번으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상황이었다. 휘리리릭! 스슷― 옷깃이 비벼지는 소리가 들리고 칠선왕의 몸이 오른쪽으로 가볍게 움직였 다. 당호곤도 눈에 힘을 주며 방향을 틀어 여전히 자세를 고수했다. "타핫! 가라." 장검을 정면으로 곧추세웠던 칠선왕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검은 정중 에서 한바퀴 회전을 일으킨 뒤 상중하 연속 세 번을 찌르며 다가들었다. 허공에서 검신에 부딪치는 태양의 빛이 반사되며 은어의 비늘 같은 빛의 쪼 가리들이 떨어져 나갔다. 오늘의 칠선왕을 있게 만든 연환구검(連環九劍)의 마지막 초식이라는 연환 방쇄(連環防鎖)의 초식이었다. 사용할 기회가 한번도 없었던 마지막 초식이 뿌려지고 있었다. "오라! 여의십팔도(如意十八刀)― 여의번천(如意蒜天)!" 당호곤도 뒤지지 않았다. 번개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대도를 휘둘러 방어막 을 펼침과 동시 대도를 내려 연속 두 번을 찍고 세 번을 횡으로 후렸다. 마 지막으로 대도는 사타구니에서 정수리로 그어졌다. 타탕! 깡! 두 번의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일자 두 개의 신형은 또다시 뒤로 물러갔다. 그들의 발은 텅텅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몸이 불편한 두 사람의 발은 더욱 무겁게 떨어졌다. "커흑!" 연속으로 네 걸음이나 물러선 당호곤은 털썩 주저앉았다. 대도의 도는 장봉 과 분리가 되어 삼 장 밖에서 뒹굴고 있었다. 부러진 도의 손잡이가 땅으로 가라앉듯 엎드려지는 몸을 지탱시켜 주었다. 가슴에는 장검이 깊숙하게 박 혀있었는데 그 위치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심장이었다. 울컥울컥! 당호곤의 입으로는 검게 변한 피가 솟구쳤다. 칠선왕의 검에는 무시 못할 강한 기파가 실려 있어 심장이 이미 기능을 멈추고 있었다. 쿵쿵쿵! 칠선왕도 연속 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가슴에는 대도에 베인 듯한 상처가 깊게 파여 피가 흘러 나왔다. 자세히 보면 흉하게 패인 늑골(肋骨)이 드러 났다. "큭!" 재채기를 참는 것처럼 고통의 신음이 토하더니 칠선왕은 혼신의 힘을 다해 가슴을 폈다. 입으로 가는 실핏줄이 흘러 내렸다. 주춤주춤! 칠선왕은 혼신의 힘으로 다가들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고는 있었으나 걸음 을 옮길 힘은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호곤은 눈을 멀뚱하게 뜨고 있으면서도 다가오는 칠선왕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심장에 박힌 검은 그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라치면 온몸을 바늘로 찌르 는 듯한 통증을 주었다. 아니, 그는 자신이 움직이게 된다면 심장이 정지하 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잘 가게!" 푹! 고기를 써는 소리가 들리더니 당호곤의 배로 칠선왕의 손이 파고들었다. 사 람의 뱃가죽은 튼튼하고 질겨 누구나 쉽게 손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지만 한 모금의 남은 힘을 다해 최후의 내공을 뿌려내 파고드는 칠선왕의 수도는 당 호곤의 복부를 파고드는데 하등의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랫배를 파고든 칠선왕의 손은 물을 휘젓듯이 복부 속을 마구 휘저어 창자 를 움켰다. "으으으!" 너무도 놀라 비명을 토하던 당호곤은 너무도 극한 충격에 두 눈을 까뒤집으 며 뒤로 넘어갔다. 칠선왕은 지쳐 무너지는 몸을 버티기라도 하려는 듯 무 릎으로 당호곤의 머리를 짓이겼다. 퍽! 수박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당호곤의 머리가 부서지며 허연 뇌 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머리 속에서 붉은 피가 스며 나왔다. "으아악!" 당호곤의 입에서 최후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끝났을 때는 머리 가 부서지고 입이 뭉개진 뒤였다. 당호곤의 아랫배로 파고든 칠선왕의 손이 배에서 빠져 나오며 손에 쥐어진 창자가 그대로 달려 나왔다. 풀썩! 참을 수 없으리 만치 체력소모(體力消耗)가 컸는지 칠선왕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졌다. * * * 두두두두두― 거친 돌개바람이 잃어나며 수십 기의 기마가 달려왔다. 말발굽에서 튀어 오 르는 작은 모래와 자갈들이 사방으로 퉁겨져 날아가며 산길을 긴장으로 몰 아넣었다. 후드드륵! 달려오는 말발굽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날개로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어서 추적하라. 놈은 멀리 가지 못했다." 말을 달리는 자들은 사천당문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도 급한 지 미친 듯 말을 달렸다. 손에는 하나같이 병장기를 뽑아들고 있어 긴박감 을 더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언덕을 넘어갔다. "후후후! 이거 재미있지 않아?" "너무나 재미있는 볼거리인걸. 우리를 습격하더니 이토록 재미있는 일이 벌 어지는군." 말이 사라지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산길의 옆에 자란 풀숲에서 두 개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사냥꾼의 복장을 한 사내들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 지 연신 키득거렸다. 그들은 산길에 몸을 나타내자마자 사라져 가는 말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말 은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하늘로 피어오른 먼지뿐이었다. "자, 우리도 가자고...... 아마 우리 식구들이 천지검문을 초토화 시켜 버 렸을 거야." "물론이지! 감히 우리를 사천당문의 아가리 속으로 집어넣으려 했다면 그만 한 대가는 충분히 받아야 하지 않겠어." 사내들은 서로의 손을 맞부딪치며 말이 사라져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사람의 몸에서 그토록 강렬한 기운이 뻗어 나온다면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 었다. 짙은 기운은 사람의 눈을 아리게 만들었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살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했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 분명했다. "그건 사실입니다." 단화연은 자신의 진실을 믿어달라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단화연의 뒤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십여 명의 문사들도 얼굴에 비장한 안색을 띄우고 동의 (同意)를 표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높은 단위에 앉아있었다. 살기 는 단위에 앉은 노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단화연, 그 동안 네놈에게 그토록 많은 기회와 시간을 주었건만 겨우 이곳 으로 도주해 오다니...... 그래 입이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느냐?" 노인은 단화연이 변명을 하려해도 믿지 않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얼굴 을 마주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보아 노인은 매우 분노한 것 같 았다. "믿어주십시오. 사천에서 쌍룡채를 습격했던 일은 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한 것이 아니고 엽산과 무영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얀 놈!" 노인의 수염이 흔들렸다. 대추빛처럼 붉은 얼굴은 변함이 없었으나 수염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노인이 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영은 노인이 단화연의 주변에 심어놓은 자였다. 겉으로는 을목세가의 식 솔 같아 보였지만 엄연히 노인의 명을 받는 끄나풀이었다. "흥!" 구차한 단화연의 말을 듣다 못한 노인이 장포를 떨치고 일어났다. 피처럼 붉은 장포가 허공에 펄럭이자 이 장이나 떨어진 벽에서 일렁이던 향촉의 불 꽃이 심하게 요동을 일으켰다. 마치 춤을 추는 무희처럼 늘씬한 불꽃을 만 들다 사그라졌다. 이미 쌍룡채의 실패(失敗)로 할말이 없는 단화연은 눈에 새파란 불꽃을 이 글거리고 있는 노인의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리를 숙이며 땅바 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부, 용서해 주십시오." 간곡한 음성이었다. 단화연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다. 아니 겉으로는 그의 사부, 어르신 이라는 자가 부른다는 것을 기회로 몸을 옮긴 것이었다. 만약 오지회의 형제들과 산채의 무인들이 오일만 빨리 만도화원과 천지검문 에 들이 닥쳤다면 단화연은 그들 손에 잡혀 죽음을 면할 수 없었거나 살아 났더라도 비참한 꼴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듣고있던 노인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서릿 발같은 분노가 한 꺼풀 씌워져있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왜 천지검문이 그토록 허망(虛妄)하게 무너져 버렸다 는 말이냐? 엽산과 무영이 모든 일을 지휘했다면 천지검문은 드러나지 않았 어야 하지 않느냐?" "그것은 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단화연은 무릎을 꿇은 채 비통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 정도로 애통했으나 활활 타오르는 노인의 분노는 막을 수가 없었다. 감히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단화연은 고개를 땅에 처 박고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화연!" "예." "네놈의 얼굴에 쓰여진 인피면구를 벗어버려라. 보기가 역겹다." "알겠습니다!" 찌이이익― 단화연의 손이 얼굴을 스쳐가자 전혀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중후하게 보 이는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이마에 팥알 만하게 찍힌 점이 그를 더욱 정 대(正大)한 인상으로 보이게 했으나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는 상태였 다. "멍청한 놈, 십 년 전에 먹이를 주었건만 받아먹지도 못하고 빼앗겨 이런 화를 자초하다니......" "죄송합니다." 단화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초풍비 이놈! 이미 죽은 놈이지만 내분이 풀리기를 바란다면 오산이다. 네 놈의 형제들까지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주마. 쌍룡채는 실패했지만 두고 보 아라.' 으드드득― 단화연은 이를 갈았다. 초풍비를 죽이면 분이 풀릴 줄 알았다. 그러나 초풍비가 뇌룡탄에서 죽었다 는 소식을 듣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 그였다. 더구나 쌍룡채의 일은 원한 을 더욱 깊게 했다. "화연!" 노인의 얼굴은 언제부터인지 변해 있었다. 조금 전 풀풀 날리던 냉기는 사 라졌고 본래 지니고 있을 법한 온화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예, 사부님!" 단화연은 노인에게 사부라 불렀다. 을목세가의 가주라 해서 사부를 모시지 못하라는 법은 없었으나 너무나 이 해할 수 없는 관계로 보였다. 사부와 제자의 모습이 마치 부하와 상전(上 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에게 목숨을 걸고 있는 부하들은 얼마나 되느냐?" "이백 명은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는 많구나."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고 단화연을 바 라보았다. "나가보아라." 맹주가 몸을 돌렸다. 단화연은 몸을 일으켜 깊숙하게 예의를 갖춘 뒤 뒷걸 음으로 물러났다. 단화연이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노인은 몸을 돌렸다. "어리석은 놈. 그렇게 미친 듯 내게 충성을 보인다고 초란이 네 것이 될 거 라고 생각하느냐? 이제 초풍비가 죽음으로서 두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혈사 (血事)는 모두 끝난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묻어 버렸다. 한동안 술렁거리던 형제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사십 명이나 되는 산채의 부하들과 오지회를 포함하여 풍무영과 남궁은미까지 합쳐 정확하게 사십 칠 명이었다. 그들은 넓은 와우평의 벌판에 앉았다. 주변으로 돌아가며 마른 소나무에서만 나오는 송심(松 )이 타고 있었고 한 결같이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촉촉하게 내린 이슬도 그들을 움직이 지 못하고 있었다. "자, 드세!" 엄숙한 분위기는 초풍비가 술을 권하며 깨어졌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서도 초풍비와 오지회의 형제들이 잔을 들지 않아 술을 들지 못하던 산채의 호걸 들이 일제히 술독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형님!" 술이 몇 순배(巡杯) 돌고 나자 사무기가 입을 열었다. "이제 진실을 이야기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형수님! 아니, 초란이라는 여인이 누구입니까?" "아우는 십 년 전의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 "물론입니다. 처음에는 소문이 도는 듯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사라 졌습니다. 소문에는 형님과 초란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대개가 다 살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것이다." 초풍비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아우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곁에 앉아 한시도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을 버리지 못하는 남궁은미를 위해서 라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오지회의 형제들 뿐만이 아니라 산적들도 숨을 죽였다. 그들 중 일부는 과거에 초풍비를 본 적이 있기도 했지만 대개는 초풍비에 대한 소문만을 듣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초풍비가 너무도 조용 하고 단아하다는 사실이었다. 강호의 소문 대로라면 초풍비는 팔이 네 개고 다리가 서너 개쯤 되는 삼두 구육(三頭九肉)의 괴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소문에는 여러 종류의 소문이 있지만 초풍비를 그토록 두렵게 묘사한 것은 초풍비와의 비무에서 패배한 자들의 입 때문이었다. 진정한 강자들은 패배를 거울 삼아 은거하거나 자신의 무공을 익히는데 전 력을 다했지만 초풍비에게 불만이 있었던 비무자(比武者)들은 얼토당토 않 는 소문으로 초풍비를 비하(卑下)시키거나 초풍비를 괴물처럼 소문을 냈다. 그것으로 초풍비는 어느 날부터인가 정사중간의 인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 고 지독한 냉혈인(冷血人)이라는 소문으로 들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중원상단(中原商團)의 딸이다." "그럴 리가?" "아니, 그 강남제일미라는 추초란(秋草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문이 사 실이었군요."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경악을 토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강남제일미라 는 이름으로 불린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십 년 전부터 그녀 의 미명은 강호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단서도 없었다. "그럼 형수님이 강남제일미였다는 말인가요?" 사무기의 말에 초풍비는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풍무영 뿐인 듯했다. 그는 담담하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그는 초풍비의 부탁을 들어 초란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녀가 중원상단의 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을목세가의 후인 인 단화연과 혼약이 오가는 사이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초풍비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역할은 그가 뇌룡탄에서 초풍비를 구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뇌룡탄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초풍비는 뇌룡탄의 굽이치는 물에 몸이 산산 조각나 버렸을 것이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 겁니까?" 혁천련의 물음에 초풍비는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굳이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알지도 못하지만 말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제가 이야기를 하지요." 풍무영이 나서자 초풍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풍무영은 초풍비의 허락 (許諾)을 득(得)하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대형의 명을 받아 태양하구에서 시작하여 성도와 아미산을 거쳐, 사 천당문까지 샅샅이 추적을 했습니다. 그래서 초란이라는 여인이 어디로 향 했는지 대략적인 추적을 했습니다마는 지금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무엇을 찾았는데?" 담붕비가 나섰다. 성격이 걸걸한 그는 뜸 들이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기면 기고 아니 면 아니라는 식의 짧은 대답만이 그에게는 유효했다. 도우선이 담붕비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풍무영이 초풍비를 대형으로 모신 이상 그들은 형제였다. 담붕비가 풍무영을 압박(壓迫)할 이유가 없었다. 도 우선의 생각을 알았는지 다른 형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붕비도 다른 때와는 달리 눈치를 채고 자리에 주저앉아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눈과 귀를 풍무영에게서 떼지는 못했다. "저는 추적을 계속한 결과 초란이라는 여인의 주위에 을목세가가 있다는 사 실을 알아냈습니다. 더구나 중원상단의 모든 재화와 상권도 을목세가에 넘 어갔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누구도 모르는 것을 알아냈군. 역시 천하제일의 추종술을 지녔다는 만리당 혜가 틀림없어." 여기저기서 감탄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금 무림에서, 그것도 사천에서 중원 상단의 모든 상권이 을목세가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풍무영은 잠시 기다렸다. 놀라움의 경악 소리는 비단 오지회의 형제들뿐만이 아니라 산채의 호걸들 사이에서도 튀어나와 잠시간 주위가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저는 성도에 자리한 만도화원이 을목세가에서 위장(僞裝)한 모습이라는 것 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잠입했다 여러 형제들을 만나게 된 것이 지요." "그랬던 것이로군." 혁천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그분만이 아니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풍무영이 만도화원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나중에야 만날 수 있었겠지만 오지회의 형제들의 만남은 훨씬 뒤에야 이루 어졌을 일이었다. 사천에서는 초풍비가 죽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고 오지회의 형 제들도 사천당가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은밀히 행동하고 있었다. 결국 적절하지 못한 시점이었다면 그들은 서로 곁에 두고서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풍무영의 출현은 그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 체(媒介體)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풍무영이 오지회의 형제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우리가 만도화원을 부셨지만 을목세가가 어디 있 는지도 모르잖아." 담붕비가 정곡을 찔렀다. 풍무영도 만도화원에서 초란의 행방을 놓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 속 에는 초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놓고 있었다. 초풍비가 없는 오지회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초풍비가 있는 오지회는 가 능한 일이었다. "저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두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오랜만에 초풍비가 물음을 던졌다. 풍무영이 급히 허리를 숙여 초풍비에게 인사를 올린 뒤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천당문에서 알려줄 것입니다." "어떻게?" 사무기가 의혹이 실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가 원한(怨恨)을 잊고 그들의 소굴, 사천당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문과 우리는 적대관계(敵對關係)에 놓여있는데..... 정신이 있는 거야?" 사천당문의 이야기가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들 모두는 사천당문이라면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사천당문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산을 내려와 그토록 고생을 할 리도 없 었을 것이고 반 이상이나 되는 산채의 동료들이 죽을 일도 없었다. 그들이 사천당문에 이를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원인이야 만도화원의 늙은이가 꾸민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산채를 습격하고 형제들을 죽인 것은 사천당문이었다. 씻으려 해도 씻을 수 없는 원한이 그 들의 가슴에는 묻혀 있었다. "조용히 해라." 명령을 내린 것은 사무기였다. 사무기가 낮은 목소리로 산적들을 꾸짖자 순 식간에 아무도 살지 않는 얼음 위처럼 조용해졌다. 산적들은 사무기가 그토록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으로 풍무영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 다. "계속 이야기하게!" 사무기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풍무영을 재촉했다. 풍 무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산적들까지도 고개를 끄덕여 어서 이야기를 하라고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가라앉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도 사천당문에 해를 입혔고 사천당문도 우리에게 해를 입혔으니 화해 (和解)의 조건은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오랜만에 혁천련이 맞장구를 쳤다. 풍무영의 말대로 사천에 진입한 다른 다섯 개의 문파가 있기는 하지만 사천 의 패자는 사천당문이었다. 어차피 사천당문과 어울리지 않고는 사천에서 발을 뻗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의 공분(公憤)을 일으켜 사천당문을 쓸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 장 좋은 것은 사천당문과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다행히 대형이 있으니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미 죽은 산채의 형제 들이 애석(哀惜)하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무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혁천련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산적들 모두의 얼굴에도 떠오르는 표정은 한결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의 얼굴은 수긍으로 변했다. 풍무영은 그들의 얼 굴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을목세가는 사천당문을 다시 부추길 겁니다. 오지회의 형제들을 사천에서 몰아내려 하겠지요. 우리는 그것을 역이용(逆利用) 하는 방법만을 찾을 수 있다면 을목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풍무영이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초풍비가 고개 를 끄덕였다. 풍무영은 그 동안 추적을 계속하며 누구보다도 정확한 강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삼제(三弟)의 생각은 어떠냐?" 초풍비가 사무기를 바라보았다. 사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혁천련 도 다른 때와는 달리 의견을 내지 않았다. 다만 사무기가 결정할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사무기가 몸을 일으켰다. "아우들의 생각은 어떠냐? 결국 우리는 사천당문을 용서하고 원흉인 을목세 가를 쳐야한다는 것인데 자네들의 의견을 듣도록 하겠다." 사무기는 산채에서 그를 따르는 아우들의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은 형제들의 혈채(血債)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무기의 말속에는 녹아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초풍비는 가볍게 술잔을 들이켰다. 기다렸다는 듯 남궁은미가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녀는 단 한 시진도 곁을 떠나지 않고 초풍비의 곁에 앉아 있었 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자는 육두령 박장형이었다. 구 척이나 되는 그가 몸을 일으키 자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웅철신이라는 외호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사무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사천당문과 적대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산적이었다는 것을 속일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이대로 가다가는 무림의 공적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산적이라는 것이 무림에서 일파로 인정을 받기는 어려웠다. 관군들도 산적이라는 세력을 쓸어버리려 할 때도 있었다. 영원히 산적으로 살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은 사천당문과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기 는 싫습니다." 박장형은 자리에 앉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장함까지 들어 있었다. "그럼!" "우리의 생각도 동일합니다." 여기저기에서 박장형의 말에 동조(同調)하는 말이 울려나왔다. 혁천련도 같 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형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소?" 사무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초풍비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서자 오지 회의 형제들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남궁은미가 일어섰고 풍무영이 일 어섰다. 산채의 호걸들도 몸을 일으켜 초풍비를 바라보았다. "모든 형제들의 마음을 들었소. 여러 형제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 주겠 소." 초풍비가 조용한 음성을 토했다. 흥분하지도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담 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초풍비의 이야기를 듣는 모두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는 그들 스스로가 알뿐이었다. "아우!" 말을 마친 초풍비는 변하지 않은 조용한 음색(音色)을 뿌리며 도우선을 바 라보았다. 도우선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지 눈을 들어 초풍비를 바 라볼 뿐이었다. 초풍비는 빙그레 웃었다. 도우선의 마음을 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내일 사천당문으로 출발하겠다." 말을 마친 초풍비는 몸을 일으켜 초막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모든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초막 안으로 사라진 초풍비의 뒷모습을 생각 하고 굳어있었다. 남궁은미가 몸을 일으켰다. "초랑, 같이 가요." 남궁은미가 뛰어갔다. 그녀의 모습도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일은 당가타로 출발하겠다. 오늘 마음껏 마셔라." 사무기가 외쳤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산적들이 침묵을 깨고 술잔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 은 초풍비의 말을 신뢰(信賴)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사심이 없이 그들은 술을 마셨다. 도우선은 어둠 속에 잠들어버린 초막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 지지 않는 초막 속에서는 초풍비와 남궁은미가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형님을 만난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소!" 도우선의 눈은 멀리 밝아오는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21 페이지: 1/41 자료번호: 293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5 ─────────────────────────────────────── ■ 상견환 제21장-사천당문에 부는 바람 초풍비를 위시한 오지회의 형제들이 사천당문의 정문에 나타난 것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이었다. 그들 모두는 긴장한 모습이었으나 초풍비는 태연하기만 했고 남궁은미는 초 풍비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지회의 형제들과 산적들은 가슴을 펴고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기이한 일은 풍무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 * "그건 사실이오." 당협은 자신의 진실(眞實)을 믿어달라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당협의 등뒤에는 이십여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원탁이 있었고 그 곳에는 십여 명의 무인들이 비장(悲壯)한 안색을 띄우고 당협의 말에 동의 를 표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절제된 분노가 함께 섞여 있었다. 그들의 앞에 늘어선 오인 때문이었다. 한때는 오지회라 불리던 자들이었고 이제는 사천무림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당문주, 사천에서 자행되어온 그 동안의 모든 것들이 당신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소.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초풍비는 아무리 당협이 변명을 하려해도 믿지 않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 라 오지회의 모든 형제의 마음은 한결같이 두텁게 얼어있었다. 모여있던 중인들은 한결같이 당문을 이끌어 가는 좌장(座長)격인 장로들이 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 당협이나 장로들과는 달리 단하에 일자로 된 의자를 놓고 앉은 대주들 과 당주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문주와 장로들을 믿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당문의 역사가 시작되고 개문(開門)이 시작된 이래 문주가 식솔들에게 배척 을 당하는 불상사(不祥事)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협으로서는 참으로 수 치스러운 일이었다. "초대협! 믿어주시오. 사천에서 쌍룡채를 습격했던 일은 본 문주의 머리에 서 나온 것이 아니오. 모두 날아든 전서구에 매달린 서찰 때문이었소." "믿지 못하겠소." "믿으셔야 하오. 믿지 못한다면 우리로서도 할 말이 없소. 당신의 말대로 정말 우리가 일전을 벌여야 한다면 그렇게 하리다. 그러나 초대협 측도 그 피해를 생각해야 할 것이오." "뭐라고! 빌어먹을 놈 같으니." 담붕비가 분노의 음성을 뿌리며 다가섰다. 담붕비에게 당협 정도의 인물은 쓰레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 당협으로서는 속이 탈 노릇이었다. 사천 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자신으로서 애송이에게 욕설을 들으며 좋을 리 는 없었다.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었다. 초풍비가 직접 나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오래 전부 터 초풍비가 은거를 했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더욱 한심할 노릇이었다. "난 검문산이 오지회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소." 오로지 변명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죽일 정도로 미웠으나 우선은 초풍비 를 달래야 했다. 당문이 그를 척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소림과 의 문제였다. 과거부터 초풍비가 천하제일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는 당협이라 한번 대적할 수도 있었다. 결과야 뒤의 일이지만 당협은 능히 자신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뒤를 생각 해야했다. 그가 건방을 떠는 담붕비에게 함부로 반론(反論)을 펴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脈絡)이었다. 우선 초풍비의 무공이었다. 소문대로라면 그는 당문의 오 백 식솔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도 있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당가타가 당문의 식솔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고 그 중앙에 당문이 있기는 했다. 만약 당문에서 한바탕의 유혈(流血)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들은 모두 몰려올 것이고 그들의 숫자는 오 백이나 된다. 하지만 누구도 초풍비를 꺾을 수 있 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당문이 자랑하는 독이나 암기로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흥!" 구차한 당협의 말을 듣다 못한 도우선이 앞으로 나섰다. 이미 쌍룡채의 공 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사천에서 명성이 실추된 당협은 눈에 새파란 불꽃을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쌍룡채에서 잃은 당문의 고수만도 무려 이 백 명이 넘었다. 비록 야욕(野 慾) 때문에 저질러진 일이기는 하지만 이미 사천에서 당문의 명성은 땅에 떨어져 버렸다. 당협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失墜)되었다는 사실을 용인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오. 당신들이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나는 당신 들에게 변명(辨明)할 것이 없소." 당협은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이 누구인지 잡히기만 하면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릴 것이 다.' 서찰을 보낸 자가 곁에 있다면 그는 정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지를 찢 어 죽이고 싶었다. 설사 그가 자신의 부친이든 아들이든 간에...... 당협은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도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소문대로 무식한 담붕비가 비하산장을 초토화시키듯 당문을 태워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문이라 해도 온전할 리가 없었다. 소문대로라면 담붕비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당협이 초풍비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소림이라는 문파가 있기 때문이기 도 했다. 무림에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풍비가 소림의 백지대사에 게 무공을 전수 받았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초풍비는 소림의 진전을 이은 속가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만약 초풍비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당문으로서는 더욱 몸을 사려야 했 다. 대문파의 제자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공 에 관계없이 그들을 건드리는 날에는 언젠가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고 문파 간의 혼전(混戰)으로 바뀌어 피를 말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마지막이 사천무림인들의 반응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역전된 상황이었다. 만약 당문이 더 이상 실수를 하는 경우에는 영원히 무림에서 어깨를 펴지 못하고 악인들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었다. 당협은 그것이 두려워서라도 초 풍비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야 산적들을 치겠다고 거병(擧兵)을 한 것이지만 일이 묘하게 꼬여 버리고 만 결과였다. "아우는 물러서거라. 당협대협은 무림의 명숙(名宿)이신데 그토록 방자한 태도가 말이 되느냐?" "죄송합니다. 대형!" 담붕비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섰다. 초풍비 때문에 물러서기는 했지만 눈에서는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모습이 었다. 초풍비가 원탁에 앉은 자들과 단하의 일자 의자에 앉은 자들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일은 벌어진 것이고 보면 그들을 추궁한다고 해서 더 이상 얻을 것 도 없었다. "아마 당협가주에게 전서구를 날린 자는 을목세가의 단화연이 분명할 것이 요." "단화연?" "그가 누구요?" 초풍비의 음성에 한결같이 의문을 토했다. 그들도 을목세가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단화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의문을 토하는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예상치 못했던 일 이기에 놀라움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을목세가의 당대 가주가 아닌가?" "아니, 을목세가가 이제 중원에서 없어졌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의견이 분분했다. 초풍비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의자에 엉덩이를 디밀었다. 기 다렸다는 듯이 네 명의 형제들이 그의 뒤에 도열했다. "아니, 위장하고 있었을 뿐이요." "위장이라니요?" 당협이 물었다. 대답하고 말하는 사람은 오로지 당협과 오지회의 초풍비 뿐이었다. 간혹 담 붕비가 끼여들기는 하지만 초풍비에게 제지당해 입을 다물고 있는 상태였 다. 특히 사천당문과 함께 검문산의 일을 주도했던 당문의 중추세력을 이끄는 장로들과 각대의 대주, 당문의 명을 받아 검문산의 습격에 참가했던 방계가 족의 수뇌부들은 감히 입을 열지도 못했다. 초풍비의 말대로라면 그들이야말로 멍청하게 속아 제자들을 죽인 장본인(張 本人)이 되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는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사천무림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오. 더 이상 나 를 핍박하지 마시오. 나는 명예를 내놓고 내 식솔들의 생명을 구걸(求乞)하 고 있소. 만약 더 이상 내가 궁지(窮地)에 몰린다면 난 부득이 다른 방법을 택하게 될 것이오." 간곡한 음성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협박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협의 아픔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강호의 일각을 차지하는 당협이 저리 말하랴 하는 생각에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고개를 수그리고 듣고있던 무인각의 각주이며 유일한 여성 장로인 당가령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서릿발같 은 분노가 한 꺼풀 씌워져 있었다. "좋아요 우리는 검문산을 공격했으니 변명의 여지는 없겠죠. 문주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동안 얼굴도 모르는 자에게 농락 당했다는 것입니까? " 모두의 시선이 다시 당협과 당가령에게 향해졌다. 사실 당가령은 당협을 제 지(制止)하려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사실이오. 변명을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소." 당협의 대답에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술렁거렸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실 이었지만 당협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보니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당문의 제자들은 허탈감과 상실감에 어쩔 줄 몰라했다. 칠백 년 동안 쌓아 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은 표정들이었 다. "사실이라고?" "이제 당문의 영화도 갔군." 앉아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한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 모두 검문산에서 형제나 제자들을 잃었지만 올바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당문을 사랑하는 한 가족이었고 당문을 잃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만약 당가령의 말이 없었다면 그들 모두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은 부하들의 시신(屍身)만을 끌어안고 있었을 것이었다. 오로지 산적들을 증오 하겠지만...... "그렇소. 본인이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는 아는 것이 없었소. 자세하게 정황 을 분석하고 역으로 추리를 해본 결과 본인은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 소." 당협은 비교적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이 검문산을 공격했던 비밀이 하나씩 풀려 가고 있었다. 당협이 등을 돌렸다. 그의 눈에 경악으로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과 식솔들이 보였다. 당협은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는 당문이 무림에서 제명(除 名)되거나 오욕(汚辱)을 뒤집어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본인의 잘못으로 식솔들이 공경에 빠졌다. 본 문주는 지금 오지회의 형제 들과 욕심으로 인해 저지른 죄와 검문산의 호걸 여러분들에게 사죄(謝罪)를 드린다." 당협은 크게 외치고 몸을 돌려 초풍비와 그의 뒤에 서 있은 검문산의 무리 들에게 큰절을 올리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당협 정도의 인물이 허리를 숙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초풍비라 는 인물이 지닌 위력은 놀라웠다. "아니, 안되오." 초풍비는 급히 다가가 당협을 말렸다. 당협은 무림의 어른이었다. 배분으로 따져 백지대사의 제자로 본다면 당협 과 같은 배분이지만 인사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문주님의 말씀은 이미 들었고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리하 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당협은 눈을 들어 검문산의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도 만족 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당가령이 날카로운 물음을 던졌다. 연배는 아래라 하나 촌수로 따지면 고모 뻘이니 당협이라 해도 당가령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당가령이 있어 당협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초풍비와 일전을 겨루어야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르겠소. 그 동안 너무 안일(安逸)했던 것은 틀림없으나 너무도 허망한 꼴을 보이고 보니 내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소. 분명한 것은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 설 수가 없다는 것이오." "그러면 당신도 낭군(郞君)과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떤가요?" 잠자코 듣기만 하던 남궁은미가 앞으로 나섰다.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남궁은미였지만 당협에게 있어서는 급한 불을 꺼주는 청량한 비와 같은 것 이었다. 당협의 얼굴이 맑아졌다. "좋소. 내 당신의 동생들과 힘을 합쳐 그들의 뿌리를 자르겠소. 당신들의 말대로 오백 명의 식솔들이 남아 있으니 적지 않은 힘이 될 거외다." 초풍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 청록색 번개가 허공의 일각을 후려치자 쪼개질듯 하늘이 갈라졌다. 어두컴 컴하던 하늘에 뇌전(雷電)이 일고 사위가 일순간에 밝아졌다. 그것도 잠시, 한 치 앞으로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 다시 밀려들었다. 우루루루루루― 하늘에서 돌이 구르는지,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 철고(鐵鼓)를 쉬지 않고 두 들기는지 무언가 구르는 듯한 소리가 하늘 저편에서 달려오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풀잎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수십 장의 나뭇잎이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떨어져 내 렸다. 후두두두둑! 마치 낙숫물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때늦은 가을비였다. 이미 우기는 오래 전에 사천을 지나갔다. 중원에서 우기에 물려있는 지방은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의 일부와 해남도 뿐이었다. 사천성은 이 제 서서히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항시 따듯한 사천이 폭설(暴雪)이 오고 몸이 어는 추위가 있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계절이 우기 를 벗어나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덜컹! 삼층 전각의 창이 열린 것은 연속된 번개로 사위가 부들부들 떨고 하늘에서 는 빗방울이 굵어지는 시각이었다. "이런! 비가 오는군." 창문을 연 인형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비가 오면 안 된다는 말투 같았다. 인형은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번쩍― 암청색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창문을 연 자의 모습은 대낮 같은 번개의 광 휘(光輝)속에서도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동군 만월창에 몸을 의지하고는 있다하나 만월창이 너무도 작아 그의 턱 이하로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법 키가 커 보였다. 쏴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굵기만 하고 띄엄띄엄 내 리던 비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치 쏟아 붓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허, 이건 좀 곤란하군!" 인형은 망설였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는 일이기는 하나 분명 그는 목적이 있어 문을 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이 다가오는 축시(丑 時)에 일어나 문을 열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인형은 한참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빗소리 속에서도 그는 장원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간혹 귀를 바깥으로 내밀어 장원을 지키는 보표들의 발걸음 소리도 들어보 기도 했고 멀리 쳐다보기도 했다. 어둠으로 인해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지만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번쩍― 짜자자자작! 허공에 다시 금이 그어졌다. 어둠이 밝아지며 모든 사물이 청백색으로 빛났 다. 마치 살아있는 것이나 죽어있는 모두가 은빛 광화(光華)를 뿌리는 귀물 같아 보였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물마저도 인광(燐光)이 번뜩이는 귀물로 보일 정도의 강렬한 빛이었다. 퍼드드득! 만월창으로 보이는 인형의 손에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흔히 전서구라 불리는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거나 급한 용무가 있을 때에는 더할 수 없이 유용한 가금조류(家禽鳥類)였다. 수 만 리를 날아도 자신의 집을 기억하고 찾아오는 비둘기를 이용하는 서찰 의 전달은 마음이 급한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연락의 수단이었 다. "비가 와서 네가 고생이 심하겠구나. 그만 가거라. 가서 전해 주려무나." 푸드드드드드! 허공으로 비둘기가 날았다. 비가 오기 때문인지 비둘기는 자유롭지 못했다. 비둘기라 하면 천공을 높이 날아 멀리 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많은 무파와 관병들이 비둘기를 연락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도 높이 날기 때문에 지상에서 쏘아 올리는 궁노나 화살 등의 사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그중 하나의 이유였다. 비가 오자 날개가 젖은 비둘기는 낮게 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형이 원하 는 것만큼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둘기가 순식간에 전각 사이 를 날아 널따란 사천당문의 외곽 담을 타넘었다. "역시 그랬군. 우리가문에 을목세가의 간세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로 군." 팟! 어둠에 잠겨있던 방안이 밝아지며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적어 도 수십 명은 넘을 것으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는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그리 크지 않은 대전으로 난입했다. 십 수명의 제자들 손에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들려있었고 한결같이 눈에 살기를 띄고 있었다. "누구냐?" 당무웅은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목소리에 실린 힘은 약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형제들을 팔아먹으면 마음이 편안하더냐?" 낮은 목소리를 뿌리지만 분노가 녹아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당협이었다. 그 의 주위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사천당 문을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수뇌부(首腦部)들이었다. 당무웅의 얼굴이 일순 창백하게 질렸다. "무슨 일들이오? 갑자기 본인의 처소에 나타나다니...... 이곳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당무웅은 마음을 안정시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협을 비롯한 적지 않은 고 수가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타난 자들은 모두가 얼굴에 분노의 기색을 띄우고 있었다. "너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네놈이 보낸 전서구는 친절하게 우 리에게 네놈을 조종하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게 될 것이다." 당협의 말은 당무웅의 얼굴을 참혹하게 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가주는 내가 가주의 자리를 탐낼까 두려워해서 음모를 꾸미는 것이오?" "흥!" 코방귀를 뀌며 나타난 그림자는 당가령이었다. 문인각을 이끄는 그녀는 군 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이에 비해 배분이 높아 당 문 제자들과 식솔들에게 무한한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배문은 가주인 당협이나 장로인 당일수보다도 높았다. 뿐만 아니라 당무웅에게는 고모가 되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놈이 보낸 전서구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결과를 보아야 하겠지만 더러운 야욕(野慾)은 오늘 이곳에서 끝장이 날 것이다." "이런!" 당무웅은 급격하게 몸을 뒤채이며 만월창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도주만이 능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상으로 떨어지며 운룡번신(雲龍蒜身)을 전개하며 당무웅은 심장을 도려낼 것 같은 분노를 뿌렸다. 당무웅은 당협가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실 당무웅의 부친과 당협의 부 친이 형제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무웅으로서는 한때 가주가 될 수도 있 었다. 당무웅의 부친이 전대가주의 큰아들이었던 것이다. 전례대로라면 의당 당무 웅의 부친이 가주가 되어야 했고 결국은 그가 가주가 되었어야 옳았다. 물론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포위하라!" 당협의 분노가 사천당문을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장원 여기저기에서 불이 켜져 올랐고 어둠 속에서 병기를 든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으드드득! 당무웅은 이를 갈아 붙였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타나는 자들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휙! 휘리리릭! 휙! 뒤를 이어 이십여 명에 이르는 수뇌부들이 당무웅의 뒤를 이어 전각에서 뛰 어내렸다. 조금 전에는 분노를 뿜어내던 그들이었으나 이제는 아예 살기로 변해 있었다. "모두 포위해라." 수십 명의 가솔들이 나타나며 당무웅을 수 겹으로 에워쌌다. 그 중에는 장 로 당윤성의 모습도 보였고 당일수도 보였다. 특히 당문에서 가장 강하다는 독령대(毒靈隊)와 비표대(飛標隊)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당무웅을 노려보고 있 었는데 한결같이 찢어 죽이고 말겠다는 듯한 짐승의 표정이었다. "물러서라. 나는 장로다." 당무웅은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번―쩍! 다시 번개가 울리고 잠시 가늘어지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횃불을 든 제자들이 불이 꺼질까 두려웠는지 몸을 옮겨 전각이나 담의 처마 밑으로 숨 었다. 기다렸다는 듯 당무웅을 둘러싼 수십 명의 제자들도 몸을 물려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당협이 앞으로 나섰다. "난, 늘 불안하고 궁금했지. 우리의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꾸 밖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굉천뢰를 운반하던 일도 비밀이었는데 검문산에서 무너졌거니와 우리의 비밀을 잘 아는 자들이 우리를 움직이리라 생각했지." "흥!" "이건 불행이다. 나는 그 동안 쭉 너를 의심하면서도 나 자신을 책망(責望) 했다. 형제를 의심하는 내가 안타까웠다." "흥!" 당협의 이어지는 말에 당무웅은 연속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당협의 말과 아 우를 설득하는 마음은 당무웅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무웅은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작은 대나무 통을 들고 있었다. 굵기가 사람의 팔뚝만한 것으로 그것은 만린화통(萬燐火筒)이라 부르는 당문의 독 문암기통(獨門暗器筒)이었다. "왜 가문을 배신했느냐?" "좋아, 궁금하다면 이야기를 해주지. 너는 당문의 가주로서 문주의 직위를 내놓을 수 있느냐?" 아예 반말이었다. 당무웅의 말에는 당협을 가문의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투가 섞여 있었다. 그보다도 그는 당협에 대한 증오를 흘리고 있었다. 당협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당무웅이 자신에게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갔던 때문이었다. "저런, 괘씸한 놈!"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은 당가령이었다. 당가령으로서는 형제들의 의가 상 했을 때 조정(調整)하는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조정 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가문 내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 아예 가문을 팔아먹은 형제의 일을 두둔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아라. 원래 사천당문의 문주는 내 아버지여야 했다. 아니라면 나 에게 자리가 돌아오는 것이 정석(定石)이었다. 네놈이 차지 할 자리가 아니 다." 당무웅은 벽력같이 분노의 음성을 뿌렸다. 당협은 묵묵히 들었다. 당협이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당문의 제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성격이 불같이 급한 당일수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기는 했 지만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당일수의 팔이 당협의 손에 잡혀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불만이었나? 네 부친이 저지른 과오(過誤)는 생각지 않느냐? 어리 석은 놈!" 당협은 몇 번인가 생각에 잠긴 듯 했으나 결국은 과거의 일을 뒤집어내고 말았다. 엄격하게 말하면 과거를 먼저 끄집어낸 사람은 당협이 아니고 당무 웅이었다. "시끄러워!" 당무웅이 얼굴이 변해 소리를 질렀다. 당가의 사람들이라면 석년 당무웅의 부친인 당희극(唐喜克)이 무엇을 어떻 게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설사 나이가 어린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당희극 의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었다. 당희극은 차기 사천당문의 문주로서 전도가 양양했다. 사천당문의 문주는 사천의 패자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아미파를 비롯한 몇 개의 대문파가 있었 지만 그들은 수도(修道)에 정진하고 있었고 욕심이 없었는지라 사천은 그야 말로 당문의 천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오십이 되던 해 사천당문에서는 커다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의 문주는 당희극의 부친 천리선투(千里旋投) 당요목(唐曜木)이었는데 고민에 빠져 있었다. 두 명의 자식, 당희극과 당걸극(唐杰克) 중 누구인가를 가주로 내정해야 하 지만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가문의 통례로 한다면 당연히 당희극이 차기 문주였다. 그러나 쌍둥이 형제 인 당걸극을 마음에 두고 있는 당요목으로서는 여간 고민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들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제쳐두더라도 당문의 가주가 될 우선 순위인 당 희극은 너무나 편협(偏狹)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무공도 당걸극에게 형편 없이 뒤져 있었다. "어떻게 한다." 당요목도 과거 둘째아들이었지만 문주가 되었다. 다른 문파나 가문이 그렇 겠지만 당문 또한 장자(長子)가 우선하는 원칙으로 가문의 주인이 승계(承 繼)되어 왔지만 언제부터인가 장자계승(長子繼承)의 원칙이 깨어지고 있었 다. 장자도 중요하지만 가문을 존속시키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가주 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모두의 바람이었다. 더구나 당희극은 나이가 든 상태에서도 여염집의 여인을 건드려 자식을 낳 는 악수(惡手)를 두었다. 그 자식이 바로 당무웅이었다. 결국 당희극은 가주의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자신이 낳은 당무웅을 당가의 자식으로 받아주는 조건으로 그는 당문에서의 모든 지위를 잃어버렸다. 자연히 가주의 자리는 당걸극에게 돌아갔고 당걸극은, 당협을 낳아 문주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것이 그리도 안타가운 일이었더냐?" 당협은 입을 다물었고 앞으로 나선 사람은 당일수였다. 당일수는 어이가 없 다는 얼굴이었다. "빌어먹을 당문!" 당무웅은 거칠게 침을 뱉었다. "만약 당시 할아버지께서 네놈을 받아주지 못했다면 너는 당문에 들어오지 도 못했다. 더구나 가주께서 네놈을 장로로서 허물을 감싸주었는데 이제 와 서 가문을 배신하다니...... 백 번이고 찢어 죽여 마땅하다." "무엇이......!" 당일수의 말에 당무웅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동시에 만린화통을 앞으로 겨누었다. 팍! 만린화통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수십 줄기의 불꽃이 당일수의 몸으로 날 아갔다. 만린화통은 수십 근의 화약과 사람의 몸에서 추출하는 인으로 만드 는 것으로 한번 사람의 몸에 붙으면 꺼지지 않는 무서운 불이었다. 화르르르르! 당일수의 몸에서 파란 인광이 피어올랐다. 수백 줄기의 불꽃이 당일수의 몸 에서 피어올랐다. "숙부, 받으십시오." 허공에서 외침이 일고 당윤성이 떨어져 내렸다. 몸을 지면에 착지시키며 당 윤성은 조그만 단지를 당일수에게 뿌렸다. 그것은 짙은 홍색의 물이었는데 중수(重水)라 불리는 물로 만린화통에서 뿜어지는 인광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어수단(防禦手段)이었다. 중수가 당일수의 몸에 뿌려지자 마치 달구어진 쇠가 물 속에 들어가 소리를 내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들리고 타오르던 불이 꺼져버렸다. 당문에서 당무웅이 만린화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 다. 독을 연구하고 암기를 연구하는 독령각주 당윤성이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괘씸한 놈들! 아주 나를 죽이려 작정을 했구나." 창! 당무웅은 이빨 시린 음성을 뿜어내더니 허리춤에서 연검(軟劍)을 뽑았다. 동시에 요대에서 꺼낸 것은 쇠로 만들어진 장갑이었다. 마치 쇳조각을 덧대어 조립한 것처럼 보이는 장갑은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 로웠다. 자세히 보면 가죽으로 만든 장갑 위에 강하고 마디가 있는 철편을 두른 기이한 장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무웅은 그가 혈린갑(血燐匣)이라 부르는 장갑을 끼고 연검을 꼬나 잡은 채 당협을 바라보았다. "당협, 죽여버리겠다. 앞으로 나서라." 당협이 앞으로 나섰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당일수와 당가령이 앞으로 나서 당협을 만류했 지만 막무가내였다. 당협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섰다. 당문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형님!" 담붕비가 물었을 때, 초풍비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조 금 전까지 초풍비의 곁에는 담붕비가 누워 있었다. 담붕비는 창가에 달라붙어 당문의 외문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 구경을 하 고 있었다. 남궁은미는 심통이 났는지 약간 쀼루퉁한 표정으로 침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간혹 눈을 들어 담붕비를 바라보았지만 담붕비는 무감 각한 표정이었다. "비가 오는데 웬 불이죠?" "예상 대로일 뿐이다." 초풍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담붕비가 창가에서 떨어져 초풍비에게 다가왔다. 초풍비가 흘리듯 한 말이 지만 무언가 뜻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빛내며 다가들었다. "뭐가? 형님이 나만 빼놓고 또 일을 벌였군요?" 담붕비는 대들듯 언성을 높였다. 어쩐지 형제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수상했 다. 저녁에 당협을 만나고 그로부터 사죄를 받은 다음부터 이상하게도 형제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물론 각자의 침실이 주어졌지만 침실을 지키고 있는 형제 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천당문은 오지회를 우대한다는 의미에서 외원(外院)의 동떨어진 곳에 전 각을 비워주었다. 만무당(萬武堂)이라 이름지어진 전각은 삼층으로 지어진 석전(石殿)이었는 데 견고하기가 설사 수십 발의 굉천뢰가 뿌려져도 견딜 수 있어 보이는 전 각이었다. 삼층에는 다섯 개의 침실과 사방 오장 여에 이르는 대전이 있었고 일층과 이층에는 각기 열두 개씩의 침실이 있었다. 열 두 개의 침실은 검문산 산채 의 식솔들에게 제공되었고 삼층의 침실들이 오지회의 형제들에게 제공되었 다. "형님들이 나만 빼놓고 일을 벌였죠?" 담붕비가 턱을 쳐들고 달려들었다. 초풍비는 피식하고 바람 새는 웃음을 터 트렸다. 담붕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지회의 형제들 중 가장 다혈질(多血質)인 담붕비를 빼놓고 일을 추진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의 괄괄한 성미 때문에 일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우선은 그가 제외되고 발빠른 풍무영이 담붕비를 대신했다. 다른 이유는 초풍비의 곁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형제들의 의견이었 다. 초풍비의 곁에는 남궁은미라고 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가 초풍비를 따르 기로 한 이상 형제들은 그녀를 형수로 인정을 해야 했다. 문제는 그녀의 안위 때문에 초풍비의 행동에 제약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 이었다. 초풍비가 움직이지 못한다면 중대한 일이 벌어질 때 형제들은 막막해 질 수 밖에 없게 되리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문제였 다. "그렇다면 막내를 형님 곁에 있게 하자. 만약의 경우 막내라면 충분히 남궁 소저, 아니 형수를 보호할 수 있을 거다." 결정을 내린 것은 도우선이었다. 초풍비는 당연히 담붕비까지 이번 일에 참가를 하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 나 어찌된 일인지 담붕비는 밤이 이슥했을 때 초풍비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남궁은미가 눈이 샐쭉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너무하오! 나만 빼놓고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담붕비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초풍비는 담붕비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변명을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덩치가 산만한 담붕비를 토닥거려야 한다는 사실이 우습게도 느껴졌지만 극 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많은 형제들 중 의외로 그가 가장 마음이 여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너에게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뭐요?" 담붕비는 화가 났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십 년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십 년 전에도 담붕비는 때때로 초풍비에게 투정을 부리 고는 했었다. 담붕비가 오지회의 형제들 중에 초풍비 다음으로 무공이 강한 것도 그런 이 유가 있었기 대문이었다. 담붕비가 투정을 부릴 때마다 초풍비는 적궁의 무공들을 가리켜 주었다. 무 공광인 담붕비는 어떤 화가 나도 무공을 전수해주면 그것으로 만족(滿足)을 하고는 해서 그가 투정을 부릴 때마다 무공이 가일층(加一層) 높아졌다. "만약 이곳에 적이 쳐들어오면 누가 막지?" "그야 내가 막죠." "네가 막을 수 없는 적이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하느냐?" "그땐 형님이 나설 것 아닙니까. 천하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무공을 지 닌 형님이 있는데 뭘 그리 걱정할 것이 있다고 그러시오. 걱정도 팔자요." 초풍비는 빙그레 웃었다. 저기의 말에 스스럼없이 끌려들어오는 담붕비를 이해시키기는 어렵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붕비는 의외로 순진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강호에서 알려진 독하고 싸움 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소문에 그의 순박한 성격과 남을 속이지 않 는 성격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 한 일이었 다. "내가 나가면 물론 위기를 막을 수는 있겠지." "물론이죠." "그러면 남궁 소저는 누가 보호해주지. 남궁 소저가 누구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남궁 소저가 여인이라 해서 해를 입히지 않으리라 생각하나?" "내참! 그러면 내가 지켜주면 될 거 아닙니까." "맞다. 그래서 네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다." 담붕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이 왜 대형의 곁에 남아있도록 형제들이 사라졌는지 이해가 되는 표정 이었다. 담붕비는 조금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남궁은미를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어이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남궁은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붕비를 바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언젠가는 담붕비가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형님, 무슨 일이요?" 초풍비는 이제 담붕비에게 이야기를 해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형 제들은 모두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을 것 같았지만 담 붕비에게는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풍비가 담붕비를 가장 생각하는 이유도 그가 순박하기도 하지만 다른 형 제들보다 약삭빠르지 못하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이 안주하며 때를 기다리고 은근히 초풍비를 찾아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그만이 십 년의 세월동안 초풍비를 찾아 강호를 돌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왜 비가 오는 날을 택해 당문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느냐?" 사실이 그랬다. 그들은 이틀 전에 사천당문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그들은 당가타에 이르기 전 정남(丁南)에서 이틀동안 사냥을 하며 즐겼다. 초풍비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가 빠른 다른 세 명의 형제들과 세밀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는 풍무영도 깨닫지 못한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초풍비에게 생각이 있으려니 하고 믿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한번 마음껏 놀아보자는 생 각을 대형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분이었다. 아무튼 당시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천당문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결전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초풍비가 장담(壯談)을 하고 사천당문으로 출발을 했다고는 하나 오지회의 형제들과 산채의 형제들은 막막하고 불안했 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압니까?" 담붕비가 볼멘소리를 흘렸다. "그건 이유가 있었다. 사천당문이 그토록 쉽게 반간계에 당한 것은 누군가 사천당문 내부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 "그렇군요." "그를 잡아야 했지.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음지(陰地)에 스며든 을목세가 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했다." "화아! 역시 형님을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까요." 담풍비는 감탄을 토했다. 조금 전 자신을 떼어놓고 형제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흥분(興奮)하던 모습 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연 보이지 않았다. 담붕비는 초풍비의 말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남궁은미도 초풍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남궁은미는 담붕비의 모습이 참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어도 귀 여운 사람은 귀여운 것이고 재미있는 사람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담붕비의 순박하고 초풍비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담붕비의 모습에 서 남궁은미는 새삼 감탄(感歎)을 하고 있었다. '초랑의 형제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 "이미 모든 것은 준비가 되었지. 비가 오는 날에는 비둘기가 날개가 젖어 높이 날지 못할 뿐만 아니라 멀리 날지 못한다는 생각도 했었다. 결국 전서 구를 날리게 된다면 풍무영이 능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엥! 그렇단 말이에요?" 담붕비는 전연 생각하지 못했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지략가(智略家)가 아 니었다. 오로지 상대를 만나면 무공으로 제압하는 무인일 분이었다. 그런 면에서 초풍비가 대형이라는 사실이 그들 오지회에는 참으로 다행스러 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만약 전서구가 날지 않으면 누군가는 몸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 형제들이 암중(暗中)에 기다리고 있단다." "하!" 담붕비는 감탄을 부렸다. "엥!"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던 담붕비가 놀란 음성을 뿌렸다. 무엇을 보고 놀 랐는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목을 내밀고 한참동안을 두리번거렸다. 몸을 뒤로 물려 초풍비를 바라보다 다시 목을 창으로 내밀어 창밖을 바라보 기도 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허둥대느냐?" "없어졌어요." "뭐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냐?" "외원 쪽에 밝혀졌던 불이 보이지 않아요. 흉수가 도망친 모양입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천당문 안에서 흉수를 놓친다면 사천당문은 이미 사천에서 그 존재(存在)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초풍비의 말에 담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초풍비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남궁은미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풍비의 말대로 당문에서 흉수를 놓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당문이 일족으로 이루어진 문파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 랬다. 서로가 얼굴을 알고 얽혀 있는 혈연관계(血緣關係)에서 유달리 동떨어지거 나 악연이 있는 핏줄만 찾아낸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 초풍비는 자신의 의견을 이미 밝힌 바가 있었다. 아마도 당협은 그의 충고 에 따라 흉수를 밝혀낼 것이었다. "당협이오. 들어가도 되겠소?" 문밖에서 당협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담붕비와 초풍비가 모든 이야기를 마 쳤을 때였다. "들어오십시오. 당가주!" 당협이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당문을 끌어가는 이전 삼각 십당의 수뇌부들 이 모두 나타났다. 당협이 초풍비의 침실로 지정된 정실로 들어서자 모두들 문밖에 도열했다. 다만 당문의 군사라고 할 수 있는 당가령만이 전신에 무장을 풀지 않은 채 따라 들어섰다. "고맙소. 다행히 당문을 좀먹는 간세를 찾을 수 있었소." 당협은 비록 호쾌(豪快)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얼굴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 었다. 초풍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협의 인상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가슴을 아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아픔으로 보아 흉수가 어떤 자인 지는 대략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분명 그의 형제이거나 그가 아끼는 자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를 아프게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 다. "불행한 일이요. 앞으로 당문은 비가 온 뒤의 진흙땅처럼 더욱 단단해질 것 입니다." 그 말이 가슴이 아픈 당협에게 전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초풍비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기는 마찬 가지였다. 당가령이 얼굴을 들었다. 얼굴에는 당협과 달리 안타까움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깃든 안타까움은 당협의 애통과는 달랐다. "흉수가 날려보낸 전서구는 잡지 못했어요." 그녀의 아픔은 그것이었다. 분명 흉수가 날린 전서구에는 당문에서 일어난 모든 경과가 적혀있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오지회나 당문에게나 충분한 위 협이 될 수 있었다. 초풍비는 빙그레 웃었고 담붕비는 얼굴을 탈색시켰다. "가주! 그것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내 형제들이 모든 것을 예상 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준비를 하기 전에 추적하여 분쇄(粉碎)해야 하오." "방법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내 형제 중에는 천하에서 가장 발이 빠르다는 만리당혜가 있 습니다. 그라면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 낮게 나는 전서구 정도는 능히 따라 잡을 수 있소." "그렇군요." 당가령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밝아졌다. 십 년 가뭄에 한줄기 소나기를 만났 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문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요?" 초풍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당협이 다가들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 도 초풍비의 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놈의 목을 졸라야 할 것 같소." "놈의 목을 조르다니?" "이미 내 동생들은 요소요소에서 진로를 확보했을 것이요. 그들이 전열(戰 列)을 가다듬기 전에 급습(急襲)을 해 일거에 무찔러 버려야 할거요." 탁! 당협이 무릎을 쳤다. 얼굴에는 감탄의 표정이 흘렀다. * * * 당문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마구간에서는 말이 꺼내어 지느라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당가타에 때아닌 소란은 가능한데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삼 백 명이나 되는 당문의 고수들이 집결(集結)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전신에 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눈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삼 백 명은 당문의 연무장에 도열해 있었다. 사방으로 타오르는 횃불이 그 을음을 올렸다. "출발하라!" 당협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사방에 밝혀져 있던 횃불이 꺼졌다. 길게 도 열했던 당문의 고수들이 어둠 속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22 페이지: 1/33 자료번호: 294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5 ─────────────────────────────────────── ■ 상견환 제22장-네놈들은 꼼짝없이 죽었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풍무영은 사천당문의 담에 기대어 초풍비가 알려주었던 이야기를 곰곰이 되 새기고 있었다. 초풍비는 풍무영이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하는 지점(地點)까지 정확 하게 지적해 주었었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고 그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었 었다. "아마 전서구는 당문에서 날아오른다면 강으로 날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산 쪽으로 날아갈 것이다. 당가타를 반원(半圓)으로 두르고 있는 장강 변에는 당문의 전초(前哨)가 있었지만 단 한번도 전서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하다. 만약 장강방면에서 전서구가 날아들었다면 전초에 들켰을 것이 고 당문이 그토록 허망(虛妄)하게 흉수의 손에 놀아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전서구는 산 쪽에서 날아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군요!" 풍무영은 초풍비의 예리한 관찰력(觀察力)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당가타에 들어와 보니 초풍비의 말대로 당문의 앞은 반원으로 굽어진 장강 의 물줄기가 굽이치고 있었다. 군데군데 서 있은 전초에는 적게는 이 인에서 많게는 십 인에 이르는 식솔 들이 장강을 감시하고 있었다. 사천당문으로서는 장강으로 들어오는 적이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다. 장강을 빼앗긴다면 그들의 수많은 발(足)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나 같았다. 당연히 장강을 감시(監視)하는 전초는 삼십여 개나 되었고 감시자는 칠십여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가타에 살고있는 당문의 식솔들은 대개가 생업(生業)으로 농사와 장강에 서 어부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낮이나 밤이나 장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장강을 거슬러 전서구가 날아왔다면 누군가의 눈에 뜨였을 것이고 당협에게 보고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춥군. 차라리 움직이는 것이 훨씬 좋겠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옷을 적시고 발 밑을 질퍽거리게 만들자 풍무영은 차라 리 움직이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머리에 쓴 방갓은 비를 피하게 해 주었으나 초풍비의 말을 믿고 준비한 도 롱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비를 막아주었으나 억수같이 퍼붓는 비는 도롱이를 파고들어 몸을 적시고 몸을 떨게 만들었다. "대형은 정말 대단한 분이야. 오늘 어떻게 비가 올 줄 알고 있었을까?" 비록 생각에 잠겨 있다고는 하나 그의 귀와 눈은 열려 있었다. 귀는 미세 (微細)한 소리라도 듣기 위해 당문 방향으로 돌려져 있었고 눈은 허공에 들 려있었다. 번―쩍! 암청색 번개가 하늘을 가르자 잠시 눈이 밝아졌다. "엉!" 풍무영은 놀람의 음성을 뿌리며 몸을 일으켰다. 번개가 하늘을 쪼개었을 때 한 마리의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당문의 담을 타넘어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둘기였다. 비둘기가 전서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림인은 없었다. 더구 나 풍무영으로서는 비둘기가 날기만을 기다리며 네 시진 동안 비를 맞고 있 었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다. "대형의 말이 옳았다. 놈은 전서구를 날렸다." 풍무영은 급히 몸에 두르고 있던 도롱이를 벗어 던졌다. 빠른 걸음으로, 그 것도 경공을 전개하는데 있어 도롱이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더구나 내공이 거의 없고 오로지 경공술만 빠른 풍무영의 입장에서는 도롱 이의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될 수 있으면 가벼운 차림으로 쫓아 가야 했다. 비둘기는 컸으나 날개짓은 시원치 않았다. 초풍비의 말대로 전서구는 날개 가 비에 젖었는지 하늘 높이 날지도 못했고 속도(速度)도 빠르지 않았다. "저 정도면 전서구를 쫓아갈 수 있다." 전서구를 사람의 발걸음으로 따라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내공이 넘치 고 몸이 가벼워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만리당혜라는 이름을 얻은 풍무영이 라해도 전서구를 쫓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강호인이 들었다면 미친놈이라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후 일 만리당혜가 전서구를 따라갔다는 소문(所聞)이 들릴지도 모르는 일이 지 금 벌어지고 있었다. 풍무영은 품에서 몇 가지의 물건을 꺼내었다. 그것은 가는 표창( 槍)이었 다. 흔히 무림에서는 탈수표(脫手票)라 불리는 것이었는데 형편없이 작아 암기로서의 위력은 없어 보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탈수표는 앞이 삼각형으로 뾰족하고 뒤가 세 갈래로 갈라 져 있었다. 뒤의 갈라진 세 개 중에 중앙의 갈라진 곳에 천이 달려있어 목 표물을 맞히게 되어 있으며 십 촌 정도의 길이였다. 팍! 탈수표가 날아가 나무에 박혔다. 노란 천이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람에 나부꼈다. 풍무영이 던진 탈수표는 모양만 탈수표였다. 길이가 현저하게 작아 그것이 암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던지면 그런 대로 암기라 할 수 있을 수도 있었으나 손가락 마디 하나의 크 기에 뒤에 달린 천의 길이만 일 척에 이르는 탈수표였다. 아마도 그것은 표식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탈수표 모양의 깃발이 틀림없 었다. "가자!" 풍무영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일 장을 날아가 잠시 바닥으로 떨어졌고 다시 일장의 거리를 뛰어넘었 다. 마치 노루처럼 달리는 모습이 그가 달리는 모습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강호 제일의 추적술사(追跡術士)가 될 수 있었다. 비둘기는 그의 머리 십 장 높이에서 부지런히 날개짓을 하고 있었으나 비에 젖은 날개가 무거웠는지 간혹 나뭇가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푸드드드드― 다시 비둘기가 날아올랐고 풍무영의 몸도 따라 노루처럼 뛰었다. 그가 사라 진 자리에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천이 나무의 허리에 박혀 있었다. 비둘기는 매우 지친 듯 보였다. 이제는 그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져 발에 매 달린 동그란 통도 보였다. 그 통에는 사천당문에 몸을 숨기고 있는 간세가 비밀리에 쓴 서찰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욕심은 나지만 전서구를 잡아 서찰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지쳐버린 전서구 를 잡아 서찰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서구는 이제 지칠 대로 지 쳐 지면(地面)을 스치듯 낮게 날아가고 있었다. 풍무영이 조금만 빠르게 달려간다면 전서구는 그의 손에 들어올 수도 있었 다. 그러나 풍무영은 전서구를 잡지 않았다. 전서구를 잡는다면 다시는 날아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 의 임무(任務)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다시 사천당문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 다. 그것은 모든 계획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곳은 당가산이잖아." 한참을 달리던 풍무영은 자신이 당가산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당가산은 당가타의 뒷산으로 제법 그 높이가 만만치 않았다. 그가 당가산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당문에 도착하기 전에 아미 당가타 주변 의 지형(地形)에 대해 상세(詳細)한 것들을 초풍비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가산은 부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높았고 마치 칼날을 세운 모양으로 바위 가 날카로웠다. 전서구를 쫓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나 풍무영도 뒤지지 않 았다. 번쩍! 회청색 번개가 하늘을 때리자 하늘이 멍이 들었는지 암청색으로 보였다. 푸드드드드드― 전서구는 다시 나무에 날아 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날개가 축 쳐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맨눈으로 확인하기는 곤란했으나 번개가 칠 때마다 보이는 전서구의 모습은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번개가 치지 않을 때에는 때때로 전서구의 존재(存在)를 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빗소리에 섞여 들리는 전서구의 날개짓 소리는 풍무영을 안전하게 인도(引導)하고 있었다. 당가타와 달리 산중턱에 오르자 비가 가늘어졌다는 것도 풍무영으로서는 전 서구를 쫓아갈 수 있게 만든 힘이었다. 팍! 풍무영은 손에 들렸던 탈수표를 날렸다. 탈수표는 허공을 날아 이 장 앞의 나무에 깊숙하게 박혀들었다. 황금색의 천이 축 늘어졌다. "이번이 스물 아홉 번째다." 풍무영이 날린 탈수표는 그의 말대로 스물 아홉 개째였다. 그의 손에는 이 제 스물 한 개의 탈수표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만약 탈수표를 다 쓰게 된다 면 방갓을 벗어 나무를 베거나 나무에 흠집을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전서구를 놓치거나 내공의 소모로 인해 추 적이 불가능해 질 수도 있었다. '어서 네 집을 찾아가거라.' 풍무영은 간절하게 빌었다. 자신이 지치기 전에 전서구가 날아드는 곳을 찾 아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전서구가 찾아드는 곳을 찾는 것이었다. 바삐 움직이던 풍무영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기다.' 어둠 속에 하나의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전서구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날아 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 풍무영은 일순 허탈(虛脫)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에 남은 탈수표는 단 한 자루뿐이었다. 풍무영은 지나쳐온 길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휙― 파라라락! 탈수표는 날아가 사람의 허리보다 굵어 보이는 고목(古木)에 박혔다. 마지 막 표식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군." 초풍비는 그에게 신신당부(申申當付)하기를 어떤 일이 있어도 전서구가 들 어간 곳으로 따라 들어가지 말라 했었다. 그것은 풍무영의 안위에 대한 당 부였다. 풍무영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장갑을 꺼내 양손에 나누어 끼웠다. 대산파 의 팽가형제 중 막내 팽염강이 사용했던 장갑이었다. 팽염강이 형제들 중 유일하게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만이 유일 하게 자신들의 방패를 날릴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풍무영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방갓으로 변한 방패를 완벽하게 날릴 수 있었다. 풍무영은 방갓을 벗어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전진(前進)했다. 마치 강아지 가 기듯 접근한 그의 눈이 등잔만하게 불거졌다. "이런! 이러니 찾을 수가 없었군." 풍무영은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자신이 본 글귀를 쳐다보았다. 당가묘(唐家墓) 그리 크지 않은 삼층의 누각과 두 개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만 사당 은 어깨높이의 담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건물은 크지 않았으나 면적은 넓었다. '산 속에 어떻게 그리 넓은 곳이 있 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넓은 전각과 주변은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당가묘는 당문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당가산의 이름을 가지게 한 바 로 그 사당 안으로 전서구가 날아 들어갔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당가묘는 무려 삼천평(三千坪)에 이르는 넓은 땅이 잔잔한 풀로 낮게 깔려 있었다. 풍무영은 방갓으로 당가묘 앞에 서 있은 감람목(橄欖木)을 후려쳤다. 어른 의 팔뚝만한 굵기를 지녔던 감람목이 소리도 없이 잘리며 기울어졌다. 그것이 목표에 도달했다는 표식이었다. "어떤 놈들인지 보아야겠다." 풍무영은 바람처럼 당가묘의 담을 솟구쳐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본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풍무영이 사라지고 난 뒤 반 시진이 지났을 때, 등에 검을 둘러맨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손에는 편경(片鏡)이 들려있었고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몸에 는 올이 성긴 마의를 입고 발목과 팔목에는 토시를 차고 있었다. 언뜻 보아 서는 먼 길을 떠나 돌아다니는 낭인무사의 모습과 흡사(恰似)했다. 중원에는 늘 무공을 익히고 이름을 날리기 위해 천하를 주유(周遊)하는 무 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가리켜 낭인이라 불렀다. 그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낭인무사였다. 낭인무사들은 관제묘나 당가묘와 같은 허름한 곳에서 잠을 청했고 때때로 주변의 무인들에게 비무를 통해 무공을 익히고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다. 비록 낭인무사의 모습이 분명했으나 그들의 모습은 조금 어색했다. 한동안 주위를 배회(徘徊)하던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 저 나무가 왜 쓰러져 있지?" "검으로 벤 것 같은데."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서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나도 그래. 이 밤중에 누가 올리는 없는 일이고.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자 고! 근래 가주와 단주가 신경이 날카로워 까딱하면 치도곤이야." "그러치." 두 명의 사내는 바삐 다가와 쓰러진 감람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 이상 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베어진 나무를 질질 끌어다 숲 속에 버리고 돌아왔 다. 그들은 한동안 당가묘의 입구에 서성거렸다. 두 명의 사내중 키가 큰 사내 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듯 잘려진 나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이 나무가 베어지면 당가 놈들이 의심을 할텐데...... 누가 벤 거지?" "어떤 놈이 화가 나서 베어 버린 모양이지 뭐! 간혹 미친놈들이 있잖아." "그건 그래!" 키 작은 사내의 말에 수긍을 했는지 키가 큰 사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것으로 그들의 모든 의구심은 풀린 것 같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다시 주 위를 돌기 시작했다. "멈추어라!" 바삐 몸을 움직이던 두 사내는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몸을 멈추었다. 그 들은 허공으로 솟구쳐 나무를 잡으려던 손을 멈추며 떨어져 내렸다. 당문에서 한다하는 무웅들이 많았지만 자신들만큼 뛰어난 자는 없다고 생각 하는 자들이었다. "누구냐?" 두 사내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외침을 뿌렸다. 모발 (毛髮)이 하늘로 솟구치는 놀라움에 자연적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너무도 컸다. 어둠 속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비록 어둡기는 했지만 두 사내의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한 사내는 오 척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작은 키에 진한 홍색의 경장을 걸치고 있었고 등에는 더욱 진해 보이는 홍색의 피풍(被風)을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 찬 검이 키보다 커 보였다. 다른 한 사내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몸에는 문사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비를 맞아 생쥐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었다. 병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우선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음을 띤 얼굴로 허둥대는 사내들을 바라보고 만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바삐 가는지 모르겠군." 목소리를 뿌린 오 척 단구의 사내는 혁천련이었다. 귀검수라 불리는 그는 처음으로 완벽(完璧)한 무장을 갖춘 모습이었다. 홍색의 경장을 두른 요대 에는 열 자루의 비도(飛刀)가 꽂혀 있었고 허리에 달린 검은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누...... 누구냐?" 두 사내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들이라 해서 오지회의 형제들을 모를 리 없었다. 당문의 식솔들은 오지회 가 당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대들이 나를 모르지는 않을텐데!" 도우선은 질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궁도 아닌 여운(餘韻)이 남는 말을 던 졌다. "오지회의 형제들이 이곳에 웬일이요?" 두 사내는 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어느 모로 보나 당문의 제자들이었다. 그 들은 당문외가(唐門外家)의 표식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버들잎 모양으로 생긴 긴 은편(銀片)을 단 것으로 보아 그들은 당문외가(唐 門外家) 중의 하나 유엽당가(柳葉唐家)의 식솔들이 분명했다 '후후후! 놈들, 이제 본색을 드러낼 때가 되었을 텐데!' 도우선은 마음속으로 하얗게 웃었다. 당문은 하루 종일 제자들을 움직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전초를 서는 무인들뿐이었다. 당협이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초풍비의 부탁에 의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도우선은 다가서는 자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후후후! 형님의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군.' 초풍비는 그들을 사천당문을 둘러싼 외곽에 몇 가지를 주문한 상태였다. 담 붕비를 제외한 세 명의 형제들은 각각 세 곳을 지키고 있었다 장강에 면한 남쪽을 제외하고 세 방향을 감시하라 일렀던 초풍비는 사내들 이 나타날 것을 예상했던 모양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었 다. "놈들이 나타날 거다. 풍무영이 전서구를 추적한 이후에 나타나는 놈들은 앞 뒤 사정 가리지 말고 죽여버려라." 초풍비가 느닷없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만 끄 덕거렸었다. 기다리기 시작한 지 두 시진이 지나자 과연 초풍비의 말대로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났고 초풍비가 말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들이 당문의 외곽에서 당문의 허실(虛實) 을 염탐(廉探)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도우선은 생각할수록 초풍비에 대한 감탄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혁천련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할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았다. "이제 그만 탈을 벗고 을목세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떠냐? 을목의 미친 개들!" 다가들던 두 사내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분명 그들은 당문의 외가인 유엽당가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을목 세가의 가솔들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도우선의 말은 짐작일 뿐이었다. 초풍비가 사람이 나타난다면 분명 을목세가의 잔당이라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는 한술 더 떠서 무작정 을 목세가의 개라고 외쳤던 것이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두 명의 사내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제법 키가 큰 사내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소리를 질렀다. "후후후, 미친 놈! 네놈이 우리에게 한 소리냐?" 도우선은 자신의 예측이 정확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그토 록 안색을 돌변(突變)시키고 거친 욕설을 뱉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오지회라 하면 천하가 알아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거칠게 응 대(應對)를 하는 것으로 보아 애당초 그들에게서 대접을 받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이곳에 네놈들 말고 누가 또 있다고 헛소리를 중얼거리느냐?" 도우선은 자신에 생각해도 제법 날카롭게 말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도우선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온화(溫和)한 사람이었다. 오지회에서 그만이 정인 군자로 취급을 받고 있는 이면(異面)에는 그가 다 른 형제들과 비교해 성격이 거칠지 않다는 것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막는 이유는?" 사내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지회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말 정도는 떨려야 했는데 간이 제법 큰 놈이었다. 사내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자신들이 오지회의 형제들을 이기지 못했을 때 대비한 탈출로(脫出路)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우선은 그들에게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간단하다. 네놈들이 죽을둥살둥 모르고 설치는 꼴이 보기 싫어 형님이 나 를 이리로 보내셨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으로 하고 네놈들이 소속(所 屬)되어 있는 유엽당가로 돌아간다면 목숨만은 보존(保存)하게 될 것이다." 도우선은 가능하면 살려주라는 초풍비의 말을 생각해 그렇게 말했다. 생각 대로라면 모두 베어버리고 싶지만 당문의 식솔이라는 것을 생각한 초풍비의 배려였다 어차피 그들이 사천당문의 방계가문(傍系家門)이 분명하다면 피를 볼 필요 는 없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서 모두 죽일 필요는 없었다. 우두머리 하나면 그들이 모두 본가에 충성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흥! 미친놈이로군. 죽여버리자." 키가 작은 사내가 허공을 바라보며 외쳤다.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이군. 동조세력(同調勢力)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도우선은 찬찬한 눈으로 미친 듯 소리를 지르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찾는 놈들은 여기에 있다." 휙! 바람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 개의 둥근 물체가 허공을 날아와 나뒹굴었 다. 진한 피비린내가 가는 빗줄기를 뚫고 스산하게 퍼져나갔다. 땅바닥에 구르는 것은 머리였다. 산발(散髮)된 머리에는 피가 엉겨붙어 있 었고 아직도 죽은 피가 끊어진 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어떤 놈이냐?" 두 명의 사내는 허공을 둘러보며 미친 듯 분노를 터트렸다. 아마도 그들 앞 에 구르는 두 개의 머리는 그들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인 것 같았 다. 스스슷― 빗속을 울리는 옷자락 소리가 들리더니 하나의 인형이 어둠 속에서 몸을 드 러내었다. 그는 오지회의 사무기였다. "인정사정 봐줄 필요가 없어 죽여버려." 사무기의 음성이 격했다. 아마도 그는 초풍비의 말을 생각해 두 명의 배반자(背反者)를 살려주려 했 었던 것 같았다. 그 이후는 생각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격해하는 이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이유일 것이었다. 평소 초풍비를 신과 같이 존경하는 사무기가 초풍비가 부탁한 것을 어겼다 는 것은 일의 전후(前後)가 어찌된 것인지 짐작하게 했다. "이렇게 되었다면 이판사판이다." 두 명의 사내가 몸을 움직이자 혁천련이 바람처럼 앞으로 나아가 사내들과 맞섰다. 도우선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사무기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바닥에 놓여진 돌에 엉덩이를 걸쳤다. 자신은 두 개의 목을 잘랐으니 할 일을 다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혁천련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지면에 검극이 닿도록 늘어드렸다. "네놈을 먼저 죽여주마! 난쟁이!" 두 개의 그림자가 혁천련을 에워싸고 각기 앞과 뒤에 섰다. 무감각하기만 했던 혁천련이 욕설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난쟁이 라는 말이었다. 혁천련은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혁천련는 사내들의 모 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사내는 각기 손에는 직도를 들고 있었고 검은 무복을 걸치고 있었 다. 검은 무복의 가슴에는 은으로 만든 길쭉한 버드나무의 잎사귀가 달려있 었다. 버드나무의 잎사귀는 그들이 나타나자 이미 보았던 것으로 그리 감흥(感興) 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우중에 희미하게 보였던 옷들이 검은 무복인 것으로 보아 그들이 단단히 준비를 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등에 매달린 피풍으로 보아 그들이 비가 오는 와중에도 짧지 않은 거리를 이동(移動)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라라락― 바람에 날리는 빨랫줄의 빨래처럼 거친 파공성이 들리며 두 사내의 등에 매 어져 있는 피풍이 팽팽하게 불어 올랐다. 가볍지 않은 내공을 지닌 자들이 었다. '합격술(合擊術)이 뛰어난 자들이다. 야행술(夜行術)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합격술도 뛰어나다면 모든 것은 이미 경지에 올라선 자들이다.' 혁천련은 전신에 진기를 유포시키며 다가드는 흑의인들의 동태를 찬찬히 살 펴보았다. 흑의인들은 서서히 왼쪽으로 돌며 위치를 변화시켰다. 그들의 보법은 매우 정묘했다. 비가 와 바닥이 미끄러울 만도 한데 그들의 움직임은 오차가 없었다. 움직 이는 것은 허리아래일 뿐으로 상체는 마치 고정(固定)된 듯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허술해 보인다.' 혁천련은 두 명의 합벽이 완벽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모든 방위(方位) 를 완벽하게 막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혁천련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닥에 구르고 있는 두 개의 머리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들 네 명은 하나의 진을 구성하는 검대(劍隊)였던 것 같았다. 두 명이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진의 위력은 현저하게 반감되어 있는 듯 느껴 졌다. "탓!"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터지는 함성이 울리고 두 자루의 직도가 각기 혁천 련의 등과 배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흑의인들이 노리는 것은 속전속결 (速戰速決), 빠른 승부였다. 쉬이이익― 두 자루의 직도는 눈 한번 끔벅이는 순간에 이미 혁천련의 명문혈(命門穴) 과 단전에 이르러 있었다. 누가 보아도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가공하리 만치 빠른 쾌도였다. "흥!" 혁천련은 번개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허리에서 백색의 빛을 쏘아내었다. 키 는 작아도 그의 장검은 길었다. 자신의 키에 이를 만치 긴 검이 허공으로 백색의 선을 만들었다. 놀랍도록 빠른 쾌검(快劍)이었다. 파라라락! 창! 허공의 일각에 파공성이 일고 허공에서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싶 은 순간 두 개의 검은 물체가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비명도 없었다. 바닥에는 네 개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각각 허리에서 반 토막으로 잘린 시체들은 검붉은 창자를 꾸역꾸역 쏟아내고 있었다. "대단하구먼! 아우의 검공(劍功)은 나날이 발전하는 것 같아. 상전벽해(桑 田碧海)라 했던가? 일취월장(日就月將)이라 했던가? 나는 아우의 새로운 모 습을 보는 것 같네." 도우선이 감탄을 토했다. 십 년 전 초풍비가 검공을 전수해주며 십 년만 부지런히 익히면 검에서 빛 의 무리를 쏘아보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그의 검법으로 보아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았다. 쩌저저정! 하늘에 다시 번개가 쳤다. 온 세상이 냉기가 날리는 은백색 빛으로 물들었다. 노인은 서찰을 내려놓았다. "초풍비, 그가 살아있었군, 그가 그리 쉽게 죽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지. "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노인의 앞에 앉은 십 수명의 사람들은 노인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숨을 죽였 다. 노인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중원상단과 을목세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었다. "그가 살아있다고 하셨나요?" 단화연이 물음을 던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表情)이었다. 당연한 것이 그는 초풍비가 뇌룡탄에서 추락해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사실 노인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초풍비를 추적하던 세 명의 환도 그렇게 보고를 했고 강호의 소문도 초풍비가 뇌룡탄에서 죽었다고 했다. 무영의 보고(報告)가 모든 것을 결정했었다. 무영은 직접 현장(現場)을 보았고 눈으로 확인했다고 말을 했었다. 모두들 초풍비가 죽었다고 했으나 당무영의 서찰은 그들의 기대(期待)를 산산조각 으로 만들고 있었다. "네놈이 하는 일이 변변한 것이 있느냐?" 노인의 눈이 냉기를 띄우자 단화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서 너 명의 무인들이 안색을 붉혔다. 그들이야말로 을목세가의 마지막 남은 수뇌부들이었다. 그들로서는 노인이 단화연을 내리 보는 언행(言行)이 화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노인에게 반박하거나 얼굴에 표정을 심어 대들지 못했다. 노인과 자신의 무공이 천양지차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을목세가가 중원상 단의 하수인이 된 지 이미 오래인 것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단화연은 눈쌀을 찌푸렸다. "단화연, 너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토록 주의를 주었건만 너는 결국 초풍비 하나를 막지 못하는구나." 노인은 거칠게 서찰을 집어던졌다. 비에 맞아 구겨진 서찰은 비록 제 모습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글씨가 거 의 번져 있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서찰이 온전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 체가 무리였다. 단화연은 서찰을 집어들었다. 구겨진 서찰을 펴들던 단화연의 얼굴이 탈색되었다. 그가 눈으로 가지고 간 서찰은 사천당문의 당무웅이 보낸 것이었다. "빌어먹을...... 명줄이 질긴 놈이로군." 단화연이 이를 갈았다. "단화연!" "예, 사부님!" 단화연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항상 그랬지만 이제는 더욱 거역하거나 얼굴에 불충(不忠)을 띄울 수 없었 다. 자신이 추진했던 모든 일이 어그러진 지금 사부는 어쩌면 자신을 희생 양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노인은 단화연을 바라보았다. "세가의 제자는 몇이나 되느냐?" "백여 명이 조금 넘습니다." "좋아!" 뭐가 좋다는 것인지 단화연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노인이 을목세가 의 제자로 방어벽을 치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백여 명의 제자라면 지하계단으로 내려오는 길목을 막을 수 있을지 도 모를 일이었다. "서찰에 적힌 그대로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아마도 당무웅은 모르고 있었지만 오지회는 이곳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서찰에 적힌 대로 당문이 길 을 열겠지." "그렇습니다." 단화연은 노인이 요구(要求)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어떤 대답도 필요 없었다. "단화연!" "예." 단화연은 얼굴을 들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표정이 변해 있었다. 평 소 변하지 않는 무표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밝아졌다 반복(反復)하는 것으로 보아 격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단화연의 뒤를 바라보았다. 단화연의 뒤에 보이는 을목세가의 중추 적인 자들이 보였다. '흠, 일섬노인(一閃老人)과 세 명의 당주! 저들이 을목세가의 살아있는 후 인들인가? 저들로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일섬노인은 을목세가의 최고 고수였던 단화연의 부친이 불의의 비명횡사(非 命橫死)를 당한 뒤 단화연의 무공을 지도하던 사부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일섬노인은 비록 을목세가의 노복에 불과한 신분이기는 했으나 한때 대막 (大漠)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을리만치 대단한 무명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그가 대막에서 위기에 처한 것을 전대가주였던 천검(遷劍) 단무겸(段 )이 목숨을 구해 을목세가에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은 당시에 끊어졌거나 다시 살아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이 났을 것이었다. 노인은 알고 있었다. 당문의 고수들과 오지회가 몰려오면 을목세가의 힘으로는 막지 못할 것이고 설사 중원상단의 남아있는 무인들을 모두 동원해도 막을 수 없을는지도 모 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화연." "예."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한 시진만 놈들을 막아라. 그 후는 네가 어 찌해도 좋다." 단화연의 얼굴에 희색(喜色)이 돌았다. 자시까지는 이제 앞으로 한 시진 밖에는 남지 않았다. 설사 호미로 막아도 적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단화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만 물러가 준비를 해라. 서둘러 망루를 점검하고 곳곳에 놈들을 잡을 덫 을 설치해라. 무영은 단가주를 따라 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무영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 * * 풍무영은 급히 계단의 손잡이를 잡으며 몸을 끌어올렸다. 노인의 거처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비록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흘러나오는 말과 무거운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어서 움직여라." 단화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풍무영은 급히 몸을 움직여 계단의 모서리 밑 어 두운 곳으로 몸을 숨겼다. 여섯 명의 그림자가 다가와 계단아래 멈추어 섰다. 단화연을 포함한 을목세 가의 마지막 남은 자들이었다. 물론 밖에도 백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있 기는 하지만 피폐(疲斃)해진 을목세가의 마지막 힘은 그들로부터 나오고 있 었다. "허복(許 )!" "예, 가주!" 목소리를 토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선 자는 두 손에 작은 도끼를 나누어 쥐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얼굴이 검고 송곳니가 뻗쳐 조금은 흉측스럽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수호전의 영웅들 중 도끼를 잘 사용했다는 흑선풍 이규를 생각나게 했다. "이제 우리에게 기회는 없는 것 같소. 그대가 한 무리의 제자를 이끌고 동 쪽을 맡도록 하시오. 한 시진만 지나면 도주해서 장강으로 피신해도 좋소."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허복이 빠르게 몸을 이동시켰다. 어둠 속을 거슬러 계단 위로 사라지는 허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단화연의 얼굴에 언뜻 아픔이 스쳤다. 다시 고개를 돌린 단화연은 벽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긴 노인에게 얼굴을 돌렸다. "우노인(右老人)!" "말씀하십시오." "천하의 천면분인랑(千面粉人郞)이 을목세가에 들어 이런 꼴을 보게 되는구 려. 할 말이 없소." "천만의 말씀입니다." 노인이 얼굴에 틀어지는 미소를 띄웠다. 비록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마 음이 상했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는 과거 무림에서 천면분인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던 노인이었 다. 중원에서는 이름을 얻은 적이 없지만 서장에서는 천면분인랑을 모르는 사람 은 없었다. 그는 서장 포달랍궁(布達拉宮)의 승려였다고 전해지는 인물이었 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서장에서 일보(一步)를 걷기 전에 얼굴을 바꾸는 변환 술(變幻術)의 일인자일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차마 행할 수 없는 만행 (蠻行)을 저지른 자였다. 서장의 포달랍궁이나 홍교(紅敎) 등도 그가 나타나면 일부러 충돌을 피했다 고 전해졌다. 언젠가 잔인한 무공으로 반드시 보복을 하기 때문이었다. "사십 명의 제자를 이끌고 동서방향에서 진입하는 계단을 맡아주시구려." "알겠습니다." 노인은 곧 계단을 올라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동안 그가 계단을 오르는 소 리가 이어졌다. "우리도 어서 갑시다." 단화연이 무거운 음성을 뿌리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나머지 네 명의 무인들이 뒤를 따랐다. 그 중에는 무영도 섞여있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풍무영은 계단의 어두운 모서리에서 기어 나오며 벌레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를 토했다. 풍무영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특별히 눈에 뜨이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러나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서 가자! 모두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풍무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 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23 페이지: 1/30 자료번호: 295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5 ─────────────────────────────────────── ■ 상견환 제23장-그가 오고 있다1 당가산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누만년(累萬年)이래 중원의 하늘을 이고 선 많은 산들 중 하나의 이름이지 만 그 이름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궁벽한 사천에 자리하고 있 기 때문이었다. 기암(奇巖)으로 이루어진 절벽이며 울울창창한 사면(斜面), 모든 것이 중원 인들의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중원오악(中原五岳)에 비견될 만하지만 당가 산은 널리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십팔 년 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사천당가의 조상들 묘가 당가산으로 이전되 었다. 한때는 대량산(大凉山) 줄기의 하나로 소량산(小凉山)이라 불러졌었던 적도 있었던 대맥(大脈)이지만 이제는 이름도 없는 산으로 전락하고 만 산이었 다. 당가 조상들의 묘가 옮겨진 십팔 년 전 이래 당가산은 사천당문의 식솔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마음대로 오를 수 없는 산이 되고 말았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던 산은 곳곳에 철난간(鐵欄干)이 세워지고 곳곳에 방책이 세워져 비조불입(飛鳥不入)의 요지로 변해 있었다. 산의 정상에는 당가묘라 이름 붙여진 거대한 시묘실(侍墓室)이 있었고 일년 에 한 번, 팔월 대보름에 당가의 후손들이 모두 모이는 거대한 제례(祭禮) 가 치러졌다. 당가의 제례는 당제(唐祭)라 해서 이름이 높았다. 스스스슷― 하늘에서는 세우(細雨)가 날리고 있었다. 두 시진만 지나면 새로운 날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인지 뿌연 안 개가 사위를 뒤덮고 있었다. 인시(寅時), 비록 안개가 물이 흐르듯 바위 사이를 감아 돌고 있었고 안개 뒤에 희미한 월광(月光)이 비추고 있다고 하나 손가락을 더듬을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사위를 칠흑으로 물들였다. 스스슷― 삿! 전신에 칠흑처럼 짙은 현의 무복을 입은 그림자들이 바람처럼 당가산을 오 르고 있었다. 비록 중원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험하기로만 한다면 중원에서 둘째가라 할 만큼 거친 산이었지만 노루처럼 뛰는 그림자들에게는 하등의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 그림자가 당가산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 표식이 있다. 산 정상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무기는 손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천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풍무영이 나 무에 던져 박아놓은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은 풍무영의 표식을 따르 기로 계획이 서 있었다. "어서 갑시다." 누군가 사무기를 재촉했다. 사무기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휙! 하나의 그림자가 나무로 급조(急造)해 만든 망루(望樓)로 솟구쳤다. 사람의 허리둘레보다 굵은 나무를 베어 만든 망루의 높이는 무려 이 장이나 되었고 망루의 기둥에는 날카로운 송곳과 칼날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침입자를 방어 하고 있었다. "누구! 헉!" 짧은 비명이 울리는 순간 망루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망루 밑으로 떨어져 내 렸다. 전신에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자였다. 달빛 아래에서도 옥색무복은 스스로 약한 발광(發光)을 일으켰다. 그것은 옥색무복에 섞인 발광체(發光體)로 인한 것으로 서로 알아보기 편하게 하기 위란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스슥! 망루를 점령한 그림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바위 뒤나 나무 뒤에 웅크리고 있 던 이삼십 명의 그림자가 어둠을 헤치며 안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너무도 신속하고 은밀한 행동이기에 망루에 올라서 있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시작되었다." 은밀한 그림자들이 나무숲으로 전진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사내는 낮 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망루에 올라선 그림자는 다시 한 번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망루에 올라선 자는 사천당문의 장로 중 한 명으로 무공으로 당협에 앞설지 도 모른다고 알려진 당일수였다. 휙! 당일수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숲 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빠른 동작으로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어서 움직여야 한다." 당일수는 번개같이 신형을 쏘아가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으로 뒤덮인 산야(山野)가 불쑥 다가들었다. 순식간에 그를 앞서 달려갔던 제자들이 당일수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당일 수는 마음이 급했다. 자신이 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 다. '빨리 가야 한다. 만약을 위한 퇴로를 열어놓지 못하면 암계(暗計)에 걸러 모두 죽을 수도 있어.' 당일수의 임무는 당가산의 북쪽에 길을 여는 것이었다. 사천당문의 식솔들 은 각기 네 갈래의 길로 당가산을 오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험준(險峻)한 산등을 타는 것으로 공격도 어렵지만 방어하기도 어려운 지형이었다. 각기 당가산의 동서남북 네 갈래로 공격 목표를 찾아 올라가기 시작한 사천 당가의 식솔들은 이미 당가묘에 다다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일수는 두 개의 돌격대와 독공을 사용하는 이십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 고 만약을 위한 퇴로를 열고 있었다. "누구냐?" 휘이이잉― 두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 당일수의 허리를 쓸어왔다. 빛살처럼 빠른 검기는 한순간에 당일수의 허리를 잘라버릴 것 같았다. 낙엽 속에 몸을 누인 채 다 가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튀어 오르는 두 개의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눈앞 으로 다가왔다. "핫!" 휘리리릭― 당일수는 짧은 기합을 토해내며 몸을 뒤집었다. 아슬아슬하게 휘어진 칼날 이 당일수의 하반신(下半身)을 스쳤다. 몸을 띄운 당일수의 옷자락이 검에 잘려 떨어졌다. 당일수는 황급히 손가락을 펼쳐 강철같이 날카롭게 세워 다가드는 두 개의 그림자를 향해 찔러갔다. "커흐흐흑!" 하나의 검은 인형이 나동그라졌다. 당일수의 손가락이 검을 휘둘러 다가온 사내의 등뒤 목의 혈도를 짚으며 허 공으로 날아오른 뒤였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당일수의 손에는 작은 표리자(剽理子)가 들려 있었다. 표리자는 혈도만을 전문적으로 공격하는 병기로 크기는 작았지만 매우 위력 있는 무기였다. 목을 지탱하고 있는 앞뒤 여섯 개의 혈도는 하나같이 가벼운 타격만으로도 사람을 살상(殺傷)시킬 수 있는 인체의 급소(急所)중 하나였는데 어둠 속에 서도 당일수는 오차 없이 적을 격살시킬 수 있었다. 푸푸푸― 목이 꺾이며 낙엽 속으로 처박힌 사내의 입에서 마지막 한숨이 터져 나왔고 뒤이어 들리던 목이 그대로 떨어졌다. "오호!" 느닷없는 반격(反擊)에 무너지는 동료를 보며 살아남은 흑의인은 낮은 부르 짖음을 토했다. 놀람을 토해내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검의 방향을 되돌리기도 전에 당일수의 발이 흑의인의 다리를 걸었다. 무공에 입문할 때 처음에 배우는 무공의 하나인 전소퇴였지만 매우 적절한 초식이었다. 급히 도약하려던 흑의인은 다리에 감겨 나동그라졌다. 퍽!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당일수의 주먹이 빨랐다. 허공에 떠있는 흑의인의 몸 에 위력이 실린 당일수의 주먹이 날아들고 흑의인의 몸은 다시 이 장을 날 아갔다. 푸하하학― 흑의인의 입이 벌어지며 피 화살이 솟구쳤다. 피뿐만이 아니었다. 부서진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뿌려지며 자욱한 혈향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잠시 꿈틀거리던 흑의인은 곧 잠잠해졌다. '늦었다, 어서 가자.' 휙! 당일수의 몸이 삼 장을 솟구쳤다. 멀리서 그를 따르는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고 거친 발소리가 어둠을 밀어냈다. * * * 파스슷― 당협을 막아서는 일단의 무리는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한결같이 몸에 두터 운 등갑(騰匣)으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등갑은 등나무와 면사를 섞어 만든 갑주(甲胄)의 일종으로 가볍고 동작이 자유로웠으며 검과 암기 같은 병기에는 대단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건 관군과 싸우는 것 같군." 갑주라는 것은 관군의 전유물(專有物) 같은 것이었다. 강호인들이 갑주를 입는 경우는 눈을 까뒤집고 보기가 힘이 드는 일이었다. "돌파하라!" 당협의 목소리가 울리자 사천당문의 무인들이 병기를 치켜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당문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십여 명의 무인들이 나타 났는데 그들은 장병기와 타병기(打兵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으스스한 살기가 흘렀다. 그들이 지닌 병기는 사천당문의 식솔들이 들고 있는 검이나 가는 도, 혹은 암기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검문산 산채의 산적들이었다. "우리가 맡겠다." 구 척이나 되는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손에는 두 자루의 판부(板 斧)가 들려 있었는데 눈으로 보기에도 무게가 자못 나갈 것 같았다. 그는 검문산 산채의 산적들 중에서 소두령 중의 한 명인 박장형이었다. 웅 철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큰 그의 몸에서는 산을 쪼갤 것 같은 힘이 느껴 졌다. "모두 죽여주마!" 휭! 박장형이 판부를 휘두르자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밀리는 듯한 소 리가 들렸다. 비록 빠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닌 판부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박장형이 앞으로 나서서 한바탕의 시위(示威)를 벌이자 검문산의 산적들이 일제히 장병기(長兵器)를 앞으로 겨누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는 듯 가 는 미소가 스쳤다. "어림없는 수작들 말아라." 등갑을 입은 사내 하나가 달려나오며 외쳤다. 손에는 세도를 들고 있었는데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박장형의 앞으로 달려나오며 세도를 휘둘렀다. 공격할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단지 박장형의 앞으로 막으려고 하는 것 같 았다. 그는 달려나와 대치상태에 이른 양측의 앞에 서려 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허세가 통하지 않는다." 부우우우우! 박장형의 손이 허공으로 들려졌는가 싶었는데 횡으로 그어졌다. 몇 그루의 가는 나무가 베어지며 판부는 나타난 자의 허리로 밀려갔다. "아니, 이런 개 같은 일이!" 나타난 자는 싸울 의사가 없었다. 다만 일정한 시간 동안 대치를 이루었다 물러나가 상황을 봐서 앞으로 달려들 생각이었다. 퍽! 판부가 허리를 파고들었다. 미처 예측도 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달려오는 속도에 몸을 가누기도 전에 달려든 판부의 공격은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한 가지 결과를 드러내었다. "으으응!" 사내는 고통의 신음을 뱉었다. 그러나 짧은 신음이 그가 이승에서 뱉어낸 마지막 언어 아닌 비명이었다. 그의 의식은 이미 육체를 떠난 후였다. "앞으로!" 당협이 외쳤고 사천당문의 제자들과 검문산의 산적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앞으로 튀어나갔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는 비명이 울리고 진한 피비린내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기―깅! 제법 요란하게 들리는 소리는 방울 소리는 벽에 걸린 여러 개의 작은 동종 (銅鐘) 중에서 하나가 깨지는 소리였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각 전 에 동종이 울렸고 노인이 주먹을 휘둘러 종을 부셔 버렸다. 벽에는 열두 개의 동종이 달려있었는데 각기 조금씩 다른 색을 띠고 있었 다. 이미 여섯 개의 동종은 깨져 바닥에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있었고 부서 진 몇 조각의 동종이 유리 같은 편린(片鱗)으로 동종이 있었다는 흔적을 말 해주고 있었다. "후후후, 제법 만만치 않은 놈들이군. 벌써 여섯 개의 관문(關門)을 돌파하 다니......" 노인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대로 하면 열두 개의 동종이 붙어있으니 열두 개의 방어 벽이 쳐져있다는 것이었다. 각각 하나의 동종은 하나씩의 관문을 의미했다. 여섯 개의 동종이 깨졌다는 것은 이미 반이나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동종 이 깨지며 밀려들어오는 힘을 느끼면서도 노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심히 건방진 놈들이군. 감히 나를 우습게 보고 수작을 걸다니...... 초풍 비, 그 아이를 믿는다는 건가?" 노인은 수염이 심하게 흔들리도록 웃었다. 그의 말대로 초풍비가 밀려온다 해도 두려운 것은 없었다. 노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초풍비를 알고 있었다. 노인은 웅크리고 있기는 했으되 놀지는 않았다. 수시로 암중의 활동을 하며 강호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고 초풍비가 활동하는 것을 감지(感知)했었다.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후후후, 너희들이 돌파한 여섯 개의 방어벽은 너희들의 힘을 빼기 위한 을목세가의 방어벽이지. 나의 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미 무너지리라 예상했었다마는 생각보다 빠르군."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몸을 반듯하게 세운 노인은 방안을 서성거리리 시작 했다. 입으로야 자신이 전혀 동요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행동은 그렇지 가 못했다. "후후후, 이제 초풍비를 기다려야 하겠지." 노인의 입에서 이빨 시린 음성이 울려나왔다. * * * 휘이이익― 한 사나이는 번개같이 신형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전신에는 검은 흑의를 걸 치고 있었다. 삼십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나이였다. 등에는 한 자루의 검을 둘러메고 있었는데 손잡이 끝에 용의 머리가 양각으 로 새겨져 있었다. 사내는 번개같이 날쌔고 제비처럼 유연(流涎)한 동작으로 신형을 전개시키 며 산곡(山谷)으로 다가들었다. 그가 수장의 넓이를 건너 뛸 때마다 바닥에 는 발자국이 새겨졌다. 사내는 지형에 대해 너무나 환히 알고 있는 듯 여러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 고 바위 뒤에 숨어 지형을 살피기도 했다. 슷―스슷! 사내는 사위를 둘러보다 다시 몸을 움직여 당가산 깊숙한 곳으로 달려들어 갔다. 사내는 몸을 날릴 때마다 사위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신형을 다시 전개시켰다. "흠! 모든 연락망이 파괴되었다. 모든 망루가 점령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이 이리도 가까이 쳐들어오도록 방어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니." 청년의 음성은 불안과 초조로 물들어 있었고 가볍게 떨리기까지 했다. "적어도 오 백 명이나 되는 당가의 제자들이 당가봉으로 안으로 들어간 듯 하다. 하지만 돌아 나온 자는 아무도 없다. 설마하니 놈들이 벌써 당가산 정상에 오르지는 않았겠지." 휘이이이― 순식간에 청년의 몸은 백선(白線)으로 변하며 속도를 빨리 했다. 몸을 움직 이며 나무그늘에 멈추어 서서 사방을 둘러보기도 했고 바위 뒤에 숨기도 하 는 그의 신법은 만리당혜 풍무영을 능가하고 있었다. 스슷! "이크!" 급히 몸을 날리던 청년은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청년의 눈에 보이 는 것은 수많은 무림인들이었다. 울긋불긋 일정하지 않은 옷을 입은 무인들 은 바로 오지회의 형제들과 검문산의 산적들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동안 무공을 익혔고 산적이라 지탄(指彈)을 받은 적이 있기 는 하지만 자부심만큼은 가장 드높은 산적들은 오지회 형제들의 지휘를 받 으며 점차 당가봉의 깊은 골짜기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이건 위험한 일이다." 사내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스슷! 비록 얼굴에는 경악이 물들고 입에서는 불안감이 물든 음성이 튀어 나왔지 만 달리는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청년은 은근슬쩍 무리의 뒤에 따라붙으며 보조(步調)를 맞추었다. 한참이 지나도 한 떼의 무리는 그가 같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거의 어깨를 맞대고 달리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하자 청년 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봐!" "왜?"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그의 옆에서 달리는 사내는 쳐다보기만 할뿐 전혀 의 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 이것 재미있는데......' 사내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의 옆에선 사십대의 사내는 전혀 관심이 없 다는 얼굴로 쉬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이봐!" "나, 말이야?"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사내는 고개를 들리며 대답했다. 너무도 갑자기 물어온 것이었기에 미처 아무 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어디 소속이야?" 사십대로 보이는 중년인이 물었다. "정보(情報)...... 정......보......" 청년은 엉겁결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당을 떠올렸다. '아차!' 사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급히 지면을 발로 찍으며 솟구쳐 올랐으나 아랫배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이 밀 려왔다. 써걱! 고기를 써는 듯한 소리는 뒤이어 들렸다. "큭!" 무너지는 사내의 뒤에서 검을 뽑아드는 사람은 무정환검 사무기였다. 손에 는 구불구불한 기형도가 들려있었는데 굴곡을 따라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 다. "야. 임마! 우리 오지회에 정보 어쩌고는 없어." 퍽! 발로 사내의 머리통을 걷어찬 무정환검의 몸이 다시 솟구치며 앞서 달려가 고 있는 오지회의 무리를 따라갔다. "쏴라!" 피피피피― 한소리 호통이 들리자 새털 같은 암기가 담붕비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새털 같은 암기는 소의 털보다도 가늘다는 우모침이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허공 중에 반짝이는 빛이 반사되는 것으로 보아 우모침 의 촉에는 독이 묻어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건방진 놈들...... 감히 암기를 날려." 쾅! 담붕비는 혈부를 휘두르며 허공에 막강한 잠력(潛力)을 뿜어내었다. 두 다 리를 땅에 굳건히 하며 단전의 힘을 끌어올리자 그의 전신을 두르고 있던 장삼이 바람넣은 공처럼 팽팽해졌다. 동시에 담붕비의 몸 전체가 금빛의 서 기로 물들었다. 근래 초풍비에게서 전수 받은 자전신공(紫電神功)이었다. 휘류류류― 금빛의 서기에 물든 담붕비의 팔이 허공에 들려지고 혈부가 붉은 그림자를 반사시키며 회오리를 일으켰다 동시 그를 향해 날아들던 암기가 반탄 되고 자전신공에서 피어오르는 회오리에 말려 하늘로 올라갔다. "엇! 암기가 되돌아오잖아." "피해라!" 휙휙휙! 반탄 되어진 암기가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암기를 날렸던 자들이 오히려 암기를 피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완벽이란 있을 수 없었다 '커흐흑!" "독에 당했어. 해약을 줘!" 자신들이 날린 암기에 당한 자들이 마구 구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어막 이 부서졌다. 목을 끌어안고 뒹굴던 흑의인의 얼굴이 곧 새파랗게 변해 갔 다. 지독한 독이었다. 스―팟! 담붕비의 혈부가 허공에서 둥그런 원을 그렸다. 혈부에서 붉은 강기가 일어 나는 듯하더니 숲과 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자들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 다. 그들의 앞에는 언제 몸을 이동시켰는지 담붕비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와르르르― 적궁의 유일한 부법이 펼쳐지자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담붕비는 초 풍비에게서 이 한 수의 도법을 전수 받고 혈부대형라는 이름을 얻었다. "케에에!" "무서운 부법이다. 피하라." 비명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담붕비의 부법은 일수에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의 주위에 남은 것은 잘리고 넘어진 나무들과 무너진 담, 이미 토막토막 끊어진 시체들뿐이었다. "어떤 놈이 감히 난동(亂動)을 피우느냐?" 갑자기 허공에서 분노에 찌든 음성이 울려 나오며 이층전각 지붕에서 하나 의 인형이 뛰어내렸다. 인형은 날렵한 신법으로 담붕비의 면전으로 하강(下降)했다. 있는 멋과 없 는 멋을 다 부리느라 뒷짐을 지고 얼굴에는 고리짝 눈을 부릅뜬 노인이었 다. 수염이 염소꼬리처럼 비비 꼬여 그리 호감이 가는 얼굴은 아니지만 눈에서 뿜어지는 힘이 그가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후후후, 나 말인가? 내가 그랬지." 담붕비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말했다. 누가 보아도 깡패 같은 놈이나 삼류건달이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건방진 놈, 네놈이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리겠구나." "그래, 세상에 혈부대형이 눈물을 흘릴 눈물이 있을까?" 추춤! 기고만장하던 노인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조금 전 거들먹거리고 허공을 내려오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누렇게 탈색된 얼굴이 보 였다. "오지회의 망나니라는 담붕비가 바로 너냐?" "그걸 알아보다니...... 네놈도 눈은 있구나." 담붕비는 거친 숨을 토하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혈부를 어깨 위로 올려 세 웠다. 태산을 누를 것 같은 기운이 몸에서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담붕비! 건방 떨지 마라. 을목세가의 삼대 호법 중 수좌(首座)인 나 천면 분인랑은 네놈의 이름에 겁을 먹지 않는다." 담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담붕비가 빙그레 웃었다.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담붕비는 힘을 쓰면 쓸수록 내공이 증가하는 혈기방장(血氣方丈)한 망나니였고 천면분인랑은 늙었다. 어떻게 보아도 과거의 천면분인랑이 아니었다. "우우!" 언제 따라왔는지 천면분인랑의 뒤에 도열하던 이십여 명의 을목세가 무인들 이 비명에 가까운 두려운 음성을 뿌렸다.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혈부대형이란 담붕비라는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없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가 한 자루의 혈부로 천하를 분탕질하고 돌아다녔다는 소문은 그들에게 공포로 다가오고 있었다.. "후후후후, 모두들 황천 갈 준비는 되었겠지?" 쿠우우우우― 담붕비의 몸에서 거친 강기가 피어올랐다. 몸에서 피어오른 자전신공이 황 금색을 벗어내며 진한 핏빛의 강기로 점차 변해갔다. "네놈은 오늘 여기에서 죽을 거다." 추―앙! 단붕비는 혈부를 거칠게 흔들었다. 파스스스스― 혈부에서 뿌려진 강기가 내력을 주입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방으로 흩어지며 가벼운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무려 오 척에 이르는 혈부는 서서히 허공으 로 들려졌다. "멈추어라! 혈부대형!" 천면분인랑이 급히 호통을 내질렀으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담붕비의 혈 부가 거칠게 허공을 찍어가고 있었다. "개소리 마라!" 담붕비는 거친 함성을 뿌리며 혈부에 힘을 배가 시켰다. 파스스승! 밤바바바바―바바밤! 혈부에서 혈광(血光)이 피어오르며 허공에 사선을 그었다. 어둡던 숲 속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혈부에서 피어오른 혈광으로 숲이 붉게 물들었다. "네놈이 먼저 죽을 것이다." 천면분인랑이 발악을 떨었다. 창! 뒤이어 천면분인랑의 뒤에서 눈을 빛내던 사오십 명의 무인들이 검을 뽑아 가슴에 세웠다. 여차하면 검을 휘두르고 달려들 태세였다. '건방진 놈들...... 나에게 검을 겨누었단 말이지?' 한순간, "우우우우!" 몸을 퉁기듯 달려가는 담붕비의 입에서 용이 승천할 때 내뱉을 것 같은 커 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혈부가 잡초를 베듯 마구 휘둘러졌다. 솨아아악― 그의 부법은 화살보다 빠른 신법을 동반한 끊어 치는 일타필살(一打必殺)의 최고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담붕비의 몸에서 수십 개의 혈부 그림 자가 밖으로 드러났다. 고오오오―고오오오― 사해를 쪼개고 태산을 뒤엎을 만한 것처럼 거대한 경력이 혈부에서 뿜어지 며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쾅! 미친 소가 꼬리에 붙은 불을 떼기 위해 날뛰듯 담붕비는 마구 날뛰었다. 순 시간에 사방은 혈부의 그림자에 가려져 그를 막으려는 자들의 모습이 보이 지 않게 되었다. "크악!" "카아아―아악!" 미처 혈부에서 뿌려진 기파를 피하지 못한 수명의 목이 퉁겨져 올라갔다. 그들은 나타나는 순간부터 담붕비라는 이름을 듣고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도 못하고 있었다. 엉겁결에 병기를 내밀기는 하지만 담붕비가 휘두르는 혈부에서 뿌려지는 강 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카카―캉! 혈부에서 뿜어진 기운이 날아들자 천면분인랑은 다급해졌다. 소문은 들었지 만 담붕비가 그토록 미친 듯 혈부를 휘두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었다. "이로다가는 제명대로 살지 못한다." 천면분인랑은 이를 악물고 가슴에 손을 넣어 한줄기 강기가 흐르는 채찍을 꺼내 들었다. 두 손을 모아 채찍을 든 천면분인랑은 온 힘으로 담붕비에게 쏘아보냈다. 캉! 혈부와 채찍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맑은 금속성을 뿌렸다. 채찍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비늘이 군데군데 달려있어 혈부를 막을 수 있었다. "흠! 제법이군." 혈부는 거친 기파가 강하고 탄력이 넘치는 채찍에 부딪치자 강한 반탄력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채찍은 혈부에 무수한 충돌을 일으켰고 한 뼘밖에 되 지 않는 길이로 도막도막 끊어져 내렸다. 아무리 내력이 숨겨져 있었고 철편이 용의 비늘처럼 심어져 있다고는 하나 단금(斷金)의 위력을 지닌 혈부를 막는다는 것은 공상으로나 가능한 것이었 다. "가랏!" 담붕비의 손이 또다시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쿠쿠쿠쿵! "쿠아아악!" 한순간에 난도분시(亂刀分屍)가 된 듯 피가 사방으로 퉁기며 천면분인랑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어지는 것이 모두의 눈에 보였다. 천면분인랑의 머리 가 목과 분리된 동체가 사오 장이나 퉁겨져 날아가 떨어졌다. 혈부에 다져지듯 연속으로 부딪친 머리는 처참하게 부서졌다. 눈 깜짝할 사 이에 머리가 수십 조각으로 분리가 되었다. 뒤이어 허공을 가득 덮는 피! 피는 우박처럼 쏟아졌다. 담붕비의 몸은 오래 전부터 피가 범벅이 되어 야차가 따로 없었다. 담붕비 는 조금도 변화 없이 혈부를 움켜쥐고 몸을 돌렸다. 붉은 피가 흐르는 얼굴 에서 눈이 밤 짐승의 눈에서 보이는 빛처럼 불을 뿜었다. 부르르르― 늘어섰던 흑의인들은 몸을 사정없이 떨었다.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인 줄 몰랐다는 듯 얼굴은 굳었고 입술은 비쩍 말라들어 갔다. 그러나 도주하려해도 오금이 떨어지지 않았다. "죽어라!" 콰아아아아― 혈부가 허공에 떠올랐다. 담붕비의 젖힌 손길에 마치 바람개비처럼 허공에서 맴을 돌던 혈부는 담붕 비가 미친 듯 달려가며 손을 내리긋자 을목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무지막지 한 힘으로 몰려갔다. "피해라!" 천면분인랑의 뒤를 늘 따라다니는 이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세상을 삼십 칠 년간 살아오며 담붕비처럼 무식하게 사람을 죽이는 자는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이크!" 자신의 몸으로 날아오는 혈부를 막기 위해 이몽은 검을 들어 가슴에 세웠 다. 헌데 이건 그가 원하지 않는 것으로 결말이 끌려갔다. 운명은 이몽의 목과 검, 모두를 원했던 모양이었다. 푸시시시시― 이몽이 허리에서 뽑아낸 검은 나름대로 매우 단단한 것이어서 웬만한 병가 와는 부딪쳐도 흠집 하나 남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날아든 혈부는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혈부와 부딪친 그의 검은 마치 수수깡처럼 부서져버리는 것이었다. "크아아악!" 아무런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이몽의 목은 이미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으므로...... 초풍비는 어렵지 않게 풍무영을 만날 수 있었다. 초풍비가 당가묘에 다가들 었을 때 풍무영은 지하(地下)로 이어진 비밀계단의 입구에 난 조그만 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초풍비가 다가서자 풍무영은 바람처럼 뛰어나왔다. 풍무영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팔 한쪽을 제외하고는 몸에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여러 차례의 위기를 넘긴 듯 옷이 여기저기 찢어져 속살이 드러났고 오른팔이 축 늘어진 것으로 보아 충격이 심한 것 같았다. "팔은 괜찮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근육(筋肉)이 끊어진 것 같기는 하지만 견딜 만 합니다. "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무영의 몸을 보아서는 그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 가 지나간 자리 뒤에 있게 하는 것이 풍무영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대형! 놈들은 당가묘의 지하에 건물을 지은 것 같습니다. 지하로 계속된 건물에 놈들이 숨어 있습니다." "지하?"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놈들이 이곳으로 출입하는 것으로 보아 여간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겨우 지하 삼층까지밖에 가보지 못했 습니다." 풍무영은 발을 들어 바닥을 찍었다. 텅! 바닥에서 공명성(空鳴聲)이 느껴졌다. 울려오는 소리는 바닥 아래가 빈 공 간이라는 것을 의미했고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23-2 페이지: 1/30 자료번호: 296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5 ─────────────────────────────────────── ■ 상견환 제23장-그가 오고 있다2 을목세가는 마지막 힘을 모아 당가묘에 이르는 길목에서도 가장 중요한 길 목을 지키고 있었다. 특히 단화연은 삼십 명의 식솔들을 이끌고 사부의 처 소(處所)에 이르는 삼층의 계단을 지키고 있었다. 각각의 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은 겉으로 보아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삼 층 누각으로 지어진 당가묘의 묘실(墓室) 뒤로 뻗은 계단은 당가 사람들도 모르는 곳이었다. 그 아래로 계단은 계속 뻗어있었고 무려 지하 구 층에 이 르는 긴 계단이었다. "가주!" 오랜 노복(奴僕)이며 단화연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던 일섬노인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일섬노인은 을목세가를 이끌어가고 있는 단화연이 노인과 손을 잡으려 할 때부터 반대를 했었다. 초란과 혼담(婚談)이 오고 갔을 때도 일섬노인은 반 대를 했었다. "소가주, 초란 낭자와의 혼담은 없던 것으로 하십시오." 초풍비와 초란이 유람선에서 을목세가의 제자들을 수장시켜 물고기의 밥이 되게 만들고 중원상단에 나타났을 때 일섬노인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단화연은 그의 조언(助言)을 무시하고 초풍비를 추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내가 중원상단의 그 늙은이에게 속아 이곳까지 오다니, 하늘도 무심(無心) 하구나.' 단화연은 찬바람이 살을 불어오는 느낌에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노려보았 다. 그곳 어디인가는 그가 죽이고 싶은 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물론, 초풍비도 그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단화연이 아니었다. 어쩌 면 그는 초풍비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계단의 입구에서 계단 위를 감시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섬노인의 말에 단화연은 눈에 불을 켰다. 이제 마지막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볍 게 울리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과연 숫자를 셀 수 없는 그림자들이 계단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단화연은 손을 들어올렸다. "쏴라―!" 슈슈슈슛― 파파파― 단화연의 명을 기다리고 있던 을목세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궁노를 놓았다. 길이가 석 자나 되는 강궁이 비스듬히 기울러진 계단 사이의 공간을 뚫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크아아악!" "캑!" 비명이 울린 것은 잠시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러나 수십 발의 강궁을 날 렸지만 들린 비명은 겨우 두세 개에 불과했다. '강자들이다.' 단화연의 눈썹이 역 팔자로 휘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일이 무언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무수한 인형이 쓰러져야 했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나타나는 자는 없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는 어둠뿐이었다. 계단의 측면 벽에 달려 있던 궁등들이 하나같 이 사그라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약삭빠른 놈들이구나." 단화연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계단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 저기!" 일섬노인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느새 일섬노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휘어진 면도(面刀)가 쥐어져 있었다. 과거 그의 이름 세 자를 알려주던 파면도(擺面刀)라는 병기였다. 계단의 반대편이었다. 희미한 궁등 아래 희끗거리는 물체가 천장을 스치듯 단화연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려가라." 콰아아아― 우렁찬 고함이 들리는가 싶더니 일섬노인이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커흑!" 일섬노인의 어깨는 붉은 피가 번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누 구라도 일섬노인을 그토록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무인은 없었다. 그런데도 믿을 수 없게도 일섬노인은 단 일수에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었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오지회가...... 벌써?" 단화연은 나타난 자들이 사천당문의 무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 을 가르며 사천당문의 문인들이 삼십여 명이나 몰려오고 있었다. '이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단화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큰 사내, 늙어 보이지만 힘이 넘치는 노인이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대도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되었다. "단화연! 그만 야욕을 버리고 나하고 한판 붙는 것이 어떤가." 나타난 자는 당일수였다. 그가 어떻게 대도를 들고 등뒤로 나타났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단화 연이 알리는 없는 일이지만 당일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퇴로를 열기로 다른 수뇌부들과 약정(約定)이 되어 있었다. 단화연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 이들만 막아낸다면 을목세가는 다시 한 번 힘 을 기를 수 있어. 여기서 무너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단화연은 벽력같이 외치며 몸을 퉁겨 계단 옆의 조그만 틈으로 날아갔다. 바닥에 뒹굴며 신음을 뿌리는 일섬노인의 안위(安危)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 다. "벽력탄을 던져라." "예." 충실하기만 한 을목세가의 제자들은 단화연의 명에 따라 일제히 벽력탄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만약을 위해 준비한 벽력탄은 숫자가 적지 않았다. 휙휙휙! 허공으로 날아간 벽력탄은 사천당문 제자들의 머리위로 정확하게 떨어져 내 렸다. "피하라." "벽력탄이다. 피하라." 어지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사천당문의 제자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흩어졌 다. 쾅― 콰콰쾅― 섬광(閃光)이 일고 자욱한 묵연(墨煙)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묵연 사이로 비틀거리는 당문제자들의 모습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벽에 걸려있던 궁등이 날아가 버려 어둠이 불러나 온 듯 다가왔고 메케한 묵연이 정적을 휘감았다. 천장에서는 깨어진 돌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크하하하! 사천당문도 별 것 아니다. 쓸어버려라." 동굴은 묵연이 가리기는 했지만 사람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희 미하기는 해도 천장에 빛을 발하는 구슬이 침침한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단화연은 허둥대는 사천당문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쾌재(快哉)를 불렀다. 오 랜 역사를 지닌 사천당문이 자신의 앞에서 갈팡질팡 허둥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듯한 환희가 밀려들었다. "쳐라!" 그는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바로 눈앞에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허둥거리고 있었다. * * * 사무기와 혁천련은 번개가 무색하게 빠른 신법으로 당가묘를 향해 몸을 움 직이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천당문의 고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신법이 너무도 빨라 미처 그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사무기가 신법마저 능숙(能熟)하니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쉽게 따 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혁천련은 몸이 작기는 하지만 비조처럼 빨라 사무기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멈추어라!" 일단의 무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미친놈들 같으니 감히 무영환검과 귀검수 앞에서 장난을 치려 하다니!" 사무기는 날 듯이 달려오는 을목세가 무인들을 향해 기형검을 거칠게 흔들 기 시작했다. 초식이고 내공이고 필요 없는 싸움이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죽여야하는 싸움에서 내공을 불러일으킬 사이가 어디 있 고 초식대로 무공을 시전할 생각이 나기나 하겠는가? 몸에 느껴지는 감각만 으로 다가오는 자들을 베고 죽이는 것뿐이었다. "와! 와!" 그들의 등뒤에서 갑자기 함성이 일며 한 떼의 무리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을목세가의 무인들이나 사무기나 모두 손을 멈 추었으나 곧 한눈에 그들이 누구인지 드러났다. 그들은 다른 누구와도 다른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짐승의 가죽을 걸친 자 도 있었고 상하(上下)가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검문산 산채의 산적들이었다. "크하하하, 산적 놈들이로구나." 을목세가의 선두에선 자는 얼굴이 칠흑처럼 검은 자였다. 손에는 두 자루의 손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수호전(水滸傳)에서 천하가 두렵지 않은 인물로 그리고 있는 흑선풍 이규를 연상하게 했다. 을목세가의 제자들은 그가 허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여덟 개의 당 중(堂中) 하나를 이끄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캇캇캇! 뒈져라." 휘이이이― 허공으로 몸을 띄운 사내는 사무기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찍어 내려왔다. 힘찬 고함도 빠지지 않았다.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될 사내였다. "마인불수참(魔人拂手斬)!" 슈우우― 우― 우우 사무기의 손에서 펼쳐지는 절기는 검으로 시전 하면 허공에 무수한 검의 그 림자가 생겨나는 듯한 모습으로 검에서 뿌려지는 예리함이 갈라져 상대의 몸을 감아버린다는 무서운 검초였다. 초풍비는 십 년 전의 어느 날 사무기에게 적궁의 무공 마인불수참을 전수해 주며 한 가지 초식만 완벽하게 익히면 검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펑! 콰지지지지! 허공에서 도끼와 마인불수참이 시전된 기형검이 충돌했다. 허공 가득 검의 그림자와 도끼의 모습이 어우러지더니 사무기의 기형도가 갑자기 수십 개로 갈라졌다. 스사아아아! 검이 갈라진 것은 착각이었다. 기형검은 허복의 얼굴을 향해 계속해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검이 바람을 가름과 동시 사람의 모발을 곤두서게 하는 파 공성이 울리고 한소리 호통이 터졌다. "감히 오지회에 도전하는 자들은 무영환검의 이름으로 징계하겠다!" 수십 자루로 갈라진 검의 그림자 중 하나가 갑자기 반전(反轉)을 일으키고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가더니 얼굴을 찔러오던 검이 방향을 틀어 도끼 를 휘두르는 허복의 어깨를 찍었다. "큭!" 비명을 토한 허복은 황급히 물러나며 오른손을 세워 사무기의 가슴을 찔렀 다. 사무기는 급히 몸을 뒤집으며 조공(爪功)을 피하기는 했으나 잡아놓은 먹이가 멀어져 버렸다. 쿵쿵쿵! 허복은 연거푸 일곱 걸음을 물러났다. 그의 입에서는 한 모금의 피가 쏟아 졌으며 밭은기침을 토했다. "커흑!" 허복은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잘린 어깨를 신속하게 찍어갔다. 혈도를 점하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던 것이 멈추었다. 그러나 혈도를 점하 고 지혈을 했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피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도 피는 감기 들린 아이의 콧물처럼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무기는 멈추지 않았다. 번개처럼 달려들어가며 널브러져 경악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허복의 심장을 향해 무찔러 갔다. 스슷! 살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기형도가 허복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커흐흐흑!"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리며 허복은 다시 땅으로 굴렀다. 허복은 심장에 찔린 검의 상처가 너무나 엄중(嚴重)했는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인가 꿈틀거리고 손가락이 움직였지만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은 아니었 다. 이미 죽었지만 신경이 살아있어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도끼를 휘두 르던 허복은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황천을 향해 혼이 떠나간 뒤였다. 그가 을목세가의 여덟 명 당주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사무기였 다. 쓰러진 허복의 주위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크아아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장검을 휘두르 는 혁천련의 손이 허공에 쾌적을 그릴 때마다 머리며 다리, 팔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들리니 비명이요 보이는 것은 붉은 피였다. 그들 모두는 일생에 볼 수 있는 피를 한번에 모두 보는 것 같았다. "놈들을 죽여라!" 산적들이 고함을 터트리며 격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은연중 사무기와 혁천련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진을 구성하며 다가드는 을목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거친 기파와 병장기의 힘을 쏟아내었다. 멀리서 먼동이 트려는지 그나마 흐릿하게 주위를 감싸던 안개가 서서히 걷 혀가고 있었다. * * * 노인은 벽면을 바라보며 거칠게 주먹을 후려쳤다. 콰직!― 팍! 여덟 개째의 동종이 깨지며 무수한 파편이 튀어날았다. 노인의 손은 부들부 들 떨리고 있었으나 두려움이라 볼 수는 없었고 차라리 분노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빠르군." 노인은 격한 행동과는 다르게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주위에 누가 있었다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먼 옛날의 과거지사(過去之 事)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꼈을 것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노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전을 거닐기 시작했다. 살랑 살랑 미풍(微風)이 부는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신선의 걸음걸이가 그러할지 몰랐다. "있느냐?" 노인은 허공을 보며 외쳤다. "대령하고 있습니다." 먼 저승에서 울리듯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마치 긴 관을 타고 들리는 목소 리 같았다. "얼마나 견디겠느냐?" "한 시진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모든 방어막이 깨지고 그들의 세력 앞에 을목세가가 굴복했습니다." "뭐라고?" 쾅! 우루루루루― 발을 구르자 대전이 심하게 요동을 일으켰다. 노인은 잠시 불안한 모습으로 방안을 서성이더니 태사의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영!" "대령했습니다. 하교(下敎)하십시오." 태사의에 주저앉은 노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영은 이미 을목세가에서 실질적으로 단화연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던 사 나이였다. 무영은 노인이 앉은 태사의 맡은 편, 서가가 서 있는 곳에 석상 처럼 서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누구냐?" "역시 예상하셨던 대로 초풍비인 것 같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맞물렸으며 눈에서는 차가운 한광이 줄기줄 기 쏟아져 나왔다. 쾅! "커흐흐흑!"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단화연은 비통한 소리를 지르며 다섯 걸 음이나 물러났다. 바닥에 깊은 족적(足跡)을 남기던 단화연은 겨우 걸음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이미 자리에 주저앉은 도우선은 입으로 튀어나오는 피를 연신 토해내며 심하게 상체를 흔들고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섰던 도우선은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몸을 엎드리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벽력탄이 터졌고 그 충격은 장 기(臟器)를 제자리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벽력탄이 터지는 충격을 미처 이겨내지 못한 상태에서 단화연의 장공에 격 타 당한 도우선은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의 곁에는 사천당문을 이끌었던 당일수가 갈가리 찢겨진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온몸에는 나무 쪼가리와 돌이 박혀 있었다. 단화연과 을목세가가 터트린 벽력탄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 보여주는 것 이었다. "형님! 괜찮아?" 언제 달려왔는지 담붕비가 도우선의 앞을 가로막으며 혈부를 꺼내 허공에 흔들며 방비(防備)를 취했다. 멀리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진을 만들어 상대하라." 아직도 벽력탄에서 뿌려진 자욱한 묵연으로 사방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담붕비는 우선 형제를 보호하기 위해 명령을 내렸고 달려오던 산적 들과 당문의 제자들은 황급하게 원진을 만들었다. 동일(同一)한 진식을 익히지 않은 무인들이 힘을 합칠 수 있는 방법은 유일 하게 원진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서로의 투로를 막아 위기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휙! 휙! 휙! 그들 나름대로 지휘자가 있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담붕비가 지휘자였다. 후이이이이― 벽력탄의 폭발로 지하로 이어지던 계단의 일부가 부서져 나가며 손바닥만큼 이 하늘을 벌리고 입을 열었다. 어느새 비가 그친 하늘이 뿌우연 안개로 보 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벽력탄이 피어 올린 묵연이 걷히기 시 작했다. 을목세가의 가솔들도 적지 않게 무너져 있었다. 삼십여 명의 제자 중 이미 이십여 명은 죽은 것 같아 보였다. 이십 명이 넘게 죽은 그들도 처참한 모 습이었다. 한결같이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너덜거려 살아있지만 살았다고 보기 어려운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들도 벽력탄에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러 곳에 잠복(潛伏)하고 있다 벽력탄에 죽은 자도 있었고 도우선의 장공에 맞아죽은 자들도 있었다. 혹 개중에는 사천당문의 제자에게 죽은 자도 있었다. "제길...... 을목세가에 이런 미치광이가 나오다니......" 담붕비는 놀란 음성을 터트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담붕비로서는 단 한번도 단화연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 다. 아무튼 그가 누구인지 모르던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앞에는 죽은 피를 울컥 울컥 토하며 가까스로 신형을 유지하고 서 있은 것처럼 보이는 단화연이 있었다. "형님을 돌보아라." "예" 휙휙휙! 서너 명의 산적들이 바삐 움직여 도우선을 에워쌌다. 그 곁으로 살아남은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에워쌌다. 졸지에 세 겹의 원진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도우선을 중심으로 원진이 구성된 것은 어찌 보면 도우선을 보호하고자 만 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원진을 만들어야 자신들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으으으으......" 단화연은 슬금슬금 뒷걸음으로 물러나기 바빴다. 단화연은 자신이 생각해도 무공이 담붕비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현듯 죽음의 공포가 다가왔다. 담붕비의 명성은 오지회의 형제들 중 최고였다. 그가 지닌 신력(神力) 때문이기도 했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투지(鬪志)와 상대를 죽일 때는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악명 때문이었다. '조금만 물러서면 살 수 있다. 담붕비! 네놈을 죽여주마.' 단화연은 물러서며 시간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 고 있었다. 그의 사부는 그에게 진시(辰時)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삼층을 지 켜주면 된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었다. "죽일 놈!" 담붕비는 한 발 한 발 단화연을 향해 다가갔다. 단화연은 비틀거리는 몸으 로 물러났다. 기묘한 대치였다. 살아남은 을목세가의 무인들도 기묘한 대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누구 하 나 끼여들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네놈은 내가 누구인지나 아느냐?" "어리석은 놈! 네놈이 누구이던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을목세가의 가주라는 것도 모르겠군.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 고......" "뭐야?" 담붕비는 매우 놀랐다. 그가 단화연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었다. 눈이 소의 눈망울 만하게 불거졌고 다리가 안정을 잃고 후들거렸다. 단화연이 두 렵다거나 무공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막상 단화연을 만나고 보니 분노가 끓어 오른 것이었다. "네놈이 단화연이었느냐? 이곳에서 만나다니 차라리 잘 되었다. 죽여주마!" 휙! "큭! 빌어먹을 놈!" 허공으로 날카로운 검기가 솟구쳤다고 느낀 순간 담붕비는 허벅지를 싸안으 며 무너졌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벽력탄의 묵연 속에서 솟구친 검이 담 붕비의 허벅지를 가른 것이었다. 츄리리리릿― 허벅지가 벌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담붕비는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물러섰 다. 상처를 입은 다리를 질질 끄는 그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크하하하! 어리석은 놈! 네놈이 머리가 둔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부스스스― 단화연의 목소리에 잠을 자고 있던 아침이 깨어 일어나고 있었다. 담붕비는 미처 대꾸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뼈가 드러나도록 깊은 상처 는 담붕비의 행동을 위축(萎縮)시키고 있었다. "치사한 놈!" 담붕비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으나 점점 힘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허 벅지를 통해 뿌려진 피가 그의 힘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허벅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담붕비의 옷을 검붉게 물들이고 그가 발을 끌어 당기고 있지만 피가 흥건히 배어 들었다. "후후후, 감히 하찮은 놈들이 을목세가를 넘보다니......" 단화연은 다시 비틀리는 웃음을 얼굴 만면에 짙게 깔며 검을 치켜들었다. 검은 담붕비의 가슴을 지향하고 있었다. 단화연은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담붕비의 얼굴 색이 변했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죽는다고 해서 목숨이 아까운 것도 아니었다. 애석할 뿐이었다. 형님을 돕 지 못하고 형제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애통(哀痛)했다. 담붕비는 이를 악물고 손을 들어 가슴으로 끌어올렸다. 전신의 힘을 모아 단 한번의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전신의 힘을 모았기 때문에 혈색이 변해버린 것이었다. "막아라! 형부대형을 도와라." 사천당문의 제자 중 누군가 피끓는 듯한 일갈이 터진 것은 바로 단화연이 검을 찌르기 위해 어깨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비록 지위가 없는 제자라 하더라도 마음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목소리 가 울리기 바쁘게 멍청한 얼굴로 단화연의 모습에 질려있던 사천당문의 제 자들과 산적들이 몸을 날려 무더기로 다가들었다. 휘리리리― "와!" "물러서지 마라!" 몸을 날린 산적들이 먼저 담붕비의 앞을 막아섰다. 단화연이 미친 듯 검을 휘둘러 서너 명의 산적들을 죽였으나 담붕비에 이르기에는 죽여야 할 자들 이 너무 많았다. "빌어먹을 놈들!" 산적들이 빠르게 담붕비와 도우선의 몸을 뒤로 옮겨갔다. 단화연은 잠시 바 뀌는 상황에 멈칫거렸다. 그사이에 도우선과 담붕비를 죽일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 사천당문의 제자들이 다시 산적들의 외곽으로 달려들어 하나의 무리를 만들 었다. 이제는 죽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오지회의 형제들을 죽이기 위해 서는 그들 모두를 죽여야 했다. "놈들을 죽여라!" 생각이 난 듯 단화연은 뒤를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의 뒤에는 을목세가의 마지막으로 남은 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렸 음에도 움직이는 제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몇 명의 제자들이 머뭇거리 는 표정으로 단화연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여라. 을목세가의 힘을 보여줘라!" 을목세가의 제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얼굴에 막연함이 떠오르고 숫자는 적었지만 그들은 을목세가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었다. 마지막 살아남은 제자들이기도 한 그들은 단화연이 직접 키운 고수들이기도 했다. "죽이자!" 을목세가의 제자들이 미친 듯 몸을 날려 산적들과 사천당문의 제자들을 베 어가기 시작했다. 사천당문의 제자들도 각기 병기를 꼬나들고 둥근 원을 유 지하며 미친 듯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천당의 제자들이 일제히 병기를 들고 맞섰으나 을목세가의 제자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기력(氣力)을 읽고 쓰러지는 것은 사천당 문의 제자들뿐이었다. "와!" "물러서지 마라. 끝까지 목숨으로 막아라." 고함을 치며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사천당문의 제자들이었지만 역부족이었 다. 그들은 점차 허공에 혈화를 그리며 쓰러져 갔고 곧 산채의 산적들이 오 지회의 형제들을 지키는 곳까지 을목세가의 제자들이 밀려들었다. "후후후, 감히 을목세가를 몰라보고 설치다니......" 담붕비를 제압한 단화연은 기고만장해서 코방귀를 뀌었다. 비록 벽력탄의 힘을 얻었다고는 하나 오지회의 형제들 중에서 두 명을 제압하고 나니 오지 회라해서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어라!" 갑자기 울려 퍼진 고함은 격전을 잠시 소강상태(小康狀態)로 만들었다. 모 두들 검을 겨눈 채 물러서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나의 인형이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머리에 패갑둔을 쓰고 손에는 반검이 들려있었다. 그는 초풍비였다. 단화연은 한눈에 그가 초풍비라는 것을 알아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좋지 않다. 놈을 막기로 한 제자들이 모두 무너졌다는 말인가? 더구 나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으로 보아 내력도 소모가 없었던 듯 보인 다.' 단화연의 가슴이 철렁하며 만장단애(萬丈斷崖)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겨룬 적은 없었지만 소문과 자신이 보냈던 수많은 살수들의 실패를 본 적이 있는 그였기에 초풍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는 단화연이었다. "네놈이 단화연이냐? "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서로 오 장의 대치를 이루자 초풍비는 성큼 앞으로 나서며 단화연에게 다가 서며 물었다. 사실 그들은 숙명(宿命)의 관계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단화연 이나 초풍비,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관계였다. "그, 그렇다." 단화연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어 다시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서며 단화연은 뒤를 둘러보았다. 그의 주위 에 보호막(保護幕)처럼 둘러섰던 을목세가의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서너 명의 제자들이 검을 늘어뜨린 채 초풍비를 노려보는 정도였 다. "이런, 개 같은...... 놈을 죽여라!" 단화연의 명을 들은 을목세가의 제자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 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한 꺼풀 덮여 있었다. 온몸이 피로 덮인 초풍비가 그 들의 눈에는 흉신악살(凶神惡殺)로 보였다. "덤비라니까!" 단화연이 고함을 질렀으나 세 명의 제자들은 다시 물러섰다. 단화연은 미칠 것 같았다. 초풍비보다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 제자들에 대한 분노가 단 전에서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단화연은 검을 들어 물러서는 제자의 안면에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사사삭! "크아악!" 갑작스러운 단화연의 일 검에 을목세가의 제자는 비명을 뿌리며 나동그라졌 다. 얼굴에 깊게 패인 검상(劍傷)은 제자를 일순간에 회복할 수 없는 지경 으로 몰고 갔다. 을목세가의 제자는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곧 땅바닥으로 얼굴을 처 박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미 붉은 피로 젖어버린 땅위로 다시 피 가 흘렀다. 지면에 붉은 피가 도랑을 만들었다. 자연의 섭리(攝理)대로 피가 낮은 곳을 따라 흘렀다. "이판사판이다. 죽어라!" 남아있던 두 명의 을목세가 제자들이 검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무모해 보이 는 공격이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주한다면 단화연의 손 에 죽음을 당할 것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차라리 초풍비의 손에 죽는 것 이 낫다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 초풍비의 반검이 허공을 갈랐다. 소리도 없었고 휘두르는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쉬릭! "크아아악!"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을목세가의 제자들이 피떡으로 변해 삼 장을 날아 가 계단 아래 널브러졌다. 그들이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 다. 추춤추춤! 단화연은 연신 뒤로 물러났다. "묻겠다. 네가 초란을 납치하고 뒤에서 수작(酬酌)을 부려 내 형제들을 궁 지로 몰았느냐?" "그렇다." "죽일 놈! 잔인하게 죽여주마!" 초풍비는 다시 세 걸음을 다가섰다. 그의 몸에서는 단화연을 찢어 죽이겠다 는 듯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단화연의 얼굴에 참혹함이 밀려들었다. '나 혼자 죽기는 아깝다.' 단화연은 발작적으로 얼굴을 들었다. "너는 속고 있다. 초풍비." 초풍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단화연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뿐이었으나 무언 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 거짓을 말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도 마음을 움직였 다. "무슨 소리냐? 단화연!" "나는 하수인(下手人)일 뿐이다. 이미 오래 전에 을목세가는 중원상단의 휘 하에 있었다." "그게......" "나를 이렇게 만든 자는 네 장인이었다. 그는 네 가문의 비밀도 알고 있다. 그가 나를 시켜 너와 네 형제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나는 그의 제자로 명을 따랐을 뿐이다." 단화연은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띄웠다. 그러나 그가 살기를 바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 혼자 죽기에는 너무도 아깝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초풍비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담담히 얼굴에 살기를 띄웠을 뿐이었 다. "그것만으로도 네놈은 죽을 이유가 충분하다." 초풍비가 반검을 들었다. 단화연도 체념의 표정을 띄우며 검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흥!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한다." 단화연은 마음이 굳어졌는지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빠르게 앞으로 달려들 었다. 죽음을 도외시한 공격이었다. 단화연의 검이 허공에서 수십 개로 갈라지는 착각(錯覺)을 일으키며 초풍비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초풍비는 느릿한 동작으로 반검을 횡으로 그었다. 너무나 단순한 동작이었 지만 그의 검에는 삼십여 번의 변화가 숨어있었다. 반검이 허공에서 바람에 떠는 풀잎처럼 마구 요동을 쳤다. 창! 사각! 창호지가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듯 스산한 소리가 울렸다. "큭!" 짧은 신음성이 바람을 갈랐다. 초풍비의 몸은 단화연의 몸을 타넘어 계단으 로 달려가고 있었다. 단화연의 몸은 검을 앞으로 내민 채 서 있었다. 그 순간이 끝이었다. "아우들은 이곳에서 몸을 치료하라. 누구도 들어오지 마라. 내가 모든 것을 종결짓도록 하겠다." 초풍비의 모습이 어두컴컴한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단화연은 아무 것도 들을 수도 없었고 들리지도 않았다. 볼 수도 없었고 보 이지도 않았다. 이미 혼백이 육신을 떠나가고 있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24 페이지: 1/41 자료번호: 297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5 ─────────────────────────────────────── ■ 상견환 제24장-장인을 뵈오이다 장방형(長方形)의 지하석실은 아름다움의 극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 다. 설사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의 침실도 석실을 따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사방의 벽에는 야명주로 수놓아진 별들이 마치 천공(天空)이 운행(運行)하 는 것 같았고 하늘의 정점에 해당하는 천장에는 주먹보다도 큰 야명주가 박 혀있었다. 석실은 넓었다. 사방 이십여 장은 충분히 될 것 같았으며 자연의 동굴을 다듬은 듯 약간의 울퉁불퉁함도 보였다. 석실의 중앙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전신에 매화가 그려진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잘 어울리 는 모습이었다. 흰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틀어 올려 일월관(日月冠)을 썼고 금차(金叉)가 가로질러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고 있어 한눈에 보아 무시할 수 없는 학문을 지닌 노년문사로 보였다. 노인은 뒷짐을 지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동굴을 거닐었다. "올게 오고 말았군. 이리도 빨리 올 것이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는데 너무 도 빨리 왔어." 노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했다. 한 시진전 부서지는 석벽의 동종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볼 때와는 또 다 른 모습이었다. 뚜벅뚜벅― 나직한 발자국소리가 들리며 야명주의 빛을 받으며 한 사나이가 들어섰다. 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멍한 얼굴로 천장의 야명주를 응시했다. 사나이는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노인은 불쑥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빨리 왔군." 여전히 무감각(無感覺)한 목소리이기는 했으나 너무나 많은 뜻이 담겨 있다 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무릎을 꿇었다. "장인(丈人)을 뵈오이다." 초풍비였다. 그는 정중하게 절을 했다. 비록 자신의 아내인 초란을 뺏어간 노인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노인은 장인이었기에 예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오느라 수고했네. 자네 몸에서는 진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군. 모두 내가 길러낸 자들의 몸에서 흘린 피 같아." "그렇습니다. 모두 내 손에 죽었지요." 초풍비도 담담하게 대꾸하고 몸을 일으켰다. 노인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허망해 보이기도 했고 달리 보면 아집(我執) 이 녹아 있는 억지 웃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겠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현문세가(玄門世家)의 후예라는 것을 알고 그토록 초란과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이야. 당시로서는 을목의 어린놈과 혼인을 하던 그건 별개의 일 이었으니까." 노인이 앞서 걸었다. 초풍비는 뒤이어 아무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노인은 느릿느릿 걸어 동굴의 한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초풍비도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자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기쁘네. 뇌룡탄에서 죽었다고 하기에 너무 나 허망한 생각이 들었지. 자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세 시진 전인데 자네는 벌써 왔군." "이곳까지 오는데 십 삼 년이 걸렸지요." "그렇군." 초풍비는 드디어 추성촌(秋星 )을 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이며 사랑을 반대했던 노인, 초풍비에게서 여인을 훔쳐간 노인. 노인은 생각보다 늙어 보였다. "내가 그 아이를 얻은 것이 마흔이 넘었을 때였네...... 너무 늙어 얻은 아 이라 정을 너무 많이 주었지. 그런데 내 말을 무시하고 사내의 손에 이끌려 사라질 줄은 몰랐지."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자네는 내 딸아이를 데리고 가지 못할 거야." "왜 그래야 됩니까? 저는 제 아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추성촌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가라는 뜻이 아니었다. 데려다 준다는 뜻은 더욱 아니었다. 그가 고 개를 끄덕인 것은 자신의 딸이 자신의 앞에 앉아 건방지게 입을 열고 있는 사내의 아내라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초풍비는 추성촌을 바라보았다. 초란과는 너무나 닮지 않았다. 아마도 초란의 어머니는 미인이었을 것 같았다. 추성촌을 닮았다면 초란은 어디에도 내놓지 못할 얼굴을 지닌 여인이 되었을 것이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초풍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추성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가문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하지요." 초풍비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추성촌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놀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각오도 되어 있었다. 설사 가문이 멸망을 했다해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연연하는 초풍비는 아니었다. 추성촌이 어떤 의도로 이야기를 하든 초풍비는 전연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네의 가문 현문세가는 내 손에 멸망했지." 초풍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결국은 추성촌이 이야기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문세가는 은자들의 집단이었다. 나는 그들이 한 장의 장보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장보도는 뇌룡탄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그곳에는 말로 할 수 없으리 만치 많은 보물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중원상단을 만들었을 때였고 무공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나는 천하제일의 상단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현문세가가 그 장보도를 서장에서 얻었다는 것 을 알았다. 나는 그들이 먼 여로(旅路)에서 돌아오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고 기다리다가 초원에서 죽였다. 그러나 현문세가의 하나뿐인 후손을 찾을 수 가 없었다. 내가 이끄는 무인들이 현문세가의 식솔들을 급습했을 때, 돌풍 (突風)이 일어났는데 그때 돌풍에 말려 들어갔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 이었다." "저를 어떻게 현문세가의 후손이라 생각했습니까?" 추성촌은 초풍비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러나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문을 열 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네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때문이다. 네가 끼고 있는 반지의 모 습은 양피지의 끝에 찍혀져 있던 것과 동일했다. 장보도에 반지의 문양이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현문세가의 문양이라는 것이다. 나는 네가 나타났을 때 을목세가의 무인들에게서 네가 장보도에 찍힌 문양과 똑같은 반지가 끼 워져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렇군요. 결국은 내가 살려 보내준 자들로 인해 이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는 말씀이군요." 초풍비는 어떻게 돌아간 사단(事端)인지 알 것 같았다. 초란을 처음 만났을 때 초풍비는 을목세가의 무인들 중 세 명을 살려보낸 적이 있었다. 그들을 죽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주했기 때문에 살려 보내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위를 알고 도주한 그들로 인해 을목세가가 다시 자신 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의도(意圖)도 섞여 있었던 것이지만 결국은 그의 배 려가 일을 어그러뜨렸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꼭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다. 네가 을목세가의 무인들을 모두 죽였 다면 나는 너를 나의 가문에 들였을 것이고 결국은 밝혀져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현문세가의 뿌리는 뽑아야 했으니까?" "장보도가 남궁세가에 흘러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궁금한 것이 많구나. 우리 중원상단이 을목세가를 억압하고 있으며 현문세가를 초토화 시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이지. 나는 보물을 모두 찾은 뒤에 그들에게 장보도가 흘러 들어가도록 하 고 소문을 내었다. 내 의도는 맞아 떨어져 남궁세가와 비류문은 모두 멸망 했지."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어찌된 일인지 안개 같았던 모든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앞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천산괴노의 손에 이끌려 적성의 후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추성촌 의 암계에 휘말린 까닭이었다. "어차피 두 가문은 양립할 수가 없는 것. 이제 내가 왜 자네를 그토록 반대 했는지 이해가 가는가?." "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초란만 돌려준다면 나는 돌아가겠습니 다." 사실이었다. 이미 멸망해 버린 현문세가의 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도 이제는 그만 수습(收拾)하고 싶었 다. 초풍비는 기이하도록 가라앉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수가 눈앞에 있었고 자신의 뿌리를 자른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불같은 분노가 전신을 감아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모든 것이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복수라는 것도 누군가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복수를 하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아무도 없는 세가를 위해 복수라는 것 은 의미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단란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초풍비로서는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안돼, 어차피 나와 자네의 운명이야. 그렇기 때문에 초란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야. 자네와 나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할 테니까." 초풍비는 아무 말 없이 추성촌을 바라보았다. 가슴에 끓어오르던 피가 싸늘 하게 식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토록 치밀한 사 람이라면 결코 암수를 쓰거나 도주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난 사람이더군. 내가 수십 년 동안 공을 들여온 모든 것을 날려 버렸더군." "그랬죠."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늘 사람은 끝이 좋아야 하는데 자네는 한 가지 실수를 했어." "실수." 초풍비가 반문을 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는 없었다. 이미 밖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있을 것 이었다. 아무리 강한 을목세가와 중원상단의 제자들이라 해도 오지회의 형 제들과 사천당문의 발아래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초풍비는 을목세가의 모든 제자들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確認)했고 단화연도 이미 죽인 후였다. '무언가 있군.' 초풍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성촌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자네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되었지." 스스슷― 기다렸다는 듯 동굴의 벽을 밀며 다섯 개의 신형이 나타났다. 동굴 벽에서 베어 나오듯 스며 나오는 다섯 명의 중년인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만큼 차가운 안광이 뿌렸다. 그들은 벽의 어느 공간에서 초풍비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싶었다. "괜찮은 친구들이로군요." "모두 환이라고 불리는 자들인데 내가 억만금(億萬金)을 들이고 심혈을 기 울여 만든 살인기계들이지. 그 동안 자네의 행적을 추적했던 자들도 사실은 모두 이들이야." 숫!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초풍비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움직인 것 같지 도 않았고 신법을 전개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눈앞에 다가와 있자 초풍비는 몸을 움찔했다. 강자를 보자 마음속에서는 맹렬(猛烈)한 투지가 타올랐다. "이들의 합벽을 뚫어야 그나마 나와 겨룰 수 있는 자격이 될 걸세. 만약 이 들이 만든 벽을 깨지 못한다면 나에게 도전할 기회도 없겠지." "기회?" "그렇다네. 이들은 그 동안 자네의 무공을 철저하게 연구했지. 쉽지는 않을 거야." 추성촌의 입에는 여전히 진한 미소가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마치 비웃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으며 달리 보면 애잔해 보이는 눈빛이기도 했다.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겨룬 후에 추성촌과 대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들은 각기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고 할 수 있지, 따라서 이들의 손에 죽어도 그다지 억울할 것은 없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추성촌이 물러섰다. 스스슷― 환이라 불린다는 다섯 명의 중년인들이 몸을 움직여 초풍비를 둥글게 에워 쌌다. 초풍비는 자신의 몸을 옥죄어오는 압박감을 느끼며 가슴을 펴려고 애 를 섰다. 어물거리다가는 숨도 쉬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도 생길 수 있기에 가급적 이면 가슴을 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아! 한 가지 알려주겠네. 이곳은 깊은 동굴이야. 만약 진기운용을 잘못 하면 모두 압사(壓死)해 버리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 조심하게." 추성춘은 멀찍이 물러나 마련되어 있던 자리에 편안하게 앉았다. 철저한 방 관자(傍觀者)의 모습이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찢고 싸워봐라 하는 듯한 표정을 보자 피가 머리끝까지 몰 렸으나 초풍비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깟 허튼 소리에 경망스럽게 움직일 내가 아니다.' 초풍비는 몸을 움직여 동굴광장(洞窟廣場)의 중앙으로 나갔다. 그를 둘러싼 오인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왔다. "이제 시작해 볼까?" "아무려나." 초풍비는 단전에 고여있던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에 유포시켰다. 공간이 협 소(狹小)한 관계로 같이 압사할 생각이 아니라면 강기를 적정량만 사용해야 했다. 아차 하는 순간이면 모두 날아갈 판이므로...... 휘류류류류― 서로의 몸에서 강기가 말려 올라왔다. 서로가 무시할 수 없는 고수들이었기 에 한 번의 실수는 곧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아는 초풍비로서는 신중(愼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차차창! 창! 다섯 명은 일제히 병기를 뽑았다. 한결같이 길이가 채 두 자가 되지 않는 짧은 도였는데 동굴같이 협소한 지역에서는 더없이 적당해 보였다. "난, 반검을 사용하겠소." 초풍비는 허리춤에서 반검을 뽑아 쥐었다. 그가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 았던 병기였다. 파아아아―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진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들 모두는 마음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올라있기에 마음에 작은 소용돌이만 일으켜도 서로의 강기가 부딪치는 탓에 진기가 마구 역류 (逆流)했다. "준비하시오. 난 반검을 뽑으면 멈추지 않는다오." 초풍비의 말에 다섯 명의 사내들은 얼굴이 잠시 굳는 듯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초풍비는 혼자고 자신들은 다섯이지만 최선을 다해야 겨우 무공에서 동수 (同數)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 었다. 먼저 진기를 발출한 사람은 초풍비였다. 반검으로 가슴을 가린 채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휘둘러 다섯줄기의 경력을 뿜어 다섯 명의 내력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과연 다섯 명은 주먹을 들어 날아드는 진기를 마주쳐왔다. 초풍비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며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만들어 뻗었다. 콰등! 초풍비의 손에서 뿜어진 진기는 동굴을 모두 무너뜨릴 것 같은 강맹한 진기 를 동반하고 토(土)의 방위를 점령한 환에게로 밀려갔다. 초풍비는 진기를 뿜어냄과 동시 빠르게 몸을 움츠렸다. '어차피 이렇게 싸우다가는 모두 진기가 고갈되어 죽는다. 그렇다면 진기를 유지하는 것이 승패의 지름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이 뻗어나가며 등이 비자 네 줄기의 강맹한 바람이 등으로 휘몰아쳐 왔다. 초풍비는 몸을 가볍게 뒤집으며 두 줄기의 강기를 피하고 쏘아져 들어오는 두 줄기의 강기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세 줄기의 강맹한 권풍이 초풍비의 머리에 부딪치려는 찰라, 그는 몸을 비 틀며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두 줄기 권풍은 그의 앞섶을 스치며 허공에서 충돌했다. 콰등! "커흑!" "컥!"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오며 세 명의 환은 연신 발 도장을 찍었다. 순식간에 오행의 방위 중 세 개의 방위가 흐트러졌다. 온전한 것은 목과 금의 방위뿐 이었다. 그들은 초풍비가 몸을 피할 줄 몰랐는지라 서로의 진기에 상처를 입은 꼴이 되고 말았다. "핫!" 초풍비는 나직한 음성을 터트리며 발로 허공을 찍어갔다. 넓은 공간 같으면 신법과 반검을 이용해 한순간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 마무리지을 수도 있으 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어딜!" 목의 방위에 있던 환이 급히 발을 들어 날아드는 초풍비의 다리를 막아갔 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발을 드는 순간 하체가 비었고 초풍비의 손이 번개 처럼 휘어져 갔다. 이어 반검이 허공에 반원을 그리고 허리를 쓸어갔다. 싹둑! "컥!" 털썩! 단말마에 무너지는 작은 소리! 고기를 써는 듯한 소리도 작았다. 너무도 갑 자기 일어난 일이라 나머지 네 명도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주먹과 발을 사용하던 초풍비가 갑자기 반검을 이용하여 목의 방위에 서 있 던 환을 베어버리자 잠시간 진이 심하게 흔들렸다. 쓰러진 환은 허리가 싹둑 잘려 상체와 하체가 각기 분리(分離)되어 나뉘어 져 있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후끈한 습기와 함께 밀려왔다. 짝짝! "매우 좋은 수법이다." 구경꾼처럼 의자에 앉아 싸움을 구경하던 추성촌이 박수를 쳤다. "으드드득, 감히 암수를 쓰다니......" 분노를 토하던 나머지 사인은 급격히 방향을 전환(轉換)했다. 동서로 가깝 게 만들고 남북으로 길게 만든 사각형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흠! 이번에는 사상진인가? 재미있군." 초풍비는 비웃으며 오른 주먹을 곧장 휘둘러 금의 위치를 부수어 갔다. 그 의 주먹은 철판도 부술 수 있는 힘이 숨어있어 누구라도 감히 맞받아 치기 가 어려웠다. 우루루루― 우레가 밀리는 듯한 소리가 주먹을 따라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금의 방위를 점하고 있던 환은 미처 몸을 움직여 피하지 못하고 두 손으로 모아 뒤집으 며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쾅!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이 일며 환은 다시 두 걸음을 물러났다. 바닥에 발이 끌렸지만 자국은 남지 않았다. 그러나 입가로 가는 핏줄기가 흘렀다. 아무리 공력이 강하다 해도 초풍비를 따를 수는 없었다. "목을 늘여라." 초풍비가 빠르게 다가들자 뒤에 있던 세 명의 환이 갑자기 공세(攻勢)를 전 환하여 짧은 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걸려들었다." 초풍비의 외침에 나머지 삼 인의 동작이 주춤해졌다. 철컹! 슈슈슈슛! 차창― 초풍비의 손이 들려 올라갔다고 여겨진 순간 머리에 쓰고 있던 패갑둔이 거 친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좁은 공간에서 솟아오른 패갑둔은 미처 환이 몸을 피하기도 전에 환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커흑!" 복부에 패갑둔이 박힌 환은 이를 길며 복부에 파고든 패갑둔을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잘리며 붉은 피가 패갑둔을 적셨다.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는 복 부에서 흘러나온 피와 서로 섞여 조개껍데기 같았던 패갑둔을 붉게 물들였 다. 환은 복부를 움켜쥐며 농부의 손에 잘린 벼처럼 머리를 숙였다. 이어 밑동 이 잘린 고목처럼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 지면을 붉게 물들였다. "우우, 무서운 놈." 남은 삼 인이 비명에 가까운 분노를 토했다. "어찌되었던 살아서 돌아갈 궁리는 어림도 없는 줄 알아라." 분노를 토하며 삼 인은 곳 삼재(三才)의 방위를 만들었다. "후후후, 이제 간격도 넓어졌고 하니 병기로 한바탕 하는 것이 어떤가? 빨 리 끝내자고! 동굴이 습기가 많아서 호흡이 곤란하구먼." 초풍비는 반검을 좌우로 흔들었다. 철커덩! "조심해라!" 쉬이잉― 두 자루의 도가 각기 목과 등허리를 가를 듯 휘어진 반원으로 공기를 가르 며 밀려 들어왔다. "핫!" 초풍비는 급히 한소리 외침을 뿌리며 반검을 사방으로 마구 휘둘렀다. 순식 간에 초풍비의 몸 주변에는 반검의 그림자로 물샐 틈 없는 방어막이 만들어 졌다. 방어막으로 그치지 않고 반검에서는 바닷바람이 가는 협곡을 통과하는 듯한 거친 바람소리가 흘렀다. 차차창! 연속 불꽃이 피어오르며 세 개의 병기가 퉁겨 올랐다. 그러한 기회를 놓칠 초풍비가 아니었다. "핫! 검강!" 바바바바― 초풍비의 얼굴에 가벼운 힘줄이 솟아올랐으나 잠시뿐이었다. 반검의 끝에 두 자를 넘을 것 같은 푸른 빛 무리가 만들어졌다. 검의 마지막이라는 검강 이었다. "피...... 피해!" "뇌룡탄에서...... 검강을 시전했다더니...... 모든 것이 사실이었어." 세 명의 환이 급한 마음에 몸을 비틀며 물러섰으나 삼재진을 지휘하는 인 (人)의 위치에서 기파를 쏟아내던 환은 피하기가 어려웠다. 초풍비와 제일 거리가 가깝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내공이 제일 강하 다는 것을 알고 있는 초풍비가 애초부터 그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스팟! 동굴에 파란 빗줄기가 허공을 날았다. "크헉!" 비명도 짧았다. 검강에 맞은 환의 가슴은 타서 재가 되어 있었다. 가슴을 뚫고 지나간 탓인 지 반경 일 척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넓은 구멍이 뚫려있었고 구멍이 뚫린 주변에는 심한 그을음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순시간에 살이 익어 버렸는지 피도 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이 타는 냄 새가 나거나 피비린내도 없었다. "으으으......" "검강이 사실이었다니......" 살아남은 두 명의 환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미 볼 것은 모두 다 본 셈이었다. 더 이상 겨루기도 어렵거니와 싸워도 이 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내공에서도 졌을 뿐만이 아니라 무공의 초식에서도 졌다. 그러나 추성촌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초풍비의 무공을 연구(硏究)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후후후, 열심히 보아 두시오. 어차피 지금 사용하는 무공의 파훼법(破毁 法)을 연구해 두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거요. 지금 사용하는 무공은 순수 한 적궁의 내공운용 뿐이니.' 스스스― 초풍비의 주위를 둘러싼 두 개의 살기가 춤을 추었다. 살아남은 두 명의 환 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초풍비를 제압해야 했다. 초풍비를 죽이거나 사로잡 으면 자신들은 살 수 있었다. 초풍비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아는 그들이기 에 죽으나 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초풍비를 죽여야 했다. "죽어라." 어디선가 열린 곳 없이 닫힌 공간이지만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기운이 느껴 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두 명의 환이 쓸어오는 도법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 으로 보아 초풍비가 만났던 환우천존 노궁탄에 비해 형편없는 무위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오인의 환 같으면 짐작하기는커녕 피하기 바빴을 테지만 이제 둘밖에 남지 않았으니 초풍비도 어렵지 않게 그들이 시전하는 도법을 볼 수 있었 다. 피아앗― 하나의 도세는 은은하지만 사방을 조여오는 도세였고 다른 하나의 도세는 마구 찢어발기는 독수리의 발톱 같은 살기가 넘치는 도세였다 창! 휘둘러 들어오던 도세가 초풍비의 반검에 가로 막혔다. 병기가 허공에서 부 딪치며 파랗다 못해 백색으로 보이는 불똥이 한 주먹이나 부어져 내렸다. 밤하늘에 은하수(銀河水)와 같은 모습으로 유려(流麗)해 보이기도 했다. '한 놈은 잡아야겠군.' 초풍비는 결심을 굳히자 상체를 앞으로 숙임과 동시 앞으로 전진하며 힘껏 반검을 그어 올렸다. 남해검문이라 불리는 해남파의 독문검공이었다. 오래 전 해남도에서 우연한 기회에 익힌 남해검문의 검공이 그에게서 찬란하게 시전 되고 있었다. 비연약파(飛燕弱波)라 불리는 남해십팔검(南海十八劍)의 일초는 허리 아래 에서 검을 찔러 들어가다 단전부근에서 좌에서 우측방향으로 휘어져 올라가 는 특이한 초식이었다. 한 번 시전하면 무려 스물한 번의 변화가 일어나 쉽게 방어하기가 어려웠 다. 소문에는 부상의 일도류가 비슷하다고 하는데 진의(眞意)는 파악되지 않았다. "으윽!" 환이 목으로 한 모금의 피를 파르르 뿌리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단전에서 부터 오른쪽 어깨까지 절단되었다는 것은 다시 병기를 잡을 수도, 내공을 축적(蓄積)할 수가 없을 것임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털썩! 환의 몸은 이미 널브러져 가야할 곳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푸들거리던 몸은 곧 잠잠해졌고 숨을 쉴 때마다 쿨럭 거리며 밀려나오던 피도 멈추었다. "웃!" 갑자기 명문혈로 찍어드는 다른 한 자루의 도를 피하기가 바빠졌다. 초풍비 는 등으로 찍어드는 진기를 겨드랑이로 스치게 하며 허공으로 비스듬히 몸 을 돌려 피했다. 공교롭게도 서로의 머리가 맞대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초풍비의 머리가 바 르게 회전했다. 초풍비의 손이 허공에 가벼운 궤적을 그렸다. 매우 짧은 일 검이었다. 허리 에서 반대편 허리로 옮겨가는 듯한 짧은 검기였지만 그것으로 환의 복부를 갈라버리는데는 충분했다.. "으으으...... 털썩!"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환은 복부를 감싸쥐며 무너졌다. 초풍비는 몸을 돌렸 다. 추성촌은 빙그레 웃는 낯으로 초풍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추스른 담붕비는 바람처럼 솟구치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무인들이 목이 잘리고 복부에서 내장을 뿌려 놓은 채 나뒹굴고 있었 다. 그들은 한결같이 을목세가와 중원상단의 무인들이었다. 순식간에 지하 육 층에 도착했다. 그의 뒤로도 수많은 무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담붕비가 도착한 층은 다른 것과 다르게 목조(木造)로 만들어진 삼 층의 누각이었다. 아마도 바위에 나무를 덧대어 만든 것 같았다. 중원상단 육 층의 계단 앞에는 현판(懸板)이 있었고 쓰여진 글씨는 생동감이 있었다. "이곳 지하요?" 뒤따라 달려온 사천당문의 당윤성이 거들었다. 그의 눈은 다른 때보다도 두 배는 붉었다. 평소에도 눈이 붉어 적안탈명이라는 당문 최고의 독공전수자(毒功傳受者)이 기는 했지만 사람의 몸에서 뿌려지는 피를 너무나 많이 보았음인지 핏발이 서 다른 때보다 붉었다. "내가 들어가 보겠어." 담붕비가 혈부를 바닥에 끌며 누각의 계단이 보이는 쪽으로 다가갔다.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사천당문과 검문산의 산적들이 다가왔다. 이미 어디에서도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나 함성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렇다고 해서 굉천뢰가 터지지도 않았다. 날이 새며 모든 것은 종결이 되어 있었다. 모여든 군웅은 모두 합쳐 삼 백 명을 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들이 살 아남은 전부라면 사천당문은 적어도 이 백 명의 제자를 또다시 잃어버린 셈 이었다. 오지회를 건드린 대가치고는 너무도 컸다.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그리 클 것이라고는 당협조차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내가 가겠소." 후이익! 담붕비가 혈부를 들어올리며 바닥을 박차고 비스듬히 삼 장을 뛰어 넘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멈추어라!" 날카로우나 살심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슷!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나며 담붕비의 앞을 막았다. 날렵한 몸집에 검은 옷을 입었으며 머리에는 초풍비와 색이나 크기가 같은 방갓을 쓰고 있었다. "형님 아니오?" 나타난 자는 풍무영이었다. 풍무영은 급박하게 소리치며 계단으로 날아와 담붕비를 막았다. 몸을 돌려 나타난 자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담붕비가 급히 신형을 멈추었다. "들어가지 마십시오." "왜지?" "형님의 명이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들어오지 말 것이며 들어오는 사람을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아군(我軍)이고 적이고 들어오는 자가 있다면 베라 하셨습니다." "형님 말이 사실이냐?" 성미 급한 담붕비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담붕비는 중인들을 돌아다보았다. 담붕비는 자신을 주시하는 중인들의 시선에 용기를 얻었다.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다시 한 번 시도를 했다. 풍무영은 물러서지 않고 손을 벌렸다. "들어오시지 말라했습니다. 아무리 아우라도 대형의 말을 거역하는 자는 형 님이 다시 보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담붕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풍무영이 그리도 강하게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초풍비의 신신당부가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풍무영은 초풍비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었 다. "이유나 알자?" "대형과 겨루는 자가 중원상단의 단주라 하십니다.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털썩! 담붕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초란이 중원상단의 단주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그가 돌아가는 상황을 놓칠 리가 없었다. 담붕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기랄...... 답답해서 미치겠네." 담붕비는 입에서 터져 나오는 욕설을 그만 그친다고 하더라도 급해지는 마 음은 참기가 어려웠다. "아우!" 몸에 입은 상처로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든 모습의 사무기가 통증(痛症)을 참 으며 담붕비에게 다가왔다. 사무기는 검문산의 산적들에게 부축된 모습이었 다. 사무기는 담붕비가 내려오지 말라했음에도 굳이 지하계단으로 내려오고 있 었다. 산적들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하고 내려온 것 같았다. 사무기 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몰골이 형편없기는 했지만 도우선과 혁천련도 계단을 내려와 담붕비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 뒤에는 사천당문의 제자들과 당협의 얼굴도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초췌(憔悴)한 모습이었다. "예, 형님." 담붕비가 몸을 일으키며 사무기의 부름에 대답했다. 사무기는 계단으로 다 가갔다. 슷! 풍무영의 몸이 빨랐다. 풍무영은 신속하게 계단의 입구를 막아서며 팔을 벌렸다. 사무기는 계단으 로 내려가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는지 풍무영의 앞에 서서 계단에 죽 늘어선 산적들과 당문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자, 여러분! 어쩔 수가 없으니 잠시 기다려 봅시다." 사무기가 돌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도우선이 다가왔다. 언제 잃어 버렸는지 오른쪽 팔은 보이지 않았고 다리는 심하게 절고 있었다. "아우. 나라도 내려가 보는 것이 어떨까?" "안됩니다. 대형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경우라도 내려오는 사람이 없도록 지키라고 하셨으니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들어갈 생각을 말아 주십시오" 풍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우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물러섰 다. * * * "과연 훌륭한 무공이야.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군. 초란이 눈은 제대로 박혔다고 해야겠지?"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초풍비도 알고 있었다. 딸을 걸고 빈정거리 는 장인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장인과 사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 었다. 마주앉은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초풍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끌어 탁자에 가까이 다가갔다. 석굴에는 그들 두 사람만이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인. 한 초식으로 끝내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무 길어지면 자네나 나나 모두 피곤해지니 한 초식으 로 끝내자고." "좋소이다." 휙! 스슷! 초풍비가 먼저 몸을 이동시켜 동굴의 중앙에 서자 추성촌이 날랜 신법으로 다가가 마주보고 섰다. 둘의 간격은 불과 일 장이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둘의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 마치 뭐라도 그들 사이에 내려놓는다면 그대 로 깨어져 버리거나 부서질 것 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나는 한 자루 검을 사용하겠네." 창! 날카로운 금속의 충돌 음향이 들리더니 추성촌은 길이가 두 자를 넘을 것으 로 보이는 소검(小劍)을 뽑았다. 팔 소매 어디인가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보였다. 허리나 등에 특별히 검을 지녔던 흔적은 없었다. "재미있구먼. 사위와 장인이 싸움박질을 해야 하다니...... 더구나 은원이 얽히고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니......"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건지 모를 조용한 소리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자신이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벌린 혈류(血流)이기도 했다. 창! 초풍비는 반검을 퉁겼다. 반검이 청명하게 울었다. 반검의 울음소리를 들은 초풍비의 몸이 가늘게 떨 렸다. "후후후! 오래 전 자네가 누구인지 알았던 처음, 그때 없애버렸다면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척! 말을 마친 추성촌은 검을 겨누었다. 파스스스― 말을 할 때는 그가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그다지 표시가 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병기를 들자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불퇴전(不退轉)의 기도가 눈에 보였다.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물론이지요. 약한 자와 싸우는 것, 그것처럼 흥미 없고 창피한 일은 흔하 지 않을 것입니다." 초풍비도 동의했다. 차랑! 초풍비도 반검을 겨누었다. "준비하게 단 일초씩이네." "물론이죠." 스스스 ― 스슷― 싯! 서로 겨눈 그들의 사이에서 질식할 듯한 강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누구도 섣불리 공격을 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의 실수는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기 에 누구도 먼저 공격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주르르르― 초풍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느끼기는 했으나 함부로 닦을 수가 없었다. 만약 병기에 힘이 실리지 않거나 땀을 닦다 팔 소매가 자신의 눈을 가리거 나 하면 모든 것은 한순간에 결정 나버리기 때문이었다.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추성촌도 등으로 흐르는 땀이 피부를 간질였다. 이마 에서도 굵은 땀방울이 사정없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태풍(颱風)의 힘이다. 움직여서는 안 된다.' 초풍비의 손에서도 땀이 질퍽해졌다. '느껴야 한다. 느끼지 못하면 모든 것은 끝장이 난다. 무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순간의 칼날 같은 틈이다. " 초풍비 눈을 가늘게 떴다. 추성촌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참을 수 없는 오한(惡寒)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손에 쥔 검을 떨지는 않았다. 한 번의 기회를 잡 기 위해서는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뚝! 한 방울의 땀이 초풍비의 눈으로 흘러들었다. 깜박! 초풍비는 눈에 들어간 땀을 밀어내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아무 것도 생각 하지 못한 사이에 일어난 작은 변화였다. 그러나 추성촌에게는 다시올 수 없는 기회였다. '틈이다.' 파라라라― "멸(滅)! 이월성신혈(移越星辰血)!" 푸하하하학― 추성촌의 몸이 동글게 말리는가 싶더니 한줄기 빛이 되어 초풍비의 몸을 뚫 고 들어왔다. 초풍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담담히 서 있었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도 초풍비는 바람처럼 머리를 쪼개고 있었다. 천산괴 노의 손에 이끌려 적성에서 익혔던 무공들이 머리를 쪼개고 파고드는 순간 초풍비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초풍비의 몸이 엷어졌다. 동시에 손에 들린 반검이 순식간에 수백 개로 갈라지는 착각이 들고 크기도 거대해졌다. 와르르르르― 지하의 누각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무슨 일이지?" 숨을 죽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오지회의 형제들과 산적들, 뿐만이 아니 라 사천당문의 제자들은 갑자기 지진(地震)이라도 난 듯한 흔들림에 황급히 전각 밖으로 몸을 날렸다. 와르르― 전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전각은 조각조 각 분해될 것처럼 흔들리고 여기저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전각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쩌―쩌적―쩍― 콰드드드― 전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피해라." "어서 이십 장 밖으로 물러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자." 휙! 무인들은 당가묘의 밖으로 퉁겨지듯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눈을 부릅뜨며 각자의 병기를 움켜쥔 채 전각을 둥글게 에워쌌다. 너무나 긴장되어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모두들 걱정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날은 밝아 있었다. 뜨거운 가을의 태양이 밤새 땀을 흘리고 붉은 피 에 멱감은 무인들의 등을 내리쬐었다. 밖으로 퉁겨져 나온 무인들은 갑작스 럽게 눈으로 파고드는 빛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쾅! 콰아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전각이 흔들리고 기왓장과 벽돌이 부서지며 두 개의 그 림자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짙은 혈색이 나는 진기를 흘리는 그림자와 허허 로운 기운을 지닌 그림자였다. 두 개의 그림자는 허공으로 오 장이나 솟구쳤다. 허허로운 기운과 붉은 기 운이 허공에서 엉키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쾅! 콰아아아아! "크악!" "헉!" 허공에서 다시 한 번 요란한 충돌이 일어났다고 생각된 순간 두 개의 그림 자는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솟구칠 때보다 빠르지는 않았지 만 무섭도록 빠른 속도였다. "저거, 떨어지는 거 아냐?" 누군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음성을 뿌렸다. 담붕비는 곁에 있는 사무기를 바라보았다. 사무기도 그와 동일한 생각인 듯 담붕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큰일 나겠지." "누구라도 별수 없을 거다." 휙! 두 사람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언제 몸을 띄웠는지 풍무영의 몸 이 빠르게 솟구치고 있었다. 담붕비의 몸도 허공으로 솟구쳤다. 두 사람의 품으로 한 명씩 떨어졌다. 휙―스스스― 두 사람은 각기 한 사람씩의 동체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는데 담붕비의 품 에 안긴 사람은 추성촌이었고, 풍무영의 품에 안긴 사람은 초풍비였다. 두 사람은 모두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 태는 같았다. 추성촌은 상처가 없는 듯 보였다. 다만 안색이 창백하고 몸이 나른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초풍비의 사태는 심각했다. 심장부근에 추성촌이 휘두른 검이 박혀있었고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를 사위에게로 옮겨주게나." 힘겨운 목소리가 들리자 담붕비는 추성촌을 안고 초풍비가 안겨있는 풍무영 에게로 다가갔다. 한 손으로 목이라도 졸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이 한이었다. 어찌되었던 그의 말은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를 죽 이는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고맙네! 자네도 오지회의 일원이로군." 자세히는 몰라도 담붕비를 안다는 표정이었다. 왠지 노인의 목소리에서 힘 이 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붕비와 풍무영의 거리가 불과 두 자 사이로 좁혀졌다. 그들 사이가 좁혀 지자 자연스럽게 초풍비와 추성촌의 사이가 좁혀졌다. "자네를 마지막으로 불러보겠네. 사위!" "예, 장인." "잘했군. 무서운 무공이었네." "장인도 그랬습니다. 가슴이 마구 끓어오르는군요." 초풍비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에 박힌 소검에서는 아직도 피 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초풍비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피식 하고 웃었다. "대단한 검학(劍學)! 아무튼 대단했어." "감사합니다." 곁에서 듣고 있는 중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초풍비의 가 슴에 박한 소검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슴에 박힌 소검은 치명적(致命的)이었다. 소검이 찔린 자리는 조금만 움 직여도 초풍비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을 수도 있는 위치였다. 초풍비의 말투도 어이가 없었다. 곧 죽을 사람은 자신인 것 같은데 이긴 사람 같은 말을 뱉어내고 있었기 때 문이다.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 모습이 바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초란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모두 보았을 거야. 자네가 나를 죽였으니 내 말대로 영원히 초란을 만날 수 없을 거야." 푸스스스스― 추성촌의 몸이 변화를 일으켰다. 머리부터 서서히 흩어지더니 급기야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다. 초풍비 가 연거푸 시전한 검강이 추성촌의 몸을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가 그나마 견디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내공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아!" 누군가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올랐다. "만세...... 초대협이 이겼다." 아우성이 당가산을 울리기 시작했다. <계 속>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 ━━━━━━━━━━━━━━━━━━━━━━━━━━━━━━━━━━━━━━━ 제 목:[종 린] 상견환 3편 종 페이지: 1/7 자료번호: 298 아이디:강호낭인 등록시간:1999/01/05 ─────────────────────────────────────── ■ 상견환 종장-상견환(相見歡) "당신은 왜 그에게 가지 않는 거지요?" 당가산의 다른 봉우리 당가묘가 한눈에 보이는 봉우리에 두 여인이 서 있었 다. 그녀들의 눈에는 초풍비와 추성촌이 자세히 보였다. 운명이 추초란이라 부르는 여인과 한때 그녀의 남편이었던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초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나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 가 없는지도 몰랐다. "남궁은미! 당신은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남편에게 달려가야 한다고?" "난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을 해봐요. 그는 나의 부친을 죽였어요. 부부(夫婦)라고는 하지만 원 수가 되었지요. 누가 이토록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비를 죽인 자와는 부부의 연을 맺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헤어지시겠어요?"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장담(壯談)을 할 수 없어요.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요.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이 사라질 시 간이 필요해요." 초란의 목소리는 어쩐지 비통하게 들렸다. 남궁은미는 초란이 생각보다는 담담하다고 느꼈다. "남궁은미. 당신은 어서 그에게 가 보도록 하세요. 그는 따듯한 여인이 필 요해요. 당신은 그에게 필요한 여자지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 모르겠어요" 남궁은미는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초란이라는 여인은 초풍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풍비는 눈을 들어 멀리 한곳을 바라보았다. 비록 충격으로 눈이 침침하기 는 했으나 내력을 끌어올리자 두 개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초란과 은미로군." 초풍비의 말을 알아들은 풍무영이 멀리 시선을 쫓았다. 그의 눈에도 작은 두 개의 점이 보였다. 자신의 눈에 점으로 보인다면 내력을 모은 초풍비는 얼굴까지도 보인다는 것을 풍무영은 알고 있었다. "모셔다드릴까요?" "아니." 초풍비가 미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온몸에 진기를 모두 쏘아낸 그는 한동안 풍무영의 팔에 의지해야 할 판이었다. 적어도 두 시진은 지나야 혼 자 거동(擧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요?" "자넨, 아무리 사랑하는 정인(情人)이지만 자신의 부친을 죽인 남자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못하지요."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렇지만 형님은 그녀를 사랑하잖아요." 풍무영이 강변(强辯)을 토했다.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초란의 소문은 이미 듣고 있던 풍무영이었다. 더욱이 초란은 초풍비가 그토록 사랑했던 오지회 의 동생들을 버리게 만들 수도 있었던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었는데...... 초풍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가자!" "형님!" 초풍비의 말에 풍무영은 하늘이 무너져라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풍무영이었다. "무영, 너는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상견환이라고?" "상견환이요?" "그래, 초란이 늘 암송하던 시였지. 뭐라 하더라.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만 날 수 없다고 하던가. 그 시에는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구구절 절(句句節節)이 녹아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이날이 올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시였을 거다." 초풍비의 말을 들은 풍무영은 몸을 돌렸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적지 않은 무인들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초란은 초풍비에게 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초풍비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가는 등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가끔 산과 들을 바라보고 굽이쳐 흐르는 장강에 시름을 달래기는 했지만 은 거를 하려 하지도 않았고 아우들을 떠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금불산! 아우들이 금불산에 지은 거대한 장원에서 그는 책을 읽고 남궁은미와 산책 을 하며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초랑! 정말로 초란 언니를 보러가지 않을 거예요." 남궁은미가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호면암(虎面岩)이라 불리는 높은 벼랑 위에 올라앉아 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발 아래는 짙푸른 장강의 물줄기가 용이 몸을 비틀 듯 용틀임을 하 며 흘러가고 있었다. "은미, 너는 이 시(詩)를 아느냐?" "무슨 시예요?" "아마도 이 시를 보면 내가 왜 초란을 잊으려 하는 것인지 알게 해 줄 것이 다." 초풍비는 입을 열어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과거 초란 이 즐겨 암송(暗 誦)하던 시였지만 남궁은미로서는 사연을 알지 못하는 시였다. 장강의 물과 함께 섞인 청아한 초풍비의 목소리가 흘렀다. 무언독상서루 (無言獨上西樓) 월여구 (月如鉤) 적막오동심원쇄청추 (寂寞梧桐深院鎖淸秋) 전불단, 이환란 (剪不斷, 理還亂) 시이추 (是離秋) 별시일반자미재심두 (別是一般滋味在心頭) 말없이 홀로 서루에 오르니 달은 고리같이 빛나고 오동나무숲은 적막한데 가을 하늘은 맑기만 하다 끊어도 안 끊기고, 거두어도 엉키는 이별의 쓰라림이여 가슴 끝 저리는 이별이어라. 하늘 저편에 황금빛 낙조가 저물고 있었다. <대미> 갈무리가 끝났습니다. [엔터]를 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