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싸움을 위해 일어서다 히틀러가 마주선 상황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란츠베르크에 서 돌아온 다음 그를 둘러쌌고, 그의 도전들과 모욕과 분리책략 등에 대해서 구 원자이며 중재자라는 더 높은 권리를 부여하였던 메시아적인 후광은 일년이 지 나자 사라져버렸다. 당은 그 정도의 부담을 한 번 더 견디어낼 처지에 있지 않 았다. 정치적 전망을 지켜내려면 그는 반대자들을 파괴해서 자기들에게 끌어드 려야 했다. 북 도이치 사람들의 사회주의 성향과 파국 전략을 물리치고 당의 통 일성을 회복하여야 했으며, 에서, 아만 등 뭔헨 친구들과 화해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의 전략적 능숙함, 지금에 와서는 해독하기 힘든 인간ㅇ르 다루는 기술, 그의 마법 등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싸움을 위한 지렛대로 그는 영주 가문에 대한 재산몰수 문제를 이용하였 다. 사회주의 정당들에 의해서 제안된 국민투표는 모든 전선과 정치적 결속을 막론하고 무처별적인 대립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현재의 파당을 무 너뜨리기에 특별히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하노버에서도 이 문제는 정열적으로 토론되었고, 합의는 오직 타협적인 형식으로만 나왔다. 노동자 계층뿐 아니라 중산층, 소규모 저축자들과 재산가들 등 원래의 당 지 지계층은 , 영주 가문이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각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영주들이 맞서기 위해서 공산주의자 들과 동맹을 맺고, 재산을 몰수해서 혁명의 부당서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다는 생 각도 이들의 민족주의저 감성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싸 움질이 계속되었다. 슈트라서를 굴복시키다 이틀러느 ㄴ재빨리 결심해서 이러한 상황의 전략적인 이점을 이용하였다. 1926년 2월 14일자로 그는 밤베르크에 전국적인 당 지도자 대회를 소집하였다. 이 도시를 선택한 것부터아 이미 세심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밤베르크는 그에제 무조건 충성하는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아성이었다. 몇 주 전 크리스마스 축제 때도 히틀러는 이곳 지구당에 나타났다. 그 빡에도 그는 대개는 별스럽지 않은 지역조직을 가진 북 도이치 관구지도자들이 도착할 때에 깃발장식과 눈에 띄는 플래카드, 밀집된 대형행사의 안내문 등을 통해서 강력한 인상을 받도록, 그리고 가능하다면 용기를 조금 잃어버리도록 배려하였 다. 나아가서 그는 임시소집자와 참석자의 명단 조작을 통해서 자신의 지지자들 이 뚜렷한 다수가 되도록 만들었다.(노동 공동체의 모든 관구 지도자들이 초청되 지는 않았다. 루르 관구 지도자 칼 카우프만은 1926년 2월 12일자 편지에서 이 점을 항의하고 있다. 다른 한편 당 지도부는 남부 독일의 충성스러운 당원들을 초청하였다.) 거의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 연설로 그는 온종일 걸리는 일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영주재산 몰수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가르켜 유대인 은행주와 증권사주의 재산을 보호하려 했다느 ㄴ이유로 성실하지 못 하다고 말했다. 그는 옛날의 영 주들이 권도 없는 것을 얻어서는 안된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것 을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당은 사유재산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남 도이치 지지자들의 커가는 박수갈채 속에서 조목별로 들어갔다. 그러자 묵 도이치 사람들도 한 사람씩 망설이면서 이쪽으로 합류하였다. 슈트 라서 일파의 정택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서 1920년의 당 정책을 내세웠다. 이것 은 "우리 종교와 세계관의 근본 취지입니다. 그것을 흔드는 것은 우리의 이념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배신 행위가 될 것입니다." 괴벨스의 일기는 반대자들 사이에서 내심은 혼란이 커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얻어맞은 것 같다. 히틀러란 어떤 사람인가? 반동분자인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서투르고 불안하다. 러시아 문제는 완전히 옆으로 치워졌다. 이탈리아와 영국은 자연의 동지들이란다, 끔찍하군! 우리의 과제는 볼셰비즘을 파괴하는 것 이란다. 볼셰비즘은 유대의 권력이라고! 우리가 러시아를 상속해야 한다고! 1억 8천만명을!!! 재산문제에 대한 영주들과 정부의 계약이라고... ! 끔찍한 일이다! 정책은 충분하단다. 그것으로 족하다. 페더는 고개를 끄덕인다. 라이도 끄덕인다. 슈트라이허도 끄덕인다. 에서도 끄덕인다. 당신을 모임에서 만나니 내 영혼이 괴 롭구나!!! 짧막한 토론. 슈트라이서가 연설하고 있다. 말이 막히고, 더듬고, 떨면 서, 미숙한 돼지들 보다 별로 나을 게 없구나...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마 치 머리에 한방 맞은 것 같다." 히틀러는 상대방이 의견을 철회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슈트라서는 반볼셰비 즘은 본능에 어긋난다고 말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혼란정책을 위한 모범이라고 불렀다, 반볼셰비즘은 민족주의 세력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착취자 이익에 봉 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패배는 완벽한 것이었다. 오토 슈트라서 는 뒷날 자기들의 굴복을 변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히틀러가 간교하게 도 평일에 이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래서 당직 이외의 직업을 가진 북 도이치 관구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괴벨스만 밤베르크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월 14일은 일요일이었다. 슈트라서 일파는 이름 있느 ㄴ거의 모든 대 표자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에서 온 힌리히로제, 폼베 이른 지방에서 온 테오도어 팔렌, 하노버의 루스트, 함부르크의 클란트 등이었 다. 그러나 좌파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옹호하기 위해서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자기들 중의 연설가인 요제프 괴벨스만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괴 벨스처럼 머리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괴벨스가 히틀러의 최면술적인 힘에 의해서, 그의 화려한 등장과, 자동차 행렬, 뮌헨 사람들의 기구와 물질적 경비에 의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압도되고 있었다면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적어도 그 순 간에는 히틀러의 능숙함과 유혹의 힘에 패배하였다. '배신자 콘체른' 에 대한 공격이 절정에 달했을 때 히틀러는 갑자기 보란 듯이 그에게 오더니 팔로 그의 어깨를 감쌌다. 이러한 행동이 슈트라서 자신을 되돌 려놓지는 못했지만, 거기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효과를 냈고, 슈트라로서로 하여금 화해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강요하였다. 북부와 서부도이치 관구 지도자 들의 노동자 계층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들의 정책입안은 제대로 토론도 되지 못했다. 영주들의 재산몰수는 거부되었다. 3주 뒤인 5월 5일에 그레고어 슈 트라는 등사된 서한을 동지들에게 보내서 정책입안서를 돌려보내달라고 긴급히 요청하였다. "아주 특별한 이유에서"라고 그는 썼다. 자신은 "히틀러 씨를 위해 서 이 문서를 완전히 회수할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슈트라서는 괴벨스ㄹ 배신에 화가나서 밤메르크 실패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괴벨스 가 히틀러와 뮌헨의 공격을 말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북부 독일에 서 떨어져 나오는 표지였다. 그러나 괴벨스는 밤베르크에서 아직 제대로 완성되 지 못했고, 그가 논쟁중에 일어서서 자신의 오류를 고백하고 자신이 히틀러 진 영으로 넘어갔다고 고백하였다는, 슈트라서가 퍼뜨린 소문은 확실한 것이 못된 다, 그것은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분명한 실패에 대해서 한 사람의 책임자를 찾 아내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칼 카우프만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괴벨스 자신은 밤베르크 이후에도 히틀러가 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주장 했다고 한다. 역시 카 우프만에 따르면 그들은 밤베르크의 실패를 괴벨스 탓으로 돌리기는 하였지만, 한참 동안으니 그르 ㄹ동지라고 여겼지 절대로 배신자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한 다.) 히틀러의 정력적인 반대는 슈트라서 일파의 좌파 강령보다는 오히려 좌파적 생각을 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념의 전조를 이념 자체보다 더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으며, 언제라도 임의로 사회주의 관념들을 받 아들이거나 아니면 장식적으로 이용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괴벨스가 밤베르크 당대회 전에 '히틀러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를 소망했던 것은 이우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당 운동에 대해서 무의미하고 치명적인 위험이라고 생 각한 것은, 토론하고 , 문제를 일으키는, 지적인 변명의 필요성과 의심의 영향을 받는 국가사회주의자였다. 그런 유형의 인물들이 슈트라이서 형제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히틀러는 슈 트라서 자신을 통해서 저 분파를 형성하는 유형이 돌아올까 두려워하였다. 그러 한 유형의 파괴적인 힘이 전에도 민족주의 운동을 파멸시켰다. 히틀러는 극단화 시키는 성향에 따라서 곧 모든 이념논쟁을 분파주의와 동일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추종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갈 등을 좋아하였고, 때로는 촉진시키기도 하였 지만 정책을 놓고 의견차이를 가지는 것만은 싫어하였다. 그런 일은 그의 생각 으로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외부로 향한 타격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 의 성공비밀 중 하나는 그 교리를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히틀러의 '카톨릭' 기질은 견고하고 변화되지 않는 형식을 고집하는 그의 신념에 잘 나타나고 있다. 몇 주 뒤에 벌써 그는 어떤 기회를 이용해서 낡은 당 강령이 분명한 약점을 자기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바로 이러한 낡 고 고색창연한 특성들이야말로 그것을 토론의 대상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들에 답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마련해주는 것 이라야 한다. 그가 엄격한 일관성을 가지고 지도자와 이념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지도자, 변화될 수 없는 강령이라는 원칙과 잘 들어맞는다. "맹목적 믿음은 산을 움직인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그의 심복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강령은 두 마디로 요약된다. 즉 '아돌프 히 틀러'다."(여름 위기 동안 히틀러는 벌써 앞으로 6년 동안 강령을 변화시키지 않 을 것을 요구하였고 자신이 당에 재입당하는 것을 그것과 연계시켰다.) 이념논쟁의 종결 밤베르크 당대회와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굴욕은 이미 국가사회주의 좌파의 종 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좌파는 시끄럽고, 특히 오토 슈트라서가 쓴 책에서 온 갖 소동을 일으켰지만 앞으로는 오직 방해하는 이론일 뿐 진지한 정치적 대안이 되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비정치적인 애국주의 구호로 대체되었다. 정다의 선동 에서 '밀매 자본주의자'의 모습은 점차 물러나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나 다른 정부 대표자 같은 '국가이익을 떨이로 파는 자들'이란 표현이 나타났다. 그와 동 시에 이대회는 국가사회당을 최종적으로 엄격한 지도자당으로 만들었다. 이제 부터는 마지막날까지 어떤이념적인 논점투쟁도 없게 되었다. 오직 자리와 총애 를 얻기 위한 싸움만 남게 된다. "우리 운동의 동화력은 무서울 정도다,"라고 히 틀러는만족스럽게 확인하였다. 동시에 국가사회주의는 자체적인 사회적 구상으 로 공화국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국가사외주의는 공화국에 맞서 이념이 아니라 투입 준비가 된, 잘 훈련된, '지 도자'의 카리스마를 가진 전투력을 내세웠다. 히틀러의 설명대로 '우리의 높으신 분들게 그 많은 공포심을 유발한' '일방성이라는 원시적 힘' 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이미지였지만 "독은 대립하는 독으로만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남자의 주먹"을 내세웠다. "더 강한 두 개골, 가장 강력한 결단력, 더 강력한 이상주의가 사태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 서 그는 이렇게 학인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싸움은 '정신적'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광신주의로 싸우는 것이다." 국가사회당을 다른 모든 정당과 정치적 투쟁운동과 구분하고, 또한 유연한 공 산당 간부들에 비해서도 분명한 우세를 확보해준 것은 이 정당의 가차없는 도구 적 성격이었다. 공산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일탈, 회의, 지적 거부의 요소 들이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당에서는 반대파의 저항 없는 자진해체 와 더불어 광범위한 종속의지가 일깨워진 것 처럼 보인다. 슈트라서의 수많은 추종자들은 이제 '정당운동을 지도자의 손에 쓰기 좋고, 흠없는 도구로' 만드는 일을 명예로 삼게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최고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이제부터 날카로운 승마용 채찍으 로 절대적 명령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결정권조차 도 갖지 못했다. '좋은 국가사회주의자의 원형'은 '지도자를 위해서 언제하도 맞 아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전당대회는 히틀러를 제1의장으로 뽑자는 확고한 제안을 형식적인 익살극처럼 명랑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실체로 괴링이 나중에 말한 것처럼 '지도자'의 압도적인 권위 옆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가 올라 설 돌 이상' 이 되지 못했다. 히틀러 스스로 자신의 절대적 지휘권을 역사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1926년 당 대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개인숭배를 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상 모든 위대한 시대에 언제나 단 한 사람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법이죠. 어떤 운동이 아니라 오직 사람들만이 역 사에서 거론되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보통 과도한 승리를 좋아하는 성격과는 달리 밤베르크ㄹ 성공을 유 화적인 태도와 결합시켰다. 그러고어 슈트라서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자 그는 '엄 청난 꽃다발을 들고서' 환자를 찾아가서 환자의 편지에 따르면 '매우 친절' 한 태도를 보였다. 슈트라서 일파의 대변인 중 한 사람으로서 뮌헨 당 지도부에서 가장 나쁜 평판을 가졌던 괴벨스도 히틀러의 직접적인 구애를 받았다. 집회가 끝났을 때 히틀러는 압도된 태도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포옹하 였다. "그는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에게 친절하다."고 괴벨스는 감동해서 적었다. 동시에 히틀러는 새로 얻은 권위를 확고하게 제도로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다. 권력확보와 승리축하 1926년 5월 22일 뮌헨에서 열린 전당대회는 국가사회당에 아주 노골적으로 히 틀러 개인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회직을 선보였다. 그에 따르면 당의 주인은 뮌 헨에 있는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연합이었다. 그 지도부는 동시에 전국지 도부가 된다. 최초의 의장은 연합법에 맞게 선출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지기반인 뮌헨 지구당의 수천 명 당원이 당 전체를 위한 선거 심의기구를 도맡아버렸다. 그로써 당은 와전히 금치산이 되고 말았다. 뮌헨 지구당원들은 다시 극히 까다롭게 조정된 방식으로만 제1의장에게 설명을 요구 할 권한을 가지므로 의장의 당 지배권은 무제한이고 통제받지 않게 되었다. 다 수결정이라도 그에 대해서는 구속력이 없었다. 권력없는 파벌이 생기는 것마저 원천보쇄하기 위해서 관구 지도자들도 지구당 대회에서 선출되지 않고 제1의장 이 임명하기로 하였다. 위원회 의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권력안전 체계를 한 번 더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조사 및 조정위원회 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일종의 당 재판소로서 개인이나 혹은 지구당 천제를 국 가사회당에서 제명할 권한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 최초의 의당은 퇴직 육군준장인 하이네만 이었다. 그는 위원회를 당 내부의 부정과 부도덕에 해항한 투쟁기구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부리기 좋은 발터 부흐 소령으 로 위원장을 바꾸었다. 위원으로는 열성이 있는 울리히 그라프와 젊은 변호사 한스 프랑크를 임명하였다. 6주 뒤인 7월 초에 히틀러는 바이마르에서 당대회를 열어서 자신의 승리를 축 하하였다. 이 당대회는 새로운 시대의 발전과 성향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모 든 비판적인, 아니면 히틀러가 경멸적으로 말한 '정신력 풍부한 움직임, 모든 '익 지 않고 불확실한 이념들'은 억압되었고, 처음으로 뒷날의 당대회 운영방식이 드 러났다. '제1의장의 서명을 받은' 신청서들만 허용되었다. 당 정책상의 견해차이 를 드러내고 '말다툼'을 벌이는 정당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잘 용접된 지도부'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개별적인 특별대회 의장들은 히틀러가 '원칙적 노선' 안에 정해놓은 대로 '지 도자 라고 느끼되 표결결과의 집행기관으로 자처하지' 않아야 했다. 원칙적으로 표결 자체가 금지되고 '끝없는 토론들을 중단해야'했다. 토론해봐야 정치적 문제 들을 '연합대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해결할 수도 있으리라'는 오류만을 부채질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상의 연설시간이 엄격하게 제안되었다. '전체 프로그램 이 한 사람으로 해서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가 바이마르 국립극장 집회가 끝난 다음에 가죽혁대와 각반바지, 방풍 재킷을 입은 모습으로 무개차에서 5천 명의 지지자들의 사열식을 검사할 때 처 음으로 이탈리아 파시스트 방식으로 팔을 쭉 뻗쳐서 인사를 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는 있는 일이었다. 제복을 입은 돌격대 종대의 모습을 보고 괴벨스는 환호하면서 제3제국이 다가오고 독일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았지만, 당시 관찰자 들의 판단에 따르면 모든 임의성을 억압한 것이 당에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을 부여하였다. 이념의 빈곤과 의견이 없는 것을 휘황찬란한 의식으로 덮어버리는 기술은 이때만 해도 뒷날처럼 아직 그토록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귀빈들 중에는 재향군인회 철모단 지휘자 테오도어 뒤스터베르크와, 곧 이어 서 돌격대로 자리를 옮기는 황제의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도 끼여 있었 다. 그리고 몇 개의 민족주의 단체들도 당의 통일성과 힘에 압도되어서 자기들 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국가 사회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레고어 슈트 라서의 입에서 나온 '죽은 국가사회주의'라는 공식이 바이마르의 인상이었다. 돌격대의 역할문제 돌격대는 아직도 불안과 반동적인 에너지의 마지막 요소로 남았다. 거기서는 슈트라서 일파의 과격한 구호들이 특별히 오래 메아리를 울리고 있었다. 히틀러 는 륌을 퇴직시키고 난 다음 일년 이상을 기다렸다가 1926년 가을에 퇴직 소령 인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을 새로운 돌격대의 최고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여러 의영군과 암살활동에 연루되었고, 나중에는 베스트팔랜 대관구 지도자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를 임명하면서 히틀러는 전톨적인 돌격대의 역할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보조적인 군대조직도, 비밀조직이나 지역구의 싸움부대도 아니고, 중앙당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선전 및 대중테러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조직원칙을 발전시 키려고 하였다. 즉 보조적인 군대조직도, 비밀조직이나 지역구의 싸움부대도 아 니고, 중앙당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선전 및 대중테러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조 직원칙을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광신적이고 순수한 전투력 으로 돌격대를 당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그는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충성서약' 과 신비스런 의식과 함께 새로운 단위부대들에게 자기가 손수 도안한 연대기들 을 넘겨주었다. 그는 폰 페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 돌격대의 교육은 군사적 관 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당 목적에 맞도록 이루어져야 합니다." 옛날 군대 식 조직이 강력하기는 하였지만 이념이 없었고 그래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비밀 조직과 암살 서클은, 적이 이름 없는 형태로 머리와 영혼에 작용하고 있으며 적 의 대변인들을 개별적으로 제거해서 적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쟁은 "작은 복수나 모반 행위의 분위기를 벗어나서 공 산주의와 그 조직체, 그리고 조종자들을 향한 세계관적인 파괴전쟁이 되어야 합 니다... 비밀집회의 형태가 아니라 강력한 대중행진의 형태로 일해야 하며, 단도 와 독, 피스톨이 아니라 거리를 점령함으로써 운동을 위한 길을 활짝 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돌격대 명령과 원칙적 지침'에서 폰 페러는 돌격대의 특성과 활동 가능성을 구분하고 엄격한 훈련기술의 대중심리 효과 행진동작, 팔 등어올리기, 혹은 '하일' 외침 등을 정하고, 대규모 장면의 효과를 조심스럽게 계 산하는 연출자처럼 느꼈다. 드물지 않게 그의 고지서는 심리기술적인 교훈의 성 격을 띠곤 했다. "돌격대가 대중 앞에 나서는 유일한 형식은 닫힌 장면이다. 그것은 동시에 가 장 강력한 선전형식들 중 하나다. 내면과 외면이 균형잡히고 잘 훈련된 수많은 남자들을 보는 것은, 그들의 쉬지 않는 전투의지를 분명하게 보거나 짐작할 수 있을 경우, 모든 도이치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문서와 연설 과 논리가 한 것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감동시키는 언어로 가슴에 속삭이게 될 것 이다. 조용한 침착함과 자명성은 힘의 인상을 강조한다. 행진하는 부대의 힘 말 이다." 그러나 돌격대를 무기 엇는 선전부대로 바꾸고 흥행적 매력을 부여하려는 시 도는 군대의 특수의식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든 대응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의 양순한 도구로 만들 려는 노력은 오직 제한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이 직업군인들의 이념 없는 시골식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고, 군대기구가 정치기구에 대해서 언제나 특수한 지위를 차지해온 나라의 전통 때문이기도 했다. 페퍼의 재교육 구호는 '투쟁운동'으로서의 돌격대가, 말하는 부분에 불과한 정 치기구(PO)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느낌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 다. 돌격대는 정치기구 'PO'를 'P-제로'라고 부르곤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돌 격대는 자신들을 '우리 기구의 왕관'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들은 우리의 돌격대를 흉내내지 못한다."고 이른바 의회정당에 대한 경멸적인 생각을 품고서 으스댔다. 물론 의회 정당은 이것을 지속적인 곤란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사회 당의 당 군대 조직에서 갱겨난 곤란한 점들로, 열등감에 가득 찬 세계전쟁의 장 교와 군인들에게 다음 세대나 가능한 굴종적이고 허약한 군주적 인간형의 가다 로운 행동 균형을 요구한다는 딜레마였다. 머지않아 룀처럼 고집센데다 더욱 독자적이고 냉정하며 전임자처럼 감상적으 로 약해지지도 않는 폰 페퍼와 최초의 갈등이 나타난다. 이 '기력 없는 오스트리 아 사람(히틀러)'이 무섭지 않다고 프로이센 추밀고문관의 아들(폰 페퍼)이 말하 였다. 베를인 돌격대가 특별히 반항적으로 행동하였다. 이곳의 하부조직들은 그들 특유의 번죄적 성향과 사기꾼 행동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 정팩을 계속 밀고 나 갔다. 관구 지도아 슐랑게 박사도 거기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정티기구의 베를 린 쪽 지도자들과 돌격대 지휘자들 사이의 싸움은 때로는 따귀를 주고받는 수준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소동은 베를린 국가사회당의 의미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곳 지구당은 당원이 채 1천명도 되지 못하는데다가 이제서야 겨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슈트라서 형제가 이른 여름에 이곳에서 신문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926년 10월의 상황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달의 당 내부 사정은 좃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관구에서는 베를린 조직의 완전한 파괴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날카로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지도자를 가져본 적이 없나는 점이 이 관구의 비극이다." 괴벨스, 히틀러에게 매료되다 같은 달 중에 히틀러는 참을 수 없게 된 이 상황을 끝냈다. 그의 전략적인 섬 세함이 이런 행동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혼란을 틈타서 베를린 지역의 정당 조직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관할에서 빼내고, 그의 자강 유능한 추종자를 매수 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요제트 괴벨스를 수도의 새고운 관구 지도자로 임 명한 것이다. 7월에 이미 이 야심만만한 반대자는 뮌헨과 베르히테그가덴(히틀러 의 별장)으로 초대 받고 자신의 극좌파적인 신념에 대해서 일지강에다가 간결하 게 '천재'라고 묘사하였다. '신적인 운명의 창조적 도구'라고 하면서 마침내 이렇 게 고백하였다. " 나는 그의 앞에서 떨면서 서 있다. 그는 어린아이 같고, 사랑스 럽고, 선량하고, 자비롭다. 고양이처럼 간교하고 영리하고 능숙하며, 사자처럼 포 효하고 거인답다. 한 인간, 한 남자... 그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다룬다. 선량한 친 구이며 스승!" 이렇게 과도한 생각은 이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슈트라서에게서 떨어져나오 면서 느낀 당혹감을 약간 힘들게 감추고 있다. 같은 자리에 슈트라이서에 대해 서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그는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여전히 마음만은 지니고 있지만. 나는 때로 그를 매우 사랑한다." 히틀러는 이질감이 재빨리 진행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는 괴벨스에게 직위를 주면서 특수한 전권을 함께 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고나구 지도가의 위상을 강화할 뿐만 아리나, 슈트라서와 마팔면을 만으러 내도 록 고려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분명하게 돌격대를 괴벨스 휘하에 들어가도록 만 들었다. 돌격대는 관구 지도자들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보 통이었다. 슈트라서를 달래기 위해서 혹은 그의 저항 에너지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그를 당의 선전부 책임자로 승진시켰다. 그러면서도 갈 등을 피할 수 없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괴벨스를 슈트라서의 영향권에서 다시 빼냈다. 옛날 친구 들과 동지들은 새로운 관구 지도자가 더러운 배신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모든 국가사회주의 좌익파들은 제각기 배신을 하였다. 배신을 안 할 경우에는 슈트라서 형제처럼 파면당했다가 나중에 도망치거나 아니면 죽게 되었 다. 괴벨스가 베를린 관구 지도자가 되면서 북 도이치 지역의 이미 흔들리던 좌익 세력은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슈트라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헤스와 로젠 베르크 같은 뭔헨 당 간부의 저항을 무릎쓰고 자신의 동지를 임명해줄 것을 요 구하였다. 그러나 괴벨스는 히틀러의 비밀스런 의도를 더 잘 알아맞힌 듯했다. 어쨌든 그는 곧바로 공산당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어제의 동지들을 향한 공개 적인 전투에 나섰다. 그는 싸움을 만들어내고, 슈트라서 형제에 대항항 경쟁지인 뻔뻔스런 가두잡지 <공격>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 형톨이며 대자 본가에게 매수되었다는 소문까지 펴뜨렸다. 자기는 나중에 괴벨스를 염두에 두 고 탄식하였다. 냉정하고 뻔뻔스럽고, 꼬치꼬치 캐어묻는 감상적인 입증의 대가로, 괴벨스는 정치적인 선동의 새로운 시대를 열였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정치선동의 현대 적 가능성을 잘 인신하였도 끝까지 이용하였다. 이름 없는 베를린 당 조직을 여 론에 올리기 위해서 그는 흉측한 곤봉부대를 모아서 확소하게 실내싸움, 소동, 총싸움질 등을 일으켰다. 1927년 3월의 경찰보고에 따르면 리히터펠데 동부 정 거장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유혈싸움을 벌인 다음에 '그때까지 거기 있던 모든 것 이 폐허로 변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베를린에서 국가사회당이 금지령을 받았지만 그런 일은 추종 자들에게 순교자 의식과 작당의 느낌을 만들어주었다. 의미 없는 지역이었던 베 를린 당 조직은 어쨌든 두드러지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빨갱이 베 를린'의 막강한 건선ㅇ르 상당부분 침입해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당 조직 확장 히틀러는 이러한 당의 외부적인 확장 노력과 동시에 당 내부 조직의 꾸준한 확장을 위해 정성을 들였다. 그는 유일한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모습 아해 폐 쇄적인 중앙집중 명력 구조를 목표로 삼았다. 서열에 따른 심습, 정장의 모든 고 지무들이 지닌 엄격한 명령 및 지시말투, 그리고 점차 더해가는 형태 단일화 등으로 당의 준군대적 성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한 지휘형태는 전쟁체험의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괴벨스는 때로 당을 향해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든 당원들에 이르기까지 단추 를 극히 살짝만 눌러도' 복종해야 한다는 과제를 내걸곤 하였다. 당이 직면하고 있던 제한과 관청의 통제는 이러한 의도들을 오히려 부추겼다. 외부의 적대감에 대한 의식과, 당기구의 긴장감과,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지휘는 서로 맞물려 결정 적으로 진행되었다. 별 수고도 없이 뮌헨 중앙당은 가장 저급 단계까지 영향력 을 확대하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 초판에서 고백하였듯이 보잘 것 없는 민 주적 요소를 제거하고 '게르만적 민주주의'를 '무조건적 지도자의 권위의 원칙으 로' 대체하였다. 이제 그는 '오직 싸움의 원천'일 뿐인 '지구당의 너무 많은 당원 집회'들을 경고하였다. 당 조직 이외에도 잘 훈련되고, 수 많은 담당영역으로 분할된 관료조직이 생 겨났다. 그것은 국가사회당이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로 급격하게 상승한 다음에 도 여전히 남아있던 시골 조직의 성격을 마침내 제거하였다. 히틀러가 개인적인 태도나 업무 스타일에서 무질서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당원에 대한 3 중 등록체계를 자랑으로 삼았고, 새로운 사무소나 등록 카드, 혹은 분류함을 받 았다고 보고할 때면 몽상적인 어조에 빠져들곤 하였다. 예전의 군대상사식 원시 관료체계 대신에 점점 더 새로운 직급과 하부조직을 가진 광범위한 그물망이 나타났다. 1926년 한 해에만 뮌헨 중앙당의 자리가 세 배나 늘어났다. 국가 사회당의 당 기구는 곧 사회민주당(SPD)의 전설적인 당 조 직을 능가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원 숫자가 많지 않고, 아주 천천히 늘어나는 것 에 비해서 어울리지 않게 큰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는 당을 자그마하고 단단 한, 선전 및 폭력전문가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만들어내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어쩔 수 없이 평화로운 적이 되며, 당은 자발적 으로가 아니라 오직 광신주의적 소수파에 의해서만 행동하게 된다고 거듭 강조 하였다. 국가 사회당은 1923년에 5만 5천명이었다가 1925년 말에는 겨우 절반 수준이 남았다. 그러던 것이 일년 뒤에는 당원 수가 거의 10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부 풀어오른 체계는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대중정당으로 출발하기 위한 광범위한 틀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다른 세력을 후원 하고 분할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세력을 더욱 늘리고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림자 국가를 만들다 같은 시기에 그림자 국가(Schattenstaat 의원내각제의 '그림자 내각'을 만들면 서 히틀러는 이런 이름을 붙였다)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일은 정력적으로 추 진되고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나의 투쟁>에서 이미 히틀러는 자신이 계획하는 국가전복을 위한 전제로서 하나의 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자체 내 에 이미 미래의 국가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 자신이 국가의 완성 된 몸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 내부의 당 내부 의 당직들은 대신할 수 없는 참다운 민족의 이름으로 '바이마르 비국가'(바이마 르 공화국을 낮춰부른 것)의 기구들에 대항하는 경쟁을 선언하고 정당성을 물고 늘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림자 국가의 행정기구들은 정부측 행정기구에 맞추어서 생겨났다. 예를 들 면 국가 사회당의 외무부, 법무부, 국방부 등이었다. 다른 부처들은 국가 사회주 의의 우선정책 주제에 맞추어서 만들어졌다. 국민 건강 및 종족부, 선전부, 거주 부, 농업정책부 등이 있었고 부분적으로 대담하게 딜레탕트적인 구상과 입법계 획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준비하였다. 1926년 이후로 국가사회주의 의사연합, 법 수호자 연합, 대학생 연합, 교사 연합, 공무원 연합 등이 당 보조기구들로 생겨 났다. 심지어는 원예와 가금 경제 영역까지도 이런 조직체들 중에 버젓이 자리 를 차지하였다. 1927년에 여성 돌격대의 결성을 잠깐 고려했다가 취소한 다음 이듬해 '붉은 갈고리 심자가'(뒷날 나치 여성대)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점점 폭발적으로 늘어 나는 정치화된 여성들을 사로잡고, 동성연애적인 남성 정당 안에서 여성들에세 실용적인 자선 분야에만 제한된 활동영역을 할당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괴벨스 가 1940년의 비밀 선언서에서 말했던 것과 사정이 꼭 같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도, 그러니까 1933년에 국가 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 조직과 경험과 정신적, 영적 원칙들을 국가 단위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생각해둔' '국가 속의 국가'라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고 하더라도, 어쨌든 국가 사외당이 권력에 대한 요구를 다른 어떤 정당보다 더 효과적이고 도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전국 지도자와 관구 지도자들은 1933년보다 오래 전부터 벌써 장관의 거동을 보였다. 돌격대는 공식행사에서 일시적으로 경찰 임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드며 드물지 않게 히틀러는 국제 회의에서 '야국'(야당이 아니라) 지도자로 향세하였 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 이념이 자주 사용된 정당 상징물에도 적용되었다. 즉 갈고리 십자가는 점점 더 진정한, 명예로운 독일의 기호로 여겨지고,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그림자 국가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갈색 셔츠, 휘장, 기호와 당 기념일 등은 국가와는 대립 할 수 밖에 없는 소속감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 국가사회주의가 발전시키고, 뒷날 미로와 같은 권력 체계 안에서 만 족을 얻게 되는 그 모든 관료주의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휘 방식은 강하 게 주관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주관적 요소들은 언제나 실용적 인 규범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급한 경우에 부닥치면 이런 규범은 임 의에 따르고, 법칙은 기분에 따르게 되었다. 나아가서 거칠 것 없이 충동에 따르는 '지도자의 뜻'은 가장 높고 논의의 여지 없는 헌법적 사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하부 지휘관들을 임명하고 해고하였 으며, 후보자의 선거인 명부를 결정하였고, 그들의 수입을 조절하고, 그들의 사 적인 사정가지 통제하였다. 지도자 원칙은 원칙적으로 제한이 없었다. 함부르크 관구 지도자 알버트 크렙스가 1928년 초에 관구 내에서 갈등을 겪은 뒤 퇴직하 겠다고 선언했을 때 히틀러는 이 청원을 거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장황한 형식 의 서류심문을 거쳐서 지도자의 신뢰만이 권력있는 지위를 허용하거나 빼앗는다 는 사실을 당 전체에 보여주었다. 자기만이 업적을 칭찬하거나 잘못을 질책하고, 조정하고, 감사하고, 용서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퇴직을 선언하였다. 점점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히틀러라는 인물은 그러한 수단을 통해서 점점 더 확정적으로 구조를 결정하였다. 당 기구조차도 그의 전기의 특성들을 반영하 였다. 광범위하고 기형적 단계를 가진 직책들에 대한 과도한 관료주의적 정열, 직함의 숭배, 아무것도 아닌 권한의 숭배 등은 이미 관리 아들의 유산을 보여주 는 부분이다. 주관적 요소가 지배하는 것 역시 히틀러가 법도 없고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방위군이 밑바닥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래된 과대망상적 성향도 끝없이 과장하는 대규모 질서에 드러나 있다. 가장 하잘 것 없는 기구들 에도 화려한 칭호를 제공한 것을 고등 사기꾼의 과욕에 불과하였다. 그림자 국가라는 생각과 전국적 규모의 당 관료조직 설비는 미래에 대한 참을 성 없는 기대이며, 현실을 앞당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지치지 않는 집회활동은 계속되었으니 1925년 한 해만 해도 히틀러에게 보고된 바에 따르면 약 2천 4백 회의 시위를 벌였다. 여론은 거기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 위한 이 모든 분노한 싸움질과 주먹질, 이 모든 소동은 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공화국은 안정되었던 그 몇 해 동안에 국가사회당은 괴벨스 말마따나 적들의 미움조차도 받지 못했고 히틀러 자신도 성공을 의심하는 듯했다. 그러면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숨막히는 전망으로 넘어가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확신을 미 래로 넘겼다. "우리의 이념이 승리를 거두기까지 20년 혹은 1백년이 걸릴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민족, 인류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한 인간이란 무엇이겠습니 까?"라고 물었다. 다른 기분일 때는 자기가 미래의 대규모 전쟁을 지휘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한 번은 헤크 카페에서 케이크 접시를 앞에 놓고 슈테네스 대위에게 커다 른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면, 슈테네크, 우리가 승리하게 되면 승리의 가로를 만 들자구. 되버리츠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에 이르는 길에 60미터 넓이로, 오른쪽과 원쪽에 트로피와 약탈품을 세워둔 승리의 가로 말이야." 최초의 뉘른베르크 당 대회 그 사이에 중앙당은 약 30개의 지구당(전체 수 대략 2백 개 중에서)이 1927년 8월 중순으로 예정된 당대회를 위한 벽보를 주문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고 탄식 하였다. 그리고 대중 집회를 조직하는 일이 힘들다는 말도 했다. 아마도 이런 이 유에서 히틀러느 처음므오 당 대회를 오래된 제국도시 뉘른베르크의 낭만적인 배경 속에서 치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곳은 근처에 있는 밤베르크와 비슷하 게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바이마르와는 달리 이번에는 히틀러의 연출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당의 폐쇄성과 전투준비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추종자 중 한 사람은 이날을 계기로 그를 '대중지휘의 마술사'라고 불렀다. 실제로 이 대회에서 뒷날 인기있 는 의식으로 반전하는 최초의 시작을 볼 수 있다. 깃발과 삼각기와 악단을 동원 하고 특수한 행렬을 이루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돌격대와 당 조직부대들이 도 착하였다. 외국에서도 수많은 대표다들이 왔다. 그리고 일년전에 창설된 히틀러 청년단이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바이마르에서 이미 다채롭게, 그러나 우연 적으로 작용한 단일화는 여기서 거의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히틀러 자신도 옛날 의용군 물푼에서 넘겨받아서 돌격대로 도입된 갈색 셔츠 를 입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물론 이 셔츠를 추하다고 여겼다. 루이트폴트 숲 에서 거행된 대규모 행사는 12개 연대기들의 화려한 축성식으로 끝났다. 그러고 나서 히틀러는 시장광장에서 무재차에서 팡을 쭉 뻗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자 기 추종자들의 분열행ㅅ능 바라보았다. 갈색의 환상적 의상을 입은 여자들과 소 녀들은 히트러 앞으로 지나갈 허락을 받지 못했다. 당대회는 노조문제를 위한 '헌금반지'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지적인 계ㅌ에 도 선전을 할 수 있도록 학회를 창설할 것을 요청하였다. 얼마 뒤에 함부르크에 서 히틀러는 처음으로 수천 명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농부들을 앞에 놓고 연설 하였다. 당의 정체현상으로 인해서 새로운 사회계층에서 지지세력을 구하지 않 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지의 시기'에 벌어들인 '수입'들 국가는 그 사이 1923~1924년의 안정화 요인들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새로 운 배상 협정, 로카르노 조약과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켈로그 협약, 그리고 처 음으로 도이치 수상 슈트렌제만과 프랑스 수상 브리앙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으 로 시작해서 점차 공식적인 분위기로 넘어가게 된 츠랑스과의 상호이해 등이 분 명한 효력을 드러냈다. 시대는 긴장완화와 국제적인 균형을 지향하고 있었다. 포괄적인 미국의 차관 은 공과국에 적지 않은 부채를 안겼지만 동시에 경제의 합리화와 현대화를 위한 투자확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의 지표 상승은 거의 모 든 분야에서 다른 모든 유럽 국각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을 뿐만 아리나 영토가 줄었는데도 전쟁 전 독일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1928년에 국민 소득은 1923년의 소득보다 약 12퍼센트나 높았고, 사회적 개선들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 렀으며 실업자 수는 약 4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시대가 국가 사회주의의 과격주의와 반대 경향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였다. 히 틀러 자신도 때로는 몇 주 동안이나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채 오버잘츠베르크 (윗소금산)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나 그의 은둔은 그가 마침내 얼마나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간혹가다만 분명하게 계산된 거리 를 두고서 훈계나 위협을 해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1926년 12월 10일에 <나의 투쟁> 제 2권이 나왔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결정 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제 1권은 1925년에 거의 1만부를, 이듬해에는 거 의 7천부를 팔았지만 1927년 전작품의 매상은 5607권으로 줄었고, 1928년에는 겨우 3015권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의 수입은 윗소금산에 있는 집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베히슈 타인 부인은 집의 설비비를 내주었고,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집안은 여러 가지 침대보나 식탁보 등의 물품과 도자기 등을 보내주어 집안을 장식하게 해 주었 다. 그들은 나중에 바그너 전집과 그의 <로엔그린>의 원본 총보중 한 페이지를 보내주었다. 그 무렵쯤 해서 히틀러는 2만 마르크를 내고 6인승에 덮개가 없는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하였다. 그 자동자는 그의 기술적, 과시적 욕구 에 잘 들어맞았다. 전후에 발견된 그의 세금 자료를 보면 이 비용은 신고된 수입액을 훤씬 초과 하는 것입을 재정당국에 숨길 수가 없었다. 세무서에 보낸 편지는 군대 기피자 로 잡히고 난 뒤 린츠 시당국에 보냈던 편지를 생각나게 하는 감상적인 약삭빠 름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기 생활이 빈궁하고 소박하다고 맹세하였다. "내것이라고 부를만한 부동산이나 금융재산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습 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구를 꼭 필수적인 것에만 한젓시키고 있습니다. 술도 담 배도 입에 대지 않으며 가장 저렴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약간의 집세를 빼고 나면 정치적 문필가의 광고비에 속하지 않는 비용이라곤 아예 없다시피 합니 다... 이 자동차도 내게는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동차는 있어야 일 상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1926년 9월에 그는 세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밝히면서 은행빚이 많다고 거듭 말하였다. 몇 년 뒤에도 그는 때때로 이 시절의 계속적인 돈 부족을 회상 하였다. 때로는 사과만 먹고 산 적도 있다고 말했다. 티르쉬 거리에 있는 과부 라이헤르트의 집에 얻은 셋방은 사실상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자그마하고 옹 색한 가구가 딸린 방이었고, 바닥에는 닳아빠진 니놀륨 장판이 깔려 있었다. 수입을 늘려보려고 히틀러는 헤르만 에서와 사진기사 하인리히 호프만과 함께 <화보 관찰자?를 만들었다. 이 사진기사에세 그는 자기 그림에 대한 전매권을 주었었다. 이 <화보 관찰자>를 위해서 그는 주석의 단조로움과 눈에 띌 정도로 약화된 문체는 이 식의 주제 빈곤을 보여준다. 이 기다림, 계획, 정지의 시기 한가운데인 1928년 여름에 그는 살아있는 동안 에는 출간되지 않는 두 번째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사이 다듬어진 외교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묘사한 책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힘들여서, 그리고 강력한 호소로써 다양한 힘에 의해서 불안하게 움직여가는 당을 한데로 붙잡고 합법화 노선에 대한 불만을 물리쳤다. 공화국의 안정을 보고도 그는 자신의 추 종자들처럼 너무 빠른 결론으로 이끌리지 않았다. 모든 약한 것과 부서지기 쉬 운 것을 간파하는 그의 본능은 그의 원한에 참을성을 주었다. 특이한 어조로 그 는 상황의 저항들과 전망 없음을 보고 특별한 성공의 자신감을 잡아냈다. 그는 자산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 운동이 승리한다는 무조건적인, 아니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근거는 바 로 그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과격파 운동인 한, 여홀니 우리를 조목하는 한 , 현재의 국가 상황이 우리에게 반대하는 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인적자원을 모아 들이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국가사회당의 뮌헨 지구 크리스마스 측제에서 그는 당의 처지, 박해, 곤궁 등 을 초기 기독교의 처지와 비교항ㅆ다. 그는 자신의 대담한 이미지와 크리스마스 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렇게 비교 확대하였다. 국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의 이 상을 현실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일은 그(히 틀러)가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 앞서 진행된 아마추어 연극 <구 원>은 현재를 '곤궁과 노예상태'로 묘사함으로써 그늬 등장을 준바하였다. "성탄 절의 떠오르는 별은 구원자를 가지킨다."고 <민족 관찰자>에서 서술하였다. "막 이 갈라지면서 도이치 민족을 수치와 곤궁에서 구해내는 새로운 구원자를 보여 준다. 바로 우리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다." 그런 선언은 바깥 세계에서 볼 때는 그를 둘러싼 낯선 후광을 더욱 강화 시키 는 것이었다. 경력의 초기 시절처럼 기묘한 출현에 대한 명성이 그를 따라다녔 다. 그러한 출현은 진진하게 고려된다기보다는 바이에른 정치의 그림 같은 특성 으로 설명되었다. 그의 습관이었고, 점점 확장되 가던 형식도 여러 가지로 의심 스런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장군홀로 진행해갈 때 가지고 갔던 깃발을 '피의 깃발'로 존경하도 록 하였다. 모든 군기의 축성식에서 이깃발의 끝을 거드림으로써 신비스런 힘을 넘겨받는 것이다. 그리고 당원들은 종족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주고받을 때 서로 '도이치로 태어난 사람 들이여'라고 호칭하였다. 다른 활동들 역시 줄지 않는 형태로 국가 사회당이 자 신의 의도를 추구하는 진지함과 요구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1926년 말에 당은 연설가 학교를 열었다. 추종자들에게 기술과 지식과 자료를 전해주기 위해서였 다.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1932년 말까지 약 6천명의 연설가를 교육하였다고 한다. 서커스 천막으로 들어오다 1927년 이른 봄에 작센 정부와 바이에른 정부는 새로 얻은 근거와 국가 사회 당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당의 지도자에 대한 연설금지를 해지하기로 결정하였 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쪽에서 요구한 선언을 하였다. 즉 절대로 법에 어극나는 목적을 추구하지도 않고, 법에 어극나는 수단을 쓰지도 않겠다는 맹세였다. 새빨 간 벽보들이 그가 3월 9일 20시에 왕관 서커스장에서 다시금 뮌헹 주민들을 향 하여 연설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경찰 보고서는 인상적으로 마치 모범적 사례처럼 이 행사의 경과를 묘사하고 있다. 서커스 장은 7시 10분에 벌써 절반이 넘게 들어찼다. 무대에서 아래로 하얀 동그라미 속에 갈고리 십자가가 들어있는 붉은 깃발이 드리워졌다. 무대는 간부 당원들과 연설자들을 위한 것이다. 특별석들도 갈색 셔츠가 퍼져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당원들을 위한 것인 듯했다. 단상에는 악단이 자리잡았다. 특별한 장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흥분하고 기대에 넘쳐 있다. 사람들은 히틀러 이야기, 그가 한때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괸장한 성공을 거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여 기저기 눈에 띄게 많이 섞여 있는 여자들도 그에게 열광한 듯이 보인다. 사람들 은 옛날 영광의 날들을 서로 이야기 하고 있다... 뜨겁고 달큰한 분위시 속에는 센세이셔널한 욕구가 떠돌고 있다. 음악음 몇 개의 소리 맑은 둔대 음악을 연주 하고, 그 사이 계속 새로운 패거리들이 몰려들어온다. <민족 관찰자>는 이리저 리 돌아다니고 계속 칭찬을 듣은다. 카운터에서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강령 을 받았다. 입구에서는 종이 한 장 씩을 손에 들려준다. 거기에는 어떤 도전에도 휩쓸려들지 말 것과 질서를 지키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 작은 깃발들을 팔고 있 다. '환영의 깃발, 각 10페니히'. 그 깃발들은 검정, 하양, 빨강이나 아주 빨간색 바탕에 각기 갈고리 십자가가 들어 있다. 여자들이 열심히 사고 있다. 그 사이 줄들이 채워진다. '전과 마찬가지고 해주십쇼!'하는 말이 들린다. 원형 의 공연장도 사람들이 들어차고 있다... 대개는 하류 직업인들로, 노동자, 과격 노동 계층 대표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좋 은 옷을 입고 있으며 어떤 신사들은 연미복 차림이다. 서커스 장을 거의 가득 채운 사람들은 어리잡아 7천 정도에 이르고 있다... 7시 반의 사정이다. 그때 입구에서 '하일' 하는 외침이 들리고 갈색 셔츠들이 행진해 들어온다, 음악이 울리고 서커스장은 떠나갈 듯한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히틀러가 갈색 레인 코트를 입고 나타나서 심복들에 둘러싸인 채 서커스 장 전 체를 통과해서 단상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은 기쁨으로 흥분한 몸짓을 하고 손짓 하고 계속 '하일'을 외치고 있으며, 의자에 올라서서 발릉 굴러댄다, 그러자 극장 처럼 나팔소리. 갑작스러운 조용함,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인사를 받으며 갈색 셔츠들이 대오를 이루어 들어온다. 맨 앞에는 두 줄로 북치는 사람들, 다음은 깃발이다. 사람들은 파시스트 방식으 로 팔을 뻗어 인사한다. 관중은 그들에게 환호를 보낸다. 깃발들이 스쳐 지나가 고, 번쩍이는 연대기들이 지나간다. 화환 속의 갈고리 십자가, 독수리들, 옛 로마 의 군기를 흉내낸 것들이다. 약 2백 명 정도가 분열 행진을 했다. 그들은 둥근 공연장을 채우고 거기에 자리 잡고 섰다. 군가와 연대기를 든 기수들이 무대를 채운다. 히틀러는 서둘러 무대의 앞쪽으로 나선다. 그는 자유롭게 말한다, 처음에는 느 린 어조로, 나중에는 빠른 속도로 말하고, 과장도니 정열로 말한느 구절들은 못 고리를 낮추어서 서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그는 팔짓과 손짓을 해보이고 흥분해서 이리 저리 펄쩍펄쩍 뛰면서, 주의 깊게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명의 관 객을 쉬지 않고 매혹시키려고 한다. 박수 갈채가 그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그는 연극적으로 두 손을 번쩍 쳐든다. 연설의 뒷부분에 자주 들당하는 '아닙니다'하 는 말은 연극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강조된다. 연설 자체는... 보고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되찾은 연설의 자유가 국가 사회당이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새 주지는 않았다. 그 동안의 연설 금지는 오히려 히틀러에게 유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출연했더라도 어쩌면 집회의 홀들을 가닥 채우지는 못했을 즐거운 무관심의 시 대에 그의 이름이 마모되는 것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는 스스로 연 설 활동을 줄였다. 1927년에는 공식 연설을 56회 했다. 2년 뒤에는 27회까지 줄여 버렸다. 그는 이때쯤 해서야 반신적인 은둔상태가 어떠한 이점을 자겨다주는지 분명하게 깨달 은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 돌아온 순간에 그는 불리한 상황의 압도적인 힘과 경쟁 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곧 실패가 나타나고 그와 더불어 비판이 뒤따랐다. 비판은 그의 지휘 방식과 엄격하게 지켜지는 합법화 정택을 향한 것이었다. 히 틀러에게 완전히 복종적이고, 지도자 숭배의 예언자 중 한 사람인 괴벨스조차도 1927년의 팸플릿 <나치- 사회주의>에서 무조건적인 합법 노선을 비판하였다, 다수는 얻으려는 노력이 실패 할 경우 당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저항적인 태도로 확언하였다. "무엇이라구?! 그럼 우린 이를 악물고 각오 가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국가에 맞서 행진하고, 독일을 얻기 위한 최후 의 위대한 일격을 감행하고 말의 혁명가는 행동의 혁명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혁명을 할 것이다. 히틀러의 개인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루어졌다. 공로가 있는 동지드을 얕보는 듯한 태도, 오랜 정당인이 바난한 것처럼 '히틀러 씨를 둘러싼 애창되는 장벽' 그의 방만한 업무 집행, 혹은 조카딸에 대한 질투심 등에 ㄷ나 것이었다. 1928년 이른 여름에 에밀 모리스가 겔리 라우발의 방에 있는 것을 히틀러에게 들켰을 때 히틀러가 너무나 격분해서 드를 위협했기 때문에 그는 창문에서 뛰어 내려서 겨우 자신을 구했다고 한다. 조사 및 조정 위원회의 의장인 발터 부흐는 자신이 ;노골적인 복종'을 하고 있 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자신의인상을 전달할 필요성을 느꼈다. "히틀러 씨, 당신 은 점차 인간에 대한 경렴에 이르는 것 같군요. 나는 두려운 근심을 느낍니다." 오류 없음에 대한 요구 당내의 시끄러운 분위기를 보고 히틀러는 1928년에 계획된 당대회를 취소하고 그 대신 뮌헨에 지도자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모든 하부 조직에 준비 모임을 금지하였다. 8월 31일 대회가 열리자 그는 흥분해서 복종과 기율을 칭찬하였다. 오직 조건 없이 결탁한 엘리트만이 '역사의 소수파'로서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 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당은 많아야 60만에서 80만의 당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다. "그것은 쓸모 있는 인원입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단순한 지지자들로 서 당의 목적을 위해서 쓸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작은 그룹의 광신자들이 대 중을 이끌어갑니다. 러시아화 이탈리아를 보세요... 강력한 소수파를 가진 다음에 비로소 다수를 얻기 위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자기 옆에 '고문단'을 두라는 제안을 조소로써 물리쳤다. 자기는 조언자가 필요치 않다. 곧 이어서 그 제안자인 튀링겐 관구 지도자 딘터를 당에서 제명해버렸다. 그보다 앞선 서신 교환에서 그는 딘터에게 정치가로서 '무오류성을 요구한다'고 확언했 다. 곧 이어서 이제 널리 쓸이게 된 명령 수령 형식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새로운 당 대회가 소집되었다. 거기서 스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동안 보한 듯이 지루하 다는 얼굴을 하고서 침묵ㅇ르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점차 쓸모 없다는 느 낌과 마비의 느낌이 퍼지게 되어서 결국 대회는 전체적으로 의기소침한 가운데 끝났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은 나중에, 히틀러가 이 대회의 개최에 동의한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을 분명히 파괴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러나 엄격하게 조직된 당의 지도자로서 히틀러는 자신 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용기를 잃어버릴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는 이제 처음으로 당내외적으로 자신의 독자성을 쟁취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부터 때때로 당은 공식적으로 '히틀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영향력 있는 후원자와 강력한 기구를 통한 특별한 후원이 없어도 당은 자신의 힘으로 승리까지는 아니라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연극을 시작해보자구" 1028년 5월 20일에 새로운 중앙의회(국회) 선거가 있었다. 국가 사회당은 2.6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9위를 차지했다. 그드의 열두 명 의원 중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고트프리트 페더, 괴벨스, 프리크와 그 사이 재산 있ㄴ느 아내와 광범 위한 관계를 얻고서 스웨덴에서 돌아온 헤르만 괴링이 끼어 있었다. 히틀러 자 신은 '국가가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입후보하지 않았다. 자신의 곤궁과 당황을 장저으로 묘사해내는 특유의 능력으로 그는 이러한 장 애를 새로우 거리가으로 만들어내는 데 이용하였다. 결멸하는 의회제도를 인정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로 시대의 열망, 사럽, 욕망들보다 높은 곳에 서 있 는 독자적인 지도가한느 역할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랫동한 고심한 끝네 선거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으 당이 의ㄷ들의 특권을 얻는다는 생각에 적잖이 영향을 받 은 것이었다. 괴벨스는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 만에 쓴 기사에서 당의 합법화 맹세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발언을 하고 있다. "나는 으회의 성원이 아니다. 나는 IdI이고 IdF이다. 즉 면책권 소지자고 무임 승차권 소지자다. 우리에게 의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의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선풀된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위탁한 사람들 이 생각하는 대로 의물르 행 할 것이다... IdI는 쓰레기더미를 보고 쓰레기더미라 고 부르고 둘러대면서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사람이다." 이 고백 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이제 당신들은 놀았는가? 그러나 우리가 벌 써 끝에 와 있다고 믿지는 마시라... 당신들은 앞으로도 우리를 많이 놀릴 것이 다. 자 그러니 연극을 시작해 보자구." 제3의 가치 이러한 발언의 경멸적인 광채는 그들의 스스로 달아오른 특성을 감추지 않았 다. 국가 사회당은 과장도니 몸짓의 파편정당이었다. 냉정하게 잘 준비를 갖추 고, 간부들을 투입해 좋고서 히틀러는 상황이 새로 과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상황이 과격해지면 대중정당으로 나서려는 것이다. 온갖 열의를 다하고, 온갖 조직적인 불안ㅇ르 다 동원했지만 그는 이제까지 쓸모 있고 광채 없이 움직인느 공화국의 그늘에서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열정 적인 혼란 상태에서 그토록 효과만점이었던 그의 카리스마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부서져가려고 했다. 때때로 민족이 마침내 공화국과의 평화, 볼품 없는 회색 상 황과 평화를 맺을 준비가 된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 만들어낸 현실, 영웅 적, 낭만적 추억을 잃어버리고, 일상적인 역사와 화해를 하려는 듯이 보였다. 의 회선거는 물론 중간 시민계층의 해체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수없이 등장 한 파편정당들의 모습으로 체계의 감추어진 위기를 알리고 있었다. 또한 당의 투종 세력도 거의 15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다음해 초에도 여전히 본 대학 교수인 사회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우리 사회 상황이 아작도 대단히 큰, 어쩌면 더욱 커지는 안정"을 얻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영역에서도, 어떤 방향으로도 일격, 비약, 혹은 파국은 있을 법하지 않다." 히틀러가 상황을 더욱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공화국의 이 짧은 행운의 시기에 도이치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제3의 가치를 가지 고 있습니다. 즉 전투욕이죠. 그것은 외국 이론과 독트린의 폐허더미에 파묻혀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대하고 강력한 정당은 그 반대를 증명하려 고 노력하고 있지만 갑자기 아주 낯익은 군악대가 와서 연줄르 시작하면 뒤따르 는 사라들은 꿈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행진하는 민족의 동지가 되어서 그들도 함께 행진 할 것입니다. 오늘날이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에세는 더 나은 이 점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행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는 행진의 시작ㅇ르 위한 표지만을 기다렸다. 당이 시대를 초 월하여 모든 허구의 허망한 신념의 체계인 자시의 역동성과 희망과 목적의식과 선택된 지도자의 이미지를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1928년 5월의 선거를 분석하면서 오토 슈트라서는 '국가 사회주의의 구원복음' 이 대중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뚫고 들어가는 일에 실패했다고 탄식하였다. 사실상 당의 지지계층은 샐러리맨, 영세 사업자, 농부들과 낭만적 저항을 생각하는 젊은 층이었다. '아주 낯익은 군 악대'가 깨우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민감하게 알아듣는 전위대인 젊은 층이었다. 그러나 겨우 몇 달 뒤에 벌써 장면은 전체적으로 변하게 된다. 4부 권력을 향한 투쟁 제1장 큰 정치판에 뛰어들다 히틀러는 1929년 여름에 막 안정되고 있던 공화국 체제에 최초의 대규모 공격 을 시작하였다.그리고 순식간에 앞으로 돌격하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동원이 가 능한 구호를 찾고 있었는데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이 갑자기 공략기점을 제공 한 것이다. 이용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고, 새로 시작된 전쟁 배상금 논쟁 을 이용해서, 그는 국가 사회당을 고림된 파편 정당의 역학에서 해방시키고 큰 정치판의 중심부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의 이런 돌격이 ㄱ이어 나타나는 세계 경제 공황과 시각적, 심리적으로 밀 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치 전주곡처 럼 자신의 수단, 조직, 전략 등을 일단 시험해볼 기회를 가졌다. 전쟁 배상금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되는 지속적 위기의 첫 박자가 되었다. 이어지는 위기는 공 화국을 사로잡았고, 히틀러에게 붙잡혀 풍부한 발상으로 촉진되어서 공화국의 종말에 이르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1929년 10월 초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죽음이 전환점이 되었다. 도이치 외무장관은 복잡한 외교개념에 대한 저항에 부딪쳐서 많은 힘을 소모하였다. 그의 생각은 '배상금 조건 이행 정책'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재로는 베르사유 조약의 점짐적인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것이었다. 죽기 직전 까지 그는 내심의 의혹이 없지는 안ㅎ으나 그래도 새로운 배상금 규정을 수용하 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새로운 규정이란 미국 은행가인 오웬 영이 이끄 는 배상 창구 위원회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그것은 유효한 조건들을 적잖 이 개선하려 했을 뿐 아니라, 슈트레제만의 고집과 외교적 능숙함 덕택으로 연 합국 점령군이 라인란트에서 일찍 척수하는 계획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국내에서 과격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공화국이 강제상 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초기 연부금도 낼 수 없는 상황에 서 거의 60년 동안이나 지불 의무를 짊어진단느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칼 두이스베르크, 아돌프 하르나크, 막스 플랑크, 콘라트 아데나우어, 한스 루 터 등의 인물들이 끼여 있는, 재계, 학계, 정계의 유명 인사 2백여 명의 공개 성 명서에서 큰 우려를 표시하였다. 저쟁이 끝난지 11년이 지난 지금 이 계획은 시 대의 열망이 들어 있는 모든 종족이 한 가족이란느 이념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 렸다. 표면적인 수많은 화해의 몸짓 뒤에서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대립이 계 속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이다. 더욱이 1988년까지 계속되는 부채 상환 요구는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231조 전범조항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도이치 민족의 자의식을 심하게 손상시켰던 바고 그 조항이었다. 과격한 민족주의 단체들은 이 비현실적인 계획 을 보고 "도이치 사람들이 전부 지불하라"는 역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하였 다. 점차적으로 전쟁 결과 극복하는 과정이어야 하고, 따라서 공화국의 안정에도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 반대로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원칙적 반대세력의 결정 지점이 된 것이다." 후겐베르크와 극우파의 결집 1929년 7월 9일에 극우파는 '영 안에 반대하는 국민청원을 위한 전국 위원회' 아래 하나로 뭉쳤다. 협정에 서명이 이루어진 약 9개월 위까지 캠페인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극좌파에서 공산당까지 가세하였다. 이 캠페인에서 위원회는 협정의 철회를 추진하였다. 복잡한 종속 양상을 몇 마디 도발적인 슬로건으로 축약시켜 수없이 되뇌었고, 그러써 날카롭게 전개된 원수 이미지에 증오가 자리 를 잡도록 애썼다. 이런 합의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고, '도이치 민족을 골고다'로 끌고가서 형리가 '비웃으면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짓이라고 했다. 동시에 여기서 처음으로 단결하여 뭉친 '범야권 연합'은 전 범조항 삭제, 모든 배상의 종결, 점령 지구에서의 조속한 철수, 도이치 민족의 '노예화'에 협조한 모든 장관과 정부 대표의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추밀 고문관 알프레드 후겐베르크가 이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는 야심만만하 지만 생각이 좁고 가차없는 63세의 남자였다. 처음에 동부의 거주 담당관으로 출발해서 크루프 회사의 이사를 역임한 후 수많은 자회사를 거느린 언론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것은 광범위한 종류의 신문들과 출판사, 통신사, UFA 영화회사 등을 거느린 것이었다. 중공업 분야의 정치적 신임 인물로서 그는 상당한 액수 의 돈을 다루고 있었고 이 모든 수단들을 이용해서 '사회 주의자 공화국'을 멸망 시키고, 노조를 파괴하고 그 자신의 말처럼 아래로부터의 계급 투쟁에 대항하여 상류층의 계급 투쟁으로 응답하려 애썼다. 자그마하고 둥글둥글한 몸집에 커다 란 코밑수염, 짧게 깎은 머리 모양으로 그는 싸음 잘하는 은퇴한 수위 같은 느 낌을 풍겼다. 그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당당하고 원칙적이며 분노한 사람처럼 보 이지는 않았다. 1928년 가을에 '어두에서 나온 사나이' 후겐베르크는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지 휘를 맡으면서 과격한 원한의 대변자가 되었다. 일단은 성공한 듯이 보이던 우 파의 공화국 합류는 즉시 패배하였다. 국가 민족당은 방법론으로나 개별적인 당 강령에 이르기까지 히틀러 정당을 모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히틀러 당을 시 민적으로 풍자한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후겐베르크는 증오스런 공화국에 대적 하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 그는 어 떤 글에서 3천명의 미국 기업가들에게 최초의 위기 상태에 빠져든 이 나라에 차 관을 주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 새로운 의자을 맞이하자마자 당원들의 약 절 반정도가 떠나버렸지만, 후겐베르크는 끄떡도 안 하고, 자기는 양 많은 죽보다는 작아도 단단한 벽돌 덩어리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가 준비한 국민 청원은, 새로운 과격 노선의 첫 번째 절정이었으며, 그는 흩 어진 우파들, 특히 철모단(재향 군인회), 모든 도이치 당원, 지주 연맹, 국가 사 회주의자들을 자기 지휘아래 한데 모아서 공격을 조직하려고 했다. 잃어버린 영 향력을 일부나마 옛날 상류층에 얻으려는 것이었다. 우파는 1918년 혁명이 기회를 놓친 덕분에 아직도 영향력, 지위, 물질적 수단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중을 자기 편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천민당 지도자게 비해 자기가 '더 나은 신사'라는 건방진 태도로 후겐베르크는 히틀러가 선동가적 재능을 지녔다고 믿었다. 사회적 망상 속에 격리된 보수주의 활동 쪽으로 대중 을 다시 불러들이기에 적합한 재능이었다. 히틀러를 이용하다가 때가 되면 그를 능가해서 제압해버리면 될 것이라고 후겐베르크는 생각하였다. 히틀러의 생각도 그보다 덜 음흉하지는 않았다. 하인리히 로제의원은 이 결합 소식을 들었을 때 근심스럽게 말했다. "지도자(히틀러)가 후겐베르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기를 바랄 수 밖에요." 그러나 히틀러는 속을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근느 분명하게 오만불손한 태돌 등장하였다. 그리고 괴벨스의 표현대로 이 모든 '좀먹은 잿빛 귀족계급'과 부르조아 반동분자인 후겐베르크에 대한 경멸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당내 '좌파'가 시술ㄱ게 관찰하는 가운데 그는 상대방이 요구하는 모든 야오를 철저히 거절하였다. 자기가 어떤 조건 아래서 그들을 도울 것인지 스스로 결정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따로 추진하기를 제안하였으나 마침내 연합활동에 동 의하였다. 물론 그는 선전을 위해서 완전히 독립성과, 준비된 재원 중의 상당 부 분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동지들을 일부러 혼란케 하거나 아니면 기를 꺾을 셈으로, 자기 휘하의 가장 유명한 자본주의의 적, 그레고어 슈트라이서를 공동의 재정 위원회에 자기 측 대표로 임명하였다. 전략가 히틀러 후겐베르크와의 동맹은 히틀러를 마침내 목적지를 데려다 줄 계속될 전략적 승리 중에서 첫 번째 승리였다. 상황을 인식하고, 어디에 이익이 있는지 꿰뚫어 보고, 약점을 찾아내고, 순간의 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히틀러의 비상한 능력이 었다.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기에 더욱더 효과적인 이런 전략적 감각은, 연설 능 력, 군부, 산업체, 법, 갈색 부대 테러 등과 함께 그의 성공의 이유가 된다. 히틀러의 출세 이야기에서 마적인 음모 혹은 완력의 요소를 지적하는 것이 한 동안 유행하였다. 그것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모든 반 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국가 사회당의 당수를 북치는 사람, 도구 등으로만 생각 하고, 히틀러가 정치 영역에서도 능력을 입증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데서 나 온 것이다. 히틀러는 전략적인 능숙함, 처음의 망설임, 부분적으로 도전적이고 부분적으로 불만스러운 협상 태도, 그리고 정직함, 명예욕, 정력 등을 가지고 있단느 인상 등을 통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출세를 앞세어 재정적인 후원을 해주도록 만들었 다. 그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그런 후원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의 성공은 자기 측의 저항을 통해서도 얻어졌다. 당내 저항 세력은 그에게 전혀 양보를 하지 않 았고, 슈트라서의 전투적 출판사가 내는 신문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굵은 난을 치고 굵은 활자를 히틀러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도이치 민족에 대한 가 장 큰 위험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시민 정당들이라고 했다. 히틀러의 전략적 승리를 평가하려면, 권력에 굶주린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라 는 보수파의 맹목성도 읽어내야 한다. 이 보수파는 국가사회주의의 힘과 활동성 에 기생하여, 속으로 경멸하기도 하고 경탄하기도 하는 반항아 히틀러와 연합해 서 오래 전에 미리 확증된 역사와의 이별을 늦춰보려고 하였다. 그래도 히틀러 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4년 반 동안이나 그는 기다리면서 준비를 갖추었다. 칼 뤼거의 잊지 못할 교 훈대로 저 '강력한 기관들',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과 연합하기 위 해서 애써왔다. 마침내 그런 제안이 나왔을 때 그는 지나친 권력욕의 인상을 만 들지 않도록 조심했다. 자신의 권력 장악 개념에 따라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 었지만, 오히려 냉정하고 자신감에 넘친 태도로 반응하고, 자신의 조건들을 내세 웠다. 여러해 동안이나 눈에 띄지 않고 잠잠한, 아니면 비웃음이나 받은 과격파 정 당의 정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개인적, 정치적 야심으로 삼아온 사람의 기분 을 짐작할 수 있어야만, 후겐베르크가 제안한 후원 약속이 그에게 얼마나 대단 한 의미르 가진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엉터리 혁명가라는 악명,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라는 악명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영향력 있는 시민 후원자들에 둘러싸인 채 대중 앞에 나서서 존경 받는 유명 인사들의 평판을 이 용할 가능성을 돌려준 것이다. 그것은 전에도 한 번 가지고 놀아본 적이 있는 기회였다. 이제 그는 그것을 좀더 신중하게 인식하는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선전기구의 활용 동맹체결과 동시에 국가 사회당은 처음으로 압도적인 선전기구를 펼쳐놓을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 비슷한 것은 독일이 한 번도 존재한 것이 없었다고 히틀 런느 어떤 편지에 썼다. "우리는 다른 어떤 정당도 한 적이 없는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헤집어 엎었습니다. " 그 오랜 기다림의 세월 동안 행동을 갈망하던 추종 자들의 분노가 이런 폭발로 분출된 것 같았다. 민족주의 연합 파트너 중 누구도 국가 사회당의 거침 없고 날카롭고 선동적인 재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주 처으부터 국가 사회당은 영 안은 캠페인의 계기 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본적으로 이른바 무능과 배신에 빠진 채 돈에만 관심을 갖는 '체제'를 소란스럽게 재판한다는 방향으로 선동하였 다. 히틀러는 11월 말 헤르스브루크에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독일 붕괴에 대한 책임이 있ㄴ느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스러질 시간이 다가옵니다. 두 려운이 그들을 사로 잡을 것입니다. 그들은 재판관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 니다." 후겐베르크와 다른 보수연합 동지들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거친 선동에 매혹 당한 채 자기들이 풀어 놓은 강력한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로 부추기고 용길르 주곤 하였다. 이미 오래 전에 자기들이 사태를 주도하고 있다는 눈먼 자 신감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캠페인이 외면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렵 지 않게 간파하였다. '도이치 민족의 노예화에 반대하는 법안'을 위한 초안은 국 민 청원을 위해 필요한, 유권자 10퍼센트의지지를 겨우 얻었을 뿐이다. 1929년 12월 22일에 이루어진 국민 투표도 패배로 끝났다. 겨우 14펴센트의 찬성표로 이번 국민 청원은 법안 통과 필요한 찬성표의 약 1/4 정도를 얻은 것에 불과하 였다. 그것은 일년 전에 의회 선거에 국가 사회당과 국가 민족당이 얻었던 표를 하진 것보다 거의 5퍼센트나 적은 것이었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쨌든 큰 정치판으로 뛰어드는 마지막 통과 절차 였다. 후겐베르트 기업의 다양한 출판매제를 통한 후원 덕분에 그는 단번에 인 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방향을 잃고 흩어진 우파에 자신이 가장 강력한 에너지 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론에 '대단히 강력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 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건방지고 오만한, 아니면 어 리것은 태도로 당을 거부하던 성향이 이제 기대에 가득 찬 희망으로 바뀐 것이 놀랍다." 고 했다.(언급된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다.) 캠페인이 시작된 다음인 1929년 8울 3~4일에 그는 뉘른베르크에 전당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럼으로써 무엇보다도 자신의 보수 진영 파트너들에게 자기 당의 힘과 파괴력을 보여주려고 했단느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은 전통적인 당 대회가, 군사적으로 기획되고 연출의 규칙과 심리적 규칙에 따른 대중 집회로 넘어가는 최초의 과도기 행사였다. 숫자 정보가 맞는다면 약 20만 추종자의 30개가 넘는 특수 행렬이 독일 저국 방방곡곡에서 이쪽으로 밀려왔다. 그들의 유니폼, 깃발, 악대등이 여러 날 동안 이나 뉘른베르크 시를 지배하였다. 장엄한 의식으로 축성을 받은 24개의 새로운 연대기들 다수는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슐렌스비히 홀스타인에서 온 것들이었 다. 거창한 폐막식에서 약 6만 명의 돌격대 대원들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와전 무장한 채로 세 시간 반 동안이나 행진 음악에 맞추어 히틀러 앞을 통과하는 분 열식을 거행하였다. 몇 개 부대는 이 며칠간의 쾌감에 빠져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려고까지 했다. 국가 사회당의 당내 과격파 건의의 배후에도 정부 참여를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금지'해야 한단느 분위기였다. 당을 '정치권력 쪽으로 데려다 줄'행동은 모두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말로 히틀러는 이런 건의를 거 절하였다. 히틀러의 합법화 노선은,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커가는 당 군대의 자신감에 의해서 거듭 위협받았다. 이미 그해 말에 돌격대 숫자는 방위군 숫자 와 같아졌다. 재계화의 관게 구축 후겐베르크와의 동맹은 히틀러에게 재계와의 광범위한 관계를 마련해주었다. 재계는 여러 해 동안이나 슈트라이만의 외교 정책을 뒷받침해 왔으나, 지금은 영 안에 정열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프리츠 티센 같은 몇 명의 예외를 빼면 소규모 기업가들에게서만 물직적 후원을 받았다. 영 주들의 재산 몰수 문제에서 반사회주의적인, 사유 재산 옹호의 태도를 취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풍부한 재원에 접근할 길이 열렸다. 연설금지 기간에도 그는 특별히 루프 지방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수백 명의 대 개는, 회의적인 기업다들을 앞에 놓고 폐쇄적인 집회를 열어서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 사회주의는 사유 재산의 정열적인 옹호자라고 주장하였다. 성공은 귀족의 증거라는 자기 생각에 맞게 그는 대기업 가란 지도하기 위해 태어난 더 높은 종족이라고 찬양하고, 전체적으로 자신은 '기업주에게 불가능한 어떤 일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일깨웠다. 그리고 뮌헨 사교계와의 관계도 다시 좋아졌다. 거기서 그는 언제나처럼 대단 히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엘자 브루크만 같은 여자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히틀 러를 '중공업계의 지도적인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는 것을 '생애의 과제'로 삼았다. 1929년에 그녀는 늙은 에밀 키르도르프와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일생 동안 위를 향해서 반대하고 아래를 향해서는 경멸해 온 이 거친 노인에게서 히틀러가 강한 인상을 받았듯이, 키르도르프 역시 상대방에게 매료 당해서 한동안 그의 소중한 후운자가 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생각을 팸플릿으로 쓰게 한 다음 그것을 개인 비용으로 인쇄해서 산업가들 사이에 돌리기도 했다.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 그는 귀빈으로 참석하였고, 그 며칠동안 자신을 가득 채웠던 그 압도의 느낌을 절대 로 잊지 못할 것이라고 나중에 편지로 써보냈다.(키로도르프는 물론 다시 당과 결별하였다. 당의 정강은 많은 점에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934년에 재압 당했다.) 1929년의 지방 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새로운 수단과 후원들은 내세 울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작센과 메클렌부르크 슈베린에서 국가 사회주의자들 은 봄에 이미 거의 5퍼센트의 득표를 하였다. 프로이센 지방 선거 진출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코부르크에서는 시장을 냈고, 투링겐에서는 빌헬름 프리크가 나와 서 국가 사회당 최초의 주 장관이 되었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 기도문을 학교에 도입하고, 중앙 정부와 갈등을 만들어냄으로써 곧 자기 목소리를 냈다. 전체적으 로 자기 정당의 연합 정부 수립 능력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과시용 무대 장치 과시적인 기질에 맞게 히틀러는 자신의 성공에 값비싼 배경 장치를 마련하려 고 했다. 그것은 다시 장래의 성공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안당사는 1925 년 이후 셸링 거리에 단순하지만 목적에 맞는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히 틀러는 프리츠 티센과 당원들이 모은 헌금으로 뮌헨의 브리엔 거리에 있는 바를 로브 궁을 사서 그것을 '갈색집'으로 개조하였다. 건축가 파울 루트비히 트로스트와 함께 그는 뒤늦게 젊은 날의 꿈으로 되돌아 온 듯이 자신을 잊고 내부 설비를 구상하고, 가구며 문, 상감 세공 등을 스케치 ㅏ였다. 커다란 바깥 셰단을 올라가면 곧장 그의 집무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 에는 한두 개의 무거운 가구들 이외에는 오직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와 무솔 리니의 흉상, 플란더스 지방에서 리스트 연대가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등 만이 있었다. 옆방의 고문관실에는 말굽 모양의 거대한 책상 주위로 붉은 모로코 가죽이 씌 워진 60개의 안락의자가 놓여있었다. 의자 등받이에는 당의 상징인 독수리가 새 겨져 있었고, 입구 양편에 있는 청동판엔느 1923년 11월 9일의 희생자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방 안에는 비스마르크와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흉상이 놓여 있었 다. 이 홀은 원래의 목적으로 쓰이지 ㅇ고 다만 히틀러의 연극적 필요로만 쓰였 다. 히틀러는 오래 전부터 고문단을 두라는 모든 제안을 단호하게 물리쳐왔다. 갈색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초상화 아래 '지도자 자리' 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몇 시간씩 부관들과 경건한 운전기 사들 사이에 앉아서 굉장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억누를 길 없는 수다 욕구를 채우곤 하였다. 그는 이제 개인적인 생활도 당의 자금 형편에 맞추었다. 1929년 이후에는 그 의 서류에서 상당히 불어난 부채의 갑작스런 이자 따위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 는 윈헨의 상류 시민층 거주지인 왕자섭정 거시 16번지에 방 아홉 개짜리 큼직 한 집으로 들어갔다. 티르시 거리 셋집의 여주인라이헤르트 부인과 아니 빈터 부인이 살림을 맡았다. 이복 누이인 라우발 부인은 전처럼 윗소금간 기슭에 있는 바헨펠트 집 살림을 맡았다. 조카딸인 겔리도 왕자 섭정 거리의 집으로 이사왔다. 그녀는 외삼촌인 히틀러의 극장에 대한 열정으로 노래 수업과 연극 수업을 받았다. 숙질 관계에 대한 소문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또한 비시민적인 자유와, 조카에 대한 애착 속에 숨어 있는 거대하고 운명적인 삶의 연관을 소중하게 여겼다. 후겐베르크와의 결별 히틀러는 영 안에 대한 캠페인이 끝난 직후에위험 하지만 효과만점인 행동을 통해서 새로 얻은 정치적 자신감을 알렸다. 후겐베르크를 둘러싼 보수파 파트너 들과 보란 듯이 관계를 끊은 것이다. 성의 없음, 약점, 국민 청원에 실패에 대한 책임 등을 들어서 그들을 통해서 전혀 방해 받지 않는 그의 이러 배신 행동은 그에게 한 번 더 전략적인 도움을 주었다. 갑작스런 방향 전환은 그가 '자본주의 개새끼 후겐베르크'와 동맹했다고 비난하는(도이치 민족주의자들은 한결같은 우 월감에 잠긴채 히틀러가 당내 좌파와 겪었던 곤란이라는 측면에서 위원회와의 갈등을 해석하였다. 물론 슈트라서 일파가 이 과저을 자신들의 승리라고 자랑ㅎ 다는 점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레고어 슈 트라서는 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동맹의 종말에 적잖이 기여하였기 때문 이다.) 자기 진영의 불안한 비난을 침묵케 했을 뿐 아니라 공화국에 반대하는 우 익 진영 유일의 힘이라는 명성을 굳혀주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감당해야 할 패배에 대한 책임을 부인 해버렸다. 그와 같이 대담한 행동은 수적으로 여전히 열세인 작은 정당에는 거의 어울리 지 않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욱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제 한 번 일깨운 당 운동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라 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공격적인 의도에 알맞게 그는 중앙당을 새롭게 조직하였 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당 기구 제1분과(정치기구)를 맡고, 퇴역 대령 콘스탄틴 히에를이 당 기구 제2분과(국가사회주의 국가=그림자 국가)를 맡았다. 괴벨스는 전국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0년 2월 2일자 편지에서 히틀러는 '거의 예언 자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예언하였다. "길어봐야 2년 반이나 3년 안에... 우리 당 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계층으로 진출 그는 후겐베르크와 결별한 뒤에 거의 중단하지 않고 변함없는 과격성으로 공 화국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계속하였다. 일년 전에 이미 당시 선전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서명을 받은 당 중앙의 지침서가 이른바 선전 활동의 실천을 요청했다. 그것은 정치 선전의 새로운 전략을 표현한 것이다. 각 관구(지역구 혹은 히틀러 치하의 행정 구역) 조직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기 습적인 작전을 가지고 마지막 마을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갈 것. 일주일 이내에 당의 모든 연설가는 수백 번의 행사에서 자기 능력의 '최후의 한 계까지' 다 쓸 것. 모든 도시와 지역은 이 기간 동안 히틀러가 손수 선정한 벽보 와 등사지, 삐라 등으로 완전히 넘쳐나도록 만들 것, '선전의 밤'을 조직할 것, 그 런 밤에는 악대의 행진곡에 맞추어 돌격대가 나타날 것. 돌격대가 "그 자리에 참 석하는 것말고 자체적으로 해도 괜찮은 일들은, 스포트 행사, 할인화, 연극 공연, 노래, 돌격대 연설, 당 영화 상영 등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1930년 6월 작센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은 그런 행사를 1천 3백 번 이상 치렀다. 이러한 지방 투입은 특정한 사회 계층 안에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 특히 샐러 리 맨과 농부들을 상당수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렇게 강력하게 돌진해 들어 감으로써 당은 조합, 상공업 조합, 직업 조함 등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예를 들ㅇ면 농톤에서 당은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농부들이 검은 깃발 아래 시위행진 을 벌일 때 처럼 긴급한 상황이 닥치면 '토지 개혁'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구호 로 맞서곤 하였다. 모든 것을 농부들의 잠재적인 반유대주의로 유도하였다. 어떤 강습 지침서에 씌여진 바에 따르면 이 반유대주의는 '미칠 정도로 부추겨야'한다 고 했다. 히틀러는 발터 다레라는 외국의 어떤 젊은 도이치 사람을 루돌프 헤스의 소개 로 알게 되었다. 그는 농업 정택에 대한 책을 완성해 1930년 3월 초에 출간하였 다. 이 책은 농부를 '민족의 가장 고귀한 계층'이라고 찬양하면서, 폭넓은 보조금 을 제안 한 것이었다. 샐러리 맨들을 위해서도 당은 종전, 도시화, 사회적인 구조변화의 압력 드을 가장 힘들게 겪은 이 계층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위기의식을 이용하였다. 그에 반해 공장 노동자층은 처음부터 당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29년 초 샐러리 맨과 농업 노동자들이 당에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이제 '모든 일하는 사 람의 정당'이라는 주장이 타당하게 되었다. 모든 계층이 몰려들면서 전국적으로 작은 세포들과 후원 지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의 위대한 출발을 위한 준비였다. 검은 금요일 이러한 성과들은 히틀러에 의해 쉬지 않고 추진된 당의 활동과, 또한 전통적 으로 분열된 우익의 어지럽고 감상적인 생각을 하나로 모아 전략적으로 강화하 는 히틀러의 능력 덕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그 사이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 덕분이었다. 독일의 경제적 발전을 가능케 하고 특히 자치 단체의 경박스런 지출 경제를 톡진시켰던 외국 차입금은 대부분 단기 차관이었다. 이제 불안해진 채권자들이 차관을 회수하였다. 세계무역의 급격한 삼소로 인해 수출을 늘려서 이러한 손실 을 메울 전망도 없어졌다. 세계 시장 가격의 하락과 더불어 농업 경제도 위기에 빠졌고 처음에는 지원금으로 근근이 꾸려나갔지만 지원금이 다시 일반적인 부담 이 되었다. 하나의 재앙이 다른 재앙을 불러 말 그대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주식 가격 의 폭락에 따라 실업자 수가 늘고, 작업 정지, 압류 등이 늘어났다. 신문마다 난 을 나누어서 강제 경매 공고가 나왔다. 정치적 반작용도 없을 수 없었다. 1928년 선서 이후로 나라는 사회 민주당의 헤르만 뮐러를 수반으로 하는 대연합 정권 아래서 힘들게 갈등을 겪으며 통치되고 있었다. 세금 수입이 줄어서 이제 엄격 한 절약이 필요해지자 정부내 보수파와 좌파 사이에 누가 위기의 부담을 떠맡아 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다툼이 벌어졌다. 총체적 위기 아무도 이 시점에선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명백해졌다. 독일의 위기 는 총체적이라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경게적이고 사회적인 동반 위 기 상황은 영국이나 특히 미국에서도 민감한 현상이었다. 다만 이 나라들은 정 치적, 도덕적, 지걱 척도가 무너지고, 모든 원인을 넘어서서 기존 질서에 대한 신뢰의 위기, 포괄적인 의식의 위기로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 위기가 독일에 가져온 변화는 객관적인 경제적 조건들만으로는 충분히 파 악되지 않는다. 위기는 오히려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영원히 계속되는 곤궁에 지 치고, 전쟁, 패배, 인플레이션 등으로 영적인 저항력은 약해지고, 이성과 명료함 을 계속 호소하는 민주주의의 멋진 말솜씨에 완전히 넌더리가 난 상태에서 사람 들은 이제 감정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들은 처음에는 물론 이 파국의 숙명적이고 꿰뚫어 볼 길 없는 힘 앞에서 비 정치적이고, 체념한 태도로 반응하였다. 개인적인 생존이 지속적인 근심거리였 다. 매일 노동청에 가보기, 식품 가게나 긴급 구호소에 줄서기, 살아남기 위한 비참하고 하찮은 고통들, 쓸쓸한 주점이나 길모퉁이, 어두운 집구석에서 쓰라린 생의 감정을 안고 무감각하고 절망적으로 어슬렁거리는 것. 1930년 9월의 실업자 수는 3백만 한계를 넘어섰다. 일년 뒤에슨 거의 450만 명이 되었고 1932년 9월에는 5백만이 넘었다. 통계수치는 1932년 초에 이미 임 시 노동자를 빼고도 6백만 명의 실업자 수를 기록하고 난 다음이었다.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실업을 당한 꼴이었다. 1500만에서 2천만 명의 사람들이 지원금에 의지하였다. 미국 기자인 니커보커의 계산에 따르면, 구호 대상자가 지언금으로 ㄱ어죽기 위해서는 10년 쯤 걸릴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있기에 충분하 다고 할만큼,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전체적인 낙담과 무의미의 감정이 모든 것 위에 덮였다. 위기이 동반 현상들 중에는 유례없는 자살 파동을 꼽을 수 있다. 그 희생자들은 처음에는 주로 파산 한 은행가와 실업가들이었지만 위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많은 중산층과 소시민 계층 사람들로 번져갔다. 작은 상점의 주인들, 샐러리 맨, 연금 생활자 등이었다. 그들의 예민한 계층 의식은 빈곤을 단순히 결핍으로만 여기지 않고, ㄱ사회적인 계급 추락이라는, 훔위 손상 표지로 받아들였다. 때때로 온 가족이 함께 자살하 였다. 출생률이 떨어지고 사망률은 증가하면서 20개 대도시의 주민수가 줄어들었다. 혼란된 그림의 전체 모습과 타락한 자본주의의 그로테스크한 비인간성은 한 시 대의 몰락이라는 자의식을 만드어냈다. 말기적인 분위기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전체적인 세계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는 마음과 비합리적 동경이 깨어났다. 야바위꾼, 점설술사, 예언가, 손금 보는 사람들, 영매들이 판을 쳤다. 기도는 아니 라도 거의 종교적인 감정들을 쳐주는, 그리고 분명하게 은총의 눈길이 끌리는 곤궁의 시간이었다. 은총의 현상이란 인간의 일만이 아니라 규범, 질서, '정치' 이 상을 약속해주는, 즉 잃어버린 생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을 뜻하였다. 대중정당으로 출발 히틀러는 다른 누구보다 본능적으로 이러한 욕구를 파악하였고 사진에게 유리 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의미에서 그의 시간이었다. 지 난 시절에도 종종 나타나곤 하던 게으름의 발작, 개인적인 영역으로의 후퇴 성 향 등의 단번에 극복되었다. 그 동안에는 그의 열정에 적합한 계기가 부족했다. 도즈 안, 점령군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 등은 적합한 공격 대상이 목 되었다. 이러한 사정들과 자기가 불붙이려는 흥분 상태 사이의 불균형을 피할 수 없었 다. 그러나 마치내 그는 자신의 선동가적인 활동에 극적ㅇ니 배경을 제공하는 파 국의 무대 장치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 그의 선동에서 고정적인 부분들은 파국 의 무대 장치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 그의 선동에서 고정적인 부분들은 메르사 유 조약과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 의회 주의, 프랑스 군의 점령, 자본 주의, 공 산 주의, 특히 유대인의 세계 음모 등이었다. 이제서야 이러한 개념 하나하나가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는 현재의 불쾌, 비참과 아주 잘 결합될 수 있게 된 것이 다.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히틀러가 우세한 점은 대중의 개인적인 소망과 절망감 에 정치적 결정의 색채를 주고, 서로 대립적인 기대들을 향해 자신의 의도를 알 리는 능력에 있었다. 다른 정당의 대변자들은 당황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어찌할 바 모른다ㅡ 사실을 인정함으로써그들은 파국을 맞이한 모든 무기력한 사람들의 연대감에 의지하였다. 그와 반대로 히틀러는 낙관적, 공격적으로,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찬 모습을 보 여주었고 증오심을 키웠다. "내 생애에 한 번도 이 시절처럼 기분 좋고 내적으로 만족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수많은 경계경보를 울리며 그는 계급 추락의 공포에 사로잡힌 혼란된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우파나 좌파, 자본주의 나 공산주의에 똑같이 짓눌린 느낌을 갖고, 현존질서가 자기들을 원조하기를 그 만두었다고 비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정책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것을 거정하였다. 반자본주의적, 반프롤 레타리아적, 혁명적, 복고적인 것이었고, 냉정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 에 그 좋았던 옛 시절의 향수 어린 그림들도 불러냈다. 예전의 계층으로 복권하 기를 열망하는 혁명적인 분노라는 모순에 알맞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의도적으 로 모든 전통적인 대립들을 교차시켰다. 히틀러는 '체제'의 바깥 멀리에 과격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현재의 곤궁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고 동시 에 현존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결을 정당화 하였다. 그의 말을 확증시켜주기라도 하듯 의회기구들의 최초의 적재력 시험에서 실패 하였다. 위기가 아직 정정에 도달하기도 전인 1930년 초에 대연적이 붕괴되었다. 연정 붕괴는 공화국이 종말 조짐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속으로 타고 있던 의 견 차이가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실업자 보험의 부담 나누기 문제에 대한 좌우익 정당의 사소한 의견 차이였다. 사실 헤르만 뮐러 정권은, 거의 모든 정치 진영에서 돌발적으로 드러난 반대 편으로 도망치려는 경향에 부ㄷ쳐 깨진 것이다. 과격파로 넘어간 주민들은 사회 민주당과 도이치 민족당이 이미 보여준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반복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뒷배경이 얼마나허약한가, 그리고 충성으 기초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공화국이 몇 년 아에 상당한 성취르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취의 색깔은 잿빛이었다. 가장 호경기 때에도 공과국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지루하 게 만들었을 뿐이다. 히틀러가 비로소 공화국 정치가들이 일상적 쓸모에 지쳐서 알지도 못하고 받 아들이지도 못했던 추진력을 가동하였다. 유토피아와 개인을 넘어서는 목적들을 향한 충동, 너그러운 마음과 헌신 의지를 향한 욕구, 지도자의 모습을 향한 원초 적인 동경 - 꿰뚫어보기 어려운 현대의 권력 과정들은 지도자의 모습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되기에 - 그리고 현재의 난군에 대한 영웅적인 해석을 향한 열망 등이었다. '제 3의 가치'라는 구호의 공허한 경제적 약속을 훨씬 넘어 방향감각을 상실한 대중을 국가 사회당의 길로 끌어들였다. 히틀러는 이제 대중 정당에 대한 망설 임을 없앴다. 처음으로 광범위한 당 조직을 위한 유연성이 입증되었다. 당 강령 이라는 쇠사슬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또한 특정한 계급적 제한에서도 자유로운 상태로 국가 사회당은 극단적으로 대립적인 요소들을 힘들이지 않고 끌어모을 수 있었다. 국가 사회당으 출신, 나이, 동기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여지 를 가지고 있었고, 당원의 이미지를 특정한 구조가 없으며, 엄격한 계급개념을 모조리 부인하였다. 히틀러 당을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 양상 아래서 반동적인 시민과 농부들의 운동이라고 파악하고, 이러한 추종세력의 물질적 관심에서 그 역동성을 해석하 려고 한다면 히틀러 당의 상승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영세한 공장경영자, 농부, 대기업가, 소비자 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에 필 요불가결한 사람등이었는데 이들 사이의 다양한 대립이 벌써 계급 운동의 가능 성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모든 정당이 부딪쳤던 한계이기도 했 다. 계급적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고, 가장 힘든 경제적, 사회적 비 참의 시기에 모든 계층을 향한 공허한 약속이라는 전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너무 많은 전문자들이 있었기에 아무도 속일 수 없는 문제였다. 물질 적인 소망에 관계하려고 하면 곧장, 임금은 높이고 물가는 낮추고, 배당금은 늘 리고 세금은 줄이고, 연금은 높이고 관세도 높이겠다고 약속하고, 농산물 생산이 라는 측면에서는 생산자들에게는 높은 가격을, 소비자들에게는 낮은 가격을 약 속해야만 대중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기술은, 열광적인 호소로 경제적인 모순들을 뛰어넘고, 적들과 분리 시켜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만 물리 관심을 이용하는 것이었 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이나 편한 생활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것만 을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 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수백만 명이 실업 수당을 받고 입을 것도 없는 처 지라면 우리가 국가주의자다로, '독일, 모든 것 위에 독일'이라고 외칠 권리가 없 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국가사회주의의 엄격한 계급적 특성은 특히 마르크스주 의 역사학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의 우세함, 사람들의 태도가 오직 경제적인 동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조재를 위한 초개인적인 동지를 가지려는 그들이 욕구에 기댔다. 그리고 계급차를 뛰어넘는 '제3의 가치'를 믿었다. 즉 국 가적인 명예, 위대함, 결탁, 희생의 각오라는 구호들이 가지는 힘을 믿었다. 아무 런 이익도 없는 헌신의 각오를 믿은 것이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우리는 벌써 행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당의 대한 공감과 당에 몰려드는 세력은 여전히 중간층에 제한되어 있 었다. 그들은 기본적인 정치적 관념을 가졌고, 옛날부터 존재기반에 문제가 많아 지면 복잡하지 않고 냉정한 질서의 안정감 속으로 도망치려는 성향을 보였던 계 층이다. 그들의 소원, 원한, 관심은 현존하는 정당 영역에서 정확하게 대변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공화국 체제가 그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했다. 굶주림과 두려움을 통해서 목적 없이 흔들리던 그들은 다시금 '자기들의' 당을 찾게 되었 다. 히틀러와의 만남에서 그들은 엄청난 선동가의 힘에 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운명 같은 것에 압도되었다. 히틀러도 계급 추락의 두려움에 압도된 시민이었고, 수많은 시민적인 야심에 패배한 사람이었다. 그후 그는 정치에 들어왔고, 그것이 그를 해방시키고 출세시 켰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정치가 그와 같은 마법으로 자기들에게도 작용하기를 갈망하였다. 그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신격화 한 것이었다. 대중 정당으로의 출발 시기에 국가 사회당을 이끌어가고, 그 기간 동안 당의 사회적 이미지를 주로 결정한 것은 이 '침몰하는 중간층' 이었다. 경제적 곤궁이 직접적으로 국가 사회당의 구호들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었고 생각하는 것은 물 론 잘못이었다. 히틀러 당은 불황이 가장 깊이 타격을 입힌 대도 시와 산업지역 이 아니라 소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 로 흠을 입지 않은 질서라는 배경에서 보면, 비참의 침입은 어느 정도 곤궁과 친숙해 있던 대도시보다 훨씬 더 원천적이고 파괴적으로 지방에 타격을 입혔다. 여기서 혼란이라는 개념은 공산주의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다. (립세트는 어떤 조사에서 국가사회당의 이상적인 투표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중산층의 자영업 개신교도, 농장이나 작은 마을에 살고, 전에는 대규모 산업체와 노동조합 의 영향에 반대하는 정치적 중간층이나 아니면 지역정당을 지지했던 사람") 위기가 진행됨에 따라 국가 사회당은 노동자 계층에서 최초의 성과들을 얻었 다. 기업세포조직(NSBO)을 동원해서 이른바 '기업 공산주의'를 극복하겠다는 ('나치 세포가 없는 일자리는 없다'고 괴벨스가 적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구 상은 전체적으로 실패하였다. 히틀러가 광범위한 국가 사회주의 노동 조합 조직 이라는 생각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의 예는 그에게 하나 의 정당이 어떻게 노동 조합과 동맹을 맺고 세계혁명이라는 이념을 얻을 수 있 으며, 그리고 나서 월급봉투 문제에 사로잡혀서 인류의 해방을 시야에서 놓쳐버 리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어쨌든 사회 혁명적인 노동자당이 '반유대주의 소시민 정당'의 골짜기로 추락 하는 위험을 막으려는 나치 잔류 좌파의 시도를 그는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노동자를 얻는 것은 열두명의 각하들이나 '높으신' 나으리들이 입당선언 을 하는 것보다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고 그들 중 한 명은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성과를 얻었다. 계급의식을 내세운 노 동자들에 대해서 국가사회당은 오랫동안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는데, 이 제 실업자 수가 증가하면서 그것이이루어졌다. 실업자의 이상적인 수용 그릇은 특히 돌격대였다. 함부르크에서는 4500명의 대원 가운데 2600명이 일자리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거의 6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다. 브레슬라우에서는 심한 서리가 내렸을 때 중대 하나가 신발이 없어서 시찰을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조용한 내전 실업자가 일주일에 두 번 나가야 하는 실업 확인소 앞에서 조직적인 신참자 모집 부대가 당사자들이 근심과 곤궁에 알맞게 만들어진 선전지 <실업자>를 나 뉘주고 거기 늘어서 있는 사람들과 긴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자기 영역에서 나치의 도전을 받았다고 생각한 공산주의자들이 반대 활동을 벌이면서 주먹다짐과 거리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점차 양측에 더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면서 '조용한 내전' 상황으로 넘어갔다. 이런 내전 상태는 1933 년 1월까지 얼마간 끊이지 않는 피의 흔적을 남기다가 한편이 권력을 잡으면서 갑자기 끝났다. 1929년 3월의 디트마이셴에서 이미 괴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이 경 과하는 동안 두 명의 돌격대원인 농부 헤르만 슈미트와 소목수 오토 슈트라이벨 이 죽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때부터 대립은 점차 대도시로 퍼졌다. 대도시의 노동자 구역, 뒷골목 등이 이 작은 전쟁의 어두운 배경이었다. 전쟁은 구석징 술집이나 지하술짐을 거점으 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돌격대 술집' 이라는 것으로 그것은 어떤 동시대인이 표 현한 것처럼 '전투지대의 방어진지'였다. 특히 대도시에서 돌격대와 공산당 전투 조인 붉은 전선 연맹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곤 해서, 이따름 거리 전체를 소란 스럽게 만들고 전투와도 같은 소음으로 가득 채우며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곤 했 다. 종종 중무장한 경찰 부대를 대규모로 투입해야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칼 마르크스를 집어삼킨다!' 베를린은 이제 점점 더 국가 사회주의 권력 장악 전략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 산주의 계열 당들이 옛날부터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전통적인 좌경 도시는 합법화 전략을 위해서 정복해야만 할 보루였던 것만이 아 니다. 국가 사회당은 베를린에 얼마 안 되는 도당을 거느린 괴벨스라는 인물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빨갱이'들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기 들 힘의 중심부인 베를린에서 그들을 쫓아낼 만한 에너지와 뻔뻔스러움을 갖춘 인물이었다. '아돌푸 히틀러가 칼 마르크스를 집어삼킨다!' 는 것이 그가 싸움을 개시하며 서 내세운 대담한 구호들 중 하나였다. 국가 사회당은 그때까지 시민적인 교외 지역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싸우면서 지부를 이끌어왔다. 괴벨스는 이 교외에서 나와 도시 북부와 동부의 비참한 프롤레타리아적인 구역 한 가운데로 대원들을 몰고가서 거리와 기업들을 장악하고 좌익에 시비를 걸었 다. 더블 단추가 달린 가죽 재킷을 입은 창백하고 수척한 그는 그 시절 인물 유형 에서 가장 특징적이 인물의 하나였다. 실망한 대중에게 너무 오랫동안 세계혁명 의 흉내만 보여오 좌파의 ㅜ안감은, 베를린 공산당 지도부가 1928년 8월에 괴벨 스식 경쟁에 대해 반응하면서 유명해진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공장에서 파시 스트을 내몰아라! 어디서 만나든 그들을 패줘라!"는 구호였다. 히틀러의 예에 따라 괴벨스는 적이 보인 모범을 보고 실천 방안을 발저시켰 다. 구호 합창, 악대 행렬, 대규모 시위, 아파트 문 앞의 소품 판매 행위 따위는 사회 주의 정당의 선정 방법에서 얻어다가, 히틀러가 발전시킨 '위대한 뮌헨 스 타일'과 합친 것이다. 괴벨스는 당의 촌스러운 면모에다가 새로운 계층이 가져온 대도회적이고 지적인 특성들을 가미하였다. 그는 청중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신력이 풍부하고 뻔뻔스럽고 시니컬 했다. 공화국의 구호인 "모두 공화국을 보호하라"의 머리 철자들을 모아서 유대 말처럼 들리는 '샤드레(Schadre)'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의 선전에 쓰인 ' 베를린 최고 악당'이란 말을 일종의 명예로운 타이틀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그리고 <공격>지에서 아주 꼼꼼하게 배열한 자살자 명단 위쪽에다가 아름다 움과 품위의 삶을 약속하였던 1918년 혁명시기의 구호를 이렇게 인용하였다. "아 름다움과 품위로 사는 이런 삶의 행복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 살자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적에게서 무제한 배울 각오가 되어있고, 권력에 따르는 건방진 태도와 잘난체 하지 않는다는 점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을 옛날 방식의 보수주의자들과 구별해 주고, 그들의 노련함에 현대적인 면모를 부여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일 이지만 시민적인 신문들보다는 극좌파 신문에 훨씬 더 주목하였다. 그리고 추종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좌파 출판물에서 가져온 공산당의 훈령을 '주목할 만한 구절들'에 싣곤 하였다. 공산당의 실천 방안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은 거칠게 등 장해서 상대방이 사기를 잃도록 만들려고 했고, 자기 편이 약할 경우에는 악의 없는 이상주의의 결과로 돌리곤 하였다. 돌격대 지휘자 호르스트 베셀은 어떤 창녀를 놓고 공산주의 경쟁자와 다투다 가 부분적으로 질투심에 찬 상대방의 총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괴벨스는 멀쩡 한 태도로 '커다란 아이 심정을 가진 영웅' '그리스도 사회주의자'였다고 그를 추 켜세웠다. 붕대를 친친 감은 거리 싸움의 부상자들을 들것에 실어서 연단 옆에 진열해 보여주는 것도 그의 호과 만점 무대 장치에 포함되었다. 디트마르셴의 유혈사태에 대한 경찰 보고는 사상자의 선전에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피의 희생자를 내는 것이 히틀러 정당에 얼마나 효과적인 선전수단이었나를 확 인해준다. 그 결가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약 30펴센트 정도의 신규가입자들을 얻 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단순하고 늙은 농부 아낙네들이 갈색 앞치마에 갈고리 십자 가를 그려 붙이고 다녔다. 그러 노파들을 보면 금세 그들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 의 목표나 으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에서 정직한 모든 사람들은 이용만 당하고, 정부는 무능하고... 오직 국가사회주의자들만이 자기들을 이런 비참에서 구해줄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독자적 형태의 청년운동 국가사회당의 가장 특기할 만한 시작은 청년들 사이에 이루어졌다. 다른 정당 과도 달리 국가사회당은 청년세대의 기대와 희망을 이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 운 일이지만 열여덟에서 서른 살의 세대는 현재의 대량실업사태에 직면해서, 명 예욕과 자기 입증 의지가 공허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위기에서 가장 심한 상처를 입은 세대였다. 그들은 과격하고 현실도피적이 되어서 거대한 공격적 잠ㄷ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들은 주변세계, 양친의 집, 교육자들, 전래의 권위 등을 경멸하였다. 기성 세대는 오래 전에 물 건너간 옛날의 시민적 질서를 절망적으로 되찾으려고만 하 여다. "우리는 배후에 믿을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부정하기에는 너무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시에 나오는 말이다. 지적인 청년층에서도 같은 분위기였다. 독일은 전쟁에 패했을 뿐 아니라 혁명 에도 패했으니 지금이라도 그것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젊은이 들은, 무기력을 찬양하고, 허약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민주주의의 타협의지라고 자랑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경멸하였다. 젊은층은 사회주의 국가의 유물론과 '쾌락주의적인 이상들'을 거부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을 가득 채우는 비극 적인 생의 분이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화국과 아울러 전통적인 정당 유형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청년 운동 에 의해 일깨워져서 전쟁에서 전설적으로 확인된 '유기적인' 공동체 형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지겹게 옳은 척하는 얼굴을 한 전통적인 정당 당 수의 사진을 보면서 '노인제들의 지배'에 대한 운한이 불붙었다. 이 넓적하고 자 기만족적인 얼굴에는 시민 계층 젊은이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불안, 거대한 '시 대변화'에 대한 의식 등이 도무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공산당에 합류하였따. 그러나 공산당의 계급투쟁적인 편 협함이 많은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ㅈ은이들은 다양하게 모자 이크를 한 민족주의 볼셰비즘 운동에 자기들의 부서진 꿈인 박사학위 시험의 표 현들을 주려고 하였다. 다수의 청년들, 특히 대학을 마친 청년들은 국가 사회주 의에 넘어왔다. 국가 사회당은 그들이 자연스러운 대안이었다. 국가사회주의 선전의 흔들리는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적인 어조를 들었다. 그들은 기율과 희 생을 구하고 있었다. 나아가 언제나 합법성이 가장자리에서 힘들게 움직이면서, 가차없는 헌신의지가 합법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는 이 운동의 낭 만성에 이끌렸다. 그것은 당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투 공동체로서, 한 남자의 전부를 요구하였고 부서지는 세계에 맞서 군인다운 새로운 질서를 내세우는 운 동이었다. 젊은 대원들이 몰려들면서 국가 사회당은 대중 정당 이전에 독특한 양식의 청 년 운동의 특성을 얻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관구에서는 1925년에 당원의 2/3 가 서른살 미만이었고, 할레세거는 86퍼센트나 되었고, 나머지 관구에서도 수치 가 비슷하였다. 1931년에 베를린 돌격대 대원이 70퍼센트가 서른 살 미망이었다. 당 전체로 이 연령층은 거의 40퍼센트에 이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사회 민주당은 그 절반 정도도 못 미쳤다. 사회 민주당 의원들의 10퍼센트 정도만 마흔 살 미만이었다면, 국가 사회주의자 정당에서는 거의 60퍼 센트나 되었다.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자극하고 책임을 맡기는 히틀러의 노력은 정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괴벨스는 스물여덟에, 칼 카우프만은 스물다섯에 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발두 어 폰 사라흐는 스물 여섯에 전국 청년단장으로 임명되었고, 히믈러는 스물여덟 에 친위대(SS) 전국 지휘자로 이명되었다. 이런 젊은 지휘자들의 무조건적인 헌 신과 변함없는 신념의 힘, 그들의 '육체적인 순수한 에너지와 투쟁욕'은 나중에 그들 중 한명이 회고한대로 "당의 추진력을 오래된 시민 정당들에선 그 비슷한 것도 내세울 수 없는 힘이었다. " 브뤼닝 정권 이 모든 표지들은 아직 당이 대규모의 비약적인 발정을 하기 이전인 1929년에 이미 당의 구성을 특정지웠다. 그럼에도 당의 사회학적인 이미지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요구와 숱한 통합구호 아에 흐려진 채 여전히 명확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러한 통합구호들 뒤에 숨어서, 정치 의식화된 노동자층을 얻으려 는 선정이 거의 성화를 보이지 않고, 국가 사회당이 대체로 원래의 지지기반에 만 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보려고 했다. 처음으로 국가적인 방해 공작이 나타났다. 1930년 6월 5일에 바이에른 주정부 는 단체복을 금지하였고, 일주일 뒤에 프로이센은 갈색 셔츠를 금지하였다. 그래 서 돌격대는 앞으로 흰색 셔츠를 입고 등장해야만 하였다. 다시 2주 뒤에 정부 는 공뭉원들에게 국가 사회당과 독일 공산당(KDP)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정부의 방어 의지는 늘어나는 소송 숫자로 나타났다. 1933년까지 약 4만건의 소 송이 이루어졌고, 14만 년의 징역과 거의 50만 마르크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런 몸짓도 '체제'에 분명히 스며 있는 허약함의 인상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대연정의 부끄러운 종말 이전에 이미 헌법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형식 상 헌법을 준수하고 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주변으로, 무능한 의원내각제를 중단하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취하자는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대통령이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어디까지 저항을 했든 그는 새로운 정부 형성 에 처음으로 정열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개입하였다. 하인리히 브뤼닝을 수상으 로 선출한 것은 대통령이 장차 정부 업무에도 개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수상은 충성심, 성격의 엄격함, 의무의식 등을 낭 만적인 근엄성과 합친 사람으로, 언제라도 말없이 자기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 다. 힌데부르크는 자기 희생의 각오를 주변에 늘 요구해 왔다. 브뤼닝은 업무를 인계받은 직후에, 실업자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위기의 공포가 커가고 있던 시 점에, 의회 표결에서 패배를 겪더니 타협의 가능성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서 부당하게 서둘러서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내무장관 비르트는 반대파들에게 의회 의 위기가 체제의 위기에 이르지 않도록 승복하라고 하소연 하였으나 소용이 없 었다. 마치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넌더리가 난 것 같았다. 새 선거는 9월로 예정 되었다. 약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국가 사회주의 선전은 다시 불붙고 영 안에 반대 하는 싸움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저 날카로운 캠페인의 음조가 되살아났다. 다시금 당의 선전지휘부가 몰려나와서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도시로 지방으로 흩 어져 들어갔다.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거리 음악회, 스포츠 축제, 자전거 타기, 소등 신호, 함께 교회 가기 등의 행사를 벌였다. 그들은 이성적일 줄도 알고, 과 격하거나 열광을 보일 줄도 알며, 상대방보다 더욱 민속적일 수도 있었다. '인간 폐물을 쫓아내라! 그들이 낯짝에서 가면을 벗겨내라! 그들의 모가지를 붙잡아라! 9월 14일에 그들의 기름 낀 배때기를 밟아주자, 그리고 영광의 빗자루 로 쓸어서 그들을 사원으로 쫓아보내자!" 전국 선전 책임자로 임명된 다음 처음 으로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괴벨스는 이렇게 썼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열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 였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조차도 그들의 우세한 부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승 리를 확신하고 있었으면서 여전히 역사가 아니라 일상만 있는 것처럼 잿빛으로, 별 기력 없는 활동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설자 코스를 마친 2,3 천명의 연설가들이 대규모로 투입되었다. 그들은 당의 이념적 판단들을 원시적으로 배워 익혀서 떠드는 치들이라 거의 새로운 추종 세 력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 많은 작은 선전꾼들이 때를 지어 몰려나오는 것은 지치지 않고 활동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었고, 히틀ㄹ의 생각으로는 그것 은 광범위한 최면 효과를 가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실력을 입증한 관구 연설가 와 전국적 수준의 연설가들이 비싼 동을 들여 준비된 행사에 등장하였다. 프로 이센 내무부의 어떤 건의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1천 명에서 1만 5천 명 사이의 관중을 동원한 집회들은 대도시에서 매일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리 예정 된 집회 장소가 청중의 수에 맞지 않는 탓으로 하나 혹은 여러개의 동시 집회가 열리는 경우도 많다. 지도자, 스타, 선거운동 조직자 등 모든 것의 정상에 히틀러 자신이 서 있었 다. 그는 바이마르의 대집회로 선거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로는 자동차, 비행 기, 철도를 이용하여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가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지 대중 이 모여들었다. 그가 계획도, 위기와 방어의 이론도 없었다고 해도 그랬다. 그러 나 그는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누구 책임인지 만할 수 있었다. 연합군, 부 패한 체제 정치자들, 공산주의자들, 유대인 등이었다. 그는 이러한 곤궁을 끝낼 전제조건들도 알고 있었다. 의지와 자신감과 권력의 회복이었다. 감정에 대한 호손느 언제나 제대로 작동하였다. "일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내개 말하지 마십시오!" 도이치 민족은 일상의 문제로 망했다는 것이다. "일상의 문제 는 위대한 문제대 대한 시각을 흐려놓는 것입니다. " 그는 의회주의 체제 우기이 이유로, 정당들과 그들의 목적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잡일'에 매달린 것을 들었 다. '사람들이 희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 이상으로 잡일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주어신 처방을 따라서 당시의 수많은 불행들을 몇 가 지의 파악하기 위운 원인 탁으로 돌렸다. 무시무시한 배후 인물들이 음모를 꾸 미는 어두운 세계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면서 이 몇가지 원인들에 폭과 악마적 후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는 연설의 재능 못지 않게 장엄한 행사와 결연한 모습으로 효과를 만들어냈 다. 자신의 암시들이 표어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었다. 날카 롭고 지속적인 수많은 개념들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그가 퇴장한 다음에도 오랫 동안 통제되지 않는 의식의 심층부에 남아서 스스로 작용할 것이었다. 몇 주 동 안 그는 비상한 조직의 체험 이외에도 광범위하게 펼쳐진 맹열한 선거 운동에 대한 심리적 기교를 터득하였다. 2년 위에 그것들이 이용될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선동의 에너지와 소란스러움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강령의 빈곤 은 국가사회당을 지속적으로 과소평가받도록 만들었다. 비판적인 동시대 사람들 은 우월감을 느끼며 국가 사회당을 약간 미친 시대의 소란스럽고 부담스러운, 약간 미친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쿠어트 무홀스키는 히들러에 대해서 상당히 정확하면서도 대단히 잘못된 평가를 하였다. " 그 남자는 전혀 없다. 그는 자기 가 만들어낸 소음일 뿐이다."(칼 폰 오이에츠키는 1930년 9월 선거 직전에 한 기 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 사회주의ㅣ 운동은 시끌벅적한 현재일 뿐 미래는 아니다.") 형식적인 합법화 선언 뒤에 거의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헌법에 적대적인 국가 사회당의 특성을 밝혀 보인 내무부 건의서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 대 신 너무 빨리 성장한 정당 내면의 모순, 당 지도층의 지적인 평이함, 조잡함, 명 예욕 등에 자기 파괴적인 폭발물질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오토 슈트라서와의 결별 이러한 기대는 1930년 여름에 국가사회당을 한 번 더 지속적으로 뒤흔든 위기 를 통해서 확인된 듯이 보였다. 뒷날의 관찰을 통해 그것은 당의 기강 확립과 타격력에 도움을 준 숙청활동이었다. 사방의 격앙된 환호를 받으며, 점점 더 마 비시키며 다가오는 떨림 속에서, 되풀이될 수 없는 시회를 포착한 히틀러는 당 내 최후의 비판 세력과 독자적인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스스로 무장을 갖추었 다. 처음에 그는 점차 모순 속으로 빠져들고 있던 당내 좌파에 대립을 강요하며 계속 뒤로 밀쳐냈다. 국가사회당이 변두리 정당으로 남아있고, 오직 소동을 일으 켜야만 사람들 눈에 띄고, 의회나 정부에서 자기들의 원칙을 실천할 처지에 있 지 않은 동안에는 이념상의 의견 차를 그럭저럭 감출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지방선거의 성과는 계속해서 적절한 자기 해명을 요구하였다. 오 토 슈트라이서와 투쟁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그늬 추종 세력은 언제나 되풀이해 서 히틀러의 합법화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적인 '파국 전략을 찬성하였다. 그들은 우악스러운 반자본주의를 자랑하였고, 폭넓은 국유화를 연설하였으며, 소 려과의 동맹을 촉구하고, 당 노선을 벗어나서 지방의 파업 활동을 지워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행동으로 그들은 방금 만들어낸, 당에 많은 이익을 가져 다주는 재계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강령을 확립하려는 과 격한 성향으로 히틀러의 전략인 강령 회피와 모든 계층을 향한 개방성을 어지럽 게 뒤흔들었다. 1월에 이미 국가사회당의 지도자는 오토 슈트라이서에게 투쟁 푸류ㅏ사를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앞 뒤 다르게, 온갖 아첨과 협박과 매수를 동시에 시도해 보이다가 다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반항적인 동지를 뮌헨 중앙당의 언론 총 책임자 자리에 임명했고, 출판사를 위해서는 약 8만 마르크를 제공하려 했다. 그 는 옛날 군인이며 오래된 국가 사회주의자인 슈트라서를 지원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자신만이 참된 국가사회주의 이념의 승리자라고 여기고 모 든 제안과 위협으 거부하였다.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다판이 1930년 5월 21일 ~22일에 당시 히틀러의 베를린 본부였던 링크 거리의 '상수시' 호텔에서 벌어졌 다. 막스 아만, 루돌트 헤스, 오토 슈트라서의 형 그레고어 등이 지켜보는 가운 데 두 적수는 일곱 시간 동안 흥분해서 각자의 주장을 주고받았다. 이 대화는 슈트라서의 수기에 기록되어 남았다. 뒷날 원탁에서 말없는 절망이 기도 했던 독학자의 광범위한 태도로 히틀러는 이 대화를 예술에 대한 설교조의 표현으로 시작하였다. (예술은 혁명적인 단절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예술'로 존 재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것은 그리스, 북유럽적인 것뿐이다. 나머 지 모든 것은 오류이다. ) 그리고 나서 개성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종족, 세계경제, 이탈리아 파시즘을 논하고, 그런 다음에는 처음부터 드러나 있던, '빌 라도 문제'인 사회주의 문제로 넘어갔다. 그는 슈트라서가 이념을 지도자보다 높은 자리에 둔다고 비난하였다. "모든 당 동지에게 이념을 결정할 권리를 주고, 심지어는 지도자가 이른바 이념에 충실한 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할 권리까지도 주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당에서 아무 런 의미도 없는 가장 나쁜 민주주의다. "라고 그는 흥분해서 외쳤다. "우리 당에 서는 지도자와 이념을 스스로 구현하고 있는 지도자가 명령하는 것을 따라야 한 다. " 그리고 자기는 동지들의 기율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당 조직이 '몇몇 망상적인 문사들 손에 망가지도록 맡겨 둘'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서열적인 관계 이외의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히틀러의 무능이 이대면에 서처럼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다. 그는 지적인 반성의 경우에도 그렇듯이 모 든 생각, 모든 반대에 대해서 권력 문제를 마주세웠다. 누가 배치권을 가지는가, 누가 명령하는 사람이며 누가 명령을 받은 사람인가? 모든 것은 지배자와 하인 의 대립으로 축소되었다. 거칠고 교육받지 못한 대중이 있고, 대중을 자기의 도 구와 조작대상으로 삼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이 대중의 합법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려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 그것이 그의 생각에 따르면 사회주의였다. 그가 시민적 반동세력과의 새로운 관계를 배려하느라 당의 혁면적인 사회주의 를 방해한다고 슈트라서가 비난하자 히틀러는 격분헤서 대답하였다. "나는 사회 주의자요. 예를 들면 재산이 많은 레벤틀로브 백작과는 달라요. 나는 단순한 노 동자로 출발했소. 오늘날에도 내가 운전기사와 다른 음식을 먹는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해하ㅡ 것은 다만 극단적인 마르 크스 주의일 뿐이오. 노동자들은 대개 빵과 놀이 밖에는 구하지 않아요. 그들은 어떤 이상에 대한 이해력이 없어요. 우리는 상당히 많은 노동자들을 얻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소. 우리는 그 어떤 도덕적 연민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들이 더 나은 종족이라는 이유에서 지배 권리를 분명히 확신하고, 광범위한 대중에 대한 지배거ㅜ을 가차없이 내세우고 확보하는 새로운 주인 계층을 선별하려는 것이오... 당신의 체계는 실제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오." 그는 자신의 출판사를 향해 말했다. "아만 씨, 당신은 속시 타이피스느가 갑자 기 당신의 말에 끼여드는 일을 참겠습니까? 생산품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기업가 가 노동자들에게도 빵을 분배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기업가들은 돈을 긁어 모으 는 것, 잘사는 것 등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책임과 권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죠. 그들은 자기 자신의 쓸모로 해서 정상에 올라선 것이며, 더 높은 종족이 입증하는 이러한 선별을 근거로 지도할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흥분된 토론을 마친 다음에 슈트라서가 그에게, 권력을 차지할 경우 생산체계 는 변하지 않는 거냐고 물었을 때 히틀러는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이죠. 당신은 내가 경제를 방해할 만큼 돌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국가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만 국가가 개입할 것이오. 그렇다고 재산 몰수나 공동 결 정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죠." 현실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체제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로는 책 임을, 아래로는 권위를'이라는 것이 수천년 전부터의 체계였으며, 지금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주변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극적으로 서술한, 상세한 묘사. 전체적으로 대화의 진술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는 없다. 바로 뒤이어서 확 인된 비망록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수많은 발언에 나타난 히틀러의 주장 들은 다른 곳에서도 일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사회주의 히틀러의 사회주의 개념에서는 인간적인 추진력도, 사회의 새로운 구상에 대 한 필요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신이 확인한 것처럼 그의 사회주의는 "경제생 활의 기계적인 구조완느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주의'라는 단 어에 대한 보충 개념으로 개인에 대한 전체의 책임을 뜻한다. 반면에 '국가주의' 는 개인이 전체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국가 사회주의에서 이 두 가지 는 합쳐진다는 것이다. 이런 술책은 모든 이해 관계를 도와 정당성을 갖도록 해주고 개념들을 도박의 칩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다. 히틀러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가 우선 성취되었다. 사회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아래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 사회주의는 권력 전략을 고려해서 좌익의 표지를 내걸었다. 그것은 안으로나 밖 으로나 강력한 국가를 요구하였으며, '익명의 대중' '영원한 미성년자 다수'에 대 한 확고한 지휘를 요구하였다. 당 역사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든 1930년에 국가 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 (NSDSP)은 히틀러의 생각에 따르면, 인기 있는 단어의 분위기를 이용하기 위해 서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리고 역동적인 사회적 힘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 당'이기도 했다. 전통, 보수적 가치관이나 기독교에 대한 고백처럼 사회주의적인 구호들도 조작이 가능한 이데올로기적인 전진기지였다. 그것은 위장, 교란 등에 이용되고, 기회에 따라 번갈아 표어를 바꿀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열광하여 입당한 어떤 젊으이는 괴벨스와 이야기 하는 중에 당 지휘 부가 강령의 언칙들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를 경허하였다. 페더의 농 노제도 중지는 사회주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말을 했다가, 그런 헛소리를 경청하 는 사람은 걔져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오토 슈트라서가 자신의 주장에 들어 있는 불합리성과 개념 조작을 그토록 당 당하게 밝혀낸 것이 히틀러의 마음을 대단히 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말 없이 그 는 뮌헨으로 돌아와서, 그런 대립의 경우에 보이는 방식대로 여러 주 동안이나 전혀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슈트라서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그가 "장 관 자린가 아니면 혁명인가?"라는 소책자에서 논쟁의 경과를 묘사하고, 당 지도 자 공동의 이념에 들어있는 사회주의 핵심 부분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하자 히틀 러는 반격하였다. 노여움이 너무 커서 문체상의 실수까지 보이는 편지를 써서 그는 베를린 관구 지도자에게 슈트라서와 그의 추종자들을 즉각적으로 제명시키 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러 달 전부터 나는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핵임있는 지도자로서, 당내 운동 계역 속으로 불일치, 혼란, 기율 없음 등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주시해 왔 습니다. 사회주의를 위해서 싸우려 한다는 가면을 쓰고서 우리는 유대, 자유주 의, 공산당 적들과 똑같은 정책을 추구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들 그룹이 요구하는 일은 바로 적들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을 해체시키는 이 요소들 을 가차 없고 예외 없이 당에서 쫓아내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운동의 본질적인 내용을 정했고 만들어놓았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운동의 근간으로 삼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감옥에서 고생했던 것이며, 단절에서 그것을 끌어내어 오늘날의 이 높이까지 끌어올렸습 니다. 우리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운동의 바탕에 둔 본질적인 내용에 잘 맞지 않는 사람은 이 운동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되고,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합니 다. 국가사회주의 정당은 내가 지도자로 있는 한 뿌리 없는 문사들이나 혼란스 런 살롱 볼셰비스트의 논쟁 클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치적인 떠돌이의 공론 적인 어리석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계급 개념이 사라지게 될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는 조직체 입니다. 6월 30일에 괴벨스는 베를린 토끼숲 홀에서 관구 당 대회룰 소집하였다. "질서 에 편입되지 않는 자는 쫓겨나야 합니다!"라고 그는 외쳤다. 자신들의 견해를 밝 히려고 참석했던 오토 슈트라서와 그의 추종 세력은 돌격대에 의해서 강제로 홀 에서 쫓겨났다. 슈트라서 그룹은 '진짜배기 스ㅏ린 주의'라고 말하고 당 지도부 에 의한 의도적인 '사회주의자 탄압'이라고 떠들었지만 그들의 세력은 급격하게 움츠러들었다. 다음란 벌써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투쟁 출판사 신문의 발행인 자리를 내놓고, 동생과는 극히 날카로운 형태로 거릴 두었다. 폰 레벤틀로브와 다른 유명한 좌 익 인사들도 이들 반란 그룹을 떠났다. 그러나 대대수는 의심할 바 없이 히틀러 가 그들에게 일깨우고 수많은 불충 행동들을 넘어서 지키도록 만든 '거의 도착 적인 충성심'으로 그런 행도을 하였다. 자신에 넘친 괴벨스는 당은 '이러한 태업 기도를 땀처럼 흘려 내보낼 것'이라 고 말했다. 7월 4일에 오토 슈트라서의 신문은 "사회주의자들이여, 국가 사회당 을 떠나자!"는 기사를 냈다. 그러나 거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에는 사회주의자가 거의 없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은 이론적으로 해석하 려고 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었다. 오토 슈트라서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여, 처음엔느 '혁명적 국가사회주의자' 라고 칭했다가 나중에 '검은 전선'으로 불렀다. 그러나 문필가적인 분파 그룹이 라는 냄세를 아주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투쟁 출판사의 신문을 읽는 것은 히틀 러 당에서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종하하는 주제는 어차피 거의 주목을 받 지 못하던 참이었다. 지도부의 친숙한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은, 역사의 호소를 듣은 것처럼 보이는, 확고하게 세계파국에 대항하는 싸움을 해온 국가사회주의 정당에는 현학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론적인 개념 논쟁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중을 당의 강령이 아니라 히틀러라는 사람에게 희망과 치유의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 슈트라서의 탈퇴는 국가 사회당 내부에서 사회주의 원칙 논쟁을 끝냈을 뿐만 아니라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는 엄청난 권력 상실을 의미하였다. 그 뒤로 그는 집안의 배경도 신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여선히 당의 전국 조직책 임자 자리에 있으면서 뮌헨에 거주하며 수많은 관계들을 장악하였으나 당원들과 여론의 눈에서 점차 사라졌다. 반 년 전만 해도 <세계무대>지는 그가 '머지 않 은 장래에 주인인 히틀러를 구석으로'몰아 붙이고 스스로 당권을 장악할 것이라 고 예측했다. 지금 그는 권력을 잃어버리고 그럼으로써 2년 뒤의 패배에 미리 도장을 찍은 셈이었다. 2년 지나서 그는 최후의 반항적인 몸짓으로 체념을 이겨 냈지만 결국 지치고 망가진 상태로 당에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