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로열스, 1 저자명: 키티 켈리 역자명: 이종인 출판사명: 동방미디어 "...가끔씩 집안의 내력은 외부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가문은 그 자신의 동화 같은 먼지 더미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볼 때 그 가문의 내력에서 찔끔찔끔 터져나오는 엄청난 거짓말과 허구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고 만다..." 캐롤 쉴즈, [스톤 다이어(The Stone Diaries)] 중에서 "귀족 정치라는 말이 합당해서 민주주의도 자신있게 그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나는 귀족 정치를 믿는데 내가 믿는 귀족 정치는 계급이나 영향력에 바탕을 둔 힘의 정치가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사려깊고 용기있는 사람들의 귀족 정치이다. 그 귀족 정치의 구성원들은 모든 나라 모든 계급 모든 시대에 발견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또 그들이 서로 만날 때에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묵계가 성립한다. 그것은 그들이 진정한 인간적 전통을 대표한다는 것이며 또 인류가 잔혹과 혼란을 극복하고 우뚝 서게 되는 영원한 승리자임을 그들이 대표한다는 것이다." -E.M 포스터 1941년에 발표된 한 에세이 중에서 들어가는 말 키티가 그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 영국 속담대로 '고양이도 왕을 쳐다볼 수 있는' 것이라면 키티(작은 고양이란 뜻 즉 저자 자신. 역주)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왕실을 쳐다보기 시작했을 때 나이든 왕의 뒤를 이은 현대적인 여왕이 왕위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에게 편지를 내어 윈저 왕가에 대한 책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조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손한 태도로 여왕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여왕의 공보 비서관은 여왕이 평생 인터뷰를 해 본적이 없다고 응답해 왔다. 왕실의 공보 비서관인 찰스 앤슨은 버킹엄 궁 편지지에다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의 정책은 군주제와 왕가에 대한 진지한 저서, 그리고 공공의 관심사에 관련된 사실적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려는 성실한 저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먼저 집필할 책의 주제를 밝히고 또 질문하고 싶은 특정 분야에 대해 알려주면 왕실에서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책의 개요를 제출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개요를 완전 비밀로 취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과연 그 개요를 여왕이나 나머지 왕실 가족들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또는 그 개요를 영국 언론에게 공개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당시 영국 언론들은 내가 여왕의 남편인 에든버러 필립 공에 대한 전기를 쓰고 있다고 부정확한 보도를 했던 것이다. 필립 공은 누군가가 허가없이 자신의 전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동요하고 있었다. 1994년에 그와 함께 여행을 했던 영국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나를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필립 공이 뉴욕을 방문 했을 때 한 기자 키티 켈리가 집필하고 있는 책에 대해서 질문하자 그는 나는 내 명예를 보호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발언은 영국 언론에 하나의 파문을 일으켰다 투데이의 크리스 허친스 기자는 이렇게 썼다. "이전에 왕실 사람이 이런 노골적인 경고를 개인적인 어조로 말한 적이 없었다. 필립 공은 고소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고 버킹엄궁 변호사들은 이미 완전 경계 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데일리 스타는 필립 공의 말을 놓고서 '필립 공, 소름끼치는 전기작가 키티 켈리에게 위협을 가하다. 당신의 책이 너무 건방지면 나는 고소하겠다'라고 보도했다. 그 기사가 나가자 워싱톤에 있는 내 사무실로 왕족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웨일스 뉴욕 등지의 사람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 그들의 부모가 왕족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진 가족 일기의 발췌본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가 친척의 편지등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출생증명서는 내놓지 않았다. 그들은 결정적 문서가 없는 상태에서도 자신들이 영국 왕실의 한 구성원의 혼외정사에 의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나는 여왕의 공보 비서관에도 다시 편지를 내어 윈저 왕가에 대해 권위있게 말해 줄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세계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미국 작가인 나는 일반 대중들이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정확한 기록을 얻고자 하니 공보 비서관이 도와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윈저 왕가에 대해서는 많은 저서가 이미 나와 있지만 그 저서들의 내용은 상호 모순되어 있다. 저명한 역사가들도 기본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했다. 윈저라는 왕가 이름의 철자가 어떻게 된다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별로 의견이 일치되지를 않았다. 당시 나는 아직도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향후 집필할 책은 영국 왕가의 이름이 윈저로 바뀐 1917년부터 현재까지 연대순으로 책을 기술해 나갈 것이라는 점만 밝혔다. 그리고 책의 개요는 제출하지 않는 대신 결혼 재정 작위 수여 등에 대한 질문을 담은 질의서 두 페이지를 제출했다. 앤슨 씨는 그 질의서에 대한 답변으로 632페이지에 달하는 로열 엔사이클로피디어를 보내왔다. 조사를 하기 위해 워싱톤과 런던을 왕복하는 도중 나와 앤슨 씨는 더 많은 편지를 교환했다. 1995년 나는 연합국 전승기념일 1945년 연합국이 유럽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날인 5월 8일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가있었다. 나는 또다시 더 많은 질문을 준비하여 왕궁을 접촉했고 인터뷰를 하게 해 달라는 요구를 새로이 제출했다. 이때에도 나는 앤슨 씨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통화만 했다. 우리는 나치 독일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는 50회 전승기념일 행사의 감동적인 의식을 잠깐 얘기했다. 그리고 그 전날 95세의 퀸 머더(Queen Mother,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를 부르는 공식명칙)가 버킹엄 궁의 발코니에 나와 왕궁 바깥에 모인 5만 명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던 감동적인 장면도 얘기했다. 50년 전 퀸 머더는 바로 그 발코니에서 승리를 기뻐하는 온 국민들로부터 칭송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1995년의 그 감동적인 장면에는 1945년 당시 그녀 옆에 서 있던 국왕 조지 6세와 윈스턴 처칠 수상이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발코니에 우뚝 서 있는 퀸 머더의 모습은 전쟁중 영국민이 보여 주었던 불굴의 투혼을 잘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행사들은 우리에게 어떤 결속력을 가져다 주죠... 그것들은 군주제가 영국민에게 딱 들어맞는 제도임을 보여 줍니다." 여왕의 공보비서관은 전화상으로 내게 말했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워싱톤에 돌아왔을 때, 앤슨 씨는 더 이상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의 협조를 오해하여 내 책을 '왕실의 허가를 받은 전기'라고 선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걱정일 뿐이다. 아무튼 앤슨 씨는 그런 걱정을 왕실에 우호적인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기자에게 털어놓았고 그래서 그 신문은 '왕궁은 여왕을 다룬 미국 책에 긴장중'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이 신문 보도 속에서 왕실의 공보비서관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즈 켈리에게는 아무런 특별 협조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우리는 왕궁에 제출된 한두 가지 사실 관계에 대해서 답변을 했습니다. 그것은 왕실 관련 저서를 집필하는 저자들에게 통상적으로 제공하는 편의지요. 이런 편의를 봐주었다고 해서 특별한 정보 접근권이 제공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며칠 뒤 나는 찰스 앤슨으로부터 마지막 편지를 받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제공한 제한적인 도움이 장래 그 어떤 방식으로도 오해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이 시점에서 강조해 둡니다." 이 편지도 영국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 가디언에는 '왕실은 행동에 돌입'이라는 기사가 실렸고 그 아래에 버킹엄 궁의 개집을 지키는 두 마리 코기 (웨일스산의 다리가 뭉툭하고 허리가 긴 개로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애완견임. 역주) 만화를 그려 넣었다. 만화 속의 한 마리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 개 밑에는 이런 캡션이 들어가 있었다. "키티! 멍멍... 그 이름만 들어도 화가 나." 왕실 공보 비서관의 공개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 3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할 수가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전에 왕실 직원이었거나 아니면 현재 직원으로 근무중이다. 나는 정보 제공에 돈을 주지는 않았지만 왕실로부터 보복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철저한 비밀 보장을 약속했다. 왕실 직원들은 대부분 채용될 때 비밀준수 협약서에 서명을 하기 때문에 솔직한 얘기를 털어 놓는다는 것이 큰 위험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런 정보를 털어 놓은 사람의 신분이 노출된다면 그는 해고 될 수도 있었다. 또 이미 왕실 직원에서 은퇴한 사람들은 연금의 혜택을 중단당할 수도 있었다. 찰스 앤슨은 내게 보낸 초기의 편지에서 그 점을 분명히 했다. "왕실에 채용될 때 직원들이 서명한 비밀준수 협약이나 기타 약속을 위반하는 경우, 우리는 대단히 심각하게 대응할 것임을 밝혀 둡니다." 그러나 왕실 직원 친구 친척을 포함하여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나는 왕실의 내부와 왕실 가족의 실제 방향에 대한 내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나는 런던 도심에 있고 버컹엄 궁으로부터 몇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켄징턴 궁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마거릿 공주가 해외여행을 떠나고 궁에 없을 때였다. 그녀의 직원 가운데 내가 잘 아는 한 사람이 내게 마거릿 공주가 사는 곳을 한번 둘러보라고 제안했다. 나는 왕궁 안에 들어가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 궁의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경비원들의 쾌활한 환대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나의 이름이나 방문 목적을 묻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잘 아는 사람이 나를 마중 나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은총과 혜택의 숙소라고 알려진 아파트부터 돌아다보기로 했다. 그것은 영국 국왕이 소수의 직원들에게 내어 준 숙소였다. 일부 조그마한 아파트는 수도자의 독방같이 작았다. 깨끗하긴 했지만 비좁았고 침대 의자 소파 테이블 등 필수적인 가구만 들여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어떤 곳은 공간이 너무 좁아 화장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욕실과 붙어 있었다. 그러나 한 직원이 말했듯이 그 아파트는 임대료를 안내는 공짜 숙소였다. 우리가 마거릿 공주 전하의 숙소로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너무 믿기지 않아서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여인의 여동생 집에 와 있기 때문에 그보다는 더 웅장하고 더 위압적인 어떤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이아몬드가 새겨진 벽과 루비가 박힌 마루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조화를 꽂아 놓은 창턱에 있는 화병과 연결 코드가 심하게 망가진 전기 히터뿐이었다. 접었다 폈다 하는 알루미늄 식판이 접혀진 채 거실 문 뒤에 보관되어 있었다. 공주가 혼자서 식사할 때는 그것을 텔레비젼 앞에다 펴 놓고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은은한 푸른색이 칠해진 어떤 방 입구에는 두 개의 거대한 흑인 조상이 세워져 있었다. 공주는 그 방에다 예쁜 컵 크리스털 잔 주전자 등을 많이 수집해 놓고 있었다. 벽에는 금 덩어리로 장식된 자기 쟁반과 접시가 세워져 있었다. 책상 옆에 있는 마호가니로 만든 덤웨이터 (식사 운반용 손수레) 위에다가 그녀는 자그마한 자기 박스를 수집해 놓았다. 1800년경에 제작된 한 박스에는 '왕이여, 오래 사셔서 왕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포상하소서)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안내인은 왕궁의 각 방의 보여 주면서 왕실 가족 -여왕, 퀸 머더, 에든버러 공, 마거릿 공주,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황태자, 황태자비, 에 대한 나의 질문을 침착하게 받아 주었다. 내가 요크가의 공작 부인인 사라 퍼커슨에 대해서 묻자 안내인은 '그녀는 왕족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초상화와 사진들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마거릿 공주와전 남편 앤토니 암스트롱 존스가 백악관 만찬에서 존슨 대통령 부처를 만나는 사진도 있었다. 존슨 대통령이 친필 서명한 그 사진은 화장실에 걸려 있었다. 계급별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윈저 왕가의 내막을 조사하고 다니는 동안 켄징턴 궁에서 버킹엄 궁으로 이르는 길은 나에게 유혹적인 손짓을 보냈다. 나는 아래층에서는 시종들, 위층에서는 왕실 직원들과 인터뷰를 했다. 또한 상원 의원과 하원 의원들의 말도 경청했다. 나는 군주제의 지배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보수당 의원과 노동당 의원들과도 인터뷰를 했다. 내가 참석한 여성들 모임에서 여배우이며 노동당 의원인 글렌다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지역구 주민들은 영국이 되어가는 꼴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실 문제에만 집중하는 언론 보도만 가지고는 지역구 주민들의 관심사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젤 웨스트라는 이름으로 스파이 소설을 쓰는 보수당 의원 루퍼트 앨러슨은 자신이 군주제를 크게 지지한다고 말했다. "나는 왕족에 대해서는 다소 구식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군주제의 어떤 부분은 매력이 없지만 그래도 그 제도는 이 나라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주제는 ...비록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소중한 제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제이콥 로스차일드 경은 약간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런던의 리버 클럽에서 저녁을 들면서 내게 자신이 최근 버킹엄 궁에서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왕궁에서 식사 도중 들은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면 왕족의 매력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가 윙크를 하며 말했다. 그의 부인은 제발 입을 다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주의를 끄는 표시로 나에게 손가락을 흔들고 나서 말했다. "당신은 그런 책을 써서는 안돼요. 우리는 왕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우리는 객관적인 미국 작가가 쓴 책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아요. 왕족에 대해서 객관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예요." 나는 또 긴 이름의 귀족들, 결혼한 귀부인들과 다과회를 가지기도 했다. 그들의 시골 별장에서 나는 그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벌어진 대관식에 입고 갔던 담비털을 두른 귀족 의복이나 그들이 대관식 때 앉았던 황금 의자 등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왕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모두 왕당파인 이 귀족들은 왕관의 위력을 굳건히 믿고 있었고 군주제가 도버 해협의 하얀 벼랑처럼 오래 존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귀중한 시간을 내어 증언해 주신 이 분들에게 감사를 말씀을 드린다. 귀족들의 통찰력은 내가 인터뷰한 공화제 지지자들의 그것과는 아주 큰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은 군주제가 폐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는 작가 앤토니 홀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런던의 커먼센스 컬럽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커먼센스 클럽은 미국의 사상가인 토마스 페인이 1776년에 쓴 상식이라는 책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곳에서 영국 작가, 편집자, 학자들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성문헌법을 마련해야 하며 상원을 폐지하고 또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앤토니 홀든씨와 공화제 지지자들은 매력과 기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공화제 정책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감사하며 또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그 정성에 감사드린다. 이외에 영국 왕실, 역사적 문제, 영국 왕실에 관련된 문헌 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그분들의 이름을 여기에 일일이 밝힐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집필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작가는 스승을 필요로 한다 머빈 블록은 내게 그런 스승이 되어 훌륭한 문장 수준을 유지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20년간의 우정을 다져오면서도 나는 아직도 그의 능력과 지능에 경이로움을 금치 못한다. 비록 창피하기는 했지만 그가 내 초고에다 휘두른 빨간 펜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문장을 보다 짧고 보다 날카롭게 보다 강력하게 만들라고 꾸준히 조언해 준 정성에 감사하고 싶다. 초고가 완성되자 출판사에서는 캐롤린 블레이크모어라는 보물을 내게 보내 주었다. 그녀는 워싱톤의 내 사무실에 도착하여 무명 같던 초고를 비단 같은 완전 원고로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나의 애정과 감사를 갖고 내 사무실을 떠나갔음을 여기서 밝힌다. 나는 또 남편 조나단 E. 저커에게 심심한 감사를 뜻을 표시하면서 이 책을 헌정한다. 그는 5년 전 내 생활 속으로 들어와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을 환희로 가득 채워 주고 있다. 로열스 차례 제 1권 들어가는 말 1.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2. 영국 왕실의 뿌리는 독일 왕족 3. 퀸 머더의 비밀 4. 미래의 여왕 5. 좋지 않은 예감 6. 가정교사의 회고록 작은 공주들 7. 있을 수 없는 행동 8. 아내, 어머니, 여왕 9. 성의 경계선 10. 허울을 위한 퍼포먼스 11. 사슬에 매인 왕족의 결혼 1.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내 뿌리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면 절대 안돼 마거릿 공주는 영화관에서 총총히 걸어나왔다. 그녀는 쉰들러 리스트의 첫 장면들을 도저히 조용히 앉아서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유대인 특유의 기도 촛불이 꺼지고 심지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재를 연상시키자 불안한 듯 몸을 비틀어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포로로 잡힌유대인 보석 세공사에게 사람 이빨을 던져주며 치아 보철물을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코를 찡그렸다. 그리고 곧 이어 악몽같은 장면이 계속되자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온ㅁ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었다. 스크린에는 거리 장면이 펼쳐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유대인 죄수, 잔인한 나치 군인들 으르렁거리며 건물을 수색하는 경찰견들, 방금 전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내버린 여행용 가방 등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바로 그 순간, 공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난 그만 가겠어. 여기에 단 1분도 더 앉아있을 수 가 없어. " 공주의 친구들은 놀라서 입을 딱 벌렸지만 즉각 공주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곧장 일어서서 공주전하를 켄징턴 궁까지 모시고 가서 하인들에게 어서 영접하라고 했다. 공주가 말했다. "난 유태인이나 나치 대학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단 한마디도 말이야. 그런 얘기라면 전쟁중에 지긋지긋하게 들었어. 그러니 그 따위 얘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 절대 안돼" 마거릿 공주의 친구들은 정작영 화를 보러 가자고 한 것은 공주였는데, 왜 저런 반응을 보일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공주는 쉰들러 리스트가 나치 대학살의 잔학상을 그린 영화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가 알지 못하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영화에 대한 논평기사를 읽은 공주는 착한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전리 품을 챙겼지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어 결국에는 남을 도와주는 영웅이 된 쉰들러. 그녀가 화면에서 보고 싶어했던 것은 그 영웅의 얘기였지, 끔찍한 나치 대학살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60여 년 동안 윈저 왕가의 공주로 지내온 마거릿 로즈는 자신의 독일인 뿌리 즉 작세 코부르크 고타의 피가 섞인 자신의 혈통을 철저하게 부인하도록 훈련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의 피에 흐르고 있는 부르템루르크 혈통, 선조들의 쉴레지히 홀스타인 손데부르크 글룩스부르크 혈통등 모든 독일 계통을 깡그리 무시하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영국이 독일의 공습을 받았던 어릴 적 기억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아홉 살이었다. 최근 (1993년) 63세가 된 마거릿 공주는 전쟁중에 겪었던 요란한 폭탄 소리와 등화관제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또한 그녀와 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참고 견뎌야 했던 내핍 생활도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시련을 겪고 이제 옛날과는 사람이 사뭇 달라진 그녀는 정상적인 유아기를 보내지 못한 것을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전쟁 당시 나치스의 압박을 피해 암스테르담의 다락방에 숨어 있던 13세의 유대인 소녀에게 왕실의 이미지는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안네 프랑크는 다락방보다 더 나은 세상이 있음을 자기 자신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마거릿 로즈 공주와 언니인 엘리자베스 공주의 사진을 2년 동안 숨어 지냈던 다락방 벽에다 붙여 두었다. 그러나 안네의 가족은 결국 게슈타포에게 밀고되었고 창문 없는 박스카(유개화차)에 실려 베르겐 벨젠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불쌍한 안네는 유럽이 해방되기 한 달 전에 사망했다. 전쟁후 안네 프랑크 기념관이 일반에 공개되었을 때, 안네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영국 공주들의 사진이 기념관 벽에 붙여져 전시되었다. 세월이 흘러 누렇게 변색된 사진속의 두 공주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거릿 공주는 전쟁중에 자신이 한 일을 대견스럽게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진지한 성격의 언니와 용감한 부모님도 나름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함으로써 전세계를 상대로 찬란한 위엄을 지키는 왕족을 이미지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마거릿 공주가 쉰들러 리스트나 나치 대학살을 다룬 따분한 영화들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의 가문에 딱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독일의 냄새였던 것이다. 윈저 왕가가 나치스의 제 3제국에게 보여 주었던 친독일적인 행태에 비하면 이들 가문의 비밀들 가령 알콜 중독, 마약 중독, 간질병, 정신병, 동성애, 양성 섹스, 간통, 외도 등 온갖 불법적인 행동은 별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윈저 왕가의 친독일적 행각의 비밀은 독일 쪽의 전쟁 기록, 가족 일기, 편지, 사진, 유물 등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련의 관련 자료들은 현재 윈저성의 왕립 문서 보관소의 안전 금고 속에 꽁꽁 숨겨져 역사학자나 관련학자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그래서 마거릿 공주의 부모가 히틀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 수상감으로 처칠보다 체임벌린을 더 좋아했다는 사실은 이제 아는 사람이 별로 없게 되었다. 마거릿 공주는 종종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없이 털어놓지만 그녀의 말은 자칭 독서를 많이 했다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무식한 말이 너무 많다. 그녀는 미술 전람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또 발레나 연극 행사에도 얼굴을 많이 내비치지만, 자신의 특별한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주 꽉 닫힌 마음을 갖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편견에 대해서 일체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인도 문제를 토론할 때 그녀는 그 조그만 갈색인종을 자기는 증오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먼 사촌뻘인 루이스 마운트배튼이 IRA(아일랜드 공화국군)의 테러로 암살당하자 런던을 방문중이던 시카고 시장에게 '그놈들은 모두 돼지' 라고 말했다. 마거릿 공주는 존경받는 칼럼니스트인 앤 랜더스를 만났을 때 그녀을 찬찬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유대인입니까?" 칼럼니스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공주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늘 그런 식이었다. '유대인을 다룬 따분한 영화'라고 투덜거리며 쉰들러 리스트를 상영하던 영화관에서 튀어나온 공주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 말만 믿고 영화를 보러갔다가 기분이 상해서 돌아와서는 자기의 집사장에게 그런 재미없는 영화에 아까운 돈을 낭비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쉰들러 리스트같은 영화는 쓸데없는 호기심만 자극할 뿐이야. 영 재미가 없더라구. 너무 불쾌하고 역겨워서 영화 상영 중간에 집으로 돌아와 버렸어." 영화를 본 그 다음 날 공주는 아침식사를 시중들던 집사장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집사장은 평소처럼 침착한 태도로 공주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이어 그는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식료품 저장실로 돌아왔다. 한참 뒤 그는 공주와의 대화를 한 미국인에게 말해 주었다. 미국인은 집사장에게 공주의 발언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집사장은 미국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전혀 당신은 이해 못할 겁니다. 공주는 왕족입니다. 왕족이라구요" 그는 왕족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존경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공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왕가인 윈저가의 사람이에요. 왕의 딸이었고 지금은 여왕의 동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처럼 지존한 신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왕족 특히 영국 왕족은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단지 그녀가 공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잘못이 면제된다는 뜻입니까?" "그녀는 왕족이에요" 집사장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비난받지 않는 거룩한 신분이라는 말인가요" "왕족은 어디까지나 왕족입니다. 결코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집사장이 말했다. 2. 영국왕실의 뿌리는 독일왕족: 미운오리 새끼는 싫어 나는 아름다운 백조야 옛날에 윈저 왕가는 하나의 환상이었다. 왕궁을 출입하던 고위직이 상상속에서 만들어 낸 채색 그림이었다. 이 왕가는 1917년 당시 왕과 왕비의 독일 뿌리를 은폐하기 위해서 급조된 것이었다. 이러한 기만 행위는 영국 왕의 지위를 굳건하게 해주었고 독일을 증오하는 영국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왕을 영국인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영국 왕들은 실제로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들은 1714년부터 20세기에 들어올 때까지 근 2백년 동안 오로지 독일어로만 말했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에 걸쳐 독일 혈통의 제왕이 대영제국을 통치해 온 것이었다. 1915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영국은 비록 독일어 억양이 좀 섞이기는 했어도 영어를 말할 줄 아는 군주, 즉 조지 5세를 갖게 되었다. 조지 5세는 영국을 80년 동안 통치해 온 작세 코부르크 고타 혈통의 독일인이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의 여러 해 동안 영국인들은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와 카이저의 침략 행위에 대해 점점 더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 혐오증은 영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유럽 전역에서 침략국 독일에 대한 증오심이 널리 퍼져 있었고 급기야 이런 심리가 미국에까지 건너가게 되었다. 영국 국민들의 독일 혐오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조지 5세는 그 때문에 독일 혈통의 자기 친척들을 보호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단지 독일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국민들의 조롱을 받던 사촌 루이스 오브 바텐배르크의 곤경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 해군장관으로 복무중이던 바텐베르크는 신속하게 해군 동원령을 내려 전쟁이 터졌을 때 해군을 완전 임전 상태로 만들어 놓은 공신중의 공신이었다. 그러나 귀화한 영국 국민이었던 바텐베르크는 전국적인 독일 혐오증 때문에 국민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우선 그의 이름이 독일식이었고 또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말하고 독일인 하인을 거느린 데다가 독일에 부동산마저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영국인이라고 외쳐대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바텐베르크는 국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받쳤음에도 불구하고 해군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프린스의 직함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모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국왕이 그에게 성을 바꾸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텐베르크라는 성을 마운트 배튼이라는 영국식 성으로 변경했다. 원래 이름의 끝 부분에 있는 berg는 산이라는 뜻인데 영어 단어인 mount를 취하여 성의 앞에다 갖다 붙여 마운트배튼이라고 급조한 것이다. 국왕은 자신의 사촌을 영국 귀족으로 만들어 줌으로서 그의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루이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귀족작위를 물려주기 위해 밀포드 헤이븐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나 평생 자신의 성을 갈아버린 모욕을 잊지 못했다.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둘째 아들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루이스 마운트배튼 (후일 영국의 마지막 인도 총독이 된 인물 역주) 은 아버지가 해군장관을 사임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그건 정말 말도 안되는 얘기였어요. 아버지는 영국 해군에서 46년 동안 근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늘 영국을 조국으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우리가족은 단 한 번도 우리가 영국 국민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5세는 군주제가 험난한 앞길을 헤쳐나가려면 덜 제국주의적으로 보이는 게 좋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족이 귀족과 결혼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 이전에 왕족은 해외의 왕족과 결혼하는 것이 통례였었다. 그래서 사상 처음으로 왕족이 귀족작위의 유무에 상관없이 평민 (왕족이 아닌 사람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일단 평민으로 취급됨 역주) 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인 앨버트가 부드러운 얼굴의 스코틀랜드 아가씨인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과 결혼했다. 그러나 백작의 딸인 이 아가씨는 백작이 웨일스 출신의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아직 이 소문을 뒷받침하는 공식 문서는 없는 상태다. 아무튼 버티와 엘리자베스의 결혼 (1923)은 영국 왕실에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고 또 윈저 왕가의 후사를 여러 대에 걸쳐 뒷받침해 주었다. 당시의 독일 혐오증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로는 이런 것이 있다. 윈저 궁에는 빅토리아여왕시절부터 국왕으로 모셔온 스탬포드햄 공이라는 귀족이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 7세 (빅토리아 여왕의 맏아들임 조지 5세의 아버지 역주)의 부탁으로 어린 조지 5세를 돌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이 스탬포드햄 공이 로렌스라는 불유쾌한 소설가의 일을 조지 5세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이 소설가는 독일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현재 도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존경받던 소설가였던 로렌스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비행기를 80대나 격추시킨 독일 항공사 리히토펜의 여동생 프리다와 결혼을 했다. 결혼 직후 로렌스와 신부 프리다는 독일에 대한 나쁜 여론 때문에 영국의 시골로 은둔하여 헛간에서 동물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 역시 독일 여자를 아내로 삼고 있던 조지 5세에게 그 소식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조지 5세 왕비인 메어리 오브 테크는 약간 독일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자기 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영국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조지 5세는 유럽 전역에 독일군을 보내 전쟁을 벌리고 있던 독일 왕 카이저 빌헬름 2세를 더 이상 '마음씨 착한 사촌 빌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쨌든 당면한 제 1차 세계대전을 잘 치르기 위해 조지 5세는 전쟁 수행 노력을 열심히 해 나갔다. 그는 왕세자 에드워드를 프랑스의 서부전선으로 시찰 보냈고 또 둘째 아들 앨버트는 전함 HMS 콜링우드에서 근무하게 했다. 국왕은 알콜의 판매를 전면적으로 금지시키고 국가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왕궁 내에서도 철저한 배급제를 실시했다. 1917년 3월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이 터져 당시 러시아 국왕이며 조지 5세의 사촌인 차르 니콜라스 2세가 왕위에서 밀려났다. 그가 폐위된 이유 중의 하나로 니콜라스가 독일 여자를 왕비로 들였다는 것도 들어 있었다. 당시 조지 5세는 영국 군주제의 보존에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착한 니키라고 부르던 니콜라스 2세를 돌봐 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한때 니콜라스 2세에게 보내주었던 따뜻한 우정을 거두어 버리고 말았다. 폐위당한 차르가 그 자신과 가족의 도피처를 영국에 마련해 달라고 부탁해 왔을 때, 조지 5세는 니콜라스 가족의 영국 입국을 거부하면서 보호의 손길을 거두었던 것이다. 당시 조지 5세는 독일의 보호를 받고 있는 러시아 제국주의와는 정치적으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차대전 당시 독일은 러시아를 전쟁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레닌을 은밀하게 지원하여 볼셰비키 혁명을 도와 주었음 당시 레닌의 혁명정부는 니콜라스 2세의 신병인도를 담보로 영국 왕실로부터 막대한 금품을 얻어내려고 했음 역주) 그래서 조지 5세는 니콜라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 러시아 왕실이 이 나라에 거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을 통보했다. 그러면서 스페인이나 남프랑스 쪽에 거주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조지 5세가 니콜라스 2세를 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의사도 돈을 내놓을 생각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차르와 그의 가족은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위협받는 왕실을 지켜야겠다는 조지 5세의 결심은 더욱 강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차적 조치로 왕실로부터 혐오스러운 독일 냄새를 말끔히 씻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결과 나온 것이 가장 영국적인 왕실 이름을 새로 지어야겠다는 아이디어였다. 왕실 직원들과 궁정 출입 귀족들이 그럴듯한 이름을 찾기 위해 법석을 떨었으나 결정적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은 조지 5세를 어릴 적부터 돌봐 준 스탬포드햄 공이었다. 그는 윈저라는 이름을 제안함으로써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기록되게 된 것이다. 윈저라는 단어는 왕이 찾고 있던 이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정복왕 윌리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성 드높은 명예로운 이미지였다. 현존하는 유물중에 가장 영국적인 상징인 윈저 성은 8백 년 동안 영국 왕실의 핵심적인 성으로 군림해 왔다. 실제로 이 성에 거주한 왕은 없었지만 여러 왕이 윈저 성에서 사망했고 또 9명의 국왕이 이 성의 왕실 지하실에 묻혔다. 윈저라는 이름은 실추된 왕실의 명예를 단번에 회복시켜 줄 좋은 이미지를 자랑했다. 윈저 왕가라는 새 왕실 이름의 선포식은 1917년 7월 17일에 거행되었고 그 다음날 도하 각신문에 일제히 발표되었다. 영국 언론은 국왕이 독일식 이름을 포기했고 또 그 자신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 후손 모두가 독일의 작위를 포기했음을 알렸다. 그리하여 앞으로 국왕과 그 후손들을 윈저 왕실로 부르게 된다는 것도 함께 발표했다. 조지 5세는 자신의 이러한 조치를 단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군주제를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독일 뿌리를 완전히 잘라버렸고 또 독일계의 친척들을 철저히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배제 작업에 대해서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차르 니콜라스 2세 차리나 (니콜라이2세의 황비), 그리고 네 명의 황녀가 시베리아에서 에카테린부르크로 강제 이주 당했다가 볼셰비키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사실을 접수하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후손을 위해 간직해 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그것은 잔인한 학살이었다. 나는 자상한 사람이고 또 완벽한 신사인 니키에게 좋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해외의 친척들과 거리를 지킴으로서 영국 국왕은 자신의 왕관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 후 20년 동안 성실하게 윈저 왕가를 다스려 나갔고 그의 통치 시대에는 일체의 스캔들이 생기지 않았다.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처럼 그는 영국민이 높이 평가하는 두 가지 덕성 즉의무감과 정확함을 철저히 실천했다. 그의 신하들은 그를 검소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인식했으며 그런 수수한 성품이 영국민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믿었다. 원래 차남인 조지 5세는 요크공이라는 직함으로 성인 생활을 시작하여 샌드링엄의 늪지에서 들꿩 사냥을 하며 17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맏형인 클래런스 공이 사망하자 왕세자로 보냈다. 왕세자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들꿩 사냥을 좋아했다. 그래서 사냥시간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해 샌드링엄의 시계를 한 시간 앞당겨 놓을 정도였다. 시골 영주답게 그는 2만 에이커 규모의 자신의 노퍽 영지 샌드링엄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딸은 귀여워했으나 다섯 아들에게는 엄하게 대했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내 아이들도 나를 무서워하게 만들 생각이야 " 조지 5세는 평소 버릇처럼 말했다. 교육받은 것이 신통치 않았던 그는 글은 거의 읽지 않았고 연극은 좀처럼 보러 가지 않았으며 고전 음악은 아예 듣지 않았다. 그는 미술 문학 과학은 깡그리 무시했다. 그의 오락은 우표 뒷면에 침을 묻혀 푸른 가죽으로 장정된 우표책에다 조심스럽게 우표를 붙이는 것이었다. 생애 말기에는 방문해 볼 생각이 전혀 없는 나라들의 우표를 엄청나게 수집해 놓고 있었다. 선원 왕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는 관광이든 교육이든 여행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군사 시설을 순찰하는 목적 이외에는 여행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1911년 그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인도를 방문한 것과 1913년 독일의 친척을 방문한 것 정도였다. "나의 아버지 조지 5세는 미국 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맏아들 에드워드 왕세자가 말했다. "거긴 너무 멀어" 조지 5세는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다 무식했다면 그의 자손들도 역시 무식했다. 생애 말년에 그의 맏아들인 나중에 윈저공이 된 왕세자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무식이 너무 창피하여 윈저 왕족의 회고록을 쓰려던 출판계약을 파기 할 정도였다. 그는 출판업자에게 계약파기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무식한 사람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요 " 왕세자는 파티석상에서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이라는 영국 고전 소설을 쓴 브론테 자매의 이름을 몰라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독서를 거의 하지 않는 왕세자는 그들이 누구이며 또 그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몰랐다. "브론트가 도대체 누구요?" 왕세자는 브론테를 브론트로 잘못 발음하면서 물었다는 것이다. 정신병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던 왕세자는 막내 동생 존의 상태를 아주 부끄럽게 생각했다. 조지 5세의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존은 정신장애에다 간질병 환자였다. 그는 아주어린 나이에 가정으로부터 격리되어 샌드링엄 영지의 농장에 유폐되었다가 1919년 13세의 나이로 죽었다. 비록 조지 5세는 대단히 무식하기는 했지만 왕실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왕실 퍼레이드에서 군복을 입고 의젓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국민들의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국민들은 그를 국부 또는 영국적 가치관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은 1차대전이 끝났을 때 전세계 영토의 4분의 1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강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지 5세는 대영제국 최후의 위대한 제왕이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대영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았다. 1936년 조지 5세가 사망할 즈음에 또다시 도탄에 빠진 영국은 독일과 또 다른 전쟁을 치르기 직전까지 내몰렸는데 이 전쟁으로 대영제국의 위세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환상의 모래위에 구축된 윈저 왕실도 스캔들의 압력을 못이겨 가라앉기 시작한다.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조지 5세는 왕세자 때문에 고민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41세의 나이에 아직도 총각인 무모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을 두렵게 생각했다. 왕세자가 어떤 유부녀와 14년 동안 사랑에 빠져 있던 것을 간신히 떼어 놓으니 이번엔 윌리스 워필드 심프슨이라는 한번 이혼 경력이 있는 유부녀에게 푹 빠져 버린 것이었다. 이미 심프슨 부인은 자기 자신을 차기 영국 왕비로 생각하는 판이었다. 당시 왕실은 이혼한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조지 5세는 왕세자의 기괴한 애인을 접견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아들에게 이혼으로 더럽혀진 여자는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조지 5세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메어리 왕비에게 저 경멸스러운 심프슨 부인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그것을 맹세 시켰다. 조지 5세를 남편 이상의 존재 -나의 전능하신 군주-로 극진히 받들었던 왕비는 그후 평생동안 왕의 유언을 굳건히 지켰다. 임종시에 조지 5세는 화목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금한 장자상속법을 저주했다. 비록 둘째 아들의 말더듬는 버릇이 조지 5세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나게 했지만 그래도 국왕은 왕세자의 괴팍한 버릇으로부터 왕관을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했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저 애는 12달 안에 제 자신을 망쳐버리고 말 것이오" 조지 5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조지 5세는 왕위가 둘째 아들로 넘어갔다가 이어서 사랑하는 손녀 엘리자베스에게로 넘어가기를 바랬다. 엘리자베스는 할아버지가 국가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를 자기의 노래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를 그랜드파 잉글랜드라고 불렀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수염을 잡아당기고 그의 그릇에서 음식을 집어들어 웨일스 산 코기 개들에게 던져 주었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네 발로 엎드리게 한 다음 '말'놀이를 했다. 노왕은 맏손녀를 아주 귀여워했고 그래서 그녀를 가슴에 안고 버킹엄 궁의 발코니에 나오기도 했다. 손녀에게 군중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얘야 사람들이 너를 보고 환호하는 거란다" 나중에 조지 5세는 그의 마필 담당관 -개인 비서-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맏아들 놈이 결혼을 아예 안해서 애가 없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게 하면 버티와 릴리벳 (엘리자베스의 애칭)이 왕위에 오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테니까 " 조지 5세는 여러 날 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1936년 1월 20일 월요일 오후 11시 55분에 숨을 거두었다. 3. 퀸 머더의 비밀: 왕비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들은 금고 깊숙이 감추어라 윈스턴 처칠은 시가 연기를 한번 훅 내뱉고 나서 헌법을 위협하고 있는 현안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조지 5세를 뒤이어 새로 국왕으로 등극한 에드워드 8세가 미국여자 윌리스 워필드 심프슨과 약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왜 국왕이 귀여운 애인과 결혼을 하면 안된다는 거야 ?" 처칠이 물었다. "왜냐하면 영국 국민은 귀여운 애인이 왕비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 극작가 노엘 카워드가 대꾸했다. 금년 춘추 41세이고 한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새 국왕은 자신의 정부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이 두 번째 이혼을 하는 즉시 아내로 맞아들이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그는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그 여자를 왕비로 대관시키겠다는 의사도 표시했다. 그러나 국왕은 월리스를 결코 왕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영국 제도권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쳤다. 당시 총리 스탠리 볼드윈은 물론이고 국민 여론도 전부 반대였다. "월리스가 내 곁에 없다면 왕위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소" 왕은 말했다. 즉위 10달만에 새 군주는 자신의 왕위를 포기했다. 그는 1936년 1월 11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양위를 선언했다. 선언문은 처칠이 기안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저녁의 방송은 전세계 영어권의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양위 6개월 뒤 왕이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자 퀸 메어리 (조지 5세의 비)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저 따위 것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하다니!" 당시 총리는 연예계의 농담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는 해군의 제독이었는데 이제는 미국 부정기선(tramp)의 3등 수병이 되었구만"(tramp에 의한 말장난임. 이 단어는 부정기선의 뜻 이외에 '처신이 좋지 않은 여자'의 뜻이 있는데 에드워드 8세가 두 번 이혼한 심프슨 부인의 세 번째 남편이 된 것을 tramp에 세 번째로 올라탄 3등 수병에다 비유하고 있음. 역주) 등극하기 전 25년 동안 왕세자로 있었던 에드워드는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높은 왕세자였다. 그가 방문하는 나라들마다 그를 자상하고 매력적인 왕세자로 칭송했고 또 금발머리에 슬픈듯한 푸른 눈이 등록상품인 매혹적인 기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는 어디를 가나 왕족다운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고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대영제국이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사랑받는 왕세자의 한 사람이었다. 여자들은 특히 이런 매력적인 왕세자를 만나보는 것을 커다란 영예로 여겼다. 그래서 민간에는 이런 말도 흘러나올 정도였다. "나는 왕세자와 춤춘 여자와 춤춘 남자와 춤을 춰봤네" 이렇게 왕세자에게 열광하는 여자들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백작 딸 엘리자베스 안젤라 마거리트 보우스 -라이언도 끼어 있었다. 보우스 라이언 백작의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사랑을 통째로 받으며 자라났다. 그녀 세대의 여자들이 그러했듯이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은 별로 없었으나 그녀는 결혼을 잘하는 기술은 완벽하게 터득해 놓고 있었다. 스물세 살이 된 그녀는 친구들이 귀족 남편을 얻어 척척 결혼을 해나가는 상황에서 아직 미혼이어서 은근히 속이 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당시 가장 잘 나가는 남자인 왕세자를 만나서 나름대로 은밀한 꿈을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왕세자는 갸름하고 키가 크고 자기처럼 양성적이고 무식욕인 유부녀들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처럼 통통하고 귀여운 처녀에게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여러 해 뒤 그와 그의 아내(당시는 윈저공과 윈저 부인)는 엘리자베스를 쿠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가 멋없이 통통한 데다 음식을 너무 밝히는 것을 꼬집는 별명이었다. 1923년 4월 엘리자베스는 왕세자의 손아래 동생인 버티 (요크공)와 결혼했다. 요크공은 레이디 모린 스탠리가 그의 청혼을 거절하자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던 것이다. 버티는 정서불안이어서 말을 더듬고 끊임없이 눈을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게다가 나쁜 버릇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입 주위의 근육을 쉴새없이 실룩거렸다. 안면 근육이 통제불능이었던 것이다. 한 전기작가는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왕족 가문에 시집가기로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버티의 청혼을 세 번째로 받게 되자 왕족 중 제일 못한 프린스로 여겨지던 버티에게 시집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윈저공 부인(심프슨 여사)과 퀸 머더(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 곧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 사이의 치열한 불화를 알아 보기 위해 윈저 공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왜 퀸 머더가 생애 말년에 윈저공 부인에게 그토록 노골적인 증오심을 드러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윈저 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질투심 때문일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나와 결혼하기를 바랬거든요"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인지라 퀸 머더의 친구들은 이 사실을 부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내가 윈저 공이 죽기 몇 해 전 그에게서 직접 들은 것입니다." 에드워드 8세가 1936년에 양위하자 그의 동생인 앨버트(버티)가 등극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인 조지 5세의 통치 철학을 물려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조지 6세라고 지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왕비 복장을 하면서 놀이하기를 좋아했던 버티의 아내는 정말로 왕비가 되었다. 이 소식은 라디오와 뉴스를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었다. 하지만 1937년 5월 12일의 대관식은 방송되지 않았다. 등극 즉시 조지 6세는 양위한 맏형 (에드워드 8세)의 또 다른 왕궁과 경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맏형을 영국 바깥으로 내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칠은 윈저 공을 바하마 총독으로 임명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왕은 의외로 그 임명안에 반대했다. 왕비가 그런 보잘것없는 자리도 윈저 공 부처에게는 너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코치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마이클 손튼은 이렇게 증언한다. "왕비는 그들의 작위를 삭탈하고 국외로 영구추방하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식민지 담당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이혼을 두 번이나 했고 생존한 남편만 셋인 여자를 바하마 총독 부인으로 만들면 왕실의 체통이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어요." 그러나 왕비의 이런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윈저 공은 바하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마이클 손튼은 또다시 증언한다. "왕비는 그래서 별도의 복수를 했지요. 윈저 공에게는 전하라는 칭호가 수여되었지만 윈저 공작 부인에게는 커트시 (여성이 무릎과 상체를 굽히고 하는 인사를 받을 권한)을 박탈해 버리고 또 전하라는 칭호도 주어지지 못하게 했지요 " 조지 6세는 윈저 공작부인을 미시즈 심프슨이라고 불렀다. 왕비는 단지 그 여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아내는 남편의 지위를 자동적으로 누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규칙을 바꾸어 윈저 공작부인에 대한 왕족 대우를 박탈해 버렸던 것이다. 두 번씩이나 이혼을 한 여자가 영국의 왕비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왕족의 구성원이 되거나 왕족 사회에 발을 들여 놓는 것도 안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윈저가의 사람들은 그녀의 남편이 죽을 때까지 그녀와 얼굴을 맞댄 적이 없으며 장례식의 의전 절차상 마지못해 얼굴을 맞대었을 때에도 최소한의 예의를 표시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그들은 내게 공손하고 친절했어요. 하지만 냉정했어요. 아주 냉정했어요." 이렇게 말한 윈저 공작부인은 남편 사후 90세의 병약한 몸으로 혼자서 쓸쓸히 죽었다. 왕비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도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남편은 왕가의 명예를 되살려야 한다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건실한 중산층 생활을 하던 왕족인 요크 공 부처 엘리자베스와 버티는 포트 벨디어에서 유부녀들에 둘러싸여 희희낙락하는, 샴페인 터트리는 왕세자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언론에서 베티와 버티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요크 공 부처는 모범적인 가정 생활을 했고 그리하여 가정적인 부부의 상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빅토리아 여왕 치세 때인 1900년에 태어나 여러 국왕과 총리의 시대를 거쳐왔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견뎌냈고 대영제국이 조그마한 공화국으로 침몰하는 것을 지켜본 그녀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화려했던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로 받들어졌다. 그녀는 공직생활 초기부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미지의 지속적인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예의바른 커트시 화려한 제복 껑충껑충 뛰는 하얀 말들. 황금마차에 앉아 영화배우처럼 손흔드는 모습, 이런 모든 것들이 왕실의 장엄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소도구였다. 이런 화려한 행사가 국민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그녀는 특히 전쟁 기간에 자기 자신과 남편을 널리 홍보하는데 뛰어난 재주를 발휘했다. 그녀는 허약하고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는 자신의 남편을 알뜰하게 부축하여 일국의 군왕답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윈저가에 시집간 최초의 평민인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은 전국민을 상대로 왕실은 이런 것이다 하고 화끈하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귀여운 손짓과 우아한 미소로써 요크 공작부인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어놓았다. 왕비로 있었던 2차대전 당시 런던이 독일의 공습을 받았던 시기에 피신하지 않고 런던에 그대로 머무름으로써 왕비의 체통을 지키고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폭격을 맞아 건물 일부가 허물어진 버킹엄 궁 앞에서 왕과 함께 서있는 왕비의 모습이 사진에 크게 잡히기도 했다. "우리가 폭격을 당해서 오히려 기뻐요. 이렇게 당하고 보니까 심하게 폭격당한 이스트 엔드(런던의 빈민가)가 어떤 모습인지 금방 짐작이 되네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밝힌 그녀는 자기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영국에서 피신하라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피신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폐하가 떠나지 않으면 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폐하는 결코 영국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녀와 국왕이 폭격 피해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이스트 엔드를 방문 했을 때, 한 유대인 양복 재단사는 국왕에게 '제국의 명의를 아내이름으로 해 놓으라'고 제안했다. 이처럼 강력하게 국민들의 사기를 돋운 그녀를 가리켜 아돌프 히틀러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여자라고 말했다 2차대전 중에는 왕관을 쓴 왕비의 사진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가 영국군 전사병에게 보내어졌다. 그것은 군주가 신하에게 보내는 소중한 기념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왕가의 분위기를 인간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데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텔레비젼이 생겨나기 전에 영화관에서 주로 상영되었던 뉴스릴에서 그녀는 국제적인 방송명사로 부상했다. 그녀의 방송연설은 나치에 의해 점령된 유럽 전지역에 희망을 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나는 밝은 눈과 미소짓는 얼굴을 봅니다. 우리의 앞길이 험난하고 어렵다해도 그 길은 똑바로 뻗어있는 곧은 길입니다. 우리가 정정당당한 원칙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독일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밝게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은 맑은 병사들에게 강렬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폭격현장을 시찰할 때에도 그녀는 언제나 화려한 모자와 빛나는 보석을 차고 다녔다. 폭격지역을 순찰할 때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어울리는 일이냐는 질문을 받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내가 온다는 것을 알면 다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올테니 나도 당연히 예의를 갖추어야겠지요" 이처럼 쾌활하고 강인한 그녀는 독일을 정말 경멸했고 독일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그녀 자신이 총을 들고 나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들의 나라가 나치에 점령당해 초라한 모습으로 런던에 피신해 온 외국의 왕과 왕비들을 쳐다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과 자기의 왕관을 쳐다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과 자기의 왕관을 지켜내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아침 리볼버 사격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왕에게도 같이 하자고 졸랐다. "난 다른 사람처럼 맥없이 쓰러지지는 않을 거예요 " 그녀와 조지 6세는 윈저 공 부처가 노골적으로 히틀러를 찬양하자 타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1941년 4월 윈저 공은 미국의 참전을 반대한다면서 만약 히틀러 정권이 전복된다면 그것은 전세계적인 참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왕비는 영국 국민들이 한 조각의 빵과 생선을 배급받기 위해 추위에 벌벌 떨며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 동안 윈저 공작부인이 호화 정기선을 타고 느긋하게 여행하는 것을 찍은 뉴스릴을 보고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수제의 최고급 에르메스 핸드백을 손목에 가볍게 건 공작부인은 영국의 피나는 전쟁 수행 노력은 아랑곳없다는 듯 화려한 여행을 계속했다. 그녀가 달걀만한 에메랄드 반지를 차고 온 방안을 덮고도 남을 풍성한 모피 코트를 자랑하며 호화생활을 하는 동안 배급을 받으며 근근히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영국 국민들은 방한을 위해 낡은 외투를 손질해 입어야 했다. 왕비는 공작부인이 바하마에서 뉴욕까지 퍼스트클래스(비행기의 1등석)를 타고 날아가 머리를 손질한다는 뉴스를 읽고서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에게는 공작부인말고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난관을 만나면 강인한 의지를 발동하여 해결 했듯이 이번에도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보였다. 그 심각한 문제는 결혼 후 몇 달이 지났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임신이 잘 안되는 증상은 남편 조지 6세의 말더듬는 증세, 안면근육경련증, 허약한 다리, 심한 위궤양 증세 등 '신경쇠약'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 신부에게 더욱 난처한 문제는 그가 아내를 회임시키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증세는 조지 6세뿐만 아니라 그의 형 윈저 공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에피소드로는 다음과 같은 윈저 공작부인의 증언이 있다. 그녀는 왜 윈저 공 부처는 아이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자 남편의 발기부전에 대해서 이렇게 농담을 했다. "공작은 후사 문제는 걱정이 없잖아요" (이 말의 원어는 Duke is not heir-conditioned임. 여기서 heir는 hair와 호응하여 공작이 발기부전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음. 역주) Heir-condition이 안되기는 동생인 조지 6세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후 2년 동안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가 왕비로 대관하기 전의 직함)은 임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산부인과 의사들과 상담을 했다. 마침내 의사는 레인 필립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녀와 남편은 인공수정이라는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의 정자를 인공적으로 그녀의 자궁에 집어넣어 임신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런 인공수정에 힘입어 그녀는 첫 아이인 엘리자베스를 1926년에 그리고 둘째 아이인 마거릿 로즈를 1930년에 출산했다. 엘리자베스가 출생한 직후에 의사들이 내놓은 논평은 제왕절개 수술로 분만했다는 것뿐이었다. "특정한 시술이 성공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표현한 것 말고는 왕가를 존경하던 영국 언론은 미래의 영국 여왕이 인공수정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비록 인공수정을 통하기는 했지만 후계자와 예비 후계자를 생산하는 책임을 완수한 평민출신의 요크 공작부인은 더욱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퀸 머더는 (종전 당시는 조지 6세의 비이고 현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는 살아있는 성자같은 칭송을 들었다. 온 국민이 그녀를 숭배했기 때문에 언론도 그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기사를 싣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당시 그녀는 끊임없이 술을 마셔서 알콜 중독 초기증세를 보였고 또 도박에 몰두하여 저택에다 부키(도박 알선꾼)전화선을 연결하여 경마 현황 속보를 받아 보고 있었다. 그래도 언론들은 일체 이런 사실을 기사화하지 않았고 혹시라도 그녀에게 불경한 기사를 작성하는 자는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A.N. 윌슨이라는 기자가 이런 관례를 깨고 스펙테이터에다 퀸 머더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기고했다. 그 기사 내용은 퀸 머더가 전쟁 중 T.S. 엘리어트를 만났던 저녁식사를 즐겁게 회상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녀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고 걱정을 했었고 그래서 윈저 성에서 저녁 독시회 행사를 열었다.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주 난처했어요. 정장은 입은 음울한 시인이 나타나서 시를 읽었어요. 사막이라는 제목의 시였던 것 같아요. 먼저 딸애들이 낄낄거렸고 곧이어 나도 낄낄거렸죠 그랬더니 폐하도 결국 웃고 말았어요." "사막이라고요 혹시 황무지라는 제목이 아니었나요 " "아 맞아요 바로 그 제목이었어요. 우린 모두 낄낄거렸지요. 은행에 근무한다는 그 우울한 남자가 시를 읽었는데 우리는 단 한 마디로도 알아듣지 못했어요." 퀸 머더는 리번 커팅, 군대 방문, 함대 진수식, 건물의 주춧돌 놓기 등의 왕실 행사를 70년 동안 해오면서 견고한 명성을 쌓아 올렸다. 속된 말로 그녀는 그렇게 해서 1백만 달러에 달하는 연금을 챙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영국 납세자들은 그만큼의 세금을 더 내야만 되었다. 그녀는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고 애교스럽게 고개를 까닥거렸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이 지상에 임대한 방의 방값이라고 할 수 있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영국 국민들은 그녀의 집사장, 2명의 운전사, 2명의 경호원, 3개의 성, 4명의 가정부, 4명의 시녀, 8명의 종복, 10명의 하인, 15명의 마구간 관리인 (14필의 말을 관리하는)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야 하는 세금이 단 한푼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인상과 세련된 매너 밑에는 이중성의 지층이 감추어져 있었다. 퀸 머더의 화려한 깃털 밑에는 부싯돌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평생동안 윈저 왕가의 비밀을 지키고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진력했다. 90세가 되었을 때 (1990년)조차도 윈저 왕가가 나치스의 제 3제국과 벌였던 비밀스러운 흥정을 영국 정부가 발표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윈저 공 부처가 1937년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를 만났던 사실을 기록한 독일측 문서가 윈저 성의 지하 문서 보관소에 철통같이 보관되도록 온 신경을 썼다. 전쟁중 독일로부터 탈취한 이 독일 문서에는 독일이 유럽을 정복한 뒤에 윈저 공을 왕으로 복위시킨다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1940년 7월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구상하면서 윈저 공 부처를 납치하여 베를린으로 데려온 다음 그곳에서 윈저 공으로 하여금 대 영국 방송을 하도록 시킬 생각이었다. 방송 내용은 영국 국민이 처칠 정부를 갈아치우고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단 평화조약이 체결되면 히틀러는 공작 부처를 허수아비 군주로 왕비에 복위시킬 생각이었다. 이 계획은 비록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윈저 공 부처가 제 3제국과 공모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왕가의 이지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귄 머더는 늘 미소지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노년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96세에 엉덩이 관절 대체 수술을 받았다. 퇴원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푸른색 실크 해트(모자)를 쓰고 지팡이 집은 채 양로원을 방문했다. "내가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을 거예요 " 그 녀는 양로원의 허약한 노인들에게 말했다. 퀸 머더는 환한 미소와 상냥한 말을 주고 받은 다음 양로원을 떠났는데 그곳의 노인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드러운 표면 밑에는 강철같은 내면이 도사리고 있었다. 외무장관 핼리팩스 경은 그녀가 벨벳장갑을 낀 쇠로 된 손이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도 한 친지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신은 나를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난 그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 그녀는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출생에 관련된 세부사항을 숨겨왔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가 이미 아이를 여덟이나 보았는데 왜 아홉 번째인 그녀의 출생 신고 마감 기한인 6주를 지키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 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스트래스모어 백작의 14대 손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밝혔다. 그는 자신의 딸이 허트퍼스셔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으나 막상 퀸 머더는 자기가 런던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런 여러 가지 모순되는 점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각종 소문이 떠돌았다. 즉 그녀의 법적 모친은 아이를 여덟 낳고 더 이상 출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아버지 가 웨일스 출신의 가정부와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이 외도의 결과로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 (퀸 머더)이라는 딸 아이가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한 사실 때문에 야기된 이런 소문을 뒷받침해 줄 만한 확실한 증거는 현재 없다. 퀸 머더는 자기 가문의 유전적 결함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가계를 정밀 조사하는 것을 꺼려해 왔다. 여러 세대 동안 스트래스모어 가문은 글라미스 (스코틀랜드의 글라미스에 있는 성으로서 스트래스모어 가문의 영지)의 괴물 때문에 시달려왔다. 전설에 의하면 퀸 머더의 작은 할아버지에게 괴물 같은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배배 꼬인 다리에 달걀 같은 모양을 한 이 남자아이는 나중에 커서 까만 털이 더부룩한 괴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괴물은 글라미스 성에 유폐되었고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의 형과 세 명의 다른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스트래스모어 가문은 이 수치스러운 사실을 절대 비밀로 지켰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거기에 대해선 말하지도 질문하지도 못하게 했어요." 퀸 머더의 큰 언니인 로즈가 말했다. 신체적 기형과 정신병을 부끄럽게 여기는 이러한 태도는 1920년대까지 계속 이어져서 엘리자베스의 어린 조카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캐더린 보우스 -라이언과 네리사 보우스 -라이언은 태어날 때부터 정신장애자였는데 이들은 레드 힐에 있는 정신병원에 유폐되어 수십 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스트래스모어 가문은 이들 두 여아의 정신병을 너무나 창피하게 여겨서 영국 귀족 연감인 버그 귀족 연감에서 그들을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 이처럼 가문의 수치를 철저히 숨기는 집안의 내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퀸 머더는 시집온 후 왕실에 수치가 되는 비밀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그녀는 남편의 알콜 중독 증세를 비밀로 지켰고 또 막내 시동생 조지 왕자의 동성애와 마약 중독도 바깥에 새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조지 왕자는 그 후 그리스의 공주 마리나와 결혼하여 켄트 공이 되었다. 4. 미래의 여왕: 7세에 여왕을 자각한 공주와 다스릴 나라가 없는 남편`감 이제 영국의 국왕 부처가 된 요크 공 부처는 미국 내의 여론을 영국 쪽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미국 측과 친교를 두텁게 쌓아나갔다. 그들은 시기가 너무 늦기 전에 미국이 2차대전이 참전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1939년 봄 국왕 부처는 주영 미국 대사인 조지프 P.케네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와 그의 아내 로즈 케네디를 윈저 성으로 초대하여 주말을 함께 보냈다. 가터 스론룸에서 베풀어진 만찬에서 왕비는 영국 총리인 네빌 챔벌린과 케네디 대사 사이에 앉았다. 그녀는 케네디 대사에게 최근에 국왕과 함께 갔었던 미국 방문이 아주 인상적이었으며 그들 (왕과 왕비)을 하이드 파그로 초대하여 핫도그와 맥주를 대접한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의 환대가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사실 국왕 부처의 미국 방문은 미국 내에서도 커다란 정치적 화제가 되었다. 당시 상류층 공화당 인사들은 아직도 영국을 모국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을 유럽전쟁에 참전시키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0년의 힘든 재선 캠페인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당시 의회 내에서 심의되던 중립법안은 영국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미국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것이었고 또 전쟁중 루즈벨트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억제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래서 루즈벨트는 그 법안이 개정되기를 희망했다. 루즈벨트는 영국 국왕 부처의 방문이 미국내 여론을 돌려 놓아 미국민들이 영국에 보다 우호적인 태도로 돌아서기를 희망했고 또 영국에 군사원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를 바랬다. 당시 주 프랑스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C. 룰릿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메모를 보냈다. 왕비는 왕과 함께 각하를 방문하는 길에 올랐습니다. 왕비는 아주 좋은 여인입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는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녀의 동서인 프린스세스 로열 (윈저 공작 부인)이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여자의 값싼 미소 운운하며 왕비를 비난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왕비는 여러 해 전 스코틀랜드 피틀로크리 골프 클럽에서 내 골프채를 들어다 주던 여자 캐디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왕은 이제 잘난 척을 조금씩 하고 있지만 여전히 겁먹은 남자일뿐입니다. 국왕부처는 그보다 한 해 전에 파리를 방문하여 대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프랑스 총리였던 에두아르 달라디어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사석에서 조지 6세를 뚱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왕비를 가리켜 자기의 왕비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희생시켜도 눈 하나 까닥하지 않을 야심만만한 젊은 여자라고 말했다. 불릿 대사가 1939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에는 국왕 부처를 만나거든 윈저 공 얘기는 하지 말라는 조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도 함께 보고되었다. "약 한달 전에 윈저 공이 퀸 메어리 (조지 5세의 비이며 윈저 공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버티 (조지 6세)가 저 버릇없는 평민 여자의 코치를 받아가며 나를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서 더 이상 그렇게 나오면 버티와 의절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들 형제의 우애가 그렇게 두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국왕 부처가 미국 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와서 미국 대사와 만찬을 함께 할 때 왕비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들에게 해 주었던 하이드 파크 피크닉의 재미난 일들을 정답게 회상했다. 그녀는 귀국할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기차역까지 나와 즉석에서 올드 랭 사인을 부르며 헤어짐을 섭섭해 하던 장면을 감회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케네디 대사는 1939년의 국왕부처의 미국방문에 대한 미국 측 언론의 뜨거운 열기를 이미 신문에서 읽은 바 있었다. 뉴욕 타임스의 아더 크록 기자는 이렇게 썼다. "영국 국왕 부처는 워싱톤을 완전히 정복해 버렸다. 그들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찬사를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은 낙관적인 고문관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탁월한 방미 효과를 올렸다." "그들은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쉽게 사람을 사귀더군요. " 엘리너 루즈벨트는 말했다. 전쟁은 피하고 보자는 고립주의 원칙의 지지자인 케네디 대사도 그런 방미 효과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만찬도중 왕비가 미국의 외교정책 쪽으로 대화를 돌려나가자 대사는 자신의 원칙을 되풀이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미국민들은 무엇보다도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다시는 안돼라고 말하고 있어요. 나는 우리 국민들의 그런 태도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하니까요" "케네디 대사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미국이 우리편에 서서 우리와 함께 일해 준다면 정말로 독재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거예요 " 루즈벨트 대통령은 왕비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 뒤 몇 달 안되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케네디 대사의 사임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케네디 대사가 개인 비서에게 '루즈벨트와 유대인들이 우리를 전쟁을 끌어넣고 있어' 라고 말한 것을 전해 듣고서 엘리너 루즈벨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그 개자식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사임되기 직전 케네디 대사는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보려는 유화적인 정책 때문에 영국 내에서 경멸당하고 있었다. 아이리시 타임스의 워싱톤 주재기자인 코너 오글레리는 이렇게 말했다. "케네디 대사는 영국 공습이 시작되던 때에 런던을 떠났어요. 영국민들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왕비는 미국 측의 연예계 사람들과는 생각이 일치되어 수월하게 사교를 하게 되었다.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만약 영국이 전쟁에 참전한다면 미국은 자연히 참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체주의적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왕비는 또 천성적으로 연예계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연극 제작자인 미국인 잭 윌슨은 왕비가 좋아하는 극작가인 노엘 카워드의 친한 친구이며 또 사업 파트너였기 때문에, 특히 왕궁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에드워드 8세의 양위 직후 윌슨은 기발한 제안을 해서 왕비의 환심을 샀다. 그는 영국 전역에다 윌리스 심프슨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심프슨 부인이 영국민들에게 하나의 축복을 내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당신(왕비)을 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에드워드 8세의 통치를 막아 주었잖아요 " 그런 재치있는 말은 왕비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래서 1939년 잭 윌슨은 왕비에게 안부전화를 걸자, 그녀는 즉각 그를 왕궁의 다과회에 초청했다. 이렇게 해서 왕궁 출입이 잦게 된 윌슨이 어느 날 종복을 따라 여왕의 응접실로 걸어들어 가다가 마루에서 놀고 있는 당시 열세 살의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났다. 윌슨은 공주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상냥하고 격의없는 인사를 했다. "잘 있었니, 큐티 파이(귀여운 여자애) 오늘은 지내기가 어때?" 그 말을 들은 종복은 온몸이 굳어지더니 감히 방안으로 들어서질 못하고 우물쭈물 했다. 그러자 공주는 연극 제작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팔를 쳐들며 마루를 가리켰다. "보이 절을 해야지, 절을 " 13세의 소녀가 40세의 제작자를 보이라고 부르면서 고개 숙여 인사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틴에이지 소녀는 이처럼 왕족의 권리를 요구하도록 철저히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는 줄 아십니까?" 연극 제작자는 웃음을 터트리며 유럽 최고 왕가의 36대 군주가 될 소녀를 처음 만난 순간을 회상했다. "그 어린 소녀가 너무 겁났기 때문에 난 그만 엉겁결에 절을 하고 말았다오" 총리 챔벌린 경도 왕궁 복도에서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났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안녕하시오 리틀 레이디" 챔벌린이 인사했다. "난 리틀 레이디가 아니에요. 엘리자베스 공주예요 " 그녀가 대꾸했다. 맏손녀의 이처럼 기고만장한 태도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할머니인 퀸 메어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 시간 뒤 퀸 메어리는 손녀를 데리고 챔 벌린경의 사무실로 가서 노크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엘리자베스 공주예요. 하지만 언젠가는 레이디가 되기를 바라는 공주예요." (Lady에 의한 말장난임. 레이디는 존칭의 뜻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뜻은 gentelman에 해당되는 여성어로도 쓰임. 할머니가 공주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손녀딸을 가르치고 있는 것임. 역주) 그후 며칠 뒤 공주는 무슨 일로 화가 나서 가정교사에게 무례한 부탁을 했다. 가정교사가 거부하자 공주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마침내 공주가 소리쳤다. "이건 왕명이야 " 이때 공주의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왕족이라고 해서 모두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특히 왕족이라는 게 나쁜 매너의 핑계가 될 수는 없어." 그렇지만 어린 공주는 자신의 도도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열 살 때부터 다음 번의 영국 여왕이라는 신분을 전제로 하여 양육되었다. 이러한 특별 대우는 그녀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권위를 어렴풋이 알게 된 공주는 심심하면 유모의 눈을 피해 달아나 일부러 왕궁 경비병 앞에서 산보를 했다. 그러면 경비병은 그녀가 지나갈 때 마다 부동자세로 서서 거총 경례를 하는 것이었다. 공주의 이름은 도자기, 병원, 심지어 초콜릿 등 안 붙여지는 곳이 없었다. 공주에 대한 이런 지나친 숭배는 그녀의 아버지를 근심하게 만들었다. 왕은 자신의 어머니인 퀸 메어리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사람들이 딸아이를 너무 사랑하여 어떤 때는 겁이 날 지경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바라지만 딸아이가 그런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지. 부디 보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불쌍한 것" 어린 공주는 크리스마스 때 울워드 백화점에서 쇼핑하기, 2층 버스의 2층에 타보기, 지하철을 타고 미행하기, 등의 일상적인 경험을 몇 가지 해 보았다. 그러나 택시는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고 자기 스스로 전화를 걸어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보호를 받아서 홍역이나 수두 같은 어릴 적의 질병을 걸려본 적도 없었다. (1971년 45세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일곱 살의 아들 에드워드로부터 수두에 감염되었고, 1982년 56세 때 처음으로 사랑니를 빼냈다.) 그녀는 주로 흰말이 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보통 어머니나 할머니 옆에 앉았고 그렇지 않으면 왕실 수행원이 배석했다. 그리고 공주는 늘 가정교사 마리온(그로피) 크로퍼드, 경호원이면서 의상 담당인 마거릿(보보) 맥도날드 유모인 클레어(알라) 나이트와 함께 다녔다. 자기 자신을 릴리벳이라고 불렀던 공주는 어릴 때부터 벨을 울리면 수행원이 금방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곱 살 때에 자신의 왕위 계승 서열이 몇 번째인지 알았다. "난 삼이고 넌 넷이야. " 그녀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아니야. 난 셋이고 넌 일곱이야." 언니가 나이를 말하는 줄 알고 어린 마거릿 로즈가 고쳐서 말했다. 자신의 큰 딸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르게 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조지 6세는 딸이 자신보다는 제왕학을 더 잘 익혀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맏형 에드워드의 양위로 엉겁결에 왕이 되기는 했지만 왕이 되면 매일 하던 들꿩 사냥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맏형의 양위가 발표되기 직전 그는 사촌인 루이스 마운트 배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내게 벌어진 일 중에 가장 끔찍한 거야. 나는 왕이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구. 난 도통 교육을 받지 않았단 말이야." 그는 그런 일이 자기 딸에게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어린 나이부터 훈련 시켰다. 우선 군주의 의식 절차부터 가르쳤다. 또 무거운 옷을 입고 오랫동안 서 있는 훈련도 시켰다. 또 매일 일기를 쓰라고 시켰고 군대를 사열하고 인사를 받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또 국왕에게 매일 올라오는 국정 운영 보고서가 담긴 빨간 박스도 함께 나누어 보았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동생인 마거릿 공주와 네 살의 터울이었으나, 왕비는 그들을 쌍둥이처럼 키웠다. 갈생 옥스퍼드옷 벨벳 칼라 신축밴드로 고정시킨 작은 모자 등을 똑같이 입혔다. 신문과 뉴스릴에 자주 나왔던 이들 자매는 어린 소녀들의 옷 입는 법, 말하는 법, 걷는 법, 행동하는 법의 전범이 되었다. 두 공주는 함께 게임을 했고 윈저 성에 특별히 마련된 무대에서 부모님을 위해 연극을 하고 또 팬터마임을 했다. 왕비는 댄스홀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고 왕은 콩가 곡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왕은 한때 자기 가족을 가르켜 우리 넷이라고 말했다. 그 우리 넷의 세계는 개와 말과 하인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친구들은 별로 없었다. 두 공주는 빙 크로스비 레코드를 들었고 매주 댄싱 수업에 참가했고 피아노를 쳤으며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왕비가 수학보다 음악을 더 강조했기 때문에 그들은 음악은 뛰어 났으나 수학은 신통치 않았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은 폴란드를 지지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곧 여자들과 아이들은 런던에서 소개되기 시작했다. 두 공주는 그후 5년 동안 윈저 성에 머물렀고 런던에 나가는 것은 치과의사를 방문할 때만 허용되었다. 버킹엄 궁은 얼리자베스 공주가 독일어 공부를 중단했다고 발표했고 미국의 동정적인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공주가 이튼 학교 선생으로부터 미국사를 새로이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마거릿 공주의 교육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거릿은 왕위 후보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중에 마거릿도 언니와 함께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 왔을 뿐이었다. "이 수업은 네게 필요치 않아." 마거릿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억울해 난 너무 늦게 태어났어." 아버지의 쾌활한 유머감각을 물려받은 엘리자베스는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자꾸 넘어지는 광대를 보면 아버지와 함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를 많이 닮은 마거릿은 보다 세련된 코미디를 좋아했으며 예리하고 재치있는 대꾸로 자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마거릿은 아이 적부터 아주 버릇이 없었다. 그래서 하인들은 그녀를 끔찍한 또는 구제 불가능한 등의 형용사로 묘사하곤 했다. 그러나 자본심 강하고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 부모는 마거릿의 그런 행동을 단지 재미나고 엉뚱하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들은 마거릿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건 마거릿이 앞으로 여왕이 될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 자신도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언니 릴리벳처럼 진지하고 또 의무감에 넘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늘 내 멋대로였다." 그래도 두 자매는 서로 가깝게 지냈고 성채 같은 윈저 성에 갇힌 채 가끔 아옹다옹 하면서 싸우기는 했지만 평생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문제가 있을 때면 언니가 늘 스승의 역할을 했다. 두 공주는 왕실의 비좁고 고립된 세계에서 함께 성장했지만 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왕과 왕비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다. 특히 전쟁통에 정상적으로 크지 못한 두 딸을 측은하게 생각한 왕은 더욱 딸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불쌍한 것들. 어린 나이에 재미있는 일도 마음껏 하지 못하고. " 그래서 왕은 틈만 나면 딸들을 재미있게 해 주려고 애썼다. 왕은 매력적이고 허풍을 잘 떠는 마운트 배튼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마운트 배튼은 너무 야심이 크고 또 너무 잘난 척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왕은 사촌 마운트 배튼의 화려한 스타일과 여유 넘치는 매력을 부러워했다. 사촌은 인생의 어려움을 아무런 고통도 없이 잘도 헤쳐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왕은 마운트 배튼의 지나친 허영도 눈감아 주었고 또 그가 외국을 수행하다가 얻은 메달과 훈장을 꺼내 놓고 자랑을 할 때에도 화를 내기보다는 재미있어 했다. 그러나 왕비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마운트배튼이 망명중인 윈저 공과 지속적으로 우정을 다지고 있었기 때문에 늘 그를 의심했다. 그리고 몇 해 뒤 마운트배튼이 인도 총독으로 재직 했을때 그가 제국을 팔아먹은 총독이라고 비난했다.(인도는 마운트 배튼 총독 당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음. 역주) 또 왕비는 그의 우아하고 날렵한 아내 에드워나 마운트배튼도 좋아하지 않았다 에드위나는 햄프셔에 있는 가족 영지인 브로드랜즈를 포함하여 엄청난 재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상속녀였다. "에드위나는 절반만이 영국인 피야. 엄마가 반쪽 유대인이었거던." 왕비는 궁중 시녀에게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비아냥거리듯 말한 속뜻은 에드위나의 별난 취미 가령 재즈, 스피드카, 칵테일 파티, 알몸으로 달빛을 맞으며 풀장에서 수영하기 등이 반쪽 유대인의 혈통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영국적 근엄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왕비는 에드위나의 그런 별난 취미를 좋게 보아 줄 수 없었다. 마운트배튼의 개인비서인 존 바라트는 두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왕비는 아주 현명한 여자여서 노골적으로 남을 비난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에드위나는 경멸했어요. 에드위나는 전세계의 베스트 드레서로 뽑히기도 했고 또 샤넬 정장을 입으면 정말 사슴을 닮은 듯한 우아한 미인이었지요. 반면 왕비는 소화전을 뒤덮는 방수포 같은 옷을 입었고 미모는 에드위나보다 훨씬 떨어졌어요. 그렇지만 왕비는 노골적으로 에드위나를 비난하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주 은밀하게 공격했지요. 그건 에드위나가 죽은 다음까지도 그랬어요. 레이디 마운트배튼은 1960년 수면중에 사망했는데 당시 퀸 머더가 되어 있던 여왕은 롬시 수도원에서 있었던 장례식 예배에 잠깐 참석했다가 자택인 클래런스 하우스로 되돌아와 텔레비젼으로 해상 장례식 장면을 지켜보았어요. 에드위나의 관이 바다속으로 내려지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어머나 저런 에드위나는 늘 알몸으로 물속에서 철퍽거리더니 죽어서도 물속으로 가는군." 재위 초기에 국왕 부처는 에드워드 8세의 양위가 던진 그림자를 왕좌에서 걷어내는 일에 열중하면서 자신들의 위치가 대단히 불안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또 윈스턴 처칠이 국왕에게 돌려져야 할 화려한 영광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마운트배튼경 (가족들 사이에서는 엉클 디키로 불리워졌음)의 움직임은 더욱 수상스러웠다. 왕비는 마운트배튼이 엘리자베스 공주의 혼사문제를 처음 꺼냈을 때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공주가 13세일 때 마운트배튼이 그 문제를 제기하자 왕비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왕비의 시어머니인 퀸 메어리는 여러 명의 신랑 후보 리스트를 갖고서 면밀히 살펴보았다. 후보는 주로 룩셈루르크나 덴마크 등의 왕자였다. 왕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운트배튼은 자신의 조카이며 미남 왕자인 프린스 필립 (오브 그리스)를 왕궁의 대소사에 꼬박꼬박 참석시켰다. 그는 자신의 양아들처럼 생각하는 필립에게 조지 6세 부처의 마음에 들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또 필립에게는 3대 떨어진 사촌 (한국식으로 따지면 10촌)인 릴리벳과 친하게 지내라고 부추겼다. 이러한 마운트배튼의 후원에 힘입어 필립은 18세가 되면서 장래의 여왕 부군의 후보로 떠오르게 되었다. 필립은 영국 해군에 입대하면서 아저씨 마운트배튼의 야심을 폭로하여 소속 함대의 함장을 놀라게 했다. 부제독 해롤드 톰 베일리 -그로맨은 1939년 여름 지중해를 순항하는 전함 래밀리스의 함장으로 근무했다. 마운트배튼 경에 대한 호의로서 부제독은 해군 소위 후보생 프린스 필립 오브 그리스를 자신의 함대 소속으로 받아들였다. 쉴레스비히- 홀슈타인 손더부르크-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독일덴마크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필립은 그리스 시민이기 때문에 영국 해군에서는 승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 국민으로 귀화하기를 바랬다. 당시 그리스는 중립국이었으므로 영국은 순번이 먼 그리스 왕위 계승권자 (필립의 순번은 6위였다)일지라도 전쟁중 적국에 의해 사살되는 불상사는 피해야 할 입장이었다. 함대장인 부제독은 자기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프린스 필립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디키 아저씨가 나의 장래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를 짜놓았어요. 내가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장가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놀라 머뭇거리며 이렇게 물어 보았다. '자네는 공주를 좋아하나' '예 정말 좋아합니다.' 매주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필립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2년 뒤인 1941년 당시 20세이던 필립은 15세의 공주와 계속 편지연락을 주고 받았다. 필립의 사촌 여동생인 알렉산드라 오브 그리스는 남아공화국의 케이프다운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해군 소위이던 필립이 편지를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누구에게 쓰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 "아니 갠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어쩌면 이 애와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 알레산드라는 기가 팍 죽어 버렸다. 은근히 필립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필립은 자신의 집안이 풍비박산되면서 친척들의 연락병 역할을 맡았다. 필립의 아버지 프린스 앤드루는 헬레네스의 왕 조지 1세의 7자였고 어머니 프린세스 앨리스는 1차대전 발발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었던 프린스 루이스 오브 바텐베르크의 딸이었다. 1922년 터키가 그리스를 침공해 오자, 군령에 불복종하고 적의 포화를 견디지 못해 근무지를 이탈한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되었다. 앤드루가 총살형으로 처형될 위기에 놓이자 아내인 프린세스 루이스는 영국 친정의 아버지에게 호소하여 남편을 살려달라고 했다. 아버지 바텐베르크 마운트배튼 공은 곧 사촌인 조지 5세를 접촉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처형을 나 몰라라 했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조지 5세는 그리스에 함대를 파견하여 앤드루와 그의 가족을 강제로 빼냈다. 앤드루는 귀머거리인 아내 앨리스, 네 딸, 그리고 어린 필립과 함께 영국 전함 칼립소에 올랐다. 당시 18개월의 젖먹이였던 필립은 오렌지 상자에다 넣어서 배에 태웠다고 한다. 필립은 어머니와 대화를 위해 수화를 배워야 했다. 어머니는 4세 때 독일 홍역을 앓은 후 귀머거리가 되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바텐베르크 공은 이 딸을 특히 불쌍하게 여겼다. 필립은 수화 이외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지만 그리스어는 단 한마디 하지 못했다. 필립은 파리 교외에서 왕족 신분이지만 가난했던 부모와 아주 어렵게 살았다. 1930년 한 해 동안 불과 아홉 달 사이에 그의 손위 누나 넷 (이들은 독일서 교육을 받았다)은 모두 독일의 귀족들과 결혼했다. 매부들 중 한 명은 2차대전 당시 힘믈러의 SS조직의 대령을 지낸 사람이었다. 네 딸을 모두 치우자 프린스 앤드루는 따분한 파리의 집에서 탈출하여 몬테카를로로 가서 그곳에서 사귄 정부의 요트에서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곧 앤드루는 도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때 필립은 10세였다. 남편이 자기를 버리자 앨리스 공주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그 증세는 폐경기를 잘못 넘겨 나타나는 증상으로 진단되었다. 이제 더 이상 어린 아들을 돌볼 수 없게 된 앨리스는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 입원했다. 몇 년 뒤 앨리스는 종교에 귀의하여 수녀회를 조직하고 그리스의 빈궁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전념했다. 2차대전중에는 그리스의 유대인 가정을 많이 보호해 주었는데 이일로 사후에 이스라엘로부터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결별 이후 평생 독신을 지키며 검소한 생활로 일관했다. 어머니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어린 필립은 어머니의 친정인 밀포드 헤이븐가(마운트배튼가)로 보내져 영국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필립은 평생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외삼촌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을 만나게 된다. 필립은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디키 아저씨의 보호를 받으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 이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키 아저씨를 내 아버지인 것처럼 생각했어요." 그 후 성년이 될 때까지 10년 동안 필립은 파리 영국 독일 스위스 등지의 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특히 스코틀랜드의 고든스다운 학교에서 5년을 체류했다. 그는 아저씨뻘 되는 스웨덴의 황태자로부터 용돈을 받기도 했으나 늘 돈이 쪼달렸다. 그래서 옷도 친구들로부터 빌려 입어야 했다. 필립과는 사촌간인 마리나가 켄트 공과 결혼할 때에는 이 친구에게서 정장저 친구에게서 커프링크 또 다른 친구에게서 칼라 등을 빌려서 간신히 결혼식 복장을 입고 갈 정도였다. 고든스다운을 졸업한 뒤 필립은 영국 공군에 들어가 전투조종사가 되려했으나 디키 아저씨의 조언으로 다트머스에 있는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필립은 어릴 적부터 왕족들 주위를 맴돌며 성장했다. 아저씨뻘인 스웨덴의 황태자를 위시하여 프린세스 마리 보나파라트와 결혼한 망명 그리스 왕도 역시 필립의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었다. 마리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총리의 애인이기도 했고 또 나중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프로이트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런던으로 망명할 때 편의를 보아 주기도 했던 그 여자이다. 필립에게 은근한 연정을 품고 있던 프린세스 알렉산드라 오브 그리스는 결국 유고슬라비아의 왕과 결혼했고 그가 귀여워했던 사촌 여동생 프린세스 프레데리카는 그리스 왕비가 되었다. 어릴 적에 필립은 런던의 켄징턴 궁 부카레스트와 시나이아의 왕궁 트랜실베이니아의 왕실 주거지 등을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그는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를 미시 숙모라고 불렀다. 또 다른 숙모인 카이저의 여동생 퀸 소비 오브 그리스도 필립이 자주 찾아간 아주머니였다. 성년이 된 후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혼사 가능성이 높아지던 필립에게 우연찮게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필립이 베니스의 한 주점에서 아주 매력적인 미국 여성 코비나 라이트를 만난 사건이 그것이다. 코비나 라이트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모델일을 하고 있었고 20세기 폭스사와도 줄이 닿아 배우로 성장하려고 애쓰던 아가씨였다. 코비나의 샤프론으로 뛰고 있던 코비나의 어머니도 필립이 자기 딸에게 흥미를 보인다는 것에 스릴을 느꼈다. 필립은 곧 코비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는 특별히 뚜렸할 것도 없는 발칸 반도의 프린스요. 내 이름은 필립 오브 그리스입니다." "그냥 필립 오브 그리스예요? 성도 없구요?" 코비나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냥 필립 오브 그리스요 " 필립은 왕족의 이름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 해주었다. 전통적으로 로열 프린스는 성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이 별로 높지 않은 평민만이 이름 식별을 위해 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 많죠. 하지만 우리는 아주 희소하니까요. "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은 싹 잊어버린 채 필립은 이 미국 미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는 코비나에게 청혼을 했고 또 그녀와 자기는 이미 약혼을 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코비나의 어머니를 자신의 장래 장모로 대접했다. 베니스에서 만나 3주를 함께 보낸 필립과 코비나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와 1주를 보냈다. 그리고 그 후 3년 동안 필립은 1주에 두 번씩 그녀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 1973년 코비나의 어머니와 인터뷰 한 바 있는 스티븐 버밍햄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코비나는 프린스 필립과 한때 연인 관계였습니다. 코비나의 어머니 딸에게 필립과 결혼하라고 재촉했지요. 그러나 그녀는 별 생각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녀는 오히려 자동차 재벌 2세인 파머 보데트와 사랑에 빠져서 1941년 파머와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코비나의 어머니는 그녀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죠." 그러나 어려서부터 눈치밥을 먹고 커서 유들유들했던 프린스 필립은 그 일을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영국 해군에 계속 근무하면서 먼 친척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비록 여배우 코비나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아버지 앤드루의 피를 그대로 물려 받아서인지 코비나 이후 평생 여자들에게는 관심 많은 남자가 되었다.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관계에 대해서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였던 마리온(크로피) 크로포드는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여자애들이 전선이나 해상의 군일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게 대유행이었어요. 그래서 공주가 필립에게 편지를 써서 보낼 때는 조국을 위해서 싸우는 군인들에게 의례적으로 보내는 것이려니 생각했어요." 어느 날 크로피는 공주의 거실 벽난로 선반에 필립의 사진이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렇게 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볼 텐데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이 곧 소문을 퍼트릴 거예요 " "그러라지 뭐" 공주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 사진은 그 뒤 지 며칠 동안 사라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론드 수염과 턱수염으로 뒤덮인 필립의 사진이 다시 그 자리에 들어섰다. "크로피 이렇게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공주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곧 소문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뒷계단에서 쉬쉬하면서 말하던 내용이 신문기시로 비화되었다. 프린스 필립 오브 그리스의 사진이 엘리자베스 공주의 침실에 놓여져 있다는게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디키 아저씨는 그 사실을 기쁘게 생각했다. 디어 필립 디어 릴리벳으로 시작되는 편지가 윈저 성과 지중해 상의 전함 사이를 오고 갔다.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정식으로 포기한 해군 소위 필립은 1942년 중위를 거쳐 대위로 승진했다. 그 다음 해인 1943년 필립은 영국으로 돌아와 4개월 동안 바다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몇 년 뒤 그는 그 기간에 특별히 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그 초청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퀸 메어리에게도 대담한 농담을 건 필립을 메어리는 아주 똑똑한 젊은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칠리아 근해에서 자신의 전투함을 공격해 오는 독일 항공기 얘기를 하면서 조지 6세를 즐겁게 했다. 또 어뢰와 기뢰를 피해나가면서 자신이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고 거들먹거리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거 아주 재미있는 얘기더군." 왕은 나중에 그렇게 말했다. 필립이 용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왕은 그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 주었다. 그러나 커다란 소리를 내며 웃고 또 투박한 매너를 보이는 그 무모한 젊은이에게 왕은 어쩐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딸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던 왕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 릴리벳이 언젠가는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 필립처럼 거친 남자는 아무래도 릴리벳의 신랑감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필립은 부자도 아니고 다른 신사들처럼 옷 잘 입는 댄디도 아니었다. "복장이 영 형편없어 아주 틀려먹었어. " 왕은 푸념하듯 말했다. 필립의 아버지 앤드루는 1944년 65세의 나이로 돈 많은 정부의 품속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 5년 동안 아내와 아들을 단 한 번도 거들떠본 적이 없었다. 무일푼이었던 앤드루는 필립에게 두 벌의 정장 낡은 가죽 혁대 상아로 만든 면도 도구 등이 든 낡은 여행용 가방을 유산으로 남겼다. 필립은 1946년에 가서야 자기에게 남겨진 이 빈약한 유산을 챙겨왔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양복을 수선하여 군복을 입지 않을 때의 신사복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색깔이 번들거리는 그 개버딘 정장은 국왕 폐하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국왕은 트위드와 플러스포즈(스포츠용의 헐렁하고 짧은 니커즈 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은 신사로 쳐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필립을 윈저 성의 들꿩 사냥에 초청하라고 아버지를 졸랐지만 왕은 플러스포즈도 없는 필립을 초청하지 않으려 했다. 왕은 딸에게 그 바지를 플러스포즈라고 부르는 이유는 보통바지 보다 4인치 더 길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헐렁한 그 바지는 골퍼들이 주로 입는 것이었다. "그럼 아빠 것을 빌려주면 되잖아요. " 엘리자베스는 지지 않고 말했다. 국왕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빌려주기로 했다. 왕은 파자마도 입지 않고 침대 슬리퍼도 없으며 정장 옷도 하나 없고 남루한 구두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필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은 프린스 필립이 왕족이 아닌 평민으로 양육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고있었다. 입고 다니는 옷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버릇이 있던 조지 6세는 필립이 단추나 보타이 나비 넥타이 등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필립은 비록 버티 아저씨와 엘리자베스 아주머니에게 늘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대했지만 너무 자신에 넘치고 또 너무 친밀한 태도 때문에 왕의 비위를 거슬렸다. 왕비 역시 필립이 너무 스스럼없는 자세로 나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왕비는 버킹엄 궁의 하인을 자기 하인처럼 부려먹는 필립에게 몇 번씩이나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왕비는 물론이고 왕 자신도 그들의 17세 된 딸이 그 젊은이에게 시집가겠다고 마음먹은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마거릿 공주는 필립에게 그토록 홀탁 빠져버린 언니를 마구 놀려댔다. 그러나 왕과 왕비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국왕 부처는 1944년 켄트 공작 부인 이 주최한 소규모 디너 파티에 참석하면서 엘리자베스가 훌쩍 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필립이 맏딸과 계속해서 춤추는 것을 보았고 또 엘리자베스에게 모피 코트를 입혀주는 장면이 사진 찍히는 것도 목격했다. 그렇지만 결혼의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18세 생일이 지나간 직후 디키 아저씨는 사촌인 그리스의 왕 조지의 옆구리를 찔러 엘리자베스의 혼사 문제를 조지 6세에게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조지 6세는 마운트배튼에게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말했고 이어 어머니인 퀸 메어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 부부는 그 애가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그 애는 동갑내기 남자애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나는 필립을 좋아합니다. 똑똑하고 유머감각도 있고 생각도 올바른 것 같아요. 조지에게 부탁하여 이 문제를 당분간 염두에 두지 말라고 조언할 생각이에요.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필립의 아저씨 마운트배튼은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당분간이라는 말에 희망을 걸면서 필립에게 나중에 있을 혼사에 미리 대비하여 시민권과 종교를 몽땅 바꾸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영국 군대가 그리스 정부의 편에 서서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자 미묘한 문제가 발생했다. 필립에게 영국 시민권을 주는 것은 영국이 그리스 왕족을 지원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고 반대로 그리스 왕족이 몰락할 것으로 내다보고 필립에게 도피처를 제공한다는 해석을 자아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운트배튼은 그 얘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필립의 시민권 문제는 1946년 3월 그리스 총선과 군주제에 대한 국민투표가 시행될 때까지 연기되었다. 마운트배튼은 자신의 독일계 뿌리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혐오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립의 독일식 성(쉴레스비히 -홀스타인 -손더부르그 -글뤽스부르크)과 필립의 매형들이 히틀러의 제3국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또한 필립이라는 이름도 독일 헤세 지방의 영주인 프린스 필립 오브 헤세 (빅토리아 여왕의 딸 -영국 왕 조지 6세의 큰 할머니-인 앨리스가 헤세 지방의 영주인 루이 4세에게 시집갔고 여기서 난 아들이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아버지인 프린스 루이 오브 바텐베르크임. 역주)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도 걱정거리라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마운트배튼은 가능한 한 필립의 독일계 뿌리를 절연 시키려고 애썼다. 모사꾼인 디키 아저씨는 자신의 조카가 영국의 제도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영국 선서관리위원에게 편지를 보내 필립은 지금껏 거의 모든 생활을 영국에서 해 왔고 전쟁 중에는 직업 군인이 되겠다는 목표로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필립은 말도 잘 타고 총도 잘 쏘고 축구같은 게임에 보통 이상의 실력을 갖춘 철저한 영국신사로 양육되었다 라고 마운트배튼은 썼다. 그는 또 필립에게 편지를 보내 귀화 절차가 순풍에 돛단듯이 진행중임을 알리면서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로맨스를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일렀다. 필립은 아저씨에게 제발 속도를 좀 늦춰 달라고 애원했다. "제발 사랑의 문제에 너무 많은 조언을 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가다가는 나중에 구혼도 대리인을 시켜서 해야 될지 몰라요. " 필립은 엘리자베스 공주의 남편감은 프린스 필립 오브 그리스라는 뉴욕 타임스 기사에 국왕 부처가 대단히 난감해 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신문 기사는 즉각 왕궁에 의해 부인되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6년 동안이나 죽어라 일만 해야 되었던 영국의 공장 근로자들은 로맨스의 소식을 목마르게 고대하고 있었다. 1945년 독일의 무조건 항복 직후 미래의 여왕이 최초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군중들은 소란스럽게 외쳐대어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필립은 어디 있어요." "필립은 어떻게 지내나요 " 엘리자베스 공주는 나중에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걸 노골적으로 물어보다니 너무 지독해 " "불쌍한 릴리벳 이제 언니 것은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연애사건까지도 " 마거릿 공주가 말했다. 5. 좋지 않은 예감: 내가 용감한 건지 아니면 어리석은 건지 잘 모르겠어 1945년 무렵 윈저 가는 완전히 새롭게 보수되었다. 어두운 독일식 기초에다 밝은 영국식 색깔을 칠하고 외관을 손질하여 매력적이고 새로운 단장을 끝냈다. 이런 가짜 외관은 윈저 왕가의 결점을 감추어 주었고 독일 왕가를 영국 왕가로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 했다. 속임수에 의해 영국 왕가로 재단장한 윈저 가는 2차대전 종료시에는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정치로부터 초연하고 붕당적 소모전에 의해서 피해를 볼 염려가 없는 왕실은 이제 존경의 표상이 되는 국민적 제도기관으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왕실에 의해서 의인화되는 군주제는 의무 예의 품위를 상징했다. 연합군이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자 영국 국민들은 용감한 전시 지도자 처칠 총리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수줍음을 많이 타는 키 작은 국왕은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했다. 독일이 항복하던 날 군중들은 버킹엄 궁을 둘러싸고 존경하는 국왕 부처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영국적 도덕심의 상징인 왕가는 대영제국의 생활 중심이 되었다. 국왕 부처가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들자 군중 속의 한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이런 좋은 국왕 폐하를 내려 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은 조지 6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조, 조 ,좋은 구, 구, 국민을 주신 하느님 가, 가, 감사합니다. " 전쟁이 끝나자 왕은 전쟁통에 가족들과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을 보충하려고 애썼다. 특히 맏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그는 발모랄 성으로 피크닉을 나가고 샌드링엄에서 사냥을 계획하는 등 큰딸이 자신의 취미 생활에 동참하도록 배려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지만 6년 동안 윈저 성에만 갇혀있었던 19세의 그녀는 런던 나이트클럽에 가서 스윙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흔들어 보는 것을 동경했다. 의무감이 강한 딸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시녀와 기사가 딸린 다이믈러 차가 배정되고 또 그녀의 침실 옆에는 응접실이 딸려 있었다. 그녀는 공립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었고 또 외국을 방문한 적도 없었다 .목욕탕 물을 스스로 받는 일도 하지 않았고 식사를 준비하거나 각종 대금을 지불하는 일도 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옷만은 직접 골랐다. 국민들은 의복 쿠폰을 이용하여 근근이 옷을 사고 커튼으로 만든 치마와 외투로 만든 바지를 입고 다니는 동안 그녀는 전속 의상 디자이너가 따로 있었고 어깨 끈이 없는 비단 이브닝 드레스를 입었다. "내 개인 차도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어떤 회사 제품이 좋으냐를 놓고 가족들 사이에 너무 말이 많아서 결국은 가지지 못할 것 같애. " 그녀는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에게 속하게 되는 것은 모두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과감하게 어떤 일을 시행해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잘못하면 어쩌나 하는지 걱정 때문에 남의 이목과 국민들의 의견에 끊임없이 신경썼다. 그는 왕실 직원들에게 일일이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서 결정 내리는 것을 대단히 불안하게 여겼다. 그런 걸로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스타일인 왕비도 맏딸에게 무엇이 좋은지 결정하는 문제만큼은 그리 과감하지 못했다. 새 차든. 모피코트든, 새로운 말이든 엘리자베스에게 사주는 그 어떤 물건도 국왕 부처는 즉석에서 결정하는 법이 없었다. "그분들은 공주에게 최선의 것을 주려고 했지요.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이 최선인지 결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공주의 가정교사인 크로피가 말했다. 왕과 왕비가 재빨리 합의에 도달한 유일한 문제는 필립 오브 그리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딸이 그 해군 대위에게 굉장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다른 남자들을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티 댄스, 디너 파티. 연극 구경. 공식 무도회 등을 마련하여 공주가 많은 귀족 자제들을 만나보게 했다. 그들은 또 윈저 성 근처에 주둔중인 총각 장교들도 초청했다. 엘리자베스는 우유부단한 귀족 자제들을 허식많고 답답하고 따분한 사람들이라고 말했고 동생인 마거릿은 장교들을 가리켜 이는 나쁘고 입술이 두터운 데다 나쁜 입냄새마저 풍기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했다. 국왕 부처의 우외전술은 공주의 할머니인 퀸 메어리도 눈치챌 정도가 되었다. 메어리는 갑자기 왕궁에 출연하는 젊은 장교들을 가리켜 보디가드라고 불렀다. 퀸 메어리의 시녀는 국왕이 과보호 탓에 딸의 연애를 못보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6년 필립이 영국에 돌아와 있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를 발모랄로 초청했다.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한지가 무려 3년이나 되었다. 필립이 윈저 성의 복도에서 가짜 이빨이 덜그덕거리는 가면을 쓰고 공주를 뒤쫓아가자 공주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 1943년의 크리스마스였던 것이다. 그 당시 엘리자베스는 필립의 재미있는 장난과 쾌활한 농담에 푹 빠져 버렸다. 그가 깡통에서 너트를 꺼내주면서 동시에 거기서 가짜 뱀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을 때 그가 그녀에게 디너 빵을 건네주면서 일부러 무례한 내장의 소음(방귀소리. 역주)를 내었을 때 공주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웃어제쳤던 것이다. 그녀는 당시 너무 웃음이 나와 식사를 계속하지 못할 정도였다. 필립의 어릿광대 같은 유머와 잘생긴 용모에 이끌린 공주는 그가 다시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정교사에게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로피 사람은 어떻게 해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죠." "나는 공주에게 남녀를 순간적으로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공통의 관심사와 또 남녀를 평생 함께 살게 만드는 사랑의 힘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공주는 내 말을 열심히 듣더군요. " 필립은 후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사이가 깊어진 것은 1946년 발모랄에서 였다고 생각합니다. " 당시 22세의 아름다운 공주는 여전히 그의 농담을 까무라칠 정도로 재미있어 했다. 버킹엄 궁의 주방장이었던 르네 루셍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필립 공이 릴리벳 공주의 최고 손님이었던 때를 아직 기억해요. 연극 행사를 끝내고 난 다음이었는데 공주가 새우 파이를 좀 올려보내달라고 특별 부탁을 하더군요. 당시 필립 공은 그 파이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필립이 왕가의 스코틀랜드 별장인 발모랄 성에서 며칠을 보낸 다음 왕은 필립이 너무 오래 머무는른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부터 눈치로 커온 필립은 그런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하고 얼른 그곳을 떠났다. 필립은 여러 해 뒤 그의 구애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저런 일로 해서 일이 자꾸 엮어지더군요. 난 그 문제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가만 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요.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사이를 심각하게 생각했고 또 거기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기도 했어요." 1946년 8월 발모랄 성에서 며칠을 보낸 다음 필립은 엘리자베스에게 구혼을 했고 그녀의 승낙을 받았다. 물론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그것은 공주가 부모님의 의견을 묻지 않고 독자적으로 취한 최초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일푼의 그리스 왕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함으로써 최초로 부모와 언쟁을 벌이게 된다. 1772년의 왕족혼인법에 의하면 조지 2세의 후손들은 국왕으로부터 혼인허가를 받아야 하고 또 결혼식을 거행하기 전에 내각의 의결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엘리자베스도 이 법을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승락을 얻어내려 했지만 아버지는 망설였다. 왕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마필 담당관에게 털어놓았고 왕의 그런 의견에 적극 동조하던 마필 담당관도 최대한 결정을 늦추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다. 왕실 내에서 엘리자베스를 밀어주는 사람은 할머니 퀸 메어리뿐이었다. 할머니는 조지 5세와 중매결혼을 했지만 점점 더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또 결국에는 5남매를 낳아 화목한 부부생활을 영위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듣는데서 필립 공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가령 필립을 가리켜 남자 아이들은 온갖 사람들과 어울려 놀아야 한다는 완전한 사회펑등 이론을 가르치는 괴상한 학교의 졸업생이라고 놀려댈 때 퀸 메어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만 쳐다보았다. "국왕의 사위로서 이러한 교육 배경이 적절하다고 보십니까? " 사람들이 그녀에게 물었다. "유익하다고 생각해요 "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조심성 많은 국왕은 왕실 직원들에게 공주가 필립 오브 그리스와 결혼해도 좋은지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왕실 직원들은 주간지 선데이 픽토리알의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대면서 계급 의식적인 영국 독자들 중 40퍼센트가 외국인인 필립과의 결혼은 안된다는 의견을 갖고 있음을 보고했다. 1세기 전 독일의 알베르트 공이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왔을 때 당시의 궁중 신하들은 그를 저 독일인이라고 불렀고 그의 참모를 독일 스파이라고 매도했다. (알베르트와 빅토리아 여왕 사이의 금실은 대단히 좋았으며 1861년 42세의 알베르트가 사망하자 당시 동갑이던 빅토리아 여왕은 그후 40년 동안 늘 그를 그리워하며 검은 가운을 입은채 수절했다. 역주) 그런데 1세기가 흐른 다음에도 여전히 왕실 직원들은 그와 유사한 외국인 혐오증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필립을 그리스인 필이라고 불렀다. 필립은 자기 자신을 스칸디나비아 사람 혹은 덴마크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인터뷰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집에서는 처음엔 영어를 사용해요. 그러다가 대화가 프랑스어로 이어지지요. 하지만 때로는 독일어로 대화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촌 중에 독일인이 많으니까 어떤 언어의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다른 언어의 단어를 가져다 쓰기도 해요. " 말보로 공작 부인의 딸은 그녀의 오빠들이 필립의 등 뒤에서 그가 귀족이 아니라고 비웃는 것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필립은 전원생활을 몰라요 그는 귀족 생활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것이 엘리자베스에게 큰 매력이 되었지요. 그런 출신 배경과 그가 아주 매력적이었다는 점이 그녀를 사로잡았어요. 비록 그는 영국 제도권에 완전히 동화된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귀족들을 흉내내기 위해 때로는 허세도 부리고 바보 같은 척도 하고 답답한 시늉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매력적인 성품으로 과감히 밀어부친 거죠."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망설이는 태도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녀는 이런 주장을 폈다. 내가 공주로 태어나겠다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단지 출생의 우연으로 여왕이라는 의무를 다하며 일생을 보내게 의무지어져 있다. 그러니 결혼만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할 수 있게 해 달라. "결국 아빠는 엄마와 결혼하셨잖아요. 엄마는 왕족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필립은 왕족이라 구요" 왕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자베스가 너무 어려서 마땅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공주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례를 들었다. "알베르트 공과 결혼했을 때 여왕은 20세였어요.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행복한 결혼이 되었어요." 왕은 공주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답게 필립의 바람둥이 기질을 걱정하고 있었다. 당시 해군 대위였던 필립이 해군 동료 마이클 파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의 유곽을 찾아갔다는 보고를 국왕은 받고 있었다. 또한 필립이 어린 시절 친구인 헬렌 푸푸니스 코르테트와 계속 사귀고 있는 것도 못마땅했다. 필립이 사촌인 데이비드 밀포드 헤이븐과 함께 밤이면 런던의 웨스트엔드를 어슬렁거린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국왕은 필립과 결혼하고 말겠다는 딸의 고집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걱정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왕위 계승권자이기 때문에 국왕의 승인은 물론 정부와 공화국의 승인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만약 이 결혼을 승락해 주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린 아저씨 윈저 공의 전철을 밟겠다는 얘기까지 슬쩍 비춰 더욱 왕의 애간장을 태웠다. 의무보다는 사랑을 앞세우는 공주의 고집은 왕실의 측근인 주영 미국 대사 루이스 더글러스에 의해서도 포착되었다. 그는 국무부로 보내는 1947년 메모에서 이렇게 썼다. 엘리자베스 공주가 프린스 필립과 결혼할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 결혼에 반대한다면 그녀는 주저없이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아주 강한 성격의 소유지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왕의 측근이었던 사람은 윈저 공의 1936년 양위 얘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윈저 공 얘기는 그때까지도 왕실에서는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측근은 공식적인 기록을 분명하게 밝히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공주는 그런 식으로 협박하지는 않았어요. 큰아버지의 로맨스가 왜 그렇게 진행되었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겠다는 정도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것하고는 엄연히 다른 얘기죠." 엘리자베스는 대중들 앞에서도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필립을 좋아하는 것은 너무 명백하여 소문 공장이 활발하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외신들은 이들 커플이 비공식적으로 약혼했다는 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 언론들은 감히 그런 추측기사를 내보낼 배짱이 없었다. 한편 세계 여론을 의식한 국왕은 왕궁 공보관에게 그 기사를 공식적으로 부인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1945년 가을에만 이런 공식 부인 성명이 다섯 번이나 발표되었다. 필립은 엘리자베스에게 프로포즈한 다음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라는 이름으로 귀화신청을 냈다. 그동안 주욱 마운트배튼의 조언을 받아온 필립은 이제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 뒤 필립은 디키 아저씨의 영향력을 평가절하했다. "내가 그 이름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 이름을 쓰기로 했죠.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디키 아저씨는 나의 인생 진로에 그다지 많은 허용을 미치지는 않았어요. " 이것은 필립이 1917년 한 전기작가에게 해 준 말이다. 필립은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다음 영국 교회에 가입하기 위해 그리스정교를 포기 했다. 1946년 12월 16일 뉴욕 타임스는 1면에 엘리자베스 커플의 약혼을 단정짓는 듯한 기사를 실었다. "그토록 많은 왕족의 로맨스를 망쳐 놓은 정치가 영국 왕위 계승권자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오브 그리스의 약혼발표를 훼방놓고 있다." 또다시 버킹엄 궁은 사실이 아니라는 부인 발표를 했다. 왕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점점 더 짜증을 내고 심술을 부렸다. 그리고 저녁식사 때마다 자기 옆자리에다 위스키 병을 갖다놓으라고 지시하여 많은 위스키를 따라 마셨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전후의 피폐한 상황에서 아직도 음식과 연료를 배급제에 의존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기본 생필품의 부족 이외에도 영국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동원 해제되자 실업자들의 홍수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이런 결과 윈스턴 처칠이 선거에 패배해서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국왕은 새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를 상대해야 되었다. 보수적 성향의 국왕은 노동당이 너무 사회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왕은 1946년의 일기에다 우울한 마음으로 이렇게 써넣었다. "음식 의복 연료 등이 우리 모두의 주된 화제이다."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특히 사촌인 디키 마운트배튼은 더욱 국왕을 짜증나게 했다. 새 노동당 정부가 그를 인도 총독에 임명하자 그는 마치 공작새가 된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마운트배튼은 인도에 부임하여 그 나라의 독립을 후견하는 최후의 인도 총독이 된다. 왕비는 디키가 또다시 자기의 메달을 뽐내고 돌아다닌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국왕은 이런 모든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웠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문제는 마운트배튼의 사촌 필립이었다. 필립이 미래의 여왕 부군이 된다면 그건 아무래도 보통 문제가 아닐 것만 같았다. 당시 국왕은 가족 동반으로 남아프리카를 10주 동안 여행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또 그 기간 중에 엘리자베스 공주의 21세 생일 파티를 성대히 베풀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주가 자신의 비밀 약혼자를 영국에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만 떠날 수 없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공주에게 너도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 여행은 2차대전 중에 자기네 총리를 쫓아내면서까지 영국의 지원했던 남아프리카에 대한 답방으로써 이미 4개월 전부터 준비되었던 것이었다. 왕은 자신의 방문으로 남아프리카의 내정분열을 치유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는 최초의 군주인 왕이 케이프타운의 중앙정부 의회의 개원을 축하하는 자리에 설 때 그 옆에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배석해야 제격인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21세 생일 파티 때 성년 선포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연설에는 미래의 군주로서 자기가 대영제국의 신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는 맹세가 들어 있었다. 이 연설은 나중에 전세계에 방송되었다. 그녀는 그 연설문의 낭독을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나 낭독할 때 마다 그 엄숙한 선언은 그녀를 눈물 흘리게 만들었다. 나는 짧던 길든 나의 전 생애를 신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바칠 것이며 또 우리 모두가 소속된 대영제국을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임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 일에 함께 동참해 주지 않으면 나 혼자서는 이 일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지금 호소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기쁜 마음으로 이러한 노력에 힘을 보태어 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참하는 모든 분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마침내 국왕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마음을 누그러트렸다. 그는 딸이 필립과 결혼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단 이름, 국적, 종교를 바꾼 필립이 영국의 제도권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필립의 아저씨 마운트배튼은 즉각 그를 영국의 언론재벌에게 소개했고 언론재벌은 필립이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뻘이며 또 영국 해군에 근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공주의 배필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국왕은 여전히 약혼 사실의 공표를 거부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남아프리카 여행 이후까지 비밀로 부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혹시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서였다. 국왕 가족의 아프리카 여행 사진첩을 보면 왕비는 연신 환하게 웃고 있는데 비해 엘리자베스는 시무룩하고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케이프 타운에서 개최된 1947년 4월 21일의 21회 생일 파티 때에는 그녀도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낮 동안에는 축하인사를 받았고 저녁에는 대무도회와 불꽃놀이 행사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오전 중에는 엄청난 생일 선물들을 끌러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3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합 모양의 백금 브로치는 4만 2천명의 로데시아 학교 학생들이 일주일치 용돈을 아껴서 적립한 돈으로 만든 선물이었다. 1년 수입이 2천 달러도 되지 않는 왕실 직원들의 모금으로 만든 다이아몬드 꽃무늬 귀고리도 있었다. 공주가 명예 연대장인 근위 보병 제 1연대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연대 배지를 진상했다. 공주의 부모로부터는 담장이 넝쿨 모양의 카르티에 브로치를 선물 받았다. 그 브로치는 가운데에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 2개가 박혀 있고 주위에는 2천 개의 좁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남아프리카는 국가 차원에서 1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선물을 국왕부처에게 내놓았다. 왕은 가터 훈장을 장식할 다이아몬드가 가득 든 황금 박스를 받았고 여왕은 22캐럿 골드가 상감된 찻잔들을 받았다. 마거릿 공주는 17개의 각종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목걸이를 받았고 엘리자베스는 21개의 각종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는 은제 서랍을 선물 받았다. 21개의 다이아몬드 중에는 바게트(장방형으로 커드한 보석형)으로 가로지른 무게 21캐럿의 다이아몬드도 있었다. 왕실은 보석을 가득 받아들고 1949년 5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공주의 약혼을 발표하려 하지 않았다. 왕은 윈저 성에서 열리는 로열 애스코트 하우스 파티의 초청자 명단에서 필립의 이름을 삭제했다. 그러나 1947년 당시 킹스무어에 있는 해군 초급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필립은 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립은 그날 밤 버킹엄 궁으로 가서 엘리자베스에게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전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말했다. 그 반지는 필립의 어머니 앨리스 공주가 갖고 있던 것이었다. 왕은 허락을 내리면서 미래의 사위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필립은 자신의 스포티한 차 MG를 몰고 윌트셔에서 런던까지 약 98마일을 달려갔다. 그 이틀 뒤 과거 2년 동안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약혼사실을 계속 부인만 하던 왕궁 대변인이 정식으로 이들의 약혼을 발표했다. 결혼식 날짜는 1947년 11월 20일로 정해졌다. 그러나 결혼식 진행 문제를 놓고 이번에도 왕이 까탈을 잡고 나섰다. 영국의 석탄 부족과 경제 침체를 지적하면서 국왕은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채플에서 간략한 예식을 치르자고 말했다. 왕은 화려한 의식과 장엄한 행진의 비용을 가능한 한 줄여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왕비는 성대한 결혼식을 주장했다. 왕은 또다시 날씨 얘기를 꺼내면서 결혼식 날짜를 내년 6월로 연기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로서는 피하고 싶은 결혼식을 가능한 한 뒤로 미루어 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설혹 결혼식 당일에 눈이 와도 상관없으니 11월에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영국 언론은 그 약혼을 세기의 연애결혼이라고 칭송했다. "이건 중매 결혼이 아닙니다." (데일리 메일) "공주 커플은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군요." (데일리 텔리그래프) 의심많은 미국 언론들도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제 전세계는 이 아름다운 여성과 씩씩한 해군장교가 정략 결혼이 아닌 연애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 중매결혼은 필립에게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1923년까지 중매결혼은 왕족의 관행이었고 연애결혼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었다. 왕족간의 결혼에서 사랑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필립의 부모가 중매결혼을 했고 마운트배튼 가의 아저씨 두 명이 그랬고 필립의 사촌들 중에 가난한 그리스 공주인 마리나가 영국으로 수입되어 호모 성향의 켄트 공에게 억지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주변 상황을 기막히게 잘 파악하는 필립은 나름대로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 결혼을 했다. 4반세기가 흐른 뒤 필립은 자신과 엘리자베스의 결혼이 중매결혼이었다고 공언했다. "왕실 가족이 남아프리카로 갔다 오더니 그 다음에 결혼 문제가 결정되었습니다. 내 결혼의 진상은 바로 그것입니다." 필립은 1971년 자신의 전기작가인 바실 부드로이드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와 결혼한지 25년이 된 필립은 이미 왕세자를 낳은 상태였고 여왕 부군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기가 다른 여자들과 놀아 난 것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필립이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을 때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필립의 친구이며 하모니카 제조업자인 래리 아들러는 말한다. 래리는 미국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자 영국으로 이주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필립이 운영하는 남성전용 점심모임인 목요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럼 필립이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느냐고요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를 존경했지요." 필립은 그토록 그녀를 존경했기 때문에 훨씬 예쁜 마거릿 대신 미운 오리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벌컥 화를 냈다. " 두 자매를 잘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부드럽게 상냥해요 그녀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필립은 말했다. 약혼이 발표되자마자 당시 인도 총독으로 있던 디키 아저씨는 결혼준비를 어떻게 해야 되고 집안 살림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등에 대해서 자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허니문 여행지로 햄프셔에 있는 자신의 영지 브로드랜즈를 제공했고 신혼부부에게 에드위나의 스위트를 사용하라고 제안했다. 그 방안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고 상아로 만든 침대 머리판과 '야릇한 핑크색 비단 시트'가 덮인 튜더식 4기둥 침대가 있었다. 필립은 아저씨의 호의를 받아들였지만 그곳에 단 며칠만 묵었을 뿐이었다. 그의 신부가 2만 4천 에이커 규모의 발모랄 성에 있는 조그마한 왕실 별장인 버크올에서 허니문의 대부분을 보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스승인 디키 아저씨를 이렇게 조심시켰다. " 나는 무례한 말씀을 드릴 의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이 작은 쇼의 총지배인 같은 역할을 하려는 듯하군요. 하지만 공주는 나와는 달라 그런 계획에 순순히 따라 줄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좋은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나처럼 아저씨를 아버지뻘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러나 이런 조심시키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운트배튼은 윈스턴 처칠에게 편지를 보내 필립을 한번 만나 '왕위 계승자와 결혼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주지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총리직에서 물러나 있던 처칠은 군주제의 보존을 위해 그 젊은 해군 대위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필립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는 자신의 들러리로 사촌인 데이비드 말포드 헤이븐을 선택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그러나 결혼식에 초대할 2천 5백명의 초청인사 중 필립은 단 2명만 초청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는 이 두 장의 초청장을 해군동료인 마이클 파커와 헬렌 코르데트 (필립의 정부로서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문이 있는 여자)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2차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윈저 공부처는 초청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망명중인 윈저 공작은 엘리자베스가 좋아하는 아저씨이기는 했지만 그 전 해(1946) 왕의 스토리라는 회고록을 발간하여 왕실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왕비는 외무부에 부탁하여 윈저 공부처가 11월중에 미국 여행을 하기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으로 윈저 공 쪽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외무부는 그 부탁을 전했으나 윈저 공은 그 시기에 미국여행을 할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버킹엄 궁은 단호했다. 더욱이 언론에서 질문해 올 경우 윈저 공 부처가 결혼식에 초대 되지 않은 사실을 부인해 달라고 윈저 공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결국 윈저 공 부처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결혼식을 중계한 라디오 방송도 듣지 않았다. 초청자 명단을 검토하던 왕비의 또 다른 고민은 필립의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왕비는 안사돈이 상냥하기는 하지만 좀 난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필립의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2차대전중 그리스에게 수녀회를 운영하면서 유대인 난민을 많이 도와서 1947년에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기로 했었다. 왕실 결혼식장의 모양새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고 있던 왕비는 필립에게 결혼식 당일날 안사돈이 수녀 복장으로 나타날 것이냐고 물었다. 왕비는 자신은 신부의 어머니로서 살구와 황금으로 장식된 비단 드레스를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립은 그것이 앨리스공 주의 회색 수녀복과 염주는 아무래도 곤란하다는 간접적인 암시임을 재빨리 눈치챘다. 그래서 결혼식 날 필립의 어머니는 모자를 쓰고 간단한 비단 드레스를 입고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왕실 사람들과 함께 자리 했다. 왕비는 나중에 안사돈의 드레스가 아주 예쁘고 적절했다고 말했다. 결혼식 날 아침 필립은 장차 하나의 제도가 될 여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표시했다. 한 친척은 당시 이렇게 회상했다. " 우리는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랬는데 필립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아주 용감한 건지 아니면 매우 어리석은 건지 잘 모르겠어." 조지 6세와 왕비는 자신들의 결혼식을 하나의 장관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이 국민들에게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은빛 트럼펫의 팡파르와 금빛 마차의 행진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열광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런 장엄한 군주제의 의식이 전후의 궁핍으로 넋이 나간 국민들을 결속시키고 또 대영제국을 하나의 축제 분위기로 단단히 묶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행사를 통하여 모든 국민이 왕가의 일에 흔쾌히 참여하고 그렇게 하여 군주가 국민들에게 행사하는 심리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엄하고 화려한 행진의 위력을 윈스턴 처칠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47년의 결혼식을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힘든 길 위에 섬광처럼 나타난 화려한 빛깔이라고 묘사했다. 뉴욕 타임스도 전후의 평화 속에서도 전시나 다름없는 부담을 겪고 있는 우울한 영국민에게 하나의 상쾌한 축제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런 보도가 나간 다음 날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한 소녀는 자기 돼지 저금통을 깨트려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결혼기념 선물로 터키 고기를 보냈다. 그런 선물을 보낸 이유는 공주가 살고 있는 영국에 국민들이 먹을 게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결혼식 행사를 준비할 기간이 4개월 밖에 없는 상황에서 왕과 왕비는 특히 의상 준비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의상이 왕가의 주된 화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공주가 멋진 의상과 웨딩 드레스를 준비할 수 있도록 각료들로부터 의복 배급 구폰이 모집되었다. (당시 영국은 전후 복구운동의 일환으로 음식 의복 연료 등이 배급 쿠본제였으며 왕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음. 역주) 공주는 자신의 의상 디자이너인 노만 하트넬에게 아주 독특하고 멋진 웨딩 드레스를 떨쳐 입고 예식장의 중앙통로를 걸어 내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했고 만약 결혼식 전에 웨딩 드레스에 대한 정보가 바깥으로 흘러나간다면 다른 디자이너에게 일감을 맡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왕실디자이너 하트넬은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비밀유지 각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고 자신의 작업실 창문을 두꺼운 하얀 머슬린 천으로 가려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공주의 웨딩 드레스를 디자인할 때 보티첼리의 그림 [프리마베라]로 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하트넬은 상아빛 새틴(수자직의 공단)과 튈(드레스에 사용하는 얇은 망 모양으로 된 비단)에다 1만여 개의 좁쌀 진주와 그 외에 수정을 박은 드레스를 구상했다. 이 드레스는 10명의 장식가와 24명의 침모가 두달 동안 온 힘을 기울여서 만들어 냈다. 결혼식 당일 드레스에 바느질할 일이 생길지 몰라 결혼식 도중에 두 명의 침모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대기했다. 신부의 튈 베일은 길이가 15야드이고 들어간 실의 길이만도 100마일에 이르렀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에게 100장의 의복 쿠본이 추가로 제공되었고 8명의 결혼식 들러리들을 위해서 추가로 23장의 쿠본이 마련되었다. 그녀는 또 결혼을 축복하는 사람들로부터 386장의 나일론 스타킹을 선물받았다. 스타킹은 전후의 어려운 부흥기를 살아가던 영국의 젊은 여성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혼수를 고르는 데에는 아낌없는 비용이 지원되었다. 그녀의 신혼 첫날밤을 위해서는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조스케 백화점에서 3백 달러짜리 나이트가운이 선택되었다. 이 당시 평균 미국인의 한달 봉급은 150달러 정도였다. 옅은 상아색깔이 감도는 고제트 나이트가운은 약 40야드의 실크가 들어간 것인데 가슴에는 새틴의 장미가 장식되어 있었다. 브로케이드 실내복은 신사 숙녀가 미뉴엣 춤을 추는 무늬가 손바느질로 새겨져 있었다. 이 백화점의 선물부 포장담당 부장은 공주가 이 귀한 옷에 손을 대기 전에 때가 타면 안된다며 포장하기 전에 외과의사처럼 몇 번이고 손을 씻은 다음 포장했다고 한다. 결혼식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결혼식이 이날 오후 데일즈 지방의 멀리 떨어진 마을에 있는 자그마한 교회에서 거행되는 동네 결혼식 절차와 똑같이 거행된다고 선언했다. 똑같은 기도를 바치고 똑같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로열 리셉션에 12개의 웨딩 케이크가 준비되었다. 그중 한 케이크는 높이가 9피트나 되었는데 필립이 큰 칼로 그 케이크 한 조각 자를 때 마다 4인 가족의 1주일치 배급량의 설탕이 그 조각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도 2666점의 결혼 선물이 답지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사로브레드 말, 밍크 코트, 22캐럿 골드 커피찻잔, 텔레비전세트,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54캐럿 핑크 다이아몬드, 케냐의 농장과 사냥터 등이다. 18대에 달하는 마차의 행렬에 태워진 왕실의 손님은 6명의 왕, 6명의 왕비, 7명의 왕자, 1명의 섭정공주, 1명의 섭정왕자, 1명의 인도 태수, 1명의 황태자, 1명의 황태자 비, 7명의 백작, 6명의 백작부인, 11명의 후작, 14명의 공작, 11명의 공작부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해군 대위로 1주에 8기니를 벌 뿐이었던 가난한 신랑은 작위, 타이틀, 지위가 있는 귀족이 되었다. 그는 제복 어깨에다 황금 견장을 달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또 1명의 종복, 1명의 사교 담당비서, 1명의 마필 담당관을 거느리게 되었다. 연간 약 10만 달러의 보수비가 책정된 클래런스 하우스라는 왕실 저택을 제공받았고 전원에 내려가 주말을 보낼 수 있는 성(서닝힐 파크)도 가지게 되었다. 결혼식 전날 아침 필립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왕은 칼집에서 칼을 꺼내 필립의 양 어깨를 한 번씩 내리치면서 미래의 사위에게 가터 훈장을 수여했다. 수레국화의 짙고 선명한 청색을 자랑하는 띠와 8각형의 별로 되어 있는 가터 훈장은 영국 서훈제도에서 국왕이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이다. 자신의 어머니 퀸 메어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왕은 그보다 여드레 전 딸 엘리자베스에게 그 훈장을 수여했다고 썼다. 그녀가 남편보다 더 우선권을 갖기 위해서 며칠 일찍 서둘렀다는 것이다. 그 전에 필립은 그리스 이름, 직위, 국적, 종교를 포기하면서 평민의 신분으로 내려앉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 개의 멋진 영국 작위 -즉 그리니치 남작, 마리오네트 백작, 에딘버러 공작 등을 부여받았다. 프린스 오브 더 렐름이라는 작위는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1957년에야 수여되었다. 그러나 결혼 직전 필립은 전하라는 칭호로 불리는 영예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호칭 부여는 일부 귀족들을 화나게 했다.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영국의 공작은 전하가 아니라 각하라고 불리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결심은 단호했다. 그는 26세의 사위에게 귀족 최고의 영예을 주어 자신의 딸이 귀족의 아내라는 지위를 획득하도록 만들었다. 왕은 또한 자신의 손자들이 귀족의 피를 물려받고 태어나기를 바랬다. " 한 사람에게 이렇게 영예를 한꺼번에 몰아주면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필립은 자신의 새로운 책무를 잘해 나가리라 믿네." 왕은 말했다. 결혼식 당일 신랑은 감기가 들었다. 그래서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평생 담배를 피지 않겠다는 맹서를 했다. 그는 결혼식 당일 들러리와 함께 식장인 예배당에 빨리 도착했다. 그 들러리에 의하면 그 전날 밤에 있었던 총각 고별 파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아침까지 남아있는 숙취를 가셔내기 위해 진토닉을 한 잔씩 했다는 것이다. 필입의 친한 친구인 래리 아들러는 여러 해 뒤 이렇게 회상했다. " 그 총각 파티는 아주 화끈한 파티였지요. 하지만 필립은 우리들만큼 파티를 즐기지는 못하는 것 같았어요. 우선 너무 겁을 먹고 있었어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얀 채로 밤새 떨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는군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어요. 국왕이 스피드 카에서부터 여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활방식을 단단히 규제하겠다고 단호히 말했거든요." " 필립은 약혼 발표 직후 사소한 자동차 사고를 내서 신문에 났었어요. 과속으로 달리다가 미끄러져서 중앙 분리대를 들이박고 약간 다쳤지요. 이게 신문에 알려지는 바람에 그는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는 무모한 플레이보이로 비쳐지게 되었어요. 당연히 국왕은 걱정을 했지요. 게다가 헬렌 코르테트와의 문제도 있었어요. 그녀와의 관계는 결혼식 직전에 프랑스 신문에 보도되었어요. 필립이 그 전 해에 파리에 있는 신비의 블론드 이혼녀를 방문했다는 얘기였지요. 그때 이래 헬렌은 필립의 첫손 꼽히는 정부로 거명이 되었어요. 또 필립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문도 돌았지요. 물론 그와 헬렌은 자기들이 파리에서 함께 자란 어릴 적 친구일 뿐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녀가 1938년 첫 결혼을 할 때 결혼식장에서 그녀를 신랑에게 인도했던 것도 필립이었고 또 그녀가 낳은 두 아이의 대부를 섰던 것도 필립이었어요 그러니 어느 말이 진실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래리 아들러는 필립과 헬렌 코르데트의 관계를 말할 때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번 들썩했다. 헬렌은 파리의 드레스 가게에게 일하다가 런던으로 이사와서 나이트클럽을 열었고 또 카바레 가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헬렌의 부모는 열렬한 그리스 왕당파였는데 필립의 부모가 그리스에게 프랑스로 탈출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이다. 이를 계기로 필립과 헬렌은 어릴 적 친구가 되었다. 아들러는 1992년에 이렇게 말했다. " 다행히 필립은 우리들에게 헬렌과의 관계를 자세히 털어놓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었죠. 또 국왕이 우리 친구 같은 난봉꾼을 공주가 사랑한다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게 이해되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당시 필립에게 자네의 바지 지퍼가 말을 못하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놀려대기도 했어요." 아무튼 필립은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생활을 계속유지 하면서 귀족부인이나 영화배우 같은 여자들과 아주 신중하게 바람을 피웠다. 한 처녀는 필립은 아이를 가졌으나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름을 대지 않자 더욱 소문만 무성해졌다. 1989년 필립의 사생아 얘기가 자꾸 나돌자 헬렌 코르데트의 아들 막스는 공식 선언을 했다. " 나는 평생 그런 소문을 들었지만 그건 참 어처구니없는 얘기이다. 나의 진짜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 마르셀 부아소인데 현재 파리에 살고 있다. 이런 쓸데없는 얘기가 나도는 것은 어머니가 어린 시절 필립과 함께 자랐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그이상의 것은 없다." 헐렌 코르데트는 자기 아들 막스가 다닌 고든스타운 학교의 학비를 필립이 대준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난했기 때문이지 필립이 애 아버지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그 소문이 너무나도 나돌아서 이미 나름대로의 자생력을 갖추고 있을 때였다. 막스의 학교 동창인 제임스 벨리니는 1994년 이렇게 증언했다. " 나는 막스 부아소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녔는데, 당시 우리는 그를 필립의 사생아일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늘 그 얘기를 우리들끼리 주고 받았으니까요.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기 전에 막스는 스코트랜드의 고든스타운을 다녔는데 이 학교는 필립의 아들 찰스, 앤드루, 에드워드가 다닌 곳이에요. 그리고 필립이 막스의 대부였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합니다. 왕족들은 그들의 사생아를 돌보기 위해 전통적으로 대부라는 위장을 써왔으니까요 이렇게라도 해서 그들의 사생아가 왕족과 희미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보살피는 거죠. 귀족들 중에 왕족을 대부모로 둔 사람을 한번 살펴보세요. 그러면 왕족의 사생아를 대충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필립이 결혼 전에 많은 여자와 놀아난 것은 사실이지만 헬렌 코르데트와의 관계는 열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필립과의 로맨스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그녀의 수줍은 듯한 부인은 런던 카바레 가수로서의 앞날을 타개하기 위한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과 필립의 관계를 서술한 [놀란 채로 태어나다]라는 책을 써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헬렌은 이 책에서 자신이 필립의 결혼식에 초청받지 못한 것은 자기가 파리 에 있는 필립의 신비스러운 블론드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자기가 이혼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처럼 당시의 왕가에서는 이혼한 사람을 뱀이나 지네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결혼 당시 숫처녀였던 엘리자베스는 퓨리턴적 기질을 갖고 있던 부모에 의해 과보호된 딸이었다. 반면 필립은 별거한 부모의 아들로서 온갖 타락과 부도덕의 분위기에 노출된 채 친척들의 눈치밥을 먹으면서 컸다. 엘리자베스는 왕궁의 밀립과 신선한 장미의 향기를 맡으면서 큰 반면 빌립은 빌려온 옷의 좀 냄새와 황급히 쌌다가 황급히 풀어놓는 낡은 여행용 가방의 좀 냄새를 맡으며 컸다. 유럽 호주 중동 등을 다양하게 여행한 26세의 신랑은 최근의 남아프리카 가족여행을 빼놓고는 해외여행을 해 본적이 없는 21세의 신부와 결혼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공립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하루 한 시간씩 영국 역사와 문장학 과목만 공부했을 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군주제에 대한 윌터 배젓의 글을 읽었고 또 복잡한 이름을 가지 세습 작위를 암기했다. 그녀는 프랑스 어는 잘 말할 줄 알았으나 수학과 과학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개와 말을 빼놓고는 자연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러드야드 키필링과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빼놓고 그밖의 모든 시를 싫어했다. 그녀의 가정교사 마리온 크로포드는 이렇게 증언했다. " 아무리 해도 그녀에게 현대시에 대한 사랑을 심어줄 수는 없었어요. 내가 현대 시인의 시를 읽어주려고 하면 공주는 그만 둬 한 마디도 못 알아 듣겠어. 도대체 이 시인은 뭘 말하려는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왕궁 바깥으로 나가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짧은 학력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한때 단테가 말 이름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이 중세의 시인 이름을 들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 아니, 아니, 말이 아닙니다." " 그럼 기수인가요." 공주가 물었다. 그녀는 단테 알리기에리는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자로서 신곡이라는 세계 걸작을 남겼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말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엘리자베스의 남편은 천재나 학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12년간의 정규 교육을 받았고 또 해군 훈련을 몇 년 간 받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뻔뻔스러움에 가까운 자신감을 발휘하면서 아무 소개도 없이 불쑥 방안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다음 자기 소개를 하고 가장 예쁜 여자에게 다가가 능청을 떨며 흰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야, 여기 내가 금방 떠나 온 사람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 있네." 필립은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화제라도 자신있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늘 자기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걱정이 되곤 했다. 내가 우리어머니 만큼만 잘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사람들에게 사소한 인사말을 걸어야 하는 리시빙 라인 (각종 행사 때 주최측 사람이 행사장입구에 서서 손님을 맞는 것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떤 때는 너무 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 저기, 나는 지금 특별히 할 말이 없네요." 엘리자베스는 한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 내 말이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녁 전 욕조에 드러누워서 이런 생각을 해. 오 내일은 내 옆에 앉는 사람이 누구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얘 난 말이야. 어떤 사람 옆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내가 생판 모르는 것을 얘기 해 오는 게 영 질색이야." 몇 년 뒤 필립도 자신의 무식함을 시인했다 "나의 학위는 매우 명예 학위에 불과하다는 것이 참 유감입니다." 그는 인도의 델리 대학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 뒤에 웨일스 대학의 학생들에게도 이 문제를 언급했다. " 나의 세대는 비록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금세기에 가장 시원찮게 교육받은 세대일 겁니다. 전쟁통에 더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통째로 상실 당했지요. 나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상실한 것을 보충하려고 애쓰는 세대입니다." 필립과 엘리자베스가 런던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그녀도 부끄러운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 우리에게 교육의 행운은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는 왕족내부로부터 대학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높은 교육을 받지 못해 단순한 사람이었던 왕은 딸애가 오히려 세련되지 못한 것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일기에다 윈저 성에서 맏딸과 함께 즐겼던 제스처 게임, 오락놀이, 거실에서의 노래부르기 등을 앞으로는 하지 못할 것이니 서운하다고 썼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왕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높이 쳐들고서 신랑 쪽은 아예 보지도 않은 채로 사랑하는 딸을 향해 축하인사를 보냈다. " 신부를 위하여." 왕은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말했다. 며칠 뒤 그는 딸에게 감동적인 편지를 보냈다.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긴 중앙통로를 너와 함께 걸어갈 때 네가 가까이 있다는 것에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너의 손을 대주교에게 넘겨줄 때 나는 뭔가 아주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너는 아주 침착하고 평온하더구나 그리고 아주 자신에 찬 목소리로 할 말을 읽어내리더구나.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는 것을 알았지. 네가 엄마에게 편지를 보내 약혼까지의 오랜 기다림 결혼까지의 오랜 기다림이 오히려 잘된 것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사실 네가 나를 굉장히 냉정한 아빠라고 생각할까봐 얼마나 걱정이 되었던지 나는 남아프리카에 너를 못 데리고 갈까봐 여간 마음을 졸인 게 아니었어. 우리 가족 우리 넷 우리 왕족은 늘 함께 뭉쳐야 해. 물론 필요한 때마다 가족이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네가 엄마의 자상한 보살핌 아래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것을 나는 여간 흐뭇하게 바라보지 않았단다. 사실 네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란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너와 또 필립이 우리 일을 도와주리라 늘 기대하고 있다. 네가 우리 곁을 떠나니 우리 생활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 것만 같구나. 그러나 너의 옛집이 언제나 네 것임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가능한 한 자주 옛집을 찾아오너라 나는 네가 필립과 함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뚜렷이 보았단다.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 이 아빠의 소원이란다. 너를 늘 지켜보고 사랑하는 아빠가. 6. 가정교사의 회고록 작은 공주들: 왕실의 신비를 벗겨내고 환상의 거품을 씻어내다 결혼을 치르고 난지 몇 달 후 프린스 필립은 자신의 젊은 아내가 너무 줄기차게 섹스를 요구해 온다고 불평했다. 그는 끝없이 샘솟는 그녀의 욕망을 목도하고서 너무 놀랐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그녀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늘 거기 있었어요. 아주 나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필립은 1948년 아내를 영국에 남겨두고 남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그런 발언을 했다. 그의 사촌이면서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서준 친한 친구 데이비드 밀포드 헤이븐도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당시 영국 친구의 모나코 별장에 머물렀다. 그 영국 친구는 필립뿐만 아니라 다른 영국 귀족들에게도 환대를 베풀었다. 필립의 그런 불평은 데이비드뿐만 아니라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데이비드는 사람들이 듣는 데서 노골적으로 필립의 경솔한 언행을 나무랬다. " 이봐 진짜 검객은 자신의 검술 상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법이야." 밀포드 헤이븐이 질책했다. " 프린스 필립은 엘리자베스 공주가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으며 늘 그에게 성적인 요구를 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모나코에 휴가를 갔었던 리즈 공작부인은 말했다. 리즈 공작부인은 필립의 경솔한 언행을 필립의 동서뻘 되는 의회의 보수당 원로의원인 올리버 리틀톤(리즈공작)에게 전하면서 강력한 제재를 요구했다. " 우리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내의 사생활을 얘기하는 필립이 버릇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구역질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리즈 공작은 말했다. " 나의 동서들은 필립의 경솔한 언행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물론 필립이 거짓말을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사생활을 까발리는 건 곤란해요. 모두 귀족인 나의 동서들은 섹스에 굶주린 음란한 공주가 장차 여왕이 된다는 얘기를 도저히 참아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데일리 메일의 가십 담당 칼럼니스트이며 리즈 공작의 딸과 결혼한 나이젤 뎀프스터가 말했다. 필립의 이런 언행은 1948년 여름 왕궁이 엘리자베스 공주의 향후 6개월 스케줄을 취소한다는 발표를 내놓으면서 약간 용서를 받았다. 1948년 6월 4일자의 공식관보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 엘리자베스 공주 저하, 에든버러 공작부인은 6월말까지 일체의 공식적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그 메시지는 공주가 임신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전기작가인 앤소니 홀든은 이렇게 말한다. " 왕실의 의전절차는 구체적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요. 그러니 공주가 임신했어야 하는 것이죠. 당시 의사들은 임신을 구속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출산일을 구속해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출산 후 공주는 자신이 직접 수유를 했는데 이 사실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왕족과 관련하여 유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죠. 이런 고색창연한 심리가 30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1980년 경 나는 찰스 왕세자의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어머니가 직접 수유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왕궁에 제출했더니 왕실 공보관인 존 도스가 화를 내며 내게 전화를 했더군요 '모유를 수유했다는 문장은 당장 삭제해 버리세요.' '아니 왜요' '왕족의 유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공주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아이의 영양상태를 돌보았다라고 돌려서 쓰면 안될까요 ' '그래도 안됩니다.' '그건 간접적으로 왕족의 유방을 언급하는 것이고 아무튼 왕족의 유방은 노출에 대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그 문장을 통째로 삭제하고 말았습니다." 왕실의 후사를 잇게 된 것이 확실해지자 프린스 필립은 일약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는 후사를 출산시켜 군주제의 연속성을 확보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더욱 확실한 후사인 남자 아이를 낳게 한 것이었다. 미래의 왕이 될 찰스 필립 아더 조지는 부모의 결혼 1주기를 6일 앞둔 1948년 11월 14일 오후 9시 14분에 태어났다.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의 몸무게는 7파운드 6온스였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보다는 버킹엄 궁의 자신의 응접실에서 출산하기를 원하여 소원대로 했다. " 나는 내 아이가 내 방, 내가 잘 아는 물건들 사이에서 태어나기를 바래요." 아이 적에 엘리자베스는 가정교사인 크로피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난 많은 암소, 말, 아이를 가질 거예요." 21세의 공주가 임신했을 때 크로피는 공주가 곧 출산하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 릴리벳 무섭지 않아요. 기분이 어때요." 크로피가 물었다 " 출산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차피 우리 여자들은 이런 경험을 해야 하지 않아요." 어느 날 아침 크로피는 어린 아이를 둔 친구가 이혼을 했다는 소식이 실린 신문을 읽고 우울해 하는 공주를 발견했다. " 크로피 왜 사람들은 이혼을 하죠.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있는데 가정을 파탄시키는 이유는 뭘까요." 크로피는 어떤 사람들은 성격적으로 서로 맞지 않아 불행하게도 이혼하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려 했으나 사랑하는 부모와 하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왕궁에서 곱게만 커온 공주는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 그렇다면 왜 처음엔 결혼을 했을까요." 공주가 물었다. 크로피는 그 화제를 슬쩍 피하면서 곧 있을 공주의 출산쪽으로 말을 바꾸었다. " 공주는 첫애가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공작은 아들이기를 바랬을 겁니다." 프린스 필립의 시종인 존 던이 말했다. 국왕 조지 6세는 양가에 여성 유전자가 강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애가 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필립은 네 명의 딸을 낳은 다음 태어난 외아들이었고 엘리자베스는 두 딸 중 첫째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아이가 딸일 유전적 가능성은 국왕을 근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처음 태어나는 아이가 전하라는 칭호를 포함하여 모든 왕족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1917년 윈저 왕가가 창설된 이래 전하라는 칭호는 오로지 국왕의 남자아이에게만 수여되었다. 그러나 모험을 싫어하는 왕은 엘리자베스 공주가 출산하기 일주일 전에 엘리자베스와 필립 사이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는 전하 호칭을 비롯, 완전한 왕족대우를 부여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렇게 하여 비록 딸이 나오더라도 왕족 대우를 해 주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남아를 출산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였고 그의 열광적인 환호는 왕궁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전염되었다. 윈스턴 처칠은 찰스 왕자의 출산 소식을 듣고 이제 영국의 군주제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반석위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찰스 왕자가 태어난 그 다음 날 국왕은 클래런스 하우스의 주택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휴식시간을 너무 많이 갖지 말라고 말하면서 저택의 완공을 재촉했다. 어서 빨리 그 집을 지어야 딸과 사위와 왕자가 비좁은 버킹엄 궁에서 그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 것 아니냐며 야근을 종용했다. 딸이 보다 안락한 주거지를 갖기를 열렬히 희망하던 국왕은 클래런스 하우스의 일꾼들을 더욱 닥달했다. 그 당시 건강이 좋지않던 국왕은 느닷없이 화를 내기가 일쑤였다. 53세인 국왕은 성냥이 필요없을 정도로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는데 이 때문에 폐암에 걸린 상태였다. 그러나 왕이 듣는 데서는 아무도 그 병명을 말하지 않았다. 폐암 때문에 기관지가 막혀서 그는 끊임없이 기침을 하고 또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나 주치의는 국왕이 지나친 흡연 때문에 완만한 자살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이미 니코틴이 윈저 왕가의 내력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퀸 메어리, 윈저 공, 마거릿 공주가 모두 골초였으며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도 하루에 여덟 개비 정도의 담배를 피웠다. 비록 대중 앞에서는 피우지 않았지만. 폐암 이외에도 국왕은 동맥경화로 고생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리에 심한 경련 증세를 느꼈다. 1949년 국왕은 그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허리 수술을 받았고 그 결과 괴혈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양다리를 절단해야 됐을지도 몰랐다. 심장합병증으로 국왕의 건강은 너무나 악화되어 공식 스케줄을 줄이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국빈 방문을 취소해야 되었다. 왕비는 남편의 병세를 감추고 싶어했다. 그래서 왕이 공식 석상에 나갈 때 창백한 얼굴을 위장하기 위해 얼굴 화장을 해 주기 시작했다. 왕의 푹꺼진 창백한 뺨에 루즈를 칠할 때 마다 왕비는 윈저 공 부처를 원망했다. " 윌리스가 볼티모어에서 느닷없이 날아들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는 특별히 지시를 내려 국왕이 얼굴 화장으로 나쁜 건강을 위장한다는 소문을 부인하게 했다. 왕비는 왕실 가족 중 가장 매력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는 대단히 총명했고 또 잘 용서하는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36년 에드워드 8세의 양위 때부터 그녀는 윈저 공 부처에 대해서만큼은 지독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이제 원망이 사무친 그녀는 자기 남편의 생명을 서서히 빨아먹은 사람이 바로 윈저 공 부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한 편지에서 에드워드 8세의 양위가 자기 남편에게 안겨준 부담감을 개탄하고 있다. " 버티가 전쟁 중에 그토록 고통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버티가 그 엄청난 부담을 자기 양 어깨에 걸머지고 신음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와 시어머니인 퀸 메어리의 마음속에서는 국왕의 심각한 병세 악화는 오로지 '저 빌어먹을 심프슨 여인' 때문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 당시 왕비는 자꾸 나빠지는 국왕의 건강 때문에 얼이 빠져서 레이디스 홈 저널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신경 쓸 여가가 없었다. 그 편지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가정교사였던 마리온 크로퍼드가 쓴 작은 공주들이라는 책의 발췌 내용에 대한 코멘트를 요구한 것이었다. 왕비는 17년간 가정교사로 일해 온 크로피가 회고록을 발간한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1949년에 사직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마리온 크로피는 왕비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마흔이 될 때 까지 자신의 결혼을 미루어 왔다고 말했다. 마리온이 엘리자베스 공주의 결혼식 3개월 전에 사직하고 결혼을 올리겠다고 하자 왕비를 비롯 왕과 시어머니 메어리 퀸도 모두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래서 마리온은 자신의 결혼을 미루어가며 공주들의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마리온이 사직을 하자 왕은 그녀에게 코맨더 오브 로열 빅토리아안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왕실 근무자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데임 코맨더 훈장을 바랬던 그녀는 내심 실망했다. 그래서 솔직하고 자세한 회고록을 써서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왕비는 크로피를 배신자라고 매도했고 그 뒤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마리온 크로 피가 1999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왕실의 그 누구도 그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조사야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 왕비는 크로피의 책이 발간되던 그 날로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왕실 가족 중에서 특히 왕비는 사생활의 세부사항과 인간적 일화가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크로피의 회고록이 갖는 역사적 영향력을 의식했다. 그래서 비록 그 책의 아름다운 문장과 정감 넘치는 얘기에도 불구하고 그 회고록이 가져온 부정적 영향 때문에 그 가정교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 왕비는 크로피가 자기를 수동적이고 관심없는 어머니로 묘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비가 애들에게 춤추고 노래하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 이외에는 별로 자녀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는 특히 싫었다. 또 왕비가 말 안듣는 딸인 마거릿을 질책한 다음 가정교사인 크로피를 시켜서 마음을 풀어주게 했다는 부분을 읽고선 배신감마저 느꼈다. 또 왕비를 내가 만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분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켄트 공작부인을 정말 빼어나게 아름다운 부인이라고 칭찬한 다음 여왕과는 다르게 가장 잘생긴 프린스와 결혼한 부인이라고 서술한 대목도 비위에 거슬렸다. 그러나 왕비는 그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의 어릴 적 얘기를 나쁘게 쓴 것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크로피는 엘리자베스가 어릴 적에 충동장애를 보였다고 썼던 것이다. " 엘리자베스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고 단정한 것에 신경을 썼다. 가령 하룻밤에도 몇 번씩 침대에서 내려와서 침대맡의 신발을 가지런히 해 놓는가 하면 또 옆에 개어 놓은 옷을 다시 매만지며 정돈했다." 이처럼 강박증세에 가까울 정도로 의무에 집착하는 아이로 엘리자베스 공주를 묘사해 놓은 것은 어머니인 왕비로서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왕비는 작은 공주들이 마리온 크로피를 20세기의 가장 널리 인용되는 역사가로 만들 것임을 알았다. 우선 그녀 이전에 왕족에 대해서 그런 자세한 회고록을 쓴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일 이후 크로피라는 말만 나오면 왕비는 경멸과 혐오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국왕 부처는 변호사에게 지시하여 미래의 모든 하인들이 반드시 서명해야 하는 비밀준수 협약서를 만들었다. 크로피처럼 배신행위를 하는 사람은 왕궁에 의해서 고소를 당할 뿐만 아니라 법원에 의해 출판정지를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크로피 때문에 버킹엄 궁에서 근무했던 하인들의 생생한 회고록은 이제 영국 바깥에서만 출판해야 되었다. 또한 왕실의 허가 없는 회고록을 감히 출판하려는 영국 출판사도 없었다. 만약 출판업자가 그런 노골적인 불충의 태도를 보였다가는 나중에 귀족 작위 후보에 오를 경우 심사에서 탈락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강제규정에도 불구하고 지난 여러 해 동안 윈저 가에서 비밀들이 새어나와 왕실의 신비를 벗겨내고 환상의 거품을 씻어냈다. 1994년 왕실의 강제규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고 출판을 주저하는 공포심도 사라져 버렸다. 소송의 위협도 왕실의 하인들에게 겁을 주지 못했다. 특히 미래의 영국 왕이 될 찰스 왕세자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신의 간통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왕실의 동화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었다. 왕세자의 시종이었던 사람은 찰스가 벌인 혼외정사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했다. " 왕세자는 정부와 함께 숲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옷에는 온통 진흙과 잡풀이 묻어 있었어요." 찰스의 파자마를 빨아야 했던 그 시종은 역겹다는 어조로 말했다. " 그러니 그들은 분명 야외에서 그 짓을 했던 겁니다." 이렇게 발언한 시종은 연봉 1만 8천 달러의 시종직에서 사퇴해야 되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때 쯤에는 이미 왕실 직원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명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권위 실추는 너무나 심각하게 진행되어 심지어 왕실의 하인도 놀랄 지경이 되었다. 왕실이 표시하는 불쾌감은 이제 1949년과 같은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49년 당시의 조지 6세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로 손이 빌 때가 없었다. 크로피의 회고록이 야기시킨 국제적 스캔들을 잠재워야 했고 또 자신의 위태로운 건강도 다스려야 했다. 게다가 해군으로 복귀하겠다는 사위의 고집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해군 제독이 되고 싶어했던 프린스 필립은 해군성에서의 관리직 보직을 그만두고 다시 해군 전함을 타고 싶어했다. 국왕은 엘리자베스가 2년간의 해외 보직 동안 남편을 따라가고 싶어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은 딸을 해외에 보내기가 싫었다. 그러나 공주가 남편을 따라가지 않기로 하자 왕은 필립을 소원대로 관리직에서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에든버러 공 필립은 1949 년 10월 몰타 임지로 향해 떠났다. 당시 그곳에 근무하고 있던 아저씨 디키 마운트배튼은 지중해 함대의 2인자였는데 필립에게 전함 HMS 매그파이의 지휘권을 맡겼다. 엘리자베스는 약속대로 처음 몇 주 동안은 아이와 함께 영국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곧 어린 아이를 유모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남겨두고 남편이 있는 몰타로 날아갔다. 그녀는 결혼 2주년 기념차 몰타로 가는 바람에 아이의 첫돌도 건너뛰었다. " 공주는 왕궁 바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잘 몰랐어요. 그러나 몰타에 있는 프린스 필립에게로 날아갔을 때 난생 처음으로 왕궁에 살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직접 보았을 거예요." 가정교사였던 마리온 크로퍼드가 말했다. 마운트 배튼 부처는 빌라 과다망기아에 있는 자신들의 언덕 위 별장을 엘리자베스의 방문기간 중 내주었다. 공주는 그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방문 기간을 크리스마스 때까지 연장했다. 그래서 어린 찰스 왕자는 부모없이 유모, 조부모, 증조모 퀸 메어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되자 그제서야 비로소 영국으로 되돌아올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귀국할 때 몰타 공항에는 마운트배튼 부인이 전송을 나왔다. 부인은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 릴리벳은 눈물이 글썽한 채로 울먹거리며 떠나갔어요. 그녀를 바이킹 호에다 태워주는 것이 꼭 작은 새를 조그마한 새장에다 넣는 것 같은 기분이더군요. 어찌나 슬프던지 나마저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요." 영국에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또다시 임신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1950년 3월 몰타로 되돌아가 남편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또 한 달을 머물렀다. 그녀는 5월에 런던으로 되돌아와 1950년 8월 15일에 둘째 아이 앤을 낳았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필립을 보지 못했다. 그는 둘째 아이 출산 직후 런던에 4주 머물다가 다시 몰타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11월에 남편을 찾아가 또 3개월 머물렀는데 이 때에도 아이들을 유모와 부모에게 맡겼다. 당시 그녀는 시녀, 시종, 경호원을 대동하고 몰타섬에 도착했는데 1대의 스포츠카, 40트렁크의 의복, 남편에게 줄 새 폴로 조랑말도 함께 갖고 왔다. 그녀는 햇빛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쇼핑을 하고 장교 부인들과 점심을 먹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으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 군사기지를 순찰하고, 의례적인 리번 커팅 행사에 참석하고 유아원을 방문했다. 저녁에는 파티, 무도회, 영화관람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휴가 중간에 필립과 함께 이탈리아와 그리스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몰타의 언론들은 그녀의 방문을 우호적으로 보도했고 또 왜 그녀가 다른 군인 아내들과는 달리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언론보 도는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한 신문은 아들이 편도선염으로 앓고 있는데 몇 주씩 아이들을 돌보지 않아도 되는 거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른 신문들은 그녀가 에드워드 조의 보드빌 여왕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체중과 의상에 대한 비난이 자녀를 소홀히 한다는 비난보다도 그녀를 더 괴롭혔다. 특히 남편의 비난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 당신 그 옷 입지 마 . 당장 벗어던져." 엘리자베스가 그에게 새 드레스를 보여 주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서자 필립이 꽥 소리를 질렀다. 한 전기에서 제프리 보카는 이렇게 썼다. " 아주 난처한 상황이었지요. 대영제국은 아주 사랑스러운 공주를 손안에 가지고 있었지만 그 공주가 너무 살이 찌고 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바람에 담배를 피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체중을 억제할 보조수단도 없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그녀는 기름기 많은 음식을 피하고 식욕 억제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어요." 공주의 다른 모든 약과 마찬가지로 암페타민(식욕감퇴제)도 하인들이 사가지고 왔다. 공주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베스가 몰타에 오래 머무는 동안 여동생 마거릿이 언니에게 다녀가게 되었다. 입을 비쭉 내미는 매력적인 아가씨인 마거릿 공주가 몰타를 방문한다는 소문은 그 섬에 주둔 중인 총각 군인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타임의 외교 담당 특파원인 롤란드 플라미니는 이렇게 말했다. " 몰타는 크기가 90평방 마일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서 마거릿 공주가 온다는 소식은 남자들에게는 정말 빅 뉴스였지요. 그들은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환호했어요. 당시 아버지가 몰타의 헌법 초안을 작성중인 관계로 당시 19세이던 나는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나볼 수 있었지요. 막상 만나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마거릿 공주의 방문에 대해서 말을 꺼내면서 방문하면 좋은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엘리자베스 공주가 특유의 새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바보 같은 년이 왜 내게 아직까지도 감사 편지를 보내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늘 단정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다른 일면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나빠지는 건강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런던으로 되돌아와야 했고 필립도 몇 달뒤인 1951년 7월 16일 해군에서 제대하여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하 수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난 11개월은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한 한 때였습니다". 닷새 뒤 영국으로 날아온 필립을 마중하기 위해 어린 아들 찰스가 유모와 함께 공항에 나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영접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애스코트 경마대회에 나갔던 것이다. 3개월 뒤인 1951년 10월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왕실을 대표하여 캐나다 방문에 나섰다. 캐나다를 방문한 다음에는 미국에도 이틀간 들렀다. 그들이 워싱톤에 도착하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트루먼이 직접 공항까지 나와서 영접했다. 미국 대통령이 그런 환대를 보인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자신의 딸 마거릿 트루먼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버킹엄 궁에서 베풀어준 환대에 답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트루먼은 왕실의 의전절차를 무시하고 엘리자베스를 'My dear'라고 부르면서 호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비행기 트랩 입구에서 10분 동안 머뭇거리면서 사진기자들에게 사진 찍을 기회를 주었다. 엘리자베스 커플의 미소짓는 사진은 그 다음 날 모든 미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사진을 조지 6세에게 보내 주었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은 손수 쓴 편지에서 그 방문이 대단한 성공이었다고 말했다. " 우리는 방금 사랑스러운 공주와 자상한 남편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이 커플은 전미국민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아버지로서 또 다른 아버지에게 우리는 정말 자랑스러운 딸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딸이 둘이니 하나뿐인 저보다도 더 훌륭한 아버지라고 하겠습니다." 조지 6세는 버킹엄 궁에서 케이블을 보내 아버지 같은 사랑을 엘리자베스에게 베풀어 준 트루먼 대통령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 왕비와 나는 워싱톤에서 우리 딸과 사위가 대통령 각하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1939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행복한 추억이 기억나는군요. 대통령각하, 우리 아이들에게 베풀어 주신 자상한 환대 정말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의 블레어 하우스에게 묵었다. 그런데 당시 같은 블레어 하우스에 기거하던 대통령의 연로한 어머니 마사 트루먼은 공주 커플을 만나고 싶어했다. "어머니에게 헬로라고 말할 기회를 드리지 않으면 어머니가 나를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트루먼이 공주에게 말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대통령을 따라서 여섯 계단 위로 올라갔다. 당시 96세의 병약한 마사 트루먼은 거의 귀가 먹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윈스턴 처칠이 1951년 10월 25일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에 재취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족을 만나 할 이야기는 준비된 상태였다. " 어머니 여기 엘리자베스 공주를 모셔왔어요." 트루먼이 소리쳤다. 그 조그마한 노파는 환히 미소를 지었다. " 당신의 아버지가 재선 되었다니 정말 기뻐요." 마사 트루먼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미소를 지었고 필립은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서민적인 트루먼 대통령은 로열 커플의 마음에 큰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3페이지에 걸친 긴 감사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 워싱톤을 방문한 기억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초대해 주신 대통령 각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단지 우리의 체재가 너무 짧았다는 것만이 유감스럽군요. 하지만 미국 방문이 너무 감명 깊었기 때문에 언젠가 꼭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미국 방문은 너무 성과가 좋아서 영국 외무부는 주미 영국 대사에게 이런 방문을 주선하느라고 공로가 많았다는 칭찬의 편지를 보냈다. 주미 영국 대사는 다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 대통령 각하 엘리자베스 공주와 에든버러 공의 방문이 너무 성공으로 끝난데 대하여 각하에게 심심한 고마움의 뜻을 표시합니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남편은 블레어 하우스에서 정말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더군요." 귀국길에 오른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자신들의 방문이 영미 관계의 증진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다. 왕과 왕비는 찰스 왕자를 데리고 빅토리아 역까지 나가 그들을 마중했다. 역에 나온 찰스 왕자는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쭈빗쭈빗 부모에게 다가갔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세 살 난 아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는데, 이때의 사진은 만년의 엘리자베스를 괴롭히는 하나의 자료가 된다. 찰스는 그후 커서 이 사진을 들이대면서 엘리자베스가 냉정하고 초연한 어머니였다고 비판하게 된다. 3년 동안 세 번의 수술은 받은 국왕은 다소 원기를 회복하여 그 동안 미루어 왔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문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주치의들이 극구 말렸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와 필립이 다시 한번 대타로 들어섰다. 왕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문을 포기하는 대신 다음 해 봄 남아프리카로 치료 여행을 떠나는 스케줄이 잡혔고 출발일은 3월 정도로 예정되었다. 영국 국민들은 왕의 회복에 기쁜 마음을 표시했다. 1951년 12월 14일 조지 6세는 버킹엄 궁에서 56회 생신을 맞았다. 한편 국왕을 대신하여 5개월에 걸친 해외 순방에 나서게 된 엘리자베스는 케냐를 여행 스케줄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결혼 당시 이스트 아프리카 국민들이 그녀에게 선물로 준 니예리의 사가나 왕실 별장을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로열 커플은 소규모 수행인원을 대동하고 1952년 1월 31일 비행기로 런던을 떠났다. 왕과 왕비 마거릿 공주 등이 공항까지 나가서 전송을 했다. 청색과 은색이 칠해진 왕실 전용 여객기의 내부까지 올라간 왕은 공주의 의상 담당인 보보 맥도날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 보보 나를 위해 공주를 잘 모셔 줘. 여행이 보보에게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왕은 비행기에서 내려와 트랩의 입구에 섰다. 모자를 쓰지 않은 왕은 아주 수척해 보였다. 뉴스릴 카메라는 외투를 입은 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왕의 모습을 찍었다. 그는 딸에게 손을 흔들었고 비행기가 하늘을 박차 올라 한 점이 될 때까지 지켜 보았다. 그리고 왕은 딸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닷새 뒤 샌드링 엄 1952년 2월 6일 새벽 왕은 혈전증의 후유증 때문에 잠자던 중 사망했다. 그날 아침 왕비가 차를 마시고 있는데 마필 담당관 해롤드 캠벨이 그녀의 방으로 와서 왕이 사망했음을 알렸다. 그녀는 황급히 남편의 침소로 가서 마지막으로 그의 이마에다 키스했다. 왕비는 왕의 침소 문을 열어놓고 철야를 지시했다. " 왕을 혼자 계시게 해서는 안돼. 그리고 빨리 릴리벳에게 알리도록 해." 그러다가 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 빨리 여왕에게 알리도록 해." 캠벨은 그 즉시 엘리자베스를 접촉할 수가 없었다. 열대성 폭풍우가 내린 케냐에는 전화선이 두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가장 명성 있는 뉴스 서비스 회사인 로이터를 접촉하여 그 메시지를 여왕 일행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그날 밤 아프리카 정글의 최전진 관측소인 트리톱스에서 머물렀다. 그들은 케냐산 기슭을 암염(동물이 염기가 있는 땅을 핥기 위해 모이는 곳)에 동물들이 모여드는 것을 구경했다. 새벽에 엘리자베스 커플은 몇 시간 수면을 취하기 위해 사가나 왕실별장으로 이동했다. 그때 로열 커플을 수행한 로이터 특파원이 런던에서 보내는 급보를 받아들었고 그는 즉시 여왕의 개인 비서인 마틴 차터리스에게 그 소식을 전달했다. 마틴은 이어서 프린스 필립의 부관인 마이글 파커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영국 BBC방송은 1952년 2월 6일 오전 10시 45분 국왕의 사망 소식을 정식으로 발표했고 조의의 뜻으로 그날 하루 일체 방송을 중단했다. 놀란 군중들은 그 전날 비가 내려 축축한 런던거리로 몰려나왔고 차를 몰고 가던 사람들은 그 소식에 충격을 못이겨 차를 세운 채 울음을 터트렸다. 교회는 국왕의 나이만큼 56번의 조종을 울렸다. 영국의 슬픔은 온 세계로 메아리쳤다. 국왕의 형인 윈저 공은 그 당시 공작부인과 함께 뉴욕의 윌도 프아스토리아 호텔에 묵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은 그에게 즉시 영국으로 귀국하라고 조언했지만 공작부인은 데리고 오지 말라고 조심시켰다. 아무래도 국민정서상 그녀가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국의 사정을 잘 아는 공작은 혼자서 귀국했다. 그리고 자기 아내에게 쌀쌀하게 대한 어머니 퀸 메어리를 원망했지만 그래도 문상기간 동안 어머니의 저택인 말보로 하우스에서 묵었다. 한편 케냐에서는 마이클 파커가 황급히 프린스 필립의 방으로 달려갔다. 파커는 이렇게 회고했다. " 여왕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건 필립 공이 해야 될 일이었어요. 그건 아무도 그의 평생을 통털어 가장 최악의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건 엄청난 충격일텐데' 그 분은 여왕을 정원으로 모시고 나가 잔디밭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여왕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더군요." 엘리자베스는 그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천천히 별장으로 돌아왔다. 거기서는 보보 맥도날드가 여왕의 구두를 닦고 있었다. 의상 담당인 보보는 얼른 일어나 공손한 자세로 여왕에게 커트시를 했다. " 오 아니야, 보보. 그렇게 할 필요없어." 엘리자베스의 시녀인 파멜라 마운트배튼이 달려와 그녀를 꼭 껴안았다. " 아 고마워요. 우리가 갑자기 영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서 사람들이 공들인 계획을 망치게 되었군요. 미안해요." 여왕이 말했다. 마틴 차터리스가 즉위 문서가 담긴 하얀 봉투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 문서에 의하면 새 군주의 이름이 우선 정해져야 되었다. 마틴은 이렇게 회상했다. " 창황중이었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즉위하면 어떤 이름을 사용하실 것이냐고 물었죠." " 오 물론 내 이름 엘리자베스를 쓸 거예요. 달리 다른 이름이 있겠어요" " 알겠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2세." 여러 해 뒤에 마틴 차터리스는 즉위에 대한 새 여왕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했다. " 나는 여왕이 된지 몇 분 뒤에 그녀를 만났습니다. 몇 시간도 아니고 몇 분 뒤였습니다. 그녀는 왕위를 거머쥐려고 손을 내뻗치고 있었던 사람 같았어요. 울지도 않았습니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얼굴이 약간 상기된 채로 서 있더군요. 자기의 운명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필립은 상황이 아주 딴판이었어요. 그는 타임스로 얼굴을 덮은 채 의자에 푹 주저앉아 있었어요. 그는 그런 상황을 전혀 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테니까요. 그는 힘들게 얻은 정신적 안정을 송두리째 빼앗긴 듯 했어요". 차터리스는 기자들을 소집하여 새 여왕에 관련된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여왕의 사진을 찍지 않음으로써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진기자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그녀가 지나가자 왼손에 카메라를 든채 오른손을 가슴에 갖다대고 조의를 표시했다. 존 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런던으로 되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모두들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보보와 내가 앞줄에 앉았고 우리들 바로 뒤에 여왕 커플이 앉아 있었어요. 여왕은 여행중 한두 번 자리를 잠시 비웠는데 자리에 되돌아왔을 때 보니까 운 것 같은 기색이었어요. 그녀는 케냐에서 입었던 베이지색의 선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마지막 순간이 될 때까지 상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거부했다. 런던에 도착하여 여왕은 기창 밖을 내다보았다. 처철 총리가 검은 상복에 검은 만장을 두르고 한 떼의 원로신사들과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색다이믈러 승용차들이 길게 늘어선 것을 보고 깜짝놀랐다. "오 하느님 사람들이 영구차를 가지고 온 것 같애." 그녀가 시녀에게 말했다. 여왕은 침착했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남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혼자 내려가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그는 갑자기 높아진 아내의 지위를 의식하며 말했다. 그는 이제 아내의 신하이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부를 때에는 폐하라고 해야 되었고 또 그녀보다 네 걸음 뒤에서 걸어가야 되었다. 눈물이 뺨에 줄줄 흘러내리는 처칠 총리는 그녀에게 조의를 표시하면서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비극적인 귀국이지만 무사한 비행이어요." 여왕이 말했다. 비행기의 승무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감사인사를 한 다음 여왕은 왕실 전용 다이믈러차를 타고 클래런스 하우스로 갔다. 그곳에서는 검은 상복을 입은 퀸 메어리가 조의를 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이며 신하인 이 사람이 여왕의 손에 제일 먼저 키스를 해야 합니다." 퀸 메어리가 말했다. 아들 조지 6세를 앞세운 지 13개월 뒤에 자신도 따라가게 되는 퀸 메어리는 복상을 위한 왕실의 기준을 설정해 놓았다. 남편 조지 5세를 지하에 묻고 또 다섯 아들 중 두 아들을 앞세운 퀸 메어리는 검은색을 죽음의 색깔로 규정하여 윈저 가의 여인들은 오로지 복상할 때 에만 검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윈저 가의 여인들은 상중을 빼놓고는 절대 검은 옷을 입는 법이 없다. "해외 여행에 올랐을 때 우리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검은 옷을 준비해갔습니다. 그래서 새 여왕은 열대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 검은 드레스, 외투, 모자를 그 즉시 착용할 수 있었습니다." 존딘이 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늘 하던대로 할머니의 양뺨에 키스를 하고 이어서 커트시를 하면서 할 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했다. 퀸 메어리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자신이 먼저 인사의 예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한 관절염으로 고통을 받는 몸이었지만 퀸 메어리는 방바닥까지 무릎을 꿇는 깊은 커트시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올렸다. 비록 25세의 손녀이지만 이제 그녀의 새로운 군주가 된 여왕에게 최고의 예의로써 경의를 표시했다. 그런 다음 꼿꼿이 일어서더니 퀸 메어리는 할머니로 되돌아가 새 여왕을 나무랬다. "릴리벳, 네 스커트가 그게 뭐냐. 상복으로는 너무 짧아." 할머니를 뵌 다음 여왕은 세인트 제임스 궁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간단한 등극의 말을 했다. "내 마음은 오늘 너무 슬픔으로 가득차서 경황이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에게 아버지이신 선왕이 했던 것처럼 하겠다는 말씀만 간단히 해 두겠습니다." 샌드링엄에서는 여왕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슬픔에 잠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거릿 공주는 너무 깊은 충격을 받아 자기 방에 꼭 쳐박혀 있었는데 거의 위로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마거릿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인생이 영원히 중지해 버린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앞날을 살아갈지 너무 막막해요." 아직 검은 옷을 입지 않은 51세의 왕비는 미망인의 상복 입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여러 곳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가 이제 퀸 도웨이저(황태후)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직위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그녀는 의전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을 퀸 엘리자베스 퀸 머더라고 불러달라고 고집했다. 그래서 이후그녀는 간단히 줄여서 퀸 머더라고 불리운다. 이층에 있던 국왕의 시신은 침소에서 성 메어리 모들린 가족 교회로 옮겨졌다. 유해를 지키는 시종들은 그날 아침 샌드링엄의 참나무로 만든 국왕의 왕기를 관위에다 얹어 놓았다. 그 옆에는 윈스턴 처칠이 보낸 하얀 조화가 놓여져 있었다. 처칠 총리는 자신의 필적으로 '용기를 위하여' 라고 쓴 만장을 보내왔다. 여왕의 조화도 곧 도착했는데 여왕은 '슬픔에 잠긴 릴리벳이 사랑하는 아빠에게' 라고 쓴 카드를 함께 보냈다. 여왕은 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향해 커트시를 올렸는데 그것이 그녀로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커트시였다. 역사가들은 조지 6세를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위해 분투한 상징적 지도자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또한 대영제국의 종말을 고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왕이나 제왕이 아닌 조지 6세는 영연방의 국가 원수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그리고 영국이 복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뒷전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주영 프랑스 대사는 조지 6세가 자신의 딸에게 역사상 가장 안전한 왕위를 물려 주었다고 말했다. 국왕은 영국국민들이 존경을 표시할 만한 영웅이었고 또 경의를 표할 만한 군주였다. 국민들은 국왕 사후에 검은 만장을 팔뚝에 둘렀고 사람들은 추모기금을 모으기 위해 헌금을 했다. 영국 의회는 1952년 2월 16일로 정해진 국장을 위해 16만 8천 달러를 지불하기로 의결했다. 이 장례비에는 국왕의 운구가 지나가는 길 위에 깔 자주색의 천 값도 포함되었다. 이 천은 국왕의 관을 관대에다 묶은 하얀 나일론 끈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케냐에서 돌아와 런던에 도착하는 그 시점부터 새 여왕은 지시를 대기하는 왕궁 직원, 고문관, 마필 담당관으로 둘러싸였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의 시신 공개. 런던에서의 국상 절차,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 지하의 매장, 오랜 국상 기간 등에 대한 그녀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한 7개국의 군주들 영연방 국가들의 총리와 고위 관료들을 접대하는 절차에 대해서 브리핑을 받았다. 이들 문상객 중에는 그녀의 큰아버지 윈저 공도 들어 있었는데 그는 골치 아픈 문제거리를 안겨 주었다. 윈저 공은 1936년이래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받아오던 연간 7만 달러의 보조금을 계속 지급받는 문제에 대해서 그녀와 의논하고 싶어했다. 이제 조지 6세의 개인 자금이 그녀의 것이 되었으므로 그녀가 계속지급 여부를 결정해야 되었다. 원저 공의 변호사는 그 보조금이 평생 연금이며 또 왕위를 포기한 대가로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금이었다고 주장했다. 윈저 공은 새 여왕이 이 문제를 어머니와 할머니 퀸 메어리와 상의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윈저 공은 런던에서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이런 냉정한 여자들에게 이토록 의존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지옥 같은 일이요. 이들은 국가 경제가 어렵다는 그럴 듯한 핑계를 내세우지 않을까 걱정되오." 그러나 퀸 머더와 퀸 메어리는 그럴듯한 핑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퀸 머더는 윈저 공이 이미 수백만 달러를 보유한 부자이고 또 공작부인이 그 많은 돈을 공단 베개나 도리시모 향수를 구입하면서 마구 낭비했다는 것을 잘 안다고 말했다. 퀸 메어리와 퀸 머더는 공작부인이 그 비싼 향수를 꽃에 들이부어 꽃의 향기를 더욱 좋게 했다는 얘기도 있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골동품 수집이 취미였던 퀸 메어리는 -그녀는 가정집을 방문했다가 그 집에 마음에 드는 골동품이 있으면 하인을 보내 값을 흥정하기도 했다. 낭비벽이 있는 윈저 공작부인의 구두를 사 모으는 증세를 꼬집으면서 퀸 메어리는 공작부인이 한 가게에서 구두를 한번에 56켤레를 산 적이 있음을 지적했다. 윈저 공에게 그 돈을 줘봐야 결국 낭비만 하고 말 것이 라고 말했다. 그래서 새 여왕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조지 6세가 사망하자 모든 왕실 소유 재산은 새 군주에게로 넘어갔다. 대표적 재산으로는 왕의 궁성들, 20마리의 암말. 왕실 직원들, 개인비서 알란(토미) 라셀 경 등이었다. 그리고 기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더 이상 집이나 말이나 직원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된다. 더욱이 어머니와 여동생이 버킹엄 궁을 비워 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엘리자베스와 필립이 클래런스 하우스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왕과 필립은 자기들끼리 벅 하우스라고 불렀던 버킹엄 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말 싫었다. "오 하느님 우린 이제 가드레일 뒤에서 살아야 하는군요." 그녀가 말했다. " 정말 지옥 같은 곳이지"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그는 현대식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클리런스 하우스를 떠나서 통풍이 잘 안되는 동굴 같은 버킹엄 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끔찍했다. 1만 개의 창문, 3마일에 달하는 붉은 카펫 깔린 복도, 1천 개의 시계, 1만 점의 가구, 690개의 방, 230명의 하인, 45에이커의 뒷뜰을 자랑하는 버킹엄 궁. 장엄하기는 했지만 살기에는 너무나 불편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7세는 이 궁을 가리켜 무덤이라고 불렀다. 뒤에 윈저 공이 된 에드워드 8세는 이 궁에서 습한 곰팡이 냄새가 난다고 불평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는 버킹엄 궁을 가리켜 냉장고라고 말했다. 그래서 하숙생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던 필립 공은 버킹엄 궁을 집무실과 의전 접대용으로 사용하고 숙소는 현재의 클래런스 하우스를 그대로 사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왕은 그 아이디어를 윈스턴 처칠에게 전달했으나 처칠 총리는 크게 화를 내며 안된다고 했다. 버킹엄 궁은 국왕의 집무실이면서 동시에 저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버킹엄 궁이 명실공히 국가의 핵심이 되고 군주제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존경받는 총리와 언쟁을 벌일 수 없었던 여왕은 자신의 의견을 거두어들이고 계획대로 이사를 가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남편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클래런스 하우스에 있던 자신의 서재의 하얀 단풍나무 패널을 뜯어다가 버킹엄 궁의 서재에다 다시 설치했다. 처칠은 이어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클래런스 하우스를 물려주라고 권유했다. 그러면서 처칠 총리는 여왕 어머니의 정신상태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퀸 머더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심령술에 심취하여 죽은 혼령과 대화를 나누는 회합에 몰두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처칠은 말했다. 처칠은 퀸 머더가 영혼과 영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얘기에 너무 놀라서 샌드링엄으로 퀸 머더를 찾아가 이제 그만 칩거하고 대외활동을 하라고 권했다. 영국 정부가 이제 그녀의 남편이 살아있을 때 보다 더 그녀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또 클래런스 하우스를 런던 저택으로 만들어서 그녀의 공식활동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존 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퀸 머더는 딸과 사위가 살고 있는 현대식 클래런스 하우스의 편리한 시설을 좋게 보고 또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 클래런스 하우스를 차지하라고 권유하니까 왕궁을 떠나기가 싫었던가 봐요. 그건 이해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기거하던 커다란 침실은 죽은 남편의 추억이 많이 서려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퀸 머더는 처칠에게 클래런스 하우스의 색칠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총리는 그것을 바꾸어 드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버킹엄 궁의 침실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침실에 있는 대리석 벽난로가 선왕의 개인적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처칠은 그 벽난로를 클래런스 하우스로 옮겨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버텼다. 자기는 클래런스 하우스 같은 호화로운 저택에 살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서,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다. 퀸 머더의 존재는 군주제에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그녀의 맨션을 보수하는데 22만 달러를 투입할 것이며 그 외에 연간 36만 달러의 연금과 15명의 직원을 제공하겠다. 그녀에게는 또 2개의 성을 추가로 제공하겠다. 윈저 성 부근의 윈저 그레이트 파크에 있는 우아한 고딕식 별장인 로열 조지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버크올 성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퀀 머더는 이것 이외에도 2만 5천 에이커의 히더로 둘러싸인 스코틀랜드의 메이 성도 별도로 사들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처칠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나는 빅 벤도 가지라고 할 판이었지. 그런데 그녀가 마침내 승복을 하더군. 적시에 말이야." 처칠이 말했다. (빅 벤은 영국 국회의사당 시계탑의 큰 시계. 그녀를 클래런스 하우스로 이사시키기 위해서 뭐든지 다하려고 했다는 뜻을 강조하는 농담. 실제로 빅 벤은 줄 수 있는 것이 아님. 역주) 새 여왕은 이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주는데 동의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16년 동안 누려오던 왕족의 특권 -왕관, 왕궁, 하인, 왕비 타이틀-을 일거에 빼앗겨 버린 사실을 가슴 아파했다. 그러나 여왕은 어머니에게 해 준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남편에게는 베풀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빨간 박스 속에 든 국정 관련 문서를 함께 읽어보는 권한을 필립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그 박스는 여왕의 승인을 받기 위해 영국 정부에서 보내오는 극비 문서가 들어 있는 박스였다. 이런 조치를 취함으로써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동안 죽 이어져 왔던 선례를 깨트렸다. 고 빅토리아 여왕은 빨간 박스를 남편 앨버트 공과 함께 나누어 보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의 아버지는 심지어 빨간 박스를 며느리 퀸 메어리와 함께 나누어 보았다. 며느리가 군주제의 옹호에 너무나 열심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남편이 왕이 되면 막후에서 왕비의 역할을 잘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조지 5세로 등극하자 퀸 메어리는 여전히 남편과 함께 그 빨간 박스를 나누어 보았다. 이어 조지 6세도 아내와 함께 그박 스를 읽어 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2세는 남편과 함께 군주의 임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그녀의 고문관들은 이런 조치에 너무 놀라서 필립 공에게도 그 문서를 열람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녀는 안된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정작 그녀 자신이 남편에게 설명할 때는 고문관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둘러대었다. 이보다 몇 주 뒤에 여왕의 친구이며 글라스클룬 3세 남작인 킨로스 경이 뉴욕타임스 매거진에다 필립 공의 프로필을 작성한 글을 기고했다. 킨로스는 남편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질문에 대한 여왕의 대답을 이렇게 기록했다. "남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데 당신이 그걸 주고 싶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의 친구에게 물었다. "그럴 경우엔 남편을 잘 설득하여 받아들이도록 해요. 실제로 우리는 때때로 합의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여왕의 친구가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건 내 방법이 아닙니다. 나는 일단 필립에게 주겠다고 해 놓고는 그가 그걸 갖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여왕은 군주의 특권을 너무 고집한 나머지 남편이 버킹엄 궁의 웨지우드 청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곳은 그녀가 일주일에 한 번씩 총리를 만나 국사를 의논하는 방이었다. "전에는 무얼하든 우린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내가 주된 입장에 섰지요." 필립은 여왕의 등극 전 생활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들을 같이 하지 않았다. 강력하고 위압적이며 주장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갑자기 남자의 기능을 박탈당했다. 그는 더 이상 아내와 똑같은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헌법적으로 볼 때 필립은 아내로부터 받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지위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런던 외교단의 단장 딸이었던 에벌린 프리벤슨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딱 열 사람이 참석한 디너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조촐한 파티에서도 불쌍한 필립은 여왕이 서 있으면 자리에 앉지를 못했어요. 즉위 초기에 그녀는 아주 기세당당한 군주였고 또 군주의 특권을 강력히 요구했어요. 만약 여왕이 입실한 다음에 필립이 그 방안으로 들어선다면 그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 여왕폐하'라고 말해야 되었어요." 필립의 친구들은 엘리자베스의 등극 이후 필립이 절망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조지 6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전 유고슬라비아 왕 피터는 이렇게 말했다. "표면 밑에 뭔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처럼 꽉 막힌 상태에서 필립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더군요. 필립은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야." 필립의 부관 마이클 파커의 아내 에일린이 말했다. 해군 제독이 되고 싶어했던 필립은 해군 경력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지 6세의 장례식 다음 날 마운트배튼 부처는 브로드랜즈 성에서 독일계 친척들을 접대했다. 디키 아저씨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는 윈저 가가 더 이상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들먹거렸다. 샴페인 잔을 손에 든 채 그는 새로운 마운트배튼 가를 위하여 축배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는 라인강 연안에서 발흥한 바텐베르크(마운트배튼)가문의 후예가 여왕의 남편이 되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 날 왕세자는 당연히 바텐베르크의 씨가 아니냐는 논리를 폈다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퀸 메어리 (엘리자베스 여왕의 할머니)는 처칠 총리를 소환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자신의 남편 조지 5세가 1917년 영국의 왕가의 이름을 윈저로 바꾼다는 칙령을 반포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디키 마운트배튼의 야욕을 맹렬히 성토했다. 처칠은 각의를 소집하여 각료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독일과 두 차례 대전을 치르는 동안 독일이라면 학을 떼었던 각료들은 차제에 여왕이 아예 자신의 성이 윈저이며 앞으로 자신에게 태어날 모든 아이는 윈저 성을 갖게 된다는 칙령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처칠은 여왕을 찾아가 여왕이 아예 마운트배튼 이름을 버리고 아버지의 이름인 윈저로 통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처칠은 그것이 영국 정부의 제안이라는 것도 밝혔다. 필립은 마운트배튼 성과 윈저 성을 동시에 사용하자고 고집했고 만약 이것이 어려우면 윈저와 에든버러 필립은 (공식 타이틀이 에든버러 공작임)의 성을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왕은 총리의 의견을 따랐고 이것은 남편에게 철저한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난 그저 아메바에 지나지 않아. 그거 뿐이야." 필립은 그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여러 해 뒤 마틴 차터리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 아메바라는 말을 정자를 심어주는 사람의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남편으로부터 그런 기능 (씨를 심는 기능)마저도 빼앗아 버렸다. 그 전 해에 또 다른 아이를 낳고 싶다는 뜻을 밝혔던 여왕은 이제 그 계획을 취소하려 했다. 그런데 신문에서 여왕이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보자 벌컥 화를 냈다. 처칠 총리 및 각료들과 성 변경에 대한 회의를 하던 도중 여왕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책했다. "난 이런 소문이 나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 날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임신을 한 게 아니라 군림하고 있어." 윈저가의 이름을 개명하는 문제로 난상토론을 벌린 윈저 왕가의 네 번째 군주인 여왕은 1952년 4월 9일 영연방의 다른 아내들과 달리 자신은 남편의 성을 취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자 필립의 지위는 아주 어정쩡한 것이 되었다. 남자가 즉위하여 왕이 되면 그 아내는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어 왕과 함께 대관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가 즉위하여 여왕이 되면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남편도 함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여전히 프린스에 머무르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영연방 내에서의 필립의 지위를 높여줌으로서 남편의 마음을 달래려 했다. 그녀는 필립의 여왕 바로 다음의 지위를 누린다는 조칙을 내렸다. 이 조칙 덕분에 필립은 왕국내에서 한 때 왕이었던 사람 (윈저 공)이나 앞으로 왕이 될 사람 (찰스 왕세자) 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왕은 또 남편을 해군 대위에서 해군 제독으로 승진시켜 해군 제독의 제복을 입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 제독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마운트배튼이 해군 제독으로 승진하여 버킹엄 궁을 방문했을 때 그를 영접했던 프린스 필립은 마침 똑같은 해군 제독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제독끼리 만나면 누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합니까?" 필립은 이렇게 대답했다. "서로 맞절을 하지만 실제제 독으로서 인사 받는 건 한 사람뿐이지요." 여왕은 또 필립에게 육군 공군 해병대의 최고 사령관 직위를 부여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공짜 영예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멜로디를 조성하기 위한 배경 음악에 불과했다." 클래런스 하우스에게 버킹엄 궁으로 이사오고 나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필립은 황달을 앓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들은 스트레스와 우울증 때문에 그런 병에 걸렸다고 진단했다. 씁쓸한 담즙이 온몸을 떠돌아다니는 바람에 그는 3주 동안 자리 보전을 하고 드러누웠다. 필립의 시종 존 발레는 따뜻하게 끓인 멀건 죽을 준비했다. 여왕은 하루에 세 번씩 문병을 왔다. 필립 공은 서서히 건강을 회복했지만 결혼 생활을 해나갈수록 자신이 점점 작아진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몇 달뒤 그는 여왕의 대관식 준비에 온 힘을 쏟게 된다. 그의 아내가 그를 준비위원장에 위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왕 부군이라는 자리의 공허함은 그를 거의 파괴 시킬 지경이었다. 7.있을 수 없는 행동: 왕실은 서울마저도 인간적으로는 용납하지 않았다 국왕의 사망이후사람들의 팔뚝에 둘러쳐졌던 검은 만장은 3개월 뒤 사라졌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인 1953년 온 영국의 관심사는 여왕의 대관식에 집중되었다. 대관식 날짜는 1953년 6월 2일 10시 30분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대관식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모든 화제는 이 화려한 행사의 준비 상황에 맞추어졌다. 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극복해 낸 영국 국민들에 대한 보상이었고 그래서 희생에 대한 추모와 부활을 바라는 희망으로 넘쳐 흘렀다.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영국 언론들은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의 도래에 대해서 연일 기사를 써댔고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때 번영했던 국운이 엘리자베스 2세의 치하에서도 다시 한번 되풀이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정작 엘리자베스 자신은 이런 대단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 자신을 튜더 왕가의 여왕과 비교하고 싶지 않아요. 그 분은 남편도 자식도 없었고 또 전제 군주로서 통치했지만 해외에는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잖아요." 자기 자신을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는 다르다고 선언하면서 엘리자베스 2세는 자기 자신을 결혼생활과 모정의 보호막에 포근히 둘러싸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관식으로부터 45년이 지난 뒤 그녀는 성실한 군주 영국 역사상 해외 여행을 가장 많이 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는 문제가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비해 엘리자베스 1세는 능력있고 지적이고 과감한 지도력으로 4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능한 통치자로 존경받고 있다. 1953년에 들어서면서 대관식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런던에는 축제 분위기가 흘러넘쳤고 영연방의 구석구석까지 대관식을 기다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 행사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잘 알고 있던 BBC는 대관식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왕궁의 직원들은 안된다고 대답했다. 귀족들만이 참석하여 축하하게 될 행사에 텔레비전 카메라가 등장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스러운 의식에 상업적 수단이 등장하다니 말이나 되느냐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여왕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BBC의 제안이 나온 지 며칠 뒤 그녀는 남편을 총리 집무실에 보내 자신의 결정을 통보했다의. BBC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단 하나의 예외조건으로서 얼굴의 클로즈업 확대 장면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여왕의 민주적인 처사는 보수적인 처칠 총리를 당황하게 만들었으나 그는 곧 냉정을 회복하고 여왕의 의견을 내각에 상정했다. "여왕 폐하께서는 모든 국민이 함께 대관식을 지켜보기를 원하십니다." 총리가 말했다. 각료들은 여왕의 결정을 번복하려고 노력했으나 처칠은 달리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아무튼 왕관을 받는 당사자는 여왕 자신이지 내각은 아니잖소." 처칠이 나중에 말했다. 여왕의 결정으로 전 세계 사람들은 7시간 반의 생중계로 대관식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인구는 3억 명으로서 사상 최대 규모였다. 나중에 BBC를 방문하여 자신의 대관식 녹화 필름을 시청한 여왕은 그 화면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여왕은 아주 흡족해 했습니다. BBC의 대관식 프로듀서인 피터 딘목이 말했다. 여왕은 감사 표시로 당시 텔레비전 이사였던 조지 반스에게 즉석에서 -녹화장면을 보았던 라임그로브에-에서 작위를 수여했던 것이다. 사실 대관식만큼 장엄하고 화려한 행사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대관식은 영국 군주제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결심했다. 대관식의 비용으로 영국 정부는 총 650만 달러를 지출했는데 이 돈을 1996년 달러로 환산하면 약 5천만 달러가 된다. 여왕은 가난한 조국의 부활을 위해서 그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볼 때 군주제야말로 영국이 소유한 가장 귀중한 재산이고 또 영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연속성을 가장 잘 상징해 주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군주제가 붕괴했지만 대영제국의 군주제는 여전히 존속되어 국민 생활에 빛을 던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의 여왕이 아닌 영연방이라는 축소된 왕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었다. 당시 영연방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카리브해의 항구도시,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제국은 사라졌지만 여왕의 왕관은 홍콩의 노무자,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로데시아의 농부, 웨일스의 광부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왕관은 신비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아니 마법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느슨하게 결속되어 있지만 강력한 유대를 자랑하는 우리 영연방을 묶어주는 힘인 것이다." 왕관이 또한 관광객의 달러를 끌어들이는 가장 큰 힘이라는 사실을 처칠은 추가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20만 명의 해외 관광객이 1주일 동안 런던에 체재하면서 하루 평균 8달러씩을 쓴다고 볼 때 24시간마다 그들이 뿌리는 돈은 무려 160만 달러가 되는 것이다. 타임스 오브 런던은 이렇게 예상했다. "대관식 주 동안에 영국의 대부분 은행에서는 1년에 취급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유통될것이다." 이 신문은 대관식 때 각종 장식에 2천 8백만 달러 대관식 당일 야간의 불꽃놀이에 28만 달러 대관식 행진에 1천만 달러 등 총 3억 달러가 소비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지만 14년 동안 전쟁, 전후, 부흥, 근검절약을 견뎌온 영국 국민들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대관식 전날 여왕은 한 가지 기쁜 소식을 받았다. 영국 산악 등반대가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유니온 잭을 꽂은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1953년 당시 높이 29,002 피트의 이산은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마지막 전초기지였다. 영토의 규모가 제국에서 영연방으로 축소되었고 또 끔찍한 박탈을 경험한 영국으로서는 에베레스트 정복이 하나의 국가적 화제가 되었다. 대관식 몇 달전에 수행된 센서스에 의하면, 영국 국민 중 450만 명이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살며 9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상수도 혜택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자동차, 냉장고, 텔레비전 세트를 가진 집은 이보다 훨씬 적었다. 영국의 귀족들은 당연히 대관식에 참석하여 새로운 군주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신들의 전통적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대관식은 귀족들이 귀족관을 쓰고 귀족복을 입을 수 있는 몇 안되는 행사인 것이다. 그들은 단 몇 시간에 불과하지만 귀족의 권한과 특권이 막강했던 과거를 다시 살아보는 것이다. 1953년 당시 영국은 너무나 가난했다. 그래서 860명의 귀족들은 족제비털로 장식한 붉은 벨벳의 귀족복 시가 600달러를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 귀족들은 1937년 조지 6세의 대관식 때 입었던 낡은 귀족복을 수리해 입어야 했다. 그나마도 준비가 안되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토끼털로 마감질한 목면 벨벳 귀족복을 빌려 입었다. 그들은 그 토끼털을 공식적으로 미니버라고 호칭함으로써 좀더 값비싸고 좀더 화려한 것인 양 허세를 부렸다. 전쟁중 말들을 대부분 팔아야 했던 영국 기병대는 대관식 행진을 위해서 양조회사에서 짐말 360필을 빌렸고 또 알레산더 코다의 영화 회사에서 추가로 100필의 말을 임대했다. 대관식 당일 아침은 날씨가 흐렸다. 그러나 여왕이 버킹엄 궁에서 나와 황금마차에 올랐 을 때 비는 잠깐 그쳤다. 그 황금마차는 1762년 조지 3세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시런던에 살고있던 플로렌스의 예술가 죠바니 바티스타 키르라니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높이 12피트, 길이 224피트, 너비 8피트의 이 마차는 외부가 전부 금색으로 도금되어 있고 내부는 새빨간 공단으로 마감처리 된 것이었다. 이 마차는 1831년 이후 대관식 때마다 사용되었다. 8필의 회색말이 끄는 무게 4톤의 이 대형마차는 선도마차에 탄 아이젠하워의 인도를 받아가며 몰(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공원의 산책로)를 천천히 굴러갔다. 지난 1년 동안 이날의 행사를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여왕은 신랑인 에든버러 공옆에 앉았다. 연도에 늘러선 국민들이 환호하며 인사를 보내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일부 관중은 이미 지난 밤부터 구질구질한 비와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텐트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단지 그녀가 지나가는 광경을 단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여왕은 머리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몇 마디 말을 거는 것처럼 입을 달삭거렸다. 여왕이 국민들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것 같은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왕궁 직원들이 특별히 여왕에게 주문했었다. 황금마차가 인도에 늘어선 사람들을 지나가자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상냥하고 이처럼 멋지고 이처럼 충성스러운 국민들이라니 너무 너무 충성스러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며 국민들에게 답례했다. 여왕의 옆에 앉아있던 에든버러 공도 해군 표지판 앞에 서서 경례를 올리는 군인들에게 답례를 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안에서는 귀족들이 긴 복도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귀족들의 질서정연한 대오가 잠시 흐트러졌다. 78세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참모총장이었고 현재는 대관식 참석 미국사절의 수석인 조지 마셜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대열에서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마셜에게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내의 가장 영예로운 자리가 배정되었다. 유럽재건개혁인 마셜 플랜의 입안자이며 그 뒤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되는 마셜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처칠은 72세의 마셜 장군을 보는 순간 2차 대전당시의 추억이 떠올라 귀족들의 대열을 흐트리면서까지 마셜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던 것이다. 얼굴이 상기된 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처칠 총리는 커다란 빨간 토마토 같아 보였다. 귀족들은 벌벳 쿠션이 놓여진 자그마한 황금의자에 앉았다. 사 원바깥에서는 사람들이 도로변에 진을 치고 있거나 14달러 짜리 관람석 (여왕이 황금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관람하기 위해 급조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왕은 무거운 왕관을 쓰고 있었고 한 손에는 보석 지구의와 다른 한 손에는 보석 지팡이인 왕홀을 들고 있었다. 트럼펫의 웅장한 소리와 4백 명의 웨스트민스터 소년 합창단의 합창을 신호삼아 여왕은 사원의 긴 복도를 걸어내려가 유서깊은 대관식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왕자들, 글루스터 공작, 젊은 켄트 공작 등과 함께 앉아있던 에든버러 공은 대관식 내내 여왕에게서 단 한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여왕이 복잡한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그는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수그리면서 그 광경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그날의 최고 순간은 오후 12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시각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여왕 폐하에게 성유를 바른 다음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며 신의 은총으로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기타 부속 영역의 여왕, 영연방의 수반, 신앙의 수호자, 영국 귀족의 군주, 근위 포병연대의 총사령관인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러한 선언으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등극하게 되는 것이며 그녀의 혈통은 색슨 왕에그버트, 헨리 8세, 스코틀란드의 메어리 여왕 등 정복왕 윌리엄 이후의 모든 영국 군주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며 신앙의 수호자가 된다. 아울러 정부를 해산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해체하고, 해군의 모든 선박을 처분하고, 공무원을 해임하고 외국에 영토를 할양하고 귀족 서임을 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범죄자를 사면하고 모든 교구에 대학을 설립하는 10가지의 제왕적 특권을 부여받는다. 입헌구주인 그녀는 군림만 할 뿐 통치하지는 않는다. 여왕의 권리는 자문에 임하고 보고를 받고 격려하고 경고하는 것이지만 그나마 이전의 군주들이 행사했던 권리보다 훨씬 제한된 것이다. 여왕의 역할은 의회의 개원, 법안서명, 관리 임명, 훈장과 작위의 수여 등 주로 의전적인 것이다. 사실상 그녀의 공식적인 조치는 영국 정부의 요구사항을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상징적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왕으로서 영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여왕 폐하의 정부이지 영국 국민의 정부가 아니다. 영국 여권도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발급되지 영국 정부의 이름으로 발급되는 것이 아니다. 여왕의 얼굴은 우표와 동전에도 나온다. 여왕의 팔은 사법부를 지배한다. 여왕의 휘장은 영국 교회를 통치한다. 내각의 각료는 여왕의 각료이고 정부 부서는 여왕의 부서이며 영국 영토 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왕의 신하이다. 영국에는 시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하만 있다. 영국의 군대와 경찰은 여왕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여왕으로서 그녀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정신적 지배력이다. 영국 사람들은 공식 연회나 디너에서 여왕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하며 또 영국 국가는 신에게 여왕을 보호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이러한 영예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녀는 모든 비판을 뛰어넘는 신성한 상징이다. 이처럼 까마득히 높은 지점에서 그녀는 절대적인 충성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미국 잡지에다 기고한 대관식 기사에서 윈저 공은 이렇게 썼다. "여왕은 이런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전범과 인품의 영향력을 통하여 이러한 기능은 민간 정부의 일상적 기능과는 전혀 품격이 다른 수준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대주교가 여왕의 머리에 왕관을 놓아준 다음 필립 공이 여왕에게 다가가 최초로 경의를 표시했다. 해군 제독의 정장을 입은 필립 공은 왕좌의 초입까지 걸어가 머리의 귀족관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 다섯 계단을 걸어올라가 여왕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필립 에든버러 공은 평생 폐하의 지체가 되는 충신이 되어 다함없는 경의를 바치겠습니다. 저는 폐하를 신앙이요 진리처럼 모시면서 그 어떤 사람들을 상대할지라도 폐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삶과 죽음을 함께 하겠습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저를 보호하소서." 여왕은 필립이 그렇게 경의를 표시하는 동안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필립은 그녀의 왕관을 살짝 만진 다음 그녀의 왼뺨에 키스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한 영국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신하의 겸손함과 남편의 자상함이 함께 어우러진 제스처였다. 여왕은 잠깐 동안 남편의 뺨에다 자신의 뺨을 꼭 밀착시켰다." 그날 밤 젊은 여왕은 자신이 결혼한 남자에게 공식적인 찬사를 표시했다. 국민들을 상대로 행한 라디오 연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국민에게 봉사하는데 평생을 바치겠으며 그러한 결심에 있어서 나의 남편도 나를 지지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여왕이 여왕 만세의 함성 속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나서자 트럼펫 소리와 교회종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74국의 축하사절을 태운 마차들이 대관식 행진로를 따라 일제히 굴러가자 기쁨으로 흥분한 군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통가의 살로트 여왕은 유일하게 무개 마차로 행진을 말했다. 몸집이 엄청나게 큰 이 여왕은 역시 엄청한게 큰 팔뚝을 사람들에게 흔들어댔다. 그녀는 같이 마차를 타고 있던 왜소한 남자들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었다. "저 여왕 앞에 있는 저 커다란 꾸러미는 뭐지." 누군가가 물었다. "그건 여왕의 점심이야." 극작가 노엘 카워드가 농담삼아 말했다. 브루나이, 조호르, 페락, 라헤즈, 켈란탄, 셀랑고르, 잔지바르의 술탄들은 화려한 터번, 비단, 사리, 번쩍거리는 깃털을 쓰고 입은 채 마차에 타고 있었다. 줄루, 아랍, 인도, 중국, 네팔 등의 민속 의상은 관중들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기술자들은 대관식 행진의 드라마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지상에다 마이크를 설치하여 우렁찬 말발굽 소리를 증폭 시켰으며 버클리 광장에서 끊임없이 노래하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도 녹음했다. 그 광경은 너무 감격적이어서 어떤 남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여왕의 마차가 지나갈 때 내 가슴은 터지는 것만 같았어요. 우리는 여왕에게 집총경례를 하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여왕과의 거리는 불과 10야드도 되지 않았는데 평생 그처럼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당직 근무를 섰던 군인 리처드 스미스는 말했다. 이와 비슷한 감격의 물결이 대성당을 휩쓸고 지나갔다. "비록 치밀하게 준비를 했지만 우리가 리허설에서 대비하지 못한 것은 그 의식이 주는 감동과 감격이었습니다. 특히 여왕의 입장과 행진 장면은 압권이었지요. 나 자신도 정말 압도당했습니다. 헨델을 왕궁의 불꽃놀이가 오르간에서 울려퍼지고, 모든 사람이 기립한 채로 패리의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성당안을 휩쓸었습니다." 라디오 아나운서인 존 스내그는 말했다. 대관식 도중 여왕의 얼굴 확대화면이 나오지 않도록 감시하는 책임을 맡은 BBC기사 벤 쇼는 그 광경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여왕의 얼굴 화면을 삭제하지 않았다. 벤 쇼는 이렇게 말했다. "장엄했습니다. 나는 여왕의 클로즈업 화면이 너무나 아름다워 삭제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여왕으로서 두 교단의 수장이되었다. 감독교인 영국 교회와 장로교인 스코틀랜드 교회가 그것이다. 그녀는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두 교회 모두 참석하여 성찬식을 거행하고 예배를 봉행했다. 그녀는 영국에서는 감독교 신자로 기도를 올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 신자로 기도를 올렸다. 모든 국민을 각각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다스리겠다고 맹서했으므로, 런던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직후 북쪽으로 여행하여 에든버러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올리고 스코틀랜드의 왕관을 받았다. 스코틀랜드 대관식에 참석했던 마거릿 맥코믹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여왕이 대관식 복장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했습니다. 나도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대관식에 갔습니다. 그런데 여왕이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 코트를 입고 나타나는 거예요. 여왕은 너무나 너무나 평범해 보였습니다. 여왕은 그 행사에 좀더 대비를 했어야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왕은 대관식 행사장인 세인트 가일즈 대성당으로 갔다. 벨벳 귀족복과 귀족관을 차려입은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검은 가죽, 구두, 청회색 펠트모자, 청회색 코트등을 입은 여왕은 아주 어색해 보였다. 특히 깃털 달린 투구와 황금장식의 해군 제복으로 성장한 에든버러 공 옆에서는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여왕의 복장 중 가장 어색한 것은 그녀가 팔뚝에 걸고 있는 커다란 손가방이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볼 때 그녀는 야채를 사러가는 중산층가정주부처럼 보였다. 제단에서 대관복을 입은 해밀턴 브랜든 공작이 무릎을 굻고 여왕에게 황금장식이 달린 벨벳 쿠션 위에 놓인 스코틀랜드 왕관을 바쳤다. 여왕이 그에게 손을 내밀자 빵가방처럼 커다란 가죽 손가방이 거의 공작의 얼굴을 후려칠 뻔했다. 그는 재빨리 얼굴을 돌려 가죽 가방을 피할 수 있었다. 대관식 장면을 기념하는 공식 그림에 보면 여왕은 손가방이 없는 상태로 스코틀랜드 고원의 고대 왕관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스코틀랜드의 초상화가는 여왕이 평민처럼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손가방을 빼버렸던 것이다. 여왕 주위의 분위기는 너무나 공손했기 때문에 감히 그녀의 복장에 대해서 비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 복장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대관식에서 몇 차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했지만 그것은 왕궁 직원들에 의해서 교묘하게 위장되었다. 그들은 군주는 완벽하다는 신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평생 봉직해 온 사람들이니까 그런 일은 잘해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엘리자베스의 통치 초기에 왕실 직원들은 기자들이 왕실에 공손하게 나올 것을 기대했고 또 기자들도 그런 기대에 따라 주었다. 언론과 왕궁 사이의 묵계에 힘입어 왕실 직원들은 뉴스를 만들어내고 정보를 감주고 제멋대로 정보를 금지시킬 수 있었다. 왕실 직원들은 언론을 조종하여 여론의 흐름을 이끌어가려고 했다. 여왕을 보다 존경스러운 군주로 보이게 하려는 직원들의 노력은 지금와서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그들의 헌신적인 태도는 나무랄 데 없었고 또 충성심도 굳건했다. 그들은 여왕이 커내스터 카드놀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여왕이 첫 초상화 제작 현장에 나타났을 때 왕관을 달걀상자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는 사실도 부인했다. 그들은 마지못해 여왕이 경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녀가 경마장에 끊임없이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시작마저 부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여왕이 도박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여왕 폐하는 베팅은 하시지 않지만 왕실의 말이 승리할 때 크게 기뻐하신다." 여왕의 공보 담당 비서관이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여왕은 늘 왕실의 말에다 베팅을 했다. 그래서 1954년과 1957년에 두 번씩이나 영국 경마장에서 최고로 많은 소득을 올린 마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녀는 심지어 왕궁의 집사들에게 왕실 말에다 베팅을 걸지 말아야 할 때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러나 도박은 불법이고 또 존경받는 여왕이 경마에 돈을 걸지 않는다는 동화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즉위 4년만에 이들 왕실 직원을 비난하면서 그들이 구식이고 꽉 막인 데다 뻔뻔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사람이 나왔다. 알트린첨 경이라는 이름의 그 비판자는 왕실 직원들을 가리켜 2류 밖에 안되는 자들이라고 매도했다. 알트린첨은 나중에 자신의 세습 귀족 작위를 포기하고 그냥 존 그리그로 불러달라고 한 사람이다. 역사학자인 존그리그는 여왕을 잘난척하지만 실은 무식한 사람이라고 최초로 비난하여 유명해졌다. 그는 또 왕실 직원들을 모두 멍청하다고 비난했다. 대관식 당시 같았더라면 이런 비난은 너무나 모욕적이어서 불경죄로 잡혀갔을 것이다. 군주제는 전국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그 제도에 봉사하는 사람들조차도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다. 당시 유일한 반대의 목소리는 왕궁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주변 사람들의 무능에 혀를 내두르던 여왕의 남편이 분노하여 으르렁거리는 소리였다. 왕실 직원들을 칠칠치 못하다고 말하고 또 그들이 버킹엄 궁을 운영하는 방식이 중세적이라고 몰아부치면서. 필립 공은 230명의 하인 대부분이 자기들 이익이나 챙길 뿐 정작 왕실의 이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바보들이라고 닦아세웠다. 필립은 해군 같은 효율성을 고집하면서 690개의 방을 자랑하지만 운영이 잘 안되어 삐걱거리는 왕궁을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애썼다. 그는 우선 하인들의 개혁부터 시작했다. 하인들이 비누, 물, 밀가루, 전분 등을 써서 머리카락을 파우더링 하는 일은 낡고 남자답지 않은 일이므로 그만두게 했다. 그 다음으로는 형편없이 구식인 왕궁의 통신 시스템을 뜯어고쳐서 왕궁내에 쓸데없는 문서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일소했다. 그는 현대식 인터콤을 설치하여 여왕이 스위치만 누르면 필립, 비서관, 아이들의 유모 심지어 주방장까지 손쉽게 접촉하도록 했다. 꼼꼼하기 짝이없는 필립 공은 그 다음에 각 사무실에 인터콤을 설치하고 왕실의 차량에 다는 쌍방 무전기를 설치토록 했다. 그는 또 빨래판으로 잔업을 해가며 세탁을 하는 세탁 아주머니들을 해고하고 그 대신 왕궁 지하실에다 현대식 세탁기를 설치했다. 또 왕궁의 여러 식당을 하루종일 난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건 하인들이 따뜻한 식사를 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여왕의 응접실 옆에다 따뜻한 음식을 넣어두는 작은 식료품실과 찬 음식을 보관하는 냉장고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하인들이 매일 아침에 여왕에게 커피를 가져다 주기 위해 3마일이나 되는 복도를 뛰어 다니는 것을 없애 버렸다. 그는 또한 군주의 침실 옆에다 스카치 위스키 새 병을 갖다 놓는 관습도 폐지했다. 이 관습은 에드워드 7세가 감기를 물리치기 위해 위스키를 요구했던 1910년 이래 계속되어 오던 것이었다. 그때 이후 그 어떤 국왕은 이 관습을 폐지하지 않았다. 필립은 여왕의 배그파이프(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가죽으로 만든 취주 악기부는 사람)를 유지하는 것은 허용했다. 배그파이퍼 관습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서 매일 아침 9시 아길 앤 사더랜드 고원의 파이프 메이저가 배그파이프를 부는 사람들과 함께 영국의 경내를 행진하는 행사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비단 바지를 입은 어린 심부름꾼이 메시지를 직접 손에 들고 달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완고한 왕실 직원들은 이러한 필립의 개혁이 도무지 못마땅했다. 그들은 필립이 동선에 따라 직원의 움직임을 관리하려는 것도 못마땅했고 출퇴근시간을 줄이기 위해 왕궁 뒤에다 헬리콥터 승강장을 만들려는 계획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샌드링엄의 농장에서 나오는 완두콩을 시판하자는 그의 계획도 비웃었고 빵을 얇게 써는 기계와 홍당무를 씻어주는 기계도 설치하려고 했을 때도 조롱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필립이 윈저 성에 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오렌지 밭을 냉난방 수영장으로 만들라고 명령했을 때도 반대했다. 왕실 직원들은 특히 필립이 왕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뒤섞이는 것에 반대했고 평민과 귀족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매너를 비판했다. 필립이 노동당 지도자들을 접대하고 영화배우를 여왕과의 점심식사에 초청했을 때도 그들은 너무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버컹엄 궁에 영화배우를 초청하는 것은 사당에 천민을 출입시키는 것 보다 더 고약한 일이었다. "저 빌어먹을 독일 왕자놈." 여왕을 현실 세계에 적응 시키려는 필립의 그런 노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여왕의 개인 비서 토미 라셀은 필립의 등 뒤에서 그렇게 욕을 했다. 여왕의 공보 비서인 리처드 골빌 경도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는 신사가 아니야. 게다가 신사라고 할 만한 친구 조차도 없어." 신사로 인정받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왕궁 직원들에게 신사가 아니라는 것은 최고의 욕이었다. 그러나 이런 욕설은 비밀스럽게 필립의 뒷전에서 만발설되었다자칭신사인왕궁직원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조심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여왕의 남편에게 노골적으로 대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식적인 자리나 필립이 있는 곳에서는 공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필립의 등뒤에서는 마구 씹어댔다. 신사라는 호칭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필립은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포괄적인 개혁을 계속 진행시켰다. 왕궁 운영의 개혁 이외에도 필립은 농장, 공장, 학교 등을 줄기차게 방문하여 끈덕지게 질문을 던져댔다. "그 일은 어떻게 해나가는 거죠.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까?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되는 방법 말입니다." 그는 왕실 직원들과는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고 아무 말 안하고 가만있는 것이 최고라는 왕실 직원들의 조언을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그는 어디를 가나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를 좋아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이런 필립의 태도는 왕실 직원들에게는 정말 곤란한 것이었다. 사실 왕실 직원들은 필립의 솔직한 발언 태도에 부정적인 언론 반응이 나오면 어떻게 하나걱정을 하고 있었다. 언론을 상대하느라고 애를 끓이던 그들은 벌써 여러 달 동안 여왕의 23세된 동생인 마거릿 공주의 스캔들을 진화하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다. 공주의 상대자는 1944년 이래 선왕 조지 6세의 마필 담당관으로 근무했고 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의 부집사장으로 근무하는 38세의 공군 대령 피터 타운센드였다. 여러 달 동안 왕실 직원들은 로맨스의 소문을 부인했으나 대관식 도중 마거릿 공주가 타운센드의 어깨 위에 묻은 실보푸라기를 떼어내는 장면이 사진기자에 의해 포착되었다. 그 자그마한 동작 하나가 사태의 진실을 폭로해 버렸고 왕궁을 일대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전투 비행사로 참전했던 피터 타운센드는 공군훈장과 무공훈장을 받은 역전의 용사였다. 전후에 조지 6세의 마필 담당관이 된 타운센드는 유머가 넘치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필립공 처럼 덩치가 당당하지도 않고 또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는 약간 연약한 듯하면서도 정감이넘 치는 남자였다. 그는 약간 말을 더듬었는데 이 때문에 역시 말을 더듬던 조지 6세의 사랑을 받았다. 타운센드는 공군에 있을 때 신경쇠약을 앓은 적이 있고 또 고질적인 신경성 습진 때문에 가끔 지상 대기 근무를 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우아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으며 또 전형적인 신사이면서 사관이라고 평가받았다. 영국 소설가인 안젤라 램버트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린 모두 그를 사랑했어요." 1955년 그가 사망하자 르 피가로의 프랑수아 누리시에 기자는 이렇게 썼다. "그는 잘생겼고 용감하고 낭만적이며 신중했다. 그의 영웅적 행위와 희생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한결 덜 자유롭고 덜 명예로웠을 것이다." 타운센드는 마거릿이 열네 살 때부터 왕실에서 근무해 왔다. 그녀의 부모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해 그는 마거릿을 무도회나 승마쇼에 데리고 다녔다. 그는 승마 친구도 해 주었고 또 킹스컵 비행기 시합에서 그녀의 비행기를 조종하기도 했다. 마거릿은 스물 한 살이 되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그를 따라다녔고 그가 접근을 거부할 때마다 왕족의 특권을 마구 휘둘렀다. 어느 날 저녁 무도회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피터에게 자기를 안아서 계단 위까지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는 싫다고 했다. 그녀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가 계속 싫다고 하자 '피터 이건 공주의 명령이야' 하고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잘생긴 마필 담당관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팔안에 끌어안았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분부대로 하옵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마거릿을 양팔에 안은 채 클래런스 하우스의 계단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아버지가 런던 외교단의 단장이면서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마거릿의 친구 에벌린 프리벤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시 그녀와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어느 크리스마스 때 국왕이 피터에게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차린 마거릿이 느닷없이 카드놀이를 피터와 함께 하고 싶다면서 떼를 썼어요. 그래서 그는 가족과 함께 보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마거릿과 카드놀이를 해야 되었어요. 그의 아내는 무슨 일일까 의아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1952년 피터 타운센드는 아내의 간통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아내의 귀책 사유로 이혼하게 되자 두 아들을 양육할 권리를 획득했다. 비록 그가 이혼소송에서 피해자였지만 그의 이혼은 왕궁 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들은 1936년의 이혼사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고 그래서 이혼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었다. 그 이혼으로 영국사의 유일한 국왕 양위사례가 나왔고 양위한 왕은 망명을 가야 하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이혼은 너무나 불명예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집사장인 챔벌린 경은 이혼한 사람이 여왕을 알현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했다. 그는 심지어 애스고트 성에서 귀빈을 초대할 때 당대 영국 최고 배우였던 로런스 올리비에를 이혼남 이었기 때문에 그를 초청 명단에서 제외했다. 1953년 마거릿 공주가 이혼남인 타운센드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영국 제도권을 뒤흔들었고 정부, 교회, 왕족 모두 이 로맨스 때문에 심한 골머리를 앓았다. 왕위 계승권 서열 3위인 마거릿 로즈 공주가 사랑에 빠진 것은 이해해 줄 수 있으나 평민인 타운센드가 감히 계급의 경계선을 넘은 것은 용서해 줄 수 없다는 일방적 태도였다. "뻔뻔스러운 자. 마필 담당관이면 말이나 돌보아야지." 에든버러 공작이 소리쳤다. 왕실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들은 계급제도의 영원함을 철저히 믿는 중세적인 사람들이었다. 피터 타운센드가 자기는 마거릿 공주와 사랑에 빠졌다고 털어 놓자 여왕의 개인 비서인 알란 래설즈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신은 돌았거나 악한이거나 둘 중에 하나야." 래설즈는 재빨리 처칠 총리와 의논을 했다. "타운센드 대령은 그 사랑에서 손떼야 해. 그래 손떼야 하는 거야." 윈스턴 처칠은 단호하게 말했다. 왕실 직원들은 처칠의 조언을 따르기로 하고 타운센드를 영국 바깥으로 추방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는 사실은 모르고 그렇게 떼어놓으면 타운센드와 공주의 사랑이 저절로 흐지부지 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거릿의 25회 생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만 강조하려 들었다. 25세가 될 때까지 마거릿은 언니의 승락이 없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언니는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여동생이 이혼남과 결혼하는 것을 승락하지 않을 터였다. 마거릿 커플을 그런 식으로 떼어 놓음으로서 그 스캔들이 여왕의 첫 영연방 순회 방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미리 예방할 수도 있었다. 피터 타운센드는 마거릿 공주와 퀸 머더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의 1953년 로데시아 방문을 수행하게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왕실 근무요원에서 브라셀 주재 공군 무관 자리로 전보가 되었다. 그는 브라셀에 도착하여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자리가 우리 두 사람에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상황을 주도한 사람이 아니므로 질문에 대답 할 수 없습니다. 마거릿 공주에 대한 나의 충성심은 불변입니다. 그 충성심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낼 것입니다." 타운센드는 너무나 신속하게 추방되었기 때문에 켄트의 기숙사 학교에 다니는 자기 아이들에게 그 소식을 전할 틈도 없었다. 마거릿은 언니에게 그 인사 명령을 취소하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했지만 거절당했다. 두 자매는 크게 언쟁을 벌였다. 마거릿은 침대에 드러누워 사흘동안 안정제를 맞으며 간신히 살아갔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의 비참한 심경을 음악 속에다 담았다. 그녀는 전기작가 크리스토퍼 워릭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악과 가사와 비탄을 함께 작곡했지요. 그건 피터 타운센드와 내가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였지요." 타운센드는 여왕 커플을 모시고 북 아일랜드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즉시 영국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보인 공식적인 모습은 비행장에서 여왕과 필립 공에게 악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거릿 공주의 25회 생일 직전에 두 번 영국에 다녀갔고 공주를 친구들의 집에서 극비리에 만났다. 1955년 10월 25회 생일을 넘긴 몇 주 뒤 마거릿은 윈저 성을 방문하여 여왕과 필립을 상대로 담판을 벌였다. 만감이 교차하는 그 만남에서 여왕과 필립은 앤토니 이든 경의 정부가 그녀의 결혼에 반대하며 또 캔터베리 대주교도 반대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왕위 계승 서열 3위입니다." 필립이 말했다 "나도 숫자는 셀 수 있어요." 마거릿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헌법적 위기를 초래했어요." 필립이 타임스의 두 번째 사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사설은 영국 교회의 통치자이며 신앙의 수호자인 여왕의 동생이 만약 이혼남과 결혼을 한다면 '앞으로 그 여동생은 더 이상 왕족의 기능을 수행해서는 안된다' 고 못박고 있었다. "만약 네가 계속 결혼을 고집한다면 너는 교회의 축복을 받지 못할 거야. 여왕이 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또 결혼식은 영국 내에서 거행될 수 없으며 마거릿 부부는 해외에서 살아야하고 마거릿은 모든 직함과 연금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또 왕가에서의 지위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거릿 공주는 울면서 윈저 성을 나왔다. 마거릿의 어머니는 불유쾌한 장면을 피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있는 메이 성으로 잠시 피해나가 있었다. 퀸 머더는 대단히 강인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서 직접적인 대결은 피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가족과의 개인적 갈등이 있을 때는 기관지염 감기 또는 두통을 호소하면서 침대에 드러누워 피해나갈 수 있었다. 제도권 내에 우군이 전혀 없는 마거릿 커플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 하다가 압력에 굴복했고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타운센드는 성명서를 초안했고 공주는 그것을 승인했다. 그녀의 성명서는 일주일 뒤 BBC가 정규방송을 잠시 중단하고 발표했는데 간단히 마거릿이라는 서명만 되어 있었다. 나는 공군 대령 피터 타운센드와 결혼하지 않기로 한 나의 결심을 밝힙니다. 기독교의 결혼은 해지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고 영연방에 대한 나의 의무를 잘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가름침과 의무를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혼자서 이러한 결정에 도달했습니다. 윈저 공은 조카로 하여금 이러한 발표를 하게 만든 제도권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꼈다. 윈저 공은 아내에게 이렇게 썼다. "타운센드를 포기한다는 마거릿의 성명에 반응하여 타임스와 텔레그래프 등이 가증스럽고도 위선적인 언어로 두둔하는 듯한 태도는 정말 받아들이기가 어렵소. 영국 교회는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었소. 그러나 이번에는 불쌍한 파리를 잡아챈 것 같구려. 반면 나는 너무나 의지가 강력하여 이제 정부 기관이 되어버린 저 낡아빠진 기관의 거미줄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주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그래서 여러 통의 항의 편지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대부분은 의무를 더 중시함으로써 그녀가 올바른 일을 했다는 서글픈 현실을 받아들였다. 교회는 전능했다. 여왕의 궁중 목사인 피터 길리엄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 일각에서는 교회가 힘없는 소녀를 강압하여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게 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견해입니다. 교회가 한 것이라고는 교회의 규칙이 어떠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준 것뿐입니다." 분노와 슬픔에 빠진 피터 타운센드는 브라셀로 되돌아가 영국 공군에서 퇴역하고 몇 년 뒤 재혼했다. 그는 파리 남서쪽의 랑부예에서 자발적 망명의 삶을 살면서 영국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화장된 유골을 프랑스에다 뿌려주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만약 제비들을 실어가는 남풍이 그 유골을 영국 쪽으로 불고 간다면 그건 내버려두라. 나는 알지도 못할 거고 또 신경쓰지도 않을 거니까." 37년 뒤 암으로 죽어가던 타운센드는 런던으로 잠입하여 켄징턴 궁에서 마거릿 공주와 함께 조촐한 점심식사를 했다. 그 자리를 함께 했던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일종의 작별인사였지요." 머리칼이 은빛으로 변하고 이제 77세가 된 타운센드는 당시 위암을 앓고 있었다. 그는 그 병을 가벼운 소화장애라며 대단치 않은 것처럼 말했다. 그는 3년 뒤 아무런 원한도 없이 죽었다. "어떤 일이 지나가 버리면 뒤돌아 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인생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타운센드는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왕실 가족의 이혼에 대한 완고한 태도는 그때쯤 이미 많이 누그려졌다. 그러나 마거릿의 로맨스에 대한 왕실 직원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전에 왕실 직원으로 근무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아주 간단하고 분명한 원칙이 있어요. 연애보다 의무. 사랑 보다는 국가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왕실을 지키기 위해서 할 일을 다 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여왕은 곧바로 해외순방을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대관식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여왕은 6개월에 걸쳐 4만 마일의 여행을 하면서 지구상의 4분의 1 지역에서 살면서 세계 무역의 3분의 1을 수행하는 7억 5천 만명의 신하들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위시하여 12개 국가, 6개 식민지, 4개 영지, 2개 자치령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녀는 276회의 연설을 듣고 6770회의 커트시를 받고13,213인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해외여행을 한 군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1963년 당시 그녀의 첫 번째 해외순방은 그 이전의 어떤 국가 수반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엄청난 일이었다. 그녀는 국가 수반이 되고 싶었다. 그저 상징적 인물로만 국민들 앞에 나서는 일은 싫었던 것이다. 여왕을 따라 다닌 소규모 언론단의 일원이었던 이브닝 뉴스의 기자 그웬 로빈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여행은 누구에게나 힘든 강행군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이브닝 뉴스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여왕을 매일 낮, 매일 밤 만났고 어떤 때는 시간마다 보았습니다. 여왕은 그 긴 여행을 에든버러 공이 없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거예요.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엘리자베스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몇 시간이나 서있을 수 있었고 말 잔등에 몇 시간씩 올라타서 끄덕없이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낯선 사람들과 오랜 시간 잡담을 나누는 것은 부담이었다. 그녀는 윈저 성에서 여동생, 하인, 가정교사들 틈에서만 성장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서툴렀고 또 어떻게 해야 사교적으로 잘 어울릴 수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사람 교제를 좋아하는 필립은 다른 사람들과 농담을 곧 잘했고 빈정거리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희희덕거리기도 잘했다. 계속되는 그웬 로빈스의 회상은 이렇다. "필립은 아주 이상적인 남편이었습니다. 여왕은 그를 아주 좋아했어요. 그녀는 당시 나이가 어려서 자기가 여왕이라는 확고한 자신감이 없었어요. 군주라는 자기 자신을 너무 의식했어요. 그래서 어떤 때 보면 불안정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러나 필립은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또 어떤 때는 세련되게 행동했어요. 그는 여왕이 좋은 기분을 갖도록 해 주었고 또 대중들 앞에 나가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켰어요. 그녀는 주위 환경에 압도당하면 우울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그때마다 필립이 억지로 웃겨서 기분을 풀어 주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기자들한테는 야비하게 굴었어요. 여기 독수리 떼가 온다. 그는 우리들을 보면 그렇게 말했어요. 몰타에 들렀을 때 필립은 우리에게 땅콩을 던지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싫어했어요. 그렇지만 여왕한테는 정말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가 다가가기만 하면 여왕은 얼굴이 환해졌고 여왕의 귀에다 대고 몇 마디 속삭이기라도 하면 여왕은 금방 기분이 좋아졌어요. 여왕이 뚱하거나 심술이 나 있을 때마다 웃기는 말을 해서 기분을 풀어주었어요. 그러니 그 여행에서 여왕을 이끌고 나간 사람은 필립이라고 할 수 있어요." 통치 초기에는 이처럼 필립의 인도를 받아야 했던 여왕도 몇 년 간 여행을 다니고 난 다음 부터는 나름대로 처신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물론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였다. 다시 그웬 로빈스의 증언을 들어보자. "여왕은 매사 단정했지만 따뜻하다거나 인간적인 분위기가 없었어요. 부자연스러우면서 초연한 데가 있었지요. 그녀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 잘못하지 말아야겠다, 이런 마음이 앞서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어요. 그처럼 마음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런 거리를 두는 방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퀸 머더처럼 대중들 앞에서 환히 빛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퀸 머더는 잘 차려입은 옷, 다정한 미소, 부드러운 깃털 등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강철같이 단단한 여인이었습니다. 마시멜로 (서양 촉규화 뿌리를 원료로 만든 부드러운 과자, 역주)처럼 부드러운 껍데기 안에 차갑고 단단한 쇳덩어리가 들어 있었지요. 젊은 군주는 각광을 받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해외순방을 주제로 만든 세 편의 필름에서 주연 역할을 했다. 런던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그녀는 열렬히 환영하는 국민들이 기다리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여왕을 태운 왕실 전용선 브리태니아가 유유히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가자 강둑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여왕만세를 계속 외쳐댔다. 국민들은 여왕이 퀸 머더처럼 대중을 즐겁게 하는 여배우가 될 수는 없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건실하게 의무를 수행하는 여왕을 믿음직스럽게 생각했다. 국민들은 왕실 전용선이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자 여왕에게 성원을 보내듯 소리쳤고 여왕은 그들의 환호에 간단히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여왕은 자신이 어머니에 비해 볼 때 정말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꼈다. 그녀는 둔탁했던 아버지처럼 그녀 자신도 매력적인 배우자에게 크게 의지해야 되었다. 그녀는 한 친한 친구에게 그 점을 시인하는 말을 털어놓았다. "필립이 없었다면 나는 계속 이끌어 나가지 못했을 거야." 8. 아내 어머니 여왕: 여왕은 자식들에게도 신체접촉을 꺼리는 이기주의자다 군주의 지위는 엘리자베스가 열살 때부터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먼 기차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늘 그 기차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언젠가는 그 기차에 올라 타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빨리 다가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스물 여섯의 그녀는 이제 막 결혼을 하고 피어나려는 참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떠밀려 등극하기 전 그녀는 좋은 어머니와 좋은 아내 중 하나를 고르라고는 한다면 언제나 좋은 아내 쪽을 골랐다. 당시로서는 남편이 늘 우선이었다. 1948년 첫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이의 유모가 아닌 어머니가 될 겁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역할이 아내의 역할과 충돌할 때 그녀는 서슴없이 유모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위임했다. 그녀는 당시 몰타에서 해군 대위로 근무중인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서 맏아들의 첫돌도 아랑곳하지 않고 런던을 떠나 몰타로 갔었다. 첫 아들을 몇 달 동안 부모님과유 모에게 맡겨놓았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이 첫 걸음을 떼는 것도 첫 이가 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가 처음 한 말은 엄마가 아니라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좋은 사람인 유모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성장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키웠다. 엘리자베스는 아주 어린 시절 6개월 동안 유모와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부모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방문중이었다. 자신도 그렇게 컸기 때문에 자기의 아이들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그녀는 죄의식을 느낀다는 말을 하곤 했다. 1962년 새로운 여왕으로 등극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생활 속에 가족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더 이상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권 수호에 전념하기로 하고 당분간 아이 낳는 것을 연기했다. 새로운 군주로서 그녀는 해외여행을 하고 국빈 방문을 하고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고 의회와 협의하고 연설을 하고 군부대를 사열하고 리번 커팅을 하고 작위를 수여하는 등 통치 행위에 나서야 했고 또 늘 웃으려고 애써야 했다. 가정교사에 의해 너무 가지런하고 너무 깔끔하고 너무 의무감에 넘쳐서 오히려 해가 되는 강박충동적 아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엘리자베스는 옛날의 그런 성격을 그대로 발휘하면서 군주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해 나갔다. 그녀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연습 기간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라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되었어요." 그녀는 열심히 서신에 답변하고 연설을 하고 빨간 박스 (정부에서 매일 보내오는 주요 문서함 속의 문서)를 읽었다. 한 왕실 직원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빨간 박스는 좋은 핑곗거리였죠. 여왕은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되었어요. 위층에 빨간 박스가 두 통이나 와 있다. 그건 나의 헌법적 의무이다. 그러니 아들, 딸 혹은 남편과 언쟁을 벌이기보다는 우선 그 일부터 해야 한다. 골치 아픈 가정 문제가 생길 때마다 빨간 박스는 좋은 도피처가 되었지요." 그러나 여왕은 공식적으로는 이상적인 어머니인 것처럼 비춰졌다. 잘생긴 남편과 사랑스러운 두 아이와 함께 찍은 여왕의 사진이 신문과 잡지에 주기적으로 실렸다. 그녀는 언론매체를 위해 사진 모델이 되어 주는 것이 여왕의 의무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필립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왕정을 잘 유지해 나가려면 우선 왕실 가정을 잘 보살펴야 해요. 그런 다음 그 가정을 대중들에게 자주 보여줘야 해요." 여왕은 이제 우선 순위를 재조정하여 왕정 1순위, 결혼 2순위, 자녀 3순위로 자리매김했다. 전기작가 필립 지글러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여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정상적인 가정의 개념은 물 건너 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여왕 자신에게 자상한 부모가 될 소질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군요. 아무튼 그녀가 왕실 행사의 회전목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자상한 부모의 노릇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좀 내야겠어요." 그녀는 총리와의 주말 면담 시간을 바꾸어 찰스(4세)와 앤(2세)이 잠들기 전 여왕의 얼굴을 마주 대할 시간을 마련했다. 또 아침엔 아이들이 여왕과 필립을 30분 동안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유모인 헬렌 라이트바디와 마벨 앤더슨이 매일 아침 9시까지 아이들을 여왕의 대기실로 데려갔다가 9시30분이 되면 다시 데려왔다. 그러면 여왕의 하루 일과는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때 앤은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 찰스가 여동생을 잡아당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앤 엄마를 성가시게 하지마. 엄마는 바빠. 여왕일을 해야 돼." 아이들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강한 유모들에 둘러싸여 하루종일 보냈다. 그리고 매일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유모는 다시 아이들을 부모 앞으로 잠시 데려갔다가 이어 유모실로 넘겨 목욕과 취침 준비를 하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보다 유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찰스 왕자는 후일 이렇게 회상했다. "아주 비참한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육문 제에 대하여 부모 중 특히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슬픈 추억은 늘 혼자였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거의 나온 적이 없었고 특히 15세까지의 생일 파티는 연속적으로 결장하고 그 대신 메모만 보냈다고 찰스는 말했다. 그러나 마운트배튼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엘리자베스나 필립에게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왕가의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고독을 견뎌야 합니다. 이건 과거나 미래나 늘 마찬가지입니다. 그 상황은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퀸 머더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퀸 머더는 한 디너 파티에서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신문에 보면 필립이 가혹한 아버지인 것처럼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그건 진실을 모르는 소리예요. 너무 엄격한 것은 늘 릴리벳이었고 그런 그녀를 조절하려고 애쓴 것은 필립 쪽이었어요." 여왕은 해외 순방에서 돌아올 때마다 어린 아들이 그동안 많이 커서 더욱 시끄러워졌음에 익숙하지 못한 여왕은 아들이 곁에 있으면 늘 난감해 했다. "아이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아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왕은 오래 전에 가정 내에서는 아이들을 부를 때 sir나 ma'am이라 하지 말고 그 대신 찰스, 앤이라고 부르라고 지시를 내렸다. 또 시녀나 종복들은 여왕과 퀸 머더에게 해야 되는 커트시를 찰스와 앤에게는 할 필요가 없다고 지시를 했다. 한편 아들 찰스는 왕실 직원과 마찬가지로 방을 떠날 때는 여왕에게 커트시를 해야 되었고 또 할머니인 퀸 머더에게도 커트시를 바쳤다. "늘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해야돼. 안 그러면 할머니 가방에서 과자가 안나와." 찰스는 한 친구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할머니에게 절을 하니." 친구가 물었다.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이야. "왜" "아빠가 그래야 된다고 말씀하셨거든." 발모랄 성에 갔을 때 유모가 찰스에게 킬트 (스코틀랜드 풍 짧은 치마) 밑에 타르탄(체크무늬) 반바지를 입히려고 하자 찰스는 싫다고 했다. "나 그거 안입을 거예요. 아빠도 안 입잖아요." 아빠가 가끔 그를 질책하고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지만 아빠는 그의 유년시절을 비춰주고 또 따뜻하게 해 주는 태양이었다. 찰스는 후일 이렇게 회상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내게 강한 영향을 주었어요. 난 아버지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었으니까요." 그러나 찰스는 아버지의 까다로운 기대에 부응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아버지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지배했던 독재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아버지는 두 가지 유형이 했다고 말했다. 첫째 유명은 칭찬할 일이 있으면 칭찬해 주고 꾸중할 일이 있어도 가능한 한 자제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아버지이고 둘째 유형은 독재자처럼 군림하면서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아버지이다. "에든버러 공은 두 번째 유형이었지." 찰스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찰스는 한 때 자기가 아버지를 우상처럼 떠받들었고 아버지의 동작을 모조리 흉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왕의 시종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회상했다. "찰스는 아이 적에 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어했어요. 아침 만남 때 아이들을 데려가면 찰스는 여왕보다 필립 공의 무릎에 앉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그 분은 아이들이 존경할 그런 아버지였어요. 여왕과는 달리 잘난 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 수준으로 내려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능력을 갖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필립을 보다 나쁜 시각으로 보았다. 필립의 친한 친구이며 마필 담당관이었던 마이클 파커의 전 아내 에일린 파커는 이렇게 말한다. "필립은 찰스를 많이 믿어줬어요. 하지만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가끔 찰스를 귀여워해 주기도 했지만 그 매너가 자연스럽지 못했지요. 그는 앤과 더 사이좋게 지냈어요 나는 찰스가 아버지를 무서워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찰스는 초연하고 압제적이고 늘 바쁜 듯해 보이는 어머니를 무서워했다. 여러 해 뒤 찰스는 유년시절에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딱 한 번 그런 비슷한 일로는 이런 것을 기억했다. 그가 저녁 목욕을 하는데 어머니가 유아실에 왔었다. 어머니는 시종을 뒤쪽에 세운 채 황금의자에 앉아 유모가 그를 씻겨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욕탕물에다 손을 넣어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목욕 과정을 지켜보기는 했어요." 찰스는 말했다. 그는 한 전기작가에게 어머니가 최초의 해 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도 털어 놓았다. 당시 6개월 동안이나 어머니를 보지 못했던 그는 어머니를 환영하기 위해 브리태니아 호의 갑판으로 달려올라갔다. 여왕은 어린 아들이 환영 인사들의 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자 '얘야, 넌 아니야.' 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을 포옹하거나 키스하지도 않았다. 단지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다음 사람을 맞이했다. 이 에피스드에 대하여 여왕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훈련을 받았어요." 영국의 칼럼니스트인 린다 리-포터는 이렇게 썼다. "여왕이 신체접촉을 싫어하는 것은 거의 공포증에 가까웠어요. 여왕 자신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연히 어머니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것을 못하게 되어요. 여왕은 견인주의자예요. 그리고 그 어머니 (퀸 머더)처럼 무자비한 기질을 갖고있어요." 여왕이 애정 표시가 서툴렀다면 여왕의 남편도 냉정하고 초연한 것처럼 보였다. 친구 마이클 파거는 증언한다. "그는 자기 마음을 잘 표시하지 않아요. 나는 늘 그가 여왕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사랑한다는 표시를 해 주기를 바랬어요. 그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늘 차렷 자세를 취했어요. 나는 그 사실을 그에게 한두 번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눈알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더군요." 찰스는 부모님이 서로 애정표시를 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서 자라났다. 여덟 살 이후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자신의 정서함양에는 어머니보다 유모가 더 소중했었다고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생후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을 박탈당하여 정서적으로 정상이 되지 못하고 수동적이면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을 보였다는 새끼 원숭이에 대한 연구 사례를 인용했다. 버킹엄 궁의 카펫 깔린 복도를 쓸쓸히 방황했던 찰스도 그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 아이의 다정한 상호작용이 아이의 머리를 촉진시켜 학습효과를 높인다는 연구 보고서를 읽고서 왜 자신이 학창시절에 애만 쓰는 아이로 놀림을 받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병약한 아이였던 찰스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의 증조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안짱다리였다. 발은 평발이어서 정형외과에서 처방한 구두를 신어야 했다. 툭하면 감기가 걸렸고 목이 부어올랐고 천식을 했고 또 고질적인 가슴 답답증을 앓았다. 전 왕실 직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찰스 저하는 아주 진지한 소년이었습니다. 품행이 방정하기는 했지만 어머니처럼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였지요. 말을 타면 불안해 했고 배를 타도 안절부절 못했어요. 이에 비해서 그보다 21개월 아래인 앤은 아버지를 닮아서 씩씩하고 쾌활했지요. 아마 그런 점 때문에 필립 공은 앤을 더 좋아하게 되었을 겁니다." 필립은 아들 찰스가 병약한 것을 걱정하여 그를 튼튼한 남자로 만들려고 애썼다. 체격이 단단하고 강인한데다 또 미남인 필립은 크리켓과 폴로놀이를 즐겼고 요트시합에도 참가했으며, 마차를 직접 몰 줄 알고, 비행기도 조종하고, 들꿩 사냥도 열심히 하는 등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아들 찰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 필립은 찰스의 첫돌에 크리켓 방망이를 선물하고 또 나중에 커서는 어떻게 플레이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또 찰스에게 처음으로 엽총을 선물하고 어떻게 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것도 필립이었다. 수영, 승마, 요트, 사냥 등도 모두 필립이 가르쳐 주었다. 또 나중에는 폴로와 그림 그리기를 가르쳐주고 자신의 비행기를 직접 조종할 수 있도록 찰스에게 비행강습도 시켰다. 찰스는 연안 소해정의 지휘를 담당하기 위해 어려운 해군 훈련도 받았으나 여전히 유약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둠을 무서워하고 손톱을 끊임없이 물어뜯는 아이였던 찰스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가며 승마를 배웠고 배멀미를 억누르며 항해술을 배웠다. 그는 여동생처럼 타고 난 운동가는 아니었으나 스포츠를 열심히 했고 어떤 때는 무모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결코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었던 필립은 찰스가 여동생을 때리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그 자리에서 찰스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것도 자주. "어렸을 적에 찰스와 나는 아주 많이 싸웠어요." 앤은 회상했다. 싸우면 필립 공으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것은 주로 찰스였다. 필립은 찰스에게 사나이답게 매를 맞으라고 말했다.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버지 필립의 끊임없는 주문이었다. 한번은 유모에게 부드러운 질책을 당한 찰스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빠 난 여자들이 너무 지겨워요. 우리 어디로 가서 남자들끼리만 있어요." 어떤 때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필립의 태도는 도가 지나쳐서 호모공포증(아들 찰스가 너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여자처럼 성장하기 때문에 나중에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태도) 에 가까운 것이었다. 영국의 실내 장식가 니콜라스 하슬람은 이렇게 회상했다. "여왕과 필립 공에게 장식이 거의 끝난 포체스터 하우스를 보여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찰스 왕자를 데리고 오셨는데 왕자는 차에다 놔둔 채 두 분만 실내로 들어 오셨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찰스 왕자도 모시고 올까요. 그랬더니 필립 공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요. 찰스는 실내장식 같은 여성적인 것을 알 필요없어요." 필립이 그렇게까지 했건만 여왕의 시종은 어린 찰스에게 여성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찰스를 처음 학교에 보낼 때였는데 찰스는 왕궁에 스며있던 내성적이고 여성적인 분위기에 익숙한 표시를 보이더군요. 그는 상당히 여성적 분위기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필립은 도무지 못마땅했다. "유모, 찬모, 침모, 보모 등 등 온통 여자들뿐이니." 또한 필립은 왕실 직원 중에 호모가 많은 것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필립은 한 남자 시종이 왕궁 내에서 시녀와간 통을 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남자 시종을 해고했다고 하는데 해고할 게 아니라 오히려 상장을 주었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필립은 그런 여성적 분위기를 말끔히 털어내기 위해 찰스가 왕궁 바깥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여왕이 반대하자 필립은 여왕 자신의 보호받은 유년시절을 거론하면서 여왕이 하인 말고는 평민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실을 상기 시켰다. 그래서 찰스의 교육 문제는 왕궁 안팎에서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다. 신문들의 헤드라인은 연속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왕실의 자녀들은 학교에 갈 수가 없는가 학교가 늘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우리는 그토록 어린 나이의 찰스에게서 정상적인 즐거움을 앗아갈 권리가 있는 것인가." 여왕은 마지못해 찰스를 런던에 있는 학교인 힐 하우스에 보내기로 동의했다. 찰스는 검은 벨벳 칼라가 달린 회색 코트를 입고 등교했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의 교복을 입었다. 그 다음 해 필립은 그 자신이 다녔던 예비학교인 체암 스쿨에 찰스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찰스는 그 학교에 입학하면 다른 아홉 명의 아이들과 함께 기숙사를 나눠 쓰고 나무판을 댄 침대 위에서 잠을 자야 했다. 여왕은 이번에도 반대했다. 그러나 필립은 물러서지 않고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부쳤다. 마침내 여왕은 동의했고 찰스는 평민들과 함께 어울려 학교에 다니는 최초의 영국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우리는 찰스가 같은 세대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면서 그들과 어울려 살고 또 유년시절부터 교육적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기를 바랬습니다." 필립은 말했다. 여왕은 체암 스쿨의 교장에게 미래의 군주를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취급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단 이름만은 찰스 왕자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동급생들이 볼 때 그는 그냥 찰스에 불과했고 일부 아이들은 그를 뚱보라고 놀리기도 했다. 생애 첫 두해 동안 비단옷을 입고 리본이 달린 보넷 (모자)만을 쓰고 다니던 어린 왕자는 이제 교장으로부터 잘못된 행동을 하면 대나무 막대기로 맞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찰스는 후일 체암 스쿨에 대해서 이렇게 회상했다. "장난을 치면 때린다는 말을 사전에 들었어요. 그리고 기숙사에서 장난을 치다가 실제로 맞기도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장난을 치지 않았어요. 나는 체벌이 잘 먹혀들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등교 첫날 찰스는 어머니가 작별 선물로 준 찰스의 이니셜이 새겨진 밀크 초콜릿 통을 꼭쥐고 있었다. 그는 다른 애들과 어떻게 나눠먹어야 하는지 몰랐고 또 너무 겁을 먹어서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유모, 보모, 가정교사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수줍음을 잘 타고 친구를 사귀는 일이 익숙치 않은 찰스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가족들과 헤어지는 걸 대단히 가슴 아파했어요." 그의 유모인 마벨 앤더슨이 말했다. "그는 유모에게 매일 편지를 썼어요. 아주 마음이 아팠던가 봐요. 편지를 쓰면서 울기도 하고 유모 너무 보고싶어요 라고 썼어요." 여동생인 앤이 말했다. 찰스는 아버지에게도 애원하듯 편지를 써보냈다. '사랑하는 아빠, 배에 탄 아빠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찰스는 필립 공이 카우스에서 조정했던 세상에서 제일 큰 돛배 그림을 편지에 다 함께 그려서 보냈다. 찰스는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자기 가족들의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는 여섯 살일 때 크리스마스 카드에다 유머러스한 그림을 직접 그려서 아버지에게 보냈다. 머리 자라게 하는 약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큰 통 옆에서 있는 아버지의 그림이었다. 당시 필립은 머리선이 자꾸 뒤로 물러나면서 자신이 대머리가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찰스는 나쁜 말을 쓴다고 해서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아마 일꾼들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죠. 또는 나한테서 얻어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필립이 말했다. 체암 학교에 5년 반 다니는 동안 찰스는 수학에서 낙제를 했고 역사는 간신히 통과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자 찰스는 아빠가 다닌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학교는 냉수 샤워와 매질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소재의 고든 스타운이었다. 필립은 아들을 고든 스타운으로 보내면 영국 공립학교의 뜨뜻미지근한 교육방법으로부터 찰스를 보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모레이셔에 있는 고든 스타운은 런던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서 기자들의 추적으로부터 찰스를 떼어 놓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이튼 학교는 뉴스에 자주 나와 그처럼 뉴스에 자주 나오면 그건 너에게 영향을 미칠거야. 스코틀랜드 북부로 가게 되면 아예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게 되지 너무 멀기 때문에 기자들도 그곳까지 찾아갈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지 또 무슨 일이 있어서 기자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 동안에 충분히 대비해 놓을 수도 있고 말이야." 찰스는 마침내 동의하고 아버지의 학교에 가게 되는데 나중에는 후회했다. "거긴 지옥이었습니다. 수학시험에서 세 번이나 낙제했고요." 그는 독일어 과목도 낙제를 했고 과학 과목도 어려워서 쩔쩔맸다. 매일 밤 슬픈 편지를 써대면서 동급생들이 자기를 못살게 군다고 불평했다. "나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애들이 밤새 슬리퍼를 집어던지고 베개로 나를 때리거나 복도를 뛰어 다녔어요 어떤 애는 나를 세게 때리기도 했습니다." 몇 해 뒤 찰스는 자기를 고든 스타운으로 보낸 아버지를 원망했다. 필립 자신은 유약한 아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고든 스타운의 억센 선생님들 손에 맡기기로 했지만 속으로는 대단히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아무튼 아들을 강인한 남자로 키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의무감이 자식에 대한 애정보다 앞섰던 것이다. 고든 스타운의 첫 학기에 맞추어 찰스를 그 학교에다 데려다 준 필립과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발모랄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말을 친구인 데이비드 버터 부처와 함께 보냈다. 어린 아들을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한 기숙사 학교에 다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자리에서 여왕보다는 필립이 훨씬 더 마음이 무거워 우울해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버터의 부인 머라 버터는 필립을 어릴 적부터 알아온 사람이었는데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필립 공이 응접실로 들어섰는데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더군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안하고 응접실 한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술을 한잔 가득 따르는 거예요. 그런 일은 그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지요. 알고 봤더니 아들이 걱정되서 안절부절못했던 거예요. 여러 해 뒤에 찰스는 왕자를 만났는데 나에게 고든 스타운에 처음 입학했을 당시의 얘기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아버지인 필립 공이 무심한 분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럴리가 있느냐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건 당신이 늘 남의 입장을 잘 생각해 주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당시의 나를 신경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발모랄 성에서 필립 공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진 사건을 말해 주어지요. 그랬더니 찰스는 놀라더군요. 그는 내 말을 믿지 않으려 했어요. 찰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1956년 무렵 그의 아버지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아내인 여왕의 시간과 관심을 놓고 왕실 직원들과 다투는 일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직원들을 구닥다리들이라고 부르면서 질타했고 또 그들에게 자꾸 의지하려는 아내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여왕은 왕궁의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남편의 자문을 구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제안에 대한 그녀의 미적지근한 태도는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자 릴리벳, 이렇게 한번 해 보자구. 그냥 밀어부치면 되는 거야." 그러나 여왕이 꿈쩍도 않자 그는 서서히 왕궁의 관료제도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목요회 소속의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필립의 이런 태도는 왕실 직원들의 고정관념을 더욱 굳혀 주었다. 그들은 그동안 필립이 화장실 유머나 좋아하는 버릇없는 청년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여왕의 개인 비서를 지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에든버러 공은 아주 음탕하고 독일물이 많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또 독일 사람처럼 알몸을 좋아하는 필립의 태도는 마운트배튼 가의 내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운트배튼 경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캐리 그란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그 증거로 들었다. 첫 번째 사진에서 두 남자는 화려한 깃털 목도리로 살짝 몸을 가린 쇼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에서는 등을 돌리고 찍었는데 쇼걸들은 목도리가 없어서 알궁둥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운트배튼은 알궁둥이 쇼걸의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확대하여 여왕의 요트 브리태니아 통행로 벽에다 걸어 놓았다. 필립도 그 사진을 처음 보고 너무 재미있다며 웃음을 터트렸고 남들에게도 그것을 보여 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심지어 국빈이 요트에 탑승했을 때에도 그 사진을 떼내지 않았다. "알궁둥이 그게 예술과 연예에 대한 독일식 사고방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여왕의 개인 비서를 지낸 사람이 말했다. 당시 필립은 영화배우 리처드 토드의 런던 아파트를 함께 나눠 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필립은 토드 이외의 두 명의 유부남과 함께 오후에는 여자 배우들을 접대했다. 필립을 뺀 세 사람은 자기들을 걸 헌팅의 3총사라고 불렀다. 영국 배우 잭 헤들리는 1993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벌써 4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그 당시 일을 발설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해요." 필립은 사우스 스트리트에 있는 자신의 마필 담당관 집도 종종 이용했다. 이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당시 필립 공을 마이크 혹은 왕궁에서 온 파커라고 불렀어요. 전화할 때마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어요. 아무튼 그는 아내와 가정을 일단 벗어나면 영 딴판인 삶을 살고있었어요. 필립은 그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늘 나타났고 또 그때마다 옆에는 시중드는 여자 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관계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어요. 필립은 주로 마이클 파커와 왕실 사진기자인 바론 나훔과 함께 왔었어요. 어느 날 밤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그 디너에 마리아 칼라스를 데리고 왔더군요. 또 어느 날 밤에는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여왕과 결혼한 프린스 베른하르트가 나타나서 우리와 소란스러운 하루 저녁을 보내기도 했어요." 래리 아들러는 이런 증언을 했다. "나도 프린스 베른하르트와 함께 보낸 저녁을 기억합니다. 당시 필립은 여왕의 부군이라는 직함을 아주 따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저녁내내 필립은 베른하르트에게 가벼운 농담을 날렸어요. 난 당신이 정말 부럽습니다. 가고 싶은 데를 마음대로 출입해도 들키지 않고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아무리 만나도 문제없고 난 어딜 가나 경찰과 기자가 쫓아오는 바람에 영 재미가 없단 말이야. 베른하르트는 그날 밤 공항이 문 닫을 시간 전에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자리를 떴어요. 그가 가겠다고 일어서자 필립이 고개 숙이며 그에게 과장된 인사를 하더군요. 여왕 폐하에게 내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는 여왕폐하라는 말을 경멸하듯 뱉어냈어요. 자기처럼 여왕에게 매인 몸인 베른하르트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1956년 무렵 필립은 왕궁의 의전 절차에 대해서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딸은 너무 어리고 아내는 너무 바쁜 상태에서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여행을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게임의 개회식 초청인사로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초대장을 받아놓고 있는터라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이 초청건을 계기로 하여 감비아, 세이셸, 말라야, 뉴기니, 뉴질랜드, 남극, 포그랜드, 갈라파고스 제도, 미국 서부 등 총 4만 마일에 달하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4개월 여행에 마이클 파커도 동행시킬 예정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해군 시절 동료였고 요트 팀에서 선수로 함께 뛰었으며, 같은 팀에서 크리켓을 하기도 했다. 파커는 최근에 아내와 별거중이고 필립도 심정적으로 잠시 별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 두 어른 소년은 화려한 남태평양 여행을 뻑적지근하게 계획하게 된 것이었다. "필립은 어딜 가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성질을 갖고 태어났어요. 다 큰 어른의 성격을 바꾸려든다는 것은 시간 낭비예요. 그러니 남편의 그런 성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필립의 계획을 보고 받은 여왕이 왕실직원에게 말했다. 여왕의 남편은 그 순회여행을 외교사절이라고 둘러댔다. "이 여행이 영연방의 이상에 기여하는 개인적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1956년 10월 15일 비행기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의 케냐 몸바사로 날아가 그곳에서 왕실 전용선인 브리태니아(승무원275명)에 승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의 여행에는 마필 담당관 마이글 파커와 사진기자 바론이 동행한다는 것도 아울러 발표되었다. 그들이 출발하기 몇 주전에 49세의 왕궁 사진기사인 바론은 관절염의 통증을 없애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여 엉덩이 관절 수술을 받았다. 해외 출장을 앞두고 몸의 상태를 좋게 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술받은 지 며칠 뒤에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약혼녀인 여배우 샐리 앤하우스는 제발 수술 받지 말라고 약혼남에게 애원을 했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자 평생 필립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래리 애들러는 말한다. "바론은 아주 멋진 친구였습니다. 기지에 넘치고 상냥하고 또 상당히 용감했었지요. 그는 목요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필립에게 총각 고별 파티(결혼 직전의 남자에게 남자들만의 독신생활 이별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어요. 1947년에는 여왕 결혼식의 공식 사진가로 활약했고 1953년의 대관식에서도 공식 사진가로 일했어요. 그는 만약 자기가 유대인이 아니었더라면 마거릿 공주와 결혼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왕가의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는데 당연히 작위 수여를 기대했지요. 그러나 필립은 그걸 해 주지 않았어요. 마음만 먹었더라면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안해 주더군요. 그 이유는 여왕이 바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틀었기 때문이에요. 필립에게 못된 짓을 시키고 또 필립에게 여자 친구를 조달해 주는 것이 바론의 짓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35세의 미남자였던 에든버러 공(필립)은 여자를 호리는데 남의 도움이 별로 필요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비밀이 보장되는 프라이버시였을 뿐이다. 그리고 해외 순방 여행은 그런 프라이버시를 제공했다. 그 여행은 많은 쑥덕공론을 낳았다. 그의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은 자세한 여행 소식을 알고 싶어하는 전기작가들에게는 대단히 궁금한 문제였고 또 필립에게 나쁜 소문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했던 그의 친구들에게도 역시 민감한 문제였다. 필립의 여자는 그가 방문해야 하는 국가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것이었다. 왕실의 취재하는 작가인 브라이언 호이는 이렇게 말했다. "싱가폴에서는 두 명의 여자 타이피스트가 배 안으로 들여보내졌어요. 그런데 그 여자들이 배안에서는 막상 타이핑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게다가 전혀 타이피스트같이 생기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멜번, 시드니, 싱가폴에 이르는 필립의 순회 방문 도중에 소문들이 끈덕지게 나돌았다. 그러나 여왕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일종의 면책특권이 되었다. 필립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여왕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되었고 1956년 당시만해도 신성불가침이라고 여겨지던 여왕에게 시비를 걸려는 사람은 영국 내에서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공화제를 주장하는 사람도 여왕에 대한 공격만큼은 자제했다. 그러니 필립은 왕궁 바깥에서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를 보장받은 셈이었다. 여행 도중 그는 가정 내에서 2등인 자신의 지위에 대해서 농담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한 젊은 커플이 그에게 소개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을 미스터 앤드 닥터 로빈슨이라고 말했다. 보통은 미스터 앤드 미시즈 로빈슨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필립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스터 로빈슨은 자신의 아내가 철학박사이고 그래서 자기보다더 훌륭하다고 말하자 필립이 곧 이렇게 응답했다. "아 그렇군요. 우리 집안에도 그런 문제가 있어요". 순방 도중 필립과 마필 담당관 마이클 파커는 누가 턱수염을 더 길게 기를 수 있나 시합을 했다. 그들은 사파리 사냥복을 입고 악어 사냥을 했다. 바다를 향해 항해하는 도중에는 브리 태니아 호의 갑판에 앉아 일광욕을 하고 오후에는 이젤을 가져다가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진토닉을 마시며 잡담을 나눴다. 필립은 모든 것이 단정하고 정확한 요트생활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정말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영국의 신문들이 필립의 이러한 해외 순방이 재원 낭비가 아니냐는 은근히 비꼬는 기사를 실었지만 필립은 개의치 않았다. 브리태니아 호가 실론 (현재의 스리랑카)를 지나갈 즈음 필립과 그의 마필 담당관은 세계가 거의 폭발 직전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영국을 떠난 직후 브리태니아 호는 수에즈 운하 문제로 중동에 전쟁이 터질지 모르니까 대비하라는 비상통지를 받았었다. 미국이 아스완 댐건설비 5천 6백만 달러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집트는 1956년 8월 수에즈 운하를 강제로 점령했던 것이다. 이어 미국측 조치에 불만을 품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외국인에게 개방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세르는 이렇게 소리쳤다.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어디 화가 나서 숨막혀 봐라.' 수에즈 운하의 연간 수입이 1억 달러입니다. 그걸 우리 이집트인이 사용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힘, 우리의 근육, 우리의 자금에 의존할 것입니다. 수에즈 운하는 우리 이집트인에 의해 운영될 것입니다." 그 운하를 매일 지나가는 150만 배럴의 원유 중 120만 배럴이 서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세르가 운하를 국유화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로 가는 원유의 주공급원을 막아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영국과 프랑스는 역시 아랍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과 힘을 합쳐 운하를 강제 점령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의 탱크가 시나이 반도를 통과하여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 다음 날 두 나라는 중동에서의 전쟁은 국제선박의 운항을 위협하니까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측은 24시간 이내에 수에즈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이집트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1956년 10월 31일 영국과 프랑스의 포트 사이드에다 5만 명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상황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자 전쟁중에는 병원선으로 사용되는 브리태니아 호는 항해를 중지했다. 필립은 시간마다 뉴스를 보내주는 왕궁과 계속 무전 교신을 했다. 그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측의 군사작전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았다. 유엔에서 영국의 최대 우방인 미국이 침공작전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자 영국의 파운드 환율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휴전제안을 거부했다. 마침내 백악관은 만약 양국이 계속 무력을 사용한다면 미국은 양국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거기다 러시아에서 무력으로 침략자를 분쇄하여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위협을 가해오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더욱 겁을 집어먹었다. 미국의 지원이 없고 전세계가 반대하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이들 3국은 압력에 굴복하여 휴전을 발표했다. 세 나라는 명분 없는 싸움을 걸어서 국제적 망신만 당한 꼴이었다. 당시 여왕은 자신의 대권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고 또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총리이던 앤소니 이든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녀는 총리 말만 믿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든이 처칠 총리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냈으므로 잘하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이든이 총리로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이든은 암페타민(각성제)의 힘으로 하루 다섯 시간만 자면서 간신히 버티었으나 이것이 그의 판단력을 흐려 놓았다. 총리실의 직원이 여왕의 서명을 필요로 하는 군대소집 명령의 긴급 문건을 가지고 왔을 때, 여왕은 경마장에 나가 있었다. 그녀는 경마 시합 중간의 휴식시간에 그 문서에 서명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은 전쟁 동원령이 내려지게 된 것이었다. 국제적 망신으로 끝난 수에즈 사태 이후 여왕은 사직한 이든 총리 대신 해롤드 맥릴란을 후임 총리로 승인했다. 그러나 영국은 국제적 수치의 후유증으로 비틀거렸다. 영국 언론은 이런 망신스러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질책했다. 심지어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필립조차도 이런 중대한 시기에 여왕을 곁에서 보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여왕은 사석에서 남편이 출장중인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가 여기 있지 않아서 잘되었어요. 만약 있었더라면 더욱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브리태니아 호에서 4개월을 보낸 필립은 리스본으로 향했다. 여왕이 포르투갈을 국빈 방문하게 되어 있어서 거기서 합류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에 앞서 필립은 지브롤타에 먼저 들려서 마필 담당관 마이클 파커와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파커는 더 이상 여왕 앞에 나타나서는 안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며칠 전 마이클 파커의 이혼 소식이 새어나왔고 언론은 온통 그 소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파커의 아내인 에일린은 성적 비행을 이유로 그를 고소했고 또 파커의 간통을 근거로 막대한 위자료를 요구했다. 이 소문 때문에 그는 마필 담당관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필립은 이혼이 왕실 근무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화를 냈다. 이든 총리도 두 번씩이나 결혼하고 이혼하지 않았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필립은 마필 담당관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그로서는 왕궁내의 유일한 동지이며 마음에 맞는 친구가 사라지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파커는 사직해야만 되었다. 특히 피터 타운센드의 사건 직후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가슴 아팠지만 엄연한 현실을 직시해야 되었다. 왕실 직원들은 필립이 여왕과 재회하기 전에 마필 담당관을 육지에다 내려 놓으라고 요구했다. 직원들의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에 화가 난 필립은 파커를 지블로터 공항까지 따라 가겠다고 고집했다.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의 전부야." 파커와 함께 탄 관용 리무진에서 내리는 필립은 우울한 얼굴이었다. 필립은 대기 중인 비행기까지 그와 함께 걸어갔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아무 말 없이 파커와 악수를 했다. 파커는 억지로 미소를 지은 다음 뒤돌아보지 않고 트랩을 걸어올라갔다. 그는 런던으로 돌아간 즉시 변호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런던 공항에는 여왕의 공보 담당 비서관인 리처드 콜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필 담당관은 콜빌을 보자 얼굴이 환해 지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기자회견에 도움을 주기 위해 공항까지 나와 줘서 고맙다고 말을 하려했다. 그러나 콜릴은 파커의 말을 제지하더니 도와주려고 공항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반갑네, 파커. 난 지금부터 자네가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온 것뿐일세. 콜빌은 그렇게 말하다니 몸을 돌려 총총히 자리를 떴다. 당시 리스본에서 필립을 기다리고 있던 여왕의 일행은 그리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독일,프랑스, 이탈리아의 언론들이 에든버러 공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잔뜩 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언론들은 '런던의 유명한 버클리 스퀴어 근처에 있는 총각 아파트'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어 '악명 높은 소호지구'에서 매주 만나는 목요회의 디너 파티에 과연 남자 친구들만 오느냐고 의문을 제기 했던 것이다. 1957년 2월 5일 런던의 이브닝 스탠다드는 필립이 윈저 성에다 새 침대를 주문했다는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암시했다. 그 침대는 필립의 요구에 따른 것인데 싱글 베드였다는 것이다. 영국 언론들은 여왕이 윈저 그레이트 파크에서 혼자 승마를 했고 또 의회 개원식 때도 남편없이 혼자서 참석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는 했지만 여왕의 불안한 결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 대신 미국 측 언론들이 그 나쁜 소식을 전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1957년 2월 8일 볼티모어 선이 앞장섰다. 그 신문의 1면에 난 기사는 '영국 왕실의 파경설이 점점 커져가는 중'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그 신문의 런던 특파원인 조운 그레이엄이 써 보낸 기사는 마이클 파커의 사임은 에든버러 공이 한 처녀에게 보통 이상의 흥미를 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도했다. 필립이 친한 친구인 왕실 전속 사진기사 바론 나훔의 아파트에서 그 여자를 지속적으로 만났다는 것이다. 여왕 부부의 난파된 결혼 상태는 평소 영국 신문에서만 정보를 얻는 영국 대중들까지도 알고 있다고 특파원은 보도했다. 또 그 기사는 필립의 4개월 해외 순방의 진짜 이유는 부부간의 갈등을 진정시키기 위한 냉각 기간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여왕의 한 측근에 의하면 자신의 결혼생활에 너무 고민한 나머지 여왕은 정신과 의사를 세 번이나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여왕은 볼티모어 선의 기사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쓸 수 있어요." 여왕은 의상 담당인 보보 맥도날드에게 말했다. 왕실 직원들은 그 기사가 여왕의 이미지를 흐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여왕의 공식 비서관인 리처드 콜릴은 그 기사를 즉각 부인했다. "여왕과 에든버러 공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콜빌의 공식 부인은 그 기사의 요약과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여왕의 가정 문제가 이제 국제적 뉴스가 되었다. 그 다음 날 여왕은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하여 얼굴을 내밀었다. 런던 주재의 유피(UP)기자는 여왕이 불화설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보도했다. 유피는 이렇게 보도했다. "여왕은 불화설을 일축했다. 그녀는 오랜 헤어짐 끝에 포르투갈에서 공작과 다시 만나면 이런 소문이 진화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때가 되면 눈을 가진 사람은 그 기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한 떼의 기자들과 사진사들이 공항에서 여왕 부부가 재회하는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몰려들었다. 필립은 그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실은 언론들을 대단히 괘씸하게 생각했다. 리스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을 보자 그는 평소와는 달리 웃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당신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해 내 아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그따위 거짓말을 그렇게 마구 보도해도 되겠어." 그는 거칠게 내뱉았다. 공항에 5분 늦게 도착한 필립은 한 번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여왕의 전용 비행기 트랩에 올라갔다. 한 시간 뒤 그는 뺨에 희미한 루즈 자욱이 묻어 있는 상태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온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여왕 뒤쪽에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여왕 부부는 브리테니아 호에서 주말을 보내고 물살이 험한 사도 강가에 정박했다. 그건 여왕으로서는 크게 양보한 것이었다. 여왕은 바다를 무서워했고 또 배멀미를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요트 타는 것도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주말에는 바다를 사랑하는 남편을 생각하여 큰맘 먹고 남편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향후 2년간의 스케줄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1959년의 캐나다 방문 이후에 세 번째 아이를 낳겠다는 뜻도 남편에게 밝혔다. 그녀는 또 왕가의 성 문제에 대한 규정도 바꾸어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자신의 자녀들이 마운트배튼- 윈저의 성을 갖도록 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여왕은 당초 결혼하면 아이를 넷 두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셋째 아이가 1960년 생의 앤드루이고 넷째이며 막내인 에드워드가 1964년 생이다. 역주) 나흘간의 포르투갈 국빈 방문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온 왕비는 이례적으로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다. 그녀는 필립에게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프린스라는 직위를 수여한다고 선포함으로써 영연방에 대한 남편의 공로에 보답했다. 또한 앞으로 남편의 직함을 프린스 필립 에든버러 공작으로 한다고 선포했다. 더 이상 그를 왕가의 부속물 정도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정부 문서가 든 빨간 박스의 열람과 주중 총리 면담을 제외하고 남편을 군주제의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뜻도 밝혔다. 또 필립이 왕실 행사에 혼자 참석할 경우 그을 위해 국가의 첫 부분을 제창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필립은 여왕의 이런 파격적 조치에 감격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신의 4개월 해외 순방을 결산하는 보고 연설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 사이의 유대가 더욱 공고해 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런 공고한 유대관계를 다지기 위한 노력도 수에즈 운하 사건으로 빛이 바래고 말했다. 그 사건은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이미지를 너무나도 실추시켜 여왕은 사후 수습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1957년에 포르투갈, 프랑스, 덴마크, 캐나다 등 네번의 국빈 방문을 했다. 1957년 10월 신임 총리 해롤드 맥릴런은 불편해진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여왕에게 미국 방문을 종용했다. "여왕의 한번 방문은 외교관을 백 명 보내는 것보다 나은 성과가 있습니다." 영미 관계를 조속히 회복하고 싶어하는 총리가 말했다. 게다가 맥밀런은 미국에게 핵무기 기술을 이전해 달라고 설득해야 할 형편에 있었다. 여왕은 그 해에만 벌써 네 번의 국빈 방문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여행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총리가 꾀를 내어 미국 신문에 실린 시사만평을 여왕에게 보여 주었다. 그 만화는 영국이 프랑스 및 이스라엘과 짜고서 수에즈를 침공함으로써 미국을 속인 직후에 나온 것이었다. 만화는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있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그리고 있는데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냈던 아이젠하워는 늘 영국을 오랜 믿음직한 우방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영국의 속임수에 깜짝 놀라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이렇게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위대한 영국은 더 이상 위대하지 않아." 그 만화를 본 여왕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버지니아주 제임스 타운, 워싱턴, 뉴욕 (그녀는 이곳에 있는 유엔 본부에서 연설하기로 되었다.)등 3개 도시를 방문하는 5일간의 미국 여행을 결심했다. 역사가 엘리자베스 롱포드의 말을 빌면 여왕은 '깨어진 방주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처럼 영국을 떠나갔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은 콜럼버스의 날에 미국에 도착했다. 2천 명에 달하는 기자와 사진사들이 여왕 부부를 따라다니며 취재를 했다. 그러나 여왕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3대 통신 서비스인 에이피 유피 국제뉴스 서비스 등은 여왕의 국빈 방문에 대해서 40만 자에 달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이에 비해 그 전주에 있었던 소련의 스푸트닉 호 발사 기사는 30만 자였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여왕의 방문이 얼마나 큰 관심사 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당시 에이피 통신의 기자였던 워렌 로저스는 여왕을 취재하고 이렇게 썼다. "처음에 나는 필립에게 동정적이었어요. 아내의 뒷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운명이니 얼마나 안됐냐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게다가 왕당파도 아닌 나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캐나다와 미국에서 13일에 걸쳐 여왕 부부를 취재해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필립은 영 바보 같은 남자였어요. 그리고 여왕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그래서 난 여왕에게 홀딱 반해 버렸습니다. 그처럼 아름답고 그처럼 수줍어하고 그처럼 진지한 분은 난생 처음이었어요. 미국 의회 의사당 바깥의 그 가파르고 층계가 많은 화강암 계단을 내려오던 여왕의 모습을 잊을 수 없군요. 난 저러다가 여왕이 앞으로 고꾸라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 죽을 뻔했지요. 그런데 퀸 스쿨에서는 밑을 내려다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오는 방법을 가르치나 봐요. 어찌나 사뿐히 잘 걸어내려 오던지 거기다가 매력적인 손짓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국빈 방문 동안 워렌 로저스는 많은 기사를 써냈는데 그 중에는 여왕과 이탈리아의 육체파 여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같은 크기의 마춤 코르셋을 입는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러자 주미 영국 대사관의 공보관이 그에게 무전으로 협조 의뢰를 보내왔다. 그런 내용은 제발 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로저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브래지어는 최대한 가슴을 돋보이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지나 못지 않은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인 여왕의 것은 가능한 한 적게 보이려는 것이었어요. 나는 바로 이것이 여왕과 여배우의 차이라고 썼지요. 그런데 영국 공보관이 여왕의 가슴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정식 항의를 해온 겁니다. 미국 기자들이 뻔뻔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한 것이 아니냐고 아주 거만한 목소리로 무전기에다 대고 말했어요. 내가 여왕에게 최소한의 경의도 표시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왕은 결코, 절대로 클리비지 (옷깃 사이로 보이는 유방 사이의 오목한 곳)을 보이지 않습니다. 9. 성의 경계선: 왕실이야기는 동화 속의 이야기 왕가의 결혼식은 군주제를 활성화시킨다. 그 화려한 행렬은 오래된 의식에 새로운 힘을 가져다 준다. 결혼식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서사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공주인 신부가 흰 말이 이끄는 유리마차를 타고 낭만적으로 행진을 하여 영원한 행복의 보금자리로 들어간다는 동화.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동화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군대의 북이 둥둥 울리는 소리, 금속성의 트럼펫이 높게 울리는 소리, 환호하는 군중들의 외침소리 등은 밤하늘을 가르는 한 무리의 유성들처럼 전 국민을 흥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흥분의 열기에 사로잡혀 국민들은 한데 뭉쳐 축하를 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왕실의 결혼식에 맞추어 모자와 가운을 디자인하고 호텔은 손님을 예약하고 식당은 잔치꾼들을 접대하고 관변 단체들은 화려한 행사를 준비하고 관광객들은 돈을 마구 쓰게 되는 것이다. 대관식 다음으로 영국 국민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이 왕가의 결혼식인데 1960년이 되자 윈저 왕가는 그런 결혼식이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대관식 이래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 점차적으로 희미해졌고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존경심의 자리에 언론의 호기심이 들어서게 되었다. 영국 기자들은 왕실에 여전히 복종적이긴 했지만 왕가를 유지하기 위해 납세자들이 얼마나 돈을 내야 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액수를 밝혔다. 1959년 현재 왕실 전용선 브리태니 아 호, 2대의 여왕 전용 비행기, 2대의 프린스 필립 전용 웨스트랜드 헬리콥터, 왕실 전용기차, 4대의 여왕 전용 롤스로이스 등을 유지하는데 1백만 달러가 들었다. 영국 언론들은 60세의 퀸 머더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았지만 근엄하기만 한 여왕, 완고한 왕실 직원, 불안정한 결혼 생활, 자주 자리를 비우는 바꾸어 말하면 외도를 하는 필립 공 등을 물고 늘어졌다. 왕가의 1959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퀸 머더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우리 왕가에 결혼식이 있어야 할 것 같애." 퀸 머더는 왕실 달력을 들여다보며 마거릿 공주의 약혼을 발표할 좋은 날짜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둘째 딸에게 왕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 생각이었다. 퀸 머더는 이런 성대한 행사가 왕실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왕은 그 계획에 반대했다. 너무 화려한 결혼식은 국민의 세금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불러넣어 줄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의 그런 비판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렇지만 어머니인 퀸 머더에게 대놓고 반대를 할 수는 없었다. 퀸 머더는 마거릿 공주의 약혼이 2월로 예정된 여왕의 셋째 아이 탄생 축하 행사와는 겹치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둘째 아이 앤이 태어난지 10년이 지나간 시점에서 여왕의 임신은 왕가의 안정감과 의무감을 더욱 굳건하게 해 주는 계기가되 었다. 의미심장하게도 세 번째 애의 탄생은 왕가의 이름을 윈저에서 마운트배튼-윈저로 바꾸는 시점과도 일치했다. 여왕은 그 전해에 왕가의 성을 마운트배튼-윈저로 바꾸겠다고 제안하면서 셋째 애의 탄생 직전에 그 문제를 확정짓겠다고 말했다. 총리는 그런 제안에 다소간의 우려를 표시했지만 그래도 여왕의 의견을 존중하여 각의에 상정했다. 전통적인 왕당파들은 그 제안에 반대했지만 해롤드 맥릴란 총리는 여왕이 아주 신경쓰는 안건이라고 말하면서 제안을 밀어부쳤다. 여러 달의 난상토론을 거친 끝에 맥밀란 내각은 여왕의 의견에 동의했다. 변호사들은 역사적 연속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왕의 소원을 수용하다보니 이름 사이에 하이븐을 넣어 왕가의 성을 마운트배튼-윈저라고 확정지었다. 중간에 든 하이픈이 다소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새 이름은 여왕과 프린스 필립 그리고 디키 아저씨에게도 만족을 주었다. 1960년 2월 8일 앤드루 왕자의 출산 직전에 여왕폐하는 다음과 같은 조칙을 발표했다. 나와 나의 자녀들은 윈저 가의 성을 그대로 따를 것이나 전하의 지위 또는 왕자와 공주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내 후손들과 시집가는 여자 후손들은 앞으로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전에 바텐베르크였던 마운트배튼 성이 왕가의 성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영국 국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여론에도 불구하고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마운트배튼은 지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조치를 자축하느라고 너무 바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앞으로 왕가의 자녀들이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이름을 갖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1960년 1월 마운트배튼 경은 실내장식가 데이비드 나이팅게일 힉스에게 시집가는 둘째 딸 레이디 파멜라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그는 딸의 결혼식을 왕가의 그것에 버금가게 만들기 위해 유럽의 왕들을 모두 초청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그 결혼식을 준 로열이라고 불렀다. 마운트배튼의 사위인 데이비드 힉스는 장인이 자신의 위상을 대단히 불안하게 생각했다는 말을 했다. "장인 어른의 문제점은 많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는 겁니다. 그분은 왕족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족의 피를 물려받았으면서도 왕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독특한 입장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자신의 위상을 대단히 불안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처음에 마운트배튼은 자신의 딸이 사회적 지위가 한참 떨어지는 평민과 결혼하겠다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자존심으로는 둘째 딸도 첫딸 못지 않은 좋은 혼처에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1946년 그는 귀여워하던 첫딸 패트리셔를 브래번 7세 백작인 존 그내치불과 결혼시켰다. 마운트배튼은 그를 흔쾌히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돈없는 실내장식가인 둘째 사위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운트배튼의 전 비서인 존 바라트는 이렇게 회상했다. "데이비드의 별볼일없는 작업과 호모 경향은 마운트배튼 경을 심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파멜라가 이미 서른 살이 다된 노처녀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 이전에 청혼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분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고치셨지요." 영국 작가인 그웬 로빈스는 데이비드와 파멜라의 만남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데이비드는 자기가 1959년에 거의 파산 상태였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 파산 상태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돈 많은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뿐이라고 한 친구가 조언해 주었대요. 그러면서 그 친구는 좋은 상속녀가 있다면서 데이비드를 파티에 초청했어요. 그날 밤 어머니와 같이 살던 데이비드는 어머니에게 영화 구경을 시켜 주기로 되어 있었대요. 그래서 어머니를 잠시 차안에 놔두고 상속녀를 헌팅하기 위해 헐레벌떡 파티장으로 달려갔답니다. 그때 등장한 여자가 레이디 파멜라 마운트배튼이었어요. 데이비드는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그 순간 가장 시원찮은 옷거리 아니 가장 시원찮은 지갑 속에 든 5백만 파운드가 문안으로 걸어들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곧 그녀에게 달려가 춤추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면 애를 몇이나 낳기를 원하느냐고 속삭였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가니까 그전에 단 한 번도 청혼을 받은 적이 없고 잘못하면 아예 결혼을 못할지도 모르는 파멜라는 기분이 황홀해졌지요. 그래서 그날 밤 파멜라는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는군요. (이건 그녀가 나중에 해 준 얘기입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기뻐하면서도 의아해 하며 이렇게 묻더랍니다. '얘야 그건 잘됐구나. 하지만 실내장식이란 게 뭐 하는 거니.' 여러 세대에 걸친 세습재산을 물려받아 평생 단 한 번도 가구라고는 사본 일이 없는 대부호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이었으니 그렇게 물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여왕의 왕실 직원들과 의논한 끝에 마운트배튼 경은 두 번째 딸의 결혼식 날짜를 1960년 1월 13일로 잡았다. 그날이 왕실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를 존 바라트는 이렇게 회상했다. "눈이 내리고 겨울바람이 부는데도 그분께서는 1월 결혼식을 고집했지요. 어떻게든 왕실 사람들을 결혼식에 참석시키고 싶어서였지요. 아무튼 여왕을 빼놓고 왕실 사람들은 대부분 참석했습니다. 당시 여왕은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샌드링엄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었어요." 앞에서 마운트배튼 경의 둘째 사위가 호모 경향이 있다고 잠깐 언급했는데 1895년 영국의 유명한 남색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호모를 가리켜 그 이름을 감히 말하지 못하는 사랑이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 세기말이던 그 당시 오스카 와일드처럼 결혼했으면서도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타락한 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남색은 투옥으로 처벌이 가능한 성적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65년이 흐른 1960년 호모를 경멸하는 그런 생각은 여전히 영국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마거릿 공주의 약혼식을 발표한 직후 그 호모가 또다시 세간의 화제로 등장하게 된다. 그 소문은 퀸 머더가 마거릿의 약혼과 뒤이어 5월로 예정된 결혼을 발표하면서 곧 시작되었다. 피터 타운센드를 포기한 다음 5년 동안 쓸데없는 파티나 하면서 세월을 죽이던 29세의 마거릿 공주가 마침내 행복을 찾게 되었다며 보통 사람들은 모두 다 좋아했다. 왕실 직원은 공주와 평민의 결혼이 왕족과 일반 가정 사이의 벽을 허물어 왕가를 보다 국민들에게 친숙하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왕실 측근들은 그 발표가 영국 제도권을 뒷받침하는 지각 구조에 커다란 소음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마거릿의 결혼 대상자인 보헤미아 풍의 사진기사는 평민인데다 그 부모가 이혼을 했고 또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의 성분을 중시하는 귀족들이 볼 때 그 사진기사는 왕의 딸이며 여왕의 동생이고 왕위 계승권 4위인 공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배필이었다. 극작가 노엘 가워드는 1960년 2월 28일자의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마거릿 공주는 토니 암스트롱 존스와 약혼했다고 발표했다. 토니는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이다. 이 결혼이 적절한 것인지 어쩐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노엘 카워드는 마거릿 공주의 사촌인 켄트 공작부인과 켄트 공작부인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공주는 그 약혼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그 약혼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 약혼 얘기를 꺼내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로널드 암스트롱 존스도 아들이 그런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난 이런 결혼식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결혼은 잘풀리지 않을 겁니다. 토니는 너무 자유분방한 아이라서 일체의 규율을 견디지 못해요. 그러니 죽어도 2등 노릇은 못할 거예요. 그 아이는 마누라보다 두 걸음 뒤에 서서 걸어야 할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날이 걱정되는데요." 토니의 친한 친구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학교 동창생이며 전 잡지 편집자였던 조슬린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내용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처럼 운대가 맞지 않는 일은 다시 없을거야." 타임스의 사설도 같은 논조를 폈다. "왕위에 그처럼 근접해 있는 사람으로서 국제적 귀족 혹은 영국 귀족과 결혼하지 않은 최근의 사례는 별로 없다." 그 결혼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리라 예상되었던 진보적 간행물인 뉴스 테이츠먼 조차도 그 결혼을 선뜻 납득하지 못했다. 토니 암스트롱 존스 같은 평민이 왕가의 일원이 될 수 있는가. 이 잡지는 몇 년 전만 해도 생각해 볼 수 없는 관대한 마음이 이 결혼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왕가에서 자기 직계 가족의 배우자로 평민을 맞아들인 것은 5백년 만에 처음이었다. 여왕은 암스트롱 존스 씨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상황을 호전시켜 보려했으나 그는 귀족작위를 거부했다. 그러나 1년 뒤 마거릿 공주가 임신 했을때 자식들에게 귀족 작위를 물려주고 싶어서 그 작위 제의를 받아들여 스노든 백작 (또는 니만스 린리 자작)이 되었다. 만체스터 가디언은 정직한 평민 암스트롱 존스 씨에게 귀족 작위를 억지로 떠맡긴 그 행위에 약간의 실망을 표시했다. 피플은 급조된 귀족 작위 때문에 그가 그나마 남아있던 매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여왕 동생의 남편인 토니 암스트롱 존스는 영국 국민의 마음에 커다란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아무런 타이틀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우리와 똑같은 평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생득권이었던 가장 귀중한 자산을 잃어버렸다." 마거릿 공주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공주가 홧김에 결혼한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1959년 10월 9일 피터 타운센드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담배 재벌의 상속녀인 벨기에 여자와 결혼한다고 알려왔던 것이다. 그는 망명지인 브라셀에서 스무 살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났다. 공주는 그 뉴스를 대단치 않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는 부자일지 모르지만 왕족은 아니야." 그 편지를 받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공주는 암스트롱 존스가 청혼하도록 유도했다. 마거릿은 여러 해 뒤 그 사실을 시인했다. "그건 사실이에요. 나는 그날 아침에 피터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에 토니와 결혼할 결심을 했어요. 하지만 우연의 일치는 아니에요. 나는 결혼할 마음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했느냐고요. 그건 토니가 내게 청혼했기 때문이에요. 아무튼 그는 그 당시에는 정말 자상한 남자였어요. 내 일을 잘 이해해 주었고 또 내가 제대로 일을 하도록 도와 주었어요. 어느 의미에서 본다면 그는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어요." 마거릿은 토니의 청혼을 몇 달 동안 비밀로 지켰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예술적인 우스꽝스러운 연극적인 사람으로 보도되었던 앤토니 암스트롱 존스(32세)는 법률가의 외아들이었다. 토니의 아버지는 오래 전에 이혼을 했고 그후 여배우와 재혼을 했으나 그 여자와도 이혼을 했다. 아들의 약혼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아버지 로널드 암스트롱 존스(63세)는 30세 연하의 항공사 스튜어디스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그 스튜어디스와 결혼함으로써 새 어머니 보다 겨우 한 살 적은 아들의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했다. 그 몇 해 전 토니의 생모는 아일랜드 귀족과 결혼하여 현재는 로스 백작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토니는 귀족의 말석에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이튼 학교에 다녔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다가 1년 뒤 낙제하면서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는 열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는데 입원 후 여러 달 동안 다리 죄임쇠를 차고 다닌끝에 거의 정상을 회복했다. 또 특수 스키 장비를 만들어 다리 근육을 더욱 튼튼하게 강화했다. 비록 정상인과 거의 다름없이 걸었지만 약간 저는 것을 감추기 위해 뛰는 듯한 걸음걸이를 개발했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그는 장애인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동정을 보냈다. 여러 해 뒤 그는 각종 장애 증상의 의학적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돈을 모금하는 자선 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또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손쉽게 이동하게 해 주는 모터가 달린 고정 휠체어를 발명하기도 했다. 토니의 삼촌 올리버 메셀은 연극 디자이너였는데 세실 비튼과 노엘 카워드와 가까운 친구였다. 이들이 작고한 왕궁 사진기사 바론 나훔에게 토니를 조수로 추천했다. 바론 밑에서 몇 달 일한 토니는 곧바로 독립하여 런던 핌리코 섹션에다 사진 스튜디오를 차렸다. 매력있고 야망있는 토니는 왕실의 일을 열심히 맡아다 했다. 그는 처음에는 젊은 켄트 공작의 사진을 찍었고 그 다음에는 여왕 마필 담당관의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여왕으로부터 버킹엄 궁에 와서 찰스 왕자와 앤 공주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몇 달 뒤 토니는 레이디 엘리자베스 캐번 디시의 집에서 마거릿 공주를 만났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공주는 그날 저녁따라 아주 상냥하게 나왔다. 하지만 토니에게 자기를 부를 때 마담이라는 호칭을 쓰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그런 요구를 했으며 그게 왕족인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마거릿 공주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은 한 친한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아침 식사 전에 남의 무릎 꺾어지는 소리를 세번 쯤은 들어야 -커트시를 세 번쯤은 받아야 -직성이 풀리죠.) 토니는 자신이 의뢰받은 보그 잡지의 패션 사진을 어떻게 만들어야 좋겠느냐고 물어서 공주의 환심을 샀다. 그는 나중에 그녀의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했고 그녀는 승락했다. 비록 그들은 전혀 다른 생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공주와 사진사는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똑똑하고 재치 넘치고 독설가인 그들은 말하자면 작은 반항아들이었다. 성냥이 필요 없는 골초라는 점 포르노 영화를 즐겨본다는 점도 닮았다. 키가 간신히 5피트 7인치인 사진기자는 낮은 계급의 신분을 탈출하고 싶었고 평평한 신발을 신어도 키가 5피트나 되는 공주는 사회의 계급구분을 타파하고 싶어해도 그들은 퀸 머더의 흥미어린 시선을 받으며 파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스카프와 선글래스로 변장한 공주는 클래런스 하우스를 몰래 빠져나와 기사 딸린 차를 타고 핌리코에 있는 사진사의 아파트로 갔다. 그는 온통 자주빛으로 장식된 자신의 침실에서 그녀를 대접했다. 쇼 비즈니스의 화려함을 좋아하는 그들은 당시의 유명 연예계 인사인 믹 재거, 데이비드 프로스트, 피터 셀러스 그리고 비틀즈 등과 어울렸다. 당시 이들을 잘 알고있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톤과 페트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별명)는 이상하고 어둡고 기괴한 터부나 페티시 (맹목적 숭배물)을 즐겨 탐구했어요." 이 친구는 그들이 서로 옷을 바꿔 입고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토니는 소년 시절 여자 옷을 가끔 입었다. 어느 날 저녁 영화배우인 새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시녀 복장을 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저녁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여자 복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 마거릿과 약혼을 하기 이태 전에는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분야에 진출하기도 했다. 연애시절 토니는 마거릿처럼 화장을 하고 마거릿의 세련된 파티 드레스를 입고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쓴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 마거릿 공주의 남자 하인은 깜짝 놀랐다. 그는 후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너무 놀라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마거릿과 그 일행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잡고 깔깔거리며 웃더군요. 공주의 밤색 주름 스커트 밑에서 토니의 호리호리한 맨살 다리가 나와 있었어요. 토니의 발에는 레이스를 매지 않은 공주의 부드러운 샌들이 신겨져 있었고요." 그 하인의 이름은 데이비드 존 페인인데 그는 후일이 옷 바꿔입기 사건에 대하여 책을 써냈다. 이 책을 본 퀸 머더는 너무 화가 나서 영국내 출판을 금지시켜 달라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녀는 하인 따위에 의해 왕가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자신이 안토니 암스트롱 존스로부터 성적 추파를 받았다는 그 하인의 얘기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영국 법원은 그 책의 영국내 출판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책은 파리에서 출판되어 프랑스 디망쉬의 독자들은 마거릿의 연애기간 동안의 세세한 내용을 환히 알게 되었다. 마거릿 공주의 결혼 전에 사직한 그 하인은 자신도 당황스럽게 여겼던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했다. 그는 공주가 런던으로 가져갈 레코드 판을 고르는 것을 돕기 위해 따라 갔다가 그곳의 공주 전용 응접실로 막 나오는 참이었다. 공주는 마루바닥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나는 응접실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막 문을 나서는데 토니 암스트롱 존스가 방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이렇게 소리 쳤습니다. "존 자네를 온 군데 다 찾아다녔구만. 자 앉지 달링." 나는 심장이 딱 멈춰섰습니다. 토니는 소파 뒤의 마루바닥에 앉아 있는 공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다정한 어조로 말한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공주가 갑자기 일어서면서 스커트 소리를 내자 입을 꽉 다물었습니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를 노려보았습니다. "존. 자 앉지, 달링 그게 무슨 뜻이죠. 도대체 누구한테 말하는 거였어요." 토니는 얼음장같이 싸늘한 그 말에 아주 당황했습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어요. "오, 마담. 난 몰랐어요. 당신을 보지 못했어요. 난 존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토니가 말했어요. "그런데 달링이라니 그건 무슨 뜻이죠." 마거릿 공주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어요. "마담 그런 표현은 연극계에서는 늘상 쓰는 겁니다." 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어요. 마거릿은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돌아다보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자녀는 물러가도 좋아.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토니를 쳐다보며 공주의 응접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녀는 계속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어요. 나는 방에서 문을 닫으면서 온몸이 땀에 젖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마거릿 공주는 약혼자가 남자 하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냈으면서도 안토니 암스트롱 존스가 즐겨 연출하는 옷 바꿔입기 게임은 재미있어 했다. 그녀도 그 게임에 동참하여 넥타이에 신사복을 입고 남자 역할을 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서로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아이 복장의 약혼자 사진을 찍었고 그는 시가를 들고 턱시도를 입은 공주의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남녀의 성 구분이 허물어지는 60년대의 서막을 알리는 행위를 했다. 그의 어머니가 백작부인이었기 때문에 안토니 암스트롱 존스는 특권층이라고 인식되었으나 그래도 정통 귀족들이 볼 때에는 신분이 훨씬 위인 사람과 결혼하는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예술가적 기질에다 이런 파격적인 사회적 약진이 겹쳐지자 언론에서 그의 벼락 출세를 빈정거리기도 했다. 게다가 언론은 토니의 성적 취향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토니의 남자친구 중에는 확인된 총각들이 많다고 은근히 내비쳤다. '확인된 총각'이라는 말은 언론계에서 호모를 가리키는 완곡어법이었다. 영국 소설가인 우나 메어리 파커는 이렇게 말했다. "토니는 자기가 아더 (남자이름)인지 마사(여자 이름)인지 잘 몰랐어요. 우리는 아담과 이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아담과 스티브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담과 스티브는 아담과 이브에 대비되어 동성애를 가리킨다. 역주)" 토니의 케임브리지 동창생도 그 문제에 대해 증언했다. "그렇게 까지 철저한 호모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호모라기보다는 양성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어느 한 쪽으로 자신의 성 생활을 제한하지 않았어요." 결혼식 몇 주전에 토니는 자신의 결혼식 들러리 이름을 발표했다. 그 소식을 접한 언론은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 들러리는 유부남이었지만 8년전 동성연애자로 판정받은 남자였다는 것이었다. 한 친구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 소식을 접한 필립 공은 화를 벌컥 냈습니다. 필립 공은 토니가 자주색 벨벳 케이프 (짧은 망토)를 즐겨입고 수염을 기른 긴 머리의 남자친구들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보고 토니가 약간 호모 기질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토니가 제레미 프라이를 들러리 라고 발표하자 참질 못하고 폭발했습니다. 토니는 어쩐지 몰라도 프라이는 진짜 호모라는 게 잘 알려져 있었거든요." 온 사방에서 압력을 받은 토니는 한 발 물러섰고 왕궁은 프라이가 갑자기 황달에 걸려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며칠 뒤 토니는 제레미 소프를 들러리로 골랐다. 그러나 런던 경시청의 형사들은 소프도 동성애 혐의가 있으므로 적절한 대안이 아니라고 왕궁에다 보고했다. 왕실 직원들은 토니에게 소프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래서 토니는 또 다른 들러리를 골라야 했다. 왕가의 결혼식으로 텔레비전 생중계가 되는 최초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왕실의 이미지는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했다. 그것이 왕실 직원들의 주장이었다. 왕실을 스캔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임무인 그들은 이런 논리를 폈다. 호모를 왕실 결혼식에 참가하도록 내버려두면 국민들이 '아. 여왕이 저런 타락한 사람들도 묵인해 주는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불쌍한 토니는 세 번째로 닥터 로저 질리어트를 골랐다. 그는 여왕 담당 산부인과 의사의 아들로서 토니와는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는 잡지 편집자인 페넬로페 질리어트와 결혼했는데 토니는 그녀가 일하는 잡지사에 가끔 사진을 찍어준 적이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토니와 마거릿은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신부의 다이아몬드 관에서부터 왕가의 사람들을 수송하는 다섯 대의 황금마차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결혼식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부의 결혼식장은 모든 것이 파베르제(러시아의 금세공가)의 박스보다 더 으리으리한 황금 색깔로 번쩍거렸다. 여왕의 황금의자, 대주교의 주교관, 황금의 제단 등 모든 것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면서 엄청난 부를 자랑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연도에는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나와 공주를 축하했다. 그녀의 결혼식은 왕가가 지금껏 연출한 결혼식 중 가장 장대하고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3백만 명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그 결혼식 장면을 지켜 보았고 학생들은 그날 하루 학교에 가지 않았다. 마거릿은 난생 처음 금줄 장식을 두른 1백 명의 기수들로 둘러싸인 유리마차를 탔다.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던 관중들은 소리 질렀다. "마거릿 어서 나와라. 마거릿 마거릿." 공주의 연금은 의회에 의해 1만 8천 달러에서 4만 5천 달러로 인상되었다. 브리태니아 호를 타고 카리브 해에서 44일간의 허니문을 보낸 다음 (여행 경비는 하루 3만 달러) 그녀와 새 신랑은 18만 달러의 국민 세금을 들여 보수한 방 10개 짜리 켄징턴 궁으로 돌아왔다. 영국 군인들은 마거릿 공주의 결혼 축의금으로 봉급의 일부를 공제당했다. 결혼식 비용만 7만 8천 달러가 들었는데 그런 많은 비용은 여왕을 불안하게 했다. 퀸 머더는 어깨를 한번 들썩하면서 여왕에게 큰맘 먹으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왕실에 기대하는 화려함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비용은 투자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결혼식에 참석한 데일리 메일의 이브 페릭 기자는 이렇게 보도했다. "그처럼 아름다운 결혼식은 또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전에도 여러 번 소문난 결혼식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다. 가령 엘리자베스 여왕이 필립 공과 결혼할 때에도 참석했고 모나코의 레이이에 공이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와 결혼하는 장면도 보았다. 어제의 마거릿 공주의 결혼식은 뭐라고 할까? 이 두 세기의 결혼식 중 좋은 장면만을 종합한 것이었다. 그건 정말 왕실의 이름에 걸맞는 웅장하고 화려한 행사였다." 극작가 노엘 카워드는 자신의 일기에다 이렇게 적었다. "여왕 혼자만이 불만인 것 같았다. 마거릿 공주는 동화에 나오는 공주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를 결혼식 제단으로 인도해 가는 필립 공은 쾌활하고 상냥했으며 또 자신이 흘러 넘쳤다. 음악도 장엄했고 팡파레도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런 화려하고 웅장하고 신성한 행사를 영국처럼 절묘하게 치러내는 국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매력적이고 낭만적이고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그 행사는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거행되었다. 아직도 영국적이라는 이미지는 이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노엘 카워드는 그가 본 그 화려한 결혼식이 실은 파국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확인할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혼식을 치른지 몇 해 가지 않아 윈저 왕가는 지금껏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인 이혼의 국면으로 내몰리게 된다. 10.허울을 위한 퍼포먼스: 살아남기 위한 여왕의 변신 비서가 영국 대사관의 전보를 갖고 들어 왔을 때 퍼스트 레이디는 백악관의 침실에 앉아 있었다. 여러 주 동안 외교 전보가 런던과 워싱톤 사이를 오고 갔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를 위하여 1961년 6월 5일 버킹엄 궁에서 개최될 엘리자베스 여왕의 디너 파티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퍼스트 레이디는 영국 대사관의 전보를 받아들고 화를 냈다. "이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인데. 내가 윈저 공 부처를 초대한 것도 아니잖아." 그녀가 비서에게 말했다. 퍼스트 레이디는 자신의 언니 리 래드지윌과 형부인 폴란드 왕자 스타니 슬라스 라드지윌을 그 파티에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표시했었다. 그러나 백악관 측이 버킹엄 궁에 초청자 명단을 보내자 여왕 자신이 래드지윌 부처를 명단에서 삭제해 버렸다. 케네디 대통령 부처는 파리를 국빈 방문한 다음 대자인 크리스티나 래드지윌의 세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을 며칠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케네디 부처는 런던 체재시 왕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버킹엄 플레이스에 있는 래드지윌의 집에서 머무를 계획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런던을 방문하게 되면 영국 총리를 비공식적으로 만나고 싶어했다. 비록 케네디의 방문이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영국 정부는 여왕에게 대통령 부처를 접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고 거기에 동의했다. 미국 대통령이 영국 여왕과 버킹엄 궁에서 만찬을 함께 하는 것은 1918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50명 규모의 디너 파티가 왕궁의 국빈 접대 식당에 준비될 예정이었다. 버킹엄 궁은 케네디 부처의 초대 인사 명단을 알려달라고 백악관에 요구해 왔다. 퍼스트 레이디는 마거릿 공주를 만나고 싶다고 했고 또 런던에서 머무를 집의 주인인 래드지윌 부처를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대통령은 자신이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만났던 마리나 공주 켄트 공작부인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왕은 이 사람들을 모두 거부했다. 여왕의 거부에 당황한 퍼스트 레이디는 워싱톤 주재 영국 대사관에다 전화를 걸어서 케네디 가문의 친한 친구인 주미 영국 대사 데이비드 옴스비 고어와 통화를 했다. 대사는 이혼에 대해서 엄격한 왕궁의 정책을 설명해 주었다. 그것이 비공식적 방문이기 때문에 이혼 경력 -부인은 한 번, 남편은 두 번 -이 있는 래드지윌 부처는 왕궁에 초대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만약 공식 방문이고 래드지윌 부처가 대통령을 수행하는 공식 집단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초청되었을 것이라고 추가설명도 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 언니이고 또 런던에 가면 우리가 머무를 집의 주인이기도 한데." 재키는 영국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 미국 의전장인 앤지어 비들 듀그를 통해 주영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브루스에게 한번 말해 보라고 조언했다. "오. 앤지, 나 좀 도와줘요." 재키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앤지어 듀크는 퍼스트 레이디에게 주영 대사를 한번 접촉해 보겠노라고 말했다. 재키는 이어 백악관의 오발 오피스(대통령 집무실)에다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취한 조치를 설명했다. 대통령은 화를 벌컥 내며 괜한 일을 했다고 재키를 나무랐다. 그는 런던의 브루스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런 일로 국제적 소란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브루스 대사는 대통령과의 통화를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싶어했다. 초청자 명단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여왕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태도였다." 여왕 폐하는 마침내 마음이 누그러져서 래드지윌 부처를 초청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여왕은 또 왕실 행사 통보지에 그들의 이름을 '프린스' '프린세스'라고 기재하는 것도 허용했다. 그것은 여왕으로서는 커다란 양보였다. 왜냐하면 여왕은 래드지윌에게 영국 내에서 폴란드 작위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 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브루스 대사의 부인인 에반젤린 브루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래드지윌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혼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해요. 내 남편도 이혼 경력이 있지만 여왕은 남편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스태시 래드지윌은 어쩐 일인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의 프린스 지위도 인정해 주지 않아서 늘 그들을 미스터, 미시즈라고 불렀고 그건 래드지윌 부처를 화나게 했어요." 재키는 나중에 전기작가인 고어 바이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여왕은 복수를 한 셈이에요. 마거릿 공주도 마라나 공주도 초청되지 않았으니까요. 여왕은 아주 위압적인 태도였어요. 나를 미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필립은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불안해 하는 것 같았어요. 그 분들에게는 다정한 느낌을 갖기가 좀 어렵더군요." 여왕은 정말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퍼스트 레이디의 화려한 파리 방문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프랑스 신문들은 '놀라운' '매력적인'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번갈아 써가면서 그녀를 극찬했다. 파리 시민들은 미국기를 들고 나와 연도를 가득 메우고서 목이 터져라 '자키' '자키'라고 외쳐댔다. (자키는 재키의 프랑스식 발음. 역주) 파리 시장은 그녀에게 4천 달러짜리 시계를 선물하면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4년 전 그 도시를 방문한 이래 가장 인상적인 방문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참모인 데이브 파워스는 언론에다 이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저리 가라였습니다. 설혹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성원은 받지 못했을 겁니다." 심지어 케네디 대통령도 자신의 아내가 그토록 커다란 열광과 흥분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통령은 프랑스 기자회견에서 자기 자신의 소개하면서 재클린 케네디의 파리 방문을 수행한 남자라고 말했다. 케네디 부처가 런던에 도착할 무렵 재키 열풍이 영국 국민들을 사로 잡았다. 그래서 그들도 연도에 늘어서서 여왕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재키를 환영했다. 한 신문은 퍼스트 레이디를 일본의 여왕이라고 표현했다. 한 신문은 퍼스트 레이디를 미국의 여왕이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신문은 자유의 여신상에다 재키의 얼굴을 그려 넣은 만화를 게재했다. 당시의 영국 총리의 해롤드 맥릴란은 회고록에다 이렇게 썼다. "젊은 대통령, 매력적인 아내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쾌활한 분위기 등이 일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보통 외국 정치가의 방문은 별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지 못하는데 케네디 부처는 달랐다. 그들은 정치적인 수준이나 개인적인 수준에서 단연 뉴스거리였다." 총리는 케네디 부처를 접대하게 된 여왕 폐하의 불쾌감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는 여왕은 헐리우드와 그 영화산업을 경멸했다. 영화가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여왕의 어머니, 여동생, 남편, 디키 아저씨와는 달리 여왕은 헐리우드나 영화배우들에 대해서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영화배우들과 어울리는 것을 경멸스럽게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의 레이니어 공과의 결혼 (1956)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했다. 여왕이 되어서도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일체 거부했다. 여왕이 텔레비전으로 최초의 크리스마스 연설을 할 때 프로듀서는 여왕에게 조금 활기찬 모습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여왕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영화배우가 아니에요." 마찬가지 이유로 여왕은 밍크 코트를 입는 것도 거부했다. 그녀는 시종인 랄브 화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절대 모피 코트는 입을 수 없어 밍크 코트를 입으면 영화배우같이 보이잖아." 그녀는 자신이 근엄한 이미지만을 주장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자기가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한 모임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엄마가 여기 있었더라면 사람들이 좀더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을 텐데." 여왕의 남편도 왕실이 영화배우의 수준으로 내려가서는 안된다는 여왕의 신념에 동조했다. 여왕과 마찬가지로 필립도 사인을 해 주는 것을 거부했고 또 그에게 연기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가 영국 영화 아카데미에 나가 연설을 할 때 영화배우 톰벨이 당돌한 주문을 했다. "좀더 활기차게 해 주세요. 우리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십시오." 그 주문에 에든버러 공은 화를 냈다. "재미있는 얘기를 원한다면 나 대신 전문 코메디언을 연설자로 선택하기 바랍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립이나 여왕은 영국 대중들이 황금마차에 앉아 초연한 손짓을 보내는 군주보다는 인간적이고 즉흥적인 반응을 해 오는 군주를 원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왕은 영연방에 대한 의무를 대단히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맥릴란 총리는 설명했다. "사실 여왕의 그런 입장은 이해가 됩니다. 영국 왕실의 권한이 너무나 축소되어 그거나마 지키지 않으면 여왕의 지위가 영화배우나 다를바 없이 될 테니까요. 여왕은 자신의 여자 혹은 영화배우 또는 마스코트로 대하려는 태도를 아주 싫어했어요." 케네디 부처가 방문하자 여왕은 헐리우드적 화려함 그 자체와 대면해야만 되었다. 여왕은 동생에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후덕한 부인 매미를 접대하는 것이 훨씬 부담 없다고 털어놓았다. 평소에는 침착한 영국 국민들을 열광적인 영화 팬처럼 만들어 버린 매력적인 재키를 대하는 것은 여왕으로서는 그만큼 부담이었던 것이다. 영국 국민들은 미국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를 보기 위해 여러 시간 동안 런던의 거리를 가득 메우며 줄을 서서 기다렸다. 여왕과 퍼스트 레이디는 이처럼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남편이 카리스마적인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매력적이고 기지에 넘치는 이 두 남자는 반짝거리는 금속물질에 이끌리는 물고기처럼 예쁜 여배우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렇지만 두 남자는 충분히 현실적이어서 낭만주의에 완전히 빠져 버리지는 않았고 또 결혼을 잘해야 하는 사회적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습지에서 시작하여 백악관까지 올라간 케네디 가문은 여왕에게 그리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여왕은 부모님이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에 대해서 갖고 있던 반감을 아직도 기억했다. 당시 주영 미국 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는 미국이 영국 편을 들어 2차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케네디 대사를 소환해야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여왕은 케네디 대사의 아들에 대해 그리 호감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다. 196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때 여왕은 케네디의 경쟁자였던 리처드 닉슨 부통령을 지지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자신의 소신을 밝힐 수 있는 필립 공은 누구를 지지하는지 분명히 했다. 영국 박람회를 개장하기 위해 뉴욕 시를 방문한 필립 공은 대통령 중심제의 정치를 잘 아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닉슨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여왕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박람회에 여왕과 함께 공동 후원자로 참석한 사실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미국과 영국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했다. 이어 필립 공은 닉슨 부통령과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와 함께 박람회장을 한 바뀌 돈 다음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사진기자들이 사진을 더 찍자고 요구하자 필립은 닉슨 부통령하고 같이 찍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케네디가 선거에서 당선되자 여왕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케네디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케네디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를 버킹엄 궁에서 접대하자는 총리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재클린 케네디는 나중에 고어 바이덜에게 여왕의 디너 파티에 대해서 언급했다. 재키는 필립 공과 마운트배튼 경 사이에 앉았다. 디너 전의 리셉션에서 재키는 여왕에게 말을 걸었으나 여왕은 냉담하고 초연한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 "여왕은 딱 한 번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내가 캐나다 국빈 방문을 했을 때 오랜 시간 서서 사열을 받아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매일 눈물 젖은 얼굴로 잭(케네디 대통령의 애칭)을 대해야 되었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여왕은 음모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시간이 좀 지나면 요령이 생겨서 덜 힘들게 돼요.' 그리고 좀 있다가 '아 당신은 그림을 좋아하죠.'라고 말하면서 나를 긴 복도 아래로 인도하더군요. 그리고 반 다이크 그림 앞에서 '저건 참 좋은 말이죠.'라고 말했어요." 여왕과 퍼스트 레이디는 말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신화적 인물이 되었고 당대의 가장 유명한 여인이 되었다. 어느 의미에서 보면 두 사람 다 제왕이었다. 한 사람은 현실의 제왕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환상 속의 제왕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정치 문제였다. 퍼스트 레이디는 정치를 싫어했고 그래서 거의 정치혐오적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달랐다. 여왕의 전기작가인 롤랜드 플래미니는 증언한다. "여왕은 정치에 조연한 분인 것처럼 되어 있어요. 하지만 여왕이 정치에 관여하고 또 영연방에 관한 문제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비록 여왕의 정치 개입은 화제의 도마 위에 오르지는 않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1962년 3월 여왕은 아르헨티나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비밀 계획을 수립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의 헌법상 임무가 총리와 대주교가 요청하는 것에 그대로 따르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국가 정책에 나름대로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다. 여왕은 남편으로 하여금 11개 남미 국가의 영국 공동체를 방문하게 했다. 표면상의 방문 목적은 영국의 산업을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립 공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진정한 목적은 왕실에 우호적인 현직 대통령 아르투로 프론디지의 재집권을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당시 프론디지는 추방된 독재자 후안 페론의 지지자들에 의해서 대통령직에서 축출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한 해 전인 1961년 여왕과 필립은 버킹엄 궁에서 프론디지를 접대한 적이 있었다. 그때 프론디지는 그 다음 해 3월 총선에서 페론 지지자들이 참가할 경우의 혼란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나 혼자만이 질서와 혼란 사이에서 간신히 버팀목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여왕은 프론디지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또 다른 독재정치를 야기시키는 군사개입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르헨티나가 영연방은 아니었지만 그곳은 미국 다음으로 영국 국민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또한 그 나라의 수출입은 영국 무역에도 대단히 중요했다. 여왕은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하여 아르헨티나의 정치에 개입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도 그러한 내정간섭이 영국민이라면 당연히 생각해 보아야 할 제국 건설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 필립의 아르헨티나 방문은 영국 왕실 사람으로는 30년만에 처음이었다. 여왕은 왕실의 후광이 프론디지의 이미지를 크게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지의 반응은 냉담했다. 필립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그 다음 날 젊은 공산당원들이 필립에게 달걀과 토마토 세례를 퍼부었다. 경찰은 그들을 체포했지만 필립은 내버려두라고 했다. 자기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긴장을 해소시키려 왔지 고조시키려 온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을 놓아주십시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세요. 가져온 신사복이 무제한으로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정치에 초연해야 한다는 헌법의 명령을 여왕이 무시한 최초의 (그렇지만 마지막은 아니다) 사례였다. 여왕은 군주로서 남의 나라 내정에 절대 간섭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여왕은 계산착오를 일으켰다. 여왕의 예상과는 달리 프론디지의 반대파들이 선거에 이겼고 그래서 기관단총을 들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진격해 들어가 전국을 장악했다. 필립은 곧바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철수했고 런던의 맥밀란 정부는 여왕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책임을 막아내는 조치에 착수했다. 영국 정부는 필립의 아르헨티나 여행에 관련된 모든 문서를 봉쇄해 버림으로써 여왕의 개입 사실을 은폐했다. 보통 30년이 지나면 봉쇄된 문서는 비밀 취급에서 해제되는 것이 통례인데 영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이 문서의 비밀 연한을 2057년까지 늦춰 잡았다. 필립은 그 후에도 영국의 친선대사 자격으로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자주 폴로 게임을 즐겼다. 그는 또 멕시코도 여러 번 방문했다. 사람들은 멕시코 방문의 결정적인 이유가 아름다운 여배우 멀 오베론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당시 멀 오베론은 아카풀코의 화려한 빌라, 쿠에르나바카의 성, 멕시코 시티의 거대한 정원 등을 갖고있었다. 백만장자인 산업가 브루노 파글리아니에게 시집간 멜은 전직 영화배우로서 연예계에서 국제적 파티의 개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호스테스가 되어 전 이탈리아 왕, 그리스의 선박왕,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 등을 접대했다. 그녀가 즐겨 초청하는 왕족으로 에든버러 공도 끼어 있었다. 뉴욕의 상류 사회에 대한 글을 자주 쓰는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패트릭 콜럼비아는 이렇게 증언한다. "여왕의 남편은 멜이 즐겨 초청하는 남자였습니다. 필립은 그녀가 자랑하는 사회적 저명인사였죠. 나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녀의 말리부 비치 하우스에서 그녀와 그녀의 의상 디자이너 루이스 에스테베스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별장의 벽에는 전세계 유명인사들의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더군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로 8인치 가로 4인치의 필립 사진이 있었어요. 커다란 은제 액자로 프레임을 두른 것이었어요. 멜은 입을 열었다하면 우리 필립이 어쪄고 우리 필립이 저쩌고 였어요. 나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관계를 잘 아는 루이스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아마 아닐 거예요. 호모인 루이스는 필립이 겉으로는 강인한 남자처럼 꾸미고 있지만 실은 호모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루이스는 필립이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멜의 멕시코 별장에 자주 갔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루이스가 보기에 그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는 없는 것 같았대요." 필립은 멜 오베른에게 로맨스를 느끼기보다는 그 최상급의 사치스러움에 더 이끌렸는지 모른다. 필립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여자와 결혼하여 최상급의 서비스를 받았지만 호화롭게 살지는 못했다. 여왕은 굉장히 검소하여 수수한 옷과 수수한 구두를 신었다. 버킹엄 궁은 춥고 통풍이 안되어서 구석구석 전기 난로를 놓아야 했다. 그러나 멜 오베른의 별장은 난방이 되는 대리석 바닥, 난방이 되는 타월걸이, 황금 잎새가 새겨져 있고 비단실로 장식된 화려한 침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의 하우스 파티는 호화롭고 느긋하고 햇빛 따뜻했으며 늘 상쾌한 부겐빌레아(분꽃)향기의 미풍이 불어왔다. 필립이 이 전설적인 미인을 알게 된 것은 15년 전 아저씨 마운트배튼 경과 함께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마운트배튼의 소개에 의한 것이 라고 한다. 필립 공은 바람둥이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여자들과 노골적으로 시시덕거리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필립은 여왕을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대단히 노력했다. 왜냐하면 당시 프로푸모 사건이 일어나서 영국 전체가 섹스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이 극심하던 그 당시 영국의 전쟁장관인 존 프로푸모가 소련의 해군 무관인 유진 이바노프와 함께 크리스틴 킬러라는 창녀의 아파트에 드나들었다. 이 스캔들로 영국 정부는 거의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다. 전쟁장관은 하원에 나와서 신상 발언을 했을 때 거짓말 한 것이 들통이 나서 사직을 하게 되었다. 몇 년 뒤 여왕은 그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당시 이 섹스 스캔들 때문에 영국은 국제적 농담거리로 전락했고 그 수치가 여러 해 동안 지속되면서 영국의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었다. 이 섹스 스캔들이 벌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영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누적된 경제적 부담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룩 잡지의 존 군터 기자는 이렇게 썼다. "영국은 수치스러운 빈민가, 판자집, 버려진 조선소 등으로 흘러넘친다. 일반 시민들은 미래를 암담하게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혼란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일부 시민들은 성난 목소리로 외쳐댔다. 사회성 강한 드라마로 영국 극단을 강타한 젊은 극작가 존 오스본은 이렇게 썼다. "빌어먹을 영국. 가공할 만한 증오 속에서 너 영국은 이제 썩어가고 있다. 곧 너는 사라지게 되리라 만질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고 게다가 고집불통인 너 영국." 미국의 전 국무장관 딘 애친슨은 영국은 과거의 영광이 다시 사라져 버렸고 아무런 방향감각 없이 비틀거리고 있다고 보았다. "영국은 제국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아직도 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날씨마저도 영국의 비참한 상황을 부채질하는 듯했다. 60년대 초 영국의 겨울은 대단히 추웠다. 그런데도 땔감이 없는 국민들은 아무 대책없이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 같았더라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했다. 여왕이 야유를 당한 것이었다. 여왕과 필립 공은 그리스의 왕 폴과 왕비 프레데리카와 함께 연극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때 런던에 와있던 그리스 시위대들이 여왕이 파시스트와 동석했다며 야유를 퍼부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야유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비난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고함소리가 자기를 향해 외쳐지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다. 1964년 여왕이 캐나다를 방문한다는 계획을 발표할 때 암살 위협마저도 나왔다. 그러나 여왕은 그런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 토론토 텔리그램은 여왕이 방문해서는 안된다는 기사를 실었고 타임스 오브 런던은 무고한 인명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여왕이 캐나다를 방문하면 제2의 달라스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데일리 미러는 우려했다. 당시 캐나다는 퀘벡주의 소수 프랑스인들이 오타와의 다수 영국인들에게 거세게 저항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방문 계획를 취소하지 않았다. 캐나다는 영연방의 일부였고 그것도 영연방 중 제일 큰 나라였다. "나는 그 여행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요. 아니, 하나도 긴장하지 않고 있어요." 여왕이 말했다. 캐나다 방문 중에 여왕은 남편과 함께 퀘벡을 방문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방탄 리무진과 폭동 진압 경관들의 호위를 받아들였다. 필립은 그토록 요란한 경호 조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평소처럼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영국 외무부는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적 긴장이 구조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고 또 몇 달 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폭력이 끔찍한 현실이 되었음을 여왕 부부에게 상기시켰다. "만약 그런 엄중한 경호만 없었더라도 케네디는 암살되지 않았을 거요." 필립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캐나다 전역에서 여왕은 무장 경호대와 무전 순찰차의 호위를 받았다. 그녀는 이미 초청장이 발부된 공식 회합에 참석했고 안전한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두 번 연설을 했다. 왕실 전용선을 타고 세인트 로런스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에는 잠수부들이 기항지마다 선체 밑바닥으로 들어가 폭발물을 검사했다.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다니 정말 우습군요." 여왕의 의상 담당인 보보 맥도날드가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마.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을 거야. 난 커다란 집처럼 안전해." 여왕이 말했다. 여왕은 오타와에서는 영어를 사용했고 퀘벡에서는 불어를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 싸우는 양쪽이 감정을 자제하고 우애를 도모하기를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녀는 캐나다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안전한 나라의 하나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야유를 당하고 번정거림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모욕과 욕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여왕이 캐나다 방문 (1964)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인 1965년 벽두 또다른 큰 사건이 발생했다. 과거 같았더라면 윈스턴 처칠의 웅장한 목소리가 영국 왕실의 미덕을 널리 선전해 주고 그리하여 캐나다에서 있었던 그따위 비난의 소리를 단숨에 잠재웠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 목소리가 사라진 것이었다. 여왕이 제일 먼저 여왕 자격으로 접견했고 또 제일 좋아했던 총리가 1965년 1월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아흐레 만에 사망한 것이었다. 여왕은 평소에도 자기가 윈스턴 처칠을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누군가가 폐하 역대 총리 중 어떤 분이 가장 접견하기가 좋으셨습니까?' 하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윈스턴이에요. 왜냐구요 그를 만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윈스턴 처칠의 죽음은 영국으로서는 한 세대를 마감하는 것이었고 왕실은 가장 큰 수호자를 잃은 셈이었다. "대영제국의 장엄한 인물이 오늘 밤 사망했습니다. 대영제국의 권력과 영광이 사라진 것입니다." 1965년 1월 24일 BBC는 그렇게 보도했다. 여왕은 사석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고 존경하는 스승인 처칠을 위해 왕실에 버금가는 장례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몇 년 전 처칠은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서 소원을 말해 둔 것이 있었다. "난 많은 군인들과 군악대가 나와 주었으면 좋겠어." 그의 군주는 그 소원을 들어 주었고 그보다 더한 예우를 해 주었다. 여왕은 왕실 행사 담당관인 마셜 백작 (노퍽 공)에게 처칠 스타일의 장엄한 규모에 걸맞는 장례식을 준비하되 비용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했다. 영국은 조국의 구원자를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길이었고 여왕은 전세계가 이 역사적 영결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장례식 광경이 그 사람 만큼이나 장엄한 것이 되기를 바랬다.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홀에다 처칠의 의식불명 상태 중 쾌유를 빌며 밤을 새웠던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도록 조치했다. 그 커다란 홀의 바닥에는 펠트 카펫을 깔아서 발자욱 소리를 흡수하게 했다. 4명의 경비원이 4개의 촛불로 관을 밝혔는데 낮 동안에는 괜찮았지만 밤이 되어 어두워지면 4개의 촛불만이 외롭게 타올랐다. 여왕과 필립 공은 관대를 지나서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에 끼어들었다. 여왕으로 통치한 이래 처음으로 여왕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중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많은 애도객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타임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윈스턴 처칠의 관대 앞에서는 모든 조문객이 평등했다." 장례식 날은 춥고 흐린 날이었는데 여왕은 담요와 뜨거운 물병을 가득 실은 여왕의 마차를 처칠 부인과 두 딸에게 빌려 주었다. 여왕 폐하는 발인하는 날 세인트 폴 성당을 방문하여 그의 관 앞에서 마지막 경의를 표시했다. 다섯 시간에 걸친 장엄한 장례식 뒤에 왕실 가족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의 계단에 마련된 세계 110개국의 조문사절이 앉아있는 곳에 합류했다. 윈스턴 처칠의 관은 이제 조포가 달린 마차에 실려졌다. 옥스포드 블래든에 있는 작은 교회 안에 마련된 묘지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묘지 옆에는 다음과 같은 쪽지가 꽂힌 여왕의 조화가 놓여졌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국과 영연방을 대신하여 -엘리자베스 R. (R은 군주의 약자) 세인트 폴 대성당의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고 조포는 처칠의 세수를 기념하여 90번 발사되었다. 2차대전중 해군 대위로 참전했고 지금은 명예 해군 제독으로서 제독 복장을 한 에든버러 공작은 조문사절 보다 한발 앞에 나와 장례마차 속의 노전사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시했다.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이 있은 지 4개월 뒤 여왕은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동안 영국을 지독히 괴롭혔던 그 나라에 여왕으로서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필립 공은 독일에 있는 누나와 매부들을 만나기 위해 자주 그곳을 방문했지만 영국 내의 강렬한 반독 감정 때문에 그 여행은 일체 공표하지 않았다. 여왕도 남편의 여행에 동행하고 싶어 했지만 그때마다 보수적인 토리당 정부는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국왕이 독일을 방문한다면 국민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옛날의 악감정을 말끔이 씻어버리고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를 바라는 노동당 정부가 여왕에게 독일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방문 일정은 1965년 5월로 잡혔다. 영국의 왕이 독일을 방문하는 것은 1913년 여왕의 할아버지인 조지 5세가 친척들을 방문한 이래 처음이었다. 독인인들이 볼 때 여왕이 자기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은 영국이 드디어 독일을 용서했다는 뜻이 되었다. 그녀는 베를린 장벽에서 보기 흉한 가시 철망을 보았을 때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의 방문으로 두 나라의 소원한 관계가 치유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밝히는 연설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극적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위대한 유산의 가장 좋은 부분을 보존하기 바란다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 두 나라 국민들을 이런 저런 문제들에 직면하여 새로 가깝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유와 평화의 이름으로 문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독일 군중들은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라고 소리쳤다. (엘리자베트는 엘리자베스의 독일식발음. 역주) 그러나 여왕은 미소짓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런 열광적인 반응에 약간 놀라는 듯했다. 영국 외무장관 마이클 스튜어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그런 열광적인 반응이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할까? 나치스의 고함소리를 연상시켰던 것이지요. 여왕이 그처럼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여왕은 따뜻함보다는 위엄을 더 앞세우면서 열하루 만에 열 개 도시를 순방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폭넓은 환영을 받았다. 39세의 영국 국왕은 헌법상 정치에 초연해야 했으나 사실 그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라고 유에스 뉴스 앤드 윌드 리포트는 보도했다. 왕실에 대한 비판도 점차 거세어졌다. 1957년 알트린첨 경은 여왕을 '잘난 체하는 사람' '목의 가시'등으로 공격했다가 그 말을 불경스럽다고 느낀 남자에 의해서 노상에서 구타를 당했다. 1년 뒤 영국의 유명 언론인인 맬컴 머거리지는 여왕을 평범하고 못생긴 작은 여인으로 몰아부치고 군주제는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가짜라고 말했다가 국영 BBC의 출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후 10년이 지나면서 왕실에 대한 비난은 이제 공공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1960년대의 학생들은 군주제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했다. 그들이 볼 때 왕가는 국민과 아무 상관없는 것 또는 웃기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관에서는 국가를 연주하는 것을 중단했다. 젊은 사람들이 너무나 야유를 퍼부어 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둔탁한 왕실 직원들도 젊은 사람들에겐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왕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어 보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여왕이 당시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비틀즈에게 대영제국 공로훈장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야 놀랐는데 난 탱크를 몰고나가 전쟁에서 이겨야만 MBE를 받는 줄 알았어요." 존 레논이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MBE를 왕궁에다 반납하면서까지 비틀즈에게 그 훈장을 수여하는데 항의했다.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존 레논은 그 소식을 듣고 화를 벌컥냈다. "육군 장교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런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서 받는 것이다. 그러니 평균을 내어 볼 때 오히려 우리가 더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다. 4년 뒤 존 레논은 영국이 나이제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지원하자 그 훈장을 여왕에게 반납했다. 레논은 그 훈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괜히 받았는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나 비틀즈에게 그 메달을 수여할 당시 메달을 반납했던 사람은 이제 그것을 되돌려 받을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다. 리버풀 출신의 네 명의 노동자 계급 출신 청년들로 이루어진 비틀즈가 메달을 받기 위해 1965년 버킹엄 궁에 나타났을 때 열광하는 팬들의 공세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 병력이 동원되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그들은 왕궁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아 마리화나를 피운 다음 여왕을 알현했다고 한다. "우린 프리스코의 카우 팰리스란 곡을 연주하기는 했지만 이런건 처음이에요. 아주 멋진 집이었어요." 버킹엄 궁 방문 직후 폴 매카트니가 말했다. "그래, 여왕 폐하는 어땠어요?" 한 기자가 물었다. "우리에게 엄마처럼 대해 주었어요." 폴 매카트니는 그후 여왕폐하는 '아주 상냥한 분이지만 할 말이 별로 없으셔'라는 노래를 작곡함으로써 여왕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그 다음 해 여왕은 카톨릭 신자, 흑인, 유대교 랍비 등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여 선례를 깨트렸다. 여왕은 심지어 조카인 헤어우드 백작의 정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백작이 그 여자와 재혼해도 좋다는 승락을 내렸다. 이러한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필립은 여왕이 너무 가정적인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1964년 여왕은 네 번째 애인 에드워드를 낳았는데 그런 것이 가정적인 것의 표상이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그는 언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년의 여왕이 중년의 남편에게 네 명의 아이를 두었다는 사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처럼 화려하게 장식하는 존재가 별 흥미를 끌지 못하는 시대에 접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왕실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거든요. 이제 사람들은 왕실이 재미 없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참아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래봐야 별 볼일 없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필립은 회사 (그는 왕실을 이렇게 불렀다)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하여 영국 박람회, 영국 물산전, 영국 무역 박람회 등에 열심히 쫓아다녔다. 이전에는 특히 미국에서는 왕가의 신비함에 대한 흠모가 남아있어서 여왕과 필립에게 열광적인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1966년이 되면서 미국인들도 영국 왕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필립이 버라이어티 클럽스 인터내셔널의 모금 운동을 위해 미국 여행에 나섰을 때 그는 헐리우드의 홍보 대리인을 채용해야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은 홍보회사 로저스 앤 코원의 핸리 로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주 운이 좋았습니다. 헐리우드에서 프랭크 시나트라 또는 리타 헤이워드 같은 배우의 대리인 노릇은 해 보았지만 왕실 사람을 고객으로 모시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아주 흥분했습니다. 그 일을 맡기 전에 나는 프린스 필립을 만나기 위해 버킹엄 궁을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아주 점잖고 좀 수줍어했지만 아주 의젓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의견을 잘 들어 주셔서 아주 좋았어요." 로저스는 필립 공에게 가는 곳마다 우선적으로 기자회견을 하라고 제안했다. 필립 공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전에도 기자들이 여왕 폐하에게 정기적으로 기자회견을 하시라고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왕실 공보 담당관인 콜빌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영화배우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지요. 여왕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군주는 그런 홍보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러나 기자회견 제의를 받은 필립은 이번에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 헨리. 난 기자회견은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우리 왕실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면 따라야겠지요 그렇지만 기자회견을 하는데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래서 기자들에게 미리 그 원칙을 알려주세요." 에든버러 공은 이어서 여왕의 부군으로서 자신의 제한된 역할을 설명했다. "먼저 내가 영국 정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기자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주세요. 영국 바깥의 기자 분들은 여왕의 역할과 나의 역할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요. 정부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영국 경제, 토리당과 노동당, 총리, 노조 문제, 인플레이션 등에 대해서 답변할 수가 없어요. 둘째 나는 여왕의 개인 신상 문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만 빼놓는다면 기자들이 그 어떤 질문을 내게 퍼부어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홍보 대리인은 필립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질문이라고 해 봐야 다 바보 같은 것만 물어올 테니까.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그 질문이라는 게 다 바보 같은 거였다. 그래서 필립은 특유의 유머를 발휘하며 가볍게 대답해 나갔다. "런던 심포니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마이애미의 한 기자가 물었다. "아주 좋은 음악을 연주하지요." 필립이 대답했다. "자녀들에게 미국 유학을 시킬 생각은 없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질문을 받아놓고 보니 좀 생각이 나는데요. 하지만 역시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비틀즈의 엄청난 성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일 수출품목으로 그들보다 더 많은 외화를 벌어다주는 것은 없다고 보는데요." "우리 영국에 부과된 온갖 부담에 비해 볼 때 비틀즈가 회수해 오는 금액은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국 여행은 이번이 처음입니까?" "아닙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 시절에 온 적이 있습니다." "왜 여왕의 생일은" "왜 여왕의 실제 생일은 4월인데 기념 행사는 6월에 개최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냥 그걸 받아들이면 됩니다. 크리켓, 파운드, 실링, 펜스 기타 기이한 영국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자들은 필립 공을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필립은 가는 곳마다 언론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성공적으로 1백만 달러의 자선사업 기금을 모은 필립은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왕실도 헐리우드 홍보 대리인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필립이 그런 아이디어를 제시하자 여왕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거절했다. 여왕은 자기 자신이나 군주제를 홍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버지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여왕이 말했다. "선왕께서는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지요. 그분에게는 윈스턴 처칠과 두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니까." 남편도 지지않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시종이 보는 앞에서 언쟁을 벌였다. 필립은 한 떼의 언론인들 앞에서 회사(왕실)에 대해서 언급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군주제는 변해야 합니다.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은 박물관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브론토사우르스(공룡)가 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나도 잘못하다 보면 박물관에서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필립은 여왕에게 홍보의 문제를 계속 밀어부쳤으나 여왕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필립은 여왕의 침실 응접실로 달려들어가 선데이 텔레그래프 한 부를 흔들어 댔다. 보수 우익의 왕당파 노선을 취하는 그 신문을 필립은 평소 농담 삼아 '집안 나팔'이라고 불렀다. "이 기사가 좀 흥미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는 그 신문의 1면 기사를 여왕에게 쓱 들이밀었다 여왕은 안경을 쓰고 '왕실에 대한 일반 대중의 현저한 태도 변화'라는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필립은 여왕의 시종이 보는 앞에서 응접실을 왔다갔다하며 기다렸다. 여왕은 아무 말없이 계속 읽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보다 덜 왕가에 대해 신경을 쓴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상당수가 여왕을 고리타분한 유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공화제를 지지하기 때문에 군주제에 반대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영국의 군주제는 분노 속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크게 벌어지는 하품 속에서 삼켜져 없어질지도 모른다." 몇 주 뒤 여왕의 공보 담당관인 코맨더 리처드 콜빌이 은퇴하자 의욕적인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윌리엄 헤셀틴이 그 뒤를 이었다. "내가 콜빌의 뒤를 이어 공보 담당관직에 취임하니까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왕이 해야 하는 역할의 본질은 의사소통인데 그걸 개선해야 되겠더라 이겁니다. 1960년대에 왕실 소식은 뉴스 페이지에서 가십란으로 격하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실 본내의 자리인 뉴스 페이지로 격상시키는 것이 저의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 폭넓게 활용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헤셀틴의 첫 번째 임무는 찰스의 왕세자 즉위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몇 해 전 여왕은 웨일스 사람들에게 맏아들 찰스를 카나번 성에서 정식으로 소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왕은 찰스가 20세기가 되기 몇 달 전에 왕세자 즉위식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왕세자 즉위식의 텔레비전 중계에 동의했다. 그런 소규모 대관식이 군주제의 연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BBC텔레비전 프로듀서는 찰스 왕자의 일대기를 만들자고 제의했으나 여왕과 필립 공은 거절했다. 아들이 아직 경험이 없어서 대본 없는 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왕세자의 역할을 소개하는 필름을 찍자고 수정 제안했다. 그러나 여왕과 필립 공은 그것마저도 거절했다. 그러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한 홍보를 적극 주장하는 헤셀틴의 권유로 왕가의 사람들과 왕가의 역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은 동의했다. 신임 왕궁 공보관 헤셀틴은 여왕, 에든버러 공 네 명의 자녀들이 따뜻한 피가 도는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도 왕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이 분들이 원만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어요." 헤셀틴의 이런 노력에 마운트배튼 경도 많은 도움을 보태주었다. 마운트배튼은 최근에 자신의 생애를 다룬 8회 방영의 다큐멘터리를 BBC에서 찍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왕의 망설였다. 그녀는 군주제가 쇼 비즈니스와 관련되는 것을 싫어했다. 게다가 자신의 가족이 텔레비전 스타처럼 행동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나는 재키 케네디가 아니고 여기는 화이트 하우스가 아닙니다." 여왕은 퍼스트 레이디의 백악관 안내 필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왕은 텔레비전에 나가 연기하는 것을 싫어했고 카메라 앞에 서면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편집권은 물론이고 저작권에다가 다큐멘터리 필름의 전세계 판매 이익의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는 마침내 필름을 찍는데 동의했다. 그녀는 매주 총리를 접견하는 버킹엄 궁 내의 여왕 집무실을 촬영하는 것도 허락했다. 총리 접견은 그녀가 너무나 귀중하게 여겨서 남편 필립 공 마저 배제했던 그런 업무였다. 또 가족 피크닉 때면 반드시 찾아가는 발모랄 성의 실내 촬영도 허락되었다. 미국 시장에 보다 높은 값으로 그 필름을 판매하기 위해 닉슨 대통령이 런던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도 한 컷 집어넣기로 했다. 촬영 내내 BBC 촬영팀은 여왕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촬영 도중 프로듀서는 그녀가 코기 (웰시 코기. 웨일스 산의 집 지키기 개로 얼굴이 여우와 비슷하고 귀가 쫑긋하며 다리가 짧고 몸통이 김. 역주) 개 한 마리를 운동시키는 장면도 넣자고 제의했다. 여왕 폐하는 한 마리가 아니라 열네 마리 모두 운동시키는 장면을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왕의 코기 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필립은 화를 벌컥 냈다. "한 마리만 찍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열네 마리 다 찍을 필요 없다고요." 완성된 필름을 보면 그 장면에서 여왕과 열네 마리의 개는 보이지만 남편은 나오지 않는다. 프로듀서는 그 필름을 역사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필름을 좋아할 겁니다. 군주의 역할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상 생활, 군주제가 현대에 적응하는 모습 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필름을 만들기 위해 텔레비전 카메라 팀은 여왕 주변에서 75일간 머물렀다. 심지어 여왕의 칠레 방문 때 따라 가기도 했다. 35만 달러의 경비를 들여 40시간 이상 촬영을 했다. 왕가라는 제목(별명은 코기 와베스)이 붙은 105분짜리 다큐멘터리는 1969년 6월 4천만 영국 국민이 시청했다. 이 필름은 그해 12월에 재방영되었기 때문에 여왕은 해마다 내보내는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그 해에는 생략했다. "재방영 다큐멘터리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왕궁에서는 그렇게 발표했다. 그러나 2만 명의 영국 국민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래서 크리스마스 연설을 생략한 여왕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BBC 논평가는 왕가를 텔레비전 사상 가장 감격적인 필름이라고 시청자들에게 소개했다. 시청자들은 여왕과 찰스 왕세자가 가족 바베큐를 만들면서 샐러드를 준비하고 필립 공과 앤 공주는 소시지와 스테이크를 굽는 장면을 보았다. 여왕은 자그마한 손가락을 샐러드에다 찔어 넣어 손가락을 빨아봄으로써 샐러드의 간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기름이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여왕은 식초를 좀더 집어넣은 뒤 이제 간이 맞는다고 말하며 남편에게 걸어갔다. "자 샐러드가 준비되었어요." "잘했군요. 당신이 보다시피 소시지는 아직 안되었어요." 남편이 말했다. 또 다른 장면에는 세계 최고 부자 여인으로 알려진 여왕이 멋진 루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왕은 아주 좋아하는 목걸이라고 말하고 페르시아의 통치자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런 다음 여왕은 옆에 있던 시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전에 이걸 차 본 적이 있었나?" 몇 분 뒤 현찰을 만져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여왕이 네 살짜리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간다. 아들에게 과자를 사주기 위해서다. 그녀는 돈을 치르고 나서 마침 과자 값을 갖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또다른 장면에서 여왕은 웃음을 터트리며 가족에게 묻는다. "시종이 다가와서 폐하 다음 접견객은 고릴라와 함께 온 겁니까?라고 말할 때 웃지 않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시종 얘기는 그 사람이 공식적인 방문객인데 고릴라처럼 생겼다는 거야." 여왕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코를 푸는 척하세요. 그리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세요." 찰스 왕자가 조언했다. 여왕은 그 필름을 사전 검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필립 공은 찰스 왕자가 막내 동생에게 첼로 줄을 조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여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악기의 줄을 단단히 조이던 찰스가 A줄을 끊어먹었는데 그것이 막내 아들 에드워드의 뺨을 스치자 막내가 그만 울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여왕은 그 필름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버려두세요. 그건 아무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대부분의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타임스는 영국 군주제의 이점 특히 군주의 의무를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군주제의 이점을 강조하면서 군주제의 장점을 홍보하는 다큐멘터리가 바람직하다는 사설을 실었다. "이 필름은 왕가와 경쾌하게 뛰어노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필름에 경의를 표시할 것이다." 한 비평가는 격찬했다. 지금껏 추락되고 있던 왕가의 이미지를 아주 요령있게 개선시켜 주는 필름이다. 그리고 이런 필름이 다 그렇듯이 그 성공의 요령은 어디서 끝내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다. 왕가는 내가 보기에 앞으로 더욱 전개될 과정의 예고편이라기보다는 완결편이라고 생각된다." 전 신문 편집인인 윌슨 하드캐슬은 말했다. 그러나 하드캐슬은 앞으로 전개될 과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예측해서 못했다. 왕실은 당시로서는 좋은 아이디어인 듯하여 텔레비전 홍보를 적극 활용했고 그렇게 하여 왕실의 이미지를 높였다. 그러나 몇 년 뒤 왕실은 그것이 커다란 실수였음을 알게 된다. 11.사슬에 매인 왕족의 결혼: 나는 이 쇠사슬을 끊고야 말겠어 찰스 왕세자는 시대에 맞춰 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많은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베트남 전쟁 반대 데모를 하고 있을 때 그는 폴로 게임을 했다. 그는 정치적 선동가들을 미치광이라고 부르면서 회피했다. 히피도 싫어했다. 그는 꽃의 자녀들을 변태라 불렀고 페미니스트는 바보같은 빌어먹을 남자 혐오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조잡한 농담과 과장된 몸놀림으로 잘 알려진 영국 코메디언 그룹 군스를 좋아했다. 찰스는 자기 자신을 구식이라고 말했다. "나는 구식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젊은이들이 독신자 바에 들어가 성적 혁명에 가담하고 있을 때 왕세자는 체리 브랜디를 홀짝거리면서 자신의 동정을 지켰다. 그는 성적 자유의 물결이 높던 60년대에 꼿꼿한 자세로 결혼의 신성함을 칭송했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열여덟이되 었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틴에이저인 찰스는 아직 두 번째 데이트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3년 뒤 대학 4년 때 그는 젊은 남미 아가씨에게 유혹되어 성관계를 갖게 된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조교를 하던 여자였다. 최초로 섹스에 입문하자 찰스는 여러 명의 애인들을 사귀게 되는데 그들에게 자기를 서라고 부르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침대에서까지도. "나는 찰스 왕자를 존경합니다. 또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마운트배튼 경도 찰스가 위대한 왕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 디키는 찰스에게 브로드랜즈(마운트배튼의 영지)를 때때로 빌려줌으로써 그에게 프라이버시를 제공해 주었지요. 찰스는 그곳에서 은밀하게 애인들을 대접했어요. 언론의 눈을 피해서 말입니다." 여류 소설가 바바라 카트랜드는 말했다. 찰스는 마운트배튼을 가장 멋지고 가장 훌륭한 아저씨 혹은 할아버지로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마운트배튼은 그런 역할을 썩 잘해냈다. "대부분의 경우 마운트배튼 경은 왕가의 조달책 노릇을 잘했습니다. 우리는 주말에 여러 번 찰스가 젊은 여자들을 대접하게 브로드랜즈를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여자들 중에는 엘링턴 공의 직계 후손인 레이디 제인 윌슬리, 스페인 대사의 딸인 루시아 산타 크루스, 그리고 에드워드 7세의 정부였던 엘리스 케펠의 증손녀인 카밀라 샌드 등이 있었습니다." 카밀라는 나중에 앤드루 파커 볼스 소령과 결혼하여 카밀라 파커 볼스가 되었다. 아주 상냥하고 쾌활한 카밀라에 비해 찰스는 늦된 남자였다. 카밀라는 자기 시동생에게 자신이 찰스 왕자를 유혹하여 처음 성관계를 가진 여자였다고 자랑했다. 리처드 파커 볼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형수가 1971년에 찰스를 접근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찰스는 그때 어떻게 섹스를 하는지 잘 모르더래요. 그래서 그녀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승마 잘하시죠.' 나를 요동치는 말이라고 생각하세요." 찰스는 당시 여자 경험이 너무 없어서 이 카밀라가 자신의 평생 여자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운트배튼이 특별히 소개한 젊은 여자로는 15세의 손녀 아만다 크내치불이 있었다. 그녀는 브래번 경의 둘째 딸이었다. 찰스보다 아홉 살이나 적은 그녀는 할아버지 마운트배튼에게 왕실 중매장이의 환상을 불붙이기에 충분했다. 그녀를 미래의 영국 왕비감이라고 생각하던 마운트배튼은 중매장이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의 먼 사촌이기도 한 찰스와 맺어 주려고 열심이었다. 마운트배튼은 그들을 주말에 브로드랜즈로 초청하기도 했고 또 가족 휴가에 함께 데리고 가기도 했다. 바하마에서 그런 가족 휴가를 보내고 나서 찰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마운트배튼에게 써보내어 더욱 그의 희망을 부풀려 놓았다. "아만다가 정말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아찔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필립 공은 마운트배튼의 중매장이 노릇을 알고 나서 은근히 그것을 지원했다. "좋아요 생판 모르는 사람을 식구로 맞아들이는 것보다는 낫지요." 레이디 아만다가 나이 들어 알맞는 신부 후보감이 될 때까지 마운트배튼은 찰스에게 여자들의 움직이는 타켓이 되라고 조언했다. 한 편지에서 그는 애인을 가능한 한 많이 사귀라고 말했다. 너 같은 경우에는 가정에 안착하기 전에 가능한 한 여자를 많이 사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를 고를 때에는 남자 경험이 없는 매력적이고 상냥하고 적당한 규수를 골라야 해. 네 어머니를 봐라. 열세 살 때 다트머스에서 아버지를 만난 이후 아무도 만나지 않았잖니. 여자들이 결혼 후에 남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결혼 전에 남자 사귄 경험이 없어야 해. 그는 찰스에게 아내를 고를 때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운트배튼은 구매자는 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아랍 속담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존 바라트는 증언한다. "그는 찰스에게 상류층의 돈 많은 집 딸하고만 사귀라고 조언했어요. 그들의 돈과 사회적 지위가 안전한 담보가 된다면서." 어떤 책에는 마운트배튼이 영국 법률가가 관리하는 개인 자금을 바하마 은행에다 설치해 놓고 골치 아픈 여자 혹은 하룻밤의 여자가 왕세자의 비행을 폭로하겠다고 덤비면 돈을 주어 무마해 버렸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 얘기가 사실이냐는 질문을 던지자 바라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좀 우스꽝스럽군요. 하지만 있을 법한 일이에요. 마운트배튼 경은 찰스 왕자와 군주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다했을 거니까." 마운트배튼은 찰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총각이고 또 여자들에게는 성적 지남철이라고 말했다. 그는 찰스를 워렌 비티 같은 영화배우에다 비교했고 또 타임 기자에게 찰스가 여자들과 함께 침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고 자랑했다. 그렇지만 마운트배튼은 속으로 찰스 왕자가 정서적으로 매우 미숙하다는 사실을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너무 쉽사리 사랑에 빠져 그리고 한번 빠지면 계속 집착한단 말이야." 마운트 배튼은 여류 소설가 바바라 카트랜드에게 말했다. 신문사 기자들은 찰스가 공개적으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면 알프스 스키장, 카리브 해변 등 어디라도 쫓아갔다. 어떤 기자들은 찰스가 도저히 쫓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곳까지 따라갔다. "나는 숲속에서 매복하면서 찰스가 발모랄의 디 강변에서 안나 윌리스에게 막 애무를 하던 장면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행위에 돌입하기 직전 망원경을 들고 포복자세로 접근해 오는 우리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다니 숲속으로 숨어버리더군요. 불쌍한 안나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속옷을 다시 입어야 했지요. 찰스는 그날 영 데데하게 놀았습니다. 비겁하게 숨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젊은 여자를 보호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건데 말입니다. 나는 그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그걸 기사화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는 미래의 영국 왕이니까요." 자신감이 없고 우유부단한 찰스는 자신의 타이틀과 국민들의 기대 때문에 큰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1077년이래 영국의 41번째 군주로 등극하여 찰스 3세라는 이름으로 군림하게 되어 있는 찰스는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반적 의미의 정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구요. 나는 특정 방식으로 훈련을 받았고 또 프로그램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늘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국 왕실의 체통에 보탬이 된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 정상적인 생활로부터 소외시켰습니다."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의 왕세자는 나른한 피곤감을 내뿜었다. 그래서 케임브리지 동창생들도 그를 따분한 녀석으로 생각해 버렸다. 한 동창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더블 신사복을 입은 검은 구름처럼 방안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친한 친구들조차도 진짜 구닥다리라고 불렀다. 남의 말을 열심히 듣고 또 지나칠 정도로 공손한 찰스는 무뚝뚝한 여동생과는 달리 남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그러나 만약 찰스가 왕세자 신분이 아니었더라면 남들로부터 무시당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자기에게 굽신거리고 자기 뒤에 서서 공손히 걸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거만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소 진지한 태도를 보일 줄도 알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주문 신사복,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 황금 커프 링그스, 실크 넥타이 등을 애용했다. 구두는 거울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닦고 다녔다. 큰 외할아버지인 윈저 공처럼 그도 옷을 잘 차려입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특히 제복을 입을 때에는 자신의 모습에 여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찰스는 공식 석상에 나서기 전에 자신의 제복을 점검하면서 안경 , 만년필, 지갑, 시계 등의 체크리스트를 혼자 중얼거린다. 이런 꼼꼼한 의식을 옆에서 지켜본 영국 대사 니콜라스 핸더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이 왕실의 의전 절차인 줄 알았다. 적어도 왕가의 남자라면 그렇게 해야 되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찰스는 우아하게 보이고 또 세련되게 행동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불안으로 떠는 남자였다.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세 개의 깃털이 새겨진 왕세자 반지를 자주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게 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귀 콤플렉스를 벗어버리지 못했어요. 정말 안된 일이지요." 전에 여왕의 시종으로 일했던 사람이 말했다. 왕세자의 툭 튀어나온 귀는 왕실 내에서도 웃음거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찰스는 그 귀 때문에 끊임없이 놀림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굉장히 자의식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마거릿 공주는 여왕에게 성형수술을 시키자고 제안했으나 여왕은 거부했다. 마거릿은 자신의 아들 데이비드도 소위 윈저 귀의 특질이 있음을 알고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에 있는 아동병원 에 보내 성형수술을 받아 바로 잡았다. 마운트배튼은 여왕과 필립 공에게 아들의 귀를 바로 잡아주라고 끊임없이 졸라댔다. 그래서 마운트배튼은 찰스에게 직접 부모님께 졸라서 성형수술을 받으라고 권했다. "너 그런 귀를 가지고 왕이 될 수는 없어." 작고한 사진작가 노만 파킨슨은 공식 초상화를 찍을 때 왕자의 귀가 너무 축 쳐져서 양면 테이프로 귀를 뒤쪽에다 꼭 고정시킨 다음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찰스 왕자는 아버지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분이 아닙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분인데 너무 자기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었어요. 그래요 내가 볼 때 그건 축 늘어지는 귀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부모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특히 여왕 폐하하고는요." 여왕의 시종이었던 사람이 말했다. 그는 자신이 모셨던 여왕이 찰스의 양육 문제에 나름대로 신경 쓴 자상한 부모였다고 강조했다. "왕자 전하는 우유부단한 소년이었습니다. 품행이 방정하기는 했지만 여왕 폐하처럼 수줍음을 많이 탔지요. 말을 탈 때도 자신있게 하질 못했습니다. 반면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여동생은 아주 과감하고 쾌활했어요.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어요. 그녀가 남자아이로 태어 나고 찰스가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한편 기자들은 찰스에게 장래 왕비로 어떤 여자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어댔다. 그들은 날씬하고 롱다리에 블론드인 그의 여자 친구들을 찰리의 천사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가장 매력적인 총각인 찰스가 많은 애인들 중에서 안전하게 고르는 것을 추구한다고 보도했다. 찰스는 자신이 실수하면 안되기 때문에 결혼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시인했다. "나 같은 사람은 이혼은 생각도 해 볼 수 없습니다. 내 입장에서 가장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이 이혼입니다. 그러니 아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한편 찰스의 이모인 마거릿 공주 부부는 이혼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여러가지 나쁜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잡지인 멘은 스노든 부처가 주최하는 황음한 파티를 취재한 카버 스토리를 실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에든버러 공은 스노든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대단히 혐오했다. 필립은 스노든이 장사꾼의 출입문을 통해 귀족사회에 들어온 자라고 말했다. 스피팅 이미지라는 풍자적인 텔레비전 쇼는 스노든 부처가 악몽 같은 커플이라는 보도 기사를 내보냈다. 에스콰이어는 스노든 부처가 서로 씹어댄다고 보도했다. 특히 마거릿 공주가 친한 친구들에게도 의전 절차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또 합당한 경의를 표시하라고 고집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마거릿 공주를 평생 알아온 한 신문 편집자는 이렇게 항의했다.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공주는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직접 부를 때는 반드시 마담이라는 경칭을 앞에 부칠 것을 요구했고 3인칭으로 부를 때는 전하라는 경칭을 쓰라고 고집했다. 그녀는 여자 들어가는 약식 커트시. 남자들에게는 목례를 요구했다. 그녀가 일단 방안으로 들어오면 아무도 먼저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녀가 새벽 4시까지 파티를 계속하자고 하면 손님들은 눈이 게게 풀어진 상태에서도 그 요구를 들어 주어야 했다. 아무도 그녀의 승낙없이는 그녀 앞에서 앉지 못했고 또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모두 입 다물고 조용히 들어주어야 했다. 스노든 부처는 곧 별거에 들어갔다. 마거릿은 무스티크라는 카리브 섬에다 별장을 지었는데 남편은 이 별장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반면에 남편은 서섹스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주말 파티를 열었는데 공주는 그곳에 간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따로 애인을 사귀는 빈껍데기 같은 결혼상태를 유지했다. 난잡한 성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난 공주는 남편 친구들 가령 록스타 믹 재거, 작가 로빈 더글러스, 홈 배우 피터 셀러스, 사진작가 패트릭 리치빌드 등과 놀아났다. 스노든 또한 혼외정사에 빠져들었는데 리딩 자작부인의 스물두 살 난 딸 에이디 재클린 루퍼스- 아이작스와 1년에 걸친 로맨스를 벌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전 총리 알렉 더글러스 홈의 조카와 놀아나는 것에 반대했다. 공주와 더글러스 홈의 로맨스는 스노든이 선데이 타임스의 사진 작업을 맡아 해외 출장을 나갔던 1966년 겨울에 시작되었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와 아내가 더글러스 홈의 시골 별장에서 주말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노든은 화를 벌컥 냈고 마거릿은 곧 그관 계를 청산했다. 더글러스 홈은 그후 알콜 중독과 마약 중독에 빠졌다가 1년 뒤 자살했다. 그는 공주에게 줄기차게 불행한 결혼생활을 끝내버리라고 간청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더글러스 홈과 주고 받은 편지에 그녀는 남편이 무섭다고 썼다. 스노든 부처의 결혼생활은 서로 물고 뜯는 개뼉다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여 물어뜯고 바삭바삭 씹어 버렸다. 처음에는 강아지처럼 가볍게 물어뜯었으나 나중에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죽자사자 달려들었다. 그런데다 두 사람 다 골초였고 또 깡술이었다. 편두통을 앓고 있던 마거릿은 아침부터 진토닉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면제를 복용했고 너무 우울하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한번 집을 나가면 몇 주씩 소식이 없던 스노든은 이혼을 원했지만 공주가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적개심은 오히려 섹스의 욕망에 불을 붙였고 그녀는 그런 적개심 속의 섹스를 즐겼다고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신앙심이 강한 그녀는 끔찍한 결혼생활이라도 이혼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특히 아들과 딸의 장래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결혼 초기에 그녀와 남편은 애를 원치 않았다. "우리가 결혼한 다음에 토니가 마음을 바꿨어요. 그래서 아이를 둘 낳았지요." 그녀는 당시 6세의 데이비드와 3세의 사라를 위해 불행한 결혼상태나마 유지하고 싶어했다. 마거릿은 윈저 왕가의 사람은 이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엄숙한 맹서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내 가족, 나 자신, 국가에 대한 의무 말이에요." 스노든은 여왕에게 직접 호소하여 여동생과의 결혼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가족내의 갈등을 애써 피해온 여왕은 여동생의 결혼생활 문제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데일리 엑스프레스가 결별의 소문을 보도하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여왕의 고문관들이 스노든 부처를 정식으로 만나라고 여왕에게 건의했다. 여왕은 마지못해 1967년 12월 18일 일과 후에 스노든 커플을 버킹엄 궁으로 불렀다. 마거릿 공주는 친한 친구에게 그 모임이 가족회의였으며 필립 공과 퀸 머더도 참석했다고 말했다. 필립은 비공식적인 별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는 스노든 부처가 군주제의 이미지를 흐리는 어물전 꼴뚜기 꼴이라고 빗대어서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미지를 좋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필립은 말했다. 마거릿은 콧물을 훌쩍거렸고 불쾌한 일은 피하는 경향이 있는 퀸 머더는 눈물은 흘렸지만 뚜렷한 의견을 내놓지는 않았다. 비록 아무 말도 안했지만 퀸 머더의 존재는 여왕의 입장을 강화해 주었다. 여왕은 자신의 결정을 가족모두 지지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깨끗이 갈라서는 것을 원하는 스노든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상의 안주머니에는 로빈 더글러스 홈이 마거릿에게 보낸 연애편지 3장이 들어 있었다. 여왕은 양측의 얘기를 무표정하게 듣기만 하더니 고문관들과 의논을 해 보아야겠다고 말했다. 스노든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버킹엄 궁을 나섰다. 마거릿은 궁에 좀더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친구 셔먼 더글러스에게 여왕이 해 준 조언을 털어놓았다. "너희들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좋겠어. 하지만 제발 조용히 처리하도록 해." 스노든은 함정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반발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자 그는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하게 반격했다. 그는 툭하면 아내를 모욕했고 사람들이 보는 데에서도 수모를 주었다. 그들이 그리스의 코르푸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과 반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스노든은 자기와 마거릿은 저녁식사 전에 몇 시간 물러가서 쉬겠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침대로 돌아가 낮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한 시간 뒤 마거릿 침실의 도어벨이 울렸다. 마거릿의 친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마거릿이 내게 전화를 했더군요. 남편 토니에게 자기 대신 전화를 해서 왜 도어벨을 울렸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어요. 내가 전화를 했더니 그는 잠든 척하더군요. 도어벨이 계속 울리자 할 수 없이 마거릿이 일어났어요. 그녀는 머리카락에 롤러를 감고 나이트 가운을 입은 상태였어요. 그런 마거릿이 문을 열어보니 여섯 사람이 서 있는 것이었어요. 토니가 차를 마시자고 그들을 초청했다면서 마거릿은 그때서야 깨달았어요. 토니가 자기를 바보로 만들 셈으로 그런 수작을 꾸몄다는 것을." 마거릿 공주는 런던에 돌아와 그의 사진 원판에다 일부러 커피를 엎질러서 보복을 했다. "어머나 이거미 안해서 어쩌죠." 그녀는 말로만 미안해 할 뿐 그 목소리는 오히려 노래부르는 듯했다. 마거릿 공주는 친구인 셔먼 더글러스가 뉴욕에서 개최한 파티에서 스노든과 멀찌감치 떨어진 방 한쪽에서 친구들을 접대했고 스노든은 스노든대로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자기 친구들하고만 얘기를 나누었다. 1947년 주영 미국 대사를 지냈던 사람의 딸인 셔먼 더글러스는 마거릿 부부 사이를 왕복하면서 대화를 해야 되었다. 그녀는 마거릿에게 인사를 하면서 여왕의 안부를 물었다. "도대체 어느 여왕을 말하는 거야. 내 언니, 내 어머니 혹은 내 남편 (여왕에는 동성애 남자를 가리키는 뜻도 있음. 역주)" 공주는 담배 빨부리를 흔들면서 되물었다. 저녁 행사였던 파티가 끝나갈 무렵 공주는 주방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인사할 생각으로 사람을 보내 남편에게 좀 오라고 했다. "전하께서 주방을 한번 돌아보고 싶어하시는데요." 심부름을 간 사람은 스노든에게 말하고 기다렸다. 그는 잠시 뒤 헛기침을 하면서 스노든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스노든은 계속 잡담만 할 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 심 부름꾼이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 들었다. "선생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전하께서 주방을 한번 돌아보고 싶어하시는데요." "아 그래요. 그녀가 거기 들어가서 뭐하게요. 달걀 요리라도 하려고 그러나요." 스노든이 심드렁하게 내뱉았다. 일주일 뒤 스노든 부처는 런던의 개인 집에서 열린 한 디너파티에 참석했다. 그 파티의 안주인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주 살벌했어요. 우리가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토니는 얼굴에 갈색 봉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어요. 조금 있다가 음식의 첫 코스가 나왔어요. 그런데도 토니는 가만히 앉아만 있더군요.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어요. 아예 그가 거기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자 마거릿 공주가 더 참질 못하고 물어보더군요. 왜 머리에 봉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토니가 당신이 꼴보기 싫어서. 하고 냉랭하게 툭 말을 하더군요." 그는 공주의 화장대에다 내가 당신을 증오하는 스무 가지 이유라는 쪽지를 남겨놓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남이 보는 데서 싸워대기 시작했다. 스노든은 친구들 앞에서 아내의 용모, 복장, 특히 키를 더 크게 보이려고 맞춤 주문하는 구두 등을 마구 씹어댔다. 결혼 초기에 스노든은 아내가 연간 4만 5천 달러의 보수를 받는 왕실 의무를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당시엔 남편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공주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남편의 매력으로 메꾸기도 했음을 시인했다. 공주는 바보 같은 애들은 만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해서 어린이 단체의 단체장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결혼초기에 그토록 헌신적이던 스노든은 세월이 좀 흐르자 병원 개원, 함선 진수식, 가로수 식 수 등의 행사에 공주를 따라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자기가 공주의 돈으로 먹고사는 남자라는 얘기를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돈을 벌고 있습니다. 1년에 세금을 2500달러나 내고 있어요." 그 무렵 그는 선데이 타임스의 사진기자로 다시 일하고 있었다. 스노든 사진이라는 캡션은 신문들이 선호하는 품목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사진기자들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인사들도 자유롭게 만나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여배우 비비안 머천트는 그것이 스노든의 재능 때문이 아니라 스노든의 배우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머천트는 한 디너파티에서 스노든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예술가들이 즐겨 당신에게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당신이 그녀와 결혼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마거릿 공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스노든은 자신의 사진 실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그런 발언에 화를 벌컥냈다. 그의 파경설은 언론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릴 뿐 기사화하지는 않았다. 타임스의 기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켄징턴 궁에 사진 전시회를 보러간 적이 있었어요. 스노든과 나는 쭈그려 앉아서 사진 교정을 보는 중이었는데 그때 공주가 방안으로 들어왔어요. 하지만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할 때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어요. '야 이쁜 사진이 많네요.' 공주가 말했어요. '젠장' 스노든은 화를 벌컥 냈어요. 그는 일어서지도 않더군요. 전하 쪽으로 고개를 한번 돌리더니 '해양 스카우트 총재 나리 오셨네' 하고 말했어요." 당시 마거릿 공주는 보이스카우트와 비슷한 단체인 해양 스카우트의 명예 총재로 있었다. 그 기자는 물론 당황했다. "그건 아주 신랄한 말이었고 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례한 거였어요. 공주에게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겠다는 의도였어요. 그는 아예 공주를 무시해 버리더군요. 공주는 15분쯤 방 안에 있다가 나갔어요. 그러자 토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군요." 마거릿 부부의 싸움은 그들의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 여자 친구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 결혼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마거릿의 세례식에는 사악한 정령이 따라 붙었나 봐요. 토니는 재미나고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주 까다로웠어요. 둘다 스타가 되기를 원했고 그들 스타는 충돌했어요. 재주는 토니가 더 많았지만 그녀는 남편이 끊임없이 자기를 돌봐주기를 바랬어요. 하지만 토니는 그런 세심한 배려를 해 줄 수도 없었고 또 그럴 의사도 없었어요. 마거릿은 아주 탐욕스럽다는 점에서 남자 같은 에고를 갖고 있었어요. 토니도 에고가 대단했지만 칭찬받을 만한 점이 있었어요. 하지만 마거릿은 무조건 칭찬해 주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영국 언론은 마거릿 공주의 불행한 결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왕위 계승권 5위일 뿐만 아니라 여왕의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십성 기사를 좋아하는 영국 언론이라고 해도 국왕과 관련된 것은 마음대로 못했지요. 당시만 해도 국왕은 비록 재미는 없지만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이 다보니 여왕의 동생은 위선의 화신이 되어 버렸어요." 영국 작가인 앤드루 던컨은 말했다. 언론에 처음 기사화된 스토리는 스노든보다는 공주를 더 보호하는 쪽으로 흘렀다. 맥콜은 스노든 백작이 화장을 너무 많이 하고 파티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프라이비트 아이는 스오든이 루돌프 누레예프가 있는 방에 달려가서 그의 입술에다 키스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 풍자적인 잡지는 스노든 경을 가죽 줄에 매인 개에다 비유했다. 공주는 끊임없이 남편의 자취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는 갑자기 사라져서 몇 주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 잡지는 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넌지시 암시했다. 1969년 샌드링엄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디너에서 토니의 어처구니없는 짓이 여왕을 너무 화나게 해서 그후 18개월 동안 여왕은 토니에게 말도 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디너가 한참 무르익자 이 작은 천재(토니)는 갑자기 흥이 발동하여 디너 테이블에 뛰어올라 라이브 스트립 쇼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해 마거릿 공주는 남편없이 아이들하고만 샌드링엄에 갔고 토니는 런던의 병원에 입원하여 치질 수술을 받았다. "여왕은 스노든 경을 늘 좋아했어요." 왕실 직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여왕이토 니를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잡지 기사를 부인했다. 몇 년 뒤 여왕 폐하가 오스카 상을 수상한 영화 제작자를 만났을 때 영화를 만들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가 사진 감독이라고 대답했다. "아 그거 흥미롭군요. 나도 사진사인 제부가 있어요." 여왕은 말했다. "아 그거 참 우연한 일치로군요. 나도 여왕인 동서가 있는데" (여왕 즉 queen은 여자 역을 하는 남자 동성연애자를 가리킴. 역주) 사진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여왕 폐하는 곧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스노든 부처의 파경설 이면에는 음주, 마약, 광란의 야회가 뒤범벅된 누추함이 꿈틀거렸다. 마거릿 공주의 전 시녀였던 사람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나빴던 것은 두 사람의 노골적인 싸움이었어요. 그건 당사자들에게도 비인간적이었고 또 주위 사람들에도 큰 피해를 주는 것이었어요. 토니는 사진 일을 맡아서 도쿄, 멜번, 뉴욕으로 나돌아다녔어요. 가능하면 그녀 곁에서 떨어져 있으려고 했지요. 마거릿도 그의 출장을 바랬어요. 그렇지만 토니 없이 일주일 정도를 지내면 그녀는 그때부터 따분해 하기 시작했어요." 사진 촬영차 인도에 3주간의 해외출장을 나갔을 때 스노든은 단 한 번도 아내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일주가 지난 다음부터 타임스의 사진 담당 편집자는 공주로부터 매일 전화세례를 받았다. 신문사에는 하루 세 번씩 전보를 보내면서도 그녀에게는 연락조차 없는 남편의 안부를 묻는 전화였다. 사진 편집자가 자리에 없을 때에는 그의 조수가 메시지를 받아서 편집자의 자리에다 쪽지를 남겼다. '전하가 전화해 왔음.' '마담이 다시 전화했음' 그렇게 2주 연속하여 전화를 받자 그 조수의 메시지에도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쪽지를 남겼다 '그 왕족 여자에게 전화해 줄 것.' 마거릿 공주의 파경설은 찰스 왕자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 당시 왕자의 중요한 책임은 결혼을 잘하여 후손을 생산하는 일이었으므로 마거릿 공주의 이혼은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찰스는 18세기에 제정된 두 가지 결혼 관련법으로 제약을 받았다. 1701년의 왕족 혼인법은 왕세자가 로만 카톨릭교도와 결혼하는 것을 금했다. 그리고 1772년의 왕실 혼인법은 왕세자가 25세 이전에 결혼을 하게 되면 군주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왕세자는 또 결혼 의사를 밝힌 다음 상하 양원의 반대가 없으면 12개월 후에 결혼할 수 있다.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찰스는 자신이 합당한 왕비를 맞아들여 윈저 가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불과 세 살이었을때 부터 그의 결혼은 언론의 기사거리 가 되었고 언론은 왕비 후보자들을 풍성하게 제시했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 왕실 행사가 벌어질 때마다 완벽한 왕비를 맞아들여야 한다는 필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1972년 5월 윈저 공이 사망하자 윈저 공이 1936년 당시 에드워드 8세의 신분으로 동생 앨버트 왕자 (조지 6세)에게 양위한 수치가 되살아났다. 또 양위에 뒤이어 찾아온 망명 생활도 하나의 스캔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결혼을 잘못했기 때문이었다. 윈저 공 부처에 대해서 왕실은 끝없는 적개심을 보였지만 찰스는 윈저 공작과 공작부인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이 파리를 공식 방문할 때 함께 수행했다가 큰할아버지인 윈저 공을 사망 열흘 전에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77세의 공작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여왕은 마지못해 닷새간의 프랑스 방문 동안 짬을 내어 그를 만나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프랑스 방문 전에 윈저 공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의 주치의로부터 아주 급박한 사태임을 알리는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다. 그렇지만 여왕은 이미 정해진 스케줄을 재조정하려 하지 않았다. 주치의는 여왕의 비서에게 공작이 아주 위독한 상태임을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분은 돌아가시기 직전이란 말입니다." 윈저 공의 주치의는 말했다. 그 다음 날 주치의는 주 프랑스 영국 대사인 크리스토퍼 솜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윈저 공의 죽음이 여왕의 프랑스 국빈 방문에 장애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였다. 주치의인 쟝신은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회상했다. "이것 보세요. 주치의 양반. 공작은 여왕의 국빈 방문 전이나 후에 돌아가셔야 해요. 방문도중에 돌아가셔서는 안된단 말입니다. 내 말 알아듣겠어요." 한 신문기자가 왜 여왕 폐하는 윈저 공에게 그토록 냉담하냐고 여왕의 비서에게 물어 보았다. 비서는 이렇게 답변했다. "당신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아무튼 공작은 여왕의 프랑스 방문 이후에 사망하여 더 이상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다. 파리 교외의 부아 드 불로뉴에 있는 윈저 공의 자택을 부모와 함께 따라 갔던 찰스는 폐암에 걸려 사망 직전인 그 노인의 취약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지만 전왕은 군주(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시해야 한다며 병상에서 일어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찰스는 윈저 공의 신사다운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왕실 최대 기피 인물이었던 윈저 공작부인은 여왕의 태도가 냉담하고 초연했다고 기억했다. "여왕은 우릴 방문했지만 그 방문으로 공작의 영예를 높여주지는 않겠다는 뜻이 역력했어요. 파리를 방문중인데도 죽어가는 공작을 찾아보지 않으면 너무 냉담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부러 체면을 차리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어요." 윈저 공작부인은 로마노네스 백작부인에게 말했다. 공작이 사망하자 찰스는 왕실에 의해서 그토록 매도당했던 공작부인에게 자상한 마음을 표시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런던 공항에 나가 그녀를 직접 맞이하여 장례식장까지 호송하겠노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왕궁은 안된다고 했다. 왕실 직원들은 왕세자가 두 번씩이나 이혼한 여자에게 그런 환대를 베풀어주면 국왕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건 잘못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여왕의 비서가 말했다. 찰스는 그런 방해공작의 진워지가 퀸 머더라는 것을 알았지만 사랑하는 할머니의 비위를 거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공항 영접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이 대신 맡게 되었다. 공작부인은 버킹엄 궁에 머무르도록 초청되었지만 체재 기간은 남편의 장례식 기간으로 제한되었다. 여왕의 집사 중 한 사람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왕실 사람들은 전부 윈저 성으로 내려갔죠. 그래서 버킹엄 궁에는 공작부인만 남게 되었어요. 나는 당시 왕궁의 식료품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퀸 머더, 여왕, 마거릿 공주가 모두 윈저 공작부인을 쏙 빼놓고 윈저 성으로 내려가 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녀를 그렇게 박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야박했습니다. 왕실 사람들이 떠난 뒤에 버킹엄 궁의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그녀의 야윈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그녀는 너무 외롭게 쓸쓸해 보였습니다." 찰스는 여동생과 함께 1972년 11월 부모님의 은혼식 파티를 개최하면서 다시한번 결혼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영국은 하루 종일 여왕의 결혼 25주년을 축하해 주었다. 학교는 하루 휴일이 주어졌으며 여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벌어진 축하 예배에 1백 쌍의 부부를 초대했다. 그 커플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여왕 폐하의 결혼 기념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거기 모였던 것이다. 감동을 받은 여왕은 그들 모두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예배가 끝나자 에든버러 공은 사원의 중앙 복도로 걸어갔고 아내를 에스코트하여 사원 바깥으로 나오려는 순간 여왕에게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들이 결혼식 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러나 여왕 폐하는 더 이상 남편 쪽을 쳐다보지 않았고 또 그 내민 팔을 잡지 않았다. 여왕 부부는 나란히 서서 바깥으로 나왔지만 서로 웃기만 할 뿐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결혼 상태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들은 의기 투합하지지만 친밀하지는 않은 효과적인 파트너 관계였던 것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런던 시청으로 몰려들어 여왕의 모범적 생활을 칭송하는 시장의 연설을 들었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엄을 통해서 폐하는 국민들로 하여금 앞 세대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자유롭게 폐하의 활짝 열려진 창문 안을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폐하께서 해오신 많은 위대한 일들 중에 폐하, 부군, 자녀들이 이루어 놓은 행복한 가정 생활의 비전은 이 나라 모든 가정의 유대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의회에서 왕실을 금테 두른 기생충이라고 매도했던 의회 의원 윌리 해밀턴 조차도 축하인사를 해 왔다. 해밀턴은 사정없이 왕실을 매도하는 말로써 국민들을 놀라게 했던 왕실 비판의 선봉장이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축하를 해 놓고 해밀턴은 은혼식 기념패와 스푼이 거리에서 매매되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이 행사를 상업화하려는 탐욕스러운 사람들과 이런 기념 행사에 대한 국민의 축하 분위기를 이용하여 한몫 잡으려는 돈에 눈먼 왕당파들은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해밀턴은 왕실이 은혼식 기념 행사에서 나온 모든 수익금을 자선단체에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탈리도마이드(수면제, 진정제)를 과다 복용한 어머니 때문에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의 치료 기금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왕실은 그의 요구를 묵살했다. "당시에 나는 왕실을 쓸데없이 매도하는 괴물로 알려졌어요.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예언자처럼 되어 있습니다." 해밀턴은 말했다. 여왕은 결혼 25주년 기념일 행사가 너무나 흡족하여 평소의 수줍은 태도를 내던지고 사람들 사이를 돌며 가벼운 잡담을 했다.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평민들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국왕이 그런 파격적 제스처를 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런던 시민들이 처음으로 본 왕실의 친밀한 제스처였다. 여왕, 에든버러 공, 찰스 왕자, 앤공주가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인사를 하면서 다정한 태도를 취하자 영국 깃발을 뒤흔들던 영국 민들은 일제히 환호의 함성을 올렸다. 자신은 가정생활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역설하면서 여왕폐하는 레이스를 두른 듯한 순진함이 돋보이는 짧은 연설을 했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결합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출발 당시 아무리 깊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발전하고 또 원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부 관계는 가족 관계, 가령 부모와 자식 관계, 조부모와 손자의 관계. 사촌, 숙부, 숙모의 관계 등으로 더욱 탄탄하게 엮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여왕이 이런 연설을 했던 당시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영국에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교회보다는 군주제라고 생각했다. (1972년 해리스 여론조사에 의거) 여왕은 군주에 대한 이런 탄탄한 지지에 힘입어 의회에 왕실 비용의 인상을 요구하는 우아한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영국은 실업자가 백만 명이나 되었지만 딱한 사람 윌리 해밀턴을 빼놓고 그 어떤 의회의원도 면세의 왕실 비용 인상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93년 윌리 해밀턴은 나- 키티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실 비용을 감시하자고 했다고 암살당할 뿐 했습니다. 여왕의 고문관들은 거만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여왕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신경쓰지마. 여왕이 얼마나 부자인지는 신경 끊어. 우린 돈이 더 필요해. 그러니 우리에게 더 내놔. 그리고 우리는 고분고분 그 명령에 따랐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알았고 또 우리가 왕실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을 두려워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어요." 의회뿐만이 아니라 국민들도 여왕 폐하가 이 세상에도 존재하는 군주 중 가장 대표적인 군주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왕이 엄청난 재산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극렬한 반대자인 윌리 해밀턴 의원을 빼놓고 여왕이 가진 4억 달러의 재산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1972년 영국 의회는 여왕이 요구한 왕실 비용 (왕족의 개인 봉급)의 인상을 별 반대없이 승인했다. 그렇게 하여 여왕은 면세 연금이 1년에 3백만 달러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각각 다음과 같이 책정되었다. 퀸 머더 237,500달러, 필립 공 162,500달러, 마거릿 공주 87,500달러, 앤 공주 37,500달러, 찰스 왕자는 콘웰 공국에서 연금을 받기 때문에 시빌 리스트 (영국 왕실 비용)에서 제외되었다. 1973년에 들어서 앤 공주가 마크 필립스 대위와 결혼하자 찰스에게 결혼하라는 압력이 더욱 가중되었다. 기자들은 찰스보다 어린 앤이 먼저 결혼하자 찰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고 보도했다. 앤은 오빠의 25회 생일인 1973년 11월 14일을 결혼식 날짜로 지정했으나 찰스는 그것을 별로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찰스는 앤의 약혼 사실을 알리는 아버지의 편지를 호위함 미네르바 선상에서 받아보았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기가 죽었습니다. 충격과 경악을 느꼈어요." 찰스와 앤은 함께 자라면서 사이가 좋았다. 특히 여왕을 대신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방문하면서 더욱 사이가 가까워졌다. 이 여행에서 앤은 이기적인 태도를 보인데다 거만하게 굴어서 오빠 찰스를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만들었다. 앤이 거만하게 굴었다면 찰스는 친절하게 나왔다. 앤은 기자들의 따분한 질문에 노골적인 면박을 주었지만 찰스는 친절하게 답변했다. 앤이 사진기자들을 귀찮은 파리 대하듯 했다면 찰스는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앤은 카메라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이거 치워' 하고 소리쳤다. 워싱톤에 들렀을 때 찰스는 하원의장에게 왜 미국의 국조로 대머리 독수리를 골랐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옆에 있던 앤이 참질 못하고 한마디 내질렀다. "아주 잘못 고른 거 아니겠어요. 네?" 닉슨 행정부에서 의전 부수석으로 근무한 사람의 아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앤은 정말 형편없었어요. 그녀는 뚱한 채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어요. 찰스는 바보 같지만 그래도 상냥한 데가 있었어요. 1970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찰스는 주미 영국 대사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여기서도 카톨릭과 개신교가 영국처럼 죽기살기로 싸웁니까?' 대사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앤 공주는 버킹엄 궁을 개인 재산으로 갖고 있는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깨를 한번 들썩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개인 재산이 아니에요. 왕궁은 왕실 소속입니다." 따분하면 참질 못하고 하품을 해대고 재미없으면 금방 싫증난다는 표시를 하는 앤은 매력이 별로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닮아 외향적인 성격이었고 언론을 대할 때는 유일하게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라는 태도를 취했다. 강인하고 뻣세고 냉정한 그녀는 할머니인 퀸 머더와는 영 딴판이었다. 퀸 머더는 무뚝뚝한 손녀보다는 부드럽고 상냥한 찰스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앤의 독립심을 높이 평가하는 마거릿 이모는 앤을 아주 좋게 보았다. 왕가의 둘째 아이로 성장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을 잘 아는 마거릿 공주는 이렇게 말했다. "앤은 나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에요. 그리고 훨씬 더 강인하죠. 또 나하고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어요. 학교도 다녔고요." 여동생의 냉정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하던 찰스는 동생이 결혼을 해서 버킹엄 궁을 떠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심경을 토로 했다. "나도 빨리 아내감을 찾아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 그러면 낙오되어 비참해질 거야." 다른 친구에게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앞뒤 좌우를 살펴봐도 모두 약혼을 하고 있어. 난 이러다가 모든 사람 다 놓쳐 버리고 어딘가 무인고도의 해변에게 혼자 남겨질지도 모르겠어." 우울해지기를 잘하는 왕세자는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긴 한탄의 편지에서 그 사실을 시인했다. "나는 이 공허감이 곧 사라질 거라고 믿어." 그는 선상 생활을 하면서 그 외로움을 혼자서 간직했고 자신의 고민을 일기에다 은밀히 털어놓았다. 찰스는 해군 동료들에게 여동생에게 약혼을 축하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앤은 자기 말하고 결혼할 수 없으니까 마크하고 결혼하는 거야." 그는 자신의 매부될 사람을 그렇게 평가했다. 마크는 여왕 근위 연대 소속의 뛰어난 승마 선수였다. 몇 해 뒤 작가 오베른 워는 마커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없는 앤 공주의 남편 말이죠. 그 사람은 큰일을 당하면 바지 에다 오줌을 지릴 정도로 답답한 사람입니다." 찰스도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찰스는 그가 너무 답답하여 안개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앤과 육군 대위의 결혼이 걸맞지 않는다고 아들에게 불평하는 편지를 보냈던 에든버러 공은 앤과 마크의 키스 장면이 신문에 나자 장래의 사위감을 호출했다. 젊은 장교는 앤 공주에 대해 불순한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필립 공은 그의 말을 불쑥 가로막았다. "그런 정치적 발언은 그만둬. 내 말은 결혼 전에 이런 재미없는 사진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거야." 왕실 직원들은 그 키스 사진이 가짜라고 주장하려 했다. 그들은 앤 공주와 마크 필립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또 두 사람은 서로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여왕의 공보관은 말했다. 이어 공보관은 선데이 미러의 편집자인 로버트 에드워드에게 앤 공주와 마크 필립스 대위의 관계에 대한 구구한 추측을 하지 않겠다는 사과성 기사를 실으라고 요구했다. 편집자는 그 요구를 따랐다. 그렇게 해 놓고 여왕은 몇 주 뒤에 딸의 약혼 사실을 발표했다. 당시 왕실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책임이 따랐다. 왕세자는 아직 미혼이었으니 아이를 낳을 형편이 아니었고 손아래 동생인 앤드루 (13세)와 에드워드(9세)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왕위 계승권 4위인 앤이 아이를 낳는 문제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마크 필립스는 왕궁으로 소환되어 정액 표본을 내놓을 것을 요구받았다. 그가 아무 이상 없음이 밝혀지자 여왕은 그에게 작위 수여를 제의했다. 그러나 젊은 대위는 공손하게 거절했다. 평민으로 남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리를 이해 못하는 여왕은 또다시 제안했다. 그러나 젊은 대위는 다시 거절했고 앤 공주도 그런 태도를 적극 지지했다. 나중에 그는 국방부의 관리직 자리를 거부하고 시골의 향사로 남겠다고 고집했다. 그래서 여왕은 앤과 마크에게 개트콤 파크를 사주겠다고 제안했다. 그것은 글루스터셔에 있는 500에이커 크기의 영지로서 시가 2백만 달러에 달하는 큰 저택이었다. 필립스는 이번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왕은 정말 좋은 분이셔." 필립스는 말했다. 4개월 뒤 무뚝뚝한 공주는 그녀를 납치하려는 총잡이에게 완강히 저항하는 용기를 발휘하여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앤과 남편은 로열 리무진을 타고 버킹엄 궁을 향해 몰을 내려가던 도중이었다. 차의 앞 유리창에 켜진 푸른 등은 차안에 왕실 사람이 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등이었다. 그래서 행인들과 자동차를 탄 사람들은 하얀 포드 에스코트 차가 그 리무진에 부닥치자 깜짝 놀랐다. 포드 자동차의 운전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차에서 뛰어나와 공주의 운전사, 경호원, 행인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어 총잡이는 공주를 납치하기 위해 로열 리무진의 뒷문으로 달려왔다. 무섭기는 했지만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인 앤과 남편은 문을 꼭 붙잡으며 저항했다. 그러자 그 정신나간 남자가 제풀에 떨어져 버렸다. 1974년 당시 영국에서는 테러 행위가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경찰관들도 권총을 휴대하지 않았고 행인들도 총맞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앤을 돕기 위해 달려들었던 한 남자는 소란보다는 오히려 매너에 더 신경을 썼다. 런던 세탁 회사의 관리자인 론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그 두 차가 충돌했을 때 나는 언뜻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에스코트 차의 주인이 접촉사고가 나자 열을 받았구나. 그래서 자기가 지금 왕실 가족을 괴롭히고 있다는 그것을 모르고 있구나. 누군가가 저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해 줘야 한다. 그래서 그걸 말해 줄 생각으로 나는 차를 길옆에다 세우고 현장에 달려갔던 겁니다." 왕실 직원들은 왕실 가족을 누군가가 공격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공주의 침착함은 칭찬했다. 그녀는 메어리 포핀스처럼 경쾌하게 그 총잡이를 물리쳤던 것이다. "공주는 정말 겁이 없는 여자이더군요." 런던의 한 택시 운전사가 데일리 메일 기자에게 말했다. 공주의 아버지도 그런 의견에 동의했다. 앤은 당시 여왕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 중인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주는 그 납치 사건을 어머니는 제치고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털어 놓으려 했다. "그 바보 같은 총잡이 녀석도 잘 된 거지요. 만약 앤을 납치했더라면 그녀를 가두어 놓고 있는 동안에 꽤나 애먹었을 겁니다." 필립 공이 말했다. 여왕은 런던으로 돌아와 공주를 도우려다 부상을 입은 네 명의 남자에게 왕실 표창장을 주었다. 에든버러 공은 자신이 좋아하는 딸이 대중들에게 용감한 여성으로 비춰진 것을 크게 칭찬했다. "잘했어. 네가 시빌 리스트를 구제해 주었구나." 왕실 비용 (왕족의 연금 즉 시빌 리스트)은 마거릿 공주가 닭장 안에 여우를 들여 놓기 전까지는 아무런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허약한 남자를 좋아하는 경향을 가진 공주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인된 호모와 동거하는 허약한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마거릿이 한 파티에서 로데릭 (로디)레웰린을 만났을 때는 마흔 세 살이었다. 로디는 그녀보다 열일곱이나 적은 스물여섯이었다. 헨리 레웰린 경의 둘째 아들인 로디는 귀족 출신이었는데 공주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로디의 아버지는 그들의 관계를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기만 했다. "로디의 새 여자 친구 말입니까? 아들 놈은 이탈리아인 웨이터들과 주로 사귀더니 이번에는 확 바꿔었어요." 헨리 레웰린 경이 말했다. 마거릿은 웨일스의 고뮨 (히피 마을)에서 사는 장발의 그 젊은이가 상냥했던 시절의 남편 토니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공주와 히피는 친구들 사이에만 알려진 은밀한 연애 관계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여왕을 의식해서 공공 장소에서는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 한편 이때까지도 마거릿과 정식 이혼을 하지 못했던 스노든은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정말 이혼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76년 마거릿 공주가 그에게 우연찮게 빌미를 하나 제공했다. 그녀가 어린 애인을 데리고 카리브 해의 무스티크 섬에 갔다가 사진에 찍힌 것이었다. 마거릿과 로디가 수영복을 입은 채 다른 커플과 함께 무스티크 섬의 한 바의 나무벤치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뉴스 오브 더 월드의 1면에 크게 보도되었다. 함께 있던 다른 커플은 사진에서 삭제 처리되었기 때문에 마치 마거릿 공주가 남편 아닌 남자와 단 둘이서 호젓하게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거릿과 미남 청년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은 신문기사는 두 애인이 손잡고 해변을 걸었다고 보도했다. "로디는 선탠 오일을 그녀의 갈색 어깨 위에다 발라 주었다. 그녀는 일반 대중들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잡지의 나중 판에서는 헤드라인이 남편이 찍을 수 없었던 사진으로 바뀌었다. 마거릿의 결혼이 삐걱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왕실의 겉모양 꾸미기를 그런 대로 인정해 주고 있었다. 국민들도 지난 여러 해 동안 마거릿 공주 만큼은 봐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대중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거나 왕실 행사에 늦게 나타나도 애교로 눈 감아주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피터 타운센드를 포기하도록 강요 당하면서 너무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 만큼은 비판의 기준을 낮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거만한 태도를 모르는 체했고 또 그녀를 불쌍한 마거릿 하면서 동정도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점점 버릇이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으로 무스티크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누가 봐도 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결혼한 공주가 그것도 국가 재정에서 연간 7만 달러를 보조받는 공인이 영국에 자녀를 남겨두고 카리브 해로 날아가 젊은 남자와 희희낙락하며 노닥거린다. 그것도 웨일스의 코뮨에 사는 호모 비슷한 남자와 그것은 여태껏 관대했던 일반 대중들도 참아줄 수 없는 것이었다. 왕실의 1급 비판자인 노동당 소속 윌리 해밀턴 의원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무스티크로 날아가서 우리 납세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 한다면 이 땅의 근로자들도 혈세로 그녀의 재정을 보조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다른 의회의원도 해밀턴의 의견에 동조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노동당 소속 의원인 데니스 캐너반도 한마디 거들었다. "공주는 기생충이다. 그녀에게 더 이상 재정 보조를 해서는 안된다." 일반 여론이 들끊는 것을 보고서 스노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부정행위에 커다란 모욕을 느낀다고 주장하면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비등하는 여론에 놀란 여왕은 마거릿을 런던으로 소환했다. 그녀는 이번에는 애인없이 혼자서 무스티크를 떠나 귀국했다. 왕궁은 스노든에게 왕실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공항에서 마거릿을 영접하라고 말했다. 그는 어린 아들을 태운 로열 리무진을 타고 공항에 나타나 마거릿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었다. 여름 목면 옷만 입고 황급히 귀국한 그녀가 런던의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사진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노든은 그녀의 뺨에다 키스를 했고 어깨에다 모피 코트를 둘러주었다.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스노든 경은 악마처럼 교활해요 ." 두 달뒤 켄징턴 궁은 마거릿 공주의 별거 성명을 발표했다. 마거릿 공주 전하 -스노든 백작부인과 스노든 백작은 별거하기로 상호 합의했습니다. 공주는 스노든 경의 도움없이 혼자서 공식 임무와 기능을 수행할 것입니다. 이혼 절차에 대한 계획은 없음을 밝힙니다. 마거릿의 한 친구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그 성명이 나온 날 밤 공주는 아주 얼이 빠진 상태였어요. 그녀는 자꾸 눈물이 나오는지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우리가 옆에서 계속 그녀의 기분을 돋구어 주었지요. 저녁 연극에 함께 가고 그 다음에는 버블 나이트클럽으로 데려가 샴페인을 터트리며 놀았어요. 그래서 새벽 네시 반까지 그녀와 함께 있어 주었어요. 아무래도 옆에서 원기를 북돋아주어야 했으니까." 영국법은 합의 이혼을 허가하기 전에 2년간의 공식적인 별거 기간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 기간 중에 한쪽이 이혼에 반대 표시를 하면 다시 3년간의 대기 기간이 주어졌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합의 없이도 이혼이 성립되게 된다. 마거릿은 별거는 하지만 그것이 이혼 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노든은 결연한 입장이었다. 그는 형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이라고 말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를 얻어야겠다고 내밀었다. 여왕은 동생의 자기 파괴적인 태도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주 동안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또 동생이 밑바닥 인생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여왕이 그렇게 말하자 마거릿의 난잡한 성생활에 대한 수군덕거림이 런던 사교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공공연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마거릿 공주는 로디 레웰린과의 관계를 끊지 못했다. 그가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유일한 남자라고 하면서 "난 그가 필요해요. 내게 너무 잘해 줘요." 그녀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일반 여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여왕은 동생에게 제발 그 관계를 청산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마거릿은 거부했다. 왕실의 천적 윌리 해밀턴은 하원에서 마거릿 공주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 교제가 현대식 남녀간의 사귐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공주는 이제 왕실의 부랑아가 되었습니다." 이번엔 해밀턴의 발언에 분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토리당 의원은 별로 없었다. 비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거릿 공주를 옹호하고 나선 사람은 그녀의 젊은 애인뿐이었다. "윌리 해밀턴이나 기타 인사들이 그녀처럼 공식 행사를 잘 수행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람들은 군주제를 지지하고 또 마거릿 공주가 해 내는 일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젊은 애인 로디 레웰린이 말했다. 그러나 이때 쯤 일반 대중은 공주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여론 조사에 의하면 국민들 중 73퍼센트가 그녀의 생활 방식이 그녀의 공적 이미지를 해치고 있으며 또 군주제의 이미지를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왕은 동생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애인을 포기하든지. 공인 생활을 포기하든지. 마거릿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자들을 저주했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설을 써대는 제도권의 신문들을 비난했다. 그녀는 그들을 싸잡아서 위선덩어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피곤하고 초췌한 표정의 그녀는 자신의 공식적 의무를 힘겹게 수행했으나 피곤하다면서 행사장에 늦게 나타나거나 혹은 행사장을 일찍 떠났다. 의사들은 그녀에게 담배와 술을 끊으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장염과 알콜성 감염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폐 수술을 받아야 되는 형편이면서도 하루 세 갑의 필터없는 담배를 귀갑 빨부리에다 꽂아넣고 피워댔다. 그녀는 신경쇠약을 앓았고 이혼 발표 직전에는 자살하겠다며 소동을 피웠다. 마거릿은 아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은 남편의 결심을 잘 알지 못했다. 비록 별거를 했지만 이혼까지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노든이 이혼을 요구하고 나서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만약 그가 재혼할 의사가 있다면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그저 이혼하겠다는 거였다. 마거릿 공주의 이혼은 1978년 5월 10일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7개월 뒤 스노든은 재혼했다. 그의 애애인 루시린지 호그는 임신 7개월 째였다. 마거릿은 그 결혼 소식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그는 나한테 미리 알려주는 아량도 없었어요. 아니 심지어 아이들한테까지도 알리지 않았어요." 마거릿은 한 전기작가에게 말했다. 헨리 8세가 1533년 클레브의 앤과 이혼한 이래 처음 벌어진 마거릿의 이혼사건은 왕세자 찰스에게 굉장한 압력을 가했다. 이제 그는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올해야말로 결혼의 해이다." 한 신문은 찰스가 데이트하다가 헤어진 여자들의 얼굴을 부분적으로 몽타주한 사진을 실으면서 그런 헤드라인을 뽑았다. 다른 신문은 이런 헤드라인을 내놓았다. "왕세자 결혼제단과 심연의 중간에서 자초하다." 필립 공은 그러한 언론 보도를 내보이며 아들을 놀려댔다. "찰스 서두르는게 좋겠어. 이러다간 좋은 규수감이 씨가 말라 버리겠어." 찰스는 1978년 11월 15일 30회 생일을 맞이했고 버킹엄 궁의 대 연회장에서 4백여 명이 참석한 생일파티가 벌어졌다. 여왕과 에든버러 공이 내보낸 초청장에는 귀족관을 쓸 필요없음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보통 집안 같으면 '생일 선물 필요없음' 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왕세자는 키 큰 블론드인 여배우 수잔 조지를 자신의 데이트 상대로 삼았다. 그러나 그날 밤 찰스와 주로 춤춘 여자들은 데일 캉가 트라이언과 카밀라 파커 볼스 등 친구의 아내인 유부녀들이었다. 이 유부녀의 아들들에게 대부를 서준 찰스는 자기를 쫓아다니는 아름다운 미녀보다는 이들 유부녀가 한결 마음 편했다. "유부녀는 안전해 남편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찰스는 나중에 약혼녀 다이애나에게 털어놓았다. 왕세자인 찰스는 사람들의 아첨에 인이 박혀 있었다. 그는 남에게서 그것을 기대했고 또 그들은 충분히 그것을 제공했다. 특히 두 유부녀는 그에게 있는 아첨 없는 아첨을 다해 댔다. 이들 유부녀는 시간을 들여 구애를 해야 하는 처녀와는 다르게 자유롭게 그들의 몸과 맘을 내주었으며 그렇게 해서 대가을 바라지도 않았다. 찰스의 유부녀 애인들은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와인 저장용 별장을 소유하는 것 혹은 레저 전용 제트기를 소유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들은 왕세자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좋아했고 그들의 남편은 미래의 국왕과 아내를 함께 나누는 것을 하나의 명예로 생각했다. 그러한 3각 관계는 귀족 사회내에서 그들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30회 생일 파티 며칠 뒤에 찰스에게 초청받아 윈저 성을 방문한 65세의 한 자작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찰스는 자기 또래의 처녀보다는 나처럼 나이들고 위압적인 유부녀들을 만나면 편안하게 여긴단 말이야, 나는 여왕 폐하와 마거릿 공주와 함께 자란 귀족 세대야. 우리들이 함께 자랄 때는 이 나라가 손바닥만해서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훤히 꿰뚫고 있었지. 나는 이제 가시적이지 않은 세계의 일부분이야. 그 세계는 거만한 상류 계급의 사회인데 거기서는 그래도 영국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 아직도 남아있지. 영국 왕가라는게 불행하게도 독일계이고 약간의 부르주아 중산층의 피가 수혈된 뭐 그런 거지. 우리는 왕가의 본질을 잘 알고 있어. 그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식한 독일인이지. 그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우리도 그들을 보호하고 싶고 그래서 왕세자는 나의 도움을 청하는 거지." 자작부인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찰스는 30회 생일 파티 직후에 내게 아주 친절하게 굴더군. 내가 점심시간에 맞춰 윈저 성에 도착하니까. 이렇게 말했어. '자작부인, 어머니가 여기 계시지 않을 때에는 신통한 음식이 별로 없어요. 지금 내 시종이 오믈렛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찰스는 내가 데리고 간 라드라도르 개를 흘낏 쳐다보았지. 어머니가 여기 안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어머니가 키우는 코기 개들이 얼마나 사나운지 저 개를 보았더라면 샌드위치를 해 먹었을 거예요. 아주 지독한 놈들이죠. 찰스는 아주 상냥하지만 영리하지는 못해. 우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 겸손하다고 할 정도로 상냥하고 매너도 좋지만 찰스에게는 뭔가 한 차원이 빠져있어. 그는 자신이 총각의 생활 방식에 너무 익숙하고 또 몰입해 있다고 했어. 그런 생활에 적응하고 또 이해해 줄 아내를 찾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 그는 이렇게 말했어. 슬픈 일이죠. 어떤 여자가 이 모든 것을 참아주겠어요. '나의 이런 생활을' 점심식사를 마친 다음 내게 자신의 말 만틸라를 보여 주었어. 그런 다음 윈저 성에서 나왔는데 나는 전보다 더 미래의 영국 국왕을 보호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찰스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값나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