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로열스, 2 저자명: 키티 켈리 역자명: 이종인 출판사명: 동방미디어 로열스2. 가려진 영국왕실의 진실 "가끔씩 집안의 내력은 외부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가문은 그 자신의 동화 같은 먼지 더미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볼 때, 그 가문의 내력에서 찔끔 찔끔 터져나오는 엄청난 거짓말과 허구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고만다..." - 캐롤 쉴즈, '스톤 다이어리(The Stone Diaries)' 중에서 "귀족 정치라는 말이 합당해서 민주주의자도 자신있게 그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나는 귀족 정치를 믿는다. 내가 믿는 귀족 정치는 계급이나 영향력에 바탕을 둔 힘의 정치가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고 용기있는 사람들의 귀족 정치이다. 그 귀족 정치의 구성원들은 모든 나라, 모든 계급, 모든 시대에 발견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또 그들이 서로 만날 대에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묵계가 성립한다. 그것은 그들이 진정한 인간적 전통을 대표한다는 것이며, 또 인류가 잔혹과 혼란을 극복하고 우뚝 서게 되는 영원한 승리자임을 그들이 대표한다는 것이다." - E. M. 포스터, 1941년에 발표된 한 에세이 중에서 차례(제2권) 12. 다이애나, 운명의 시작 13. 로열 스타의 탄생 14. 다이애나의 진면목 15. 다이애나의 중매 16. 신데렐라의 꿈은 사라지고 17. 나, 원래 그런 여자야 18. 퇴장당하는 사라 19. 결별선언 20. 왕실의 다이애나 축출 시나리오 21.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왕실 22. 왕실이여, 안녕 * 한국어판 저자 후기 * 역자의 말 12. 다이애나, 운명의 시작 - 열아홉 살 이 처녀의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 1979년 8월 27일 아이슬랜드에 낚시를 가 있던 찰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아일랜드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미얀마 의 마은트배튼 백작(디키 아저씨)이 IRA(북아일랜드 독립을 요구하는 아일랜드 공화군)의 폭탄에 의해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찰스는 평소 마운트배튼 경에게 굉장히 의존했다. 그들은 매일 대화를 나누고 매주 한번씩 편지를 보내는 다정한 사이였다. 그는 찰스에게 할아버지, 아버지, 스승, 가장 친한 친구 등 그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필립도 찰스와 마운트배튼의 이런 가까운 사이를 놀리기도 했었다. 필립 공은 아일랜드 공화군의 소행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보다 이태 뒤에 여왕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던 도중 IRA 데모대를 지나치게 되었다. 여왕은 그들을 무시하고 앞만 쳐다보았다. 필립은 손을 들어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마운트배튼의 장례식 날 찰스는 슬픈 모습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제단 위로 올라가 아저씨가 자신의 국장에 대비하여 골라 놓은 기도문을 읽었다. 왕세자는 온갖 리본과 메달로 장식한 해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찰스가 시종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것이 마운트배튼이 평소 좋아했던 복장이라는 것이다. 생시의 마운트배튼은 훈장들로 장식된 가슴을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IRA 놈들이 내 가슴을 쏠 생각이라면 이 훈장 때문에 좀 힘들 거야." 찰스는 해군 제독을 추도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시편 107편을 읽어나갔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대양을 헤치며 장사하던 자들... 그들은 야훼께서 하신 일을 보았고 깊은 바다에서 그 기적들을 보았다..." 찰스는 침착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나팔수가 마지막 나팔을 불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찰스의 그런 태도는 몇 피트 떨어진 곳에 돌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어머니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폭탄 사고가 발생했던 날9장례식 열흘 전), 왕궁은 여왕 폐하가 '깊은 충격을 받고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왕은 자신의 사촌이며 어릴 적 친구인 마운트배튼의 자녀들에게 조문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또 발모랄 성에서 보내게 되어 있는 후가 계획을 취소하지도 않았다. 여왕이 발모랄로 간 그 다음 날 앤 공주가 아들 피터를 데리고 피크닉을 하러 왔다. 여왕은 정원에서 코기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했으며 두 살짜리 외손자 피터와 장난을 쳤다. 한편 찰스는 거의 몇 달 동안 마운트배튼의 죽음 이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마운트배튼이 인도 총독으로 재직할 당시 참모로 일했던 작가 로렌스 반 데어 포스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찰스를 노인인 반 데어 포스트를 존경했다. 그 노인은 이제 마운트배튼을 대신하여 찰스의 사부, 정신적 스승, 정치적 고문이 되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의 친구이며 전기작가인 반 데어 포스트는 신화와 꿈을 통해서 나타나는 집단 무의식에 대해 찰스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찰스에게 초자연적인 것을 믿고 또 영혼의 세계에 귀기울이라고 조언했다. 또 찰스가 남서 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으로 여행갈 때 함께 따라가서 부시맨의 유령과 대화를 나눠 보라고 제안했다. 찰스는 그 노인의 신비주의에 빠져들었고 곧 견자, 무당, 사이킥스(심령술사)로부터 위안을 얻게 되었다. 그는 초정상적인 것에 흥미를 느껴 세앙스(명상치료)에 참가하게 되었고 사망한 마운트배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견자와 상담하게 되었다. 마운트배튼의 개인 비서였던 존 바라트는 이렇게 말했다. "찰스는 위저 널빤지(심령술에서 쓰이는, 점괘를 나타나게 하는 널빤지) 위에서 마운트배튼 경의 영혼을 부르려고 했어요. 하지만 언론이 이 사실을 알아내자, 왕궁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라고 시켰어요. 그랬다가는 찰스가 돌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줄 수 있었으니까요." 이 당시 찰스는 인도 태생의 아름다운 여배우 조 살리스와 가깜게 사귀고 있었다. 조 살리스는 헐리우드 영화 감독 존 휴스턴의 정부였던 여자인데 1962년 휴스턴의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불교신자였고 또 요가를 열심히 수행했다. 이 여자가 찰스 왕세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왕궁은 우려를 표명하게 되었다. 그녀는 초월주의와 다신 교리를 믿었는데 이것은 전능한 유일신을 믿는 영국 교회와는 일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 국교의 수호자인 국왕이 될 사람으로서 그런 신앙 태도는 절대 금기인 것이다. 그러나 찰스는 자신보다 열 살 위인 새 애인에게 홀딱 빠져 버렸다. 그래서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찰스에게 '도인의 길'이라는 책을 주었고, 자신의 임무는 찰스를 개종시켜 윤회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찰스가 서서히 윤회를 믿는 듯하자 왕실 직원들은 더욱 놀라게 되었다. 찰스는 영혼의 윤회를 말하면서 마운트배튼 경이 이 지상에 되돌아 올 때 어떤 모습을 취하게 될까를 자주 언급했다. 왕세자의 개인 비서인 에드워드 애더앤은 찰스에게 영국 교회의 가르침으로 되돌아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찰스는 듣지 않았다. 그는 니르바나의 메시지에 너무 매혹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애더앤은 여왕에게 직접 호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찰스는 마지못해 불교신자 애인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31세의 왕세자는 아직도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 여름 그는 건초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를 발견했다. 당시 19세의 사랑스런 그녀는 너무 어리고 너무 순진하여 과거는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여자였다. 그녀보다 14세 연상인 찰스는 한 친구의 시골 별장에서 열린 주말 파티에서 그녀를 보았다. 사실 찰스는 그보다 3년 전인 1977년 다이애나를 잠깐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다이애나의 큰 언니인 사라와 잠깐 데이트를 하던 찰스는,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75마일 떨어진 노샘프턴셔에 있는 스펜서 가의 영지 알소프에서 주말을 보내며 만나는 여자의 동생인 다이애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다이애나가 3년 전인 열여섯 때에 비해 많이 성숙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젠 젖살이 하나도 없군'하고 찰스는 말했다. 다이애나는 얼굴을 붉히고 눈을 내리 깔며 자신의 긴 다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키가 좀 커졌어요. 젖살이 위아래로 퍼졌다고나 할까요." 그녀가 농담삼아 말했다. 자기를 낮추는 듯한 그 농담이 마음에 든 찰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같이 건초더미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근위대 장교였던 닐 맥코퀴데일에게 시집간 큰 언니 사라 얘기, 마운트밴튼의 장례식 얘기 등을 나누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이 찰스와 나눈 대화를 룸메이트에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 유치원의 보모로 일하고 있었는데, 왕세자를 어린애처럼 위로해 주었고 또 그도 어린애처럼 자신에게 이끌렸다고 말했다. 찰스는 그날 일찍 떠나면서 런던까지 자기 차를 타고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찰스의 제안을 승낙하면 초대해 준 호스트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거절했다. "그건 다이애나가 잘한 거지요. 버릇없는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고 또 너무 적극적으로 대든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았으니까." 룸메이트가 말했다. 다이애나로서는 이미 구애작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녀는 왕세자의 관심을 끌었다는 데 흥분했으며 룸메이트들에게 만약 기회가 온다면 큰 언니처럼 행동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큰 언니 사라는 기자들에게 너무 솔직히 말했던 것이다. "나는 왕세자를 내게는 없는 큰 오빠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 분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그를 사랑하지는 않아요. 나는 상대가 청소부든 영국 국왕이든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가 내게 청혼하더라도 나는 거절하겠습니다." 바바라 카트랜드의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은 다이애나는 왕자와 결혼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왕자를 큰 언니처럼 거절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6개월 간의 구애 기간은 찰스가 북치고 장구치는 일방저기 게임이었다. 찰스는 제멋대로 만날 장소를 지정했다. 그것도 만나기 몇 시간 전에 아무런 승용차 편도 제공하지 않고 어디로 알아서 나오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다이애나는 묵묵히 참았다. 당시 다이애나는 해로즈 백화점 근처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증조모가 물려 준 돈으로 방 세 개짜리 그 아파트를 샀다. 그 돈은 그녀의 성년 기념 선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두 언니와 마찬가지로 18세 되던 해에 다이애나는 75,000달러의 돈을 상속받았다. 어머니가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하자 다이애나는 그 아파트를 샀던 것이다. 아파트와 주택부금을 부어 나가기 위해 그녀는 세 명의 룸메이트로부터 임대료를 받았고 또 그들에게 임대료의 일부를 공제해 주는 조건으로 청소를 담당시켰다. "하지만 실은 다이애나가 집안 청소를 다했어요. 그녀는 청소하는 걸 좋아해요.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였어요." 한 룸메이트가 말했다. 몇 해 다이애나는 자신의 이런 청소벽에 대해서 정신과 의사가 이렇게 설명하더라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털어 놓았다. 그렇게 완벽하게 청소를 하려는 충동은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필사적 노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강박적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신경안정제의 복용을 극력 피하려고 했다. 일단 그런 약물을 복용하면 중독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대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집안은 이혼, 알콜 중독, 폭력으로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다이애나의 아버지 에드워드 존 스펜서는 정식 이름과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는 조니 스펜서로 알려져 있다. 알소프 자작인 그는 막대한 재산과 1만 3천 에이커의 영지인 알소프 하우스(16세기에 그의 조상들이 세운 집)를 물려받은 상속자였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마필 담당관을 지낸 조니 스펜서는 8대 스펜서 백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세습작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들이 필요했다. 그는 1954년 4대 퍼모이 경의 아름다운 블론드 딸 프랜시스 로치와 결혼했다. 1955년에 첫딸 사라가, 1957년에 둘째딸 제인이 태어났고, 1959년에 바라던 아들을 얻었으나 출생 직후 사망했다. 그리고 1961년 7월 1일에 셋째딸 다이애나 프랜시스가 태어났다. 또 딸을 본 조니 스펜서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래 아들이기를 바랐던 자리에 딸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예요." 다이애나는 후일 그렇게 털어 놓았다. 조니 스펜서는 그 후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고 아들을 못 낳는 아내를 원망했다. 그는 아내를 런던의 할리 스트리트의 전문가에게 보내 뭐가 잘못되어 아들을 못 낳는지 알아 보게 했다. 그리고 1964년 당시 스물여덟의 프랜시스 스펜서는 드디어 아들 찰스를 낳았다. "마침내 나는 내 할 일을 다했다!" 그녀는 감격하여 외쳤다. 여왕이 그 아이의 대모가 되어 주었다. 1975년 조니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조니는 저식으로 알소프 백작이 되었고 당시 아홉 살이던 아들 찰스는 알소프 자작이 되었다.(백작의 아들은 자작이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면 작위를 세습하여 백작이 됨. 역주). 그러나 이때쯤 아내 프랜시스는 남편에게 혐오감을 느껴 정력적이고 돈 많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새 남자는 그녀의 인생에 열정과 목적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42세의 피터 산드 키드는 작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돈 많고 매력적인데다 뛰어난 유머감각을 갖춘 남자였다. 왕실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조니 스펜서와는 다르게, 키드는 왕실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왕과 디너를 하고 난 뒤에 키드는 자녀들에게 여왕폐하는 '여전히 따분하고' 버킹엄 궁은 '거만한 성채'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벽지 회사의 상속인인 키드는 전직 해군 장교로서 영국, 스코틀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었다. 또 세 명의 어린 자녀를 둔 유부남이기도 했다. "그것이 프랜시스에게 장애가 될 수는 없었어요. 그녀는 아주 강인했어요. 약탈자처럼. 그녀가 아버지에게 딱 달라 붙자 저희 어머니는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었어요." 키드의 전처 아들이 말했다. 그러자 피터 키드의 부인은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냈다. 조니 스펜서는 아내의 간통에 커다란 모욕을 느꼈고 곧바로 자녀의 양육권을 자신이 갖겠다고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조니와 프랜시스의 양육권 소송에서 프랜시스의 어머니인 레이디 루스 퍼모이는 딸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사위인 조니의 편을 들었다. 퀸 머더의 시녀를 지낸 루스 퍼모이는 평생 왕당파였다. 그녀는 딸 프랜시스가 평민인 키드와 결혼하면 손녀오 손자가 귀족들로부터 멀어질 것을 우려하여, 사위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일로 딸 프랜시스와 어머니 루스는 서로 말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프랜시스는 1969년 피터 키드와 결혼했다. 당시 다이애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위의 언니 사라와 제인은 기숙사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키드도 조강지처를 버리고 프랜시스와 결혼한 것을 후휘하여 알콜 중독이 되었다가 결국 1990년에 프랜시스와 이혼하고 말았다. 이처럼 결손 가정의 자녀인 다이애나는 학습 진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래서 그녀의 남동생은 간신히 과락을 면할 그녀를 둔하고 느리다고 놀려대었다. 그녀가 학교에 다닐 때 받은 유일한 상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기니 피그(돼지)에게 잘 대해 주었다고 받은 애완동물 애호자를 위한 파머 컵이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몇 시간이건 상관없이 토댄스, 탭댄스, 발레 등 춤추는 연습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공부는 영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열여섯 살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그녀의 학력 부족을 염려한 아버지는 다이애나를 스위스의 보습학교(그스타드에 있는 인스티튜트 알핀 디비데마네트)에다 등록시켰다. 그녀는 마지못해 스위스로 가서 요리와 프랑스어를 되는 둥 마는 둥 공부했다 그리고 유학 기간의 대부분을 스키를 하면서 보냈다. 그것도 한 3개월 쯤 지나니까 너무 지겹고 고향이 그리워 학기를 못 마치겠노라고 아버지에게 호소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댔다. 그 집이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사망으로 거대한 자코뱅식 맨션이 된 알소프 하우스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이애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이애나는 계속 그녀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데일리 텔리그래프'에 게재된 학벌없이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이밀며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계속 런던으로 보내 달라고 졸랐다. 자기도 언니들처럼 아파트를 얻어서 생활하고 싶다면서, "나는 당시 알소프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요. 레인이라는 심술ㄱ은 여자가 좇아오고 있었거든요" 다이애나는 말했다. 레인은 당시 47세의 레이디 다트머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열렬한 보수당 지지자인 그녀는 한 정치집회에서 조니 스펜서를 만났다. 당시 이혼을 하여 외로웠던 조니는 레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조니에게 집안의 가구들을 팡아치우고 거기서 나온 돈으로 알소프 하우스를 보수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스펜서의 자녀들은 그 레인이라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남동생과 함께 알소프 하우스의 복도를 오르내리면서 어린이 노래인 '레인, 레인, 고 어웨이(비야, 비야, 물러가라)'를 불러대며 레이디 다트머스를 놀려댔다(레이디 다트머스의 성은 Raine이고 비는 Rain인데 읽으면 같은 소리가난다. 역주). 조니 스펜서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새 애인을 '애시드 레인(산성비)'이라고 불렀고 그 여자가 있을때에는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막내 찰스는 노골적으로 레인과 얘기를 하지 않으려 했고 다이애나는 익명의 중상모략 편지를 보내거나 레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갑자기 끊어 버리는 술수를 썼다9그녀는 이런 위협적 술수를 나중에 다시 써먹게 된다). 레인이 정장을 하고 저녁을 먹자고 하면 조니 스펜서의 아이들은 일부러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레인은 조니 스펜서와 사랑에 빠졌을 때 유부녀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간통을 이유로 이혼소송을 내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 또 자녀의 양육권마저도 잃어버렸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 아주 괴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레인의 아들이 말했다. 레인의 남편 제럴드 레기-다트머스 백작-는 너무 화가나서 미술가를 불러다가 가족 초상화에서 레인의 얼굴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미술가는 레인의 자리에다 나물르 대신 그려넣었다. 그러나 그때 즈음 레인은 이미 루이 뷔통 트렁크에다 짐을 꾸려서 알소프 하우스로 이사를 해버렸다. 조니 스펜서의 아이들은 새 어머니가 싫다고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렸으나 아버지는 마음을 온통 그 여자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1976년 그들은 결혼을 했고 레인은 스펜서 백작부인이 되었다. 한편 조니 스펜서의 아이들의 아무도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레인은 스펜서 백작부인이라는 타이틀, 그 가문의 재산, 영지 등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녀는 조니의 전처 아이들만 빼놓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레인은 결혼 초기 아이들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 놓았다. "큰 딸 사라는 말이 되지 않는 아이예요. 제인은 아이나 낳을 줄 알까, 뭘 제대로 하는 일이 있어야죠. 다이애나요? 걔하고는 아무런 지적인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지능지수가 한 자리도 안되는 애하고 무슨 얘기를 해요? 만약 그애에게 '아프가니스탄'이라고 말하면 그 애는 '그거 먹는 치즈예요?'하고 물어볼 겁니다." 새 어머니와 전처 자식들간의 적개심은 1978년 9월 조니 스펜서가 뇌출혈로 입원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레인은 남편의 간병을 자기 혼자서 맡아야 한다면서 아이들의 문병을 철저히 거부했다. 실제로 그녀는 심혈을 기울여 간호를 했다. 병원에서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까지 했으나 스펜서 백작은 그녀의 간절한 기도와 간호 덕분인지 몰라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뇌손상을 입어 언어와 동작이 어눌했다. 이러한 레인의 극진한 간호도 아이들의 적개심을 돌려 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레인도 강철 같은 여자였고 그런 섭섭한 태도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레인은 다이애나가 왕세자와 사귐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신분이 높아질 수 있는 기회를 환영했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아버지 스펜서 백작은 고교 중퇴자에 불과한 딸이 왕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생모인 프랜시스 키드는 큰딸 사라가 찰스왕의 일에서 실패를 보았던 것처럼, 다이애나도 실패를 보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였다. 한편 찰스 왕세자는 7월의 주말 하우스 파티에서 다이애나를 만나 나누었던 대화를 인상 깊게 기억했다. 그래서 그녀를 오페라에 초대했다. 그는 비서를 통해서 초청을 했고 또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알렸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스릴을 느꼈다. 그녀는 그 초청을 받아들였고 베르디 오페라를 좋아하는 척했다. 찰스는 그녀를 코드레이로 초청하여 자기가 폴로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보게 했고, 샌드링엄으로 초대하여 사냥하는 것을, 러드로에서는 말타는 것을 지켜보게 했다. 다이애나는 그 초청을 모두 받아을였고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그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게 좋았어요."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찰스와 함께 왕실 전용선인 브리태니아도 타보았고 카우스에서 벌어지는 수상 요트 경기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버킹엄 궁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디너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그녀는 찰스의 친구 중 니콜라스 패티 솜스 같은 나이든 남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겁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또 잘 적응했다. 찰스의 친구들은 왕세자를 열렬히 연모하는 그녀의 태도를 특별히 좋게 보았다. "그녀는 찰스를 잡아야겠다는 단호한 태도였고 또 그를 아주 좋아했어요. 정말로 그를 원하는 것 같더군요." 찰스의 친한 친구의 아내인 패티 파머-톰킨슨은 말했다. 몇 년 뒤 다이애나의 전기작가인 앤드루 모튼은 보다 적나라하게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 기이한 구애기간 동안 다이애나는 찰스가 휘파람을 불기만 해도 그의 발꿈치에 달려오는 말 잘 듣는 강아지였어요." 다이애나는 1980년 가을까지는 언론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해 가을, 디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찰스 옆에 앉아 있다가 드디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신문기자 제임스 휘태커와 사진기자 아더 에드워드의 고성능 망원경이 나무들 사이로 그녀의 모습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녀는 기자들이 자기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살짝 모습을 감추었따.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런던까지 추적했다. 며칠 뒤 '저 지독한 휘태커 씨'(다이애나가 왕실 관련 정보를 즐겨 싣는 타블로이드 판 신문기자인 휘태커를 즐겨 일컫는 말)가 독자들에게 '레이디 다이'를 소개했다. 휘태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예쁘지만 아주 끝내 주게 예쁜 것은 아니었어요. 매력은 있었지만 마력은 없었어요. 그러나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의 기적을 연출했어요.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인으로 변모해 버렸던 겁니다. 언론과 대중의 절대적 추종을 받는." 황금 단추가 달린 블레이저(코트)의 가슴 주머니에다 실크 손수건을 꽂고 다니는 뚱뚱한 기자(휘태커)는 다이애나에게 신데렐라의 대모 같은 사람이 되었다. 휘태커는 마법의 여론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써내는 기사마다 그녀를 '미래의 왕비로 가장 합당한 여성'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녀의 '순진함' '황홀한 매력' '타고난 겸손함'을 칭송했고, 그녀의 '넘치는 신선함'과 '왕족 같은 모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외쳐댔다. 다른 동료 기자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런 기조로 다이애나 관련 기사를 써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 달도 안되어 스펜서 백작의 착한 딸은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총각 왕세자에게 아름다운 블론드 세자비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영국 국민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다이애나는 완벽했다.제임스 1세를 통해서 찰스와는 16세대 떨어진 사촌간이 되는 찰스 2세로부터 시작하여 5대의 세계를 자랑하는 귀족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가 과거가 없는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처녀성은 세자를 낳을 왕비 후보로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심지어 필립 공마저도 흡족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왕가에 큰 키의 자손을 낳아줄 거야." 그는 마치 그녀가 새끼 낳는 암말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영국 언론은 일반대중들만큼이나 그녀에게 매혹되었으며 그녀를 '수줍은 다이'라고 칭송하면서 그녀의 기사를 얻지 못해 야단이었다. 그들은 신문과 잡지의 표지에다 그녀의 사진을 실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눈을 착 내리깔은 얌전한 규수의 모습이었다. '선'은 이렇게 써댔다. '열아홉의 ㅈ은 그녀는 완벽한 영국의 장미다.'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여고생 같은 순진성의 상징이었다. '미러'지는 그녀를 가리켜 '신성하다(Di-vine)'라고 말하면서 앞의 두자(Di)를 따로 처리하여 그녀가 곧 신성이라고 치켜세웠다. 기자들이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고, 그녀의 빨간 차를 뒤쫓았고, 그녀의 사진을 찍기 위해 지붕 위에까지 올라왔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전화통에서, 그녀의 직장에서 매일같이 그녀를 추적했다. "달링, 어떻게 그 지독한 자들을 그리도 잘 견디어내오?" 찰스가 안쓰러워하며 물었다. "나는 애들과 함꼐 일하는 것을 좋아해요. 애들에게 침착하게 대하는 법을 배웠거든요. 나는 기자들을 그저 애들처럼 대할 뿐이에요." 다이애나는 말했다. 그녀는 너무 친밀하게 구는 사진기자를 점잖게 타일렀다. "헤이, 다이, 왼쪽으로 좀 돌아봐요." 한 사진기자가 소리쳤다. 그녀는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내 이름은 다이애나예요." 그녀는 침착하게 말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처음엔 아주 침착하던 그녀도 기자의 차들이 추적해 오면서 자기 차를 길 밖으로 몰아내자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어떤 때는 미안해 하는 기자들이 그녀의 차 앞 유리창에다 사과 쪽지를 남겨 놓기도 했다. "우린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 미안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사진기자가 그녀으ㅐ 사진을 찍기 위해 그녀가 일하는 유아원의 화장실 유리창을 통해 몰래 침입하다가 사진 장비를 덜그럭거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자 유아원 아이들이 무서워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다이애나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사진기자에게 포즈를 취해 주겠다고 말해야 되었다. "딱 2분뿐이에요." 그녀는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진기자는 네 번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러자 유아원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 사진이 다이애나를 전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진이 되었다. 그 사진 속에서 다이애나는 이제 막 꽃피어나는 미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었다. 한 아이를 허리춤에 부여안고 다른 한 아이는 손에 잡고 있는 그 사진을 찍을 때 다이애나는 햇빛이 자신의 얇은 스커트 사이로 비쳐들어, 찰스 왕세자가 찬탄하며 말한 '멋진 긴 다리'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 사진에는 '레이디 다이애나의 슬립'이라는 캡션이 붙었다. 영국의 신문사들은 찰스에게 전화를 걸어 저 순진무구한 처녀를 영국의 미래 왕비로 삼으라고 일제히 외쳐댔다. '선데이 타임스'는 그녀가 완벽하다고 말했다. '진지하지만 따분하지 않고, 상냥하지만 유약하지 않고, 재미있지만 바보같지 않고, 활기차지만 장난스럽지 않고, 섹시하지만 음란하지 않은' 그런 여자라는 것이었다. '데일리 매일'의 니젤 뎀프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이상적인 여성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왕가의 아이들을 생산하는 데 신체적으로 완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신문의 헤드라인은 이렇게 권고했다. "찰스, 머뭇거리지 마라." 또다른 헤드라인은 '다이를 위하여!'라고 소리쳤다 언론은 왕세자가 1980년 11월, 32회의 생일파티 때에 청혼을 하리라고 예상했다. 다이애나는 그 생일 주간에 샌드링엄에서 찰스를 포함한 왕실 가족들과 함께 주말을 보냈다. 그래서 기자들은 그 성의 바깥에서 진을 치고서 발표를 기다렸다. 그들은 다이애나가 금요일에 도착해서 일요일에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떠나가자 찰스는 개를 데리고 기자들 옆의 산책로에 산책을 나섰다. "이봐요, 기자 양반들. 왜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에게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지난 금요일 날 뉴스를 기다렸던 모양인데, 실망시켜 미안하오. 하지만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왕세자가 청혼을 하지 않자, '가디안'의 사설은 그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지난 밤 버킹엄 궁에서 나온 왕실 행사 통보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지금 정치적, 경제적 불만에 휩싸여 있는 우리 나라는 멀리서 지나가는 똥차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왕실 결혼 황금마차의 황금빛 소리에 의해서 진압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로맨스는 1980년 11월 16일 '선데이 미러'에 실린 '왕실의 사랑 열차'라는 1면 폭로 기사 때문에 거의 물거품이 되어 버릴 뻔했다. 이 신문은 신원 미상의 경찰관의 말을 인용하여, 레이디 다이애나가 왕실의 기차에서 찰스 왕자와 비밀리에 이틀밤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정교한 부엌, 응접실, 침실 등이 딸린 그 기차는 왕실 가족이 공식 업무로 출장을 갈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신문기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찰스가 콘월 공국에서 약혼을 한 다음 한밤중에 경찰 바리케이드를 통해 다이애나를 몰래 그 기차 안으로 들여왔다. 윌트셔에 정차되어 있는 그 한적한 기차 사진의 옆에는 이런 캡션이 붙었다. '호젓한 열차 속의 사랑.' 그 기사를 접한 여왕의 공보 담당 비서관은 호통을 쳤다. "정말 말도 안되는 엉터리 기사에요. 여왕 폐하께서도 진노하고 계십니다." 왕궁은 기사 최소와 함꼐 사과 기사를 게재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신문의 편집인인 로버트 에드워드는 굳세게 버티었다. 그것을 목격한 증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 여자가 그 기차에서 이틀밤 머물고 또 왕세자의 개인 침실에서 여러 시간을 함께 보낸 다음 비밀리에 기차를 빠져나간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겨한 사람의 서면 진술서를 갖고 있다고 그 편집인은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 블론드 여자를 다이애나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마운트배튼 경의 개인 비서였던 존 바라트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건 다이애나가 아니라 카밀라 파커 볼스였습니다. 마운트배튼이 사망했을 때 그녀가 찰스에게 조문 전화를 걸면서 다시 찰스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당시 브로드랜즈에서 짐까는 일을 내가 지휘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카밀라는 그때 이후 찰스와 지속적으로 접촉을 해왔어요. 그도 파커 볼스 부인이 자신의 생활 속에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더군요.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 카밀라가 도움이 된다고 했어요. 두 사람은 승마, 사냥, 사격 등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그녀는 찰스의 디너 파티에서 호스테스(안주인) 역할을 했고 점심식사와 시골 별장의 주말 행사 등을 주관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초청객 명단도 그녀가 주무르게 되었지요. 찰스는 심지어 그녀를 자신의 걸 프라이데이(충실한 여자)라고 불렀어요. 카밀라는 그에게 아주 완벽한 여자였어요. 성품이 쾌활한데다 그의 요구를 잘 받아 주었지요. 찰스는 윈저 가의 남자들을 그대로 빼다박았습니다. 그들은 남자같인 생긴 여자를 좋아해요. 승마바지를 입은 긴 다리의 여자들 말에요. 뭐라고 할까, 자기의 여자가 말처럼 생겼기를 바랬어요. 그래서 마운트배튼의 여자들, 필립의 여자들, 찰스의 여자들이 모두 하나같이 똑같았어요." 왕세자는 카밀라의 남편 앤드루 파커 볼스 중령이 로데시아(지금의 짐바브웨)로 파견되어 그 나라가 신생 독릭국가로 이행하는 것을 돕는 동안, 계속 카밀라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의 임지에 따라가지 않았다. 카밀라와 함께 승마를 했던 그녀의 친구는 이렇게 증언했다. "찰스가 그녀에게 헤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가지 않았지요. 그건 또 카밀라의 남편으로서도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앤드루 파커 볼스도 그 당시 다른 여자와 깊숙이 사귀고 있었으니까요." 다이애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카밀라란 여자가 자신이 주위에 늘 달라붙는 물귀신 같은 존재라는 것은 막연히 느끼고 있었지만, 자기보다 나이 많은 그 여자가 어떻게 자기와 찰스의 관계를 잘 아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왕세자에게 여자 친구에 대해서 물어볼 만큼 입지가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룸메이트와 언니들에게는 불편한 심기를 털어 놓았지만 찰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가 왕실 기차 사건에 대해서 역정을 내는 것을 보고 약간 안심했다. 그는 언론을 매도하면서 그들을 '인정사정없는 독수리떼'라고 욕했다. '선데이 미러'의 편집인이 '기차 속의 사랑' 기사를 취소하지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자, 찰스는 왕실 직원들에게 두 번째 부인 발표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며칠 뒤 여러 달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인도 여행길에 올랐다. 다이애나는 그를 전송하기 위해 공항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그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왕실 전용기의 트랩위로 무심이 걸어올라가자, 그녀는 왕칵 울음을 터트렸다. 기자들은 찰스가 타지 마할을 방문할 때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무굴 제국의 황제가 죽은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저 아름다운 건축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찰스에게 물었다. "아주 멋진 일입니다. 사랑한 사람을 위해 저토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찰스가 대꾸했다. 그러자 인도 기자가 찰스의 결혼 전망은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물었다. 찰스는 이상한 답변을 해서 그 기자를 잠시 멍하게 만들었다. "내가 만약 무슬림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을 테니..." 영국 기자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왕세자가 농담을 한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찰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기사화한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찰스의 말을 살짝 고쳐서 이렇게 보도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의 힘이 이런 타지 마할도 만들게 하는군요.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언젠가 나도 나의 아내를 여기에 데려와 이 건물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기차 속의 사랑'기사의 여파가 여전히 다이애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선데이 타임스'에 난 그 '지저분한' 사건 관련 기사를 읽고 히스테리를 부렸다. 1980년 11월 30일자의 그 신문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일반 대중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사항이 무엇인지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왕실에서는 그녀의 이력을 더럽힐 수 있는 오점을 제거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레이디 다이애나가 적합한 규수로 떠오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시쳇말로 '과거없는 여자'라는 사실인 것이다. 즉 이전에 애인을 사귄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의문점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 시점까지 다이애나는 어딜 가나 칭송만 받았다. 그녀에 관한 기사는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나 '선데아 타임스'의 그 기사를 읽자 그녀는 겁을 먹고 눈물을 터트렸다. 그리고 친어머니(생모)에게 전화를 걸어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당황하고 화가 난 프랜시스 샨드 키드는 '타임스'에 강력한 항의 편지를 발송하여, 자신의 딸에 대한 '악의에 찬 거짓말'과 '지어낸 이야기'를 그만두라고 호소했고 한편으로 그녀는 기자들에게 다이애나를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영국 의회 의원 60여 명도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가 언론에 의해서 학대받는 현사태를 개탄한다'는 결의문을 내놓았다. '가디언'은 '열아홉 살에 집중포화를 맞다'라는 사설을 내어 십대 소녀에게 이처럼 엄청난 시련을 안긴다는 것은 가혹하다는 주장을 폈다. 다이애나는 어머니가 과잉 반응을 한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여 재빨리 '데일리 스타'의 제임스 휘태커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항의 편지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다. 그녀는 언론과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휘태커는 이렇게 회상했다. "다이애나는 단지 찰스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물론이고 누구나 다 그걸 원하고 있었습니다. 다이애나는 내게 전화를 걸어 자기는 결단코 왕실 기차에 간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발 내 말을 믿어 주세요. 나는 그 기차에 간 적이 없어요. 아니, 그 기차를 본 적도 없어요.' 나는 그걸 기사화했고 그날 저녁 내내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들과 텔레비전을 봤다는 그녀의 말을 인용했지요." 다이애나의 새 어머니 레인만 빼놓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이애나가 포시아('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여주인공. 역주)처럼 순결하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자신의 처녀성을 주장한 적은 없다. 그러나 몇 년 뒤 전기 작가인 앤드루 모튼이 그녀를 대신하여 처녀성 주장을 해주었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지만 미래의 결혼에 대하여 운명의 손길 같은 것을 느꼈다고 모튼은 주장했다. "나는 앞일을 생각할 때 내 몸을 깨끗이 간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새 어머니 레인은 다이애나가 열일곱이던 1978년 드라이 진을 제조하는 양조장 집인 길비 가의 아들 제임스 길비와 데이트를 하면서 처녀성을 잃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인과 다이애나의 적대적 관계를 감안하면 이 주장은 앤드루 모튼의 그것에 비해 신빈성이 떨어진다. 언론에서 연일 다이애나의 실추된 이미지를 보도하자 레인의 어머니인 환상 로맨스 소설가 바바라 카트랜드도 우려를 표시했다. 로맨스 소설로 수백만 달러를 번 여류작가 카트랜드는 냉정한 진실보다는 부드러운 거짓말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거짓말은 환상을 부채질하지만 현실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만 하는 것이다. 카트랜드는 왕족과 평민 사이의 묵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왕족은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허세를 부리고 일반 평민은 그 허세를 받아 주어야만 비로소 묵계는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80세의 로맨스 작가는 핑크빛 마라부(대머리 황새) 깃털 옷을 화려하게 떨쳐입고서 기자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자기는 다이애나의 결백을 ㅂ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찰스 왕세자는 순진무구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나는 다이애나가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내 소설 속의 여주인공처럼 순결합니다. 요즈음 같은 시절에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그녀는 완전무결 그자체입니다." 카트랜드는 말했다. 다이애나의 새 어머니 레인은 속으로는 다이애나의 처녀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우리가 남이냐'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친어머니 바바라 카트랜드의 낭만적 선언보다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느꼈다. 게다가 레인은 다이애나의 누드 사진이 언론에 보도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걸 미리 막기위해 변호사를 접촉했다. 당시의 변호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레인은'프라이비트 아이'를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레인은 다이애나가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스위스의 한 풀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비키니를 벗어 버리고 찍은 사진에 대해 키득거리며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던 것이다9그 누드 사진은 1993년 한 독일 잡지사가 입수하여 영국 측에 팔겠다고 제안했다가 곧 철회하고 사진을 다이애나에게 돌려주었다. 그 잡지의 편집인은 그 사진이 언론보도의 가치가 없는 눈요기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변호사는 그런 사진이 보도되기 전에 보도금지 명령을 얻어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레인을 안심시켰다. 변호사는 도 귀족들 중 다이애나의 순결을 공식적으로 보장해 줄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레인은 다이애나의 아저씨인 퍼모이 경을 접촉하여 가문의 명예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4년 뒤 조울증으로 자살해 버린 그 귀족은 즉각 언론에 다이애나의 순결을 주장했다. 퍼모이 경은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단언하지만, 다이애나는 애인이 없었어요. 찰스 왕세자의 신부감을 고를 때 순결성이 하나의 푸리미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최근에 사귀었던 여자들을 꼼꼼히 살펴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집니다. 내가 알기로 다이애나는 그 어떤 남자와도 사귄 적이 없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습니다." '뉴스위크'는 이렇게 선언했다. "사람들의 중론은 다이애나의 순결이 동정 그대로라고 믿고 있다." 열성기자들이 왕세자를 땅끝까지 쫓아다니며 결혼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 보면서 왕세자의 로맨스에 대한 언론보도는 점점 더 가열되기 시작했다. 1981년 1월 샌드링엄 궁의 별장으로 나가 있던 왕실 가족들은 마치 자신들이 가택 연금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자들과 사진기자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길다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 사형수를 감시하는 것처럼 삼엄하구만." 프린스 필립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참모에게 말했다. 찰스는 기자들이 그토록 쫓아 다니는 것이 너무 지겨웠지만 그래도 그들을 만나면 공손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는 샌드링엄 궁 앞에 진치고 있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여러분, 1982년은 더욱 보람찬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들을 이곳까지 내보낸 편집자들은 지저분한 한 해를 맞기 바래요." 찰스는 '편집자들'을 말할 때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며칠 뒤 다이애나가 샌드링엄에 도착하자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샌드링엄의 입구를 가로막고 그녀의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였다. 여왕은 참다못해 아들을 준엄히 꾸짖었다. "너의 로맨스가 이런 식으로 1년만 더 계속된다면 우리 식구들은 저 사람들(기자들) 때문에 노이로제가 되어 버릴거야." 필립 공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왔다. 그는 우유부단한 아들을 향해 까놓고 말했다. 다이애나의 명성에 먹칠하기 전에 빨리 결심해라. 그래서 우리도 좀 편히 살자. 늘 자식의 문제에 개입하는 아버지였던 필립은 찰스가 데이트하는 여자들을 모니터했다. 그는 아들이 흑인 여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금지했고 '팬트하우스'의 샌터폴드 여자(잡지의 맨 가운데에 소개되는 매력적인 여자)들과 사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게도 알고 있었으나 그런 불륜 관게가 왕실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필립은 찰스에게 어서 결혼하라고 압박을 넣는 한편 결혼 상대자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 그 신부가 누구든 회사(왕실)의 앞날을 대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평생을 왕실에 투자해 왔고 그래서 자신의 투자 종목을 지켜야 할 입장이었다. 찰스가 서른 살을 넘긴 이후 필립은 더욱 감시의 눈길을 강화하면서 데이트 상대의 가부를 제때제때 판정해 주었다. 찰스는 양조재벌의 금융부문을 담당하는 사업가의 딸인 사브리나 기네스와 데이트를 하면서, 그녀를 왕실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골 별장의 하우스 파티에 초대했다. 그런데 그 초대 사실이 언론에 흘러나가 찰스의 새 여자에 대한 추측 기사가 언론에 떠오르게 되었다. '이 마당에 또다시 사랑에 빠졌는가?' 한 신문의 헤드라인은 그렇게 뽑고 있었다. 필리은 그 기사를 보고 너무 호가 나서 그 하우스 파티의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그 젊은 여자를 초청객 명단에서 제외시키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지시를 이행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필립은 자기가 직접 그 주말 오후 5시에 그곳에 가보겠노라고 말했다. 찰스의 친구들은 시키는 대로 했고 미스 기네스에게 필립 공의 방문과 겹치지 않게 오후 5시 전에 자리를 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필립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그곳에 도착하여 막 현장을 떠나는 그녀오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응접실에서 잠깐 보자고 말했다. 그녀가 응접실로 걸어들어오자 필립은 다정한 인사말이나 잡담은 일체 생략한 채 본론부터 꺼냈다. 마치 길로틴의 날이 쳐내려오듯이, 필립은 그녀에게 아들의 인생에서 사라져 달라고 요구했다. 그녀의 이름이 찰스 왕세자와 연결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서 이 집에서 나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울면서 응접실에서 나왔다. 필립은 다이애나 스펜서와 결혼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거친 매너로 아들에게 말했다. 그는 찰스에게 그녀와 결혼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빨리 결심하라고만 말했다. "어서 끝장을 내, 찰스." 필립은 샌드링엄까지 따라와서 설쳐대는 기자들에게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여왕의 비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는, 찰스는 망설이는데 필립은 단칼이라는 점입니다." 찰스는 그 후 4주 동안 다이애나와 결혼할까 말까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일기에다 자신의 혼란된 마음 상태를 고백하고 있다. 정부인 카밀라 파커 볼스와도 상의를 했다. 카밀라는 결혼해도 좋다고 했고 자기 친구들에게 다이애나를 '생쥐'라고 불렀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찰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괴롭히는 것은 미지의 상황 속으로 점프해 들어가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조국과 가족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런 일로 고민하는 것인데 이 모든 게 어떤 때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약속을 했다고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느낍니다." 몇 년 뒤 찰스는 원하지 않는 결혼 쪽으로 자기를 밀어부친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 아무튼 자신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1년 2월 6일, 버킹엄 궁의 3층 집무실에서 다이애나와 단 둘이 디너를 하면서 청혼을 했다. 다이애나는 열광적인 마음으로 승낙했고 찰스는 그녀에게 줄 반지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며칠 뒤 그는 왕실 전용 보석상인 개라즈를 접촉했다. 보석상은 검은 벨벳 쟁반에 놓인 반지를 여러개 가지고 왔다. 다이애나는 18개의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인 6캐럿짜리 사파이어 반지를 골랐다. 가격은 5만 달러였다. "내가 제일 큰 반지를 골라잡으니까 여왕은 눈을 크게 뜨더군. 하지만 그 반지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 그녀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왕세자와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의 약혼 사실은 1981년 2월 24일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나는 영국 국민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찰스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왕실과 함께 그 약혼을 축하했다. 그러나 다이애나의 생모인 프린새스 샨드 키드는 딸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나는 약혼 발표 후 6주 동안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다이애나가 왕실에 시집 가고 난 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그녀는 한 친척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13. 로열 스타의 탄생 - 신성과 청순함으로 포장된 다이애나의 진실 그날 쇼의 최우수 조연상은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의 드레스가 수상해야 마땅했다. 1981년 다이애나가 어깨끈 없는 대담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런던의 골드스미스 홀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놀라서 숨을 멈췄다. 그것은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의 약혼을 발표하고 찰스와 함꼐 처음 나타난 공식석상이었다. 언론은 콘도르가 죽은 시체에 달려들 듯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플래새가 연속적으로 터졌고 히드라의 머리 같은 마이크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왕세자 커플이 로열 오페라 자선 행사장에 들어서자 BBC 논평가는 그 눈 튀어나올 정도의 매력적인 드레스를 설명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는 '가슴이 터진'이라는 말을 더듬으면서 다이애나의 클리비지(유방 사이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가슴이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는 수줍게 미소지었다. 카메라가 다른 곳으로 가자 BBC 논평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클리비지 하나로 영국 남자들 가슴이 다 터져 버리겠네." 흥분한 기자들은 계속 그녀의 주위에 몰려들었고 카메라맨들이 그녀에게 장비를 들이대자 자선 행사장에 나온 초청객들은 행사장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찰스는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행사장 밖으로 나가면서 기자들이 자기를 따라올 줄 알았다. 그러나 기자들은 여전히 다이애나 주위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기가 일으킨 소란이 좀 멋쩍었든지 다이애나는 실례하다면서 그날 자선 행사장에 나온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와 함꼐 분장실로 들어갔다. 다이애나는 분장실에서 저토록 소란스러운 기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하며 조언을 구했다. 기자들의 귀찮은 공세에 인이 박혀 있던 켈리 왕비는 그들을 그냥 바람이나 비 같은 자연현상으로 생각해 버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앞으로 공세는 더욱 심해질 거예요." 켈리는 자상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말은 바로 그 다음 날, 사실로 밝혀졌다. 언론들은 일제히 다이에나와 그 놀라운 드레스에 대해서 숨막힌다는 논평을 써댔다. 그녀의 전신 사진을 실었음은 물론 그럴듯한 헤드라인을 달았다. '레이디 다이, 위태로운 일을 감행'이라고 '데일리 미러'는 소리 높여 외쳤고 '과감한 다이'라고 '선'은 찬탄했다. 한편 '데일리 엑스프레스'는 '수줍은 다이, 충격을 주다'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심지어 제도권의 신문들도 유아원 보모답지 않은 그 대담한 드레스를 언급했다. '타임스'는 '수줍은 다이의 훤한 노출'이라고 캡션을 달았다. 다이애나는 당황했다. "사람들이 외 저토록 난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건 내가 즐겨 입는 드레스의 하나일 뿐인데." 그녀가 찰스 왕세자의 시종에게 말했다. 시종은 시선을 발등에 고정시켰다. "그렇지만 그 옷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다이애나가 결혼하고 한 달 만에 해고되었다. '데일리 엑스프레스'의 기자 진 룩은 다이애나가 어깨를 훤히 노출하는 끈 없는 드레스를 입고 나온 과감함을 칭찬했다. 그 기자는 이렇게 썼다. "바람처럼 날아갈 듯한 그녀의 옷은... 일단 입고 나오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또 그런 옷차림을 계속 유지하려면 더욱 용기가 필요하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잡은 바에 의하면, 다이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빳빳한 보디스가 받쳐주는 겨드랑이 부분의 약간 나오는 군살을 제거하는 일이다." 다이는 자신의 '풍만한 몸매' 또는 '꽃피어나는 몸매' 등에 대한 신문 논평을 읽으면서 위축되었다. 특히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아주 뚱뚱해 보였어요. 암소처럼 살이 쪘어요. 그런 나를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탄식하듯 말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로부터 '뚱보'라는 놀림을 받고 당황했던 경험이 있는 찰스도 그녀를 놀려댔다. 몸매 유지를 위해 거의 광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 찰스는 죽어라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은 수도승처럼 조금만 먹었다. 찰스는 몸매를 유지하려면 식사는 아주 간단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단 것을 좋아하는 다이애나의 식성을 비웃으면서 그녀를 '호박'이라고 놀려댔다. 신문에 난 자기의 사진을 보면서 고민하고 있는 다이애나를 찰스는 더욱 놀려먹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푸딩을 먹으면 안되겠어." 그는 이 말을 무심코 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대식증(bulimia: 음식을 무절제하게 많이 먹고 위에서 소화되기 전에 화장실 변기 같은 데다 인위적으로 토해 버리는 증세)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본 직후 다이애나는 너무 심란하여 많이 먹고 곧 토해 버리는 증세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식생활 난조는 다이애나 부모님의 결혼이 파탄으로 끝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이애나의 둘째 언니인 제인도 부모님 때문에 너무 고민을 하여 무식욕증에 빠졌었다. 제인은 ㅈ었을 때 몸무게가 거의 아이 수준으로 빠질 정도로 식사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집안 사람들이 강제로 치료받게 했다. 다이애나도 불안한 일이 있으면 식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 상황에 대처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허기를 참지 못하고 설탕고 아이스크림을 듬뿍 친 곡류를 몇 접시씩이나 허겁지겁 먹어댔다. 부드러운 젤리 캔디도 몇 봉지씩이나 먹었고 그 다음에는 하얀 프로스팅이 발라진 바닐라 과자를 끝없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리고는 곧 화장실로 가서 토해 버렸다. 그녀는 왕실의 법도를 배우기 위해 결혼 몇 달 전에 버킹엄 궁으로 이사해 들어갔다. 그런데 찰스가 해외 여행을 나갔을 때 혼자 식사를 하게 되면 대부분 자신의 방에서 식사를 했다. 처음엔 음식 그릇에 손도 안댄 채 그녀의 방에서 그대로 나왔다. 주방장은 자신의 요리가 그녀의 입에 맞지 않는가 싶어 걱정을 했다. 그래서 주방장이 그런 생각을 내비치자 그녀는 화장실 변기에다 음식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왕궁의 식료품실에 있는 켈로그 프로스티를 엄청나게 몰래 가져다 먹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시종이 훔쳐가는 게 아닌가 의심을 했고 그래서 그 시종은 해고될 뻔했어요. 그때 다이애나가 나서서 자기가 그랬다고 시인했어요." 왕실 담당 기자인 로스 벤슨이 말했다. 처음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왕실 직원들은 미래의 왕비가 주기적으로 대식을 하고 그 다음에는 토해 버리는 대식증 환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레이디 다이애나가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모습이란... 오,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그건 우리로선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왕실 직원 한 사람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아무튼 직원들은 다이애나가 그 없어진 음식을 먹어치운 범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사실을 시인했는데도 시종의 좀도둑질을 보호해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왕궁의 2층에 있는 다이애나의 응접실 방청소를 하는 시녀가 그녀의 화장실에서 토한 흔적을 발견하면서부터 비로소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대부분의 직원은 믿지 않으려 했다. 다이애나는 체중 조절을 하면서 대식했다가 토하는 해로운 사이클이 자꾸 반복되어 하루에 다섯 번씩 대식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3개월 만에 20파운드를 뺐다. 찰스는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 증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1981년 봄에 찰스는 5주 예정으로 미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찰스가 현지 총독으로 부임하는 문제까지 거론되었다. 여왕과 필립 공은 찰스의 해외 순방 도중의 발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필립 공은 아들이 가난한 사람, 장애인 등에게 관심을 표시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보았다. 찰스는 의전적인 일보다는 실제적인 일에 더 관심을 많았는데 비해 필립 공은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필립은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의 문제는 교회에다 맡겨두는 것이 좋으며, 특히 영국 교회나 국가보건청 같은 제도권과 분규를 일으키는 짓이야말로 왕실 사람들이 극력 피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찰스는 오스트레일리아에 교환 학생 신분으로 가본 적이 있었으므로 결혼 후 호주 총독으로 부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여왕의 제안에 호의적이었다.총독직은 총리보다 더 많은 연봉을 제공받았지만 군총사령관직 이외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었다. 1980년 여왕은 그 임명건에 대해서 마거릿 대처 총리와 협의했고 대처 총리는 외무부에 그 건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대처 총리는 찰스가 다음 번 오스트레일리아 방문 때 '비공식적으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봐도 좋아는 보고를 여왕에게 해왔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에 나선 찰스는 설혹 총독직 제의가 오더라도 거절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너무나 따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총리는 도무지 유머 감각이 없어요. 너무 근엄해요. 나는 대화의 분위기를 좀 재미있게 해보려고 애썼지만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어요." 찰스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이애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다(이 전화는 비밀리에 녹음되었다). 찰스는 그곳에서 다이애나와 여왕에게 도합 다섯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전화국에 근무하는 반영국적인 공화당 인사가 그 통화 내용을 비밀리에 녹음했다. 이 통화 내용은 독일 잡지인 '디 악투엘'에 실렸고 이어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아이리시 인디펜던트'에 실렸다. 한편 버킹엄 궁은 호주와의 국가적 마찰을 우려하여, 그 통화를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통화 내용이 영국 내에서는 출판되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었다. 이 공개된 대화 내용에 의하면 찰스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이애나는 우선 짧은 시간 내에 배워야 할 왕실의 법도가 너무 많아서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난 너무 흥분되어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다이애나가 말했다. "나도 당신이 보고 싶소. 하루 종일 일정대로 움직이다가 이제서야 시간을 내어 사랑하는 약혼녀와 대화를 나누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소." 찰스는 저녁 파티에 가야 할 시간이지만 호스트가 좀 기다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측의 배려로 공항에서 다이애나를 닮은 여자가 자기(찰스)를 영접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하지만 실물보다는 못한 것 같았소." 그러자 다이애나가 낄낄대며 웃었다. 찰스는 언론에 대해서 불평을 터트렸다. "이번 여행 동안 이 친구들은 내 머리의 대머리 진 부분만 찍으려고 덤벼들었어요." 다애애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난 당신이 대머리 진 부분이 있는 줄 몰랐어요." "참 바보 같은 자들이요. 나는 이처럼 열성적으로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데 그 자들은 고작 내 대머리에만 관심이 있다니." "그건 정말 우습군요." "그렇지. 나도 아이 적에 아버지가 대머리를 감추려고 하는 걸 아주 재미있게 생각한 적이 있었소." "당신의 대머리가 그 분처럼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나보다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군요." 비록 완곡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다이애나는 왕실의 법도를 배우는 것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찰스에게 퀸 머더를 존경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따.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클래런스 하우스로 가서 퀸 머더와 며칠 지내는 동안 '거의 무시를 당했다'라고 털어 놓았다. 버킹엄 궁으로 이사를 간 직후 다이애낭게는 찰스의 차석 개인비서관인 올리버 에버렛의 방 옆에다 자그마한 사무실이 주어졌다. 에베럿은 그녀가 헤드폰을 끼고 댄스용 타이츠를 입은 채 사무실로 뛰어들어오는 것을 처음 보고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주말 댄스 시간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녀가 로큰롤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난 원래 댄서가 되려고 했었어요. 그랬는데 키가 너무 훌쩍 커버려서 못하고 말았지요." 그녀는 밤낮 텔레비전을 보았고 연속극 드라마에 몰두했다. 왕실 직원들은 우선 그녀에게 왕실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세자비 수업을 시작했다. 세자비가 참가해야 할 공식 행사는 애스코느 경마대회, 근위여단 사열식, 배드민턴 경마 시주회, 의회 개원, 첼시 꽃 전시회, 윔블던, 가든 파티, 코우스 레가타, 병원자선행사, 각종 자선행사, 군대 사열 등 줄잡아도 연간 170개 이상의 행사였다. 여왕의 시녀인 수잔 하세이가 세자비에게 왕실 법도를 가르치는 주담당관인 데버렛을 도왔다. 공식석상에서는 모자를 쓰고 밝은 색깔의 옷을 입어 남의 눈에 띄게 하라, 팔뚝 전체로 손을 흔들어야지 손목만을 흔들어서는 안된다. 공용 화장실은 절대 사용하지 말라. "세자비가 되어서 가장 괴로웠던 일은 소변을 마음대로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다이애나는 여러 해 뒤에 말했다. 에버렛은 왕세자비의 역할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 다이애나에게 역사책을 여러 권 주면서 최초의 교육적 장애에 부딪쳤다. 대식증으로 고생하는 데다 찰스가 곁에 없어서 너무 외로웠던 그녀는 그런 고리타분한 읽기 과제를 거부했던 것이다. 마필 담당관이기도 한 에버렛이 그 방안에서 나가자 그녀는 역사책들을 마루바닥에다 내동댕이쳤다. "나보고 이 책들을 읽으라는 얘긴가 본데, 내가 어디 읽나 보자.." 그녀는 그렇게 투덜거렸다고 나중에 친구에게 말했다. 급격히 체중을 빼서 몸이 쇠약해진 그녀는 영국 역사상 중요했던 행사(왕세자의 결혼)를 준비하면서 빈번히 스트레스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혼식 몇 주 전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점점 더 겁이 나요." 그녀는 폴로 경기장에 갔다가 사진기자들 앞에서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그래서 어머니가 급히 그녀를 경기장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야 했다. "그녀로서는 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찰스 왕세자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는 친한 친구들에게 걱정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연 그녀가 그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군." 테니스 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다이애나는 윔블던 대회의 결승전에 참관했으나 미국 테니스 스타인 존 매켄로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기 전에 로열 박스를 나섰다. 매켄로가 열세 번씩이나 심판 판정에 반발하며 욕설을 내뱉고 심판을 저주하는 등 볼썽사나운 꼴을 보여 자리를 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윔블던 구장 아래층의 다과실에서 윔블던 여자 우승자인 크리스 에버트를 접견했다. 에버트는 왜 찰스 왕세자는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해요. 다 큰 어린아이 같아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를 포근하게 진정시켜 윔블던 게임을 함께 보러 오도록 할게요." 다이애나는 에버트에게 결혼을 앞두고 근심이 많음을 시인했다. "나는 다이애나에게 결혼을 행복한 일이며 별로 걱정할 게 없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결혼은 행복한 일이라고 강조하던 에버트는 그 후 영국의 테니스 스타인 존 로이드와 결혼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이혼했다. "다이애나에게 결혼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 결혼 이외의 것들을 생각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습니다." 에버트가 말했다. 찰스 왕세자의 보좌관들도 다이애나가 미래의 책무에 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일별, 월별 행사 계획표를 그녀에게 보여 주었고 또 6개월 전에 미리 짜여지는 여행 스케줄도 일러 주었다. 그러나 그런 행사표보다 그녀의 관심을 사로잡는 문제는 왕세자의 여자 문제였다. 왕세자의 참모들은 그녀의 끈덕진 개인적인 질문에 난감해 했다. "나는 찰스에게 아직도 카밀라 파커 볼스와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명확한 대답을 안하더군요. 난 어떻게 하면 좋죠?" 다이애나느 프란시스 코니시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찰스의 개인 비서관들은 다이애나의 개인적 질문에는 눈을 내리깔면서 얼른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며칠 뒤 찰스의 개인 비서인 마이클 콜본은 보다 더 난처한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이애나는 그의 책상에서 팔찌를 발결했다. 그것은 찰스가 그의 정부에게 줄 작별 선물이었는데 콜본이 대신 주문한 것이었다. 라피스 라줄리 보석이 박혀 있는 그 황금 팔찌에는 G.F.(Girl Friday: 충실한 여자)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다이애나는 콜본에게 그 선물이 누구 거냐고 다그쳐 물었다. "난 그게 카밀라에게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 선선히 시인하세요. 도대체 그건 무슨 의미죠? 찰스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콜본은 그제서야 마지못해 자기가 그 선물을 주문했다는 사실만 시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거부했다. 그도 결혼식 직후 실직하고 말았다. 다이애나는 찰스에게 직접 물어 보았다. 그는 아스프레이 보석상에서 산 팔찌가 카밀라 파커 볼스에게 주려는 것이라고 시인했다. 하지만 그 팔찌를 직접 건네 주면서 작별인사를 하려 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는 그 작별을 고하는 선물이 그들의 관게에 종지부를 찍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이애나는 그런 구차한 핑계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언쟁을 벌였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아직도 정부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는 생각을 가족들에게 털어 놓았다. "그건 정말 안됐군, 더크. 하지만 네 올굴이 이미 다과회 기념 타월에 새켜져 있어. 이젠 뒤로 빼려 해도 너무 늦었어." 다이애나의 큰 언니 사라가 다이애나의 가족 내 별명으로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 벌써 몇 주째 페미니스트들은 '다이, 결혼하지 마!'라는 글자가 새겨진 단추를 달고 다녔다. 그 다음 날 다이애나는 결혼식 조찬회의 초청객 명단에서 카밀라의 이름을 빼버리는 것으로 복수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정부들을 마치 카드짝 돌리듯이 멋대로 가지고 놀던 것을 보면서 자라난 찰스는 화가 난 약혼녀가 그런 조치를 취해도 별로 따지지 않았다. 그는 개인 비서에게 다이애나가 느앗없이 심술을 내면서 뚱해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또 갑자기 눈물을 터트려 영 난처하다고 말했다. 찰스의 마필 담당관이 다이애나가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몇 시간이고 우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보고해 오자, 찰스는 깔짝 놀라기도 했다. 찰스는 그런 태도가 우스꽝스럽고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개인 비서는 다이애나의 그런 태도를 결혼 히스테리로 간단히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려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우유부단한 찰스는 일이 그렇게 돌아가자 다이애나와의 결혼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트콤 파크로 여동생 앤 공주를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다. 당시 둘째 아이를 가져 출산 한 달 전이었던 앤 공주는 오빠의 고민을 자세히 들어줄 형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빠에게 왜 그리 과단성이 없느냐고 질책했다. "오빠, 일단 손에 들어온 패는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젠 그 패를 가지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게임을 하는 수밖에 없는거예요." 앤 공주는 백토리아 여왕이 사랑의 문제와 관련하여 딸들에게 해준 조언을 되풀이했다. "그저 눈을 감고 영국만을 생각하가." 비록 신부는 대식증 환자이고 신강은 바람둥이지만 그들은 아주 이상적인 커플처럼 보였다. 일반 대중들은 그들의 로맨스에 매혹당했다. 백마를 탄 왕자는 마침내 신데렐라 같은 공주를 찾았고 그리하여 1981년 7월 29일 결혼식을 올리면 그 뒤 영원히 행복하게 살 터였다. 여왕은 왕실의 결혼이 가난한 나라에 가져다 주는 매혹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3백만 명의 영국 사람들이 실업자 상태였지만, 여왕 폐하는 납세자들의 돈을 주저하지 않고 소비했다. 그녀는 결혼식 준비에 들어가는 의전 관련 비용(가령 초청장을 인쇄하는 데에만 1만 달러가 들었다)은 사람들의 무기력함을 떨쳐 버리는 강력한 방어가 된다고 느꼈다. 여왕은 쇼 비즈니스를 싫어하고 왕실 사람과 유명 인사를 서로 배교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드럼, 트럼펫, 황금마차가 동원된, 할리우드 뺨치는 화려한 행사를 연출했다. 그녀의 연출 작품은 '고급 사회'라는 로맨스에다 '환상'이라는 마법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녀는 '벤허'보다 더 많은 의상과 더 많은 마필을 준비시켰다. 여왕이 1981년에 연출한 왕실의 결혼식은 영국 왕실에 최고의 흥행 기록을 안겨 주었고 또 영국 관광업계에 최대의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여왕은 자신의 왕실과 자신의 왕국이 이런 화려한 행사에 의존하여 광채를 발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혼식의 장소는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정해졌는데 그곳이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더 많은 관중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으로 정해진 게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몰라요. 나의 부모님이 평생을 다짐하며 결혼했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찰스와 결혼한다는 것은 내게 큰 고통이었을 거예요." 다이애나는 말했다. 그녀가 선택한 결혼의 찬송가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랑, 대가를 지불하는 사랑, 제단 위에 최후의 희생을 바치는 사랑'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여왕은 친지, 가족, 국가 수반, 유럽의 왕가 등 2,500여명의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스페인 왕 후안 카를로스는 신혼부부가 허니문 동안 지브롤터에서 브리태니아 호에 승선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그 초청을 거부했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끝에 있는 작은 식민지인 지브롤터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을 의문시해 왔던 터였다. 카를로스 왕은 찰스와 다이애나가 지브롤터에서 왕실 전용선에 승선하기로 한 결정은 외교적 실수라고 말했다. 나중에 후안 카를로스를 직접 만난 필립 공은 카를로스가 바보라고 말했다. "우린 지브롤터 얘기라면 지긋지긋해. 게다가 그곳은 물가가 너무 비싸." 필립은 말했다. 미국의 대통령도 여왕의 초청을 거부했다. 백악관 참모들이 거부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기 때문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참모들은 대통령의 첫 해외 나들이가 영국 왕실의 화려한 행사에 참여해서 들러리나 서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이견을 피력했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대통령의 영부인이 남편없이 혼자서 갔다. "나는 찰스 왕세자를 아주 좋아합니다." 낸시 레이건은 말했다. 한편 왕궁의 공보 비서관은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의 공식 타이틀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결혼식 직후부터 그녀는 왕세자비 다이애나로 불리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공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이애나 공주라고 붙여서 호칭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군주의 소생만이 공주 앞에 the를 붙이는 것이 관례이므로, 그녀의 경우 이름없이 공주라고 부를 경우 the를 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함에 대한 관례를 잘 모르는 미국인들은 그녀를 그저 프린세스 다이(다이애나 공주)라고 블렀다. 결혼식 전날 밤 왕실의 가족들은 버킹엄 궁의 발코니에 모여서 2차대전 때의 공습 이래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말이 끄는 마차의 행렬을 보기 위해 약 17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세인트 폴 대성당 근처의 보도에서 노숙을 했다(영국 경찰의 추정 수치). 귀족들이 여왕의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버킹엄 궁으로 몰려들었다면 일반 대중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 주위에 몰려들었다. 여왕이 주최하는 무도회가 끝난 다음 다이애나는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찰스는 정부의 품에 안겨 보냈다. 카밀라 파커 볼스는 손아래 시동생에게 자기가 버킹엄 궁의 찰스 응접실에서 함꼐 잤노라고 털어 놓았다. "그녀는 비록 찰스가 다이애나와 결혼하지만 그의 마음은 자기가 오로지 갖고 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시동생은 리처드 파커 볼스가 말했다. 그러나 왕세자비는 남편의 마음을 정부인 카밀라에게 빼앗길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다이애나는 임신을 함으로써 자기의 결혼을 더욱 공고히 해야겠다고 마음벅었다. 그래서 허니문 짐을 쌀 때, 찰스가 좋아하는 초록색 비키니 수영복, 6개의 비단 레이스로 된 테디 속옷, 아주 야한 나이트가운 여러 장을 함꼐 쌌다. 찰스는 낚시 장비를 가지고 갔다. 그는 또 아더 쾨슬러가 쓴 준 심리학 책 한 권과 로렌스 반 데어 포스트의 학술서적 다섯 권을 쌌다(그는 이런 책들을 아내와 함께 나눠보겠다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남편 찰스가 못마땅해 하는 줄 알면서도 다니엘 스틸의 소설책 두권을 쌌다. "남편은 내가 싸구려 소설을 읽는 것을 싫어해요. 하지만 나는 그 소설들이 재미있어요." 왕실 전용선 브리태니아 호에 승선한 왕세자비는 256명의 해군 사병들을 매혹시켰다.특히 그녀가 디저트를 더 달라고 졸라댔던 요리실 사병들은 그녀는 아주 좋아했다. 왕실 가족들이 묵는 응접실 근처에 근무하는 사병들은 고무창을 댄 슬리퍼를 신었다. 소음을 일으켜 로열 커플을 방해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찰스 왕세자는 자신의 공식 전기작가인 조나단 딤플비에게 허니문을 가서야 나이 젊은 아내가 대식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털어 놓았다. 찰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증세는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래서 다이애나가 한 순간에는 쾌활하다가 갑자기 다음 순간에는 뚱해지곤 했다는 것이었다. 브리태니아 호에서 2주를 보낸 다음, 신혼 커플은 발모랄에서 묵고 있는 왕실 사람들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다이애나는 위압적인 시동생, 시누이에게 압도되어 식사 도중에도 실례한다고 말하고 화장실로 가서 음식을 토해내곡 했다. 찰스는 그녀의 식생활 장애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로렌스 반 데어 퍼스트에게 좀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다이애나도 신임하는 그 노인은 여러 번의 세션을 가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이애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 의견이었다. 그는 찰스에게 명망 높은 정신과 의사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고 그래서 그 의사가 매일 아침 11시에 남몰래 발보랄 성을 방문하여 상담해 주었다. 그는 부부 함께 30분, 다이애나하고만 30분 이렇게 상담하면서 그녀의 근심을 덜어 주려고 애썼다. 찰스는 아내의 정신 상태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아내는 너무 긴장을 해요. 신경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요." 그는 아내가 조울증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태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오전에는 아주 쾌활하고 매력적이다가 저녁이 되면 느닷없이 포악해지는 그 태도를?" 정신과 의사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라고 권유했다. 허니문을 다녀온 후 다이애나는 런던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안정제의 복용은 거절했다. 자신의 강박증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다이애나는 자신이 약물에 중독될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그 후 11년 동안 대식증은 그녀를 괴롭히게 된다. 그녀는 여러 해 뒤 이렇게 말했다. "그건 참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고질적 증세입니다. 자기에 대한 존경심이 바닥에 와 있을 때 그 증세가 찾아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쓰레기만도 못한 사람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하루에도 네다섯 차례 식사를 하여 위장을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안락한 느낌이 들어요. 마치 부드러운 두 팔이 자기를 껴안는 것 같은 느낌이지요. 그렇지만 그건 잠시에요. 곧 자신의 위장이 풍선처럼 팽팽하게 늘어났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껴요. 그래서 그걸 다 토해 버리는 겁니다... 아주 반복적인 패턴을 보이는 그 증세는 그렇게 파괴적일 수가 없어요." 한편 신혼 커플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은 발모랄까지 따라왔다. 찰스는 기자들의 요구에 응할 기분이 전혀 나지 않았지만 발모랄에 머문 지 나흘 만에 마지못해 기자들의 취재 요구에 응해야만 되었다. 기자들의 취재 공세에 둘러싸인 왕실은 마치 포위를 당한 성채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왕은 공보 담당관을 보내서 협상을 하게 했다. 그 결과 신혼부부와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게 해주는 대신, 왕실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준다는 타협을 짓게 되었다. 그런 신사협정이 맺어졌기 때문에 들꿩사냥을 나갔던 찰스는 할 수 없이 협조를 해야만 되었다. 왕세자는 스코틀랜드에 주둔하는 고든 연대의 명예 사령관이었다. 그래서 무릎까지 올라으는 양말, 평직 치마, 가죽 스포란(치마 앞에 차는 일종의 지갑) 등, 타탄(체크무늬의 모직물) 복장을 하고 기자회견장에 나왔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지정된 시간에 기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어디서 연기를 해주기 바랍니까?" 찰스가 물었다. "여기가 좋겠습니다, 전하." 한 기자가 대답했다. 찰스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우리와 함꼐 지중해를 도느라고 재미 좀 보았소?" "네, 비용이 좀 들기는 했지만." 그 기자가 대답했다. "좋아요." 찰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무뚝뚝한 왕세자와 매력적인 왕세자비가 기자들고 대화를 나누는 도중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다. "허니문은 어땠습니까?" "아주 환상적이었어요." 다이애나가 대답했다. "그리고 결혼생활은요?" "아주 좋아요. 한번 해보세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남편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아침을 안 먹어요." 찰스는 다이애나의 그런 재치문답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가 되겠구려." 그가 약간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다이애나는 눈을 내리깔면서 미소를 지었다. 몇 초 뒤 찰스가 그녀의 손에 키스하자 다이애나는 쾌활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진기자들은 열심히 셔텨를 눌러댔다. 두 달 뒤인 1981년 11월 5일, 왕궁은 왕세자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따. 그녀는 왕실 행사에 계속 참석하려했으나 아침마다 입덧을 심하게 해서 일정을 취소해야 되었다. 찰스는 기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들도 다 아내가 있으니 사정을 잘 알겁니다... 그러니 다이애나는 여러 가지 일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약 3개월 뒷면 사정이 좀 좋아질 겁니다." 찰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이어갔다. "오늘의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며칠 뒤 왕세자비는 자신의 임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중들 사이를 걸어가고 또 꽃다발을 받으며 갑자기 구토가 치밀어오르는 증세에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의 입덧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너무해요. 아무도 내게 이런 느낌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았어요." 더비셔에서 임신한 여자를 만난 다이애나는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아, 그 아침 입덧, 그건 너무 끔찍해요." 그녀는 외출할 때마다 기자들을 달고 다녔고 대중들 앞에서 완전무결하게 연기를 했다. 그러나 한번 연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힘이 쪽 빠지는 것을 느꼈고 정서적인 고갈상태에 빠졌다. 일단 집에 오면 모든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이 안 보는 닫혀진 문 뒤에서는 눈물과 신경질뿐이었습니다." 왕궁의 한 직원이 회상했다. 찰스는 아내의 신경질적인 정신 상태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는 정부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기도 했고 또 폴로 게임에 더 많이 참석하기도 했다. "나는 밖으로 좀 나가야겠어. 너무 호르몬이 축적되었어." 그는 보디가드에게 말하곤 했다. 찰스가 여자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다이애나는 점점 더 화를 냈다. 그녀는 카밀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몰래 내빼는 찰스를 비난했다. 그러면 찰스는 다이애나가 지나치게 질투한다면서 화를 내었고 몰래 집을 빠져 나갔다. 그것은 악감정의 악순환이었다. 남편이 사라진 줄 알면 다이애나는 더 신경질을 내며 발악을 했다. 남편의 바람기에 화가 나고, 남편이 어디 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밖에 사진기자들의 악착 같은 촬영 공세에 넌더리가 난 다이애나는 여왕에게 비통한 심정으로 하소연했다. 그러면 여왕은 며느리의 신경질에 난감해 했다. 여왕은 그렇게 된 건 언론의 탓이 크다면서 플리트 스트리트의 편집자들을 소환하여 제발 왕세자비를 가만히 내버려둬 달라고 말했다. 왕궁의 공보 담당관인 마이클 셰아가 기자들과 먼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허니문이 지나면 언론의 관심이 다소 수그러들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왕세자비는 자신이 포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를 사랑하고 또 그녀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은 언론의 무절제한 관심이 불러오는 반작용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어 여왕이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서 그 메시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망원 렌즈를 후대하고 숲속에 숨어 있다가 왕세자비 모르게 그녀를 찍어 버린다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라고 여왕은 말했다. 여왕은 하루 전날 신문에 난 다이애나 사진을 언급했다. 그것은 글루스터에 있는 왕세자 부처의 집 하이그로브 바깥에서 다이애나가 남편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왕의 질책을 들은 기자들은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한발 뒤로 물러섰다. '포위당한 왕세자비'라는 사설에서 '타임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언론이 왕세자비를 왕궁에다 감금시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성숙된 태도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기자들과의 휴전은 6주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찰스의 무관심에 극도의 분노를 느낀 다이애나는 찰스에게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샌드링엄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낸 직후 그녀는 만약 찰스가 사냥을 가기 위해 또다시 그녀를 혼자 내버려둔다면 그때는 자살을 해버리겠다고 말했다. 찰스가 화를 내며 바깥으로 나가 버리자 그녀는 짧은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때 81세의 퀸 머더가 그 소란한 소리를 듣고서 밖으로 나와보니 왕세자비가 층계참에 널브러져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시종에 의해 자기 방으로 인도되었고 주치의가 소환되었다. 그녀를 검사한 의사는 배에 약간 타박상을 입은 것 이외에는 괜찮다고 말했다. 태아도 다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시종은 '선'에다 왕세자비가 계단에서 넘어진 정보를 팔았다. 왕실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충성심은 아무래도 돈보다는 못한 것이었다. 그 신문은 다음 날 1면 기사에다 그 사실을 보도했지만 그게 자살 시도였다는 얘기는 쓰지 않았다. 퀸 머더는 자신의 조카인 존 보우스-라이언에게 다이애나의 행동을 언급하면서 몸이 불편하면 그런 신경질적 행동이 악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존 보우스-라이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다이애나는 몇 분간 지속되는 발작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 그런 증세가 도지면 그녀는 갑자기 이상해지면서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처음에 의사들은 그런 갑작스러운 히스테리가 간질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혀를 삼키거나 기타의 간질 증세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히스테리는 유전적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퍼모이 가문에는 그런 유사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왕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그 후 3년에 걸쳐 다이애나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그것은 자기를 파괴하려는 처절한 시도였다. "나는 네 번 혹은 다섯 번 정도 자살을 시도했어요." 그녀는 런던의 가이스 병원에서 근무하는 식생활 장애 전문가인 모리스 리프세지 박사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레몬을 써는 칼로 팔뚝을 절단한 일, 손목을 절단한 일, 한쪽 다리의 정맥을 절단한 일, 유리 캐비닛에다 몸을 던진 일 등을 언급했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고 또 나 혼자뿐이라는 느낌이 들 때, 그때는 온갖 위험한 일이 다 벌어지는 거예요. 그 자살 시도는 도움을 청하는 나의 애타는 절규였어요." 찰스 부부가 반목한다는 최초의 징조를 발견한 여왕은 찰스와 다이애낭게 여행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여왕의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왕 폐하는 늘 도피 여행을 권유했지요. 어디 좋은 데로 함께 가서 문제를 정리하고 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는 것이 여왕의 해결방식이었지요. 여왕은 그런 방식으로 늘 문제를 해결했어요. 그러니 아들 부부에게도 그게 통하리라고 본 거지요." 며칠 뒤 왕세자 부처는 바하마 제도의 원더미어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찰스는 그 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햇빛 따뜻한 곳에서 휴가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출산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또다시 망원렌즈를 준비한 프리랜서 사진사들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오렌지빛 비키니를 입고 파도를 헤치는 임신 5개월의 다이애나를 사진에 담았다. 다이애나가 타블로이드 신문의 1면 기사로 등장하자 여왕은 벌컥 화를 냈다. "이건 영국 언론 최악의 날이예요." 그녀는 공보 담당관을 통해 말했다. '선'은 사과 보도문을 게재하고5백만 독자들에게 왜 사과하는지 이유를 설멍하기 위해 비키니 입은 다이애나 사진을 두 번째로 실었다. 여왕 폐하는 다시 한 번 '선' 때문에 당황했다. '선' '선데이 타임스' '타임스 오브 런던 ' '스카이 TV' 등을 거느린 언론 재벌 루버트 머독은 왕실의 낮은 임금은 체크북 저널리즘(독점 인터뷰에 큰 돈을 지불해서 기사는 작성하는 저널리즘)에 맞설 수 없음을 여왕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왕궁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사소한 정보라도 모두 사들이고, 센세이셔널한 기사가 있으면 돈을 아끼지 않고 매수하는 것, 이것이 체크북 저널리즘의 습성이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첫 아이이며 영국 왕실의 43번째 후사인 윌리엄은 1982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근위포병연대는 전통에 맞추어 새로운 왕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41발의 축포를 쏘았다. 블론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그 남자아이는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놓고 언쟁을 벌인 이레 동안 '베이비 웨일스'라고 불리워졌다. "우리는 아이 이름을 놓고 약간 다투었습니다." 찰스는 기자들에게 말다툼한 사실을 시인했다. 찰스 부부는 마침내 아이의 이름을 윌리엄 아더 필립 루이스라고 짓기로 합의를 보았다. 정복왕 윌리엄, 전설적인 아더왕, 에든버러 공,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의 이름에서 각각 따온 것이었다. 윌리엄 왕자(부모는 그를 '윌스'라고 불렀다)는 퀸 머더의 82회 생일 때 세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다이애나는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아주 어려운 임신이었어요. 임신 기간 내내 몸의 상태가 좋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온 나라가 나와 함께 해산의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윌리엄이 태어났을 때 나는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요." 영국 국민들은 모두 환호했지만, 당시 친선방문차 미국에 건너가 있던 윌리엄의 고모 앤 공주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성품이 원래 무뚝뚝한 앤 공주는 왕실 사람들의 인기도에서 최하위를 달렸다. '그러면 안돼, 앤'이라고 '데일리 메일'은 헤드라인을 뽑았다. 그 신문은 앤이 다이애나에게만 조명이 쏟아지는 것을 질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왕실 가족들 중 앤 공주와 왕세자비의 관게는 아주 험악했다. 그들은 서로 싫어했다. 앤은 다이애나가 허영이 많고 똑똑하지 못하며 신경증 환자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들한테 너무 감상적으로 대하는 여자야." 앤은 다이애나에 대해서 말했다. 한편 다이애나는 시누이를 남자 같은 여자라고 몰아부쳤다. "그녀는 아마도 면도를 할 걸요." 다이애나도지지 않고 말했다. "앤이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에 참가하는 여자 선수들 중 유일하게 성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넌 잊었니?" 다이애나의 친구가 말했다. "만약 성검사를 받았더라면 그 결과가 아주 난감했을 거야. 앤은 여자옷을 입은 필립이야." 다이애나가 조크를 했다. 왕세자비는 전혀 여자답지 않은 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앤은 화장을 하지 않았고 머리를 뒤로 넘겨 트레머리로 묶었으며 싸구려 가게에서 헐값으로 파는 것 같은 옷을 입었다. 다이애나는 앤이 왕궁의 근위 장교(뒤에 밝혀지지만 이 장교는 카밀라 파켜 볼스의 남편인 앤드루 파커 볼스임. 그러니까 카밀라와 앤드루는 서로 결혼 전에 각각 찰스와 앤을 상대로 관계가 있었음. 역주)와 간통한 사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장교가 앤의 어떤 점에 성적으로 이끌렸는지 이아해 했다. "앤에게서 도대체 뭘 본 거지?" 총알처럼 노골적인 앤은 남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잘하지 못햇다. 그녀는 특히 언론을 싫어했다. "당신은 카메라를 손에 든 페스트(전염병) 같은 존재야." 그녀는 자기를 찍으려는 사진기자에게 그렇게 내뱉았다. 찰스도 앤이 까다로은 여자라는 것을 시인했다. 그렇지만 여동생에게 가족 특유의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앤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찰스를 대부로 삼아서 찰스를 영예롭게 해주었다. 그래서 찰스는 앤을 윌리엄 왕자의 대모 중 한 사람으로 해주어서 그 영예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그런 제안을 차갑게 거절했다. "달링, 제발. 다시 한 번 생각해 줘요." 찰스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찰스는 그녀의 마음을 바꾸려고 몇 번 시도해 보다가 포기했다. 2년 뒤 둘째 아들 헨리 왕자가 태어났을 때, 찰스는 또다시 앤을 대모로 삼으려 했으나 그때에도 역시 다이애나가 거절했다. 헨리의 대부모 선정 문제는 왕실 내에서도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찰스가 두 번씩이나 앤 공주를 대모로 세우지 않은 것에 화를 낸 필립 공은 6주 동안 찰스에게 말도 하지 않았고 두 번째 손자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해 연말에 필립 공은 찰스에게 왕세자 노릇을 똑바로 하라고 질책하는 메모를 보냈다. 필립은 자신이 좋아하는 딸인 앤이 왕실 가족 중 가장 열심히 일한다고 말했다. "앤은 왕실을 대신하여 201번의 행사에 참석한 반면, 찰스 너는 93회, 네 아내는 51회 참석했을 뿐이다. 너희 부부가 1984년에 공식 행사에 참석한 횟수를 모두 합쳐도 앤의 횟수에 미치지 못한다." 3년 뒤 여왕은 앤 공주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를 프린세스 로열로 지명했다. 그 직함은 왕실 가족 중 여성에게 수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영예였다. 그러나 앤은 두 번씩이나 대모 명단에서 따돌림받은 것에 모욕을 느껴 두 번째 왕자인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부모는 그를 '해리'라고 부름)의 세계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마침 그 날이 자기와 남편이 계획한 사냥 파티 날짜와 겹친다고 말했다. 여왕과 찰스 왕세자는 세례식 장소를 버킹엄 궁에서 윈저의 세인트 조지 채플(앤 공주의 영지에서 가까운 곳)로 바꾸면서 앤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여왕의 공보 비서관은 전화를 걸어서 사냥 파티 날짜를 재조정해 볼 수 없겠느냐고 애원했다. 언론이 앤의 불참을 왕세자비에 대한 모욕으로 판단할지 모른다고 공보관은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피터와 사라가 갈 거니까 그걸로 충분해요" 아이들을 대신 보낸 앤애 말했다. 공보 담당관 마이클 셰아는 다시 한 번 애원했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공보관이 우려했던 대로 머독 언론 재벌은 여왕의 딸을 심술궂고 복수심 많은 여자로 매도했다. 그들은 왕세자비를 높이 떠받들면서 퀸 머더 다음으로 왕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자라고 칭송했다. 14. 다이애나의 진면목 -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여왕과 필립 공은 1983년 레이건 대통령 부처의 초청으로 캘리포니아를 공식 방문했다. 당시 영국 총리이던 마거릿 대처는 로널드 레이건이 정치적 동지나 다름없었는데, 미국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처 총리는 여왕에게 미국 친선 방문을 주선함으로써 영국 왕실을 좋아하는 미국민의 기호를 충족시키도록 조치했다. 1982년 영국 군대가 아르헨티나로부터 포크랜드 제도를 되찾기 위해 그 섬에 상륙했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대처 총리를 지지했다. 포크랜드 상륙작전으로 237명의 해군 장사병이 목숨을 잃었고 37억 달러의 비용이 투입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국이 너무 가난하고 또 너무 수동적이어서 그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전격적으로 수행된 그 작전은 영국의 국제적 위신을 크게 높여 주었다. 1982년 6월 아르헨티나가 항복하자, 강력한 지도자 대처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새롭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여왕이 특히 좋아하는 아들인 앤드루 왕자는 이 전쟁에서 해군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했도, 종전이 되자 영웅이 되어 귀국했다. 이처럼 영국과 미국의 '특별한 관계'는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하자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에 영국 식민지였던 카리브 해의 섬나라는 이제 영연방의 회원국으로 영국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는 그레나다의 여왕이기도 한데, 우방국인 미국이 영연방 회원국을 침공한 사실을 기분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왕은 그 문제를 놓고 레이건 대통령의 처사를 크게 불만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노동당 대변인이 말했다. 여왕은 마거릿 대처 총리를 왕궁으로 불러서 그레나다 침공 사실을 왜 총리가 아닌 BBC방송으로부터 알아야 되느냐고 따졌다. 대처 총리는 자신도 몇 분 전 레이건 대통령과 통화를 하고서야 비로소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건 가벼운 공격입니다." 레이건은 대처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레나다 섬에 공산정권이 들어설 경우에 대비하여 1천 명의 미국인을 철수시키려는 작전이라고 설명했다. 대처 총리는 자신도 그런 뉴스에 당황했다고 여왕에게 말했지만 영국이 그 침공을 비난하지는 않을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미국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며 이보다 더 중대한 경우에도 계속적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미국은 유럽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대처 총리는 말했다. "여왕은 회의 도중 총리에게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불쾌감을 표시했다. 회의가 끝난 다음 여왕은 대처의 반응을 이렇게 말했다. "오늘을 커트시가 두 번뿐이었어요."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우리'라는 말흘 쓰는 대처 총리의 과장된 존경심을, 왕가 사람들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필립 공은 대처가 그랜덤에 있는 야채가게의 딸로 태어났다고 해서 '야치가게 딸'이라고 얕잡아 불렀다. 여왕과 대처 총리의 관게는 존경과 우호에 바탕을 둔 것이었지만, 여왕과 윈스턴 처칠 혹은 여왕과 해롤드 윌슨의 관계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부분적인 이유는 여왕이 남자 총리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캐나다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여성의 열드엉을 자연의 당연한 질서라고 생각했어요. 또다른 이유는 마거릿 대처 총리의 성품이었지요. 그녀는 우선 너무 강력한 사람이었어요." 찰스 왕세자는 '선데이 엑스프레서'의 편집자에게 대처 총리가 '근엄한 학교 선생' 같다고 털어 놓았다. 찰스는 대처의 보수적 정책에 너무 환멸을 느낀 나머지 대처가 나라를 거덜내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여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왕은 비록 아들의 의견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영연방국의 지도자들을 만나면 불평을 털어 놓곤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전 총리인 로버트 호크는 이렇게 회상했다. "여왕 폐하는 마거릿 대처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대처를 위험한 인물로 보았다.." 쇼크로스 경과의 디너 도중 여왕은 대처 총리에 대한 울분을 털어 놓았다. 여왕잉 울분을 느낀 것은, 마거릿 대처가 이란의 샤 왕에게 영국 내의 도피처를 마련해 주겠다고 해놓고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일단 약속을 했으면 그건 꼭 지켜야 합니다." 여왕이 말했다. 이처럼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마거릿 대처가 총리직에서 사임한 다음 국가 최고 훈장인 카터 훈위를 수여했다 딱 24명으로 수여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이 훈장은 주로 총선엣 패배하지 않은 은퇴 총리에게 수여되는 것이 관례이다. 여왕은 정치적으로도 마거릿 대처를 수상스럽게 여겼다. 대처도 자신의 보수당 참모들에게 여왕 폐하가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철의 여인 대처는 아파르트헤이드(인종차별정책)를 반대하는 영연방의 성명을 놓고 여왕과 논쟁을 벌였다. 대처는 영연방을 지키려는 여왕의 열성적인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 내에서의 영국의 위상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았다. 사실 대처는 영연방을 탐욕스러운 거지들의 집단 정ㄷ로 생각했다. 여왕은 영국 노동당 의원인 앤소니 벤에게 자기는 공동시장을 싫어하며, 그 지도자들을 무례하고 냉소적이며 의욕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벤은 자신의 일기에다 여왕이 그렇게 말한 것은 유럽 통합이 이루어질 경우 자신의 역할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적었다. 공화주의자인 벤은 왕실 직원이 적어 준 대본이 없으면 '굿모닝'이라는 말도 못할 것이라며 여왕을 비웃었다. 그러나 여왕은 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영연방에 대해서 충실한 수호자 역할을 한다고 자임했다. 여왕은 군주제라는 삐걱거리는 제도를 반석 위에 올려 놓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특히 공화제에 대한 열망이 높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 군주제의 이상을 심기 위해 진력했다. 1982년 현재 여왕은 캐나다는 12차례, 오스트레일리아는 9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두 나랑 주기적으로 왕실 사람들을 파견함으로써 왕실의 존재를 부각시키도록 노력했다. 1983년 여왕은 왕세자 부처를 6주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에 파견했다. 왕세자비는 처음 에 가지 않으려 했으나 상당한 입씨름 끝에 가기로 동의햇다. 그러나 그녀는 아홉 살난 아들과 유모도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다. 찰스의 쓸쓸했던 유년시절을 상기시키며 아들에게 남편의 그런 경험을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피부접촉에 의한 어머니 노릇, 즉 '껴안아 주고 얼러 주는 것'을 강조했다. 그녀는 전혀 엉뚱한 시간(가령 아이가 잠든 시간)에 유아실로 뛰어들어와 유모인 바바라 반스를 놀래켰다. "난 얘에게 키스해주러 왔으요." 그녀는 윌스에게 손을 뻗어 잠을 깨우며 말했다. 늘 조바심치는 어머니였던 다이애나는 요람 주위를 맴돌면서 아이가 울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랐다. "애가 괜찮은 거예요?" 다이애나는 어머니와 유모의 위치가 역전되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반면 윌스가 '바바'라고 부르는 유모는 그녀의 그런 걱정이 빚어낸 느닷없는 애정 공세에 역정을 느꼈다. 몇 해 뒤 다이애나는 아이가 '바바'와 '마마'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유모를 해고해 버렸다. 찰스가 1983년 여행 때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여왕은 반대했다. 찰스는 다이애나가 6주 동안 아이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여왕은 찰스의 말을 찬찬히 듣더니 외무부에다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찰스 부부는 아이와 함께 여행할 수 있게 뙤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다이애나는 걱정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몇 달 전 오스트리아에 스키 여행을 다녀온 이후 다이애나의 태도는 여왕을 심려하게 만들었다. 당시 찰스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수많은 파파라치를 몰고 다녔다. 그들은 스키 슬로프, 가게, 레스토랑 등을 좇아다니면서 온갖 소란을 피워댔다. 왕세자 부처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 가려고 이리저리 밀치고 소리치던 파파라치들 때문에 정작 관광객들은 한쪽으로 몰려서 멍하니 쳐다보아야만 했다. 그 리조트 타운은 카메라나 마이크를 든 광인들에 의해 일제 공격을 당한 상황이었다. 사진기자들은 다이애나를 좀더 가까이서 찍기 위해 그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문을 부수고 또 가게 유리창을 파손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경찰이 동원되어서야 간신히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언론에 늘 웃으면서 협조적이었던 다이애나는 포즈를 취해 주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움직일 때마다 기자들에게 쫓기는 것을 너무나 지겹게 생각했다. 그녀는 코트 깃에다 얼굴을 감추고 주머니에다 손을 집어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스키캡을 얼굴 깊숙이 당겨 쓰고 대형 안경을 쓰고 미소짓기를 거부했다. 다이애나가 이렇게 나오자 기자들은 더욱 기를 쓰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실로 기자들과 다이애나 사이에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진 양상이었다. 여왕은 신문에서 왕실 경호원들이 영국의 카메라 맨들을 거칠게 다룬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그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왕실 직원을 보냈다. 그날 오후 유머 감각이 뛰어난 캐나다 외교관인 빅터 채프먼과 찰스의 참모인 프랜시스 코니시가 오스트리아의 리조트 타운 리히텐수타인으로 날아갔다. 왕세자 부처와 만난 코니시는 다이애나에게 왕실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상기시켰다. 언론계 사람들에게 혀ㅂ하는 것이 여왕 폐하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실 직원이라면 딱 질색인 다이애나는 코니시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나 엄중하게 설교를 하는 도중에도 간간히 윙크를 보내는 채프먼의 매력적인 태도에는 마음이 끌렸다. "빅(빅터의 애칭)은 사랑스러운 남자예요. 그는 두 번 결혼했고 딸만 다섯을 두었지요.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빅은 다이애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녀에게 아첨을 하고 강요를 하고 놀리기도 하면서 잘해냈던 겁니다." 그 당시 왕세자비는 심리적 혼란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임신 중에 불었던 몸무게(53파운드)를 다이어트로 빼버렸기 때문에 아주 날씬해 보였다. 그녀는 배고프다는 싱각을 억제하기 위해 매일 쇼핑을 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의 최우선 사항이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역사상 가장 옷 잘 입는 왕세자비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키스를 불어보내는 첫인상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녀는 신문에 난 자신의 사진을 연구했고 자신의 의상에 대한 논평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마구 읽었다. 그녀는 패션 편집자오 디자이너들의 자문을 구하면서 그들에게 말햇다. 또 하얀 손지갑, 가든 파티용 모자, 튼튼한 굽낮은 구두 등이 등록상표인 윈저 가의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패션을 구사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밝혔다. 다이애나의 반짝이는 블론드 머리와 일년 내내 건강한 구리빛 피부는 그 어느 여배우에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았다. "그녀를 표현하는 데에는 '대단하다'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대단하다." '보그'는 그렇게 찬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세자비가 대식증으로 고생을 하고 또 산후의 우울증으로 애를 먹고 있다는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왕실 직원들은 그녀가 곱게 커서 버릇이 좀 없는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빅터 채프먼에게 자기는 왕실 의무를 이행하는 게 너무 지겨우며 가능한 한 빨리 다시 임신을 할 생각이라고 털어 놓았다. "꽃다발을 받아드는 일보다는 마음껏 먹고 편히 쉴 수 있는 임신이 더 좋아요." 실제로 다이애나는 몇 달 뒤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았고 그 사실을 발모랄 성에서 휴가를 보내던 왕실 가족에게 알렸다. 여왕은 샴페인을 터트리는 축하 파티를 지시했다. 그리고 1주일 만에 유산을 했다. 그녀는 1983년에 다시 임신을 하여 1984년 9월 15일에 둘째 아이 해리를 낳았다. 다이애나의 그런 불평을 듣고 빅터 채프먼은 이렇게 답변했다. "마담, 나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정보를 프랜시스 코니시에게는 알려 주지 마세요." 채프먼은 다이애나와 대단히 따뜻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래서 그 점을 잘 알고 있던 여왕은 1983년 왕세자 부처의 오스트레일리아 여행 때 채프먼을 함게 따라보냈다. 당시 함께 여행했던 한 여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채프먼은 그곳에서 다이애나를 혁명적인 방식으로 소개시켰습니다. 빅은 그녀에게 진짜 공주가 되는 방법을 보여주었어요.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코치를 했지요. '카메라 앞에서 남편과 함께 춤을 춘다면 아주 멋져 보일 거예요.' 그는 맬번의 사던 크로스 호텔의 자선 무도회의 밤 직전에 그렇게 말했어요. 다이애나는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을 지푸렸지요. 그렇지만 그는 자신있게 권유했어요. '재미있는 시간을 보니세요. 사람들에게 당신의 스타일을 보여 주세요' 그는 다이애나가 가장 뛰어난 댄서라고 아첨을 했어요. '가장 뛰어나다고요?' 그녀는 물었어요. 빅은 웃음을 터트렸어요. 마고 폰테인 다음 가는 댄서라고 추켜 주었어요. 그리고 폰테인이 다이애나보다 나은 댄서가 된 것도 누레예프라는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다이애나는 망설였어요. 남편 찰스가 공식 디너 파티에 참석하여 최초의 댄싱을 해야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는데, 그런 남편의 입장을 생각해 줘야 한다면서, '당신한테 털어 놓고 하는 말인데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구경거리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요'라고 찰스가 말했다는 거예요. 빅은 다이애나와 함께 있으면 장난을 많이 쳤어요. 그녀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녀는 그날 밤 시녀가 목걸이의 조임쇠를 잘 끄르지 못해 안절부절하자 인상을 썼어요. 그러더니 그 목걸이를 시녀한테서 빼앗아서 머리 위로 뒤집어썼어요. 원래대로라면 시녀가 목주위에 감아 줄 대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녀는 콧마루 위로 그 목걸이를 넘길 수가 없었어요. '내 코가 너무 커요.' 다이애나가 말했어요. 빅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어요. '그렇다면 머리에다 쓰면 어떻겠어요? 당신압게 ㅈ고 매력적이에요. 자연스럽게 당신의 멋진 모습을 연출해 보세요. 사람들은 아름다운 공주를 원해요. 그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빅은 그런 식으로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정말로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찰스와 다이애나가 함께 춤추는 사진은 언론을 냉대하는 오아세자비에 대해 걱정하던 영국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퀸 메어리의 에메랄드 목걸이를 머리에 뒤집어쓴 디스코 다이(다이애나의 애칭)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이 끝났을 때 다이애나는 시녀 앤 벡위스-스미스에게 값비싼 귀고리를 선물했다. 함꼐 동봉된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잘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왕세자비의 언론기피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그런 해결 방법은 찰스 왕세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우린 문제가 생겼어요. 다이애나는 너무 인기가 좋아요. 그리고 찰스는 그걸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요." 채프먼은 영국에 돌아와서 친구인 캐롤린 타운센드에게 말했다. 왕세자는 아내의 폭발적 인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아름다움보다는 자신의 지성이 더욱 평가받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기뻐 환호하는 것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아니라 그녀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가령 길을 건널 때도 사람들이 그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편에 서는 것도 찰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천사같이 생긴 다이애나는 왕실의 공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찰스가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꿈을 성취시켜 주었다. 그래서 찰스는 질투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환상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가 무엇인지 알았고, 아름답고 멋진 동화를 먹고 자라는 그 정서의 젖줄을 적절히 건드릴 줄 알았다. 결혼과 동시에 획득한 ;전하;라는 칭호도 사람들에게 그녀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 그녀는 종교계의 성인처럼 자동적으로 존경을 받았고 또 찬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포장했고 자연스러운 따뜻함을 가미한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더욱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찰스는 비록 가치있고 보람있는 원칙을 위해 헌신했지만 화려하게 번쩍거리는 다이애나에 비해 보면 둔탁하고 재미없는 남편으로 보이는 것이었따. '사이콜로지 투데이'의 사이먼 세배그 몬트피오르 기자는 이렇게 썼다. "오늘날 세상에 날이 적용되는 몇 안되는 진정한 일반화의 하나는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여 모든 나라가 그들의 왕조의 결점과 장점을 경멸하고 찬양함으로써, 일상생활의 따분함을 달랜다는 것이다." 그래서선배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혹은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와 마찬가지로, 왕세자비는 대중들을 위한 화제의 초점이 되었따.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간주되는 그녀는 집단 히스테리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고 팔을 내밀었고 그녀가 자기 쪽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진지하기만 한 찰스 왕세자와는 달리 그녀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그녀는 영화배우 같은 매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남편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빅 채프먼은 자기를 재클린 케네디의 남편되는 사람이라고 낮추어 소개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유머를 본받으라고 찰스에게 조언했다. 그러나 찰스는 케네디가 아니었다. 찰스는 자기를 낮추어 말할 때마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했다. 어떤 사람이 다이애나에게 꽃다발을 건네 주려고 꽃다발을 흔드는 것을 보고 찰스는 대신 전해 주겠다고 말했다. "요즈음 나는 꽃다발을 대신 전달해 주는 사람입니다." 찰스가 말했다. 왕세자의 그런 동작은 자기를 낮추는 유머 속에서 속죄를 바라는 죄인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런 동작도 진정한 신앙심(자기가 죄인이라는 마음, 즉 다이애나에 비해 별로 인기 없음을 인정하는 마음)의 발로는 아니었다. 아무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에 서툴렀지만, 찰스는 노력을 했다. "아내가 둘이라면 한결 수월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면 길을 건너갈 때 두 아내가 양옆에 서고 나는 가운데서 걸어가며 방향만 지시하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찰스가 영국 왕세자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채프먼은 찰스가 한발짝 비켜서서 아내를 스타로 추켜세워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았다. "빅은 우리와 함꼐 시골로 내려가 있었어요. 그런데 밤늦게 왕세자로부터 전화가 온 거예요. '그런 기사가 난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십시오'라고 빅은 조언했어요. 보통 찰스 주위의 사람들은 찰스를 두둔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지만 빅은 그렇지 않았어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찰스에게 말해 주었어요. 다이애나는 왕궁을 불쾌하게 하는 신문기사가 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어요. 한번은 그녀가 새 머리 스타일을 하고 공시석상에 나타난 적이 있는데, 그날 마침 의회 개원식에 참석한 여왕보다 다이애나의 모습이 더 돋보인 거예요. 그러자 마거릿 공주는 불같이 화를 내며 찰스에게 한마디 쏘아 붙였어요. 그래서 찰스도 다이애나에게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막 쏴댔어요. 불쌍한 다이애나는 그 당시 질책만 받으면 벌벌 떨었어요. 그녀의 손톱이 하나의 증거였어요. 만약 그게 짧거나 짓이겨져 있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였어요." 캐롤린 타운센드가 말했다. 영국 언론들은 결혼생활 3년 동안 다이애나가 공식석상에서 5백 마디밖에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그녀는 너무 겁을 먹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또 남편없이 공식석상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혼자 행사에 참석한 것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의 그레이스 모타코 왕비의 장례식에서였다. 다이애나는 런던의 골드스미스 홀의 자선 행사 때 그레이스 왕비를 딱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지만 그녀를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다이애나는 그레이스 왕비의 딸 캐롤라인에게 말했다. 점성술과 수점술을 믿는 다이애나는 자기와 모타코 왕비가 같은 별자리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비한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 두 사람은 결손가정 출신에 셋째 아이였고 또 왕자와 결혼을 했다. 두 사람 모두 남편보다 더 유명해졌고 그 때문에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몇 년 뒤 로커트 레이시가 '그레이스'라는 전기를 펴내면서 알려졌다. 이 책은 그레이스의 과도한 음주, 삐걱거리는 결혼, 혼외정사 등을 폭로했다. 다이애나는 그 전기가 자신의 정신적 직관을 입증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레이스 왕비가 1982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다이애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만 되었다. 왕실의 다른 사람이 참석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왕실은 다이애나의 참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장례식 참석에 많은 언론이 관심을 기울여 준 것을 보고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확신했다. 찰스는 자신의 사업이나 선행이 보다 많은 평가를 받기를 바랬다. 그는 자신이 왕실 사람으로는 최초로 헌혈을 했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나는 에이즈 공포 때문에 헌혈량이 줄어드는 시점에서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헌혈을 했어. 그런데도 언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그들이 신경을 쓰는 것은 다이애나의 치마자락뿐이야. 언론인은 모두 기이한 사람들이야, 아니, 아주 웃기는 자들이야." 찰스는 자신의 개인 비서에게 그렇게 말했다. 개인 비서는 찰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찰스가 (사후의 )장기기증 카드를 갖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 기자는 그것을 기사화했지만 다이애나에 의해 가려져서 거의 눈에 뛰지 않았다. 그 전날 밤 다이애나는 한쪽 어ㄲ를 환히 드러내고 다른 한쪽 어깨에는 실버(은빛 가루)를 두른 드레스를 입고 자선행사에 나타났는데, 그 사진이 신문들의 전면을 장악해 버렸던 것이다. 며칠 뒤 끈덕진 찰스의 개인 비서관을 BBC 라디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찰스 왕세자가 빈민가의 사회적 불안의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찰스가 밤새 런던의 어두운 밤거리를 걸으면서 난민 피난처를 방문하고 집없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폴로 게임을 열심히 하는 왕세자는 자신을 서민들을 위한 왕세자로 보이고 싶어했으나 막상 그의 여동생 앤 공주는 찰스가 '너무 장대하여' 그런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찰스는 자신의 권력은 이해를 했지만 왜 자신에게 비난이 쏟아지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칭찬만 받으며 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몇 달에 걸쳐서 잡지와 신문들이 찰스, 그의 아내, 그의 결혼생활을 비웃어댔다. '배니티 페어'는 찰스와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처가의 신세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정부인 카밀라는 다이애나를 생쥐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이애나를 왕실의 큰쥐라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약 40여 명에 달하는 왕실 직원을 해고하거나 그만두게 했다. 그녀는 찰스의 참모 중 '핑크 마피아(다이애나가 호모를 지칭하는 말)'를 대부분 그만두게 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들 주위에 있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남편의 라브라도르 개도 쫓아내 버렸다. 다이애나는 남편 못지않게 언론에 대해서 불만이었다. 언론은 그녀의 '충동구매'와 하이스타일 패션에 들어가는 '엄청난 돈'을 꼬집었던 것이다. 영국판 '보그'가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기 시작한 이래 다이애나가 1년에 140만 달러의 의상 구입비를 지출했다고, 한 신문은 추정했다. 그녀가 모자, 벨트, 구두, 손가방 등이 한 세트인 373벌의 옷을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이 아니에요. 처음에 나는 새옷들을 끊임었이 사야만 되었어요. 여행에 나서면 하루에 서너 벌씩 옷을 갈아입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새 옷을 사게 된것이에요. 늘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어요." 그때 이래 그녀의 의상은 켄징턴 궁의 방 여섯 개를 가득채울 만큼이 되었다. 그중 한 곳은 오로지 구두만 보관하는 곳이었다. "모두 320켤레야. 함께 딸려나오는 구두는 세지 않은 숫자야." 그녀는 희희낙락하며 자신의 친구인 사라 퍼거슨에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실 행사로 해외 순방에 나설 때 맞춰 입는 디자이너 의상의 구입비를 영국 외무부에 청구하기 시작했다. 오만, 카타르,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16일 동안 여행하면서 그녀가 신청한 의상 구입비는 12만 2천 달러였다. 그녀가 아침이슬 같은 처져에서 느닷없이 변신하여 자기 생각만 하는 악처로 바뀌었다는 신문기사는 다이애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사냥과 사격을 금지시켜 남편을 허약한 신비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근거없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찰스는 끊임없이 신문보도에 대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값싸고 뻔뻔스런 쓰레기 신문'이라고 불렀던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읽는 수준 높은 신문들이 자신의 보람찬 사업을 충분히 보도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는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편집자 페레그린 워스손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렇게 불만을 털어 놓았다. "어떤 때는 이 모든 일을 그만두고 폴로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기투표로 먹고 사는 정치가들처럼 찰스와 다이애나는 여론의 향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 가령 의회의 보수당 의원들, 신중한 편집자들, 순종하는 왕실 직원들의 의견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들은 변호사와 언론 컨설턴트들을 켄징턴 궁으로 초청하여 자문을 구하곤 했다. '선데이 엑스프레스'의 전 편집자 존 쥬노는 회고록에다 이렇게 썼다. "내가 그들과 점심식사를 함꼐한 것은 1984년 11월이었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 비가 인터뷰를 언젠가 시작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직은 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녀가 좀더 경험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겠어요.' 왕세자비도 동의했다. '난 내 목소리가 너무 싫증나요. 그걸 견딜 수가 없어요. 지난 주 새로운 선박을 진수시키는 행사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는데, 나중에 다시 들어보니 그게 정말 내 목소리인지 믿어지지 않더군요. 전혀 내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왕세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저렇게 고상한척하는 목소리가 과연 내 목소리인지 믿어지지 않더군.'" 찰스는 주노에게 홍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고 물었고 또 언론에 나오는 '바보 같은 이야기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찰스는 이윽고 자신의 관심사, 영국의 장애 어린이, 영국 교회의 비효율성 등에 대해서털어 놓았고 쥬노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다이애나도 역시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쥬노가 그녀를 대화에 끼워 넣었다. "달링, 미안해요. 나 혼자서만 예기했구려. 그래 뭐 좀 할 말이 있어요?" 찰스가 말했다.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냥과 사격을 못하게 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 분노를 터트렸다. 그때 찰스가 끼어들었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 아내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내도 사냥과 사격을 좋아해요. 나 스스로 그런 취미활동에 반기를 들게 된 겁니다." "그건 남편이 스스로 결정한 거였어요. 나는 시골에서 자라나서 사냥을 좋아해요. 신혼여행 때 밥모랄에서 사슴사냥을 하기도 했어요. 난 찰스가 결혼 후 취미가 약간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왕세자비의 매력에 매혹당한 존 쥬노는 찰스에 대해서 약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찰스는 아주 진지한 젊은이에요. 아니, 너무 지나칠 정도예요.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래서 아내를 답답하게 하고 나아가 따분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었어요." 점성술가 등 여러 조언자들고 몇 주에 걸쳐 의논한 결과,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언론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텔레비전에 출연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인터부에 정정당당히 응하여('물론 인터뷰 기자는 존경받는 언론이어야 한다'고 찰스는 말했다), 신문들의 주관적인 태도를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진실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이런 특혜 인터뷰에 대한 탑례로 '인디펜던트 텔레비전'은 왕세자 부처에게 인터뷰의 편집권을 주었고 또 부드러운 조명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내 대머리가 시청자들의 눈을 어찔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찰스가 농담을 했다. 그들은 영화감독인 리처드 아텐보로에게 인터뷰 코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지도 아래 그들은 세계적인 환상의 커플이 되었다. 찰스는 낭만적인 역할을 한 주연이었다. 다이애나는 아름다운 순정 소녀역의 조연이었다. 두 어린 왕자 윌스와 해리는 배경에서 피아노를 두드려대는 엑스트라였다. 미래의 국왕으로서 찰스는 강력하고, 단호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으로 비춰져야 했다. 왕세자비인 다이애나는 그의 옆에 다정하게 앉아서 온갖 내조를 다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1975년 10월이 되자, 그들은 자신들의 극중 역할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찰스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달링 당신도 사람들이 사기를 북돋아 주고 또 이 나라의 사기를 떨어트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리라 믿어요." 다이애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이애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에요. 늘 남편 뒤에 있으면서 그를 격려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에요." 약 40분 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녀는 자기가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위저 널빤지(심령술에서 쓰이는, 점괘를 나타내는 널빤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쇼핑에 미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호메오파시요법(건강체라도 대량 투여하면 질병을 일으키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여 치료하는 방법)응ㄹ 실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소문과는 달리 앤 공주를 아주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물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기자가 부부 사이이 미묘한 문제, 즉 다이애나가 자기 주장이 심한 아내이며 남편의 치ㅜ미를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펄쩍 뛰었다. "가끔 엉뚱한 넥타이를 남편에게 골라 주는 것 정도이지, 그 이상은 결단코 아니에요."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온 왕세자 부부는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 받으며 장난스러운 행동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나쁜 소문을 싹 털어냈다. 그들은 간간히 농담을 하고 자주 미소를 지음으로써 시청자들을 매혹시켰다. 이 텔레비전 인터뷰는 나중에 미국 텔레비전에서도 방영되었는데, 왕세자 부처의 워싱턴 방문(1985)에 일부러 타이밍을 맞추었다. 다이애나로서는 미국을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왕은 왕궁의 공보 담당관인 마이클 셰아를 미국에 먼저 보내 언론매체들을 접촉하도록 했다. 마이클 셰아는 미국 기자들에게 행동지침을 브리핑한 다음, 질문할 것이 있으면 왕세자에게 하고 왕세자비에게는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아예 물어 보려고 하지 마세요." 이틀 동안의 공식 방문 동안 다이애나는 공개석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스 부처가 미국을 떠나려는 시점에서 한 기자가 다이애나에게 워싱턴이 마음에 들었느냐고 물었다. "아주 좋았어요. 나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고 말했다. 그때 찰스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녀의 대변인 자격으로 말씀드리는데 아주 멋졌다고 생각합니다." 찰스는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클 셰아는 찰스가 아니라 다이애나에게 직접 질문한 그 기자를 비난하듯 노려보았다. 그 기자도 지지 않고 눈알을 부라렸다. "그렇다면 왕세자비가 백악관 디너를 재미있게 생각했는지 좀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그 기자가 찰스에게 물었다. "달링, 재미있었지요? 존 트라볼타와 춤을 췄는데 그걸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바보일 것입니다." 찰스가 말했다. 왕세자 부처를 위한 백악관이 디너 댄스가 열리기 며칠 전, 낸시 레이건은 해병대 밴드부에다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 나오는 음악을 미리 연습해 두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주인공인 존 틀볼타가 왕세자비와 함께 백악관의 그랜드 포이어에서 춤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이애나가 한때 발레리나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은 그녀를 일부러 미국 발레 디어터의 관장인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옆에 앉혔다. 퍼스트 레이디는 또 다이애나가 좋아하는 배우인 닐 다이아몬드, 톰 셀렉,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을 초청했다. 공화당원인 퍼스트 레이디는 비록 찰스 왕세자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세자가 좋아하는 여배우인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는 초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보적인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다이애나가 좋아하는 배우들은 모두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햇던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이었다. 백악관 디너가 벌어진 그날 저녁 왕세자 부처와 레이건 대통령 부처가 제일 처음으로 춤을 추고 난 다음, 퍼스트 레이디는 존 트라볼타에게 다가갔다. "존, 이제 시간이 되었어요." 퍼스트 레이디가 말했다. 트라볼타는 왕세자비의 테이블로 걸어가 함께 춤을 추자고 제의했다. "나는 정말 스릴을 느꼈어요." 다이애나가 나중에 말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잡담을 멈추고 다이애나와 트라볼타가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수잔 패럴과 춤추고 있던 왕세자는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트라볼타는 이렇게 회상했다. "왕세자비는 그게 특별행사로 마련된 것이라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정말 날아갈 듯 잘 추더군요. 아주 리듬 감각이 탁월했어요. 우리는 스핀과 회전을 많이 했어요. 그건 일종의 현대식 폭스트로트였는데, 그녀는 아주 잘 따라와 주었어요. 춤에는 타고난 소질이 있어군요." 음악이 끝나자 초청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쳐댔고 트라볼타는 다이애나를 그녀의 자리에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나긋나긋한 몸매의 왕세자비는 흥분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또다시 춤추기를 원했다. 그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자기보다 키가 더 큰 남자와 춤추는 걸 좋아한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이스트우드에게 자기 키가 5피트 10피치이기 때문에 남편보다 작게 보이려고 낮은 힐을 신는다고 털어 놓았다. "그렇지만 당신은 6피트가 넘잖아요." 그녀는 바위같이 울퉁불퉁한 얼굴의 배우에게 말했다. "나도 춤추자고 제안하고 싶지만 당신은 나에 비해 너무 늙은 것 같소." 이스트우드가 무표정한 건맨의 얼굴로 말했다. "난 겨우 스믈네 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다이애나가 유혹하듯 말했다. "오, 그렇다면 좋아요. 이번 딱 한 번만 예외로 하지요." 55세의 영화배우가 말했다. 이스트우드는 다이애나와 춤춘 것을 자신의 영화 '더티하리'의 대사를 약간 각색하여 표현했다. "그녀가 나의 날을 만들어 주었다." 왕세자 부부가 워싱턴과 팜 비치에 들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그들을 환영했다. 어린 소녀들은 다이애나를 보자 너무 흥분하여 깡충깡충 뛰었다. 왕세자비는 이제 국제적인 아이콘(초상)이 되었고 록스타와 마찬가지로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고함을 자아내는 스타가 되었다. 그녀가 남편을 따라 워싱턴 국립 예배당의 종교 예배에 들르자 무려 1만 2천 명의 사람들이 그 교회에 나왔다.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나온 것은 그녀의 비행접시 같은 모자 때문이라고 생각히요. 찰스 왕세자는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다이애나에게 관심을 집중시켰지만, 찰스는 나름대로 나이든 여인들을 매혹시켰다. 미국 정부의 의전 담당관인 셀와 루즈벨트는 그녀의 회고록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찰스가 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해야 되겠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우아하게 말을 하고 아버지를 닮아 매력적이고 또 유머감각이 풍부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딸인 모린은 그보다 더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는 모두 찰스를 좋아했다. 다이애나는 바보 같았다. 그녀는 긴 속눈썹만 살짝 치켜 뜨면 모든 것이 다 잘되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인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는 것을 누군가가 말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왕세자비는 걸어 다니는 기념비가 되어 있었다. 영국의 여론조사는 그녀가 영국의 가장 강력한 관광기념물이며 트라팔가 광장과 영국 의회를 함친 것보다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고 말했다. 한 전국적 조사는 1983--1985년 사이에 그녀가 잡지, 책, 관광업 등으로 도합 6천 660만 달러의 수입을 발생시켰다고 추산했다. 그녀는 왕실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장갑 ㄲ 않고 악수를 하고, 사인해 주고, 욍국의 국가 원수에게 키스(뺨비비기)를 하고, 에이즈 환자를 포옹한 사람이라고 칭송받았다. 그녀는 무기력해진 윈저 왕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1985년 12월 23일 밤에는 엄청난 섹스어필의 장면을 연출했다. 그녀는 찰스 왕세자를 따라서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후원하기 위한 코벤트 가든의 자선행사에 참석했다. 막간 도중에 그녀는 잠시 실례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찰스를 혼자 로열 박스에 남겨 놓은 그녀는 살짝 무대 뒷편으로 들어가 깜짝 쇼를 준비했다. 커튼이 다시 올라라자, 날씬한 몸매의 블론드 여자가 무대 옆쪽에서 무대 중앙으로 뛰어나왔다. 그녀는 스파게티처럼 가느다란 끈으로 허리를 묶으 몸매가 잘 드러나는 하얀 비단 슬립을 입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 댄서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순간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빌리 조엘의 '업타운 걸'이라는 대중 음악에 맞추어 멋들어지게 춤을 추어댔다. 하얀 비단신을 신은왕세자비(5피트 10인치)는 같이 춤추는 남자 파트너인 웨인 슬립(5피트 2인치)보다 훨씬 커 보였다. 니진스키보다 더 예리한 다리 회전을 하는 능력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왕립 발레 단원인 웨인 스ㄹ은 다이애나에게 눌려 거의 존재가 희미해졌다. 모든 사람의 눈은 다이애나에게 고정되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켄징턴 궁에서 그 춤을 몰래 연습해 왔었다. 그녀는 그 선물을 2,600명의 관객 앞에서 남편에게 내놓은 것이었다. 왕실 사람이 매혹적으로 무대 위에서 춤추는 것을 본 관중들은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웨인 슬립은 이렇게 회상햇다. "왕세자는 너무 놀라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습니다. 특히 그녀가 내 머리 위로 높다랗게 킥을 올려찰 때에는 더욱 그랬죠... 그녀가 킥을 할 때마다 관중들은 대환호성을 울렸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춤을 잘 추는지 믿어지지 않더군요. 그녀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자기 자신의 춤솜씨를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는 고열 박스를 향해 커트시를 하기까지 했어요." 웨인 슬립은 그녀를 양팔로 번쩍 안아올려 무대 바깥으로 나갔다. "사실 나는 안절부절하지 못했습니다. 장래의 영국 왕비를 내 가슴에 안고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관중들은 일대 환호를 보내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서민적인 왕세자비에게 아낌없는 칭송을 바쳤다. 그들은 그녀에게 여덟 번의 커튼 콜을 보내 주었고 그녀는 인사를 하면서 남편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나중의 앙코르를 받아줄 태세를 취했다. "내가 앙코르를 받아 주면 안된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두 번째에는 사람들이 트집을 잡게 마련이지요. 그녀는 좋은 춤꾼이기는 하지만 전문 춤꿈은 아니에요. 앙코르에 응하여 다시 춤추러 나가려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내가 만류했지요. 아무튼 그녀는 그날 밤의 그 분위기를 사라했어요." 다이애나는 몇 달 뒤 무대로 되돌아가 '오페라의 유령' 주제가에 맞춰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제작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쇼를 여섯 번 보고 난 다음, 다이애나는 런던 로열 디어터의 관리자에게 'All I Ask of You'라는 사랑의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필름으로 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비디오를 남편의 생일선물로 줄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왕세자비의 요청이었기 때문에 극단 관리자는 필요한 무대오 오세스트라를 제공해 주기로 동의했다. 그녀는 나중에 그 비디오가 실은 남편에게 줄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인적 용도로 만든 것임을 시인했다. 그녀는 오페라 하우스의 공식 사진작가가 다이애나와 웨인 슬립의 춤추는 장면을 수천 달러를 받고 팔았을 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코벤트 가든에서 본 가장 섹시한 공연이었습니다." 그 사진작자가 말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그날 밤 관중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를 공식적으로 칭송했던 왕세자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점잖치 못한 방식으로 자기의 춤솜씨를 과시한 그녀를 단둘이 있을 때 꾸짖었다고 한다. 찰스는 그 춤 선물을 자기애적 과시욕의 표현이라면서 거절했고 자기를 엿먹이기 위한 또다른 책략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아내의 재능을 도무지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심한 모욕을 느꼈고 그래서 정부 카밀라 파커 볼스의 품에 파묻혀 위안을 얻었다. 15. 다이애나의 중매 - 사라, 너를 앤드루와 결혼시켜 줄게 "사라 퍼거슨은 우리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이었습니다. 무례하고 까다롭고 천박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런던에서 호메오파시 요법을 시술하는 스티븐 마이틴이 말했다. "결혼 몇 달 전에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있는 우리 클리닉에 와서 비만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몸매 때문에 애를 먹고 있던 웨딩 드레서 디자이너 린드카 시에라크가 그녀를 데리고 왔어요. 우리는 클리닉에서 침과 처방으로 그녀를 치료했어요. 나의 동업자는 그녀가 당시 묵고 있던 버킹엄 궁에서도 치료를 해주었어요. 그러나 몇 번 세션(치료를 위한 만남)을 하고 난 다음 울는 그녀에게서 손을 뗐습니다. 겨느는 우리가 24시간 대기하기를 바랬어요. 그녀가 미친 듯이 먹어대면 우리가 뭔가 조치를 취해 주기를 바랬어요. 또 피고하면 진정시켜 주기를 바랬어요. 그리고 숙취 때문에 피곤하거나 온몸이 나른하면 마사지를 해주기를 바랬어요. 음식, 섹스, 알콜 그 무엇이든지 그녀의 욕구는 통제 불능이었어요. 모든 것을 과도할 정도로 지나치게 해댔어요. 그녀는 코카인, 암페타민, 샴페인을 남용했어요. 늘 음식을 먹어대고 게걸스레 섹스를 했어요." 1986년 봄, 당시 26세의 사라 마거릿 퍼거슨(퍼기)은 앤드루 왕자와 약혼한 직후 살을 빼느라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라는 정말 도움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대로 그녀를 도와 주려고 했지요... 나는 클리닉의 뒷문으로 몰래 그녀를 데려갔어요. 돈 내는 일도 내가 대신 해줘서 아무도 모르게 했지요." 그녀가 앤드루 왕자 전하와 결혼한다는 공식 발표는 사라의 집안을 아주 기쁘게 했다. 앤드루 왕자의 시종인 제임스 베리는 사라의 아버지가 너무 기뻐했다고 말했다. "사라의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한 발을 들고 팔짝팔작 뛰었어요.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환호의 비명을 내지르더군요." "우리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사라의 새 어머니인 수잔 퍼거슨은 말했다. 앤드루 왕자는 여자들과 사귀었다가 금방 헤어지는 총각으로 명성이 높았다. 게다가 여배우와 모델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ㅇ었는데, 주근깨가 얼굴에 가득한 퍼기는 도저히 그런 타입의 여자가 아니었다. '버크의 귀족연감'은 귀족들이 바이블인데 왕위 계승권 4위인 앤드루 왕자가 사라 퍼거슨 같은 여자를 선택한 데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왕가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합당하다고 볼 수 없는 개인 생활을 영위했고 또 그런 문란한 생활이 전국지에 보도가 되었으며... 6년 동안 여섯 번의 로맨스가 있었고... 그래서 도무지 빅토리아적 분위기를 갖추었다고 할 수 없는 여성..." 전직 육군 소령인 사라의 아버지 로널드 퍼거슨은 그런 평가를 비웃었다. "딸 애가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과거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퍼기의 그런 배경 때문에 오히려 그녀가 앤드루에게 이상적인 여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앤드루는 남녀간의 성행위를 '수평적인 달리기'라고 생각했고 데이트 상대인 여자의 수영복에다 살아 있는 가재를 집어넣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의 요란한 스타일은 친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앤드루 왕자의 젊을 적 친구인 퍼디 맥도날드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그 문제에 대해서 왕자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왜 여자애들에게 물을 뿌리거나 물건을 던지느냐고요. 그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여자들은 그렇게 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내가 물을 뿌리니까 언제나 비명을 지르던데. 그건 좋다는 뜻 아니야?'라고 말했어요." 퍼기도 앤드루 못지않게 심하게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자신의 요란한 연애생활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현대적인 여성이에요." 그녀는 남자처럼 욕설을 내뱉았고,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웠고, 남자애들과 지저분한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녀는 첫 번째 텔레비전에 나와서 'prick(남자 성기를 가리키는 욕)'이라는 말을 내뱉았다. 잘난 척하고 거칠게 말을 해대는 그녀는 포커 게임에 뛰어든 유일한 여성 플레이어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예스'라고 공손하게 말하지 않고 '야'라고 거칠게 말했다. BBC 기자가 아침으로 무엇을 먹었느냐고 묻자 '소식지와 편두통'을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조랑말에서 자주 떨어져 그 이후부터 편두통을 심하게 앓았다고 말했다. 운동을 아주 좋아하는 그녀는 스키, 수영, 승마 등에서 챔피언 리본을 탄 바도 있었다. 한밤중에 벌어지는 장애물 경마 시합에 참가하여 위험한 스포츠 클럽의 명예회원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그 시합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무에 기어올라가 장난질을 치던 말괄량이 같은 기질을 결코 버리지 못했다. 활처럼 휜 다리에 커다란 보폭으로 씩씩하게 걷는 걸음걸이가 마치 목동 같았으며, 또 담배를 물고 말하는 것처럼 입을 비틀어 말을 해대는 버릇이 있었다. 버크셔의 서닝데일에 있는 기숙사 학교인 허스트 로지에 같이 다녔던 동창생은 사라의 왕성한 식욕을 잘 기억했다. 동창생들은 그녀를 '두 번'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식사 때 마다 두 번씩 식사를 타먹었기 때문이었다. 통 크고 열정적인 그녀는 마음이 관대했으며 커다란 부케와 값비싼 선물을 보내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라는 세일즈 보조원, 여행사 심부름꾼, 웨이트리스, 운전사, 여행 가이드 등 온갖 일을 다했다. 스의스에 스키 여행을 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농가의 품팔이꾼, 호텔 청소부 등으로도 일했다.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자 그녀는 런던에 있는 퀸스 비서대학에서 한 학기 수강했다. 그녀는 학교 공부에 충실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그녀를 가르쳤던 교수가 말했다. 그녀는 그 코스에서 제일 꼴지로 졸업했다. 그리고 간신히 타이핑 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그녀는 어ㄲ를 한번 들썩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글읽는 것보다 말타는 것이 더 좋아." 사라의 아버지도 책보다는 말을 더 좋아했다. 메이저 론(로널드 퍼거슨은 이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좋아했다)은 딸의 약혼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향상시키려 한다는 비난을 받자, 왕가의 도움으로 출세해 보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 메이저 론은 자신의 어머니가 버클류 공작 5대손의 딸이었으므로 자신도 귀족인데, 무엇 때문에 왕실의 도움을 필요로 하겠느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타임스'는 사라 퍼거슨이 귀족 출신이라기보다는 지방 지주의 후예라고 보도했다. 그녀의 조상들은 대대로 기병대에서 근무했다. "그녀의 아버지 대까지 대대로 근위 기병연대의 장교로 복무해 왔다. 오래 된 돈을 가진 가문이지만 그가 돈을 가진 것은 아니다." 1970년 메이저 론은 찰스 왕세자의 폴로 매니저라는 무보수 직책을 받아들이면서 돈을 벌어야 할 절박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근위 기병연대에서 중령으로 승진하는 시험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승진의 길이 막혀 버린 메이저 론은 군에서 제대했다. 그는 윈저에 있는 가즈 폴로 클럽에다 사무실을 차렸고 사무실 벽에다가는 수영복 미녀 그림의 달력을 걸었다. 비록 민간인이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군대 계급을 불러 주기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메이저(소령)라고 부릅니다." 한 작가가 그를 미스터 퍼거슨이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당시 21세였던 왕세자가 메이저 퍼거슨에게 폴로 게임을 준비해 주는 명예직을 제의하자, 그 게임을 열렬히 즐기는 메이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왕세자와 가까워지려는 카르티에나 롤렉스 같은 기업 스폰서들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해서 폴로 시합이 경비와 왕세자의 비용을 충당했다. 이런 돈 많은 기업들의 찬조금에는 당연히 폴로 매니저인 그 자신의 보수도 상당액 포함되었다. 메이저 론의 첫 아내인 수잔은 이렇게 회상했다. "로널드는 찰스 왕세자로부터 그 제안을 받고 기뻐했어요. 왕세자와 오랜 시간 함께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장 큰 관심사인 말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었기 때문이죠." 2년 뒤인 1972년 사라와 여동생 제인이 10대 소녀였을 때 사라의 부모는 별거에 들어갔다. 로널드 퍼거슨은 자기 아내인 수잔이 필립 공과 바람을 피웠다고 털어 놓았다. 메이저 론과 필립 공은 1960년대에 폴로 게임을 함께하면서 아는 사이가 되었다. 긴 머리와 가는 다리가 매력인 수잔 퍼거슨은 아주 스포티하고 우아한 여자로서 한때 랄프 로랑으로부터 폴로 모델로 나와달라고 제안받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정말로 필립이 좋아하는 타입이었어요." 사라가 말했다. 메이저 퍼거슨은 필립과 자기 아내에 대한 관계를 노골적으로 떠벌이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여왕의 남편이 '나하고 같이 있는 것보다는 내 아내하고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한편 수잔 퍼거슨은 자신의 첫 번째 결혼생활 동안 필립과 혼외 정사를 벌였다는 소문을 부인하면서 남편에게 충실했노라고 주장했다. 수잔은 회고록에다 이렇게 썼다. "오히려 로널드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돌아다녔어요. 심지어 내가 임신하고 있을 때에도 말이에요... 그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나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요... 정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러나 수잔 퍼거슨은 두 번째 결혼이 끝난 다음에 필립 공과의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의 딸 사라는 그 비밀 로맨스를 자주 언급했다. 사라는 뉴욕에 있는 친구들에게 어머니가 1992년 11월 세계 야생동물 기금 행사에 참석차 필립과 함께 아르헨티나에 갔었다고 말했다. 사라 퍼거슨의 친한 친구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건 윈저 성에 불이 났을 때였어요. 또 우연찮게도 여왕의 45회 결혼 기념일이기도 했지요. 필립이 수지(수잔의 애칭)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내려가 있을 때, 여왕은 혼자서 윈저 성의 물양동이를 나르면서 불을 끄려고 애썼지요." 로널드 퍼거슨은 그런 얘기에 대해서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는 필립 공이 늘 수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두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친구 사이로 남아 있습니다." 로널드는 1994년에 그렇게 썼다. 수잔 퍼거슨은 론 퍼거슨과 16년간 같이 살다가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리는 바람에 두 딸의 양육권을 상실했다. 그녀의 두 딸은 아버지와 함께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60마일 떨어진 더머라는 햄프셔의 한 마을에 머물렀다. 이혼이 결정되자 수잔 퍼거슨은 패기만만한 아르헨티나 남자인 헥토르 바란테스와 재혼했다. 바란테스는 폴로 경기장에서 로널드 퍼거슨과 좋은 적수가 되었다. 수잔 부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사해 갔고 바란테스는 그곳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폴로 조랑말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메이저 퍼거슨은 자신이 이혼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음을 시인했다. "아무리 완곡하게 말한다고 해도 그건 끔찍한 일이었어요. 십대의 민감한 딸들을 돌볼 어머니가 없었으니 참으로 황당했지요. 그래서 아빠인 내가 엄마 대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제 새끼를 내버리고 간 년이야." 그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메이저 퍼거슨은 1976년, 부유한 농가의 딸인 수잔 뎁트포드와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사라는 장난조로 '나의 사악한 의붓어머니'라고 말하며 새 어머니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켰다. 새 어머니로 들어선 두 번째 수잔 퍼거슨도 바람을 피우는 남편 때문에 수모를 감당해야 되었다. 로널드 퍼거슨은 접대부를 놓고 윤락행위를 하는 안마시술소에 드나들다 발각되자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사실 앤드루 왕자가 제일 내 마음에 드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그가 바람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다소 안심이 되더군요. 그는 많은 여자들과 사귀는 아주 정상적인 해군 장교입니다. 내가 볼 때 그런 건 아주 정상적인 징후예요." 사실 앤드루 왕자는 바람둥이였다. 그런데 앤드루가 자기보다 네 살이나 위인 미국 여배우 쿠 스타크와 사귀고 있다는 것이 공개되자 앤드루는 언론에서 '랜다 앤디(음란한 앤드루)'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들이 로맨스를 벌이는 동안,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영국의 포르노 영화에 레즈비언으로 출연하여 알몸을 과시한 쿠 스타크의 누드 사진을 실었다. 그 사진은 쿠 스타크가 다른 여자와 함께 알몸으로 샤워를 하는 장면이었다. 몇 달 뒤 타블로이드 신문은 캐나다에서 알몸으로 강속으로 다이빙하는 앤드루 왕자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 몇 주 뒤 T.S. 엘리어트가 경영했던 출판사인 페이버 앤드 페이버 사에서 알몸의 앤드루 왕자 사진이 들어 있는 책을 출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여왕은 그런 유수한 출판사도 돈만 밝히는 루퍼트 머독 언론 재벌을 닮아간다고 개탄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앤드루의 아버지 필립 공이 개입했다. 에든버러 공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쿠 스트카와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엄명했다. "앤드루, 그건 끝난 걸로 해." 필립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23세의 왕자는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를 너무나 무서워했고 또 어머니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싫었다. 비록 쿠 스타크룰 사랑하기는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꼼짝도 못하게 된 앤드루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쿠 스타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청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루는 이제 비겁하게 뒤로 빼는 것이었다. 그는 사과도 하지 않았고 더욱이 해명도 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 또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쿠 스타크의 인생은 앤드루 때문에 절단나고 말았어요.." 쿠 스타크의 친구인 루이스 알렌 존스가 말했다. 비록 충격을 받았고 또 가슴이 쪼개지는 듯이 아팠지만, 쿠 스타크는 우아하게 떠나 주었고 또 신중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몇 달 뒤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배우 생활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 앤드루라는 딱지를 떼어버리지 못했다. 그녀의 결혼은 몇 년 뒤 이혼으로 끝나 버렸고 그 후 몇 년 동안 앤드루를 만나지 못했다. 앤드루는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를 했지만 그래서 마음 속에서는 쿠 스타크를 사랑했다. 그러는 와중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앤드루의 마음을 돌려 놓기 위해 사라 퍼거슨을 소개해 주었다. 다이애나는 결혼하기 전 폴로 시합장에서 퍼기를 만났는데 그 후 둘은 곧 친구가 되었다. 둘은 점성가, 견자, 타로 카드 점술가 등을 좋아해꼬 그래서 세션(점보기)이 끝나면 서로의 점을 맞추어 보기도 했다. 결혼생활 동안 퍼기는 런던의 심령술사인 마담 바소의 지하 아파트를 주기적으로 받문했다. 마담 바소는 퍼기를 푸른 플라스틱 피라미드 아래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녀를 매혹시켰다. 퍼기는 마담 바소가 심령술을 써서 자기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사라는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다이애나가 우울하던 시절 켄징턴 궁으로 여러 번 방문하여 그때마다 웃겨 주었다. 사라는 다이애나의 21회 생일 파티 때 버킹엄 궁으로 초청된 유일한 민간이었다. "사라는 아주 재미있어요." 다이애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시동생인 앤드루에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또 로열 애스코트 주에 윈저 성으로 초청할 만한 처녀라고 하면서 여왕에게 사라의 명단을 제출했다. 그 당시 퍼기는 스위스에서 가끔씩 동거생활을 해왔던 자동차 레이서 패디 맥낼리와 결혼할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3년 동안 그와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번 청혼을 했다. 그러나 아이가 딸려 있는 48세의 홀아비인 맥낼리는 계속 안된다고 대답했다. 이윽고 사라는 최후 통첩을 내렸다. 나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내가 떠나겠다. 맥낼리는 그녀가 이사짐을 꾸리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남자들로부터 홀대를 당했어요." '머제스티'의 편집인이며 퍼기의 친구인 인그리드 슈어드가 말했다. 사라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했듯이 맥낼리는 노골적으로 다른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녀 사라를 울려 놓았다. 그래서 사라는 맥낼리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로열 애스코트에 참석해 달라는 여왕의 초청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런 좋은 기회는 어서 받아들여 왕족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넓히라고 하면서 그녀를 격려했다. 그는 심지어 애스코트 경마대회가 벌어지는 주말에 사라를 윈저 성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맥낼리는 쾌활하게 손을 흔들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라고 말한 다음 멀어져 갔다. 사라와 앤드루는 경마대회 중 점심을 함께 들면서 서로 알게 되었다. 사실은 그 전에도 그들은 만난 적이 있었다. 20년 전 어린아이였을 때 왕실의 폴로 시합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만나서 앤드루는 그녀에게 프로피터롤(소형 슈크림 빵)을 먹여 주었고 그녀는 앤드루의 팔에다 펀치를 먹이면서 너무 살이 찐 것이 아니냐고 놀려댔다. 그는 억지로 그녀의 입에다 빵을 밀어넣으려 했고 그녀는 웃어대면서 음식을 놓고 웬 싸움질이냐고 농담을 했다. 시끌벅적하고 쾌활한 것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화장실 유머를 좋아했고, 트림, 껄덕거림, 툴툴거림 등 신체적인 소음을 내는 것을 좋아했다. 윈저 성에서 그들의 시중을 들었던 웨이터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그가 방귀에 관련된 농담을 할 때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어제쳤습니다." 음식 그릇을 식탁 위에다 탁탁 내던지고 다른 사람이 먹기도 전에 자기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투박스러운 앤드루 왕자를 가리켜, 어떤 사람들은 '독일적이고, 촌스럽고, 아버지처럼 허세가 많은 자'라고 비난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앤드루가 여왕의 자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해군 복무를 진지하게 수행하는 젊은이'라고 말했다. 앤드루는 해군 복무 이외에 사진술을 연구했고 또 골프를 프로 선수처럼 잘 쳤다. 증조부, 조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앤드루는 영국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대학 교육을 건너뛰었다. 해군에 입대했을 때 그는 왕위 계승권 2위이기 때문에 왕족 대우를 받았다. 다른 장교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자기 방에서 혼자 식사했다. 해군 전투비행사인 그의 비행복 가슴에는 '앤드루 왕자 전하'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고 그의 별명은 전하(His Royal Highness)를 가리키는 H였다. 1981년 앤드루는 해군에 12년 동안 복무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했다. 그 다음 해 포클랜드 전쟁 때 그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빛냈다. 1985년 사라를 만났을 때, 그는 전함 HMS 브레이즌에 승선한 해군 대위였다. 로열 애스코트 대회 며칠 뒤, 그는 전함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귀대하기 전에 사라에게 장미꽃과 'A'라고 적혀진 카드를 보냈다. 왕세자비는 네 살난 아들 윌리엄과 함께 앤드루의 전함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세워서 사라의 구애 행각을 도왔다. 다이애나는 사라를 자신의 시녀로 함께 데리고 갔고 언론은 그들을 사진 찍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왔다. 퍼기는 언론의 지대한 관심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녀는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자 숨을 멈추고 말했다. "계속 웃어. 그냥 웃는 게 최고야." 다이애나는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사라에게 속삭였다. 왕세자비는 나중에 사라와 앤드루를 하이그로브로 초청하여 조용한 주말을 보내도록 배려했다. 하이그로브의 관리인들은 퍼기가 그곳에 들를 때마다 왕실의 편지지를 주머니에 다 집어넣고 또 더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다고 기억했다. "하이그로크 편지지에다 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려고 해요. 내가 친구들에게 편지하겠다고 했거든요. 걔들은 이 편지지를 보면 깊은 인상을 받을 거예요." 사라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하이그로브 관리인은 편지지와 깨끗이 세탁된 그녀의 옷들을 가져다 주었다. "사라가 여기 올 때마다 우리는 그녀의 지저분한 옷들을 빨아서 깨끗이 다려 주어야 했어요.." 하이그로브 관리인이 회상했다. 앤드루와 사라는 구애기간 동안 친구들의 주말별장 같은 데를 이용하여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 별장에 초대받은 초청객들은 그들이 육체적으로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며 또 서로 장난을 많이 쳤다고 기억했다. 1985년 겨울의 어느 주말, 술래잡기 게임을 하는 도중에 앤드루는 테이블 밑에 숨었고 눈을 가린 사라는 마루를 엉금엉금 기면서 그를 찾아다녔다. 이윽고 그를 찾아내자 그녀는 앤드루의 엉덩이를 세게 꼬집었다. "그만해! 아직 왕자의 엉덩이를 꼬집어서는 안된단 말이야!" 그날 저녁 앤드루는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어제 말한 거 농담이었다고 해도 괜찮아요." 사라가 대답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앤드루는 또다시 청혼을 했고 그녀에게 3만 7천 달러짜리 루비 반지를 주었다. 사라는 그 즉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그가 내게 청혼해 왔어요. 난 의심스러워서 두 번이나 청혼하게 했어요." 그녀는 앤드루가 여왕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당분간 그 사실을 비밀로 지켜 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왕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라는 앤드루가 휴가를 나오는 주말이면 윈저 성에 머물렀다. 사라는, 다이애나와 다르게, 여왕과 함께 아침 승마를 했다. 다이애나는 어릴 적에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팔을 부러뜨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는 말을 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왕과 함꼐 승마를 할 수가 없었다. 사라는 또 다이애나와는 달리 셔레이드 게임(몸짓에 의하여 말을 알아맞히는 놀이)을 좋아했고 또 여왕 폐하가 좋아하는 게임을 모두 할 줄 알았다. "사라는 레이싱 데몬 게임에서 내 어머니보다 더 속임수를 잘 써요." 여왕이 사라의 할머니에게 말했다. 여왕은 장래의 며느리를 브를 때 늘 이름을 불렀다. :퍼기라고 한 적은 없고 언제나 사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왕실의 한 참모가 말했다. 여왕 폐하는 아들과 약혼녀의 활기차고 다정한 관계를 마음에 들어했고 또 승낙하는 듯이 말했다. "앤드루가 이번에는 제 배필을 만난 것 같애." 사라는 시아버지가 될 필립 공과 비판하는 말도 거리낌없이 주고 받았고 또 필립의 음탕한 농담에도 마구 웃어제쳤다. 그리고 그에게 덮개 없는 마차를 모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나는 사라가 왕실에 큰 재산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필립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녀는 활력이 넘치고 또 의욕적입니다. 함께 있으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찰스 왕세자도 동의했다. 앤드루도 그녀에게 쏙 빠져 있었다. "내가 사라오 결혼하기로 한 결정은 내 평생에서 최고의 선택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는 사라가 40시간의 비행 훈련을 받아 헬리콥터 조종사인 남편의 커리어를 돕고 싶다고 말했을 때, 더욱 황홀해 했다. "그녀는 훌륭한 해군의 아내가 될 겁니다." 앤드루가 가족들에게 말했다. 사라는 드디어 앤드룽게서 자기를 존경하는 남자의 마음을 발견했다. "내가 느끼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앤드루와 있으면 내가 숙녀가 된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에게 매너없이 대하는 남자들을 매력있다고 생각했언 적이 내게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과거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사라는 윈저 성에서 보낸 주말에 대해 너무 재미있었다며 아버지에게 정신없이 말해 주었다. "딸애는 앤드루를 사랑하거나 아니면 왕실을 사랑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후자가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메이저 론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왕실은 사라 퍼거슨을 그들의 일원으로 맞아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적합성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했다. 일부 귀족들은 그녀가 왕실의 앞날에 커다란 짐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내 말을 명심해서 들으세요. 저 평범한 여자한테서는 아무런 좋은 것도 나올 게 없어요." 퀸 머더의 시녀인 루스 퍼모이가 말했다. '플리트 스트리트'의 한 편집자도 루스 퍼모이의 의견에 동의했다. "퍼기는 윈저 왕가를 쓰러트릴 겁니다." '데일리 메일'의 브라이언 바인이 말했다. 패션잡지들은 사라를 '건장한' '몸매가 우람한' '루벤스의 여주인공 같은'이라고 묘사했다. 한 칼럼니스트는 그녀가 '미래의 포크 공작부인'이라고 말했다(둘째 왕자의 부인은 요크 공작부인이라는 칭호가 붙는데, 요크 대신 돼지를 가리키는 포크를 써서 말장난을 하고 있음. 역주). 다른 기자는 그녀가 '감자처럼 다정하고 실제적'이라고 말했따.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기 자신을 방어했다. "나는 뚱뚱하지 않아요. 또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요. 그러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여자다운 몸매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신체치수가 마담 튀소의 왁스 박물관에 공개되었을 때, 그 치수를 재었던 왁스 조각가는 수치를 밝히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한 신문은 퍼기의 신체지수가 39-49-59라고 과장되게 보도하면서 '여기 허리 치수가 49인치인 신부가 오다'라고 말했다. 퍼기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퍼기의 스커트를 무릎 위로 밀어올렸다. 사진기자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러댔다. 그 사진의 캡션은 'Her Royal Thighness'였다(Her Royal Thighness는 Her Royal Highness: 전하의 말장난으로써 Thigh(허벅지)가 두텁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역주). "퍼기는 쾌활한 하키 스틱 같은 여자ㅇ. 한줄기 신선한 바람 같은 여자지요. 활력에 넘치고요. 뭐라고 할까 튀어오르는 공 같은 여자예요." 한 패션 잡지 편집인이 말했다.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뒤에다 묶어 매면 퍼기는 도시에서 길을 잃은 시골처녀 같은 여자였다. 속물 근성이 가득 들어 찬 패션 디자이너들은 주근깨투성이에다 곱슬머리인 그녀를 형편없다고 과소평가했지만, 일반 대중들은 그녀의 신선함을 평가해 주었고 펑퍼짐한 드레스와 낡은 신발을 좋게 받아들였다. 여왕도 그런 편이었다. 여왕이 장래의 며느리에게 해준 유일한 충고는 손을 천천히 흔들라는 것이다. 퍼기는 여왕의 손 흔드는 모습을 훙내내면서 '전구 갈아끼우는 것'처럼 천천히 흔든다고 말했다. 아무튼 사라는 이제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강아지처럼 천방지축이었고 도무지 자제할 줄 몰랐다. 그녀는 선거유세에나선 정치가처럼 군중들 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이, 야, 하이, 야!" 그녀는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며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그때쯤 왕세자비는 이미 영국 패션업계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디자이너 의상을 입은 다이애나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제 팝콘 공주라고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그녀를 '이 세상 제일의 유명 인사'라고 불렀다. 1986년 전세계 잡지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다이애나의 얼굴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를 포함, 그 어떤 여자보다 더 많이 잡지의 표지 얼굴로 등장했다. 헐렁한 잠바와 줄무늬 옷을 입은 퍼기는 '새들 업', '웨이터 워처스' 등 살빼기 전문 잡지의 표지 모델로나 나올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 점을 인정했다. "사라의 아버지도 그 점을 인정했다. "사라가 입고 있는 어떤 옷은 정말 형편없었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싫어했지요." 그녀는 패션계의 불공평한 평가에 마음이 크게 상했다. 특히 자기를 왕세자비와 비교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나는 다이애나 복사판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사라가 탄식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퍼기는 날씬하지 못하고 우아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태도를 취햇다. 그러나 웨딩 드레서 디자이너인 린드카 시에라크에게는 아름답게 보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결혼식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볼 5억 인구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6년 7월 23일 결혼식 날 아침에, 여왕은 앤드루 왕자에게 요크 공작, 이버네스 백작, 킬릴레아 남작의 칭호를 수여했다. 그의 아내인 사라는 요크 공작부인 전하가 되었다. 이 칭호는 1936년 이래 수여되지 않던 것이었다. 당시 요크 공작부인은 왕비로 등극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등극하자 퀸 머더가 된 86세의 전 요크 공작부인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족이 되었다. 사라는 이제 전하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으며 남자들로부터는 목례를, 여자들로부터 커트시를 받는 자격을 획득했다. 그녀에게 커트시를 바치지 않는 여인은 그녀보다 위치가 높은 여왕, 퀸 머더, 왕세자비뿐이었다. 퍼기는 그 칭호가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라고 말했다. 요크 공작부인이 된 사라는 남에게 소개될 때 반드시 자기 이름 앞에 전하라는 칭호를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기를 부를 때에는 마담이라는 호칭으로 불러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문장을 사용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호박벌과 엉겅퀴로 문장을 만들고 그 밑에 'Ex Adversis Felicitas(역경으로부터 행복이 온다)'라는 모토도 새겨넣었다. 결혼 후에 그녀는 자기 가족들로부터도 공식적인 인사를 받기를 고집했다. 그것은 아버지도 목례를 하고 새 어머니도 커트시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는 이런 의례를 면제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될 때는 반드시 왕실 의전 절차를 주지시키라고 직원들에게 요구했다. 미국으로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서면 지시문을 만들어 자기가 입장하기 전에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다. 1. 말을 걸기 전에 먼저 말하지 말 것. 2. 그녀가 먼저 악수를 하기 전에 악수를 청하지 말 것. 3. 대화의 토픽을 강요하지 말 것. 4. 그녀의 왕실 호칭인 전하를 이름 앞에 붙여 사용할 것. 요크 공작이 된 앤드루는 2만 달러의 해군 연봉 이외에 시빌 리스트(왕실비용)로부터 연간 10만 달러의 보조를 받았다. 그는 또한 여왕이 설립해 놓은 1백만 달러의 기금신탁에서 일정 수익을 얻었다. 그런데도 퍼기는 연봉 3만 5천달러의 결혼식 비용으로 35만 달러를 지불했고 신부에게 다이아몬드 3중관, 다이아몬드 팔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했다. 여왕은 앤드루 부처에게 5에이커의 부지를 하사했고 윈저 성에서 5마일 떨어진, 방 46개짜리 맨션인 서닝힐 파크의 건축비로 7백만 달러를 지불했다. "댄에게 그 정도 해주었으니 당연히 앤드루에게도 똑같이 해주어야죠." 여왕은 말했다. 결혼식 날 아침 황금마차와 유명 인사들의 행진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일찍부터 몰려들었다. 메이저 퍼거슨은 사람들이 연도에 죽 늘어선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저 사람들 좀 봐. 내 딸 아이를 보려고 저렇게 줄 서 있는 거야."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인 낸시 레이건이 22명의 경호 요원의 호위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화장품 재벌인 에스터 로더는 영화배우 마이클 케인의 뒤에서 걸어왔다. 보라색 안경을 쓰고 말총머리를 한 팝 가수 엘튼 존은 모나코의 앨버트 왕과 함께 손을 흔들어댔다. 잠시 뒤 마거릿 대처 총리가 도착했다. 그러나 대처 총리는 광부들의 파업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기마경찰을 투입했기 때문에 관중들의 야우를 받았다. 관중들은 빅토리아 풍의 상아빛 드레서를 입어 날씬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신부를 보자 일제히 환성을 울렸다. 메이저 퍼거슨은 딸의 손은 잡고 11세기에 지어진 웨스트 민스터 사원의 중앙통로를 불안스럽게 걸어갔다. 사라 퍼거슨은 연방 미소를 날려보냈다. 그녀는 한 관객에게는 인상을 써보였고 다른 관객에게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으며, 1,800명의 초청객 중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는 농담을 걸었다. 메이저 퍼거슨은 계속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여왕과 앤드루 왕자가 우리를 기다리며 내려다보고 있던 내진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사라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자 이제 그만해. 이젠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구.'" 퍼기는 자제하려고 했지만 억지로 노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해군 대위 제복의 가슴에 포크랜드 훈장을 달고, 제단 앞에 서 있던 앤드루 왕자는 한발짝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주 아름다워 보이는구려." 앤드루가 사라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달링. 칫솔을 싸가지고 오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사라가 말했따. "괜찮아, 신경쓰지 마." 요크 공작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왕은 예식 도중 복받치는 감격을 억누르기 위해 가끔 심호흡을 하면서 자기 아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왕세자비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일반 축하객들과는 떨어져서, 분홍빛 섞인 황금의자에 왕실 가족들과 함꼐 앉아 있던 다이애나는 멍하고 슬픈 표정으로 허공만 쳐다보았다. 그녀는 네 명의 어린 시동 중의 하나인 네 살배기 윌리엄이 제단 앞으로 걸어들어오자 순간적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사라와 앤드루를 서로 맺어지게 해준 다이애나는 친구를 동서로 두어 '왕실의 부담'을 함께 가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언론의 각광을 함꼐 나누어 가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늘 언론의 주목 대상이었던 다이애나는 언론의 관심이 갑자기 퍼기에게로 향하자 당황하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2위의 자리로 밀려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격하된 지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기자들에게 농담을 걸었다. "당신들은 이제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겠네요. 퍼기가 있으니까." 그날 결혼식에서 앤드루와 사라는 그처럼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 순백의 행복은 앞으로 잠시밖에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었다. 16. 신데렐라의 꿈은 사라지고 - 나는 더 이상 찰스의 여자가 아니에요 찰스 왕세자는 아내가 그녀의 경호원과 놀아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85년 왕세자 부처의 결혼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던 당시, 사교성이 좋은 경찰관 배리 마나키가 다이애나의 경호원으로 배정되었다. 그는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찰스가 아내와 떨어져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히 다이애나는 개인 경호원인 그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39세의 경호 결찰관은 아이 둘을 둔 유부남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세 살짜리 윌리엄 왕자와도 친해지게 되었다. 왕세자 부처의 별장인 하이그로브 관리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배리는 아주 재미있는데다 부담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했지요. 그는 왕세자비에게는 아주 적합한 경호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잘 들어 주었고 때로는 농담을 나누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를 놀려먹기도 해서 두 사람이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정사를 벌엿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만,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닐 거라고 믿어요. 다이애나는 배리를 그저 친구, 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어요." 왕세자비의 경호원은 지겨울 정도로 쇼핑을 나서는 그녀를 반드시 따라다녔고 찰스가 혼자 낚시를 하러 갔을 때나 그녀가 왕실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할 때에는 바모랄의 숲으로 드라이브를 시켜 주었다. 그 당시 그녀는 울적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마나키에게 의지했다. 그러면 그는 따뜻한 위로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튼튼한 어ㄲ를 제공했다. 그녀가 공식행사에 나가기 전에 신경이 날카로운 증세를 보이면 그가 위로해 주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가 더 이상 행사 참슥을 할 수 없다며 내 양팔에 쓰러진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포옹하며넛 울지 말라고 했지요. 그것말고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마나키가 말했다. 경호원은 다이애나의 비밀을 받아 주는 사람이 되었고 당연히 찰스와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도 알게 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가 결혼 전의 파커 볼스와의 관계도 알게 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가 결혼 적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다시 카밀라에게 돌아갔다고 마나키에게 말했다. 그녀는 어느 주말 하이그로브에 갔을 때 찰스가 거기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찰스의 참모는 다이애나가 도착하기 직전 왕세자가 스포츠 카를 타고서 황급히 하이그로브를 떠났다고 말했다.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비상시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이애나는 찰스의 서재로 들어가 그의 이동전화기의 리콜(재통화) 버튼을 눌러보았는데 파커 볼스 저택의 번호가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찰스의 개인 캘린더를 뒤져보았는데 마침 그 날짜에 'C'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또 책상 서랍을 뒤졌더니 카밀라에게서 온 편지 묶음이 들어 있었다. 어떤 편지는 수다스러웠고 어떤 편지는 아주 다정한 것이었는데, 찰스를 '내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마나키는 다이애나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 왕세자비를 더욱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애나는 왜 남편이 자기를 멀리 하느냐고 눈물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바보입니다. 정말 바보예요." 마나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이애나는 경호원의 충성심에 감동을 받았고 또 그의 노동자 같은 런던식 억양에 미소를 지ㅓㅆ다. 그는 그녀의 친한 친구, 비밀을 보관해 주는 사람, 심지어 패션 컨설턴트가 되었다. 그녀는 아내가 남편 앞에서 하듯이 입은 옷을 자랑하며 경호원의 의견을 구했다. 하인들은 왕세자비가 공식 모임에 나가기 앞서 방에서 나오면서 경호원에게 옷의 상태를 물어보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회상했다. "배리, 나 어떻게 보여요? 귀고리가 제대로 매달린 것 같아요?" "아주 좋습니다." 그녀는 배리 앞에서 몸을 한번 돌려보이면서 이브닝 드레스의 잔주름을 부드럽게 펴고 입술에다 립 그로스를 좀더 발랐다. "정말이에요? 괜찮아 보여요?" 그녀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센세이셔널합니다. 나 자신도 매혹될 지경입니다." 배리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따. "이미 매혹되어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애교스럽게 물었따. 그들이 그처럼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이 찰스의 마음을 괴롭혔다. 찰스는 2중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이그로브의 정원사에게 자신의 결혼생활이 엉망이라고 사실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경호원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찰ㅅ는 그녀가 도무지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한탄했다. 찰스는 닫혀진 문 뒤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부부간의 싸움이 이제 하인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는 것을 당황스럽게 생각했다. 찰스는 그렇게 된 것이 사람들 앞에서 말대꾸하는 다이애나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혼 초기에 그녀는 남편의 기세에 눌려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자신의 그런 수줍음을 극복하게 되었고, 대중들에 대한 인기도가 높아져서 자신감을 갖게 되자 더 이상 찰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만은 않았다. 다이애나는 대중들 앞에서는 꼭 참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분노를 터트렸다. '아첨만 해대는' 남편의 친구들, 폴로 경기에의 지나친 몰두, '시가 냄새가 나는 따분한 늙은이들'과의 디너 파티, 혼자서 낚시, 그림, 스키 여행을 떠나는 것 등에 대해 불평을 했다. 그녀는 찰스가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자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찰스는 그녀의 신경질적인 행동 때문에 흐트러진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그런 여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기절하는 사태까지 내보인 대식증에 대해 다이애나를 질책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언제나 아프다고 말해. 왜 좀 퍼기처럼 쾌활하게 할 수 없는 거야?" 그는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또 식사 도중에는 이렇게 그녀를 나무랬다. "그 먹고 있는 음식, 나중에 토해 버릴 건가: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그러면 다이애나는 찰스가 이기적이고 인색하다고 말하면서 대들었다. 그러자 찰스는 그녀가 낭비벽이 있다고 받아쳤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며 왕실의 측근인 니콜라스 하슬렘은 이렇게 말했다. "찰스가 인색하게 나오며 그녀는 약이 올라서 더욱 낭비를 했습니다. 찰스의 구두쇠 짓은 그녀를 돌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왕족들은 가난한 척하기를 좋아합니다. 카밀라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돈 쓰는 것을 그렇게 아까워했어요. 그리고 찰스는 그녀의 그런 성격을 좋아했어요.찰스와 카밀라는 서로의 인색한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카밀라가 세탁소에서 너무 비싸게 부른다고 불평을 하면 찰스는 귀를 쫑긋하고 들어 주면서 자기 역시 세탁비용이 많이 나간다고 툴툴거렸습니다. 옷은 일반 세탁소에다 맡기는 비용이 너무 많아고 불평한 것인데, 이런 필수적인 용도에 돈을 좀 썼다고 그렇게 불평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왕세자비는 찰스가 구두쇠 짓을 하는 바람에 하이그로브에 테니스 장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내가 그걸 얼마나 갖고 싶어하는지 알아요?" 다이애나가 찰스에게 물었다. 그러나 찰스는 테니스 장을 짓는 데 2만 달러가 들어가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건 말도 안돼요. 당신의 그 지겨운 정원이나 기타 당신 취미에 맞는 일에 쏟아붓는 수천 달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도대체 나의 요구사항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는 어ㄲ를 한번 들썩 하고 나서는 방 밖으로 나갔다. 다이애나는 닫힌 문을 통해 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그녀는 저녁식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찰스가 식당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유아실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그녀는 사라응ㄹ 구걸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심하게 부부싸움을 할 경우 그들은 욕설을 퍼붓고 물건을 내던졌다. 한바탕 큰 싸움을 치른 다음, 찰스는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 차를 타고 하이그로브를 벗어났다. 다이애나는 2층으로 뛰어올라가 창문을 열고서 고래고래 쇨를 질렀다. "찰스, 네놈은 똥이야. 똥 같은 존재라구!" 또다른 부부싸움 때 그녀는 차주전자를 그에게 집어던지고 방 밖으로 달려나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 그런 와중에서 그녀는 시종과 맞부딪칠 뻔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이렇게 소리질렀다. "찰스, 네놈은 지겨운 동물이야. 난 네놈을 증오해." 찰스를 싫어하고 또 카밀라 파커 볼스를 질투하는 다이애나는 찰스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찰스는 아내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했다. 그가 오랫동안 집을 비운다고 다이애나가 눈물을 흘리며 폭발해 버리는 것은, 찰스가 볼 때, 성격적 불안정만 드러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 따분했다. 그는 의상, 춤, 로큰롤 등 그녀의 취미를 하찮은 것으로 보았다. 그녀가 병원을 방문하여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것도 자기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한 간교한 행위라고 생각했고 한때 그가 그토록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유머도 이제는 신경에 거슬렸다. 지적 성향의 대학 졸업자인 찰스는 사하로프와 솔제니친도 구분하지 못하는 고교 중퇴자와 결혼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1986년 하이그로브에서 텔레비전 인터뷰를 녹화할 때 다이애나는 대학시험에 실패한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농담을 했다. "나는 머리 크기가 완두콩 정도밖에 안되나 봐요." 찰스는 그녀의 농담을 삭제편집해 달라고 고집했다. 다이애나는 삭제하지 말라면서 오히려 찰스가 하이그로브 정원의 식물들에게 말을 건다는 장면을 삭제해야 한다고 맞섰다. "식물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인터뷰 기자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이 짖는다고(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다이애나가 찰스에게 말했다. 아무튼 다이애나의 의견이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찰스의 그런 말을 들은 시청자들은 미쳤다고까지는 아니지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텔레비전 인터뷰는 찰스 커플이 마지막으로 함께 출연한 인터뷰였다. 이처럼 부부 사이가 비틀어진 데 대해 비참함을 느끼고 있던 찰스는 1986년 3월 11일 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의 결혼생활은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혀 버린 것 같다네." 끈임없이 자기와 같이 있어 달라는 다이애나의 요구는 찰스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다이애나가 공식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도와 주지 않았다. 그는 다이애나의 자기 몰두와 지나친 허영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면서 다이애나가 하루에 몇 시간씩 신문과 잡지에 난 자기 관련 기사를 정독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고 매도했다. 다이애나의 친구 캐롤린 바솔로뮤는 다이애나가 자기 자신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전기작가인 앤드루 모튼에게 이렇게 변명했다. "전세계 사람의 절반 이상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예전엔 공식석상에서 만큼은 침착하고 우아한 태도를 유지했던 찰스는 드디어 공시석상에서도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다이애나가 찰스의 1970년산 아스톤 마틴 컨버티블 차의 덮개 위에 앉아서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자, 찰스는 벌컥 화를 냈다. 당시 12만 5천 달러나 나가는 그 진귀한 차는 어머니가 찰스의 21세 생일 기념으로 선물한 것이었다. "내려와, 내려와! 내 차를 엉망으로 만들려고 그래? 거기 앉으면 안돼, 내려와! 차가 망가진단 말이야." 다이애나는 남편이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자 창피했다. 그녀는 재빨리 보닛에서 내려와 그를 약간 걷어차는 시늉을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그녀의 팔을 잡고 차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그녀는 팔을 뿌리치면서 차안으로 들어갔다. 화가 난 찰스가 그녀의 목덜미를 거머쥐려는 순간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얼른 손을 뗐다. 그는 엉거주춤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또 한번은 서로 소리치고 싸우다가 찰스가 나무로 만든 장화벗기는 기구를 다이애나에게 집어던졌다. "감히 내게 그따위 말짓거리를 해? 내가 누구인지나 알고 있어?"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처음에 다이애나가 발악을 할 때마다 찰스는 우울한 침묵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분노를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고 어떤 때는 참지 못하고 폭발하기까지 했다. 찰스는 한번은 방안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오더니 화장실로 들어가서 시종인 켄 스트로나크가 보는 데서 화장실의 사기 세면대를 떼어내 방바닥에다 박살을 내버렸다. 시종은 후일 찰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회상했다. "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어. 내 기분 이해하지?" 깜짝 놀란 시종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찰스는 여러 번 미친 듯이 폭발했지만 아내를 ㄸ린 적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램프를 집어던지거나 유리창을 깬것은 아내 쪽이었다고 말했다. 다이애나의 가족 영지인 알소프를 방문했을 때, 찰스 부부는 다이애나의 아버지가 새로 단장한 응접실에서 머물렀다. 그때 그 방이 '다소 파손되었다'고 다이애나의 아버지는 시인했다. 둘이 굉장한 싸움을 벌였다고 말한 스펜서 백작은 곧이어 모든 부부가 그렇게 싸운다고 둘러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이애나는 여전히 찰스를 매우 사랑하고 있어요." 다이애나는 새 어머니가 싫어서 그 후 알소프에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스펜서 백작은 딸과 손자들을 보려면 런던까지 나와야만 되었다. 남동생 찰스 스펜서가 결혼한 직후 다이애나는 '저 여자(새 어머니)'는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고 말했다. 남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레인이 스펜서 가의 고택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것이 너무나 다이애나의 비위에 거슬렸다. 그녀는 생모인 프랜시스샨드 키드가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생모 프랜시스는 재혼한 남편 키드가 최근 다른 여자에게 정을 주자 19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해 버렸다. 다이애나의 아버지 조니 스펜서가 알소프를 상속받기 전에 프랜시스는 조니의 곁을 떠났는데도, 다이애나와 그 형제들은 레인이 난데없이 나타나 어머니의 지위를 ㅃ앗아간다는 근거 없는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형제들은 다 큰 뒤에도 새 어머니를 계속 미워했다. 알소프에서 결혼식 전 파티가 열렸을 때 다이애나는 레인이 유아실로 들어가 조니 스펜서의 손자들에게 차를 따라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인이 그 방에서 나와 큰 계단으로 다가섰을 때 다이애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레인이 계단의 첫단에 발을 내딛자 다이애나가 갑자기 달려와 어ㄲ로 레인을 밀쳤다. 58세의 레인은 쓰러져서 몇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 층계참에 멈춰 섰다. 그러나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다. 다이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피해서 파티 장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레인은 그 일을 주변 사람에게 말했다. "다이애나가 왜 저러지? 왜 갑자기 폭발해서 미쳐 버리는 거지? 난 도무지 저 애를 알 수가 없어." 식생활 장애와 남편의 외도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다이애나는 화산처럼 갑자기 폭발하는 성향을 보였다. 찰스는 한차례 습관처럼 부부싸움을 벌인 후, 다이애나가 침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경호원에게 지난 밤 찰스가 카밀라 파커볼스에게 전화를 한 다음 느닷없이 사라진 사실을 털어 놓는 장면을 목격했다. 찰스는 그녀가 그처럼 신중하지 못한데 대해서 충격을 받았다. 그 후 며칠 만에 왕세자비를 1년 동안 경호해 온 그 경찰관은 외교단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왕세자의 한 참모는 그같은 갑작스런 인사발령은 경호원이 왕세자비와 '너무 친해졌기 때문'이라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그는 나를 엿먹이는 거예요." 다이애나는 친구들에게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가정적인 이유 때문에 전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를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마나키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찰스는 하인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찰스가 볼 때 아내가 하인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은 못마땅한 일이었다. 그는 참모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고 그래서 아내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의상 담당, 경호원, 집사장 등을 마치 자기 가족처럼 대했다. 찰스의 마필 담당관은 이렇게 말했다. "왕세자의 태도를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왕족으로 성장하다 보니 그에게는 다소 초연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런 왕족다운 초연함이 없었던 다이애나는 하인들도 친구처럼 대했다. 그녀는 직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샌드링엄, 발모랄, 버킹엄 궁 어디든지 그녀의 도착 일성은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였다. 그녀는 직원들의 파티에도 참석했고 음악 레코드도 가져왔고 하인들에게도 함께 춤을 추자고 제안했다. 그녀의 남편은 자기가 직원들의 파티에 참석하면 지나치게 공식적인 모임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런 파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그런 태도를 격식에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지나친 애정 표현도 그를 화나게 했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 모두, 심지어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키스(뺨비비기)를 한다고 찰스는 말했다. 그녀가 고속도로 노동자와 국가원수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폴로 게임에서 메이저 론 퍼거슨을 만난 그녀는 인사 대신 키스를 했다. 결혼식 직후에는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로드 하이 챔벌린에게도 키스를 했다. 허니문을 떠났을 때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에게도 작별인사로 키스를 했다. 뉴질랜드에 가서는 마오리 부족 여인들과 코를 부벼댔다. 귀국해서는 하인들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배리 마나키는 왕실경호단에서 전보된 지 8개월만에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접촉사고를 일으켜 사망했다. 찰스는 그 소식을 즉시 보고받았으나 24시간 시다렸다가 다이애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들이 칸느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도중, 그녀가리무진에서 내려 기자들과 만나기 직전에,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 그런데 말이야, 어제 왕실 경호단으로부터 들은 얘긴데 불쌍한 배리 마나키가 죽었다는구만. 교통사고 였대. 정말 안됐지?" 리무진이 왕실 전용기 앞에 정차하기 직전 다이애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찰스는 그녀를 차밖으로 밀어냈다. "자, 나갑시다, 달링. 기자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구료." 찰스는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이애나는 마나키의 죽음이 사고였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했따. 그녀는 자신의 전 경호원이 질투하는 남편의 사주를 받은 M15(영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자기가 마나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차례 심령술 회합을 통해 그의 영혼을 불러오려거 애를 썼다. 한 작가가 마나키의 죽음과 관련, M15의 음모설을 암시하는 책자를 발견하자, 마나키의 아버지는 그 음모설을 부인하고 아들이 사고로 죽었음을 확인했다. 다이애나는 마침내 사고설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 소식을 그처럼 야비하게 전달한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남편이 잔인한 사람이며 자기를 괴롭히는 일에 악마 같은 쾌락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찰스와 다이애나의 동화는 끝난 상태였다. 그렇지만 일반 대중들은 그 화려한 유리 동화에나 있는 가느다란 균열의 금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균열을 처음 드러내는 사건이 폴로 시합장에서 연축되었다. 찰스는 그의 팀에 지자 수백명의 사람들이 보는 데서 아내의 뺨에다 키스를 했다. 그녀는 혓바닥을 축 늘어뜨린 개한테 빨린 사람처럼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는 손바닥으로 뺨에 묻은 캐스자국을 닦아냈다. 서서히 타블로이드 신문 기자들은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긴장관계를 눈치채기 시작했고 찰스 부부가 영국에 있으면서도 같은 침대를 쓰지 않은 것이 연속 37일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찰스가 가족 후가에서 스케줄보다 일찍 돌아오는 것이 포착되었고 찰스와 다이애나가 같은 곳에 갈 때에도 따로따로 도착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런던의 패션쇼와 록 콘서트에 참석할 동안 찰스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113마일 떨어진 하이그로브 정원에서 혼자 일했다. 그가 발모랄에 혼자 낚시를 갈 때,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켄징턴 궁에 머물렀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긴장된 결혼생활에 대해 추측기사를 남발하는 언론이 미웠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내가 남편없이 혼자 다닌다고 해서 내 결혼생활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항변했다. 다이애나는 전보다 더 많은 공식행사에 참가했지만(1984년의 177건에 비해 70퍼센트나 더 많은 299건(1985)) 이 중 절반 이상이 남편없이 혼자서 참석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처럼 왕실 행사에 열심히 쫓아 다니는 것을 기특하게 생각한 시아버지 필립 공은 루머 따위에 신경쓰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시아버지의 조언을 따랐다. "우리가 처음 결혼했을 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부부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어요.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가톨릭 신자이면서 흑인인 사람을 애인으로 두었다는 보도가 나올지도 몰라요." 다이애나는 그렇게 의뭉을 떨었다. 공식 행사에 꾸준히 참석해야 한다는 외부적 압력과 사형 집행관처럼 행동하는 기자단에게 우아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부담은 다이애나를 마구 짓눌렀다. 한 유치원을 방문했을 때, 유치원 원장이 집 바깥에서 아우성치는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해 줄 것이냐고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그들에게 그렇게 해줄 필요없어요. 그들이 내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다이애나가 말했다. 그 다음날 아침 '선'은 사설을 써서 그녀에게 반격을 가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신문이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우리 '선'은 왕세자비에게 모든 것을 해주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신문이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신문이 매혹과 로맨스의 후광을 안겨 주었다. 신문이 없었다면 윈저 가의 가족들 모두가 덴마크나 스웨덴의 왕가처럼 별볼일없게 되었을 것이다." 화사하게 웃는 공식적인 이미지를 지킨다는 일은 커다란 부담이었고 왕세자비의 활기를 빼앗아가는 고역이었다. "나는 이런 부담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얻지 못해요." 다이애나는 시녀에게 불평을 털어 놓았따. 남편 찰스와 마찬가지로 왕궁은 그녀가 아무 불평없이 의무만 수행해 주기를 기대했다. 공식석상에 계속 나가되 아무런 불평도 하지 말라, 이것이 왕궁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배리 마나키가 없기 때문에 이제 그녀를 격려해 주고 조언해 주고 애정을 표시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다이애나를 이유없이 징징거리는 여자로 취급했다. "아니, 이번엔 또 뭐야?"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면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이애나는 왕실 내에서도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친정 어닌들에게도 비밀을 털어 놓지 못했다. 특히 둘째 언니 제인은 여왕의 개인 비서인 로버트 펠로스와 결혼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다이애나는 찰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 사라 퍼거슨도 경계했다. 다이애나는 자기의 결혼생활이 빈껍데기뿐이라는 말로 친구들을 실망시키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룸메이트였던 캐롤린 프라이드 바솔로뮤가 다이애나의 갑작스러운 체중 감소를 걱정하자, 다이애나는 마침내 자신의 식생활 장애를 털어 놓았다. 자기가 너무 불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너다섯번씩 음식을 많이 먹었다가 토해 버리는 일을 되풀이한다고 고백했다.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가 더 이상 자상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캐롤린 바솔로뮤는 오스트레일리아에 갔을 때, 왕세자 부처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물어보는 기자들의 답변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왕세자 부부가 각방을 쓰고 휴가도 따로따로 보낸다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거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도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한 기자가 26세의 다이애나가 39세의 찰스에게 따분함을 느끼는 것이 아내냐고 물었다. "오, 그건 아니에요." 바솔로뮤 부인이 말했다. "그럼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에... 에... 그래요... 그들은 아이가 있잖아요." 1986년 한 칵테일 파티에서 제임스 휴이트 대위를 만났을 때, 다이애나는 아주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그녀는 외로웠고 버림받았고 그래서 절망적이었다. 27세의 총각 대위는 일정한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고 왕세자비와 희희덕거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근위여단의 총무과에서 근무하는 유능한 승마수였다. 다이애나는 자기가 어릴 때 조랑말에서 떨어진 이후 승마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승마를 못하는 것이 남편과 승마를 사랑하는 왕실 가족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승마를 좀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잘생긴 기병대 장교는 미소를 지으며 도와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이틀 뒤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승마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사립학교인 밀필드를 졸업한 뒤에 샌드허스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제임스 휴이트는 졸업 후 근위여단에 배속을 받았고 그 이후 군생활을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삼을 겸심을 했다. 그는 자기가 국왕의 엘리트 근위 요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육군 대위는 군복을 입지 않을 때에는 더블 신사복, 구치 구두, 황금 커프링크스를 착용했다. 그는 비단 넥타이를 매고 폴로 게임을 하면서 좋은 매너를 닦아나갔다. 황갈색 곱슬머리, 두툼한 입술, 졸리운 듯한 푸른 눈 등 매력적인 용모를 갖춘 제임스 휴이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은 말과 섹스뿐입니다." 몇 해 뒤 그는 왕세자비와 함께 그 두가지를 나누어 가졌다고 말했다. 그들의 혼외정사는 나이트브리지 병영의 마구간에서 기작되었다. 첫 두 달 동안 다이애나는 경호원과 시녀를 대동하고 매주 승마 레슨을 받으로 왔다. 곧 시녀는 바깥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ㄱ고 경호원은 왕세자비와 승마교관이 승마로에 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타는 동안 병영 안에 머물렀다. 다이애나는 자기와 동갑인 제임스 휴이트에게서 여자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긴장한 말을 다루듯이 여자를 다루었다. 그는 여자들을 안심시키고 또 편안하게 해주었다. 휴이트의 아버지는 해병대 대위 출신이고 어머니는 치과 의사의 딸이었다. 그래서 왕세자비는 휴이트와의 사귐을 계속하기 위해 계급의 경계선을 넘어야 했다. 다이애나는 한 친구에게 휴이트를 '내 영혼'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비록 성장 배경은 다르지만 성격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우아한 운동선수였고 자신들의 신체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또 자기들의 용모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했다. 그들은 멋진 옷을 떨쳐입는 것을 좋아했고 대중들 앞에 나서기 위해 몇 시간씩 공들여서 준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매력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유혹자였다. 두 사람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정신적 상흔에 의해 마음이 결속되어 있었다. 다이애나는 자시 애들한테만은 자신이 어렸을 때 겪었던 고통을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결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렸을 때 겪었던 것, 즉 아우성치는 싸움과 눈물젖은 욕설의 장면을 애들에게 그대로 보여 주고 말았다. 휴이튼는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실수를 피할 수 있었다. 외아들이었던 그는 어머니의 편애를 받았고 두 명의 누나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커서도 누나들과는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찰스와는 다르게 휴이트는 다이애나의 예기를 열심히 들어 주었다. 그녀의 자선사업 얘기, '그들(왕실 직원들)'이 간섭하지 않았을 때 훨씬 더 잘 왕실 임무를 수행한다는 얘기 등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녀는 자기가 병든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신성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한 치유의 능력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정신'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기가 병원을 방문하는 왕세자비라는 의식적인 역할 이상의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왕관을 쓴 마더 테레사라고 생각했다. 비록 휴이트는 그녀의 신비주의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들어 주었고 그녀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휴이트에게 자식들의 얘기도 해주었다. 두 왕자를 '빛나는 갑옷을 입은 나의 어린 기사들'이라고 불렀다. 자식들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몇 주에 걸쳐 그녀는 파탄 직전의 결혼생활에 대해 휴이트에게 말해 주었다. 그녀가 대식증, 자살 기도, 각방쓰기, 찰스의 정부 등에 대한 결혼생활의 비밀을 모두 털어 놓자 휴이트는 다이애나가 버림받아 정신을 못 차리는 허약한 여자임을 알았다. 다이애나를 전에 만났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현명하게도 그는 다이애나가 먼저 행동을 취해 오도록 했다. 그래서 그녀는 찰스가 하이그로부에 가고 없을 때 그를 켄징턴 궁의 디너에 초대했다. 그녀는 직원들을 대부분 외출시켜 버리고 현관문에서 흥분된 상태로 휴이트를 맞이했다. 그리고 휴이트를 은밀한 응접실로 데려가 샴페인 큰 병을 대접했다. 그녀는 자기가 별로 술을 마시지 않으나 이번만은 예외라고 말했다. 왕세자비는 휴이트에게 캐시미어 스웨터, 에르메스 넥타이, 1,500달러 짜리 승마화, 신사복, 셔츠, 외투, 캐시미어 양말, 황금 커프 링크스, 다이아몬드 박힌 넥타이 핀, 18캐럿 황금 시계 등을 선물로 주었다. 연봉 5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 기병대 장교는 다이애나에게 그런 비싼 선물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입고 다니던 것들을 선물로 주었다. 다이애나는 휴이트의 티셔츠를 입고 잠자리에 들었는가 하면 그의 크리켓 스웨터를 얻어다가 스키 파카 밑에다 받쳐입었다. 또 그의 오리털 자켓을 얻어서 산책 나갈 때 입고 다녔다. 그가 준 가장 값비싼 선물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귀고리였는데, 그녀가 손톱을 물어뜯지 않는 데 대한 감사표시였다. 켄징턴 궁에서 처음 디너를 하고 난 다음, 다이애나는 응접실 소파에서 그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그리고 사이드 테이블의 램프를 끄더니 그의 무릎 위로 올라오 양팔을 그의 목에다 둘렀다. 몇 분 뒤(그는 그의 전기작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침실로 그를 인도했다. 그 후 18개월 동안 그들의 정사는 아주 활기차고 열성적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때는 보안에 별로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불이 붙었다. 휴이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알소프를 방문하여 수영장에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들은 데본에 있는 휴이트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여 그 집 정원에서도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은 찰스가 여행을 나가 집에 없을 때면 켄징턴 궁이나 하이그로브에서 아이들과 함께 주말을 보냈다. 어린 왕자들은 휴이트의 존재에 아주 익숙해져서 그를 '제임스 아저씨 라고 불렀다. 그는 몇 시간이고 지겨워하지도 않고 왕자들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그는 왕자들을 병영으로 데려갔고 그러면 아이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행진하는 법, 경례하는 법, 집총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차례로 다이애나는 휴이트의 아버지와 누나들을 런던에 초대하여 은밀하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제임스는 가족들에게 다이애나와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다이애나는 또 그를 따라 데본으로 놀러가서 승마학교를 운영하는 휴이트의 어머니와 며칠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제임스의 어머니 셜리 휴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점심식사 이후에는 늘 설거지를 도와 주었어요. 그릇을 닦아 주는가 하면 찬장 청소를 깨끗이 해주었어요. '아니, 이거 왜 이렇게 엉망이죠'하더니 찬장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꺼내서 속속들이 청소해 주었어요." 데본에 놀러갔을 때 다이애나는 제임스의 어린 시절을 물어보면서 휴이트 부인의 비위를 맞춰 주는 애교를 부렸다. 다이애나와 휴이트 부인은 그의 어릴 때 사진이 든 앨범을 보면서 함께 그를 놀려먹기도 했다. 휴이트는 왕세자비와 사랑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이애나가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우울해하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겸연쩍어하면서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그렇지만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상상하는 것은 재미있었어요. 우리는 함께 평생을 보닐 수 없을까 하고 꿈을 꾸었던 거지요." 1351년에 제정된 반역법에 대해 다소 불안한 농담을 하면서, 그는 다이애나와 동침한 것 때문에 런던탑으로 보내져 목이 잘리지는 않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이 고색창연한 법은 후사의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세자의 아내와 간통하는 것을 금한 법이다. 왕세자비와 승마교관 사이의 로맨스가 휴애트에 의해 발설되고 다이애나에 의해 확인되자, 일부 왕실작가들은 구리빛 머리의 휴이트와 녹빛 머리의 해리 왕자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휴이트는 그 사실을 강하게 부인하면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이태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다이애나를 만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라이비트 아이'는 다르게 보도했다. "휴이트는 그보다 5년 전인 1981년의 폴로 게임에서 다이애나를 만났다. 그러니까 그녀가 결혼하기 전이었다." 왕세자비는 기병대 장교와의 관계를 비밀로 하는 데 있어서 그리 신중하지 못했다. 휴이트의 소속 부대에 있는 공중 전화로 전화를 걸 때 자신의 목소리를 위장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가 공식 행사에 나설 때에는 데이비드 워터하우스 소령이나 필립 던 같은 은행가의 에스코트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스캔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왕세자비인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호의를 믿었다. 사람들이 육군의 기마대를 책임진 장교와 그녀의 간통을 의심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로맨스가 깊어지자 다이애나는 전 룸메이트였던 캐롤린 바솔로뮤에게 비밀을 털어 놓았고 휴이트의 소속 부대가 있는 나이츠부리지의 산 로렌초 레스토랑(다이애나와 휴이트는 이곳에서 가끔 점심식사를 했다)을 소유한 친구 마라 베르티에게도 얘기했다. 그녀는 어디든지 따라 다니는 경호원 켄 훠프에게도 비밀을 털어 놓았다. ㄱ고 로맨스를 위한 외출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휴이트, 훠프 등과 비일상적으로 피크닉을 나가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1988년 11월 남편의 40회 생일을 기념하는 하얀 넥타이 무도회에 초청하는 여왕의 초청자 명단에다 자신의 애인 이름도 올려 놓았다. 그녀는 5백 명의 초청객 명단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카밀라 파커 볼스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의상 디자이너인 브루스 올드필드 옆에다 승마교관의 이름도 슬쩍 얹어 놓았다. 버킹엄 궁에서 열린 그 무도회에는 왕실의 모든 사람이 참석했다. 단 당시 HMS 에든버러 호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 해역을 순항하던 앤드루 왕자만 참석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과 소피아 왕비, 노르웨이, 룩셈부루크, 리히텐슈타인의 왕들, 폐위된 그리스 왕 등도 참석했다. 노덤벌랜드 공작과 웨스트민스터 공작도 록스타, 디스크 자키, 실업가 등과 함께 춤을 추고 샴페인을 마셨다. 찰스는 런던 북서부의 버밍엄 빈민가를 돌아다보면서 40세의 첫날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이곳에다 프린스 트러스트를 설립하여 젊은 장애인들을 고용해 왔다. 그는 아침 일찍 두 아들의 선물인'인생은 40부터'라는 버튼을 단 채 그곳에 도착하여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관중들은 열광적으로 '해피 버스데이'를 불러제쳤다. 찰스는 그날의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비판에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이제 마흔이고 전보다 더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불우이웃들을 위한 자신의 사업이 왕족다운 사업이라고 말하면서 에이즈 호나자를 돕는 아내의 일은 '부적절'하며 또 그런 환자들은 아내가 방문할 때 언론이 과장보도하는 것은 때때로 '감성적'이거나 '상업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 뉴욕 시의 할렘 병원에 입원중인 어린이 에이즈 환자들을 다이애나가 방문한 것은 정말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블랙 아메리카의 심장부인 할렘을 함께 방문하자는 다이애나의 제안을 찰스가 거부하자, 구녀는 혼자서 그곳을 방문했다. 죽어가는 흑인 어린이 에이즈 환자를 안고 있는 그녀의 사진을, 찰스는 '빤한 통수'라고 하면서 비난했다. 다이애나는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그녀는 '데일리 미러' 사진기자에게 자신의 바빴던 일정을 언급하면서 이런 저런 행사를 바쁘게 돌아쳐야 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 흑인 아이를 가슴에 안았을 때 슬픔을 느꼈어요. 아주 감동적이기도 했지요. 아마도 내가 혼자서 여행을 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남편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왕궁은 그녀의 코멘트를 남편에 대한 간접적인 공격으로 해석하고 그녀가 빡빡한 일정 때문에 심신이 피곤한 상태라는 내용의 성명을 재빨리 발표했다. "할렘 병원을 방문한 것은 그녀로서 대단히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그녀는 이틀 동안 논스톱으로 뛰어다녔고 그래서 그 피로가 그녀에게 엄습해 온 것 같다." 그것은 교활한 왕실 직원들과 역시 만만찮은 왕세자비 사이에서 벌어지게 되는 언론 전쟁을 예고하는 첫 총성이었다. 런던 칼럼니스트인 로스 벤슨은 이렇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한 수 위 술책을 펴는 데 뛰어났어요. 그녀와 찰스가 음악대학을 방문했을 때 찰스는 주위의 권고로 마지 못해 첼로를 잠깐 연주하게 되었어요. 그건 그녀에게도 놓치기 아까운 찬스였어요. 그가 연주를 하는 동안 그녀는 무대 위를 걸어가 피아노 앞에 앉더니 뚝겅을 열고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서두 부분을 멋지게 연주했어요. 사진기자의 카메라가 모두 일시에 그녀에게로 달려들었어요. 그래서 찰스는 바보처럼 수모를 당했지요.: 다이애나의 한 수 위 술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밀라 파커 볼스의 언니인 안나 엘리어트의 생일 파티에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파티에 참석한 40여 명의 초청객들은 하이그로브에 자주 오는 나이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다이애나가 참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남편의 넝부와 대결을 벌일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파티가 끝나갈 무렵 다이애나는 카밀라에게 다가가 조용히 얘기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마지막 손님들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라이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노골적으로 말해 버렸다. "왜 내 남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거죠?" 깜짝 놀란 카밀라는 아니라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그녀의 말을 차갑게 끊으면서 그들의 관게를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화 건 것, 편지 보낸 것, 여우사냥에 따라간 것, 일요일 밤마다 찰스를 찾아온 것 등을 열거했다. 다이애나가 없을 때 카밀라가 하이그로브에 놀러온 것을 말하면서 어떻게 감히 남의 집을 더럽힐 수 있느냐고 따졌다. 다이애나는 카밀라 때문에 찰스가 자식들을 멀리하고 결혼 생활을 파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마음 속의 말을 다 하고 난 다음, 그녀는 방에서 나와 찰스에게 집에 가자고 말했다. 그 다음날 아침 다이애나는 캐롤린 바솔로뮤에게 전화를 걸어 어젯밤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제임스 휴이트에게도 전화해서 그 대결을 자세히 말해 주면서 자신의 과감한 행동을 다시 한 번 음미했다. 그녀는 자기가 마침내 카밀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왜, 내가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 후회돼요. 이렇게 속시원한 걸 말이에요." 다이애나는 제임스에게 말했다. 휴이트는 그녀의 용감한 행동은 메달감이라고 말한 뒤 찰스의 반응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돌처럼 굳어져서 차갑게 화만 내고 있어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지요." 다이애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이애나의 아버지는 1989년 5월 다이애나의 새 어머니 6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찰스 부처를 알소프로 초대했다. 그러나 그때 찰스는 이미 계획된 터키 여행을 취소하지 않으려 했다. "난 계획대로 여행을 하겠소." 그는 아내에게 메모를 보내 자신의 의사를 통보했다. 당시 아내와의 언쟁을 피하기 위해 그런 메모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켄징턴 궁에서 짐을 옮겨 아예 하이그로브에 눌러앉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말마다 하이그로브로 놀러갔다. 그는 아내에게 터키 여행에 카밀라 파커 볼스와 그 남편 앤드루 파커 볼스가 동행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육군 준장으로 승진한 앤드루 파커 볼스(Andrew Parker Bowless)는 당시 '프라이베트 아이'라는 잡지에서 'Andrew Park Your Balls(Park Your Balls는 오쟁이진 남자라는 뜻. 역주)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그들이 동행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휴이트에게 터키 여행을 말해 주면서 자기가 찰스와 카밀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휴이트는 그녀가 아직도 카밀라에 대해서 신경쓴다고 생각했다. 또 그녀가 아니라고 하지만 실은 결혼생활을 되살려 보려고 애쓴다는 감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조니 스펜서의 무도회에 자기를 에스코트해 달라는 그녀의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초청객이 오백 명이나 되니까 우린 안전할 거예요." 다이애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그 직후 휴이트는 독일로 가서 탱크 여단을 지휘하라는 인사이동 명령을 받았다. 지휘관으로 승진된 휴이트는 흥분했지만 자신이 2년 동안 그녀 곁은 떠나게 되었다고 말하면 다이애나가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과연 그녀는 자기보다 군대 내의 승진을 더 중시한 휴이트를 비난했다. 그녀는 여러 달 동안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다이애나를 보지 못한 채 독일로 떠났다. 여러 주 동안 다이애나는 자신이 17세 때 좋아했던 남자인 제임스 길비를 수소문했다. 이번에 제임스 길비는 전보다는 더 고분고분하게 나왔다. 점심식사 혹은 조용한 저녁 식사를 하면서 길비는 비참한 결혼 생활의 내막을 털어 놓는 다이애나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길비는 그녀의 쿠션(안전판)이 되었다. 그들은 텔레비전 인터뷰 기자인 데이비드 프로스트)아내는 카리나 프로스트)의 집에서 있었던 은밀한 디너 파티에 참석한 후 계속 만나게 되었다. 다이애나와 길비는 그날 저녁 프로스트의 집을 나오면서 그 앞에서 긴 키스를 나누었고 그 장면이 사진에 찍혔다. 그 키스 장면이 너무 열정적이라고 생각했던 한 사진기자는 해로드 백화점 근처의 레녹스 가든에 있는 길비의 아파트 부근에서 잠복근무를 했다. 며칠 매복한 끝에 사진기자는 새벽 1시 15분에 길비의 아파트를 나서는 왕세자비를 찍는 데 성공했다. 길비는 그녀와 함께 그 시간에 브리지 게임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다이애나와 내가 그런 상황에서 만났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다이애나는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그녀는 우체국 사서함을 이용하여 우편물을 보내서나 받았고 전화를 걸 때는 암호로 말했다. 그녀는 보안성이 높다고 하여 이동전화기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이동전화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켄징턴 궁의 전화기를 사용할 때에는 응접실의 문을 닫고 텔레비전 소리를 높여 놓아 하인들이 엿듣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9년 12월 31일 그녀가 제임스 길비와 나눈 전화 통화가 한 낯선 사람의 스케닝 장비에 포착되어 녹음되었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3년 뒤 그 10분짜리 통화 녹음을 공개했을 때, 왕세자비와 제임스 길비가 수음에 대해서 얘기한 부분은 삭제되었다. 통화 속에서 다이애나는 임신의 두려움을 말하고 있었다. "달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임신되지 않아요." 길비가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애나는 그날 오후 연속극을 보았는데 주인공이 임신했다는 말을 했다. "드라마 속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 아이가 남편의 애인 줄로 알아요. 하지만 임신은 다른 남자가 시킨 것이었어요." 왕세자비는 말했다. "스퀴지(길비가 다이애나를 부르는 별명), 내게 키스해 줘요... 오 하느님, 이건 정말 너무 멋지군. 그렇지 않아요, 이런 느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정말 좋아요. 정말." 다이애나가 대답했다. 스퀴지게이트라고 알려지게 되는 이 녹음통화가 공개되었을 무렵, 왕세자비의 명성은 진흙 속으로 쳐박혀졌고 그녀는 진흙탕 위로 머리를 내놓기 위해 안간심을 쓰게 된다. 17 나, 원래 그런 여자야 -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 정직했던 사라의 몰락 요크 공작부인9사라 퍼거슨)의 행동은 좌충우돌, 그야말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결혼식 몇 주 전에 '의무의 예의'라고 표시된 길에서 제멋대로 벗어났다. 게다가 그녀는 왕세자비를 타락의 길로 dlRMs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두 여인이 아스코 경마대회에서 우산끝으로 남자의 엉덩이를 찌르는 장면이 사진에 잡혔다. 며칠 뒤 그들은 여자경찰관으로 변장하여 앤드루 왕자의 총각 고별파티 장에 난입했다. 경찰 배지를 차고 경찰 곤봉을 든 채 두 여자는 아나벨 나이트클럽으로 쳐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느릇이 술을 마셨다. 영국 언론들은 그 사건을 미국적 용어로 표현했다. 즉 두 사람의 관계는 메이저 리그 대 마이너 리그라는 것이었다. 사라는 지옥에서 온 폭주족 같은 여자로 조롱을 받았다. 반면 이웃집에 사는 애인 같은 여자 다이애나는 그런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상처없이 모면했다. 그들은 두 공주의 동화를 그대로 빼다박았다. 한 공주는 입을 열면 루비와 다이아몬드가 쏟아져 나오는데 다른 한 공주는 입을 열면 두꺼비만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선데이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크레이그 브라운은 이렇게 썼다. "왕세자비는 사라보다 이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크 공작부인과는 달리 노골적이지 않기 때문에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작부인은 현대 영국의 나쁜 점, 가령 천박함, 버릇없음, 신비롭지 못함 등을 그대로 내보였기 때문에 무차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결혼한 지 1년도 못되어 요크(York) 공작부인은 여크(Yuck) 공작부인이 되고 말았다(여크는 경멸을 뜻하는 속어. 역주). 그녀는 연간 120일의 후가를 보냈으면서도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투덜거렸다. 앤 공주가 연간 429건의 왕실 의무를 수행한 데 비해 그녀는 고작 55건이었다. 그렇게 되자 사라 퍼거슨은 두리틀(별로 하는 게 없는)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첫 번째 임신기간 동안 몸무게가 50파운드가 늘자 포크(돼지)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가 무료 일등석 비행기표, 무료 호텔 스위트 룸. 무료 리무진 서비스를 턱턱 받아들이자, '공짜 좋아하는 퍼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카르티에로부터 공짜 시계, 루이 뷔통으로부터 공짜 여행용 가방을 받아들였다. 다우(돈) 공작부인이라는 별명답게 인터뷰를 해주면 돈을 기대했고 디나이너들에게는 공짜로 비싼 의상을 제공할 수 없냐고 요구했다. 프랑스의 디나이너인 이브 생 로랑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영국의 디자이너인 잔드라 로데스는 차갑게 거절했다. "나는 홍보 따위는 필요없어요." 사라는 술취해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마냥 비틀거리며 화제 속을 말려들어갔다. 그녀는 공식석상에서 남편에게 롤빵을 던졌다. 또 어떤 때는 남편의 머리에다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다시 샴페인을 마구 뿌려댔다. 남편 앤드루는 공식 석상에서 그녀를 마구 질책했다. 특히 그녀가 술취했을 때에는 더욱 소리치며 나무랐다. 한번은 그가 크게 질책을 하자 그녀가 달려들었다. "뭘 잘목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망신을 줘도 되는 거예요? 그건 신사답지 못해요. 어떤 때 당신은 당신 아버지만큼이나 매너가 없어요." 언론이 자기를 나쁘게 보도한다는 것을 기분좋지 않게 생각했던 퍼기는 기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앤드루는 기자들을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 자들과는 말도 하지 마. 바보 같은 놈들이야.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가는 마구 끌어내리는 자들이지." 앤드루가 사라에게 조언했다. "난 어떻게 하면 좋지? 앤드루는 신경쓰지 말라는 거야. 하지만 그는 멀리 배 타고 나가 있고 나는 비판적인 언론보도의 한가운데에 있으니..." 사라가 친한 친구에게 말했다. 요크 공 부처가 1988년 2월 영국의 예술과 산업을 홍보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여행하는 동안, 언론의 비판기사는 좀 잠잠해졌다. 당시 임신 3개월이었던 사라는 프랑스테 옷을 입고 도착했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속옷은 영국제라고 밝혔다. 앤드루는 그보다 4년 전인 1984년 총각의 몸으로 캘리포니아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로스앤젤레스 텔레비전의 한 논ㅍ가는 '영국이 1812년 전쟁에서 백악관을 불태운 이래 가장 불쾌한 영국인의 방문'이라고 악평을 했었다. 당시 대처 총리는 거른 언론보동 당황하여 런던의 '사치 앤 사치' 회사의 홍보 담당 전문가에게 앤드루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달라며 비밀 스터디를 지시했다. 대처 총리가 스터디의 결과를 여왕에게 발송하자 여왕은 그 보고서 읽기를 거부했다.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 "내 가족 문제에 관한 한, 그 조그만 여자가 보낸 조언 따위는 필요없어요."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88년의 여행에서 앤드루는 훨씬 몸조심을 했다. 왕실 전용선인 브리태니아를 타고 롱비치에 도착한 앤드루와 사라는 남부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열흘을 보냈다. 그들은 학교와 수퍼 마켓 등지를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앤드루는 사인을 했고 사라는 키스를 불어보냈다. 그녀는 머리카락에다 미국기와 영국기를 동시에 꽂고 나타나서 사진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내 머리를 좀 살펴봐 주세요." 전에 공작부인을 만나본 적이 없던 학동들은 퍼기 주위에 몰려들어 왕궁에서 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제일 어려운 일은 화장실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라가 여왕의 낡은 화장실에 대해서 말해 주자 어린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장실 변기를 아래로 밀어내리는 것이 아니로 위로 당겨올려야 해요. 그래서 난 늘 실수를 해요." 영국 언론들은 그녀가 히힝거리는 당나귀처럼 천박하다고 매도했다. 한때는 신선한 한줄기 공기로 묘사되던 여자가 이제는 가든 파티에 느닷없이 나타난 스컹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는 이렇게 불평을 해댔다. :그녀는 국제적인 망신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나중에 세련된 디너 파티에 참석하여 영국인의 천박성을 화제삼아 의견을 주고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저녁 공작부인은 여왕으로부터 받은 다이아몬드를 몸에 두르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파티장에 나온 미국인들은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사라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헐리우드의 영화 배우들 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모건 페어차일드는 마지못해 사라에게 커트시를 했고 피어스 보로스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특별히 할 말이 없어군요." 브로스넌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자 잭 니콜슨은 한마디 했다. "그녀는 자기가 내 옆에 앉지 못해서 실망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게 오히려 잘된 일일지 모른다고 말해 줬어요. 만약 내가 그녀 옆에 앉았더라면 어떻게 그녀를 대해 주었을지 나도 잘 모르니까요." 퍼기는 존 트라볼타에게 황급히 다가가 왕세자비가 아직독 백악관에서 같이 춤춘 것을 자랑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다이애나가 늘 그 얘기를 한다고 내게 전해 주더군요." 트라볼타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요크 공작 부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팜 스프링스로 여행했다 그곳에 윌터 아넨버그와 리 아넨버그의 주말 손님으로 초대받았던 것이다. 아넨버그 부처는 서니랜즈에 208에이커 규모의 사막 영지를 갖고 있었다. 전직 주영 미국 대사였던 아넨버그와 부인은 그들의 개인 활주로에서 앤드루 부처와 왕실 헬리콥터를 영접했다. 아넨버그 부처는 공작과 공작부인, 의상 담당, 참모, 경호원, 그리고 개인 짐을 나르기 위해 롤스 로이스 덮개의 골프 차를 여러 대 준비했다. 퍼기는 헬리콥터에서 깡총 뛰어내렸다. 그녀는 'ROCK'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타 모양의 커다란 황금 머리핀을 머리에 꽂고 있었다. 그들은 아넨버그가 마련한 골프 차에 뛰어올라 아이들처럼 낄낄거리며 그 차를 몰고서 활주로를 달려갔다. 사라에 대해서 좋은 언론보도도 있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이렇게 논평했다. "퍼기의 패션에 대한 논평에 늘 의문부호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그리 주용한 문제가 아니다. 그녀처럼 반짝거리는 성품을 가졌다면, 설혹 램프갓을 머리에 쓰고 있더라도 방안을 환히 비출 수 있을 것이다." 퍼기도 미국인을 좋아했다. 그녀는 몇 년 뒤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미국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미국인들이 내게 잘 대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생에 미국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중들은 환호했지만 공작부인이 윤회를 믿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특히 뉴욕 방문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거기서 제가 물건 좀 사들였죠." 그녀는 뉴욕에서 자신이 벌였던 마라톤 쇼핑을 말하는 것이었다. 런던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항공사는 그녀의 초과짐 51개에 대하여 1,200달러의 추가 운임료를 징수했다. "그 미국 나들이 때문에 영국에서의 이미지는 추락하기 시작했죠." 사라의 친한 친구인 영국 저널리스트 잉그리드 시워드는 말했다. 그러나 사라는 신경쓰지 않았다. 남편이 늘 바다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따분했다. 그래서 콩코드 비행기를 타고 뉴욕 나들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벼락부자들에게 공작부인이라는 칭호는 하나의 매력이었다. 그런 직함이 주는 사회적 매력 덕분에 돈 많은 사람, 막강한 실업가 등이 그녀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녀는 아주 예쁩니다. 아주 쾌활하고 성격도 원만해요." 백만장자인 도널드 트럼프는 말했다. 사라는 그들을 상대로 늘 재미있고 즐거운 얘가룰 눌어 놓았다. 그런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얘기는 주로 왕실 가족의 사소한 일화들이었다. 그러나 왕실 사람들을 유머의 소재로 삼아서 지껄여대는 사라의 태도를 왕실 직원들이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그들은 곧 사라의 못 말리는 쾌활성을 억누르는 작업에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쾌활한 성격을 짓누르는 왕실의 비정한 관료제도에 맞서 혼자 싸워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우군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까지도 그녀를 도와 주지 않았다. 비록 앤드루가 사라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왕실 직원들에게 맞서면서까지 옹호해 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앤드루는 그들을 너무나 무서워했다. 사라가 비공식적 고문관으로 삼았던 한 미국 여자 사업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사라는 자기를 짓누르는 군주제의 위력과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난관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를 조언해 줄 어른이 없었습니다. 왕궁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도와 주려 하지 않았어요. 여왕은 그녀를 좋아했지만 여왕은 왕궁의 중심이 아니랍니다. 필립 공이 왕궁의 모든 일을 관장했어요. 필립이 사라는 문제를 일으킬 뿐, 보호해 줄 가치가 없는 여자라고 판단한 이상, 그녀는 끝난 거였어요. 늘 바다에 나가 있는 앤드루는 그녀를 도와 주지 못했어요. 사라의 어머니는 브라질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간호하고 있었어요. 언니 제인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신의 이혼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지요. 게다가 사라의 아버지는 당시 매춘하는 안마시술소를 단골 출입했다는 섹스 스캔들에 휘말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녀의 친구인 내가 도와 주겠다고 나섰지요." 그 뉴욕 사업가는 공작부인에게 왕실 임무를 보다 충실하게 수행하고 장애아와 지진아를 위한 자선행사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여 이미지를 높이라고 조언했다. "나는 다이애나가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말해 주었어요." 뉴욕 사업가는 공작부인과 왕세자비의 서먹한 관계도 좋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두 사람의 질투와 경쟁심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석한다는 점도 설명해주었다. "사라는 자기가 미래와 왕비인 다이애나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부당한 희생을 강요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언론에서 두 사람을 부당하게 비교한다고 느꼈어요. 다이애나는 자애심 가득한 어머니로 묘사도는데 비해, 자기는 몇 달 동안 아이들은 니버려두고 호화 사치 쇼핑이나 다니는 못된 여자로 묘사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사라에게 스키를 지도했던 브루토 스프레커는 사라가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라고 말했다. "비록 20분 간격으로 중지하고 담배를 피워야 되었지만 그래도 사라는 스키를 잘 탔습니다. 파티에 나가서도 남자들 사이에서는 잘 어울렸어요. 하지만 여자들과 경쟁하는 것은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사라를 도와 주는 뉴욕 사업가는 다르게 보았다. "불행하게도 사라는 너무 솔직한 게 늘 손해되는 점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이를 낳기도 전에 자기는 아이를 싫어한다고 말했어요. 다이애나는 물론 아이를 좋아하는 마돈나처럼 인식되었지요. 그런데 사라는 어머니로서의 다이애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찰스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태도를 좋지 않게 보았지요. 다이애나는 어린 왕자들에게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너는 누굴 제일 좋아하니? 너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니?'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린 왕자들은 '엄마를 제일 좋아해요'라고 대답해야 되었습니다. 사라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사라는 또 다이애나가 찰스를 나쁘게만 말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찰스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둔감한 데가 있기는 했지만 다이애나가 말하는 그런 괴물은 아니라는 거죠." 뉴욕 사업가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라는 드러내 놓고 왕세자비를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자기가 다이애나에게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여러 번 느꼈다고 해요. 가령 왕세자비가 메이저 론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에게 섭섭하게 대한 것을 들 수 있지요." 사라의 아버지 메이저 론은 1988년 5월 안마시술소에 주기적으로 다니는 사람으로 타블로이드 신문에 폭로되었다. 4년 뒤인 1992년 메이저 론과 레즐리 플리에어의 불륜 관계가 폭로되었고 레즐리는 론의 아이를 유산한 사실을 시인했다. 그런 섹스 스캔들이 터지자 찰스 왕세자는 그를 폴로 게임 매니저에서 해임했다. 다이애나는 그런 스캔들 때문에 메이저 론과는 될 수 있으면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녀는 어린 왕자들을 폴로 경기장에 내보내지 않음으로써 아이들이 메이저 론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피했다. 사라는 아버지 일로 속상하고 또 창피를 느꼈다. 그러나 다이애나의 집안도 따지고 보면 그리 거룩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다이애나의 남동생 찰스 스펜서는 결혼 직후 '데일리 메일'의 가십담당 칼럼니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 아닌 여자와 혼외정사를 벌였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 여자의 폭로기사가 타블로이드 신문에 등장하기 며칠 전이었다. 스펜서의 스토리는 영국에서 신문 1면을 차지하는 스캔들이 되었다.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일로 아내에게 평생 가도 씻어내지 못할 슬픔을 안겼습니다. 나의 우둔한 행동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제 우리 애가 태어난 이후로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우리의 결혼은 평생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전직 모델이었던 그의 아니(빅토리아 록우드)는 큰 충격을 받았고 신경성 무식욕증과 알콜 중독으로 고생했다. 그녀는 중독제거 센터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심각한 심리적 문제(찰스 스펜서의 말)'로 3개월 동안 입원을 해야 되었다. '샴페인 찰리'로 알려진 찰스 스펜서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역경과 순경을 함께 헤쳐나갈 아내를 찾으라고 조언한 아버지의 말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축하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빅토리아를 잘 아시는 분들은 그녀가 역경과 순경을 저와 함께 헤쳐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뒤, 4명의 아이를 둔 찰스 스펜서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다. 요크 공작부인은 공식적으로는 안마시술소에 출입한 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아버지의 스캔들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가 추락했다고 불평했다. 그 스캔들로 인해 자선사업에 참여하여 자기의 이미지를 높이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그녀는 '말을 타고 달리는 메이저(메이저 론이 자기를 가리키는 말)' 때문에 자신이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느꼈다. 왕실의 후원을 바라는 단체들, 특히 돈을 모금하고 좋은 프로필을 유지해야 하는 단체들은 사라를 피했다. 그 결과 왕세자비는 120개 자선 사업의 후원자인데 비해 요크 공작부인은 15개 후원사업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이 당 시 사라는 약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움을 받았던 치료사인 79세의 잭 템플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살빼는 약(암페타민)을 너무 많이 먹고 있었어요. 그 때문에 그녀는 몰락하기 시작한 겁니다. 살빼는 약이 그녀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어요. 마치 안개낀 것처럼. 그래서 그녀의 행동은 정상이 아니었어요." 뉴욕에 있는 사라의 고문관은 언론이 사라를 점점 더 나쁘게 보도하는 현상을 우울하게 지켜보았다. 언론은 그녀가 아무에게나 양손바닥을 활짝 벌리는 돈만 밝히는 여자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20만 1천6백 달러를 주고 한 영국 신문에다 독점 인터뷰 권리를 팔았다. 그 신문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털어 놓지 ㅇ낳았다고 불평하면서 그녀에게 지불해야 할 돈 일부를 유보했다. 그런 기사가 그 신문에 나온 날 사라는 텔레비전 인터뷰 기자에게 자신이 둘째 아이를 가졌다고 털어 놓았다. "난 그 사실을 잊어버렸어요." 그녀는 그 신문사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유보한 금액을 지불해 달라고 말했다. 만약 지불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그러나 여왕이 중재에 나서자 사라는 뒤로 물러섰다. 사라의 뉴욕 고문관은 점점 더 당황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라에 대한 신문 보도는 점점 더 무자비해져서 나는 마침내 인터뷰를 그만하라고 조언했어요. 그녀의 즉흥적인 논평이 그녀를 죽인다고 설명했죠. 그년 딴에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것을 말한 것이었는데, 그게 활자화되면 늘 오해되거나 아니면 천박하고 우둔한 말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녀의 비서는 기자들에게 질문을 미리 서면으로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사라는 그 질문과 자기가 대답할 내용을 팩스로 내게 보냈어요. 그러면 내가 그 내용을 검토해서 다시 팩스로 보내 주었어요. 그런 방식이 한 동안 통했는데..." 뉴욕 사업가는 공작부인을 온론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공작부인의 가장 큰 적은 공작부인 자신이었다. 그녀는 친구의 조언을 따르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나쁜 대외 이미지를 개탄하면서 주위 사람들, 왕실 직원, 언론, 왕세자비('그녀가 내 얘기를 흘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라고 사라는 말했다), 아벚., 심지어 남편까지 원망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남편을 '지겨운 달링'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앤드루가 왕자다운 생활 스타일에 걸맞는 수입을 벌어들이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미국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 특히 텍사스의 거부들과 호쾌한 씀씀이에 매혹된 사라는 자신의 수입을 늘리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첫 번째 임신기간 동안 그녀는 어린이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버지(오스트레일리아산 사랑새의 별명)'라는 이름을 가진 헬리콥터를 주제로 동화책을 썼는데, 이 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녀는 이 책의 선인세로 사이먼 앤 슈스터 사로부터 1백만 달러를 받았고 그 뒤 네 권의 버지 책을 내놓고 양장본 판권, 해외판권, 페이퍼백 판권 등으로 25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비록 비평가들이 '형편없다'고 매도했지만 이 책은 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한 독자가 사라의 버지 책과 수년 전에 죽은 영국 작가 아더 볼드윈이 쓴 '헬리콥터 헥터'와 너무 유사한 점이 많다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표절시비가 붙었다. 눈썹달린 헬리콥터가 등장한다는 점, 삽화가 비슷하다는 점, 줄거리가 비슷하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라는 판권의 일정 퍼센트를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선언만 해놓고는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그 돈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라는 버지 책이 자신의 순수한 창작이라고 버티기 시작했다. '헬리콥터 헥터'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출판사는 사라의 말을 의심했지만 그 말을 공식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1989년 11월 두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사라는 린 와이어트와 오스카 와이어트의 주빈으로 초청되어 텍사스로 날아갔다. 와이어트 부처는 재산 80억 달러의 거부로서 개인 전용 비행기와 프랑스의 별장 여러 채를 둔 호화생활자였다. 사코위츠 백화점 주인의 상속녀인 린은 오스카의 네 번째 아내였다. 석유왕인 오스카는 코스탈 코퍼레이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바비 인형과 켄 인형을 수집하는 아이들처럼 와이어트 부처는 유명 인사들, 영화배우, 모델, 예술가, 디자이너, 왕족 등을 수집했다. "그레이스와 레이니에가 남프랑스에 있는 우리 별자으이 이웃이예요." 린 와이어트는 천천히 말했다. 마치 모나코 왕과 왕비가 이웃 목장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옷잘 입는 여성 리스트에 곧잘 오르는 블론드 미녀인 린 와이어트는 앤디 워홀, 믹 재거, 제리 홀, 리자 미넬리, 낸시 레이건, 마거릿 공주, 아가 칸 등과 어울려 지내는 사회적 명사였다. "와이어트 부처는 걸어 다니는 돈지갑이야." 퍼기는 국제적 명사이며 물쓰듯 돈을 쓰는 이들 부부에 대해서 한 친궁게 말했다. 사라는 린 와이어트가 장식해 놓은 몬테 카를로 스포팅 클럽 무도회의 초호화판 행사 준비를 숨도 안 쉬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노란 장미 4천 송이를 공수해 왔어. 그런데도 눈하나 깜짝 않더군." 퍼기가 손가락을 딱딱 꺾으면서 말했다.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의 후원자인 린 와이어트는 영국 오페라의 공연에 왕실을 대표할 사람으로 공작부인을 초청해다. 린은 사라의 방문을 축하해 주는 디너 파티를 개최했고 그 파티에 전 남편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축하객으로 참가시켰다. 린 와이어트는 36세의 맏아들 스티브를 사라 옆에 다 앉혔다. 그는 런던에 살면서 양아버지의 석유회사 일을 돕고 있었는데 주로 중동과의 판매거래를 담당했다. 그는 어머니가 요크 공작부인을 위해 개최하는 디너 파티에 참석할 목적으로 일부러 런던에서 휴스턴까지 날아왔다. 퍼기는 그 키 크고 날씬한 텍사스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짙은 머리카락, 늘 건강해 보이는 구리빛 피부, 우람한 근육 등 흠잡을 데 없는 남자였다. 그는 자기가 심령술을 믿는다고 말했고 또 자신의 영성은 오로지 심령술사인 마담 바소 덕분이라고 말했다. 마담 바소는 나중에 사라와 스티브의 혼외정사는 사라가 임신 5개월 때부터였다고 말했다. 마담 바소는 1996년 리틀 브라운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이 얘기를 해주면서 이걸 소재로 책을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의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편집자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공작부인의 문란한 성생활에 별로 흥미가 없다면서. 점성술가들의 의견을 주기적으로 물어보는 사라는 한 점성술가에게 그 텍사스 남자가 너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믿을 수 없는 정도로 맛있는, 푸른 눈을 가진 푸딩'이라고 묘사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에게 '프레드(와이어트의 암호명)'가 침대에서 대단히 와일드하다고 말했다. 처음에 메이저 퍼거슨은 그런 관게에 반대하면서 그만 끊으라고 조언했다. "그거 진정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그래, 진정이야. 이제 그만둬." "밤이면 밤마다 독수공방을 하라는 얘기는 아니겠지요."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고서 6개월 동안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사라에게 스티브 와이어트를 만나지 말라고 조언했어요. 그러면 그들도 몇 달 동안 사라와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사라의 아버지 메이저 퍼거슨은 말했다. 스티브 와이어트는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인 오스카 와이어트에 의해서 입양이 되었다. 스티브의 생부인 로버트 리프먼은 약물남용중에 여자를 살인하여 살인죄로 6년의 복역형을 선고받았다. 스티브는 돈 잘 쓰는 양아버지 오스카 와이어트를 숭배했고 생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생부 얘기를 물으면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상류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는 돈 많은 유부녀에게는 아첨을 하고 돈 많은 유부남은 존경을 했다. 스티브와 사라는 신비술사, 심령술사, 전자장으로 가득찬 투명 크리스털을 믿는 뉴에이지 언어를 구사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이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준다고 믿었다. 그녀는 스티브에게 자기 머리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그녀를 온갖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영혼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마담 바소의 피라미드 판을 침대 위에 걸어두고 잤다고 사라에게 말했다. 그는 매일 아침 명상을 하고 오래 살게 해주는 다이어트 음식을 먹었다. "그는 장수 다이어트, 좋은 카르마, 기타 현대 미국인들이 믿는 엉뚱한 것들을 말하면서 우리들을 따분하게 만들었어요." 칼럼니스트인 타키가 말했다. 와이어트는 담배를 싫어했기 때문에 사라는 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신체의 단련을 철저하게 믿고 있던 스티브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신체는 나의 신전입니다." 공작부인은 그 신전을 숭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둘은 껄걸 웃음을 터트렸다. 후스턴에서 사라를 기념하는 디너 파티가 개최된 그 다음날 오스카 와이어트는 뉴질랜드 코퍼스 크리스티 근처에 있는 자신의 2만 9천 에이커 크기의 목장을 비행기를 타고 둘러보자고 했다. 그는 사라를 자신의 개인 헬리콥터에 태워서 그녀에게 조종간을 잡아보라고 했다. 스티브는 그녀의 조종솜씨에 감탄했다. "당신 남편이 가르쳐 주었나요?" 스티브가 물었다. "남편은 니게 이런 걸 가르쳐 줄 시간이 없어요." "정말 안됐군요." 스티브는 여왕의 며느리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고 또 그 사실을 그녀에게 표시했다. 사라는 그에게 왕궁의 개인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고 런던으로 되돌아오면 전화하라고 말했다. 그가 런던에서 전화를 걸어오자 그녀는 그를 술자리 초대했다. 그는 파티, 레스토랑 디너, 멋진 휴가 등으로 보답했다. 그녀는 카도간 스퀘어에 있는 스티브의 집을 방문했다. 몇 주 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에게 스티브를 소개했다. 그리고 앤드루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자 그녀는 와이어트를 버크셔에 있는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그를 집들이, 아이들 세례식, 시집 식구들과의 디너에도 초대했다. 심지어 스티브를 여왕 바로 옆의 영예석에 앉히기도 했다. 1990년 1월 앤드루가 함대로 돌아가자, 사라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단히 우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편과 한 달씩이나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결혼을 어떻게 계속할 수 있겠느냐고 칭얼거렸다. 앤드루는 결혼 전 사라에게 해 준 말을 되풀이했다. 자기는 남편이기 이전에 왕자요 해군장교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라에게 혹시 임신 때문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사라는 이 지겨운 결혼 생활과 왕실 직원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난 조랑말 목장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살고 싶어요." 그녀는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의 통화는 한 낯선 사람이 스캐너를 이용하여 녹음을 했고 그는 그 테이프를 영국 신문에다 팔아넘겼다. 앤드루는 1990년 3월 23일 둘째 딸아이가 태어나자 집으로 돌아와 6주 동안 머물렀다. 그와 유모가 갓난 아이를 돌보는 동안, 스티브 와이어트는 사라와 두 살 난 딸 베아트리스를 개인 비행기에 태워서 모로코로 데려갔다. 그 다음날 와이어트는 사라를 남프랑스의 빌라로 데려갔다. 그 빌라는 스티브의 어머니 린 와이어트가 얻어 놓은 것이었다. 몇 주 뒤인 1990년 8월 스티브는 사라에게 이라크의 석유장관인 닥터 람지 살만을 버킹엄 궁에서 접대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사라는 어렵지 않게 승낙했다. 그녀는 자신의 애인과 이라크 석유장관을 버킹엄 궁 2층에 있는 자신의 응접실에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순진한 그녀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며칠 뒤에 사담 후세인의 대표자를 접대했고 그러한 접대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영국 군대가 이라크를 상대로 참전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왕실 사람이 이라크 인사를 공식적으로 접대한한다는 것은 '생각없는 짓' 또는 '우둔한 짓'이었다. 사라는 그 책임이 왕실 직원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 주었어야지요.' 그날 저녁 디너가 끝난 뒤 사라는 두 손님을 런던의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인 르 가브로슈로 데리고 갔다. 보수당의 전 재정 담당이었던 알리스테어 맥알파인이 주최한 작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맥알파인 부처는 요크 공작부처의 친구였고 또 가끔 서닝힐 파크에 와서 저녁식사도 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사라를 좋아했지만 사담 후세인의 사절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들은 또 스티브 와이어트를 대하는 사라의 태도에도 불안감을 느꼈다. "별 세 개짜리 레스토랑에서는 본 적이 없는 상호 애정의 표시를 그들은 해댔습니다." 맥알파인 부처의 초청객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나중에 알리스테어 맥알파인은 이렇게 썼다. "공작부인에게는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이 있다. 자기가 무엇을 하든 본능대로 했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아무리 부적절한 행위일지라도." 놀랍게도 '펀치' 잡지가 '속물근성'의 화신이라고 불렀던 사라는 미국 애인. 그것도 남부 사투리로 천천히 말하는 바보 같은 애인고 사귀는 행위의 사회적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귀족과 아르마딜로(남미산의 야행성 포유류. 여기서는 별볼일없는 사람) 사이의 문화적 충돌이었다. 아버지가 돈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텍사스 남자는 영국 제도권 너머로 기어오르지 못했다. 스티브 와이어트 같은 민첩한 등산가도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을 정도로 영국의 사회적 장벽은 높았던 것이다. 그 장벽을 넘어 보려고 했던 월리스 심프슨은 결국 망명생활로 일생을 끝내고 말았다. 한때 영국 국왕이었던 사람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미국인이 야만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롤드 브룩스 베이커는 말했다. 1990년이 되자 남편 앤드루만 빼놓고 모든 사람이 사라의 결혼생활은 끝장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라와 사귀는 중에도 다른 여자들과 계속 동침하던 사라의 애인은 왕실의 초청을 여전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데일리 메일'은 이렇게 썼다. "스캔들에 감싸인 생활을 하는 부모를 둔 저 휴스턴 출신 유대인 남자로서는, 요크 공작부인이 보내 준 초청장보다 더 큰 사회적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90년 12월 버킹엄 궁의 무도회에 참석하여 퀸 머더(90), 마거릿 공주(60), 앤 공주(40), 요크 공작(30)의 생일을 축하하도록 초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스티브는 더 이상 초청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여왕은 마필 담당관들을 통해 그 관계에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공작부인이 더 이상 허풍쟁이 텍사스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여왕을 곤란하게 하느니 차라리 황소한테서 젖꼭지를 기대하겠소." 스티브의 양아버지 오스카 와이어트는 사업 동료에게 말해다. 그는 여왕 폐하의 심기를 건드릴 의사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아들을 미국 본사로 소환함으로써 왕궁의 지시에 협조했다. "이거 아주 난처한 상황이에요. 앤드루 왕자는 심지으 스티브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다고 말했어요." 린 와이어트는 가십 담당 칼럼니스트에게 말했다. 카도간 스코ㅔ어의 아파트에서 이사를 하면서 스티브 와이어트는 1990년 5월 사라와 그녀의 두 딸을 데리고 모로코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찍은 사진 120장을 남겨두고 갔다. 그 아파트에 이사해 온 사람이 그 스냅사진을 펼쳐 보다가 주인공이 요크 공작부인인 것을 알고 타블로이드 신문에다 그것을 팔아넘겼다. 사라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정부와 함께 팜비치를 여행하다가, 그 사진이 신문에 나기 직전 남편 앤드루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왕궁에서 그 사진과 관련하여 앤드루를 접촉했을 때 그는 함대에 있었다. 여왕의 공보 비서관은 공작이 아내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앤드루는 사라에게 전화를 했다. 사라는 남편의 전화를 팜비치 공항에서 받았다. 그녀는 자기를 옹호해 주지 않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사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당신은 그 사진을 보았어요. 또 그 휴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어요. 나보고 가라고 했잖아요. 왜 그 말은 안했어요? 왜 그 개자식들을 상대로 나를 옹호해 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전화기를 쾅 내던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다. 그 다음 날 오전 그녀는 신경장애협회에 나타난 지난 밤 과음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지난 밤 마이타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습니다." 그녀는 웨스트 팜비치에 있는 코너 유치원에 들렀을 때는 기분이 좀 밝아졌다. 거기서 에이즈를 앓고 있는 흑인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날 밤 그녀는 팜 비치에 있는, 인종차별을 하는 에버글레이즈 클럽의 디너 파티에 참석했다. 그러나 사라는 그 다음 날 신문에서 비난을 당했다. 비록 고의 성은 없다고 하나 흑인과 유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클럽에 갔다는 것은 왕실 사람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또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샴페인 두 잔을 마신 다음 그녀는 아버지에게 각설탕을 집어던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정부에게 젖은 타월을 던졌고 기내에다 땅콩을 집어던졌다. 메이저 퍼거슨의 정부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더니 사라는 시크 백(속이 미식거릴 때 토하는 봉지)을 머리에다 뒤집어쓰더니 거기다대로 전화벨 울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실없는 여학생이나 된 것처럼 마구 웃음을 터트렸어요. 기내의 다른 승객들도 그 광경을 보았어요. 그중에는 언론인이 세 명 있었어요." 메이저 퍼거슨은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게 나중에 윤색되어 기사화된 걸 보니, 언론이 내 ㄸ을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두 달 뒤인 1992년 3월 19일, 왕궁은 요크 공작과 공작부인이 별거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여왕의 공보 비서관인 찰스 앤슨이 BBC 기자에게 개별적으로 브리핑했다. 그 기자는 '왕궁에서 퍼기를 죽이려고 칼을 빼들었다'라고 보도했다. BBC 기자는 여왕이 공작부인 때문에 대단히 화를 내고 있으며, 나머지 왕실 사람들도 그녀가 왕실 사람으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라의 아버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펠로스 경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무자비하게 일을 처리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왕실 직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나의 일입니다. 왕실을 보호하고 특히 여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소." 퍼거슨이 항의했다. 이윽고 공보 담당관은 사라의 일을 느닷없이 처리한 것을 사과했고 여왕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여왕은 사표를 반려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그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천박, 천박, 천박한 여자야." 차터리스 경은 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공작부인을 비난했다. 전에 여왕의 개인 비서를 지냈던 차터리스경은 저널리스트 노린 테일러와 가진 '스펙테이터' 인터뷰에서 사라를 드러내 놓고 매도했다. '선데이 타임스'의 칼럼리스트인 존 쥬노는 공작부인이 '대단히 부도덕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그녀가 아무나 탈 수 있는 왕실의 오토바이 같은 여자라고 매도했다. 그때쯤 사라는 아내로서 또 어머니로서 완벽하게 망신을 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더욱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더욱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따. 그녀가 자기의 평생의 사랑이라고 불렀던 스티브 와이어트가 미국 사교계의 미녀인 케이트 매지니스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그가 사라에게 그 소식을 전하자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행복을 빌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고 나중에 친구들에게 말했다. 스티브의 결혼식이 끝난 다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결혼해 버렸으니 이제 그 사람을 가질 수가 없어. 나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왜 그는 나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18. 퇴장당하는 사라 - 이상은 하늘, 현실은 땅 스티브 와이어트에 뒤이어 또다른 구변 좋은 텍사스 남자가 사라 퍼거슨에게 접근해 왔다. 이 남자는 그 뒤 3년 동안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된다. "그는 정말 돈 문제에는 귀재예요. 정말 완벽해요." 요크 공작부인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는 존 브라이언을 남편에게 귀재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재정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그 35세의 미국인과 진지하게 의논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난 그걸 확신해요." 사라가 말했다. 1991년 무렵 공작과 공작부인은 그들의 연간수입보다 네 배나 많은 지출을 하고 있었고 여왕은 그들의 지출초과액을 대신 지불해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물 쓰듯 돈을 써오던 사라는 근검절약을 거부했다. 결혼생활이 불안하면 할수록 더 많은 돈을 썼고 그렇게 하여 대금청구서는 눈동이처럼 불어났다. 어느 한 해 그녀는 선물로만 10만 2천 달러를 썼고 심령술사에게만도 84,560달러의 돈을 지불했다. 그럴 즈음 스티브 와이어트가 존 에이드리언 브라이언 2세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스티브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를 '조니'라고 불렀다. 죠니는 그녀를 재정적으로 도와 주겠다고 약속했다. "죠니가 끼어들어 퍼기의 회계 문제를 맡게 된 것이죠." 칼럼니스트 타키가 말했다. 자칭 재정업무의 귀재라는 존 브라이언은 협상의 기술을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스위스 은행 계좌의 복잡미묘한 절차와 해외의 면세혜택 제공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재정문제의 신비를 풀어헤쳤고 복잡한 거래를 단순한 논리로 환원시켰다. 그는 돈 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라와 앤드루 같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존 브라이언은 사라의 출판 사업과 '버지' 동화책에서 나오는 수입을 회사 형태로 통합시키면 세제 혜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앤드루와 사라는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브라이언은 ASB(앤드루 사라 브라이언) 출판사를 설립했고 앤드루와 사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 회사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다. 그러잖아도 스승, 점성술가, 점쟁이 등의 말을 잘 듣던 공작부인은 활달하게 말 잘하는 미국인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가 곧 그의 목표가 되었는데, 존 브라이언의 말을 빌면,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커다란 돈을 벌자는 것이었다. 존 브라이언과 앤드루 부처의 첫 만남 때 배석했던 한 비서관은 죠니가 사라의 언론 이미지를 개선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해서 앤드루의 환심을 샀다고 회상했다. 아무튼 앤드루와 사라는 그 미국인이 자신들의 부채를 자산으로 바꾸어 놓는 방법을 말해 주자 황홀한 상태로 듣고만 있었다. 그는 사라 부부의 재정적 미래를 장밋빛으로 설명해 주었다. 대머리인 그 마법사는 자기가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 모래를 팔아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독나방도 아름다운 나비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너무나 말을 잘했다. 존 브라이언은 아주 인상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연기를 연출했다. 그는 번드레한 포장과 첫인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주문 제작한 양복을 입고 수제 구두를 신고 황금커스 링크스를 찬 그는 개인 전용 클럽에서 스키, 골프, 스쿼시 등을 했다. 테니스 코트에서 치열하게 테니스 게임을 펼쳤고 패션 모델 또는 새로 나온 여배우들과 데이트를 했다. 그러나 그의 번드레한 외관 뒤에는 실제적인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재산의 등록상표인 부동산이나 포트폴리오(유가증권 투자목록)가 없었다. 벌어들이는 돈을 대부분 지출해 버렸고 그것도 수입 이상으로 써대고 있었다. 뉴욕, 런던, 뮌헨 등지에서 운영한 그의 회사는 돈이 모자라 파산 상태가 되었고 그리하여 그 도시를 떠났다. 그는 먼저 뉴욕에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다. 1979년 텍사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이어 피츠버그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땄다. 그 다음엔 맨하탄으로 가서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끌어들인 1백만 달러의 돈을 가지고 통신회사를 차렸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커다란 수익을 약속했으나 4년 뒤 파산하고 말았다. "나는 그 친구 때문에 5만 달러를 날렸습니다. 윌의 우정만 믿고 그 친구에게 투자했던 것이지요... 정말 그 친구의 하는 짓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당시 그 친구는 너무 확실한 사업이니까 실수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5만 달러만 투자하면 어렵지 않게 1백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는 회사가 망한 뒤에 잠시 잠적했다가 런던에 다시 나타났는데, 그때는 퍼기의 친구가 되어 있더군요." 칼럼니스트인 타키는 말했다. 영국 이민국은 그에게 취업비자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무실 겸 거주지로 사용하는 런던 아파트의 가재도구도 모두 임대였다. 글루스터셔에 있는 시골 별장도 역시 임대했다. 역시 임대인 그의 차는 주차위반 티켓을 하도 많이 발부받아 8백 달러의 범칙금을 지불해야 되었다. 그러나 벌금을 지불한 뒤에도 주차위반 티켓을 발부받자 경찰은 그의 차를 압수해 버렸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회사가 망하기 전, 회사 비용으로 가끔 대형 리무진을 렌트하기도 했다. 그는 가끔 코카인을 사는 돈을 제외하고는 거의 현금을 내는 경우가 없었다. "퍼기도 코카인을 흡입햇었지요. 나도 피워본 적이 있으니까 잘 알아요." 사라 부부를 잘 아는 칼럼니스트 타키가 말했ㄷ. 존 브라이언은 자기를 텍사스 출신의 백만장자라고 소개했으나 실은 델라웨어 주 윌밍턴 출신이었다. 그가 아홉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생모)와 이혼을 하고 텍사스의 상속녀인 조세핀 애버크롬비와 재혼하여 휴스턴으로 이사했다. 이 두 번째 결혼생활 중에 그의 아버지는 사코위츠 백화점 상속자의 아내인 파멜라 조더러 사코위츠와 혼외정사를 벌였다(그리고 후에 세 번째로 이 여자와 결혼했다). 그런데 사코위츠 백화점 상속자는 스티브 와이어트의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었따. 런던 사교계의 외곽을 빙빙 돌아다니던 존 브라이언은 아나벨스나 트램프스 같은 값비싼 레스토랑이나 고급 나이트클럽에서 파티를 개최했다. 그는 요크 공작부처의 재정 고문관이 되자 영국 사교계의 핵심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화이트나 브룩스 같은 고급 개인 사교클럽은 그를 기피했다. 영국 귀족들이 볼 때 그는 출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미국 사기꾼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크 공작부인은 그를 하얀 말을 탄 기사로 보았다. 그는 그녀를 부자로 만들어 주고 또 그녀의 이미지를 개선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사라만큼이나 그녀의 타이틀을 중시했다. 그래서 NBC 텔레비전에서 사라와 인터뷰를 할 때 인터뷰 기자인 마리아 쉬라이버가 그녀를 사라 퍼거슨이라 부르는 것을 못하게 하도록 조언했다. "나는 공식명칭이 요크 공작부인 전하입니다." 사라가 마리아 쉬라이버에게 지적했다. 브라이언은 그녀에게 전하라는 칭호가 시장에서 값나가는 물건임을 인식시켰다. "당신의 이미지는 당신의 전재산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대한 자산입니다." 브라이언은 말했다. 퍼기를 이용하여 브라이언은, 말하자면, 최대 규모의 기업 합병에 성공했다. 사라가 앤드루와 별거한 지 며칠되지 않아 브라이언은 그녀의 일상사를 완전 장악했다. "사라가 서닝힐 파크에서 웬트워스에 있는 임대주택인 로멘다 로지로 이사할 때, 존이 직원 계약, 임대 협상, 담보 비밀 협약 등의 세부사항을 도와 주었습니다." 사라의 아버지 메이저 퍼거슨이 말했다. 이사한 직후 사라는 휴가를 가지 않으면 신경쇠약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J.B.(사라와 그녀의 딸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는 6주간의 극동 여행을 계획했다. 그는 여행 시간표, 전세편 비행기, 리무진, 고급 호텔 등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여행 비용 13만 5천 달러를 전액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태국 인근의 휴양섬인 푸켓에서 공작부인, 두 딸, 유모, 경호원 등과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여행했다. 그는 공작부인과 함께 여행하는 사람으로 사진에 잡혔고 또 유제니 공주를 어ㄲ에 메고 다니는 신원미상의 남자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는 자기가 집안일을 보아 주는 친구이며 공작과 공작부인의 결혼 카운셀러로서 두 사람의 재결합을 주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여왕과 앤드루 왕자로부터 사라의 재정관계를 좀 관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몇 주 뒤 브라이언과 사라는 사라의 어머니를 방문했다. 그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4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폴로 게임용 조랑말을 사육하고 있었다. 사라는 브라이언이 어머니 수잔 바란테스에게 조랑말 목장의 경영과 관련하여, 조언해 주기를 바랬다. 1992년 여름 동안 브라이언과 사라는 뉴욕에서 쇼핑을 하고, 런던에서 파티를 하고, 파리에서 춤을 추었다. 그렇지만 죠니는 그들의 관게가 플라토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말만 그렇게 했을 뿐 그때 즈음에 자신의 옷을 로멘다 로지에 있는 사라의 옷장에다 옮겨 놓았고 그의 슬리퍼를 그녀의 침대 밑에다 놔두고 있었다. 그는 아주 정확하게 그녀의 재정상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자신도 낭비가 심했던 브라이언은 한 달에 약 8만 1천 달러를 써제치는 사라의 큰 씀씀이에 입을 딸 벌렸다. 그는 사라에게 그녀가 연간 1백만 달러를 쓴다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그녀는 어ㄲ를 한번 으쓱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직도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여자의 며느리였던 것이다. 재정담당인 존 브라이언은 사라가 이혼을 한 다음, 그녀오 결혼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칼럼니스트 타키는 회의적이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그가 퍼기의 낭비벽을 감당해낼 만한 돈이 없어요." 브라이언은 자기가 퍼기에게 필수불가결한 사람임을 입증시키기 위해 그녀의 토자, 휴가, 의상, 심지어 음식까지 관리했다. 그는 사라의 일이라면 세세한 것까지도 챙겼다. 심지어 그녀의 가재도구까지도 보살펴 주었다. 그런 관심에 감사함을 느낀 공작부인은 그에게 값비싼 선물을 계속 주었다. 그의 생일이 돌아왔을 때에는 2만 달러를 들여 생일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1992년 여름, 사라와 브라이언은 프랑스의 생트로페 해수욕장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이들이 수영장 옆에서 벌인 사라의 장난이 망원렌즈에 잡히게 되었다. 그녀는 빨갛고 노란 꽃이 그려진 비키니 수영복의 윗부분을 벗어던진 채였다. 프랑스의 코트 다쥐르에 있는 해수욕장에서의 애무 장면을 찍은 사진들은 군침을 돌게 하는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사라는 브라이언 옆에 놓여진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브라이언의 대머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카메라는 사라의 발을 집어들고 발가락에 키스하는 브라이언을 잡았다. 착칵 착칵. 그는 그녀의 다리를 마시지하고 어ㄲ를 주무른 다음 유방을 애무했다. 찰칵 찰칵. 그녀는 그의 대머리에다 선탠 오일을 발라 주었다. 찰칵 찰칵. 그는 자신의 장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의 장의자로 가서 그녀 위에 올라탔다. 찰칵 찰칵 찰칵. 그녀는 양팔로 그를 껴안으며 입술에다 키스했다. 찰칵 찰칵. 그들은 담배를 함꼐 나누어 피웠다. 그들 주위에서는 사라의 두 딸이 천진스럽게 놀고 있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왕실 경호원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실직했다. 이 난처한 사진들은 사라가 왕실 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발모랄 성에서 휴가를 보낼 때 신문에 공개되었다. 그녀는 1주일 동안 다녀가기 위해 별거중인 남편 및 딸들과 함께 발모랄에 도착했다. 1992년 8월 20일 목요일 아침, 아이들은 유아실에다 둔 채 요크 공작과 공작부인은 아침식사에 나타났다. 사라와 앤드루는 그 사진이 신문에 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처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 사진이 몰고올 충격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데일리 미러'는 유방을 드러낸 채 누워 있는 사라 위에 올라탄 수영복 차림의 존 브라이언 사진을 공개했다. 사라는 식탁 위에 놓인 그 사진을 보고 얼굴이 하얘졌다. "난 거의 기절할 뻔했어요." 그녀가 나중에 회상했다. 몇 초 뒤 에든버러 공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몇 달 전 필립 공은 엘튼 존의 40회 생일 파티에 참석한 사라를 매우 꾸짖은 적이 있었다. 신문들이 그 가수의 섹스 스캔들을 일제히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필립 공은 그처럼 문제 많은 사람의 생일 파티에 왕실 가족이 주책없이 참석했다고 나무랐던 것이다. 그런데 사라는 이제 또다시 준엄한 질책을 당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필립은 그녀를 동정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이렇게 말했다. "뭔가 질책을 당하리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이만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그는 어깨를 쭉 펴더니 찰스와 앤드루를 데리고 들꿩 사냥을 가겠다고 말했다. 필립 공은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사라는 그 뒤에도 사흘간 더 밥모랄에 머물렀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날 로버트 펠로스 경이 그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마음 편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사실상 축출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왕실의 차가운 분위기를 눈치채고 그곳을 떠났다. 별거 이후 사라는 공식석상에 나가 왕가를 대표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애스코트 경마대회나 군부대 사열 같은 행사에서 축출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게 뭐 대단해? 내 모자가 닳지 않으니 오히려 잘되었지 뭐야." 그러나 그녀는 버킹엄 궁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이 폐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렇게 마음 편히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왕실 직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그들을 '여왕의 불독'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그녀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전세계의 신문들이 그 가슴을 드러낸 애무의 장면을 크게 보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진의 공개를 막으려고 여러 가지 행동을 취했으나 실패한 존 브라이언은 또다른 행동을 개시했다. "우리는 이 사태를 반전시킬 수 있어요. 두고 보세요. 우린 이 자식들을 혼내 줄 수 있어요. 나는 저 왕실의 개자식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 줄 거예요." 그가 사라에게 약속했다. 브라이언은 개인의 집에다 참호를 파놓고 무려 이틀 동안 매복하면서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은 기자를 프라이버시 침해로 프랑스 법정에다 고소하면서 5백만 달러의 손해보상을 청구했다 그는 또 '파리 마치'도 고소했다. 이 프랑스 잡지사가 공작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진 때문에 그녀는 존경받는 인물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피해를 당했다." 브라이언의 소장에는 그렇게 적혀져 있었다. 프랑스 판사는 그 고소가 일리 있다고 판정하여 사라에게 9만 4천 달러를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사라는 그 보상금을 영국 뇌장애 아동 협회에다 기증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어요? 대부분의 기자들은 뇌장애자니까 말이에요." 사라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의 언론이 자기를 바보 같은 여자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너무 많이 비판을 받아서 자신감과 자존심을 깡그리 잃어버렸어요." 그녀는 그 사진의 캡션인 '퍼기, 최후의 각주'를 보고서 울음을 터트렸다. 런던의 한 거리에서 발가락 모양의 초콜릿을 팔고 있는 장사꾼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서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브라이언에게 발가락 키스를 허용한 퍼기를 빗댄 것. 역주). "이건 지옥이에요. 나는 신문을 읽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한 영국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라가 요크 공작부인이 도고 난 이래, 왕실 가족을 취재하는 것은 유리배를 타고 하수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되었어요." 아무리 근심 없는 사라였지만 이번 사태만큼은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닷새 동안 집안에 꽁꽁 숨어 있었다. 한편 존 브라이언은 그녀의 손상된 이미지를 복원시키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는 그녀를 착한 공작부인으로 보이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는 초인적인 정력을 발휘하면서 막후에서 온갖 협상을 벌이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하여 사라는 ABC 텔레비전 방송국의 다이언 소여와 인터뷰를 갖게 되었다. 당시 인터뷰를 했던 다이언 소여는 사라가 왕세자비와 왕실 가족에 대한 질문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그 문제가 발가락 키스 사건보다 더 그녀를 괴롭히는 것 같았어요." 그 인터뷰의 프로듀서가 말했다. 인터뷰의 끝부분에서 다이언 소여는 존 브라이언에 대해서 슬쩍 질문했다. "도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 주실 겁니까?" 사라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좋은 일을 많이 해주고 있어요. 특히 나의 재정 관계 일을 돌봐 주고 있어요. 아주 좋은 친구예요." "그러니까 단지 재정 고문만 해준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군요." 다이언 소여가 물고늘어졌다. "재정 고문만 해준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어요. 그가 아주 좋은 친구라고 말했어요. 특히 내 재정 관계 일을 봐주는." 활기찬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친선사절 단체인 '에인절스 인터내셔널'은 사라를 후원자 명단에서 삭제했다. 왕실의 육군 항공대도 그녀를 명예 대령으로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사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정신장애 어린이 여러 명을 데리고 네팔로 등산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카트만두의 최고급 호텔에 들었다고 하여 비난을 받았고 또 등산 도중 에비앙 생수병을 들고 다녀서 구설수에 올랐다. 그녀는 네팔에서 만난 22세의 셰르파를 영국으로 초대했다 그래서 그 셰르파는 히말라야 오지의 고향을 떠나 로멘다 로지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셰르파를 데리고 영국에 돌아오자 언론은 그녀가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비난기사를 실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이렇게 조롱했다. "제멋대로인 공작부인이 원주민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아마도, 고상한 귀족적 전통을 계속 이어가려는 뜻일 것이다." 그녀가 네팔에서 등산할 때 음식을 준비하고 무거운 짐을 메고 날랐던 셰르파는 로멘다 로지에서도 계속 그런 일을 했다. 한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를 하인처럼 부려먹었고 게다가 봉급도 주지 않았어요." 사라의 대변인인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공작부인의 손님이에요. 공작부인은 그가 이 세상의 다른 구석을 구경하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러나 왕실 직원들이 막대한 이혼 위자료를 깎기 위해 온갖 꼬투리를 다 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라는 그 셰르파를 도로 네팔로 보내 버렸다. 브라이언은 그녀의 공포심을 달래 주면서 이번에야말로 '수백만 달러'를 협상해 주겠다고 큰 소리쳤다. 사라는 이혼 위자료로 일시불 1천만 달러, 아이 양육비로 월 5천 달러, 그리고 타이틀(직위)을 요구했다. 그녀는 결국 자기 앞으로는 75만 달러를 받았고 아이들 앞으로는 3210만 달러의 신탁기금을 받았지만 타이틀은 박탈당했다. 한편 브라이언은 동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조급한 마음에 사라의 남편을 해코지하려고 했다. 그는 '유에스에이 투데이'의 영국판인 '피플'에다 전화를 걸어 앤드루 왕자가 혼외정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브라이언의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브라이언은 뻔뻔스럽게도 농담으로 한번 해본 소리였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사라는 너무 화가 나서 브라이언을 집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며칠 뒤 그들은 화해했고 그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환영이 뜻으로 은제 지구의를 그에게 선물했다. 그 지구의에는 '우리는 함께 그것을 정복할 수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코트 다쥐르 해수욕장에서 장난질치던 사진이 공개된 다음부터 그들은 좀더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햇다. 그 자신들의 연애행각을 감출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더 이상 공식석상에 함께 나타나지 않으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브라이언이 사라의 로멘다 로지 집을 방문할 때 사라는 직원을 보내서 역에서 마중하도록 했다. 야구 모자와 선글래스로 변장한 상태로 런던에서 도착한 존은 그녀의 차 트렁크에 숨어서 장물처럼 밀수되어 왔다. 사라는 공식적으로는 앤드루와 이혼하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나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만이 많았다. 자선단체인 에인절스 인터내셔널의 이사장인 테오 엘러트(여)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다시는 앤드루와 동침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들의 성생활은 처음부터 시원치 않았고 그 즈음에는 이미 구제불능의 상태에 와 있었습니다." 테오 엘버트는 공작부인과 대판 싸우고 난 다음에 그런 증언을 했다. 그녀(테오)는 퍼기가 자선사업의 최고 집행자인 자기를 도와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퍼기는 내가 자기로부터 영예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구했던 사라는 심령술사, 점성술가, 점쟁이 등과도 상의를 했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의 뉴에이지 심령술사, 뉴욕 시의 무당, 런던의 집신술사 등과도 전화를 했다. 그녀는 메드주고르제 성당에서 '그리서도의 눈'이라고 알려진 보스니아의 신부와도 상담을 했다. 스베토자르 크랄제비크 목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남편에게로 돌아가세요. 당신, 당신의 영혼, 당신의 자녀, 왕가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재결합입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재결합한다면 나는 수녀 같은 생활을 해야만 돼요." 사라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 신부는 그녀에게 보스니아의 수녀원에 들어가 당분간 수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라고 말했다. "그들은 당신에게 독신생활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 줄 겁니다." 그녀는 보스니아 신부의 엄중한 조언을 무시하고 이번에는 알리스테어 맥알파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사라와 함께한 점심식사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녀는 조언을 구하고 그 조언을 해준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한 다음, 자기가 원래 생각했던 대로 행동해버렸다. 그녀는 자기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사람들이 조언을 해주었다는 명예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녀는 인간의 본성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 것인가." 사라는 맥알파인 경에게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 따분해요. 골프치는 것하고 과학영화 비디오 보는 것밖에 몰라요." 맥알파인 경은 이혼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더니 왕세자비도 자기와 똑같은 날에 이혼할 마음이 있었다고 밝히더군요. 그랬는데 공작부인의 말을 빌면, '내가 어떻게 해나가는지 살펴보기 위해' 이혼을 한두 달 늦췄다는 것이었어요." 다이애나가 버스에 머물리고 결정했다면 사라는 뛰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반 대중의 여론과 '왕실의 태도'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왕실의 태도는 곧 금전적인 보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맥알파인은 설명했다. 한편 존 브라이언은 호두를 주워 오는 다람쥐처럼 사라의 수입을 올려 주기 위해 온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는 늘상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언론사에다 전화를 걸어 각종 제안을 해대면서 사라를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팔아먹었다. 단독 사진을 1회 찍는 데 2만 5천 달러, 단독 인터뷰를 하는 데 20만 달러를 요구했다. 존 브라이언은 '하퍼스 앤 퀸' 잡지와의 카버 스토리를 협상할 때 온갖 요구 조건을 다 붙여댔다. 마침내 너무 설펴대는 브라이언에게 밥맛 떨어진 잡지사는 그 협상을 그만둘 뜻을 밝혔다. 사라가 끝내 인터뷰에 응하기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잡지의 표지 얼굴로 나오는 것은 허락했지만 질문에는 응하지 않으려 했다. 사라는 잡지사의 편집자인 빅키 우즈에게 전화를 걸으 그녀의 마음을 바꿔보려고 했다. 우즈는 나중에 존 브라이언으로부터 걸려오는 '지겨운 전화' 때문에 심신이 피곤했었다고 말했다. "당신이 나를 그저 유명 인사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진지한 사람이고 공짜 크리스마스 카드를 얻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사라는 비키 우즈에게 말했다. 편집자는 공작부인에게 표지 사진기자와는 협상가능할지 몰라도 사라와의 인터뷰를 하지 않으면 비용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라는 왕실의 의전절차를 설명하면서 선처해 줄 수 없겠느냐고 애원했다. "늘 책임을 지는 것은 나였어요. 이런 일을 해서 비난을 당하는 것은 늘 나였다고요. 늘 내 잘못이라는 말, 그 말이 너무도 지겨워요. 그래서 난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나만의 인생을 살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의 책임을 대신 져주는 것이 너무 지겨워요. 나는 지난 4년 동안 왕세자 부부의 희생양이었어요." 그 후 16개월 동안 존 브라이언은 뉴욕, 런던, 파리를 오가며 공작부인 전하를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는 사라를 모델, 작가, 대사 등으로 팔아먹으려 했다. 그는 발행인과 프로듀서들에게 호소하여 '버지, 작은 헬리콥터'를 텔레비전 만화 시리즈로 판매하려고 했다. "그 물건은 내가 인수받았을 때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아무 신용도 없었고 아무도 그걸 다루려고 하지 않았어요. 10피트 길이의 막대기로도 그걸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고요..." 존 브라이언은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버지'를 텔레비전에다 판매했고 또 버지 소품들 가령 수영 연습용 부낭, 수영복, 비치(해수욕장용) 타월, 안부인사 카드, 선물 포장지, 야광등, 램프갓, 풍선 등에 '버지'를 부착하는 상업권을 판매했다. 이 짭잘한 사업은 공작부인에게 3백만 달러의 수입을 확보해 주었고 거기다 판매액의 일정 퍼센트까지 보장했다. 영국 언론은 그 거래 내용을 약간으 존경심과 상당한 질투심을 섞어 보도했다. 퀸 머더는 클래런스 하우스의 응접실에 앉아 진토닉을 마시다가 그 뉴스를 접했다. 그녀는 진토닉을 두 잔 더 마시고 나서 용기를 내어 딸인 여왕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분명 술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퀸 머더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 보도를 주의깊게 들었다. 요크 공작부인은 그녀의 책 '버지, 작은 헬리콥터'가 전세계 텔레비전 채널에 방영되면서 약 8백만 파운드(약 1,200만 달러)를 벌어들이게 되었습니다. 공작부인은 자신의 책을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드는 권리를 판매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테이블 소품에서 화장실 변기 덮개에 이르기까지 작은 기념품을 만드는 라이센스권을 13개 미국 회사와 체결했습니다. "화장실 변기 덮개? 저 아나운서가 변기 엎개라고 했나?" 퀸 머더가 물었다. "예, 마담.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집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퀸 머더는 진토닉을 한잔 더 부탁하고 나서 그날의 신문을 요청했다. 그녀의 거실에서 간이 바(bar)로 이용되는 테이블에서 또다른 진토닉이 날라져 왔다. 그녀는 왼쪽 눈의 백내장 때문에 거의 글을 읽지 않았다. 집사장은 1994년 4월 19일자 '데일리 메일' 한 부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퀸 머더의 관심 뉴스가 실린 페이지를 펼쳐들었다. 퀸 머더는 집사장이 공작부인의 주말 칸느 방문을 다룬 기사를 크게 읽어내려가는 동안 모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사라는 세계 최대 규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집회에서 2백여 명에 달하는 주요 바이어들에게 '화려한 디너'를 내기 위해 칸느로 날아간 것이었다. "내가 1989년에 쓴 작은 책을 가지고 전세계적으로 사업적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라는 그렇게 말한 것으로 신문에 인용되어 있었다. 퀸 머더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소 초연한 듯했다. 그녀는 사라 퍼거슨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단 한 마디 비난의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사라 퍼거슨이 자기(퀸 머더)를 놀리는 농담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왔을 때에도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말썽만 일으키는 공작부인은 런던 해로드 백화점의 식품 코너를 이리저리 돌다가 퀸 머더의 얼굴을 새긴 비스킷 통을 발견했다. 사라는 그 통을 손으로 세게 치면서 '할머니, 거기 들어 있어요?'라고 소리질러 구경꾼들을 놀라게 했다. 사라는 참모들과 함꼐 한 달씩 스케줄 계획 회의를 하면서 자기가 참석하기 싫은 약속을 빠져나가는 방법으로서 퀸 머더의 죽음을 가상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회상했다. "만약 참석하기 귀찮은 행사가 있을 경우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좋은 쪽만 보기로 하자구요. 가령 퀸 머더가 돌아가시면 상사 때문에 모든 계획을 최소할 수 있잖아요." 대중적 존경을 받는 퀸 머더는 높은 위치에서 사라 퍼거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기에 두 여인은 공통되는 특징이 몇 가지 있었다. 둘 다 평민 출신으로 제왕의 둘째 아들과 결혼하여 요크 공작부인이 되었다. 둘 다 두 딸의 어머니이고, 다정하고, 사교적이고, 의지 강한 여성으로서 각광받기를 좋아한다. 둘 다 남자들의 관심을 끌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애교꾼이다. 그러나 60년의 세월이 퀸 머더와 요크 공작부인의 차이점을 뚜렷이 구분해 놓았다. 나이든 퀸 머더는 전통적인 반면 젊은 공작부인은 현대적이었다. 전자는 왕실의 가족이 되는데 필요한 높은 희생을 기꺼이 치렀지만 후자는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미망인인 퀸 머더는 평민적 기질을 보유한 왕족으로 존경받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공작부인은 그저 평민에 지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으로 매도되었다. 집사장은 칸느 기사를 퀸 머더에게 읽어 준 다음, 그 신문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월리스가 제일 지독했을 때에도 이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않았어." 퀸 머더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윈저 공작부인의 이름을 언급하며 말했다. 클래런스 하우스의 한 하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것이 퍼기에게는 죽음의 키스가 되었습니다. 퍼기의 추락은 그날 저녁 클래런스 하우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사라에게 주어졌던 왕실의 특권, 왕실 경호원, 왕실 기차, 왕실 임무, 왕실 초정상은 모두 박탈되었다. 이제 우편 특권마저도 박탈되어 자신의 편지를 무료로 보낼 수 없게 되었다. 부활절 때 남편과 두 딸이 윈저 성을 방문할 경우에도 동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왕은 그녀를 그처럼 철저하게 배척하는 것을 가슴 아파했다. 사라는 아버지 메이저 퍼거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떠나는 게 아니에요. 앤드루가 떠나는 거지, 여왕은 나를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왕실 사람들이 싫다고 해요." 사라는 윔블던 구장의 로열 박스석도 박탈당했다. 그리고 마담 튀소의 왁스 박물관에 있는 실물 크기의 사라 왁스 인형도 제거되었다. 애스코트 경마장의 왕족 출입구를 이용할 수 없게 된 그녀는, 도로 한 옆에 비켜 서서 자기 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했고 또 왕실 마차를 타고 출입하는 여왕에게 손을 흔들어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쓸쓸한 풍경이었다. 여왕 폐하의 지속적인 관용도 바라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영국 사회 내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지위도 박탈될 상황이었다. 왕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공작부인은 곧 절망에 빠졌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줄 왕실 경호원도 없는 상태여서 그녀의 정신병원행은 곧 알려지고 말았다. 한 신문사 사진기자가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찍었던 것이다. "정말 끔찍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느님꼐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었어요." 퍼기가 말했다. 당시 나이 94세인 퀸 머더는 이미 결손처리해 버린 공작부인에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점에서 공작부인의 문제는 전화 한 통화면 충분했다. 퀸 머더는 여왕 폐하와 통화를 하고 난 다음, 왕실이 그 귀찮은 여자를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여자는 에이저 검사를 세 번이나 받았다고 선언하여 왕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참으로 당돌한 여자였다. 퀸 머더는 아직 3백만 달러에 달하는 이혼 합의금이라는 귀찮은 문제가 남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금전의 문제일 뿐이었다. 일단 그 돈이 지불되고 나면 요크 공작부인은 붉은 머리의 평범한 여자로, 역사 속에 각주 처리될 것이었다. 연세 높은 퀸 머더는 그런 시시한 문제 때문에 정신을 어지럽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커다란 서커스 텐트를 떠받치는 중앙 기둥으로서 중요한 일에만 전념을 해야 되었다. 그리고 스리 링(링이 세 개 있는 대형의) 서커스 내부에서 앞으로 벌어질 중대한 문제를 위해 점점 쇠약해지는 자신의 힘을 아껴두어야 했다. 19. 결별선언 -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68세의 스펜서 백작은 폐렴으로 런던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다이애나는 오스트리아로 스키를 떠나기 전날 아버지의 병문안을 갔다. 그녀는 이미 여러 달 동안 아버지와는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병원에 갔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리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불행하게도 스펜서 백작의 자녀들은 그의 사망 당시 아무도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들 찰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무도 그 옆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커다란 슬픔입니다." 스펜서 백작의 자녀들은 알소프 저택의 보수작업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반목해 왔다. 무려 350만 달러에 달하는 보수비를 들여가며 그 일을 벌인 아버지와 새 어머니를 싸잡아 비난했다. 자녀들은 백작과 새 어머니가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고 말했다. 백작이 황폐한 저택을 보수하기 위해 11점의 반 다이크 그림을 포함, 알소프 가의 귀중한 가재도구를 처분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애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웨딩 드레스 복제권을 일본 업체에게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분개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그건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 새어머니의 '번드레한' 장식과 아버지의 '촌스러운' 상업주의에 혐오감을 느낀다고도 말했다. 그리하여 스펜서 가문 내의 불화가 신문의 1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둘째 아내를 사랑했던 백작은 알소프 저택을 이권사업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새 어머니의 노력을 헐뜯기만 하는 자녀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이애나가 심하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다이애나에게 상당히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약 75만 달러에서 150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주어 해리의 앞날을 대비해 투자하라고 했어요." 스펜서 백작은 다이애나가 둘째 아들의 장래에 대해서 걱정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녀의 첫아들인 윌리엄은 나중에 왕세자가 되어 결국에는 왕위에 올라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되겠지만 해리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다이애나는 돈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녀는 경험이 없어요. 너무 어려요." 스펜서 백작은 자녀들이 '재정적으로 미숙하다'고 비난했다. 버릇없이 커서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저택을 운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서 자기들 마음대로 지껄인다는 것이었다(이 점은 스펜서 백작의 말이 맞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아들 찰스 스펜서는 아버지 사후에 4년 동안 약 1억 3,200만 달러 규모의 알소프 저택을 운영했으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전문 관리자에게 저택 운용을 넘겨 버렸다). 곧 자녀들은 알소프 저택을 방문하지 않게 되었고 아버지와도 말을 하지 않게 되었ㄷ. 1992년 3월 29일 다이애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퉁보된 직후 다이애나의 시녀가 스위스 스키 리조트의 옷보관실로 달려가 검은 드레스, 검은 구두, 검은 모자 등을 꺼내왔다. 그런 검은 옷들은 왕실의 갑작스런 상사가 있을지 몰라 통상적으로 준비해 두는 것이었다. 다이애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도 찰스는 따라 가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쇼를 부리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그녀가 잘라 말했다. 그는 다이애나가 혼자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찰스는 뒤에 남아 애들과 함께 계속 스키를 하기로 했다. 그녀는 찰스가 장인의 죽음을 빌미로 사랑스러운 남편인 척 허세를 부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혼자 가겠다고 고집했던 것이다. 왕세자의 개인 비서가 찰스 커플의 충돌을 눈치채고 여왕의 개인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여왕 폐하가 중간에 끼어들어 다이애나에게 전화를 하자 그제서야 왕세자비는 남편과 함께 돌아가는 데 동의했다. 그 다음 날 비행기에서 내리는 그녀는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비탄에 잠겨 있었다. 스펜서 가문의 자녀들은 가정 내의 불화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가 할머니를 배척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아이들은 부모가 지저분하게 싸우는 것을 보면서 성장했고 부모의 싸움은 이혼 후에도 계속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둘다 재혼을 했으나 그들은 비싼 선물을 마구 안기면서 아이들의 관심과 주의를 끌려고 서로 경쟁했다. "그런 선물 공세는 우리를 아주 물질적으로 만들었어요." 아들 찰스 스펜서는 후일 말했다. 다이애나의 조화는 그녀가 직접 쓴 카드와 함꼐 참나무 관 앞 잘 보이는 곳에 놓여져 있었다. 카드에는 '사랑하는 아빠, 정말 너무 너무 슬퍼요, 그렇지만 아빠를 영원히 사랑할게요... 다이애나'라고 씌어져 있었다. 관 뒤의 잘 안보이는 곳에 '심심한 조의를 표명하면서'라는 카드가 부착된 왕세자의 조화가 놓여져 있었다. 기자들 앞에서 네 명의 스펜서 자녀들은 새어머니에게 다정한 태도를 취했다. 다이애나도 한순간에는 새어머니의 팔을 잡으며 동적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남편이 죽은지 48시간 이내에 새 주인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알소프 저택에서 이사를 나왔던 새 어머니 레인은 가정부를 보내 자신의 옷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자 다이애나와 그녀의 오빠가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정부가 도착하여 스펜서를 나타내는 'S'자가 새겨진 루이 뷔통 여행용 가방에다 짐들을 담기 시작했다. 가정부가 그곳에서 나오려 하자 다이애나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 안에 뭐가 들었죠? 그 가방은 돌아가신 아버지 것이에요. 그 가방은 당신 것이 아니라고요." 다이애나가 말했다. 가정부는 레인이 일본 여행을 할 때 'R.S'라는 이니셜이 달린 손가방과 매치되는 여행용 가방을 구입했다고 설명했다. 다이애나는 그 설명을 들은 체도 않고 커다란 검은 플라스틱 백에다 내용물을 모두 비우고 가방을 놓고 가라고 말했다. 가정부가 그 지시를 따르자 다이애나는 여행용 가방을 낚아챘다. 남동생 찰스는 한술 더 떠서 옷을 넣은 검은 플라스택 백을 계단 아래로 걷어차 버렸다. 며칠 뒤 레인이 자기가 옮겨가고 싶은 물건들에게 빨간 스티커를 붙이기 위해 알소프에 들르자 거기에는 의붓아들의 변호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호사는 그 물건들을 구매했다는 증명을 제출하기 전에는 단 한 점의 가구도 가져가지 못한다고 통첩했다. "레인은 6주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릴 추모예배 절차를 묻기 위해 새 백작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새백작은 변호사에게 팩스를 보내 주라고 지시하더군요." 레인이 측근 인사가 말했다. 고 스펜서 백작의 유골이 스펜서 저택의 지하묘실에 안치되었을 때, 레인은 가족 추모회에 초대되지도 않았다. 고 스펜서 백작이 사망 직전 마지막으로 체결한 상업계약은 '다이애나: 그녀의 진실'의 출판사와 맺은 출판 계약이었다. 그 책이 자신의 가문 그리고 자신의 딸을 우호적으로 묘사할 것임을 확신한 백작은 스펜서 가문 앨범 중 약 80여 장의 사진 판권을 그 출판사에 팔았다. 이번에는 다이애나도 그 책의 출판에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결혼생활에서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는 그 책에 사진을 넣기를 원했다. 출판 몇 달 전 그녀는 몇 명의 친한 친구들에게 그 책의 저자인 앤드루 모튼과 만나서 자기에 관한 얘기를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녀는 남동생, 친한 친구, 애인, 안마사 등의 발언을 통해 자신의 산산조각 난 동화를 폭로했다. 왕자인 줄 알고 키스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왕자가 두꺼비였다는 것이었다. 왕세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대식증이라는 병에 걸렸고 또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얘기도 털어 놓았다. 쇠약한 왕실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그녀의 노력을 왕실 가족들은 전혀 평가해 주지 않았음도 말했다. 이 책의 요약된 내용은 '선데이 타임스'에 실렸다. 한때 존경받았던 신문의 1면에 그 기사가 실렸다는 것은 가십 위주의 타블로이드판 신문보다 한결 기사의 신빙성을 높여 주었다. 또한 기사의 주인공인 찰스 왕세자 자신이 그 신문의 애독자라는 사실은 더욱 센세이셔널한 화제거리가 되었다. 총리, 의회의원, 언론제소위원회 위원장 등이 일제히 그 기사가 스캔들만 추구하는 지저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 발췌본이 신문에 실린 그날 아침, 왕세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화가 났었어요." 하이그로브의 관리인은 말했다. 찰스는 아침식사를 하면서 왕실 공보 비서가 런던에서 팩스로 보낸 그 연재물을 읽었다. 찰스는 다이애나 관련 저서가 곧 발간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기껏해야 자선사업을 홍보하고 예쁜 사진을 적절히 섞은 그런 책이려니 짐작했다. 남자,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자질을 의문시하는 책이 나오리라고는 추호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발췌본을 모두 읽자 식탁에서 일어나 발췌본을 손에 든 채 다이애나의 방으로 갔다. 다이애나는 나중에 그 방에서의 대면을, '대부'의 알파치노가 남편을 버리고 도망간 아내인 다이언 키튼을 마구 욕하던 그 장면에 비유했다. 다이애나가 왕실을 마피아에 비유한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촌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실과 마피아의 유일한 차이는, 이 강도들이 왕관을 쓰고 있다는 것뿐이야." 찰스가 욕설을 퍼부은 뒤 방 밖으로 나간 지 몇 분 되지 않아 그녀는 울면서 하이그로브를 나섰다. 그녀가 그 책에 대해서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는데도 불구하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그쳤던 것이다. "난 그녀가 그 얘기를 직접 말했다고 생각해. 그건 분명 그녀의 말이야." 찰스는 개인 비서인 리처드 에일라드에게 말했다. 다이애나의 외할머니인 레이디 푸스 퍼모이는 며칠 뒤 하이그로브로 찰스를 방문하여 그를 위로했다. 왕세자는 83세의 병약한 레이디 퍼모이를 포옹한 뒤 그녀에게 정원을 함께 산책하자고 말했다. "루스는 별거의 원인을 제공한 다이애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다이애나가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의 가문에 수치가 되었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임종 직전까지 다이애나와 말하지 않았고 또 말을 했을 때에도 왕실을 배반한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레이디 퍼모이의 대자이기도 한 찰스가 말했다. 찰스는 자신의 정부 이름을 발설함으로써 왕실의 침묵 약조를 깨트린 다이애나의 뻔뻔스러움에 깜짝 놀랐다. 다이애나는 카밀라를 '로트바일러 맹견'이라고 불렀고 그녀의 이빨이 자기 결혼을 꽉 물고서 놓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언론은 카밀라를 '평범한 얼굴의 여자' 또는 '말처럼 생긴 여자'라고 나쁘게 보도했다. '스코티시 헤럴드'는 이렇게 비웃었다. "카밀라는 담배를 피우고, 농담을 하고, 말 안장에 하루종일 앉았다가 목욕도 안하고 드레스로 갈아입는 여자이다." 왕세자가 그녀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을 너무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카밀라가 식료품 가게에 들렀을 때 화가 난 사람들이 그녀에게 롤빵을 집어던졌다. 찰스는 자신의 정부를 마구 비난하는 아내의 태도를 어린애 같은 질투심으로 치부했다. 그는 다이애나의 절망이나 발악적인 공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가 왕세자비라는 특권을 지키기 위해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맹렬히 반격해 오자 깜짝 놀랐다. 찰스는 자기를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그 책자의 발간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왕궁은 재빨리 찰스 보호 작업에 착수했다. 로버트 펠로스 경은 다이애나가 하이그로브를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당신이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는 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펠로스는 다이애나의 둘재 언니인 제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다이애나의 가족 관계에 긴장을 일으켰다. 다이애나는 눈물 젖은 목소리로 그 저자를 만난 적도 없고 또 인터뷰를 한 적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형부인 펠로스에게 그녀가 진실을 얘기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펠로스는 그녀가 자신이 일으킨 대소동에 겁먹은 것뿐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겁먹은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점성술가에게 그 책의 발간에 협조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찰수는 침묵에 의해서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그가 왕세자 신분이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에요. 그는 장차 국교의 수호자가 될 사람이라고요." 11년의 결혼생활 끝에 그녀는 남편의 부정은 마땅이 폭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책이 너무 자세하게 부부생활을 묘사한 데 대하여 충격을 받았고 또 남동생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한 것에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가 충동적 자살기도자인 것처럼 말한 제임스 길비의 말에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길비가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승인하에서 또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지만 자신의 그런 처량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이 발간된 후 그녀는 길비와 절교해 버렸다. 다이애나가 그 책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다짐하자, 여왕의 개인 비서는 언론제소위원회에다 일련의 항의문을 제출했다. 그는 그녀가 그 책의 발간에 개입했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모두 부인한다는 성명서도 작성했다. 여왕의 공보 비서는 공식적인 부인 성명서를 발표해야만 효과가 있다고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일반 대중들은 지난 해 벌어졌던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최악의 사태를 추측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이란 큰 아들 윌리엄과 관련된 것이었다. 몇 달 전 윌리엄 왕자는 우연히 골프 클럽에 머리를 맞아 두 개골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해 급히 입원을 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산 로렌조 식당에 있었던 다이애나는 급히 아들 곁으로 달려거 그가 퇴원할 때까지 이틀 간 병실을 지켰다. 찰스는 수술 직후 아들을 잠깐 방문한 다음 공식 일정을 계속햇다. 그는 '토스카'의 공연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은 깜짝 놀랐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된 아버지인가?" '선'은 그런 헤드라인을 뽑았다. '데일리 엑스프레스'의 진 루크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여덟 살짜리 아들이 골프 클럽에 맞아 머리가 깨졌는데 수술 결과를 알기도 전에 저녁 오페라를 보기 위해 병원을 나서는, 그런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아버지인가?" 찰스는 자신을 냉정한 아버지처럼 보이게 만든 건 다이애나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언론의 공세에 약간 당황한 찰스는 몇 주 뒤 아들들과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공개했다. 그러나 찰스가 24시간 뒤에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폴로 게임을 하러 갔다고 다이애나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진 루크는 아이들을 '바쁜 부모들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저절로 찾아가는 잘 키운 애완동물'처럼 대하는 찰스가 나쁘다고 비난했다. "윌리엄과 해리는 아버지를 직접 보기보다는 텔레비전에서 더 많이 보아야 하는 것이 가슴 아팠을 겁니다." 찰스가 샌드리엄에서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가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중들 속의 어던 사람이 왕세자비는 어디에 있냐고 묻지 찰스는 긴장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오늘 여기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은 환불을 받아갈 수 있습니다."('환불받다(get your money back)'는 쇼가 재미 없을 때 쓰는 말로서, 찰스는 쇼가 재미 없으니 미안하게 되었다는 농담 겸 비아냥을 하고 있는 것임. 역주) 다른 사진들도 앙세자 부처의 긴장관계를 폭로했다. 인도를 방문했을 때 다이애나는 타지 마할 앞에서 혼자 앉아 있는 장면이 사진에 찍혔다. 그 슬픈 사진(일부 기자들은 그 사진이 왕세자비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고 했다)은 찰스 왕세자의 결혼 전 일도 방문을 연상시켰다. 그는 당시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영원한 사랑의 기념물인 이 17세기 건축물에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가 1992년 나흘간의 일정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사이였다. 그들은 서로 별도의 비행기를 타고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오만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고 그녀는 런던에서 직접 왔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뉴델리 호텔의 다른 층에 있는 다른 스위트룸에서 묵었고 의사소통은 참모를 통해서 했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만 미소를 지었다. 이어 피라미드 앞에 혼자 서 있는 다이애나의 사진이 나왔다. 그녀는 자기가 이집트를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동안 찰스는 터키에서 정부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음을 온 세계에다 알렸다. 다이애나가 나환자촌을 방문하는 동안 찰스는 폴로 게임을 하는 사진이 계속 신문에 나왔다. 다이애나가 리버풀의 암환자를 위로하는 동안 찰스는 샌드링엄에서 새 사냥을 했다. 다이애나가 이 세상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테레사 수녀와 만나는 동안 찰스는 이 세상의 가장 부자인 브루나이의 술탄과 파티를 했다. 왕궁은 왕세자 부처의 불행한 결혼이 일으키는 껄끄러운 소음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새로운 폭로 사실들이 습지의 개구리처럼 튀어올랐다. 하이그로브에 주재하는 경호 경찰관인 앤드루 제이크스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같은 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왕궁은 그 스토리가 타블로이드 픽션이라고 발표했다. 하이그루브에서 4년간 근모한 그 경관은 자기 말은 사실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만나는 것은 식사 때뿐이며 그것도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는 찰스 왕세자는 자신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테디 인형이 있는 한 방에서 혼자 자고, 왕세자비는 대침실에서 혼자 잔다고 밝혔다. "그들은 미소짓거나 웃는 법이 없고 또 함께 무엇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4년 동안 나는 그들이 서로 뺨에다 키스를 하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경호경찰관의 이러한 폭로에 대하여 제도권은 귀족문제 전문가인 해롤드 브룩스 베이커에게 적절히 답변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태생의 이 왕당파는 당연히 그 요청을 받아들여 '뉴욕 타임스'에다 대고 이렇게 대답했다. "언론들이 그렇게 떠들어댄다고 해서 튼튼하게 서 있는 결혼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아닙니다. 언론들은 지난 달 다이애나의 30회 생일 때 왕세자 부처가 이혼할 것이라고 추측 기사를 많이 써댔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 주 그녀와 남편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알기로 생일 케이크도 있었고 또 왕세자가 그녀에게 예쁜 팔찌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하이그로브의 전 관리인은 왕세자가 다이애나의 30회 생일 선물로 준 보석은 가짜 보석이었다고 밝혔다. 왕세자 부처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동안 일기를 쓴 그 관리인은 그 날짜 일기에서 다이애나가 그것이 가짜임을 알고 눈물을 터트렸다고 적었다. 비싼 선물로 위로받는 데 익숙해 있던 ㅗ앙세자비는 남편이 정부에게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고 자기에는 가짜 보석을 주었다는 사실에 한 동안 얼이 바져 버렸다. 그 일기는 다이애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난 이따위 가짜 보석은 필요없어. 아무리 바람피우는 남편이라도 마누라에게는 진짜 물건을 주고 첩에게는 가짜 물건을 준다고 들었는데, 이게 뭐야." 다이애나의 30회 생일을 위해 찰스는 파티를 열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그와 함께 생일 축하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하고서 최근 걸프 전쟁에서 돌아와 있던 애인 제임스 휴이트와 몰래 축하 행사를 가졌다. 찰스는 아내의 생일을 소홀히 넘겼다는 언론 보도에 당황하여 자신의 친구인 가십 칼럼니스트 나이젤 뎀프스터에게 사람을 보내 정확한 상황을 알렸다. 뎀프스터는 '데일리 메일'에다 왕세자의 파티 개최 제안을 알리는 1면 기사를 기고했다. 다이애나는 그 다음 날 친한 친구를 통해 '선'에다 왕세자비는 남편의 '답답한 친구들'이 북적거리는 대무도회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두 사람이 언론을 통해 대리전을 벌이는 것에 염증을 느낀 앤 공주는 결혼생활을 언론의 폭로전으로 만들어 버린 다이애나를 나무랬다. "당신이 오기 전에는 이런 정보가 누출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이제 배에 구멍이 가득 나서 배가 가라앉고 있어요." 다이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누이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앤 공주는 위축되지 않았다. "내가 만일 당신이라면 그렇게 많은 얘기를 떠벌리지는 않겠어요. 그런 얘기가 언젠가는 당신에게 되돌아올 테니까요." 앤의 질책을 듣자 다이애나는 왕실이 하나같이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불행한 결혼에 대해 마음껏 발설해도 좋다고 허락함으로써 앤드루 모튼과 협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들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대로 하세요." 그녀는 친구들이 그 책에 대해서 물어오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자신과 제임스 휴이트의 혼외정사에 대해서는 앤드루 모튼에게 말하지 말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몇 달 뒤 그녀는 이제 그 책의 내용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형부인 로버트 펠로스 경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와 그가 작성한 부인 성명을 읽어줄 때, 그 성명의 발표를 승인하지 않았다. 형부는 공식적으로 그 책의 내용을 부인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이 한 말에 대해서까지 책임질 수는 없어요." 왕세자비의 성명을 기다리는 동안, '선데이 타임스'의 편집자 앤드루 닐은 갑갑해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나는 그 책의 내용을 믿지 않았어요. 단 1분도요. 왕세자비가 대식증을 앓아서 변기에다 머리를 처박고 음식을 토해낸다? 그리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건 불가능한 얘기였어요. 그래서 앤드루 모튼을 달달 볶아서 취재원을 밝히라고 윽박질렀지요. 그리고 그 취재원들을 별도로 인터뷰했습니다. 그래서 책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신하자 나는 발표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나 두 명의 주요 취재원인 캐롤린 바솔로뮤와 제임스 길비는 자기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확인서에다 서명까지 했어요." 그 신문의 센세이셔널한 발췌본은 1992년 6월 7일 조간에 게재되었다. 그날 오후 여왕은 카밀라 파커 볼스와 그 남편을 윈저 성에 있는 왕가 로열 박스에 초대하여 함께 폴로 시합을 구경했다. 다이애나는 여왕의 그런 제스처가 자신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속으로 과연 여왕의 처사가 현명한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여왕이 이 결혼을 지속시킬 의사가 있다면 왜 보다 신중한 시어머니 같은 처신을 하지 못하는가?" 그 다음 날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편집자는 '선데이 타임스'의 편집자를 말가죽 채찍으로 채찍질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분노한 앤드루 닐은 제임스 길비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왕세자비가 다른 친한 친구들과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와도 여러 차례 자신의 자살 기도에 대해서 의논했음을 확인합니다." '선데이 타임스'의 편집자인 앤드루 닐은 전 토리당 소속 내무장관인 알란 클라크 같은 귀족에게서 전화를 받고서 이제 군주제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클라크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야,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손실은 아니야, 왕족이라는 것은 회반죽 같은 얼굴의 독일인둘 집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신문 기사, 사설, 텔레비전 논평의 대홍수 속에서 한때는 신성불가침이었던 제도가 난상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군주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며 과연 영국은 왕족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자기 자녀보다 개나 말에 더 신경을 쓰는 군주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여론은 압도적 다수로 왕세자비를 지지했으며 특히 미국 여성들은 일방적으로 다이애나 편이었다. 주로 여성인 2천만 명의 독자를 자랑하는 '피플' 주간지는 16년 동안 다이애나를 무려 41회나 표지 얼굴로 등장시켰다. 그리고 앤드루 모튼의 책 발췌본과 다이애나의 표지 얼굴을 내보낸 주의 '피플'은 역사상 최고의 발매기록을 올렸다. 미국의 작가인 카밀 파글리아는 왕세자비가 20세기의 아이콘이라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오늘날 전세계적인 대중문화 속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왕실 공보 담당관은 공손한 태도로 자세를 바꾸었다. 그들은 당초 앤드루 모튼의 책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무책임하다'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제 한발 뒤로 빼고 있었다. "우리는 현재로서는 더 이상 코멘트할 것이 없습니다." 왕궁의 공보관실이 왕세자의 혼외정사에 대한 질문을 피해나가는 동안, 왕궁에서는 왕실 직원들이 불법적인 사생활을 영위하면 안된다고 경고하는 회람이 나돌았다. 다이애나는 여왕이 그런 회람을 왕실 직원들에게 내려보낼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부터 먼저 주의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앤드루 모튼의 책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할 말이 많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선데이 타임스'의 편집자는 애간장을 태웠다. "우리 신문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앤드루 닐이 말했다. 그러나 몇 시간 앤에 앤드루 닐은 익명의 여성 전화통화자에 의해서 구제되었다. 그 여자는 영국의 전국 규모 뉴스사인 프레스 협회에 전화를 걸어서 왕세자비가 캐롤린 바솔로뮤의 집을 방문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 앤드루 모튼 책의 주요 제보자인 캐롤린 바솔로뮤를 다이애나가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사진은 그 책의 내용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잘못되었음을 밝혀 주는 것이었다. 그 사진이 발표되자 로버트 펠로스 경은 자신이 다이애나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다이애나와 그 책은 서로 관계없다는 부정확한 정보를 여왕에게 보고했으므로 그는 여왕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여왕은 사표를 반려했다. 1992년 6월 15일 여왕은 찰스와 다이애나를 윈저 성으로 불러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어떻게든 그 결혼을 유지시켜 볼 마음이었던 여왕은 로열 애스코트 승마대회를 시작으로하여 부부간의 단합을 과시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필립 공은 반대했다. "그런 허세를 부릴 필요가 있을까? 이제 이 일을 여기서 끝내자고." 그러나 여왕은 며칠 전 다이애나에게 환호하는 관중들을 보았고 또 '다이애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신이여 왕세자비를 보호하소서'라는 플래카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여왕은 아스콧으로 가는 왕가의 전통적인 마차 행렬에 다이애나가 없으면 국민들이 분노할 것임을 잘알았다. 여왕은 다이애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 말 알아들었지?" 그 당시 다이애나는 여왕에게 드러내 놓고 대들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여왕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나는 내 의무를 알고 있습니다." 다이애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관중들은 여왕과 찰스 왕세자의 1호 마차에 뒤이어 퀸 머더와 함께 앉아 있는 2호 마차의 다이애나를 보자 환호성을 내지르며 1호 마차보다 2호 마차에 더욱 박수를 보냈다. 에든버러 공은 그걸 보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제임스 휘태커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필립 공은 그날 노골적으로 다이애나를 홀대했습니다. 그녀가 로열 박스로 들어가자 아예 다른 데를 쳐다보며 그녀에게 말을 걸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프로그램에 코를 처박고 있자 그녀는 혼자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쳐들지도 않았고 그녀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쓰는 것 같지 않더군요." 누군가가 필립 고으이 홀대를 지적하자 그녀는 어ㄲ를 한번 들썩하고서 말했다. "그 분은 따듯한 마음이 완두콩만큼밖에 없어서요." 그녀는 사람들의 환대에 마음이 따ㄸ해졌다. 그러나 자신감이 사라지자 그런 자부심도 곧 증발해 버렸다. 윈저 성에서 가족회의를 했을 때, 여왕은 다이애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법적인 별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왕은 승낙하지 않고 냉각기를 가져보라고 권했다. "우리 그 문제를 6개월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여왕은 그러면서 찰스 커플에게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던 대한민국 방문을 예정대로 진행하라고 일렀다. 그들은 동의했지만 그 일정은 홍보의 대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외교 케이블은 찰스와 다이애나 사이는 남북한의 대치만큼이나 냉랭한 긴장이 감돌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의 사진도 서울과 런든을 오가는 비밀 케이블의 내용을 뒷받침 했다. 그 사진은 서로 경멸하는 우울한 왕세자와 침통한 왕세자비를 보여 주었다. 여왕은 그 사진을 보고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찰스, 난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여왕은 아들이 왜 좀더 노력을 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직도 모르세요? 그 여자는 미쳤어요. 아예 확 미쳐 버렸다고요." 여왕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찰스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영국으로 돌아온 다이애나는 친구들에게 남편이 와잉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비록 자기는 왕비가 되지 못하겠지만 찰스는 자기 없이도 왕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제 그녀는 찰스의 통치 능력을 의심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판단이 자신의 본능과 남편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논평은 찰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렇잖아도 찰스는 어린 시절에 수줍음 많은 소년으로서 조바심을 잘 친다는 얘기를 왕왕 들었었다. 한 신문의 사설은 '외도를 하면서도 우물쭈물하는?'이라는 헤드라인을 뽑고서 '그는 너무 수줍음을 많이 타서 왕이 될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찰스는 즉각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자신을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충실한 마필 담당관은 찰스 일대기를 제작하면 어떻겠느냐며 언론인 조나단 딤블비를 접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래서 왕세자는 그 존경받는 언론인에게 자신의 개인 일기와 편지를 보여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독점 텔레비전 인터뷰에 뒤이어 나올 그 전기는 찰스의 왕세자 즉위 25회 기념행사에 맞추어 발간될 계획이었다. 이러한 기념행사는 왕실에 멋진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로 자축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1992년 즉위 40년을 맞이한 여왕은 웅장한 축하행사를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의회 광장에서 계획된 360만 달러의 모금 행사를 중단시켰다. 또 군대행진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녀는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한 해는 순수한 기쁨으로 뒤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아니었습니다. 왕실에 우호적인 기자의 말을 빌면, 그것은 'annus horribilis(재앙의 한해)' 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1월에는 요크 공작부인이 스티브 와이어트와 모로코로 후가를 간 사건이, 2월에는 왕세자비가 독일제 벤즈차를 구입하여 구설수에 오른 사건이, 3월에는 요크 공작부처의 정식 별거 발표가, 4월에는 앤 공주가 마크 필립스와 이혼한 사건이, 5월에는 앤 공주(42세)와 해군 지휘관 티모시 로렌스(37세)와의 염문이, 6월에는 여왕의 막내둥이 왕자 에드워드(28세)가 자기는 동성연애자가 아니라고 부인한 사건이, 7월에는 다이애나가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말한 사건이, 8월에는 사라 퍼거슨이 존 브라이언과 남프랑스에서 젖가슴을 드러낸 채 애무를 한 사건이 들통났고, 9월에는 왕궁이 왕세자비의 결혼생활에 이상 없다고 발표한 사건이, 10월에는 여왕이 독일 방문을 했다가 야유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11월이 가장 나쁜 달이었습니다'라고 여왕은 말했다. 1992년 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윈저 성의 하늘이 오렌지 불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리고 검은 연기구름이 윈저 성 주변을 감쌌다. 여왕 전용 예배당 커튼을 태운 램프 불에 의해 시작된 그 화재는 곧 '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성(사무엘 피프스의 말)'을 모두 불태울 기세였다. 왕실 직원들은 화재 경보를 울리지 않고 성의 전화기 교환판을 울려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 주말을 윈저 성에서 머물고 있던 앤드루 왕자는 황급히 어머니의 보물을 꺼내는 자업에 달려들었다. 그는 직원들의 줄에 함꼐 늘어서서 값비싼 그림, 테이블, 시계 등을 손에 손으로 연결하여 불길이 미치지 않는곳으로 옮겨 놓았다. 소방수들은 그 건물에다 150만 갤런의 물을 들이부었으나 불은 15시간 계속 타올랐다. "여왕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윈저 성의 물건들, 미술품을 꺼내는 일을 함꼐 돕겠다고 했습니다. 여왕은 그곳에 30분 정도 머물렀습니다." 앤드루는 어머니가 런던에서 도착한 직후 CNN 기자에게 말했다. 찰스는 그 다음 날 피해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그것을 '비극'이라고 말한 다음, 샌드링엄에서 계획된 사냥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노퍽으로 떠났다. 여왕의 다른 자녀인 앤 공주와 에드워드 왕자는 아예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불타 버린 현장을 돌아보는 60세의 군주는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여왕의 모든 왕궁 중 왕조의 상징인 윈저 성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성이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곳에서 성장했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개인 컬렉션인 여왕의 미술품이 수장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녀의 수장품 중에는 렘브란트, 다빈치, 홀바인, 루벤스, 베르미어 등의 미술품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도자기, 태피스트리, 가구, 정복왕 윌리엄의 갑옷 등이 들어 있었다. 두건 달린 파카를 입고 고무장화를 신은 여왕은 불자동차, 물 호스, 사다리 등을 멍한 얼굴로 살펴보았다. 그날은 그녀의 45회 결혼기념일이었는데 남편은 당시 다른 여자와 함께 아르헨티나에 가 있었다. 필립의 수행단원 중의 한 사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필립 공은 세계 야생동물 보호기금의 총재로서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수잔 바란테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그러나 수잔 바란테스의 딸 사라 퍼거슨은 함께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와 그의 비서에 대한 얘기는 있었습니다...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화재 사고 다음날 아침의 이사회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왕과 앤드루 왕자가 윈저 성에서 잔해를 돌아다보는 장면을 방영한 텔레비전 보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지요. 필립이 그때 그 회의실(부에노스 아이레스의)로 들어오더니 그 화재사건, 아내, 아들 등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회의를 시작하더군요. 우린 정말 믿기지 않더군요. 그런 대사건이 있었는데,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다니." 영국의 문화부 장관은 그 화재를 국가적 재난이라고 선포하고 국가적 관심과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여왕에게 정부가 책임지고 윈저 성을 복구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화재보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납세자들이 복구비용으로 내놓아야 할 돈은 8천만 달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관은 국민들이 그 부담을 '자랑스럽게' 떠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은 불경기에 들어가 있었고 여왕 폐하의 신민들은 복구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윈저 성이 제대로 서 있을 때는 왕족의 것이고, 불타서 가라앉으면 그때는 우리 국민의 것이란 말인가?" 자넷 데일리는 '타임스'에다 그렇게 기고했다. 그러나 왕실이 윈저 성을 화재 보험에 들지 않은 것은 명백히 정부의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가장 큰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타블로이드인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독자들의 찬반 여론을 조사했다. 두 대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고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는 1번 전화기로 '여왕이 부담해야 한다'는 2번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했다. 총 1만 6천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 중 1만 5천 통이 '여왕이 부담해야 한다'에다 걸었다. 그래서 여왕은 수익을 내는 사업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돈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재벌 사업가처럼 여왕은 왕조를 살려내는 방법을 구상했다. 아무리 막강한 영국의 군주제라고 할지라도 근거없는 특권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 무한정 버틸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총리를 통해 자신도 앞으로는 세금을 내겠노라고 선언했다. 또 1년에 두 달 버킹엄 궁을 일반에 공개하기로 동의했다. 그녀는 버킹엄 궁 입장료로 12달러를 받아서 윈저 성 복구작업비로 충당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또 왕궁 내에 기념 찻잔 및 받침대(36달러)와 왕관 모양의 초콜릿(6달러)을 판매하는 선물가게를 운영하여 그 수익금을 복구비에 보태겠다는 것도 밝혔다.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7년이 되면 왕실 전용 함정인 브리태니아호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함정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폐기하면 수리비만큼의 세금을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브리태니아 호를 폐기하기 6개월 전에 영국 국방장관은 2002년 여왕 즉위 50년을 맞이하여 1억 달러 규모의 새왕실 전용 선박을 건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왕가 친척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왕, 여왕 어머니, 남편 이렇게 세 사람을 빼놓고는 모든 왕족의 연금을 삭제하여 정부에 되돌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납세자들은 약 1천 4백만달러의 세금 감면 혜택을 보게 되었다. 시빌리스트(왕실비용)에 오른 여왕의 연금은 1천 185만 달러, 퀸 머더는 97만 2천 달러, 남편은 54만 7천 달러였다. 필립 공은 여왕의 배려로 이러한 연금을 수령하게 되었지만 그때 즈음, 언론에서 성역시되던 그의 개인 생활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는 그와 여왕이 다른 침실에서 취침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배니티 페어'는 그가 정부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뉴요커'는 '텔레비전에 그의 정부인 여배우들이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내막을 아는 시청자들은, 저 여자는 그의 정부 중 하나, 라고 말한다'라고 보도했다.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태틀러'는 '로열 콜렉션'을 발간했다. 거기에는 '에든 버러 공의 팬클럽'이라고 자칭하는 열세 여자의 이름, 이력,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 리스트는 별볼일없는 영국 배우만 거명했을 뿐 제인 러셀, 자자 가보르, 셜리 맥클레인 같은 미국츨 거물 배우는 제외시켰다. 칼럼니스트 타키는 이 리스트와 관련, 이렇게 말했다. "태틀러 리스트는 훌륭한 라인업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사샤(아베콘 공작부인)가 필립의 정부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공작부인은 그 중 제일 오래간 여자였다. 6년 내지 8년간 지속되었으니까... 필립은 '브리태니아'를 카리브 해까지 항해시킨 적이 있다. 공작부인이 그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억지로 세인트 키트 교회의 오프닝에 참석한 것이다." 그 카리브 여행 때 찍힌 필립의 사진이 한 신문에 팔렸다. 그 사진 속에서 필립은 허리에 타월만 감은 채 수영복을 입은 공작부인의 어ㄲ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 뒤의 몇 피트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공작부인의 남편 제임스는 사진에서 잘려져 나갔다. "제임스는 정말 마음씨 착한 남자라고 할 수 있지요. 필립 같은 사람을 견뎌낸 걸 보면." 타키가 말했다. 마운트배튼 경의 개인 비서를 20년 동안 지냈던 존 바라트는 1993년 죽기 직전 필립의 혼외정사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털어 놓았다. "아베콘 공작부인은 지금은 필립의 정부이지만 원래는 마운트배튼의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그의 대자였는데, 마흔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마운트배튼이 아주 좋아했지요. 그랬는데 그가 필립에게 넘겨 준 겁니다..." "여왕은 아주 차갑고 무서워요. 어떤 때는 근엄하기까지하죠. 그래서 필립이 바람을 피워도 들키지 않게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애인이라는 것이 신분을 상승시키는 명예의 배지가 되는 거죠... 그런 류의 여자로는 패트리셔 클루거를 들 수 있습니다." 패트리셔 클루거는 리버풀 출신의 포르노 벨리(배꼽춤) 댄서인 여자였다. 존 바라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알렉산드라 공주(켄트 공과 결혼한 마리나 공주의 딸)는 다릅니다... 그녀와 필립은 오래 사귀었어요... 그녀는 여왕의 사촌이기도 해요. 키가 큰 블론드 미녀였는데 앵거스 오길비 경과 결혼했지요... 그녀의 용모는 필립이 좋아하는 딸인 앤 공주를 많이 닮았어요. 필립의 정부들은 대부분 앤처럼 키가 크고 가냘픈 그런 용모를 갖고 있습니다. 말 같은 이, 아치형의 머리카락, 가늘고 긴 다리..." "기본적으로 필립은 행복한 남자는 아닙니다. 그의 결혼생활은 안정되어 있지만 행복한 것은 아니에요... 그는 정말 정력이 넘쳐흘러요. 여왕의 남편이라는 공허를 메꾸기위해 끊임없이 여행을 다니지요... 그는 돈 많은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재미있는 세월을 보내다가 이혼을 해버리면 딱 좋을 그런 남자입니다. 그 경우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율적인 권한이라도 있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여왕의 남편이다 보니 잘 보살핌을 받는 남자에 불과해요. 이혼도 할 수 없구요. 그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로서 그건 참 비인간적인 상황이지요." 여왕은 자기가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눈감아 버렸다. 그리고 필립은 아주 신중하게 자신의 로맨스를 추진했다. 가끔 여배우들과 사귀는 것 이외에는 교제 대상을 귀족 계급 내의 유부녀들로 제한했다. 귀족의 아내들은 그의 왕족 혈통과 다정한 관심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여자들도 그가 여왕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에든버러 공의 '노골적 추파'를 당한 적이 있던 한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아주 은근한 형태의 협박이었어요." 3개 국어를 말할 줄 알고, 전세계로 여행을 다니고, 미술품을 수집하고, 그림을 그리고 여러 권의 책을 발간한 에든 버러 공은 때로는 어리석은 청년 같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막내 아들의 여자 친구인 로미 애들링턴은 필립의 악동 같은 행동에 '당황했었다'고 말했다. 로미 애들링턴은 열여섯살 때 에드워드 왕자와 왕실 가족들과 함꼐 첫 주말을 보냈었다. 그런데 66세의 공작이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윙크를 하는가 하면 그녀가 자기 방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걸어갈 때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거리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또 저녁 식사 도중에는 그녀의 클리비지(가슴 가운데의 오목한 부분)를 자꾸 곁눈질로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다른 여자의 경우 그보다 더한 경우도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들어오면 그게 곧바로 겉으로 드러나 버리지요." 필립의 전 마필 담당관이었던 사람은 여자와 섹스에 대한 필립의 노골적 태도를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필립이 '남자 중의 남자'라고 말했다. 그는 '남자들이란 다 그런거 아닙니까'라는 표정을 짓고 어ㄲ를 들썩하며 필립을 변호했다. 그는 필립이 어떤 영화의 시사회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직접 만난 장면을 회상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은 리시빙 라인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그녀의 속이 비치는 드레스와 유방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는 곁에 있던 마필 담당관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두 개의 베개 같군. 푹 파묻히고 싶어." 그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점은 여자들이 뜨개질하는 능력으로 가장 잘 입증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작가인 글레니스 로버츠에게 이렇게 말했다. "뜨개질은 여자들이 손으로 하는 것과 머리로 하는 것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바로 그런 능력 때문에 여자들은 지식인들이 대단히 지겨워하는 반복적인 생산 라인 작업을 잘하는 것입니다. 나는 공장의 한 공원 아가씨에게 일을 하는 동안 뭘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어요. 남자 친구, 쇼핑, 앞으로 볼 영화 등을 생각한다고 대답하더군요. 얼마나 멋집니까." 필립은 넓은 캔버스에다 자신의 생각을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무례하게 펼쳐놓았다. 그래서 필립이 창녀와 아내를 대등한 존재라고 빗대어 말했을 때 영국의 어머니 협회는 그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필립은 사냥에 대하여 말하면서, 스포츠로 동물을 죽이는 거나 돈 때문에 동물을 죽이는 거나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다가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건 섹스와 비슷한 겁니다. 나는 창녀가 아내보다 덜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결국 똑같은 거니까요." 피흘리는 스포츠인 사냥을 좋아하는 필립이 어떻게 세계 야생동물 보호 기금의 총재가 될 수 있느냐고 한 의회의원이 묻자 필립은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채식주의자입니까?" "아닙니다." 질문을 던진 의원인 앤토니 보몬트 다크가 대답했다. "날고기를 먹습니까?" 필립이 물었다. "네, 먹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늘을 날아 다니는 불쌍한 새들을 총으로 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은 의견이 달랐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즐기지만 않는다면 간통은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문제는 공작께서 나보다 더 잘 아실 테니까, 그렇겠지요." 의회의원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20. 왕실의 다이애나 축출 시나리오 - 다이애나와 다시 사느니 차라리 내가 죽어 버리겠다 버킹엄 궁은 유감스럽게도 왕세자 부부가 별거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두 전하는 이혼할 계획도 없고 그분들의 헌법적 지위도 영향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결정은 우호적으로 내려진 것입니다... 여왕과 에든버러 공은 슬픔을 금할 수 없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경위에 대하여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정하고 있습니다. 1992년 12월 19일 영국 총리는 하원에 나와 이러한 발표문을 낭독했다. 찰스 왕세자 부부의 별거를 발표했을 때 그는 장례식장에서 찬사를 말해야 하는 사람 같았다. 여왕의 변호사와 왕실 직원들이 직접 작성한 그 연설문은 진실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채 별거라는 슬픈 소식만 전하는 것이었다. 발표문의 내용은 진실과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권유에도 불구하고 왕세자 커플은 이혼을 계획했고 그들의 별거 결정은 우호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헌법적 지위도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여왕과 에든버러 공은 그런 결정에 슬픔이 아니라 분노를 느꼈다. 오히려 여왕 부처는 왕세자의 결혼이 아무리 비참한 것이라도 군주제를 위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리의 발표 직후 영국 국민 4명 중 3명이 윈저 왕가가 붕괴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는 여론조사가 흘러나왔다. 당시 샌드링엄에 있었던 여왕은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그 성명 발표를 시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코기 개들을 산책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여왕의 시종이 기다렸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녀는 머리를 간단히 끄덕이더니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알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찰스는 하이그로브의 참모들에게 보다 솔직한 의견을 털어 놓았다. '나는 커다란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는 다이애나가 비우고 간 방들의 보수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아이들의 오래된 인형을 비롯, 그녀가 내버려두고 간 모든 물건들을 태워 버리라고 지시했다. 총리의 발표 직후 기자들은 윌트셔에 있는 카밀라 파커 볼스의 집으로 몰려가서 취재에 열을 올렸으나, 그녀는 왕세자 부처의 별거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 분들에게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면 정말 안된 일이에요. 그러나 나는 거리의 평범한 사람보다 더 아는 게 없어요. 그저 텔레비전에 나온 것만 알 뿐이에요." 거기서 50마일 떨어진 런던에서 사는 카밀라의 남편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밖으로 나왔다. 결혼한 지 19년이 되는 카밀라 커플은 별거중이었으며 가끔씩 주말에만 만나고 있었다. 기자들이 그에게 소감을 묻자 앤드루 파커 볼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슬픈 마음뿐입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별거의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하는 기자를 질책했다.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내가 몇 번씩이나 강조해야 합니까? 그런 얘기들은 순전히 소설일 뿐입니다." 거리에서 만난 한 중년의 여인은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들은 남에게 행동의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왕실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세자 부처의 별거에 대한 반응은 세대에 따라 달랐다. 2차대전 당시 런던의 지하 대피소에서 웅크리고 앉아 밤을 지세워야 했던 세대는 왕족을 어둠 속의 횃불로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공습 소리 대신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며 자라난 세대는 왕실을 하나의 유물로만 여길 뿐이었다. 비디오 게임을 하며 자란 전후의 최근 세대들은 군주제를 아주 우스꽝스러운 제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리버풀 출신의 19세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현실 감각도 없는 부자들에 불과하죠." 그러나 왕당파인 세인트 존 오브 포즐리 경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왕가의 가정생활이 현대의 결손가정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서방세계에서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이혼율이 높은데 그러한 현대적 추세가 왕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금세기에 들어와 왕가는 모범 가정으로 높이 받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왕가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왕가의 현재 상태는 보다 국민들에게 밀접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왕가 역시 모든 국민들이 직면한 가정 문제로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요." 윈저 왕가처럼 이혼을 하지 말라고 강조한 왕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윈저 왕가처럼 국민들에게 많은 이혼 사례를 보여 준 왕가 또한 없을 것이다. 1992년 현재, 왕가의 모든 결혼한 자녀들은 법적으로 별거중이거나 이혼을 준비중이었다. "결혼식은 뻑적지근하게 올려 놓고 그 다음 결혼생활은 엉터리로 하는구만." 작가인 발레리 그로브스는 그렇게 꼬집었다. 영국 국민의 절반 정도가 20세기가 끝나면 군주제는 폐지될 것이며 영국은 그런 제도의 철폐로 피해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언론은 국민들의 그런 감정을 반영했다. "찰스는 왕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이는 왕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선'은 그렇게 예측했다. "최근에 왕가가 보인 대혼란은 군주제의 존립을 의문시하게 한다. 만약 그런 혼란이 멈추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의문 때문에 왕가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데일리 미러'는 말했다.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찰스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지지도가 떨어졌다. 심지어 의회 내의 보수당 의원들조차도 그의 왕위 계승에 이문을 표시했다. 헌법상의 위기를 우려한 이 의원은 자신의 친구인 아놀드 굿맨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유명한 법률가인 굿맨은 이혼한 사실 때문에 왕위 계승에 지장을 받지는 않겠지만 만약 재혼을 한다면 계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래서 찰스는 재혼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나는 다음 번 왕이 될 것입니다." 왕세자 부처의 별거는 국제적인 반향을 몰고 왔다. 독일의 왁스 박물관은 찰스와 다이애나의 왁스 마네킨을 서로 분리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충성맹세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폐지했다. 영국 노동당 의원인 안소니 벤은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는 여왕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선출 대통령을 옹립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 각각 의회를 허용하자는 안도 함께 제출했다. 비록 안소니 벤 법안은 폐기되었지만 군주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우려를 표시했다. 왕실은 침착한 태도를 보이면서 굳건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특히 퀸 머더는 아주 침착했다. 그녀는 영국이 나쁜 왕, 미친 왕, 허약한 왕, 바보 같은 왕, 동성애 왕, 심지어 외국인 왕 등도 모두 견뎌왔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92세인 퀸 머더는 자신이 좋아하는 찰스를 도와 주어 그의 운명을 성취해야 한다고 확고히 결심했다. 그녀는 킹 메이커인 자신의 지위를 잘 알고 있었다. 왕비로 있던 시절의 그녀는 허약한 남편의 척추를 꼿꼿하게 세워서 국민들에게 강력한 군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 그녀는 위기에 빠진 손자에게도 똑같은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혼에는 반대했다. 그래서 세인트 제임스 궁의 찰스 아파트 보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찰스가 할머니 집에 이사와서 살겠다는 제안을 거부했다. 퀸 머더는 이혼을 사회적 재앙으로 여기던 시절에 성장했다. 그래서 군주제를 위협하는 제일 큰 장애는 이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알콜 중독에서 마약 중독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각종 비행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이혼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혼이 가정의 안정에 치명타라고 말하면서 윈저 왕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ㅋ 머더는 스코틀랜드에서 거행된 앤 공주의 두 번째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왕실의 또다른 이혼 사례인 앤 공주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혼에 대해서 이처럼 유보적인 퀸 머더도 결국에는 태도가 많이 완화되었다. 퀸 머더는 왕실이 사라 퍼거슨이나 다이애나 스펜서 같은 평민들과 결혼함으로써 스스로 위기를 불러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왕실 사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평민 출신인 퀸 머더는 자연히 그런 의견을 받아들일 수가 었었다. 그녀는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혼 때문이며, 사라와 다이애나는 이혼한 부모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배필로서 '부적합'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사라와 다이애나는 가정을 박차고 나와 다른 남자에게서 행복을 얻으려 했던 비정상적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들은 역경과 권태를 극복하고 평생의 동반자 정신으로 성숙된 결혼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이라고는 의무나 책임보다는 개인적 만족을 더 중시하는 어머니의 한심한 정신상태뿐이었다. 퀸 머더가 볼 때 의무와 책임이야말로 왕실의 등록상표였다. 아무튼 이혼한 어머니를 보면서 자란 이 딸들은 결혼 서약을 깨트림으로써 제멋대로인 어머니의 생활 방식을 답습한 것이었다. "결손가정에서 두 며느리를 데려왔어요. 그랬더니 그 애들은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군요." 여왕이 말했다. 퀸 머더도 여왕의 이견에 동의했다. 그녀는 다이애나가 결혼의 '지저분한' 비참삼을 온 세상에다 공개한 것을 특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퀸 머더는 손자와 함께 말하는 도중 '지저분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찰스는 할머니에게 다이애나의 '불안정한 성격'과 '근거없는 비합리성'을 이미 경고했었다. 그렇지만 퀸 머더는 다이애나의 불경한 폭로에 대해서 전혀 대비가 없었다. "대식증... 음식을 꾸역꾸역 먹은 다음에 토해 버리는 그 증세. 그건 퀸 머더를 아주 역겹게 했어요. 미래의 영국 왕비가 화장실의 하얀 변기통에다 머리를 처박는 모습이라니... 퀸 머더는 왕세자비가 먹은 것을 다 토한 다음 화장실 타일 위에 널브러진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을 거예요." 퀸 머더의 절친한 친지가 말했다. "우리 왕실에 반역자가 들어온 거야." 퀸 머더는 자신의 시녀였던 루스 퍼모이에게 말했다. 레이디 루스는 슬프게도 그 발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반역자'는 자신의 손녀였던 것이다. "왕당파인 사람에게는 혈육이라든지 가문이라든지 하는게 다 소용이 없어요." 루스 퍼모이의 손녀인 다이애나가 말했다. 레이디 루스는 골수 왕당파였다. 그녀는 자기가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찰스와 별거한 다이애나를 질책했다. 루스는 그날이 자기 생애 중 가장 슬픈 날이었다고 말했다 퀸 머더와 자신(레이디 루스 퍼모이)이 그 결혼을 주선했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자신은 다이애나가 찰스와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루스는 말했다. 루스는 그 당시 다이애나에게 왕가에 시집가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이미 열렬한 사랑에 빠진 상태였고 루스 할머니에게 찰스에게 평생을 바치겠다고 확언했다. "다이애나는 루스가 죽기 직전 그녀와의 관계를 약간 회복했어요. 그러나 약간일 뿐이었어요. 나는 그녀가 이튼 스웨이어ㅇㅔ 있는 루스의 아파트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현장에 있었어요. 다이애나가 돌아가자 루스는 여전히 다이애나의 소행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다이애나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이애나를 용서하지 못한 것은 다이애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녀(프랜시스 샨드 키드)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섭섭한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나는 그를 사랑해요. 그래서 나는 양쪽 어느 편도 들 수가 없어요.' 다이애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퀸 머더는... 그녀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개들을 마구 풀어 놓았지요. 그래서 다이애나는 그 후부터 아주 어렵게 견디어야 했어요." 퀸 머더의 친지가 말했다. 불쾌한 일은 극력 피하는 퀸 머더는 공식석상에서는 으르렁대거나, 직거나, 물어뜯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은 '그녀가 데리고 있는 개들'을 시켰다. 그래서 그 사절들은 퀸 머더의 이견을 계속적으로 언론에다 흘려대기 시작했다. 딸인 여왕과 마찬가지로 퀸 머더는 인터부를 허용하지 않는 신화를 계속 유지했지만, 여왕이나 퀸 머더는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털어 놓곤 했다. 그러나 별거 발표 몇 주 뒤에 다이애나는 죄 지은 여자라기보다 남편의 죄 많은 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은 여인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1993년 1월 12일, 찰스가 정부오 다정한 얘기를 나누는 전화통화를 녹취한 기록이 공개되었다. 카밀라게이트로 알려진 이 비밀 녹취록은 스퀴드게이트로 알려진 다이애나와 제임스 길비의 통화보다 며칠 전인 1989년 12월 18일에 있었던 전화통화를 녹음한 것이었다. 이 두 전화통화는 여가 시간에 햄 무전사처럼 공중파를 스캔한다는 남자 호사가에 의해서 픽업이 되었다. 그러나 음모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훨씬 기괴한 설명을 내놓는다. 우선 전화통화가 있은 지 3년이 지나서야 그 두 통화가 공개되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국의 국내 정보기관인 M15가 왕실을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혹은 군주제를 흔들어 볼 목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국민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한 작가의 말을 빌면 국민들은 '정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래의 영국 교회 수장인 사람이 그 녹취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전신을 쓰다듬고 싶어. 위아래로 안으로 밖으로... 특히 안으로 밖으로 느끼고 싶어. 나는 그저 당신 바지 속에서만 살고 싶어. 그게 한결 편안한 삶일 것 같아." 찰스는 카밀라에게 말했다. 이 늦은 밤에 이루어진 전화통화에서 찰스는 자신이 '탐팍스'(삽입용 생리대. 역주)가 되어 카밀라의 내부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고 그녀는 대단히 기발한 생각이라며 낄낄거렸다. "어머 정말 멋진 아이디어예요." 카밀라가 말했다. 찰스는 잠시 멈추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화장실에 내버려져 계속 휘둘리다가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나의 행운이겠지." 그녀는 매혹당한 목소리로 그를 밤이고 낮이고 원한다고 말했다. "열렬히, 열렬히, 열렬히..." 그 녹취록이 공개된 날, 기자들이 카밀라의 집을 둘러쌌다. 그녀는 그들이 거기 나타난 이유를 알자 깜짝 놀랐다. "정말 믿겨지지 않아요. 남편과 상의해 봐야겠어요. 그가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엥." 그녀는 문을 닫고 전화 코드를 뽑아 버렸다. '6분짜리 사라으이 테이프 때문에 찰스의 왕위가 위태로워'라고 '선'은 헤드라인을 뽑았다. 그러나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는 이렇게 물었다. '음담패설하는 왕이 어쨌다는 거냐?' 찰스는 자신의 개인적 대화가 녹음된 데 대하여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물의를 일으켜 미안하다고 말했다. 찰스의 친구들은 개인의 대화가 녹음, 복제, 판매되고 또 녹취록이 출판된 상황을 개탄했다. "찰스와 카밀라야 당황해도 싸지만 찰스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찰스의 전기작가인 페니 주노가 물었다. 아홉 살인 윌스(윌리엄 왕자)는 학교에서 동급생과 싸우면서 그 친구의 머리를 화장실에 처박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모의 불화에 크게 우울해 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죽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그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의 동생인 해리는 학교에서 담배를 슬쩍 훔치다가 들켰다. 두 아이 모두 엄지손가락을 빨았고 밤에 야뇨증이 있었다. 이러한 사태 진전에 대하여 전국민이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공식석상에 나타난 찰스는 노골적으로 야유를 받았다. 한 공식 회합에서 군중 속의 한 남자가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은 창피한 것도 모릅니까?" 여론조사 결과 영구 국민 3명 중 1명 정도가 찰스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할 뿐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찰스를 하나의 정치인 정도로 생각했고 나쁜 이미지의 정치인은 자리를 박탈하듯이 당연히 찰스의 자리도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친구이며 전 마필 담당관인 니콜라스 솜스는 장자 상속의 계승 원칙을 설명했다. 그는 찰스의 왕위 계승권은 그의 지지도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왕위는 그의 의무, 책임, 운명입니다. 그건 그가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의 것입니다... 1,200년을 자랑하는 영국의 역사가 발행부수 전쟁에 돌입한 머독 언론 재벌에 의해서 파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왕위 계승권자는 당연히 다음 번 왕이 되는 것이고 그 이상의 의논은 불필요합니다." 찰스의 또다른 친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정말 위기였습니다. 찰스의 생애 중 최악의 순간이없어요... 그는 자신이 진지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어요. 또 하고 싶은 중요한 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누구도 개입해서는 안될 그와 그의 여인 사이에 벌어진 6분간의 통화 때문에 그의 명성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어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잔인하게 매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피지 제도의 사람들도 화를 냈다. 피지 정부는 찰스의 생일을 더 이상 공휴일로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찰스가 더 이상 그들에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부인은 앞으로 찰스에게는 커트시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부총리는 2000년 올림픽 개회식 선언을 하게 되어 있는 찰스를 초청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차라리 아버지 대신에 그 아들인 윌리엄 왕자가 개회를 선언하게 합시다." 위기에 몰리자 당황한 찰스는 친한 친구 여섯 명을 샌드링엄으로 불러들여 회의를 하면서 조언을 구했다. 그 회의 결과 한 친구가 '텔레그래프'로 파견되어 왕세자가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할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날 그 신문의 1면 기사는 '왕세자 독신 생활을 선택'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그러나 국민들의 신임을 회복하려는 작업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찰스는 커다란 모욕을 느꼈다. 그의 경호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왕세자 전하는 밖으로 잘 나다니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괜히 뒤로 물러서지 말라고 권고했어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돕는 모습을 보여라' 이렇게 조언을 했던 거죠. 그러나 그 분은 겁먹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 분의 눈빛에서 그걸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덮에 걸린 코끼 같은 상황이었어요."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 급격히 하락하는 상황이었던 1993년 5월, 5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군주제의 장래를 토론하는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논쟁을 듣기 위해 런던의 엘리자베스 2세 회의 센터에 몰려들었다. 회의에 참가한 교수, 역사가, 극작가, 언론인 등은 군주제의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영국 왕실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옹실은 자신들의 운명을 토론한 그 논쟁에 초연한 태도를 취했다. 여왕의 전 마필 담당관인 차터리스 경은 공화파들이 주장하는 변화의 아이디어가 왕궁의 벽을 침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여왕은 왕세자 부부의 별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누가 이 뻘밭의 싸움에서 잘 싸우고 있고 또 누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겁먹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았다. 여왕은 여론조사를 읽고 있었고 별거중인 며느리가 싸움에서 이기고 있고 아들은 뻘밭에 처박혀 뭉기적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찰스는 계속 철벅거리면서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워 그 상황을 반전하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더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같이 되어갔다. 그는 언론에서 성녀처럼 혹은 영화배우처럼 떠받드는 아내를 상대로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한 신문의 헤드라인은 이렇게 상황을 설명했다. "왕세자비는 자신의 비판가들에게도 후광과 안녕을 나누어 준다." 그녀는 호스피스 기관, 고아원, 적십자사 급식소 등을 방문했다. 인도에서는 천민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네팔에서는 나병환자를 포옹했다. 팔다리를 절단당한 사람들을 안아 주었고 굶주린 난민들에게 수프를 떠먹여 주었다. 그녀의 따듯함, 아름다움, 매력에 매혹된 사람들은 그녀를 보기 위해 떼지어 몰려나왔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집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를 방문했고 매 맞는 아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남편이 잠자는 동안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지른 여인에게 동정을 표시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하는 짓이 너무 괘씸하여 그런 짓을 저질렀을 뿐 결코 살인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여 무죄석방되었다. 왕세자비는 그녀를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용감하군요." 비록 찰스는 다이애나처럼 군중을 동원할 능력은 없었지만 그의 마필 담당관 말에 따르면 아내와 별거하게 되어 시원하게 생각했다. 왕세자는 왕세자비 문제로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 '피상적인 악수 여행'을 떠나지 않게 되어 후련해 하면서 점점 자신감을 회복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신문에 다루어진 기사의 양으로만 따져볼 때 다이애나와 찰스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 미디어 리서치(언론 조사 연구) 사는 1993년 3월의 첫 6일 동안 찰스와 다이애나를 다룬 언론 칼럼의 길이가 다이애나는 3,603인치인데 비해 찰스는 겨우 275인치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자 왕궁은 왕세자비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왕실 직원들은 그녀의 자선 사업을 겉으로는 돕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일부러 지원을 태만히 했다. 그들은 그녀가 영국 적십자사 총재에 취입하는 것을 방해했고 또 유니세프의 총재로 추천하지도 앉았다. 그들은 그녀가 여러 가지 시사적인 이슈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 분야는 그녀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며 반대했다. 그녀는 한 전국적인 에이즈 회의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에이즈를 해결하기가 이중으로 어렵다. 이 나라는 정서적인 문제에 대하여 솔직하고 공개적인 토론을 갖는 것을 대단히 꺼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금지의 장벽을 어떻게 깨트려야 할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왕세자비가 BBC의 명예로운 리처드 딤블비 코너에 나와 에이트에 대한 의견을 솔직하게 피력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자, 이번에도 왕실 직원이 나서서 사전 봉쇄 행동을 취했다. 결국 그 초청장은 취소되었다. 왕실 직원들이 박탈하지 못한 것은, 찰스가 나서서 박탈했다. 그는 여왕 전용기, 왕실 기차, 왕실 전용선, 기타 왕실 여행의 특권 등을 그녀로부터 박탈함으로써 그녀를 공식 생활에서 제거하려고 했다. 사실 찰스는 왕실의 모든 특권을 그녀로부터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여왕은 다이애나를 고립시켰을 때 그것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여왕은 총리를 켄징턴 궁으로 보내 왕세자비에게 일정한 역할을 계속 부탁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여왕 폐하는 총리의 방문 사실을 왕실 행사 통지서에 게재케 함으로써 일반 대중과 다이애나에게 그녀는 아직도 평가하고 있음을 알렸다. 왕궁은 그녀에게 친선 여행을 허용했지만, 찰스의 지시에 의해, 한때 그녀에게 제공되었던 영예를 대폭 축소했다. 더 이상 왕실의 고위 직원이나 공식 시녀가 그녀를 수행하지 않았다. 비행기 좌석도 일등석에서 이등석으로 조정되었고 그녀가 네팔에 도착했을 때 국가를 연주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그녀에게 우호적인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그런 사소한 모욕에 대해서 언급했고 장래의 왕의 어머니에게 보다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그러나 왕실 직원들은 그 스타의 앞에다 커튼을 내리기 시작했고 그녀를 조금씩 무대 바깥으로 밀어내려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군부대 사열 같은 공식적인 축하행사에 왕실 가족들과 함께 나타나지 못했다. 1993년의 로열 애스코트 승마대회에 초청받지 못한 다이애나는 아이들과 함께 플래닛 할리우드로 놀러갔다. 또한 1993년 8월의 퀸 머더 생일에 초청받지 못한 다이애나는 아이들과 함꼐 카트 타기를 하러 갔다. 자비의 천사라는 이미지를 심고 싶어했던 다이애나는 워링턴의 쳐셔 마을에서 IRA의 폭탄세례로 사망한 두 명의 아이들 추도식에 참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왕실은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 대신 필립 공을 보냈다. 다이애나는 왕셀에다 자신도 모질게 반격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죽은 아이들의 슬퍼하는 어머니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거기 가서 당신들을 포옹해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시아버지를 보내는 바람에 못했어요." 심지어 다이애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왕궁이 치졸한 방식으로 보복하려 한다고 느꼈다. 다이애나는 왕실 가족이 모조리 남편을 거들어 자신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 다이애나는 자신의 곤경에 대해서 가벼운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매 맞는 아내들이 수용된 런던 호스텔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치료 세션에 참가하여 자신들의 삶을 재건하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들 얘기를 들었다. 사람들이 다이애나에게 그런 재건 작업에 참가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자신의 블라우스를 가볍게 잡고 터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온 사방에서 불이 날아와 정신이 없었요." 타블로이드 신문 기자들은 그녀의 가벼운 농담을 재미있어 했다. 한 기자가 그녀의 몸매가 아주 멋지다는 인사말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지금보다 젊었고 또 가슴이 지금보다 훨씬 컸던 때를 기억하느냐고 말하면서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래요, 마담, 그때는 정말 호시절이었지요." 그녀가 좋아하는 사진작가인 아더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에드워드 기자는 그녀가 왕세자의 청혼을 기다리던 열아홉 시절부터 그녀는 취재해 왔다. 그 당시 다이애나는 콜헌코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나가다가 수많은 기자들이 자신의 차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에드워드 기자는 당시 사람들 틈을 헤치고 달려가 그녀를 도와 주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면 안돼요. 씩씩한 모습을 보이세요.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왕비 다이가 되면 저를 아더 경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이애나를 격려했다. 그때 이후 다이애나는 그 타블로이드 사진기자를 보면 늘 다정한 미소로써 답해 주었다. 그가 아파서 잠시 자리에 드러눕자 그녀가 직접 약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의 이름을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찰스 왕세자는 언제나 나를 '에드워드씨'라고 경칭을 쓰면서 갖은 예의를 다 차려요. 나는 이 시대에 그런 태도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선'의 사진 담당 기자인 아더 에드워드는 왜 왕세자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 신문의 1,300만 독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였겠지요. 아주 재미있는 것은 다이애나가 가장 잘 협조해 준 신문은 정기구독 부수가 높은 신문들이었어요." 왕세자비가 새로운 멋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면 아더 에드워드는 칭찬의 말을 했다. "마담, 오늘 밤 대단히 아름다우십니다." 그녀가 전에 입었던 것을 또 입고 나타나면 그는 불평을 터트렸다. "또 그 옷입니까?" 그러면 왕세자비도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아더, 차라리 내가 알몸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신문에 그런 모습의 당신 사진을 실을 수는 있겠지요." 아더도지지 않고 대꾸했다. "아더, 그런 농담하지 말아요." 다이애나가 비난하듯 말했다. 아더는 나중에 왕세자비를 회고한 책을 썼고 그 책 제목으로 다이애나의 대답('내가 알몸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을 썼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한 말을 그렇게 써먹는 것이 싫다는 뜻을 그에게 밝혔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미소짓지 않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아더, 그래서 그 책 몇 부나 팔았어요?" 아더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마담, 당신은 정말 멋지십니다. 당신에게 해를 입히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다이애나의 아버지 고 스펜서 백작도 자기 딸을 가리켜 '속에는 단단한 쇠가 들었다'라고 말했다. 아더 에드워드는 가끔씩 그녀로부터 잽을 맞았다. 그녀의 새 머리 스타일을 논평하면서 아더는 머리가 조금만 짧으면 시드니 오코너 같겠다고 말했다. 오코너는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는 아일랜드의 팝 스타였다. "그래서 나는 약간 머리가 남아 있잖아요." 다이애나는 사진기자의 대머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자들은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했을 때, 반드시 독침을 맞았다. 한 젊은 여기자는 다이애나가 왕실 여행에서 편안하지만 촌스러운 옷을 입었다는 기사를 썼다가 그녀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다.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다이애나는 그 여기자의 발목까지 오는 스커트를 보고서 '저 여자 오래 가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다. 왕세자비가 또다른 해외 여행을 계획한다는 소리를 듣고 젊은 여기자는 '또 여행가시게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다이애나는 웃지도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 "더 여행을 갈 거고 더 촌스러운 옷을 입을 거예요." 다이애나는 별거 이후 특히 기자들에게 잘 대해 주었다. 공식 별거 후 그녀와 찰스는 언론 보도 경쟁을 벌였고 또 언론을 이용하여 서로에게 공격을 가했다. 두 사람 다 전국지를 동원하여 파경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공격했다. 그녀는 평소 기자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찰스보다 더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해외 여행을 취재한 기자들에게 칵테일 파티를 열어 주고 또 기자들의 기사가 마음에 들면 감사 쪽지도 보내고 또 그들의 생일도 기억해 주었다. 그녀는 '데일리 메일'의 왕실 담당 기자인 리처드 케이에게 정기적으로 브리핑을 해주었다. 그래서 케이가 다이애나와 차 안에 같이 앉아 속삭이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녀는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을 켄징턴 궁으로 초청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고 오프라 윈프리나 바바리 월터스 같은 유명 방송인들도 초청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또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인 캐더린 그레이엄을 방문하여 그녀의 환심을 하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피플' '하퍼스 바자' '배니티 페어' 등에서 후원한 파티에도 참석했다. 그녀는 '보그'지의 표지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두 아들과 함께 떠난 스키 여행에 따라와 준 사진기자들에게 아주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의 지지자들은 다이애나가 어머니답게 보이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찰스도 이에지지 않고 아이들을 데리고 이탈리아와 그리서 등지에서 이국적인 휴가를 보냈다. 다이애나는 아이들을 플로리다의 디즈니 월드에 데리고 감으로써 찰스를 한수 눌러 주었다. 그러나 찰스도 밀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부활절을 보내기 위해 두 아들을 발모랄로 데리고 가면서 축구 골포스트, 배드민턴 채, 산악용 자전거, 트램폴린, 토끼와 까마귀 잡는 사냥총, 3천 달러짜리 소형 오토바이 등을 사주었다. 그러나 찰스는 두 아들과 아무리 열심히 사진을 찍고 다녀도 인기도의 차이를 반회할 수 없었다. "왕실 사람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기자를 전봇대처럼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봇대를 피해가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이게 나쁜 명성을 얻게 된 이유의 하나입니다... 다이애나는 그런 나쁜 명성을 불식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지요." 아더 에드워드는 말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사진을 많이 찍히는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진기자들은 그녀의 사진을 찍어서 수천 달러를 벌었다. 그러던 중 다이애나는 왕실의 친구인 레이디 엘리자베스 존스턴으로부터 그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가는 헬스클럽에세 비밀리에 사진이 찍히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전화를 받은 지 6개월이 지나서 '선데이 미러'에 스판덱스 사이클용 반바지와 몸에 꼭끼는 리어타드를 입은 다이애나의 사진이 게재되었다. 그 신문사는 두 다리를 쫙 벌린 상태로 자신의 어ㄲ로 숄더 프레스를 밀어올리는 다이애나의 사진들을 입수하기 위해 25만 달러를 지불했다. 그 포즈는 아주 흉직한 것이었다. 왕세자비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해도 골반 주위의 온갖 굴곡을 강조하는 앵글에서 찍혔기 때문에 결코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 관음증적인 사진을 보면서 독자들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에게 몰래 카메라를 들이대어 찍은 것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이애나는 비록 아이를 낳고 애인을 두었지만, 그래도 순진한 용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놀라운 클리비지를 보았고 또 얇은 비단 슬립을 입고 다리를 높이 차올리는 장면도 보았다. 또 임신한 채 비키니를 입고 있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이처럼 보기 흉한 모습을 취한 장면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국부를 적나라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체면도 뭐도 없는 역겨운 것이었다." 한 잡지 편집자는 말했다. 다이애나가 다니던 헬스장인 L.A.피트네스의 주인 브라이스 테일러가 돈에 눈이 어두워 천장 패널에다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운동하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진이 신문에 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헬스클럽 주인은 소송에 말려들었고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여 고객의 운동모습을 찍었다는 나쁜 소문이 나면서 파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프리 로버트슨이라는 유명한 변호사가 헬스클럽 주인을 변호해 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자 다이애나 측은 곤경에 몰리게 되었다. 다이애나가 헬스클럽에 나와서 운동을 할 때 일부러 사람들이 잘 볼수 있는 곳에서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몸매를 뽐냈다고 증언하는 헬스클럽 종업원들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들은 다이애나가 남자 헬스클럽 출입자들과 농담도 자주 했고 자신의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 도발적이면서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왔다고 증언했다. 다이애나의 변호사들은 그녀가 운동을 하러 갈 때 운동에 알맞는 복장을 했을 뿐 도발적인 옷은 입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설혹 그녀가 무슨 옷을 입었든 그녀의 프라이버시는 보호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들은 다이애나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한 1990년 9월 25일자 브라이스 테일러의 편지를 제시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법정으로 비화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여왕은 당초 다이애나의 송사를 지지하려던 입장을 재고하게 되었다. 여왕은 먼저 감정적인 왕세자비가 법정의 무자비한 반대심문을 견디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더욱이 다이애나의 전 애인이었던 제임스 휴이트가 헬스클럽 주인의 변호사인 제프리 로버트슨의 친한 친구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로버트슨은 과연 다이애나가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해서 그처럼 철저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휴이트를 소환하겠다는 뜻을 슬쩍 내비쳤다. 여왕은 휴이트가 로버트슨의 아내인 캐시 레트에게 했다는 말을 신문에서 읽고는 크게 낙담했다. 캐시 레트는 휴이트에게 왕세자비는 실제로 겪어보니 어던 사람이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휴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입에서 악취가 나요. 그런데다 늘 섹스를 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언론은 일제히 그 소송사건에 대해서 흥미를 표시했다. 75석밖에 방청석이 없는 그 법정에 무려 900명 이상의 기자들이 방청을 신청했다. 여왕은 그 소송 사건이 법정에서 일으킬 국제적 화제를 우려했고 또 왕실의 사람이 증언석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여왕은 다이애나에게 그 사건을 법정 밖에서 해결하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헬스클럽 주인 브라이스 테일러에게 회유책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을 하지 않으면 법적 도움은 물론이고 재판 비용마저도 건질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법정 밖 해결을 추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헬스클럽은 나쁜 소문으로 이미 망해 버렸고 그래서 그는 센세이셔널한 재판이라도 하여 그 스토리를 전세계 언론사에 팔아넘겨야 단돈 얼마라도 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고용한 언론 담당 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늘 돈, 돈이었다." 여왕의 개인 비서는 다이애나의 친한 친구인 피터 팔룸보경을 접촉하여 왕세자비에게 재판의 시련이 부과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여왕의 뜻을 밝혔다. 팔룸보 경은 그런 여왕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래서 팔룸보 경은 관련 변호사들을 만나 쌍방간에 유리한 타협안을 마련했다. 그 타협안은 이런 것이었다. 브라이스 테일러는 다이애나에게 사진과 원판을 돌려 주고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더 이상 의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테일러는 무기명 신탁으로부터 도합 45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매달 분할하여 접수한다. 이러한 타협안이 발표되었을 때,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가는 안전하다.' 그 보기 흉한 사진을 실었던 '미러'의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소송에서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대가가 너무 컸어요. 금전적인 대가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우리를 증오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특히 다이애나를 좋아하는 저소득 계층의 독자들로부터 엄청난 미움을 받았을 거예요." 다이애나는 비록 언론에서는 승자처럼 보도되었지만,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직원들은 대부분 사임했다. 요리사, 마필 담당관, 의상 담당, 운전사, 경호원 등이 사직했다. 그녀는 찰스와 결혼한 이래 별거 이후에도 그녀를 곁에서 도와온 충실한 집사장 해롤드 브라운을 해고함으로써 찰스에게 보복을 했다. 그 사실을 안 마이클 오브 켄트 공주가 그 키 크고 고손한 집사장을 자신이 채용하겠다고 하자 다이애나는 안된다고 거절했다. 그녀의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찰스 왕세자는 그 집사장을 불렀다. "그녀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했다니 유감이요. 하지만 나는 개입할 수가 없어요... 내가 당신을 데려다 쓸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여왕에게도 왕세자비가 한 일을 보고하도록 하겠소." 그 집사장은 마침내 마거릿 공주에 의해서 채용이 되었다. 공주는 그에게 임대료 없는 아파트(왕실의 하인들이나 종복들에게는 무료 아파트가 제공됨. 역주)를 그대로 유지하라고 말했다. "왕세자비는 감히 마거릿 공주에게 누구를 채용하라 말라 말할 수 ㅇ는 입장이 아니지요. 마거릿 공주는 태생이 왕족이니까요. 하지만 다이애나는 결혼에 의한 왕족일 뿐이에요. 그건 아주 커다란 차이지요. 의전절차상으로는 다이애나가 마거릿보다 높은 서열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문서상의 서열에 불과해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마거릿 공주는 여왕의 동생이기 때문에 다이애나는 진짜 왕족한테는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는 거죠. 가령 다이애나가 마이클 오브 켄트 공주한테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마거릿 공주의 참모가 말했다. 그럴 즈음, 다이애나의 왕실 임무는 대폭 축소되어 있었고 찰스는 화해하자는 그녀의 제의를 차갑게 거절했다. 그는 다이애나와 다시 사느니 차라리 자기가 죽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왕실에 의해서 축출되었고 언론에 의해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공식생활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1993년 12월 3일, 그녀는 또다시 울먹이면서 자신은 이제 프라이버시를 원한다는 공개성명을 발표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공적인 생활에서 은퇘하는 것이 국가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대중의 동정을 자아내기 위해 쇼를 하는 교활한 여배우라고 매도했다. 그녀가 왕실 행사에서 은퇴한 것은 수많은 사설과 논평을 야기시켰다. 심지어 '아이리시 타임스'까지도 아쉬워했다. 미국에서는 캘빈 트릴린이라는 작가가 엉터리 시를 작시하여 그녀의 재고를 촉구했다. '오 다이!'하고 소리치며 타블로이드는 후회한다. "당신이 맡은 역할을 그만두지 말아요." 우리는 당신이 질책하는 비행을 재빨리 시정할 수 있으니까요. 다이,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왜 그런지 이유를 말해 줄게요. 왕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문을 많이 사보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다이, 우리는 함께 헤쳐나가야 해요. 자, 이제 우리를 위해 착한 사람이 되어줘요. 우리는 더 이상 엿보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비겁하게 몰래 야비한 짓도 하지 않을게요. 당신의 넙적다리를 찍지도 않을게요. 그러니 우리에게 굿바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네, 다이? 21.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왕실 - 그들의 추악한 싸움 영국 왕실의 가족들은 이제 사기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석을 패용하고 황금 장식의 옷을 입고 황금 마차를 타고 다녔다. 그렇지만 행동은 전혀 왕족답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고 진실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선량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정직함, 자상함, 타의 모범이라는 왕족의 의무를 이해하지 못했다. 문학과 예술 속에서 연면히 칭송되어 온 왕가의 전통은 이제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왕족은 스스로의 진흙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들의 문제접은 다른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이 추악하고 불쾌한 것이었다. 언론들은 일제히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에 빗대어 '윈저 가는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sors)'라는 반왕당파적 헤드라인을 뽑았다. '뉴욕 타임스'도 '승자와 패자(Winners and Losers)'라는 말에 빗대어 패자인 윈저 가(Windsors and Losers)'라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자신들을 인도해 줄 도덕심의 표상을 기대했던 군주제 지지자들은 오히려 기괴한 연속극만 보아 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 연속극에는 불륜, 폰섹스, 발가락 섹스, 그리고 찰스의 시종에 의하면 정원에서의 섹스 등이 등장했다. 한때 군주의 충실한 종복이었던 언론들이 이제는 주인이 되었다. 왕실에 관련된 소문이 너무나 많이 나돌기 때문에 왕실은 전통적인 '노 코멘트'의 태도를 버리고 가장 극악한 소문에 대해 논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앤드루 왕자의 건강에 대한 소문이 계속 퍼져나가자 왕실은 공식적으로 그가 HIV-양성(에이즈 보균 환자)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앤드루 왕자에 대한 루머는 사라 퍼거슨이 에이즈 검사를 세 번 받았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나온 것이었다. 사라가 결혼 전에 약물을 복용하고 또 약물 복용자와 계속적인 섹스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에게 에이즈를 ㅇ기지 않았겠느냐는 소문이 퍼졌다. 앤드루의 친한 친구들은 그 점을 우려했으나 막상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감히 말해 줄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사라에 대해서 비판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어요. 그는 사라에 대한 악담은 듣지 않으려고 했어요." 앤드루의 한 여자 친구가 말했다. 왕궁이 앤드루의 에이즈 보균 사실을 부인한 지 4개월 뒤 그는 해군에서 제대했다. 외짝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제대의 사유였다. 다른 사람들은 부함장이었던 앤드루가 함장으로 진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17년간의 해군생활을 청산하고 제대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해군은 재빨리 앤드루가 '대단히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장교'였다고 발표했다. 전통적으로 왕가의 남자들은 군복무를 필하면 보다 남자답고 애국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앤드루 왕자의 아버지도 해군에서 복무했고 할아버지인 조지 6세도 젊은 시절 1차대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다. 앤드루가 제대하자 이제 왕실의 남자 중 현역으로 복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막내아들인 에드워드는 해병대에 장교 후보로 입대했으나 제복을 입은 지 90일 만에 그만두었다. 에드워드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집안을 아주 당황하게 만들었다. 여왕은 에드워드에게 앞으로 더 이상 공식행사에서 제복을 입지 못하게 될 것이니 조기 제대계획을 재고하라고 말했다. 그의 누나인 앤 공주는 막내 동생이 유약한 남자로 낙인찍힐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22세이던 에드워드는 험한 특공 훈련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해병대의 명예 사령관이기도 한 아버지 필립 공은 좀더 씩씩하게 처신하여 왕실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라고 소리쳤다. 어린 왕자는 기가 죽어서 몇 시간에 걸쳐 울어댔다. 아무튼 에드워드는 그 다음날 사관후보에서 면제되었다. '뉴욕 포스트'는 '윈저의 울먹이는 유약남'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필립 공은 해병대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식에 대한 불만스러움을 표시했다. "이런 사태는 당연히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이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은 그 아이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인생의 재조정이라는 아주 어려운 국면에 처해져 있습니다." 필립의 서신이 신문에 공개되자 여왕은 그 신문을 소송하여 손해배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 즈음, 전 영국 사람들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라진 꿈을 알게 되었다. 막재 왕자가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앤드루 로이드 웨버 연기단에 가입했을 때 그는 더욱더 조롱을 받았다. 칼럼니스트 카티는 '스펙테이터'에다 에드워드 왕자가 연기 경력을 추구하고 공인된 총각들(호모)와 어울리는 것을 과연 국비로 지원해야 하는가 하는 불평을 터트렸다. 전에는 뒷전에서만 수그려지던 앤드루 왕자의 호모 기질이 이제 인쇄물에서조차도 암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이 호모가 아니라고 강력 부인했다. 여왕의 막내아들 에드워드가 소피 라이스 존스와 데이트를 시작하자, 한 신문은 그들의 로맨스를 가리켜 '대중 전시용'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키 크고 블론드인 왕자와 매력적인 여자 친구는 왕가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돌려보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고 추측했다. 비판을 잘 견뎌내지 못하는 에드워드는 런던의 뉴스 협회에 팩스를 보래 '나와 내 여자 친구를 좀 조용히 내버려 둬 달라'고 요구했다. 여왕은 소피가 버킹엄 궁의 에드워드 아파트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함으로써 에드워드를 지원했다. 요크 대주교는 결혼 전와 남녀가 죄악 속에서 사는 것을 허용한 여왕 폐하를 질책했다. 여왕은 그러한 질책을 무시했고 필립 공은 그 대주교를 잘난 척하는 바보라고 불렀다. 1994년 6월 찰스 왕세자는 군주제의 낡은 실밥을 잡아당겼고 그리하여 그 오래 된 태피스트리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불안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나가 자신이 아내에게 보정했다는 것을 시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간통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음 번 왕이 되고 싶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나는 평생 동안 내 의무를 수행하도록 훈련받아 왔습니다." 찰스는 텔레비전에 나가 그렇게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가족, 친구, 정부의 조언을 물리쳤다. 그를 사랑하는 할머니는 그런 계획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찰스의 개인 비서인 코맨더 리처드 에일라드는 찰스에게 실추된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찰스의 자부심과 허영심에 불을 질렀다. "전하, 당신의 주장을 정정당당하게 밝히십시오." 에일라드는 찰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기자들과 협력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개인 편지와 일기를 공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충성심 강한 마필 담당관(개인 비서)은 왕세자가 왕세자비에게 복수하기를 바랬다. 그는 전기 작가 조나산 딤블비가 가장 좋은 수단이요 충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일라드는 1차로 '찰스: 개인과 공직'이라는 책에 이어 '찰스 왕세자'라는 전기물을 연달아 펴내 원투 펀치를 먹일 생각이었다.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찰스는 종교, 정치, 섹스 등 까다로운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 왕으로 제시하고 싶어했다. 옥스 브리지 졸업생, 예술가, 소해정 함정, 유기농업을 하는 농부, 사업가, 박애주의자, 스포츠맨, 대사, 자선사업가 등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끊임없이 캐고 다니는 언론에 대하여 불평을 말했다. 종교의 수호자인 국왕이 어느 한 종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대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말했다. 그러나 텔레비전 인터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자신의 부정을 시인했다는 것이었다. 언론들은 일제히 찰스를 매도했다. 그러나 찰스 지지자들은 그 솔직함을 칭송하고 나섰다. 그러나 텔레비전 인터뷰를 본 필립 공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아들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여와은 그 인터뷰가 '현명치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왕은 또 어느 단일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를 수호해야 한다는 국왕의 역할 수정에 대한 찰스의 제안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아들이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황의 미사에 참석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내렸던 여왕은 영국 교회에 대한 찰스의 견해에 불만이었다. 필립 공도 나이가 마흔다섯이나 된 아들이 갑자기 바보가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왕궁은 그 인터뷰에 대해서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언론사는 나름대로 논평을 가했다. '타임'은 '찰스의 속이려는 마음'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고, '뉴스위크'는 '후계자의 고통스러운 날'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뉴스위크'는 그 인터뷰를 '나쁜 섹스: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한 전희에 뒤이은 번개 같은 클라이맥스'라고 특정지었다. '데일리 메일'은 '찰스: 내가 바람을 피웠을 때'라는 헤드라인을 뽑았고, '선'은 '다이(다이애나)가 당신에게 바람피운다고 따지지 않았느냐'라는 제목을 선정했다. 한 만화가는 왕관을 삐뚜름하게 쓰고 바보처럼 웃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왕세자를 그렸다. 만화의 제목은 '누워 있는 왕(The Lyin' King)'이었다(lyin'의 원형인 lie는 눕다, 거짓말하다의 두 가지 뜻이 있음. 역주). 또다른 만호는 10계명이 담겨 있는 두 개의 석판 앞에 서 있는 왕세자를 그렸다. 그는 그 석판에서 제6계명(간음하지 말라)을 지워내고 있었다. 여왕의 전 개인 비서(마필 담당관) 마틴 차터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작가인 노린 테일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소요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용서할 거예요. 정직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말이 많은 거니까요." 차터리스 경은 군주제가 위기의 시절을 겪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슬픈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여왕은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녀는 가만히 소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어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여왕의 주특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몇 주 동안 아들의 텔레비전 인터뷰에 뒤이어 나올 전기의 출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책은 여왕이 러시아를 방문하기 직전에 출판되었다. 1908년 에드워드 7세의 방문 이래 영국 국왕으로서는 처음 러시아 방문 길에 나선 여왕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내려 우호의 악수를 나누는 그 순간 본국에서는 찰스의 전기가 그녀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공식적으로 승인된 전기작가의 손을 통해 나온 그 전기에서 찰스는 여왕이 어머니로서는 냉정하고 무심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자신이 '정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자랐으며 어머니로서는 '줄 수도 없고 주지도 않으려 했던' 사랑을 그리워하며 성장했다고 말했다. 아버지 필립 공은 독설을 퍼붓는 엄격한 사람이었고 고든스타운 선생들은 독재자였다고 회상했다. 별거중인 아내는 정신적으로 나사가 풀린 자기 몰두적 노이로제 환자라고 말했다. 다이애나가 질투심에 불타서 사리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휘발적이고' '히스테리컬하고' '강박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 분들은 찰스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있었어요. 그분들은 늘 그렇듯이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구체적인 것은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지나가듯이 어떤 책에 대한 우려감을 표시하더군요. 그냥 책이라고만 말했어요. 우리는 그것이 제임스 휴이트가 다이애나와의 연애를 폭로한 그 책이려니 짐작했어요." 여왕은 휴이트가 5년에 걸친 다이애나와의 연애사건을 다룬 '사랑에 빠진 왕세자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여왕은 그 책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어요. 여왕의 관심은 찰스가 자신의 전기에서 뭘 말할까 하는 것이었어요." 왕세자의 전기는 그의 하인들이 팔아먹은 사생활 얘기만큼이나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 보통 신중함과 애매모호함으로 일관하는 왕실의 전례를 깨트린 찰스의 전기는 번드레한 한탕주의식의 화제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까지도 놀라게 만들었다. '가디언'은 '어리석고 안쓰러운 공식 전기'라는 의견을 보였다. 좌파 신문인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는 군주제를 반대하고 공화제를 지지한다는 사설을 내보냈다. 온건한 '에코노미스트'도 군주제를 '한물간 제도'라고 판단했다. 보수적인 '데일리 텔레그래프'도 그런 책을 일반 대중 앞에 내놓은 왕세자를 질책했다 칼럼니스트 존 쥬노는 찰스를 '사악한 '사람이라고 매도하면서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가 '아들은 대영제국을 좀먹지 않는다'는 군주제의 절대적 원칙을 망각했다며 그를 '비탄의 왕자(The Prince of Wails)'라고 불렀다(영국 왕세자의 정식 명칭은 The Prince of Wales인데 '비탄의 왕자'는 유사한 발음의 단어를 통한 말장난임. 역주). 에든버러 공도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냈다. 그는 아들의 책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나는 개인적인 문제를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여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왕실의 가족에 대해서 코멘트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집니다." 찰스의 남동생들과 여동생은 그런 책을 내서 부모님을 욕되게 한 찰스를 비난했다. 그러나 자기 연민에 빠진 왕세자는 사태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어느 정도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합리화했다. 그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털어 놓고 싶었다고 말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이렇게 한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음을 알게 될 거야." 찰스는 그렇게 예측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잘못 디딘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카밀라의 남편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는데,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앤드루 파커 볼스는 왕세자와 자기 아내 사이의 로맨스를 놓고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것을 견인주의자처럼 참아왔다. 앤드루 왕자의 친한 친구인 조슬린 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앤드루 파커 볼스가 그걸 즐기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일부 계층에서는 자기 아내가 미래의 국왕과 놀아나는 것이 명예처럼 여겨지기도 해요." 영국의 작가인 앤소니 홀든은 미국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싱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일부 보수적인 영국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군주에게 헌상하는 것은 영예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건 프랑스의 'droit du seigneur(영주의 초야권)'에서 온 것인데 집안의 주인이 하인들과 동참할 수 있는 권한이죠..." 그러나 앤드루 파커 볼스는 신문에서 자기가 '조국을 위해 아내를 바친 사나이'로 비춰지는 것을 보고서 벌컥 화를 냈다. 그는 그러지 않아도 지난 2년간 이혼 소송을 진행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단지 찰스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여 머뭇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왕세자는 자신이 이미 별거를 발표한 마당이어서 왕실이 또다른 결혼 스캔들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며 말렸던 것이다. "내가 문제를 좀 그르친 것 같군요." 찰스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카밀라의 남편은 왕실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법적 소송을 시작하지 않기로 동의했던 것이다. 앤드루 파커 볼스는 찰스의 친구이면서 또 전 참모이기도 했었다. 근위기병을 지위하는 육군 중령인 앤드루 파커 볼스는 실버스택(은으로 만든 단장)을 가진 궁내 근무 영관장교였고 그래서 여왕이 군부대를 사열할 때에는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앤드루 파커 볼스는 1970년 앤 공주와 정사를 벌인 이후에도 왕실 가족들과는 가깝게 지냈고 특히 퀸 머더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찰스가 텔레비전에 나가서 공식적으로 자신을 오쟁이진 남자로 만들어 버리자 그도 달리 선택안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앤드루 파커 볼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혼을 신청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밝혔다. 그 전 해 앤드루와 카밀라는 20회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시골의 영지에서 커다란 파티를 열었다. 그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지난 세월, 그 부부(카밀라와 앤드루)가 각기 애인을 원하면 은밀히 협조를 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찰스 왕세자의 사냥과 사격 일행이기도 한 그 친구들은 파커 볼스 부처가 이혼계획을 발표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이제 이토록 각각이 되어서... 우리들 사이에 공통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런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1995년 이혼 허가를 획득했고 그 후 1년도 못되어 앤드루 파커 볼스는 재혼했다. 카밀라는 자기 집을 팔고 찰스의 집 가까운 곳에다 집을 샀다. 다이애나는 남편의 정부가 이혼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 헬스클럽으로 가면서 기자들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러나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속이 펄펄 끓었다. 그녀는 '데일리 메일'의 왕실 출입기자인 리처드 케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녀는 파커 볼스 부처의 이혼이 자기가 서서히 재개하기 시작한 공식생활로부터 자기를 밀어내기 위한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카밀라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자기를 잡으려고 나선 '적들'에 대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햇다. '그들'이 그녀에게 해를 입히겨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켄징턴 궁의 전화에 도청장치가 부착되었다고 의심하여 전자장치를 동원하여 전화선을 깨끗이 청소했다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데일리 메일'의 왕실 출입기자를 세 시간 동안 접견했다. 그녀는 선글래스를 쓰고 야구 모자를 눈 위에까지 꾹 눌러 쓴 다음, 런던의 웨스트 에드까지 차를 몰고 나가 그 기자를 자기 차에다 태우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 기자를 만나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털어 놓았다. 케이 기자는 그녀를 '왕세자비의 친구'라고 둘러댔다. 그는 다이애나에 대한 독점 기사를 너무 많이 발표하여 그녀의 비공식적 대변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료 기자들은 그를 '마담의 대변인'이라고 놀려댔다. 다이애나의 구애시절 그녀를 도와 주었던 타블로이드 신문기자 제임스 휘태커는 자신이 '따돌림'당하는 것을 개탄했다. 그러나 아무런 섭섭한 감정없이 왜 자기가 다이애나가 총애하는 기자 자리를 놓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데일리 메일'은 그녀의 지지자들이 구독하는 신문이지요. 그 신문은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보다 독자층이 고급입니다." 리처드 케이의 이름이 달린 왕세자비에 대한 기사는 이제 다이애나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이라고 너릴 인식되었다. 그는 제임스 휴이트와의 정사를 강력하게 부인하는 그녀의 입장도 보도했다. "우리는 결코 애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리처드 케이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나중에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휴이트와 간통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녀는 리처드 케이에게 제임스 길비와 정사를 벌였다는 사실도 부인했다. 그러나 다이애나와 길비의 전화통화 녹취록을 보면 그녀는 임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녀는 또 영국 럭비팀 주장인 윌 칼링과의 관계도 부인했다. 당시 칼링의 아내인 줄리아 칼링은 간통 대문에 벌어진 자신의 이혼 소송에서 다이애나의 이름을 지명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햇던 것이다. 리처드 케이의 독점 기사 속에서 왕세자비는 생활의 모범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자신의 어머니 역할에 위협을 느낀다고 말했다. 찰스가 두 아들과 함께하는 여러 가지 활동을 도와 줄 보모로 알렉산드라 레기 버크를 고용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유아원 보모로 일했고 티크를 고용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유아원 보모로 일했고 티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 여자는 다이애나가 찰스와 별거하고 난 지 몇 달 뒤에 채용이 되었다. 아이들은 티기의 쾌활한 태도를 좋아했고 그래서 티키는 아이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왕세자비는 티기가 아이들에게 달려가 '내 아이들'이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처음 보는 순간 '복부를 강타당한' 느낌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다이애나는 29세의 젊은 보모가 스위스의 클로스터스에서 아이들과 스키를 타는 장면, 샌드링엄에서 들꿩 사냥을 하는 장면, 발모랄에서 사슴 사냥을 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고서 '엄마'로서 뒤로 밀려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티기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나는 애들에게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있어요. 신선한 공기, 총, 말 등을 주고 있는 거지요." 왕세자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 여자는 내 아이들을 망치고 있어요." 그녀는 타기의 흡연 습관에 대해서 불평했고 아이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찰스가 흡연을 증오한다고 말해 놓고 나서 골초인 여자들을 좋아하는 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녀는 하루에 담배를 한갑 피우는 카밀라 파커 볼스를 은연중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신문에서 티키가 '따뜻하고 쾌활한 여자' 혹은 '훌륭한 대리모'라고 칭찬하는 기사를 보자 더욱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다이애나는 리처드 케이에게 이렇게 털어 놓았다. 만약 자기가 아이들과 함께 놀아 줄 '대리부'를 채용했다면 그녀는 나쁜 엄마로 매도당했을 것이라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를 갈 때 티기를 대동해야 하는 남편과 달리, 자기는 아이들을 방문하거나 놀러 갈 때 대리부가 필요없다고 말했다.찰스가 서너 번 티기를 포옹하고 또 입술에다 키스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고 나서 다이애나는 찰스가 '아마도 저 조그만 하인 여자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그 키스 장면은 세간의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나 찰스의 개인 비서인 코맨더 에일라드는 보모에 대한 공식적인 감사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아무튼 어머니이 지위에 위협을 느낀 다이애나는 육아와 관련된 티기의 역할을 제한하는 요구사항을 남편에게 퍼부었다. 왕세자비는 보모가 아이들의 침실과 화장실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아이들이 공식석상에 나올 때 티키는 배경에 머물러서 앞에 나서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아이들과 같은 차에 타고 가거나 아이들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사진을 찍어서도 안돼요." 또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때 샌드링엄에서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올 때, 영지 내의 다른 건물로 보내서 자기와 은밀하게 통화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우리가 전화통화를 할 때에는 직원이나 하인이 그 옆에 있어서는 안돼요." 다이애나는 자신의 맏아들 칭찬을 리처드 케이에게 길게 말해 줌으로써 미래의 국왕의 어머니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애썼다. 그녀는 열세 살짜리 맏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키가 크고 또 아버지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자랑했다. 그녀는 아들 윌리엄을 높임으로써 아버지 찰스를 낮추려고 했다. 아들은 '단호하고'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추었으며'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그들의 신분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처럼 축 처진 귀를 갖고 있지도 않다고 자랑했다. 다이애나를 만나고 돌아온 리처드 케이는 이렇게 썼다. "윌스에게 잘생겼다고 말하면 윌스는 자기가 잘생긴 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잘생겼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허영 많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버지와는 다르게 이 상냥한 아들은 어머니를 감싸 주었다 윌스는 어머니가 톰 행크스를 좋아하여 그에게 전화질을 해댄다는 타블로이드 신문기사를 보고서 어머니에게 따졌다. 어머니는 그런 시시한 기사 따위는 웃어넘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은 공식 부인 논평을 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나중에 학교 친구에게 그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건 내 엄마를 창녀처럼 보이게 한단 말이야. 1994년 8월 20일 리처드 케이 기자에게 전화했을 때 왕세자비는 당황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어디서 나를 미친 여자로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어요." 그녀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내일 신문들이 일제히 그녀가 이슬람 미술품 딜러인 올리버 호어에게 18개월 동안 익명의 전화를 걸어서 호어를 괴롭혔다고 보도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녀는 호어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으면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전화를 건 사람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 있는다는 것이었다. 다이언 호어는 ;그 '침묵전화'를 남편에게 말하면서 '무섭다'고 했다. 호어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추적에 착스하여, 그 침묵전화가 켄징턴 궁의 다이애나와 찰스의 개인전화, 다이애나의 이동전호, 다이애나가 언니 집을 방문했을 때는 언니의 전화에서 걸려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담당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호어 씨는 전화 발신지 추적 보고서를 보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그런 전화를 걸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찰스 왕세자의 친한 친구인 호어 부처는 왕세자 부처의 결혼 이후 다이애나를 알아온 사이였다. 찰스는 그 소식을 접수하고 슬프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고 아이들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이런 일 때문에 애들이 멍들고 있어요. 애들이 학교에 가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찰스가 말했다. 호어 부처는 고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런던 경시청의 누군가가 언론에 그 사실을 흘렸고 그래서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왕세자비는 아주 처량한 꼴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아세자비는 미쳐 버린 것인가?" 한 신문의 사설은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히스테리가 심한 여성입니다. 신경쇠약 일보 직전에서 비틀거리고 있어요." 한 칼럼니스트가 지적했다. 그녀를 치료한 사람들도 (신문에 보도된) 그녀의 병적인 태도가 오로움과 고립감을 느끼는 대식증 호나자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분석했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또 사람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여인의 경우 전화로 괴롭히는 행위는 위력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보복을 하는 안전한 방법이 되는 거지요." 다이애나를 치료했던 한 전문가가 말했다. 그리서 뒤이어 좀더 재미난 소식이 들려왔다. 매력적인 남자이며 두 아이의 아버지인 미술품 딜러(올리버 호어)는 괴로워하는 오아세자비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강박적으로 괴롭히지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정확한 얘기가 아니라고 올리버 호어의 운전기사인 배리 호지가 말했다. 호지는 다이애나와 관계 없는 이유로 운전기사직에서 해고되고 난 다음 입을 열었다. 운전기사는 다이애나와 미술품 딜러가 실은 혼외정사를 벌였다는 것이었다. 두 남녀는 핌리코에다 '사랑의 보금자리'를 차려 놓고 거의 4년에 걸처 주에 3--4회씩 만나왔다는 것이었다. 호어는 운전기사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호어 부인은 별거를 요구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곧 화해했다. 다이애나는 올리버 호어와 '친구'사이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런 침묵전화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케이가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건 적이 없느냐고 묻자 그녀는 '나는 주차 미터기를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공중전화를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이애나의 그런 답변은 제임스 휴이트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다이애나는 휴이트가 근무하는 군부대에 전화를 걸 때면 공중전화를 이용했고 또 목소리마저 감추었다. 그녀는 찰스가 면밀히 검사하는 전화요금 청구서에 휴이트의 번호가 나오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공중전화를 썼던 것이다. "그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이트는 말했다. 찰스는 아내의 명성에 금이 가는 그 기회를 적절히 이용했다. 그는 다이애나를 지적으로 멍청하고 텔레비전에 중독된 한심한 여자로 묘사한 다음, 그녀의 유일한 목적은 샤넬 화장품 가게를 싹쓸이하고 또 찰스의 비용으로 자신의 화장대를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런던의 한 디너 파티에 참석하여 그녀의 여행 비용과 이상 비용이 너무 많으 든다고 불평한 다음, 그녀가 '화장'만 하는 데에도 한 달에 13,900달러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이렇게 대꾸했다. "나의 화장품대는 그 빌어먹을 폴로 조랑말을 유지하는 비용에 비하면 절반도 들지 않아요." 그러자 며칠 뒤 신문에 그녀의 연간 '화장' 비용에 대한 명세가 발표되어 사람들은 직접 그 비용이 과다한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25,000달러: 매니큐어와 페디큐어 24,000달러: 머리 자르는 등 미용실 이용 7,000달러: 헬스 강사비 4,400달러: 척추지압술 비용 4,300달러: 결장세척 비용 4,290달러: 생리반사 검사비용 3,800달러: 정골치료 비용 2,200달러: 전신 마시지 비용 3,800달러: 향유치료, 가정방문 포함 1,000달러: 침술 비용 2,000달러: 최면 기술 65,000달러: 점성술가, 심령술사, 심신 카운셀러 비용 20,000달러: 정신치료 도함: 166,790달러 그러자 다이애나는 또다시 당황하여 리처드 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건 나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조직적인 음묘예요." 그녀는 치료 비용이나 기타 비용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왕실의 누군가가 자기를 낭비만 하는 여자로 몰고 가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말했다. 별거중인 동서 요크 공작부인도 왕세자비에게 전화를 걸어 동정을 표시했다. 사라 또한 왕실의 음모에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라는 다이애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이 우릴 죽이려고 대단히 대들었어요. 특히 그 펠로스라는 자가 말이에요. 먼저 나를 죽이고 그 다음에는 당신에게 덤빌 거예요. 우리가 나쁜 여자라고 매도하면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전하고 있어요." 펠로스는 여왕의 개인 비서로서 다이애나의 형부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질질 끄는 이혼 협상 기간 동안 퍼기는 왕궁으로부터 3백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정신없이 낭비한 여자'라고 매도당했다. 사라의 지출 명세, 구두 두켤레에 6,500달러, 드레스 열두 벌에 3백만 달러 등도 언론에 유출이 되었다. 그런 명세가 공개된 직후 여왕은 공작부인의 비용 청구서를 대신 물어 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왕실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녀의 수입, 아니 왕실의 수입 이상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왕실 직원들의 박해를 의식한 사라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할 때마다 문서파쇄기를 휴대하여 그때그때 관련 자료들을 없애 버렸다. 공연히 왕실의 음모에 휘말리기 싫어서였다. 다이애나도 사라가 제기하는 왕실 음모설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별거 기간 동안 사라와 다이애나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고 또 항우울제 처방을 받았다. 왕실의 아내라는 부담감 때문에 이 두 여인은 애인을 사귀었고 그 납자 애인들은 돈의 유혹에 넘어가 그들을 배신했다. 이제 정서적으로 취약해졌고 또 미래가 불안한 두 여인은 점성술가, 수점술가, 심령술가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이 점성술가들도 그들을 배신했다. 다이애나는 미용사, 손금 봐 주는 사람, 심령술사 등이 자기에 대한 책을 쓴다는 정보를 접하고서는 더 이상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공작부인과 왕세자비는 귀찮은 언론을 물리치기 위해 공동전선을 폈다. 더 이상 왕실의 가족이 아니고 또 국고의 보조를 받지 않는 그들은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신당한다고 느끼는 그들은 신문에 난 모욕적 기사를 추적하여 어던 기자가 믿을 만한 기자인지 명단을 작성했다. 그들은 부정적 기사가 나올 때마다 서로 전화를 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상의했다. 퍼기는 기분 나쁜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노골적으로 따지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퍼기는 신문에서 워낙 얻어맞았기 때문에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아주 도전적이었다. "여기선 우리를 미워하지만 미국에서는 우리를 좋아해요." 퍼기가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두 여인은 미국으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왕실의 쓰레기가 아니라 진짜 왕족처럼 대우해 주었다. 영국에서도 '유에스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셔츠를 즐겨입는 다이애나는 콜로라도에 스키를 타러갔고 뉴욕 시에서 쇼핑을 했으며 마사스 비녀드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러나 퍼기는 미국에 오면 주로 돈을 벌어갈 궁리부터 먼저했다. 취업중인 이혼모들을 위한 매뉴얼을 쓰기로 하고 미국 출판사에서 2백만 달러를 받는 등, 너무 돈을 버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을 지적하는 기자의 질문에 사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두 아이를 둔 별거중인 어머니이고 또 내 가정의 재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이런 상업적인 일에 몰두하는 겁니다. 믿어 줄지 어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진실이에요." 그러나 퍼기에 관한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은 그녀가 돈 많은 친구들과 열렬한 지지자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답변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선 행사나 테마 파크 행사 등에 출연하고서도 출연비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다이애나가 성녀 테레사 수녀와 사귀는 것을 좋게 생각한 다이애나의 친구들은 제멋대로인 공작부인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낭비 심하고 제멋대로인 퍼기는 당신의 친구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작가인 존 쥬노가 충고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동서 사라 퍼거슨이 자신의 유일한 동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길을 걸어왔어요." 다이애나가 퍼기에 대해서 말했다. 과거에 두 여인은 긴장된 관계를 유지했다. 경쟁심과 질투심이 발동하여 소원한 사이였기 때문에 서로 회피하면서 친구들에게 서로를 헐뜯었다. 그러나 결혼이 난파당하자 두 젊은 여인은 난파선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사람들처럼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다. 법적 별거 기간인 2년이 지나자 두 여인은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지만 결혼관계를 청산하는 데 있어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 길에는 도로 표지판도 없어요." 피해를 입은 아내의 입장을 굳건히 지키려는 다이애나가 말했다. "특히 재정 문제가 어려울 때는 더욱 그렇지요." 보다 현실적인 공작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1천말 달러의 이혼 합의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또한 '전하'라는 타이틀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런 타이틀이 없는 퍼기는 석유 없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마찬가지였다. 다이애나 역시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변호사들은 이혼의 미로를 탐사하는 작업에 퍼기를 앞세우라고 말했다. 그들은 공작부인을 '시범 케이스'라고 불렀다. 두 여인은 개인적으로 재정적 뒷받침이 있는 합의 이혼을 추구했지만 겉으로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다는 태도를 취했다. 1995년 가을 다이애나는 리처드 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혼 문제는 나와 남편 사이에 거론된 적이 없습니다." 그 무렵 다이애나는 럭비팀 주장 윌 칼링과의 염문 때문에 언론의 화제가 되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두 아들이 럭비를 좋아해서 윌 칼링과 알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는 플라토닉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애인 따위는 필요없습니다'라고 다이애나는 응수했다. 다이애나는 이제 다가오는 이혼을 대비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높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동병상련의 신세였던 퍼기가 그녀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자기(퍼기)처럼 텔레비전에 나가서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 놓으면 이미지를 새롭게 한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퍼기는 또 여왕 몰래 해야 하며 그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면 여왕이 방해를 놓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왕실에도 알리지 않고 BBC의 마틴 바시르와 카메라 팀이 켄징턴 궁을 몰래 방문하여 촬영을 했다. 그녀는 이 인터부에서 자신의 남편, 자신의 결혼, 왕실 생활 등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다이애나는 인터뷰 방영 며칠 전에 여왕에게 인터뷰 사실을 알렸다. BBC는 찰스 왕세자의 47회 생일 축하 국가 연주에 뒤이어 4시간짜리 '세계적인 독점 인터뷰'를 방영한다고 발표했다. 이 사실이 발표되자 다이애나의 개인 비서와 공보 비서는 우롱당했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여왕도 BBC의 인터뷰에 분개하여 그 다음 해 60년 동안 여왕의 크리스마스 연설을 방영했던 BBC에게 연설방영권을 주지 않고 다른 방송국에 넘겼다. 1995년 11월 20일 밤, 2천2백만 명의 영국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왕세자비의 인터뷰를 시청했다. 그리고 그 후 이 인터뷰가 전세계적으로 재방송되었을 때, 약 100여 개국 2억 명의 사람들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침착한 자세와 평온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한 다이애나는 자신의 산후 우울증, 자살기도,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증세, 대식증 등을 말해 나갔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를 쓸모없고 불필요한 완전 실패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굉장한 고통을 겪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그런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시정을 요구하는 아내를 질책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녀가 왕가의 부담이라고 말했고 결혼 후 그녀가 알게 된 제도권 사람들은 그녀의 신경질이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중증이라고 말했다고 다이애나는 털어 놓았다. 남편은 '내가 늘 언론의 반응을 더 많이 이끌어 내고 또 일을 더 많이 하고 또 남편의 일보다 내 일이 더 평가를 받기 때문에' 질투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결혼생활 도중 부정한 행위를 한 일이 있음을 시인했다. 그녀는 제임스 길비와 올리버 호어와의 관계는 부인했으나 제임스 휴이트는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래요, 나는 그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나는 매우 우울하여 침체된 상태였어요." 그녀는 아이들에게 휴이트와의 관계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카밀라 파커 볼스와 간통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말해 주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적개심이나 분노의 감정은 없이 그저 부드럽게 말해 주었을 뿐이에요." 그녀는 언론의 사생활 침해를 질책했다. "나는 언론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요. 전에는 그런대로 관계가 원만했는데, 이제는 언론이 너무나 나를 괴롭히고 또 권력을 남용해서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자신이 영국의 왕비가 될 수 없음을 시인하면서 그렇지만 국민들의 마음 속에서 왕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대사가 되고 싶어요." "어떤 근거에서 당신이 대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터뷰 기자가 물었다. "나는 15년 동안 특별한 지위에 있었어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해야 하는지 익히게 되었어요. 나는 그 지식을 활용하고 싶습니다." 잠시 뒤 그녀에게 남편이 왕이 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그녀는 속눈썹 화장을 짙게 한 눈을 치켜뜨면서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답변했다. "나는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운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 어떤 상황이 어떤 변수를 촉발시킬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녀는 괴로움을 많이 당한 남편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녀는 야비한 말은 삼간 채, 남편의 통치 능력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했다. "내가 볼 때 최고의 지위는 그에게 엄청난 제한을 가할거라고 생각돼요. 나는 그가 그런 상황에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다이애나는 왕이 되는 것에 대한 '갈등' 때문에 찰스는 왕위를 건너뛰어 그것이 성인이 된 윌리엄 왕자에게 넘어가도록 조치를 취할지도 모르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전국민이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한 텔레비전 논평가가 늦은 뉴스에서 말했다. 그 다음날 아침 영국의 신문은 1면을 다이애나 관련 기사로 할애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의상(맞춤 해군용 파카, 반투명 검은 바지), 조명, 용모, 어위 등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찰스의 친구인 니콜라스 솜스는 크게 화를 냈다. 그의 반격은 그녀의 공격에 더욱 신빙성을 부여했다. '왕세자의 부당한 공격을 당했습니다'라고 솜스는 말했다. 그는 그녀의 인터뷰를 '정말 끔찍한 내용'이라고 말한 다음, '그녀가 중증의 편집증세를 보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은 왕세자비를 사랑했다. 여론조사는 그녀에 대하여 85퍼센트의 지지율을 보여 주었다. 언론인이며 역사가인 폴 존슨은 그녀가 히로인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왕세자가 간통을 저질렀을 때 그녀가 순결한 처녀였다'는 점을 들어 그녀의 성적 비행을 용서했다. 계급과 신분에 따라 찰스와 다이애나의 진영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나이든 보수당 신사와 성공회 교직자들은 왕세자를 지지했지만, 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왕세자비를 지지했다. 왕측의 감정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었다. 신분들은 왕세자와 왕세자비에게 하루 빨리 그 비참한 결혼생활에서 탈출하려고 애원했다. 의회의 보수당 의원들은 총리에게 어서 빨리 여왕과 이혼 건을 상의하라고 촉구했다. 여왕은 총리와 상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전 총리 제임스 캘러헌과 캔터베리 대주교와 함께 여왕과의 주중 회의장에 도착했다. 총리는 여왕에게 왕세자 부부의 불안정한 결혼생활이 국정운영에 지장이 된다고 말했다. 영국은 체면을 읽고 있으며 군주제의 위상이 위축되어간다고 보고했다. "나는 단지 여왕 폐하의 고문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 메이저 총리는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이어 총리는 여왕이 링 안에 들어와 그 싸움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1995년 12월 17일, 여왕은 찰스와 다이애나에게 편지를 보내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우호적이고 평화적으로' 이견을 해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서로 이혼에 동의하라고 요청하면서 그 결정을 조속히 알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왕은 그 편지를 외부에 공개했다. 다이애나는 여왕이 그 편지를 공개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여왕인 원하지 않는 이혼 쪽으로 그녀를 떠밀고 있다고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변호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즉각 결정을 내리지 말고 시간을 끌라고 그녀에게 조언했다. 협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왕의 편지 공개에 화가 나서 크리스마스의 왕실 가족 모임에 참가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찰스는 즉각 여왕의 편지에 응답하여 이혼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다이애나와의 소송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함의 이혼을 원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는 또한 재혼하지 않겠다는 의사도 천명했다. 여왕의 편지가 도착한 같은 날, 다이애나는 윌스와 해리의 외출과 야외활동을 돕는 젊은 보모인 티기 레기 버크의 변호사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다이애나가 티기에 대해여 '헛된 주장'을 한 것을 취소할 것과 며칠 전의 직원 파티에서 다이애나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님'을 시인할 것을 요구하는 두 가지 사항이었다. 다이애나는 며칠 전 왕세자 부처의 직원들을 위한 연말 점심 파티 참석차 레인버스로 호텔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다이애나는 호텔 입구에 서 있던 티기를 모른 체하지 않고 일부러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애 얘기는 참 안되었군요." 다이애나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티기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말하는 '애'가 바로 근거없는 소문 속의 그 애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다. 티기가 찰스의 애를 임신했다가 유산을 했다는 소문이 얼마 전에 떠돌았던 것이다. 티기는 찰스 왕세자의 전폭적인 성원을 받으면서 다이애나의 모욕적인 말을 걸어 소송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왕세자의 친구들은 왕세자비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법정에서 왕족을 상대로 투쟁을 벌이는 것을 재미있어 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햇다. 찰스도 친구들의 조언에 동의했다. 그리고 티기는 변호사들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 끝에 소송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다이애나가 근거없이 티기를 공격한 행동은 그녀가 '올해의 박애주의자'로 지명되고 나서 몇 시간 지난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뉴욕 시에서 돌아오는 길에 직원들을 위한 연말 점심 파티에 들렀다. 그녀는 뉴욕에서 전 국무장관이 헨리 키신저로부터 이름 높은 '뇌성마비상'을 받았던 것이다. 72세의 노정객 헨리 키신저는 왕세자비의 푹 패인 드레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등학생처럼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키신저의 소개 말에 이어 다이애나가 연설을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그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1천 달러를 지불한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번쩍거리며 단상에 나오는 다이애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다이애나는 지체 장애자들의 곁에서 밤새워 간호하는 부모를 정말 존경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관중석의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데 다이애나, 당신의 아이들은 어디 있나요?" "그애들은 학교에 있어요." 다이애나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이어 그녀는 연설을 계속해 나갔다. 그녀가 연설을 끝마치자 관중들은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호했다. 아까 그 여인의 무례한 질문을 퍼부은 중년 여자에게 다가가 왜 왕세자비에게 소리를 질러 그녀를 놀라게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인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전혀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답변했다. "나는 박애에 대해서 설교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22. 왕실이여, 안녕 - 1,200년 세월 동안 그들은 무엇을 남겼는가 왕가의 전운이 감돌았다. 여왕은 두 달 동안이나 왕세자비가 자신의 편지에 응답해 오기를 기다렸다. 여왕 폐하의 개인 비서는 다이애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 일시와 장소는 1996년 2월 28일 오후 4시 30분, 세인트 제임스 궁의 찰스 사무실로 정해졌다. 그녀는 변호사, 마필 담당관, 비서들을 배제한 채 단 둘이만 만날 것을 제안했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정해진 시간에 그곳에 나타났다. 왕실 직원들은 메모를 해야 한다면서 그 같은 단독 회동에 반대했으나 찰스가 그들을 물리쳤다. 직원들이 방에서 나가자 다이애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들은 이 방에다 도청장치를 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나중에 '데일리 메일'의 리처드 케이를 만나 자신이 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밝혔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애들의 아바지이기 때문에 늘 사랑할 거예요" 그러나 찰스는 신문에 난 그런 말을 보고서 화를 냈다. 그는 자신의 참모에게 그녀는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고 또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다이애나가 몇 달 전에 한 협박의 말이었따. 찰스에 따르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왕이 되지 못해요. 내가 당신을 파괴시켜 버리겠어요." 그들의 은밀한 만남에 대하여 다이애나가 말한 내용이 '데일리 메일'에 실린 것을 보고 찰스는 함구령을 얻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다이애나가 앞으로 결혼생활에 관련하여 말이나 글로써 발언하지 못하도록 하는 비밀 조항을 이혼합의서에 집어넣자고 요구했다. 다이애나는 그것이 일방적인 강요라고 맞서면서 찰스도 유사한 맹세를 하라고 반격했다. 그러나 찰스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명예를 지키겠다는 말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찰스의 사무실에서 만나서 단독 회동하는 동안, 그녀는 찰스에게 이혼을 먼저 요구한 사람은 찰스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이혼 협상에 응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심지어 왕실 가족의 위상도 포기하겠다고까지 말ㅎ다. 그녀의 타이틀은 나중에 협상의 장애물이 되었지만, 처음엔 그녀가 선선히 그 따위 타이틀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담이 끝난 다음 그녀는 여왕에게 전화를 걸어 '깊은 유감을 느끼며' 이혼에 동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 캠프의 변호사들은 싸움에 들어갔다. 그들은 7,500만 달러의 위자료를 일시불로 지불해 달라고 요구했다. 찰스의 변호사들은 위자료 금액과 지불 방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더 작은 금액을 원했고 일시불보다는 분할 지불을 원했다. 그렇게 하면 다이애나가 제멋대로 행동할 경우 남은 돈을 가지고 통제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할지불을 거부했다. 그녀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고잽했다. 찰스가 그녀의 법률 비용이 '과다하다'고 말하며 부담해 줄 수 없다고 하자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녀 측은 누가 먼저 이혼을 원했는가를 찰스측에 상기시켰다. 그녀는 협상을 그만두겠다고 위협하면서 그 경우 찰스는 함의가 필요없는 이혼을 얻어내기 위해 앞으로 2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맞섰다(영국 이혼 규정은 별거 후 5년이 경과하면 무합의 자동 이혼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왕은 더 이상 그 문제를 끄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왕이 개입했고 찰스는 아내의 법률 비용 12만 달러를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하여 이혼의 제반 문제에 대한 논쟁이 5개월 간 진행되어 양측의 변호사는 두 교전국의 조약서처럼 복잡한 이혼합의서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합의서에 따르면 다이애나는 왕가에서 선물로 준 보석(총 가치가 1억 달러를 상회)을 평생 유지할 수 있게 뙤었다. 그녀는 퀸 머더가 결혼 선물로 준 30캐럿 사파이어 브로치를 포함하여 왕실로부터 받은 선물을 대여하거나 매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사망하면 그 보석들은 미래의 왕세자인 윌리엄에게 자동적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되었다. 그녀의 유언장에다 이 점을 명기한다는 것이 이혼합의서에 명시되어 있다. 쌍방간에 논쟁이 붙지 않았던 유일한 분야는 아이들의 양육이었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아이들을 함께 기른다는 공동 책임에 동의했고 그래서 똑같은 접근권과 양육권을 갖게 되었다. 이 밖의 문제들은 아주 사소한 점까지도 논의되었다. 심지어 다이애나에게 배정될 사무실의 크기까지 의논되었다. 찰스는 앞으로 5년 동안 세금 포함 그녀에게 2,6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더하여 그녀의 사무실 직원, 집기, 장비 등에 대한 비용으로 연간 60만 달러씩 지불하기로 했다(1997년 영국의 부자 1,000인을 조사한 연간 조사에서 다이애나는 9,800만 달러의 개인 재산으로 916위에 랭크되었다). 다이애나는 이사하거나 재혼할 때까지 켄징턴 궁을 자신의 저택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 다이애나는 별로 미련이 없ㄷ던 자신의 왕실 위상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 그 타이틀을 유지해야겠다고 말했다. 전에는 '또다른 타이틀은 필요없어. 나는 원래 타이틀(스펜서 백작)이 있는데 뭘'하고 농담삼아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은 HRH(Her Royal Highness: 전하) 타이틀을 유지하라고 권했다. 그들은 다이애나가 치욕적으로 밀려난 사라 퍼거슨처럼 사람들로부터 천대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혼할 때 HRH 타이틀을 포기해야만 되었던 불쌍한 공작부인은 전국적으로 동네북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탐욕스럽고 돈만 밝히는 여자로 조롱을 받던 그녀는 이혼 후 아주 노골적으로 매도당했다. 거기다가 전에 애인이었거나 직원이었던 사람들이 그녀의 비행을 폭로하는 책자들을 연달아 내놓자 사라는 흐느껴 울면서 여러 날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여왕이 너무 걱정되어 사라가 자살하지 않는지 감시ㅎ는 지시를 내렸다는 신문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왕궁은 그 보도를 부인했다. 그것은 여왕이 전 며느리가 무슨 일을 벌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왕궁의 그러한 반응은 사라에 대한 비판기사를 써도 좋다는 묵시적 동의였다. 반면 사라는 미국에선 왕족 대접을 받았다. 그녀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또 그녀에게 370만 달러를 벌어 주었다. 그녀는 오션 스프레이 크랜애플 주스의 상업광고에 모델로 나가 120만 달러의 모델료를 받았고 또 국제체중감시위원회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100만 달러를 받았다. 그녀는 이처럼 톡톡히 소득을 올린 미국 판촉 행사를 하고 돌아와 몇 주 만에, 620만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완전 변제하여 여왕을 놀라게 했다. 사라는 '미국 사람들은 여자에게 숨쉴 틈을 주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퍼기가 타이틀을 잃은 다음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난 다이애나는 타이틀 반납에 반대했다. 찰스의 변호사들이 왕세자비 전하라는 타이틀 대신에 콘월 공작부인이 어떻겠느냐고 의사 타진을 해오자 다이애나는 거부했다. 그러자 그들은 HFRH(Her Former Royal Highness: 전 전하)라는 타이틀은 어떻겠느냐고 대안을 내놓았다. 다이애나는 언론계의 지지자들에게 성원을 호소했다. 그들이 여왕에게 호소하여 다이애나의 지위와 왕실 내 위상을 보유하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다이애나의 지지자들은 장래 국왕의 어머니로서 그 정도 대우는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역사가 존 그리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그녀가 HRH 타이틀을 갖지 못한다면 그녀는 마이클 오브 켄트 공주에게도 커트시를 바쳐야 한다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발생한다. 심지어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커트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찰스는 다이애나의 왕실 내 위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 특히 필립 공이 다이애나는 왕족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강경하게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필립이 볼 때 그녀는 '회사를 배반했고 또 그녀의 경솔하고 불충한 행동 때문에 최소한의 예우 이상은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이애나가 자신이 재혼하여 낳은 아이에게도 세습 타이틀이 주어져야 한다는 요구를 해오자 필립 공은 더욱 입장이 완고해졌다. 다이애나는 심지어 퀸 머더가 사망하면 클래런스 하우스를 자신의 공식 저택으로 해달라는 지나친 요구를 내놓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필립은 그녀의 타이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박탈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여왕도 거기에 동의했다.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결국 양의 털은 벗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다이애나의 협상대표가 말했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결국 배앗기고 말 것, 선선히 포기하라는 조언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변호사들은 그녀가 15년 결혼생활 중에 누렸던 것과 유사한 타이틀을 협상해 냄으로써 그녀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 그래서 '왕세자비 다이애나'라는 타이틀로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또 그녀가 '경우에 따라 왕실의 가족인 것처럼 고려될 수도 있다'라는 구절을 삽입했다. 그러나 법률적 문서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런 '경우'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코끼리가 하늘을 날아가는 경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이애나는 14살의 맏아들과 얘기를 한 다음 타이틀에 대한 싸움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윌승게 자신이 전하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신경쓰이겠느냐고 물었다. 윌스 왕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호칭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요. 엄마는 그저 엄마이니까요." 그러나 그녀가 소속되어 있는 세계의 기준으로 볼 때 그녀는 가장 가치있는 것을 박탈당했다. HRH를 박탁당한 그녀는 사회 내의 높은 지위를 잃어버렸다. 왕세자비 다이애나라는 타이틀로는 사회적으로 두 아들보다 지위가 열등한 것이다. 더 이상 왕족이 아니기 때문에 100여 개 이상의 자선단체의 후원자 역할도 할 수 없고 또 군부대의 명예 지휘관 자리도 내놓아야 했다. 바깥 세상에서 볼 때 35세의 왕세자비는 여전히 왕족처럼 빛나 보였다. 그녀의 반짝이는 아름다움은 그녀를 더욱 서정적인 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소속된 세계(로열스의 세계) 안에서는 더 이상 경쟁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타이틀을 박탈당한 효과는 며칠 안가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때 그녀에게 존경을 바쳤던 기자들이 방자하게 나왔던 것이다. 그녀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이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은 취재차 떼거리로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를 지르는 등 깡패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로열이었을 때, 그들은 설설 기었다. "제발, 마담, 한 번만 더 찍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그녀가 로열이 아니게 되자 그들은 전보다 덜 공경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한 사진기자는 자기 쪽으로 미소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헤이, 다이, 왼쪽으로 좀 고개를 돌려 주겠소, 오케이?" 보기 민망한 사진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에 무스를 바른 채 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찍은 사진도 있었고 그녀의 스커트가 히프까지 말려올라간 사진도 있었다. 한때 그녀를 공경했던 사진사들은 그녀가 왕족 지위를 상실한 것이 개인적 모욕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개인적 보복이라도 하려는 양 팝 가수와 록 스타에게 들이대듯 냉정한 카메라를 그녀에게도 들이댔다. 왕족이라는 후광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다이애나는 믹 재거,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의 유명 연예인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또다른 모욕적인 사건은 그녀가 즐겨 가는 백화점인 하비니콜스에서 쇼핑을 할 때 벌어졌다. 경비원이 감시 카메라를 그녀의 가슴 쪽으로 들이대어 그녀의 클리비지를 찍은 것이었다. 그 경비원은 절도죄로 입건되었고 법정에 출두하여 비디오 테이프를 제출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는 비디오 강간이라는 혐의로 고소되었다. 그러나 그 경비원을 변호한 여성 변호사는 다이애나를 질책했다. "왕족이든 아니든 어떤 사람이 낮은 클리비지를 내보인채 공중의 장소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그 클리비지를 쳐다보거나 사진 찍어도 좋다는 묵시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사진 찍는 행위를 비디오 강간 운운하며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왕가의 이혼은 1996년 8월 28일 확정되었다. '선'은 '바이 바이 큰 귀여'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큰 귀는 찰스를 가리킴. 역주). 심지어 테레사 수녀도 기뻐했다. "앞으로는 가정의 사랑과 화목을 강조하는 설교를 해야할 것 같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85세의 수녀는 인도의 한 기자에게 말했다. 영국의 총리는 찰스가 '급히' 재혼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이어 총리는 여왕에게 브리핑하면서 찰스가 만약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을 한다면 그건 군주제에 치명타가 될것이라고 경고했다. 왕실은 최대 스타를 잃어버렸지만 여왕은 다이애나 없이도 계속 쇼를 진행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발모랄, 윈저성, 버킹엄 성의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는 재떨이, 머그잔, 엽서 중 다이애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들을 모두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또 의회에서 왕실 가족을 위해 올리는 공식 기도에서 다이애나의 이름을 빼라고 요청했다. 여왕이 '런던 가제트'에다 개봉칙허(일종의 통보장)를 발간하라고 지시했을 때, 그것은 다이애나에게 마지막 굴욕이 되었다. 그것은 여왕 폐하가 정부, 대사관, 외교 사절 등에게 며느리였던 두 여자가 이제 왕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통보하는 공식 절차였다. "이건 윌리스의 재판이야, 그렇지 않아?" 퀸 머더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그녀는 사라 퍼거슨과 다이애나 스펜서의 왕실 내 위상이 박탈되었다는 사전 통보서를 받아들고 그렇게 말했다. 그 통보서에는 박탈되는 두 여인의 이름조차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퀸 머더는 과거에 윈저 공작부인에게서 왕족 타이틀을 빼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두 며느리의 타이틀을 박탈하는 일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왕실 직원들은 물개처럼 미끄러웠다. 그들은 그 살벌한 통보장이 일상적 의전 절차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사회적 호칭을 정확하게 통지하는 문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통지서가 살벌하고 또 보복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군주가 개봉칙허를 하나의 빗자루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70세의 여왕은 45년의 통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 주관하에 게임을 끝내는 방식을 알았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그녀를 보좌했던 디스레알리 같은 명민한 총리가 없는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 직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여왕이 신에 의해서 지명되었다고 믿었다. 여왕은 자신의 지위가 신의 권위로 수여된 것이기 때문에 정치인들처럼 여론의 향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군주제가 인기경쟁이 아니라 신성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자 여왕은 과거의 조치가 하나의 서막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임시 방편으로 윈저 가를 세워 제1차 세계대전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나갔다. 자신의 독일 부리를 부인하고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내세움으로써, 조지 5세는 독일인을 미워하는 국민 감정을 달랠 수가 있었다. 여왕은 할아버지가 군주제를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알고 잇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할아버지의 투자를 보존할 생각이었다. 여왕은 20세기의 영국 군주 중 세금을 내는 최초의 군주가 됨으로써 왕가 보존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이어 시빌 리스트(왕실 비용)에서 대부분의 가족을 제외시켰다. 국민들이 불타 버린 윈저 성의 보수 비용을 부담하지 않자, 그녀는 버킹엄 궁을 일반에 공개하고 입장료를 받아 보수 비용으로 충당했다. 그녀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방문함으로써 영국 내 가장 큰 교단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현재 군림중인 군주가 가톨릭 교회를 방문한 것은 4백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96년 현재 영국의 성공회 신자는 전 국민의 2처센트에 불과한 반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영국 기독교 신자 중 43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여왕의 여러 가지 양보에도 불구하고 2000년을 눈앞에 둔 지금 군주제는 여전히 취약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황금마차로 상징되고, 전세계에 영국을 대표하는 군주제는 이제 때묻은 제도가 되었고 괴이할 정도로 장대하기만 한 것이 되었다. 군주제라는 마차의 샤시(몸체)는 흔들거리고 바퀴는 삐걱거린다. 게다가 그 정신적 위엄마저 빼앗긴 마차는 이제 절뚝거리며 굴러가고 있다. 여왕은 퀸 머더가 사망하면 왕가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국상 기간이 지나가면 그 열정도 식어 버린다는 것도 안다. 지독히 현실적인 여왕이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을 세밀하게 준비한 플랜의 검토는 원하지 않았다. "이걸 지금 검토해야 할 필요는 없지?" 여왕은 오퍼레이션 라이언이라고 명명된 그 플랜의 서류 철을 옆으로 밀쳐 놓으며 말했다. 그 서류철은 퀸 머더의 사망 직후 언론이 취해야 할 절차를 5페이지로 요약해 놓은 것이다. 여왕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하면 윈스턴 처칠 이래의 가장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줄 생각이다. 퀸 머더는 사흘 동안의 조문 기간을 거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결을 고하게 될 것이다. 조의의 뜻으로 상업 방송국들은 광고 방송을 중지하고 퀸 머더의 업적을 회고하는 화면을 내보낼 것이다. 영결식은 영국 국민들에게 화려했던 과거를 호고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고, 나치 독일의 공습을 견뎌내고 그 위기에서 용감하게 대처했던 왕실의 되새기게 될 것이다. 보통 때에는 전혀 센티멘털하지 않은 여왕이지만, 퀸 머더가 아흔이 넘은 이후에도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곧 다가올 엄연한 현실을 회피하려고 했다. 여왕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엄마가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마거릿과 나만 외롭게 남게 되겠지요." 영국 국민의 가장 큰 두려움은 여왕이 갑자기 죽어서, 영국 국민과 찰스만 외롭게 남는 경우이다. 찰스의 이혼 이후 그에 대한 저항은 점점 더 커져 왔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그는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또 국민들을 대변하는 의회의원들은 인기없는 왕세자를 보호하다가 의원직을 잃고 싶지 않았다. 노동당 소속 의원 론 데이비스는 텔레비전에 나가 이렇게 선언했다. "찰스는 왕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간통한 자다... 나무, 꽃, 식물들과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자다... 그는 어린 두 아들에게 들판으로 나가 야생동물과 새들을 재미삼아 쏴 죽이라고 권유하는 자다..." 1997년 총리직에 오른 노동당 당수 토니 브렐어는 론 데이비스에게 그 발언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미래와 왕을 나무들에게 말을 걸고 피흘리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간통하는 환경주의자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사과했다. 블레어는 선거 기간 동안 군주제의 존속을 지지한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는 쓸데없는 과격한 제안으로 국민들의 보수주의를 자극하여 자신의 앞서 가는 입장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 철저한 왕당파였던 노동당은 이제 더 이상 통일된 당론을 갖고 있지 않다. 몇몇 이원들이 침묵을 거부하면서 의회의 입법으로 군주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좌파 의원인 폴 플린은 이렇게 말했다. "찰스가 왕으로는 부적합하다는 견해를 국민의 4분의 3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왕실 주위에는 늘 날파리가 윙윙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또다른 노동당 의원은 군주제를 시대착오라고 부르면서, 여왕의 통치가 끝나면 과연 세습 국가원수 제도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 국민투표를 해서 물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노동당 의원인 윌리 해밀턴은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20년 전에 나는 그런 국민투표 제안을 했다가 암살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나를 변태,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군주제를 비난하느니 차라리 하느님을 비난하는 것이 더 쉬웠습니다. 그렇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가디언'도 1996년에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전환점에서 영국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오락적 재미만으로 왕가를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어이없는 질문에 불과하다. '뉴욕 타임스'는 왕가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물론 영국은 왕가를 존속시켜야 한다. 우리 미국인들을 위해서라도." 따지고 보면 영국 왕실처럼 세련된 배우도 없다. 오래된 보드빌 악극단처럼 그들은 무대 위로 올라와 익숙한 절차에 따라 연기를 펼쳐나간다. 루즈를 바른 기이한 사람들처럼 그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화려한 연기를 해보인다. 의상만을 놓고 볼 때 그들은 아직도 정기적인 구경꾼을 끌어모을 수 있지만, 멋쟁이 왕세자비가 퇴장하는 바람에 구경꾼을 크게 잃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멀리서 보여질 때 가장 멋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는 자신들의 결점이 여지없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화려한 악극단은 나쁜 년 역할을 맡은 퍼기가 무대에 등장하자 조롱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무대에서 사라지자 그 뒤에는 아주 매력적인 왕자가 등장했다. 결혼의 실패를 통해 앤드루 왕자는 치욕 앞에서도 위엄있게 행동하는 처신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전처가 그 무슨 말로 자신을 모욕하고 또 비난을 퍼부어도 침묵으로 일관하여 왕자로서의 위신을 지켰다. 그의 아버지는 아침 무대의 우상으로서는 이제 한문이 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도자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얼굴에 검버섯이 생겨나면서 잘생긴 모습은 사라지고 팽팽한 피부에 날카로운 용모가 드러나 더욱더 매 같은 인상을 풍긴다. 필립 공이 여왕에게 충실하게 봉사했기 때문에 대다수 영국 국민둘은 그의 실수를 눈감아 준다. 그러나 필립은 촌스러운 발언을 하여 국제적 망신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그는 '영국 여자들은 요리를 할 줄 모른다'라고 말하여 영국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나 여왕은 남편의 각종 실수에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녀는 남편의 촌스러운 매너를 눈감아 주었고 어색하고 당돌한 유머를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는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왕가의 허락하는 지지도를 걱정했고 왕가를 바보로 만드는 언론을 비난했다. 그는 부모에게 미래(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21세기를 대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발모랄 성에 들른 찰스는 왕가가 앞을 내다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그 자신, 부모, 형제, 여동생, 고문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2주에 한 번씩 만나 회의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회는 '웨이 어헤드 그룹'이라고 명명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황폐해진 윈저 가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루는 의제에는 왕실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아이디어들도 들어있다고 한다. 가장 화급한 의제는 왕실이 더 이상 국고보조를 받지 않는 문제이다. 이 위원회는 연간 지급되는 시빌리스트(납세자들로부터 받는 약 1,400만 달러)를 폐지하고 왕실 소유 재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왕실로 되돌리는 일이다. 왕실 소유 재산에는 런던의 노른자위 보동산 수십만 에이커도 들어 있다. 만약 이 대지들을 임대해 준다면 연간 1억 달러 이상의 임대료를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들 왕실 재산은 1760년 조지 3세에 의해 의회에 헌납되었다. 또 다른 의제로는 11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장자상속권을 폐지하고 여성에게도 동등한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자는 것도 있다. 또 왕실도 다운 사이징(규모 축소)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HRH 타이틀을 가진 아저씨, 아주머지, 사촌들을 양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왕실의 일부 가족이 사망하면 '회사'는 여왕, 여왕 부군, 자녀, 왕위 계승권을 가진 손자 등에게만 HRH 타이틀이 부여될 것이었다. 찰스는 자신이 특정 신앙의 수호자가 되지는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의회입법에 의해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권리장전과 왕위상속법에 의해 군주는 영국 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옹호하겠다고 맹세해야만 한다. 그러나 찰스는 이 두 교회의 성찬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웨이 어헤드 그룹'은 군주를 종교의 의무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와 정치를 분리하자고 제안했다. 찰스는 군주가 된다면 개신교의 전통을 옹호해야 하는데 이것도 그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그는 왜 로마 카톨릭 신자는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또 군주가 로마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도 6천만 영국 국민 중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로마 카톨릭 신자를 차별하는 불공정 조항이라고 생각했다. 찰스 왕세자는 왕위에 오르겠다는 결심이 확고하다. 비록 젊은 아내를 내팽개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정부와 사귀고 있지만 그는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점증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이 버티고 있다. "나는 영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화려한 과거를 꿈꾸는 사람들조차도 찰스가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 공화제 협회의 회장인 스티븐 해슬러 교수는 만약 찰스가 왕위에 오른다면 영국은 두 쪽이 나고 말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무정부 상태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일한 대안은 여왕이 동의하는 의회입법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왕이 사망하거나 양위하는 경우, 군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국가 수반을 선거로 뽑아야 합니다."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왕이 스스로 왕조를 해산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왕당파들은 이런 제안에 필사적으로 반대한다. 그들은 만약 군주제를 폐지하면 영국은 커다란 상처를 입고 사회적으로 대격변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군주제의 폐지는 정부조직을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성문헌법을 제정하는 등 대대적인 후속 조치를 가져와 국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또 계급제도가 사라지고 상원은 붕괴해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측에 대해서 공화당 지지자들도 동의하고 또 그런 대대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국가를 재건하려면 그런 구조적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적 논의가 시작되었고 전 같으면 대역죄에 해당되는 말들이 아무런 제지없이 발언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국 국민들은 공화당파와 왕당파 사이에 끼어 있다. 그들은 군주제를 유지하고 싶어하지만 왕세자는 제치고 싶어한다. "그 대답은 바로 ABC(Anybody But Charles: 찰스 빼고는 다 좋다)입니다." 한 의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여왕이 차라리 앤 공주를 다음 번 군주로 지명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론조사도 이 아이디어를 크게 지지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찰스를 건너 뛰어, 다이애나가 말한 것처럼, 왕세손으로 바로 넘어가자고 말했다. 도박사들은 군주제가 21세기까지 지속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돈을 걸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도박비율이 100대 1이었으나 그 다음 해에는 5대 1로 급격히 떨어졌다. 1996년 예측불가의 이 문제에 대하여 윌리엄 힐 소속의 한 런던 도박사는 이렇게 예측했다. "노련한 도박사는 여왕 폐하가 75세에 물러나면서 왕위를 찰스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현재로서는 여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5년 동안 여오아은 총기와 협상을 벌일 겁니다. 집권 정부가 노동당이든 보수당이든 상관없습니다. 양당이 군주제의 지속을 원하니까. 만약 여왕이 그렇게 요구하면 아무도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ㄴ." 그러나 그 '만약'이 변수이다. 어떤 도박사들은 의무를 강조하는 여왕의 모정을 의심하기 때문에 그 '만약'에다 돈을 걸기를 주저한다. 그들은 무관심한 어머니였던 여왕이 중년의 아들에게 왕관을 물려 줄 것 같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여왕은 자신의 의무에 혼신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왕위가 평생의 일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니 양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볼 때 여왕이 천사들 앞으로 가기 전에 물러날 것이라는 가능성은 희박한 겁니다." 런던의 한 도박사가 말했다. 여왕의 군주 자격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여왕은 어머니로서는 실패했다. 네 아이 중 셋은 이혼했고 막내는 아직도 제대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 해 전 이집트의 마지막 왕이었던 파루크는 21세기가 되면 대부분의 왕가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서 파루크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즈음에는 오로지 다섯 왕만 남을 것인데, 하트, 클로버, 다이아몬드, 스페이드(모두 포케 게임의 패)의 네 왕과 영국 왕이 그것이다." 파루크 역시 영국 왕가의 매력에 그토록 매료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후 그 마력은 아주 심하게 닦여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무게는 스스로 새로워지는 그 제도의 존속을 선호했다. 영국이 군주제를 재평가하는 그 시점에도 왕실은 적응과 타협의 수완을 발휘하면서 파괴에 도전하고 있다. 종교와 애국심에 신비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왕가는 철폐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영국의 정신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도버 해안의 하얀 절벽처럼 영구적인 이 제도는 아름다운 마차 행진과 귀중한 신화를 가슴 속 깊이 아껴온 영국국민들 속에서 1,2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이다. 왕가의 마력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골수 왕당파들조차도 모든 왕과 왕비가 선량하고 고상하고 현명했던 것은 아니라고 시인한다. 그런데도 왕가는 천년 넘는 세월을 존손해 왔던 것이다. 영국 국민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제도를 가져야겠다는 필요를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위대하고 장업한 인물이나 사물을 숭배하고 싶은 순수한 동경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군주제는 이제 신 같은 광휘가 부식되었고 또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수모를 겪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장엄함에 대한 매혹과 새로워진 왕권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한국어판 저자 후기 윈저 왕가는 1997년 8월 31일 자정 직후, 36세의 왕세자비가 사망하면서 암흑의 시기를 맞이했다. 파리에서 오토바이를 탄 파파라치에 의해 추적을 당하던 그녀는 타고 가던 벤즈 리무진이 지하차도의 콘크리트 벽을 들이박자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사고 발생 현장에서 사망한 운전사는 술 취한 상태로 과속 운전을 했다. 프랑스 경찰 당국은 벤즈 차의 속도계는 시속 121마일을 가리켰다고 말했다. 다이애나의 남자 친구인 도디 파에드도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사망했다. 유일한 생존자는 조수석에 타고 있던 보디가드뿐이었다. 왕세자비의 끔찍한 사망 소식을 알리는 BBC의 보도는 사람들의 가슴에다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다. 조의를 표하기 위해 영국 국기가 반기로 내걸렸고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가 추모의 뜻으로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런 의전상의 대우는 바로 몇 달 전에 다이애나로부터 박탈되었던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마치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 떨어져서 끔짹한 어둠 속으로 추락해 버린 느낌이었어요." 영국의 총리 토니 블레어는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비탄에 빠진 영국 국민들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블레어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국민의 왕세자비였습니다. 그녀는 앞으로 윌의 마음과 추억 속에서 영원히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을 것입니다." 길거리에 서서 넋 놓고 울던 사람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런던 시민들은 교회에 모여 기도를 올렸고, 그녀가 다니던 체육관을 돌아보았으며, 그녀의 단골 레스토랑들 앞에 조화를 갖다놓았다. 그들은 다이애나가 살았던 켄징턴 궁 앞에 모여들었고 철제 대문 앞에 애도의 화활을 가득 쌓아올렸다. 한 부케의 카드에는 이런 글귀가 쒸어 있었다. "숙녀로 태어나 왕세자비가 되었고 성녀고 돌아가셨도다. 그리고 이제 상심한 사람들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도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민을 대표하여 애도의 뜻을 표시했고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도 간절한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왕족이 없는 도시인 워싱턴 디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왕세자비를 여왕처럼 받들어 모셨다. 왕세자비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기 위해 주미 영국 대사관을 찾은 수백 명의 사람들은 여러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서야 추모의 뜻을 표시할 수 있었고, 또 조문객 방명록에다 서명할 수 있었다. 뉴욕 시에서 벌어진 유에스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테니스 스타인 안드레 아가시는 어깨에 검은 리본을 매단 채 게임을 했다. ㄱ고 제네바의 국제 적십자사 본부는 사망한 왕세자비를 추모하여 반기를 게양했다. 왕세자비는 사망하기 얼마 전에 지상의 지뢰를 철거하라는 적십자사의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 보스니아로 직접 날아가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왕세자비가 사망하기 수주 전, 여론 조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과반수의 국민들은 더 이상 왕족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보였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윈저 왕가에 대한 실망감이 넓게 확산된 것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18--24세의 젊은 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들은 영국이 왕실 없이도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뻔뻔스럽게 벌리는 손과 챙기기만 하는 주머니를 가진 자들'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다이애나에게 조의를 표시하기 위해 버킹엄 궁 앞에 모인 수많은 조문객들 사이에는 왕실에 대한 암묵적 비판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왕실은 그때 스코틀랜드에 있는 발모랄성에 칩거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버킹엄 궁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끼던 한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여왕 폐하는 국민들 앞에 나타나 국민들을 위로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폐하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것도 아닐 겁니다. 폐하도 마음 아파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 한마디의 다정한 말, 단 한 방울의 눈물, 단 한 번의 제스처를 보이실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러나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고 난 직후 며칠 동안 여왕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분명 충격을 받은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두 언니와 함께 파리로 날아가 그녀의 시신을 고국으로 운구해 왔다. 왕실 기준에 따라 왕가의 휘장이 둘러쳐진 그녀의 관 옆에 서 있는 찰스 왕세자는 황량해 보였다. 영국 해군의 의장대가 그 관을 번쩍 쳐들어 왕세자의 런던 내 사저인 세인트 제임스 궁으로 운구해 갔다. 찰스는 관이 안치된 직후 15세의 윌리엄, 12세의 해리와 함께 지내기 위해 발모랄 성으로 떠났다.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누나를 죽게 만든 언론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다이애나의 이미지를 추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편집자들은 양손에 피를 묻힌 채 돈만 밝히는 자들'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젠가는 언론이 누나를 죽이고 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누나의 죽음에 개입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혼자 살고 있는 다이애나의 친 어머니 프랜시스 샨드 키드(61)로부터는 그 어떤 공식적인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슬프게도 그녀와 다이애나는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사이였다. 그러잖아도 서먹했던 모녀 관계는 샨드 키드 부인이 다이애나 사망 몇 주 전에 '헬로!'와 인터뷰를 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다이애나는 어머니가 자기를 팔아먹었다고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비난했다. 이 잡지는 다이애나의 어린 시절, 식사장애, 찰스 왕세자와의 관계 등을 말해 주는 조건으로 다이애나의 생모에게 35만 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이애나의 어머니는 사생활을 고백하는 텔레비전 인터뷰를 가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싸잡아 비잦했지만, 결혼이 파경에 이른 원인을 말할 때는 딸의 편을 들지 않았다. 또한 찰스 왕세자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딸이 이혼하면서 왕족 타이틀을 박탈당한 것을 즐기는 듯한 발언을 했다. 높은 신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이애나는 어머니가 털어 놓은 개인적 세부사항에 대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리처드 케이 기자에게 말했다. 또한 그러한 기사가 나간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그 잡징 '크게 실망했고 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그 잡지가 다이애나의 상반신을 노출한 사진(스페인에서 찍은 것)을 입수하고서도 게재하지 않았던 1994년 이래 그 잡지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다음 번 자선행사 때 '헬로!'의 사진 기자들을 출입금지시켰다. '데일리 메일'은 그녀의 이러한 반응을 1997년 5월 28일자로 보도했다. 이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다이애나, 어머니의 스토리에 분노!" 켄징턴 궁 앞에 서서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던 한 흑인 남자는 이 에피소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홀대를 당했습니다. 남편, 애인들, 가족들... 친정 사람들과 왕실 사람들... 그녀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해 준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그녀가 우리를 평가해 주었기 때문이죠?" 그 흑인 남자는 한 벌의 카드에서 하트 무늬의 여왕카드를 뽑아들더니 그것을 애도의 꽃다발 위에다 올려놓았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더니 자신의 추모 예물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W.H.오든의 싯귀 위에 풀로 붙여진 삼중관을 쓴 왕세자비의 사진이었다. 그녀는 나의 북, 나의 남, 나의 동, 나의 서, 나의 일하는 주일, 나의 일요일 휴식,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말, 나의 노래, 나는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했건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네. 별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별들아 꺼져라 달을 가려 버리고 태양을 뜯어내라. 대양을 흘려 없애 버리고 숲을 쓸어내라. 이제 그 어떤 것도 내게는 쓸모없게 되었느니. 꽃다발과 동물 인형들 사이에 으ㄲ어진 카메라가 한 대 놓여 있었고 거기에 이런 카드가 붙어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러운 왕세자비를 죽인 살인무기." 어떤 사람들은 다이애나가 에마드 모하메드 알 파에드(친구들에게는 '도디'로 불림)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위로를 얻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망 전 5주 동안에 그와 네 번의 휴가를 보냈는데, 끔찍한 교통사고로 사망한 날은 공교롭게도 네 번째 휴가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그들의 로맨스가 공식적으로 알려지자, 런던의 헤로즈 백화점과 파리의 리츠 호텔을 소유한 억만장자 모하메드 알 파에드의 아들인 도디의 사진이 전 세계 유명 신문에 등장했다. 영국에서 가장 큰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뉴스 오브 더 월드'는 도디를 가리켜 금년 41세의 플레이보이로서 영국의 귀족사회에 결혼해 들어오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가 화려한 파티를 개최하기를 좋아하고, 값비싼 시가를 피우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데이트르르 한다'고 보도했다. "그는 미래의 영국왕의 의붓 아버지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영국 언론들이 다이애나의 새 구혼자를 대하는 경멸적인 태도를 파악한 '뉴욕 타임스'는 도디를 '계급 집착적인 영국 사회에서는 따돌림을 받는 부유한 젊은이'라고 보도했다. 그와 다이애나의 로맨스는 1997년 7월에 시작되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왕세자비와 두 아들을 프랑스 리비에라의 파에드 가족 전용 빌라에 초대하여 파에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영국 언론은 영국 정보로부터 시민권을 거부당한 남자의 초대에 응한 다이애나를 비난했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아랍인인 알 파에드는 영국 의원들에게 뇌물을 준 사실은 시인했지만, 자신이 영국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인종차별이라고 말했다. '왕세자비와 두 아들은 파에드 씨의 그런 배경을 알고서는 그 사람의 신세를 지기가 거북할 것이다'라고 '데일리 텔리그래프'는 선언했다. 그 다음날 다이애나가 에마드 모하메드 알 파에드의 요트에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사진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녀는 도전적인 미소가 아니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휴가 여행 동안 다이애나는 그녀를 쫓아 생트로페까지 내려간 기자들에게 약간의 프라이버시를 요구한 다음 깜짝 놀랄 만한 뉴스에 미리 대비하라고 말했다. "두고 보세요, 당신들은 내가 다음 번에 벌일 일에 깜짝 놀랄 테니... 우리 아이들이 자꾸 나보고 영국을 떠나라고 해요. 그렇게 하는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나보고 해외에서 살라는 거예요. 내가 늘 런던에만 있으면 사람들이 자꾸 욕이나 해대고 어디로 가나 나를 쫓아다닌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길 좀 떠나야겠다는 압박을 받아요. 윌리엄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윌리엄은 그러다가 기분이 아주 나빠지고 말아요. 나는 이 여행을 아주 비밀로 하려고 했어요." 그 다음날 신문이 일제히 왕세자비가 영국을 떠날 계획을 한다고 보도하자, 그녀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성명을 번복한다고 말했다. 기자들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아이들이 아주 멋진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나중에 헤로즈 백화점의 대변인인 마이클 콜에게 말했다. 그녀는 '데일리 메일'의 리처드 케이 기자에게 개인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공직 생활을 그만둘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케이 기자느 이렇게 썼다. "그러면 그녀는 늘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초상(그녀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한다)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밀한 개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도디와 다이애나의 사진이 전 세계의 타블로이드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고, 또 망원렌즈로 잡힌 두 사람의 키스 사진은 5백만 달러의 사진료를 받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선데이 미러'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영혼의 반려자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둘 다 영국의 기성제도와 충돌한 경험이 있는 국외자들이다." 도디 아버지의 요트인 사르디니아 호를 타고 하루종일 바다를 항해했던 8월말, 두 사람은 아버지의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날아가 역시 아버지의 호텔인 리츠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 다음날 다이애나는 런던으로 날아가 두 아들이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그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두 아들은 발모랄 성에서 아버지 찰스 왕세자와 왕실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 며칠 뒤인 9월 6일(일요일), ㅈ은 왕자 윌리엄과 해리는 아버지와 함께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서서 어머니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올렸다. 다이애나에게는 대포 소리와 소리죽인 북소리가 울려퍼지는 국장이 허용되지는 않았다. 여왕의 권위로서 충분히 그런 장례 절차를 허가해 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주지 않은 것이었따. 그 대신 왕궁은 '독특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독특한 영결식'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천 년 동안 영국의 군주들이 대관식을 거행하고 또 사후에는 매장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에는 2천 명의 사람들이 초대받았다. 그 뒤에 왕세자비는 브링턴 마을에 있는 스펜서 가의 영지에 조용히 매장되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초대된 조문객들은 왕족에서 현실로 하야한 다이애나의 짧고도 화려한 생활의 면면을 표상하는 모든 사람이 초대되었다. 그러나 사원 바깥에 모여서 애도를 표시한다는 수십 만의 사람들은 그녀가 왕실로부터 받아온 것 이상으로 오아실에 더 많은 위엄을 가져다 준 젊은 여인이었음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은 병든 영국 왕실에 새로운 활력을 불었다. 그녀의 독특한 마법은 거대한 후광처럼 윌리엄 왕자를 둘러쌌다. 엄마를 쏙 ㅃ닮은 어린 왕자가 어머니의 사망일에 고개를 푹 숙이고 교회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린 왕자의 슬픈 표정에 가슴이 찡해진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들이 왕으로 등극하기를 바랬던 어머니의 꿈을 기억했다. 영국의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친절과 자선을 베풀었던 아름다운 왕세자비의 그런 꿈을 실현시켜 주자! 그녀가 죽던 날, 영국 국민들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간 생각들 중 그것처럼 더 소중한 생각은 없었다. 다이애나의 친절함은 세익스피어의 말 '아름다움은 친절과 함께 살거니'를 연상시켰다. 왕실의 그 누구보다도 더 명확하게 다이애나는 20세기의 왕세자비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내민 손은 황금의 손이었다. 왕족의 하얀 장갑을 끼지 않은 순백의 맨 손이었다. 그녀는 높은 신분의 여인이었지만 결코 오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취약함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나누어주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몸소 부드러운 강인함을 보여 주었고, 그렇게 하여 그들도 우울을 박차고 불은을 견뎌내고 마침내 불행을 이겨낼 수 있다는 신념을 주었다. 그녀는 섣부른 꿈을 남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족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사람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더 좋은 느낌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밝은 기분을 갖도록 해주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녀의 때이른 죽음을 그토록 애통해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 잃었다는 것을 가슴 속 깊으 ㄲ닫고 있는 것이다. 역자의 말 - 진흙과 백자 피천득 선생의 수필 '가든 파티'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영국에 여왕이 계시므로... 국민들은.. 영국의 유구한 전통이 계승된다는 행복감을 느끼리라고 믿는다. 여왕은 우아와 자혜의 상징으로 아름다운 동화를 실현한 느낌을 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지난 1953년에 즉위하여 재위 45년이 되는 지금껏 바람 부는 현실 속에서 그 동화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바람둥이 남편인 필립 공, 속만 썩이는 여동생 마거릿 공주, 우유부단한 아들 찰스 왕세자, 뻣세기가 남자 못지않은 앤 공주, 그리고 왕족이 아닌 평민 계급에서 데려온 두 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 이 모든 풍상을 헤치고 여왕은 이제 대망의 즉위 50주년(2002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1917년에서 1997년에 이르기까지 80년에 걸친 윈저 왕가의 내밀한 스캔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로서 왕실 가족의 모든 비행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지만, 그래도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여왕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왕실이라는 '동화'를 지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적으로 기울인 헌신과 노력이 세밀하게 다루어져 있는 것이다. '시대착오' 또는 '구태의연'이라는 거센 비판 속에서 군주제의 전통을 이만큼이라도 지켜온 여왕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1952년 5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 조지 6세의 태산 같은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둘째 왕자로 태어난 앨버트 왕자(후일의 조지 6세)는 1936년 맏형 에드워드 왕자(에드워드 8세0가 느닷없이 양위를 하면서 국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부터 어린 딸 엘리자베스를 미래의 여왕으루 훈련시키는 아버지의 애틋한 부정은 후일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어 그 모든 시련을 견뎌내는 힘이 되었다. 이 책의 후반에서 집중 조명된 다이애나와 찰스의 파경, 둘째 며느리 사라 퍼거슨의 이해할 수 없는 음란한 행동 등은 왕실도 이혼과 결손가정이라는 영국적 사회 현상(영국은 미국에 이어 서방 세계에서 이혼율 2위 국가임)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왕실의 이런 고뇌를 모두 견디고 군주제라는 커다란 집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여왕의 모습은 정말 '바람 부는 현실 속의 동화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 동화는 현실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이 있는 것이다. 진ㅎ에 유약을 묻혀 강력한 불을 쏘이면 본래의 진흙 상태를 소멸하고 하얀 백지가 되듯이, 현실의 갖은 지저분한 모습에 사라오가 고뇌의 강력한 불길을 쏘이면 그것이 더욱 견고한 동화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백자도 바닥에 내팽개치면 원래의 진흙으로 되돌아가듯이, 1,200년 역사의 군주제도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힘겨운 노력이 없으면 역시 길 위의 먼지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영국 왕실은 진륵과 백자라는 양자택일의 시점에 도달했다. 특히 왕세자 찰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왕실 전체를 공멸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상황은, 빅토리아 여왕, 에드워드 왕자, 조지 왕세손으로 이어지는 1900년의 빅토리아 말기와 유사하다. 모후인 빅토리아 여왕 사후에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이미 59세의 나이로서 평생 여자들의 품에 안겨 샴페인이나 마시며 인생을 탕진한 사람이었다. 그가 즉위 10년이 못되어 사망하자 조지 왕자가 조지 5세로 등극하여 1917년 윈저 왕가를 창건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백년의 세월을 거리에 두고 영국 왕실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왕조의 운명은 과연 백년 전처럼 파격적인 비약을 맞이할 것인가? 가령 영국 왕위가 에드워드 7세처럼 평생 여자 품에 안겨 인생을 탕진해 버린 찰스 왕세자를 건너뛰어 바로 왕세손 윌리엄에게로 넘어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어떠한 결단을 내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여왕의 마음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다. 남편 필립공의 외도를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도 왕실을 위해 눈감아 주었고, 다이애나가 분명 억울한 입장이었는데도 역시 왕실을 위해 찰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렇다면 여왕은 다시 한 번 왕실을 위해 아들 대신 손자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이 책을 전부 읽어 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또한 얼마 전에 비극적으로 죽은 다이애나가 과연 왕실 관료제도의 희생양이냐 아니면 결손가정 출신의 못된 며느리에 불과한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런저럼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읽을 거리가 풍성한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양서를 번역할 기회를 주신 동방미디어 측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1998년 1월 이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