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박경민 옮김 옮긴이 서문 앵무새 는 기쁨과 양심의 상징 옮긴이 서문을 쓰면서 내가 마치 저자이기나 한 것처럼 설렘과 책임감이 앞서는 것은 이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번역을 시작했고 그래서 문장 한 줄, 단어 하나하나에도 많은 시간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있다는 나의 말에 외국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은 책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아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더욱 굳혀주었던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곳이 시드니의 어느 단아한 책방에서였듯이 1960년대에 발표된 이 책은 지금도 영어권 어느 나라 책방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 책이 문학수업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또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 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도 두 차례에 걸쳐 소개되었다. 고전으로 통하여 비영어권의 많은 나라에서도 출간이 된 이 좋은 책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출간이 늦어진 이유 중 하나는 지은이 하퍼 리 특유의 재치있는 문장과 유머 등을 언어의 구성이 완전히 다른 우리말로 옮기는 것에 따른 어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앵무새 죽이기)는 To Kill a Mockingbird란 원제를 직역한 것으로 머킹버드mockingbird는 미국에서만 사는 앵무새과에 속하는 새로서 인간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 노래만을 불러주는 새라고 한다. 지은이 하퍼 리는 유일한 출간 작품인 이 책으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녀를 잠시 소개해보고자 한다. 하퍼 리는 1926년 앨라배마 먼로빌에서 변호사인 아버지 프란시스핀치 리와 어머니 아마사 콜맨 리 사이에서 태어나, 그 소도시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 이런 배경은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는 작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그녀의 어린시절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는 혐의를 짙게 하고 있다. 그녀는 먼로빌에서 공립학교를 마치고 헌팅턴 대학에서 이 년, 앨라배마 대학에서 사 년간을 수학했다. 1950년 대학을 떠나 단기법률과정을 밟고, 그리고 뉴욕에서 집필경력을 쌓았다. 이 작품의 모태는 한 편의 단편 원고였다. 이 원고를 본 문학출판 전문가가 장편소설로 늘리면 어떻겠느냐고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런 격려와 친구들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리는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싸구려 아파트에서 창작에만 전념하여 이 역작을 탄생시켰다. 이 한편의 소설로 그녀는 1961년에 퓰리처 상, 같은 해 앨라배마 도서관협회상과 국제 기독교도 및 유태인 연맹조합상, 1962년에 그해 최고 베스트셀러상을 수상하였다. (앵무새 죽이기)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많은 암시와 긴장감을 주면서도 재치와 유머, 어린아이의 천진성으로 인해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게 하는 감동적인 소설이다. 이 책은 진 루이스 핀치(스카웃)라는 여성이 일곱 살부터 열 살가지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카웃은 1930년대 미국 남부 앨라배마 중의 조그만 마을인 메이컴을 배경으로, 변호사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네 살 위의 오빠 젬과 함께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스카웃과 젬은 이 소설에서의 삼 년 기간 동안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이해를 넓혀간다. 그들을 성숙시킨 사건의 열쇠는 검둥이라는 이유만으로 강간범으로 몰린 흑인 톰 로빈슨을 그들의 아버지가 변호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로빈슨의 결백을 명백하게 증명했는데도 배심원들은 결국 유죄라고 결정한다.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을 지켜본 젬은 눈물을 흘리며 인종 편견 타파를 맹세한다. 이 소설에서의 또하나의 재미는 속세와 단절하고 사는 이웃에 대한 미스터리에 있다. 그 미스터리의 주인공 부 래들리는, 그 아버지의 양보 없는 종교성과 그 집안 자존심의 희생자로서, 점차적으로 그 시대 사회구조적 편견의 희생양이 되어 어른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 성향으로 변해간다. 부에 대한 호기심을 날로 키워가던 아이들은 부야말로 진정으로 진실된 친구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톰 로빈슨과 부 래들리라는 소외된 이웃은 아이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즉 앵무새 는 두 이웃의 기쁨과 양심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애티커스, 낙천적인 이웃 머디 아줌마, 개구쟁이 친구 딜, 젬과 스카웃의 또다른 식구인 칼퍼니아,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는 커닝햄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카웃과 젬 ,,, 이들은 어느 나라의 성인을 막론하고 추억을 더듬는 행복감과 동시에 교육적인 만족을 주는 우리의 이웃이 되리라 믿는다. 끝으로 심오한 철학이 아닌 그저 어린시절의 삶의 일상을 통해 이토록 많은 재미와 교훈을 줄 수 있는 하퍼 리 여사께 존경을 보내며, 이 책의 어려운 번역 작업을 도와주신 미국인 교수 로버트 해롤드Robert Harrold와 이 책에 빛을 주신 도서출판 한겨레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1992년 가을 박경민 차 례 옮긴이 서문 앵무새 는 기쁨과 양심의 상징 1 메이컴의 수수께끼 2 첫 수업시간 3 골칫거리 4 부 래들리와 떡갈나무 5 그집은 그저 슬픈 집일 뿐이야 6 부 래들리 흠쳐보기 7 누가 보내준 선물일까 8 예기치 않은 친구 9 아버지의 마음 10 앵무새를 죽이는 일은 죄 11 동백꽃과 두보스 할머니 12 나도 검기 때문이지 13 내 마음속의 카스트 제도 14 우리는 모두 필요한 사람들이야 15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16 흑인을 변호하는 아버지 17 당신은 왼손잡이군요, 이웰 선생 18 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낳고 19 진실 20 죄 많은 남자 이야기 21 유죄, 유죄, 유죄 22 고통의 장을 넘기는 마지막 사람 23 이유 있는 의혹 24 숙녀들의 세계 25 소중한 인간의 생명 26 다시는 그 법정 얘기 하지 마 27 할로윈 축제 28 오빠의 비명소리 29 안녕, 부 아저씨 30 그건 앵무새를 쏘아 죽이는 것 31 부 래들리와 팔짱을 끼고 1. 메이컴의 수수께끼 젬 오빠가 팔에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은 열네 살 때였다. 상처가 아물어가고 축구를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차츰 누그러질 무렵, 오빠 역시 후유증에 대한 두려움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오빠의 왼팔은 오른팔보다 약간 짧아졌고, 서 있거나 걸을 때면 손바닥이 뒤쪽을 향해 있어서 다소 어색해보였지만, 공을 차거나 던지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우린 그 사건에 대해 가끔 논쟁을 벌이곤 했다. 나는 그 사건의 발단이 이웰 집안 사람들 탓이라고 주장했고, 나보다 네 살 위인 오빠는 그게 아니라 훨씬 전인 어느 무더운 여름날 딜이 부 래들리를 집 밖으로 끌어내자고 우리에게 말했을 때부터라고 우겼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오빠에게 나는 그렇다면 앤드류 잭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응수했다. 그 옛날 잭슨 장군이 크릭스 인디언과의 싸움에서 기세를 뻗치지만 않았다면 사이먼 핀치가 앨라배마까지 노를 저어 오진 않았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고 따졌다. 주먹다짐으로 시비를 가려내기에는 우리는 제법 어른스러웠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께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우리 의견이 모두 옳다고 했다. 남부사람들은 해스팅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어떤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록은 조상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이곳에 첫발을 디딘 사이먼 핀치는 영국 콘월 출신으로 지나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인이었다. 모피와 약을 취급하는 장사꾼이었던 사이먼 핀치는 구교도였던 탓에 감리교도들의 박해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하는 수 없이 스스로 감리교도임을 자처하며 대서양을 건너 필라델피아로, 자메이카로, 거기서 다시 모빌로 돌아다녔다. 이렇듯 여러 지역을 누비고 다니던 그는 세인트스티븐을 흘러들었다. 물건을 사고 파는 데 있어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격언을 잊지 않고 있던 사이먼은 장사에 성공을 했고 부자가 되었지만, 청교도적 생활습관에 익숙한 나머지 값비싼 옷으로 치장함이 신의 영광에서 벗어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느라 행복하지 않았다. 고심하던 사이먼은 사유재산에 대한 성경말씀을 접어두기로 하고 세인트스티븐에서 사십 마일 떨어진 앨라배마 강둑 근처에 세 명의 노예와 함께 농장을 만들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세인트스티븐으로 떠난 것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였고, 아내와 함께 앨라배마로 돌아온 사이먼은 딸이 많은 부유한 가정을 이루며 장수를 누렸다고 한다. 집안 내력에 따라 핀치 집안 남자들은 그들의 영토 사이먼 농장에 남아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이먼 농장은 목화재배를 주로 하였고 다른 농장에 비해 생필품은 거의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얼음과 밀가루, 옷감은 모빌에서 배로 공급받곤 하였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사이먼을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하는 것만이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 사이먼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겨우 영토만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엔 이십 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적 삶의 뿌리가 남아 있었다. 우리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법률을 공부하러 몽고메리로 떠났고, 삼촌은 의학공부를 하러 보스턴으로 갔다. 고모 알렉산드라만이 사이먼 영토에 남은 핀치 가문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모는,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찌의 흔들림으로 물고기가 잡혔는지를 확인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해먹에서 보내는 조용한 남자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메이컴으로 돌아와 개업했다. 메이컴은 핀치 가문의 영토로부터 이십 마일 정도 떨어진 메이컴 군의 마을이었다. 법원에 있는 아버지의 사무실에는 모자걸이, 침 뱉는 그릇, 체스판, 때묻지 않은 앨라배마 법전 등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처음 맡은 두 명의 소송의뢰인은 메이컴 군에서 교수형을 받은 마지막 죄수들이었다. 아버지는 주 정부에 특별사면을 요청, 사형만은 면하도록 변호했지만 그들은 하필 메이컴 군에서 악명 높은 하버포드 집안의 문제아들이었다. 그들은 말다툼 끝에 메이컴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를 세 사람의 목격자가 보는 앞에서 살해했다. 그랬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누구든지 변호하기 좋은 여건이라고 떠들며 일급 살인죄를 무죄로 변론해달라고 고집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소송의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할 수 있는 건 그저 교수형에 처해지는 걸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그 사건이 바로 우리 아버지가 범죄사건을 변호하는 일에 심한 혐오감을 갖게 된 원인이 되었다. 메이컴에 돌아온 아버지는 그후 다섯 해가 바뀌는 동안 줄곧 근검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잭 삼촌의 학비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보다 열 살 아래인 잭 삼촌, 존 헤일 핀치는 목화값이 폭락하던 시기에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나 그때 마침 아버지는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메이컴을 좋아했다. 메이컴에서 태어나 메이컴에서 자란 아버지는 이곳 사람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고, 메이컴 사람들 역시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사이먼 핀치 가문이 번성하면서 메이컴의 여러 집안들은 우리 가문과 혈연 또는 지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메이컴은 오래된 마을이었다. 내가 처음 그것을 느꼈을 때 이미 이곳은 지쳐 나른해 있었다. 장마철에는 골목골목이 붉은 진창으로 변하고 보도블록 사이로 잡초들이 웃자라 있곤 했다. 법원 건물은 광장 앞에 축 늘어져 있었다. 어쨌든 지금보다 훨씬 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꺼먼 개들은 무더운 여름을 견뎌야 했고, 후버 말 대여소에는 바짝 마른 노새가 무성한 떡갈나무 그늘 아래서 땀투성이가 된 채 매여 있었다. 노새는 달려드는 파리를 쫓느라 꼬리만을 휘두를 뿐이었다. 남자들의 셔츠칼라는 아침 아홉 시쯤만 되어도 후줄근해지고, 숙녀들도 아침 샤워 후 세시의 낮잠시간이 지나고 땅거미가 질 무렵엔 땀과 화장분으로 얼룩지곤 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른한 걸음걸이로 광장을 가로질러 상점에 들어갔다가는 다시 나와 느릿느릿 흩어져 갔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선 왠지 길게 느껴졌다. 서둘러 해야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사야 할 물건도, 돈도 없었고, 메이컴 주변에는 마땅한 구경거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때가 매우 낭만적이었다고 회상하게 하는 시절이었다. 그 무렵 메이컴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곤 했다. 나는 읍내 주택가에서 살았다. 아버지 애티커스, 젬 오빠, 나 그리고 요리사인 칼퍼니아와 함께였다. 오빠와 나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와 놀아주었고 책을 읽어주었으며 예의를 갖추고 우리를 공평하게 대해주었다. 칼 아줌마는 우리와는 좀 달랐다. 그녀는 온몸의 뼈마디가 모두 튀어나온 듯 마른 몸집이었고 근시에다 사팔이었다. 손마디는 막대기처럼 뻣뻣했고 살결이 무척 거칠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부엌에서 나가라고 다그쳤다. 젬 오빠의 나이가 나보다 더 많다는 걸 알면서도 왜 젬처럼 행동하지 못하느냐고 야단치곤 했다. 그리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 집으로 불러들였다. 칼 아줌마와의 다툼은 서사시적이며 늘 일방적이었다. 대개 아버지가 칼퍼니아 아줌마의 주장을 거들었으므로 언제나 그녀의 승리로 끝났다. 아줌마는 오빠가 태어난 이후 줄곧 우리와 함께 지냈고, 그래서 나는 언제나 독재 군주적인 그녀의 존재를 느끼며 살았다. 내 나이 세 살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머니의 부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몽고메리 출신의 그레이엄 집안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처음 주 입법부에 당선되었을 때 만났다고 했다. 아버진 그 무렵 이미 중년의 나이였고 어머닌 열다섯 살이나 연하였다. 젬 오빠가 결혼 첫해에 태어났고, 오빠와 네 살 터울로 내가 태어났으나, 그로부터 이 년 후 어머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외가의 내력이라고들 했다. 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았지만 젬 오빠는 달랐다. 오빠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선명했고 놀이에 열중하다가도 문득 긴 한숨을 쉬곤 갑자기 차고 뒤로 달려가 혼자 놀곤 했다. 그럴 때면 난 오빠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일곱 살, 젬 오빠가 열한 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우리들이 집밖에서 놀 때는 칼 아줌마가 부르면 들리는 거리에 있어야 했다. 집에서 북쪽으로 두 번째인 헨리 라파예트 두보스 할머니 집과 남쪽으로 세 번째인 래들리 집까지가 우리의 행동반경이었는데, 한 번도 그보다 먼 곳까지 나가 놀거나 한 적은 없었다.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래들리 집은 납득할 수 없는 집안으로 통했다. 오랜 세월 우리의 유년기에 영향을 준 이웃사람들의 소문에서나 얼핏 들을 수 있었다. 두보스 할머니의 소름 끼치는 모습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딜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해 여름이었다. 이른 아침 뒷마당에서 그날의 첫 놀이를 시작하려는데 라이첼 하버포드 아줌마의 케일 텃밭에서 이상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아줌마의 랫테리어 개려니 하며 철책으로 다가갔다. 그 너머에는 키가 케일만한 아이가 우리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우리도 그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그저 마주보고만 있었다. 안녕? 그래 안녕? 오빠가 쾌활하게 인사를 받았다. 난 찰스 베이커 해리스야. 난 글을 읽을 줄도 알아. 그래서 어쨌다는 거니? 내가 물었다. 응, 그냥 ,,, 읽을 수 있는지 너희들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뭐든지 읽을 게 있는데 못 읽는다면 내가 대신 읽어줄게 ,,, . 너 몇 살이니? 네 살, 다섯 살? 오빠가 물었다. 여덟 살이야. 어휴, 정말? 그래 보이진 않는데. 오빠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스카웃은 태어나면서부터 읽었는걸. 학교 입학도 아직 안했는데 말이야. 넌 여덟 살 치곤 좀 작다, 안 그래? 작아도 할 건 다 할 수 있어. 오빠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훨씬 잘생겨보였다.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어때? 찰스 베이커 해리스야. 맙소사, 이름도 기네. 그래도 형 이름보다는 짧은 걸 뭐. 라이첼 이모가 형 이름은 제레미 애티커스 핀치라고 하시던데. 오빠는 콧등을 찡그리며 맞장구쳤다. 그래도 난 이름에 걸맞게 키가 크잖아. 네 이름은 키에 비해 너무 길어. 일 피트는 더 길 거다. 그냥 딜이라 불러. 딜이 철책 아래서 안간힘을 썼다. 위쪽으로 넘어오는 게 쉬울 거야. 너 어디에서 왔니? 내가 물었다. 딜은 이모인 라이첼 아줌마 집에서 여름을 보내러 미시시피 주 메리디안에서 왔다고 했다. 원래 딜의 가족은 메이컴 출신으로 엄마는 메리디안에서 사진사로 일했는데 예쁜 아기 컨테스트에 딜의 사진을 출품하여 상금 오 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딜의 엄마는 상금을 딜에게 주었고, 그는 그것으로 영화를 오십 편도 넘게 보았다고 했다. 군청에서 가끔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 말고는 여기선 영화상영을 거의 안 해. 오빠가 말했다. 네가 본 것 중에 재미있던 게 뭐니? 딜은 드라큘라 를 보았다고 했다. 뜻밖의 영화이야기로 오빠는 딜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얘기해봐. 딜은 남다른 아이였다. 리넨으로 된 파란색 바지와 셔츠는 단추가 있는 곳은 모두 채워져 있었다. 그애는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난 그 아이의 머리 위로 탑처럼 솟아 있었다. 머리칼은 눈같이 희어 마치 오리털을 머리에 얹어놓은 듯했다. 이야기를 할 땐 푸른 눈이 흐려졌다 짙어졌다 했고, 갑자기 폭발적으로 웃곤 했다. 그밖에도 이마 한가운데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자주 잡아당기는 습관이 있었다. 오빠는 딜의 얘기가 드라큘라가 재로 변하는 장면에 이르자 영화가 책보다 재미있겠다면서 군침을 삼켰다. 나는 딜에게 아버지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넌 아버지 얘긴 하나도 안 했어. 난 아빠가 없어. 돌아가셨니? 아니 ,,, . 돌아가신 게 아니라면 아버지가 있는 거잖아, 그렇지? 딜은 그 순간 얼굴을 붉혔다. 젬 오빠는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다그쳤다. 오빠의 그러한 태도는 딜을 살펴본 결과 마음에 들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그날 이후 우리들의 여름은 매일매일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뒷마당의 우람한 쌍둥이 멀구슬나무 사이에 있는 나무집을 고쳤던 일, 괜히 법석을 떨며 돌아다니던 일, 올리버 옵틱, 빅터 애플톤과 에드가의 작품으로 꾸민 연극놀이에 열중했던 일들이었다. 이 연극놀이에 관한 한 딜이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전엔 나에게 떠맡겨진 (타잔)의 원숭이 역이나 (해적선)의 크랩트리 역, (톰 스위프트)의 악당 역을 딜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딜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은 괴벽스런 계획과 이상한 열망, 별스런 공상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여름의 막바지인 팔월 말쯤 되자 레퍼토리는 셀 수 없는 반복으로 김빠진 듯 지루해져 있었다. 그때 딜은 부 래들리를 집 밖으로 나오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래들리 집은 딜의 충분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우리의 경고와 소문에 대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마치 달이 물을 끌어당기듯 그 집은 딜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딜 역시 래들리 집으로부터의 안전거리인 전신주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전신주에 팔을 두른 채 래들리 집을 바라보며 호기심만을 키워나갔다. 래들리 집은 우리집에서 조금 떨어진 제법 정리된 커브길 가운데쯤 자리잡고 있었다. 남쪽으로 걷다보면 그집 현관이 나오고 보도를 돌아가면 마당이 나왔다. 래들리 집은 으스스했다. 나지막한 지붕, 과연 하얀색이긴 하얀색이었을까 의심가는 현관, 이미 오래 전에 거뭇하게 변해버려 우울하게 가라앉은 녹색 덧문, 비에 썩어 베란다 처마 위까지 늘어져 있는 지붕 위의 판자, 그나마 새어드는 빛을 차단하고 있는 떡갈나무, 술취한 듯 후줄근하게 서서 앞마당을 지키고 있는 말뚝, 엉겅퀴와 존슨풀이 우성해서 결코 한 번도 쓸어본 적이 없는 듯한 마당 ,,, 집 안에는 무시무시한 악령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마을사람들은 래들리가 살아 있다고들 했지만 오빠와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달이 높다랗게 뜨는 밤이면 이집 저집 창문을 몰래 훔쳐본다고도 했고, 갑작스런 강추위로 철쭉이 얼어버리는 이유는 그가 입김을 불어넣은 탓이라고 했다. 그래서 메이컴에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은밀한 범죄는 모두 그가 저지른 일로 간주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계속되는 이상한 사건들로 마을이 온통 공포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애완동물이 여기저기 잘린 채 발견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 범인은 베이커스에디 강에서 자살한 미친 애디 짓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처음의 혐의를 털어버리지 못한 채 래들리 집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밤에는 흑인들도 래들리 집 앞 보도를 피해 반대편 보도로 휘파람이라도 부르며 지나가야 했다. 래들리 집 뒷마당과 학교 운동장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집 뒷마당 호두나무에서 학교 운동장으로 호두가 떨어져도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았다. 래들리 집 호두를 먹으면 죽어버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야구공이 그집 마당으로 날아가면 그 공은 그대로 잃어버리는 공이었다. 아무도 그 공을 찾으려고 그집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래들리 집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인식이 이렇게 된 까닭은 오빠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에 연루된다고 했다. 래들리 집안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들 스스로 판단한 대로 마을사람들을 기피했고 교제조차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이곳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회에 가지 않았고 집에서 예배를 보았다. 래들리 부인이 이웃과 어울리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으며, 선교서클에 가입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래들리 씨는 매일 오전 열한시 반에 읍내로 갔다가 열두 시면 서둘러 귀가하곤 했는데, 가끔 그의 손에는 식료품이 들어 있음직한 누런 종이 봉투가 들려 있었다. 래들리 씨는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그의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을까. 오빠는 래들리 씨를 어디에서 수입이 생기는지 모르는 수상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단추구입상 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놀고 먹는 사람에 대한 공손한 표현이었다. 래들리 씨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그곳에서 살아왔으며 마을사람 모두가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었다. 래들리 집에서 취한 생활방식 중 또 한 가지 별스런 것은 일요일에도 언제나 덧문이 잠겨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에서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은 추울 때가 아니면 병이 들었다는 의미였다. 언제나 일요일은 의례적인 방문의 날이어서, 숙녀들은 모처럼 코르셋을 입고 남자들은 정장을 하고 아이들도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일요일 오후에 래들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집은 칸막이문도 없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아버지께 여쭈어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칸막이문이 있었다고 들려주었다. 마을에서 전해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래들리 씨의 아들인 아서 래들리가 열댓 살쯤 되었을 무렵에 일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 아이가 북쪽지역에 거주하는 껄렁한 올드새럼 출신의 커닝햄 아이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동네 건달처럼 몰려다녔다. 그들은 특별히 나쁜 짓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마을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는 충분했고 급기야 세 명의 목사로부터 공개적인 경고를 받았다. 그들은 이발소 근처를 아무할 일 없이 어슬렁거렸고, 일요일엔 애보츠빌로 버스를 타고 영화를 보러다녔으며 강변에 있는 도박장이나 이슬방울 여인숙, 또는 낚시터 캠프에 춤추러다니며 독한 위스키를 마시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래들리 씨에게 그의 아이가 그런 패거리와 어울려다닌다고 전할 용기가 없었다. 어느 광란의 밤에, 그 패거리들은 훔친 싸구려 자동차를 광장 뒤쪽으로 몰고 다니며 메이컴의 교구 직원 코너 씨가 정지하라고 해도 무시하더니 도리어 그를 법원 화장실에 넣고 잠가버렸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어떠한 조치든 취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누구보다도 코너 씨는 그들의 행동거지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다음 풍기문란, 노성방가, 폭행과 구타, 아녀자 희롱죄를 죄목으로 삼아 보호관찰하려 했다. 그때 그들이 자수를 해왔다. 판사가 코너 씨에게 마지막으로 첨가된 죄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녀석들이 큰소리로 욕지거리를 했기 때문에 메이컴의 모든 여자들은 다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판사는 최종판결을 메이컴 읍내에 있는 실업학교에 그들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매우 훌륭한 시설과 음식이 제공되는 그 학교는 일반 아이들도 다니는 학교로 감옥소도 아니었고 물론 불명예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래들리 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판사에게 아서를 그 학교에 보내지 않게 해준다면 앞으로 철저히 감시하겠다고 간청했다. 래들리 씨의 인품을 믿고 있던 판사는 기꺼이 허락했다. 실업학교로 보내진 다른 아이들은 메이컴 군에서 관리하는 가장 좋은 중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어번의 기술학교를 끝마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이후 래들리 집만이 일요일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문이 닫혀져 있었고 그의 아들은 열다섯 해가 바뀌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오빠는 마을사람으로부터 들은 부 래들리에 관한 소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래들리 집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의 일은 그들 자신의 마음이며 래들리 집 사람들도 그들 마음대로할 권리가 있다는 말뿐이었다. 어쩌다 오빠가 얻어들은 소문을 이야기하면 머리를 흔들면서 음, 음, 음 하는 낮은 소리만을 읊조렸다. 오빠가 가져온 대부분의 정보는 동네의 수다쟁이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오빠는 아줌마가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아줌마 말에 의하면, 부는 거실에 앉아 (메이컴트리뷴)지의 기사를 오려 스크랩북에 붙이고 있었고, 그때 그의 아버지가 부 옆을 지나자 부는 가위를 들어 아버지 다리를 찌르고는 다시 가위를 빼내 바지에 닦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곧이어 래들리 부인이 아서가 모두를 죽이려 한다며 호들갑스럽게 뛰쳐나가고 보안관이 도착했는데도 부는 여전히 거실에 앉아 신문을 오리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때 부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고 했다. 또한 래들리 씨는 그의 아들 부를 수용소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으며, 이웃들이 투스카루사 요양소의 기후가 부에게 많은 도움을 줄 거라고 권유했지만 부는 미치광이가 절대 아니며 다만 이따금 극도의 긴장상태에 빠지는 일밖에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래들리 씨는 부를 가두어두는 것엔 수긍을 하면서도 부에겐 어떠한 책임도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 그가 범죄성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보안관도 부를 차마 흑인과 함께 감옥에 넣을 수 없어 법원 지하실에 가두어두었다. 부가 법원 지하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의 상황은 젬 오빠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협회 사람들은 래들리 씨에게 부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축축한 지하실에서 죽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래들리 씨가 부를 어떤 협박으로 묶어두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빠는 침대에 묶어놨을 거라고 추측했으나 그것에 대해 아버지는 그건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며 인간을 허깨비로 만드는 일은 또다른 것이 있는 거라며 일축해버렸다. 가끔 래들리 부인이 앞문을 열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 칸나에 물을 주던 모습이 내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젬 오빠와 나는 매일 래들리 씨가 읍내에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움푹 패인 눈꺼풀에 초점이 흐린 눈동자였고, 그 눈빛이 너무나 희미해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는 듯했다. 광대뼈는 튀어나와 있었고, 커다란 입은 윗입술이 얇고 아랫입술은 두꺼웠다. 스테파니 아줌마는 그가 하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때문이라 했다. 우리는 래들리 씨의 걸음걸이가 흔들림이 없는 일직선과 같았으므로 그 말을 믿어버렸다. 래들리 씨는 한 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가 지나갈 때 우리가 고개를 땅으로 처박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아저씨 하고 인사를 하면 그는 마른기침만으로 그만이었다. 래들리 씨의 큰아들은 펜사콜라에 살았다. 그는 성탄절이면 이곳을 찾아왔는데, 래들리 집을 드나드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마을사람들은 래들리 씨가 아서를 집으로 데려온 그날부터 죽은 집이나 다름없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마당에서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고 외출하면서도 칼퍼니아에게 우리가 조용히 지내도록 위임했다. 래들리 씨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로 된 굄틀이 래들리 집 양쪽 끝을 막고 보도 위에는 마른 짚단이 놓여졌다. 차는 뒷길로 돌아갔고 레이놀드 의사선생님은 왕진을 올 때마다 우리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래들리 집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나 결국은 굄틀이 치워지고 우리는 현관에 서서 집 앞으로 지나는 래들리 씨의 마지막 여정을 지켜보아야 했다. 신이 숨을 불어넣어주신 인간 중 가장 불쌍한 사람이 가는구나. 칼퍼니아 아줌마가 중얼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줌마는 마당에 침을 뱉았다. 그녀가 백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을사람들은 래들리 씨가 땅속에 묻히는 순간이라도 부가 밖으로 나오리라 추측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부의 형인 나단이 펜사콜라에서 돌아와 그 집에 살게 되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 래들리 씨가 다른 점은 오직 나이뿐이었다. 젬 오빠는 나단 래들리 씨 역시 단추구입상 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인사에 답례를 해주었고 가끔은 손에 잡지가 들려 있었다. 우리가 딜에게 래들리 집안에 관해 들려줄 때마다 그는 더 많이 알고 싶어 안달을 했고, 전신주에 팔을 두르고 서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집 안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저길 봐, 얼굴을 밖으로 내미는 것 같아. 딜이 말했다. 물론 밖에 나오기도 하지. 캄캄한 밤에 ,,, 스테파니 크로포드 아줌마가 그러는데 어느 날 한밤중에 깨어보니 창문에서 그가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는 거야. 마치 해골 같은 얼굴을 하고 말이야. 딜, 너 밤에 무슨 소리 못 들었니? 그 사람은 이렇게 걷는다. 오빠가 모래땅 위를 미끄러지듯 걷는 시늉을 했다. 라이첼 아줌마가 밤이면 문을 왜 그렇게 잠그시겠니? 우리도 뒷마당에서 여러 번 그의 발자국을 봤지. 또 그때는 미닫이문을 긁는 소리도 들었거든. 그런데 아빠가 다가가자 그 소리는 사라져버렸어. 그는 어떻게 생겼을까? 딜이 궁금해 했다. 오빠는 부의 생김새를 그럴듯하게 설명했다. 그의 발은 발자국으로 봤을 때 육하고 반 피트 정도. 식사는 다람쥐나 고양이 등 손에 잡히는 대로. 그래서 손은 언제나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다. 동물을 날것으로 먹는다면 누구도 핏자국을 말끔히 없앨 수는 없으니까. 얼굴엔 지그재그식 흉터가 있고 이빨은 누렇게 썩어 있다. 눈은 빼꼽하고 언제나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린다 등등. 그를 밖으로 끌어내보자.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만 본다면 소원이 없겠어. 딜이 말했다. 오빠는 죽고 싶다면 래들리 집으로 가서 앞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해서 래들리 집으로의 첫번째 불의의 침입이 이루어졌다. 어느 날 딜이 오빠에게 래들리 집 마당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순 없을 거라며 도전해왔기 때문이다. 오빠는 (회색유령)을, 딜은 (톰 스위프트)를 내기에 걸었다. 내기에 걸려 있는 책보다 중요한 점은 오빠는 지금까지 한 번도 도전을 거절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빠는 그 도전에 대해 사흘 동안 고심했다. 그때 나는 오빠가 머리보다는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았다. 딜이 오빠를 한마디로 굴복시켰기 때문이었다. 첫날 딜이 말했다. 겁이 나는 거지? 아니야, 다만 신중할 뿐이야. 오빠가 대답했다. 그 다음날도 딜은 오빠를 부추겼다. 형은 너무 무서워서 그집 마당에 엄지발가락 하나도 내딛지 못할 거야. 그러자 오빠는 그런 정도라면 어떻게 매일매일 래들리 집 앞을 지나쳐서 학교에 갈 수 있겠느냐고 변명했다. 언제나 뛰어서 말이지. 내가 덧붙였다. 드디어 사흘째 되던 날 딜은 오빠를 굴복시키고 말았다. 딜이 메리디안 아이들과 메이컴 아이들을 비교하며 메이컴 아이들처럼 겁쟁이는 난생 처음이라고 빈정댔던 것이다. 이 말은 오빠를 래들리 집 앞까지 진군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예의 그 전신주에 기대어 손으로 만든 조잡한 경첨이 미친 듯이 삐걱거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딜 해리스, 그가 우릴 매일 한 명씩 죽여버리리라는 걸 어떻게 해야 알아듣겠니? 나와 딜이 다가가자 오빠가 말했다. 그가 네 눈을 뽑아버린다 해도 내 탓은 하지 마. 내가 시작한 건 아니니까. 아직도 무서운 거지? 딜이 끈기있게 다그쳤다. 오빠는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딜이 한 번만이라도 알아주길 바라며 말했다. 그가 우리를 해치지 않게 하면서 그를 끌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야. 오빠는 여동생인 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빠가 그렇게 말했을 땐 나도 그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죽게 되면 너희들은 어떡하지? 오빠가 말하며 땅 위로 풀쩍 뛰어내렸다. 래들리 집에 다다를 때까지는 책임감이 남아 있는 듯했다. 형은 도전을 묵살해버리진 않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땐 ,,, . 딜, 넌 이 일을 그렇게 쉽게 생각해선 안 돼. 좀더 생각 좀 해보자 ,,, 이건 마치 거북이를 끌어내는 일과 같아. 어떻게 할 건데? 딜이 물었다. 불을 놓는 거야. 나는 래들리 집에 불을 놓으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겠다고 말했다. 딜도 거북이에게 불을 놓는 일은 끔찍하다고 만류하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아. 그냥 나오도록 권유하는 정도니까. 직접 장작을 지피는 것과는 달라. 오빠가 맞섰다. 거북이가 성냥불에 다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어? 거북이는 멍청이라 잘 못 느끼거든. 거북이가 돼본 적이나 있어? 딜, 내 별자리가 거북이야. 하여간 생각 좀 해보자 ,,, 우리가 그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방법을 ,,, . 오빠가 생각에 잠겨 한참을 서 있자 딜이 너그럽게 양보했다. 형이 도전을 포기하면 앞으로 형을 상대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현관문을 치고 온다면 (회색유령) 책을 줄게. 오빠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현관문만 치고 오면 된다 이거지? 그것이 다야? 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다. 좋아, 그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 알았어. 형이 마당에 있는 걸 보면 그가 뒤쫓아나올 거야. 그때 스카웃과 내가 그를 덮치고 우린 그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말할게. 우리는 래들리 집으로 나있는 옆길을 가로질러 문 앞에 섰다. 더 가, 형 뒤엔 우리가 있으니까. 가고 있잖아. 재촉하지 마. 그는 다시 한 번 코너까지 갔다 돌아와서 가장 효과적인 코스를 결정하려는 듯 지형을 유심히 살핀 다음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의 그런 모습을 보자 나는 코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오빠가 담장문을 홱 열어젖히더니 집 한쪽 구석으로 질주하여 현관문을 손바닥으로 탁 때리고는 힘껏 달려오더니 우리를 지나쳐버렸다. 오빠가 한 생동의 반응여부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딜과 나는 오빠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있는 힘껏 뛰었다. 안전하다고 느낀 것은 우리집 현관에 이르러서였다. 숨이 차 헐떡이며 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 낡은 집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쇠약해 늘어진 듯 병이 들어버린 모습으로. 거리 아래로 내려올 때 우리는 그집 덧문이 닫혀졌음을 알았다. 휙, 아주 작은, 거의 느낄 수 없는 움직임. 그집은 그리고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2. 첫 수업시간 딜은 구월 초순에 메리디안으로 돌아갔다. 우린 다섯 시 버스로 가는 그를 전송했고, 일주일 후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딜이 없다는 게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내 생애, 나의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겨울 내내 온종일 나무집에 올라가 학교 마당을 훑어보거나 오빠가 준 두배율의 망원경으로 아이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놀이를 익혔다. 또한 눈가리기 놀이를 하느라 꿈틀대는 원을 지나는 오빠의 빨강색 재킷을 추적하며 대부분의 불운과 어쩌다 한 번인 승리를 비밀스레 나누었다. 나는 정말 그들과 함께 놀고 싶었다. 학교가 시작된 첫날 오빠는 어른 같은 태도로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이런 일은 보통 부모의 역할이었지만 아버지는 오빠가 나를 교실까지 기꺼이 안내해줄 거라는 말씀뿐이었다. 이 거래로 오빠의 손에 얼마간의 돈이 쥐어진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래들리 집 모퉁이를 껑충거리며 뛰어갈 때 오빠의 주머니에서 익숙지 않은 짤랑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학교에 가까워지자 오빠는 학교에 있는 동안 타잔이나 개미인간 역을 맡으라고 그를 찾아오거나 집안 얘기를 삼가할 것과,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그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심스레 강조했다. 나는 일학년이었고 그는 오학년이어서, 간단히 말해 그를 혼자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럼 이젠 오빠와 함께 놀 수 없다는 거야? 집에서는 항상 하던 대로야. 하지만 학교에서는 달라. 그건 확실히 그랬다. 첫날 오전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나의 선생님 캐롤라인 피셔는 나를 교실 밖으로 끌어내어 손바닥을 때리곤 점심 때까지 교실 구석에 세워놓았으니 말이다. 캐롤라인 선생님은 스물두 살도 채 안 되었다. 그녀는 밝은 갈색 머리에 핑크빛 뺨, 진홍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뒤축이 없는 높은 펌프스 구두와 빨강과 흰색의 줄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외모처럼 박하향이 났다. 그녀는 우리집 길 건너 한 집 아래인 머디 애킨슨 아줌마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머디 아줌마가 우리를 그녀에게 인사시켰을 때, 오빠는 며칠 간을 황홀하게 보냈다. 캐롤라인 선생님은 칠판 위에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인쇄체로 쓴 다음 그것을 천천히 읽었다. 나는 캐롤라인이며 북앨라배마 윈스턴에서 왔어요. 반 아이들은 그 지방 사람 특유의 괴벽스러움을 드러내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웅성거렸다. 앨라배마가 1861년 1월 11일 의회로부터 탈퇴할 때, 윈스턴도 앨라배마에서 분리되었고, 메이컴의 모든 아이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앨라배마는 술제조업이 활발한 지역으로 협회나 제철회사, 공화국의 교수들과 배경을 알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캐롤라인 선생님은 고양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첫날 수업을 시작했다. 깜찍한 옷을 입고 부엌 난로 아래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들의 긴 대화였다. 고양이 여사가 식료품 가게에서 생쥐를 넣은 초콜릿을 주문하려는 대목에 이르자, 반 아이들은 한 양동이의 누에처럼 서서히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일학년 아이들의 넝마조각 같은 옷이며 두꺼운 면치마, 밀가루 부대로 만든 스커트 등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걸을 수 있을 정도만 자라면 문학적 상상력은커녕 목화를 따고 돼지먹이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서는 물었다. 얘들아, 정말 재미있지 않니? 그녀가 칠판으로 가서 거대한 대문자로 알파벳을 쓰고는 돌아서서 물었다. 이것 읽을 줄 아는 사람? 대부분의 일학년생들은 지난해의 낙제생들이었으므로 처음 부분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지적하리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알파벳을 읽어나가자 그녀는 양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다시 (모바일레지스터)에 나오는 증권시장 인용문을 읽자, 내가 글을 읽는다는 걸 확인이라도 한 듯 무척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앞으로는 어떠한 것도 가르치지 말아줄 것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네? 나는 놀라서 말했다. 아빠는 제게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으셔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캐롤라인 선생님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정말이에요, 선생님. 아빠는 늘 피곤해 하시고 책만 읽으세요. 그렇다면 누가 널 가르쳤다는 거지? 누군가에게 배웠을 거 아니니? 네가 태어나서부터 (모바일레지스터)를 읽은 건 아닐 테니까. 오빠는 그렇다고 했어요. 오빤 내가 태어나자마자 다리 밑에서 주워올 때, 핀치가 아닌 불핀치였을 때부터 읽었다고 했어요. 전 원래 진 루이스 불핀치에요. 이름을 바꿨거든요. 캐롤라인 선생님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했다. 지나친 상상력은 곤란해. 자, 아버지께 그렇게 말씀드려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읽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으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너를 맡아 지금까지의 잘못된 것을 원상태로 고쳐줄 거라는 것도 말씀드리도록. 저 서언 ,,,? 네 아버지는 가르치는 방법을 잘 모르실 테니까. 그럼 앉아도 좋아요. 나는 죄송하다고 우물거리며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의아해 하며 물러나왔다. 나는 읽기에 노력한 적도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매일매일의 신문에 멋대로 탐닉해 있었다. 내가 글을 배운 것이 교회에서의 그 오랜 시간 동안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찬송가를 읽지 못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다시 언제부터였는지 생각을 짜내보았다. 그것은 마치 위아래가 붙은 속옷 단추를 채울 수 있거나 엉킨 구두끈을 풀러 예쁘게 리본을 맬 수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신문 위를 움직이는 아버지의 손가락과 그 위의 활자들이 언제부터 구별이 되어 다가왔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날의 뉴스인 법률에 관한 빌의 방향 이나 로렌조 다우의 일지 등을 들으며 저녁 내내 움직이는 손가락을 응시했던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 매일밤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그가 읽던 모든 것을 읽었을 테니까. 나는 읽은 것을 잊어버릴까 조바심내면서 읽은 기억 또한 없었다. 사람은 숨쉬는 것을 고민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선생님을 귀찮게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쉬는 시간에 오빠가 나를 일학년 교실에서 떼어놓을 때까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가 학교 마당에서 어땠느냐고 물었다. 나 학교 안 다닐 수 없을까?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 그 엉터리 선생님은 아버지께 가서 내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도록 말씀드리라는 거 있지. 걱정 마, 스카웃. 오빠가 나를 위로하려 했다. 우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캐롤라인 선생님은 새로운 교수법을 소개할 거래. 전문학교에서 배웠다나봐. 그리고 모든 학년에 적용될 거래. 그 방법은 책에서 많은 걸 배우기보다 ,,, 으음, 그러니까 만약 네가 젖소에 관해 알고 싶으면 직접 가서 우유를 짜보는 거 ,,, 뭐 그런 식인가 봐, 알겠니? 응, 하지만 난 젖소공부는 하기 싫어. 넌 해야 돼. 메이컴에서 젖소란 중요하니까. 나는 억지를 부리며 오빠에게 돌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난 네게 일학년에서 가르치고 있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뿐이야. 그게 바로 듀이 대시멀 교수법이라는 거야. 그건 오빠의 허풍에 불과했다. 그래도 난 그의 설명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사실 그 듀이 대시멀이란, 그 라든가 고양이 다람쥐 사람 너 등을 쓴 종이를 우리에게 보이면 우리가 대답하는 식의 교수법이었다. 반 아이들은 이런 뜻밖의 새로운 방법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난 지루하여 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캐롤라인 선생님은 나를 또 잡아내서 읽기는 물론 쓰기를 가르치는 걸 중단하라고 아버지께 전하라는 것이었다. 일학년에서는 필기체를 배우지 않고 삼학년이 될 때까지 인쇄체만 배울 거라는 것이었다. 우선 칼퍼니아 아줌마가 이 문제에 대해 비난할 것이다. 급한 경우 그녀가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가끔 그녀는 편지나, 성경구절을 그대로 옮겨적도록 내게 시켰다. 제대로 적을 경우 그 대가로 특별 샌드위치나 버터 바른 빵, 사탕 등을 주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적은 정확했고 또한 대가를 받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집에 가서 점심 먹을 사람 손 들어봐요. 캐롤라인 선생님의 음성이 칼퍼니아 아줌마에 대한 생각을 깨뜨려버렸다. 읍내에 사는 아이들은 집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곤 찬찬히 훑어보며 지시했다. 모두 점심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도록! 캐롤라인 선생님이 책상 사이를 오가며 도시락을 들여다보고 찔러보기도 했다. 점심이 마음에 들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을 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월터 커닝햄의 책상 앞에 섰다. 네 도시락은 어디 있지? 월터 커닝햄의 얼굴은 십이지장충에 걸려 있다는 걸 모두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한결같이 맨발인 채로 다녔으므로 십이지장충에 걸린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맨발로 돼지우리나 헛간엘 들어가면 십이지장충에 걸리지 않는가. 월터는 입학 첫날이나 신발을 신었을까 그 다음날부터 한겨울까지는 신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날 그는 깨끗한 셔츠와 말쑥하게 수선된 뽀빠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시락을 잊고 왔니? 선생님이 물었다. 월터는 똑바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말라빠진 턱근육이 꿈틀거렸다. 도시락을 잊었느냐고 물었는데? 월터의 턱이 다시 뒤틀렸다. 네, 선생님. 마침내 그가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자기 책상으로 가 지갑을 열었다. 여기 이십오 센트다. 오늘은 읍내에 나가서 사먹고 오도록 해라. 이 돈은 내일 갚으면 되니까. 월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가 천천히 말을 끌며 대답했다. 캐롤라인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바심으로 빨라졌다. 자, 월터, 어서 받아. 월터는 다시 머리를 저었다. 월터가 세 번째 머리를 저을 때 누군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스카웃, 네가 대신 말해줘라. 나는 돌아섰다. 읍내 아이들과 시골버스를 타는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과 나는 이미 두 번이나 말을 했고 그 친밀감이 이해를 낳을 거라는 천진한 확신이었다. 나는 월터를 대신해서 우아하게 일어났다. 저, 캐롤라인 선생님, 뭐지, 진 루이스? 그앤 커닝햄이에요. 그리곤 자리에 앉았다. 뭐라구, 진 루이스? 나는 충분히 알렸다고 생각했고,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월터 커닝햄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도시락을 잊고 온 게 아니었다. 아예 점심 식사라는 것이 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그 아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십오 센트짜기 세 개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설명을 시도했다. 월터는 커닝햄 집안 아이에요.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진 루이스? 네, 선생님도 모든 마을 아이들을 알게 되겠지만요, 커닝햄 사람들은 갚지 못할 것은 받지 않아요. 갖고 있는 것으로만 살아가지요. 남의 것은 갖지 않아요. 없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에요. 커닝햄 사람들에 대한 내 남다른 지식은 지난 겨울에 있었던 사건에서 얻은 것이었다. 월터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의 소송의뢰인 중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밤 상속인 한정에 대한 따분한 대화가 있은 후 떠나기에 앞서 말했다. 핀치 변호사님, 어떻게 이에 대한 보수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말했다. 그때 난 오빠에게 상속인 한정이 무슨 뜻인지 물었고, 오빠는 상속문제에 제3자가 끼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또 아버지에게 커닝햄 아저씨가 돈을 갚을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 돈으론 아니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갚는 걸 너희들도 보게 될 거다. 우리는 보았다. 이른 아침 오빠와 나는 뒷마당에서 스토브 장작더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후 뒷계단에는 호두 한 자루가 놓여졌고, 크리스마스가 되자 야채 한 바구니와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가 보내졌다. 그리고 그 다음해 봄, 무 잎으로 덮여 있는 함지를 발견했을 때 아버지는 커닝햄 씨가 갚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내왔다고 들려주었다. 그분은 왜 그런 식으로 값을 지불하나요?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스카웃. 돈이 없으니까. 우린 가난해요, 아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잠자코 있던 오빠가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가 커닝햄네만큼 가난하다구요? 반드시 그렇진 않아도 커닝햄은 시골사람들이구 ,,, 농부들이지. 게다가 크게 실패를 했거든. 아버지는 이곳의 농부가 가난하기 때문에 전문직업인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메이컴이 농사를 짓는 마을인 만큼 의사나 치과의사, 변호사에게도 오 센트나 십 센트짜리조차 돌아오기가 힘들었다. 상속인 한정은 커닝햄 아저씨의 고민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상속이 안 되는 논밭은 완전히 저당이 잡혀 있었고, 적은 돈은 모두 이자로 나가버렸다. 만약 그가 요령만 부린다면 공사기획청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지만 땅을 지키며 그 땅에서 배고픔을 참고 그것으로 투표의 권리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커닝햄 씨가 완고한 집안 출신이라고 덧붙였다. 커닝햄 같은 사람들은 지불할 돈이 없을 경우 갖고 있는 물건으로 대신 갚았던 것이다. 레이놀드 의사선생님도 같은 방법으로 일하고 계시는 거 알고 있지? 아버지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분은 아이를 받아주고 한 자루의 감자를 받기도 한단다. 그리고 스카웃 아가씨, 똑똑히만 듣는다면 무엇이 상속인 한정인지를 설명해주지. 젬이 얘기한 것도 때론 아주 정확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내가 만약 이런 일들을 캐롤라인 선생님께 설명할 수만 있었다면 이런저런 불편함과 뒤이어 일어난 억울한 일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분명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이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그 아일 망신주시는 거예요. 월터는 갚을 돈도 없고 선생님은 스토브 장작도 필요없으시잖아요. 선생님은 꼼짝도 않고 서 있다가는 나의 목깃을 움켜쥐곤 그녀 책상으로 끌고 갔다. 진 루이스, 난 오늘 아침에도 할 만큼 했다. 넌 눈치없이 아무 때나 나서는 게 탈이구나. 손 내밀어. 나는 그녀가 내 손에 침을 뱉으려는 줄 알았다. 그것은 메이컴에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영수증 대신 구두로 증명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거래가 이루어졌는지 의아해 하며 반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반 아이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자를 들어 여섯 대를 짧게 내려치고 구석에 서 있으라고 말하자, 마침내 교실을 누르고 있던 웃음이 터져나왔다. 캐롤라인 선생님이 으름장을 놓자 다시 웃음바다로 변해 브라운트 선생님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까지 계속됐다. 브라운트 선생님은 메이컴 토박이로 아직 그 이상한 듀이 대시멀 교수법을 시작하지 않은 분이었다. 그녀는 손을 허리에 얹고 공표했다. 만약 이 교실에서 한 마디라도 더 들린다면 모두들 가만두지 않겠어요, 캐롤라인 선생님. 이렇게 떠들어대면 육학년은 어떻게 산수에 집중할 수 있지요? 나는 교실 구석에서 오래 감금되어 있지 않았다. 정오의 종소리가 나를 풀어주었고 캐롤라인 선생님은 점심을 먹으러 줄지어 나가는 아이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나는 맨 나중에 나가면서 선생님이 의자 깊숙이 앉아 머리를 묻고 있는 것을 보았다. 캐롤라인 선생님이 조금만 더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더라면 조금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텐데. 선생님 역시 부족한 한 인간이지 않은가. 3. 골칫거리 학교 마당에서 월터 커닝햄을 잡아채는 일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내가 그 아이 코를 땅에 비벼대고 있을 때 오빠가 다가와 말렸다. 넌 쟤보다 크잖아. 하지만 오빠와 같은 나이인데 뭐. 보내줘라, 스카웃. 왜 그래? 쟨 점심 안 먹었어. 나는 월터의 점심도시락에 내가 개입하게 된 일을 설명했다. 월터는 털고 일어나 우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우리 둘로부터의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라도 할 듯 그는 주먹을 반쯤 쥐고 있었다. 나는 발을 구르며 월터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젬 오빠가 그의 팔을 잡고 나를 제지했다. 오빠는 그를 자세히 살펴본 후 곧 물어보았다. 너희 아빠가 올드새럼의 월터 커닝햄 씨지? 월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터는 마치 낚싯밥을 끌어올리듯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딜 해리스만큼 푸른빛이었지만 가장자리가 붉고 물기가 서려 있었다. 촉촉하고 불그스름한 코만이 창백한 얼굴 위에 얹혀 있었다. 그는 뽀빠이 바지의 가죽끈을 만지작거리며 신경질적으로 금속 훅을 잡아뜯었다. 오빠가 갑자기 씨익 웃어보이며 말했다. 월터, 우리집에서 점심 먹지 않겠니? 같이 가자. 월터의 얼굴이 밝아지는 듯하더니 다시 어두워졌다. 우리 아빠는 너희 아빠를 아셔. 그리구 스카웃 쟨 돌았나봐. 이젠 널 못살게 굴지 않을 거야. 그건 장담할 수 없어. 내가 끼여들었다. 내 공약을 오빠가 제멋대로 처리하는 것에 짜증이 났지만 소중한 점심시간이 째깍째깍 달아나고 있어서, 결국 난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월터야. 다시는 널 안 때릴게. 너 콩 좋아하지 않니? 우리집 칼 아줌마는 정말 대단한 요리사야. 월터는 그 자리에서 입술을 질근거리며 꼼짝않고 서 있었다. 오빠와 내가 권유를 포기하고 래들리 집 근처까지 걸어왔을 때였다. 그제서야 월터가 우리를 부르며 뛰어왔다. 얘들아, 나도 갈게. 월터가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오빠는 그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저기엔 유령이 산다. 그는 성의있게 래들리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유령에 관해 들어본 적 있니, 월터? 응, 처음 학교에 입학해서 그집 호두를 먹고 죽을 뻔했어. 사람들이 그러는데 거긴 독이 들어 있대. 호두나무 가지가 늘어진 학교 담에까지 독이 퍼져 있다고 하지 뭐야? 오빠는 월터와 나 사이에서 걸어가며 얘기했는데 두려움 따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더니 차츰 으스대기 시작했다. 저 집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지. 오빠가 월터에게 말했다. 그집을 다녀오기까지 한 사람이 그집 앞을 지날 때마다 왜 그렇게 달음박질일까 ,,, . 나는 구름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누가 뛰었다고 그래, 떠벌이 양? 누군 누구야, 오빠지. 옆에 아무도 없을 때 그랬잖아? 우리집 계단에 이르렀을 때, 월터는 자신이 커닝햄 사람이라는 것도 잊은 듯했다. 오빠는 부엌으로 가서 일인분을 더 부탁했다. 아버지는 인사를 받고 나서 오빠와 내가 모르는 곡식에 관해 월터와 얘기를 나누었다. 제가 매번 낙제를 면치 못하고 일학년에 머무는 건요, 봄이 되면 아빠를 도와 풀베기를 해야 하거든요. 다행히 오늘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아주어서 학교에 갈 수 있었어요. 그 사람에게도 감자로 지불할 거니? 내가 물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월터가 음식을 먹어대는 동안 아버지는 마치 어른을 대하듯 그와 얘기를 나누어 오빠와 나를 놀라게 했다. 아버지가 농촌문제에 대해 상세히 얘기하는 도중에 월터가 당밀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칼 아줌마를 불렀다. 아줌마는 시럽 주전자를 가져와 월터가 야채와 고기에 듬뿍 들이붓기를 기다렸다. 내가 도대체 뭘 하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면 월터는 분명히 그의 우유잔에도 시럽을 들이부었을 것이다. 주전자를 놓을 때 은받침이 덜그럭 소리를 내자, 그는 재빨리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쏙 집어넣었다. 아버지는 내게 다시 머리를 저어보였다. 하지만 쟨 저러다 시럽에 빠져죽을 텐데요. 모든 곳에 시럽을 들이붓고 있으니 ,,, . 그때 칼퍼니아 아줌마가 나를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아줌마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화가 나면 그녀의 말투는 사뭇 달라져 버리고, 그렇지 않을 때는 메이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말솜씨를 과시했다. 아버지도 칼 아줌마는 다른 흑인들에 비해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했었다. 그녀가 거의 사팔이 되어 나를 내려다볼 때 깊은 눈가에는 잔주름이 잡혔다. 우리처럼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녀가 매섭게 속삭였다. 그렇다고 해서 식탁 앞에서 무안을 주는 건 뭐야. 저 아인 친구지, 너의 친구. 탁자를 죄다 먹어치워도 놔둬야 해. 알아들었니? 쟤는 내 친구도 아닌데 ,,, 그냥 커닝햄인데 ,,, . 입 다물어. 누구건 이 집에 발을 들여놨으면 친구야. 그리고 다신 그런 식으로 대단한 일처럼 말하지 마. 커닝햄 집 아이를 데려온 이상 다 똑같아. 그들을 망신 당하게 할 만한 거리는 없어. 네가 식탁에서 먹을 자격이 없으면 여기 부엌에서 먹든지. 칼퍼니아 아줌마는 엉덩이를 따끔하게 때리곤 식당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접시를 들고 부엌에서 점심을 마저 먹었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다시 보기가 멋쩍었다. 나는 칼 아줌마를 불러 또 이러면 난 베이커스에디 강에 가서 빠져죽을 거고 그렇게 되면 아줌마도 잘못을 뉘우치게 될 거라고 한마디 해주었다. 게다가 아줌마는 오늘도 나를 곤경에 빠뜨렸는데 그건 쓰는 법을 나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며, 그것도 순전히 아줌마 잘못이라고 마구 해댔다.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응? 아줌마가 쏘아붙였다. 오빠와 월터가 먼저 학교로 돌아가고 나는 뒤에 남아 칼 아줌마를 향한 내 불만에 대해 아버지의 의견을 들었다. 그건 혼자서 래들리 집 앞을 있는 힘껏 달려야 하더라도 중요한 일이었다. 칼 아줌마는 저보다도 젬 오빠를 더 좋아해요. 나는 결론지어 말하며 아버지가 아줌마를 그만두게 할 수는 없는지를 물었다. 젬이 너보다 훨씬 걱정을 덜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니? 아버지의 목소리를 차가웠다. 난 그녀를 내보낼 생각이 없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린 칼퍼니아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나갈 수 없어. 칼이 널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나를 생각해봐라. 앞으로 아줌마에게 더 신경쓰도록 해. 알아들었지?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그 아줌마를 미워하면서 ,,, 갑작스런 비명소리가 나의 중오심을 흐트러놓았다. 캐롤라인 선생님이 교실 가운데에 서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인내하는 빛이 역력했다. 살아 있어! 선생님이 소리쳤다. 교실에 있는 남자아이들이 선생님 옆으로 몰려갔다. 맙소사. 선생님은 쥐 한 마리에 놀라는 것 같았다. 자연현상과 모든 생물에 대해 참을성이 많은 리틀 척이 선생님을 향해 외쳤다. 어디에요, 선생님! 어느 쪽으로 갔는 데요. 빨리요! 디시. 그는 뒤에 있는 남자애에게 돌아섰다. 디시, 문 닫아. 도망 못 가게. 어서요, 선생님. 어디로 갔어요? 캐롤라인 선생님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바닥도 책상도 아닌 곳을 가리켰다. 그러나 선생님이 가리킨 건 내가 모르는 웬 덩치 큰 아이였다. 리틀 척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맞아요, 이건 살아 있어요. 선생님은 이것 때문에 놀라셨나 보죠? 캐롤라인 선생님은 이미 자포자기하여 천천히 말했다. 그냥 걷고 있는데 저것이 머릿속에서 기어나오지 뭐니 ,,, 머릿속에서 그냥 기어나오는 거야. 리틀 척은 거침없이 이를 드러내보이며 웃었다. 이를 무서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한 번도 못 보셨나 보죠? 이젠 됐어요. 책상으로 가셔서 수업하셔도 돼요. 그 이의 장본인은 이러한 소동에도 무관심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마 위를 더듬어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두개골에서 이를 끄집어냈다. 캐롤라인 선생님은 솔깃한 매력에 빠져들기라도 한 듯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틀 척이 종이컵에 물을 가져왔다. 선생님은 고마워하며 물을 마시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이름이 뭐지? 그 남자애는 눈을 끔벅거리며 말했다. 누구요, 저요? 캐롤라인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리스 이웰. 선생님은 출석부를 뒤졌다. 그래, 여기 이웰이 있구나. 하지만 이름이 없는데 ,,, 스펠링이 어떻게 되지? 몰라요. 그냥 버리스라고 불러요. 좋아. 버리스, 나머지 오후수업은 면제해줄 테니 집에 가서 머리를 좀 감고 오렴. 그녀는 두꺼운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며 읽어나갔다. 바람직한 가정의료라 ,,, 버리스, 머리를 잿물비누로 감고 램프용 석유를 바르고 와라. 뭣 때문에요? 그 ,,, 그 ,,, 이를 없애기 위해서야. 알겠니, 버리스? 다른 아이들에게 옮기면 안 되잖니? 그 아이는 일어섰다. 그앤 내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지저분한 인간이었다. 목은 검은 잿빛이었고, 손등은 보기 흉하게 트고 손톱 깊숙이까지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었다. 그애 얼굴 중 유일하게 깨끗한 부분은 주먹크기만한 눈이었는데 여전히 뚫어지게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그 아이에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오전 내내 선생님과 내가 반 아이들을 흥미롭게 해주었던 까닭인지도 몰랐다. 버리스, 내일 학교에 오기 전에도 꼭 목욕을 해라. 그 아이가 무례하게 웃어제꼈다. 날 집으로 보내시진 못할 걸요, 선생님. 난 내 발로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난 이미 이번 학년치 분량은 끝마쳤다구요. 캐롤라인 선생님은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아인 대답도 없이 비웃듯 코웃음만을 흘렸다. 반에서 제일 나이 많은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그앤 이웰 집안 아이에요. 난 이 말에 대한 설명도 나의 시도처럼 실패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나와는 달랐다. 학교엔 저런 아이들이 많아요. 쟤들은 개학날만 오곤 끝이에요. 감시관이 보안관을 데려와 겁을 줘도 소용없어서 포기했어요. 그래서 그 감시관도 첫날 이름만 올리는 것으로 의무이행을 끝내요. 선생님께서도 앞으로 계속 결석표시를 하셔야 될 거예요. 그럼 부모님들은 ,,,? 선생님이 건성으로 물었다. 어머니가 없어요, 아버지는 말썽이 많구요. 버리스 이웰은 자기에 관한 얘기로 우쭐해졌다. 첫날만 학교에 오기를 삼 년째 하고 있죠. 그가 대범하게 말했다. 이번엔 잘만 하면 이학년으로 올라갈지도 모르는데 ,,, . 제자리에 가서 앉아라, 버리스. 선생님이 말하는 순간 난 그녀가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 날 갖고 노시나요? 리틀 척이 일어났다. 선생님, 그를 보내세요, 저 아인 어쩔 수 없어요. 정말 형편없거든요. 무엇이든 시작을 했으면 끝을 내셔야 해요. 여긴 어린아이들도 많으니까요. 리틀 척은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작았다. 버리스 이웰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리틀 척의 오른손이 주머니로 갔다. 조심해, 버리스. 널 한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자, 집으로 가. 버리스는 자기의 반도 안 되는 아이에게 겁을 먹은 듯했다. 그때 캐롤라인 선생님도 기회를 잡았다. 버리스, 집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교장선생님을 부르겠어. 어쨌든 이 일을 보고해야겠지만. 그 아이는 콧방귀를 뀌며 유유히 문을 향해 구부정하게 걸어나갔다. 안전하게 사정거리 밖으로 나간 후 돌아서서 소리쳤다. 보고한다구! 헹, 해볼 테면 해보시지. 그까짓 화냥년 똥구멍 같은 학교 선생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기억해두시죠, 선생님. 날 어디에도 보낼 순 없을 거예요. 암, 어디로도 못 보내요. 그 아인 선생님이 우는 걸 확인하고서야 건물 밖으로 내달았다. 우리들은 곧장 선생님 책상으로 몰려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선생님을 위로했다. 정말 못된 아이야, 비겁한 짓을 하다니 ,,, 그런 앤 배울 가치도 없어요. 메이컴엔 저런 애가 없는데요, 선생님. 신경쓰지 마시구요. 책 읽어주세요. 그 고양이 이야긴 정말 재미있었어요 ,,, 선생님 ,,, . 캐롤라인 선생님은 힘없이 웃으며 코를 풀었다. 고맙구나, 얘들아. 우리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이번엔 공회당에 사는 두꺼비에 대한 긴 이야기였으며 우리 일학년짜리들은 모두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나는 그날 우울했다. 게다가 네 차례나 래들리 집 앞을 지나쳤는데, 그중 두 번은 있는 힘을 다해 뛰어야 했다. 나는 그집 때문에 더욱 우울해졌다. 나머지 학교생활도 첫날처럼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충만함이라도 있다면 조금은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홉 달 동안을 읽기와 쓰기를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망치고만 싶어졌다. 늦은 오후 우리의 놀이도 끝마쳐야 할 무렵, 사무실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하러 젬 오빠와 함께 달려가면서도 나는 그다지 열심히 뛰지 않았다. 아버지가 저 멀리 우체국 건물을 돌아나올 때 그리로 힘껏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 일상의 반복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점심 식사때 내가 품위를 잃은 것에 대해 잊은 듯했고, 학교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나의 대답은 네, 아니오 정도였고 아버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칼퍼니아 아줌마도 오늘이 내게 있어 힘든 하루란 걸 알아차렸는지 저녁 요리만드는 것을 구경하게 해주었다. 자, 눈 감고 입을 벌려봐라. 그녀가 바삭바삭한 크래킹 빵을 만드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 동안은 시간이 없어서 그랬지만 오늘은 우리 둘 모두 학교에 가고 나니 한가한 하루였다고 했다. 아줌마는 내가 크래킹 빵을 무척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네가 없어서 허전했단다. 두시까진 집이 텅 빈 것 같아 라디오를 다 틀었대두. 아무리 그랬을까. 오빠와 나는 비오는 날만 빼고는 집에 있지도 않았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너희 둘 중 한 명은 집 근처 어딘가에 늘 있었지. 나는 너희들을 따라다니고 불러대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는지를 생각해봤단다. 자, 이제 다 됐나보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빵이 다 구워진 모양이야. 저기서 저녁상 차리는 걸 좀 도와주렴. 칼퍼니아 아줌마는 허리를 굽혀 뺨에 키스했다. 나는 아줌마가 왜 그럴까를 생각하며 뛰어나왔다. 그녀는 내게 화해하고 싶은 거야. 맞아, 나에겐 항상 너무 엄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미안하다고 말하기엔 칼 아줌마는 고집이 너무 센 거야. 나는 이미 그날의 일로 지쳐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아버지는 신문을 펼치고 앉아 나를 불렀다. 스카웃, 읽을 준비 됐니? 하느님은 내가 견뎌내기 어려운 시련을 주려나보다. 내가 현관 밖으로 뛰쳐나오자 아버지가 서둘러 따라나왔다. 무슨 일이지, 스카웃?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으며 아빠만 괜찮다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다리를 포개고 그네에 앉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늘 보이는 행동이었다. 나는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핑계를 찾았고 아버지는 온화한 침묵으로 기다려주었다. 아빠도 학교에 다니지 않았잖아요. 할아버지가 아빠와 잭 삼촌을 가르치신 것처럼 저도 집에서 가르쳐주세요. 아니, 난 그럴 수 없다. 아빠는 돈을 벌어서 생계를 꾸려가야 하고 너를 학교에 안 보내면 그들이 나를 감옥에 보낼 거야. 오늘은 진정제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일을 학교에 가도록 해라.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그렇겠지. 어서 무슨 일인지 말해봐. 나는 수업 첫날 내가 당해야 했던 불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아빠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더이상 읽기도 할 수가 없어요, 언제까지나요. 제발 학교에 보내지 마세요, 네? 아빠. 아버지는 일어나 현관 입구 쪽에 있는 등나무를 살피더니 다시 내게 다가왔다. 첫째로, 스카웃, 네가 아주 간단한 요령을 배운다면 넌 모든 사람과 훨씬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들이 보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한 절대로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 . 네? 네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봐야 한다는 거야. 아버지는 오늘 내가 많은 것을 배웠고 캐롤라인 선생님 역시 몇 가지는 깨달았을 거라고 덧붙였다. 첫째 그녀는 커닝햄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고 그들에 대해 알 수 있었으므로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와 월터가 정직한 실수를 한 셈이었다. 그건 그녀가 메이컴의 모든 것을 하루만에 익힐 수 없으며 그녀가 모른다고 해도 책임을 그녀에게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전 바보짓을 했어요. 제가 못 읽는 척했어야 했는데 ,,, 그럼 되는 건데 ,,, 아빠 전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갑작스런 생각이 터져나왔다. 아빠, 버리스 이웰 아세요? 그 아인 수업 첫날만 와요. 감시원도 출석부에 이름만 올리는 것으로 봐준대나봐요. 넌 안 된다, 스카웃. 때때로 아주 특별한 경우 법을 조금 조종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너의 경우 법은 엄하고 학교엔 가야 한다. 걘 되고 전 왜 안 되는 거죠, 아빠? 자, 들어보렴. 아빠는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이웰 집안 사람들은 삼 대째 내려오며 메이컴에서 수치스럽게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한 그 집안 사람 누구도 성실하게 일한 적이 없었다. 어느 성탄절에 그들의 생활을 알게 하려고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가신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원한다면, 아니 교육이라는 것에 털끝만한 관심만 있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단다. 강제로 그들을 잡아둘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웰 집안 같은 사람들을 새로운 환경에 밀어넣는 일은 바보짓이란다. 만일 내일 제가 학교에 안 가면 강제로 보내실 건가요? 그 얘기는 잠깐 미뤄두기로 하자. 아버지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너 스카웃 핀치는 평범한 사람이야. 법에 복종해야만 하지. 그리고 이웰 사람들은 배타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이웰 같은 사람들의 행동을 눈감아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일단 그들은 학교에 안 가도 눈감아주고, 두 번째는 버리스의 아버지인 봅 이웰이 사냥이 금지된 시기에 사냥하고 덫을 놓더라도 묵인해준다는 것이었다. 아빠, 그러면 안 되잖아요. 메이컴에서 금렵기에 사냥하는 것은 경범죄였고, 일반적 견해로는 치명적 중죄였다. 안 되지, 물론 네 말이 맞다. 그리고 그건 분명 나쁜 일이야. 하지만 국가에서 나오는 빈민구제연금을 그의 값싼 위스키에 다 써버리고, 아이들이 배고픔에 울고 있다면 그때 그 애들을 먹일 불법사냥을 못하게 할 땅임자는 없지 않겠니? 이웰 아저씬 그러면 안 되는데 ,,, . 물론 그래선 안 되지. 하지만 그는 결코 자기의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진 못할 거다. 그 아이들 앞에서 넌 그를 비난할 수 있겠니? 아뇨. 나는 중얼거리며 마지막 저항을 해보았다. 하지만 제가 학교엘 가면 아빠와 읽기를 할 수 없잖아요 ,,, . 그것이 골칫거리구나, 그렇지? 네, 아빠.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볼 때마다 그 표정에서 항상 어떤 기대감을 느껴왔다. 타협이란 말 뜻을 알고 있니? 법을 조종하는 거요? 아니, 타협이란 서로의 양보로 동의에 도달하는 거란다. 자, 보자. 넌 학교에 그대로 가고 우린 항상 하던 대로 읽기를 계속하는 거야. 그러면 되겠지? 네, 아빠. 내가 침 뱉을 준비를 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통상적 의례없이 이것을 조인한 것으로 간주하자, 응.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아버지의 은밀한 말씨가 전해졌다. 스카웃, 저 말이다, 학교에 가서 우리끼리의 계약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요? 우리 행동이 그 박식한 관계당국의 반대를 받을지 걱정돼서 말이야. 오빠와 나는 유언장에나 나옴직한 아버지의 용어선택에 습관이 되어 있었고 이해가 안 되는 건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예? 저 말이다 ,,, 난 한 번도 학교에 간 적이 없는데 만약 캐롤라인 선생님이 우리가 매일밤 읽기를 한다는 걸 알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거든, 난 결코 그러길 원치 않으니까. 그날 저녁 아버지는 우리를 편안히 내버려두었고 깃대 위에 앉아 있는 남자가 실린 신문을 조심스러운 듯 읽고 계셨다. 그것은 오빠로 하여금 그 다음 토요일을 나무집 위에 앉아 보내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오빠는 아침 식사 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 밤을 새우려 했지만 아버지가 그의 공급라인을 중지시켰다. 나는 거의 온종일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오빠가 원하는 문학서적과 먹을 것, 마실 것 등의 심부름으로 분주했다. 마침내 밤에 덮을 담요를 가져가려는데 아버지가 넌즈시 일러주셨다. 오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무집에서 내려올 거라고. 역시 아버지가 옳았다. 4. 부 래들리와 떡갈나무 그후의 학교생활도 처음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느릿느릿 계속해야 하는 지루한 숙제 같은 거였다. 주 정부의 배려로 공급된 수마일 정도의 도화지와 크레용에 불과했다. 또한 나에게 교집합을 가르치는 일은 헛된 노력이었다. 듀이 대시멀이라는 교수법은 일학년 말경 학교 전체로 퍼졌으므로 나는 다른 교수법과 비교할 새도 없이 내 경험 안에서 빙빙 돌 뿐이었다. 집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아버지와 잭 삼촌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최소한 두 분 중 한 분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수년간 반대 없이 주 입법부에 당선되었고 선생님들이 주장하는 선량한 시민의 필수인 청렴결백 또한 아버지에게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는 반은 듀이 대시멀로 반은 던스캡을 기초로 교육받았기에 혼자서나 그룹에서나 적응력이 뛰어난 듯 보였다. 그러나 오빠는 적당한 본보기가 아니었다. 책으로 배우는 걸 막으려고 개인교수제가 고안된 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은 (타임)지나 손에 닿는 모든 읽을거리에서 얻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메이컴의 단조로운 학부제에 대부분 적응하지 못한 채 무엇인가로부터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나는 어쩌면 덜 지루했을 그해 열두 살 시절이 정확히 어떤 마음의 상태였는지를 기억할 수가 없다. 한 해가 지나면서 나는 세시에 끝나는 젬 오빠보다 삼십 분 일찍 수업에서 풀려났다. 그러고 나면 나는 래들리 집 근처에서부터 우리집 현관에 닿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멈추지 않고 뛰었다. 내가 달리기를 하던 어느 날 오후였다. 무언가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본 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래들리 집 마당 끝엔 두 그루의 떡갈나무가 서 있었다. 그 뿌리는 길 위까지 울퉁불퉁 뻗어나와 있었다. 그중 한 그루가 나의 눈길을 끈 것이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내 눈높이의 옹이구멍에 은박지 같은 것이 오후의 태양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발꿈치를 들고 서서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본 다음 그 구멍 속으로 손을 넣었다. 겉포장이 없는 두 개의 껌. 나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입 속으로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서야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고는 다시 우리집 현관까지 뛰어와서 나의 전리품을 살펴보았다. 그 껌은 새것 같았다. 킁킁 냄새를 맡아봐도 별 이상이 없어 그것을 슬쩍 핥은 다음 죽는지 아닌지 기다렸다가 별 기미가 없자 마구 씹어댔다. 리글리 회사의 더블민트껌. 오빠가 와서 그런 건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나는 주웠다고 대답했다. 주운 걸 먹으면 어떡하니? 땅에서 주운 건 아냐. 나무 위에 있었어. 괜찮은 거야. 학교에서 오다가 저 나무옹이 안에서 주웠어. 뭐라구? 당장 뱉지 못해! 오빠가 엄포를 놓았다. 나는 뱉아버렸다. 어쨌든 단맛은 다 빠졌으니까. 여태 씹어도 죽지 않았잖아. 아프지도 않더라. 오빠가 발을 굴렀다. 저 나무에 손대면 안 돼. 죽는단 말이야. 오빤 그 집을 만지기까지 했잖아. 그건 달라. 너 당장 입가심해. 내 말 안 들려? 안 그러면 칼퍼니아 아줌마한테 이른다. 오빠의 명령에 따랐다. 아줌마랑 얽히게 되느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몇몇 이유에서 나의 학교생활은 칼퍼니아 아줌마와 나와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칼퍼니아 아줌마의 전제군주적인 불공평함과 지나친 간섭이 일상적인 불만의 표시 정도로 그쳤고, 더 많은 말썽을 일으켜도 그다지 성을 내지 않았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와 나는 조바심을 내며 다가오는 여름을 기다렸다. 우리에게 여름은 최고의 계절이었다. 뒷현관 간이침대에서의 휴식, 나무집에서의 낮잠, 여름의 풍성한 과일이며 음식 등이었다. 또한 여름의 이글거리는 대지 위엔 갖가지 오색 빛깔이 펼쳐지곤 했다. 그러나 여름을 가장 기다리게 하는 건 딜이었다. 방학식날 오빠와 나는 조금 일찍 풀려나 함께 걸어왔다. 딜이 내일쯤은 올 수 있을까? 내가 물었다. 아마 모레쯤일 거야. 미시시피 주는 하루 늦게 방학하니까. 래들리 집 떡갈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백 번도 넘게 껌이 있던 자리를 눈여겨보곤 했다. 그때였다. 나는 또다른 은박지를 가리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보여, 스카웃. 보인다구! 오빠는 주위를 둘러보곤 손을 뻗쳐 반짝이는 작은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고 뛰었다. 그건 껌종이에서 모은 은박종이를 조각조각 이어 포장한 작은 상자였다. 그건 결혼반지 케이스인데 자줏빛 벨벳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오빠는 재빨리 열어젖혔다. 공들여 광을 낸 동전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오빠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인디언 얼굴이 새겨져 있어, 스카웃. 이건 1906년도야, 또 하난 1900년, 정말 오래된 것들이라구. 나는 따라 외웠다. 1900년 ,,, 말하려 ,,, . 조용히 해봐, 내 생각엔 ,,, . 아니야, 그곳은 어른이 아니면 잘 지나다니지 않아. 어른들은 비밀장소 같은 거 만들지 않아. 그렇지, 오빠? 그거 우리가 가져도 될까? 나도 몰라, 스카웃. 누구에게 돌려줘야 할지. 그곳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세실도 집으로 갈 때 돌아서 가고. 세실 제이콥은 우리집 쪽으로 제일 끝에 있는, 우체국 옆집 아이로 학교에 갈 땐 래들리 집과 헨리 라파예트 두보스 할머니 집을 피해 가느라 거의 왕복 일 마일 정도를 돌아서 다녔다. 우리집에서 두 번째 윗집에 사는 두보스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심술궂은 늙은 마귀라고들 했다. 오빠도 아버지와 함께가 아니면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건데, 오빠? 주인이 없다면 주운 사람이 임자였다. 때때로 동백꽃을 딴다거나 여름철에 머디 애킨슨 아줌마네 젖소의 따뜻한 젖을 짜내는 일, 남의 밭에서 자라고 있는 머루를 서리하는 일 등은 메이컴의 윤리적 문화의 하나로서 묵인되곤 했지만 돈은 달랐다. 그래, 어떻게 하냐 하면, 우리가 보관했다가 개학한 다음 누구 것인지 물어보자. 어쩜 버스 타고 다니는 애들 건지도 몰라. 학교 끝나고 챙기려다 잊은 걸 거야. 이건 분명 임자가 있어. 자, 봐. 얼마나 말끔하니? 잘 보관되어온 것 같잖아. 응, 하지만 왜 껌 같은 걸 그렇게 놔뒀을까? 그건 오래가지 않잖아. 나도 모르겠어, 스카웃. 하지만 이건 분명 누군가에게 중요한 물건일거야. 뭐가 중요한데, 오빠 ,,,? 그러니까 인디언 얼굴, 이건 진짜 인디언 것인지도 몰라. 기가 막힌 마술이 들어 있어.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몰라. 기대하지 않은 닭고기 정도가 아니야. 어쩌면 그건 오래 산다거나 건강하게 되거나, 여섯 주 시험에 통과되는 마술일지도 모른다구. 그런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일일테니까 내 트렁크에다 넣어둬야겠어. 오빠는 들어가기 전에 한참 동안 래들리 집을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이틀 후 딜은 영광의 빛과 함께 도착했다. 그는 혼자 메리디안에서 기차를 타고 애보트에 있는 메이컴 행 터미널로 와서 택시로 다시 라이첼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식당차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베이 세인트 루이스 역에서 하차하고 있는 두 쌍둥이를 보았다면서 어떠한 야유에도 개의치 않고 허풍을 떨어댔다. 그는 셔츠까지 단추가 채워진 그 지독한 파란 바지를 벗어버리고 벨트가 달린 아주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은 조금 찐 듯했지만 키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만나보았다고도 했다. 딜의 아버지는 우리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키에 검은 수염을 길렀고, 지금은 L&N 철도회사의 사장님이라고 했다. 내가 잠깐 기술자로 도왔지. 딜이 하품하며 말했다. 허풍떨지 마, 딜. 자, 그만하구.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까? 오빠가 말했다. 톰, 샘, 딕. 앞마당으로 가자. 딜이 말했다. 딜은 (해적선) 연극놀이를 하고 싶어했다. 거기엔 세 군데 정도 할 만한 대목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가 정해준 배역에 싫증을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난 그거 별로야. 내가 말했다. 나는 연극 중간에 갑자기 기억을 상실하여 끝부분까지 대본에서 사라졌다가 알래스카에서 발견되는 톰 로버 역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 하나 지어내자. 내가 제안했다. 싫어, 이젠 꾸며내는 것도 지쳤어. 자유의 몸이 된 첫날부터 우린 모두 이렇게 지쳐 있었다. 이 여름은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린 앞마당을 어슬렁거렸고 딜은 래들리 집이 정면으로 보이는 음산한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킁킁, 죽음의 냄새가 난다 ,,, 냄새가 나 ,,, . 내가 그만두라고 윽박질러도 딜은 소용없었다. 아니, 내 말은 누가 죽을지 미리 가려내어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거야. 어떤 할머니한테서 배운 거야. 딜은 내게도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진 ,,, 루이스 ,,, 핀치 ,,, 넌 삼사흘 안에 죽을 것이다 ,,, . 딜, 너 입 다물지 못해. 앉은뱅이를 만들어놓을까 보다. 정말이다, 너 지금 ,,, . 야, 모두 조용히 해. 오빠가 왈왈거렸다. 너희들 핫스팀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오빤 아니구? 내가 대꾸했다. 핫스팀이 뭔데? 딜이 물었다.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길을 갈 때 왠지 뜨뜻한 데를 지나간 적 없었니? 오빠가 딜에게 설명했다. 핫스팀이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외딴 거리를 헤매는 유령을 일컫는 말인데, 너도 그곳을 지나치면 죽어서 그렇게 되는 거야. 그리곤 밤에 돌아다니며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인대 ,,, . 그걸 피할 수는 없을까? 없어. 그건 길 여기저기에 깔려 있으니까. 하지만 그곳을 지날 때, 천사의 빛이여. 죽음 속의 삶은 써억 사라져라. 내 영혼을 빼앗지 마라. 이렇게 말하면 그 주문이 너를 감싸 보호해줄 거야. 오빠가 하는 말, 한 마디도 믿지 마, 딜. 칼퍼니아 아줌마가 그러는 데 그건 검둥이들이 꾸며낸 말이래. 오빠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다른 말로 얼버무려버렸다. 놀이는 할 거야 말 거야? 타이어타기 하자. 내가 제안했다. 오빠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너무 커서 안 되잖아. 밀어주면 되잖아. 나는 뒷마당으로 가 마루밑창에서 오래된 타이어를 꺼내와 앞마당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내가 먼저. 딜은 오랜만에 이곳에 왔으니 자기가 먼저 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오빠가 중재에 나섰다. 내가 첫 번째였고 다음이 딜이었다. 나는 타이어 안으로 몸을 접어넣었다. 나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핫스팀에 대해 떠드는 오빠를 반박한 것 때문에 오빠가 무척 언짢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보복할 기회를 끈기있게 기다렸던 것이고 끝내 있는 힘을 다해 보도 쪽으로 타이어를 밀쳐버렸다. 하늘과 땅, 집들이 다함께 뒤범벅이 되어 실성한 팔레트로 변하고 귀에선 맥박이 뛰며 숨이 막혀왔다. 타이어를 세우려 해도 팔이 가슴과 무릎 사이에 쐐기처럼 박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오빠가 나를 잡아주거나 보도에 타이어가 부딪혀주는 것이었다. 오빠가 내 뒤를 쫓아오며 뭔가 소리소리 질렀다. 타이어는 자갈 위에 쾅 부딪혀선 길 반대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다시 벽에 부딪히고는 포장도로 위로 코르크 마개처럼 통통통 튀어나갔다. 어지러움과 울렁거림으로 나는 시멘트 바닥에 누워 머리를 흔들었다. 귀는 침묵 속에서 둥둥거리고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카웃, 거기서 빨리 나와, 어서. 머리를 들어보니 바로 코앞에 래들리 집이 다가왔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빨리, 스카웃. 거기 처박혀 있지만 말구! 오빠가 계속 소리 질렀다. 어서 일어나. 조금씩 정신을 차리면서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타이어 갖고 와! 오빠가 소리쳤다. 갖고 오라니까, 어서. 방향을 잡게 된 나는 무릎이 떨리는 것도 참고 온힘을 다해 그들에게로 뛰어갔다. 타이어를 두고 오면 어떡해? 오빠가 소리쳤다. 오빠가 가져오면 되잖아. 나도 소리쳤다.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보시지. 문에서 멀지도 않은데. 집을 만지기까지 한 사람이 뭘 그래? 오빠는 나를 사납게 노려봤지만 뿌리칠 수는 없는 듯 보도를 향해 물에서 헤엄치듯 걸어갔다. 그리곤 래들리 집 마당으로 돌진해 들어가 타이어를 되찾아왔다. 봤지? 오빠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별것 아니야, 스카웃. 정말이라구, 넌 가끔 너무 계집애 티를 내거든. 정말 못 봐주겠어. 오빠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가 또 하나 있었다. 하지만 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현관에 나타났다. 자, 레모네이드 마실 시간이다. 너희들 그렇게 밖에만 있다간 모두 통닭구이가 될 거야. 오전중의 레모네이드 시간은 여름에 꼭 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아줌마가 주전자와 컵을 현관에 놓고 들어갔다. 오빠는 화가 아직 덜 풀렸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레모네이드가 기분을 회복시켜줄 것이었다. 오빠는 레모네이드 두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고 가슴을 두드렸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지 생각이 났노라. 오빠가 엄숙히 말했다. 뭔가 새롭고 특별한 것이니라. 그게 뭔데, 형? 부 래들리. 오빠는 가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짓을 했다. 오빠는 자신의 대담한 용맹성과 겁내는 나를 비교하여 어떻게 해서든 래들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부 래들리라니 ,,, 어떻게? 딜이 물었다. 스카웃, 넌 래들리 부인 역을 맡고 ,,, . 오빠가 지시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할 수 있어. 하지만 난 ,,, . 왜 그래? 아직도 겁나니? 딜이 물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잠든 밤에 나와서 ,,, . 오빠가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댔다. 스카웃, 우리가 뭘 하는지 그가 어떻게 알겠니? 그리구 난 그가 그집에 살아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는 이미 죽었고 박제가 돼서 굴뚝에 쑤셔박혀 있을 거야. 스카웃이 싫다면 형하구 나하구 하면 되잖아. 나는 부 래들리가 안에 있다는 것을 거의 확신했지만 증명할 길이 없었고,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괜히 핫스팀 따위나 믿는다고 덮어씌울 것만 같았다. 오빠는 배역을 정해주었다. 내가 맡은 래들리 부인 역은 현관에 나와 빗자루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딜은 래들리 씨로, 오빠가 말을 시키면 마른기침을 하며 보도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오빠는 자연히 부 래들리 역할을 맡았다. 그는 계단 아래로 기듯이 가며 가끔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소리를 길게 뽑으며 울부짖기도 했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우리의 놀이도 깊어갔다. 우리는 그 연극을 갈고 닦아 완성시켰다. 이 괴상한 연극을 꾸며내기까지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여 대화나 줄거리에 살을 붙여나가는 방식이었다. 딜은 악인역할의 천재였다. 그는 어떤 역할이라도 잘 소화해냈다. 키 큰 사람 역할에선 실제로 키가 커 보이는 듯 연기했다. 그는 아무리 고약한 역이라도 열심히 했고. 그의 연기가 최고조로 달할 땐 진짜 괴기스러웠다. 나는 대본에 맞춰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건 결코 타잔만큼도 재미있지 않았다. 오빠의 말대로 부는 이미 죽었고 낮에도 칼퍼니아 아줌마와 오빠가 함께 있고 밤에는 아버지가 집에 있기 때문에 부는 어떤 짓도 하지 못할 거라는 장담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연극을 하며 그해 여름을 보냈다. 오빠는 타고난 재간꾼이었다. 그것은 이웃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뜬소문들을 짜맞춘, 짧지만 슬픈 드라마였다. 래들리 부인은 한때는 아름다웠으나 래들리 씨와 결혼하면서 재산을 전부 날려버렸다. 그 이빨과 머리칼까지 다 빠지고 집게손가락마저도 잘라지고 말았다. 이 대목은 딜의 아이디어로, 부가 먹을 고양이나 다람쥐 등이 없을 때 물어뜯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거실에 앉아 부가 모든 가구를 조금씩 쏠아대는 동안 종일토록 우는 것이었다. 우리 셋은 말썽을 피웠던 그 불량소년들의 역할도 해냈다. 나는 유언검인 재판관을 맡았고, 딜은 오빠를 끌어내어 계단 아래 꿇어앉혀 놓고 긴 빗자루대로 찔렀다. 오빠는 필요에 따라 보안관, 유별난 마을사람, 그리고 래들리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던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 역을 번갈아가면서 했다. 래들리 역할 중 중요한 대목에 이르자 오빠는 집으로 들어가 칼퍼니아 아줌마 몰래 재봉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왔다. 그리곤 그네에 앉아 신문을 오리고 있다가 딜이 지나가자 넓적다리를 찔렀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보면 진짜 찌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나단 래들리 씨가 우리 앞을 지날 때는 그가 우리를 수상히 여기지는 않을까 조바심하며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런 우리의 놀이는 이웃사람들이 지나가면 중단되었다. 길 건너 머디 아줌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꽃밭에서 우리를 바라다보았다. 어느 날 우리가 (어느 가족의 이야기) 2막 25장을 연기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을 때 아버지가 길가에 서서 잡지를 말아 무릎을 치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열심이었고 태양은 정오를 알려주듯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너희들 지금 무슨 놀이를 하고 있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오빠가 우물거렸다. 나는 오빠의 태도로 보아 이 놀이가 비밀이라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가위는 어떻게 된 거냐? 신문은 왜 저렇게 오려놓고, 응? 오늘 신문이면 혼 좀 나야겠는데.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무 것도 아니냐? 그냥 저 아무 것도 ,,, . 그 가위 이리 다오. 가위를 갖고 놀 일은 없을 테니까. 너희들 혹시 래들리 집과 관련된 놀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아빠. 오빠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겠지. 아버지는 짧게 말하곤 안으로 들어가셨다. 형 ,,, . 쉿, 아직 거실에 계셔. 거기선 말소리가 들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안전한 장소인 마당으로 나와서야 딜은 연극놀이를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빤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으니까. 오빠, 아빠가 알고 계신 것 같아. 아니야, 아빤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씀하셔. 그래도 나는 안심이 안 되었지만 오빠는 그것이 여자아이가 되어가는 증상이며 계집애들은 되지도 않는 공상을 해서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며 말을 막았다. 그리곤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놀이에 끼워주지 않겠다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좋아, 그럼 다른 데 가서 함께 놀아줄 아이를 찾아봐. 아버지의 갑작스런 출현은 오히려 내가 그 연극을 그만두려는 두 번째 이유였다. 진짜 이유는 내가 래들리 집 마당으로 굴러들어갔을 때 들려온 소리 때문이었다. 그 소린 내가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후 오빠의 아우성과 함께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보도 쪽에서 난 소리 같지는 않았고, 누군가 집 안에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5. 그집은 그저 슬픈 집을 뿐이야 나의 투정이 받아들여져서 당분간 그 놀이가 지연되리라 판단했지만 오빠는 여전히 놀이를 계속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확실하게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못하게 하더라도 오빠는 배역의 이름만 바꾸면 어떤 연극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딜은 이 계획에 무조건 찬성했다. 또한 그는 새로운 놀이를 시도할 땐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젬 오빠의 모든 점을 추종했다. 초여름에 딜은 내게 결혼신청을 했는데, 금방 잊어버린 듯했다. 또한 나를 잘 지켜보고 점찍어 놓았으며 자기가 사랑한 유일한 여자애라고 말했다가도 역시 금방 잊어비린 듯했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그를 때렸지만 효력이 없었다. 여전히 오빠라고만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집 위에서 함께 궁리를 하다가 오로지 세 번째 역할이 필요할 때만 나를 불렀다. 나는 계집애라 불리는 것이 속상해 바보 같은 놀이에는 절대 끼여들지 않고 머디 애킨슨 아줌마와 함께 아줌마네 현관에서 저녁노을이 물들어가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오빠와 나는 철쭉꽃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후 늘 머디 아줌마네 마당을 자유로이 뛰어다녔지만 아줌마와는 그다지 가깝게 사귀진 못했다. 오빠와 딜이 나는 소외시키기 전까지는 단지 인자한 성품의 이웃 아줌마일 뿐이었다. 우린 그집 정자만 빼놓고는 언제나 잔디 위에서 놀기도 하고 넓디넓은 뒷마당을 누비고 다닐 수도 있었다. 아줌마는 관대했지만 우리는 그 무언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오빠랑 딜의 행동거지로 나는 머디 아줌마랑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머디 아줌마는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낭비라 했다. 그녀는 미망인이었는데 멜빵 달린 작업복 바지에 낡은 밀짚모자를 쓰고 종일 꽃밭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오후 다섯시가 지나 샤워를 하고 카멜레온처럼 달라진 모습으로 현관에 나타난 아줌마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워 그 거리를 압도하곤 했다. 아줌마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잡초까지도 ,,,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건 너트풀이었다. 작은 잎사귀 하나라도 발견할 때면 제1차 대전 때 마린 강가에서 전투를 하듯 우리를 멀리 떼어놓고 철뚜껑으로 짓누른 다음 독한 제초제를 밑등부터 뿌려댔다. 그냥 뽑기만 하면 안 되나요? 나는 손가락만한 잎사귀에 그렇게 요란스럽게 방역하는 것이 이상스럽게 여겨져 물어보았다. 뽑아버려야 해, 스카웃. 저기도. 머디 아줌마는 연한 싹을 뽑아서는 손가락으로 비벼댔다. 약간의 풀즙이 스며나왔다. 이것 봐. 너트풀 하나가 마당 전체를 망쳐놓곤 한단다. 가을철이 되면 마른 풀이 바람에 날려 메이컴 전체가 너트풀 천지가 되지. 아줌마는 마치 옛날 흑사병 이야기라도 하듯이 진지했다. 메이컴 사투리를 쓰는 아줌마의 말씨는 명쾌했다. 아줌마는 우리 모두에게 성과 이름을 함께 불러주었고 생긋이 미소지을 땐 섬세해보이는 금니가 드러나보이기도 했다. 내가 감탄하면서 아줌마처럼 금니를 갖고 싶다고 하면 혀차는 소리를 내며 의치를 밀어보였다. 자, 이걸 보렴. 진지한 아줌마의 그런 몸짓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머디 아줌마는 젬 오빠와 딜에게도 항상 따뜻이 대해주었다. 아줌마는 이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었는데 우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그다지 자랑삼지 않는 아줌마의 음식솜씨를 한껏 누릴 수 있었다. 아줌마는 커다란 케이크 하나와 작은 케이크 세 조각을 구워놓은 다음 길 쪽을 향해 소리쳤다. 젬 핀치, 스카웃 핀치, 찰스 베이커 해리스야, 이리 오렴. 우리의 재빠른 행동은 언제나 아줌마의 보상을 받았다. 여름의 황혼 무렵은 길고도 평화로웠다. 요즘 들어 나와 머디 아줌마는 현관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이 노랑에서 빨강으로 물드는 해질녘을 바라보기도 하고 흰털제비가 이웃집 담 위를 살짝 스치듯 날아 학교 건물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차분히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아줌마. 어느 날 저녁 나는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부 래들리 씨가 살아 있나요? 그의 이름은 아서고, 물론 살아 있단다. 아줌마는 떡갈나무 흔들의자를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우리집 미모사꽃 냄새 좀 맡아보렴. 오늘은 정말이지 천사의 숨결 같구나. 그걸 어떻게 아세요? 으응, 무엇을? 그 부 ,,, 아니, 아서가 살아 있다는 거요. 그 질문은 아주 이상한데? 섬뜩한 얘기이기도 하구. 진 루이스, 그는 살아 있단다. 그가 실려나가는 걸 본 적은 없으니까. 그가 죽어서 박제를 해서 굴뚝에 처박아놓았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거지? 오빠가 그랬어요. 후훗, 젬은 점점 잭 핀치를 닮아가는구나. 머디 아줌마는 아버지의 동생인 잭 삼촌과 또래여서 함께 자랐다. 머디 아줌마는 이웃 지주인 프랭크 버포드 의사의 딸이었고, 버포드 선생님의 의학을 전공했는데도 모든 식물에 매료되어 가난하게 살았다고 했다. 잭 삼촌이 가진 식물로는 내시빌에 있는 그의 집 창문 위의 화초가 전부였고, 그래서인지 부자였다. 잭 삼촌은 크리스마스를 우리집에서 보내곤 했다. 그때마다 길 건너에 대고 머디 아줌마에게 결혼하자고 큰소리로 말하면 아줌마도 되받는 것이었다. 좀더 크게 말씀하시지, 잭 핀치 씨. 저 우체국까지 들리도록 말이야. 뭐라구요? 난 아직도 안 들리는걸! 오빠와 나는 결혼신청의 하나라고 여겼다. 그러나 잭 삼촌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삼촌은 사십 년 동안이나 머디 아줌마에게 프로포즈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아줌마는 아줌마대로 삼촌이 놀림을 당한 첫남자이자 결혼을 생각해본 마지막 남자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의 공격과 방어의 의미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서 래들리는 집에 있는 것뿐이란다. 그것이 전부야. 너도 밖에 나오고 싶지 않을 땐 집에 있지 않니? 네, 하지만 전 집 안에만 있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는 왜 그렇지 않을까요? 머디 아줌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도 그 이야긴 들었을 텐데.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머디 아줌마는 의치를 제자리에 놓았다. 돌아가신 래들리 씨가 침례교도였다는 건 알고 있지? 아줌마도 마찬가지잖아요. 나의 신앙은 그다지 뿌리가 깊지 않았단다. 난 그냥 침례교도일 뿐이지. 아줌마는 침례의식을 안 하세요? 하기야 하지, 매일 목욕을 하니까. 초기 침례교도는 정확히 선을 그어 판단한 후엔 다른 어떤 종파와도 친교를 끊었단다. 침례교도들은 모든 즐거움은 죄라고 믿지. 어떤 침례교도는 숲속에서 불쑥 나와서는 우리집 꽃에다가 대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들 이라고 하던걸. 아줌마네 꽃을 보고두요? 그래, 요 아가씨야. 나랑 지옥불에 떨어질 거라는 거야. 그들은 내가 성경은 읽지 않고 신의 주변에서만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거든. 머디 아줌마가 개신교가 말하는 지옥에서 영원히 끓을 생각을 하니 목사님의 교리에 대한 믿음까지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사실 아줌마의 사리는 분명했고, 스테파니 아줌마처럼 이웃 일로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오빠와 나는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는 믿지 않아도 머디 아줌마만큼은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머디 아줌마는 한 번도 우릴 고자질하거나 귀찮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사생활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지 않은 탓일지도 ,,, 그래도 아줌마는 우리의 친구였다. 이 끝도 없는 숙제 속의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그런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건 말도 안 돼요. 아줌마는 가장 훌륭하신 분인걸요. 머디 아줌마가 싱긋 웃었다. 고맙구나, 꼬마 아가씨. 사실 침례교도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조차 죄라고 하고 있거든.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지. 그럼 아서 아저씨는 여자를 안 만나려고 집에만 계시는 걸까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말도 안 돼요. 전 그 아저씨가 천국을 찾아 현관 밖에라도 몹시 나오고 싶어할 것 같아요. 아버진 하느님은 네 자신을 네가 사랑하는 것만큼 널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머디 아줌마는 흔들의자를 멈추고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넌 너무 어려서 이해 못하겠지만 때론 네 아빠처럼 위스키 병을 손에 든 사람보다 성경책을 든 사람이 더 나쁘기도 하단다.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빠는 위스키를 안 마셔요. 아빤 평생 한 방울도 안 마시 ,,, 아니, 네 맞아요, 딱 한 번 마신 적이 있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어요. 머디 아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너희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는 취할 때까지 마신다 해도 다른 사람 같지는 않을 거다. 다만 세상엔 죽은 후의 일을 걱정하느라 이 세상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자, 그럼, 거리를 내려다보고 더 생각해보렴. 아줌마는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부 ,,, 아서 아저씨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들요. 무슨 말인데? 나는 소문으로 들은 것을 모두 얘기했다. 그 소문의 대부분은 흑인들에게서 나온 말이고 나머지는 스테파니 크러포두에게서 일 거다. 머디 아줌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내게도 그런 말을 했으니까. 어느 날 한밤중에 일어나보니 그가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난 스테파니에게 그래서 어떻게 했지? 침대로 모시기라도 했니? 라고 말해주었단다. 그랬더니 아무 말 못하더군.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머디 아줌마의 말투는 누구든 입을 다물게 하는 힘이 있었다. 스카웃, 그런 것 다 거짓말이란다. 그 집은 그저 슬픈 집일 뿐이야. 난 아서 래들리가 어린 소년일 때를 기억한단다. 사람들이 뭐라 말하건 아서는 언제나 기분좋게 이야기 했었지. 그는 미친 건가요? 머디 아줌마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쯤은 그럴지도 모르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거니까. 저 닫혀진 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 무슨 비밀들이 ,,, . 아빤 오빠와 나에게 집에서나 길 한복판에서나 똑같이 대해주세요. 나는 아버지를 감싸야 할 의무를 느끼며 말했다. 착하기도 하지. 나는 예를 들려는 것일 뿐, 네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란다. 그래, 난 분명히 말할 수 있어. 네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집에서나 공공장소에서나 똑같이 행동한다고 ,,, 새로 구운 파운드 케이크 좀 가져가련? 난 파운드 케이크를 정말 좋아했다. 다음날 아침 오빠와 딜이 뒷마당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다가가자 늘 그랬듯이 저리 가라고 쫓았다. 싫어, 이 마당 오빠가 샀어? 나도 여기서 놀 권리가 있어, 젬 핀치. 딜과 오빠가 뭔가 쑥덕거리더니 다가왔다. 그럼, 넌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딜이 경고하듯 말했다. 안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넌 마치 밤새 어른이라도 된 듯한 말투구나. 좋아, 그게 뭔데? 오빠가 조용히 얘기했다. 부 래들리에게 간단한 쪽지를 전하려고 해. 어떻게?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공포를 느끼며 이겨내려 했다. 머디 아줌마와의 대화도 괜찮았지만, 역시 그녀는 나이가 많았고 그 현관이 아무리 아늑하다 해도 내 또래들의 정서와는 달랐다. 오빠는 낚싯대에 쪽지를 끼워 덧문 안으로 집어넣을 거고 그때 누군가 나타나면 딜이 종을 치기로 되어 있었다. 딜의 오른손에는 우리 어머니의 은종이 들려 있었다. 그집 옆으로 돌아갈 거야. 오빠가 은밀히 설명했다. 어제 길 건너에서 잘 살펴보니까 덧문이 조금 열려 있었거든. 그 창문틈으로 밀어넣을 수 있을 거야. 오, 오, 오빠. 너 이제 딴소리 하면 안 돼, 미스 떠벌이!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난 안 볼래. 누군가가 ,,, . 그래, 그렇게 해. 넌 저쪽 끝에서 망이나 봐. 딜은 집 앞길 쪽을 맡을 테니까. 누가 오면 종을 울리는 거야. 자, 그럼 됐지? 응, 그런데 뭐라고 썼어? 딜이 대답했다. 가끔 나오실 수 없냐고 썼고, 그 안에서 뭘 하시는지 말해달라고 했고, 절대 귀찮게 하지 않으며 아이스크림을 사드리고 싶다고 되도록이면 정중하게 썼지. 모두 미쳤어. 우릴 죽여버릴 거야. 이건 내 생각인데 그가 우리와 얘기라도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딜이 말했다. 그가 기분이 나쁠지 어떻게 알아? 야, 만약 몇 백 년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고양이나 먹으며 갇혀 있다면 넌 기분이 좋겠니? 그는 분명 수염이 여기까지 내려올 거다. 너희 아빠처럼? 우리 아빤 수염이 없어. 아빤 ,,, . 딜은 기억을 짜내려는 듯 말을 그쳤다. 으흠, 알 만해. 내가 말했다. 네가 기차로 떠나기 전에 너희 아빠가 근사한 검은 수염을 길렀다고 말했잖아. 그래, 누가 뭐래? 하지만 아빤 지난 여름에 수염을 깎아버리셨어. 맞아, 난 증명할 편지도 있어. 이 달러도 함께 보내주셨거든. 계속하시지. 난 네 아빠가 경찰유니폼도 보내줬다구 하구선 한 번도 안 입더라, 그렇지? 넌 언제나 말뿐이야, 딜 해리스. 그러자 딜 해리스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중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편비행기에 열일곱 번이나 올라갔었다는 얘기며 노바스코티아에 갔던 일, 코끼리를 본 일, 또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조 훨러 육군 준장이어서 칼을 남겨주었다는 것을 목청껏 이야기했다. 너희들 모두 조용히 해봐. 오빠는 소리를 치고는 집 아래로 급히 내려가 누런 대나무 장대를 끌고 왔다. 이게 저기까지 닿을까? 그 집을 만지기까지 한 용감한 사람은 낚싯대가 필요없는 거잖아? 그냥 앞문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지 그래? 내가 말했다. 이, 이건 달라. 얼마나 더 얘길 해야 알아듣겠니? 오빠가 말했다. 딜이 쪽지를 꺼내 오빠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조심스레 그 낡은 집을 향해 나아갔다. 딜이 전신주에 남고 오빠와 나는 그집 맞은편 보도로 천천히 다가갔다. 나는 오빠 반대편 커브길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어. 내가 말했다. 오빠는 보도를 살피고 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낚싯대에 쪽지를 매달아 미리 봐둔 창문으로 길게 뻗쳐보았다. 몇 인치쯤 모자랐다. 오빠는 할 수 있는 한 앞으로 더 구부렸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낚싯대를 내질러댔다. 보다못해 나는 오빠에게 다가갔다. 장대에서 쪽지가 떨어지질 않아. 좀더 구부리면 내가 넘어질 것 같구 ,,, 제자리로 가 있어, 스카웃. 나는 되돌아와 텅 빈 커브길을 바라보았다. 가끔 오빠를 돌아보았다. 장대가 내려오면 다시 치켜올리면서 끈기있게 쪽지를 창문턱에 올리려 하고 있었다. 난 부 래들리가 그걸 받아도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울리는 종소리가 나의 상념을 흐트러놓았다. 난 거리 아래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부 래들리의 피묻은 얼굴이 아닌 아버지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딜은 있는 힘을 다해 종을 흔들어댔다. 그때 오빠의 모습은 너무 끔찍해보여 뭐라고 말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는 장대를 질질 끌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종 그만 울리지. 아버지가 딜을 저지했다. 딜이 추를 움켜잡았다. 침묵이 뒤를 이었고 나는 종을 계속 울려주길 갈망했다. 아버지는 모자를 젖히고 손을 허리에 올려놓았다. 젬 뭐하고 있는 거냐? 아무 것두 아니에요. 야단 치치 않을 테니 말해봐라, 어서. 전 ,,, 저희들은 래들리 씨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중이에요. 뭘 그렇게 전하려는 거지? 편지요. 이리 가져와봐. 오빠는 꼬질꼬질한 종이조각을 내밀었다. 무엇 때문에 래들리 씨를 나오게 하려는 거지? 우리와 함께 있으면 즐거워하실 것 같아 ,,, . 딜은 아버지가 쳐다보자 말하려다 말고 급히 말문을 닫았다. 젬, 이미 얘길했지만 그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아라. 너희 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는 래들리 씨가 무엇을 하건 그의 일이라고 했다. 그가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호기심에 찬 아이들을 피해 집 안에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 거라며 그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라고 했다. 야밤에 아버지가 노크도 없이 우리 방에 불쑥 들어온다면 기분이 어떻겠느냐. 우린 그와 같은 일을 래들리 씨에게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래들리 씨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기묘하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그 자신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했다. 덧붙여 일반시민이라면 옆창문이 아닌 앞문으로 당당히 연락을 취하는 것이 상례가 아니냐고 했다. 끝으로 초대받기 전엔 절대 근처에도 가지 말 것과 어리석은 놀이도 하지 말 것. 특히 이 거리, 이 마을 안에선 절대로 누구를 놀려대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저희는 그를 놀리려는 게 아니었어요. 비웃지도 않았구요. 저희는 다만 ,,, . 그것도 마찬가지야. 그를 놀린 거요? 아니, 그가 살아온 삶은 이웃의 생각으로 교화시키려 하는 것 말이다. 오빠는 애써 힘을 내 말했다. 그러지 않았어요, 저흰 그러지 않았는데요.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웃었다. 넌 이미 그렇게 말한 거야. 그리고 당장 이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둬라. 너희들 모두. 오빠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넌 법률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그렇지? 아버지의 입매는 억지로 일직선으로 만들려고 한 듯 의심스레 꽉 다물어져 있었다. 오빠는 핑계댈 구석이 없음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잊은 서류철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오빠는 결국 늙은 변호사의 회유에 말려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오빠는 계단 근처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다가 아버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쪽을 향해 소리질렀다. 법률가가 되려고 했지만 지금으로선 확실하지 않아요! 6. 부 래들리 훔쳐보기 그래라. 딜이 내일 떠난다며 라이첼 아줌마네 집에서 놀아도 되냐고 오빠가 묻자,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했다. 잘 가라고 인사 전하고, 내년에 다시 보자고 해라. 우리는 라이첼 아줌마네 낮은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오빠가 메추라기 휘파람을 불자 딜이 어둠 속에서 대꾸했다. 바람 한점 없네. 저길 좀 봐. 오빠가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엔 거인 같은 딜이 머디 아줌마네 호두나무 위에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밤엔 달 속에 십자가가 들어 있는 것 같지? 딜이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딜은 신문과 노끈으로 열심히 담배를 만들고 있었다. 아니야, 숙녀가 들어 있어, 거기에 불붙이지 마. 그 냄새가 마을을 온통 뒤덮을 거야. 메이컴에서는 달 속에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빗는 숙녀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우린 네가 보고 싶을 거야, 딜. 그보다 에이베리 아저씨를 보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내가 말했다. 에이베리 아저씨는 길 건너 헨리 라파예트 두보스 할머니 집에서 하숙을 했다. 접시 수집이 취미인 그는 매주마다 접시를 바꿔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또한 매일밤 아홉 시쯤이면 코를 골아대곤 했다.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우린 그 아저씨의 굉장한 공연을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적이 있었다. 그건 분명 마지막 광경이었다. 우리에게 들킨 이후로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우리가 라이첼 아줌마네 집 계단에서 헤어지려는데 딜이 우리를 불렀다. 맙소사, 저길 좀 봐. 그는 길 건너를 가리켰다. 처음엔 포도넝쿨로 덮여 있는 현관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보니 활모양의 오줌줄기가 잎사귀 아래로 이어져 가로등 불빛에 노란 원으로 빛나고 있었다. 최소한 땅에서 삼 미터 높이는 돼보였다. 우리에겐 거의 그렇게 보였다. 그것에 대해 오빠는 에이베리 아저씨가 어쩌다 실수로 저렇게 되었다고 했고, 딜은 한 들통의 물은 마셨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계속 거기에 관한 논쟁과 각자의 무용담으로 또다시 나를 소외시켜버렸다. 난 이 분야에 관한 한 할말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르지 않은가. 딜은 하품에 기지개를 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산책하자, 우리 ,,, . 그 말은 수상쩍게 들렸다. 메이컴에선 누구도 괜히 산책을 하진 않았다. 어디로 산책을 가자는 거니, 딜? 딜은 머리를 남쪽으로 홱 돌렸다. 좋지. 오빠가 맞장구치며 내가 안 된다고 반대하자 부드럽게 말했다. 넌 따라오지 않아도 돼, 오월의 천사여. 넌 갈 필요없어. 알고 있겠지만 ,,, . 오빠는 지나간 승리에 우쭐대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반대신문에 있어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스카웃, 우린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냥 저 가로등까지 갔다올 거야. 우리는 보도 아래로 한가로이 걸어갔다. 현관에 있는 그네는 무게를 못 견뎌 삐꺽거렸고 어른들의 잡담소리는 부드럽게 밤공기에 울려퍼졌다.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의 웃음 소리도 멀리 들려오는 그런 밤이었다. 됐어, 형. 좋아, 스카웃, 넌 집으로 가. 뭐 할 건데? 딜과 오빠는 조금 열린 덧문으로 간단하게 부 래들리를 훔쳐볼 것이고, 난 그들을 따라가지 않을 경우, 집으로 곧장 가서 나의 도톰한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럼 도대체 왜 오늘밤까지 기다려 온 거야? 밤엔 누구에게든 들킬 염려가 없고, 아버지도 책에 파묻혀 왕국이 떠밀려온다 해도 모를 것이며 부가 우릴 죽인다 해도 방학이 끝났으니 별로 억울할 것 같지도 않고 낮에 어두운 곳을 보는 것보다는 밤에 보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빠, 제발 ,,, . 스카웃, 너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는데 입을 다물든지, 집으로 가든지 해. 난 정말이지 선언하는데 넌 나날이 계집애가 돼가고 있다구! 이리하여 난 선택의 여지없이 그들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들키지 않으려고 래들리 집 뒷마당 높은 철사 울타리를 생각해냈다. 그 울타리는 정원과 옥외변소에 둘러쳐져 있었다. 오빠가 맨 아랫단 철사를 들어주어 딜이 들어갔고 이어서 나도 들어갔다. 그런 다음 우리는 오빠를 위해 철사를 들어주었다. 그 공간은 오빠에게 너무 좁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마. 오빠가 속삭였다. 케일밭으로 걸어가지 마. 소리가 굉장할 거야. 이런 요구들 때문에 한 발자국 걷는 데 일 분은 걸렸다. 오빠가 멀리 달빛 아래서 손짓을 해서 조금 빨리 움직였다. 우리는 뒷마당 사잇문에 다다랐다. 조금 밀어보니 삐걱 소리가 났다. 침 뱉아. 딜이 속삭였다. 오빠 때문이야, 우린 갇혔어. 어떻게 나가? 내가 중얼거렸다. 쉿, 빨리 침이나 뱉아, 스카웃. 우리는 입이 마르도록 침을 뱉았다. 그런 다음 오빠가 천천히 문을 들어 옆으로 밀어 울타리에 기대놓았다. 그제야 뒷마당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은 더욱 조용했다. 삐딱한 현관 위에 두 개의 문과 창문이 있었고 기둥을 대신하여 거친 버팀대가 지붕끝에 서 있었다. 고물 난로가 구석에 놓여 있고, 모자걸이에 달려 있는 거울엔 달이 으스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 오빠가 발을 들으며 조그만 소음을 냈다. 왜 그래? 닭똥이야. 그가 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어떤 방향이든 캄캄한 곳을 헤쳐나가야 했기에 딜이 앞장서가며 하느님 이라고 조그맣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확인하며 나아갔다. 그리곤 집 옆을 돌아 살금살금 기어 덧문이 있는 창문으로 갔다. 창문턱이 오빠보다도 몇 인치 높았다. 손을 올려봐, 딜. 아니, 기다려봐. 우리는 손으로 깍지 껴서 가마를 만들고 딜을 우리 손에 올라타게 하곤 그를 창문턱으로 올렸다. 빨리 해. 오빠가 속삭이듯 말했다. 더이상 못 버티겠어. 딜이 내 어깨를 치고 우린 그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뭐가 보이니? 커튼만 보여. 흐린 불빛이 조금 움직였어. 자, 여기서 빨리 나가자. 그리곤 오빠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뒤쪽으로 다시 가보자. 나는 반대를 하려 했지만, 오빠는 쉬잇 하면서 조용히 하라고만 했다. 뒤쪽 창문에서 다시 해보자, 형. 하지만, 딜. 딜은 멈춰서서 오빠를 앞장세웠다. 오빠가 계단 아래 발을 디디자, 나무판자가 삐그덕거렸다. 다시 꼼짝 않고 서 있다가 천천히 몸무게를 실었다. 조용했다. 두 계단씩 올라 현관 위에 서서 앞뒤로 움직여보고 창문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였다. 나는 그림자를 하나 보았다. 모자를 쓴 남자의 그림자. 처음엔 나무인 줄 알았지만 바람 한점 없었고 나무가 걸을 리는 만무했다. 뒷현관은 달빛으로 가득찼고, 그 그림자는 갓 구워낸 토스트처럼 바삭거리며 오빠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다음 딜이 보았다. 얼굴을 가렸다. 그림자가 오빠에게 닿았을 때에야 비로소 오빠도 보았다. 그는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그 그림자는 오빠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팔이 나왔다가는 다시 내려져 그대로 있었다. 그리곤 돌아서서 현관을 따라 사라져버렸다. 현관 아래로 젬 오빠라 뛰어내려 미친 듯 달려왔다. 우리는 케일밭 이랑 사이를 나는 듯이 뛰었다. 케일밭 중간쯤 와서 내가 걸려 넘어졌다. 이웃집에서 들리는 커다란 엽총소리 때문이었다. 딜과 오빠가 내게로 뛰어들었다. 스카웃! 오빠의 숨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했다. 학교 마당 울타리로, 빨리! 오빠가 철조망을 들었다. 딜과 내가 기어들어 학교 마당의 유일한 떡갈나무를 향해 반쯤 뛰었을 때야 오빠가 없음을 알아챘다. 그리곤 다시 울타리로 뛰어갔다. 오빠가 버둥거리며 철사에 걸린 바지를 벗어 던지고 있었다. 그리곤 속바지 바람으로 떡갈나무를 향해 마구 뛰었다. 안전지대에 도착하고 나니, 무감각이 엄습했다. 그러나 오빠의 마음은 아직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집으로 가자, 아빠가 찾으실 거야. 우리는 학교 마당을 가로질러 우리집 뒤에 있는 사슴목장 울타리 아래로 기어들어서는 뒷담을 넘었다. 오빠는 멈춰서서 좀 쉬자고 했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우리 셋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천히 앞마당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래들리 집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기 가보자, 우리가 안 나타나면 이상하게 여기실 거야. 나단 래들리 씨가 엽총을 들고 문간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머디 아줌마와 스테파니 아줌마 사이에 서 있었고, 라이첼 아줌마는 에이베리 아저씨 가까이에 서 있다. 우리는 머디 아줌마 옆으로 끼여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희들 모두 어디 있었니? 무슨 소리 못 들었니? 무슨 일인데요. 오빠가 물었다. 래들리 씨가 케일밭에 들어온 흑인을 쏘았다는구나. 어머, 그를 맞췄나요? 아니. 스테파니 아줌마가 대답했다. 공포만을 쐈다는구나. 놀라서 질겁을 했을 거야. 이 근처에 하얀 흑인이 지나가면 바로 그 사람인 줄 알아라. 그리고 또 소리가 나면 이번엔 총부리를 그렇게 높이 올리진 않을 거다. 개건 흑인이건, 또는 ,,, 젬 핀치! 네? 그때 아버지가 물었다. 네 바지는 어디다 뒀지? 바지요? 그래, 바지.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 앞에 속바지 바람으로 나타났으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그건요, 핀치 아저씨.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나는 딜의 음모를 보았다. 눈이 더 커지고 통통한 얼굴은 더 동그래졌다. 그래 뭐지, 딜? 저, 제가 따먹었어요. 그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땄다구, 어떻게? 딜은 뒷머리를 한 번 만지곤 다시 이마를 더듬었다. 저 고기연못에서 스트립 포커를 했거든요. 오빠와 나는 한숨을 놓았다. 이웃들도 이해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시 모두 굳어졌다. 스트립 포커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그걸 밝힐 기회 없이 라이첼 아줌마가 불자동차 사이렌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왔다. 두두두, 이 장난꾸러기! 딜 해리스, 내 연못에서 도박을 했다구? 내가 널 발가벗겨놓겠어, 이 꼬마 도령아! 아버지가 갑작스런 곤경에서 딜을 구해주었다. 잠깐, 라이첼, 그런 짓을 하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너희들 모두 카드놀이를 했다는 거냐? 오빠는 눈을 딱 감고 딜의 계략을 받아넘겼다. 그게 아니라요. 그냥 시합이었어요. 나는 오빠에 대해 깊이 감탄했다. 시합이 그저 위험스러운 것이라면 카드놀이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젬, 스카웃, 다시는 포커나,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딜에게 가서 바지 찾고, 제자리로 가거라. 걱정 마 딜. 오빠는 보도를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위로했다. 아줌만 널 어쩌지 않으실 거야. 아빠가 잘 얘기하실 거야. 너 정말 기발했어. 잠깐, 들리니? 우리는 멈춰서서 아버지의 목소릴 들었다. ,,, 심각한 건 아니고 ,,, 아이들도 생각할 ,,, 라이첼. 딜은 안심했다. 하지만 오빠랑 나는 아니었다. 아침이 오면 바지를 보여야만 했으니까. 내 것을 하나 줄게. 딜이 계단 앞에서 말했다. 오빠는 고맙지만 소용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딜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다시 뛰어 나오더니 오빠가 보는 앞에서 내 뺨에 키스했다. 그는 나와의 결혼약속을 기억했음이 분명했다. 편지해, 알았지? 그가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우린 오빠의 바지를 되찾기 전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밤 뒷현관에서 나는 소리는 세 배나 크게 들리는 듯했다. 자갈밭을 스치는 모든 소리는 부 래들리가 앙갚음을 하려고 헤매는 소리 같았고 지나가는 흑인들의 웃음소리도 부 래들리로부터 풀려나 우리를 따라오는 소리로 들렸다. 덧문에서 퍼덕대는 곤충들의 소리도 부 래들리가 손가락으로 미친 듯 철사를 끊어내는 소리 같았다. 멀구슬나무는 악의를 품은 듯 살아서 꿈틀거렸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오빠의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어서 더 자, 꼬마 세눈박이야. 돌았어? 쉬잇, 아빠 방에 불이 켜졌어. 이울어진 달빛 속으로 오빠의 후들거리는 다리가 보였다. 찾으러 가야겠어.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지마, 안 돼. 오빠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었다. 가야 돼. 그럼 아빠를 깨울 거야. 그러기만 해봐, 가만두나. 나는 오빠를 내 침대로 끌어 앉히곤 이치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오빠, 나랑 래들리 씨가 그걸 발견하면 오빠옷인 줄 알 거야. 아빠께 보인다면 좀 곤란하겠지만, 그것으로 끝이잖아. 침대로 가서 자. 그게 바로 내가 염려하는 거야. 그래서 찾으러 가려는 거구. 가슴이 아팠다. 혼자 그곳으로 가다니 ,,, . 나는 스테파니 아줌마 말이 떠올랐다. 나단 씨는 다음을 위해 총알을 장정해뒀다는 것, 흑인이거나, 개거나 ,,, 오빠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결사적이었다. 그건 그럴 가치가 없어. 오빠, 조금은 속상하겠지만 오래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다가 총알이 머리를 날리면 어쩔래? 제발 ,,, . 오빠는 끈기있게 숨을 내쉬었다. 스카웃, 저, 그건 있지, 스카웃. 오빠가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날 한 번도 때리지 않으셨어. 난 그걸 계속 지키고 싶어. 이건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 걸러 한 번쯤은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으신 걸로 난 알고 있었는데 ,,, 그럼 오빠 말은 아빠가 아무 것도 알아채지 못하셨다는 거야? 그럴 거야, 그래서 난 그걸 지켜나가고 싶다는 거지. 스카웃, 오늘밤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때 난 처음으로 오빠와 동료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끔 오빠의 행동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길게 가진 않았다. 이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제발. 나는 애원했다. 잠깐만이라도 생각해봐. ,,, 저기 좀 앉아서. 입 다물어! 아빠가 다시는 아무 말도 안 하실 것 같지는 않아. 나 아빠 깨울래. 정말이야. 오빠는 나의 잠옷깃을 움켜쥐어 비틀었다. 그럼 나도 갈래. 나는 숨이 막혀왔다. 안 돼, 더 성가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저 뒷문 빗장을 벗기고 오빠가 계단을 내려가는 걸 지켜보았다. 새벽 두 시쯤 되었을까. 달도 지고 격자무늬의 그림자가 보풀 같은 희미한 공간 속으로 흐릿해져갔다. 오빠의 하얀 옷자락이 밝아오는 새벽에 놀라 깜박거리며 달아나는 유령 같았다. 실날같은 미풍이 내 옆구리에 흘러내린 땀에 닿아 서늘하게 느껴졌다. 지금쯤은 사슴목장 뒤쪽으로 해서 학교마당을 건너고 있겠지. 지금은 울타리를 돌고 있을 거야. 보나마나 아까 가던 대로 가겠지. 시간은 더 많이 걸릴지도 몰라. 아직 걱정할 필요는 없어. 래들리 씨의 엽총소리가 날 때까진 걱정하지 않을래. 그때 나는 뒷울타리가 삐걱대는 소릴 들은 듯했지만, 그건 나의 착각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기침소리에 나는 다시 숨을 죽였다. 우린 가끔 한밤중 화장실로 순례를 할 때,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를 보곤 했다. 아빠는 때때로 밤에 일어나서 우리를 한 번 돌아보고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나는 불빛이 켜 있는 복도를 응시하느라 눈이 아팠다. 불이 꺼지고 나는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밤짐승들도 모두 돌아가고 바람에 잘 익은 물수레나무 열매가 지붕 위로 내리굴러서 마치 북을 치는 듯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는 어둠을 더욱 황량하게 했다. 저기 돌아오고 있었다. 오빠의 하얀 셔츠가 뒷울타리 위로 쑥 올라오더니 점점 크게 다가왔다. 계단을 올라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말없이 바지를 들어보였다. 오빠는 누웠고, 잠시 침대가 움직이곤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7. 누가 보내준 선물일까 오빠는 일주일 동안이나 말도 없이 우울해 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난 오빠의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만약 밤 두시에 래들리 집을 혼자 갔다 왔다면 그 다음날은 나의 장례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될 수 있는 한 오빠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 했다. 개학을 했다. 이학년도 역시 좋지만은 않았다. 아니, 더 나빴다. 그때까지도 카드만을 보여줄 뿐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이젠 옆반이 된 캐롤라인 선생님 반은 웃음이 들려오는 횟수에 따라 진도를 추측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애들은 낙제하여 다시 일학년에 머물러 질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학년이 되어 잘된 일 한 가지는 오빠와 같은 시간에 수업이 끝난다는 것이었다. 세시가 되면 우리는 함께 집으로 걸어오곤 했다. 어느 날 오후 집으로 돌아오느라 학교 마당을 걷고 있었는데, 오빠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며칠 만에 들어보는 제대로 된 말투였다. 나는 용기를 주려 애쓰며 말했다. 무슨 얘긴데? 그날 밤에 대해서야. 그날 밤 일은 한 마디도 안 해줬어. 오빠는 마치 모기라도 날려보내듯 내 말에 손을 흔들어 날려버리곤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반바지 찾으러 갔을 때 있잖아 ,,,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바지가 온통 헝클어져 있었거든. 그런데 가보니까 ,,, . 오빠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그곳에 가보니까, 바지가 잘 개어져서 철망 이쪽에 나와 있는 거야 ,,,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야. 울타리 이쪽에 ,,,?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집에 가면 보여주겠지만, 찢어진 걸 꿰매놨어. 여자 솜씬 아닌 것 같구. 꼭 내가 한 것처럼 삐뚤빼뚤거렸어. 그건 거의 ,,, . 누군가 오빠가 그걸 찾으러 갈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오빠는 몸서리를 쳤다. 마치 누군가 내 마음을 훤히 알고 있듯이 내 행동을 내다보고 있었던 거야.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스카웃? 오빠의 질문엔 호소력이 있었다. 나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말했다. 오빠랑 함께 살지 않는 한 무엇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야. 어떤 땐 나도 모르는걸. 그때 오빠와 나는 우리의 나무를 지나고 있었다. 그 옹이구멍 안에는 회색실로 꼬아진 공이 놓여 있었다. 잡지 마, 오빠. 여긴 누군가의 비밀장소일 거야. 아냐, 스카웃. 아니야, 내 말이 맞아. 월터 커닝햄 같은 아이는 이곳에 내려올 때마다 물건을 숨기고 우리가 따라오면 가져가버려. 여기에 놔두고 며칠 기다려보다가 그래도 계속 있을 땐 우리가 갖자, 응? 좋아, 네 말도 맞는 것 같다. 여긴 큰 녀석들을 피해 물건을 감추는 꼬마들의 비밀장소일 거야. 우리가 물건을 발견한 것도 학교가 시작됐을 때이니까. 응, 하지만 여름방학 때는 한 번도 이곳을 지나지 않았잖아. 우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공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셋째날이 되어 오빠는 그 공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부터 그 옹이구멍에서 나오는 건 모두 우리 것으로 간주했다. 이학년은 엄했다. 오빠는 자기도 처음엔 그랬다며 좀더 있으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육학년은 되어야 뭔가 가치있는 걸 배우게 된다고 했다. 육학년은 처음부터 오빠를 흥미로 이끌었다. 이집트 시대를 배울 때는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어버리는 지경이 되었다. 한 판을 앞에 놓고 또 하나는 뒤에 두고 다리를 포개어 마치 그림에 나오는 이집트인처럼 걸으려 온 힘을 기울이면서 그 사람들은 이렇게 걸었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난 그들이 그런 식으로 걸으면서 어떻게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종알거렸다. 그러면 오빠는 그들은 미국인이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루어놓았다고 했다. 화장실 종이나 영구보존의 미이라도 그들이 발명한 것이며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되었겠느냐고 외쳐댔다. 그에 대해 아버지는 오빠가 하는 말에서 형용사를 몽땅 빼버린다면 사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부언설명을 해주셨다. 남 앨라배마는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았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모르는 사이에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겨울은 있는 듯 마는 듯, 지나간 봄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여름으로 녹아들었다. 길고 긴 가을은 얇은 재킷이면 충분할 만한 기온을 유지했다. 오빠와 난 우리들의 활동범주를 총총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느 날 오후였다. 다시 옹이구멍 앞에 멈추어보니 하얀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번엔 오빠가 나에게 꺼내는 영광을 주었다. 나는 비누에 새긴 조그만 조각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소년이고 또 하나는 짧은 스커트를 입은 소녀였다. 난 마법에라도 걸린 물건을 본듯 비명을 지르며 땅에 내던졌다. 오빠가 얼른 집어들었다. 왜 그래? 오빠가 소리지르며 붉은 흙을 털었다. 이건 훌륭한 거야. 이런 건 본 적이 없어. 그것을 내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거의 완전한 두 아이의 모형이었다. 소년은 짧은 바지를 입었고 헝클어진 매끈한 머리칼이 눈썹까지 내려와 있었다. 나는 오빠를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칼이 가리마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빠도 여자 인형을 한 번 보고는 내게로 눈을 돌렸다. 그 소녀상은 나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건 우리를 조각한 거야. 오빠가 말했다. 누가 그랬을까? 우리 주위에 누구 조각하는 사람 알고 있니? 에이베리 아저씨. 그 아저씨는 이와 비슷한 일을 할 뿐이야. 내 말은 진짜로 조각하는 것 말이야. 에이베리 아저씨는 일주일에 평균잡아 장작 하나를 자르고 갈아 이쑤시개를 만들어 씹고 다녔다. 스테파니 아줌마의 옛 애인이야. 내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 아저씬 저 아래 살잖아. 우릴 그렇게 자세히 보았을까? 어쩌면 현관에 앉아 스테파니 아줌마를 보는 대신 우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 아저씨라도 그랬을 테니까. 오빠는 한참 동안이나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물어도 오빠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집으로 돌아와 그 비누조각인형을 오빠의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그로부터 이주일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우리는 껌 한 통을 또 발견했다. 래들리 집 부근의 모든 것에는 독이 들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우리는 신이 나서 씹어댔다. 그 다음 주에는 옹이구멍이 녹슨 메달을 내놓았다. 오빠는 그걸 아버지에게 보였다. 아버지는 그것이 철자법 우승 메달인데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메이컴 학교 철자법 경시대회에서 우승자에게 준 메달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고는 누군가 잃어버린 거라며 주인을 찾아주려 해보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찾아낸 곳을 말하려 하자 오빠가 낙타처럼 뒷발로 걷어찼다. 그리곤 우승한 사람을 기억하실 수 있느냐고 여쭈어보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흘 후에는 우리들에게 굉장한 선물이 나타났다. 그것은 고장난 주머니 시계로 체인에 알루미늄 칼까지 달려 있는 것이었다. 오빠, 이건 백금이지? 모르겠어. 아버지께 보여봐야지. 아버지는 새것이라면 십 달러는 족히 될 거라고 하셨다. 학교에서 누구와 교환했니, 젬? 어유, 아니에요. 오빠는 갖고다니던 할아버지의 시계를 꺼냈다. 아버지는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일주일에 하루만 그 시계를 차고 다니게 허락했던 것이다. 오빠는 그 시계를 차는 날은 달걀이라도 끼고 걷듯 어기적거리며 다녔다. 아빠, 아빠만 괜찮으시다면 대신 이걸 갖고 다닐래요. 어쩌면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시계에 대한 신기함이 시들해지면서 그것을 갖고 다니는 것이 짐스러운 일이 됐고, 오 분마다 시계를 확인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용수철 하나와 작은 핀 하나로 열심히 고쳐보려 했지만 시계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휴, 못 고치겠어. 스카웃? 응? 이런 것들을 보내주는 분께 편지를 쓰는 게 어떨까? 참 좋은 생각이야, 오빠. 감사의 편지를 쓰자 ,,, 어, 왜 그래? 오빠는 귀를 막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도 모르겠어, 모르겠어. 나도 왠지 몰라, 스카웃 ,,, . 그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나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 아니야, 난 못해. 내가 대신 말할까? 아니야 그러지 마, 스카웃. 스카웃! 왜? 오빠는 저녁 내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얼굴이 밝아져 내게로 왔다가 다시 마음이 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자, 여기 있어. 편지나 쓰자. 내가 종이와 연필을 오빠의 코앞에 갖다댔다. 그래, 존경하는 아저씨께 ,,, . 그 사람이 남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난 머디 아줌마라고 생각하는데.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으음, 머디 아줌마는 껌을 씹지 않아. 오빠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아줌마 솔직하신 거 알지? 내가 언젠가 껌을 드리니까, 싫다고 하시면서 껌은 입천장에 들러붙어 말을 제대로 못하게 만든다고 하셨어. 오빠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럴듯하지 않니? 응, 어쨌거나 그 아줌마는 주머니시계도 없으니까. 오빠가 시작했다. 존경하는 아저씨께. 우리는 그것을 감사 ,,, 우리는 선생님께서 옹이구멍 안에 보내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제레미 애티커스 핀치 올림. 이렇게 사인하면 오빤지 모르실 거야. 오빠는 지우고 그냥 젬 핀치라고 다시 썼다. 나도 그 이름 아래 진 루이스 핀치(스카웃)라고 적었다. 오빠는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다음날 학교 가는 길에 오빠는 앞장서서 뛰어가 나무 앞에 멈추었다. 나무를 올려다 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를 불렀다. 스카웃! 나는 뛰어갔다. 누군가 시멘트로 옹이구멍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울지 마, 스카웃 ,,, 울지마, 걱정 마. 오빠는 학교로 가는 동안 내내 중얼거렸다. 점심때 오빠는 음식을 한입 가득 집어넣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나갔다. 아직 지나가지 않았어. 다음날도 오빠는 불침번을 섰고 마침내 그 대가를 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나단 아저씨. 안녕, 젬, 스카웃. 저, 아저씨. 래들리 씨가 돌아섰다. 저, 혹시 저 아래 옹이구멍을 아저씨가 막으셨나요? 그래, 내가 메워버렸다. 왜요, 아저씨? 나무가 죽어가고 있거든. 병이 들면 시멘트로 막아줘야 하는 거란다. 너도 알아둬라, 젬. 오빠는 오후 늦게까지 그것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게 되자 생각에 잠긴 듯 옹이구멍을 가볍게 두드리곤 점점 우울해졌기 때문에 나는 오빠에게서 거리를 두고 걸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우리는 아버지를 마중나갔고 돌아오는 길에 오빠가 말했다. 아빠, 저 아래에 있는 나무 있잖아요. 무슨 나무? 학교에서 오자면 래들리 집 마당 쪽에 있는 거요. 으응. 그 나무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 잎사귀를 봐라, 푸르고 무성하잖니 누런잎 하나 없이 ,,, . 그건 병이 난 것도 아니죠 ,,,? 저 나무는 너희들처럼 건강하다, 젬. 그런데 왜 그러지? 나단 아저씨가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집 나무니까 더 잘 알고 계실 테지.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가셨고, 오빠는 현관기둥에 기대어 어깨를 비비고 서 있었다. 가려워, 오빠? 나는 한껏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안 들어갈 거야? 조금 이따가. 오빠는 해가 질 때까지 서 있었고, 나는 오빠를 기다렸다. 집으로 들어올 때 보니까 오빠는 울고 있었다. 오빠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8. 예기치 않은 친구 그해 겨울로 접어들면서 메이컴에 전해져 내려온 예언들이 불가사의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많은 체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지난 보름 동안이 1885년 이래 가장 추웠다고 들려주었다. 에이베리 아저씨에 의하면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거스르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담배를 피우거나 서로 싸우면 계절이 뒤죽박죽이 된다고 로제타 석에 씌어 있다는 것이다. 로제타 석이란 1799년 나일 강변에서 발견된 이집트 비석이다. 오빠와 나는 자연을 변화시킨 데 대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이웃이 불행을 겪었고 그래서 우리는 불안했던 것이다. 그해 겨울 래들리 부인이 목숨을 잃었다. 부인의 죽음은 어떠한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웃들은 그녀가 칸나에 물을 주는 시간외엔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빠와 나는 마침내 부가 그녀를 해친 거라고 단정했지만 그집을 다녀온 아버지는 그녀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우리는 적잖이 실망을 느꼈다. 여쭤봐. 오빠가 속삭였다. 오빠 나이가 더 많으니까 오빠가 해. 그러니까 네가 하라는 거야. 아빠, 아서 씨 보셨어요?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신문 너머로 굳은 표정을 짓고 쳐다보셨다. 아니. 내가 더 질문을 하려 하자 오빠가 나를 저지했다. 아버지가 래들리에 대해 아직도 예민해 있으니 더이상 조르지 말라고 했다. 지난 여름 연못에서의 스트립 포커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근거가 없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창문 밖을 본 나는 놀라움으로 거의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질렀고, 아버지는 그 소리에 놀라 면도를 하다 말고 목욕탕에서 뛰어나오셨다. 아빠, 세상이 끝났어. 제발 어떻게 좀 하세요. 나는 아빠를 창문으로 끌고 갔다. 아니야, 저건 눈이 오는 거란다. 오빠는 눈이 계속될지를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오빠도 눈을 본 적은 없었지만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듯했다. 아버지 역시 눈에 관한 한 오빠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아마 녹으면 비가 될 거야. 전화벨이 울리자 아버지가 수화기를 들었다. 율라 메이 양인데 처음 오는 눈이라 학교를 쉰다고 하는구나. 율라 메이는 메이컴의 수석 전화교환원으로 공공기관의 발표나, 결혼 초청, 소방서 사이렌을 울렸고, 의사선생님이 부재중일 땐 응급치료 지시까지 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우리를 식탁으로 불러 창문 대신 접시를 보도록 명령해야만 했다. 그때 오빠는 눈사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글쎄다. 나도 잘은 모르겠는걸. 눈이 눈덩이를 만들 만큼 올지 어떨지 ,,, . 칼퍼니아 아줌마가 들어와 눈은 잘 뭉쳐질 거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뒷마당으로 뛰어나갔다. 푹신한 눈이 얇게 깔려 있었다. 이 안에서 걷지 마. 저봐, 네 발자국으로 온통 엉망이 됐잖니. 나는 발자국으로 움푹움푹 해진 눈자국을 돌아보았다. 오빠는 눈이 조금만 더 오면 그것을 긁어모아 눈사람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혀를 내밀어 눈송이를 받았다. 타는 듯했다. 뜨거워 오빠. 아니야. 너무 차가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먹지 마, 스카웃. 아껴야 되잖아. 그냥 내리도록 놔둬. 난 여기서 걷고 싶어. 그래, 그럼 저기 머디 아줌마네 집으로 걸어가자. 오빠가 앞마당을 가로질러 껑충거리며 뛰었고, 나도 그 발자국을 따라 쫓아갔다. 머디 아줌마네 집 앞 길에 서 있을 때, 에이베리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분은 불그스름한 얼굴에 벨트 아래로 배가 툭 불거져 있었다. 너희들이 한 짓을 봤겠지? 메이컴에선 빙하시대 이후 한 번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 같은 고약한 말썽쟁이들이 이렇게 날씨를 뒤바꿔놓았지 뭐냐? 지난여름 아저씨가 벌인 그 광경을 한 번 더 보게 되길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를 그 아저씨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것이 대가라면 할 말이 없기도 했다. 나는 에이베리 아저씨가 어디에서 그런 기상학적 통계를 모아오는지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로제타 석에 직접 씌어 있을 테니까. 젬 핀치, 얘 젬 핀치! 머디 아줌마가 부르셔, 오빠. 현관 부근에 아르메리아가 눈 속에 묻혀 보이지 않으니 밟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오빠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멋있죠, 머디 아줌마? 글쎄다. 그렇지만도 않은걸. 만약 얼음이 언다면 내 철쭉꽃은 다 죽어버릴 테니! 머디 아줌마의 낡은 밀짚모자 위에 눈송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줌마는 덤불 위에 엎드려 누런 삼베로 꽃나무를 싸매주고 있었다. 오빠가 왜 그렇게 해주느냐고 물었다. 따뜻하게 해주려는 거지. 어떻게 따뜻하게 해주나요. 그건 느끼지도 못할 텐데. 글쎄,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더 추워지면 꽃들이 얼어버린다는 건 확실하거든. 그래서 감싸줘야 하는 거야! 이젠 알겠니? 네. 머디 아줌마? 으응? 아줌마네 눈 좀 가져가도 되나요? 그럼, 모두 가져가렴. 저기 삼태기로 나르면 되겠지. 머디 아줌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젬 핀치, 그 눈으로 뭘 하려는 거지? 두고보면 아실 거예요.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눈을 마당으로 가져왔다. 이걸로 뭘 할 건데, 오빠?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자, 이제 앞마당으로 옮기자. 발자국만 따라 와. 오빠는 역시 주의주는 걸 잊지 않았다. 꼬마눈사람 만들 거야? 아니, 진짜 눈사람. 그러니까 열심히 모아야 해. 오빠는 뒷마당에서 괭이를 가져와서는 장작더미 옆을 파냈다. 그러면서 나오는 지렁이와 벌레는 옆으로 치웠다. 그리곤 다시 빨래바구니에 흙을 담아 앞마당으로 날랐다. 우린 마침내 바구니로 흙을 다섯 차례나 나르고 눈을 두 바구니 모았다. 이건 흙투성이잖아. 이따가 다시 할 거야. 오빠는 흙을 듬뿍 퍼서 흙더미 위에 덧붙여 가볍게 도닥거리며 뼈대가 세워질 때까지 붙여나갔다. 검둥이 눈사람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 적도 없는데. 조금 있으면 하얗게 될 거라니까. 오빠는 툴툴거렸다. 젬 오빠는 뒷마당으로 가서 부러진 복숭아 나뭇가지를 엮어 흙을 붙여서 뼈대를 만들었다. 저건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가 팔을 엉덩이에 올려놓은 것 같아. 봐, 허리는 굵고 팔은 짧잖아. 더 크게 만들 거야. 오빠는 진흙 사람에 흙탕물을 발랐다. 오빠는 잠시 생각에 잠겨 바라보다가 허리선 아래에 커다란 배를 본떠 만들며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눈사람 에이베리 아저씨! 그렇게 보이지 않니? 눈을 붙이기 시작했다. 앞쪽은 오빠가 하고 나는 뒤쪽만을 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에이베리 아저씨가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나무를 조금 꺾어다가 눈, 코, 입, 단추를 만들어 에이베리 아저씨와 비슷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엔 스토브 장작 하나로 마무리를 했다. 오빠가 뒤로 물러나 그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정말 멋져. 꼭 오빠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아. 그래, 정말 그렇지? 오빠가 수줍은 듯 우물거렸다. 우린 도저히 점심때까지 아버지를 기다릴 수가 없어 전화를 걸어 놀래줄 일이 있다고 했다. 아빠는 돌아오자마자 환호를 하며 정말 훌륭하다고 칭찬해주었다. 난 네가 자라서 무엇이 될지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넌 언제나 기발하거든. 아버지가 칭찬을 하자 오빠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뒤로 물러서는 걸 예리하게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점점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 아들, 앞으로 무엇이 될 테냐 ,,, 공학박사, 법률가, 초상화가 ,,, 이 앞마당에서 명예훼손죄가 일어나고 있다니 ,,, . 우리, 이 친구, 변장을 좀 시켜야겠는걸. 아버지는 툭 튀어나온 배를 조금 깎아내고 스토브 장작 대신 빗자루로 바꾸고 앞치마를 입히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오빠는 그렇게 하면 흙이 드러나버려 완전히 망쳐버릴 거라고 말했다. 네가 무슨 일을 하건 난 간섭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이웃의 모든 것을 풍자해 작품으로 만들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그렇겠지? 풍자가 아니에요. 단지 그 아저씨처럼 보일 뿐이에요. 에이베리 씨는 그렇게 생각지 않을 거다. 아하! 오빠가 곧장 달려가서 머디 아줌마네 뒷마당으로 사라졌다가 잠시 후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가져온 밀짚모자를 씌우고 팔 안에 원예용 가위를 끼워놓았다. 아버지도 훌륭하다고 말해주었다. 머디 아줌마가 현관으로 나와 우리를 길건너에서 쳐다보았다. 갑자기 커다랗게 웃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젬 핀치 이 악마, 내 모자를 어서 가져오지 못할까! 오빠가 아버지를 올려다보자 아버진 고개를 저었다. 머디 아줌만 괜히 그러는 거야. 네 작품에 정말 감동했을 거다. 아버지가 머디 아줌마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서로 손짓을 하며 무슨 얘긴지를 나누었다. 겨우 몇 마디가 들려왔다. ,,, 저런 허깨비를 마당에 세워놓다니! 애티커스! 저걸 계속 세워놓을 참인가요? 오후가 되어 눈은 그쳤지만 기온은 더 떨어져서 해가 진 후엔 에이베리 아저씨의 예언이 사실로 드러났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집 안 모든 벽난로에 불을 지폈지만 추위는 여전했다. 아버지는 칼퍼니아 아줌마에게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아줌마는 높은 천장과 긴 창문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차로 아줌마를 데려다주었다. 잠들기 전에 아버지는 내 방 난로에 석탄을 넣으며 온도계가 화씨 십육 도를 나타낸다며 아버지의 기억으로는 가장 추운 날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우리의 눈사람은 밖에서 꽁꽁 얼어 있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니, 몇 분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가 싶더니, 아버지의 코트가 내 위에 둘러쳐졌다. 벌써 아침인가요? 스카웃, 일어나야겠다. 아버지는 내 잠옷가운과 코트를 들고 있었다. 옷부터 입어라. 오빠는 아버지 옆에서 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서 있었다. 한 손은 코트깃을 쥐고 나머지는 주머니에 쿡 찔러넣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뚱뚱해보였다. 어서 스카웃. 여기 양말과 신발이 있다. 비몽사몽 간에 신발을 대충 신었다. 아침인가요? 아니, 좀더 있어야 아침이다. 자, 어서. 마침내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무슨 일 났나요?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마치 새들이 가야 할 곳과 언제 비가 올지를 알고 있듯 우리 이웃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황금빛 음성과 급한 발걸음, 웅성거림이 나를 어찌할 수 없는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누구네 집인데요? 머디 아줌마네다. 아버지가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앞문에 서서 머디 아줌마네 집 식당창문에서 분출되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기다렸다는 듯 사이렌 소리가 웨앵웨앵웨앵 계속 울부짖었다. 전부 타버리겠어요. 오빠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자, 이제 너희들은 아래로 내려가서 래들리 집 앞에 있거라. 여기서 멀리 떨어져서. 알겠지?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부는지 가늠할 수 있겠니? 네, 우리 가구는 안 꺼내도 될까요? 아직은 괜찮다. 젬, 내가 말한 대로 뛰어가라. 스카웃을 돌봐줘야 한다. 알겠지? 꼭 데리고 있어. 우리는 밀리다시피 래들리 집으로 갔다. 불길이 머디 아줌마네 집을 조용히 삼켜버리는 동안 거리는 남자 어른들과 차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왜 서두르지 않을까. 왜 좀더 빨리 못하지 ,,, . 오빠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그 이유가 밝혀졌다. 낡아빠진 불자동차가 추위에 시동이 꺼져 마을사람들이 밀어오고 있었던 데다가 소화전에 호수를 이었지만 물이 쏟아지는 듯하더니 이내 얼어서 보도 위로 달가닥거리며 떨어져버렸다. 오, 하나님 ,,, . 오빠가 내 팔을 잡았다. 괜찮아, 스카웃. 아직 걱정할 때가 아니야. 그렇게 되면 말해줄게. 메이컴 남자들은 각자 옷을 입거나 벗은 채로 머디 아줌마네 가구를 끌어내 길 위로 날랐다. 무거운 떡갈나무 흔들의자를 나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머디 아줌마가 가장 아끼는 것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씀씀이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에이베리 아저씨의 얼굴이 위층 창문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소리칠 때까지 그는 매트리스며 가구를 밀어 내려뜨렸다. 딕, 어서 내려와요. 사다리 갑니다. 거기서 빠져나와요. 어서, 에이베리 씨! 에이베리 아저씨가 창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스카웃, 꼼작 못하게 됐어 ,,, . 에이베리 아저씨가 갇혀 있었다. 나는 오빠의 팔에 얼굴을 묻고 오빠가 소리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풀려났어, 스카웃. 무사하셔. 그제야 고개를 드니 에이베리 아저씨가 위층 현관을 건너고 있었다. 난간 위에서 그네를 타듯 뛰어 기둥을 타고 소리지르며 미끄러져 머디 아줌마의 머루나무 위로 떨어졌다. 갑자기 어른들이 후퇴하더니 우리 쪽으로 내려왔다. 더이상 가구도 나르지 않았고 불길은 순식간에 이층으로 퍼져 지붕을 삼키고 있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창문틀에서 오렌지빛 불길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오빠, 꼭 늙은 호박 같아. 저길 봐, 스카웃. 연기가 우리집 쪽으로 넘실대고 라이첼 아줌마 집도 강둑의 안개가 피어오르듯 자욱했다. 남자들이 호스를 그곳으로 들이댔다. 애보츠빌에서 온 불자동차가 왱왱 거리며 커브를 돌아 우리집 앞에 멈추었다. 그 책 ,,, . 뭐라구? 오빠가 물었다. 그 (톰 스위프트) 그거 내 것도 아닌데 ,,, 딜 건데 ,,, . 걱정 마, 아직은 괜찮아. 오빠가 말했다. 저길 봐. 이웃사람들 속에서 아버지가 코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 있었다. 마치 축구경기라도 관람하듯 머디 아줌마 옆에 서 있었다. 봤지? 아직 걱정하시지 않잖아. 왜 아빠는 집 위에 올라가지 않으실까? 너무 늙으셨어. 목이 부러질 거야. 가서 우리 물건 끌어내자고 할까? 됐어, 언제 그래야 하는지는 알고 계실 거야. 애보츠빌에서 온 소방차가 우리집에 물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누군가 지붕 위에 서서 가장 위험스러운 곳을 가리켰다. 나는 우리의 허깨비 눈사람이 까맣게 녹아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머디 아줌마의 밀짚모자가 흙더미 위에 떨어져 있었고, 원예용 가위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 때문에 어른들은 코트와 목욕가운을 벗어던지고 파자마 상의나 잠옷을 바지에 쑤셔넣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있는 곳은 점점 더 춥게 느껴졌다. 나는 오빠에게서 팔을 빼내어 양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며 발을 굴렀다. 또 한 대의 불자동차가 스테파니 아줌마네 집 앞에 섰다. 그렇지만 수도전이 없어 소화기만으로 불을 꺼야 했다. 머디 아줌마의 양철지붕이 화염에 녹아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장작더미 사이로 불길이 솟아오르자 이웃집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이 모포를 들고 몰려와 불꽃과 장작더미 위를 두들겨댔다. 처음엔 한두 명씩, 그리곤 무리를 지어 남자들이 그곳을 떠날 때쯤엔 멀리서 먼동이 트고 있었다. 그들은 메이컴 소방차를 시내로 밀고 갔고, 애보츠빌 소방차도 떠났다. 육십 마일이나 떨어진 클락스 페리에서 온 소방차만이 남겨졌다. 오빠와 나는 미끄러지듯 길가로 내려갔다. 머디 아줌마가 마당에서 까맣게 그을어버린 퀭한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못하도록 우리를 집으로 몰았다. 머디 아줌마는 당분간 스테파니 아줌마 집에서 머물 거라고 했다. 내가 온몸을 떨고 있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뜨거운 코코아 마실 사람? 아버지는 부엌 스토브에 불을 당겼다. 코코아를 마시다가 아버지는 처음엔 이상하다는 듯, 그 다음은 꾸짖기라도 할 듯 나를 살펴보았다. 너희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그곳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 그럼요, 그렇게 했어요. 우린 ,,, . 그럼, 저건 누구 담요지? 담요요? 그래. 이 꼬마아가씨야. 그 담요는 우리 것이 아닌데. 갈색의 북미풍 담요가 내 어깨 위에 둘러져 있었고 나는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머, 어떻게 된 거지? 저 ,,, 전 ,,, . 나는 영문을 몰라 오빠를 쳐다보았지만 오빠는 더욱 어리둥절해 하며 담요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으며 아빠가 시키시는 대로 했을 뿐, 래들리 집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열을 올리며 설명하다가 갑자기 말을 그쳤다. 나단 아저씨는 불난 곳에 없었어요 오빠가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말했다. 그 아저씨를 본 것 같아요. 아니, 봤어요. 그분이 모포를 씌워주셨을거예요, 아버지. 정말 ,,, . 알았다. 아버지가 천천히 웃었다. 어찌됐건 오늘밤은 메이컴 사람 모두가 밖으로 나왔구나. 젬, 찬장에서 포장지를 가져와라. 우리가 ,,, . 아빠, 안 돼요! 오빠는 마치 실성한 듯 우리의 비밀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듯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옹이구멍에서부터 바지사건까지 모두 쏟아놓았다. ,,, 우리가 그곳에서 아무 것도 발견 못하도록 나단 씨가 시멘트로 발라버린 거예요. 사람들 말대로 그는 미쳤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절대로 우릴 해치거나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날 밤 나를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잘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대신 바지를 꿰매주기까지 한걸요. 그는 절대로 우릴 해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그럴 거다, 아들아. 네 말이 맞다. 이 담요는 우리가 보관하는 게 좋겠구나. 언젠가는 스카웃이 감사하게 될 날이 올 거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부드러워 안심은 됐지만 나는 아버지가 오빠의 얘기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감사를 해요? 부 래들리. 너는 불에 정신이 팔려 그 아저씨가 모포를 둘러준 것도 몰랐던 거야. 오빠가 흉내를 내듯 모포를 들고 나에게 살금거리며 다가올 때는 뱃속이 뒤틀리면서 거의 토할 것만 같았다. 그는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 이렇게 돌아보며 ,,, 다시 살금 ,,, 사 ,,, 알금 다가와서 이렇게 ,,,!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웃었다. 제레미, 그렇다고 더이상 문제를 일으키진 말아라. 오빠가 이마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무 짓도 안 할 거예요. 그래도 난 오빠의 눈에서 새로운 모험의 광채를 볼 수 있었다. 스카웃, 생각해봐. 네가 잠깐만 돌아봤다면 넌 그를 볼 수 있었던 거야. 오, 맙소사. 칼퍼니아 아줌마는 정오가 되어서야 우리를 깨웠다. 아버지는 잠을 푹 자지 못한 상태에선 어떤 것도 배울 수 없다며 우리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우린 칼퍼니아 아줌마의 명령에 따라 앞마당으로 나갔다. 머디 아줌마의 밀짚모자가 얇은 얼음 속에 박혀 있었다. 호박반지 속에 있는 파리를 연상시켰다. 우린 원예용 가위를 흙 속에서 찾아냈다. 뒷마당으로 가보니 머디 아줌마가 얼어붙은 철쭉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가위 가져왔어요. 정말이지 안된 일이에요. 뒤돌아보는 머디 아줌마의 얼굴 위로 친근한 미소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난 항상 작은 집을 원했단다, 젬 핀치. 하느님께서 철쭉꽃을 심을 더 넓은 땅을 주신 거야! 슬프지 않으세요?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그집은 머디 아줌마의 전부라고 말했었다. 슬프냐구? 아니, 그 오래된 암소 헛간은 정말 보기 싫었단다. 난 정말이지 백 번도 더 그집에 불을 놓고 싶었지. 내가 그곳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 .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진 루이스 핀치. 네가 모르는 일이 많이 있는 거야. 자, 보렴. 작은 집을 지어 두 명 정도한테 세를 주고 그리고 ,,, 고맙게도 앨라배마에서 가장 훌륭한 정원을 갖게 될 테니까. 내가 시작만 한다면 저 벨링그리스 궁전도 보잘것없어질 거다. 오빠와 나는 마주 바라보았다. 불은 어떻게 붙었어요. 오빠가 물었다. 잘 모르겠지만 분명 부엌의 가스관에서 시작된 것 같아. 지난밤 화분이 얼을까봐 그곳에 불을 켜 놓았거든. 그건 그렇구 지난밤 예기치 않은 친구를 갖게 됐다면서, 진 루이스? 어떻게 아셨어요? 애티커스가 오늘 아침 법원으로 가며 얘기해줬단다. 사실은 말이다, 난 너희들과 무엇이든 같이 나누고 싶거든. 그리고 나 역시 그 정도의 감각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머디 아줌마는 내게 있어 정말 수수께끼 같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가장 아끼던 정원조차 엉망진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기운차고 오빠와 나의 일에까지 진심어린 관심을 보여주다니. 아줌마는 나의 혼란을 알아챈 듯 말씀하셨다. 내가 지난밤에 유일하게 마음태운 것이 있다면, 그건 그 불로 인한 소동과 위험이었단다. 여기 있는 모든 이웃이 다칠 수도 있었거든. 에이베리 씨는 일주일은 몸져누워 있어야 할 거다. 그는 온힘을 다 써버렸고, 그러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지. 난 이미 그렇게 얘기했다마는. 자 그럼 손을 씻고 스테파니 아줌마가 안 볼 때 그에게 가져다줄 케이크를 만들어야겠구나. 아줌마는 나의 요리법을 삼십 년간 따라하고 있지만 내가 함께 산다고 해서 그 비결을 알려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지. 나는 머디 아줌마가 망해서 그 요리법을 넘겨준다 해도 스테파니 아줌마는 결코 따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머디 아줌마는 내게 요리법을 보여주었는데 특별한 비결이라면 설탕 같은 재료를 듬뿍 넣는 것이었다. 그날은 모든 게 멈춘 듯 고요했다. 공기는 차고 맑았으며, 법원 시계는 줄이 팽팽히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크게 울려퍼졌다. 머디 아줌마의 코가 빨개졌다. 난 여섯시부터 계속 밖에 나와 있었단다. 금방이라도 얼어버릴 것 같구나. 들어올린 손바닥은 십자무늬의 잔 금으로 가득했고 흙과 피가 말라붙어 갈색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다 엉망이 돼버리겠어요. 흑인을 좀 쓰시지 그러세요. 그리곤 오빠는 주저없이 말했다. 스카웃과 저도 도와드리겠어요. 고맙구나. 하지만 먼저 저쪽에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그리곤 우리 마당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허깨비 눈사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 건 번개같이 치울게요. 내가 대답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머디 아줌마의 입술이 소리없이 움직이더니 갑자기 손을 이마로 가져가고는 웃음을 못내 참지 못하고 우리가 떠나온 그 자리에서 계속 깔깔거리고 있었다. 오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으며 저런 모습이 바로 머디 아줌마일 거라고 말했다. 9. 아버지의 마음 너 그말 취소해! 나는 세실 제이콥에게 다그쳤다. 이 일은 앞으로 오빠와 나에게 닥쳐올 작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한 번만 더 싸웠다는 소릴 들으면 단단히 조처를 취할 거라고 했다. 이제 그런 유치한 싸움을 벌이기엔 나이도 먹었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자제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만큼 빨리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 순간엔 그 말씀을 잊고 있었다. 세실 제이콥이 잊게 만든 것이었다. 그저께 운동장에서 스카웃의 아빠는 검둥이 변호사라고 떠들어댔고 난 아니라고 대들었다. 나는 그 일을 오빠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별거 아니야, 아빠께 여쭤봐. 그날 저녁이었다. 아빠는 검둥이를 변호하세요? 물론이지, 스카웃. 그런데 검둥이가 뭐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아주 품위없는 말이니까. 학교에선 다 그렇게 부르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한 사람이라도 그러지 말아라. 그렇다면 왜 저를 학교에 보내세요? 거기선 온통 그런 걸 배우는데요. 아버지가 날 재미있다는 듯 조용히 바라보았다. 난 타협을 했는데도 첫날 이후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피해보려는 몸부림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지난달 구월 초부터는 현기증이나 가벼운 배앓이 정도의 일시적 증세를 호소했고,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 있는 라이첼 아줌마네 집 요리사 아들에게 가서 오 센트를 주고 그 아이 머리를 비벼보기도 했지만 나에겐 옮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난 또 다른 핑계를 찾아낸 것이다. 모든 변호사는 흑인을 변호하나요? 물론이다, 스카웃. 그럼 왜 세실 제이콥이 아빠더러 검둥이 변호사라고 하는 거죠? 마치 아빠가 법을 위반하시기라도 한다는 말투였어요. 아버지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난 그저 톰 로빈슨이라는 흑인을 변호하고 있단다. 그는 쓰레기 매립지 부근에 살고 있지. 칼퍼니아 아줌마네 교회에 다니고 있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더구나. 스카웃, 넌 세상일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다. 요즈음 마을에선 그 사람을 변호하면 안 된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지. 이번 여름회기 때 이 공판이 시작될 거다. 아주 예외적인 일이지만 존 테일러 판사님이 그때까지 연기해주셨단다 ,,, . 안 된다는데 왜 그걸 하시는 거예요? 몇 가지 이유가 있단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 공판을 맡지 않고는 이 마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고, 소위 이 메이컴 군의 입법부에서 일한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와 젬에게 어떤 일이든 가르칠 수조차 없게 되지. 그럼, 오빠랑 내가 아빠 말씀을 안 듣게 된다는 건가요? 말하자면 그런 거지. 왜요? 난 다시는 너희들에게 내 말을 들으라고 명령할 수가 없게 되거든. 스카웃, 모든 변호사들은 말이다, 그의 생애 중 한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공판이 한 가지는 있는 거란다. 이 아빠한테는 이번이 그렇단다. 앞으로 학교에서 이 일에 대해 불쾌한 일을 겪게 될 거다. 하지만 나를 위해 네가 해줄 일이 있다면 그건 머리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상관하지 말고 그 애들이 널 놀리는 재미를 주지 말라는 거다. 머리로 싸우라는 얘기지. 그것이 설령 네 공부에 조금 지장을 준다 해도 괜찮다. 아빠, 우리가 이길 건가요? 아니. 그러면 왜? 수백 년을 이어 내려온 모든 것이 꼭 이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단다. 아빠는 꼭 아이크 아저씨 같은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의 사촌형인 아이크 핀치 아저씨는 메이컴 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부동맹 기자 출신의 제대군인이었다. 그 아저씨는 후크 장군처럼 턱수염을 길렀는데 지나치게 자부심이 강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오빠와 나를 데리고 그 아저씨를 찾아뵈었고 그때마다 뺨에 키스를 해야 했다.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오빠와 나는 두 분의 전쟁에 관한 얘기를 또 한 번 공손히 들어야만 했다. 애티커스, 내가 말해주지. 아이크 아저씨는 그렇게 이야길 시작하곤 했다. 그 미조리 주에서의 타협은 우리를 능가한 거야. 또다시 그것에 뛰어들게만 된다면 전에 아니 그보다 더 전인 1864년에 그들을 패배시켰듯이 한 발 한 발 이겨나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스톤월 잭슨 장군이 파병되고 ,,, 아! 우리 어린양반들께 미안한데 ,,, 그리고 그 올 블루 라이트(잭슨장군)도 저 세상으로 가시고 ,,, 신이 그 영혼을 돌봐주실 거야 ,,, . 이리 오너라, 스카웃. 아버지가 팔을 벌렸다. 난 무릎으로 기어들어가 아버지의 턱 아래 내 머리를 끼워넣었다. 아버지는 팔을 둘러 천천히 흔들어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은 다릅니다 형님, 이번은 북군 양키와 싸우는 게 아닙니다. 친구들과 싸우는 거죠.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얼마나 쓰디쓴 결과인지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이며 여긴 우리 고향이니까요 다음날 나는 세실 제이콥과 학교 마당에서 마주쳤다. 너 그 말 취소해! 네가 먼저 싸움을 걸었잖아! 우리집에서 그러는데 너희 아빠는 창피를 알아야 되구 그 검둥이 녀석은 저 물탱크에 달아매야 된댔어!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를 때리려 손을 쳐든 순간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다. 난 주먹을 내리곤 그냥 걸어와버렸다. 스카웃은 겁쟁이래요! 그 소리가 귓전에 울려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싸움을 포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세실과 싸운다면 난 아버지를 실망시킬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오빠와 내게 부탁을 하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난 겁쟁이라는 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은 나를 무척이나 고상한 기분에 빠지게 했고, 그 기분은 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곤 성탄절이 오고 재난의 서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빠와 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바라는 것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잭 핀치 삼촌이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때면 언제나 잭 삼촌을 마중하러 나갔고, 그 이후 일주일을 함께 보내곤 했다. 그리고 원치 않는 것은 알렉산드라 고모와 프란시스의 양보를 모르는 굳은 얼굴이었다. 지미 고모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딱 한 번 그 담장에서 어서 내려와! 라는 말을 제외하곤 한 번도 내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이 세상 어느 것도 그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오래 전 두 분의 사이가 좋을 때 아들 헨리를 낳았고 헨리는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해 프란시스를 낳았다. 헨리 부부는 크리스마스 때면 프란시스를 부모님께 맡기고 홀가분한 생활을 즐겼다. 아무리 애원해도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를 우리집에서 보내지 않았다. 우린 언제나 핀치 가문의 영토로 가야 했다. 고모의 훌륭한 요리솜씨만이 이런 성스런 축제일을 프란시스 핸콕과 억지로 보내야 하는 것에 약간의 위안이 될 뿐이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는데, 내 기본방침은 될 수 있는 한 그 아이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내가 싫어하는 일만 골라했고 그 애는 그 애대로 나의 솔직한 표현을 싫어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아버지의 여동생이었지만 난 그것을 믿지 않았다. 오빠가 혈연관계나 바뀌어진 아이에 관한 얘기를 할 때면 난 그것이 바로 고모의 일이라고 단정지었고 할아버지가 핀치 대신 크러포드 집 아이로 바꿨을 거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고모는 꼭 에베레스트 산 같았다. 내가 그때까지 품어왔던 산에 대한 신비한 개념은 법률가나 재판장 같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선입견과 같았다. 어린시절 고모에 대해 내가 가진 인상은 차갑게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런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잭 삼촌이 열차에서 뛰어내린 후, 우리는 역무원이 기다란 포장꾸러미 두 개를 넘겨주길 기다려야 했다. 오빠와 나는 언제나 잭 삼촌이 아버지 뺨에 뽀뽀하는 걸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남자끼리 뽀뽀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오빠랑 악수를 하고 나를 한 번 휙 올려주었다. 하지만 별로 높이 들지는 못했다. 삼촌은 아버지보다 한 뼘 정도 작았다. 그는 고모보다 아래인 집안의 막내였고, 고모와 닮았지만 좀더 표정이 풍부해서 결코 그 날카로운 코와 턱이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무섭게 하는 않는 몇 안 되는 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발의 가시를 빼는 것 같은 가벼운 처치를 할 때에도 언제나 설명과 함께 아픔의 정도, 사용되는 의료기구에 관해서 일러주었다. 어느 크리스마스였다. 비틀린 가시가 발에 단단히 박혀 나는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며 숨어 있었다. 그때에도 잭 삼촌은 나를 붙들었다 괴상한 목사 얘기, 즉 후카를 피워 정신적 위안을 받고 강론은 오 분도 안 돼 후닥 해치우고 교회에 가길 무척이나 싫어하는 그런 목사 이야기로 나를 웃게 하고는 엉겁결에 가시를 빼 핀셋으로 들어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곤 내가 웃는 동안 가시를 빼낸 그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포장꾸러미는 뭐예요? 나는 역무원 아저씨가 넘겨준 길고 가는 꾸러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가씨가 상관할 일이 아닌걸. 삼촌의 대답이었다. 로즈 아일머는 잘 있나요? 오빠가 물었다. 로즈 아일머는 잭 삼촌의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는 매끈한 누런색 암컷으로 삼촌은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사는 몇 안 되는 여자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고양이의 스냅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고 우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점점 살이 찌는 것 같아요, 삼촌. 내가 말했다. 그렇지? 내가 병원에서 나오는 사람고기를 갖다 먹이기 때문이지. 어휴, 그건 정말 개 같은 얘기네요. 뭐라구 했지? 신경쓰지 마라, 잭. 그저 널 떠보려는 거니까. 칼이 그러는데 요즘 나쁜 욕을 자주 해댄다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잭 삼촌은 눈썹을 치켜올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난 되지도 않는 생각으로 그런 나쁜 말을 계속해대고 있었다. 그건 그런 말들이 갖고 있는 매력은 둘째치고 그것을 학교에서 주워들었다고 생각하여 아빠가 날 학교에 보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그날 저녁 식사 때 말했다. 저 좇 같은 햄 좀 집어주세요. 그때 잭 삼촌이 나를 가리키며 경고하듯 말했다. 이따 좀 봐야겠어, 꼬마아가씨.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잭 삼촌이 거실에 앉아 가까이 앉으라며 무릎을 두드렸다. 난 삼촌 냄새가 좋았다. 알코올 냄새 비슷한 더 기분좋은 달콤한 냄새였다. 그는 나의 앞머리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엄마보다 아빠를 많이 닮았어. 바지가 좀 작은 듯한데. 아직은 괜찮아요. 요즈음 좇 같다라든지 개 같다는 말을 잘 쓰는 것 같은데, 어때?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럼 안 되지. 그런 것은 극단적으로 짜증이 날 때만 쓰는 말이거든. 내가 머무는 동안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구나, 스카웃. 네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게 되면 자꾸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될 거야. 너도 숙녀가 되어야겠지, 그렇지? 나는 특별히 대답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하리라 믿는다. 자, 그럼 트리를 만들어볼까. 우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트리를 장식했고 그날 밤 두 개의 긴 꾸러미가 오빠와 나의 선물인 꿈을 꾸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선물더미로 뛰어들었다. 그건 잭 삼촌에게 부탁한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바로 우리가 바라던 그것이었다. 집 안에선 안 된다. 오빠가 벽에 걸린 사진틀에 조준했을 때 아버지가 말렸다. 형님이 쏘는 법을 가르쳐줘야겠어요. 네가 해야지. 난 불가항력에만 굴복할 뿐이니까. 법정에서 말하는 듯한 아버지의 음성은 우리를 주목시켰다. 아버지는 핀치 가문 영토에는 공기총을 가져가지 못하게 했고 우리가 만에 하나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공기총을 영원히 압수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프란시스를 쏘아버릴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핀치 가문의 영토인 방파제 끝 높은 벼랑에서 삼백육십육 야드쯤 내려가면 유서깊은 목화밭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핀치 가의 흑인노예들이 화물과 생산품을 싣고 얼음덩어리, 밀가루, 설탕, 농기구나 여성복을 내리곤 했다. 바큇자국이 선명한 길은 강가로부터 뻗어나와 검은 빛을 띤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길 끝에 원추형 계단이 있는 이층집이 서 있었다. 우리의 조상이신 사이먼 핀치 할아버지는 늙은 나이에 잔소리꾼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 건물을 지었다고 했다. 그집은 그 시대 말기의 일반적인 건축모형이었는데 내부구조는 사이먼의 고지식함과 얼마나 자손을 중시하고 신뢰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위층에 있는 여섯 개의 침실 중 네 개는 여덟 명의 딸이 썼고 하나는 외아들 웰컴 핀치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방문객을 위한 것이었다. 그 딸들 방의 계단과, 웰컴과 손님용 방의 계단은 따로 있었다. 딸들의 계단은 부모의 침실 옆에 있어서 사이먼 할아버지는 언제나 딸들의 외출을 감시할 수 있었다. 부엌은 독립되어 나무로 된 좁은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뒷마당 높은 장대 위엔 녹슨 종이 매달려 있는데 그 종은 밭에 나가 있는 일꾼을 부르거나 비상사태를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먼 옛날 미망인들이 바다로 나간 남편을 기다렸다는 망루가 있었지만 미망인은 없었고 그곳에서 사이먼 할아버지는 감독관을 살피거나 강을 바라보거나 근처에 있는 소작인들을 살피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 고모와 프란시스가 잭 삼촌에게 키스했다. 지미 고모부는 말없이 잭 삼촌과 악수했으며 오빠와 나는 프란시스에게 선물을 했고 그애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다. 오빠는 나이를 의식하여 자연스레 어른들에 휩쓸려서 나만 프란시스와 놀게 놔두었다. 프란시스는 열 살로 올백머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선물을 받았니? 나는 품위있게 물었다. 나도 막 물어보려는 참인데. 프란시스는 무릎까지 오는 바지와 빨간 가죽가방, 다섯 개의 셔츠, 묶지 않는 넥타이 등을 받았다고 했다. 좋은 거 받았구나. 나는 거짓으로 말했다. 오빠랑 나는 공기총을 받았어. 게다가 우리 오빠는 실험기구들도 받았어. 장남감이겠지. 아니야, 진짜야. 오빠는 보이지 않는 잉크도 만들어준댔어. 그것으로 딜에게 편지할 거야. 프란시스는 그래서 무엇을 할 건지 물어왔다. 음 ,,, 그러니까, 편지는 왔는데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았을 때 그 얼굴을 상상해봐. 아마 그 아인 돌아버리겠지. 프란시스와 이야기할 때면 난 언제나 대서양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앤 내가 이제껏 본 아이 중에서 가장 싫증나는 아이였다. 그애가 모빌에 살 때에도 나에겐 학교에 대해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으면서도 알렉산드라 고모에게는 나에 관해 별걸 다 일러바쳤었다. 그러면 고모는 아버지께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짐을 덜어내곤 했고, 아버진 잊어버리거나,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나를 꾸짖었던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토록 날카롭게 말씀하시는 걸 처음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알렉산드라, 난 애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뽀빠이 바지차림으로 마구 돌아다니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고모는 나의 옷차림에 대해선 거의 광적이다시피 했다. 치마를 입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아무리 호소해도 반바지는 숙녀되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밤낮 그런 바지만 입으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될 거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을 때 고모가 준 진주박힌 목걸이를 하고 소꿉장난이나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품행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난 아버지의 고독한 생애에 한줄기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바지차림으로도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고모는 그렇게 되려면 태양 빛과 같은 행동을 해야만 할 것이라고 하며 나는 잘 태어났지만 해가 갈수록 못되게 자란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감정을 아프게 한다면 나는 고모를 영원히 싫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아버지와 의논했다. 아버지는 우리집엔 이미 충분한 태양광선이 있으니까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또 내가 그런 식으로 자라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크리스마스 만찬 때면 나는 식당의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아야 했다. 고모는 큰 테이블에서 어른과 함께 자리잡은 오빠와 프란시스로부터 계속해서 나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럴 때면 나는 잠깐 공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그릇을 내동댕이친다든가, 다른 사람과 함께 앉도록 해준다면 예의바르게 행동할 거라고 간청해볼까 등등. 난 우리집 식탁에서도 아무런 말썽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결국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손님이니까 고모가 정해주는 곳에 앉아야 하며 알렉산드라 고모는 딸이 없어 여자아이를 이해 못하는 것뿐이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고모의 음식솜씨는 모든 것을 덮어주기에 충분했다. 세 가지 종류의 고기, 여름야채, 복숭아 피클, 두 가지 종류의 케이크와 맛좋고 향기로운 음식들이 지나치지 않은 품격으로 크리스마스의 만찬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저녁 식사 후에 거실을 차지하고 한가롭게 둘러앉아 있었다. 오빠는 바닥에 엎드렸고, 나는 뒷마당으로 나왔다. 코트를 입고 나가야지. 아버지가 졸린 목소리로 일렀지만 난 듣지 않았다. 뒷계단에서 프란시스가 내 옆에 앉았다. 음식은 최고였어, 프란시스. 할머닌 정말 요리를 잘하셔. 나에게도 요리법을 가르쳐주실 거야. 사내아이가 무슨 요리를 하니? 나는 오빠가 앞치마를 두른 것을 상상하며 킬킬거렸다.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남자들도 모두 요리를 배우고, 아내를 소중히 여겨서 아플 때는 시중도 들어야 한다고 하셨어. 난 딜이 내 시중드는 거 싫어, 내가 딜의 시중을 드는 편이 좋지. 딜? 응, 아직 말할 순 없지만 어른이 되면 우린 결혼할 거야. 지난 여름 나한테 청혼했거든. 프란시스가 야유를 퍼부었다. 그 아이가 어때서? 걘 아무 문제도 없어. 너 그럼, 할머니가 말씀하신 라이첼 아줌마 집에 오는 그 쬐그만 녀석 말하는 거냐? 응 바로 걔야. 난 그 자식에 대해 다 알고 있지. 프란시스가 거들먹거렸다. 뭘 안다는 거야?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걘 집이 없다더라. 아니야, 메리디안에 집 있어. 집이 없어서 이집저집 친척집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거래. 라이첼 아줌마가 여름마다 맡는 거구. 그렇지 않아, 프란시스! 프란시스가 비웃듯 웃음을 날렸다. 넌 가끔 지독히 멍청하단 말이야, 진 루이스. 그래, 역시 넌 모르는 게 좋겠지. 그게 무슨 소리니? 할머니 말씀대로 큰할아버지가 널 길 잃은 개처럼 키운다고 해도 그게 네 잘못은 아닐 테니까. 거기다 검둥이 변호사라 해도 어쩔 수 없을테고.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하겠는데, 그건 나머지 식구들에게 창피를 주는 거란 말이야. 프란시스, 너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니? 말한 대로야, 할머니가 그러셨는데 너를 멋대로 놔두는 것도 나쁜 데다가 검둥이 옹호자가 되셨으니 우린 이제 다신 메이컴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게 됐다고 하셨어. 너희 아빤 집안을 망쳐놓고 있어. 바로 지금 그런 일을 하고 계신단 말이야. 프란시스가 벌떡 일어나 옛날 부엌 복도로 내달려 안전거리에 이르자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스카웃 아빤 검둥이 옹호자래요.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따위 못된 소린 당장 집어치워야 될걸! 나는 있는 대로 씩씩거렸다. 훌쩍 뛰어 프란시스의 목덜미를 단단히 잡고는 그말을 취소하라고 다그쳤다. 프란시스가 몸을 홱 빼내어 옛날 부엌 쪽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검둥이 옹호자. 먹이감을 낚으려면 시간을 두는 것이 최선이다. 아무 말도 안 하면 프란시스는 분명 호기심이 발동해 나타날 것이다. 드디어 프란시스가 부엌에 나타났다. 너 아직도 미쳤니, 진 루이스? 나를 떠보려 말을 걸어왔다. 너랑 말 안 해. 내가 말했다. 프란시스가 복도로 나왔다. 너 그말 취소해! 이번엔 내가 조금 성급했다. 그애가 부엌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난 계단으로 가서 끈기있게 기다렸다. 오 분 정도 지나자 알렉산드라 고모의 말소리가 들렸다. 프란시스 어디 있니? 저쪽 부엌에 있어요. 그곳에서 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프란시스가 문으로 나와 소리쳤다. 할머니, 쟤가 날 못 나가게 해요. 이게 무슨 소리냐, 진 루이스? 나는 고모를 올려다보았다. 아니에요, 고모. 전 가만히 있는데요. 아니에요, 할머니. 쟤가 날 못 나가게 해요. 너희들 싸웠구나. 진 루이스는 날 미치게 해요, 할머니. 프란시스, 어서 거기서 나와. 진 루이스, 또 한 번 무슨 소리 들리면 네 아빠께 말씀드리겠다. 너 조금 전 개 같다고 했지. 아니에요. 분명히 들었다. 다신 그런 말 하지 마라. 알겠지? 알렉산드라 고모는 남의 말을 몰래 엿듣기를 잘했다. 고모가 들어가자 프란시스가 고개를 쳐들고 나와 이를 드러내며 비겁하게 웃었다. 이젠 바보 같은 짓 안 하는 게 좋을걸. 프란시스는 마당으로 훌쩍 뛰어내려 적당한 거리를 두고는, 마당의 풀을 걷어차기도 하고 가끔 나를 돌아보고 웃기도 하며 걸었다. 오빠가 현관에 나와 우리를 내다보곤 다시 들어갔다. 프란시스가 미모사나무 위로 올라갔다 내려와서 소리를 질렀다. 우와! 나는 누가 그런 소릴 했느냐고 물었다. 잭 삼촌? 프란시스는 내가 자기를 가만히 놔두면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젠 건드리지 않을게. 프란시스는 날 주의 깊게 쳐다보곤 충분히 누그러졌다고 판단이 됐는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검둥이 옹호자. 내 주먹이 그의 이빨로 날아갔다. 왼손이 이빨에 찢겨 오른손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잭 삼촌이 내 팔을 잡아 꼼짝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만. 고모는 프란시스를 돌봤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머리를 살피곤 볼을 쓰다듬었다. 프란시스의 고함소리를 듣고 아버지, 오빠, 지미 고모부가 현관에 나타났다. 누가 먼저 시작했지? 잭 삼촌이 다그쳤다. 우린 서로를 가리켰다. 할머니, 쟤가 나보고 매춘부라고 덤벼들었어요. 프란시스가 울부짖었다. 그 말이 맞니, 스카웃? 그런 것 같아요. 나를 내려다보는 삼촌의 모습이 고모와 너무도 닮아보였다. 그런 말 다신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 하지만 ,,, . 그럼 야단을 맞아야겠구나. 거기 좀 서 있어. 나는 서 있을까 말까를 생각했고, 그 지체된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돌아서서 달아나려 했지만 삼촌이 더 빨랐다. 난 갑자기 빵조각을 먹기 위해 잔디 위에서 끙끙거리는 개미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신 삼촌하고 말 안 할 거예요. 정말 싫어. 난 삼촌을 경멸해. 내일 죽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들이 무엇보다도 삼촌을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편이라도 들어주실까 하고 아버지한테 뛰어갔지만 집에 갈 시간이 가까워졌다고만 했다.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차 뒤칸에 올라탔다. 집에 돌아와서는 내 방으로 뛰어올라가 문을 닫아버렸다. 오빠도 못 들어오게 했다. 나는 상처를 살펴보았다. 예닐곱 개의 빨간 잇자국이 나 있었다. 누군가 문을 노크했을 때는 아까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잭 삼촌이었다. 가세요. 그런 말을 하면 또 한 번 벌을 주겠다고 해서 난 가만히 구석으로 가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스카웃, 내가 아직도 밉니? 제발, 가세요. 계속 그러고 있지는 않겠지만 난 실망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저도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못써. 삼촌은 공평치 못해요. 공평하지 않다구요. 잭 삼촌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공평치 않다구, 어떻게? 삼촌은 정말 좋으세요. 공평치 못하게 하셨어도 전 삼촌을 좋아하지만 삼촌은 아이들을 이해 못하세요. 삼촌이 허리에 손을 올려놓곤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뭘 이해 못한다는 거지, 진 루이스? 그런 행동에 무얼 이해해야겠니, 응? 난폭하고, 입버릇 고약하고 ,,, . 제가 말씀드려도 되나요? 건방진 말을 하려는 건 아니구요, 단지 모든 걸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잭 삼촌이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양미간을 모으고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럼 얘기해봐라.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삼촌은 제 입장을 얘기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어요. 그냥 저만 야단치시구요. 오빠와 내가 싸우면 아빤 절대 오빠 입장만 들어주지는 않으세요. 제 말도 들어주세요. 그리구, 그런 말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정말이지 약오를 때는 어쩔 수 없다구요. 오늘 프란시스는 절 지독하게 약올렸어요. 잭 삼촌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렇다면 네 입장이란 것이 뭐냐? 프란시스가 아빠를 뭐라고 불렀는데, 전 그걸 취소시키지 못했어요. 프란시스가 뭐라고 했는데? 검둥이 옹호자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걘 그렇게 말했어요. 삼촌 저는요 ,,, 전 아빠에 대해 무슨 말을 들어도 참기로 아빠와 약속했어요. 네 아버지를 그렇게 불렀단 말이지? 네, 또 아빠가 집안을 타락시키고 젬 오빠랑 나를 제멋대로 키운다고 ,,, . 난 삼촌의 얼굴을 보고 또 벌을 서게 되나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건 좀 알아봐야겠는데. 나는 프란시스가 야단맞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오늘밤 아주 기분좋게 그곳엘 갔었는데 ,,, . 삼촌, 제발 그냥 놔두세요. 그럴 순 없어. 누님도 이 일에 대해 알아야 하니까. 그 생각은 ,,, 그 녀석을 손 좀 봐줄 때까지 기다려라 ,,, . 아빠께는 아무 말씀 안 한다고 약속하세요, 네? 삼촌, 제발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싸우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그것이 아빠를 위하는 일이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제발 말하지 ,,, . 하지만 프란시스가 그런 식으로 물들게 놔둘 수는 없다. 손에 피가 좀 나는데 붕대를 감아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지, 내가 손이 없다 해도 네 붕대는 감아줘야 하고말고. 잭 삼촌이 기운차게 욕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 손을 씻기고 붕대를 감으며 호지라는 고양이와 사는 늙고 괴상한 신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출근할 때마다 보도의 갈라진 금을 일일이 세고 다녔다고 했다. 자, 이젠 끝. 결혼반지를 낄 손가락에 숙녀답지 못한 상처가 남겠는 걸. 삼촌? 으응? 매춘부가 뭐예요? 삼촌은 갑자기 국회에 앉아 깃털을 궁중에 후후 불어 계속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장난을 하며 이성을 읽어버린 수상의 이야기를 또 늘어놓았다. 나는 내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하는 줄 알았는데, 마침내는 아무 판단도 할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난 결혼 못할 것 같아요, 형님. 왜? 결혼하면 아이를 가져야 될 거 아닙니까? 아직 배울 게 많을 거다. 맞아요, 오늘 형님 따님에게 첫강의를 받았어요. 내가 아이들을 이해 못한다며 그 이유를 말해주는데, 그것이 꽤나 조리가 있지 뭐겠어요. 게다가 어떻게 다루는 것까지도 가르치는 거예요. 어휴, 맙소사. 심하게 해서 안된 생각이 드네요. 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스카웃도 나름대로 얻은 게 있을 거야. 너무 자책할 건 없다. 나는 삼촌이 내 입장에 대해 아버지께 말할까봐 가슴을 조였다. 그때까진 아무 얘기도 없었다. 스카웃은 나쁜 욕을 뜻도 모르면서 해대더군요. 저한테 매춘부가 뭐냐고 묻는 거예요 ,,, . 그래서 대답해줬니? 아뇨, 전 그저 멜번 수상 얘기로 얼버무렸어요. 잭, 아이들이 무엇이고 물으면 대답을 해줘야 한다. 지어내지 말고. 아이들은 아이들이야. 하지만 뭔가 숨긴다는 걸 어른보다 더 빨리 알아채지. 그리곤 혼란으로 빠지게 되지 ,,, 아니다. 아버지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셨다. 넌 옳은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근거가 잘못된 것뿐이지. 그리고 유행어나 속어에 관한 한 아이들이 거쳐가는 한 단계에 지나지 않아. 시간이 흘러 매력이 없어지면 자연히 그만두게 돼. 성급함은 금물이야. 스카웃은 머리를 써서 배운 다음 몇 달 동안 저장을 한단다. 잘 해나가고 있지. 젬이 자라나면서 그애의 좋은 점을 따라하고 있다. 스카웃에게 필요한 건 조금씩 거드는 정도면 될 것 같다. 형님은 애들을 절대 마음대로 다루시지 않는군요. 그런 편이지. 여태까지 난 으름장 같은 건 놓지 않았어. 잭, 그 아인 할 수 있는 만큼 날 염려한다. 철이 들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노력하고 있지. 그것이 해답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그 해답은 그 아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그걸 내가 알아준다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것이 바로 차이점이라는 거야.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젬과 스카웃이 얼마 안 있어 추악한 일들을 수용해야 된다는 거다. 젬은 참아낼 거라 믿지만 스카웃은 자존심에 관게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덤벼들기 때문에 ,,, . 그때까지도 잭 삼촌은 나와의 약속을 깨뜨리지 않았다. 형님, 이번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이제 얘기할 기회도 없는데요.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거야, 잭. 요즈음 당면한 문제는 이웰 사람들에 대한 흑인들의 반발이야. 증거는 요약되었지만 이웰 사람들은 법을 부정한 톰 로빈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거다. 이웰 사람들 알고 있지? 삼촌은 그렇다고 하며 기억을 더듬어 그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건 옛날 얘기야. 그때나 지금이나 이웰 사람들이 별다르진 않지만 다른 것이 있지.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시작하기 전에 배심원을 조금 놀라게 해줄 작정이다. 내 생각으론 우리도 법에 호소할 기회가 주어지리라 본다. 지금 단계로선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이런 일 없이 내 삶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지. 그런데 테일러 판사님이 나를 지적하셨어. 당신이 해야 합니다 라고. 이 운명의 잔을 지나쳐버리는 게 어때요, 네?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난 아이들을 마주 대할 수가 없게 돼. 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거다, 잭. 난 다만 젬과 스카웃이 별 고통없이 지나쳐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무엇보다도, 메이컴에서 벌어지는 그 병적인 관념들에 물들지 않고 말이야. 난 이성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흑인이 관계되는 일이면 왜 뻣뻣하게 굳어 미쳐 날뛰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 . 난, 젬과 스카웃이 마을에서 하는 소리를 듣지 말고 내게 와서 해답을 얻길 바랄 뿐이고 나를 믿어주길 희망 ,,, 진 루이스! 내 머리털이 솟구쳤다. 네! 가서 자야지. 나는 방으로 총총히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다. 잭 삼촌은 나를 깎아내리지 않은 왕자 같은 어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엿듣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모든 말을 내가 듣고 있기를 바란 아버지의 마음을 ,,, . 10. 앵무새를 죽이는 일은 죄 아버지는 오십이 가까운 나이여서 허약했다. 오빠와 나는 아버지께 왜 그렇게 나이가 많냐고 여쭈어보기도 했다. 그 대답은 늦게 시작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린 아버지의 능력이나 남자다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우리반 아이들의 부모보다 훨씬 늙었으며 그래서 우리반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말할 때면 오빠와 나는 그저 묵묵히 있었다. 오빠는 열렬한 축구광이었다. 아버지는 결코 피곤하다는 핑계로 오빠와의 경기를 피하진 않았지만 오빠가 태클을 하러 달려가면 슬그머니 피했다. 난 너무 늙어서 안 되겠는걸. 아버지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보였다. 약국도 아닌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덤프트럭도 몰지 않을 뿐 아니라 보안관이나 농부, 자동차정비사 같은 뭔가 대단해보이는 일을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안경을 썼고 왼쪽 눈의 시력이 훨씬 나빴는데 그건 핀치 가문의 유전이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때는 머리를 돌려 오른쪽 눈으로 봐야만 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사냥을 하지 않았고 포커나 낚시, 술을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우리반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놀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지 거실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까닭에 우린 뚜렷하게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해 학교는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우리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고, 누구도 그 일을 칭찬하지는 않았다. 세실 제이콥과의 싸움에서 손들어버린 내 비겁함 때문에 스카웃 핀치는 더이상 싸우지 않으며 그건 아빠가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모두 맞는 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위해 공공연하게 싸우진 않았지만 예전에 프란시스 핸콕한테 했던 것처럼 집에선 나의 모든 이빨과 손톱을 세우고 다녔던 것이다. 아버지는 공기총을 선물하고도 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잭 삼촌이 기초만을 가르쳐주었다. 아버지는 총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오빠에게 당부했다. 난 네가 뒷마당에서 양철깡통이나 맞추며 익히길 바라지만, 넌 분명 새를 쫓아다니게 될 거야. 그때에 맞출 수만 있다면 어치는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일은 죄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가 죄 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난 머디 아줌마에게 그것을 이야기했다. 너희 아빠 말씀이 옳다. 앵무새는 노래를 불러 우리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축내거나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만들지는 않아. 그저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러주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면 죄라고 하셨을 거다. 아주 늙은 이웃이에요. 그렇죠? 그럼, 이 마을보다도 더 오래된 친구지. 아니, 제 말은요, 우리 길 쪽의 이웃들이 모두 나이가 많다구요. 이 동네에선 오빠와 나만 아이들이고 두보스 할머니도 백 살이 가까우시고 라이첼 아줌마, 머디 아줌마, 그리고 아버지도 늙으셨어요. 쉰 살이 늙었다고는 할 수 없지. 머디 아줌마가 새침데기처럼 말했다. 나나 네 아빠는 아직 휠체어 신세는 안 지니까, 그렇지 않니? 그래, 나의 오래된 무덤을 태워 없애주신 신의 섭리는 놀라운 것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그집을 간수하기엔 난 너무 늙었거든. 그래, 네 말이 맞다, 진 루이스. 이곳의 이웃들은 모두 안정된 나이들이지. 젊은 또래가 많지 않아, 그렇지? 아뇨, 학교엔 많아요. 내 말은 젊은 어른 말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행운인 줄 알아야 한다. 네 아버지 나이의 철학을 단단히 누리고 있으니까. 만일에 말이다, 네 아버지가 지금 삼십 대라면 너희들의 삶도 무척이나 달라져 있을 게다. 그럴 거예요. 지금은 아무 일도 못하시니 ,,, . 아니다, 그에겐 아직 힘이 남아 있어. 너도 놀랄 거야. 아빠가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데요? 으음. 그래, 그는 상대에게 조금도 공격할 틈을 안 주고 완벽하게 유산상속을 처리해주시잖니. 어휴 ,,, . 그렇다면, 그가 이 마을 체커 왕이란 건 알고 있겠지? 우리가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는 저 영토에서 강 양쪽 저 아래 모두를 패배시켰단다. 말도 안 돼요, 머디 아줌마. 오빠랑 내가 언제나 아빠를 이기는데요. 그건 져주시는 걸 거야. 그래. 참, 네 아버지가 하프를 연주한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쥐어짜낸 아버지에 대한 칭찬은 나를 더욱 창피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 . 그리고 뭔데요?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하여간 네 아버지는 자랑할 만하단다. 하프 연주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지금은 끼여들지 않는 편이 좋겠어. 자, 그럼, 난 철쭉꽃을 돌봐야겠구나. 거기 판자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렴. 뒷마당으로 가보니 오빠가 양철깡통을 쏘아맞히고 있었고 여치가 그 주위를 조롱하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앞마당으로 되돌아와 구멍난 타이어, 오렌지 상자, 빨래집게, 현관의자와 오빠가 준 팝콘상자에서 오려낸 성조기 등으로 현관 양쪽에 복잡한 울타리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집에 들르는 점심때쯤 난 길 건너를 겨냥하며 나의 울타리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얼 쏘려는 거지? 머디 아줌마 엉덩이요. 아버지는 돌아서서 관목 위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의 넉넉한 표적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모자를 뒤로 젖히며 건너편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머디, 경고할 게 있어요. 지금 당신은 엄청난 위험 속에 빠져있소. 머디 아줌마가 몸을 일으켜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애티커스, 당신을 정말 지옥에서 온 악마예요. 그때 아버지는 돌아서서 총을 내리게 하곤 절대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실 난 아버지가 지옥의 악마라도 되길 바랐다. 그래서 칼퍼니아 아줌마에게 그 문제에 대해 다시 말을 꺼냈다. 핀치 변호사님? 물론 하시는 일이 많지. 예를 들어서 어떤 거요? 칼퍼니아 아줌마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잘은 모르겠구나. 오빠는 아버지도 감리교팀으로 참가할지 어쩔지 궁금해 했다. 그에 대해 아버지는 그런 종류의 일을 하기엔 자신이 너무 늙었고 잘못하다간 목이 부러질 거라고 답변했다. 감리교인들은 교회의 저당금 전액을 지불하기 위해 침례교인들에게 축구로 도전을 했고 아버지를 제외한 이 마을 모든 아버지들이 그 경기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해 오빠는 가기도 싫다고 했지만 어떤 형태로든 축구경기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빠는 아버지와 나와 함께 침례교도팀에서 훌륭한 터치다운을 보여주는 세실 제이콥의 아버지를 침울하게 바라보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오빠와 나는 토끼나, 다람쥐 등을 맞힐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공기총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래들리 집 저쪽으로 오백 야드 정도 갔을 때 오빠가 거리 저 아래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여 눈의 초점을 최대한 집중시켜 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야? 저 아래, 늙은 개. 저거 늙은 팀 존슨 같지 않니? 맞아. 팀 존슨은 해리 존슨 씨네 개인데, 그분은 모빌버스로 달려야 하는 마을 남쪽 끝에 살고 있었다. 팀은 다갈색의 사냥개로 한때는 메이컴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도 몰라, 스카웃. 집으로 가야겠다. 오, 오빠 지금은 이월이야. 여름도 아닌데 저 개가 미쳤을 리도 없잖아. 상관없어. 칼 아줌마에게 얘기해야겠어. 우리는 집으로 달려와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칼 아줌마, 저 보도 아래로 잠깐 나가보세요. 왜? 난 지금 바쁘단다. 저 아래 늙은 개가 좀 이상해요. 칼퍼니아 아줌마는 한숨을 쉬었다. 난 지금 개의 상처나 봐줄 시간이 없단다. 침실에 거즈가 있으니 네가 해주렴. 오빠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 같아요. 뭔가 잘못됐어요. 무슨 짓을 하는데? 꼬리라도 잡으려 하던? 아뇨, 이렇게 ,,, . 오빠는 금붕어처럼 헐떡거리며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고 몸을 비틀었다. 방향도 없이 이렇게 가는데요. 꾸며대는 건 아니겠지, 젬 핀치? 칼퍼니아 아줌마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정말이에요. 그 개가 뛰던? 아뇨, 그냥 어슬렁거려요. 너무 느려서 잘 알아볼 수도 없지만 어쨌든 이리로 오고 있어요. 칼퍼니아 아줌마는 손을 헹구고 오빠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아무 것도 없는데? 그리고 래들리 집 너머까지 따라와 오빠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팀 존슨이 저 멀리 마치 하나의 점무늬처럼 보이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은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짧은 듯 일정치 않게 걸어 마치 모래바닥에 박혀 있는 자동차를 연상시켰다.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렸군. 오빠가 말했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한참을 노려보더니 우리의 어깨를 움켜잡고 집으로 몰았다. 그리곤 나무문을 닫고 전화기를 들어 소리쳤다. 핀치 변호사님, 저 칼인데요. 저, 저쪽 길에 미친개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 이, 이 길로요. 네 그건, 팀 존슨이 ,,, 틀림없어요, 네 ,,, 네 변호사님 ,,, 네. 아버지가 뭐라시는지 우리가 물으려 하자 아줌마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수화기를 덜컥거렸다. 율라 메이양, 지금 네, 네, 제가 변호사님과 통화를 했는데요. 라이첼 부인, 스테파니 크러포드 부인, 그리고 이 근처에 전화 있는 집은 모두 연락을 해서 미친개가 오고 있다고 알려주세요. 어서, 좀. 칼퍼니아 아줌마가 귀를 기울였다. 알고 있어요, 지금이 이월이라는 건. 율라 메이 양, 제가 한 번 봤기 때문에 알 수 있어요. 빨리 좀 서둘러주세요. 칼퍼니아 아줌마가 오빠에게 물었다. 래들리 씨 집에 전화가 있나 좀 보렴. 오빠가 전화책을 들춰보곤 없다고 대답했다. 어찌됐든 그 사람들은 밖에 안 나올 거예요, 아줌마. 그래도 알려는 줘야 해. 아줌마는 현관 앞으로 뛰어갔다. 오빠와 내가 그녀를 바짝 따라나섰다. 너희들은 여기 있거라. 칼퍼니아 아줌마의 통보가 이웃에게 알려진 듯 사정거리 안의 모든 집들의 나무문이 닫혀졌다. 아직 팀 존슨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줌마는 치맛자락을 잡고 래들리 집으로 뛰었다. 앞치마가 무릎 위에서 펄럭였다. 현관 계단을 뛰어올라 문을 두드려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단 씨, 아서 씨, 미친개가 오고 있어요. 미친개가 온다구요. 뒷문 쪽으로 가려나봐. 내가 말했다. 오빠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일 텐데 ,,, . 칼퍼니아 아줌마는 문을 세게 두드렸지만 누구도 그녀의 경고를 들은 것 같지 않았다. 아줌마가 그곳에서 전속력으로 뛰어 올 때야 검정색 포드가 차도에서 유연하게 한 바퀴 돌아와 섰다. 아버지와 헥 테이트 씨가 차에서 내렸다. 헥 테이트 씨는 메이컴의 보안관이었다. 키는 아버지와 비슷하고, 몸집은 더 왜소했다. 코가 유난히 길고 금속장식이 달린 장화, 승마용 바지에 면 잠바를 입고 있었다. 벨트 위에 총알이 나란히 채워져 있었고 무거운 라이플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현관으로 오르자 오빠가 문을 열었다. 너희들은 안에 있도록 해라. 칼, 그 개는 어디쯤에 있소? 이곳에 당도할 때쯤 됐습니다. 변호사님. 칼퍼니아 아줌마가 길 아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뛰지는 않던가요? 네, 비틀린 상태였습니다. 보안관님. 그쪽으로 가야 할까, 헥?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겁니다. 변호사님. 그런 것은 대개 일직선으로 오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래들리 집 뒷마당으로 곧장 갈 겁니다. 조금 더 기다려보시죠. 래들리 마당엔 울타리가 있어서 갈 수 없을 거요. 아마 이 길을 따라 올 거야 ,,, . 아버지가 말했다. 미친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펄쩍펄쩍 뛰고, 달리며, 목을 부딪기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팔월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팀 존슨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텅 빈 길을 지켜보는 일은 황량하기만 했다.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앵무새도 침묵을 지켰다. 머디 아줌마네 집 목수 아저씨도 자취를 감추었다. 테이트 씨가 코를 풀고는 팔을 구부려 총을 옮겼다.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의 얼굴이 창문 위에 나타났고, 머디 아줌마가 그 옆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의자 위에 발을 올리곤 넓적다리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저기 온다. 은밀한 음성이었다. 팀 존슨이 시야에 들어왔다. 래들리 집과 평행을 이루는 길 모퉁이를 돌아 눈이 부신 듯 걸어오고 있었다. 저걸 봐, 보안관 아저씨가 미친개는 일직선으로 걷는다고 하셨는데 정말. 저건 길에서 쉬지도 않나봐. 오빠가 속삭였다. 저렇게 아파보이는 개는 처음 봤어. 내가 말했다. 테이트 씨는 이마에 손을 얹고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잘 오고 있습니다. 변호사님. 팀 존슨은 달팽이 정도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개들처럼 냄새를 맡거나 장난치지도 않은 채 마치 한 방향에 목숨을 건 듯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금씩 움직여 오고 있었다. 말이 파리를 떨쳐버리듯 턱을 떨며 여닫기를 반복했고 한쪽으로 몹시 기울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팀 존슨은 우리를 향해 이끌려 오고 있었다. 죽을 장소를 찾고 있나봐. 오빠가 말했다. 테이트 씨가 돌아보았다. 죽으려면 아직 멀었다, 젬. 아직 시작도 안 한 거니까. 팀 존슨이 래들리 집으로 이어지는 사잇길에 이르렀다. 그 빈약한 마음에 어떤 찌꺼기가 건드려 멈추게 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며 방향을 잡는 듯 망설이던 발걸음을 옮겨 래들리 집 앞에 섰다. 그곳에서 돌아서려 했지만 무척이나 힘들어보였다. 헥, 사정거리 안에 있소. 옆길로 가기 전에 지금 해치우는 게 좋겠어. 어느 쪽으로 올지 모르니 안으로 들어가요, 칼. 칼퍼니아 아줌마가 덧문을 열고 들어와 빗장을 걸었다가는 다시 풀어 고리 위에 얹어놓았다. 아줌마는 오빠와 나를 몸으로 막아섰고 우리는 아줌마 팔 사이로 밖을 지켜보았다. 변호사님이 쏘시죠. 테이트 씨가 아버지에게 총을 내밀었다. 오빠와 나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시간낭비 말아요, 헥. 어서 쏴요. 이건 단번에 끝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변호사님? 아버지가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냥 서 있지만 말고 어서, 헥. 마냥 기다려주질 않아. 제발, 변호사님. 빗나가면 래들리 집을 맞히게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전 잘 쏘지 못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난 삼십 년간을 총을 놓고 있었어. 테이트 씨가 라이플 총을 던지다시피 아버지에게 건넸다. 정말 마음이 놓입니다. 오빠와 나는 어쩔 줄을 모르며 아버지가 총을 받아들고 길 앞으로 걸어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걸음은 빨랐지만, 마치 물 속에서 수영하는 사람을 연상시켰다. 시간은 기어가듯 흘러 속까지 메슥메슥거렸다. 아버지가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자 칼퍼니아 아줌마가 중얼거리며 얼굴을 감쌌다. 하느님, 그를 도와주소서. 아버지의 안경이 이마 위로 올려졌다간 미끄러져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고, 아버지는 눈과 턱을 문질렀다. 우린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래들리 집 문 앞에서의 팀 존슨은 마침내 돌아서서 원래 오던 방향대로 우리집을 향해 다가왔다. 아버지가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더니 머리를 들었다. 몸이 잠시 굳어지는 듯 총을 어깨 위로 올리고 방아쇠를 홱 잡아당겼다. 그 움직임은 마치 동시에 이루어진 듯 순식간에 터져나왔다. 총성이 울렸다. 팀 존슨이 위로 붕 튀더니 털썩 떨어져 갈색과 흰색의 더미로 보도 위에 구겨져 있었다. 아버지 자신은 명중시킨 것도 모르는 듯했다. 테이트 씨가 현관을 훌쩍 뛰어내려 래들리 집으로 뛰어가 개 앞에 웅크리고 앉아 살펴본 후 일어섰다. 왼쪽 눈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소리쳤다.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치셨습니다. 핀치 변호사님. 언제나 그래, 내겐 산탄총이 더 낫지.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안경을 집어들고 땅에 깨진 안경렌즈를 밟아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곤 테이트 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팀 존슨을 내려다보았다. 문이 하나씩 열리며 동네 사람들이 꾸물꾸물 밖으로 나왔다. 머디 아줌마도 스테파니 아줌마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오빠는 완전히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여 내가 꼬집어주어야만 했다. 그때 아버지가 큰소리로 명령했다. 거기 그냥 있도록 해라. 테이트 씨와 아버지가 마당으로 돌아왔고 테이트 씨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붙였다. 제보한테 치우라고 해야겠어요. 다 잊어버리진 않으셨습니다. 절대로 잊지는 않으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빠? 젬 오빠가 불러보았다. 응?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역시 명사수 핀치군요! 아버지가 소리나는 쪽으로 빙그르 돌아 머디 아줌마와 서로 말없이 쳐다보곤 차에 올랐다. 이쪽으로 와라, 젬. 아직 가까이 가지 마라. 알았지? 살아 있을 때만큼이나 위험하단다. 가까이 가지 마라. 네. 아빠 ,,,? 왜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하, 벙어리가 됐구나. 테이트 씨가 젬 오빠를 보고 웃었다. 너희 아빠를 몰라봤었지? 가만, 헥. 어서 갑시다. 그들이 가버린 후 오빠와 나는 스테파니 아줌마네 집 계단에 앉아 제보가 운전하는 쓰레기차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는 정신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스테파니 아줌마는 큰소리로 떠들었다. 오, 세상에 이월의 미친개를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아마 미친 게 아니라 돌아버린 걸 거야. 해리 존슨이 모빌에서 달려와 총에 맞은 그의 개를 보는 걸 어떻게 봐줘야 하나. 그나저나 저 개가 지금 벼룩을 있는대로 뿌리고 있을 텐데 ,,, . 오빠는 점점 멍청스레 뚝뚝 끊어 말하기 시작했다. 봤니? 스카웃? 저기 서 계신걸. 봤지? ,,, 오, 갑자기 모든 걸 끝내 버리셨어. 마치 총이 몸의 일부인 것처럼 ,,, 난 뭘 좀 맞추려면 십 분은 족히 조준을 해야 하는데 ,,, . 머디 아줌마가 심술궂게 싱긋 웃으시며 말했다. 자, 진 루이스 양, 아직도 네 아빠가 아무 것도 못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부끄럽게 생각지도 않을 테구? 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네게 해줄 말이 있었지. 그건 애티커스 핀치는 하프 연주 외에도 그 시대 메이컴에서 제일 가는 명사수였다는 거야. 명사수 ,,, . 오빠가 따라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젬 핀치. 이젠 태도를 바꿀 거라고 생각하는데 ,,, 네 아빠가 소년이었을 때 별명이 한방에 날려 였던 거 몰랐겠지? 우리가 처음 이곳으로 옮겨왔을 때는 열다섯 발을 쏴서 열네 번을 맞혀도 총알을 낭비했다고 불평할 정도였단다. 그런 얘기는 한 마디도 없으셨어요. 오빠가 중얼거렸다.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단 말이지? 네, 머디 아주머니. 사냥을 왜 안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건 내가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사격술은 말이다, 신의 선물이지. 타고난 재주 말이다. 오! 물론, 완벽하게 되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지만, 사격은 피아노를 치는 것과는 다르단다. 내 생각으로는 신이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을 위해 그에게 부당한 재능을 주셨다는 걸 깨달은 후 총을 내려놨을 거야. 네 아버진 꼭 쏘아야 할 때를 빼고는 절대 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거야. 오늘이 바로 그런 때였구. 그걸 자랑으로 여기시나봐요. 내가 종알거렸다. 글쎄다,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단다. 제보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그는 쓰레기차 뒤에서 쇠스랑을 가져와 조심스레 팀 존슨을 들어올려 트럭 위로 던졌다. 그리곤 커다란 주전자로 팀이 쓰러진 자리에 무언가를 들이부었다. 당분간은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아라. 그가 소리쳤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자랑할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오빠가 돌아섰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스카웃. 난 꼭 말할 거야. 메이컴에서 제일가는 명사수는 우리 아빠뿐이니까.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하셨다면 벌써 얘길 하셨을 거야. 우리에게도 말씀해주셨을 테고. 그거야 잠시 잊어버리셨겠지, 뭐. 아니야, 스카웃.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야. 아버지는 늙으셨어. 하지만 난 아빠가 아무 일도 못한다 해도 상관하지 않아. 축복받을 일을 전혀 할 수 없다 해도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오빠는 돌멩이를 집어서 차고 쪽으로 던지고는 환성을 올리며 돌멩이를 따라 뛰었다. 아빠는 멋쟁이야. 나처럼 말야! 11. 동백꽃과 두보스 할머니 오빠와 내가 더 어렸을 때 우리의 활동범위는 남쪽 동네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가 이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부 래들리를 귀찮게 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되어버렸고 점점 메이컴의 상업지역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때 우린 두보스 할머니 집 앞을 지나쳐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일 마일 정도를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그 할머니와 그다지 맞닥뜨릴 일이 없었지만 앞으론 더 많아질 거라고 오빠는 말했다. 두보스 할머니는 집 안 일을 돌봐주는 흑인 소녀를 두고 혼자 살았다. 그집은 우리집 뒤쪽에서 두 집 건너 있었는데 가파른 계단과 좁은 통로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너무 늙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와 휠체어에서 지내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남부 연방의 권총을 숄 속에 감추고 있다고도 했다. 오빠와 나는 그 할머니를 무척 싫어했다. 우리가 지나갈 때면 현관에 나와앉아 몹시 화가 난 눈빛으로 흘기며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무자비한 신문조의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도 늙으면? 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하게 만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얼마 전엔 그집 반대편 길로 다니자는 생각을 해냈지만 결국 그 할머니의 목소리만을 높여 모든 이웃이 다 듣게 되었을 뿐이었다. 무엇으로도 두보스 할머니를 기쁘게 할 수는 없었다. 내 딴엔 가장 명랑하게 인사를 해봤다. 두보스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세요라니, 요 못된 것! 안녕하십니까 두보스 할머니! 라고 해야지. 역시 할머니의 외마디소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두보스 할머니는 심술이 사나웠다. 한 번은 젬 오빠가 아버지를 애티커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집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은 할머니의 악담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지 가장 뻔뻔스럽고 무례한 얼간이가 되고 말았다. 또한 우리 집안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가 재혼을 안 하는 것에 대해 안된 일이라는 둥, 우리 어머니같이 사랑스런 여인은 없었는데 애티커스 핀치가 아이들을 저렇게 난폭하게 키우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는 둥 서슴지 않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오빠는 부 래들리 사건에서도 건재했고 미친개나 여러 가지 무서운 위험 속을 이겨왔기 때문에 라이첼 아줌마네 집 계단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왠지 비겁한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 채 아버지를 만나러 우체국 코너까지 뛰어야 했다. 오빠는 많은 날들을 두보스 할머니의 독설에 성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고 아버지는 그것을 지켜봐야 했다. 쉽게 생각해라.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그분은 늙고 병들었단다. 넌 그저 머리를 들고 신사가 되면 사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시든지. 그분이 너를 미치게 하도록 놔두지 말아라. 오빠는 그 할머니가 그토록 악담을 퍼붓는 것으로 보아 아프지도 않을 거라고 투덜댔다. 우리 셋이 그 앞을 지날 때면 아버지도 모자를 벗고 상냥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두보스 여사님. 오늘 저녁은 한 폭의 그림입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가 그림 어쩌구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곤 법원 소식을 전하고 내일은 두보스 할머니에게는 좋은 날이 되길 충심으로 바란다고 하고는 바로 그 할머니 보는 앞에서 나를 어깨에 태우고 황혼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럴 때면 나는 아버지야말로 무력을 싫어하고 어떠한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는 가장 용감한 남자라고 여겼다. 그 다음날은 오빠의 열세 번째 생일이어서 오빠의 주머니에는 돈이 남아돌 정도였다. 그래서 우린 서둘러서 시내로 향했다. 오빠는 축소형 엔진을 사고 나에게는 빙빙 돌릴 수 있는 지휘봉을 사주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그 지휘봉을 얼마나 갖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엘모어 회사 제품으로 반짝이는 금속조각과 금실로 장식된 십칠 센트짜리였다. 내가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강렬한 목표가 있다면 그건 메이컴 고등학교의 밴드 앞에서 지휘봉을 돌리는 일이었고 그걸 연습하기 위해 막대기를 위로 던져올렸다가 잡아내는 일을 수도 없이 해댔다. 하지만 칼퍼니아 아줌마는 내가 막대기를 갖고 있을 때면 집 안 출입을 막았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된 지휘봉을 사서 집 안에서 마음껏 연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오빠가 지휘봉을 사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빠의 배려에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날도 역시 두보스 할머니가 현관 앞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냐, 응? 할머니가 소리쳤다. 학교 빼먹었지? 당장 교장에게 전화해서 일러버릴 테다. 할머니는 당장 그렇게 할 것처럼 손을 의자바퀴에 올려놓고는 움직거렸다. 저, 오늘은 토요일이에요, 두보스 할머니. 오빠가 대답했다. 토요일이라도 다를 건 없어. 너희 아버진 너희들이 어디 가는지 알고 계시냐? 저희는요, 요만했을 때부터 우리끼리 시내에 다녔어요. 오빠가 보도에서 대략 이 피트 높이로 손바닥을 올리며 말했다. 나에게 거짓말하지 마라, 제레미 핀치. 머디 애킨슨이 그러는데 너희들이 머루정자를 망쳐놨다면서? 머디가 네 아버지에게 말하면 넌 다신 밝은 빛을 볼 수 없을 거야. 다음주 안에 널 소년원에 보내지 않는다면 내 성을 갈 테다. 머디 아줌마의 머루정자엔 지난 여름부터 한 번도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갔었다고 해도 머디 아줌마는 그럴 분이 아니란 걸 알기에 그저 간단히 아니라고만 대답했다. 내 말에 반박하지 마라! 그리고 너! 그녀는 관절염을 앓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 바지가 뭐냐, 응? 넌 스커트와 캐미솔을 입어야 한다는 걸 모르느냐? 앞으로 누가 다시 가르치지 않으면 넌 테이블 시중이나 들며 커야 될 게야 ,,, . 핀치도 오케이 카페에서 웨이터 노릇을 하긴 했었지. 하 하 하! 나는 놀랐다. 그 오케이 카페는 북쪽 광장 저쪽에 있는데, 저속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나는 오빠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손을 흔들어 느슨히 했다. 참아, 스카웃. 신경쓰지 말고 머리를 들어. 신사가 되는 거야. 하지만 두보스 할머니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핀치는 다방에서 시중만 드는 게 아니라 법원에서 검둥이 변호를 하고 있지! 오빠가 빳빳이 굳었다. 두보스 할머니의 연발은 급소를 찔렀고, 할머니 자신도 그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정말이지 핀치가 출세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지 ,,, 내가 말해주랴? 할머니가 손을 입에서 떼어놓자 침이 길게 늘어져 나왔다. 너희들 아버진 검둥이보다 나을 것도 없어. 쓰레기 같은 짓만 하지. 오빠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오빠의 옷자락을 끌고는 우리 집안의 정신적 타락에 대한 심한 공격을 받으며 보도를 따라 올라갔다. 어찌됐건 핀치 집안 사람의 반 정도가 수용소에 있었다는 것이 대전제였다. 그렇다 해도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이런 상태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빠의 불쾌함이 얼마나 지독한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우리 가족의 정신건강에 대한 부당한 평가가 나를 몹시 화나게 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모욕에는 만성이 되어버렸지만 어른들로부터 듣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에 관한 것만 빼면 두보스 할머니의 공격은 언제나 판에 박힌 소리였다. 날씨는 벌써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고 있었다. 그늘은 아직 서늘했지만 햇볕은 뜨거웠다.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기다림이란 딜과 방학이었다. 오빠는 증기엔진을 샀고 나의 엘모어 제 지휘봉도 샀다. 오빠는 자신의 새 물건에 대해 전혀 관심없이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내 옆에서 말없이 걸었다. 나는 지휘봉 연습으로 하마터면 링크 디스 아저씨와 부딪칠 뻔했다. 잘 보고 걸어야지, 스카웃. 그렇게 오는 동안 지휘봉을 던지고 떨어뜨리느라 두보스 할머니 집에 닿았을 때는 꽤나 더러워져 있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현관에 없었다. 나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도무지 어떤 힘이 오빠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던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라는 단어를 깨뜨렸는지 알 수가 없다. 오빠도 나만큼이나 여러 번 아버지가 검둥이 변호사라는 실없는 소리를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빠가 성미를 가라앉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오빠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조용하고 무던한 성품이라는 평판을 얻어왔다. 하지만 그때 일어난 사건을 돌이켜보면 오빠가 그 몇 분동안 돌았었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그집 문 앞에 이르자 젬 오빠는 내 지휘봉을 나꿔채어 두보스 할머니의 앞마당으로 미친 듯이 뛰어들었다. 아버지와의 약속도, 그 할머니가 숄 아래 권총을 갖고 있다는 것도, 더구나 그 집엔 일하는 아이 제시가 있다는 것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오빠는 두보스 할머니가 아끼는 동백꽃의 새순을 모두 잘라냈다. 마당은 순식간에 초록색 어린 새순들로 뒤덮여버렸다. 그리곤 내 지휘봉을 무릎에 대고 두 동강을 내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때 내가 질식할 듯한 비명을 질러대자 오빠는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으며 얼마든지 또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입을 다물지 않으면 내 머리칼을 죄다 뽑아놓겠다고 소리소리질렀다. 나는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오빠가 발로 걷어차자 나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오빠는 나를 확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제서야 다소 미안해 하는 듯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는 아버지를 마중나가지 않았다. 그저 칼퍼니아 아줌마가 내쫓을 때까지 부엌에서 서성거렸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흑인 특유의 마술로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의 엉터리 변명으로는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오빠에게 금방 구워낸 버터 비스킷을 주어 나와 함께 먹도록 했다. 솜사탕 같은 맛이었다. 우리는 거실로 갔다. 나는 축구잡지에서 딕시 호웰 사진을 발견하여 오빠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사람 꼭 오빠 같아. 그것은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지만 그것도 별 효과가 없었다. 오빠는 그저 창문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양미간을 찌푸리고는 뭔가를 기다리는 듯 앉아 있었다. 태양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계속될 듯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아버지의 신발 터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덧문이 쾅 닫혔다. 잠시 후 아버지는 복도 모자걸이 앞에 서 있었다. 젬. 겨울바람처럼 냉랭한 음성이었다. 아버지가 거실 스위치를 올리자 천장으로부터 불빛이 쏟아졌고, 우린 얼어붙은 듯 그 아래 서 있었다. 아버지의 손엔 내 지휘봉이 쥐어져 있었다. 지저분한 노란 술장식이 융단 위로 늘어져 있었고, 다른 손바닥 위에는 살오른 동백나무의 싹이 올려져 있었다. 젬, 이거 네가 한 짓이냐? 네. 왜 그랬지? 아버지를 검둥이 변호사에다 쓰레기라고 했어요. 오빠가 조용히 대답했다. 단지 그 말을 했다고 해서 이렇게 해놓았다는 거냐? 네. 오빠의 입술이 움죽거렸지만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이 짧게 대답했다. 젬, 친구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때 네가 분명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늙고 병든 할머니에 대한 너의 이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당장 두보스 할머니를 찾아뵙고 사과하도록 해라. 그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도록! 오빠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가자, 오빠. 나는 오빠를 따라 거실을 나왔다. 넌 이리 와 있어. 아버지의 명령에 나는 되돌아왔다. 아버지는 (모빌프레스) 신문을 집어 오빠가 비워놓은 흔들의자에 앉았다. 나는 아버지가 그의 유일한 아들을 남부 연방의 유품으로 살해될지도 모르는 현장에 보내고도 어떻게 냉담히 앉아 신문을 읽을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때론 죽도록 미울 때도 있지만 그런 마음이 가라앉으면 젬 오빠는 나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이걸 아는지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만큼은 아버지가 미웠다. 하지만 대개 야단을 맞고 나면 쉽게 피로를 느끼듯이 나도 곧 아버지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 아버지가 양팔로 나를 감싸안았다. 이제 많이 자랐구나. 아빤 오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 안 하시죠? 아빠를 위해선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오빠를 총알 속으로 보내신 거예요. 아버지가 내 머리를 턱 밑으로 끌어안았다. 아직은 걱정할 때가 아니야. 젬은 이런 일로 절대 머리를 날려보내지 않을 게다. 난 네가 더 걱정이야. 왜 우리는 머리를 들고 태연히 신사나 숙녀가 되어야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나는 종알거렸다. 스카웃, 여름이 오면 더욱 어려운 일이 일어날 거야. 그때 아무렇지 않게 그걸 견뎌내야만 한단다. 물론 젬과 네게 그건 결코 공평치 못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린 때에 따라 많이 참아야 할 때가 있고 그 인내는 우리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거야.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은 앞으로 너희들이 이 일에 대해 결코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톰 로빈슨의 경우인데 인간의식 중에서도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지 ,,, 스카웃, 내가 이 남자를 모른 체하고는 교회도 갈 수 없고 예배도 드릴 수 없게 된단다. 아빠가 틀릴지도 모르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음, 모든 사람들이 아빠보고 틀리다고 하니까요. 그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자격이 있고 그들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겠지.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과 살 수 있기 전에 자기 자신과 잘해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거란다. 다수의 원칙에 의해 지속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의 의식이란 거지. 오빠가 돌아와 아버지의 무릎 위에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어떻게 됐니? 아버지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난 오빠를 살짝 훔쳐보았다. 그는 괜찮아 보였지만 무언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이상한 약이라도 먹인 게 분명했다. 전 어질러놓은 걸 치우고 죄송하다고 했어요. 사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요. 그리고 싹이 나올 때까지 매주 토요일 꽃밭에서 일해야 돼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잘못했다고 말한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젬. 그분은 병들고 늙었다. 그분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네가 질 수는 없는 거야. 물론 나도 그분이 나에게 직접 그런 말을 했다면 더 좋았으리란 생각은 한다. 하지만 어떻게 좋은 일만 있겠니. 오빠는 카펫의 장미무늬에 넋을 빼앗긴 듯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빠, 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셨어요. 책을? 네, 아빠, 매일 방과 후에 토요일까지 두 시간씩 읽어달라는 거예요. 그걸 해야 하나요? 물론이지. 한 달씩이나 해달라시는데요. 그렇다면 한 달을 해야지. 오빠는 장미무늬 가운데를 엄지발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밖에서 본 그집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어요. 안은 컴컴하고 소름이 끼쳐요. 천장은 거미줄투성이고 ,,, . 아버지가 냉랭하게 미소지었다. 그건 네 상상력과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왜? 거기가 래들리 집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니? 그 다음 주 월요일 오후, 오빠와 나는 두보스 할머니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조그만 통로를 터벅거리며 들어갔다. 오빠는 (아이반호)를 들고 확실한 지식으로 무장한 채 이층의 왼쪽 문을 두드렸다. 두보스 할머니 계셔요? 그가 소리쳤다. 제시가 덧문을 열고 미닫이의 빗장을 벗겼다. 네가 젬 핀치니? 어머, 동생도 데려왔구나. 어떡하지 ,,,? 둘 다 들여보내라, 제시. 두보스 할머니의 명령이었다. 제시는 우리를 들여보내곤 부엌으로 가버렸다. 문지방을 넘자 짓누르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는 석유램프와 물받이, 더러운 침대시트가 있는 비에 썩은 회색 집에서 나는 듯한, 언제나 두려움과 경계심, 그리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냄새였다. 방 저쪽 구석 청동침대와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나는 오빠의 행동이 할머니를 구석으로 몰아부친 건 아닐까 생각하며 잠시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누비 이부자리 아래에 누워 있는 할머니는 상냥해 보일 정도로 평소와는 달리 느껴졌다. 침대 옆에 대리석 세면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엔 티스푼이 꽂혀 있는 컵 하나, 빨간 귀가 있는 주사기, 탈지면 한 상자, 그리고 놋으로 된 자명종이 가느다란 세 다리로 버티고 있었다. 그래, 넌 저 지저분한 동생을 데려왔구나, 그렇지? 할머니의 첫인사였다. 오빠가 조용히 말했다. 내 동생은 더럽지도 않고 전 할머니가 겁나지 않아요. 나는 오빠의 무릎이 떨리는 걸 알아챘다. 나는 예의 그 지루한 공격연설을 예상했지만 할머니는 짧은 한마디만을 던졌다. 자, 읽어라, 제레미. 오빠는 등나무 의자에 앉아 (아이반호)를 펼쳤다. 나도 의자를 끌어와 오빠 옆에 앉았다. 좀더 가까이 오너라. 침대 옆으로. 우리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앉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할머니를 대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순간 의자를 뒤로 물리고 싶어졌다. 두보스 할머니는 끔찍스러웠다. 얼굴빛은 더러운 베갯닛 같았고 양 입꼬리는 조금씩 떨리는 듯 움직였다. 뺨 위에는 점점이 검버섯이 찍혀 있었고 흐릿한 눈에는 눈동자만이 선명히 드러났다. 손마디는 옹이처럼 툭 불거졌고 손톱 위의 살갗이 늘어져 마치 손톱을 덮으려는 듯 보였다. 또한 아래쪽 틀니는 윗입술 쪽을 약간 베어물고 있었고, 그래서 침이 더 빨리 고이는게 아닌가 싶었다. 오빠가 (아이반호)를 읽기 시작했으므로 난 더이상 쳐다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오빠의 책 읽는 속도에 맞춰 들으려 애썼지만, 오빠는 너무 빨리 읽어나갔다. 그것을 알아차린 두보스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읽도록 명령했다. 이십 분쯤 흘렀을까. 오빠가 책 읽는 동안 창문 저쪽에 있는 벽난로의 그을음을 보고 있는데 어느덧 할머니의 참견이 줄어들고 그 간격이 차츰 벌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빠가 한문장쯤 공중에 날려버려도 모르는 듯했다. 나는 다시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턱까지 누비이불을 덮고 반듯하게 누워 있어서 얼굴만이 겨우 보였다. 그런데 천천히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며 이따금 입이 크게 벌어지면서 혀가 느리게 물결치는 것이 보였고, 침이 길게 나왔다가는 다시 들어가고 또다시 입을 벌리곤 했다. 그입 자체가 별개의 것으로 부각되었고, 썰물 때의 조개구멍같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간혹 푸푸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 소리는 물질이 지글지글 끓을 때 나오는 악의 물질이 내는 소리 같았다. 내가 오빠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기자 나를 쳐다본 오빠는 그제서야 침대로 눈길을 돌렸다. 할머니의 머리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두보스 할머니, 괜찮으세요? 오빠가 말했지만 할머니는 더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때 자명종이 울렸다. 우리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졌다. 잠시 후 우린 아직도 신경이 팽팽한 채로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도망쳐 오지는 않았다. 제시는 시계태엽이 다 풀리기도 전에 우리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자, 자, 모두 집으로 돌아가거라. 오빠가 문에서 망설였다. 약 드실 시간이란다. 제시가 말하며 문을 닫고는 급히 두보스 할머니의 침대로 가버렸다. 집에 와보니 겨우 세시 사십오분이었다. 오빠와 나는 뒷마당에서 공놀이를 시작했다. 그날 아버지는 내게 노란색 연필 두 자루, 오빠에게는 축구잡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건 어쩌면 힘겨운 첫날에 대한 말없는 보상이었으리라. 그 할머니가 너희를 놀라게 하진 않으시던? 아버지가 자상하게 물었다. 아뇨, 하지만 몹시 불결했어요. 발작도 하구요. 침도 뱉아내구.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아프게 되면 때론 흉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난 무섭더라. 내가 말했다. 아버지가 안경 너머로 날 쳐다보았다. 알고 있겠지만, 넌 안 가도 된다. 다음날 오후도 첫날과 같았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점점 할머니의 타입이 드러났다. 할머니의 첫마디는 동백꽃이나 아버지의 검둥이 옹호성향 등의 흥미로운 주제로 오빠를 괴롭힌 다음 차츰 조용해지고, 그 다음 자명종이 울리면 제시는 우리를 쉬쉬거리며 쫓아내는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나머지 시간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아빠, 검둥이 옹호자가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어느 날 저녁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아버지의 표정은 근심으로 얼룩져갔다. 누가 네게 그런 소릴 했니? 네, 두보스 할머니가 아빠를 그렇게 불렀구요. 제일 처음 들은 건 지난 크리스마스 때 프란시스로부터였어요. 그렇다면, 그때 싸운 이유가 그것이었니? 네, 아빠 ,,, . 그럼 왜 진작 묻지 않았지? 나는 프란시스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태도가 나를 화나게 했음을 설명하려 했다. 그건 제가 느끼기에 코딱지 같다고 말한 정도였어요. 스카웃, 검둥이 옹호자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말 중 하나야. 그래 꼬딱지같이. 하지만 설명하기가 어렵구나. 그건 말이다, 무지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자신들보다 흑인을 더 좋아한다고 느낄 때 쓰는 말이란다. 즉 그런 류의 인간들이 누군가를 천하고 추하게 부르고 싶을 때 마구 해대는 말인 거야. 그럼 아빠는 검둥이 옹호자는 아니지요, 그렇죠? 아니, 난 분명히 그렇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때론 곤란을 받기도 하지만. 스카웃, 그것이 나쁜 별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모욕이 되는 건 아니야. 그건 단지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시시한 인간인가를 보여주는 것일 뿐, 네게 상처를 주진 않을 거다. 그러니까 두보스 할머니가 너희들을 놀릴 기회를 드리지 않도록 하는 거지. 한 달이 지난 오후, 오빠는 월터 스콧 경 (젬 오빠는 (아이반호)를 이렇게 불렀다)을 열심히 읽고 두보스 할머니가 틀린 곳을 지적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할머니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침대로 가서 두보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사무실에도 돌아와보니 아이들이 보이질 않아서요.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보스 할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토록 싫어한다면서 어떻게 아버지에게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몇 시인지 알고 있수, 애티커스? 할머니가 물었다. 정확히 다섯시 십오분입니다. 저 자명종은 다섯시 삼십분에 울리기로 되어 있군요. 전 그걸 알고 계신가 해서요. 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오랫동안 그집에 잡혀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자명종은 매일 몇 분씩 더 늦게 울렸던 것이고 그때까지 그녀의 발작도 늦춰진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덫에 걸려든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자명종만이 우리를 놓아주는 신호였던 것이다. 그 자명종이 끝까지 울리지 않는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가 알기로는 젬의 읽기가 거의 끝나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 기억으로는 일주일이 더 남아 있는 걸로 아는데 ,,, 그냥 확인을 한다면 ,,, . 할머니가 말했다. 젬 오빠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아니 ,,, . 아버지가 젬 오빠를 가로막았고 오빠도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빠는 일주일을 더 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일주일뿐이다, 젬. 싫어요, 아빠. 오빠가 버텼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해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음주에도 계속해야 했다. 그 후로는 자명종 대신 이젠 됐다며 우리를 풀어주었다. 어떤 날은 우리가 너무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와 신문을 읽고 있기도 했다. 그때쯤엔 할머니의 발작은 없어졌지만 늙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또 어떤 날에는 월터 스콧 경 에 나오는 성이나 성곽 주위에 있는 연못에 대한 문장이 할머니는 지루하게 했고, 그러면 느닷없이 잔소리로 우리에게 들러붙었다. 제레미 핀치, 내 동백꽃 자른 거 반성하라고 했는데, 반성했느냐? 오빠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다. 넌 내 만년초도 죽이려 했어, 그렇지? 제시가 그 꽃이 피어나려 한다고 했는데 ,,, . 다음엔 어떻게 하려고 했지? 응? 뿌리채 뽑을 거냐? 오빠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우물거리며 말하지 마. 머리를 들고 네, 할머니라고 말해라. 네 아버지처럼 그냥 넘어가진 못해. 오빠의 턱이 올려졌다. 그리곤 아무 원망의 빛도 없이 할머니의 얼굴을 응시했다. 오빠는 지난 몇 주일에 걸쳐 정중한 말씨와 호기심을 없애는 일에 단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곤 할머니가 해대는 소름 끼치는 끔찍한 질문에도 공손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두보스 할머니는 어느 날 오후 이만 됐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오늘로써 끝이다. 모두들 좋은 날들이 되길 바란다. 그렇다, 끝이었다. 우리는 보도 위를 풀쩍 뛰어내리기도 하고 신나는 해방감을 느끼며 괜히 소리도 질렀다. 그해 봄은 따스했다.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져서 우리는 오래도록 실컷 놀 수 있었다. 오빠는 전국의 모든 대학 축구선수의 생생한 점수통계표를 작성하느라 분주했다. 매일밤 아버지는 신문의 스포츠란을 읽어주었다. 올해에도 앨라배마 팀은 로즈 바울 팀과 다시 겨루게 되었다. 우수선수의 명단이 나왔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버지가 윈디 시턴의 칼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잠깐 두보스 할머니 댁에 다녀오마. 늦진 않을 거다. 그러나 아버지는 잠잘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캔디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요, 아빠. 오빠가 궁금해 했다. 우리가 풀려난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우리는 현관에 나와 있는 할머니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두보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젬. 그곳에 내가 도착하고 몇 분 후에 ,,, . 오, 잘 돌아가셨네요. 오빠가 심술궂게 말했다. 그래, 그분은 이제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게다. 그분은 오랜 시간 병에 시달려왔거든. 그 발작이 왜 그런지를 몰랐겠지? 오빠가 머리를 끄덕였다. 두보스 할머니는 모르핀 중독자였지. 그것을 진통제로 몇 년간을 써온 거야. 의사가 그걸 권했단다. 그것으로 남은 생애를 심한 고통 없이 마쳤지만 그녀는 매우 ,,, . 네? 오빠가 재촉했다. 네가 그 엉뚱한 짓을 하기 전에 그분은 유산상속 문제로 나를 부르셨단다. 레이놀드 선생님이 생명이 한 달 정도 남았다고 하셨지. 모든 것이 완전하게 정리되어 있었단다. 그런데도 그분은 한 가지 정리하지 못한 것이 있어 라고 말씀하셨거든. 그게 무엇이었는데요? 오빠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성급해 했다. 그분은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매이지 않고 떠나고 싶다고 하셨단다, 젬. 네가 만약 할머니처럼 고통스러웠다면 넌 모르핀 주사 정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 게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죽기 전에 그걸 깨뜨리려 했던 거야. 그래, 바로 그것이었단다. 그럼 그 발작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지, 네가 읽는 것을 그분이 한 마디라도 제대로 듣고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분의 모든 정신과 육체는 그 자명종에 집중되어 있었거든. 네가 그분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해도 내가 널 보냈을 거다. 그건 그분을 조금이나마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 ,,, . 할머니는 편안히 돌아가셨나요? 산속의 공기처럼 편안히.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식이 있었단다. 그리고 아주 심술사나웠지. 그 말씀 도중에 아버지는 오빠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분은 내가 하는 일에 여전히 반대였고 내가 널 감옥에서 빼내느라 보석금 마련에 평생을 보내야 할 거라고 하셨단다. 그분이 이 상자를 네게 보내셨다. 아버지가 손을 뻗어 캔디상자를 오빠에게 건네주셨다. 오빠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물에 적신 솜뭉치 위에 하얗고 초를 먹인 듯한 동백꽃이 제모습을 잃지 않고 놓여 있었다. 오빠의 눈이 머리에서 튀어나올 듯했다. 지옥 마귀, 늙은 지옥 악마! 오빠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상자를 내동댕이쳤다. 왜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 거예요!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오빠 앞에 다가섰다. 오빠는 아버지의 셔츠에 얼굴을 묻었다. 쉬이, 그분은 이것으로 네게 이야길 하려 하신 거다. 모든 것이 잘 됐다. 두보스 할머니는 훌륭한 부인이셨고, 젬, 알았지? 훌륭한 부인이라구요? 오빠가 새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아빠께 그런 말을 했는데도 훌륭한 부인이라구요? 그분은 훌륭하셨다. 물론 나와는 다른 견해였지만 사물에 대한 안목이 있으셨지. 젬, 난 이미 말했듯이, 네가 그런 행동을 안 했다 해도 내가 널 그분께 보냈을 거야. 그 이유는 그분의 어떤 것을 네가 배우길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진짜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총이나 들고 있는 남자들의 어줍잖은 용기가 아닌 진짜 용기 말이다. 너도 조금은 느꼈겠지만 그건 시작이 되었고 무엇이 되었건 그걸 통해 배우게 된 거야. 넌 좀처럼 승리감을 맛볼 수 없겠지. 하지만 때때로 승리자가 될 것이다. 두보스 할머니는 승리한 거야. 아흔여덟 살의 노인이 말이다. 그분은 마음먹은 대로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떠나신 거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용감한 분이셨다. 캔디상자를 들어 불 속으로 던져버린 오빠는 동백꽃을 집어 만지작거렸다. 나는 천천히 내 방으로 가려고 그 자리를 떴고, 아버지는 신문을 펼쳐들었다. 12. 나도 검기 때문이지 열세 살을 맞이한 오빠는 그해부터 달라져갔다. 변덕스럽고 가끔은 우울해보여서 그전처럼 오빠와 어울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오빠의 식욕은 놀라울 정도로 왕성해졌고 내게 하는 말이란 고작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말뿐이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오빠 뱃속에 촌충이라도 들어 있나봐요. 아버지는 그게 아니라 그저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만 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참아내고 오빠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빠의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달라져갔다. 두보스 할머니는 무덤에서도 춥지 않을 거야. 오빠는 집에서 책읽기에 함께 동행해준 내게 매우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지난 밤 사이에 오빠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어떠한 판단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깨달았다고 했고, 그것을 내게 가르치려 했다. 오빠는 여러 차례에 걸쳐 나를 이해시키려고 애썼으나 결국 한 번의 말다툼 끝에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너도 이제 소녀가 될 때가 됐잖아? 여자답게 좀 행동해! 나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칼퍼니아 아줌마에게 달려갔다. 미스터 젬이 그러는 거 너무 기분 상해 하지 마라. 미스터 젬이라구요? 물론이지. 젬은 어른이 되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닌데요. 오빠는 지금 누군가에게 실컷 맞아야 해요. 하지만 난 힘도 없고 크지도 않으니 어쩔 수도 없고 ,,, . 스카웃, 젬이 저러는 건 누구도 어쩔 수 없단다. 젬은 지금 자신을 어디로 보내버리고 싶은 거야. 그리고 남자아이들이 하는 일을 다 찾아 다닌단다. 어디로든 떠나버리고 싶은 거니까. 그러니까 네가 심심하다고 느낄 땐 부엌으로 오렴. 그럼 되겠지? 부엌에는 할 일이 많으니까. 그해 여름은 좋은 예감과 함께 다가왔다. 젬 오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나는 딜이 올 때까진 칼퍼니아 아줌마의 제안대로 부엌에서 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부엌에 나타나면 아줌마는 좋아하는 빛이 역력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소녀가 되려면 적절한 처세 역시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여름이 왔다. 그러나 딜은 오지 않았다. 스냅사진이 동봉된 편지만이 배달되었다. 편지에는 새아버지가 생겼다고 씌어 있었고 낚싯배를 건조하기 위해 메리디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딜의 새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같이 변호사인데, 훨씬 젊고 쾌활한 외모를 가졌다고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딜에게 새아버지가 생겨서 나도 기뻤다. 딜은 나에게 영원히 사랑한다며 돈을 많이 벌면 나에게 결혼신청을 할 거라고 했다. 답장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편지를 끝맺고 있었다. 나는 영원한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딜이 이곳에 오지 않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여름의 추억은, 연못가에서 종이로 말은 가짜 담배로 어른 흉내를 낸다거나, 부 래들리를 나오게 하려는 거창한 계획으로 눈동자를 빛내던 딜의 모습이 전부였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난 여름 내게로 다가와 오빠가 한눈을 파는 사이 얼른 내 뺨에 키스하던 딜. 때때로 서로에 대해 열망하면서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시간들. 그러나 딜이 가까이 없었으므로 올 여름은 별다른 추억거리를 만들지 못했고, 그가 없는 여름이 자못 속상하기만 했다. 나는 이틀 동안을 슬픔 속에 잠겨 지내야만 했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듯 아버지는 주 입법부에 비상이 걸려 보름 동안 집을 비워야 했다. 또한 그 무렵 메이컴은 정책적으로 범선에 붙은 따게비를 떼어내는 일에 열중했고, 버밍햄에서는 연좌농성으로 시끄러웠다. 도시의 실업자 수가 점점 늘어나고, 시골 사람들은 갈수록 살기 어려워진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국문제들은 오빠와 내게는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우리는 어느 날 아침, (몽고메리 신문)에 실린 메이컴의 핀치 라는 표제를 단 만평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맨발에 짧은 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책상에 쇠사슬로 묶인 채 무엇인가를 열심히 석판에 쓰고 있고, 그 옆에는 천박한 여자가 야유를 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저건 칭찬하는 거야, 스카웃. 아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계시거든.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으응? 요즈음 들어 젬 오빠는 매사에 아는 척을 하려고 들었다. 오, 스카웃, 그건 국가의 조세제도를 재편성하는 거와 같은 거야. 그런 일들은 대부분의 남자들에겐 힘들고 어려운 일이거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 오, 혼자 있게 해줘, 스카웃. 신문을 읽고 있는 중이라구. 오빠의 소원대로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콩깍지를 까고 있던 칼퍼니아 아줌마는 나를 보자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이번 일요일에 교회 갈 때 내가 도울 일 없냐? 네, 아빠가 헌금 낼 돈을 주시고 가셨어요. 칼퍼니아 아줌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칼 아줌마, 우리가 지난 몇 년간 교회에서 얌전하고 예절바르게 행동한 거 아시죠? 지금 칼퍼니아 아줌마는 오래 전 아버지도, 교회 선생님도 없었던 비오는 일요일의 사건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날 우리는 보일러실에서 성경놀이를 한답시고 유니스 앤 심프슨을 의자에 묶어놓았다. 그애의 역할은 포로인 사드라쉬였다. 그런데 예배시작을 알리자 우리는 그애의 존재를 깜빡 잊고는 교회 이층으로 떼지어 올라가 조용히 설교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아래층에서 라디에이터 관이 터지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그곳을 조사해보고 결국 유니스 앤을 꺼내주자 풀려난 그녀는 더이상 사드라쉬 역은 하지 않겠다고 울부짖었다. 그일에 대해 젬 오빠는 그 유니스 앤의 신앙심이 투철했다면 불에 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어찌됐건 보일러실은 몹시 더웠던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아빠가 우리만을 남겨두고 가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까지는 교회 선생님께 확실히 부탁하셨는데, 이번엔 아무 말씀도 안 하셨거든. 잊으셨나봐. 칼퍼니아 아줌마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갑자기 미소지었다. 너희들 내일 나와 함께 우리 교회에 가는 것이 어떨까? 정말? 그래, 어떻게 생각하지? 칼퍼니아 아줌마가 싱긋이 웃었다. 그 토요일 저녁 아줌마는 전에 없이 내 몸 전체에 비누칠을 두 번이나 해주었고, 욕조에서 새 물을 퍼내어 헹궈주었다. 머리를 세면대에 숙이게 하고는 옥타곤 비누와 카스틸 비누를 번갈아 칠해서 감겨주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젬 오빠를 신용해왔으면서도 그날 만큼은 오빠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해서 오빠를 화나게 했다. 이 집에서 혼자 목욕 못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칼퍼니아 아줌마는 옷가지 더미에 묻혀 있었다. 어젯밤 그녀는 부엌에 있는 간이 침대에서 잤던 것이다. 그날 아침 집 안은 온통 우리들의 일요일 복장이 널려 있었다. 내가 입고 갈 드레스는 풀을 너무 매겨서, 앉으면 텐트 모양이 되곤 했다. 아줌마는 페티코트를 입힌 후 허리엔 분홍색 장식띠까지 단단히 매주었다. 게다가 에나멜 구두는 비스킷으로 닦아서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였다. 우린 마치 마디 그래스(참회의 화요일로 사육제 마지막날의 카니발)라도 가는 것 같은데요? 왜 그러는 거죠, 칼 아줌마? 오빠가 물었다. 너희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소리를 누구에게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녀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젬! 그 양복에 그 넥타이는 절대 안 돼, 그건 초록색이야. 이게 어때서요? 양복은 푸른색인데 구분 못하겠어? 히히, 오빠는 색맹이래요. 내가 떠들어댔다. 오빠는 화가 나서 얼굴을 붉혔다. 그때 칼퍼니아 아줌마가 말했다. 자, 이젠 다 됐다. 미소를 머금고 퍼스트 퍼처스 교회에 가면 되는 거야. 퍼스트 퍼처스 아프리칸 M.E 교회는 마을 남쪽 경계 밖 옛날 제재소 너머 흑인 숙소에 자리잡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건물로 메이컴에선 유일하게 뾰족탑과 종이 있는 교회였다. 퍼스트 퍼처스란 이름은 해방 노예들이 처음 번 돈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일요일은 흑인들의 예배장소였고, 주중엔 백인들의 도박장소였다. 교회 마당은 단단한 벽돌용 진흙으로 덮여 있고, 근처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누가 건조기에 죽기라도 한다면 그 시체는 비가 와서 땅이 부드러워 질 때까지 얼음덩이에 넣어둬야만 했다. 공동묘지에는 부서져 흔적만 남은 묘지들도 있었고, 새 묘지 주변에는 색유리와 깨진 코카콜라 병이 놓여 있기도 했다. 피뢰침만이 불안정하게 잠들어 있을 몇몇 무덤을 지키고 있었고 타버린 양초가 아이의 무덤 머리맡에 꽂혀 있는 평화로운 사원 묘지였다. 교회 마당을 들어서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흑인들 특유의 달콤씁쓸한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사랑의 증표 라고 불리는 헤어스타일은 애서페티더 냄새와 호이츠 코롱, 브라운즈뮬, 박하향과 라일락향의 분으로 뒤섞여져 있었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우리와 동행한 것을 보자 남자들은 뒤로 조금 물러서며 모자를 벗었고 여자들은 정중한 인상을 주려는 몸짓으로 팔을 다소곳이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양 옆으로 나뉘어 교회문까지 작은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화사한 옷차림을 한 교인들의 인사에 답하며 나와 젬 오빠 사이에서 걸었다. 무슨 일이죠, 칼? 우리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오빠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돌아보았다. 그 길에 큰 검둥이 여자가 한쪽 다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불량한 몸짓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손바닥으로 우리를 가리켰다. 허리가 둥근 그녀는 아몬드 모양의 이상한 눈을 하고 코는 곧았으며 입술은 인디언 활모양을 하고 있었다. 칼퍼니아 아줌마의 손이 내 어깨를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왜 그러는 거야, 룰라?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투로 아줌마는 조용히 경멸하듯 내뱉았다. 검둥이 교회에 왜 백인 아이들을 데려왔죠? 얘들은 내 친구들이야. 칼퍼니아 아줌마가 말했다. 또 한 번 나는 그녀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흑인과 같은 말투로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요? 난 당신이 평일에만 일하는 줄 알았는데? 웅성거림이 군중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냐. 그렇게 속삭이는 칼퍼니아 아줌마의 모자 위 장미가 격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룰라가 우리를 향해 다라오자 칼 아줌마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 당장 서, 이 검둥아. 룰라가 멈춰서서 말했다. 백인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올 필요는 없잖아요. 그들은 그들 교회가 있을 텐데. 우린 우리 것이 있고 이건 우리 교회예요. 안 그래요, 칼? 하느님은 다 같아. 집으로 가요, 칼. 우리가 이곳에 오는 걸 원치 않나 봐요. 젬 오빠가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원치 않았다. 보이는 것보다는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로 점점 다가오는 듯 느껴져 난 칼퍼니아 아줌마를 올려다보았다. 얼핏 바라본 아줌마의 눈빛에 장난기가 서려 다시 아래를 쳐다보니 룰라는 사라지고 흑인들 여럿이 무리지어 있었다. 그 군중들로부터 누군가 걸어나왔다. 쓰레기 청소부인 제보였다. 젬, 여러분이 와줘서 정말 반가워요. 룰라는 신경쓸 것 없고 ,,,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님께서 그녀의 기를 꺾어놔서 뒷전에서 다투길 좋아하거든, 말썽꾸러기구, 건방진 생각에 공상이나 하고 ,,, 아무튼 우린 여러분이 와줘서 정말 기뻐요. 그의 말이 끝나자 칼퍼니아 아줌마는 우리를 이끌고 교회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인사를 건네며 우리를 맨 앞으로 안내했다. 교회는 천장도 없고 페인트칠도 돼 있지 않았다. 벽을 따라 남포등이 놋쇠 남포받이 위에 매달려 있었다. 교회 의자는 소나무로, 연단은 거친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 위에는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씌어진 빛바랜 핑크빛 실크 깃발이 늘어져 있었고, 그 외에 세상의 빛 이라고 헌트식의 프린트가 된 그라비아판이 교회 장식의 전부였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보게 되는 피아노며 오르간, 찬송가나 교회 프로그램 등 교회에서 쓰는 비품들의 흔적은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둠침침한 교회내부의 냉랭한 습기는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천천히 가셨다. 각자의 의자마다에는 싸구려 종이부채가 놓여 있었고, 겟세마네 정원 관리 안내문이나 세관검사면제 안내, 원하시는 것 모두 있습니다 라고 번쩍이는 글씨체로 된 틴데일 철공소 광고지가 놓여 있었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젬 오빠와 나를 장의자 맨 끝으로 오라고 손짓하고 우리들 사이로 들어와 앉았다. 그리곤 손주머니에서 끝을 막아 묶은 손수건을 꺼내 풀은 다음 십 센트씩 젬 오빠와 내게 각각 나누어주었다. 우리도 있어요. 오빠가 말했다. 그건 너희들이 갖고 있어. 칼퍼니아 아줌마가 말하자 오빠의 표정에 주저하는 빛이 역력했으나 어른에 대한 예우라고 판단한 오빠는 동전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나도 별다른 생각없이 오빠를 따라했다. 칼 아줌마.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찬송가는 어디에 있어요? 이곳엔 찬송가가 없단다. 그럼 어떻게 ,,, . 쉿. 어느새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연단 위에 서서 교인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작고 당당한 몸집의 리버렌드 목사는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금시계줄이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에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젬 군과 스카웃 양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들의 아버지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공지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몇 장의 메모지를 들추다가 하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선교회가 아네트 리브스 자매 집에서 다음 화요일에 모임을 갖습니다. 바느질감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는 또다른 메모지를 읽었다. 여러분 모두 톰 로빈슨 형제의 어려움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소년 때부터 이 교회의 충실한 신도였습니다. 그의 아내 헬렌을 위해 오늘부터 다음 셋째주 일요일까지 헌금을 걷을 예정입니다. 나는 오빠를 탁 쳤다. 저것이 바로 톰 ,,, . 쉬이! 나는 칼퍼니아 아줌마를 향해 얼굴을 돌렸지만 입도 열기 전에 아줌마는 주의를 주었다. 할 수 없이 궁금증을 억제하며 다시 목사에게 주목했다. 목사는 내가 조용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찬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제보가 가운데 통로로 내려가 우리 앞에 섰다. 그는 낡아빠진 찬송가를 펼치며 말했다. 273장을 찬송하겠습니다. 난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찬송가도 없이 어떻게 찬송을 해요? 칼퍼니아 아줌마는 미소를 머금고 내게 말했다. 조용, 곧 알게 될 거야. 드디어 제보가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멀리서 울리는 듯한 대포 소리로 찬송가를 읽어 나갔다. 저 강 너머에 은총의 땅이. 제보가 읽은 찬송가 가사들이 초자연적인 음색으로 수백 가지의 목소리가 되어 터져나왔다. 다만 마지막 음절은 제보를 따라 허스키한 소리로 허밍을 했다. 그곳은 영원한 꿀이 있는 곳. 음악이 다시 부풀어 오르듯 커졌는데, 마지막 음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다음 음절을 읽은 제보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믿음의 힘으로 그 강에 닿으리. 그 다음엔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들이 제보가 우렁차게 암송함에 따라 다시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이어서 제보가 찬송가를 덮었다. 찬송가 도움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꺼져갈 듯한 음성으로 제보가 이어나갔다. 인식의 해, 저기 저 영원한 꿀이 흐르는 땅이, 빛나는 강 바로 저 너머. 찬송가가 서글픈 웅얼거림으로 한 음절씩 끝날 때마다 단순화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젬 오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빠는 제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보았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순서로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는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도록 하느님께 간구하는 등 우리 교회 예배의식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설교 중에 신성한 어투로 신도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 특이할 뿐이었다.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의 설교는 벽에 걸려 있는 격언이 엄격히 선언이라도 하는 듯 죄에 관한 솔직한 고발이었다. 밀주 제조업과 도박,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의 죄에 대하여 경고했다. 밀매업자는 흑인특정지구에 커다란 고통거리였으며 여성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이미 모든 성직자에게 흡수되어 있는 여성음란에 대한 교리와 또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오빠와 나는 그 다음 주일에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서 똑같은 설교를 들어야 했다.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면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는 개인적 타락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좀더 자유롭게 표현했다는 점뿐이었다. 이를테면 짐 하이디가 아프지도 않으면서 다섯 번이나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거나, 킨스턴스 잭슨은 이웃과의 싸움으로 평판이 좋지 않으니 좀더 행동에 조심하라는 등의 직접적인 경고였다. 이러한 설교를 끝마친 목사는 연단 앞 테이블 옆에 서서 아침헌금을 간청했다. 그것 또한 생소한 장면이었다.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오 센트나 십 센트를 검정 에나멜칠을 한 커피깡통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곤 동전이 짤랑 하고 울릴 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다소곳하게 읊조리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바로 그 테이블 위에다 커피깡통을 쏟아 동전을 긁어모으고는 몸을 똑바로 세워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는 안 됩니다. 십 달러가 더 필요합니다. 신도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고 계실 겁니다. 헬렌은 톰이 감옥에 있는 동안 아이들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동전 한 개라도 더 헌금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곤 리버렌드 목사가 손을 들어 큰소리로 말했다. 알렉, 문을 닫아요. 십 달러가 모일 때까진 누구도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손주머니를 열어서 낡은 동전지갑을 꺼내 젬 오빠에게 반짝이는 이십오 센트를 건네주었다. 아니에요, 칼 아줌마 우리 돈으로 넣을게요. 오빠가 속삭였다. 네 것도 내놔, 스카웃. 그 교회 안의 분위기가 차츰 무겁게 가라앉았고, 리버렌드 목사가 신자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그 마음이 서서히 내게도 전해졌다. 선풍기는 지치지 않고 시끄러운 소음을 내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교인들의 발소리만 흩어지고 있었고, 씹는 담배를 즐기는 사람은 더욱 고역스러워 보였다. 순간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의 준엄한 음성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캘로 리처드슨, 난 당신이 이 통로에 나오는 걸 아직 보지 못했소. 카키색 바지를 입은 깡마른 사내가 통로로 나와 동전을 떨어뜨렸다. 사내의 행동에 동의한다는 표현이 교인들 사이로 짓눌린 듯 터져나왔다. 아직 부양가족이 없는 분들이 희생을 하셔서 십 센트씩 넣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힘들게 십 달러가 모아졌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따뜻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제보가 요르단 폭풍의 강둑 을 읊는 것으로 예배는 끝을 맺었다. 나는 좀더 남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칼퍼니아 아줌마는 나를 앞세우고 통로로 몰았다. 교회문 앞에서 칼 아줌마가 제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오빠와 나는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의문스러운 점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칼퍼니아 아줌마에게 묻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 찾아와줘서 정말 기쁘구나. 너희 아버님처럼 훌륭한 분을 찾아보긴 힘들단다. 결국 나의 호기심이 터져나왔다. 이 교회에서는 왜 톰 로빈슨의 아내를 위해 헌금을 해야 하나요? 모르고 있었니? 헬렌은 아이가 셋이라서 밖에서 일을 할 수가 없거든.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목사님. 들판에서 일하는 흑인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그늘진 적당한 곳에 놓아두곤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두 줄의 면끈 안에 앉아 있었고 갓난아이는 엄마 등에 업히거나 헝겊자루를 이용하여 그 안에 앉혀놓았다.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머뭇거리다가 얘기를 시작했다. 진 루이스 양, 헬렌은 요즈음 일거리를 찾기가 아주 어렵단다 ,,, . 목화 따는 철이 오면 링크 디스 씨가 그녀를 써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 . 왜 그러는데요, 목사님? 어느새 칼퍼니아 아줌마의 손이 나의 어깨 위에 올려져 지긋이 누르는 압박감이 전해져왔다. 여기 들어오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간단히 인사치레를 했고, 오빠도 똑같은 인사말을 한 다음, 우리는 그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칼 아줌마, 톰 로빈슨이 무슨 잘못을 하고 감옥에 있는지는 알지만, 그렇다고 그의 아내를 고용하지도 않나요? 내가 물었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곤색 무명 원피스에 테있는 모자를 쓰고 젬 오빠와 나 사이에서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톰이 한 일을 떠들고 다니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은 자기 가족과 관련이 없으면 별생각 없이 떠들어대거든. 그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 칼퍼니아 아줌마가 한숨지으며 말했다. 저 ,,, 봅 이웰 씨가 자기딸을 강간했다고 고발을 했단다. 이웰 씨요? 나는 기억의 촉수를 곤두세웠다. 학교에 첫날만 오는 그 이웰 아이와 연관이 있나요? 왜, 있잖아요. 아빠가 그들을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하셨거든요. 난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빤 ,,, . 그래 맞아, 그 사람이야. 만약 메이컴의 모든 사람들이 이웰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안다면 헬렌을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을 텐데 ,,, 그런데 강간이 뭐예요, 아줌마? 아버지께 여쭤보도록 해요. 더 잘 설명해주실 테니까. 너희들 배고프지 않니? 오늘은 목사님이 엉킨 걸 푸시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 대체로 이처럼 지루하게 인도하시진 않으셨거든 ,,, . 그분은 저희 목사님과 똑같아요.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찬송을 하나요? 오빠가 물었다. 라이닝 말이니? 그걸 그렇게 말하나요? 그래, 라이닝이라고 하지. 언제나 그런 식으로 한단다. 젬 오빠는 일년 정도 헌금을 모아 찬송가 책을 사야겠다고 의사를 표시했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웃었다. 그래도 소용없단다. 그들은 읽지를 못하거든. 못 읽는다구요? 그 모든 사람들이요? 나는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응, 못 읽는단다. 우리 퍼스트 퍼처스에서는 오직 네 명이 글을 읽는데 내가 그중 한명이지. 무슨 학교에 다니셨어요, 칼 아줌마? 오빠가 물었다. 아무 곳도. 글쎄 누가 내게 글을 가르쳤을까? ,,, 음 ,,, 그래, 머디 애킨슨 부인의 고모이신 부포드 부인이셨다. 그럼 칼 아줌마도 그 정도 나이세요? 나는 핀치 변호사님보다도 나이가 많단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싱긋이 웃었다. 몇 살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언젠가 기억을 더듬어 본 적이 있었지. 그때 내가 핀치 변호사님보다 몇 년 정도 더 기억할 수가 있었거든. 사실, 많다고 해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거야. 남자들은 여자만큼 기억을 잘 못하니까. 생일이 언제예요, 아줌마? 난 진짜 생일을 몰라요. 그저 기억하기 쉽게 크리스마스로 하고 있단다. 하지만 아줌마는 아빠보다 훨씬 젊어보여요. 오빠가 말했다. 흑인들은 쉽게 늙지 않는단다. 어쩌면 글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칼퍼니아 아줌마가 제보를 가르치셨어요? 오빠가 물었다. 그래요, 젬. 그가 소년일 때는 학교조차도 없었지. 그래도 난 그를 가르쳤단다. 제보는 칼퍼니아 아줌마의 큰아들이었다. 내가 그런 일들을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그녀의 성숙된 삶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 제보가 청년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난 그점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우리들처럼 초급용 책으로 가르치셨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 매일 성경 한 페이지씩을 읽혔단다. 부포드 부인이 나를 가르치신 책을 내가 어디서 구했는지 너희들은 모를걸?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건 말이다. 너희들의 할아버지이신 핀치 선생님이 주셨단다. 그러면 칼 아줌마도 핀치 가문의 영토 출신이세요? 어째서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죠? 그래, 난 분명 그곳 출신이야, 젬 선생. 부포드 가문과 핀치 가문의 영토 사이에서 살면서 대부분 양쪽 집안 일을 했단다. 그리곤 네 아빠가 엄마와 결혼하시자 메이컴으로 온 거지. 그게 무슨 책이었는데요? 내가 물었다. 블랙스콘의 (비평서)였단다. 젬 오빠가 한대 얻어맞은 듯 멍청하게 물었다. 그럼 제보에게도 그 책으로 가르쳤나요? 그렇지. 왜, 뭐가 잘못됐나? 칼퍼니아 아줌마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것이 내가 갖고 있던 유일한 책이었거든. 너희 할아버지께서 블랙스톤은 훌륭한 영어문장을 사용했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말했구나. 오빠가 알 만하다는 듯 말했다. 다른 사람 누구? 다른 흑인들 말이에요. 물론 칼 아줌마도 교회에선 그런 식으로 말했지만요 ,,, . 나는 칼퍼니아 아줌마가 지켜온 적당한 이중생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 가족과 밖의 생활에서 두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것을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다. 칼 아줌마, 수준이 낮다는 걸 알면서 그들과 있을 땐 왜 그런 투의 말을 하세요? 으음, 그건 말이다, 첫째는 나도 검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요. 젬 오빠가 말했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모자를 기울여 머리를 긁적이곤 다시 귀까지 조심스럽게 눌러썼다. 그걸 정확히 설명하기란 좀 어렵구나. 음 ,,, 스카웃이 집에서 흑인들 말투를 썼다고 해보자. 왠지 어색하겠지. 그렇지? ,,, 마찬가지로 내가 우리 교회에서 백인 말투만 쓰고 다닌다면 그들은 내가 모세한테라도 덤빌 듯 꼴값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단다. 하지만 칼 아줌마는 더 많이 알고 있잖아요. 나도 오빠를 거들었다. 내가 아는 걸 모두 다 말할 필요는 없단다. 그건 첫째 교양있는 일도 아니고, 둘째, 사람들이란 자기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법이거든. 더욱 화만 나게 할 뿐이지. 옳은 일을 지적해줘도 전혀 바꾸려하지 않는단다. 그들이 배우길 원하든 말든 그저 그들의 방식대로 따라가주는 것이 최선이란다. 가끔 칼 아줌마를 찾아봐도 되나요? 아줌마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보다니? 매일 보구 있잖니? 칼 아줌마네 집에서요. 일이 끝나면 아무때나 ,,, 아빠가 승낙하실 거예요.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하지. 우리는 래들리 집 앞 보도 위를 걷고 있었다. 저기 현관 좀 봐. 오빠가 말했다. 나는 그네 위에 앉아 있는 유령이라도 기대하며 래들리 집을 살펴보았다. 그네는 비어 있었다. 거기 말고, 우리 현관. 나는 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꼿꼿하고, 고집스럽게 알렉산드라 고모가 마치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13. 내 마음속의 카스트 제도 칼퍼니아, 이 가방 내 침실로 갖다놔요. 알렉산드라 고모의 첫 번째 주문이었다. 진 루이스, 머리는 좀 그만 긁도록 하지. 두 번째 주문이었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고모의 무거운 여행가방을 집어들고 문을 열었다. 내가 할게요. 젬 오빠가 받아 들었다. 그 여행가방이 침실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음이 들려왔다. 잠깐 다니러 오셨어요? 내가 물었다. 핀치 영토에 살고 있는 알렉산드라 고모의 방문은 참 드문 일이었고 고모는 주 전체를 고루 여행하곤 했었다. 한때는 고모도 지나칠 정도로 깔끔한 밝은 녹색의 스퀘어 뷕 자동차와 흑인 운전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너희 아버지가 말씀 안 하시던? 오빠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잊으셨나보구나, 아직 안 돌아오셨니? 네, 보통 오후 늦게 돌아오세요. 오빠가 말했다. 그래? 너희 아버지와 상의해본 결과 내가 너희들과 당분간 함께 있어야 할 시기라고 결정을 했단다. 메이컴에서의 당분간 이라는 의미는 사흘에서 삼십 년까지를 모두 내포하는 말이었다. 젬 오빠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젬은 자라고 있고, 너도 마찬가지야. 고모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래서 이집에 여자가 있어서 너희들을 돌봐야 한다고 결정을 했단다. 난 오래있진 않을 거야, 진 루이스. 네가 사내아이와 옷에 신경을 쓰게 될 때까지만이다.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몇 가지 할 말이 있었다. 칼 아줌마도 여자이며 내가 남자아이에 흥미를 느끼려면 몇 년은 더 지나야 할 테고 더욱이 옷에 관해서라면 나는 결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미 고모부도 오시나요? 젬 오빠가 질문했다. 아니, 그곳에 남아 집을 돌보실 거야. 그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가 말했다. 보고 싶지 않으세요? 이 질문은 그다지 재치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고모부는 말수가 적었으므로 고모부는 있으나 없으나 별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나의 질문을 못 들은 채 그냥 넘겼다.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실은 고모께 무슨 말을 할까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언젠가 있었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모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어떠니, 진 루이스? 좋아요, 고모. 고모는요? 응, 좋다. 무얼하며 지내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네. 너 친구있지? 네. 친구와는 뭘하고 지내지? 아무 것두요. 고모가 나를 엄청나게 답답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 내가 좀 둔한 것 같다고 아버지께 전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고모의 느닷없는 방문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난 고모에게 따져 물어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알렉산드라 고모는 왠지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고모는 뚱뚱한 편은 아니었지만 날씬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적당한 코르셋을 선택해서 가슴높이까지 끌어올리고 허리는 핀으로 있는 대로 조여 고정시킨 덕분에 히프에서부터는 나팔꽃처럼 퍼져 있었다. 그 모습은 모래시계를 연상시켰으며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장관이었다. 오후의 나머지 시간은 친척이 방문했을 때 특유의 조용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자동차 소리로 그 분위기는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몽고메리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젬 오빠는 위엄과 품위도 잊은 채 나와 함께 뛰어나갔다. 그리고 아빠의 서류가방과 여행가방을 움켜잡았다. 나는 아버지의 팔에 뛰어올라 일상적인 키스를 받으며 말했다. 책 사오셨어요? 고모 오셨어요. 아버지는 두 가지 말에 모두 긍정으로 답하셨다. 고모와 함께 지내는 거 좋지? 나는 아주 좋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사람이란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들 고모와 나는 지금이 어린 너희에게 꼭 필요한 때라고 느꼈다. 그건 이렇다, 스카웃. 아버지는 진지하게 말했다. 너희 고모는 너희들처럼 나를 도와주시거든. 난 하루종일 너희들과 있어줄 수가 없는 데다가 다가올 여름은 더욱 바빠질 것 같아서 말이다. 네, 아빠. 나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쨌든 난 고모의 출현이 아빠의 제안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모는 언제나 가족을 위한 최선의 길 에 대해 자주 선언했고, 우리집에서의 생활 역시 그 범주 안에서 결정된 거라고 믿고 있었다. 메이컴은 고모를 반갑게 맞이했다. 머디 애킨슨 아줌마는 레인케익을 구워왔다. 와인을 너무 많이 넣어 나를 취하게 했지만 ,,, . 스테파니 아줌마는 고모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그들의 대화는 거의 스테파니 아줌마가 머리를 끄덕이며 음, 음, 음 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웃집 라이첼 아줌마는 오후에 커피를 마시러 왔고 나단 래들리 아저씨도 우리집 앞마당에 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고모가 우리와 함께 지내면서 생활은 다시금 매일매일의 속도로 계속 되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마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선교단체모임에서 고모의 음식솜씨는 안주인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독실한 개신교도인 고모는 이 모임의 필수조건인 맛있는 요리를 칼퍼니아 아줌마에게 맡기지 않았다. 또한 고모는 메이컴 기자클럽의 간사가 되었다. 메이컴의 파티 참석자 중에는 꽤 나이가 든 편이었다. 고모는 보트를 갖고 있었고, 기숙학교에서 배운 예의범절이 있었다. 또한 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따르며 지지했고, 대단한 사명을 띠고 태어난 듯한 구제불능의 수다쟁이였다. 고모는 학창시절에 어떠한 과목에서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우등생이었던 탓인지 내면의 아름다움은 미처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결코 지루해 하는 법이 없었고, 아무리 작은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걸 조정하고 충고하며 주의를 주고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 고모는 우리 가문이 지닌 우수성을 염두에 두고 다른 집안의 단점을 지적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고, 그런 습관은 젬 오빠를 오히려 재미있게 만들었다. 고모는 메이컴 사람들에 대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취조와 감시를 하시는 것 같아. 결국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핏줄인데 말이야. 고모는 젊은 샘 메리웨더의 자살에 대해 이미 정신적인 이상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그것으로 그 집안을 병적인 내력이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또한 열여섯의 소녀가 성가대에서 킬킬거리기라도 하면 대뜸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저건 모든 펜필드 가의 여자들이 경망스럽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어찌됐건 메이컴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성향이 있었다. 술마시는 성향, 도박, 천하고 한심한 성향 등이다. 한 번은 스테파니 아줌마가 다른 사람에 대해 지나치게 알고 싶어하는 것은 유전이 분명하다고 고모가 단정하자, 아버지가 덧붙였다. 알렉산드라, 네가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연관시킨다면 핀치 가문 초기에 우리 조상들도 사촌과 결혼한 게 되는 거야. 결국 넌 핀치 가문이 근친성 결혼이라고 말하는 거야. 고모는 절대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왜냐하면 우리 집안 사람들의 손과 발이 작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모의 유전에 관한 편견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상기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란 자신의 감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성취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왔다. 그러나 고모의 간접적 견해로 볼 때 훌륭한 가문이란 이 땅이 발견된 이래 조그만 땅뙈기라도 갖고 있는 부류를 뜻하는 듯했다. 그럼 이웰 집안 사람들도 훌륭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오빠가 말했다. 버리스 이웰이라는 종족은 메이컴의 쓰레기더미에서 삼 대째 살아왔고, 극빈자 복지연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찌됐건 알렉산드라 고모의 논리엔 뭔가 숨겨진 것이 있었다. 메이컴은 오래된 마을이었다. 그것은 핀치 가문 영토에서 이십 마일 떨어져 엉거주춤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철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여인숙을 하고 있던 싱크필드라는 약삭빠른 사람이 아니었다면 메이컴은 강가로 더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그는 애국자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총포 사업을 위해서라면 앨라배마에 속한 이주민이거나 인디언 부족이거나 가리지 않고 양쪽 모두에게 총을 팔아먹었다. 언젠가 그의 사업이 크게 번창할 때 윌리엄 와트 빕이라는 사령관이 새롭게 메이컴을 넓혀서 관할 청사를 세우려고 그곳으로 측량사를 급파했었다. 그 측량사는 싱크필드의 여관에 머물며 그에게 그 메이컴의 예정지를 보여주었다. 그때 싱크필드가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대담한 욕심이 없었더라면 메이컴은 모든 이익이 철저히 배제된 윈스턴 늪지에 자리잡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메이컴은 싱크필드 여관을 기점으로 상당히 넓어졌다. 그때 싱크필드는 당시 측량사가 지독한 근시에다 술에 취한 걸 이용하여 자신의 이해타산에 맞게 지도와 도표를 고쳐놓았던 것이다. 그리곤 다음날 술 다섯 병과 함께 그 고쳐진 도표를 하나는 그들 것으로 또 하나는 사령관용으로 잘 싸서 보낸 것이다. 메이컴이 지금처럼 된 첫째 이유는 관할청이 있기 때문에 다른 소지방과 다르게 궁색스러움을 면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에 세워진 건물은 견고하고 조형미가 뛰어났으며 메이컴의 자랑인 거리는 넓었다. 전문인의 비율도 높아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이를 뽑기 위해 메이컴을 찾아야 했고, 마차를 고치거나 영혼을 구제받기 위해, 또는 노새를 검사하러 메이컴으로 몰렸다. 그러나 싱크필드 전략은 결국 문제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당시 유일한 수송로인 강으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상품을 사려는 사람들은 메이컴 주의 북쪽 끝에서 메이컴으로 가는데 이틀을 소비해야 했고 그 결과 메이컴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넓은 목화밭과 임목지역으로 된 여전한 풍경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었다. 메이컴은 전쟁으로 인한 커다란 피해는 없었으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과 제도적 장치를 위한 꾸준한 검토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그건 지역 이기주의에 불과했고,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거의 정착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 지역사회 사람들끼리 인연이 깊어져 갔으므로 같은 집안끼리 결혼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간혹 누군가 몽고메리나 모빌에서 살다가 되돌아와도 메이컴 특유의 분위기에 흡수되어버렸다. 그런 분위기는 나의 유년기와 별 다름이 없었다. 메이컴은 진정한 의미에서 카스트 제도가 존재한다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카스트 제도는 마을 어른들과,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온 현재의 시민들로 대별되어 서로를 철저히 들여다본다는 것이었다. 마음가짐이나 성격, 성장기의 모습과 행동거지 등이 대대로 이어져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련되어왔다. 크러포드의 마음은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니다. 메리워터의 삼 대는 불건전하다. 진실은 델라필즈 은행에도 없다. 부포드 사람들은 그렇게 걷는다. 이와 같은 격언이 암암리에 생겨났고 날마다의 삶을 간단히 지배하고 있었다. 신중한 전화 없이는 절대 델라필즈 은행으로부터 수표를 끊을 수 없었고 머디 애킨슨 아줌마의 어깨가 올라간 이유도 그녀가 부포드 집안이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 메리웨더 부인이 리디아 필크햄 상표의 진을 홀짝인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잘맞는 장갑처럼 메이컴의 세계에 적응해나갔다. 그러나 오빠와 나의 세계와는 결코 맞지 않았다. 나는 툭하면 어떻게 고모가 아버지가 잭 삼촌의 누이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 그래서 오빠가 꽤 오래 전에 얘기해준 만다라 꽃뿌리나 슬쩍 바꿔친 아이에 관한 희미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단지 고모의 한 달간의 체류를 종합해본 추상적 고찰에 지나지 않았다. 고모는 우리와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고 식사 시간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만 겨우 마주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여름이어서 우리는 늘 집 밖에서 놀았다. 가끔 물을 마시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갈 때면 메이컴 숙녀들과 함께 거실에서 차를 홀짝이거나 속삭이며 부채질하는 고모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틀림없이 나를 불러세웠다. 진 루이스! 이리 와서 이분들께 인사드려라! 내가 문 앞에 나타나는 순간 고모는 나를 부른 걸 후회하는 듯 보였다. 나는 보통 진흙투성이에 모래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네 사촌 릴리께 인사드려라. 어느 날 오후 복도에서 고모는 나를 불러세웠다. 누구라구요. 너희들 사촌 릴리 브룩이란다. 저 분이 우리 사촌이세요? 몰랐는데. 알렉산드라 고모는 릴리 사촌에게 송구스러운 듯한 미소를 점잖게 보내고, 나에게는 단호한 비난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릴리 브룩 사촌이 떠나면 난 꼼짝없이 야단을 맞을 것이다. 아버지가 핀치 가문에 대해 말하기를 게을리했거나 가족으로서 품위를 갖춰야 할 것들에 대해 소홀히 여긴 것은 슬픈 일이었다. 고모는 젬 오빠를 호출했고 오빠는 내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고모는 잠깐 자리를 떠나 (조슈아 클레어 명상집)이라고 금장으로 찍힌 자줏빛 벨벳책을 가져왔다. 너희들 사촌이 이 책을 쓰셨단다. 아주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셨지. 젬 오빠가 조그만 책을 검사하듯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분이 그렇게 오랫동안 감금되었던 사촌 조슈아인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거요? 그분이 대학에서 술마시며 떠들고 다녔다고 아빠가 얘기해 주셨는데요.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급사일 뿐이라며 학장님을 산발총으로 쏘기까지 했지만 불발로 터져버렸다고 하셨어요. 그분을 꺼내기 위해 오백 달러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고요. 알렉산드라 고모는 황새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알았다. 우리 이점에 대해 생각 좀 해봐야겠구나.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책을 빌리러 오빠 방에 가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노크하고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오빠 침대에 앉아 우리를 찬찬히 바라보고는 싱긋 웃었다. 어 ,,, 으흠. 얘기를 꺼내시려는 듯 했다. 아버지의 쉰 목소리에는 잡음이 섞여나왔고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점점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외모로 보아서는 그다지 늙어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냥 말씀하세요. 저희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아버지는 무척 난감해 하며 쩔쩔맸다. 아니다. 그저 좀 설명해줄 것이 있어서 ,,, 너희들 고모께서 당부를 했거든 ,,, 젬 너는 핀치 가문의 후손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여태 얘기하셨던 거잖아요. 눈끝으로 쳐다보는 젬 오빠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가 무릎에 양손을 포개어 올려놓았다. 난 너희들에게 삶의 실상을 말해주려는 거다. 아버지가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바꿨다. 억양과 감정이 배제된 변호사의 목소리였다. 너희 고모는 너와 진 루이스가 아무렇게나 찍어내어진 것이 아닌 오랜 전통의 점잖은 가문 출신이라는 걸 마음속에 새겨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단다. 잠깐 말을 멈춘 아버지는 내 다리에서 교묘히 움직이는 빨간 풍뎅이를 바라보았다. 명문 집안으로 ,,, . 내가 풍뎅이를 털어버릴 때에도 아버지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너희들은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답변을 무시한 채 쉬지 않고 계속 얘기했다. 고모는 너희들이 어린 숙녀와 신사로 행동하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한다고 했고,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온 그 가문이란 이 메이컴 안에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너희들이 알고 있기를 바라신단다. 그러나 지금부터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처신을 바꾸기 바란다. 아버지는 단숨에 결론을 지어 얘기를 끝마쳤다. 오빠와 나는 얻어맞은 듯 얼떨떨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에게 시선을 옮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즉시 젬 오빠와 거울로 가서 빗을 집어 이빨에 대고 드르럭거렸다. 그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겠니? 아버지의 퉁명스러운 핀잔이 나를 저지했다. 나는 이빨 중간 쯤에 멈춰진 빗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이유없이 울고 싶었다. 그리곤 멈출 수 없었다. 이 순간만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는 이런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충고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알렉산드라 고모가 선동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젬 오빠를 보았다. 오빠도 나와 닮은 꼴의 고립된 웅덩이에 빠져 있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피해갈 곳도 없었지만 난 돌아서서 걷다가 아버지의 조끼에 부딪혔다. 난 거기에 머리를 묻고 푸른빛 옷감 저 안쪽에서 계속되는 작은 내장으로부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머니시계의 째깍소리, 풀먹인 셔츠의 엷은 구김소리와 부드러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뱃속에서 구르륵 소리가 들려요. 나도 안다. 사이다라도 좀 드셔야겠어요. 그래야지. 아빠? 그런 쓸데없는 것들이 일을 좀 다르게 만들어주나요? 제 말은 아빠가 ,,, . 아버지의 손길이 내 뒷덜미에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아라. 아직 걱정할 때가 아니지. 그것으로 난 아버지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리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할 때 난 머리를 들었다. 아빤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길 바라세요? 전 외울 수도 없지만 그 핀치 가문이면 해야 하는 ,,, . 잊어버려라, 나도 너희들이 기억하길 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방을 나섰고 문을 닫았다. 거의 쾅하고 닫혀지려는 순간에 문고리를 잡아 살짝 놓았다. 오빠와 내가 닫힌 문을 응시하고 있을 때 다시 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눈썹이 올라가고 안경은 흘러내려온 아버지의 얼굴이 ,,, . 내가 점점 조슈아 사촌을 닮아가는 것 같지? 나도 결국 오백 달러를 가족들에게 부담시키게 될까? 나는 아버지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자였다. 그런 일은 여자들이 맡아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14. 우리는 모두 필요한 사람들이야 우리는 고모로부터 더이상 핀치 집안에 대해 듣지 않게 되었지만 마을사람들로부터는 계속 듣게 되었다. 니켈로 무장한 어느 토요일 젬 오빠는 내가 따라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요즘 오빠는 사람들 앞에서의 내 존재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고는 했다. 우리가 한증막 같은 보도 위를 허우적대며 사람들 속을 지나칠 때면 대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저기 그집 아이들이 가네. 핀치네 아이들이잖아요.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엔 그저 메이코 약국에서 관장약을 들어보고 있는 농부들이나, 후버 말 대여소의 마차 위에 앉아 있는 밀짚모자를 쓴 땅딸막한 시골 여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풀려나자마자 이 지방의 어려운 일을 도맡고 있는 사람을 강간한 거야. 우리 곁을 지나쳐가던 말라빠진 신사가 잘 알 수 없는 말을 해댔고 그것은 아버지에게 하려던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아빠, 강간이 뭐예요? 창가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신문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와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저녁 식사 후 삼십 분 정도는 아버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설명해주었다. 강간이란 여자의 동의 없이 힘으로 성교를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왜 칼퍼니아 아줌마는 대답을 안 해주었을까요? 아버지는 서글픈 표정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슨 얘기지? 저 그날 교회에서 돌아올 때 강간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빠께 여쭤보라고만 했거든요. 그리곤 잊어버렸다가 지금 생각나서 여쭤보는 거예요. 아버지의 신문은 이미 무릎 위로 내려져 있었다. 천천히 다시 얘기해보렴. 나는 칼퍼니아 아줌마와 함께 예배보았던 그 교회에서의 일들을 자세히 말했다. 아버지는 흥미를 느끼는 듯 했고,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수를 놓고 있던 알렉산드라 고모 역시 자수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렇다면 그날 너희들은 칼퍼니아 아줌마의 교회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단 말이니? 네, 아줌마가 우릴 데려가주었어요. 오빠가 대답했다. 그때 난 또다른 것이 생각나 덧붙여 말했다. 아빠, 칼 아줌마 집에 놀러가기로 했어요. 다음 일요일에 갈래요. 그래도 돼죠? 아줌마가 아빠가 데려다주시면 언제든지 좋다고 했어요. 안 돼. 알렉산드라 고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홱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고모를 쳐다보는 것도 거의 동시였다. 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고모께 말한 게 아니에요! 이 말이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집의 최고 어른인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일어섰다 앉더니 다시 일어서서 충고했다. 네 고모께 잘못했다고 말씀드려라. 전 고모께 말씀드린 게 아닌데 ,,, 아빠께 여쭌 건데 ,,, . 머리를 저으며 바라보는 아버지 특유의 멋진 눈빛은 나를 벽에 고정시켰고, 꼼짝 못하게 했다. 목소리의 억양은 자못 상기되어 엄중하게 들렸다. 먼저 고모께 사과부터 드려라. 잘못했습니다, 고모. 나는 웅얼거렸다. 자, 이제 정확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넌 칼퍼니아 아줌마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내 말을 들어야 하구. 그리고 이 집에 너희 고모가 계시는 한 고모의 말도 들어야 한다. 알겠니? 잠시 생각해본 뒤에야 그 말뜻을 알아들은 나는 품위를 잃은 자존심을 안고 목욕탕으로 가서 상황을 정리해보며 숨어 있으려고 마음먹었지만 계속되는 거실에서의 격렬한 논쟁으로 조바심치느라 복도에서 서성댔을 뿐이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오빠가 축구잡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마치 생생한 테니스 시합 중계라도 보는 듯 책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다. ,,, 오빠는 그녀에 대해 조처를 취해야만 해요. 너무 오랫동안 방관하고 계신 거예요, 너무 오랫동안요. 그곳에 보낸다고 해서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여기서와 똑같이 돌봐줄 거야. 두 사람이 말하는 그녀란 누구인가.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핑크빛 벽지의 빳빳한 벽이 징벌방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오빠가 인정이 많다는 건 알아요, 여유있고 너그러운 분이니까요. 하지만 딸을 생각해야죠, 자라나고 있는 딸을.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거다. 그렇다면 늦추지 말아요. 조만간 부딪치게 될 문제일 테니. 서둘러 시작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지금은 이집에서 그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라구요.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알렉산드라, 칼은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이집을 떠나지 않을 거다. 넌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없었다면 우린 어려웠을 게다. 그녀는 성실한 우리집 식구이고 너도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거야. 게다가 네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이든 벌이는 건 원치 않는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우리에겐 앞으로도 여전히 칼이 필요하니까 ,,, . 하지만 오라버니 ,,, . 또한 그녀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애들 엄마가 했던 것보다 그녀가 더 엄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나쁘게 키우진 않을 거야. 그녀는 대부분의 흑인들처럼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그녀는 타고난 지혜로 아이들을 다루고 있고, 그녀의 지혜는 퍽 훌륭한 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거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란 칼퍼니아 아줌마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운을 되찾아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그때 아버지는 다시 신문을 집어들고 있었고, 고모는 자수를 걱정하고 있었다. 퐁, 퐁, 퐁. 바늘 꽂히는 소리에 이어 더 팽팽하게 천이 잡아당겨지고 퐁, 퐁, 퐁 소리가 이어졌다. 고모는 화가 나 있었다. 오빠가 일어나 카펫 위를 어정어정 걸어가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자기 방으로 나를 데려간 오빠는 문을 닫았다. 표정은 매우 진지하게 보였다. 두 분이 다투셨어, 스카웃. 오빠와 나는 자주 싸우고 떠들어댔던 편이었지만 아버지가 다투는 모습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으므로 그것은 마음 편한 광경이 아니었다. 스카웃, 고모한테 반항하지 마, 알겠니? 아직도 두 사람의 논쟁이 쟁쟁하게 나의 귓전을 맴돌고 있었으므로 오빠의 질문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뭐라고 그랬어? 됐어, 아빤 요즈음 우리 걱정 말고도 근심이 많으셔. 그게 뭔데? 아버지는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톰 로빈슨 일로 몹시 걱정하고 계셔. 나는 아버지가 그런 일로 걱정할 리가 없고 그런 일은 가끔 우리를 불편하게 할 뿐 오래 가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건 네가 뭘 모르고 있기 때문이야. 조금 더 있으면 ,,, 어른들과는 달라, 우리 ,,, . 오빠는 말을 하려다가 중간에서 그만둬 버렸다. 요즈음 오빠의 허세는 나를 견딜 수 없게 하곤 했다. 오빠는 책을 읽다가도 홱 나가버리는 버릇이 있었고, 아직까지는 읽던 책을 내게 빌려주기는 했지만, 하여튼 예전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오빠는, 전에는 내가 책읽기에 신나는 듯 보여 책을 빌려줬지만 지금은 나의 계발과 교육을 위해서 삼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대단한 척하시네! 너 정말, 고모께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가만 안 놔둔다. 해볼 테면 해보시지. 이 형편없는 허수아비야. 내가 가만두나 봐라. 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오빠의 앞머리를 움켜잡고 다른 손으론 입을 눌러버렸다. 오빠가 나를 후려치는 바람에 다시 왼쪽을 시도했지만, 오빠의 주먹이 내 배를 향해 날아왔고, 나는 바닥에 뻗고 말았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오빠도 여전히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으니까 우린 아직도 비긴 것이었다. 그렇게 높고 거룩한 체하더니. 나는 목청껏 소리지르며 다시 덤벼들었다. 오빠가 아직도 침대 위에 있어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던 나는 온몸을 날려 때리고, 꼬집고, 잡아당기고 비틀었다. 주먹싸움이 큰 소동으로 확대되어 아버지가 우리를 떼어놓을 때까지 나는 끝끝내 버둥거리고 있었다. 자, 그만. 당장 침대로 돌아가! 바보, 멍청이, 매롱! 오빠가 나가자 아버지가 체념한 듯 물었다. 누가 시작했니? 오빠요, 제게 명령하려 했어요. 아직은 오빠 말 안 들어도 돼죠? 그렇조, 아빠?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젠 그만해라. 젬이 올바른 행동을 한다면 오빠 말도 들어야 한다. 그럼 됐지? 묵묵히 지켜보던 알렉산드라 고모가 아버지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계속 얘기한 일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 . 그말은 우리가 다시 공동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우리들 방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내가 그 벽에 달린 문을 닫자 오빠가 말했다. 잘 자라, 스카웃. 오빠두. 나는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려고 조심스레 다가가며 우물거렸다. 그리곤 침대로 가려는데 따뜻하고 뭉클한 것이 밟혔다. 고무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지 않은 어떤 것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내려다보았지만 바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연결문을 두드렸다. 왜 그래? 뱀의 느낌이 어때? 조금 거칠거칠하고 차갑지 뭐. 먼지 낀 것 같기도 하구. 그런데 왜? 내 침대 아래에 있는 것 같아. 이리 와서 좀 봐줄래? 너 장난치려는 거지? 오빠가 문을 열었다. 파자마 차림이었고, 내가 주먹으로 쳐서 생긴 멍이 입 언저리에 나타나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입 언저리를 쳐다보며 뱀 같은 것이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 넌 내가 얼굴을 들이대면 엉뚱한 짓을 생각해낼 거야. 잠깐 기다려봐. 오빠는 부엌으로 가서 자루가 긴 비를 가져왔다. 침대 위로 올라가봐. 진짜 뱀인 것 같아? 사실 이런 일이 아주 황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마을의 집들은 지하실 없이 바닥에서 몇 피트 정도 위에 지어졌던 것이다. 아직 파충류가 들어왔다는 소문은 많지 않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라이첼 하버포드 아줌마는 어느 날 실내복을 걸어두러 가보니 벽장에 방울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매일 아침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셔야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오빠가 시범적으로 침대 밑을 훑었고, 나는 뱀이 있는지 보려고 발 아래를 일일이 조사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오빠가 더 깊숙이 휘저었다. 뱀이 킬킬거려? 뱀이 아니야, 누군가 있어. 갑자기 갈색 꾸러미가 침대 아래서 튀어나왔다. 순간 오빠가 비를 들어 내리쳤는데, 딜의 머리에서 일 인치 정도 빗겨나갔다. 맙소사! 오빠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딜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딜은 더 건강해진 듯 보였다. 완전히 몸을 펴고는 어깨를 추스르고 발목도 돌리고 목뒤를 문질러 근육을 푼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빠는 다시 하느님을 불렀고, 나도 할 말을 잃었다. 난 지금 굶어죽을 지경이야. 뭐 먹을 것 좀 없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상태에서 나는 부엌으로 내려가 우유와 저녁에 남긴 옥수수빵을 가져왔다. 딜은 습관대로 앞이빨로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나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여길 어떻게 온 거니? 우유와 옥수수빵으로 겨우 기운을 차린 딜은 그의 틀에 박힌 이야기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의 새아버지는 딜을 몹시 미워한 나머지 사슬로 묶어 지하실에 가두어버렸다. 메리디안에는 지하실이 있다고 했다. 살려달라고 외쳐대는 소리를 들은 농부가 그를 구해주었는데, 마음씨 착한 농부는 통풍장치 안으로 두 말 정도의 콩깍지를 넣어주었던 것이다. 딜은 벽에서 사슬을 잡아당겨 도망칠 수 있었지만 팔목엔 쇠고랑이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메리디안에서 이 마일 밖까지 헤매다가 규모가 작은 서커스단을 만나 그 자리에서 낙타 목욕시키는 일에 고용되었다. 그의 정확한 방향감각으로 추측컨대 메이컴에서 강 하나 사이인 애보트 군이 있는 앨라배마에 도착할 때까지 서크스단과 함께 미시시피 전체를 여행했으며, 나머지 길은 걸었다는 것이다. 이곳엔 어떻게 왔니? 오빠가 물었다. 그는 어머니의 지갑에서 십삼 달러를 꺼내 메리디안에서 아홉시 차를 타고 메이컴 행 터미널에 내렸고, 메이컴까지 십사 마일 중 십에서 십일 마일 정도는 걸었다고 했다. 그를 찾으려는 경찰관을 피해야 했으므로 간선도로를 빠져나와 관목숲을 걷거나 목화 마차 뒤에 매달려 왔다는 것이었다. 딜은 두 시간 가량 우리집 침대 밑에 숨어 있었으며 식당에서 들리는 소리 탓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했다. 오빠와 내가 이 방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고 했다. 둘이 싸울 때는 훨씬 큰 오빠를 내 대신 때려줄까 별렀지만, 그때 마침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있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딜은 지쳐 있었고, 쳐다보기 힘들 만큼 지저분하고 형편없었다. 그분들은 네가 여기 있는 걸 모르시겠지? 널 찾고 계신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오빠가 말했다. 메리디안의 모든 영화관을 뒤지고 있을 걸 생각하면 ,,, . 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넌 어머니께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드려야 해. 오빠가 말했다. 딜이 눈을 끔뻑이며 오빠를 쳐다보았다. 오빠는 방바닥을 골똘히 내려다보더니 복도로 나가 우리 어린시절의 약속을 깨뜨렸다. 아빠, 이곳에 잠깐 올라오실 수 있으세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먼지투성이의 딜은 하얗게 질렸다. 나는 오빠의 행동에 역겨워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이미 문 앞에 서있었다. 아버지는 방 한가운데로 걸어오더니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딜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괜찮아, 딜. 무엇이든 몇 가지만 물어보실 거야. 딜이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대두, 아빤 널 괴롭히지 않아, 무서워할 필요도 없구. 난 겁나지 않아 ,,, . 딜이 중얼거렸다. 그저 배만 고프겠지, 그렇지?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건조한 쾌활함이 담겨 있었다. 스카웃, 식었지만 옥수수빵을 좀 가져다주어야겠다. 우선 이 녀석의 허기를 해결해놓고 나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핀치 아저씨, 라이첼 이모껜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절 돌려보내지 마세요. 그럼 또 도망쳐버릴 거예요. 아니다, 딜. 누구도 널 보내지 않는다, 그 어디로도. 잠시 후 침대로 가는 것 빼놓고는 말이다, 알겠지? 난 그저 네 이모께 가서 네가 여기 있다는 것만 알리고, 우리와 함께 있어도 될지 알아보려는 거야. 괜찮겠지, 응? 그리고 얼굴의 그 흙먼지는 제자리로 좀 보내줘야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토양의 침식이 심각하니까. 딜이 아버지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빤 네 기분을 바꾸시려는 것뿐이야. 목욕을 좀 하라는 말씀이셔. 거봐, 아빤 널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했지? 오빠는 마치 배반자인 양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딜, 난 알려야만 했어. 엄마 몰래 삼백 마일이나 도망쳐올 수는 없는 거니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버려두었다. 딜은 먹고 또 먹었다. 차표 사는 데 돈을 다 써버려서 지난 밤부터 굶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해본 경험을 살려 기차에 올라 낯익은 차장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들은 이미 아이들의 무전여행에 만성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돈이 떨어졌을 때는 저녁 값을 빌려주고 기차종점에서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기도 한다고 했다. 딜은 내가 준 것을 다 먹고도 돼지고기 캔과 찬장 속의 통조림을 집어 들었다. 그때 라이첼 아줌마의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오, 하느님 맙소사. 아줌마가 불쑥 들어오자 딜은 토끼처럼 떨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부모들 걱정 따윈 아무 것도 아니지. 내일 당장 집으로 돌려보낼 때까지 기다려. 라이첼 이모의 꾸지람을 꿋꿋하게 듣고 난 딜은 한참 있다가 미소지으며 능청을 떨었다. 그래도 해리스는 이모의 조카인걸요. 하룻밤만 재워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오랫동안 포옹을 했다. 아버지가 안경을 밀어올리고는 얼굴을 문질렀다. 네 아빤 피곤하시다. 알렉산드라 고모가 말했다. 몇 시간 만에 입을 떼는 듯했고, 옆에 계속 있었는 데도 난 갑작스런 사태에 멍청해져 있어 못 느끼고 있었다. 너희들도 이제 자야지. 우리가 식당을 떠날 때까지도 아버지는 여전히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강간에도 폭동에 가출까지.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두 시간 후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태가 생각보다 잘 풀려나가는 듯하자 딜과 나는 오빠에게 다시 친절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딜은 오빠의 침대에서 함께 지내야 할 처지여서 그러는 편이 나았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책을 읽다가 나는 갑자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피곤에 휩싸였다. 딜과 오빠는 잠잠했고, 내 방 스탠드를 껐는데도 오빠방으로부터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울어지는 달빛 속에서 방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조금만 비켜, 스카웃. 오빠에게 너무 화내지 마.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일 테니까. 내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냥 네 옆에서 자고 싶어 온 거야, 너 깼니? 나는 잠이 달아나버렸지만 졸린 듯 물었다. 왜 그랬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왜 도망쳐 나왔냐구? 새아빠가 정말로 널 그렇게 미워했니? 아니 ,,, . 편지에 배 만든다고 하더니 만들었니? 말만 하구선 아무 것도 안 했어. 나는 팔꿈치를 괴고 옆으로 누웠다. 딜의 윤곽이 보였다. 그건 도망칠 이유가 못돼. 약속한 것을 못 지킬 수도 있다구 ,,, .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이지. 그런 일로 가출을 한다는 건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어떻게 대하는데? 응, 언제나 어디로들 나가버리구, 집에 있다 해도 자기들끼리만 지내. 거기서 무얼 하는데? 아무 것두, 그냥 책만 읽어. 그러면서도 내가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나는 베개를 침대머리에 밀고 앉았다. 널 이걸 알아야 해. 난 오늘밤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도망치고 싶었어 ,,, . 부모님이 항상 네 곁에 있다 해도 넌 역시 끔찍해 할 거야, 딜 ,,, . 딜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잘 자. 우리 아빠는 하루종일, 어떤 때는 새벽까지도 입법부에 계셔.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네 부모가 항상 네 곁에 있는 것 또한 원치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넌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거든. 그건 그렇지 않아. 딜이 설명하는 동안 난 오빠가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걱정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나라는 존재의 도움과 조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떨까. 칼퍼니아 아줌마까지도 내가 없으면 잘해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할 것이었다. 딜,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네 부모는 너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야. 틀림없이 너를 중요하게 생각하실 거야. 내가 말해볼까? 딜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분들에겐 내가 없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거야. 나는 어떤 것으로도 그분들을 도울 수가 없어. 내 도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구.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잔뜩 사주곤 이걸 사줬으니 이젠 갖고 가서 놀아라. 방안 가득 장난감이 있잖니? 책도 있고 이런 식이지. 딜의 목소리는 자못 심각한 투로 바뀌어 있었다. 넌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몰라. 사내아인 나가서 야구든 뭐든 하고 노는 거야. 집 안에 처박혀 눈치만 보진 않아. 딜의 목소리가 본래의 음성을 찾았다. 어휴, 그들은 그저 키스하고 잘 자라, 잘잤니, 잘가,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 스카웃, 우리 애기 하나 데려오자. 어디서? 딜은 보트를 가진 남자가 안개 낀 섬으로 노를 저어가서 아가를 데려온다고 알고 있었다. 한 명을 신청하면 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게 아니야, 고모가 그러시는데 하느님이 아기를 굴뚝으로 떨어뜨려주시는 거래. 그건 내가 상상했던 것이기도 하구. 이 말을 해줄 때의 고모는 더듬거리는 어투였다. 지금까지 그러한 고모의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아니야, 아이들은 각자 얻는 거다. 어떤 사람은 아기가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거야 ,,, . 그러고 나서 딜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름다운 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 책을 빌려 읽기도 좋아했지만 자신이 발명한 마술을 더 좋아했다. 그는 덧셈 뺄셈을 번개치듯 해치울 수도 있었지만, 아가가 고요히 잠들어 있고 아침햇살을 받고 피어날 순백의 백합을 갈망하는 그 자신의 여명을 더 좋아했다. 그는 입속 말로 웅얼거리며 서서히 잠으로 빠져들었고 나도 그랬다. 그 순간 안개섬의 정적 속에 갈색 문이 있는 슬프디 슬픈 회색집의 빛바랜 영상이 떠올랐다. 딜! 으음? 넌 부 래들리가 왜 도망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딜은 길게 숨을 내쉬며 돌아누웠다.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일 거야 ,,, . 15.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수많은 전화, 피고의 변론과 피고의 어머니가 보낸 용서를 구하는 장문의 편지가 도착한 후, 딜 은 당분간 우리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일주일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리고 얼마 지 나지 않아 서서히 악몽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딜이 건너와 있었고 알렉산드라 고모와 아버지는 각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고모에게 예의를 갖추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오빠의 키는 부쩍 자라 나무집에 손쉽게 올라갈 수 있었는데도 딜과 나를 위해 줄사다리를 만 들어주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딜은 손끝 하나 까딱 않고 부 래들리를 끌어내는 묘안을 짜내려고 분주했다. 뒷문에서 앞마당까지 레몬즙을 떨어뜨려놓으면 마치 개미처럼 그 자국을 따라 나올 거 라는 등등.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가 나갔다. 헥 테이트 씨였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저, 핀치 변호사님, 밖에서 사람들이 뵙자고 하는데요. 메이컴에서 남자 어른들이 앞마당에 서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죽음과 정치. 나는 누 가 죽었을까를 생각하며 오빠와 문가로 다가갔다. 집 안에 있거라. 아버지가 큰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거실의 전등을 끄고 코를 창문에 처박고 내다보고 있었다. 고모가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잠깐만요, 고모. 누구인지만 보구요. 딜과 나는 또다른 창문을 차지했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아버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 은 한꺼번에 얘기하는 듯 보였다. ,,, 내일 그를 군내 교도소로 옮기는 ,,, . 테이트 보안관이 말하고 있었다. 말썽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무 일 없으리란 보장은 할 수가 없어서요 ,,, . 어리석은 소리. 여긴 메이컴이요, 헥. 아버지가 타이르듯 말했다. 전 ,,, 그저 불안해서요. 보안관, 이미 이 공판의 연기신청은 얻어냈고 미심쩍은 일도 전혀 없소. 오늘이 토요일이니 공 판은 월요일쯤이 될 거요. 보안관이 그를 하룻밤만 지켜주면 돼요. 할 수 있겠소? 이렇게 어려운 때에 메이컴에서까지 소송의뢰인에 대해 원한을 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버지가 말했다.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링크 디스 씨의 얘기로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곳에서 어떤 짓을 벌일 사람은 없어요. 저기 올드새럼 작자들이 걱정인 거요 ,,, 안 그렇소, 보안관? 그럼 재판관할구를 바꾸세요. 이제 그건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테이트 씨가 말했다. 아버지가 뭐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오빠에게 고개를 돌리자 조용히 하라고 손을 내저었 다. ,,, 게다가 당신은 그런 패거리들을 겁내진 않을 거 아니오. 아버지의 말이었다. ,,, 그들이 취해 있을 땐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 . 일요일엔 술도 안 마시고 대부분 교회에 가 있을 거 아니오 ,,, . 어찌됐거나 이 문제가 워낙 예삿일이 아니라서 ,,, .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고모는 거실 전등을 꺼버린 건 집안망신이라고 했지만 오빠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웅성거 리는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 왜 변호사님이 이 일에 손을 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링크 디스 씨가 계속했다. 이 일을 계속하신다면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당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위험스런 반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얼마 전에 내게 던졌던 아버지의 말투가 떠올랐다. 스카웃,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체커판을 휙 쓸어버렸고, 곧이어 오빠에게 말했다. 젬,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다면 이걸 읽도록 해라. 오빠는 그날 저녁 내낸 헨리 W. 그래디의 연설문을 읽어내느라고 낑낑거려야 했다. 링크, 그 사람을 전기의자에 앉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진실이 밝혀질 때까진 그럴 수는 없소. 그리고 당신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있을거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버지가 계단 맨 아래로 물러서고 사람들이 웅성거리 며 다가서자, 불길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빠가 소리쳤다. 아버지, 전화예요. 사람들이 조금 움찔하더니 흩어졌다. 그들은 우리가 늘상 보아왔던 상인과 마을 농부들이었다. 레이놀드 선생님과 에이베리 아저씨도 한쪽 구석을 서 있었다. 알았다, 젬. 아버지가 외치자, 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버지가 거실 스위치를 올렸다. 오빠가 하얗게 질린 채 서 있었는데 창문에 비벼댔던 코만이 발갛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니, 왜들 이렇게 컴컴한 데 앉아 있는 거지? 오빠는 의자로 가서 저녁신문을 집어올리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버지 생애의 모든 위 기는 (모빌레지스터)나 (버밍햄 뉴스), (몽고메리 신문) 등에 펼쳐진 객관적인 평가에 귀결시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저 사람들 아빠를 따라온 거죠, 그렇죠? 오빠가 다그치듯 물었다. 아빠를 해치려고 했어요. 아버지가 신문을 내려놓고 쳐다보았다. 이런 판국에 뭘 읽으시려는 거예요? 아니다, 젬. 그들은 내 친구들이야. 아니에요, 갱들 같았어요, 그렇죠? 오빠는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웃음으로 넘기시려 했지만 이미 굳어진 표정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아니야, 메이컴에서 폭도란 있을 수 없다. 말도 안 된다. 난 메이컴에 갱이 있다는 소릴 들어 본 적이 없어. 쿠 클룩스가 카톨릭 신자를 해친 적이 있잖아요. 메이컴에 카톨릭 신자는 없다. 넌 뭔가 혼동하고 있는 거야. 1920년이라면 클랜이 있었지만 그 건 정치조직의 하나였고, 누구에게 겁주려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밤이었지. 그 클랜이 포목상을 하는 유태인 샘 레비의 집에서 시비를 벌였는데, 샘이 현관에 선 채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그 하얀 천은 어디서 생겼겠느냐며 그냥 지나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망신주는 바람에 그들 자존심이 크게 상했단다. 레비 가문은 모든 면에서 훌륭한 집안이고 최고의 지성으로 메이컴에서만 오 대째 살아오고 있 었다. 쿠 클룩스는 사라졌다. 다신 나타나지도 않을 테고.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딜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고모에게 하는 말을 무심코 들었다. ,,, 누구에게나 남부의 여성상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 가며 우아 한 허구를 지켜나가려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버지의 어투로 보아 두 사람이 또 다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보였다. 오빠는 침대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분이 그 일에 대해 말씀 나누시는 거야? 내가 물었다. 대충 그래, 고모는 톰 로빈슨에 관한 한 아빠에게 지지 않을 거야. 아빠가 우리 가문을 더럽힌 다고 생각하시니까 ,,, 스카웃, 난 두렵다. 뭐가 두려운데? 아빠가 걱정이야. 누군가 아빠를 해치려고 할 거야. 오빠는 말을 하다가 괜시리 멈춰 잠시 침묵을 지킴으로써 궁금하게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리곤 한다는 소리가 혼자 있게 해달라는 거였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주일학교 수업을 마치고 예배가 시작되기 전, 휴식을 취하며 또다른 사 람들과 마당에 서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헥 테이트 씨도 있었다. 난 그가 성령이라도 본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지금까지 교회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메이컴트 리뷴)지 외엔 어떤 조직도 상대하지 않는 언더우드 씨까지도 거기에 있었다. 그 신문사의 유일한 소유주인 그는 편집인인 동시에 발행인이었다. 그는 주조활자와 함께 살다 시피 하다가는 다량의 체리와인을 마시며 활기를 되찾곤 했다. 직접 뉴스거리를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뉴스를 제공해주는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메이컴튜리뷴)의 모 든 편집은 언더우드의 머리에서 만들어져 활자화되는 거라고들 했다.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이 그를 이곳으로 오게 한 것일까. 나는 교회문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톰 로빈슨이 메이컴 감옥으로 옮겨가 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단 소동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내게 말했지만 그것은 아버지 자 신에게 확인시키려는 듯 보였다. 주께로 가까이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으며 아버지가 조그맣게 말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고모나 우리와 함 께 앉지 않았다. 교회에서 만큼은 혼자이고 싶은 듯했다. 일요일을 짓누르고 있는 거짓 평온은 알렉산드라 고모와 더불어 짜증을 더욱 가중시켰다. 아버 지는 식사 후 곧장 사무실로 갔고 알렉산드라 고모는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나서 이웃에게 방해가 된다며 조그만 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다. 어른 티를 내는 오빠는 산더미 같은 축구잡지에 파묻혀 있었고 딜과 나는 사슴목장을 살금살금 기어다녔다. 일요일에는 사냥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딜과 나는 목장 주위에서 오빠의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딜은 또다시 부 래들리를 움직이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답변한 나는 지난 겨울에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었다. 오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딜은 나의 얘기에 상당히 감동받은 듯했다. 우리는 저녁 무렵에 헤어졌고 오빠와 나는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쉬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손에는 흥미로운 물건이 들려 있었다. 전구가 달린 기다란 전기코드를 갖고 나온 것이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오마. 돌아올 때쯤엔 너희들은 자고 있을 테니, 지금 굿나잇을 해야겠구나. 그리곤 모자를 쓰고 나갔다. 차를 타고 계셔. 오빠가 말했다. 아버지는 몇 가지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후식을 먹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걷 기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공적인 업무를 제외하고 우리집 차 샤보레는 최적의 상태로 차고에서 쉬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무실까지 하루 네 번, 합치면 이 마일은 족히 될 거리를 걸어다녔다. 그것이 아버지 의 유일한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메이컴에서의 괜한 산책은 그 사람의 무능을 드러내는 거 라고 여겨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미 고모와 오빠에게 굿나잇을 하고 나서 독서에 열중해 있었다. 오빠가 잠자리에 들며 내는 소리는 내게 익숙해 있었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부스럭댔다. 마침내 나는 오빠방 연결문을 두드리고야 말았다. 안 자고 뭘 해? 잠깐 시내에 좀 다녀와야겠어.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오빠가 말했다. 지금 열시야. 왜 가려는데? 지금이 몇 시쯤 됐는지 알고 있겠지만 오빠는 무조건 갈 태세였다. 나도 갈래, 나 꼭 갈거야, 알았지? 오빠는 더이상 실랑이를 벌인다면 고모를 깨우게 될 것 같아 마지못해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고모 방 불빛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뒷계단으로 빠져나왔다. 그날따라 달도 보이지 않았다. 딜도 가고 싶어할 거야.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겠지. 오빠가 침울하게 말했다. 우리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라이첼 아줌마네 마당을 지나서 딜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메추라기 휘파람을 불자 딜의 얼굴이 창문에 나타났다. 그 얼굴이 사라진 지 오 분 만에 딜이 살금살금 밖 으로 나왔다. 우리의 노병은 보도에 닿을 때까지 한 마디도 없이 따라왔다. 무슨 일이야? 오빠 영감이 발동을 했대. 칼퍼니아 아줌마가 그건 모든 사내아이들의 재난이라고 했어. 난 그저 느낌이 이상해서 그래. 그냥 느낌 말이야. 오빠가 말했다. 우리는 두보스 할머니네 집을 지나고 있었다. 뒷문이 모두 내려져 있는 그집은 썰렁해 보였고, 동백꽃은 잡초와 존슨풀로 뒤덮여 있었다. 우체국 있는 곳까지 가려면 아직도 여덟 집을 지나쳐 야 했다. 광장 남쪽은 황량한 벌판으로 커다란 칠레 삼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으며 나무 사이로 뻗어 있는 철로가 가로등 아래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군청 화장실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화장 실과는 대조적으로 법원은 캄캄했다. 법원 광장은 가게들에 둘러싸여 커다란 상가를 형성하고 있 었는데, 상가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무실은 처음에는 법원 건물에 있었으나, 몇 년쯤 지나서 좀더 조용한 메이컴 은행 빌딩으로 옮겨졌다. 광장을 돌아가보니 은행 앞쪽에 샤보레가 주차되어 있었다. 아빤 여기 계셔. 젬 오빠가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곳에 없었다. 긴 복도 끝에 있는 아버지의 사무실 앞에 애티커스 핀치 변호 사 라는 평범한 글씨체가 불빛에 반짝이고 있어야 했는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캄캄할 뿐이었 다. 오빠가 은행문 안을 들여다보며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문은 잠겨 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위로 올라가보자, 언더우드 아저씨를 찾아가셨는지도 모르니까. 언더우드 씨는 (메이컴트리뷴) 사무실에서 일만 할 뿐 아니라 숙식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무실은 교도소나 군청에 관한 뉴스거리를 위층 창문에서 내려다보아도 간단히 취재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무실 건물은 광장의 북서쪽 코너에 있었으므로 교도소를 지나쳐가야 했 다. 메이컴 교도소는 군내의 건물 중 가장 비밀스럽고 으스스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 건물 양식 이 마치 사촌 조슈아 세인트 클레어가 디자인했을 것 같은 분위기라고 말하곤 했다. 그 건축양식 은 누군가의 꿈이었음이 분명했다. 그 건물의 지붕은 경사진 모양새였고, 직사각형의 주변 가게들 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 서 있었다. 넓은 감방 하나와 높은 감방 두 개가 있는 고딕식 축소형 건물로 총안이 있는 흉벽과 위태로운 버팀목, 더욱이 두 개의 검붉은 색 외 벽과 굵은 쇠기둥으로 된 철책은 교회의 창문모양과 함께 더욱 으스스하게 보였다. 그 건물은 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틴데일 철공소와 (메이컴트리뷴) 사무실 사이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그 교도소는 메이컴의 건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비방하는 사람들은 빅토 리아 시대의 변소라고 떠들어댔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권위있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을 가 득 채운 흑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정신이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보도를 따라 올라가자 멀리서 외로운 불빛 한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상한데, 교도소 밖에는 전깃불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오빠가 말했다. 불빛이 문 밖에 있는 것 같아. 딜이 말했다. 전깃줄이 이층 창문 철책 사이로 나와 아래로 길게 내려져 있었고, 알전구의 강한 불빛 아래 아버지가 버티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사무실 의자 하나를 빼내와 신문을 읽고 있었다. 멍청한 날파리들이 아버지의 머리 위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내가 뛰어가려 하자 오빠가 붙잡았다. 가지마,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아빠한테 아무 일도 없으면 됐어. 집으로 가자, 난 아빠가 어디 계신지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 우리가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먼지를 뒤집어 쓴 네 대의 자동차가 줄지어 천천히 간선 도로에서 진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광장을 휘돌은 자동차들은 은행 건물을 지나 교도소 앞에 멈 추었다. 차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신문에서 눈을 떼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 히 신문을 접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모자를 뒤로 젖혔다. 그들이 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듯 했다. 이리 와봐. 오빠가 조그맣게 말했다. 우리는 광장을 가로질러 힘껏 뛰어 수퍼마켓 문에 몸을 숨겼다. 오빠가 보도 쪽을 엿보았다. 좀더 가까이 가보자. 다시 틴데일 철공소까지 뛰었다. 그곳은 안전하기도 하고 가까이 볼 수도 있는 곳이었다. 하나, 둘 ,,, 남자들이 차에서 나왔다. 건장한 몸집들이 감옥을 향해 움직였고 그림자들은 불빛 아래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가 남자들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았다. 그자가 이 안에 있겠죠, 핀치 변호사님. 한 남자가 말했다. 그렇소, 잠들어 있으니 깨우지 마시오.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음성을 낮춰 속삭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한 편의 웃지 못할 역겨운 코미디 장면을 기억해내곤 한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아실 거 아닙니까? 그 문에서 비켜서세요. 변호사님.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돌아가시오, 월터. 헥 보안관이 이 근처에 있소. 아버지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어림없어요. 헥 일당은 숲속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아침까지는 안 나올 겁니다. 또 다른 남자의 음성이었다. 그래요? 왜 그렇지? 도요새 사냥에 정신을 몽땅 뺏겨버렸을 겁니다. 자, 이제 어떻습니까, 변호사님? 그래도 난 믿지 않아요. 당신들한테는 그것이 사태를 바꿀 수도 있겠군, 그렇소? 아버지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그렇지요. 낮은 음성의 그림자가 말했다. 당신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오늘 난 이 질문을 두 번째 듣게 되었다. 그건 누군가 순식간에 아버지를 칠 것만 같은 느낌이 었다. 난 더이상 참을 수 없어 불빛 속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오빠가 소리를 지르며 붙잡으려 했지만 난 이미 그들을 훨씬 앞질러 거무죽죽하고 냄새나는 남 자들을 제치고 불빛으로 뛰어들었다. 아빠! 나는 익살스럽게 놀라는 아버지의 표정을 기대했지만 얼굴을 보는 순간 그 기대는 사라졌다. 공포로 가득차 있는 아버지의 눈빛과 마주친 것이다. 난 딜과 오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불 빛 아래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썩은 위스키 냄새와 돼지우리 냄새 때문에 주위를 흘끗 둘러보고 나서야 그들이 낯선 사람들임 을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강렬한 당혹감이 나를 뚫고 지나갔다. 한 번 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의 소굴로 의기양양하게 뛰어들어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치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노인처럼 천천히. 그리고 주저 하는 듯 신문의 귀를 맞추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젬, 집으로 가거라. 스카웃과 딜을 데리고 집으로 가 있어. 아버지가 흔쾌히 묵인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명령에 재빨리 움직였다. 그러나 그날 오빠는 움직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자, 오빠. 오빠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양팔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주먹을 쥐자 오빠도 따라했 다. 얼굴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의 외모는 닮은 점이 거의 없었다. 엄마를 닮은 오빠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눈, 달걀 모양의 얼굴형, 아담한 크기의 귀가 아버지의 짙은 잿빛 머리카락, 각 이 진 얼굴 등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닮은 듯 보였다. 두 사람의 도전적인 태도가 조금은 닮아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라고 했다. 오빠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녀석들은 내가 보내야겠군. 건장해보이는 남자가 오빠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는 낚아챘다. 오빠를 건드리지 말아요! 나는 순식간에 맨발로 그를 걷어차고 말았다. 그는 매우 아픈 듯 웅크렸다. 정강이를 차려했던 것인데 너무 높게 겨냥이 되었던 것이다. 자, 그만, 스카웃. 사람을 걷어차면 못써. 아버지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내가 변명하려 하자 그만 이라고 못박았다. 누구든, 오빠에게 그런 식으로 대할 순 없어요. 내가 말했다. 좋습니다, 변호사님. 저 애들을 먼저 보내십시오. 아버지는 이런 낯선 사람들 속에서 오빠를 설득하려 최선을 다했다. 오빠는 아버지의 위협과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확고하게 대답했다. 전 안 가요. 젬, 제발 동생들을 데리고 집에 가 있어. 마침내 아버지는 애원하듯 말했다. 물론 오빠는 아버지와 함께 갈 작정이었지만 나는 점점 짜증스러워져 슬그머니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여름밤이었는데도 옷을 잔뜩 껴입고 있었고 멜빵이 달린 청바지에 두꺼운 무명천 셔츠를 입었는데 목과 소매까지 단추를 채운 것으로 보아 추위를 심하게 타는 듯 여겨졌다. 몇 명은 귀 까지 모자를 눌러쓰기도 했다. 모두들 늦은 시간에 익숙지 않은 듯 졸리운 눈에 못마땅한 표정으 로 시무룩해 있었다. 그 반원모양으로 둘러싼 사람들 가운데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커닝햄 아저씨?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안녕하세요, 커닝햄 아저씨? 아저씨네 상속인 문제는 잘 되시나요? 월터 커닝햄 씨의 법정소송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으므로 나도 잘 알고 있 었다. 그 키 큰 아저씨는 눈을 끔뻑거리며 엄지손가락을 가죽 멜빵에 걸고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큰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의 친절한 인사치레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커닝햄 씨의 모자로 가리워졌던 이마의 부분이 햇 빛에 그을린 얼굴과 대조되어 하얗게 빛냈다. 항상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가 무거 운 장화를 옮겨놓았다. 저를 모르세요, 커닝햄 아저씨? 전 진 루이스 핀치에요. 언젠가 히코리 땅콩을 보내주셨잖아 요, 그렇죠? 나는 점점 우연한 만남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때의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 월터하고 같은 학교에 다녀요. 나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월터는 아저씨 아들이죠, 그렇죠? 그렇죠, 아저씨? 커닝햄 씨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전 월터하고 같은 학년이에요. 걔는 아주 잘하고 있어요. 좋은 아이구요. 나는 계속했다. 정말 괜찮은 아이에요. 점심때 우리집에 초대한 적도 있어요. 나는 잠시 시무룩해져서 말을 이었다. 저에 대해 들으셨을 거예요. 사실 전 월터를 때린 적이 있거든요. 그때 월터는 정말 멋지게 행 동했어요. 안부 전해주세요. 그러실 거죠? 아버지는 예의바른 사람은 자신의 관심거리보다 상대방의 관심거리에 대해 얘기하는 법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커닝햄 씨는 아들에 관한 얘기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편하게 느끼도록 만들어보려는 결사적 노력으로 다시 한 번 상속인 한정 문제를 들먹거렸다. 상속인 한정은 나빠요. 충고하듯 얘기하고 있던 나는 그들 모두를 향해 연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모 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몇몇은 입을 반쯤 벌리고 있기도 했다. 아버지도 더이상 오빠를 다그치 지 않았다. 남자들은 딜 곁에 그렇게 서 있었다. 결국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황 당스러운지 그 특유의 표정으로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예 감아버렸다. 아빠, 전 그냥 상속인 한정이 나쁘다는 것을 커닝햄 아저씨께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아빤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구요 ,,, 그리고 아저씨는 함께 이겨 내실 수 있을 거예요 ,,, . 순간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상속인 한정이란 거실에서의 잡담 정도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뒷덜미에서 진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여러 낯선 사람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건 도 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내가 물었다. 아버지가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커닝햄 씨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묘한 행 동을 보였다.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의 양어깨를 잡은 것이었다. 내가 그 녀석에게 안부를 전해주마, 꼬마 아가씨. 그리고는 다시 몸을 세워 그 커다란 손을 흔들었다. 자, 그만 돌아들 가지. 그들은 하나, 둘 흩어져 덜컹대는 차 안으로 사라졌다. 차문이 세차게 닫히고 엔진이 기침소리 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돌아갔다. 나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감옥 벽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있었다. 나는 따라가서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집에 가요, 아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천천히 문지른 다음 코를 힘껏 풀었다. 핀치 변호사님. 부드럽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위쪽에서 어둠을 뚫고 날아왔다. 그들은 모두 갔나요? 아버지는 조금 물러서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들은 갔소. 눈좀 붙여요, 톰. 다시는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 다른 방향에서 또다른 목소리가 선명하게 밤을 가로질렀다. 어지간하십니다, 변호사님. 언제나 엄호를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쌍발식 권총을 찬 언더우드 씨가 (메이컴트리뷴) 사무실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작스런 피곤이 나를 누르기 시작하자 아버지와 언더우드 씨가 밤새 도록 얘기를 나누는 듯이 느껴졌다. 언더우드 씨는 창문 밖으로 반쯤 몸을 내밀고 있었고, 아버지 는 올려다보며 얘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얘기를 끝낸 아버지는 전깃불을 끄고 의자를 집어들었다. 제가 들고 가겠어요, 핀치 아저씨. 딜이 말했다. 딜은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고맙구나, 얘들아. 딜과 나는 아버지와 오빠의 뒤를 따라갔다. 딜은 의자 때문에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이미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빠를 단단히 나무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완전한 기우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치며 아버지는 손을 뻗어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 었던 것이다. 그건 아버지의 애정표현 중의 하나였다. 16. 흑인을 변호하는 아버지 내가 흐느끼는 소리에 오빠는 연결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방에는 불 이 켜져 있었으므로 우리는 불이 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방에서 잠시 뒤 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오빠는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서 누우라고 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자려고 해봐. 내일이면 모든 것이 지나가버릴 거야. 우리는 고모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조용 들어왔다. 아버지는 차의 엔진을 끄고 차고에 밀어넣 은 후 뒷문으로 말없이 올라왔다. 나는 굉장히 지쳐 있었다. 텅 빈 거리에서 안경과 모자가 뒤로 젖혀진 채 침착하게 신문을 접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그려졌다. 그날 밤 있었던 모든 상황들의 의미가 그제서야 충격으로 다가와 나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오빠는 나에게 극진히 잘해주었다. 더 고마운 것은 열 살 먹은 아이의 행동거지에 대해 들먹이지 않았다는 사실 이다. 그건 오빠의 크나큰 배려였다. 다음날 아침은 모두들 입맛을 잃고 있었는데, 오빠만은 예외였다. 이미 달걀을 세 개째 먹어치 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감탄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커피를 홀짝이며 불만 스러운 표정을 얼굴 가득 담은 채 아이들이 밤에 나돌아 다니는 짓은 집안의 수치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에 뒤따르는 불명예를 기꺼이 받겠다고 하자 고모가 다시 말을 받았다. 넌센스예요, 언더우드 씨가 그곳에 있었을 거 아니에요? 저 말이지, 그 브랙스톤은 아주 재미있는 구석이 있거든. 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흑인을 경멸하고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구. 감정적이고 이단적인 작달막한 키의 언더우드 씨는 지나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유머 감각이 유별난 그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연합사령관의 이름을 빌어 그에게 브랙스톤 브레즈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고, 그 또한 특별한 세례명답게 엉뚱하게 사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에 대해 아버지는 연합사령관 이름을 딴 사람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한 술꾼이 되어가는 법이라고 덧붙였 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고모의 커피잔에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간청하는 애교스러운 나의 눈길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커피 마시기엔 아직 어려. 나는 커피를 마시면 뒤틀리는 위장이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칼퍼니아 아줌마 는 이번 한 번뿐이라며 찬장에서 컵을 꺼내 커피 한 스푼에 우유를 가득 부어주었다. 나는 아줌 마에게 감사하며 컵 주둥이에 혀를 갖다댔다. 그때 경고하듯 눈살을 잔뜩 찌푸린 고모를 올려다 보고 말았다. 그건 내가 아닌 아버지를 향한 불만의 표시였다. 고모는 칼퍼니아 아줌마가 부엌으로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그들 앞에서 그런 소릴 하면 어떻게 해요. 누구 앞에서 무슨 소리를? 아버지가 반문했다. 칼퍼니아 앞에서 브랙스톤 언더우드 씨는 흑인을 경멸한다고 그랬잖아요. 바로 그녀 앞에서. 그래? 난 칼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아니지, 칼뿐 아니라 메이컴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 나는 요즈음 들어 아버지의 말씀이 다소 복잡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 는데, 고모와 얘기를 나눌 때면 특히 두드러졌다. 짜증스러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조용 히 안으로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는 약간 거북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식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말은 칼퍼니아가 들어도 괜찮은 거야. 우리 가족에서 그녀가 차지 하고 있는 의미를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좋지 않아요, 오빠. 그건 단지 그들을 부추길 뿐이에요. 그들끼리 모였을 땐 어떤 말을 하는지 아실 거 아니에요. 이 마을 모든 사건이 거의 그들 지역에서 벌건 대낮에도 일어나고 있어요. 아버지는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들이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법률조항은 없다. 그들에 대해 우리가 먼저 입을 다문다면 그들 도 조용해질 거야. 스카웃, 커피를 왜 안 마시지? 나는 찻숟가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커닝햄 아저씨는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 아빠가 오래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는 아직도 우리 친구란다. 하지만 지난밤엔 아빠를 해치려고 했는데도요? 아버지는 포크를 나이프 옆에 놓고 접시를 밀어놓았다. 커닝햄은 좋은 사람이란다. 단지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무모한 면을 갖고 있을 뿐이지. 그때 오빠가 말했다. 무모하다고만 말씀하지 마세요. 지난밤 그가 거기에 갔던 건 아빠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날 조금은 다치게 했을지도 모르지 ,,, 네가 좀더 자라서 인간을 더욱 이해를 하게 되면 폭도 란 항상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될거야. 커닝햄도 지난밤엔 폭도일 수 있었어.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인간이란다. 남부의 작은 마을 폭도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변하게 만들지. 그들에 대 해 더이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겠지? 네. 오빠가 대답했다. 그래서 열 살짜리 어린애가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한 거야. 어떤 것으로든 그 난폭한 사람 들을 진정시켰던 것은 간단히 말해 그들이 아직은 인간이기 때문이야. 으흠, 거기에 아이들 경찰 대가 필요했던 거야 ,,, . 바로 너희 어린이들이 월터 커닝햄을 잠시나마 이 아빠의 입장에 서게 한 거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다, 나는 오빠가 더 자라서 사람들을 많이 이해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월터가 학교에 온 것이 첫날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 나는 확인하듯 말했다. 그 아이를 그냥 놔둬라.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너희들이 이 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원한 을 품지 않기를 바란다. 보세요, 무슨 일이든 일어나겠어요. 제가 말리지 않았다고는 말씀 못하실 거예요. 고모가 말했다. 아버지는 결코 그러지는 않을 거라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할 일이 많아 먼저 가봐야겠다. 젬, 오늘 너희들은 시내에 나오지 않도록 해라. 부탁이다, 알았 지? 아버지가 나가자 딜이 복도에서 식당 쪽으로 펄쩍 뛰어내려왔다. 오늘 아침 읍내 전체로 퍼졌어. 우리 어린아이들이 맨손으로 백 명의 어른들은 어떻게 해치웠 는가를 ,,, . 알렉산드라 고모가 말없이 딜을 쳐다보더니 입을 뗐다. 백 명이란 사람은 있지도 않았고 누가 누구를 해치우지도 않았다. 그건 단지 술 취하고 무질 서한 커닝햄 같은 인간들의 소굴인 것뿐이야. 저, 고모, 그건 딜의 말투가 그런 것뿐이에요. 오빠가 변명해주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너희들 모두 앞마당에서 놀아야 한다. 우리가 현관을 빠져나올 때 고모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날은 마치 토요일 같았다. 메이컴 남쪽 끝에서부터 사람들의 행렬이 한결같은 속도의 걸음걸 이로 한가로이 우리집 앞을 지나쳐 흘러갔다. 돌퍼스 레이먼드 씨는 그의 혈통 좋은 말에 올라타 건들거리고 있었다. 안장도 없이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어. 오빠가 계속 중얼거렸다. 어떻게 아침 여덟시도 안 돼서 취할 수 있을까? 숙녀를 가득 태운 왜건 한 대가 덜컹대며 지나갔다. 그들은 무명 선보닛을 쓰고 소맷자락이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모직 모자를 쓴 턱수염이 긴 사내가 마차를 몰고 있었다. 저기 메노파 사람들 좀 봐. 그들은 단추를 사용하지 않고 숲속 깊숙이에 살고 있는데 대부분 강 건너 무역을 하느라 메이컴엔 오지 않아. 오빠가 넋이 빠져 쳐다보고 있는 딜에게 설명했다. 메노파란 개신교도들의 한 갈래였다. 그들은 모두 푸른 눈에다가 결혼하고부터는 수염을 깎지 않는댜. 그 아내들은 수염을 만지작 거리는 걸 좋아한다나봐. 엑스 빌업 씨가 노새 위에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저 아저씨는 재미있는 분이야. 엑스(X)가 약자가 아니라 진짜 이름이거든. 언젠가 법정에서 이 름을 물었더니, 엑스 빌업이라고 했겠지. 서기가 철자를 물었어. 그래도 엑스라고 했지. 그러니 다 시 와서 물었고, 또 엑스라 대답한 거야. 결국 흰 종이에 엑스라고 써서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보 여야 했다나봐. 그래, 누가 이름을 지었냐고 물었더니 그가 태어났을 때 어른들이 써놓은 사인이 었다는 거야. 그날 오빠는 우리 앞을 지나가는 메이컴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 견해와 특별한 사람들에 대한 내력을 딜에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텐소 존스 씨는 터부시되는 일에 유독 관심을 보인다는 둥, 에밀리 데이비스 양은 사생활이 문 란하다는 둥, 바이런 월러 씨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다는 둥, 제이크 슬레이드 씨는 세 번씩 이나 이빨이 부러졌다는 등등이었다. 그 순간 말쑥하게 차려입은 굳은 표정의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때 머디 애킨슨 아 줌마는 마당에 나와 있었다. 마당은 여름 꽃들로 불타는 듯 보였고, 머디 아줌마는 현관에 파수꾼 처럼 서 있었다. 그 현관은 아줌마의 표정을 읽기에는 먼 거리였는데도 우리는 늘 그곳에 있는 아줌마의 모습만으로도 당시의 기분을 알아차리곤 했었다. 그녀는 팔꿈치를 굽혀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어깨를 약간 쳐진 듯이 내려뜨리고 얼굴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안경은 햇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가 지독히도 심술궂은 웃음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부가 노새의 속력을 늦추자 웬 여자가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허영에 물든 자, 어둠 속에 사라지리라. 머디 아줌마가 대답했다. 즐거운 마음이 아름다움을 주리라! 마부는 노새에 속력을 가했다. 저 이상한 침례교도들은 악마 같은 우리들이 사리사욕을 위하여 성경을 인용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든 낮시간을 밖에서 보내는 머디 아줌마이기는 하지 만 성경에 대한 믿음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머디 아줌마의 정원을 혐오하는지 이상하다 는 생각이 점점 고개를 들었다. 아줌마도 오늘 법정에 가시나요? 오빠가 물었다. 우리는 한가로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니, 오늘은 법원에 아무 볼 일이 없구나. 구경하러 가시지 않느냐구요? 딜이 물었다. 아니. 재판을 가장하여 그 불쌍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건 끔찍하구나. 저 사람들 좀 봐라. 마치 로마 사육제의 광란 같지 않니? 하지만 재판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긴 그렇지 ,,, 공개적이니까 내가 꼭 가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때 스테파니 아줌마가 모자를 쓰고 면 레이스 장갑을 끼고 지나갔다. 우후후, 저 사람들 좀 보렴. 마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연설이라도 들으러 가는 것 같구 나. 어디 가요, 스테파니? 머디 아줌마가 물었다. 시장에 좀 가려구. 모자를 쓰고 시장에 간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머디 아줌마가 대꾸했다. 응, 난 그저 법원구경도 하고 애티커스의 변론도 좀 들어보려구. 스테파니 아줌마가 대답했다. 애티커스가 당신한테 소환장을 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머디 아줌마의 대답은 스테파니 아줌마가 그 재판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어 증인으로 불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오까지 할 일 없이 돌아다녔다. 점심 식사를 하러 온 아버지는 오전 내내 배심원 선 발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점심을 먹고 난 우리는 딜을 불러내어 읍내로 갔다. 읍내는 마치 축제를 연상시켰다. 노새를 매어놓을 수 있는 공공 장소는 아니었지만 나무 아래 에는 어디에나 노새와 마차들이 매여 있었다. 법원 마당은 신문지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 들로 뒤덮였는데 과자 부스러기는 흩어져 있고 주스병에선 따끈한 우유가 흐르기도 했다. 식어버 린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씹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좀더 여유있는 사람들은 잡화상에서 산 코카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아이들은 땀으로 번질번질해진 얼굴로 군중 사이를 누비고 다녔고, 젖먹이 들은 엄마의 젖가슴을 열심히 빨고 있었다. 그늘이 없는 광장 저쪽 구석에는 흑인들이 조용히 앉아 정어리 통조림과 과자로 식사를 하며 맛이 강한 니히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돌퍼스 레이먼드 씨가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형, 저 사람은 종이백 안에 있는 뭔가를 마시고 있어. 딜이 말했다. 돌퍼스 레이먼드 씨는 그렇게 보였다. 갈색 종이백 밖으로 두 개의 노란 빨대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저렇게 마시는 건 처음 보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저러고 있을까? 딜이 중얼거렸다. 오빠는 갑자기 킬킬거렸다. 저 사람은 코카콜라 병에 위스키를 잔뜩 넣어가지고 다녀. 숙녀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거 야. 오후 내내 저걸 입에 달고 있을 테니 봐. 잠깐 나가선 다시 채워오곤 하지. 그런데 저 사람은 왜 흑인들과 어울려 앉아 있지? 언제나 그래. 우리보다 그 사람들이 더 좋은가봐. 경계선 근처에 혼자 살다가 흑인여자를 얻었 어.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혼혈아야. 그 아이들이 나타나면 누군지 가르쳐줄게. 건달 같지는 않은데. 딜이 말했다. 그래, 맞아. 저 아래 강둑 저편이 모두 그의 땅인데다가 아주 전통있는 가문 출신이거든. 그런데 왜 저렇게 살까? 그거야 그 사람 맘이지. 오빠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첫결혼 직전의 끔찍한 사건을 극복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래. 원래 스펜더 집안 아가씨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여자는 교회에서 결혼 예행연습을 한 후 이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머리를 날려보냈대. 산탄총을 거꾸로 들고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거야. 왜 그랬는데? 글쎄, 돌퍼스 씨 빼고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사람들은 흑인여자가 있다는 걸 그 아가씨가 알 았기 때문이라고들 해. 그는 그 흑인여자도 돌보며 한편으론 결혼하려고 했나봐. 아마 그때부터 술을 저토록 마셔댔는데 ,,, 그래도 저 사람 자기 아이들에겐 굉장히 잘한다! 오빠, 혼혈아가 뭐야? 내가 물었다. 반은 백인이고 반은 흑인인 사람이야. 너도 봤을 거야. 그 잡화상에서 배달하는 빨간 곱슬머리 해야 혼혈아인데, 정말 비참해. 뭐가 비참한데? 그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니까. 흑인들은 반은 백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백인은 백인 대로 그들을 멸시하지. 그러니까 어중간하게 백인도 흑인도 아닌 채 살아가면서 어쩌지도 못하나 봐. 그렇지만 돌퍼스 씨는 두 아이를 북쪽으로 보낼 거라는 거야. 북부에선 괜찮은가봐. 저기 그 중 한 명이 온다. 조그만 아이가 흑인여자의 손을 잡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내게는 모두 흑인처럼 보였다. 그 아이는 윤기 흐르는 초콜릿빛 피부에 코는 넓적했으며, 이는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흑인여 자는 즐거운 듯 깡총거리는 아이를 똑바로 걷게 하려고 손을 잡아당기곤 했다. 오빠는 그들이 우리 앞으로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속삭였다. 쟤가 그런 아이야. 어떻게 구별하는데? 다 똑같잖아. 때론 혼혈인 걸 모르면 잘 알 수 없어. 하지만 저 아이의 반은 분명 레이먼드 씨 아이야. 어떻게 알아? 내가 다시 물었다. 말했잖아, 그냥 누군지 아는 것으로 구별한다구. 그럼, 우리가 흑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 잭 삼촌이 그러셨는데 정말 모르는 거래. 하지만 핀치 가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봐도 조상 중 흑인은 없대. 창세기 때부터 순수하게 이어졌다고 하셨어. 구약성서의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우리에겐 너무 먼 얘기야, 그렇지? 맞아,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너는 온통 검둥이가 돼버리는 거야. 야, 저기 봐. 어떤 신호가 있었는지 광장에서 점심을 먹던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문지 조각, 셀로판 포장지 조각이 흩어졌고,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뛰어갔다. 어느새 젖먹이들은 엄마의 등요람 안에 있었다. 땀에 절은 모자를 쓴 남자들이 가족을 모아 법원 안으로 떼지어 들어갔다. 그 동안 마당 한구석에서 흑인들과 돌퍼스 레이먼드 씨가 일어나면서 엉덩이를 털고 있었고, 몇 안 되는 여자 와 아이들이 그들과 섞여 있었다. 그곳만은 휴일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백인들이 다 들어 갈 때까지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이제 들어가, 형. 딜이 말했다. 안 돼. 맨 나중에 들어가자. 아버지 눈에 띄면 안 좋을 것 같아. 오빠가 말했다. 메이컴 법원 건물은 옛날의 앨링턴 묘지를 어렴풋이 연상시켰다. 남쪽 지붕은 받치고 있는 기 둥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워보여 얼핏 보기에 짐스럽게 느껴졌다. 그 원형 건물은 1865년에 불타 버리는 바람에 겨우 남아있던 기둥 위에 다시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남쪽 현관은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북쪽에서 보면 훌륭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다른 쪽에서 보면 그리스 시대를 옮겨놓은 듯한 원주가 십구 세기 스타일의 어마어마한 녹슨 시계탑과 겹쳐져 있었다. 몇몇 선각 자는 이 모든 과거의 유물들을 보존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이층으로 올라가면 햇빛이 들지 않는 비좁은 복도에 고만고만한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세액 사정관, 관세 징수관, 군 서기관, 군 법무관, 순회재판 서기관, 유언검인 재판관이라 씌어 있는 간판들이 서늘하고 흐릿한 건물 안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방들은 기록문서가 썩어드는 냄새, 오래되어 낡은 건물의 습기찬 시멘트 냄새와 오줌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낮에도 불을 켜야 했고 먼지 낀 마루판자에는 항상 거미줄이 널려 있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 람들은 바람이나 햇볕에 조금도 그을리지 않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일층 복도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빠와 딜을 놓쳐버려 혼자 벽을 따라 밀려가다 보니 오빠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이들러즈 클럽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는 것을 알고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 클럽은 하얀 셔츠에 카키색 바지를 유니폼으로 입고 황혼기의 일상을 보내는 할아버지들의 모임 이었다. 법원 업무에 관해 상당한 비평가인 아버지도, 그들은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법원장만큼이 나 법률에 밝다고 들려주었다. 보통 때는 그들만이 법원의 유일한 참관인이었으므로 오늘의 그 많은 인파에 의해 방해받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듯 보였다. 무심코 하는 말에도 왠지 중요한 의 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 그 사람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 한 사람이 말해다. 지금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애티커스 핀치는 학식이 높아, 아주 높지.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처음에 얘기를 꺼냈던 사람이 말했다. 사실 그가 하는 일이 그것뿐이니까. 다음 사람이 말을 받자, 그 클럽 전체가 킬킬대며 웃었다. 빌리, 이번 흑인 변호를 위해 법원에서 직접 그를 지명한 걸 알고 있나?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음, 그러나저러나 문제는 애티커스가 그 변호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 뿐이야. 이것은 새로운 뉴스였다. 아버지가 원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 그런데 왜 그것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을까. 여러 차례 우리는 아버지 입장에 대해 또한 자신에 대 해 변호해야만 했는데 ,,, . 아버지는 그 얘기를 해주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덜 싸우고 소동을 피우기 않기 위해서라도 설명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마을사람들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가. 법정이 아버지를 지명했고, 아버지는 그에 대해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점이 바로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라니 ,,, . 나는 혼란스러웠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모두 들어가기를 기다렸 다가 입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러즈 클럽의 한 멤버가 지팡이로 막았다. 어이, 잠깐 기다려요. 아직 위층으로 올라가지 마시오. 그리곤 그 클럽 할아버지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딜과 오빠는 나를 찾아 빠져나오다 거의 압사 직전의 상태에서 소리쳤다. 스카웃, 이리 와. 거긴 자리가 없어. 서서 봐야 될 것 같아 ,,, . 저길 좀 봐! 오빠는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위층엔 흑인들이 들끓고 있었고 설 만한 자리는 모두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행운이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 내 탓이었다. 오빠에게 핀잔을 들으 며 궁상맞게 벽에 기대고 있었다. 너희들 이곳으로 올라오겠니?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위층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모자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스카웃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래? 자리를 만들어보마. 잠시 후 리버렌드 목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래층은 자리가 없구나. 어때, 발코니라도 괜찮겠니? 물론이죠, 목사님. 오빠가 대답했다. 우리는 법원 복도로 뛰듯이 나가 지붕이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리 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숨을 몰아쉬며 우리들과 함께 흑인들이 있는 발코니 쪽으로 천천히 비집 고 들어갔다. 맨 앞줄에 있던 네 사람이 좌석을 내주었다. 그 흑인들이 있던 발코니는 삼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삼층 높이의 베란다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잘 보였다. 배심원들은 아래층 왼쪽의 기다란 창문 밑에 앉아 있었다. 볕에 그을리고 깡마른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모두 농부인 듯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읍내 사람들은 배심원석에 앉 지 않으려고 파업을 하거나 사퇴하기도 했다. 배심원 중 한두 명은 커닝햄 사람들 같은 옷차림으 로 신분도 분명치 않았는데, 모두 연단 위에 똑바로 앉아 빈틈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순회재판 법무관과 또다른 남자, 아버지와 톰 로빈슨은 등을 보이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법 무관 책상 위엔 갈색 책과 누런 서판장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 앞에는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 다. 관람석과 법정을 나누어놓은 가로대 바로 안쪽엔 증인들이 우리 쪽을 등지고 소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테일러 판사는 졸린 늙은 상어처럼 의자 위에 앉아 있었고 그의 방어(pilot fish)들은 바로 아래 에서 무언가를 빠르게 쓰고 있었다. 테일러 판사는 내가 항상 보아왔던 대부분의 판사와 똑같은 이미지였다. 부드러운 백발에 혈색 이 좋은 편인 그는 자신의 법정에서 놀랄 만큼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때로는 양다리로 버티고 서 있거나 주머니칼로 손톱을 다듬기도 했고, 언제나 조는 듯한 인상이었다. 한 번은 변호사가 그를 깨워놓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쌓여 있는 책더미를 바닥으로 밀어버린 적이 있 었다. 그러자 판사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했다. 휘틀리 변호사, 또 한 번 그런 짓을 하면 백 달러 벌금을 물리겠소. 그는 평생을 법률로 살아온 사람으로, 부주의한 듯 보여도 그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소송절차에 대해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법정이 열리고 처음으로 판사를 몹시 당혹스럽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건 커닝햄이라는 사람들의 사건으로 그들은 올드새럼 출신이었다. 그런데 불행 히도 그 초창기에서부터 같은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커닝햄 집안과 코닝햄 집안이 결혼을 했고 그들은 토지 분배로 마찰이 생겨 재판을 의뢰했다. 그때 이 사람들이 논쟁하는 동안 짐스 코닝햄은 자기의 어머니가 계속 커닝햄으로 발음했다고 증언했다. 사실 그녀는 코닝햄이라는 철 자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책을 읽을 줄도 몰랐으며 베란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홉 시간 동안 이 엉뚱한 사건을 듣게 된 후 테일러 판사는 그 소송사건을 법원 밖 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이건 소송방조에 근거가 되는 거야! 이렇게 소리치며 이건 소송 당사자들이 각각 자신들의 이름에 정확한 발음을 결정하여 그것에 만족하기를 신의 이름으로 희망한다고 선언하면서 판결을 끝낸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했 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테일러 판사는 재미있는 버릇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법정에서 흡연을 허락하고 있어서 때로 운이 좋으면 마른 시거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른 시거가 점차로 없어지면서 담배의 진액이 나와서 타액과 섞였고, 몇 시간 후에는 단순히 맨질맨질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테일러 부인이 키스하는 걸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지 여쭈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그분들은 키스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다고 대답해주었다. 증인석은 판사석 오른쪽에 있었고, 우리가 자리에 앉았을 때는 이미 헥 테이트 씨가 그곳에 있 었다. 17. 당신은 왼손잡이군요, 이웰 선생 오빠, 저 아래에 이웰 집안 사람들이 있어. 조용히 해봐, 헥 테이트 씨가 증언하잖아. 정장을 한 테이트 씨의 모습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긴 부츠와 두꺼운 무명 재킷, 탄환 이 박혀 있는 벨트가 보이지 않아 그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사라졌다. 증인석에서 앞으로 나올 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는 검사의 말을 들으며 거머쥔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고 있었다. 검사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러 씨로 애보츠빌 출신이며 언젠가 한 번 법원소집에서 본 적이 있 을 뿐이었다. 오빠와 나는 법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었으므로 자주 대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 다. 그는 대머리에 매끈한 얼굴이어서 사십대에서 육십대까지 어느 나이로든 보아줄 수 있었다. 그가 우리를 등지고 있어도 그의 눈이 약간 사팔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유리한 점이었다. 사실 그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에도 마치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해 배 심원과 증인에게는 아주 지독한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빈틈이 없고 세심한 검사를 대하 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니까. ,,, 당신이 직접 ,,, . 길머 씨가 말하고 있었다. 글쎄요, 테이트 씨가 안경을 만지며 두 눈을 내리깐 채 얘기하기 시작했다. ,,, 저를 불렀습니다 ,,, . 배심원석을 향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테이트 씨. ,,, 고맙습니다. 누가 당신을 불렀습니까? 봅 ,,, 아니, 저기 봅 이웰 씨가 어느 날 밤 저를 불렀습니다. 그게 언제였습니까? 십일월 이십일일 밤이었습니다. 제가 막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보 ,,, 아니, 이웰 씨가 들어왔습 니다. 어떤 검둥이가 자기 딸을 강간했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가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죠.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녀가 거실 한가운데 엎드려 있었습니다. 몹시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흔들었더니 천천히 일어나 구석으로 가선 얼굴을 닦더군요. 그리곤 괜찮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톰 로빈슨이 그랬다고 했습니다. 손톱에 열중하고 있던 테일러 판사는 마치 아버지의 이의 제기를 예상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 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트 씨가 계속했다. 분명 톰이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고, 그가 유혹했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 다. 곧장 톰의 집으로 가서 그를 데려다 확인시키고 감금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고맙습니다. 길머 씨가 말했다. 질문 있습니까, 애티커스? 테일러 판사가 물었다. 네, 있습니다. 아버지는 테이블 뒤에 다리를 포개고 비스듬히 앉아 한 팔을 옆의자의 등받이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의사를 불렀습니까, 보안관? 어떤 의사든 말입니다. 아버지가 질문을 던졌다. 아닙니다. 테이트 씨가 대답했다. 의사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네. 테이트 씨가 반복했다. 왜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엉망이 되어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습 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의사를 부르지 않았군요. 당신이 그곳에 있는 동안 사람을 보내거나 그녀를 누구에게 보이거나 하지 않았습니까? 네, 변호사님. 그때 테일러 판사가 신문을 중단시켰다. 그는 세 번이나 똑같은 대답을 했소, 애티커스. 그는 의사를 부르지 않은 겁니다. 전 확인을 하려는 겁니다, 재판장님. 아버지의 말을 들은 판사는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발코니 난간을 꽉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숨을 몰아쉬곤 내려다보았다. 난 오빠가 괜히 폼잡느라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딜은 태평스레 쳐다보고 있었고, 옆자리의 리버렌드 사 이크스 목사도 그처럼 앉아 있었다. 뭐야, 오빠? 쉿. 내가 속삭이자 오빠는 말을 가로막았다. 보안관, 당신은 그녀가 지독하게 구타당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구타를 당했습니까? 저, 그러니까 ,,, . 그녀의 상처에 대해서만 설명해주십시오. 네, 그녀는 머리부분을 구타당했고 팔도 멍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오기 삼십 분 전에 일어난 일이었거든요. 어떻게 아십니까? 테이트 씨가 웃었다. 그건 그들의 말이었습니다. 어찌됐건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땐 심하게 멍들어 있었습니다. 눈 주위도 퍼렇게 되어 있었구요. 어느 쪽 눈이었습니까? 테이트 씨가 눈을 끔뻑거리더니 한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저, 그러니까 ,,, . 그는 조용히 말하며 그 질문이 유치하다는 듯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기억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테이트 씨는 앞에 앉은 사람을 놓고 기억을 떠올리는 듯 바라보며 말했 다. 왼쪽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왼쪽입니까, 당신이 보는 쪽에서 왼쪽입니까? 네, 맞아요. 그녀의 오른쪽입니다. 오른쪽 눈이었어요, 핀치 변호사님. 지금 기억이 납니다. 그 주위가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 . 말을 마친 그는 무언가 명백해진 듯 눈을 끔뻑이곤 머리를 돌려 톰 로빈슨을 훑어보았다. 톰 로빈슨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명백한 것을 얻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안관, 지금 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해주시겠습니까? 전 분명 그녀의 오른쪽 눈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서기 책상으로 걸어가 몸을 구부리고 뭔가를 격렬하게 휘갈겨 쓰곤 속기노트를 홱 돌 렸다. 그때 법원서기가 말했다. 전 분명히 기억합니다, 핀치 변호사님. 얼굴 오른쪽을 얻어맞았다는 것 말입니다. 아버지가 다시 테이트 씨를 쳐다보았다. 어느 쪽이었다구요, 헥? 오른쪽이었습니다, 변호사님. 게다가 그녀는 더 멍이 ,,, 말해도 될까요? 아버지는 경계의 빛을 잠깐 보이곤 그러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판단한 듯 말했다. 네, 그녀의 다른 상처는 어땠습니까? 테이트 씨가 대답하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서서 톰 로빈슨을 쳐다보았다. 미리 이야기된 것이 아닌 듯했다. ,,, 그녀의 팔에도 멍이 들어 있었고, 목을 보여주는데 식도 주위에 선명한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목 전체였습니까? 목 뒤쪽에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님. 그렇습니까? 네, 그녀의 목은 가늘어서 누구든지 쉽게 움켜쥘 수 있었을 겁니다. 질문에 네, 아니오로만 대답해주십시오, 보안관. 아버지가 냉담하게 말했고 테이트 씨가 말을 끝냈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으며 법무관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곤 재판장에게도 테이트 씨에게도 끄덕 였다. 테이트 씨는 증인석에서 꼿꼿하게 일어났다. 그는 마루바닥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안고 있는 젖먹이들은 다시 추스려졌고, 몇몇 아이들은 법 정 안을 뛰어다녔다. 우리 뒤의 흑인들도 그들끼리 조용히 속삭였다. 딜이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에게 모두들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묻자, 모른다고만 했다. 지금까 지는 매우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큰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었고, 상대 편 변호사 사이의 치열 한 공방도 없었다. 극적인 장면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실망의 빛이 역력하게 느껴졌 다. 아버지는 마치 사회자처럼 부드럽게 진행해 나갔다. 아버지는 거친 바다를 잠재울 능력이라도 가진 듯 목사의 설교처럼 딱딱하게 강간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썩은 위스키 냄새, 짐승우리 냄 새와 게슴츠레한 눈을 한 뚱한 얼굴들, 간밤에 들려왔던 쉰 목소리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그 쉰 목소리는 핀치 선생님, 그들은 돌아갔나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악몽은 날이 밝으면서 사라 졌다. 오빠만을 제외한 모든 방청객들은 테일러 판사만큼이나 느긋해져 있었다. 그의 입술은 의미심장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눈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증언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모습에서 잘난 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로버트 E. 리 이웰! 서기의 벼락 같은 목소리에 답변하려는 듯 장닭 같은 남자가 일어나 우쭐거리며 증인석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름이 호명되자 목 뒤가 빨개졌고 서약을 하고 돌아선 그의 얼굴도 이미 목덜미만큼이나 빨개져 있었다. 이름에 비해 그는 딴판이었다. 금세 감은 듯한 숱 없는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와 있었다. 가늘고 뾰족한 코는 번들거렸고, 턱 부분이 분명치 않았다. 그 턱은 스멀거리는 목의 일부분일 정도였다. ,,, 그러니 신의 도움으로. 그는 수탉이 우는 듯 읊어댔다. 메이컴 규모의 모든 읍에는 이웰 집안과 흡사한 집안이 있기 마련이었다. 경제적 부나 빈곤은 그들의 신분을 바꾸어놓지 못했다. 불경기일 때나 아닐 때나 그들은 마을 안에서 방관자처럼 살았다. 게으름은 그들의 많은 아이들을 돌볼 수 없게 했고, 제아무리 우수한 보건소라 할지라도 대대로 이어지는 타고난 게으름에서 비롯된 불결함이나 기생충으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메이컴의 이웰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흑인들의 오두막이었던 쓰레기장 뒤쪽에서 살았다. 그 오두막의 판자로 된 담은 슬레이트 판으로 보수되었고, 지붕은 양철캔을 두드려 편 것으로 이어져 있어 낱낱의 캔 상표나 디자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각진 총구멍만한 문에, 네 칸으로 나누어진 오두막은 네 개의 고르지 못한 석회암 위에 불안스레 자리잡고 있었다. 창문이라고 해야 벽을 뚫어 놓은 정도였고, 그나마 여름철에는 쓰레기더미에서 잔치를 벌여대는 해충을 막기 위해 더러운 무명조각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이웰 사람들이 매일매일 철저하게 쓰레기를 뒤지는 탓에 벌레도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마당 주위에 오두막집은 개구쟁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나무조각이나 빗자루, 연장들이 얼기설기 울타리를 이루었고, 녹슨 망치, 쇠스랑, 부삽, 도끼, 괭이 등이 가시철망 쪼가리들과 함께 견뎌내고 있었다. 이 바리케이트로 둘러싸여진 지저분한 마당 구석에는 고물 포드 자동차가 놓여 있었다. 버려진 치과병원 의자, 오래된 냉장고 등 자잘한 고물들은 끝이 없었고, 떨어진 신발짝, 못쓰게 된 라디오, 사진틀, 잼 항아리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오렌지빛 닭들만이 희망차게 땅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는 울타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이 빠진 사기단지 여섯 개에 빨간 제라늄이 찬란하게 피어 있어, 머디 아줌마의 꽃만큼이나 정성스럽게 가꾸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머디 아줌마 마당에도 제라늄이 만발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마옐라 이웰네 것이라고 말했다. 오두막 안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여섯이라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아홉이라 했다.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여남은 명의 아이들이 지저분한 얼굴로 창문 밖을 내다보곤 했다. 성탄절 외에는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성탄절엔 교회에서 구호품이 지급되었고, 메이컴 시장이 우리 쓰레기를 거두어들이는 그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강변하곤 했다. 지난 성탄절, 아버지는 시장의 요청으로 자료를 구하러 그곳에 우리를 데려가주었다. 간선도로가 끊기는 곳에서 비포장 도로가 쓰레기장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 이웰 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오백 야드 떨어진 곳에 그리 넓지 않은 흑인 거주지역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으로부터 돌아오거나 간선도로를 이용할 경우라면 결국 도로끝에서 우회해야 했다. 서리가 내리는 십이월의 어스름녘, 그 오두막에선 푸른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고 집 안은 호박색 불빛이 밝혀져 있었다. 문간은 제법 말쑥하고 아늑해보였다. 황혼녘의 공기처럼 바삭거리는 닭고기나 베이컨 굽는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빠와 난 다람쥐 고기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아버지 또래의 시골 출신은 그 냄새가 주머니쥐나 토끼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그 냄새는 이웰네 집을 뒤로 하여 사라져갔다. 잿물비누에 뜨거운 물로 문질러댄 이웰 씨의 하얀 피부를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버트 이웰 씨? 길머 씨가 물었다. 네, 제 이름인뎁쇼, 검사님. 길머 씨의 등이 굽어보였다. 나는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에 연유된 감상이었다. 법률가의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법정에서 뜨거운 논쟁을 벌일 때에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한다고 들어왔다. 논쟁의 상대방을 부모의 개인적인 적으로 오판하여 좋지 않은 감정에 휩쓸리게 되다가, 정작 첫휴식 시간에 자신의 부모가 논쟁하던 사람들과 팔짱을 끼고 다정스레 나가는 것을 보면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빠와 나에게 그런 혼란은 적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정확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논쟁이 소란으로 이어져 시끄러워져도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한 변호사로서 지켜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귀먹은 증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길머 씨도 아버지처럼 자신의 일을 할 뿐이며, 이웰 씨는 길머 씨의 증인일 뿐이었다. 그가 이웰 씨에게 무례하게 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당신이 마옐라 이웰의 아버지입니까? 두 번째 질문이 던져졌다. 그렇습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걔 에미는 죽었습죠. 테일러 판사가 제지했다. 그는 회전의자를 천천히 돌리면서 증언자를 자애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마옐라 이웰의 아버지입니까? 아래층에서 들리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네, 재판장님. 이웰 시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테일러 판사는 호의적인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을 이곳에서 본 적이 없는데, 법정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오? 증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판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한 가지 명백히 해둘 것이 있소. 내가 여기 앉아 있는 한 이 법정 안에선 어떤 주제로든 풍기문란한 공론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이웰 씨는 끄덕였지만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테일러 판사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자, 됐으니 시작하시오, 길머 씨! 고맙습니다, 재판장님. 이웰 씨, 십일월 이십일일 저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신이 직접 얘기해주십시오. 오빠가 싱긋 웃으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 당신이 직접 이라는 말은 길머 씨의 등록상표였다. 우리는 당신이 직접 이 아니면 누가 한다는 말인지 우스꽝스럽게도 캐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러니까 십일월 이십일일밤 제가 불쏘시개감을 갖고 숲에서 돌아와 막 울타리를 넘는 뎁쇼, 집 안에서 저년이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네. 이때 테일러 판사는 증인을 날카롭게 힐끗 쳐다보곤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다시 졸린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때가 몇 시였습니까, 이웰 씨? 해가 막 지려는 중이었죠. 그러니까 제가 ,,, 마옐라가 ,,, 아이쿠 맙소사, 어마어마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고 했습죠. 얘기가 딴 방향으로 흐르자, 재판장이 이웰 시를 제지했다. 예?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구요? 길머 씨가 물었다. 이웰 씨는 당황하며 판사를 보았다. 그 지독한 소리는 점점 커졌고, 전 짐을 내리다 말고 힘껏 뛰었습니다. 울타리로 뛰어들어 정신을 차리고 창문으로 가보니 ,,, . 이웰 씨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그러더니 일어나 톰 로빈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검둥이가 저년을 덮치고 있지 뭡니까? 테일러 판사는 그의 망치를 오 분간이나 계속 두드려야 했다. 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 무언가 헥 테이트 씨에게 말을 했고, 그는 복도 가운데서 법정의 소동을 진정시키는 이 마을 최초의 보안관이 되었다. 우리 뒤에 선 흑인들이 성난 신음소리를 억제하고 있었다.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딜과 나를 건너 오빠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젬 군, 진 루이스 양과 집으로 가는 게 좋겠는데 ,,, 젬 군, 알겠지? 오빠가 머리를 돌려 말했다. 스카웃, 너 집에 가. 딜, 너 스카웃 데리고 집에 가라. 가려면 오빠부터 가. 무슨 일을 할 땐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대꾸했다. 오빠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고 나서 말했다. 괜찮아요, 목사님. 쟨 들어도 모르니까요. 나는 기분이 몹시 상해버렸다. 오빠가 알아듣는 정도는 나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어. 조용히 해. 쟨 몰라요, 목사님. 아직 열 살밖에 안 됐거든요.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의 검은 눈이 걱정스러운 듯 보였다. 핀치 변호사님이 너희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계시냐? 이 재판은 진 루이스 양이나 너희 둘에게는 맞지 않는데 ,,, . 오빠가 머리를 저었다. 아빤 저희를 보실 수 없어요, 목사님. 어떤 말로도 오빠를 이곳에서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난 오빠의 고집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일단락되었고, 딜과 나는 그대로 있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가 보려고만 한다면 쉽게 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테일러 판사가 망치를 세게 내리쳤고, 이웰 씨는 증인석에서 자신이 연출한 장면을 떠올리며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다. 테일러 판사의 망치소리는, 여행자이기라도 한 듯한 그의 태도를 샐쭉하고 긴장되어 중얼거리는 군중의 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내려치는 망치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 법정 안의 유일한 소리는 판사가 연필로 의자를 두드리는 희미한 톡톡 소리였다. 법정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테일러 판사는 몸을 의자 깊숙이 파묻었다. 그는 갑자기 지친 듯 보였고, 늙수그레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보였다. 얼핏 테일러 판사는 그의 부인과 키스를 자주 하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일흔 살 가까이 되었던 것이다. 테일러 판사가 말했다. 요청이 있습니다. 이 법정 안의 모든 분께, 최소한 여자분과 아이들을 위해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원하는 것을 듣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의 자녀에게 들려줄 권리도 있습니다. 단 지금 분명히 다짐할 일은 조용히 듣고 보아달라는 겁니다. 그럴 수 없다면 이 법정을 떠나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법정모독죄에 해당되는 일 없이 모두 이곳에 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웰 씨, 당신은 가능한 한 크리스찬 다운 언행으로 증언해주시기 바랍니다. 길머 씨, 계속하시오. 이웰 씨는 마치 벙어리를 연상시켰다. 그는 분명 테일러 판사가 지적한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입은 침묵 속에 고투했지만 판사가 한 말의 요지는 그의 얼굴에 각인된 듯했다. 반면에 테일러 판사에게는 절대 감출 수 없는 진지함이 드러났다. 그는 이웰 씨가 감히 자신을 속이기라도 한다는 듯 증인석의 그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길머 씨와 의미있는 눈짓을 주고 받은 후 의자에 앉았다. 손을 뺨에 대고 있어서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테일러 판사의 발언이 진행을 방해하고 있었으므로, 길머 씨는 더욱 난감해 하고 있었다. 이웰 씨, 피고가 당신의 딸과 성교하는 걸 직접 보았습니까? 네, 보았습니다. 방청객들은 조용했고 피고가 무엇인가를 말했다. 아버지가 톰 로빈슨에게 속삭였으나,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은 창문에 있었다고 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마당에서의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약 삼 피트였습죠. 방 안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까? 네, 검사님. 그 방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그러니까 ,,, 마치 싸움이라도 벌어진 듯 모든 것이 팽개쳐져 있었습죠. 당신은 피고를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저 ,,, 집을 돌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가 앞문으로 달아났지요. 전 그를 똑똑히 봤습니다. 네, 마옐라에게 정신이 팔려 그놈을 쫓아가지 못한 채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딸애가 마룻바닥에 엎드려 큰소리로 울고 있지 뭡니까? 그 다음엔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테이트 씨에게 달려갔습죠. 전 그놈이 누군지 알았으니까요. 그럼요, 매일 우리집 앞을 지나는 저 아래 검둥이 마을에 사는 저 ,,, 판사님, 전 저 아래 온상을 치워달라고 십오 년간이나 군청에 탄원했습죠. 위험한 데다가 내 땅의 가치를 떨어뜨리니까요. 자, 수고하셨습니다. 이웰 씨. 길머 씨가 서둘러 말했다. 그 증인은 증인석에서 황급히 내려오느라 그에게 질문하려고 일어난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테일러 판사의 묵인 아래 법정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잠깐만요, 선생. 아버지가 친절하게 불러세웠다. 한두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이웰 씨는 증인석으로 되돌아가 자리를 잡고는 야릇한 표정을 띤 거만한 얼굴로 아버지를 주시했다. 메이컴의 증인들이 상대방을 대할 때 나타내는 몸짓이었다. 이웰 씨, 아버지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날 밤은 모두들 뛰기에 바쁜 날이었군요. 당신은 집으로 뛰고 창문으로 뛰고 다시 안으로 뛰다가 또 마옐라에게 뛰어갔습니다. 또 테이트 씨에게도 뛰어갔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뛰면서 의사에게도 뛰어갔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보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마옐라의 상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까? 물론 관심있었죠. 전 누가 그랬는지 봤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난 그녀의 육체적 상해를 말하는 겁니다. 당신은 당연히 딸의 상해에 대해 즉각적인 의료조치를 서둘러야 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뭐라구요? 즉각적으로 그녀를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까? 증인은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고 평생 의사를 불러본 적도 없다고 했다. 설령 그렇게 했더라도 괜히 돈만 없앴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젠 다 된 겁니까? 아직 아닙니다. 아버지가 편안하게 대답했다. 이웰 씨, 당신은 보안관의 증언을 들었겠지요? 그래서요? 당신은 헥 테이트 씨가 증언할 때 법정에 있었으므로 그가 하는 말을 다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이웰 씨는 그 질문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는 안심이 된다고 결정한 듯 보였다. 네. 당신은 마옐라의 상처에 대한 설명에 동의합니까? 그게 무슨 ,,, . 아버지는 길머 씨를 돌아다보고 미소지었다. 이웰 씨는 그날 변론을 하지 않으려고 결심이라도 한 듯했다. 테이트 씨의 증언에 의하면 마옐라의 오른쪽 눈의 멍들고 그녀가 온통 구타당 ,,, . 아, 그거라면 테이트 씨가 말한 게 모두 맞죠. 그렇습니까? 난 그저 확인을 하려는 겁니다. 아버지가 부드럽게 말하며 서기에게로 가서 무언가를 얘기했고, 그 서기는 마치 증권시장의 시가인용문을 읽듯 테이트 씨의 증언을 읽음으로써 당분간 법정 안을 즐겁게 해주었다. 네, 맞아요. 그녀의 오른쪽입니다. 오른쪽 눈이었어요, 핀치 변호사님. 지금 기억이 납니다. 그 주위가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기는 책장을 홱 넘기곤 계속했다. 얼굴의 그 부분임을 보안관은 반복하였습니다. 그녀의 오른쪽 눈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로버트. 당신은 또 한 번 들었습니다, 이웰 씨. 그것에 첨부할 것이 더 있습니까? 당신은 보안관이 한 말에 동의합니까? 테이트 씨의 얘기에 동의합니다. 그 아인 멍들고 심하게 얻어맞았으니까요. 그 땅딸막한 남자는 방금 전의 굴욕을 잊은 듯 아버지가 쉬운 상대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가슴은 부풀고 또 한 번 빨간 수탉이 되어 아버지가 한 가지만 더 질문한다면 그의 셔츠단추는 터지고 말 것처럼 보였다. 이웰 씨, 당신은 읽고 쓸 줄 아십니까? 길머 씨가 저지했다. 이의 있습니다. 증인의 교육수준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적절하며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님. 테일러 판사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아버지가 말을 가로막았다. 재판장님, 이 질문을 허락해주신다면 곧 그 이유를 아시게 될 겁니다. 좋아요, 계속하십시오. 무효를 선언합니다. 길머 씨는 이웰 씨의 교육 정도가 이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우리들만큼이나 궁금해 하는 듯했다. 그러면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반복합니다. 당신은 읽고 쓸 수 있습니까? 분명 할 수 있습죠. 당신의 이름을 써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나도 구원기금 수표에 서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웰 씨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듯 보였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수군대는 소리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는 이웰 씨가 제시하는 것과 분명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내겐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개구리잡이를 하는 것과 같았다. 반대신문에서 질문에 대한 증인의 답변은 결코, 결코,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들어왔던 바였다. 그렇게 해서 예상치 못했던 사건의 열쇠를 얻어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답변으로 재판의 패소를 인정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편지봉투를 꺼낸 후 조기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빼냈다. 아버지는 매우 천천히 움직였다. 배심원들이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돌아서서 만년필 뚜껑을 열어 테이블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다시 펜을 들어 조금 흔들고는 봉투와 함께 증인에게 건네주었다. 자, 여기에 이름을 써주시겠습니까? 배심원들이 볼 수 있도록 똑똑하게 써주십시오. 이웰 씨는 봉투 위에 이름을 손쉽게 쓰고 나서 치자꽃 가득한 방에라도 앉아 있는 듯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을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는 테일러 판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엉거주춤 앉아 있는 길머 씨를 보았다. 배심원들은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아예 난간 위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흥미 있다는 겁니까? 이웰 씨가 물었다. 당신은 왼손잡이군요, 이웰 선생. 테일러 판사가 말했다. 화가 난 이웰 씨는 판사에게로 돌아서서 왼손잡이가 뭐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고, 자신은 신을 두려워하는 선량한 시민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애티커스 핀치는 자기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런 약삭빠른 변호사는 언제나 속임수를 써서 자기 같은 사람을 이용한다고 떠들어댔다. 계속해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흑인을 보았으며, 흑인이 도망갔고, 보안관에게 달려간 일 등 자기가 취한 행동에 대해 거듭 지껄여댔다. 그의 증언을 뒤집어놓은 후 아버지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길머 씨가 끝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이웰 씨, 당신은 왼손잡이지만 양손을 다 쓸 수 있겠지요? 난 절대 그렇지 않습죠. 아 ,,, 아니 네, 왼손잡이지만 남들 오른손에 지지 않게 쓸 수 있어요. 조금도 지지 않게요. 그가 피고측 테이블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오빠는 조심스럽게 감정이 흥분되는 것 같았다. 발코니 난간을 톡톡치면서 속삭였다. 우리가 드디어 해냈어. 아버지는 이웰 씨가 마옐라를 구타했으리라는 가정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깊은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오른쪽 눈을 맞았다면 얼굴의 오른쪽 부분을 구타당한 것으로, 그건 왼손잡이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셜록 홈즈와 젬 핀치와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를 붙잡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톰 로빈슨 역시 왼손잡이일 수 있으니까. 헥 테이트 씨가 했던 것처럼 한 장면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순식간에 무언극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톰이 오른손으로 그녀를 잡고 왼손으로 짓이겼으리라고 결론지어버렸다. 나는 이웰 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우리 쪽을 등지고 있었으므로 넓은 어깨와 황소처럼 두꺼운 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었으리라. 그래도 나는 오빠가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18. 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낳고 누군가 또 호명되었다. 마옐라 바이올렛 이웰! 젊은 아가씨가 증인석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손을 들어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해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서약했다. 그녀는 다소 허약해보였지만 우리를 마주하여 증인석에 앉자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친 노동에 단련되어 있는 단단한 체구의 여자였다. 메이컴에서는 사람들이 목욕을 매일하는지, 아니면 연중행사로 하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이웰 씨도 마치 밤새껏 물에 불렸다가 그를 보호하고 있던 때를 한 겹 벗겨낸 흔적이 피부에 민감하게 나타나, 마치 끊는 물에 덴 듯한 모습이었다. 마옐라도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이웰 집 마당의 빨간색 제라늄을 떠올렸다. 길머 씨는 마옐라에게 지난해 십일월 이십일일 저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배심원들을 향해 있는 그대로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옐라는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날 저녁 무렵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길머 씨가 끈기있게 질문했다. 현관 위. 무슨 현관입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앞 현관. 현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안 했어요. 테일러 판사가 거들었다. 일어난 일을 사실대로 말하도록 해요. 할 수 있지요? 마옐라는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그리곤 입을 막고 흐느껴 울었다. 테일러 판사는 잠시 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자, 됐어요. 그만하도록. 아가씨가 진실을 말하는 이상 이곳에선 누구도 두려워할 게 없어요. 모든 것이 생소하겠지만 부끄러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마옐라는 입을 막고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다. 뭐라구? 판사가 다시 물었다. 저 사람. 그녀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흐느꼈다. 핀치 씨? 그녀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말했다. 저에게도 아빠에게 하듯 할까봐 무서워요. 아빠가 왼손잡이인 걸 밝혀내듯이요 ,,, . 테일러 판사는 그의 숱많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그도 이런 종류의 문제에는 한 번도 직면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몇 살이지? 스물한 살이요. 테일러 판사는 목청을 가다듬고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하려 애쓰면서 신음하듯 말을 이었다. 핀치 씨는 증인에게 무섭게 하지 않아요.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가 말릴 테니까. 내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지. 자, 다큰 아가씨니까 똑바로 앉아서 증언을, 일어난 일을 말하도록 해요. 그럴 수 있겠지요? 나는 오빠에게 속삭였다. 무슨 속셈이 있는 걸까? 오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증인석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말을 안 하고 있어. 판사님이 자길 가엾게 여기도록 만들려는 속셈이야. 그래도 ,,, 어휴, 모르겠다. 자신을 진정시킨 마옐라는 아버지에게 섬뜩한 눈길을 주고는 길머 씨에게 말했다. 네, 검사님. 저는 현관에 있었구요, 그리고 ,,, 그리고 그가 따라왔어요. 그러니까. 저 오래된 쉬퍼로브가 마당에 있었거든요. 아빠가 불쏘시개감으로 가져오셨어요. 하지만 전 너무 힘이 들어서 ,,, 그때 그가 지나갔어요. 그가 누굽니까? 마옐라는 톰 로빈슨을 가리켰다. 이때 길머 씨가 말했다. 난 좀더 자세한 진술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서기는 몸짓을 글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저기 있는 로빈슨.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제가 검둥아 이리와, 오 센트를 줄 테니 이 쉬퍼로브 좀 잘게 쪼개줘 이렇게 말했어요. 그는 그 일을 간단히 끝내주었죠. 그래서 그가 마당을 들어오게 되었고, 난 동전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따라오는지도 모르고 돌아서보니 바로 내 뒤에서 달려들었어요. 네, 맞아요. 내 목을 조이며 욕을 하고 추잡한 말을 했어요. 저는 맞서 싸우려 소리쳤지만 그가 내 목을 잡고 때리고 또 때렸어요 ,,, . 길머 씨는 마옐라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땀에 젖은 손수건을 비비 틀었다. 얼굴을 닦으려고 손수건을 펼쳤을 때는 그녀의 뜨거운 손바닥에 있는 손수건이 온통 주름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길머 씨가 계속 질문하기를 기다렸으나 하지 않자 스스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날 마룻바닥에 내던지고 목을 조르며 희롱했습니다. 비명을 질렀습니까? 비명을 지르며 싸웠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고 걷어찼어요. 죽도록 악을 썼어요.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정신을 차려보니 아빠가 방 안에서 소리치고 계셨어요. 누가 그랬니, 누가 그랬어 라고요. 그리곤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테이트 씨가 저를 바닥에서 일으켜 물양동이 쪽으로 데려가주셨어요. 마옐라는 증언을 반복함으로써 확신을 가지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의 아버지처럼 경솔한 종류의 확신이 아니었다. 그건 은밀한 것으로 꼬리를 감춘 변함없는 눈빛 같은 것이었다. 아가씨는 있는 힘을 다해 격렬히 싸웠다고 했지요? 그때 이빨과 손톱을 사용했습니까? 분명히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당신을 겁탈했다는 걸 긍정합니까? 마옐라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난 또 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계속했다. 그는 계속 노리고 있던 짓을 한 거예요. 길머 씨는 얼굴과 손을 닦음으로써 그날이 무척이나 더운 날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당분간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아직 그대로 있어요. 저 키 크고 무서운 핀치 씨가 몇 가지 질문이 있다니까. 아버지는 싱긋이 웃으며 일어났다. 증인석으로 걸어가는 대신 웃옷을 열어 조끼 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걸고는 반대편 창문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버지는 밖을 내다보았지만 특별히 무엇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돌아서서 증인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아버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결론을 끌어내려고 애쓰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마옐라 양, 조금도 아가씨를 무섭게 하지 않겠습니다. 아직은 아니에요. 우리 서로 자세히 알아보기나 합시다. 몇 살입니까? 스물한 살이라고 얘기했잖아요, 저기 판사님께. 맞습니다, 그랬죠. 당신은 나를 참아내야 할 겁니다, 마옐라 양. 나도 열심히 하겠지만 내가 한 것을 그대로 기억할 수는 없어요. 이미 말했던 것을 또 질문하게 될 거고, 그러면 당신은 내게 대답을 해야 할 겁니다, 그렇죠? 좋아요. 나는 마옐라의 표정에서 그녀의 성의있는 협력을 확인하려는 아버지의 요구를 긍정하는 기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를 계속 조롱하는 한 전 한마디도 않겠어요. 뭐라구? 아버지가 펄쩍 뛸 듯이 물었다. 나를 계속 놀려댄다면요. 그때 테일러 판사가 말했다. 핀치 씨는 아가씨를 놀리는 게 아니오. 왜 그러지? 마옐라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분은 내게 계속 아가씨니, 양이니 하고 있어요. 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그런 건방진 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어요. 아버지는 창문 쪽으로 다시 걸어가 테일러 판사에게 이 일을 처리하도록 맡겼다. 판사는 결코 연민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해명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그의 쓰리고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단지 핀치 씨의 습관일 뿐이오. 마옐라에게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 법정에서 수십 년간 일을 처리해오고 있지만, 그때마다 핀치 씨는 모든 이에게 항상 정중히 대해왔어요. 그는 예의를 갖추려는 것이며, 그건 그분의 습관이오. 테일러 판사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혔다. 애티커스, 계속 진행하시오. 그래서 그녀의 생각대로 건방진 꼴을 당하지 않았음을 기록에 보여줍시다. 그녀에게 과연 아가씨나 마옐라 양이라고 불러주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결코 그런 사람은 없었으리라. 일상적인 예의에도 화를 낸다면 도대체 그녀의 삶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곧 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아가씨는 스물한 살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시작했다. 형제가 몇이나 됩니까? 아버지는 창문에서 증인석으로 돌아왔다. 일곱 명이오. 나는 보았던 그 아이와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같을까를 생각해보았다. 당신이 맏이입니까? 제일 위입니까? 네. 어머닌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몰라요, 오래 전이에요. 학교엔 다녔습니까? ,,, 저 아빠만큼 읽고 쓸 수 있어요. 마옐라는 내가 읽은 책의 미스터 짤랑이 처럼 대답했다. 학교는 얼마나 다녔습니까? 이 년 ,,, 삼 년 ,,, 잘 모르겠어요. 나는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아버지의 진행방식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길머 씨로부터 아무런 이의저지도 받지 않고 배심원들 앞에서 이웰 사람들의 모든 생활을 천천히 풀어나갔다. 그것으로 배심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탐지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구제기금 수표로 그 가족이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은 이웰 씨가 그 돈으로 모두 술을 마셔댔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건 그가 며칠씩이나 할렘 가로 사라졌다가 상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질 때면 신발이 없어도 괜찮았지만 추워지면 낡은 타이어로 신발을 만들어 신고, 쓰레기더미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곤 했다. 그들은 추려진 쓰레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씻고 싶을 때면 각자 물을 길어와야 했으므로 어린아이들은 일년 내내 감기와 만성 피부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때로는 부인들이 찾아와 마옐라에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해도 그 가족 가운데 쓰고 읽을 수 있는 두 명 중 하나인 그녀는 나머지 아이들은 배울 필요가 없고 아버지도 원치 않는다고만 하는 것이었다. 마옐라 양.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스물한 살인 아가씨라면 친구가 있을 겁니다. 친구가 있습니까? 그 증인은 마치 어려운 문제를 푸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친구요? 그래요, 아가씨 나이또래거나 아니거나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자건 여자건 그냥 보통 친구 말입니다. 중립상태로 가라앉아 있던 마옐라의 적의가 다시 훨훨 타올랐다. 날 또 놀리시네요, 핀치 변호사님. 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묵살하고 계속했다. 아버지를 사랑합니까, 마옐라 양? 사랑하느냐구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말은 아버지가 아가씨에게 잘해주는지, 또 서로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거예요. 아빤 괜찮아요. 어떤 때만 빼고 ,,, . 그게 어떤 때입니까? 마옐라는 그녀의 아버지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난간 밖으로 나올 듯 초조히 쳐다보다가 똑바로 고쳐앉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빤 좋으세요. 이웰 씨가 다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때 아버지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술 마실 때만 제외하곤, 그렇죠? 마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아가씨를 괴롭힌 적도 있습니까? 무슨 말이세요? 아버지를 화나게 하면 아가씨를 때린 적도 있느냐는 겁니다. 마옐라는 서기석에서 판사석까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답변을 하시오, 마옐라 양. 테일러 판사가 말했다. 아빠는 내 머리털 하나 건드린 적이 없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진술했다. 한 번도 때리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안경이 미끌어지고 다시 코 위로 밀어올려졌다. 우린 충분한 비공식 담화를 했습니다, 마옐라 양. 그럼 지금부터 재판으로 들어갑시다. 아가씨는 톰 로빈슨에게 무언가를 쪼개달라고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면이 전부 서랍으로 된 옷장인 쉬퍼로브요. 당신은 톰 로빈슨을 잘 알고 있었습니까? 무슨 말이에요? 내 말은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사는지 알고 있었느냐는 겁니다. 마옐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그가 누구인지 알아요. 매일 집 앞을 지나갔거든요. 아가씨가 그를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마옐라는 보일 듯 말 듯 움찔했다. 아버지는 창문으로의 순례를 다시 시작하여 바깥을 내다보며 답변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그녀의 무의식적인 경련을 보지 못했지만 알고 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돌아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 . 다시 시작하려 했다. 네, 그랬어요. 전엔 그에게 담장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그녀는 이제 준비가 되어 있어 힘주어 말했다. 네, 그런 적 없어요. 분명 그러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대답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그렇다면 전엔 그 이상한 일을 한 번도 그에게 시킨 적이 없다는 겁니까? 아버지가 조용하게 질문했다. 모르겠어요, 거긴 검둥이들이 꽤 돌아다니니까요. 또 그랬던 적이 있습니까? 아뇨.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시작합니다. 방 안에서 뒤를 돌아보니 톰 로빈슨이 바로 뒤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죠? 네. 그가 아가씨의 목을 쥐고는 추잡한 욕을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맞습니까? 네, 맞아요 ,,, . 갑자기 아버지의 기억력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그가 나를 잡고는 목을 조르며 나를 희롱했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맞습니까? 네, 그렇게 말했어요. 그가 당신을 구타한 것을 기억합니까? 마옐라는 망설였다. 당신도 그가 목을 졸랐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같이 싸웠다고 했습니다. 기억하겠죠? 걷어 차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어요 라고. 그렇다면 그가 당신의 얼굴을 구타한 걸 기억할 수 있겠지요? 마옐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짜놓은 계획에 대해 무언가를 명백하게 하려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가 잠시 헥 테이트 씨가 했던 것처럼 자기 앞에 벌어졌던 일을 그려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길머 씨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옐라 양, 이건 간단한 질문입니다.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그가 당신을 구타한 것을 기억합니까?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정을 잃어버린 채 메말라 있었고, 직업적인 어투로 변해 있었다. 그가 당신의 얼굴을 구타한 걸 기억합니까? 아뇨, 기억할 수 없어요. 아니, 내 말은 ,,, 그는 나를 때렸어요. 그것이 답변입니까? 예? ,,, 네, 그가 때렸어요. 전 기억 못해요. 그냥 기억할 수 없어요 ,,,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나서 ,,, . 테일러 판사가 마옐라를 엄하게 쳐다보며 주의를 주었다. 울지 말아요, 아가씨. 판사가 계속 말하려는데 아버지가 제지했다. 울고 싶다면 울게 놔두십시오, 판사님.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까요. 마옐라가 격분한 듯 코웃음을 치고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어떤 질문을 해도 전 답변할 거예요.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 그렇죠? 무슨 질문이든 대답하겠어요. 그래야지요, 마옐라 양. 몇 가지만 더 질문하면 됩니다. 길진 않을 겁니다. 피고가 당신을 유혹했다고 했지요?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누가 당신을 강간했는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저기 저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피고 쪽으로 돌아섰다. 톰, 일어서십시오. 마옐라 양이 당신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마옐라 양, 이 사람입니까? 톰 로빈슨의 탄탄한 어깨가 그의 얇은 셔츠 아래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오른손으로 의자 등받이를 짚고 서 있었다. 기묘한 불균형으로 보였는데, 단지 서 있는 자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왼팔은 오른쪽에 비해 족히 십이 인치는 짧았으며, 옆구리에 매달려 있었고, 그 팔 끝에는 오그라든 작은 손이 붙어 있었다. 발코니 이쪽 멀리에 있는 나도 그 팔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카웃! 오빠가 숨을 몰아쉬었다. 스카웃, 봐! 목사님, 그는 불구자예요.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오빠에게 속삭였다. 그는 면사기계에 저렇게 되었단다. 소년시절, 돌퍼스 레이먼드 씨의 조면기계에 저렇게 되었지 ,,, 뼈에서 살이 전부 발라지고 죽도록 피를 흘렸지. 이 사람이 당신을 강간했습니까? 분명해요. 아버지의 다음 질문은 한 마디로 충분했다. 어떻게? 마옐라가 발광을 하듯 소리쳤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는 나도 몰라요. 어쨌든 그랬어요.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고 했잖아요. 전 ,,, . 자,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봅시다. 아버지가 계속하려 하자, 길머 씨가 이의를 제기했다. 부적합하거나 아주 경우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증인을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테일러 판사는 호탕하게 웃어댔다. 길머 씨, 그는 심하게 하지는 않을 거요. 그렇다 해도 저 아가씨가 그를 가만두진 않을 테니까. 테일러 판사만이 법정 안에서 웃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젖먹이들조차도 소리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아가들이 엄마 젖무덤에 질식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아해 했다. 자. 아버지가 시작했다. 마옐라 양, 당신은 피고가 목을 조르고 때렸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몰래 다가와서 욕을 했고, 돌아보니 그가 거기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등을 보인 채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하면서 손마디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당신은 모든 증언을 재고할 의향이 있습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말하라는 거예요? 아니, 일어났던 일을 말하시오. 전 이미 다 말씀드렸어요. 당신이 돌아보니 그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신 목을 졸랐다고. 네. 그 다음 목을 놓고 당신을 때렸습니까? 그랬다고 이미 말씀드렸어요. 그가 당신의 왼쪽 눈을 오른쪽 주먹으로 멍을 들여놨다는 겁니까? 전 머리를 재빨리 숙였기 때문에 주먹이 빗나갔어요. 그랬어요, 전 피했고 빗나갔어요. 마옐라는 마침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낸 것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기억을 못하더니 갑자기 선명히 떠오르게 되었군요, 그렇죠? 전 단지 그가 날 때렸다고 말했어요. 좋아요, 그가 당신 목을 조르고 때리고 강간했죠? 맞습니까? 그래요. 아가씬 건강한 사람이오. 그러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소? 그냥 거기 서 있었소? 전 소리지르고, 걷어차고, 싸웠다고 했어요 ,,, . 아버지가 손을 뻗어 안경을 벗었다. 잘 보이는 오른쪽 눈으로 증인을 노려보며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질문 하십시오, 애티커스. 증인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어야지요. 테일러 판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려고 했어요 ,,, . 그러려고 했다구? 무엇이 못하게 끌어당깁디까? 그가 홱 넘어뜨렸거든요. 나를 넘어뜨리고는 내 위에 올라탔어요. 그래서 당신은 내내 소리를 질렀겠죠? 분명 그렇게 했어요. 그럼 다른 아이들은 왜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쓰레기더미에?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었소? 왜 아이들은 증인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달려오지 않았소? 그 쓰레기장은 숲속보다 가깝지 않소? 그녀는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증인은 당신의 아버지가 창문으로 볼 때까지 비명을 지르지도 않은 건 아니었습니까? 그때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역시 대답이 없었다. 당신은 톰 로빈슨이 아닌 바로 당신의 아버지를 보고 비명을 지른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침묵이 계속되었다. 누가 당신을 때렸습니까? 톰 로빈슨이요, 아니면 당신의 아버지요? 그녀는 전혀 입을 떼지 않았다. 당신의 아버지가 창문을 통해 본 것은 무엇이었소? 강간이요, 아니면 그것을 방어하려는 몸짓이었소?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건가, 이 어린 아가씨야. 봅 이웰이 때리지 않았다구? 아버지는 마옐라에게서 얼굴을 돌려버렸다. 마치 위경련을 일으킨 듯 보였다. 마옐라의 얼굴은 공포와 분노로 뒤엉켜 일그러져 있었다. 피곤에 지친 아버지는 자리에 앉아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았다. 갑자기 마옐라가 한 마디 한 마디를 짚어가며 말을 시작했다. 할 말이 있어요. 아버지는 얼굴을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까?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권유에 섞여 있는 어떠한 동정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가 할 말이란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저기 저 검둥이가 저를 겁탈했어요. 변호사님이 훌륭한 신사라면 그에 대해 어떤 것도 변호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들은 겁쟁이에 악취를 풍기는 비겁자들이에요. 더러운 비겁자들이라구요. 당신의 그 터무니없는 변덕은 엉터리에요. 아가씨니 마옐라 양이니 모두 돼먹지 않은 수작이라구요. 그녀는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어깨는 격한 흐느낌으로 들썩거렸고, 말했던 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길머 씨조차도 그녀의 지난 일을 추적하려 했지만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그토록 무지하고 가난하지만 않았더라도 당장 감옥에 집어넣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이에게 보여준 치욕만으로도 테일러 판사는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다소 그녀를 몰아세웠다 해도 심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건 아버지의 개인적인 흥미를 위한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는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증인석을 떠나 아버지의 책상을 지나며 보여준 증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것이다. 길머 씨가 휴식 시간이라고 말하자 테일러 판사는 휴정을 선언했다. 휴정합니다. 십 분간 쉬겠습니다. 아버지와 길머 씨가 의자 앞에서 만나 무엇인가를 속삭이듯 주고받고는 증인석 뒤쪽 문으로 나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기지개를 켤 수 있다는 신호였다. 그제서야 나는 벤치 맨 끝에 걸터앉아 있어서 온몸이 마비된 걸 느꼈다. 오빠가 일어나 하품을 하자 딜도 따라했다.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모자를 벗지 않은 채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화씨 구십 도는 되겠는걸. 브랜스톤 언더우드 씨는 취재기자석에 조용히 앉아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머릿속에 모든 증언을 빨아들고 있었다. 문득 눈을 들어 흑인들이 앉아 있는 발코니를 휘둘러보다가 내 눈과 마주치자 슬쩍 웃음을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오빠, 언더우드 아저씨가 우릴 봤어. 괜찮아, 아빠께 이르지는 않을 거야. (트리뷴)지 사회면에 기사를 내긴 하겠지만. 오빠는 딜에게 등을 돌리고 설명했다. 그 공판은 오빠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왠지 평소와는 달라보였다. 아버지와 길머 씨의 논쟁은 길지 않았다. 길머 씨는 마지못해 그일을 수행하는 듯 보였다. 거의 이의제기 없이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을 증인들로부터 빼내는 데 그쳤다. 언젠가 아버지는 아무리 뛰어난 법률가라도 대부분 테일러 판사로부터 지시를 받는다고 말했었다. 테일러 판사는 게을러보이고 잠에 취해 있는 듯해도 일반적인 상황을 거의 역전시키지 않았는데, 그것은 오랜 연륜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훌륭한 재판장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였다. 테일러 판사가 회전의자에 앉아 조끼 주머니에서 시거를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딜을 툭 쳤다. 한참 동안 점검한 시거를 심술사납게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우린 가끔 저걸 보려고 여기 올 때도 있어. 내가 말했다. 아마도 오후 내내 저걸 씹을 거야. 자, 봤지? 알아차릴 수 없는 세밀한 검사를 마치고 끝까지 씹은 시거를 입술을 움직거려 교묘하게 밖으로 내밀어 퉤 하고 침뱉는 그릇에 정확히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 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릴 정도였다. 마치 스핏볼을 내던지는 것 같군. 딜이 중얼거렸다. 대개 휴정은 일반적 의미의 탈출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가엾은 사람들까지도 벽에 기댄 채 남아 있었다. 그래도 헥 테이트 씨에게는 공무원을 위해 남겨진 의자라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버지와 길머 씨가 돌아오고, 테일러 판사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네시가 되어가는군. 그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법원시계가 최소한 두 번은 쳤을 텐데도 나는 진동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테일러 판사가 물었다. 오늘 오후까지 끝낼 수 있겠습니까, 애티커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증인이 얼마나 더 있습니까? 한 명입니다. 좋아요, 그를 부르십시오. 19. 진실 톰 로빈슨이 앞으로 나가 오른손으로 왼팔을 잡아 성경책으로 끌어당겼다. 고무 같은 왼손을 검은 책표지 위에 올려놓으려 시도했지만, 오른손을 떼자마자 그 쓸모없는 손은 성경책에서 미끄러져 서기의 책상 위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하려 하자 테일러 판사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됐어요, 톰. 톰은 선서를 하고 증인석으로 걸어나갔다. 아버지는 신속하게 톰에 관한 사항으로 우리를 유도했다. 스물여섯 살인 톰은 아내와 함께 세 명의 아이들과 살고 있었다. 경범죄로 삼십 일 형을 받은 작은 사건이 있었다. 그건 작은 소동일 뿐이었겠지요? 아버지가 말을 끌어냈다. 어떻게 된 일이었습니까? 싸움을 했는데 그가 나를 칼로 찌르려 했습니다. 그래서 찔렸습니까? 네, 변호사님. 조금 ,,, 심한 상처는 아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전 ,,, . 톰이 왼쪽 어깨를 움죽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럼 당신들 모두 유죄선고를 받았습니까? 네, 변호사님. 전 벌금형이었지만 돈이 없어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나를 찌른 사람은 벌금을 물었습니다. 딜은 나를 가로질러 몸을 굽히고 오빠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자, 오빠는 톰이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거라고 설명했다. 피고는 마옐라 바이올렛 이웰과 아는 사이입니까? 아버지가 물었다. 네, 매일 들일을 하러 가려면 그녀의 집을 지나야 했습니다. 누구 집 일을 해주었습니까? 전 링크 디스 씨 댁 목화를 따고 있습니다. 당신은 십일월에 목화를 땁니까? 아닙니다, 변호사님. 주로 가을에서 겨울까지는 가내 작업장에서 일을 합니다. 저는 일년 내내 그 댁에서 꾸준히 일하고 있습니다. 호두나 무 등 일거리가 많으니까요. 당신은 일하러 다닐 때 이웰 씨의 집을 지나야 한다고 했는데, 다른 길은 없었습니까? 네, 변호사님.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톰, 그녀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온 적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변호사님. 그곳을 지나칠 땐 가볍게 인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저더러 안으로 들어와 쉬퍼로브를 쪼개달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러니까 쉬퍼로브를 쪼개달라고 했던 때 말입니다. 작년 봄이었습니다, 핀치 변호사님. 그때가 목화를 따는 시기라서 기억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 괭이를 갖고 있었습니다. 괭이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집에 손도끼가 있으니 그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손도끼로 쉬퍼로브를 쪼개주었습니다. 그녀는 네게 동전을 주어야겠지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 아닙니다, 아가씨. 그냥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핀치 변호사님. 작년 봄이었으니까 일 년이 더 지난 일입니다. 당신은 그곳에 또 간 적이 있습니까? 네, 변호사님. 언제였습니까? 저 ,,, 여러 번 갔습니다. 테일러 판사의 손이 본능적으로 망치를 집어들었지만 곧 다시 내려놓았다. 그의 도움 없이도 아래층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로 그곳에 갔습니까? 네? 왜 당신은 여러 번이나 그집 울타리 안을 들어갔습니까? 톰 로빈슨의 이마에 긴장이 풀렸다. 그녀가 저를 안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변호사님.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제게 작은 일감을 주었습니다. 불쏘시개감을 만든다거나 물을 긷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빨간 꽃에 물을 주었거든요. 그렇다면, 그 대가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변호사님. 처음에 동전을 주겠다고 한 이후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 기꺼이 했습니다. 이웰 씨나 동생들이 도와주지도 않는 듯했고, 또 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동생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애들은 언제나 집 주변에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걸 보기도 하고 창문가에 있기도 했습니다. 마옐라 양이 당신에게 말을 했습니까? 네, 변호사님. 그녀는 제게 말을 했습니다. 톰 로빈슨이 증언을 해 나아감에 따라 마옐라 이웰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외로운 아가씨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이십오 년 동안 집에만 갇혀 있어야 했던 부 래들리보다도 더 외롭게 생각되었다. 친구가 있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도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듯했고 오히려 자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오빠가 혼혈아라고 부르는 아이들만큼이나 비참해 보였다. 백인들은 짐승 같은 생활을 한다고 상대하려 들지 않았고, 흑인들은 백인이라고 외면했던 것이다. 그녀는 흑인 친구를 좋아하는 돌퍼스 레이먼드 씨와도 달랐다. 그녀는 강둑의 땅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고, 전통있는 가문 출신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웰 사람들에 대해 그들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메이컴 사람들은 성탄절 구호품과 복지기금을 건네주며 경멸을 나타낼 뿐이었다. 톰 로빈슨은 분명 그녀를 인간적으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자신을 겁탈했다며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듯 발끝으로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당신은. 아버지의 질문이 나의 명상을 방해했다. 이웰 집에 마음대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권유를 받지 않고도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핀치 변호사님. 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님. 언젠가 아버지가 증인이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는 그 표정보다 말소리로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나도 그 방법을 응용했다. 즉 톰은 그것을 울먹이지도 않고 차분하게 세 번이나 부정했다. 그렇게 여러 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를 믿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품행이 반듯한 흑인으로 보였다. 행동거지가 바르다면 자기 멋대로 남의 집 마당에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톰, 지난해 십일월 이십일일 저녁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래층 방청객들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반쯤 내밀었다. 우리 뒤쪽에 있는 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톰은 검은 벨벳 같은 흑인이었다. 번들거리지 않는 부드러운 검은 벨벳, 두 눈이 하얀 이와 함께 검은 얼굴 위에서 반짝였다. 불구만 아니었다면 훌륭한 인간의 표본이었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핀치 변호사님, 그녀도 말했듯이 저는 그날 저녁 평상시처럼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옐라 양이 현관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조용했는데 전 왜 그렇게 조용한지 몰랐습니다. 왜 그런지 지나가면서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그녀가 울 안으로 들어와 잠깐 해줄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들어가서 불쏘시개감이라도 쪼갤 일이 있나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제 할 일은 집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낡아빠진 문의 경첩이 떨어졌다면서 그건 왜 그리 빨리 떨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습니다. 그래서 스크루드라이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갔고, 그녀의 손짓에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은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습니다. 앞뒤로 당겨보았지만 아주 멀쩡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내 앞에서 문을 닫았습니다. 변호사님, 저는 그곳이 왜 그렇게 조용한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어디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톰의 검정 벨벳 같은 피부가 빛나기 시작했고, 그는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잠시 후 다시 진술을 시작했다. 전 아이들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로 시내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오 센트짜리 동전 일곱 개를 모으는 데 십 년은 걸린 것 같지만 마침내 해내고야 말았다고 덧붙였습니다. 톰의 불안함이 후텁지근한 실내온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뭐라고 했습니까, 톰? 아버지가 물었다. 동생들에게 그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훌륭하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느냐며 샐쭉거렸습니다. 전 그녀가 제 말 뜻을 잘못 이해한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돈을 모아서 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준 것이 훌륭했다는 의미였거든요. 난 피고를 이해합니다, 톰. 계속하십시오. 전 할 일이 없으니 집으로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다시 물었더니 의자 위에 올라가 쉬퍼로브에서 상자를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피고가 쪼갰던 쉬퍼로브는 아니었겠지요? 그 증인은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변호사님. 다른 것이었습니다. 천장에 거의 닿을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상자를 내려놓으려는데 그녀가 ,,, 그녀가 ,,, 제 다리를 붙들었습니다. 핀치 변호사님, 전 너무나 놀라서 휙 뛰어내리다 의자를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 방의 유일한 가구였는데 제 발이 걸리는 바람에 넘어져버린 겁니다. 전 신께 맹세합니다. 그 의자를 넘어뜨린 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톰 로빈슨은 마비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쳐다보고는 배심원석을 지나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언더우드 씨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피고는 모든 진실을 말하리라 맹세했습니다. 일어난 일을 말해주시겠습니까? 톰은 초조한 듯 손을 입으로 갖다댔다.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답하시오. 테일러 판사가 재촉했다. 시거의 3분의 1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핀치 변호사님, 전 넘어뜨린 의자를 돌아 섰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덮쳐왔습니다. 당신을 덮쳤다구요? 맹렬하게? 아뇨, 변호사님. 그녀는 ,,, 그녀는 ,,, 저를 껴안았습니다. 제 허리를 안았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테일러 판사의 의사봉이 쾅 하고 내려쳐졌다. 그때 법정 위에 박혀 있던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아직 어둠이 깔리지는 않았지만 오후의 태양은 창문 왼쪽으로 밀려가 있었다. 테일러 판사가 신속하게 소란스러워진 법정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했습니까? 증인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서 제 뺨에 키스했습니다. 어른과는 한 번도 키스한 적이 없었다며 검둥이와 키스하는 편이 낫겠다고 속삭였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다면서 내게 키스해줘, 검둥아 라고 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뿌리치며 뛰어나가려는데 문 앞을 가로막고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전 그녀를 밀어야만 했습니다. 그녀를 해칠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핀치 변호사님. 그래서 제발 내보내달라고 사정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 이웰 씨가 창문 밖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톰 로빈슨이 다시 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씀드리기가 불편한데요 ,,, 여러분과 아이들 앞에선 좀 곤란한 말입니다.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톰?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당신은 배심원들에게 증언해야 합니다. 톰 로빈슨은 눈을 감았다. 너, 이 망할 매춘부 같은 년,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 테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전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변호사님. 톰, 당신은 마옐라 이웰을 강간했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님. 전에 그녀를 괴롭힌 일이라도 있습니까? 핀치 변호사님, 그녀를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녀를 밀어버리려 하거나, 달려들어 강간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전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톰 로빈슨의 태도는 아버지만큼이나 훌륭해보였다. 그러나 훗날 아버지가 그 일을 꺼내 자세히 설명해줄 때까진 톰의 난처한 입장에 대해 그 미묘한 부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감히 백인여자를 밀어버릴 수 없는 입장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도망이 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였다니 ,,, . 톰, 당신은 이웰 씨에게 돌아가거나, 혹은 그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변호사님. 무슨 말인가 했지만, 전 이미 그곳을 나와 있었습니다. 됐습니다. 아버지가 세밀하게 말을 끊었다. 무슨 소리를 듣긴 했습니까? 그렇다면 이웰 씨는 누구에게 말한 것입니까? 마옐라 양을 보며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도망쳤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 왜 도망쳤습니까? 전 두려웠습니다, 변호사님. 무엇이 두려웠습니까? 변호사님도 저 같은 검둥이였다면 역시 겁나셨을 겁니다. 아버지가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길머 씨가 증인석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증인 앞으로 가기도 전에 링크 디스 씨가 방청석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제가 여러분들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제가 팔 년째 데리고 있지만,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조용히 하시오, 선생! 테일러 판사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모습으로 고함쳤다. 소리를 지르느라 얼굴은 새빨개졌고, 시거를 입에 물고 있었지만, 그 말소리는 기적적으로 방해받지 않았다. 링크 디스 선생,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서약을 하고 적절한 시간에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 방을 나가셔야 합니다. 아셨습니까? 이 방을 나가셔야 한다구요, 선생. 만약 이런 일이 또 있을 땐 단단히 조처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의가 있으면 말해보라는 듯이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머리를 홱 숙여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웃어댈 뿐이었다. 나는 테일러 판사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끔은 자신의 권위 이상으로 논평을 해대는데 그런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변호사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쳐다보자 오빠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배심원이 일어나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라. 링크 아저씨는 조금 전의 긴장감과 그 밖의 다른 분위기를 방해하고 있는 거야. 테일러 판사는 서기에게 핀치 선생님도 저 같은 검둥이였다면 ,,, . 이후에 일어난 일은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하고, 배심원들에게 링크 디스 씨를 신경쓰지 말라고 일렀다. 그리곤 테일러 판사는 중앙 통로를 의심스러운 듯 내려다보았다. 나는 링크 디스 아저씨가 퇴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추측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진행하시오, 길머 씨. 피고는 경범죄로 삼십 일 구류를 받은 적이 있소? 길머 씨는 신문을 시작했다. 네, 검사님. 그와의 싸움은 어떤 것이었소? 그가 나를 구타했습니다, 길머 검사님. 그랬겠지. 하지만 피고는 유죄선고를 받았지? 아버지가 얼굴을 들었다. 그것은 경범죄였다고 기록에도 있습니다, 재판장님. 그 목소리에서 아버지가 지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증인이 대답할 겁니다. 테일러 판사도 다소 싫증난 듯 말했다. 네, 검사님. 전 삼십 일을 살았습니다. 나는 폭력 전과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옐라 이웰도 충분히 희롱할 수 있다는 것을 배심원들에게 알리려는 길머 씨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톰의 전과에 관심을 갖는 유일한 이유였다. 로빈슨, 피고는 한 손으로도 쉬퍼로브를 쪼개 불쏘시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 변호사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피고는 여자 목을 졸라 질식시킨 다음 마룻바닥에 내던질 만큼 강한가? 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님. 그래도 피고는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님. 피고는 그녀를 눈독들이고 있었지? 아닙니다, 검사님. 전 그녀를 마주 쳐다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피고는 대단히 공손한 청년이로군. 땔감을 만들어주고 물까지 길어다주다니 말이야. 전 그저 도우려 했을 뿐입니다, 검사님. 정말 대단한 아량이군. 피고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에 그집 허드렛일까지 했으니 ,,, 그렇지 않은가? 네, 검사님. 왜 당신 일을 제치고 그런 일을 해주었지? 전 두 가지 다했습니다, 검사님. 피고는 꽤나 바빴겠군. 하지만 왜? 무슨 말씀이신지요 ,,,? 그녀의 허드렛일에 왜 그리 걱정이 많았느냐 말이야? 톰 로빈슨은 답변할 말을 찾으려고 잠시 망설였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보였습니다. 이웰 씨에다 아이들이 일곱 명이나 있었는데도 말인가? 네,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피고는 친절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그 모든 허드렛일을 했단 말인가? 전 그녀를 도운 것뿐입니다. 길머 씨가 배심원들을 바라보며 잔인한 미소를 띄었다. 피고는 상당히 괜찮은 친구군. 그렇게 보이지 않소? 그 모든 일을 한푼도 받지 않고 해주다니 ,,, . 네, 검사님. 그녀가 다른 식구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아 불쌍해보였습니다.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다 이 말이지? 그녀가 불쌍해보였다고? 길머 씨는 마치 천장 위로 올라가버릴 듯한 기세로 외쳐댔다. 증인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는 불안하게 고쳐앉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래층에서 톰 로빈슨의 대답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길머 씨는 그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자, 그렇다면 지난 십일월 이십일일 피고는 평소처럼 그 집을 지나갔지? 그리고 그녀가 피고에게 쉬퍼로브를 쪼개달라고 했지? 아닙니다, 검사님. 피고가 그집을 지나간 것을 부정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녀는 집 안에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피고에게 쉬퍼로브를 쪼개달랬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지? 아닙니다, 검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피고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아버지가 일어섰다. 하지만 톰 로빈슨은 그의 도움 없이도 답변할 수 있었다. 길머 검사님, 전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 그저 뭔가 잘못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것뿐입니다. 길머 씨의 계속된 열 가지 질문은 마옐라의 각색을 반복했고, 증인은 그녀가 잘못 생각했을 거라는 일관된 답변을 토로했다. 이웰 씨가 그 자리에서 당장 결판낼 듯이 달려들진 않았나? 그렇게 생각진 않습니다, 검사님. 그게 무슨 뜻이지? 그분이 제게 달려들 만큼 그곳에 오래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선 꽤나 솔직하군. 그렇다면 왜 그렇게 빨리 도망쳤나? 전 겁이 났습니다, 검사님. 양심의 가책이 털끝만큼도 없었다면 무엇이 겁났다는 말인가, 응? 이미 말씀드렸듯이 어떤 검둥이도 그러한 곤경 속에선 안전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고는 지금 곤경에 빠져 있고, 그것으로 마옐라 양을 모함하는 증언을 하는 것 아닌가? 그녀가 피고를 다치게 할까봐 그게 두려워서 도망치고 ,,, 그렇지? 피고 같은 덩치 큰 수사슴이 말이야, 응? 아닙니다, 검사님. 전 법정에 서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체포될 것이 두려웠나, 아니면 피고가 저지른 행위를 시인할 것이 두려웠나? 아닙니다. 전 제가 하지 않은 일을 시인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지금 내게 건방을 떨려는 건가? 아닙니다, 전 그러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들은 길머 씨의 반대신문의 전부였다. 딜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딜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울기 시작하여 멈추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조용히 훌쩍이던 것이 점점 커져 방청객들이 전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오빠는 그를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름장을 놓았고,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법정을 나오고 말았다. 그날 딜은 별일 없어 보였는데 ,,, 그렇다면 집에서 도망쳐 나온 후유증이 아닐까 ,,, . 기분이 좋지 않니? 계단 아래까지 내려왔을 때, 말을 건넸다. 딜은 남쪽 계단을 뛰어내릴 때쯤엔 완전히 마음을 가라앉힌 것 같았다. 링크 디스 씨가 맨 윗계단에 쓸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니, 스카웃? 우리가 옆을 지나가자 그가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저씨. 나는 등 뒤쪽에 있는 그에게 대답했다. 딜이 조금 아파요. 나무 아래로 가자. 햇볕이 너무 강해. 우리는 가장 무성한 떡갈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난 단지 그 사람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어. 누구, 톰? 그 늙은 길머 씨 말이야. 톰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그에게 그토록 지독하게 말하는 것 말이야. 딜, 그건 그 아저씨 직업인데 뭐. 검사를 세우지 않았다면 피고측 역시 변호사도 없었을 거야. 딜은 참으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정도는 다 알아, 스카웃. 그것이 바로 나를 구역질나게 하는거야, 구역질. 그 아저씬 그렇게 행동하도록 되어 있어. 그분이 반대신문을 ,,, . 그전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어, 그 아저씨 ,,, . 그 사람들은 그가 세운 증인이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핀치 아저씨는 그 늙은 이웰과 마옐라를 신문할 때도 그렇게 하진 않았어. 그런데 그 사람은 항상 얘야 어쩌구 하면서 반말로 빈정대고, 그가 대답하고 나면 배심원들을 휘둘러봤단 말이야. 그래, 딜. 어찌됐건 그건 톰이 검둥이기 때문이야. 난 그런 거 상관 안 해. 그건 옳지 않아, 누구든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어. 그것이 나를 구역질나게 하는 거야. 그건 길머 아저씨의 습관일 뿐이야, 딜. 그분은 언제나 그런 식이야. 넌 그 아저씨가 누구에게건 친절히 대하는 걸 결코 볼 수 없을 거야. 그래, 오늘 길머 아저씬 더욱 심하긴 했어. 하지만 대부분의 검사들은 언제나 그렇게 행동해. 핀치 아저씬 그렇지 않았어. 아빠가 표본은 아니잖아, 딜. 아빤 ,,, .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머디 애킨슨 아줌마가 아버지에 대해 얘기한 그 빈틈 없는 말을 기억해내려 더듬고 있었다. 아빠는 큰길 한가운데 있을 때나 법정 안에 있을 때나 항상 똑같아.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그때 우리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뭘 말하려는지 난 알아. 나무기둥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잠시 후 돌퍼스 레이먼드 씨가 나무 뒤에서 나와 우리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넌 비겁하지 않아. 바로 그런 것들이 널 구역질나게 하는 거야, 그렇지? 20. 죄 많은 남자 이야기 이곳으로 돌아와봐라. 네 뱃속을 가라앉힐 만한 것이 있으니까. 돌퍼스 레이먼드 씨는 기분 나쁜 사람으로 그의 초대가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딜은 따라갔다. 왠지 레이먼드 씨와 가까워지는 것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알렉산드라 고모는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자, 여기. 그 아저씨는 스트로가 꽂혀 있는 종이봉지를 딜에게 내밀었다. 한 모금 쭉 빨아봐라. 좀 진정될 거다. 딜이 한 모금 빨고는 씩 웃으며 스트로를 빼냈다. 히히. 분명 어린이를 타락시킨 것을 즐거워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딜, 너 조심해. 내가 경고했다. 딜이 스트로를 놓으며 싱긋 웃었다. 스카웃, 이건 그냥 코카콜라야. 코카콜라라구. 풀밭에 누워 있던 레이먼드 씨가 나무에 기대앉았다. 너희 어린양반들, 날 고자질하진 않겠지, 그렇지? 내 명성에 금이 가는 건 곤란하거든. 그러면 아저씨가 마신 건 그냥 코카콜라였다는 말씀이세요? 아무 것도 안 탄 코카콜라요? 그럼요, 꼬마아가씨. 레이먼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저씨의 냄새가 좋았다. 그것은 가죽이나 말, 목화씨 같은 것이 뒤섞인 냄새였다. 그는 언제나 영국제 승마부츠를 신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마시는 건 바로 그거였단다. 그러면 아저씬 그냥 혼혈아인 체하신 거예요? 어머, 죄송합니다, 아저씨. 난 자제를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 . 레이먼드 씨는 감정이 조금도 상하지 않은 듯 껄껄 웃었다. 나는 다시 분별있는 질문을 짜내려 노력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세요? 아, 네 말은 내가 왜 그런 척하느냐 이 말이지? 그건 아주 간단하지. 사람들 중엔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단다. 난 그런 것에 개의치도 않고, 그래서 지옥이나 떨어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그들이 싫어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해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들을 향해 지옥이나 갈 것들이라고 악담할 순 없겠지, 그렇지? 그럼요, 아저씨. 딜과 나는 동시에 대답했다. 자, 봐라. 난 그들에게 핑계를 주고 싶을 뿐이야. 그들의 판단력에 빗장을 걸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들을 돕는 거니까. 내가 읍내에 나가는 건 드문 일이지만, 그럴 때면 이 종이봉지에서 술을 마시는 것처럼 꾸미는 거지. 그러면 사람들은 말이다, 저 돌퍼스 레이먼드는 위스키 손아귀에 걸려 있다고 말한단다. 그것이 바로 내 삶이 나아질 수 없는 이유이며, 나 자신도 추스르지 못해 이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말이다. 그건 정직하지 않아요, 레이먼드 아저씨. 아저씨 그대로의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좋은 텐데요. 그래, 그건 정직하지 못하지. 하지만 사람들에겐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비밀인데 말이다, 사실 난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거든. 그러나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걸 그들은 절대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너도 알게 될 거야. 나는 혼혈아를 낳고도 누가 그걸 알아도 상관하지 않는 여기 이 죄 많은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묘하게도 나를 매혹시키고 있었다. 나는 자기 자신을 고의적으로 기만하는 존재와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말할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는 까닭이 뭔지 궁금해져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건 말이다, 너희들은 아직 어리고 어린이의 마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너희들이 하는 말을 듣기도 했고 ,,, . 그는 딜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상의 일이란 아직은 본능만으로 꿰뚫어볼 수 없는 거란다. 이 아이가 조금만 더 자랐어도 울거나 구역질하지 않았을 거야. 단순히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테니까. 조금만 더 나이들면 울지 않게 될 거야. 아저씨는 제가 왜 울었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딜의 사내다움이 권위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옥을 준다는 것에 대한 울음, 그것도 아무 생각 없이 백인이 흑인을 향해 던지는 지옥에 대한 울음이지. 흑인들 역시 인간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 그런 행동에 대한 울음 말이다. 아버지는 흑인을 속이는 건 백인을 속이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나쁘다고 하셨는데 ,,, . 내가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더없이 나쁘다고 하셨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진 루이스 양. 넌 네 아빠가 그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란 걸 모를 거야. 그걸 네 마음속에 확실히 새겨두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걸릴 게다. 아직은 이 세상을 아니, 이 마을조차도 충분히 볼 수 없을 테니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정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일 게야. 그때 길머 씨의 반대신문을 거의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법원 광장의 서쪽 지붕 뒤로 서둘러 내려앉고 있었다. 난 두 개의 열망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뛰어들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레이먼드 씨인가, 아니면 제5사법 순회법정인가. 이리 와봐, 딜. 이젠 괜찮니? 내가 말했다. 응, 괜찮아. 뵙게 돼서 즐거웠어요, 레이먼드 아저씨. 그리고 마실 것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젠 뱃속이 다 나았어요. 우리는 법정을 향해 힘껏 뛰었다. 두 계단씩 뛰어올라 발코니 난간을 따라 비집고 들어갔다. 리버렌드 목사가 우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법정 안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난 또다시 아가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했다. 테일러 판사의 시거가 입술 한가운데에 갈색 점으로 찍혀 있었다. 길머 씨는 누런 종이뭉치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마치 법정서기를 밀어내기라도 할 듯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휴, 놓쳐버렸네. 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배심원들에게 논고를 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끄집어낸 것이 분명한 서류뭉치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고, 톰 로빈슨이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확실한 증거의 결여로 이 남자는 사형죄로 기소되었고, 지금은 그의 목숨이 걸려 있는 공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 나는 오빠를 흔들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어? 그냥 진술서를 다시 읽는 중이야. 오빠가 속삭였다. 우리가 이길 거야, 스카웃. 진다는 건 있을 수 없어. 시작하신 지 오 분쯤 됐어. 내가 너에게 설명하듯 아주 쉽고 명료하게 하고 계셔. 너만한 아이들도 알아듣게 말이야. 길머 검사님은 어땠어? 쉿, 새로운 건 없었어. 그냥 똑같았어. 이제 좀 조용히 해. 우리는 다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글씨를 받아쓰게 할 때 짓곤 하던 초연한 표정으로 변론하고 있었다. 배심원석 앞을 천천히 거닐기도 했다. 배심원들은 자신들이 올바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얼굴을 똑바로 들고 아버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건 어쩌면 아버지가 큰소리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멈춰서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계줄을 풀어 탁자위에 놓으며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법정에서 허락하신다면 ,,, . 테일러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조끼단추와 칼라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린 다음 양복 웃옷까지 벗었던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진 옷조각 하나 흐트러 입은 적이 없었으므로 오빠와 나로서는 아버지가 마치 알몸으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배심원 쪽에서 뒤돌아왔다. 금빛단추와 펜 끝이 불빛에 반짝였다. 배심원 여러분. 오빠와 나는 또다시 쳐다보아야 했다. 마치 스카웃 하고 부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초연함과 사무적인 건조함을 걷어낸 목소리로 그저 길가의 상점이나 우체국에서 만난 아저씨에게 말하듯 서두를 꺼내는 것이었다. 배심원 여러분, 전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 사건은 세심하게 고민하여 판단해야 할 만큼 복잡하지도 난해하지도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또한 피고가 유죄라는 그럴듯한 의심을 하기 이전에 여러분 자신의 신념에 찬 판단만이 요구된다는 것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흰색과 검은색처럼 단순합니다. 주 정부는 이번 사건에서 톰 로빈슨이 떠맡게 된 범죄결과에 대해 어떠한 의학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반대신문을 통해 심각한 질문을 끌어냈을 뿐 아니라, 피고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된 두 증인의 진술을 믿는 것으로 증거를 대체해버렸습니다. 피고는 유죄가 아닙니다. 죄인은 이 법정 안에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정심도 그녀가 한 남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한,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거기엔 어떠한 동정의 여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전 그녀에 대해 유죄라고 말합니다. 그건 그녀가 유도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는 범행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 사회의 전통과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 관념은 너무나 가혹해서 누구든 그것을 깨뜨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혹한 빈곤과 무지의 희생양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동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백인이며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졌는지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욕망은 자신이 깨뜨려버린 그 관념보다도 더 강했습니다. 그 욕망을 이뤄내려고 기회를 노려왔던 거지요. 그녀는 계속 주시했던 것입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을 저질렀고, 그 증거를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밀매품을 훔쳐 감추는 그런 어린이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녀는 피해자를 제거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그녀의 눈앞에서,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범죄의 증거를 없애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범죄의 증거란 무엇이겠습니까. 살아 있는 인간인 톰 로빈슨인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톰 로빈슨을 없애야 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범죄사실을 매일 생각나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바로 검둥이를 유혹한 것입니다. 그녀는 백인입니다. 그리고 흑인을 유혹했습니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녀는 흑인에게 키스했습니다. 늙은 아저씨가 아닌 젊고 건장한 흑인남자에게 말입니다. 그녀가 깨뜨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 관습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피고는 그의 말처럼 증인대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아버진 어떻게 했을까요. 물론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적 증거로 볼 때, 마옐라 이웰은 엄청나게 센 왼손으로 잔인하게 구타당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웰 씨가 무슨 일을 했는지 대충은 짐작합니다. 신을 경외하고, 참을성 있고, 존경받을 만한 백인이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을 그 역시 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왼손으로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 앞에 앉아 있는 톰 로빈슨은 불편한 왼손 대신 건강한 오른손으로 선서했습니다. 이렇듯 조용하고, 존경받을 만하여 겸손한 흑인, 한 백인여성을 불쌍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순수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이 흑인은 두 백인에 대해 반대증언을 해야 했습니다. 증인대 위에서 그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선 더이상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직접 그들을 보았으니까요. 그들은 주 정부의 증인이, 메이컴의 보안관을 제외한 이 법정 안의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으리라는 겁없는 배짱으로 그들 자신을 증언했습니다. 그 배짱은 악의적인 억측 즉,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간직해온 억측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흑인은 거짓말쟁이이며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창조물이고, 특히 모든 남자 검둥이는 우리 여성들 주위에 안심하고 놔둘 수 없다는 억측인 것입니다. 신사 여러분, 우리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제가 지적할 필요조차 없는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진실이란 흑인 가운데에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음험하기도 하고, 또 여자들 주위에 안심하고 둘 수 없는 흑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특정 인종의 남자에게만이 아닌 모든 인종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법정 안에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도 없으며, 욕망을 품고 여자를 쳐다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남자란 살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말을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벗고 땀을 닦았다. 그것으로 우린 또 하나의 생소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땀 흘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평소 얼굴에 땀이 안 흐르는 사람으로 통했던 것이다. 지금 아버지의 황갈색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배심원 여러분, 끝내기 전에 한 마디만 더하겠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고 했습니다. 그 문구는 워싱턴 행정분과의 백인들이나 여성들이 우리를 비난할 때 자주 쓰는 말입니다. 서기 1935년 지금, 어떤 사람들은 이 문구를 문맥에 상관없이 모든 상황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어이없는 예는 정규교육을 받았다는 그 사람들이 근면함과 함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동시에 조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물론 몇몇은 그렇게 믿을 수도 있습니다만, 어떤 이는 보다 더 영리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난 환경 덕분에 더 많은 기회를 갖습니다. 어떤 이는 돈을 더 많이 벌기도 하고, 어떤 여성은 더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표준 이상의 능력을 선물받고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 한 곳이 있습니다. 가난뱅이와 록펠러를, 백치와 아인슈타인을, 무식쟁이와 대학총장을 동등하게 하는 인류의 공공기관이 있는 것입니다. 신사 여러분, 그 기관은 바로 이 법정인 것입니다. 그것은 미합중국의 최고 대법원이거나 가장 초라한 지방법원이거나 간에 여러분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존경받을 만한 법정인 것입니다. 인류에 의해 설립된 모든 기관이 그러하듯 우리의 법정도 결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정의 사람들은 평등주의자들이어야 하며 법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되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전 우리의 법정과 배심원제도가 완벽하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는 아닙니다. 그것은 제게 이상일 수만은 없으며 다만 일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일 뿐입니다. 여러분, 법정은 여기 배심원들과 본인 앞에 앉아 계신 여러분 각자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법정은 단지 배심원들의 소리이며 배심원은 그들 개개인의 유일한 목소리인 것입니다. 전 여러 신사분들이 지금까지 경청하신 증거에 대해 아무 의심없이 재조사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이 피고를 그의 가정으로 되돌려줍시다. 신의 이름으로 본분을 다하십시오. 아버지 목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배심원석에서 돌아서더니 무언가를 말했다. 법정에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말한 듯했다. 나는 오빠를 쳤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야? 신의 이름으로 그를 믿으라고 하신 것 같아. 딜이 갑자기 내게 몸을 뻗어 오빠를 힘껏 잡아당겼다. 저길 봐요!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우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칼퍼니아 아줌마가 가운데 통로에서 아버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21. 유죄, 유죄, 유죄 칼퍼니아 아줌마는 난간 앞에 수줍은 듯 서서 테일러 판사가 쳐다보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새로 다림질한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편지를 들고 있었다. 테일러 판사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칼퍼니아 아니오, 그렇지요? 네, 재판장님. 이 쪽지를 핀치 변호사님께 전해도 될까 해서요. 전, 재판장님, 이것은 이 재판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 . 테일러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는 쪽지를 건네받아 내용을 읽고 말했다. 재판장님, 저 ,,, 이건 제 동생에게서 온 것인데 제 아이들이 없어졌다는군요. 오후 내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 전 ,, 혹시 ,,, . 그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애티커스. 언더우드 씨가 큰소리로 말했다. 위층 발코니에 흑인들과 함께 있어요. 정확하게 오후 한시 십팔분부터 거기에 있었지요. 아버지는 돌아서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젬, 내려오너라. 큰소리로 말하고 다시 판사에게 무언가를 얘기했다. 우리는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 앞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아버지와 칼퍼니아 아줌마를 만났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짜증스럽게 내려다보았고, 아버지는 이미 체념한 듯 보였다. 오빠는 흥분으로 뛸 듯했다. 우리가 이겼죠, 그렇죠? 아니다. 아버지가 짧게 잘라 말했다. 너희들 오후 내내 이곳에 있었단 말이지. 이젠 칼퍼니아 아줌마와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집에 있도록 해라. 아빠, 여기 있게 해주세요. 오빠가 간청했다. 제발, 판결을 듣도록 해주세요, 아빠. 배심원들은 퇴장했고, 잠시 후면 돌아올 거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는 아버지가 부드러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좋다. 이미 모두 보고 들었으니 나머지도 듣는 게 좋겠지. 그대신 먼저 할 일이 있다. 집에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와서 듣는 거야, 천천히. 그렇게 해도 중요한 대목은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게다. 만일 배심원들이 계속 퇴장해 있으면 더 기다리겠지만, 내 생각엔 너희들이 돌아오기 전에 끝날지도 모르겠다. 아버진 그분들이 그렇게 빨리 톰을 무죄방면시킬 거라고 생각하세요? 오빠가 말했다. 아버지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만두고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난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우리 자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했지만, 배심원들의 퇴장과 함께 사람들도 따라나갔을 생각을 하곤 기도를 그만두었다. 오늘밤 저녁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로 간이식당이나 오케이 카페, 호텔이 얼마나 붐빌지 짐작되고도 남았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행진해갔다. 혼꾸멍이 한 번 나야 해. 맙소사, 그 모든 걸 너희 어린 것들이 들었다니! 젬, 어린 여동생이 그 공판을 들어선 안 된다는 걸 몰랐니? 알렉산드라 고모가 아시면 발작이라도 일으키실 거야. 아이들에겐 맞지 않는 일이었어. 벌써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서 분개해 있는 칼퍼니아 아줌마의 옆모습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젬, 앞으론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해. 알아듣겠지? 네 어린 여동생이야, 어린 동생,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해야지. 나는 완전히 들뜬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너무나도 빠른 시간에 일어나 그것을 가려내는 데만도 몇 년은 걸릴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칼퍼니아 아줌마가 오빠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엔 어떤 새로운 요술구슬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오빠가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칼 아줌마는 듣고 싶지 않으세요? 조용히 해, 그렇게 웃는 게 부끄럽지도 않니? 칼퍼니아 아줌마는 겁도 안 나는 위협을 되풀이했고, 그것으로 오빠는 약간의 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앞 계단으로 나아갔다. 핀치 변호사님이 젬을 벌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혼을 내줄 거야. 집안으로 들어가거라. 오빠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갔고, 칼퍼니아 아줌마는 딜에게 고개를 끄덕여 저녁 식사를 함께 해도 좋다는 무언의 승낙을 보냈다. 당장 라이첼 아줌마한테 전화 드려라. 아줌마는 딜에게 말했다. 네 이모님은 널 찾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내일 아침 당장 배에 실려 메리디안으로 보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거야. 칼퍼니아 아줌마가 우리가 있던 곳을 말하자 고모는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법정으로 다시 와도 된다고 한 아버지의 말씀은 고모를 더욱 심난하게 했다. 고모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접시에 음식을 조금 더 담고는 단단히 벼르면서 우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칼퍼니아 아줌마를 서글픈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우유를 따라주고 감자샐러드와 햄을 접시에 덜어주며 투덜거렸다. 부끄러운 행동인 줄을 알아야 해요. 힘을 주어 말하곤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이젠 모두 천천히 먹도록.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여전히 우리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나 비워둔 자리가 그대로 있다는 것에 놀랐고, 우리가 떠날 때와 거의 같은 법정 안의 분위기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심원석은 비어 있었고, 피고와 테일러 재판장은 우리가 자리를 잡을 때쯤에야 다시 나타났다. 거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어. 오빠가 말했다. 배심원들이 퇴장하자 몇몇 사람만이 움직였지. 리버렌드 목사가 계속 설명해주었다. 남자들은 저녁을 사 나르고, 애엄마들은 아가들에게 젖을 먹였단다. 그분들은 퇴장한 지 얼마나 됐나요? 오빠가 물었다. 약 삼십 분쯤 됐지. 핀치 변호사님과 길머 검사님이 좀더 이야길 나누셨고, 테일러 판사님이 배심원들에게 훈시를 하셨단다. 오빠가 물었다. 뭐라고 하셨냐구? 아, 그러니까 아주 잘하셨어. 난 털끝만큼의 불만도 없단다. 그분은 대단히 공정하셨으니까. 그분은 배심원들에게 당신들이 믿는 것에 한해 판결을 내리라고 하셨어. 내 생각엔 그분이 우리 쪽으로 약간 기우신 것 같구나.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가 미소지었다. 그분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을 거예요, 목사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긴 거니까요. 오빠는 재치있게 말했다. 이 세상 어떤 배심원들이 그걸 유죄로 판명할 수 있겠어요? 젬, 지금은 그렇게 확신할 수 없단다. 나는 백인을 누르고 흑인을 편들어준 배심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 . 그러나 오빠는 리버렌드 목사가 예외적인 상황에 희망을 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강간과 관련된 법률적 지식은 오빠의 견해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놔두었다면 그것은 강간이 아니며, 강간으로 친다 해도 앨라배마에서는 열아홉 살 이하에만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옐라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얘기하면 폭력에 의해 꼼짝도 할 수 없이 눌려 거의 무의식상태에 놓였을 때만이 강간의 범위에 들 수 있고, 때문에 발로 걷어차고, 소리지르고 모든 걸 동원해 반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열아홉 살 이하일 경우엔 이 모든 과정이 아니더라도 그 범주로 간주되었다. 젬 군. 리버렌드 사이크스 목사가 오빠의 말을 가로막았다. 꼬마숙녀 앞에서 이런 일을 얘기한다는 건 품위있는 일이 아닌 듯하군 ,,, .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쟨 무슨 얘길 하는지도 몰라요. 야, 스카웃, 너 무슨 말 하는지 모르지?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난 오빠가 하는 말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알아들을 수 있어. 이것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대답이었다. 그후 오빠는 입을 다물고는 그 주제에 대해선 다시 논의하지 않았다. 목사님, 몇 시에요? 오빠가 물었다. 여덟시가 다 돼가는데. 나는 아래층으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창문 쪽으로 해서 배심원석 난간을 따라 걸으며 난간 안쪽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테일러 판사가 권좌를 지키고 있는 모습도 점검하곤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나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고, 아버지도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버지는 다시 그의 여정을 시작했다. 길머 씨는 창문가에 서서 언더우드 씨와 얘기하고 있었고, 법정서기인 버트 씨는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기대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법원의 대표격인 아버지와 길머 씨, 졸고 있는 듯한 테일러 판사, 그리고 버트 씨는 그나마 행동이 무난해보이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난 법정 안이 그토록 정적이 감도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아가들이 짜증스럽게 울어대거나 종종걸음으로 뛰는 것 말고는 마치 예배시간에 앉아 있는 듯 어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발코니에는 흑인들이 성경에나 나옴직한 인내심으로 우리 주위에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법정 안의 오래된 시계가 팽팽히 잡아당겨지더니 뼛속까지 뒤흔들어놓을 듯 여덟을 내리쳤다. 그 시계가 열한 번을 울렸을 때 난 이미 졸음과 싸우다 지쳐 있었다. 리버렌드 목사의 편안한 팔과 어깨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은 모양이었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려고 애쓰는데, 아래층 사람들의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열여섯 명의 대머리와 적갈 색 머리칼의 열네 남자가 보였다. 마흔 명의 머리칼은 갈색과 검정색으로 뒤섞여 있었다. 언젠가 젬 오빠가 물질탐구를 공부하며 내게 설명했던 것을 떠올려냈다. 그것은 경기장에 가득찰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나무에 불이 붙기를 기원하면서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그 나무는 저절로 불이 붙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래층의 모든 사람들이 톰 로빈슨을 풀어주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봤지만 그들이 나만큼 졸리다면 별다른 효과는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딜은 오빠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정신없이 자고 있었고 오빠는 조용히 있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렇지? 그럴 거야, 스카웃. 오빠가 흔쾌히 답변해주었다. 으흠, 그럼 한 오 분쯤 걸릴까? 오빠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네가 이해 못하는 일들이 있는 거야. 나는 너무나 피곤해서 논쟁을 벌일 기운도 없었다. 그래도 난 아무쪼록 깨어 있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내게 다가올 감명의 순간을 맞아할 수 없을 테니까. 이 기분은 지난겨울에 경험했던 일과 비슷했다. 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법정 안의 공기가 그 이월의 차가운 아침공기와 똑같아질 때까지 그 느낌은 점점 강해져갔다. 앵무새조차 잠잠했고 머디 아줌마네 집 목수도 망치질을 멈추었다. 모든 이웃의 덧문이 래들리 집 문처럼 단단히 잠겨 있었다. 황폐함과 텅 빈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법정 안은 다시 사람들로 가득찼다. 푹푹 찌는 이 여름밤이 그 겨울아침과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긴 장화에 면잠바 차림을 한 헥 테이트 씨가 법정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슨 얘기인가 건넸다. 아버지는 잔잔한 여정을 멈추고 발을 의자막대 위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넓적다리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테이트 씨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렇게 한 마디만 하면 모두 끝날 것이었다. 그를 데려가십시오, 핀치 변호사님.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법정의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그 권위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아래층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법정을 떠났던 테이트 씨는 톰 로빈슨을 데리고 돌아와 아버지 옆에 그를 세우고 자신도 그 옆에 섰다. 테일러 판사도 민첩하게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은 다음 비어 있는 배심원석을 쳐다보았다. 마치 꿈속 같은 어렴풋함 속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 간에 배심원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물속을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테일러 판사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고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오로지 법률가의 아이들만이 지켜볼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길 한가운데로 걸어가 라이플 총을 어깨 위에 올리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그 총은 총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당혹감 같은 것이었다. 그 어느 배심원도 입장할 때나 판결이 선고될 때 톰 로빈슨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배심원장이 테이트 씨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고, 그것이 사환을 거쳐 재판장에게 건네졌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테일러 판사가 배심원들의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유죄 ,,, 유죄 ,,, 유죄 ,,, . 나는 오빠를 슬쩍 쳐다보았다. 발코니 난간을 잡고 있는 오빠의 손이 백지장 같았다. 유죄라는 말이 오빠를 찌르는 무서운 흉기라도 되는 듯 유죄가 선언될 때마다 어깨가 움찔거렸다. 테일러 판사가 무엇인가를 말하며 망치를 들었지만 그것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가 가방에 서류를 밀어넣는 모습이 안개 속처럼 뿌옇게 바라다보였다. 잠시 후 딸각 닫히는 소리가 났고, 아버지는 법정 서기에게로 가서 무엇인가를 말한 뒤 다시 길머 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톰 로빈슨에게로 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슨 말인가 속삭였다. 그리곤 의자에서 옷을 벗겨내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법정을 떠나갔다. 평소 이용하던 출구가 아닌 남쪽 출입구를 향해 재빨리 내달렸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원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 시선이 아버지의 머리를 좇았지만 아버지는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나는 통로를 걸어내려가는 아버지의 쓸쓸한 영상으로부터 마지못해 눈길을 돌렸다. 진 루이스 양, 나는 뒤돌아보았다. 그들이 서 있었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저쪽벽 발코니의 흑인들이 모두 일어나 있었다. 리버렌드 목사의 목소리가 테일러 판사의 목소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들려왔다. 일어나요, 진 루이스. 아버님이 나가고 계세요. 22. 고통의 장을 넘기는 마지막 사람 이번엔 오빠가 울 차례였다. 유쾌해보이기만 하는 군중 속을 헤치고 나가는 오빠의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심하게 얼룩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광장 구석에 이를 때까지 내내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조끼와 칼라단추도 채워져 있었고, 넥타이 역시 제자리에 단정히 매여 있었으며, 시계줄은 반짝였다. 아버지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있는 듯 보였다. 이건 옳지 않아요, 아빠. 오빠가 반박하고 나섰다. 그래, 젬. 그건 옳지 않았다. 우리는 집을 향해 걸었다. 알렉산드라 고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는 나이트가운 차림이었는데, 그속에 코르셋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안됐어요, 오빠. 고모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고모가 아버지를 오빠라고 부르는 걸 지금까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오빠를 훔쳐보았지만 오빠는 듣고 있지도 않은 듯 아버지를 올려다보곤 다시 마룻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오빠의 그런 행동은 톰 로빈슨의 유죄선고에 아버지의 책임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고모가 오빠를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곧 나아질 거다. 이번 일이 젬에겐 좀 힘겨웠을 거야. 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잠을 좀 자야겠다. 아침에 늦더라도 깨우지 말아다오. 아이들을 그렇게 놔둔 건 현명치 못한 일이었어요. 여긴 그애들 집이다. 우린 저 아이들을 위해 길을 만들어주었을 뿐이고, 그들은 이겨나가는 것을 배워야 해. 하지만 법정에까지 가서 그런 일에 빠져들 필요는 없었잖아요. 그건 선교회의 다과회와 다를 것이 없는 일이야. 오빠. 알렉산드라 고모는 조심스러운 눈빛을 띄며 말을 이었다. 오빠가 고통으로 이 장을 넘기는 마지막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난 별로 비참하지 않다. 다만 피곤할 뿐이다. 자러 가야겠다. 아빠. 오빠가 을씨년스럽게 불렀다. 아버지가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왜 그러니, 젬? 그 사람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글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전에도 그래 왔고, 오늘밤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게다. 그저 아이들만이 눈물을 흘리게 되겠지. 잘 자거라. 모든 일이란 아침이 되면 훨씬 나아지게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평소대로 새벽같이 일어나 거실에서 (모바일레지스터)를 읽고 있었다. 우리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부스럭거리며 거실로 내려갔다. 오빠는 졸린 얼굴을 하고도 무언가 묻기 위해 입술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직 걱정할 때가 아니야. 아버지가 오빠를 안심시키고 식당으로 들어가며 덧붙여 말했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상고가 남아 있다. 아니, 칼, 이게 다 뭡니까? 아버지는 아침 식사가 담긴 접시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 톰 로빈슨의 아버지가 오늘 아침 이 닭을 보내왔습니다, 변호사님. 그분께 정말 고맙다고 전해줘요. 백악관이라도 아침 식사로 닭고기를 먹을 만큼 호화롭진 않을 거야. 아니, 이것들은 또 어떻게 된 거요? 말아서 만든 고기인데, 저 아래 에스텔 호텔에서 보내왔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칼 아줌마를 올려다보자 아줌마가 계속했다. 핀치 변호사님, 부엌에 좀 가보세요. 우리도 따라나갔다. 싱크대 위엔 우리 가족이 일주일은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음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토마토, 콩, 머루 등등. 마침내 아버지는 돼지무릎 비계절임을 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고모가 이것들을 식탁에서 먹게나 할지 모르겠구나. 오늘 아침 여기에 와보니 뒷계단에 저것들이 널려 있지 뭐예요? 그들은 변호사님께서 하신 일을 고맙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들이 지나친 건 아니겠죠, 변호사님? 칼퍼니아 아줌마의 설명을 들은 아버지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분들께 내가 아주 고마워하더라고 전해줘요. 그리고 다시는 이러지들 말라고도 꼭 전하세요. 요즈음같이 살기 어려운 때에 ,,, . 아버지는 식당으로 가서 고모한테 양해를 구한 후, 모자를 쓰고 마을로 갔다. 딜이 현관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칼퍼니아 아줌마는 아버지가 손도 안 댄 아침 식사를 그대로 테이블에 남겨놓았다. 딜은 토끼이빨을 드러내며 어젯밤 일에 대한 라이첼 아줌마의 반응을 전했다. 그건 우리 아버지가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격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 말씀은 알아들었지. 닭다리를 조금조금씩 뜯으며 딜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이모는 별로 말씀을 안 하셨어. 어젯밤 내가 어디 있는지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주무셨다는 거야. 나를 찾으러 보안관한테 갔었지만, 그는 참관중이었다나봐. 딜, 너 이제 말도 없이 어디로 가는 짓은 그만해. 그건 네 이모를 더욱 화나게 할 뿐이야. 오빠의 충고에 딜이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난 내가 어디에 갈 건지 수천 번도 더 얘기했어. 단지 이모가 옷장에서 너무 여러 번 뱀을 본 것이 문제야. 그건 아줌마들은 아침 식사 때마다 오백 밀리리터 정도의 술을 마셔야 할 테니까. 그날도 이모는 술을 두 잔 가득 마신 것이 분명해. 보면 알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딜. 알렉산드라 고모가 꾸짖듯이 말했다. 세상을 비꼬는 듯한 그런 말은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아. 전 비꼬는 게 아니에요, 아주머니.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예요. 절대 비꼬지 않아요. 말하는 그 태도가 문제야, 그 태도가. 오빠는 고모를 향해 두 눈을 반짝였지만, 딜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나가자, 그리고 저 롤러스케이트 네가 가져도 좋아. 우리는 현관 밖으로 나왔다.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가 머디 애킨슨 아줌마, 에이베리 아저씨와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한 번 돌아보곤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빠가 총소리 비슷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난 어른들이 형을 쳐다보는 눈빛이 싫어. 마치 무슨 일을 저지르기라도 할 것처럼 살펴보거든. 머디 아줌마가 오빠를 큰소리로 불렀다. 오빠가 끙끙거리며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줄게. 딜이 말했다. 스테파니 아줌마의 코는 호기심으로 벌름거렸다. 우리가 법정으로 가도록 누가 허락했는지 정말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아줌마가 우리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흑인 발코니에 있었다는 소문이 오늘 아침 마을 전체에 퍼져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그곳에 세운 것인지, 그런 일을 그토록 가까이서 보게 해도 되는 것인지, 내가 그 모든 걸 알아들었는지, 아버지가 참패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 우리를 미치게 하지는 않았는지 등등이었다. 그만하지, 스테파니. 머디 아줌마의 말투는 치명적이었다. 난 오늘 현관에 앉아 아침나절을 다 보낼 순 없어. 젬 핀치, 너와 네 친구들에게 내가 만든 케이크를 대접하고 싶은데. 난 다섯시부터 일어나 케이크를 만들었으니까. 물론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럼 우린 이만 실례할게요, 스테파니, 그리고 에이베리 씨. 머디 아줌마의 싱크대 위에는 케이크 한 개와 작은 케이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작은 것이 세 개 있어야 할 텐데 ,,, 혹시 머디 아줌마가 딜을 잊은 건 아닐까 ,,, . 하지만 그녀가 큰 케이크에서 한 조각을 잘라 딜에게 줄 때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케이크를 먹으며 이것이 머디 아줌마가 이야기를 꺼내는 방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언제나 변함없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식탁의자에 조용히 앉아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너무 마음 상해할 건 없다, 젬. 일이란 겉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머디 아줌마는 무언가를 장황하게 말하고 싶을 땐 손가락을 펴서 무릎 위에 놓고 틀니가 잘 고정되도록 손보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잠자코 기다렸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에는 우리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대신하려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네 아버지가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시다. 어휴! 오빠가 소음을 냈다. 이거 원. 어휴라든가 이거 원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젬 선생. 머디 아줌마가 오빠의 숙명론자적인 소음을 알아채고 응수했다. 너희들은 내 말 뜻을 알아듣기엔 아직 어리다. 오빠가 먹던 케이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에고치 안에 있는 번데기 같은 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따뜻한 둥지에 감싸인 채 잠들어 있는 ,,, 전 메이컴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그렇게 보였으니까요. 아직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란다. 기독교도가 되기를 강요받지도 않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우리를 대신해서 변호해줄 너희 아버지 같은 분이 있으니까. 오빠가 슬픈 듯 미소지었다. 이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우리 마을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알면 너도 놀랄 거야. 그게 누군데요? 오빠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이 마을에서 톰 로빈슨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사람이 누구죠, 누구냐구요? 우선 그의 흑인친구들이 있겠지.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 그러니까 테일러 판사님이나 헥 테이트 씨 같은 분들이다. 잠깐 먹는 일을 멈추고 생각 좀 해보렴, 젬. 테일러 판사님이 그런 청년의 변호사로 왜 아버지를 지명했는지 생각 안 해봤니?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는 거야. 이것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관선 변호사는 신출내기 변호사인 맥스웰 그린 씨에게 주어지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다. 그걸 생각해보렴. 그건 우연이 아니야. 나는 지난밤 현관에 앉아 기다렸단다. 너희들이 길가에 나타나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그러면서 생각했단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기지 않았다고. 아니, 이길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는 이 정도의 재판으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든 최초의 변호사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말했단다. 그래, 우리는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지금은 아가의 걸음마 정도지만 그것도 걸음은 걸음이라고 말이다. 듣고 보니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아요. 기독교도인 판사나 변호사가 이교도의 배심원들을 바꾸어놓을 순 없을까요? 오빠가 계속 중얼거렸다. 제가 자라면 ,,, . 그래. 그것이 바로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야 할 일이란다. 머디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머디 아줌마네 집의 새로 지은 그늘진 계단을 내려와 따뜻한 햇볕 속으로 들어갔다. 에이베리 아저씨와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가 인도로 내려가 스테파니 아줌마네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라이첼 아줌마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난 자라면 서커스단의 광대가 될 거야. 딜이 말했다. 오빠와 내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광대 말이야, 난 세상에서 웃기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도 없어. 그러니까 서크스단에 들어가서 실컷 웃어버릴 거야. 넌 취소하게 될걸. 오빠가 말을 받았다. 광대들은 슬퍼. 사람들은 바로 그걸 보고 웃는 거야. 그렇다면 새로운 종류의 광대가 되지 뭐. 무대 한가운데에 그들을 보고 웃어줄 거야. 어 저기 좀 봐. 딜이 가리켰다. 저 아줌마들 모두 마귀할멈의 빗자루라도 타야겠는걸. 라이첼 이모는 이미 탄 것 같구. 스테파니 아줌마와 라이첼 아줌마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딜이 본 것은 사실이었다. 오, 맙소사. 오빠가 숨을 크게 쉬었다. 저걸 안 봤다면 큰일날 뻔 했는데. 무엇인가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에이베리 아저씨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재채기를 해대고 있었는데, 더이상 다가가면 우리가 날려갈 것 같았다. 스테파니 아줌마는 흥분에 떨고 있었고, 라이첼 아줌마는 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너희들 뒷마당에 가 있어. 위험한 사람이 오고 있단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물었다. 아직 못 들었니? 온 마을에 퍼졌는데 ,,, . 그때 알렉산드라 고모가 문 앞에 나타나 우리를 불렀지만 때는 늦고 말았다. 스테파니 아줌마가 이미 우리에게 말해버린 뒤였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랬다. 그날 아침 봅 이웰이 우체국 코너에서 아버지를 보자 얼굴에 침을 뱉고는 기어이 해치우고야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었다. 23. 이유 있는 의혹 제발 봅 이웰이 씹는 담배라도 좀 삼가했으면 좋았을걸. 그 봅 이웰에 대해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우체국을 지나는데 이웰 씨가 다가가 욕을 퍼붓고 침을 뱉더니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스테파니 아줌마는 시장을 가느라 그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며 자세히 설명해나갔다. 그때 아버지는 눈 하나 깜빡않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는 이웰이 아무리 욕설을 퍼붓고 거칠게 행동해도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전쟁에 참여했던 재향군인인 이웰 씨는 아버지의 조용한 반응에 더욱 화가 났을 게 틀림없었다. 대단한 인간이라서 나 따위와는 상대하지 않겠다 이거지. 이 검둥이 옹호자, 더러운 놈아. 아니, 난 싸우기엔 너무 늙었어. 이웰 씨의 독설에 아버지는 간단히 대답하고 나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성거렸을 뿐이었다고 했다. 또한 스테파니 아줌마는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고 겸손하게 대처하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도 했다. 오빠와 나는 그 사건이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그래도 아빠는 이 마을에서 총을 가장 잘 쏘는 명사수였으니까 아빤 할 수 ,,, . 아빤 총을 갖고 다니시지 않잖아, 스카웃. 아예 총도 없고. 아빤 그날 밤 교도소 앞에 있을 때고 총을 갖고 있지 않았어. 너도 알잖아. 총을 갖고 있다는 건 누군가가 널 쏘도록 유인하는 거라고 말씀하신 거. 오빠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이번은 달라. 우리가 아빠한테 총을 빌려놓으라고 말씀드리자. 벌써 말했어. 하지만 아빤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셨을 뿐이야. 딜은 우리가 함께 좀더 간청하면 아버지의 그 곧은 성품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만약 이웰이 아빠를 죽인다면 우린 모두 굶어서 죽어버릴 거고, 게다가 알렉산드라 고모 마음대로 독재를 행사할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땅에 묻히기도 전에 칼퍼니아 아줌마를 해고시킬 거라고 했다. 나같이 어린 여자아이가 울면서 애원한다면 아버지가 들어줄지도 모른다며 오빠는 딜의 의견에 덧붙였다. 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후 아버지는 우리가 집 근처에서만 어슬렁거리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놀이에도 흥미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새 축구잡지로 오빠의 기분을 북돋우려 했지만, 오빠는 책장만 홱홱 넘기고는 옆으로 던져놓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얘기를 꺼냈다. 요즈음 널 괴롭히는 것이 뭐냐? 오빠가 간단히 대답했다. 이웰 씨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아무 일도 없지만 아빠가 걱정돼서요. 그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그를 평화의 끈으로 묶어두기라도 할까? 누군가가 아빠를 죽이겠다고 했다면 그건 보통일이 아니잖아요. 그가 말할 땐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젬, 네가 잠시라도 봅 이웰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나는 그 공판에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을 한 조각 진실성마저도 폭로해버려 누구도 그를 믿지 않게 만든 거란다. 인간은 만회해보려는 본성을 갖고 있단다. 그도 마찬가지겠지. 내 얼굴에 침을 뱉고 날 협박하는 것으로 자기 딸에게 한 번이라도 매질을 덜 한다면 그런 정도는 내가 기꺼이 당할 수도 있단다. 그는 어차피 누군가에게 발산해야만 했다. 그집에 가득한 아이들에게 발산하는 것보다는 내게 한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단다. 이해할 수 있겠지?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말하는 도중에 알렉산드라 고모가 들어왔다. 봅 이웰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날 아침, 그는 할 만큼 다 해버린 거야. 난 꼭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오빠. 그의 성격으로 보아 어떤 짓으로든 보복할 거예요. 그런 류의 인간이 어떻다는 건 아시잖아요. 도대체 이웰이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알렉산드라? 무엇이건요, 음흉하고 수상쩍은 짓 ,,, 오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메이컴 안에서 남몰래 무슨 짓을 하기란 쉽지 않아. 아버지가 반박했다. 우리의 두려움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해 여름은 녹아버릴 듯 지나갔고, 우리는 충분히 그 여름을 즐겼다. 아버지는 톰 로빈슨이 고등법원에서 상소심을 받을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었고, 톰이 풀려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최소한 또 한 번의 시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체스터에서 칠십 마일 떨어진 엔필드 교도소에 있었다. 내가 톰의 아내와 아이들이 면회할 수 있는지 묻자, 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있었다. 만약 상소에서도 지면 톰은 어떻게 되는 거죠? 전기의자에 앉혀져 사형당하게 될 거야. 주지사가 형을 감해준다면 모를까 ,,, 하지만 아직 걱정할 때는 아니다, 스카웃. 우린 좋은 기회를 확보한 거니까. 오빠는 소파에 앉아 기계에 관한 잡지를 읽다가 팔다리를 길게 뻗으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건 옳지 않아요. 그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누굴 죽인 건 아니잖아요.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았어요. 앨라배마에서는 강간죄가 사형이라는 걸 모르니? 알아요, 아빠. 하지만 배심원들에겐 그를 사형시킬 권리가 없어요. 이십 년 정도의 징역형이라면 모를까 ,,, . 사형선고를 내리고도 남지. 톰 로빈슨은 흑인이야, 젬. 세상 어떤 배심원도 유죄이긴 하지만 조금 유죄일 뿐이다 라고 하진 않는단다. 무죄방면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란다. 오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이 잘못된 건 분명한데, 뭐가 잘못된 건지 찾을 수가 없어요 ,,, . 단지 강간죄 하나로 사형까지 시키지는 말아야 해요. 아버지는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강간에 관한 법규에 대해선 할 말이 전혀 없지만, 주 정부의 허락과 완전한 상황증거에 기인하여 내려진 배심원들의 사형선고에도 의심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 거라고 했다. 잠시 말을 멈춘 아버지는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좀더 쉽게 설명해나갔다. 내 말은 말이다, 한 인간에게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한 명이나 두 명 정도의 목격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란다. 예를 들어 네, 나는 거기에서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걸 봤습니다 라는 정도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황증거만으로도 교수형을 당하잖아요. 그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그런 형을 받아 마땅하지. 하지만 목격자가 없을 때는 언제나 피고가 정말 유죄인지 의혹을 품게 된단다. 물론 아주 미묘한 의혹의 그림자 정도일 때도 있어. 법에서는 그것을 이유있는 의혹 이라고 한단다. 원래 피고에게는 그런 의혹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항상 가능성이 있는 거지. 얼마만큼 있을 법한 일이냐에 관계없이 결백할 수도 있는 거야. 그렇다면 그땐 다시 배심으로 되돌아가야 하나요? 오빠는 집요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웃지 않으려 애썼지만 참지 못하고 말았다. 네가 나보다도 더 철저하구나. 좀더 나은 길이 있을 게다. 법을 바꿔야겠지. 사형의 경우, 형벌을 결정하는 힘이 오직 재판관에게 있도록 바꾸는 거야. 그럼 몽고메리로 가서 법을 바꾸면 되잖아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면 너도 놀랄 게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안 될 거고 너희들 세대에 변한다 해도 네가 늙었을 때쯤에라야 겨우 될 게다. 그 정도 설명으로도 오빠에겐 충분치 않았다. 아뇨, 아빠. 우선 배심원 제도를 철폐해야 할 거예요. 그들은 유죄도 아닌 걸 유죄라고 했으니까요. 네가 배심원이었다면 ,,, 그리고 나머지 열한 명도 너같은 소년이었다면 톰은 풀려났을 게다. 아버지가 얘기를 계속해나갔다. 지금까지 너의 이성이 발달하는 것을 방해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톰의 배심원들과 같은 배심원들이 열두 명이나 있다면, 넌 거기에서 그들 자신과 네 이성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보게 될 거야. 그날 밤 교도소 앞에서도 똑같은 일을 경험했던 거지.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단다. 그중 하나는 아무리 애써 노력해도 공명정대할 수만은 없다는 거지. 우리 법정만 보더라도 백인이 흑인을 걸고 들어가면 언제나 백인이 이긴단다. 물론 비열한 짓이지. 하지만 그게 현실이란다. 말도 안 돼요. 오빠가 무신경하게 말하곤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그 정도의 증거로 한 인간에게 유죄를 선고할 순 없어요. 절대 할 수 없어요. 그래, 할 수 없지.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했다. 네가 더 자라면 더 많은 일을 겪게 될 게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건 바로 법정이란다. 그 안에서의 개인은 무지개의 모든 빛깔이 되어볼 수도 있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배심원석까지 그들의 원한을 갖고 가는 것이지. 네가 앞으로 좀더 자라면 백인이 흑인을 속이는 일을 일상에서 흔히 보게 될 거야. 여기서 네게 분명히 해둬야 할 말이 있다. 그건 흑인을 속이는 백인은 그가 부자거나, 또는 훌륭한 가문 출신이거나 하는 것에 관계없이 인간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다. 아버지는 아주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지만, 그 마지막 말은 우리의 귓전에 쟁쟁하게 울렸다.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몹시 흔들렸고 격렬해보였다. 저속한 백인이 흑인의 무지를 이용하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네 자신을 바보로 만들지 말아라. 언젠가는 우리가 그 빚을 갚아야 할 날이 올 게다. 나는 그날이 너희들 세대에 찾아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빠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아빠, 왜 사람들은 우리나 머디 아줌마를 배심원으로 지명하지 않는 걸까요? 배심원들 중에서 메이컴 사람들은 한 명도 못 봤어요. 모두 숲 저쪽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아버지는 무슨 이유인지 흔들의자에 앉은 채 몸을 뒤로 젖히며 오빠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첫째로 머디 아줌마는 여자이기 때문에 배심원으로서 봉사할 수 없는 거란다. 아빠까지도 앨라배마에선 여자들은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분개하여 반박했다. 으응 ,,, 내 생각으로 말이다, 우리의 연약한 숙녀들을 톰의 경우와 같은 그런 너저분한 일들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일 거야. 게다가 ,,, . 아버지는 싱긋이 웃으며 계속했다. 그 숙녀들께선 질문을 해대느라 재판을 잘 치르게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말이다. 오빠와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머디 아줌마가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인상적이었다. 두보스 할머니가 휠체어에 탄 채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모습은 또 어떨까. 아마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리라. 존 테일러 판사, 그 망치 좀 그만 두드려요. 나 이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좀 있으니까. 우리의 조상들은 현명했음이 틀림없다. 아버지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 같은 시민들은 세금을 내는 것으로 배심원일을 대신하는 거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고집 센 메이컴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또한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또한 ,,, . 두려워한다구요, 왜죠? 오빠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니까 ,,, 만약 라이첼 부인이 머디 여사를 차로 친 사건에 링크 디스 씨가 배심원석에 앉았다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링크 씨의 가게에 발길을 끊을 테니까. 이런 이유로 그는 테일러 판사님에게 가게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배심원으로 봉사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고, 테일러 판사님도 그를 면제해주신 거란다. 물론 그분도 마땅치 않지만 면제해줄 때도 있단다. 링크 씨는 왜 그들 중 하나는 거래를 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라이첼 아줌마는 끊을 거구, 머디 아줌마는 안 그럴 거야. 하지만 배심원 투표는 비밀투표잖아요, 아빠. 내 질문을 가로챈 오빠의 말에 아버진 껄껄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공부를 한참 더 해야겠는걸. 배심원 투표는 비밀리에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배심이란 것이 실제로는 외부 압력에 의해 결정하거나 선언하게끔 되어 있단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 때론 불쾌감을 주기도 하거든. 톰의 배심원들은 판결을 너무 빨리 내렸어요. 오빠가 투덜거리자, 아버지는 조끼의 시계주머니를 더듬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그렇지 않다. 이 말은 우리에게라기보다 아버지 자신에게 하는 듯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 그렇다, 이건 시작의 그림자에 불과하겠지만, 이번엔 몇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그건 보통 몇 분이면 판결날 사건이었지. 이번엔 ,,, . 아버지는 말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너희들은 아주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자신의 상황을 극복해낸 사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단다. 그는 처음부터 완전히 무죄석방을 위하여 훌륭하게 처신했단다. 그분이 누군데요? 오빠가 놀라서 되물었다. 아버지는 두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올드새럼 출신이었단다 ,,, . 커닝햄 사람이에요? 오빠가 놀라 소리쳤다. 그 집안 사람이라면 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데요 ,,, 아빠, 괜히 그러시는 거죠. 오빠는 눈꼬리를 흘리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친척들 가운데 한 명이었지. 물론 추측할 뿐이야. 정확한 건 아니고, 그저 눈치를 챈 것뿐이지.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단다. 어이구, 세상에. 오빠는 조용히 웅얼거렸다. 금방이라도 죽이려 하다가 그 다음날 놓아주려 하다니 ,,, . 전 살아있는 한 절대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아버지는 우리가 커닝햄 사람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은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래 그 누구도 해치거나 죽인 적이 없다는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그들이 한 번 관심을 가진 일에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정성을 쏟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만 해도 그들은 이미 핀치 가문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갖고 교도소 앞을 떠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것이 또한 커닝햄의 마음을 뒤바꾸는 뜻밖의 역할을 해낸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이 두 패만 있었다면 우린 배심원을 장악할 수 있었을 거야. 오빠가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날 밤 아빠를 죽이려 했던 사람을 배심원으로 앉혔다는 말씀인가요? 어떻게 그런 모험을 할 수 있으세요, 네? 어떻게? 잘 분석해보면 거기엔 위험이 거의 없단다. 유죄판결을 내리려는 남자와 역시 유죄판결을 내리려는 또다른 남자와의 차이는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니? 그렇다면 유죄를 결정한 남자와 마음속에 약간의 망설임이 남은 남자와는 어떨까? 아주 미미한 차이가 있겠지, 그렇지? 그는 모든 과정에서 반신반의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단다. 그분은 커닝햄 집안과 어떤 관계인데요? 내가 물었으나 아버지는 일어나 기지개를 켜곤 하품을 했다.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은 아니었으므로 우린 아버지가 신문을 읽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신문을 접어 내 머리를 가볍게 치며 자신에게 말하듯 단조로운 어조로 얘기했다. 자, 보자. 그렇지, 맞아. 겹사촌일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두 자매가 두 형제와 결혼했겠지. 됐지? 이 다음은 너희들이 궁리해 보렴. 나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내가 만약 오빠랑 결혼하고 딜에게 여동생이 있어 그애가 우리 아이와 결혼한다면 그것이 겹사촌일 거라고 결론내렸다. 어휴, 끔찍해라. 아버지가 거실에서 나간 뒤에 내가 말했다. 정말 괴상한 사람들이야. 들으셨지요, 고모? 알렉산드라 고모는 깔개를 만드느라 뜨개바늘을 잡아당기면서도 다 듣고 있었다. 일감 바구니는 그녀가 앉은 의자 옆에 있었고, 깔개는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왜 여자어른들은 이 찌는 듯이 무더운 밤에 털깔개를 만드느라 뜨개바늘을 잡아당기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들었다. 고모가 대답했다. 나는 월터 커닝햄을 몰아세웠던 일을 떠올리며 흐뭇해 하고 있었다. 곧 개학하면 월터에게 우리집에서 함께 밥먹자고 말해야지. 나는 보기만 하면 때려주겠다던 결심도 잊은 채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걘 수업이 끝나는 대로 곧장 집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 . 그리고 아빠가 올드새럼까지 태워다주실 거야. 어쩌면 우리집에서 자고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괜찮지, 오빠? 그 일은 좀 생각해봐야겠다. 알렉산드라 고모가 잘라 말했다. 고모는 언제나 으름장을 놓거나 두고 보자고 말할 뿐, 명확하게 약속하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라 고모를 돌아보았다. 왜요, 고모? 좋은 사람들이에요. 고모는 돋보기 안경 너머로 날 쳐다보았다. 진 루이스, 그들이 좋은 품성을 가졌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하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고모 말씀은 그들이 한심한 족속이라는 거야, 스카웃. 오빠가 거들었다. 한심하다니? 말하자면 ,,, 음, 시끄러운 거. 깡깽이 소리 같은 거 말이야. 그렇다면, 나도 그런데 ,,, .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진 루이스. 알렉산드라 고모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문제는 월터 커닝햄을 아무리 반짝반짝 씻기고 새 신발 새 옷을 입힌다 해도 그 아인 결코 젬같이 될 수 없다는 거야. 그 집안은 대대로 술고래야. 핀치 가문의 여성이라면 그런 사람에겐 관심이 없지. 고모, 스카웃은 아직 열 살밖에 안 됐어요. 지금부터 배워두는 것이 좋아. 오빠의 말에 알렉산드라 고모가 잘라 말했다. 나는 아직도 지난번 고모에게 항복했던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저 칼퍼니아 아줌마의 집을 방문하려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저 흥미와 호기심으로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었고, 그녀의 사는 모습과 친구들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방법은 달랐지만 고모의 목적은 같았다. 이것이 고모가 우리와 함께 사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친구를 마음대로 선택해주는 것. 나는 될 수 있는 한 고모를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제가 월터에게 잘하는 것이 왜 안 되는 일이죠? 잘 대해주지 말라는 게 아니야.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그리고 우아하게 행동해야 한단다. 하지만 그 아이를 집으로 불러들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거야. 만일 걔가 우리 친척이라면요, 고모? 걘 우리 친척도 아니고 그렇다 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야. 고모. 오빠가 거침없이 말했다. 아빠는, 친구는 선택할 수 있어도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인정하든 안하든 친척은 역시 친척이라구요.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는걸요. 내 말이 바로 너희 아버지 말씀을 반복하는 거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 루이스, 이 집에 월터 커닝햄을 초대할 수는 없어. 그애 겹사촌이라 해도 사무적인 일로 아버지를 방문하는 것 외엔 받아들일 수 없어. 됐니? 그래도 전 월터랑 놀고 싶은걸요. 왜 안 되는 거죠, 고모? 알렉산드라 고모는 절대로 함께 놀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이유를 말해주지. 그 아인 껄렁껄렁한 아이잖니. 난 네가 그애 주변에서 못된 말이나 주워듣고 천박한 행동을 배우도록 놔두진 않을 거다. 네 아버진 지금만으로도 너로 인해서 충분히 골치를 앓고 계셔. 난 고모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흐느끼기 시작하자, 오빠는 팔을 둘러 내 어깨를 안은 채 우리방으로 데려갔다. 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우리방 문 뒤로 얼굴을 내미셨다. 괜찮아요, 아빠. 아무 일도 아니에요. 오빠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아버지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거 씹어, 스카웃. 오빠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주었다. 얼마 후 그 사탕은 내 입 안에서 부드러운 껌덩어리가 되었다. 오빠는 옷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앞머리만 내려와 있을 뿐 머리카락은 전부 뒤로 넘겨져 있었다. 그 머리모양이 아저씨 같아 보여서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적당한 위치에 말끔하게 자라 있었고, 눈썹도 더 짙어져 있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유난히 호리호리해보였다. 오빠는 키가 점점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뒤돌아본 오빠는 내가 또 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말을 건넸다. 네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보여줄 게 있어. 그게 뭔데? 오빠는 셔츠단추를 풀고는 겸연쩍은 듯 싱긋 웃었다. 근데 뭐? 뭔가 보이지 않니? 아니. 자, 여기 이 털을 좀 봐. 어디? 여기, 바로 여기. 오빠는 내가 볼 수 있도록 그곳을 가리켰고, 나는 근사하다고 말했지만 아무 것도 보지는 못했다. 정말 멋지다, 오빠. 여기 겨드랑이에도 난다. 내년엔 축구를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스카웃, 고모를 화나게 하지 마. 오늘처럼 전에도 고모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던 오빠의 말이 떠올라 마치 어제일처럼 느껴졌다. 고모는 여자아이한테 익숙하지 못하신 거 알잖아, 특히 너 같은 여자아인. 고모는 널 숙녀로 만들려는 거야. 너 바느질이나 뭐 그런 것 좀 배울 수 없니? 끔찍해. 고모는 날 좋아하지 않아. 그게 전부야. 하지만 상관 안 해. 내가 아빠의 골칫거리라고 해서가 아니라 월터 커닝햄을 천박하다고 했기 때문이야. 사실은 내가 골칫거리냐고 솔직하게 여쭤봤었는데, 아빠는 아니라고 하셨어.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건 해결할 수 있는 거라고 하셨어. 그리고 두 번째로 신경쓰시는 내 지능도 큰 걱정은 아니랬어. 아니야, 월터 커닝햄은 쓰레기 같은 애가 아니야, 오빠. 그 아인 이웰 사람들과는 달라. 오빠는 신발을 벗어 내던지고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그리곤 베개에 기대앉아 스탠드를 켰다. 스카웃, 너 이거 아니? 난 이제 모든 것을 알 것 같아. 요즘 들어 많이 생각해보고 정리한 건데,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나와 우리 이웃들로 이루어진 보통사람들, 숲 저쪽에 사는 커닝햄 같은 사람들, 쓰레기더미에 묻혀 사는 이웰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흑인이 있지. 중국인들이나 저 아래쪽 발드윈에 사는 루이지애나 원주민들은? 내 말은 메이컴 안에서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발견한 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커닝햄 류의 사람들을 싫어하고, 커닝햄 사람들은 이웰 사람들을 멀리하고 이웰 사람들은 흑인들을 경멸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커닝햄 사람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왜 톰을 무죄석방하지 않은 거지? 이웰 사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오빠는 내 말을 유치한 질문으로 치부해버렸다. 너 그거 아니?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아빠가 발장단을 맞춘다는 사실 말이야. 그리고 아빤 그 누구보다도 술을 좋아하신다구. 그건 우릴 커닝햄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거잖아. 난 왜 고모가 ,,, . 잠깐, 내 말 먼저 들어봐. 그렇다고 해도 우린 아직 커닝햄 사람들과는 달라. 언젠가 아빠께서 고모가 우리 가족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이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어. 그건 우리가 가풍을 제외하곤 단 한 푼도 물려 받은 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어. 어휴, 오빠. 난 모르겠어. 아빤 내게 전통있는 가문 사람들은 어리석은 편인데, 그건 가문이 오래된 만큼 속물근성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흑인들이나 영국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냐고 여쭤봤더니 그렇다고 하셨는걸. 가풍이 오랜 가문을 뜻하는 건 아니야. 가문이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읽고 쓰기를 해왔느냐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스카웃, 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했는데, 이것이 유일한 이유일 거야. 핀치 집안의 조상 가운데 어느 분이 이집트 어디에선가 상형문자나 숫자를 배워와서 아이들에게 가르쳤겠지. 오빠는 웃으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고모가 증조할아버지가 읽고 쓰셨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걸 생각해봐. 여자들은 별 희한한 걸 가지고도 자랑으로 여기니까. 나도 증조할아버지가 읽고 쓰신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빠가 읽고 쓰시지 못했다면 난 곤경에 빠졌을 테니까. 그래도 난 그런 것이 가풍과 관계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오빠. 그렇다면 커닝햄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니? 월터 아저씨가 힘겹게 사인하는 걸 봤어. 우리 가문이 그 집보다 더 오래 전부터 읽고 쓰기를 해온 거야. 아니야, 사람은 다 배우면서 알아가는 거야.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아는 건 아니라구. 월터도 자기가 하는 일은 잘 알아. 밖에 나가서 아빠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뿐이지.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오빠, 난 사람들은 모두 한 종류뿐이라고 생각해. 오빠는 몸을 돌려 베개에 펀치를 먹이곤 머리를 편하게 기댔다. 오빠는 차츰 우울해졌고 나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오빠의 눈썹이 한데로 모이고, 입술은 가는 선이 되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도 네 나이 때는 그렇게 생각했어. 오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걸까? 그들이 모두 동등하다면 왜 고의적으로 서로를 경멸할까? 스카웃, 난 이제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아. 난 왜 부 래들리가 집 안에만 틀어박힌 채 살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 . 그건 단지 그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일거야. 24. 숙녀들의 세계 칼퍼니아 아줌마는 방금 풀을 먹여 다린 듯한 빳빳한 앞치마를 두르고 쟁반에 푸딩을 나르느라 엉덩이로 문을 지긋이 밀었다. 나는 음식이 가득 담겨 있는 쟁반을 그렇게 손쉽고 자연스럽게 다루는 솜씨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알렉산드라 고모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오늘은 칼퍼니아 아줌마가 식탁을 차리도록 했다. 벌써 구월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내일이면 딜은 메리디안으로 떠날 것이다. 오늘 그와 오빠는 베이커스에디 강으로 떠났다. 오빠는 자기에겐 마치 걷는 것만큼이나 쉬운 수영을 딜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와 함께 놀라워했다. 그들은 샛강에서 이틀 낮을 보냈는데 발가벗고 있을 거라며 나는 오지 못하게 했다. 따돌려진 나는 외톨이가 된 기분으로 칼퍼니아 아줌마와 머디 아줌마 사이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냈다. 그날 알렉산드라 고모는 그녀가 가입한 선교단체 사람들과 함께 거실에 가득 모여 유익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므루너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관해 보고하는 그레이스 메리웨더 부인의 목소리가 부엌에까지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 므루너 사람들은 때가 되면 여자들을 오두막 밖으로 내보낸다고 했다. 그들은 가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특히 그 부분이 고모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아이들이 열네 살이 되면 무시무시한 의식을 치르게 하는데 그것은 지렁이처럼 지그재그로 기게 한다든가, 나무껍질을 씹어서 각자 준비한 항아리에 뱉아놓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면 나무껍질에 취하는 경우도 있고 ,,, . 그레이스 부인의 보고가 끝나자 다과를 들기 위해 토론을 잠시 보류했다. 나는 식탁 쪽으로 가야 할지 밖으로 나가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고모는 이런 자리에 어울릴 필요도 없을 뿐더러 보나마나 지루한 일이니 다과를 들 때만 함께 있으라고 했었다. 나는 일요예배 때 입는 분홍색 원피스와 구두 그리고 패티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실수로 뭐라도 묻히게 된다면 칼퍼니아 아줌마는 내일을 위해 즉시 내 옷을 빨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그녀에게 무척 바쁜 날이지 않은가. 뭐 좀 도와드릴까요, 아줌마? 내가 도울 만한 몇 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대하며 말을 건네자, 칼퍼니아 아줌마가 출입문에 멈춰서서 대답했다. 저쪽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내가 오면 쟁반에 담는 일을 도와주렴. 그녀가 문을 열자 부인들의 부드러운 콧노래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알렉산드라, 난 정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푸딩은 처음이에요. 정말 훌륭해. 난 빵껍질이 이렇게 되도록 구워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정말 안되던데 ,,, 누가 이 작은 딸기파이를 ,,, 칼퍼니아? ,,, 그것을 누가 생각이나 ,,, 그 목사부인에 대해 누가 말해주지 않았나요 ,,, 아뇨, 아, 그녀는 아직 걷지를 못하고 ,,, . 그녀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새로운 음식이 나왔음이 분명했다. 칼퍼니아 아줌마는 엄마가 쓰던 은주전자를 쟁반에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 커피 주전자는 참 진기하기도 하지. 요즈음은 이렇게 만들지 못해. 내가 가져 갈까요? 그럼 한 번 해보렴. 엎지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져가서 테이블 끝에 내려놓고 잔도 함께 내려놓아라. 따르는 건 고모가 하실 테니까. 나는 칼퍼니아 아줌마가 했던 대로 등으로 문을 밀어보았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줌마가 지긋이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조심해, 무거우니까 그걸 쳐다보지 말아라. 그러면 엎지르지 않을 거야. 나의 모습은 성공적이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여기 앉으렴, 진 루이스. 이것은 나를 숙녀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의 일부이리라. 그날의 모임을 주관하는 여주인들은 침례교도든 장로교도든 그들의 이웃을 티타임에 초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은 라이첼 아줌마, 머디 아줌마, 그리고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의 참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머디 아줌마 옆에 앉았다. 숙녀들께선 왜 길 하나를 건너오는 데도 모자까지 써야 하는지 궁금해 하면서 ,,, . 부인들 여럿이 모여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그녀들에게선 종잡을 수 없는 염려와 어딘가에 숨겨진 확고부동한 욕구들로 가득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알렉산드라 고모가 망쳐버렸다 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파스텔 톤의 부서질 듯한 얇은 옷차림을 한 부인들의 모습은 시원해 보였다. 대부분은 파운데이션만 두껍게 펴바르고 립스틱은 칠하지 않았다. 한 명만이 립스틱을 칠했는데, 그렇다 해도 엷은 주홍빛 정도였다. 손톱에는 연분홍빛이 반짝였는데, 몇몇 젊은 부인들은 장밋빛이었다. 그녀들의 향기는 하늘에라도 날아오를 듯했다. 나는 조용히 앉아 의자의 팔걸이를 단단히 움켜잡고는 누군가 말을 건네오길 기다렸다. 드디어 머디 아줌마의 금니가 반짝거렸다. 오늘은 아주 훌륭하게 차려입었구나, 진 루이스. 짧은 바지는 어디에 두었니? 제 드레스 속에요.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숙녀들은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실수했음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내 뺨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디 아줌마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웃기려 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결코 웃지 않았다. 갑작스런 침묵이 흐른 뒤 내 맞은편에 앉은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가 물어왔다. 이 다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진 루이스, 법률가? 아뇨,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 . 화제를 바꾸어준 배려에 깊이 감사하며 서둘러 나의 천직을 고르기 시작했다. 간호원? 비행사는 어떨까? 저 그냥 ,,, . 왜 있잖니, 나는 네가 법률가가 되리라고 확신하는데. 넌 이미 법정에 출근하기 시작한 셈이니까. 숙녀들은 또다시 웃어댔다. 스테파니의 술책이 또 나오는군. 누군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스테파니 아줌마는 신이 난 듯 그 얘기를 계속해나갔다. 법률가가 되고 싶지 않니? 그때 머디 아줌마가 내 손을 잡았고, 나는 매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냥 숙녀가 될 거예요. 스테파니 아줌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무례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곤 만족하게 말했다. 그래, 네가 드레스를 좀더 자주 입는다면 그렇게 힘든 일만도 아닐거야. 머디 아줌마는 내 손을 잡은 손에 좀더 힘을 주었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그레이스 메리웨더 부인은 내 왼쪽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무엇이든 말을 건네는 것이 예의일 거라고 생각했다. 메리웨더 아저씨는 혼자서는 절대 노래하지 않는 독실한 감리교도였다. 놀라운 은총,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요! 나같이 가엾은 사람을 구원해주시고 ,,, . 메이컴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메리웨더 아저씨가 술을 끊고 성실한 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부인 덕분이라고 했다. 메리웨더 부인은 메이컴에서 가장 헌신적인 여성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관심을 가질 만한 화젯거리를 찾으려고 했다. 오늘은 무엇을 연구하셨어요? 오, 아가야, 그 불쌍한 므루너 사람들에 대해서란다. 그녀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질문할 말이 몇 가지 더 필요했다. 메리웨더 부인의 커다란 갈색 눈은 누군가 핍박받는다고 생각할 땐 언제나 눈물로 가득차곤 했다. 그 아무도 없는 정글에서 그림스 에버리트하고만 산다는 건 ,,, 백인들은 아무도 그들 근처에 가지 않아요. 단지 그 성자 같으신 그림스 에버리트 그분만이 ,,, . 메리웨더 부인의 목소리는 마치 오르간을 연주하는 듯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충분히 납득되었다. 그 빈곤 ,,, 그 무지 ,,, 난잡함 ,,, 아무도 모를 거야. 오직 그림스 에버리트만이 아시지. 교회의 지시에 따라 그 캠프에 갔을 때, 그림스 에버리트가 내게 뭐라고 하셨는지 아니? 그 분이 거기 계셨나요? 제 생각엔 ,,, . 나는 말 끝을 흐렸다. 집으로 돌아가시오, 메리웨더 부인. 부인은 모르십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지 그것조차도. 이것이 그분이 내게 하신 말씀이란다. 그랬군요. 그래서 나도 에버리트 선생님, 메이컴의 에피스코펄 남부감리교회 여신도들이 전부 선생님 뒤에 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단다. 그리곤 말이다, 난 그 자리에서 맹세했단다. 고향에 돌아가면 므루너 사람들에 관한 강좌를 만들어 그림스 에버리트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그래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거란다. 네에 ,,, . 메리웨더 부인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검은 곱슬머리가 가볍게 물결쳤다. 진 루이스, 넌 행운아야. 기독교 마을의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 인들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까. 저 바깥 그림스 에버리트 선생님의 땅에는 죄악과 불결함만이 존재하고 있단다. 네, 아주머니. 죄악과 불결함 ,,, 뭐라고 했죠, 거트루드? 메리웨더 부인은 옆에 앉은 숙녀에게로 돌아섰다. 오, 그것이에요. 그렇죠, 난 항상 용서하고 잊으라고 ,,, 맞아요, 그 말을 또 하고 또 하죠. 그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기독교도다운 생활로 이끌도록 그녀를 도와야한다는 거예요. 남자분들도 마찬가지죠. 그곳 목사님에게 가서 그녀를 격려하도록 말해야 할 거예요. 저, 죄송하지만 메리웨더 아주머니. 내가 말을 중단시켰다. 지금 마옐라 이웰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예 ,,,? 아니, 아니다. 저 흑인 아내 얘기다. 톰의 아내, 토옴 ,,, . 로빈슨요. 메리웨더 부인은 옆자리 쪽으로 시선을 돌려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난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어요, 거트루드.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내 방식을 올바르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구요. 그들을 용서한다는 걸 알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세상일들이 별탈없이 돌아가줄 텐데 ,,, . 저, 메리웨더 아주머니, 나는 또 한 번 말허리를 끊었다. 무엇이 별탈없이 돌아가줄 거라는 말씀이세요? 메리웨더 부인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얘기할 땐 억양을 달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응, 별건 아니란다, 진 루이스. 그녀는 위엄있게 천천히 덧붙였다. 요리사와 들판의 일꾼들이 불만을 품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진정되어 제자리로 돌아갔단다. 그 재판 다음날 그들은 온종일 투덜댔었단다. 메리웨더 부인은 패로 부인에게 얼굴을 갖다댔다. 거트루드, 난 샐쭉해진 검둥이를 보면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입은 축 처져가지고 ,,, 그들에게 부엌을 맡겼다간 그날 하루를 완전히 망치고 말 거예요. 내가 우리집 소피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거트루드? 소피, 오늘 넌 마치 이교도처럼 보이는구나. 예수님은 결코 투덜대며 불평을 늘어놓진 않으셨어. 이렇게 말했지요. 그러니까 그 아인 네, 메리웨더 마님. 예수님은 결코 투덜거리진 않으셨어요 라고 하지 뭐겠어요. 물론 그런 점이 그 아이의 장점이기도 하죠. 거트루드,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 아이들에겐 신의 이름으로 증언할 기회를 절대 주지 않도록 하세요. 그 순간 핀치 집안의 영토에 있던 교회당의 오래된 작은 오르간이 생각났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내가 말을 잘 듣거나 할 때면 아버지는 한 손가락으로 음정을 누르며 내가 오르간에 펌프로 공기를 넣도록 허락해주곤 했다. 펌프의 공기가 유지되는 한 그 마지막 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듯 메리웨더 부인 역시 공기를 다 써버리고 나자 패로 부인에게 말을 시켜 그동안 다시 공기를 채워넣고 있는 것이었다. 눈부신 몸매의 패로 부인은 발 볼이 좁고, 잿빛 머리카락은 상큼하게 웨이브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은 늘 피곤해 보였다. 그녀는 메이컴에서 두 번째로 헌신적인 숙녀였는데 말을 시작할 때 스스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었다. 스스스, 그레이스. 그녀가 말했다. 그건 며칠 전 내가 휴스턴 형제님에게 말한 것과 똑같아요. 전 이렇게 말했죠. 스스스, 휴스턴 형제님, 우린 이미 패배해버린 전쟁에서 싸우는 것 같아요. 진 싸움 말이에요. 그들에겐 별 상관도 없겠지만 우린 그들을 기독교도로 인도하려고 성심성의껏 노력했어요. 결국 그 결과는 요즈음엔 어떤 숙녀도 마음놓고 밤길을 다니지 못한다는 거죠 그랬더니 제게 패로 자매님, 요즈음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시지 뭐예요. 스스스, 그래서 저도 그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라고 말씀드렸죠. 메이웨더 부인은 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목소리는 커피잔 부딪치는 소리, 입 속에서 과자를 아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온 방 안에 울려퍼졌다. 거트루드, 이 마을엔 천성을 훌륭하지만 잘못 인도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성품이야 훌륭하지요, 하지만 잘못 인도된 사람 말이에요. 그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요. 물론 전 그들이 누구라고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란 흑인들을 선동할 뿐이에요. 그것이 전부죠.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전 그 분야에 관해선 책을 읽지 않아 모르지만, 그 샐쭉해 있는 꼴이란 ,,, 또 그 불만투성이 ,,, 우리집 소피가 계속 뾰루퉁해서 투덜댄다면 난 내보낼 거라고 말하겠지만, 그 엄청난 곱슬머리에다 대고 아무리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유는 단지 이런 불경기에 몇 푼이라도 적선하려는 것뿐이라구요. 그렇게 해서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기나 하겠어? 내 옆자리의 머디 아줌마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입을 다물자, 입 언저리에 두 줄의 주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커피잔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톰 로빈슨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그만둔 이후 대화의 실마리를 잃어버린 채, 핀치 영토와 강가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나머지 시간들은 알렉산드라 고모가 장악했고, 그 모임의 사무적인 일이란 것이 내게는 황량하게만 느껴질 뿐이기 때문이었다. 머디, 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물론 그러실 테지. 메리웨더 부인의 말에 머디 아줌마가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그녀를 화나게 했음이 분명했다. 화가 났을 때의 머디 아줌마의 말투는 언제나 간결했고 얼음장 같았던 것이다. 그녀의 잿빛 눈은 목소리만큼 차가웠고 메리웨더 부인은 얼굴이 빨개져서 나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눈을 돌렸다. 나는 패로 부인도 볼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라 고모가 일어나서 재빨리 다과를 나르면서, 메리웨더 부인과 게이츠 부인이 얘기를 나누도록 해준 다음 퍼킨스 부인도 그들 대화에 넣어주곤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 나서 머디 아줌마에게 정말로 고맙게 생각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으로 나는 세상여자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머디 아줌마와 고모는 한 번도 가까이 지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서 고모는 그녀에게 무언의 감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고모가 도움받은 것에 대해 사무치도록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들의 세계인 듯 했다. 물론 나 역시 얼마 후면 온갖 향내를 풍기며 천천히 흔들거리며 우아하게 부채질하면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있는 이 숙녀들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난 아직은 아버지의 세계에 더 가까이 있었다. 헥 테이트 씨 같은 사람들은 짐짓 순진한 질문으로 상대방을 골탕먹이거나 놀려댈 마음이 없는지도 모른다. 젬 오빠까지도 상대가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크게 비판적이지는 않았다. 숙녀들은 남자들에 대해 어렴풋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꺼리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남자들이 좋았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도박을 하고 폭언을 퍼붓더라도 말이다. 몹시 신이 나서 떠들어댈 때라도 그들에게선 왠지 깊이가 느껴졌다. 그들에겐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그 무엇이 ,,, . 위선자란, 퍼킨스 부인, 타고난 위선자란 말입니다, 최소한 그런 죄의식을 양 어깨에 지고 있진 않아요. 메리웨더 부인이 계속했다. 저 북부 양키들이 그들을 놓아주긴 했죠. 하지만 그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있는 걸 볼 수는 없을 거예요, 절대로. 최소한 우리는 그래, 너희들은 우리와 동등하다. 그러니까 저만치 물러나 주시지 라는 식의 기만은 없어요. 여기 우리 남부 사람들은 너흰 너희 방식대로 살아라. 우린 우리대로 살겠다 라고 말할 뿐이니까요. 제 생각으론 그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은 실성한 것 같아요. 단지 실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죠. 버밍햄까지 내려와서 그 검둥이들과 같이 앉다니 ,,, 만일 내가 버밍햄 시장이었다면 난 ,,, . 그렇다, 우리들 중 누구도 버밍햄 시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단 하루만이라도 앨라배마의 주지사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교회의 선교단체가 숨돌릴 틈도 없이 톰 로빈슨을 풀어주리라. 나는 어느 날 칼퍼니아 아줌마가 라이첼 아줌마네 요리사에게 톰이 그 판결을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에도 말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쉽게 침묵하는 건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톰이 교도소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핀치 변호사님. 이젠 해주실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애쓰셔도 소용없습니다. 또한 톰은 교도소로 가면서 모든 희망을 버렸는데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위로한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다. 라이첼 아줌마네 요리사는 아버지가 왜 석방될 거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그렇게 했다면 톰에게 훨씬 큰 위안이 되지 않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칼퍼니아 아줌마는 그건 법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며, 법률가의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배울 것은 어떤 일에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엔 절대 함부로 약속하는 분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때 일을 떠올리고 있는데 앞문이 세차게 닫히고 아버지가 복도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반사적으로 시간을 떠올렸다. 아직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고 게다가 선교모임이 있는 오늘 같은 날에는 대개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모자는 손에 들려 있었고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신경쓰지 말고 모임을 계속하십시오. 알렉산드라, 잠깐 부엌으로 나올 수 있을까? 난 잠깐 칼퍼니아와 갈 곳이 있어서 ,,, . 아버지는 식당으로 곧장 가지 않고 뒤쪽 복도를 지나 뒷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라 고모와 나도 따라갔다. 잠시 후 식당문이 열리고 머디 아줌마가 들어왔다. 그러자 칼퍼니아 아줌마가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칼, 헬렌 로빈슨네 집에 같이 좀 가줘야겠소. 무슨 일인데요? 고모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톰이 죽었어 ,,, . 고모는 하얗게 질린 채 손을 입에 갔다댔다. 그를 쐈다는구나. 그때가 운동시간이었는데 그가 도망쳤다는군. 별안간 이성을 잃고 미친 듯 뛰어가 담을 넘더라는 거야. 바로 그들 앞에서 말이다 ,,, . 그를 막으려고도 하지 않았대요?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느냐구요? 알렉산드라 고모의 목소리가 평정을 잃고 있었다. 그렇게 했겠지. 보초병들이 그를 세우려고 소리치고 공포를 쏘았는데도 말을 듣지 않자 죽였다는 거야. 그가 막 담을 넘으려는 순간이었다더구나. 마치 그의 두 팔이 멀쩡하기라도 한 듯 재빨리 움직였다는구나. 열일곱 발이나 쏘았다니 ,,,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 . 칼, 헬렌에게 말할 때 날 좀 도와줘요. 네, 변호사님. 칼 아줌마는 앞치마를 더듬으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머디 아줌마가 칼퍼니아 아줌마의 앞치마를 풀어주었다. 그에겐 아직 기회가 있었는데 ,,, 이번 기회가 그가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는데, 오빠. 알렉산드라 고모가 말했다.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겠지. 검둥이 하나가 무슨 의미를 갖겠어. 그 많은 죄수 가운데 하나 정도? 그들에겐 톰이 아니야. 다만 탈옥수일 뿐이지. 아버지는 냉장고에 기댄 채, 안경을 밀어올리고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우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지만, 그 기회 이상은 확신할 수 없었지. 톰은 백인들의 기회라는 것에 이미 지쳐 있었고, 자신을 스스로 거두고자 했을 거야. 준비됐소, 칼? 네, 핀치 변호사님. 그럼 갑시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칼퍼니아 아줌마 의자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난 고모가 기절한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머디 아줌마는 금방 계단을 올라온 듯한 다급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부인들이 즐거운 듯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산드라 고모가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얼굴에서 손을 뗀 고모는 지쳐 보였고,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머디, 난 그가 하는 일이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진 않아. 하지만 내 오빠고, 이러한 그의 의지가 언제 끝날지 알고 싶을 뿐이야. 고모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이 일은 그를 갈기갈기 찢고 있어. 겉으로 나타내지 않을 뿐, 갈갈이 찢기고 있어. 나는 처음부터 그들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그에게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머디, 무엇인가 다른 것 말이야. 그들이 원하는 게 뭘까? 머디 아줌마가 물었다. 문제는 이 마을사람들이야. 그들은 자신이 하기엔 너무나 두려우니까 그에게 완벽하게 떠맡겨버린 거야. 그들은 기껏해야 동전 몇 푼 정도 잃게 되겠지. 그리곤 자기들이 두려운 일을 그에게 시켜 건강을 해치려고 해. 그들은 ,,, . 조용, 모두 듣고 있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순 없을까, 알렉산드라? 메이컴에선 알거나 말거나 우리는 한 인간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거야. 옳은 일을 하는 그를 믿는 것, 바로 그거야. 그게 누군데? 고모는 열세 살짜리 조카의 질문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걸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마을의 몇몇 사람들이지. 백인과 흑인의 공정한 게임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법률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흑인들을 보며 만일 내가 그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겸손함을 갖춘 사람들 말이야. 머디 아줌마는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몇몇 사람들, 그들이 누구겠어? 조금만 더 주의깊게 들었다면 오빠가 정리한 인간의 분류에 한 가지를 더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두려움에 온몸을 떨고 있었는데, 좀처럼 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에 엔필드 교도소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축구장 크기의 운동장을 내게 보여주었는데 ,,, . 그만 떨어라. 난 머디 아줌마의 지적을 받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일어나자, 알렉산드라. 우린 너무 오랫동안 나와 있었어. 고모는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고는 허리춤에서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닦았다. 그리곤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때,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머디 아줌마가 대답했다. 같이 갈래, 진 루이스? 네, 아줌마. 이제 저 숙녀들과 합류해야겠지. 그녀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머디 아줌마가 식당문을 열자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앞장섰던 알렉산드라 고모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퍼킨스 부인, 커피가 없네요. 제가 가져오지요. 칼퍼니아가 잠시 심부름 갔어, 그레이스. 머디 아줌마가 말했다. 여기 딸기파이 좀 더 들지. 내 사촌이 낚시광인 건 요전에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네 ,,, . 고모와 머디 아줌마는 커피를 따르고 과자그릇을 나르면서 그들의 유일한 애석함은 칼퍼니아 아줌마 대신 가사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 양 식당을 돌아 즐겁게 웃고 있는 숙녀들에게 돌아갔다. 그 부드러운 콧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그래요, 퍼킨스. 그 그림스 에버리트는 순교자나 마찬가지에요. 그는 ,,, 그를 필요로 하는 결혼식에 뛰어가고 ,,, 매주 일요일 오후엔 미장원으로 ,,, 해가 지자마자 ,,, 그는 침대에 ,,, 닭들을 ,,, 병든 닭은 한 상자 가득 담아 ,,, 프레드는 그것으로 뭔가 시작할 거라고 했어요. 프레드가 말하길 ,,, . 알렉산드라 고모가 저편에서 나를 쳐다보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는 쟁반의 과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고 메리웨더 부인에게 걸어갔다. 나는 최대한으로 예의를 갖춰 과자를 권했다. 겨우 이런 것으로 고모가 숙녀가 되었다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25. 소중한 인간의 생명 하지 마, 스카웃. 뒷계단 쪽에 놓아줘. 미쳤어. 뒷계단에 놓아주라고 말했다, 응.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조그만 생물을 꺼내 맨 아랫계단에 올려놔주곤 간이침대로 돌아왔다. 구월이 찾아왔지만 조금도 서늘해지는 기미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뒷현관 칸막이에서 잘 수 있었다. 반딧불은 여전히 돌아다녔고, 날벌레들은 가을이 오면 어디로 갈지 그저 긴 여름을 즐기며 미닫이문에 부딪쳐 오곤 했다. 쥐며느리는 집 안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나는 아까 그 작은 벌레가 계단을 기어올라 문 아래턱쯤 왔으리라 추측했다가 그것을 발견하고 간이침대 근처 바닥에 책을 내려놓았다. 일 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그 생물은 내가 조금만 건드리면 몸을 단단한 잿빛 공모양으로 동그랗게 말았다. 내가 엎드린 채 손을 뻗어서 가볍게 건드리자 그것은 다시 동그랗게 움추렸다가 안전해졌다고 느낀 듯, 천천히 몸을 다시 폈다. 그리고는 수백 개나 되는 다리로 몇 인치쯤 여행을 계속했다. 난 또 다시 건드렸고 그것은 동그랗게 말았고 ,,, 순간 난 졸음이 몰려와 끝장을 내려고 눌러 비비려는데 오빠가 말렸다. 오빠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표정은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할 때 나타내는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난 오빠가 빨리 끝내기만을 기다렸다. 오빠는 원래 동물을 괴롭히지 않았다. 하지만 벌레에게까지 미치는 그의 동정심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이면 어때? 널 귀찮게 하지도 않잖아. 오빠는 어둠 속에서 말하며 스탠드를 켰다. 이젠 파리 모기도 못 죽일 단계에 와 계시군. 마음 변하면 얘기 해.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나도 웅크리고 앉아 쥐며느리나 할퀴려는 건 아니니까. 아, 시끄러워. 오빠가 졸린 듯 대답했다. 오빠 말대로 나날이 계집애처럼 되어 가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오빠인 것 같았다. 난 편안하게 등을 대고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딜을 생각했다. 그는 이달 첫날 우리 곁을 떠났다. 학교가 방학하는 대로 돌아오겠다는 굳은 약속을 남기고. 그는 이 정도면 가족들이 여름방학을 메이컴에서 보내고 싶어한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라고 떠벌였다. 라이첼 아줌마가 메이컴 역까지 택시로 우리를 데려다주었고, 딜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딜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난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딜은 떠나기 전 이틀 동안 베이커스에디 강에서 오빠에게 수영을 배웠다. 딜을 생각하자 쏟아지던 잠이 어디론가 달아나버렸고 난 다시 그와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베이커스에디 강은 마을에서 일 마일 정도 떨어진 메리디안 간선도로에서 갈라져나간 포장도로 끝에 있었다. 그 간선도로에서 목화마차나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아타고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다음부터 샛강까지는 걸어다닐 만한 거리였지만, 땅거미가 지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올 때 집까지 걸어온다는 것은 참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수영객들은 너무 오래 머물지 않도록 유의해야 했다. 딜은 그날의 일을 이렇게 말해주었다. 오빠와 함께 간선도로를 따라 걷는데 아버지의 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손을 흔들어댈 때까지 오빠와 딜을 보지 못한 듯했는데 마침내 알아보고는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안됐지만 돌아가는 차를 잡아타고 가야겠다. 우린 갈 곳이 있단다. 뒷좌석에는 칼퍼니아 아줌마가 앉아 있었다. 오빠가 항의를 하다가 나중에 애걸하다시피 졸라대자 아버지는 차 안에만 있겠다면 함께 가도 좋다고 말했다. 톰 로빈슨의 집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는 톰에게 일어난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들은 간선도로에서 옆길로 빠져 쓰레기더미 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웰 집을 지나 흑인들의 오두막이 모여 있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갔다. 톰 집의 앞 마당에서 흑인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차에서 내리자 칼퍼니아 아줌마도 뒤따랐다. 딜은 아버지가 앞 마당의 한 아이에게 물어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샘? 스티븐 자매님 댁에 가셨어요, 핀치 아저씨. 엄마 불러올까요? 아버지가 기운 없은 목소리로 그렇게 하라고 하자 샘이 뛰어나갔다. 하던 놀이를 계속해라, 얘들아.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잠시 후 오두막에서 조그만 여자아이가 나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은 뻣뻣한 돼지꼬리 뭉치 같았는데, 그 끝에는 밝은 색 리본이 매여 있었다. 그 아이는 입이 헤벌어지게 싱긋 웃고는 아버지 쪽으로 가려 했지만 너무 어려서 잘 걷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모자를 벗고 다가가 손을 내밀자 그 아인 아버지의 손을 움켜잡고 계단을 쉽게 내려왔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칼퍼니아 아줌마에게 데려다주었다. 얼마 후 샘은 로빈슨 부인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안녕하세요, 핀치 변호사님. 좀 앉으시지요 ,,, . 헬렌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아버지도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스카웃, 그녀는 흙 위에 그냥 무너져내렸어. 거인의 거대한 발에 짓밟혀버린 것같이 그냥 이렇게. 딜이 그때의 상황을 말했다. 딜은 통통한 발로 땅을 세게 누르며 굴러댔다. 개미를 발로 밟아뭉갠 것처럼. 딜은 다시 얘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칼퍼니아 아줌마와 아버지가 헬렌을 들다시피 부축하여 움막으로 들어간 지 한참 후에야 아버지는 혼자 조용히 걸어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웰 집에서 누군가 고함을 질러댔지만 딜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틀 정도 메이컴의 관심은 톰의 죽음을 둘러싼 얘깃거리에 쏠려 있었다. 그 얘기 들었어? 아니, 뭔데?" 톰 말이야, 그가 번개같이 달아났다는 거야 ,,, . 그래? ,,, . 이런 얘기들이 온 마을에 퍼져나가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톰의 죽음에 대해 가장 검둥이다운 죽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계획도 없이 허둥지둥 달아난 것부터가 그랬지만, 기회가 왔다고 해서 무작정 도망친 것은 나중일을 생각하지 않는 검둥이들의 정신상태를 그대로 보여준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완전히 풀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 . 톰은 기다려야 했다. 말도 안되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거야. 되는 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지. 그 로빈슨이 법적으로 결혼했고 거짓이 없었으며 교회에 다녔다는 게 모두가 일순간 어디로 달아났는지 그 허식은 너무나도 얄팍했다. 그리고 결국 흑인들은 그렇게 되는 것으로 결론 지어졌다. 좀더 자세한 대목은 전해질 때마다 각색되었는데, 그 다음주 목요일, 그 사건이 (메이컴트리뷴)지에 실리고 나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흑인뉴스란에 간략한 사망기사와 사설이 실렸던 것이다. 브랙스톤 브래즈 언더우드 씨가 가장 통렬하게 썼는데, 그는 누가 광고나 예약을 취소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메이컴에서 그렇게 하진 않았다. 언더우드 씨는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성심성의껏 기록함으로써 외쳐댈 수 있었고, 그래도 광고와 예약은 끊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엉뚱한 일로 웃음거리가 된다 해도 언더우드 씨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뿐이었다. 언더우드 씨는 사법적 오류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다만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표현했다. 그가 서 있었든지 앉아있었든지, 혹은 도망쳤든지 간에 결국 한 불구자를 죽이는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면서 톰의 죽음을 사냥꾼이나 아이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죽어간 노래하는 새에 비유했다. 그것에 대해 메이컴 사람들은 (몽고메리 신문)에 다시 실릴 만큼 시적인 사설이라고 평가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나는 언더우드 씨의 사설을 읽으며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살육, 그 죽음의 날, 톰은 법적인 절차에 따라 열두 명의 훌륭하신 배심원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판결을 받아 진실이 밝혀지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를 위해 계속 싸우고 있었는데 ,,, . 언더우드 씨가 써내려간 사설의 의미가 점점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톰 로빈슨을 구해내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음속까지는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옐라 이웰이 입을 크게 벌려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 톰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웰이란 이름만 들어도 속이 메스꺼워졌다. 죽음에 대한 이웰 씨의 견해가 메이컴을 떠돌아 다녔고, 그것은 영국해협처럼 무슨 말을 듣든지 곧장 흘려보내는 수다쟁이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를 거쳐 온 마을에 퍼졌다. 스테파니 아줌마는 오빠가 있는 자리에서 고모에게 그 말을 전했다. 나는 나중에 그 말을 전해들으면서 오빠가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될 만큼 자란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소문에 의하면 이웰 씨는 그 사건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큰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오빠는 그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웰 씨는 세상에 둘도 없는 허풍쟁이일 뿐,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그 얘기를 아버지한테 한 마디라도 이른다면 다시는 나와 상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26. 다시는 그 법정 얘기 하지 마 새학기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래들리 집 앞을 지나다녔다. 오빠는 칠학년이 되어 저쪽 초급중학교 건물로 옮겼고 나는 삼학년이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일상은 판이하게 달라지기 시 작했다. 오빠하고는 아침에 학교 갈 때와 식사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다. 오빠는 축구단에 들어갔 지만 너무 마르고 아직 어려서 물양동이를 나르는 일만 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일에 아주 열심 이어서 오후 내내 구단에서 시간을 보냈다. 래들리 집은 더이상 나를 두렵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떡갈나무 아래의 그 집은 여 느 때 못지않게 음산했고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여전히 나단 래들리 씨는 맑은 날이면 읍내를 다녀오느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우리는 부가 그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도 그가 실려나오는 걸 못 보았다는 한 가 지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칠 때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세상을 등진 사람을 몰래 들여다보고, 낚싯대로 편지를 전하며, 그의 케일밭을 배회했을까 생각하며 가끔 자책하곤 했 다. 난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디언 얼굴이 새겨진 동전 두 닢, 껌, 비누인형, 녹슨 메달, 고장 난 시계와 시계줄을. 오빠는 그것들을 어딘가에 잘 간직해두었으리라. 어느 날 멈춰서서 그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시멘트가 덧발라져 있는 부분이 부풀어 누렇게 변 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두 번 정도는 그를 볼 뻔 했다. 그건 누가 뭐래도 상당한 성과였다. 난 여전히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를 찾았다. 언젠가는 그를 볼 수 있으리라 상상해보는 것이 었다. 별 생각없이 이 길을 따라 올라오는데 그가 저기 그네에라도 앉아 있다면 난 어떻게 할까. 안녕, 아서 아저씨. 정말 화창한 날이구나, 그렇지? 네, 아저씨. 정말 좋은 날씨에요. 이렇듯 평소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곤 가던 길을 계속 가리라. 그것은 단지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달이 진 후에 나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가 보고 있을 때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가 그를 볼 수 있다고 해도 내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우리 앞에 나타 나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 어느 날 밤,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부 래들리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되지도 않은 바람 을 중얼거리자, 아버지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분명히 얘기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 돼. 나는 너무 늙어서 네가 래들 리네 집으로 가는 것까지 말릴 수도 없단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일이야. 나단 씨의 총에 맞을 수 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단 씨는 그림자만 보여도 모두 쏴버리거든. 잎사귀만한 발자국만 봐도 쏘 아버린단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야. 나는 입을 다물었는데, 순간 아버지에게 무척 놀라고 있었다. 래들리 집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 이 알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아, 그 일이 일어난 게 언제였더라 ,,, 겨우 지난 여름이었나? 지지난여름? 그때가 ,,, 시간이 나를 놀려대는 것만 같았다. 오빠에게 물어봐서 기억 해낼 수밖에.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부 래들리에 대해 최소한의 두려움을 간직하 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이란 언제 어떻게 일어날 지 모르는 것이고, 일단 일어난 일은 가라앉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톰 로빈슨이란 존재가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적 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분명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그 여름의 일들은 밀폐된 방에 연기가 가득찬 것처럼 오빠 와 내 머릿속에 드리워져 있었다. 메이컴의 어른들은 오빠와 내가 있는 자리에선 그 사건에 대해 절대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아이들에겐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변호사인 아버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자기 아이들에게 우리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스스로 우러나온 생각이 아니었기에 제멋대로 시비를 걸어왔다. 결국 오빠 와 나는 아이들과 몇 차례의 짧은 주먹질을 벌인 끝에 그 문제를 끝내버렸다. 그 일로 우리는 머 리를 높이 들고 각자 신사, 숙녀가 될 것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것은 버럭 고함을 질러대는 헨리 라파예트 두보스 할머니를 견뎌내야 했던 때와 비슷했다. 하도 뜻밖이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개구쟁이 아이들을 두었다는 부모로서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반대 없이 주 입법부에 재선되었던 것이 다. 난 그저 어른들이란 참 별스럽다고 결론지음으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된 일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각자 신문기사 를 오려 내용을 분석한 다음, 앞으로 나가 발표하는 시사뉴스 시간이었다. 이 실습은 다양한 범죄 들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라 했다. 또한 교단 위에서 보는 훈련을 할 수 있고, 균형감각을 기르며, 짧은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익힐 수 있다고 했다. 전개하는 연습을 함으로써 낱말을 바르게 사용 하고 ,,,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문에 난 기사를 익힘으로써 기억력을 키워주고 혼자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스스로 느껴 단체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취지도 있었다. 그 깊은 취지와는 달리 메이컴에서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 우선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은 신문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으므로 신문기사를 분석하는 일은 읍내 아이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다 보니 버스를 타고 다니는 시골 아이들은 읍내에 사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모든 관심을 차지한다고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시골 아이들 몇몇이 (그리트페이퍼)를 오려오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주로 가 십이나 스캔들을 다루는 신문으로 우리 게이츠 선생님이 저질로 여기는 신문이었다. 아이들이 <그리트페이퍼> 읽는 것을 선생님이 왜 못마땅해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어쩌면 바이올린을 켠다든가 시럽을 얹은 과자 정도로 점심을 때운다든가, 혹은 예배시간에 손뼉 치며 떠들어대거나 귀엽게 불러야 할 당나귀 노래에서 단나귀라고 발음하는 정도의 것이리라. 게다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무엇이 시사뉴스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암소에 관한 것이라면 백 살 된 사람만큼 잘 알고 있는 리틀 척 리틀조차도 넛첼 아저씨 이야기를 하다가 반도 안 돼서 제지 당하고 말았다. 찰스, 그건 시사뉴스가 아니에요. 그건 광고예요, 광고. 그래도 세실 제이콥은 시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듯 자기 차례가 되자 앞으로 나가 발표하 기 시작했다. 늙은 히틀러는 ,,, . 아돌프 히틀러란다, 세실. 게이츠 선생님이 지적했다. 사람 이름 앞에 늙은 이란 말을 붙이는 법은 없어요. 네, 선생님. 그 늙은 아돌프 히틀러는 박혔다 ,,, . 박해했다예요, 세실. 아니에요, 선생님. 여기 그렇게 씌어 있어요. 어쨌든, 늙은 아돌프 히틀러는 유태인을 잡아다 감옥에 넣고 모든 재산을 압수해서 누구도 그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했다. 또한 심약한 것들 을 모두 없애버리려고 ,,, . 심약한 것들을 모두 없애버리려 했다구? 네, 선생님. 그들은 스스로 회개할 생각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바보라서 자기를 깨끗하 게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기 시작했 고,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들을 등록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의 시사토론이었습니다. 잘했어요. 게이츠 선생님이 무턱대고 칭찬하듯 말하자, 세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교실 뒤쪽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누가 무엇을 했다는 거지? 게이츠 선생님이 인내를 가지고 물어보았다. 제 말은요, 히틀러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둘 수 있었냐는 거예요. 그건 전부 에서 못하게 해야 돼요. 히틀러가 곧 정부였어요, 전부가 아니고. 게이츠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곤 수업 분위기를 활기차게 하려는 듯 칠판으로 걸어갔다. 인쇄체 로 커다랗게 민주주의 라고 쓴 다음 소리내여 읽었다. 민주주의, 이말의 정의를 내려볼 사람? 저요. 난 언젠가 아버지가 말해준 캠페인 슬로건을 떠올리며 손을 들었다. 그래, 말해봐요, 진 루이스. 모든 이에게 평등한 권리가 주어지고, 특권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인용하여 대답했다. 잘했어요, 진 루이스. 정말 잘했어요. 게이츠 선생님이 미소지으며 민주주의 앞에 우리는 이라고 썼다. 자, 모두 함께 큰소리로 읽어봐요. 우리는 민주주의. 우리가 그것을 소리내어 읽자, 게이츠 선생님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독일은 달라요.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독일은 독재국가예요, 독재국가. 우리나라에 서는 누군가를 박해하지 않아요. 박해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편견. 선생님은 주의깊게 똑똑히 발음했다. 유태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민족인데, 왜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교실 중간쯤에서 미심쩍은 듯 누군가 물었다. 그럼 선생님께선 왜 그가 유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나도 모르겠어요, 헨리. 유태인은 세계 곳곳에서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있고, 그들 대부분이 깊 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에요. 히틀러는 종교를 멀리하고 있으니 아마 그것이 이유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때 세실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울렸다. 저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들은 돈을 바꾸거나 뭐 그런 걸 했다고 해서 박해하진 않았겠죠? 그들도 백인이잖아요, 그렇죠, 선생님? 세실, 네가 고등학교에 가면 유태인은 역사가 시작된 이후 그들 나라에서도 쫓겨나 박해를 받 아왔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다. 그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란다. 자, 여 러분, 이제 산수시간이에요. 나는 산수를 지독히도 싫어했기 때문에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엘머 데이비스가 라디 오를 통해 히틀러에 대한 최근 소식을 전했을 때, 아버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라디오를 거칠 게 꺼버렸었다. 내가 왜 그토록 히틀러를 증오하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었다. 그는 미치광이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교실에선 계속 산수문제를 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흥미가 없었으므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한 명의 미치광이와 수백만의 독일사람들 ,,, 그가 그들을 가두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그들이 그 를 가두면 될 텐데.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더이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나중에 아버지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꺼내보았지만 그 문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버지도 정확한 답 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히틀러는 미워해도 되는 거죠? 아니, 누구를 미워한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란다. 아빠, 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게이츠 선생님이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했어요. 히틀러 는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말씀하시며 얼굴이 새빨개지셨어요. 그러셨겠지. 하지만 ,,, . 하지만 뭐지? 아니에요, 아빠. 나는 내 생각을 설명할 자신도 없고 그 느낌을 정확히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그곳을 나왔다. 어쩌면 오빠가 그 해답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학교일에 대해선 오빠가 아버지보다 더 잘 이 해하고 있으니까. 오빠는 그날 물양동이 나르는 일로 완전히 지쳐버린 모습이었다. 그의 침대 밑에는 적어도 열 두 개 정도의 바나나 껍질과 빈 우유병이 흩어져 있었다. 이 쓰레긴 다 뭐야? 내가 물었다. 코치 선생님이 내 몸무게가 이십오 파운드 정도만 되면 내년엔 경기를 하게 해준다고 했어. 이게 가장 빠른 길인 것 같아. 물건들을 다 집어던질 만큼 화내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오빠한테 물어볼 것이 있는데 ,,, . 말해봐. 오빠는 책을 내려놓고 다리를 뻗었다. 게이츠 선생님은 좋은 분이지, 그렇지? 응, 나도 그 선생님 반일 때 좋아했어. 그런데 그 선생님은 히틀러를 아주 싫어하셔. 그게 어쨌다는 거야? 오늘 선생님은 히틀러가 유태인을 박해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 어. 오빠, 누구를 박해하는 건 나쁘지, 그렇지? 내 말은 그가 누구이건 상관없이 말이야, 그렇지? 물론이야, 스카웃. 너 뭐 잘못 먹었니? 오빤 못 봤겠지만 그날 밤 법정에서 나올 때, 게이츠 선생님이 우리 앞으로 내려가시며 스테 파니 크러포드 아줌마한테 얘기하는 소릴 들었거든. 그때 선생님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진실을 깨 우쳐줘야 할 시기라고 하셨어. 그들은 분수도 모르는 채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다면서 이젠 우리 와 결혼이라도 하자고 덤벼들 거라고 하셨거든. 오빠, 그처럼 끔찍하게 히틀러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나라 사람에겐 어떻게 그토록 야비할 수 있는 거야? 오빠가 갑자기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뛰어내려 내 칼라를 움켜잡고 흔들어댔다. 너 다시는 그 법정 얘기 하지 마, 절대로, 절대로,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냐구? 한 마디도 하지 말란 말이야, 알겠어? 나는 너무 놀라서 울 수조차 없었다. 괜히 건드려서 더이상 거칠어지지 않도록 슬며시 방을 나 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면서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거실로 내려가서 아버지 무릎 위로 기어올라갔다. 아버지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점점 자라고 있구나, 이젠 안아줄 수도 없는 걸. 그리곤 가까이 당겨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스카웃, 오빠 일로 너무 마음쓰지 말아라. 젬은 요즈음 힘든 과정을 보내고 있단다. 나도 다 들었다. 아버지는 오빠가 지금 무언가를 열심히 잊으려 하고 있다면서 충분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그가 하는 대로 잠시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했다. 오빠는 그것을 돌이켜 생각해보고 정리하면서 혼자 힘으로 극복해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27. 할로윈 축제 아버지 말씀대로 그 당시의 일들이 유행처럼 지나가자, 모든 나날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해 사월 중순쯤 메이컴에서 두 가지 조그만 사건이 일어났다. 엄밀히 얘기하면 세 가지였다. 세 번째 사건은 우리 핀치 집안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첫 번째는 봅 이웰 씨가 일자리를 잃은 것이었다. 그것은 1930년대의 역사에서 가장 희귀한 일 이었다. 게으르다는 이유로 공사기획청에서 해고당한 사람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얻 었던 명성이 짧게 끝나버린 것만큼이나 그의 일자리는 오래 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웰 씨 자신도 톰 로빈슨만큼 잊혀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듯했다. 그는 복지연금을 받기 위해 매주 정기적으로 복지관리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도 고마워하는 마음은커녕 마을을 이끌어간다는 사람들이 선량한 시민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조차도 못하게 한 다고 투덜거리며 연금을 타갔다. 어느 날 그 복지관리소에 근무하는 루스 존스라는 여직원이 아버지가 계속 일하게 된 것에 대 해 이웰 씨가 공공연하게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는, 당황하여 아버지의 사무실로 내려와 그 얘기 를 전했다. 아버지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만약 봅 이웰이 그 일에 불만을 가지고 따지려 한다면 아버지 사무실을 알 테니 언제든지 오면 될 거라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두 번째 사건은 테일러 판사의 집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요일 밤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으 로 알려져 있었다. 그날도 부인만 가고 혼자 서재에 앉아 봅 테일러의 글을 읽고 있었다. 봅 테일 러가 그의 친척은 아니었지만, 그와 성이 같아서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풍 부한 유머감각과 화려한 미사여구에 한참 잠겨 있는데 주의력을 흐트러뜨리는 긁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 판사는 살만 찌고 별다른 특징도 없는 개, 앤 테일러에게 소리쳤지만, 텅 빈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소리는 뒤쪽 현관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테일러 판사는 앤 테일러를 내보내려고 흠흠 거리며 뒷현관으로 갔다. 그런데 미닫이 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고, 집 저쪽에서 그림자가 언뜻 사 라져버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테일러 부인이 돌아와보니 남편은 무릎 위에 산탄총을 얹어놓은 채 봅 테일러의 글에 열중해 있더라는 것이다. 세 번째 사건은 톰의 미망인인 헬렌 로빈슨에게 일어났다. 톰 로빈슨은 부 래들리만큼 잊혀져 갔지만, 톰을 고용했던 링크 디스 씨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데 헬렌에게 일자리를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칼퍼니아 아줌마는 헬렌이 일하러 나가면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집 일을 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웰 집을 피해 가려면 일 마일은 더 돌아야 했던 것이다. 어느 날 링크 디스 씨는 그녀가 엉뚱한 방향에서 오는 걸 눈치채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냥 내버려두세요, 링크 주인님. 제발요. 헬렌이 애원하듯 대답했다. 그 못된 인간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링크 씨는 아주 단호하게 말하며 헬렌에게 집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가게에 들르라고 일렀다. 그날 저녁 가게문을 닫은 링크 씨는 모자를 단단히 눌러 쓰고 이웰 집을 지나는 지름길로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미치광이네 집 문 앞에 서서 소리쳤다. 이웰! 인기척이 없었다. 이웰 있나? 항상 아이들로 가득하던 창문이 텅 비어 있었다. 난 너희 끝엣놈 한 놈까지도 마루에 엎드려 있다는 걸 안다. 봅 이웰, 똑똑히 들어라. 만약 헬 렌에게 이 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소리를 한 번만 더 들으면 해가 지기 전에 널 감옥으로 보내버릴 테다. 링크 씨는 어둠 속에서 침을 뱉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헬렌은 그 지름길을 거쳐 일터로 갔다. 그런데 이웰 집을 몇 발자국쯤 지나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이웰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계속 걸었고,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 고 링크 디스 씨 집까지 따라왔다. 따라오는 동안 내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낮은 소리로 퍼 부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무서워 링크 씨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까이에 있는 그의 가게 로 전화했다. 링크 씨가 달려오자, 이웰이 울타리에 기대서서 빈정거렸다. 뭐 더러운 오물이라도 보듯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마슈. 난 뛰어들지 않았다구 ,,, . 이웰, 너 이놈. 당장 그 더러운 몸뚱이를 내 집 울타리에서 떼어내라. 난 페인트를 다시 칠할 돈이 없어. 그리고 우리집 요리사에게 멀리 떨어져라, 이놈. 그렇지 않으면 당장 폭행죄로 고소할 테다. 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 ,,, 링크 디스, 난 검둥이 근처엔 절대로 가지 않아. 만약 폭행죄가 적용될 수 없다면 여성법에 의해서라도 널 당장 처넣어버리고 말겠다. 그러니 내 눈앞에서 썩 꺼져라. 말이 말 같지 않으면 어디 또 그 여자를 귀찮게 해봐라. 이웰 씨는 결국 그 말이 진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더이상 헬렌을 뒤쫓지 않았다. 정말 소름끼쳐요, 오빠, 정말로. 이 사건에 대한 고모의 소감이었다. 그 재판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 대한 끝없는 악의가 아닐까요? 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원한 을 품으면 어떻게 푸는지 알아요. 하지만 법정에서도 제 뜻대로 다 해놓고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안 그래요? 난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메이컴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와 마옐라가 꾸민 거짓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걸 그 들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일 거야. 아마 영웅이 될 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가 수고한 대가는 ,,, 그렇지, 좋아. 우리는 이 검둥이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넌 다시 쓰레기더미로 돌아가 라, 이런 식이지. 결국 그는 모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으로 위안받을 수밖에 없을 거야. 시 간이 지나면 조금 가라앉겠지. 그런데 그는 왜 존 테일러 판사님 댁을 침입하려 했을까요? 판사님이 집에 안 계실 거라고 생 각했거나, 집 안까지 들어가려고 한 건 아닌 게 분명해요. 일요일 밤엔 앞 현관과 서재에만 불이 켜져 있었을 텐데 ,,, . 봅 이웰이 미닫이 문을 부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물론 다른 사람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웰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증명했듯이 존 그분은 그를 바보로 만드셨거든. 이웰이 증인석 에 앉아 있었을 때 난 감히 존 판사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 그분은 이웰이 마치 세 발 달린 닭 이나 네모난 달걀이라도 되듯 쳐다보셨거든. 그리곤 배심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지 나를 재 판장이라 부르지도 말고 당신들도 그런 편견을 가진 배심원 노릇은 하지 마시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껄껄 웃었다. 시월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신나게 놀고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에게 익숙해 있던 일상의 질서 를 되찾았다. 오빠는 무엇을 잊으려고 애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있는 듯 보였고, 고맙게도 우리반 아이들은 아버지의 괴벽스러움을 잊게 해주었다. 어느 날 세실 제이콥은 아버지가 급진파가 아니냐고 내게 물어왔다. 그 얘기를 아버지에게 전 하자 아버지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나를 더욱 애타게 했음을 알아채고는 나를 비웃는 게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녀석에게 가서 난 코튼 톰 헤플린만큼이나 과격파라고 일러주렴. 알렉산드라 고모의 선교모임은 점점 잘 돼가고 있었다. 고모가 다시 리드하게 된 걸 보면, 머디 아줌마가 그 선교단체 사람들을 잘 무마시켰음이 틀림없다. 회합 때 차려내오는 음식도 더욱 맛 있어졌고, 나는 그 불쌍한 므루너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메리웨더 부인으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로 가족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는 듯했다. 다만 종족 전체가 하나의 큰 가족이 되어 모든 남자 어른들은 아버지 역할을 하고, 여자들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풍습을 바꿔보려고 그림스 에버리트가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절실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메이컴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지난해, 그 지난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메이컴다운 모습이었다. 단지 두 가지의 작은 변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가게 창문이나 자동차에 붙어 있던 N. R. A. 우리 일은 우리가 라고 씌어진 스티커를 떼어낸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묻자, 아버지는 국가재건운동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누가 결정한 일이냐고 다시 물었고, 아버지는 아홉 명의 높은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대답해주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정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지난해에 일어났다. 그때까지 메이컴에서 는 할로윈 축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기껏해야 아이들이 말 보관소 꼭대기에 벌레투성이의 전등을 걸어놓거나, 서로 힘을 모아서 무거운 것들을 옮겨놓는 등의 놀이를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장난이 너무 지나쳐서 투티 여사와 프루티 여사의 평온을 산산이 부숴놓고 말았다. 투티와 프루티 바버 여사의 본명은 사라와 프란시스로 자매 사이였다. 둘 다 미혼으로 지 하실이 있는 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유별난 사람들이었다. 공화당으로 소문난 바 버 자매는 1911년 앨라배마 클랜턴에서 이주해왔다. 그녀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좀 생소하게 느껴 졌다. 메이컴에서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지하실이 딸린 집을 찾아내 결국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아 이들도 없이 단둘이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투티와 프루티 여사가 북부 사람들과 같은 방식대로 사는 것은 별문제라 치고, 둘은 귀 머거리였다. 투티 여사는 그것을 철저히 부정하여 침묵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프루티 여사는 달랐 다. 나팔모양의 커다란 보청기를 사용하여 어떤 이야기도 놓치지 않았다. 오빠는 그 보청기가 빅 트롤라 축음기에서 나온 확성기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심술궂은 아이들은 할로윈이 다가오자 바버 자매가 완전히 잠들 때까 지 기다렸다가 거실로 살며시 들어가서 가구들을 전부 빼내어 지하실에 숨겨놓았다. 메이컴에서 는 래들리 집을 제외하곤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런 일에 합세하는 걸 거절했었다. 다음날 바버 자매는 이웃들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다 들었어. 2말발굽들이 땅을 울려대듯 트럭을 문에 들이대는 소리를 들었다구. 지금쯤 뉴올리언스로 도망갔을 거야. 투티 여사는 이틀 전에 마을을 지나간 떠돌이 모피장수가 가구를 훔쳐 갔을 거라고 확신했다. 흉악한 시리아인들 같으니라구! 얼마 후 헥 테이트 씨가 와서 그 구역을 검사한 뒤 마을사람의 소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 자 투티 여사는 메이컴 사람의 목소리라면 전부 다 알고 있다면서 그날의 목소리는 메이컴 사람 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메이컴의 경찰관이 잃어버린 가구를 찾아낼 거라고 했다. 그녀 는 말할 때마다 혀를 몹시 굴려댔다. 테이트 씨는 어쩔 수 없이 십 마일 정도 변두리로 나가 그 동네 사냥개를 데려와서 그들을 뒤쫓게 했다. 그런데 테이트 씨가 바버 여사 집 앞계단에서 출발시켰던 사냥개들은 집 뒤쪽을 뛰어다니며 지 하실 문 앞에서 짖어대기만 했다. 세 번째 개까지 풀어놓고서야 비로소 테이트 씨가 사건을 추리 하게 되었다. 그날 메이컴의 아이들은 정오까지 맨발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사냥개들이 돌아갈 때까지 아무도 신발을 벗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메이컴의 여자어른들은 아무래도 올해에는 무슨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논의한 끝에 고등학교 강당에서 마을 축제를 열기로 했다. 사과 따먹기, 엿가락 늘이기, 당나귀 꼬리에 집게 꽂기 등의 아이들 놀이와 일등 한 사람에게 이십오 센트의 상금이 주어지는 할로윈 의상쇼 를 벌이게 되었다. 오빠와 나는 신음소리를 내듯 끙끙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축제에 놀이가 기본이라지만 우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들이야. 어찌됐거나 오빠는 할로윈에 참여하기에는 자기는 너무 컸다면서 중학생들에겐 아무 흥미도 없 는 놀이들이라고 말했다. 결국 날 데려가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나는 연극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메리웨더 여사는 메이컴 아드 아스트라 페르 아스페라 라는 제목이 붙은 최초의 연극을 연출했다. 나는 햄으로 분장했다. 그녀는 이 지방의 농산물을 나타내는 의상을 아이들에게 입히는 것이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실 제이콥은 암소로 분장했고, 아그네스 분은 귀여운 완 두콩으로, 또 다른 아이는 땅콩으로 ,,, . 메리웨더 부인은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여 모든 아이들에 게 연극의상을 입혔다. 두 차례의 총연습으로 정리해본 결과, 우리의 유일한 의무는 작가도 해설자도 아닌 메리웨더 부인의 확인을 받고 무대 왼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돼지 라고 부르면 그것이 내가 등 장할 차례라는 신호였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무대 위에 다 모이면 메이컴, 메이컴, 우리는 그 대에게 언제까지나 진실하리라 를 노래함으로써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고, 곧이어 메리웨더 부인이 우리 마을의 깃발을 들고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막이 내리는 것이었다. 내 의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재봉사인 크렌셔 아줌마가 메리웨더 부인만큼이나 상상력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크렌셔 아줌마는 철사를 이용해서 햄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갈색 천을 씌 운 다음 페인트칠을 하여 진짜 햄처럼 보이게 했다. 내가 그 속으로 가볍게 들어가자 누군가 그 기묘한 의상을 아래로 끌어내려 주었다. 옷은 내 무릎까지 내려왔다. 크렌셔 부인은 자상하게도 밖을 볼 수 있도록 왼쪽에 구멍을 내주었다. 정말 멋진 의상이었다. 오빠는 진짜 햄에 다리가 달린 것 같다고 말해주었지만, 몇 가지 불편한 점은 있었다. 그 안은 더웠고 몸에 너무 달라붙어 있어서 코가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할로윈이 시작되면 모든 가족들이 나를 보기 위해 공연장에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 맘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재치를 발휘하여 오늘밤 축 제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일주일 동안 몽고메리로 출장갔다가 그날 오후 늦게 야 돌아올 거라며 오빠가 함께 가줄 거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라 고모까지 오후 내내 무대장치를 하느라고 완전히 지쳐서 일찍 누워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다시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을 열 듯 했지만 아무 소리도 하 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고모? 음,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괜히 소름이 끼치는구나. 고모는 날카롭게 전해오는 예감을 떨쳐버리며 가족들 앞에서 총연습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오빠가 내게 의상을 씌워주고 거실문에 서서 메리웨더 부인이 하던 것처럼 돼지 라고 불렀다. 난 그 소리에 맞추어 거실로 행진해 들어갔다. 아버지와 알렉산드라 고모는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칼퍼니아 아줌마를 위해 부엌으로 가서 또 한 번 행진을 했고, 그녀도 훌륭하다 고 말해주었다. 나는 길 건너 머디 아줌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지만, 오빠가 아줌마는 그 공연장 에 꼭 올 거라고 했다. 한바탕 행진을 하고 나니 가족들이 공연장에 오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졌다. 오빠가 날 데려다 주면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28. 오빠의 비명소리 시월의 마지막 날은 유난히 따뜻했다. 재킷조차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할로윈에 참석하러 갈 때쯤엔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고 있었다. 오빠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따라 달도 보이지 않았다. 길모퉁이의 가로등은 래들리 집 위로 뾰족한 그림 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빠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밤엔 아무도 저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오빠는 나의 햄 의상을 어설프게 들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남자다워보였다. 정말 으스스한 곳이야, 그렇지? 부는 누군가를 해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가 같 이 가줘서 다행이야. 아버지는 절대로 널 혼자 보내시진 않아.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바로 저 모퉁이를 돌아서 운동장만 건너면 되는데. 자 운동장은 밤중에 너처럼 조그만 여자아이가 혼자서 가기엔 꽤 긴거리거든. 오빠가 나를 쿡쿡 찌르며 장난쳤다. 너 유령이 겁나지 않니? 우린 웃었다. 유령, 달걀귀신, 몽당귀신, 마귀 따위는 태양이 떠오르면서 안개가 걷히듯이 언젠 가는 사라질 것들이었다. 그 옛날 일들 말이야 ,,, . 오빠는 일부러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사의 빛이여, 삶과 죽음의 길에서 사라져라. 내 숨을 빨아들이지 말아다오 ,,, . 그만해. 어느덧 우리는 래들리 집 앞에 있었던 것이다. 부는 집에 없을 거야. 잠깐, 저 소릴 들어봐. 오빠가 말했다. 어둠 속 저편에서 외로운 앵무새가 나무에 앉아 행복을 모르는지 목청껏 노래하고 있었고, 해 바라기새의 날카로운 키키 소리와 어치새의 성미 급한 쿠아악소리가 푸윌푸윌 하며 우는 푸어윌 새의 슬픈 애도에 답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다가 나는 땅 위로 뻗어 있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오빠는 나를 잡아주 느라 햄 의상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길 옆으로 돌아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칠흑같이 캄캄한 날이었다. 오빠, 여기가 어디야? 몇 발자국 떼어놓고 나서 내가 물었다. 떡갈나무 아래야. 다른 곳보다 시원하잖아. 조심해, 또 넘어지지 않게. 우리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나무는 짝이 없 는 오래된 떡갈나무였다. 두 아이가 마주보고, 양팔로 나무를 끌어안아도 서로 손이 닿지 않을 만 큼 우람했다. 그 나무는 선생님, 탐정꾼들, 호기심 많은 이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물론 래들리 집과는 가까이 있었지만, 래들리는 그 나무에 아무런 호기심이 없었다. 땅속으로 뻗은 가 는 뿌리들은 온갖 싸움과 열매 감추기 놀이 등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멀리 고등학교 강당에서 불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불빛이 눈앞을 더욱 캄캄하게 만들었다. 앞을 보지마, 스카웃. 오빠가 말했다. 땅을 보고 걸어야 안 넘어져. 손전등을 가져올 걸 그랬어, 오빠. 이렇게 어두울 줄은 몰랐는데 초저녁에 이렇게 어두운 건 처음 봤어. 구름이 너무 많이 꼈나 봐. 그래서 그런 거야. 좀더 가보자. 그때 누군가 우리 앞에 뛰어들었다. 어휴, 맙소사! 오빠가 소리쳤다. 불빛이 우리의 얼굴 위로 부서졌다. 세실 제이콤이 신바람이 나서 뛰어나왔 다. 하하, 잡았다! 이 길로 올 거라고 생각했지. 세실은 키득거리며 소리쳤다. 여기서 너희들끼리 뭘 하는 거니? 부 래들리가 겁나지 않니? 세실은 부모님과 함께 자동차로 강당까지 안전하게 갔다가, 우리를 찾느라 이 멀리까지 모험을 하며 내려온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이 길로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일 거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쳇, 저쪽 모퉁이만 돌면 되는데 뭐. 누가 저런 걸 겁낼 줄 아니? 오빠가 큰소리치듯 말했다. 세실이 우리를 놀래키기는 했지만 그가 있어서 훨씬 좋았다. 그의 손전등으로 학교건물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건 세실의 특권이었다. 너 오늘 암소 할 거지? 옷은 어디다 뒀니? 내가 물었다. 무대 뒤쪽에. 세실이 대답했다. 메리웨더 아줌마가 그러시는데 지금 당장 시작하지는 않을 거래. 네 옷도 내것하고 같이 놔둬, 스카웃. 이제 다른 애들한테 가보자. 이것은 오빠에게도 아주 근사한 제안이었다. 오빠 역시 세실과 내가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으로 오빠는 자기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도착해보니 아버지와 무대장치로 지치신 고모, 추방당했거나 갇혀 있는 사람을 빼고는 온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복도는 한껏 멋낸 시골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 고등학교 건 물 아래층엔 넓은 강당이 있었는데, 그 양쪽을 따라 설치된 매점 주위에 사람들이 한데 몰려 있 었다. 어휴, 오빠, 나 돈을 안 가져왔어. 난 그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빠가 주시지 않았구나. 여기 삼십 센트야. 여섯 가지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이따가 만나자. 좋아. 나는 삼십 센트와 세실에 매우 만족해 하며 말했다. 그리곤 세실과 함께 강당 가운데로 내려가 문을 열고 무대 뒤로 갔다. 메리웨더 부인이 마지막 장면을 연습하느라고 낭독대(lectern) 앞에 있 었기 때문에 나는 햄 의상을 놓고 서둘러 떠났다. 넌 돈이 얼마나 있니? 나는 세실에게 물었다. 그애도 삼십 센트가 있었으므로 우린 서로 공평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 돈을 가장 먼저 공포의 집 에 써버렸다. 그곳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 공포의 집은 칠학년 교 실을 깜깜하게 하여 신체 각 부위의 모형을 늘어놓아 귀신이라도 된 듯 그것들을 만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눈깔. 우리는 접시에서 껍질이 벗겨진 두 개의 포도알을 만지며 말했다. 여기가 심장. 그것은 날간인 것 같았다. 이것이 내장인가봐. 우리는 차가운 스파게티 쟁반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세실과 나는 칸막이를 차례로 돌다가 테일러 판사 부인이 만든 성경 주머니를 샀다. 나는 사과 절임을 사먹고 싶었지만, 세실이 그건 비위생적인 식품이라고 말렸다. 그의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한 그릇에 있는 음식을 여럿이 먹는다는 건 비위생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부정했지만, 세실 은 막무가내였다. 훗날 이 문제에 대해 고모한테 얘기하자, 고모는 그런 생각은 상류사회로 끼여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말했다. 우리가 설탕과 버터, 땅콩 등을 함께 넣고 졸여 만든 태피사탕을 사려 할 때 누가 와서 메리웨더 부인이 무대 뒤에서 부른다고 전했다. 준비할 시간이 되었던 것 이다. 강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메이컴 고등학교 밴드가 무대 아래쪽에 정렬해 있었다. 무 대조명이 켜지고 빨간 벨벳 커튼이 물결을 일으키며 뒤쪽으로 종종걸음 치듯 들어가버렸다. 세실과 나는 무대 뒤에서 좁은 복도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는 걸 보았다. 어른들은 집에서 만든 고깔 모자, 남부연합군 모자, 스페인미국전쟁 모자, 그리고 세계대전 헬멧 등을 다양하게 쓰 고 있었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 농산물 의상을 입고 작은 창문 아래 모여 있었다. 빽빽히. 누가 내 의상을 짓눌러놨어. 나는 낭패스럽게 울부짖었다. 메리웨더 부인이 내게로 달려와서 철사를 펴서 모양을 가다듬은 다음 나를 안쪽으로 밀어넣어 주었다. 괜찮니, 스카웃? 네 목소리가 멀리 들려서 꼭 반대편 언덕에 있는 것 같아. 세실이 말했다. 네 목소리도 가깝게 들리진 않아.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시작되자, 우리는 청중들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큰북이 울렸 고, 동시에 밴드 옆 낭독대 뒤에 서 있던 메리웨더 부인이 외쳐댔다. 메이컴, 아드 아스트라 페르 아스페라. 큰북이 다시 쿵쾅거리며 울려퍼졌다. 이 말은 진흙에서 빛나는 별까지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해석까지 했다. 축제! 메리웨더 부인은 불필요하게 덧붙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저렇게 해주지 않으면 모를 거야. 세실이 속삭이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마을사람들 모두 그 정도는 알아. 내가 속삭였다. 하지만 시골사람도 왔잖아. 그뒤 좀 조용히 해. 앞쪽에서 어떤 남자가 명령하는 소리에 우리는 말을 멈추었다. 메리웨더 부인이 메이컴의 역사 에 대해 낭독할 때마다 큰북이 울려댔고, 그녀는 메이컴이 그 주보다도 오래되었음을 과장되게 칭송했다. 메이컴은 미시시피와 앨라배마 주에 걸쳐 있었다. 그 처녀림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유언검인 재판관의 증조부로 다섯 번이나 이주했지만, 그것은 결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 다음 대담한 메이컴 육군 대령이 나타남으로 해서 메이컴이란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앤드류 잭슨은 그를 관료로 임명했지만, 메이컴 대령의 지나친 자신감과 빈약한 방향감각은 크 릭스 인디언 전쟁에서 그를 추종한 모든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메이컴 대령은 자신의 영토만큼은 민주주의로 안전하게 지키고자 끝까지 노력했지만, 그것은 첫 번째 시도로 끝나고 말 았다. 그의 지령은 절친한 인디언에 의해 교대로 전달되어 마침내 남쪽까지 전해졌다. 그런 다음 남쪽 방향을 표시하기 전에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 부하가 과감히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나 메이컴 대령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적진을 향해 단호히 진격해나갔다. 결국 그의 기병중대 는 북서쪽 숲에서 우왕좌왕 헤매다가 이주자들에 의해 구출되어 내륙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메리웨더 부인이 삼십 분 동안 메이컴 대령의 업적을 낭독하는 사이에, 나는 무릎 을 굽혀 의상 안으로 몸을 밀어올리면 앉을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메리웨더 부인과 웅 웅대는 큰북 소리를 들으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서 메리웨더 부인이 맨 마지막 부분에 가장 신경썼다고 전해들었다. 한참 잠 에 빠져 있는데 그녀가 낮은 소리로 불렀던 것이다. 돼지! 소나무와 완두콩이 신호에 맞춰 제때 입장한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조그맣게 부른 것이었다. 돼지. 몇 초 후 다시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돼지! 나는 꿈결에 그 소리를 들었거나, 아니면 밴드가 연주한 쾌활한 딕시음악에 잠을 깬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나타나야 할 때를 잘못 선택하고 말았다. 메리웨더 부인이 마을의 깃발을 들고 잘난 체하며 무대 위로 올라갔을 때에야 입장을 시작하여 앞장선 아이들을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했으 니 말이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때 테일러 판사는 내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웃다가 무릎을 너무 세게 쳐서 부인이 물과 알약을 갖다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메리웨더 부인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환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대 뒤에서 나를 잡고는 내가 연극을 망쳐놓았다고 말해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선 내 의상이 잘 보이지도 않더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오빠는 정말로 동정심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의상 안에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 는 듯 조금 늦게 입장한 것뿐이라며 괜찮았다고 말해주었다. 오빠는 내 실수에 대해 거의 아버지 만큼이나 자상하게 위로해주었다. 오빠는 내 입장을 생각해서 군중 속을 뚫고 가지 않도록 무대 뒤에서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너 그거 벗을래, 스카웃? 아니, 그냥 입고 있을래. 옷으로 얼굴을 가리면 덜 창피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모두 집에 태워다줄까? 누군가 물어왔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걸으면 돼요. 유령을 조심해라.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유령에게 스카웃을 조심하라는 편이 낫겠지. 이제 거의 돌아갔어, 우리도 가자. 오빠가 내게 말했다. 우리는 강당을 가로질러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왔다. 여전히 어두었다. 남은 차들이 건물 맞 은편에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하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가 있다면 뭐가 좀 보이겠는데. 오빠가 말했다. 여기야, 스카웃. 너, 넘어질지도 몰라. 괜찮을 것 같아. 응, 그래도 조심해. 오빠가 햄의 꼭대기 부분을 잡았다. 오빠가 날 잡고 있는 거야? 응? 으응 ,,, . 우리는 칠흑 같은 학교 마당을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발을 보기 위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빠, 나 무대 뒤에다 신발을 두고 왔는데 ,,, . 그래? 다시 가지러 가자. 우리가 돌아서는 순간 강당불이 꺼지고 말았다. 내일 찾아야겠다. 하지만 내일은 일요일이잖아. 오빠가 나를 집쪽으로 끌어당겼지만, 난 계속 우겨댔다. 수위 아저씨한테 들여보내달라고 하자 ,,, . 스카웃? 응? 아무 것도 아니야. 오빠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나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의아했지만 집에 도착 하면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빠의 손가락이 내 의상 꼭대기를 누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 세게. 그렇게 느껴졌다. 나 는 머리를 흔들었다. 오빠, 그럴 필요 ,,, . 조용히 해봐, 스카웃. 오빠가 말하며 나를 눌렀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걸었다. 조금 아까 무슨 생각했어? 나는 오빠를 쳐다보았지만 윤곽만이 겨우 보일 뿐이었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 잠깐 서봐. 우리는 멈춰섰다. 무슨 소리 들렸지? 아니. 오빠는 다섯 발자국도 못 가서 다시 나를 세웠다. 오빠, 나 겁주려고 그러지? 난 안 속아 ,,, . 조용히 해봐. 그제서야 난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적막한 밤이었다. 오빠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갑작스런 미풍이 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바람이 거세게 불어올 징조였고, 천둥을 동반 한 비가 내리기 전의 정적임을 알 수 있었다. 길 잃은 개가 내는 소리였을 거야. 아니야, 우리가 걸어가면 들리고 멈추면 그쳐. 내 의상이 부스럭거리는 거야. 어휴, 할로윈으로 모두 정신이 나갔어 ,,, . 나는 오빠에게라기보다 나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난 오빠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내 의상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 ,,, 세실일지도 몰라. 오빠가 유쾌하게 말했다. 이번엔 속지 말자. 우리가 허둥대는 꼴을 보여주지 않는 거야. 우리는 천천히 기듯 걸어갔다. 나는 오빠에게 세실이 이런 어둠 속에서 어떻게 우리를 알아보 고 따라올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그 아이가 갑자기 뒤에서 쿵 하고 뛰쳐나오기라도 한 듯 쳐다보았다. 맞아, 스카웃. 오빠가 말했다. 어떻게? 난 모르겠어. 네 의상에 굵은 줄이 보여. 크렌셔 부인이 야광칠을 한 게 분명해. 아까 무대조명에 그것이 빛 났었거든. 그래서 세실은 멀리서도 널 잘 볼 수 있었을 거야. 난 세실에게 그가 우리 뒤에 숨은 걸 알고 있고, 그래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 다. 세실 제이콥은 물에 빠진 생쥐! 나는 홱 돌아보며 소리질렀다. 우리는 멈추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생쥐란 소리만이 멀리 학 교 건물벽에 부딪쳐 되울려나왔다. 내가 해볼게. 오빠가 말했다. 헤이 헤이 헤이, 메아리가 울려왔다. 세실이라면 그렇게 오래 끌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놀리면 재빨리 반응했을 텐데 ,,, . 우리는 이미 뛰어가고 있었다. 오빠가 내게 또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 다. 스카웃, 너 그거 벗을 수 있겠니? 오빠가 조용히 속삭였다. 응, 하지만 옷을 안 입었어. 여기 네 옷이 있어. 너무 캄캄해서 입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좋아, 됐어. 오빠, 무서워? 아니, 거의 나무 있는 데까지 온 것 같아. 몇 미터만 더 가면 길이 나올 거야. 거기에 가로등 도 있구. 오빠는 서두르지도 않고 침착하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마나 더 세실의 장난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노래 불러도 돼, 오빠? 안 돼, 정말 조용히 해야 돼, 스카웃. 우리는 걷는 속도를 빨리 하지 않았다. 오빠는 발을 완전히 땅에 대지 않은 채 돌부리를 피하 며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고, 게다가 난 맨발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뭇잎 이 살랑대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날 밤은 바람도 없었고 떡갈나무 외엔 별다른 나무도 없었다.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은 마치 무거운 신발을 신은 것처럼 발을 끌며 짧게 내딛고 있었다. 그가 누구이든 면바지를 입었을 것이다. 내가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소리는 면과 면이 스치는 소리로, 발자국을 뗄 때마다 휙휙거렸다. 차가운 모래가 발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난 떡갈나무 아래에 와 있다는 걸 알았다. 오빠가 내 머리를 눌렀다. 그리곤 멈춰서서 우리를 따라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을 끌며 짧게 내딛는 소리가 이번엔 우리와 함께 멈추지 않았다. 바짓자락이 스치는 휙휙 소 리가 부드럽게 꾸준히 들려왔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더니 다시 우리를 향해 계속 뛰어오는 것이 었다. 그건 아이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뛰어, 스카웃! 뛰어, 뛰어! 오빠가 소리쳤다. 나는 거대한 발자국에 잡혀서 낚싯줄에 감기듯 끌려갔다. 내 팔은 아무 쓸모 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중심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오빠, 도와줘, 오빠! 무언가가 내 철사옷을 짓이겼다. 쇠붙이까지 잘라졌으므로 나는 땅바닥에 넘어져 있는 힘을 다 해 굴렀다. 나는 철사감옥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가까운 곳 어딘가에서 발을 끄는 소리, 발길질하는 소리, 구둣소리, 그리고 흙과 나무뿌리에 살갗이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내 옆으로 굴러왔다. 난 오빠란 걸 알았다. 오빠는 번개처럼 일어나 나를 잡아당겼지만, 내 머리와 어깨가 햄 의상에서 풀려났음에도 나는 너무나 얽혀 있어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거의 도로 쪽까지 뛰어왔을 때, 나는 오빠의 팔이 내게서 떨어져나가 땅바닥으로 거칠 게 잡아당겨지는 걸 느꼈다. 곧이어 발을 끌며 내딛는 소리, 무언가 꺾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 고 오빠가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비명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다가 축 늘어진 남자의 배와 부딪쳤다. 헉! 그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난 철사뭉치로 단단히 얽혀 있었다. 그 배는 부드러웠지만 팔은 강철 같았다. 그는 천천히 나를 누르면서 숨통을 막았다. 나는 꼼짝할 수가 없 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뒤쪽으로 젖혀지더니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오빠가 일어났다 고 생각했다.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던 순간이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때론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로 난 거 의 벙어리가 된 채 서 있었다. 발을 짧게 끌며 내딛는 소리가 끝났다.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 ,,, 그리고 밤은 다시 정적에 묻혔다. 잠시 후 아직도 누군지 모를 남자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무 로 가서 기대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독하게 기침을 해댔다. 흐느끼는 듯한, 뼈가 흔들릴 정 도의 기침이었다. 오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남자의 무거운 숨소리만이 계속되었다. 오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 남자는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 주위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신음소리를 내며 무언가 무거운 것을 땅바닥에 끌어올렸다. 지금 나무 아래엔 네 사람이 있다는 것이 천천히 느껴져왔다. 아빠 ,,,? 그 남자는 휘청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길 쪽으로 옮겼다. 나는 오빠가 있을 법한 곳을 발끝으 로 짚으며 나아가다 미칠 듯 놀랬다. 누군가가 발끝에 와닿아 있었던 것이다. 오빠? 나의 발끝은 벨트 버클, 단추, 칼라를 짚어나갔다. 무언가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얼굴의 억센 수염이 오빠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썩은 위스키 냄새가 났다. 나는 도로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몸을 너무 돌려대느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결국 도로를 찾았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남자가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 다. 그 남자는 일정하게 끊어지는 듯한 발걸음으로 너무도 무거워보이는 누군가를 들고 가는 것 이었다. 모퉁이를 돌고 있었고, 들려 있는 건 오빠였다. 오빠의 팔이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모퉁이로 갔을 땐, 그 남자는 우리집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버지가 보 였고, 계단을 뛰어내려와서 오빠를 안으로 데려갔다. 내가 문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복도 안으 로 들어가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고모가 뛰어와 나를 안았다. 레이놀드 선생님을 불러! 아버지의 목소리가 오빠방에서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스카웃은 어디 있나? 여기 있어요. 고모가 큰소리로 외치고 나를 바짝 잡아당기며 전화기로 다가갔다. 고모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힘껏 끌어당겼다. 고모, 전 괜찮아요. 전화 하세요. 율라 메이? 레이놀드 선생님 좀 연결해줘요. 빨리, 급해요. 아그네스, 아빠 집에 계시니? 오, 하나님,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니? 돌아오시는 대로 이곳에 좀 오시라고 해주렴, 급하단다. 메이컴 사람들은 서로들 목소리를 알고 있어서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가 오빠방에 서 나왔다. 아버지는 고모가 내려놓으려는 수화기를 받아들고 훅을 거칠게 누르고 말했다. 율라 메이, 보안관 좀 대줘요. 헥? 애티커스 핀치요. 누군가 내 아이들을 덮쳤소. 젬이 다쳤어. 여기서부터 학교 사이인 것 같소. 난 내 아들 곁을 떠날 수가 없으니 당신이 그곳에 범인이 아직 있나 살펴주시오. 그를 찾게 될진 모르지만 난 그 작자의 얼굴이라도 좀 봐야 겠소. 수고해주시오, 헥. 아빠, 오빠가 죽었나요? 아니다, 스카웃. 이 아일 보살펴줘, 알렉산드라. 아버지는 복도로 내려가며 큰소리로 부탁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내 몸에 엉켜 있는 찌그러진 햄 의상 몸통과 철사를 풀어주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니, 우리 스카웃? 고모는 나를 풀어주며 묻고 또 물었다. 마침내 마음이 안정되자 팔이 쿡쿡 쑤시기 시작했고, 육각형의 빨간 자국이 조그맣게 찍혀 있 었다. 나는 그 자국을 문지르는 것으로 기분이 좀 나아졌다. 고모, 오빠가 죽었나요? 아니, 아니다. 의식을 잃었단다. 레이놀드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는 얼마나 다쳤는지 모른단다, 진 루이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저도 모르겠어요. 고모는 더이상 묻지 않고 내게 입힐 것을 가져왔다. 이 옷을 입으렴. 난 그때 고모의 착시현상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고모가 가장 경멸했던 옷을 내게 건네주 었던 것이다. 고모는 오빠방으로 급히 뛰어갔다간 다시 내게로 와서 넋이 나간 듯 내 등을 두르리다 다시 오 빠방으로 갔다. 자동차가 우리집 앞에 멈추었다. 곧이어 아버지 발 소리와 거의 흡사한 레이놀드 선생님의 발 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오빠와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주었고 오빠가 나무집 위에서 떨어 졌을 때를 비롯하여 아기 때부터 우리를 질병에서 구해주었다. 그리고 한 번도 우리와의 우정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 레이놀드 선생님은 커다란 종기가 나면 우리 키가 한 뼘은 자랄 거라 고 했지만 우린 그 얘기를 믿지 않았다. 레이놀드 선생님이 문으로 들어오며 안부부터 물었다. 괜찮은가? 그리곤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다니 ,,, .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돌아섰다. 그는 우리집의 방들을 알고 있었으며, 내가 시원치 않을 때는 오빠도 그렇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영원히 이어질 듯한 십 분이 지나고 레이놀드 선생님이 되돌아왔다. 오빠가 죽었나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내게 몸을 구부리며 따뜻하게 말해주었다. 오빠는 너처럼 머리를 쾅 부딪혔고, 팔이 부러졌단다. 스카웃, 저쪽을 쳐다봐라. 아니, 머리는 돌리지 말고 눈만 굴려봐. 자, 저길 쳐다봐라. 오빠는 아주 심하게 부러졌단다, 팔꿈치를 말이다. 마치 누군가가 팔을 비틀어서 꺾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 . 자, 이젠 날 쳐다보렴. 그런데도 안 죽어요? 그럼. 레이놀드 선생님이 일어나며 대답했다. 오늘 밤은 그다지 해줄 일이 없단다. 다만 될 수 있는 한 그를 편하게 해주어야 해. 팔을 엑스 레이로 찍어야 한단다. 당분간 그 팔은 아래위가 뒤바뀐 채 놓여 있게 될 거야. 그래도 걱정은 하 지 마라.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 좋아질 테니까. 제 친구녀석들과 똑같이 뛰어놀 수 있을 게 다. 레이놀드 선생님은 말을 하면서도 나를 빈틈 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 이마를 손가락 으로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넌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다, 그렇지? 레이놀드 선생님의 가벼운 농담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그럼 이젠 오빠가 죽는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그는 모자를 쓰며 말을 계속했다. 장담은 못하지만 젬은 아주 쌩쌩하단다. 거의 모든 부분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단다. 가 서 잠깐 만나보도록 해라. 내가 다시 온 다음 함께 결정하자. 레이놀드 선생님의 발자국 소리는 젋고 활발했다. 그러나 헥 테이트 씨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무거운 부츠가 현관을 강타하는가 싶더니 거북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레이놀드 선생님과 똑 같이 말을 했다. 괜찮니, 스카웃? 네, 아저씨. 지금 오빠한테 가는 중이에요. 아빠도 거기 계세요. 함께 가자. 알렉산드라 고모는 오빠의 스탠드에 수건을 씌워 불빛을 약하게 만들었다. 어둠침침한 방 안에 오빠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얼굴 한 쪽에 보기 흉한 상처가 나 있었고, 왼팔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팔꿈치가 약간 구부러진 상태에서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오빠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아 ,,, . 스카웃, 젬은 못 듣는단다. 전구가 나가버린 것처럼 말이야. 정신이 잠깐 들어왔었지만 레이놀 드 선생님이 다시 잠들게 하셨단다. 아버지가 말해주었다. 네, 아빠. 오빠방은 넓은 직사각형이었는데 알렉산드라 고모는 벽난로 옆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빠 를 들고 왔던 그 남자는 한쪽 구석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얼굴로 시골사람인 듯 했다. 축제에 왔다가 우리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왔음에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오빠의 침대 가까이에 있었고, 헥 테이트 씨는 문 앞에 모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작업복 차림이었는데 손전등 때문에 바지 주머니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들어오시오, 헥. 아버지가 말했다. 뭘 좀 찾아냈소? 누가 이런 비열한 짓을 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 작자를 찾아주었 으면 했는데 ,,, . 테이트 씨가 헛기침을 했다. 구석에 있는 남자를 예리하게 흘끗 쳐다보더니 그에게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곤 방을 둘러보았다. 오빠, 알렉산드라 고모,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차례차례로 시선 을 주었다. 잠깐 앉으십시오, 핀치 변호사님. 그가 씩씩하게 말했다. 자, 모두 앉도록 하지. 헥, 그 의자에 앉으시오. 내가 거실에서 하나 더 가져올 테니. 아버지가 테이트 씨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는 오빠의 책상 의자에 앉아 아버지가 돌아와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구석에 서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왜 의자를 마련하지 않는지 의아했 지만 아버지가 시골 사람들의 습관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아버지 의 시골에서 온 소송의뢰인 중에는 가끔 귀가 기다란 그들의 준마를 뒷마당 멀구슬나무 아래 부 려놓았으므로 아버지도 뒷계단에서 약속을 하곤 했었다. 그 사람이 그곳을 더 편안해 하기 때문 이었다. 핀치 변호사님. 테이트 씨가 말을 시작했다. 제가 찾은 걸 말씀드리죠. 우선 스카웃의 옷을 찾았습니다. 제 차 안에 있습니다. 그거 네 옷 맞지, 스카웃? 네, 아저씨. 프릴 달린 분홍색요. 테이트 씨는 마치 증인석에 앉아 있는 듯 행동했다. 그는 주정부나 변호사의 제재 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말하길 좋아했다. 때때로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그리고 전 우스꽝스러운 진흑빛 천조각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제 의상이에요, 테이트 아저씨. 테이트 씨는 한 손으로 넓적다리 아래를 쓸어내렸다. 이번엔 왼팔을 문지르고는 오빠방의 벽난 로 장식을 조사하듯 쳐다보았다. 마치 벽난로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긴 코를 쓰다듬 었다. 무엇이오, 헥. 아버지가 물었다. 테이트 씨가 이번엔 목덜미를 천천히 문질렀다. 봅 이웰이 저 나무 아래 누워 있습니다. 갈비뼈 아래를 부엌칼에 찔린 채 죽어 있습니다, 핀치 선생님. 29. 안녕, 부 아저씨 알렉산드라 고모가 일어나면서 벽난로를 짚었다. 테이트 씨가 부축하려고 일어났지만 다행히 고모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의 깍듯한 예의범절이 잊혀진 순 간이었다.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단지 봅 이웰이 살아 있는 동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했던 말만이 떠올랐다. 그는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게 사실이오? 아버지가 공허하게 물었다. 네, 정말 죽었습니다. 얌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다시는 아이들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 아버지는 잠꼬대를 하는 듯했고, 나이 들은 모습이 한결 역력하게 드러나보였다. 심리적 혼란으 로 턱에 있는 깊이 팬 주름이 조금씩 엷어지고 귀 아래쪽 주름이 늘어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 었다. 그리고 칠흑같은 머리카락은 관자놀이 가까이부터 군데군데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거실로 가는 것이 좋겠어요. 마침내 고모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전 ,,, 젬만 괜찮다면 이곳이 더 좋겠는데요. 스카웃이 ,,, 얘기를 하는 동안 오빠 의 상처도 봐야 하구요. 그럼 전 가도 되겠죠? 여기 여러분이 계시니까요. 오빠, 전 내 방에 있겠어요. 고모는 문으로 걸어가서 돌아섰다. 오빠, 난 오늘밤 예감이 이상했어요. 난 ,,, 이건 내 잘못이에요. 내가 갔어야 ,,, . 테이트 씨가 손을 저었다. 알렉산드라 부인, 큰 충격이겠지만 너무 애태우지 마십시오. 우리 추측대로라면 고양이들이 꼬 리를 쫓는 것과 같을 겁니다. 가 계십시오. 자, 우리 스카웃 아가씨가 일어났던 일을 우리에게 말 할 수 있는지 좀 볼까? 아직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면 말이야. 할 수 있겠지? 그가 따라오는 걸 봤니? 나는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두 팔로 나를 감싸주었다. 나는 아버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말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전 신발을 두고 왔다고 오빠한테 말했어요. 그래서 학교 로 되돌아가려는데 불이 꺼졌어요. 오빠가 내일도 찾을 수 있다고 했어요. 스카웃, 고개를 들어야지. 그래야 보안관 아저씨가 들으시지. 아버지의 말에 나는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오빠가 잠깐 조용히 하라고 했어요. 전 오빠가 생각할 게 있다는 걸 알았어요. 오빤 언제 나 생각할 게 있으면 조용히 하라고 해요. 그래야 생각할 수 있다구요 ,,, . 그런데 무슨 소리가 난다구 했어요. 우린 그게 세실인 줄 알았어요. 세실? 네, 세실 제이콥이요. 그애가 오늘밤 우릴 한 번 놀래켰기 때문에 또 걘줄 알았어요. 걘 유령 옷을 입고 있었어요. 최고 의상상에 이십오 센트를 준다고 했거든요. 누가 탔는지는 모르겠어요. 너희들이 세실이라고 생각한 곳이 어디쯤이었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에요, 그래서 전 소리쳤어요. 뭐라고 소리쳤지? 저 ,,, 세실 제이콥은 멍청이 생쥐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아무 소리가 없어서 오빠가 헤 이 헤이 하며 있는 대로 소리쳤어요. 잠깐, 스카웃. 테이트 씨가 말을 막았다. 핀치 변호사님, 그 소릴 들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라디오를 틀어놓았는데, 알렉산드라 고모가 침대로 가면서 소리를 조금 줄여달라고 해서 기억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겸연쩍게 웃었다. 난 항상 라디오를 크게 틀거든. 그렇다면 이웃들이 들었을 텐데 ,,, . 테이트 씨가 의아해 했다. 의심이 가는군, 헥. 하지만 그들은 라디오를 듣거나 아이들과 침실로 갔을 거요. 머디 애킨슨 도 그곳에 갔을 텐데 이상하군. 계속해라, 스카웃. 테이트 씨가 말했다. 오빠가 소리치고 난 다음 우린 계속 걸었어요. 아저씨, 전 그 의상에 갇혀 있었는데도 그 소리 가 들렸어요. 그 발자국 소리요. 우리가 걸으면 걷고 멈추면 함께 멈추었어요. 오빠는 크렌셔 아 줌마가 내 의상에 야광 페인트를 칠해놓아서 제가 움직이는 게 보일 거라고 했어요. 저는 햄이었 거든요. 그게 뭔데? 테이트 씨가 놀라듯 물었다. 아버지가 테이트 씨에게 나의 역할과 의상 구조를 설명해주었다. 이 아이가 들어올 때 당신이 보았어야 했소. 찌그러져 너덜너덜 했으니까. 테이트 씨가 턱을 문질렀다. 이웰에게 어떻게 그런 자국이 있었는지 이상했거든요. 그의 옷소매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팔에도 찔린 자국이 있었어요. 가능하다면 그 의상을 보여주시죠. 아버지가 내 햄 의상의 남은 부분을 가져오자 테이트 씨는 원래의 모양을 상상해 내는 듯 그것 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분명 이것이 이 아이의 생명을 구했군요. 여길 보세요. 그가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무뎌진 철사 위에 반짝거리는 선이 빛나고 있었다. 봅 이웰은 정말로 일을 저지르려 했군. 테이트 씨가 혼잣말을 했다. 그는 돌은 거야. 아버지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는 단순히 돌은 것이 아닙니다. 악마예요. 스컹크 같은 비 열한 인간성에다 그 엄청난 술이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포악한 심성을 부추긴 겁니다. 이제 다시 는 변호사님과 마주칠 일이 없게 되었지만요. 아버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런 인간을 이해할 수가 없어. 핀치 변호사님, 인간 중엔 감싸주기 전에 총으로 쏴버려야 할 부류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들 은 총알만큼의 가치도 없는 인간이지요. 이웰이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입니다. 그가 날 협박하던 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고 생각했었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직접 나 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생각했소. 그 인간은 불쌍한 흑인여자를 괴롭히는 심장을 갖고 있었고, 테일러 판사님 댁이 비어 있는 줄 알고 그분을 괴롭히려고 했던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대낮에 결투라도 신청할 줄 아셨습니 까? 테이트 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계속하지요. 자, 스카웃, 네가 뒤에서 그가 오는 소릴 들었다고 했지? 네, 저희가 나무 아래까지 왔을 때 ,,, . 나무 아래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곳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전 맨발이었어요. 오빠가 나무 아랫부분의 땅은 언제나 더 시원하다고 했거든요. 젬을 예비판사로 밀어야겠군. 계속해라. 그때 갑자기 무엇인가가 나를 움켜쥐고 제 의상을 짓이겼어요 ,,, . 제가 땅으로 엎드렸던 것 같아요 ,,, . 나무 아래서 치고 받는 소리가 ,,, 마치 나무에 몸을 부딪는 듯한 소리가 들렸어요. 오 빠가 저를 찾아서 끌어당기곤 도로를 향해 뛰었어요. 그리고 ,,, 그 ,,, 이웰 씨가 오빠를 땅에 넘 어뜨린 것 같았어요. 곧바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소리가 났고 ,,, 끔찍한 소리가 들리더니 오빠가 비명을 질렀어요. 나는 말을 멈추었다. 오빠의 부러진 팔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오빠가 비명을 지른 다음엔 아무 소리도 안 났어요. 그리고 이웰 씨는 나를 ,,, 절 죽이 려고 짓눌렀어요. 죽일 듯이요. 그 다음 누군가 이웰 씨를 잡아 넘어뜨린 것 같아요. 전 오빠가 일어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추측으로요. 그것이 전부예요 ,,, . 그 다음은? 테이트 씨가 꿰뚫을 듯 쳐다보았다. 누군가 비틀거리며 헐떡이더니 심하게 기침을 했어요. 처음엔 오빤 줄 알았는데 오빠 목소리 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전 오빠를 찾으려고 더듬거렸어요. 아빠가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가 지친 거라고 생각했어요 ,,, . 그럼 누구였지? 저기 저분 ,,, 전 모르는 분이에요. 난 구석에 서 있는 남자를 쭈뼛거리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꾸짖으실까봐 팔을 재빨리 내렸다.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일은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내가 가리키자 팔을 내리고 손바닥으로 벽을 지긋이 눌렀다. 그 손은 지나칠 정도로 창백했다. 한 번도 태양을 본 적이 없는 병자 같은 창백한 손이었다. 너무 희어서 거뭇한 크림색 벽에 대조되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나의 시선이 손에서, 모래로 더럽혀진 그의 카키색 바지로 옮겨졌다. 그리곤 찢겨진 작업복 셔 츠 안의 마른 체격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의 얼굴은 손만큼이나 창백했으며, 튀어나온 턱이 유일한 그늘을 만들어줄 뿐이었다. 뺨은 푹 패었고 입술은 크고 얇았다. 관자놀이 부근이 보일 듯 말 듯 들어가 있었고, 회색 눈은 너무 흐려 서 장님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머리카락은 생기가 없고 가늘어서 마치 깃털 같았다. 내가 그를 가리켰을 때 그의 손바닥이 가볍게 미끄러져 내려오느라 땀과 기름기가 섞인 손자국 이 벽 위로 그어졌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벨트에 걸었다. 석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라도 들은 듯 희미한 경련이 눈위로 스쳤다. 내가 경이로움으로 그를 쳐다봄에 따라 서서히 긴장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의 입술 위로 수줍은 미소가 드리워지고 갑작스레 흐르는 내 눈물로 그의 영상이 흐려 졌다. 안녕, 부. 나는 울먹이는 소리로 겨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30. 그건 앵무새를 쏘아 죽이는 것 아서 아저씨라고 해야지, 아가야. 아버지가 부드럽게 정정해주셨다. 진 루이스, 이분이 아서 래들리 씨란다. 이미 널 알고 계셨을 게다. 이런 상황에서 자상하게 부 래들리를 소개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아버지뿐이리라. 부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오빠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의 수줍은 미소가 그의 얼굴 위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순간 당황한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괜스레 오빠의 이부자리 를 만지작거렸다. 아, 젬을 건드리지 말거라. 아버지가 제지했다. 테이트 씨는 의자에 앉은 채 뿔테 안경 너머로 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 려는데 마침 레이놀드 선생님이 들어왔다. 모두들 나가주시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선생님이 말했다. 잘 있었나, 아서? 아까는 자네가 있는 걸 못 봤네. 레이놀드 선생님의 목소리는 그의 발소리만큼이나 씩씩하고 서글서글했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 없는 저녁인사였고, 그것이 이방 안의 누구보다도 나를 놀라게 했다. 물론 부 래들리도 가끔은 병 이 나서 레이놀드 선생님을 만났을 테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만도 아니었다. 레이놀드 선생님은 신문지로 싼 커다란 꾸러미를 오빠의 책상 위에 놓고 코트를 벗었다. 젬이 말짱해서 이젠 안심이 되겠지?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말해줄까? 검진할 때 나를 걷어찼 거든 ,,, . 젬을 진정시킨 후에 적절하게 치료를 해야만 한단다. 그러니 조용히. 레이놀드 선생님이 내게 말해주었다. 으흠. 아버지가 부를 흘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헥, 앞 현관이 어떨까? 의자도 충분하고 아직 날씨도 따뜻하니까. 왜 아버지는 거실 대신 앞 현관을 제안했을까. 그건 거실 불빛이 끔찍하게 강렬했기 때문이었 다. 우리는 조용히 줄을 지어 나갔다. 테이트 씨부터 방문을 나섰다. 아버지는 먼저 나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테이트 씨 뒤를 따라 나갔다. 사람들은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일상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 었다. 이리로 오세요, 아서 아저씨.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려왔다. 우리집 잘 모르시죠? 제가 현관까지 모시고 갈게요.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복도를 지나 거실을 지나쳤다. 여기 앉으세요, 아서 아저씨. 이 흔들의자는 편하고 멋있어요. 그에 대한 나의 공상이 새삼 되살아났다. 그가 저 현관에 앉아 있는다면 ,,, . 정말 화창한 날씨에요, 그렇죠, 아서 아저씨? 그래, 아주 좋은 날씨구나. 이런 대화가 오고 가리라 생각했었다. 부자연스러운 미묘한 상황이었다. 그가 앉은 곳은 아버지와 테이트 씨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부는 어둠 속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버지는 그네에 앉았고 테이트 씨가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거실에서 나오는 불빛이 그들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나는 부 옆에 앉았다. 자 그럼, 헥.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내 추측으론 말이지 ,,, 오, 맙소사.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군. 아버지가 안경을 밀어올리곤 눈 주위를 문질렀다. 젬은 아직 열네 살도 채 안 됐는데 ,,, 아니, 열네 살이 됐지 ,,, 생각이 나질 않아. 어쨌든 군법 정에 서기 전까지는 기억 나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변호사님? 테이트 씨가 포갰던 다리를 바로 하며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물론 명백한 정당방위였소. 그래도 난 사무실로 가서 조사해야 ,,, . 그럼 변호사님은 젬이 봄 이웰을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냐구요? 당신도 스카웃이 한 말을 들었지 않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오. 그 아인 젬이 일어나 그를 거칠게 잡아당겼다고 했어요 ,,, . 그 ,,, 그 아인 분명히 어둠 속에서 이웰의 칼을 집어들었을 거 요 ,,,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찾아봐야겠지만. 잠깐만요, 변호사님. 테이트 씨가 말했다. 젬은 결코 봅 이웰을 찌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그제야 그가 한 말을 알아차린 듯 쳐다보았다. 그리곤 머리를 흔들었다. 헥, 그 마음 정말 고맙소. 그 착한 마음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시 작하지 맙시다. 테이트 씨가 일어나 현관 끝으로 걸어가서 관목숲에 침을 뱉았다. 그리고 손을 바지 뒷주머니 에 쑤셔넣곤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식이라니요? 어떤 식 말입니까? 내가 심하게 얘기했다면 사과하오, 헥. 그러나 아무도 이 일을 무마해버릴 순 없어요. 그런 식 으로 살 수도 없고. 누구도, 어떤 것도 무마할 게 없습니다, 변호사님. 테이트 씨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의 부츠는 현관의 마루판자 위에 단단히 세워져 있었다. 내 가 알 수 없는 어떤 법칙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아버지와 보안관 사이에서 진전되고 있었던 것이 다. 그 느낌은 점점 강렬해졌다. 헥, 당신은 말하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알고 있소. 그것에 감사하고 있소. 진 루이스 ,,, . 아버지가 내게로 돌아섰다. 젬이 이웰을 거칠게 잡아당겼다고 했지? 네, 그런 것 같았어요 ,,, 전. 자 들었죠, 헥? 난 진심으로 당신에게 감사하오. 하지만 난 내 아이가 합당하지 못한 것으로부 터 출발하는 건 원치 않아요. 이 사건의 최선은 모든 걸 숨김없이 드러내는 겁니다.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게 말이오. 이 마을사람들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할 거요. 나는 그 아이가 숙덕공론에 휘말려드는 게 싫소. 젬 핀치 저 아인 ,,, 그애 아빠가 끌어내려고 조폐공사라 도 차린 모양이야 라는 식의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은 거요. 우린 이 일을 빨리 끝낼수록 더 좋은 거요. 테이트 씨가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봅 이웰은 제 칼에 찔려 죽은 겁니다. 아버지가 현관 구석으로 걸어가 등나무 등걸을 바라보았다. 완강함을 나타내는 또하나의 몸짓 이었다. 나는 누가 먼저 굴복할 것인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고집은 조용하고 그다지 명백하진 않 았지만 어떤 면에선 커닝햄만큼 굳어져 있는 것 같았다. 테이트 씨는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고집과 거의 맞먹고 있었다. 헥! 아버지가 돌아섰다. 만약 이 일을 이대로 무마시켜버린다면 내가 그 아이를 길러온 방식이 간단히 부정되어버릴 거요. 때때로 난 부모로서 부족함을 느끼기도 하오. 하지만 난 아이들의 전부라고 할 수 있소. 젬 은 다른 사람을 보려 하기 이전에 내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나 역시 그 아이들을 정정당당히 되 돌아볼 수 있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소 ,,, . 내가 만약 오늘 같은 일로 무언가를 묵인한다면 솔직 히 난 그 아이 눈을 쳐다볼 수도 없고, 그를 잃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젬과 스카웃을 잃고 싶지 않소. 그 아이들은 나의 전부이기 때문이오. 핀치 변호사님. 테이트 씨는 여전히 마루판자 위에 서 있었다. 봅 이웰은 그의 칼에 찔린 것입니다. 전 그것을 입증해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방향을 바꾸었고, 주머니 속에서 끊임없이 손을 움직여댔다. 헥, 내 입장을 생각해봐요. 당신도 아이들이 있지만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이를 먹었소. 저 아이 들이 어른이 되면 난 늙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오. 당장 지금 나를 ,,, 그 아이들이 나를 믿지 않게 된다면 그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될 거요. 젬과 스카웃은 무슨 일 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소. 만일 그 아이들이 내가 한 말과 다른 것을 마을사람들에게서 듣고 온 다면 ,,, 헥, 난 더이상 아이들을 다룰 수 없을 거요. 나는 집에서와 마을에서의 삶을 각각 다른 식으로 살아갈 순 없소. 테이트 씨는 한쪽 발을 흔들며 끈기있게 말했다. 그는 젬을 한순간에 넘어뜨리려다가 나무뿌리에 채여 넘어진 겁니다. 보세요, 제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테이트 씨는 옆주머니에 손을 넣어 긴 재크나이프를 끄집어냈다. 그때 레이놀드 선생님이 현관 으로 나왔다. 아드님은 ,,, 저 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어요. 바로 학교 운동장 안에서요. 선생님, 손전등을 갖 고 계십니까? 이걸 가져가시죠. 그냥 가서 자동차 라이트를 켜면 되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이놀드 선생님은 보안관의 손전등을 받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나며 말했 다. 젬은 괜찮을 거요. 오늘밤에 깨어나지는 않을 거야. 그래야만 하구. 걱정하지 말아요, 애티커 스, 헥. 그 칼에 이웰이 찔렸나? 아닙니다. 아직 그에게 꽂혀 있습니다. 손잡이로 봐서 부엌칼인 듯해요. 켄이 영구차를 몰고 그곳으로 갔을 겁니다. 네, 그럼 살펴가십시오. 테이트 씨는 칼을 가볍게 꺼냈다. 그 상황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는 설명을 하며 시범을 보였다. 넘어지는 시늉을 하며 왼팔을 앞으로 내리고 엎드렸다. 보면 알 수 있겠죠? 이렇게 갈비뼈 사이의 이 곳을 찌른 겁니다. 그의 몸무게에 눌려 찔린 거 죠. 테이트 씨가 칼을 접어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스카웃은 이제 열 살입니다. 너무 놀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무척이나 놀랐겠지. 아버지가 우울하게 말했다. 전 그 아이가 꾸며낸 일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것뿐이죠. 그곳은 지독하게 캄캄했습니다. 먹물을 뿌린 듯했죠. 그런 어둠 에 단련된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법정 증인자의 자격이라도 주어질 겁니다 ,,, . 그래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소.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제기랄! 그래요, 전 젬을 전혀 생각지 않고 말하는 겁니다. 테이트 씨의 부츠가 마루판자를 심하게 내리굴렸다. 머디 아줌마와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 의 침실 불이 켜져 있었다. 테이트 씨가 길 건너편으로부터 눈길을 거두고 다시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리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테이트 씨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다시 말을 꺼냈다. 핀치 변호사님, 전 변호사님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마당에 언성을 높이고 싶진 않습니다. 변호사님은 오늘 어떤 사람도 겪지 못할 긴장감 속에 계시니까요. 왜 한 발자국쯤 떨어져 생각하 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지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 일을 오늘밤 결정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봅 이웰, 그 밥통은 자신의 부엌칼에 찔린 채 누워 있 는 겁니다. 테이트 씨는 아버지가 그 상황을 잘 모르고 있다고 덧붙인 다음 오빠나이 정도의 소년이 한 팔 이 부러진 채 왼팔만으로 어떻게 어른을 넘어뜨려 죽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헥.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그 재크나이프는 어디서 났소? 술 취한 사람에게서 압수한 겁니다. 테이트 씨가 냉담하게 말했다. 나는 다시금 그때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웰 씨가 나를 짓누르고 ,,, 그러나 떨어져 나갔지 ,,, 나는 마침내 오빠가 일어난 거라고 생각했지 ,,, . 헥? 오늘 저녁 시내에 나갔다가 술취한 남자에게서 압수한 겁니다. 이웰은 분명 저 쓰레기더미 어 디에서 부엌칼을 찾아냈을 겁니다.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린 거죠 ,,, 때를 기다린 겁니다. 아버지가 그네에 앉았다. 두 손이 무릎 사이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두 눈은 마루판자를 응시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날 밤 교도소 앞에서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신문을 접어 의자에 놓기까지의 순간이 끝이 없을 듯 길게 느껴졌었다. 테이트 씨가 현관 앞을 터벅거리며 서성대고 있었다. 이 일은 변호사님이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제 사건입니다. 제 결정에 달려 있고, 제 책임입니다. 제 방법에 한 번만 눈을 돌리신다면 복잡할 것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계속 개입 하신다면 전 변호사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할 겁니다. 아드님은 절대 봅 이웰을 찌르지 않았습니 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며 이제는 변호사님도 그걸 아셨을 겁니다. 그 아이가 원한 건 여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오려는 것뿐이었습니다. 테이트 씨가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 앞에 섰다. 우리를 등지고 있었다. 전 그다지 대단한 인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 메이컴의 보안관입니다. 전 태어나서부터 줄곧 이곳에서 자라나 마흔세 살이 되었습니다. 이 마을에 대해서만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흑인 청년이 죽었습니다. 바로 저 인간이 그를 죽음에 이 르게 했습니다. 핀치 변호사님, 죽음이 죽음을 묻어버리게 합시다. 테이트 씨가 그네로 가서 아버지 옆에 놓여 있던 그의 모자를 집어 들었다.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모자를 눌러썼다. 죄악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한 시민에게 법을 위반한 죄목을 씌운다는 것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젬은 그 죄악을 막았던 것입니다. 변호사님은 변호사님이 잘못 판단한 그 일을 온 읍내 에 알리는 것이 제 의무라고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렇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 겠습니까? 제 아내를 포함해서 메이컴의 모든 부인들은 엔젤케익을 만들어 저 사람의 문을 두드 릴 겁니다. 제 생각으로 말입니다. 선생님과 이 마을을 위해 그런 훌륭한 일을 한, 저 부끄럼타는 소년의 삶을 회백등 아래로 끌어낸다는 건 ,,, 전 그것이야말로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 명 죄악이며 전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건 다르겠지요. 하지만 이 소년만은 아닙니다. 핀치 변호사님. 테이트 씨는 부츠 끝으로 마루판자에 구멍이라도 내버릴 듯 했다. 코를 잡아당기다가 다시 왼 팔을 문질러댔다. 전 대단한 인간은 아닙니다, 핀치 변호사님. 하지만 여전히 메이컴의 보안관이며 봅 이웰은 자 기 칼에 찔린 겁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테이트 씨는 쿵쿵거리며 현관 계단을 내려가서는 앞마당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갔다. 차 문 이 세게 닫혔고 그는 곧 사라졌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마루판자만 내려다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스카웃, 이웰이 그의 칼에 찔렸단다. 이해할 수 있겠니? 아버지는 무엇이건 기운을 북돋울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뛰어가 아버지 를 꼬옥 껴안고 뺨에 키스했다. 네, 아빠. 전 이해할 수 있어요. 난 다짐하듯 말했다. 보안관 아저씨 말씀이 맞아요. 아버지가 팔을 풀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지? 그건 앵무새를 쏘아죽이는 것, 그런 종류였지요, 그렇죠? 아버지가 내 머리에 얼굴을 부볐다. 그리곤 일어나서 현관 그늘 쪽으로 걸아갔다. 활기찬 걸음 걸이가 되살아나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부 래들리 앞에 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내 아이들을 구해줘서 고맙소, 아서. 31. 부 래들리와 팔짱을 끼고 부 래들리가 발을 끌 듯이 내디딜 때 거실 창문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그의 이마 위에 부서졌 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왠지 위태로워보였다. 그건 마치 모든 물체에 그의 손발이 닿아도 되는 지 안 되는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쏟아져나오는 지독한 기침 때문에 몸의 경련이 심 해져 의자에 다시 앉아야만 했다. 뒷주머니를 더듬어 손수건을 꺼낸 그는 한 차례 기침을 하곤 이마를 닦았다. 그동안 그의 칩거에 너무도 익숙해 있어서 그가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 다.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서서 내 쪽으로 돌아선 그는 현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한테 굿나잇을 하시려는 거죠, 그렇죠? 아서 아저씨,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그를 복도로 안내했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오빠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들어와요, 아서. 아직 잠들어 있어요. 레이놀드 선생님께서 강한 진정제를 놓으셨어요. 진 루이 스, 아버지 거실에 계시니? 네, 거기 계실 거예요. 뭘 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어서 ,,, 레이놀드 선생님께서 뭘 남기고 ,,, . 고모는 말끝을 흐렸다. 부는 방 한쪽 구석으로 가서는 턱을 치켜들고 멀리 오빠를 세심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손 을 잡았다. 그 창백한 빛에 비해 손은 놀랍게도 따뜻했다. 내가 그를 슬쩍 잡아당기자 그도 순순 히 응했다. 레이놀드 선생님은 오빠의 팔에 텐트 같은 장치를 해놓았다. 침대로 이끌려온 부는 몸을 숙이 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 번도 소년을 본 적이 없는 듯한, 호기심어린 소심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입을 조금 벌린 채 오빠를 이마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살펴보더니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리는 것이었다. 만지셔도 돼요, 아서 아저씨. 오빤 잠들었어요. 깨어나면 만질 수 없을 거예요. 오빠가 만지지 ,,, . 부의 손이 오빠의 머리 위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계속하세요, 아저씨. 오빠는 잠들었어요. 그의 손이 오빠의 머리 위에 가볍게 내려졌다. 나는 그의 몸짓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는 내 손을 힘껏 쥐는 것으로 떠나고 싶다는 것을 넌즈시 알리는 듯했다. 나는 그를 현관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불안한 발걸음이 멈추어졌지만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를 보내려는 뜻이 아니었 다. 집에까지 같이 가주겠니? 그는 나즈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이었다. 나는 우리집 계단 앞에 섰다. 그의 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서 아저씨, 팔을 이렇게 구부리세요, 이렇게. 네, 됐어요. 나는 그가 팔을 구부리자 팔짱을 끼었다. 그는 나를 위해 몸을 약간 구부려야 했다. 스테파니 아줌마가 이층 창문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한다면, 아서 래들리가 마치 여느 신사처럼 나를 호위하 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길모퉁이에 있는 전신주에 다달았다. 딜은 저 굵직한 전신주를 껴안고 래들리 집을 바 라다보며 얼마나 오랫동안 호기심을 키웠었던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오빠와 함께 이곳 을 지나쳤던가. 나는 생애 두 번째로 래들리 집 대문으로 들어가서 현관계단까지 올라갔다. 그의 손이 문고리를 더듬고는 부드럽게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이웃사람들은 초상이 나면 음식을, 병중에 있을 때는 꽃을 날랐고, 자질구레한 일들에는 적은 일손이나마 돕고 있었다. 부는 우리의 이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비누인형 두 개, 고장난 시계와 줄, 행운의 동전 두 닢,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주었다. 그러나 그 이웃은 우리의 보답을 거절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꺼내온 그 나무에도, 그에게도 아무 것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슬프 게 했다. 나는 집을 향해 돌아섰다. 가로등은 언제나처럼 길을 비쳐주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까이에는 머디 아줌마와 스테파니 아줌마의 집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집 현관 앞의 그네가 보였다. 우리집 너머로 라이첼 아줌마 집이 선명하게 보였고, 두 보스 할머니 집까지도 보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문 왼쪽으로 덧문이 달린 긴 창문이 있었다. 나는 그앞에 섰다가 다 시 돌아섰다. 낮이라면 우체국 너머까지도 볼 수 있으리라. 한낮 ,,, 내 마음속에서 점차 밤이 사라져갔다. 낮, 우리 이웃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낮, 스테파니 아줌마는 라이첼 아줌마에게 최근에 들은 이 야기를 하러 길을 건넌다. 머디 아줌마는 철쭉나무 위에 엎드려 있다. 한여름이었다. 두 아이가 멀리서 다가오는 한 남자를 향해 길 아래로 뛰어내려 간다. 그 남자는 손을 흔들고 아이들은 경 주하듯 그에게로 달려간다. 아직도 여름이었다. 아이들이 점점 다가온다. 한 소년이 낚싯대를 끌며 보도를 터벅터벅 내려간 다. 한 남자가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은 채 기다리고 서 있다. 여름, 앞마당에서 아이들이 저희들 끼리 꾸며낸 서툰 연극놀이를 하고 있다. 가을이었다. 아이들이 두보스 할머니집 앞 보도에서 싸우고 있다. 그 소년은 여동생을 일으켜세 워 집으로 데려간다. 가을, 그 아이들은 그날의 슬픔과 기쁨을 얼굴에 가득 담고 길모퉁이를 총총 거리며 뛰어 돌아다닌다. 그들은 무엇을 깨달은 듯 그리고 기쁨과 호기심, 궁금함으로 떡갈나무 아래에 멈춘다. 겨울, 그 아이들은 집이 불타고 있는 영상속에서 떨고 있다. 여전히 겨울이었다. 한 남자가 안 경을 떨어뜨리고 길가로 걸어온 개를 쏘았다. 여름, 그는 아이들의 슬픔을 본다. 또다시 가을, 아이들이 부를 필요로 한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언젠가 아버지는 남의 입장에 서보지 않는 이상 결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래들리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건 충분했다. 길가 가로등 불빛은 가랑비에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갑자기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코 끝에 내려앉은 미세한 안개방울을 두 눈동자를 한데 모아서 바라보다 어찔 어찔해서 그만두었다. 내일 오빠에게 말해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친 것이 분해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며 오빠와 내가 자라온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앞으로 산수만 제외한다면 배울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계단을 뛰어올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아버지의 방도 어두웠다. 난 오빠가 어떤지 살펴보아야 했다. 아버지는 오빠의 침대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오빠는 아직 안 깨어났어요? 편안히 자고 있단다. 아침까진 깨어나지 않을 거야. 아빠, 여기서 밤 새실 거예요? 그저 한두 시간만. 스카웃, 이제 자야지. 너희에겐 너무 긴 하루였다. 저 여기에 좀더 있으면 안 되나요? 마음대로 하렴.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부드러운 묵인이 의아했다. 아무리 애써도 난 아버지의 마음 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앉는 순간 잠이 쏟아지는 걸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슨 책이에요? 아버지가 책을 뒤집어보고 말해주었다. 젬 건데, (회색유령)이라는 거구나. 나는 갑자기 잠이 달아났다. 왜 그걸 읽으세요? 그냥 뽑아본 거야. 읽지 않은 몇 편 중 하나거든. 아버지는 시원스럽게 대답해주었다.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아빠. 그거 정말 무시무시한 거예요? 넌 그 동안 충분히 놀랐다. 이건 너무 ,,, . 아이, 아빠. 전 놀라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눈썹이 치켜졌지만 난 계속 때를 썼다. 적어도 보안관 아저씨께 그걸 말하기 전까진 아니에요. 오빠도 겁내지 않았어요.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니라고 했어요. 책보다 더 무서운 건 없어요. 아버지가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움직이다가 그만두었다. 읽은 부분까지 엄지손가락으로 끼고 있던 아버지는 다시 첫페이지를 펼쳤다. 나는 아버지의 무릎에 기대었다. 으흠. 회색유령, 지은이 세키터리 허킨스, 제1장 ,,, . 나는 깨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려 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날 내린 비는 아주 부드럽게 땅을 적시고 있었고, 방은 따뜻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윽했고 무릎은 또 얼 마나 편안했는지 ,,, . 몇 초 후 아버지의 손끝이 내 갈비뼈를 살그머니 누르더니 나를 일으켜 안아 내 방으로 데려가 려는 듯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다 들었어요. 나는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 정말 잠들지 않았어요. 그건 배에 관한 것이었구 ,,, 세 손가락 달린 프, 플, 우레드와 음, 스 토너의 소년이었지요 ,,, . 아버지는 나를 안은 채 겉옷 단추를 끄르곤 내 파자마를 집어들었다. 네, 그리구 그들 모두 클럽하우스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스토너의 소년이라 생각하곤 잉크를 던져 온통 ,,, . 아버지는 나를 침대에 누이곤 다리를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 그리구 그를 쫓아갔지만 잡지 못했어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리구 아빠 ,,, 결국 그를 잡았을 땐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까요 ,,, 아빠, 그는 정말 멋있어요 ,,, . 아버지의 손길이 내 턱아래에서 움직였다. 이불을 당겨 덮어주었던 것이다. 스카웃, 나중에 너도 그들을 이해하게 될 게다. 아버지는 전등불을 끄고 방을 건너갔다. 아버지는 밤새 그곳을 지키리라. 오빠가 아침이 되어 깨어날 때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