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반지 지은이: 루이제 린저 출판사: 혜진서관 성 게오르그 수도원 내가 다섯 살 난 꼬마였을 때, 우리집은 평화롭고 자그마한 한 도시에 자리잡 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은 그 작은 도시보다 평화롭고 따스했다. 그렇게 평화스럽게 지내던 어느 날, 파도처럼 출렁이는 잿빛 행렬이 넘쳐흐르 듯 거리를 지나갔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우리 군대란다. 정말 씩씩하고 훌륭해 보이지 않니?” 며칠 동안 그 행렬을 내가 살고 있던 그 자그마한 도시의 거리를 가득 매웠 다. 조용하고 평화스럽던 도시는 그때부터 갑자기 군화 소리, 거친 군가 소리, 차 소리에 뒤덮여 너무나 시끄럽게 변해버렸다. 어두운 밤조차도 그 소란을 잠재울 수 없었다. 어둠이 깔린 시간에도 어디를 가나 군인들이 불러대는 군가와 군용 트럭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끊이 지 않았다. 밤이면 아이들은 자기 방에 들어가 잠을 자도록 되어 있었지만, 뭔가 불안한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말하고 있는 ‘전쟁’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 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전쟁’은 우리 가족도 그 와중 속으로 끌어드렸다. 아버지가 군대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나서 어머니와 나는 그 평화롭고 자그마한 도시를 떠나야 했다. 즉 내 어린 시절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와 나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초라한 역에서 내렸다. 역사앞에서 수탉 한 마리가 홰를 치며 울고 있었다. 나는 처음 듣는 그 소리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빛바랜 낡은 우편 마차 한 대가 우리를 힐끔 보고는 몇 번이나 고개를 넘어 고요하고 텅 빈 가을의 풍 경 속으로 달아났다. 우리를 태울 마차가 왔다. 마차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길다란 골짜기가 마차 끝 에 매달렸고, 골짜기가 깊어감에 따라 주위는 더더욱 고요함 속으로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우리는 성 게오르그 수도원의 담과 탑이 보이는 고 개 위에 이르렀다. 마을은 노을에 싸여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곧 수도원의 아치 문을 지나 수도원 안뜰에 들어섰다. 주위는 너무나 적막해서 마치 전쟁의 불안한 기운이나 소란들은 먼 나라의 일같이 느껴졌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나는 그 아치 문을 들어설 때면 언제나 그때의 그런 적막함 을 느끼곤 했다. 그 고요함은 생에 대한 갈망과 땅 위의 모든 고뇌, 자신에 대한 초조감들을 깨끗이 씻어주는 신비롭고 영원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긴 여행에 지쳐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피곤 함도 잊은 채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그 높고 견고한 담에 넋을 빼앗겼다. 검은 제복을 입은 나이든 사람이 어머니와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때 수도원의 종이 울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성호를 긋고, 가슴 앞으로 두 손 을 가지런히 모았다. 어머니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엉겁결에 손을 모 으고 성스러운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사방에서 그 종소리들이 일제히 내게로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내 마음 안에서 어 떤 거대한 힘을 가진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종소리의 마지막 여운이 공중으로 흩어지고 그제서야 늙은 성직자는 우리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천주시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나는 주름이 깊게 패인 낯선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말씀하셨 다. “네 큰아버지 휄릭스씨란다.” 우리들은 아무말 없이 좁고 한적한 길을 지나 이슬이 내린 풀밭과 어둠이 스 며든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 정원을 지나가면서 난 갑자기 이 정원의 향기는 다른 정원에서는 맡을 수 없는 독특한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꼈다. 그건, 정말이지 경건한 향기였다. 나는 나중에 그 향기의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끼 낀 돌과 고목과 소 나무, 자로 잰 것처럼 깨끗이 손질되어 있는 관목과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울타 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너도밤나무와 쌉쌀한 주목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향기였다. 그후 몇 십 년이 지난 뒤, 나는 그 향기의 뒷편에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말이나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수백 년 동안 순결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지켜온 그런 곳에서만 있을 수 있는 숨결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는 그 정원을 그렇게까지 소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 다. 정원을 지나자 커다란 문 앞에서 카롤리느 아주머니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 다. 카롤리느 아주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었고 -그때도 물론 어렸지만- 지금은 큰아버지의 살림을 도와주고 계셨다. 그녀는 나를 안고 들어 가서는 이것저것 음식을 먹였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었고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눈을 떠보니 달빛이 온 방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방이 홀처럼 넓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방 한구석에는 책장과 테이블, 의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내게서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마치 낯선 풍경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들이 잔잔한 물 속에서 헤엄을 지는 것 같아 보였다. 마루 바닥이 너무 잘 닦여 있어서 가구들이 거기에 비쳐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을 나 는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호기심과 불안감에 싸인 눈으로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천정을 올려보다 가,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상한 풍경과 마주쳤다. 천정에 정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풀과 덩쿨이 서로 얽혀 있었 다. 그 사이로 노루, 사슴, 토끼들이 뛰어다니고, 꽃은 그들의 입가나 발 아래에 잘 어울리게 피어 있었다. 또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며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가만히 흔들리는 이상하고 불투명한 정원이 었다. 너무 조용하고 이상해서 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마술 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몰라 두 손으로 눈을 꼬옥 가렸다가 잠시 후에 혼을 떼고 다시 천정을 보았다. 정원은 그대로였다. 그 속의 사슴도 작은 새도 그대로 있었 다. 어느새 나는 잠이 들었고 새벽녘에 다시 눈을 떴다. 나는 전날 밤에 본 정원 이 생각나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사슴이 뛰어다니던 정원의 모습도 없었다.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돌로 만들어진 활처럼 굽은 천정뿐이었다. 나는 실망 했다. 그리고 어제 밤 내가 마술에 걸렸던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활모양의 천 정에 정원이 펼쳐지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살아 움직였던 것, 그건 분명히 마술 이었다. 어느날 밤 나는 그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이 달빛을 받아 높다란 창문을 통해 천정까지 스며든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안 후에도 그건 여전히 신비롭게만 보였다. 수도원에서 맞은 첫번째 아침에 나는 잠을 깬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어디 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음악은 노래도 아니고 풍 금소리나 미사곡도 아닌, 내가 전혀 모르는 독특한 소리였다. 들릴듯 말듯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반복되는 그 소리는 한 사람 의 목소리인가 하고 생각하면, 어느새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어우러지곤 했다. 그러나 그 음조만은 한결같았다. 새벽 바람소리나 멀리서 흐르는 물소리를 착 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음조는 매우 단조로왔다. 나는 그 소리를 정확히 듣기 위해서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소리가 조 금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는 대신, 나도 모르게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아침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는 내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힘이 있었다. 그 단조로운 소리가 그치고 나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창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창 밖은 바로 정원 이었다. 평평하고 넓게 펼쳐진 땅이 비탈을 이룬 작은 구릉으로 이어져 있고, 그 구릉 너머에는 다시 평평한 땅이 점점 낮아지면서 담 옆으로 펼쳐져 있었다. 담 너머 넓게 펼쳐진 들판과 하늘의 끝이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들판에 는 길도 집도 보이지 않았다. 집도 길도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넓은 들판에 풀과 나무뿐인 그런 경치는 태 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향긋한 냄새가 한없이 좋았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서 날이 밝을 때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뒷방으로 달 려가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가 난 듯이 소리를 높였다. “아니 무슨 일이니? 겨우 다섯시밖에 안됐는데, 다시 네 방으로 돌아가서 좀 더 자도록 해라!” 나는 풀이 죽어서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열어 놓은 탓에 커튼이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돛폭 같았다. 나는 왠지 초조해져서 누가 나를 불러 주기 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날 아침은 내게 있어서 온통 놀라운 일들뿐이었다. 나는 혼자 식당에 들어 갔다. 그곳이 식당인 줄은 정말 몰랐다. 활 모양의 천정은 너무 높아 보였고, 커다란 십자가와 어두운 빛의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림 속의 창백하고 엄숙한 얼굴들이 전부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워서 문지방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데,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큰아버지였다. 큰아버지는 이미 아침 식사를 끝내고 그곳에서 연도를 집도하고 계셨다. 나는 큰 아버지를 따라 “성총을 입으신 마리아시여...”라는 기도의 한 구절을 외웠 다. 그런데, 그 크고 엄숙한 성당에 비해 내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늘 잘 외고 있었던 구절인데 갑자기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나무라듯 한번 흘낏 눈을 던지더니 나 대신 그 나머지 구절을 외 웠다. 식탁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버터, 꿀, 우유, 작은 흰빵조 각, 설탕을 발라 구운 과자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 고급스럽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었지만, 난 그림 속의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이 음식과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했다. 아침 식사가 다 끝나자 큰아버지는 마을에 있는 환자들을 방문하러 나가셨고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싱싱한 야채를 뽑으러 가셨다. 난 몰래 집 밖으로 나와 수 도원 안을 이곳 저곳 둘러보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내 눈에 띈 것은 육중하고 검은 문이었다. 난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보았다. 그저 평범한 거실이었다. 다음 방도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을 뿐 다른 특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들은 정말 많았으나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방마다 내가 처음 맡아보는 어 떤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었고,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천정에는 정원이 있었 다. 그 정원은 어떤 때는 하얀빛으로, 또 어떤 때는 햇빛에 반사되어 일렁거렸 다. 창문으로 반사되어 비추는 빛은 그 각도에 따라 전신을 짜릿하게 하는 색조를 띠기도 했다. 방은 한결같이 넓었으며, 눈에 잡히지 않는 뭔가가 나를 억누르는 듯한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 많은 방을 일일이 조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한쪽 구석에 열쇠가 꽂힌 장 하나와 반들반들 윤이 나는 둥근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는 넓은 거실에 들어섰다. 호기심이 많았던 난, 열쇠가 꽂혀 있는 그 장 앞을 못본 척 하고 그대로 지나 칠 수가 없었다. 열쇠는 너무 크고 모가 나서 내 작은 손으로 움직이기는 힘들 었다. 그래도 난 있는 힘을 다해 열쇠를 돌려 마침내 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장을 열고 본 순간의 놀라움은 정말 잊을 수 없을 만큼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 장 속에는 신부들이 미사 때 사용하는 금잔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뿜으며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금잔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보석들이 박혀 있었으며, 가 장자리에는 금으로 만든 뱀이 입 안 가득히 금사자를 문 채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너무 너무 놀란 나머지 감히 그 성물에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외에 도 동화 속에 나오는 교황이나 왕이 입을 것 같은, 숭고함의 상징인 하얀 비단 천에 금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미사복도 있었다. 그 옆에는 두껍고, 빛바랜 가죽 뚜껑이 금으로 만든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이 상한 책이 한 권 있었다. 나는 글을 읽을 줄은 알았지만 그 책에 씌어진 글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읽 을 수가 없었다. 그 책에는 그림도 있었으나, 암만 자세히 봐도 무엇을 그린 건 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마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 다. 어쩌면 마술책일지도 몰랐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겁에 질려서 그 방을 뛰쳐나왔다.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아까 그 방보다 더 넓었고, 사방이 책들로 빽 빽히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 많은 책 중에 아무 책이나 한 권을 집어들었다. 책 뒷장에는 금박 장식이 붙어 있었는데, 다행히 무슨 글자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난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낸 <고해 신부를 위한 지침서>를 읽을 수는 없었다. 내 기억속에 있는 그 방의 냄새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 제단과 고서의 냄새, 빛바랜 양탄자와 먼지 냄새가 한데 섞여 뭔가 신성한 약속이 가득 넘치는 듯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훗날까지도 그때 그 냄새는 내 가슴에 뚜렷이 남아 있어서, 그 냄새를 다시 맡을 때면 항상 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요와 정숙과 예지의 엄숙함이 가슴에 솟구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음 방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 게 한 걸을 물러섰다. 그 방에는 나보다도 훨씬 큰 성상들이 회색 커튼에 가려 져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는 문 밖에 선채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고개만 빼꼼 안으로 디밀었다. 드디어 나의 왕성한 호기심이 두려움을 물리치고 어느새 조심조심 방 안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다행히 그 회색의 유령들은 나를 밖으로 내쫓을 마음은 없 었던 것 같았다. 나는 단단히 결심하듯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재빨리 커튼을 들어올리고 들여다보았다. 성상은 연한 하늘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과 성상이 나무로 만 들어져 있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나는 안심하고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부인이 들고 있는 잔 속에서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도 있었고, 불타고 있 는 작은 집에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끼얹으려고 물통을 들고 있는 남자상은 어린 이들의 성자인 니콜라우스 대주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한 여인이 마차 바퀴에 무릎을 기대고 있는 것 같은 성상도 보였 다. 또 무섭게 이를 드러내고 꼬리를 휘두르며 기세좋게 달려드는 짐승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전사의 성상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커튼을 활짝 젖히고 눈부신 햇빛 아래로 성상들의 모습을 드러내놓았다. 난 그 말 못하는 성상들 사이에 서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했다. 다시 커튼을 가리자마자 갑자기 뭔지 모를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마치 쫓 기듯이 두번 다시 뒤도 뒤돌아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다음으로 내가 간 방은 이제까지 본 방 중에서 가장 환하고 넓은 방이었다. 그 방은 완전히 텅빈 모습이었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 발이 바닥에 깔린 돌에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곤 했다. 나는 바닥에 깔린 돌들이 일정한 무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곧 알았다. 그 무늬를 따라 하나하나 돌을 건너 뛸 수가 있었고, 또 방 가장자리의 줄을 따라 돌 수도 있어서 아주 재미있었다. 그 줄은 점점 안으로 좁혀지면서 방 한 가운데에서 끝나 있었는데 나는 꼭 달 팽이 무늬 같다고 생각했다. 그 방의 돌은 둥그렇게 깔려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람들에게 춤을 추라 고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단순한 놀이를 비롯해서 나는 더 복잡하고 재미있는 놀이를 많이 생각 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눈을 감고 이쪽 끝에서 맞은 편 구석을 찾아가는 놀이, 또 중앙의 달팽이 무늬를 쭈욱 따라 바깥쪽으로 돌아나오는 놀이 등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는 중앙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맴을 돌며 춤 을 추는 것이었는데, 그건 성당같이 엄숙하고 경건한 장소에서 춤을 추며 느끼 는 일종의 죄책감을 비롯하여 온갖 미묘하고 짜릿한 기분을 다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그 놀이에 싫증이 나서 길다란 창가로 다가갔다. 그 창문은 이상 하게 서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쪽은 동쪽으로, 한쪽은 남으로. 그 창에서는 넓게 펼쳐져 있는 야채밭을 볼 수 있었다. 수도원의 여자들이 하 얀 머리 수건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중 몇 사람은 굉장히 큰 황금빛 호박을 마차에까지 나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몇년 동안이나 나의 유일한 소망은 그들처럼 수도원에서 일하는 여자가 되어 밭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었다. 잘 익어 황금빛으로 물든 호박이 있는 곳, 그곳의 평화롭고 고요함속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 함께 일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인으로 말이다. 그 방에서 나오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너무 긴 복도여서 난 마치 산이라도 오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빛바랜 천정에는 둥그런 모양의 그림들이 조각되어 있었고, 그 그림 옆에는 알아볼 수도 없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 중 한 그림이 눈에 띄었다. 붉은색의 그림이었는데,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고 그 나무 아래에 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끝에는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글씨가 보였다. <그림자만이 완벽하게 볼 수 있노라!> 하지만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계속 입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그 말에 가 락을 붙여보았다. 꽤 근사하게 들렸다. 며칠동안 난 그 글귀를 계속 중얼거리면서 다녔다. “그렇지만!”이라고 중얼거리는 내 버릇에 모두들 관심을 가져 주었다. 큰아 버지나 아주머니, 어머니 모두가 그 말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그날 오후 큰아버지는 수도원을 하나하나 구경시켜 주겠다면서 내 손을 이끄 셨다. 난 큰아버지께 벌써 다 구경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책이 많이 있는 방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이 방은 그림도 없이 책만 잔뜩 있단다.” 라고 말씀하셨다. 큰아버지는 내가 바로 그 책들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 많은 방들이 저마다 근사하고 멋진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큰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도서실, 베네딕트 방, 그리고 막달라 방, 수렵실, 영주의 방 등등. 옛날에는 그 방안에 멋있는 테이블과 책장, 의자, 훌륭한 그림들이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그 런데 수백년 전에 야만인들이 침입해서 불을 지르고 멋있고 훌륭한 가구와 그림 들을 약탈해 갔다는 것이다. 동틀 무렵 창가에 기대서서 바라보았던 그 정원에도 가 보았다. 큰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잡목 숲속에 그때까지 남아있던 무너진 담벼락이나 쓰러진 돌기둥 이며 움푹 패인 돌층계 등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었다. 돌층계는 평평한 잔디밭으로부터 구릉으로 연결되다가 잡목 숲에서 끊어지기 도 하고 다시 굴 안으로 이어져 있기도 했다. 큰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그 굴은 몇 시간은 걸어야 할 만큼 깊은 굴로 끝이 수도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입구가 막혀 그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나는 십자로의 자취를 살펴보았다. 잡목과 딸기 덩쿨 그리고 고사 리 같은 식물들이 무성한 곳에 십자로가 있었는데 거의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 로 망가져 있었다. 우리는 바위에서 쉬었다. 그 황폐한 곳, 무너진 돌기둥들과 벽들만이 남은 그 곳이 예전에는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대문과 교회, 그리고 제단과 종탑이 자리잡 았던 곳이었단다. 큰아버지는 믿음이 독실한 어느 왕이 1천 년 전에 이 성당을 세웠다고 하셨 다. 1천 년이란 시간이 그때의 내겐 어마어마한 무게로 다가왔다. 건립 이후 헤아릴 수 없는 외적의 침략과 유랑민들의 광폭한 약탈, 그리고 몇 차례의 커다란 화재, 또 인간의 업적을 무심히 앗아가 버리는 세월 탓에 지금처 럼 쇠락하고 말았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성당의 그 웅장하고 영광스러웠던 모습은 이제 무너진 벽면과 주춧돌의 흔적 으로만 남고, 원래 부수적인 건물에 불과했던 지금의 수도원만이 옛날의 맥을 가까스로 보존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말씀을 마치셨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 귀에는 비바람에 어스러진 바위가 모래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또렷이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끊임없이 그리고 서 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게 얼마나 묘한 기분이 었던지! 큰아버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주 잘 익은 산딸기가 눈에 띄었다. 나는 딸기를 따서 먹었다. 풀밭 중앙으로 짤스부르크 산배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껍질이 푸르스름한 게 아직 설 익어 보였다. 그런데도 난 그 배를 한 알 따서 베어물었다.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달고 파삭파삭했다. 나는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모래알이 흩날리는 소리라든지, 세월의 덧없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밤에 피는 백합 성탄절과 부활절, 니콜라우스 축제일은 아이들의 명절이나 마찬가지다. 어린 마음에 난 크리스마스 트리의 향내와 휘황한 불빛에 취해 마냥 즐거웠 다. 니콜라우스 축제일에는 땅거미가 질 무렵의 아늑한 어둠이 좋았고 봄기운이 완연한 정원에서 알록달록 물들인 달걀을 찾는 일이 좋았다. 그러나 그 어느것도 여름이 시작될 즈음에 있는 성체 축일만큼 내 마음을 앗 아가지는 못했다. 그날은 선물을 주고받는 일도 없고 아이들을 위한 축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 이들의 관심을 별반 끌지는 않는 날이었다. 그날은 하나님을 위한 축제이며 <제단의 성체>속에서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 리기 위한 날이라고 학교 교리문답시간에 배웠다. <성체>는 얇은 천에 싸여진 채 신부가 보관하는 번쩍이는 황금상자 속에 모 셔져 있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다. 그리고 나는 결코 그 사실에 의심을 품 은 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토록 자그마한 상자 속 빵조각 안에 몸을 숨기고 계시다는 사실을 추호의 의혹도 없이 당연스레 여겼다. 그런 변신이야 동화 속에서도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개구리가 왕이 된다든지, 죽은 사람의 뼈가 피리로 둔갑한다든지. 내 가까이 있는 아주 평범한 것들, 풀과 나무, 동물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다. 무심코 들고 있던 나뭇가지가 불현듯 딱정벌레로 변해서 달아날 수도 있고, 어둠 속에서 마주친 어떤 사나이가 갑자기 굳어져서 버드나무가 된다고 해서 이 상할 것은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형체란 있을 수 없으며, 우주의 삼라만상은 갖가지 모양 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 단순한 것은 아무것도 없 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런 변화는 위태로운 반면 짜릿한 전율을 주기도 한다. 나는 조금씩 그런 생각에 침잠해 가다가 급기야 나 자신의 모습까지도 변화시 킬 수 있는 마술을 배우고 싶어졌다. 물속에서는 물고기가, 숲에서는 넓은 잎을 팔랑이는 활엽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 요술이 가능할진대 하나님이 빵조각으로 변한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 기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생각으로 인해 나는 성체 축일에는 상당히 경건해질 수 있었다. 축일 이틀 전에 강 언덕으로부터 도끼소리가 들려오면서 비로소 축제는 시작 된다. 백작나무 묘목들을 옮겨다 길가와 주택가에 심었다. 축일 전날 밤이면 나무로 높게 쌓은 제단이 들판 네 군데에 세워지고 수도원 뜰은 어느 때보다도 더 활기를 띠게 된다. 수녀들은 정문 앞에 세워지는 제단에 못질을 하고 길을 쓸고 길가에 자란 잡 초를 뽑았으며, 생나무 울타리 가지들을 잘라주는 등 손질을 했다. 분주하게 일 에 여념이 없는 수녀들의 모습은 마치 유리벽 저쪽에서 일하는 듯 매우 조용했 다. 꼬마들도 보통 때와 달리 희한하고 우스운 분장을 하고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들은 똑바로 세워 묶은 머리카락에다 버터나 맥주를 발라 뻣뻣하게 만들었다. 축일 아침에 머리를 풀어 얌전히 빗으면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이집트의 조각이나 되는 듯 엄숙하고 진 지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머리는 워낙에 심한 곱슬머리였기 때문 이다. 나는 내 머리카락이 대단히 마음에 안들었다. 그날만은 다른 아이들처럼 그런 식으로 머리를 묶어 그 고통을 함께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봉사라고 생각되었으니까. 축일을 하루 앞둔 날 마음 처녀들은 둘씩 짝을 지어 들판으로 나갔다. 행렬을 지어 걸을 때 길가에 뿌릴 꽃을 따 모으기 위해서였다. 사루비아, 국화, 크로바, 잎이 떨어진 장미 등등. 나는 그 마을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그 일에 참여할 수가 없었 다. 그저 창가에 기대서서 마을 처녀들이 들판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 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즐거울 수 있었다. 그것은 나 나름 대로 그 의식에 참여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축일 아침 종탑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나는 잠을 깼다. 사실 새벽 4시 밖에 안 된 시간이었으므로 아침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자리에 서 일어나 이불을 둘러쓴 채 추위에 떨며 경건한 마음으로 창 밖을 주시하고 있 었다. 이른 새벽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황홀했다. 수녀들은 벌써부터 잠자리에서 일 어나 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갓 베어낸 풀을 길위에 펼치고 그 위에 붉 은 양탄자를 덮었다. 수녀 중 몇 사람은 장미와 참붓꽃을 꽃밭에서 잘라냈다. 촉촉히 이슬을 머금 은 탐스런 꽃송이들이었다. 젊은 수사들은 덤불 속에서 짙은 향기를 뿜는 쟈스 민을 가지째 꺾고 있었다. 멀리 마을에서 아침을 부르는 닭들의 소리가 들려왔 다. 그들도 그날만큼은 먹이에 욕심을 내는 수탉들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보다 먼저 솟아오르는 아침을 목격하려는 것이었다. 하늘은 차츰 푸른빛으로 옅어졌 고 새들은 어느새 노래를 시작하고 있었다. 드디어 햇살이 산 위로 하얗게 내리뻗치는 아침이 되었다. 그처럼 유리같이 차고 투명한 새벽의 마술을 피부로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급히 성당으로 들어간 수녀들은 아침 성가를 시작했다. 주님의 뜻대로 하루가 바쳐질 수 있도록 간구 하는 성스런 합창까지 듣게 되어 나는 무척 유쾌했다. 그런데 조금씩 그 축일에 대한 불신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마도 내가 성체 축 일에 대한 슬픈 기억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나는 일곱 살짜리 꼬마였다. 그때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어 울려 그 행렬의 선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행렬의 끝자락에서 기도문을 중얼대 는 아낙네들 사이에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하게 앞줄을 차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행렬의 뒷부분은 즐거운 축제 분위기도 없이 그저 혼잡스러울 뿐이었다. 거기 서는 나보다 어린 꼬맹이들이 멋대로 떠들어대거나 뭐라고 칭얼대거나, 아니면 울다가 지쳐 어머니의 품안에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꾸만 옆길로 새려다가 어머니께 야단을 맞고서야 겨우 제자리로 돌아오는 등 뒤죽박죽이었 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지나 푹 적시는 꼬마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나 자신을 거듭 위로한 후에야 마음 이 편해졌다. 주위의 번잡스러움을 외면하고, 들고 있는 꽃다발의 향기에 애써 몰두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꼭 1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일곱 살이 되고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이번 행진 때에는 들꽃다발이 골칫거리였다. 축일 전야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꽃다발에 쓸 꽃을 장만하기 위해 정원으로 나갔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해 꽃을 골랐다. 어머니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울 뿐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마 음 속에도, 당신의 딸이 다른 어느 집 자식보다도 훨씬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다 발을 들어야 한다는 다분히 세속적인 허영심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부인할 순 없 었다. 따라서 물망초는 너무 흔하다고 제껴졌고 비비추꽃은 너무 활짝 피어 줄기가 시들어 있었으며 언제나 매혹적이었던 계란풀은 그해에는 왠지 별로였다. 또한 장미는 잎이 떨어지기 쉽다는 이유로 뺐다. 다만 붓꽃 앞에서는 우리 둘 다 꽤 오랫동안 주춤거렸다. 자홍빛으로 활짝 핀 꽃들은 정말로 아름다왔다. 헌대 어머니는 가위를 줄기에 대시고는, 늪지에서 자 라는 식물인데 손에 들고 다니면 수분이 모자라서 금새 시들어버릴 거라면서 망 설였다. 나는 문득 커다란 레이지 꽃으로 결정해버렸다. 어머니가 꽃밭을 샅샅이 뒤져 서 찾아낸 반쯤 핀 백합처럼 고고하지는 않아도 내겐 강한 힘이 느껴졌기 때문 이다. 어머니는 겨우 찾아낸 백합 앞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셨다. “이 백합이 어떻겠니?”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어머니는 번쩍이는 가위를 가지로 가져가셨다. 나는 놀라서 소릴 질렀다. “아녜요, 그건 싫어요!” 이미 가지는 잘려지고 있었다. “왜 그러니?” 어머니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물으셨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갑자기 서글픔이 몰려왔다. 그저 막연히 느껴지는 쓸쓸 함 같은.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커다란 꽃병에 백합을 꽂아 수렵실로 가져갔다. 그곳이 가장 서늘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났다. 꿈은 깨어남과 동시에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대신 밀물처럼 밀려드는 그 까닭모를 슬픔의 정체를 밝힐 수 없어 내 마음은 더욱 어지럽고 무거웠다. 꿈 속에서 울었는데 깨어보니 실제로 눈물이 뺨을 적시고 있었다. 낮에 혹시 나쁜 짓을 저지른 게 아닌가, 무엇을 깨뜨리거나 잃어버리고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 따져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때 내가 다섯 살 정도만 나이를 더 먹었어도 그와 비슷한 일을 여러번 경험 해 보고 그 정체불명의 슬픔이 앞으로 닥쳐올 일의 한 징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련만. 분명 그 꿈은 곧 내가 부딪히게 될 쓰디쓴 눈물을 예고하고 있었다. 차츰 슬 픔이 짙게 쌓여지다가 확실하게 굳어져 가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애써 낮에 있었던 일을 더듬다가 백합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곧장 자리를 털 고 일어나 구두를 신고 머플러까지 감싸고 방을 나섰다.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가 컸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들 은 사람은 없었다. 1백미터가 넘는 긴 복도를 지나야 수렵실이 있었다. 달이 떴으나 복도의 창이 전부 서쪽으로 나 있었기 때문에 동쪽에 걸려 있는 달이 복도까지 비추지는 못 했다. 수도원 맞은편 건물의 흰벽이 어슴푸레 주변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된 복도는 걸을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를 냈고, 안쪽은 아주 깜깜해 더듬거려야 했 다. 겨우 수렵실에 이르러 문을 열었다. 순간, 빛의 바다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활짝 열린 창으로 달빛이 물결처럼 쏟아져 들어와 정원이 환하게 내다보였다. 그 빛 가운데서 지붕 꼭대기가 물에서 헤엄을 치는 검은 짐승의 등처럼 누워 있었다. 커다란 화분받침에 갖가지 화분들이 올려져 있었는데 내 백합만 찾을 수가 없 었다. 나의 백합은 어두운 구석에 혼자 떨어져 있었다. 꽃은 유리병 밖으로 자라나는 것 같았다. 꽃과 유리는 함께 어우러져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쌀쌀한 달빛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스스로의 무게 때문인지 약간 고개숙인 꽃은 보일듯 말듯 흔들리고 있었다. 밤 바람 때문인지 몰랐다. 나는 다가갔다. 꽃받침의 눈부신 화사함 속에서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꽃받침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곧 줄기를 지나 꽃잎으로 전해졌다. 꽃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열정적인 몸짓으로. 그때 꽃 속에서 그림자 같은 검은 무엇이 나와 꽃잎을 따라 부드럽게 줄을 긋 는가 싶더니 날개를 팔랑이며 정원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백합을 사랑하는 밤나비에 관해 들은 적이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싹 백합 앞으로 다가갔다. 밤나비가 막 날개를 펴고 날아가 버린 꽃잎 위에 투명한 물방울이 뭉글져 있 었다. 눈물? 나는 호기심과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것을 만져보고 싶은 나머지 꽃받침에 살짝 손을 대보았다. 물방울이 내 손 에 달라붙었다. 끈끈한 기름 같았는데 향기로왔다. 뭔가 아주 귀중한 물건을 앞 에 둔 심정이었다. 그것에 좀 더 욕심이 나서 약간 들어 보았다. 하지만 이내 놓 아버렸다. 꽃은 낯설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다시 꽃을 들어 올렸다. 빳빳하게 선 꽃받침 속으로 달빛이 고 이고 있었다. 활짝 핀 꽃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푸른 잎사귀가 어울려 빛을 반사 했는데 마치 꽃이 어떤 특이한 발광체 같았다. 나는 꽃을 내려 놓았다. 꽃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꽃에서 떠날 줄 몰랐다. 한참 후, 나는 내가 꽃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받침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깊고 검은 물속처럼 그 깊은 곳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 듯했다. 갑자기 꽃이 트럼펫처럼 보였다. 줄기에서 꽃이 솟아나오는 것처럼 꽃 속에서 뭔가 강하고 힘찬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게 분명했다. 나는 트럼펫이 음악을 연주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꽃이 줄기로부터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꽃 잎을 조금씩 끌어당길 수는 없을까? 더 많은 꽃들이 아직도 줄기에 감추어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감히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뭔가 불길한 것이 거기에 숨어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꽃잎은 하얀 뱀의 머리로 보였고 줄기는 번들거리는 몸을 길게 폈다가 뛰어오르며 사람을 칭칭 감는 뱀의 몸뚱이로 보였다. 갑자기 뭔가 스멀 거리는 것 같고 왠지모를 불길함이 밀어닥쳤다. 백합에도 독이 있나? 독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건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뱀이나 벨 라도나 독당근 같은 것에 겁을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그것을 만져보고 싶다는 억제하기 어려운 충동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점차 주위가 어둠에 싸이는가 싶더니 백합도 빛을 잃어갔다. 그제서야 나는 백합과 이별할 용기를 냈다. 숨을 죽여 살금살금 걸어 내 방으로 돌아와서는 그 대로 곯아 떨어졌다. 아침 식탁 위에 그 백합이 놓여 있었다. 일순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오한을 느꼈으나 곧 시들해졌다. 지난 밤의 그 은밀한 변신을 경험한 꽃은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꽃을 집어 들었다. 차고 매끈한 감촉이 내게 전해졌다. 그건 단순히 식물이었고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었다. 나는 꽃을 손에 들고 성당 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의 진짜 비애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앞줄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을 헤치며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제서야 나 혼자만 꽃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동네 처녀들이 그런 나를 보며 자기들끼리 쿡쿡 찌르며 웃어댔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은 한 처녀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는 것이었다. “넌 항상 다른 애들과는 반대로구나.” 그러자 조금 나이든 처녀가 안쓰러운 눈으로 내게 충고했다. “의자 아래에다 넣어둬.” 나는 다시 한번 불쌍한 나의 백합을 들여다 보았다. 꽃은 볼수록 아름다웠다. ‘욱’하는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다시말해 백합에 대한 나의 애정이 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선의의 충고를 무시할 수도 없었 다. 순간적으로 꽃을 의자 밑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가물거렸다. 나를 위해 가장 예쁜 꽃을 찾던 어머니, 그리고 이것을 발견하고 기 뻐하며 백합을 자르시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다시 꽃과 나를 묶어 주는 것 이었다. 아가씨들의 무언의 조롱이 파도처럼 나를 괴롭혔다. 의자 아래로 백합을 넣어 버리면 일단 나는 그 파도에서 건져질 수가 있었다. 미사는 큰아버지의 집전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오르간 소리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성유와 백양나무에서 풍겨나오는 부드러운 향기가 기분 좋았다. 나는 우울한 기분을 억누르며 진심으로 기도문을 외었으나 마음 한구석이 내 내 텅빈 것 같았다. 마침내 내 위기의 돌파구가 보이는 듯했다. 나는 결심했다. 큰아버지가 제단 오른쪽에 서면 꽃을 포기하고 왼쪽에 서면 그대로 꽃을 든 채 있겠다고. 그런데 큰아버지는 그대로 한가운데 계셨고 그 상태로 미사는 끝나가고 있었 다. 더이상 주저할 시간도 없었다. 우리는 마을을 등진 채 펄럭이는 깃발을 앞세우고 성당 뜰을 나섰다. 천천히 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언덕을 넘었다. 나는 또다시 백합을 살펴보았다. 내가 걸음을 떼면 백합도 따라 재빨리 그리 고 우스운 모습으로 꽃잎을 흔들었다. 그때 나는 마음먹었다. 누가 뭐라든 상관없이 백합을 없애버려야겠다는, 조금씩 그것을 망가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찬 나 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이윽고 꽃잎은 거의 떨어지고 줄기만이 앙상하 게 드러났다. 꽃잎 몇개가 슬픈 모습으로 아직도 그 엉성한 줄기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 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들이 하나같이 말짱했다는 것이다. 내가 글 줄기를 높 이 쳐들어 막 버리려고 하는 찰나, 아이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성모님께 경배를, 마리아시여!” 아찔한 꽃내음이 코를 찔렀다. 누군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는 기도 안 드려?” 나는 기도를 올리고 싶었으나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퍼뜩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전날 밤처럼 백합에만 못 박혀 있었다. 맑게 빛나는 꽃받침에서 어떤 낯선 것이 나와 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 깊고 푸르스름한 곳에서 꽃술이 날름 혀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꽃술마저 떼어냈다. 남김없이 모두 뽑아냈다. 푸른 꽃술이 꽃받침에 매달 린 채 뽑혀지질 않았다. 힘을 주어 따냈다. 그런 것은 정말 좋지 않은 행동일 것이다. 강도들이나 할 법한 잔혹한 짓. 암술이 떨어지며 손에 잡혔다. 뭔가 끈적한 것이 으깨어진 암술 머리에서 느껴졌다. 꽃받침은 한껏 벌어지고 꽃잎도 꽃술도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모두 손에 쥐고 꺾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두어 장의 꽃잎이 여전히 줄기에 달려 있었다. 잔인하고 뻔뻔스런 나의 손에 쥐어진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그 꽃잎들은 빛을 잃은 하얀 나비처럼 애틋하고도 고운 모습이었다. 헐벗은 줄기가 그 앙상한 몸을 드러내 놓고 있었으며, 씨방은 말똥말똥한 눈 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손톱으로 씨방마저 악착같이 파내었다. 푸른빛의 작은 씨앗들이 그 속에서 나왔다. 기름처럼 끈끈한 것이 백합에서 나오는 기름이리라 생각했다. 백합유, 그 생소한 표현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그 멋진 표현에 지난 모든 두 려움과 죄의식이 전부 녹아들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제야 나는 일의 마무리를 지었다. 나는 떼어낸 꽃잎들과 꽃들을 손에 움켜 쥐고 있는 상태였다.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줄기가 구부러지고 푸른빛 수액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꽃과 달리 수액의 향기는 너무 지독했다. 식물은 내게 완전히 항복했고 나는 한때 살아 있었던 그것의 시체만을 들고 있는 느낌 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손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나는 당황해서 손 을 폈다. 짓이겨진 것들이 최후의 몸부림으로 저항하며 내게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것들을 더욱 난폭하게 짓이겼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쥐고 있는 한 나는 그들의 저항을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했 다. 행렬이 방향을 바꾸게 됐을 때 드디어 그것들을 떨궈 냈다. 손바닥은 푸른 수 액으로 얼룩져 있었다. 혼탁했던 머릿속이 서서히 투명해지면서 온갖 욕심과 괴로움, 그리고 악한 마 음이 내게서 빠져나갔다. 대체 내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심정이었다. 어느 틈엔가 내 입에선 기도문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행렬의 앞머리는 막 성당 뜰 안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자 난 집으로 향했다. 피리소년 나의 어린 시절은 늘 경건함으로 둘러싸인 채 곰팡내나는 책 냄새와 유혹적인 정원의 향기, 그리고 큰아버지와 아주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조용히 평온하 게 흘러갔다. 이러한 평온함 속에서 나의 생활은 어느덧 안정되었고 고요함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적막감과 고독과 친숙해지게 되었다. 자라면서 차츰 수도원의 부속학교에도 가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와 친해지려 고 무척이나 애를 썼고 나 또한 가끔, 아주 가끔은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 했으나 이미 내 또래의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너무나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이었고 아는 것도 많았기 때문에 친구와의 교제나 우정으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나는 이따금 큰아버지와 아주머니, 어머니를 따라 강변을 거닐곤 했다. 여덟 살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검붉게 익은 산딸기 덩굴을 발견하고는 어른들 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산딸기를 따느라 뒤로 처졌던 적이 있었다. 그런 데 그때 덩굴가지 하나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순간 ‘노루가 숨어 있나?’하면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내가 마주친 건 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눈부신 햇빛과 나뭇잎 사이에서 춤추듯 일렁이는 소년의 얼굴을 아주 짧은 순 간이었지만 확실하게 보았다. 가지는 이내 흔들리지 않았고 그 소년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 다. 왠지 가슴이 설레이고 있었다. 그때 나를 찾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난 정신을 차리고는 아쉬움을 안은 채 미적미적 어른들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등뒤로 귀를 기울였다. 그 낯선 소년의 발자국 소리는 사뭇 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무성한 덩굴 숲에 모습을 가린 채 단지 발자국 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 다. 그애는 내가 걸음을 멈추면 똑같이 멈춰 섰고, 내가 뛰어가면 따라 뛰었다. 그 게 마을 어귀 풀숲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곤 이내 그애가 돌아서서 뛰어가는 소 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사건은 어린 나를 설레이게 했다. 며칠동안 내 머리속은 온통 그 소년과의 만남으로 가득찼다. 떠돌이 집시 아이일까? 마술에 걸린 왕자님일까? 친구, 아니 면 아주 나쁜 사람?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마침내 그애를 다시한번 만나봐야 겠다고 결심했다. 다시 그애를 찾아나선 날은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풀숲을 헤치며 가시에 찔리고도 했고,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가다가는 금방 또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졸졸 물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이름모를 유황색 독버섯 -옛날에 어머니께서 들은 적이 있는 -에 깜짝 놀라곤 했다. 한번은 갑자기 푸드 득거리며 새가 날아오르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헤매고 헤맨 끝에 간신히 시냇물이 흘러서 호수를 이룬 곳에 당도할 수 있었 다. 저만큼에는 물에서 솟아나와 기슭쪽으로 치우친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손을 뻗거나 건너뛰기엔 어림도 없는 거리였고 그 바위 위에는 하얗게 햇볕이 바랜 두개골이 보였다. 아마 토끼나 노루의 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엔 묘하게 감동을 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갓 꺾어서 만든 듯한 갈대꽃 다발이었는데 왠지 그 소년이 만들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숫가 숲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애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 여러 가지 그애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붉은 조약돌, 나무 등걸에 걸어놓은 은빛 조개목걸이, 막대기에 씌워놓은 엷은 뱀허물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애의 몸을 숨기기에 충분해 보이는 갈대로 엮은 오두막도 나 타났다. 호숫가의 상당히 넓게 트인 빈터에 이르렀다. 그 기슭에 조각배가 매어져 있 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드디어 그애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햇볕에 거무스름하게 그을은 그애가 뱃바닥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호숫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쩐지 불안했다. 하지만 그애에게 반드시 말 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깨기를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과 끊임없이 잔잔하게 울리는 물소리가 잘 어우러졌다. 물결에 따 라 그 조그만 조각배는 이따금 흔들렸다. 갈대와 마른 풀냄새가 너무나 강렬해 서 취할 지경이었다. 그때 문득 그애가 움찔하며 눈을 뜨는 게 보였다.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쏘아 보듯 날카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고기가 튀어오르듯 그애는 민첩하게 배에서 기슭으로 뛰어내렸다. 내 앞을 지나며 자기를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앞장서서 뛰어가더니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그애의 뒤를 따라갔다. 숲에 이르렀을 때, 돌연 팔 하 나가 쑥 나오더니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묶고 있는 리본을 가리켰다. 곧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리본을 풀어 그애의 손에 건네 주었다. 그러자 소년의 모습을 쑥 나타났다. 그애는 어느새 리본을 허리띠처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애는 숙련된 원숭이처럼 나무에 올라가서 내게 눈짓을 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힘을 내어 나무에 기어올라 그애와 나란히 앉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애가 나무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곤, 무섭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듯 그애를 쳐다보았다. 더더욱 나를 당황하게 한 건, 그애가 위험천만하게도 제일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서서 아 무것도 잡지 않은 채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내 표정을 보고 그애는 크게 웃 었다. 나는 그애가 굉장히 담이 큰 애라는 것을 느끼다 그애의 터무니없는 즐거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리고나서 그애는 미끄러지듯 나무를 타고 내려갔다. 물론 나도 따라했다. 우리는 호숫가로 돌아왔다. 그애는 햇빛에 반짝이는 돌 하나를 노려보더니 불 쑥 손을 뻗쳐 도마뱀 한 마리를 움켜 잡았다. 그리곤 망설임도 없이 옷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었다. 잠시 후 도마뱀은 옷 속을 타고 무릎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 왔다. 그애가 도마뱀을 내게 건네 주었다. 흥분과 협박과 기대가 뒤섞인 묘한 웃음 을 띄며...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안에서 꿈틀대는 도마뱀의 감촉이라니! 그 차고 매끄러움은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오싹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 놈을 옷 속 에 집어 넣어야 했다. 마침내 해냈다. 그 놈은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 섬뜩함에 몸이 오싹했다. 그 렇지만 나는 그 순간을 넘기고는 태연한 척 도마뱀을 집어 도로 그애에게 건네 주었다. 그애가 벌떡 일어났다. 나도 따라했다. 이것으로 그애는 나를 시험했으며 나 또한 합격했음을 알았다. 그제서야 그애는 말을 건넸다. “얘, 너 피리 만들 수 있어?” 나는 만들 줄 몰랐다. 아니, 만들어 본 적도 없다. 그애의 목소리는 생소했지 만 그리 듣기 싫진 않은 사투리였다. 그애는 버들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서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이 고르 지 않고 들쑥날쑥하더니 곧 어떤 가락을 잡아갔다. 약간 불안했지만 아름답고 신비스런 선율을 지닌 피리였다. 그애가 선물이라 면서 피리를 내밀었다. “마술 부릴 줄 아니?” 그애가 물었다. 나는 할 줄도 모르지만 마술을 부리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일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애가 말했다. “만일 누가 너에게 나쁜 짓을 했을 때, 복수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 까?” 그리고는 속이 텅빈 달팽이 껍질을 찾아 집어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한테 나쁜 짓을 한 애의 머리카락을 세 개 뽑아서 이 속에 넣고, 그걸 뱀 이 지나가는 길목에 두는 거야. 뱀이 지나가는 걸 지키고 있다가, 뱀이 지나갈 때 걔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 그앤 독사에게 물려 죽게 돼.” 난 지금까지 그렇게 잔인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하는 걸 느끼며 놀라서 소리쳤다. “안돼! 그건 다섯번째 계율을 어기는 거야. 그러면 벌 받아.” 그애는 어리둥절한 듯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그앤 이제까지 나의 모든 생활을 이끌어온 계율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 비로소 깨달 았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애는 내가 모르는, 그리고 알아서도 안되는 세계, 즉 어둡 고 위태로운 혼돈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수도원과 아침마다 들려오는 수녀들의 합장과 경건한 기도, 그리고 나의 일상생활의 지침과 질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나의 생활과 질서들은 소년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자, 아무 런 가치도 위력도 없는 것으로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아직 접해본 적도 발을 디뎌서도 안되는 금지된 세계로 뛰어들 고 싶은 충동이 고개를 비집고 일어섰다. 그 어둡고 불안한 세계는 힘과 활기와 유혹의 손길을 뻗치며 다가왔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짙어지는 어둠 안에서 불안과 공포에 질려 온몸이 떨렸다. “이제 가 봐야 돼.” 내가 말했다. “왜?” 그애가 물었다. “저녁 종이 울릴 땐 꼭 집에 있어야 돼.” “아니 왜?”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이유도 붙일 수 없는,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계율이었기 때문이다. “니네 집은 어디야?” “수도원, 성 게오르그 수도원. 그런데 너는?” 그애는 호숫가 숲 어딘가를 막연하게 가리켰다. “저기가 다 너희집이야? 집은 보이지 않는데.” 내가 다시 묻자 그애는 고개를 저으며 아까와 같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곧 피식 웃어 버렸다. 그 웃음은 마치, ‘넌 몰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이 없는 그애가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나랑 같이 갈래?” 그애의 제안에 난 섬뜩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그 제안에 응할 충분한 마음 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왔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내 자신에게 말하듯. “아니야. 그래선 안돼.” 그리고는 홱 몸을 돌려서 그곳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애는 내 손을 꽉 잡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늪과 가시밭길과 수렁을 아주 익숙하게 헤쳐나갔다. 마을 어귀에 이르러서야 겨우 내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소년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내일은 안되고, 나중에 우리집에 놀러와.” 소년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떡이곤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집에 들어갔을 때 나는 어머니께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 “하루 종일 어디 갔었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숲에 갔었어.”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묘하게 자랑스럽기도 하고 긍지 같은게 느껴졌다. “엄마한테 말도 하지 않고 또 숲에 가서 이렇게 늦게 오면 그땐 정말 혼날 줄 알아, 알겠니?” 어머니는, 걱정하며 기다리게 한 것에 정말 화가 난다는 듯 내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또 갈꺼야!” 나는 어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뱉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놀란 나머지 어머니는 매를 들었다. 그리고 무척 당황해 하셨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한 마디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물론 용서를 빌지도 않았고 입을 꾹 다문 채 매를 참아냈다. 너무 흥분해서 아픈 것도 잊었다. 어머니는 벌로 저녁을 주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정말 그 야생소년이 한없이 부러울 뿐이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갑작스레 돌변한 나의 나쁜 행동에 대해 큰아버지와 의논하 셨다. 바로 내 방 앞에서 얘기하셨기 때문에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계시던 큰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아이도 자기 생활에 대한 권리가 있고, 이제 그 애도 함께 어울린 친구가 필요할 때죠. 테레제라도 초대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요?”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흥! 테레제라고?’ 테레제는 우리 반에서 제일 얌전한 아이다. 그날 오후 인형을 안은 테레제가 우리집을 찾아왔다. “얌전히 놀아라.” 어머니는 그렇게 한마디 하고 나가셨다. 인형의 머리를 빗기면서 리본을 묶고 있던 테레제가 말했다. “너, 인형 갖고 있니?” “인형은 바보나 갖고 노는 거야. 난 인형하고 안 놀아.” 테레제는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애의 인형은 아주 예뻤다. 그렇지만 앞만 바라보고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 따윈 관심도 없고 신비롭지도 않았다. 나는 숲에도 갔었고 그 피리소년도 알고 있었다. 난 나만의 비밀이 있다. 그런 점에서 테레제와는 영원히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인형을 빼앗아 수정 같은 눈동자를 짓찧었다. 망가뜨릴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 따위 인형은 생명도 없고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테레제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인형이란 게 얼마나 우스운 건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테레제 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나의 거친 행동에도 불구하고 테레제는 인형처럼 얌전히 예의바르게 앉 아 있었다. 테레제는 곱게 빗어내린 머리카락 한 올 흩어진 적이 없고, 구두끈도 풀어지 는 법이 없었다. 옷에 흙탕물조차도 튀긴 일이 없었다. 전에는 그애의 그런 점에 호감이 갔다. 고상하면서도 근사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애의 그런 모두가 역겹기까지 했다. 테레제는 하얗게 질린 채 인형의 눈동자가 빠지는 걸 지켜보았다. 소리도 지 르지 않고 말리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얌전히 인형을 끌어당겨 자기 품에 껴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지마! 부탁이야.” 테레제는 애원하듯이 속삭였다. “제발 그만해!” “자! 좋을대로 해!” 난 소리를 지르고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반쯤 허물어진 담에 올라가 앉아 있자니 느닷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잠시 후 에 얌전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테레제가 다가왔다. “얘! 내려와. 위험하잖아.” 그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큰 잘못이라도 했다는 투로, “화내지마, 응?”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투에 화가 치밀었다. “내버려둬. 이제 니네 집에 가!” “나랑 놀아주면 예쁜 그림 한 장 줄께. 응?” “그만둬. 모르겠어? 난 네가 싫단 말야.” 나는 재빨리 담에서 뛰어내려 풀밭을 지나 언덕으로 뛰어올라갔다. 왠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나는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내 책상 위에 그림이 한 장 놓여 있었다. 그 그림 위에는 빛이 비치는 데에 따라 빨강, 파랑, 초록으로 반사되는 유리종이가 붙여져 있었 다 그걸 집어 책상 밑으로 내팽개쳤다. 그림은 매일 계속되었다. 예쁜 헝겊조각, 별이 박힌 유리병, 풋자두 등 한가지씩 매일매일 어김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 다. 그걸 발견할 때마다 잘못을 빌며 애원하는 듯한 테레제의 시선은 물론 나에 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렇지만 나는 매일 숲속의 그 소년을 기다렸다. 소년은 보이지 않았고 테레 제는 어김없는 선물과 함께 정말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녔다. 테레제는 너무나 귀찮은 존재였고 아울러 어머니도 점점 더 나를 다루기 힘들어 하셨다. 그 피리소년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쳐 난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검은 말 두필이 끌고 가는, 푸 른색 지도가 걸린 유랑인들의 마차가 지나가는 꿈이었는데 그 꿈 속에서 나는 검은 말 하나에 타고 있었다. 다른 말은 어떤 모르는 사람이 타고 있었고 우리 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생소하고 울창한 숲의 잿빛 안개 속을 달리고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 안에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말은 차츰 속력을 내더니 마침내 날아오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잠이 깼다. 난 그때 나의 정체모를 그리움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직감이라는 건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고 진짜 나의 부모나 가족은 분명 집시일 거라는 예감이었다. 집이나 수도원의 규율같은 건 전혀 나와 무관하고, 집시인 친부모가 날 잃어 버렸거나 그냥 버린 것이다. 난 당연히 집시였다. 또한 그 소년은 나의 오빠, 분명히 오빠는 나를 찾아와 내가 동생임을 확인시 켜 줄 것이며 그 아름다운 자유와 동경의 세계로 인도해 주리라. 그 꿈을 꾼 날 이후, 나는 잠시 수도원에 머문 손님일 뿐이라고 줄곧 내 자신 에게 다짐시켰다. 그 소년이 데리러와 지금의 가족들과 떨어질 때를 대비해 마 음의 준비를 해 두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앞으로 내가 속하게 될 그 세계로 갈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테레제의 애정은 집요했다. 내겐 도저히 그애를 떨칠 힘이 없었다. 궁리 끝에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다. 난 집시이며 질서나 계율 따위완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서 떠오른 묘안이었다. 이제 내게는 숲의 자유만이 유일한 규율이었고, 따라서 마술을 쓴다는 게 조 금도 죄될 게 없고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라도 테레제를 떨치고 싶었다. 그 피리소년이 가르쳐 준.... 테레제의 머리카락 세 가닥을 몰래 잘라내어, 미리 준비해 둔 빈 달팽이 껍질 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뱀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인 정원 구석의 허물어진 돌길 위에 올려놓았다. 쭈그리고 앉아 상당히 오랫동안 뱀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자그마한 도 마뱀이 다가가 눈동자를 굴리다간 가버렸다.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문을 외우고 테레제의 이름을 외치며 뱀을 기다 렸다. 그 때 돌담에서 작은 돌멩이가 정통으로 달팽이 껍질 위에 굴러 떨어졌다. 나는 만족했다. 공포와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드디어 내가 뱀을 부른 것이었다. 나도 마술을 부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기쁨에 흠뻑 취해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 때, 어머니가 목이 메인 채 말했다. “테레제가 짐차에 치었다고 하는구나. 그 착한 애에게 어쩌다 그런 일이 일 어났는지, 정말 가여워서 죽겠구나!” “그래서요? 죽었나요?” 나는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제가 죽다니!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저녁 식탁에서 어른들 사이에 오르내린 화제는 그 사고 얘기뿐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내 방으로 들어왔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 생각은 계속 한 가지에만 치닫고 있었다. 내가 아까 낮에 한 마술! 나는 뱀을 불렀고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고, 그것과 함께 짐차가 오고, 마침내 짐차에 테레제가 치이고 말았다. 바로 내가 테레제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뱀에게 물리기를 바랬지, 결코 죽기 를 바란 건 아니었었다. 난 단지 그애의 집요한 애정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 었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다니!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보 이지 않는 운명의 신을 저주했다. “하나님, 무서워요. 제발 못된 아이가 되지 않도록 해 주세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아침이 되면 모두가 거짓말이 고 꿈이기를 기도했다. 그러면 나는 활짝 웃을 수 있고,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 었던 게 되지 않을까. 장례식 날 아침, 여자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뭇가지에 성수를 적셔 뚜껑 이 열린 작은 관에다 뿌렸다. 나도 관 앞으로 걸어갔다. 테레제의 어머니는 목놓아 우셨고 아버지는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고 계셨다. 나는 흐느낌과 슬픔과 꽃다발, 관, 촛불, 그 모든 것으로부터 목을 졸리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문득 내가 저지른 일이 생각났다. 왜 테레제가 이렇게 갑자스레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만이 알고 있다. 나만의 비밀. 나는 그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대신 숨이 막히고 불투명한 통증이 가슴을 압박했다.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으레 치뤄야 하는 아픔일까? 나는 당당하게 그 고통을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다. 그건 다른 아이와 나를 구분짓는 분명한 계기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나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두려움과 이상야릇한 감정과 긍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위태롭고 신비로운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비밀의 여름이 지나고 차가운 가 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정원도 울긋불긋한 낙엽이 뒹굴 뿐 썰렁하게 텅비어 버렸다.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낀 기묘한 어느 밤이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피리소리 가 들렸다.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아련한 피리소리, 나는 벌떡 일어나 창 가로 달려갔다. 그리곤 정신없이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안개는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최면이라도 걸 린 듯이 피리소리에 끌려 갔다. 마침내 정원의 담벽 밑에 이르렀다. 반쯤 허물어 진 담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끊일 듯 말 듯 이어지는 끝없는 피리소리. 나는 신비스런 피리소리를 들으며 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 담 너머에 그 소년과 숲의 평화와 자유가 있었다. 나는 감미로운 유혹에 빠져들었다. 나는 부모님과 수도원과의 결별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듯 내부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수도원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지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알 수 없는 힘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담에서 천천히 몸을 떼었다. 그리고는 낙엽이 뒹구는 정원의 잿빛 안개 속을 느릿느릿 걸었다. 담을 뒤로하고... 피리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신비에 싸여 사방으로 퍼져갔다. 갑자기 눈물이 주 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안개와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어느덧 피리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난 집 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카랴얀과 아주머니 경건한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수도원에서의 아주머니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심심풀이인 양 그다지 힘든 기색도 없었고, 바쁜 것 같지도 않게 일을 하셨다. 물론 하루 세 끼 식사준비, 청소와 빨래 등을 마치 하녀처럼 도맡아 하신다는 건 잘 안다. 게다가 환자들을 보살펴 주고 낡아서 해진 값비싼 제의들을 노련한 솜씨로 멋 지게 재생시켰고,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하는 기도를 거르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도 언뜻 보면 한가롭게 꽃밭이나 가꾸며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꽃밭은 너무나 아름다왔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어른은 수도원을 둘러본 뒤 꼭 이 꽃밭을 구경하고 가실 정도였다. 꽃밭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햇볕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북쪽엔 옛날 수도원 터까지 담이 높게 이어지고 있었다. 예전의 주춧돌에 벽화색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담 주변으로 암록색 담쟁이 덩굴이 어지럽게 뻗어 있었다. 그 담에는 보이지 않는 수도관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줄곧 물이 흘러내 렸다. 그 물은 옛날에 성수반으로 쓰이던 이끼낀 돌 수반에 고였다가 얇은 면사 포처럼 가장자리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바로 그 아래는 자갈밭이었는데, 흘러 넘치는 물로 인해 자갈에도 잔뜩 이끼 가 끼어 있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이라도 그곳을 찾아가면 상쾌하고 시원한 물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붕붕거리는 꿀벌들의 날개짓 소리와 풀잎과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끊임없는 물소리와 더불어 자장가처럼 달콤한 화음을 이루었다. 이 멋진 꽃밭의 한 구석에는 샐러리 같은 귀하고 구하기 힘든 채소도 재배되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꽃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초봄의 설앵초나 미나리아재비부터 시작해서 늦가을에는 국화, 덩굴장미, 아스 터에 이르기까지 화원의 황홀한 모습은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겨울 석 달 을 빼고는 항상 꽃이 만발했다. 꽃분홍빛 프록스와 황금색 해바라기가 피어 일 렁일 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주머니는 그 넓은 꽃밭을 손수 가꾸셨다. 손님들이 감탄사를 연발할 땐 언 제나 의미심장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꽃의 아름다움은 제단에 바쳐질 때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매일 성당을 장 식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일만큼은 큰아버지의 지시나 반대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청교도적 성격이라 검소한 편이었다. 이를테면 성당 장식은 낡은 촛대 하나면 충분하다는 식이다. 그리고 기껏해야 성체를 모시는 감실 양쪽에 백합이나 너도바람꽃 몇 송이 꽂도록 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성당 안에 늘 꽃이 가득하길 바랬다. 그래서 축일 때면 성 당은 온통 꽃으로 장식되었다. 미사를 볼 때 간혹 큰아버지는 성가신 듯 언짢은 얼굴로 화분을 옆으로 밀어 놓거나 나무 아래로 굽은 가지는 아무 망설임없이 꺾어 버리곤 했다. 가끔 큰아버지가 넌지시 그런 뜻을 비추면 아주머니는 초연히 대답했다. “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꽃을 피우신 거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도로 거두셔야죠. 우리들은 아무리 하나님께 감사드 려도, 그건 도저히 하나님 은혜에 미치지 못한다구요.”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내가 그 황홀한 제단의 꽃장식에 매혹되어 자칫 하면 큰일을 저지를 뻔 했던 것이다. 추수감사절 전날 밤이었다. 제단에는 다알리아, 당아욱, 매역취가 섞인 화려하고 커다란 화환이 사이사이 푸른 나뭇잎과 함께 장식되어 채워져 있고, 추녀돌림대 위에는 과일, 채소를 비 롯해서 온갖 수확물들이 가을의 풍성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포도, 배와 같은 과일들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정성스레 꽃처럼 묶여 진열되 어 있었고, 누렇게 익은 옥수수도 사방에 한묶음씩 걸려 있었다. 촛대도 세워져 있었다. 밖에서 보니 제단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꽃밭 같았다. 아주머니는 장식을 다 하고 이미 안채로 가신 뒤였고, 저녁 종소리가 울려퍼 질 때까지 성당은 문이 열려 있었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성당 안을 나는 혼자 돌아보다가 제단 앞에 섰다. 너무 나 황홀해서 숨을 죽이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때 성당지기 아저씨의 아들 인 그레고리가 제의실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우리는 곧 친해져서 그 훌륭하고 근사한 광경을 함께 구경했다. 점점 어두워 질수록 빨강, 노랑, 흰색 꽃들은 불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 다. 제쳐 놓은 채 나온 제의실 창문으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꽃다발과 곡식 이삭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우리는 저녁 노을과 성당에 가득찬 꽃과 과일 향기에 흠뻑 취해 정신이 아찔 해졌다. 그레고리가 더 들떠 있었다. “미사 놀이 하자.” 그애가 비밀스레 제안했다. “내가 신부님하고, 넌 복사해. 멋지지?” “싫어! 그건 못된 짓이야. 죄짓는 거라구.” “바보야! 괜찮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 애는 나를 끌어 제의실로 데리고 갔다. 옷장이 열려져 있었다. 우리는 작은 옷을 골라 갈아입었다. 그레고리는 책장에서 은빛 시사책을 꺼내 들춰보더니 내게 도로 갖다놓으라고 했다. 내가 앞장을 서고, 그 애가 성배를 들고 내 뒤를 따랐다. 엄숙한 걸음으로 제단을 향했다. 나는 무서웠다. 이건 분명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거의 얼이 빠진 듯이 제단을 올라갔다. 신부님 역을 맡은 그레고리는 더듬더듬 라틴어 기도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제 는 완전히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고리가 신부님을 흉내내며 엄 숙하게 말했다. “얘야! 이렇게 어두운데 왜 촛불을 켜지 않느냐? 어서 불을 켜라.” 나는 정신이 번쩍났다. “그건 안돼, 그레고리. 혼난단 말야.” “왜?” 그레고리는 기분나쁜 듯 되물었다. “이 초는 내일 추수감사절 미사 때 쓸 거야. 얼마나 비싼 건지 알아? 더구나 지금 불을 켜면 우린 들킨다구!” “어서 켜! 켜지 않으면 미사 놀이도 못하잖아.” 그의 갑작스런 거친 행동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제의실에서 성냥을 찾아왔 다. 그레고리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촛대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가서 불을 붙여야 했다. 네 개쯤 되는 촛대에 불을 붙였을 때 그만 불이 붙은 성냥이 꽃다발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마른 곡식단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불이 번졌다. 삽시간에 화환 과 꽃다발에도 불이 붙었다. 불꽃으로 인해 제단은 환하게 밝아졌고 마른 곡식 단과 꽃이 파삭거리며 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둘은 얼어붙은 채 넋나간 사람처럼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옷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마침 누군가 제의실로 달려 들어와 내게 덮쳐 불을 끈 뒤 제단을 달려가 커튼 을 떼어 불을 껐다. 곧 불은 완전히 꺼졌다. 성당 안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불기와 그을음에 꽃잎 들은 시들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얼어붙은 듯 벽에 기대어 있었다. 맵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 아주 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큰일날 뻔 했구나. 날 이리로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겠다.” 아주머니는 잠시 제단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나서 엉망이 된 제단을 치우고 다시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와 나는 몸에도 맞지 않는 헐렁한 미사복을 걸친 채 벌받기를 기다리며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주머니는 부드럽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빨리 제의를 벗어놓고 창고에 가서 물통과 빗자루를 가져와야지.” 우리는 재빨리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아주머니는 불에 그을은 화 환을 꺼내 조심스럽게 광주리에 옮겼다. 우리도 함께 거들었다. 아주머니가 갑작스런 불로 인해 우리를 잊으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가슴을 죄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한참 후에 우리들 생각이 났던지 그만 가서 자라고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침대로 돌아온 나는 어리둥절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침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엉망진창이 된 제단 앞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무서운 벌을 면치 못할 테니까 말이다. 다음날, 추수감사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뼛주뼛 성당으로 향했다. 도저히 똑바로 제단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단을 본 순간 난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황홀한 제단은 변함없이 그 아름다 움을 뽐내고 있었다. 불에 그을은 곡식단이나 화환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어젯밤 일이 꿈이었나 생각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불에 데인 팔의 상처가 부풀어오르며 통증이 느 껴졌다. 역시 꿈은 아니었다. 그날 나는 아주머니 눈에 띄지 않으려고 슬슬 피해 다녔다. 멀더라도 가능한 한 길을 돌아서 다니며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마음을 죄며 며칠 이 지났으나 매를 맞거나 벌을 서는 등 내가 걱정했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차츰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면서 그처럼 모른 체 마음을 써 주시는 아주머니가 더욱 좋아졌다. 아주머니가 바삐 제의를 손질하거나 꽃을 가꾸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아주머니와 함께 있는 날은 내게 있어서 기쁨의 시간들이었다. 아주머닌 여름에는 거의 꽃밭에서 살다시피 하시기 때문에 슬쩍 스치기만 해 도 꽃내음이 물씬 풍기곤 했다. 특히 가을철 라벤델과 장미를 자를 때쯤에는 그 내음이 한결 짙었다. 무더운 여름날, 우리가 밤나무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히는 동안에는 커다란 유리병에 담근 앵두나 찔레꽃 술이 자갈밭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곁에는 라벤델 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고 우리는 시든 라벤델을 솎아내어 병 속에 담곤 했다. 가끔 라벤델을 한 웅큼씩 쥐고 향기를 맡으며 그 향기에 취해 보거나, 이따금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치곤 하면서 조용히 일을 했다. 달콤한 향기에 벌들이 모여들었다. 저녁에 가죽푸대에 풀잎을 담아 옷장에 걸 어두면 가을의 풀냄새가 옷에 흠씬 스며들곤 했다. 아주머니는 아무 내색없이 꽃잎과 향료를 섞어 축제 때 쓸 합을 준비해 두시 는 걸 잊지 않았다. 여름이면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정원으로 나가 반쯤 핀 아름다운 장미를 작은 바구니에 가득 모았다. 꽃잎이 상하지 않게 하나하나 따서 소금을 뿌려 커 다란 통에 재웠다. 그리고 며칠 후 거기에 물이 생기면 그 물은 쏟아 버리고, 물 기가 없도록 꽃잎을 짠 다음 엄숙하게 향합에 담는 의식이 행해졌다. 향합에 장미꽃잎을 차곡차곡 쌓고, 소합양, 붕사, 오랑캐꽃향, 정향유 등 진귀 한 여러 가지 향료를 배합했다. 이 비법은 옛날부터 아주머니댁에 전해 내려온 것으로 그걸 전해 받으신 분이 바로 아주머니였다. 다 준비된 백자 합을 어두운 창고 속에 진열해 두면 창고는 마치 약국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겨울에 성애가 낀 창문가에 그 꽃잎을 조금 덜어다 놓으면 꽃밭의 향기를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 신기한 감격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주머니와 점점 친해졌다. 말이 없는 가운데, 그리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 는 방법으로 아주머니는 힘있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향이 첫봉오리를 피울 무렵이었다. 정향은 처음 심은 것으로 이제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꽃이었다. 자색의 줄무 늬가 섞여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흰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 꽃에 도취되어 한 웅큼씩 꽃을 꺾었다가는 시들해지면 버리고 또 다른 꽃을 꺾었다. 그러기를 반 복하며 정신나간 사람마냥 아무 생각 없이 마구 꽃밭을 헤매고 다녔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내가 버렸던 정향이 커다란 유리병에 꽂혀 있었다. 시 든 꽃들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튿날 다시 보니 마치 갓 피어난 듯 싱싱하게 살아올랐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야단을 치는 대신 그런 식으로 아주머니는 나를 가르치셨다. 마을에는 폴란드인지 러시아인지에서 온 노인이 한 분 살고 계셨다. 이 노인 과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번 아주머니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노인은 예전에는 상당한 부자였었다. 부인이 죽고 두 번 재혼했으나 이상 하게도 결혼하는 사람마다 죽었다. 그러는 동안 결국 많던 재산도 다 날리고 지 금은 혼자 양로원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카라얀이라 불리는 그 노인은 반달형의 검은 수염을 불룩나온 입가에서 어깨 까지 늘어뜨렸다. 그 나이에도 새까만 머리카락은 여자애들처럼 가운데 가리마 를 타서 누렇게 넓적한 얼굴 약쪽으로 내려뜨리고 다녔다. 게다가 수염이고 머 리카락이고 기름때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무시무시하고 유령 같은 노 인이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카라얀 노인을 무서워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어른들은 ‘저기 카라얀이 온다!’하고 겁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 무시무시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뭔가 흡인력같은 걸 지니고 있 었다. 아마 그의 훌륭한 노래 솜씨 덕분이 아닐까. 나는 이따금 양로원 근처의 숲에 앉아 굵직하고 구슬픈 카라얀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 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다. 멀리 그의 모습이 보 이기만 해도 문을 닫아 걸고, 심지어 개를 풀어놓는 집도 있었다. 고양이나 뱀을 잡아먹고 눈에 띄는 대로 훔치고, 자기의 세 부인도 모두 약을 먹여 죽였다는 등 별별 흉칙한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 돌아다녔다. 혼자서 집을 보던 어느 날 오후였다. 카라얀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 나 문을 닫기엔 이미 한발 늦었다. 그는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흉칙한 차림이었지만 걸음걸이만은 얌전한 짐승 같았다.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지나쳐 큰아버지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깜짝 놀라 그 방문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집엔 아무도 안 계세요. 왜 그러세요?” 그는 들은 척도 않고 나를 밀치더니 묵묵히 문을 열었다. 나는 바싹 긴장된 채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서 있었다. 방을 이리 저리 둘러본 뒤 그는 장 앞으로 갔다. 거기에는 큰아버지의 금고가 있었다. 그는 더러운 손으로 돈을 움켜쥐고 어느 새 그의 소매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아 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고 분했다. 그는 복도를 나오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를 따르던 내게 당당하게 말했 다. “꼬마야. 저녁에 놀러와라. 노래를 불러줄께.” 그렇게 내뱉는 말을 자칫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뻔 했지만 다행히 아주머 니가 나타나시는 바람에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와 마주치자 카라얀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했다. 그러더니 뭐 라고 구걸을 하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머니 옆에 붙어 서서 내가 방금 본 일을 소곤거렸다. 그러나 아주머 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구걸의 말이 끝나자 카라얀 의 더럽고 누렇게 뜬 손을 다정하게 잡으시는 것이었다. “마침 차를 끓이던 중이에요. 절 따라오세요.” 카라얀은 아무 말 없이 큰어머니의 뒤를 따라가 부엌 의자에 앉았다. 나는 눈 치를 보고 있다가 큰아버지 서재에서 돈도 아주 많이 훔쳤다고 다시 한번 알려 드렸다. 여전히 건성으로 듣고 계셨다. 나는 안타까와서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그 흉악스럽고 너절한 카라얀 에게 차와 빵을 내놓았다. 아주머니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끝에 부드럽게 그에게 물었다. “영감님, 돈이 필요하시죠?” 노인은 고개를 끄떡이더니, 갑자기 대꾸했다. “아니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있소” “그러세요? 그런데 돈은 뭣에 쓰시게요?” “담배도 사고, 그리고...” “여기 있어요. 이거면 담배 한 봉 정도는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아주머니는 테이블 위에 돈을 놓고 빵을 더 가져오려고 일어나셨다. 카라얀은 재빨리 그 돈을 받아넣었다. 식탁 위의 너저분한 빵 부스러기를 남김없이 그 더 러운 손으로 꾹꾹 찍어먹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 다. 그는 음식을 다 먹은 뒤 다시 한번 큰절을 하더니 말했다. “마님! 뭐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그럼 부엌에 있는 저 커다란 화분을 수렵실로 옮겨 주실 래요?” 아주머니는 그 노인에게 수렵실을 일러준 뒤 나에게 꽃밭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를 혼자 내버려 두다니!’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옷장도 잠궈 놓지 않은 텅빈 집 안 에 그를 혼자 두고 나온 것이다. “저 사람 도둑이에요. 집에 혼자 두면 안돼요. 다 훔쳐갈거라구요.” 그러나 아주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훔치지 않아. 그럴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이렇게 태평하시지? 분명히 큰 소동이 벌어지고 저 할아버지도 도둑 으로 경찰서에 잡혀가게 될 거야.’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카라얀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마님! 화분을 다 옮겼습니다.” 아주머니는 진심으로 고맙다면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주머니와 나는 그 가 뒤돌아서 조용히 모퉁이를 돌아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아주머니가 웃고 서 계신 것이 도무지 불안하고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미소는 더욱 더 밝고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얘야! 저 영감님은 좋은 분이야.” 아주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머니는 저 할아버지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나는 힘이 없음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꾹 참고, 내가 지켜본 일들을 처음 부터 샅샅이 보고했다. “그랬구나. 가진 돈도 없고, 돈을 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일을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살아가자면 돈이 필요하고... 저 영감님도 달리 도리가 없었지 않겠 니?” 부엌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식탁 위에 돈이 놓여 있었다. 아까 금고에서 꺼낸 돈이었다. 왜? 카라얀은 어째서 돈을 두고 갔을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들키지 않고 도로 금고에 넣을 수도 있었는데, 눈에 띄도록 식탁 위에 두고 갔다. 나는 그제서야 카라얀과 아주머니, 두 사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결국 나는 아주머니 가슴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리반지 정원에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가 많았다. 수도원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너머로 키 큰 포플라와 관목들이 섬처럼 꺼멓게 솟아 있었 다. 어느 날 수렵실 창문을 통해 그 섬을 발견했다. 나는 곧 포플라 섬에 가보기 위해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리고 출발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정오 무렵이었다. 일단 들판 끝까지 가 기로 했다. 한참을 걷다가 끝없이 이어진 풀밭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파도가 규칙적으로 풀밭 위를 걷는 듯 일렁이고 있었다. 한가로운 대낮, 초원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했다. 온갖 자그마한 곤충들과 벌레와 알록달록한 호랑나비들이 날개를 접고 흡사 꽃송이처럼 풀섶에 살그머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때때로 꿈꾸듯 날아올랐 다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 앉곤 했다. 마른 풀냄새와 초원은 끝없이 넓고 고요했다. 나무는 한 그루도 없어서 그늘 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연히 불안해졌다. 이상한 것이 공기 속을 떠도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술에 걸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이 낯선 곳에서 벗어나려고 성큼성 큼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이번엔 청각이 아주 예민해졌다. 어떤 작은 소리라도 그냥 넘기지 않고 귀가 쫑긋쫑긋 서는 듯했다. 소리라곤 발에 밟히고 팔에 스치 는 풀섶의 흔들림이 전부였는데도 하나도 놓치질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러자 그 일렁이던 소음이 일시에 멎 었다. 정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마른 풀밭이 타는 듯한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뜨거운 여름 한 낮의 태양이 풀을 태우는 것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음은 곧 불안한 일 렁거림이 아닌 비올라의 음률로 바뀌었고, 그건 곧 정적의 소리였다. 나는 이제껏 느끼지 못한 생소한 감정에 휩싸였다. 불안과 경건함, 기쁨과 고 통 등 서로 대립되는 두 감정이 행복감과 함께 평행을 이루며 다가오는 것이었 다. 그 짧은 행복의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불안의 소용돌이가 나를 휘감았다. 그 것은 바위처럼 굳은 정적에 대한 불안이었다. 끝없는 하늘, 너른 들판, 한낮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무섭게 대지를 위압하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갑자기 고요를 깨뜨리는 날개짓 소리가 들렸다. 새가 날아 올랐던 것이다. 그것이 흡사 들판이 깨어나는 신호인 양 동시에 나비들이 날아올라 클로버 잎 위를 옮겨다니고 벌들이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나도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이 생명의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는 내동 댕이쳐진 듯한 기분이 되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정적은 내가 느껴보지 못한 또다른 두려움이었다. 그 해 여름은 재도전을 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빨리 왔고 눈도 일찍 내렸다. 내가 미루어 오던 일, 어쩌 면 영영 이루지 못할지도 모를 두려운 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털어버리지는 못했다. 겨울, 눈에 뒤덮힌 들판이 다시 나를 유혹했지만, 그 신비를 캐내지는 못했다. 다만 이사가지 않길 빌면서 다음해 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푸르른 풀바 다 속의 그 섬이 내게 어떤 해답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점점 확고한 믿음이 되 어 자리잡게 되었다. 새로운 5월이 되자 나는 다시 그 망망한 고요의 풀바다 앞에 섰다. 방금 내린 촉촉한 봄비로 더욱 상큼해 보였다. 들판에는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젖은 풀섶 때문에 옷 이 젖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포플라섬을 향해, 신비의 환상을 쫓듯 발을 떼어 놓았다. 드디어 섬 앞에 도착했다.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쥐똥나무와 버들가지와 라일락들이 만발해 있었다. 나 는 망설이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며 찬란한 무지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 양쪽의 돌담이 허물어져 한쪽이 막혀 있었고, 무성하게 자란 백리향, 바위취, 꽹풀들이 아름다운 향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연못의 가장 자리는 거의 바닥이 드러났고 창날처럼 뾰족한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검은 물 위에서 나뭇잎들이 떠다니고 한가로운 백수련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관목 사이로 비춰드는 햇살이 오색영롱했다. 땅에서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고, 만발한 꽃송이마다 벌 나비들이 춤추고 있었 다. 그 사이사이 키 큰 잡초들도 섞여 있었다. 매혹적인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축축하고 무거운 생명의 충만감이 나의 넋을 빼앗아 갔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느새 나는 마술에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보이지 않 는 낯선 존재가 나의 내부로 스며들어 나도 모르게 한없는 갈증을 느끼게 했다. 나는 쓰러졌다. 그리고 수선화와 돌멩이와 검은 땅 위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머리를 풀고 옷섶도 풀어헤쳤다. 그러나 나의 흥분을 가라앉힐 무엇도 그곳엔 없었다. 대지가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질질 끌려가며 울고 웃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 았다. 이윽고 난 정신을 차렸다. 몸을 일으키고 옷을 제대로 입었다. 관목숲을 헤치며 집으로 달음질쳤다. 집은 그 무엇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 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포근히 맞아주었다. 역시 집은 포근했다. 수도원 뜰은 좀 색다른 구석이 있었다. 들판의 그 세찬 감미로움과 고통을 겪 고 난 후의 내겐 더없는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새삼스럽게 나는 그곳을 나의 피신처, 휴식처로 마음껏 누려보고 싶었다. 수도원과 성당 사이에 있는 뜰을 가로질러 가면 연못이 있었다. 나는 때로 그 연못가의 돌층계에 앉아 늘 유리처럼 투명한 수면을 바라보곤 했다. 그날따라 물의 모습도 참 독특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는데 그게 도무지 이상했다. 평소, 나는 그냥 그곳을 통과해서 맞은 편의 야외행사장으로 가곤 했다. 야외 행사장은 천정이 없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탁 트인 하늘이 훤히 다 보 였다. 큰아버지는 이따금 야외행사장의 육중한 나무 대문의 열쇠를 내게 주셨다. 들 어가 문을 닫으면 하늘이 보이는 넓다란 홀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뚜껑이 덮인 수반이 구석에 세 개 있고 그 안에 성찬이 있었다. 그곳엔 방황 중이던 한 성자가 갈증이 나서 돌을 두드리자 갑자기 물이 솟아나왔다는 전설이 얽혀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가운데 있는 뚜껑없는 수반이었다. 시원한 물과 행사장의 냄새, 그 냄새는 아찔할 정도로 달콤하고 강한 꽃밭의 향기와는 달랐지만, 오래도록 생생히 기억속에 자리잡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물과 돌이 전부였고 아무 향기도 없었다. 단애와 같은 돌담에 둘러싸여 투명하고 깨끗한 물이 수반을 채우고 있었다. 공기에 향기가 없듯이 물에도 색이 없었다. 구태여 색을 말하려 한다면 투명한 물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둘레를 하나의 성당으로 생각하고 정숙하게 앉아 있곤 했다. 물은 정 지하여 조용히 고여 있었다. 맑고 투명하기만 한 그 물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나 그 고요도 더이상 나를 지켜줄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난 또다른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정지됨과 고요에 파문을 일으켜 깨뜨리고 싶다는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나는 조그만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수면 한가운데로 던졌다. 잔잔한 파 문이 일었고, 물결은 반지 모양이 되어 퍼져 나갔다. 하나, 둘, 셋 ... 계속 던져갔다. 그때마다 처음의 파문은 뒤로 밀리고 새로운 파문이 생겨나 소리없이 바깥으로 커져갔다. 그 파문들은 영롱하게 수면을 달려가 수반의 벽에 부딪히면 다시 한가운데로 되돌아오곤 했다. 밀려나는 파문과 되돌아오는 파문이 교차되어 유리반지처럼 투명하고 신비스런 무늬를 이루었다. 그 무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만들어지는 잔잔한 무지개빛 무늬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이 물의 고요를 깨뜨리고 싶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뭇잎과 꽃잎을 수반 위에 띄웠다. 그리고 파문이 어지럽혀지는 순간을 지켜 보았다. 그때 난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상처를 입혀도 결국 수면만을 건드릴 뿐 물 자체는 결코 파괴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그 물의 신비는 내 힘 밖 에 거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커다란 벽돌을 물 한복판에 던졌다. 물결이 솟구치며 부서졌다. 그러 나 벽돌은 가라앉았고 요동도 잠시뿐 다시 의연한 물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 완전한 나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날 이후 그곳은 지금까지 느끼던 안락처가 아니었다. 고통의 장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수치심과 고통의 감정은 엷어지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씩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꽃잎을 띄우며 그 놀이를 즐기긴 했지만 전처럼 물을 흐트러뜨리고 싶다는 충동 은 없었다. 단지 새롭게 뭔가를 알아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무언지를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소중하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몇년이 흐른 뒤에도 나는 그 유리반지의 신비스럽고 투명한 파문의 유 희를 즐기며 새로운 위안과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은밀한 법칙이며 리듬이자 질서였고, 마술이고 음악이며 나만의 비밀 이었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그 유희의 힘은 들판에서 느꼈던 비올라의 음율보 다 훨씬 힘차고 강한 것이었다. 숲속의 소녀 내가 열 살 때 여름 방학의 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들판을 헤매다가 어떤 이상한 숲을 발견했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숲에 매료되어 숲 깊숙히 끌려 들어갔다. 그 순간, 어른들의 보호에서 벗어났다는 즐거움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솟았다. 나는 마구 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숲속의 꼬불꼬불한 길은 어떤 작은 성당 앞에서 끝나 있었다. 성당은 별 특징 은 없었다. 그저 순례지나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있는 성당처럼 평범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문을 통해 보이는 성당 안과, 천정에서 새어 나오는 싸 늘한 기운에 끌려 나도 모르게 발을 들여 놓았다. 성당 안은 뭔가 음침하고 기분나쁜 분위기로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짙고 붉 은색의 햇살과 오싹하리만치 푸른색이 하나가 되어 어두컴컴한 성당 안을 비추 고 있었다. 그 빛은 성당의 한가운데서 완전히 하나로 모아져 더욱더 음산한 빛을 만들고 있었다. 잠시 후, 그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색유리창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서도 나는 불안하고 섬 한 기분에 휩싸여서 도무지 마 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창 한쪽은 붉은색 유리였고 또 다른 한쪽은 푸른색 유리였다. 그러나 그렇게 오싹할 정도로 음침한 성당 안은 나뭇잎과 꽃향기로 가득차 있 었다. 자세히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제단 둘레에 둘러친 철책 위에 돌로 된 탁 자가 있고, 그 위에 실제 크기 만한 성상이 있었다. 그건 형장의 예수님이었다. 그러나 그 조각은 온갖 꽃과 나뭇잎들로 장식돼 있었기 때문에 얼굴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십자가와 쇠줄과 기둥에 세워둔 고 문 기구에 꽃다발이 정성스레 묶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날개를 파닥이는 듯한 소리가 들린 듯했다. 철책 끝에 찔린 딱정벌레가 기를 쓰고 날개를 파닥이며 바둥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철책 끝에 꽂혀 있는 것은 딱정벌레뿐이 아니었다. 나비, 파리들도 눈에 띄 었다. 이미 죽어서 말라 있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면서 아직 살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고 무서움에 덜덜 떨었다. 잠시 마음 을 가라앉힌 후, 용기를 내어 아직 고통스럽게 살아 있는 벌레들을 죽여주었다. 그때 문쪽에서 날카롭고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대면 안돼! 저리 비켜. 그건 모두 내꺼야!” 내 또래의 소녀가 문에 서 있었다. 그 아이의 몸은 색유리를 통해 들어온 빛 때문에 반은 붉은색이었고, 또 반은 파란색이었다. 나는 머뭇머뭇하면서 그 낯선 소녀의 옆을 지나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밖으 로 나와버렸다. 그런데 내가 몇 걸음 걷고 있는데 그 아이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난 ‘나 를 때리려고 그러나?’라고 생각하면서, 싸움을 걸어오면 기꺼이 맞서주겠다는 듯이 그 아이쪽으로 돌아다 보았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아이는 마 치 겁에 질린 들짐승처럼 몸을 움츠리고 기죽은 태도를 보였다. “괜찮으니까, 들어가서 봐.” 목소리에도 역시 힘이 빠져 있었다. “같이 가서 봐도 괜찮아.” 나는 여전히 쭈뼛쭈뼛하면서 그 아이의 뒤를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네가 만든 거니?” 내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그 애의 태도가 변했다. “저길 봐. 저 분은 살아 계셔. 움직이는 게 보이지, 그러지 않니?” 그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고통받는 예수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 런 얘기를 듣고 예수상을 보니,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그 아니는 거의 광적으로 흥분해 있었다. 성상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 아니는 열심히 중얼거리면서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가 끝난 뒤 넋을 잃은 듯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뒤따라 나갔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귀에다 무언가 속삭였다. “이건 기적이야. 이건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돼.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그분 은 다시 살아나서 움직이셔. 내 이름은 프란체스카야.” 마르고 창백한 표정에서 나와 사귀고 싶어하는 그애의 강한 욕구를 볼 수 있 었다. 그러나 난, 그순간 그애에게서 받은 이상하고 강한 인상 때문에 도저히 그 애와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애가 친절하게 종탑이 보이는 성게오르그 수도원까 지 데려다 주었다. 나는 다시 생각을 고쳐 그애와 친해지고 싶어졌다. 그 음침한 성당과 프란체스카와의 만남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어머니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 숲의 성당에 갔다. 내가 간 시각은 오후 2시쯤이었다. 프란체스카가 말한 예수상의 기적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안 되어서, 난 초조하게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날 프란체스카가 한 것처럼 피를 흘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성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진 성상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혀 나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고통받고 있는 그 분의 손을 풀어 주기 위해서 철책 위로 기어 올라 갔다. 일은 의외로 쉬웠다. 오랜 세월에 썩은 나무고리는 내 손이 닿자마자 제단 앞 으로 떨어졌다. 고리에서 풀려난 성상의 손은 마치 허공을 향해 무언가를 갈망하는 모습이었 다. 성상에 대한 나의 연민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길처럼 솟아오르고 있 었다. 나는 철책에서 내려와 성상의 무릎을 부여잡았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눈물 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성상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난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 며 한 걸음 물러났다. 성상의 얼굴이 움직이면서 내게 눈짓을 했다. 나는 성상에 홀린 듯이 다시 앞 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그 놀라고 당황한 감정은 이미 사라지고, 이런 기적을 직접 볼 수 있 다는 가슴저리도록 짜릿한 감격과, 나만이 그 기적을 볼 수 있도록 선택된 것만 같은 자랑스러움으로 뿌듯했다. 나는 그 살아 움직이는 성상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프란체스카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 한참 후에 왔다. 한손에는 방금 꺾어서 만든 듯한 가시덤불 다발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딱정벌레를 쥐고 있었다. 딱정벌레의 등에는 금색 무늬가 있었다. 그건 제물로 바쳐질 벌레였다. 프란체스카는 나를 한쪽 구성으로 데려가서 고문 기구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것들을 보여 주었다. 나는 호기심에 차서 물어보았다. “이것들로 뭐하는 거야?” “나를 고문하는 거야. 난 가끔 이 위에 올라서기도 하고, 밤이 되면 나무판자 위에서 잠을 자기도 하지. 예수님이 우리들을 대신해서 고통받으신 것과 똑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하는 거야. 사람들만이 아니라 짐승들도 말야. 넌 그렇다고 생 각하지 않니?” 아니, 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난 프란체스카의 말 을 듣는 순간, 내 자신이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게으르게 살아왔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애가 하라는 대로 딱딱한 나무 판자로 나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때릴 때마다 그 나무 판자에 박혀 있는 못이 가시처럼 사정없이 내 살을 파고 들었 다. 또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만들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수렵실에서 홀로 자신을 고문하는 의식을 행했다. 그 러나 내 내면에서는 프란체스카가 말한 기적에 가까운 승화된 감정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그 행위를 행할 때마다, 지독한 아픔과 수치심만 커질 뿐이었다. 나는 그 런 식으로 고행하여 얻은 기쁨보다는 차라리 속죄하는 편이 더 좋을 거라고 생 각하였다. 나의 선생이 된 프란체스카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고행은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야. 재를 삼키거나, 또는 쓴 나뭇 잎을 씹는다든가 한 후에 나무 판자 위에 무릎을 꿇어야 해. 또 성당을 세 바퀴 나 돌아야 하는 거야.” 나는 그 애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승화된 희열은 없었고 다만 고통만 느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숲이나 정원의 돌담 옆에서 프란체스카와 만났지만, 그때 마다 내 가슴 속에 있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이따금 이상한 놀이를 생각해냈다. 그 놀이는 여주인에게 학대 받는 하녀 놀이였다. 항상 나는 학대받는 하녀를 맡았고 그애는 무서운 여주인 역을 맡았다. 나는 스스로 나를 학대하기 위한 뾰족한 가시로 살갗을 찔러야 했고, 맨발로 숲속을 걸어다녔으며, 내가 먹고 싶은 빵을 꾹 참고 새들에게 나눠주어야만 했 다. 내가 맡은 역할, 즉 하녀로서 맡은 일을 아주 성의껏 대하면, 여주인은 만족해 하면서 어느새 천사의 모습으로 변해 나를 성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가시 면류관 대신 온갖 낙엽으로 만든 관을 씌워 주기도 했다. 나는 점점 프란체스카의 그 이상한 행동과 그의 말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점 점 더 나는 그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애가 나에게 들려주는 천사들의 얘기나, 빵을 나누어 준 거지들과 만나는 얘기들을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순순히 받아 들였고, 또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그애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사실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의 내부에서는 그애에 대한 반항심이 켜지고 있었으며, 또 한 고행에 대한 그애의 지시나 감시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그동안 나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야단치는 이유가 온당하지 않아도 꾹 참고 어머니의 꾸 지람을 듣는다든가, 아침에 커피를 마실 때 설탕을 넣지 않고 마신다든가, 놀다 가 중간에 놀이를 그만두는 일 등.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프란체스카는 처음으로 학교에 등교하여, 나와 우리 학급에 편입했다. 프란체스카의 아버지는 산지기이고 이번 여름에 이리로 옮겨 왔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애를 사귀게 되자, 그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비 감도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프란체스카와 나는 착실하게 우정을 유지해 갔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희미하게나마 프란체스카가 가지고 있는 신비함이 무엇 인지 조금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애가 하는 이상한 얘기를 계속 즐겁게 들 어주었으며, 가끔 그것이 진짜인 것으로 믿었다. 고행에 대해서도 몇 가지 더 가 르침을 받았다. 나는 그애 모르게 어떤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프란체스카가 내게 말했다. “있지, 네가 있는 수도원을 구경시켜 주지 않을래?” 나는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수도원은 아무나 함부로 데려갈 수가 없어.” “그건 상관없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몰래 데리고 들어가면 되잖아.” 그애의 말투는 너무나 강압적이면서도 애원하는 투여서 끝내 나는 거절할 수 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어머니는 이웃마을에 다니러 나가셨고, 큰아버지 는 주일미사를 위한 설교문을 작성하느라고 서재에 계셨다. 그애와 나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여 긴 복도를 지나갔다. 수렵실 앞에서 나는 프란체스카의 팔을 꼭 잡고 간청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응? 너는 여기에 들어가면 안돼. 정말이야 프란체스카. ” “왜? 왜 안된다는거야?” 나는 그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애가 틀림없이 그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순수함과 성스러운 질서를 무너뜨릴 것 같은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애는 못들어가게 말리고 있는 나를 팔로 확 밀치더니 문을 활짝 열 어젖혔다. 프란체스카는 승리감에 겨워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바로 그때 악마가 나타나서 나의 절망감을 앗아가 버렸다. 나는 방 한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장미 무늬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기서 춤도 출 수 있어.” 프란체스카는 내 말을 금방 이해했다. 우리는 장미 무늬를 따라 빙빙 맴돌며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프란체스카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뱀 처럼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애는 힘없이 축 늘어진 채 흰자위를 번득이며 누워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에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일어나 다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그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나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소리쳤다. “이제 그만해, 그만 좀!” 그러자 그애는 서서히 춤을 멈추었다. 나는 비로소 신성한 수렵실이 더렵혀진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는 프란체스카에게 소리쳤다. “어서 이 방에서 나가!” 그애는 잠자코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거울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마루 위에 어질러져 있는 그애의 발자국들을 남김없이 지워버렸다. 그리고 깊은 죄책감과 피곤에 지 쳐 처참한 마음이 되어 그 방을 나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나와 그애는 서로 만나는 일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나 는 계속 나의 절제와 고행을 멈추지 않았다. 가을도 지나가고, 대강절이 시작되어 성당에서는 매일 새벽 미사를 올리고 있 었다. 겨울을 새벽바람은 차가왔다. 나는 이번 새벽 미사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으려 고 단단히 `있었지만 그건 실천하기 힘든 결심이었다. 더구나 내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어머니였다.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며 성당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건강에 안 좋다면서 말리셨다. 하지만 다행히 큰아버지의 설득 덕분에 어머니는 허락을 하셨다. 그것은 어린 내가 감히 새벽 미사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새벽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다섯 시 반이면 어머니 방에서 어김없이 자명종이 울렸다. 나는 그 소리와 동 시에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의 큰 방은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아서 말할 수 없이 추웠다. 정말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고 이가 서로 맞부딪칠 정도였다. 내가 종종 걸음으로 복도를 걸을 때마다 높은 천정이 울렸다. 복도는 한밤중 처럼 깜깜해서 나는 항상 세면장을 더듬어 찾아가야만 했다. 밤 사이에 흐른 물이 대야에 조금 얼어 있었다. 처음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리다가 차츰 맑아진다. 그러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대야에 손을 담그는 일이 더 힘들게 여겨지곤 했다. 아침 식사는 새벽 미사 전에는 할 수 없었다. 말하자만 단식도 미사 의식의 하나였다. 나이가 어린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 힘든 일을 한다는 생각에 가슴을 기쁨으로 가득했다. 추워서 온몸이 떨고 있는 사이에 나는 점점 마음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과의 말없는 대화를 계속할 수가 있었다. 밤에 밖에 나와 주위를 둘러보면, 멀리 산마루에는 별들이 꽁꽁 언 채 하늘에 걸려 있고, 대지에는 추위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때때로 솜처럼 푹신푹신한 하얀 눈의 내리거나, 종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 종소리와 함께 여자들이 하나 둘 성당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성당 안은 아직 불이 밝혀져 있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주머니는 양초 주머니에서 초를 꺼내 책상 위에 세우고는 경건한 태도로 불 을 켰다. 성당을 가득 메운 어둠에 비해 우리가 밝힌 촛불은 너무 초라했다. 하 지만, 얼마 안 있어 여기저기 촛불이 밝혀졌다. 성당의 문이 열릴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불꽃은 마구 흔들리고, 또 꺼 지기도 했다. 미사가 시작되면 촛불은 더욱 밝게 타올랐다. 촛불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온 기와 초가 타는 냄새가 성당을 가득 메웠다 내가 읽고 있는 기도서는 겉표지가 가죽으로 된 약간 낡은 책이었지만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씌어 있었 기 때문에 읽기가 편했다. 나는 그 기도서를 즐겨 읽었는데 그건 기도서 중간중간에 옛날 이야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나의 흥미를 끈 것은 황야의 방랑자들에 대한 글 이었다. 그 내용은 방랑자들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해서 사나운 짐승들까지도 그 들의 시중을 든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미사 때마다 촛불 타는 냄새를 맡으며 열심히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나는 그렇게 새벽의 찬 공기를 호흡하는 아침이 되면 알 수 없는 희열에 들떠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듯한 평온감에 내 몸을 맡기곤 했다. 그건 이제까지의 고행을 통해서는 맛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이 안에 있었다. 한겨울에 들어서면서, 며칠째 계속 내리는 눈으로 정원의 관목까지 하얗게 덮 이고 말았다. 그 내린 눈으로 숲속으로 나 있는 오솔길도 막히게 되어 프란체스 카는 학교에 나올 수가 없었다. 덕분에 나는 모처럼 나만의 평온한 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프란체스카와의 음침하고 괴이한 우정의 틀에서 나는 오랜만에 벗어나, 마치 개구장이들처럼 겨울이 내게 주는 모든 놀이에 열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여름날 그리움에 가슴조이던 언덕은 멋있는 썰매터로 변해 버렸고, 무너진 기둥 옆에 내가 만든 눈사람이 싱긋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봄이 찾아와 눈은 서서히 녹아 개울 물이 되어 흐르고, 황량한 들판에는 연푸른색의 나무들이 점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란체스카도 다시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 그애는 숲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 보다 더 우수에 찬 모습으로 나의 즐거움을 모두 산산조각내 버렸다. 이른 봄 어느 날, 큰아버지는 열 살쯤 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고해에 관해 말씀해 주셨다. “이젠, 너희들도 부활절이 되기 전에 고해성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단다. 다들 기쁘지 않니?” 그때 나는 프란체스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큰아버지께선 사순절 동안 고해의 의미에 관해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나도 차차 가벼운 마음으로 고해를 기다릴 수 있었다. 이윽고 고해하는 날이 다가왔다.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성당 안에 있 는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 성당에는 고해대가 두 곳이 있었다. 한쪽 고해대엔 큰아버지가 계셨고, 다른 한쪽 고해대엔 내가 모르는 신부님이 계셨다. 나는 어느 분을 나의 고해신부로 택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의 반항과 테레제를 죽인 일,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에 대한 생각들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내 영혼이 죄로 가득차 있음을 깨달았다. 신부님 앞에 나아가 고해 를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지은 죄를 참회해야만 했다. 그리고 참회하기에 충분하 다고 생각하였다. 고해할 차례가 멀었기 때문에 나는 참회의 감정이 가슴 속에서 우러나올 때까 지 조용히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었다. 드디어 성당 안은 어두워졌고, 두 곳의 고해대 앞에는 촛불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도 황금빛 제 단은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차례를 뒤로 미루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 순서를 미루다가 마침내 내 앞에는 아이들이 몇 명밖에 남 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참회할 시간도 적어지게 되었다. 그때 앞쪽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순간 프란체스카는 몸을 휘청거리면서 일어나더니, 고통받고 있는 마리 아상 앞으로 나갔다. 점점 소리높여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차츰 높게 흐느끼던 울음소리는 오열로 변해 성당 안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서로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지르면서 킥킥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애의 울음소리 때문에 가슴이 터질듯이 괴로왔다. 프란체스카는 참회를 했기 때문에 그만큼 슬피 울 수 있는거다. 그럼 나는 뭔 가. 신에게서 방치된 채 그저 멍청히 있었다. 그러다가 이유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내가 지은 죄에 대해 생각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짐은 나에게 있어서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 록 내 마음 속에는 반항심만 커가고, 눈물따위는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난 집요하게 자신에게 말했다. “참회만 하면 뭘해. 오늘이 지나면 어제와 같은 일을 다시 할텐데. 다 쓸데없 는 짓이라구.” 나는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나의 외출복 입은 모습도 생각하고, 또 우리반 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프란체스카보다는 내가 더 똑똑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촛불의 숫자가 짝수이면, 하나님은 내가 참회를 안 해도 틀림없이 용서 해 주실 것이고, 만약 촛불의 숫자가 홀수일 경우는 내가 참회를 한다해도 하나 님은 내게 저주를 내리실 거라고. 촛불을 세어보니 아홉이었다. 홀수였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 그대로 앉 아 있을 수 있었다. 고해를 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악마가 유 혹하는 기분이 들어서 난 그대로 참고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내 앞에 남아 고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한 아이마저 고해대로 나가 고 결국 나 혼자만이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 잠시 후면 나의 운명이 결 정되리라는 심정으로. 나는 지금껏, 자기가 지은 죄를 먼저 참회하지 않고 고해를 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벌이 내린다고 배워왔다. 무릎이 점점 떨려왔다. 난 참회를 하고 싶었다. 초조함으로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눈물로 얼굴이 온통 얼룩진 프란체스카가 고해대쪽으로 향하고 있는 모 습이 보였다. 그애는 심한 죄책감과 고통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천천히 고해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해대 안에서 그애의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프 란체스카가 무엇을 고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속삭임은 서서히 흐느낌으로 변했다. 난 더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프란체스카!” 나는 그애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으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 소리치고 말았 다. 그러나 그애는 아까와는 달리 아주 밝은 표정으로 고해대에서 나왔다. 잠시 후 내가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나는 몸을 떨며 고해를 하기 시작했다. “이 불쌍한 죄인은...” 정신을 차리고 나는 나 자신이 말하고 있는 고해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누 군지 알 수 없는 고해 신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고해대에서 나와버렸다. 저녁 식사 때, 혹시 나의 고해를 받으신 분이 큰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 각을 했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태도로는 내가 지은 죄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확신할 수 가 없었다. 다만 아주머니와 어머니는 평소와는 달리 내게 조심스럽게 대해 주셨지만 두 분 모두 유쾌한 표정이었다. 큰아버지는 그날도 다른 날처럼 가벼운 우스개 소 리를 하셨다. 그날 밤, 어머니는 나를 잠자리까지 데려다 주고, 잘 자라는 인사로 이마에 키 스까지 해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뜻밖의 키스를 받고 마치 무슨 뾰족한 것에라도 찔린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집안에 살인을 한 아이가 하느님에게 버림받고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 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나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 움에 몸부림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깊은 우물 속에 몸이 잠긴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의 발 아래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깊은 연못이 있었고, 위 에는 샘물의 입구가 있었다. 그 입구로부터 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실 지경 이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져서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 었다. 뭔지 알 수 없는 무거운 것이 내 발목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나의 가 슴은 점점 조여오고, 손으로 아무거나 잡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 히지 않았다. 발바닥에 끓어오르는 연못의 물이 느껴졌다. 순간, 이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 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멎자 내 옆에는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숨을 헐떡 이면서 천사가 있는 쪽으로 마구 달려가려고 했지만 아주 싸늘한 바람이 나를 휘감았다. 나는 마침내 우물에서 빠져나와 환한 빛을 가득 몸에 받았다. 잠이 깼을 때는 새벽이 조용히 걷히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보고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단지 꿈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로 나타났다. 그 꿈은 나의 마음속 깊이 냉정함을 갖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유치한 놀이 는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진지하게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천사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프 란체스카와는 될 수 있는 한 만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활절이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우리의 우정의 나무에서 새로운 잎이 돋았다. 혼자 숲을 거닐고 있던 나는 우연히 프란체스카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아 무말 없이 숲을 향해 걸었다. 숲은 나뭇잎 사이로 간간히 비치는 희미한 햇살이 있을 뿐 어두웠다. 나는 프 란체스카에게 이끌러 아네모네와 노송나무 사이로 펼쳐진 들판으로 갔다. 오리나무가 들판 한가운데 쓸쓸히 서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나무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제일 아래 가지는 활모양으로 구부러진 채 땅에 늘어 져 마치 대문이나 교각을 연상케 하였다. “지금부터 놀이를 시작하는 거야.”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내 말을 잘 들어봐. 너는 이제부터 선교사야. 선교사가 이교도의 마을에 찾 아와 그들에게 설교하는 거야. 그런데 그들은 너를 독화살로 쏘아 죽이게 되는 거야.” 나는 그애의 말대로 휘어진 오리나무 가지에 올라서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많은 얘기를 해 주었다. 풀밭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수천 명의 이교도 들에게 나는 열심히 내가 알고 있는 얘기를 모두 들려 주었다. 그리고 나무를 흔들어 이교도들에게 빵을 주고, 노송나무 언덕의 좁은 길을 헤쳐나가며 그들에게 성지로 안내해 줄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 수천 명의 이교도 중에 한 명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활을 겨냥한 채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고는 활의 시위를 퉁겼다. 그 순간 나는 가슴 깊숙히 화살 끝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풀밭 위로 쓰러졌다. 숨을 들이쉬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풀꽃으로 내 몸을 덮고 있었다. 그 꽃은 부드럽고 서늘한 느낌이었다. 밤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향기는 감미로왔다. 나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푸르고 깊은 연못에 떠 있는 기분으로 풀밭에 누워 꼼짝않고 있었다. 잠시 후 내 곁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내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방은 계속 이름을 부르더니 마침내는 내 몸을 흔들 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억지로 눈을 떴다. 무릎을 꿇고, 흘러내린 눈물로 얼룩져 있는 프란체스 카의 얼굴이 보였다. 그애는 내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거룩한 순교자의 죽 음 앞에서 참회하는 이교도 여인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슬픈 얼굴에 잠긴 그애를 본 순간, 다시 한번 더 진한 사랑을 되 새기게 되었다. 나는 프란체스카를 부둥켜안았고, 우리는 서로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그렇게 흐느끼며 점점 어두워지는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놀이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의 우정도 전과는 다르 게 성장해 나갔다. 비키와의 만남 프란체스카와의 사건이 있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비키와의 만남은 나의 소녀시절에 있어서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 비키의 모습은, 맨발에 나막신을 신 고 햇볕에 그을은 거무스름한 피부와 붉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마굿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 는 모습이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장이 수도원 바로 부근에 있었다. 비키는 바로 이 농장 소작인의 딸이었다. 나보다 세 살 위였다. 어느 날 내가 혼자 농장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그때 비키가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 은 마굿간에서 수레에 거름을 가득 실어 퇴비더미에 갖다 붓는 일이었다. 나는 물론 해 본 적도 없고, 여자아이가 그런 일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나 비키는 별로 힘들지도 않은 듯 가 볍게 일을 해치웠다. 그리고 다시 마굿간으로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퇴비더미를 수레에 싣고 가는 일을 숙련된 하녀처럼 반복했다. 그애가 열네 살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어떤 남자애가 나타나더니 비키의 팔을 잡았다. 비키는 힘껏 그 남자애의 엉덩이를 한 대 때려 주었다. 언뜻 들은 그애의 웃음소리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우렁차서 마치 농장에 군림 하는 여주인 같았다. 조금 지나자 그애는 소떼를 몰고 농장을 가로질러 갔다. 마차에 뛰어올라 소 엉덩이를 두드리 더니 이내 커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농장을 빠져나간 마차는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밭쪽으로 갔다. 나는 약간 거리를 두고 마차를 따라갔다. 그애의 노래소리는 들판에 가득 울려퍼졌고 붉은 수건은 햇볕을 받으며 춤추듯 흔들리 고 있었다. 그애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일꾼들은 일손을 멈추고 인사를 했다. 그 사람들의 얼굴엔 기쁨이 찬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후미진 밭에 이르자 그애는 소 고삐를 어떤 젊은 사람에게 넘겨주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일 꾼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그애는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걸었다. 생울타리 뒤에 이 르자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주머니에서 검은 빵을 한덩어리 꺼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 서서, 그렇게 당당하게 앉아 자랑스럽게 빵을 먹는 그애의 모습을 부러운 듯이 쳐다 보고 있었다. 자신의 할일을 마치고 난 뒤의 기쁨, 그리고 자신의 현실에 대해 즐겁고 만족해 하 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애는 철저히 대지에 속하고 땅에 존재하는 권리를 당당히 누리고 있었다. 그 애에게 절망과 주춤거림과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낼 능력이 있고 불가능이란 애초부터 마음에 담아두질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활기에 차고 아름다운 그 애를 보자 내 자신이 지나치게 보잘 것 없고 비참해졌다. 그 리고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에 대해 갑자기 싫증이 났다. 프란체스카와의 괴상한 놀이와 기쁨이 일시에 우습기도 하고 너무나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명력 없는 삶이란 얼마나 가치가 없는 것인가. 나는 그애가 부러웠다. 진심으로 그애처럼 되고 싶었다. 비키가 지닌 모든 것은 활기와 갖가지 색깔로 넘치고, 그애가 가는 곳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붉은 수건을 쓰고 마굿간에서 일하거나 소에게 먹이를 먹이거나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거나, 소떼를 모는 나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너무 나 근사했다. 나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이미 땅 위에 굳게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못박혀 서 있었다. 그제야 비키는 나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러나 이내 나를 무시하고 계속 빵을 먹어댔다. 나는 천 천히 다가가 바로 앞에 섰다. 비키는 여전히 빵을 먹으며 건성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심문조였다. “이름이 뭐야? 나이는? 집은 어디지? 어디 가는 길이야?” 나는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주뼛거리며 대답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빵을 다 먹었던 것이다. 나는 잠자코 따라갔다. 내가 구두를 신은 걸 보더니 그애가 불쑥 말했다. “왜 구두를 신었니? 맨발로 다니면 훨씬 편할텐데.”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그애는 경멸스럽다는 말투로 이렇게 덧붙였 다. “더구나 이렇게 날씨가 따뜻한데!” 나는 곧 길에 주저앉아서 구두와 양말을 벗어 들었다. 농장 앞에서 주춤거리며 있는 나에게 그 애가 말했다. “괜찮아. 들어와.” 농장 안에 들어가자 애는 나에겐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고 자기 할 일만 계속했다. 나는 이제 나 저제나 그애가 쳐다봐주기를 고대했지만 여전히 나를 무시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돌아가 버릴 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왔다갔다하는 일꾼들의 바쁜 모습과 마차 연장과 소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 순 간 결코 비키가 내게 무관심한 게 아님을 깨달았다. 다만 인간과 사귀는 것보다 가축과 사귀는 것이 재미있고 즐겁다는 사실을 내게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마굿간으로 들어가 소의 입에서 약간 떨어져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하는 소의 양볼을 살짝 만져보곤 했다. 그 중 한 마리가 외롭게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힘도 세어 보였고 숨소리도 요란스러운 놈 이었다. 멍에도 씌워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키가 다가와서 나를 끌고 갔다. 나를 미워하는 건 지 야단을 치려는 건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리와! 저건 황소란 말야. 나랑 토끼 먹이나 주러 가자.” 그애가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이 기뻐서 얼른 따라갔다. 그애는 토끼집 앞 들판을 가리키며 말했 다. “넌 토끼풀이나 뜯어 와.” 그렇게 말하곤 이내 사라졌다. 풀을 열심히 뜯으며 난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뻐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손에 도 비키의 손처럼 민들레물이 드는 것이 즐거웠다. 뜯어온 풀을 토끼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데 비 키가 왔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더니 이윽고 어떤 놈에겐 좀 적게, 또 다른 놈에게 풀을 더 주 기도 하며 골고루 나눠 주었다. “다음은 장작을 쌓으러 갈 거야.” 도와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도와주든 구경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뜻 같았다. 우리는 함께 헛간으로 갔다. 비키는 내가 집어주는 장작을 담벽에 붙여 쌓았는데 마치 자로 재 는 것처럼 똑바로 쌓았다. 벤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리나무는 아직 덜 말라서 눅눅했고 적황색이었다. 냄새도 싱그러웠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등, 허리, 손이 아팠지만 그래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일을 했다. 조금 어슴푸레해질 무렵 처마 끝에 달린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종소리야.” 비키는 말했다. 우리는 함께 뜰에 있는 우물가에서 손을 씻었다. 일을 도와준 것이 당연한 듯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집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큰 방으로 들어서려니 조금 불안했다. 비 키는 내 팔을 끌어 식탁에 앉혔다. 다른 일꾼들과 하녀들도 묵묵히 식탁에 둘러 앉았는데 모두들 배가 고파서 떠들 기운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나에 대해 누구 한 사람도 궁금해 하지도 신경쓰지도 않았다. 집 주인 부부는 맨 나중에 들어왔다. 주인 남자는 성호를 그은 뒤 기도를 시작했다. 끝 부분에 가서는 다 함께 따라서 기도를 했다. 기도원과는 기도형식이 상당히 달랐다. 큰아버지는 또박또박 분명하게 발음하셨고 중간 호흡을 끊으며 독특하게 힘을 넣으시곤 했다. 그러나 그곳의 기도는 숲의 중얼거림 같았다. 기도는 계속 되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분명히 알 아들을 수는 없었다. 조용히 넓게 울려퍼지는 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기도는 갑작스럽게 아멘 소리와 함께 끝났다. 일시에 삐걱거리는 소리와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비키와 주인 아주머니 사이에 앉았다. 그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로 내게 인사를 하며 수저를 건네주었다. 식탁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양은 그릇에서 따뜻한 감자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각 기 그 감자를 자기 접시에 덜었다. 그 다음에 소금 그릇에서 소금을 조금씩 덜어갔다. 감자 외에 찬 우유가 한병씩 돌아갔고, 비키는 자기몫을 내게 넘겨 주었다. 감자는 껍질을 벗긴 뒤 소금을 쳐서 우유와 함께 먹었다. 그런 식사는 처음이었다. 나는 언제나 큰아버지의 농담을 들으면서 하얀 식탁보와 금빛 조각을 새긴 자기 그릇이나 은식 기에 훌륭하게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먹었다. 그러나 지금, 어두침침한 농가의 방안에서 처음 맛보는 소박한 식사는 무슨 외식이라도 하는 듯이 아주 멋지게 느껴졌다. 나는 물집이 잡힌 손으로 구두와 양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온통 흙투성이인 앞치마 를 두른 채였다. 어머니의 노여움은 불과 같았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잠자코 꾸중을 듣고 있었다. 꾸중을 들 으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낮에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어머니 께 말씀드리고 나서 오늘 저녁 식사는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모양이구나. 어째 갈수록 말썽만 피우고 하루도 조용 한 날이 없니?” 어머닌 거친 솔로 옷의 먼지를 털도록 명령했다. 기꺼이 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했다. 온몸은 지 칠 대로 지치고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하고 더없이 기뻤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 비키를 찾아가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 버렸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세계 와는 전혀 다른 생의 일면을 그애에게서 보았다. 그 세계는 활기에 찬 생명력과 안정감으로 충만 해 있었다. 꿈과 이상에 들뜬 나의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비로소 꿈꾸는 듯한 나의 과거가 서서히 사라지 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 펼쳐질 현실을 움켜잡았다. 이제 암소에게 먹이를 줄 줄도 알았고 나무를 패고 건초나 곡식단을 엮는 일도 도울 수 있게 되었다. 버드나무에 가축을 매어두고 밭에서 감자를 캘 수도 있었다. 완전히 농장 사람이라고 해 도 별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햇볕과 바람으로 인해 피부는 갈색으로 그을었고 손과 발꿈치는 못이 박혔다. 정말 재미있고 진심으로 삶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하루하루였다. 들판이나 밭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졌고 구름이나 날아가는 새떼를 보고도 날씨를 점칠 수 있었다. 버섯이나 잡초를 찾아낼 수 있었고 개와 토끼, 산돼지, 노루 같은 산짐승 의 발자국을 구별하는 것도 배웠다. 비키는 언제나 별로 말이 없었지만 그애 역시 나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비키는 어 깨를 으쓱이며 자기방에 있는 유리 그릇을 자랑했다. 그 방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알록달록 색칠이 된 촛대, 기도하는 천사상, 헝겊인형, 성화, 유리로 만들어진 꽃다발, 향기나는 비누, 사과의 버찌, 은그릇, 그리고 통에 든 기타도 있었다. 우리는 축제를 열었다.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축제, 그렇지만 언제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축제 였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즐긴 개암나무 축제는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나무를 쌓아놓은 헛간 뒤로 개암나무 생울타리가 있었다. 그래서 개암을 따려면 할 수 없이 헛간 위로 기어 올라 가야만 했다. 우리는 지붕 위에 걸터앉아 갈색으로 익은 개암을 따서 속껍질 채 먹었다. 그 개암을 먹으며 비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개암을 먹으며 가을의 모든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지 않았을까. 나는 개암을 먹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었다. 그건 지붕 위에 올라가 구름과 구름이 이어 지는 텅빈 가을 들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주홍빛으로 불타는 숲과 푸른 산맥이 보 이고, 아득히 멀리 하늘과 맞닿는 멀고 먼 산봉우리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여름이 가버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밀 려와 그 감미롭던 가을의 감상이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비키와 농장과의 이별이 다가오 고, 행복했던 시절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그 고통 을 견딜 수 있었다. 그 해 가을, 나는 정말 이별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바로 비키와도 성 게오르그 수도원과도 이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편지를 하셨다. 초겨울에 수용소에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곧 수도원을 떠나야 된다고 일러주셨다. 그 후 몇 주일은 이별의 준비기간이었다. 내가 가장 아끼던 밤나무가 죽었고 예년과 달리 일찍 내린 서리로 꽃밭은 시들어 버렸고 뜰에 난 십자로도 무너졌다. 비키는 이웃마을에 사는 언니가 아기를 낳기 때문에 가야만 했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큰아버지의 개도 죽었다. 어떤 비열한 사냥꾼의 총에 맞은 것이 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흥분한 나머지 그 사냥꾼을 고발하라고 큰아버지께 떼를 썼다. 너무 격분 해서 큰아버지의 슬픔은 생각지도 못한 짓이었다. 그런 내게 큰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얘야! 세상에는 옳지 못한 일이 많단다. 그런데 모두가 복수를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 니? 그리고 법관이 모두 우리 편은 아니야.” “그럼 법이나 재판관, 교도소는 왜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가 많단다. 물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하는 거지. 하지만 옳다고 모두가 옳은 것으로 판정되는 것만은 아니라나. 넌 이런 얘길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에게서 떠난 온갖 사물은 곧 우리의 짐을 덜어주는 거란다. 짐이 덜 무거울수록 쉽지 않겠니?” “그렇지만 큰아버지도 슬퍼하고 계시잖아요.” “나도 물론 슬프단다. 내가 사랑했던 것을 위해 슬퍼할 줄도 알아야지. 눈물을 흘리는 게 결 코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야. 그래, 좋은 일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내게서 하나님이 가져가시는 것에 대해 슬퍼하고 잡으려는 것과 눈물을 참고 사랑하는 걸 기꺼이 바치는 것과의 차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나는 막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가슴에 와 닿았지만 이해하고 싶진 않았다. 울면서 뒤뜰 로 뛰어나갔다. 큰아버지가 따라나오셨고 나는 기어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슬픈 일이 많아요. 앞으로도 계속 다가오겠지요.” 나는 넋두리처럼 말했다. “그래, 그렇단다. 앞으로도 슬픈 일은 늘 다가올 거야. 물론 기쁜 일도 많을 테고.” 큰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나를 위로한다기보다는 긍정하시고 계셨다. 나도 그 진실에 오 싹해졌다. 그러나 그 진리는 나를 단단하게 해주었고,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저녁에 우리는 나무 밑에 개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무덤은 큰아버지가 직접 만드셨고 흙도 덮어 주셨다. 우리는 무덤 앞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큰아버지에게 조용히 물었다. “큰아버지, 기도를 드리셨어요?” “그래” “개를 위해서요?” “개와 다른 모든 피조물을 위해 기도했단다.” “개는 이제 어디로 갈까요? 천국으로, 아니면 지옥으로 가나요?” “고향으로 갔을 거야.” “고향이 어딘데요?” “말을 해도 잘 모를 거야. 네가 좀 더 크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걸 알게 될 게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11월, 유난히 일찍 내린 눈은 집과 정원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그 무 렵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성 게오르그 수도원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탄 마차가 마을 밖을 벗어날 때까지 그쪽으로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귀향 아버지는 전쟁에 참가하셨다가 5년 동안 러시아 수용소에서 생활하셨다. 그동안 우리 고향 집 은 비어 있었다. 나는 빨리 우리집이 보고 싶었다. 이따금 멋지고 근사한 우리집을 상상해 보곤 했다. 꽃이 가득한 넓은 정원과 높은 창문과 큰 방이 여러 개 이어져 있는 이층집, 뒷뜰엔 과일나무 가 여러 그루 있고 집 앞으로는 큰 길가에 가로수가 곧게 뻗어 있는 집이 내 상상속의 우리집이 었다. 그러나 역에서 집으로 가는 모퉁이를 돌 때 내 앞에 펼쳐진 건 금방 유령이라도 나올 듯한 쓰 러져가는 폐허뿐이었다. 운치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고, 앙상한 가로수와 엉망진창이 된 거리는 도 무지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날씨는 지독히 흐려 서릿발이 낀 잿빛 햇살이 구름 밖으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 었다. 어머니는 그러한 풍경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잠자코 앞만 보고 걸어갔다. 허물어지고 흉칙해 진 집들 사이에 비교적 밝은 집이 보였다. 나는 그게 우리 집이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집을 그냥 지나쳤다. 그리곤 작고 음침한 어떤 집 현관에서 다 왔다고 짐 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담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보기 싫고 운치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집이었다. 그런 집 위로는 결코 행운의 별이 비추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달그락거리며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곰팡내와 케케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꼭 누군 가 죽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튼도 옷감도 닿기만하면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곧바로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온 것이 기쁜 듯 가구를 정돈 하고 난로에 불을 지폈다. 행복에 겨운 표정이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주의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담은 바로 뒷집과 붙어 있었고 몇 그루의 나무 만이 삭막하게 뜰에 서 있었다. 더욱 썰렁해 보였다. 나는 이곳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겉 같았다. 그런데 문득 마술을 부리는 힘이 내게 있다는 게 생각났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곧 아치형 문을 지나 성 게오르그 수도원을 들어섰다. 정원의 향긋한 꽃내음에 머리가 아찔했다. 수 녀들의 합창소리를 들으며 기둥 사이로 뛰어다녔다. 마지막까지 긴장하면 계속 그곳에 머물 수 있게 된다. 나는 마술이 절정을 이른 순간 눈을 떴다. 그러면 성 게오르그 수도원에 계속 머물 수 있으리 라 믿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곳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절감해야만 했다. 마술을 시작할 때 실수가 있 었거나 너무 빨리 눈을 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마술을 시작했다. 성 게오르 그로 가기는 쉬웠지만 게속 머물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귀향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몇 주 동안 그 삭막한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 냈다. 나는 그곳 학교에 들어갔으나 거기에 마음을 쏟지는 못했다. 즐거움이라곤 없는 나날이 덧 없이 흘렀다. 수도원에 대한 그리움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일에 쫓겨 나에게 신경을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와 조용히 지내는 날이 별로 없었다. 이유는 어머니가 소중히 여기시는 물건을 내가 너 무 무심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내 구두나 마룻바닥이 깨끗하든 더럽든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장난을 치지도 않았고, 공 부도 밖에 나가서 노는 일도 다 귀찮았다. 난로가 있는 따뜻한 다락방만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리곤 창틀에 앉아 창 너머로 성 게오르그 수도원 쪽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 자 내 일의 전부였다. 날씨가 맑고 화창한 날이면 멀리 수도원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더 이상은 감당해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춥더라도, 이러다가 죽을 병에 걸려 먼 나라로 가더라도, 언젠가 는 그 시골길을 걸어서라도 수도원에 가야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버지의 귀향이었다. 나는 아주 마음씨 좋은 자상한 의사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술사를 기다리듯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1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밤 드디어 아버지가 오신단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많이 기다렸지?” 많이 기다리다니! 난 기다린 정도가 아니라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니 이상하게도 들떠 있던 흥분이 차츰 가라앉았다. 이른 저녁, 역의 개찰 구 앞에 서 있자니 기쁨마저도 완전히 사그라져 버렸다. 이윽고 기차가 들어와 멈추고 한 남자가 뛰어내리더니 곧장 어머니에게 뛰어왔다. 나는 두 사 람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그 수염투성이의 남자가 뼈만 앙상한 손으로 내 손을 움켜잡았다. 너무 낯설었다. 그 사람은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역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그동안의 많은 이야 기를 짧은 시간에 주섬주섬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나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가끔 이해할 수 없 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의 굳은 표정은 밝고 따뜻한 거실과 깨끗하고 맛있게 차려놓은 식탁 앞에서도 좀체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 흘끔흘끔 그를 쳐다보았고 그때마다 그는 마치 울 안의 갇힌 늑대처럼 주위를 두 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이런 음식에 익숙하지 않을 거야. 시베리아에서 풀죽과 날고기만 먹었을 테니까’하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수도원과 학교생활에 관해 얘기하라고 옆에서 자꾸 재촉했지만, 그 사람은 손 을 내저으며 피곤하니까 그만두라고 했다. 아버지가 방을 나간 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지금 나처럼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몰라. 나와 똑같이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 거야. 이 집이 예전 같지 않게 낯설고, 어머니와 나를 귀찮은 유령으로 여기실지 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계시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런 아버지가 불현듯 가련하게 느껴졌다. 내 마음을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었다. ‘전 아버지의 마 음을 알아요. 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거든요.’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를 본 척도 않고 지나가 버렸다. 여러 주일이 지나자 아버지는 다시 일을 시작하셨다.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바쁘게 다녔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소시민의 생활을 시작했으나 그 의 미나 목적을 깨닫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주위를 살피는 울에 갇힌 늑대 같았고, 내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차갑고 말없는 손님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낯선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 의 음산함이 전염되지 않을까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봄이 다가왔다. 꽃샘바람에 서서히 눈이 녹고 아이들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큰길가에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안식처인 다락방에서 봄을 맞이했다. 어느날 오후, 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람을 가득 실은 마차와 부딪쳤다. 순간,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숲속의 친구, 피리소년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돌려 그 마차를 뒤쫓기 시작했다. 마차는 시내의 자갈밭 공터에 짐을 풀었다. 갈색 피부의 여자들과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 바 쁘게 일을 시작했다. 우선 말뚝을 박고 천막을 쳤으며 여러 가지 기구들을 늘어 놓았다. 이내 곡 마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차마다 기웃거리며 그 피리소년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곡마단의 생활이 나를 유혹했다. 천막을 붙잡아주고 장대를 번들거리도록 닦아 주 었고 밧줄을 집어주는 등 서슴없이 일을 거들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가 친절하게 말을 걸며 자기가 저녁에 보일 재주를 미리 보여 주었다. 물구나무를 서서 차바퀴를 돌리는 재주였다. 나도 안간힘을 다해 흉내를 내려고 했지만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발 뒤꿈치를 들고 뱅글뱅글 맴을 돌 줄은 알았다. 그건 수도원의 수렵실에서 익힌 춤이었다. 곡마단 사람들은 잘 한다고 찬사를 보내며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머 리가 아찔함에도 불구하고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거의 되었다. 마차와 곡마단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서 피로와 슬픔에 지쳐 정신없이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집요하게 다그쳤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도저히 못참겠다면서 몇대 쥐어박기도 했으나 나는 별 로 화도 내지 않고 용서를 빌지도 않았다. 내가 곡마단 앞에서 보인 춤은 정말 멋진 것이었다. 그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금 이 지겨운 감금생활을 감당해야 하다니! 괴롭고 후회스러웠다. 그들과 휩쓸려 자유로운 방랑생활로 떠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 이다. 물론 내 이성은 나의 그러한 생각과 행동에 신랄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과연 무엇이 잘못일까? 나는 생각에 골몰했다. 무질서한 방랑생활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린 아이는 아니었다. 마침내 유희와 쾌락을, 방종함을 즐기는 게 나의 천성적인 죄가 아닐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 다. 그리고 나를 억누르는 우리집의 중압감, 그 고통스런 중압감이 내게 기름을 부은 것이리라 생 각했다. 어머니를 향한 맹목적인 반발심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꾸 커져 갔다. 어머니는 개미 같 은 부지런함과 근면함, 수다스러움으로 아버지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옷을 조금만 더럽혀도 몇 시간씩 어머니에게 들볶여야 했다. 어머니는 어느날 나를 도저히 참 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락방에만 온종일 틀어박혀 지내는 나의 생활에 의심을 품고 마침내 조사 를 시작한 것이다. 때때로 내 방으로 와서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해 슬며시 물어보기도 하고 괜스 레 옷장을 뒤지며 수상한 게 없나 의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갑자기 폭발한 반발심을 참지 못해 어머니에게 구두를 한 짝 내던지고 말 았다. 그 얘긴 이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나를 엄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다락방은 이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는 부모님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얌전히 집안일을 거들어야만 했다. 두 분의 산책길에도, 외출할 때도 꼭 따라다녀야만 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그걸 견뎌내는 방법 을 터득해야 했다. 그건, 하루종일 부모님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수도원과 꽃밭과 정원의 샘에 관 한 환상에 젖는 것이다.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고 이제는 부모님을 대하는 방법도 나름대로 배워나갔다. 날이 따뜻해지자 폐허였던 시내의 가로수도 차츰 새 잎이 돋고 거리도 한결 깨끗해졌다. 뒷뜰 의 초라하던 정원도 살아나기 시작했고 담장도 백당나무의 파릇한 잎으로 덮이고 있었다. 어느 봄날 나는 정원의 한 구석에서 검고 기름진 땅을 발견했다. 그곳의 흙냄새는 성 게오르그 수도원과 그곳의 꽃밭과 농장, 여름과 우정에 대한 추억을 한층 강하게 불러일으켜 주었고 나의 얼어붙은 마음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담벽에 이마를 기대고 눈물을 흘렸다. 그 뜨거운 눈물은 부드럽게 내 마음의 상처를 위로 하며 감싸주었다. 그곳에 나의 꽃밭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잠시 반항심을 죽이고 어머니께 꽃씨를 부탁했다. “꽃씨? 뭐하려고?” 차가운 어머니의 시선이 다시금 내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반항심이 꿈틀거렸다. 나는 싸늘하게 응수했다. “있어요, 없어요?” “맙소사! 엄마한테 말투가 그게 뭐냐? 얌전히 말 못하겠니? 그 말씨를 고치기 전엔 꽃씨를 줄 수 없어.” 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자 아름다운 꽃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어머니와 화해를 하지 않으면 꽃씨도 받지 못할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원 구석에 꽃밭을 만들려고요. 그러니까 꽃씨를 좀 주세요.” 나는 어머니가 기특해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나의 말을 단 한마디로 무시해 버렸다. “그곳은 그늘져서 꽃이 자라지 못해. 너다운 생각이지만 꽃씨를 심어봐야 소용이 없단다. 얌전 히 잡초나 뽑고 있어라. 그게 더 나을 거야.” 나는 더이상 어머니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서 몇 가지 꽃씨를 얻을 수 있었다. 무슨 꽃인지는 잘 몰랐 지만 그 검은 땅에 정성껏 심으며 꿈에 부풀었다. 그날 이후 나의 깊숙한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마음의 상처는 천천히 자라는 꽃의 비밀스런 힘 으로부터 영양을 섭취하였다. 나의 정성과 사랑이 꽃들을 감싸듯 나의 상처는 꽃들에 의해 차츰 차츰 아물어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할아버지 봄이 서서히 우리들의 곁을 지나갈 즈음 우리 집안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만일 그런 변화가 내게 좀더 일찍 찾아왔었다면 내가 느끼는 고통도 그것만큼 덜 했었으리라 생각된다. 평온하던 어느 봄날 부모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겉봉에는 낯설고 이국적인 느 낌을 주는 우표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와 우표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부모님의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나는 주의깊게 보고 있었다. 부모님의 당황하는 표정 속에는 뭔가 좋은 예감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와 아버지 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왜, 제가 그런 일까지 해야 되지요? 늙은 노인을 모시고 함께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지 당신은 생각해 보셨어요? 게다가 그 노인은 너무 까다롭잖아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물어 보고 싶었지만 나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상상을 해 보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어머니는 이층 객실을 정리하신 후 나와 침대를 옮기다가 갑자기 얘기를 꺼내셨다. “너는 우리집에 누가 오는지 궁금하지도 않니?” 나는 그냥 관심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동양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오신단다.” 그제서야 나의 상상 속에 자리잡고 있던 미지의 그 분이 마침내 명칭을 갖게 되었다. 나는 안 도의 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그저 나이들고 병들어 초췌한 모습이 떠오르게 되지만, 어쩐지 동양에서 오신다는 그분에게는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아직 할아버지는 오시지 않았지만, 집안에는 온통 동양의 이국적인 향취와 이상한 향료와 고급 스런 목재 냄새가 가득차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도착하기로 한 날, 나는 나의 정원에 나가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을 꺾었다. 빌로 드와 같은 빨간 앵초, 그리고 붉은 색을 띤 프랑스 국화와 삼색 제비꽃, 물망초 등등 내 손 가까 이 있는 꽃들은 전부 꺾어 한아름이나 되었다. 아직 채 피지 않아 꽃봉오리인 것도 꺾었다. 그런데도 꽃다발은 별로 아름다와 보이지 않았다. 난 어머니 꽃밭에 들어가서 괜찮게 피어있는 시클라멘도 꺾었다. 그런 짓을 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집안 식구들 몰래 내가 꺾은 꽃다발 을 객실 한구석에 가져다 놓았다. 그날 저녁, 나와 부모님은 역으로 할아버지를 마중나갔다. 할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산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던 어머니는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자 억지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기차가 멈추고 매우 밝은 색 옷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나는 부모님이 먼저 그분을 알아보기 전에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저기 오셨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분이 계시는 곳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나는 열네 살을 먹도록 그런 분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반갑다는 듯이 덥석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잠시 후에 부모님이 오셨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만나자 늘 하듯이 질문을 퍼붓고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쌍두마차를 부르고,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낯선 이국땅에서 오신 할아버지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지만 내가 본 것은 할아버지의 눈뿐이었다. 눈빛은 조용하고 침착했는데, 상대방이 말하는 모습을 가끔 쳐다볼 뿐, 거의 아무 얘기도 귀담 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말하는 내용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빛은 드디어 무엇인가를 찾아낸 듯 싶었다. 그 고요하고 침착한 눈은 어딘지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걸 느꼈다. 집에 도착해서 객실로 안내된 할아버지는 내가 아침에 마련해 둔 꽃다발이 있는 곳까지 곧장 가시더니 그 꽃다발을 자세히 들여다보셨다. 그리고 어머니를 바라보셨다. “고맙구나. 이런 걸 다 준비하고.” “제가 한 것이 아닌데... 누가 그랬지?” 어머니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시고 나와 꽃을 번갈아 보더니 이맛살 을 찌푸렸다. 나는 어른들이 집안을 정리할 동안 어둠이 깔린 정원으로 나갔다. 꽃밭 주위에 앉아 밀려오는 싱그러움과 평화스러운 냄새를 한껏 맡았다. 마치 성 게오르그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나를 불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머니는 나와 단 둘이 있게 되자 기 다렸다는 듯 허락없이 꺾은 시클라멘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 “너 제정신이니? 저 꽃은 내 꽃이고, 네 멋대로 꺾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 텐데.” 어머니는 내 뺨을 때렸다. 다행이 그때 할아버지가 오셔서 벌은 그 정도에서 끝났다. 할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다 끝내고 곧장 방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나더러 할아버지께 차를 갖 다드리라고 시켰다.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할아버지는 화려한 비단 잠옷을 입고, 창문을 활짝 열어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방에는 향기로운 담배 냄새가 초여름 정원에서 풍겨오는 향기와 합쳐져서 향을 피워놓은 것 같았다. 그 향기 속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차를 가지고 온 나를 보지도 않고 그저 창 밖을 향한 채, ‘고맙구나’라고 말씀하 셨다. 나도 저녁 인사를 하고 곧바로 나오려고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난 내 방에 가는 대신 한 참 문간에 서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좀더 많이 알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정신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눈치챈 듯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넌, 아까 역에서 어떻게 나를 그렇게 빨리 알아볼 수가 있었니? 내 사진이라도 보았니?” “아니요.” “이리 내 곁으로 가까이 오려무나.” 할아버지는 내가 다가가자 내 작은 손을 꼬옥 잡아 주셨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참 그렇게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객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정원은 나에게 새로운 느낌을 갖게 했다. 내게 그렇게 보인 것은 모 두 화가 할아버지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랫층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려와야지!” 나는 할아버지의 의사를 묻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구나. 참 저기에 있는 상자를 네게 주고 싶다." 나는 할아버지가 주신 상자를 가지고 나와 우선 마루에 있는 장 속에다 잘 넣어 두고는 어머니 께로 서둘러 내려갔다. 어머니는 항상 그렇듯이 나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그렇게 철이 없니? 먼 여행으로 매우 피곤하실 텐데, 그렇게 오래 그 방 에 있으면 어떻게 하니? 난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넌 통 모를 아이구나." 나는 그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숙제를 다 한 뒤에야 내 방에 가서 잘 수가 있었다. 과연 그 상 자 안에 무엇이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장 속에 넣어 둔 상자를 꺼내 들고 내 방으로 갔다. 상자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은색 바탕에 금빛으로 나뭇잎과 꽃이 그려져 있었다. 상자 뚜껑 을 열자, 그 안에서 향긋한 나무 냄새가 퍼져 나왔다. 나는 천천히 하나 하나씩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눈에 띈 것은 반짝이는 검은 반점이 박혀 있는 딸기 모양의 팔찌였다. 그 다음에 꺼낸 것은 누런 솜 같은 종이에 똑같은 모양의 글씨가 수백 개나 새겨진 것이었고, 그 밑에는 금빛 비단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그 주머니 안에 돌같이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주머니 겉에는 섬세하고 화려한 수가 놓여져 있 는 끈이 있어서 목에 걸 수도 있었다. 상자의 맨 밑에는 화려한 비단이 깔려 있었는데 그 비단은 매우 길었다. 비단에는 꽃, 나무, 짐승들, 그리고 달과 별, 또 강물과 다리 모양의 수가 놓여져 있었고, 가장 자리는 금빛으로 나비의 날개가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 비단은 나의 몸을 다 감싸고도 남았는데 무게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 시 접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마음이 들떴다. 그러고 있다가 계단을 올라오는 어머니의 발소리를 듣고 재빨리 상자를 침대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서둘러 옷을 벗었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아직도 안 잤니? 빨리 잠자리에 들어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방에서 나가셨다. 나는 침대 속에 있는 상자를 꼬옥 가슴에 안고 잠이 들었 다. 나는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정원의 내 꽃밭을 보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 다. "요길 좀 봐라!" 그리고는 할아버지는 꽃잎을 들추었다. 나는 어제 내 정원에 피어있던 꽃들을 전부 꺾었고 그 나마 피지도 않은 봉오리까지 꽃다발을 장식하기 위해 꺾었다. 그런데, 다시 거기에서 새롭게 또 힘차게 솟아 오른 꽃망울들이 잎 속에 가려져 있었다. 나는 그 놀라운 생명력 역시 할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마술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저녁에 내가 할아버지께 차를 가져다 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상자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이건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지. 그런데 너는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니? 이 물건은 아주 오래된 것인데, 일본 친구가 내게 주면서, 유럽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나를 알아보는 사람에 게 주라고 하더구나. 이걸 받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면서 말야.” 상자 안을 들여다보시며 할아버지는 계속 말씀하셨다. “이건 염주라고 하는 것인데 인도에서 가져 왔단다. 이 염주알은 생명력을 준다는 이상한 나 무 열매로 만든 거야. 그리고 이 종이는 티베트에 있을 때 어느 승려가 준 것이지. 너는 이 종이 보다는 염주에 더 호기심이 가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그 종이에 씌어 있는 말은 무슨 뜻인지요?” “응, 이건 우리 말로 하자면 ‘마음을 항상 편안하게’라는 뜻이란다.” 그 말은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기도문처럼 여겨졌다. “그럼, 다른 글의 뜻은 뭐지요?” “아니. 여기에 적혀 있는 수백 개의 글은 모두 같은 뜻이란다.” 나는 매우 지겨운 기도문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 비단 주머니도 인도 거란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할아버지는 그 주머니를 꽉 움켜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할아버지, 그러시다가 전부 망가질 거예요!” 그러나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손을 떼자 그 주머니는 아까처럼 평평하게 펴지면서 땅에 떨어 졌다. 할아버지가 그 주머니를 열자 나는 놀랐다. 주머니 안에서 비단이 뱀처럼 소리없이 빠져 나 왔고, 끝으로 비단에 싸인 뭔가가 굴러나왔다.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내가 물었다. “이건 홍옥이라는 보석이야.” 할아버지는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내 목에 그 주머니를 걸어 주셨다. “주머니를 아무도 보지 않도록 옷 속에다 감추어야 해. 꼭 아무한테도 말해서는 안돼. 알겠지? ” “그럼 할아버지, 특별한, 그러니까 마술을 부리는 보석인가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상자 뚜껑을 닫고 할아버지는 창 쪽으로 다가가셨다. 그러나 내가 방에서 나올 때 할아버지는 나에게 다짐을 하셨다. “그것으로 마술을 할 생각을 하면 안돼.” 할아버지의 말은 마치 내가 성 게오르그 정원에서 뱀 주문을 외어 테레제를 죽게 한 일을 다 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갑자기 강기슭에 있는 새 집으로 가셨다. 그 집은 높은 창문이 있 고, 대문을 양옆으로 열어 젖히도록 되어있는, 마치 성 같은 이층집이었다. 대문을 열면 테라스가 바로 보였고, 그 테라스에서 시작된 넓다란 계단이 정원을 가로질러 강 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 계단은 마치 돌로 만든 폭포 같았다. 정원에는 나무가 많았다. 모두 오래된 나무여서, 이끼와 풀들이 나뭇가지에서 마치 녹색의 베일 을 드리운 것처럼 축 늘어졌고, 온갖 종류의 백당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은 한여름에 도 땅이 습하고 서늘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넓은 과수원이 있었고, 그 과수원은 강쪽으로 약간 경사가 졌다. 집 앞에는 철 이른 장미와 붓꽃, 그리고 참제비꽃이 쟈스민, 양귀비들과 함께 피어 있었고, 담은 포도덩굴로 덮였다. 파아란 포도가 송이송이 달려 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그 집을 새로 단장하는 일을 도울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할아버지가 쇠 장식을 단 큼지막한 상자를 열때면 옆에 서서 항상 그것을 지켜보 았다. 마치 그 상자 안에서 처음보는 보석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상자 안에서 나오는 것은 책과 공책과 서류들 뿐이어서 항상 나에게 실망을 안겨 주 었다. 몸을 틀고 있는 독사나, 비단 또는 독약, 아니면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흔한 조개 껍질조차도 없었다. 난 그 속에서 그동안 할아버지가 살아온 생활을 대강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놀러갈 때마다 항상 서류들이나 책을 읽고 계시거나 정원에 나오셔서 장미나 포도넝쿨을 다듬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는 꼭 시험관 또는 절구, 환약, 물 같은 것을 만지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 게 될 것 같은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물건들을 다루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상하 게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물건들이었 다. 그것들은 두 가지였는데, 모두 말은 하지 못했으나 할아버지의 알 수 없었던 생활의 일면을 잘 보여 주는 것들이었다. 두 가지 중 하나는 검은 대리석으로 조각된 춤추는 무희의 상이었다. 그 무희는 매우 큰 눈을 가졌고, 짐승의 해골로 만든 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무희는 다리 아래에 누워 있는 남자의 가슴을 밟은 채, 한 손에는 피곤에 지쳐 있는 듯한 표정 을 가진 사람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 그 두 손 말고는 마치 날개처럼 생긴 손이 두 개나 더 있었다. 그 무희상은 나와 마주볼 때마 다 무관심한 듯 또는 위협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언제고 한번이라도 용기를 내어 그 무희상을 만져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나 스스로, 그 무 희상은 한갓 돌로 만든 조각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무서워서 손조차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항상 그 조각 옆에서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 때문에, 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또, 할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그 무희상 외에 금속의 남자좌상이 있었다. 색이 칙칙하고, 매우 오래된 것 같았다. 그 남자상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다리를 꼬고, 머리에는 헬멧처럼 끝이 뾰 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 남자 좌상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를 내다가 그만 땅바닥에 넘어지는 꼴을 할 아버지께서 보시게 되었다. “그만둬라.” 내가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딱딱한 어조였다. "그런 흉내는 내면 안돼." "왜요?"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건 힘드니까 그렇지." "왜 저 남자는 그렇게 힘든 걸 하고 있어요?" "저 남자는 몇 년간 연습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거든." "왜요?" "저렇게 앉아야만 생각을 잘 할 수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자기가 꼭 해야 될 일을 생각하는 거야. 착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야." "저 사람은 지금도 그걸 깨닫지 못했어요?" "항상은 아니지만, 사람은 모든 일을 쉽게 잊어버리지." "저도 하고 싶은데 잘 안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건, 네가 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럴거야." 할아버지는 더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지 내가 아무리 물어봐도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얘기하셨다. “내가 죽으면 이건 네가 가져라.” 나는 생각지도 않은 선물에 너무 놀랐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고한 선물이어서, 나는 가슴이 죄이는 아픔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싫어요, 받을 수 없어요.” “내가 너에게 이걸 주는 게 싫다는 거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부담스러운 짐을 떠맡듯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동방에서 온 나의 할아 버지는 정말로 하늘 나라의 천사가 되었다. 부모님은 이렇다 할 만한 이유도 없이 내가 할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썩 좋게 생각지 않 았다. 굳이 내가 할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나는 부모님에게서 무언의 저항감 같 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할아버지댁에 갈 때마다 이유없는 가책이나 부모에 대한 반발심 그리고 슬픔 등을 느끼곤 했다. 나는 할아버지댁 마당에 첫발을 들여놓고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 또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이 긴 여행을 떠나게 되어 나는 할아버지댁에 맡겨졌다. 해가 어둑어둑해 질 즈음, 나는 짐을 들고 할아버지가 계신 성 언덕을 올라섰다. 난 처음으로 새처럼 날것 같은 가 벼운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담너머로 짐을 던진 후, 나도 담을 넘어 곧장 할아 버지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할아버지 주위를 빙빙 맴돌고, 관목 위를 뛰어다니고, 또 큰 소리로 웃고 노래했다. 마치 성 게오르그에서처럼 이 집과 정원의 고요를 마구 깨뜨렸다. 그런 나를 할아버지는 그저 미소를 띤 채 귀엽다는 듯 바라보셨다. 나는 나의 그런 기분이 어 느 정도 가라앉자 할아버지의 얼굴이 여느 때와 달리 창백한 것을 알았다. '너무 피곤하신가봐.' 나는 생각했다. 한 순간 불안한 생각이 스쳤으나, 그건 금방 나의 즐거움 속에 묻혀 버렸다. 밤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어갔으나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 바로 그 때, 정원 쪽에서 자갈 위를 걷고 있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보았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깔린 자갈 위로 어렴풋이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어두운 덤불에 가려지기도 했다. 강물 소리가 대낮보다 더 크게 나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어둠이 깔린 정원이 나를 유혹하며 손짓하고 있었지만, 할아버지께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국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발소리를 죽여가며 밖으로 나왔 다. 정원에 깔린 자갈길 옆 밤이슬에 젖은 덤불에 숨어서 할아버지의 뒤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녔 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강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둘째 손가락을 하늘로 드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칠흑같은 어둠속 어딘선가 밝은 색을 띤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 손가락 주 위를 몇번이나 빙빙 돌더니 마침내 손각락 끝에 사뿐이 앉았다. 나비는 양쪽 날개를 퍼득이면서 마치 부드러운 풀잎이나 향기좋은 꽃잎에라도 앉은 것처럼 고 요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자세로 꼼짝없이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마치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하얀 꽃잎처럼 나비들이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 리, 계속 모여들고 밤에 피는 꽃이라도 되는 듯 손가락 주위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날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기둥처럼, 꼼짝 않고 서 계셨다. 그 주위를 빙빙 돌며 날던 나 비들은 밤바람에 흩날려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유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자 모여 있던 나비들은 모두 정원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할아버지 는 들판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의 뒤를 쫓았 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풀섶의 흔들림과 동시에 나의 미행도 끝나고 말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머뭇머뭇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꼬옥 잡으시고는 아무 야단도 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나는 손을 잡은 채 정원을 거닐다가, 한기가 느껴져 돌계단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테라스에 몸을 기대어 한숨을 쉬셨다. “무슨 일이에요. 할아버지?” “괜찮아. 몸이 조금 피곤하구나. 별일 아니야.” 또다시 먹구름이 밀려왔지만 그것도 잠시,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우스개 소리를 하시자 멀 리 흘러가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하녀에게서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었다. 나 는 발소리를 죽이며 할아버지 방에 갔다. 그 방에 들어서자 성 게오르그 수녀들의 방에서 느끼던 서늘한 냉기가 밀려왔다. “많이 아프세요?” 나는 불안한 얼굴로 할아버지에게서 아픔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인자하게 미소 를 짓고 계셨다.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라.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할 건 없어. 난 이제 곧 죽게 될 거야.” 나는 할아버지가 한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지금 한 말 은 농담이었어’라고 하실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잡았다. 잠시 후에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내게 말씀 하셨다. “부탁이 있는데, 정원에 나가 있다가 조금 후에 다시 들어 오겠니?” 나는 할아버지가 부탁한 대로 관목이 무성하게 자란 숲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 기 슬픔이 밀물처럼 몰려 왔다. 친구가 되어 주시던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젠 정말 이세상에서 외토 리가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할아버지는 이렇게 병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셔야 되는 걸까? 의사를 불러야 돼. 의사 를 부르자.’ 나는 곧 할아버지에게로 뛰어갔다. “할아버지, 시내에 가서 의사를 불러올께요. 그러면 돌아가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렇죠?”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절박하게 애원했다.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으셨다. “빨리 도착하면 조금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나는 너무 어려서 그 말 속에 담긴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이 놓여서 더 매달리며 되물었다. “정말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시죠?” 할아버지는 대답을 못하시고 가슴을 움켜잡으며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빨리 도 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이겨내실 거야. 꽃봉우리도 피게 하시고 밤나비를 불러 모으시고, 작은 주머니에 서 무지하게 긴 비단도 끄집어 내실 수 있잖아. 그러니까 분명히 할아버지는 혼재 해내실 수 있 을 거야. 지금을 병이 나셔서 고통스러워 하시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씀하실 거야. 그러면 어 두운 검은 유령들은 할아버지 곁에서 자취를 감출 테고...’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계셨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참지 못하고 나지막 이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조용히 눈을 뜨며 내게 물으셨다. “지금 그 보석을 목에 걸고 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슴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드렸다. “이 보석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지? 그 얘길 해 주겠다. 이 홍옥에는 글이 새겨져 있단다. 그 글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서 그 보석을 걸고 다니는 사람은 결코 고향을 다시 찾을 수 없다는 뜻의 글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너도 먼 훗날 그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때 가 있을 거야. 잘 새겨두고 남에게는 비밀로 해 두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숨을 돌리시고는 계속 말씀하셨다. “저기 보이는 약병과 잔을 가져와다오.” 할아버지가 약병의 마개를 열자 금방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해졌다. 아무 색깔 도 없는 약물을 잔에 따라 할아버지는 단숨에 마셨다. 나는 안심했다. 어쩌면 그 약이 기적을 가 져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말이다. 나는 마음을 놓고 침대 곁에 앉아 할아버지가 잠드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의 고른 숨소리만이 방안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리의 새가 아까부 터 조용히 창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시든 겹장미의 향기가 풍겨왔다. 햇빛이 옆으로 비켜나는가 싶더니 방의 정 적이 눅눅한 나뭇잎의 저녁 냄새를 싣고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계속 꼼짝 않고 누워 계셨다. 나는 살며시 할아버지의 손을 만져보았다. 차가왔다. 얼른 이불을 끌어 그 싸늘한 손을 덮어드렸다. 그리고 옆에 앉아서 깨어나시길 기다렸다.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방안의 불도 켜지 않았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녀가 마실 것과 과일을 들고 들어왔다. 난 그녀에게도 조용히 하라 고 눈짓을 했다. “오래 주무시네요?" 나지막이 말하며 그녀는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으스스하게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 다. 어슴푸레하게 창 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새들의 아침 합창이 시작되고 강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얼른 할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난, 그제서야 이미 오래 전에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숙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게 되자, 우리는 강기슭에 아담하게 지어진 그 집을 팔아 버리고 책과 서류들을 우리집 서재로 옮겨왔다. 나는 그 불상을 상자에 조심스럽게 담아 빛나는 금빛 상자 옆에 함께 두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나는 가끔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언덕 위의 집에 간 적이 있다. 막상 집 앞에까지 갔을 때, 나는 이제 그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나를 그다지 슬프게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할아버지와 계속 얘기를 하 고 있었고 할아버지 특유의 냄새도 늘 내 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몇달이 지나서 아버지는 국경 가까이에 있는 소도시에 직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 히도 그곳에는 내가 다닐 만한 상급 여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곁을 떠나 대도시에 있는 여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그 당 시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없다는 식이었다. 어쩌면 그 답답하고 음울한 도시를 벗어날 수 있기만을 소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도시의 여학교에 가서 내게 특별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따위는 전 혀 없었다. 내가 대도시로 가게 될 날은 부활절이 지나고 며칠 후였다. 떠나기 전날 까닭없이 마음이 답 답해졌다. 문을 열고 정원에 있는 나의 꽃밭에 나가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잡초들이 앵초꽃과 국화 사이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뽑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낯익은 길을 따라 언덕 위의 집에 가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이 굳게 잠겨 있을 뿐이었다. 철책 너머로 보이는 앞마당의 잔디밭에는 수선화가 가득 피어 있었다. 나는 그 철책을 살그머 니 넘어가서 곱게 피어있는 수선화를 전부 꺾고 말았다. 내 손에는 한아름이나 되는 수선화가 들려 있었다. 난, 수선화와 함께 담쟁이와 사철나무, 그리 고 고운 색으로 피어있는 개나리 가지를 꺾어 정성스레 꽃다발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꽃다발을 준비한 나는 공동 묘지에 묻혀 있는 할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가지고 간 꽃 잎과 나뭇가지를 주변에 뿌려놓았다. 그러나 난 수선화 다발만은 집으로 가지고 와서 통에 담았다. 그리고 불상과 금빛 상자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대도시로 가게 된 날은 나의 열세번째 생일날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함께 와서 나를 학교 기숙 사에 넣어준 뒤 곧 돌아가셨다. 난 들어간 날부터 기숙사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 나는 예의 수선화 다발을 꺼내 꽃병에 꽂은 후 그 옆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지내게 된 방은 너무 넓었고, 나는 그곳에서 혼자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방에 들어와 병에 꽂혀 있는 수선화 다발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기숙사 규칙에는 꽃병에 꽃을 꽂아 두면 안돼요. 그러니까 그 꽃은 내가 가져가겠어요. 그 꽃 으로 구내 성당의 제단을 장식하면 어울리겠군요.”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 꽃병을 막고 서서 소리를 질렀다. “안돼요. 이건 제 꽃이에요!”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안돼! 어쨌든 그 꽃은 규칙상 내가 가져가야만 하겠다.” 그 사람은 사감이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목소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말했다.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사감은 나를 무시한 채 꽃을 가져가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난 재빨리 그 꽃을 병에서 뽑 아 들고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나는 강으로 내려가는 언덕이 있는 곳까지 정신없이 달려가 손에 들고 있던 수선화를 모두 흘러가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멍청하게 강물에 실려 떠내려가는 꽃다발을 바라보면서, 절대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 짐했다. 그러나 한참 그렇게 다짐하다가, 문득 기숙사에 숨겨둔 불상과 상자가 생각났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걸 눈치챈다면 큰일날 것 같았다. 할수없이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기숙사로 향했다. 내가 나간 사이에 학생들이 몇 명 와 있었다. 방안은 그들이 가져온 짐들로 꽉찼고, 모두들 자기의 옷과 책 등을 작은 장 안으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가슴을 펴고 정면을 바라보면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지나 내 침대로 갔다. 다행 히 숨겨둔 불상과 상자는 무사했다. 나는 어쩐지 숨겨놓은 곳이 안심이 안됐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 상자를 내 옷장 안에 숨기고 옷으로 상자를 가렸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떤 아이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불행히도 눈치채지 못 하였다. 그애가 말했다. “여기는 너만의 비밀이 없어. 그렇게 감춘다고 해서 남들이 모를 줄 아니? 먹는 게 있으면 모 두 같이 나눠 먹는 게 오히려 좋은 거야. 알겠어?” “이건 먹는 게 아냐.” “그래? 아마 그렇겠지. 그러나 여기서 지내는 동안, 너도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될테니까...” 그애는 경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그때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식당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사감이 나를 노려보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잠자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이윽고 식사와 학습시간, 그리고 저녁 미사를 다 마치자 학생들은 순서대로 성당 문 앞에 서 있는 사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내밀고 있었다. 사감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나는 곧장 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취침시간을 알리고 불이 켜졌으나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얘기를 주고받으며 뭐가 우 스운지 킥킥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 모두 잠이 들었는지 방안이 고요해졌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옷장 속에 감 추어 둔 상자들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불상의 형체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불상의 손 과 발을 더듬어 만지기도 했고, 금박 상자 안에 들어있는 비단을 꺼내 가볍고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집도한 신부는 젊고 나이에 비해 몸집이 비대한 편이었다. 나는 그날 아침까지는 미사드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향 냄새와 번쩍거리는 금빛 제단과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제의소리와 신부님의 기도 소리 외의 모든 것이 나를 유쾌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기도서를 덮고, 투명한 창문 너머 보이는 나무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종탑 너머로 눈을 돌렸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까 마치 일종의 자유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작정 숲과 언덕과 마을이 펼쳐져 있는 넓은 대지를 헤매고 있었다. 그 자유의 세계에 도취되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있었 다. 미사가 끝난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우리들은 성당에서 나와 함께 얘기를 하며 학교로 갔다. 나는 한동안 교실 생활 에 익숙치 못했다. 서로들 자리를 가지고 다투었다. 그리고 잡담, 웃음소리, 책들이 머리 위로 날 아 다니는 모습들이 나를 더욱 서먹서먹하게 했다. 마침 신학기에 들어 새로 전학온 아이가 나 혼자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나이, 이름, 고향 등등. 또 아이들은 내가 앞으로 해야할 것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만악 키가 작은 담임이 교실 문을 들어서면, 우리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해 그냥 그 대로 의자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하면 된다는 것, 또 생쥐처럼 비쩍 마른 올드 미스가 들어오면 모두 큰 소리로 '야옹'하고 고양이 흉내를 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를 말해 주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새로 우리를 맡게 될 담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놀려 줄 계획을 단단히 짜고 새로운 담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사실을 듣고 나서야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나, 비어 있는 자리 는 앞 줄에 몇 군데밖에 없었다. 나는 그 중에서 문 가까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곳이 제일 자유롭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막 그 자리에 앉으려 하자, 키가 크고 얼굴빛이 좋지 않고 피부가 약간 검은 어떤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애가 들어오자 아이들은 모두 존경심을 나타내듯 그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그 아인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 옆에 앉았다. 마치 새로 전학온 나 같은 아이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이 앉자마자 곧 책을 꺼내 읽었다. 시집을 읽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어쩌면 그 아이가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속에서 따뜻 한 감정이 올라 온몸에 퍼졌다. 그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곁눈으로 쳐다보는데, 그 아이 는 눈치를 챘는지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넌 새로 온 애니? 난 꼬르넬리아야. 넌?” 내가 이름을 알려주자 그애가 눈으로 반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애들은 너무 극성맞아. 마치 새끼 짐승들마냥 지치지도 않고 수다를 떨고 있지만, 저 애들 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보면 완전히 텅비어 있어.” 그 아이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의 얘기를 듣고 속으로 놀랐다. 나 역시 일상적인 틀에 박힌 것보다는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을 더 좋아했다. 난 그 아이의 조금은 오만에 가득찬, 그리고 우수에 잠긴 열정적인 목소리에 매혹되었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다시 교실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늙다리나 고양이가 들어오면, 모두들 알겠지?” 그와 동시에 교실 문이 열렸다. 교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리고는 뒷쪽에서 짧은 환호성 이 터졌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은 우리들의 기대와는 달리 빼어난 미모의 여선생이었다. 상아빛 피부에 윤이 나는 검은 머리를 가진 젊은 여선생이었다. “새로 부임해 온 선생이야. 아직 해, 햇병아리 같은데...”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여선생은 기품있고 고상한 모습으로 교단을 올라서서 우리들을 보더니, 손을 이상하게 마주잡 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기도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카톨릭에서 하는 기도와 전혀 달랐다. 나는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나를 꼼짝 못하도록 사로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용히 기도를 끝낸 뒤 그녀는 우리들을 자리에 앉도록 하고 나서 말을 시작했다. 자기를 선생으로 대하기 전에 진심으로 친구로 대해주기를 바라며, 점수를 따기 위해 하기 싫 은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만이 학교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런 것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인의 노래와 우정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서로 사랑하고 이 해할 줄 알아야 함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주일의 성경 구절을 정해 주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추구하는 것이 그 모든 것인 까닭이다.” 나는 너무 너무 놀랐다. 그녀는 나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의 그리움에 언어를 주었으며 나 스스로 영혼의 갈증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순간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눈시울을 적셨다. 나의 삶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에게 향하고 있음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그녀의 목소리는 더 정열적이었다. 그녀는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적절한 때 에 그에 대응하는 언어를 잘 구사했으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원했다. 수업시간에도 모두들 열에 들떠 있었다. 그녀는 눈짓만으로도 학급 전체를 압도하였고, 나는 한 순간도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그녀에게 질문도 대답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놀라움과 감탄의 눈빛으로 꼬르넬리아의 영리함과 조숙함에 주목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지만 난 그녀의 관심을 살 수가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께서, 도서 실을 정리하기 위해 우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서로들 하겠다고 손을 들었지만, 결국은 꼬르넬리아와 다른 한 명이 뽑히게 되었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려고 할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서 재빨리 말했다. “저도 도와드렸으면 하는데요.” 그녀는 나를 보면서 좋다고 대답했다. 그날 나는 도서실에서 그녀 옆에 서서 책을 집어 주거나, 책에 씌어 있는 이름을 말해 주었고, 또 겉표지에다 목록을 써 붙이는 일을 했다. 그녀가 움질일 때마다 손과 머리카락이 내 몸에 닿았다. 도서실의 책에서는 오래된 곰팡내가 났지만, 난 그 냄새가 좋았다. 그 냄새는 고향의 냄새를 느끼게 해 주었고, 성 게오르그의 서재를 생각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즐거웠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옛날의 순수한, 그리고 조용한 행복감과는 느낌이 달랐다. 도서실은 따뜻하면서도 나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그건 즐거움이었다. 그 즐거움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나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 꼬르넬리아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손 끝에 닿을 때마다 창백하게 얼굴빛이 변하곤 했다. 도서실 일이 다 정리되자 우리는 헤어졌다. 꼬르넬리아와 또 다른 한 명은 일이 끝나자마자 집으 로 갔다. 하지만 나는 곧장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 끝에 있는 기둥 뒤에 숨어서 선생님이 나오기 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선생님이 내 앞을 지나갔지만 나는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냥 가만 히 기둥 뒤에 서서 선생님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완전히 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꼼짝 않고 있었다. 기숙사에 돌아온 시간은 점심 식사가 시작된 뒤였기 때문에 사감이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 다. “이리와! 여태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학교에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한 말을 사감이 믿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까 있었던 일을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 식사에 늦은 벌로 수프와 디저트가 없는 점심을 먹어야 했다. 식사가 끝난 뒤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한 시간 동안 공원을 산책했다. 그 시간은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고, 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었다. 나는 마치 꿈을 꾸는 듯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공책에 이런 글을 적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추구하는 것이 그 모든 것인 까닭이다.” 나는 선생님이 들려준 구절을 정확히 백 번을 공책에 써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곧 저녁이 되었다. 나는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튿날도 아침 미사가 있었다. 나는 평소에 앉던 자리보다 몇 자리 안쪽에 앉게끔 되었다. 그러 나 작은 유리창 너머로 나무와 하늘과 종탑이 보이는, 나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그 자리를 떠나 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남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덕분에, 한 아이가 그냥 내 다 리를 넘어가서 안쪽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가 와서 나더러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 아이 역시 나의 다리를 넘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어떤 아이가 왔지만 나는 다시 거절하고 있었다. 사감이 내 행동을 보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저 애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잖아요.” 그 아이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사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나의 그 표정이 너무나 간절해 보였는지, 사감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가버렸다. 그래서 그날 난, 경건한 마음으로 멀리 보이는 종탑 위로 천천히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아침 미사 시간이 되면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아이들은 나를 미워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난 미사 시간에 바깥 세상을 볼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을 즐기며 그런 미움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생활이 몇 주일 지나자 자연히 그 자리는 나의 전용이 되었다. 그리고 이젠 아무도 내가 그 자리에 앉아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시간에 나는 어린 시절의 정원을 걸었고, 할아버지와 함께 검은 대리석으로 조각된 무희상 도 보았고, 비키와 프란체스카와도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숲속의 소년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자리에는 다른 모습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아름다운 여선생님과 꼬르넬리아였다.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사로잡혀, 뿌연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 보곤 했다. 그 모습은 이름을 부를 수도, 내 곁에 머물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런 생각 은 매일 학교 안에서 만나는 꼬르넬리아나 여선생님과의 만남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진짜같았다. 학교에서 두 사람을 대할 때는 그냥 두 사람의 시선에 매료되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 러나 꿈 속에서는 달랐다. 두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더욱더 커졌으며, 나 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결국 나는 두 사람에 대한 끊이지 않는 갈망 속에 허덕였다. 이제는 꿈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두 사람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항상 내 주위를 맴돌며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행히 꼬르넬리아와 나는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친해질 기회는 없었다. 꼬르넬리아는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항상 어디론가 가버리곤 했다. 드디어 나는 그 아이가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난 그애를 찾으러 거의 미친 듯이 학교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니기 시작했다. 난 그애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학교 건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마침내 창고로 통하는 계단 옆 창문에 앉아 있는 꼬르넬리아를 발견했다. 그 때 그애는 마치 무언가에 흘린 듯한 표정으로 꼼짝않고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 히 옆에 앉아 그애가 나를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애가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를 너무나 그리워했기 때문에 부끄럽다는 생각도 미 처 못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앉으면서 나지막이 얘기했다. “왜 여기 혼자 앉아 있니?” “이젠 찾는 것에 지쳐 버렸어. 난 이제껏 모래뿐인 사막에서, 그리고 빙판에서 포도와 꽃을 찾 고 있었지만 이젠 알았어.” “넌, 여태까지 너 자신하고만 얘기를 하며 지냈구나. 그렇지?” 그 아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그런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나는 긍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널 찾아다녔어.” “왜?” “실은 나도 혼자니까.” “넌 혼자 있는 게 싫으니?” “응. 널 알고부터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수업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정원에서 교실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와서 앉아.” 꼬르넬리아가 말했다. “여기서는 먼 곳까지 보인단다. 나무들도 멋있고.” 그 아이는 힘있게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난 오래 전부터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마 넌,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을 말해도 경멸 하지 않을 거야. 어때, 적어도 한번이라도 네가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니? 그리고 행복했 던 적이 있었니? “아니, 한번도 없었어.” “왜 없을까?” 왜냐고? 난 그 대답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왠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꼬르넬리아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아이의 슬픔이 내게도 전해졌다. 난 참을 수 없는 슬 픔에 잠겨 버렸다. 잠시 후에 꼬르넬리아가 흥분에 들뜬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난 이따금 행복한 때가 있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마을에는 낮은 구름이 아주 많고 호수가 있어.” 꼬르넬리아의 눈은 꿈꾸는 듯 신비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 호수에는 흰 돛단배가 아무도 태우지 않은 채 외로이 떠 있어. 큰 날개를 가진 흰 새들은 언덕을 날고는 있지만,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또 소리도 지르지 않아. 가끔 해와 달과 별이 하늘 을 지나다가 물 위와 나무 꼭대기를 스쳐가기도 하고 하얀 새들은 산딸기를 쪼아먹듯이 별들을 쪼아먹어.” 그 아이는 점점 열에 들떴다. “그때 나는 호수 위를 가볍게 걸어다니면서 별과 흰새와 공중에 떠다니는 것들을 주워다가 꽃 다발을 만들지. 하지만 그 꽃다발은 너무 가벼워서 바람이 불어오면 손에서 흩어져 버려. 그러면 난 다시 웃으면서 물에다 손을 담궈. 나 말고는 그곳에는 말하는 사람도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어. 아무도 살지 않아.” 꼬르넬리아의 마음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미 난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 마을은 곧 나의 마을이 기도 했다. 꼬르넬리아는 흥분을 억누르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와 만난 후부터는 그 마을에 나 혼자만 있을 수 없게 되었어. 그 여자는 구름 을 넘어와 배에 앉아 비와 바람을 부르면서 내 나라를 빼앗고 있어.” 나는 그 아이가 말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너와 내가 그 여자에게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주는 거야. 너와 나만이 알 수 있는 이름으로. 엘리나, 엘리나가 어떠니? 이제부터 그 이름을 아는 건 너와 나, 둘뿐이야. 그녀는 예뻐. 너도 얼 마나 그녀가 아름다운지 알고 있지?” 그 아이의 말은 섬광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서야 비로서 나의 모든 것이 엘리나와 관계가 있었으며, 나의 외로운 밤은 그녀를 꿈꾸고 있었음에 불과했고 낮은 그녀 를 향한 그리움의 발산임을 알게 되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꼬르넬리아의 말이 우리의 침묵을 깼다. “인간은 내면에 꿈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서 또한 하나님이 될 수 있고, 환상 속에서는 거지 도 하나님이 될 수 있어.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꿈과 환상과 영감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아버지께 쫓겨난 방탕한 자식이 된다는...” 그 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우리들 앞에서 우리들을 부르고 있었다. 나와 꼬르넬리아의 얼 굴은 하얗게 질린 채 우리 앞에 서 있는 엘리나를 보게 되었다. 엘리나는 우리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이 라틴어 시간이지? 그렇지?”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른 체 그녀의 얘기만 계속 듣고 있었다. “그런 구절을 어디서 배웠지?” “전 히포리온(힐더린의 시)를 전부 외우고 있어요.” 엘리나는 시선을 내게로 던지며 말했다. “지금 두 사람은 거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지?” “그냥 얘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내가 다시 이곳에 올 때까지 꼼짝말고 여기 있도록 해.” 엘리나는 돌아서서 교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수업중인 교실문을 두드리고 라틴어 선생님과 잠시 뭐라고 얘기를 주고 받더니, 곧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날 따라와.” 우리는 잠자코 그녀를 따라 비어있는 음악실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나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했고, 그녀가 말하는 소리까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아주 싫어해.” “저희들은 돌아다닌 게 아니에요.” 꼬르넬리아가 말대답을 했다. “전 그 라틴어 시간이 지겨워요. 그리고 제 친구가 그 수업시간에 늦은 것은 저를 찾아다니느 라고 그렇게 된 거예요.” “수업이란 너희가 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너희들에게 입학하면서 너희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의 무야. 그런데 너희가 그걸 멋대로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꼬르넬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조금 떨고 있었다. 엘리나는 계속 지나친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자기 마음대로 세워 놓은 규칙이나 감정적인 충동에 의해 멋대로, 즉 마음 내 키는 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 그러니까 모든 일을 자기의 고집대로만 주장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사람들 말이야. 나는 그런 사람들이 가장 비열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녀는 진지하게 계속 얘기했다. “사소한 일에도 자기가 할 도리를 다할 줄 알고, 자신을 극복해 나갈 줄 아는 사람이 보다 높 은 곳을 향해 자유롭게 날 수도 있는 거야. 꼬르넬리아, 넌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아마 이런 글을 읽었을 것 같구나. ‘자기 주장대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비겁하다’는 글 말야.” 그 순간 꼬르넬리아는 ‘아!’하는 신음과 함께 그녀의 발 아래 쓰러졌다. 그리고는 얼굴을 엘 리나의 구두 위에 대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전 죽게 되요.” 엘리나는 발 아래 있는 꼬르넬리아를 내려다보고는, 손을 내밀어 꼬르넬리아의 머리를 어루만 지려 했다. 저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고 굳은 목소리 로 말했다. “일어나라. 넌 앞으로 너 자신을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겠구나.” 그리고 엘리나는 내게 말했다. “넌 교실에 가거라. 라틴어 선생님께는 말을 해 놓았으니까 그다지 혼나지는 않을 거야.” 나는 힘없이 교실로 돌아왔고, 꼬르넬리아는 수업이 끝난 후에야 핼쓱한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는 침묵만 지킬 뿐 서로에게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교문 앞에서 이별을 나눌 때 꼬르넬리아가 내게 말했다. “엘리나는 너무나 엄격한 여자야. 아테네의 여신상보다도 더!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라구.” 나는 그 아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뻗었던 엘 리나의 따뜻한 손길. 하지만 그런 생각은 가슴에만 두고 있었을 뿐 꼬르넬리아에게는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아이의 앞날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구어낼 수가 없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혀 그 아이를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졸’이라고 이름붙인 그 동네의 구름과 별들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며 그 아이를 위로해 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혼자 있고 싶다며 한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가버렸다. 다음 날, 나는 꼬르넬리아가 계속해서 주먹을 꼭 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글 씨를 쓰기도 힘든 것 같았다. 쉬는 시간이 되어 둘만 있을 때 그 아이는 주먹을 펴 보였다. 손바닥에는 ‘E’자가 칼자국으로 새겨져 있었다. 엘리나의 머리글자. 손바닥을 펼 때마다 생 채기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나는 감탄하였으나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다가 엘리나가 이걸 보면 어떻게 해?” 나의 물음에 그 아이는 외치듯 말했다. “이젠 내 앞에서 그 여자 얘길 꺼내지 말아 줘. 제발 다시는. 그 여잔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 조각에 지나지 않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꼬르넬리아가 그토록 괴로와하고 있을 줄을 몰랐었다. 그 아이는 이성을 잃은 채 흥분에 떨며 계속 소리쳤다. “자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난 자제란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단 말이야. 난 오직 활활 타오르고 싶단 말이야. 그렇게 죽어버리고 싶다구.” 그리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너한테만 털어놓겠는데 난 사실 죽음을 찾고 있어” 나는 그 아이를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죽음이란 할아버지의 경우처럼 가볍게 비상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꼬르넬리아가 찾고자 했던 죽음은 파괴였다. 최소한 내게 다가온 느낌은 그랬다. 섬짓 했다. 그 아이의 극단적 생각 앞에서 허탈한 심정에 빠진 나는 엘리나를 죽여버리겠다는 절규에 가까 운 열망에 사로잡힌 채 몇 주일을 보내야 했다. 꼬르넬리아를 향한 나의 그러한 광적인 사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가라앉긴 했으나 비애 와 연민은 끝내 씻어버릴 수가 없었다. 꼬르넬리아는 흡사 병자 같았다. 나는 엘리나가 그 아이를 주시하며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 음을 느꼈다. 그전까지만 해도 꼬르넬리아는 수업 시간에 필기며 대답이 늘 정확해서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런데 그렇듯 총명하던 그 아이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묵묵부답이 아니면 마지못해 대답을 하더라도 엉뚱한 대답만 하기가 일쑤였고 숙제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으며 학기말 시험은 엉망진 창이었다. 선생님들은 그런 꼬르넬리아를 그전처럼 만들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며 애를 썼다. 엘리 나도 그 아이를 여러번 호출했으나 돌아올 때의 그 아이의 모습은 더욱 침울해 보였다. “우리의 ‘졸’은 이제 위태롭기 짝이 없어. 새들은 벌써 그걸 알아차리고 떠나버렸어, 구름도 예전의 장소에서 자취를 감췄어. 배는 흰돛을 올린 지 오래야.” “꼬르넬리아.” 나는 절규하듯 간절히 그 아이를 불렀다. “그런 끔찍한 말은 제발 그만둬. 보란 말이야. 올리브 나무에 다시 새 잎이 돋고 있잖아. 이 제 곧 싱싱한 잎으로 자랄거야. 호숫가에는 우리들의 오두막이 있고 우린 그곳에서 살게될 거야. 저녁이면 엘리나가 찾아오고.” 하지만 그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해둬. 너무 늦었어. 이젠, 그런 꿈은 애들한테나 어울리는 거라구. 난 이제 어린아이가 아 니란 말이야. 어느틈엔가 많은 걸 깨닫게 됐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부모님에게 병이 난 친구와 함께 방학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런데 친척이 오기로 돼 있어서 친구의 방문은 난처하다는 답장이 어머니로부터 왔다. 방학이 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꼬르넬리아와 헤어졌다. 부모님은 내 성적표를 보시더니 못마땅해 하셨다. 게다가 사감은 내가 기숙사에서 적지 않은 말썽을 부리는 장본인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부모님에게 보내왔다. 결국 나의 첫 방학은 시작부터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국경 근처의 도시에는 조용하고 한가로운 산책길이 있었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좋은 것은 강물이었다. 맑고 푸르른 물은 마치 유리 같았다. 강가에는 쇠줄로 묶여 있는 배가 있어서 그곳에 누워 공상을 즐길 수도 있었다. 우리의 ‘졸’에 있는 호수가 드넓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로, 올리브나무가 버드나무와 포플러 고목으로 바뀐 셈이었다. 흰 새 대신에 떼지어 갈매기가 날았다. 엘리나와 꼬르넬리아를 잊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그 투명한 환희는 나를 외면하였다. 낮시간에는 강물에 뛰어들어가 물장구를 치거나 백사장 위에 길게 누워 있기도 했고, 물구나무 서기를 하며 재주를 넘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밤이 오면 무섭도록 사무치는 추억에 시달렸으며 꼬르넬리아가 그리워 입술이 타들어가 는 것만 같았다. 때때로 추억과 환영이 뒤엉켜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 꼬르넬리아는 ‘졸’에서 어두컴컴한 나무 위를 헤매이는 검은 별이었고, 엘리나는 빛 나는 별이었다. 엘리나는 반짝이며 검은 별을 향해 가까이 가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베일을 쓴 채로 깊은 물 속으로 잠겨들기도 했다. 드디어 방학이 끝나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뜻밖에도 꼬르넬리아는 건강하고 활발해 보였다. 손바닥위의 상처도 이제 모두 아물어서 글자 만 뚜렷했다. 엘리나도 쾌활해 보였다. 방학을 남쪽지방에서 보내서인지 피부가 약간 그을려 있었다. 이러저러한 징조들로 미루어 이번 신학기에는 기쁜 일이 많을 것 같았다. 꼬르넬리아와 나는 다시 우리의 ‘졸’에 대해 얘기했으며, 그 아이는 방학동안 그린 그림을 나에게 보여 주기도 했 다. 밝은 색뿐인 그림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날로 깊어갔다. 꼬르넬리아는 나를 좋아했고 나의 사랑 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가을은 조용히 지나갔다. 나는 차츰 친구에게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그 아이에게 불상, 금박상자, 그리고 홍옥 주머니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마침내 이것을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상자와 불상을 학교로 가져갔다. 쉬는 시간, 우리만의 피난처인 계단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비밀들을 그 아이에게 보여 주었다. 꼬르넬리아는 매우 흥분하여 계속 환호성을 질러댔다.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보기도 하고, 하얀 비단을 자꾸 쓸어보기도 하며 오래도록 응시하기도 했다. 꼬르넬리아는 불상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그애는 불상을 내려 놓으면서 한숨을 쉬고 는 중얼댔다. “불상은 온전하게 평온한 상태로 있구나.” 그 아이의 그런 모습이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깊숙히 가려진 그 고통의 비 밀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그 아이에게 홍옥의 비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절대 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에게조차 비밀로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았 다. 홍옥은 신비스러운 힘이 있는 만큼 그 아이에게 행운을 선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것만은 참아야 돼.’ 라고 내 마음 속의 이성은 말했지만, 나는 이미 그 말에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나는 품 속에서 그것을 꺼내고 말았다. “그게 뭐야?” 그애가 물었다. “마술을 지니고 있는 보석이야.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향을 찾을 수가 없대. 할아버지가 인도에서 가져 오신 거야.” 꼬르넬리아는 공손한 태도로 비단에 싸여 있는 보석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처음으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의 삶은 그렇게 해서 완 전히 그 아이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로 인해 나는 고초를 당하고 말았다. 기숙사에 들어와 상자와 불상을 막 옷장에 넣으 려는데 사감이 들어왔다. “옷장에 뭘 감추었지?” 나는 잽싸게 옷으로 보물을 가렸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빛나는 사감의 눈은 이미 모 든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뭘 감추고 있냐고 물었잖아!” 나는 가슴이 쿵쿵거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선 비밀이 있을 수 없어.” 사감을 옷장을 열어젖히고는 불상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사감은 불 상임을 확인하자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불상을 가지고 그냥 가 버렸다. 나는 옷장 앞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하지? 사감을 찾아가 불상을 갖게 된 동기를 말하고 돌려달라고 해야할 텐데.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자존심과 초조함 때문에 온몸이 마구 떨려왔다. 내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했는지 알 것 같 았다. 다음날 아침 미사가 끝나자 나는 접견실로 호출되었다. 뚱뚱하게 살찐 젊은 신부는 아침을 먹 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고통스럽게 기다려야만 했다. 책상 위에는 내 불상이 놓여 있었 다. “어떻게 저걸 얻었지?” 신부가 불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부라 할지라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화가 나도 목소리만은 온화하고 조용하던 그였으나 이 날은 마구 큰소리를 쳐 댔다. “너도 이 조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말로 알고 있으니까. 신부가 협박조로 물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우상을 가지고 있었나?” 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상이요? 나는 그게 우상인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말해. 이 조각의 인물이 누군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것이 기독교에 대항하는 군대를 몰고 와 우리의 성지를 점령하고 하나님과 같은 위 치에서 똑같은 신으로 경배받으려던 자의 우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테지?” 나는 귀를 세우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이해가 안 됐다. 어머니가 할아버지에 대해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불교신자이시라 불상 앞에서 예배를 드린단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신부가 계속 말했다. “네가 솔직하게 말해 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 에게도 그렇고, 기숙사 안의 신앙심 강한 다른 친구들에게도 매우 안좋은 일이다. 그만 가보아라. ” 나는 무심코 불상을 집어들었다. “당분간 불상은 내가 보관하겠다. 때가 되면 돌려 줄테니 그리 알도록.” 나는 말없이 그 방을 나왔다. 교실로 돌아오니 꼬르넬리아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백지장 같은데.” “지금은 아무말도 할 수 없어. 다음에 얘기할께.” 그러나 첫시간도 못참고 나는 꼬르넬리아에게 쪽지를 보냈다. <불상을 들켰어. 그것이 우상이라면서 나를 이교도로 취급해. 퇴학당할지도 모르겠어.> 꼬르넬리아가 그 아래 부분에다 다시 적어 보내 왔다. <머리 속에 아무것도 없는 그들을 걱정할 게 뭐 있니? 엘리나와 상의해봐.> ‘그래. 엘리나가 있구나. 그녀에게라면 뮈든지 다 털어놓을 수 있으니까.’ 쉬는 시간에 엘리나가 정원에 있었으나 다른 선생님들과 대화중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 공원에서 그녀의 퇴근길을 지키기로 했으나, 한 발 늦어 그녀는 이미 퇴근한 뒤였다. 내일로 미루는 수밖에. 그런데 다음 날 독일어 수업에 들어온 선생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병이 났다고 했다. 꼬르넬리아와 나의 실망한 눈길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쉬는 시간에 교장실로 불려갔다. 심각한 표정의 교장 옆에는 그 뚱돼지 신부가 떡 버 티고 서 있었다. 교장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엘리나가 아프다는 사실에 정신을 빼앗겨 그 심문이 중요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그릇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내게 달리 방법이 있지도 않 았으므로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장과 신부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으나 나는 건성으로 대할 뿐 생각은 엘리 나에게만 쏠려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 학생의 부모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입니다.” “집안에도 직분이 상당한 성직자가 많은 걸로 압니다.” 이야기는 직원회의의 결과를 보자는 쪽으로 결말이 났다. 나는 겨우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 었다. 뚱돼지 신부는 교장실을 나와 문 앞에서 나와 헤어질 때 이렇게 말했다. “이 눈 먼 가련한 아이야. 정말 안됐구나. 오후에 학교에서 고해성사가 있으니 그때에 하나님 에 대한 의심과 우상숭배의 과오를 참회토록 해라. 아마도 하나님께선 너를 용서해 주실게다.” 꼬르넬리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고해성사가 있다는 내 말에 그애가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것 참 잘됐구나. 그걸 구실로 기숙사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니?” “그래, 그러면 되겠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하는 동안 엘리나에게 가볼 수도 있겠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곤란해. 어떻게 그러니? 나는 그런 짓 못해.” “고집부리지마. 넌 그렇게 해야만 해.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 거야.” 꼬르넬리아는 진정 열성적으로 고해하는 대신에 엘리나를 찾아가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졌다. 엘리나의 집이 있는 골목을 찾아내어 그녀의 집을 지나치며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오랜만에 마술을 사용하고 싶었다. 정신통일을 하고 간곡하게 그녀만을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그녀는 결국 내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수십번이고 절실하게 그녀의 이름을 외웠다. 저쪽 길모퉁이에 꽃파는 아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나는 흰색 가을 장미 몇 송이를 살 돈이 있 었다. 꽃을 사들고 엘리나의 집을 지나쳤다. 그리움과 설움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대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를까 망설이고 있었다. 벨을 누르기만 하면 그녀에게 갈 수 있었다. 또한 그녀를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런데도 나는 그러지 못하고 마냥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하녀로 보이는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선생님을 만나려고 그러죠? 어떻게 하나, 지금 너무 심하게 아파서 면회가 어려운데. 꽃을 선 생님께 전해 들릴 수는 있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낸 사람은 누구?”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전해 주세요.” 맥이 쭉 빠진 내 말에 하녀는 조용히 웃었다. “알겠습니다. 이름 없는 분이 흰 장미를 보내왔다고 전해 드리겠어요.” 하녀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나는 온몸의 힘이 빠져 비틀거리면서 걸어나왔다. 그 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나가 창가에 서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 는 느릿느릿 다가갔다. 방안에 들어선 후에도 그녀의 눈만 바라보았다. 그 눈은 차츰 처졌다.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반 짝하고 빛이 쏟아졌다. 그 순간 나는 의식이 가물거렸다. 눈을 떠보니 내가 낯선 침대에 눕혀 있었고 옆에는 엘리나가 보였다. 그녀가 나지막이 소근거 렸다. “이제 정신이 드니? 차를 마시거라.” 나는 찻잔을 받아들고 한모금 마셨다. “무슨 일이 있었지? 어디 침착하게 이야기해 봐.” 지나간 일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때. 나는 이제 그녀 곁에 있지 않은가. 그 무엇도 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왔 다. 엘리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싶어했다. 그것은 내 존재의 핵심을 짚은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생 처음 나 자신을 열어 보인 것이다. 아침에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 도 이야기했다. “그런 멍청이 같은 일로 신경쓸 필요 없어. 내가 도와주마. 그렇지만 앞으로 그런 일에 자주 부딪치게 될 거야. 아무튼 나도 학교를 상대로 싸우겠다. 오해를 받게 되겠지. 내 편은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난 그런 바보들한테는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어. 꼬르넬리아가 즐겨 외우던 싯귀를 아니?” 그러면서 그녀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을 들고 큰 소리로 읽었다. “어린이는 진정 신과 같은 존재. 인간의 보호색에 몸을 가리기 전의 그들의 가슴 속에는 풍요 로운 보화 넘치니 그 마음 삶의 가난을 알지 못한다네. 어른들, 저마다 그걸 참지 못하나, 그들 역시 어린이들처럼 되면 신과 같아질 것이니...”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걸 깨뜨린 사람은 엘리나였다. “넌 나와 매우 비슷하구나.” 그 말이 나에게 준 행복감은 마치 찌르는 아픔과 같았다. 나는 그녀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리려는 자신을 겨우 가누었다. 타고난 수줍음만 아니었더라면 반드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을 것이다. 어느새 방안에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헤어질 때 엘리나는 방금 자기가 읽었던 책을 내게 주었다. 나는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서 혼자 울고 웃으며 걸었다. 강과 기숙사가 보였다. 다행히도 그 때 고해성사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 있어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도서관으로 가자마자 엘리나가 준 책을 폈다. 흰 띠가 놓여 있는 곳을 펼치니 히페리온과 알리 바나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그곳을 읽어 내려가다가 나는 가슴이 섬짓했다. 엘리나가 일부러 나에게 그 페이지를 일러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래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녀가 마침 그 장면을 읽고 있었거나 아니면 내가 우연히 그곳 을 펼친 것뿐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위해 그곳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다. 행복하고 꿈 같은 나날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누구도 나를 다시 호출하지 않았다. 엘리나도 다 시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 그녀가 불상을 내게 도로 주었다. 그리고 그 문제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게 되었다. 내게도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시절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리움으로 넘치던 꿈에서 깨어나 밝 게 타오르며 나의 삶을 휘어잡았다. 학교 공부에도 열심히었다. 옛날에 꼬르넬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반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감 탄어린 눈으로 나를 보게 되었다. 엘리나와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신호를 주고 받았다. 의미있는 눈길, 우연인 듯 하지만 사실은 나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수업중의 문장, 숙제 검사중에 슬쩍 덧붙인 개인적인 의견 등등. 반대로 꼬르넬리아는 점점 말을 잃었다. 가을 풀꽃처럼 시들어갔다. 나의 가슴 속에서도 서서히 그녀를 거두어갔다. 대신 엘리나만이 나의 마음을 모두 독차지하고 있었다. 가을이 왔다. 그러나 그 해 가을은 나에게 너무도 가혹했다. 나는 꼬르넬리아와 엘리나를 모두 잃었던 것이다. 가을 행사의 일환으로 학교에서 소풍을 가게 되었다. 소풍은 여러 가지로 즐거울 것 같았다. 엘리나는 평소처럼 갈색이나 어두운 청색 옷 대신에 경쾌한 빛의 가벼운 자색 옷을 입었다. 그녀의 상아 같은 피부와 어울려 그 옷은 기막히게 멋졌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욱 젊고 유쾌해 보였다. 꼬르넬리아도 유쾌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기차를 타고 가 어느 역에서 내렸다. 차 안 에서 엘리나와 꼬르넬리아는 같이 앉아서 스스럼없이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은 기차에서 내려 가을의 늪지를 거닐 때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나는 너무 행 복해 할 말을 잊었다. 붉은 색이 곁든 갈색의 늪지 위로는 잿빛 안개가 흐릿하게 덮여 있었고 이따금 숲속에서 노루 나 산양의 머리가 마치 헤엄이라도 치듯이 솟아나오곤 했다. 안개가 걷히자 가깝고 먼 곳의 숲들이 온통 금빛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들새들이 푸득거리며 유리 같은 늪지 위로 날아 올랐고 산딸기가 마구 흐트러진 채 영글어 있었다. 어디선가 감자 굽는 냄새가 나고 맑은 공기를 타고 멀리서 밭일 하는 농부들의 외침이 간간이 들려오기도 했다. 나는 성 게오르그에 와 있는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비키와 함께 그녀의 농장으로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점심 때가 되어 낮은 언덕 위에 평화롭게 자리잡은 작은 동리에 다다랐다. 그 중 높다 란 언덕에는 오래된 성이 있고 주위에는 공원이 꾸며져 있었다. 공원 복판의 잔디밭에 앉아 점심을 먹고 오락을 했다. 그리고나서 공원을 쏘다니다가 엘리나가 장미 꽃밭을 찾아냈다. 그때까지도 장미가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아래에는 시든 장미꽃잎이 뒤덮여 있었다. 우리는 좁다란 길목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나가 책을 읽어 주었다. 나는 그녀 뒷편의 벽에 기대 고 서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대신 마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처럼 그녀의 머리칼과 어깨, 손을 취한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이에 얼마나 소중한 의미가 되는지를 온몸으로 느꼈 다. 낭독을 끝낸 엘리나는 마치 나만을 위해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대 목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무안한 듯 웃었다. “고백할 게 있어요.” 내가 말했다. “그래, 이야기해 보렴.” “사실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어요.” 그녀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이미 그녀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사 실을 감지했다. 우리는 공원과 마을을 떠나 명랑한 걸음으로 들판과 가시밭길을 걸어서 강기슭으로 갔다. 따뜻 한 날씨였다. 어떤 아이들은 물에 손과 발을 담그었고 유지나무와 마가목가지를 꺾는 아이들도 있었다. 꼬르넬리아와 나는 바위에 걸터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꼬르넬리아는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 고 상냥했으며 행복해 보였다. 잠시 후 숲속에서 엘리나가 나타났다. 손에는 단풍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다. “이리들 오너라. 잔치를 벌이자.” 그녀가 우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그녀 주위에 둘러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대로 울긋불긋한 단풍잎으로 다발을 지어 온몸에 칭칭 감았다. 엘리나는 숲의 여왕으로 분장을 하고 가을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 며 엘리나를 따라 웃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엘리나와 손을 잡고 있느라고 나는 미처 꼬르넬리아에게 마음을 쓰지 못했다. 춤은 더욱 빨라 졌고 그만큼 즐거워졌다. 한참 후에야 엘리나와 나 단둘이만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다. 멀리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옷자락이 보였고 서로 부르는 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쳤다. 엘리나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와락 껴안고 내 귓가에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나는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마구 숲을 향해 달려갔다. 그 때 수풀 사이로 꼬 르넬리아가 사라지는 모습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나는 강가까지 계속 달려갔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이 할딱거리는 나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너 우니? 왜 그래?” 그제서야 내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별거 아냐. 뛰었더니 땀이 흘러서.” 멀어져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방금 전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수치심으로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엘리나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화장이 지워진 핏기없는 얼굴 로 숲에서 나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그녀가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서야 아까부터 꼬르넬리아가 안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허겁지겁 돌아서서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흐르는 강물 소리뿐이었다. “꼬르넬리아가 안 보여요.” 내가 외치는 소리에 앞에 가던 엘리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이 꼬르넬리아를 찾아올테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뒤따라갔다. 그녀는 모른 척 해주었다. 우리는 꼬르넬리아의 이름을 부르면 서 온 숲을 뒤지고 다녔다. 강 언덕에 이르렀다. 언덕 바로 밑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꼬르넬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어서 역으로 가자. 너희들도 먼저 돌아가라. 나는 남아서 꼬르넬리아를 더 찾아보겠다.”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아마 그애는 벌써 지름길로 역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 엘리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우리는 불안해 하며 묵묵히 역으로 갔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기차를 탈때 슬쩍 빠졌다. 엘리나를 따라 마을로 갔다. 엘리나는 마을 사무 소에 들어갔다가 잠시후 몇 명의 남자들과 함께 나왔다. 사람들은 각자 램프, 몽둥이, 들것 등을 가지고 왔고, 날은 완전히 컴컴해졌다. 사람들은 엘리나 를 따라 우리가 춤추던 숲으로 향했다. 각자 흩어져서 꼬르넬리아를 찾기로 했다. 램프 불빛에 때때로 시커먼 나무들이 보였다. 나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갈대숲 사이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꼬르넬리아 를 고함쳐 부르기는 했으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절망감에 휩싸여 갈대숲을 헤매다가 그만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긴 나뭇가지를 꺾어 몸을 떨면서 웅덩이의 깊이를 재어보았다. 검은 수면을 향해 몸을 굽히는데 밑에 꼬르넬리아가 보였다. 나는 꼼짝도 못하고 무엇에 홀린 듯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한참 후에 가까운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엘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검은 물 밑을 가리켰다. 순간 엘리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달이 차츰 높이 떠오르는 동안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여 전히 하얗게 질린 채로 사람들을 불렀다. 꼬르넬리아의 시체는 마을 사무실의 빈 방으로 옮겨졌고 의사가 와서 검시를 하였다. 의사는 우리에게 그녀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그애의 말로는 어머니가 오래 전에 정신병으로 죽었다더군요.” 엘리나의 말에 의사는 모든 게 확실해졌다는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버럭 소리쳤다. “거짓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의사가 물었다. “아, 이애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보겠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서로 사랑했다는 것밖에는. 의사는 흰 천으로 시체를 덮어 주고는 가버렸다. 시내로 가는 차편은 이미 오래 전에 끊겼다. 농부들이 우리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엘리나는 내게 그들을 따라가 자라고 하였으나 나는 사양했다. 우리는 말없이 촛불이 타는 조용한 방에 앉아 있었다. 파김치가 된 나는 곧 잠이 들었다. 잠을 깨니 한밤중이었다. 엘리나는 여전히 시체를 지키고 있었다. 나도 더이상 자지 않았다. 새벽의 여명이 차츰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해가 뜨기 전에 앰블런스가 꼬르넬리아를 실어갔다. 엘리나와 나는 기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교실에 들어가자 사방에서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 졌다. “꼬르넬리아는 죽었어.” 막상 그 말을 내뱉고 나니 긴장이 풀어지며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이들이 숙연해졌다. 꼬르넬리아는 곧 무덤으로 갔고, 변함없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내 옆자리는 그대로 비어 있었다. 난 다시 이전의 몽상가로 돌아가 버렸고, 학년 말에 엘리나는 전근을 갔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말이 없었다. 그녀가 떠나자 나는 다시 혼자 가 되었다. 밤외출 그 일이 있은 뒤 2년 동안, 나는 평범한 여학생으로 학교생활을 보냈다. 꼬르넬리아외 엘리나에 대한 추억은 점점 희미해지는 꿈처럼 가물거릴 뿐이었다. 언제나 변함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의 삶은 활동을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듯 의식이 마비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나를 한 곳에 고정시켜 두질 않았 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이미 낯선 강의실 안에 와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보통 점심 식사가 끝나면 산책을 하도록 되어있다. 사감은 안경너머로 차가운 시 선을 보내며 대열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거리에 나가면 항상 얌전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지겹기 짝이 없는 주의를 되풀이하곤 했다. 우리는 그런 똑같은 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기숙사 문을 열어도 좋다는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럴 때면 나는 갑자기 그렇게 얌전하게 열을 맞춘 채 서 있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강 렬한 격분이 나의 내면에서 치솟아 올랐고, 알 수 없는 변화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다가는 결국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곤 하지만 그렇다고 소란스럽게 굴지는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묵묵히 층계를 지나 거리를 따라 공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강쪽으로 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단조롭게 움직이는 앞 사람의 등만을 응시하면서 걸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대열을 벗어나 길을 가로질렀다. 아이들은 내가 미리 허락을 받고 취하 는 행동이라 생각했던지(나의 당당한 걸음걸이는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를 부르지도 않고 정해진 길을 걸어갔다. 맨 앞줄에서 걷고 있던 사감은 내가 벌써 옆 골목의 모퉁이를 돈 다음에야 상황을 알아차리고 법석을 떨었다.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은채 계속 걸어갔다. 그렇다고 급하게 서둘러서 걸은 것도아 니었다. 이윽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때 마침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이 눈에 띄었 다. 나는 얼른 그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집 안뜰에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고물 차바퀴, 가죽, 조각, 목재, 연장 따위가 사방에 널 려 있었다. 나무에 조각을 새기고 있던 어떤 노인이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고 노인은 곧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문 밖에서 소란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대문 앞에서 고함치듯 말했다. "이 집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어요." 노인은 재빨리 창고 안에다 나를 밀어넣고는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뜰에서 사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 한 명이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누가 들어왔느냐구요?" 노인은 얼른 반문했다. "여학생 한 명 말이에요." "여학생이라고 하셨소? 나원참. 여학생이 나같은 늙은이를 찾아올 리가 있겠소? 농담을 하셔 도... 그런 좋은 시절은 벌써 다 지나가 버렸소." 노인의 한숨 소리에 이어 사감이 그냥 나가버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노인은 우습다는 듯 킥킥대며 사감을 보내고는 창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젠 맑은 공기를 마셔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물었다. "도망쳐 나온 거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잠시 노인 옆에 서서 그가 보리수나무로 동물의 생김새를 본딴 가면을 만드는 과정을 구 경했다. 내가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자 노인이 안으로 들어가 완성된 가면을 몇 개 가지고 나왔다. 사육제 때 쓰는 마녀의 가면과 숲속의 요정 가면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눈동자가 음산한 표 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 외에도 칼로 판 작은 목각인형으로 가득 채워진 상자도 보여 주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골라 가져라." 나는 검은 나무로 된 숲의 요정과 노루를 양손에 들고 어느것을 가질까 망설였다. 그러자 노인 이. "검은 걸 가지렴." 하며 그것을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밀고서 밖을 살피더니 말했다. "다들 돌아간 모양이구나." 나는 노인에게 인사한 뒤 밖으로 나왔다. 걸으면서 노인이 준 선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요정은 양의 발바닥 크기 만했으며, 얼굴에는 커다란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칼로 조각한 눈물 방울.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요정이 마술을 부려 내가 그런 엉뚱한 짓 을 저지르도록 유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뚜렷한 대상도 없는 경멸감과 자존심과 무조건적인 그 리움에 휩싸여 나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전차길이 끝나는 교외까지 걸어가 썩은 침목더미 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온 몸을 휘감았다. 옷 속으로 싸늘한 밤바람이 파고들 때까지 그렇게 주저앉아 선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선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어둠이 깔리는 초저녁, 나는 낯선 길을 걸으며 결 코 어겨서는 안될 금기 사항을 깨뜨림으로써 무서운 벌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생 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학교로 되돌아갈 수 없고, 이제 내가 자초한 운명을 스스로 감당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힌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짜릿해지도록 근사했다. 거의 무모에 가 까운 신념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용기로 나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강 건너편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입구의 가시덤불만 헤치고 들어가면 멋진 오솔길이 이어지게 돼 있었다. 그 숲을 하루 정도만 헤쳐나가면 틀림없이 성 게오르그에 다다를 수 있으리 라. 그러나 얼마 후, 나는 기숙사 근처 시내를 서성거리는 나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깜깜한 밤길이 나를 멍청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원을 지나 기숙사 부근으로 접근해 갔다. 불켜진 도서관 창문 안으로 책이나 콤파스, 지구의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 다. 자신은 이미 그런 질서정연한 생활에서 팽개쳐져 어둠과 위험의 궁지로 몰려가고 있다는 사실 이 섬 하도록 가슴을 찔러왔다. 슬픔과 후련함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런 심정으로 낯익은 창문들 하나 하나에 이별을 고했 다. 몇 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짤랑거렸다. 싸구려 과자 몇 개와 차 한잔 정도는 구할 수 있는 돈 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조그마한 카페에 들어가서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조금씩 몸이 따스 해지자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한 여인이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자줏빛 모자를 쓰고 붉은 갈색 머리와 노란 목걸이를 한 우유빛 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잡지가 들려 있었지만 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형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거리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게 유리창에 비쳤는지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내 테이블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아가씨로군. 언제부터 여길 나왔지?" 나는 짐짓 그녀의 말투에 당황했으나 애써 쾌활한 척 대꾸했다. "오늘부터요." 그러자 그녀는 새삼스럽게 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그런 동작과 함께 귀걸 이가 즐거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가씨는 너무 어려." "열다섯 살이나 된 걸요."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한 웅큼 쥐어보더니 말했다. "가발은 아니군. 진짠데." 그러더니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의 말투나 웃음에서 이방인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의 목소리와 눈길에서 따스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난 항상 이 모양이라니까. 갈 시간이 지났는데." 그녀가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특별히 바쁜 일이 없으시면 좀 더 같이 있어 주시지 않겠어요?" 어쩌면 그녀의 온화한 체온을 잠시나마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2인분의 과자와 차를 시켰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런 곳엘 왔지?" 그녀가 물었다. "배가 고파서요." "혼자 왔니?" "네." "내 생각으론 어디서 몰래 도망쳐 온 아가씨 같은데, 안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어떻게 그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같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장황하지 않은 설 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아주 멋진 얘기였어. 하지만 물론 다시 돌아갈 생각이겠지?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니까. 헌 데 오늘은 너무 밤이 깊었군." "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앞으로 밀려올 운명의 먹구름에 대한 공포와 그런 운명을 자초하고 만 자신에 대한 비애가 뒤 범벅이 되어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왜 그런 마음을 먹은 거지?" 다분히 장난기 섞인 말투였다. 나는 그녀의 말투에서 도망쳐 왔다는 것을 그녀가 믿지 않고 있 음을 직감했다. 나는 반발심이 솟구쳐 올라 단호하게 결심을 굳히며 외치듯 말했다. "돌아가지 않을 거란 말예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도대체 뭘?" "기숙사 말예요. 감옥 생활이나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공부도 다른 것도 전부 다 그래요. 전부 몽땅 내던져 버릴 수 있을 텐데...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서 미칠 것 같다구요." 우수에 잠긴 허탈한 얼굴로 그녀는 손을 가로저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란다.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야. 어떤 일이든 자신이 뜻하는 대 로 소망을 이루는 사람은 없단다. 그래,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창밖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쫓아 밖으로 눈을 주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눈길이 창 밖을 서성이는 한 산책객에게 쏠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일로 머릿속이 뒤집힐 지경이라 그녀의 시선이 의미하는 것 따위에는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괜히 화가 치밀어 올라 짜증스럽게 외쳤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당신은 자유로운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도 당신한테 명령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생각되니?" 그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으로 반문했다. 순간, 그녀가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당신을 괴롭히는 게 뭐예요? 알고 싶어요." 내가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말로 표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난 슬픈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났단다. 흡사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개처럼 말야. 그 개는 이른 아침 골목길을 헤매고 있었지. 몇 개의 밥통이 뒹굴고 있었 지만 전부 텅텅 빈 것뿐이었어. 하나같이. 그래도 개는 포기하지 않고 기를 쓰고 먹을 것을 찾아 다니더군. 그런 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눈물이 쏟아졌어. 결국은 엉엉 울고 말았지." 그녀는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돌아가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만 내 감상에 불과했어."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인생이 슬프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요." 나도 그 낯선 여인에 대해 따뜻한 우정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할아버지의 홍옥을 꺼냈다. 그리 고는 말했다. "이 보석은 마술에 싸여 있어요. 어떤 마술인지 아세요? 이걸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 고향을 찾을 수 없다는 주문이 붙어 있어요."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결코 누구도 고향을 찾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때, 창 밖의 그 산책객이 창문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밝은 표정으 로 돌아가 그 신사에게 환한 웃음을 던졌다. "가야 되나요?" 내가 묻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천천히 가도 된단다. 그건 그렇고 아가씬 어쩔 작정이지?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까? 친척이라 고 하면 별문젠 없을 거야. 길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왔다고 하면 되잖아."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럼 아가씨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병이 났다고 하면 어떻겠어?" "그래봐야 믿어주지 않을 거예요. 돌아가야 된다면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아요." "역시 그렇겠군. 아가씨 말이 맞아. 굳이 거짓말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날 만난 것까지 털 어놓으면 난처한데. 그러진 않겠지?" "원하신다면 그러죠. 그런데 뭐가 곤란하다는 말이지요?" 그녀는 내게서 눈길을 돌리고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아가씨, 괜히 모르는 척하는 것 아니야? 진짜 모르는 거야?" "뭘 말예요?" "내가 뭐하는 사람이라는 것 말야."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내 표정의 변화를 읽은 그녀가 빠 른 어조로 말했다. "이젠 아가씨도 나를 경멸하는군."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거리의 여자, 그녀가 속해 있는 어두운 세계에 대해 내가 구체적으로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나마 느낌으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선량하고 아름다운 자태였다. 그런 여인이...이윽고 그녀가 일 어섰다. "아가씨,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늦은 시간이지만 기숙사 문이야 열어 주겠지. 그리고 만약에..." 그녀는 차갑고 딱딱한 촉감을 지닌 작은 물건을 내 외투 주머니에 넣어주더니 작별의 말을 건 넸다. "잘 가. 아참, 내 이름은 엘리자베드야. 게롤드가에 살고있지. 안녕!" 그녀는 휑하니 나가버렸다. 나는 부끄러움과 선망이 엇갈린 떨림을 안고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하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순간, 그녀와 나 자신에 대한 슬픈 감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와 가슴을 메웠다. 각양 각색의 인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가슴에 다가와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엘리자베드!" 소리는 어둠을 뚫고 나갔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캄캄한 공원을 지나 기숙사로 갔다. 이미 창문의 불은 모두 꺼진 상태였다. 부속 성당에서 흘러나오는 '영원의 불빛'만 희미하게 길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마치 밤바다를 안내하는 등대처럼. 나는 조그만 돌을 하나 집어 침실 창문으로 던졌다. 하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 었다. 떨리는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 다. 그대로 멀리 달아나고픈 충동을 겨우 달래며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녀가 나오더니 문을 열었다. "어디갔다 오는 거지?" 하녀는 나를 들어오게 해야 할지 어쩔지를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대답대신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오는데 어서 가서 자도록 해요."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녀의 걱정을 뒤로 하고 침실로 갔다. 내 발소리에 깨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기상시간이 되기 전에 살며시 기숙사를 빠져 나왔다.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허기와 추위에 지친 몸으로 교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자 딱딱한 촉감의 물건 두 개가 잡혔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검은 요정 과 엘리자베드의 현관문 열쇠. 수업이 끝난 후, 나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가 되어 기숙사로 돌아왔다. 나를 무슨 위험스런 짐승처럼 여기는 듯한 아이들의 눈초리가 거슬렸다. 기분은 점점 더 울적해졌다. '사감은 어제 일에 대해 다그치겠지...' 하지만 아무리 사감이 다그친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나 자신조차도 도무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들에 빠져 있을 때 나보다 조금 큰 아이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얘, 넌 이제 쫓겨날 거야. 나도 네가 있는 한은 기숙사에 있지 않을 거고. 더 이상 너하고 같 이 지낸다면 소름이 끼칠 것 같애." 하지만 그런 말 따위는 내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었다. 그 후 며칠 동안은 학교에서고 기숙사에서고 끈질긴 추궁속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당사자 인 나는 관심밖의 일을 대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 버렸고, 그 심문자들에게 나를 납득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후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은 새로 온 교장의 호출까지 받게 되었다. 교장 이 말했다. "시내에서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내말이 맞니?"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교장이 계속 말했다. "너 같은 아이를 여러번 겪어 봤다. 네 나이 때면 문득 모든 게 혼돈스럽게 느껴지는 수가 흔 히 있지. 그래서 무분별한 행동을 저지르게 되고, 곧 후회를 하게 되지만 그땐 이미 늦어요. 결국 은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냐. 너도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나는 어느 정도 호의를 베풀어주려는 교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의 말은 하나도 그릇된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변명을 늘어놓거나 용서를 빌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며칠간 학교를 쉬도록 명령받았다. 그런 어느 날 오후 기숙사 휴게실로 불려갔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랬었군요..." 오히려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말에 아버지는 몹시 노기를 띠며 흥분하셨다. "그랬었군요 라니? 맙소사. 뻔뻔스럽기 짝이 없구나. 창피한 줄 알아야지. 너 때문에 얼굴도 못 들고 다니는 아버지는 생각지도 않니?" 아버지는 내게 등을 보이고는 창가로 가서 밖을 보고 계셨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지는 자신 을 느꼈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냐? 어디 네 생각 좀 들어보자." 또다시 억센 차바퀴가 나의 생 한가운데로 굴러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철없는 녀석 같으니라구! 마음 같아선 무슨 짓을 하든 여기에 팽개치고 가고 싶지만 그럴 수 도 없는 노릇이고...엄마와 의논한 끝에 다른 기숙사 방을 구해놨다. 어른 있는 곳인데 시험삼아 널 받아 주기로 결정했다더라." 아버지의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학교에도 갔었다. 근신 처분을 받았더구나. 한번 학적부에 기록된 오점은 평생동안 지워지지 않을게다. 저녁에 데리러 올테니 짐을 챙겨 놔라. 당분간은 집에서 지내도록 하고." 아버지는 내게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다. 나는 넋나간 사람처럼 짐을 쌌다. 커다란 침실에는 나 혼자 남겨져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올 뿐이었다. 모든 일을 간단하게 처리해 나의 부담을 덜어준 아버지에게 차라리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모든 일이 멋대로 꿰맞춰져, 또다시 나를 틀에 박힌 궤도 속에 집어넣고 있음에 대한 씁쓸함에 휩싸였다. 내가 원한 건 최소한 그런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확실한 건 그런 조치들이 나 의 운명에 대한 월권행위라는 사실이다. 짐을 다 챙기는 동안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녁 때가 되려면 아직 몇 시 간이 더 지나야 했다. 시내의 꽃가게로 갔다. 난초를 사고 싶었는데 내가 가진 돈으로는 겨우 몇 송이밖에 살 수가 없었다. 난초가 그렇게 비싼 줄 미처 몰랐었다. 거기에 장미를 몇 송이 섞어 엘리자베드의 집 문앞에다 놓아두고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는 줄곧 침묵만 지킬뿐이었다. 집에서 2주일 간의 방학을 보내면서 나 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어머니는 분에 못이겨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때로는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그러다간 다시 격한 어조로 야단을 쳤다.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것이라곤 매몰찬 반발심뿐이었다. 수난이 거듭되던 어느 금요일 오후에 어머니가 말했다.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려야 되지않겠니?" 나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는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 말했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오도록 해라. 시간이 다 됐다." "성당엔 가기 싫어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성당엘 가기 싫다니?" "그래요. 가기 싫단 말예요." "맙소사..." 어머니는 어이가 없는 듯 아버지를 불렀다. "당신도 저 애가 지껄이는 말을 들으셨지요? 어쩌다가 저꼴로 변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 는군요." "바람이나 좀 쐬고 올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나 기가 막힌다는 듯 넋나간 표정으로 내가 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 다. 잠시 후 등 뒤에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아예 눈 앞에 나타나지도 말아라!" 그 말을 듣자 답답한 속이 확 뚫리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 졌다. 나는 이내 두 분의 일을 잊 어버린 채 즐거운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다리를 건너고 넓은 들판을 지나 비로소 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새로운 감각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 은 몹시 예민하고 섬세했다. 산꼭대기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와 식물의 줄기를 타고 양분 이 흡수되는 소리, 적당히 건조한 검은 흙이 꿈틀대는 소리까지 빠짐없이 들려오는 듯했다.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들판과 자작나무 숲 사이 오솔길을 걷는 일은 참으로 즐거웠다. 부끄럽고 기분나쁜 기억들은 몽땅 훈훈한 봄바람 속에 흩어져갔다. 그 홀가분함과 동시에 약간 은 비애스러운, 하지만 신선하고 상큼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숲과 태양, 꽃과 봉우리, 대지." 마치 모든 사물에게 내가 최초로 새롭고 멋진 이름을 지어 주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어둠은 일찍 찾아왔다. 짙은 그늘이 언덕을 둘러쌌고, 바람은 겨울로 돌아간 듯 냉랭해졌으며 찬 서리가 대지를 적셨다. 상쾌했던 기분은 가시고, 밀려오는 어둠이 나를 허탈감 속으로 몰고갔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시내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울창한 관목이 숲을 이룬 언 덕을 내려가며 생각에 잠겼다. 그곳 가까이에 국경선이 있었다. 보초도 없으니 마음만 먹으면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선만 넘으면 나를 찾을 사람도 데리러 올 사람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국경선 너머 남쪽에는 이탈리아가 있었다. 어쩌면 꼬르넬리아와 나의 '졸'도 있으리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나라는 차가운 바람만이 캄캄한 숲을 때리며 지나가고, 누구도 나를 사 랑으로 안아주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꼬르넬리아가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와 엘리자베 드도.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과 더불어 이름도 형체도 없는 다른 뭔가에 대한 그리움 이 가슴을 조이며 밀려왔다. 고목 주위를 돌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외롭고 침울할 때면 대지를 수놓은 갖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예쁜 꽃망울들, 구름, 새...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제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 버렸다. 나는 단지 나일 뿐이며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한 인간에 불과하다. 갑작스런 공포가 엄습해 왔다. 고목과 산봉우리와 어둠에 덮인 숲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게 깔린 구름은 두려움으로 상기된 나를 그저 무심히 지켜볼 뿐이었다. 다시찾은 성 게오르그 성 게오르그 수도원을 동경하는 나의 절실한 그리움. 나는 그 그리움을 6년이 넘도록 가슴에만 쌓아둔 채 시간을 보냈다. 내게 있어 그곳은 잃어버린 보물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영혼으로 다시 찾아야 할 낙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철자법이 엉망인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얼마 전 시집을 간 비키가 보낸 것이었는데, 지금 그녀는 농장의 어엿한 여주인이었다. 부활절을 성 게오르그에 와서 지내라는 초대장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락을 얻는 것은 어 렵지 않았다. 큰아버지와 아주머니 곁에 있으면 내가 많이 좋아지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부활절 바로 전날 그렇게 그리던 성 게오르그를 다시 밟게 되었고, 뾰족한 탑이며 육중한 담을 대하게 되었다. 우편마차 정류장에 비키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예전보 다 훨씬 건강해 보였고 살도 찐 것 같았다. 시골 농부의 아낙네 티가 물씬 풍겼다. 나는 예전과 변함없는 그녀의 위풍당당함에 주눅이 들어 또다시 꼬마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벌써 축제 준비를 끝낸 고요한 마을길을 따라 마을 맨 끝에 위치한 집마 져 지나쳤다. 거기부터는 물과 대지, 들꽃 냄새가 싱싱하게 퍼져나오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초원을 거쳐 외딴 곳에 이르자 그녀의 농장이 보였다. 집 앞에는 내 또래쯤 돼 보이는 갈색 피부의 소년이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기고는 아직 끈적한 액체가 묻어나는 거기에다 나선형이나 고리 모 양 따위의 무늬를 새기고 있었다. 그는 일에 열중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내게 인사를 건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비키가 그 아이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름은 세바스찬, 고아로 버려진 아이를 농장에서 키워 지금은 어엿하게 한 사람 몫의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참 후에 밖엘 나가 보니, 그는 예쁘게 무늬를 새긴 나뭇가지를 장대에다 동여매느라 끙끙대 고 있었다. 부활절 행사 중의 하나로 성당에다 누구의 장대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시합이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기를 써도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버드나 무 가지의 무게 때문에 매자마자 이내 헐렁하게 풀어지곤 했다. 난 그에게 다가가 엄지 손가락으로 매듭을 누르고는 끈을 여러번 겹쳐서 단단하게 맬 수 있도 록 도와주었다. 세바스찬은 나의 도움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나는 나무가 튼튼하게 묶여졌음을 확인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집 모퉁이를 도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목을 길게 내밀고 나를 쳐다보던 그의 시선과 마주쳤 다. 결국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럴듯한 계기가 생기기를 기대했으나 그 생각은 계면쩍인 웃음으로 얼버무려지고 말았다. 밤이 되었다. 농장의 모든 것이 어둠 속에 가라앉을 무렵, 나는 작은 방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둥그스름한 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밝은 달빛 아래에는 봉오리가 맺힌 벚나무 가지들이 수 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집 앞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또렷한 음으로 들려왔고, 멀리 있는 숲과 새싹들의 속삭임도 들려왔다. 습기를 먹은 공기와 흙과 수액과 자라나는 온갖 사물들의 냄새가 열려진 창을 통해 쏟아지듯 흘러들어왔다.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개가 눈에 띄었고, 잠자는 소의 숨소리와 고삐 부딪치는 소리가 외양 간으로부터 간간히 새어 나왔다. 수도원은 들판 너머에 있었다. 수도원이 그처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자 설레임이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이 밤만 지나면 난 그곳엘 갈 수 있어.’ 어린 나를 그토록 설레게 하던 그곳의 모든 것들이 아직 그대로 있는지, 아니면 지나간 시간과 함께 변해버렸는지 빨리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자 도저히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살며시 집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달빛을 받으며 이슬이 축축하게 내린 길을 따라 마을로 갔다. 웅장한 아치형 문을 지나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높이 솟은 지붕 위로 펼쳐진 하늘이 네모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벽면은 어슴푸레하게 빛났지만 그렇지 않은 쪽은 칠흑같은 어둠만 드리워져 있었 다. 수도원은 강렬한 불빛이라도 뿜어내는 듯 환하게 밝았다. 탑처럼 서 있는 정원의 검은 사이프 러 소나무들 틈으로 달빛이 스며나와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나 자신도 깜짝깜짝 놀랐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생생한 추억을 머금은 담쟁이 향기와 풀내음이 전신을 아찔하게 했다. 나는 굶주린 사람처럼 그 냄새들을 들이마셨다. 억제할 수 없는 감격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문득,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생각나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그 문은 덤불로 뒤덮여 있어서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길에는 쐐기풀과 말오줌나무가 우거졌고, 문은 덤불로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내 손은 온통 상 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그 길을 이젠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가 시덤불로 우거져 있을 리가 없었다. 나무로 된 문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그 문을 빠져나와 정원으로 들 어갔다. 길게 펼쳐진 정원에는 한아름의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원은 뿌옇게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서 목욕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순간,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격류가 나의 내부로 밀려들었다. 감격과 아픔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 나는 취한 듯 몽롱한 상태가 되어 달빛이 출렁이는 정원을 정신없이 달려갔다. 정원 한가운데 있는 검은 포플라 섬과 무너진 십자로 근처의 풀밭에서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 슬에 젖은 풀을 헤치며 나무며 기둥이며 돌계단이며 무너진 돌담 등을 다시 만났다. 옛 친구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라도 하듯이. 마지막으로 성수반이 있는 야외 행사장의 문으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다. 예전에 으레 사용하 던 커다란 열쇠가 이젠 필요없게 된 셈이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물. 나는 어렸을 때처럼 돌멩이를 집어 그 수면 가운데로 던졌다. 하지만 그때 구름의 그림자가 수면 위에 드리워져 유리반지같은 파문을 덮어버렸다. 대신 거기 에는 암울한 우수의 그늘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허탈해져서 떨리는 몸을 가누며 비키의 농장 으로 돌아왔다. 부활절 대미사가 성대하게 끝나고, 나는 큰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큰아버지는 벌써 여러 해 전부터 근육이 마비되셔서 거동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수도원 재정 관리는 새로 온 젊은 신부가 맡고 있었다. 큰아버지께서는 이제 많은 방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분을 뵙게 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떠날 무렵부터 흰 머리카락이 하나 둘 눈에 띄던 아주머니는 이제 백발의 할머니로 변해 있었다.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맞아주셨다. “큰아버지 뵙거든 너무 오래 있진 말거라. 그리고 되도록이면 네 얘기를 많이 들려드리도록 해라. 말을 알아듣기는 하시니까.” 당연한 얘기를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하시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큰아버지는 창가 휠체어에 앉아 계셨다. 바로 앞에 작은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낡은 책 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약간 긴장하며 큰아버지 곁으로 갔다. 큰아버지의 눈가에는 반가움의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큰아버지께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내 손을 마주 잡아주실 수가 없었다. 가만히 미소만 짓고 계셨다. 나는 아주머니의 말씀을 기억해내고는, 학교와 부모님 그리고 큰아버지와 내가 아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들려드렸다. 나는 큰아버지의 그 석상 같은 미소에 빨려들면서 목소리가 들뜬 것처럼 빨라 가는 것을 스스 로 느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큰아버지가 미소를 짓는 바로 그 순간에 마비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큰아버지는 평소의 성품대로 그 온화한 미소를 영원히 간직하시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큰아버지는 바라볼수록 낯설었고 왠지 비애감만 젖어올 뿐이었다. 문득 가슴이 미어질 듯 슬픔이 밀려왔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 후로는 그런 감정을 참아내는 데 점차로 익숙해졌고, 큰아버지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책을 읽고 싶어도 책장을 넘길 수 없는 큰아버지를 위해 대신 책장을 넘겨드렸다. 그것은 꽤 신중한 주의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큰아버지의 눈빛을 세심히 살펴 그 장을 다 읽으셨는지를 재빨리 파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내가 큰아버지보다 많이 앞질러 읽었을 때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노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정 적과 평온을 즐기며, 그분 곁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사색의 영역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큰아버지의 심오한 사상세계를 접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곳과 작별을 고하고 내 생을 스스로 꾸려 나가야 하는 동안에도 그 느낌은 추호의 흐트러짐없이 유지될 것만 같았다. 성 게오르그에서의 생활은 강가의 숲과 봄날의 들판, 수도원의 꽃밭, 성지 주간의 분위기, 세바 스찬과 성에서 온 청년 르네에 의해 나날이 새롭고 알차게 달라져 갔다. 르네와 처음 만난 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그날 이른 아침에 세바스찬과 마을에 갔었다. 세바 스찬의 손에는 양철통과 삽이 들려져 있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많은 사내아이들과 청년들이 양철통을 들고 모여 있었다. 모두 모 여 성당과 연못 사이에 있는 넓은 공터로 갔다. 그곳에서 불의 축성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맑고 서늘한 아침이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신부가 오기를 기다렸다. 길다란 빨강색 저고리에 하얀 연미복 바지를 입은 미사(목사)들이 소리를 치면서 지난 해 부활 절 때 불에 그을린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풀밭에다 장작과 덤불을 쌓아올렸다. 신부의 등장과 함께 소란스런 말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조금 있으면 거행될 의식에 대한 경건함 때문이 아니라 불이 점화될 순간을 기다리는 긴장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은 하나같이 불씨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불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자 기쁨에 찬 환호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기도를 드리는 동안에도 사내아이들은 서로 밀치며 불쪽으로 가까이 가려 했다. 그러다가 신부 가 성당 쪽을 향하여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삥 둘러쌌다. 이윽고 불이 가장 잘 붙은 장작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서로 밀치며 싸우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모두들 가지고 온 양철통에다 타오르는 불덩이를 담고는 신중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가져온 불씨로 그 해의 새로운 불을 화덕에 지피는 것이 옛부터 내려온 관습이었다. 세바스찬은 맨 먼저 장작을 재빠른 동작으로 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 고 있는 르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성당 담에 기대서서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 소란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훌쩍 큰 키에 새하얀 얼굴, 귀티가 나는 소년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일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간 다음에야 느릿느릿 불더미 쪽 으로 걸어갔다. 아주 깊은 사색에 빠진 표정으로 가물가물 꺼져가는 불더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불더미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그리고는 성당 뜰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부활절 아침, 나는 다시 르네와 마주쳤다.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교외에 있는 숲속의 작 은 성당으로 야유회를 가는 게 이 마을 풍습이었다. 비키, 세바스찬과 함께 나도 그 성당으로 갔다. 성당 가운데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다. 세바스찬은 그 바위 표면의 얼룩을 가리키며 말 했다. “저 얼룩은 피가 말라붙은 거야.” 그리고는 무슨 비밀스런 얘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내 귀에다 속삭였다. “수백 명의 순교자들이 저 바위 위에서 이교도들의 개한테 물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 그 때 등 뒤에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참다가 터진 듯한 웃음소리의 주인공 은 르네였다. “순 엉터리 같은 얘기를 하고 있네.” 르네의 말이었다. “저게 핏자국이라고? 바보 같은 소리. 핏자국이라면 어떻게 천년씩이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겠니?” 그러자 세바스찬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기적이라 할 수 있지.” 르네가 또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가 설명해 봐? 저건 핏자국이 아니라 밝은 화강암에 붉은 백운석이 박힌 거라구.” 세바스찬은 그의 말을 곧이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내게 말했다. “저건 틀림없는 핏자국이야. 저 친구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돌아오는 길에 르네는 나와 세바스찬과 함께 동행했다. 나는 르네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도시 출신이고 상급학교에 다니고 있 다는 점에서 묘한 동질감같은 것을 느꼈다. “난 돌 모으는 게 취미거든. 언제 한 번 구경오지 않겠니?” 그가 내게 제안했다. 다음 날, 나는 그의 부모님의 농장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 농장은 마을과는 거리가 좀 떨어진 들판과 숲 사이에 있었다. 르네의 부모님은 여행을 떠나 고 안 계셨다. “우리 엄마 아버진 거의 매일 여행이야.” 르네는 툭 한마디 던지고는 별로 기분좋은 일은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넓은 농장에서 그는 늙은 유모와 하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지나치게 자유를 욕심내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고독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타고난 듯 늘상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니 독서를 하거나 숲속을 돌아다니며 희한한 돌, 식물을 수집하는 게 자연스럽게 취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모은 것들 중에는 신기하게 보이는 돌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내게 돌의 이름과 출처, 생 성 연대, 강도 등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아주 주의깊게 상자에서 돌을 꺼내 그 신비로운 무늬와 광채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딱딱한 돌에 무슨 생명이라도 담겨있다는 듯 사랑과 소중함으로 빛나고 있 었다. 하지만 나는 돌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르네는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면 서도 가만히 상자를 치웠다. 그리고나서 말했다. “나하고 같이 가. 기막히게 멋진 곳을 보여 줄테니까.” 그를 따라 숲과 개울 사이로 난 오솔길을 얼마쯤 가자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이상했다. 전에 내가 그토록 돌아다니면서도 그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니. 성벽 안에는 널찍한 정원이 있었고 그 중앙에 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손길이 닿지 않는 정원에는 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고 헐어진 돌담과 관목이 무질서하 게 얽혀 있어 황무지 그자체였다. 나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곳이었다. 더욱이 그 성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곳에 시간의 영속성을 초월한 채 르네가 주문을 외자 이제 마악 지하에서 솟 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르네의 안내를 받으며 묵묵히 성으로 다가갔다. 덧문이 내려져 있는 창들, 그 위로 장미와 포도 덩굴이 제멋대로 뻗어가고 있었고, 추녀 위에는 낙엽이 쌓였다. 르네가 성문을 밀어 젖혔다. 둔탁하게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성 안 깊숙히 메아리가 되어 울렸 다. 흡사 깊은 동굴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사람을 긴장시키는 싸늘한 바람이 엄습해 왔다. 르네가 중앙의 홀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홀 구석으로 그림자를 닮은 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 고 있었다. 르네가 덧문을 하나 들어올렸다. 그러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창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불자 천정의 샹들리에를 장식한 수백 개의 수정이 서로 부딪히며 낡은 장난감 시계 같 은 소리를 냈다.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긴 했으나 금이 가 있었고, 휘장이 흡사 미이라에서 나온 옷감처럼 낡을 대로 낡아 바스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르네와 나는 마치 거대한 비밀이라도 정탐하는 사람들처럼 발소리를 죽여가며 주위를 살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곳에서 나와 성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공포에 사로 잡힌 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원 쪽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성은 이내 매혹적으로 느껴졌고, 다음 날부터 그곳은 우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우린 성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느껴지는 음울한 기운에 빨려 들었고, 머릿속은 한 대 얻어맞 은 듯 아찔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써 어린 티를 벗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어린아이들 마냥 장난에 빠져들 수가 있었다. 르네와 나는 그 성의 주인 부부가 되어 하인들의 청원을 들어주기도 하고 백성들을 성 안으로 이주시킬 거창한 계획을 전행시키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폭군이 되어 보기도 했으며 공주가 되어 포로로 지하 감옥에 갇혔다가 구조되기도 했다. 오리시우스와 나우시카가 되어 고전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세바스찬이 함께 어울리면서부터 우리의 놀이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넓다란 대리석 난 간에서 재주를 부리거나 장애물 뛰어넘기, 또 길다란 복도에서 달리기 등을 하였다. 그러한 놀이 들도 재미있었다. 음산한 부엌 화덕에 불을 지피고 둘러앉아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세바스찬의 귀신이야기를 들으며 덜덜 떨기도 했다. 이야기는 대체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마녀와 살인에 얽힌 내용들이었 다. 나는 두 소년에게 성 게오르그 수도원의 정원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르네는 내가 하던 것처럼 야외 행사장에 앉아 성수반에 돌을 던지며 유리 반지 모양으로 퍼지 는 파문 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정원을 마구 쏘다녔다. 그런데 세바스찬이 갑자기 숨 을 헐떡거리며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얼굴이며 손이며 온몸이 흙투성이었다.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지 대신 손을 펴 보였다. 아주 오래된 옛날 동전이 그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어디서 난 거니?” 세바스찬은 여전히 숨을 씩씩거리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그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언젠가 큰아버지가 말씀하시던 굴 앞이었다. “위험해! 무너지면 어떡해.” 하지만 세바스찬은 이미 안 쪽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나와 르네는 초조와 불안에 싸여 서 있었다. 조금 지나자 우리의 발 주위에 계속해서 동전이 떨어졌다. 우리는 그것들을 윤이 나도록 닦았다. 그런데 갑자기 세바스찬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굴에서 나왔다. “왜 그러지?” 그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고개짓으로 굴 속을 가리켰다. 궁굼해서 못견디겠다는 듯 르네가 굴 속으로 들어갔다.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고 이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르네가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둘 다 대답 대신 내게 직접 들어가 보라고 눈짓했다. 굴 속으로 조금 들어가 보니 입구에서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에 사람의 해골이 비춰졌다. 나 는 놀라움에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와서도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 가서 꺼, 꺼내오자.” 세바스찬이 더듬더듬 말을 꺼내며 침묵을 깨뜨렸다. “그보다도 우선 아무한테나 알려야 되지 않을까?” 르네의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걸음을 떼려 하지 않았다. 굴 입구에서 흙이 와르르 쏟아지더니 돌멩이가 굴러떨어졌다. 우리는 갑작스런 상황에 움찔 놀 라며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세바스찬이 다시 들어가 보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르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를 질 렀다. “뭣하러?” “그냥 뭐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세바스찬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세바스찬의 제의를 받아들여 결국 굴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굴 속으로 들어갔다. 해골과 뼈다귀들 앞에서 우리는 서로 몸을 바싹 붙인 채 웅크리고 앉았다. 모두들 몸을 떨었다. 갈수록 무서움이 더욱 엄습해 왔고 우리는 눈앞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도저히 더이상은 공포감을 견딜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버렸다. 또 흙이 쏟아져 내려 굴 입구가 완전히 막혔다. 우리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쏜살같이 뛰었다. 음산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날씨였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화덕에 불을 지피고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하지만 전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다물고 있었 다. 그렇게 한참 지난 후 내가 말했다. “르네, 누구한테든 알려야 되지 않겠니?” “경찰에 신고해야겠지.” 다시 침묵이 흘렀다. 세바스찬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만 알고 있지 뭐. 그게 좋을 것 같애.” 결국 세바스찬의 말을 따라 거기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 후 우 리 셋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뭔가 비밀을 갖고 있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못되었다. 같이 장난을 치다가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큰둥해져 버렸고 누군가 하나가 슬쩍 빠져 나 가기 일쑤였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성에 모인 것은 부활절 방학이 끝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홀 중앙에 빵과 부활절 계란으로 성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별은 우리 셋 모두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들 그런 감정을 애써 감추며 내색하지 않 았다. 오히려 그전보다 휠씬 소란을 피우며 놀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길다란 탁자에서 미끄럼을 타고, 의자를 마구 뛰어 넘기도 했다. 계단 난간을 미끄러져 내려가거나 문을 발로 걷어차며 시끌 벅쩍하게 장난을 쳤다. 우리는 그런 소란 속에서 이별의 슬픔과 사라져가는 어린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을 떨구어 버리 려고 안간힘을 썼다. 밤이 왔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르네가 성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열쇠가 찰칵 하는 나지막한 소리. 그것은 우리들 가슴 깊숙히 어떤 상징으로 새겨졌다. 한참이나 우리는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오자, 우리.” 르네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공허한 위안과 소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 었다. 한없이 밀려오는 슬픔으로 인하여 우린 허탈해졌다. 다음 날, 나는 우편 버스를 타고 성 게오르그를 떠났다. 밭에서 돌을 고르고 있는 세바스찬의 모습이 멀리서 가물거렸다. 마을에서 꽤 많이 떨어진 강가 숲속의 네거리를 지나면서 나는 르네를 만났다. 그는 아직 방학 이 며칠 더 남아 있었다. 꽃봉오리가 맺힌 덤불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과 함께 푸른 낙엽송 가지가 흔들리고 있 었다. 성 게오르그의 담과 종탑들도 짙푸른 숲의 구름에 가려지며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성숙한 아이들 여름방학 때 나는 성 게오르그를 다시 찾았다. 르네는 전에 떠나올 때 모습 그대로 그 네거리 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르네와 함께 성으로 갔다. 훨씬 뒤에야 겨우 깨달은 것이지만 그때 우리 사이는 뭔가 어색했다. 세바스찬과 함께 있을 때도 그 어색함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괜스레 당황해 했으며 시선은 자 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방황했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셋은 무시무시한 변화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얼굴 모습은 이미 예전의 어린 티를 벗었고 팔도 우습게 늘어져서 어디다 두어야 할지를 모르고 저혼자 흔들 리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우리의 장난은 다시 시작되었다. 달리기도 하고 부활절 놀이도 해보고 여우구멍을 찾아 여우를 잡기도 했고, 도둑과 순경놀이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미 예전과 달랐다. 전처럼 즐겁고 재미있지도 못했고 괜한 초조함과 어색 함으로 욕심만 부리다가 시들해지는 꽃이었다. 숲속에 있는 성에도 수도원의 비밀스런 정원에도 가지 않았다. 우리들의 놀이는 일 주일도 채 못되어 알 수 없는 짜증과 고통으로 짓눌리게 되었다. 농장에서 세바스찬과 마주쳤을 때엔 슬그 머니 피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를 멀어지게 했다. 나는 고민과 이유없는 우울에 시달렸다. 미소를 띤 채 굳어계신 큰아버지 옆에 서 있거나 혼자 수도원의 정원을 헤매고 다녔다. 난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초록바다 위의 너울대는 섬이 다시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바람에 실려오는 가을의 향긋한 꽃내음과 갈대 냄새가 내 가슴을 강렬하게 고동치게 했다. 무너진 돌담 위에 앉아 그 내음을 맛 보다 보면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느날, 난 내가 늘 앉아 있던 장소에서 르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 정원에 있는 장미에 봉오리가 맺혔어.”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말이 ‘초대’라는 것을 알았다. 난 머뭇거리면서 성벽 안의 정원 으로 그를 따라갔다. 르네는 물에서 사는 온갖 수생식물을 가꾸고 있었다. 그곳엔 동심초, 소귀나 물, 노랗거나 자줏빛을 가진 차붓꽃, 양치류, 장미 등이 있었다. 초록 꽃봉오리가 벌어지며 은빛의 꽃이 막 피고 있는 꽃을 찾아냈다. 르네와 나는 입을 다문 채 그 꽃을 바라보았다. 잠시 긴장과 침묵이 흘렀다. 봉오리가 서서히 깨어지는가 싶더니 은빛의 장미꽃이 힘차게 뻗어 왔다. 우리는 이 신비스런 기쁨 속에서 우리의 우정을 다시 확인했다. “저녁에 낚시하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르네가 제의해 왔다. 그러나 난 그의 말투가 옛날과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녁은 굉장히 찐득찐득하고 더웠다. 우리는 갈대가 길게 자란 연못 위에 낡아빠진 배를 띄우 고 배에 올라탔다. 르네가 낚싯대를 드리우는 동안 난 뱃전에 앉아 연못에 다리를 담그고 있었다. 연못은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회색의 고요였다. 갈대 숲속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잠시 요란스 러웠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가끔 물고기의 은빛 몸뚱이가 물 위로 솟아오르고 멀리서 번갯불이 숲 위를 잠시 비추기도 했다. 그 때 르네가 낚싯대를 힘껏 당겼다. 근사하게 생긴 제법 큰 놈이었다. “야, 이거 굉장한 놈인 걸.” 르네는 고기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를 다시 놓아주고 말았 다. 나는 놀라 소리쳤다. “이런 바보! 무슨 짓이야?” 르네는 대답 대신 배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뱃전을 손으로 힘껏 내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 앞에서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뭔가 위안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나 난 다시 물에다 발을 담그고 그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다 소용없어, 모든 게 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이렇게 소리치고 허탈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그리고나서 낚시를 걷어 낡은 배창고에 집어넣고는 아무 말 없이 휘파람을 불며 가버렸다.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여름내내 옷 속에 수영복을 입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차츰 다가오는 먹구름과 물뱀과 사나운 물고기에 겁이 났지만 나는 주저 하지 않고 깜깜한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물에서 나와보니 세바스찬이 와 있었다. “르네는 어디 갔니?” 나는 아무말 없이 농장 쪽을 가리켰다. 숨이 차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바스찬은 갑자기 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었니?” 내가 물었다. “아니 별일 아냐. 내일도 낚시하러 올 거야?” “그건 왜?” “응, 난 방앗간에 볼일이 있거든.” “그래?” 나는 세바스찬과 함께 방앗간에 가기로 약속했다. 이튿날 아침 무렵에 마을에서 르네를 만났다. “세바스찬과 방앗간에 가기로 했는데 함께 안 갈래?” “난 그만둘래.” 르네는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날씨는 몹시 더웠다. 정오가 조금 지나갈 무렵 세바스찬과 산기슭에 있는 방앗간으로 갔다. 메 마른 땅 위로 뿌연 먼지가 일었고 풀은 모두 말라 있었다. 숲속에선 마른 침엽수 잎 떨어지는 소 리가 마치 부슬비라도 내리듯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방앗간 옆의 개울물도 말라붙어 허연 자갈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방앗간은 나무와 돌로 지어 만든 작은 오두막이었다. 커다란 방아가 벽에 걸려 있고 연장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음침하고 어두운 오두막은 대들보마저 삐걱소리 를 냈다. 세바스찬은 바구니에 숯돌을 주워 담았다. 일이 끝나자 우린 나란히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나 른해져서 졸음이 몰려 왔다. 좀 서늘해진 다음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낮 의 뜨거움은 좀체 식을 줄을 몰랐다. 그림자는 꽤 길어졌는데도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세바스찬이 뭔가 알아내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참을 수가 없어 짜증을 부렸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왜 그래, 도대체?” 내가 좀 거세게 쏘아붙이자 그는 어물거리며 말했다. “너는 왜 매일 르네하고만 같이 다니니?” 그 말에 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이가 없었다. “매일? 매일은 아냐. 오늘은 너랑 같이 있잖아!” “웃지 말어!” 그가 심각하게 말했다. “왜, 르네하고 같이 있으면 안돼?” “그야... 모르겠어, 왜 그런지, 그렇지만 그게 어쨌든.” 그는 소리를 높여 위협하듯 말했다. “아무도, 앞으로는 그러지마!” 순간 문이 갑자기 열리며 돌개바람이 불어 닥쳤다. 뒤에서 참나무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굉음처 럼 들려왔다. 우리는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엔 시커먼 먹장구름이 뒤덮여 있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세바스찬!” 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린 다시 오두막으로 뛰어들어가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숨박꼭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바로 머리 위에서 천둥이 쳤다. 더럭 겁이 났다. 세바스찬이 두 팔로 나를 안아주었다. 낡은 지붕 위로 빗물이 떨어 지기 시작했고, 세찬 바람에 잡목가지들이 오두막의 뒷벽을 후려치고 있었다. 세바스찬이 몸을 떨 었다. 그 떨림이 곧 내게로 전해왔다. 무서움이라곤 전혀 모르던 그가 떨고 있다니. “넌 떨고 있잖니?” “떨긴, 아냐.” “감출 것 없어.” 그의 떨림에서 난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나를 안고 있는 그는 이미 어린 소 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음침하면서도 달콤한, 그리고 은근한 성의 전율이 나의 온몸을 훑고 지나 갔다. 우리는 서로 떨면서도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밀어내며 꼼짝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 었다. 그 때, 바람에 문이 열리며 빗줄기가 쏘아대듯 밀려들어왔다. 그순간 난 분명 문에 서 있는 르 네를 보았다. 아니, 그가 혹 르네가 아닐른지도 모른다. 문은 다시 세차게 닫혔고 그는 환영처럼 사라져버렸으니까. 일어나서 문을 열고 빗속을 살펴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우리는 무 슨 묵계라도 한 듯 서로 그 이야기를 입밖에 내려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소낙비는 겨우 가느다란 빗줄기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빗속을 걸어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까 지 오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후 난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르네와 세바스찬은 달랐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도 투정부리기 일쑤고 아예 서로 어울리려고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유치하고 구차스런 감정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이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날 세바스찬과 르네의 모습이 통 보이질 않았다.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들이 없는 수도원 의 정원은 이미 생명이 없었고 혼자 산책하는 것도 흥미가 없었다. 나는 어슬렁거리면서 비키의 농장이 있는 채석장 쪽으로 갔다. 망치소리가 들리고 입구에 세바스찬의 연장이 놓여 있었다. 세 바스찬은 자기 연장에 독특한 표시를 해두어서 어디서든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그는 이 표시를 ‘집시의 표적’이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세바스찬은 커다란 돌을 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윽고 그 는 연장을 집어들더니 그곳을 서둘러 떠났다. 그러다가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숨어있던 곳에서 나왔다. 채석장의 깎아지른 듯 내리뻗은 절벽 아래로 산 딸기 덩굴과 나뭇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 사람과 동물모양의 석상이 서 있 었다. 오랫동안 비바람에 깎여 원래의 모습을 잃은 것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 원래부터 얼굴과 몸 만이 겨우 윤곽을 드러내고 있을 뿐 여느 돌덩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들이었다. 갑자기 석공의 힘이 다했거나, 그의 마음에 차지 않아 버려진 것들이리라. 성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 모양의 석상들은 굳어버린 팔다리만이 달려 있어 마치 옛날 고대의 신상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눈은 굳어 있고 일그러진 입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나는 세바스찬 의 작품인 그 석상 위에 걸터앉았다. 돌 위로 하얀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다람쥐 한 마리 가 눈을 껌뻑이며 나를 보다가 잽싸게 사라졌다. 그 때, 메마른 풀섶에서 독사 한 마리가 미끄러 지며 기어나왔다. 나는 뒷걸음질로 뱀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뱀은 느긋하게 어느 석상 발 밑 에다 또아리를 틀더니 잠이 들었다. 채석장은 그리 재미있는 곳은 아니었다. 뭔가 어색하고 낯설고 한 것이, 마치 태고의 신들이 전 설로 자리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갈대와 꽃으로 된 상치와 광대수 염풀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석상 하나 하나에 걸어 주었다. 세바스찬이 품고 있는 은밀한 비밀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를 꼭 만나야 될 것 같은 절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저녁에 세바스찬이 일을 하고 있을 나무광으로 그를 찾아갔다. 뚜렷한 이유 없이 상처나고 부 서져버린 우리의 옛 우정을 가슴 가득 안고. 그러나 막상 나무광까지 오게 되었을 때 나는 정작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젠 나 역 시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날, 세바스찬의 채석장으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때 르네가 그곳에서 뛰어나오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인기척에 당황해서 달려나온 듯했다. 나는 그가 세바스찬의 채석장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쫓기 듯 채석장으로 뛰어갔다. 석상 두 개가 남자 여자처럼 울긋불긋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어처구니없 게도 그 두 석상은 나와 세바스찬을 닮아 있었다. 게다가 서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난 두 석상을 떼어놓으려고 해 봤으나 내 힘으론 무리였다. 색칠을 지워버리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채석 장을 나와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세바스찬이 곧 나타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그가 왔다. 예의 두 석상을 발견하고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내 쪽에서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손에 들린 도끼로 그 석상을 미친 듯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석상마저 부수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그는 목이 터져라 악을 쓰며 숲속으로 내달렸다. 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후에 연못으로 수영하러 갔다가 또다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물 위로 르네의 낚시도구가 산산조각이 난 채 떠다니고 있었다. 배 역시 연못 한가운데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헤엄을 치고 싶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연못가에 앉아 배가 물결에 흔들리며 갈대숲으로 사라 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었다. 찌르는 듯한 아픔이 전신에 엄습해 왔다. 악몽과도 같은 고통이, 생 각하기도 싫은 그 악몽이. 배를 다시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섰다가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야릇한 두려움 이 자포자기하는 체념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고 겪어야 할 것이라면 굳이 이렇게 아 파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까지 깊게 믿어왔던 모든 것이 뿌리부터 흔들리 기 시작했음을 겨우 알기 시작한 것이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자 다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슬픔과 고통은 사라져버리고 어린 시절의 기쁨이 다시 춤추는 것 같았다. ‘세바스찬을 찾아가 르네와 함께 놀자고 해야지’ 그러나 세바스찬은 집에 없었다. 구릉이 시작되는 들판 길에서 간신히 말에 매인 건초마차를 발견했다. 냇가 쪽에서 낫질소리와 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숲속에서 또 르네가 나타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고는 마차로 다가가 말고삐 를 풀어놓았다. 말은 두살박이로 굉장히 거친 놈이었다. 고삐가 풀린 것을 알자 힘차게 뒷발을 한 번 내지르더니 숲속으로 달려가버렸다. 세바스찬은 풀을 베는 데 정신이 팔려 말이 도망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르네는 화가 나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앞을 지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 를 아까는 미처 못본 모양이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등에다 대고 치를 떨며 악을 썼다. “이 천치, 쪼다야!” 르네는 힐끗 한번 뒤돌아 보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눈빛에 서린 절망적인 고뇌의 흔적을 언뜻 보아버렸다. 몸을 돌려 그가 사라진 반대편의 숲으로 서서히 발길을 돌렸다. 눈에 띄는 대로 가시 덤불 속에 넘어져 있는 나무 등걸에 걸터앉았다. 뭐라 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온몸에 스몄다. 오후에는 계속 큰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분의 옆에 앉아 라틴어로 된 고서의 책장을 넘겨 주며 정원을 스치는 메마른 바람소리를 들었다. 평온했다. 그러나 아주 갑작스레, 소녀 시절과의 결별에 대한 커다란 절망이 온몸을 덮쳐 평온 을 깨뜨리고 말았다. 르네와 세바스찬이 나를 버리고, 그 둘마져 서로 등을 돌렸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그 무엇이 몰려와 그렇게 뒤죽박죽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변신이라는 인정머리 없는 천사에 의해 유년의 땅에서 추방되어 위태로운 사춘기의 싸움 속으 로 휘말린 것이다. 어느새 책장을 넘기는 일도 큰아버지의 시선도 잊어버린 채 내 두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마냥 흐르고 있었다. 나는 기어코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슬픔이 복받친 소녀의 흐느낌, 이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리 라. 나는 푸념까지 하며 울어댔다. 그러는 동안 큰아버지는 계속 먼 곳으로 미소를 날리고 계셨다. 석상처럼 굳은 채, 인간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는 방심 상태에서 자신을 변화의 질서에 맡기 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아버지.” 나는 흐느끼며 큰아버지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전 정말 모르겠어요. 왜 이래야만 하는지. 무엇 때문에 모든 일이 이처럼 힘겹고 슬픔으로 가 득차 있어야만 하는지...” 큰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내고 계실 뿐이었다. 나는 일어나 정원으로 달렸다. 딸기를 따는 수녀들의 티없는 웃음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나는 길게 자란 풀밭을 마구 뛰었 다. 꽃잎을 받쳐주고 수액을 뿜어 올리는 꽃줄기를 정신없이 짓밟았다. 그것들이 소리를 내며 내 발밑에서 터지고 쓰러졌다. 난 견디기 힘든 절망감으로 포플라 가지 를 꺾어 나무둥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너무도 간절한 열망과 까닭없는 노여움에 몸을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도망치듯 다시 무작정 내달렸다. 풀밭은 무참히 짓밟힌 꽃줄기며 잎사귀들로 가엾게 어지러져 있었다. 그 길을 되돌아와 어느덧 야외 행사장 앞에 서 있었으나,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부 끄러움과 동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막막한 마음으로 문턱에 주저앉았다. 마침내 육중한 문을 밀치 고 수반가로 가 앉았다. 동요라고는 없는 무영하기만 한 물을 들여다보았다. 온몸에 가느다란 떨 림이 퍼졌다. 옛날 그 파문 놀이가 아직도 마술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아보려고 돌멩이를 집 어 던졌다. 거울 같은 수면에 물살이 유리반지 모양으로 소리없이 밀려갔다. 나는 그것이 뜻밖에도 엄격한 질서에 의해 무늬를 만들어감을 발견했다. 그것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나는 비로서 나의 인생을 이끌어갈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은 칙칙하게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세계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예리하고 투명한 영혼의 세계였다.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의 좌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