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꾼 의식 물론 연설가 히틀러의 성공 이유를 충동적이고 성적인 대용 효과를 노린 황홀 경만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은 실망하게 마련이다. 그의 특징인 도취상태와 합리 성이 여기서도 뒤섞여 이ㅆ. 무대 조명을 받으며 몸짓을 하고, 창백한 모습에, 거칠고도 낭랑한 음성으로, 미난, 외침, 증오의 수다를 터뜨리는 그의 언제나 자 기 감정을 냉정하게 통제하는 사람이었고, 그 모든 경솔함 가운데서도 자신의 본능에 일정한 방법을 부여한느 것을 방해받이 않앗다. 그것은 그의 모든 행동 방식을 특징짓는 이중성이었다. 그 이중성이야말로 그의 성격의 기본사항이었다. 이런 점에서 연설 기술은 합법화 전략과 같은 것이며, 뒷날 권력 쟁취의 방법, 혹은 외교상의 조작술과 같은 것이다. 그가 세웠던 정거ㅜ 자체도 이러한 모습 을 띤 것이었고, 바로 그렇기에 '이중 국가'라고 정의되었던 것이다. 계획적으로 훈련된 심리적인 제압기술의 합리성, 광범위하게 확대된 기술살의 도구들, 이런 것이 이 시기의 성공을 초기의 성공과 구분해주는 점들이다. 히틀 러의 성공은 언제나 그가 극단적인 한계까지 밀고나간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정상으로만 과격해진 것이 아니라 계산을 하는데 있어서 도 더욱 과격해졌다. 1920년 8월의 어떤 연설에서 이미 그는, 명료한 인식의 근거에서 '본능적인 것 을 일깨우고 채찍질하고 선동하는 것'(브라이팅레게 히틀러는 1931년 초에 이렇 게 말했다. "정신적인 싸움은 신념으로만이 아니라 이성으로도 이루어지는 법이 다. 대중에게 우리는 신념의 감정을 향해 호소해야 하지만 우리 지도부에서는 신념을 논할 자리가 업삳. 모든 것은 냉정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을 자신의 의 무로 삼았다. 그 뒤에는 이미 그 자신의 대중적 성공의 비밀에 대한 개념이 숨 어있었다. 그러나 곧 세계 경제 공황이라는 비할 바 없이 예민한 조건 아래서 이러한 통찰력은 그의 선동 스타일에 냉정하게 계삭해서 적용된느 방법을 만들 어내었다. 그것은 그가 모든 선전의 목적이라고 부른 심리적 '항복'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괴벨스에 따르면 선거전을 계획하면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항 목을 '가장 세부넉인 데 이르기까지 조직'하고 아무것도 우연에 내맡기지 않았 다. 노선, 투입되는 행진, 집회의 크기, 청중의 정확한 혼합 상태, 긴장을 고조시 키기 이ㅜ해서 깃발 펼치기, 행진곡 리듬, 열광적으로 외친느 하일 외침 소리 등 을 연출함녀서 연사의 등장을 언제나 일부러 늦추다가 갑자기 타오르는 조명을 받은 연사가 목말라 애태우며 현기증을 느낄 준비가 된 대중 앞으로 나서는 것 이다. 어젠가 당의 초기 시절에 히틀러는 오전에 집회를 계호기하였다. 홀에 사람이 가득 찼는데도 불구하고 이 청중들과 "매우 불행하게 전혀 어떤 결합도, 작은 접 촉도"이루지 못했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행사는 모두 저녁 시간으로 잡았다. 독일 비행의 기간에도 그는 가능한 한 이 원칙을 지켰다. 그렇지 않아도 밀집된 행사를 저녁 시간으로 모으는 일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들어냈다. 그 래서 슈트랄준트에 갔을 때처럼 때때로 그는 늦게 도착해서 새벽 두시 반뎡에야 겨우 모습을 나타낸 경우도 있었다. 4만 명의 청중은 거의 일곱 시간을 기다렸 다. 그가 연설을 끝내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처럼 공간에 대해서도 그 는 특별한 의미를 두었다. <ㅎ파르시팔> 공연이 이루어지는 동안 어두운 바이 로이트 축제 극장의 '신비스런 마법'이나 '카톨릭 교회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신비스런 어둠'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방해'하려 하는 선전꾼의 의도 를 한결 쉽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사고의 차단 그는 간혹 자신의 인식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러나 진실로 그런 모든 행사는 두 개의 대립하는 힘의 싸움을 표혀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그의 생각에 따름면 모든 싸움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선동꾼에게는 모든 제압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혀옹되어 있다. '사고의 차단' '최면상태' '광 신적 헌신에 의한 수용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공간, 시간, 행진곡, 조명, 대중 집회 등이 심리기술적인 투쟁의 수단이다. 히틀러는 해설하듯이 이렇게 설명하 엿다. 한 개인이 "스스로 작은 존재라고 느끼던 일터나 대기업에서 빠져나와서 처음으로 대규모 행사장에 들어서서 자기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수천 명의 사람 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면, 무엇인가를 갈구하면서 이 최면 상태, 열광상태의 강력한 효과 속으로 다른 3,4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휩쓸려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성공, 수천명의 공감이 이 새로운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주면, 그리 고 청므으로 이제까지 믿어온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는 벌써 우리가 대중 최면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의 마법과 같은 영향에 굴복한 것이다. 의지 력과 동경, 그리고 다른 수천 명의 힘이 각각의 개인 속에 누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의심하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런 집회장에 들어온 사람은 내면의 확신을 가진 상태로 집회장을 떠나게 된다. 근느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 그는 '모든 인간적 약점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자신의 발상법과 선동의 원칙들 에 '수학적' 성공의 확실성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두 번째 독일 비행을 하 는 동안 괴를리츠에서 연설을 하고 나서 조명을 받은 비행기가 밤하늘에서 수천 명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비행이 만들어낸 효과를 발견한 다음부터는 언제나 이 방법을 다시 사용하곤 하였다. 헌신과 지도자에 대한 동격의 분위기를 만들어내 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당 운동을 우해서 피의 증인들과 순교자를 베풀어주신 전능 자의 은총을 찬양하였다. 1차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다음에 그는 당 기관지를 향해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고, 자율적이자 못하고, 미지근하고 정열이 없다."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돌격대원들의 죽음에서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질 문했다. 어떤 참석자가 그의 말을 기억한 것에 따르면, 자시들은 죽은 동지들을 "북치고 피리 불며 파묻었다. 그런데 어째서 깨진 두 개골, 칼로 ㅉ긴 피투성이 셔츠 등을 당 기관지의 진열창에 내놓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 신문들은 그 멍청한 정치적 헛소리를 떠드는 대신, 죽은 사람들의 관 옆에 몰려든 민중을 선동하고, 살인자와 그 조종자들에 대하여 반항하도록 부추기지 않았던가? 장갑 순양함 포템킨의 선원들은 나쁜 음식물에 대한 반감으로 혁명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우리는 동지들의 죽음을 가지고 국민적 해방 전쟁을 만들 수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들, 그의 모든 심리적인 정열은 언제나 다시 대중 집회 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것은 "작고 가여운 인간에게 작은 벌레가 거대한 용의 한 부분이 된 것 간은 자부심에 찬 신념을 만들어낸다. 그 용의 빛나는 숨결 아래 서 증오스런 시민세계는 불꽃 속으로 날아가버릴 것"이라고 했다.(이 발언은 물 론 히틀러의 수많은 전략적 인식들이 그렇듯이 마르크스주의 적을 향산 것이었 다. 그러나 이것은 말솜씨였을 뿐이다.) 전략적이고 제의적인, 언젠나 똑같은 질 서를 행사진행의 바탕에 깔았다. 점점 더 효과적으로 자신의 출현을 드높이기 위해서 그 질서를 이용하였다. 깃발, 행진곡의 박자. 기대에 찬 외침이 대중을 점점 더 자극적인 불안으로 몰아넣는 동안 그 자신의 극도로 예민한 상태로, 쉬 지 않고 광천수를 마시면서 호텔 방안이나, 당 사무소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짧 은 간격으로 홀 분위기를 보고받았다. 이따금 그는 마지막 지시를 내리거나 악 센트를 담은 전달문으 ㄹ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드물지 않게 대중의 초조감이 가라앉고 인위적으로 드높인 발작적인 분위기가 마비되려고 할 때쯤에야 일어서 곤 하였다. 자기최면 그는 긴장을 높이는 긴 과정을 생각하고, 완전히 뒤에서 부터 연단에 등장하 곤 하였다. '바덴바일 행진곡'을 독자적인,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입장음악으로 삼 았다. 그 음악이 멀리서 그의 입장을 알리며 울리면 속삭임이 가라앉고 사람들 은 팔을 쳐들고 허공을 향하여 외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증 의미를 이용 하여 행복한 존재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그'가 나타나 것이다. 당시의 수많은 영상들은 그가 발을 구러며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타리 사이로 조명등을 받으면 서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괴벨스가 적은대로 "살아있는 사람들로 이루어 진... 개선의 길을 통과하여" 등장하는 모습니다. 앞에는 드물지 않게 여자들이 있고, 그 자신은 고독하고, 폐쇄되고, 영적 유린을 향한 욕망으로 도취된 모습니 다. 그는 자기 개인만 쓰는 도입연설아나 인사말을 거부하였다. 그는 연단에 서 서 한순간 기계쩍으로 손을 흔들면서 넋나간 모습으로, 쉬지 않고 눈길을 움직 이면서 대중의 회침 속에서 나타난 힘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밀려 올라가려고 한다. 자주 몇 분 동안의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지 집중을 위한 정적이 계속되고 난 다음 최초의 말이 둔하게 쓰다듬듯이 정적 속으로 퍼져나간다. 시작부분은 단조 롭고 진부하고, 대개는 초기 시절의 전설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1918년 이름 없는 병사였을 때... "이런 시작은 그가 후각을 곤두세우고 스스로 조율할 수 있 도록 도와준다. 그러다가 누군가 내지르는 외침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 하나의 답변, 날카로운 언급이 나오면 열렬히 기다리던 최초의 박수갈채가 터져나오고 그것은 상호접촉을 마련해 준다. 그는 격양되어 도취상태에 빠저들고, 어떤 관찰자가 언급한 것처럼 "약 15분 쯤 지나면 옛날의 어ㅜ시적인 비유를 이용해서 표현 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난 다. 즉 정령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거칠고 폭발적인 움직임과 함께 쇳 소리로 변한 음성이 가차없이 절정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그는 말들은 마구잡이 로 토해낸다. 귀신을 부르듯 열광에 사로잡혀서 두주먹을 얼굴 위로 치켜올리고 눈을 감고 대체 성행위의 흥분 상태에 완전히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의 연설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것이고, 언제나 앞에 놓여있는 메모를 철저하 게 지키는 편이지만 근본적으로 대중과의 긴밀한 의사소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시적으로 그의 추종자 노릇을 했던 어떤 사람의 눈에는 마치 그가 청중의 감 각을 호흡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비상한 민감성을 그의 주 변에 확실한 여성적 후광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민감성은 청중과의 밀교적인 결 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청중은 성서의 의미로 '그를 보고 자신을 아는' 것 이다. 그가 대중의 가장 비밀스런 움직임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혼란스런 상태 를 모범적인 방식으로 자기 안에 지니지 않았더라면, 심리적인 예민함도, 집회를 연출하는 합리성도 그에게 그토록 엄청난 마법의 힘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중은 그의 연단 앞에서 만나 자신을 축하하고 자신을 숭배하였다. 그것은 병 적인 만남이엇고, 도취된 억압의 축제에서 개인적 위기의식과 집단적 위기의식 의 한판 만남이었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어떤 집회에서나 그 집회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말하였 으며, 진짜 내용은 극히 표피적으로만 건드렸다는, 언제나 되풀이된느 주장이 정 확한 것이다. 근느 기회주ㅇ거인 대중적 말재주꾼이 아니라 제압, 공포, 증오란 느 수많은 감정들을 위한 입이엇다. 근느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정 치적 동력으로 바꾸었다. 미국인 기자 니커보커는 뮌헨의 대중집회가 끝난 다음 이렇게 표현하였다. "히 틀러는 혼란스럼게 이야기했다. 그는 거대한 집회에서 설교한느 전도사였다. 도 이치 정계의 빌리 선데이(미국의 야구 선수, 복음 설교가)다. 그가 개종시킨 사 람들은 그와 함께 가고 그와 함께 웃고 그와 함께 느꼈다. 그들은 그와 함께 프 랑스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와 함께 공화국에 야유를 보냇다. "그러한 결합에서 그는 "자신의 노이로제를 일반적 진리로체험하고, 집단 노이로제를 자신의 강박 관념에 대한 공명의 근거로 삼았다. "그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토록 자신의 성 과에 매달렸다. 연설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박수 갈채가 필요하였다. 홀 안에 한 줄기 반대의 분위기만 있어도 방해 받았다. 처음부터 그가 어디에 등장하든지 항상 데리고 다녔던 돌격대는 질서를 유지한느 역할만을 한 것이 아 니라 모든 반대와 저항의 느낌을 숨죽이게 만들고 협박을 통해서 환호성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불친절한 청중을 만나면 곧바로 연설의 실마 리를 잃어버리고, 연설을 중단하고 즉석에서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는 보고가 여 러개나 된다. 그는 극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중의 환호성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환호성 은 그를 일깨우고, 그를 긴장상태로 잡아두고, 계속 앞으로 나가게 했기 때문이 다. 그는 이런 소란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역사가 칼 알렉산더 폰 뭘러는 자신의 교욱과정에 참가했던 히틀러의 초기 연 설을 보고, 그가 청중들에게 흥분을 전달하고, 청중의 흥분이 그에게 다시 목소 리를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앗다. 물론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고, 유능한 권력 조직 자이며, 정확한 심리학자엿다. 온갖 단절, 빈자리, 열등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엇 지만 당시늬 비상한 공공 현상의 하나였다. 그를 온갖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저 이겨내기 어려운 천재성을 그는 대중과의 결함에서 얻었다. 평범한 것을 강력한 예언적인 구상으로 끌어올리고, 자신을 지도자로 변화시켰다. 일상적인 상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은 그에게 언제나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기본상태 는 무감동이고, '오스트리아식의' 피로감에 물든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 모든 게으름, 칼튼 찻집의 '즐거운 과부'와 초콜릿 케이크, 혹은 끝도 없는 건축 이야 기 등으로 만족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둘러싼 대중의 시끌벅적한 혼동이 야말로 그에게 저 영원한 의지의 행동을 위한 충동력을 부여하였다. 의지력은 그에게 행동의 기쁨, 지속성, 확고한 공격성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시끌벅적한 혼란 상태는 그가 쉬지 않고 필요로 하는 마약이었다. 1931년 10월 초에 처음으로 브뤼닝과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그는 수상의 자 세한 설명이 끝난 다음에 한 시간동안이나 말을 계속했는데 말하는 동안 점점 더 격렬해지고 거침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미리 돌격대에게 일정한 간격 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창 밑으로 행진해 가라고 명령을 해놓고 그들의 소리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므뤼닝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자신의 마음 을 충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대중의 추종동기 히틀러를 효과적인 선동가 이상으로 만드로, 예를 들면 요점을 잘 찍어서 사 람들을 휩쓸어가는 괴벨스에 비해서 확실하게 우위를 확보해준 것은 바로 대중 과의 이런 깊은 결합이었다. 선거 유세를 위해서 비행기를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이러한 배경에 놓고 보아야만 그 재치를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등장하는 곳 마다 메시아적인 빛을 던졌따. 히틀러는 여러 시간이나 끈질기게 기다린, 부글부 글 끓어오르고 있는 대중 위에 구원자처럼 내려와서 그들을 둔감과 절망감에서 끌어내어,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앞으로 밀어주는 히스테리'로 데려갔다. 괴벨스느 이런 집회를 '우리의 정치적 작업의 예배의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떤 함부르크의ㅣ여고사느 1932년 4월에 12만명이 모인 선거유세장을 찾은 다 음에 히틀러가 "도움을 주는 사람, 구원자의 모습으로, 지나치게 커진 곤궁에서 해방시키는 사람"으로 등장했을 때의, '사람을 사로잡는 경건성'을 서술하고 있 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동생인 엘리자베트 푀르스터 니체는 히틀러가 바 이마르를 방문한 다음 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사람이 라는 인상'을 받앗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게 하고, 그의 승리의 상승을 가능케 했던 것은 이념 적 요소들이 아니라 이런 형이상학적인 특징들이었다. 히틀러의 대중적인 성공 은 무엇보다도 종교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오히 려 영적 상태로 보였다. 히틀러는 분명히 전통적인 사고와 반응방식의 확장된 체계와 결합할 줄도 알 고 있었다. 즉 권위에 대한 도이치의 애착, 비현실적인 사고 형성의 경향과, 깊 은 복종의 필요성, 정치에 대한 독특한 무관심 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반적 인 접속 지점의 바로 뒤에서 벌써 일체감은 대개 끝나게 마련이었다. 히틀러의 증오와 구호에 공명한 것은 무시무시한 도이치의 반유대주의ㅣ가 아니었다. 그 는 다만 눈에 보이는 적이라는 공격대상을 다시 붙잡은 것뿐이다. 그가 모아들 인 것은 아주 독특한 도이치 사람들의 전투정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자기 존경, 민족적 자존의 감정이었다. 대중은 그가 제약없ㄴ느 제국주의적 욕구 를 우크라이나 평원의 모습들로 유혹하였기 때문에 그를 따른 것이 아니였다. 역사에 다시 동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그를 따랐다. <나의 투쟁>이 엄청난 부수로 발행되엇지만 실제로 그것을 읽은 극소수의 독자층은 히트럴의 구체적 강령에 나타나는, 이념에 대한 지속적인 무관심을 지적하곤 하였다. 사람들이 종종 회고하듯이 국가사회당의 상승과 권력 획득은 제국주의와 반유 대주의라는 목적을 내걸고 도이치 사람들이 세계에 대항한 음모가 아니었다. 대 중 동어ㅜ 시적의 히틀러의 연설을 특이할 정도로 구체적인 의도표명이 적었다. 그리고 그의 이념적인 고정 지점인 반유대주의와 생존공간에 대해서도 이상할 정도로 소홀히 취급된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공허하고 일반적인 주제, 세계 관과 무관한 은유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잡히는 목표라는 점에서 그의 연설들은 <나의 투쟁>의 공개적인 태도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엇다. 히틀러 자 신이 2차 세계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위기 한가운데 서, 자신이 여러해동안이나 무해정책을 펼쳤다고 고백하였다. 상황이 자신에게 평화의지라는 가면을 쓰도록 강요하였다고 밝혔다. (1938년 10월 10일자 국내 언 론계의 주간들에게 행한 히틀러의 연설. 골드 만은 때때로, 1930년 선거들을 위 한 히틀러의 선언은 빽빽하게 인쇄된 13쪽에 국가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온갖 적들과 배신자들을 차례로 나열하고 있지만 단 한마디로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곤 하였다.) 위대한 연설가의 자의식을 가지고 그는 점점 더 내용과 구체적인 개념성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고 형식에 치중하였다. 지속적인 성공은 국가사회주의가 얼마 나 카리스마적인 운동이고, 얼마나 이념적이지 않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강령이 아니라 지도자를 바라보는 운동이었다. 지도자를 통해서 비로 소 불명확한 이념 혼합이 윤곽과 맥락을 얻었다. 그는 이념이 둔하고 혼합된 상 태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음조이고, 최면 을 거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남아잇는 동경과 주도적인 꿈들을 분명하 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에게 환호성을 올린 사람들 다수는 그의 연단 앞에서 자기들의 피로와 자기들의 공포를 잊으려고 했다. 민스크나 키에브를 생각하지 않앗고, 분명히 아우슈비츠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무엇보다도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랐다. 정치적인 고백은 현존하는 것의 맹목적인 거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구호와 표어들 좌우익의 모든 경쟁자들보다 허ㅜ씬 날카롭게 히틀러는 이러한 부정의 심리에 들어 있는 가능성들을 인식하였다. 그의 선동가적인 전략은 중상과 전망, 현실에 대한 증오스런 트집잡기, 그리고 강력한 미래의 약속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강한 국가 찬양, 국민 추켜올리기, 민족의 재탄생요구, 정치적인 행동의 자유 등이었다. 특별히 그는 도이치 통일의 필요선을 역설하엿고, 국민의 '자기 해체'를 탄식하였다. 계급투쟁을 '열등한 자들의 종교'라고 부르고, 구각 사회주의 운동을 '국민의 가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이치 사람들이 언젠가 다시 세계의 '문화 비료'가 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일깨웠다. 자기 흥분과 대중 동원의 수단이 되는 그의 본래 주제는 현실의 평가절하하였 다. '독일의 폐허', 국민의 비참, 공산주의의 위험, '정당국가의 반자연적인 음탕 함' '소규모 저축자의 비극', 배고픔, 실업, 자살 등이었다. 일부러 일반적인 형식 을 취한 비참의 서술은 그의대중적인 성공의 가장 큰 공통 분모를 마련해주었던 것만이 아니다. 히틀러는 또한 정확한 의도표명이 정당의 내적인 분열을 일으키 며, 목표를 불확실하게 해야만 정당 운동의 추진력이 오히려 커진단느 사실을 인식하였다. 대중, 그리고 최종적으로 권력은 현실의 가장 과격한 부인을 가장 불명확한 미래의 약속과 결부시키는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특이하고도 수없이 변화해온 상과 대립상, 저주와 유토피아를 결합시켰 다. "우리 민족이 서른 개 당으로 찢어져 있다면, 그리고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면 그것이 도이치일까요? 이 모든 슬픈 정치갇르에게 나는 아ㄹ게 말하고 싶군 요. '독일은 단 하나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 영웅적인 위대한 민족의 정당이 되 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동시에 현존하는 것에 대한 엄격하고 선동적인 구호는 단순화의 기회를 그에 게 주었다. 그는 이러한 단순화가 바로 자신의 성공의 이유이며 나아가 자기 원 치ㅣ의 확실한 확인이라고 보았다. "모든 선전은 민속적으로 되어야 하며, 선전 의 정신적 수준은 가장 능력이 제한된 사람의 숭요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원 칙이었다. 1932년 3월의 연설에서 나온 한 구절이 하나의 예를 보여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이 정권이 13년이나 유지되었으면서 오직 '파국의 결과들'만을 민들어냈다 고 비난하였다. 혁명의 시절에 시작하여 질곡과 노예의 시절까지, 조약들과 비상사태의 시대 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실수에 실수, 붕괴에 붕괴, 비참에 비참이 쌓이는 것을 보 았으며, 낙담과 무기력, 희망 없음이 파국의 이정표였습니다... 농부들의 상태는 오늘날 바닥까지 떨어졌고 생업으 붕괴되고 수백만이 저축한 돈을 잃어버렸고, 이전에 위대하였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 이라면, 이 불행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과 정당들입니다. 그들으 오늘 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되풀이되고 변조된,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러한 고발 형식들, 저항을 부채질하는 구호들, 조국, 명예, 위대함, 권력, 복수 등 애매한 처 방들을 가지고 그는 대중의 힘을 한데 모았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고발하면서 만들어내는 혼돈을 감정의 흥분이 지속적을 부추기도록 신경을 썼다. 그리고 현 존하는 사정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체제에서 모든 역 동성이 발전해 나와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 무도 변화에 대한 점점 더 커지는 욕구를 그보다 더 믿음직하고, 확고하고, 대중 적으로 요약해낸 사람은 없었다. 1932년 초에 베를린을 방문하고 나서 헤럴드 니콜슨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절망해서ㅓ '대안처럼 보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정도'라고 일기에 적었다. 사회적인 추진력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히틀런의 불확실한 선동은, 모든 사회 적인 갈등을 넘어서 대립들을 말로 덮어싸야 할 처지로 그를 몰고갔다. 베를린 의 프리드리히 숲에서 자정에 행해진 히틀러의 연설에 대해서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거기에는 모든 사회 하ㅌ민들이 모였다. 그들은 지도자의 연설에 완전 히 감동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주 잘 나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중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어마이스터라는 교수는 그를 '도이치 예술가 들의 후보자'로 추천하였고, '인간을 사로잡는 그의 연설기술의 심정의 소리'를 찬양하였다. 지방 연합 지도자들과 국경 지방의 귀족 지도자들 앞에서 히틀러가 두 시간 동안 위기, 이익, 사회적 갈등 등을 다룬 연설을 하고 났을 때 어떤 지주는 '모 두의 이름으로'토론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방금 들은 것을 머리 속에서 신 성하게 만들어야 할 시간에 다른 것으로 방해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했 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을 충심으로 받아들여 줄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론자들 과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으며, 하늘 나라도, 한 국가도 기습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댔다. 그의 표어들, 정충적인 철학 나부랭이, 날카롭게 기초를 만든 감정들을 긁어 보아 놓으면 누구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기서 찾아낼 수 있었다. 두려워하 는 시민층은 질서와 사회적 세력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혁면적인 젊은 세대는 새롭고 낭만적인 사회의 수강을, 도덕을 잊은 노동자 계층은 안전과 빵을, 십만 군대는 경려과 화려한 제복의 전망을 얻었다. 지식인들은 이성 경시과 생의 우 상화라는 유행하는 분위기에 대한 대담하고 생생한 답변을 얻었다. 이러한 다양 성은 사방을 향한 거짓말보다는 오히려 비정치적인 기본음조를 잡아내는 능력에 기초한 것이다. 나폴레옹처럼 그는 누구라도 자신의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자기 가 권력을 장악하는 날 그 어떤 희망이라도 자신의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자기 가 권력을 장악하는 날 그 어떤 희망이라도 걸지 않을 계층은 없다고 말 할 수 있었다. 1932년은 의심의 여지 없이 히틀러가 연설가로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시기였 다.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 따르면 그보다 이전 시기에 개별적인 집회에서는 더욱 풍부하고, 믿음이 가는 연설을 했으며, 뒷날 수상시절, 완전히 제의적인 대 중집회에서 거의 측량할 수도 없이 수많은 대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구 원의 열망,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전향력에 대한 의식, 하나의 ㅣ목적을 향한 극 단적인 긴장, 고통스런 비참의 배경을 앞에 놓고 자신이 선택받았단느 믿음이 그토록 '연금술적인' 결합 상태에 이른 것은 없었다. 히틀러에게 이 시기는 깊은 인상을 새겨넣는 원초적 체험의 시기였다. 그것은 언제나 되풀이해서 그의 결정 에 영향을 미쳤다. '영웅 서사시' '싸워서 극복해낸 지옥', 혹은 '거인들간의 싸움' 이라고 찬양되는 '투쟁시기'의 신화 속에 이러한 감정이 살아남았다.(히틀러가 전 쟁중에도 특히 두 번째 국면에서 후퇴를 앞에 놓고 이 투쟁 시절에서 어느 정도 의정보와 자신간을 얻었던가 하는 것은 뚜렸하게 나타나고 잇다.) 집회의 결말부분은 조심스럽게 계산된 시작부분의 제의 의식과 잘 어울렸다. 악단은 소란과 환호성 사이로 독일 노래나 당 찬가 하나를 연주하였다. 그것은 종결과 동감의 인상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히틀러가 전신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아직도 마비되고 긴장돤 모습으로 그 장소를 떠나서 기다린느 자동차에 올라 탈 때까지 모여든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역할도 하였다. 그는 대중이 모려들거나 돌격대나 친위대가 넓은 종대를 이루어 횃불 행진을 하는 동안 운전기사 옆에 서서 인사하고, 기계적으로 미소짓곤 하였다. 그는 피곤하고 힘이 빠지고 탈진한 채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위대한 대중연설을 한 다음 집회의 과도한 분위기를 마무리 짓는 어지러운 감정 탐닉에 빠진 상태였다. 이러한 순간에 그가 조용하 게 초점 없는 눈길로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어떤 관찰자에게 부관인 브뤼크너가 길을 막아서면서 "그분을 놔두십쇼. 완전히 지쳤어요!" 하고 말했다. 관구 지도자 한 사람은 이런 연설이 있은 다음날 아침에 호텔 방안에 그가 '고독하게, 등을 구부린 채 피곤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둥근 탁자에 웅크리 고 앉아서 천천히 야채 수프를 떠먹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선거결과 히틀러는 자기가 불러 일으킨 선동효과만으로 권력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프 로이센의 주의회 선거에서 국가 사회당은 36.3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지금까지 의 사회 민주당과 온건파 정당 연합정권을 물리쳤다. 그러나 절대 다수를 얻지 는 못했다. 그것은 석달 뒤인 7월 31일 의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은 230 석을 얻어서 지금ㄲ의 의석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고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히틀러가 확장 가능성의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중도파와 우파 시민 정당들에 큰 손실을 주었거나 부분적으로 흡수해 버렸지만 그래도 중신으로의 진출은 아직도 막혀 있었다. 엄청난 선거 비용, 끊임없는 대중 집회, 행진, 벽보와 삐라 부착, 당 연설가들 은 지쳐빠지도록 투입하고, 히틀러 자신도 세 번째 독일 비행에 올라ㅆ. 그는 보 름 만에 50개 도시에서 연설하였다. 이모든 일들은 프로이센 지방의회 선거에서 당에 1퍼센트의 득표 증가를 가져다주었을 뿐이었다. 이미 당시에 괴벨스는 이 결과에 대해서 이런 주석을 붙였다.. "이제 ㅁ무슨 일인가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 는 짧은 시일 내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선거에서 이겨 서 죽을 것이다. "(그밖에 7월 선거가 끝난 다음 의회내 국가사회당 소속 의어ㅜ 들의 구성도 흥미롭다. 230명의 의원들 중에는 노동자와 봉급 생활자들이 55명, 농부 50명, 상업, 기술, 산업계 대표자 43명, 당직자 29명, 공무원 20명, 교사 12 명, 전직 장교 9명 등이었다. ) 이러한 기대에 대해서 곧 최초의 연결점들이 나타났다. 순수한 긴급사태 체제 로 넘어가면서 특히 재선 이후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몇 명의 개인들에게 자신 의 직책을 맡기다시피 했다. 그리고 점점 더 뚜렸하고 멋대로 자신이 바라는 것 이 곧 국가의 복지라고 여겼다. 몇 명의 무책임한 조언자들에 의해서 그러한 생 각이 뒷받침되었다. 그들 중에는 그이 아들 오스카도 있었다. 당시의 인기 있는 유행어에 따르면 '헌법에 안 나오는 인분'이었다. 특히 비서관인 마이스너와 슐 라이허 장군, 젊은 보수파 의ㅣ어ㅜ 게레케 박사, 혹은 힌덴부르크의 이웃 영지 의 주인인 폰 올덴부르크 야누샤우 등이었다. 그는 황제시대부터 '반동적 촌뜨 기'역을 해왔고, 예를 들면 언제라도 한 명의 소위와 열며의 병사로 의회를 해산 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단느 따위의 주장으로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던 인물이었 다. 그 밖에 몇 명의 동 프로이센 귀족들, 뒷날엔느 프란츠 폰 파펜도 그중에 들 었다. 다음 몇 달은 그들의 배후 작용 시기였다. 그들의 동기와 이익을 결정하는 것 은 언제나 분명하지 않았다. 강력하고 도전적인 덩어리처러머 히틀러는 정치무 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하였다. 그들의 의도는 그를 자기들에게 합류시키고, 좌익 에 대한 위협 수단으로 이용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식 독일이 망상적인 오 만에 사로잡혀서, 역사에 잃어버린 역할을 되찾으려고 애쓴 최후의 시도였다. 여러 가지 음모 그들의 최초의 희생자는 아이러티컬하게도 브뤼닝이었다. 수상은 대통령의 후 원을 믿고서, 저 '강력한 인물' 중 몇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적인 히틀러 는 바로 그들의 호의를 받아서 그토록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정부는 여러 모로 나타나는 산업계의 요구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산업 계는 점점 더 심하게 정부에 등을 돌려ㅆ. 이제는 힌덴부르크와 계급상의 동지 인 지주들도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들은 특히, 어려움에 빠진 영지의 수익성에 따라서 물질적 지원 여부를 결정하고, 희망없을 정도로 빚을 많이 진 영지들은 실업들 완화시키기 이위한 대규모 신도시 건설에 이용하려고 하는 브뤼닝의 의 도에 분개하였다. 곧장 이익집당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어서, 수상이 볼셰 비즘 사상을 품고 있다는 빈나까지 나왔다. 늙고 판단력이 흐렴진 대통령에 대 한 여러 가지 압력들을 개별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브뤼닝과 결별하 려는 대통령의 결심에 일조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이 재선과정에서 자신을 엉뚱한 진영과 대립하도록 만든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주변의 속삭임까지 가세하니 자기가 빠져들었던 깊은 개인적인 갈등을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브뤼닝은 군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슐라이허의 신임 을 잃어버리자 곧 정치적인 종말을 맞았다. 이 사건은, 정부의 활발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통치활동 내부의 감추어 진 대립이 밖으로 드러나고, 그와 함께 공화국 최후의 비명에 도니 돌격대와 친 위대의 금지령으로 대두되었다. 복스하임 문서가 발견되면서 국가사회주의자들 이 폭력적인 국가전복도 고려하고 있다는 새로운 근거가 노출된 셈이었다. 당 군대는 점점 더 초조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행동을 하였다. 히틀러는 이중 성을 가진 합법화 전략을 따르면서 때때로 걱정하는 듯한 태도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색 셔츠 부대를 잡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루덴 도르프는 흥분해서 간혹 독일을 '돌격대 점령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차 대 통령 선거 이틀 전에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돌격대와 친위대 지휘 부와다음 며칠 동안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 논의했다. 어디나 불안 뿐이다. 쿠데 타라느 말이 유령처럼 떠돈다. " 선거일에 룀은 돌격대 부대에 경계령을 내리고, 베를린을 갈색 셔츠로 포위해 버렸다. 프로이센 경찰은 몇 개의 돌격대 조직 중심들을 뒤지다가 중요한 문서 를 찾아냇다. 그것은 대규모의 반역 행위는 아니지만 히틀러의 당선이 확실한 경우를 위한 세부적인 경계조치와 행동 조치들을 지시한 것이었으며, 구데타 암 호 '할머니가 죽었다'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침공해올 경우에 국토 방위 참가를 거부하라는 명령이 동부지역 돌격대에 내려진 사실도 밝혀졌 다.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발견이었다. 몇 개 지방 정부 의 성급한 재촉에 따라 제안된 돌격대와 친위대의 금지령은 만장일치로 결정되 었으며, 이 결정은 오랫동안 품고 있었으면서 언제나 미루어 온 생각들을 종결 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금지령이 내려지기 며칠 전에 몇가지 사건이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하 였다. 금지령에 찬성하고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냈다고 자랑하던 슐라이허가 '하 룻밤 새' 모든 생각을 뒤집고, 금지령이 내려지지 않도록 쉴새없이 반대 활동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반대 활동에는 곧 힌덴부르크 대통령까지 연루되었다. 슐라 이허는 대통령에게 금지령으로 이미 실망한 우익측 추종자들에게 더욱 인기를 잃게 되리라고 암시했던 것이다. 슐라이허의 반대 행동은, 돌격대와 함께 예를 들면 철모단과 공화국에 충성스런 국기단 같은 모든 군대 조직을 해체하고, 대 규모의 민방위군과 군 스포츠 연합을 만들어서 공화국 방위군의 하부조직으로 삼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아가서 이런 행동은 과 격한 금지는 싫고 더욱 섬세하게 일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음모꾼 같은 성격과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히틀러에게 돌격댈르 탈군대화 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요구들을 하였는데, 그러한 요구들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어서 돌격대가 그것을 거부하면 히틀러가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될 만한 것들이었다. 어느 정도 주저하면서, 그리고 돌격대와 친위대에 근무한느 자신의 '옛전우들' 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금지령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4 월 14일에 경찰이 대대적인 활동을 한느 가운데 히틀러의 개인군대는 해체되고 사령본부, 막사들, 학교, 병기창고 등이 점령되엇따. 그것은 1932년 11월 이후 국 가사회당에 대하여 국가공권력이 내린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 개별적인 인물들 이 아니라 개인 군대의 존재 자체가 금지령의 동기라는 당국의 설명은 오래간만 에 다시 국가의 자기 주장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조직된 권력을 유지한느 것 은 오직 국가만이 가지는 권한이다. 개인이 그러한 권력을 조직하고 국가가 이 것을 용인하면 그것은 이미 평화와 질서를 위ㅣ태롭게 한다... 권력국가에서 군 사력은 국가 헌법에 맞는 조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적인 군대 조직은 본질적으로 합법적인 조직이 될 수가 없다... 해체 조치는 국가 유지 자체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 룀은 처음으로 자신의 40만 군대의 공격성과 힘에 의지해서 실력행사를 햅보 이려고 결심했던 듯하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곧 이 어서 그는 돌격대를 정치 기구 안에 흡수하였고,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에 손상 을 입히지 않았다. 파시즘 운동은 국가의 최초의 저항을 받으면 벌써 힙없이 싸 움터를 비운다는 사실이 다시 입증되었다. 1920년에 이탈리아에서 카브리엘 디 눈치오가 대포 단 한 방 쏘아서 퓨메시를 소탕하였던 것처럼 히틀러도 합법화 전략에 따라서 금지 조치에 가장 엄밀하게 복종하였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총 한 방은 총 한 방 이상이 될 것이고, 금지령은 제한된 방어조치와는 다른 것 이었다. 그것은 보수파 지배와 혁명적인 민족 운동의 결합체인 '파시즘 정국'의 무력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슐라이허나 그의 측근에서, 정부 내에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는 정보를 히틀러 에게 보내왔기 때문에 그는 아심하고 기꺼이 굴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근느 자신의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는 아주 여유 있게 행동하였다. 히틀러 운동 을 제압한 조치가 내려진 그날 저녁에도 괴벨스는 황제궁 호텔에서 히틀러와 나 누었던 대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ㅜ력을 떠맡게 도리 경우의 인 사문제를 논의하였다. 마치 우리가 이미 정부 내에 있는 것처럼, 내 생각으로는 어떤 운동이 성공의 반대편에서 이토록 자신만만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브뤼닝의 몰락 벌써 이튿날로 힌덴부르크가 그뢰너 국방장관에게 특별히 냉랭한 글을 써보낸 것은 대규모 음모의 신호였다. 이 음모는 법률지들의 열렬한 캠페인과 함께 이 루어졌는데, 이러한 캠페인에 민족주의 진영의 유력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합류 하였다. 황태자는 국방 장관이 "돌격대와 친위대에 소속되어 가치있는 교육을 받 고 잇는 놀라운 인적자원을 파괴하려는"일을 돕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 다.. 슐라이허는 자신을 언제나 '양자'처럼 대우해준 직속장관에게 사퇴를 권고하 였다. 그리고 악성 비방을 퍼뜨리거나 어쟀든 적어도 이런 비방을 반박하지 않 았다. 그뢰너 장관은 병들어 있으며 평화주의자다, 혹은 두 번째 결혼에서 아이 가 지나치게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군대가 악성 루머에 빠제게 되었다는 따위의 비방들이었다. 대통력에게 슐라이허는, 이 아이는 방위군 안에서 핀란드 달리기 선수의 이름을 따서 (아이가 너무 빨리 나와서) '누르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설명하였다. (에센부르크는 '제국 지도부의 기능'은 이 시점까지는 브뤼닝, 그뢰 너, 슐라어허, 힌덴부르크 사이의 인간적인 이해에 상당히 기초하고 잇었음을 지 적하였다. 독신상태가 상호의존의 정도를 강화시켰다." 그뢰너가 재혼하면서 이 관계가 깨졌다. "그뢰너와 슐라이허는 이제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어졌고, 생각 을 교환하는 정도와 따라서 신뢰 관계가 차츰 멀어졌다. " 마찬가지로 힌덴부르 크에 대해서도 눈에 띄게 멀어졌다. 너무 일찍 태어난 아리고 인해서 그뢰너에 대한 온갖 비난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힌덴부르크와 그의 친구들에게 있어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도덕적인 규범도 포함해서 몰락의 징조였다. 이토록 부도 덕한 시대정신에 그뢰너까지 굴목한 셈이었다. 1931년 7월에 슐라이허도 결혼했 다. 그것도 자기 때문에 이혼하게 도니 장군의 부인과 결혼하였다. 이것도 힌덴 부르크의 엄격한 도덕심을 손상시켰다.) 동시에 슐라이허는 국가사회당 지도부에 자신은 개인적으로 돌격대 금지령에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국가 사회당을 권력에 참여시켜서 그 번개를 뺏을 생각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말처럼 영향력 있는 전문가들의 내각으로 그들을 '포위하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개인 군대까지 거느 린 호민관에게 이런 마법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솔리니가 보여주 기도 했으련만 그렇게 생각하였다. 4월 말에 그는 히틀러와 최초의 협상을 하였다. "대화는 상당히 잘 진행되었 다."고 괴벨스는 적었다. 곧 이어서 마이스너가 오스카 폰 헨덴부르크까지 합세 한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것이 잘돼 간다...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브뤼닝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행복 한 느낌." 드러나지 않도록 안에서 붕괴시키는 작업을 약 한 달쯤 한 뒤에 사태는 결정 되었다. 5월 10일에 그뢰너는 의회에서 우파의 분노한 공격에 맞서 돌격대 금지 령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연설 재주도 없는 그가 '국가 속의 국가'이고, '국가에 맞선 국가'인 국가사회당에 반대한는 항의를 시작했지만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일 으킨 분노의 소동에 밀려 시작부분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였다. 어찌할 바 모르 고 혼란에 빠진, 이미 지쳐버린 장관과 더불어 그가 시작하였던 군사령관인 하 머슈타인 장군이 그에게 항명하면서 그는 방위군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퇴임해야 한다고 알였다. 그뢰너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호소하려 했으나 아 무 소용도 없다 이틀 뒤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들 도안의 계획에 의하면 어차피 그것은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외투를 잡아당겼으니 당연히 그 외투를 입고 있던 공작도 딸려나올 형편이였다. 5월 12 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거의 2주 일정으로 노이데크로 출발하였다. 브뤼닝이 면담을 요청하자 대통령은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절하였다. 대통령은 이때 분명 히 자신의 계급동지들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흔들리는 수상의 지 위를 맹공격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였든 그것은 대지주들과 늙은 장교들의 완고한 태도로 정직성과 원칙에 대한 고려 없이 나온 이유들이었다. 힌덴부르크가 5월 말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수상과 결별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브뤼닝은 외교상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월 30일 그가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 직전에도 군비축소 문제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약속해주는 정보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음모로 가득 찬 보고서는 마지막 순간에 그 가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보고할 기회를 막아버렸다. 일년 전만 해도 힌덴브르 크는 브뤼닝이 자신의 마지막 수상이다. 자신은 그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욕적일 정도로 짧은 겨우 몇 분 간 면담한 상태 에서 해임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소카게락 전투일을 기념하는 수병의 행진을 참 관하려고 하였다. 전쟁기념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군대행사가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색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군축협상에서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단느 정보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는 브뤼닝이 그것을 지나치 게 평가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프란츠 폰 파펜 브뤼닝의 후임으로 슬라이허 장군은 대통령에게 정치경력이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던 어떤 남자의 이름을 들먹였다. 프란츠 폰 파펜은 오래된 베스트팔 렌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봉건적인 기병연대에서 근무하였고,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대사관 무관으로서 음모사건에 연루된 탓으로 미국에서 추방되 었을 때에 처음으로 어느 정도 일반에 알려지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솔하게도 자신의 비밀 활동에 대한 중요한 서류를 영국 관리에 게 넘겨주고 말았다. 자르의 중요한 산업계 인사의 딸과 결혼을 해서 그는 상당 한 정도의 부와 중요한 산업계 인사들과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카톨릭 귀족으로서 고위 성직자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예전에 총사령부 장교였던 까닭 으로 방위군에도 다양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수많은 이익 집 단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슐라이허의 관심을 끌였던 것인지 도 모른다. 파펜은 거의 기묘한 방식으로 고풍스러웠다. 황고함, 오만함, 불평 많 은 건방진 태도 등으로 인해서 시사만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 인물 로 그려졌고, 당시 사람들은 그 그림이 그의 특성을 잘 그려낸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경박하고, 너무 서두른다고 알려졌으며 아무도 그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 았다. "일이 성공하면 그는 대단히 만족한다. 그러나 실패하면 전혀 반성하지 않 는다. " 그러나 바로 이런 사치스럽고 용감하고 태평스러운 태도야말로 슐라이허의 눈에 파펜이 특별한 적임자로 보이도록 만든 이유였다. 그러한 그의 특성은, 점 차 구체적으로 고려되고 있던, '온건한' 독재체제 아래서 의회 제도를 소멸시키 려는 계획을 밀고 나가기에 알맞은 특성으로 보였다. 경험 없고, 겉모양만 생각 하는 파펜은 수상직 자체와 그것을 가져다주는 대표기능 만으로 허영심을 만족 시킬 것이고 그 밖의 점에서는 쓰기 편한 도구가 되어주리라는 생각도 작용하였 다. 바로 이런 생각은 명예를 탐하면서도 공식석상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슐라 이혀의 기질에 잘 맞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파펜은 두뇌가 아니라고 깜짝 놀라 서 그를 말렸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는 두뇌일 필요도 없어, 모자 노 릇만 하면 되니까." 파펜이 그런 광범위한 관계망 덕분으로 사회민주당보다 보수적인 모든 정당들 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의회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고 슐라이허가 믿었다면 그는 곧 실망하였다. 새로운 수상은 정치적 기반이 전 혀 없었다. 브뤼닝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카톨릭 중앙당은 과격한 반대파로 변했고, 후겐베르크도 자신의 야망이 한 번 더 무시되었기 때문에 몹시 화를 냈 다. 공식적으로 적대적인 거부감에 부딪치자 새 수상인 파펜도 화가 났다. 그는 수상직에 취임하자마자 브뤼닝이 마련했던 성공을 자기 것으로 감고, 로잔 회담 에서 배상금 문제를 종결지었는데도 기대했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사실상 그의 내각은 민주적인 것도 아니었고, 각 분야별로 합법적인 조직으로 여겨지지도 않 았다. 그것은 대통령의 애국적 호소를 거절할 수 없었던 가문 출신의 남자들로 만 이루어진 것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일곱 명의 귀족, 두명의 합병기업 회장, 뮌헨 시절 히틀러의 보호자였던 프란 츠 귀르트너, 그리고 장군 한 명 등으로 구성된 내각이었다. 여기에는 중산층이 나 노동자층의 대표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늙은 지도층이 얼마나 현 실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당시 '귀족 내각'이라고 불렸으 며 순전히 힌덴부르크의 권위와 방위군의 힘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장부가 극단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하자 히틀러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슐라이허와의 협상에서 그는 새로운 선거를 공고하고, 돌격대에 대한 금 지조치를 해제하고, 국가 사회당에 완전한 활동의 자유를 줄 경우 정부를 승인 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뤼닝이 해임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5월 30일 오후에 그는 파펜의 지명 에 동의하는가 하는 대통령의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 수상이 7워 4 일에 으회해산으로 그의 불운한 조치들을 시작하고, 곧 이어서 돌격대 금지령의 해제를 생각하고 있을 때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벌써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 였다. "우리는 시민적인 과도내각에서 가능한 한 빨리 물러나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예민한 감각의 문제다." 라고 괴벨스는 적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시민적인 똘마니들 근처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공격> 지를 타고서 파펜 내각을 향하여 새로운 공격에 나서야겠다." 돌격대 금지령이 기대했던 것처럼 곧바로 풀리지 않자 그는 어느 날 저녁 "금 지령에도 불구하고 항의하기 위해서 완전히 제복을 갖춘 40~50명의 돌격대 지휘 자들을 거느리고 포츠담 광장의 커다란 카페에 나타났다. 우리는 경찰이 우리를 체포하기만을 원했다... 우리는 자정쯤 아주 천천히 포츠담 광장을 지나 포츠담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나 어떤 자식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찰 대장은 몹시 당황 해서 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 이틀 뒤인6월 16일에 금지령은 마침내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망설임 은 오히려 '다가오는 새로운 세력 앞에서 국가 권력이 무릎을 꿇었다'는 인상만 만들어냈다. 마지막 순간에 나온 그런 친절의 대가로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나중 에 정부에 참여한다는 동의를 얻어내려는 파펜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시도 는, 슐라이허가 미리 손을 썼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이미 너무 늦었다. 뿐만 아니 라 그것은 히틀러의 광범위하게 뻗은 궝력욕의 범위와 과격성에 대해서는 거의 그로테스크할 정도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파펜은, 굽히지 않고 냉정하게 온갖 반대 요구들로 공박해 오는 상대방에게서 의회선거가 끝난 다음에 만날 약 속을 얻어낸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네 갑자기 거리에서 내전 비슷한 대립 상황이 다시 벌어지더니 진짜 절정에 도달하였다. 금지령이 해제되고 7월 20일까지 5주동안 프로이센에서만 거의 5백 건의 충돌에 사망 99명, 부산자가 1125명이나 되었다. 7월 10일은 전국 에서 17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수많은 장소에서 방위군이 본격적인 싸움에 개입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른스트 텔만이 돌격대 금지령 해제는 공식적인 살인 권 유였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물론 그는 자기 편인 공산당 투쟁조직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지 소극적인 활동을 벌이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7월 17일에 함부르크 알토나에서 그해 여름에 가장 심각한 혈전이 벌어 졌다. 약 7천명의 국가 사회당 항의 시위대가 공산당 노동자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보 고 공산주의자들은 지붕과 창문을 통해 불 공격으로 응답하였다. 그것은 다시 과격한 대응을 불러일으켜 서둘러 바리케이트를 넘어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사 망자 17명과 수많은 중상자들을 냈다. 1932년 7월의 그 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68명 가운데 30명이 공산주의자였고, 38명이 국가사회주의자였다. 괴벨스는 이렇 게 적었다. "서로 두들겨패고 총을 쏘고 있다. 이 정권의 마지막 구경거리." 위로부터의 쿠데타 돌격대를 인전한 것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의식을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깨 닫지 못하고 파펜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으뜸패를 내놓아서 거의 고립되어버린 정부의 위신을 강화하고,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에게 화해적인 태돌르 보이려는 희망에서 파펜은 7워 20일에 프로이센 주정부의 주도적인 인사 세명을 수상 집 무실로 부르더니 갑자기 비상권한으로 주지사 브라운과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주 내무장관 세베링을 해임한다고 밝혔다. 비상계엄 사령관으로서 자신이 주지사의 임무를 떠맡겠다고 선언하였다. 세베링이 강제력에 굴복해서만 자신의 집무실을 비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날 저녁에 일방적으로 경찰력을 행사하 겠다는, 수많은 비판을 받은 '협정'이 이루어졌다. 미리 준비된 두 번째의 비상사 태법에 힘입어 파펜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일언에 군사적 비상 사태령을 내 리고 이렇게 해서 정치적 권한을 장악하였다. 저녁에 내무장관 집무실에 나타난 세 명의 졍찰 간부의 요청을 받고 세베링은 자신은 오직 강제력에 굴복하여 자 기 자리를 내놓은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 곳을 떠나 옆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갔 다. 오후에 이미 그 비슷한 방법으로 아무런 저ㅇ도 받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이 었던 프로이센 경찰 지휘관들이 제압되었다. 베를린 시경찰 총장 체진스키와 부 총장인 바이스, 경감 하이만베르크 등이 잠깐 체포되어서 경찰청사의 마당으로 끌려나갔을 때 전하는 바로는, 몇 명의 경찰관들이 총장에게 국기단 구호로 작 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유!'하고 외쳤는데, 그토록 오랫동안 허약하였 고, 열의도 없었고, 이제는 체념상태에서 포기되는 바이마르의 자유에 대한 작별 인사로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이덴은 그밖에도 1932년 7월 20일에 사 회민주당의 경찰사회주의가 끝났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쓸데없인 인용되던 아무런 의미도 없는 힘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이 정부는 여러해동안이나 경찰의 칼날을 갈고 호통을 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것을 사용해야 할 순간이 되자 이 아름다운 것을 감히 쓰지도 못했다. ") 물론 광범위한 저항이 고려되었다. 어떤 관찰자에 따르면 체진스키와 하이만 스베르크 내무부 국장인 클라우제너와 힘을 합쳐서 세베링에게 '보든 수단을 동 원한 전투 실시'를 고집하였으며, 특히 '베를린 경찰의 체포, 그리고 대통령의 무 력화 선언'을 요구하였으나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고 한다. 저항은 효력도 없는 언론상의 항의와 국사범 재판소를 소집하는 것으로 그치 고 말았다. 이 때 프로이센 정부는 훈련받은 경찰병력 9만 명, 국기단, 공화주 의 정당들, 노동조합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밖에도 온갖 중요한 직 책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내전에 대한 염려, 현재의 실업상황에서 총파업의 효력에 대한 의심, 그밖에 수많은 비슷한 고려들이 저항 계획을 가로막고 말았 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적들의 수동적인 체념의 눈길만을 받으면서 파펜은 '공화국의 가장 강력한 방법'의 권한을 장악하였다. 프로이센 정치가들의 동기에 대해서는 무게와 존경을 금할 수 없으며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의 결정이 합리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 앞에서 보면 그들의 합리성은 별 것 아니다. 항의 시위조차 생각하지 못했 다.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세베링과 신경쇠약에 걸리고 도덕적으로 파괴된 그의 동지들은, 명예심과 하직함으로써 지난 13년 도안의 미숙과 태만을 잊게 만들 뿐 아니라, 새로워진 민주적 자의식을 위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 해보지 않았다. 1932년 7월 20일, 절대로 얕잡아 볼 수 없는 이날의 의미는 심리 적인 결과들로 나타난다. 그것은 공화국 수호자들의 저항이 얼마나 별 것 아닌 가를 보여주어서 한편의 용기를 빼앗고 다른 편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초조감만 키워놓았다. 이제는 세 개의 날카롭 게 대립하는 진영이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첫째로는 파펜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으적, 군위주의적인 세력으로, 의회에서는 유권자의 10퍼센트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둘째로는 이 미 역할이 끝나버린 민주주의 세력, 그들은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여론의 지원 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적대하는, 국가 사회주의와 공산당이라 는 전체주의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합쳐서 53퍼센트라는 부정적 다수를 장악하 고 있었다. 이 두세력이 그렇듯이 모든 진영은 서로 차단되고 마비되어 있었다. 1932년 여름과 가을 내내 계속 새로운 전략적 수단을 써서 상대 진영을 부수려 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파펜도 7월 20일의 행동을 이런 관점에서 보았다. 아무런 요구도 받지 않았는데 그는 브뤼닝에게, 자신은 히트러를 권좌에 오르게 할 계획이 없고, 다만 그를 속이려 할 뿐이라고 알려주었다.) 8월 5일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영주산(퓌르스텐베르크)에서 슐라 이허를 만났다. 여기서 처음으로 그는 전권을 요구하였다. 자신에게는 수상직을, 그 밖에 내무, 법무, 농업, 항공 장관직과, 새로마든 선전부 장관직, 그리고 7월 20일의 비상사태법에 근거해서 프로이센 주지사 및 내무장관직도 요구하였다. 그리고 포고령을 통해서 통치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가진 가진 전권위임법 을 요구하였다. 괴벨스의 표현대로는 '권력을 차지하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는 내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이레서 우리 시체를 끌어내지 않는 한 말이다. " 권력을 넘겨받기 직전에 와 있다는 확신을 가진 채 히틀러는 슐라이허와 헤어 졌다. 헤어질 때 그는 명랑한 기분으로 영주산 집에서의 만남을 기념하여 기념 비를 세우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자시의 요구에 무게를 싣기 위하 여, 그리고 벌써 직장을 떠나서 승리의 날에 축하와 방종과 약속받은 직위를 준 비하려고 소동을 피우는 돌격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히틀러는 단위부대들이 베를린을 둘러싸고 행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점점 더 촘촘한 원을 이 루며 도시를 둘러쌌다. 1932년 시민 양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가 마지막 순간에 피스톨을 빼들려 는 것 같았다. 전국 방방곡고에서, 그러나 특히 슐레지엔과 동 프로이센에서 유 혈충돌이 더 많아졌다. 8월 9일에 나온 정치 테러 금지령은 "정치적인 싸움의 열 정에 사로잡혀 분노와 증오로 상대방을 공격하여 죽이려 하는" 자에게 사형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밤에 상부 슐레지엔에 있는 포템파라는 마을에서 정 복을 입은 다섯명의 돌격대원이 어떤 공산당 노동자의 집에 침입해서 그를 침대 에서 끌어내다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문자 그대로 발로 밟아서 죽였다. 대통령의 거부 이러한 과정들이 어디까지 국가사회당의 권력에 대한 기대를 방해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슐라이허 스스로 이미 길들인다는 생각을 포기했던 것 같다. 어쨌든 히틀러를 우파 연합의 수상으로 임명해서 책임감 안 에 묶어두고 이런 방법으로 그의 인기를 줄여보겠다는 그의 계획은 우선 대통령 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대통령은 그 사이에 파펜의 민첩함과 뻔뻔스런 매 력에 반해서 아버지 같은 애착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런 파펜을 보헤미아의 광 신자이며 엉터리 메시아인 히틀러와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밖에도 대통령이 좋아하는 대리황제 노릇을 문제로 삼고 있었다. 8월 13일에 국가 사회당 지도부와 확대 회담을 열었을 때 슐라이허는 파펜과 힘을 합쳐서 히틀러의 전권 요구를 거절하고 그 대신 부수상 자격으로 현재의 내각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하였다. 불같이 화가나서, 그리고 전부냐 무야 하는 기 분에 사로잡혀서 히틀러는 그따위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파펜이 어느 정도 '서로 신뢰하고 성과가 있는 협조'의 시기가 지나면 히틀러에게 유리하도록 수상 직을 포기하ㅇ다는 너그러운 제안을 덧붙였는데도 고집스럽게 거절하였다. 그의 연극적 상상력이, 먼지 속에 빠진 마비된 세계에 지배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보여주겠다는 상상을 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자동차로 베를린으로 오는 도중에 그는 킴 호숫가의 어떤 음식점에서 '커다란 계란 케이크를 먹으면서' 자신의 지휘자들을 향해서 이미 공산주의자들에게 감 행할 살육의 모습을 그려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갑자기 자기가 기만당했다고 여겨진 그의 삶에서 후퇴가 있을 때마다 실망에 이어 거대한 절망의 몸짓이 뒤 따랐다. 같은 날 오후에 힌덴부르크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그는 부름에 응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궁측에서 아직 아ㅁ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분 명한 확인을 해주어서야 그에게 한번 더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힌덴부르 크는 히틀러가 현재의 정부를 지지할 마음이 있는가 물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였 다. 히틀러는 물론 없다고 대답했다. 늙은 대통령이 개인들에게 자기 의사를 관 철할 때 잘 쓰곤 하던 애국심에 대한 호소도 히틀러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 서 경고와, '얼음장 같은 작별'만 남았다. 돌아가는 길에 히틀러는 흥분해서 대통 령의 몰락을 예언하였다. (이 대담의 진행에 대한 견해들은 적잔힝 다르다. 힌덴 부ㄱ르크가 안 좋은 분위기레서 히들러를 세워둔채로 맞아들여서 짧은 대화를 했고 이 과정에서 히틀러에게 과격주의가 드러나자 히트럴가 권력을 장악할 경 우 자기가 쏘아버리겠다는 위협을 해서 도로 ㅉ타버렸단느 견해가 널리 퍼져 있 다. 그러나 파펜이 자신의 회고록 224쪽에서 밝힌 의견은 다르다. 그는 이 만남 이 정확한 상황을 강조하면서 이별의 순간에만 "얼음장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마이스너는 같은 날에 대한 비망록에서, 힌덴부르크가 돌겨ㄱ가 방종한 행 도을 할 경우에는 날카로운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그런 다음에 는 친절하게 담화를 끝냇다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래된 전우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나중에도 우리의 길이 서로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전우로 손을 내밀겠소.") 곧이어 서둘러 발표된 성명서를 보고 히틀러는 자기가 또다시 당했다고 느끼 면서 분노는 더욱 커졌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요구를 "아주 분명하게 거절하 였다. 정부원력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국가 사회주의운동에 정부 권력 전체를 넘겨주는 것은 양심상으로나 의무상으로 조국에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성명서에 씌여 있었다. 또한 히틀러가 이전의 약속에 따라서 대 통령의 신임에 의해 만들어진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식적 인 유감이 표현되어 있었다. 관공서 용어로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약속위반 에 대한 비난이었고 과거의 인물들인, 자이서, 증오스런 폰카르 등을 기억나게 하는 암시였다. 물론 몇 달 뒤에는 이런 생각들은 잊혀지고 말 것들이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지체없이 더욱 격렬한 반대를 계속하였고, 파펜에게 항 구적인 선불정책이 얼마나 생각없고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8월 22일에 정치적 테러 금지령에 근거해서 포템파의 살인자들이 사형선고를 받 게 되자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다시피 한 법정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정복 차림으로 나타난 슐레지엔의 돌격대 지휘자 에드문트 하이네스는 법정에 대고 요란하게 보복하겟다고 위협했다. 히틀러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전보를 보 냈다. 그것은 '끔찍한 사형판결을 받은 동지들'에게 자시의 '무제한의 신의'를 보 장하고 빠른 해방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2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지켜온 시민적 태도라는 가면을 과격한 태도로 벗어던 지고, 예전의 험악한 시절에 하던 대로 살인자들과 연대감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격함은 그의 분노의 정도를 부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추종자들의 흥 분에 대한 고려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돌격대가 다시금 깊이 실망 하고 있었다. 돌격대는 이제 전국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전투조직으로서 난폭하 고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빌헬름 거리의 연미복 입은 부르주아들을 경멸하였 다. 돌격대측에서는 히틀러가 어떻게 계속되는 굴욕을 아무렇지 않게 참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충성스런 전사들을 마침내 길거리로 내보내어 피 의 축제를 벌이도록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돌격대는 그런 축제를 벌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히틀러도 이제는 돌격대를 전보다 더욱 위협적인 방식으로 이용하였 다. 열흘 동안이나 거의 쉬지 않고 캠페인을 벌인 끝에 9월 2일에 파펜이 양보 해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위신까지 손상시켰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 을 종신형으로 감형해 달라고 대통령 특사를 신청하였다. 그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종신형 감방에서 풀려났다. 9월 4일자 히틀러의 연설에도 속은 사람의 분노와 노여움의 소리가 여전히 들어있다. 나는 나으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들은 자리 몇 개를 내주고 우리 입을 틀어막아 버리려는 거지요. 이 낡아빠진 마차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죠, 여러분, 나는 흥정하고 팔고 에누리해주려고 당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당은 아무 양이나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라고 만든 사자가죽이 아 닙니다. 당은 당입니다. 그뿐입니다!... 나를 장관 자리 몇 개로 꼬실 수 있을 거 라고 절말 믿으셨나요? 나는 정말 당신들을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내게 있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무관한 일인지 나으리들은 전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사랑 하는 하느님께서 그러기를 바라셨더라면 우린 한 알짜리 안경을 가지고 이 세상 으로 왔겠지요. 가당치 않은 소리! 저들은 높은 자리들이 자기들 것이 아니기 때 문에 그것을 차고 앉아 있는 겁니다. 힌덴부르크와 파펜에 의해서 굴욕으로 거절당한 사건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는 아주 강한 것이었기에 처음에 그는 합법화 노선을 포기하고 유혈봉기를 통해서 권력을 차지할까 하는 유혹까지도 느꼈던 것 같다. 그 스캔들은 정치적으로만 그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그의 시민적인 소속 욕구에도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 다. 전보다 더 자주 위협적인 문구가 집회장에 울려퍼졌다. "청산의 시간이 다가 옵니다!" 그는 파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카톨릭 중앙당과 협상을 시작했 다. 그 과정에서 한 번은 실망한 좌파의 도움을 받아서 의회의 결정과 국민 투 표를 거쳐서 힌덴부르크를 하야시키자는 모험적인 제안이 나온 적도 있었다. 그 리고 지난 몇 주 동안에 복수욕에 불타서 그는 자신과 측근에게 혁명적인 방식 으로 요직들을 점유하는 상황들을 힘으로 쓰러뜨리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어쨌 든 그가 몇 년 전부터 힘들여서 추구해 온 합법적인 길은 냉정하고 조심스러우 며 그의 본질의 의존 본능적인 측면에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그 의 공격성, 지나치게 긴장된 상상력과, 피를 흘리지 않고는 역사적 위대성을 생 각할 수 없다는 발상법은 앞의 면모와 반대되는 것이다. 잔인성에 대한 명상 국가 사회당 소속인 단치히 시장 헤르만 라우슈닝이 이때쯤 윗소금산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내면의 모순이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 라우슈닝 은 강력한 민중대표의 이러한 소시민적인 삶의 방식에 깜짝 놀랐다. 창가에는 면직물 커튼, 이른바 농부들의 가구, 매달린 새장에는 지저귀는 새, 그리고 연로 한 부인들과의 교제등이 모두 놀라운 일이었다. 히틀러는 파펜에 대해서 격렬한 인신공격을 하고, 민족주의적인 시민계급을 '독일의 진짜 적'이라고 불렀다. 포템 파 판결에 대한 항의는 상당히 교육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였다. "우리는 잔인해 야 합니다. 잔인성을 위한 양심을 회복해야 합ㄴ.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우리 민 족에게서 상냥함과 감상적인 편협성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 '평온함'과 초저 녁 술좌석의 즐거움 말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감정들을 위한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려면 민족을 강요해서 위대하게 만들 어야 합니다. " 그는 그렇게 역사적인 도전의 전망 속에 빠져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스스 로를 비스마르크에 견주다가 갑자기 단치히와 독일 사이에는 국가간 범죄자 인 도 조약이 있는가 물었다. 라우슈닝이 그 질문을 제대로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괴벨스의 일기자에는 8월 25일자로 자우슈닝에게 한 히틀러의 질문을 설명해 주는 기록을 하고 있다. "지도자가 구류 상태라는 소문이 돌고 잇다. 하지만 그 건 어린애 장난이다. ") 그러고 나서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다시 자신감을 보였다. 파펜의 경박함, 단 순성, 양보의 각고, 모든 민족주의 요소들과 대통령이 노령에 대해서 느끼는 주 저하는 듯한 불안감, 이 모든 것이 그의 지구력을 강화시켜주었고, 그에게 안도 감을 주어서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포템파의 살인자들을 '동지'라고 부른 지 며 칠 지나지 않아 히틀러에게 권력이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서둘러서 경 제 계획에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이런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나 의 일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더라도 - 그리고 내가 성채 안에 갇혀 있는 경우 라도 - 나는 당신의 충실한 조력자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미국 통신사인 언합통신의 대표가 이 무렵 히틀러에게 무솔리니의 경우처럼 베를린으로 행진할 생각인가 물어보았을 때 히틀러는 이중적인 의미로 대답하였 다. "무엇하러 베를린으로 행진해 갑니까? 난 이미 거기 있는데요!"(앞에서 말한 힌덴부르크의 노력에 대한 히틀러의 조롱섞인 지적은 1932년 9월 4일자 연설에 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오늘 나를 대통령 각하와 대립 시킨다면 나는 웃을 것입니다. 그 싸움을 나는 대통령 각하보다 훨씬 오랬동안 견딜 수 있거든요.") 제4장 드디어 수상관저로 고전 드라마의 법칙에 따라서 1932년 가을부터 근거 있는 의망을 일ㄲ우면서 위기를 극복할 듯한 전환점이 사건진행에 나타났다. 마치 연출자의 상상혁이 작 동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근본적으로 국가사회주의의 상승을 도와주었던 전제 조건들이 한 번 더 혼란에 빠졌다. 아이러니의 한 순간 게임은 모든 국면ㄹ에서 뒤집어지는 듯이 보였고, 히틀러의 과장된 권력 기대를 폭로하는 듯이 보였다가, 장면은 급격히 무너져내렸다. 8월 13일 이후로 파펜은 히틀러의 뜻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겠다고 분명히 결 심하였다. 그의 설명이 그다지 맏을 만하지 않아서 그런 결심의 상세한 동기들 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대도 이렇게 뒤늦은 ㄲ달음에 도달한 계기는, 괴벨스가 나증에 '겉보기 너그러움'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한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적인 기만노선이었다. 성공의 강요에 떠밀리던 당이 순간적으로 직면한 불안정한 상황은 , 지소적인 거부의 전략 속에 어떠한 기회들이 들어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정부의 권위기반이 약해서 수상은 하는 수 없이 포템파 재판을 흐지부지 만들었다. 그 러나 신경질적으로 된 히틀러가 살인자들에게 보낸 위로 전보는 그 자신의 속셈 을 폭로하고 말았다. 곧 이어서 그는 한 번 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파펜이 9월 12일에 소집한 의회에서 그는 얼결에 자신에게 전략적으로 불리하 기만 한 의회해산안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라펜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생각을 앞서버렸다.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헤르만 괴링의 도움으로 그는 수 상에게 도이치 정당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42대 512)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파펜은 보복으로 의회가 개원하기도 전에 만든 의회해산 명령을 적은 유명한 붉 은 지도를 의회에 내보이는 데 성공하였따. 의회 운영을 망치고 체면으; 손상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방금 개원한 새 의회는 약 한시간 가량의 회의를 한 당음에 벌써 해산되었따. 새로운 선거날ㄹ짜는 11월 6일로 확정되었다. 모든 증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히틀러는 원래 이러한 급변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이해에 어긋나는 것이기 ㄸ문이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 모두 깜짝 놀라 것 같다. 아무도 우리가 이런 결정을 할 요긱를 가졌 다고는 다. 우리는 다만 기쁠 따름이다. 그러나 병적인 전투욕구는 곧 사라져버리고 여러 해 전에 없어졌던 풀죽은 상 태에 빠졌다. 당은 변덕스런 유권자들 덕택에 눈부신 상승을 누렸다. 유권자들은 패하지 ㅇ낳는다는 인상에서 그에게 승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히틀러 자신 이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8월 13일의 패배, 다시 대립을 ㅗ돌아선 것, 포템파 사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갈등, 이 모든 것이 그를 선출해야 한다는 믿음과, 그가 비할 바 없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손상시켰다는 사실을 분명하 게 느꼈다. 성공의 분위기가 한 번 뒤집히ㅁ 당의 내적인 법칙으로 보아 당의 매력도 사라져버릴 것이고 바닥 없이 추락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파펜의 무력화 전략이 성공한 것도 히틀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난 일년 동안 값비 싼 선거전들을 치르고 난 지금 당은 거의 힘의 한계에 도달하였다. 자금도 바닥 이 났다. 히틀러의 충신은 점점 더 의기소침한 태도로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적들도 우리가 이번 전투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힘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계 산하고 있다." 4주 뒤에 그는 추종자들 사이에서 돈과 인력을 놓고 불화를 빚고 있다.고 말 한다. "조직은 수많은 선거전을 통해서 대단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너 무나 오랫동안 방공하 속에 엎드려 있는 중대처럼 과로하고 있다." 근심어린 어조로 그는 자신의 낙관론을 펼친다. "우리의 기회는 나날이 좋아지 고 있다. 전망이 상당히 나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몇 주 전의 위안 없던 전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다." 히틀러만은 적절한 결심을 한 다음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에 넘쳐서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따. 10월 전반부에 그는 네 번ㅉ 독일 비행 길에 올랐고, 점점 더 커지는 상승의 필요성에 맞게 연설의 숫자와 비행 거리 기록을 갱신하였다.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을 방문해서 중무장낳ㄴ '군신의 아들 들'에 불러싸인 채, 호전적인 자동차 행렬을 이루어 포츠담의 전국 청년단 대회 까지 따라갔던 쿠어트 뤼데케에게 자시느이 생각을 들려주었다. 희망과 현실이 뒤얽힌 상태에서 자신이 수상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도 힘의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자동차가 달리는 동안 수행원은 미국에 대한 보고를 해서 그가 잠들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미국은 그에게 칼 마이의 기억들로 가득 채워진 곳이었다. 그가 장담한 바에 따르면 위네토우, '늙 은 그림자 손'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강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는이 감기려고 할 ㄸ마다 깜짝 놀라면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계속, 계속하라구, 난 잠들면 안돼!" 7만 명의 히틀러 청년단이 벌이는 인상적인 선전 쇼가 끝나고 이틀 뒤에 뤼데 케가 이틀러와 작별했을 ㄸ 히틀러는 완전히 지쳐 보였다. 기차의 좌석 구석에 서 겨우 힘 없는 작별인사를 할 힘밖에는 없었다. 선거전의 흥분, 권력의 약속, 연극적인 등장, 숭배와 ㅈ비단착란 등이 그를 붙 잡고 있었따. 사흘 뒤 뮌헨의 지도자 대회에서 그는 괴벨스의 말대로 '형식상 대 단히 위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주 광범위한 전망을 ㅗ우리 투쟁의 발 전과 현상태에 동화와 같은 윤곽'을 부여하였다. "그는 사실상 우리 모두 위에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절망적인 분위기에 빠질 ㄸ마다 당을 깨워 일읕킨 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던 어려움은 점점 더 커졌으며 그들의 정ㅊ거인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자금 붑족이 분명하게 마비시키는 기능ㅇ르 하였다. 파펜과 그의 '방동내각'과 대립전선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국가민족당 계열의 자본가 그룹과 적대적인 입장에 빠졌고, 그들의 기 부금은 당연히 전보다 더 적어졌다. "돈을 만들기가 극히 어렵다. '재산과 교영' 을 갖춘 어리신들은 모두 정부 편을 들고 있다. " 선거전도 '귀족도당' '시민적 불량배' '타락한 귀족 클럽 정권'에 반대하는 방향 을 이루어졌다. 당의 선전지침도 입에서 입으로 '파펜과 그의 내각에 대한 직접 적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구호들을 전파하는 것이었다.(시민정당들이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말한 선전지시에서 분노의 어조로 인용된, 오이치 민족진영의 선전책자의 예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 선전책자에서는 국가 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 찌꺼기로 묘사되어 있거나 아니면 괴벨스는 '남자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욕을 얻고 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그의 일파는 나중에는 실망하고 말 것이지만 어ㅉ든 한 번 더 위대한 희망의 시기를 맛보았다. '반동을 거부하자!'는 것이 히틀러가 내놓 은 공식적인 선거구호였다. 그것은 정부의 기업가 위주 경제 정책에 대한 열렬 한 공격, 도이치 민족주의 집회들을 강제해산시키기, 철모단 지도자들에 대한 조 직화된 기습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국가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강령이 없었고 학문 이전의, 주문을 읊는 듯한 비유로만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매수되지 않는 도이치 직업관료인 프로이센 장교의 업적주의 원칙이고, 성벽이며, 시청, 주교좌 교회, 자유 제국도시의 구빈원이며, 그 모드든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자 계 층에서 노동자주의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직한 모호성이 야말로 그것을 민중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정직한 노동을 위한 정직한 살림'이라는 말이 야간 학습에서 배운 치유의 믿 음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체제의 분배기구가 자연 의 수확품을 제대로 분배하는 법을 모른다면 이 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변화되어 야 마땅하다." 이런 구호는,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기본감정에 잘 들어맞 았다.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어떤 연설에서 '반자본주의적 동경'이라는 말을 했는 데 그것은 곧 표어가 되어서 당시 시대 분위기를 광봉무이하고도 이론적인 개념 으로 잡아냐는 가장 이닉있는 표현이 되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그레고어 슈 트라서가 그러한 표현을 찾아낸 것이다.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위대한 시대 전환기 시대의 증거가 되었다.(이 구절의 전체 맥락은 다음과 같다. "국가 사회주의 운동의 상승은 노동과 자연스러운 생활의 재건의 권리를 거부하 는 구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인 것이다. 오늘날 경제체제의 분배기구는 자연의 풍부하 생산물을 제대로 나누어줄 줄 모른다. 이 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국민을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발전에서 본질적인 것은 우리 민족을 일관하는 거대한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이다. 이러한 동경은 오늘날 의식, 무의식적으로 우 리 민족의 95퍼센트를 사로잡았다. 이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은... 우리가 거대한 변화 앞에 서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극복과 경제에서 새로운 생 각을 일깨우고 국가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일걔워야 할 시간이다. " 국가 사회당 내부에서 슈트라서의 정치적 영향력이 근본적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대 평 가되어 온 것은 상당 부분 이러한 표현이 만들어낸 작용이다.) 베를린 교통파업 선거 며칠전 분명하게 지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던 선거전이 막바 지에 이르렀을 때, 그 동안 당이 좌익 구호를 외쳐온 것이 진지한 의도였음을 보여줄 기회가 찾아왔다. 11월 초에 베를린 운수업체들의 파업이 발생했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투표결 과에 반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파업이었다. 그리고 기대와 달리 국가사회 주의자들이 이 파업에 곧바로 합류하였다. 돌격대와 붉은 전선은 공동으로 5일 동안이나 대중교통 수단을 길거리에 세우고 철도의 구간들은 막았다. 파업 감시 초소들을 세우고 일하려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ㅡ, 긴급을 ㅗ조직된 보조 교통 의 운행을 힘으로 방해하였다. 행동 통일은 언제나 좌익 과격파와 우익과격파의 운명적인 공통점이라고 평가 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순간에 국가사화당에는 다른 선택의 여 지가 없었다. 시민적인 유권자들 사이에 두려움이 커져서 재정적인 후원이 거의 전면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언론 전체가 우리에게 욕을 퍼부어댄다. 이것이야말로 볼세비즘이란다. 그렇지만 우리 에게는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도로공사 노동자들의 가장 원시적인 생존권이 달려 있는 이 파업에서 우리가 빠졌다면 노동자 계층에 굳힌 우리의 확고한 지 위가 흔들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거 이전에 반동에 대항한 우리의 노선이 정말로 내면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릴 기 회를 가졌다." 그리고 며칠 뒤 11월 5일자. "최후의 돌진이다. 패배에 맞서기 ndl한 당의 절 망적 몸부림... 마지막 순간에 1만 마르크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돈은 토요일 오 후 선전비로 3들어가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이제 운명의 결정만 남았다." 11월 6일 선거 패배 운명은 1930년 이후 처음으로 구각사회당원들의 권력요구에 불리한 판정을 내 렸다. 2백만 표를 잃고 의석 34석을 잃었다. 사회민주당도 의석 몇 개를 더 잃어 버렸다. 다만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11석, 공산주의자들이 14석을 더 얻었다. 전 체적으로 보아서 여러 해 전부터 진행된 시미적 중도정당들의 붕괴가 머증ㄴ 것 으로 여겨지는 결과였다. 국가사회당의 후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 전국적으로 고루 일어난 현상 으로 지역적인 패배가 아니라 전체적인 패배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 난번 선거에서 가장 강력하고 믿을 많나 지원을 보여주었고, 원래 대도시 소시 민 정당의 이미지를 벼화시켜주었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저지 작센, 포메른 같은 농ㅇ업지역에서도 국가사회당은 상당한 표를 잃었다. 지도자들은 "이 벌어 진 틈을 다시 메우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싸우겠노라."고 야속하였지만 다음 몇 주 동안 이루어진 지방선거에서도 침체가 계속되었다. 당의 승리의 행진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당이 아직도 대단한 약속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 신화는 아니 었다. 당이 평범한 대정당으로 남느냐 아니면 신화로 남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 되었다. 파펜의 독자노선 선거 결과에 만족한 살마은 누구보다 파페니었다. 위대한 개인적 승리를 의식 하는 태도로 그는 히틀러에게 묵은 싸움을 그만두고 모든 민족주의 세력의 결속 을 시도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수상의 자신만만한 어조를 통해 오직 자신이 허약하다는 사실만 더욱 뚜렷하게 의식하게 된 히틀러는 며칠 동안이고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채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저녁에 그는 정부와의 협상에 대한 생각 을 일찌감치 떨구어버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룹는 공개되어 있고, 일부는 은폐된 적들이 쓰러지기까지 가열찬 싸움을 계속할 것"을 선포하였다. 적들의 반 동적인 정책은 나라를 볼셰비즘의 팔에 밀어 넣는 것이라고 했다. 파펜이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왔을 때야 비로소 그는 며칠 더 잘 계산된 망설 ㄴ임을 보이고 나서 거부하는 답변을 보녔다. 이번에도 이룰 수 없는 조건들을 여러 개나 붙인 거부였다. 수상은 다른 정당들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경우 날 카로운 거부의사로 받아들였다. 이제 정부는 거의 전국적인 불쾌감을 얻으면서 마지막 남은 대안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의회를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위험할 뿐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드는 정치적인 유예기간을 한 번 더 만들거느 아니면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대 로 공식적으로 헌법에 손을 대고, 대통령과 군부의 힘을 빌어서 처음에 국가사 회당, 공산당, 그리고 가능하면ㅇ 다른 정당들도 금지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나서 의회의 우파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릭도 새로운 선거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를 일종의 초법적인 권위로 만들어서 그가 소집한 옛 지도층 의 대표자들 한가운데 안정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분명하게 실패한 민주적, 의회주의적인 '열등한 사람들의 지배'가 있은 다음에 파펜의 주변에서 구상된 새로운 국가는 '우수한 사람들의 지배'를 허용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국가사회자의시그이 야만스런 독재체제를 바로잡게 될 것이라고 생 각하였다. 파펜이 10월 12일자 연설에서 몇 가지 부분을 드러내보인 이러한 해 결책의 세부사항은 아직 불분명하고 단순한 입장표명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 도 전체적으로 보면 사고 유희의 단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힌덴부르크의 이웃이며 친지인 늘긍ㄴ 올덴부르크 야누샤우는 반동ㅈ거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자기와 자기 친구들은 짧은 시간 안에 "도이치 민족에게 헌법을 낙 인으로 새겨주어서 민족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파펜이 "놀이공처럼 정치적, 사회적 힘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던져지지 않고 그 모든 힘들 위에 굳건히 서 있는 " 강력한 국가권력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알리자 그는 갑자기 슐라이허측으로부터 생각지도 않는 저항을 받게 되었다. 장군은 파 펜이 광범위한 민족주의 연합을 펼쳐서 히틀러 당을 통제하는 데 쓸모 있는 유 순하고 민첩한 도구라고 여겼기 ㄸ문에 그를 기용하였다. 그런데 파펜은 도구가 되기는커녕 히틀러와 성과 없는 개인적인 투쟁상태에 빠졌을 뿐 아니라 힌덴부 르크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회를 바탕으로, 여론에 등장하기를 꺼리는 장군에게 쓸모있게 여겨졌던 유순한 특성마저 잃어버렸다. 슐라이허는 때로 방문객을 향해 이렇게 비웃곤 하였다. "자 이제 무슨 마릉ㄹ 하시겠소, 우리 귀여운 프란츠(파펜)가 자신을 발견했단 말씀이야." 파펜과 달리 그는 1932년의 위기에 몰린 산업국가의 문제점을 기사의 관점에 서 보지 않았으며 국가가 무조건 강해야만 한다고 속접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수상의 모험적인 개혁안이 그를 화나게 했으며, 그는 그런 안을 위해서 바우이군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러한 계획은 구대를 국가사회당 및 공산당과 내전 비슷한 대치 상황에 빠뜨릴 것이기 ㄸ문이다.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은 거의 1천8백만의 지지자를 등에 업고 어쨌든 백만 단위를 헤아리는 군사적 추종세력 을 갖춘 집단이었다. 슐라이허가 결정적으로 전향하게 된 거승ㄴ, 그사이 변화된 권력상황에서 국가사회당을 길들이고 서서히 마멸시킬 확실한 기회를 보았다고 여겼기 ㄸ무닝다. 그러한 생각을 품은 채 그는 파펜에게 형식적으로 물러서서, 당 지도자들과 '우파 연합 내각'에 대한 협상을 대통령 자신에게 맡ㅋ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하 였다. 파펜은 11월 17일에 이 제안을 따르면서 속으로는 대화가 실패로 돌아가 고 자신이 다시 기용되기를 바랐다. 이틀 뒤에 히틀러는 서둘러 소집된 사람들 의 환호를 받으면서 황제궁 호텔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대통령궁으로 차를 달렸다. 그러나 이 대화도, 이어진 두 번ㅉ 회합도 성과 없이 끝났다. 히틀러는 고집스럽게 특수한 전권을 가진 대통령식 내각을 요구하였다. 그에 반해서 파펜의 조종을 받은 힌덴부르크는 이런 전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라가 계속해서 비상사태법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면 파펜을 해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를 의회의 다수파 정당 정권의 수상으로 임명 할 수는 있다고 했다.(대통령의 트구건을 누가 가질 것이가 하는 문제를 놓고 줄 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다. 히틀러는 대통령의 특권을 지닌 수상직을 요구하고 있 는 데 반해 대통령은 그것을 양보하려고 하지않는다). 국가사회상 당수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 ㄸ문에 힌덴부르크으 ㅣ국무비서관인 마이스너 는 11월 24일자 편지로 글에게 통보하였다. 매우 존경하는 히틀러씨, 대통령께서는 당신이 대통령식 내각의 지휘권을 인 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거듭해서 배타적 특권을 강조해 왔고, 대통령 개인에 대해서나 그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정치적, 경제적 조치들에 대해서 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정당의 당수에 게 대통령의 전권을 넘겨주는 일이 도이치 국민 앞에서 책임질 수는 없다고 생 각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이ㅡ는 대통령식 내각이 결국 은 일당독재로 넘어가서, 도이치 alwrh에 존재하고 있는 대립들을 극단적으로 날카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맹세와 자신의 양심을 걸고 그런 일을 초래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괴벨스가 '걸작'이라고 불렀던, 다음에 언급되는 히틀러의 글은 히틀러의 전략, 엉터리 요설, 심리학 등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예리한 비난이었다. "혁명은 다시 닫힌 문 엎에 서 있다."고 괴벨스는 분노한 어조로 적었다. 이번에는 패배가 언론에 알려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상세한 편지에서 그는 상당히 예리한 감각으로 힌덴부르크가 내세운 조건들의 내적인 모순을 분석하고, 1월 30일 경정되는 해 결 방안의 기본적인 윤곽을 처음으로 그려 보였다. 통치방식을 헌법 48조에 따 라, 합헌적으로 가결된 전권위입법으로 대체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이 특히 대통 령궁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정ㅊ거인 거래에 희말려드는 일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해방시켜주 고, 견디기 힘든 책임을 면제시켜줄 수 있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의 무게는 앞으 로의 발전 과정에서 지나치게 평가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마이스너의 편지에서 그토록 분명하게 거부의사를 밝힌 대통령을 ㅗ하여금 이남자의 권력 요구에 결 국 항복하도록 만드는 데 상당히 기여한 것이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이 고작 체신부 장관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던 그 남자였다. 슐라이허의 저항과 수상취임 파펜은 물론 모든 협상이 결렬된 다음에 자신이 다시 수상직으로 복귀되리라 고 믿었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슐라이허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통해 서 국가사회당과 접촉을 하면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자기가 이끄는 내각에 참여 시킬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활한 계획은, 이 너그러운 제안이 히틀러의 부하들 사이에 상당한 폭발력을 지닌 갈 등을 만들어내리라는 생각을 바탕으로한 것이다. 슈트라서는 최근 당의 패배를 보고 거듭 양보전략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특히 괴벨스와 괴링이 고집스럽게 모든 '얼치기 해법'에 반 대하면서 분산되지 않는 전권을 요구하고 있었기 ㄸ문이다. 슐라이허가 정타ㅁㄹ 계속하는 동안 그는 12월 1일 저녁에 파펜과 함께 대통 령구응로 부름을 받았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서 입장ㅍ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바독 파펜은 자기가 생각하는ㄴ 대로 국가전복 형식의 헌법개정안을 밝혔다. 이 럭승ㄴ 이미 여러 달 동안이나 공개적으로 거론한 다음 거의 형식적으로 대통령 의 승인을 요청한 것에 불과하였는데 슐라이허가 갑자기 극적인 반대의견을 펼 쳤다. 그는 파펜의 의견의 의견을 불필요하고도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전 의 위험을 그려 보였다. 그리고 국가사회당에서 슈트라서 계보를 빼나고, 철모 단, 노조, 사회민주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세력들을 모아서 자신이 지휘하는, 당파를 초월한 내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힌덴부라크는 이 유도 제대로 캐보지 않고 고집스럽게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자신의 계회은 대 통령에게 맹세를 깨는 위험을 피하엑 해줄 것이라는 슐라이허의 지적도, 이 늙 은 대통령이 총애하는 파펜 수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헌법 문제를 초월할 정 도의 애착을 흔들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슐라이허는 패배할 사람이 아니었다. 대담이 끝난 직후 파펜이 장제력 을 통한 헌법개정을 위해서 방위군을 투입할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보자 슐라이 허는 솔직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그리고 다음날 내각회의에서도 국방부의 연구결과를 지적하였다. 즉 사흘 동안의 전쟁놀이의 결과를 요약하고 베를린 교통파업에서도 드러났던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의 힘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힘이 군대에 없다고 단언하였다. 더욱이 총파업과 더불어 동부국경 에서 폴안드가 침입해오는 경우를ㄹ 예상해보면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거의 스러져가는 소수파의 지원을 받는 수상과 그의 지나치 게 대담한 복구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당파를 초월한 방위군을 투입하는 일에 대한 의혹을 드러냈다. 슐라이허의 설명이 내각구서우언들에게 미친 강력한 인 상을 보자 파페능ㄴ 자신이 속ㅎ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체없이 대통령을 방문해서 새로운 상황을 보고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 순간 그는 슐라이허의 해임을 요구하고 새로운 국방장관과 자신의 계획을 계속 추진 할 결심을 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힌덴부르크가 그를 말려ㅆ. 이어서 나 온 눈물난는 장면을 파펜 자신이 상당히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거의 고통스럽게 울리는 음서응로 ... 그는 나를 향했다. '지금 내가 의견을 바 꾼다면, 친애하는 파펜 , 당신은 나를 악당이라고 여기겠지요,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에 내전에 대한 책임까지 떠맡기에는 이미 너무 늙었어.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으로 폰 슐라이허 씨가 자기 행운을 시험해보라고 놔두는 수밖에 없소' 이 거구의 강한 남자가 작별하기 위해 내게 손을 내밀 ㄸ 두 줄기 굵은 눈물 이 그의 뺨 위로 흘러내혔다. 우리는 협동기간이 끝난 것이다. 영적인 교감의 정 도는 ... 몇 시간 뒤에 장군께서 이별 기념으로 내게 주신 그림 아래에 적인 '나 는 동지를 가졌네!'라는 헌사를 보면 구외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ㄹ은. 대통령의 마음을 재빨리 얻고, 또한 '정치적 위기에 사려 깊은 가교를 놓을 마지막 기회르 걸고 승부를 가릴 수 있는 파펜에게 있어서 사임이 었을 뿐 이별을 나니었다. 생각지도 않돈 추락에 대해서 그가 느낀 모욕가ㅁㄴ, 슐라이허가 이제는 배후의 은신처에서 앞으로 나와서 아무런 보호물도 없이 강 렬한 조명을 바덱 된데 반해, 자시능ㄴ 대통령 곁에 남아서 슐라이허가 해오던 조언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보고 상당히 완화되었다. 파펜이 공직에서 사임한 다음에도 국가와 재산을 장악한 사람의 자부부심을가 지고 대통령궁과 마당 하나 사이를 둔 수상관저에 계속 살았다는 사실은, 힌젠 부르크 대통령과의 '영적인 교감'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마이스너와 오스카 폰 힌덴부르카까지 가세하면 그것은 일종으 ㅣ집안 공동체였다. 그들은 노회한 슐라이허 장군의 여러 가지 노력드을 차갑고 불쾌한 눈길로 주시하면서 방해하 고 마침내 비싼 대가르 치르고 실패하도록 만든 사람들이었다. 국가사회당의 위기 시국은 슐라이허가 의도한 대로 아주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히틀러가 직 면한 위기느 거의 절정에 도달하였고, 그것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퇴각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추종세력의 초조감과,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어서 모든 여역에 서 터져나오고, 당은 빚은 압사당할 지경이었다. 이제까지는 돈 있는 기부자들의 기부금이 없어진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채권자들이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 다. 당 기관지들을 인쇄하는 인쇄업자, 제복 재단사들, 옷감 공급업자들, 사무소 의 임대인들,tkansg은 어음 소지자들이었다. 히틀러는 뒷날 야비한 논리로 이렇게 고백하였다. 당시 자신은 수많은 채무증 서에 서명하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승리하면 지불하기가 쉬울것이요, 패배하면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기 ㄸ문이라고 했다. 거리 모퉁이마다 돌격대원들이 빈둥거리면서 행인들에게 도장찍힌 모금함을 내밀었다. "마치 전쟁 지휘자가 연금 대신 동냥질 허가증을 내주기라도"한 것 같 았다. "나쁜 나치를 좀 도와주시죠!"라고 그들은 냉소적으로 소리치고 하였다. 콘라트 하이덴은 얼마나 많은 절망한 돌격대 하위장교들이 적대적인 정당과 신 문사로 달려가서, 비밀을 폭로하고 대신 현찰을 받아려고 했는지 알려주고 있다. 당이 승승장구할 ㄸ는 큰소리로 불안하게 몰려들었던 오만가지 기회주의자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불안해 하면서 새로운 냄새를 맡기 시작한 것도 붕괴의 조짐이었다. 그ㄸ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아성이었던 튀링겐 지압ㅇ의회 선거에서 국가사회당은 가장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12월 6일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 게 적었다. "상황은 거의 파국적이다. 튀링겐에서 우리는 7월 31일 이후 거의 40 퍼센트으 lthstlf을 입었다. "나중에 그는 이 시기에 당 운동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휩싸였다고 공공연히 고백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사무실 마다 탈퇴서가 수북이 쌓였다. 히틀러의 노선에 대해서도 분명한 회의가 나타나ㅆ. 그는 여전히 굽히지 않고 절반의 권력을 거부하였다. 그렇다고 전권을 얻을 능력도 없었다. 슐라이허의 수 상취임은 승리냐 아니면 몰락이냐 하는 그의 최종적인 요구를 한 번 더 거절한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모든 패베, 실망, 위기를 넘어서까지 과격한 양자택일에 집착하는 것은 분명히 경탄스런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잇 어떤 해설가처럼 히틀러의 고집이 이제 어리석음으로 변했다고 물어볼 만하지 않겠는 가?" 슈트라서, 프리크, 페더 등이 이끄는 일부 추종세력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여겼다. 당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 었던 경제 위기는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 부분을 포함해서 1932년 10월 ㅂ러써 875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 로 아ㅍㄹ 내다볼 수 없는 과격ㄱ한 효과를 불러올 혹독한 겨울에 진입하는 중 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르면 처음으로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지표 들이 전환점을 가리켜 보였다. 외교정책상으로도 그토록 오랫동안 질질 끌어오 던 협상이 진척되고 있었다. 히틀러으 ㅣ표어인 전부냐, 무냐 하는 것은 퓨트라 서 일파가 정확하게 인식하였듯이 합법화 전략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슐라이허 가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준비할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두려움 들은 사라졌다. 당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새로운 선거를 감당할 힘이 없었 다. 슈트라서가 어떤 추종세력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당수의 명령 을 어기면서 까지 무엇보다 정치기구 책임자인 그를 따를 준비가 어느 정도나 되어 있었는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63명의 국가사회당 의원들을 추종세력으 로 꼽고 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1백 명의 추종세력을 말한다. 히틀러 자신과 특히 괴벨스는 국가사회당의 언론 기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슈트라서 일 파의 활동을 전혀 언론에 발표하지 않았따. 과격노선의 대표자로서 괴벨스는 언 제나 전부냐, 무냐 노선을 지지하였다.) 여러 가지 견해들 중 하나는 이런 추측 을 하고 있다. 히틀러가 처음에는 고지ㅂㄹ 굽히고 슈트라서의 입각에 동의하려 고 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은 적어도 그 자신의 절대권력의 요구를 지켜주면서 당을 권력 주변에 둘 수 있기 ㄸ무닝다. 그러다가 괴링과 괴벨스가 히틀러를 원 래의 노선으로 되돌려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다른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 는 자신의 ㅗ선을 '냉정하고 분명하게'유지하였다고 한다. 슐라이허가 자시느이 '반자본주의적 동경의 내각'(슐라이허 최초의 경제정치적인 조치들은 파펜의 반 동적인 조치들을 부분적으로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조치들은 이러한 특성 화를 부적합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구성을 위한 협상에서 슈트라서에게 부수상과 노동부 장관 자리를 제안하였고, 그 대가로 당을 둘로 가르는 일에 동 의를 받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슈트라서가 히틀러를 속이려는 생각을 하기나 했는지, 아니면 그는 다만 자의 식 강한 당내 2인자의 권리의식에서 혀뵤ㅏ을 시작했을 뿐인지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슐라이허에게 자신을 비행부 장관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는 괴링과 결 국 같은 행동을 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비밀 담합설, 약속에 대한 암시들, 여러 가지 주장등이 혼합된 가운데 믿을 만한 기록문서가 전해지지않고 있으며, (이런 배경에 대한 지식은 디트리히의 짤막한 언급에 근거하고 있다.) 단순히 뒤 죽박죽 음모, 여러 가지 모함들, 협의 ,분노한 경쟁 등만이 입증ㄱ되고 있다. 이 것이야 말로 이념적으로 동원력이 있고, 지도자 이념과 충성 원칙에 입각하고 있으며 언제나 실무적인 고려가 아니라 오직 개인적인 고려에서만 결정을 내렸 던 당의 어두운 얼굴이었다. 히틀러를 둘러싼 당 지휘부는 마지막까지 격분한 채 서로 싸우는 췬위병 무리로 남아 이었다. 그들은 어느ㄸ인가는 모두가 모두 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될 판이었다. 당이 무너지는 날이면... 튀링겐에서 손실이 큰 선거가 있고 난 다음 12우러 5일 황제궁 호텔에서 열린 지도3자 대회에서 격렬한 대립상황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슈트라서는 공공연 히 프리크에 의해서 곤경으로 몰렸고, 모든 것을 유린하는 히틀러의 연설의 힘 에 밀려서 고립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틀 뒤에 그는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더 수 많은 비난의 폭포를 겪고 음험함, 배신, 충성 남용 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아마 도 히틀러의 비난과,, 자신의 변명에 대한 회의 참석자들의 반응응ㄹ 보고 슈트 라서는 자시느이 노력이 전혀 전ㅁ\망이 없다는 사실을 ㄲ달ㅇ랐던 것 같다. 어 ㅉ든 그는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진 동안에 자시느이 물건들을 챙겨서 말도 인사 도 없이 슬며시 방을 떠났다. 호텔 방에 도착해서 그는 히틀러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지난 여러 해 동안의 그들의 관계를 요역하ㅓ고, 구제불능으로 괴벨스와 괴링의 영향을 받은 당의 선동적인 과격화정책을 비난하고, 히틀러의 일관성 없음을 비난하고, 그가 결국 '폭력행위와 ㄷ이치의 폐허 더미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체념과 혐오가ㅁㄹ 느끼면서 모든 당직에서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 사직서는 당을 정망적인 침체상태로 몰아넣었다. 특히 편지에 슈트라서의 앞날의 의도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아서 더욱 심했다. 슈트라서의 가장 가까운 추종세력인 에리히 코흐, 쿠베, 카우프만, 레벤 틀로브 백작, 페더 , 프리크, 슈퇴 어 같은 사람들만 어떤 표지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도 잔득 신경ㅇ이 날카로워져서 공식적인 토의에서 의견차이를 조정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퓨 트라서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불안은 점점 커졌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저 녁에 지도잦는 우리집으로 왔다. 분위기가 제대로 잡히지를 않았다. 우리 모두 의기소침해쏙, 당전체가 분열되고 그 동안 해온 모든 일이 허사가 될 위험 쭬 때문에 그랬다. 우리는 결정적인 시련 앞에 서 있다. " 나중에 자신의 호텔 방에 서 히틀러는 갑자기 침묵을 깨고 소리쳤다. "당이 무너지는 날이면 나는 3분 안 에 권총으로 끝을 내고 말겠어"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두려운 슈트라서, 한순간 당의 운명을 자기 손 에 쥔 것으로 보인 슈트라서는 그날 오후를 친구와 함꼐 맥주를 마시면서 보냈 다. 체념한 사람의 편안한 심정으로 그는 여러 해 동안이나 억눌렸던 울분을 토 하고 욕하고 한숨 ntl고 들이켰다. 그러다가 지친 모습으로 저녁 기창에 올라타 자신을 녹초로 만든 히틀러 곁을 떠나 휴가길에 올랐다. 자신의 추종세력은 아 무런 방책도 없이 남겨놓았다. 이러한 체념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여러 해 동안 이나 무조건적인 추종이 가져온 해약의 작용으로 보앙 할 것이다. 그레고어 슈 틀서는 너무나 오랫동안 충성을 다해왔기에 이제 독자적으로 설 수 없게 된 것 이다. 슈트라서의 퇴직이 채 알려지기도 전인 다음날 벌써 히틀러는 당내 그의 계파 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번개처럼, 빠르게, 독특하고 격렬한 확고함으로 그는 명령과 호소를 하였다. 돌격대 위기의 해법 모형에 알맞게 그는 슈트라서가 맡 고 있던 정치기구를 스스로 떠마고 벌써 여러해 전 하노버에서 맹목적인 충성을 입증하였던 로버트 라이를 참모로 임명하였다. 갱니 ㅂ지서인 루돌프 헤스를 제 3자의 권력욕에 맞서기 위한 경쟁기관인 정치부 중앙 상무처자응로 승진시켰다. 나아가서 농업과 국민교육 담당영역들이 각기 독립되어 다레와 괴벨스에게 맡겨 졌다. 이어서 히틀러는 간부들과 당소속 의원들을 의회의장인 헤르만 괴링의 관저로 ㅅ빕해서 감동적인 충성서약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어서 자기가 언제나 슈트라 서에게 신의를 다하였는데, 그는 언제나 자기를 향한 신의를 깨뜨렸으며, 당을 파멸의 가장자리로 이끌어 넣었다고 하였다. 승리 직전에도 이런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흐느끼면서 머리를 책상에 부딪쳐서 절망의 연기를ㄹ 했는지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괴벨스는 "그토록 강력한 개인적인 고미능 로 해서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여러해 전부터 당에서 흔들리지 않고 싸우고 일해 온 오랜 동지들은 분노와 고통과 수치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저녁은 운동의단합을 위해 아주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히틀러는 슈트라서 추종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이러한 열정적인 압도의 자염ㄴ 에서 빼놓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공공연하게 굴종의 행동을 요구하였 다. "모두들 그에게 손을 내밀고 약속하였다. 무슨 일이든지 닥칠테면 닥쳐라, 그 와 더불어 계속 싸워나갈 것이며, 목수ㅁㄹ 걸어야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위대 한 일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슈트라서는 이제 완전히 고립되었다. 죽은 사람이다." 상대방의 무기력 그와 더불어 히틀러는 한 번 더 생애의 커다란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붕 괴와 해체를 오히려 추종 강화의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재능ㅇ르 한 ㅂ전 더 입 증하였다. 그에게 싸움도 타협도 강요하지 않은 슈트라서가 물론 그의 성공을 쉽게 만들어주었고, 편리하게도 지난 몇 달 동안의 실패에 대한 속죄양 노릇을 해주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적대자들이 싸울 주응ㄹ 모르고 감정을 억누르면서 체념하고, jRO를 으쓱하며 직무에만 골몰하였다는 시실 또한 히틀러 상승에 나 타나는 동반현상의 하나였다. 힌덴부르크ㄹ 바음이 돌아서자마자 브뤼닝이 그랬 고,. 7월 20일에는 세베링이나 체진스키도그렇게 빨리 체ㅕ하였다. 이제는 슈트 라서와 그의 도당 그리고 후겐베르크와 다른 사람들 차례였다. 그들 모두 그의 분노 앞에서 막대기를 내던지고 가버렸다. 히틀러와 달리 그들은 권력을 향한 정열이 없었다. 한 번의 위기는 그들에게 패배나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그에 반 해서 그에게 있어 위기는 싸움을 위한 기회이며 새로운 확실성을 향한 출발점이 되고 하였다. "속지 맙시다."하면서 그는 시민적인 적수의 유형을 날카로운 경멸 감으로 묘사해냐ㅐㅆ. "그들은 우리에게 저항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하는 모든 말 속에 우리와 타협하자는 외침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열망하 고 권려ㅛ을 차지하고 기쁨을 느끼는 남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들은 조용한 가운데 꽃을 보살피고, 습관이된 시간에 낚시 하러 가고 그밖에는 경건한 관찰을 하며서 삶을 보낼 수만 있으면 대단히 행ㅂ 족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1932년 12월 위기는 바로 이러한 오만불손한 이미지를 확인해준 것이었으며, 전재으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패배와 붕괴에서 일어서서 승리자의 ㅎㄹ신을 가질 필요가 있ㅇ르 ㄸ마다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예로 인용되고 하였다. 히틀러는 과거를 돌어보며 이렇게 사람드르이 용기를 북돋우곤 하였다. 당시 자신은 "전혀 다른 낭떠러지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으며 존재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양자택 일에 바닥친 것도 여러 번이었다."는 것이다. 슈트라서 사건과 더불어 국가사회당의 정치적위기가 극복된 것은 전혀 아니었 다. 괴벨스가 쓴 일기자응ㄴ 다음 몇 중동안에도 계속해서 낙담의 표현들로 가 득 차 있었으며, '수만흥ㄴ 싸움질과 불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 지도부, 특히 히 틀러, 괴벨스, 괴링, 라이 등은 당원들의 사기와 신뢰감을 회복하기 위해 주말이 면 관구들을 방문하였다. 대규모 선거전의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는 하루 네 번까지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연설을 하고 하였다. 재정적인 결핍은 끝이 없 었다. 베를린 관구에서는 당 직원들의 봉급을 줄였고, 국가사회당 소속 프로이센 지방의회 의원들은 의회 심부름꾼들에게 크리스마스 팁도 주지 못했다. 12월 23일에는 괴벨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시무시한 고독이 어두운 절망 처럼 나를 덮친다!" 해가 바뀔 부렴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국가사회당의 마법에서 풀려나는 것' 을 축하하였다. 반면 영국 좌파의 지도적 지식인인 해럴드 래스키는 이렇게 확 인하였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생명이 위험하다고 묘사하던 시간은 지났다... 우연이 사태를 바꿔놓지만 않는다면 늙은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시골 구석에 처 박혀서 저녁이면 맥주집에서 친구들에게 자기가 한때는 도이치 제국을 뒤엎을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생을 마감하는 일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 다. "그에 대한 답변이라기도 한 것처럼 괴벨스는 불쾌한 몸짓으로 이렇게 썼다. "1932년은 영원한 악운의 실타래였다. 그것을 조각내 부수어야 한다... 모든 절망 과 희망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파펜의 음모 그 순간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변화가 나타났다. 슐라이 허가 아무리 영리하게 수상직무를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벌써 모든 파벌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그는 스스로 '사회주의적 장군'이라고 소개하였지만 노동자들을 향한 그의 고백은 사 회민주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기업가들은 그런 고백에 대해서 괘 씸하게 여겼다. 농부들은 노동자를 선호한 것에 대해서 분노하였고, 대지주들은 예고한 계획경제의 이념들, 노동조합을 향한 접근 시도, 혹은 의회 상태의 회복 을 위한 노력 등 이 모든 것은 정직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오직 불 신과 저항만이 돌아왔다. 슐라이허가 표명한 낙관론은 수많은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칠 처지에 있지 않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가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벌였던 음모는 일찌감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사건은 사기를 잃고 빚에 쪼들 리고 있던 국가사회당의 응집력에 무거운 손상을 입혔다. 히틀러의 도움 없이는 반정부 전선이 아무런 폭발력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손상을 입은 히틀 러는 아직 동맹을 맺을 상대로 여겨지지 않았다. 슐라이허의 이 모든 생각들을 꿰뚫어보고 국가 사회당에 예기치도 ㅇ은 기회 를 마련해중 사람은 다름아닌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슐라이허의 경쟁 상대자들 이 마침내 히틀러를 '공동 대표'로 점찍은 것이다. 슐라이허 장군이 수상이 된 지 2주만에 벌써 파펜은 퀄튼의 은행가인 쿠어트 폰 슈뢰더에게 국가사회당 당수와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 이 접촉은 그레고어 슈트라이서와의 결별과 맞물려있다. 그것은 산업계의 후원자들이 슈트 라서 사건을 당 내에서 혁명적이고 반자본즈의 분위기가 극복된 것은 아니라도 어쨌든 그 수뇌가 제거되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1월 의회 선거가 강화시켜준 공산당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진다는 사실도 히 틀러에 대한 기업가들의 망설임을 없애는데 기여하였다. 더욱이 국가사회당의 선전은 이런 구호를 담도 있었다. 당이 내일이라도 무너지면 모래 독일에는 벌 써 1천만 명의 공산당이 더 생긴다는 것이다. 슈뢰더는 퀄튼 신사클럽의 대표로 서 라인 중공업계에 상당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히틀러를 위 해서 활동적으로 일을 벌인 적이 있었고, 1932년 11월 히얄마르 샤흐트가 히틀 러의 권력 요구와 관련된 청원서를 낼때도 거기 서명했다. 당시 파펜은 날카로 운 어조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했지만 지금 슈뢰더가 1월 4일에 히틀러와 약속이 되었다고 알리자 즐겁게 수락하였다. 퀄른 회담 엄격한 비밀조치 아래서 이루어진 대화는 1932년 8월 13일의 굴욕을 문제시하 는 히틀러의 분노와 비난에 찬 독백으로 시작되었다. 얼마동안 시간이 지난 뒤 에야 겨우 파펜은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모두 슬라이허의 책임이라고 돌리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히틀러 사이에 일종의 양두제 성격으로 도이치 국가민족당과 국 가사회당의 연합을 제안하였다. 슈레더가 뉘른베르크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히 틀러는 다시 '긴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수상으로 임명될 경우 혼자서만 정부의 수반이 되겠다는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파펜의 부하들 은 많은 변화의 정책을 함께 마련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 장관 자격으로 자신 의 내각에 들어올 수가 있다고 했다. 그가 암시한 변화들 중에는, 사회민주당, 공산당, 유대인들을 독일의 지도적 위치에서 쫏아내겠다는 내용과 공공생활에서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히틀러는 슐레이허가 의회를 해산 할 권한이 없다는 것, 따라서 국가사회당은 선거를 다 시 치를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아주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이 만남을 가리켜 '제3국의 탄생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타당한 일이 다.(여기 제시된 회동의 표현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파펜 자 신은 여기에 대해서 정열적으로 반대입장이었다. 그의 변명서인 회고록에 들어 있는 묘사들도 물론 상당 부분 독자의 신뢰를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회 동에 우연적이고 부수적인 의미만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거듭 그는 순수하 게 정보의 목적을 가진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슈뢰더의 확언만 여 기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그보다 몇 주 전에 파펜과 협상하기 를 거절했다. 파펜이 나중에 장담한 말, 곧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사 실이라고 해도, 히틀러가 파펜의 말을 사실은 힌덴부르크의 말로 들었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여전히 결정적인 것이다. 파펜은 자신이 슐라이허의 이해 와지원을 얻기 위해서 이 회동을 가졌다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양두체 제의 계획도 히틀러와 자신이 아닌, 히틀러와 슈라이허의 관계된 것이었다고 하 낟. 이 회동을 둘러쌌던 두려운 비밀주의는 이 만남의 부조리한 성격을 보여주 는 것이다.) 33. 특별히 산업체의 돈으로 획득한 영지는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형식상 힌 덴부르크가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선물되었다. 1932년 7월 20일 사태로 인해 힌덴부르크는 상당히 걱정하였다. 브뤼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슐라이허가 수상 직에서 물러나기 4일 전 저녁에 병원에 있는 나를 방문한 에르빈 플랑크는 힌덴 부르크가 고발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부ㄱ 직면하게 된 곤란점들을 설명하 였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데 히틀러가 동의한 까 닭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이 순간부터 1월 30일에 이르기까지 인과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1월 30일은 퀀른에서 이 순간 처음으로 윤곽이 잡힌 연합의 표지를 지니고 탄생하였다. 이 만남은 히틀러의 야심을 지원해 온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빛을 주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 파멸에 가까운 다의 재정 상태에 대한 이야기와 빚을 청산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논의되었는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회담 자체가 이미 당의 지불 능력을 회복 시켰고 재무 자체는 하찮은 것으로 되돌려버렸다. 1월 2일만 해도 국가사회당의 세무 고문관이 베를린 재무부에, 당이 독립성을 포기할 경우에만 세금을 지불할 처지에 있다고 보고했다. 이제 괴벨스는 당이 '다시 호황기에' 들어섰다고 적었 다. 흔히 주장되는 대로 그것이 재정 상태를 '갑작스럽게 개선'시키지는 않더라 도 어쨌든 "조직의 나쁜 재정상태를 걱정할 마음은 전혀 없다. 이번에 일이 제대 로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퀼른 회담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신감과 승리의 기대를 회복시켜준 만큼 슐 라이허와 그의 정부에는 결정적인 일격이 되었다. 다가오는 위험을 의식하고 수 상은 돌아가면서 언론에 정보를 주고, 이어서 힌덴부르크에게 청원하였다. 대통 령이 앞으로는 파펜을 자기가있는 자리에서만 만나 달라는 청에 대해서 그는 엉 뚱한 대답을 들었다. 처음으로 자기 위치가 약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힌덴부 르크 대통령은 국가기관이나 올바른 직무수행의 원칙들을 자신의 '젊은 친구' 파 펜보다 우선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그는 대담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훌 륭한 이야기꾼이었다. 이번 만남에서 파펜이 이미 대통령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 다. 그는 사실과 다르게 히틀러가 마침내 양보하고 정부 권력을 혼자서 차지하 겠다는 요구를 철회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파펜이 제멋대로 한 것을 나 무라기는커녕 대통령은 "이런 설명(슬라이허의)이 맞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 말하고,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밀한 접촉을 유지하라고 부탁하였다. 마지막으 로 그는 자신의 국무비서인 마이스너에게 파펜의 의무에 대해서 슬라이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대통령 자신이 자기 수상에 반대하는 음모 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모든 정치의 끝 이미 형성중이던 파펜-히틀러 공동전선은 곧 이어서 효과적으로 강화되었다. 슬라이허가 점점 약해지는 자신감을 가지고 슈트라서, 노동조합, 정당들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동안 1월 11일에 지주연맹 대표가 대통령궁을 방문해서 정부 가 보호무역 정책을 취하지 않는다고 심한 불만을 토했다. 이러한 불만의 뒤에 는 브뤼닝 수상이 만들었고 최근 재개된 신도시 계획에 대한 지주들의 근심이 숨어 있었다. 또한 그 동안 수많은 지주들에게 부당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착 취 행위를 통해서 인기 없은 공화국에 근본적인 고민을 만들어준 동부 보조금ㅁ 에 대한 의회의 검토에 대한 근심이 숨어 있었다. 각료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대 통령은 대지주들의 이익 대변다 노릇을 하였다. 슐라이허가 금세 구속력이 있는 수긍을 해주지 않자, 목격자의 보고에 따르면 노이데크의 지주(힌덴부르크)는 주 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최후 선언을 하였다. "폰 슐라이허 수상, 당신에게 청 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퇴역장교이니 청원이란 부드러운 형식이라는 사 실을 아실테지. 오늘 밤이라도 내각을 소집해서 법을 제정하고 내일 서명할 문 서를 내게 보내달라는 말이오." 슐라이허는 처음에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러 나 몇 시간 뒤에 지주연합의 선동적인 결정을 알게 되자, 도전을 받아 들이고 갑자기 협상을 결렬시켜버렸다. 그러고나서 이틀 뒤 그가 반동적인 후겐게르크 에게 경제장관직을 거절하고 자신의 사회정책적인 그의 반대편에 섰다. 사회민주당은 이 '장군'에게 처음부터 일체의 지원을 거절하였고, 노조 지도자 라이파르트가 슐라이허와 협상하는 것도 방해하였다. 히틀러의 판단에 따르면 사회민주당은 스스로의 이념적 상투어와 어설픈 사상으로 장식된 평이한 생각들 에 걸려 넘어졌다. 반대편의 보수적인 유명인사들이 '역사적 권능'이라는 특별의 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회민주당은 역사철학적 기반을 가진 자기만족에 빠져 서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진보에만 매달렸다. 그들은 히틀러가 해방된 질서의 최 종적인 실현에 앞선 짧은 우회로라고 여겼다. 슐라이허는 분명히 수많은 간계들과 정부기구에 어울리지 않는 음모들을 꾸며 서 자신의 신용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것만으론느 그를 히틀러보다 더 믿지 못할 충분한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장군을 몰락하도록 내 버려둔 냉담성에는, 전통의 표상에 전혀 맞지 않았던 이국가에 반대한느 전통의 어떤 신중성이 드러나 있다. 어쨌든 이 모든 신중성, 불쾌감, 반대를 통해서 슐 라이허가, 권력의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히틀러에 대항하여 그나마 마지 막 남겨진 대안이란느 인식이 붕괴되고 말았다. 대연정이 붕괴된 뒤 몇 해 동안 사회민주당은 거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이제 사회민주당이 한 번 더 벌떡 일 어섰지만 그럼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공화국의 마지막 생존 기회마저 없앴을 뿐 이다. 약아빠진 수상은 기대보다 빠르게 출구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올바른 자기 생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휘안 정책은 기업ㄷ가들을, 신도시 정책은 지주들을, 그의 츨신은 사회민주당을, 슈트라서를 잡으려는 생각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헌법 개정 은 실현 불가증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의회를 가진 정부도, 의회 없는 정부도, 혹은 폭력 투입도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치 자체가 그와 더불어 종말에 이 른듯했다. 새로운 내각을 위한 교섭을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 각 조직 문제는 반쯤 가려진 상태에서 열렬히 이루어지는 활동의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협상 위치를 강화하고 국가사회당의 권력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1월 15일로 예정된 리페 지역 지방의회 선거를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아부 었다. 비용이 가장 많이 투입된 선거전에서 그는 한 번 더 유명한 당 연설가들 을 전부 오인하우겐 남작의 성에 소집해서 저년마다 그들을 물림듯이 투입하였 다. 첫날 괴벨스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까지 합해서 세 번 연설하였다. " 히틀 러 자신도 며칠 사이에 열여덟번의 집회 연설을 하였다. 여러 번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냉담한 경멸감에 부딪쳐본 확고한 심리적 눈길을 가지고 그는 이 선거가 가진 기회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처음부터 선거결과가 권럭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결정적인 시련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선거전을 펼쳤다. 실제로 여론은 이런 관팡 방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0만 명 유권자들의 투표인 이 작은 지역선거가 마치 '6800만 인구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시느이 판결인 것처럼 모 두 기다렸다. 이렇게 엄청난 투입에 알맞게 히틀러는 1월 15일에 전 해 7월 선거 이후 최초 의 승리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당은 39.5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전해에 리페에서 얻었던 득표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계열정당들은 모두 합쳐서 히틀러 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러나 국가사회당의 엄연한 승리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론은, 이 결과를 비할 바 없는 노력의 결실로 보지 않고, 또한 탈진해서 대규모 선거전을 펼칠 능력이 없는 국가사회당에게 작은 선거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상황의 이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이것을 히틀러 정당이 패하지 않는다는 영광을 되찾은 것이라고 여겼다. 히틀러가 1월 18일 최근 자기에게 합류한 주류상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에 베 를린 달렘에 있는 집에서 프란트 폰 파펜을 만났을 때 높아진 자신감으로 수상 직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일 것이라는 파펜의 대답으로 회담은 결렬 위기에 빠졌다. 며칠 뒤에 번거로운 비밀유지 조치 아래서 대통령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담 이 다시 진행되었다. 히틀러와 그 수행원들은 어둠 속에서 마당을 통해서 리벤 트로프의 집으로 들어가고,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국무비서 마이스너는 처음 에 보란 듯이 오페라에 참석하였다가 휴식 시간이 끝난 직후에 로열석을 떠났 다. 파펜은 리벤트로프의 자동차로 호송되엇다. 모든 참석자가 다 모이자마자 히틀러는 대통령 아들을 옆방으노 불러냈다. 마 이스너의 참석을 고집하였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는 그로써 고립되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두시간에 걸친 둘만의 대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 는지 전혀 확실하지 않다. 자신의 전략적인 방법에 알맞게 히틀러는 아마도 적 절한 위협과 매수를 뒤섞어서 대통령 아들은 자기 편으로 붙잡으려고 애썼을 것 이다. 그중에 아마도 국가사회당측에서 이미 되풀이해서 확언했던 것으로 프로 이센에 대한 정부측의 쿠대타 행동의 책임을 물어 힌덴부르크를 고발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힌덴부르크일가가 노이테크 영지를 양도하면 서 나온 탈세 소문을 국가사회당이 밝혀 낼것이라고 오스카게에 암시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특별히 산업체의 돈으로 획득한 영지는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형식상 힌덴부르크가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선물되었다. 1932년 7월 20 일 사태로 인해 힌덴부르크는 상당히 걱정하였다. 브뤼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슐라이허가 수상직에서 물러나기 4일 전 저녁에 병원에 있는 나를 방문한 에르 빈 플랑크는 힌덴부르크가 고발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부ㄱ 직면하게 된 곤란점들을 설명하였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데 히 틀러가 동의한 까닭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나아가 히틀러의 최면적인 힘도 기회 주의적인 대통령 아들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리벤트로프의 집으로 들어설 때는 히틀러에 대해 주저하던 오스카가 돌아오는 길에서 마으스 너에게, 이제 다른 가능성은 없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어야 한다, 게다자 파펜 자신도 부수상직에 동의를 하지 않았든냐고 말했다. 슐라이허는 이때쯤 해서냐 비로소 상황의 전체적인 위험성을 간파한 듯하다. 1월 23일에 그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국가사회당을 분열시키고 의회의 비중 에 따라 내각을 조직하려는 자신의 의도는 실패하였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어서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의 금지령을 선포할 전권을 청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2월 2일의 대립 을 상기시켰다. 그 당시 파펜이 비슷한 해결책을 제안했지만 슐라이허의 반대에 부딪혀서 좌절되었다. 상황은 변했다는 수상의 암시를 늙은 대통령은 들으려 하 지 않았다. 그리고 마이스너와 의논한 다음 슐라이허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예상대로 대통령 주변 세력은 지체없이 슐라이허의 의도를 여론에 흘렸다. 사 방에서 격렬한 항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짐짓 화난 태도로 국가 쿠데타 계획 '슐라이허 최고'를 비난하였다. 공산당원들도 당연한 일이지만 화를 냈다. 수상은 민주적 중도당에서도 나머지 위신을 잃고 말았다. 한 목소리로 나오는 이런 반응이 힌덴 부르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리 없었 고, 그래서 히틀러 내각의 계획에 더욱 마음이 쏠리게 되엇다. 1월 27일에 괴링 이 대통령궁으로 마이스너를 ㅌ아와서 '존경하는 사령관 각하께'히틀러는 슐라이 허와는 대대로 법을 깨뜨림으로써 대통령의 양심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고 엄격 하게 헌법을 준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포위작전 그 사이 파펜은 끈질기게 계획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갔다. 이 시점에서 그의 계획은 장래의 내각조직에 도이치 국가민족당을 참여시키고, 대통령과 가까운 철모단 지도자를 참여시켜서 이 계획을 대통령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 집중되 었다. 도이스터베르크는 이른바 히틀러 내각의 '절박한 필요성'에 대해서 결정적 으로 반대하였지만 젤테와 후겐베르크는 파펜의 계획에 동이하였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후겐베르크는 "어떤 일도 일어날 리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및 바위군 최고 통수권자 자리에 남 고 파펜이 부수상이 되고 후겐베르크 자신은 경제 분야를, 젤테는 노동부를 맡 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히틀러를 포위하자는 겁니다." 힌덴부르크의 흔들림 힌덴부르크는 지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쩌다 사태를 제대로 바라볼 능력이 생기곤 하였다. 그는 물론 이 시점에도 여전히 히틀러를 부수상으로 한 파펜 내 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육군 사령관 하머슈타인 장국니 1월 26일에 정치적인 움직임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을 때 힌덴부르크는 "극히 예민하게 정치적인 영향 을 일체 거부하였지만 아마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 듯 오스트리아 상병을 국방 장관이나 수상으로 임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정확하게 말하 자면 1933년 1월 26일 오전 11시 30분 한 명의 증으니 앞에서"라고 하머슈타인 은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다음 날 파펜이 나타나서 대통령에게 파펜 내각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힌덴부르크는 이제 히틀러의 임명에 반대하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다음날 하루 동안에 어떤 사정이 전기를 마련했는지 세부적으로 알 수가 없 다. 측근 세력의 강력한 노력이나 국가사회당의 위협, 대지주와 우파 그룹의 개 입이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그 누구에게도 슐라이허란느 이름이 대안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몫 하였다. 응석받이 재주꾼 파펜 이 새로운 정부에는 우파 대표들이 빠짐없이 참석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도 대통 령에게 작용하였다. 피로에 지친 힌덴부르크가 '노동조합 간부들의 지배'라고 여 겼던 상태에 끝을 내고 우파 방식으로 통치하자는 것이 슐라이허 이전 브뤼닝 수상을 해임할 때 가장 결정적인 동기의 하나였다. 힌덴부르크가 한 번 더 자문 을 구한 정당은 당수들도 슐라이허에게 반대하고 파펜을 다시 수상으로 임명하 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합당한 안정감을 가진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해서 자기들이 그토롱 오랫동안 공들인 마모과정을 노출시킬 시간이 되었다 는 의견이었다. 즉 공화국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1월 28일에 슐라이허는 판을 장악하려는 최후의 시도로 힌덴부르크에게 의회 해산권을 요청하고 안 되면 해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정오경에 그는 대통령 궁 으로 갔다. 그가 이 시점에서도 거의 준비가 끝난 히틀러 내각에 대해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그가 영향력을 상실하였는지 분명하게 보 여주는 부분이다. 정반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힌덴부르크가 자기 편이라고 믿고, 언제라도 자기에게 해산권을 주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여겼다. 그 랬기 때문에 대통령이 다시금 요청을 거절하자 그는 개인적으로 모욕을 받았다 고 느끼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각하, 각하계서 저 의 직무수행 능력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실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4주 전만 해도 그 반대의 말씀을 서면으로 해주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각하꼐 서 임명한 수상의 등뒤에서 다른 사람하고 협정을 맺으실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군요. 이것은 약속 위반입니다. 대통령이 가지는 한 발을 이미 무덤에 내려놓고 있으며 이런 결정을 언젠가 하늘예서 후회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슐리이허는 화가 나서 냉정한 태 도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약속 위반을 하신 다음에도 각하께서 하 늘나라로 가실지 저로서는 확실치가 않군요."(힌덴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 다. "조국을 위해 당신이 애써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오, 장군. 이제는 신의 도 움으로 토끼가 어떻게 계속 달리는지 두고 봅시다.") 슐라이허가 물러난 직후에 파펜이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마이스너와 함께 대 통령에게 히틀로를 수상으로 임명하자고 졸랐다.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힌덴부르크는 결정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엿다. 관례와는 달리 그는 히틀러 자신이 새로운 정부 내각을 조직하도록 청하지 않고, 파펜을 "의회의 여러 정당 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정치적 위치를 분명하게 하고 현재의 가능성을 확정하가." 는 명령을 수행할 '대리인'으로 임명하였다. 마지막 난제들 그날 오후 재빨리 파펜은 장관직 두 개의 후겐베르크의 참여 약속을 받아냈 다. 그런 다음 국가회당의 당수를 찾았다. 광범위한 사전협상에서 이미 히틀러측 은 수상직 이외에 내무장관직과 괴링을 위해서 새로 만들어낸 시민 비행부 장관 직을 받기로 합의하였다. 히틀러는 그밖에도 프로이센 총독직과 프로이센 내무 장관직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프로이센 경찰 통수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밖데오 선걸르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금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다른 조건들에 대 해서 듣더기 다시 나쁜 예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러다 물로 ㄴ이중적인 의미 였지만 ' 이것이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약속을 듣고 겨우 진정하 였다. 그리고 마친네 그는 준비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파펜이 프로이센 총독직을 차지한 것만 빼면 히틀러의 요구는 모두 관철되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1월 29일 슐라이허가 하머슈타인과 함께 포츠담 위수병에게 경계령을 내리고 대통령을 체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방위군을 장악하려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결정은 더욱 속도가 붙었다. 늙은 대통령을 '납으로 봉인된 가죽 자동 차'에 태워서 노이데크로 데려가야 한다고 오스카 힌덴부르크의 부인은 며칠 동 안이나 화가 나서 떠들었다. 수상 광장에 있는 괴벨스의 집에서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대담한 선동가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즉각적으로 베를린 돌격대에 경 계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기대하고 있는 권력에 미리 도취하여, 빌헬름 거리를 점령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여섯 군데 경찰대대에 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 소문을 낸 사람이 누군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가 그 소문으 로 이익을 얻었는지는 아주 분명했다. 파펜은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는 데 이 위 협적인 군사 쿠데타의 유령을 이용하였다. 1월 30일 새벽에 블롬베르크 장군을 제네바로 소환하여 다른 내각 구성원에 앞서서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분명이 슐라이허가 마지막으로 절망적인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기선을 제압하 기 위해서였다. 슐라이허는 이제 자기 쪽에서 히틀러와 결탁하려고 하엿다. 히틀 러가 내놓은, 선거를 다시 하자는 조건에 강하게 반대하였던 후겐베르크도 이 같은 위협으로 압력을 받았다. 파펜은 확인되지 않은 쿠데타 소식이 히틀러에게 들어가는 것ㅇ르 막으려는 의도에서 1월 30일 아침 7시에 벌써 그를 이쪽으로 불러서 '격양된 흥분상태에 서' 그가 내세운 선거라는 조건을 바꾸려고 했다. "11시까지 새로운 정부가 구성 되지 않으면 방위군이(쿠데타를 위해) 행진할 것이오!"하고 그는 소리쳤다. 그러 나 후겐베르크는 파펜봐 더 날카롭게 히틀러의 속셈을 꿰뚫어보았다. 히틀러는 무한한 국가재원을 투입해서 새로운 선거를 치름으로써 11월 6일의 선거 결과를 만회할 기회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반대 의사를 고집하였다. 파펜이 10시 10분 전에 계획된 내각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눈이 얇게 쌓인 정 원을 지나 대통령 궁의 마이스너의 집무실에서 장엄한 태도로 새 수상 히틀러에 게 인사했을 때 다시 모든 것이 한 번 더 위태로워지는 듯했다. 히틀러가 감사 의 말을 하면서 "이제 도이치 민족이 보통 선거를 통해서 이미 만들어진 내각구 성을 확인해 주어쟈 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후겐베르크의 완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단히 격렬한 대입에서 히트러는 상대방에게 한 발 다 가서서 새로운 선거가 내각의 인적 구성을 바꾸지는 않으리라고 '화려한 약속의 말'을 하였다. 자기는 "현재 이 자리에 계신 누구와도 작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파펜이 근심스럽게 뒤를 밀었다. "고문관님(후겐베르크), 어려움 속에서 이 루어진 합의를 위태롭게 할 생각입니까? 당신은 도이치 남자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히틀러가 포위해서 제어한다는 거대한 결의는 이로써 첫 시련에서 이미 그 약 점은 노출했다. 단순히 수적으로만 살펴보면 히틀러를 소수파로 만드는 데 성공 하였다. 국가 사회당원 세명이 여덟명의 보수파 장관들에 마수저는 것이며, 국가 의 결정ㅈ거인 열쇠가 되는 지위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단단하게 결속된 동지들 손 안에 들어있었다. 다만 그를 포위한 사람들이 파펜, 노이라트, 젤테, 슈베린 크로지크만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방어를 위한 가치의식도 에너지 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특권을 지키는 것밖에는 별 다른 관심도 없었다. 히틀러가 수적으로 불리한 합의를 기꺼이 수락한 것은 그가 가진 자신감뿐 아니라 이들 보수파에 대한 상당한 경멸감을 보여주는 것이 다. 방의 창가에서 이들 동맹자들은 힘을 합쳐서 저항하는 후겐베르크를 공격하였 다. 옆방에서는 대통령이 국무비서를 불러서 이렇게 지체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초조하게 물었다. 마이스너는 '손에 시계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여러분 대통령에 대한 선서가 11시에 정해져 잇습니다. 지금 11시 15분입니다, 대통령 각하를 더 이상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사령관 대통령의 전설적 인 이름은 공화국 최후의 생사 순간에, 보수파 친구들의 공격도, 히틀러의 기습 하는 기술도, 파펜의 맹세도 하지 못했던 일을 갑자기 이루어냇다. 솔직한 자부 심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 타당하게 후겐베르크는 자신을 가리켜 '고집불통'이라 고 불렀다. 작년 8월에만 해도 근느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자신은 '히틀러에게 서 계약에 대한 충실성'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무슨 일을 하는 것 인지 잘 알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약속 시간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보였 다. 몇 분 뒤에 내각은 선서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