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그는 7월초에 쌓여 잇던 책더미를 향한 것과 같은 똑같은 을 가지고 격 렬하게 <나의 투쟁>집필에 달라붙었다. 석 달 반 뒤에는 책의 제 1부를 완성하였다. 그는 "자신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영혼으로부터 써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밤늦게까지 타자기 소리가 울려나왔고, 그가 좁 은 방에서 친구인 헤스에게 원고를 불러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임 완성된 부분을 대개는 토요일 밤에 소년들처럼 자기를 둘러싸고 앉은 동지들에게 낭독해 들려주었다." 이 책은 처음에 '4년 반의 투쟁'을 청산하고 정리하는 의미로 시작되었지 만 점차 자서전, 이데올로기적인 논문, 전략적 행동방침 등의 혼합물로 발 전하게 되었고 동시에 지도자 신화를 완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정치로 들어서기 이전의 비참하고 어두운 시절은 이 책의 변용시키는 묘사룰 통해 서 축적과 내적인 준비과정이라는 성격을 얻었다. 곤궁과 결핍으로 대담하 게 짜여진 모습과 고립을 통해서였다. 그것이 신의 뜻이기도 한 30년간의 사막 생활로 바뀐 것이다. 센세이셔널한 배후를 밝힌 체험고백을 기대하였 던 출판업자 막스 아만의 원고가 딱딱하고 지루한 것을 보고 대단히 실망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예욕은 처음부터 아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는 폭로하려고 했던 게 아니 라 최근에 생겨난 지휘 요구를 위하여 지적인 바탕을 튼튼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토록 찬양한 대로 정치가와 강령입안자가 천재적으 로 결합한 예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이 대단히 높은 의도에 대하여 열쇠 가 되는 구정이 책 제 1권 한가운데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들어 있다. 정치가의 기술은 가능성의 기술이라는 말이 진정 맞는다면 강령입안자야 말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원하면 신들의 마음에 들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인류의 기 긴 세월동안 정치가와 강령입안자와 결합되는 일은 단 한번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이 내면적일수록 정치가의 활동에 반대하는 저항도 더 커지고 마련이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평범 한 시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요구들을 위해서 일을 해 야 할 뿐 아니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목적들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사람과 미움으로 찢기게 된다. 그럴수록 성공은 드물다. 그렇지만 수백 년만에 한 번 어떤 사람에게 성 공이 닥쳐오면 아마도 그의 노년에는 다가오는 명성의 나직한 빛이 그를 둘러싸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위대한 사람들은 역사에서는 마라톤 주 자들이다. 당대의 월계관은 죽어가는 영웅을 머리에 겨우 씌워지게 될 것 이다. 콤플렉스와 왜곡된 사상의 집합체 이렇게 나직한 빛에 들러싸인 현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 이 책의 끊임없는 암시내용이다.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은 자신이 겪은 실패를 비극적으로 변용 시키려는 노력이다. 히틀러는 비상한 진지함으로 갈채를 배려하면서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책으로 그는 학교교 육이 부족하였지만 그리고 미술 아카데미에서 실패하고 남자 하숙집의 치 명적인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민적인 교양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입증 하려고 하였다. 자기가 생각이 깊고 현재의미 말고도 미래에 대한 구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넘은 의도였다. 큰소리치는 앞모습 뒤에 자신의 지적인 능력에 대한 독자의 의심을 두 려워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염려가 분명하게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언어에 기념비적인 특성을 주기 위해서 그는 자주 명사를 여러 개 나 길게 나열하였다. 많은 명사들은 형용사나 동사에서 만들어 낸 것이어 서 그런 단어들의 무게는 공허하고도 인공적인 효과를 냈다. "민주적인 결 정을 통해 성취된 동의과정에서, 라는 의견을 대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호흡이 없는 언어이고 자유가 없으며 마치 경련상태에 있는 것 같다. "최 근에 나는 이 새로운 세계의 이론적 문헌에 탐닉하고 그 가능한 효과들을 분명히 하면서 이 효과들을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생활에서의 실질적인 현상과 그 효율성의 사건들과 비교해보았다. 점아 나는 내 자신의 확신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얻었다. 그래서 이 시기 이후로 이 문제에서 나의 내 면의 관점의 변화를 일으킬 입장에 서지 않게 되었다. 열 추종자들의 교열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수많은 문체사의 탈선은 박학다식한 척하는 저자의 태도에 원인이 있다. '우리 민족의 정치적 오염의 쥐새끼들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학교 교육 을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광범위한 대중의 기억으로부터 갉아 먹어버렸고, '제국의 깃발을, 전쟁의 품에서'꺼냈다고 혹은 사람들을 '단순히 육체로부터 타락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루돌프 올덴은 히틀러 문제의 과도한 가난으로 때때로 놀이가 어떠한 피 해를 입는가를 지적하였다. 예컨대 히틀러는 곤궁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 다. "조라 죽이는 독뱀의 집게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가람은 그 독니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이 몇 마디 말에는 너무나도 많은 오류들이 있어서 논문 한 편을 써도 제대로 고 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독뱀은 집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간을 조여 죽일 수 있는 뱀은 독니를 갖고 있지 않 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뱀에게 목 졸라 죽임을 당하더라도 독니를 알게 되지는 않는다." 이 책에는 사고의 과장된 무질서와 동시에 그런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날 카로운 확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확신들은 깊이 비합리성에서 직접 튀어나온 것이며 드물지 않게 적절한 형식이나 인상적인 그림들을 보여주 고 잇다. 이 작품을 특징짓는 모순되고 차단된 모습이다. 그의 완고함과 완 강함은 폭풍우 같은 구절들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취향과 모순된다 언제 나 느낄 수 있는 양식화 의지는 자기통제의 결핍과 모순되고 논리는 둔감 과 모순된다. 단조롭고 광적으로 억누른 자기중심주위만이 모순 없이 드러 난다. 이러한 작 중심주의는 책이 두꺼우면서도 이 책에 사람인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잘 어울린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읽기가 매우 힘들고 까 다롭지만 그런데로 상당히 정확하게 저자의 초상화를 보여준다. 그는 남 이 자기를 꿰뚫어볼까 하는 근심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보여주는 사람이 다. 자기 책의 이러한 폭로적인 특성을 알아채고 히틀러는 뒷날 이 책과도 거리를 두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간혹 <나의 투쟁>은 <민족 관찰자>의 사설들을 형편없는 문체로 엮어놓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창살 속의 공상'이라고 밀쳐버리기도 하였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제국수상이 되리라는 사실을 1924년에 미리 알았더라면 이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 라는 점이다." 그는 전략적인 혹은 문체사의 확신들만을 유보하고 싶다고 암시하였다. "내용상으로는 아무것도 고치고 싶지 않다" 교양 시민적인 과시욕과 오스트리아 관리 스타일의 과장 섞인 질질 끄는 벌레 같은 복합문 등 책의 외람된 문체는 책에 접근하기를 어렵게 만들었 다. 그 결과 나중에 1천만 부나 찍어서 보급된 이 작품은 다른 수많은 의무 문헌들의 운명을 이어받아서 읽히지 않고 서가에 꽂히기만 하였다. 언제나 독같이 암울한 강박관념을 드러내는, 환기되지 않은 그의 모든 콤 플렉스와 감정이 기반하고 있는 의식 바탕도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히틀 러는 자신의 의식을 바탕을 잘 준비된 연설가로 등장할 경우에만 감출 수 있었다. 이상하게 파괴적인 소문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페이지들, 특히 매독에 관한 장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전체적으로 수없이 지저 분한 표현들, 뒤틀린 그림들,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문체의 가난뱅이 냄새 등이 독자들에게 역겹게 느껴졌다. 전쟁과 전 후 활동에 몰두해서 란츠베르크에 갇힐 때까지 고작해야 어머니 같은 여자 친구들만 알았던 망가진 젊은 남자의 금지 관념들은 그가 세계상에 부여한 답답한 흐름에 반영되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여자와 연관된 소문 에 빠질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역사, 정치, 자연 혹은 삶에 대한 모든 관념들은 한때 남자 하숙집에 살았던 사람의 공포와 욕망 을 담고 있다. 언제가지나 계속되는 사촌기의 자극적인 발푸르기의 밤의 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세계를 짝짓기, 음란 성 도착증, 능욕, 혈통 오염 등의 그림들로만 본다. 유대인의 최종 목표는 다른 민족들은 탈민족화하고 뒤죽박죽 사생아로 만들고, 최고종족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민족의지식인들을 제거해서 민족 뒤섞기를 지배적인 추세로 만들고 그 자리에 자기 만족을 투입하는 것이 다. 그는 계획적으로 여인들과 소녀들을 망칠 분 아니라 대규모로 다른 사 람들의 혈통이 제한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유대인들이야말 로 라인 강에 검둥이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똑같은 속마음과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사생아 만들기를 강제로 도입해서 증오스런 백인 종 족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백인의 문화적, 정치적, 수준을 덜어드리고 스스 로 주인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멋쟁이 패션 제품을 통 해서 육체의 아름다움이 덜 중요해지지 않았더라면 수십만의 소녀들이 다 리가 휘고 역겨운 유대놈 사생아들에게 유혹된다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들 검둥이 기생충 민족은 계획적으로 우리의 경험 없고 젊 은 금발 소녀들을 욕보이고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민족주의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이 개와 말과 고양 이의 품종 개량만을 근심하지 말고 인간을 높이는 일을 걱정하는 더 고상 한 시대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국가사회주의의 특성 분명히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는 이 책의 발산물 부자연스러움, 조각난 무질서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의미를 낮추어 보 는 이유의 일부가 되어왔다.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도 그럴 수도 없었으며, 이런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헤르만 라우슈닝은 썼다. 그리고 더욱 정밀한 배경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확언하였다. "원래 히틀러가 바라고 있던 것은 , <나의 투쟁>에 들어 있지 않다" 상당한 문체상의 광채와 사료적 효과를 가지고서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허무주의 혁명'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의 말로는 히틀러와 히틀러가 주도한 얻을 만한 어떤 이념이나 대략적인 세계관 없이 효과를 보아가면서 지지 를 얻을 만한 분이기와 경향들을 그때그대 이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민족 주의, 반자본주의, 관습숭배, 외교상의 개념들, 그리고 종족 신념이나 반유 대주의 마저 언제나 흔들리는 완전히 원칙 없는 기회주의에 노출되어 있었 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회주의는 아무것도 존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믿지 않았고, 가장 화려한 맹세조차도 전혀 가차없이 깨뜨리는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전략적인 배신 특성은 그야말로 끝이 업으며 모든 이데올 로기는 권력 의지를 감추기 위한 시끄러운 앞면일 뿐이라고 한다. 이 권력 의지는 언제나 오직 자신만을 원하면 모든 성과를 오직 거칠고 야심 만만 한 새로운 모험을 위한 기회와 단계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의미도, 구체적 인 목적도, 만족도 모른 채 말이다. " 이 운동을 이끌어 가는 힘들은 완 전히 조건도 강령도 없으며 행동만 준비되어 있고, 그 최고의 핵심멤버들 은 본능적이며, 지도부의 정예요원들은 극히 사려 깊고 냉혹하고 매운 교 묘한 자들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자신의 운동에 대해서 항상 제시할 수 있는 어떤 목적도 가진적이 없으며 지금도 없다." 30us대에 어떤 사람이 국가사회주의 이면을 보고 조롱조로 '표상 없는 의지의 세계'라고 말한 것 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국가사회주의가 언제나 높은 정도의 적응력을 보였고 히틀러 자신이 강 령과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것은 사실이 다. 예를 들면 25개 조항이 낡은 다음에도 근 거기 매달렸다. 전략적 고려 에서 그는 모든 변화는 혼란을 부를 뿐이고 어차피 강령이란 상관없는 것 이라고 고백하였다. 국가사회주의 기본서로 여겨지는 ,중요 전락가 알프레 트 로젠베르크의 대표저서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자신은 '너무 어려워서, 극히 조금밖에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가 정통이론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무릎만 꿇으면 정통 사상을 입증한 것을 여겼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직 전략적으로만 생각하는 성공의지와 지배의지였던 것은 아니다. 권력만을 절대적인 것으 로 이데올로기는 그때그대의 요구에 따라 멋대로 이용하는 종류의 권력의 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국가사회주의는 실질적인 지배와 독트린 두 가지 다였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다. 개별적으로 전해지는 목적의식 없는 권력욕에 대한 극단저긴 고백들을 살펴보아도 히틀러와 그의 가까운 주변 사람은 언 제나 자기들이 가진 선입견과 억눌린 유토피아의 포로들이었다. 국가사회 주의는 권력을 높여줄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서는 이념상의 동기 를 받아들이기 않았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권력의 고백들은 대단히 희미 하고 알아보기 힘든 것이라도 이념적 동기를 빼고는 이해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그의 놀라운 인생행로에서 전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든지 기민한 전략으로 쟁취하였다. 그의 성공에 나타나는 상당히 인상적인 상황이었다. 성공 자체는 이념화된 공포, 희망 비전들이 복합체와 관계가 있다. 히틀러 자신이 그의 성공은 강제적인 사유능력과 관계가 있다. 그는 역사와 정치, 권력의 인간존재에 대한 몇 가지 기본 문제들에 대한 사색에 서 그러한 사유능력을 이용할 줄 알았다 히틀러 세계상의 일관성 그러므로 <나의 투쟁>으로 세계관을 표현하고자 한시도가 불충분하고 문학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비록 단편적이고 무질서한 것 이긴 해도 이 책은 분명히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 하고 있다. 히틀러가 원했던 것이 실제로 그 책 안에 쓰여 있다. 비록 그 시대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흩어진 부분들 을 정리하고 그 논리적 구조들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숨막 힐 정도로 철저하고 일관된 이면의 건물'을 찾아내게 된다. 히틀러는 그것 을 란츠베르크 감옥 이후 몇 년 동안 계속 다듬고 체계화해 나갔지만 전체 적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겪지 않았다. 초기의 고정관념들은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상승의 세월과 통치의 세월 동안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을 앞에 두고도 그 마비 시키는 힘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허무적인 태도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다윈주의 적인 생존투쟁 이념으로 둘러싸인 공간의지, 반공산주의 , 반유대 주의 등은 그의 세계상의 일관성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최초와 최후의 진 술내용을 결정짓고 있다. 그것은 물론 새로운 이념이나 새로운 사회적인 행복을 제시하는 세계관 은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중엽 이후로 넓게 퍼진, 기묘한 민족주의의 천 박한 학문에 속했던 수많은 이론들을 멋대로 짜맞춘 것이었다. 히틀러의 '스폰지 기억력'이 지나간 세월의 탐욕스런 독성 빨아들인 것들은 놀라운 변화를 거쳐서 상당히 새로운 맥락으로 다시 나타났다. 시대의 이념의 페 허에서 일으켜 세운, 어두운 구석들이 없지도 않은 대답하고 두려운 건축 물이었다. 히틀러의 독창성은 , 극히 이질적이고 거의 조합이 불가능한 것들을 하 나로 엮어내는 능력이었으며 이데올로기라는 조각이불에 밀도와 구조를 부여하는 능력이었다. 그의 지성은 사상들을 생산하지는 못했으나 거대한 힘을 생산해냈다는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은 이념 혼합체를 조여서 단단하게 마들고 거기에 얼음장같은 맹혹성을 부여하였다. 휴 트레버 로퍼는 이러한 정신의 차가운 착란세계를 인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정말 위풍당당하게 화강암처럼 단단한 모습으로 그러면서도 불쌍한 정도로 뒤죽박죽 잔뜩 긁어모아서 썩어가는 쓰레기더미에 둘러싸인 채 그 어떤 야만인이 입상처럼 거대한 힘과 거친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낡은 당통과 죽은 해충들, 재와 껍질들과 오물, 여러 세기의 지적인 쓰레기 들에 둘러싸인 채" 어떤 사상도 권력문제를 질문해보는 히틀러의 능력이 특별한 무게를 지 니고 나타난다. 재치 있는 이념으로 인해 오히려 실패해버린 민족운동의 대표자들과는 반대로 그는 사상 자체를 '단순한 이론 '이라고 해서 중히 여 기지 않았다. 실천적이고 조직능력이 있는 핵심이 그 안에 들어 있을 경우 에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가 당 목적에 맞는 관점들에 다른 생 각이라고 부른 것은 모든 이념, 경향들, 심지어는 맹목적 신앙에도 권력에 걸맞는 ,그러니까 원래 의미에서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두려움에 사인 시민 계급의 방어이념을 요약하였 다. 그 원래의 관념들을 더 조잡하게 만들고, 공격적이고 목적의식 뚜렷한 행동이론을 마련한 것이다. 그의 세계관에는 시민시대의 악몽들과 지적인 유행들이 모드 다 드러나 있다. 1789년 이후로 잠복해서 작용하는 ,러시아 와 독일에서 활성화된 좌익혁명에 대한 거대한 공포가 사회적 공포로 나타 나다. 종족적, 생물학적, 공포로는 도이치계 오스트리아 사람으로써 외세에 대 한 공포가 있다. 서툴고 몽상적인 도이치사람들이 민족들 간의 경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는 민족적인 염려가 민족주위 적 공 포로 드러나며 자기계급의 위대성의 시대는 끝나고 안전의 느낌이 부서지 는 것을 바라보는 시민계급의 시대공포도 나타난다. 히틀러는 소리였다.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 내부에 어느 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외면적이며 우리를 스쳐지나간다. 우리민족의 생각은 불안하고 성급해졌다. 삶 전체가 완전히 찢기고 있다" 종말론적인 다윈주의 무한한 공간을 탐하고 빙하기에서 움직이고 싶어하는 그의 극단적인 성 향은 이러한 근원적인 공포감을 세계위기의 징후로 확대시켰다. 이러한 위 기 속에서 시대들이 태어나고 몰락해 가고, 인류의 운명은 유희의 대상이 된다. " 이 세상은 끝에 왔다." 그는 거대한 세계질병의 관념에 사로잡혔 다. 바이러스, 흰개미의 폭식, 인류의 궤양 등에 의한 질병이었다. 나중에 그가 희르비거의 빙하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지구의 역사 와 인유발전이 강력한 우주적인 파국에 이른다는 주장이 그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몰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열광하였던 가. 이런 세계상에 들어 있는 대재앙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소명의 식을 이끌어냈다. 역사 앞에서 사명감을 가진 치유하는 특성이었다. 전쟁중 마지막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군사적 필요성에 거역하면서가지도 그 가 유대인 근절 작업을 계속해 나간,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일관성 병적 인 고집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상의 이해관계를 훨씬 넘어선 거인들을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 우주를 구하기 위해 선택되어 서 악을 '다시 악마에게 돌려보내는' '다른 힘'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뿌리 를 박은 것이었다. 강력한 우주적 싸움이라는 생각은 이 책의 모든 주장과 앞모습을 배하 고 있다. 그러한 주장들일 아무리 부조리하고 공상적인 것일지라도 그것들 은 이 생각의 해석에 형이상적인 진지함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어둡고 장 엄한 연극적 관점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몰락할지도 몰라, 아마도 그러 나 우리는 세계를 함께 끌고 갈 거야 무스피리, 세계방화 말이야" 언젠가 그는 종말론적 기분에 휩싸였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투쟁>에는 그가 자신의 맹세에 세계를 함께 끌어들이는 우주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구절들이 수없이 만하다. 그는 이렇게 확인하였다. "공산 주의라는 유대식 이론은 우주의 토대로서, 사상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질서를 종말로 이끌어 갈 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세계의 질서원칙을 끌어올리는 이런 무의미한 가설을 우주적인 영역에서 생각하려 는 항거할 길 없는 히틀러의 성향을 보여주고 이사. 그는 '별들' ' 혹성들' ' 세계의 기' '수백만 년들'을 극적인 사건 속으로 함께 끌어들이고 '창조' '지 구' '천공'등을 배경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분명한 방식으로 모두에 대한 모드의 싸움이라는 원칙 약자에 대한 강자의 승리라는 원칙을 감추어주고 일종의 종말론적인 다윈주의로 발전해 나가는 배경이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구는 떠도 는 술잔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언제나 가장 강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수만 년 전부터" 그는 영원히 계속되는 치명적인 상 호 갈등에서 일종의 세계 법칙을 찾아냈다고 믿었다. 자연은 생명체들을 이 지구에 자리잡게 하고서 힘에 의한 자유로운 게 임을 구경한다. 용기와 근면성에서 가장강한 존재가 자연의 총아가 괴어 존재의 지배권을 얻게 된다. 오직 약하게 태어난 자만이 이런 법칙을 잔 혹하다고 느낀다. 그럼으로써 그는 오직 약하고 제한된 인간이 될 뿐이다. 이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다면 모든 유기적 생명체의 최고발전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보존의 욕구만이 언제나 마지막에 승리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욕구에서 보면 이른바 휴매니티란 멍청함, 게으름, 망상 적인 아는 체하기 등의 혼합을 표현한 것으로서 3월 햇빛에 눈처럼 녹아버 리고 마는 것이다. 영원한 싸움을 하면서 인류는 위대해졌다. 영원한 편한 속에서 인류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단단한 자연법칙 이러한 '단단한 자연법칙'은 모든 사색의 출발점이며 연관점이 되고 있 다. 그것은 역사란 다름아닌 생존공간을 둔 민족들 간의 생존싸움이라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생존 싸움에 '모든 가능한 수단'이 다 허 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설득, 간계, 영리함. 인내 .선의, 교활함, 그리고 잔인성까지도 말이다. 전쟁과 정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며, '전쟁 이야말로 정치의 최종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사건의 규범들로 일 치하는 것만을 존중하는 정의 혹은 도덕의 개념들을 특징짓는 생각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공격성을 강조하는 귀족주의적인 지도자 이념과 종족 적인 특질 도태의 이념들에 양분을 주었다. 그는 유럽 전체에서 '형통에 다 른 고기잡이'를 해서 금발에 흰 인종이 '자신의 혈통 근거를 확장'시키는 것을 돕게 만들고 ,패하지 않는 종족으로 만들려 한다고 했다. 이렇데 전체적인 전투 철학의 표지에서 보면 복종이 미덕보다 더 중요하 고 헌신의지가 통찰력보다 광신적인 맹목성이 최고의 미덕보다 더 중요하 였다. 결혼은 자기 주장의 결합이고, 집은'생존 싸움을 위한 성'이 되었다. 동물 세계와 인간사회를 거칠게 유추해서 히틀러는 가차 없는 사람들이 감 성적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찬양하였다. 그의 말로는 원숭이들은 모든 것은 '아웃사이더 적으로 간주하고 덤벼들어 죽인다. 원숭이에게 타당한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에게도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언급에 아이러니가 얼마나 적은가 하는 것은 자신의 채식주의를 보존하기 위해 원숭이의 식사습관을 예로 들면서 원숭이가 올바른 길을 보 여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한 일이다. 도한 자연을 보면 예컨대 자 전거는 올바른 것이고 비행선은 '완전히 미친 짓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탐구하고 그것을 다루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 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자연상태의 잔인한 도태원칙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해 낼 수가 없다. 자연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고양이가 쥐를 먹는다는 것이 누구 잘못일까?"라고 그는 비웃었다. 이른바 인간의 휴매니티란 '인간의 허 약함에 봉사할 뿐이며 사실은 자기 존재를 가장 잔혹하게 절멸시키는 짓' 이다. 싸움, 굴복, 파괴 등은 변경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한존재는 다른 존 재의 피를 마신다. 하나가 죽어야 다른것의 양분을 얻는다. 휴매니티 같은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타인의 권리 타인의 행복의 요구에 대한 히틀러의 완전한 무관심, 그의 극단적인 부도덕성은 "신적인 존재법칙에 조건 없이 굴복한다"는 생각에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시대의 데카당스와 약자의식 을 보충해보려는 후기 시민사회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드러나 있다. 주저하 지 않는 갊은 찬양하고 가차없고 원시적인 것을 본래의 것으로 여기려는 경향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히틀러가 자연법칙에 기대어 자신의 개인적인 냉정함 과 감정 없음을 변명하려 했다고 추측된다. 초개인적인 원칙을 들이댐으로 써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싸움, 살인, '피의 희생 '등을 신의 계율을 겸손하 게 실현하는 행동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서 나 자신을 지 키는 것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그는 <나의 투쟁>에 썼다 . 그리고 거의 20년이 지난 다음전쟁과 유대인 근절의 한가운데서 도 덕적인 만족감을 지닌 채 이렇게 확인하였다. "나는 양심이 깨끗하였다." 전쟁과 파괴는 위협받는 세계의 정치의 도덕이며 형이상학이었다. 자기 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거대하고 불확실한 거리를 두고 시대들을 눈앞에 떠 올려보면, 그리고 민족들과 문명들의 몰락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본 능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곤 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지배체계 들이 피로, 허약 상태, 파국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을 무시한 것, 특히 종족 을 뒤섞은 일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종족의 순수성 에 대한 뿌리 깊은 총동을 존중하고 "박새는 박새에게, 참새는 참새에게, 황새는 황새에게, 들쥐는 들쥐에게 " 가는데 반해서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생물학적인 배신을 하려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리하르트 가그너가 죽은 날인1883년 2월 1일에 베네치아에서 쓰 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은 못했던<인간의 암컷에 대해서>라는 논문에서 다 루었던 주장이었다. 민족들이 성 불능에 빠져 늙어죽는 것은 원래의 질서 를 거부한 데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피의 혼합과 그를 통해서 생겨나는 종족 수준 저하야말로 모든 문명들의 죽음의 원인이다. 인간은 전쟁에 패 해서 몰락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순수한 피에만 깃들여 있는 저항력 의 상 실로 몰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종족이 아닌 것은 폐품 이 되고 만다. 창조적인 종족핵 이론 그 뒤에는 창조적인 종족핵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태초 부터 소수의 아리안족 엘리트가, 우둔하고 역사도 없이 스러져간 열등한 민족들의 대중을 지배해 왔다. 종속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들의 천재적인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국가들을 건설하고 문명들을 만 들어낼 수 있는 이 빛나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은 "언제나 새로이 불을 만 들어내었고 그 불은 인식이었다. 그것은 말없는 비밀의 밤을 밝혀서 사람 들에게 지상의 다른 생물들의 지배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이 아리안 종족핵이 종속된 종족과 섞이기 시작하면 문명의 하강과 몰락이 나타났다. "지구의 이 지역에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란 아리안족의 존재와 뗄 수 없 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종족의 죽음이나 몰락은 이 지역에서 문 명 없는 시대라는 어두운 베일을 다시 내려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 이야말로 인류가 새로 직면한 위험이라는 것이다. 고대의 위대한 왕국들의 몰락과는 달리 이제는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 더 높은 인종 자체의 종말이 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리안 핵의 파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전되어 있 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게르만 혈통은 점차 쇠진을 향해 다가가고 있 다."고 히틀러는 절망해서 말했다. 다가오는 승리를 의식하면서 사방에서 어둠의 세력들이 몰려들고 있다. "유럽을 생각하면 나는 몸이 떨립니다." 하고 그는 연설에서 외쳤다. 구대륙은 이제 '피와 슬픔의 바다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비겁한 허풍쟁이들과 자연을 비판하는 자들'이 자연 의 기본적인 법칙을 공격하려 하고있으며, 수많은 위장 아래 몸을 감춘 채 '종합적인 총공격'의 요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공산주의, 평화주의, 국제연맹, 모든 국제적 운동과 국제기구들, 그리고 유대-기독교의 사랑도덕 이 도덕의 전세계적인 변형태들이 인간을 설득하 려고 한다. 즉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감히 자기 충동의 주인이 되어서 영원한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 하늘에 대하여 반항'할 수 없는 법이다. 의심할 수 없는 자연의 의지는 종 족들의 존재와 싸움을 통한 발전을 인정하고 있으며 주인과 노예로 갈라지 는 것과 잔인한 종족유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체계에서 어렵지 않게 고비노의 흔적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종족불평등에 대한 고비노의 이론은 최근의 종족 뒤섞 임에 대해 공포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명의 몰락을 혈통의 혼란 과 연결시켰다. 점차 밀려나는 지배층의 계급적 원한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거의 감추지 못한, 프랑스 귀족의 종족 콤플렉스 '망가진 천민 혈통'에 대 한 거부감 등은 이념상의 자의와 천재적인 모호함으로 동시대 잡문문필가 패거리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과장적인 유사문헌 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웅주의'와 '파 르시팔'에 대한 에세이까지 이르렀다. 히틀러는 이러한 주장을 한 번 더 종합해서 선전에 쓸모 있도록 만들고, 시대의 모든 불쾌감, 공포감, 위기현상 등에 설득력 있는 설명체계로 만들 어낸 것이다. 베르사유,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두려움, 자본주의 질서의 압 력, 현대 예술, 밤의 생활과 매독 등이 아주 오래된 싸움의 형식으로 여겨 지게 되었다. 그 싸움에서 저급한 종족이 인간귀족 아리안에게 대항하여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 뒤에 숨어서 싸움을 조종하는 전술가이 며 권력을 탐하는 최고 원수는 가면을 벗기고 보면 신비로운 영역으로 올 라선 '영원한 유대인'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유대인, 모든 죄악과 공포의 원흉 그것은 지옥의 일그러진 도깨비 모습이었다. '지구를 뒤덮은 것'이고 철 천지 원수고 '반대세계의 주인'이며 광란과 심리적 계산으로 이루어진 처치 곤란한 존재였다. 적을 여럿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원칙에 다라서 히틀러는 유대인을 가능한 모든 죄악과 거포의 원흉으로 만들어버렸다. 유대인은 문 제 거리고 그 모순이며 명제이고 반명제이고, 말 그대로 '모든 일에 죄가 있는'존재였다. 증권의 독점지배, 벌세비즘, 휴매니티 이데올로기 소련에서 3천만 명이 희생된 일 등 모든 것이 다 유대인 책임이었다. 그 사이에 죽은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히틀러의대화가 란츠베르크에 갇혀 있는 동안 출간 되었는데 거기서 히틀러는 이사야 19장 2~3절, 출애굽기 12장 38절 등을 인용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볼세비즘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것은 휴매니티 사상으로 천민 들을 사주하여 혁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어렵지 않게 모세가 최초의 볼세비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세계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기 독교를 어느 정도 창안해내었듯이 레닌도 현대의 질서를 끝내기 위해서 공 산주의 이론을 이용하였다. 구약성서의 구절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되풀이 되는 더 가치 있고 창조적인 종족에 대한 유대인의 공격 모델을 보여주었 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유일한 죄인 유대인을 지구상의 원수로 만들어버리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에 들어 있는 선전 기술적인 측면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유 대인이 없다면 "우리가 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동 시에 유대인은 그의 감정의 고정점이었다. 그것은 주관적인 모습으로 보면 악마적인 선전관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병리적인 망상증이었다. 그가 미워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투사한 것이었다. 모든 마키아벨리적인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지배에 대한 유대인 의 갈망이라는 주장에서 심리적인 이 거대한 시대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그의 커가는 확신은 바로 이 '구원의 형식'에 자 리잡은 것이다. 1924년 7월 말에 란츠베르크에 그를 찾아온 어떤 보헤미아의 국가사회주 의자가 유대인에 대한 그의 입장이 변했는가 불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 다. "그럼요, 물론이죠. 유대인에 대한 투쟁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나는 지급까지 너무나 온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책을 써 나가면서 앞으로는 성공적으로 우리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서 가장 날카로 운 투쟁수당으로 써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있어 생존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세계 의 페스트거든요.' 사실 이러한 증오의 유례없는 강화와 잔인성은 란츠베르크 시절이 사색 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이미 1923년 5월에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었다. "유대인은 종족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유대인은 영원하신 신과 똑같은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이 될 수 없습 니다. 유대인은 악마와 같은 똑같은 형상입니다. 유대인은 모든 민족에 대 한 결핵종족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이념조각들과 감정들을 처음으로 눈에 확 들어오게 정리하면서 그는 세계관이라는 건물을 확실하게 만들어낸 이 론가의 지적인 확신과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유대인의인간으로써의 특성을 의심하고 그 근거로 기생충학 용어를 끌어다 쓰는 것은 이미 단순한 선동가의 외침이 아니었다. 치명적이고도 치료를 확신하는 진지함이었다. 자연법칙 자체가 '기생동물' '영원한 거머 리' '민족들의 흡혈귀'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조치는 확고 한 독자적인 도덕을 가진다. 그의 사상체계의 일관성 속에서 말살과 대량 학살은 이러한 도덕의 최고 승리가 되는 것이다. 히틀러는 마지막까지 이 러한 맥락을 인식하고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낸 과격성을 인류에 대한 동적 처럼 주장하였다. 근 나폴레옹처럼 정복자로서의 명성만을 가졌던 것은 아 니었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다만 인간일 뿐 세계적 사건은 아니었던'것이 다. 1942년 2월말에 이른바 최후의 해결을 결의하였던 반 호수 회의가 있은 직후에 그는 원탁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유대인이라는 바이러스 발견 은 이 세상에서 일찍이 감행하였던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이다 내가 이 끄는 이 싸움은 지난 세기의 파스퇴르와 코흐가 했던 것과 같은 싸움이 다. 얼마나 많은 병들이 유대 바이러스의 탓으로 생겨난 것인가! 우리는 유 대인을 말살해야만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그는 다른 보든 사람보다 더 깊 이 생각하고 더 많이 꿰뚫어보는 사람의 확신을 가지고 자연질서의 창조자 인 자신에게 주어진 세속적인 사명을 깨달았다. 자신의 '거인적인 의무'말 이다. 그것은 고비노를 본질적으로 교정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종족과 문화가 죽는 과정을 몰락에 모든 원인이 되는 유대인현상으로 의인화했을 뿐 아니 라 역사에 유토피아를 되돌려주었다. '고비노의 우울하고 숙명적인 염세론 을 공격적인 낙관론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프랑스 귀족과 달리 히틀러는 종족의 몰락이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 라 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대인의 세계음모 전략은 아리안족의 유산인 독 일에서 결정적인 적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생물 학적인 감염이나 자본주의와 볼세비즘의 협동음모가 여기서처럼 체계적이 고 파괴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실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를 불러낼 에너지를 이끌어냈다. 독일은 지구의 상속권을 결정 하는 세계의 전쟁터다. 이러한 생각을 보면 그가 도이치 몇 유럽의 전통적 인 반유대주의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유대인 망상증은 국가적인 크기를 가진 다른 비전들보다 그를 더욱더 광증으로 이끌어갔다는 사실도 볼 수 잇다. "우리 민족과 우리 국가가 피 와 돈에 굶주린 유대인 민족폭군의 희생제물이 된다면 지구 전체가 이 히 드라에 먹히고 말 것이다. 독일이 이 포위에서 벗어난다면 모든 민족들에 게 가장 위험한 위협이 전세계에서 부서진 것으로 간주해도 될 것이다" 그 러면 저 천년왕국이 독일에 나타날 것이다.- 그는 겨우 하나의 도정을 뒤 로하자 벌써 몹시 서두르면서 이 천년 왕국의 시작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나면 깊은 몰락에서 질서가 다시 생겨나고 통일성이 실현될 것이다. 주인 과 노예는 서로 마주서고 현명하게 이끌어 가는 '세계의 핵심민족들' 은 서 로 존중하고 보호하게 될 것이다. 세계질병의 뿌리 이 모든 본능적 불안과 자연을 거역하는 혼합의 원천이 마침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본능적'이라고 부른 확실성을 그의 길에 마련해준 것은 결코 완성된 적은 없지만 이토록 굳게 입을 다문 이데올로기였다. 그가 시대의 은총을 얼마나 인정했든지 세계상태의 해석과 목숨을 건 투쟁의식은 그것 과 완전히 무관하였다. 그러한 투쟁의식은 그의 정책에 확실한 일관성과 무감동의 특성을 부여하였다. 확정을 꺼리는 태도, 거의 모든 동료들이 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결단에 대한 히틀러의 두려움은 언제나 전략적인 대안 들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는 망설이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뒤로 미루어놓고 기다리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극히l 초조하고 확고한 태도로 위대한 최종대립을 서둘러 추진했다. 히틀러 정권의 수많은 비인간성을 극히 단순하게 무지의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그를 잘못 본 것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일어난 일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어느 누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가까운 추종자 한 사람 이 확인해주었듯이 그는'과격한 국가사회주의자'였다. 이데올로기와 외교정책 그의 이념적 관념들의 긴장된 복합체는 특별히 외교정책에 반영되었다. 공상적으로 보이는 목표설정 탓으로 구체적인 정책강령으로 이해되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달랐던 본질적이 노선은 이미<나의 투쟁>안에 드러나 있다. 독일의 패배를 출발점으로 삼고, 혼탁한 종족적 자질이 회복되는 정도에 영토회복의 정도를 연계시켰다. '혈통의 찢김'이라 고 부르는 것이 도이치 제국에서 '세계지배권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도 이치 민족이 역사발전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양떼 같은 통 일성을 얻게 되면 그날로 도이치 제국은 지구의 주인이 될 것이다.' 국가사회당에서도 널리 퍼져 있던 공간 없는 민족이란 민족주의 전통적 표어에 대해서 그는 민족 없는 공간이란 표어를 내세웠다. 국가사회주의의 국내정치 사명은 마스 강과 메멜 강 사이의 텅 빈 공간으로 민족을 보내 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공산주의 인간대중일 분 도이치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에 떠도는 혁명의 모습은 엘리트 주의적이고 생물학적인 관념 들로 채워진 모습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지배형식과 기관들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인간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새로는 인간의 도래는 수많은 연설과 고시문에서 '진짜황금시대'의 시작이라고 찬양되었다.. "국가 사회주의의 오직 정치운동이라고만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국가사회주의는 종교 이상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 창조의 의지다"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다라서 새로운 국가의 가장 절박한 과제들 중에는 '더 이상의 사생아 만 들기'를 중단시키고 '결혼을 지속적인 종족 오염의 수준에서 구해내고 '다 시금 '주님과 똑같은 사람들을 생산하고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튀기를 만 들어내지 않도록'한다는 것도 들어 있다. '억압이 이종 교배'를 통해서 줄어 들게 된 순수한 아리안이 다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이상적인 상태를 히틀러는 생물학적이고 교육적인 지루한 과정의 결과라고 보았다. 1939년 1월 25일 고위장관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연설에서 그는 1백년 이나 걸리는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 마지막에는 다수가 선별의 의지를 표지를 이용하게 되고, 그 표지들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생존공간의 확보를 거듭 요구하곤 하였다. 생존공간이란 '흘러 넘치 는' 주민을 위해서 위협받는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 었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정복 전략에 출발기지로서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탐욕스런 상상력을 가진 민족은 오늘의 동맹과 정세에 더 이상 얽 매이지 않도록 해 줄 만한 공간, 일정한 크기의 영토를 필요로 한다. 역사상의 위대성을 지리적이 넓이와 결합시키는 이런 생각을 히틀러는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종말이 다가오기 직전 벙커 속에서 명상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무모한 정복을 강요한 운명을 탄식하였다. 거대한 공간이 없는 위협에 대처하는 네 가지 가능성 중에서 산아제한, 내부의 식민지 화, 해외의 식민지화 등을 한편으로는 소심한 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품 위 없는 과제'라고 비난하였다. 분명하게 미국을 염두해 두고서 오직 정복 전쟁의 가능성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했다. "선의의 대해서 거부된 것은 주먹이 빼앗아야 한다"고 그는 란츠베르크 에서 썼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확장 욕망의 방향을 말하였다. "유럽에 서 기반과 토양을 가지려고 했을 때 이것은전체적으로 오직 러시아를 희생 시켜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제국은 다시금 그 옛날 기사단들의 길로 행진해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생각 뒤에는 다시 위대한 세계전환의 관념이 나타났다. 그가 알 아낸 바로는 역사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에 있다는 것이다. 한 번 더 역 사는 강력한 바퀴를 굴렀고 운명과 기회들을 새로 나누어주고 있다. 함대 들로써 먼 나라들을 정복하고 부를 쌓고 전진 기지들을 건설하고 세계를 지배하던 해군력의 시대는 이제 종말의 국면에 서 있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기 전 시대의 고전적인 연결통로였던 바다는 이제 현대성의 조건 아 래서 넓은 제국의 지배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 거대한 식민지는 시대 착오적인 것이고 몰락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현대의 기술적인 수단들, 가능성, 도로, 활주로, 철도, 등은 끝없는 영역으 로 퍼져나가고 밀집된 거점 체계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옛 질서는 뒤 집혔다. 미래의 세계왕국은 지상병력이 될 것이라고는 그는 주장하였다. 단 단하고 이음새 없이 조직된 방어력을 갖춘 거대병력 말이다. 시대는 이미 그리로 향한 길 위에 있으며 과거의 유산은 이미 공표되였다. 뒷날 히틀러의 외교상의 연속적인 기습은 분명히 그의 본질에 있는 극 단적인 불안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시대에 대항한 ,역사 의 경과에 대항한 절망적인 돌진하였다. 세계를 분할하는 과정의 독일도 다시 너무 늦게 나타나는 거시 아닐까 하는 근심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 다. 독일의l 새로운 세계시간이 시작될 때 미래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할 만한 세력들을 검토해 보면 그는 언제나 거듭 러시아에 부딪치곤 하였다. 종족적, 정치적, 지리적, 역사적 요인들이 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것은 동족 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지평을 앞에 두고 히틀러는 외교정책상의 구상들을 발전 시켰다. 그는 수정론자로서 인생항로를 시작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 와 동시에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1914년 국경선을 회복하고 모든 도이치 사 람들을 강력한 대국 안에 하나로 모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 평화조약의 악의적인 실천자였던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 러내고 프랑스가 이탈리아 및 영국과 뚜렷한 견해차를 보이는 점을 이용하 여 보복의 출발점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규모로 생각하는 히틀러의 성향은 시선을 곧장 대륙 전체로 향하고, 국경정책에서 공간정책으로 넘어 가고 있다. 동쪽으로 방향을 돌림 모든 사색의 출발점은 독일이 '가차없는 권력정책을 앞에 내세울 경우에 만' 군사적, 정치적, 지리적으로 위협받는 중간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는 것이었다. 빌헬름 시대의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히틀러는 일찍이 독일 이 해상 무역과 식민지를 포기하고 영국과 힘을 합쳐 러시아에 적대하든가 아니면 해상무역과 식민지를 계속 추구하면서 러시아와 힘을 합쳐 영국에 적대하든가 하는 두 가지 대안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은 20년대 초에 분명히 두 번째 가능성을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은 제국을 '원칙상의' 적대장 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 그는 분명히 친 러시아 정책을 발전시켰다. 쇼이브너 리히터와 로젠베 르크 같은 이민자 그룹의 영향을 받은 가운데 '민족주의적이고' '다시 건강 해진' '유대, 볼세비즘 질곡'에서 벗어난 러시아와 힘을 합쳐서 서방에 맞선 다는 정책이었다. 나중에 그의 확장주의적 동방정책의 중심점이 되는 슬라브 종족을 열등 감에 대한 확신이나 생존공간 개념이 이때만 해도 아직 아무런 역할도 못 하고 있었다. 1923년 초에야 비로소,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정권이 안정되 는 것을 보면, 동맹관계를 뒤집어서 영국과 힘을 합쳐 러시아에 대적하자 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료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히틀러는 일년 이상 새로 운 구상을 거듭 검토해보고, 발전시키고, 그 결과와 실현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나의 투쟁>의 유명한 4장에서 러시아에 대적하는 생존공간 투쟁의 생각을 강령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최후의 벙커 독백의 순간까지 일관되게 히틀러의 외교정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 나 이러한 생각은, 남부 티롤을 양도함으로서 이탈리아의 호의를 사고, 모 근 식민지 요구를 포기함으로써 영구고가 바라던 동맹을 맺는 등 독일이 동쪽으로 방해받지 않고 진출하려는 전제조건들을 마련하는 가운데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1925년에 쓴 <나의 투쟁> 제 2권에서 이미 히틀러는 전적으로 비논리적 이고 우연하고, 너무 좁고, 군사 지리적인 목적에도 맞지 않는 국경선 회복 을 지향하는 수정주의 개념을 극히 날카롭게 거부하였다. 그것은 나아가 독일을 이전의 전쟁상대국 모두에 대립시키고 뿔뿔이 흩어진 적들의 동맹 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줄 뿐이라고 했다. 그는 강조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914년의 국경선 회복을 요 구하는 것은 자신을 범죄자로 드러내는 결과와 정도를 보이는 정치적 무의 미"라고 했다. 그 대신에 대 공간을 획득하는 일은 "신 앞에서, 그리고 우 리 도이치 후세 앞에서 피흘린"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유일한 행동이며 책 임있는 정치가들에게 그 어느 날인가 '민족을 희생하였다는 죄목을 벗겨 줄' 유일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공대함 속을 전쟁을 끌어들이는 것, '동쪽에 있는 옛날 도이치 공간'에 거대한 대륙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게르만 대이동의 이념은 그때 부터 히틀러 정책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 사상에 대해서 '분열 되지 않는 헌신'과 마지막 에너지의 힘'까지도 고백하였고, 의미심장한 정 치적 행동의 '유일한 목적'이러고 찬양하였다. 이러한 결정도 세속의 등급 을 얻었다. 그럼으로써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전쟁 이전 시대의 외교정책을 의 도적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6백년 전에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한 다. 우리는 서부와 남부 유럽을 향한 영원한 게르만 이동을 중단하고 눈길 을 동족에 있는 나라로 향한다. 우리는 마침내 전쟁 이전 시대의 식민지 및 무역정책을 종결짓고 미래의 영토정책으로 넘어가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자신의 사고의 출발점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이론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제 3장에게서 얻은 것이냐 하는 질문은 그대로 놔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생존공간 사상은 분명히 루돌프 헤스를 통해서 히틀러의 이념세 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헤스는 진자 추종자의 긴박감을 자고 가지고 히틀러를 '이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사람에 대한 열렬한 경탄 덕분으로 란츠베르크 시절에 모 든 경쟁자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고, 특히 에밀 모리스의 비서직위를 인정 하지 않았다. 헤스는 1922년 이미 히틀러와 자기 스승인 칼 하우스호퍼의 개인적인 접촉을 알성하였다. 하우스호퍼는 영국인 핼포드 매카인더경이 창설한 '지정학'의 결실 풍부한 생각을 제국주의적인 확장철학으로 발전시 킨 인물이었다. 히틀러의 정복개념을 특징짓는 온갖 마키아베리적인 냉담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복개념은 매카인더가 '심장땅'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몽롱한 확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지정학의 창시자가 약속한 바에 다르면 땅덩어리가 거대한 탓으로 어떤 공격에서도 거대한 탓으로 어떤 공격에서도 보호되고 상처를 입지 않은 동 유럽과 유럽 족 러시아의 '세계 지배의 보루'였다. "심장땅을 정복한 자각 세계를 지배한다" 이런 엉터리 학문 형식들에 잇는 마적인 합리주의야말로 히틀러적 지성의 특수한 구조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지식도 그에게는 영역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영향이 아무리 분명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히틀러의 비상 한 조합능력은 외교정책의 골격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외교정책의 개념은 여러 유럽 강대국 대한 독일의 관계, 프랑스 에 대한 보복의 필요성, 공간과 정복의 열망들d들, 시대변화의 요소와 다양 한 이념적인 고정관념들을 사상적으로 응집된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낸 것 이다. 이 개념은 종족사적인 테마로 돌아가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로써 하 나의 원이 완성되고 있다. 운명 자신이 여기서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해주려고 하는 것 같다. 러시 아를 볼세비즘에 넘겨줌으로써 운명은 러시아 민족에게서 지금가지 그 국 가존속을 만들어내고 보장해 주었던 지성을 빼앗았다. 러시아 국제의 구조 는 러시아에 있는 슬라브 민족의 국가 정치적인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게르 만적 요소가 열등한 종족에게서 만들어내는 국가형성 작용에 대한 놀라운 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부터 러시아는 상부 지도층의 이런 게르 만 핵에 의해서 소모되어 왔다. 이 핵은 오늘날 거의 흔적 없이 말살되고 근절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잇다. 그 자리에 유대인이 들어섰다. 자신의 힘으 로 유대인의 질곡을 끊어버리는 것이 러시아에는 불가능한 일이듯이 , 유 대인으로서도 이 강력한 제국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유대인은 조직의 요소가 아니라 해체의 효소다. 동족에 있는 거대왕국은 붕괴할 시간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유대지배의 종말은 국가로서 러시아의 종말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러한 파국의 목격자가 되도록 선택되었다. 그것은 민족적인 종족이론의정당성을 아주 강력하게 확인해주 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20년대 초에 벌써 뒷날 히틀러가 추구하게 될 외교정책 의 기본구상이 형성되었다. 초기에 영국과의 동맹 노력, 로마와의 축, 프랑 스에 대한 전쟁, 동부의 정복을 위한 말살정책, 그리고 '세계의 심장땅'의 접수 등이었다. 도덕적인 고려들이 그런 일을 어렵게 하지는 않았다. 전쟁 위도를 목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동맹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그는 <나의 투 쟁>에서 확인하고 잇다. 국경선이란 언제나 사람들에 위해서 만들어지고 변경되는 것이고 '생각 없는 약자만' 불변하는 것으로 여긴다. 정복자의 힘 이 권리를 입증하는 것이며 '가진 자가 갖는다' 그것이 그의 정치 도덕의 원칙이었다. 그가 자신의 악몽들과 역사이론들과 생물학적 곡론들, 그리고, 상황분석 에서 이끌어내 이 강령은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정신이상의 느낌이 들지만 그 모든 과격성은남부 티롤이나 알사스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온건한 수 정주의측의 개념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공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민족주의 파트너들과는 달리 히틀러의 독일이 현존하는 권력 및 체계 안에서는 기회 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정상적인 것에 대한 그의 깊은 원한이 그가 근본으로부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을 때에 도움이 되었다. 게임을 거부한 자만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바깥을 향하고, 이 체계를 망가뜨리겠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하던 소련 에 대항함으로써 체계의 힘들이 그의 편이 되었다. 그 힘들은 모르는 사이 에 독일을 "대단히 강력하게 만들어서, 극히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제국의 정복은 브롬베르크나 쾨니히스휘테를 따로 되찾는 일보다 더 쉬었고' 모스 크바 공격은 슈트라스부르크나 보첸 공격보다 훨씬 전망이 있었다. 세계적 권력이, 아니면 몰락이냐 목적이 그렇듯이 히틀러는 위험을 알아보았고 받아들였다. 그는 1933년 에 이전의 계획을 확실하게 실현시키려고 착수하였다. 그에게 있어 선택이 란 언제나 말뜻 그대로 정확하게 세계적 권력이냐 아니면 몰락이냐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임하였다. 1930년에 에얼랑겐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앞에 두고 행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존재는 확장을 지 향하고 모든 민족은 세계지배를 지향하는 법입니다" 그의 의견으로는 이 명제는 다른 사정없이 자연법칙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디서나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절멸 혹은 조건없는 굴복을 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임에서 모든 것을 아 잃고 몰락을 눈앞에 둔 마지막 시점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때의 추종자들을 깊이 당혹케 하는, 일관된 발언을 알버 트 슈페어에게 하는 것이다. '도이치 민족이 가장 원시적인 생존을 계속하 기 위해서 필요한 토대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민족은 "약자 로 판명이 났고, 그렇다면 미래는 오직 더 강력한 동방민족의 것이기 때문 이다.' 독일은 전쟁 이상의 것에서 패배하였다. 그는 완전히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애와 사고에 명령을 내리는 판결기관이 었던 자연법칙, '모든 지혜의 잔인한 여왕'에게 굴복하였다. 출감 거의 일년이 지난 다음인 1924년 말에 벌서 히틀러가 '국비 대학교'라고 불렀던 수감시기가 끝나게 되었다. 뮌헨 지방재판소 검찰의 요청을 받은 교도소장 라이볼트는 1924년 9월 15일에 집행유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 게 만드는 보고서를 보냈다. "히틀러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동료죄 수들까지 질서와 기율을 지키는 사람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절제력이 있고 겸손하며 친절하다. 아무런 요구도 없고, 조용하고 이해심이 있고 진 지하고 전혀 공격적이지 않고 감방생활의 제한들을 따르기 위해 최대한 노 력을 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인 허영심이 없는 사림이며, 감옥의 식사에 만 족하고, 담배나 술을 하지 않으며 동지애를 발휘하여 다른 수감자들 사이 에서 일종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히틀러는 민족주의 운동을 새로이 불 붙이려 하고 있으며 전처럼 폭력적이고 긴급상황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수 단을 쓰지는 않고 정부와의 교감을 가지려고 한다." 이 보고서가 서술하는 모범적인 생활과 전략은 법정이 내세운 6개월 형 량을 채운다음에 가능한 집행유예의 전제조건이었다. 집행유예를 박탈당한 국가사회당 지도자가 어떻게 해서 이념적으로 부패한 장관의 독단으로 법 절차를 벗어낫는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여러해 동안이나 갖 은 불안과 싸움을 꾸며내고 중앙정부의 무효를 선언하고, 장관들을 체포하 고 사망자를 냈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보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검찰측 항의는 처음에 법원의 결정을 중지시키는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 러나 국가권력은 범법자에 대해서 국가가 허약했던 점을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 국가권력은 법적으로 꼭 필요한 것으로 규정되어 잇는 히틀러의 추방문제도 어설프게 처리하였다. 뮌헨 경찰청의 9월 22일 중앙 정부 내무부 장관에게 보내 보고서에서 히틀러 추방을 '필수적인' 일 이라고 표현하였고 새로운 바이에른지사 헬트는 추방할 경우 오스트리아 당국이 히틀러를 받아들일 것인지 알아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일도 없었다. 히틀러 자신이 처신을 바르게 하겠 다는 의사를 가능한 방식으로 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레 고어 슈트라서가 지방의회에서 히틀러가 계속 감옥에 있는 것은 바이에른 의 수치고 '돼지데, 개처럼 천한 돼지떼'가 바이에른 주를 통치한다고 말했 을 때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룀의 지하활동도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상황은 다시금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2월 7일 실시된 의회선거에 서 민족주의 진영은 겨우3퍼센트의 표만을 얻어서 그 이전까지는 31명이었 던 의원이 14명으로 줄어들었다. 극우파의 활동이 이미 절정을 지났다는 생각도 12월19일의 상급 지방 법원의 집행유예를 반대하는 검찰의 불만을 물리치고 서둘러서 히틀러의 석방결정을 내렸다. 12월20일 란츠베르크의 수감자들이 크리스마스 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때 뮌헨에서 온 전보 한 통 이 히틀러와 크리벨의 즉시석방을 명령하였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몇몇 친구와 추종자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감옥 문 앞에서 히틀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망스러운 숫자였다. 운동은 산산조 각이 나고 추종자들은 흩어지거나 적이 되었다. 뮌헨의 집에는 헤르만 에 서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만 모습을 나타냈다. 위대한 등장도 아니었고, 승 리도 아니었다. 히틀러는 많이 풀죽은 모습으로 불안하고도 긴장된 태도를 보였다. 같은 날 저녁에 그는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을 찾아갔다. 집으로 들어서면 서 곧바로 고통스럽게 말했다. "사랑의 죽음을 연주해줘요." 란츠베르크에 서 이미 때때로 종말의 기분이 그를 엄습했다. 어떤 비꼬는 애도기사는 그 가 젊어서 죽었노라고 적었다. "게르만의 신들이 그를 정말 사랑했다"고 제 2장 위기와 저항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출감해보니 아닌게 아니라 용기를 꺾는 방향으 로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작년의 흥분은 잠잠해지고 히스테리 발작들은 사라졌고 흩날리는 먼지와 연기 속에서 평범하고 비낭만적인 일상의 윤곽 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화폐가치가 안정되면서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사회적 기반에 대한 신뢰감을 다시 회복하였고, 그 결과 무질서한 혼란을 만들어내던 군사적 요소들, 극히 부족한 액수로만 유지되던 의용군과 준군 대 조직체계들에게서 물질적 기반을 빼앗아갔다. 공권력은 점차 확고함과 권위를 되찾았다. 1923년 11월 9일에 선포된 비상사태는 1924년 2월 말레 해체되었다. 1924년 한 해가 경과하는 동안 슈트레제만 시대의 친선정책이 최초의 효과를 나타냈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들보다는 전체 적으로 개선된 독일의 심리적 태도로 설명되었다. 전쟁기간이 낡은 증오심과 원한이 점차 풀리기 시작하였다. 도즈 안에서 배상문제의 해결책이 눈에 보이게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루르 지방에서 철수를 준비하였고 안전협약과 가입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들어 오기 시작한 미국의 차관자본이 수많은 경제문제들을 개선하였다. 거리 모 퉁이마다 빈민 구호소와 사회복지기관 앞에 늘어선 빈민들 모습에 끔찍한 색깔을 부여하였던 실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상황의 변화는 선거결과에도 반영되었다. 1924년 5월 선거에서는 과격파 세력은 한 번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같은 해 12월 선거에서는 분명하게 패배하였다. 바이에른에서만 민족주의 계열은 거의 70퍼센트의 지지를 잃 었다. 이러한 변화가 순식간에 민주적 중도파의 강화로 나타나지는 않았지 만 독일이 위기와 전복위협과 실망의 세월을 보낸 다음 마침내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갈가리 찢긴 추종세력 이제 막 등장한 수많은 직업 없는 직업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도 모험과 시민적이지 않은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불규칙한 존재기간을 끝 내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애송이 시절의 공포였던 '평화와 질서' 에 다시금 직면하게 되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의 처지는 정말 희망이 없었다. 연설의 힘으로 법정에서 승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별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절반쯤 잊혀진 실패한 정치가의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은 온갖 조직을 금지 당했다. <민족 관찰자>도 마찬가지였다. 방위군과 대부분의 개인 지지자들도 뒤로 물러섰고 내전놀이가 끝난 다음 에 다시금 일상의 의무와 사업으로 돌아가 버렸다. 1923년을 돌아보며 많 은 사람들은 어깨를 으슥하면서 정신나간 고약한 시대라고 여겼다. 디트리 히 에카르트와 쇼이브너 리히터는 죽었고 괴링은 망명 중이었고 크리벨도 망명을 떠났다. 가까운 추종자들은 대부분 아직 복역중이거나 아니면 싸움 에서 지고 흩어져버렸다. 체포되기 직전에 히틀러는 급히 연필로 휘갈겨 쓴 메모를 알프레트 로젠 베르크에게 남겼다. "친애하는 로젠베르크, 이제부터 당신이 운동을 이끌어 주시오" 관련성이 풍부한 롤프 아이트할트라는 가명으로-철자를 흩었다가 다시 배열하면 아들프 히틀러라는 이름이 나오다- 로젠베르크는 옛날 추종 자들 중 남은 사람들을 모아서 '큰 도이치 민족공동체'를 만들었다. 돌격대 는 수많은 스포츠단체들 합창단, 사격클럽 등으로 위장된 존속하였다. 그러나 로젠베르크가 권위가 없고 말수가 많은 탓으로 ns동은 곧 적대적 으로 싸우는 패거리들로 찢어지고 말았다. 루덴도르프는 옛날 국가사회당 당원과 폰 그레페와 레벤틀로브 백작이 이끄는 '도이치 민족자유당'의 통합 을 주장하였고 슈트라이허는 밤베르크에서 '바이에른 민족단'을 만들었다. 그 또한 독자적인 요구를 내세웠다. '큰 도이치 민족 공동체'안에 남아 있 던 슈트라이허와에서, 아르투어 딘터 등은 각자 지휘권을 잡으려 하였다. 딘터는 과도한 피의 망상들을 소설형식으로 썼고, 튀링겐 지방에 근거를 둔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서 루덴도르프는 폰 그레페,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어서 에른스트 룀과 힘을 합쳐서 '국가사회중의 자유당'을 만들어서 모 든 민족주의 집단들의 통합단체로 조직해나가고 있었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기간을 이용하여 스스로 민족 운동 내부의 정상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히틀러를 지도적 지위에서 선전꾼의 역할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끝없는 싸 움과 간계들이 펼쳐졌다. 이토록 실망스런 상황을 보고도 히틀러는 놀라지 않았다. 로젠베르크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히틀러가 자기를 임시지도자로 임명한 사실에 깜짝 놀 랐다고 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그런 결정은 의도적으로 당이 이와 같이 파 괴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닌가 하고 타당성이 있는 추측을 하였다. 뒷날 자 신의 지휘요구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드물지 않게 나온 이런 비난은 히틀러의 요구를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내 려진 운명의 부름까지 양도할 수는 없었다. 구원의 역사는 대리 구원자라 는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로젠베르크, 슈트라이허, 에서, 룀, 아마, 슈트라서, 폰 그레페, 폰 레벤틀 로브, 루덴도르프 사이의 싸움질에서 히틀러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 추종자 한 사람이 말했듯이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 려 그는 적대자들을 번갈아 가면서 부추기고 민족주의 진영들 간의 통합 열의를 방해하였다. 자기가 갇혀 있는 동안 가능하면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고 권력중심이 형성되거나 지휘요구의 근거가 마련도지 않도록 했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의회선거에서 참여한 것은 합법적인 권력쟁취라는 새로운 전략에 합당한 것이었는데도 그것을 비난하였다. 국회의원은 면책 권을 통해서 어느 정도 독자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자유당이 1924년 5월의 제국의회선거에서 총의석 472석 중에서 32석이나 차지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곧 이어서 보낸'공개서한'에서 그는 당 지휘권을 포기하였다. 전권을 포기하고 정치적 동기에서 자신을 방문하는 일을 일절 금지하였다. 루돌프 헤서는 어느정도 자만의 목소리를 깔고서 감옥에서 쓴 어떤 글에 서 추종자들의 '어리석은'을 말했다. 히틀러는 그의 높은 목소리를 보고 상 당한 보상감을 느꼈다. 란츠베르크에서 나왔을 때는 오직 페허만이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진짜 경쟁자는 없었다. 확고한 반대자들의 전열 대신에 그는 무능한 파벌들의 초조함을 보였다. 그는 자시도 가세해서 만들어낸 쇠약증 상태에 빠진 민족운동이 오랫동 안 기다려온 구원자들로서 등장하였다. 히틀러는 이 폐허에서 논란의 여지 가 없는 지휘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솔직하게 이렇게 고백하였다. "전에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당시 난 다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돌아오면서 멀리 뻗어나간 희망만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갈가 리 찢긴 추종자들의 극히 모순되는 요구들에 마주서게 되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우파 진영에서 모든 파벌들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이 정당에 분명 한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의 정치적 장래를 결정할 판이었 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주 뚜렷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다지 의미가 크지 않아서 다양한 요구들을 한데로 합칠 수 잇는 그런 특성이어야만 했 다. 그가 루덴도르프와 함게 민족진영 연합운동을 조직하리라는 수많은 사람 들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그는 모든 것 위에 우뚝 서서 숭배의 높이까지 올려진 지도자의 모습만이 자기가 생각한 통합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으 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서둘러서 동맹을 맺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경계선을 긋는 조건 없는 개인적 요구를 발전시키는 일이 더 중 요하였다. 다음주 몇 주 동안 히틀러의 전략적 행동은 이러한 생각에서 나 온 것이었다. 헬트와의 협상 푀너의 충고에 따라서 그는 우선 새로 바이에른 지사가 된 헬트에게 협 상을 요청하였다. 바이에른 민족당 당수인 헬트는 엄격한 카톨릭이고 연방 주의자였다. 히틀러와 그의 동지들은 한때 정열적으로 그와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1925년 1월 4일에 이루어진 이 만남의 흥미진진한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 히틀러는, 아직도 란츠베르크에 남아 있는 동지들의 석방문제를 교 섭할 의도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합법화의 일보를 내디딘 것이다. 민족진영 내부의 비관자들은 그가 이러한 방문으로 '로마와의 평화'를 만들 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사실상 그는 공권력과의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퓨 덴도르프와 달리 자신은 적들에게 자기가 그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예고할 마음이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 시도의 성공은 그의 앞으로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서 민족 진영 내부 의 지도자 자리 확보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독재적으로 운영되는 군 사적 정당의 건설과 권력획득의 야심을 위해서 강력한 국가기관의 신뢰를 회복하고 11월 9일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이 극히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즉 정치란 압도와 열광과 공격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중적 존재여 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이중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는 새로운 역할을 해낼 수 있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적이면서도 동시에 기존질서의 옹호자로 보여야 한 다는 것, 과격하면서도 절제있게 보여야 한다는 것, 질서를 위협하면서도 질서의 수호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 정의를 파괴하면서도 그 회복을 위 해 노력한다는 믿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히틀러가 이러한 전 략의 모순을 이론적으로도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것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해 나갔다. 냉정한 지사에게 그는 우선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앞으로는 합법적 으로 행동하겠고, 11월 9일의 쿠데타는 오류였다고 맹세하였다. 그 사이 자 신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자신은 이미 시민적 애국자로서 힘닿는 대로 거기 공헌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의 파괴적인 힘에 맞선 싸움에서 정부편에서 노력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주장 하였다. 물론 그런 활동을 위해서 자신의 정당과 <민족 관찰자>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가 이러한 제안을 민족주의당의 반 카톨릭주의와 어떻게 결합시킬 생 각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히틀러는 그것은 루덴도르프 개인의 망상이라 고 공격하였다. 자신은 그렇지 않아도 이 장군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으며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했다. 전부터 종파적인 싸움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시험이 끝난 민족주의 힘들이 서로 힘을 합쳐야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헬트는 이러한 능변에 냉담하였다. 그는 히틀러가 마침내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주지사인 자신은 어차피 누구에게나 국 가 권위를 주장할 셈이었다. 11월 9일과 같은 사태가 바이에른에게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는 히틀러의 보호자이기도 하였던 개인적 친 구 귀르트너 박사의 권고를 받아서 마침내 국가사회당과 당기관지의 금지 를 해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히틀러와 회담을 하고 나서 "이 맹수는 길들여졌다."고 회담의 인상을 요약하였다. 굴복이냐, 제명이냐 며칠 뒤에 히틀러는 지방의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치 당의 상태 가 충분히 고립되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쓰라린 도전을 하였다. 이제 자신 의 소도구가 되어버린 하마가죽 채찍을 손에 들고서 그는 주의회 건물로 들어섰다. 민족진영 의원들은 환영의 인사말을 기대하고 거기 모여 있었다. 긴 서론도 빼고 그는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지도력 결핍과 개념 없음을 비난하고, 그들이 헬트가 제안한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고 격분하 였다. 깜짝 놀란 일행이 품행바른 사람이 포기할 수 없는 원칙들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적대자에게 도이치 민족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와 더불 어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법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의원 한 사람이 히틀러가 이 연합정권과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때이른 석방을 얻어낸 모양 이라는 의심을 표시하자 히틀러는 운동을 위해서 자신의 석방은 스물댓 명 의 민족당 소속 의원들이 지키고 있는 원칙들보다 1천 배나 중요하다고 경 멸적으로 답변하였다. 실제로 그는 날카롭고도 도전적인 지휘 요구를 통해서 자기에게 복종하 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명하려고 했던 듯하다. 그는 뒷날 반어적인 경멸 감을 가지고 당이 1923년에 '인플레이션 이익'을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당 은 너무 빨리 성장하였으며, 그것이야말고 당의 취약성과 위기의 순간에 저항력이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거기서 결론을 이 끌어냈다. 민족주의 진영 지도자들은 협조하려 하지 않는 히틀러의 태도를 비난하고 장군홀 앞에서 함께 흘린 피를 들먹였다. 그러나 그런 신비적인 감상주의보다 1923년의 속박상태에 대한 기억이 히틀러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였다. 당시에 까다롭거나 고집스러운 수많은 동지들을 계속 고려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서 이끌어낸 결론, 즉 협 조체제란 일종의 속박상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바깥쪽, 즉 공권력을 향해 공손한 자세를 취한 반면 운동 내부에는 끈질기게 복종의 태도를 고집하였다. 그래서 이런 대립의 결과 24명의 주의회 의원들 중에 서 겨우 6명만이 그의 편에 남고 다수가 다른 당으로 넘어가는 일을 기꺼 이 감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새로운 대립들 을 시작하였고 소규모로 변한 운동의 가장자리에 있는 다른 조각들을 계속 떼어버렸다. 그는 다른 수많은 민족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집단과 자신을 구 별한 특성을 강조하곤 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협동을 비난하였다. 14명의 국회의원들 주에서 겨우 4명만이 그의 진영에 남게 되었고, 그들도 만만치 않게 반발하면서 헤르만 에서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같은 수상쩍고 깨끗 하지 못한 추종자들과 결별하라고 요구하였다. 히틀러는 앞으로 몇 달 동 안의 괴로운 싸움은 깨끗함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당내 단독 지배권이 문 제라는 사실을 이들 반대자들보다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으므로 한 발 짝도 양보하지 않았다. 루덴도르프와 결별하다 그러는 사이 그는 루덴도르프와 결별을 준비하였다. 11월 9일 정오에 히 틀러가 장군홀 앞에서 도망친 일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 도이치 장교는 그런 남자 밑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발언만이 그런 조치의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남부 독일의 '총사령관' 이, 그 자신의 고집과 두 번째 부인이며 의사인 마틸데 폰 켐니츠의 과도 한 명예욕으로 해서 계속 새로운 분규에 휘말려들면서 당에 부담스러운 존 재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고, 바이에른의 왕세자와 불필요한 체 면싸움을 일으켰고, 장교단과 사이가 나빠져서 상당수의 옛날 전우들이 그 에게 장교단에서의 추방을 통고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분파 이데올로기의 준종교적인 우매함 속으로 점점 더 구제불능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수많은 모반의 공포들, 게르만 신들에 대한 믿음, 문명 비관 론 등과 같이 연관되어 있었다. 히틀러 자신은 초기 시절의 보수반동주의, 란츠 폰 리벤펠스, 툴레 결사 의 정신나간 생각 등의 양상을 보이는 이런 성향과는 오래전에 이미 결별 하였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이러한 민중 낭만주의에 대한 경멸감을 표 현하였다. 사실은 자신의 관념세계도 어느 정도 유치하게 그러한 낭만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질투심도 작용하였다. 군사적으로 엄격 한 민족에게서 예전에 상병이었던 장군을 따라잡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사 실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징적인 일이지만 어떤 민족진영 그룹이 1925년 초 어떤 편지에서 루덴 도르프를 '영원한 각하,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른 반면 히틀러는 '오늘의 어 두운 상황에 불을 비치는 불의 정신'이러고 불렀다. 히틀러는 1차 세계 전 쟁의 장군이 자신의 수행원인 울리히 그라프를 군대식 명령으로 자신에게 서 빼간 것을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최초의 대담에서 벌써 그에게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점차 끓어오르는 적대감으로 북부 도이치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의 지도자들인 폰 그레페와 폰 레벤틀 로브 와의 대립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히틀러가 옛날의 권력을 되찾을 수는 없다. 그는 재 능있는 선동꾼이기 하지만 정치가는 아니라고 선언했다. 변화된 자신감을 드러내는 뒷날의 편지에서 히틀러는 폰 그레페에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자 신은 전에 북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오직 독 일을 위해서일 뿐이며 "하느님께서 나는 도와주시는 한!" 절대로 그레페와 그 패거리를 위해서 북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당을 새로 창설함 1925년 2월 26일에 처음으로 <민족관찰자>가 다시 발행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실패한 쿠데타 장소였던 시민 양조장에서 국가사회당이 새로운 창 설(재창설이 아니라)을 예고하였다 사설 '새로운 시작'에서, 그리고 동시에 출간된 당조직을 위한 기본노선 책자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지휘권에 대한 요구를 하였다. 우선 모든 전제조건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에서와 슈 트라이허에 대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서 당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 주종자의 도덕성이나 파벌들간의 갈등과는 별 상관이 없고, 정책을 추진하는 일이라 고 주장하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는 '정치적 아이들' 이라고 불렀다. 그의 정력적인 진로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온 나라에서 충성 표명이 나왔다. 모두 히틀러에게! 다음날의 장면은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고려되었다. 자신의 호소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히틀러는 두 달이나 연설 활동을 일절 중지했다. 이러한 방 식으로 그의 지지자들의 기대와 라이벌들의 신경질이 극단적으로 높아졌 다. 그는 방문객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외국의 대표단도 거절하였 고, 모든 정치적인 서한은 '읽지 않고 서류바구니에' 던져버린다고 알리게 했다. 이날 집회는 저녁 8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른 오후에 벌서 '입장료 1마르크'짜리 최초의 참석자들이 나타났다. 6시에 경찰은 홀을 폐 쇄해야 했다. 약 4천 명의 지지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히틀러 가 홀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최초의 과도한 숭배의식으로 변했다. 참석자들 은 탁자 위로 올라가서 환호성을 지르고 돌로 된 1리터, 2리터들이 맥주조 끼를 흔들어대고, 행복에 겨워 서로 얼싸안았다. 막스 아만이 사회를 보았 다. 안톤 드렉슬러가 에서와 슈트라이허를 추출해야 참석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망설이는, 아니면 고집스런 이 모든 당원들을 향해서 히틀러는 두 시간 에 걸쳐서 대단히 효과적인 연설을 행했다. 그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시작 해서 아리안족의 문화창조적인 업적들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외교정책을 언급하면서 평화협정은 파괴되었고, 배상합의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그렇 지만 유대의 혈통 오염을 통해서 독일이 몰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옛날 의 강박관념으로 돌아가서 그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거리에 나타난 유대 인은 모두가 금발의 도이치 소녀를 팔에 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공산주 의는 "몰락할 수도 있고, 그에 대항해서 더 그럴싸하면서도 똑같이 잔인하 게 행동하는 다른 주의를 마주세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루덴도르프를 비판하였다. 그는 어디서나 적대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것을 적이라고 부르면서 실은 다른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핵심에 이르렀다. 누군가 와서 내게 조건을 제시하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친구여, 우선 내가 자네에게 제시하는 조건을 기다려보게. 나는 대중을 얻 기 위해 애쓰지는 않네!' 라고 말입니다. 당원 여러분, 일년이 지나서 여러 분이 직접 판단해보십시오. 내가 올바르게 행동했다면 그야 좋은 일이죠. 내 행동이 옳지 못했다면 나는 내 직위를 여러분 손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나 혼자서 당을 이끌 어가고, 내가 혼자서 책임을 지는 동안에는 다른 누구도 내게 조건을 제시 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운동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분노로 빨개진 얼굴로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적대감을 파묻 어버리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당내의 싸움을 끝내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추종하라고 청하지 않았고, 타협을 암시하지도 않았으며, 단순히 복종이냐 아니면 결별이냐를 요구하였다. 마지막에 환호성이 울러퍼져서, 새로운 국 가사회당에서 자기 혼자 이끌어가는 지도자 정당의 권위적인 노선을 취하 려는 그의 의도를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환호성의 한가운데로 막스 아만이 끼여들어서 대중을 향해서 소 리쳤다. "싸움은 이제 끝이다. 모두 히틀러에게 향하자!" 그 순간 갑자기 단상에는 옛날의 적대자들이 나타났다. 슈트라이허, 에서, 페더, 프리크, 뤼링겐의 기사 딘터, 바이에른 파벌지도자 부트만 등이었다. 이 압도적인 장면에서 그들은 소리지르면서 의자와 탁자 위로 올라선 수천 명의 사람들 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손을 내밀었다. 슈트라이허는 약간 당황한 태도 로 '신의 사명'에 대해서 말했다. 최근에 지방의회파 앞에서 상병 히틀러에 게 날카롭고도 조롱섞인 반대로 표명하였던 부트만은 자기가 가졌던 온갖 주저하는 마음이 "지도자가 말씀하시자 내 안에서 녹아 없어졌다."고 선언 하였다. 루덴도르프의 압도적 모습으로도, 폰 그레페, 슈트라서, 로젠베르크, 룀 등이 개별적으로나 혹인 연합해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그는 약간의 조치 로 벌써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권위와 자신감을 강하게 만들 어주었다. 부트만의 표현대로 과거에도 있었지만 루덴도르프와 다른 경쟁 자들로 인해서 매우 제한적으로만 그에게 붙여졌던 칭호가 아날부터 논쟁 의 여지 없이 그의 것이 되었다. 즉 '지도자'였다. 연설 금지령 헤르만 에서가 표현한 것처럼 민족주의 진영의 경쟁자들이라는 '악당 같 고 저주스런 음모덩이'들과 대결해서 이전보다 더욱 독재적인 당의 지배권 을 확보하자마자 히틀러는 곧바로 두 번째 목표의 실현에 착수하였다. 곧 국가사회당의 조직을 자신의 전략적 목적에 맞는 유연하고도 강력한 기구 로 만드는 일이었다.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혁명을 달성하려는 결심에 대해서 그는 이미 란츠베르크에서 비웃는 추종자 한 사람에게 이렇게 확언하였다. "내가 활 동을 다시 하게 된다면 나는 새로운 정책을 추구해야 할 겁니다. 무기의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과 공산당 의원들이 화를 내겠 지만 우리는 의회에 진출합니다. 투표로 이기려면 총으로 쏘아버리는 것보 다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들의 헌법이 우리에게 승리를 만들어줄 거예요. 합법적 절차는 모두 느린 법이니까요." 그것은 히틀러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느리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 고 언제나 다시 후퇴, 저항, 갈등을 맞이하였다. 그 자신이 최초의 힘든 불 운에 대해서 책임질 상황이 닥쳐왔다. 바이에른 정부는, 어떤 것을 적이라 말하면서 다른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그의 발언을 원래 뜻 그대로 헌법에 대한 적대감의 표지로 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적이 자기 시체를 넘어가 든지 아니면 자기가 적의 시체를 넘어갈 것이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화를 냈다. 그는 이 말 끝에 계속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투쟁이 다음번에 나를 쓰러뜨리면 철십자가 내 시체를 덮는 천으로 쓰이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의 충성 확인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일깨워서 처음에 바이에른 당국이, 그리고 이어서 대다수의 주들도 그가 공식적으로 연설하 는 것을 일시 금지하였다. 집행유예와, 언제나 위협적인 추방령과 연관해 서, 전반적인 사정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그에게 내려진 이 금지령은 일체 의 전망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노선의 일시적 실패를 의미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안감이나 분노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년 반 전인 1923년 여름에만 해도 한 번의 퇴각이 그를 길에서 밀쳐내서 젊은 날의 무 기력과 약점을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연설 금지라는 개인적인 타격을 입고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잃어버린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이제부터 당 기관지를 위해서 쓰는 사설의 사례 비로 생활비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자주 브루크만 집에서 40에서 60명 정도의 소규모 손님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모든 마취제, 모 든 흥분제가 없어졌으므로 선전과 위장을 위해서 새로운 수단을 써야만 했 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모두 히틀러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변화했다는 사 실을 증언하고 있다. 생기 없는 정신병자 같은 모습에 처음으로 윤곽과 개 성을 마련해준 엄격하고 엄숙한 모습들을 알아본 것이다. "좁고 창백하고 병적이고, 자주 거의 텅 빈 듯하던 얼굴이 훨씬 더 강력한 형태로 집중되 었다. 이마부터 턱에 이르는 골격의 강한 구조가 이제 두드러지게 드러났 다. 전에 꿈꾸는 듯이 보였던 요소는 사라지고 이제 분명한 강인함의 모습 이 나타났다." 이 강인함은 이제 모든 재앙을 통해서 그에게 끈질긴 특성을 주었다. 그 러한 끈질긴 힘으로 그는 30년대 초에 마침내 승리의 행진이 시작되기까지 정체기간을 잘 견디어냈다. 1925년 여름에 모든 희망의 저점에서 국가사회 당의 지도자 모임에서 그에게 대리인을 내세우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그는 당 운동은 자신과 함께 일어서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할 것이라는 도전적인 이유를 들어서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의 가까운 주변을 보면 그의 말이 옳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난 몇 달 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충돌과 분리는 중간급의 아니면 종속적인 추종자만 그의 곁에 남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측근은 다시 가 축상인, 운전기사, 경호원, 이전의 직업군인 무리로 한정되었다. 그는 당의 처음 시작 시절부터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감상적이고, 거의 인간적인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 패거리의 대개 좋지 못한 평판이나 그들의 떠들썩 한 조잡함과 유치한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람들 과의 교류는 그가 시민적이고 탐미적인 원래의 출신계층과 얼마나 무관한 사람이었던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때로 들어오는 항의에 대해서 그는 언젠가 어느 정도 불확실성의 흔적을 지닌 채, 자기 생각으로도 측근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잘못이 없지 않은' 인간의 본성 탓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수상이 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그가 좋아하는 측근이었다. 히틀러가 한때는 비스 마르크의 것이었던 방에서 영화를 즐기거나 아니면 시시한 대화를 위해서 저고리 단추를 끄르고 무거운 안락의자에서 두 다리를 쭉 내뻗곤 하던 저 길고 공허한 저녁의 사적인 모임에서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분위기를 지 배하였다. 배경도, 가족도, 직업도 없이, 성격이나 경력에서도 철저히 단면 만을 지닌 이런 사람들은 한때 남자 하숙집에 살았던 히틀러에게 수많은 친근한 기억들을 일깨웠다. 크리스치안 베버, 헤르만에서, 요제프 베르히톨트, 막스 아만 같은 사람 들에게서 다시 보았던 것은 저 빈 시절의 후광이나 냄새였을지도 모른다. 경탄과 정직한 헌신만이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가 '오스테리 아 바바리아'나 '노이마이어 카페' 같은 곳에서 장광설의 독백을 시작하면 그들은 놀란 모습으로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들의 비판 없는 열광에 서 그가 마약처럼 꼭 필요로 하지만 참아야 했던 대중의 열광에 대한 대용 품을 보았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 마비의 시기에 히틀러가 얻은 빈약한 성공 중에는 무엇보다도 그레고 어 슈트라서를 얻은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한 11월 쿠데타에 이 르기까지 란츠후트의 약사였고 저지 바이에른 대관구 지도관이었던 이 인 물은 가끔가다만 전면에 등장하곤 하였다. 그는 원래 '전선 체험'을 통해서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히틀러가 없는 기간을 이용하여 스스로 앞으로 나서려고 애쓰면서 그는 '국가사회주의 자 유운동'의 틀 안에서 특히 북부 독일과 루르 지방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세 력을 만들어냈다. 뚱뚱하면서도 상당히 예민한 이 남자는 음식점들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호머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읽고, 우울한 바이에른 소도시 유명인사의 원형처럼 행동하였다. 그는 인상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연 설 재능 이외에도 기자인 동생 오토를 공격적인 동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부서지고 냉정하고 신경쇠약증에 걸린 히틀러와은 잘 어울리 기 어려웠다. 히틀러라는 사람과 지저분하고 비굴한 측근이 다 그의 마음 에 들지 않았다. 정치적인 견해에서 두 사람의 의견일치는 여러 가지로 해 석이 흔들리면서 전체적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에만 한정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마법과, 추종자를 모아 하나의 이념을 위해서 동원하는 능력에 감탄하였다. 새로운 당 창설을 위한 모임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1925년 3월 초에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과 결별한 대가로 북부 독일 전역에 대해 서 상당히 독자적인 국가사회당 지휘권을 제안하자 슈트라서는 자기는 추 종자이지 대등한 동지로서 히틀러에게 합류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 는 도덕적인 주저와 의심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 래를 위한 이념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히틀러 씨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에른스트 팀과의 결별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상당한 손실을 불러왔다. 슈트라서가 폭풍 같은 에너지로 북부 독일에 당조직을 마련하고, 짧은 시간 안에 슐레스비히 홀 슈타인, 폼메른, 저지 잔센 사이에 7개의 새로운 대관구(국가사회당과 히틀 러 통치 시대의 행정구: 역주)를 만들어내는 동안 히틀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많은 후퇴를 겪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권위와 노선을 지 키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에른스트 룀과 결별하였다. 뭔헨의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면서도 석방된 전직 대위 룀은 즉시 의용군과 전투동맹 시절의 옛 전우들을 긁어모아 새로운 모임, 즉 '전우회' 를 만들었다. 상황이 점차 정상화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 영원한 병사들은 거의 예의 없이 룀의 전략적 능력과 조직능력 아래 모여들었다. 란츠베르크에서 이미 히틀러는 이런 활동을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 것은 자신의 조기석방, 민족주의 운동 내에서 권력확보와 새로운 전략을 어느 정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23년 11월의 교훈에 따르면 이제 부터 군대조직과 그들의 무장한 자신감, 음모적인 행태, 병졸놀이 따위와 결별해야 했다. 히틀러의 의지에 따르면 국가사회당이 필요로 하는 것은 준군사적으로 조직된, 오직 정치적 지휘, 따라서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당의 군대였다. 그에 반해서 룀은 방위군을 위한 비밀부대라는 한때의 이상에 붙박여 있었고, 심지어 돌격대를 당과 완전히 분리시켜서 오직 자신의 전 우회 하부조직으로 만들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보면 돌격대의 명령권과 기능을 놓고 다투는 오래된 싸움이 었다. 느리고 둔한 룀과 달리 히틀러는 그 사이 원한과 인식을 얻었다. 그 는 로소브와 그 휘하 장교들이 11월 8일과 9일에 배신한 사실을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그날 밤의 사건에서, 맹세와 합법성은 장교들 대다수에게 있 어 뛰어넘을 수 없는 도덕적 장벽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로소브의 배신은 관례에 어긋나고 명예스럽지 않는 불법적인 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망 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카르, 히틀러, 로소브 자신의 갈팡질팡하는 마음, 상 황이 그러한 불법적 일 속에서 군대를 이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히틀 러는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군과는 어떤 형태로도 뒤섞이지 말 것. 바 로 거기에 온갖 불법성의 시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4월 초반에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룀은 몽상적인 애착으로 히틀러에게 매달렸다. 그는 정직하고 자발적이고, 자신의 견해와 친구들에 대해서 똑같 이 충성스러웠다. 히틀러는 정치 이력 초창기에 룀에게서 얼마나 많은 도 움을 받았는지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시대가 변했고, 한때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 그 사이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려 들지 않는 고 집스럽고 힘든 친구로 변했다는 사실도 보았다. 얼마 동안 그는 망설이면서 룀의 고집에 양보를 했다. 그러나 마침내 아 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결별을 결심하였다. 4월 중순에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룀은 한 번 더 국가사회당과 돌격대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 하였다. 자신의 부대는 비정치적인 개인군대로 남아서 당과 일상적인 투쟁 과 무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언성이 높아졌다. 히틀러는 특히 룀의 생각이 1923년 여름처럼 아직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 의 의도를 위한 포로로 만들고, 또다시 '선전꾼' 으로 격하시키려는 데 자 존심이 상했다. 화가 잔뜩 나서 룀에게 우정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하지 룀 은 대화를 중단해버렸다. 다음날 그는 서면으로 돌격대 지휘권을 반납하였 고 히틀러는 답변하지 않았다. 룀은 전우회 지휘권도 내놓고 난 다음 4월 말에 히틀러에게 한 번 더 편 지를 썼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함께 보냈던 아름답고 힘든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자네에게 그 전우 애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한 자네의 개인적인 우정만은 없애지 말아달라 고 부탁하고 싶네." 그러나 히틀러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 음날 민족주의 신문에 사직서를 넘겨주자 <민족관찰자>는 아무런 주석 없 이 그것을 실었다. 세력 약화 히틀러에게 불안정한 전망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주 로 이유에서 이루어진 루덴도르프와의 결별이 정치적으로 타당한 일이었음 을 알려주는 사건이 이 무렵 발생하였다. 1925년 말에 사회민주당 출신의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죽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권유로 민족주 의 진영은 '시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유능하지만 완전히 이름 없는 야레 스 박사에 맞서서 루덴도르프를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장군은 겨우 1퍼 센트 남짓한 표를 얻어서 완패하였고, 그것을 히틀러는 잔혹한 만족감이 없지도 않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선거가 끝난 지 며칠 만에 그의 곁에 남은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믿을 만하고 중요한 동지인 푀너 박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러자 그는 정말 로 정치적 경력의 마지막에 이른 것 처럼 보였다. 당은 뮌헨에 겨우 7백 명의 당원이 있을 뿐이었다. 안톤 드렉스러는 그와 결별하고 자신의 온건 한 성향에 알맞는 정당을 창설하였다. 히틀러의 싸움부대는 그곳을 찾아가 쑥밭으로 만들고 경쟁정당을 엉망으로 만들곤 하였다. 그와 비슷한 일이 다른 유사 단체들에도 일어났다. 드물지 않게 히틀러 자신이 하마가죽 채 찍을 손에 들고서 집회에 쳐들어가서 연설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단상에 서 대중을 향하여 미소짓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 는 재선거에 앞서서 그는 지지자들에게 그 사이 입후보한 폰 힌덴부르크 사령관을 지지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힌덴부르크를 지지한 것은 그 어떤 '장기적인 정치적 고려'에서 나 온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표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질서정당'의 전선으로 합류하였음을 과시적으로 보여주었고, 거의 모든 강력한 기관들 에 대한 열쇠를 장악하였거나 앞으로 장악하게 될 남자, 이 '대리황제'에게 접근해 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지속적인 후퇴가 히틀러의 당내 지위를 약화시켰다. 특히 튀링겐,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지에서 지배권을 얻기 위해 계속 악전고투해야 했던 반면,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북부 독일에서 당의 건설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쉬 지 않고 움직였다. 대개의 밤을 기차나 대합실에서 보냈으며 낮 동안에는 지지자들을 방문하고, 관구들을 창설하고, 당 임원들을 소집하고 회의를 하 거나 집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1925년과 1926년에 그는 거의 1백 개의 회 합에서 주연설자로 토론을 맡았다. 반면에 히틀러는 침묵의 판결을 받고 있었다. 슈트라서의 경쟁적인 명예욕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사정이 일시적으로 당 의 무게중심이 북부로 옮겨간 것 같다는 인상을 일깨웠다. 슈트라서의 충 성심 덕분에 히틀러의 지도적 지위는 전체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지만, 이 멜로 드라마적이고 소시민적인 보헤미안(히틀러)과 그의 '로마 노선'에 대 한 냉정하고 청교도적인 북 도이치 사람들의 불신이 거듭 드러나곤 하였 다. 그리고 드물지 않게 뮌헨 중앙당에 대한 광범위한 독립의 인정을 전제 로 해서만 새로운 당원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지구당 지도자들을 당 지도부가 임명한다는 히틀러의 요구도 북부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당원지침서를 간행하는 권리를 사이에 둔 중앙당 과 관구들 사이의 갈등은 오랜 세월을 끌었다. 히틀러는 극도로 예민한 권 력의지를 가지고서 그러한 조직상의 부수적인 문제들이 중앙당이 통제력을 가지느냐 아니면 무능하냐를 결정하는 문제가 되리라는 사실을 간파하였 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양보하지 않았으면서도 개별적인 관구 들의 독자적 권력을 오랫동안 참아야 했다. 북부 라인란트 관구는 1925년 말에도 뮌헨 중앙당의 당원지침서를 이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새로운 유형' 요제프 괴벨스 엘버펠트에 자리잡은 라인란트 관구의 사무장은 젊은 인텔리였다. 기자, 작가, 증권 브로커 등이 되어보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다음에 그는 마 침내 어떤 도이치 민족주의 정치가의 비서가 되어서 국가사회주의, 이어서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연결되었다. 그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라는 이름이었 다. 그를 슈트라서에게 끌어들인 요인은 무엇보다도 그의 지적 과격주의였 다. 그는 정열적인 문학작품과 일기장에서 자기 자신에 전율을 느끼면서 이 렇게 확인하였다. "나는 가장 과격한 사람이다. 새로운 유형이다. 혁명가의 유형이다." 그는 높고도 특이하게 매혹적인 음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시대 에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열정을 함축성과 결합시킨 문체를 가졌다. 그의 과격주의는 주로 민족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혁명이념을 이용하였다. 그의 새로운 후원자인 슈트라서의 개념들과 주장들을 알팍하고 날카롭게 서술한 것 같았다. 피가 통하지 않는, 이상스럽게도 추상적인 감정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히틀러와는 달리 감정적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전후시대의 곤궁과 비참의 체험에서 낭만적인 특성을 가진 사회주의를 이끌어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침투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는 기대와 결합된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요제프 괴벨스를 자기 동생 오토 와 나란히 자신의 정책노선의 지적인 대변자로 보았다. 이 노선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히틀러의 '파시스트적인' 남 도이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일종의 사회주의적 대안의 표현으로서만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슈트라서 일파와 그들의 생각 불도이치 국가사회주의들의 특별의식을 처음에 1925년 9월 10일 하겐에 서 창설된 노동결사로 나타났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나란히 괴벨스가 모 습을 드러냈다. 참석자들은 거듭 뮌헨 중앙당에 대한 공격을 하였고, '서부 블록'이나, '반대공격'이니 '뮌헨의 완고한 보스'니 하는 말을 하면서 당 지 도부가 당 정책 문제에 관심이 적다고 비난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민족관찰자>의 '끔찍하게 낮은 수준'을 탄식하였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수많은 비난들 중 어느 것도 히틀러 개인이나 당수로서의 위치 자체를 향한 것은 없었다. 그의 지위 자체는 약화시키기 는커녕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생각이었다. 그가 아니라 '중앙 의 무질서한 살림'에 대해서, 그리고 에서와 슈트라이허의 '능숙한 허풍'에 대한 비난이었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잘못 평가한 가운데 슈트라서 일파는 '파멸적인 뮌헨 노선' '에서의 독재' 올가미에서 히틀러는 해방시키고 자신 의 일에 충실하도록 만들기를 희망하였다. 이미 초기 시절부터 퍼져 있었고, 모든 증거와 외양에 반대하면서 마지 막까지 남아 있던 이해하기 힘든 관념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즉 '지 도자'는 불안하고 인간적인데 다만 잘못된 충고자들과, 이기적이거나 악의 적인 요소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작자들이 지도자가 자신의 정직한 의지를 좇는 것, 재앙의 흐름을 간파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집단의 정책은 괴벨스가 순수 작업하는 반원간 잡지 <국가사회주의 편지>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운동의 시야를 현재로 향하도록 하고, 동경에 가득 찬, 회고적인 중산층 이념의 협소함에서 벗어나려고 하 였다. 뮌헨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이 여기서는 의문으로 바 뀌거나 공공연히 부패로 여겨졌다." 특히 이 잡지는 북부의 다른 사회적 조건, 그러니까 바이에른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적, 도시적인 사회구조를 고려해서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강조하였다. 어떤 베를린 당원이 편지에 쓴 것처럼 국가사회주의는 '과격화된 부르주 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사회주의라는 말에 두려움'을 가져 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책적 고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우 리는 사회주의자다. 경제적 약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보수를 주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철천지 원수들이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 라도 이러한 체계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괴벨스는 (민족)국가주의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의 접근공식을 탐색하였고, 동일한 태도와 신념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는 계급투쟁 이론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붕괴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에 대한 우리의 꿈을 영원히 파묻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전세계의 원수 유대인이라는 히틀러의 이론에 분명한 의문을 표시하였다. "자본주의 유대인과 볼셰비키 유대인이 동일한 존재라는 말은 사실이 아닐 듯하다." 그리고 유대인 문제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대담하게 주장 하였다. 외교정책도 뮌헨 지도부와 현저히 달랐다. 슈트라서 일파는 시대의 사회 주의적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한 호소로 여기 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국민들을 위한 호소'로 이해하였다. 배신당하고, 치 욕을 겪고, 착취당한 독일이 그 국가들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은 세계를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당한 민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의 투 쟁>에서 '정치적 헛소리'라고 평가된 바 있는 수정주의적 요구를 하였다. 외교정책도 뮌헨 지도부와 현저히 달랐다 슈트라서 일파는 시대의 사회 주의적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한 호소로 여기 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국민들을 위한 호소'로 이해하였다 배신당하고, 치 욕을 겪고, 착취당한 독일이 그 국가들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은 세계를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당한 민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의 투 쟁>에서 '정치적 헛소리'라고 평가된 바 있는 수정주의적 요구를 하였다. 히틀러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광범위한 정복계획의 대상으로 여겼고, 로 젠베르크는 러시아를 '유대인 형리 식민지'라고 불렀다면, 괴벨스는 유토비 아를 향한 러시아의 의지를 극히 높이 평가하였다. 슈트라서 자신은 "프랑 스의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윌스트리트의 자 본주의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와의 동맹에 찬성하였다. 슈트라서 일파는 정 책 설명에서 대토지 소유를 없애고, 모든 소규모 기업은 조합에 들 것과, 20명 이상의 노동자를 가진 모든 작업장의 부분적인 사회주의화를 주장하 였다. 민간업체의 경우 노동자에게 10퍼센트를 배당하고, 국가에 30퍼센트, 지역에 6퍼센트, 소속구역에 5퍼센트를 배당하였다. 그들은 또한 입법의 간 편화, 계급차별 없는 학교, 보수를 부분적으로 현물로 지급하는 것 등의 제 안에 찬성하였다. 보수를 현물로 지급하는 것은 인플레이션 시대에 생겨난 화폐에 대한 불신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하노버 당대화 이러한 기본적 정책노선들은 1925년 11월 25일 하노버에서 열린 당대회 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제안하였다. 북부와 서부 도이치 관구들의 중앙 에 대한 저항과, 관구지도자 루스트가 표현해서 박수갈채를 받은 '뮌헨의 교황'에 대한 저항적인 분위기는 예상한 정도를 넘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월 말에 다시 하노버에 있는 관구지도자 루스트의 집에서 열린 합의 모든 쟁점을 기록하자 재빨리 문을 가리키며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자료들이 틀 리지 않는다면 그는 이 모임에서 "소 부르주아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사회 주의 당에서 쫓아내기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모반적인 어조보다도 실무적인 언급들이 더욱 뚜렷하게 히틀러의 당내 신망이 그 사이 얼마나 추락하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슈트라서는 12월에 자신의 정책입안을 만들었다. 그것은 상당히 멋대로 조합한 옛날의 25개 조항을 대체하고, 당을 소시민의 이해를 대표한다는 나쁜 평판에서 구해내기 위한 정책안이었다.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12월 중에 널 리 퍼졌다. 히틀러가 이러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서 '분노'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아 무도 패더의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서 모든 표결에서 그에게 투표권을 거부하였다. 25명의 참석자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바보 멍청이에 어쩌면 음모꾼'인 퀄른 관구지도자 로버트 라이만이, 괴벨스가 '화폐가치 인상의 똥'이라고 부른 페더와 더불어 히틀러 편을 들었다. 그 사이 이 지역 여론에서 열렬하게 논의된 문제, 도이치 영주가문들의 재산을 국유화하느냐, 아니면 1918년에 압류된 그들의 재산을 돌려주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노동결사는 히틀러는 전략적인 고려에서 영주들과 기 득권 세력을 편들 필요성을 보았다. 그에 반해서 슈트라서 일파는 좌파 정 당들과 마찬가지로 예전 영주들의 재산 박탈에 찬성하였다. 물론 당 지도부를 공격할 의도는 아니라는 말뿐의 고백을 앞세우기는 하 였다. 그리고 뮌헨 중앙당의 동의도 받지 않고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자>라는 신문을 발간하고,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란츠후트에 있는 자신의 약국을 저당 잡히고 얻은 돈으로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금세 상당한 정도의 콘체른으로 발전하였다. 6주간의 신문으로 그는 일시 로 뮌헨 중앙당의 에어 출판사를 크기면에서 추월했을 뿐 아니라, 콘라트 하이덴의 평가에 따르면 '정신적인 다양성과 정직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쪽 의 출판물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하노버에 모여든 이들 패거리가 히틀러와 권력시합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는 사실은, 히틀러가 추진하는 합법적 충성전략을 공격적이고 극단까지 이 르는 '파국정책'으로 바꾸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요구로 나타났다. 그는 국가를 해치고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수단, 곧 쿠데타, 폭탄, 파업, 거리폭 동, 소동 등을 전투적인 권력정보 의지에 어울리는 것으로 여겼다. 바로 뒤 이어 괴벨스는 이 개념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 목적을 위해 배고픔, 절망, 희생 등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민족 안에 등대불을 밝혀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절망의 위 대한 불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때까지 히틀러는 이 일파의 활동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일 시적으로 당내 제2의 정부 형태로 보이는 권력중심을 만들어내고, 그레고 어 슈트라서의 이름이 북 독일에서 그 자신의 이름보다 '더 많은' 명성을 날려도 그랬다. 괴벨스는 일기장에서 이렇게 환호성을 울렸다. "아무런 뮌 헨을 믿지 않는다. 엘버펠트가 도이치 사회주의의 메카가 되어야 한다." 자 신을 명예회장으로 끌어내리고, 흩어진 민족주의 진영을 더 큰 운동 안에 포섭해 들이려는 의도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경멸적으로 무시하고, <나의 투쟁>에서 그들에게 몇 페이지의 조롱을 보냈을 뿐이다. 히틀러, 산 속의 평화에 파묻히다 히틀러의 이러한 은둔은 부분적으로 개인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히슈타인 부부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베르히테스가덴 근처 오버잘츠베르크(윗소금산)에 있는 함부르크 상인의 별장을 세냈다. 그 것은 1층에 커다란 거실과 베란다가 있고, 2층에는 세 개의 방들이 있는,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집이었다. 방문객들에게는 이 집이 자기 것이 아 니라고 강조하곤 하였다. "다른 '정당거물'들의 고약한 행실을 본받아 보스 로서의 거동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이 과부가 된 이복누이 앙겔라 라우발에게 자기 집의 살림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열일곱 살 난 딸 겔 리가 그녀를 따라 왔다. 그는 이 예쁘고, 경박스럽고, 조카라고 강조하곤 하던 소녀를 귀여워 하였다. 그것 은 곧 정열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물론 이 관계는 그의 참을성 없음과 낭 만적으로 과장된 여성에 대한 이상, 숙질 사이의 관계라는 스캔들 등으로 인해서 곧 부담스러운 것으로 변했다가 절망적인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주 드물게 히틀러는 자신의 숙소를 떠났다. 그것도 보통은 조카딸과 함께 뮌헨의 오페라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때로 시내에 있는 친구들을 방 문하러 갈 때뿐이었다. 친구들이라야 한프슈텡글, 브루크만, 에서, 호프만 부부 등이었다. 당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 독일에서도 그가 당지도자 의 일을 게을리하고, 당의 자금을 개인용도로 이용하며, 예쁜 조카딸과 함 께 시골의 파티만 즐긴다는 비판이 커졌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비난 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1925년 여름에 <나의 투쟁> 제1권이 나왔다. 이 책이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첫해에 1만 부도 팔리지 않았건만 히틀러 는 연설 욕구가 꽉 막혀 있는데다가 변명이 필요하기도 해서 제2권을 구술 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침착한 태도로 그는 이 산 속 평화에서 북 도이치 지지자들의 당 정책 논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은둔을 결정을 내리는 일을 두려워하는 그 의 특성에 의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론에 대한 실용주의자의 무관심 탓 이기도 했다. 그는 개념들을 경멸하고 꼭 필요할 경우에는 어떤 용어를 써 서든지 어떤 일이든 막아내곤 하였다. 그는 또한 은밀한 란츠베르크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유희가 되풀이되기를 기대하였던 것 같다. 경쟁자들을 부 위를 높이는 방법 말이다. 슈트라서 파국전략으로 이제는 상황이 심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를 보고 그는 당연히 개인적인 도전의사를 알아보았다. 그들의 의도는 자신의 집행유예와 아울러 정치적 장래까지 불안하게 만들 었던 룀의 기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초조하게 기회를 기다렸다. 적대자들에게 한방 먹이고 자신의 권위를 되찾을 기회였다. 뒤돌아보면 히틀러의 초조하고도 지배적인 특성이 당의 성공적인 재출발 뒤에 1923년 11월의 돌진에 못지않게 당을 파괴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성 질은 전략적인 개념들을 분명히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1925년 8월에 어떤 지구당은 1월에 138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이제는 겨우 30명만 활동하고 있 다고 보고 하였다. 히틀러가 이 시기에 안톤 드렉슬러에게 행한 모욕주기 작전에서 추종자이며 증인인 어떤 사람이 그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맺음말 에서 국가사회당은 그의 방법을 가지고는 장기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서두 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당신은 아주 슬픈 종말을 맺을 것입니다!" 히틀러만은 계속되는 자신의 실패의 고리 속에서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의 세계관을 이미 형상화해낸 확고함과 고집은 이런 위기를 어떤 의기소침의 흔적이나 체념적인 기분 없이 넘기도록 해주었다. 극단적으로 극적인 상황에 마주섰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둘러싼 운명적 인 사건들에 얼마나 얽매이지 않았던가 하는 것은 이 시기에 그가 스케치 북이나 자그마한 편지함에 고풍스러운 과시용 건축물, 개선문, 멋진 둥근 지붕 홀 등을 그렸다는 사실이 보여주고 있다. 숭고하게 통제된 여백을 가 진 극장 배경그림은, 깨지지 않는 세계정복 계획들, 세기의 기대, 그 모든 실패와 당시의 통탄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